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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상구는 미리 봐두고 기체 멈추면 곧장 탈출”

    2일 에어 프랑스 여객기가 착륙 사고로 화염에 휩싸였으면서도 탑승자 309명 모두 무사히 탈출한 것을 언론들은 ‘기적’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ABC방송 인터넷판은 3일 정부 통계를 인용, 지난 1983년부터 2000년까지 비슷한 사고를 당한 승객 20명 가운데 사망자는 1명꼴에 그쳤다며, 비상행동 요령만 숙지하면 이런 기적은 얼마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1999년 아칸소주 리틀록 공항에서 아메리칸항공 여객기는 불기둥이 치솟는 상황에서도 145명 중 134명이 탈출에 성공했다. 생존자들은 제트유(油)에 흠뻑 젖은 상태에서 아주 작은 틈새로 기체를 빠져나와 4m 아래로 몸을 내던져 목숨을 구했다. 미 연방항공국(FAA)은 승무원들이 사고 후 90초 안에 승객들을 탈출시키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이를 ‘황금시간’이라고 부른다. 전문가들은 승객들이 비행기에 오를 때 자기 좌석과 비상구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꼭 기억해둬야 한다고 조언한다. 자욱한 연기 때문에 눈을 감고 선반에서 떨어진 수화물들을 치우며 복도를 빠져나와야 하기 때문에 승객들은 반드시 이 거리를 기억해야 한다. 위험한 착륙이 시도될 때 올바른 자세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등을 좌석에 기대지 말고 앞좌석에 손을 올린 채 머리를 숙이고 있어야 한다. 기체가 멈추면 연기와 독성 가스가 순식간에 퍼지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출구 쪽으로 움직여야 하고 빠져나온 뒤에는 기체에서 가급적 멀리 벗어나야 한다. 에어 프랑스 승객들은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차량들을 세워 타고 기체 주변으로부터 멀리 달아났다.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국제플러스] 바그다드 폭탄테러 22명 사망

    |바그다드 연합|24일 바그다드의 한 경찰서에 차량폭탄공격으로 최소 22명이 숨지고 25명이 부상했다고 경찰이 밝혔다. 경찰은 폭탄을 실은 트럭 한 대가 바그다드 동쪽 라사드 경찰서로 돌진, 경찰서를 둘러싼 콘크리트 장벽과 충돌하면서 폭발했다고 밝혔다. 이날 공격으로 경찰차량 2대를 포함,6대의 차량이 화염에 휩싸였고 인근 가게들이 피해를 입었으며 폭발지역에 사체들이 흩어져 있었다고 경찰이 전했다. 이라크 저항세력은 이라크의 경찰 및 보안군을 주된 목표로 테러공격을 강화하고 있다.
  • 서울 2호선 전동차 ‘신형’ 교체

    국제 표준화 기준에 적합한 신형 전동차가 서울 지하철을 달린다. 서울지하철공사(1∼4호선)는 5일 법정 수명인 25년이 지나 10월 말까지 신형으로 교체될 2호선 전동차 54량 가운데 10량을 우선적으로 투입했다고 밝혔다.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참사 이후 전동차 의자 등 편의시설을 불연재 등으로 바꾼 경우는 있어도 이처럼 차량 전체를 항목별로 국제기준에 따라 제작한 전동차가 운행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새 전동차는 산소 발생, 화염 절연, 연기 독성을 포함한 각 안전항목에 대해 국제표준화기구(ISO)등 규정에 따라 마련된 새 건설교통부령의 ‘도시철도 차량 안전기준에 관한 규칙’의 기준을 맞춘 것들이다. 공사 안천헌 차량 팀장은 “화재 안전성은 물론 냉난방 자동조절 및 이산화탄소 자동감지 기능 등을 갖췄으며, 기존 전동차의 열발산 문제를 해소해 내구성을 높였다.”고 설명했다. 공사는 지난달 제작을 마친 이 10량에 대해 성능 시험과 시운전을 마치고 이날 전동차 1편성으로 운행에 투입했으며,10월 말까지 올해로 법정수명을 넘기는 나머지 44량의 노후 전동차도 모두 교체할 계획이다. 공사는 1∼4호선 전동차 가운데 법정 사용내구연한을 넘어선 전동차를 단계적으로 신형 전동차로 교체할 예정이다. 이 구간에서 운행 중인 전체 1944량 가운데 올해로 20년 되는 차량은 106량이며 10년 이하 된 차량은 22량이다.1974년 개통한 1호선의 경우 89년 이후 전량 교체됐다.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씨줄날줄] 세계보도사진전/이용원 논설위원

    장면 하나-차 앞유리창을 뚫은 총탄 흔적은 10여개. 공포가 지나쳐서일까. 안에 탄 미군은 얼이 빠져 있다. 장면 둘-굳은 표정으로 관람객을 응시하는 사내. 짙은 눈썹 아래 양눈과, 수염으로 덮인 입술은 철사로 꿰매져 있다. 장면 셋-하늘을 벌겋게 물들인 화염의 기세는 순식간에 초라한 골목을 덮칠 듯하다. 그러나 소녀는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만 있다. 절망은 달아날 마음조차 앗아간 것일까. 첫 장면의 미군은 이라크에 파병된 해병 에릭 에욘 일병이다. 지난해 4월6일 매복공격을 받아 차량에 탄 9명 가운데 그만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하지만 사흘 뒤 그 역시 같은 장소에서 전사했다. 눈·입을 꿰맨 사내는 이란의 망명자 메흐디 카우보시. 네덜란드 정부가 망명신청을 기각하자 항의 표시로 이같은 일을 벌였지만 강제추방 명령은 취소되지 않았다. 지난해 8월 브라질 상파울루의 빈민가에 큰 불이 나 누옥 200여채가 불탔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니 그 소녀는 다시금 고단한 삶을 이어갈 것이다. 서울 태평로1가 서울신문사(프레스센터) 1층 서울갤러리에서 열리는 ‘2005 세계보도사진전’에 연일 관람객들이 몰리고 있다. 전시된 사진은, 세계보도사진재단(WPP)이 123개국의 출품작 7만점 가운데 수상작으로 가려낸 199점. 지난해 지구상에서 일어난 사건·사고와 지구촌 가족의 삶, 자연의 신비 등이 두루 포함돼 있다. 먼저 눈길을 끄는 사진은 이라크전·쓰나미 피해 등 전쟁·테러·자연재앙과 관련한 것들이다. 겁에 질린 미군 병사의 사진 곁에는 짐승 우리 같은 철망에 갇힌 이라크 반군 포로의 모습이 나란히 붙어 있다. 하지만 무겁고 어두운 사진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페루의 고산지대 마을 부녀자들이 치마를 입고 축구하는 장면, 아테네올림픽 개인탁구 결승전에서 유승민 선수가 강력하게 스매싱을 날리는 장면 등은 절로 미소를 떠오르게 한다. 사진은 한 컷만으로 무한한 이야기를 전달한다.‘세계보도사진전’을 한바퀴 둘러보면서 새삼 느낀 사실은 타인의 삶, 다른 문명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그 고통·기쁨을 나눠가짐으로써 서로를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점이었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seoul.co.kr
  • [미술단신]

    ●손영 개인전 한국화 화가인 손 씨는 오는 15일부터 21일까지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개인전을 갖는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오브제 같은 느낌의 먹빛 뚜껑에서 한국화의 전통을 살리면서 현대적 변용을 모색하는 작가의 치열한 작업 면모를 볼 수 있다.(02)736-1020. ●베를린에서 DMZ까지 광복 60주년 기념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전시회.15일부터 다음달 31일까지 서울 올림픽미술관에서 열린다.▲평화염원전(국내 유명작가의 베를린 장벽 작품 6점)▲통일염원전(DMZ대북심리전장비 이용한 회화, 조각, 설치미술)▲베를린 장벽전(세계 유명작가의 장벽 작품 30점)▲모자이크전(한마음으로 펼치는 화합의 장) 등 네가지 주제다.(02)733-3961.
  • [사회플러스] 오산 농성 철거민등 24명 구속

    경기도 화성경찰서는 10일 오산 세교택지개발지구 철거민 30명 가운데 대책위원장 김모(40)씨 등 세교지구 주민 5명과 전국철거민연합 회원 19명 전원 등 24명을 살인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수원지방법원 영장전담 정형식 부장판사는 “철거민 전원이 경비용역업체 직원 사망과 관련, 화염병을 던진 혐의를 부인하고 일부는 묵비권까지 행사하고 있어 정확한 범죄 사실을 가려내기 위한 보강수사가 필요하다.”며 영장을 발부했다.
  • 오산 철거민농성 54일만에 강제해산

    지난 4월16일 시작된 경기도 오산 세교택지개발지구 철거민 농성이 경찰 진압으로 54일 만에 일단락됐다. 경찰은 8일 오후 1시10분쯤 철거민들이 농성중인 W빌라 옥상에 경찰 특공대 40여명을 투입,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저항하는 철거민들을 모두 연행했다. 진압작전에 돌입한 지 3시간 만이다. 경찰은 대형 크레인을 이용해 경찰특공대 대원들이 탄 컨테이너 박스를 빌라 101동과 102동 옥상에 투입, 이곳에서 농성중이던 철거민들을 모두 진압했다. 철거민들은 벽돌과 화염병을 던지고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등 완강히 저항했으나 경찰투입 5분여 만에 완전 진압됐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철거민 모두 큰 부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오랜 농성에 지쳐 있던 철거민들은 최루액이 섞인 물에 흠뻑 젖어 저항을 하지 못했고 그 결과 부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경찰은 밝혔다. 이날 경찰에 연행된 농성 철거민과 관계자들은 30명이다. 경찰은 특공대 투입에 앞서 대형 크레인 2대와 소방차 13대를 동원,3시간여 동안 물대포를 쏘며 인화성 물질 등을 사전에 제거했다. 또 농성장 주변에 경찰특공대 50명외에 경비병력 20개 중대 2400여명을 배치했으며 철거민들의 우발적 행동에 대비해 그물 50개, 매트리스 40개, 응급차 등을 대기시켰다. W빌라 철거민들은 지난 4월16일 적절한 보상 등을 요구하며 빌라 5층 옥상에 높이 13m의 망루를 설치하고 농성을 시작했으며, 당일 오후 망루를 철거하려던 경비용역업체와 충돌, 용역업체직원 이모(25)씨가 화염병에 맞아 숨지고 한모(21)씨 등 6명이 부상했다. 오산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사설] 철거민에 새총 쏜 정신 나간 경찰

    경기 오산시 세교택지 개발지구내 한 빌라 건물에서 농성 중인 철거민들에게 경찰이 자체 제작한 대형 새총을 사용해 골프공을 쏘아댄 것은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시민단체의 항의에 따라 경기지방경찰청이 감찰 조사를 한 결과 현장 경찰관들은 쇠파이프로 1m 높이의 새총을 만든 뒤 한밤중에 철거민들이 농성 중인 건물을 향해 골프공을 쏜 사실이 드러났다. 게다가 새총 제작을 지시한 사람이 현장 책임자인 경비교통과장이라니 정신 나간 짓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세교지구 철거민들의 농성은 지금까지 40일 넘도록 지속되고 있고 그 와중에 지난달 16일에는 철거민들이 던진 화염병·시너에 불이 붙은 철거 용역업체 직원 한명이 사망하는 불상사마저 일어났다. 또 대형 새총에 골프공을 담아 상대에게 쏘아댄 것도 철거민들이 먼저 시작한 일이다. 그렇더라도 시위 진압에 나선 경찰이 보복이라도 하듯 같은 방법으로 농성자들을 공격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는 행동이다. 현장 경찰은 “철거민들이 화염병·골프공 등 시위도구를 모두 쓰도록 유인하고자” 새총 공격을 했다고 변명했다니 더욱 기가 찰 노릇이다. 경찰은 이번 사태의 책임을 물어 화성경찰서장을 교체하고 경비교통과장을 직위해제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문책이 아니다. 현재 경찰은 수사권 조정 문제를 놓고 검찰과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 ‘새총 사건’을 보면 일부 경찰관들의 의식수준은 민주화시위를 폭력으로 진압하던 20∼30년 전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공권력이 물리력을 행사할 때는 그 목적은 물론 과정·수단도 정당해야 함을 경찰은 명심하기 바란다.
  • SK정유탑 농성 무혈진압

    울산지방경찰청은 18일 새벽 울산석유화학공단안 울산건설플랜트 노조원들의 천막농성장을 전격 압수수색한 데 이어 오후엔 18일째 고공농성중인 SK㈜ 정유탑에 경찰특공대를 투입, 이모(42)씨 등 건설플랜트 노조원 3명을 10여분 만에 강제진압했다. 경찰은 오전 수색에서 화염병 8개, 쇠파이프 497개, 쇠파이프가 장치된 수레차 2대, 새총 11개, 시너 2통(4ℓ), 볼트 등 새총알 500개, 돌자루 1포대 등을 압수했다. 전날 시위과정에서 노조원들이 경찰로부터 빼앗아 간 무전기·방패·경찰봉·경찰모 등도 회수했다. 경찰은 불법폭력 시위에 가담한 노조원은 모두(수백명으로 예상) 소환해 사법처리하기로 했다. 또 체포영장이 발부돼 있는 박해욱 노조위원장을 비롯한 노조원 7명에 대해서도 은신처 압수수색 등을 통해 검거에 주력하기로 했다. 경찰은 건설플랜트노조 시위가 갈수록 과격·폭력화되고 극렬해져 더 이상 방치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판단, 앞으로 집회를 허용하지 않을 방침이다. 또 국제포경위원회(IWC) 울산 회의가 시작되는 날에 예정돼 있는 전국노동자대회 때는 정예기동대와 살수차를 비롯한 특수진압장비를 동원해 대처할 계획이다. 전날 시위 진압과정에서 시위대가 휘두른 쇠파이프 등에 전·의경 44명이 부상(전치 3∼6주)했다. 한편 경찰은 이날 오후 5시30분쯤 대형 크레인 3대와 탑에 설치돼 있는 사다리를 이용해 특공대 24명을 SK㈜ 정유탑 꼭대기로 투입, 이씨 등을 모두 검거했다. 이들은 검거과정에서 저항은 하지 않았다. 경찰은 이들에 대해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조사한 뒤 사법처리할 예정이다. 울산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노조원·경찰 120명 부상

    울산건설플랜트노조 조합원들이 석유화학공단에서 시위를 벌이면서 경찰과 충돌, 전·의경과 노조원 120명이 상처를 입었다. 파업 중인 건설플랜트 노조원 800여명은 6일 오후 1시40분쯤 울산 남구 석유화학공단내 SK㈜ 공장 앞에서 집회를 열고 공장 진입을 시도하는 등 3시간 동안 시위를 벌였다.SK공장 안으로 진입하려던 노조원들이 화염병과 보도블록을 던지고 쇠파이프와 각목를 휘두르며 경찰과 충돌했다. 공장 진입에 실패한 노조원들은 울산시청 쪽으로 행진하다 남구 야음동 도로가에 주차된 충남경찰청 기동대 소속 버스 1대도 부쉈다. 오후 5시쯤 남구 삼산동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로 집회 장소를 옮기면서 교통 체증이 빚어졌다. 경찰은 “폭력시위를 계속하면 특단의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울산 민노총은 “한 달 동안 플랜트 노조원 19명이 구속됐다.”면서 “앞으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투쟁에 나서겠다.”고 주장했다. 울산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젊은이들은 원래 반항적” 獨영화 ‘에주케이터’

    “젊은이들은 원래 반항적” 獨영화 ‘에주케이터’

    ‘세상을 바꾸자’는 젊은 구호는 독일에서도 ‘세대 고정적’인 것인가보다. 우리나라에 ‘386 세대’가 있다면 독일에는 ‘68혁명 세대’가 있다.6일 개봉하는 독일 영화 ‘에주케이터(edukator)’는 청춘시절 품었던 비뚤어진 세상에 대한 뜨거운 분노를 상실한 오늘날 ‘68혁명 세대’의 현주소를, 새로운 세대의 세 청춘을 통해 풍자한다. 감독 한스 바인가르트너는 “젊은이들은 본래 반항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당시 그들의 순수한 에너지는 지금 다 어디로 가버렸는가.”라고 질책한다. 부르주아 계급의 ‘교육자’역할을 자청하고 나선 젊은이가 있다. 피터(스티페 에르켁)와 얀(다니엘 브륄)은 선배 혁명가들과 달리 손에 쇠파이프와 화염병을 들지 않는다. 비어있는 부잣집에 침입해 가구와 고가품들을 재배치해 마치 설치미술처럼 쌓아놓고는 유유히 사라진다.“풍요의 날은 얼마남지 않았다.”는 경고의 메시지와 함께. 물건은 훔치지 않는 것이 이들의 불문율. 이들은 이같은 ‘혁명 놀이’를 통해 사회내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주위를 환기시킬 뿐이다. 피터가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 피터의 여자친구 율(율리아 옌치)은 얀과 함께 이 놀이에 나선다. 이들은 벤츠 자동차를 소유한 하르덴베르크(버그하르트 클로브너)의 고급 빌라에 침입해 이 ‘혁명 놀이’를 하다 그만 휴대전화를 두고 나온다. 다시 이를 찾으러간 두 사람은 경찰에 발각되고, 돌아온 피터와 함께 얼떨결에 하르덴베르크를 납치, 산장으로 도망간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 세 사람. 그들이 증오한 전형적인 부르주아 하르덴베르크는 한때 세상 전복을 꿈꾸며 68세대의 선봉에 섰던 인물. 이후 하르덴베르크는 세 젊은이를 통해 순수했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고, 세 젊은이들은 순수한 이상을 흔들리게 만드는 미묘한 사랑의 감정에 휩싸인다. 그러나 결국 영화는 발칙한 결말을 선택한다. 젊은이들과 하르덴베르크가 서로를 배신하는 것.“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화면속 메시지가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독일 영화 답지 않게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풍자와 경쾌한 유머의 맛깔스러운 조화가 돋보인다.15세 관람가.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이슬람 과격운동 이집트서 불붙나

    중동지역에서 비교적 치안이 안정된 것으로 여겨져온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외국 관광객을 겨냥한 자살폭탄 공격과 총격전이 2시간 간격으로 발생했다. 이번 사건으로 범인 3명이 모두 숨지고 외국인 관광객 4명 등 9명이 다쳤다. 지난달 7일 이후 또다시 외국인을 겨냥한 테러인데다 여성이 테러에 직접 가담한 것도 전례가 없어 관광대국 이집트가 큰 충격에 빠졌다. 당국의 거듭된 부인에도 불구하고 자생적 이슬람 과격단체들이 갈수록 행동수위를 높이고 있어 90년대말 자취를 감춘 이슬람 과격운동이 되살아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다. ●2시간 간격 관광객 겨냥 테러 이날 오후 3시15분쯤 카이로 국립박물관 근처 다리에서 한 남자가 뛰어내리며 사제폭탄을 터뜨려 이스라엘인 부부 등 외국인 4명과 이집트인 3명이 다쳤다. 내무부는 이 남자가 지난달 7일 관광객이 즐겨 찾는 칸 엘 칼릴리 시장에서 폭탄테러를 저질러 프랑스인 2명과 미국인 1명을 희생시킨 단체에 연계된 이합 유스리 야신이며 경찰 포위망이 좁혀오자 이같은 짓을 저질렀다고 발표했다. 2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이번엔 야신의 누이동생과 약혼녀가 얼굴을 히자브로 가린 채 폭탄테러 현장에서 3㎞쯤 떨어진 올드 카이로구역의 사이다 아이샤 모스크 근처에 정차된 관광버스를 향해 총기를 난사했다. 경찰은 두 여인이 자살했다고 발표했으나 목격자들은 경관 총에 맞아 숨졌다고 주장하는 등 혼선이 빚어졌다. 이집트인 2명이 다쳤을 뿐 관광객 피해는 없었다. ●과격 이슬람운동 재연될까 전전긍긍 사건 발생 직후 ‘순교자 압둘라 아잠 여단’이란 생소한 이름의 단체가 이슬람 사이트에 올린 성명을 통해 “지난해 10월 시나이반도 폭탄공격에서 순교한 이들의 희생에 값하고, 경찰의 무차별 연행에 대한 보복으로 공격을 감행했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이집트 무자헤딘 그룹’ 명의의 성명도 동일 사이트에 등장했다. 실제로 이집트 당국은 지난해 폭탄테러 직후 4000여명을 무차별 연행, 아직도 수십명을 감금하고 있고 다른 조직사건까지 포함하면 전체 구금자는 1만 6000명에 이른다. 이집트에선 지난 1992년부터 약 6년간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외국인 관광객을 겨냥한 테러가 끊이지 않았다.97년 9월 카이로 국립박물관 앞 타흐리르 광장에 서있던 관광버스에 화염병이 날아들어 독일인 9명이 숨졌고 같은 해 11월 룩소르 신전 앞에선 총격으로 외국인 58명 등 62명이 희생됐다. 그러나 그 후 잠잠했던 외국인 겨냥 테러가 지난달 7일 칸 엘 칼릴리 시장 사건 이후 되살아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알 아흐람 정치전략연구소의 테러문제 전문가 디아 라슈완 박사는 최근 일련의 테러가 가족이나 친구 등으로 구성된 소규모 그룹의 소행이며 분노심에서 공격을 단행했을 뿐 진정한 조직을 갖추진 못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다른 분석가들은 ‘자마아 알 이슬라미야’나 이슬람지하드와는 다른 새로운 세대의 과격단체가 결성돼 행동에 나섰을지 모른다며 대책 마련을 주문하고 있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6) 정감록, 언제 누가 썼나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6) 정감록, 언제 누가 썼나

    ‘정감록’이 수백년 동안 인기를 누려왔다는 점은 이미 여러 차례 말했다. 그런데도 막상 언제, 누가 정감록을 썼냐고 물으면 딱 부러지게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 정감록은 조선왕조의 멸망을 예언한 책자라 왕조 말까지 금서(禁書)였고, 그래서 저작에 관해 참조될 만한 기록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럼, 우리는 정감록의 저자와 출현 시기를 하나도 알 수 없단 말인가? 여러 해 전부터 나는 이 문제를 풀어보려고 고심했다.‘조선왕조실록’,‘비변사등록’,‘승정원일기’ 등 조선시대의 정사를 샅샅이 뒤지며 여러 가지로 궁리해보았다. 이제는 정감록이 언제, 어디서 나왔는지를 답할 수 있게 됐다. 이 글에선 정감록의 기원에 관해 다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가졌는지를 먼저 살펴보고, 이어서 그 문제에 대한 내 생각을 말해보겠다. ●선조22년 정여립 역모사건이 기원? 처음으로 정감록을 학문적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이는 이능화다. 그는 선조 22년(1589)에 발생한 정여립의 역모 사건을 ‘정감록’의 기원으로 간주했다. 이능화의 저서 ‘조선기독교급 외교사(朝鮮基督敎及 外交史)’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정여립은 뜻을 잃고 나라를 원망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계룡산에 갔다가 반란할 마음을 적은 시(反詩)를 지어서 자기의 뜻을 보였다. 그리고 장차 나무 아들(木子, 즉 이씨)이 망하고 전읍(奠邑, 즉 정씨)이 일어난다는 노랫말을 지어서 퍼뜨렸으며, 스스로 그에 응하였다. 이것이 정감록에 관한 주장의 시초가 된다.”요컨대 정여립이 계룡산에서 지은 ‘반시’에서 정감록이 시작됐다는 말이 된다. 일제시기엔 정감록의 기원을 좀 더 분명하게 밝히려고 노력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애써 찾아낸 답도 근거가 불명확하기는 마찬가지였다.1923년 도쿄(東京)에서 간행된 ‘정감록비결집록(鄭鑑錄秘訣集錄)’을 보면 그 사정이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 있다. “그 저자에 대하여도 항간의 주장은 구구하다. 어떤 사람은 삼봉 정도전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승려인 무학(無學, 또는 舞鶴)이라고도 한다. 무학은 고려 말의 뛰어난 승려였다. 조선의 태조가 무학을 존경하고 숭배하였던 것은 고려의 태조가 도선(道宣 또는 道詵이라고도 함)을 대우한 것과 비슷하였다. 조선 태조는 도읍을 한양에 정하였는데, 사실은 무학의 결정을 따른 것이었다. 무학의 비석은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에 있다. 결국 오늘날에 와서는 그것이 누구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인지를 입증할 수 없다.” 정감록의 작자와 출현 시기에 관한 논의는 최근까지도 별로 진척되지 못했다. 오리무중(五里霧中)이라고나 할까.1973년 안춘근은 현재 남아 있는 정감록의 이본들을 대대적으로 수집 정리하여 ‘정감록집성(鄭鑑錄集成)’을 간행했다. 그는 정감록의 저자를 확인하기가 곤란한 사정을 이런 식으로 요약했다. “작자에 대한 확증은 그것이 사회적으로 파란을 일으키면 일으킬수록 알 수 없게 숨겨질 것이기 때문에 당대는 말할 것도 없고, 시일이 경과할수록 더욱 알기 어려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이 정감록과 같이 허황하면 그럴수록 또 작자는 미궁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전해지고 있는 이른바 술서(術書) 또는 그 밖의 미신과 관련 있는 저작들의 작자는 밝혀지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요, 그것이 밝혀졌다고 하더라도 과학적으로 논증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이 말대로 정감록을 언제, 누가 썼는지를 정확히 알아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조선시대에 금서로 낙인 찍혀 있었던 책이라서 그 사본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베끼는 사람의 개인적인 목적이나 학식에 따라 변형됐을 것은 틀림없다. 내 자신의 연구결과 확인된 사실이지만 역사상 여러 기록에 나와 있는 정감록의 내용은 현재의 정감록과 많은 점에서 달랐다. 어떤 연구자는 정감록이 등장한 시기를 16세기 말 또는 17세기 전반으로 보기도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사회가 어지러워지자 정감록이 등장했다는 주장이다.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이 주장 역시 뒷받침할 증거는 뚜렷하지 못하다. ●‘정감록’은 고구려 때 나왔다? 학자들의 생각은 그렇다 치고 정감록을 애독한 민중들은 그 저자를 누구라고 생각할까? 1979년 서울시 도봉구 수유동에 살던 강성도(조사 당시 69세) 노인은 정감록의 유래를 이렇게 말했다. “정감록이라고 하는 사람이 상고(上古)에, 뭐라더냐. 고구려 때, 그 때쯤 되었던 모양이라. 응 그 때쯤인데 어디 사람인가 하니 평안도 사람이야. 나면서부터 이 양반은 참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어. 그래서 중국 땅을 한번 시찰로 나갔는데. 이 정감록은 남방의 화직성(火直星, 화성임) 정기를 타고난 사람이야. 이 재주를 당할 재주가 없어. 미래를 다 알고 앉았으니 말이야. 뭐 요새 정감록비전(鄭鑑錄秘傳)이 그런 소리가 있지? 그 정감록이 남긴 책이 그렇지.” 강성도 노인은 정감록의 저자를 고구려 사람 정감록으로 보았다. 정감록을 평안도 출신이라고 못 박은 점도 재밌다. 젊었을 때 누구 못지않게 ‘정감록비전’을 자주 읽었다고 하는 강 노인의 이런 확신이 무엇을 근거로 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강 노인의 견해가 일반의 인식을 대표하는지도 솔직히 의문스럽다. 하지만 구비 전승의 근본적인 성격을 고려해 볼 때 노인의 주장을 완전히 억지주장이라 매도하기도 어렵다. 강 노인 역시 어디선가 그 비슷한 이야기를 읽었든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에게서 전해 들었을 것이다. 말을 바꾸면, 한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정감록’이 삼국시대 고구려에 살던 정감록이란 사람의 저작으로 알려져 왔다는 뜻도 된다. ●‘정감의 참위한 글’을 서로 널리 전하였다 정감록이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것은 언제, 어디서였을까?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보았다. 영조 15년(1739) 음력 8월6일(경진)이었다. 그 날짜 실록엔 정감록의 성격과 그 책에 대한 당시 조정의 입장을 알려주는 중요한 구절이 실려 있다. 정감록에 관해 워낙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어 몇 줄만 그대로 옮겨 보겠다. “이때 서북변방(평안도와 함경도)의 사람들이 ‘정감의 참위한 글’(鄭鑑讖緯之書)을 서로 널리 전하였다. 그래서 조정의 신하들이 그 책을 불살라 금지시키기를 청했다. 아울러 소문의 뿌리를 캐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임금은 말하기를,‘그것이 어찌 진시황이 서적의 소유를 금지한 것과 다르겠는가? 바른 기운(正氣, 유학을 숭상하는 기풍)이 충실하면 나쁜 기운(邪氣)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바른 기운을 북돋우는 데 학문이 아니면 무엇으로 하겠는가?’ 이어서 왕은 수백 마디 말로 훈시하였다.” 방금 읽은 실록 기사는 정감록에 관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것을 한꺼번에 다 거론하기는 어렵겠기에 우선 한 가지 사실만 특히 강조해 둔다. 정감록은 1739년경 황해도, 함경도 및 평안도 지방에 유행했다는 점이다.“이 때 서북 변방의 사람들이 ‘정감의 참위한 글’을 서로 널리 전하였다.”라는 구절로 보아 명백하다. 만일 그 때 ‘정감록’이 전국에 널리 퍼져 있었다면 특히 서북지방이 심하였다는 식으로 기술되었어야 할 것이다. 이미 앞에서 인용한 강 노인의 진술에서도 예언서의 작자가 평안도 사람 정감록이라고 했다. 물론 노인의 이야기를 글자 그대로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그가 전한 말 가운데는 정감록이 평안도를 비롯한 북부지방에서 처음 등장한 역사적 사실이 반영돼 있다. ●문제의 인물 조유제는 누구? ‘정감록’이 1739년 서북지방에서 출현했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은 또 다른 자료인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실록보다 약 두 달쯤 앞선 그 해 6월15일자 기록에 정감록의 유행에 대해 새로운 단서가 포착된다. “우의정 송인명이 또 아뢰었다.‘정감록(鄭鑑錄), 역년(歷年) 등에 관한 일은 조사에 있어 철저를 기해야 하고 또 엄히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함경감사에게 명령해서 조사 결과를 보고하게 하는 게 옳습니다. 그런데 본사(비변사)에 있는 서류를 살펴보니 조유제(趙裕齊) 등이 아주 밀접하게 관련돼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이름을 차례로 적어가지고 비밀리에 함경도로 내려보내서 수사에 도움을 주면 어떨까 합니다.’ 임금은 그 말대로 하라고 말했다.” 문맥으로 보아 정감록이나 역년은 모두 예언서가 틀림없다. 이들 예언서의 전파에 직접 관여한 이는 조유제로 밝혀져 있다. 전후 관계로 보아 함경도에서 중앙에 보고한 문서 가운데 언급된 사항은 아니다. 함경도 관찰사는 미처 모르고 있는 정보를 비변사가 입수했다는 뜻으로 봐야 된다. 어쩌면 조유제란 이는 예언서나 괴문서를 조작한 전과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만일 그런 사실이 있었더라면 함경도 측이 몰랐을지 의문이다. 내가 짐작하는 마지막 가능성이 하나 더 있다. 당시 서울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 함경도 사정에 정통한 사람이 있어 비변사에 조유제를 밀고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내 짐작이 옳다 해도 조유제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미해결로 남아 있다. 나는 조유제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고 싶어 실록 등을 검색해 보았으나 도무지 정보가 없다. 좀 더 추측해 보면, 서울의 비변사가 그의 행적을 자세히 파악할 수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어떤 사건에 연좌돼 함경도로 유배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혹은 본래 함경도 사람으로 볼 수도 있다. 이 경우 그 지방에선 이름이 다소 알려진 식자층에 속했을 것이다. 예언서를 저술할 정도라면 상당한 학식을 갖추었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실록에 조유제란 이름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점으로 볼 때, 그의 정치적인 비중은 대단하지 못했다고 여겨진다. ●하필 서북지방에서 ‘정감록’이 출현한 이유는? 조선 왕조는 오랫동안 북부 지방 출신을 차별했다는 것이 큰 문제점으로 지적될 만하다. 조선 왕조를 개창한 이성계가 함경도 출신이었고, 개국공신(開國功臣)들 중에는 함경도와 평안도 출신의 무인(武人)들이 다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왕조는 초창기부터 이들 무인을 박대하였다. 게다가 서북 사람들은 본래 상무적(尙武的) 기질이 강해 문과를 비롯한 과거 시험에서도 성적이 부진했다. 결과적으로 서북인들은 중앙 정계로부터 더욱 소외되었다. 자연히 서북 사람들은 조선왕조에 대한 원망이 컸는데, 이 점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 긴말이 따로 필요 없을 것이다. 새로운 사실을 위주로 간단히 정리해 보면 이러하다. 서북 출신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대우는 20세기 초까지도 서북 출신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돼 있었다. 박은식은 광무 10년(1906)에 창립된 서우학회(西友學會)의 기관지 ‘서우(西友)’ 창간호에서 그간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기술할 정도였다. “여러 백년 동안 이른바 서토(西土 평안도와 황해도)의 출신이 우리나라 사람들로부터 어떠한 대우를 받았던가. 책 읽는 선비는 재상 집안의 심부름꾼이요, 일반 평민은 모두 관리배들의 희생물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잘 되었다는 이가 이른바 진사(進士)니 급제(及第) 등으로 붉은 대문(재상의 집)에 찾아가서 종일토록 머리를 숙이고 손님(벼슬을 구하기 위한 비굴한 행동을 말함) 노릇을 하면서 서울의 여관에서 세월을 보내다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수염과 머리카락이 하얗게 새지 않았던가. 이렇게 하여 평생을 그르쳤으니, 뜻을 이루지 못한 이는 진실로 안타깝다 하려니와 설사 뜻을 이루었다고 하는 이라 한들 만족할 만한 지위를 얻은 이가 있었던가.” 또 한 가지. 정감록이 하필 서북지방에서 출현하게 된 데는 서북지방이 악명 높은 유배지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16세기 말부터 시작된 당쟁이 점점 치열해지자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중앙 정객들은 산간 오지가 많은 평안도나 함경도로 유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지금도 우리들에게 익숙한 속담 중에 “내일은 삼수(三水, 함경남도) 갑산(甲山, 함경남도)을 갈지라도.” 라는 표현이 있다. 함경도의 삼수나 갑산 같은 곳으로 유배를 당할망정 지금 당장은 뜻대로 하고 싶다는 말이다. 이 속담이 웅변하듯이 서북지방의 유배지는 누구에게도 최악의 거주 장소였다. 권좌에서 축출돼 서북 변경으로 쫓겨온 정객이라면 현실 정치에 대해 불만이 컸을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 않아도 지역 차별 정책으로 말미암아 국가에 대한 반발심이 컸던 서북지역에 다수의 불만 정객들이 원한을 품은 채 지내는 실정이었다. 서북지방은 조선왕조의 입장에서 볼 때 일촉즉발의 화염병이었다. 따라서 ‘정감록’처럼 “민심을 현혹시키는” 예언서가 서북 지방에서 출현하게 된 것은 역사적으로 보아 필연이 아니었을까? 앞에서 나는 비변사등록에서 정감록 사건의 관련자로 거론된 조유제를 유배객 또는 지방 양반으로 추정했다. 바로 그와 같이 불우한 인사들이 예언서를 조작하고 유포하였을 것이다. ●나라를 원망하는 뜻이 꺾인(怨國失志) 사람들 손에서 탄생 정감록이 실제 출현한 시기는 1739년보다 앞섰는지도 모른다. 예언서란 것이 민간에 남몰래 유행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조정에서 문제로 삼기 전에 이미 항간에 유포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다만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점은 정감록이 역사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이 1739년이었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해, 그 때부터 조선왕조는 정감록을 문제의 책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우리가 읽어본 실록 기사를 되새겨 보면, 정감록은 “참위(讖緯)”라고 했다. 이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왕조의 정치적 운명에 관한 예언서란 뜻인데, 왕조의 뜻에 반하는 예언서라서 문제가 된 것이다. 이런 예언서는 당시의 정치적 현실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 조작하고 유포했다고 봐야 한다. 일찍이 이능화는 그 점을 아주 적절하게 표현했다. “정감록은 나라를 원망하는 뜻을 잃은 무리(怨國失志)의 손에서 나온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당쟁에서 실패한 사람들과 애써 관직을 구하던 선비들이 조선 왕조를 전복시키고자 할 때면 반드시 정감록의 예언에 의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감’은 가공인물인가 역사적 인물인가 이 지점에서 나는 한 가지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싶어진다. 실록에선 ‘정감록’을 “정감의 참위한 글”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당시 조정은 정감이란 사람을 예언자 또는 정감록의 저자로 인식하였다는 뜻이 된다. 정감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는 가공인물인가 또는 역사적 인물인가?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동독출신 젊은 화가, 시대를 붓질하다

    세계 미술계에서 구상회화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1970∼80년대 독일 ‘라이프치히 젊은 작가들’에게 쏠리는 관심은 각별하다. 라이프치히 작가들의 중심에 선 화가는 네오 라우흐. 그래픽과 사진, 북아트 등을 가르치는 라이프치히 시각예술대학에서 미술교육을 받았고,2002년 빈센트 반 고흐 상을 수상했다. 지난해에는 오스트리아 빈의 알버티나 미술관에서 미켈란젤로, 루벤스와 같은 거장들과 나란히 전시를 열기도 했다. 올해 마흔다섯 살의 네오 라우흐. 이 젊은 작가의 매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천안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콜드 하츠(Cold Hearts)’전에 걸린 라우흐의 작품 ‘늪’에 눈길을 돌려보자. 낭만주의 화풍을 계승한 듯한 배경의 풍경 묘사, 화면 하단에 불타고 있는 차량, 동굴에서 올라온 듯한 작업복 차림의 남자, 술병을 꺼내고 있는 사람, 포를 메고 숲으로 향하는 남자, 지상에 붕 떠있는 공연장 같은 건물을 배회하는 부랑자…. 언뜻 보면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한 화면에 자리잡고 있는 이 작품에는 독일 통일이후 세태에 대한 작가의 냉소적인 시선이 담겼다. 숨돌릴 사이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그림속 인물들처럼 무심한 듯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사회로의 급격한 변화를 경험한 옛 동독 출신 주민들이 현재 경험하고 있는 불안정한 심리를 반영한다. 라우흐의 부인 로자 로이 역시 화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화가다. 화염이 치솟는 건물 옆에 위치한 붉은색 비행기와 두 명의 여자 조종사를 묘사한 그녀의 그림 또한 파괴적이면서도 생산적인 이미지를 통해 남성중심의 사회를 여성중심으로 변화시키려는 생각을 표현한다. 이번 전시에는 라우흐와 로이 부부 외에 틸로 바움가르텔, 크리스토프 루크해베를레, 다비트 슈넬, 마티아스 바이셔, 율리아 슈미트 등 라이프치히에서 활동 중인 30∼40대 작가 9명의 작품 70점이 나와 있다.6월26일까지.(041)551-5100.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영화속 수능잡기] 7월4일생

    [영화속 수능잡기] 7월4일생

    어느 날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셔서 비장한 어투로 이렇게 말씀하신다.“제군들 드디어 우리의 위대한 제국 대한민국이 아시아의 번영과 평화를 위하여 미국과 성스러운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어제 아침 우리 공군과 해군은 미국의 진주만을 공격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적의 고공포에 맞아 화염에 휩싸인 우리의 전투기 안에는 여러분의 ‘신민고등학교’ 6년 선배인 한진정군이 타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군은 탈출할 수 있었지만 적의 함대로 감연히 뛰어들어 장렬하게 산화했다고 합니다. 자, 숙연한 마음으로 우리 모두 묵념합시다.” 선생님의 눈에서는 쉴새없이 눈물이 흐른다. 뒷날 운동장에서는 ‘애국조회’가 열린다. 교장 선생님도 눈물을 흘리며 한군의 학창시절을 회고한다.“우리는 그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 뜨거운 애국정신으로 다시 무장해야 합니다.” 여기저기서 열렬한 박수가 터진다. 브라스밴드의 음악은 분위기를 더욱 비장하게 한다. 다음으로 학생회장 순서다.“저는 여러분도 나라를 위해 선배님처럼 죽음을 택하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방울의 피를 국가에 바칠 수 있을 것입니다.” 학생들은 너도나도 팔뚝을 걷고 헌혈의 대열에 앞장선다. 손가락을 칼로 그어 태극기에 ‘대한민국 만세’ 혈서를 쓰는 학생들도 있다. 수많은 학생들이 학업을 중단하고 전쟁에 참여한다. 애국부인회가 조직되어 헌혈운동을 독려하고 물자 아껴 쓰기 운동을 벌인다. 문학인들은 각 학교를 방문하여 대한민국 애국강연회를 연다. 그러나 전황은 불리하게 돌아간다. 결국 대한민국은 서울과 부산에 두 발의 원자폭탄을 맞게 된다. 대통령은 침통한 목소리로 항복을 선언한다. 모든 이들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떨군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전쟁을 접을 수 없다고 광화문 광장에 모여 궐기대회를 갖는다. 자, 위의 이야기에서 대한민국을 일본제국으로, 서울과 부산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로, 광화문과 종로는 도쿄의 어떤 곳으로 살짝 바꾸어 보자. 한군은 적당한 일본 이름으로 바꾸자. 그리고 생각해보자. 애국심은 아무런 조건없이 성스러운 것일까. 보편타당한 합리성의 기준으로 반성되지 않은 애국심은 끔찍한 폭력의 온상이 될 수도 있다. 영국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애국심은 사악한 자의 미덕이다.”라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 있다. 영화 ‘7월4일생’. 미국 독립기념일인 7월4일에 태어난 성실한 청년 론 코빅은 어느 날 학교를 방문한 해병대 하사관들의 모습에 매혹되어 자원입대한다. 베트남에 파견된 그는 전투에서 그만 실수로 민간인들과 아이들, 전우까지 죽게 만든 뒤 나락에 빠진다. 결국 그는 심한 부상을 당해 하반신이 마비된 불구자가 되어 귀향한다. 폭음을 하고 난폭한 짓을 서슴지 않는 폐인이 된 론 코빅. 그에게 나라를 위하겠다는 청년의 애국심은 간데없다. 우리는 론 코빅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애국심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부당한 권력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 애국심은 아니다. 현명한 애국심은 정의에 대한 섬세한 분별력을 요구한다. 올리버 스톤 감독, 톰 크루즈 주연,1989년작 김보일 서울 배문고 교사 uri444@empal.com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6) 낙산사와 해수관음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6) 낙산사와 해수관음

    놀라운 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맙소사!’,‘아이구, 하나님!’이라거나 ‘어머나!’를 외친다. 그런데 예전 사람들은 ‘나무관세음보살….’이 입에 붙어 있었다.5일 식목일, 한국 관음도량의 진원지인 천년 고찰 낙산사가 화염에 휩싸인 장면을 보면서 ‘나무관세음보살’이라는 탄식이 절로 터져 나왔다. 관음보살은 화마도 물리친다는데…. 지난해 10월 낙산사를 답사했지만 ‘사람들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곳’이라는 생각에 막상 글은 쓰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 낙산사가 잿더미로 변했다. 동해의 ‘관해 1번지’는 두 말할 것 없이 낙산사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곳이라 오히려 수학여행 코스에서 빠질 정도로 널리 알려진 낙산사가 쑥대밭이 되었으니, 고찰의 운명이란 이런 것인가. ●남해 보리암·강화 보문사와 함께 3대 관음도량 관음보살은 관세음, 또는 관자재보살이라 한다. 대자대비의 화신으로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진심으로 부르기만 해도 고통과 번민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관세음보문품’에 부처께서 이르기를 “선남자여! 많은 중생이 온갖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 관음을 한 마음으로 부르면 그 소리를 들으시고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신다. 활활 타는 뜨거운 불길에 갇힌다 해도 타지 않으니, 관세음보살의 위력 때문이다. 큰 물길에 떠내려간다 해도 관음을 부르면 곧 안전한 땅에 이르게 될 것이다.”고 했다. 큰 일 닥쳤을 때 저절로 관세음보살을 외치는 것은 이런 관음 영력을 믿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낙산사는 남해 보리암, 강화 보문사와 더불어 한국 3대 관음도량이자, 세계 8대 보타성지다. 그 중 관음신앙의 원조는 아무래도 낙산사다. 의상조사가 세운 가람이기 때문이다. 순조시절의 범해(梵海)가 찬한 동사열전(東師列傳)에 다음 같이 의상의 행장을 밝히고 있다.“귀국하는 당나라 사신의 배에 실려 입당, 화엄의 2대 조사인 종남산 지엄의 방에 들어가 함께 화엄경에 관해 문답하였다. 화엄경의 오묘한 뜻을 논함에 있어 깊숙하고 은밀한 부분까지도 철저히 해부, 분석하니 가히 청출어람 격이었다.”이렇듯 해동 화엄종의 시조라 하여 그는 의상조사로도 불린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의상은 원효와 가까웠던 도반이다. 뜻을 같이 해 중국유학길에 오르다 원효는 되돌아오고, 의상은 건너갔다.661년에 산둥반도 끝에 있는 무역항 등주로 들어갔으니 이 때 그의 나이 이미 30대 후반. 오늘날까지 불교의식에서 빼놓지 않고 애송되는 그 유명한 법성게도 바로 의상조사의 창작이다. 화엄경의 심오한 진리를 7언시 30구로 응축시켜 놓았으니 본래 이름은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이다. 의상은 일관되게 실천하는 삶을 살았으니, 철저한 신분제 계급사회인 당대에 거대한 토지와 노비를 거느린 사찰의 영화를 끝내 거부하였다. 그런 그가 세운 가람이 바로 낙산사이다. 설악산의 준수한 줄기가 양양쪽 동해로 흘러 내리다가 빚어낸 오봉산 품안에 넉넉하게 자리잡아 산은 작되 옹골지며, 산세가 수려하여 송림이 우거졌고, 동해를 벗하여 가히 해산(海山)의 격조를 말해 준다. 벼랑 때리는 파도를 벗삼아 잠들고, 다시금 파도 소리에 선잠을 깨는 가람이다. 오봉산은 본디 보타산 낙가산이었으니, 낙산이란 관음보살이 산다는 포타라카(Potalaka)의 음역으로, 낙가산 혹은 낙가로도 불린다. ●당에서 귀국한 의상, 관음 계시로 낙산사 지으니 당에서 귀국한 의상은 온 나라를 주유하며 뜻을 펼칠 마땅한 땅을 찾다가 이곳에 이른다. 해변 석굴에 관음 진신이 산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높이 100자가 넘는 해식 단애의 깎아지른 바위 틈으로 쉴 새 없이 파도가 드나드는 험한 곳. 그곳에서 관음 진신을 만나길 간구했으나 뜻을 못이루자 그대로 바닷물에 몸을 던진다. 마침내 관음이 그 정성에 감복하여 진신은 드러내지 않은 채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건냈으며, 동해 용왕도 여의보주 한 알을 내렸다. 그러나 의상은 다시 이렛동안 진심으로 기도하여 마침내 관음을 친견한다. 관음은 의상에게 굴 위 산꼭대기에 쌍죽이 솟아날 것인즉, 그곳에 절을 짓도록 계시한다. 낙산사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중국 보타산을 알아야 한다. 관음도량인 보타산은 오대산 문수보살, 아미산 보현보살, 구화산 지장보살 도량과 더불어 중국 불교의 4대 성지다. 바다 가운에 꽃처럼 피어있는 보타산은 상해에서 쾌속선으로 1시간 반, 항주 이남의 영파에서는 4시간이 걸리는 곳이다. 불긍거관음원(不肯去觀音院)은 보타산의 여러 사원 가운데 중심이며, 조음동사원은 우리 낙산사와 주위 경관이나 지형이 너무도 흡사하다. 동해 일출의 관해지인 의상대와 바닷물이 절벽 아래까지 밀려들어와 절벽을 치며 동굴에서 파도를 일으키는 홍련암 관음굴이 너무 비슷해 하나의 의문이 풀린다. 의상이 일찍이 중국 보타산을 순례하고 그곳 지형과 거의 흡사한 동해안에서 바다로 돌출한 해식 동굴을 찾아내 그 위에 건물을 올렸던 것이 다양한 연기설화로 전해진 것은 아닐까. 그동안 불긍거관음원을 세운 유래를 불조통기(佛祖統記)란 자료를 통해 일본 승려 혜악(慧鍔)선사와 관련지어 설명하는 학설이 주류였으나, 신라 상인들이 지었다는 설이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다. 북송 말 서긍은 고려도경(1124)에서 “석교의 산록 위에 양무제가 세운 보타원이 있고, 전각 안에는 영험한 관음상이 있다. 옛날에 신라 상인이 오대산에 갔다가 그 불상을 조성해 싣고 본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바다로 나아갔으나 배가 암초에 걸려 더 나아가지 아니하므로 관음상을 바위 위에 내려 놓았다. 관음원의 승려 조악이 전각 안으로 모셨더니 해상으로 왕래하는 이들이 반드시 나아가 기도하매 감응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적었다. 글은 보타산이 관음보살의 주도량이며, 항해를 위한 기도도량으로 조성된 사실을 알려준다. 실제로 관음원 앞바다에는 신라초(新羅礁)로 불리는 조그마한 암초까지 남아 있다. 의상을 비롯한 많은 고승들의 중국유학, 보타산과 비교되는 낙산사, 그리고 보타산의 신라인 흔적은 해로를 통한 중국과의 왕성한 교류를 잘 암시한다. ●중국 보타산과 주위경관·지형 흡사 낙산사에는 관음과 얽힌 여러 설화들이 전해진다. 삼국유사를 보면 원효 역시 낙산의 관음 참배에 나선다. 낙산 근처에서 흰옷 입은 여인이 벼를 베기에 원효가 다가가 장난삼아 벼를 달라고 하니 여인은 벼가 흉작이라 줄 수 없다고 답한다. 다리에 이르니 한 여인이 서답을 빨고 있기에 마실 물 좀 달라고 청하니 서답 빨던 더러운 물을 주는지라 원효는 냇물을 새로 떠마셨다. 그랬더니 들판의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휴제호와상아”라고 말하는데, 모습은 보이지 않고 소나무 밑에 짚신 한 짝만 남아 있었다. 절에 이르러 보니 관음상 아래에 방금 전에 보았던 짚신이 한 짝 있음을 보고서야 자신이 만난 여인이 관음임을 깨닫는다. 원효가 다시 암굴에 들어가 관음 진신을 보고자 했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나 들어가지도 못한 채 낙산을 떠나야 했다. 원효의 관음 친견까지 더해 관음도량 낙산사의 격을 한층 높이는 설화다. 관음의 주장처이면서도 정작 낙산사는 늘 편치가 않았다. 고려시대 몽골군의 침략으로 초토화되어 관음상도 부서진다. 오대산에 자주 나다니던 세조는 원통전 석탑을 7층으로 늘리고 중창 불사를 단행한다. 그로부터 20년 뒤(1485)에 낙산사를 찾은 남효온의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를 보면, 그 때까지는 의상이 만들었다는 관음소상이 관음전에 안치돼 있었고, 관음굴에는 파도가 돌을 쳐대는 전각도 있었으며, 그 시대에도 낙산 일출의 장관을 보려는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것 같다. 관동팔경의 하나인 낙산일출은 이미 조선시대부터 유명세를 치렀으니 최소한 600년이 넘는 전통이다. ●여러번 화마에 휩싸였던 낙산사 또 ‘고통’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절은 다시 무너진다. 광해 11년(1619)에 관음굴을 중건하며, 인조 9년(1631)에 재건하여 어느 정도 복원된다. 그 모습은 겸재 정선이 힘찬 필치로 그린 낙산사와 관음굴에 잘 남아 있다. 이후 낙산사는 중건을 거듭하며 1925년에는 의상대까지 세워 동해 일출의 적지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삼팔선 근역에 위치, 한국전쟁의 격전지가 되면서 다시금 금석물과 원통전 앞 원문을 제외한 모든 당우가 불타버린다. 불자들이 가장 많이 찾아오는 고려시대 불상인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362호)을 모신 원통보전도 전쟁 이후 새로 세운 것이다. 연꽃을 타고 바다를 건너는 관음이니, 낙산사 홍련암이란 검푸른 동해에 떠있는 붉은 연꽃, 즉 관음의 분신이렸다. 홍련암 마루바닥에는 10㎝ 가량의 구멍이 있어 파도가 들이치는 모습이 한 여름에도 전율을 느끼게 한다. 해일이 몰아쳐서 집채만한 파도가 몰아쳐도 홍련암만큼은 버텨 왔다. 의상이 관음을 친견하고 동해 용왕이 여의주를 내린 장소로 손색이 없다. 이상하게도 벼랑 위에 위태롭게 세운 홍련암은 온갖 병화에도 끄떡없다. 그것 또한 관음의 원력은 아닐런지. 그러나 이 모든 게 이번 산불로 다시 잿더미가 되고 말았으니 낙산사는 본디 애초의 출발지였던 관음굴로 되돌아 간 셈이다. 원통보전은 물론이고 해수관음을 상징하던 보타루도 사라졌다. 한가롭게 바다를 굽어보며 차를 마시던 솔숲이 흉물스럽게 그을렸다. 바닷가 홍련암 요사채도 사라지고 관음굴만이 화마를 피했으니 본디 낙산사의 원점으로 회귀한 폭이다. 붉은 장송이 하늘을 가린 아름다운 솔밭길을 올라가면 해수관음상이 있는 신선봉이 나오는데, 그 솔밭도 그만 타버렸다.1977년에 700여t의 돌을 들여 높이 16m로 세운 해수관음만이 남아있어 먼 동해를 굽어보며 서있을 뿐이다. 관음보살이 중생들의 원력을 시험하려고 하심인가. ●집채만한 파도 몰아쳐도 버텨온 홍련암 죽어 자빠진 소나무의 몰골들이 귀신을 부를 것만 같은데 화마가 훑고 갔어도 낙산의 일출만은 어제와 다를 바 없으니, 그 아름다운 관해의 1번지를 모두의 공력으로 다시 세울 일이다. 관해의 명당이어서 만은아니다. 역사적으로나, 규모로나 동해안 사찰의 태두 격인 낙산사의 화마 소식에 실로 안타까운 헌사를 바치지 않을 수 없다. 삶의 덧없음을 갈파한 낙산사 조신설화처럼 사람의 인생뿐 아니라 말 못하는 문화유산도 덧없는 것이런가. 아름다운 원장(垣墻)이 처참하게 불에 그을린 채 동해를 굽어보는 모습이 참으로 안쓰럽고 민망하다.
  • “평생일군 재산 10분만에…” 보금자리 잃은 양양이재민

    “평생일군 재산 10분만에…” 보금자리 잃은 양양이재민

    “자식 먹여 살릴 논밭을 일구는 데는 반백년이 걸리더니 잿더미가 되는 데는 10분도 안 걸리더래요.” 6일 새벽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용호리 마을회관. 난데없는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를 피해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주민들이 푸석푸석한 얼굴로 삼삼오오 모여앉아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날이 밝아오자 불길을 피해 달아났던 개와 송아지들이 주인을 찾아 마을회관 근처를 맴돌았다.61가구 180여명이 사는 용호리는 28가구가 전소됐으며 29가구 73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최대 피해지역이다. 마을회관에서 기자와 함께 밤을 보낸 박진호(64·여)씨는 다른 주민이 곯아 떨어진 뒤에도 혼자 몸을 눕히지 못하고 넋두리를 했다. 멍하니 앉아 있던 박씨의 눈에서는 매캐한 연기 때문인지 아픔 때문인지 밤새 눈물이 흘러 내렸다. 박씨는 5일 오전 불이 꺼졌다는 소식에 마음을 놓았다가 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눈 앞에서 덮쳐오는 시뻘건 화염을 마주 대했다. 박씨는 맨발로 남편 손을 잡고 무조건 반대쪽으로 내달렸다. 손자 선물을 사주려고 모아둔 용돈을 챙길 겨를도 없었다. 박씨는 “스물 한살 때 제사에 쓸 숟가락도 없는 가난한 종갓집으로 시집와 차곡차곡 장만한 살림살이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뒷산 대나무밭에서 순식간에 불이 번져 집을 잃은 엄재을(81·여)씨는 잠들기 전 머리를 감으면서 끝없이 흘러내리는 시커먼 잿물을 보고 다시 한번 놀랐다. 갓 스물에 시집와서 청상과부가 된 뒤 용호리에서 논밭을 일구고 소를 치며 생계를 꾸려온 엄씨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박사에, 공무원까지 시켜준 고마운 땅이 다 잿더미가 되어버렸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산달을 앞둔 암소를 풀어주려고 불이 붙은 집으로 들어갔다 가까스로 빠져나온 김명화(61·여)씨는 곤히 잠든 뒤에도 바람이 유리창을 때릴 때마다 흠칫흠칫 놀라며 자다깨기를 반복했다. 김씨는 “평생을 맞아온 저 바람이 집을 잡아먹었다.”고 탄식했다. 대대로 살아온 집과 이앙기, 바인더, 경운기, 분무기 등 농기계를 몽땅 잃어버린 김남성(61)씨는 “어렵게 사는 아들에게 의지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하기만 하다.”고 먼산만 바라봤다. 양양 유지혜 이재훈기자 wisepen@seoul.co.kr
  • 텍사스 정유공장 폭발 14명 사망

    미국 텍사스시티에 있는 영국석유(BP) 정유공장에서 23일(현지시간)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사고가 발생, 최소 14명이 숨지고 100여명이 부상했다. 이 공장은 하루 원유 가공량이 46만배럴로 미국 전체 수요의 3%에 해당하며 미국에서 세번째로 큰 정제시설이다. 이에 따라 지난 22일 올해 들어 가장 큰 낙폭인 배럴당 2.22달러의 하락을 기록했던 국제 유가가 반등세를 보이면서 고유가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특히 여름 성수기 전 공장 가동이 정상화되지 않을 경우 미국 내 휘발유 가격이 오르고 이것이 다시 유가를 끌어올리는 악순환이 빚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실제로 사고 소식이 전해진 뒤 24일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5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중질유(WTI)는 전날보다 배럴당 31센트 오른 54.12달러로 거래가 시작된 뒤 장중 한때 54.58달러까지 치솟았다. 닐 채프먼 BP 대변인은 부상자들이 골절상·뇌진탕 등을 호소하고 있으며 적어도 3명은 중태,1명은 위독한 상태라고 전했다. 현장 구조 책임자들은 테러의 흔적이나 고의로 폭발이 일어난 것 같지는 않다고 덧붙였다. 애니 스미스 BP 미국법인 대변인은 “심대한 타격을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완전 가동 중단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현장에는 화염과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희생자 수색이 진행 중이며, 공장옆 도로에는 커다란 구멍이 파여 있었다고 목격자들은 전했다.486㏊ 부지에 30동의 정유시설이 들어선 이 공장은 미국에서 가장 복잡한 석유화학단지로 알려져 있다. 이 공장에서는 1년 전인 지난해 3월31일에도 원인 모를 폭발 화재가 발생했었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인권위 “부안사태 과잉진압 인권침해”

    국가인권위원회는 21일 전북 부안 핵폐기장 반대 시위 참가자에 대한 과잉 진압은 인권 침해라고 결정하고, 경찰이 치료비 등 손해배상을 할 것을 권고했다. 인권위는 ‘핵폐기장 백지화 핵발전소 추방 범부안군민대책위원회’ 김인경 공동대표 등 3명이 “2003∼2004년 부안 원전시설 설치 반대 집회에서 경찰로부터 인권침해를 당했다.”며 진정을 낸 데 대해 이같이 결정했다. 인권위는 “전북경찰청장은 폭력시위에 가담하지 않았는데도 과잉진압으로 상처를 입어 치료를 받은 피해자에게 치료비 등 손해를 배상하고, 피해자료를 제출한 문규현 신부 등 38명에게는 대한변호사협회가 법률구조에 나서라.”고 권고했다. 인권위는 또 “행정자치부장관은 경찰청에, 경찰청은 전북경찰청에 각각 경고 조치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수립·시행하라.”고 요구했다. 또 경찰청장 훈령인 ‘채증활동규칙’을 개정해 시위 참여자뿐 아니라 경찰관의 불법행위도 의무적으로 채증하도록 했다. 지난 2003년 부안군 핵폐기장 유치를 저지하기 위해 부안군 농민회와 지역 종교인들이 만든 대책위는 지난해 2월까지 화염병과 가스통을 동원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40여명의 주민이 구속되고 수백명이 다쳤다. 이효용기자 utility@seoul.co.kr
  • 儒林(295)-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儒林(295)-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해변의 묘지’를 지은 폴 발레리의 묘는 실제로 지중해의 바다를 굽어보는 높은 산위에 있다. 비록 바다는 아닐지라도 이제는 바다와 같은 호숫가에 묻힌 두향의 묘지 앞에서 나는 혼잣말로 ‘해변의 묘지’의 처음부분을 중얼거려 보았다. “비둘기들 노니는 저 고요한 지붕은 철썩인다 소나무들 사이에서, 무덤들 사이에서, 공정한 것 정오는 저기에서 화염으로 합성한다. 바다를, 쉼 없이 되살아나는 바다를.…(중략)…. 심연 위에서 태양이 쉴 때, 영원한 원인이 낳은 순수한 작품들, 시간은 반짝이고 꿈은 지식이로다.…” 발레리의 시처럼 호수는, 쉼 없이 되살아나는 호수는 영원한 원인이 낳은 순수한 작품인 두향의 무덤 위에서, 두향의 인생위에서 시간은 태양처럼 반짝이고 있음이었다. 나는 유명한 ‘해변의 묘지’마지막부분을 암송하여 보았다. “바람이 분다. 살려고 애써야 한다. 세찬 마파람은 내 책을 펼치고 또한 닫으며, 물결은 분말로 부서져 바위로부터 굳세게 뛰쳐나온다. 날아가거라. 온통 눈부신 책장들이여. 부숴라, 파도여. 뛰노는 물살로 부숴 버려라. 돛배가 먹이를 쪼고 있던 이 조용한 지붕을.” 발레리의 시처럼 쪽빛 호수는 지붕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위를 바람이 불어 수면 위를 뛰노는 물결의 파도는 부서지고 있었다.‘바람이 분다. 살려고 애써야 한다.’는 절창은 ‘해변의 묘지’의 골수. 두향은 이곳에 무덤으로 살아 있음이니. 그렇다. 우리들의 생은 발레리의 시처럼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고,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삶도 무덤과 같은 것이고, 책장을 열고 닫는 한순간의 바람이라고 할지라도 함부로 사라지지 않으니, 두향은 우리들 곁에 죽어서 살아있음이다. 살아서 죽어 있음이다. 상석 옆에 또 하나의 비석이 서 있었다. 죽은 사람의 내력을 기록하고 있는 묘비였다. 검은색 화강암에는 두향의 묘에 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그 묘비를 읽어 보았다. “성명은 두향. 중종시대의 사람이며, 단양태생. 특히 거문고에 능하고 난(蘭)과 매화(梅花)를 사랑했으며, 퇴계 이황(1501∼1570:제15대 단양군수)을 사모했으며, 수절종신(守節終身)하였다.‘명기열전(名妓列傳)’에 의하면 두향이 단양팔경을 지정하기 위해서 청풍군수인 토정 이지번(?∼1575) 선생에게 청풍 경계인 옥순봉(玉筍峰)을 양보 받도록 이황에게 청원하여 단양팔경을 지정하게 하였다. 매년 5월 초에는 두향을 위해 제를 지내고 있다.…” 묘지를 읽어 내리던 내 눈은 어느 한 지점에서 멎어섰다. “명기열전(名妓列傳)” 내 기억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소설의 제목이다. 오래전 작가 정비석(鄭飛石)이 동명의 이름으로 신문에 연재하였던 소설의 이름인 것이다. 제목이 암시하듯 우리나라에서 전해 내려오는 황진이를 비롯한 여러 명기들의 이야기들을 열전형식으로 엮은 인기 소설이었다. 실제로 두향의 묘가 널리 알려지고 두향의 무덤이 수장될 뻔하였던 것을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여 이렇게 보존되고 있음은 전적으로 작가 정비석 한사람의 공 때문이니. 그런 의미에서 정비석은 두향 재발견의 일등공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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