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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밀화 추상화…간송미술문화재단 ‘화훼영모… ’展

    세밀화 추상화…간송미술문화재단 ‘화훼영모… ’展

    ‘내 지금 생물을 바라보며 하늘의 마음을 보았노라.’(我今觀物見天心) 조선 전기의 뛰어난 문장가인 매계(梅溪) 조위(曺偉)의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우리 선조들은 꽃과 새, 곤충과 물고기들을 자연의 일부인 동시에 우주 만물의 섭리가 함축된 존재로 인식했다. 보고, 기르고, 나아가 글과 그림으로 옮겨 내면서 자연과 생명의 오묘한 이치를 터득하고 자신의 성정을 함양하고자 했다.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수장 작품 중에서 동식물을 소재로 한 전통 회화작품들을 시기별로 선별해 ‘화훼영모-자연을 품다’전을 서울 동대문 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고 있다. 화훼영모(花卉翎毛)란 꽃과 풀, 날짐승과 길짐승을 가리킨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에서 1년에 두번씩 열던 소장품전을 DDP 개관과 함께 대중 속으로 들여온 뒤 여는 다섯 번째 기획전으로, 그림을 통해 시대 정신과 기법의 차이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는 오세창 선생이 화첩으로 만들어 소장하던 고려 공민왕(1330~1374)의 ‘이양도’(二羊圖)부터 조선왕조 말기의 이도영(1884~1933)이 그린 ‘백령식록’(百齡食祿)까지 550년의 기간 동안 각 시기를 대표하는 거장들의 작품 90여점이 출품됐다. 한국민족미술연구소 백인산 연구실장은 “선조들은 동식물들을 통해 도덕적 이상과 더불어 무병장수나 입신출세, 부귀영화 등과 같은 현세적 욕망을 담아내곤 했다”며 “시대별 화법의 변화와 각 소재들이 담고 있는 상징, 문화적 코드를 맞춰 가며 읽으면 더욱 재미있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고려 말 조선 초 주자성리학의 도입과 정착 시기에는 중국 남방 화풍의 강한 영향을 감지할 수 있다. 출품작 중 김안로의 막내아들 김시(1524~1593)가 그린 ‘야우한와’(野牛閒臥)에서 보듯이 배경은 우리 산수지만 소는 남중국의 물소다. 주자와 송설이 남중국 출신이라는 점과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다. 16세기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조선성리학을 이뤄내면서 그림에도 진경산수화가 출현하고 화훼영모화의 소재로 우리 주변의 동식물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화훼영모화는 진경시대에 이르러 겸재 정선(1676~1759)에 의해 독자적 사생 기법이 완성되고 현재 심사정(1707~1769)이 시도한 조선남종화풍으로의 반전을 거쳐 조선 고유색이 다양한 형태로 극대화된다. 패랭이꽃이 피어 있고 참개구리와 나비가 모여든 한여름의 오이밭 풍경을 담은 ‘과전전계’(瓜田田鷄·오이밭의 참개구리)는 진경산수화의 대가 정선이 70대 후반에 그린 그림이다. 겸재풍의 사생 기법을 계승한 변상벽(1730~1775), 김홍도(1745~1806), 김득신(1754~1822)에 의해 절정에 이른다. 표암 강세황(1713~1791),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청조문인화풍의 함축된 생략 기법을 화훼영모에 도입했다. 조선 말기에 이르면 문화 노쇠 현상과 맞물려 사생력이 후퇴하고, 화려하고 장식적인 측면이 부각된다. 옛사람들은 진흙 속에서도 화사한 꽃을 피우는 연을 보고 세속에 물들지 않는 고고한 군자를 떠올렸다. 시서화 삼절로 명성이 높았던 강세황의 ‘향원익청’(香遠益淸·향기는 멀수록 맑다)은 두 포기의 연으로 청정한 자태를 담아냈다. 화훼영모화가 인기 있었던 이유는 사물들이 지닌 의미에 빗대 많은 메시지를 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잉어는 등용문을 뜻하니 과거에 급제해 출사하라는 뜻을, 모란은 부귀영화를 기원하는 등 문화적 의미를 지닌다. 김홍도의 ‘황묘농접’(黃猫蝶·노란 고양이가 나비를 놀리다)은 화창한 봄날 뜰에 있던 주황빛 고양이가 패랭이꽃을 보고 날아든 검푸른 제비나비를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다. 평화로운 전원 풍경을 담은 이 그림에는 ‘일흔, 여든이 되도록 청춘을 누리며 뜻하는 대로 이뤄지소서’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전시는 내년 3월 27일까지. (02)2153-0608.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간송문화재단 동식물 소재 동양화 걸작 선보인다

    간송문화재단 동식물 소재 동양화 걸작 선보인다

     ‘내 지금 생물을 바라보며 하늘의 마음을 보았노라.’(我今觀物見天心)  조선 전기의 뛰어난 문장가인 매계(梅溪) 조위(曺偉)의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우리 선조들은 꽃과 새, 곤충과 물고기들을 자연의 일부인 동시에 우주 만물의 섭리가 함축된 존재로 인식했다. 보고, 기르고, 나아가 글과 그림으로 옮겨 내면서 자연과 생명의 오묘한 이치를 터득하고 자신의 성정을 함양하고자 했다.  간송문화재단이 수장 작품 중에서 동식물을 소재로 한 전통 회화작품들을 시기별로 선별해 ‘화훼영모-자연을 품다’전을 서울 동대문 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고 있다. 화훼영모(花卉翎毛)란 꽃과 풀, 날짐승과 길짐승을 가리킨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에서 1년에 두번씩 열던 소장품전을 DDP 개관과 함께 대중 속으로 들여온 뒤 여는 다섯 번째 기획전으로, 그림을 통해 시대 정신과 기법의 차이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는 오세창 선생이 화첩으로 만들어 소장하던 고려 공민왕(1330~1374)의 ‘이양도’(二羊圖)부터 조선왕조 말기의 이도영(1884~1933)이 그린 ‘백령식록’(百齡食祿)까지 550년의 기간 동안 각 시기를 대표하는 거장들의 작품 90여점이 출품됐다.  한국민족미술연구소 백인산 연구실장은 “선조들은 동식물들을 통해 도덕적 이상과 더불어 무병장수나 입신출세, 부귀영화 등과 같은 현세적 욕망을 담아내곤 했다”며 “시대별 화법의 변화와 각 소재들이 담고 있는 상징, 문화적 코드를 맞춰 가며 읽으면 더욱 재미있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고려 말 조선 초 주자성리학의 도입과 정착 시기에는 중국 남방 화풍의 강한 영향을 감지할 수 있다. 출품작 중 김안로의 막내아들 김시(1524~1593)가 그린 ‘야우한와’(野牛閒臥)에서 보듯이 배경은 우리 산수지만 소는 남중국의 물소다. 주자와 송설이 남중국 출신이라는 점과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다. 16세기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조선성리학을 이뤄내면서 그림에도 진경산수화가 출현하고 화훼영모화의 소재로 우리 주변의 동식물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화훼영모화는 진경시대에 이르러 겸재 정선(1676~1759)에 의해 독자적 사생 기법이 완성되고 현재 심사정(1707~1769)이 시도한 조선남종화풍으로의 반전을 거쳐 조선 고유색이 다양한 형태로 극대화된다. 패랭이꽃이 피어 있고 참개구리와 나비가 모여든 한여름의 오이밭 풍경을 담은 ‘과전전계’(瓜田田鷄·오이밭의 참개구리)는 진경산수화의 대가 정선이 70대 후반에 그린 그림이다. 겸재풍의 사생 기법을 계승한 변상벽(1730~1775), 김홍도(1745~1806), 김득신(1754~1822)에 의해 절정에 이른다. 표암 강세황(1713~1791),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청조문인화풍의 함축된 생략 기법을 화훼영모에 도입했다. 조선 말기에 이르면 문화 노쇠 현상과 맞물려 사생력이 후퇴하고, 화려하고 장식적인 측면이 부각된다.  옛사람들은 진흙 속에서도 화사한 꽃을 피우는 연을 보고 세속에 물들지 않는 고고한 군자를 떠올렸다. 시서화 삼절로 명성이 높았던 강세황의 ‘향원익청’(香遠益淸·향기는 멀수록 맑다)은 두 포기의 연으로 청정한 자태를 담아냈다. 화훼영모화가 인기 있었던 이유는 사물들이 지닌 의미에 빗대 많은 메시지를 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잉어는 등용문을 뜻하니 과거에 급제해 출사하라는 뜻을, 모란은 부귀영화를 기원하는 등 문화적 의미를 지닌다. 김홍도의 ‘황묘농접’(黃猫弄蝶·노란 고양이가 나비를 놀리다)은 화창한 봄날 뜰에 있던 주황빛 고양이가 패랭이꽃을 보고 날아든 검푸른 제비나비를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다. 평화로운 전원 풍경을 담은 이 그림에는 ‘일흔, 여든이 되도록 청춘을 누리며 뜻하는 대로 이뤄지소서’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전시는 내년 3월 27일까지. (02)2153-0608.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꽃과 여인의 화가’ 천경자 세상과 조용한 이별

    ‘꽃과 여인의 화가’ 천경자 세상과 조용한 이별

    사망설이 꾸준히 제기됐던 천경자 화백이 지난 8월 91세를 일기로 미국에서 사망했으며 천 화백의 딸 이혜선(70·미국 거주)씨가 유골함을 들고 기증 작품이 전시된 서울시립미술관을 방문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대한민국예술원은 22일 오후 “예술원 회원인 천 화백이 지난 8월 6일 사망한 사실을 확인했다”며 “고인의 명복을 빌며 후속 행정조치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서울시립미술관 관계자에 따르면 이씨는 지난 8월 19일 서울시를 통해 미술관에 협조 요청을 하고 이튿날인 20일 천 화백의 그림이 전시된 상설전시실과 수장고를 다녀갔다. 1998년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미국 뉴욕으로 떠났던 천 화백은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진 후 거동을 하지 못해 뉴욕 맨해튼에 있는 큰딸 이씨의 간호를 받아 왔다. 장기간 병석에 있던 천 화백은 지난해 11월 추수감사절 이후 몸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졌으며 지난 8월 6일 새벽 의사가 보는 가운데 숨을 거둔 것으로 전해졌다. 천 화백의 시신은 화장했고 뉴욕 성당에서 장례를 치른 것으로 알려졌다. 딸 이씨는 외부와의 접촉을 끊은 천 화백이 의식은 있는 상태라고 주장해 왔지만 미술계에선 천 화백이 길게는 10여년 전 이미 사망한 게 아니냐는 등 추측성 소문이 무성했다. 2013년 이씨는 천 화백이 서울시에 기증한 작품이 관리 소홀로 훼손됐다며 기증 작품을 모두 반환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대한민국예술원이 회원인 천 화백의 근황이 확인되지 않는다며 월 180만원의 수당 지급을 잠정 중단하자 이에 반발해 탈퇴서를 제출했다. 한 예술원 회원은 “사망설이 꾸준히 제기되는 상태에서 유가족이 천 화백의 사망 사실을 즉각 알리지 않고 감춘 것은 뭔가 꺼림칙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며 “고인의 명예를 생각할 때 참으로 안타깝다”고 말했다. 1924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천 화백은 유복한 어린 시절을 거쳐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 때 혼담을 피해 일본 유학을 떠나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여인의 한(恨)과 환상, 꿈과 고독을 화려한 원색의 한국화로 그려 1960~1980년대 국내 화단에서 여류 화가로는 보기 드물게 자신의 화풍을 개척했고 문화예술계 전반에서 폭넓게 활동했던 ‘스타’ 화가였다. 꽃과 여인의 화가로 이름을 날렸지만 ‘미인도’를 둘러싸고 1991년 일어난 위작 시비에 말려 심적 충격 속에 절필을 선언한 바 있다. 그의 작품에는 여인의 고독과 애틋한 사랑,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 이국에 대한 동경, 자신을 지탱하려는 나르시시즘이 복합적으로 묻어 있다는 평이 뒤따른다. 대표작인 ‘길례언니’(1973), ‘고’(孤·1974),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1977), ‘탱고가 흐르는 황혼’(1978), ‘황금의 비’(1982) 등은 몽환적이고도 섬뜩한 눈빛의 여인이 등장하는 작가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뛰어난 글솜씨를 지녔던 천 화백은 ‘언덕 위의 양옥집’ ‘아프리카 기행 화문집’ 등 수필집과 단행본 10여권을 냈다. 그의 사망 소식에 따라 작품 가격 추이에도 관심이 모이고 있다. 지난 10년간 경매시장에서 천 화백 작품의 호당 평균 가격은 1700만원으로 박수근, 이중섭, 장욱진, 김환기에 이어 다섯 번째로 높다. 최고가로 낙찰된 작품은 2009년 K옥션을 통해 거래된 ‘초원Ⅱ’(1978, 105.5×130㎝)로 12억원에 팔렸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천경자 화백 별세, 위작시비에 “예술원 탈퇴하고 붓 놓겠다” 무슨 일 있었나

    천경자 화백 별세, 위작시비에 “예술원 탈퇴하고 붓 놓겠다” 무슨 일 있었나

    천경자 화백 별세, 위작시비에 “예술원 탈퇴하고 붓 놓겠다” 무슨 일 있었나천경자 화백 별세 사망설이 꾸준히 제기된 천경자 화백이 지난 8월 이미 사망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91세. 천 화백의 딸 이혜선씨는 지난 여름 유골함을 들고 서울시립미술관을 방문해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은 22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천 화백의 딸 이씨가 몇 달 전 미술관에 유골함을 들고 수장고에 다녀갔다는 보고를 받았다”며 “이씨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고 밝혔다. 김 관장은 “당시 이씨가 관련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말아줄 것을 강력 요청했다고 들었다”며 “개인적인 일이라 본인이 적절한 시점에 밝힐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씨의 지인은 이날 연합뉴스에 이씨로부터 “병석에 계시던 천 화백이 지난해 11월 추수감사절 이후 몸 상태가 안 좋아졌으며 지난 8월 6일 새벽 의사가 보는 가운데 돌아가셨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이 지인은 “천 화백의 시신은 화장했고 뉴욕 성당에서 장례를 치른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씨가 “같은 달 서울시에 협조를 요청한 뒤 서울시립미술관에 있는 ‘천경자 상설전시실’과 그의 작품이 보관된 수장고를 다녀왔다”며 “어머니가 아끼는 작품이 시립미술관에 있으니 가봐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씨는 이 과정에서 언론에 관련 사실을 알리지 말아줄 것을 당부했다고 그는 말했다. 꽃과 여인의 화가로 불리는 천 화백은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진 후 거동을 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으며 미국 뉴욕 맨해튼에 있는 큰딸 이씨의 간호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외부와 접촉을 끊은 천 화백은 의식은 있는 상태라는 것이 이씨를 통해 그동안 미술계에 알려져 온 사실이다. 미술계에선 천 화백이 길게는 10여 년 전 이미 사망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성 소문이 무성하게 돌았다. 지난해에는 대한민국예술원이 천 화백의 근황이 확인되지 않는다며 2월부터 수당 지급을 잠정 중단했고 이씨는 이에 반발해 탈퇴서를 제출했다. 예술원은 이씨에게 공문을 보내 천 화백의 의료 기록 등을 요구했으나 이씨는 이런 예술원의 요구가 천 화백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며 응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본인 의사를 알 수 없는 예술원으로선 탈퇴 처리를 하지 않았으며 현재 인터넷 홈페이지에선 미술 분야 회원으로 소개하고 있다. 예술원은 그간 천 화백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려 했으나 직접적인 확인은 하지 못했다. 천 화백은 1998년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뉴욕으로 떠났다. 딸 이씨는 천 화백이 서울시에 기증했던 작품이 관리 소홀로 훼손됐다며 93점을 반환할 것을 2013년 요구하기도 했다. 천 화백은 여인의 한(恨)과 환상, 꿈과 고독을 화려한 원색의 한국화로 그려 1960~1980년대 국내 화단에서 여류화가로는 보기 드물게 자신의 화풍을 개척했고 문화예술계 전반에서 폭넓게 활동했던 ‘스타’ 화가였다. 그러나 여인의 모습을 그린 ‘미인도’를 둘러싸고 1991년에 일어난 위작시비는 천 화백 노년의 최대 시련으로 심적 충격 속에 절필을 선언한 바 있다. 미인도 위작 논란은 1991년 4월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천경자의 작품에 대해 작가가 직접 위작 의혹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어깨에 나비가 앉은 여성 인물화로 국립현대미술관의 ‘움직이는 미술관’ 전시에 포함됐다. 이 작품의 아트 포스터(복제품)를 본 친지에게서 “복제품이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천 화백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과 복제품을 검토해 자신의 그림이 아니라는 주장을 했다. 이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고 국립현대미술관은 그림의 제작연도부터 소장경위 등을 추적해 진품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1999년 고서화 위작 및 사기판매사건으로 구속된 위조범 권모씨가 검찰 수사과정에서 “화랑을 하는 친구의 요청에 따라 소액을 받고 달력 그림 몇 개를 섞어서 ‘미인도’를 만들었다”고 말하면서 위작 시비가 재연됐다. 이에 대해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미인도’(29Ⅹ26㎝)는 진짜이며 현대미술관이 현재 소장하고 있다”면서 “한국화 위조범과 현대 미술관 중 어느 쪽을 믿느냐”고 반문했었다. 천 화백은 “자기 자식을 몰라보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후속 조치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한국과학기술원에 작품 감정을 의뢰했고 한국화랑협회에서는 진품이라는 감정을 내렸다. 당시 화백은 창작자의 증언을 무시한 채 가짜를 진품으로 오도하는 화단 풍토에선 창작행위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다며 붓을 놓고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직도 사퇴하겠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천 화백은 ‘자기 그림도 몰라보는 정신 나간 작가’라는 불명예를 안았고 엄청난 정신적 고초를 겪었다. 천 화백의 둘째딸 김정희씨는 당시 “위작 시비는 언젠가는 밝혀질 자명한 사건”이라며 “위작 여부의 진실이 밝혀지겠지만, 국가기관이나 특정 이익단체가 조직적으로 나서 일평생 외골수로 작업한 화가의 작가 정신을 말살하는 사건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천경자 별세, 위작시비에 “예술원 탈퇴하고 붓 놓겠다” 대체 왜?

    천경자 별세, 위작시비에 “예술원 탈퇴하고 붓 놓겠다” 대체 왜?

    천경자 별세, 위작시비에 “예술원 탈퇴하고 붓 놓겠다” 대체 왜? 천경자 별세 사망설이 꾸준히 제기된 천경자 화백이 지난 8월 이미 사망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91세. 천 화백의 딸 이혜선씨는 지난 여름 유골함을 들고 서울시립미술관을 방문해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은 22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천 화백의 딸 이씨가 몇 달 전 미술관에 유골함을 들고 수장고에 다녀갔다는 보고를 받았다”며 “이씨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고 밝혔다. 김 관장은 “당시 이씨가 관련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말아줄 것을 강력 요청했다고 들었다”며 “개인적인 일이라 본인이 적절한 시점에 밝힐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씨의 지인은 이날 연합뉴스에 이씨로부터 “병석에 계시던 천 화백이 지난해 11월 추수감사절 이후 몸 상태가 안 좋아졌으며 지난 8월 6일 새벽 의사가 보는 가운데 돌아가셨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이 지인은 “천 화백의 시신은 화장했고 뉴욕 성당에서 장례를 치른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씨가 “같은 달 서울시에 협조를 요청한 뒤 서울시립미술관에 있는 ‘천경자 상설전시실’과 그의 작품이 보관된 수장고를 다녀왔다”며 “어머니가 아끼는 작품이 시립미술관에 있으니 가봐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씨는 이 과정에서 언론에 관련 사실을 알리지 말아줄 것을 당부했다고 그는 말했다. 꽃과 여인의 화가로 불리는 천 화백은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진 후 거동을 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으며 미국 뉴욕 맨해튼에 있는 큰딸 이씨의 간호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외부와 접촉을 끊은 천 화백은 의식은 있는 상태라는 것이 이씨를 통해 그동안 미술계에 알려져 온 사실이다. 미술계에선 천 화백이 길게는 10여 년 전 이미 사망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성 소문이 무성하게 돌았다. 지난해에는 대한민국예술원이 천 화백의 근황이 확인되지 않는다며 2월부터 수당 지급을 잠정 중단했고 이씨는 이에 반발해 탈퇴서를 제출했다. 예술원은 이씨에게 공문을 보내 천 화백의 의료 기록 등을 요구했으나 이씨는 이런 예술원의 요구가 천 화백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며 응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본인 의사를 알 수 없는 예술원으로선 탈퇴 처리를 하지 않았으며 현재 인터넷 홈페이지에선 미술 분야 회원으로 소개하고 있다. 예술원은 그간 천 화백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려 했으나 직접적인 확인은 하지 못했다. 천 화백은 1998년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뉴욕으로 떠났다. 딸 이씨는 천 화백이 서울시에 기증했던 작품이 관리 소홀로 훼손됐다며 93점을 반환할 것을 2013년 요구하기도 했다. 천 화백은 여인의 한(恨)과 환상, 꿈과 고독을 화려한 원색의 한국화로 그려 1960~1980년대 국내 화단에서 여류화가로는 보기 드물게 자신의 화풍을 개척했고 문화예술계 전반에서 폭넓게 활동했던 ‘스타’ 화가였다. 그러나 여인의 모습을 그린 ‘미인도’를 둘러싸고 1991년에 일어난 위작시비는 천 화백 노년의 최대 시련으로 심적 충격 속에 절필을 선언한 바 있다. 미인도 위작 논란은 1991년 4월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천경자의 작품에 대해 작가가 직접 위작 의혹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어깨에 나비가 앉은 여성 인물화로 국립현대미술관의 ‘움직이는 미술관’ 전시에 포함됐다. 이 작품의 아트 포스터(복제품)를 본 친지에게서 “복제품이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천 화백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과 복제품을 검토해 자신의 그림이 아니라는 주장을 했다. 이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고 국립현대미술관은 그림의 제작연도부터 소장경위 등을 추적해 진품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1999년 고서화 위작 및 사기판매사건으로 구속된 위조범 권모씨가 검찰 수사과정에서 “화랑을 하는 친구의 요청에 따라 소액을 받고 달력 그림 몇 개를 섞어서 ‘미인도’를 만들었다”고 말하면서 위작 시비가 재연됐다. 이에 대해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미인도’(29Ⅹ26㎝)는 진짜이며 현대미술관이 현재 소장하고 있다”면서 “한국화 위조범과 현대 미술관 중 어느 쪽을 믿느냐”고 반문했었다. 천 화백은 “자기 자식을 몰라보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후속 조치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한국과학기술원에 작품 감정을 의뢰했고 한국화랑협회에서는 진품이라는 감정을 내렸다. 당시 화백은 창작자의 증언을 무시한 채 가짜를 진품으로 오도하는 화단 풍토에선 창작행위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다며 붓을 놓고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직도 사퇴하겠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천 화백은 ‘자기 그림도 몰라보는 정신 나간 작가’라는 불명예를 안았고 엄청난 정신적 고초를 겪었다. 천 화백의 둘째딸 김정희씨는 당시 “위작 시비는 언젠가는 밝혀질 자명한 사건”이라며 “위작 여부의 진실이 밝혀지겠지만, 국가기관이나 특정 이익단체가 조직적으로 나서 일평생 외골수로 작업한 화가의 작가 정신을 말살하는 사건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천경자 별세, 위작 시비 일자 “대한민국 예술원 탈퇴하고 붓 놓겠다” 왜?

    천경자 별세, 위작 시비 일자 “대한민국 예술원 탈퇴하고 붓 놓겠다” 왜?

    천경자 별세, 위작 시비 일자 “대한민국 예술원 탈퇴하고 붓 놓겠다” 왜? 천경자 별세 사망설이 꾸준히 제기된 천경자 화백이 지난 8월 이미 사망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91세. 천 화백의 딸 이혜선씨는 지난 여름 유골함을 들고 서울시립미술관을 방문해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은 22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천 화백의 딸 이씨가 몇 달 전 미술관에 유골함을 들고 수장고에 다녀갔다는 보고를 받았다”며 “이씨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고 밝혔다. 김 관장은 “당시 이씨가 관련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말아줄 것을 강력 요청했다고 들었다”며 “개인적인 일이라 본인이 적절한 시점에 밝힐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씨의 지인은 이날 연합뉴스에 이씨로부터 “병석에 계시던 천 화백이 지난해 11월 추수감사절 이후 몸 상태가 안 좋아졌으며 지난 8월 6일 새벽 의사가 보는 가운데 돌아가셨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이 지인은 “천 화백의 시신은 화장했고 뉴욕 성당에서 장례를 치른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씨가 “같은 달 서울시에 협조를 요청한 뒤 서울시립미술관에 있는 ‘천경자 상설전시실’과 그의 작품이 보관된 수장고를 다녀왔다”며 “어머니가 아끼는 작품이 시립미술관에 있으니 가봐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씨는 이 과정에서 언론에 관련 사실을 알리지 말아줄 것을 당부했다고 그는 말했다. 꽃과 여인의 화가로 불리는 천 화백은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진 후 거동을 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으며 미국 뉴욕 맨해튼에 있는 큰딸 이씨의 간호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외부와 접촉을 끊은 천 화백은 의식은 있는 상태라는 것이 이씨를 통해 그동안 미술계에 알려져 온 사실이다. 미술계에선 천 화백이 길게는 10여 년 전 이미 사망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성 소문이 무성하게 돌았다. 지난해에는 대한민국예술원이 천 화백의 근황이 확인되지 않는다며 2월부터 수당 지급을 잠정 중단했고 이씨는 이에 반발해 탈퇴서를 제출했다. 예술원은 이씨에게 공문을 보내 천 화백의 의료 기록 등을 요구했으나 이씨는 이런 예술원의 요구가 천 화백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며 응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본인 의사를 알 수 없는 예술원으로선 탈퇴 처리를 하지 않았으며 현재 인터넷 홈페이지에선 미술 분야 회원으로 소개하고 있다. 예술원은 그간 천 화백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려 했으나 직접적인 확인은 하지 못했다. 천 화백은 1998년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뉴욕으로 떠났다. 딸 이씨는 천 화백이 서울시에 기증했던 작품이 관리 소홀로 훼손됐다며 93점을 반환할 것을 2013년 요구하기도 했다. 천 화백은 여인의 한(恨)과 환상, 꿈과 고독을 화려한 원색의 한국화로 그려 1960~1980년대 국내 화단에서 여류화가로는 보기 드물게 자신의 화풍을 개척했고 문화예술계 전반에서 폭넓게 활동했던 ‘스타’ 화가였다. 그러나 여인의 모습을 그린 ‘미인도’를 둘러싸고 1991년에 일어난 위작시비는 천 화백 노년의 최대 시련으로 심적 충격 속에 절필을 선언한 바 있다. 미인도 위작 논란은 1991년 4월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천경자의 작품에 대해 작가가 직접 위작 의혹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어깨에 나비가 앉은 여성 인물화로 국립현대미술관의 ‘움직이는 미술관’ 전시에 포함됐다. 이 작품의 아트 포스터(복제품)를 본 친지에게서 “복제품이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천 화백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과 복제품을 검토해 자신의 그림이 아니라는 주장을 했다. 이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고 국립현대미술관은 그림의 제작연도부터 소장경위 등을 추적해 진품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1999년 고서화 위작 및 사기판매사건으로 구속된 위조범 권모씨가 검찰 수사과정에서 “화랑을 하는 친구의 요청에 따라 소액을 받고 달력 그림 몇 개를 섞어서 ‘미인도’를 만들었다”고 말하면서 위작 시비가 재연됐다. 이에 대해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미인도’(29Ⅹ26㎝)는 진짜이며 현대미술관이 현재 소장하고 있다”면서 “한국화 위조범과 현대 미술관 중 어느 쪽을 믿느냐”고 반문했었다. 천 화백은 “자기 자식을 몰라보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후속 조치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한국과학기술원에 작품 감정을 의뢰했고 한국화랑협회에서는 진품이라는 감정을 내렸다. 당시 화백은 창작자의 증언을 무시한 채 가짜를 진품으로 오도하는 화단 풍토에선 창작행위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다며 붓을 놓고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직도 사퇴하겠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천 화백은 ‘자기 그림도 몰라보는 정신 나간 작가’라는 불명예를 안았고 엄청난 정신적 고초를 겪었다. 천 화백의 둘째딸 김정희씨는 당시 “위작 시비는 언젠가는 밝혀질 자명한 사건”이라며 “위작 여부의 진실이 밝혀지겠지만, 국가기관이나 특정 이익단체가 조직적으로 나서 일평생 외골수로 작업한 화가의 작가 정신을 말살하는 사건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천경자 화백 별세, 위작시비에 “예술원 탈퇴하고 붓 놓겠다” 대체 이유가?

    천경자 화백 별세, 위작시비에 “예술원 탈퇴하고 붓 놓겠다” 대체 이유가?

    천경자 화백 별세, 위작시비에 “예술원 탈퇴하고 붓 놓겠다” 대체 이유가?천경자 별세 사망설이 꾸준히 제기된 천경자 화백이 지난 8월 이미 사망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91세. 천 화백의 딸 이혜선씨는 지난 여름 유골함을 들고 서울시립미술관을 방문해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은 22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천 화백의 딸 이씨가 몇 달 전 미술관에 유골함을 들고 수장고에 다녀갔다는 보고를 받았다”며 “이씨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고 밝혔다. 김 관장은 “당시 이씨가 관련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말아줄 것을 강력 요청했다고 들었다”며 “개인적인 일이라 본인이 적절한 시점에 밝힐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씨의 지인은 이날 연합뉴스에 이씨로부터 “병석에 계시던 천 화백이 지난해 11월 추수감사절 이후 몸 상태가 안 좋아졌으며 지난 8월 6일 새벽 의사가 보는 가운데 돌아가셨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이 지인은 “천 화백의 시신은 화장했고 뉴욕 성당에서 장례를 치른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씨가 “같은 달 서울시에 협조를 요청한 뒤 서울시립미술관에 있는 ‘천경자 상설전시실’과 그의 작품이 보관된 수장고를 다녀왔다”며 “어머니가 아끼는 작품이 시립미술관에 있으니 가봐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씨는 이 과정에서 언론에 관련 사실을 알리지 말아줄 것을 당부했다고 그는 말했다. 꽃과 여인의 화가로 불리는 천 화백은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진 후 거동을 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으며 미국 뉴욕 맨해튼에 있는 큰딸 이씨의 간호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외부와 접촉을 끊은 천 화백은 의식은 있는 상태라는 것이 이씨를 통해 그동안 미술계에 알려져 온 사실이다. 미술계에선 천 화백이 길게는 10여 년 전 이미 사망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성 소문이 무성하게 돌았다. 지난해에는 대한민국예술원이 천 화백의 근황이 확인되지 않는다며 2월부터 수당 지급을 잠정 중단했고 이씨는 이에 반발해 탈퇴서를 제출했다. 예술원은 이씨에게 공문을 보내 천 화백의 의료 기록 등을 요구했으나 이씨는 이런 예술원의 요구가 천 화백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며 응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본인 의사를 알 수 없는 예술원으로선 탈퇴 처리를 하지 않았으며 현재 인터넷 홈페이지에선 미술 분야 회원으로 소개하고 있다. 예술원은 그간 천 화백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려 했으나 직접적인 확인은 하지 못했다. 천 화백은 1998년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뉴욕으로 떠났다. 딸 이씨는 천 화백이 서울시에 기증했던 작품이 관리 소홀로 훼손됐다며 93점을 반환할 것을 2013년 요구하기도 했다. 천 화백은 여인의 한(恨)과 환상, 꿈과 고독을 화려한 원색의 한국화로 그려 1960~1980년대 국내 화단에서 여류화가로는 보기 드물게 자신의 화풍을 개척했고 문화예술계 전반에서 폭넓게 활동했던 ‘스타’ 화가였다. 그러나 여인의 모습을 그린 ‘미인도’를 둘러싸고 1991년에 일어난 위작시비는 천 화백 노년의 최대 시련으로 심적 충격 속에 절필을 선언한 바 있다. 미인도 위작 논란은 1991년 4월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천경자의 작품에 대해 작가가 직접 위작 의혹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어깨에 나비가 앉은 여성 인물화로 국립현대미술관의 ‘움직이는 미술관’ 전시에 포함됐다. 이 작품의 아트 포스터(복제품)를 본 친지에게서 “복제품이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천 화백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과 복제품을 검토해 자신의 그림이 아니라는 주장을 했다. 이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고 국립현대미술관은 그림의 제작연도부터 소장경위 등을 추적해 진품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1999년 고서화 위작 및 사기판매사건으로 구속된 위조범 권모씨가 검찰 수사과정에서 “화랑을 하는 친구의 요청에 따라 소액을 받고 달력 그림 몇 개를 섞어서 ‘미인도’를 만들었다”고 말하면서 위작 시비가 재연됐다. 이에 대해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미인도’(29Ⅹ26㎝)는 진짜이며 현대미술관이 현재 소장하고 있다”면서 “한국화 위조범과 현대 미술관 중 어느 쪽을 믿느냐”고 반문했었다. 천 화백은 “자기 자식을 몰라보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후속 조치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한국과학기술원에 작품 감정을 의뢰했고 한국화랑협회에서는 진품이라는 감정을 내렸다. 당시 화백은 창작자의 증언을 무시한 채 가짜를 진품으로 오도하는 화단 풍토에선 창작행위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다며 붓을 놓고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직도 사퇴하겠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천 화백은 ‘자기 그림도 몰라보는 정신 나간 작가’라는 불명예를 안았고 엄청난 정신적 고초를 겪었다. 천 화백의 둘째딸 김정희씨는 당시 “위작 시비는 언젠가는 밝혀질 자명한 사건”이라며 “위작 여부의 진실이 밝혀지겠지만, 국가기관이나 특정 이익단체가 조직적으로 나서 일평생 외골수로 작업한 화가의 작가 정신을 말살하는 사건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천경자 별세, 위작시비에 “대한민국 예술원 탈퇴하고 붓 놓겠다” 이유가?

    천경자 별세, 위작시비에 “대한민국 예술원 탈퇴하고 붓 놓겠다” 이유가?

    천경자 별세, 위작시비에 “대한민국 예술원 탈퇴하고 붓 놓겠다” 이유가? 천경자 별세 사망설이 꾸준히 제기된 천경자 화백이 지난 8월 이미 사망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91세. 천 화백의 딸 이혜선씨는 지난 여름 유골함을 들고 서울시립미술관을 방문해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은 22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천 화백의 딸 이씨가 몇 달 전 미술관에 유골함을 들고 수장고에 다녀갔다는 보고를 받았다”며 “이씨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고 밝혔다. 김 관장은 “당시 이씨가 관련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말아줄 것을 강력 요청했다고 들었다”며 “개인적인 일이라 본인이 적절한 시점에 밝힐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씨의 지인은 이날 연합뉴스에 이씨로부터 “병석에 계시던 천 화백이 지난해 11월 추수감사절 이후 몸 상태가 안 좋아졌으며 지난 8월 6일 새벽 의사가 보는 가운데 돌아가셨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이 지인은 “천 화백의 시신은 화장했고 뉴욕 성당에서 장례를 치른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씨가 “같은 달 서울시에 협조를 요청한 뒤 서울시립미술관에 있는 ‘천경자 상설전시실’과 그의 작품이 보관된 수장고를 다녀왔다”며 “어머니가 아끼는 작품이 시립미술관에 있으니 가봐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씨는 이 과정에서 언론에 관련 사실을 알리지 말아줄 것을 당부했다고 그는 말했다. 꽃과 여인의 화가로 불리는 천 화백은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진 후 거동을 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으며 미국 뉴욕 맨해튼에 있는 큰딸 이씨의 간호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외부와 접촉을 끊은 천 화백은 의식은 있는 상태라는 것이 이씨를 통해 그동안 미술계에 알려져 온 사실이다. 미술계에선 천 화백이 길게는 10여 년 전 이미 사망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성 소문이 무성하게 돌았다. 지난해에는 대한민국예술원이 천 화백의 근황이 확인되지 않는다며 2월부터 수당 지급을 잠정 중단했고 이씨는 이에 반발해 탈퇴서를 제출했다. 예술원은 이씨에게 공문을 보내 천 화백의 의료 기록 등을 요구했으나 이씨는 이런 예술원의 요구가 천 화백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며 응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본인 의사를 알 수 없는 예술원으로선 탈퇴 처리를 하지 않았으며 현재 인터넷 홈페이지에선 미술 분야 회원으로 소개하고 있다. 예술원은 그간 천 화백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려 했으나 직접적인 확인은 하지 못했다. 천 화백은 1998년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뉴욕으로 떠났다. 딸 이씨는 천 화백이 서울시에 기증했던 작품이 관리 소홀로 훼손됐다며 93점을 반환할 것을 2013년 요구하기도 했다. 천 화백은 여인의 한(恨)과 환상, 꿈과 고독을 화려한 원색의 한국화로 그려 1960~1980년대 국내 화단에서 여류화가로는 보기 드물게 자신의 화풍을 개척했고 문화예술계 전반에서 폭넓게 활동했던 ‘스타’ 화가였다. 그러나 여인의 모습을 그린 ‘미인도’를 둘러싸고 1991년에 일어난 위작시비는 천 화백 노년의 최대 시련으로 심적 충격 속에 절필을 선언한 바 있다. 미인도 위작 논란은 1991년 4월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천경자의 작품에 대해 작가가 직접 위작 의혹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어깨에 나비가 앉은 여성 인물화로 국립현대미술관의 ‘움직이는 미술관’ 전시에 포함됐다. 이 작품의 아트 포스터(복제품)를 본 친지에게서 “복제품이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천 화백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과 복제품을 검토해 자신의 그림이 아니라는 주장을 했다. 이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고 국립현대미술관은 그림의 제작연도부터 소장경위 등을 추적해 진품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1999년 고서화 위작 및 사기판매사건으로 구속된 위조범 권모씨가 검찰 수사과정에서 “화랑을 하는 친구의 요청에 따라 소액을 받고 달력 그림 몇 개를 섞어서 ‘미인도’를 만들었다”고 말하면서 위작 시비가 재연됐다. 이에 대해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미인도’(29Ⅹ26㎝)는 진짜이며 현대미술관이 현재 소장하고 있다”면서 “한국화 위조범과 현대 미술관 중 어느 쪽을 믿느냐”고 반문했었다. 천 화백은 “자기 자식을 몰라보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후속 조치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한국과학기술원에 작품 감정을 의뢰했고 한국화랑협회에서는 진품이라는 감정을 내렸다. 당시 화백은 창작자의 증언을 무시한 채 가짜를 진품으로 오도하는 화단 풍토에선 창작행위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다며 붓을 놓고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직도 사퇴하겠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천 화백은 ‘자기 그림도 몰라보는 정신 나간 작가’라는 불명예를 안았고 엄청난 정신적 고초를 겪었다. 천 화백의 둘째딸 김정희씨는 당시 “위작 시비는 언젠가는 밝혀질 자명한 사건”이라며 “위작 여부의 진실이 밝혀지겠지만, 국가기관이나 특정 이익단체가 조직적으로 나서 일평생 외골수로 작업한 화가의 작가 정신을 말살하는 사건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30] 겸재가 묘사한 국영 도자기 제작소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30] 겸재가 묘사한 국영 도자기 제작소

     겸재 정선(1676∼1759년)은 65세 되던 영조 15년(1740년) 양천현령에 임명됐다. 양천현은 지금의 서울 강서구와 양천구 일대다. 아파트가 가득 들어찬 지금의 가양지구 한 복판에 현아(縣衙)가 있었다. 양천은 도성이 강 건너로 멀지 않은 데다, 물산이 풍부하고 경치도 좋아 현령 자리를 노리는 인사가 많았다고 한다.  영조가 진경산수화풍이 경지에 오른 겸재를 양천현령에 임명한 것을 두고 한강변 경치를 마음껏 그려보라는 뜻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겸재는 영조의 기대대로 한강변의 경치를 33폭에 담았는데,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이 그것이다.  ‘경교명승첩’은 겸재와 당대 진경시의 거장인 사천 이병연(1671∼1751)의 우정이 낳은 시화첩(詩畵帖)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겸재의 양천현령 발령으로 헤어지게 되자 무척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양의 사천이 시를 써 보내면 양천의 겸재가 시제(詩題)에 맞추어 그림을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화폭마다 천금을 준다고 해도 남에게 넘기지 말라는 뜻으로 ‘千金勿傳’(천금물전)이라고 낙관하기로 했다.  ‘우천’(牛川)에도 화면의 왼쪽 아래 ‘천금물전’ 도장이 보인다.‘우천’은 ‘경교명승첩’에 담겨있는 한강변 풍경 가운데 가장 상류지역에 해당한다. 우천은 용인에서 발원해 광주를 거쳐 한강으로 흘러드는 경안천의 하류지역이다. 경안천 하류 일대는 팔당댐이 지어진 뒤 수도권 주민들의 식수원인 거대 호수로 탈바꿈했다.  ‘우천’이 눈길을 끄는 것은 풍경도 풍경이지만 분원(分院)의 모습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분원은 조선시대에 왕실에 음식을 공급하는 총괄기관인 사옹원의 그릇을 만드는 하부조직으로 일종의 국영 도자기 제작소였다고 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조선의 마지막 분원이 있던 곳이 바로 그림 속에 집들이 보이는 지금의 경기도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이다. 기관 이름이 그대로 마을 이름이 된 것이다.  ‘우천’에 나타난 분원의 모습은 왜 이곳이 왕실 도자기 제작소로 이름을 떨쳤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맑고 풍부한 물과 충분한 땔감, 원료의 조달과 완성품의 수송이 손쉬워야 한다는 도자기 가마의 입지조건을 완벽하게 갖추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분원은 세조 13년(1467년)에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던 사옹방을 사옹원으로 이름을 바꾼 다음 경기도 광주 일대에서 보통 10년을 주기로 옮겨다녔다. 땔감을 찾아다닌 것인데, 경종 즉위년(1720)에 이르면 더 이상 가마에 불을 지필 수 없는 형편에 이른다.  분원을 우천이 가까운 금사리로 옮긴 것은 배가 지나다니는 하천에서는 땔감 수급이 원활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땔감 뿐만 아니라 그릇을 만드는 흙 역시 수로를 이용해 편리하게 공급받을 수 있었다. 만들어 놓은 그릇을 실은 배는 노를 저을 필요도 없이 흐름을 타고 순식간에 마포에 로 다다를 수 있는 것도 장졈이었다.  그림에 보이는 산중턱의 큰 기와집이 분원 시설인지는 얼마간 의문도 없지 않다. 금사리에 있던 분원이 공식적으로 이전한 것은 영조 28년(1752)으로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교명승첩’이 제작된 시기와는 10년이 조금 넘는 시차가 있다. 겸재가 찾았을 당시 사옹원과 관련한 어떤 시설이 이미 분원리에 세워져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배를 타고 바라보는 시점의 ‘우천’은 일대 풍경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압축하여 밀도있게 재구성한 그림이다. 산허리에 기와집이 보이지 않고, 강가에는 그릇을 실어나를 돛단배가 없었다면 ‘우천’은 조금 심심한 그림이 되었을 것이다.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시리즈 전체보기
  • 구순에도 이어 온 사물·인물과의 은밀한 대화

    구순에도 이어 온 사물·인물과의 은밀한 대화

    “마음이야 지금도 붓을 잡고 싶지요. 그런데 이제는 망가져서 그림을 더 그릴 수가 없어요. 건강이 허락한다면 정물과 인물을 더 그리고 싶어요.” 구순(九旬)까지도 붓을 놓지 않고 현역으로 창작의 열정을 불태웠던 문학진(91·서울미대 명예교수) 화백. 그는 더이상 그림을 그릴 조건이 되지 않는다. 2년 전 넘어져서 골반에 인공관절을 넣는 대수술을 받은 뒤 몸이 급속히 쇠약해진 탓이다. 그래도 그는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하루도 빠짐없이 작업실을 찾아 머릿속으로 구상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자기 세계를 확고하고 지속적으로 지켜 온 예술가로서, 겸손한 인간미로 화단의 존경을 받아 온 문 화백의 개인전이 서울 종로구 사간동 현대화랑에서 열리고 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한국 모더니즘 1세대 작가인 그가 현대화랑에서 전시를 하는 것은 1989년 이후 26년 만이다. 이번 전시에는 문 화백의 회화 작품과 종이 콜라주 작품들로 구성된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의 비구상 작품 30여점이 소개되고 있다. 전시 작품 대부분은 작가 소장이며 연대순으로 공백이 있는 작품들은 화랑에서 개인 소장자들로부터 대여했다. 1924년 서울에서 출생한 문 화백은 1953년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한 한국 미술 교육 1세대 작가로 일찍부터 1950년대 국전의 아카데믹한 화풍에서 벗어나 추상 형식을 도입한 작품 세계를 선보였다. 이후 인물과 정물을 주요 소재로 선택해 간략하게 변형하고 사물과 사물의 관계를 화면에 재배치함으로써 반추상적 화면을 구성했다. 안정된 구도와 무채색 기조의 차분한 색감이 빚어낸 정적인 분위기의 작품에는 추상적 형태와 색의 배치에 따르는 질서와 통합이 드러나고 있다. 전시회 개막일에 맞춰 오랜만에 나들이를 한 문 화백은 정물 그림을 주로 그린 것에 대해 “밖으로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실내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며 “생활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것들을 이리저리 배치해 가며 구성의 아름다움을 찾아본 것”이라고 말했다. 정년을 앞두고 건강상의 이유로 교수직을 버리고 스스로 은둔자의 생활로 들어갔던 그는 침묵 속에서 사물들과 은밀한 대화를 나누며 삶의 내밀함과 고독감을 화면에 채웠다. 그는 전시를 하는 소감을 묻자 “나는 화단의 도움을 참 많이 받고 편하게 지내 온 사람이에요. 후한 대접을 받으며 화가 생활을 마치고 이제 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라며 활짝 웃었다. 이번 전시를 마련한 현대화랑의 박명자 회장은 문 화백에 대해 “1960년대 반도화랑 근무 시절부터 인연을 맺은 박수근, 손응성, 윤중식 작가 등과 함께했던 기억을 갖고 있는 중요한 작가”라며 “오랜 세월 이어 온 예술 열정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오는 31일까지.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이젠 붓을 잡을순 없지만... 九旬화백의 예술열정

    이젠 붓을 잡을순 없지만... 九旬화백의 예술열정

     “마음이야 지금도 붓을 잡고 싶지요. 그런데 이제는 망가져서 그림을 더 그릴 수가 없어요. 건강이 허락한다면 정물과 인물을 더 그리고 싶어요.”  구순(九旬)까지도 붓을 놓지 않고 현역으로 창작의 열정을 태웠던 문학진(91·서울미대 명예교수) 화백. 그는 더이상 그림을 그릴 조건이 되지 않는다. 2년 전 넘어져서 골반에 인공관절을 넣는 대수술을 받은 뒤 몸이 급속히 쇠약해진 탓이다. 그래도 그는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하루도 빠짐없이 작업실을 찾아 머릿속으로 구상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자기 세계를 확고하고 지속적으로 지켜 온 예술가로서, 겸손한 인간미로 화단의 존경을 받아 온 민 화백의 개인전이 서울 종로구 사간동 현대화랑에서 열리고 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한국 모더니즘 1세대 작가인 문 화백이 현대화랑에서 전시를 하는 것은 1989년 이후 26년 만이다. 이번 전시에는 문 화백의 회화 작품과 종이 콜라주 작품들로 구성된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의 비구상 작품 30여점이 소개되고 있다. 전시 작품 대부분은 작가 소장이며 연대순으로 공백이 있는 작품들은 화랑에서 개인 소장자들로부터 대여했다. 1924년 서울에서 출생한 문 화백은 1953년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한 한국 미술 교육 1세대 작가로 일찍부터 1950년대 국전의 아카데믹한 화풍에서 벗어나 추상 형식을 도입한 작품 세계를 선보였다. 이후 인물과 정물을 주요 소재로 선택해 간략하게 변형하고 사물과 사물의 관계를 화면에 재배치함으로써 반추상적 화면을 구성했다. 안정된 구도와 무채색 기조의 차분한 색감이 빚어낸 정적인 분위기의 작품에는 추상적 형태와 색의 배치에 따르는 질서와 통합이 드러나고 있다.  전시회 개막일에 맞춰 오랜만에 나들이를 한 문 화백은 정물 그림을 주로 그린 것에 대해 “밖으로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실내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며 “생활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것들을 이리저리 배치해 가며 구성의 아름다움을 찾아본 것”이라고 말했다. 정년을 앞두고 건강상의 이유로 교수직을 버리고 스스로 은둔자의 생활로 들어갔던 그는 침묵 속에서 사물들과 은밀한 대화를 나누며 삶의 내밀함과 고독감을 화면에 채웠다. 그는 전시를 하는 소감을 묻자 “나는 화단의 도움을 참 많이 받고 편하게 지내 온 사람이에요. 후한 대접을 받으며 화가 생활을 마치고 이제 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라며 활짝 웃었다.  이번 전시를 마련한 현대화랑의 박명자 회장은 문 화백에 대해 “1960년대 반도화랑 근무 시절부터 인연을 맺은 박수근, 손응성, 윤중식 작가 등과 함께했던 기억을 갖고 있는 중요한 작가”라며 “오랜 세월 이어 온 예술 열정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오는 31일까지.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분청사기의 멋 담은 ‘풍경’

    분청사기의 멋 담은 ‘풍경’

    분청사기 기법을 회화에 접목해 독특한 화풍을 펼치고 있는 차규선(47) 작가의 개인전이 서울 종로구 율곡로 이화익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대구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그가 3년 만에 서울에서 갖는 전시다. 원래 흙을 주요 재료로 사용해 작업해 왔다는 작가는 “자유분방한 미학을 드러내는 분청에 이끌리게 됐다”며 “흙과 아크릴 물감을 섞어 바탕을 바른 후 마르기 전에 나무 작대기를 붓 삼아 어린 시절부터 보았던 경주의 풍경을 일필휘지로 그린다”고 말했다. 그는 “도공의 마음으로 물감을 올리고 물로 씻어내기도 하며 그림을 그리고 바람과 햇빛에 모든 것을 맡겨 놓고 작품의 완성을 기다린다”며 “공자의 회사후소(繪事後素·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을 칠한 뒤에 한다는 뜻으로 구체적인 기술보다 마음의 바탕이 먼저임을 강조한다)를 새기며, 잘되고 못되고를 따지지 않는 추사 김정희의 경지에 오르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은 화려하지 않으면서 온기가 흐르고 질박하면서 고졸한 멋이 밴 분청의 편병을 보는 듯하다. 이번 전시에서는 백설이 덮인 소나무 숲, 새벽 안개가 자욱한 경주 남산, 하얗게 서리가 내린 늦가을의 들녘 같은 아스라하고 부드러운 ‘풍경’을 담은 신작 20여점을 선보이고 있다. 전시는 25일까지.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분청사기의 고졸한 멋을 담은 풍경, 차규선 개인전

    분청사기의 고졸한 멋을 담은 풍경, 차규선 개인전

     분청사기 기법을 회화에 접목해 독특한 화풍을 펼치고 있는 차규선(47) 작가의 개인전이 서울 종로구 율곡로 이화익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대구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그가 3년 만에 서울에서 갖는 전시다.  원래 흙을 주요 재료로 사용해 작업해 왔다는 작가는 “자유분방한 미학을 드러내는 분청에 이끌리게 됐다”며 “흙과 아크릴 물감을 섞어 바탕을 바른 후 마르기 전에 나무 작대기를 붓 삼아 어린 시절부터 보았던 경주의 풍경을 일필휘지로 그린다”고 말했다. 그는 “도공의 마음으로 물감을 올리고 물로 씻어내기도 하며 그림을 그리고 바람과 햇빛에 모든 것을 맡겨 놓고 작품의 완성을 기다린다”며 “공자의 회사후소(繪事後素·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을 칠한 뒤에 한다는 뜻으로 구체적인 기술보다 마음의 바탕이 먼저임을 강조한다)를 새기며, 잘되고 못되고를 따지지 않는 추사 김정희의 경지에 오르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은 화려하지 않으면서 온기가 흐르고 질박하면서 고졸한 멋이 밴 분청의 편병을 보는 듯하다. 이번 전시에서는 백설이 덮인 소나무 숲, 새벽 안개가 자욱한 경주 남산, 하얗게 서리가 내린 늦가을의 들녘 같은 아스라하고 부드러운 ‘풍경’(작품)을 담은 신작 20여점을 선보이고 있다. 전시는 25일까지.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아칸서스 잎 모양에 숨겨진 참뜻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아칸서스 잎 모양에 숨겨진 참뜻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아칸서스라는 식물은 주로 열대지방에 많으나 지중해 연안이나 인도네시아·아프리카·브라질·중앙아메리카·한국 등 전 세계에 분포돼 있다. 약 250속 2500종이어서 모양도 여러 가지다. 바늘 모양이나 톱니 모양의 엉겅퀴와 비슷한 잎이 달리고 가시가 많다. 지중해 연안에서 자생하는 식물이라 해 아칸서스 잎의 모양은 고대 그리스 이래 고전주의 미술의 주요한 장식 모티브의 하나가 됐다. ●아칸서스 문양 코린트식 건축 주두 장식에 주로 사용 특히 건축에서는 코린트식의 주두(柱頭) 장식에 두드러지게 사용됐다. 아칸서스는 근대에 이르도록 주두 장식에 계승됐을 뿐 아니라 유럽의 대부분 공예 의장(意匠)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칸서스 문양은 그리스, 로마에서 이란과 인도로 퍼졌다. 한편 간다라를 통해 중국과 한국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는 사이 많은 변형이 이뤄졌고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와서 고도의 완성을 보게 됐다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세계적으로 많은 아칸서스의 조형에 대해 왜 아칸서스여야 하는지 의문을 가진 사람은 세계에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보잘것없는 관목이 세계 조형예술의 숨통을 막아 버리고 있어도 답답하게 느끼지 못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용의 조형적 본질을 파악하면서 아칸서스라고 부르는 식물이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됐다. 용은 물을 상징하는 제1영기싹과 보주로 이뤄졌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해 왔는데, 바로 이것이 용성(龍性)이다. 아칸서스 모양이 물을 상징해 제1영기싹과 보주와 함께하는 아칸서스는 현실에서 보는 특정의 식물일 수 없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세계의 그 수많은 아칸서스 조형이 순식간에 영기문이 돼 일체 조형이 영기화생(靈氣化生)하는 경이적인 광경으로 변할 것이다. 아칸서스 모양의 조형을 분석해 보면 제1영기싹 및 무량보주와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서양의 조형예술에서는 아칸서스 모양의 영기문에서 일체가 화생한다. 그 첫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프랑스 직물박물관 소장 ‘달마티카’ 영기문 생성 원리 표현 15세기 달마티카의 무늬다(①). 달마티카는 시리아에서 기원한 동양계 T자형 겉옷으로 크로아티아의 달마티아 지방에서 착용한 것을 3세기 이후 로마에서 도입했다. 6세기 이후에는 종교 예복이 돼 오늘날 가톨릭과 그리스정교회의 신부복으로 사용되고 있다. 프랑스 리옹의 직물박물관이 소장한 달마티카의 ‘아칸서스 무늬’를 살펴보자. 필자는 조형언어를 문자언어로 읽으려 한다. 조형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고구려 벽화의 영기문이라는 생명 생성의 전개 원리와 똑같다. 맨 밑의 중앙에 출발점인 작은 영기잎이 있다. 그 위로 제3영기싹이 솟아오른다. 갈래 사이에서 나온 것이 이른바 아칸서스다. 그런데 팔메트 같기도 하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아칸서스가 팔메트에서 비롯됐다고 말하기도 한다. 오류가 오류를 낳는 또 하나의 예다. 좌우대칭이므로 왼쪽 것만 설명하면 모두 설명한 것이 된다. 작은 아칸서스 모양 좌우로 제1영기싹이 발산하고 있다. 그리고 좌우로 뻗어 나간 긴 영기잎은 곧 밝혀지겠지만 잎이 아니고 연이어진 제1영기싹 영기문이다. 그 끝은 제1영기싹이고 거기에서 다시 무수한 제1영기싹 모양의 파동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한번 접힌 아칸서스 사이에서 네 개의 영기문이 나오고 있다. 즉 처음에 가장 간단한 제1영기싹이 1개. 그다음에는 긴 강낭콩 같은 것이 나오는데 무량보주다. 그 끝에서 제1영기싹이 발산한다. 그다음 영기문은 길고 굵은 새싹이 제1영기싹처럼 뻗어 나가고 끝은 제1영기싹으로 마무리 짓고 제1영기싹 모양의 파동이 세 번 일어나나 무한히 파동을 이루는 것과 같다. 좌우로 연이어 같은 영기문이 전개해 나가는데, 세 번째 잎은 아칸서스 모양을 띠기 시작하며 그 갈래 사이에서 영기줄기가 나와 중앙의 하얀 아칸서스 모양을 거쳐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아칸서스 모양의 영기잎을 낸다. 거기에서 먼저 하얀 아칸서스 모양 영기잎들이 나오다가 역시 하얗고 둥글둥글한 보주가 연이어 나오며 제1영기싹으로 마무리 짓는다. 그리고 잎에서 다시 잎이 나오면서 좌우로 전개해 나가며 제1영기싹 파동이 일어난다. 끝은 아칸서스 모양을 이루며 처음에 밑으로부터 전개해 나간 영기문과 서로 걸친다. 좌우대칭이므로 아래에서 양쪽으로 전개한 영기문이 위 중앙의 흰 아칸서스 모양을 거쳐 다시 양쪽으로 뻗어 나가며 중앙에서는 하얀 영기잎에서 작고 노란 영기잎이 양쪽으로 뻗어 나가고 다시 각각 제1영기싹이 좌우로 발산한다. 독자 여러분은 인내를 가지고 필자의 설명에 따라 그림을 자세히 보면 아칸서스가 아칸서스가 아님을 아는 감격을 누릴 것이다. 조형언어를 문자언어를 한 자 한 자 읽듯이 읽어 보기 바란다. 우리가 문자언어로 된 문장을 한 자 한 자 읽듯이 조형언어도 한 자 한 자 읽어 나가야 한다. ●용처럼 물 상징하는 제1영기싹·보주로 이루어져 있어 그러는 사이 아칸서스 모양의 실체를 자연히 알 수 있다. 용은 제1영기싹과 보주로 이뤄졌다. 마찬가지로 여래의 광배도 제1영기싹과 보주로 이뤄져 있다(②, ③). 14세기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금선(金線)으로 그린 화엄경 권12 그림의 주인공인 비로자나불의 광배를 보자. 맨 가의 것을 불꽃무늬라고 부르지만 그려 보면 연이은 제1영기싹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연이은 제1영기싹은 물, 즉 생명 생성의 근원을 상징한다. 그 안쪽으로는 보주와 제1영기싹 사이에 다시 영기문이 나오는 제3영기싹으로 돼 있다. 독자 여러분도 문자언어를 쓰듯이 조형언어를 그려 보면 매우 재미있을 것이다. 이후 코린트식 주두의 지붕의 한 부재를 떠받치고 있는 아칸서스 모양의 구성을 그려 보면 여래의 연이은 제1영기싹과 똑같음을 알 수 있다(④).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연이은 제1영기싹을 그려 봐도 어느 경우든 같은 조형언어다. 즉 어느 특정한 아칸서스가 아니라 물을 상징하는, 대(大)생명력을 상징하는 영기잎을 그리스인은 창조한 것이다. ‘영기잎’이란 말은 무량한 보주를 발산하는 잎이라는 뜻이다. 꽃에서만 무량한 보주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잎에서도 나온다는 것을 알았을 때 보주의 본질에 한 발자국 더 다가서는 느낌이었다. ●프랑스 ‘샤토 메종의 쇠창살’ 영조가 화생하는 조형 보여 그런데 가장 큰 충격을 준 작품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한 ‘샤토 메종(어느 고위층의 집)의 쇠창살’이다(⑤). 1670년쯤 작품이다. 정교한 쇠창살에 독수리같이 생긴 영조(靈鳥)가 화생하는 조형이 있지 않은가. 자세히 보면 맨 위에 독수리 모양이 있지만 현실에서 보는 독수리가 아니다. 마치 용이 항상 분노하는 눈 모습을 띠듯 영조도 분노하는 눈이다. 그리고 영조의 입에서 얼굴 없는 뱀처럼 길게 전개하며 덩굴 모양과 얽히며 올라가다가 끝맺음하고 있는데 바로 그 끝을 영조가 물고 있다. 즉 영조가 입에서 발산하는 보주줄기다. 영조 머리 뒷부분을 보면 아칸서스잎 모양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갈래 사이로 매우 굵은 기둥 같은 것이 나오고 그 속에서 다시 큰 아칸서스잎 같은 것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하나는 길고 다른 하나는 짧다. 그것은 영기문이 방향을 틀 때 그런 조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짧은 것은 제1영기싹으로 끝나지만 긴 것은 전개가 끝없이 뻗어 나가 이뤄진다. 잎이 아니라 힘찬 물줄기가 쏟아져 나오는 것 같다. 그 갈래 사이에서 가는 영기문이 바로 둥글게 꼬부라져 강력한 제1영기싹을 이루며 줄기가 끝에서는 영기잎으로 변하면서 끝을 맺는다. 한편 굵은 기둥 같은 것이 동시에 나오며 영기잎이 다시 나오면서 갈라지고 그 사이에서 영기문이 끝없이 전개해 나간다. 그런 가운데 입에서 발산하는 긴 영기문은 머리는 확실하지 않으나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가는 용 같은 강력한 영기문이 함께 얽혀 있어서 이 조형에 역동성을 준다. 아랫부분에서는 제1영기싹의 끝에 영기꽃이 핀다. 이 그림은 샤토 메종 쇠창살의 3분의1 부분으로 위에 있는 한 단위의 영기문을 택한 것이다. 다시 거시적으로 이 그림을 보면 그 긴 S자 모양은 영조의 꼬리에 해당한다. 조형예술에 나타나는 영조나 영수는 모두 꼬리에서 영기화생한다. 그러므로 꼬리 부분이 엄청난 영기문으로 이뤄져 있다. 방향으로 보면 영조 머리에서 아래로 향하고 있으나 조형언어를 읽을 때에는 끝에서부터 시작해 영조로 가야 한다.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엄청난 힘을 가진 영조의 초자연적인 탄생이다. ●14세기 피렌체파 역시 무량보주 상징하는 작은 꽃 그려 피렌체에서 일어난 새로운 양식의 조형을 살펴보자. 흔히 플로렌스파(派)라고도 하는데 피렌체를 영어로 플로렌스라 부르고 있으나 피렌체라는 말을 써야 한다. 피렌체파는 14세기 피렌체에서 발달한 명암법과 원근법 등 자연주의 양식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을 말한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마사초 등 르네상스의 쟁쟁한 화가들과 그 화풍을 가리킨다. 아칸서스가 아니라는 것을 강력히 보여 주고 있는 참으로 놀라운 조형이다(⑥). 피렌체 예술가들은 어떻게 아칸서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까. 그러면서 왜 계속 아칸서스라 불렀을까.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뤄진 조형은 실로 충격적이다. 양옆이 좁은 공간 안을 보면 맨 밑의 붉은 띠로 맨 노란 보따리 아래로 영기잎이 발산하고 있다. 이제부터는 아칸서스란 말을 쓰지 않기로 한다. 중간의 영기잎에서 위로 노란색으로 칠한 부분이 부풀어 오르고 있는데 이 조형이 그림의 중심적 역할을 한다. 그 아래로 영기잎이 퍼지면서 발산해 노란 보따리를 감싸고 있다. 보따리는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 위로 세 갈래 넓은 영기잎이 나오는데 놀랍게도 무량한 빨간 보주들을 감싸고 있다. 그 사이사이로 가는 영기줄기가 나오면서 작은 영기꽃을 피우고 있다. 즉 영기꽃은 무량보주를 상징하니 비록 작은 꽃이나 ‘큰 영기잎들이 감싼 무량보주’와 같은 값을 지닌다. 더 놀라운 것은 최근 보여 드린 사방으로 확산하는 무량보주가 무량한 보주를 감싼 영기잎들에서 발산하고 있지 않은가. 서양에서 장미창이라 부르는 것이 무량한 보주가 사방으로 확산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난 다음에 이 조형을 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12세기 창건한 프랑스 중부 부르주 교외의 ‘생 위르생 예배당’에는 돌로 만든 문 장식이 있다. 아랫부분에 영기문띠가 있으며 ‘아칸서스 당초문’이라고 부른다(⑦). 채색 분석해 보면 절묘한 영기문을 이루며 갈래 사이에서 보주가 하나씩 생겨나고 있다. 영기문 전개 원리에 충실하다. 그 아래 영기문을 간략화해 그려 보니 필자가 발견한 영기문의 전개 원리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가. 천재라고 불리는 대표적 근대 예술가인 윌리엄 모리스는 아칸서스를 주제로 수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그 여파가 우리나라에도 미치고 있다. 그런데 그는 과연 아칸서스의 본질을 알고 창작했을까, 아니면 그저 옛날 것들을 모방하되 다르게 변형시켰을 뿐인가. 그러나 만일 그가 그 본질을 알았다면 놀라서 자세히 설명했어야 한다. 그는 끝내 가장 많이 창작했던 아칸서스의 상징과 조형원리를 알지 못하고 타계한 셈이다. 이제 아칸서스는 더이상 아칸서스가 아니다. 만물 생성의 근원인 영기잎이다. 용이 제1영기싹과 보주로 이뤄진 것처럼 아칸서스도 제1영기싹과 보주로 이뤄져 있다. 저 오랜 그리스의 코린트식 주두에 표현됐다고 하는 아칸서스는 반드시 보주들과 보주로 이뤄진 제3영기싹으로 표현된 이래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데, 이제 모두 더이상 아칸서스라고 부르지 말자. 인류의 고귀한 조형의 올바른 이해와 창작을 위해 만천하에 선언한다.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 ‘냉장고를 부탁해’ 오세득 출연, 보아 셰프들과 다정한 포즈 인증샷 공개

    ‘냉장고를 부탁해’ 오세득 출연, 보아 셰프들과 다정한 포즈 인증샷 공개

    ‘냉장고를 부탁해’ 오세득 출연, 보아 셰프들과 다정한 포즈 인증샷 공개 냉장고를 부탁해 오세득 ’냉장고를 부탁해’에 출연한 보아가 키와 최현석, 오세득, 이원일, 홍석천 등 셰프들과의 인증샷을 공개했다. 보아는 20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냉장고를 부탁해’ 녹화를 마친 뒤 오세득, 최현석, 홍석천, 이원인 셰프와 게스트로 함께 출연한 샤이니의 키와 모여 다정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을 게재했다. 사진 속에는 셰프들 사이에 보아가 브이를 그리며 해맑게 웃고 있는 모습이 담겼다. 이날 방송된 JTBC ‘냉장고를 부탁해’에서는 보아의 냉장고 속 재료를 이용해 ‘적은 재료로 만드는 음식’과 ’넘버원 면요리’라는 주제로 셰프들이 대결을 펼쳤다. 특히 ‘넘버원 면요리’에서는 간판 셰프 최현석과 스페셜 셰프 오세득이 맞붙어 신경전이 돋보이는 대결이 이뤄졌다. 이날 첫 출연한 오세득 셰프는 ‘보아 씨, 초면입니다’라는 이름의 중화풍 면 요리를 선보여 최현석 셰프를 꺾었다. 한편 앞서 방송에서 보아는 “오빠로 삼고 싶은 셰프가 있느냐”는 질문에 이원일 셰프를 꼽으며 “성격이 좋으실 것 같다. 요리할 때도 자상하게 가르쳐줄 것 같다”고 말해 관심을 모았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냉장고를 부탁해’ 오세득 “보아 씨, 초면입니다” 보아 셰프들과 녹화 인증샷 공개

    ‘냉장고를 부탁해’ 오세득 “보아 씨, 초면입니다” 보아 셰프들과 녹화 인증샷 공개

    ‘냉장고를 부탁해’ 오세득 “보아 씨, 초면입니다” 보아 셰프들과 녹화 인증샷 공개 냉장고를 부탁해 오세득 ’냉장고를 부탁해’에 출연한 보아가 키와 최현석, 오세득, 이원일, 홍석천 등 셰프들과의 인증샷을 공개했다. 보아는 20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냉장고를 부탁해’ 녹화를 마친 뒤 오세득, 최현석, 홍석천, 이원인 셰프와 게스트로 함께 출연한 샤이니의 키와 모여 다정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을 게재했다. 사진 속에는 셰프들 사이에 보아가 브이를 그리며 해맑게 웃고 있는 모습이 담겼다. 이날 방송된 JTBC ‘냉장고를 부탁해’에서는 보아의 냉장고 속 재료를 이용해 ‘적은 재료로 만드는 음식’과 ’넘버원 면요리’라는 주제로 셰프들이 대결을 펼쳤다. 특히 ‘넘버원 면요리’에서는 간판 셰프 최현석과 스페셜 셰프 오세득이 맞붙어 신경전이 돋보이는 대결이 이뤄졌다. 이날 첫 출연한 오세득 셰프는 ‘보아 씨, 초면입니다’라는 이름의 중화풍 면 요리를 선보여 최현석 셰프를 꺾었다. 한편 앞서 방송에서 보아는 “오빠로 삼고 싶은 셰프가 있느냐”는 질문에 이원일 셰프를 꼽으며 “성격이 좋으실 것 같다. 요리할 때도 자상하게 가르쳐줄 것 같다”고 말해 관심을 모았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냉장고를 부탁해’ 오세득 최현석, 패션 대결 승자는? ‘두 사람 이렇게 친했나?’

    ‘냉장고를 부탁해’ 오세득 최현석, 패션 대결 승자는? ‘두 사람 이렇게 친했나?’

    ‘냉장고를 부탁해’ 오세득 최현석 오세득 셰프가 ‘냉장고를 부탁해’에 첫 출연하며 화제가 된 가운데, 과거 최현석 셰프와 이탈리아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 화제다. 14일 최현석은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네뚜노에서 오세득과 함께 극복할 수 없는 핏의 차이. 절대 무보정”이라는 글과 함께 사진을 올렸다. 사진 속 최현석과 오세득은 각각 파란색과 분홍색의 셔츠를 입고 분수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특히 최현석은 큰 키와 늘씬한 몸매로 모델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한편, 20일 방송한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에서는 가수 보아가 출연해 냉장고를 공개했다. 이날 방송에서 오세득과 최현석은 ‘넘버원 면요리’라는 주제로 대결했다. 오세득은 ‘보아 씨, 초면입니다’라는 이름의 중화풍 면 요리를 만들었다. 최현석은 직접 제면한 ‘최.면.석’을 만들었다. 이날 오세득은 15분의 제한 시간에도 여유로운 태도로 요리에 임해 눈길을 끌었다. 이후 두 사람의 요리를 맛본 보아는 “면 요리 자체는 최현석 셰프님 것을 더 좋아하지만, 오세득 셰프님 면이 더 맛있었다”라며 오세득의 손을 들어줬다. 이에 오세득은 “(최현석이) 호랑이를 키운거죠”라며 너스레를 떨어 웃음을 자아냈다. ‘냉장고를 부탁해’ 오세득 최현석, ‘냉장고를 부탁해’ 오세득 최현석, ‘냉장고를 부탁해’ 오세득 최현석, ‘냉장고를 부탁해’ 오세득 최현석, ‘냉장고를 부탁해’ 오세득 최현석 사진 = 서울신문DB (‘냉장고를 부탁해’ 오세득 최현석) 연예팀 seoulen@seoul.co.kr
  • ‘냉장고를 부탁해’ 오세득 스페셜 셰프 출연, 보아·키와 다정 인증샷 공개

    ‘냉장고를 부탁해’ 오세득 스페셜 셰프 출연, 보아·키와 다정 인증샷 공개

    ’냉장고를 부탁해’ 오세득 스페셜 셰프 출연, 보아·키와 다정 인증샷 공개 냉장고를 부탁해 오세득 ’냉장고를 부탁해’에 출연한 보아가 키와 최현석, 오세득, 이원일, 홍석천 등 셰프들과의 인증샷을 공개했다. 보아는 20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냉장고를 부탁해’ 녹화를 마친 뒤 오세득, 최현석, 홍석천, 이원인 셰프와 게스트로 함께 출연한 샤이니의 키와 모여 다정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을 게재했다. 사진 속에는 셰프들 사이에 보아가 브이를 그리며 해맑게 웃고 있는 모습이 담겼다. 이날 방송된 JTBC ‘냉장고를 부탁해’에서는 보아의 냉장고 속 재료를 이용해 ‘적은 재료로 만드는 음식’과 ’넘버원 면요리’라는 주제로 셰프들이 대결을 펼쳤다. 특히 ‘넘버원 면요리’에서는 간판 셰프 최현석과 스페셜 셰프 오세득이 맞붙어 신경전이 돋보이는 대결이 이뤄졌다. 이날 첫 출연한 오세득 셰프는 ‘보아 씨, 초면입니다’라는 이름의 중화풍 면 요리를 선보여 최현석 셰프를 꺾었다. 한편 앞서 방송에서 보아는 “오빠로 삼고 싶은 셰프가 있느냐”는 질문에 이원일 셰프를 꼽으며 “성격이 좋으실 것 같다. 요리할 때도 자상하게 가르쳐줄 것 같다”고 말해 관심을 모았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냉장고를 부탁해’ 오세득 “보아 씨, 초면입니다” 보아 셰프들과 다정한 인증샷 공개

    ‘냉장고를 부탁해’ 오세득 “보아 씨, 초면입니다” 보아 셰프들과 다정한 인증샷 공개

    ‘냉장고를 부탁해’ 오세득 “보아 씨, 초면입니다” 보아 셰프들과 다정한 인증샷 공개 냉장고를 부탁해 오세득 ’냉장고를 부탁해’에 출연한 보아가 키와 최현석, 오세득, 이원일, 홍석천 등 셰프들과의 인증샷을 공개했다. 보아는 20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냉장고를 부탁해’ 녹화를 마친 뒤 오세득, 최현석, 홍석천, 이원인 셰프와 게스트로 함께 출연한 샤이니의 키와 모여 다정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을 게재했다. 사진 속에는 셰프들 사이에 보아가 브이를 그리며 해맑게 웃고 있는 모습이 담겼다. 이날 방송된 JTBC ‘냉장고를 부탁해’에서는 보아의 냉장고 속 재료를 이용해 ‘적은 재료로 만드는 음식’과 ’넘버원 면요리’라는 주제로 셰프들이 대결을 펼쳤다. 특히 ‘넘버원 면요리’에서는 간판 셰프 최현석과 스페셜 셰프 오세득이 맞붙어 신경전이 돋보이는 대결이 이뤄졌다. 이날 첫 출연한 오세득 셰프는 ‘보아 씨, 초면입니다’라는 이름의 중화풍 면 요리를 선보여 최현석 셰프를 꺾었다. 한편 앞서 방송에서 보아는 “오빠로 삼고 싶은 셰프가 있느냐”는 질문에 이원일 셰프를 꼽으며 “성격이 좋으실 것 같다. 요리할 때도 자상하게 가르쳐줄 것 같다”고 말해 관심을 모았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냉장고를 부탁해 오세득, ‘보아 씨 초면입니다’ 최현석에 승..레시피 대체 뭐기에?

    냉장고를 부탁해 오세득, ‘보아 씨 초면입니다’ 최현석에 승..레시피 대체 뭐기에?

    냉장고를 부탁해 오세득, ‘보아 씨 초면입니다’ 최현석에 승..레시피 대체 뭐기에? ‘냉장고를 부탁해 오세득’ 오세득 셰프가 ‘냉장고를 부탁해’ 첫 출연에서 최현석 셰프를 꺾었다. 20일 방송된 JTBC ‘냉장고를 부탁해’에서는 보아가 게스트로 출연한 가운데 오세득 셰프와 최현석 셰프의 면 요리 대결이 펼쳐졌다. 이날 방송에서 오세득 셰프는 면 요리인 ‘보아 씨 초면입니다’를 만들었고, 최현석은 직접 제면한 ‘최.면.석’을 선보였다. 중화풍 초면 요리인 ‘보아 씨 초면입니다’ 레시피는 먼저 끓는 물에 소면을 삶은 뒤 얼음물에 헹구고, 물기를 제거한 면을 기름을 두른 팬에 넣고 지진다. 이어 기름을 두른 팬에 대파를 볶고 얇게 썬 소고기 안심, 소금, 다진 마늘을 넣은 뒤 얇게 썬 오징어와 손질한 채소를 넣고 소금, 후추, 맛술을 더해 볶는다. 여기 에 소금, 후추, 맛술, 간장과 물을 넣고 끓이고 참기름과 전분물을 넣어 소스 농도를 맞춘다. 밀폐용기에 고춧가루, 으깬 마늘, 식용유를 넣고 전자레인지에서 가열해 고추기름을 만들고 그릇에 면을 담고 소스를 올린 뒤 고추기름을 뿌린다. 마지막으로 파채를 올린 뒤 끓인 기름을 두르면 완성된다. 냉장고를 부탁해 오세득 셰프의 ‘보아 씨 초면입니다’를 맛 본 보아는 “중식당 누룽지에 고추 잡채 소스를 곁들인 거 같다. 해물과 고기가 같이 들어가 있다. 내가 야채를 잘 안 먹는데 이건 잘 먹을 수 있을 거 같다”고 호평했다. 보아는 이어 최현석의 ‘최.면.석’의 요리를 먹고는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보아는 “두 요리는 다른 매력이 느껴진다. 이 짧은 시간에 이렇게 탱글탱글한 면발을 만든 게 놀랍다”고 감탄했다. 이후 보아는 오세득 셰프의 ‘보아 씨 초면입니다’에 손을 들어줬다. 보아는 “면으로 평가하면 최현석 셰프님의 면이 더 좋지만, 맛이나 간은 오세득 셰프님의 요리가 더 잘 맞았다”고 평했다. 사진=JTBC ‘냉장고를 부탁해’ 캡처(냉장고를 부탁해 오세득) 연예팀 seoule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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