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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 월드컵축구예선 한국 UAE 꺾던 날

    ◎“또 이겼다”… 온국민 환호·열광/역·터미널TV앞 시민몰려 골순간 “만세” 함성/“새벽부터 기다린 보람”… 밤늦도록 승리 자축 한국 축구가 지난달 28일 일본 열도를 뒤흔든데 이어 1주일만에 서울 잠실벌에서 또다시 승전보를 울려,온나라를 승리의 환호로 몰아넣었다. 한국 축구 대표팀은 4일 아랍에미리트연합(UAE)과의 98년 프랑스월드컵 최종 예선전에서 국민들의 열화같은 성원에 화답하듯 3대 0으로 대승을 거둬온 국민을 토요일밤의 뜨거운 환희속에 빠져들게 했다. 잠실 경기장에서 열광적인 응원을 보낸 관중들은 물론 TV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한채 태극 전사들의 활약을 지켜본 국민들은 우리 팀이 골을 터뜨릴 때마다 “만세”를 외쳐 기쁨의 함성이 전국에 메아리쳤다. 평소같으면 주말을 맞아 시민들로 붐볐을 신촌과 강남 등의 유흥가는 축구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썰렁할 정도로 조용했으며 역·터미널·공항의 TV 앞에는 축구를 보려는 시민들로 붐볐다. 경기가 끝난뒤 술집 등 유흥가는 승리를 자축하려는 시민들이 몰려 축구 이야기로 밤늦게까지 시간가는줄 몰랐다. 이날 잠실주경기장에는 새벽부터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시민들이 몰려들었고 입장 시간인 하오 3시에는 경기장 입구에서 2호선 종합운동장 역까지 1㎞를 빽빽하게 늘어서 장사진을 이뤘다. 상당수 관객들은 우리 축구 선수단의 유니폼과 똑같은 빨간 T셔츠를 입고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든채 입장,경기시간 내내 열화같은 응원을 펼쳤다. 특히 이번 월드컵 예선을 거치면서 한국의 ‘공식 응원단’으로 자리잡은 ‘붉은 악마들’(RED DEVILS)회원은 한일전 때보다 10배나 늘어난 3천여명이 나와 응원석을 가득 메웠다. 암표도 날개돋힌 듯이 팔려 1만원짜리 일반석표가 3배가 넘는 3만원,2만원권 지정석은 4,5만원을 호가했다. 맨 앞줄에서 경기장에 입장한 구자경씨(49·회사원·서울 송파구 삼전동)는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어제밤부터 나와 텐트를 치고 밖에서 기다렸다”면서 “경기 내내 있는 힘껏 소리높여 응원했지만 한국팀의 승리로 피곤한 줄 모르겠다”면서 즐거워했다. 인천해사고 1년 김대원군(17)도 “한편의 드라마였던 일본 원정경기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우리 태극전사들이 거둔 쾌승으로 너무 기쁘다”면서 “우리 팀의 승리가 확정되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지난달 28일 우리나라가 일본을 꺾자 손님들에게 공짜 맥주를 제공했던 서울 신촌의 대형 K생맥주집에서는 이날도 모든 손님들에게 맥주 1병씩을 무료로 제공했다.주인 정전촌씨(56)는 “오늘 같은 승리의 신바람을 우리의 저력으로 결집시켜 프랑스로까지 이어가자”고 말했다. 경찰은 이날 경기장내 질서유지와 안전사고에 대비,17개 중대 2천여명의 병력을 경기장 주변에 배치했다.
  • ‘도쿄의 승전보’ 전국민 만세 합창/한국축구 일본 꺾던 날

    ◎동점­역전골 터지자 서로 얼싸안고 환호/역·터미널TV앞 인산인해… 도심 ‘텅텅’/업소선 무료음료… 곳곳 밤늦도록 ‘건배’ 한국 젊은이들의 승전보가 전국을 뒤흔들었다. 한국과 일본의 ‘축구전쟁’이 한국팀의 극적인 막판 역전승으로 끝나자 4천5백만 국민은 하나가 되어 환희의 하루를 보냈다.‘만세’를 외치는 전국민의 환호성이 거대한 함성이 되어 가을 하늘에 울려퍼졌다. 98년 프랑스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한국과 일본전이 열린 28일 하오 전국민들의 눈길은 온통 동해를 건너온 TV 생중계에 쏠렸다. 가정과 역,터미널은 물론 행락객들조차도 TV에서 눈길을 뗄 줄 몰랐다.경기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서울을 비롯,전국의 도심은 차량통행이 끊겨 적막감마저 돌았다. 특히 후반전 들어 먼저 한골을 허용한 뒤 절망적인 상황에서 교체 투입된 서정원 선수가 동점골을 터뜨리자 모든 국민들은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서로 얼싸안고 기쁨을 나눴다. 후반 41분 이민성 선수의 통렬한 왼발 중거리 슛이 일본의 골문을 가르자 시민들의 환호는절정에 달했다. 경기가 끝난 뒤에도 서울의 신촌 대학로 등 유흥가가 밀집한 지역에서는 축구팬들이 모여 밤늦도록 역전 드라마를 되새기며 자축의 술잔을 기울였다. 우승때 음료 무료 제공 등의 이벤트를 내건 서울 서대문구 C호프집과 S갈비집 등은 손님들에게 골을 넣을 때마다 맥주 1병씩을 무료로 주면서도 즐거워했다.손님들도 무료 맥주가 나올 때마다 환호로 화답했다. 컴퓨터통신 축구동호회 ‘붉은 악마들(레드 데블스)’회원 가운데 일본에 가지 못한 135명의 회원들은 이날 하오 서울 종로구 명륜동 M호프집에서 성대한 자축 파티를 열고 한국 축구를 가장 사랑하는 대표 인물 ‘레드 데블스 마스코트’로 김도영씨(21·대학생)를 선발하기도 했다. 동점골을 넣은 서선수의 부모는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상번천리 집에서 마음을 졸이며 TV를 보다 서선수가 골인를 시키자 손을 맞잡고 “이겼다”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아침 일찍 인근 사찰을 찾아 불공을 드리고 왔다는 서선수의 부인 윤효진씨는 “국제 경기를 많이 지켜봤지만 이번 한·일전이 가장 긴장됐었다”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역전골을 터뜨린 이민성 선수의 아버지 이지형씨(55·인테리어점 경영·인천시 부평구 갈선동 동남아파트 1동402호)는 “그 놈이 해낼줄 알았다”며 아들을 대견스러워 했다. 김포공항에서 한국인들의 축구관전을 지켜본 미국인 저스틴 매시씨(27·타임지 도쿄지사 근무)는 “휴가차 한국에 왔는데 월드컵 축구에 대한 응원 열기가 너무도 열광적이어서 놀랐다”며 한국팀의 승리를 축하했다. 회사원 박성섭씨(55·서대문구 홍은동)는 “일본 축구에 대해 많은 걱정을 했는데 이번 경기로 두려움이 말끔히 없어졌다”며 “내년 프랑스 월드컵 본선으로 가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말했다.
  • 서양화가 김형근(이세기의 인물탐구:144)

    ◎한시대의 미감 바꾼 ‘은백의 화가’/사물을 눈으로 보지않고 마음으로 ‘내면 터치’/한국미술대전 심사위원장도 지낸 ‘화단의 리더’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겨 퇴색한 과녁에 박힌 세개의 화살,나뭇결이 선명히 드러난 과녁에 두개의 화살은 힘차게 박혀있으나 하나는 과녁을 맞추고도 힘에 부친듯 사선으로 그 끝을 떨어뜨리고 있다. 지난 70년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차지한 김형근의 ‘과녁’은 싱싱한 박진감과 치열한 묘사력으로 인해 당시 이 작품을 뽑은 원로화가들은 “이는 일찍이 우리 화단사상 보지 못했던 현장감”이며 “한 시대의 미감을 바꾸어 놓았다”고 찬사해 마지 않았다.한장의 그림에 담긴 만감이 엇갈리는 진한 메시지는 작품의 의취를 일순간에 짐작할수 있게 하는 명작이기 때문이다.과연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는 얼마나 많은 세월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는가.그러나 실패와 좌절의 되풀이속에서도 낙선의 고배를 패배로 치부하지 않았고 시련은 아프지만 오히려 치솟는 힘이 되었다. ○70년 국전서 대통령상 수상 만일 김형근의 ‘여인상’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그의 아름다움에 대한 극단적인 미추구에 감탄하지 않을수 없게 된다.영롱한 보석타래와도 같은 그의 여인상은 눈부신 치장과 황홀감으로 인해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을 멈추게 하는 혼도직전의 전율을 던져준다.미적감흥을 불러 일으키는 색채와 조형적인 균제·비례와 조화와 함께 장미향기와 라일락바람이 넘나들고 어느 때는 오베른 언덕같은 천상의 노래가 가슴을 후비기도 한다.여인과 꽃의 아름다움을 극명하게 재현하기 위해 극사실적인 표현기법으로 독특한 미감을 절묘하게 살리면서도 작가의 천부적 감수성은 실제에서 지각할 수 없는 내면의 지성미까지도 붓끝으로 일궈놓고야 만다.그래서 여인의 볼에서는 발그레한 생명감이 피어나고 실크처럼 고운 살갗은 조금만 건드려도 상처가 날듯 섬세하고 연연하다.여기에 그치지 않고 극미와 화미에 다다르기 위해 보일듯 말듯한 미소에 귀족적 기품과 첨단적인 세련미를 담아내어 평자들은 “테크닉을 극복한 지점에 작가 자신을 세우고 있다”고 표현한다.‘사물을 눈으로 보지않고 마음으로 읽는 관조미의 극치’가 그것이다. 미술평론가 신항섭은 ‘김형근의 은백색 공간’이란 한 미술평론에서 “엄격한 의미에서 한국 사실주의 회화는 김형근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단정한 바 있다.“지금까지의 사실적인 표현양식이 순수미와 자연주의를 재현하는데 그쳤다면 김형근은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한 극사실적인 작품을 통해 작가적 입지를 구축했다”고 했다. 이러한 평가를 받는데는 남보다 특이한 환경에서 자라나 전혀 뒤늦게 화가의 길에 들어선 것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그의 고향은 산자수명한 경남 통영.한의사이던 하범 김전수씨의 무녀독남으로 다섯살때부터 글씨를 쓰거나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그러나 통영수산고에 다닐때까지 학교에 바래다주고 데리러 오던 부친은 외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고 부친의 뜻과는 달리 그림의 길을 선택하게 된 이상 그는 지금까지 예상치 못했던 혹독한 고독과 고생스러운 수련의 길을 모색하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 ○70년대 미 화단과 인연 그는 군인대학인 정치대 법정과를 나왔고 10년간 장교의 신분으로 있으면서 화가를 지망했으며 화단에 인맥이나 학맥이 닿을 리 없었다.오죽하면 대통령상 수상이후 그는 “심사위원들의 아집과 편견과 독선으로 인해 15년간의 국전도전시대는 까마득한 험난준급”이었으나 혼자서 어둠속을 걸어가는 듯한 극한 상황에서도 “그림을 그릴때만은 언제나 행복에 넘쳐 있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또한 그가 ‘은백의 화가’로 불리는 이유는 ‘동양의식의 세계화’를 목표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불생불사’의 세계를 형상화한데 있다고 할 수 있다.은백색과 흔적의 무한성,화면을 장식하는 꽃과 여인에서 그는 직선의 유리화병에 꽂힌 백합다발과 구름을 타고 비상하는 동자,다른 한쪽엔 남색 유리컵과 옛날의 종을 등장시키기도 한다.여기에 아득한 시간속에 가리워진 옛날을 현대에 용해시켜 유구하게 이어져온 역사와 생의 긍정과 환희를 절묘하고도 신비롭게 연출해낸다. 대통령상 수상이후 그는 미국 아메리칸 아트스쿨에 다니면서 70년대 이후 미국화단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고 오랜 작업실이던은평구 녹번동을 떠나 석촌 올림픽선수촌아파트로 옮기는가 하면 경기도 양평과 일본의 지바(천엽),뉴욕에 각각 대작을 위한 아틀리에를 둔 국제적 화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이김복여사와의 사이에 딸만 넷,모두 출가했고 그의 그림의 모델이던 차녀(성희씨)가 중년에 접어들자 최근에는 손자들을 데려다 모델로 삼고 있다. ○그의 그림선 숨결과 향기가… 시각적인 포만감뒤에 은은히 감도는 절제미는 특유의 긴장감을 극으로 끌어올리면서 그의 여인은 순정적인 정령의 서조를 당당하게 지켜나간다.그리고 어떤 어려운 일에 부딪혀도 반드시 이겨내고 슬픔이나 분노보다 작가자신의 기쁨과 즐거움을 부여한 빛나는 화면을 성취한다. 그리하여 그의 그림은 다이아몬드같은 흰빛을 뿌리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이상화된 현실을 만끽하기에 이른다.그를 아끼고 깊이 연구하는 평론가들은 이를 두고 “심신을 정화시키는 미의 공간에 우리가 들어서고 있다”고 표현한다.미의 사절인 김형근의 세계는 그림에서의 숨결과 향기와 음악과 함께 황폐한 현대인들로 하여금미의 극치앞에 감탄을 금치못하게 하고 결국 행복과 사랑을 깨닫게 하는 구원의 암시를 함축하고 있다. □연보 ▲1930년 경남 통영 출생 ▲1955년 국전 입선 ▲1968년 국전 특선 ▲1969년 국전 문공부장관상 ▲1970년 국전 대통령상 ▲1971년 도미기념전(신세계미술관) ▲1972년 아메리칸 아트스쿨수학 ▲1975년 역대국전 대통령수상작가 초대전, 김형근초대전(부산호텔화랑) ▲1977년 현대화랑초대 개인전 ▲1978∼81년 수도여사대교수 ▲1979년 김형근도화전(선화랑) ▲1981년 서독미술전초대전 ▲1983년 국전 심사위원 ▲1988년 뉴욕 웰리F 화랑 전속,알파인화랑초대전 ▲1991년 시가 있는 그림전(서림화랑) ▲1993년 현대미술 100년의 열정전 초대(현대화랑) ▲1995년 대한민국미술대전심사위원장 ▲1996년 현대리얼리즘회화 초대전(한국 포스코갤러리) ▲1997년 현대작가 1호전(선화랑) ▷수상◁ 경상남도문화상(68년) 서울시문화상(81년) 통영시문화상(95년) ▷작품소장◁ ‘과녁(관혁)’ ‘우리의 슬기’ ‘영원의 장’(청와대) 벽화 ‘여명의 비상’(한국외환은행) ‘한려수도’(경남도청)외 다수
  • 35㎞ 인간사슬로 인류애 다져/파리 세계청소년가톨릭대회 폐막

    ◎160개국 70만명 참석… 교황 화합기원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학살발생기념일인 24일 파리 교외 롱샹 경마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야외 미사를 끝으로 6일간 대장정의 막을 내린 제12회 세계 청소년 카톨릭 대회기간 중에는 인류애를 다지는 각종 행사가 줄을 이었다. 대회폐막 전날인 23일 상오 10시 50분(현지시간)에는 대회에 참가한 청소년 40만여명이 1분동안 ‘전인류의 결속’을 상징하기 위해 35㎞의 인간사슬을 만들어 파리 시가지를 에워싸는 행사가 열려 절정을 이뤘다. 파리시내를 비롯 근교인 일 드 프랑스 일대의 모든 성당에서는 인류화합을 위한 인간사슬이 시가지를 에워싸는 순간 일제히 종을 울려 국가간의 믿음과 우정,평화및 화합을 함께 기원했으며 청소년들은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합창했다. 그리고 이날 저녁 롱샹 경마장에서는 세계 1백60개국 청소년 70만명이 참석한 가운데 요한 바오로 2세의 집전으로 야외미사가 열렸으며 미사에 앞서 교황은 러시아와 홍콩 등 각국에서 참가한 14세에서 30세사이의 청소년 대표 10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그리고 이날의 야외 미사는 참가 청소년들의 축제로 이어지면서 각종 콘서트와 불꽃놀이 등의 행사가 밤까지 계속됐다. 미사가 끝난뒤에도 청소년들은 국가별로 무리를 지어 밤늦게까지 파리 및 근교를 돌며 찬양의 노래를 부르는 등 더욱 분위기를 돋우었으며 마지막날인 24일에는 교황이 마지막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 롱샹 경마장에 도착하기 3시간 30분전인 상오 6시에 파리 몽마르트의 성심성당의 수도사들과 50명의 성가대의 축복속에 참가 청소년들의 대규모 새벽미사가 열리기도 했다.
  • 연꽃축제 개최 정토사 주지 한보광 스님

    ◎“염불·선 융합한 생활불교 실천해야”/2000년부터 통일기원 결사 계획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상적동 청계산 염불근본도량 정토사 주지 한보광스님은 지난주 개산 15주년 기념법회와 제1회 연꽃축제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는 정토사 조실 불심도문 스님과 송석구 동국대총장·일본 정토정 대본산 쓰보이 준에이 박사·신도 등 1천여명이 참석,국립관현악단과 김덕수패 사물놀이 등의 연주로 음성공양을 올리고 연등행사를 가졌다. 행사를 마치고 만난 한보광 스님은 “설법과 노래,연꽃과 연등이 있는 곳에서 신도들에게 사바의 모든 시름을 잠시나마 잊고 극락의 환희에 젖게하기 위해 마련한 행사가 잘 치뤄졌다”고 흡족해 했다. 경주 출신의 보광 스님은 67년 범어사에서 불심도문스님을 은사로 득도,동국대학교 불교학과와 대학원을 거쳐 89년 일본 교토의 불교대학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동국대 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학위논문 ‘신라정토사상연구’를 오사카 동방출판사에서 700쪽 분량으로 출판한 스님은 “신라시대의 삼국통일을 이룬 사상이 바로 정토사상이었으며 원효사상이 바로 정토사상입니다.앞으로 남북통일후 북한동포에 대한 포교를 위해서도 정토사상이 필수적입니다”고 거듭 정토사상의 의미를 강조했다. 보광스님은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 북한동포들에게 참선을 요구해서는 포교를 기대할 수 없고 현실에 적응해서 염불을 하며 근로를 통한 생활을 강조해야 한다고 했다.다시말해 염불과 선을 융합해서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사는 생활불교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국대학교 개교100주년 기념사업본부장을 겸임하고 있는 보광스님은 “일본에는 불교의 종립대학이 전국에 54개나 되는데 우리나라에는 동국대 밖에 없다”며 “신라불교에 대한 자료가 국내에 보다 일본에 더 많은 현실이 불자로서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육군 맹호부대의 군종법사로 대위로 전역한 보광 스님은 2000년 6월6일부터 남북통일과 불국정토를 기원하는 1만일(30년) 염불결사에 들어갈 작정이라고 밝혔다.
  • 축구전용구장(외언내언)

    지난해 5월31일 2002년 한일 월드컵축구 공동개최가 확정됐을때의 감격과 환희가 아직까지 생생하다.올림픽에 버금가는 세계인의 축구제전을 유치하기 위해 쏟았던 땀과 정성이 컸기에 기쁨 또한 그토록 대단했던 것이다. 그러고 1년여 지난 지금,두 나라의 준비상황은 너무 대조적이다.일본은 이미 지난해 말 엄격한 심사를 거쳐 10개 개최도시를 선정해 전용구장을 짓고 숙박시설이나 교통·통신시설을 비롯해 필요한 모든 문제를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다.우리는 어떤가.유치때의 열기는 다 어디로 가고 아직 개최도시조차 선정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올 연말에 있을 대통령선거에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한 정치권의 외압까지 작용하고 있다고 하니 정말 한심한 노릇이다.개최를 원하는 14개 지방도시에 대한 실사를 마쳤으면서 정치권의 눈치를 보느라 선정작업은 내년으로 미뤄질 것 같다는 것이다.세계적인 대제전을 유치해 놓고 정말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인지 묻고 싶다.정부와 조직위원회,축구협회는 다 무얼하고 있는가.우리 나라에는 지금 대통령선거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이에 가장 앞장서야 할 서울시가 재정부담을 이유로 축구전용구장 건설결정을 미뤄오다 22일에야 월드컵경기장 설명회에서 뒤늦게 축구전용구장을 짓기로 확답했다.서울시는 이날 설명회에서도 당초 주장대로 잠실 종합경기장이나 뚝섬 LG돔구장 유치안을 들고 나왔다가 세계적인 행사인 월드컵 개회식과 준결승전 경기장으로 부적합하다는 지적을 받고 마지못해 제3의 장소에 6만5천석 이상 규모의 전용구장을 짓기로 했다고 한다.어려운 재정형편에도 불구하고 이미 지난 해부터 별도 예산을 편성해 전용구장공사에 착수,개최지 유치에 나서고 있는 지방도시들의 자세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비록 서울시가 전용구장을 건설하기로 했다고는 하지만 3천5백억원에 이르는 건설비용분담문제라든가 장소선정문제 등 해결해야할 난제들이 산적해 있다.21세기 첫 월드컵을 우리가 치른다는 긍지를 갖고 서울시는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이 문제를 풀어야할 것이다.물론 정부와 조직위도 기념비적인 전용구장건설에 힘을 합쳐야 마땅하다.
  • 발레리나 최태지(이세기의 인물탐구:143)

    ◎예술혼 담긴 춤사위 ‘호수의 백조’/기쁨의 율동엔 환희가,슬픔의 몸짓선 눈물이…/30대 최연소 국립발레단장… 한국발레의 기수 최태지는 변화가운데 발전을 추구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예술가다.변화하기 위해서는 설득력을 잃은 낡은 전통에 더이상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차이코프스키의 야심에 찬 ‘백조의 호수’는 마리우스 프티파에 의한 대작이지만 지난 87년 마츠에크가 개작하여 파리 데아트르 드라빌에서 초연했을 때는 더 이상 가냘프고 아름다운 백조는 아니었다.왕자가 백조를 들어올리는 ‘파드되’조차 다리의 근육을 이완시켜 덜렁거렸고 튀튀는 입었지만 맨발로 비상하여 파리시민들을 경악시켰다. 그외 자유분방(Fancy free)의 제롬 로빈스, 스펙터클한 모리스 베자르, 민족적 제재를 사용하는 지리 킬리안을 보고 배운 세대가 최태지라고 할 수 있다.특히 모리스 베자르에 경도된 그는 ‘무대는 사람이 자신의 영혼의 정확한 크기를 발견할 수 있는 이 세상 마지막 피란처’라는 말에 적극 공감한다. ○일본 교토서 태어나 그의 나이는 60·70대의 기라성같은 대선배들이 도열한 무용계에서는 어쩌면 신세대이지만 발레의 연륜이 다른 무용보다 짧다는 점에서 지금 최정상과 절정에 서있는 위치다.클래식발레의 규격화된 미감에 머물지 않고 매력적 연기를 가미한 드라마틱 발레를 추구하는 것도 그렇다. 그는 국립발레단 창단이후 처음으로 현대무용가를 트레이너로 초청하여 단원들에게 몸의 표정을 살리는 방법을 훈련시켰고 지난 7월에는 이스라엘 칼미엘 축제에 초청되어 이집트의 저명한 모하메드 알 에자비로부터 ‘동양에는 동양의 문화가 있고 한국에는 한국의 전통문화가 있다.그러나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알려진 발레가 색다른 고급예술로 한국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호평을 받아냈다. 최태지는 일상생활에서도 꾸밈없이 시원하고 솔직해서 상대방에게 어떤 긴장감도 주지않는 성격이다.무대에서는 튀튀를 입고 현대적인 해석으로 스토리를 끌고 가지만 고도의 문학성과 철학성을 살려 발레 본연의 격조에 미세한 흔들림도 주지 않는다.국내 발레사상 최연소단장이라는 핸디캡을 딛고 발레단을 능란하게 운영하는 것을 본 전단장 김혜식은 ‘최태지의 행복하기만한 모습 저변에는 예술가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어쩔수 없는 고뇌의 흔적이 침잠되어 있다’고 말한다.그래서 그의 기쁨의 율동에서는 환희가 우러나오고 슬픔의 몸짓에서는 눈물방울이 흘러내린다. 최태지는 여러가지 특이한 주변환경을 지니고 있다.첫째 그는 일본 교토에서 태어났다.레미콘 회사를 경영하는 부친 최태병씨와 김명림여사의 2남4녀중 막내. 교토 마이즈루(경도부 무학시)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집앞에 있던 마이즈루무용학원에 다녔다.마치 그의 운명이 춤추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그가 태어난 도시는 ‘춤추는 학’이란 뜻의 ‘마이즈루’였고 그는 ‘발레없이 산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고 말할만큼 춤에 빠져들었다.그리고 자연스럽게 무대에 오르기 시작하여 만16세가 되기전에 ‘코펠리아’의 스와닐다로서 ‘마주르카’와 ‘밀 이삭춤’‘차르다즈(Czardas)’와 그랑 파드되를 추었고 17세때에는 가이타니발레단 제국(제국)극장공연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솔리스트로 뛰었다.다음해 ‘잠자는 미녀’로 일본의 발레계가 주목하면서 민족차별을 극복했고 국비장학생에 선발되어 프랑스 프랑케티발레학교에 유학했다. 83년,가이타니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과 일본 문부성이 주관한 ‘한여름밤의 꿈’에서 전일본신문이 대대적으로 호평한 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의 국립발레단이 그를 ‘백조의 호수’에 초청, 2년후 국립발레단에 정식 입단하면서 모든 레퍼토리의 주역을 휩쓸었다.이후 뉴욕에서 회계학을 전공한 최두원씨를 만나 결혼,자녀는 딸만 둘.양재동에 자택이 있고 시부모는 근처에 함께 산다. 그는 ‘발레는 고도의 서커스같은 기술만으로는 안된다’고 말한다.‘드라마틱 발레로서 예술성을 성취했을 때만이 발레로서의 아름다움이 보석처럼 빛나게 된다’고도 했다.그의 꿈은 네오클래시시즘에서 모던발레를 거쳐 드라마틱 발레의 완성을 이룩하고 싶은 것이며 세계 최고의 안무자인 존 노이마이어의 ‘카멜리아 레이디’(춘희)를 위해 바로 혼신의 무대를 만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백조의 호수’ 주연 ‘발레는 현실이며 환상의 예술이 아니라는 것’과 ‘관객의 가슴을 채워주지 못하는 발레는 더이상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그리고 관객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선 얽매인 룰과 규격에서 벗어날수 있는 열린 사고가 어느때보다 절실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진보적 예술이란 변화가운데 질서를 유지하면서 예술의 내부가 투명하게 들여다보일때만 비로소 가능해진다.그때 인간의 춤,관객과 호흡을 함께 하는 살아있는 춤,예술이 들여다보이는 최상의 춤으로 그는 최고의 비약을 꾀하려는 것이다. □연보 ▲1959년 일본 경도 출생 ▲1975년 가이타니발레단 도쿄 제국극장공연 ‘코펠리아’전막외 ‘삼각모자’ ‘스프링’ 주역 ▲1978년 일본 동무학고교 졸업, 뮤지컬 ‘한여름밤의 꿈’ 출연,NHK방송국 발레의 밤 ‘사계’ 등 주역 ▲1981∼82년 파리 프랑케티발레학교 유학 ▲1983년 한국국립발레단 객원 ‘세하라자데’ ‘백조의 호수’ 주역 ▲1987년 국립발래단입단,88년 문화예술축전 ‘왕자호동’ 주역 ▲1991년 ‘춤의 해’에 ‘올해의 무용가’ 선정 ▲1993년 국립발레단 지도위원,국립발레단부설 문화학교강사,예술의 전당개관기념 ‘백조의 호수’ 주역 ▲1994년 뉴욕 아메리칸 발레시어터·뉴욕 시티발레컴퍼니 발레연수 ▲1996∼현재 국립발레단 단장 및 예술감독 ▷대표작◁ ‘레파티누르’ ‘로미오와 줄리엣’ ‘해적’ ‘동키호테’ ‘바이올린소나타’ ‘에스메랄다’ ‘고려애가’ ‘레퀴엠’ ‘삼차원’ 등 주역 다수
  • 성악가 박수길(이세기의 인물탐구:141)

    ◎미성과 볼륨 지닌 바리톤의 선도자/독특한 가창법엔 철학적 예술성 가미/오페라도 40여편 출연·연출한 재주꾼 위대한 인물중에서 피나는 노력없이 정상에 오른 사람은 없을 것이다.또 노력하지 않은 천재가 일찍이 사회에 공헌한 일이란 드물다.바로 바리톤 박수길이 걸어온 역경의 뒤안길은 한낱 흘러간 추억일 수 없는 진한 교훈을 우리에게 남겨준다.어둡고 외롭고 험란한 가시밭길을 걸어왔으나 그의 얼굴은 햇살처럼 밝고 항상 즐거움에 넘쳐있다.극단적인 아픔을 이겨낸 노래 또한 증류수와도 같은 청정이 깃들어 그가 슬픈 노래를 부르면 심장이 울리고 기쁨에 찬 노래는 환희의 감동을 전달해준다. ○함흥서 출생 1·4후퇴때 월남 지난 68년 ‘사랑의 묘약’을 첫 오페라로 그는 ‘라보엠’의 마르첼로역만 6차례,‘아이다’ ‘리골렛토’ ‘라트라비아타’ 등 40여개의 오페라에서 주역과 조역을 해냈다.그중에서도 그의 노래의 백미는 슈베르트 가곡인 ‘겨울 나그네’와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전곡연주를 들 수 있다.특히 지난날을 자전적으로 읊조리는 듯한 ‘겨울 나그네’의 ‘얼어붙은 눈물’은 마음속으로 쓰는 시와 마음속으로 흘러내리는 차가운 눈물을 느끼게 한다. 그는 오페라 가수로서 자신의 역할에 도취하여 역할의 성격들을 철저히 표현해 내는가 하면 피부에 스며드는 음악성을 엘레지아코(비가조)로 살리는데 혼신을 다한다.가곡을 부를때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느냐도 중요하지만 풍부한 성량을 가지고 어떻게 소리를 내느냐에 치밀하게 접근한다.지금도 50대 중반의 예술가로서 사고의 여백과 서정적 시정을 담아 함축성있는 창법이 한층 내공화하는 시기다. 음악평론가 김형주는 ‘한국의 명연주가 집중연구’에서 “인간미 넘치는 표정뒤에는 음악에 대한 인내와 집념이 숨어있고 감미롭고 특이한 가창법과 유려한 가요성은 그만의 매력”이라고 평한다.더구나 그의 탁발한 창법은 오랜 연주생활 경험에서 얻어진 ‘철학적인 예술성’을 발휘하여 오성적인 인식이 고도화된 경지다.‘온화하고 차분한 학자적 풍모’가 있는가 하면 ‘옳다고 판단된 일은 끝까지 밀어부치는 고집과 행동력’ 또한 만만치가 않다. 박수길은 어쩌면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곤두박질치는 인생의 전환을 겪은 예라고 할 수 있다.그는 함남 함흥에서 신교육을 받은 박영록씨의 3남2녀중 장남.그러나 6·25의 와중에서 1·4후퇴때 외조모를 따라 먼저 피란을 내려온 것이 지금까지 이산가족으로 남게된 동기가 된다.어릴때는 부친이 아코디언을 켜는 가정환경에서 풍족하게 자라났고 초등학교에 들어가기전부터 노래에 뽑혀다니는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외삼촌댁이 있는 전라도 이리에서 동산초등학교에 다니다가 중학교시절은 서울에 있는 백부댁에서 기식,친척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동성고를 졸업했으나 대학진학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오히려 노래실력이 뛰어난 그를 안타깝게 여긴 친구들이 음대진학을 권유해 주었고 친구들의 도움으로 연세대교수이던 황병덕씨를 소개받아 생전 처음으로 발성법이며 창법 호흡법을 배울수 있었다.그리고 60년,연세대 성악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그러나 등록금이 없어 한달만에 자퇴해 버렸고 그로부터는그의 인생의 길은 터널속처럼 멀고 암담하기만 했다.무엇에도 희망을 걸 수 있는 실마리란 없어보였다.생계해결을 위해서 시계모형을 만드는 공장에 들어가 철판을 자르는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단지 그는 절망이나 포기대신 언젠가는 자신이 무엇인가가 되리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해 가을,한양대가 설립되었고 당시 한양대 음대학장인 오현명씨와 총장인 김연준씨의 배려로 전학년 장학생으로 발탁되었다. ○한양대 음대 장학생 발탁 그는 오페라에서 어떤 역할을 맡든 작품이 갖는 내용의 주제와 시가 갖는 운율을 남보다 전달하는 노력이 투철하다.이는 ‘인간에 대한 심오한 사랑이 내부에 도사려있기 때문’이며 ‘젊은 날의 방황과 고통이 음악적으로 양성됐기 때문’일 것이다.그의 음역은 베이스의 깊은 음색과 테너의 화려함을 동시에 지닌 테너 바리톤으로 인생의 쓸쓸함과 순수한 청춘의 아름다움을 거침없이 넘나든다. 음악을 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은 지난 61년 서울에 와서 독창회를 연 독일의 세계적인 바리톤 게르하르트 휘시의 연주를 보고나서부터다.당시 휘시는 60을 넘긴 나이였으나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싸늘하게 식어버린 아침이슬’처럼 불러주었고 그후 슈베르트 가곡을 부를때마다 그는 휘시의 음유적인 음악세계를 되살려 노래의 참맛과 멋에 빠져들수 있었다. 최근에는 오페라연출에도 손대어 ‘피가로의 결혼’과 지난해 ‘사랑의 묘약’을 연출했고 요즘은 국립오페라단의 하반기공연인 ‘섬진강 나루’를 지휘감독하면서 오페라단 운영,연출의 새로운 모색 등 오페라발전을 위한 여러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탐색을 게을리하지 않는다.69년에 바이올린을 전공한 부인 김진희씨와의 사이에 남매. 그동안 그를 둘러싼 수많은 호평이 있었으나 그중에서도 음악평론가 이유선씨가 ‘독일 리트의 사전인 카를로 베르곤지의 미성과 볼륨을 가진 한국 바리톤의 일인자’로 지적해준 것과 78년 뉴욕 카네기홀 데뷔때 뉴욕타임스가 ‘장래가 촉망되는 감명깊은 노래’로 평해준 것이 그의 음악생애에 커다란 힘이 되어 주었다.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연출 그는 명실공히 한국 오페라와 가곡을 이끄는 리더의 입장에 서있다.이제 그가 할 일은 그가 두고온 고향산천과 그리운 부모,삶의 축적을 희로애락으로 담아 늙어서도 청중의 심금을 울리는 눈물의 가곡을 전생애적으로 노래부르는 ‘진실한 예술의 혼’으로 존재하고 싶은 것이다. □연보 △1941년 함남 함흥 출생 △1964년 한양대 음대 졸업 △1968년부터 오페라 ‘사랑의 묘약’ ‘순교자’출연 △1972년 국립극장 독창회 △1978년 뉴욕 매네스 음대 졸업,뉴욕데뷔 독창회(카네기 리사이틀홀) △1978∼84년 성심여대 음대 부교수 △1979년 귀국독창회(국립극장) △1982년 슈베르트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전곡 우리말번역연주,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첫연출 △1984∼현재 한양대 음대 교수 △1987년 슈베르트와 슈만가곡의 밤(호암아트홀) △1989년 국립합창단 ‘독일진혼곡’ 협연(나영수 지휘) △1995∼현재 국립오페라 단장 △1997년 9회 독창회(국립극장) ▷오페라 출연◁ ‘아이다’‘리골렛토’‘파리앗치’‘일트로바토레’‘세빌리아의 이발사’‘오델로’‘호프만의 뱃노래’‘마담 버터플라이’‘춘향전’‘파우스트’‘탄호이저’‘논개’‘카르멘’‘원효’‘결혼’‘돈파스칼로’‘원술랑’‘돈카를로’‘돈조반니’‘심청’‘무당’ 등 40여편,현재 한양대 교수·국립오페라단 단장·예울음악무대 대표,‘섬진강 나루’제작 예술감독(8월19일부터 국립극장)
  • 30일 하오 11시59분 유니언 잭기 하강/주권반환행사 어떻게

    ◎1일 0시 오성홍기·홍콩특구기 게양/새벽 1시30분 홍콩특구 정부 출범식 반환 공식행사는 신축한 홍콩의 컨벤션 센터 신관 그랜드 포이어에서 30일밤 11시 30분부터 다음날 0시10분까지 거행된다.주권 교체를 상징하기 위해 유니언 잭과 홍콩기가 자정 직전인 11시59분 영국국가인 「신이여 여왕을 구하소서」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하강되고 0시 정각 중국의 오성홍기와 홍콩특구기가 중국 국가 「의용행진곡」 연주속에 게양된다. 이에 앞서 컨벤션 센터 부근 이스트 타마르에서 고별식을 가진 영국측은 반환행사가 끝난 직후 찰스왕세자와 크리스 패튼 총독,브라이언 더튼 홍콩주둔군 사령관등이 빅토리아항 부두에 정박중인 왕실 소유 브리타니아호를 타고 홍콩 식민지 경영에 작별을 고하고 필리핀으로 떠난다. 반환식을 마친 강주석과 이총리등 중국 지도자들은 1일 새벽 1시 30분 컨벤션센터에서 홍콩특별행정구(SAR) 정부 출범식을 주재하고 동건화 초대 행정장관과 행정 요인,입법부 위원,사법부 판사들의 취임선서를 받는다.이어서 SAR 정부는 1일 상오10시 같은 장소에서 4천여명의 귀빈을 초대,1시간 30분동안 출범 기념식을 성대하게 개최한다. 홍콩에 이미 선발대 196명을 진주시킨 홍콩 주둔 인민해방군은 30일 오후 9시 509명의 병력을 미리 진입시키는데 이어 0시를 기해 4천여명이 21대의 장갑차를 앞세우고 홍콩에 입성,각각 기지로 배치된다. 한편 중국의 수도 북경의 천안문광장과 광장 동편 홍콩회귀 카운트다운 시계앞에서는 30일 저녁 8시부터 10만여명의 군중이 모여 1일 새벽까지 장장 9시간에 걸친 「북경시민 홍콩회귀 영접 종합축전」을 다채롭게 펼친다.중국혁명역사박물관 서쪽 입구위에 설치된 카운트 다운 시계에 「10」이 나타나면 10만 군중은 목청을 모아 『스(10),지우(9),빠(8)… 싼(3),알(2),이(1)』를 외치며 숫자판이 마침내 「0」을 표시하는 순간 찬란한 불꽃이 북경 하늘을 수놓는 가운데 천안문광장 일대는 국가인 「의용군행진곡」 합창과 환희의 함성으로 뒤덮인다.
  • 서울예술단,20·21일 가무악 「네가 마음을 보느냐」

    ◎몸짓과 소리로 찾는 「마음의 세계」/춤·노래·연주 혼합… 주제 표현·관객 감흥 불러/희노애락·위협·투쟁·평온회복의 상념 스케치 서울예술단이 오는 20·21일 서울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가무악 「네가 마음을 보느냐」를 공연한다.이 무대는 우리 문화예술의 세계화를 목표로 지난 88년 창단한 서울예술단이 어려운 성장기를 거쳐 2∼3년전 비로소 자신들만의 몫으로 찾아낸 「가무악」으로 야심있게 대중과 만나는 자리가 된다. 서울예술단이 독자적으로 창안한 종합예술의 한 장르인 가무악은 원래 우리 전래 연희에서 원형을 찾을수 있다.춤과 노래,악기 연주를 한 무대에서 비슷한 비중으로 혼합시켜 주제의 표현과 관객의 감흥을 이끌어내는 독특한 양식이다.출연자가 무용과 소리,악기연주를 한꺼번에 소화해내야 하는 어려움을 안고 있는데다 일반에는 널리 알려져있지 않아 아직까지는 공연장르로 크게 확산되지 못하고 있는 것.하지만 서울예술단에서는 95년 첫 선을 보인 「신의 소리·춤」에 이어 지난해 「천년전설」이 연달아 국내외에서호평을 얻음에 따라 이제는 정기공연의 고정 레퍼토리로 굳혀졌다. 이번에 공연하는 「네가 마음을 보느냐」는 제목에서 나타나듯 명상의 세계를 통해 인간의 마음작용을 객관화시켜보려는 작품.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마음을 인간의 몸과 소리 및 다양한 악기음으로 꿰뚫어 그 실체를 찾아내려는 시도다.『형식적으로는 가무악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기존의 작품들과는 달리 다양한 이미지 창출을 위해 현대적 특성을 보다 많이 가미했다』는 것이 안무와 주역을 맡은 김나영씨의 설명이다. 5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정돈된 상태의 고요한 마음이 애욕과 분노,위협과 투쟁,절망과 환희 등을 거쳐 다시 평온을 회복해가는 일련의 과정을 춤과 소리로 그려낸 상념의 스케치라 할 수 있다.변화무쌍한 마음의 작용을 다루는 만큼 몸짓과 소리의 변화폭이 크고 또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무용수들이 발휘하는 창과 연주도 즉흥성을 많이 띤다. 또한 각기 다른 상념의 특성 및 이들간 조화·갈등을 표현하기 위해 북·장고·징·꽹과리의 사물 및 바라·아쟁 등 다양한 전통악기와 함께 재즈피아노를 한 무대에 올려 전통악기와 현대 서양악기의 이색적 어울림을 맛볼수 있게 하고 있다. 안무와 주역을 맡은 김나영과 사물놀이패를 제외한 출연진 대부분이 20대 단원들이다.따라서 사물놀이의 타악 연주음과 이들 젊은 출연진들의 역동적 춤이 어우러져 전반적으로 힘있는 무대분위기를 맛볼수 있다.피아노 연주는 유일하게 외부에서 초빙된 재즈 피아니스트 신관웅이 맡는다. 일반 대중과의 친화를 통해 우리 전통예술을 되살려 간다는 공연취지에 맞춰 관람료를 받지 않고 무료공연하며 국내공연이 끝나면 해외공연길에 나선다.20일 하오7시30분,21일 하오5시.523­0983.
  • “나라 걱정소리 귀담아 들어”/김 대통령 조찬기도회 참석 안팎

    ◎모처럼 활기찬 목소리로 시국문제 호소 김영삼 대통령이 활기를 되찾고 있다.한보사태와 차남 현철씨 문제로 난마처럼 얽힌 현 정국을 풀어나갈 「묘수」를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다. 16일 김대통령을 비롯,기독교및 사회 각계인사 1천9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힐튼호텔에서 열린 국가조찬기도회는 1시간 30분동안 숙연한 분위기속에서 진행됐다.김대통령은 기도회 연설에서 「위기는 동시에 기회」라면서 모처럼만에 활기찬 목소리로 시국에 임하는 소신을 피력했다. 김대통령은 한보사태와 현철씨 파문 등으로 소용돌이치는 현 국가상황에 대해 『우리나라는 정치·경제·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많은 시련을 겪고 있다』며 『지금처럼 나라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할 때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김대통령은 『오늘의 어려움 앞에서 분노하고 허탈해 하며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국민의 소리를 귀담아 듣고 있다』며 『저는 대통령으로서 아침 저녁으로 하나님앞에 엎드려 이 나라를 지켜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대통령은 이어 『성경은 소돔과 고모라를 구하는데 의인 몇사람이 있으면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며 『소망과 용기를 가지고 나아간다면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언약한 「약속의 땅」이 펼쳐질 것을 굳게 믿는다』고 덧붙였다.김대통령은 『신앙인을 비롯한 온 국민이 다시 한번 단합하고 결속하여 일어선다면 지금의 위기는 반드시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김대통령의 이날 기도회 연설 내용을 「참회」와 「반성」으로 요약했다.한보부도 및 현철씨 사태로 인해 온 나라가 혼돈을 거듭하고 있는데 김대통령이 참회하고 반성하는 것이라는 설명인 것이다. 신한국당 이한동 고문은 『김대통령의 목소리에 힘이 있고 생기가 넘쳐보인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기도회 준비위원장인 신한국당 박세직 의원은 『우리는 문민정부 4년을 통해 희망과 환희도 맛보았고 실망과 좌절도 겪었다』면서 『우리 모두 죄인임을 고백하고 특히 국민의 불신을 받고 있는 국회의원들부터 회개하자』고 정치권의 자성을 촉구했다. 정시채 농림부장관은 개회기도에서 『우리 사회는 모든 면에서 시련에 직면하고 있다』면서 『김대통령에게 솔로몬의 지혜와 더 많은 능력을 주시고 다윗과 같은 훌륭한 대통령이 되도록 기도하자』고 말했다.
  • 멕시코 유카탄주 치첸이차(세계 문화유산 순례:24)

    ◎천문학에 눈뜬 마야인의 신도시 유카탄 반도의 주도 메리다의 아침은 그리 상쾌하지는 않았다.멕시코만과 카리브해에서 불어오는 습한 바람 탓에 다소 끈적한 느낌마저 들었다.과거 문명의 흔적을 더듬어가는 즐거움이 아니었다면 쉬 짜증이 날만한 기후였다. ○성채닮은 캐슬피라미드 꼭대기까지 365계단 태양력 1년 날수와 같아 마야인들은 욱스말이 점차 도시기능을 잃어가자 그 중심지를 동쪽으로 옮겼다.양과 질에서 점차 커져가는 자신들의 문명을 담아낼 새 그릇이 필요했던 것이다.오늘날로 말하면 신도시를 건설했다고나 할까.그곳이 바로 메리다에서 동쪽으로 120㎞쯤 떨어져 위치한 치첸이차(Chichen Itza)다.그래서 이 도시는 후기 마야문명(AD 900년경∼AD 1521년)의 중심지가 됐다.선대의 정신적·물질적 가치들이 보다 정제된 형태로 남아 있는 것도 이 때문인 것이다. 관광객들 틈에 섞여 입구를 지나 숲이 드리운 서늘한 그늘 길을 100m쯤 걸어 갔을까.너른 잔디밭위에 떡하니 버티고 앉은 건축물 하나가 길을 가로막았다.이름 그대로 웅장한 성채를 닮은 「캐슬 피라미드」였다.길이 55.3m의 정사각형으로,전체 높이가 23m나 되는 「캐슬 피라미드」는 모두 9개 층을 이루었다.그리고 사방 벽면에 4개의 계단 구조를 갖추었다. 피라미드 구조를 찬찬히 뜯어보면 더욱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각각 91칸인 계단수를 합치면 모두 364단이다.여기다 꼭대기의 제단을 더하면 꼭 태양력의 1년 날수와 같은 365단이 됐다.또 9개 층 계단을 의도적으로 양분해 놓아 당시의 달수(월수)인 18이라는 숫자를 나타냈다.그러고 보면 「캐슬 피라미드」는 마야인들의 예술적 건축기술과 천문학 지식수준이 한데 맞물린 문명의 집적체 그것이었다. 피라미드 북쪽 계단은 또다른 신비를 간직했다.피라미드 밑에서 꼭대기에 이르는 돌 난간이 해마다 춘분과 추분날 하오 4시만 되면 환영을 연출한다는 것이다.태양의 빛과 그림자가 오묘한 조화를 이뤄 마치 커다란 뱀이 꿈틀대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정확히 3시간22분동안 계속된다는 그 환영을 목격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뱀을 숭배했던 마야인들은 해마다 춘분이 돌아오면 엄청난 영적환희에 휩싸였을 것이다. ○인신제물의 마야인의 풍습/「착몰」신께 바친 제물은 공놀이서 이긴 자의 심장 「캐슬 피라미드」를 뒤로 한채 동쪽으로 걸어갔다.멀리서부터 촘촘히 서있는 흰색 돌기둥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그 수가 족히 1천개가 넘는다고 한다.언뜻 보기에 지붕을 떠받치던 기둥이 아닐까 했지만 그러기에는 간격이 너무 좁았다.그렇다면 이 돌기둥들은 과연 무엇에 쓰였을까? 궁금증이 채 가시기도 전에 가파른 계단이 나타났다.「전사의 피라미드」에 오르는 통로였다. 계단은 36단을 이루었다.서둘러 오르자 먼저 「착몰」(Chac Mool)신의 형상이 시야에 들어왔다.앉아있는 것도,누워있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의 신은 엉덩이를 땅에 댄채 상체를 45° 각도로 들었다.그리고 발목을 엉덩이에 붙인채 두 무릎을 바로 세웠다.얼굴은 왼쪽으로 향한채 끝이 안보이는 어딘가를 직시하면서 두 손은 가지런히 모아 배위의 접시를 받치고 있다. 「착몰」신상의 쓰임새를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스페인 정복 이전 마야인들이 산사람의 심장을 신에게 바치는 풍습이 곧바로 연상됐다.방금 꺼낸 사람의 심장을 신상이 두손으로 받친 접시 위에 올려 놓았을 것이다. 마야인들은 신에게 심장을 바칠 인신제물을 「후에고 데 펠로타」,즉 공놀이장에서 구했다.신성한 공놀이에서 승리한 사람은 곧 자신의 심장을 신에게 바쳤다.승자가 죽음을 영광처럼 받아들였던 마야인의 심성은 참으로 불가사의했다.「캐슬 피라미드」서쪽에 위치한 「후에고 데 펠로타」는 길이 146m,폭 36m로 중앙 아메리카 최대 규모로 밝혀졌다.그 형태가 비교적 깨끗하게 남아있는 양쪽 벽면에는 전형적인 마야의 깃털장식과 동물가면을 쓴 군인들의 모습이 선명했다.용맹스런 군인을 상징하는 「재규어의 신전」이 벽 위에 우뚝한채 공놀이장을 내려다 보고있는 모습 또한 인상적이었다. 치첸이차 유적지에서 빼놓을수 없는 것이 북쪽에 있는 「세노테」(Cenote)다.지름이 50∼60m는 족히 넘고 깊이가 40여m에 이르는 대규모 연못이다.1924년 미국인 고고학자 에릭 톰슨이 발굴작업을 실시한 결과,각종 도자기·흑요석 등과 함께 인간의 뼈가 나왔다는 사실은 주목할만 했다.가뭄이나 흉년이 들었을때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세노테」는 농사지을 물을 대는 저수지 기능을 했을 뿐아니라 제소로도 활용했던 성지였음이 틀림없다. ○천체 관측한 「돔」탑/창문에 비친 태양각으로 춘하추분 정확히 알아 치첸이차는 마야인들이 천문학에 본격적으로 눈을 떴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또다른 증거를 간직하고 있다.「캐슬 피라미드」남쪽 300m 지점에 천문대로 사용했을 「소라의 피라미드」가 바로 그것이다.오늘날의 우주관측소에서 볼수 있는 돔(Dome)형 지붕이 뚜렷하고,내부에는 천체관측에 사용된 이중 구조물이 남아있다.마야인들은 돔탑을 둘러가며 나있는 창문에 비친 태양의 각도를 재어 춘하추분을 정확히 알아맞추었다.현대과학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그들의 문명수준이 놀라웠다. 1988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치첸이차에는 이들 유적 말고도 전쟁포로의 목을 길게 꿰어 벽면에 걸어놓았던 「솜팡틀리」와 「금성의피라미드」 등 여러 건축물이 남아있다.제사를 앞둔 제사장이나 사냥에 나설 사냥꾼들이 몸을 씻거나 출산전후의 임산부가 목욕을 하던 증기목욕탕 시설까지 갖춘 완벽한 도시 치첸이차.떠나면서 다시 돌아본 고대도시에는 마야인들은 오간데가 없고,석양을 뒤로한 문명의 그림자만이 깔려있을 뿐이었다. ▷여행가이드◁ 메리다 시내에 숙소를 정하고 관광버스나 렌터카를 이용할 수 있다.그러나 치첸이차가 메리다와 세계적인 휴양지인 칸쿤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어 유적지를 둘러본뒤 칸쿤으로 숙소를 옮기는 것이 낫다.입장료는 18페소(일요일은 10페소). 또 매일 하오 7시와 9시에는 휘황찬란한 조명으로 피라미드의 야경을 버여주는 「빛과 소리의 쇼」가 열린다.7시는 스페인어로,9시는 영어로 설명을 해준다. 치첸이차로 가는 도중 우리나라의 초기 중남미 이민사를 대표하는 「에네껭 농장」
  • 이씨 저서 「대동강 로열패밀리…」/뒤늦게 베스트셀러로

    ◎망명상황·남한사회 적응과정의 갈등 서술/「박 대통령 청부암살 미수」 등 비화도 소개 이한영씨 피격 이후 이씨가 지난해 6월 펴낸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잠행 14년」이 서점가의 화제가 되고 있다. 이씨는 권력핵심부에서 누렸던 부귀영화를 저버리고 자유의 품으로 망명할 수 밖에서 없었던 상황과 남한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갈등과 고민을 담담한 어조로 서술했다. 「지난 79년 북한 청년들은 폭력조직을 결성,모란봉 주변의 데이트족을 상대로 강간행위를 일삼다가 30여명이 그 자리에서 사살됐다」 등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비화도 담고 있다.또 북한이 70년대 중반,일본 야쿠자조직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해 줄테니 몇백만달러를 달라는 제의를 받고 적극 검토하다 최종단계에서 취소했던 「박대통령 청부암살 미수사건」도 다루고 있다. 김정일주변의 기쁨조,부하에게 「하사」되는 여배우,「물고기집」 연회 등 김정일일가의 향락과 부패상도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다. 책의 중반부터는 이씨가 자유를 찾아 망명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기기까지의 긴박한 상황이 펼쳐진다. 지난 82년 10월1일 서울의 상공이 눈앞에 펼져지는 순간 이씨는 『새롭게 삶을 시작하자』고 중얼거리며 밀려오는 막연한 불안감과 환희를 느꼈다고 적고 있다. 그 뒤 남한사회의 적응훈련을 마치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행복하게 누렸던 결혼생활,억대의 돈벌이,부도를 낸 뒤의 수감생활 등 15년간 파란만장했던 「제 2의 인생」이 그려진다. 이씨는 곳곳에서 어머니 성혜랑씨에 대한 그리움을 간절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 어깨처진 여당의원/박찬구 정치부 기자(오늘의 눈)

    『낡고 썩은 정치의 청산으로 안정속의 지속적인 개혁을 통해 제2의 건국을 이루자』 96년 2월 6일.그날 잠실실내체육관의 열기는 뜨거웠다.팡파르와 꽃가루,분수불꽃 속에 신한국당은 제1차 전당대회를 갖고 공식 출범했다. 그로부터 1년뒤.4·11총선에서 예상밖에 선전한 신한국호는 그러나 97년 새해 벽두 「한보」라는 암초에 걸려 최대의 시련을 맞고 있다.출항 한돌을 맞는 기쁨과 자축은 눈을 씻어도 찾을수 없다. 4일 한보철강 당진제철소를 찾은 신한국당 한보사태 조사위원들에게서도 한보철강의 불투명한 운명 못지않게 당의 앞길을 걱정하는 모습이 역력했다.「4·11전사」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당혹감과 낭패감으로 얼룩졌다.충청권의 한 의원은 『이건 금의환향도 아니고…』라며 착잡한 심경을 털어놨다. 특히 간담회에서 지역주민 대표가 『며칠전에는 다른 당,그 며칠전에는 또다른 당이 오더니 오늘은 신한국당이냐』면서 『지역주민들은 당마다 따로 오는 것을 상당히 안타깝게 생각하니 국회차원의 특별조사단이나 빨리 만들라』고 충고(?)하자 의원들은 하나같이 시선을 떨어뜨렸다.게다가 『설 이전에 신속한 지원이 이뤄지지 않으면 도산과 생계위협 등 엄청난 집단민원으로 사회적인 문제가 야기될 것』이라는 한 관련업체의 호소문에서는 시끌벅적한 「금배지」들의 「행차」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도 배어 있었다. 『4·11총선 이후 자만하고 교만하지 않았는지 다시 한번 추스리는 계기가 돼야 한다』­지난 3일 당 사무처 월례조회때 강삼재사무총장의 자성을 조사위원들도 뼈저리게 느꼈을 법 하다.환희와 박수속에 내년의 출범 두돌을 맞기 위한 신한국당의 발걸음은 이날따라 웬지 무거워 보였다. 신한국당이 「제2의 건국」을 바란다면 「제살」이라도 부패와 비리의 줄기를 과감히 잘라내고 「용광로」의 쇳물처럼 달아오른 개혁의 초심으로 돌아가는 일이 가장 시급한 과제일 터다.조사위의 활동에 대한 국민 신뢰도 그때 비로소 생겨날 것이다.〈충남 당진제철소에서〉
  • 김영진씨 둘째아들 해광군의 탈북기/우리가족 로정의 일기 전문:Ⅰ

    ◎“탈북=지도자 배신” 생각들어 갈등/농촌일손 가들랴 폐품 모으랴… 공부시간 몇이나/기차안서 굶주려 사람 보고 “누구때문” 울분 22일 귀순한 김영진씨 일가의 탈북기록인 김씨의 둘째아들 해광군의 「우리가족 로정의 일기」는 우리 맞춤법에 틀리거나 낯선 북한용어도 있지만 생생한 분위기를 전하기 위해 원문을 그대로 살려 게재했습니다. 나는 애어린 14살 아이이지만 살길을 찾아떠나가는 노정을 기록하여 어느때에 이사실이 세상에 공개되며 북조선 나의 동무들이 이 글을 볼 수 있을까 손꼽아 기다리며 한자 두자 일기로 적고저 한다.내가 살던 고향 집 앞에는 들판,뒷산 옆에는 4월,5월이 되면 과수나무들이 흰색옷을 입는듯 만발한 꽃으로 봄을 알리는 배나무들이 지켜섰습니다. 아름다운 내고향과 정다운 동무들을 버리고 나는 왜 떠나야 했는지,…. 그것는 배고픔에 못이겨서인지 아니면 북조선의 무상교육 무상배려가 좋은데 내가 일년에 공부하는 시간이 도대체 몇날,몇시간이 되었던가. 북조선에서는 한창 배울 나이에 공부를 배우는 시간보다 농촌자원에 동원했고 폐철모우기 폐유리모우기 폐고무 폐동 등등,모우기를 하루도 그칠날이 없으니 그런것이 어디에 있으량 하는수없이 나의 동무들은 선생님의 성화에 못이겨 공장,농장 주민의 것을 훔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결국 그것이 도리어 나라에 좋은일 한다는 것이 학생들에게 도적질을 배워주는 것과 다름이 없다.우리 학급 인원은 42명이다. 거기서 학교에 오는 동무들은 하루에 절반밖게 못온다.절반숫자의 동무들은 왜 학교에 오지 못하였던가? 그것은 참기어려운 배고픔때문이다. 나는 정말 배우고 싶은 심정이다.어디로 가야 배움의 길을 찾을 수 있을까? ◇1996년3월18일 월요일 날씨 맑음 이날은 정든고향,정다운 동무들과 이별하고 3월19일 기차를 타고 함경북도 무산군으로 향하였다. 기차에 오른 사람들은 왜 이다지도 많은지? 이 많은 사람들은 무엇을 목적으로 집을 떠나 다니는지 알고 싶은 마음이었다. 침침컴컴한 기차에 올라서니 사람들이 밀고당기고 힘내기를 하는 바람에 나는 넘어질듯 하였다. ◇1996년3월20일 수요일 이날도 기차안에서 무대기였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사람들이 서로 붐비면서 자기보따리를 찾는 사람,아이들이 배고파 우는소리,여성들이 신경질적으로 아우성치는 소리에 기차간은 그야말로 난장판 수라장이었다. 더욱이 내가 목격한 것은 굶주림에 시달려 숨을 방금 지울듯한 한 청년이 기차한막판에 누워 있었다. 그누구도 그사람을 동정과 위안해주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끝내 그사람은 굶주림에 못이겨 숨을 거두고 말았다.그때 나는 어린 마음에도 처참한 참상을 보고 울분을 금할수 없었다.나는 처음으로 어린 나이에 내눈으로 직접 사람이 죽는 것을 보았다. 나는 학교에서 공산주의 도덕교양을 받을때 웃사람을 존경하고 아래 사람을 사랑하며 곤란한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교양을 받은 나로서 아직도 그참상은 나의 눈앞에 생생이 나마있다. 어째서 이 비참한 참상,한 인간의 운명을 보고도 모르는 척 하는가? 아직 나로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과연 누구탓이며 누구 때문인가? ◇1996년 3월21일 목요일 지루함을 느끼면서 타고온 기차는어느덧 끝내 목적지 무산읍에 도착하였다. 이날은 마을이 서글퍼서 인지 하늘 그름을 뭉게뭉게 나의 마음을 쓸쓸하게 한다. 목적지인 외할머니네 집에 들어서니 할머니는 없었고 누나가 우리를 맞이하였다. 무산에서는 외할머니네 생활처지는 내고향의 생활처지와 다름이 없었다. 피곤한 나머지 나는 할머니가 들어서 오시는줄도 모르고 잠에 골아 떨어졌다. ◇1996년 3월22일 금요일 날씨(맑음) 아침 새벽에 나는 잠결에 할머니와 어머니 간에 말씀하는것을 들으니 먹을것이 없어 풀뿌리로 끼니를 채우며 겨우 장사를 하여 하루하루 살아가는데 너희들이 또왔으니 반가움대신 근심이 된다고 걱정하는것이 였다.나는 비롯 나어린 마음이지만 또다시 마음속 충격을 받았다. ◇1996년 3월23일 토요일 맑음 아침에 깨여나 보니 벌써 할머니는 장사를 나가고 없었다.나의 아버지니와 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무슨 토론을 하고있었다.그때나는 무슨 내용인지 모르지만 어머니는 앞으로 우리들의 살길을 찾는 심정에서 모데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나는 아버지어머니한테 묻고 싶었지만 어른들의 말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아침을 강냉이 뿌리로 만든 국수로 대충끼니를 하고 우리 온가족은 두만강 구멍을 나갔다. 두만강 기슭을 따라 얼마쯤 내려가니 유달리 화려한 집이 두만강 건너에 있었다. 후에 알아보니 그집은 남조선 사람들이 와서 지은집이라고 하였다. 나는 이때에 믿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되여 남조선 사람이 자기 나라도 아닌 중국땅에 와서 훌륭한 집을 지을수 있는가고 생각하여 나는 이사실을 알고 싶었지만 부모님한테 선듯 묻지 않았다. 이때 아버지께서 하는 말씀이 이제는 더는 북조선에서 살길이 막막하여 더는 살수없으니 너희들이 보다시피 할머니에 집도 생활이 구차하며 하루하루끼니를 이어가는 형편인데 너희들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고 묻는 것이었다. 이때 나는 아버지에게 정확한 대답을 올리지 못했다.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살길은 다만 남조선에 가야만이 너희들은 공부도 마음대로 할수있고 마음놓고 배불리 먹을수도 있고 희망의 날개를 펼칠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였다. 이때 나는 아버지가 나라를 배반하고 친애하는 지도자품을 떠나자고 여기로 데리고 왔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이때 나는 나의 아버지이지만은 나쁜 사람이 아닌가고 생각되어 내 생각대로 절대로 친애하는 지도자 선생님품을 떠나서는 살수 없다고 아버지께 말씀올리었다. 이때 나의 형님 누나는 이구동성으로 나의 말을 찬성하였다.우리 행동을 보신 아버지께서는 먼 남쪽하늘만 쳐다보며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였다. 침묵을 지키며 서로 얼굴만 쳐다보던중 어머니께서는 그러면 너희들은 어디로 갔으면 좋겠는가? 우리는 집도없고 재산도 다 팔고 할머니를 크게 믿고 왔댔는데 보다시피 할머니네 집 신세역시 구차하여 먹을것이 없어 하루살이로 생명을 유지하는데 우리까지 어떻게 같이 있겠는가고 하였다. 어머니 말을 듣고 우리 형님은 우리를 데리고 한쪽에 가서 말을 좀 하자고 하였다. 나의 형님은 우리보고 너희 생각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고 물어보는 것이였다. 이때 나와 누나는 한결같이 우리는 절대로 지도자동지품을 떠날수 없다고 말하였다. 우리 형제 사이에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때 아버지께서는 우리들의 침묵을 깨뜨리면서 하는 말씀이 너희들은 지도자 동지품이 좋다고 하지만 우리 온집안을 거처하여 먹여 살릴수가 없을 뿐만아니라 아버지는 이제는 고향으로 갈래야 갈수가 없는 몸이라고 말하였다.내가 왜서인가고 물으니 아버지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몇년전부터 남조선 방송을 들으면서 남조선은 자유세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씀하시었다. 또한 15명을 조직하여 북조선정치는 불모순 정치며 남조선정치는 자유정치라는 것을 선전하던중에 아버지는 노출되어 갈 수 없는 문제라고 알기싶게 이해시키는 것이었다. 이때 형님은 잘돼도 우리아버지 못돼도 우리아버지인데 아버지 뜻을 따르자고 말하였다. 나는 이때 생각이 많았다. 하나는 나의 아버지이고 하나는 조국의 품이었다. 이 갈림길에서 나의 심정은 아버지와 이별하고 싶지 않고 친애하는 지도자선생님의 품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현실은 하나의 길만 선택하여야 했다.하지만 현실은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기본 선차적 문제로 생각할때 아버지를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마음 상에서는 그리 달갑지 않았다. 이런 환경에서 아버지께서는 명령하다싶이 요구성을 높여 무조건 남조선으로 가야만이 삶의 길이라는 것을 결심하면서 너희들은 꼭 부모들의 의향대로 움직이라고 강박하는 것이었다.아버지께서 결심하신 그날 저녁 밤10시부터 중국도강준비에 들어갔다. 음력 2월6일이라 조각달은 지고 두만강 기슭옆에 캄캄한 밤 아버지를 따라 두만강 기슭에 가깝게 접근하였다.은밀히 접근하여 새벽2시까지 정찰하면서 보호병 움직임,조명등,불바침의 시간적으로 하산하여 아버지께서 명령을 내리시었다. 우리 자식들을 생각하는 부모님들은 우리를 꼭 살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백포로 우리를 위장시켜 한치 한치 두만강을 도강하기 시작했다. 끝내 새벽 3시30분에 성공하여 중국땅을 밟게 되었다. ◇1996년 3월 24일 일요일(맑음) 이날은 유달리 날씨도 쨍쨍하게 맑은 날씨였고 하늘도 우리를 도와주는듯 기분이 상쾌하게 날씨가 맑았다. 새벽4시에 중국 조과향에도착하여 산에 오르기 위하여 사람들의 눈을 피해 50도가량인 벼랑급한 산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산에 오르자니 급한 벼랑에서 아차 한발 실수하면 죽음을 면치 못하는 아슬아슬한 벼락산이었다.이때에 어린 여자의 몸으로 산을 오르는 나의 누나는 기진맥진하여 겨우 형님의 도움을 받으며 산등성이에 올라 섰을때 새벽 6시30분이 되었다.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아침식사 준비에 굴뚝에서 연기들이 뭉게뭉게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그때 나의 정든 고향 생각을 하며 다시한번 강건너 북조선을 바라보았다. 이때 어머니께서는 사람들이 볼수없는 산에 좀더 들어가 불을 피우고 아침식사를 하자고 하는 말에 우리는 발길을 돌렸다. 또다시 우리 일행은 지친 발길을 돌리며 눈이 무릎까지 오는 북쪽 산으로 향했다. 1시간쯤 눈길을 걸어 나무가 우거진 깊은산에 불을 피울장소를 찾았다. 우리들은 불을 피우고 젖은옷을 말리며 아침식사를 하게 되었다. 물이 없어 눈을 녹이며 물을 만들어 먹었다.식사를 끝낸후 피곤에 몰려 나도 모르게 잠에 떨어져 꿈나라로 갔다. 꿈속에서 나의 동무들이 나를 보고 나라를 배반한 변절자라고 손가락질을 하고 있을때 나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이런 꿈을 꾸고 있을때 어머니께서 나를 깨우는 바람에 깨어보니 꿈이었다. 이때 나무하러온 조선족 중국부부가 올라오고 있었다.그들이 하는 말이 북조선에서 온 사람이 아닌가? 물어볼때 우리 온가족은 어쩔바를 몰라 몹시 당황하였다. 그런데 생각과는 달리 자기는 나쁜사람이 아니라고 하며 북조선 생활정황을 잘알고 있으니 우리를 동정하여 말하면서 자기 집으로 내려가자고 하였다.우리는 중국집에 들어섰을때 나는 아주 놀라며 이집은 중국에서 제일 부유한 부자 집이 아닌가고 생각하였다. 집에 들어서니 한눈에 안겨오는 것이 냉동기 텔레비전 재봉기 등 가정품들이 일제히 꾸려져 있었다. 나는 이집 주인님이 여기에서는 이밖에 고깃국을 정상적으로 먹는다고 할때 크게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이때 어머니께서는 이것이 사실인가 믿어지지 않는다고 다시 물어보시었다. 주인은 웃으며 중국은 개방이후 발전되어 백성들의 생활이 보다시피 좋다고,집집마다 생활형편이 모두가 이정도는 된다고 하면서 우리집은 보통 생활이라고 말하였다. 나는 중국땅을 처음 밟았을때 중국에서 사는 조선족 부부가 나에게 준 첫인상은 정말로 내가 상상도 하지못한 인상이었으며 자연적으로 중국과 조선을 대비해 보지 않으면 안될 정도였다. 중국땅에 처음와서 만난 사람은 담배농사를 지으며 산에서 나무를 해다 불을 때어 온실관리를 하고 있는 집이다. 밤11시가 되도록 주인님의 말을 들으니 정국정황을 다소나마 알게 되었다. 집주인은 우리에게 중국 낡은 옷이지만 조선옷과 바꾸어 입혀주면서 화룡현까지 갈 차비를 주어 우리일행은 버스를 타고 화룡까지 수월히 오게 되었다. ◇1996년 3월 25일 월요일 (맑음) 화룡시에 들어서니 북조선에서 볼수없는 휘황하고 유명한 시장거리,사람마다 웃음이 가득찬 거리,생기발랄하고 환희가 넘치는 얼굴들.그모든 모습들.없는것없이 차려놓은 시장과 과일류,복장류,당가루류 등등 없는 것없이 그득히 차려놓는 시장거리 그야말로 영화의 한장면을 펼쳐 놓은듯 하였다. ◇1996년 3월26일 화요일 (흐림) 우리일행은 노비가 떨어지며 화룡시에서부터는 도보로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상오 9시30분부터 걷기 시작한것이 어찌 피곤하고 힘들던지 저녁 10시에 서성명함에 도착하였다.한밤중에 낯설고 물설은 이국땅에 오니 잠자리가 근심이 되어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한집에 들어가 길가는 손님이니 하룻밤 쉬고 가자고 애원하고 사정하였다.첫집에서는 안되고 열집만에 애원하던중 11번째 집에서는 우리를 받아들여 밥도 주고 잠도 잘수 있게 되었다. ◇1996년 3월27일 수요일 우리일행은 도보로 걸어서 연길시내에 도착하였다. 연길시내에 들어서 아버지에게 물어보니 한국사람만 만나면 도움을 받는다고 하여 한국사람을 찾았다. 한국 대사관에 전화를 하려고 공동전화 하는 곳에 가니 한아주머니가 우리를 보고 북조선에서 오지 않았는가 하며 자초지종을 물으며 반갑게 대하는 것이었다.그는 북한에 오빠가 있다고 하며 북한실정을 물어 우리는 북한생활 형편을 말하며 우리는 망명자가 아니라,중국에 친척방문왔다고하였다. 박아주머니는 우리는 북조선돈 3천원을 가지고 중국돈도 바꾸어주어 90원을 생활에 보탰다. ◇1996년 3월 28일 목요일 연길시 장백공사 리화의 김래삼아저씨네 집에서 하루 묵게 되었다. 이집은 채소농사를 하며 살아가는 집이었다. 우리를 반갑게 대해주면서 하는말이 어째서 온 가정이 한창 공부시킬 나이에 아이들까지 데리고 먼길을 떠나왔는가? 하는 것이었다. 어머니께서는 흑룡강 오상현에서 빚에 시달려 빚재촉에 못견디어 살수없어 연변에 친척을 찾아온다고 말하였다. 살수없이 연변에 친척 찾아 온다고 말하였다. (이말은 로라를 처음 만났던 부부가 이렇게 알려 주었다)
  • “설원서 펼치는 요정들의 군무”

    ◎숙대 한국무용과 50명/동계U대회 폐막행사 장식/「요정춤」 연습 열기 「설원을 무대로 눈의 요정을 꿈꾼다」 숙명여대 한국무용과 학생 50명 전원은 24일 개막되는 97 무주·전주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의 행사요원으로 참여,개·폐막식 행사를 빛낸다. 행사에는 「한국춤」의 안무가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댕기머리」교수 정재만 교수(49)가 안무를 맡는다.그는 지난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에서도 안무를 맡았다. 정교수는 개막식 행사에 자신이 단장을 겸하고 있는 삼성무용단을 비롯,벽사무용단,원광대·무주초등학교 등 학생무용단 10여개 팀을 이끈다. 이들은 개막식 행사에서 「하늘에 알린다」는 뜻인 「고천」(고천)을 주제로 「봉화춤」「북춤」 등을 펼친다. 폐막 축제에는 「함께 산다」는 뜻의 「상생」을 주제로 「눈꽃」(요정춤),「모두 함께」(다람쥐춤),「생명의 환희」(동물춤),「불타는 숲」(활춤),「학의 날개」(학춤) 등을 화려하게 선보인다. 특히 이번 공연은 총 800여명의 무용수들이 「고천」과 「상생」이라는주제 아래 통일된 연기를 펼친다.극장 무대에서는 느낄수 없는 웅장함과 화려함이 돋보인다는 평이다. 그런 만큼 참가 무용단원 모두의 호흡이 중요하다.무용과 학생들은 지난 1년간 학교체육관·운동장 등지에서 다른 무용단들과 함께 많은 땀을 흘렸다.힘들면 선후배가 따로 없이 서로를 다독거리며 격려했다. 정교수는 『이번 유니버시아드대회는 젊음의 축제로서 발랄함과 생기가 눈 덮인 자연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룰 것』이라며 『우리 춤을 세계 각국에 널리 알릴수 있어 더할 나위없이 기쁘다』고 말한다. 이번 공연에는 정교수의 장남 용진군(20·서울예전 2년)도 「학춤」에 무용수로 참가한다. 무용과 4학년 유세희양(23)은 『교수님이 댕기머리를 한 것은 멋보다 작품 때문이지만 왠지 같은 세대같은 느낌이 들어 좋다』고 말한다. 정교수는 지난 80년과 84년 대한민국 무용제에서 각각 안무상과 대상을 받은 베테랑.91년에는 프랑스 「디종 국제민속예술제」에서 그랑프리를 받기도 했다.
  • 모녀·친지 부둥켜안고 눈물마/탈북일가 회견장

    ◎비참한 북 실상 설명하다 끝내 목메/“김일성 대원수 고맙습니다…” 5세 소녀노래에 섬뜩함도 북한 주민의 처절한 삶에 대한 폭로,탈북 대장정의 긴박했던 순간에 대한 회고,그리고 그리던 가족·친지들과의 상봉…. 「동토의 왕국」 북한을 탈출,지난 9일 자유의 품에 안긴 김경호씨 일가족의 17일 기자회견장은 눈물과 환희로 가득찼다. 회견에는 김씨의 일가족 등 17명 가운데 임신 8개월인 넷째딸 명실씨(28)를 제외한 16명이 참석했다.김씨의 맏형 경태씨(70)·조카 홍석씨(34),이태원 친구 이한성(61)·변지열씨(61),그리고 부인 최현실씨(57)의 어머니 최정숙씨(76) 등 일가 친지 등 14명도 회견 장면을 처음부터 지켜보았다. 회견이 끝나자 이들은 서로 부둥켜안았다.아무런 말도 없이 눈물만 흘렸다. 내·외신 기자 200여명과 TV로 이를 지켜본 사람들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특히 탈북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회안전부 노무원 최영호씨(30)는 북한에 아내와 세살박이 아들을 두고 온 것으로 밝혀져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이날 회견에서는 몸이 불편한 김씨 를 대신해 부인 최씨가 마이크를 잡았다.사지에서 일가족을 탈출시킨 「대모」답게 목소리는 시종 담담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배고픔과 가난….최씨는 너무도 비참한 북의 실상을 설명하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장내는 이내 숙연해졌다.이를 지켜보던 최씨의 어머니 최정숙씨도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최씨는 『북한 당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아이들에게 수면제를 먹이려고 했고 발각되면 북으로 끌려가기보다 쥐약을 가족들에게 돌리려고 했었다』고 두만강을 건널 때의 비장한 각오를 털어놓았다. 이어 『남한에는 한강다리 밑에 거지가 수두룩하다고 들었는데 막상 와보니 빌딩하고 큰 배(유람선)만 다니더라』고 말해 장내에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셋째 사위 박수철씨(38)는 『북한에서는 간부와 어부,과부들이 잘 산다고 해 「3부」로 불린다』면서 『간부는 주민들의 뇌물로,어부는 통제가 적은 바다에서 고기를 낚기 때문에,과부는 몸을 팔아 그나마 잘 살 수 있다』고 설명해 북한의 실상을 엿보게 했다. 손녀 박봄양(5)은 『한국에 오니까 과자랑 사탕을 마음껏 먹을 수 있어 좋다』면서 마냥 즐거워했다.기자들이 노래를 불러보라고 하자 「따사로운 품속에 안아주시니 김일성 대원수님 고맙습니다…」라고 또렷하게 불러 북한의 철저한 정신교육에 섬뜩함을 느끼게 했다.
  • 판소리 명창 조상현(이세기의 인물탐구:106)

    ◎타고난 성음 거침없는 연기력 객석 압도/전통고수보다 「시대의 향」담긴 음악 주장/“국악을 대중가까이…” 매년 수십차례 공연 이 시대 걸출한 인물의 한사람인 명창 조상현.타고난 성음에 거칠 것 없는 연기력은 어느 무대에서나 흥청거림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그의 목은 묵직한 철성을 단전에서 끌어올리는 동편이나 감칠맛이 넘실대는 서편제와는 다르다.억세면서도 바닥이 고르게 다져진 우람장중한 힘과 정한이 배분된 강산제소리로 장시간 소리를 질러도 갈수록 목이 터서 유려한 가슴의 소리를 울리는 것이 특징이다. 훤칠한 체구에 두둑한 배짱,사나이다운 기백이 전신에 서린 조상현을 가르켜 일찍이 국악계의 대부이던 정권진은 「몇십년만에 한번씩 나오는 희한의 득음」으로 찬사한 바 있다. ○변화무쌍한 소리 구사 실제로 오음과 육률을 임의로 변화시키는 것은 물론 평성으로 하다가 위로 튀는 목이며 목청을 좌우로 헤쳐가며 힘차게 내는 걸쭉한 반 수리성은 중상성을 낼 때도 세성을 내지 않는다. 그는 지금도 혼자서 일인다역을 감당하는 「심청전」 「춘향전」 「수궁가」 완창에서 장(우조) 한(만조) 화(평조) 원(계면조)을 변화무쌍하게 구사하고 아니리 발림에 능란하다.그중에서도 향청의 창고직이,감관과 색사를 두루 잡아들이는 「춘향전」의 「어사출도」장면은 「만장의 폭포가 쏟아지듯 웅건장대한 자진몰이」로 현란하게 말을 엇붙이고 장단을 가지고 놀면서 시원한 통성으로 객석을 압도한다. 그가 즐겨 부르는 「심청전」중 맹인잔치에서 심봉사가 청이를 만나 눈뜨는 장면 역시 평계면에서 끓어오르는 격정을 토해내는 진계면으로 넘어가는 대목은 일품이 아닐 수 없다. 지난 90년5월 도쿄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열린 일본공연에서 히다치노미아(상융궁) 일왕자부처를 비롯,전현직 장관·중참의원 등 1천700여관객이 만장한 가운데 장중한 공연이 끝나자 10여분간의 뜨거운 박수갈채로 심봉사로 분한 그에게 환호를 보냈다. 그동안 겪어온 숱한 고초가 부녀상봉과 개안이라는 환희의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장단은 중모리에서 빠른 자진모리로,창조도 애원성을 담아 관객이 눈물을 적시는슬픈 대목인데도 청승푸념이 범람하지 않는 영출한 기량에 일본신문은 한같이 「관객의 심금을 울린 명무대」로 호평하고 있다. 판소리 다섯마당중에서도 그가 특히 「심청전」에 애착을 갖는 것은 그가 살아온 지난날이 애통비절과 가난의 파란으로 점철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가 태어난 전남 보성군 결백면 오호리는 강산제의 원가인 회천면 금천리와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부친 조기원씨는 순천일대를 주름잡던 한량에다 광폭의 주란으로 그는 하루도 가정불화가 그치지 않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다행히 부친이 못 배운 것을 한하여 3남2녀중 막내인 그만은 유독 서당에 보내주었다.6살때부터 동몽선습에서 대학·소학을 배우고 율포중에도 진학했다.그러나 어릴 때부터 「강산제의 정한어린 노랫가락」을 들으면서 소리에 눈뜬 그는 협률사공연을 보고 「소리꾼」이 될 것을 결심,12살되던 해 인근의 유명한 정응민문하에 들어가 판소리를 배우게 되었다. 보성고를 졸업할 때까지 꼬박 7년을 하루 10시간이상 강산제소리인 춘향가·수궁가·심청가를섭렵했고 20세되던 해 광주로 나가 「적벽가」의 박봉술 명창을 사사,한때 우쭐거리는 마음으로 그는 「나를 당할 명창이 누구냐」는 식의 호기와 만모로 군복무중에는 군예대를 만들어 전방을 휩쓸고 광주의 극장을 누비는등 객기만만의 시절을 보낸 적도 있다. ○가난과 객기의 젊은시절 그러나 목포문화방송의 국악프로를 맡아 출연하던 무렵 그곳에 들른 박녹주명창이 『지방에 두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인재』란 이유로 그를 수양아들을 삼았고 그때부터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있던 명창의 자택에 머물면서 문밖출입이나 사람만나는 일이 허용되지 않는 참으로 가혹한 시련의 학습시기를 거쳤다.그리고 이제까지의 타성이던 떠는 소리(발성),입안소리(함성),비성과 횡성을 말끔하게 씻고 그는 비로소 명창서열에 들어섰다. 71년 국립창극단에 입단,잘 생기고 떡벌어진 젊은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만조와 평조,판소리장단을 두루 꿰뚫자 청중은 그를 환호해 마지않았고 73년 국립창극단 「수궁가」를 필두로 그가 주역으로 나오는 공연은 관객이 3층 복도에까지 차는 이변을 빚었었다.「TBC향연」에 나가면서 삼성 이병철회장의 눈에 띄어 각별한 사랑을 받는등 서울공연 4년만에 집을 마련하기도 했으나 이로 인해 가정이 파탄이 나는 불행을 겪기도 했다.자택은 양천구 목동아파트,부인 이숙정 여사와의 사이에 2남이 있다. ○80년대 장극무대 휩쓸어 옳은 말을 잘하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탓에 82년 국악향상을 위한 국립창극단 오디션에 모순점과 부정이 개입됐다는 이유로 이에 앞장서 항의하다 자진사퇴해버렸고 그후 KBS창극단무대를 통해 「멀 있는 국악을 대중 가까이 끌어들인 개척자」를 자처하여 텔레비전 화면에 가장 자주 비치는 국악인의 한사람이 되었다. 사나이다운 광활한 성격에 비해 술·담배를 입에 대지 못하는 그는 국악의 대중화라는 이름 아래 모든 창극에서 주역을 휩쓸면서 86년 파리 퐁피두문화센터에서의 「조상현 춘향전완창」, 89년 예향 광주에 시립국극단을 창단,「심청전」 유고·헝가리순회와 「아리랑」 구소련순회 등 70여개국을 도는 화려한 소리의 여정을 펼쳐나갔다.매해 수십차례의 공연을 끊임없이 가지는 중에도 「전통판소리를 보존하고 유지하는 선이 아니라 당대의 향취와 후대를 동반할 수 있는 음악을 지키려는 것」이 그의 의지다. 중국 악서에 나오는 「음악을 들어보면 그 나라의 정치를 알 수 있고 춤을 보면 그 나라의 덕을 알 수 있다(문낙지정 관무지덕)」는 구절을 성취하려는 그는 요즘도 1주일중 사흘은 광주에서 보내고 주말에는 서울에 올라와 서울판소리보존연구회의 판소리강습, 3년전부터는 전국판소리명창대회를 직접 주관하는 등 한시도 쉬지 않는 완강한 젊음과 정열을 불태우고 있다. 판소리 옛예인의 단아단정하며 오로지 전통을 지켜나가는 소극적 이미지가 아닌,사나이의 호방과 웅장청원으로 새로운 판소리명창의 인상을 새긴 그는 지금 대광입신의 경지에서 거장다운 절창을 펼치면서 판소리무대의 「영원한 젊음」으로 우뚝 서 있다. □연보 ▲1939년 전남 보성출신 ▲51∼58년 율포중재학중 명창 정응민사사,보성고 졸업 ▲58∼60년 광주국악원서 박봉술 「적벽가」 사사 ▲60년부터 명창 박녹주문하사사 ▲71∼82년 국립창극단원,주역 ▲7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판소리후계자지정 ▲73∼75년 판소리보존연구회 사무국장,판소리의 전승보급 ▲74년 남원 전국명창대회 1등 ▲76년 전주대사습 전국대회 판소리부문 대통령상 ▲78년 한국국악협회 상무이사 ▲80년 「수궁가」 완창발표(국립극장대극장) ▲82년 판소리보존연구회 이사장 ▲83년 「수궁가」 완창발표(서울 문예진흥원대강당,부산 가톨릭센터) ▲84∼95년 전남대 국악강사 ▲86년 「춘향전」 완창발표(파리 퐁피두문화센터) ▲89년 광주시립국극단창단 ▲90∼현재 광주시립국극단 서울공연 「놀보전」(호암아트홀)을 비롯,창극 「아리랑」 구소련순회,「놀보전」 「심청전」 유고·헝가리순회 등 매해 수십회공연 ▲9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지정 ▲94년 전국판소리 명창대회 주관 〈현재〉 판소리보존연구회 이사장·광주시립국극단단장 〈수상〉 대한민국국악대상(82년) 한국방송60년 방송유공자문화포상 대통령상(87년) 무등문화상(89년)
  • 시인·무용평론가 김영태(이세기의 인물탐구:105)

    ◎춤을 찾아 떠도는 문단의 보헤미안/공연장마다 출현… 화제작 대본 직접 쓰기도/시작·평론·그림 쉼없는 행보… 작품집 40권 김영태는 언제나 공연장주변에 서 있다.10년전이나 20년전 보다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외환은행에 다닐 때는 직업상 신사복 차림을 할수 밖에 없었으나 직장을 스스로 떠난 지금 그는 복장부터가 마음껏 자유로워졌다. 「내 키는 1미터 62센티인데/모리스 라벨의 키는 1미터 52센티 단신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라벨과 나」란 시의 첫구절처럼 크지 않은 체구에다 말투에는 전혀 힘이 들어있지않고 머리를 약간 외로꼰 담배피우는 모습이 그의 이미지다.「접시,호리병,기묘한 찻잔을 수집하기/화장실 한구석 붙박이/나무장안에 빽빽이 들어찬/향수진열 취미도/나와 비슷합니다/손때묻은 작은 소지품들이(누에문양 포켓수건이나 열쇠고리까지)/제자리에 있어야하고」. 실제로 그가 30여년을 살던 종로구 사직동집은 골동소품에서 인형과 이색적인 찻찬,책과 1천3백여장이 넘는 LP판들이 온통 도배를 한듯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고 책과커피향이 어울리는 코펠리아무대의 분위기였다. 천성적으로 치밀하고 꼼꼼한 그는 작은 낙서한장 버리지 않았고 지난 30년간의 족적을 「Ma Vie(나의 인생)」란 책으로 묶어 자신의 모든 것을 낱낱이 정리해 보이고 있다.66년에 직접 손으로 쓴 결혼청첩장이며 김구용 박목월 김춘수 신석정 황동규 마종기 권옥연이 보내온 친필 엽서,오영수 휘호,조병화의 소묘,그가 그린 포스터 프로그램 책표지에 이르기까지 먼지도 버리지않는 섬쩍함이 섬뜩하다. 그런 그를 생전의 김현은 「초속주의자」 혹은 「좋은 의미의 딜레탕트」라고 했고 같은 문학평론가인 김인환은 「미학추구자,김종삼 이후 문단의 마지막 보헤미안」으로 부르고 있다.또 캐리커처에 능한 소묘가·무용평론가·시인으로서 모름지기 「우리시대의 삼절」로 찬사된다.그는 스스로를 『아름다움을 훔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의 소묘와 평론에는 그나름의 새롭고도 빛나는 색채가 들어있다.시와 춤과 그림을 동시에 작업하는 과정에서 「춤과 그림은 그의 시의 내용이며 시와 춤은 그의 그림의 내용」이기 때문이다.그의 시는 대부분 아름다운 대상을 순간의 떨림속에서 태어나게 하면서 「어느 때는 목청 높은 대담한 사설조로 상황에 대한 해학적 음성」을 펼치기도 한다. ○꼼꼼한 성격의 수집광 시인 김승희는 「저 탐미의 괴물」을 향해 『현대인의 반타이타니즘을 그는 한컵 가득 독약처럼 마시지만 그러나 그는 독약 때문에 죽지는 않는다』고 꼬집는다.피아노와 그의 발레그림들은 「언뜻 팔에 힘을 빼고 흐느적흐느적 술취한 듯이 비틀거리는 선의 파격적인 굴절이나 데포르마시옹으로 외계의 간섭에 맞서는 야유의 메시지」이다. 발레리나가 턴을 하는 찰나나 도약 직전을 섬광 같은 솜씨로 포착하면서 막연한 형태의 생략과 색채의 요점을 「부호와 관념만으로」 남기고 있다. 그는 종로구 필운동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강북을 떠나본 적이 없는 서울토박이다.종로바닥에서 유명했던 「김인기 포목점」의 김인기씨가 그의 조부이고 부친은 장사나 이재에는 취미가 없는 김종화씨로 일본 무사시노미대 출신. 화가로 활동하진 않았으나 부친의 영향을 받아 미대에 진학했고 홍대재학중 박남수 추천으로 문단에 나와 그동안 시집만도 15권,끊임없이 쓰고 끊임없이 발표하여 산문집·무용평론·무용자료집·시론집·소묘집·음악평론집 등 40권에 이른다. 연극 음악평에도 손댔으나 그에게 맞는 것은 무용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봄에는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춤작가 12인전」에서 현대무용가 이정희가 그의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무용화한 「풍경」에 10여분간 특별출연,커피를 갈고 스탠드를 켜며 담배 피우는 마임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무대에 펼쳤다. 그외 최현의 「비상」,전홍조의 「멀리서 노래하듯」,박명숙의 「결혼식과 장례식」「잠자며 걷는사람 잠자며 걷는나무」 등 무용공연에서 화제가 됐던 작품들은 거의 그가 대본을 썼거나 그의 시에서 빌린 것이고 책표지 포스터 프로그램과 수많은 캐리커처와 무용가·작가를 위한 헌시를 썼다. 그는 무용인들의 닳아빠지지 않은 순결한 심성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그중에서도 특별히 최현과 절친하다.까다로운 사람은 까다로운 사람과 통하 듯이 춤이아름다운 실력있는 이 원로와는 음악매니아로서 의기투합 한다. 자유로운 그는 틈틈이 여행을 즐긴다.해외에서 무대에 올려진 중요한 공연을 보기 위해 무용단의 해외공연에 따라나서거나 여행적금으로 가장 아름다움 춤이 있는 지구상의 모든 곳을 떠돌아다닌다.3년 전에는 슈투트가르트에서 강수진이 「로미오와 줄리엣」주역으로 데뷔하는 공연에 참관했고 올해도 세차례나 밖에 다녀왔다. 그는 『철저하게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만 찾아다닌다.나는 보통사람으로 남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문득 이 세상을 떠날 때 무언가 내흔적을 남기고 싶다』고 한글에서 밝히고 있다.과연 그가 좋아하는 것만 찾아다니는 「움직이는 극장」「사시사철 춤보러 다니는 구경꾼」으로서 그는 예술가다운,시같은 삶을 살고 있음에 틀림없다.더구나 인형제작가인 부인 정복생과 두아들이 미국에 유학후 뉴욕에 머물러버리자 20년 가까이 혼자서 동부이촌동의 아파트에 살고 있다. ○「춤작가 12인전」 특별출연 그래선지 그의 최근 연작시인 「남몰래 흐르는 눈물」은 읽는 이의가슴에 한줄기 흐르지 않는 눈물을 삼키게 한다.「무엇이 이제까지 나인가/질문을 하지만 답이 없습니다/시험지에 답못쓰는 답답함/눈물을 흘릴줄 몰라도/흐르는 눈물이 답입니다」.윌리엄 제임스의 「슬프니까 우는 것이 아니라 우니까 슬퍼진다」는 사실을 체험으로 증명해보이는 시이다. 김인환은 『비트겐슈타인이 수학자란 수학의 언어놀이에 참여하는 사람이라고 했듯이 김영태는 시와 춤,그림과 음악을 가지고 논다』고 말한다.놀이가 빨리 끝날까 두려워 그는 「아껴가며 음미하면서 논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과 마음이 모두 폐품이고 서향창에 어쩌다가 헹군 헝겊천사」라고 고백하면서 부드러운 검은색의 헐렁한 외투에 숄더백과 벙거지차림으로 오늘도 어김없이 공연장에 나타난다.그리고 그에게 떠오르는 이미지들에 고통과 환희,비참과 영광의 색채를 칠함으로써 「그의 시의 이미지들은 중립적인 경쾌함 대신 현실의 중압감을 버티려는 환상」으로 독자에게 읽혀진다. 그의 아호는 「지푸라기」라는 뜻의 「초개」다. 한달이면 50여차례 공연을 보러가고 낮에는 혜화동글방에서 집필,「삶은 소진하다 가는것」이라는 그의 행보는 그의 자작시 「허행초」처럼 어딘가에 구속당한데 없이 유유하고 자적하다.일찍이 김수영시인이 지적한대로 「예술적 냄새가 너무 짙은」 김영태 초상화는 그의 소원대로 주변사람들에게 독특한 탐미의 이미지를 새기고 그래서 그의 흔적은 이 검은 도시의 밤하늘에서 별빛처럼 영롱하게 빛난다. □연보 ▲1936년 서울 출생 ▲57년 경복고 졸업 ▲59년 「사상계」지 시추천 ▲61년 홍대 서양화과 졸업 ▲65년 첫시집 「유태인이 사는 마을의 겨울」 출간 ▲68년 외환은행 조사부 입사,극단 자유극장 동인,첫번째 산문집 「공기의 모든 부분속에서」 출간 ▲71∼95년 개인전 6차례 ▲75년 「12인의 인성을 위한 대사더듬기」(백병동 작곡)공연 ▲76년 단막극 대본 「이화부부」(이원경 연출공연) ▲80년 미술잡지 「선미술」 주간 ▲81년 음악펜클럽 총무간사 ▲82년 한국무용평론가회 회원 ▲84년 판뮤직페스티벌 「대사더듬기」재공연,일본국제무용콩쿠르 심사,서양화 10인전(낙산공방) ▲85년 첫번째 무용평론집 「갈색 몸매들,아름다운 우산들」출간,「객석」·국립극장·영화진흥공사 자문위원 ▲88년 단막극 「이화부부」현대무용으로 공연(배정혜 안무,정성조 음악) ▲89년 한국무용평론가회 회장,동아무용콩쿠르 심사 ▲90년 서울무용제 운영심사위원 ▲91년 음악평론집 「음의 풍경화들」 출간,외환은행퇴 직 ▲93년 한·일댄스페스티벌도쿄공연 참가,윤덕경무용단 중국공연 동행 ▲96년 무용자료집 「풍경을 춤출수 있을까 Ma Vie」출간,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출강 시집 「남몰래 흐르는 눈물」 등 15권,산문집 「핀지콘티니가의 정원」 등 9권,무용평론집 「멀리서 노래하듯」 등 6권,소묘집 「선의 나그네」 등 6권,총40권. 현대문학상(72년) 시인협회상(82년) 서울신문 문화예술평론상(89년) 예음공로상(94년) 현대무용진흥회 공로상(95년)
  • 광복절 아침에/국가·민족의 진로 다시 점검하자/박유철(특별기고)

    제51주년 광복절을 맞이한다.우리에게 광복절의 의미는 무겁다.이날은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의 질곡속에서 광명을 되찾은 환희와 감격의 날이다.우리는 이 날을 통해 자유로운 삶과 독립된 나라의 축복을 기뻐하며,이를 영원히 지켜갈 결의를 다진다. 이 날은 감사의 날이다.나라를 되찾기까지 수많은 애국선열들의 피와 땀,눈물이 있었다.그분들은 총칼의 위협속에서 주저하지 않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으며 만주로 연해주로,하와이로 버마로,벌판과 골짜기로,감옥과 형장으로 조국광복의 길이면 어디든지 두려움 없이 멀고 험한 길을 걸었다.그분들은 식민지배의 긴 어둠과 질곡속에서 3·1운동으로 민족공동체를 완성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근대국가와 자유민주주의의 기초를 놓았다. 또한 이 날은 경계의 날이다.간계와 무력으로 우리국권을 유린하고 우리민족에게 씻을수 없는 치욕과 측량할 수 없는 고통,헤아릴수 없는 불행을 안겨주었던 과거 일본의 침략주의를 경험하였던 우리는 이러한 역사를 되새김으로써 침략주의에 대해 끊임없는 경각심을 일깨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더구나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 일본의 일부 지도층들이 일본 국민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인류평화에 책임있는 역할을 하도록 이끌어야 할 처지에 있음에도 과거 침략주의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하고 수시로 망언을 일삼으며 국민을 오도하려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진정한 한·일우호협력관계의 발전을 위해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광복절의 의미는 감격하고,감사하고,경계하는데 그치지 않는다.해방 3년뒤인 1948년 이날,대한민국이 수립됨으로써 광복절은 대한민국 건국기념일의 의미까지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다.우리는 이 날을 맞을 때마다 자주독립 국가로서의 국가적·민족적 진로를 다시 점검하고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지난해 우리는 광복50주년을 경축했다.지난 50년간을 되돌아볼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고 한 한용운 선생 시의 일절이 진리로 느껴진다.근대사의 질곡속에서 우리민족이 겪었던 고통이 생명력으로 승화된 것을 보는 것이다. 지난 반세기동안 분단된 국토,빈약한 자원,동족상잔의 상처,어지러운 정치속에서 이룩해낸 경제발전,민주화의 성취가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다.우리는 35년간 식민지 지배하에서 움츠러들고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에서 이제 비로소 제대로 당당하게 펴진 자신의 모습을 찾게된 것이다.그렇다.지난 반세기동안 우리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과 진정한 가능성을 찾게 되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는 무엇인가로부터 쫓기며 이러한 것을 찾았다.「식민지 지배의 고통으로부터」,「빈곤의 고통으로부터」,「독재의 고통으로부터」숨이 턱에 닿도록 쫓기며 광복과 번영과 민주화를 이루어 냈다. 새로 시작되는 반세기의 첫해,우리가 이제부터 가야할 길을 「제2의 광복」이라 부르자.그 길은 고통으로부터 쫓김의 길이 아니라 반세기동안 헐었던 상처를 치유하는 길,갈라진 것을 맞추는 길,거친 것을 다듬는 길,삐뚤어진 것을 바르게 하는 길,흐트러진 것을 간추리는 길이 되게하자.그리하여 우리국토에 드리워진 철책선을 걷어내고,분단으로 멍울진 한을 씻으며,미움이 있었던 곳에 사랑을,원한이 있었던 곳에 용서를,대립이 있었던 곳에 일치를 이루어,우리들 마음은 끝없이 자유롭고,생각과 행동은 세계로 향해 달려가며,화목한 눈길과 명랑한 웃음이 꽃피는,해같이 빛나고 달같이 아름다운,하나된 민족,강력한 나라,유덕한 사회를 이루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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