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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다피, 폭격 피해 병원 떠돌며 은신”

    “카다피가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밤마다 병원으로 도망 다니고 있다.” 영국 비밀 정보국인 MI6가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캐머런 총리는 이번 주에 이 보고를 받은 뒤 아파치 헬기 4대를 리비아에 투입하는 작전계획을 승인했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이 2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가디언은 MI6의 보고 내용을 파악하고 있는 정부 관계자와 외교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두려움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가 공습을 피해 병원을 떠돌고 있으며, 매일 밤 그가 숨는 병원이 바뀌고 있다.”고 전했다. MI6의 보고에는 카다피군의 주요 지휘관들이 통화내용이 도청돼 위치가 탄로날 것을 우려해 전화사용을 멈췄으며, 이 때문에 지휘관끼리 제대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없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프랑스에서 열리고 있는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에 참석한 영국 정부 관계자도 리비아 공습 이후 어느 때보다 확신에 찬 어조로 카다피의 도주 행각을 확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외교 소식통은 “아파치 헬기를 투입하는 등 영국의 군사적인 압박이 높아진 것과 카다피의 심리상태에 대한 영국 정부의 평가와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정부 관계자는 “카다피는 우리가 폭격하지 않을 장소들을 전전하고 있다.”면서 “그가 밤마다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그가 있는 곳을 알게 될까 봐 우려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고 밝혔다. 현재 리비아 정부의 상황을 ‘피해 망상에 젖은 카다피와 내부 균열에 따른 불안감’으로 압축할 수 있다는 얘기다. 카다피의 야간 도주 행각은 최근 리비아 정권이 애처로울 정도로 반군에 휴전을 호소하며, 입헌 정부와 희생자 보상, 휴전 준수에 대한 아프리카연합(AU)의 감시 등을 약속하고 있는 것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고 가디언은 보도했다. 알 바그다디 알리 알마흐무디 리비아 총리는 반군과 새롭게 대화할 용의가 있느냐는 질문에 “리비아 전체를 대표하는 모든 조직과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 리비아인이면 누구든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캐머런 총리와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모두 카다피의 휴전 제의가 신뢰성이 없다고 여긴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박찬구기자 ckpark@seoul.co.kr
  • [저자와 차 한 잔]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한국영화 1001’ 펴낸 소설가 이세기

    [저자와 차 한 잔]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한국영화 1001’ 펴낸 소설가 이세기

    많은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다. 1919년 발표된 최초의 한국 영화 ‘의리적 구토’(김도산 감독)부터 2007년 영화 ‘추격자’(감독·각본 나홍진)까지 다양한 의미로 한국영화사를 장식한 그 많은 영화들을 책 한 권에 소개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한국영화 1001’(마로니에북스 펴냄)은 영화인들조차 엄두를 못 냈던 일을 깔끔하게 해냈다. 한 세기를 관통하는 한국영화 대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난 25일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저자 이세기씨를 만났다. 어떻게 1001편을 선정했는지부터 물었다. “4년 전 집필이 결정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그동안 만들어진 한국영화가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는 것이었습니다. 검색 결과 2002년 말까지 만들어진 영화가 6402편, 여기에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제작된 영화 360여편을 더해서 약 6800편, 그 중에서 1001편을 골라야 한다는 답이 나왔지요.” ●1919년 첫 영화부터 2007년作까지 어떤 기준에 의해 어떻게 선정할 것인가가 다음 숙제였다. 나름대로 기준을 정했다. 우선 해마다 국내에서 열리는 영화제 수상작 위주로 목록을 짰다. 문화관광부 선정 ‘우수영화’나 영화진흥공사의 ‘좋은 영화’ 선정 작품, 대종상·청룡상·백상예술대상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수상작을 연도별로 모았다. 여기에 각종 해외 영화제 수상작과 영화사전에 나와 있는 감독과 배우의 데뷔작 및 대표작을 추가하고 평론가들의 저서에서 비중 있게 거론된 작품들을 보탰다. 그것도 모자라 영화에 관심 있는 문화예술인 100명을 선정해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영화’ ‘일반적으로 잘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는 영화’를 물었다. 선정작업과 자료조사에만 2년 가까이 소요됐다. ●국내외 수상작·원로 추천작 등 기준 이씨는 “개인의 취향에 치우칠 수 있다는 우려를 배제하기 위해서 최대한 객관적인 기준으로 선정했다.”면서 “결과적으로 책에 소개된 영화들은 문화예술계 원로들이 추천한 영화인 셈”이라고 말했다. 원고지 분량만 1만 1000장. 언론인 출신의 소설가인 이씨가 지금까지 쓴 글 중에서 가장 길다. 영상자료원에서 보지 못했던 옛날 영화들을 틈틈이 봐 가면서 바깥 출입도 되도록 삼가고 2년 가까이 정말 공을 들였다고 했다. 원고를 마무리하고 나니까 이 정도면 대하소설도 너끈히 쓰겠다는 자신감까지 생기더란다. ●“바깥출입도 자제… 알기 쉽게 썼어요” “글은 지극히 ‘객관적이고 평이하게’ 쓰려고 했습니다. 본격적인 비평은 평론가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신문의 영화리뷰를 근거로 저의 안목과 지식의 범위 안에서 영화를 소개하는 수준으로 썼습니다.” 개인적으로 김기영, 신상옥, 이만희, 유현목 감독의 흑백 작품을 좋아한다는 그는 “문학인으로 예술 다방면에 관심이 있지만 영화를 특히 좋아하는 이유는 대중적이고 보편적이어서 누구나와 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라며 “이번 책이 한국영화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는 좋은 길잡이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두시간 십분’으로 당선돼 등단한 저자는 서울신문 논설위원으로 1999년까지 재직했으며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 세종문화회관 운영위원, 한국영상자료원 이사,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차범석 연극재단 이사와 영상물등급위원회 영화예심위원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창작집 ‘바람과 놀며’ ‘그 다음은 침묵’과 김옥길 평전 ‘자유와 날개’, 한국 명인 100인을 소개한 ‘빛을 가꾸는 에피큐리언’, 강선영 평전 ‘여유와 금도의 춤’ 등이 있다. 함혜리 문화에디터 lotus@seoul.co.kr
  • “세계시민과 소통하는 국가브랜드 포럼으로”

    “세계시민과 소통하는 국가브랜드 포럼으로”

    “제주포럼을 스위스의 다보스포럼 같은 국제적인 포럼으로, 국가 브랜드 포럼으로 만들겠습니다. 세계시민과 소통하고 인적·지적 네트워크를 통해 지속 가능한 발전을 꾀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국내외 거물급 등 1200여명 참석 27일 오전 11시 제주 서귀포시 해비치호텔&리조트. 우근민 제주도지사는 제주포럼을 여는 자리에서 이같이 말했다. 우 지사는 “사람들이 제주도를 흔히들 국제적인 관광지로 부르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면서 “국제회의는 양질의 관광산업을 발전시킬수 있는 기회이며 다양한 분야의 부가가치를 창출할 기회”라고 강조했다. 2001년 제주평화포럼으로 시작, 격년으로 열리다 올해부터 명칭을 바꿔 매년 열기로 한 이 행사는 통산 여섯 번째. ‘새로운 아시아: 평화와 번영을 위하여’를 주제로 29일까지 계속된다. 예년에 견줘 경제, 환경, 문화 등 세션을 다양화했다. 6개 전체회의와 52개의 동시회의 등 모두 64개의 세션으로 구성됐고, 모두 1200여 명의 내·외국인이 참석해 아시아와 지구촌에 평화와 공동번영의 화두를 던진다. 이번 포럼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차세대를 위한 미래비전’ 세션. 중국과 한국의 청년기업들이 정보를 공유하는가 하면 도내 고등학교 학생들을 선발해 포럼문화를 배울 수 있는 기회의 장까지 제공한다. 우 지사는 “마이스(MICE)산업을 제주의 신성장동력으로 키우려고 하는 만큼 미래를 책임질 지역의 청소년들에게 포럼문화에 익숙해 질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참가 인사들의 면면만 봐도 높아진 포럼의 위상을 알 수 있다. 김황식 국무총리와 글로리아 아로요 전 필리핀 대통령, 중국 전국정치협상회의 외사위원회 주임(장관급)인 자오치정이 기조연설을 한다. 특히 ‘미국 여성운동의 대모’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패널로 나서는 등 여성 참여율이 20%에 이른다. 다보스포럼 여성 참가율은 15%다. 이 밖에 타이완 출신의 영화배우 금성무를 비롯해 중국 최대철도 기업인 남차(CSR)그룹의 자오샤오강 회장, 세계적인 화공업체 날코(NALCO)의 글로벌 부총재 겸 중화권 주석인 예잉, 중국 영화시장의 20%를 점유하고 있는 영화사 폴리보나필름의 위둥 회장 등 중국기업 CEO 등 거물급들이 대거 참석한다. 50여 명의 국내외 언론인들도 몰려 왔다. 서울신문에서는 박재범 주필(이사)이 패널로 참가했다. ●올해부터 유료참가제 본격 도입 독특한 것은 지역경제 파급효과를 위해 올해부터 유료참가제가 본격 도입됐다는 것. 한태규(62) 제주평화연구원장은 “스위스 다보스포럼이나 중국 보아오포럼 등 유명포럼들도 참가자들이 회비를 내고 참관하고 있다.”면서 “재정적으로도 안정된 포럼으로 뿌리를 내리려면 기업후원과 유료참가제는 필수불가결한 선택”이라고 말했다. 강동삼기자 kangtong@seoul.co.kr
  • 韓·中작가 정지아·한사오궁의 ‘유쾌한 문학 대담’

    韓·中작가 정지아·한사오궁의 ‘유쾌한 문학 대담’

    첫 만남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상대방의 작품을 전혀 읽지 않았다.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로 잘 알려진 소설가 정지아(46)의 몇몇 작품은 영문으로 번역됐지만 중국 소설가 한사오궁(韓少功·58)에게는 낯설었고, 국내에 번역 출간된 한사오궁의 수필집 ‘산남수북’(山南水北), 장편소설 ‘마교사전’(馬橋詞典) 등 몇 작품 역시 정지아의 독서 편력에 해당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마치 맞춘 듯 서로 꼭 들어맞았다. 세상을 바라보는 낮고 겸손한 시선이 하나였고, 생명을 경외하는 열정도 마찬가지였다. 상업적 혜택을 받지 못하는 작가의 물질적 곤궁함 또한 다르지 않았다. 한국과 중국에서 눅진한 흙냄새 풍기는 농사꾼이자 치열하게 원고지 붙잡고 씨름하는 작가라는 사실이 언어의 다름, 경계의 차이를 넘어 둘을 스스럼없이 만나게 했다. 정지아, 한사오궁이 26일 서울 종로1가 대산문화재단 회의실에서 만났다. ‘세계화 속의 삶과 글쓰기’를 주제로 지난 24일 개막한 서울국제문학포럼이 계기가 됐다. 1시간 30분에 걸친 둘의 대화는 유쾌했고, 진지했다. 과학기술로 상징되는 현대 문명과 자본주의에 대한 선험적, 지성적, 비판적 통찰이 질문으로, 대답으로 오갔다. 둘은 통역을 제쳐 두고 만나자마자 영어로 자신을 소개했다. 정지아는 “부모님이 모두 남한 사회가 반대하는 이념을 가진 사회주의자였고, 그런 이야기들은 남한에서는 금기시된다.”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던 이들이 변화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들의 신념은 지금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등을 작품에서 주로 다뤘다.”고 말을 건넸다. 한사오궁은 “오오, 그런가. 그러면 당신은 어떤가.”라고 슬쩍 되물었다. 정지아는 “사실대로 말하면 우리 사회에서는 아마 내가 감옥에 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눙치더니 이내 “사회주의자는 아니다.”라고 말을 고쳤다. 이쯤에서부터 통역이 끼어들었다. 대화의 속도는 조금 더뎌졌지만, 더욱 깊어지고 묵직해졌다. 한사오궁은 “중국에서도 1980년대 이전 이데올로기 분쟁이 있었지만 이제는 돈을 버는 좌파와 우파, 돈을 벌지 못하는 좌파와 우파로 나뉠 뿐”이라면서 “돈을 벌 수 있으면 다 된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이데올로기”라고 말했다. 정지아는 “기존의 이념을 뛰어넘어 세상이 시장과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붙잡혀 있다는 말씀이지요?”라고 말을 받은 뒤 “한 선생님은 돈을 버는 좌파인가요?”라고 한 걸음 더 내쳤다. 그는 “100만~200만권씩 팔리는 베스트셀러 작가야 돈을 벌겠지만 나는 그저 10만~20만권 팔리는 정도”라면서 “그나마 중국 출판 시장이 크니까 겨우 살아가게는 한다.”고 받았다. 엄살에 가깝다. 그는 2002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예기사 작위를 받고, 2007년 루쉰문학상을 받은 저명한 작가다. 현재 하이난성작가협회 주석이며 모옌(莫言), 위화(余華) 등과 함께 중국 문단에서 가장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꼽힌다. 그는 이 대목이 대화에 언급되자 손가락으로 ‘×자’를 만들며 “전혀 사실이 아니다. 믿지 말라. 노벨문학상은 올림픽처럼 계량해서 점수나 순위를 매기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어쨌든 이 또한 엄살에 가깝다. ●시골생활 예찬론자끼리 만나다 정지아는 “한 선생님의 포럼 발제문 ‘수요와 욕구’를 읽고 탐욕에 대한 경계 등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면서 “10여 년 전에 시골에 내려가서 사신다고 하는데 저도 최근 시골로 내려갔다.”고 말했다. “어떤 연유로 시골로 내려가셨나. 고향인가.”라는 한사오궁의 질문에 정지아는 “시골에서 태어났고, 시골의 풍경이 핏줄기 속에 남아 있는 것 같다. 도시에서는 여러 욕망들을 버리기 쉽지 않았는데, 시골에서 흙 만지며 야채 키우다 보면 그런 것들이 절로 사라진다. 쾌적하고 평화롭다.”고 답했다. 한사오궁은 “맑은 날 열심히 농사짓고, 비오는 날 책 읽는 것이 가장 좋은 생활이라고 했다(청경우독·晴耕雨讀). 손과 발, 머리를 모두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자본주의, 특히 도시 사회에서 나타나는 인간과 사회의 관계는 건강하지 않다.”고 맞장구쳤다. 한사오궁의 수필집 ‘산남수북’은 루쉰문학상 수상 작품이며 ‘중국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라는 평까지 얻을 정도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배경이 된 후난(湖南)성 바시동(八溪洞)은 문화대혁명 시절 그가 청년 지식인으로 하방을 간 곳으로 11년 전부터 그곳에서 매년 4월부터 11월까지 지내며 농사짓는 곳이다. 한사오궁은 바시동을 ‘제2의 고향’이라고 불렀다. ●작가로서 실존적 고민을 나누다 정지아는 “근대문학의 위기, 시장의 변화 등으로 작가들이 괴로운 시절이다. 이런 시대에 작가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말 고민스럽다.”고 내밀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한사오궁은 계면쩍은 표정으로 “나도 같은 고통을 겪고 있다. 어떡하겠나. 계속 밀고 나가고, 그리고 기다리는 수밖에. 그리스 신화를 보면 끊임없이 돌을 굴렸다가 떨어진 돌을 다시 굴리기를 반복해야 하는 시시포스가 있지 않나. 사람의 인생도 똑같다. 작가의 인생은 더더욱 그러하다.”고 말했다. ‘교과서 중심으로 복습 철저’와 같은 식의 모범답안이지만 정지아는 진지하게 고개를 주억거린다. “끝없이 써야만 하는 것이 작가의 숙명이라는 말씀이네요. 그러고 보니 그동안 고향 인구가 계속 줄어들다가 2년 전부터 미미하지만 조금씩 늘어가기 시작해요.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부유한 삶이 행복의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 같아요. 희망은 살아있는 것이지요. 문학도 마찬가지일 것이고요.” 한사오궁은 “맞다. 나빠도 그 범위 안에서 나빠지고, 좋아도 그 범위 안에서 좋아진다. 욕망도 절망도 경계해야 한다.”면서 “목표에 도달하는 것은 어떻게 할 수 없더라도 그 과정은 우리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위로하며 서로 희망을 나눴다. 정지아는 우직하게 사실주의 기법을 틀어쥐며 작품 활동을 하는, 문단에 몇 남지 않은 작가다. ‘빨치산의 딸’뿐 아니라 ‘행복’, ‘봄빛’, ‘숙자 언니’ 등 자본주의사회에 남은 사회주의자들의 모습과 내면을 핍진하게 풀어가는 작품을 주로 썼다. 리얼리스트 정지아 역시 사회주의자들 못지않게 외로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사오궁은 “정 선생의 작품이 중국어로 번역된 것이 없다니 아쉽긴 하지만 영어로 된 책을 찾아 읽어 보겠다.”면서 “다음에 중국 오시면 꼭 연락해 달라. 내가 직접 마중나가고 또 직접 기른 토마토와 야채도 맛보여 주고 싶다.”고 말했다. 정지아가 활짝 웃으며 “혹시 노벨문학상 받은 뒤에도 여전히 유효한 약속인가.”라고 묻자 한사오궁은 “노벨문학상보다 직접 가꾼 토마토가 더 중요하다.”고 맞받으며 환하게 웃었다. 한사오궁은 정말 토마토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정지아는 각자 직접 가꾼 고추와 토마토를 나누자고 했다. 땅 일구는 이들은 보통의 도시 사람보다 조금은 더 욕망을 무화하는 능력이 탁월함을 두 작가가 보여 준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한사오궁은… 한사오궁은 중국 후난사범대학 중문과를 졸업하고 중국의 대표적 문예지 ‘줘자’(作家)로 등단했다. ‘뿌리 찾기’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심근문학(尋根文學)의 대표 주자로서 현대 중국문학의 거장이다. 작품 속에서 전통문화에 대한 반성과 재인식을 바탕으로 소재와 형식 등 중국의 전통을 재현하려 한다. ‘아빠, 아빠, 아빠’(爸爸爸), ‘유혹’(誘惑), ‘빈 성’(空城), ‘열렬한 책읽기’ 등의 작품이 있다. 하이난(海南)성 작가협회 주석이지만 후난성 바시동에서 살며 가을걷이가 마무리돼야 하이난다오로 돌아갈 정도로 시골 생활에 흠뻑 빠져 있다. 첫 중국인 노벨문학상 수상 유력 후보로 거론된다. 2000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오싱젠(高興建)은 중국 출신 프랑스인이다. ■ 정지아는… 정지아는 전남 구례가 고향이다.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나왔다. 빨치산이었던 부모님의 실제 삶을 그려낸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을 1990년 실천문학에서 펴내며 등단했다. 소설은 출간 직후 판매금지됐다. 작가 자신도 3년 가까이 수배 생활을 하는 등 혹독한 필화사건을 겪었다.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고욤나무’가 당선돼 안정적으로 ‘제도권’에 진입했다. 가족사적인 배경이 그러하듯 비극적인 현대사의 중심과 주변에서 역사를 직조했던 개인들의 상처와 희망, 불안 등을 주되게 다루고 있다. 이효석문학상, 한무숙문학상, 오늘의소설상 등을 받았다. 올 초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가 ‘연세(年貰) 200만원’에 집을 얻고 낮에는 밭 가꾸고 저녁에는 글쓰는 단출하고 정갈한 삶을 시작했다.
  • [부고] ‘부산 美문화원 방화 사건’ 주도 김은숙씨 하늘로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을 주도했던 김은숙씨가 위암 투병 중 24일 오전 7시 40분 서울 면목동 녹색병원에서 숨졌다. 52세. 김씨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미국이 눈감고 있는 것에 분노해 82년 문부식·김현장씨 등 부산 지역 대학생들과 함께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을 일으켰다. 이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5년 8개월간 수감생활을 했다. 김씨는 지난해 8월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투병생활을 해 왔다. 지난달에는 임수경씨 등 지인들이 그녀의 쾌유를 비는 ‘작은 음악회’를 마련하기도 했다. 김씨의 동생은 “어제 갑자기 하혈을 하고 의식을 잃으면서 상태가 나빠졌다.”면서 “숨지기 직전 산소호흡기를 뗀 상태에서 가족들에게 큰 소리로 ‘사랑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김씨를 곁에서 후원해온 통일운동가 임수경씨는 이날 오전 트위터에 “김은숙님의 온가족이 밤새 병상을 지켰다.”면서 “주치의 선생님이 야간 당직이라 수시로 환자 상태를 봐 주셨지만 곁에 있는 사람들을 알아볼 수 없는 상태…. 제발 힘을 내세요.”라고 쾌유를 비는 메시지를 올렸다. 그러나 김씨는 2시간여 뒤 눈을 감았다. 김씨는 감옥에서 나온 뒤 소설과 번역서를 펴내며 두 딸과 생계를 이어 갔다. 지난해 위암 말기 판정을 받기 전까지 서울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자녀를 돌보는 ‘참 신나는 학교’를 운영했다. 김씨는 지난 8일 어버이날을 맞아 사단법인 오월어머니집이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어머니들에게 주는 ‘제5회 오월어머니상’을 받기도 했다. 김씨의 빈소는 녹색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6일 오전 9시다. 김소라기자 sora@seoul.co.kr
  • 김기덕 감독 ‘아리랑’ 칸 사로잡다

    김기덕 감독 ‘아리랑’ 칸 사로잡다

    김기덕 감독의 ‘아리랑’(포스터)이 제64회 칸국제영화제에서 공식부문인 ‘주목할 만한 시선상’을 받았다. 이로써 김 감독은 베를린영화제 감독상, 베니스영화제 감독상 등 세계 3대 영화제에서 모두 수상하는 쾌거를 일궈냈다. ●세계 3대 영화제 모두 수상 김기덕 감독은 칸 영화제 폐막 하루 전날인 21일(현지시간) 드뷔시관에서 열린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시상식에서 독일 안드레아스 드레센 감독의 ‘스톱드 온 트랙’(Stopped on track)과 함께 공동 수상했다. 지난해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에 이어 주목할 만한 시선상을 2연패한 것으로, 이 상의 수상자가 2년 연속 한 국가에서 배출된 것은 처음이다. 세계 3대 영화제에서 본상을 수상한 국내 감독은 김 감독이 유일하다. 김 감독은 2004년 ‘사마리아’로 베를린영화제 감독상, 같은 해 ‘빈집’으로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을 각각 수상했다. 1978년 제31회 칸영화제 때 신설된 주목할 만한 시선은 경쟁부문과 함께 대표적인 공식부문으로 꼽힌다. 주로 새로운 경향의 영화들을 소개한다. 김 감독은 2005년 ‘활’로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진출했고, 2007년 ‘숨’으로 경쟁부문에 초청되기도 했다. 올해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는 개·폐막 작을 포함해 19개국에서 21편이 초청됐다. 한국영화는 김 감독의 ‘아리랑’, 홍상수 감독의 ‘북촌방향’, 나홍진 감독의 ‘황해’가 진출했다. 김 감독은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두 번이나 차지한 프랑스의 거장 브루노 뒤몽, ‘리턴’으로 제60회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과 신인 감독상을 거머쥔 러시아의 안드레이 즈비야긴체프, 싱가포르를 대표하는 에릭 쿠 등 주요 감독들을 제치고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김 감독은 수상식 뒤 인터뷰에서 “이번 상으로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그는 수상 소감 뒤에 영화 속 삽입된 아리랑을 부르기도 했다. 김 감독은 데뷔작 ‘악어’(1996) 등 십여편의 영화를 만든 국내 대표 감독 가운데 한 명이다. 하지만 지난해 연말부터 외부와 연락을 두절한 채 칩거에 들어가 폐인이 됐다는 소문이 나오기도 했고, 최근엔 자신의 제자인 장훈 감독이 메이저 영화사와 계약한 일을 두고 ‘배신 논란’을 빚으며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손태겸 감독 시네파운데이션 3등상 한편 손태겸 감독의 ‘야간비행’이 칸영화제 학생경쟁부문인 ‘시네파운데이션’에서 3등상을 수상했다. 손 감독의 중앙대 영화학과 졸업 작품으로, 10대의 일탈문제를 다루고 있다. 1998년에 만들어진 시네파운데이션 부문은 해마다 전 세계 학생영화 중 15~20편 정도의 중·단편을 선보이는 칸영화제 공식초청 프로그램으로, 매년 초청작 중 우수작 세 편을 수상한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정종욱 “김정은 조만간 訪中 가능성”

    정종욱 전 주중 한국대사는 18일 “최근 북한과 중국의 움직임으로 미뤄볼 때 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 조만간 중국을 방문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정 전 대사는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미문제연구소 춘계심포지엄에서 “지난해 10월 부임한 지재룡 주중 북한대사의 움직임을 보면 뭔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면서 이같이 전망했다. 그는 “지 대사 일행이 최근 만나고 있는 중국 내 기관과 인물은 이례적”이라면서 “북한의 권력 승계자인 김정은이 당장 다음 달은 아니더라도 올해 안에 방중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 대사는 지난달 28일 중국의 차기 지도자로 유력시되는 시진핑 국가부주석을 만난 것을 비롯해 신화사 사장, 인민일보 사장 등 중국 내 고위층과 잇따라 면담했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사설] 저소득층 사회안전망 더 촘촘히 짜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어제 발간한 ‘2010 임금 과세(Taxing Wages)’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저소득층의 임금 과세 수준은 고소득층이 저소득층보다 소득세를 더 많이 부담함에도 불구하고 사회보장기여금 증가로 고소득층에 비해 증가폭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2000년 대비 2009년 사회보장기여금 증가 수준을 보면 무자녀 기준으로 했을 때 고소득층(평균임금의 180~250%)은 0.78% 포인트 감소한 반면 저소득층(평균임금의 50~80%)은 0.79% 포인트 늘었다. 두 자녀 기준으로 할 때도 같은 비율이었다. 고소득층에 비해 저소득층의 사회보장기여금이 증가한 것은 2000년 이후 사회보험 적용 대상 범위가 확대되고 2008년에 장기요양보험 등 신규 제도가 도입되면서 사회안전망이 지속적으로 넓어지고 있는 데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2003년에는 국민연금 가입 대상이 1인 이상 사업장으로 확대됐고 2004년에는 고용보험의 실업급여 대상자에 건설공사 근로자, 일용근로자, 단시간 근로자 등이 포함됐다. 이에 따라 국민연금 가입 사업장 수는 2000년 21만 2000개이던 것이 2009년에는 98만개로, 고용보험 가입 사업장 수(5인 미만)는 46만 8000개에서 98만 4000개로 각각 늘었다. 사회안전망 확충에도 불구하고 사각지대는 여전히 남아 있다. 국민연금과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비정규직 근로자와 영세 자영업자 수가 각각 390만명, 280만명가량 된다. 고령화사회에 접어들면서 질병과 실업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사회안전망의 확충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부는 사회보험료 감면이나 재정 지원 등을 통해 이들을 사각지대에서 구해야 한다.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무상의료·무상교육 등 복지서비스를 놓고 이전투구할 게 아니라 사회안전망 확충에 더 관심을 쏟아야 한다. 복지서비스보다 사회안전망이 먼저다.
  • 도심 속 시골정취 맛보세요

    도심 속 시골정취 맛보세요

    서울에 ‘생태 도시 만들기’가 대세다. 시골 정취를 자아내는 생태공원도 만들고 농사 체험 프로그램도 마련한다. 하지만 주로 땅이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외곽 지역에 국한될 뿐이었다. 고층 빌딩이 즐비한 용산구, 서울 자치구 가운데 인구가 가장 많은 송파구 도심 한가운데에서 펼쳐지는 ‘시골의 향연’들을 소개한다. ●한강로·반포로 등 360㎡ 규모 용산구 한강로, 한남로, 반포로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테마 화단과 특색 있는 가로화분, 걸이화분 등이 복잡한 도심을 수놓는다. 화사하고 쾌적한 가로환경 조성을 위해 구가 실시한 ‘사계절 꽃길 조성사업’ 덕분이다. 구는 이를 위해 다양한 원예소재를 도입했다. 지난달 수국, 애니시다, 만냥금 등 다양한 초화류를 활용, 360㎡에 이르는 테마화단과 20조의 특색 있는 화분을 설치했다. 이달 초에는 웨이브피튜니아, 한련화, 제라늄 등을 철제가로등에 부착했다. 주요 도로변에는 이팝나무, 수수꽃다리, 영산홍, 자산홍 등 봄꽃들로 이루어진 테마화단이 아름다운 볼거리를 제공한다. 성장현 구청장은 “이런 경관을 유지할 수 있도록 급수작업 등 유지관리를 지속적으로 할 예정”이라면서 “계절에 적합한 초화류와 다양한 원예소재, 관상수목 등을 적극 활용하겠다.”고 말했다. ●석촌호수 부근 ‘솔이두렁길’ 조성 교통량이 많기로 유명한 지하철 2호선 잠실역 석촌호수 부근에는 상자텃밭 거리가 생긴다. 바로 ‘솔이두렁길’이다. 석촌호수 사거리 측 보도 98m 구간이다. 솔이두렁길 상자텃밭에는 감자와 고구마, 옥수수, 기장 등 다양한 작물들을 심을 수 있다. 또 토종벼를 심고 그 속에 논우렁이를 자라도록 해 청소년들에게 농촌 간접체험과 자연생태 관찰의 기회도 준다. 특히 텃밭 제작에는 인근 가락시장에서 버려지는 팰릿 폐목재를 재활용하기로 해 더욱 눈길을 끈다. 박춘희 구청장은 “도시농업은 경제·환경·교육 등 여러 방면에서 긍정적인 효과가 있는 미래 농업형태”라며 “솔이두렁길은 갈수록 여유를 잃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시농업의 장점을 알리면서, 지방을 고향으로 둔 시민들에게 향수도 느끼게 하는 친환경도시 구축에 도움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WHO & WHAT] “남느냐, 떠나느냐” 희곡으로 본 어느 서재 도서들의 열띤 논쟁

    [WHO & WHAT] “남느냐, 떠나느냐” 희곡으로 본 어느 서재 도서들의 열띤 논쟁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그대의 돈을 책 사는 데 써라. 황금과 지성을 얻을 것이다.’ ‘남자는 모름지기 다섯 수레의 책을 읽어야 한다.’ 책처럼 나쁜 평가를 찾아보기 힘든 존재도 없다. TV와 게임이라면 기겁하던 부모들도 책을 읽는 자식의 모습에 흐뭇해하고, 책을 읽는다고(물론 수업시간에 교과서 이외의 책을 보는 것은 예외다) 혼나는 경우도 드물다. 책은 하나의 활자로 똑같이 찍혀 나오지만 읽는 사람에 따라 그 가치가 수도 없이 달라지는 독특한 존재다. 책을 통해 성공의 실마리를 잡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단순히 시간을 보내기 위해 책을 뒤적이는 사람이 있다.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 책을 사 모으는 사람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책에는 ‘베스트셀러’라는 왕관이 씌워진다. 베스트셀러에는 시대와 유행이 반영된다. 1980년대 초반 시(詩)의 시대를 거쳐, 2000년대에는 경영학 책이 각광받았고 최근에는 인문학책이 부활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가상인터뷰 ‘Who & What’(후 앤드 왓) 이번 회에서는 어느 직장 여성의 서재에 꽂혀 있는 베스트셀러들이 새로운 친구를 맞게 되면서 벌이는 소동을 희곡 형식으로 풀어 봤다. 출간 당시에 주목 받은 책들이 실제로는 어떤 애환을 겪는지, 또 시간이 흘러가며 잊혀지는 책의 모습은 어떠한지를 들어 봤다.   ========================================================================  ●등장인물  -장혜진. 책을 좋아하는 32세 직장 여성. 빌려서 보기보다는 직접 사서 소장하는 스타일    ●등장도서  -정의란 무엇인가(정의)/ 마이클 샌델/ 김영사/ 2010  -아프니까 청춘이다(청춘)/ 김난도/ 쌤앤파커스/ 2010  -셰익스피어 4대 비극(비극)/ 찰스 램/ 성우/ 1984  -곰돌이 푸(푸)/ 앨런 밀른/ 아름드리/ 1995  -시간의 역사(시간)/ 스티븐 호킹/ 청림출판/ 2000  -성공하는 사람의 7가지 습관/ 스티븐 코비/ 김영사/ 1994  -신의 물방울(물방울)/ 기바야시 신/ 학산문화사/ 2007  -오만과 편견(오만)/ 제인 오스틴/ 민음사/ 2003  -호밀밭의 파수꾼(파수꾼)/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문예출판사/ 1998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세계)/ 김우중/ 김영사/ 1989  -수학의 정석(정석)/ 홍성대/ 성지사/ 1992  -성경/ 모세 외/ 성서원/ 2008  -해리포터 시리즈(포터)/ J.K.롤링/ 문학수첩/ 1999  -홀로서기/ 서정윤/ 청하/ 1987  -그 외 책들    ●시간=2011년 5월 15일 저녁부터 이튿날 새벽 1시 무렵    ●장소=책장 여럿과 책상 하나로 가득 찬 좁은 방. 책장은 빼곡히 차 있고, 책상 위에는 컴퓨터가 놓여 있다.    #1  저녁 7시. 외출을 다녀온 혜진이 방으로 들어서며 불을 켠다. 손에 든 종이가방에서 책(정의, 청춘)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이어 책장을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혜진/ 책을 더 이상 꽂을 공간이 없잖아. 정리해서 될 일이 아니네. 다음 주에 회사에서 바자회를 한다는데 좀 내놔야겠네.    손에 종이가방을 든 채로 불을 끄고 방을 나간다.    #2.  밤 11시. 천천히 불이 켜진다. 책장에서 책들이 하나둘씩 등장해 새로 온 책들 쪽으로 다가간다.  ▲포터/ (촐싹대며) 또 왔어. 어떻게 밖에 나가기만 하면 새 책을 사 갖고 오냐. 내일이면 누군가 쫓겨나겠는데.  ▲정의/ (천천히 일어서 주변을 둘러본 후 딱딱한 목소리로) 서점에 나가는 순간 입양될 거라고 하더니 정말 그러네. 하루 만에 팔려오다니. 안 그래, 청춘?  ▲청춘/ (패기 넘치는 목소리로) 생각보다는 책이 많네. 주인이 책을 좋아하나 봐. (포터를 쳐다보며) 거기 안경 낀 학생. 이 집 분위기는 어때?  ▲포터/ (순간 멈칫하며) 학생이라니. 이래 봬도 당신보다 열살 이상 위라구. 뭐 아무튼 살을 부대끼며 계속 살게 될 테니 그 정도로 하고. 이 집 주인은 회사원인데, 책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사람이우. 보아하니 당신들이 정의와 청춘인 모양인데 요새 계속 산다산다 하더니 결국 왔구먼.  ▲정의/ 그런데 서 있을 곳도 없어 보이네.  ▲포터/ (심각한 표정으로) 그래서 당신들을 마음껏 반길 수 없는거유. 새로운 책이 오면 여기 중 누군가는 방을 빼야 한다는 거지.  ▲청춘/ (화들짝 놀라며) 그래요? 미안해서 이걸 어쩌나.    이때 구석에서 초라하고 늙은 모습의 ‘비극’이 천천히 걸어나온다. 온화한 모습이다.    ▲비극/ 아무도 자네들을 미워하지 않는다네. 마음의 양식이라는 둥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둥 우리를 떠받드는 것 같지만, 책 팔자는 주인 맘이라오. 많이 팔린다고 다 좋은 것도 아니고, 무조건 오래됐다고 책장에서 밀려나는 것도 아니고. 얼마 전 이 집에 왔던 재테크 서적은 베스트셀러라고 뻐기더니 이틀 만에 재미 없다고 어디론가 사라져 갔지.  ▲정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모습으로) 난 좀 다를 거유. 한국에서만 100만권이 넘게 팔렸거든요.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 얘기는 들어보셨나 모르겠네. 소설이나 재테크 책처럼 날 취급하면 안되죠.    여기저기서 키득키득대는 소리가 들린다.    ▲포터/ (한쪽으로 뛰어가더니 ‘시간’을 두드려 깨운다) 형님 등장하실 시간이에요. 강적입니다.    ‘시간’이 천천히 일어난다. ‘정의’ 쪽을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드러누워 잠든다.    ▲정의/ (얼어붙은 목소리로) 저 분이 누구신데요?  ▲비극/ 스티븐 호킹 교수가 쓴 ‘시간의 역사’라네. 전 세계적으로 1000만부 이상 팔린 친구지. 저 친구의 유일한 문제는 어렵다는 거야. ‘역사상 가장 안 읽힌 베스트셀러’라는 칭호까지 얻었지. 주인도 몇 번 시도하다가 실패하고는 저 상태로 계속 잠만 자고 있어. 똑같은 과학책이라도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화려한 사진 때문인지 열심히들 읽었는데. 쯧쯧.  ▲정의/ 그럼 처음부터 사질 말았어야죠.  ▲비극/ 어허. 책은 단순히 지식을 전파하는 도구가 아니라네. 사는 사람의 허영이나 욕망도 반영하고 있는 존재지. 남들이 읽었다면 읽어보고 싶고, 남들이 내가 그 책을 읽었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원하기도 하지. 내 보기엔 자네의 정의론도 호킹의 물리학과 별로 달라보이지 않네만.    ‘정의’, 갑자기 시무룩해져 주저앉는다. 이때 ‘청춘’이 나선다.    ▲청춘/ 그럼 여기 계속 있는 책은 공통점이라도 있는 건가요?  ▲비극/ 그거야 주인 따라 다르긴 한데. (‘포터’를 가리키며) 저 친구는 형제 23명이 이 집 책장에 있어. 워낙 유명해진 덕분에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있는데, 개봉 때마다 주인이 줄거리가 기억이 안 난다며 다시 꺼내지.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오만’을 쳐다보며) 저 숙녀분 역시 형제들이 다 이 집에 있지. 주인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제인 오스틴이거든. (‘청춘’에게 귓속말로) 오스틴이 사실은 글을 정말 못 썼고, 편집자가 엄청나게 고쳤다는 얘기를 듣고는 주인이 상심하기도 했어.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오며) 여기 이 친구는 ‘성공하는 사람의 7가지 습관’이라는 책인데. ‘청춘’ 자네의 조상쯤 되지. 물론 이 집 주인도 그렇지만, 이 책을 읽고 실제로 성공했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네. 여기 이 날씬한 친구는 ‘홀로서기’라고 아주 감성이 예민해. 한때 한국에도 시집이 베스트셀러 1위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산증인이야.  ▲청춘/ (가장 위쪽을 가리키며) 저기 저분은요? 같은 분들이 여럿인데요?  ▲비극/ (‘청춘’을 손끝을 따라가다가 황급히 눈을 내리깐다) 아.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이자, 기본적으로 몇 개씩 갖게 된다는 ‘성경’이라는 분이야. 굳이 분류하자면 역사책이신데, 최소한 60억권 이상은 팔리셨다더군. 겉표지부터 가죽이신데다 지퍼로 몸을 감싸고 계셔서 대화는 주인하고만 하시지.    ‘비극’이 힘들어하며, ‘포터’를 향해 손끝을 까닥인다.    ▲포터/ 저 옆에 하얀 표지에 두꺼운 분은 ‘정석’인데, 한국 고등학생들의 필수 참고서 같은 거지. 근데 전 세계 100대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렸다는 거 아니야. 4000만권쯤 팔렸고, 아직도 매년 100만권 가까이 팔리지. 머리쪽에 때가 많이 탄 것은 사람들이 매번 새로운 마음 어쩌고 하면서 처음 부분만 집중적으로 봐서 그렇대. (‘세계’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며) 아니 저 분도 아직 계셨네. 한국 자서전의 시조쯤 되는 분인데, 대기업 회장님이 쓰신 책이지. 근데 그 기업이 망하고 그러면서 절판됐다던데. 그 옆에 우울한 표정의 친구는 ‘파수꾼’. 그냥 성장소설일 뿐인데, 테러범이나 사이코패스들의 범행현장에 자꾸 발견되는 통에 괜한 오해를 사고 있는 불운한 책이지.  ▲청춘/ 저기 곰돌이 그려진 책은요?  ▲포터/ ‘곰돌이 푸’. ‘어린왕자’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같은 친구들은 다른 집에서는 애들이 크면 다 버리던데, 이 집 주인은 시집올 때 가져왔거든.  ▲청춘/ 저런 동화책들은 얼마나 좋을까요. “그후로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다.”는 뻔한 얘기만 해도 다들 예뻐라 하잖아요.  ▲포터/ 그게 그렇지가 않더라고. 쟤 결말이 크리스토퍼 로빈이 크면서 더 이상 푸와 숲속 친구들을 찾지 않게 되는 거더라고. 사실 백설공주도 원래는 왕비를 데려다가 뜨거운 불판에서 맨발로 춤을 추게 했다나 뭐라나.    이 때 ‘정의’가 벌떡 일어나 뚜벅뚜벅 걸어나온다.    ▲정의/ 다 좋은데 쟤는 도대체 뭡니까. (정의가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물방울’이 있다.) 만화책 나부랭이는 왜 있는거죠?  ▲포터/ (‘물방울’ 쪽으로 뛰어가 앞을 가리고 ‘정의’를 향해 혀를 내민다.) 너도 정신 차리려면 멀었다. 책의 가치는 주인이 정하는 거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지금까지 와인에 대한 어떤 책도 얘만큼 많은 정보를 주진 못했다구. 니가 아무리 베스트셀러라도, 팔리는 순간 니 운명은 주인 맘이야. 주인이 외면하면 넌 그냥 종이쪼가리라니까.    이때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책들 황급히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순식간에 암전된다.    #3.    잠옷 차림의 혜진 들어와 불을 켠다. 책장을 살핀다.    ▲혜진/ 잠이 안 오는데 책이나 읽어야지. (구석에서 ‘시간’을 발견한다.) 이 책이 아직도 있었네. (웃음) 오랜만에 한번 다시 도전해 볼까. 뭐 읽다 보면 잠이라도 오겠지.    혜진 불을 끄고 시간을 들고 퇴장한다. (끝)   ※도움말 주신 분 : 김현정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담당 북마스터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서울신문은 매주 1회 독특한 포맷의 가상 인터뷰 [WHO&WHAT(후 앤드 왓)]을 1개면에 걸쳐 연재하고 있습니다. 일반 신문기사로는 다루기 힘든 동서고금의 지식과 역사의 정수들을 만남 또는 대담의 형식을 통해 알기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는 지면입니다. 청소년, 어른 모두에게 즐겁고 색다른 지식의 장이 될 것으로 자부합니다. 특히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는 훌륭한 논술교재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WHO&WHAT] “퀴즈쇼서 인간에 완승한 슈퍼컴 왓슨(Watson)을 만나다” [WHO&WHAT] 무덤에서 불러낸 독재자 4인의 가상만찬 ‘재스민 혁명’을 논하다 [WHO&WHAT] 천재소년 송유근, ‘우주비행 성공 50주년’ 맞아 유리 가가린을 만나다 [WHO&WHAT] ‘슈퍼히어로’ 스파이더맨, 정신과 전문의 김상준 원장과 상담하다 [WHO&WHAT] 지구수비대 지원한 인간형 로봇 ‘마루’ “아톰·태권V처럼 지구 지켜서…” [WHO&WHAT] ‘최악’ 통념 B형 男기자, 혈액형의 아버지 ‘란트슈타이너’에 따지다 [WHO&WHAT] ‘전 세계 여성의 로망’ 버킨백을 만나다 [WHO&WHAT] 선택 따라 전혀 다른 결과…”이렇게 검색하면 진리가 밝혀질까?” [WHO&WHAT] “남느냐, 떠나느냐” 희곡으로 본 어느 서재 도서들의 열띤 논쟁 [WHO&WHAT] ‘위대한 유산’ 남긴 간송미술관의 전형필, 그리고 우피치미술관의 메디치 [WHO&WHAT]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로, 그는 왜 라파엘로를 죽이고 싶었을까 [WHO&WHAT] ‘美우주왕복선은 초대형 폭탄이나 마찬가지’ 물리학자 파인먼의 폭로 [WHO&WHAT] 외규장각 도서 귀환으로 본 약탈문화재의 ‘수구초심(首丘初心)’ [WHO&WHAT] “재능만 주고 사랑은 주지 않던 나쁜 부모들” 유명 인사들의 회상기 [WHO&WHAT] 인류역사를 바꾼 ‘억세게 운 좋은 사내들’ 서바이벌 현장…과연 승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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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로 주민센터, 휴대전화 발신자 표시 서비스

    구로구 동주민센터가 오는 20일부터 전화기 ‘레터링 서비스’를 실시한다. ‘레터링 서비스’는 통화가 연결될 때 수신자의 휴대전화 액정에 회사명이나 홍보문구 등이 표시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신도림동 주민센터에서 민원처리를 위해 주민의 휴대전화로 통화할 경우, 상대방 휴대전화에 ‘신도림동 주민센터’가 뜨는 형태다. 구가 이 서비스를 도입한 데에는 전화사기, 보이스피싱 등으로 주민들이 모르는 번호를 기피하는 현상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구청이나 동주민센터에서 민원처리를 위해 전화를 걸어도 주민들이 전화를 받지 않는 경우가 허다해 민원처리에 어려움이 많았다. 구 관계자는 “업무의 효율적 처리를 위해 발신자의 신분을 알려줄 필요가 생겼다.”고 말했다. 구는 또 전화를 받지 못하는 경우를 대비해 발신자의 전화번호도 함께 표시하기로 했다. 주민들이 부재중 번호를 확인하고 손쉽게 동주민센터로 전화를 걸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구는 일단 동주민센터를 대상으로 레터링 서비스를 실시한 후 반응이 좋으면 내년부터 구청과 보건소에도 도입할 예정이다. 김지훈기자 kjh@seoul.co.kr
  • 국내 유일의 세계 100대 베스트셀러는 ‘수학의 정석’

    국내 유일의 세계 100대 베스트셀러는 ‘수학의 정석’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그대의 돈을 책 사는 데 써라. 황금과 지성을 얻을 것이다.’  ‘남자는 모름지기 다섯 수레의 책을 읽어야 한다.’  책처럼 나쁜 평가를 찾아보기 힘든 존재도 없다. TV와 게임이라면 기겁하던 부모들도 책을 읽는 자식의 모습에 흐뭇해하고, 책을 읽는다고(물론 수업시간에 교과서 이외의 책을 보는 것은 예외다) 혼나는 경우도 드물다.  책은 하나의 활자로 똑같이 찍혀 나오지만 읽는 사람에 따라 그 가치가 수도 없이 달라지는 독특한 존재다. 책을 통해 성공의 실마리를 잡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단순히 시간을 보내기 위해 책을 뒤적이는 사람이 있다.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 책을 사 모으는 사람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책에는 ‘베스트셀러’라는 왕관이 씌워진다. 베스트셀러에는 시대와 유행이 반영된다. 1980년대 초반 시(詩)의 시대를 거쳐, 2000년대에는 경영학 책이 각광받았고 최근에는 인문학책이 부활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가상인터뷰 ‘Who & What’(후 앤드 왓) 이번 회에서는 어느 직장 여성의 서재에 꽂혀 있는 베스트셀러들이 새로운 친구를 맞게 되면서 벌이는 소동을 희곡 형식으로 풀어 봤다. 출간 당시에 주목 받은 책들이 실제로는 어떤 애환을 겪는지, 또 시간이 흘러가며 잊혀지는 책의 모습은 어떠한지를 들어 봤다.    ========================================================================  ●등장인물  -장혜진. 책을 좋아하는 32세 직장 여성. 빌려서 보기보다는 직접 사서 소장하는 스타일    ●등장도서  -정의란 무엇인가(정의)/ 마이클 샌델/ 김영사/ 2010  -아프니까 청춘이다(청춘)/ 김난도/ 쌤앤파커스/ 2010  -셰익스피어 4대 비극(비극)/ 찰스 램/ 성우/ 1984  -곰돌이 푸(푸)/ 앨런 밀른/ 아름드리/ 1995  -시간의 역사(시간)/ 스티븐 호킹/ 청림출판/ 2000  -성공하는 사람의 7가지 습관/ 스티븐 코비/ 김영사/ 1994  -신의 물방울(물방울)/ 기바야시 신/ 학산문화사/ 2007  -오만과 편견(오만)/ 제인 오스틴/ 민음사/ 2003  -호밀밭의 파수꾼(파수꾼)/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문예출판사/ 1998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세계)/ 김우중/ 김영사/ 1989  -수학의 정석(정석)/ 홍성대/ 성지사/ 1992  -성경/ 모세 외/ 성서원/ 2008  -해리포터 시리즈(포터)/ J.K.롤링/ 문학수첩/ 1999  -홀로서기/ 서정윤/ 청하/ 1987  -그 외 책들    ●시간=2011년 5월 15일 저녁부터 이튿날 새벽 1시 무렵    ●장소=책장 여럿과 책상 하나로 가득 찬 좁은 방. 책장은 빼곡히 차 있고, 책상 위에는 컴퓨터가 놓여 있다.    #1  저녁 7시. 외출을 다녀온 혜진이 방으로 들어서며 불을 켠다. 손에 든 종이가방에서 책(정의, 청춘)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이어 책장을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혜진/ 책을 더 이상 꽂을 공간이 없잖아. 정리해서 될 일이 아니네. 다음 주에 회사에서 바자회를 한다는데 좀 내놔야겠네.    손에 종이가방을 든 채로 불을 끄고 방을 나간다.    #2.  밤 11시. 천천히 불이 켜진다. 책장에서 책들이 하나둘씩 등장해 새로 온 책들 쪽으로 다가간다.  ▲포터/ (촐싹대며) 또 왔어. 어떻게 밖에 나가기만 하면 새 책을 사 갖고 오냐. 내일이면 누군가 쫓겨나겠는데.  ▲정의/ (천천히 일어서 주변을 둘러본 후 딱딱한 목소리로) 서점에 나가는 순간 입양될 거라고 하더니 정말 그러네. 하루 만에 팔려오다니. 안 그래, 청춘?  ▲청춘/ (패기 넘치는 목소리로) 생각보다는 책이 많네. 주인이 책을 좋아하나 봐. (포터를 쳐다보며) 거기 안경 낀 학생. 이 집 분위기는 어때?  ▲포터/ (순간 멈칫하며) 학생이라니. 이래 봬도 당신보다 열살 이상 위라구. 뭐 아무튼 살을 부대끼며 계속 살게 될 테니 그 정도로 하고. 이 집 주인은 회사원인데, 책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사람이우. 보아하니 당신들이 정의와 청춘인 모양인데 요새 계속 산다산다 하더니 결국 왔구먼.  ▲정의/ 그런데 서 있을 곳도 없어 보이네.  ▲포터/ (심각한 표정으로) 그래서 당신들을 마음껏 반길 수 없는거유. 새로운 책이 오면 여기 중 누군가는 방을 빼야 한다는 거지.  ▲청춘/ (화들짝 놀라며) 그래요? 미안해서 이걸 어쩌나.    이때 구석에서 초라하고 늙은 모습의 ‘비극’이 천천히 걸어나온다. 온화한 모습이다.    ▲비극/ 아무도 자네들을 미워하지 않는다네. 마음의 양식이라는 둥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둥 우리를 떠받드는 것 같지만, 책 팔자는 주인 맘이라오. 많이 팔린다고 다 좋은 것도 아니고, 무조건 오래됐다고 책장에서 밀려나는 것도 아니고. 얼마 전 이 집에 왔던 재테크 서적은 베스트셀러라고 뻐기더니 이틀 만에 재미 없다고 어디론가 사라져 갔지.  ▲정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모습으로) 난 좀 다를 거유. 한국에서만 100만권이 넘게 팔렸거든요.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 얘기는 들어보셨나 모르겠네. 소설이나 재테크 책처럼 날 취급하면 안되죠.    여기저기서 키득키득대는 소리가 들린다.    ▲포터/ (한쪽으로 뛰어가더니 ‘시간’을 두드려 깨운다) 형님 등장하실 시간이에요. 강적입니다.    ‘시간’이 천천히 일어난다. ‘정의’ 쪽을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드러누워 잠든다.    ▲정의/ (얼어붙은 목소리로) 저 분이 누구신데요?  ▲비극/ 스티븐 호킹 교수가 쓴 ‘시간의 역사’라네. 전 세계적으로 1000만부 이상 팔린 친구지. 저 친구의 유일한 문제는 어렵다는 거야. ‘역사상 가장 안 읽힌 베스트셀러’라는 칭호까지 얻었지. 주인도 몇 번 시도하다가 실패하고는 저 상태로 계속 잠만 자고 있어. 똑같은 과학책이라도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화려한 사진 때문인지 열심히들 읽었는데. 쯧쯧.  ▲정의/ 그럼 처음부터 사질 말았어야죠.  ▲비극/ 어허. 책은 단순히 지식을 전파하는 도구가 아니라네. 사는 사람의 허영이나 욕망도 반영하고 있는 존재지. 남들이 읽었다면 읽어보고 싶고, 남들이 내가 그 책을 읽었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원하기도 하지. 내 보기엔 자네의 정의론도 호킹의 물리학과 별로 달라보이지 않네만.    ‘정의’, 갑자기 시무룩해져 주저앉는다. 이때 ‘청춘’이 나선다.    ▲청춘/ 그럼 여기 계속 있는 책은 공통점이라도 있는 건가요?  ▲비극/ 그거야 주인 따라 다르긴 한데. (‘포터’를 가리키며) 저 친구는 형제 23명이 이 집 책장에 있어. 워낙 유명해진 덕분에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있는데, 개봉 때마다 주인이 줄거리가 기억이 안 난다며 다시 꺼내지.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오만’을 쳐다보며) 저 숙녀분 역시 형제들이 다 이 집에 있지. 주인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제인 오스틴이거든. (‘청춘’에게 귓속말로) 오스틴이 사실은 글을 정말 못 썼고, 편집자가 엄청나게 고쳤다는 얘기를 듣고는 주인이 상심하기도 했어.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오며) 여기 이 친구는 ‘성공하는 사람의 7가지 습관’이라는 책인데. ‘청춘’ 자네의 조상쯤 되지. 물론 이 집 주인도 그렇지만, 이 책을 읽고 실제로 성공했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네. 여기 이 날씬한 친구는 ‘홀로서기’라고 아주 감성이 예민해. 한때 한국에도 시집이 베스트셀러 1위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산증인이야.  ▲청춘/ (가장 위쪽을 가리키며) 저기 저분은요? 같은 분들이 여럿인데요?  ▲비극/ (‘청춘’을 손끝을 따라가다가 황급히 눈을 내리깐다) 아.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이자, 기본적으로 몇 개씩 갖게 된다는 ‘성경’이라는 분이야. 굳이 분류하자면 역사책이신데, 최소한 60억권 이상은 팔리셨다더군. 겉표지부터 가죽이신데다 지퍼로 몸을 감싸고 계셔서 대화는 주인하고만 하시지.    ‘비극’이 힘들어하며, ‘포터’를 향해 손끝을 까닥인다.    ▲포터/ 저 옆에 하얀 표지에 두꺼운 분은 ‘정석’인데, 한국 고등학생들의 필수 참고서 같은 거지. 근데 전 세계 100대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렸다는 거 아니야. 4000만권쯤 팔렸고, 아직도 매년 100만권 가까이 팔리지. 머리쪽에 때가 많이 탄 것은 사람들이 매번 새로운 마음 어쩌고 하면서 처음 부분만 집중적으로 봐서 그렇대. (‘세계’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며) 아니 저 분도 아직 계셨네. 한국 자서전의 시조쯤 되는 분인데, 대기업 회장님이 쓰신 책이지. 근데 그 기업이 망하고 그러면서 절판됐다던데. 그 옆에 우울한 표정의 친구는 ‘파수꾼’. 그냥 성장소설일 뿐인데, 테러범이나 사이코패스들의 범행현장에 자꾸 발견되는 통에 괜한 오해를 사고 있는 불운한 책이지.  ▲청춘/ 저기 곰돌이 그려진 책은요?  ▲포터/ ‘곰돌이 푸’. ‘어린왕자’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같은 친구들은 다른 집에서는 애들이 크면 다 버리던데, 이 집 주인은 시집올 때 가져왔거든.  ▲청춘/ 저런 동화책들은 얼마나 좋을까요. “그후로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다.”는 뻔한 얘기만 해도 다들 예뻐라 하잖아요.  ▲포터/ 그게 그렇지가 않더라고. 쟤 결말이 크리스토퍼 로빈이 크면서 더 이상 푸와 숲속 친구들을 찾지 않게 되는 거더라고. 사실 백설공주도 원래는 왕비를 데려다가 뜨거운 불판에서 맨발로 춤을 추게 했다나 뭐라나.    이 때 ‘정의’가 벌떡 일어나 뚜벅뚜벅 걸어나온다.    ▲정의/ 다 좋은데 쟤는 도대체 뭡니까. (정의가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물방울’이 있다.) 만화책 나부랭이는 왜 있는거죠?  ▲포터/ (‘물방울’ 쪽으로 뛰어가 앞을 가리고 ‘정의’를 향해 혀를 내민다.) 너도 정신 차리려면 멀었다. 책의 가치는 주인이 정하는 거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지금까지 와인에 대한 어떤 책도 얘만큼 많은 정보를 주진 못했다구. 니가 아무리 베스트셀러라도, 팔리는 순간 니 운명은 주인 맘이야. 주인이 외면하면 넌 그냥 종이쪼가리라니까.    이때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책들 황급히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순식간에 암전된다.    #3.    잠옷 차림의 혜진 들어와 불을 켠다. 책장을 살핀다.    ▲혜진/ 잠이 안 오는데 책이나 읽어야지. (구석에서 ‘시간’을 발견한다.) 이 책이 아직도 있었네. (웃음) 오랜만에 한번 다시 도전해 볼까. 뭐 읽다 보면 잠이라도 오겠지.    혜진 불을 끄고 시간을 들고 퇴장한다. (끝)    ※도움말 주신 분 : 김현정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담당 북마스터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비단장사 왕서방’ 개인전 여는 임동식

    ‘비단장사 왕서방’ 개인전 여는 임동식

    동·서양의 대비를 강렬하게 느껴볼 수 있는 자리다. 무엇보다 간결하게 툭툭 치고 끊어 버리는 붓질이 시원스럽다. 오는 26일까지 서울 송현동 이화익갤러리에서 열리는 임동식(66) 개인전 ‘비단 장사 왕서방’ 얘기다. 전시는 동양의 비단 포목점과 서양의 양복점을 대비시켰다. 화려한 문양의 비단 천이 가득한 가게에 있는 동양 ‘왕서방’과 곧추 선 손님의 치수를 재느라 마치 몇 배속으로 돌린 짐 캐리(미국 영화배우)처럼 움직이는 서양 ‘왕서방’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캔버스에 담았다. “사변적인 서양과 정감 있는 동양을 대조해 보고 싶었다.”는 게 작가의 말이다. →왜 하필 비단 대 양복인가. -동양의 문양성에 집중해 보고 싶었다. 문양은 약간 민속 미술, 토속 미술 같은 취급을 받아왔다. 컨셉트를 중시하는 서양 미술 전통에서는 더더욱 퇴기 취급을 받았다. 그런 걸 한 번 전복해 보고 싶었다. 지적인 기반을 중시하는 서양 미술의 끝자락은 도대체 어디쯤인가라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다른 이유도 많다. 색깔도 다르고, 지어 입는 방식도 다르고…. →안 그래도 색 느낌이 극히 대조적인데. -도시 문명이란 게 그렇다. 우리 농촌만 떠올려 봐도 알록달록 색동옷도 있고 그렇지 않나. 그런데 도시 문명은 워낙 번쩍대는 것들이 많으니 옷에 무거운 색을 많이들 쓴다. 특히 양복은 더 그렇다. 지하철 타 보면 남자들은 대부분 검은색 일색이다. 옷 색깔을 그렇게 무겁게 해야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게 도시 문명의 특징인 것 같다. →왕서방을 키워드로 동·서양 대비를 끌어낸 게 재밌다. -독일에서는 이런 말을 한다(그는 독일 함부르크미술대 출신이다). 서양은 아벤트란트(Abendland), 동양은 모르겐란트(Morgenland). 밤의 나라, 아침의 나라라는 뜻이다. 필름 사진 시절에는 코닥과 후지가 달랐단다. (일본 필름인) 후지는 벚꽃을 찍어야 하니 화사한 톤에 맞췄고, (미국 필름인) 코닥은 어두운 서양 톤에 맞춘 거였다. 그래서 후지로 서양 찍고, 코닥으로 동양 찍으면 사진의 맛이 안 났다고 한다. 정일성 촬영감독 별명이 ‘소방수’인 거 알고 있나. 화사한 빛의 톤을 살리기 위해 촬영 전 현장에 미리 물을 뿌린단다. 그래야 햇볕이 번지면서 고명도의 빛감이 살아나니까. 동·서양의 그런 느낌 차이를 캔버스에 주려 했다. →그림 속 인물도 대조적이다. 동양 왕서방은 누드인데 서양 왕서방은 엄격히 치수를 재는 모습이다. -그런 부분도 마찬가지다. 치수 재는 행위는 굉장히 규격에 맞춘 구속적인 행위다. 서양 왕서방에게는 그걸 표현해 주고 싶었다. 그에 반해 비단은 그야말로 자연 아닌가. 비단 가게에 어울리는 형태는 누드라고 생각했다. 동양 왕서방에게는 스토리도 담겨 있다. 퇴락해 가는 전통 문화, 즉 왕서방은 대체 어디로 가고 그 유산은 누가 물려받는가 하는 문제다.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비단 포목점 유산을 어떻게, 누가 이어받을 것인가가 인물들의 동작에 다 들어 있다. 전시는 하지 않았지만 맨 마지막 작품은 할아버지 기저귀를 손자가 갈아 주는 장면으로 마무리했다. 거기에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고 보니 동양 왕서방은 비슷한 인물이 반복적으로 이어진다. 특정 모델이 있나. -그게 재밌다. 오완근씨라고, 공사 현장 인부다. ‘왕서방’이란 작업을 하는데 사진을 찍겠다고 했더니 그 사람 하는 얘기가 자신도 왕년에 이름 때문에 왕건, 왕서방으로 자주 불렸다며 흔쾌히 허락하더라. 그래도 초면에 옷 벗자고 할 수 없어서 사진은 옷 입고 찍되 그림 속에서는 누드로 할 거라고 했더니 어떻게 그림을 가짜로 그릴 수 있느냐며 함께 목욕탕에 가자더라. 덕분에 사실적으로 그릴 수 있었다(웃음). →홍익대 회화과 출신에 독일 유학까지 다녀왔다. 최신 유행은 다 해 봤을 거 같은데 왜 이런 작업으로 돌아섰나. -1970년대 홍대에 다녔는데 팝아트를 제일 먼저 한 게 우리들이었을 거다. 최신이란 거는 다 해 봤다. 그런데 서양 미술은 지나치게 사변적이다. 흰 캔버스를 앞에 두고 뭘 그릴까 한참 고민하다 아무것도 그리지 않기로 하면 그게 곧 예술이 되는 거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개구리를 안 보고 그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탐미적 탐닉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돌아선 거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식민지 조선의 강요된 ‘명랑화 운동’

    대략 2년 전쯤의 일이다. 소래섭 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는 1930년대 작가인 박태원과 김기림의 작품 속에 ‘명랑’(明朗)이라는 단어가 유독 많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소 교수는 이후 일제강점기 신문과 잡지를 탐색해 ‘명랑’의 문화사적 의미 변화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명랑’의 끝자락에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암울한 현실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유쾌하고 활발하다.’는 뜻의 평범한 단어 하나에 놀라운 역사적 역설이 숨겨져 있었던 것.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웅진지식하우스 펴냄)는 명랑이란 단어에 주목해 우울한 근대를 읽어낸다. 총독부와 근대 자본주의가 강요한 명랑의 홍수 속에서 1930년대는 웃음이 넘쳐난 시대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대다수 지식인과 예술가, 학생, 노동자들은 우울에 젖어갔다. 저자는 일제가 당시 조선에선 잘 쓰이지 않던 ‘명랑’이란 단어를 의도적으로 앞세우기 시작했다고 지적한다. 총독부가 벌인 ‘대경성 명랑화 프로젝트’가 단적인 예다. 경성이 급속하게 팽창하면서 보건 위생과 치안 등 여러 문제점을 드러내자, 총독부는 이를 바로잡겠다며 도시 명랑화 정책을 펴기 시작한다. 하지만 실제 목적은 체제에 저항하는 세력을 억압하고 체제순응형 인간을 양성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경성에 ‘명랑’이란 감정이 이식되기 시작했다. 학교는 ‘언행일치의 명랑한 인격’을 양성하라는 지침에 따라 ‘모범 인간’ 양성에 나섰고, 주류 언론들은 퇴폐적이고 저속한 유행가 대신 명랑한 유행가를 현상 공모하기도 했다. 산책 즐기는 남자를 부축해주는 ‘스틱 걸’과 당구장에서 손님과 함께 게임을 하는 ‘빌리어드 걸’, 주유소의 ‘가솔린 걸’ 등 화려한 용모와 미소로 명랑을 꽃피우는 온갖 ‘걸’들이 출현한 것도 이 시기였다. 이러한 ‘강요된 명랑’의 잔재는 ‘명랑화 운동’이나 ‘사회 명랑화 캠페인’ 등을 통해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저자는 1990년대 이후 ‘명랑화’라는 말은 자취를 감췄지만 자신의 감정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순응만을 강요하는 명랑화는 ‘행복화’나 ‘쿨’ 등의 레토릭으로 대체된 채 여전히 살아있다고 꼬집는다. 88만원 세대의 ‘쿨’ 또한 1930년대 ‘명랑 가면’의 21세기 버전에 불과하다는 것. 저자는 만화 명랑소녀 캔디를 통해 ‘외로워도 슬퍼도’식 명랑화로부터 벗어나라고 충고한다. “진정한 명랑이란 자신의 진실한 감정과 대면하고 슬픔까지 껴안을 수 있을 때만 찾아오는 것이니, 바늘로 허벅지 찔러가며 쿨한 척 애쓰지 말고 자기 감정의 주인이 되라.”고 말이다. 1만 3800원.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지방시대] 지방 대학과 지자체의 상생/박경량 순천대 대학원장

    [지방시대] 지방 대학과 지자체의 상생/박경량 순천대 대학원장

    우리는 지금 저출산·고령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게다가 농촌을 포함한 지방은 상주인구 감소로 갈수록 활력이 떨어지고 있다. 지방의 중소도시에서는 대도시로, 또 지방의 대도시에서는 교육 등을 이유로 수도권으로 인구가 이동하고 있다. 그런데 고민은 우리나라 전체의 인구증가율, 출산율이 계속 낮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교육과학기술부의 교육 통계자료에 따르면 고교졸업자가 2012~2015년에는 60만명 초반을 유지하지만 2021년에는 42만 6000여명으로 급감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학령인구의 감소는 초·중등은 물론 대학 교육환경에도 큰 변화가 예상된다. 이는 곧바로 대학의 구조조정과 산업구조 재편에 영향을 줄 것이다. 인구의 감소는 대학과 지방자치단체의 위기로 직결된다. 상생할 수 있는 지혜로운 해법을 모색할 시점이다. 현재 위기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대학과 지자체의 역할과 소임을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대학은 그 지역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유형·무형의 기여를 하고 있다. 지역경제 활성화와 지역문화 창달은 그 한 예다. 지식과 정보가 넘치는 지식정보화사회, 지속적으로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평생학습사회, 모든 경계가 물리적·화학적 차원에서 무너져 내리고 합쳐지는 융·복합시대 속에서 원리와 체계를 세워주고 있다. 유형과 무형의 세계, 미시와 거시의 세계를 이어주는 철학과 비전을 끊임없이 제공해 주고 이끌어 주는 것은 아무래도 대학일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보더라도 오늘날 대학은 또 다른 차원에서 그 역할과 소임이 막중해졌다고 할 수 있다. 지자체는 특히 인문학과 순수예술과 같은 영역을 전공한 대학 졸업생들이 그 지역에 상주, 지역사회가 그들이 터득한 지식과 기술과 능력을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식생산 연계망을 지역사회의 공공영역을 구축하는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다양한 형태의 도서관·박물관·미디어센터와 같이 공공성이 강조되는 시설물들을 구축하고 늘려나감으로써 지역문화를 창달해야 한다. 이를 통해 대학과 지자체의 유기적인 협력관계를 돈독하게 하고, 지역의 품격을 고양시킬 수 있다. 지자체의 이러한 정책과 지원은 대학을 학교기업화·취업기관화하려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더욱 중요하다. 모르는 사이에 대학의 교육적·학문적·사회비판적 가치 등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되고, 오로지 경제적 가치만 부각되는 현 상황에서 바로 대학을 대학답게 살려주는 하나의 해법이 될 수 있다. 대학과 산업체의 협력관계는 대학 내에 설치된 산업협력단을 통하여 어느 정도 활성화되고 있으나, 대학과 지자체 간의 협력프로그램은 극히 소수의 대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대학과 지자체는 그 지역의 경제적·정신적·문화적 차원의 삶의 질을 높이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두 기관의 역할과 소임에 대한 재인식과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 핀란드의 쿠오피오 시가 지역 소재 대학, 정부기관 그리고 기업체 등과 협력해 시와 그 주변을 유럽에서 가장 앞서가는 웰빙지역으로 만드는 ‘건강쿠오피오 프로그램’은 건강특화도시를 추구하면서 시와 대학과 기업이 상생하는 좋은 본보기다.
  • 서울지역 대학들 경기도로 몰린다

    서울지역 대학들 경기도로 몰린다

    서울 지역을 비롯한 전국의 대학들이 미군기지 반환이 예정된 경기도로 몰려들고 있다. 미군반환공여지에 대한 지원 특별법으로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토지를 매입할 수 있고, 수도권에 위치하는 등 입지 조건에서도 유리하기 때문이다. 6일 경기도에 따르면 서울대를 비롯해 건국대, 성균관대, 서강대, 동국대 등 서울 지역 14개 대학이 경기 지역에 캠퍼스 유치를 추진하고 있다. 특히 최근 토지보상 문제로 국방부와 이견을 보였던 이화여대가 토지 매입과 관련해 긍정적인 재협의에 나서면서 유명 대학들의 유치에도 청신호를 켜고 있다. 현재 국방부는 이화여대 파주 캠퍼스가 들어설 월롱면 영태리의 미군기지 캠프에드워드 29만 9000㎡에 대한 땅값 재감정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국방부는 이화여대 파주 캠퍼스와 관련, 해당 부지 땅값을 1750억원으로 평가하고, 그 이하로는 매매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반면 이화여대는 지난해 2월 감정평가를 시행한 뒤 652억원 이상으로는 매입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혀 양측 간 갈등이 지속됐다. 주한미군기지의 대표 도시인 동두천시의 경우 첫 번째 반환공여구역 사업으로 상패동 일원에 침례신학대학교 동두천캠퍼스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을지대학교는 의정부시 금오동 일원 의정부 캠퍼스에 대한 TF를 구성하고 도시기본계획 변경 절차를 진행 중이다. 남양주시 호평동 일원에 추진 중인 상명대학교 남양주 캠퍼스는 관련 용역을 진행하고 있다. 동국대는 이미 일산에 바이오메디융합캠퍼스 건립 공사를 완료해 지난 3월 2일 문을 열었다. 반환공여지역 지원법에 따른 각종 혜택과 수도권 인재 영입이 유리하다는 게 큰 매력이다. 동국대는 경기 북부 이전을 통해 약학대학 설치를 인가받았으며, 보건복지부 산하 보건의료기술(HT) 고속화사업 공모(전국 2개대학)에 선정되는 등의 혜택을 받았다. 연극코메디과, 만화게임영상과 등 4개과가 이전할 예원예술대도 관련 분야 업체로부터 스튜디오 설치 등 협력 제의가 개교 이전부터 들어오고 있다. 동국대 약대의 경우 지역 고교 특례입학제를 통해 정원의 20%를, 을지대와 침례대는 입학 정원 10% 이상을 우선 선발할 계획이어서 지역민의 뜨거운 호응도 얻고 있다. 남양주시는 서강대를 유치하기 위해 그린벨트 해제 관련 용역을 추진하고 있으며, 시흥시는 서울대 국제캠퍼스유치를 구체화하고 있다. 장충식기자 jjang@seoul.co.kr
  • “무상 달콤한 유혹에 현혹되지 말아야”

    “무상 달콤한 유혹에 현혹되지 말아야”

    “무상복지는 한정된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재정을 어려움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태공(太空) 송월주(76) 스님이 3일 주지로 있는 서울 구의동 영화사에서 ‘나의 불성을 깨우고 남의 불성을 돌봅시다’라는 부처님오신날 봉축 법어를 전한 뒤 최근 정치권에서 갈등을 빚고 있는 사회 현안 등에 대해 쓴소리를 쏟아냈다. 스님은 “현실 정치에 대해 발언하는 것은 조심스럽지만 종교지도자로서 사회 발전과 사회적 갈등을 해소해야 할 책임감이 있다.”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무상복지에 대해 스님은 “위정자들의 정치적 주장과 선전이 때론 부처님의 가르침을 흐리게 한다.”면서 “노력 없이 얻는 열매는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이것이 바로 무상복지라는 달콤한 유혹에 현혹되지 말아야 할 이유”라고 말했다. 이어 “수조원이 예상되는 무상의 구호와 정책이 중생을 구하고 살리는 길인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도 했다. 그는 이날 ‘무상급식 주민투표 청구인 서명부’에 서명하기도 했다. 스님은 ‘불자행도이 내세득작불’(佛子行道已 世得作佛·불자가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 부처를 이룰 수 있다)이라는 말을 인용하며 “국민의 세금으로 표를 얻는 행위는 이번 기회에 뿌리 뽑아야 한다.”며 주민투표에 동참할 것을 당부했다. 스님은 “늦은 감은 있지만 최근 비생산적인 갈등과 분쟁을 보면서 답답해 나서게 됐다.”며 “다만 나의 발언은 불교계를 대표하는 것이 아닌 개인적 소신”이라고 선을 분명히 그었다. 글 사진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끊임없이 적을 만드는 전쟁 선동자…‘지지 않는 탐욕의 해’가 만든 분쟁사

    분쟁 지역 취재를 하던 히로세 다카시는 어느 날 이스라엘 가자 지구를 찾아가 팔레스타인 난민을 만난다. 고통과 증오로 범벅된 눈빛으로 삶을 영위하는 이들을 만나고 돌아온 저녁에는 팔뚝에 나치 강제수용소의 문장과 수인 번호를 찍은 채 살고 있는 이스라엘 여성을 만난다. 어느 한쪽에 서서 다른 한쪽을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도 없는 상황을 몸으로 직접 맞닥뜨린 셈이다. 그리고 인류사에서 벌어진 전쟁과 갈등의 근본적 원인에 대해 스스로 묻고, 묻고, 또 묻는다. 고민과 성찰 속에서 그는 역사 속 한 인물을 만난다. 군사이론 교범서 ‘전쟁론’을 쓴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1780~1831)다. 히로세는 평화와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하면서도 역설적으로 근대사에서 전투와 전쟁의 기술적 이론을 만들어 내며 ‘천재적 군사 전략가’로 일컬어지는 이를 호출하며 전쟁의 근본 원인에 대한 의문을 풀어 가기 시작한다. ‘왜 인간은 전쟁을 하는가’(히로세 다카시 지음, 위정훈 옮김, 프로메테우스 펴냄)는 47장의 지도를 앞세워 시작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5년부터 1991년까지 해마다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전쟁과 전투, 분쟁을 빼곡히 채워 놓은 분쟁사 연속 지도다. 지도는 지구상에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전쟁이 계속돼 왔음을 한눈에 보여 준다. 구구한 말과 설명 없이도 지도 자체가 전쟁의 지긋지긋함을 웅변해 준다. ‘1인 대안 언론’이자 ‘평화와 대안의 삶’을 직접 실천하며 사는 히로세는 생생하고도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며 전쟁이 세상과 인류를 어떻게 절멸시키는지 생생히 보여 준다. 1984년에 처음 쓰여진 책으로 히로세 평화사상의 원형과도 같다. 평화운동의 고전으로도 꼽힌다. 책의 원제목이 ‘클라우제비츠의 암호문’인 것에서 짐작되듯 그는 전쟁이 미치는 해악과 무엇을 이용해 학살을 자행했는지, 누가 전쟁을 지시했는지를 클라우제비츠가 ‘전쟁론’에서 밝힌 이론을 차용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던진 ‘전쟁의 이유’라는 질문에 ‘클라우제비츠형 인간’이 끊임없이 적을 생산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는 쉼 없이 전쟁을 지향하며 주변을 선동하는 사람을 ‘클라우제비츠형 인간’이라고 구분 짓는다. 히로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사는 ‘클라우제비츠형 인간’에 의한 ‘전쟁 선동사’였으며 이들이 적을 만들어 내는 능력에 의해 전쟁이 이뤄진다고 결론짓는다. 전쟁의 근원적 이유를 탐구하기 위해 클라우제비츠를 불러냈다가 다시 그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셈이다. 히로세에 따르면 역사 속 ‘클라우제비츠형 인간’은 나폴레옹, 클라우제비츠로부터 시작해 히틀러, 스탈린, 부시, 앨런 덜레스(미국 CIA 국장) 등으로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며 이어져 왔다. 그리고 전쟁사는 ‘전쟁 선동사’였다고 규정하고 전쟁은 인간의 본성에 의한 결과물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내용은 분쟁 지도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클라우제비츠형 인간’은 A전쟁 프로젝트를 완수하면 곧바로 B전쟁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그래서 히로세는 권유한다. 독자들 또한 자신처럼 매일 신문에서 분쟁 기사를 보며 분쟁 지도를 만들어 보라고. 미국이건, 구 소련이건 가릴 것 없이 전쟁으로 탐욕을 채워 가는 존재들은 집요한 취재의 결과물 앞에서 낱낱이 까발려진다. ‘핵을 중심으로 한 군사력이 전쟁을 억지한다.’는 논리에 대해 히로세는 “핵은 오로지 핵전쟁만을 방지하고 핵이 없는 나라의 군사적·경제적 지배만을 가능하게 했을 뿐”이라며 그 허구성을 논박한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도 개운찮은 구석이 있다. 뭔가 말을 마치지 않고 책을 닫는다는 느낌이 들 수 있다. ‘클라우제비츠형 인간’들이 철저히 개인과 집단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고 했는데 추구하는 ‘이익’의 실체 등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어서다. 히로세는 2년 뒤 ‘제1권력-자본 그들은 어떻게 역사를 소유해 왔는가’를 출간했다. 국내에서는 이 책이 첫 번째 책 ‘왜 인간은’보다 먼저 나왔다. 히로세는 두 책을 통해 전쟁과 자본의 연관성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며 자신의 이론을 완성해 나간다. 한국전쟁 때 자행된 세균 전쟁의 진실과 1983년 여객기 격추 사건에 얽힌 음모, 한국과 일본의 군대를 이용한 방위 시스템을 구축해 ‘손 안 대고 코 푼’ 미국 CIA의 첩보전 실상 등도 곁들여져 있다. 세계 패권을 둘러싼 치열하고 야만적인 전쟁의 역사 속에서 한반도 역시 주요 전장이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1만 8000원.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동반성장 손 맞잡은 기업·사회] 동서식품

    [동반성장 손 맞잡은 기업·사회] 동서식품

    동서식품은 주력 제품인 커피처럼 향긋한 문화사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대표적으로 ‘동서커피문학상’이 있다. 1만 7000여 편의 응모작이 접수될 정도로 전문성과 정통성이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아마추어 여성 문학상으로 자리매김한 이 행사는 1973년 ‘주부에세이’로 첫발을 디딘 후 1989년 ‘동서커피문학상’으로 이름을 바꿔 2년마다 열리고 있다. 2004년부터는 대상과 금상 수상자들에게 등단의 기회도 제공, 여성문인의 산실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2008년 창립 40주년을 기념해 ‘동서커피클래식’을 마련, 해마다 커피가 가장 잘 어울리는 가을에 음악회를 열고 있다. 커피향처럼 나눔을 퍼뜨리는 ‘맥심 사랑의 향기’도 2009년부터 진행되고 있다. 미국 카네기홀 공연으로 화제가 됐던 부산 소년의 집 ‘알로이시오 관현악단’, 국내 유일의 면 단위 관악오케스트라인 산청 신안초등학교의 ‘신안 윈드오케스트라’, 대전 지역 저소득가정의 청소년들로 이뤄진 태화오케스트라단을 후원해 왔다. 맥심커피배 입신최강전은 신의 경지에 올랐다는 9단들만이 참여하는 권위 있는 바둑 대회로 대접받는다. 동서식품장학회를 통해 1996년부터 지금까지 중·고·대학생 1473명에게 총 20억 4900여 만원의 장학금을 지급, 저소득가정 청소년들의 꿈을 든든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이 밖에 국립암센터에서 암으로 투병 중인 환우들과 그의 가족들을 위한 시음행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사랑의 연탄 나르기, 환경정화운동, 급식봉사활동 등 다양한 봉사활동으로 우리 사회의 구석진 곳을 밝히고 있다. 동서식품 안경호 홍보실장은 “앞으로도 다양한 문화 나눔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쳐 삶의 향기를 전파하는 따뜻한 기업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감사원 “고객 외면 KT에 과징금 부과하라” 통보하자… 부실감독 방통위 “104억 내라” 면피용 뒷북

    감사원 “고객 외면 KT에 과징금 부과하라” 통보하자… 부실감독 방통위 “104억 내라” 면피용 뒷북

    “KT의 배짱영업과 방송통신위원회의 부실감독에 소비자는 울화통이 터진다.” 집전화 정액요금제에 무단 가입된 KT 고객들의 피해가 고객을 우롱하는 영업행태와 이를 지도감독해야 할 방송통신위원회의 직무유기로 더 커진 것으로 감사원 감사결과 드러났다. 감사원은 25일 가입자의 동의 없이 집전화 정액요금제에 무단 가입시킨 KT에 대해 과징금을 부과하도록 방송통신위원회에 통보했다. 또 가입 고객의 데이터 삭제로 인해 피해발생이 우려될 경우 일정기간 고객데이터의 삭제를 중지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토록 주문했다. 감사원의 이 같은 조치는 2002년 9월 출시된 KT의 집전화 정액요금제 무단가입 행위와 관련, 방송통신위원회가 직무를 유기했다는 서울 YMCA의 감사청구(2010년 10월 7일)에 대한 감사결과에 따른 것이다. 감사결과 KT는 2002년 9월 집전화 정액요금제 상품을 출시한 이후 지난해 5월까지 고객 263만여명을 몰래 무단 가입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KT의 정액요금제 가입 고객은 전체 1342만 8000여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액요금제는 월평균 전화사용료에 추가요금을 내면 무제한으로 통화를 할 수 있는 제도이지만 휴대전화 보편화로 일부 가입자는 오히려 손해를 보게 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같은 해 10월부터 민원제기가 잇따랐다. 하지만 방통위는 KT의 정액요금제에 대한 민원 급증에도 불구하고 6년여 동안 행정지도만 하다가 2008년 1월에야 사실조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2007년 정액요금제 신규가입 156만여건에 대해서만 실시해 무단 가입 행위는 13만 7000여건을 적발하는 데 그쳤다. 이후 KT는 집전화 해지 후 6개월이 지난 경우 고객 데이터가 삭제됐다며 피해고객에게 환불을 해주지 않으면서 다시 민원이 증가하자 지난해 5월 전체 가입자에 대해 사실조사를 실시해 추가로 249만여건의 무단가입 사실을 확인했다. KT의 이 같은 무단 가입과 환불 불응에는 KT의 오만한 경영도 문제지만 방통위의 감독소홀이 한몫한 것으로 감사원 감사결과 드러났다. KT가 환불을 거부했다면 방통위는 전기통신사업법에 따라 즉시 사실조사에 착수해 과징금을 부과했어야 했다. 하지만 방통위는 이 같은 민원접수 후 7개월이 지난 2010년 5월 17일 사실조사에 착수했다. 더구나 KT에 고객데이터 삭제를 중지하도록 명령할 법적 근거가 없다는 사유로 즉시 자료보전도 요청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로 인해 2009년 10월 20일부터 2010년 9월 30일까지 정액요금제 가입자 중 전화를 해지한 후 6개월이 지난 고객의 자료는 모두 삭제돼 소비자 단체 등으로부터 행정신뢰를 크게 훼손했다고 감사원은 지적했다. 방통위는 이날 전체회의를 개최해 KT가 가입자의 의사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유선전화 정액제 가입자를 모집한 행위에 대해 104억 9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고 시정명령을 내리기로 의결했다. 이동구·유지영기자 yidonggu@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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