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환희
    2026-07-24
    검색기록 지우기
  • 3번 라인
    2026-07-24
    검색기록 지우기
  • 호투
    2026-07-24
    검색기록 지우기
  • 유통
    2026-07-24
    검색기록 지우기
  • 노형동
    2026-07-24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025
  • ‘수병과 간호사’ 찍은 카메라 1억6000만원 낙찰

    ‘수병과 간호사’ 찍은 카메라 1억6000만원 낙찰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수병과 간호사의 키스’를 찍었던 카메라가 경매에 나와 고가에 낙찰됐다. AFP통신 등에 따르면 세기의 키스로 손꼽히는 이 사진을 찍은 카메라가 오스트리아 빈의 베스트리히트 갤러리에서 25일(현지시간) 열린 경매에 나와 11만 4000유로(약 1억 6000만원)에 팔렸다. 작가의 서명이 돼 있는 이 사진 프린트 한 장도 2만 4000유로에 낙찰됐다. 이 사진은 뉴욕의 시사화보잡지 사진기자였던 독일 출신 알프레드 아이젠슈타트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5년 8월 14일 두 남녀가 미국 뉴욕 타임스 스퀘어에서 만나 승전을 기뻐하며 환희의 키스를 나누는 모습을 찍은 것으로, ‘종전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다. 사진 속 간호사는 당시 27세였던 이디스 셰인으로 2010년 9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수병은 로드아일랜드주 뉴포트에 거주하는 해군 출신 어부 조지 멘돈사(90)인 것으로 밝혀졌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UEFA 챔피언스리그] 큰 경기에 약하다고?…로번 “봤지, 1골1AS”

    종료 휘슬이 울렸다. 아르연 로번(29·바이에른 뮌헨)은 그라운드에 엎드려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환희의 눈물이었다. 로번은 26일 영국 런던의 웸블리스타디움에서 열린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독일)와의 2012~13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1골 1도움을 기록, 2-1 승리에 앞장섰다. 그동안 발목을 붙잡았던 지긋지긋한 결승 악몽은 휘슬과 함께 스러졌다. 로번은 “마침내 꿈이 이뤄졌다. 패배자로 남고 싶지 않았다”며 우승트로피 ‘빅이어’를 힘껏 들어올렸다. 로번은 항상 한 끗이 부족했다. PSV에인트호번(2002~04년·네덜란드), 첼시(2004~07년·잉글랜드), 레알 마드리드(2007~09·스페인) 등 챔스리그 명문팀을 두루 거쳤지만, 유럽 챔피언과는 인연이 없었다. 2009년 바이에른 뮌헨에 둥지를 튼 뒤에는 질긴 ‘파이널 징크스’가 시작됐다. 로번은 2009~10시즌 주제 무리뉴 감독이 이끄는 인테르 밀란(이탈리아)과 결승전에서 선발로 나섰지만 뚜렷한 활약 없이 들러리에 그쳤다. 첼시(잉글래드)와 격돌한 2011~12시즌 결승전은 더욱 처참했다. 로번은 천금 같은 페널티킥을 놓쳤고, 연장전 후 이어진 승부차기에서도 실축했다. 패배의 원흉으로 지목된 건 어쩌면 당연했다. 팬들은 ‘로번을 팔아버리라’고 성토했다. 팬들은 2010년 남아공월드컵 때 로번의 모습도 기억해냈다. 에이스로 활약하며 ‘오렌지군단’ 네덜란드를 결승까지 이끌었지만, 골키퍼와의 완벽한 일대일 찬스를 두 차례 날려버렸다. 결국 네덜란드는 연장 끝에 스페인에 패했다. ‘중요한 경기에서는 믿을 수 없다’는 말이 나왔다. 특히나 로번은 올 시즌 부상이 겹쳐 정규리그 34경기 중 반토막인 16경기(5골)에 나선 게 고작이었다. 팀이 분데스리가 우승컵을 들어올릴 때도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이날도 큰 경기 울렁증은 재연되는 듯했다. 로번은 전반에 로만 바이덴펠러 골키퍼와 두 차례 일대일로 맞섰지만 득점에 성공하지 못했다. 로번은 얼굴을 감싸며 절규했다. 하프타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로번은 후반 15분 마리오 만주키치의 선제골을 도우며 날갯짓을 시작했다. 도르트문트에 동점골을 내주면서 연장을 예감하던 후반 44분, 로번은 프랑크 리베리의 뒤꿈치 패스를 받아 통쾌하게 골망을 흔들었다. 수비수 두 명을 제친 뒤 골키퍼 옆을 스치는 절묘한 슈팅을 날렸다. 뮌헨의 승승장구를 이끈 ‘로베리’(로번+리베리)가 결국 마무리한 것. 로번은 자신을 힐난하던 서포터스 앞에서 마음껏 세리머니도 펼쳤다. 구세주에게 팬들은 뜨거운 박수로 화답했다. 맨오브더매치로 선정된 로번은 “축구선수로서 최고의 순간이다. 지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기 때문에 타이틀을 더 즐길 수 있다”고 흥분했다. 조은지기자 zone4@seoul.co.kr
  • 이탈리아 북부 이야기 Italy, eataly, italo② Veneto 베네토주

    이탈리아 북부 이야기 Italy, eataly, italo② Veneto 베네토주

    Veneto 베네토주 베네토의 행복학 실습 언젠가 들은 ‘행복론’ 강의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이것이었다. ‘기대했던 것을 보여주면 만족하지만 기대 이상의 것을 보여줄 때 행복해진다’고. 그런 의미에서 파도바Padova와 트레비조Trevizo는 행복을 준 도시였다. 이 도시의 모든 것은 의외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오리엔테이션이람?’ 그런 마음으로 스크로베니 예배당Scrovegni Chapel로 달려갔다. 관람 전에 반드시 동영상을 시청하는 일은 ‘알고 보라’는 뜻 외에도 그 시간 동안 관람자들의 체온이나 배출하는 땀 등을 조절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들이 이토록 소중하게 보존하려는 것은 조토Giotto di Bondone·1266년(추정)~1337년의 프레스코화(1303~1305년)였다. 사람들을 꾸벅꾸벅 졸게 했던 동영상과 달리 눈앞에 펼쳐진 예수와 마리아의 생애, 최후의 심판 등은 사람들을 빨아들였다. 입체적으로 표현된 인물들은 내면의 감정을 밖으로 표출하고 있었고, 그 기쁨, 절망, 고통, 환희는 성서 속 이야기에 현실성을 부여했다. 관람 시간이 제한되어 있어서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서야 했지만 조토의 화풍은 동시대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 파두아와 근교 도시에서는 지오토 스타일의 프레스코화를 종종 만날 수 있다는 점이 위안이 된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전날부터 여전한 비를 뚫고 팔라조 보Palazzo Bo에 들어섰을 때도 ‘웬 대학이람?’ 이라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이런 투덜거림은 원형경기장을 연상시키는 세계 최고最古, 1594년의 해부실과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의학대학부속 식물원 앞에서는 가당치 않은 것이었다. 파두아 대학은 이탈리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전세계적으로는 볼로냐, 파리 다음으로 3번째) 대학이다. 교황의 영향력이 컸던 볼로냐에 비해 파도바는 학문의 자유가 인정되는 분위기였고, 학생들은 단테, 갈릴레오 갈릴레이 등의 실력 있는 선생들을 모셔서 직접 수강료를 지불했다. 회장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세계 여러 도시와 가문의 문장은 당시 이 대학으로 유학을 왔던 명문가의 자제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증명한다. 선생들의 열정도 대단하여 제자들을 위해 자신의 시신을 실습용으로 기증하기도 했다. 지금도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실습실은 원형의 나무 난간들이 촘촘하게 둘러쳐진 형태였다. 참관 중에 기절하는 사람의 추락을 막기 위한 것. 악취를 배출하기 위한 창문이 필수였고, 그나마 겨울 동안에만 가능했다. 해부학의 발달 덕택인지 모르지만 유럽의 대성당은 성인들의 유해를 보물로 간직하고 있다. 파도바 성안토니오 대성당에는 안토니오 성인의 성대와 혀, 아래턱이 보존되어 있다. 자녀를 위한 수호성인이기도 한 그와 관련된 여러 가지 기적의 증표들도 남아 있어서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 곳이다. 이탈리아 여행 내내 계속 비가 내렸지만 트레비조Treviso의 비오는 풍경이 가장 기억에 남는 이유는 잔잔히 물결치던 운하와 세차게 돌아가던 물레방아 때문인 것 같다. 중세의 수채화 같은 도시 풍경은 실레강으로부터 뻗어 나온 브라넬리 운하로 인해 마치 작은 베니스를 연상케 한다. 운하 주변의 집들은 창가에 꽃을 내놓거나 석상 등을 진열해 놓았다. 작은 다리를 건너 회랑을 지나고 또 로마시대 그대로인 듯한 골목들을 걷다가 도착한 곳은 신전을 연상케 하는 두오모였다. 티치아노의 ‘성모 수태고지’와 지롤라모 다 트레비조의 ‘꽃의 성모’ 등이 증명하듯 트레비조는 놓쳐서는 안 될 작품들을 품고 있었다. 트레비조의 프레스코화에 최초로 안경을 쓴 인물이 등장하고, 그런 이유로 지금도 트레비조의 안경이 유명하다는 소소한 사실들이 트레비조의 작은 상점 하나하나를 달라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문득, 시뇨리 광장 근처의 베네통 매장이 다른 어느 도시보다 크다고 느꼈다면, 그건 이 도시가 베네통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일행이 쇼핑을 간 사이 노천카페에 앉아 트레비조에서 생산되는 유명한 발포성 와인인 프레스코를 한잔 마셨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베네토 지방의 두 도시를 여행하며 느꼈던 행복감이 잔 속의 공기방울처럼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오랫동안 음미할 수 있는 그런 행복이었다. ▶travie info 카페 페드로키 1831년에 문을 연 카페 페드로키Caffe Pedrocchi 는 오스트리아에 대항하는 청년 운동이 시작되었던 역사적인 장소다. 건축가의 이름을 딴 이 카페는 녹색, 빨강, 백색의 소파천 색으로 구별되는 3개의 홀로 이뤄져 있다. 그중 가운데 홀이 카페고 그린홀은 시민을 위한 휴식 공간으로 내어 주던 곳이었다. 대표 메뉴인 페드로키 커피는 에스프레소 위에 차가운 민트 아이스크림을 얹은 것으로 색다른 맛이다. 주소 Via VIII Febbraio, 15-Padova 문의 +39 049 8781231 www.caffepedrocchi.it트레비조의 베네통 본사 트레비조는 부유한 도시로 알려져 있다. 거리의 작은 상점들조차 예사롭지 않다. 그중에서 가장 반가운 브랜드는 역시 베네통이다. 트레비조에 본사를 두고 있는 베네통은 톡특한 컬러감으로 전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캐주얼 브랜드가 됐다. 루치아노 베네통이 아직도 새로운 사업구상을 하고 있다는 베네통 본사 건물은 작고 아름다운 정원을 끼고 있었다. 주소 Via Villa Minelli, 1 31050 Ponzano Veneto Treviso 문의 +39 0422 519111 www.benettongroup.com 글·사진 천소현 기자 취재협조 이탈리아정부관광청 한국사무소 02-775-8806, 레일유럽 한국사무소 02-3789-6110, 맥아더글랜 한국사무소 02-553-0822
  • [명사가 걸어온 길] (11) 한국 헌법학의 태두 김철수 (상)

    [명사가 걸어온 길] (11) 한국 헌법학의 태두 김철수 (상)

    열두 살 되던 해 일제가 패망했다. 환희에 천지가 요동쳤다. 해방. 어렸지만 그게 뭔지 너무도 잘 알았다. 그러나 조국의 운명은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혼돈과 분열이었다. 국토는 남북으로 찢기고 민중은 좌우로 갈렸다. 얼마 전까지 ‘조국 해방’을 외치며 함께 어깨를 걸었던 동지들이 생각이 다르다고, 처지가 다르다고 원수가 돼 등을 돌렸다. 어제까지 한 교실에서 공부했던 친구가 좌익 프락치로 몰려 책상을 비웠다. 해방 공간의 극심한 무정부 상태를 보며 소년은 결심했다. 반드시 국가 시스템의 뼈대가 되는 헌법을 공부하겠노라고. 그 다짐대로 헌법 연구는 평생의 업이 됐고, 소년은 우리나라 헌법학의 ‘태두’(泰斗)가 됐다. 지난 10일 서울 동작구 상도동 한국헌법연구소에서 만난 김철수(80) 서울대 명예교수는 5시간에 걸친 긴 인터뷰에도 피로한 기색 없이 꼿꼿하게 여든 성상의 인생과 철학을 얘기했다. 1933년 7월 대구에서 빈농(貧農) 집안의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책 읽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다. 유복한 친구를 둔 덕에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책 읽느라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다. 통학 기차 안에서도 그의 손에는 항상 책이 들려 있었다. “친구 아버지가 당시 대구지역 마사회 회장이었어요. 경마장에는 일본 사람들이 자기들 나라에서 가져온 세계 문학대전집, 세계 사상대전집 같은 책들이 그득그득 꽂혀 있었지요. 그때 읽은 책 중 가장 감명 깊었던 게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었어요. 강의 중에 ‘레 미제라블’을 말하면 학생들은 ‘아 장발장이 빵 하나 훔쳤다가 탈옥하는 거요?’ 정도의 반응이 대부분이었지만 사실 이 책은 대단한 책입니다. 무려 260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 형벌, 정치, 법철학 등 다양한 사회 문제와 고민이 담겨 있으니까요.” 책에 빠져 살던 김 교수의 관심이 사회로 옮겨가기 시작한 것은 나라가 광복을 맞으면서였다. ‘민주국가 건설’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어떤 민주주의를 택하느냐를 두고 극심한 분열 양상이 온나라를 휩쓸었다.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나라가 완전히 엉망이었지요. 특히 제가 살던 대구는 당시 공산주의의 총본산인 모스크바(소련의 수도)에 빗대어 ‘한국의 모스크바’로 불렸을 정도예요. 좌익의 활동이 국내 어떤 도시보다도 활발하고 강했어요. 그러다 보니 저는 극렬한 좌우 대립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며 큰 충격을 받았어요. 경찰이 사람을 잡아가고 때리고, 또 반대되는 공공기관 테러가 일어나고. 우리 사회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바로 헌법이었던 것이지요.” 1947년 제헌(制憲) 헌법을 만든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법대생이나 학자들이 보던 고시 잡지 등을 읽으며 헌법학자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때가 우리 나이로 열다섯이었다. 1950년 전쟁이 터졌다. 고도근시로 고생하던 그는 전쟁터로 끌려가지 않았다. 1952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전쟁 탓에 서울의 대학들이 부산으로 피란 온 터였다. 부산의 허름한 판자촌에서 법학 강의를 들었다. 법학도들이 ‘천막 강의실’에서 힘겹게 공부하던 이 시기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불법적인 개헌을 추진한다. 이른바 ‘발췌개헌’의 시작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부산으로 피란 가 있는데 거기에서 임기 4년이 만료됐어요. 이 대통령은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헌법을 고치려 들었는데, 이걸 야당이 반대했고 그 결과로 야당 의원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어요” 이 대통령은 “전시에 부산에 침투한 간첩이 많으니 소탕을 해야 한다”는 이유를 대며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이내 속셈을 드러냈다. 간첩을 잡겠다던 당초 주장과 달리 야당 의원과 무고한 시민에 대한 검거와 폭력이 이뤄졌다. “야당 지도자였던 장면 선생도 잡아넣었어요. 3명 이상 모이면 잡아갔어요. 국회로 출근하는 버스가 있었는데 버스에 탄 채로 계엄사령부에 끌려 가기도 했어요. 옛 경남도청에 무덕관이라고 해서 유도 연습장 같은 곳을 국회의사당으로 썼는데 그 일대에 ‘백골단 깡패’들이 쫙 깔려 있었어요. 이 대통령에 반대하는 의원은 전부 계엄사령부로 소환했다고 보면 될 겁니다.” 김 교수는 해방 이후 우리 사회의 질곡의 상당 부분은 친일파 등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지만 일부 불가피한 대목도 있었다고 말했다. “광복 이후 친일파 척결은 예견된 수순이었습니다. 그래서 친일파를 처벌하는 법률도 만들었는데 법률로 처벌하려다 보니까 당시 정부관료, 경찰, 군인 등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걸렸던 거죠. 일제강점기 때는 외국 유학자를 비롯해 능력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이 대통령이 보기에 친일파를 다 쫓아내면 행정이나 정치를 못하겠다 싶었던 거죠. 반민특위에 걸렸던 경찰들을 풀어주고, 결국 그 경찰들이 치안 등 최소한의 사회 시스템을 유지해 전쟁통에 질서를 유지했다고 볼 수 있죠. 일부 사람들은 이 대통령이 반민특위를 없앴다는 이유로 친일파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당시의 사정도 일부 헤아릴 필요는 있을 겁니다.” 이 대통령은 연임에 성공했고 1953년 전쟁이 끝났다. 김철수는 스무 살의 청년이 됐다. 김철수는 한 살 아래 학과 동기를 만나 사랑을 키워갔다. 궁핍과 혼돈의 시대에 서울대 법대 커플의 사랑은 주위의 부러움과 시샘을 샀다. 하지만 당사자들을 포함해 그 누구도 이들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날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대화 주제가 ‘첫번째 아내’로 옮겨가자 김 교수의 목소리톤이 낮아졌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김 교수의 첫 번째 아내는 한국 문학계와 여성 예술인들 사이에서 ‘불꽃처럼 살다간 여인’으로 회자되는 전혜린이다. 두 사람은 부산에서 맺은 인연을 서독(독일 통일 전) 뮌헨에서 키워나갔다. 전혜린이 1955년 먼저 뮌헨대 유학길에 올랐고 김 교수는 이듬해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이역만리에서 기쁨과 고통을 나눴다. 문학가가 꿈이었지만 아버지의 성화로 법대에 진학했던 전혜린은 독문학과에 입학해 그토록 바랐던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체계적인 법 공부에 목 말랐던 김 교수는 법학 공부를 이어갔다. 하지만 전쟁국가 출신 동양인에게 서독은 마음 놓고 공부만 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은 아니었다. 당시 누구나 그랬듯 너무도 가난했다. 나라를 벗어나 공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선택받은 삶이 됐던 시절이었다. 대통령의 허가가 있어야만 외국 송금이, 그것도 최고 50달러까지만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두 사람은 장학금과 통·번역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계를 꾸렸다. 전혜린은 훗날 유학생활의 궁핍에 대해 “물을 마시니까 죽지는 않더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인에 대한 시선은 싸늘했다. 지구상에 한국, 코리아라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사람들에게 한국에서 왔다고, ‘코리아’라고 그러면 아프리카 콩고에서 왔냐고 그랬어요. 그 나라에 기차는 있느냐, 뭘 먹고 사느냐 등 질문을 해대는데, 미개인 취급을 하더군요. 교수들도 저를 보며 전쟁 중인 나라에서 공부는 무슨 공부를 했겠느냐며 일본 학생들과도 크게 차별을 뒀습니다. 약소국 국민의 설움이란 게 뭔지 당해 보지 않고서는 알기 어렵습니다.”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소외감은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했다. 1957년 그들은 뮌헨에서 결혼을 했다. 생활은 결혼 전과 다름 없이 곤궁했지만 함께한다는 것만으로 의지와 위안이 됐다. 그러던 중 전혜린은 1959년 딸을 낳고 한국으로 돌아가 이듬해 성균관대에서 강사로 둥지를 틀었다. 김 교수는 2년 뒤 모교 교수 자리를 제안받고 서울로 돌아왔다. 배 고프고 힘들었던 서독 생활을 정리하고 고국에 왔지만 서울에서는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귀국하자마자 5·16 쿠데타가 터졌다. 박정희 당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이 무력으로 청와대를 장악했다. 당시 박정희 군부가 취한 여러 조치 가운데 ‘군 미필자는 공무원이 되지 못한다’는 게 있었다. 시력이 나빠 군대에 못 간 김 교수는 공무원인 서울대 교수에 임용되지 못했다. 서울대는 물론 어디에서도 군 미필자인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아내와의 관계도 벌어지기 시작했다. 먼저 입국한 전혜린은 대학에서 강의하며 서울의 문인들과 어울렸다. 밤 늦게까지 명동에서 삶과 죽음, 예술을 논했다. “아내가 언제부턴가 문인의 죽음을 동경했어요. 처음에는 나는 사회규범과 질서를 중시하는 법학자이고 아내는 사회의 틀보다는 자유와 이상을 갈망하는 문학가라서 서로 다르겠거니 했는데 이 사람이 자꾸 ‘니체도 카프카도 일찍 죽었다’ 이러면서 빨리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거예요. 수면제도 많이 갖고 다니고. 그러다 보니 저도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결국 두 사람은 1964년 합의이혼을 했다. 그리고 1년 뒤 전혜린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그는 교수 임용 제한이 풀리면서 서울대 법대 학생과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2년 뒤 김 교수는 고교 교사와 재혼을 했다. “아내는 지금도 꼬박꼬박 그 사람(전혜린)의 제사를 지내고 있어요. 자기가 낳은 아이들에게도 제사에 꼭 참석하라고 그러고. 참 고마운 사람이죠.” 그는 사별한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반평생 이상을 함께하고 있는 지금의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함께 표했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큰 시련을 겪고 난 그는 다시 연구에 매진했다. 체계적인 헌법학 이론과 정력적인 강의, 활발한 저술활동으로 헌법학계에서 빠르게 자신의 입지를 굳혀갔다. 이는 박정희 군사정권이 새롭게 부상하는 법학자에 대해 점차 날카로운 감시의 눈초리를 들이대도록 만드는 빌미가 됐다. 드디어 등장한 유신헌법의 시대. ‘학자 김철수’는 어떻게든 이 난국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김철수가 걸어온 길 1933년 경북 대구 출생(6남 1녀 중 장남) 1956년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1957년 서독 뮌헨에서 전혜린과 결혼 1961년 서독 뮌헨대 졸업 1962년 서울대 법과대학 조교수 1967년 미국 하버드대 법과대학원 수료 1971년 서울대 법학박사 1972년 서울대 법과대학 교수(~1998년) 1988년 한국공법학회 회장(~1989년) 1990년 한국헌법연구소 소장(~2001년) 1995년 한국법학교수회 회장, 국제헌법학회 이사 1998년 제주 탐라대 총장(~2000년)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1998년~) ■주요저서 헌법학(1972) 현대헌법론(1979) 비교헌법론(1980) 법과 사회정의(1982) 한국헌법사(1988) 법과 정치(1995) 정치개혁과 사법개혁(1998) 헌법정치의 이상과 현실(2012)
  • [씨줄날줄] 봄의 실종/임태순 논설위원

    미국 태생의 영국 시인 T S 엘리엇은 서사시 ‘황무지’에서 1차 세계대전을 통해 현대문명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인간을 지켜보면서 봄은 잔인하다고 했다. 그는 ‘잘 잊게 눈(雪)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球根)으로 약간의 목숨을 내준 겨울이 오히려 따뜻했다’면서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우는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다. 문명의 모순에 실망한 시인은 역설적으로 봄 대신 겨울을 찬미했지만 봄만큼 인간의 감성을 풍성하게 하는 것도 없다. 모든 게 죽어 움직이지 않던 대지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니 감탄과 찬사를 보내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상춘곡’이니 ‘신록예찬’이니 하면서 봄을 노래했다. 문학과 거리가 멀 듯한 고(故)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도 1980년대 어느 날 봄 서울신문에 보낸 기고문에서 봄은 가난한 사람부터 찾아온다며 멋을 부렸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에게 겨울은 죽음과 절망의 상징이었지만 봄은 희망과 부활의 계절이었다. 지구온난화로 봄이 짧아지는 추세지만 특히 올해는 저온현상이 이어지면서 봄이 실종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4월에는 서울에 19년 만에 눈이 올 정도로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려 봄다운 봄이 없었다. 5월에 접어들어서는 8일 강원 화천·양양, 경북 영천의 낮기온이 30도를 웃도는 등 한여름 더위가 찾아와 봄을 느낄 새가 없었다. 9~10일 비가 내리면서 반짝 무더위는 가셨지만 비가 그치면서 다시 기온이 올라간다고 하니 계절의 여왕인 봄은 곧장 여름으로 달려갈 모양이다. 빠듯한 전력사정에 갑자기 닥친 이상고온 현상으로 에어컨 사용이 급증하면 때이른 전력난도 우려된다.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등 양극화는 세계적인 추세다. 기상에도 이 같은 쏠림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폭우나 폭설이 잦아지고 혹서와 혹한이 길어지는 등 날씨가 점점 ‘포악’해지고 있다. 석탄, 석유 등 화석연료의 사용이 늘어나면서 환경 파괴가 날로 극성을 부리기 때문이다. 미국의 환경운동가 레이첼 카슨은 환경도서의 고전 ‘봄의 침묵’에서 ‘우리는 이제 봄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숲과 바다에는 죽음의 정적만이 깔려 있을 뿐이다’면서 환경재앙에 경종을 울렸다. 봄이 여름에 흡수돼 사계절이 겨울, 여름 두 계절로 양분되는 것은 우울한 일이다. 희망의 찬가와 생명의 환희가 넘실대는 봄이 사라지면 우리네 감성도 황폐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질도 그렇지만 계절 역시 한쪽으로 편중되는 것은 좋지 않다. 간밤에 소리 없이 내린 봄비가 새삼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부처님오신날’ 불교계 각 종단 봉축사·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축하메시지

    ‘부처님오신날’ 불교계 각 종단 봉축사·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축하메시지

    불기 2557년 부처님오신날(17일)을 앞두고 불교 각 종단 대표들이 일제히 봉축사를 발표, 나라의 안녕과 국민의 행복을 기원했다. 특히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인 염수정 대주교도 불교계에 축하 메시지를 전달해 눈길을 끌었다. 각 종단 수장들의 봉축사와 봉축 메시지를 요약한다.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 세상에 희망이 넘치고 마음에 평화가 깃들기를 경건한 신심으로 두 손 모으고 환희로운 마음으로 부처님을 찬탄합니다. 모든 이웃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희망이 넘치고 저마다의 마음에 따뜻한 평화가 깃들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부처님 오신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으뜸으로 받들어야 할 가치는 바로 공동체 의식입니다. 탐욕과 증오를 내려놓고, 편견과 차별을 내려놓고, 멈추어 서서 다시 바라볼 것을 염원합니다. 그리하여 연대와 협력의 손을 잡고 평화와 행복의 길에 동행합시다. 이웃을 부처로 모시는 일이 삶의 현장에서 구현되기를 발원합니다. ■인공 태고종 총무원장 이웃의 아픔이 나의 아픔임을 깨달을 때 상생의 삶이… 인간의 무한한 물질적 가치 추구는 생태계의 파괴를 불러오고 재난과 자연재앙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지나친 배금주의는 전통적 윤리관과 미풍양속을 훼손하고 도덕적 해이로 이어져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신적 가치의 바탕 위에서 이웃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요, 이웃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더불어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상생하는 삶이 열릴 것입니다. 오늘 밝히는 하나의 연등이 사바의 어둠을 걷어내고 부강한 국가와 온 국민의 행복한 미래를 열어가는 등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도정 천태종 총무원장 부처님 가르침은 자비로서 중생을 구제하는 길 부처님오신날은 우리 모두의 생일날입니다. 일체중생이 눈을 뜨고, 높은 것은 높아서 아름답고 낮은 것은 낮아서 어여쁜 그 본래의 면목을 찬탄하고 환희하는 날입니다. 전쟁의 위협도 경제 불황도 인륜의 타락도 본래 없는 것임을 사무쳐 보아, 청정자성의 심연(深淵)에 연꽃 한 줄기 피워 올리는 날입니다. 끝을 알 수 없는 세계적인 경제 불황과 물질만능의 폐퇴(廢頹)가 지역과 집단, 세대와 계층 사이의 갈등과 부조화를 부추기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고통 속에서 지혜를 보고, 지혜로써 자비를 일으키고, 자비로써 억조창생을 구제하는 길입니다. ■염수정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불교의 나눔·실천이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기를 고통에 허덕이는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부처님의 자비가 온 누리에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가치는 나눔, 자비, 사랑의 정신일 것입니다. 종교인이 먼저 상대에게 이해와 사랑을 실천하며 참다운 진리로 나아감으로써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더욱 큰 희망의 징표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불교 최대의 축제일인 석탄일을 봉축하며 부처님의 생애와 설파하신 말씀을 다시금 되새길 수 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불교의 나눔과 실천의 정신이 우리 사회 전반에 깊이 뿌리내릴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출범 30년… 숫자로 돌아본 K리그

    출범 30년… 숫자로 돌아본 K리그

    1983년 5월 8일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유공과 할렐루야의 첫 경기를 시작으로 한국프로축구 K리그가 막을 올렸다. 1호골의 주인공은 유공의 박윤기(53)였다. 전반 23분 이강조의 절묘한 패스를 받아 벌칙지역 오른쪽에서 통렬한 오른발 슈팅으로 할렐루야의 골망을 흔들었다. 그러나 K리그 첫 경기는 두 팀이 1-1로 비기며 끝났다. 그로부터 30년이 흘렀다. 동대문운동장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K리그는 K리그 클래식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K리그 챌린지를 2부 리그로 품었다. 많은 게 변했지만 기록은 쌓였다. 출범 30주년을 맞은 K리그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환희와 영광의 순간을 숫자로 정리했다. 지난 5일 K리그 클래식 10라운드까지 K리그로 열린 경기는 모두 5342경기. 역대 최다 득점의 주인공은 이동국(34·전북). 1998년 포항에서 데뷔해 이후 상무-성남-전북을 거치며 통산 144번의 골맛을 봤다. 올 시즌에도 3골을 기록 중. 필드플레이어로 최다 출장 선수는 포항에서 은퇴한 김기동(41). 1993년 유공에서 K리그에 데뷔, 2010~11시즌까지 501경기에 출전했다. 전 포지션을 통틀어 K리그 통산 최다 출장을 기록한 선수는 지금도 전남 골문을 지키는 김병지(43)다. 1992년 울산에서 데뷔한 이후 무려 22시즌 동안 615경기에 출전한 ‘살아 있는 역사’다. 30년 동안 5342번의 킥오프 휘슬이 울린 경기장을 찾은 관중은 지난 5일 어린이날까지 모두 5202만 7741명이었다. 또 현재 K리그 클래식과 챌린지에 소속된 팀은 모두 22팀이지만 지금까지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팀은 9팀뿐인 점은 신기할 법도 하다. 성남이 일곱 차례로 우승 경험이 가장 많다. 럭키금성과 안양LG의 후신인 FC서울이 다섯 차례, 포항과 부산(전 대우 로얄즈), 수원이 네 차례로 뒤를 이었다. 울산과 전북이 각각 두 차례, 유공과 부천SK를 이어받은 제주 유나이티드가 한 차례 정상에 올랐다.울산은 430승을 거둬 K리그 최다 승리 기록을 갖고 있다. 포항은 팀 통산 최다 득점(1423골) 기록을 지니고 있다. 한편 한국프로축구연맹은 ‘K리그 레전드 베스트 11’ 팬투표를 네이버 모바일 페이지에서 이날 시작해 19일까지 실시한다. 최병규 기자 cbk91065@seoul.co.kr
  • [지금&여기] 리더의 모습/임주형 체육부 기자

    [지금&여기] 리더의 모습/임주형 체육부 기자

    지난 16일 프로농구 챔피언결정 3차전이 끝난 뒤 모비스 구단 관계자들에게 슬쩍 물어봤다. “만약 우승하면 누구를 최우수선수(MVP)로 뽑겠어요?” 이구동성으로 돌아온 답은 “당연히 양동근”이었다. 약간 의외였다. 그때까지 겉으로 드러난 양동근의 기록은 문태영이나 김시래보다 좋지 않았고, 특히 3차전에서 그의 활약은 보잘 것 없었기 때문이다. 3점슛 7개를 날렸지만 모두 림을 빗나갔고 야투 성공률도 25%에 그쳤다. 그러나 한 관계자는 “그의 리더십이 팀을 이끌고 있다. 더 좋은 모습을 보일 것”이라며 굳은 믿음을 내비쳤다. 그의 확신대로 양동근은 4차전에서 무려 29점을 몰아넣으며 기자단 투표(78표) 만장일치로 MVP를 차지했다. 유재학 감독도 양동근의 리더십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리더로서 숙소에서나 연습장에서나 충분히 자기 몫을 다하는 선수다. 위대한 선수다.” 올 시즌 모비스는 문태영과 김시래, 로드 벤슨 등이 새로 가세하며 강력한 전력을 구축했다. 그러나 구슬도 꿰어야 보배가 되듯 조직력이 맞지 않아 고전했다. 이때 양동근이 리더로서 팀을 다졌다고 한다. 양동근은 올 시즌을 앞두고 팀 샐러리 캡을 고려해 연봉 동결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양동근은 세 살 많은 문태영을 “형”이라고 부르면서도 코트 안에서는 가드인 자신을 따르도록 만들었다. 시즌 초반 프로 무대에 적응하지 못했던 김시래에게 많은 조언을 하며 성장시켰고, 벤슨에게는 기존 외국인 리카르도 라틀리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도록 신경을 썼다. 결국 모비스는 정규리그와 플레이오프에서 20연승을 달리며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양동근이 처음부터 완벽한 선수는 아니었다. 2004~05시즌 데뷔한 뒤 신인왕에 올랐지만, 유 감독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질책 받은 내용을 모두 노트에 적어 두며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프로 세 번째 시즌이 돼서야 유 감독으로부터 “이제는 그만 야단쳐도 되겠다”란 말을 들었다. 스포츠는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도전과 열정, 땀과 눈물, 환희의 순간을 짧은 시간에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15명 정도의 선수들을 이끈 30대 초반 젊은이의 리더십이지만, 손에 땀을 쥐며 경기를 본 많은 팬들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hermes@seoul.co.kr
  • [커버스토리-불법 온라인 도박의 함정] 5000원 베팅해 120만원 대박… 불행의 시작 사채까지 쓰며 수천만원 빚더미…“돈·꿈 다 잃었다”

    [커버스토리-불법 온라인 도박의 함정] 5000원 베팅해 120만원 대박… 불행의 시작 사채까지 쓰며 수천만원 빚더미…“돈·꿈 다 잃었다”

    사방이 환했다. 저녁을 먹고 컴퓨터에 앉은 것 같은데 12시간이 금세 지났다. 눈은 퀭했고, 빨갰다. 재떨이의 담배꽁초는 수북했다. 사설 스포츠토토는 끊을 수 없는 마약 같았다. 간밤에도 그랬다. ‘손해본 것만 만회하면 바로 나와야지’라며 로그인했다. 저축은행에 이어 대부업체까지 손을 벌려 마련한 돈이었다. 반전을 꿈꾸며 클릭을 거듭했지만, 해가 밝았을 때는 다시 빈털터리였다. 3년째 되풀이 된 불면의 밤. 청년은 “돈과 시간, 꿈과 건강과 인간관계까지 모든 걸 잃었다”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19일 인터뷰에 응한 서울대 졸업생 김용진(가명·28)씨는 사설토토에 빠져 지낸 지난 3년을 힘겹게 곱씹었다. 시작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사설토토를 즐기는 친구를 보고 재미 삼아 시작했다. 2010년 가을, 프로야구 포스트 시즌 때였다. 어차피 학교 수업 끝나면 집에서 매일 야구를 보는 그였다. 딱 5만원 걸었을 뿐인데 짜릿함은 배가 됐다. 투수의 공 하나, 타자의 방망이질 한 번이 달리 보였다. 스포츠의 세계가 무한해지는 느낌이었다. 이후 김씨는 종종 사설토토를 했다. 전보다 흥미진진하게 스포츠 중계를 볼 수 있었다. 중독되기 시작한 건 첫 베팅 후 3개월이 지났을 무렵. 여느 때처럼 푼돈을 걸었는데 대박을 쳤다. 프로농구(KBL)·여자농구(WKBL)·미국프로농구(NBA) 몇 경기의 승패, 언더-오버, 핸디캡 등 12개 결과를 모두 적중시킨 것이다. 베팅한 돈 5000원은 채 1분이 안 돼 현금 120만원으로 통장에 꽂혔다. 심장이 펄떡거렸다. 씀씀이는 점점 커졌다. 쉽게 번 돈인 만큼 부담 없이 마구 질렀다. 며칠 뒤에는 농구 언더-오버에 걸었던 100만원이 285만원으로 돌아왔다. 김씨는 “초반에 그렇게 몇 번 따니까 힘들게 직장생활 할 필요 없이 사설토토로 돈을 벌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회상했다. 승산이 있다고 믿었다. 행운에만 의존하는 도박이 아니라 공부하면 정복할 수 있는 주식 같았다고 했다. 사전정보가 있고 그 정보를 세밀하게 분석한다면, 본인만 잘한다면, 충분히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전문 돈벌이로 사설토토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불행의 시작이었다. 김씨는 변수와 이변이 적고 베팅종류도 많지 않은 해외 축구를 집중적으로 팠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와 스페인 프리메라리가는 기본이고, 덴마크·핀란드·칠레·크로아티아·파라과이·에스토니아·사우디아라비아 등 제3세계 축구까지 닥치는 대로 챙겼다. 경기를 본 게 아니었다. 실시간으로 변하는 배당률과 씨름했다. 상대전적, 홈·원정 승률, 주요 선수 컨디션 등을 꼼꼼하게 살폈다. 경기정보가 빼곡한 분석사이트(베트익스플로어러, 오즈포털)와 외국 베팅업체 사이트(벳365, 188벳, 윌리엄힐), 전 세계에서 진행 중인 모든 경기의 점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라이브스코어 사이트를 분주하게 오갔다. 공책에 베팅업체별 적중률, 배당률의 흐름·변화주기 등을 빼곡하게 적으며 자기만의 비책을 만들었다. 그렇게 추려진 통계 정보로 항상 경기시작 1분 전에 베팅했다. 한 경기에 20만~30만원씩, 확신이 있을 땐 최대 베팅금액인 100만원을 걸었다. 평일엔 6~7경기, 주말엔 10경기를 분석해 다양한 조합으로 베팅했다. 최고 1000만원을 딴 적도 있었지만 바로 베팅에 쓰거나 유흥비로 탕진했다. 몇 번의 ‘잭팟’은 흔히 말하는 초심자의 행운이었다. 환희보다 탄식과 분노, 오기가 일 때가 더 많았다. 사설토토는 ‘돈 먹는 하마’였다. 김씨는 인생에서 열심히 해서 정복하지 못할 건 없다고 믿었고 그렇게 살아왔다. 재수 1년만에 수능점수 120점을 끌어올려 서울대에 입학한 의지의 사나이였다. 분석 결과가 빚나가 돈을 잃을 수록 오기가 생겼다. “내가 호구 같이 돈을 뜯기고 있다는 기분을 참을 수 없었어요. 이기고 싶었고, 이길 수 있을 것 같았죠.” 야무지게 부딪혔지만 매번 돈을 잃었다. 평범한 대학생 용돈으로는 적자 폭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돈이 필요했다. 인터넷으로 계좌를 조회하다 부모님이 김씨 이름으로 붓던 적금을 발견했다. 적금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농협에서 100만원씩 야금야금 빼냈다. 대출한도액 1500만원은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그래도 끊을 수 없었다. 저축은행에서 금리 25%짜리 대학생 신용대출로 600만원을 빌렸다. ‘잭팟’ 한 번이면 빚을 모두 갚을 수 있을거란 생각에 갇혔다. 번번이 실패. 결국 김씨는 지난해 11월, 무려 30% 이자를 내야하는 일본계 대부업체에서 200만원을 빌렸다. 더러는 땄지만, 대부분 돈을 잃었다. 빚은 2500만원까지 늘었다. 김씨는 눈이 침침해질 때까지 담배를 뻐끔거리면서 불면의 밤을 보냈다. 친구들과 낄낄대면서 마시던 소주도 전혀 생각이 안 났고, 연애도 귀찮게만 느껴졌다. 때론 ‘내가 지금 뭐하는거지?’ 하는 자괴감이 들어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김씨는 “생활은 피폐했고, 항상 비참했다. 밤일을 하니까 인간관계가 단절됐고, 결국 고독함의 극치를 맛봤다”고 회상했다. 더러운 기분을 잊으려고 더욱 토토에 매진했다. 악순환이었다. 매일매일 그만하려고 노력했다. 심지어 사이트 비밀번호는 ‘akwlakr’. 키보드를 한글로 치면 ‘마지막’이란 뜻이다. 굳게 마음먹고 사이트 탈퇴신청을 한 적도 있다. 회원가입된 상태면 자제하기 힘들 것 같아 아이디(ID)를 없애달라고 업체 측에 요청했지만, 계정은 2주가 지나도 안 없어졌다. 끊임없이 유혹메시지가 왔다. 아침마다 후회와 공허함을 느끼면서도 김씨는 저녁이면 어김없이 사이트에 접속했다. 손을 털게 된 계기는 어머니였다. 적금을 담보로 친동생에게 돈을 빌려주려던 어머니는 김씨가 이미 대출을 받아갔단 사실을 알게 됐다. 지난 2월 말의 일이다. 사실이 발각된 뒤 김씨는 일주일간 집을 나가 방황하다가 다시 돌아와 무릎 꿇고 빌며 “주식에 손을 댔다”고 둘러댔다. 빚 2500만원도 있다고 털어놨다. 순간 위기는 모면했지만, 어머니의 눈물은 내내 잊히지 않았다. “엄마 얼굴을 떠올리니까 다 되더라”고 했다. 김씨는 그날 이후 사설토토를 끊었다. 그는 지난 3년을 어떻게 정의할까. “친구들은 다 취업해서 번듯한 회사를 다니는데, 나는 뭐했나 싶어요. 갈 데까지 갔는데 도박의 마지막은 엄청난 외로움만 남더군요. 공허하고 황폐하고 고독하더군요. 해봤자 별거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앞으론 남들보다 두 배로 열심히 살겁니다.” 조은지기자 zone4@seoul.co.kr
  • [김종민 이 생각 저 생각] 4월 그리고 비무장지대 산소공장

    [김종민 이 생각 저 생각] 4월 그리고 비무장지대 산소공장

    4월이 이처럼 스산하기는 처음이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다는 말이 절실하다. 겨울은 오히려 따듯했고 4월이 가장 잔인하다던 엘리엇의 시가 가슴 깊숙이 스며든다. 마구 쓴 화석연료가 만든 온실가스로 지구가 더워졌다. 기상이변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고 있다. 북극은 녹는다는데 아지랑이 피는 봄날, 한겨울 추위와 폭설이 들이친다. 턱없는 지구종말론에 신경이 쓰이기도 한다. 더하여 북한은 핵으로 세상을 겁주고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강건한 시민정신이 반석 같고 사재기나 유언비어가 별로 없는 것이다. 이 봄의 모순을 그린 삽화로는 외국 언론들이 ‘전쟁 날랑가’로 왔다가 ‘알랑가 몰라 시건방춤’을 보고 가는 모습이요, 압권이다. 자연의 변덕이나 전쟁 괴담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역정이 나게 한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꽃이 피면 같이 웃고···봄날은 간다’처럼 풍류 있고 격조 높은 봄을 맞이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이럴 때 태평가 한 가락이 위로가 된다. ‘짜증을 내어서 무엇 하나 성화를 받치어 무엇 하나….’ 없었으면 좋았겠지만 필연이라면 어찌하겠나.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거센 폭풍이 몰아친다면 역풍장범(逆風張帆)의 고통이라도 웃으며 즐길 수밖에.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와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명언을 남겼다. 시간과 공간은 하나이고 애초 시작과 종말은 없으니 현재적 위기에 연연하지 말고 미래를 향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얼어붙은 한반도에 아름다운 4월이 오게 하는 좋은 방법은 없을까. 식목의 계절이라 그런지 내일 한반도에 전쟁이 난다고 해도 오늘 나무심기가 떠오른다. 막강한 남북한 화력과 병력의 대치 속에서 60년을 버텨온 비무장지대(DMZ)에 숲을 만들어 생명을 치유하고 평화를 가꾸며, 미래를 창조하는 것은 상상만 해도 뜻 깊고 보람찬 일이다. 그러나 일상의 식목행사는 축제처럼 할 수 있어도 금단의 정전지대에서 지뢰를 치우며 나무를 심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전쟁 포기에 준하는 의지와 담력을 요하는 일이며, 복잡한 경우의 수를 읽어야 한다. 주변국들의 이해와 남북 간 대화와 합의는 필요충분조건이다. 무엇보다 유효한 신뢰 프로세스의 구축을 필요로 한다. 힘들고 어렵겠지만 숲 만들기의 파급효과는 매우 클 것이다. 파괴와 살육의 땅이던 비무장지대 DMZ는 평화생명지대 PLZ(Peace Life Zone)로 거듭나게 된다. 식목에 필요한 벙커와 무장의 철거는 남북 군비 축소의 실천적 첫걸음으로 연결될 수 있다. 지뢰 제거는 공간 이동의 자유를 제공한다. 우리는 60년 동안 섬 아닌 섬에서 벗어나 반도로 돌아갈 수 있다. 아울러 국내 동식물의 65% 정도밖에 살지 못하는 불완전한 자연을 살리는 호기가 된다. 인위적 산불과 같은 군사작전 수요가 줄어들면서 건강한 생태계의 회복은 빨라진다. 2015년 전세계적인 탄소배출권 거래를 앞두고 2013년 2월부터 탄소흡수원 유지 및 증진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고 있다. DMZ 숲 가꾸기는 온실가스를 줄이고 산소를 만들며, 탄소 상쇄(Carbon Offset)로 수익을 창출하는 길이기도 하다. 지난 4월 4일 유엔 지뢰의 날에 강원도와 대한적십자사는 정전 60주년, 그리고 청소년적십자 60주년을 맞이하여 DMZ 역사상 가장 유의미한 일에 착수했다. 비무장지대 동쪽 끝 고성 땅 한 모퉁이, 한 발 한 발 지뢰를 제거해온 철책 아래 2018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전쟁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면서 평화의 숲, 생명의 숲 가꾸기에 나섰다. 3억평 DMZ에 비하면 작은 물결이지만 아름다운 4월을 부르는 장엄한 서곡이다. 평화의 제전 평창올림픽을 기리기 위한 세계평화의 외침이자 환희의 찬가이다. 동쪽에서 시작된 녹색 물결이 서쪽으로 뻗어 나가고, 북한도 동참해서 DMZ 전체가 평화와 생명의 산소공장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해 본다.
  • “사적인 감정 나올까봐 연습 따로 가요”

    “사적인 감정 나올까봐 연습 따로 가요”

    “무조건 (출연)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함께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환희다.”(전혜진) “실제 부부로서 부부 역할을 한다는 게 부담이 된다. 무대에서 떨림이 있겠지만 즐기려고 한다.”(이선균) 5일 서울 중구 명동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린 연극 ‘러브, 러브, 러브’(이하 ‘러브’) 기자간담회에서 배우 이선균(38)과 전혜진(37)은 함께 무대에 오르는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연극 ‘러브’는 영국 극작가 마이크 바틀릿의 2010년 작품으로, 베이비붐 세대 남녀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한 세대의 열정과 망상 등을 현실감 있게 다룬다. 이선균·전혜진 부부는 작품 속에서 케네스·산드라 부부를 연기하면서 19세부터 63세까지 폭넓은 나이대의 모습을 소화한다. 전혜진은 “산드라는 좋은 집에서 여유로운 삶을 살지만 뭔가 잃은 듯한 허전함을 느끼고, 자유와 구속이 공존하는 사랑을 찾는 사람”이라면서 “우리도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그 안에 약간의 공허함이 있었다”면서 역할에 대한 공감을 에둘러 말했다. 이선균은 뮤지컬 ‘록키호러쇼’(2001)로 데뷔했지만 이후 방송과 영화에만 전념해왔다. 뮤지컬 ‘그리스’ 이후 10년 만에 오르는 연극무대라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한다. 실제 부부가 부부 연기를 하는데 도움이 되느냐는 질문에 이선균은 “서로 견제가 심하다”면서 “실제 생활 속 감정을 갖고 무대에 오르면 관객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된다. 그래서 연습하러 나올 때조차 따로 나온다”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연출과 번역을 맡은 이상우 극단 차이무 대표는 “번역을 하면서 산드라 역할로 전혜진이 그냥 떠올랐다. 이선균은 전혜진과 함께 낚싯줄에 걸리듯 끌려 온 경우”라면서 “이 부부가 어떤 말투로 대화하고, 어떻게 싸우는지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극중 부부와 굉장히 잘 맞아떨어진다”고 말했다. 이어 “이 작품은 세대 간 갈등과 충돌의 해결점은 역시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라고 덧붙였다. 공연은 27일부터 4월 21일까지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오른다. 최여경 기자 kid@seoul.co.kr
  • [명사가 걸어온 길] 5. 영원한 은막의 여인 최은희

    [명사가 걸어온 길] 5. 영원한 은막의 여인 최은희

    어느 시인이 말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 지으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너무나 드라마틱했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운명적 단어들로 여자의 일생이 가득 채워졌다. 15살에 집을 나가 배우가 됐고 순탄치 않은 결혼과 이혼, 전쟁의 아픔, 그리고 신상옥 감독과의 만남, 납북과 탈출 등으로 이어지는 질곡의 세월은 말 그대로 한 편의 서사시였다. 사람들은 이러한 그를 가리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인생’이라고 말한다. 영원한 은막의 스타 최은희(83)씨. 서울 강남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까만 모자에 안경, 목도리가 잘 어울리는 차림이었다. 파란 많은 삶을 살아온 그 세월이 무진할 텐데 수줍게 웃는 모습이 여전히 은막의 소녀처럼 다가온다. 그러면서도 가끔씩 창밖을 바라본다. 안경 너머의 눈빛,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신 감독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애절하게 서려 있는 듯했다. 중얼거림으로 다가온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길고도 모진 세월을 살아왔다. 고생을 모르고 자유와 평화 속에서 살아온 젊은 세대들은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시간들이었다”라고 말이다. 최씨는 지난해 12월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선정 제2회 아름다운예술인상 시상식에서 공로예술인상을 수상했다. 이 자리에서 영화 ‘은교’로 신인예술인상을 받은 한참 후배 김고은의 손을 잡고 격려해 주는 훈훈한 장면을 연출해 눈길을 끌었다. 요즘에는 어떻게 지낼까. “올겨울에는 날씨가 워낙 추워서 되도록 집에서 쉬면서 지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생의 삶, 지나온 세월 등 많은 생각을 하게 됐지요. 요새는 쉬어도 피곤함을 느낍니다. 모든 것이 다 그렇지만 기능을 너무 많이 혹사시켰나 봐요. 제 삶을 되돌아보면서,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 나는 참 바보처럼 살았다’라는 식으로 말이죠.” 그는 한마음한몸운동본부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하지만 몸이 불편해 외부활동을 하지 못하고 대신 마음의 정성을 담은 카드 등을 보내는 일로 대신하고 있다. 나들이할 때에는 걷기가 힘들어서 휠체어에 의지한다. 젊었을 때 너무 열정적으로 일을 하다보니 건강을 돌보지 못했고 요즘에는 노후 관리라도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단다. 집에는 사촌동생이 함께 있고 가끔 영화감독인 아들 신정균과 영화 이야기를 나눈다. 아들은 1999년 ‘삼양동 정육점’으로 데뷔했으며 ‘스무살’(2001)과 ‘나의 스캔들’(2008) 등을 제작했다. 아들의 영화에 대한 평을 부탁했더니 “열심히 잘하고 있는 것 같다”며 웃는다. 자연스럽게 우리 영화 얘기로 이어졌다. 지난해 ‘영화 관람객 1억명 돌파 시대’와 관련해 그는 “너무 고맙고 흐뭇한 일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잘 만들어 가고 있다”면서 1961년 자신이 출연했던 ‘성춘향’을 떠올렸다. 이 영화는 당시 설 연휴 때 명보극장에서 개봉돼 서울에서만 40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당대 최고의 흥행작이었다. 이로 인해 ‘신상옥-최은희’ 전성시대를 열었다. “지금은 시대도 바뀌었고 자유롭게 작품을 만들 수 있어요. 옛날에는 검열이 심했거든요. 그로 인해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요즘에는 패밀리 영화가 자주 나오는데 좋은 현상이고 고무적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영화가 세계를 제패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신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 당시를 잠시 떠올린다. 북한을 탈출한 뒤 신 감독은 할리우드에 ‘신프로덕션’을 설립해 ‘쓰리 닌자’를 제작했으며 시사회 때 미국 전역 1500개 극장에 배급이 결정된다. 이는 대단한 사건이었고 신 감독은 할리우드 진출 1호로 기록됐다. 최씨는 2007년 자신의 영화 인생을 담은 자서전 ‘최은희의 고백’을 펴냈다. 이와 관련, “영국의 한 제작사에서 작년부터 제의가 들어왔고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곧 촬영에 들어간다. 또 최근 미국 드라마 제작사에서 제의가 들어와 국제변호사와 얘기하고 있다”고 말해 해외 진출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영화 발전을 위해 원로 연기자로서의 견해를 밝힌다. “집에 있으면서 드라마를 자주 보는 편입니다. 작가가 대본을 잘 쓴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고 때로는 얼굴만 가지고 등장하는 후배 배우도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면 대사 구성을 잘 못하는 경우이지요. 뭐든지 확실한 기초를 다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들, 어머니, 딸 역할이 분명해야 하구요.” 드라마를 볼 때마다 자신이 걸어온 인생을 반추해보며 영화배우로서의 삶을 되돌아보는 일이 많아졌다. 화제를 데뷔 당시로 돌렸다. 어린 시절 활달하지 못한 성격이어서 친구들도 거의 없었다. 일제강점기 말이었다. 방공호에서 만난 친구가 “배우하자”고 느닷없이 제의했다. 그러더니 친구가 방공호에 함께 있는 배우 문정복(탤런트 양택조의 어머니)씨한테 가서 배우시켜 달라고 졸랐다. 당시 문씨는 연극계에서는 유명한 주연배우로 현대적이고 세련된 미인이었다. 이튿날 그는 친구와 함께 종로6가에 있는 극단 ‘아랑’ 사무실에서 문씨를 다시 만났다. 부모한테 허락을 받았느냐는 질문에 친구는 거침없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바람에 허드렛일을 시작하면서 단원이 됐다. 나중에 연극협회 회원증을 받아 정식 회원이 됐고 덕분에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게 됐다. 얼마 후 지방 공연 일정이 잡혔다. 첫 행선지는 대전이었다. 기차를 타고 가는데 문씨가 대본을 건넸다. 얼떨결에 읽었다. 그랬더니 이번 지방공연 때 무대에 한 번 서 보라고 권유했다. 제목은 ‘청춘극장’으로 하녀 역할이었다. 반응은 성공적이었다. 이렇게 해서 연기자로 데뷔하게 됐다. “지금도 첫 무대의 낯섦과 두려움, 떨림과 환희, 관객들의 숨소리, 뜨거운 눈물과 갈채를 잊지 못합니다. 극단 연구생으로 어렵게 치러냈던 첫 무대에서 이미 연극의 마력에 푹 빠져 버렸습니다. 열심히 했고 운 좋게도 주연을 많이 맡았습니다.” 광복이 되자 새롭게 시작하고픈 마음에 이름을 최경순에서 최은희로 바꿨다. 극단 활동 또한 ‘토월회’와 ‘극예술연구회’ 등으로 넓혀 ‘40년’ ‘맹진사댁 경사’ ‘이순신’ ‘세자매’ ‘나도 인간이 되련다’ 등에 출연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영화를 처음 시작한 것은 동양극장에서 연극할 때였다. 토월회에서 함께 일했던 최운봉 선생이 찾아와 시나리오 대본을 주면서 같이 영화를 하자고 권유했던 것. 신경균 감독의 ‘새로운 맹세’에서 순박한 어촌 처녀 역할이었다. 이 영화 역시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뒀다. 이어 ‘마음의 고향’ ‘밤의 태양’ ‘무영탑’ 등에서 잇따라 주인공역을 맡으면서 영화계의 새로운 스타로 떠올랐다. 그러다가 목포에서 ‘사나이의 길’을 촬영할 때 6·25전쟁을 맞이한다. 배우들이 우왕좌왕했다. 부산으로 피란을 가거나 월북하는 배우들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남편과 집안 식구들이 걱정돼 서울로 왔다. 집에서 지내다가 먹을 것이 없어 시장 보러 가던 중 그를 알아보는 인민군 장교를 만나 어쩔 수 없이 북한 내무성 소속 경비대 합주단원이 됐다. 당시 합주단 사무실은 명동 성당의 수녀들이 숙식하던 곳이었다. 배우 김동원·김승호, 지휘자 임원식, 성악가 등 200여명의 예술인들이 모여 있었다. 포로들처럼 수용돼 사상교육을 매일 받았다. 그러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이 후퇴할 때 평남 순천 쪽으로 끌려갔다. 평양에 거의 다다랐을 때 목숨 건 탈출을 했고 그 과정에서 국군을 만났다. 최씨는 인민군복에서 국군복으로 갈아입고 정훈공작대원으로 선무활동에 나서게 된다. 전쟁의 와중이라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다 1·4후퇴 때 서울을 거쳐 피란지인 대구에서 극단 ‘신협’ 단원들과 연극을 하게 된다. 이때 출연했던 작품이 ‘마의태자’ ‘춘향전’ ‘맹진사댁 경사’ ‘뇌우’ 등이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수십편의 연극에 출연했다. 신 감독과 만난 것은 ‘춘향전’ 공연 때였다. 어느날 알고 지내던 배우 황남씨가 영화 출연 교섭을 해왔고 며칠 뒤 중국집에서 신 감독을 처음 만났다. 이후 신 감독은 극단에서 공연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열정을 보였다. 결국 영화를 하자는 구애작전이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1954년 3월 7일 을지로6가의 허름한 여인숙에서 둘만의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둘은 하루 24시간 그림자처럼 같이 다녔다. 영화 같은 삶이 시작된 것이다. 두 사람이 찍은 첫 작품 ‘꿈’을 비롯해 최씨는 ‘젊은 그들’ ‘무영탑’ ‘지옥화’ ‘춘희’ ‘성춘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 1976년까지 130여편에 출연했다. 이 가운데 ‘어느 여대생의 고백’으로 대박을 터뜨리며 대종상의 전신인 문교부 주최 제1회 국산영화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이후 ‘다정도 병이런가’ ‘동심초’ 등에서도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신 감독과 함께 전성기를 누린다. 우리 영화사의 큰 획을 그은 것도 이때였다. 1978년 최씨는 신 감독과 이혼을 했으며 안양예술학교를 운영하는 일에 전념했다. 어느 날 홍콩 금정영화사의 초청으로 홍콩을 방문했다. 일정을 소화하던 중 북한의 요원들에 의해 납북된다. 이후 5년 동안 연금 상태에서 혼자 지내다가 북한에서 신 감독과 다시 운명적인 재결합을 한다. 그렇게 9년 동안 북한에서 지내면서 모두 17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이때 찍은 대표작이 ‘불가사리’ ‘임꺽정’ 등이다. “당시 매주 금요일에 연회가 열렸고 여러 번 참석하면서 김정일 위원장과 여동생 김경희·장성택 부부, 김영남 외교부장 등과도 만났지요. 김정일 생일에도 초대를 받은 적이 있어요. 김정일과 관계된 곳은 공공 건물이든 가정집이든 어디나 영사실이 부설돼 있는 게 특징이었습니다.” 1986년 베를린영화제에 참석했다가 탈출에 성공한 최씨 부부는 미국에서 한동안 지내다가 1999년 다시 국내로 돌아왔고 2006년 신 감독이 세상을 떠나자 혼자 노년을 보내고 있다. 최씨에게 앞으로 출연기회가 온다면 어떤 역할을 하고 싶은지 물었더니 “그동안 정적인 역할이 많았다. 발랄한 연기를 하고 싶다”며 빙그레 웃는다. 김문 선임기자 km@seoul.co.kr
  • [北 3차 핵실험 강행] 北, 국제사회 강공에 “무자비 보복”

    북한은 12일 제3차 핵실험에 국제사회가 강력한 대응을 예고한 것에 대해 ‘무자비한 보복타격’을 거론하는 등 오히려 공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핵실험 사실만 간략히 보도하고 당국 차원의 성명이나 주민 반응을 즉각 공개하지 않았던 1, 2차 핵실험 때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북한은 이날 핵실험을 강행한 지 2시간40여분 만인 오후 2시 43분 “제3차 지하핵실험을 성공적으로 진행했다”는 조선중앙통신 보도를 내보냈다. 또 설 연휴 마지막 날인 이날 종일 방송을 한 조선중앙TV를 비롯해 북한의 주요매체들은 설맞이 프로그램을 방영하면서도 매시간 조선중앙통신의 핵실험 보도를 반복적으로 보도했다. 특히 조선중앙TV 등은 이날 오후 8시부터 ‘핵실험 성공’ 소식을 접한 평양시민의 표정을 구체적으로 전했다. 한 시민은 “지하핵실험에서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끓어오르는 격정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외용 라디오방송인 평양방송도 “제3차 지하 핵실험 성공 소식에 접한 온 나라 천만군민은 끝없는 감격과 환희에 넘쳐 있다”고 보도했다. 핵실험 당일 당국 차원의 반응이 나온 것도 이례적이다.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오후 8시1분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내놨다. 1차 핵실험(2006년 10월 9일)과 2차 핵실험(2009년 5월25일) 때에는 각각 이틀이 지난 뒤에야 외무성 대변인 담화와 북한군 판문점대표부 성명 등 당국차원의 반응을 내놨다. 김효섭 기자 newworld@seoul.co.kr
  • [평창 스페셜올림픽] 1등만이 아닌 참가자 모두가 승자…‘Together We Can!’

    [평창 스페셜올림픽] 1등만이 아닌 참가자 모두가 승자…‘Together We Can!’

    오는 29일 막을 올리는 스페셜올림픽은 세계 지적 장애인들의 축제다.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여동생이자 사회사업가인 고(故) 유니스 케네디 슈라이버의 제안으로 1968년 시작돼 1975년부터 비장애인 올림픽 주기에 맞춰 4년마다 열리고 있다. 스페셜올림픽은 지적발달 장애인의 운동 능력과 사회 적응력을 높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따라서 승패보다 장애를 극복하려는 도전정신과 치열한 노력에 더 의미를 둔다. 1~3위에겐 메달을 수여하지만 나머지 참가 선수들에겐 리본을 달아 준다. ‘참가자 모두가 승자’가 스페셜올림픽의 모토인 것이다. 신체능력과 관계없이 8세 이상의 모든 지적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엘리트 선수가 참여하는 장애인올림픽(패럴림픽)과도 구분된다. 올림픽, 패럴림픽과 함께 3대 올림픽에 들어가는 이 대회의 32개 종목 가운데 동계대회에서 치러지는 종목은 알파인스키와 크로스컨트리, 스노보드, 스노슈잉 등 4개 설상종목과 피겨스케이팅, 쇼트트랙, 플로어하키 등 3개 빙상종목 등 전체 7개 종목에 모두 55개의 금메달이 걸려 있다. 10회째인 평창 대회는 5년 뒤 같은 곳에서 열리게 되는 평창동계올림픽의 리허설은 아니다. 애당초 대회가 목적하는 바가 다르고, 참가자들의 성격부터 뚜렷이 구별되기 때문이다. 29일 용평리조트에서 막을 올려 알펜시아리조트, 강릉빙상경기장 등에서 다음 달 5일까지 8일 동안 열리게 될 이번 대회는 2005년 나가노동계대회, 2007년 상하이하계대회에 이어 아시아에서 세 번째로 평창에서 개최된다. 국제사회 기여를 통해 대한민국의 위상과 해당 지자체 브랜드의 품격을 높일 수 있는 기회다. 이번 대회 슬로건은 ‘Together We Can!’이다. 선수는 물론, 자원봉사자, 후원자들이 힘을 합침으로써 스포츠 활동은 물론, 이들의 도전 정신을 격려하면서 지적 장애인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헤쳐 나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마스코트인 반달가슴곰(Ra)과 붉은 양(In), 양치기 개(Bow) 등은 각각 스페셜올림픽의 안전과 배려, 편견없는 교류와 사랑, 그리고 푸른 평창을 상징한다. 엠블럼은 역동과 환희라는 거대한 콘셉트 아래 역동적이고 생동감 있게 달려 나가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개회식은 29일 오후 6시 용평돔에서 열린다. 세계 111개국 3190명의 선수단과 자원봉사자 87명, 초청인사 등 약 4200여명이 평창의 축제를 연다. 다음 날인 30일 알펜시아리조트 컨벤션센터에서는 김황식 국무총리와 미얀마의 민주화 지도자 아웅산 수치 여사, 조이스 반다 말라위 대통령 등 정상급 지도자 300여명이 참가하는 ‘글로벌 개발 서밋’도 막을 올린다. ‘지적 장애인들의 유엔 총회’로 불리는 이날 회의는 세계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지적 장애인들의 건강과 사회적 적응을 지원하기 위한 국제적 관심을 촉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편 지난 17일 그리스 아테네에서 채화돼 이틀 뒤 한국에 도착한 대회 성화는 23일 오전 11시 서울 광화문 중앙광장에서 국내 도착 환영 및 봉송식을 가진다. 전국 40개 시·군을 순회한 뒤 28일 대회장에 도착한다. 최병규 기자 cbk91065@seoul.co.kr
  • [서울광장] 2월 25일 밤 놓아야 할 것들/진경호 논설위원

    [서울광장] 2월 25일 밤 놓아야 할 것들/진경호 논설위원

    그날 밤이 어떤지는 김대중 자서전에 나와 있다. “…청와대에 밤이 왔다. 나를 그토록 핍박했던 역대 집권자들이 머무르던 곳. 깊이 생각했다. 그들은 과연 여기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내는 방이 너무 넓어서 놀라는 눈치였다. 그것을 불편해하고 있었다. 70대의 우리 부부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1998년 2월 25일, 정권교체의 새 역사를 쓴 날 15대 대통령 김대중은 청와대에서의 첫 밤을 그렇게 적었다. 멀리 박정희가 있었고, 전두환·노태우가 있었고, 바로 그제 자신의 영원한 맞수 김영삼이 밤새 뒤척였을 그 침실에서, 김대중은 헤쳐온 날들과 헤쳐갈 날들이 뒤엉킨 군무(群舞)에 그만 잠을 잃었다. 한 달 뒤면 ‘김대중을 그토록 핍박했던 집권자’의 딸이, 어린 시절 격동의 18년을 보냈고, 끝내 부모를 모두 빼앗아간 청와대에 들어선다. 아버지가 비운을 맞았던 만 61세의 나이로, 33년 4개월 전까지 아버지가 있었던 침소로 들어선다. 어떠할까. 질곡의 정치사와 개인사를 씨줄과 날줄로 엮어 품은 그가 2013년 2월 25일 밤 홀로 대면할 상념은 무엇일까. 누구에게 견줘야 어림할 수 있을까. ‘잘살아보세….’ 그 밤 박근혜를 짓누를 상념의 무게를 헤아릴 수는 없으나, 그 끝자락에 움켜쥘 단어는 아마도 이 유업(遺業)일 것이다. 제 식대로밖에 모르는 북한과, 결이 거친 대외경제와, 숨이 가쁜 민생과, 이젠 DNA로 유전되는 것만 같은 지역과 이념의 강파른 대치를 풀고, 묶고, 바로 세우겠노라 다짐하며 신발끈을 동여맬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김영삼은 ‘개핵’(개혁)을 외치며 내달렸고, ‘선상님’ 김대중은 만기친람(萬機親覽)이 뭔지를 몸소 내보였다. 노무현은 정체 모를 ‘그들’과 내내 싸웠고, 이명박은 전봇대 숫자까지 챙겼다. 그러나 그런 그들에게 청와대의 봄은 다시 오지 않았다. 겨울이 끝나면 다시 가을, 겨울이 됐다. 자식 문제로, 측근 비리로, 실정으로 몇 번씩들 머리를 숙였다. 1년도 못 돼 노무현 비서실의 민정수석 문재인은 이빨이 10개나 빠졌고, 이명박 청와대의 ‘얼리버드’들은 새벽 5시면 집을 나서야 했지만, 청와대의 5년차는 늘 한숨으로 채워졌다. 독주(獨奏)의 끝은 항상 그랬다. ‘선거의 여왕’이 성공한 대통령을 보장하지 않는다. 아니, 성취는 그 자체로 독배(毒杯)다. 그 앞에 서면 누구든 작아지고 하명을 기다리며 시립(侍立)하게 만드는 박근혜이고 보면 전임 누구보다 많은 독배에 둘러싸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벌써 그런 징후들이 감지된다. 정부 조직개편안의 밀실 탄생이 그 증좌의 하나다. 잡음을 막겠다며 밀실을 택했고, 공론은 없이 통보만 있었다. ‘나를 따르라’ 식의 박정희형 리더십이 어른댄다. 윤창중 대변인을 낳은 ‘나홀로 인사’와, 완장을 찬 그가 ‘나만 기자다’라고 외치며 인수위와 기자실 사이의 쪽길을 홀로 내달리는 과유불급의 행태도 박근혜의 앞날을 걱정케 한다. 5·16 쿠데타 이후 우리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고, 결과가 과정을 지배하는 역사를 헤쳐왔다. “나처럼 불행한 군인은 다시 없어야 한다”고 박정희는 말했지만, 그가 이룬 고도성장은 목적과 결과가 수단과 과정을 지배하는 가치 왜곡을 초래했다. 갖은 양태의 선거 부정을 저지른 통합진보당의 이정희가 고개 빳빳이 들고 “박근혜 떨어뜨리려고 나왔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멀리 보면 이런 결과지상주의의 잔재다. 전도된 가치를 바로잡는 5년이 돼야 한다. 그 어떤 목적도 수단을 지배할 수 없다는 가치를 바로 세워야 한다. 독선과 독주의 리더십으로 새드엔딩을 자초한 대한민국 권력의 불행한 역사를 끊는 5년이 돼야 한다. 남은 한 달 인수위 과정이 이를 준비할 마지막 기회다. 2월 25일 박근혜 당선인은 지난 반세기 이 나라에 환희와 눈물을 안겨준 박정희와 마주선다. 제의(祭儀)의 밤이다.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홀로 설 시간이다. 부친이 이루지 못한 화해와 포용의 새 날을 여는 아침을 맞기 바란다. jade@seoul.co.kr
  • [NATE 검색어로 본 e세상 톡톡] 청와대 특별사면, 說이길…비 근신 처분, 제대로 받길

    [NATE 검색어로 본 e세상 톡톡] 청와대 특별사면, 說이길…비 근신 처분, 제대로 받길

    스포츠 스타의 엇갈린 운명이 눈에 띄었다. 1위는 ‘조성민 발인’이다. 유력한 투수였던 데다 슈퍼 스타 최진실과의 결혼으로 많은 화제를 낳았던 조성민이 최진실·진영 남매에 이어 자살로 삶을 마무리했고 서울 안암동 고려대병원에서 장례식이 치러졌다. 환희, 준희 남매와 고인의 누나, 어머니 등이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10위는 ‘장미란 은퇴’다. 한국 역도의 영웅이었던 장미란이 지난 10일 기자회견을 열고 은퇴를 공식 선언했다. 선수 생활에 더 욕심이 났지만 몸과 마음이 버텨내지 못해 은퇴를 결심하게 됐다는 얘기를 눈물과 함께 전했다. 자신의 재단을 통한 비인기 종목 선수 지원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 도전에 매진하겠다는 꿈도 선보였다. 대선이 끝난 뒤 가는 자와 오는 자에 대한 조명도 관심거리다. 3위는 ‘인수위 공식 출범’이다. 6일 현판식을 하고 공식 인수인계 절차에 착수한 것. 김용준 인수위원장 등 26명의 인수위원이 드러났다. 4위는 ‘청와대 특별사면 검토’다. 2월 10일쯤 특별사면이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인데 특히 관심을 모으는 이들은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이상득 전 새누리당 의원 3인의 거취 문제다. 목 놓아 법치를 부르짖어 왔던 이명박 대통령은 물론 사면권 행사를 엄격히 제한하겠다던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대응은 무엇일지 관심을 모은다. 온 국민의 공분을 자아내는 성폭행 사건도 빠지지 않았다. 5위는 ‘나주 성폭행범 사형 구형’이다. 10일 광주지검은 나주 성폭행범 고종석에 대한 결심 공판에서 사형을 구형했다. 잔인한 성폭행범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추세가 반영된 것이다. 고종석은 지난해 집 안에서 자고 있던 7살짜리 소녀를 이불에 싸 납치, 성폭행한 뒤 살해하려 한 혐의로 기소됐다. 7위는 ‘엘리베이터 중학생 성폭행’이다. 집에 가던 14살 여학생을 뒤따라가 성폭행한 10대에게 서울남부지법이 징역 6년을 선고했다. 2위는 ‘비 근신 처분’이다. 공무 출장 중 배우 김태희와 연애한 가수 비에게 국방부가 7일간 근신 처분 결정을 내렸다. 6위는 ‘다케시마 후원 기업’이다. 독도를 다케시마라 부르는 캠페인을 후원하는 일본 기업 명단이 인터넷에 나돌았다. 8위는 ‘강심장 폐지’다. 연예인들의 강하고 자극적인 고백으로 인기를 이어 왔던 프로그램이 사라진다. 9위는 ‘명문대 알바생 사기’다. 아르바이트 시간 확인을 위해 스마트폰이 필요하다고 속인 뒤 스마트폰 판매 보조금을 챙겨 달아난 사건이다.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무덤에서 큰 부자 무슨 소용있겠는가…죽기 전에 쉬는 법을 먼저 배워야”

    “무덤에서 큰 부자 무슨 소용있겠는가…죽기 전에 쉬는 법을 먼저 배워야”

    미국과 유럽에서 선풍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세계적인 명상 수행가 아잔 브라흐마(62) 스님이 한국에 왔다. 10일 개막해 16일까지 서울 중구 필동 동국대에서 열리는 ‘세계명상힐링캠프’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스님은 ‘선정체험과 실체 깨침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고대 불교명상을 과학적 명상체계로 복원한 자신의 집중수행을 즉문즉설과 실참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캠프 개막에 앞서 10일 조계사에서 기자들과 나눈 일문일답.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명상을 하나. -(앞의 찻잔을 들어 보이며)이 잔을 1분을 넘겨 5분가량 들고 있으면 팔이 저려 오고 고뇌에 빠지게 된다. 30초만 내려놓았다가 다시 든다면 훨씬 쉽게 들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명상을 하는 이유이다. 명상은 마음의 고요가 얼마나 효율적인지를 알게 해 준다. →영국 명문 케임브리지대를 그만두고 출가한 이유는. -출가 전 모든 종교를 탐색해 보았다. 일종의 시장조사를 먼저 한 셈이다. 불교가 나에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대학 시절 처음 명상을 배웠고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유명한 과학자들, 특히 물리학자들 가운데 불교신자가 많다. 대학시절 존경했던 교수들과 지금도 교류하고 있다. →불교신자 물리학자가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 -우주 세계는 여러 번의 빅뱅이 있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빅뱅은 가장 최근 것에 불과하다. 과학자들은 끊임없이 생겼다가 소멸하는 이 우주현상을 현대 물리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과학도 출신인 불교도의 입장에서 굳이 불교와 과학을 분리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요즘 불교 명상에 편승한 힐링 열풍이 강하게 불고 있다. 어떻게 봐야 하나. -2500년 불교의 역사는 마음 탐색이 핵심을 이룬다. 마음 작용이 어떻게 용서와 평화에 영향을 미치는지 고민하는 과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서구 의학계는 지금 불교와 건강의 상관관계 연구에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다. 몸의 건강에 마음 건강이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입증한 성과도 숱하다. 한국사회의 힐링 열풍도 그런 맥락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아잔 스님의 명상과 한국불교 간화선의 수행법은 어떻게 맞닿아 있나. -다른 종류의 명상이라고 해서 차이가 있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현대차이든 기아차이든 목적지에 가 닿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명상의 방편에 상관없이 어떻게 수행하는지가 중요하다. 명상 자체를 떠나 평화롭고 친절하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관대할 필요가 있다. →현대인이 안고 사는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요즘 사람들은 빨리빨리 서두를 줄만 알았지, 가만히 고요하게 머물지 못한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갈수록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더 오래 살 수 있다. 무덤에서 큰 부자로 있다는 게 무슨 소용 있나. 죽기 전에 편하게 쉬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더 높은 경지의 깨달음을 경험하고도 초기의 선정으로 돌아간 이유는 뭔가. -수행자들을 해탈의 경지로 데려다 주는 일종의 운송수단이라고 봐야 한다. 부처님 자신도 초선에서 경험한 환희심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제자들이 그 초선의 환희심을 궁극의 깨달음으로 연결하도록 이끈 방편이 아닐까 한다. →명상센터나 스승을 만나지 않고도 일상에서 명상 수행을 할 수 있나. -요리를 배울 때 일단 요리법을 먼저 배운다면 훨씬 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명상이 고요하고 평화롭게 된다면 굳이 스승을 찾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서양 사람들은 한국을 비롯한 동양에 나쁜 악업을 많이 쌓았다. 그 악업을 풀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서로의 종교를 존중했으면 한다. 한국의 문화와 정서는 아름답다. 굳이 서구문화를 좇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아잔 브라흐마 스님은 1951년 영국 런던 태생. 케임브리지대에서 물리학을 공부하던 중 불교에 심취했으며 태국에서 아잔차의 제자로 출가했다. 호주 보디니야나 수행센터를 중심으로 전 세계에 명상수행법을 전파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모은 명상 에세이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의 저자이며 근간으로 ‘성난 물소 놓아주기’, ‘놓아버리기’, 명상안내 요약집 ‘멈춤의 여행’을 내놓았다.
  • 국과수, 조성민 시신 부검 “목매 숨져”… 자살 결론

    전직 프로야구 선수 고(故) 조성민(40)씨의 사망 원인이 자살로 최종 결론났다. 서울 수서경찰서는 7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부터 ‘조씨가 목을 매 숨진 게 합당하다’는 소견을 받았다”면서 “국과수로부터 조씨의 최종 사망시간 등을 확인받은 뒤 내사 종결로 사건을 마무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조씨의 시신 부검은 이날 오전 8시 30분쯤 서울 성모병원에서 이뤄졌다. 통상 부검에는 2~3시간이 걸리지만 타살을 의심할 만한 흔적이 없어 50여분 만에 끝났다. 시신은 부검을 마친 뒤 오전 10시 30분쯤 빈소인 고려대 안암병원 장례식장으로 옮겨졌다. 오후 5시 입관식 때는 상주를 맡은 아들 환희(12)와 딸 준희(10) 남매가 “아빠, 잘 가. 좋은 곳에서 엄마 만나”라며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조씨의 전 에이전트 손덕기씨는 “마지막 모습은 잠자는 듯 평온해 보였다”고 전했다. 발인은 8일 오전 7시 30분이며 경기 성남화장장에서 화장된 뒤 광주시 분당스카이캐슬추모공원에 안치될 예정이다. 조은지 기자 zone4@seoul.co.kr
  • 나는 유럽의 한국 마에스트로

    나는 유럽의 한국 마에스트로

    한해를 마무리하는 2012년 12월 31일. 110년 역사를 가진 독일 함부르크 라이스할레 대공연장은 관객으로 가득찼다. 2023석은 물론 입석까지 촘촘하게 자리했다. 장내가 잠잠해지자 검은 머리에 넉넉한 풍체를 지닌 동양인 지휘자가 등장했다. 송년음악회장을 찾은 현지인들에게는, 외국인인 그가 독일의 자부심과 철학이 담긴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지휘하다니, 의심반 기대반이었을 터. 4악장 ‘환희의 송가’가 끝나는 순간 기립박수가 터지고 함성과 휘파람이 이어졌다. 엄숙한 독일 공연장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이 지휘자는 2013년의 첫날,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음악으로 같은 반응을 이끌어냈다. 한국에서는 생소한, 하지만 유럽에서는 지휘자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이영칠(43)이다. 10일 불가리아 소피아필하모닉의 신년 정기연주회, 15일 러시아 모스크바필하모닉 신년음악회 등 줄줄이 이어지는 음악회 준비로 그는 눈코뜰새 없이 바쁘다. 프랑스에서 불가리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그는 이메일로 이날 공연의 소감을 알려왔다. “베토벤 9번으로 독일인들에게 인정받았다는 건 자랑스럽고 감사하고, 즐겁고 북받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잘 모르는 한국의 지휘자가 그들을 일어나 박수치게 했다니, 어떤 느낌인지 알겠죠?” 그는 미국 뉴욕 메네스대에서 호른을 전공하고, 2000년 뉴욕 주립대에서 연주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3년 불가리아 소피아의 음악 아카데미에서 지휘를 수료하며 지휘자의 길로 들어섰다. 불가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등 동유럽에서 차곡차곡 경력을 쌓았다. 불가리아 플로브디프 필하모니의 종신 객원지휘자(2006), 보스니아 사라예보 필하모니의 객원 상임지휘자(2007)가 된 데 이어 불가리아 소피아 필하모닉과 플레벤 필하모닉의 종신 객원지휘자(2009), 폴란드 오폴레 필하모닉의 2012년 시즌 상임지휘자, 체코 야나체크 필하모닉 객원 지휘자로 임명됐다. 지난해에는 독일 마그데부르크에 상주하는 유럽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로 선임됐다. 환경운동가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는 민간교향악단으로, 로만 헤어초크 전 독일 대통령, 클라우스 퇴퍼 전 독일 환경부 장관, 크리스티아나 피게레스 유엔 기후변화협약 사무국장, 노벨평화상 수상자 무함마드 유누스 그라민은행 총재 등이 후원하고 있다. ‘최초’라는 수식어도 다양하게 달고 있다. 2010년 터키 이즈미르 국립교향악단과 한국 국적 음악인으로 최초로, 2011년 모스크바필하모닉과는 아시아인 최초로 초청연주를 했다. 한국음악을 사랑하는 그는 2009년에는 영국 런던 카도간홀에서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초청으로 지휘한 자리에서 박재은 작곡가의 ‘아리랑’을 초연하기도 했다. 유럽을 사로잡은 비결이 무엇일까. 그는 “솔직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대답했다. “있는 그대로 느끼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 그게 음악의 본질이죠. 요즘 음악은 내면보다는 외형을 중시해서 감정이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전 연주를 할 때는 어린아이처럼 마냥 즐겁고, 음악이 사랑스럽습니다. 아마도 이 느낌이 전달돼 관객들이 좋아해주는 것 아닐까요.” 물론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려움도 많았다. “그동안 겪은 텃세와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텃세보다 힘든 건, 한국의 무관심이다. “함부르크 신년음악회에, 제가 알기로는 한국인 관객은 없었습니다.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무대에 한국인 지휘자가 서는데 한국 사람이 아무도 안 온다는 것을 독일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어떤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부끄러웠죠.” 그는 이어 “중국과 일본은 예술인들에게 무한한 관심과 격려가 있지만 우리는 유명해져야 관심을 갖는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많은 한국인 예술가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보여준다면 외국인들의 텃세 정도는 이겨낼 수 있다”면서 애정을 당부했다. “지휘할 때 가장 행복하다”는 그는 올 상반기에도 빠듯한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오는 2월 13일에는 멕시코 오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3월 20일과 22일에는 일본 NHK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연주회를 할 예정이다. 최여경 기자 kid@seoul.co.kr
  • 한파속 ‘창작의 꿈’ 펼치는 얼음조각 달인들

    한파속 ‘창작의 꿈’ 펼치는 얼음조각 달인들

    “한겨울에 야외에서 얼음을 깎는 작업이 굉장히 추울 거라 생각하죠. 하지만 조각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하다 보면 추운 줄도 몰라요.” 얼음 조각가 김광성(38)씨의 말이다. 4일 오후 8시 케이블 채널 서울신문STV로 방영되는 ‘TV 쏙 서울신문’은 대구 비슬산자연휴양림을 찾아 맹추위 속에 얼음과 씨름하고 있는 얼음 조각의 달인들을 만났다. 얼음 위에 올라가 조각을 하기 때문에 신발에 아이젠을 착용하는 것은 필수다. 얼음 조각가 하석구(38)씨는 “위험한 장비로 작업하기 때문에 한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며 “전기톱에 잘린 얼음 조각이 얼굴을 때리고 피부까지 상하게 하지만 이런 고된 과정을 거쳐 조각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환희를 느낀다”고 말했다. 높이 2m 정도인 작품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4~5시간 정도 쉬지 않고 작업해야 한다.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얼음 조각가는 80여명 정도다. 각종 축하연에 얼음 조각이 빠질 수 없는 장식물로 인식되면서 점차 늘고 있는 추세지만 야외에서 ‘창작의 꿈’을 펼치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조각가는 소수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 밖에 ‘TV 쏙 서울신문’은 3일 경기 여주군 일대와 서울에서 열린 ‘한·아세안 청년 네트워크’를 찾아갔다. 한·아세안센터 주최로 열린 이번 행사에는 한국을 비롯해 베트남, 태국, 필리핀 등 각국의 학생 70여명이 모였다. 세종대왕릉과 명성황후 생가를 방문하고 인삼과 김치 체험장에서 직접 음식을 맛보는 등 다양한 행사를 통해 문화적 유대감을 형성하는 장면들을 담았다. 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유일한 혈흔 형태 전문가 서영일(38) 연구사도 만났다. 범죄 현장에 떨어진 핏자국은 살인 등 유혈 범죄 수사에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경우가 많다. 혈흔의 모양이나 크기, 방향에는 범행 도구와 용의자의 움직임 등 다양한 정보가 들어 있다. 서 연구사는 “공판 중심주의 사법제도를 가진 우리나라에서 혈흔의 형태는 기소 내용의 설득력을 높이고 진술의 진위 여부를 가려내는 결정적 단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는 추세”라고 말했다. 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유품을 최초로 공개한 국립고궁박물관을 찾아가 덕혜옹주의 복식과 장신구, 혼수품 등 귀중한 기록물을 영상으로 담았다. 그 밖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나타난 목소리를 통해 한 주일간의 뉴스 흐름을 짚어보는 ‘톡톡 SNS’에서는 새해 예산안 및 ‘택시법’ 통과 등과 관련한 다양한 의견을 전한다. 박홍규 PD gophk@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