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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 호우총 方相氏탈은 도깨비 얼굴 새긴 화살통”

    지난 1946년 경주시 노서동 호우총(壺우塚)에서 발굴돼 그동안 방상씨(方相氏)탈로 알려졌던 목심칠면(木心漆面)은 도깨비 얼굴 화살통이라는 사실이밝혀졌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8일 “새로운 보존과학 장비를 이용해 목심칠면의 상태를 정밀 재조사한 결과 화살통으로 재해석하게 됐다”고 밝혔다. 목심칠면은 폭 23.7㎝,높이 13.3㎝ 크기로 그동안 역귀를 몰아내는 역할을하며 장례행사에도 사용된 중국 기원의 방상씨탈로 교과서에까지 실렸다. 중앙박물관은 최근 유물의 상태를 정밀 재조사하는 과정에서 X선 촬영결과 내부에서 철제화살촉과 철제상감 화살통 장식, 은제허리띠 장식의 존재를 확인했다. 중앙박물관은 복원한 칠기 도깨비 얼굴 화살통을 ‘5월의 보존처리 문화재’로 선정해 5월1일부터 31일까지 중앙홀에서 전시한다. 서동철기자 dcsuh@
  • 양궁 올림픽 메달전선 ‘빨간불’

    시드니의 악명 높은 바닷바람을 잡으려던 양궁 국가대표팀의 호주 전지훈련이 ‘헛걸음’에 그쳤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높다. 2차전까지 치러진 올림픽대표 선발전에서 여자부 세계랭킹 3위인 김조순(홍성군청)을 비롯해 박명화(전북도청)와 김민정(대전체고),남자부 오진혁(상무) 등 기대주들이 대거 초반탈락의 쓴잔을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여자 대표팀은 10위권에 든 선수가 정창숙(3위·대구서구청) 한명밖에없어 올림픽 금메달 전선에 초비상이 걸렸다는 분석이다. 간판 이은경(한국토지공사)은 뒤에서 4번째인 21위를 기록,3차전에 턱걸이로 진출해 세계랭킹 1위의 자존심에 금이 갔다.은퇴한 뒤 6년만에 활을 잡은김수녕(2위·예천군청)과 3년간 공백기를 가졌던 김경욱(7위·삼익스포츠)보다도 뒤처지는 성적을 남겼다. 남녀 대표팀 1,2진 16명은 지난 2월29일부터 3월14일까지 보름동안 시드니의 올림픽파크양궁장으로 옮겨 적응훈련을 가졌다.경기장 근처 바다에서 불어닥치는 계절풍을 이겨내야만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기간이 짧아 아쉬웠으나 바람의 강도와 방향에 따라 조준점을 달리 하는 오조준 방식은 그래도 괜찮았다.하지만 화살촉 무게를 0.5그램 늘려 훈련한 데에는 비판적인 견해가 지배적이다.평소에 쓰던 경기용구에 조그만 변화가 생겨도 성적에 큰 영향을 줄 정도로 양궁이 감각적인 경기란 점을 놓친 것이아니냐는 얘기다. 남자대표팀 서오석 코치는 “시드니와 같은 악천후에서 힘을 바탕으로 한서양선수들에 비해 불리할 수 밖에 없다”면서 웨이트트레이닝 등 정석을 통해 적극 대비하는 한편 바람을 역이용하는 훈련에도 힘쓰겠다고 밝힌다. 송한수기자 onekor@
  • 충주 남한강 유역에 대규모 신석기 유적지

    충주 남한강변에서 신석기∼청동기시대에 이르는 대규모 유적지가 발견됐다. 충북대박물관(관장 강경숙)은 지난 2월부터 충북 충주시 동량면 조동리 일대에서 발굴조사를 벌이고 있다.그 결과 신석기시대의 대규모 유적지를 확인하고 빗살무늬토기·그물추·간석기·숯 등 유물을 대량 수습했다.특히 볍씨가 나옴으로서 한반도의 벼농사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발굴을 주도한 이융조 충북대교수는 11일 “중원지방의 남한강 유역에서 신석기층을 발견하기는 처음”이라면서 “공백상태로 남아있던 이 지역 신석기 문화연구에 중요한 기준을 제시할 수 있게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번 조사에서는 청동기층에서 불땐자리(화덕) 19기와 움 5기 등 24기의 유구를 확인했다.낫알이 발견됨으로서 곡식저장고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움과 다양한 모양의 불땐자리는 불(火)과 불가분의 관계였을 수 밖에 없는 청동기인들의 생활상을 복원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엄청난숫자의 돌그물추가 발견된 것은 고기잡이가 주업이었음을 보여준다. 청동기층에서는 또 말과 어린소·작은소 등 각종 동물의 뼈도 상당량 발견됐다.특히 완전히 성숙한 2년생이면서도 크기는 송아지만한 작은소의 뼈는 국내 고고학 유적에서 처음 드러난 것이다.서울시립대 최삼용·충북대 조태섭박사는 “작은소는 정강이뼈가 예리하게 잘려나가 있어 제사의식이나 순장의식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학계에서 가장 주목하고 있는 부분은 신석기층에서 나온 볍씨다.신석기시대의 전형적인 유물인 돌도끼·빗살무늬토기·화살촉 등과 함께 출토됐다.볍씨에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법을 적용한 결과 신석기 상위층이 5,300년전,하위층이 6,100년으로 나왔다.한강하구의 일산 가와지 볍씨가 5,020년,김포 가현리가 4,500년으로 나왔던 것과 비교하면 오히려 연대가 앞선다.벼가 중국 양자강에서 한강을 거쳐 한반도에 유입됐다는 설에 새로운 연구과제를 제시한셈이다. 조동리 유적은 지난 90년 집중호우가 내려 층위가 깎여나간 뒤 땅 소유자의제보로 조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여,96년과 97년 두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진곳이다. 학계인사들은 이번 3차 조사에서 신석기유적까지 발견되자 현재 충주시가 건립을 계획하고 있는 선사박물관을 공주 석장리와 양양 오산리·단양 수양개처럼 이곳 유적지에 짓는 것이 바람직스럽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서동철기자 dcsuh@
  • SK야구단 팀 이름 ‘와이번스’

    신생 SK야구단의 팀 명칭은 ‘SK 와이번스(Wyverns)’,초대 감독은 강병철씨(54·전 한화 감독)로 결정됐다. 안용태 SK야구단 사장은 20일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팀 명칭과 감독 엠블렘 및 로고타입 등을 확정짓고 오는 31일 워커힐호텔에서창단식을 갖는다고 발표했다. 이에따라 SK는 오는 25일부터 쌍방울 선수들을 주축으로 시범경기에 나서며새달 5일 프로야구 개막과 함께 한화 롯데 LG와 매직리그에 속해 페넌트레이스를 펼치게 된다. 비룡을 의미하는 와이번스는 날개가 달리고 2개의 다리와 화살촉 모양의 꼬리를 가진 상상의 동물로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SK그룹의 위상을 반영,빠른시일안에 명문구단으로 도약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팀 명칭은 사내와 인터넷을 통해 공모한 900여 응모작 가운데 낙점됐다. 또 3∼4명을 후보로 초대 감독 물색에 고심해온 SK는 2차례 우승 등 풍부한 현장 경험을 지닌 덕장 강병철씨를 감독,그동안 쌍방울 선수단을 이끌어온김준환 감독을 수석코치로 하는 코칭스태프도 선임했다.계약조건은 확정되지않았다. 김민수기자 kimms@
  • [대한광장] 공동체위한 지도층의 조건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는 국민들의 가슴은 답답하다 못해 처절함 바로 그것이다.일년내내 언론이 다루고 있는 최대의 관심사는 민족의 장래를 염려하는 통일문제도 아니고,치열한 경쟁속에 치러지고 있는 경제의 구조조정 문제도 아닌 것같고,새천년의 비전을 두고 갑론을박하는 미래지향의 틀도 아닌 것 같다. 언론을 장식하는 보도의 대종은 연초부터 벌어지고 있는 고급옷 로비 사건이고,언론대책 문건으로 빚어지기 시작한 각양각색의 폭로전이고,소위 서경원 간첩사건을 중심으로 하는 검찰수사의 의혹 등등 지극히 정치적인 사건들이다.역사가 구체적인 사건들의 집합체이기도 하지만 사안의 경중을 따져보면 우리가 이토록 한가한 시대에 살고 있는가 되물을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미국 클린턴 대통령이 탄핵 일보직전에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소위 섹스스캔들이 세계의 뉴스초점이 되었던 것을 기억한다.결과야 어떠하든 한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스캔들이라는 사안 자체는 그리 큰 관심사는 아니었지만,그것을 둘러싸고 전개된 일련의 과정에서 ‘거짓말’이란 요소가 엄청난 파국을 몰고오고 또 거짓말은 반드시 밝혀지고 만다는 사실이다.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이지만 선진지향사회는 기본적으로 진실과 성실이 받침이 되는 신뢰사회일 수밖에 없다.거짓은 신뢰사회의 적이다.진실은 신뢰사회의 뿌리다.클린턴 섹스스캔들로 미국사회는 엄청난 손해를 입었다.보통 있을수 있는 섹스스캔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대통령의 스캔들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공직자의 최고봉이요 세계권력의 최첨단 직위와 관련된 스캔들이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의 거짓을 극복하는 데는 평범한 진실을 찾는 것으로 족할수 있다.하지만 지도층의 거짓은 파장도 그만큼 크지만 진실을 찾아 정의를 세우는 일은 엄청난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일단 지도층이라는 명예와 권세를얻으면 그 책임과 영향력은 그만큼 큰 파장을 타게 마련이다.예컨대 옷로비스캔들을 중심으로 벌어진 거짓말의 구조는 청와대 공직자를 비롯하여 검찰의 공조직, 나아가 지도층 부인들에게 이르기까지 난마처럼 얽히고 설켜 있다.그래서 평범한국민은 슬퍼한다.차라리 지도층이기를 포기하라는 절규이다. 경제회생을 위한 구조조정은 단순히 기업구성과 체질을 바꾸는 것만이 아니다.경제운용자의 철저한 변신과 변화를 기본 조건으로 삼는다.고위 공직자를 비롯한 지도층의 바꿈과 변신은 공직기구의 재편 못지않게 중요하고 필수적이다. 요즈음 ‘기러기 논쟁’도 있다.기러기가 화살촉 모양으로 대오를 지어 함께 날아갈 때는 혼자일 때보다 71% 정도의 거리를 더 날 수 있다고 한다.조류전문가들의 분석이다.그런데 화살촉 방향타 맨앞에 나는 기러기는 가장 힘있고 부유한 기러기가 아니다.힘없고 약한 기러기 아니면 순번을 바꿔가며평범한 능력의 기러기가 포진하고, 힘센 지도층은 중간과 말미에 포진하여까악대는 소리와 날개놀림으로 앞에 포진한 기러기의 힘을 북돋아주고 용기를 주며 함께 날아간다고 한다. 우리사회 지도층이 아무리 고매한 도덕과 힘을 지녔어도 평범한 사람들과함께 어울려 날지 않으면 힘없는 구성원은 탈락하고 급기야는 공동체 전체가 이합집산화하거나 최악의 경우 붕괴될수도 있다.하물며 힘만 있고 방향을잃은 지도층이 제멋대로 앞에서 날면 후속부대는 어떻게 되겠는가,지도층이평범한 주민의 필요한 대열에 포진하여 격려하고 아껴주며 모범을 보여야 그공동체가 기러기공동체로 살아갈 수 있다. 공권력의 위치와 역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솔직히 말해 국민속에 뿌리박고 국민을 섬기는 지도층이 건재하면 그 사회는 안심하고 순항할 수 있다.공동체적 결속의 조건은 바로 서로 믿고 의지하는 신뢰의 관계이다.신뢰를 공고히 하는 조건은 진실이다.도덕적 진실이고,실천적 진실이고,공동체적 진실이다.썩은 지도층은 도려내기에 앞서서 스스로 퇴진해야 옳다.자신들만붕괴되는 게 아니다.사회 전체가 붕괴를 향해 달리기 때문이다. [朴宗和 경동교회 담임목사, 前기독교장로회 총무]
  • 해양한국 장보고에서 21세기까지(12회)

    ■ 韓·日 연합왕국說 경성대학교는 1990년부터 김해 대성동에서 4∼5세기초 금관가야의 왕릉급무덤들을 발굴하였다.이 발굴을 통해 금동말안장 등 마구와 철제갑주,철제큰칼,방패에 붙였던 파형동기(巴形銅器),청동거울,그리고 많은 양의 철정(鐵鋌)등 유물을 발굴하였다.물론 근처인 동래의 복천동과 양동리에서도 많은 양의 유물들이 출토됐다.이렇게 해서 삼국사 속에서 사라졌던 나라인 가야가복원되고 사국사(四國史)가 기술되게 되었다. 가야는 일찍부터 발달한 나라였다.중국기록에 일찍부터 등장하고,왜 등 주변국가들과 교역을 한 국제적인 나라였다.국력이 매우 강하여 전기에는 신라를 제압하기도 했으며,고구려의 광개토대왕군이 신라를 구원하고자 할 때 백제,왜와 연합해 대항하기도 했다.가야는 미약하나마 562년까지 실존한 나라였다.그럼에도 기록이 불실하고,실체가 불분명하여 해석이 분분했다.그 가운데 하나가 ‘임나일본부설’이다. 4세기경 야마도정권이 신라를 정벌하고,가야지방을 정복한 뒤 약 200년간‘임나일본부’가 존속하였다는 것이다.이 설은 기록의 문제점과 당시 동아시아의 대세로 보아 한일학자들에 의해 비판되어 왔다.그중에는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가 주장한 ‘기마민족국가설’이 있다.부여 고구려지역에서 남진해온 기마집단이 4세기 초 가야지방에서 일본열도로 이동한 다음 규슈북부와 한반도 남부지역에 걸쳐서 연합왕국을 건설했다는 이론이다.이 설은 활동주체를 일본열도 쪽에 두는 한계가 있지만 그 사이에 바다를 둔 국가의 존재를 상정한 것은 타당성이 있다. 필자가 지면을 통해 꾸준히 주장하였듯이 동아지중해 해양문화는 매우 뛰어났고,특히 대한해협은 주민들이 활발하게 오가는 교통로였던 것이다.가장 손쉽고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교통로는 김해지역과 규슈북부를 연결하는 항로이다. 일본 건국신화에는 아마테라스의 손자인 니니기노미코도(瓊瓊杵尊)가 삼종신기를 갖고 다카마노하라(高天原)를 떠나 히우가(日向)의 다가치호노다게(高天穗峰)의 구시후루(환觸峰.久士布流多氣)에 도착한다.그의 후손인 짐무(神武)는 동쪽으로 정벌을 완료한 후 초대 천황이된다는 내용이 있다.이 신화는 김수로왕의 ‘천손강림신화’와 구조나 내용이 같고,등장하는 지명(구시후루는 구지봉(龜旨峰)과 음이 유사함)도 비슷하므로 가야계 집단이 일본열도에 도착,고대국가를 형성해가는 과정으로 해석한다. 대마도나 규슈북부지역에는 가야계 지명이 매우 많다.특히 고대항로의 깃점인 당진(唐津)은 원래는 한진(韓津)이었으며,지금도 ‘가라의 항구’란 뜻인‘가라츠’라고 읽는다. 만을 굽어보는 산은 ‘가야산’이고, 근처에 ‘가라도마리’,‘게야’등 가야와 관련된 지명이 많다.특히 천손인 니니기노미코도를 모신 규슈 중부의 기리시마신궁(霧島神宮) 근처에는 가라쿠니다케(韓國岳)가 있다.그외에도 한국과 가야를 가리키는 말이 무수히 많다. 가야와의 관련성은 유물에서도 나타난다.일본신화에서 태양을 상징하는 청동거울이 양동리 대성동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가야는 변진의 전통을 이어받아 철기문화가 발달하였다.대성동 2호분에선 철도끼와 교역품이었던 대형철정 150점이 발견되었고,다른 곳에서도 철제칼 무기 등이 발견되었다.중요한 고분에서는 철제 갑옷과 투구,마구류,행엽,가죽방패 등이 나온다.기마문화가 발달하여 4세기 경에는 기마군단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그외에 파형동기,통형동기 등 일본적인 것으로 알려진 유물이 있는데,이는 오히려 일본보다 시대에서 앞서고,기술도 뛰어나 가야가 원류라는 주장도 나온다. 가야인들은 철제무기로 무장한 기마군단을 보유한채 함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를 정복한 것이다.물론 당시 조선수준으로는 대규모 군마를 운송할수 없었다.때문에 군사는 빠른 전선에 타고,군마는 뗏목(宮本常一 설)이나쌍동선(雙胴船:石井謙治 설)에 싣고 대선단을 이뤄 건넜다는 주장도 나왔다. 가야인들은 이렇게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양안을 동시에 지배한 해양제국을 건설했을 가능성이 크다. 대성동에서 발굴된 벽옥제 화살촉 등이 조공품이었다는 견해는 그러한 상황속에서 가능한 일이다.가야는 점차 일본열도의 중심부를 향하여 진격하는 한편,남해무역을 독점해 국가의 부를 더욱 축적하였을 것이다.그러나 고대국가가 성장하고,해양능력이 전반적으로 향상되면서 시대는 변하고 있었다. 신라는 질좋은 철을 생산하고,동해남부 항로를 개척하면서 일본열도로 진출하였다.백제 또한 전라도 해안까지 진출한 뒤 대한해협을 본격적으로 건너갔다.고구려 역시 광개토대왕 이후에 동해를 건넜다.이렇게 사국의 해양력 경쟁체제가 성립되자 가야는 항로의 독점권을 빼앗기고,교역상의 이익이 사국으로 분산되면서 점차 위상이 약해져 갔다.해양폴리스들을 주축으로 한 소국연합체인 가야는 필연적으로 내부 통합력이 약했다.또 양안에 걸친 지배체제였을 경우 관리와 통제가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이런 한계를극복하지 못하고,해양제국인 가야는 점차로 사라져 갔다.하지만 그들은 대한해협의 정치와 상업을 장악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주인이었으며,우리는 그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 [이세기 칼럼] 空超문학상

    이 시대를 살다 간 수많은 시인,작가,묵객들은 저마다 기상천외한 기행과호방한 일화들을 남기고 있다.그 중에서도 공초(空超) 오상순(吳相淳)시인의 무정처(無定處)·무소유(無所有)의 삶은 무절제한 탐욕에 사로잡힌 세속인들에게 매서운 화살촉처럼 가슴을 꿰뚫는 경고를 준다.삶과 죽음의 일체를공(空)으로 돌리고 한조각 뜬구름처럼 표박(漂泊)을 즐기던 그의 시인적 삶은 우리 문단에서는 방랑과 참선과 애연의 전설적 인물로 회자되고 있다. 그가 타계한 지난 63년 6월3일,지금의 한국프레스센터 건너편인 세종문화회관별관(구 국회의사당)에서 영결식을 끝내고 수유리 장지로 향하는 행렬은그야말로 전에도 후에도 볼 수 없었던 감동의 물결이 아닐 수 없었다.영정에는 잠들 때 외엔 손에서 놓지 않는다는 담배연기가 피어오르고 만장을 든 여학생들과 가사를 걸친 승려들의 독경,문인 음악가 화가로 이어지는 이 땅의모든 예술가들은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 합세하는 이채로운 광경을 연출해내었다.그때 연도에서 이 행렬을 지켜보던 한 외국인이 “한국이 이처럼 문화국가인 것을 몰랐다”고 한 감탄은 우리에게 긍지를 주었다. 공초 시인은 하루가 끝나고 잠자리에 들 때마다 모든 것을 청산하고 정적의 세계로 돌아간다고 했고 다시 하루가 시작되면 그는 ‘반갑고 기쁘고 고마운’ 마음에서 날마다 새로운 삶을 맞이하고 있었다.불교에 심취하던 시절의 명찰순례와 고승들과의 고담준론,한때는 모던하고 진보적인 청년교사로서영어에 능통했으나 언제부턴가 삭발한 채 먹는 것,입는 것,잠자리를 걱정하지 않는 완전한 자유인이 되어 방황과 표랑의 생활에 안위하게 되었다.그의기인적 행각은 수주(樹州) 변영로 등과 술을 마시고 대낮에 벌거벗은 채 소를 타고 큰거리로 진출을 시도하는가 하면 기르던 고양이가 죽자 친구들에게 부음을 띄우고 무덤을 만들어 곡을 하면서 ‘천지가 곡(哭)을 한다’는 시를 지은 것이 후에 ‘짝잃은 거위를 곡하노라’로 발표되고 있다.한 손으로는 세수하고 한 손으로는 담배를 피우면서 밤낮없이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50년대 중반부터는 서울 명동의 청동다방에 칩거하여 195권의 ‘청동문학’을 남긴 것은 그만의 남다른 문학적 성취일 수 있다.예를 들어 ‘담배연기는 스러져 어디로 가나’라는 화두 아래 월탄(月灘) 박종화는 ‘늙지 않은 공초,늙을 수 없는 공초,늙어서는 아니될 공초’를 쓰고 있고 이은상도 ‘오고싶지 않은 곳으로 온 공초여,가고 싶은 곳도 없는 공초여’를 기록하고 있다.이를 두고 구상(具常) 시인은 ‘어느 현세의 시인이나 철인,사제나 선사 중에서도 이렇듯 끊임없고 헤아릴 수 없는 형이상학적 인생문답자를 찾지 못한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우리의 서정시에 강렬한 사상성을 불어넣은 신시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한 그가 우리를 사로잡는 진정한 힘은 그의 문학보다 문학적으로 이룩한 삶의 체현에 있다는 것이 아마도 가장 옳은 평일 것이다.무상한 세태의 와중에서 언제나 행운유수(行雲流水)로서 그는 손에 잡히지않는 곳에 부동의 섬으로 떠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93년부터 공초숭모회와 대한매일신보사가 공초의 기일(3일)을 전후해서 그의 문학을 기리는 공초문학상을 시상하고 있다.오늘이 바로 7번째다.혼탁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오염과 시속기(時俗氣)가 없는 문학적 삶을 체현(體現)한 시인을 가졌다는 것은 여간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다.그러나 해를 거듭할수록 그의 묘소를 찾는 후학들의 발걸음이 뜸해진다는 소식은 아쉽다.일본에는 ‘사양(斜陽)’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를 위한 ‘앵도기(櫻挑忌)’나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기(愚國忌)’ 등 시인·작가를 추모하는 모임이 많은것으로 알고 있다.시 한줄을 읽는 것보다 한 시인의 위대한 삶을 비춰보는추모의 마음은 시심보다 값지다.우리는 누구보다 앞장선 문화국가,문화민족의 긍지를 잊지 말고 이런 정감어린 행사를 키워가는 분위기를 생각해봐야겠다. [논설위원 sgr@]
  • 고성 문암리 유적지 발굴…신석기 유물 50점 공개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12월부터 지난달 말까지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초기 신석기시대 집터 3기와 야외 불땐자리 5기를 확인하고 덧무늬토기와 눌러찍은무늬토기를 비롯해 돌칼돌도끼화살촉 등 유물 50점을 출토했다며 22일 이를 공개했다. 이번에 발굴된 유물 가운데 덧무늬토기는 국내에서는 가장 앞선 시기의 토기로 덧무늬를 빗금 방향으로 장식한 뒤 가로 방향으로 다시 덧붙인 형태다. 이같은 토기는 동해안 오산리 유적에서 출토된 적이 있지만 이번처럼 완전한 형태로 출토되기는 처음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집 자리와 출토된 토기의 형태를 볼 때 동해안에서가장 오래된 오산리 유적과 연대(기원 전 6000년)가 같거나 그보다 이전의것으로 보이며 한반도 선사인의 원류와 이동경로 등을 밝힐 수 있는 자료”라고 밝혔다.
  • 양구군 하리‘양구 선사 박물관’(생활속의박물관·미술관:13­1)

    ◎원시인의 숨소리 들리는 듯/구석기때 쓰였던 긁개­찍개·밀개…/돌칼·화살촉·빗살무늬토기도 가지런히/고인돌 공원·선사 주거지까지 조성 스트레스가 쌓일수록 현대인들은 과거의 따뜻한 고향이 그립다.수십만년전의 때묻지 않은 원시생활은 질식할 듯한 도시문명에 지친 현대인들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일지 모른다.IMF 지원체제의 고달픈 일상생활을 잠깐 잊고 타임머신을 타고 선사시대로 돌아가 보자.양구선사박물관에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쓰던 석기·토기 등이 전시돼 있어 원초적 인류의 체취가 느껴지는 듯하다. 인류가 원시적 형태나마 농경이나 목축을 하며 인간다운 삶을 시작한 것은 1만여년 전인 신석기시대 부터.그 이전은 인류가 유인원으로부터 분리된 이후 지속된 구석기 시대다.돌을 깨뜨려 쓰다가 갈아서 사냥을 하고 토기를 구워 음식을 담아내는데 수십만년이 걸렸다.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하리에 자리잡은 양구선사박물관(관장 金圭鎬·36)에는 수십만년전에서 기원전 300여년전까지 살았던 선사인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1만여평의 부지에 160여평의 전시관 및 고인돌공원,선사주거지 등이 조성돼 있다.전시관에는 양구읍 상무룡리와 해안면 현리 등에서 발굴된 구석기 및 신석기,청동기시대의 유물 630여점이 짜임새 있게 전시돼 있다.86년 평화의 댐 기초공사를 위해 파로호 물을 방류시키자 일제 때부터 수장돼 있던 바닥이 드러나면서 발굴된 것들이다.국립중앙박물관 강원대박물관 등에 분산 보관해 오다가 95년 양구군이 박물관을 건립해 모아놓았다. 구석기인들이 사용한 석기들은 단순하면서도 쓰임새에 따라 재미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동물 살을 저미고 가죽을 벗기는데 쓰던 긁개는 오목하게 세운 날이 제법 매섭고,짐승을 찍어 토막을 내는데 쓰던 외날찍개는 그 뾰족함이 섬뜩하다.단단한 차돌을 아이 주먹만하게 다듬은 사냥돌을 쥐면 함성을 지르며 짐승을 쫓던 옛 조상의 모습이 보이는 듯 하다.이밖에도 뼈를 깎는데 쓰던 밀개,가죽을 째는데 사용하던 째개,짐승을 잡거나 나무뿌리를 자를 때 쓰던 주먹도끼,짐승을 찔러 죽이거나 가죽에 구멍을 뚫던 찌르개 등이 있다.구석기인들의 석기 제작과 사용 모습을 담은 모형도 만들어 놓아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해안면에서 발굴된 빗살무늬토기 조각과 숫돌,갈판,보습 등은 이곳에 신석기문화가 형성됐음을 잘 보여준다.해안면은 혜성이 지구에 충돌해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는 ‘펀치볼분지’ 지역.농사와 목축에 안성맞춤이다.파로호 상류인 고대리·공수리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시베리아·만주 지역에서 내려온 이주민들이 형성했던 청동기문화의 증거다.매끈하게 갈아 다듬어진 돌칼과 화살촉,홈자귀,돌도끼 등 한층 세련된 석기들과 동검,동경 등이 비로소 현대적 형태의 도구 모양을 하고 있다. 고인돌공원에는 발굴 당시의 것을 그대로 옮겨놓은 고인돌 15기가 있다.한강이북에서 발견되는 탁자식과 한강이남의 개석식이 섞여 있다.청동기인의 고인돌 축조방식은 과학적이고도 기발하다.바위틈에 깊은 홈을 파 박은 나무말뚝에 불을 붙여 팽창케 해 바위를 갈라 큰 돌을 채취했다.그것을 바닥에 통나무를 깔고 밧줄을 이용해 수백명이 끌어다 고인돌을 세웠다. 보는것만으로 양이 차랴.‘선사인 체험코스’에 도전해 보자.돌을 깨 돌도 끼도 만들어 보고 빗살무늬토기도 구워 보자.힘을 모아 고인돌을 축조하고 박재동물을 향해 사냥돌을 던지는 동안 선사인의 숨소리가 느껴질 것이다.10여평 넓이의 구덩이에 억새를 엮어 지붕을 덮은 움집에서 보내는 하룻밤은 아득한 원시의 밤과 다를게 없다. 박물관 가는 길은 춘천에서 46번국도를 이용하거나 인제에서 31번 도로를 이용해야 한다.서울 상봉터미널에 양구행 직행버스가 있다.매주 화요일 휴관하며 요금은 어른 770원,25세 이하 청소년 및 어린이 330원.(0364)481­3004, 480­2677
  • 고구려 軍유적지 남한서 첫 발굴/구리 아차산

    ◎타원형 성벽·간이 대장간 등/5∼6세기 南進전진기지 추정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워커힐 인근 아차산 일대에서 남한 최초로 고구려 군사 유적지가 발굴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5세기 중엽∼6세기 중엽의 것으로 보이는 이 유적지는 100여명 정도가 묵었던 크기로 모두 15곳 가량이 확인됐다. 따라서 이 지역이 적어도 대장수 등 비중있는 인물이 기거한 것으로 추측됨에 따라 광개토대왕에서 장수왕까지 이어지는 고구려 남진정책의 전초기지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서울대 인문학연구소 발굴단(단장 오인석)이 지난 7월 발굴을 시작해 9일 공개한 아차산 보루성 유적지(사적 제234호)는 타원형 성벽과 7기의 장방형 건물지,간이 대장간 시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출토된 유물은 토기인 접시 시루 동이 등과 철기인 정·끌·호미·화살촉·갈고리창 등 모두 100여점에 이르며 개체분까지 포함하면 1,000여점에 달한다. 고구려 유물 가운데 명문이 새겨진 토기가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무서워하며 신성시한 ‘산중영물’/호랑이해 호랑이 이야기

    ◎소신으로 섬기며 호환의 두려움 달래/죽림맹호 경제난 쫓는 ‘벽사의 몫’ 기대/호랑이 살상 민족성정 안맞아 사냥 엽사들 중국옷 판 올해 1998년은 호랑이 해 무인년이다. 동물을 상징으로 한 열두 개의 지지에 따라 호랑이 해는 12년만에 한 차례씩 돌아온다. 그러나 열개의 천간을 하나씩 떼어 그 해의 지지에 앞세워 붙이기 때문에 무인년은 60년만에 맞는 호랑이 해다. 이를 갑년이나 회갑,또는 주갑이라 한다. 그 호랑이는 한민족 마음속에 일찍부터 자리를 잡았다. 단군설화에 곰과 함께 호랑이가 등장하니까 꽤나 오래되었다. 곰과 호랑이는 모두 인간으로 변신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호랑이는 야성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뛰쳐나와 결국 맹수로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단군설화에 나온다. 렇듯 인간과 쉽게 동화할 수 없었던 호랑이는 무서운 동물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곰과 함께 단군설화 등장 중국의 사서인 ‘후한서’동이전에도 호랑이가 기록되었다. 동이는 중국쪽에서 본 우리 한민족이다. 그 사서는 산천을 떠받드는 우리민족의 풍속을 소개하면서호랑이에게 제사를 지내고 또 신으로 섬긴다는 대목을 적어놓았다. 호랑이가 그만큼 두려워 제사로 달래준 옛 사람들의 마음이 보인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도 885년 2월에 호랑이가 궁궐마당으로 뛰어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호환이 분명하다. 조선시대 후기 실학자 이규경이 백과사전식으로 쓴 오주연문장전산고는 호랑이를 진군이라고 했다는 사실을 기록했다. 그 진군은 무당이 진산에서 올리는 도당제를 받았다는 것이다. 호랑이를 두려워하는 인간의 본능은 급기야 호랑이를 신앙의 대상으로 올려놓았다. 그래서 산신은 호랑이로 상징되었거니와 그 별칭도 산군 말고도 산군자,산령,산신령,산중영웅등 숱하게 많다. ○호랑이 신앙의 이중성 한민족은 호랑이를 신성시했고,때로는 무서운 가해동물로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알 수있다. 이를 학문적으로 말하면 호랑이 신앙의 이중성이라고 한다. 신성시하면서도 무서운 가해동물로 여긴 한민족의호랑이 신앙은 매우 지혜로운 민족의 성정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지극히 인위적인 생태보존운동을 버금하는 지혜인 것이다. ‘후한서’동이전의 기록처럼 산천(자연)을 떠받들었던 민족의 심성이 드러난다. 그것은 환경친화의 사고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민족의 자연관은 호랑이 번식을 방해하지 않았다. 다른 동물에 비해 번식력이 그리 왕성하지 못한 동물이 호랑이다. 그 호랑이가 민족의 마음속에 신성하고도 무서운 영물로 자리잡은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자연의 섭리에 순응한 우리 마음이기도 하고,호랑이를 마구하지 않은 이유가 되었다. 그래서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온 웬만한 심산에는 호랑이가 서식했던 모양이다. ○백두대간 심산에 서식 한국의 호랑이는 유명했다. 1953년 1월 일본을 방문했던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요시다(길전)일본 수상의 대화속에도 호랑이가 화제로 떠올랐던 에피소드가 전해온다. 요시다수상이 “한국에는 지금도 호랑이가 많은 가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일본인들이 다 잡아서 없소”라는 대답이 나왔다는 것이다. 사냥한 호랑이를 마치 전리품인양 내놓고 찍은 일본인들의 옛 사진첩이 지금도 돌아다닌다. 그 호랑이가 1946년 북한땅인 평북 초산에서 한 마리가 잡혔다는 풍문을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우리 민족에게도 호랑이 사냥이 물론 있기는 했다. 고려 공민왕이 그렸다는 이른바 전공민왕필 ‘음산대렵도를 보면 호쾌한 호랑이 사냥을 펼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사냥에 나선 엽사들의 입성은 모두 호복차림의 변복이다. 호랑이를 잡는 일이 민족의 성정이나 생활습관에 결코 어울릴 수 없다는 생각에서 일부러 엽사들 옷 차림새를 중국옷으로 바꾸어 그렸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왕정의 중요행사였던 정렵만을 보더라도 규모가 크지 않았을 뿐 더러 기껏해야 매사냥 정도였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에 적혀있다. 고구려 고분인 무용총벽화 ‘수렵도’에도 박진감 넘치는 호랑이사냥이 나온다. 말을 탄 기사가 힘껏 시위를 당기는 참인데,호랑이 꽁무니를 명중할 수 있는 위치다. 시위에서 손을 떼기만 하면 화살이 호랑이 꽁무니를 꿰뚫을 찰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화살을 들여다 보면 살상용이 아니다. 호랑이를 겁주어 기절을 시킬 요량으로 살상용 화살촉대신 명적을 썼다. 석류모양을 한 명적은 그저 소리만 요란하여 맞는다 해도 호랑이가 기절하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 ○산신탱화에 의레 등장 그 호랑이는 살상을 금하는 불교와도 연결되었다. 우리 고유의 산신신앙을 받아드린 불교의 산신탱화에는 의례히 호랑이가 들어있다. 탱화에 나오는 신선은 호랑이가 모습을 달리한 변화신이다. 그리고 탱화의 산신 곁에는 실제 호랑이가 늘상 자리를 같이하여 따라붙는다. 전남 순천시 승주읍 선암사 소장 산신탱화의 호랑이는 평퍼짐한 자세로 앉아있는 산신을 감싸았다. 호랑이 꼬리를 S자로 그리며 하늘을 향했다. 그러니까 호랑이는 여러 모습으로 민족 앞에 다가왔다. 호랑이는 그림의 소재로도 자주 응용되었다. 정초 세화나 부적에 호랑이를 그렸다. 그리고까지 호랑이에는 까치와 함께 호랑이가 등장했다. 대나무숲속의 호랑이 죽림맹호같은 호랑이 그림도 있다. 그런데 대나무숲의 호랑이 그림은 요사스러운 잡귀를 물리친다는 벽사의 뜻을 담았다. ‘담문록’이라는 책에 대나무를 잘라 불속에 던져 큰 소리로귀신을 쫓아버렸다는 내용과 상응하는 그림이다. 올 오랑이 해 무인년에도 호랑이가 벽사의 큰 몫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오늘의 경제위기를 물리쳐주는 그런 벽사를 호랑이에게 부탁하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 삼국시대 목기 등 유물 대량발굴/경산 임당유적지서

    경북 경산시 임담동 일대 삼국시대 유적지내 낮은 지역 저습지에서 보기 드문 목제류 유물을 포함한 1천500여점의 유물이 발굴됐다. 이들 유물이 나온 지역은 우리나라에서 좀체로 나타나지 않는 주거지 이웃의 저습지 유적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끌고 있다.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 임당유적발굴조사단(단장 이백규)이 지난 6월 발굴에 들어가 16일 공식 공개한 이 유적의 규모는 현재 동서 110m,남북 12∼40m.국내에서 거의 조사되지 않은 나무 노와 가래빗 방망이 기둥 그릇 박자판 칼자루 등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돼지뼈와 사슴뿔로 만든 화살촉 바늘 칼자루 뒤꽂이 복골이 발굴됐다.복골은 주로 돼지와 사슴 어깨뿔로 만들었는데,그 부호는 새기거나 새기고 나서 불로 지져 표시한 것으로 밝혀졌다.이밖에 화살촉과 낫,칼,도끼,창 등의 철기류와 항아리와 군다리접시 등의 고식도질토기도 나왔다.
  • 청도감/달콤한 감칠맛 과일중 “으뜸”

    ◎둥글납작 홍시… 씨없고 육질 유연/비타민 풍부… 야맹증·설사에 효과/전국 총수확량의 38%… 올 12,540t 예상 요즘 경북 청도는 고은 붉은 빛이다.마을마다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기 때문이다. 청도 감은 생긴 모습이 둥글납짝하여 반시라고 불린다.조선 명종 1년(1545년)에 청도군 이서면 신촌리 세월마을 출신인 일청제 박호 선생이 평해군수로 있다가 향리로 귀향하면서 중국에서 전래됐다다는 감나무 묘목을 가져와 청도에 심은 것이 청도 반시의 효시다. 청도에 살았던 사람들은 어릴때 아침일찍 노란 감꽃을 주워 실이나 지푸라기에 꿰어 목에 걸고 다니면서 수술을 떼어 먹던 기억을 갖고 있다. 청도 감나무는 1천개가 넘는 열매를 맺는 과목이므로 많은 아들 딸을 낳아달라고 비는 기자목으로 주술적인 의미를 지녔다.자식이 귀한 집 부녀자들은 요즘도 감꽃을 목에 걸고 다니면서 수술을 떼어 먹는다. 청도지역에는 감나무를 오상오절이 있는 동양의 대표적인 과일나무로 인식된다. 나무가 몇백년을 사니 수가 있고,새들이 함부로 집을 짓지 않으니무조소이며 벌레가 먹지 않으니 무충이라 하였다.나무가 단단하므로 목견이고 감나무 잎이 서리를 맞아 단풍이 들면 먹이 잘먹어 운치있는 종이로 사용사용할 수 있어 시엽지라 했는데 이것은 문을 뜻하는 것이다. 나무가 단단하여 화살촉으로 사용할 수 있으니 무이며 열매가 다른 과일과는 달리 속과 겉이 같이 붉어 표리부동하지 않으니 충이 있고 열매가 부드러워 노인도 먹을수 있으니 효를 상징하며 서리를 이기고 늦가을까지 버티고 있으니 절이 있다 하였다. 청도 반시는 주로 생으로 많이 먹는다.어느때 가장 맛이 있는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서리를 맞은 감이 물러져서 약간 타박하면서도 달콤한 감칠맛이 으뜸이라는 주장과 뜨거운 물에 담궈 삭힌 것이 원래의 단감에 비할바가 아니며 술안주중 과일로서는 단연 으뜸이라는 지적이 있다. 가을에 따서 항아리에 넣어 두었다가 겨울철 따뜻한 구들목에 누워서 먹는 겨울 홍시가 단연 최고라는 미식가들도 있다. 청도 반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씨가 없고 육질이 유연하며 당도가 20%로 높고 수분이 많아 주로 홍시로 먹는다.비타민 A와 C가 많아 야맹증 암 감기 중풍 등의 예방에 효과가 있으며 설사와 숙취에도 좋다. 감은 양지에서 잘자라고 추위에 비교적 강하며 모래성분이 있는 땅에서 생육이 왕성해 청도지역에서 재배하기 알맞은 작목이다. 이를 반영이라도 하듯 청도지역 감 재배면적은 80년 267㏊ 85년 717㏊ 90년 1천58㏊ 95년 1천63㏊ 등으로 해마다 늘고 있다.올해는 1천320㏊에 이른다. 면적증가에 비례해 생산량도 큰 폭으로 늘었다.80년 5천553t에서 86년 6천560t으로 늘어났으며 90년 들어서는 두배 가까이 증가한 1만1천t에 이르렀다.올 생산량은 1만2천540t으로 예상된다. 이는 전국 감 생산량의 38%에 해당하는 양이고 경북도내 생산량의 82%에 이른다. 다른지역 감은 한해 풍작을 이루면 다음해 생산량이 줄어드는 해걸이 현상이 나타나지만 청도 감은 이같은 현상을 좀처럼 볼 수 없다. 군에서도 생산량 증가를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해 감원성낙엽병의 영향으로 생산량이 크게 줄자 청도군은 올해 이를 예방하기위해 감원성낙엽병이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6월부터 주민회의와 방송 등으로 농민들의 경각심을 일깨웠고 지속적인 방제작업을 벌였다. 또 석희유황압제 등 농약을 적기에 살포 탄저병 등도 예방했다. 일부 농가에서는 추석을 앞두고 수확을 시작했지만 본격적인 수확시기는 이달 말쯤이다. 수확된 감의 일부는 중간상인에게 판매되지만 대부분은 청도농협 공판장에서 경매를 통해 대도시 농산물시장으로 유통된다.청도 감은 품질이 뛰어나 경매가격도 ㎏당 1천100원으로 다른 지역 감보다 10%이상 높다. ◎사계절 맛보는 청도감/아이스 홍시·퓨레·식초·카스테라 등 개발/“전략상품” 군서 지원… 4천여 농가 큰 소득 청도 반시는 이제 늦가을에만 맛볼수 있는 과일이 아니다. ‘아이스(ICE)홍시’ ‘감 과육퓨레’ ‘감 카스테라’ ‘감 식초’등이 이 지역의 얼굴 상품이 됐다. 이는 청도군이 군내 감 재배농사 4천2백여가구의 소득을 높이기 위해 노력한 결과다. 청도군은 반시로 연간 1백30여억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지난해 가을 반시를 개당 200원씩에 사들여 이를 홍시로 만들어 떫은 맛을 제거한 뒤 영하 25도에 급냉해 보관했다.올 여름 대구 유명백화점에 구매가격의 4배인 8백원씩에 납품했다.개당 용기에 포장,계약 출하했고 상표명은 ‘아이스 홍시’였다.제조기술은 특허청에 등록돼 있다. 청도군이 7억8천원을 들여 부지 1천2백여평에 450평 규모의 건물을 지어 아이스홍시를 생산하고 있다.지난해 90t 60만개의 반시를 아이스홍시로 제작,현재 대부분이 팔렸다. 반시를 이용한 감식초도 소비자들에게 인기다. 청록영농조합법인에서 생산하는 감식초는 월 평균 700들이 2천여개를 생산,개당 1만원에 판다.감식초는 비타민C가 풍부해 피부노화를 방지하고 피로회복에 특효가 있으며 특히 청도 반시는 효능이 뛰어나다. 감가루를 밀가루와 썩어 만든 감카스테라는 청도농촌지도소에서 시험개발중이며 신세대의 취향에 맞는 감과육퓨레도 곧 선보일 예정이다.
  • 강화 고인돌(외언내언)

    우리 민족은 어느 곳에서나 삶의 터를 잡으면 제단을 높은 곳에 쌓고 깨끗하게 가꾸며 제사를 올렸다.하늘을 두려워 하고 땅을 업신여기지 않는 민족이었기에 국태민안과 번영을 이 제단에서 빌었던 것이다.그 대표적인 제단이 강화도 마니산에 있는 참성단이다.단군 할아버지께서 나라를 세우신 지 51년 되던 해에 직접 백두산과 한라산의 중간지점인 이 곳에 제단을 만들라고 명하시어 세운 것이라고 전해진다.5천년을 뛰어넘어 경건하게 살았던 우리의 자랑스런 조상들을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강화도에는 이 참성단외에 선사시대 우리 조상들의 문화와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유적들이 또 있다.바로 고인돌이다.큰 돌로 4면을 상자모양으로 막고 덮개 돌을 올려놓은 것이 바로 강화도에 남아있는 북방식 고인돌이다.그 속에서 사람의 뼈와 돌칼,돌화살촉 토기등이 발견돼 청동기 시대 석총으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 일부 학자들은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제사지내는 제단의 일종이라는 학설도 내놓고 있다.고인돌만 가지고도 아직 연구할 과제가 무수히 많이 남아있다는 얘기가 된다.그 정확한 용도는 무엇이었으며 왜 그 자리에 만들었는지,그리고 그 시대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등 관심거리가 많다.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인천시가 느닷없이 강화도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고인돌 150여기를 한데 모아 ‘고인돌 공원’을 만들겠다고 한다.이 공원에는 강화도의 고인돌을 모두 옮겨 복원하고 선사시대의 각종 유물을 보여주는 전시관도 건립해 관광명소로 꾸미겠다는 것이다.한 마디로 탁상행정의 표본이며 문화말살 정책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문화유적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때 가치를 지니며 지리적 위치와 분포 그 자체가 연구대상이 된다.그럼에도 인천시는 관광수입을 올리기 위해 공원조성계획을 강행하리라 한다.이에 대해 주민들과 지역 문화계 인사들이 거세게 반발하며 이 계획을 즉각 철회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당연한 요구다.인천시는 이 요구를 받아들임은 물론 한발 더 나아가 현재 방치하다시피한 고인돌을 그 자리에 잘 보존하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 임진왜란 당시 무기류 대량발굴/용인 임진산 성터

    ◎조란탄·화살촉 등 포함 경기도박물관(관장 장경호)은 지난 6월4일부터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 풍덕천리 산 37 임진산 성터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여 임진왜란 당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기류를 대량 발굴했다고 8일 발표했다.이에 따라 지난 4월 이 지역에서 발견돼 현재 국립문화재연구소와 경기도박물관에서 보존처리중인 총통 2점이 당시 사용된 진품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번에 발굴된 무기류는 총통에 사용된 총탄인 조란탄을 비롯해 철창과 철칼,매화무늬가 새겨진 칼집의 손칼,총통과 활에 사용된 화살촉 등 당시 전란때 사용된 병기가 일괄적으로 포함돼 있고 진지에 주둔하던 병사들의 청동숟가락과 백자용기가 함께 출토됐다.
  • 임진강유역/원삼국시대 세력집단 터/파주 주월리서 대규모 유적발굴

    ◎백제 건국집단의 세력판도일 가능성/철제유물중 비중 큰 무기류가 반증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주월리 임진강 남쪽 언덕배기 평지에서 원삼국시대의 대규모 유적이 발굴되었다.원삼국시대는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 전환하는 기원 전후부터 300년까지 이르는 삼국시대 초기에 해당하는 시기다.백제의 시작이 한강유역이라기보다는 임진강유역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새롭게 나온 가운데 이 유적이 발굴되어 학계의 관심이 임진강쪽으로 쏠리고 있다. 한양대박물관과 경기도박물관이 지난 10월부터 발굴한 파주 주월리유적 전체면적은 4만여평.이 가운데 지난 여름 대홍수로 쓸려나가 노출된 3천여평을 발굴했다.그 결과 집자리 10기를 포함한 17기의 유구를 찾아내고 철기류 48점과 토기·석기·옥제품 등 다량의 유물을 거두었다.특히 철기류에는 도끼·투겁창·낫·칼·화살촉 등 무기구실을 할 수 있는 유물이 가장 많은 것으로 가려냈다. 이 철기류와 더불어 주목을 끈 유구는 큰 집자리유적.큰 집자리는 긴 쪽이 17.5m,짧은 쪽이 10.85m나 되어 다른 집자리에 비해 무척 넓었다.그 평면은 철자형을 이루었고,널빤지를 세워 만든 북쪽 벽체가 불타버린 뒤 집안으로 쓰러진 흔적을 남겼다.그리고 서쪽 벽체를 받쳐주기 위해 구멍을 파서 맞춘 자국이 보이는 불에 탄 목재도 발견되었다. 큰 잡자리 동쪽 벽체 근처에서는 길이 300㎝,너비 60∼100㎝,깊이 40㎝정도의 사다리꼴 온돌시설도 나왔다. 큰 집자리의 온돌시설은 한반도 북쪽으로부터 철기와 함께 흘러들어온 문화현상의 하나로 보고 있다. 그러면 원삼국시대 주월리에 산 사람은 누구일까 하는 문제가 남는다.강력한 세력집단이었다는 해답이 나올 수도 있다.주월리에서 거두어들인 철기중에 무기류가 차지하는 비중이 다른 원삼국시대 유적보다 높다는 것은 이를 어느 정도 뒷받침한다.또 지표조사에서 우선 확인한 유적규모가 자그마치 4만여평에 이르기 때문에 엄청나게 큰 마을자리를 찾아낼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동국대 이기동 교수(한국고대사)는 『원삼국시대의 고구려는 본거지 압록강유역에서 임진강유역으로 가는 사이 대동강유역에는 낙랑세력이아직 건재했기 때문에 임진강까지 진출할 만한 입장이 못되었다』는 점을 먼저 강조했다.
  • 단양 수양개 마을/“삼한 「세력집단」 터전”

    ◎학자들 단양 유적 답사서 드러나/내륙서 발견된 집터·철기유물 등이 반증/소국들간으 교역루트 규명에 도울될 듯 고대 삼한사회의 실체가 최근 이루어진 유적발굴을 계기로 새롭게 드러났다.유적은 충북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 남한강상류 수양개의 마을자리(취락지).충북대박물관(관장 이융조)이 발굴한 수양개 마을자리 유적에서는 삼한사회의 한 세력집단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일러주는 여러 흔적과 각종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 마을자리 유적은 약 5만평에 이르고 있다.1차발굴조사에서 찾아낸 집터만도 26군데.그리고 이들 집터와 그 주변에서 석기를 비롯,토기·청동기·철기 등 각종 유물을 많이 거두어들였다.유물 가운데는 방울과 같은 청동의기와 화살촉·도끼·창·작살·낚시바늘 따위의 철기가 포함돼 있다.이밖에 치레걸이용 대롱옥(관옥)과 벼 짜는데 필요한 가락바퀴,두드림무늬토기,불에 탄 곡식,돼지턱뼈,어망추 등이 나왔다. 마을자리를 발굴한 결과 대부분의 집터는 구자형과 요자형을 이루었다.그리고 기둥을 세우거나 판자를 돌려 지은 집이 한꺼번에 불에 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많은 분량의 커다란 숯덩어리를 발견했다.또 다른 특이한 시설은 집안에다 강돌로 만든 화덕을 설치했다는 점이다.이 화덕은 취사용이라기보다는 돌을 달구어 실내공기를 오래 따뜻하게 데워주는 일종의 라디에이터라는 것이다. 지난주 발굴현장을 답사한 학자들은 우선 삼한시대 최대규모 마을자리 유적이라는데 뜻을 같이했다.그러면서 집터와 출토유물을 여러 각도로 해석한 학자들은 수양개 마을자리를 삼한 소국의 중요내륙읍락으로 보았다.가옥구조나 유물출토상황으로 미루어 삼한시대 수양개 사람은 농사와 고기잡이·사냥 등으로 안정된 삶을 꾸리면서 다른 먼 지역 읍락과 교역의 길도 텄을 것으로 추정했다. 수양개 마을자리 유적을 돌아본 전문학자들은 이 유적을 높이 평가했다.삼한시대 대규모마을일 뿐 아니라 청동기인 방울은 경북 영천 출토품과 서로 닮아 어떤 문화루트를 설정할 수 있다는 견해(한병삼문화재위원)가 먼저 제시되었다.그리고 집터입구의 흙돋음흔적과 벽에 판자를 사용한 흔적은 이 시대가옥구조에서 처음 나타난 것(장경호 전 문화재연구소장)이라는 새로운 사실도 들추어냈다. 이와 더불어 수양개 마을자리 유적 출토토기를 통해 백제계 두드림무늬토기원류를 비로소 찾았다(안승주 공주대 교수)는 주장도 나왔다.또 전반적인 문화상을 강원도 춘천을 중심으로 발흥한 고대의 소국 맥과 연결하는 문제가 검토되어야 한다(최몽룡 서울대 교수)는 견해도 조심스럽게 제기되었다.농업사연구의 중요자료라는 점을 들어 불에 탄 조를 주목하는 학자(허인회 전 서울대 교수)도 있었다. 이 유적은 지금으로부터 2천50년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집터에서 나온 숯을 가지고 측정한 이같은 연대는 삼한의 소국들이 철기문화의 보급과 정치·문화적 변화속에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는 시기에 해당한다.그러면 수양개 마을자리 유적은 어떤 세력집단의 터전이었는가.학자들이 연구할 몫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 나주 복암리 고분 출토/마한유물 복원 공개

    ◎길이 36.5㎞ 큰 고리칼 등 10여점/빅제권내 마한연구 중요자료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전남대박물관 합동조사단은 지난 7월부터 2개월간 전남 나주시 다시면 복암리 고분군내 3호고분에서 발굴한 금속유물들을 20일 공개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보존처리를 거쳐 이날 공개한 유물가운데 손잡이 끝에 은을 입힌 36.5㎝크기의 큰 고리칼인 은장삼엽환두도는 무척 화려했다.이와 함께 나온 도자형 화살촉(19.5㎝),+자로 갈라진 타원형 표면을 은장식한 말재갈멈치(11.5㎝),금장식된 말띠꾸리개(운주) 5점,은장식된 말띠드리개(행엽) 3점,말을 탈때 발을 걸치는 발걸이 등 말갖춤은 고대사회 한 실력자의 정치적 우월성을 드러내보였다. 나주 복암리 3호분은 AD 5세기말∼6세기초 마한시대 수장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남북 43m,동서 35m,높이 6m크기의 평면 사다리꼴 고분이다.무덤 언덕주변에 여러개의 옹관이 흩어져 있었고 석실안에서도 4개의 옹관이 놓여진 특이한 형태를 이루었다.발굴당시 금동신발 1쌍과 철제장검 1점,뚜껑달린 잔,입이 넓은 항아리등 토기10여점이 수습됐었다. 발굴당시 주목을 끌었던 유물은 청동으로 신발형태를 만들어 순금을 입힌 금동신발.나주 신촌리 9호분과 공주 무령왕릉,익산 입점리 1호분에서도 출토된 것으로 이 무덤의 주인공은 이 지역 마한사회의 막강한 실력자였을 것이다. 김동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이 유물들과 관련,『영산강유역의 마한사회가 백제지배아래 들어간 이후에도 오랫동안 세력을 유지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고 말했다.지금까지 학계는 마한사회가 AD 4세기쯤 소멸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들 나주 복암리 출토유물은 마한연구를 재조명할 수 있는 중요자료로 평가됐다.
  • 철기시대 집터 발굴 토기등 수십점 수습/단양 수양개 유적지

    충북대 박물관(관장 이융조)은 지난 7일부터 충북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 수양개 선사유적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여 서기 1∼2세기쯤의 것으로 보이는 초기 철기시대 집터 9기와 불땐 자리 1기를 확인,25일 공개했다. 수양개 유적지는 지난 83년부터 발굴조사를 통해 후기 구석기시대 유물을 비롯해 신석기·청동기시대 유물이 광범위하게 확인된 지역으로 지난해에는 초기 철기시대 집터 15기와 유물이 처음 발견돼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지난해 철기시대 집터가 발견된 지역에서 남한강변을 따라 2백m 지역에서 실시한 이번 조사에서 집터는 밀집된 채로 확인됐고 집터의 형태는 모죽임 네모꼴(말각방형)을 띠어 집터에서 모두 불탄 흔적이 발견됐다. 이가운데 남북 8백45㎝,동서 6백30㎝ 크기의 집터에서는 가운데에 진흙띠로 돌려 만든 타원형 불땐 자리 흔적이 확인됐고 그 주변에서 토기단지등 토기류 7점,화살촉,그물추,옥구슬,불탄 밀,보리등이 수습됐다.〈김성호 기자〉
  • 금관가야 유물 5백52점 발굴/김해 양동리서

    경남 김해 양동리 가야 고분군에서 금관가야의 것으로 추정되는 AD3∼4세기의 유물이 대량 발굴됐다. 부산 동의대박물관(관장 임효택)은 지난해 10월부터 경남 김해시 주촌면 양동리 산3 양동리 고분군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여 토광목곽묘 39기와 수혈식석실묘 4기,옹관묘 6기등 가야시대 분묘 49기를 확인하고 토기·철기·청동기·장신구 등 유물 5백52점을 수습했다고 13일 발표했다. 분묘는 토광목곽묘가 주종을 이루며 특히 이 토광목곽묘 39기중 6기에서는 순장자의 사체와 유물을 안치한 길이 5m,너비 3.1m,깊이 1.4m크기의 방형또는 장방형 부곽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이들 분묘에서는 토기 1백68점과 말재갈·검·도끼·화살촉등 철기 3백65점,사각무늬청동거울인 「방제방격규구문경(방제방격규구문경)」 1점등 청동기 6점,금제 귀고리등 장신구 12점이 함께 출토됐다. 이 가운데 「방제방격규구문경」은 중국 한대의 영향을 받아 가야에서 새롭게 제작한 것으로 당시 구리거울연구에 귀중한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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