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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플 인 포커스] 사르코지 佛여당 대선후보 공식지명

    |파리 이종수특파원|프랑스 집권당 대중운동연합(UMP)의 당수이자 내무장관인 니콜라 사르코지(51)가 14일(현지 시간) 대통령선거 후보로 공식 지명됐다. UMP는 이날 파리 베르사유 전시장에서 당원대회를 열고 사르코지가 지난 2주일 동안 33만 8520명의 당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인터넷 투표에서 23만 3779명이 참가,22만 9303표의 찬성표를 얻어 98.1%의 지지율을 얻었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그는 오는 4월22일 치를 대선 1차투표에서 사회당의 세골렌 루아얄(53)과 박빙의 승부를 펼쳐야 한다. 1955년 파리에서 태어난 사르코지는 프랑스 정가의 ‘이단아’다. 사회주의 전통이 강한 프랑스에서 미국식 시장경제를 공개 지지하는 등 친미 성향을 과감없이 드러냈다. 또 내무장관으로서 이민자에 너그러운 관행에 맞서 단호한 처방을 내놓기도 했다. 지난해 빈 건물을 점유 중이던 가난한 이민자를 추방했다.2005년 이민자들의 소요 사태 때는 시위대에게 ‘깡패’라는 표현을 써 물의를 빚었다. 또 다른 엘리트 정치인과는 다른 길을 걸어 왔다. 헝가리 2민 이세에다 학교도 고위관료 양성기관인 국립행정학교(ENA)가 아니라 파리10대학을 졸업했다. 그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에는 ‘중간 지대’가 없다. 우파들은 그가 2002년 내무장관에 임명된 뒤 저돌적으로 ‘범죄와의 전쟁’과 성매매 단속 등을 추진하자 대대적으로 환호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직설적인 발언과 강성 이미지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도 많다.‘엘리제 궁’으로 가는 그의 길은 순탄치만은 않아 보인다. 같은 당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3선 출마 여부를 밝히지 않은 채 그에게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있다. 도미니크 드 빌팽 총리 등 시라크 계파 정치인의 반발도 만만치않다. vielee@seoul.co.kr
  • ‘굿모닝 비보이’ 공연서 보컬 활약 배에스텔

    ‘굿모닝 비보이’ 공연서 보컬 활약 배에스텔

    흑진주가 조개껍질을 박차고 나왔다. 반짝이는 큰 눈망울과 다양한 표정은 저절로 그녀의 노래를 듣고 싶게끔 만든다. 배에스텔(23)은 오는 19일부터 3월31일까지 서울 정동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에서 공연되는 ‘굿모닝 비보이’에서 노래를 한다. 그동안의 비보이 공연은 춤이 중심이었지만 ‘굿모닝 비보이’에서는 에스텔의 노래와 춤이 어우러진다. 젊은이들의 열광을 끌어냈던 비보이들이 전연령층에게 고르게 다가갈 수 있는 뮤지컬이다. 에스텔은 ‘잇츠 레이닝 맨’, 송골매의 ‘어쩌다 마주친 그대’ 등 중장년층에게도 친숙한 노래 3∼4곡을 부르게 된다. 인간극장이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그녀의 일상을 ‘꿈꾸는 흑진주’란 제목으로 방영하면서 에스텔은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당시에는 혼혈 가수지망생이었지만 지금은 4∼5차례의 오디션 끝에 뮤지컬 가수로 무대에 서게 됐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일산의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를 불러온 에스텔은 “무대에서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노래할 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말했다. 때문에 매일 파주 문산역에서 2시간이나 기차를 타고 홍익대 근처 지하연습실까지 다니는 수고를 마다않는다. 공연 개막일이 하루하루 다가오면서 마음도 설렌다. 에스텔은 용산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던 어머니가 주한미군과 결혼하면서 태어났다. 에스텔이란 이름은 미국에 있는 할머니가 지어주신 것. 어렸을 때 미국에서 아버지와 잠깐 같이 산 적도 있지만 외할머니가 아파 한국에 돌아오게 됐다. 어머니는 재혼을 해서 이젠 새아버지와 동갑인 남동생이 있다. 미국에 있는 아버지와 연락은 하지 않는단다. 미국 프로 풋볼 선수 하인스 워드가 한국을 찾았을 때 공항에 환영 플래카드를 들고 나가서 언론의 집중 관심을 받았었다. 에스텔은 먼저 “워드가 왔다 간 뒤에 뭐가 변했는지 궁금하시죠?바뀐 건 하나도 없어요.”라고 선수를 쳤다. 에스텔은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진 효순, 미선양 사건 때는 집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취객들로부터 노골적인 욕을 들으며 봉변을 당한 적도 있다. 그녀가 노래에 대한 꿈을 접지 않도록 도와준 것은 24시간 걱정해주는 엄마와 5년 이상 함께 해온 인터넷의 혼혈인 카페 모임이다. 뮤지컬 무대에서 맹활약중인 소냐나 한때 흑인 디바로 군림했던 휘트니 휴스턴처럼 되고 싶은 것이 에스텔의 소망이다. 글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사진 이호정기자 hojeong@seoul.co.kr
  • [지방시대] 지방에서부터 희망을/최형재 전주아름다운가게 공동대표

    지방은 어렵다. 정말 어렵다. 차별과 낙후를 얘기하며 선심 쓰듯 도와 달라고 떼쓰기 위해 어렵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지방분권과 자치시대임을 인정하고 지역특화사업을 통해 내발적 발전전략을 가지려 해도 수도권에 비해 경쟁력과 여론 전파력이 부족하다. 제도도 갖춰지지 않았고 인력도 태부족이다. 그래도 지방에서부터 희망을 얘기해야 한다. 창조적인 도전을 하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도 이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지역에는 여전히 많은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 지방이 살아야 대한민국이 살기 때문이다. 연말연시 우리 지역에서는 우리나라 대표기업이며 민주노조 운동의 구심이고 우리 지역 노동자들에게 부러움을 받는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의 노사협상 결과가 주민들을 웃고 울렸다. 현대차 전주공장은 노사공동위원회를 구성해 주문이 밀려드는 버스 생산을 늘리기 위해 노사협상을 벌였다. 쟁점은 간단했지만 협상은 늘어졌다. 주야간 맞교대를 통해 버스 생산을 늘리자는 것이 사측의 주장이고 심야작업은 건강을 해치니 시설투자를 확대해 고용을 창출하면서 생산량도 늘리자는 것이 노조 주장이다. 224일간의 장기교섭을 통해 연말에 어렵게 맞교대를 하기로 잠정 합의했다. 전라북도와 친행정사회단체 그리고 지역 언론은 마치 합의가 완성된 양 환호했고 노사를 극찬했다. 안타깝게도 연초에 치러진 조합원 투표에서 잠정합의안이 부결되고 말았다. 도민의 여론은 싸늘해졌고 도민의 염원을 외면했다며 조합원을 원망했다. 노사협상 결과에 도민들이 웃고 울게 된 것은 현대차가 지역에서 차지하는 경제적 영향력이 지대할 뿐 아니라 현대자동차 문제 해결 여부가 향후 기업유치 등 지역경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적극적인 중재에 나서 지역의 중대 현안이 되었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결과가 나온 것은 소통의 부재로 보인다. 전라북도와 도민들은 낙후와 차별을 딛고 잘살아 보는 것이 한 서린 염원이다. 기존의 기업이 잘 돌아가고 대기업을 유치하는 것이 고용도 창출되고 부자 되는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협상이 잘 안 되면 공장이 이전될 것이라는 소문이 있고 대기업 유치에도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타결을 강제하는 쪽으로 발전했다. 노조는 도민의 이러한 요구가 ‘변형된 3자 개입’이며 생색내기 위해 나서는 것이라고 폄하해 버린다. 조합원들이 심야근무 위험성이나 부당함을 소리 높여 얘기하면 ‘귀족노조’의 배부른 소리라고 도민들은 귀를 막는다. 우리는 지역에서부터 희망을 만들기 위해 공동체 정신을 살려야 한다. 분노와 감정보다 화해와 상생의 마음으로 상대방의 처지가 돼 봐야 한다. 사용자는 도민의 염원을 조합원을 압박하는 수단으로만 활용해서는 안 된다. 시설투자 요구에 인색해서도 안 된다. 시설확충 없이 생산성만 높이려니 마찰이 생기는 것이다. 노조의 요구를 진지하게 들을 줄 아는 파트너가 돼야 한다. 노동조합도 회사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성숙함을 보여야 한다. 지역주민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지역사회와 함께해야 한다. 전라북도의 중재도 이해해야 한다. 시간을 분초로 나누어 쓰는 도지사가 이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도민의 요구가 강하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을 폄하한다면 기본을 무시하는 것이다. 도민들도 현대차노조를 이해해야 한다. 민주노조 운동의 간판으로 처신이 어려운 점도 고려할 줄 알아야 한다. 노조 내의 복잡한 사정과 고민에 대해 평소에 관심도 없다가 표출된 사건에 대해 갑자기 전문가가 된 것처럼 압박하면 조합에서 서운해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이러한 작은 실천을 모아 큰 희망을 전북에서부터 만들어 나가자. 최형재 전주아름다운가게 공동대표
  • [누드 브리핑]

    정송학 광진구청장이 ‘고주몽’으로 변신한 뒤 ‘해를 불러’(?)와 눈길을 끌었습니다. ●갑옷 입은 구청장, 고주몽? 새해를 맞아 일부 구청장은 가까운 산에서 주민들과 함께 해맞이 행사를 했습니다. 정송학 광진구청장이 아차산에 고구려 갑옷을 입고, 주몽으로 변신해 주민들 앞에 나타나 주민들의 환호성을 샀습니다. 정 구청장의 숙원사업이 고구려 유적복원 사업입니다. 정 구청장과 직원들은 지난 1일 오전 7시30분 아차산 중턱에 있는 ‘해맞이 광장’에 모였습니다. 산에는 1000여명의 주민들이 해를 보려고 나와 있었지요. 광진구 일행과 주민들은 10분 후 뜰 해를 조마조마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날씨가 흐려서 그만 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인사말이 끝나고 오색 풍선 2007개를 하늘에 날려보내자 즐거운 분위기가 살아났죠. 이때 정 구청장이 준비한 갑옷과 투구를 쓰고 등장했습니다. 고구려 무사로 등장한 그는 미리 설치해 둔 큰 북을 둥둥 울렸습니다. 아이들은 그 모양이 재미있고 신이 나서 박수를 치며 “주몽”이라고 환호성을 질렀고요. 휴대전화 플래시가 사방에서 터졌습니다. 이때 회색구름 사이로 밝은 해가 살포시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이번엔 어른들도 만세를 부르고 노래를 부르는 등 분위기가 살아났습니다. 정 구청장에 이어 주민들도 북을 세번씩 치면서 소망을 빌었습니다. 정 구청장은 “고구려의 정기가 깃든 이곳에서 새해 첫날을 힘차게 출발하자.”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올해의 주력사업은 ‘홍보’ 신영섭 마포구청장은 2일 시무식에서 ‘구정 홍보역량’을 특히 강조했습니다.“구정의 모든 소식은 홍보과를 통해서만 나가도록 하고 이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은 마포구의 정책이 아니다.”고 했다는군요. 마포구는 조직개편을 통해 올해부터 이전 공보팀에서 담당하던 업무를 1과 3팀으로 독립시킬 계획입니다. 홍보과 안에는 공보팀, 홍보기획팀, 인터넷미디어팀을 둔다는데요. 구정 홍보를 일원화해 체계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것이죠. 구에서 하는 사업을 알리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책 기획단계부터 보도를 중점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겁니다. 정책을 만드는 것만큼 알리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이 언론인 출신 신 구청장의 소신입니다. 시청팀
  • 반총장 “사형은 각국 법따라 결정”

    |워싱턴 이도운특파원|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유엔본부 직원들의 환호와 환영 속에 2일(현지시간) 첫 공식업무를 마쳤다. 반 총장은 이날 오전 9시30분 뉴욕 맨해튼의 유엔본부에 도착, 기다리고 있던 직원들의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 한국인 사무총장 시대를 맞은 유엔 직원들은 반 총장이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처럼 유엔 내에 대화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달라며 기대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반 총장은 2층 안전보장이사회 앞 기자회견장에서 첫 출근의 소감과 향후 계획을 밝혔다. 반 총장은 특히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역할을 묻는 질문에 “사무총장으로서 6자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도록 하고, 관련 국가 및 유엔 안보리 회원국과 밀접하게 이 문제를 논의함으로써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다.”고 말했다. 반 총장은 사담 후세인 이라크 전 대통령의 처형 문제에 관한 질문에는 “후세인은 이라크인에 대한 흉악한 범죄의 책임이 있고 우리는 이같은 범죄의 희생자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면서 “사형은 각국이 법에 따라 결정할 문제”라고 말했다. 반 총장의 발언은 사형에 반대한다고 밝혀온 유엔의 기존 입장과는 다른 것이다. 이 때문에 이날 미셸 몽타스 신임 유엔 대변인의 정오 브리핑에서 기자들은 사형제에 관한 유엔의 입장에 변화가 있는지를 집중 질의하는 등 논란이 됐다.dawn@seoul.co.kr
  • [열린세상] 사담과 조지/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언젠가 르몽드지에서 프랑스에서 행해진 마지막 공개처형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그 사진에서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 처형이 행해진 연도였다. 프랑스에서조차 20세기 중반까지 버젓이 공개처형을 했던 모양이다. 당시에는 그게 당연하게 여겨졌겠지만, 인상파와 야수파, 다다와 큐비즘을 낳은 예술의 도시 한복판의 기요틴은 오늘날의 눈에는 매우 초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하긴, 그 잔혹한 그 기요틴도 처음 등장했을 때에는 ‘인도주의’의 도구가 아니었던가. 미셸 푸코가 묘사하는 17세기의 처형장면은 우리를 전율케 한다. 그때 처형은 단번에 집행되지 않았다. 사형수들은 피부가 벗겨지고, 안구가 뽑히고, 온 몸이 으깨지는 고통을 하루종일 당한 후 지는 해와 더불어 비로소 마지막 자비의 칼날을 받을 수 있었다. 이에 비하면 순식간에 목숨을 끊어주는 기요틴은 얼마나 인도주의적인가?처형이 잔혹극으로 연출되던 시절, 관객들의 성정도 지금과는 달랐다. 공동체의 안녕을 해친 범법자에게 가하는 정의의 심판이 그들을 심히 흡족하게 했던지, 사형수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면 그들은 크게 즐거워하며 환호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직도 이 바로크적 성정을 가진 관객들이 있나 보다. 얼마 전 어느 독재자가 처형을 당했을 때, 지구촌의 일각에서 기뻐 환호성을 지른 나라들이 있었다. 후세인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자 미국, 영국, 호주에서는 일제히 크게 반기는 성명을 냈다. 반면 유럽연합에 속하는 국가들은 일제히 그의 처형을 비난하고 나섰다. 앵글로색슨 계열의 나라에서 ‘정의’라고 부르는 것을 다른 유럽의 국가에서는 ‘야만’이라 느끼는 모양이다.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말대로 잔인성의 포기가 ‘문명화 과정’에 수반되는 현상 중의 하나라면, 같은 제1세계에 속하는 나라들 사이에도 문명화의 정도에는 차이가 존재하는 모양이다. 오늘날 문명화는 세계 3분의2의 국가에서 사형제가 폐지되는 데까지 이르렀다. 설사 사형제를 유지하는 나라에서도 지금은 사형을 비공개로 집행한다. 이렇게 잔인함을 감추는 것 역시 문명화의 한 단계. 그리하여 우리는 중국이나 북한에서 행해지는 공개처형을 이미 ‘야만적’이라 느낀다. 그런데 후세인의 처형 장면은 어떤 이유에선지 언론을 통해 공개되었다. 듣자 하니 저항세력의 기를 꺾어놓을 의도에서 행한 조치라고 한다. 목에 밧줄을 건 후세인의 사진을 보면 마음이 착잡해진다. 이게 과연 죽은 독재자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 때문일까? 형리들은 사형대 위의 후세인을 조롱했다. 형장으로 향하는 사형수에게 조롱을 퍼붓는 관습. 여기에는 예수가 유대의 왕을 자처하던 시절이나 후세인이 이라크의 대통령을 자처하는 시대나 변함이 없는 모양이다. 수천 년이 흘렀어도 인류의 잔혹성의 정도에는 이렇게 큰 차이가 없다. 착잡함은 이 사실을 확인하는 우울함에서 온다. 시아파 형리가 부족의 이름으로 수니파 대통령을 모욕한다. 이것은 근대적 의미의 법 집행이 아니라 사실상 전근대 사회의 종파적 린치에 가깝다. 그래도 일국의 대통령이었던 자의 처형 장면을 언론에 공개했다. 이는 트로이의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문 앞에서 전차에 헥토르의 시신을 매달아 질질 끌고 다니던 아킬레스 행위를 연상시킨다. 적군의 사기를 꺾기 위해 적장의 목을 베어 효시하던 고대의 관습이 이렇게 카메라와 비디오를 통해 부활했다. 세계인들은 사담 후세인이 왜 죽어야 했는지 안다. 그리스도가 온 인류의 죄를 사해주기 위하여 죽었다면, 사담 후세인은 딱 한 사람, 조지 부시의 죄를 사하기 위해 죽어야 했다.“사담이 없어져서 세계가 더 좋아졌다.” 부시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후세인의 처형으로 세계의 상태는 ‘더 좋다’로 바뀌었으니, 인류에게 남은 과제는 하나. 조지마저 사라져주면 가장 좋은 상태가 되지 않을까?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 [서울신문 신춘문예-희곡당선작] 문득, 멈춰 서서 이야기 하다- monologue Quartet/김정용

    따사로운 봄볕, 아련한 음악. 그리고……. 명일, 고개를 숙인 채 힘없는 걸음으로 등장, 어디론가 걸어간다. 신내, 꽃다발을 들고 환한 얼굴로 등장, 어디론가 걸어간다. 두정, 병원복 차림으로 휠체어를 타고 등장, 잠시 휠체어를 세우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어디론가 간다. 신흥, 전화기를 들고 등장, 상대가 받지 않는지 계속 버튼을 눌러대다가 퇴장한다. 다시 명일이 등장했다 사라진다. 다음엔 신흥, 신내, 두정 차례로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그들은 서로 인식하지 못한 채,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어느새, 각자 자리를 잡고 서 있는 네 사람. 모두들 잠시 망설이다, 각자 어딘가를 향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네 사람: (동시에)저기……. 짧은 암전. 명일: 그녀를 처음 본 건 두정: 치악산이었습니다. 신흥: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군요. 신내: 환하게 웃는 모습이 너무 멋졌어요. 신흥: 숨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명일: 노을이 너무나 아름다웠던 해질무렵이었는데, 지금도 기억나요. 두정: 그날 따라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습니다. 신내: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명일: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요? 남들이 뭐라하건 전 그때 운명을 느꼈습니다. 두정: 이렇게 될 운명이라 그랬던 걸까요? 신흥: 앞이 깜깜하더군요 신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 사람 모습만 보이는 거 있잖아요. 신흥: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떤 것부터 수습해야 할지, 그때만 생각하면……. 두정: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날 일은. 명일: 그날이 제 생애에서 가장 큰 기적이 일어난 날입니다. 신내: 제가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편이라……, 그래도 용기를 내야겠죠? 신흥: 용기가 나질 않더군요, 어떻게 마누라 얼굴을 봐야 할지, 술이라도 먹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술은 입에도 못 대고……. 두정: 술요? 입에도 대지 않았습니다. 산행하는 날은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내려와서 마시면 모를까. 명일: 시간 되시면 저랑 술 한 잔 하실래요? 명일 주변이 밝아지고, 나머지 사람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명일: 이 말이, 제가 그녀에게 처음 건넨 말이었어요,‘술 한 잔 하실래요?’ 참 바보 같았죠, 머릿속에 별별 말이 다 떠돌았는데, 막상 나온 말이 그거였어요, 말을 해놓고 아차 싶었죠,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런데 그녀가 뭐라고 한 줄 아세요? ‘한잔만요?’(미소) 그렇게 시작 했어요. 우리들. 정말 행복했어요, 너무 행복해서 불안할 정도로,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좋은 일만 계속 생기면 왠지 불안해지고 그러는 거. 육상 경기복 차림의 신내 등장. 얕은 숨으로 몸을 푼다. 명일: 하지만 그런 불안도 그녀의 미소 앞에선 힘을 잃고 말았죠.(신내 환하게 미소 짓는다.) 우린 언제나 함께였어요, 몸이 떨어져 있는 시간에도 마음만은 늘 붙어 있었죠. 신내: 그만해, 더는 못 들어주겠다. 그래서 대학 떨어지면 누구 탓하려고? 아빠가 그러시더라고요. 많이 놀랐어요, 원래 말씀을 거침없이 하시는 편이시지만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리라곤 생각지 못했거든요, 제가 원하는 일에 반대 한번 안 하셨던 분인데, 아빠도 제가 고3이 되는 게 스트레스가 되셨나봐요, 사실 전 아무렇지도 않은데. 육상하면서 공부 열심히 할 수 있다고 아무리 말해도 들으실 생각조차 안 하세요 명일: 그런 우리를 하늘이 시샘했는지 신내: 그만해 명일: 불안함을 현실로 만들어 버리더군요. 신내: 그래서 그만두기로 했어요. 명일: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이야. 신내: 낼 모레가 마지막 시합이에요. 오빠가 와 줄까요?(호루라기 소리) 예, 가요! 암튼 쉬는 꼴을 못 본다니까.(급하게 달려 나간다.) 명일: 다 제 잘못이에요, 급하게 달려 나가는 연수를 잡았어야 했는데, 연수가 제 눈앞에서 붕 떠오르더니 바닥으로 나뒹굴었어요, 아주 잠깐 사이였는데……, 두정: (휠체어를 타고 등장) 그렇게 몇 바퀴를 굴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깨어나 보니 병원이더군요. 명일: 수술실 앞에서 내내 기도했어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두정: 멀리서 누군가 절 부르는 것 같은 소리에 눈을 떴는데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하얀 천장, 그보다 더 하얀 형광등뿐이었죠,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명일: 잠깐만 쉬었다 하면 안 될까요? 저 세수좀 하고 올게요. 죄송합니다.(나간다.) 두정: 이제 에베레스트는커녕 문턱하나 넘지 못하게 된다고 생각을 하니 죽고 싶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결과가 나와봐야 안다고, 설령 잘못 되더라도 열심히 재활하면 될 거라고 말했지만, 제 몸은 그 누구보다 제가 잘 압니다. 저는 걷지 못할 겁니다. 이제 에베레스트는 제게 있어 그림엽서 속에서만 존재하는 산일 뿐입니다. 신흥: (통화하며 등장)아니라니까 그러네, 왜 내 말을 못 믿어, 다 잘 될 테니까 너무 걱정마……, 나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끝나지 않아,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그깟 일로 안 무너져……, 여보 나 믿지? 그래 내가 알아서 잘할게, 그리고 내 전화 말고는 다른 전화는 절대 받지마……, 알아, 알아 당분간 친정에 가 있어, 애들은……, 그래, 너무 걱정마.(끊는다.) 두정: 너무 걱정마, 모두들 저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저라도 그렇게 말했을 거예요, 인간이란 동물은 원래, 남의 불행에 대해서는 지나치리만큼 관대한 법이니까요. 이렇게 되고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관대함이란 게 무관심의 다른 말이라는 것을요, 지나친 비약이라고 생각하시죠? 그것도 다 여러분이 사고를 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드는 생각입니다.(사이)저도 며칠 전까진 여러분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상상도 못하고 있었죠. 정말 순식간이었습니다. 절망이란 놈은 순식간에 저를 이곳에 앉혀 놓고는 두 다리를 옭아맸습니다. 정말 순식간에……. 신흥: “너무 걱정 마”,“걱정하지 마세요.” 도대체 이 말을 몇 사람에게 몇 번이나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길거리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붙잡고 걱정 말라고 당부하는 꿈을 꿀 정도였으니까요, 근데 웃긴 건, 그 어느 누구도 저에게 이 말을 해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은 저인데도 말이죠. 가해자 취급만 당했어요, 물론 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저 잘못 했어요, 그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딱 까놓고 말해서, 저만 좋자고 프로젝트 진행시킨 겁니까! 다 같이 잘되자고 한 일인데, 일이 틀어지고 나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모든 사람들이 피해자로 돌변하더군요, 같이 진행한 동료들까지도 말이죠, 정말 순식간이었습니다, 정말 순식간에……. 두정: 다 필요 없습니다. 신흥: 다 필요 없어요. 신내: (등장)꽃이 필요할 거예요, 그쵸? 신흥: 그래서 준비한 게 있습니다. 두정: 전……, 이곳에서 탈출할 생각입니다. 신흥: (약병을 꺼낸다)저만 없어지면 됩니다. 두정: 제가 없어지면 모두들 걱정하는 척하다가 금세 잊어버릴 겁니다. 다리병신 하나쯤 없어졌다고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요 신내: 아니야, 그건 아니야.(두정 나간다.) 여자가 먼저 꽃을 주는 건 좀 그렇겠죠? 신흥: (병뚜껑이 열리지 않는다.) 이게 왜 이래. 신내: 어떡하지? 신흥: 어떡하지? 신내: 오빠가 와주긴 할까요? 신흥: 깨버릴까? 신내: 용기내서 말하긴 했는데 대답을 못 들었거든요 신흥: 용기가 깨질 때 유리 파편이 섞이면 먹기 힘들 텐데.(열심히 뚜껑을 돌린다.) 신내: 다시 한 번 말해 볼까요? 이상한 애로 보이면 어쩌죠?(사이) 안 되겠어요. 신흥: 안 되겠어. 수건 같은 게 있으면 좋겠는데. 신내: 무슨 수를 써야지……. 명일, 나가는 신흥과 교차되며 들어온다. 신내: 아하! 다시 말하기는 그러니까, 편지가 좋겠어요. 그렇죠? 좋은 생각이죠? 마지막 시합에 오빠가 와주면 더 힘내서 뛸 수 있을 것 같다고 쓰는 거예요. 역시 솔직한 게 좋겠죠? 그래, 그래야겠어요. 명일: 죄송합니다. 어디까지 얘기했었죠? 신내: 편지 명일: 편지 얘기는 아직 안 하지 않았나요? 신내: 우선 펜하고 종이가 필요하겠죠? 명일: 적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그냥 듣기만 하시면 안 될까요?(신내, 고개를 끄덕인다.) 감사합니다.(신내, 나간다.) 그럼 얘기가 나왔으니 편지 얘기를 할게요.(잠시 머뭇거리다) 사귀기로 한 날부터, 저는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뭐 그렇다고 대단한 연애편지를 쓴 건 아니고요, 일기 쓰듯이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있었나 써서 메일로 보냈어요. 하루도 빼먹지 않았어요, 단 하루도.(웃음) 어떤 일이 있었냐면요, 어느날 술을 잔뜩 마셔서 떡이 된 적이 있었는데요, 그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떴는데 아차 싶은 거예요, 하루도 빼먹지 않겠다고 약속했었거든요, 늦었지만 변명이라도 해볼 양으로 부랴부랴 컴퓨터 앞에 앉았죠, 그리고 메일을 쓰려고 로그인을 했는데 수신 확인 창이 뜨는 거예요, 그래서 뭔가 하고 봤더니, 글쎄 제가 전날 밤에 메일을 보냈더라고요, 무슨 말을 썼는지 궁금해서 메일을 열어 봤는데(피식거린다.) 그게, 영어도 아니고 한글도 아니고 그런 거 있잖아요.fhufhㅈ뎌???ㄷew 이런 거 (웃는다.) 더 웃긴 건, 제목이 뭐였는지 아세요? fhi롤fwqo어ㅈㅇ……. 명일, 말을 잊지 못하고 정신없이 웃는다. 무대 뒤에서 두정과 신흥의 절규가 들려온다. 명일: (무안해 하며)죄송합니다. 신흥, 두정 서로 반대편에서 등장 신흥, 두정: 이럴 순 없어 두정: 병원 정문도 못가서 잡혀버리다니. 신흥: 내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신흥, 두정: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내가 아무리 이런 꼴이 됐어도 두정: 병원문턱 하나 신흥: 병뚜껑 하나 신흥, 두정: 내 맘대로 두정: 넘지, 신흥: 열지-못하다니, 왜 하필 이런 일이 나한테 닥친 거야, 왜 하필이면 나냐구, 내가 뭘 잘못했게! 내가 바라던 삶은 이런 게 아니었어.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명일: 다시 시작하죠. 두정: 그만하자, 그만해,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내 꼴만 더 우스워지지. 두정, 신흥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신흥: (병을 내밀며) 저……, 이것 좀. 명일: 네? 두정: 뭘 봐! 휠체어 탄 사람 처음 봐! 명일: 네. 신흥: 죄송합니다. 이것 좀 열어 주세요, 부탁 좀 드릴게요.(병을 건넨다.) 두정: 씨발.(술병을 꺼내 마개를 따려한다.) 이건 왜 이렇게 안 열려 신흥: 잘 안 열리죠?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명일: 무리라뇨, 전 괜찮아요.(사이) 알겠습니다. 내일 오면 되는 거죠? 같은 시간에 두정: (술병을 집어던진다) 젠장, 젠장, 젠장! 신흥: 그렇게 까지 하실 필요는 없는데,(사이) 안 열리면 할 수 없죠 뭐(병을 받는다) 감사합니다. 명일: 안녕히 계세요. 아련한 음악 다시 흐른다. 명일, 천천히 무대를 돌고. 신흥 뚜껑을 열기 위해 애쓰며 퇴장, 두정 지친 듯 어깨를 늘어뜨리고 퇴장, 신내 편지를 들고 등장, 음악이 끝나면 명일과 신내 각자 자리를 잡는다. 신내: 편지 다 썼어요, 들어 볼래요?(편지를 꺼내 읽는다.) 오빠 명일: 연수야, 야! 신연수 신내: 잘 지내고 계세요? 명일: 난 잘 지내고 있어, 너는 잘 지내고 있는 거야? 신내: 전 무지무지 잘 지내고 있어요. 제가 며칠 전에 오빠에게 했던 말 기억나세요? 명일: 기억난다. 너랑 여기 자주 왔었는데, 신내: 죄송해요, 갑작스럽게 말하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도망쳐 버려서, 놀라셨죠? 명일: 아니야. 네가 미안할 건 없어, 붙잡아 주지 못한 내가 미안하지. 신내: 그래서 말인데요. 오빠가 너무 당황스러운 나머지 제 얘기를 못 들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편지를 써요. 저, 내일모레 있을 시, 도 대항 육상 대회에 시 대표로 나가게 됐어요, 아마도 제 인생의 마지막 경기가 될 것 같아요, 아빠가 육상을 못하게 하시거든요. 마지막 경기를 오빠가 꼭 보러 와줬으면 좋겠어요, 그럼 힘이 불끈 불끈 날거 같아요 어쩌면 한국 신기록을 세울지도 몰라요, 그렇게 되면 아빠도 더는 반대 못하시겠죠.-제발 그렇게 됐으면-, 자라나는 한국 육상 꿈나무의 앞길을 열어 주세요, 네 오빠! 우리가 대기하는 곳이 3번 게이트 쪽이거든요, 그쪽 스탠드 앞쪽에 계시면 제가 오빠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꼭 와주셔야 해요, 오빠가 오지 않으면 저는 실망한 나머지 다리에 힘이 풀려 꼴찌를 할지도 몰라요, 꼭 와야해요, 꼭 꼭 꼭. 명일: 가고 싶어, 그곳에……. 멀리서 호루라기 소리 들려온다, 신내 재빨리 편지를 감춘다. 명일: 저 소리 들려? 우는 소리가 괴상하니까 분명 생긴 것도 이상한 새일 거라고, 확인해 보고 싶다고 몇 시간이나 헤매고 다녔었잖아. 결국 확인도 못해보고…….(목이 멘다.) 두정, 훈련복 차림으로 호루라기를 불며 걸어서 등장. 두정: (버럭)지금 뭐하는 거야! 정신이 있어 없어!(신내 얼른 뛰어 나간다.) 그런 정신 상태로 뭘 하겠다는 거야, 응! 그것밖에 안 되는 놈이었냐? 정말 실망이다. 네놈만은 꽤 괜찮은 녀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너 같은 녀석은 에베레스트를 입에 담을 자격도 없어! 명일: 미안, 그때 널 잡았어야만 했는데. 두정: 에베레스트는 고결한 자에게만 허락된 곳이다, 약해 빠지고 결점투성이인 인간에게는 절대로 그 하얀 살결을 허락하지 않아! 명일: 그렇지 않아, 다 내 탓이야. 두정: 그깟 집안일 때문에 술에 절어 사는 게 부끄럽지도 않냐? 네가 말했던 꿈이라는 게 고작 이런 거였어? (사이) 그래, 나 이해 못한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 네가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것 같지? 얼빠진 놈.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어떤 인간인 줄 알아? 바로 너 같이 환경 탓, 상황 탓 하는 것들이야. 우리는 최악의 상황을 뚫고 나가야 하는 사람들이야. 별것도 아닌 일에 주저앉아 버리는 너 같은 놈은 필요없어! 당장 내 눈 앞에서 사라져, 무슨 염치로 훈련장에 나타난 거야, 나타나길. 다른 팀원들이 너 보면 사기 떨어지니까, 좋은 말로 할 때 얼른 꺼져라, 그리고 다시는 우리 앞에 나타나지 마. 명일: 제발 나타나줘, 한번 만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내 앞에 나타나줘. 암전. 빛 속에 홀로 있는 신흥 신흥: (반쯤 줄어든 약병을 들고 허탈하게 웃으며) 안되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겨우겨우 열어가지고 스무알을 넘게 먹었는데……, 뭐? 고통 없이 갈 수 있다고? 나쁜 새끼들.(꺽꺽댄다.) 이딴 걸 20만원씩이나 주고 산 내가 미친놈이지.(전화 벨이 울린다, 병을 내려놓고 전화를 확인하고는 배터리를 빼버린다.) 미안해 여보. 날 용서하지 마.(사이) 한심하죠? 저도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습니다. 하기야 태어날 때부터 한심한 인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살다보니까, 어찌어찌 하다보니까 한심해지는 거지.(사이) 돌아가신 저희 아부지께서 술만 드시면 어린 저를 붙잡고 늘상 하시던 얘기가 생각나네요. 두정: (빛 속에서 등장) 너 같은 놈은 필요 없어.(사라진다) 신흥: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어요, 근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알겠더군요, 그게 무슨 말이었는지, 아부지가 어떤 심정이었을지.“넌 어른이 되지 마라,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추악한 동물이 바로 어른이란 동물이다.” 백번 맞는 말인 것 같아요, 그렇지 않나요? (사이) 그나저나 이제 어떡해야 하죠? 수습할 수도 없고, 도와줄 사람도 없고, 빌어먹을 죽지도 못하고, 어떡해야 하죠? 신내: (빛 속에서 등장) 그럴 땐 초콜릿을 먹으면 돼요, 그것도 아주 진한 다크 초콜릿, 아무리 우울해도 한두 조각이면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한두 번 혼난 것도 아니고 뭐. 괜찮아요. 초콜릿 하나면 땡이에요.(사라진다.) 신흥: 그 생각도 안해본 건 아닙니다. 근데 제가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예? 그건 너무 고통스럽지 않을까요? 제가 아픈건 딱 질색이라. 명일: (목소리) 연수야, 연수야 신흥: 쉿! 지금 누가 제 이름 부르지 않았나요? 설마 놈들이 여기까지?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제발 좀 도와주세요, 잡히기라도 하는 날엔……,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명일: (목소리)아! 꿈이었구나. 신흥: 윽!(배를 움켜쥔다.) 아 배야, 갑자기 왜 이러지? 뭐 먹은 것도 없는데. 화장실, 화장실……, 크 아퍼, 먹은 거라곤 이것뿐인데,(무언가 떠올라.) 약! 이 약! 개새끼들.(배를 부여잡고 달려 나간다.) 빛 속에 덩그러니 남겨진 약병. 빛이 점점 번져 공간을 환하게 만든다. 밝아지면 테이블에 앉아 있는 신내. 신내: 이 시간이면 항상 이곳을 지나가는데 (두정 등장) 어! 태령 오빠! 두정: (신내의 맞은편에 앉는다.) 왜 불러낸 거야? 신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드릴 게 있어요. 두정: 뭔데 신내: (편지를 건네며) 이거 두정: (받으며) 이게 뭔데? 신내: 나중에 읽어 보세요(얼굴이 붉어진다.) 두정: (읽은 후) 각서……, 야! 지금 너 장난하냐? 신내: 아니에요, 안 빨개요 두정: 이딴 종이 쪼가리를 어떻게 믿어? 신흥 한손에 휴지를 들고 등장, 처절한 소리를 지르며 부리나케 테이블을 지나쳐 반대편으로 사라진다. 신내: 전엔 죄송했어요, 제 말만 하고 멋대로 가버려서. 두정: 죄송하다면 다야? 신내: 예, 그치만 오래 기다리진 않았어요. 두정: 그 말을 어떻게 믿어. 신내: 오빠. 두정: 이제 날 그렇게 부르지 마. 더 이상 난 네 대장이 아니다 신내: 호, 혹시……, 여, 여자친구……, 있으세요. 두정: (단호하게) 없어, 추호도. 난 한번 결정한 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바꾸지 않아. 마음 같아서는 널 죽도록 패주고 싶지만 옛정이 있어 참는다. 신내: 다행이다. 제가 얼마나 조마조마했다고요. 두정: 더 할 말 없으면 나 간다. 훈련중이었거든, 네놈이 그렇게 하찮게 여겼던 그 훈련 말이다. 신내: 그러세요, 예, 가보세요, 편지 꼭 읽어 보시고요, 두정: 두 번 다시 널 만나는 일이 없길 바란다.(각서를 구겨 테이블에 던진다.) 신내: 저도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신내 꾸벅 인사하고는 떠나는 오빠(두정)의 뒷모습을 눈으로 는다. 두정 나간다. 신내는 오빠의 모습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자리를 뜬다. 신흥 허겁지겁 등장, 숨을 곳을 찾는다. 급하게 숨을 곳을 찾고는 몸을 숨긴다. 신흥: (숨을 몰아쉬며) 하필이면 화장실에서 마주칠 건 뭐야, 그나마 나오는 길에 마주쳤기에 망정이지 들어가는 길에 마주치기라도 했어봐. 아유아유 죽겠네.(두정이 버렸던 병을 발견) 뭐야? 새거잖아.(너무나 쉽게 병을 열고는 벌컥벌컥 마시고는 다시 뚜껑을 닫아 제자리에 놓는다.) 햐 시원하다.(허탈하게 웃으며) 안좋은 일만 생기는 것 만은 아니구나.(제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제 인생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요? 아부지 말처럼 어른이 돼버려서 이렇게 된 걸까요? 가장 더럽고……, 후후후.(사이) 네? 어른이 되기 전에요? 글쎄요, 어른이 되기 전이라……. 그러고 보니 제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네요. 그땐 뭐, 다들 그렇겠지만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되고 싶은 것도 많고 그랬는데, 샐러리맨 따위가 될 거라고는 상상이나 했겠어요, 그 때의 저한테 미안한 생각까지 드네요,(사이) 그럼요, 뭐였냐면요……, 막상 말하려니까 쑥스럽네요, 웃지 마세요, 가수예요, 가수 (웃음) 웃기죠? 가수를 꿈꾸던 청년 도망자 되다! (웃음 소리속에 점점 슬픔이 담긴다.) 명일: (초췌한 모습으로 등장) 꿈이었어, 꿈. 연수야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연수야.(컴퓨터를 켠다, 윈도 시작음악) 언제까지 너한테 편지를 쓸 수 있을까? 언제 와서 이 편지 읽어 줄래,(창 뜨는 소리, 몹시 놀란다.) 어, 어! 신흥: 아, 아! (배를 움켜쥐고) 또야? (뛰어 나간다.) 명일: (흥분) 틀림없어요. 그녀가 읽은 거예요. 그녀가 읽은 거라고요! 연수는 살아 있어요. 죽은 사람이 어떻게 메일을 읽어요, 안 그래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죽은 게 아니었던 거예요,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짧은 사이)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신흥: (등장) 지독한 놈들, 왜 화장실 앞에서 죽치고 있는 거야, 아, 미치겠네.(반대쪽으로 달려 나간다.) 명일: 봤죠, 네 봤어요, 근데 제가 본건 사고 나서 실려 가는 것까지였어요, 죽은 연수를 본 건 아니잖아요. 장례식요? 어……, 그건……, 아 그래그래, 필요했던 거예요 장례식이, 연수는 큰 사고를 당했어요, 죽지는 않았겠지만 몸이 성치는 않을 거예요, 왜 그런 것 있잖아요, 영화나 소설 보면 죽은 걸로 하고 숨어서 지내는 거, 그래 그거야, 그거.(짧은 사이) 비약요? 그건 선생님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다시는 여기 오지 않겠어요, 연수가 살아있어요! 제 우울증 따위는 한방에 끝났다고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연수를 데려가지 않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어떤 모습이라도 좋아요 살아 있기만 하다면요, 신흥: (퀭한 얼굴로 등장) 살았다……. 두정: (목소리) 야! 야! 신흥: (소리 나는 쪽을 보며) 젠장! (도망친다.) 두정: (휠체어를 타고 등장. 낮은 목소리로) 거기 서! 뭐 나한테 속이는 거 있지? 틀림없어, 귀신은 속여도 나는 못 속이지. 뭐야? 사실대로 말해봐. 뭐야 대체? 명일: 예? 두정: 뭐라고 했어 지금? 다시 한 번 말해봐. 명일: 몇 번을 얘기해야 알아들으시겠어요, 지금은 연수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짧은 사이) 선생님! 왜 자꾸 그러세요? 선생님은 연수가 살아 있는 게 싫으세요? 비밀 번호를 아는 사람은 연수밖에 없어요, 그런 건 철저한 애였어요, 수신확인이 됐다는 건 연수가 열어 봤단 소리예요. 다른 가능성은 없어요. 두정: 그래 알았어, 너희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거 이해한다. 알았어, 알았어,(짧은 침묵) 잘 가라, 참 그리고 앞으론 문병 같은 거 오지마라, 훈련에만 전념해, 나 들어간다. 명일: 안녕히 계세요. 연수를 찾아봐야겠어요.(나간다.) 두정: (가다 멈춰서) 개자식들! 신흥: (온 몸엔 상처, 옷은 쥐어뜯겨 엉망인 채로 등장) 개새끼들! 두정: 의리 없는 놈들 같으니라고, 내가 이렇게 된지 얼마나 됐다고……, 그 자식을 끌어들여? 신흥: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이렇게 패냐 두정: 씨발, 씨발 씨발,(거친 웃음) 신흥: 아, 진짜 아프다, 돈 몇 푼에 아주 사람을 죽이려고 환장을 했구먼, 도망치지 않았으면 골로 갈 뻔했네.(어이없다는 듯이 웃다가 흐느끼기 시작한다.) 씨발 새끼들, 아부지, 여보, 나 아퍼.(울음소리 점점 커진다.) 두정: 그만해, 그만해!(울먹인다.) 두정과 신흥의 울음소리가 무대를 가득 메운다. 신내 허겁지겁 들어온다. 신내: 뭐하는 거예요 대체,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요 얼른 일어나요 (두정, 신흥 울음을 그친다.) 자 초콜릿 (두정과 신흥 앞에다 놓는다.) 이거 먹으면 힘나거든요, 씹어 먹지 말고 천천히 녹여 먹어요.(사이) 자 가요, 가서 멋지게 1등하고 돌아오면 되잖아요. 그럼 분명 코치님도 기뻐하실 거예요, 얼른 일어나세요. 시간 다 됐어요. 우리 몸도 풀겸, 경기장까지 뛰어 가요! 오케이.(나간다.) 두정, 신흥 꾸역꾸역 자리를 털고 일어나, 신흥은 두정의 자리로, 두정은 신흥의 자리로 간다. 둘은 동시에 바닥에 떨어져 있는 초콜릿을 발견하고 집어든다. 신흥: 아깐 음료수 이번엔 초콜릿? 두정, 신흥: (하늘을 올려다보고 주변을 둘러보고는 다시 초콜릿을 본다.) 뭐야? 둘, 초콜릿을 까서 입에 넣는다. 마법같은 음악 잠깐. 알 수 없는 미소가 둘의 얼굴에 감돈다. 두정, 신흥: 그래, 힘내자, 신흥: 약을 스무 알씩이나 먹고, 그렇게 맞았는데도 안 죽었는대. 두정: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던 거야, 발버둥 쳐 봤자지. 두정, 신흥: 뭔가 길이 있을 거야. 두정: 그렇지? 신흥: 그렇지. 둘, 서로 반대편으로 퇴장, 신내 다른 곳으로 들어온다. 신내: 자! 우리 파이팅하는 거예요! 코치님도 병원에서 틀림없이 우릴 지켜보고 있을 거예요.(몸을 풀며 두리번거린다.) 아직 안 왔어요, 조금 있으면 시작인데 설마 안 오는 건 아니겠죠? (관중석으로 손을 흔들며 웃는다.) 엄마, 아빠 여기, 여기.(사이) 차가 막히나? 설마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 아닐거야. 그래, 그래. 오빤 틀림없이 올 거야. 자! 힘내자 연신내. 멋지게 달려서 일등 하는거야, 알았지? (더욱 열심히 몸을 푼다.) 명일 등장. 신내: 어! 오빠! (명일에게) 여기에요, 여기.(환하게 웃으며 인사) 오빠가 왔어요, 오빠가 왔다고요. 좋았어, 아자아자! 명일: 어디서부터 시작하지? 친구들은 모를 테고, 부모님을 찾아뵈어야 하나? 그래, 일단 아이피 추적부터 해보자, 좋았어, 아자아자! (컴퓨터 앞에 앉는다.) 소리: 여자 800미터 예선전 참가자들은 본부석 쪽으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신내: (오빠 쪽을 향해) 꼭 일등 할게요! (나간다.) 두정 등장, 휠체어를 세우고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 재활운동을 시작한다. 각자의 일에 열심인 두 사람. 명일: 안 되네, 이렇게 하는 게 아닌가? 두정: 헛 둘, 헛 둘. 한참을 하다 지친 둘. 명일: 아, 모르겠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 야? 두정: (숨을 몰아쉬며) 두고 봐 꼭 해내고 말 테니까. 기다려라 에베레스트, 내 네놈을 꼭 밟아주고 말 테다. 소리: 딩동댕동.601호 특실 환자분 면회객이 와 있습니다. 속히 병실로 돌아와 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명일: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어디서 공사하나? 집중을 할 수가 없잖아 집중을. 두정: 면회? 누구지? (휠체어에 오른 후 퇴장.) 명일: 도저히 안되겠다. 누구 컴퓨터 잘하는 사람 없나? 아 그렇지! (휴대전화를 꺼내 건다.) 여보세요? 문정이냐? 응, 나 명일인데·…….(통화하며 나간다.) 나가는 명일과 교차하며 신내 등장. 긴장을 풀기 위해 몸을 턴다. 소리: 여자 800미터 세번째 경기가 시작되겠습니다. 선수들은 입장해주시길 바랍니다. 신내 앞으로 나와 몸을 푼 다음 놓여 있는 병을 들고 마시고는 (두정이 버렸던 병) 출발선에 선다. 소리: 차렷, 준비. 소리2: 거기 서 개새끼야! 소리: (총소리) 탕 출발과 동시에 터지는 응원과 환호성 속에서. 슬로 모션으로 출발하는 신내.“안 서면 죽어!” 소리를 등지고 신흥 슬로로 뛰면서 등장. 신내와 신흥 같은 방향으로 뛴다. 혼신의 힘을 다해 뛰는 두 사람. 신흥이 점점 신내를 따라잡아 이윽고 나란히 뛰게 된다. 신흥이 신내를 앞서가려는 찰나. 신흥의 발이 꼬여 중심을 잃고, 그런 신흥에 걸려, 비명을 지르고 넘어지는 신내. 신흥은 얼른 추스르고 멀리 달아난다. 엎어진 채 그대로 있는 신내에게 빛이 모아진다. 빛은 점점 작아진다. 암전. 다시 서서히 밝아지면 신내의 자리에 서서 홀로 빛을 받고 있는 신흥 신흥: 하하하, 꼴좋다, 내 그럴 줄 알았어. 내가 한번은 잡혀도 두 번은 안 잡힌다! 이래 봬도 왕년에 한달리기 한 사람이야 왜 그러셔.(사이) 그나저나 이제 뭘 어떡해야 하지? 집에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렇게 길거리에서 전전긍긍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약만 안 샀더라도 좀 더 나았을 텐데 (뒤적거려 지갑을 꺼낸다.) 육 만원. 육 만원이라, 이걸 갖고 뭐해……, 인생 허무하다, 나이 서른여덟에 가족 버리고 수중에 딸랑 육 만원 들고서 고민하는 꼴이라니……, 아니다, 아니다. 돈 한푼 없는 것 보다 낫지, 그래 그렇게 생각하자. 육 만원으로 새출발하는 거야! 까짓 인생 대역전이 별거야, 나라고 뭐 육 만원의 신화 만들지 말라는 법 있어? (절규한다.) 젠장, 근데 뭘 하냐구! 세 개의 빛이 동시에 들어온다. 빛 속에 나란히 있는 명일, 신내, 두정, 신흥. 명일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고, 신내, 입 주변이 피에로처럼 초콜릿이 범벅인 채로 무지막지 멍하게 앉아 있다. 두정은 한 곳을 응시한 채 얼어있다. 지하철 환승 멜로디가 경쾌하게 울린다. 소리: 이번 역은 전동차를 갈아타실 수 있는 환승역입니다. 다른 전동차를 이용하실 손님께서는 빠뜨리신 물건이 없나 잘 살펴보시고 다른 열차로 갈아타시길 바랍니다. 넷. 각자의 자리를 떠나 각기 다른 사람이 있던 자리로 이동한다. 두정과 신흥 쪽의 빛이 어두워진다. 명일: 틀림없다니까요, 증거요? 몇 번이나 말씀드려야 돼요, 제가 보낸 메일이 수신 확인이 되어 있었다고요, 왜 그게 증거가 안 되는 건데요, 비밀번호는 연수 말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른다니까요.(사이) 그러니까 한번만 조사해달라는 거예요, 저기요, 무슨 얘긴 줄 알겠는데요, 사망신고가 됐다고 해서 꼭 죽었다고 볼 수는 없잖아요.(사이) 말이면 답니까! 제가 미친놈으로 보입니까? 당신들 시민의 요청을 거절하는거 그거 직무 유기야 알아? 민중의 지팡이라며? 친절봉사라며! 이따위로 일할 거야! (사이) 제발요, 딱 한번만이라도 좋으니까 조사해 주세요. 연수는 살아 있어요, 죽은 사람 살리는 셈치고 아니, 정말로 죽은 사람 살릴 수 있는 일이니까 한번만 도와주세요? 네? 한번만요. 신내: 안 돼! 안 돼! 아무리 초콜릿을 먹어도 나아지지 않아,(흐느낀다.) 마지막 시합이었는데, 다시는 달릴 수 없는데……, 오빠가 보고 있었어, 정말 잘하고 싶었는데……, 끝이야, 전부 끝장나버렸어. 명일: 이대로 끝낼 순 없어. 신내: 코치님 얼굴을 어떻게 보지? 입원하실 정도로 열심이셨는데. 명일: 이젠 뭘 어떡해야 하지? 신내: 이젠 뭘 어떡해야 하지? 모두들 나한테 손가락질할 거야, 부모님도 친구들도 오빠도 모두들 한심하게 생각할 거야. 내가 전부 망쳐버린 거야. 어떡해. 멀리서 신흥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한 손에 낡은 기타를 들고 등장하는 신흥 미친 듯 웃으며 무대를 휘젓고 다닌다. 신흥: 하하하, 이거야 이거! (기타를 튜닝하며 흥얼댄다.) “나는야 돈 한푼 없이 기는 도망자라네 하지만 나에겐 낡은 기타와 노래가 있어 둥기둥가.” 가수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요? 육 만원으로 어떻게 새 삶을 시작할까 고민해 봤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더군요, 이럴 때 의지할 마땅한 친구도 없는 내 자신이 한심했습니다. 갈 곳은 없고 배는 고프고, 그러고 있자니 일단 배라도 채우고 보자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눈에 띄는 포장마차에 들어가 오뎅을 집어 들었습니다. 터진 입술에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한입 베어 물었는데,(웃음) 오백원짜리 오뎅이 그렇게 맛있는 거예요, 사실 길거리에 서서 쩝쩝거리며 먹는 사람들을 보면 손가락질 했었는데……, 아! 이래서들 먹는 거구나, 이해가 되더라고요. 막 세 개째 꼬치를 집어드는데 낯익은 노래가 들려왔어요, 포장마차 앞에 있는 레코드 가게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노래였어요, 렛잇비였는데, 너무 유명해서 촌스럽게까지 느껴졌던 그 노래가 전혀 다르게 들리는 거예요, 길거리 오뎅과 렛잇비, 저한테는 그냥 그저그런 뻔한 것들에 지나지 않았거든요……, 뭐 암튼, 오뎅을 질겅거리며 노래를 들었어요. 렛잇비가 그대로 두라는 뜻이라면서요? 어렸을 때는 왜 그대로 두라는 건지 이해를 못했었는데, 그 순간에 아! 그런 거구나 하고 고개가 끄덕여졌어요 그래서 그길로 곧장 중고 악기상으로 달려가 이놈을 장만했습니다. 지금 제 수중에 있는 거라곤 이 녀석과 단돈 삼천원이 전부입니다. 기타와 삼천원이라 뭔가 고독하기도 하고 낭만적이지 않나요? 그래서 결정했습니다.20년 만에 만들 노래의 제목.“기타와 삼천 원” 하하하, 놀라셨죠? 저도 놀랐습니다 이런 완벽한 제목을 만들어 내다니, 제목부터 뭔가 확 필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명일: 뭐라고요? 다시 한 번만 말씀해 주세요. 신흥: 기타와 삼천원 명일: 설마……. 신내, 신흥 쪽을 바라보다 ‘흑’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려 뛰쳐나간다. 신흥: (신내가 나간 방향에 대고) 놀라시긴……, 노래가 완성되면 여러분은 지금보다 열배는 더 놀라실 겁니다. 명일: 잘 알겠습니다.(사이) 흥신소요? 아닙니다. 그냥 개인적인 일 때문에 찾는 겁니다. 그러니까 서둘러 이사를 간 것 같은 느낌을 받으셨다는 거죠.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신흥: 일단은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만들었던 노래로 시작할 겁니다. 장소는 뭐, 찾아봐야죠, 설마 서울 하늘아래 제가 노래할 만한 곳이 없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부터 저는 가숩니다. 불행한 샐러리맨이 아니라 어릴적 꿈을 이룬 멋진 사람이 된 거죠. 하하하. 자! 그럼 저를 기다리는 무대를 찾으러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신흥, 큰 소리로 웃으며 퇴장, 명일 쪽지와 주소들을 확인하며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두정 휠체어를 타고 등장. 두정: (놀람을 감추며) 웬일이냐? 명일: 여기가 16-28번지 맞죠? 두정: 용케도 올 생각을 했구나. 명일: (떨리는 목소리로) 연수네 집 맞죠? 두정: 다 알고 온 거 아니야? 그런 건 왜 물어. 명일: 저는 연수 남자친구 명일이라고 합니다. 두정: 팀을 맡게 됐다고, 축하한다. 명일: 힘드시겠지만 저도 어렵게 마음먹고 온 것이니 제 얘기 좀 들어주세요. 두정: 너하고 할 얘기 없으니까 그만 가봐. 명일: 그 심정 이해합니다. 하지만……. 두정: 사실대로 말하지, 네 얼굴 두번 다시 안 봤으면 좋겠다. 명일: 잘 알겠습니다. 오늘 이후 찾아뵙는 일은 없을 겁니다. 대신 한 가지만 대답해 주십시오. 두정: 꼴 좋다고 웃고 싶겠지, 웃고 싶으면 웃어. 명일: 연수……, 연수 살아있죠? 네? 두정: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명일: 사실대로 얘기해 주십시오. 사고 이후에도 매일같이 연수에게 메일을 보냈었는데 며칠전 그 메일이 모두 수신 확인이 됐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전에 살던 집에서 이사 하실 때 도망치듯 떠났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연수가 살아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두정: 상상력이 풍부하구먼. 그따위 소리는 집어치워, 보시다시피 난 글러먹었어. 명일: 그렇다면 제가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저는 연수 찾는 걸 포기하지 못합니다. 두정: 내가 그런 소리를 했던가? 그래 그런 말을 했겠지……, 하지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달라. 상황 탓, 환경 탓 하는 게 아니야, 현실이 그렇다는 거지. 네 놈이 그런 말을 하는 저의를 모르겠다. 더 이상 널 마주하고 얘기하고 싶지 않다. 조심해서 가라.(나가려 한다.) 명일: 거짓말……, 거짓말이죠? 그럴 리 없어, 저를 포기하게 하려고 하는 얘기죠? 그렇죠? 두정: (멈춰서서 혼잣말로) 고결한 자만이 에베레스트에 오를 수 있다·……, 고결한 자라…….(쓴웃음) 에베레스트. 그런 게 있기는 한 걸까 (나간다.) 명일: (절망적으로) 잘 알겠습니다, 폐를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나가려다 멈춰서서) 연수야……, 너 정말 없는 거야? 명일이 나가자마자, 박수 소리와 함께 현란한 조명이 무대를 훑는다. 무대 중앙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선글라스를 쓴 신흥이 기타를 들고 마이크 앞에 서 있다. 신흥: 여러분 감사합니다. 다음에 들려드릴 곡은 지금의 저를 있게한 바로 그 노래입니다.20년 전 그러니까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가수의 꿈을 가득 품고 며칠 밤을 새우며 코피를 쏟아가면서 만든 노래입니다. 제 입으로 말하기는 쑥스럽지만, 좋은 노래는 세월이 흐를수록 그 가치를 더해간다는 얘기가 있죠, 그게 바로 이 곡을 두고 한 얘기란 걸 요즘 들어 새삼 느끼게 됩니다. 자 그럼 눈을 감고 제 목소리에 취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목은 “빌어먹을 인생.” 신흥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단조롭고 유치한 느낌의 멜로디. 신흥: 인생이란 무엇일까 인생이란 무엇일까 그것이 뭔지 몰라도,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 산다는 건 무엇일까 산다는 건 무엇일까 각각의 빛을 받으며 세 사람 나타난다. 약통을 들고 있는 명일, 휠체어 위의 두정, 경기 중에 쓰러져 있는 신내. 신흥: 그것이 뭔지 몰라도 신내: 이건 아니야, 명일, 두정: 이건 아니야 신흥: 목적도 모른 채 공부를 하고, 의지와 상관없이 순위가 매겨지고 누구의 인생인데, 내 삶의 주인은 대체 누구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모두: 이건 아니야. 간주. 두정 굳은 표정으로 한곳만 응시하며 생각에 잠겨있다. 명일: 전부 제 착각이었습니다. 여동생이 혹시나 하고 비밀번호를 쳤는데 열렸대요, 계정을 없앤다고 그러더군요, 그렇다고 앞으로는 메일 보내지 말라고……, 근데 비밀번호가 뭐였는지 아세요? ‘엠, 와이, 유, 엔, 지, 아이, 엘’이었대요. 명일, 제 이름이었어요.(허탈하게 웃는다.) 연수야 조금만 기다려 내가 갈게.(약병을 바라본다.) 신내: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어떡하지, 일어날 수가 없어, 오빠, 엄마, 아빠, 코치님……. 일어나 달려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아요, 모두들 저만 바라보고 있겠죠, 고개를 들 수 없어요, 너무 무서워요. 신흥: 이른 아침, 아니 그건 해도 안 뜬 새벽이야. 흔들어 깨우며 하시는 말씀, 얼른 일어나, 얼른 일어나. 늦은 밤에, 아니 그건 달도 지는 새벽이야 지친 나에게 하시는 말씀, 공부 하다 자, 공부 하다 자, 조금만 더 자고 싶어요 제발. 잠도 못 자가며 난 무얼 하는 걸까. 누구의 인생인데, 내 삶의 주인은 대체 누구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 간주. 명일 결심한 듯 약을 꺼내 털어 넣는다. 신내는 여전히 그대로 엎드린 채다. 등이 들썩거린다. 두정, 휠체어에 브레이크를 걸고 수건을 감은 숟가락을 꺼내 입에 문다. 명일 쓰러진다. 두정, 있는 힘껏 일어나려 하지만 바닥에 쓰러지고 만다. 온힘을 다해 일어나려 한다. 신흥: 귓가에 맴도는 어머니 말씀. 일어나, 일어나, 어서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다 너를 위해 하는 말이야 인생이란 다 그런 거야, 좋은 말로 할 때 어서 일어나,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 신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한다, 일어나려고 애쓰는 두정 신흥: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명일 갑자기 일어나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간다. 명일: 아 배야! 눈물을 흘리며 일어난 신내, 이를 앙다물고 슬로로 뛰기 시작한다, 두정 간신히 몸을 지탱해 휠체어에 오른다. 신흥을 제외한 나머지 빛이 사라진다. 신흥: 인생이란 그런 거야 이유는 없어, 모두들 다 그렇게 살아 일어나, 일어나. 얼른 일어나서 밥 먹고 학교가 빌어먹을! 일어나, 어서 일어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기쁨에 차 인사를 하다가 갑자기 표정이 굳는다.) 여, 여보……. 무대 밝아진다. 신흥 머뭇거리는 사이 신내 천천히 등장한다. 신내: 오빠 신흥: 여, 여보 신내: 어쩐 일이세요? 신흥: 당신이 어떻게 여길……. 신내: 잘 왔어요, 그렇지 않아도 할말 있었는데. 신흥: 그러니까……, 그게 신내: 아무 말 마세요, 부탁이에요, 제가 얘기할 테니 듣기만 하세요. 신흥: 미안해, 정말 미안해. 신내: 사실 저 오빠 좋아했었어요, 하지만 이제 아니에요. 신흥: 그게 무슨 소리야? 신내: 말 그대로예요, 이젠 오빠를 좋아하지 않아요. 신흥: 여보, 그러지 마, 제발, 응? 내가 잘못했어, 내가 죽일 놈이야. 신내: 고마워요, 진작 얘기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정말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저 꼴찌해서 이런 거 아니에요. 정말 오빠에 대한 마음이 식어 버려서 그런 거예요. 신흥: 내 뭐든 할 테니까, 제발 죽는다는 소리는 말아줘, 부탁이야. 신내: 그러지 마세요, 오빠답지 않아요. 신흥: 난 이미 끝난 놈이지만, 당신하고 우리 창신이 수진이는 아니잖아. 남편, 아버지 잘못 만난 죄밖에 없잖아, 여보, 그러니까 그런 소리 두번 다시 하지마. 신내: 괜찮아요? (사이) 저요? 보세요 전 아무렇지 않아요. 신흥: 많이 생각해 봤는데 그 방법밖에 없는 것 같아. 신내: 그래요, 그렇게 해요. 신흥: 이혼하면 놈들도 더는 못 괴롭힐 거야, 자리잡히는 대로 연락할게, 당분간은 어렵겠지만 생활비랑 애들 교육비는 최대한 노력해 볼게. 어떻게든 아빠 노릇은 하도록 할게. 미안해 여보. 신내: 그럼 저 이만 가볼게요, 오빠도 조심해서 가세요. 안녕……, 안녕.(자리를 옮긴다.) 신흥: 놈들이 위치추적을 해서 전화기 못쓰니까, 내가 연락할게. 신내: 오빠도 제가 좋대요, 우습죠? 기껏 마음 정리했는데 고백을 받다니……, 조금만 빨리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괜찮아요, 저,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무렇지도…….(사이) 저 끝까지 달렸어요, 포기할까도 생각했었는데, 그 순간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어요,“일어나, 일어나! 어서 일어나서 레이스를 마쳐!” 목소리를 따라 나도 모르게 일어나서 다시 달리기 시작했어요, 사실 그 이후엔 아무 생각도 안나요, 어떻게 결승점을 통과 했는지, 어떻게 집으로 돌아 왔는지……. 정신이 들고 보니까 제 방에 덩그러니 앉아 초콜릿을 잔뜩 쌓아놓고 먹고 있더라고요, 그러다 우연히 거울을 봤는데 눈은 너무 울어서 퉁퉁 부어 있고, 입 주변은 초콜릿이 번져서 피에로처럼 되어 있더라고요, 순간 그 모습이 너무 우스워서 깔깔대고 웃어버렸어요, 한참을 그렇게 웃고 있는데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 왔어요,“일어나, 일어나! 어서 일어나서 레이스를 마쳐!” 눈을 감고 목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해서 들어 봤어요, 자세히 들어 보니까 제 목소리더라고요, 자기 목소리를 녹음해서 들어 보면 처음엔 자기 목소린 줄 모르잖아요, 그런 것과 비슷한 거였어요, 조금 익숙해지니까 알겠더라고요, 제 목소리인지. 신흥: 그랬어? 그거 다행이네. 알았어 그러니까 그렇게 하자고.(사이) 내 걱정은 하지마, 당신하고 애들이 힘들지 나야 뭐……. 그만 가봐, 수일내로 전화할게, 조심해서 들어가고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든다.) 여보! (사이) 아, 아니야. 애들한테 안부 전해줘.(사이. 혼잣말로) 잘 살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평소에 안해 버릇해서 힘드네. 신내: 근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경기는 이미 끝나버렸는데, 레이스를 마치라니,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그게 무슨 뜻일까 하고,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신흥: 자! 이젠 나의 무대를 찾아가 볼까,(기타에게) 가자 로시난테, 갈 길이 멀다. 서두르지 않으면 날이 저문다고.(나간다.) 신내: 800미터 경기는 트랙을 2바퀴 도는 거예요, 작전도 중요하긴 하지만 페이스 조절과 순간의 판단력이 그 어떤 종목보다 중요해요, 처음부터 너무 빨리 달려도 안 되고 페이스 조절한다고 천천히 출발해도 안 되죠, 작전대로 달리다가도 상황에 따라 작전을 포기하고 감으로 스퍼트하는 경우도 많고요. 생각해 봤어요, 나는 지금 어디쯤 달리고 있을까.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달려온 것보다 달려야 할 트랙이 더 많이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낸다.) 알람이네요. 저 이제 그만 가봐야 해요, 중요한 일이 있거든요.(나간다.) 텅 빈 무대. 멀리서 전동차가 다가오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로 들려온다. 소리는 멈추지 않고 무대를 가로지른 후 점점 멀어져 간다. 두정 훈련복 차림으로 빈 휠체어를 끌고 등장한다. 휠체어를 세우고 한두 걸음 떨어져 선다. 두정: (휠체어에 대고) 너한테는 안 된 일이지만, 위로해 주고 싶은 맘은 추호도 없다. 잔인하게 들려도 할 수 없어. 다 네 잘못이야, 한 번 더 점검했어야지, 한 번 더 살폈어야지. 그 정신 상태로 에베레스트에 올랐다면 너 때문에 동료들 모두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어, 너 이렇게 된 거, 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목숨과 다리를 바꿨다고 생각해, 어찌 보면 이렇게 된 거 너한테는 축복일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를 한두 번 본 게 아닌 인생 선배로서 하는 얘기니까 귀담아 듣는 게 좋아, 휠체어 생활도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야, 괜히 재활한다고 힘 낭비하지 말고 그 다리에 적응하는 편이 나을 거다. 나같이 바른 말을 하는 선배를 만난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라고. 이제 가봐야겠다, 돌아가서 합숙 준비를 해야 하거든, 들어가서 한 숨 자는 게 어때? (휠체어를 밀고 나간다.)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와 함께 두정이 나간 반대편에서 피골이 상접한 명일이 다리 힘이 풀린 채로 등장 명일: 이렇게, 이렇게 죽는 건가……. 정말 특이한 약이야. 고통스럽냐고 물었을 때 왜 그런 웃음을 지었는지 이해가 돼.(힘없는 웃음) 왜 죽으려고 했는지, 죽기로 결심한 내가 원망스러워지다니……, 아픈 배를 감싸고 변기 위에 앉아 있자니 살려달라는 말이 절로 나오더군요, 그러다 알게 됐어요, 연수를 잃었을 때보다 변기 위에서 더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요.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는데 웃음이 나왔어요, 눈물은 줄줄 흐르고 웃음은 멈추지 않고, 아래도 멈추지 않고 (힘없는 웃음) 제가 연수를 사랑하지 않았던 걸까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는데, 배가 아프기 전까지만 해도 더 이상 아픈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걸까요? 멀리서 호루라기 소리 명일: 저 새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까요? (고개를 숙인다.) 서로 다른 곳에서 나오는 신흥, 신내, 휠체어 탄 두정. 각자 자리를 잡고 선다. 네 사람: 요 며칠 정말 힘들었어요. 세상에서 버려져, 혼자 어딘가에 버려진 것 같은 느낌, 세상의 모든 불행이 한꺼번에 나한테 달려든 것 같은 느낌, 빠져나오려 하면 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진흙 구덩이에 빠진 것 같았죠. 두정, 신흥: 왜 하필 나야? 명일, 신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네 사람: 속으로 원망도 하고 고래고래 소리도 질러 봤습니다. 근데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당연한 얘기죠, 고민하고 소리 질러서 일이 해결 된다면 이 세상에 힘든 사람은 한 명도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신흥: (큰 목소리로) 가수가 되기로요! 두정, 명일: (바로 이어) 받아들이기로요 신내: (이어서) 다시 달리기로요. 네 사람: 많이 겁나고 솔직히 자신 없기도 하지만 어쩌겠어요? 일어나야죠, 신흥: (노래한다) 일어나, 일어나, 어서 일어나 네 사람: 변하는 건 하나 없지만 그렇다고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두정: 저, 결국 에베레스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휠체어를 뒤로 돌리자 자동차 번호판 모양의 판에 ‘에베레스트’라고 쓰여 있다.) 썰렁했나요? 지하철이 들어온다고 알리는 방송이 나온다. 지하철이 다가오는 소리, 멈추는 소리, 문 여는 소리. 모두 한발씩 앞으로 자리를 옮긴다. 다시. 따사로운 봄볕, 아련한 음악. 그리고……. 명일, 고개를 숙인 채 힘없는 걸음으로 어디론가 걸어간다. 신내, 힘찬 걸음으로 어디론가 걸어간다. 두정,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어디론가 간다. 신흥, 기타를 정성껏 보듬으며 어디론가 간다, 다시 명일이 등장했다 사라진다. 다음엔 신흥, 신내, 두정 차례로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그들은 서로 인식하지 못한 채,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어느새, 각자 자리를 잡고 서 있는 네 사람. 모두들 잠시 망설이다. 각자 어딘가를 향해 이야기한다. 네 사람: (동시에) 저기……. 암전. 어둠 속에서 신흥의 목소리 신흥: (목소리) 드디어 완성했습니다.‘빌어먹을 인생’을 이을 평생의 역작.‘기타와 삼천원’ 조명을 받으며 멋지게 등장한 신흥. 노래한다. 신흥: 옛날 어느 시골 마을에 가수를 꿈꾸는 소년이 살았다네 매일 밤 꿈속에서 노래하던 소년은 매일이 너무나 행복했다네 그러나 어느 샌가 소년은 노래하는 꿈을 꾸지 않게 되었네 그렇게,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갔다네. 서울 하늘 아래 어딘가 가수를 꿈꿨던 남자가 살고 있다네 꿈을 잊은 채로 살아가던 남자는 하루가 너무나 힘들었다네 그러나 어느 순간 갑자기 노래하던 꿈을 떠올렸다네 그렇게,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갔다네 아, 가진 건 사랑스런 기타와 단 돈 삼천 원뿐이지만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네, 아, 가진 걸 모두 잃어 남은 것 하나 없어 불행하지만 나에겐 기타와 삼천원 있네, 기타와 삼천원, 기타와 삼천원. 기타와 삼천원, 기타와 삼천원. 세상에 내 것이 하나 없어도, 노래를 할 수 있어 행복하다네, 기타와 삼천원, 기타와 삼천원, 기타와 삼천원 있어 너무 행복하다네. 너무 행복하다네. 박수 소리에 몇 번이고 감사의 인사를 하던 신흥, 키스를 날리며 퇴장한다. 무대 한쪽에서 연수, 차분한 걸음으로 등장 어디론가 걸어간다. 태령, 꽃다발을 들고 환한 얼굴로 등장, 어디론가 걸어간다. 약장수, 전화기를 들고 등장, 상대가 받지 않는지 계속 버튼을 눌러대다가 퇴장한다. 다시 연수가 등장했다 사라진다. 다음엔 약장수, 태령, 차례로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그들은 서로 인식하지 못한 채,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어느새, 각자 자리를 잡고 서 있는 세사람. 연수: 그 사람을 처음 만난 건 약장수: 종로 5가입니다. 태령: 어찌 할 바를 모르겠더군요. 연수: 환하게 웃는 모습이 너무 멋졌어요. 약장수: 주로 자살하려는 사람들이 고객이죠. 혹시 필요하신가요? 태령: 네, 그녀를 사랑했거든요. 연수: 사랑했어요, 그래서 많이 미안했고요, 혼자 남겨두고 떠나서 약장수: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습니다. 태령: 그녀는 떠났지만 전 아직 그녀를 떠나보내지 않았습니다. 연수: 이제 떠날 거예요, 명일씨를 놓아주려고요, 마음속에서 서서히 사라질 거예요. 약장수: 그 약을 먹게 되면 죽을 각오로 살게 되죠, 태령: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우선은 열심히 달리는 신내를 뒤에서 지켜보는 것부터 시작하고요 연수: 뒤에서 지켜본다는 거 그리 쉽지 많은 않더라고요, 많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는 것이……. 약장수: 그것이 문제죠, 부작용이 너무 심해요, 설사가 장난 아니거든요,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되네요, 하하하. 세 사람 모두 정지. 두정이 휠체어를 밀고 들어온다. 무대 중앙에 휠체어를 놓고 나간다. 휠체어 홀로 빛을 받는다. 휠체어: 전 에베레스틉니다. 제 주인님이 붙여준 이름이에요, 전 어디를 가나 주인님과 함께 하죠,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고나 할까요. 늘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주인님이 제게 이름을 붙여주고 난 뒤로 가끔이긴 하지만 웃는 모습을 보이시더라고요, 저는 그래서 제 이름이 좋습니다. 지하철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휠체어: 지하철이 왔네요, 못다한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죠, 저는 지금 지하철을 갈아타야 하거든요. 경쾌한 음악과 함께 암전. ■ 등장인물 명일(25세, 대학생) 신내(18세, 고등학생, 육상부) 두정(32세, 산악인) 신흥(38세, 샐러리맨)
  • 한수원 본사 경주 양북면 장항리 이전 확정

    한수원 본사 경주 양북면 장항리 이전 확정

    한국수력원자력(이하 한수원) 본사 이전지역이 경북 경주시 양북면 장항리로 최종 결정됐다. 한수원은 29일 이 같은 내용의 본사 이전부지 확정내용을 발표하고 경주시에 해당지역을 토지거래 허가구역으로 지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한수원은 장항리의 경우 ▲경주시가 이전 후보지로 최초 추천한 곳이며 ▲인근에 월성원전 1∼4호기와 방폐장 및 신월성원전 1,2호가 가동 또는 건설 예정인 원자력 시설이 밀집된 지역이라는 점 ▲동해안에 접해 도심 접근성이 편리하다는 점 등을 선정이유로 밝혔다. 한수원은 경주지역 주민들의 반발여론을 감안해 본사에 근무하는 직원들의 사택부지는 경주 시내권에서 물색하기로 했다. 내년 초부터 부지매입과 문화재 지표조사 등에 착수할 계획이다. ●동경주 주민 “장항리 이전은 순리” 한수원 본사 이전지가 장항리로 최종 결정되자 그동안 치열한 유치전을 벌여온 동경주(양북·양남면, 감포읍)주민들과 시내 도심권 주민간에는 환호와 반발이 교차했다. 집과 사무실 등에서 확정 소식을 접한 양북면을 비롯한 동경주 주민들은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도 불구, 시위의 주무대였던 양북면사무소로 몰려 나와 일제히 환호하며 기쁨을 나눴다. 주민 시위와 농성을 이끌었던 배칠용(53)‘방폐장 유치확정에 따른 지역대책위’ 집행위원장은 “장항리 이전은 순리”라면서 “이제는 도심권과의 갈등을 씻고 경주지역 전체의 발전과 화합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에 ‘경주도심위기대책 범시민연대’최태랑 공동대표는 “이번 결정은 한수원 본사 도심권 유치를 희망하는 경주의 26만여 다수 민의를 완전히 무시한 처사”라며 반발했다. 최 대표는 “오늘 중 대책위원 긴급회의를 소집해 헌법소원 등 구체적 대응책을 마련하겠다.”면서 “방폐장 반납 등 동원 가능한 모든 방법이 포함될 것”이라고 말해 앞으로 상당한 후유증이 우려된다. 백상승 경주시장은 “한수원의 최종 결정은 동경주와 시내권 모두 만족스럽지 못한 면이 있지만 마땅히 수용해야 한다.”면서 “다만 한수원 관련 기업의 동반이전이 불투명한 만큼 이들 기업이 모두 경주로 이전해 경제적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경찰, 불법행위 주민 사법처리 방침 한수원의 본사 이전 공식 발표를 위한 기자회견은 노조원들의 거센 반발로 무산됐다. 이중재 사장은 이날 오전 10시 서울 삼성동 본사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본사 이전지역을 발표할 계획이었으나 이전부지 선정에 반대하는 노조원 50∼60여명과 심한 언쟁을 벌이다가 실신, 병원으로 후송됐다. 이 바람에 기자회견은 취소됐으며 회사측은 보도자료를 통해 본사이전 사실을 발표했다. 한편 경북지방경찰청은 한수원 이전 과정에서 불법행위를 한 주민들을 사법 처리키로 했다. 이날까지 불법행위를 한 47명 중 6명을 입건하고 41명에 대해 출석요구서를 발송했다. 대구 김상화 서울 안미현기자 shkim@seoul.co.kr
  • [이건호의 뷰티풀 샷] 크루즈룩 연출하기

    [이건호의 뷰티풀 샷] 크루즈룩 연출하기

    ‘퀸메리호를 아시나요’ 1930년대부터 영국과 미국을 운항하던 정기여객선이다. 당시 그 유명한 타이타닉호보다 더 컸던 초호화 유람선이기도 했다. 하지만 항공기의 등장과 채산성의 악화로 결국엔 2차대전 이후 현역에서 은퇴한 후 현재 미국 LA남부 롱비치에 과거의 영화를 뒤로한 채 선상호텔과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2005년 6월호 ‘W지’의 화보촬영은 이곳 퀸메리호의 선상에서 이루어졌다. 해마다 6월 즈음이면 크루즈룩을 주제로 화보를 기획한다. 여름 휴가철을 앞두고 매년 진행되는 단골메뉴이다. 좀더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던 중 1930년대를 주제로 한 크루즈룩의 진행을 기획하고 영화 타이타닉을 상상하며 퀸메리호를 촬영장소로 정했다. 막상 도착한 퀸메리호는 그 공간이 생각보다 광대해서 선뜻 촬영장소를 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정작 객실은 너무도 협소해서 1등실조차 촬영하기가 여의치가 않았고, 반면에 항해사실과 선장의 침실, 응접실, 체육관 등은 이를 발견하고 환호하는 필자의 기대를 저버리는 촬영불가지역이었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미국에서는 60여년이 된 시설들이 역사적 가치가 높은 귀중한 사료로 대접받는 것이 얼핏 당혹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사유재산조차도 정부에 의해서 소중히 유지보존되는 것을 보고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아무튼 LA에 방문계획이 있으신 분이라면 그리멀지 않은 곳이니 한번쯤은 타이타닉의 로맨스를 상상해 보는 것도 좋을 듯. 특히 실내 수영장에서 보여주는 유령쇼는 유치하지만 즐거운 경험이다. 촬영장은 아르데코풍의 선내외의 각 곳과 기관실 조타실 등에서 이루어졌다. 사진에서 보듯 의상은 대부분 가벼운 드레스를 위주로 선택하였고, 간편한 일상복과 수영복이 추가되었다.30년대풍을 재현하기 위해서 메이크업에 특별히 신경을 썼는데 진한 아이메이크업과 가늘게 표현된 눈썹 조그맣고 어두운 색상의 입술 등으로 분위기를 강조하였다. 일부 자연광을 이용한 촬영이었기 때문에 메인조명은 HMI(주광과 비슷한 색온도를 가진 인공지속광)를 사용하였고 느린 셔터속도를 이용, 자연스러운 흔들림으로 깊이감을 표현하였다. 패션사진의 경우 때로는 사진촬영의 보편적인 방법과는 정반대의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색다른 표현을 시도한다. 예를 들면 부분적으로 초점이 안 맞게 하든지, 느린 셔터를 이용한 흔들림이라든지, 정상적이지 않은 화학처리를 한다든지 하는 것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번 촬영에서도 부분적으로 초점을 흐트러지게 함과 동시에 저속셔터의 기법을 사용하였다. 이와 함께 후반작업에서 세피아색감의 모노톤으로 색상을 처리해 오래된 흑백사진의 느낌을 표현하고자 했다. 사진작가
  • [2006 희망 키우는 아이들] (8) 전남대병원 소아암병동학교

    [2006 희망 키우는 아이들] (8) 전남대병원 소아암병동학교

    “와!방학이다.” 소아암과 싸우고 있는 소아암 병동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전남대병원이 지난 9월28일 문을 연 ‘여미사랑학교’ 학생들이 오는 30일 겨울방학을 맞는다. 악몽의 터널을 빠져 나와 완치의 문턱까지 온 아이들의 입에서는 방학을 맞은 기쁨에 대한 환호성이 넘쳤지만 볼 위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여미사랑학교’의 전교생은 초등학생 11명, 중학생 13명 등 모두 24명. 이들의 교육을 위해 특별히 파견나온 선생님은 3명이다. 방학이지만 아이들이 외래진료를 받으러 오는 화요일에는 교실 문을 연다. 학교입학이 허용된 학생들은 병원 7층 소아암 입원실에서 골수이식 수술이나 항암치료를 받고 상태가 호전된 환자들이다. 아이들은 2주에 1번씩 외래진료를 받는다. 피 검사, 항암제 투여, 척추 주사 등을 맞는 데 2∼3시간이 걸린다. 기다리는 사이사이에 수업을 받는다. ●링거 달고 살지만 수업은 꼬박꼬박 책가방을 들기조차 버겁기에 교실에는 책상과 의자, 컴퓨터·교과서·참고서 등이 준비돼 있다. 교실벽에 걸려 있는 아이들이 그린 그림 6점에는 너나 할 것 없이 건강한 사람 얼굴이 그려져 있다. 자신들의 장래 모습인 것 같다는 게 김재란(51) 교사의 설명이다. 화순 오성초등학교에서 파견나온 김 교사는 “함께 공부하던 두 아이가 잇따라 하늘나라로 갔을 때는 정말 힘들었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아이들은 수업일수 3분의1을 채워야 유급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너무 아파서 70일을 결석한 영철이(가명·13)는 유급됐다.5학년으로 올라가지 못했다며 한동안 눈물을 쏟다가 토닥거리는 선생님 손길에 표정이 금세 환해졌다. 달래(가명·8·초등1년)는 지난 2월 입원한 뒤 항암치료를 10번이나 받았다. 그래도 “2번만 더 치료를 받으면 내년에 캠프에 갈 수 있다.”며 밝게 웃었다. 공주(가명·16·중2년)는 “골수 이식 수술 뒤 휴학계를 냈는데 다행히 여미학교가 생겨 장래 희망인 교사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며 좋아했다. ●“항암치료 끝내면 캠프도 갈 수 있대요” 이들이 거쳐온 소아암병동 입원실에는 젖먹이부터 중학생까지 16명이 서로 의지하면서 지낸다. 가족이 따로 없다. 아이들이라 병실도 의외로 소란스럽다. 보호자들도 애써 이런 분위기를 즐긴다. 창백하고 가냘픈 양손목에 링거 주사기를 달고 사는 아이들 앞에서 엄마는 독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항암치료 후유증으로 구토증과 울렁증을 호소할 때면 눈가에 이슬이 절로 맺힌다. 종민(가명·12·초등5년)이는 몸이 좋아지면 목사가 되려고 한다. 고열이 나면서 고통을 호소하는 만성육아종으로 5년 동안 입원과 통원치료를 반복중이다. 손자 걱정에 눈물마저 말라버린 할머니를 오히려 위로했다.6살 때부터 악성빈혈로 치료를 받았지만 학업성적 1등을 놓치지 않은 은경이(가명·11·초등4년)는 골수이식 수술을 받은 뒤 ‘1등’의 욕심을 접었다. 하지만 학교에 나오면 아픈 몸을 부여안고 기어코 1시간 이상 컴퓨터로 화상강의를 듣는 독한 아이다. 백희조(소아과) 교수는 “소아암에는 급성림프구성 백혈병이 가장 많고 2∼3년은 치료해야 한다.”며 “그러나 장기 치료기간 중 입원은 길어야 4개월이고 나머지는 2주에 1번씩 통원치료를 한다.”고 말했다. 광주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기쁘다♪ 축구산타 오셨네~

    시를 좋아하는 중학교 1학년 허혜린(13)양.2년 전 급성골수백혈병이 발병했다. 가족 나들이도 자주 할 수 없었다. 몸은 아프지만 시인이 되고 싶은 꿈은 늘 간직하고 있다. 틈틈이 써놨던 시를 모아 지난해 시집을 내기도 했다.25일 ‘홍명보장학재단과 함께 하는 자선축구경기’(이하 홍명보 자선경기)가 열린 수원월드컵경기장 스카이박스에서 두꺼운 털모자와 마스크를 쓴 혜린이를 만났다. 혜린이는 “TV로만 보다가 이렇게 직접 경기장에 나오니까 정말 기분이 좋다.”면서 “홍명보 선수를 제일 좋아한다.”고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2003년 시작해 올해로 4회를 맞은 ‘홍명보 자선경기’는 한국 축구에서 ‘사랑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축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매년 입장수익, 후원금, 중계료 등으로 약 2억원의 기금을 모아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백혈병과 소아암을 앓고 있는 어린이와 소년·소녀 가장에게 사랑과 희망의 손길을 건네 왔다. 예전엔 경기가 있는 날이면 동장군이 기승을 부렸으나, 이날 만큼은 날씨가 포근했다. 혹 동장군이 찾아왔더라도 41명의 스타와 7500여 관중이 뿜어내는 열기로 추위를 몰랐을 터. 소아암과 백혈병을 앓고 있는 어린이와 그 가족 등 60명이 스카이박스에서 사랑의 향연이 열리고 있는 그라운드에 시선을 고정했고, 소년·소녀 가장 등 가정 형편이 어려운 어린이 200여명도 자리를 함께 했다. 경기 시작 30분 전 산타클로스와 다양한 동물 캐릭터로 꾸민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나와 사인볼을 전달하자, 열기가 한껏 고조됐다.2003년 소아암 판정을 받았다가 홍명보장학재단의 지원으로 골수이식수술을 받아 건강해진 윤다희(12)양의 시축으로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아름다운’ 경기가 시작됐다. 오랜 만에 선수로 뛴 사랑팀 황선홍(전남 코치)을 시작으로 골이 터질 때마다 환호성이 이어졌다. 선수들 얼굴에는 웃음이 넘쳤고, 겸연쩍은 실수에도 아낌없는 박수가 쏟아졌다. 한국 테니스의 간판 이형택과 유도 ‘한판승의 사나이’ 이원희도 후반 교체투입돼 발재간을 자랑했다. 특히 이형택이 사랑팀의 3번째 골을 어시스트하자, 이원희는 희망팀에 네번째 골을 안겼다. 이후에도 주변의 도움(?)을 얻어 이형택이 결승골을 포함해 2골을, 이원희는 한골을 더 보탰다. 최강희 전북 감독이 사령탑을 맡은 사랑팀이 허정무 전남 감독이 지휘한 희망팀을 6-5로 이겼다. 이날 공동 최우수선수(MVP)로 뽑힌 이형택과 이원희는 “뜻 깊은 자리에 함께 해 정말 기쁘고 즐거웠다.”면서 “앞으로도 어린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일에 힘을 모으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옥에 티도 있었다. 앞서 이천수가 개인사정으로 나오지 못한 데 이어 ‘반지의 제왕’ 안정환과 김정우도 산타 변신이 불발돼 팬들이 섭섭해 했다.수원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사설] 女핸드볼 감독 우승 답례가 실직인가

    여자핸드볼 국가대표팀의 강태구 감독이 직장에서 쫓겨나게 생겼다. 소속팀인 부산시설관리공단으로부터 새해 재계약불가 통보를 받았다. 부산시의 긴축재정 방침으로 감독·코치 대신 코치 1인 체제로 바꾸기로 한 데 따른 조치라고 한다. 프로화 경력이 꽤 된 야구 축구 농구가 초라한 성적을 거둔 가운데, 아시안게임 5연패를 일군 여자 핸드볼팀에 온 국민이 환호한 게 불과 얼마 전이다. 금메달 팀의 수장에 대한 보답치고 너무 가혹하다. 핸드볼은 이른바 비인기 종목이다. 여자팀은 불과 6개뿐이다. 하지만 선수들은 열악한 조건에서도 불꽃 같은 투혼으로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때마다 조국에 승리의 기쁨을, 국민에겐 감동을 선사해 왔다. 연장전까지 가는 사투 끝에 은메달을 목에 걸었던 지난 올림픽때의 모습은 지금도 진한 감동으로 남아 있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도 아줌마들의 투혼이 국내외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이들의 대우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고졸 연봉이 1800만원 수준이고, 대졸도 2000만원 남짓이라고 한다.10년을 뛰어야 3000만원이 안 된다. 감독도 낮은 연봉에 계약직이다. 대우는 아마추어, 계약방식은 프로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야구 축구 농구 등 프로 선수들은 이제 억대 연봉이 자연스럽다. 다년 계약에 연봉 10억원이 넘는 선수가 나오는 실정이다. 이에 비하면, 핸드볼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협회차원에서 강 감독 구제방안을 검토하길 당부한다. 아울러 대기업이 비인기 종목의 지원에 참여하는 방안을 강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장난감 병정’ 박강성 22~23일 송년 디너쇼

    ‘장난감 병정’ 박강성 22~23일 송년 디너쇼

    지난 9월23일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 대강당. 복도에까지 의자를 놓아야 할만큼 관객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가운데,300여개에 달하는 빨간 막대풍선이 일사불란하게 율동을 벌인다. 마치 아이들 스타의 공연장을 방불케 한다. 박수와 환호과 교차하고, 열기는 장내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막대풍선을 흔드는 사람들이 30∼40대 ‘아줌마 부대’라는 것. 이날 공연의 주인공은 가수 박강성이었다. 자신의 대표곡인 ‘장난감 병정’처럼 단단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어딘가 짙은 페이소스가 느껴지는 가수다. 공연마다 특유의 무대 장악력과 뛰어난 가창력으로 ‘미사리의 서태지’라고 불리는 그가 올 연말에 서울 쉐라톤 워커힐 호텔에서 송년 디너쇼를 연다. 특급호텔에서 열리는 송년 디너쇼가 나훈아, 패티 김 등 기라성 같은 대형가수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전례로 볼 때, 가벼이 넘길 일은 아니다. 널리 알려진 히트곡도 많지 않고,TV 등에서도 자주 볼 수 없었던 그가 요즘 만들어가고 있는 현상들을 보면 적잖이 놀랍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공연때마다 거의 예외없이 입장권 매진 행렬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 지난 2003년 3월 서울 대학로 콘서트에서 시작된 입장권 매진사태는 올해 개런티 6억원을 받고 시작한 ‘세가지 소원’ 공연에서도 어김없이 이어졌다. 비싼 좌석부터 매진되는 것도 이채롭다. 가까운 곳에서 그를 느끼려는 관객들이 많다는 뜻이다. 이번 송년 디너쇼의 경우도 40대 여성 예매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고 주최측은 전했다. 통상 송년 디너쇼의 경우 20∼30대가 표를 사서 부모님께 선물하는 것이 일반적. 콘서트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40대 여성이 직접 표를 산다는 것은 이들이 열성적인 팬이라는 얘기다. 박강성은 1982년 MBC ‘신인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가요계에 얼굴을 내밀었다.89년 히트곡 ‘장난감 병정’으로 이름을 조금 알리는가 싶더니, 3∼4집의 연이은 실패로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가수가 된 게 슬펐어요. 꿈도 잃었고요. 먹고 살기 위해 술집에서 노래를 불러야 하는 현실이 죽기보다 싫었죠.” 그가 다시 일어선 것은 95년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얼마나 찾았는지 아세요’라고 쓴 한 팬의 메모를 보면서부터.“나를 사랑하고, 나로 인해 위로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단지 그들이 고통스런 현실에 가려져 있었을 뿐이었던 거죠.” 그는 요즘 행복하다. 인기도 인기지만, 무엇보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되찾았기 때문이다.“내년쯤에 50년대 음악들을 재즈와 트로트, 팝 등으로 재해석한 앨범들을 내놓을 예정이에요. 여태 한번도 기획되지 않은 시도죠. 새로운 앨범도 준비하고 있어요.10곡 정도 새노래를 담을 겁니다. 타이틀 곡 한두개만 신경쓰는 것이 아니라 앨범 전체를 완성도 높게 만들어야죠. 음반시장이 열악한 상황에서 음반제작에 투자하는 것이 모험이기는 하지만, 가수라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대중은 민감하다. 준비되지 못한 채 무대에 오르는 가수와, 치열한 음악적 성찰을 통해 소양을 갖추고 무대에 오르는 가수를 분명하게 구분해 낸다.“정말 잘할 자신이 있어요. 좋은 노래를 담아내는 방법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요. 노래를 부를 때 제 목숨까지 걸 겁니다.”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2006 희망 키우는 아이들] (2) 한글문화학교 몽골 어린이들

    [2006 희망 키우는 아이들] (2) 한글문화학교 몽골 어린이들

    “우∼와, 다 맞았어. 다 맞았어!” 14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정동의 한글문화학교에는 몽골 아이들의 해맑은 환호성이 울려퍼졌다. 수학 문제집에 빨간 동그라미가 커다랗게 그려지는 순간 몽골 소녀 유정(가명·13·초등학교 4년)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수업을 맡은 정재은(26·여) 선생님이 “방학 때부터 유정이는 5학년 수학 문제집을 풀어도 되겠다.”며 머리를 쓰다듬자 유정이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퍼졌다. 수업에 지각한 춘식(14)이가 덩달아 들떠서 “선생님, 저도 채점이요!”라고 서둘다가 “넌 늦었으니 순서를 기다려야지.”라는 핀잔을 듣고 뾰루퉁한 표정을 짓는다. ●두 평 남짓한 교실에는 아이들의 희망 가득 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은 한국에 온 지 1년이 채 안된 몽골 아이들. 두 평 남짓한 교실에는 몽골 아이들 서너명이 짝을 이뤄 방과후 수업을 듣는다. 몽골인 중 경제 사정이 안 좋은 가정의 아이들이 많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생기가 넘쳤다. 유정이의 꿈은 가수가 되는 것.“한국 말을 열심히 배워서 좋은 직업을 갖고 싶어요. 아빠도 건강하게 해드리고 엄마한테 효도할 거예요. 엄마는 제가 수학을 잘 하니까 의사가 되었으면 하는데 친구 수연(가명·11·여)이랑 가수가 되기로 약속을 했어요.” 그러나 마냥 신나 보이던 수학 만점 유정이에게도 아픔은 있다. 몽골에 계신 아빠가 4살 때 말을 타다 떨어져 다리를 제대로 못 움직인다. 유정이는 돈을 벌기 위해 2000년 한국으로 와 봉제공으로 일하고 있는 엄마를 찾아 지난해 10월 왔다. 좁은 지하방이나 친구들의 놀림보다 힘든 것은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다. 옆에 있던 수연이는 아유미의 ‘큐티허니’를 잘 부른다면서 “나중에 꼭 가수가 되어서 이승기(가수)를 만날 것”이라며 깔깔거렸다. 수학을 못해 선생님에게 자주 야단맞지만 주눅드는 기색이 없다. 수학 문제를 몽골어로 중얼거리더니 “여기선 마음대로 말해도 되니까 좋아요.”라며 연신 웃음을 지었다.“일반학교에서는 한국 친구들이 하는 말을 몇 번 못 알아들었더니 애들이 말도 안 걸어주고 안 놀아줘서 친구가 없어요.” ●“한국말 열심히 배워서 효도할래요” 올 4월 한국으로 왔다는 진아(가명·11)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왜 그러냐.”는 질문에 “그런 얘기는 하기 싫다.”며 고개를 돌렸다. 진아의 사정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진아는 돈을 벌러 한국으로 온 부모와 3살 때 헤어지고 할머니와 살아야 했다. 한국에 와서 가장 좋았던 것이 “엄마·아빠의 얼굴을 처음으로 본 것”이란다. 엄마·아빠와 오래토록 이곳에서 살 수 있을지 걱정이라는 진아는 벌써 어른이 다 된 듯했다. “좋아하는 과목이 뭐냐.”는 질문을 하자 수학, 영어, 체육, 컴퓨터를 줄줄이 꼽으며 “수학 선생님이나 어린이집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꿈을 펼쳐 보였다.“학교에서 아이를 가르치는 일은 너무 재미있고 좋을 것 같아요. 애들을 돌보면서 좋은 선생님이 될 거예요.” 정 선생님은 “처음 이곳에 올 때는 활달했던 아이들이 한국 학교에 다니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내성적으로 변한다.”면서 “커서 뭐가 될 거냐고 물으면 의사나 교수 등을 꼽던 아이들이 나중에는 ‘돈만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고 한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그래도 아이들이 고생하는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어른스럽고, 수업을 적극적으로 듣는다.”면서 “아이들이 한국에서 자신이 원하는 꿈을 이뤘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글문화학교는 한글문화학교는 2003년 외국인들을 위한 한글학교로 출발해 지난해 9월 ‘이주노동자 자녀들을 위한 정동한글문화학교’로 문을 열었다. 정동 제일교회가 운영하는 이 학교에는 상근 선생님 6명이 60여명의 아이들을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6개월 과정으로 한글을 가르친다. 방과후 오후 6시까지 영어·수학·피아노도 배울 수 있다. 지금까지 한 해 100∼200여명의 아이들이 이 학교를 거쳐갔다. 서재희기자 s123@seoul.co.kr
  • “현 상황에선 김정일이 최선”

    |워싱턴 이도운특파원|현재의 북한 상황에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최선의 선택일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미국 방위대학의 마이크 마잘 국가안보전략 담당 교수는 12일 한·미경제연구소(KEI)를 통해 발간한 ‘김정일의 전략과 심리학’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북한의 군부 소장파들이 강경하게 나갈 가능성이 있으며, 그같은 위험을 완화시키려면 김 위원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마잘 교수는 북한의 최고지도자인 김 위원장이 이성과 논리가 통하지 않는 괴퍅한 독재자로 인식돼 왔지만 이런 평가와 달리 북한체제의 약점을 잘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마잘 교수는 김 위원장이 행사장에서 환호하는 군중들의 모습을 보며 납북된 영화감독 신상옥씨에게 “나는 바보가 아니다. 이것은 거짓 쇼”라고 말한 사실을 들어 “김정일은 광적인 이념가가 아니라 고집 센 생존자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마잘 교수는 김 위원장이 측근들을 장악하는 방안으로 선물을 주거나 호탕하게 술을 마시는 것은 유교적 측면에서는 부하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독특한 방식이라고 주장했다. 마잘 교수는 또 김 위원장이 2000년 당시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북한의 미사일 프로그램에 대한 10여개 질문에 거침없이 답변한 점을 들어 그가 구체적인 통치행위에도 긴밀히 개입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따라서 미국이 북핵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군사적 억지력을 유지하면서도 진지하고 실질적으로 대북 포용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한편, 보수적인 싱크탱크인 허드슨연구소의 리처드 와이츠 선임연구원은 미국이 이라크에서 군사적으로 실패할 경우 이미 핵무기 개발을 선언한 북한의 벼랑끝 전술을 더욱 부추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와이츠 연구원은 이날 주미대사관 홍보원이 주최한 ‘이라크 사태가 동아시아에 미치는 의미’라는 제목의 특강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와이츠 연구원은 “미군의 이라크 침공 초기 김정일은 6주 동안 지하벙커에 숨어 지내는 등 무척 긴장된 반응을 보였다.”고 말했다.dawn@seoul.co.kr
  • 칠레 독재자 피노체트 사망… 군중들 환호·애도 엇갈려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대통령과 함께 냉전 시대 중남미의 좌·우파 양대 독재자로 각각 군림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전 칠레 대통령이 10일 산티아고의 군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했다. 지난주 심장병 악화로 수술을 받은 뒤 회복하지 못했다.91세.●사망·실종 4197명 수만명 망명생활 1990년 권좌에서 물러나기까지 17년 동안 피노체트 권력이 휘두른 고문과 살인 등 각종 인권유린을 단죄하기 위해 노력해온 인권단체들의 노력도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1973년 9월11일(공교롭게도 미국 9·11테러 발생과 같은 날이다.) 피노체트 당시 군 사령관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 유혈 쿠데타를 일으킨 뒤 정치적 이유로 사망한 사람은 3197명, 실종자는 1000여명이나 됐다. 수만명이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나중엔 부인과 가족들의 탈세혐의 등 경제범죄까지 추가됐다. 피노체트 사망 소식이 전해진 뒤 수천명의 군중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피노체트 만세’를 외치며 장엄하게 국가를 부르는 지지자들과,‘군부독재의 종말’ 피켓을 들고 춤을 추며 ‘축하행진’을 하는 반대자들. 극명하게 대립된 평가를 그대로 투영했다. 지지자들은 그를 ‘냉전 시대의 영웅’이라고 했다. 공산체제의 굴레를 벗겨내고 붕괴 직전의 칠레 경제를 살린, 그래서 남미 경제 전체의 안정화 주춧돌을 놓은 위대한 지도자란 것이다. 1973년 피노체트는 남미 공산주의 수출에 카스트로와 손을 맞잡고 나선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을 쿠데타로 축출했다. 당시 군사령관이었던 그는 대통령궁에 폭탄 세례를 퍼부었고, 아옌데는 그의 친구 카스트로가 선물한 총으로 자살했다. 칠레 국민들은 쿠데타 직후 산티아고 축구장이 정치범들의 구금과 고문의 장소로 사용되는 모습을 목격하기 시작했고 이후 17년 인권유린은 계속됐다. 쿠데타는 남미 공산세력 확산 저지에 나섰던 미국 CIA의 지원을 받았다. 이날 토니 프렛 미 백악관 대변인은 “피노체트 독재는 이 나라 역사에서 가장 힘든 시절 중 하나다. 오늘 우리의 생각은 피노체트 집권기간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과 함께한다.”는 말로 과거를 비켜 나갔다.●정식재판 회부도 못하고 심장死 피노체트에 대한 국제 사회의 평가는 엄격하다. 칠레 정치사에 깊이 연루된 스페인의 좌익 및 우익 정당들은 그가 인권유린 사건으로 처벌되기 전 사망했다는 데 유감을 표하고 “유혈 독재자의 사망에 결코 아쉬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논평했다. 피노체트는 1990년 퇴임 후 스페인 정부와 인권단체의 기소로 수차례 가택연금을 당하기는 했으나 고령으로 인한 건강 등의 이유로 정식 재판에 회부되지 않고 모두 피해나갔다. 그는 자신의 행위가 공산주의에 대한 ‘십자군 전쟁’이었다며 스스로를 ‘천사’로 부르기도 했다.민정이 들어선 뒤, 이뤄진 조사에서 쿠데타 직후 1개의 관에 2구의 시신을 함께 넣고 매장한 사실도 드러났다. 이에 대해 그는 “공간을 아끼지 위한 적절한 조치”라고 강변했다. 죽음이 임박한 지난달 91회 생일때 “집권 기간에 일어난 모든일에 대해 정치적인 책임이 있다.”고만 했을 뿐이다. 19일 치러지는 피노체트의 장례는 전직 대통령 사망시 치러지는 국장(國葬)의 예우를 현 정부로부터 받지 못한다. 중도 좌파인 미첼 발레트 대통령의 아버지는 피노체트 집권 시절 옥사했고, 발레트 대통령 역시 고문을 받았다. 피노체트는 화장될 것으로 알려졌다. 피노체트의 아들 마르코 안토니오는 “아버지는 정적들에 의해 무덤이 파헤쳐지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김수정기자 외신 종합 crystal@seoul.co.kr
  • 세계를 웃긴 ‘유쾌한 입담’

    ‘모범생’‘주사’‘기름장어’ 등의 별명을 갖고 있는 반기문 차기 사무총장이 지난 8일(현지시간) 유엔 출입기자단(UNCA)이 주최한 송년 만찬에 참석,‘파격적인’ 연설과 유머로 국제사회에 새 면모를 과시했다. 오는 14일 제 8대 유엔 사무총장 취임 선서를 앞두고 있는 반 차기 총장의 이 같은 색다른 모습에 대해 유엔 외교가는 그동안 ‘무(無) 카리스마’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씻어내는 효과를 봤다는 평가를 보내고 있다. 반 차기 총장은 이날 뉴욕 맨해튼 유엔본부에서 유엔 출입기자단과 외교사절들이 참석한 가운데, 그동안 공식 외교 무대에선 거의 드러내지 않았던 특유의 개그성 입담을 선보였다. 유엔개혁 의지를 담은 크리스마스 캐럴 개사곡까지 불렀다. 빌 클린턴 전 미 대통령에 이어 연단에 오른 반 차기 총장은 반과 본드의 발음이 비슷한 것에 착안,“내 이름은 ‘반’이지 ‘제임스 본드’가 아니다.”면서 “나는 007이 아니지만 아침 07시에 사무실에 나오고 7주의 인수인계 기간을 가지고 있다.”며 좌중의 웃음을 이끌어 냈다. 그는 서울과 뉴욕에서 얻은 별명 즉,‘기름장어’,‘테프론 외교관’이란 별명이 “내가 원한다면 비밀요원처럼 능란하게 당신들을 현혹시킬 수 있다는 뜻”이라면서 “그러나 앞으로 나의 행동은 절대 미끈거리지 않을 것이며 ‘언행일치’를 좌우명으로 삼아 사무총장의 역할을 수행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파격의 압권은 ‘산타클로스 이즈 커밍 투 타운(Santa Claus is coming to town)’이란 크리스마스 캐럴을 ‘반기문 이즈 커밍 투 타운(Ban Ki Moon is coming to town)’으로 개사, 직접 부른 것. 서툰 솜씨였지만 큰 환호를 받았다. 특히 개작 가사 중 “나는 리스트를 만들어 두 번씩 확인하고, 누가 개구쟁이고 누가 착한 아이인지 찾아내지”라는 구절의 경우 강력한 사무국 개혁 의지를 표명했다는 해석이 대두되기도 했다. 이날 UNCA 송년 만찬에는 반 장관과 유순택 여사, 아난 사무총장 내외, 빌 클린턴 전 미 대통령, 각국 외교사절, 출입기자 등 370여명이 참석했으며 클린턴 전 대통령은 UNCA가 주는 세계시민상을 받았다. 한편 뉴욕타임스는 9일자 1개면을 할애, 반 차기총장의 성장과정과 한국에서의 관료생활, 인물 면면을 집중 소개했다.뉴욕타임스는 반 차기총장이 총회 수락연설에서 겸손함을 단호함과 열정 부족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지만, 반 장관의 이력과 스타일로 볼 때 현재로선 ‘장군(General)’형보다는 ‘비서(Secretary)’형으로 예측된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10년 전 코피 아난 사무총장도 비서로 불렸지만 퇴임 시점에선 장군형으로 불렸다.”고 우회적으로 반 차기총장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다.김수정기자 뉴욕 연합뉴스 crystal@seoul.co.kr
  • [2006 도하 아시안게임] 축구 남북 8강전

    이번에는 북한 남자축구가 ‘도하의 기적’을 일궈내 4강 길목에서 남북대결이 펼쳐지게 됐다. 도하의 기적이란 미국월드컵 아시아 예선 최종전에서 이라크가 일본과 종료 직전 극적으로 무승부를 연출하는 바람에 한국이 본선에 나가게 된 사건을 가리킨다.1993년 10월 카타르 도하 스포츠클럽에서 벌어진 최종전에서 한국은 북한을 3-0으로 눌렀다.그러나 경기 종료 후 선수들은 일본이 후반 막판까지 이라크에 2-1로 앞서 있다는 소식에 망연자실했다. 그러다 종료 17초를 남기고 이라크가 동점골을 뽑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풀 죽어 있던 한국 선수들이 펄쩍펄쩍 뛰며 환호했던 일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7일 같은 장소에서 열린 도하아시안게임 예선 최종전에서 북한이 일본을 2-1로 누르고 8강에 극적으로 합류, 한국과 10일 새벽 1시 알 라얀 경기장에서 격돌한다. 아시안게임에서 남북대결은 1978년 방콕대회에서 무승부로 공동우승한 이후 28년만이다. 이정만 북한 감독은 “불행히도 결승이 아니라 8강에서 남조선과 만났다.”며 “최근 대결에서 우리가 좋은 경기를 했고 이번에도 비슷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역대 전적에서 한국이 5승3무1패로 앞서있다. 가뜩이나 시원치 않은 전력에 남북대결이라는 부담까지 떠안게 된 핌 베어벡 한국대표팀 감독은 “우리 선수들에게 남북 대결의 정치적 의미나 배경을 주지시키지 않아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누드 브리핑] 구청장들 앞다퉈 ‘시장님 찬가’ 왜?

    김효겸 관악구청장이 직원 워크숍에서 보여준 엄청난 주량과 메들리 노래 실력이 ‘전설’로 남게 됐습니다. 자치구를 순회중인 오세훈 서울시장을 향한 구청들의 ‘애교공세’가 도가 지나치다는 지적도 화제에 올랐습니다.●관악구청장의 엄청난 음주가무 실력 김효겸 관악구청장이 직원 워크숍에서 보인 ‘엄청난’ 술과 노래실력이 두고두고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말 우수부서 직원 50여명이 경기도 여주 남한강으로 워크숍을 떠났는데요. 김 구청장이 주말을 이용, 격려 방문했답니다. 저녁 회식시간이 돌아오자 직원들은 바짝 긴장했습니다. 구청장이 애로사항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라고 독려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답니다. 결국 김 구청장이 ‘특단의 조치’를 내렸습니다. 소주잔을 들고 직원 한 명, 한 명에게 잔을 돌리며 분위기를 이끌었습니다. 직원들도 서서히 마음을 풀고 구청장에게 소주잔을 건넸습니다. 수십 잔이 오갔는데도 김 구청장은 끄덕 없었답니다. 오히려 직원들이 얘기하는 애로사항을 꼼꼼히 메모하고 챙길 정도였답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기분 좋게 취한 김 구청장이 노래 메들리를 시작했지요.‘모정의 세월’‘원점’‘과거는 흘러갔다’‘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등 7곡이 이어졌습니다. 일부 직원들은 백댄서를 자처하며 흥을 돋웠습니다. 조용필에 버금가는 환호성을 받으면서 ‘아쉽게’무대를 내려왔다고 하네요.워크숍에 참석한 한 직원은 “어색한 자리를 구청장님이 유쾌하고 재미있게 만들어 주셨다.”고 말했습니다.●숙원사업 호소에 애교 만발 요즘 오세훈 서울시장이 자치구를 순회 방문하면서 구정보고를 받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구청장들은 예산부족 등을 이유로 미루고 있는 숙원사업을 나열하면서 지원을 요청합니다. 실제로 하나쯤은 해결이 되고요. 사정이 이러다 보니 오 시장에게 ‘어필’을 하려고 기발한 ‘이쁜 짓’이 등장하곤 합니다. 지난 4일 강북구를 방문했을 때입니다. 애교 섞인 현수막이 줄줄이 걸렸습니다.‘시장님은 우리의 오아시스’‘오세훈 파워+삼각산 정기’‘수수께끼를 풀 사람은 바로 오세훈’‘운도 기적도 믿지 않는다. 오세훈 시장만 믿을 뿐’ 등등 입니다. 순발력이 돋보이게 구정 현안을 보여주는 영상물도 제작했는데, 마지막 장면에서는 어린이 합창단이 등장해 지원을 호소하는 내용의 노래를 부른 뒤 ‘오세훈 시장님 사랑해요.’를 합창했다고 합니다. 평소 쇼맨십이 뛰어나다는 평을 듣는 김현풍 구청장도 보고회에 참석한 공무원과 주민 대표에게 연신 오 시장을 격려하는 박수를 청하면서 분위기를 띄웠습니다. 시장을 향한 자치구의 애교공세가 너무 과열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입니다.시청팀
  • [문화마당] ‘영향력’있는 허구속 인물들/여건종 숙명여대 영문학과 교수

    최근 미국에서는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허구속 인물의 순위가 발표된 책이 출간되어 화제가 되었다. 책의 제목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101명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로,“신화와 전설과 TV와 영화의 인물들이 어떻게 우리 사회를 형성하고, 우리의 행동을 변화시켰으며 역사의 진로를 설정했는가?”라는 거창한 부제가 달려 있다. 서구 문화권을 중심으로 선정된 것이어서 더러는 처음 듣는 이름들도 있으나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한 이름들이 이 리스트의 상위를 차지했다. 전직 의사, 컴퓨터 프로그래머, 과학 기술 저술가인 저자들은 각각의 리스트에 선정이유를 밝히는 짧은 에세이를 수록하고 있는데,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숫자, 그리고 영향이 얼마나 깊었는가가 선정 기준이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가상 인물 리스트에서 1위의 영광은 미국의 담배회사 필립 모리스의 말보로 담배 광고에 등장하는 말보로 맨이 차지했다. 수상 이유는 전세계 수백만명의 사람들을 암으로 사망하게 한, 지난 200여 년간 가장 악명 높은 살인자라는 것이다. 카우보이 모자를 눌러쓴 채 담배를 물고 거친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는 이 사나이 중의 사나이의 모습에서 이상적 남성의 전형을 찾은 많은 남자들이 그 대가로 일찍 이 세상을 하직했다.2위를 차지한 빅 브라더는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정치적 전체주의의 상징이다. 선정이유는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정치체제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기 때문이다. 자유와 풍요를 상징하는 신자유주의의 중심, 미국과 빅 브라더의 친연성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상당한 수준의 풍자이다. 오늘의 미국 사회가 시장 전체주의의 징후를 보인다는 점에서 이 풍자는 우리에게 하나의 경고로 들린다. 그것은 이 책이 순위 매기기 좋아하는 미국사람들의 호사가적 관심을 넘어서 어떤 종류의 문명비판을 지향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산타 클로스는 매년 4·4분기 미국 경제를 지배한 공로로 4위에 올랐고, 인형 바비(43위)는 도저히 달성할 수 없는 미의 기준을 세운 죄로,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 새끼(55위)는 아름다움을 인간의 가장 고귀한 속성으로 강조함으로써 인류의 99%에게 모욕을 준 죄로, 신데렐라(26위)는 이혼이 보편화된 시대에 계모들을 멸시하고 사람들을 마법에 의존하게 만든 죄로 선정의 영광을 안았다. 사람들은 흔히 이야기가 현실을 모방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현실이 이야기를 모방한다. 이야기가 먼저 있고 현실은 그것을 모델로 구성된다. 우리는 이야기라는 틀을 통해서만 현실을 보고 알 수 있다. 이 이야기 속에 다양한 인물들이 살고 있다. 정신 분석학에 의하면 인간은 원래 어떤 충동과 욕망과 에너지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 생물적 존재를 정치적·문화적 존재로 만드는 것은 이야기 속의 인물들을 닮고 싶고, 그것이 되고 싶은 욕망이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자아 이상이라고 불렀다. 이 자아 이상과 닮아 가는 과정에서 태어나는 것이 ‘나’라는 존재이다.‘나’는 수많은 자아 이상들이 축적되어 형성되는 어떤 것이다. 우리는 이 자아 이상을 만났을 때 환호에 차서 소리친다.“저것이 바로 나구나.” 내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역동적인 과정, 하나의 축복이다. 따라서 이야기와 그 안에 살고 있는 인물들은 우리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살 만한 것으로 만드는 상징적 자원이다. 말보로 맨은 많은 사람들을 고통 속에 죽어가게 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목숨을 걸고 담배를 피우게 만든 말보로 맨의 그 흡인력을 인정한다. 우리에게는 이야기가 있고 그 안에는 멋있고 재미있는 인물들이 살고 있다. 다시 한 번 삶을 긍정해 본다. 여건종 숙명여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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