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황석영
    2026-03-05
    검색기록 지우기
  • 군무원
    2026-03-05
    검색기록 지우기
  • 인공섬
    2026-03-05
    검색기록 지우기
  • 이수혁
    2026-03-05
    검색기록 지우기
  • 부모님
    2026-03-05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662
  • [황석영의 맛따라 추억따라](8)낯선 땅에서

    *'옹심이 수제비'맛보았던 가슴아린 강릉길. 이미 청소년기에 집을 나가 한 해 가까이 남도 곳곳을 싸돌아 다녔고, 장성해서도 남한의 이 구석 저 구석을 헤집고 다녔으니 비록 먹는 이야기라 하여도 한정된 지면에 모두 기억하여 쓸 수는 없을 것 같다. 음식이나 풍속과 말씨에 오래 전부터 동한 서한의 구분이 있어 강원 경상도와 충청 전라도가 한데 묶인다.같은 생선탕도 서해의 조기매운탕과 동해의생태매운탕은 그 맛이 전혀 다르다. 내가 강원도 출입을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일학년부터였는데 첫 학기에 등산반에 들어갔던 탓이었다.당시의 고등학교 등산반은 그냥 산에만 오르고 내리는 게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선배들이 암벽타기 훈련부터 시켰다. 기초는 대개 인왕산에서 슬로프 코스와 침니를 익히고 북한산으로 가서 인수봉의 두코오스를 마치고 틈틈이 오봉과 우이암에서 세밀한 기술을 익힌다.그래서 바위에 자신이 붙으면 도봉산의 선인봉 남측 측면 십자로와 전면을 타고 주봉의 그 유명한 티자 침니를 기어 오른다.그리고는 여름방학이면 벌써설악산으로 가던 것이다.겨울에는 다시 빙벽 훈련을 하러 내설악을 찾아가고 지경을 넓혀 오대산까지 찾아갔다.고등학교 때에 알고 지내던 어린 록크라이머들은 조난으로 죽은 친구들도 있었지만 나중에 유명한 산악인이나 등산지도자로 성장했다. 내가 고교를 자퇴하고 집을 나가서 방랑했던 얘기는 뒤에 하겠지만,하여튼산에 다니면서 나는 당시 일제에서 해방 되었어도 전체주의 교육의 잔재였던규율과 획일화라는 학교감옥에서 놓여나는 기분이 들었다.감수성이 예민하던시절에 벌써 나는 학교와 집과 동네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체험을 원격지 등반을 통하여 익혔던 셈이다. 훨씬 뒤에 아직은 이십대 초반이었지만 아직도 수염이 뻣뻣하지는 못했을 적인데 나는 러시아 문학을 전공 한다는 어느 친구와 함께 강원도를 돌아다녔다.나도 가난했지만 그 친구도 겨우 남의 가정교사로 용돈벌이를 하던 중이었다.그에게는 사랑하던 여자가 있었건만 심중을 털어 놓지는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의 집이 왕십리에 있었는데 우리는 막걸리 한 주전자를 놓고 어느 선술집에앉아 있었다.그는 술이 거나하게 오르자 점점 우울해지는 얼굴로 변해 갔다.이해가 되는 것이 그는 영장을 받아 놓고 있던 터였다.연기를 할 수도 있었건만 집안 형편도 좋지 않으니 얼른 나가서 때우고 와야 할텐데 그네가 마음에 걸린다는 얘기였다.그는 도스또에프스키의 죄와 벌에 나오는 라스꼴리니꼬프처럼 창백하고 마른 인상은 아니었지만 러시아 소설에나 나옴직한 깃넓고 치렁치렁한 검게 물들인 군용 오버코트를 겨우내 걸치고 다녔다. 때는 마침 늦은 봄이라 불행하게도 분위기 있던 외투를 벗어버리고 역시 검게 물들인 미군 쫄쫄이 작업복 차림이어서 볼품은 없었다.그가 갑자기 강릉엘 가자는 것이었다.거리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봄비가 제법 세차게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청량리 역은 선술집에 앉아서도 기적 소리가 들려올 만큼가까운 거리에 있었다.우리는 비를 맞으면서 역까지 걸었다.거의 통금시간이다 되어 출발하는 강릉 가는 완행열차가 있었다.처음에는 소주에 마른 오징어를 씹다가 서로 기대어 자다가 날이 밝으면서 영주 태백을 지나서삼척에당도하면 거기서부터 철도는 바닷가를 향해 달린다. 바로 철로 아래 흰 포말이 이는 파도와 짧은 백사장이 보이고 저 근사한 해변묘지가 천천히 지나간다.해송이 구부리고 섰는 숲 위로 백로 떼가 날아 앉는다.벌써 상큼한 바다 비린내가 풍겨 온다. 우리는 항구에 도착했다.정박해 있는 배는 마치 잠시 후에는 모든 것을 훌훌털고 먼 바다로 떠나버릴 자유의 상징처럼 보이기도 했다.그가 전화를 건다. 그네는 주문진에서 소학교 선생님으로 있다고 한다. 사범학교를 나와 부임했다니 겨우 우리네와 동갑내기이거나 아래일 것이 분명했다.소녀였지만 그네는 하여튼 선생님인 것이다. 퇴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니까 우리는 강릉으로 되돌아 나가서 하루 종일서성거렸다.그때에는 해수욕장이라곤 경포대 정도 밖에 없었고 요즈음처럼시도 때도 없이 바다를 보러오는 사람도 드물어서 봄철의 바닷가는 거의 인적이 없었다. 그가 주문진으로 그네를 만나러 가기 전에 우리는 선창가 언저리를 돌아다니다가 뱃사람들이나 가끔씩 들를 것같은 구석진 모퉁이의 작은선술집을 발견하고 들어가 앉았다. 거기서 술국과 끼니 대신 먹어본 것이 ‘옹심이 수제비’였다.팟죽에 넣는찹쌀경단이나 조랑떡국의 동그랗게 뭉친 떡 보다는 약간 크고 투박하게 뭉친알심이 들어 있었다.감자 전 지질 때처럼 감자를 강판에 갈아 녹말을 내려서건더기와 함께 반죽하여 수제비 끓일 때처럼 멸치 다시에 호박이며 양파며 풋고추 등속을 넣고 그저 설설 끓여낸 것인데 시원하고 얼큰하고 든든하다. 그때 처음 본 오징어 순대도 신기했지만 나중에는 흔한 음식이 되어 버렸다. 그냥 시장 모퉁이 아무데서나 해장으로 끓여 주는‘곰치국’은 충청도 서해안 지방의‘물텀벵이탕’과 비슷했다.해안가에서 사는 메기 비슷하게 생긴놈인데 살과 뼈가 흐물거리고 무를 함께 넣고 오래 우려낸 국물 맛이 비리거나 기름지지 않고 맑았다. 나는 선창이 멀리 내다보이는 일본식 이층의 여인숙에 방을 정하고 주문진에그네를 만나러 간 친구를 기다렸다. 그는 통금이 되어서도 돌아오지 않더니한 시가 넘어서야 술이 만취해서 방문을 벌컥 열었다.그는 아무 말없이 그무렵에 젊은 여자들 사이에 대유행이던 흰색 하이힐을 비좁은 방 가운데로 던졌다.나는 이불 위에 떨어진 여자 구두를 내려다 보았다.잠이 번쩍 깨는 느낌이었다. 엽기적인 생각과 함께 그가 성공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부러움이 동시에 지나갔던 것이다.그렇지만 그는 사건의 전말을 절대로 얘기하지 않고 취해서 시뻘건 눈으로 자기 청춘의 시대가 이것으로 막을 내렸노라고 중얼거렸다.그는한 달 뒤에 군대에 나갔고 몇 년 후에야 제대한 그에게서 그날 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여선생을 만나서 다방에 앉아 청혼을 했다고,그네는 어리둥절하고 놀라서 말을 못하더라는 것,마침 휘영청 달이 밝은데 그가 여선생을 하숙집까지바래다 주겠다고 했고,걷다가 이제는 마지막이니 표적이라도 남기겠다며 그가 입을 맞추려고 덤볐다는 것,바로 길 옆에는 바람에 휘청대는 보리밭이 있었고,장소는 맞춤했지만 술 취한 그 보다 그네가 힘이 더 세었다고,그쪽에서떠미는 바람에 넘어지고, 넘어져서도 두 다리를 잡았다는 것,그래서 그네는콩쥐처럼 신만 남겼다고 한다. 어쩌다가 동해안에 가게 되면 음식들은 모두 관광 일색이 되어 온통 생선회천지가 되었지만 ‘옹심이 수제비’나 ‘곰치 해장국’을 찾으려면 선창을이곳 저곳 기웃거리며 헤매다녀야 한다. 황석영
  • [황석영의 맛따라 추억따라](7)잃어버린 먹거리

    최초의 도시락은 아마도 주먹밥이었을 것이다. 집 부근의 논이나 밭에 나가 일하는 동안에 아낙네들이 대광주리나 채반에 밥과 반찬을 얹어 나르던 일은 오래된 행사였을 터이다.조선 시대의 민화에보면 들밥 먹는 그림이 심심찮게 나온다.춘향전에도 걸인 차림의 어사또가들밥을 얻어 먹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나도 예전에 남도를 방랑하던 청소년 시절에 들밥을 종종 얻어먹은 적이 있었다.당시에는 아직도 농촌이 별로넉넉하지 않던 시절이라 여름철에는 대개가 푹 삶아 퍼진 보리밥을 먹었다. 깡보리도 있고 이밥에 보리를 나우 섞은 밥도 있었다.지금 생각해 보아도 호박나물이나 알감자 조림 또는 가지나물 등속의 맛이라든가 상추며 깻잎이며데친 호박 잎에 장을 쳐서 풋고추 툭 부러뜨려서 싸먹던 기억이 새롭다. 들밥은 품앗이나 두레로 이루어진 공동 노동의 산물이기도 하였다.한 마을에서 집집이 돌아가면서 여럿의 농사 일을 협동하여 서로 해주는데 이 때에 새참이나 끼니도 공동으로 해결하였다.비록 햇보리밥에 제철 푸성귀 뿐이었지만 인심은 풍성하여 일하는 남정네는 물론이고 부엌 일을 거드는 노약자나집에서 놀던 어린 것들까지 손목 잡혀 나와서 함께 먹었다.그뿐인가,지나는나그네라도 보이면 서로 손짓하여,들밥 좀 같이 자시고 쉬어서 가시라고 불러대는 것이었다.들밥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막걸리인데 대광주리에는 식반찬과 함께 닷되들이 술병이 들어있다.밥 먹으랴 서로 권커니 잣커니 하는 밥주발의 막걸리 마시랴 하다보면,식곤증으로 축 늘어져서 제각기 땡볕을 피하여 나무 그늘을 찾아가 짧은 낮잠 한 숨을 부치게 된다.담배 한 두어 죽 피울만치 오침을 하고나서 다시 일을 시작하면 아침처럼 새로운 기운이 부쩍난다. 덧붙여 말하자면,이제 이러한 들밥은 사라져 버렸다.요즈음은 농촌에서도 일손 구하기가 쉽지 않은 데다 하루 일당 노임이 전국적으로 또박 또박 정해져 있고 서로 나누는 인심 따위는 없어졌다.들에서 일하다가 핸드폰으로 짜장면 시켜 먹고 커피까지 배달해다 먹는다.새참이라고 하여도 대광주리로 이어나르는 일은 없고 빵이나 우유나 코카콜라 음료수가 나온다. 집 근처에서는 식구와 동네 사람들이 들밥을 어울려 먹었지만 혼자서 깊은산에 나무나 약초를 하러 간다든가 먼길을 떠날 적에는 주먹밥이나 떡이나곡물가루 같은 비상식량을 해가지고 다녔다.옛날 전쟁 기록에서도 그렇고 구한말 동학사 같은 데서 보자면 병정들도 마찬가지였다.밥을 주먹만하게 뭉쳐서 가운데에다 장을 찍어 바르거나 소금을 적당히 풀어 놓은 물에 두 손을담궜다가 간간하게 밥을 뭉쳐서 주먹밥을 만들었다.육이오 때에는 나도 그런 주먹밥을 먹은 기억이 있고 전선의 군인들도 고지 위로 보급 되어 올라온돌처럼 얼어붙은 주먹밥을 으깨어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다.동양에서는 봉건시대의 전형으로 알려진 일본에서 오래전부터 그리고 최근까지도 주먹밥 문화가 생생하게 남아있는 편이다. 주먹밥과 다꾸앙은 사무라이의 야전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김밥이나 각종스시의 원형도 그러할 것이다. 주먹밥에서 시작하여 가랑잎,연잎,파초잎,호박잎 같이 넓적한 나뭇잎에 밥을 싸서 간수하는 데서부터 베보자기나 헝겊에 싸기도 하다가 도시락이 탄생한다. 도시락은 대나무나 왕골이나 덩굴 줄기로 작은 고리 상자를 짜서 만들었다. 이것을 허릿춤 또는 지게 모퉁이에 매달기도 하고 일터에 가서는 바람이 잘통하는 서늘한 나뭇가지에 걸어 놓기도 하고 옹달샘에 담궈 두었다. 하여튼 입맛이란,여럿이 함께 먹는 음식과 노동을 한 뒤의 것이 훨씬 맛있고풍성한 자연 속에서는 더욱 살아나기 마련이다. 우리 기억 속에 ‘도시락’은 우리말 가꾸기로 나중에 바뀐 말일뿐 그 맛과함께 남아있는 말은 일본 말인 ‘벤또’였다.근대를 일제의 식민지로 치뤄낸 우리의 점심 문화는 벤또로 시작했던 것이다.즉 직장이며 학교며 근대적 의미에서의 일터란 모두 일제가 가져온 것들이었다.알미늄으로 만든 그릇들을총칭해서 양은 그릇이라고 했는데 어른들은 아르마이또 라고 불렀다.아낙네들은 일터에 나가는 가장에게 알미늄으로 만든 깊숙하고 네모난 벤또를 작은 손수건만한 보자기에 싸서 주었고 남정네는 제 점심을 자전거 화물칸 위에얹고 출발했다.퇴근 길에는 빈 벤또 속에서 젓가락이 부딪치는 소리가 딸그락거렸다. 나는 소학교 시절부터 장성해서까지 오랫동안 이 벤또를 ‘까먹고’ 하루를보냈다.겨울날 조개탄 난로 위에 이것을 층층이 올려놓고 식은 밥과 김치를데워 먹던 생각이 난다. 도시락 반찬의 변천사도 만만치 않다.반찬 칸이 밥과 함께 있던 터라 뭔가양이 적으면서도 짭짤한 것이 필요했다.김치가 도시락 반찬의 대종을 이루었지만 때로는 멸치볶음이니 콩자반이니 각종 건어조림이나 어포 볶음 등이 많았고 해방 뒤에 무슨 서양요리처럼 등장한 계란 프라이는 밥 위에 그대로 얹어서 부잣집 반찬 행세를 했다.그러나 어디 우리네 전래의 장아찌에 비길만한 도시락 반찬이 있을 건가!철철이 나오는 채소와 해물을 뒷뜰의 장독대에 있는 간장 된장 고추장을 덜어내어 담궈 두기만 하면 되었다.대개는 한 해만 묵히면 깊은 맛에 쫄깃하고 아삭거리는 장과를 만들 수 있었다.채소를 일단 소금에 절여서 풀을 죽이거나 수분을 줄이고 간이 배게 한 다음에 장에 박거나 담근다.가장 기초적인것이 무나 마늘이나 오이를 된장 고추장 그리고 간장에 담그는 것이다.특히된장과 고추장에박은 무는 노랗고 발갛게 색깔이 서로 다르고 맛도 다르다. 소금에 절이기만한 오이와 무도 담백한데 참기름과 고춧가루를 쳐서 무치기도 한다.마늘과 마늘쫑은 각각 간장과 고추장에 담근 것이 맛이 다르다.더덕은 고추장에 담근 것이 맛있고 풋고추와 깻잎은 간장에 담근 것이 맛이 있다.감이나 오이 참외 가지 등속은 된장에 담그면 아삭거리고 깊은 맛이 든다. 무말랭이는 간장에 담았다가 무칠 때에 고춧가루 등속을 쓴다.김이며 미역다시마 등속은 고추장에 담근 것이 맛있다. 작년에 제주도에 갔던 일이 생각난다.망명과 투옥으로 십여년 이상이나 국내여행을 못했다가 오랜만에 찾아가니 친구들이 반겨주었다.하루는 나를 바닷가의 사라봉으로 점심 초대를 하길래 따라 나섰다.몇집에서 그날 먹으려던음식들을 제각기 싸가지고 나왔는데 모두 싱싱한 푸성귀에 짭쪼롬한 밑반찬종류였다.콩잎에 멸치 젓을 넣어 밥을 싸먹기도 하고 잘게 토막쳐서 양념에버무린 자리돔을 상추에 싸먹기도 하였는데 특히 입맛을 돋구었던 것은 된장에 버무려 담은 제주도식의 갓김치였다. 하여튼 돌아온 뒤에도 그런 소박한 반찬을 싸들고 집 부근으로 나가서 점심이나 저녁을 먹는 취미가 생겼다.또 달랑 제 식구만 나가는 게 아니라 이웃이나 친구 가족도 불러서 함께 갔다.어떤 날은 옛날식 양은 도시락에 짭짤한 밑반찬과 밥을 싸서 하다못해 동네 공원에 나가서 먹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아이들은 정체도 모를 미국식 패스트푸드로 점심을 때우고 어른들도 야외에만 나가면 그저 고기를 떡 벌어지게 지글지글 구어서 독주에다실컷 마시고 쿵쾅거리는 가라오케 기계 틀어놓고 법석댄다. 장아찌는 장독대가 사라지면서 백화점의 반찬가게로 옮겨갔고,서로 담 넘어로 장을 빌리거나 찬을 나누고 들밥을 함께 먹던 문화는 식구끼리의 외식문화로 바뀌었지만 실천에 따라서는 회복하지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황석영
  • [황석영의 맛따라 추억따라](6)잃어버린 먹거리

    *피란시절 동태탕은 가족 결속시키고... 전쟁 전이나 휴전 뒤에 생활이 다시 안정 되었을 때에 우리가 고기 대신 먹었던 여러 가지 생선들이 생각난다.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지금은 사라져버린 물고기들이 많은 것 같다.또한 있다고 하여도 다른 먹거리가 많아서 찾지않게 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아침 저녁 무렵이면 동네 골목마다 장사꾼들이 차례로 등장하기 마련이었는데 호객하는 소리도 독특해서 재미가 있었다.콩나물이나 무 배추 따위의 채소장수들에서부터 새우젓 어리굴젓 장수들 그리고 생선장수들은 모두들 팔려는 물건 뒤에다 ‘사료’나 ‘사우’를 부쳐서 목청을 높였다.두부장수는 자루가 달린 놋쇠 요령을 가지고 다니면서 딸랑 딸랑 하고 흔들었다.나중에 쓰레기차가 오면 청소부들이 그런 손 종을 치곤 했다. 비웃드렁 새,하는 소리는 청어를 사라는 생선장수의 소리였다.전쟁 전에는청어가 서울 인근에서는 가장 좋은 비린 반찬이었고 주점에서도 어른들이 제일로 쳐주는 안주감이었다.청어는 생선도 있고 소금에 절인 것도 있으며 꾸덕꾸덕 말린것도 있었다.숯불 풍로에 철사로 얼기설기 엮은 석쇠에다 굵은천연 소금을 뿌려서 구운 청어는 기름이 자르르 하고 고소하며 살집이 푸짐했다.집집마다 담장을 넘어서 골목길에까지 청어 굽는 냄새가 가득찼다.생선은 찌개도 끓이고 찜도 하고 소금에 절인 것은 조리기도 하며 그냥 숯불에굽기도 하고,꾸덕꾸덕 말린 것은 갖은 양념하여 재어 두었다가 북어나 조기처럼 구었다. 아지라는 생선도 많이 먹었는데 나는 무어니 무어니 하여도 어머니가 뼈를발라 간장과 설탕과 양념을 섞어서 장을 내어서는 아지 생선 위에다 바르면서 천천히 구워낸 아지의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듯이 그 맛이 생선 중의 으뜸이라는 준치도 굽거나 조림이 고작인 셈인데 나는 가시가 많아서인지 별다른 기억이 없다.다만 그 맛이 남도 사람들이 친다는 전어와 비슷하지 않았는지.전어는 소금 뿌려 놓았다가 기름에 지지거나 구어 먹는 것이 제일 좋은데 봄철 나물과 번갈아 먹는 맛이 그럴 듯 하다. 이면수와 가자미는 살이 담백하고 기름지지 않다.이면수는살갗이 꺼칠하고두꺼운 느낌이 들어서 별로 맛들이지 못했고,다만 가자미는 손바닥 두어배되는 큰 놈을 소금 뿌려서 태우지 않고 껍질이 바짝 마를 정도로 숯불에 구워서 통째로 먹는 맛이 기막히다.일본에서 그렇게 먹었던 기억이 나는데 전혀 비리지 않고 무슨 바다의 감자를 먹는 느낌이었다.그러나 어려서는 별로맛있는 줄 몰랐다. 소학교 때까지만 하여도 어머니는 해마다 봄철이 되면 인천에서 들어온 조기를 몇판씩 사들여다가 뒷마당에서 이모와 같이 김장 때처럼 법석대며 손질을 했다. 소금에 절이고 자잘한 놈은 젓갈을 담기도 했는데 메주 말리던 넓다란 대나무 채반을 몇 개씩 늘어놓고 소금에 절인 조기를 말렸다.당시에는 집집마다담장에 널어 말리는 조기를 볼 수가 있었다.바싹 마르면 굴비가 되었고 장사꾼들은 굴비의 대가리를 새끼로 줄줄이 꿰어서 팔러 다녔다.요새처럼 ‘영광 굴비’가 특상품이라고 하지는 않고 ‘연평 굴비’라고 외쳤다.연평 굴비는 수백년 동안 서울 사람들의 여름철 반찬이었다.굴비를 두었다가 구어 먹는것이 보통이지만통째로 여러 마리를 고추장에 박아 두었다가 몇 달이 지나서 꺼내어 살을 잘게 찢어서 저장한다.살이 쫄깃하고 암갈색이 되는데 쇠고기 장조림의 열 배는 더 맛이 있었다.무더운 여름날 먼길을 걸어서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배가 고픈데도 당장 점심을 먹기도 지겹고 할 적에 어머니가 구운 굴비를 찢어서 열무김치와 함께 밥상을 차려 준다.찬물에 밥을 말아서 굴비와 열무김치로 먹기 시작하면 그제사 식욕이 왕성해지던 것이다. 조기철에 뒤이어 초여름 무렵부터는 꽃게가 들어왔다.꽃게는 어머니와 누나들이 마당의 수돗가에서 손질을 하려면 사방으로 달아나 어떤 놈은 장독대뒤의 독 사이로 숨고 어떤 놈은 판자 담장 아래로 빠져서 행방불명이 되기도 한다. 게장을 담그는데 시골에서는 오종종하게 작은 밤게를 쓰지만 사실은 물산의왕래가 불편하던 옛날의 일이고 기생충도 많고 다리는 살이 적고 몸통마저도 먹잘 것이 없어서 귀찮기만 할 것이다.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나 바닷가에서는 꽃게를 많이 썼다.또 요즈음 식당에 가면 시뻘겋게 양념을 해서 꽃게장을 담아 즉석에서 먹어 치우기에 간편하지만 최근의 남도 식이지 옛날 식은 아니다. 꽃게를 솔로 박박 문지르며 소금물에다 깨끗이 닦아서 털 같은 아가미와 세모의 등딱지며 모래주머니를 모두 떼어내고 발가락 끝을 잘라내어 손질을 한다. 간장에 생강 마늘 고추 등속을 넣고 끓여서 붓는 것은 얼추 같은데 여기에맛의 비방이 첨가 되어야 한다.기름기 없는 쇠고기 다진 것을 넣고 물 대신에 사이다를 부으면 짜지도 않고 깊은 맛이 생겨난다.팔팔 끓인 양념 장을식혀서 손질하여 채곡채곡 항아리에 담은 게 위에 붓는다.사흘쯤 지나서 다시 장을 따라내고 끓여 붓기를 모두 세 차례쯤 하고 나면 먹을 수 있게 된다.알과 내장이 맛깔스러운 게딱지는 물론이고 살이 푸짐하고 쫄깃한 다리와집게발마저 먹을 것이 많다.그리고 남은 간장 또한 밥에 비벼 먹을만 하다. 남도에서는 밤게를 담을 적에 항아리 밑에다 다진 쇠고기를 두고 게를 깨끗이 씻어 넣어 하룻밤 재운다고 하였다.그러면 게들이 밤 사이에 쇠고기를 모두 먹는다는데 여기에다 간장을 붓는다고 한다.중세 유럽의 서민들을 살린 것은 난류와 한류가 합치던 대서양의 대구와 아메리카에서 들어온 감자였다고 한다.당시만 하여도 고기는 특권층의 먹거리였고 대구는 엄청나게 잡혔다.인구의 팽창과 곡물의 흉작은 전쟁과 굶주림으로 이어졌는데 감자가 주식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거의 신의 은총이라고 여겨졌다고도 한다. 우리에게도 다른 맛있는 생선들이 근해에서 하나 둘씩 자취를 감추거나 희귀해져서 값비싼 생선이 되어갔지만 가난한 시절부터 지금까지 서민들의 영양을 담보해준 것은 꽁치와 고등어였다.한때 갈치가 많이 잡힐 적에는 그 신세도 많이 졌는데 이전에는 갈치가 탐스럽게 커서 두툼하게 썰어놓은 식빵만했다.역시 소금구이와 조림이 주종이었고 무를 반달형으로 큼직하게 썰어 넣고 풋고추와 고춧가루를 벌겋게 버무려 지진 호남의 갈치 조림은 입맛을 돋군다.나중에 여행지 이야기를 하면서 제주 갈치의 여러 가지 조리법이 소개가되겠지만 지방마다 생선의 조리는 조금씩 다르다. 장에 갔던 가장이 어스름한 달밤에 막걸리 한 잔으로 거나해져서타령 한 소리 읊조리며 영을 넘어올 제 새끼에 꿰어 들고 오던 것이 간고등어 한 손이다.산지가 많은 영남 사람들은 지금도 평야 지방의 그들먹한 한정식 보다도경상도 막장으로 끓인 찌개와 구운 간고등어 한 토막을 더 쳐줄 정도가 아닌가.고등어 역시 생선 조림이나 양념하여 꾸둑꾸둑 말린 것을 무를 넣어 조리거나 굽는다. 꽁치는 또한 그 무렵의 사철 고기반찬이었다.소금 뿌려서 연탄 화덕에 구운것을 질리지도 않고 거의 하루 걸러서 먹었다.나중에 통조림이 쏟아져 나와등산길에서도 군대에서도 콩나물 국에 고기 대신 왕건이가 되어서 다투어 건져 먹곤 했다. 지금은 그러한 신문기사를 찾으려고 눈을 씻고 보아도 없지만 그 시절에는버려진 복어알을 주워다 온 가족이 끓여먹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심심치않게신문에 오르내렸다.전쟁 때 피란 시절에는 어쩌다 먹는 동태 탕이 식구들을따뜻하게 결속 시켰다.당시에는 저 먼 남의 나라 바다에 나가서 잡아오는 참치 같은 맛들일 수 없는 고급 생선은 존재하지 않았다.이제는 허드레가 되었거나 희귀해져서 최고급이 되어버린 생선 대신에,나는 오늘도 지금까지 내가 맛나게 먹은 고등어의 놀란 눈을 떠올리며 슬며시 웃는다. 황석영.
  • [황석영의 맛따라 추억따라](5)잃어버린 먹거리

    *북서 먹어본 단고기 별미...겨자로 무쳐 새콤달콤 북에서 먹은 음식 가운데 매우 독특한 찌개가 생각난다.언젠가 전주에 갔다가 ‘오모가리’라는 민물고기로 끓인 일종의 고추장 찌개가 별나다고 생각했던 것과도 같았다. 북에서는 여러 초대소를 다녀 보았는데 그중에 오래 있던 곳이 서재골 초대소와 철봉리 초대소였다.서재골은 외국 사절들이 묵는 곳이어서인지 주방의조리 방식이 다분히 중국 요리나 서양식으로 뒤섞여서 나왔다.장기간 머무는이에게는 일종의 연회 음식이 이내 질리기 마련이다. 철봉리에서는 삼십대의 주방장과 연회가 있을 적에는 노인 한 분이 지원차오곤 했다.주방장의 이름은 잊었지만 황해도 안악이 고향이라는데 나중에 그의 집도 방문했다.그의 어린 두 딸이 고사리 손을 조물거리면서 무용을 하고노래를 하던 모양이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정성스럽게 차려주는 연회 음식 먹기가 지겨워서 나중에는 스스로 외환상점에 나가 일제 카레를 사오거나 라면을 사다가 점심을 직접 해먹기도 하였다. 이런 얘기가 밝혀져도 괜찮을까는 모르지만 북쪽 초대소의 남녀 접대원에서요리사와 운전수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호위총국 소속의 군인들이었다.나중에그들과 한 식구처럼 친해진 뒤에야 그들의 계급도 알 수가 있었다. 여성 접대원들은 대개는 소위 중위들이고 때로는 사격 훈련도 한다고 하였다.따라서우리 주방장이 소좌라는 사실도 나중에야 알았다. 선생님,토속으로 자시고 싶다 그거지요?그는 돼지고기 김치 찌개도 만들고 된장 뚝배기도 내왔다.북의 통조림으로나오던 볶은 고추장이 해외동포들에게 인기였는데 나는 아무래도 된장이 더먹고 싶었다.그렇지만 가정식 장독대가 거의 사라져버린 고장에서 맛깔스러운 된장을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었다.역시 우리가 예전에 진짜 일본의 미소 된장하고는 다르면서도 왜된장이라고 부르던 공장에서 대량으로 속성되어나오는 된장이었다. 북한 문인들 말을 들어보면 전후 복구에 힘을 쏟던 ‘천리마 운동’ 기간에 가정음식들이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구역마다 밥 공장과반찬 공장을 두어 단체로 식사를 하거나 타다가 먹었다고 하는데, 경제복구가 끝나고도 직장이나 기업소마다 단체급식을 하는 생활은 남아있는 셈이었다.즉 손님 접대는 연회 음식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하루는 주방장이 고심을 했던지 김치도 보다 맵게 담그고 간고등어도 굽고저 유명한 서해안 곤쟁이젓도 내왔는데 못보던 음식이 나왔다.구수하고 짭짤한 것이 입맛이 확 살아났다.이게 뭐냐고 했더니 ‘호박짠지 지지개’라고한다.열무와 호박이 섞여 있는데 애호박이 보통 호박찌개처럼 물컹하지 않고설익은 것처럼 설컹거렸다. 그는 평양에서 한 시간 반쯤 거리인 안악의 고향 집에 다녀왔다고 한다.역시북에서도 장이나 밑반찬 같은 먹거리는 고향 부모님들이 보내준다고 하였다. 이제 노인님들이 다 돌아가시면 젊은 아낙들은 음식을 못해서 큰일이라고사내들마다 걱정인 것은 우리와 같다.그가 안악에 가서 가져온 것은 된장과바로 이 ‘호박짠지’였다. 열무나 배추로 짠지를 담글 적에 호박을 쑹덩쑹덩 썰어서 김치 담그듯이 한켜씩 소금을 뿌려가며 항아리에 담는다.소금에 충분히 절인 다음 풀물이나뜨물을 부어 사나흘이 지나면 대충 익게 된다.호박짠지를 꺼내어 물에 헹구고 된장과 까나리 또는 조개를 넣고 찌개를 끓여내는데 파와 마늘과 풋고추를 썰어 넣으면 된다. 내가 이 음식을 기억하게 된 것은 실로 십 년 만의 일이었다.충청도 덕산으로 이사와서 한 마을에 혼자 사시는 할머니 한 분이 집안 일을 도와 주러 오게 되었는데,곁에서 며칠 동안 나의 식성을 지켜 보고나서 무슨 음식을 냄비에 담아 왔다. 좋아하실까 모르겄지만 한번 잡숴봐유. 그래서 뭐냐니까 충청도 ‘호박김치’란다.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이랬다. 호박짐치는 원래가 찌개 끓여 먹을라구 당그는기유. 어허,가만 있어 봐.어디선가 먹은 기억이 나는데.그제서야 이북에서 먹었던생각이 났다.충청도 호박김치는 늙은호박을 속을 긁어내고 쓰는데 무청이며배추를 섞어서 김치를 담그듯이 갖은 양념하여 새우젓까지 쓴다.그냥 먹기에는 호박이 입 안에서 뱅뱅 맴도는 것이 어쩐지 김치 맛이 나질 않고 찌개를끓여 먹으면 담백하고 구수하다.얼핏 제주도의 갈치 찌개 생각이 나서 이 호박김치에 잔 갈치를 토막 쳐서 넣고 끓였다.역시 호박김치 찌개의 훌륭한 완성이 아닌가. 같은 서해안에 지형과 풍토가 비슷해서 그런가 충청도와 황해도의 음식은 여러 가지로 비슷한 점이 많이 있다. 북에서 먹은 음식 가운데 여러 가지 기억이 나지만 그중에서도 ‘단고기’는아주 특별하다. 개장국은 각 지방마다 서로 다르지만 특히 서울식은 사라져버렸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옛날 개장국은 지금 보다는 맑고 오히려 육개장 비슷했던것 같은데 남도식과 섞여 버렸다.들깨나 깻잎을 많이 쓰는 것이 그렇다. 남도 식은 오리탕도 그렇지만 들깨를 거의 죽처럼 갈아서 넣고 고구마순도 함께 넣는다. 북쪽의 개장국도 평안도쪽과 함경도 식이 서로 다른데 평안도 식이 서울의예전 개장국 비슷하다면 함경도 식은 요즈음 서울의 두루치기와 비슷하다. 하여튼 단고기를 먹은 중에서 대단히 맛이 있었던 것은 가장 부드러운 목둘레의 살을 얇게 저며서 해파리 냉채 무치듯 겨자를 넣고 새콤달콤하게 무친것이었다. 백두산 지방을 돌아다녔을 때 삼수에서 먹은 산천어 구이는 특별했다.두만강상류라고 하지만 폭이 오륙미터 밖에 안되는 개천인데 이쪽은 조선이고 저쪽은 중국이라 하였다.개천에 그물을 쳐두고 기다렸다가 건지면 팔뚝만한 산천어가 걸려서 퍼덕였다.산천어는 송어가 강을 따라서 올라왔다가 붙박이 고기가 된 것인데 백두산 천지에 방류하여 양식에 성공하였다고 한다. 안내인은여러번 해왔던지 부근의 반질거리는 반석 아래 장작불을 때어서 달군 다음에참기름을 두르고 소금을 뿌려 살아있는 산천어를 던졌다.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백두산 송이버섯을 얇게 저며 함께 굽는다.꼬리와 머리에 은박지를 감아쥐고 옥수수 먹듯이 산천어를 뜯으며 송이로 입가심을 한다.고기의 살이 솜처럼 부드럽고 향긋한 물비린내가 입맛을 돋구었다. 이런 식의 자연식은 이를테면 해금강에서 먹었던 대합 구이에 비길만 했다. 해금강은 군사분계선 구역이라 무인지경이었는데 주먹만한 자갈이 깔린 바닷속이 온통 대합의 밭이었다.삽시간에 군인들이 두 양동이나 건져 나왔다.해변 자갈 위에 늘어놓고 알콜 한 병을 들이붓고 불을 붙이니 파란 불이 좌악퍼져 나가면서 조개들이차례로 입을 벌렸다.사실은 익히려고 불을 놓는 게아니라 대합의 굳은 입을 벌리기 위해서란다.그대로 초장을 조개 안에 한숫갈 치고는 후루룩,하는데 입안이 가득찬다.그리곤 소주 한 잔 캬아! 하면서넘기고. 황석영
  • [문화예술 분단장벽 허무나](2)공연예술

    분단의 상처를 창작의 원천으로 삼아 예술적으로 승화하려는 움직임은 연극,무용,음악 등 공연예술계에서도 꾸준히 이어져왔다. ◆연극/ 분단초기인 1950년대에는 전쟁의 충격으로 반공의식을 담은 작품들이주로 창작됐으나 60년대들어 전쟁과 분단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학계에서는 60년 신춘문예작인 박현숙의 ‘사랑을 찾아서’를 ‘분단희곡’의 출발로 꼽는다.한 여인이 사랑을 찾아 이데올로기에 상관없이 남북을 오가는 과정을 그린 이 작품은 남자주인공인 공산당원을 인간적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다. 차범석의 ‘산불’은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이데올로기 갈등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보다 객관적으로 묘사했다는 평을 받은 작품.‘관광지대’‘모가지가긴 두사람의 대화’(박조열)‘바꼬지’(이재현)등도 60년대 분단과 통일문제를 다룬 희곡들이다.이재현은 ‘포로들’(72)‘멀고 긴 터널’(77)‘적과 백’(83)등 6·25전쟁포로를 다룬 기록극형식의 삼부작을 내기도 했다. 80년대에 이르러 분단희곡은 새로운 전기를맞는다.동서간의 해빙무드에 힘입어 보다 적극적으로 분단의 모순상황을 지적하고 이데올로기의 무의미성을고발하는 작품들이 대거 쏟아졌다. 노경식의 ‘하늘만큼 먼나라’(85)황석영의 ‘한씨연대기’(84)이강백의 ‘호모세라파투스’(83)‘칠산리’(89)이반의 ‘아버지 바다’(89)등이 대표적이다. 분단과 통일문제를 정치사회적인 시각으로 묵직하게 다룬 80년대에 비해 90년대는 풍자적이고 우화적인 분단희곡들이 눈에 띈다.장소현의 ‘김치국씨환장하다’(98)나 오태영의 ‘통일익스프레스’(99)는 패러디와 유머감각,아이러니를 표현기법으로 도입함으로써 관객들의 변화된 정서에 부합하는 한편날카로운 사회비판도 놓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수작으로 꼽히는 작품들이다. 연극평론가 유민영씨(단국대 교수)는 “분단을 다룬 수작 희곡들이 상당수이나 양적인 면에서나 스케일,그리고 심도에 있어서 소설에 비해 미약한 것이사실”이라고 지적하고 “6·25를 이념이나 상황이 아닌 철학적 성찰로 접근할때 비로소 뛰어난 작품이 나올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무용/ 지난 95년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산하 민족춤위원회는 해방5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춤제전을 벌였다.‘해방50년,겨레의 몸짓으로’를 주제로한 이 행사는 그간 개별적으로 이뤄져온 무용계의 분단 형상화작업을 전체적으로 묶어내는 역할을 했다.당시 선보인 한상근의 ‘무초Ⅲ’은 현대춤과 전통춤을 조화시켜 통일을 위해 몸바친 이들을 그려냈으며,정혜진 무용단은 ‘새들의 암장’이란 작품에서 북한에 고향을 둔채 이국땅에서 삶을 마감한 박남수시인의 삶을 형상화했다. 개인적으로 분단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보여온 무용가로는 분단이후 한국상황을 무용극 ‘내사랑 한반도’(88)로 풀어낸 조기숙을 비롯해 살풀이 시리즈의 이정희 중앙대교수,강혜숙 청주대 교수등이 대표적이다. 민족춤위원회 김채현위원장은 “분단문제를 현대적인 관점으로 접근해 외국인도 공감할 수 있는 국제적인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무용계의 과제”라고 지적했다. ◆음악/ 작곡가 안익태가 30년대 작곡했던 ‘코리아환타지’를 60년대에 전쟁을 승화시키는 쪽으로개작한 것을 비롯해 변훈의 ‘떠나가는 배’이호섭의‘울음’등 많은 작곡가들이 분단의 비극을 음악으로 형상화하는데 힘을 기울였다.그러나 작품 못지않게 삶자체에 통일의지가 가득했던 작곡가 윤이상이 갖는 상징성은 그 무엇보다 큰 자리를 차지한다. 95년 독일 베를린의 한 병원에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윤이상은 조국의 분단을 걱정했다.67년 동베를린간첩단사건에 연루돼 71년 독일에 귀화한 뒤 한번도 고향땅을 밟지 못했던 그는 음악으로 남북 화해의 다리를 놓기위해 수시로 북한을 오갔다.‘오보에와 하프를 위한 이중 협주곡’칸타타‘나의 땅,나의 조국’등 통일을 염원하는 작품창작뿐 아니라 88년에는 남북축전을 제안하고,90년 평양에서 범민족통일음악회를 직접 주도하기도 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민경찬 교수는 “남북한이 서로 민족음악을 내세우지만 결국 둘다 반쪽의 민족음악일 수 밖에 없었다”면서 “남북의 음악계가 서로합심해 새로운 통일음악을 모색할 시기”라고 강조했다. 이순녀기자 coral@
  • [황석영의 맛따라 추억따라](4)잃어버린 먹거리

    6·25전쟁 전에도 쌀이 늘 모자라서 수제비나 국수를 많이 먹었지만 밥을 지어 먹을 때에도 반찬은 한 두어 가지가 고작이었다.동그란 밥상 가운데에 찌개 냄비 올려놓고 김치 한 보시기에 밥 한 그릇씩이 고작이었다. 그러니 밥에다 뭔가 넣어서 해먹으면 양식도 절약이 되고 반찬도 따로 장만할 필요가 없게 된다.나는 요즈음 경양식 집에서 김치와 베이컨과 햄이며 당근 등속을 넣고 버터에 볶은 김치볶음밥은 어딘가 맛이 분명치 않아서 딱 질색이다. 김치가 시어지면 속을 좀 털어내고 송송 썰어서 김치밥을 해먹었고 햇감자가나오면 감자밥을, 고구마가 나오면 고구마밥을,그리고 가을에 김장하고나서남은 무를 넣고 무밥도 해먹었는데,콩나물은 값싸고 가장 흔한 채소라 어느철에도 가끔씩 해먹었다. 영등포의 그 작은 집 뒷뜰에는 화단도 있었고 수돗간과 광도 있었고 광 위에장독대가 있었다. 여름이면 화단에다 일년초의 씨를 뿌렸는데 봉숭아 채송화분꽃 그리고 나팔꽃이 누나들이 매어준 실을 타고 판자 울타리 끝에까지 기어 올랐다.익으면 발간 주황색이되는 유자도 열렸고 수세미 넝쿨도 광의 지붕으로 뻗어 올라갔다.초겨울이 되면 아버지가 광의 뒷편 그늘진 곳에다 땅을 파고 김장독을 묻곤 했다. 어머니가 뚜껑과 짚으로 둥글게 짠 덮개를 열고 웅크리고 한 손을 집어넣어통배추 김치나 절인 무를 꺼내는 모습이 지금도 눈 앞에 삼삼하다. 김치밥은 돼지고기를 써야 더욱 맛이 좋다.돼지 살코기를 다져서 갖은 양념하여 살짝 볶아 놓고 쌀을 앉힐 때 김치와 돼지고기와 쌀을 켜켜로 두어 물을 잡는다.보통 때보다 물을 약간 덜 잡아서 밥을 하면 되지만 약간 질척한듯 짓는 것이 더욱 맛있는 것같다.양념장을 준비했다가 조금씩 밥 위에 두고비벼서 먹는다. 멸치로 다시를 낸 맑은 미역국과 함께 먹으면 다른 찬이 필요가 없다. 콩나물 밥도 짓는 법은 비슷하여 양념이 된 고기를 볶아서 콩나물과 같이 쌀에 앉히는데,더욱 구수한 맛을 내려면 다시마 우린 물이나 멸치 맛국물로 밥물을 잡는다.역시 양념장을 넣고 비벼서 먹는다.국은 재첩이나 조개로 된장국을 끓여서 낸다. 무밥이나 감자밥 고구마밥도 모두 양식이 모자라던 시절의 밥짓기지만,얼마전에 여행길에서 산간에 들어갔다가 감자밥과 막장으로 끓인 호박찌개를 먹고 투박하고 구수한 옛맛이 살아나서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웠던 적이 있었다.도무지 이런 맛이란 시중의 음식점 어디를 가보아도 없다.요즈음 대중식당의 차림표와 음식은 서울에서 저 남도 끝이며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어슷비슷한 맛이다. 의 평준화가 이루어진 셈이랄까.대충 벽에 붙은 차림표대로 주문을 하고나면어디선가 먹은 그 음식이 같은 모양새로 나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밥은 또 어떤가.밤중에 공부를 하다가 아니면 책을 읽다가 귀찮기는 하지만 속이 출출해서 슬슬 부엌에 나가서 뭔가 먹을 것을 찾는다.형제들이 많은 집이면 서로 가위 바위 보를 하기도 하고 제일 굴풋하고 시장한사람이 부엌으로 나가게 된다. 밥이 솥 안에 조금 남아있고 찬장에는 먹던 김치가 있고 고추장 뿐이다.허름한 양은 냄비에다 참기름을 두르고 밥과 고추장과 김치를 넣어 비비면서 볶는다.그대로 숫가락 여러 개를 꽂아서 냄비채로 들고 방으로 돌아오면형제들이 저마다 달려들어 퍼먹는데 밤참의 그 맛이란 세 끼 중에 가장 특별한맛이다. 뭔가 나물이나 김치나 하여튼 먹고 남은 찬을 넣고 비벼 먹는 음식은 어느지방에나 있는데 사람들 추측에 의하면 대개 명절이 지난 뒤라든가 제사를지낸 며칠 후에 ‘먹어 치우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전주 지방의 비빔밥이 유명하지만 안동에서는 원래의 의미대로 헛제사밥이라고 부른다. 어렸을 적에 평양이 고향이던 어머니는 ‘온반’을 제대로 한 적은 없었다. 부모님들은 아마도 수십년 동안을 남쪽에 정착해 살면서도 이곳은 임시 거처려니 여기고 살아온 게 분명할 것이다.더구나 어머니는 농촌 가정 출신이 아니라 개화된 지식인 집안이었고 커서 배운 요리도 거의가 일본식의 개화 음식이었다.아니,그렇다고는 해도 무엇보다도 어머니는 뿌리를 뽑힌 ‘피난살이’의 살림을 의식적으로 벗어날 수가 없었을 게다.내가 중학교에 들어가서몇 대를 서울에서 살아온 토박이 아이들의 도시락 반찬을 보고 깊은 인상을받았던 기억이 난다. 특히 그들이 찬통에 싸온 여러 종류의 장아찌는 기가막힌 맛이었다. 머니는 나중에 아버지와 사별하고부터는 혼자서 벅찬 생업을 감당하노라고더욱 부엌일과 멀어졌고 우리집 식단은 그야말로 가게에서 그날 그날 사다가후딱 조리해서 먹어치우는 식이 되었다. 어머니는 노티를 외우던 것처럼 고향의 온반이 먹고 싶다고 여러번 말했고 비슷하게 만들어 먹기도 했다.그저콩나물 시금치 무나물 등속에다 두어 국물을 부어 만든 것이었는데 우리가보기에는 국밥도 아니고 비빔밥도 아닌 이상야릇한 음식인 듯했다.이렇듯 야릇한 음식으로는 중국집의 울면이 있다.우동이나 짬뽕처럼 시원한 국물도 아니고 짜장면처럼 비비는 것도 아닌 걸죽한 소오스가 아닌가.마치 비벼 먹다가 마음이 변해서 국을 들이부운 것만 같다. 내가 몇 차레 김일성 주석과 나눈 점심에 온반을 먹게 되었다.어느 기록에도보니까 해방후 초기 집권 시절에 부인이 집에서 직접 콩나물 기르는 얘기가나오고 장군(김 주석)이 콩나물 국밥을 즐겨했다고 한다. 이거이 주로 먼길 떠나는 사람들이 먹었디.손님이 많고 일손은 바쁘고 할적에 온반 한 그릇씩 주면 얼마나 편리했겠소.속두 풀리구 든든하디. 온반 역시 설이나 제사 뒤의 비빔밥의 유래와 같은 계통의 음식이었을 것이다. 다만 추운 지방에서는 남은 음식을 차게 먹을 수 없으니 더운 국물을 부어서먹었을 게 분명하다. 이것을 끓인 것으로 온반죽이 있으니 더욱 그럴 듯 하다. 표고버섯과 고기를 볶고 찢어 놓은 고사리며 갖은 양념하여 무친 숙주나물을두고 달걀 지단을 썰어 밥 위에 얹고 녹두전을 부쳐서 밥 위에 얹고나서, 그위에 푹 곤 양지머리 국물이나 닭 가슴 살을 곤 맑은 육수를 부어서 먹는다. 대개는 국물을 자박자박하게 잡지만 나는 뜨거운 국물을 밥과 건더기가 푹잠기도록 부어야 직성이 풀린다.벌겋고 시원하게 담근 깍두기나 고추를 갈아젓과 버무린 배추 겉절이 김치를 곁들여 먹으면 이마에서 땀이 나고 속이후련해진다.과음한 이튿날 속풀이로도 그만이고 별로 입맛이 없는 요즈음의여름 날 점심 때에 땀을 흘리며 먹고나면 이열치열도 될 것이다. 초대소에서도 점심으로 몇번 더 먹은 기억이 난다.요새는 북에서 무슨 국을끓여도 대개는 닭을 고아서 쓰는 모양이었다.내가 된장국의 맛을 내려고 멸치를 찾았더니 주방장은 멸치를 어떻게 국물로 쓰느냐고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내가 자꾸만 된장국이나 야채국에는 멸치를 넣어야 제맛이 난다고 했더니 답답했던지 그가 멸치를 가지고 나와서 내게 보여 주었다.아뿔싸,이북에서는 동해안 멸치가 있긴 있는데 크기가 거의 작은 꽁치만이나 했다.이건비려서 못쓰겠지.이것 보다 작은 게 있어야 한다고 했더니 그건 멸치가 아니라 까나리라고 하는 것이었다. 역시 지방마다 맛과 조리법이 다른 이유는 기후와 풍토,그리고 자연조건에따른 것이다.그러한즉 땅은 작지만 팔도마다 서로 조금씩 다른 말과 음식은얼마나 아기자기한가.
  •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모임 “조선일보 취재 거부”

    최근 소설가 황석영씨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 응했다가 네티즌들로부터곤욕을 치른 후 “앞으로 절대로 조선일보와 인터뷰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힌데 이어 진보적 학자·언론인·시민운동가 등으로 구성된 학술단체에서 조선일보에 대한 취재거부를 공개 천명하고 나서 화제가 되고 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모임’(대표 강정구·동국대교수)은 지난 9일 열린 제5차 행사준비모임에서 조선일보에 대한 취재거부는물론 보도자료 일체를 제공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그간 조선일보사는 극우 편향적 보도태도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해왔다”며 이같이 결정했다.조선일보의 자매지 월간조선 역시 지난 2월호에서 ‘제주 4·3사건’의 희생자들을 공산폭도로 매도,유족들로부터 비난을 산바 있다.한 관계자는 “행사 당일 행사장 입구에 ‘조선일보 취재거부’라는문구를 공개적으로 써 붙일 계획”이라면서 “조선일보가 편향적인 보도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앞으로 이같은 활동을 계속 벌일 것”이라고 밝혔다. ‘민간인학살진상규명 모임’은 21일 오후 1시∼5시 프레스센터에서 ‘전쟁과 인권’을 주제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문제를 놓고 유족들이 참가한 가운데 심포지엄을 가질 예정이다. 정운현기자
  • [황석영의 맛따라 추억따라](3)잃어버린 먹거리

    고한 김일성 주석과 공개석상에서 또는 비공식으로 수십여 차례 만났던 얘기는 책 한권을 엮을만큼 많은 사연이 있지만,그동안 가장 미묘한 부분이기 때문에 한번도 제대로 써서 발표한 적은 없었다.몇 년 뒤의 회갑 때에 가서나회고록 안에서 정리를 해볼 작정이다. 맨 처음에 만났을 때에는 다 알려진 바와 같이 문익환 목사 일행과 동석한자리였다.접견 장소로 들어가는데 그가 집무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서있었다.체격이 크고 쇳소리가 나는 음성이었다.김 주석은 그의 젊은 시절의 사진들에서 보는 바와 마찬가지로 호남자의 인상이었다.완전한 백발은 아니고 회색의 반백 머리를 올백으로 넘겼는데 특히 인상적인 것은 눈썹이 짙고 길게 드리워져 있는 점이었다. 원형의 식탁에 모두 둘러 앉았는데 주석을 중심으로 오른편에 문목사가 왼편에 내가 앉고 수행원들도 함께 앉았다.그는 당시에는 살아 계시던 문목사 노모의 안부도 물었고 용정이나 북간도 시절의 추억도 말했다.문목사는 만주용정에 살 때 집에 독립운동가들이 수많이 묵기도 하고 드나들기도 했는데안중근 의사도 모친이 대접해드린 일이 있다고 말했다. 김주석도 만주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중국 항일군들과 연대할 때에 중국인부락을 지나다가 군량을 보급 받거나 숙박하고 나서 돈이 없으면 간단한 차용증을 써주고 ‘조선인민혁명군 김사령’이라는 글을 남기곤 하였는데,중국혁명 이후에 옛날 지주들을 척결하면서 김사령의 차용증을 지닌 지주들은 거의 다 사면했다는 말이 있더라고 중국정부의 간부들 가운데서 자신과 가장가까웠던 주은래가 전하더라면서 웃었다.그는 특히 옛날 중국의 시 속에서나 꺼우리 라는 만주 지역 사람들의 성씨에도 나타나듯이 만주는 고구려의 옛땅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국의 서안을 비롯한 예전 고구려 땅에서 남에서는 ‘식혜’라고 하는 감주를 담가 먹는다는데 등소평이가 감주를 썩 좋아한다면서,그 너르고 기름진 땅을 우리 조상들이 국토로서 보존해내지 못했다고 아쉬워 하였다.그렇지만 함경북도 일대에는 한때 여진족이 살았다고 하면서 아오지 탄광의 아오지는 ‘불타는 돌’이란 여진 말이며,주을 온천의 주을은‘뜨거운 물’이라는 여진 말이라면서 인민들 중에도 예전 여진의 성을 가진 사람이 간혹 있어서 모두우리 식으로 고쳐 주었다고 했다. 일행 중의 누군가가 느닷없이 주석님 어머님이 전도부인이 아니셨느냐고 묻자 그는 잘 못들었다는 시늉으로 귓가에 손을 갖다 대며 되묻고나서 측근이모친께서 교회에 나가시지 않았느냐 하는 말씀이라고 설명해주자 웃으면서대답했다. 우리 오마니는 살기 힘드시니까 교회에 가서 주로 주무셨디…. 사실 주석의 외조부는 장로교의 목사였고 외삼촌은 장로였으며 부친도 장로교단 소속인 숭실학교를 다녔으며 모친도 ‘강반석’이란 성명인데 그 뜻은‘베델’이란 세례명에서 왔다고 한다. 이같이 나도 일찍이 개화한 집안 분위기를 나도 아는 터이고 당시 이북의 개화 지식인이라면 반드시 기독교와 관련이 있는 게 흔한 일이었다.김주석의부친 김형직은 교회 식의 야학을 운영하면서 청년들을 모으고 민족주의적 독립운동을 하다가 나중에 러시아 혁명과 신문물에 접하면서 무산자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독립운동에 눈 뜨게 되는데 그때가 아마도 어린 김성주와 가족을 평양에 남겨두고 만주로 떠날 때가 아닌가 생각 되었다.북선지방의 근대주의자는 마르크시스트와 크리스천의 두 얼굴에서 비롯된다는 것은참으로 의미가 있어 보인다.나는 그 뒤에도 이미 작고했지만 당시에는 중국에 망명 중이던 캄보디아의 시아누크공 부처와 만찬을 함께했던 적도 있었고 개인적으로도 점심을 함께한 적이 몇번 있었다. 공식적인 만찬 자리에서 그는 언제나 활달하게 좌중에 음식을 권하고 설명을 해주기도 했다.한식과 중식이 서로 적당히 어우러진 듯한 정식이 코스로 나오곤 했는데 약주도 즐겨 들었다.만찬 술은 인삼주이거나 백두산 들쭉술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15도 짜리 들쭉술을 좋아했다.미테랑 프랑스 대통령 내외도 들쭉술을 좋아해서 열 두 상자나 비행기편에 실어 보냈다고 했다.들쭉은제주도의 멀구슬처럼 새까맣고 동그란 일종의 들딸기라고 하는데 고원지대에서만 자란다고 한다.요즘에는 남에서도 북한산 들쭉술을 먹을 수 있지만 한정된 야생의 열매로 그 많은 물량을 감당할 수는없을테니 혼합주로 맛을 낸 것이 분명하다.진품 들쭉술은 약간 쌉싸름하고 조금 떫은 것이 진한 적포도주 비슷하면서도 매우 향기롭다.전에는 담배를 하루에 두 갑씩 피웠지만 주위에서 하도 말려서 겨우 끊었다고 한다.그는 점심 뒤에 한 시간씩 집무실옆의 방에서 오침을 한다고 말했다. 가 깊은 인상을 받은 어느 점심은 매우 소박했다.작은 메추리 다리를 몇 개먹고나서 국수가 나왔다.주석은 자신이 국수를 제일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은 두 끼만 국수를 먹어도 곧 질린다고 하지만,자기는 한 열흘은 먹을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국수를 담은 유리 대접을 내려다보니 면이 그야말로새까만 색이었다.콩물국수인 셈인데 하얀 콩물에 검은 국수가 잠겨있는 모양이 이색적이었다.주석이 다른 날처럼 음식 설명을 내게 해주었다. 이거이 언 감자 국수라고 하는 거요.일전에 독일의 작가 루이제 린저 여사가 왔을 때 독일에 감자 음식이 많은줄 아는데 이렇게 조리하는 방법은 아느냐고 했더니,얼린 감자로 요리하는 건 세계에서 조선밖에 없다고 하더군. 검정색‘언 감자 국수’의 면발은 찰지고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웠다.언 감자를 우려내어 녹말을 낸 다음에 끓는 물에다 국수를 뽑는다는데 차디찬 콩물에 말아 먹는다.위에는 검은 깨를 뿌리고 함경도식 갓김치를 얹어서 먹는다. 그가 음식의 유래를 내게 말해 주었다. 우리가 두만강 연안에서 항일 투쟁할 때에 인민들이 많이 도와 주었소.화전하는 인민들도 저이 먹을 것이 없는데 우리가 지나는 산길에다 표를 해두고감자를 묻어놓군 합네다.눈이 한 길이나 쌓이고 땅은 꽁꽁 얼어 붙어 있디. 감자를 파내면 시꺼멓게 얼어서 돌덩이야.근거지루 질머지구 가두,언 감자를 구워도 못먹고 삶아도 못먹어요.그때 왜놈들 청야작전이 철저해서 보급선을 멀리서 차단하고 있대서.얼어 죽거나 굶어 죽고 남은 빨치산들을 토벌하겠다는 소리요. 인민들이 준 것을 버려서는 안된다구 그때 함경도 출신 동무가 우려내서 국수 만드는 법을 생각해냈소.가난한 인민들은 다 살아갈 궁리를 하는 지혜가있소. 맹물에다 소금만 넣고 끓인 국수가 어찌나 맛이 있던지. 나중에 뉴욕에서 나는우연히 개마고원이라는 냉면 집에서 이 국수의 조리법을 듣게 된다.아는 사람에게 듣기로는 그 집의 물김치가 기가 막히게 시원하고 맛있다는 것이었다.그래서 찾아가 보니 북청에서 피난 나왔다가 미국으로 이민했다는 사람네 집이었다.과연 물김치가 일품이었다.무는 보통 물김치처럼 나박썰기가 아니라 길쭉 길쭉하고 얇게 썰었고 배추 잎도 그만한 크기로썰었는데 오이쪽이 간간이 떠 있다.얇게 채 썬 밤,대추,사과,배,쪽파,등속의 건더기가 알맞게 섞였고 역시 김치 국물이 한 대접이다.고춧가루를 채에 걸러서 탔는지 붉은 물이 들었지만,나중에 뉴욕에 왔던 한시해 부부장에게서들으니 진짜 개마고원 김치는 고춧가루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집의 할머니가 팔십이 다 된 분인데 ‘언 감자 국수’를 알고 있었다.함북지방의 화전민들이 곧잘 해먹는다는 것이다. 언 감자를 강판에 갈아 채에다 녹말을 내리는 것은 감자국수 해먹는 거나 다를 바가 없다.반죽을 하여 국수틀에 넣고 끓는 물에 국수를 뺀다.국수를 찬물에 우릴 적에 손가락으로 세심하게 끈기를 씻어내어야 찰기가 더 좋다고한다. 콩물 내는 것은,물에 담갔다가 위로 뜨는 콩을 버리고 골라내어 비린 맛이가실 때 쯤까지 끓이다가 설컹할 적에 건진다.그래야만 콩의 고소한 맛이 살아 있다고 한다.믹서에 갈 적에는 물을 조금 붓거나 편리한 대로 두유를 함께 넣어도 맛있다.콩국의 맛을 내려면 땅콩이나 잣을 갈아서 넣어도 좋고 들깨나 참깨도 좋다.검은 참깨를 뿌리고 위에다 함경도식 갓김치를 얹어 먹는다.함경도 산야의 들갓은 길이가 짧막하고 줄기도 여리다.여기 갓김치는 전라도 식으로 젓갈을 전혀 쓰지 않아서 깊은 맛은 없는 대신에 쌉쌀하고 향긋한 갓의 냄새가 싱싱한 것이 특징이다.
  • 남북 정상회담/ 시민 표정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순안공항에서 직접 영접하고 북한 주민들이 열렬히 환영하는 모습을 텔레비전 생중계를 통해 지켜본 국민들은 감동과 놀라움에 휩싸였다. 대다수 국민들은 김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악수하는 모습을 보고 남과 북이한핏줄임을 새삼 확인하며 회담의 성공을 기대했다.일부 시민들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편길석(片吉錫·67·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씨는 “두 정상이 손을 맞잡은모습을 보니 너무 감격스럽다”면서 “나도 죽기 전에 평양에 한번 가보고싶다”고 활짝 웃었다. 순안공항에서 회담 장소인 백화원영빈관으로 가는 길목에 환영나온 평양시민들의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본 황재환(黃在換·70·경기도 남양주시 오남면)씨는 “벌써 통일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면서 “남과 북이 한핏줄임을 확인했다”고 감격스러워 했다. 주부 문은경(文銀景·25·서울 강남구 개포동)씨는 “두 정상이 오랜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얘기를 나누는 모습에 감동했다”고 말했다.김재우(金在雨·51·건축업·경기 용인 수지읍)씨는 “건축현장에서 일을 하다 정상회담이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궁금해서 근처 부동산소개소로 가서 텔레비전을 봤다”면서 “김 위원장이 직접 마중나온 것을 보고 북한이 생각보다 적극적인자세로 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정상회담의 성공을 낙관했다. 유창순(柳昌淳·71·황해민보사 편집국장)씨는 “대통령이 평양에 도착하는모습을 보니 50년 동안 가시지 않았던 응어리가 조금은 풀리는 것 같다”면서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통일의 길이 열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향민 2세인 조남일(趙南一·32·변리사)씨는 “두 분이 만나는 모습을 보고 눈물이 핑 돌았다”면서 “빨리 북한에 있는 친지들을 만날 날이 오면 좋겠다”고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기대감을 표시했다. 대전시 동구 성남동 형제의 집 미전향 장기수인 김용수씨(68) 등 3명은 “남북의 정상이 만나는 모습을 보니 그동안 힘들었던 일이 눈녹듯 사라졌다”면서 “정상회담이 분단을 종식하고 통일을 이룰 수 있도록 근본문제부터 차근차근 해결할 원칙을 마련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실향민 이성만(李成萬·64·평북 중앙도민회 총무부장)씨는 “김 위원장이공항에 나와 대통령을 영접하고 차에 함께 타는 모습을 보니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면서 “대통령이 우리를 대신해 고향 땅을 밟아주셔서 망향의 한이 풀리는 것 같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소설가 황석영(黃晳暎)씨는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두 정상이 서로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황씨는 이날 오전 인천 뉴스타호텔에서 ‘분단시대의 문학’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갖고 “북한이 경제적으로 힘들다는 것은 그들도 인정하는 사실인데 굳이 이를 들먹여 북측을자극하지 않는 것이 좋다”면서 “북측도 남한을 배제하고 미국만을 상대하려는 접근방식을 버리고 남측을 협상의 상대로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영우기자 ywchun@
  • 남북정상회담/ 각계 기대와 희망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난다.반세기 넘어 처음이다.때로는 안타까움도 있었지만 저 밑바닥에는 언제나 민족이라는 핏줄 특유의 애틋함이 흐르고 있었다. 남쪽 사람과 북쪽 사람들을 대표해서 정상들이 만난다니 그냥 좋다.몇번이나기대에 부풀었다가 실망해버린 적이 있었다.일정이 하루 늦춰지면서 가슴이철렁하기도 했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느낌이 예전과 다르다.무언가 이뤄질것 같은 예감이 든다.남북 정상들의 만남에 앞서 ‘사람들’의 얘기를 모아봤다. ■강동희(프로농구 기아 엔터프라이즈 선수)그동안 각종 국제대회에서 이명훈 등 북한 선수들과 경기를 하면서 우정을 나눠왔다. 그러면서 분단된 남북한이 하루빨리 하나가 돼야 한다는 것을 직접 피부로느꼈다. 특히 지난해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통일농구대회를 치르면서 통일의 물꼬가서서히 열리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이런 스포츠 류가 농구뿐만 아니라 다른 종목에서도 광범위하게 이뤄졌으면한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한의 스포츠 교류가 더 이상 뉴스가 되지않는 시대가 됐으면 좋겠다.더 나아가서는 한국프로농구(KBL)에 북한의 벼락팀이나 우뢰팀이 참가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또 축구,탁구에서와 같이 농구에서도 남북단일팀이 구성되기를 바란다. ■김은선(실향민·76·부천시 원미구 도당동) 51년 결혼한 아내와 함께 남한에 내려와 2남3녀를 두고 열쇠공 기술을 익혀 힘겹게 고생하며 산 지 50년째다.북에 두고온 아버지와 여동생의 생사 한번 확인하지 못하고 한달에 1∼2차례 임진각에 가서 고향땅을 바라보며 한스러운 마음을 달래고 있다. 우리같은 실향민의 마음만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단지생전에 어린 시절 뛰어놀던 고향땅을 한번 밟아봤으면 좋겠다. 김대통령은 정상회담을 통해 다른 것보다도 북한에 경제적으로 도움을 많이주고 식량이라도 많이 가져가 나눠줬으면 좋겠다. ■박종환(숭민원더스여자축구단 단장)90년 통일축구대회를 위해 대표팀을 이끌고 북한에 갔을 때의 감회가 새롭다.당시 15만명이 입장한 경기장에서 경기를 펼쳤는데 운동장 시설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현지에서 느꼈던 것은 북한 사람들이 남쪽과 모든 것을 성사시키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또 칭찬해주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그러나 그들은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으면서도 1단계,2단계 하는 식으로 과정을 만들어 일을 미루곤한다. 그들과 무엇을 하고자 할 때 주의할 점은 자존심을 세워주면서 조급하게 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 때보다 세월이 10년이나 흘렀으니 북한 사람들도 생각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기대가 된다. ■신무성(미 8군사령부 병장·24) 남북한이 화해무드 속에서 성사된 회담이라 국민적인 기대감이 무척 큰 것 같다.회담 성사 사실을 발표하던 날을 생각하면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로 회담 성사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그러나 너무 갑작스런 평화·화해 무드에 도취돼 느슨한 생각으로 북한을 바라봐서는안된다고 생각한다.현역 군인으로서 돌발적인 사태에 대비,긴장감을 풀지 않고 국가방위에 충실하고 있다.다른 전우들도 마찬가지다.양측의 적대관계가조금이라도 풀릴 수 있는 방안이 나왔으면 좋겠다.회담의 최우선 과제는 어떤 경우에도 서로 전쟁은 피한다는 국제적 선언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측은 경제위기 등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빗장을 연 것으로 여겨진다. ■신현균(서울 성민교회 목사)지난 부활절,분단 이후 처음으로 평양 봉수교회에서 열린 남북 합동연합예배에 남한 개신교를 대표해 참석했다.감회가 새로웠다.당시 북한 기독교계의 달라진 분위기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종교계는 다른 분야에 비해 비교적 교류가 많았지만 남북정상회담이후 보다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교류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지금 우리 종교계에서는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목소리와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북한의 종교계에서도 남북 교류에 대한 기대가 큰 것으로 전해지고 있고,지난 부활절의 남북 합동예배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직접 실감했다.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 종교계가 명실상부한 화합과 일치를 이룰 수있도록 회담이 튼실한 열매를 맺기를 바란다. ■유영례(주부·44·인천시 강화군 송해면) 내가 사는 강화는 북한과 밀접해있어서 집안까지 대남방송이 다 들린다.그래서 그런지 이번 회담을 접하는느낌은 되레 담담하다.다만 아들이 최근 해병대에 입대했는데 북한이 갑자기이번 회담을 핑계삼아 무슨 도발이라도 할까봐 가슴이 뛸 때가 많다.남북한정상이 분단 이후 처음 만나는데 모든 일이 쉽게 풀리기는 어려울 것으로본다.김대통령께서는 너무 회담 성과에 대해 부담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국민은 정부가 소신껏 대북정책을 펴는데 신뢰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말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물어봤으면 좋겠다.남한에서 쌀이나비료도 지원해주는데 왜 자꾸 딴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이산가족도 만나게해주고 아니면 전화통화라도 할 수 있게 해달라.터놓고 상대하면 어려울 것이 없을 것이다. ■이남은(인천 부평구 부광여고 3학년·18) 우리 국민과 북한 동포들이 전쟁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달라.이렇게 해서 서로 방위비를 줄이면 교육비에 더 많은 지원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불쌍한 북한의 어린이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갈 것이다. 사실 북한을 다른 나라처럼 여겨왔는데,정상회담이 잘 돼 교류가 늘면 한민족이라는 생각이 싹틀 것이다.하지만 이번 정상회담으로 곧 통일이 온다고는믿지 않는다.50여년 동안 다른 사상과 문화 속에서 살아왔는데 쉽게 동질감을 느낄수 있겠는가. 우선 평양교예단이나 학생예술단처럼 문화 방문단이 서로를 번갈아 찾으면좋겠다.우리나라 가수들의 공연을 보면 북한 학생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사뭇 궁금하다.많은 일을 하시는 대통령께서는 다음 회담을 위해서라도 몸건강하길 빈다. ■최우영(납북자가족모임 총무·30·여) 납북자 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정상회담에 거는 기대와 설렘은 누구보다 크다.아버지는 지난 87년 1월 부산에서출발한 동진호를 타고 조업을 하다 납북되었다.올해 54세가 되었지만 생사조차 전혀 모르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두 정상이 만나 모든 것을 허심탄회하게 얘기했으면 한다.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북한에 억류돼 있는 우리 국민들에 대한 얘기를 꼭 전해주었으면 좋겠다.이번 회담의 성사는 지속적인 ‘햇볕정책’의 결과이듯이 북한에 억류돼 있는 납북자와 북송을 원하는 미전향 장기수에게도 자신들이 원하는 곳에서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살게 해줬으면 좋겠다.이번 회담에서는 이산가족과 함께 납북자 문제가주요의제로 다뤄져야 한다. ■태진아(가수)지난해 12월 평양 봉화예술극장에서 공연을 했던 나로서는 남북 정상의 만남이 이렇게 빨리 이루어졌다는 데 대해 놀랍고 반갑고 고맙기만 하다.그때 만나 ‘형님’이라고 부르며 친하게 지냈던 북한 분을 평양교예단 공연장에서 만나뵙고 뜨거운 포옹을 나누었다. 평양 공연때 무릎을 꿇은 채 ‘사모곡’을 부르며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김용순 아태평화위원장이 “왜 그렇게 울었냐”고 묻길래 “나보다 더 평양을 그리워했을 실향민들을 생각하느라 그랬다”고 대답했었다.이번 정상회담에서 그분들의 50년 숙원이 이루어지면 좋겠다.나아가 정상회담 이후 남북의 문화교류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져 온 배달민족이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계기가 만들어졌으면 한다. ■한필성(목축업·67·경기도 파주시 교하면)남북정상회담으로 꿈에 그리던고향방문길이 꼭열릴 것 같다.90년 2월 일본 삿포로 동계 아시안게임에 북한 선수단 스케이트 코치로 참가한 여동생 필화(59)를 상봉한 뒤에도 기회가있을 때마다 어머니(최원화)와 여동생을 만나기 위해 준비해 왔지만 번번히무산됐다. 71년 일본 삿포로 동계올림픽에 북한 스피드 스케이팅 대표선수로 참가한필화와 전화통화만 하고 만나지 못했던 때를 돌이키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하다.생전에 그렇게도 보고 싶던 어머니가 98년 4월19일 94세로 세상을 떠나셨다.고향방문길이 열리면 어머니와 아버지 묘소부터 찾아가 불효에 대한 용서를 빌겠다.이번에 남북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이뤄져 이산가족들의 한을 풀어 주었으면 좋겠다. ■현정화(한국마사회탁구단 코치·전 국가대표)91년 남북 탁구단일팀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을 당시엔 당장 통일이 될 것같은 분위기였다.벌써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 통일무드가 조성되는 것 같아 너무 기쁘지만 사실 늦은감이 없지 않다.지난 10년간 남북이 서로 화해하고 협력했으면 탁구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훨씬 더 많은 발전이이루어졌을 것이다. 우승을 확인한 순간 같이 부둥켜안고 울던 북한의 이분희가 무척 그립다.팀동료 김성희와 결혼해 아이까지 낳았는데 아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너무 아팠다.이번 남북정상회담이 성공리에 끝나 탁구단일팀 구성은 물론 그리운 사람들도 마음껏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91년에 느꼈던 ‘작은통일’의 감격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다. ■황석영(작가)만남 자체에 의미를 두자고들 하지만 비전을 갖고 해야 할 것은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우선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꿔야 한다. 4강이 한반도를 통해 정치적 이익을 얻고 있는 만큼 넘어야 할 산이 많을 것이다.하지만 이미 91년에 합의한 남북합의서에 기본정신은 다 들어 있다고할 수 있다.그걸 실천하겠다는 두 정상의 선언이 공식화돼야 하겠다.한반도긴장 완화를 위해 평화선언이라도 해서 그 가능성을 열어둬야 할 것이다. 앞으로 문화교류가 물밀듯 할 것으로 예상되는데,문화인의 한 사람으로서교통정리가 되길 바란다.‘두루미와 여우’의 만남처럼 서로의 이질성만을부각시켜서는 안된다.통일문화를 형성한다는 의도된 목표 아래 공감할 수 있는 부분부터 교류할 수 있도록 문화교류기획위원회 같은 전담기구를 구성해야 한다.
  • [황석영의맛따라추억따라](2)노티맛으로 이산가족의 연줄이어

    어머니는 목사이며 교육자였던 집안의 둘째 딸이었다. 큰오빠가 있었고 위로 맏딸인 언니가 있었으니 형제들 순으로 따지자면 셋째인 셈이다.어머니 아래로 여동생이 둘이고 남동생이 하나 있었단다.그러니까 딸 넷에 아들 둘,모두 육남매였다는데 내가 어릴적에 부모님이 월남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본적이 없다. 그들 중에서 우리 식구처럼 월남했던 어머니의 바로 아래인 셋째 이모와 오라비인 큰아버지(이북에서는 외삼촌의 경우에도 큰아버지라고 부른다)만을알고있을 뿐이다. 셋째 이모는 딸 하나를 낳았는데 네 살 때인가 죽었다.이름이 인옥이었다.셋째 이모네는 우리 보다 좀 뒤늦게 월남해서 어떻게 수소문을 해가지고 우리동네에서 가까운 이웃 동네로 이사를 왔다.이모부는 몸집이 마르고 얼굴도창백한 병약한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인옥이도 보채기를 잘하고 병치레를 많이 했다.내가 여섯 살 때였으니까 나하고는 아마 두 살 차이가 날 것이다. 인옥이는 오빠 오빠,하면서 나를 따라다녔고 내가 세발 자전거를 타고 영등포 로타리를 한바퀴 돌아오려고 출발하면 징징 울면서 쫓아왔다.이모부는 그래서 나를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그 애가 죽었을 때 이모네 집에 가보았는데 비좁은 마당이 있는 방 세 칸짜리 한옥이었다.맞은편 담 가에 우리 집 뒷마당처럼 일년초가 피었는데 분꽃이 빨갛게 피어 있던 게 기억난다.이모부는 마루에 앉아서 술에 취한 채 담배를 피워대고 있었고 이모는 계속해서 울기만 했다.그들이 살던 마루의 건넌방 미닫이가 열려 있었는데 멜방처럼 광목끈을 매어 놓은 작은 널판자의 상자가 보였다.나는 그것이 뭔지 대번 알아보았다.어릴적에 인옥이 생각만 하면 후회했다.자전거를 좀 많이 태워줄걸. 어머니의 오라비인 큰아버지는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의사였다.내가 오래 전에 그분을 빌어서 ‘한씨년대기’라는 중편소설을 쓴 적이 있다. 전쟁이 터지고나서 1.4후퇴 때에 우리 식구는 대구로 피난을 갔다.대구 역에서 중앙통은 그때에도 제법 대도시처럼 붐볐는데 아버지와 내가 둘이서 길을가다가 큰아버지를 만났던 것이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큰아버지는 멋쟁이었다.그이는 어머니처럼 키가 크고 굽실굽실한 긴 머리를 뒤로 넘기고 있었는데 깃이 넓은 헐렁한 검은 외투를 입고 있었다.안에는 당시에 미군부대에서 나온 목 앞에 단추가 달린 국방색 털쉐타를 입고 있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고 앞에서 우리를 지나쳐 가려던 키 큰 남자가 우뚝 섰다.두 사람은 잠시 그대로 서서 외마디 고함을 지르더니 서로 부둥켜 안았다.그래서 어머니는 오라비와 바로 손아래 여동생을 가까이 두고살수가 있었다. 셋째 이모는 교사가 되었는데 중년에 남편과 이혼하고 자식도 없이 혼자 살았다.이모부가 다른 데서 아들을 낳고 살림을 따로 냈던 것이다. 큰아버지는 소설에 썼던 대로 오십년대의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허무러졌다. 그를 고용했던 무면허 의사의 모함으로 동창생들과 술자리에서 말 몇마디 한 것으로 반공법에 걸려서 호된 고문을 당했다.그리고는 다른 죄목으로 기소되었다가 풀려난 뒤로 세상살이에 뜻을 잃어버린 듯했다.그이도 두 번인가재혼을 하더니 말년에 딸 하나 보고 외롭게 살았다.그들은 요즈음 말로 이산가족 일 세대인 셈인데 이제는 모두 세상을 떠났다. 내가 이러한 쓸쓸한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노티’ 때문이다.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부터 먹고 싶다고 몇번이나 말했다는 그것 때문이다. 사실 나는 잊고 있었다.어머니쪽 외가 식구들이 영등포에 모여 살 적에는 추석이나 설이 되면 꼭 이틀 밤낮을 모여서 명절을 같이 쇠고는 했다.좁아 터진 집에 세 집이 모이면 불편할 것 같지만 이모는 독신이고 큰아버지도 그때는 아직 혼자여서 다른 집처럼 아이들로 붐빌 것도 없었다.큰아버지는 노상술만 마셨는데 그의 주정을 아버지 혼자 다 감당하곤 했다.그는 언제나 술이취하면 어머니에게 성화였다. 야야 노티 좀 해먹자꾸나. 오라반두 참…여게 어디 고향 같은 기장쌀이 있습네까. 어쨌든 어머니가 그 무렵에 구정 설이 되면 찹쌀을 빻아서 노티를 했다.그렇지만 나는 그 맛을 잊고 지냈다.아마도 약과 비슷한 것도 같고 모양은 지짐이(녹두 빈대떡) 비슷했을 것이다.얼마 후에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나는 장성해서 떠돌다가 뒤늦게 어머니를 모셨는데 어머니는 그동안한번도 노티 얘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내가 어릴 적부터 재봉틀을 돌리거나 뜨개질을 하면서 여러 이야기를 해주었다.워낙에 말 재간과 기억력이 대단한 분이라 도깨비 이야기며 소설책 이야기며 고향 이야기들이 재미 있어서 나는 졸린 눈을 부비며 자꾸 되묻고는 하였다. 당신이 어릴 적에 형제들과 방에서 하던 놀이도 많이 배웠다.팥을 쪼개어 종이를 둥글게 말아서 그 안에 집어 던지는 벼룩이 윷이며,남포불이 비춘 벽위에다 그림자 놀이를 하는 법이며,서로 다리를 포개고 헤아리면서 ‘한알대 두알대 삼새’하다가 끝나는 다리의 임자가 술래가 되는 놀이며,손을 서로잡고 엄지 손가락을 세워서 상대방의 엄지를 찍어 누르는 엄지 씨름,뭐 끝이 없었다. 어머니는 이남 것은 과일도 밭 작물도 별로 맛이 없다고,이를테면 내가 참외를 맛있게 먹고 있는데도 그런 식으로 입맛을 버려 놓고는 했다.나중에 커서야 그게 일리가 있음을 알았다.어머니의 입맛은 고향을 그리는 향수였던 셈이기도 하고,또한 선배들의 말에 의하면 위도나 기후 상으로도 그렇고 논 보다는 밭이 많던 북선 지방의 작물이 맛이 월등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드는 방법도 모르고 그 맛도 잃었던 나는 팔십 구년에 방북했을 적에 기적처럼 노티와 만나게 된다. 누나와 내가 어렴풋이 기억한 외가 식구들과 사촌들의 이름을 적어 갔는데정확하게는 큰외삼촌네 아들 형제들,그러니까 내 사촌 형제들과 어머니의 여동생인 막내 이모를 찾았다.막내 이모네도 아들이 셋에 딸 하나가 있었다. 고려 호텔의 지정된 방에 갔더니 낡은 한복 차림의 할머니가 낯선 형제들과앉아 있었는데 나는 가슴이 저려오는 느낌이었다.어쩌면…돌아가신 어머니가 거기 앉아 있는 게 아닌가.어머니의 말년 모습과 똑같았다.울고 불고,서로소식 묻고,형제들 소개하고,그런 법석을 하다가 차츰 침착해졌다.나는 특별히 시내에 있는 사촌 맏형의 집에까지 따라갈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서 밤늦게까지 이모와 함께 수많은 이야기를 했다.물론 어머니의 임종 얘기와 노티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떠나오던 날 이모는 사촌들과 순안 비행장에 배웅을 나왔다.헤어지기전에 휴게실에서 이모가 푸른색 보퉁이 하나를 내밀었다. 이거 개져다 먹어보라. 그게 노티였다.나는 비행기 안에서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두 개나 먹었고 북경에서 나머지를 다 먹어 치웠다.이모가 일러준 대로 한번 만들어 먹어 볼작정이지만 내 기억이 맞는지는 잘모르겠다. 요즈음은 구수한 기장쌀을 구하기 힘들테니 찹쌀을 빻아다 시루에 찐다.엿기름가루에 물을 내려 우려낸다.익은 찹쌀가루와 엿기름가루를 섞어,우려낸 엿기름 물을 붓고,소금 간을 하고 참기름 넣어서 반죽을 한다.반죽을 아랫목에 한 두 시간 덮어 두어 삭힌 다음에 손바닥만한 크기로 약한 불로 지져낸다. 이것을 식혀서 꿀에 재어 항아리에 채곡채곡 넣어서 장독대에 내다 놓고 먹는다고 한다. 순안 비행장에서 막내 이모와 그렇게 헤어진 것이 마지막이 되었다.그로부터 석 달 뒤에 이모는 이산가족 일세대의 마지막 사람으로 세상을 떠났다.나의 어거지 방북으로 겨우 혈육의 연줄을 이은 셈이다. 어머니의 언니인 큰이모와 남동생은 진작에 전쟁 때 죽었다고 하는데 나는어머니가 갖고 있던사진은 본 적이 있었다.큰이모는 여학생 때부터 광주학생사건 등이 전국으로 번졌을 때 주동자 노릇을 하더니 일찍이 만주로 달아나서 독립군에 들었고 해방이 되어서야 돌아왔다고 한다. 언니가 어찌나 노티를 좋아했던지,겨울 밤에 몰래 장독대에 나가 동생들 몫까지 먹어치우는 바람에 둘째 딸인 어머니와 다투곤 했다고 하는데. 황석영
  • 소설가 황석영씨 “조선일보와는 인터뷰 사절”

    좌파지식인인 소설가 황석영(57)씨가 우익 보수신문인 조선일보의 인터뷰에 응했다가 네티즌들로부터 곤욕을 치르고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는 응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혀 화제가 되고 있다.그동안 좌파지식인 가운데 조선일보의 기고·인터뷰 문제로 더러 논란이 된 바 있으나 자신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황씨가 처음이다. 문제가 된 기사는 지난 5월 18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황씨의 인터뷰 기사.이날 조선일보는 5월초 신작 장편 ‘오래된 정원’을 출판한 황씨를 5·18 20주년을 맞아 인터뷰한 것.황씨의 인터뷰 기사가 나가자 안티조선 ‘우리모두’ 사이트 등에는 황씨를 비난하는 글이 쇄도했다. 시인 김정란씨(상지대 교수)는 “조선일보 기고문제가 지식인 사회에서 충분한 합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려줬어야 마땅했다”며 황씨의 처사를 비판했다. 한편 지난달 30일 황씨는 서울대 강연회에서 5월 18일자 조선일보 인터뷰 기사와 관련,“책을 출판한 창비사측의 주선으로 마련된 홍보자리였으며 조선일보 기자는 부르지 말 것을 부탁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인터뷰를 한후 이곳저곳에서 ‘작살’이 났다”면서 “앞으로 절대 조선일보와 인터뷰는안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정운현기자
  • [황석영의 맛따라 추억따라](1)잃어버린 먹거리

    내가 잃어버렸다고 하는 것은 지금은 먹을 수 없다거나 만들 수가 없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그때의 맛이 나지 않는다는 소리다.사람이 변했든지 세월이변했든지 했을 터이다. 나는 다 알려져 있듯이 만주에서 태어났고 해방이 되면서 외가가 있던 평양으로 나와서 다섯 해를 살았다.따라서 기억이 나는 것은 평양에서의 한 두해가 될 것이다.태어나자마자 줄곧 피난 길이었는데 이것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팔 년 동안이나 계속 되었다. 평양에서는 이른바 적산집이라고 일본인이 버리고 간 이층 목조 집에서 살았는데 가파른 나무 계단과 모든 방마다 다다미가 깔려 있던 게 생각난다.방안쪽에는 또한 일종의 붙박이 벽장인 오시이레가 있어서 혼자 들어가 숨기에맞춤했다.오시이레 안에서는 나프탈린 냄새가 났다.그 냄새는 우리 가족이륙색이나 봇짐을 지고 이리 저리 남한의 산하를 돌아다닐 적에도 내내 따라다녔던 냄새였다. 우리 식구가 아버지의 취직으로 남한으로 내려올 때 삼팔선을 넘었는데 해주의 어느 사공 집에서 저녁을 먹었던 일이 어렴풋하게 남아 있다.갯가에서 흔하게 주을 수 있는 작은 게를 장에 조린 반찬이 신기했다.앙징맞게 작았지만집게발과 두 눈의 생김새가 그대로 있는 통째로의 게여서 입 안에 넣기가어쩐지 징그러웠다. 나는 나중에 어른들에게 듣고서야 거기가 개성의 피난민 수용소임을 알았는데,지금 기억에 남은 건 운동장의 무너진 담 사이로 보이던 작은 언덕에 봉긋봉긋 솟아난 한아름 크기의 새 무덤들과 그 앞에 사이다 병에 꽂아놓은 들꽃들이다. 만주에서부터 육로로 나온 일본인 귀환자들이 많았다는데 대부분의 작은 무덤은 그들 어린 아이들의 것이었다고 한다.내게는 다만 사이다 병에 꽂힌 들꽃들이 선명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다.서울에 와서도 효창동의 일본집들이가득찬 골목에서 세를 들었는데 분위기는 평양의 이층 집과 비슷했던 것 같다.하여튼 그 시절에 길 위에서도 새로운 고장에 도착했을 적에도 언제나 어른이 내 손에 쥐어준 것은 김밥이었다.그냥 밥 몇 술을 펴담고,조글조글하고아작아작한 (단무지가 아니라)다꾸앙을 길게 박아서 마른 김 한 장에 둘둘만 김밥은 어린내 눈에 굉장히 커 보여서 아마도 오랫동안 손에 쥐고 자다깨다 하면서 먹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오래된 일본식 집에 가서 무심코 오시이레 문을 열면 나프탈린냄새가 떠오르고 다꾸앙과 김밥 냄새가 나곤 했다.그 김밥은 요즈음에 패스트푸드가 되어버린 체인점의 김밥과는 달랐다.그 뒤 전쟁이 터지고 다시 피난길에 오르면서부터 김밥의 속이 달라지고 주먹밥이나 개떡을 먹는 일이 흔해졌지만 나중의 일이다. 해방 뒤부터 전쟁 때에는 물론이고 전후에도 오랫동안 양식이 부족해서 도회지에서는 밀가루로 연명하는 날이 많았다.어머니는 언제나 없는 재료로 아이들이 좋아할 뭔가 색다른 반찬들을 만들어내야 했다.그럴 적에 등장했던 것이 바로 ‘장떡’이었다.훨씬 뒤인 칠십년대에 와서야 어머니가 정식으로 어릴 적에 할머니로부터 전수 받은 진짜 장떡을 먹어보고서야 당시의 그것이얼마나 엉터리였는지를 알았다.어머니가 당시에 된장국과 김치 한 보시기를달랑 올려놓기가 거북했을 때에 급조했던 장떡은 우리 형제들에게는 대단한특식이요 별찬이었다.어머니가 부엌에서 장떡을 지지는 냄새를 풍기면 우리어린 것들은 둥그런 밥상 주위에서 야,장떡이다 장떡! 하면서 맴돌았다. 어머니가 급히 지져낸 장떡은 사실은 고추장떡이었다.밀가루를 묽게 반죽해서 거기에 고추장을 타고 그때 그때 눈에 띄일 때마다 파나 마늘이나 풋고추를 썰어 넣고 지진 기름끼가 도는 음식이었다.이것은 지져낸 당시에 방금 먹지 않으면 나중에는 흐물흐물해져서 풀때죽이 되어버리고 만다. 대개 장떡은 이북 음식으로 알려져 있는데 지방에 따라서 고추장을 넣든가된장을 넣든가 아니면 둘 다를 섞어 조리하기도 한다. 평안도나 황해도에서는 된장을 주로 쓰는데 밀가루와 찹쌀을 섞어서 맛을 돋굴 마늘이나 부추 또는 깻잎 등을 다져 넣고 시루에 쪘다가 한 낮의 햇볕에한 사날 말려서 갈무리해두고 먹을 때마다 참기름이나 들기름에 지져 먹는다. 개성에서는 햇된장을 건질 적에 아예 장떡 조리용으로 소금을 치지 않고 두었다가 찹쌀가루와,다진 쇠고기며,깨,파,마늘 고춧가루 참기름을 섞어서 동그랗게 빚는다.그리고 앞서와 같이 말리거나 쪄두었다가 지져 내지 않으면구워서 낸다.여기서는 햇된장에 고춧가루를 섞는 것이 특징인데 그냥 고추장떡 보다 훨씬 맵쌀한 게 특징이다. 미나리와 부추를 섞어서 밀가루와 멸치가루 등속을 넣고 파 마늘 다진 것에고춧가루나 고추장을 버무려 동글납작하게 빚어서 담백하게 그냥 즉석에서쪄먹기도 한다. 똥그랑뗑처럼 다진 쇠고기나 다진 돼지고기를 역시 으깬 두부에 섞어 된장고추장과 밀가루에 반죽해서 기름에 지져내기도 한다. 얼마 전에 큰 아이가 장가를 갔는데 사돈 댁의 법도에 따라 우리 집에 오면서 ‘이바지’ 음식을 며느리 손에 들려 보내왔다.한과니 전이니 과물이니는 제사 때 보던 것과 같은데 유난히 눈에 띄는 음식이 있었다.그것이 바로 사돈댁의 고향인 강화의 수수장떡이었다.수수를 빻아다가 찹쌀을 섞고 된장을넣어 부추와 마늘을 다져 넣은 것이었다.며늘아이가 말하기를,수수장떡의 주의할 점은 반죽할 때 절대로 물을 타지 않는다는 점이란다.된장과 부추의 물기로 반죽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색깔을 보니 어두운 회색 빛인데 속으로부추의 푸른 빛이 어른거린다.강화의 장떡은 다른 지방과는 달리 수수로 빚으면서 그냥 날것인 채로 햇볕에 말린다는 특징이 있다.꾸덕꾸덕하게 한나절 햇볕에 말린 다음 그대로 쪄서 먹거나 역시 참기름에 지져 먹으면 된다.아이들에게는 조부모가 되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조촐한 젯상을 차리고 ‘이바지’ 음식을 드리고 참배했다. 그때 물이 스미는 것처럼 영등포의 그 작은 집 안방의 가난했던 밥상이며 어머니가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던 생각이 났다. 방은 두 칸이었고 마루방 하나가 딸려 있었는데 부엌은 비좁은 편이었다.시멘트로 바른 부뚜막에는 중간 크기의 쇠솥 두 개가 걸려 있었고 부엌 문 앞의 처마 밑에 숯을 사용하는 풍로가 있었다.어머니는 두 솥에다 밥과 국을짓고 풍로는 아궁이의 잔불이 사라진 다음에 밑불로 타다 남은 숯을 작은 부삽으로 꺼내어 풍로에 옮기고는 그 위에서 석쇠로 생선을 굽거나 찌개를 끓이거나 번철에 뭔가 지지곤 했다.나는 누나와 함께 가끔씩 부엌에서 어머니를 도와 잘 붙지 않는 밑불을 살리노라고 풍로를 돌리곤 했다. 우리는 비 오는 날이나 또는 일요일 오후에 어머니가 부엌 봉당에 주저앉아밀가루 부침개를 붙이거나 고구마를 삶거나 할 때에 나직하게 부르던 노랫소리를 기억한다.일본 노래도 부르고 전쟁 때에 나온 유행가도 불렀다.어머니는 당시 표현대로 교육을 받은 신여성 인텔리였다.그래서 나중에 전후의 가난이 어느 정도 가셨을 때에는 요리책에 나온 특별한 서양 음식도 해주곤 하였다. 제를 끝내고 아이들과 둘러앉아 물린 상을 먹으면서 그제서야 실로 몇 십년만에 장떡을 먹어 보았는데 어쩐지 물컹하고 아무런 맛도 없어서 저도 모르게 구워낸 굴비쪽으로만 젓가락이 가는 것이었다.아이들은 더해서 한 점을밥 위에 올려 놓고 떼어 먹는 품이 못내 내키지 않는 양이다.그래도 보낸 쪽의 성의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더해져서 서너 점을 먹고나니 밥이 한참이나 그릇에 남았는데도 벌써 배가 불렀다.수저를 놓고나서야 장떡의 미덕을알게 된다.밥을 보통 때보다 적게 먹었는데도 어쩐지 덧부룩하고 든든한 느낌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광주에 살던 시절 모시고 있었는데 광주사태 있고나서 내가당국의 권유로 제주도에 유배 비슷하게 머물던 그해 겨울에 돌아가셨다.암이라서 식구들도 모두 포기하고 병원에서 모셔내다가 진통제나 놓아 드렸다.아내가 내게 ‘노티’가 뭐냐고 물었다.글쎄…그게 뭘까,했더니 그네가 말했다.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몇번이나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노티를 꼭 한 점만 먹고 싶구나.
  • 서울국제도서전 새달2일 개막

    국내 최대 책 잔치인 2000 서울국제도서전이 6월 2∼7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COEX) 태평양관에서 열린다. ‘책으로 열자,새로운 천년’이란 주제 아래 한국출판문화협회(회장 나춘호) 주최로 펼쳐질 올해 서울국제도서전에는 전자·인터넷 출판업체를 포함한 22개국 1,500여개 출판·잡지사와 출판관련단체 등이 참가한다. 회사별 독립전시장,국제전시장,국내 대표 출판물전과 별도로 마련될 특별전시장에는 ‘새천년 미래를 읽는 책’이란 특별기획전이 꾸며져 400여종의 각 분야별 미래예측서들이 전시된다. 지난해 이탈리아 볼로냐 아동도서전 우수작 전시회를 비롯해 ‘세계 속의 한국 문학,한국 작가전’,‘점자도서 특별전’ 등의 특별코너도 설치된다. 부대행사로 SBS FM 라디오 ‘책하고 놀자’가 매일 오후 4시부터 1시간씩 황석영·이문열씨 등 작가들이 참여하는 가운데 현장에서 생방송한다. 국제 디지털문자식별자(DOI) 워크숍,‘바람직한 국민독서 진흥방안 모색’세미나,민족문학작가회의 주최 제6회 세계 작가와의 대화 등도 개최된다. 김주혁기자 jhkm@
  • 음식에얽힌 삶의 담론…새달부터週1회 연재

    요리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진 요즘 전문가의 기능적인 조언이 아닌, 우리 맛과 음식에 관한 진정하고 재미있는 담론이 강하게 요청되고 있습니다. 대한매일은 ‘객지’‘장길산’에 이어 최신작 ‘오래된 정원’ 등의 소설과 진보적인 행적으로 이미 한국문학사에 우뚝 선 작가 황석영의 ‘맛따라 추억따라’를 6월1일부터 12월까지 약 7개월간 매주 목요일에 연재합니다.누구보다 다양하고 풍부한 인생경험을 자랑하는 작가는 음식에 얽힌 추억을 구수하게 펼치는 한편 일상적인 요리와 식사행위 등에 숨어있는 수많은 인문학적인 의미를 예리하게 캐낼 것입니다.컬러 1개면이 할애될 이 연재물은 옥새전각장인 민홍규 화백의 기백 넘치는 삽화가 서정적인 색채를 더하게 됩니다.줄곧 역사의 전면에 서왔던 작가 황석영이 이제 맛과 추억의 뒤안을 밟아보며 힘차게 펼칠 삶의 담론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작가의 말. 음식에 대한 글을 쓰려는 순간 예전의 단식 경험과 함께 막 거른 포도주,검은 빵 뿐이었던 젊은 예수의 최후의 만찬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순수한 처음의 식사를 회복하는 일은 자기 시대를 정화하려는 모든 사람들의 기본 출발점이었다. 무엇보다 음식은 사람끼리의 관계이며,시간에 얽힌 기억들의 촉매이다.나는앞으로 어떤 것보다도 내 시대의 추억을 되씹으면서 인생살이와 사람의 관계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볼 작정이다.
  • [황석영의 맛따라 추억따라] 작가와의 대화

    본지에 연재될 작가 황석영의 ‘맛따라 추억따라’는 두 가지의 커다란 새로움을 한꺼번에 독자에게 선사할 전망이다.잊어버린 맛의 기억을 새롭게 되살려주고 작가 ‘황석영’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케 하는 것이다.모두 우리의삶을 살찌우는 새 기억이고 새 모습임이 틀림없다. 충남 홍성 부근의 덕산에 신축한 집에서 작품활동에 여념이 없는 작가를 서울에서 잠깐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출간하자마자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오른‘오래된 정원’의 독자사인회 상경길이었다.웬 요리 이야기냐는 등의 질문에 논리정연한 대답을 내놓았다.그만큼 이 연재물에 대한 생각과 준비가 숙성된 표시였다. 작가는 우선 요리가 “새로운 세기에도 대단히 중요한 일거리로 남을 것임”을 강조한다.사람끼리의 사적인 관계와 소통,인간적인 작업,비획일성,다양함,생산의 창조적인 과정 등이 사라지는 후기 산업사회에서 요리는 인간적이고 가족적인 영역으로서 한층 소중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거기에 세계화에도불구하고 요리는 지역적 전통적 특수성을 잃지 않으면서 서로 어우러지고섞여 새롭게 태어난다는 점에서 새 세기의 인간적 ‘모델’이 될 수 있다고덧붙인다. “한 시대의 먹거리는 당대 삶의 표현입니다.이 점은 글쓰는 사람한테 굉장히 중요하게 다가옵니다.담론의 형식이 바뀐 것이 분명하다면 요리를 통해서 시대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다고 보여지는 거죠” 시대의 실체를 밝히는 소설을 쓰듯 이번 연재물에 접근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엿보인다.소설이 재미있어야 하듯 ‘맛따라 추억따라’는 작가의 구수하고흥미진진한 음식 이야기가 먼저 독자들의 구미를 당길 것이다.장떡 개떡 수제비 술찌게미 보리밥 장아찌 등 우리 모두가 잃어버린 음식은 물론 베트남유럽 중국 일본 미국 그리고 북한에 체류하면서 작가가 유일하게 경험한 음식 이야기가 ‘입담좋게’ 펼쳐질 전망이다. 그러나 ‘맛따라 추억따라’는 이런 구상적인 소재와 소품 일색이 아니다. 작가는 음식,요리로 인간과 삶을 꿰뚫어보고 싶은 것이다.작가가 그간 작성한 집필 메모를 읽어보면 이같은 인문학적인 시선과 각오가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일정한 기간 단식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침 점심 저녁의 식사가 하루 중에서 얼마나 중요한 행사인가를 알게되었을 것이다.‘끼니’를 잇는 일은 생명을 위해서도 그렇지만 잠자는 시간 외에 깨어나 활동하는 사람들의 ‘시간’을 적절히 분할해주고 매 단락을 맺어준다.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으면 하루가 엄청나게 길고 모든 것이 갑자기 무의미해진다” “그리고 매우 소중한 발견은 만남이나 헤어짐이나 대화나 목소리 얼굴의인상 따위와 같은 사람끼리의 관계가 빠져버린다는 점이다.천하가 적막하고고요할 뿐이다.남과의 소통은 당연히 끊기고 자기 자신마저 살아있는 것 같지 않다.먹지 않는 시간은 시간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맛을 잃어버렸다.맛있는 음식은 노동의 땀과,나누어 먹는 즐거움의 활기,오래 살던 땅,죽을 때까지 언제나 함께 사는 식구,낯설고 이질적인 것과의 화해와 만남,사랑하는 사람과 보낸 며칠,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궁핍과 모자람이라는 조건이 그 기억을 최상으로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미식가나 식도락자를 ‘맛을 잃어버린’ 사람으로 규정한다.마치 진정한 사랑을 찾아서 끝없이 헤매는 돈 쥬앙처럼 말이다” 이어 작가 황석영은 “무엇보다 인생살이와 사람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작정”이라는 말로 음식에 관한 멋지고 선도적인 담론을 쓰기 위한 집필메모를 마무리하고 있다. 김재영기자 kjykjy@. *삽화 민홍규 화백…“우리색채로 고유의 맛 우려낼 것”. 황석영씨와 함께 일을 하게 되어 기쁘다.새달부터 시작되는 새연재 제목처럼 황씨의 파란만장한 삶속에 녹아있는 구수한 맛의 향수를 단화(單畵)로 승화시키는 작업은 만만치 않을 일로 본다. 맛을 그림으로 그려낸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응과 묘한 맛이 배어있어 때론 정반합의 역설화법이 필요하다.삽화의 획일성에서 가끔 벗어나는 일도 있어야 한다. 독자들의 일방적 ‘감상 들추기’에 폭넓은 구상,비구상 형식이 전개될 것이다. 된장찌개는 할머니의 손맛으로,장떡은 코흘리개 아이들의 가슴으로,보리개떡은 늦은 봄 야윈 어머니의 미소로 그려내고 싶다.밥상 위에 다양한 맛의반찬이 있듯 ‘우리색채’로 맛을 우려내려고 한다.아울러 고단한 우리네 삶을 녹여주는 숱한 표상을 그려내고 싶다. ■프로필 1952년 경남산청에서 출생했다.중학시절 석불문하에서 ‘옥새전각’전수생활을 했고 극장간판을 그리기도 했다.90년 옥새전각의 종합성으로새로운 미술사조인 LAP ART(선묘,문자예술) 장르를 정립했다.1991년 ‘현대서예협회’를 창립해 서예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도 했다.현재 옥새복원작업을 하고 있으며 해외 LAP ART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 5·18항쟁 문화적 영향/ 문학·출판부문 성과

    문학은 제일 먼저 느끼고 가장 늦게 잊는다.5·18 광주민주항쟁은 잊어버리고 싶으나 죽어도 잊을 수 없는 억울한 피의 기억,죽기 전에 다시 느끼고 싶은 뜨거운 시민 공동체의 삶이 있다.문학이 어찌 5·18을 모른체 할 수 있을까. 5·18을 소재로 한 5·18문학,광주문학은 지난 20년 동안 연면히 이어졌다. 5·18이 가지고 있는,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역사적 지형성과 풍부한 문학적 잠재량 등에 비춰 그간의 문학적 노력이나 성과가 기대에 못미친다는 지적이 있긴 하다.그러나 문학의 바탕이 되는 일반의 관심과 인식을 살필 때,5·18이 전국적·보편적 스케일로 성장하지 못한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여러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광주 5·18의 피에 절은 꾸러미를 풀어보지도 않고서 싫증을 내며 창고에다 쳐박아 버렸다면 틀린 말일까.이같은 지역적 한계를 염두에 두면 소설이 주축이 된 지난 20년간의 5·18 문학화는 긍정적인 색채를 띤다.특히 최근 이삼년 5·18문학의 재흥 기류는 보다 더 확실하다. 5·18 문학은 80년대에는 외적 제약을 비집고 나오려고애를 썼고,90년대에는 내적 관심의 불씨를 다시 살리는 데 힘을 쏟았다.사태후 4년 가까이 거론조차 할 수 없는 금기였던 5·18은 ‘존재’가 점선,괄호로나마 인정되면서문학화를 출발시켰다.85년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광주항쟁의 전말과 의미를 민중적 전망아래 정리한 보고문학의 역작이나 본격 문학작품은 아니었다.본격작품은 이보다 다소 앞선 84년말 임철우의 단편 ‘봄날’을 꼽을 수 있다.5·18을 직접 말하지 못하고 우회적으로 유추하게 하는 이 작품은 내용도 항쟁의 당시상황이 아닌 항쟁이후 남은 자의 죄책감에 관한 것이다.이같은 사태이후의 후일담 성격은 알레고리나 우회적 언급을 차용한 작품화 방편을 거둬들인 뒤에도 80년후반 1차 광주문학 활성기의 주조라 할 수 있다. 광주문학을 연 작가 임철우는 이어 4년간 ‘직선과 독가스’ ‘사산하는 여름’ ‘불임기’ ‘관광객’ ‘동전 몇닢’ ‘어떤 넋두리’ 등의 광주 단편을 차례로 발표했다.윤정모의 85년 단편 ‘밤길’도 항쟁 현장을 빠져나온부끄러움을 이야기하지만 보다 강한 저항의 정신을 담고 있어 주목받았다.국회 광주특위가 가동된 88년에 발표된 중편들인 홍희담의 ‘깃발’과 최윤의‘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는 방향에서 커다란 편차를 드러내 넓어진 광주문학의 폭을 말해준다.시민군 주체와 관련해 노동자의 주도성을 급진적으로 해석한 ‘깃발’은 광주항쟁이 없었으면 나올 수 없는 작품이며 항쟁 와중에 실성한 소녀의 실존적 후일을 그린 ‘저기 소리없이…’에서 광주사태는 역사성이 최대로 희석된 특수한 인간조건으로 확장된다. 80년대 말까지의 5·18문학은 87년과 90년에 차례로 나온 소설집 ‘일어서는 땅’(인동)과 ‘부활의 도시’(인동)에 집약되었다.문순태(‘일어서는 땅’‘녹슨 철길’)한승원 (‘어둠꽃’)이영옥(‘남으로 가는 헬리콥터’)정찬(‘완전한 영혼’‘새’‘슬픔의 노래’)정도상(‘십오방이야기’‘저기 아름다운 꽃 한송이’)공선옥(‘씨앗불’‘목마른 계절’)을 비롯 김중태 김남일 김유택 박호재 김신운 박원식 백성우 이명한 이삼교 홍인표 이순원등이 1차 광주문학의 축대에 돌을 보탰다. 문학의 역사성에 반기를 든 90년대 들어 5·18은 소설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었으나 끝무렵 새얼굴의 문학을 솟구쳐 낸다.임철우는 97년말부터 98년초에걸쳐 장편 ‘봄날’ 5권을 완간,다시 광주문학의 기수 역을 맡았다.완성하는 데 10년이 소요된 이 대장편은 작가가 소설이 아니라 기록으로 읽어달라고주문할 만큼 비참하고도 찬란한 당시상황을 세밀하게 복원한다.이어 그때 수습위원으로 일했던 송기숙과 현지 신문사 부국장이었던 문순태는 올해 장편‘오월의 미소’와 ‘그들의 새벽’을 각각 내놨다.80년대에 볼 수 없었던항쟁기간의 디테일 삽입과 함께 화해와 테러를 동시에 모색하거나 노동자 출신 시민군의 마음 끝까지 더듬고자 한다.그리고 시인 황지우는 5·18 당시와 오늘을 역동적으로 엮은 희곡 ‘오월의 신부’를 지금 무대에 올리고 있다. 이처럼 90년대 말부터 재기한 2차 광주문학은 장편화와 입체화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기억과 껴안음의 새 길을 열고있는 5·18문학은 시간이 지날수록 한층 뜨겁고 투명한 불꽃을피워낼 것이다. 김재영기자 kjykjy@. *”5·18은 민중문화 뿌리내린 주역”. 소설가 임철우(46)씨는 이맘때만 되면 예서제서 부지런히 들먹거려지는 사람이다.누구 한사람 ‘5월’이라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있을 때 그는 광주이야기를 감히 소설로 썼었다.그러나 여전히 맘은 편치 않다.그날의 이야기가 오늘로 남지 못하고 20년전 과거로 잊혀지는 지금,‘5월 작가’라는 이름표는 버거운 짐이다. “진상은 제대로 파악되지도 알려지지도 않았는데,모두들 부담스러워 잊어버리려 하는 게 5월의 역사 아닙니까? 광주시민들에게는 피눈물 솟구치는 현실이 세상사람들에게는 한낱 수습 끝난 과거가 돼있으니까요.5월만 되면 으레들떠서 설치는 언론들도 솔직히 밉상맞고 그렇습니다”그는 “아무도 귀 기울여주지 않는 소리를 하느라” 청년기의 한 토막을 생으로 바쳤다.1980년 5월16일부터 27일까지 열이틀간의 ‘광주사태’(소설을탈고할 때까지 ‘사태’였다) 현장으로 아득바득 사람들을 이끌어간 소설이장편 ‘봄날’이다.모두 5권짜리 대하소설을 이태전 원고지 7,000장으로 묶어내기까지는 꼭 10년이 걸렸다. 그에게 소설은 단순한 글쓰기 영역이 아니다.현장에 있었으면서도 아무것도하지 못했던 그에게 그건 “비겁하게 살아남아 치르는 대가”일 뿐이다.전남대를 휴학하고 지역마당극단에서 연극운동에 몰입하던 당시 ‘광주사태’는글쓰기에 대한 확신을 갖게 했다.아니,확신이라기보다는 의무를 주었다고 해야 옳다.등단하기도 전이라 소설을 쓰겠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는데,치열하게 현장을 기록하고 다녔더랬다.광주시내 골목골목을 뒤지며 보이는 것,들리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적어뒀다.그 수첩 기록들이 고스란히 ‘봄날’ 원고속으로 들어갔다. ‘5월 문학’이란 용어를 그는 달가워하지 않는다.5월 이야기가 한국문학사의 엄연한 한 맥락인데,굳이 거기에 특별한 수식어를 달아 생색내는 것 같아서이다. “80∼90년대의 화두는 광주였습니다.그 화두를 꺼내 고통스런 십자가를 지는 역할을 문학이 자임했고요.5월 문학이 없었다면 ‘민중문학’이나 ‘민중론’이 목소리를 낼 터전도 없었겠지요.5·18은 우리 사회에 민중문화를 뿌리내리게 하고 문화예술에서의 민족 주체성을 확인시킨 주역이었어요”그는 5월 이야기를 다시 꺼낼 엄두를 못 내고 있다.5월을 폐광처럼 팽개치는 세상에다 또 그 이야기를 들이민다는 게 맥도 빠진다.“기력이 소생하기를기다린다”며 그가 웃었다.지난 3월 5·18연극 ‘봄날’을 각색해 무대에 올리기도 했던 그는 요즘 수원 한신대로 출강한다. 황수정기자 sjh@. *6·29선언 계기 활발히 출간. 5·18의 참상을 친구들 간에도 터놓고 얘기하기가 불안했던 시절이 꽤 오랜기간 있었다.활자화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지난 85년 5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황석영 기록)가 처음 책으로 묶여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당시만 해도 비밀리에 인쇄를 마치고 제본작업을하다 발각돼 전량 압수당한 뒤 밤새 마스터인쇄로 조금씩 찍고 손으로 제본해 5,000부를 발행,대학가 서점을 통해 은밀히 판매했다.대학가의 필독서로자리잡았다. 5·18 관련단체와 종교단체 등이 증언록이나 자료집을 간간이낸 것을 제외하고는 전무하다시피했던 5·18 관련서적은 87년 6·29선언을 계기로 활발히 출간되기 시작했다.‘죽음을 넘어…’도 이때야 정식출판됐다.이제까지 나온 책은 대략 수백종.종류도 시·소설 등 문학물에서 사진기록·자료·증언·수기집,취재기,정치·사회·법적 연구서까지 다양하다.‘광주민중봉기와미국’(이삼성) 등 잡지 등에 발표된 글이나 연구논문들도 많다.5·18 관련주요 서적을 정리한다. 김주혁기자 jhkm@
  • 녹색평론·황석영씨 14회 단재상 수상

    도서출판 한길사 제정 단재(丹齋)상의 제14회 수상자로 격월간지 ‘녹색평론’(학술부문)과 최근 출간된 ‘오래된 정원’의 작가 황석영(黃晳暎)씨가각각 뽑혔다. ‘녹색평론’(대표 金種哲)은 국내 최초로 환경·생태운동의 중요성을 부각했으며 방북사건으로 5년간 복역했던 황석영씨는 ‘오래된 정원’을 통해 80년대 이후의 한국사회를 그렸다. 시상식은 25일 오후7시 서울 강남출판문화센터 이벤트홀.
  • 황석영 새장편 ‘오래된 정원’

    황석영은 ‘오래된 정원’(창작과비평사) 상·하권을 다 쓴 뒤 책말미 후기에 “이 작품을 쓰기까지 거의 십오년 동안을 딴짓으로 세월을 보낸 셈”이라고 썼다.작가 황석영의 ‘딴짓’은 문학이 딴짓이라고 시비붙기가 거의 유일하게 난감한 역사의 최전선에 서기였다. 이제 그간의 역사적 의용출병을 딴짓이라고 가볍게 일축하면서 문학의 신전으로 되돌아와 깊게 고개수그리는 작가의 모습이 연상된다.원고지 3,000장안팎의 ‘오래된 정원’은 이같은 돌아옴을 맹세하는 공헌물과 같다.그리고그가 방금 떠나온 역사의 제일선이 이 공헌물의 속을 채운다. ‘오래된 정원’은 1999년 말이나 2000년 초의 엿새간이란 좁은 시간적 울타리에 싸여 있지만 1980년 광주항쟁을 기점으로 장장 20년 세월의 강이 흐르고 있다.남자주인공은 광주항쟁 중간에 광주를 빠져나왔으며 수배도피 도중 북한을 새롭게 의식하려는 찰나 체포되는데 작품의 역사적 색채를 결정해주는 행적이다. 그러나 외적으로는 남녀주인공 모두 이보다 훨씬 굵직굵직한 역사와 사연의물결에 휩싸인다.70년대부터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남주인공은 광주항쟁 관련자들이 특사로 풀려나는 직후인 82년 여름 체포되고 당시 독재정권에 의해사상적 빨강 색이 의도적으로 강조되는 가운데 무기형을 선고받는다. 작가는남주인공이 자신의 사회주의적 신조를 숨기지 않고 끝까지 견지하는 모습을보여주긴 하지만 그 이상 ‘왼쪽’으로 내딛지 않는다. 대신 황석영은 남녀주인공의 소설적 형상화에 힘을 쏟는다.빨치산 출신을아버지로 두었던 여주인공은 전라도 시골에 미술교사로 와있다가 82년 봄 남주인공을 숨겨주다 사랑하게 되고 3개월간 같이 산다.여자는 풀려나올지 알수 없는 무기형수가 된 남자의 애를 잉태하고 있다.여기까지가 내용으로나분량으로나 소설의 전반부를 이룬다.후반부는 이후 18년간이 이야기된다. 이 기간 한국은 이전보다 민주화되는 한편 세계의 사회주의권은 붕괴일로를걷게 된다.‘오래된 정원’의 주인공들이 누릴 수 있는 역사의 폐활량이 축소되는 상황인 것이다.작가는 후반부에서 소설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맞게된셈인데 황석영은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민주화란 이념은 낡았고 북한이란 카드는 위험할 정도로 새로운 상황에서평등,민족,환경 등을 다시 만나는 주인공들의 정신적 편력이 그려지지만 어쩐지 힘이 빠져 있다.황석영은 후반부에 감옥수형,독일 망명체류 등을 십분활용하는데 이 개인적 체험에 기대 소설적 난국을 타개하려는 태도가 일견솔직해 보이지만 작품의 결정적 한계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의 최일선에서 갓 돌아온 작가에게 체험의 개인적인 냄새를 화학적으로 말끔히 털어버린 ‘예술적’ 작품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역사로의 출타를 끝내고 다시 상주할 문학의 집을 곧장 지어낸 작가의 재능과 열성을 확인하는 것으로도 큰 기쁨이다. 김재영기자 kjykjy@
  • “제2의 황석영문학 시작될 겁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이 시대를 헤쳐온 작가 황석영(57)이 출옥 2년1개월만에2권짜리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창작과비평사)을 출간했다.방북사건으로5년간 복역하는 동안 구상된 이 작품은 1980년 이후의 한국사회 변화와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근간으로 하는 세계사적 변화를 배경삼으면서 젊은 두 남녀의 파란많은 삶과 사랑을 그리고 있다.1년2개월간 일간지에 연재된 이 작품은 작가가 ‘무기의 그늘’이후 12년만에 내놓은 역작이다.현재 홍성에 살고있는 작가가 25일 책출간을 맞아 상경해 기자를 만났다. ■출간의 감회는. 5년여의 망명,5년여의 징역을 끝내고 출옥했을 때보다 훨씬 더 기쁘다.작가로 되돌아왔기 때문이다.10여년의 우여곡절과 방황에서 놓여나는 기분이며처음 시작하는 이삼십대로 되돌아간 마음이다.제2의 황석영문학이 시작될 것이다.침체되고 서사가 결여된 한국문학이 남성적이며 서사가 풍부한 본격문학으로 새 출발할 수 있도록 힘쓸 것이다. ■작품이 이미 일간지에 연재되었는데. 3,000여매의 연재분 가운데 군더더기 에피소드 300∼400매를 빼는 등 다시손봐 빠듯하게 조였다.연초에 나왔으면 한층 시의에 맞았을 것이다.제목에서암시하듯 이 소설은 유토피아가 있었느냐고 묻는 것이다. 세계와 더불어 한반도가 겪은 유토피아 갈등을 다룬 것이며 그 마지막 불꽃인 우리의 80년대를 정리한 의미를 갖는다.이 책은 국민들의 사회변혁 욕구가 높아지는 현 상황에서 80년대 시절과 386으로 불리는 그 시절의 젊은 세대에 대한 나의 진혼곡이다.나는 당시 기성세대 연배였지만 내 분신들과 같은 그때의 청년들과깊이 연결되었었다. 그래서 광주로 대변되는 80년대 초 학생 세대들이 출옥한 뒤에도 내게 개인적으로 커다란 관심을 표해 주었다. ■감옥에서 오래 구상했다는데. 그렇다. 그런데 구상보다 실제 글이 훨씬 더 잘 풀렸다.감옥에서의 구상엔삶의 디테일이 빠져 있었다.시정에 섞여 사람들과 같이 살 때 구체적으로 이야기가 된다.또 하나 스스로 놀란 것은 글쓸 때의 노심초사가 없어졌다는 것이다.마음을 비웠다고나 할까.이처럼 편안하게 글을 써보기는 40년 문단생활처음이다. 마감 원고질질 끌기로 유명한 나였는데 이번 연재에서는 몇회분을 앞서 갖다주기도 여러번이었다.이같은 변화는 비유컨대 옛날엔 문학과 내가 사랑하는 젊은이들처럼 꼭 부둥켜안고 있는 형국으로 가끔 지겨워질 수있었다면 지금은 성숙해져서 뒤에서 가만히 다가와 나 아직 있어 하는 듯 툭툭 어깨를 치는 그런 모습이다. ■출옥하면서 앞으로 쓸 작품들을 구체적으로 거론해 주목받았는데. 감옥에 있으면서 출옥하면 이런 글을 쓰겠다고 제목까지 임시로 정해 여러사람에게 알린 것이 5∼6개 되고 그중 ‘손님’이란 글을 먼저 쓰고자 했었다.그러나 그 작품은 소설의 양식을 실험하는 것이어서 이번의 ‘오래된 정원’에 밀렸다.‘손님’은 지금 절반쯤 쓰고 있고 다음달부터 연재해서 4∼5개월만에 마무리할 생각이다.1,000매 정도로 얄팍한 소설이다.긴 작품 안 읽기는 세계가 다 마찬가지다.대하드라마 시대는 갔다고 할 수 있다.우리의 80년대는 19세기적 상황이었다.그런 시절이 간 지금 소설의 수법과 관련해서‘영상’을 떠올리게 된다.영화와 영화적 기법에 관심이많다. ■최근의 한국문학에 대해 말한다면. 지금 한국문학은 한국영화 정도의 현실성과 서사조차 없어 보여 안타깝다. 서사가 부족한 점과 관련해 너무 감각적인 경향이 눈에 띤다고 할수 있다.인생은 가볍지만은 않다.경제위기를 맞은 지 2년이 되어 사는 게 그만큼 힘들어졌건만 이에 관해 제대로 된 소설 한 편이 안 나왔다고 할 수 있다.반면영화는 크게 발전했다.탄탄하고 그리고 다양하다.옛날엔 문학에서 영화가 영양분을 취했지만 이제는 반대가 된 듯하다. ■자신의 문학 2기라고 말했는데. 10여년 동안의 어떤 모색들을 현실화한다는 의미이며 양식 실험 및 리얼리즘과 관련이 깊다.현실 생각을 반영하는 사실주의적 내용에다 연희 놀이 등동아시아적 양식을 과감하게 채용하고자 한다.리얼리즘을 우리 식으로 풍부하게 하고자한다.우리는 그간 현실주의를 너무 사실주의적으로 해석해왔다. 객관적 사실주의에서 벗어나는 남미 문학이 서구에서 큰 칭찬을 받고있고 우리의 꼭두각시놀음 같은 것에는 전위적인 요소가 담겨있다.이것들을 끌어내야겠다. 김재영기자 kjykjy@. ◆ 황석영 연보. 1943년 만주 장춘에서 태어나 고등학생 때인 1962년 단편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받으면서 등단했고 70년 단편 ‘탑’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이후 소설집 ‘객지’(74) ‘북망.멀고도 고적한 곳’(75) ‘심판의집’(77) ’가객’(78) 등에 이어 84년 장편 ‘장길산’ 10권을 완간했다. 89년 베트남 전쟁을 그린 장편 ‘무기의 그늘’ 2권을 낸 뒤 3월 북한의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초청으로 방북하였고 이후 독일 미국 등지에서 체류했다.93년 4월 자진 귀국하여 방북사건으로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98년3월 석방되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