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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佛 “피카소 위험인물” 귀화신청 거절

    |파리 함혜리특파원|20세기 현대 미술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가 과격한 무정부주의자 내지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혀 프랑스 국적을 얻지 못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파리 시경 소속 박물관에서 21일 시작된 경찰 소유 고문서 전시회에는 피카소의 귀화신청서와 경찰 의견서 및 정보보고 문서 등 ‘피카소 파일’이 포함돼 관람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전시된 정보 문서들에 따르면 경찰의 감시 대상이었던 그는 1930년과 1940년,두 차례 프랑스에 귀화를 신청했다.하지만 프랑스 당국은 두번 모두 그를 무정부주의자·공산주의자·과격파 등으로 간주,거절했다. 파시스트인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집권하고 있던 스페인을 떠나 1901년 파리에 도착한 피카소는 친구인 무정부주의자 마니치 피에르의 집에 묵었으며 이 때문에 프랑스 경찰은 그가 도착한 직후부터 줄곧 감시했다.프랑스 경찰은 이전에 발생했던 무정부주의자 테러로 인해 과격파와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던 시절이었다. 피카소는 1930년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하며 귀화를 신청했으나 프랑스 당국은 그를 무정부주의자,과격파로 간주하고 거절했다.그림을 팔아 많은 돈을 벌고 유명해진 피카소는 1940년 거주지 경찰서장의 추천서까지 첨부해 또다시 귀화를 신청했다.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70만프랑을 세금으로 낸 것으로 기록돼 있다.피카소가 귀화를 다시 신청했던 것은 프랑코 정권과 가까웠던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한 뒤 그를 스페인으로 추방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프랑스에 잘 정착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과격한 사상을 간직하고 있으며,심지어 공산주의자가 됐다.”는 이유로 거절했다.경찰 의견서에는 심지어 “국가 차원에서 위험인물로 간주해야 할 것”이라고 적혀 있다.피카소는 이후 다시는 귀화를 신청하지 않았다. 피카소가 프랑스에 귀화를 신청했던 것이나 과격한 사상을 이유로 거절당했다는 사실을 그의 가족들조차 몰랐었다고 전시회 관계자는 전했다. lotus@˝
  • ‘손학규 사단’ 총선서 전멸

    총선에 출마한 손학규 경기도지사 측근들이 모두 참패했다. 당초 절반 정도는 당선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뜻하지 않은 탄핵역풍에 줄줄이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총선에 출마한 손 지사 측근은 정승우 제2행정부지사와 한현규 정무부지사,이철규 경기개발연구원장,정성운 서울사무소장 등 4명.이들은 그동안 도정 운영에 핵심 역할을 수행해 왔다. 이들은 모두 한나라당 공천을 받았으며 이 과정에서 손 지사가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져 앞으로 손 지사의 정치행보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 강세지역인 수원 영통에 출마한 한 전 부지사는 이의동 첨단·행정신도시와 평택·양주 평화신도시 등 굵직한 대형 프로젝트를 주도하며 손 지사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그러나 현 정부 경제부총리를 지낸 김진표 후보라는 거물을 만난데다 탄핵역풍까지 겹쳐 패하고 말았다. 6·13지방선거 당시 선거캠프에서 손 지사 당선에 힘썼던 이 원장도 시흥에서 선전했으나 탄핵바람을 뚫지 못했다.손 지사 보좌관 출신으로 손 지사의 지역구(광명)를 넘겨받은 정 소장과 경기도제2청 소재지인 의정부에서 출마한 정 전 부지사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이들 측근인사뿐 아니라 현역의원으로 손 지사 인맥으로 통하던 신현대(수원 권선)·박종희(수원 장안) 후보 역시 고배를 마셔 탄핵역풍의 벽을 실감케 했다. 수원 김병철기자 kbchul@ ˝
  • “적정 예보료 예금의 6%돼야” 이근경 금통위원 논문서 주장

    자산 건전성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했을 때 국내은행들은 예금잔액의 6%를 예금보험료로 적립해야 할 것으로 분석됐다.그러나 현재 은행들이 예금보험공사에 내는 예보료의 적용요율은 0.1%에 불과해 비상시 정부 의존도를 심화시키는 것으로 지적됐다.이같은 지적이 국내 최고 통화신용정책 결정기구인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에 의해 제기된 것이어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근경 금통위원(차관급)은 11일 ‘국내 은행산업의 건전성 제고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박사학위 논문(서강대 경영학과)에서 “2002년 기준으로 국내 8개 은행의 적정 예보요율을 추산한 결과 은행별로 0∼13%,전체 평균으로는 6%로 나타났다.”고 밝혔다.조사대상은 조흥,하나,한미,외환 등 4개 시중은행과 부산,대구,제주,전북 등 4개 지방은행이었으며 원화예수금,금융채,양도성예금증서(CD) 등 부채상황이 종합적으로 감안됐다. 예금보험제도는 금융기관들이 영업정지나 파산 등으로 고객예금을 지급하지 못하게 됐을 때에 대비,미리 일정액을 비상지급 준비용으로 떼어 적립하는 것을 말한다.은행은 보장대상의 0.1%,증권사는 0.2%,보험사는 0.3%를 예금보험공사에 내야 한다.이 위원은 “예보요율이 같은 업종의 금융기관간에 동일하게 적용돼 여러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면서 “은행들의 신용위험을 측정해 요율을 달리 적용해야 도덕적 해이를 막고,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태균기자˝
  • 록펠러가의 사람들/피터콜리어·데이비드 호로 지음

    ●100년간 미국 뒤흔든 재벌 록펠러가문 아버지는 더러운 돈을 벌어들였고,아들은 돈으로 왕조를 이룩했다.‘형제들’은 돈으로 미국을 지배했고,‘사촌들’은 돈이 싫다며 가문의 이름을 거부했다.4대 100년간에 걸쳐 미국을 좌지우지한 재벌 록펠러가,그들은 과연 누구인가.‘록펠러가(家)의 사람들’(피터 콜리어ㆍ데이비드 호로위츠 지음,함규진 옮김,씨앗을 뿌리는 사람 펴냄)은 세계 최고의 재벌가로 한 세기를 풍미한 ‘록펠러 왕조’의 흥망성쇠를 다룬 책이다. ●1대, 정유업 투자… 검은 돈 불려 ‘록펠러 제국’의 건설자 존 데이비드슨 록펠러 1세.고등학교 시절 늘 우울하고 엄숙해 ‘집사님’으로 통했던 그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조그만 위탁판매 회사에 경리직원으로 들어갔다.종교적인 신성함을 느끼게 할 만큼 일에 몰두했던 록펠러가 막대한 재산을 모으게 된 것은 정유업에 투자하면서부터다.그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재산을 불렸다.리베이트와 뇌물 증여 등의 편법으로 석유산업의 동맥인 철도를 장악하고 스탠더드 오일을 설립해 전국의 대형 정유회사들을 하나씩 인수했다.기업합동의 원조인 스탠더드 트러스트를 출범시켜 전성기엔 미국 전체 석유 공급량의 95%까지 주무르는 ‘완전’ 독점을 실현했다.이 석유부호는 만년에 들어선 “내 재산은 인류의 복지를 위해 쓰라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며 록펠러 의학연구소와 록펠러 재단을 세우는 등 자선 사업가로 변신하기도 했다.하지만 ‘검은 돈’의 오명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2대, 자선사업으로 인맥 구축 록펠러 1세의 외아들 존 데이비드슨 록펠러 2세는 가업을 이을 황태자로 기대를 모았지만 심약한 성격으로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 살아야 했다.그는 주식투자에 실패하고 온갖 구설수에 오르다 일찌감치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자선사업에 몰두했다. 록펠러 2세는 이후 정·재계 및 문화계의 유력인사로 자리잡고 가문의 이미지를 높이는 데 힘썼다.록펠러 재단을 중심으로 콜로니얼 윌리엄스버그·베르사유 궁전 같은 문화유적을 복원했고,옐로스톤 등 각지의 명승지를 국립공원으로 조성했으며,제3세계의 위생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그가 이룩한 거대한 인적 네트워크는 록펠로 가문이 명실상부한 ‘왕조’를 이루는데 결정적인 힘이 됐다. ●3대, 정·재·학계서 왕성한 활동 록펠러 2세의 다섯 아들,이른바 ‘형제들’로 불린 록펠러 3대는 정·재계와 학계에 뛰어들어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그러나 이들의 승승장구는 재산의 낭비와 집안의 분열 등 부정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다.특히 욕망의 화신인 둘째 넬슨 올드리치 록펠러는 정계에 뛰어들어 가문의 재산을 탕진했으며,대중에게 록펠러가에 대한 나쁜 인식을 심어줬다.넬슨은 ‘백악관’ 을 목표로 가문의 역량을 총동원했다.닉슨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되는 데 맞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공화당이야말로 록펠러가의 부속기관 아닙니까.록펠러 재단과 록펠러 대학처럼 말입니다.” ●4대, 대부분 정신병원 드나들어 록펠러 4대는 21명에 이른다.이 ‘사촌들’의 삶은 각양각색이다.이들은 거의 모두 정신과 병원을 들락거렸다.세계 최고의 부잣집 자손으로 태어났지만 가문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려 애썼다.저널리스트 출신인 저자들은 1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록펠러 왕조는 이들 증손자 대에 와서 종말을 맞게 됐다고 말한다.록펠러 1세와 2세가 ‘개같이’ 벌어들인 엄청난 재산을 록펠러 3대가 ‘정승처럼’ 써버렸고 록펠러 4대에 와선 ‘개도 싫고 정승도 싫다.’며 각자의 길로 뿔뿔이 흩어진 형국이라는 것이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비스마르크와 함께 록펠러를 ‘현대를 만든 사람’으로 꼽았다.그만큼 록펠러가의 그림자는 넓고 짙다.이 책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말에 걸친 세계 자본주의의 역사와 미국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된 록펠러 관련 책들은 록펠러가가 미화되거나 부정적인 예단에 의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그랜트 시걸의 ‘세계 최고의 부자 록펠러’는 록펠러 1세를 위대한 신앙인이자 자선가,사업가로만 묘사한다.또 히로세 다카시의 ‘억만장자는 할리우드를 죽인다.’는 모건가와 록펠러가가 전세계를 주무르는 암흑의 군주라는 전형적인 음모이론에 입각한 책이다.이에 비해 ‘록펠러가(家)의 사람들’은 록펠러가의 흥망사를 비교적 불편부당한 관점에서 다룬다.우리말 번역본으로 900쪽이 넘는 대작이다.3만 3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SBS 새수목드라마 ‘파란만장 ‘ 주인공 김현주

    돈 때문에 애인을 뺏겼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SBS가 ‘햇빛 쏟아지다’ 후속으로 7일부터 내보내는 수목드라마 ‘파란만장 미스김 10억 만들기’(극본 박연선·연출 장기홍)는 이 가정에서부터 출발하는 드라마다. 결혼식장에서 신랑 영훈에게 바람 맞은 ‘미스김’ 은재는 부잣집 딸 우경으로부터 영훈을 되찾기 위해 10억 만들기에 돌입한다.우연히 결혼식장에 있다가 어쩔 줄 몰라하던 자신을 구해준 반백수 무열과 함께.둘은 어렵사리 종자돈을 마련해 인터넷 꽃배달 사업을 시작하고 은재의 연적 우경은 번번이 훼방을 놓는다. 은재 역을 맡아 2년 만에 안방극장에 복귀하는 탤런트 김현주는 10억이 생기면 뭘 하고 싶을까.“드라마 시작 이후 부쩍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아요.근데 그냥 주어지면 더 욕심이 생겨서 별로 안 좋을 것 같아요.여기저기서 연락도 많이 올 것 같고…(웃음)” 지금까지 돈에 대해 간절히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는 그는 고교시절 모델 데뷔 때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혀 의상을 스스로 마련하기 위해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꽤 큰 돈을 받았는데 주인은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걸로 알고 있었죠.그땐 실제보다 나이 들어 보였어요.” 무열 역은 MBC ‘대장금’의 민정호 종사관 지진희가 맡아 180도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쉬고 싶었는데 대본이 너무 재미있어 안 할 수가 없었다.”는 그는 자신의 변신에 “충격 좀 받을걸요.”라며 즐거운 표정이다. ‘절약의 화신’으로 결정적인 순간 은재와 무열을 도와주는 하숙집 노부부역으로 중견 탤런트 신구와 여운계가 등장한다.이런 부모 밑에서 남다른 돈벌기 비법을 체득,은재와 무열에게 훈수를 놓는 아들 봉규는 MBC ‘논스톱4’의 귀염둥이 봉태규가 맡았다.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이헌재·강철규의 ‘시장경제 해법’

    출자총액제한제도 완화 여부 등 재벌정책을 놓고 재정경제부와 공정거래위원회 사이에 최근 해묵은 신경전이 재연되면서 경제수장인 이헌재 부총리 겸 재경부장관과 시장감시자인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의 시장경제에 대한 시각과 해법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일각에서는 시장을 바라보는 인식과 철학이 다르기 때문에 정책 혼선으로 비쳐지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반박한다.이 부총리는 “둘 다 ‘정제된 표현’을 쓰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고 말했고,강 위원장도 “이 부총리가 시장을 안정시켜 나가고 있다.”며 거들었다. ●공통점은 시장신봉주의자 두 사람은 극단적 시장주의,신자유주의를 배격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이 부총리는 적극적인 정부 개입을 주장하는 케인스학파보다는 시장의 자율을 중시하는 시카고학파에 가깝다는 말을 들어왔다.이 부총리 주변에서도 ‘그는 관료의 힘보다는 시장의 힘을 믿는 사람이다.’고 말한다.‘관치의 화신’이란 별칭은 1998년 금융감독위원장 시절 기업·금융구조조정이라는 특수 임무를 맡았던 때의 상황을 빗댄 것이라고 말한다.강 위원장도 자원의 생산·배분을 가장 효율적으로 이뤄내는 체제는 시장경제라는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따뜻함과 투명함의 차이 하지만 이 부총리는 시장논리의 무게를 ‘경쟁’에,강 위원장은 ‘질서’에 두고 있다.이 부총리는 스스로 ‘따뜻한 시장주의자’라고 말한다.기본적으로 시장에 맡기되 시장이 책임과 규율을 벗어났을 때만 정부가 개입해야 하며, 시장 실패자에 대해서는 ‘세련되게 마무리하는 따뜻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정부의 시장 개입이 실패하면 또다른 위기로 비화된다는 우려에서다.LG카드 사태 처리 등이 좋은 예다. 하지만 강 위원장은 정부의 시장 개입은 시장 자체의 결함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라는 입장이다.시장에 대한 지나친 신뢰는 금물이며,투명한 시장질서를 위해 적정 수준의 감시와 시장 개입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시장은 스스로 질서를 세우지 못하고(불안정성),언제든지 실패할 가능성이 있으며,미성숙돼 있다.”며 “그래서 시장이 투명하고 공평하게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시장개입 방식은 달라 이 부총리는 루빈 미 전 재무부장관의 자서전에 나오는 ‘리스트-워스트 옵션’(Least-Worst Option·가장 덜 최악인 선택)이란 말을 좋아한다.시장 개입은 최소화하되,시작하면 신속하고 세련되게 처리한다는 것이다.반면 강 위원장은 신중히 점진적으로 진행돼야 한다고 말한다.이 부총리는 ‘상황론’에,강 위원장은 ‘원칙론’에 가깝다. ●재벌정책은 뜨거운 감자 이 부총리는 시장 내의 ‘가진자’(대기업)와 ’덜 가진자’(중소기업)의 비교는 규모의 차이가 아니라 경쟁에서 살아남느냐,퇴출당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본다.시장에서 벤처·모험·기업가 정신이 없이 안주하려는 곳은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배려할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그래서 출자총액제한제도가 생산적인 투자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돼서는 안된다는 판단이다. 강 위원장은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경쟁에서 불공정한 행태는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는 입장이다.재벌기업과 중소기업은 경쟁의 출발선이 다르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그래서 우월적 지위에 있는 대기업에 대한 규제와 감시는 당분간 유지돼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차변(자산)을 늘려야,대변(부채·자본)도 감시해야 이 부총리는 시장은 생산적 경쟁관계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질 높고 풍부한 시장이어야 한다는 것이다.벤처·모험·기업가 정신을 중시하는 ‘미국식 성장동력론’을 강조한다.금감위원장 시절에는 대차대조표로 비유하자면 부채비율 축소 등 대변(부채·자본)의 경쟁력을 키우는 데 주력했지만,앞으로는 차변(자산)의 파이를 키우는 것이 과제라고 말한다. 강 위원장은 차변 못지 않게 대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파이(성장)를 키우기 위해 재벌의 시장질서 위반을 묵인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이는 자연스레 성장과 분배의 조화론으로 이어진다.다만 분배는 ‘일한 만큼 대접받는 것’이어야지,무조건 나눠 먹자는 식은 안된다는 논리다. 주병철기자 bcjoo@seoul.co.kr˝
  • [세상에 이러일이] 내, 猿참

    사람이 원숭이에게 치이는 곳이 있다.이슬람교를 믿는 방글라데시에서도 서쪽에 위치,회교도의 고향으로 알려진 케샤브푸르가 그곳이다.100년전쯤 원숭이들이 모이기 시작했는데 원숭이들끼리 입소문이 도는지 한때는 수천마리가 이 곳에 살기도 했다.지금 원숭이수는 350마리 정도라고 영국 BBC방송이 최근 보도했다. 원숭이와 사람의 동거가 쉬울 리는 없다.한번은 무리를 지배하는 수컷을 마취시켜 마을 외곽의 숲에 갖다 뒀다.다른 원숭이들도 따를 것이라 기대했는데 마취에서 깨어난 수컷은 보무당당하게 돌아왔다. 이들이 좋아하는 곳 중 하나는 먹을 게 많은 부엌 지붕.수십마리의 원숭이는 병원 지붕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환자를 보러 온 사람들이 가져오는 바나나 과자 케이크 등이 이들의 목표물이다.빼앗기지 않으려는 사람은 얼굴에 생채기가 나거나 옷이 찢기는 수모도 당한다. 이곳 주민들은 이 긴꼬리 원숭이를 원숭이신인 하누만의 화신으로 여겨 원숭이를 보면 운이 좋은 것이라 여긴다.또 원숭이를 용서할 때마다 원숭이신이 자신들을 용서한다고 생각한다.이들에게 하루 두번씩 바나나와 견과류를 주는 자선단체까지 있으니 원숭이 천국인 셈이다. 전경하기자 lark3@˝
  • [‘즐거운 주말’ 2題] 가마타고 인사동 행차

    ‘물렀거라∼ 꼬마도령 나가신다.’ 서울 종로구(구청장 김충용)가 서울의 전통거리인 인사동에서 어린이 꽃가마·사인교 태워주기 행사를 벌이고 있다. 인사동의 명물인 포도대장과 순라군들이 대거 행사에 출연,위엄과 멋을 갖추고 남인사마당을 출발해 북인사마당을 돌아온다. 매주 토·일요일 오후 4시부터 펼쳐지는 이 행사는 종로구 관내 어린이(만4∼7세) 뿐만 아니라 전국 모든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다.전화신청(02-731-1185)만 하면 선착순으로 선정(남자 1명,여자 2명)한다.비오는 날을 제외하고 연중 계속된다.남자 아이용 도령복과 두건은 마련돼 있으나 여자 한복은 각자 준비해 와야 한다. 이 행사는 올해 문화관광부 우수 문화관광프로그램으로 선정돼 4000만원의 국비를 지원받는다. 최용규기자 ykchoi@˝
  • ‘김대건 신부’ 그린 20년대 연극대본 발견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1822∼1846)의 일대기와 순교사를 다룬 1920년대 연극대본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한국교회사연구소가 16일 공개한 국·한문 혼용체의 책자형태로 된 연극대본 ‘金神父傳(김신부전)’은 조선교구 보좌주교였던 프랑스 외방선교회 드브레 에밀 알렉산드레 조셉 주교가 라틴어로 쓴 원작을 우리말로 옮긴 번역본.평화신문 미주지사가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거주하는 교포로부터 기증받아 이 연구소에 기탁했다. 1921년 경기 봉담면 왕림성당에서 등사판으로 찍어 손으로 제본한 대본은 7막 140쪽으로 구성돼 있으며 막과 막사이에 대본과 함께 독창·합창 악보와 가사가 수록돼 있어 눈길을 끈다. 조셉 주교가 쓴 라틴어 원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김성호기자 kimus@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2)대원위대감의 생각 (上)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2)대원위대감의 생각 (上)

    조선 제26대 국왕 고종(高宗,1852∼1919)의 아버지 이하응(李昰應)을 두고 세간에서는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이라 불렀다. 그는 조선후기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쇠락한 왕권을 강화해 프랑스,독일,미국,일본,청나라,러시아등 19세기 세계 열강의 침략에 맞설 힘을 기르며 조선을 중흥시키기 위해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던 인물이다. 오늘은 그 대원위대감이 왜 그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결과는 어떻게 끝났는지,파란만장한 그의 생애 이면에 감춰진,권력을 향한 무서운 집념의 한 증거를 찾아서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로 간다. 예산(禮山)은 유서깊은 고장이다.백제시대에는 오산현(五山縣)이라 불렀는데 신라에 정복당한 뒤 고산(高山)으로 바뀌었으며,예산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 것은 고려 태조2년의 일이었다. 왕건은 견훤이 다스리던 후백제를 정복한 뒤 이곳을 다스리려 했으나 민중은 왕건의 통치에 순응하지 않았다.두 임금을 섬길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미 신라에 정복당한 뒤 100년이 넘도록 신라의 강권통치에 대를 물려 저항해왔던 백제유민들이기 때문에 백제가 망한 지 2세기가 지난 후에 견훤이 후백제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백제 유민들이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왕건에 대해서도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백제인들의 핏속에 흐르는 자긍심과 백제문화에 대한 뿌리깊은 정신의 힘때문이었다. 이 정신은 곧 현대사회에서도 충청·전라도 사람들의 기질,즉 겉은 부드럽지만 안은 강철처럼 단단하고,문학과 예술 그리고 아름다움의 근원을 지향하는 삶으로 드러나고 있다. 왕건은 이곳 사람들의 정신에 큰 감동을 받았다.정복자로서의 권위나 자신감이 아닌,존경과 화해의 마음으로 새로운 이름을 선물하고자 했다.충절과 예의의 고장임을 기리기 위해 예산이란 새 이름을 정하고 민중의 뜻을 물었다.이곳 사람들도 더는 거부하지 않고 새롭게 시작된 고려왕조에 동의해주었다. 그 후 대흥(大興)과 덕산(德山)을 합쳐 지금의 예산군이 된 것은 1914년부터다.오늘의 여행 목적지 예산군 덕산면(德山面) 상가리(象伽里)에는 대원위대감의 야망과,권력 장악을 위한 고뇌와 갈등,정치의 권모술수와 피할 수 없는 재앙을 새로운 차원에서 재조명할 수 있는 역사적 증거와 문화적 논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만약 그가 지금 살아있다면 이 증거들을 완벽하게 없애버리고 싶을 것이다.그리고 역사를 향하여 그 사실들을 부정할 것이다.한국의 정치꾼들이 가장 좋아하는 거짓말과 책임회피 증후군으로 볼 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하지만 어쩌랴,누구도 자신의 죄를 제 손으로 지울 수는 없으니. ●‘명당’ 가야사 품은 옥양봉, 기도처로 이름나 덕산 들녘에서 서북 방향을 바라보면 예산군과 서산군 경계 쯤에 산맥이 걸쳐 있다.가야산(伽倻山)이다.들길을 지나 상가리 쪽으로 다가서면 맞은편에 잘 생긴 산 하나가 보이고,오른쪽으로도 얌전한 산봉우리 하나가 나타난다.맞은편 산은 옥양(玉陽)산이고,오른쪽 산은 서원(書院)산이다.두 산 모두 가야산이 거느리고 있는 줄기다. 해인사가 깃들어 있는 산도 가야산이라 부르는데,경상도와 충청도에 있는 가야산은 모두 같은 뜻을 지녔다.즉 가야(伽倻,迦倻)라는 말은 원래 산스크리트 gaya를 음역하여 표기한 것인데,흰코끼리를 의미하는 말이다. 석가모니가 도를 이룬 곳을 부다가야(Budhagaya)라고 부르는 것과 맥이 통하는 상징어다.이 가야산에는 일찍이 6세기 후반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마애삼존불’이 북쪽 자락 해발 200m 가량의 능선 암벽에 새겨져 있기도 해서 온 산이 불교신앙의 성지처럼 숭배되어 왔다. 가야산 남쪽 기슭이 되는 옥양봉 아래에 가야사(伽耶寺)라는 절이 있었다.이곳에는 금탑(金塔)으로 부르는 철첨석탑(鐵尖石塔)이 있었고 탑 사면에는 석감(石龕)이 있어 각각 석불이 봉안되었을 만큼 빼어난 작품이었는데 백제 불교 미술의 정교함과 깊은 신앙심이 깃든 걸작이었다고 한다. 또한 가야사에는 예부터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매우 흥미있는 풍수설이 전해져 왔다.가야사 대웅전 터에서 왕손(王孫)이 생겨나리라는 풍수지리설이었다.세간에서는 절을 허물어내고 그 자리에 묘를 쓰면 반드시 왕손을 낳게 된다는 풍수설이 끈질기게 이어졌다. 하지만 감히 누구도 그런 무모한 짓을 하지는 못하고,대신 훌륭한 자식을 점지해달라는 기도처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옥양봉에 이르는 계곡은 펀펀하면서도 깊다.그래서 그런지 옥양봉 계곡에는 한때 100개가 넘는 크고 작은 사찰들로 꽉 차서 절골이라고도 불렀을 만큼 승려들의 목탁소리와 범종소리,향 내음과 독경 소리가 일년 사철 끊이질 않았다.상가리(象伽里)라는 이름이 그래서 붙여졌던 것이다. ●구걸로 어린시절 연명한 ‘권력의 화신’ 이하응 이같은 솔깃하고 엄청난 비밀이 깃든 것처럼 느껴질수도 있는 풍수설을 은밀하게 새기면서 가야사 주변을 여러 해 동안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이하응이란 청년이었다.올때마다 동행하는 자가 있었는데 이름난 지관(地官)이었다.그는 옥양봉,서원산,가야산 정상 어느 한곳도 빼놓지 않고 꼼꼼하게 살피고 돌아다녔다.아무도 그를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전혀 얼굴이 알려진 자도 아니었거니와 행색도 남루했고 늘 빈털터리였다. 이하응은 유아기에 아버지를 여읜 뒤 사고무친의 왕손으로 불우한 청년기를 보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버지는 조선후기의 왕족이다.이름은 구(球),사도세자의 서자로서 정조(正祖)의 이복동생인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가서 남연군(南延君)에 봉해졌다.1771년(영조 47년) 양부 은신군이 정적의 모함으로 작위를 삭탈당한 뒤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변사하자 남연군도 불우한 처지로 내몰리고 말았다. 1821년 수릉관(守陵官)이란 말단직을 지내다가 쓸쓸하게 죽었다.이하응은 남연군이 죽던 해에 겨우 세 살짜리 어린 아이였었다. 이하응의 유년과 청년 시절은 지독하게 불우했다.이름뿐인 왕족으로서 구걸,비웃음과 온갖 능멸로 양식을 삼았다.수모,고뇌,방랑으로 점철된 세월이었다. 암울하고 억울한 세월 속에서 시정잡배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권력을 향한 무서운 집념을 불태웠다.집념의 핵심은 목숨을 건 타협과 거래였다. 긴 방랑생활 중에 이하응은 가야사의 풍수설을 알게 되었다.딱히 할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심심풀이 삼아 가야사와 가야산 일대를 수없이 오르내리면서 풍수설의 내용을 음미해보았다.왕손을 낳을 수만 있다면 가야사를 불태워버리는 일쯤은 얼마든지 감행할 자신이 있었다.수차례에 걸친 답사와 계획 끝에 결심을 굳혔다. 그의 나이 21세 때인 1840년(헌종 6년) 마침내 목숨을 건 모험에 돌입했다.부랑배들을 이용하여 가야사에 기거하는 승려들을 밖으로 유인해 낸 다음 절에다 불을 질렀다.목조 건물은 한밤 중에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그 무렵 조선사회는 이하응의 행동과 같은 짓거리들이 크게 유행했다. ●남연군묘 이장뒤 얻은 둘째 명복이 훗날 고종 전국 곳곳의 사찰이 불타고,불탄 자리에 무덤을 짓는 일이 공공연하게 벌어졌다.대표적인 예는 신라 선문9산의 하나인 경남 창원 봉림사,경기도 양주 회암사,전라도 흥덕 연기사,경남 산청 단속사를 비롯해 풍수지리설에서 명당자리로 알려진 사찰들이 유생들에 의하여 불탔다. 이같은 시대적 추세에 따라 이하응도 그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가야사 법당터에다 이장했다.누구도 이를 비난하거나 저지하지 못했다. 그런 다음 해인 1841년 그는 흥선정(興宣正),1843년에는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졌다.1846년에는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되어 벼슬의 맛을 보기 시작했다. 남연군의 묘를 옮겨 쓴지 12년만인 1852년 이하응은 둘째아들을 보았고,그로부터 다시 11년 뒤인 1863년 둘째아들 명복(命福)이 조선 제 26대 국왕인 고종(高宗)이 되고,이하응은 마침내 대원위대감이 되어 모험에 찬 정치도박이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2)대원위대감의 생각 (上)

    조선 제26대 국왕 고종(高宗,1852∼1919)의 아버지 이하응(李昰應)을 두고 세간에서는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이라 불렀다. 그는 조선후기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쇠락한 왕권을 강화해 프랑스,독일,미국,일본,청나라,러시아등 19세기 세계 열강의 침략에 맞설 힘을 기르며 조선을 중흥시키기 위해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던 인물이다. 오늘은 그 대원위대감이 왜 그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결과는 어떻게 끝났는지,파란만장한 그의 생애 이면에 감춰진,권력을 향한 무서운 집념의 한 증거를 찾아서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로 간다. 예산(禮山)은 유서깊은 고장이다.백제시대에는 오산현(五山縣)이라 불렀는데 신라에 정복당한 뒤 고산(高山)으로 바뀌었으며,예산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 것은 고려 태조2년의 일이었다. 왕건은 견훤이 다스리던 후백제를 정복한 뒤 이곳을 다스리려 했으나 민중은 왕건의 통치에 순응하지 않았다.두 임금을 섬길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미 신라에 정복당한 뒤 100년이 넘도록 신라의 강권통치에 대를 물려 저항해왔던 백제유민들이기 때문에 백제가 망한 지 2세기가 지난 후에 견훤이 후백제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백제 유민들이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왕건에 대해서도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백제인들의 핏속에 흐르는 자긍심과 백제문화에 대한 뿌리깊은 정신의 힘때문이었다. 이 정신은 곧 현대사회에서도 충청·전라도 사람들의 기질,즉 겉은 부드럽지만 안은 강철처럼 단단하고,문학과 예술 그리고 아름다움의 근원을 지향하는 삶으로 드러나고 있다. 왕건은 이곳 사람들의 정신에 큰 감동을 받았다.정복자로서의 권위나 자신감이 아닌,존경과 화해의 마음으로 새로운 이름을 선물하고자 했다.충절과 예의의 고장임을 기리기 위해 예산이란 새 이름을 정하고 민중의 뜻을 물었다.이곳 사람들도 더는 거부하지 않고 새롭게 시작된 고려왕조에 동의해주었다. 그 후 대흥(大興)과 덕산(德山)을 합쳐 지금의 예산군이 된 것은 1914년부터다.오늘의 여행 목적지 예산군 덕산면(德山面) 상가리(象伽里)에는 대원위대감의 야망과,권력 장악을 위한 고뇌와 갈등,정치의 권모술수와 피할 수 없는 재앙을 새로운 차원에서 재조명할 수 있는 역사적 증거와 문화적 논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만약 그가 지금 살아있다면 이 증거들을 완벽하게 없애버리고 싶을 것이다.그리고 역사를 향하여 그 사실들을 부정할 것이다.한국의 정치꾼들이 가장 좋아하는 거짓말과 책임회피 증후군으로 볼 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하지만 어쩌랴,누구도 자신의 죄를 제 손으로 지울 수는 없으니. ●‘명당’ 가야사 품은 옥양봉, 기도처로 이름나 덕산 들녘에서 서북 방향을 바라보면 예산군과 서산군 경계 쯤에 산맥이 걸쳐 있다.가야산(伽倻山)이다.들길을 지나 상가리 쪽으로 다가서면 맞은편에 잘 생긴 산 하나가 보이고,오른쪽으로도 얌전한 산봉우리 하나가 나타난다.맞은편 산은 옥양(玉陽)산이고,오른쪽 산은 서원(書院)산이다.두 산 모두 가야산이 거느리고 있는 줄기다. 해인사가 깃들어 있는 산도 가야산이라 부르는데,경상도와 충청도에 있는 가야산은 모두 같은 뜻을 지녔다.즉 가야(伽倻,迦倻)라는 말은 원래 산스크리트 gaya를 음역하여 표기한 것인데,흰코끼리를 의미하는 말이다. 석가모니가 도를 이룬 곳을 부다가야(Budhagaya)라고 부르는 것과 맥이 통하는 상징어다.이 가야산에는 일찍이 6세기 후반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마애삼존불’이 북쪽 자락 해발 200m 가량의 능선 암벽에 새겨져 있기도 해서 온 산이 불교신앙의 성지처럼 숭배되어 왔다. 가야산 남쪽 기슭이 되는 옥양봉 아래에 가야사(伽耶寺)라는 절이 있었다.이곳에는 금탑(金塔)으로 부르는 철첨석탑(鐵尖石塔)이 있었고 탑 사면에는 석감(石龕)이 있어 각각 석불이 봉안되었을 만큼 빼어난 작품이었는데 백제 불교 미술의 정교함과 깊은 신앙심이 깃든 걸작이었다고 한다. 또한 가야사에는 예부터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매우 흥미있는 풍수설이 전해져 왔다.가야사 대웅전 터에서 왕손(王孫)이 생겨나리라는 풍수지리설이었다.세간에서는 절을 허물어내고 그 자리에 묘를 쓰면 반드시 왕손을 낳게 된다는 풍수설이 끈질기게 이어졌다. 하지만 감히 누구도 그런 무모한 짓을 하지는 못하고,대신 훌륭한 자식을 점지해달라는 기도처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옥양봉에 이르는 계곡은 펀펀하면서도 깊다.그래서 그런지 옥양봉 계곡에는 한때 100개가 넘는 크고 작은 사찰들로 꽉 차서 절골이라고도 불렀을 만큼 승려들의 목탁소리와 범종소리,향 내음과 독경 소리가 일년 사철 끊이질 않았다.상가리(象伽里)라는 이름이 그래서 붙여졌던 것이다. ●구걸로 어린시절 연명한 ‘권력의 화신’ 이하응 이같은 솔깃하고 엄청난 비밀이 깃든 것처럼 느껴질수도 있는 풍수설을 은밀하게 새기면서 가야사 주변을 여러 해 동안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이하응이란 청년이었다.올때마다 동행하는 자가 있었는데 이름난 지관(地官)이었다.그는 옥양봉,서원산,가야산 정상 어느 한곳도 빼놓지 않고 꼼꼼하게 살피고 돌아다녔다.아무도 그를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전혀 얼굴이 알려진 자도 아니었거니와 행색도 남루했고 늘 빈털터리였다. 이하응은 유아기에 아버지를 여읜 뒤 사고무친의 왕손으로 불우한 청년기를 보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버지는 조선후기의 왕족이다.이름은 구(球),사도세자의 서자로서 정조(正祖)의 이복동생인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가서 남연군(南延君)에 봉해졌다.1771년(영조 47년) 양부 은신군이 정적의 모함으로 작위를 삭탈당한 뒤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변사하자 남연군도 불우한 처지로 내몰리고 말았다. 1821년 수릉관(守陵官)이란 말단직을 지내다가 쓸쓸하게 죽었다.이하응은 남연군이 죽던 해에 겨우 세 살짜리 어린 아이였었다. 이하응의 유년과 청년 시절은 지독하게 불우했다.이름뿐인 왕족으로서 구걸,비웃음과 온갖 능멸로 양식을 삼았다.수모,고뇌,방랑으로 점철된 세월이었다. 암울하고 억울한 세월 속에서 시정잡배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권력을 향한 무서운 집념을 불태웠다.집념의 핵심은 목숨을 건 타협과 거래였다. 긴 방랑생활 중에 이하응은 가야사의 풍수설을 알게 되었다.딱히 할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심심풀이 삼아 가야사와 가야산 일대를 수없이 오르내리면서 풍수설의 내용을 음미해보았다.왕손을 낳을 수만 있다면 가야사를 불태워버리는 일쯤은 얼마든지 감행할 자신이 있었다.수차례에 걸친 답사와 계획 끝에 결심을 굳혔다. 그의 나이 21세 때인 1840년(헌종 6년) 마침내 목숨을 건 모험에 돌입했다.부랑배들을 이용하여 가야사에 기거하는 승려들을 밖으로 유인해 낸 다음 절에다 불을 질렀다.목조 건물은 한밤 중에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그 무렵 조선사회는 이하응의 행동과 같은 짓거리들이 크게 유행했다. ●남연군묘 이장뒤 얻은 둘째 명복이 훗날 고종 전국 곳곳의 사찰이 불타고,불탄 자리에 무덤을 짓는 일이 공공연하게 벌어졌다.대표적인 예는 신라 선문9산의 하나인 경남 창원 봉림사,경기도 양주 회암사,전라도 흥덕 연기사,경남 산청 단속사를 비롯해 풍수지리설에서 명당자리로 알려진 사찰들이 유생들에 의하여 불탔다. 이같은 시대적 추세에 따라 이하응도 그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가야사 법당터에다 이장했다.누구도 이를 비난하거나 저지하지 못했다. 그런 다음 해인 1841년 그는 흥선정(興宣正),1843년에는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졌다.1846년에는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되어 벼슬의 맛을 보기 시작했다. 남연군의 묘를 옮겨 쓴지 12년만인 1852년 이하응은 둘째아들을 보았고,그로부터 다시 11년 뒤인 1863년 둘째아들 명복(命福)이 조선 제 26대 국왕인 고종(高宗)이 되고,이하응은 마침내 대원위대감이 되어 모험에 찬 정치도박이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
  • 韓銀조사국 ‘부활의 노래’ 부른다

    한국은행이 경제 분석과 전망 등 조사(調査)기능의 부활을 선언했다.독보적인 경제연구기관으로 자리매김했던 과거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얘기다. 박승 총재는 최근 “경제에 대한 탁월한 안목이 중앙은행 직원의 기본인데도 요즘 이 부문이 너무 소홀히 다뤄지고 있다.”고 질타하고 “조사부문에 우수 인재를 집중 배치해 분석 및 예측 능력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한은은 올해 신입행원 71명의 38%인 27명을 조사국·경제통계국 등 조사담당 직군으로 보냈다.대부분 성적 상위권에서 뽑았다.예년에는 신입행원의 15% 정도만이 조사 직군에 배치됐다.한은은 해외연수 등에서도 조사 직군에 상대적으로 많은 기회를 주기로 했다.당장 다음달 있을 인사에서 국·실별로 똑똑하다는 직원들을 대거 조사국으로 보내라는 지시가 내려져 있는 상태다. 조사업무는 생산,소비,투자,수출,고용,임금,금리,환율,물가,재정,세계경제,경제정책 등 우리경제를 구성하는 온갖 요소들을 종합해 큰 틀에서 분석하고 전망하는 일이다.올해 우리경제 성장률을 5.2%로 전망한 곳이 조사국이다.나라경제의 장기 과제를 연구하기도 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조사부(현 조사국)는 한은 내 최고부서로 통했다.소관업무가 한은법에 명시돼 있는 유일한 ‘법정(法定)부서’라는 자부심이 강했다.그러나 각종 민간·공공 경제연구소들이 생겨나면서 독보적 지위가 흔들리게 됐다.경제현상이 복잡해지고 글로벌화하면서 업무강도가 높아진 데 대한 부담도 커졌다. 배우고 연구한 것을 현실에 직접 활용하기 어려운 ‘아카데믹’한 특성도 젊은 직원들에게 매력을 주지 못했다.최근에는 정책기획국,금융시장국 등 통화신용 직군에 대한 선호도가 행내에서 가장 높은 편이다. 한 조사국 직원은 “경제를 결정하는 요인들이 나라 안팎에서 엄청나게 다양해지면서 분석과 예측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면서 “특히 다른 연구기관들과 달리 한은은 분석·전망 결과에 대한 책임이 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했다.실제로 매년 한은은 경제성장 전망치 등이 실제와 어긋나게 나와 여론의 뭇매를 맞아왔다. 61년 입행해 76년 중앙대 교수로 나갈 때까지 16년간을 조사통(通)으로 있었던 박 총재의 노력이 한은의 조사능력 향상으로 이어질지 두고 볼 일이다. 김태균기자 windsea@˝
  • [서울 탱고]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우∼네‘ 무명 가수 조용필을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은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발표 30여년이 지난 요즘도 여전히 노래방 등에서 40∼50대가 즐겨 부르는 곡이다.트로트 계열의 구슬픈 곡조와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한(恨)많은 우리네 정서와 잘 어우러져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특히 노랫말에 부산의 유명 관광지인 해운대 동백섬과 부산 해로(海路)의 관문인 오륙도,부산을 상징하는 갈매기를 담아 부산사람들에게는 더욱 살갑게 다가온다. 남녘 끝자락에서 기지개를 켜며 북상 중인 봄의 화신이 코끝을 간지럽히자,동백섬 산책로에는 봄맞이 나온 행인과 운동복 차림의 주민들이 싱그러운 해풍을 맞으며 여가를 보낸다.길가에는 하나둘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동백꽃이 수줍은 새색시마냥 다소곳이 고개숙인 채 이들을 반긴다.동백섬에서 바라본 오륙도는 일제의 핍박으로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할아버지·아버지들의 애환을 아는지 모르는지,오늘도 묵묵히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시대적 상황과 배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고,서민들의 기쁨과 슬픔,즐거움과 아픈 흔적을 응집해 표출하고 있다.그래서 그 어떤 장르보다 폭넓은 호소력과 전파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부산 출신의 작곡가 황선우씨가 작사·작곡하고 조용필이 부른 이 노래는 일본·중국·동남아시아는 물론 유럽에도 전파돼 부산을 알리는 데 톡톡히 한몫했다. 원래 이 곡은 남녀간의 사랑과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연가(戀歌)였다.작곡가 황씨가 젊은 시절 같은 마을에 사는 처녀를 사모했는데,이 처녀가 멀리 시집을 가버렸다.황씨가 그녀와 이루지 못한 사랑을 그리며 작사·작곡한 노래가 바로 ‘돌아와요 부산항에’이며,그의 첫 작품이었다. 지난 72년 부산의 밤무대에서 활동하던 조용필이 음반을 취입했으나 반응이 신통찮았다.2년여 뒤 부분적으로 개사한 뒤 재취입해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님 떠난 부산항’은 ‘형제 떠난 부산항’으로 ‘그리운 내 님이여’는 ‘그리운 내 형제여’로 바뀌었다.당시 일본 조총련 동포 성묘단의 모국방문과 노랫말이 잘 맞아떨어져 국민 애창곡 1위로 떠오른 것.재일동포 대부분이 나라잃은 설움을 삼키며 부산을 통해 일본으로 떠나게 된 것을 알고 그들의 귀국을 반기는 취지의 곡으로 바꾼 게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게 됐다. 시민들은 부산을 세계에 널리 알린 황씨와 조씨를 기념하기 위해 지난 94년 5월 해운대해수욕장 입구 호안도로 옆 송림공원에 ‘돌아와요 부산항에 노래비’를 세웠다.현역으로 활동 중인 가수의 노래비가 건립되기는 처음이다.노래비는 93년 부산지역 시민단체인 ‘부산을 가꾸는 모임’ 주도로 3000만원의 기금을 모아 제작됐다. 신라대 미술학과 김청정 교수가 제작한 이 노래비는 가로 1m,세로 0.4m,높이 2.6m 크기다.윗부분 청동판에는 부산을 상징하는 파도·갈매기·오륙도를 형상화했다.아랫부분 대리석에는 가사가 2절까지 새겨졌다. 수십년이 흐른 지금도 동백섬과 오륙도는 한결같지만,주변에 고급 아파트촌과 호텔 등이 들어서 호젓하고 아늑한 정취가 갈수록 사라져 아쉬움을 더해 주고 있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
  • [씨줄날줄] 대한민국 스캔들/정인학 논설위원

    스포츠 외교를 모두 밝히면 ‘대한민국 스캔들’이 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체육단체 공금 등 38억 4000여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김운용 의원이 법정에서 토설한 한 토막이라고 한다.횡령 혐의의 시궁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조국의 국제적 망신도 주저하지 않겠다는 협박인 셈이다.국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온갖 영화를 누렸던 당사자라면 설혹 대한민국 스캔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치졸한 인질극으로 위기를 넘기려 해서야 쓰겠는가. 요즘 대한민국은 집단 울화병을 앓고 있다.감투썼던 ‘나리’들의 간교한 위선 행각이며 국민을 인질로 협박을 일삼는 그 행태가 속을 뒤집어 놓는다.금방 감옥에 갇히면서도 검은 돈을 받지 않았다고 고함을 질러댄다.청렴과 결백의 화신인 양 떠들어 대던 이른바 386들의 추잡한 치부며,궤변으로 변명을 일삼는 행태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총선 얘기만 나오면 몇 석을 얻지 못하면 알량한 벼슬을 내놓겠다느니,개헌 저지선이 어쩌느니 하고 국민을 협박해 댄다. 김운용씨는 기회 있을 때마다 국가 위상을 높이기 위해 스포츠 외교에 헌신해 왔다는 말을 반복해 왔다.그리고 이제 와선 바로 스포츠 외교를 인질로 삼은 것이다.국가를 앞세워 개인 영달을 획책해 왔음을 웅변적으로 털어 놓은 게 아닌가.하기야 한국올림픽위원회 위원을 선임하면서 돈을 챙긴 연유를 신문하자 ‘스포츠 활동이라는 게 돈 있고 시간 있는 사람들이 하는 거니까 (돈을)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니 국가의 위신 따위야 안중에 들어 올 리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른바 지도층 인사에 대한 관찰의 눈초리를 곧추세워야 한다.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다고 떠벌이거든 더욱 경계해야 한다.어찌어찌하면 어찌어찌하게 될 것이라고 협박하거든 그대로 응징해야 한다.나중에 대한민국 스캔들을 볼모로 대국민 인질극을 벌일 것이다.우리는 싸늘해져야 한다.싹수가 노란 것은 노란 것이다.상대적 온정주의에 빠져 그래도 누구보다는 낫다며 노란 싹수가 파랗게 변할 수 있으리라고 현혹되어선 안 된다.이번 대한민국 스캔들에서 배우지 못하면 우리는 어느날 또 조국을 인질로 삼는 협박에 운명을 맡겨야 할지 모른다. 정인학 논설위원 chung@˝
  • [우리금융그룹배] 변연하 V화신

    변연하를 앞세운 삼성생명이 금호생명을 물리치고 단독 1위에 나섰다. 삼성은 1일 인천체육관에서 열린 여자프로농구 겨울리그에서 슈터 변연하(26점)의 중·장거리포가 불을 뿜어 포인트가드 김지윤(22점)이 분전한 금호를 74-69로 꺾었다.8승2패를 기록한 삼성은 1라운드에서의 패배를 설욕하며 단독 1위로 한발 앞서 나간 반면 금호는 7승3패로 국민은행과 함께 공동 2위가 됐다.2쿼터 후반 변연하가 외곽포를 잇달아 꽂는 ‘원맨쇼’로 승부가 결정됐다.삼성은 2쿼터 종료 3분34초를 남기고 센터 김계령이 레이업슛을 성공시켜 26-24로 앞선 뒤 변연하의 3점포 2개가 거푸 터지면서 32-24로 점수차를 벌렸다.변연하의 ‘원맨쇼’는 이때부터 본격화됐다.3점슛에 이어 가로채기,골밑슛 등 전천후 활약에 힘입어 삼성은 39-26으로 간격을 벌렸다.변연하는 2쿼터 막판 3분동안 3점슛 3개를 포함해 혼자 11점을 몰아 넣어 승리의 주역이 됐다.3쿼터까지 44-58로 뒤진 금호는 4쿼터 들어 김지윤이 12점을 터뜨리며 막판 추격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박준석기자 pjs@˝
  • ‘알코올 중독’ 허근신부 美서 상담 박사학위

    알코올 중독의 어려움을 극복한 뒤 자신의 경험을 살려 알코올 치료상담활동을 벌이고 있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알코올 사목센터 실장 허근(52) 신부가 최근 미국 로스앤젤레스 근교 찰스워스의 버나딘대학교에서 기독교상담학(D.C.C)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논문은 ‘회복 중인 알코올 중독자들을 위한 영적인 치유 서비스 및 효과적인 영적 성장 프로그램’. 허 신부는 논문에서 지난 98년 9월부터 2000년 12월까지 29∼68세의 알코올 중독 남녀 18명에게 자신이 개발한 알코올 중독치료 프로그램을 적용해 치료한 결과,70% 이상이 지속적으로 단주(斷酒)하는 데 성공했다는 내용을 밝혔다.허 신부는 1980년 사제 수품 후 추기경 비서와 서울 상계동·면목동 주임신부를 거쳐 현재 성동노인복지관 관장을 겸하고 있다. 한때 앉은 자리에서 소주 8명,맥주 24병을 마실 만큼 심각한 알코올 중독에 빠져 정상적인 사목이 불가능했으나 신앙의 힘으로 알코올 중독에서 탈출했으며,지난 2002년 6월부터 ‘평화신문’에 ‘허근 신부의 알코올 탈출기’라는 고백성 수기를 쓰고 있다. 김성호기자 kimus@˝
  • [이런 책 어때요] 권력과 탐욕의 역사/필립 지강테스 지음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한다는 목표 아래 시작된 십자군전쟁의 이면엔 이슬람이 차지하고 있던 무역로를 확보하고 포화상태인 유럽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려는 유럽인들의 속셈이 들어 있었다.십자군의 세속적 욕망은 같은 그리스도교국인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고 전리품을 획득하는 데 눈멀었던 행동에서도 잘 드러난다.인간의 권력욕과 탐욕은 세계사의 진로를 바꾸는 데 큰 몫을 했다.‘그 어머니에 그 아들’인 아그리피나와 네로 황제,‘비잔틴 제국의 에바 페론’ 에비타 테오도라 등 탐욕의 화신들을 소개한다.1만 5000원.˝
  • '이헌재發 충격파’ 오나…금융권 초긴장

    ‘이헌재 경제팀’의 출범에 금융권이 잔뜩 숨을 죽였다.정부의 시장규율을 중시하는,이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특유의 스타일 때문이다.당장 지난 11일 취임하며 쏟아낸 발언들이 심상치 않다.“시장은 어린애 놀이터가 아니며 시장을 해치는 행위는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등 예상을 뛰어넘는 고강도 발언의 후폭풍이 예상된다.이 때문에 최근 정부 주도의 LG카드 지원계획에서 발을 뺀 외환·한미 등 외국계 은행들은 ‘이헌재 발(發) 한파’의 현실화 가능성을 따져보며 극도로 긴장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이 부총리와 악연(惡緣)이 많은 한국은행도 재경부와의 ‘밀월시대’가 막을 내렸다고 보는 분위기다. ●긴장하는 외환·한미은행 지난 5일 LG카드 지원 거부를 선언한 외환은행 등은 이 부총리가 말한 ‘철없는 어린애’가 자신들을 가리킨 것이라는 분석에 바짝 긴장하고 있다.영국의 경제전문지 파이낸셜타임스는 12일 “이 부총리의 경고는 LG카드 지원을 거부한 외국계 은행을 직접 겨냥한 것”이라고 보도했다.외환은행 관계자는 “LG카드 지원 거부가 외환카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는 것을 정부가 이해할 것으로 믿는다.”고 애써 태연해 했다. 그러나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정부가 외환은행 등을 ‘시범케이스’로 삼을 수 있다.”며 “신규사업·신규상품 인허가,감독당국 검사,각종 정부기금 운용 등에 정부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정부에 밉보이는 것은 경영에 큰 타격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특히 금융정책의 실무총책임자인 재경부 금융정책국장 자리에 지난달 말 ‘관치금융의 화신’으로 통하는 김석동 국장이 온 것도 긴장의 도를 더하고 있다.LG카드 지원안 마련 과정에서 정부에 강하게 반발했던 국민은행도 편치만은 않다.관계자는 “우리의 주장은 LG카드 지원원칙을 분명히 하자는 것이었고,결국 지원에도 다 참여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증권·투신업계도 긴장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한 증권사 임원은 “증권시장 통합 및 증권사 구조조정 등에 가속이 붙을 것으로 보인다.”며 “이 과정에서 한바탕 회오리 바람이 불 것”이라고 말했다. ●한은,“앞으로 피곤하게 됐다.” 과거 이 부총리와 자주 마찰을 빚었던 한은 임직원들은 떨떠름해하는 표정들이다.특히 지난 1년동안 김진표 전 부총리와 역대 최고의 우호관계를 유지해 온 터여서 더욱 그렇다. 양쪽간의 대표적인 마찰은 외환위기 때인 1998년에 있었다.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이던 이 부총리는 한은에 “원활한 기업·금융 구조조정을 위해 자금지원을 확대하라.”고 요구했지만 전철환 당시 한은 총재는 “중앙은행의 발권력은 함부로 쓰는 것이 아니다.”며 거부했다.앞서 97년 금융개혁위원회에서 한은법 등 13개 금융개혁 관련법안을 심의할 때에도 당시 금개위원이던 이 부총리는 한은의 독립성 강화에 강하게 반대했다. 한은 관계자는 “부총리가 금융전문가임을 내세워 금리정책과 금융시장에 지나치게 영향을 미치려고 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재경부는 또 한은 급여성 경비의 예산 승인권을 쥐고 있다.반면 금감위와 금감원은 이정재 위원장과 이 부총리의 관계가 원만하기 때문에 손발이 잘 맞을 것으로 예상하며 환영하고 있다. ●향후 행보놓고 다양한 해석 한은 관계자는 “절박한 경제상황을 감안할 때 이 부총리가 강도높은 시장규율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그러나 반대되는 분석도 많다.금감원 관계자는 “외환위기 직후와 지금은 금융시장 상황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밀어붙이기식’ 시장개입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한은의 다른 관계자도 “자신의 기용이 시장의 불안을 해소하고,아마추어적이라는 지적이 많은 현 경제팀에 프로의 안정감을 불어넣기 위한 것임을 누구보다 이 부총리 자신이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예전같은 스타일을 고수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했다. 김태균 김미경 김유영기자 windsea@˝
  • 금통위, 경제정책 비판

    ‘소 잃고 외양간 고치고,닭 잡는 칼을 소 잡는 데 썼다.’ 국내 최고 통화신용정책 결정기구인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지난해 10월 회의에서 정부의 경제해법을 강도높게 비판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한은이 8일 공개한 지난해 10월9일 금통위 의사록에 따르면 위원들은 정부의 부동산 대책,신용카드사 대책 등의 적절성과 시기에 대해 다양한 문제제기를 했다.금통위 의사록은 통상 4개월 뒤 익명을 원칙으로 공개된다. 당시 한 위원은 “경기가 빠르게 하강한 것은 정부가 부동산가격 급등을 억제하기 위해 주택담보대출 인정비율(LTV) 축소 등 대출관련 규제를 너무 늦게,또 너무 강력하게 시행했기 때문”이라면서 “이로 인해 소비위축,출하감소,가동률 하락,설비투자 회복지연 등이 심화됐다.”고 주장했다.그는 “부동산 문제에 대해서는 세제 개선 등 투기 억제책으로 대응하고 경기부진에 대해서는 콜금리를 더 내리는 식으로 대처했어야 했다.”고 비판했다. 일부 위원은 신용카드사 부실과 관련,“홍콩의 경우 정책당국이 적절히 대처해 연착륙을 유도했는 데 반해 우리나라는 너무 늦게 대응함으로써 정책비용을 더 지불하게 됐다.”고 비판했다. 금통위원들은 당시 정부가 검토 중이었던 주택담보대출 총액한도제도 도입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상당수가 한은법에 이 제도의 도입 조건으로 명시돼 있는 ‘국민경제상 꼭 필요할 경우’에 해당되는 상황이 아닐 뿐더러 주택 실수요자들에게 미치는 부정적 영향,국제적 비판 가능성 등을 들어 반대했다.그러나 이근경(재정경제부 추천) 위원은 ‘필요하다면 이 제도의 도입을 검토하겠다.’는 내용을 의결문 등에 포함시키자고 주장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김태균기자˝
  • 金금통위원 노조에 각서쓰고 출근

    선임된 지 사흘이 지나도록 한국은행 노동조합의 반대로 출근하지 못했던 김종창 신임 금융통화위원이 결국 노조에 각서를 쓰고서야 한은에 발을 들였다.대통령이 임명하는 금통위원이 문서로 확약서를 작성해 노조에 낸 것은 한은 역사상 처음이다.이에따라 금통위원의 권위와 노조개입의 범위를 둘러싸고 논란이 예상된다. 지난 2002년 이근경 금통위원도 노조로부터 출근저지를 당했으나 통화정책의 중립적 수행을 구두로만 약속했다. 김 위원은 이날 오전 9시20분쯤 한은에 출근,정문에서 농성 중인 노조원들에게 독립적이고 중립적인 통화정책을 소신있게 수립할 것을 약속했다.노조는 그러나 구두 약속으로는 부족하다며 김 위원에 서면 확약서 제출을 요구했다.확약서는 “첫째,통화정책은 한은법에 따라 독립적·중립적으로 수립되어야 한다는 것이 평소 저의 소신임을 밝힙니다.둘째,저에게 주어진 임기를 준수해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해 나가겠습니다.셋째,원활한 노사관계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는 내용으로 돼 있다.김 위원은 기획예산처 장관으로 발탁된 김병일 전 위원의 후임으로 지난 2일 임명됐으나 ‘관료 출신 반대’를 내세운 노조의 출근저지 투쟁에 막혀 이틀 연속 출근길이 봉쇄됐다. 금융계 관계자는 “은행연합회의 공식 추천절차에 의해 선임된 차관급 인사가 노조의 허락을 받고서야 임명장을 받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우며 국내 최고 통화신용정책 결정기구의 권위를 크게 훼손한 사례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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