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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자호란 다시 읽기] (53) 끝없는 가도의 風雲

    [병자호란 다시 읽기] (53) 끝없는 가도의 風雲

    인조가 원종 추숭을 위해 골몰하고 있을 때 가도의 상황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반란을 일으켜 조선의 정벌 대상이 되었던 유흥치(劉興治)는 조선에 대한 물자 징색(徵色)을 멈추지 않았다. 유흥치를 토벌하려 했던 ‘원죄’ 때문에 조선은 그의 보복을 받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1630년(인조 8) 8월, 비변사는 총융사 휘하의 경포수와 어영군을 평안병사 유림(柳琳)에게 배속시키고 도내의 정예병을 안주, 정주, 구성 등지에 배치하여 유흥치 일당의 노략질에 대비할 것을 청했다. ●가도 정벌 시도의 후유증 1630년 8월 유흥치는 차관 이매(李梅)를 서울로 보내, 조선이 자신을 공격하려 했던 까닭을 힐문하려 했다. 인조는 처음에는 그와의 면담을 회피했다. 하지만 결국 그를 만나 토벌 시도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다. 유흥치는 9월에도 차관 이현(李見)을 보내왔다. 그는 먼저 ‘정충신이 가도 사람들이 배 만들고 숯 굽는 것을 방해했다.’고 비난했다. 정충신이 토벌에 나섰을 때 유흥치의 정탐꾼들을 체포하고 한인들을 살해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유흥치는 이어, 굶주리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양곡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뻔뻔함의 극치였다. 인조는 이현에게 요구를 대체로 수용하겠다고 했다. 같은 해 10월, 인조는 문안관 정유성(鄭維城)을 가도로 보냈다. 유흥치는 ‘기공대첩(奇功大捷)’이란 글자를 쓴 깃발을 세워놓고 정유성을 만났다. 그는 정유성에게 자신이 섬 안의 훼방꾼들을 제거했는데 조선이 자신을 왜 공격하느냐고 힐문했다. 그러면서 ‘조선이 천조(天朝)를 범하는 오랑캐는 토벌하지 않으면서 명나라 장수를 향해 군사를 들이대는 까닭이 무엇이냐?”고 다그쳤다. 정유성은 대꾸할 말이 없었다. 머쓱해진 정유성에게 유흥치는 본색을 드러냈다. 섬 안에 군량이 부족하니 조선이 그것을 공급하라고 다시 요구했다. 조선은 군사를 일으켜 아무런 성과도 얻어내지 못하고 힘만 낭비한 꼴이 되고 말았다. 유흥치에게 약점을 잡혀 코가 꿰인 셈이었다. 유흥치는 정유성을 만난 직후, 평안도 일대에 부하들을 보내 곡물을 운반해 오도록 했다. 그들은 조선 관민들에게 수천 석의 군량을 빨리 운반하라고 독촉했다. 유흥치는, 압록강이 얼기 전에 군량을 보내주지 않으면 군사들을 평안도에 풀어놓겠다고 협박했다. 유흥치가 가도로 돌아온 뒤 조선에 보낸 게첩(揭帖)에는 모욕적인 언사가 많았다. 김상헌이 회답서를 썼는데, 유흥치의 무례함을 질책하고 비판하는 내용이 있었다. 인조는 유흥치가 노여워할까 우려하여 내용을 고치라고 지시했다. 김상헌은 인조의 지시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인조는 김상헌에게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고, 김상헌은 홍문관 부제학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맞섰다. 도무지 일관성이 없는 인조의 태도도 유흥치의 작폐를 조장하고 있었다. ●유흥치의 수탈이 격화되다 유흥치가 반란을 일으킨 뒤 명 조정은 가도에 대한 군량 공급을 중단했다. 굶주림을 이기지 못한 가도의 한인들은 조선에서 토색질을 벌였다. 조선의 관민들 가운데는 한인들의 작폐에 시달리다 못해 그들을 습격하는 경우도 있었다.1630년 12월, 중화의 대장(代將) 양덕위(梁德渭)는 노략질을 일삼는 한인들을 공격하여 17명을 살상했다. 조정 일각에서는 유흥치가 알게 되면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하여 양덕위를 처벌하자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평안감사 민성휘의 의견은 달랐다. 양덕위를 살인죄로 처벌한다면 한인들이 더욱 거리낌 없이 난동을 피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조선 관민들의 ‘자구책’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역시 같은 해 12월에는 황주의 백성들이, 배를 수리하기 위해 왔던 한인들을 습격하여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화가 난 한인들은 황주 관아로 몰려가 주동자 색출을 요구했다. 자신들의 작폐에 대한 조선 관인들의 태도가 과거와 달라진 것을 절감한 유흥치는 대책을 마련했다. 그는 우선 서울 등지에 정탐꾼을 들여보냈다. 정탐꾼들은 사대부가와 여염을 돌아다니며 조선 사정을 파악하려고 골몰했다. 그들이 무엇보다 관심을 가졌던 것은 조선과 후금의 왕래 상황이었다. 정탐꾼들을 통해 파악된 정보를 바탕으로 유흥치는 잔꾀를 부리기 시작했다.1630년 11월, 전국해(錢國海)라는 자가 등래순무(登萊巡撫) 손원화(孫元化)의 차관이라 칭하며 조선으로 출발했다. 그는 ‘조선에서 군량 2만석과 전마 3000필을 얻어 유흥치에게 공급한다.’고 떠벌렸다. 가도에서 그를 만났던 조선 접반사 이경헌(李景憲)은 ‘조선에서는 전마를 키우지 않고 평안도는 이미 황폐화되어 군량을 더 이상 마련할 수 없다.’고 조선행을 만류했다. 전국해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서울로 올라왔다. 전국해는 본래 유흥치의 부하였다. 유흥치는 그에게 위조한 자문(咨文)을 주었다. 자문의 내용은 가관이었다.‘명 조정은 이제 유흥치를 용서했다. 감격한 유흥치는 공을 세우고 싶지만 식량과 전마가 부족하여 이웃에 의지해야만 한다. 듣건대 조선이 후금을 돕고 한인들을 많이 죽였다는 소문이 있다. 부득이하게 후금에게 머리를 숙인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조선이 명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않았는지의 여부는 곡식과 전마를 제공하는가에 달려 있다. 즉시 전마 2000필을 가도로 보내고 한인들을 핍박하지 말라’. 조선이 후금과 우호적으로 지내는 것을 빌미로 군량과 전마를 뜯어내려는 수작이었다. 조선 조정은 전국해의 정체를 금세 알아차렸다. 과거부터 등래 군문(軍門)이 바다 건너 조선으로 사람을 보내 군량과 전마를 청했던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국해는 인조를 만났을 때, 자신이 손원화가 보내서 온 차관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인조는 양곡과 전마를 보내달라는 그의 요구를 거부했다. 비변사는 서울에 있는 한인들을 모두 색출하여 가도로 돌려보내자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 상인과 역관들이 가도에 들어가 무역하는 것을 엄격히 제재하자고 했다. 그들을 통해 조선 사정이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처였다. 바야흐로 조선과 유흥치 사이의 긴장이 높아가고 있었다. ●계속되는 가도의 변란 1631년(인조 9) 1월, 가도로 들어간 조선 문안관을 만났을 때 유흥치는 다시 길길이 뛰었다. 그는 한인들을 살해한 범인을 체포하여 자신에게 묶어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러지 않으면 병력을 풀어 자신이 직접 살인자를 찾아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유흥치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명 본토로부터 군량 공급이 여의치 않은 데다 조선 또한 과거처럼 고분고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흥치는 결국 1631년 3월, 부하 장도(張濤)와 심세괴(沈世魁) 등에게 피살되었다. 유흥치는 가도를 통제하는 것이 여의치 않자 후금으로 투항을 시도하다가 심세괴 등의 반발을 사서 죽은 것이다. 모문룡과 원숭환이 죽은 뒤, 사실상 방치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가도의 난맥상이 여지없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가도에서 다시 일어난 변란의 불똥은 조선으로 튀었다. 인조는 유흥치가 후금으로 투항을 시도하다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가도 정벌’을 다시 운운했다. 그런데 당시는 ‘가도 정벌’을 운운할 상황이 아니었다.1631년 5월, 후금의 홍타이지는 조선 사신을 만난 자리에서 협박을 늘어놓았다. 그는 우선 조선이 보낸 방물(方物)의 양이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어 ‘굶주린 유흥치가 자신에게 귀순하려고 했는데 조선이 식량을 공급해 주는 바람에 귀순을 거부했다.’고 따졌다. 그는 조선이 이후에도 가도에 식량을 대주면 병력을 의주로 보내 차단하겠다고 협박했다. 조선의 원조가 없으면 가도는 쉽사리 자신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라는 계산에서 나온 협박이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조선이 가도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않는 한, 후금과의 관계는 안정될 수 없었다. 하지만 오락가락했던 인조의 태도에서 드러나듯이 조선의 가도 정책은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것은 결국 후금과의 원한을 쌓아 가는 과정이었다. 파국이 다가올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가도와의 관계를 정리할 수 없었던 것, 바로 거기에 조선의 비극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51) 원숭환의 죽음과 그 영향

    [병자호란 다시 읽기] (51) 원숭환의 죽음과 그 영향

    홍타이지의 반간계에 휘둘리고, 엄당의 참소가 곁들여져 원숭환에 대한 반감과 증오가 높아 가던 분위기 속에서 엄당 계열의 온체인(溫體仁)은 다섯 차례나 상소를 통해 원숭환을 죽이라고 촉구했다. 반면 동림당 계열의 신료들은 ‘적이 성 아래까지 와 있는 상황에서 스스로 장성(長城)을 허물 수는 없다.’며 숭정제에게 구명을 호소했다. 원숭환의 생사는 바야흐로 동림당과 엄당 대결의 핵심 현안으로 등장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숭정제는 엄당의 손을 들어주었다. ●원숭환의 죽음과 그 배경 1630년 9월22일, 원숭환은 북경 서시(西市) 거리에서 ‘임금을 속여 모반을 꾀한 죄’로 처형되었다. 원숭환은 책형(刑)이라 불리는 가장 잔혹한 형을 받았다. 기둥에 묶어 놓고 형리들이 달려들어 칼로 온몸의 살점을 발라내고, 나중에는 두개골까지 부숴 버리는 상상을 초월한 끔찍한 형벌이었다. 후금이 파놓은 반간계에 휘말려 원숭환을 처형했던 사람은 숭정제였지만 그 일련의 과정에서 원숭환을 죽이고 동림당 계열을 제거할 음모를 주도한 자들은 온체인과 왕영광(王永光)이었다. 이들은 숭정제 즉위 후 약화된 자신들의 권세를 만회하기 위해 엄당의 잔당들을 규합하려 했다. 온체인은 모문룡과 같은 고향인 절강 출신이었다. 위충현을 찬양하는 송가(頌歌)를 지을 만큼 엄당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온체인은, 모문룡을 살해한 원숭환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었다. 이부상서 왕영광 또한 위충현의 잔당으로서 동림당에 대한 보복을 늘 꾀하고 있던 자였다. 그렇다면 이들이 원숭환을 제거하려 했던 것과 ‘모문룡 문제’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을까? 이미 언급했지만, 모문룡은 가도에 위충현의 소상(塑像)을 세웠을 만큼 그와 밀착해 있었다. 모문룡은 해마다 자신에게 공급되는 막대한 요향(遼餉·명 조정이 요동으로 보내던 군량) 가운데 상당한 양을 횡령했고, 그렇게 착복한 자금을 바탕으로 위충현 등 엄당의 요인들에게 뇌물을 바쳤다. 조선과 후금 상인들을 통해 흘러들어 온 인삼, 모피, 진주 등의 보화도 철철이 엄당 신료들에게 보내졌다. 엄당은 뇌물을 챙기는 대신 모문룡의 뒤를 든든하게 봐주었다. 그런데 그 모문룡이 죽었다. 때마다 쏠쏠하게 들어오던 뇌물도 뚝 끊어졌다. 당연히 모문룡을 죽인 원숭환에 대한 반감과 그와 연결된 동림당에 대한 적의(敵意)는 높아갈 수밖에 없었다. 여타 조정 신료들 중에도 원숭환에게 반감을 품은 자들이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북경 주변의 경기 지역에 원림(園林)이나 정사(亭舍)를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후금군이 장성을 넘어와 경기 지역을 유린하자 그들이 소유한 원림이나 정사가 망가지거나 파괴되었다. 자연히 그들은 원숭환을 원망하게 되고, 궁극에는 그가 후금군을 고의로 끌어들였다고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원숭환, 반청흥한(反淸興漢)의 영웅으로 추앙 원숭환의 죽음을 계기로 명은 확연히 자멸의 길로 들어섰다. 원숭환을 죽이고 전용석 등 동림당 관인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 온체인 등은 숭정제를 주무르며 정권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상황 파악이 어두운 황제와 그에게 달라붙은 간신들의 발호 속에 후금에 대한 방어 대책이 제대로 마련될 리 없었다. 한 예로 원숭환을 믿고 따랐던 부하 조대수(祖大壽)는 주장(主將)의 투옥과 죽음을 통탄하다가 결국 후금으로 투항하고 말았다. 명에 대한 후금의 도전이 본격화되었던 만력 연간부터 숭정 연간까지 원숭환은 명의 마지막 보루였다. 그런 그가 너무도 어처구니없이, 허망하게 죽자 많은 사람들이 비탄에 잠겼다. 원숭환은 자연스럽게 과거 송(宋) 시절 금(金)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분투하다가 주화파 진회(秦檜) 등에 의해 제거되었던 명장 악비(岳飛)에 비견되었다. 청나라 말엽 반청흥한(反淸興漢)의 열기가 높아갈 무렵 ‘한족의 영웅’으로서 원숭환을 추모하는 분위기도 고조되었다. 변법자강 운동에 가담했던 지식인 양계초(梁啓超)는 원숭환을 기려 ‘원독수전(袁督師傳)’이라는 글을 썼다. 광서(光緖) 연간 일본에 유학했던 장백정(張伯楨)은 누구보다도 열렬한 원숭환 찬양론자였다. 원숭환과 같은 광동(廣東) 출신이었던 그는 원숭환이 남긴 시문(詩文)을 수집하여 문집을 만들고 그를 추모하는 사업을 주도했다.‘원숭환유집(袁崇煥遺集)’의 발문에서 그는 ‘원숭환이 죽음으로써 명이 드디어 망했고 애신각라씨(愛新覺羅氏)가 중원을 차지하게 되었다.’라고 썼다. 장백정은 원숭환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명의 문제점을 지적했지만,‘궁극적으로 반간계를 써서 원숭환을 죽게 만든 것은 청’이라고 하여 청에 대한 반감과 복수심을 드러냈다.‘반청흥한’의 분위기 속에서 원숭환이 재발견되었던 것이다. 원숭환에 대한 추모 분위기는 계속 이어졌다.1952년 북경시 정부가 도시 정비 차원에서 원숭환의 묘를 외곽으로 옮기려 할 때, 북경의 지식인들은 모택동에게 원숭환의 묘를 보전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모택동은 당시 북경시장 팽진(彭眞)에게 원숭환 묘를 원위치에 보전하도록 지시했는데, 모택동 또한 원숭환을 ‘민족영웅’으로, 후세 사람들을 감동시킬 ‘애국주의의 화신’으로 평가한 바 있다. ●이신(貳臣)들 홍타이지 명령받아 반간계 실행 원숭환이 투옥되고 결국 처형되었던 것은 명이 스스로 무너져 가는 과정이었다. 명이 이렇게 자멸하는 과정에서 주목되는 역할을 담당했던 부류가 이신(貳臣)들이다. 이신이란 ‘두 조정을 섬긴 신하’, 즉 명에서 벼슬하다가 후금으로 귀순하거나 투항하여 벼슬했던 한족 신료들을 가리킨다. 명이나 한족의 입장에서는 이들이 ‘배신자’였지만 후금이나 만주족의 입장에서는 매우 소중한 존재였다. 특히 홍타이지는 이신들을 중용(重用)하여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 후금의 국가 제도와 체제를 정비하는 데 활용했다. 실제 당시 원숭환을 제거하기 위한 반간계를 제시했던 사람도, 홍타이지의 명을 받아 반간계를 실행으로 옮겼던 사람도 모두 이신 출신이었다. 홍타이지의 명령을 받아, 사로잡은 명의 환관들이 있던 옆방에 머물면서 ‘원숭환이 후금과 내통했다.’고 말하며 반간계를 실행했던 고홍중(高鴻中)과 포승선(鮑承先)은 모두 한족 출신이었다. 홍타이지에게 원숭환을 제거할 반간계를 기획하여 제공한 사람은 한족 출신 범문정(范文程)이었다. 그는 심양의 명문 출신으로 증조 범총(范총)은 명 조정에서 병부상서를 지냈고 조부 범심(范瀋)은 심양위지휘동지(瀋陽衛指揮同知)를 역임했다. 범문정은 1618년 누르하치가 무순을 공격했을 때 자발적으로 투항했다. 홍타이지는 그의 재주를 높이 사서 자신의 책사(策士)로 중용했다. 범문정은 1629년 홍타이지의 관내(關內) 원정에 수행했는데, 원숭환 때문에 전황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그를 제거할 반간계를 구상했다. 숭정제가 평소 시기심과 의심이 많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홍타이지는 결국 이신 범문정을 활용하여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명의 간성(干城)을 제거할 수 있었다. 범문정은 뒤 시기 순치(順治) 연간에도 시정(施政)의 계책과 방향을 제시하여 청이 중원을 원활히 통치할 수 있는 기반을 닦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병자호란 이후 청이 조선을 ‘제어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많은 이신들이 청으로 귀순했던 이유는 제각기 다양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명으로부터 무엇인가 ‘상처’를 받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북경까지 달려와 사투 끝에 적을 물리쳤지만, 간신들의 참소에 넘어가 원숭환을 처형하는 숭정제를 보면서 조대수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신들의 후금으로의 귀순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명의 목줄을 겨누게 되었다. 원숭환의 죽음과 이신들의 존재 앞에서 ‘자멸한 왕조’ 명이 던지는 역사의 교훈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50)자멸의 길로 들어서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50)자멸의 길로 들어서다

    우여곡절 속에 조선이 후금과의 관계를 힘겹게 이어가고 있을 무렵 명의 정세는 어떠했는가? 후금의 위협이라는 커다란 외환(外患)을 앞에 두고 명은 이런저런 내우(內憂)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극복은커녕 망하는 길로 확실히 접어들고 있었다.1630년 9월, 원숭환(袁崇煥)이 북경의 저잣거리에서 처형된 것은 명이 자멸의 길로 들어섰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홍타이지, 명의 허를 찌르다 1629년 10월2일, 홍타이지는 몽골의 코르친(科爾沁) 부족을 길잡이로 앞세워 북경 공략에 나섰다. 홍타이지는 원숭환이 굳게 지키고 있던 영원성과 산해관을 우회하여, 영평(永平) 관할의 용정관(龍井關)과 준화(遵化) 관할의 대안구(大安口), 희봉구(喜峰口)를 통해 직접 북경으로 들어가는 길을 택했다. 산해관에서 영원성으로 이어지는 주공로(主攻路) 방어에 집중하고 있던 명군은 허를 찔리고 말았다. 일찍부터 혼인 정책 등을 통해 몽골 부족을 회유하여, 산해관 동북의 장성 외곽을 돌파하려 했던 후금의 시도가 성공했던 것이다. 그 같은 사태는 원숭환이 이미 예견했던 것이다. 그는 일찍이 황제에게 올린 상소에서 산해관을 제외한 장성 외곽지역의 방어 태세가 몹시 취약하다는 것, 후금이 몽골을 회유하여 쳐들어 올 경우 심각한 사태가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하지만 대책은 마련되지 않았다.10월26일, 후금군은 황성(皇城) 코앞의 경기(京畿) 지역까지 들이닥쳤다. 영원성에 머물던 중에 홍타이지의 공격 소식을 접한 원숭환은 당황했다. 그는 병력을 끌어 모아 그야말로 미친 듯이 북경을 향해 달려갔다. 원숭환은 산해관에 도착한 직후 참장(參將) 조솔교(趙率敎)에게 병력 4000을 주어 준화를 구원하도록 명령했다.11월4일, 후금군은 준화성 공격에 나섰다. 왕원아(王元雅)가 이끄는 명군은 힘껏 저항했지만 곧 무너지고 말았다. 성안에서 후금군에게 내응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준화를 향해 달려오던 조솔교는 중간에 복병을 만나 전사하고 말았다. 성 함락 후 준화에서는 후금군에 의해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준화 함락과 대학살 소식에 북경은 전율했다. 11월17일,90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밤낮으로 달려온 원숭환은 북경 광거문(廣渠門) 앞에 이르렀다. 병사와 말 모두 굶주림도 잊고 휴식도 없이 달려온 길이었다. 부총병 주문욱(周文旭)은 일단 휴식을 취하고 상황을 보아 북경으로 들어가자고 했지만 원숭환은 듣지 않았다. 황성이 포위되려는 마당에 휴식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윽고 11월20일, 원숭환의 명군은 광거문 앞에서 후금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6시간 이상 벌어진 10여차례의 사투 끝에 후금군은 뒤로 물러났다. 무리한 행군과 굶주림 속에서도 정신력으로 버틴 끝에 얻은 승리였다. ●홍타이지 원숭환에 패해 후퇴하다 11월23일, 후금군을 물리친 뒤 원숭환은 숭정제에게 장거리 행군과 전투, 그리고 노숙에 지친 병사들이 성안으로 들어가 휴식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했다. 숭정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원숭환이 분전 끝에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숭정제는 이미 원숭환에게 노여움을 품고 있었다. 후금군이 북경에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 원숭환의 책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숭환 휘하의 병력은 엄동에 다시 노숙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 11월27일 좌안문(左安門)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원숭환은 후금군을 격파했다. 원숭환이 있는 한 북경을 도모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홍타이지는 병력을 북경 외곽의 남해자(南海子)란 곳으로 철수시켰다. 그는 북경에서 물러나면서 숭정제에게 서신을 보내 화친을 맺자고 요구했다. 일종의 양동작전이었다. 홍타이지는 이후 북경의 상황을 관망하면서 북경 주변의 여러 지역에 병력을 풀어놓았다. 후금군은 영평(永平), 준화, 난주( 州), 천안(遷安) 등지의 성과 촌들을 마구잡이로 겁략했다. 그들은 도처에서 사람과 가축, 각종 물자를 약탈하고 저항하는 인원들을 도륙했다. 황성 방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던 명군은, 후금군이 외곽 지역에서 벌이고 있던 약탈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후금군은 통주(通州) 등지에서 1000척 가까운 조운선(漕運船)을 불태웠다. 수만 명의 포로를 획득하고, 후금군 병사 한 사람에게 1필씩 돌아갈 만큼의 우마를 획득했다. 잔혹한 학살과 방화, 그리고 약탈 속에서 북경 주변은 초토화되었다. 비록 황성은 어렵사리 지켜냈지만 명은 심장부가 유린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홍타이지는 원정을 통해 또 다른 명의 장성(長城)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무너뜨리게 된다. 그 ‘장성’이란 다름 아닌 원숭환이다. 후금군은 광거문 전투에서 원숭환에게 패했지만 귀중한 포로 두 사람을 사로잡았다. 마방태감(馬房太監) 양춘(楊春)과 왕성덕(王成德)이 그들이었다. 홍타이지는 이 두 사람의 포로를 활용하여 원숭환과 숭정제를 이간시킬 수 있는 반간계를 구상했다. 양춘과 왕성덕을 감금해 놓은 방 바로 옆에서 홍타이지의 부하 고홍중(高鴻中)과 포승선(鮑承先)이 밀담을 나누었다. 밀담은 ‘원숭환이 이미 홍타이지와 몰래 약속하여 북경을 공취(攻取)하기로 했고 곧 함락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겨우 벽 하나로 나뉘어진 옆 방에서 환관 두 사람은 고홍중과 포승선의 밀담 내용을 모두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홍타이지와 후금군 지휘부가 의도적으로 그 같은 상황을 연출했음은 물론이다. 11월29일, 홍타이지의 명을 받은 고홍중과 포승선은 태감 두 사람을 고의로 풀어주었다. 자금성으로 달려온 두 환관은 숭정제에게 그 사실을 고했다. 홍타이지가 북경을 기습한 직후부터 명 조정에 있던 엄당(奄黨)의 잔당들은 원숭환을 제거할 함정을 이미 만들어 놓고 있었다.‘원숭환이 오랑캐를 일부러 사주하여 북경으로 끌어들였다.’는 참소가 주된 내용이었다. 또 ‘원숭환이 병력을 이끌고 북경 옆의 통주에 다다를 때까지 후금군과 한번도 접전하지 않았다.’는 등의 이야기도 떠돌고 있었다. ●원숭환, 하옥되다 당시 19세에 불과한 데다, 대국(大局)을 볼 수 있는 역량이 없었던 숭정제는 홍타이지가 던진 ‘미끼’를 덥석 물었다.1629년 12월1일, 황제는 원숭환을 황성으로 불렀다. 명목은 ‘군량 문제를 의논하자.’는 것이었다. 이미 ‘원숭환이 오랑캐와 내통하고 있다.’고 믿었던 숭정제는 혹시라도 원숭환이 낌새를 채고 오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에 ‘군량 문제’를 운운했던 것이다. 원숭환이 황성 앞에 도착했을 때 문지기들은 성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오랑캐’에게 북경 주변이 포위된 계엄 상태였기 때문이다. 문이 열리는 대신 성 위에서 밧줄에 달린 바구니가 내려왔다. 당시 계요총독(遼總督)이자 병부상서 직책을 갖고 있던 원숭환은 바구니에 실린 채 황성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것 자체가 치욕이었다. 황성으로 들어선 직후 원숭환은 금의위(錦衣衛)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반면에 그와 동행했던 총병 만계(滿桂)와 흑운룡(黑雲龍) 등은 황제로부터 칭찬을 듣고 승진했다. 내각 대학사 성기명(成基命)이 원숭환을 구명하기 위해 애써 숭정제에게 호소했지만 황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동림당(東林黨)에게 복수하기로 작심했던 엄당의 신료들은 원숭환을 죽이라고 아우성이었다. 원숭환은 동림당 계열의 대학사 전용석(錢龍錫)의 문인이었기 때문에, 원숭환의 ‘죄’를 물고 늘어지면 동림당 계열을 일망타진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홍타이지의 반간계는 완벽하게 성공했다.1618년 누르하치가 무순성을 공격하여 선전포고했던 이래 후금군은 승승장구했다. 그런데 그 승승장구에 제동을 걸고 끝내 누르하치를 비명횡사시킨 장본인이 바로 원숭환이었다. 그가 영원성과 산해관을 막아서는 한, 아니 그가 존재하는 한 중원 정복이라는 목표는 실현될 수 없었다. 원숭환은 바로 명의 장성이었다. 그런데 그 ‘장성’이 반간계 한 방으로 무너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요컨대 홍타이지는 탁월했고, 숭정제는 암우(暗愚)했다. 지도자의 차이가 후금과 명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49)우여곡절 속 후금과의 관계

    [병자호란 다시 읽기] (49)우여곡절 속 후금과의 관계

    정묘호란 직후 조선은 후금에 유연한 태도를 취했다. 모문룡을 비롯한 한인(漢人)들의 비방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후금 사자에 대한 접대나 그들과의 무역에 성의를 보였다. 하지만 조선의 입장에서 후금과의 우호 관계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것이었다. 조선이 후금을 ‘오랑캐’로 인식하고 있는 한 ‘내키지 않는 관계’가 오래 지속되기는 어려웠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필연적으로 파열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후금, 병력 철수하고 조선과 사신교환 정묘호란이 끝난 뒤에도 의주 등지에 병력을 주둔시켰던 후금은 1627년 9월경부터 병력을 철수시켰다. 두 나라의 관계가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셈이다. 당시 조선과 후금은 정기적으로 사신을 교환했다. 인조는 신료들에게 호차(胡差·후금 사신에 대한 멸칭)들을 우대하여 환심을 잃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후금 또한 호란 직후에는 조선에 매우 우호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 때문에 심양을 왕래하는 조선 사신들의 후금에 대한 인식은 긍정적이었다.1627년 5월 심양에서 돌아온 원창군(原昌君) 일행은 인조를 만난 자리에서 ‘후금 사람들이 매우 친절했다.’고 보고했다. 인조가 홍타이지와 후금 신료들의 인물됨을 묻자, 호행관(護行官) 이홍망(李弘望) 등은 모두 뛰어난 인물들이라고 칭찬했다. 인조의 우호적인 태도는 후금 사신들을 접견할 때 잘 나타났다.1627년 5월 서울에 왔던 후금 사신 용골대는 인조를 만났을 때 ‘전하께서는 극진하게 대우하시는데 관리들이 삼가지 않는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조선 관리들이 그를 인조에게 인도하면서, 대궐 문 앞에서 말에서 내리게 하고 인도자도 없이 한참 걷도록 만든 것이 불만이었다. 인조는 즉각 사과하고 용골대 등이 나갈 때 어로(御路)에서 말을 타고 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당시 봉산(鳳山)에 살던 백성 박응립(朴應立)과 황하수(黃河水)가 서울로 올라가던 용골대 일행을 가리키며 ‘죽여야 한다.’고 소리친 사건이 있었다. 용골대 일행이 불만을 터뜨리자 조정은 봉산에 이문(移文)하여 곧바로 그들을 붙잡아 하옥시키고 후금 사신 일행의 경호를 강화하는 조처를 취했다. 비변사 신료들은 ‘호인들과 기미(羈)하기로 작정한 이상 원하는 물품을 많이 주어 그들을 기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조와 신료들을 막론하고 정묘호란 직후 후금을 대하는 조선의 자세는 유연했다. 그런데 병자호란 무렵이 되면 이 같은 유연함을 도무지 찾을 수 없다. 그 까닭이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開市에 대한 후금의 열망 정묘호란 직후 후금이 조선에 가장 강하게 바라던 것은 무역이었다. 그들은 시장을 열어 쌀을 공급해 달라고 간청했다. 쌀뿐만이 아니었다. 생필품과 사치품을 막론하고 후금이 요구하는 물품은 참으로 다양했다.1628년 1월 서울에 왔던 후금 사신들은 홍시와 대추, 알밤 등 과일과 약재 등을 요구했다. 중국산 비단과 청포(靑布), 일본에서 들여오는 후추를 비롯하여 단목(丹木), 칼과 창 등도 그들의 관심 품목이었다. 명과 적대 관계가 지속되면서 과거와 달리 만주 지역으로 몰려오던 중국 상인들이 끊겨 버린 상황에서 후금이 원하는 물품을 공급해 줄 나라는 조선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선은 후금과의 교역에 소극적이었다. 일단 교역의 문을 열어줄 경우, 후금 측의 요구가 끝없이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김상헌을 비롯한 일부 신료들은 특히 중국산 물화를 후금 상인들에게 파는 것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하찮은 오랑캐에게 천조(天朝)의 물품을 넘겨주는 것은 예가 아니다.’라는 것이 명분이었다. 1627년 12월 심양에 갔던 회답사(回答使) 박난영(朴蘭英) 일행은, 중강(中江)에서 속히 시장을 열어 교역하자는 후금 측의 재촉에 시달려야 했다. 박난영은 ‘전쟁 때문에 평안도와 황해도가 극히 피폐해졌다.’는 것,‘명나라 산 물자는 조선이 구하기 어렵다.’는 것 등의 이유를 들어 난색을 표했지만 후금 측은 집요했다. 후금 측은 ‘조선과 후금이 이미 한집안이 되었으니 어려움을 서로 구제해야 한다.’며 ‘모문룡은 값도 치르지 않고 조선으로부터 쌀을 공짜로 빼앗았지만 우리들은 정당하게 값을 치르고 사겠다는데 뭐가 문제냐.’라며 회답사 일행을 압박했다. 조선 측은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이후 쌀과 과일, 약재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산 물품 등도 후금 측에 공급했다. 중국산 물품은 가도를 통해, 일본산 물품은 왜관을 통해 입수되었다. 당시 가도에는 명의 강남 등지로부터 수많은 상선들이 모여들었다. 조선 상인들은 은이나 인삼을 갖고 가도로 가서 비단과 청포 등을 구입하여 그것을 다시 후금 상인들에게 판매했다. 사실상 후금에 중국과 일본산 물자를 공급하는 중개자 역할을 했던 셈이다. 조선은 또한 후금과의 개시를 통해 피로인(被擄人)들을 속환(贖還)하려고 시도했다. 피로인이란 정묘호란 당시 후금군에 사로잡혀 끌려갔던 포로들을 말한다. 호란 당시 무방비 상태였던 서북 지방에서는 엄청난 수의 포로가 생겨났다.1627년 5월 평안도 평양, 강동(江東), 삼등(三登), 순안(順安), 숙천(肅川), 함종(咸從) 등 여섯 고을에서 파악된 포로 숫자만 4986명이었다. 같은 해 6월의 기록에 따르면 심양에서 도망쳐 오는 포로의 숫자가 매일 40명에서 50명에 이른다고 할 정도였다. 이것을 토대로 계산하면 당시 후금군에 끌려간 피로인의 수는 최소 수만 명을 넘는 수준이었다. 조선은 개시에서 후금 측에 쌀을 공급하는 대가로 피로인들을 넘겨받고자 했던 것이다. ●피로인 송환 등 둘러싸고 분열양상 1628년 2월 후금 측은 개시가 열린 중강에 200여명의 피로인을 데리고 왔다. 그들 가운데 조선에서 우선적으로 속환하려 했던 사람들은 귀의할 수 있는 부모나 형제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포로들의 몸값을 정하는 것도 문제였다. 결국 개시 장소에 왔던 200여명 가운데 70명 정도만 가족 품으로 돌아오는 행운을 얻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시 발길을 돌려야 했다. 후금 상인들은 자신들이 어렵게 데려온 피로인들을 모두 구입해 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고국 귀환을 애타게 고대하고 왔다가 후금 병사들에게 이끌려 도로 심양으로 돌아가는 피로인들은 조선 국경 쪽을 쳐다보며 통곡했다. 처참한 광경이었다. 후금과의 개시는 유지되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파열음을 냈다. 우선 개시에 대한 양측의 입장이 사뭇 달랐다. 조선은 봄가을 두 차례 개시할 것을 원했다. 후금 측은 봄, 여름, 가을 세 번을 정기적으로 하되 필요하면 제한을 두지 말자고 맞섰다. 그들은 중강 이외에 함경도의 회령에서도 개시하자고 요구했다. 개시할 때 후금 측이 데리고 오는 인원의 숫자도 문제였다. 1628년 2월 중강에서 개시할 때 용골대 일행은 자그마치 1300명의 인원을 데리고 왔다. 그들에게 필요한 식량과 마초는 전부 조선 측의 몫이었다. 조선은 부담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측이 문제를 제기하자 후금 측은 조선과 명의 전례를 들고 나왔다.‘과거 조선이 명과 개시할 때는 소와 돼지까지 증여했는데 우리에게는 식량과 마초만 주는데 무엇이 부담스러우냐?’는 식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조선이 계속 식량 공급을 거부하면 서울로 올라가서 소 몇 백 마리와 군사들이 한 달 먹을 식량을 얻어 내고야 말겠다고 협박했다. 조선은 결국 용골대 일행에게 쌀 2000섬을 그냥 주기로 약속했다. 후금에서 도망쳐 온 피로인들을 송환하는 문제도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후금은 수시로 조선에 국서를 보내 조선이 고의로 피로인들을 숨겨 주고 있다고 비난했다. 피로인들을 ‘피 흘려 얻은 대가’로 여겨 송환을 요구하는 후금과 ‘살겠다고 도망 온 혈육’을 송환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조선의 갈등은 필연적이었다. 양국 관계는 수많은 우여곡절 속에 위태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47) 親明意識(친명의식)의 고양과 가도 정벌

    [병자호란 다시 읽기] (47) 親明意識(친명의식)의 고양과 가도 정벌

    모문룡을 제거한 이후 원숭환은 가도( 島)에 대한 정비 작업에 나섰다. 부총병 진계성(陳繼盛)에게 임시로 가도의 군병들을 지휘토록 하는 한편, 유해(劉海)를 시켜 진계성을 보좌하도록 했다. 그리고 자신의 휘하인 부총병 서부주(徐敷奏)를 가도로 보내 주민들을 위무(慰撫)하고 군병을 점검했다. 그 과정에서 과거 모문룡과 결탁했던 인물들을 제거하고, 노약자들을 찾아내어 등주(登州) 등지로 이주시켰다. 바야흐로 가도는 후금을 공격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개편되고 있었다. ●변화하는 가도 상황과 조선 가도의 노약자들을 명 내지로 옮긴 원숭환의 조처는 조선의 숙원이었다. 그들이 먹는 식량의 대부분을 조선이 공급해야 했기 때문이다. 조선은 이미 광해군 시절부터 ‘전투 병력만 남기고 노약자들을 색출하여 등래(登萊) 지역으로 옮겨달라.’고 간청했지만 모문룡은 조선의 요청을 무시해 왔었다. 원숭환은 또한 가도 군병들이 조선에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엄격히 단속하겠다고 약속했다. 조선으로서는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원숭환의 이 같은 조처들은 일견 조선에 대한 ‘배려’처럼 보였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는 조선을 통제하려는 조처도 빼놓지 않았다. 원숭환은 조선 사신들이 북경으로 갈 때 이용하는 해로를 바꾸었다. 가도에 들렀다가 여순(旅順) 근처의 섬들을 지나 산동반도의 등주로 상륙하는 기존의 길을 폐지하고, 각화도(覺華島)를 거쳐 자신이 머물던 영원에 들러 가도록 했다. 북경을 왕래하는 조선 사신들을 자신이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였다. 조선이 모문룡의 작폐 때문에 고통을 겪었던 사실은 인정했지만, 모문룡에게 길들여져 후금과 싸울 의지가 없어져 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숭환은 조선을 철저히 견제하여 후금과의 결전에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실제로 원숭환이 가도를 장악한 이후, 조선이 운신하기는 더 어려워졌다. 후금과 결전을 벌이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던 원숭환의 눈치를 보아야 했기 때문이다.1629년(인조 7) 8월, 추신사(秋信使) 박난영(朴蘭英) 일행이 후금에서 돌아올 때, 아지호(阿之好)와 중남(仲男) 등 후금의 사절단도 서울을 향하고 있었다. 당시 가도에 와 있던 원숭환의 부하 서부주는 후금 사절단 일행을 공격하여 죽이려고 시도했다. 진계성 등이 적극적으로 뜯어말려 미수에 그쳤지만, 서울을 왕래하는 후금 사신들은 청북(淸北) 지역을 지날 때마다 명군의 위협에 노출되었다. 자연히 그들도 자위(自衛)를 위해 더 많은 병력을 대동하게 되었고, 그럴수록 명군과의 충돌 가능성도 높아져 갔다. 조선은 양측의 충돌을 막기 위해 노심초사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명과 후금 모두로부터 ‘은혜를 저버렸다.’,‘맹약을 어겼다.’는 등의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親明,主戰의 분위기가 높아가다 조선은 ‘후금을 공격하는 데 동참하라.’는 원숭환의 압박 때문에 가슴앓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명분을 생각하면 원숭환의 종용에 당장 따르고 싶었지만 당시 조선의 현실은 군사적으로나 재정적으로 후금에 적대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어렵사리 유지되고 있는 후금과의 화친이 깨질 경우 평화는 물론, 모든 것이 결딴날 판국이었다. 이 같은 와중에 명분과 현실 사이에서 어정쩡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의 고민을 더욱 깊게 만드는 사건이 일어났다.1629년 10월, 후금의 홍타이지는 심양을 출발하여 명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그는 원숭환이 절벽처럼 버티고 있는 영원성으로 향하지 않고 몽골족들이 살고 있는 만리장성의 외곽으로 우회하는 길을 잡았다. 홍타이지는 장성 동북쪽의 희봉구(喜峰口)라는 곳을 통해 북경 부근으로 진입하여 황성(皇城)을 기습했다. 영원성과 산해관을 거치지 않고도 북경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명 조정은 경악했고 북경 주변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뒤에 다시 서술하겠지만, 당시 영원성에 있으면서 홍타이지의 장성 돌파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 원숭환은 소환되어 처형되었다. 1630년(인조 8) 1월, 평안병사의 장계를 통해 황성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조선 또한 경악했다. 인조는 번국(藩國)의 신하로서 숭정(崇禎) 황제의 안위를 걱정하는 차원에서 정전(正殿)에 머물지 않고 월랑(月廊)에 거처하면서 신료들을 불러모았다. 신료들은 가도에 사람을 보내 정확한 정보부터 탐지하자고 했다. 인조는 “장계를 보니 경악을 금할 수 없다.”며 “우리나라에 약간의 병력만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오랑캐의 본거지로 쳐들어가 뒤엎어 버릴 적기”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신료들도 후금에 대한 적개심과 스스로 느끼는 자괴감을 계속 쏟아냈다.2월에 열린 경연 자리에서 이귀는 “우리와 중국의 관계는 의리로 보면 군신(君臣)이고 은혜로 보면 부자(父子)”라며 “군부(君父)가 환란을 겪고 있는데 어떻게 수수방관할 수 있냐?”며 대책을 촉구했다. 그는 아예 병력을 이끌고 오랑캐의 소굴을 짓밟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광현(金光炫)은 “오랑캐가 황성을 포위하고 있는 상황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의리를 보여주기는커녕 조정은 풍정(豊呈, 잔치)의 명목으로 풍악을 울리며 춤추고 있다.”고 통탄했다. 홍타이지의 황성 기습은 엉뚱한 방향으로도 불똥이 튀었다.‘후금군의 배후에 있으면서 황성이 포위되었음에도 팔짱만 끼고 있다.’는 명 조정의 비판을 피하기 위해 가도의 서부주 등이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은 1630년 3월, 오랑캐의 사자를 체포한다는 명목으로 명군 병력을 이끌고 의주에 잠입했다. 명군은 의부부윤 이시영(李時英) 등을 마구 구타하고 물건을 약탈했다. 이시영은 당시 의주에 머물던 호차(胡差) 중남 등을 탈출시켜 창성(昌城)으로 안내하여 압록강을 건너 도주할 수 있도록 도왔다. 강 건너에서는 후금 장수 용골대 일행이 군대를 이끌고 건너올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다. ●가도의 반란 가도를 ‘요동 수복의 전진기지’로 재정비하려던 원숭환이 하옥되자 가도의 정세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섬 전체를 장악할 만한 지휘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원숭환에 의해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던 진계성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사람이 본래 무른데다, 딸이 모문룡의 첩이었기 때문에 원숭환의 부하들 앞에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해 유해는 민완하고 눈치가 빨랐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도의 모든 권한은 유해와 그 형제들에게 집중되어 갔다. 1630년 4월, 유해의 동생 도사(都司) 유흥치(劉興治)는 반란을 일으켜 진계성을 살해하고 가도의 권력을 장악했다. 원숭환이 사라진 여파가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가도에서 일어난 변란의 소식을 들었을 때 인조와 조선 조정은 격앙되었다. 인조는 4월 21일 비변사 신료들을 소집했다. 인조는 이 자리에서 유흥치를 ‘명 조정의 반적(叛賊)’이라고 규정하고 조선이 군사를 일으켜 토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좌의정 김류(金 )도 유흥치가 분명 오랑캐에게 투항할 것이라며 속히 토벌하자고 동조했다. 부원수 정충신(鄭忠信)은, 수군 3천명을 동원하여 유흥치 일당의 배를 불태우면 역도들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김류를 비롯한 일부 신료들의 동조 속에 인조는 토벌대의 대장에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를, 수군 사령관에 정충신을 지명했다. 반대하는 신료들이 의견을 채 제시하기도 전에 원정은 이미 기정사실이 되었다. 인조는 고무되었다. 그는 ‘유흥치는 항우보다 나쁜 자’라며 ‘토벌은 명분이 바르고 정당한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정묘호란을 맞아 오랑캐와 화친하고, 황성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어도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던 자괴감을 유흥치 토벌을 통해 한꺼번에 씻어버리려는 것 같았다. 바야흐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가도 정벌이 시작되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43) 일본의 氣 가 살아나다 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43) 일본의 氣 가 살아나다 Ⅱ

    1629년 겐포(玄方) 일행은 상경을 허용하라고 요구하면서 자신들이 도쿠가와 막부 장군의 명령을 받아 온 사자(國王使)라고 강변했다. 조선 조정은 그들이 진짜 국왕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정홍명(鄭弘溟)을 선위사(宣慰使)로 왜관에 보냈다. 하지만 겐포 일행은 국왕사가 마땅히 지참해야 할 국서(國書)를 갖고 있지 않았다. 조선은 당연히 상경을 다시 거부했다. 겐포는 국왕사라고 우기며 협박을 계속했다. 임진왜란 이후 최초의 상경을 둘러싼 실랑이는 쉽사리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외교전문가로 길러진 겐소의 제자 겐포 겐포(1588∼1661)는 17세기 초반 조·일 관계에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승려였다. 그의 정식 이름은 기하쿠 겐포(規伯玄方)였고 호를 백운(白雲) 또는 회계(晦溪)라고 했다. 규슈 하카다(博多)에서 태어난 그는 출가한 이후 쓰시마로 건너갔는데, 출가한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겐포에게 외교술을 가르쳐준 스승은 게이테쓰 겐소(景轍玄蘇)였다. 본래 하카다의 성복사(聖福寺) 주지였던 겐소는 1580년 쓰시마로 건너갔다. 겐소는 뛰어난 한문 실력을 바탕으로 쓰시마에서 조선과의 외교 교섭을 담당하는 책임자로 활약했다. 조선과의 교역이 경제적 생명선이나 마찬가지였던 쓰시마의 입장에서는 능숙하게 외교문서를 다룰 수 있는 전문가가 절실했다. 문화적으로 일본인들을 ‘한 수 아래’로 보았던 조선 관인들과 접촉하려면 한문 실력뿐 아니라 시문(詩文) 등을 수작(酬酌)할 수 있을 만큼 문학적 재능도 필요했는데 겐소는 바로 그 같은 임무에 적격이었다. 겐소는 임진왜란에도 참전했다. 왜란 당시 명군 지휘부는 그를 일본군의 모주(謀主) 가운데 한 명으로 지목하여 그의 목을 가져오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상금을 주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겐소의 활약은 왜란이 끝난 뒤에도 이어졌다.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승리를 통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집권한 이후 쓰시마의 소오씨(宗氏)는 겐소를 내세워 조선과의 강화를 성공시켰다. 겐소는 조선 사절의 도일(渡日)을 이끌어내고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조선과의 관계를 놓고 볼 때, 겐소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련한 외교관이었던 셈이다. 겐포는 17세부터 쓰시마의 이정암(以酊庵)이란 곳에 머물며 겐소를 보좌하면서 조선과의 외교를 배웠다.1611년 겐소가 세상을 떠나자 스승을 이어 쓰시마의 외교문서를 담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소오씨는 겐포의 나이가 아직 어린 점을 고려하여 그를 교토(京都)로 보내 좀더 학문을 닦도록 했다. 겐포는 1619년부터 쓰시마의 외교 업무를 담당했다. 그는 1621년에도 국왕사라는 직함을 갖고 부산에 왔던 적이 있었다. 요컨대 겐포는 스승 겐소와 쓰시마 당국에 의해 의도적으로 길러진 외교 전문가, 조선 전문가였던 셈이다. ●조선, 논란 끝에 상경을 허용하다 겐포가 상경을 고집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조선 조정은 고민했다. 인조는 강경했다. 그는 ‘왜놈들은 우리의 원수’라고 전제한 뒤 일단 금제(禁制)를 풀면 이후의 폐단을 막을 수 없다는 것과 대의(大義)를 고려하여 상경을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고 했다. 또 ‘상경을 허용하면 공갈과 협박에 굴복하는 셈이 되고, 일본은 분명 조선에 사람이 없다고 여길 것’이라고 우려했다. 신료들의 의견은 사뭇 달랐다. 병조판서 이귀(李貴)는 ‘선조(宣祖)께서도 일본을 이웃나라로 대우했는데 이웃 사신의 상경을 불허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했다. 그는 현실론을 내세웠다.‘호란 때문에 만신창이가 된 현실에서 왜인들의 비위를 거스를 수는 없으며 유순한 태도로 강자를 제압하는 것이야말로 보국(保國)의 방책’이라고 강조했다. 신료들의 생각도 대체로 이귀의 주장과 같았다. 하지만 인조가 워낙 강경하게 반대하여 결론은 쉽사리 내려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현실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겐포가 왔을 무렵 안팎의 사정이 너무 뒤숭숭했기 때문이다.1629년 2월, 후금 사신 만월개(滿月介)가 서울에 들어왔고, 같은 달 후금군은 선사포에 있는 모문룡의 둔전을 습격했다. 이 때문에 서울에는 후금이 다시 쳐들어올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퍼지면서 피란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3월에는 홍타이지가 국서를 보내와 ‘조선이 맹약을 지키지 않는다.’고 질책하고 ‘모문룡과 관계를 끊으라.’고 다시 협박했다. 전국적으로 가뭄이 계속되는 와중에 명화적(明火賊) 등이 발생했다. 이정구(李廷龜)는 이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두고 당시의 조선을 가리켜 ‘공허한 나라(空虛之國)’라고 표현했다. 이귀가 다시 나섰다. 그는 ‘후금과 문제가 있는 상황에서 일본과 사단을 만들 수는 없다.’는 논리로 상경을 허용하자고 주장했다. 이정구는 절충안을 내놓았다. 그는 겐포 일행 가운데 몇 사람만 ‘특소(特召)’라는 명목으로 상경을 허용하되 나머지 인원은 부산에서 접대하자고 주장했다. 인조도 상황 논리에 밀려 결국 신료들의 주장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조정의 절충안이 부산으로 전달되었다. 조선 조정은 겐포 일행에게 상경을 허용하면서 그들을 국왕사가 아닌 바로 아래의 거추사(巨酋使) 급으로 대우하기로 결정했다. 국서가 없었기 때문이다. 국왕사의 사절 정원은 25인이었는데 거추사의 정원은 15인이었다. 겐포는 반발하면서 거추사의 인원에 수행원 4인을 더 추가해야 한다고 강청했다. 또 자신이 ‘보행이 불편하다.’는 핑계를 내세워 가마를 타고 상경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정홍명은 겐포 일행의 집요한 요구에 밀려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이윽고 1629년 4월6일,19명으로 구성된 겐포 일행은 부산을 출발하여 서울로 향했다. 임진왜란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열린 상경 길이었다. ●돌아갈 때 목면 600동까지 챙겨 겐포 일행은 4월22일 서울로 들어왔다. 그들은 4월25일, 경덕궁(慶德宮, 오늘날의 경희궁)에서 인조에게 인사를 올리는 숙배(肅拜)를 행하고 5월21일 출발할 때까지 약 한 달 동안 서울에 머물렀다. 그들은 인조를 알현할 때 진상품으로 조총 20정을 비롯하여 화약 원료인 유황(硫黃)과 염초(焰硝) 수백 근을 바쳤다. 조선이 후금과 막 전쟁을 치렀던 것을 염두에 둔 행동이었다. 전쟁을 치른 조선이 가장 아쉬워 할 수밖에 없는 무기류를 헌상함으로써 쓰시마의 존재 가치를 환기시키려는 의도가 담겨 있기도 했다. 겐포가 이끄는 사절단의 본래 목적은, 막부의 명령을 받아 정묘호란 이후의 조선과 대륙 정세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겐포 일행은 서울에 머무는 동안 조선 내부 사정은 물론 명과 후금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부심했다. 조선인들을 통해 얻어들은 정보를 기행문 등에 꼼꼼하게 적었는가 하면, 대동했던 화가들을 시켜 목도했던 상황을 그림으로 그려 기록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겐포 일행은 실리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쓰시마 도주(島主)가 특별히 보낸 스기무라(杉村采女)는 무기류 등을 헌상하여 조선의 환심을 사는 한편, 당시 이런저런 이유로 조선으로부터 받지 못했던 목면(木棉)을 지급해 달라고 요청했다. 스기무라가 요청한 목면의 양은 600동(同)이었다. 자그마치 3만 필이나 되는 엄청난 양이었다.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조선 조정은 당연히 거절했다.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겐포 일행은 5월21일 서울을 뛰쳐나갔다. 조선 조정이 쓰시마 도주에게 보내는 서계(書契)의 접수도 거부했다. 조선 조정은 난감했다. 최명길 등은 남변(南邊)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달래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선은 결국 목면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왜관에 머물며 조선의 수락 소식을 들은 겐포 일행은 6월12일 유유히 귀국선에 올랐다. 정묘호란을 겪은 직후 ‘공허지국’ 조선의 외교를 이끌던 당국자들의 고뇌가 눈에 밟힌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41) 정묘호란의 후유증

    [병자호란 다시 읽기] (41) 정묘호란의 후유증

    인조는 1627년 4월12일, 서울로 돌아와 경덕궁(慶德宮)으로 들어갔다.1624년 이괄의 난을 맞아 서울을 버렸다가 되찾았던 경험을 3년 만에 되풀이했던 것이다. 이번에도 어렵사리 정권은 지킬 수 있었지만 그 후유증은 컸다. 청북에서는 의병들이 계속 저항하는 와중에 모병과 후금병 사이의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명은 ‘조선이 오랑캐와 화친했다.’고 의혹의 눈길을 보냈고 후금은 ‘속히 모문룡을 잡아 죽이라.’고 채근했다. 민생 문제가 시급한 와중에 조정 신료들은 후금과 화약을 맺은 것에 대해 시비와 논란을 멈추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문제를 풀어야 할지 막막한 상황이었다. ●모문룡, 후금과 화친 빌미 자신의 발호 정당화 화의가 체결되면서 후금군 대부분은 철수를 시작하여 압록강을 건넜다. 하지만 홍타이지는 의주를 조선에 반환하지 않았다. 후금군은 의주 부근에 주둔하면서 모문룡을 체포하겠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몽골병을 포함하여 수천 명에 이르렀는데 아예 농사를 지으면서 장기간 주둔할 태세를 보이고 있었다. 조선은 사자를 보내 완전히 철수하라고 종용했지만 후금 측은 듣지 않았다.“조선이 모문룡을 제거해 주면 철수하겠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모병들은 그들대로 청북 주변의 섬과 육지를 오가며 마구잡이로 날뛰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후금군을 습격하는가 하면 조선 관아와 백성들에 대한 약탈을 멈추지 않았다. 조선 조정은 단속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모문룡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모문룡은 ‘조선이 후금과 화친했다.’는 것을 빌미로 자신들의 발호를 정당화하려 했다. 과거에도 그러했지만 정묘호란 이후 청북은 훨씬 더 위험한 ‘화약고’가 되어 버렸다. 모병과 후금군 사이의 충돌은 다반사가 되었고, 그 와중에 조선은 ‘샌드위치’의 처지로 몰렸다. 화약을 체결하면서 조선과 후금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사자의 왕래가 빈번해졌다. 문제는 사자들이 서울과 심양을 오가면서 모병들이 득실대는 청북 지역을 지나야 한다는 점이었다. 모문룡은 후금 사자를 체포하여 ‘한 건 올리려’ 덤볐고, 후금 사절들은 그들대로 모병들과의 충돌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1627년 5월, 심양을 왕래했던 이홍망(李弘望)의 보고 내용은 ‘샌드위치’가 되어 버린 조선의 딜레마를 여실히 보여 준다.“후금 군인이 한인 네 명과 조선인 네 명을 붙잡아 제게 데려왔습니다. 그는 저에게 ‘한인이 조선 사람들을 살해하기에 잡아 왔으니 그대가 직접 한인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그럴 수 없다는 뜻으로 말했더니 후금 군인이 말하기를 ‘조선은 한인과 마음을 같이하고 있으니 도리상 그러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마침내 한인을 죽였습니다.” ●화친에 대한 비판이 격화되다 종묘사직을 지키려고 화의를 맺긴 했지만 조선의 입장에서 ‘오랑캐’ 후금을 ‘형’으로 받드는 것은 도무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와 함께 인조와 화의를 주도한 신료들을 특히 힘들게 했던 것은 명의 반응이었다. 이미 정묘호란이 일어난 직후 명 일각에서는 노골적으로 조선을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1627년 5월, 성절사(聖節使)로 명에 갔다가 귀국했던 김상헌(金尙憲)은 명에서 ‘조선이 누르하치에게 양곡을 원조했던 사실이 있다. 조선이 후금을 두려워하여 명과 후금 사이에서 관망하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는 등의 소문이 돌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1627년 6월, 요동에서는 ‘조선이 오랑캐와 혼인을 맺었고, 오랑캐에게 땅을 내주고 거주하는 것을 허용했다.’는 풍문마저 돌았다. 인조와 조선 신료들은 명의 그 같은 태도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미 ‘오랑캐와 화의를 맺은 것 때문에 인조반정 당시 내세웠던 명분이 크게 훼손되었다.’고 스스로 찜찜해 하던 차였다.‘광해군이 후금과 화친했기 때문에 타도해야 한다.’고 외쳤던 인조정권의 입장에서 명의 비난은 극심한 굴욕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인조는 이미 척화파 윤황(尹煌)의 발언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은 바 있다. 윤황은 강화도에 있을 때, 화의에 반대하면서 ‘오늘의 화친은 이름만 화친일 뿐 실제로는 항복입니다. 전하는 요행을 바라는 간신들에게 넘어가 더러운 오랑캐 사자를 접견하고도 부끄러워 할 줄을 모르십니다.’라고 직격탄을 날렸었다. ‘항복’이란 말에 격분한 인조는 ‘유식한 그대들은 오랑캐에게 항복한 임금을 섬기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라고 맞받았다. 그러면서 윤황을 잡아다가 국문하라고 지시했었다. 서울로 돌아온 뒤 논란은 재연되었다.7월1일, 생원 이흥발(李興渤) 등이 상소를 올렸다.‘명나라 장수가 우리 경내에서 피살되었음에도 전하는 오랑캐 사신을 객관에 머물게 하고 극진히 예우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적 사신의 목을 베어 명나라로 보내지 않으면 우리는 끝내 중국을 배신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었던 인조는 ‘그대들이 가상하다. 나도 후회하고 있다.’며 물러섰다. 화의에 대한 자괴감과 명에 대한 미안함은 신료들에게 엉뚱한 자격지심을 촉발시켰다. 후금군은 철수하면서 강홍립이 조선에 남도록 허용했다. 이어 강홍립이 후금에 억류되었을 때 거느리던 사람들도 조선으로 송환했다. 화의가 이루어진 데 대한 만족감의 표시였다. 송환된 사람 가운데는 강홍립이 후금에서 재취(再娶)했던 부인도 있었다. 그녀는 한족 출신 장군 동기공( 奇功)의 딸이었다. 신료들은 그녀가 강홍립에게 가겠다고 하자 아우성을 쳤다.‘오랑캐에게 항복하여 누르하치와 홍타이지를 섬긴 자에게 한족 여인을 다시 거느리게 해 주는 것은 참람하다.’는 것이 반대 명분이었다. 인조는 그녀를 강홍립에게 보내라고 했지만 신료들은 반대했다. 그들은 그녀를 명나라로 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기공의 딸은 ‘조선에서 살 수 없으면 죽어 버리겠다.’고 호소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논란이 한창이던 7월27일 강홍립이 세상을 떠났다. 자신을 ‘매국노’로 매도하는 분위기에서 비롯된 스트레스 때문이었을까? 그의 죽음과 함께 논란은 종식되었다. ●이인거, 창의중흥대장 칭하며 병권 요구 화의를 둘러싼 논란이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던 1627년 9월, 모반 사건이 터졌다. 강원도 횡성(橫城)에 살던 유학(幼學) 이인거(李仁居)가 주도했던 사건이었다. 이인거는 9월26일, 원주목사 홍보와 강원감사 최현(崔晛)을 찾아가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계획을 털어 놓았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조정에서 오랑캐와 화친했으니 내가 의병을 일으켜 곧바로 서울로 올라 가겠다. 전하께 주화파 간신 한 사람의 목을 베도록 청한 다음 서쪽으로 달려가 오랑캐를 토벌하겠다.’ 최현 등이 미심쩍게 여겨 반신반의하고 있던 9월29일, 이인거는 군사를 일으켜 횡성현의 무기고를 탈취한 뒤 스스로를 ‘창의중흥대장(倡義中興大將)’이라 칭했다. 10월1일, 이인거의 상소가 조정에 도착했다. 이인거는 ‘전하는 호란을 맞아 몸소 갑옷을 입고 와신상담하는 자세로 적과 맞서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오랑캐 사신의 접대나 일삼고 눈치만 살폈으니 천지와 귀신이 공분(公憤)하고 나라가 견융(犬戎)의 땅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라고 일갈한 뒤, 자신에게 병권을 달라고 요구했다. 인조와 조정은 경악했다. 급히 선전관을 보내 강원감사 최현을 잡아들이게 하는 한편, 서울과 경기도의 병력 수천을 동원하여 전진시켰다. 비변사는 궁성의 호위를 강화하기 위해 호위대장이 군관들을 거느리고 대궐 밖에서 숙직하도록 하고, 동대문에서 횡성에 이르는 길의 요소 요소마다 정탐병을 배치했다. 이인거가 거느렸던 병력은 고작 70명 남짓이었다. 그는 9월30일, 횡성읍에서 벌어진 가벼운 교전 끝에 체포되었다. 싱거운 ‘해프닝’이었다. 하지만 처벌은 참혹했다. 심문 과정에서 모두 20명이 죽고 14명이 유배되었다. 진압 이후 인조는 모든 책임을 윤황에게 돌렸다. 윤황이 ‘항복’ 운운하는 바람에 이인거 등이 민심의 불만을 틈타 일을 저질렀다고 질타했다. 하지만 인조와 화의를 주도한 신료들의 마음은 도무지 편치 않았다. 이인거의 시도는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후금과의 화의에 대한 싸늘한 민심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정묘호란 직후 조선의 분위기는 그렇게 어수선하고 착잡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40) 정묘호란과 모문룡

    [병자호란 다시 읽기] (40) 정묘호란과 모문룡

    1627년 4월21일, 용골산성의 영웅 정봉수로부터 긴급 보고가 올라왔다.‘평안도 구성부터 곽산까지 후금 군사들이 가득 차 있고 용골산성은 고립되어 있다. 성안에는 7000명 가까운 군사가 있지만 양식이 다 떨어져 굶어 죽은 자가 이미 30명이 넘었다. 후금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해 오는 백성이 무수히 많지만 그들을 먹여 살릴 방도가 없다.’고 했다. 정봉수는 죽어 가고 있는 평안도 백성들을 살릴 진휼(賑恤) 대책을 속히 마련해 달라고 호소했다. ●서북 백성들의 비극 정묘호란 시기 평안도와 황해도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초는 끔찍했다. 조정에서 버림받은 채 후금군의 칼날 앞에 가장 먼저 노출되었던 그들이었다. 많은 이들이 후금군에 목숨을 잃거나 포로가 되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살던 곳을 버리고 피란을 떠났다. 피란길에 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해에 있는 섬으로 들어갔다. 후금군이 바다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섬으로 들어가면 목숨은 건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갑자기 들어간 섬 안에 식량이 제대로 준비되어 있을 리 없었다. 후금군을 겨우 피했지만 섬에서 굶어 죽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강화가 맺어져 전쟁은 끝났지만 서북 백성들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어느 고을을 가든 굶어 죽기 직전까지 몰린 사람들로 넘쳐났다.‘황해도의 마을들은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 비어 있고, 평양성 안에는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다.’고 했다. 압록강 부근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도 처참했다. 후금군에 끌려가던 포로들이 압록강을 건널 때 강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후금군은, 투신을 막으려고 포로들을 결박하고 배에다 울타리를 치기도 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강으로 뛰어들어 압록강이 시체로 뒤덮였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비극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정묘호란이 일어났던 초기, 평안도 백성들 가운데는 후금군의 앞잡이가 되어 모문룡 휘하의 명군(모병:毛兵)을 공격하는데 가담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난이 일어나기 이전 모병들이 자행했던 극심한 민폐 때문에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었다. 강화가 이루어지고 후금군이 철수하자 모병들의 보복이 시작되었다. 곽산, 구성, 삭주, 선천, 창성, 철산, 의주 등 모병의 주둔지 부근에 살고 있던 무고한 양민들까지 모병들에 살해되었다. 정묘호란 직후 모병들의 살육과 약탈은 극에 이르렀다.1627년 4월19일 무렵, 모문룡의 부하 모유후(毛有厚)는 안주에 정박해 있던 조선 선박 3척을 나포했다. 조선 피란민들이 타고 있는 배들이었다. 모유후는 배들을 기습하여 건장한 남자들과 노약자들은 모두 살해하고 여자들과 화물만을 남겨 끌고 갔다. 중군(中軍) 진계성(陳繼盛)이란 자는 조선 조정이 황해도 장연의 선박들을 쇄환하려는데 불만을 품고 조선인 역관을 잡아다가 곤장을 치고 귀를 자르는 악행을 저질렀다. 서북 지역에서 조선의 행정 체계와 공권력이 허물어진 상황에서 모병들은 마구잡이로 날뛰고 있었다. ●정묘호란 중의 모문룡 후금의 홍타이지가 정묘호란을 일으키면서 가장 중요한 목표로 내세운 것은 모문룡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조선에 대한 공격은 사실 부차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모문룡은 후금군의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가도에서 다른 섬으로 도피하여 용케 목숨을 보전했다. 그는 이후 평안도 연해 일대를 돌아다니며 상황을 관망했다. 조선 조정은 그가 배후에서 후금군을 공격하거나 견제해 줄 것을 기대했지만, 그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대신 조선 정부의 통제력이 사라진 틈을 이용하여 청북(淸北) 지역 주민들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높이려고 시도했다. 실제로 정묘호란 당시 평안도 지역의 조선 의병이나 백성들 가운데는 모문룡에게 의지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용골산성 싸움에서 공을 세웠던 중군 이립(李)과 품관 장희범(張希範)은 자신들이 벤 후금군의 수급(首級-머리)을 모문룡에게 가져다 바쳤다. 용천(龍川)의 군관 김여의(金汝義)는 수급뿐 아니라 후금군에서 노획한 말을 바쳤다. 모문룡은 그들에게 은이나 식량 등을 상으로 주었다. 적과 싸워 군공을 세워도 그에 합당한 포상을 받지 못하던 서북 지역 의병들의 입장에서는 모문룡이 상으로 주는 식량 등이 아쉬운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모문룡에게 수급을 바친 사람들 가운데는 조선인의 머리를 후금군의 것으로 속이는 자들도 있었다. 모문룡은 그렇게 얻은 수급을, 마치 자신이 적과 싸워 얻은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명 조정에 군공으로 보고했다. 청북 지역에 대한 조선 조정의 통제력이 사라진 데서 비롯된 비극이었다. 조선 조정은 강화가 성립된 후 모문룡에게 문안사(問安使)를 보냈다.1627년 4월27일, 문안사 신달도(申達道)는 모문룡을 면담했다. 신달도가 “수로와 육로가 모두 막혀 이제야 노야(老爺)를 찾아 뵙게 되었다.”고 공손히 안부의 인사를 전할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괜찮았다. 문제는 신달도가 가져간 자문(咨文)의 내용이었다. 자문 속에는 ‘귀하의 진영에서 조선을 돕기 위해 한 무리의 군대도 동원하지 않아 섭섭하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자문을 읽은 뒤 모문룡은 길길이 날뛰었다. 그는 ‘조선이 후금군을 끌어들여 명군을 도살했고, 의주부윤 이완(李莞)은 후금군이 자신을 죽일 수 있도록 고의적으로 그들을 방임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조선이 후금과 강화를 체결한 것은 명의 은혜를 배신한 ‘패륜행위’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신달도가 ‘강화를 체결한 것은 조선의 본심이 아니며 적을 기미(羈-어르고 달래는 것)하기 위한 목적에서 부득이하게 선택한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모문룡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조선 백성들을 죽이거나 약탈하지 못하도록 부하들을 단속해 달라.’는 신달도의 요청도 묵살했다.‘조선 사람들이 먼저 자신의 부하들에게 적대 행위를 했기 때문에 보복한 것’이라며 입을 막았다. ●모문룡에 미곡 5만석·은 10만냥 하사 4월28일, 정묘호란의 전말을 명 조정에 보고하기 위해 북경으로 가고 있던 주문사(奏聞使) 일행이 가도에 도착했다. 주문사 일행은 모문룡에게 면담을 신청했지만, 그는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만나 주지 않았다. 모문룡은 부하들을 시켜 조선의 주문사 일행이 명나라로 가는 것을 저지하도록 했다. 주문사 일행의 보고를 통해 정묘호란 중 자신의 행적이 탄로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모문룡은 아예 주문사 일행에게 명 조정으로 가져 가는 보고서의 내용을 뜯어 고치라고 강요했다.‘조선이 후금군의 침략을 받아 망하기 직전까지 몰렸는데 모문룡의 활약 덕분에 적이 크게 패하여 철수했다.’는 내용으로 고치라는 것이었다. 자신의 요구를 거부하면 북경으로 가는 해로를 열어 주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주문사 일행은 북경으로 가기 위해 결국 그의 요구대로 따랐다. 정묘호란 직후 명의 천계제(天啓帝)는 모문룡의 사기 행각에 완전히 넘어갔다. 요동에 파견되었던 태감(太監) 유응곤(劉應坤)은 정묘호란과 모문룡에 관련된 보고서를 조정에 올렸다. 그것은 한마디로 ‘소설’이었다.‘오랑캐 군사 6만이 조선을 공격했는데 모문룡이 기책(奇策)을 내어 제압하여 그들이 심양으로 도망쳤다.’는 내용이었다. 모문룡은 다른 경로로 올린 보고서에서는 ‘자신이 세 차례 대승을 거둠으로써 조선이 보전되었다.’고 허풍을 치는가 하면 ‘조선이 요민들이 끼치는 민폐에 불만을 품고 후금의 첩자 노릇을 하고 있다.’고 무고까지 했다. 1627년 5월 천계제는 모문룡의 ‘군공’을 치하하고 그에게 미곡 5만석과 양곡 구입 자금으로 은 10만 냥을 주도록 재가했다. 평소 위충현을 비롯한 환관들을 뇌물로 ‘구워 삶았던’ 모문룡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최고 지도자가 환관과 간신들에게 철저히 농락 당하고 있던 명의 앞날이 어떤 모습일지 예감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37)정묘호란 일어나다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37)정묘호란 일어나다Ⅱ

    1627년 후금이 갑자기 정묘호란을 도발했던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복합적이었다. 조선과 후금, 명과 후금, 그리고 조선과 명(-모문룡 문제를 포함) 사이의 문제점들이 서로 얽혀 있었다. 특히 누르하치가 죽은 뒤 추대 형식으로 즉위했지만 한(汗)의 위치에 걸맞은 권력과 권위를 갖지 못했던 홍타이지는 전쟁을 통해 여러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려고 했다. ●조선과 무역 통한 식량 확보도 전쟁 도발 배경 홍타이지는 조선에 대해 강경론자였다. 그는 일찍부터 부친 누르하치에게 조선을 공격하라고 청했다. 특히 1619년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이 심하 전역에서 패하여 투항한 뒤에는 ‘후금과의 화의에 미온적인 조선의 장졸들을 전부 살해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누르하치나 홍타이지의 형 다이샨(代善)의 입장은 달랐다. 두 사람은 ‘조선이 명의 배후에 있는 점을 고려하여 적대하지 말고 포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결국 조선을 삐딱하게 보고 있었던 홍타이지가 한으로 즉위한 것 자체가 조선에는 재앙이었던 셈이다. 홍타이지는 조선 정벌을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 즉위 당시 홍타이지의 권력은 미약했다. 그는 명목상으로는 한이었지만 실제로는 그의 형제들과 연정(聯政)을 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사촌형 아민은 홍타이지 추대에 반발하여 자신의 기(旗)를 이끌고 독립하려고 시도했다. 이 같은 배경을 염두에 두면 홍타이지가 조선을 치러 가는 원정군 사령관으로 아민을 임명한 것은 시사적이다. 아민에게 원정의 모든 책임을 지움으로써 그의 충성심을 시험할 수 있고, 결과가 좋지 않을 경우에는 정치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도 있었다. 아민은 실제 원정 도중 홍타이지의 방침과는 배치되는 독단적인 행보를 보임으로써 홍타이지의 ‘기대’에 부응한 바 있다. 후금이 전쟁을 도발했던 원인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경제적 문제였다. 홍타이지의 즉위 직후 만주 지역에는 심각한 기근이 닥쳤다.‘청태종실록’에는 ‘굶어죽는 자가 속출하여 사람이 서로를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고 돈이 있어도 식량을 구할 수 없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점령 지역은 늘었지만 농작에는 아직 서툴렀던 후금은 식량을 자급하지 못하고 있었다. 과거에는 명나라 상인들과 곡물 무역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명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당시 상황에서는 그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 심각한 기근 때문에 위기에 처한 후금에 조선의 존재는 특별했다. 자신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줄 유일한 나라였다. 후금은 정묘호란을 일으켜 조선으로부터 식량을 무역하겠다는 약속을 얻어내고자 했다. 후금의 전쟁 도발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핵심은 역시 ‘모문룡 문제’였다. 모문룡이 가도에 머무는 한, 후금의 서진(西進) 시도는 언제나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모문룡의 존재 때문에 한인들이 계속 후금을 탈출하고 있었다. 모문룡이 군사적으로는 미약했지만 후금에는 ‘목에 걸린 가시’였다. 그 ‘가시’를 제거하여 ‘후고(後顧)의 여지’를 없애는 것이야말로 전쟁을 일으킨 결정적인 배경이었다. ●아민, 홍타이지에 증원군 긴급 요청 조선 조정은 황해도 이북의 방어선이 붕괴되자 전열을 다시 정비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도원수 장만과 부원수 정충신(鄭忠信)에게 평안도 지역의 패잔병과 함경도, 강원도 등지의 병력을 모아 임진강을 방어토록 했다.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에게는 남한산성을 본거지로 삼아 하삼도 군사를 통괄 지휘하여 한강을 방어토록 했다. 그리고 통제사 구인후(具仁)가 거느리는 수군 병력으로써 적의 강화도 상륙을 저지하도록 조처했다.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역시 인조가 머물고 있는 강화도를 수비하는 문제였다. 전쟁 초반의 전체적인 전황(戰況)은 조선이 일방적으로 몰리는 상황이었지만 후금군은 의외로 신중했다. 후금군은 의주성을 함락시킨 직후 총사령관 아민의 명의로 평안감사 윤훤에게 서신을 보내 화의(和議)를 제의했다. 윤훤은 후금 측에, 조정에 품의(稟議)한 후 회답을 주겠다고 했고 1월18일 조정은 윤훤의 장계를 통해 후금이 화의를 제의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승승장구하던 시점에 후금이 갑자기 화의를 제의한 까닭은 무엇일까? 먼저 당시 후금군의 병력이 충분하지 않았던 점이다. 후금은 조선 침략에 약 3만명의 병력을 동원했는데 아민은 그 숫자로는 서울까지 진격하는 것이 어렵다고 보았다. 그는 청천강 이북을 점령했던 직후, 이미 홍타이지에게 사람을 보내 증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한 바 있다.3만명의 병력으로는 한편으로 전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점령 지역을 방어하고 그곳의 조선 관민들을 통제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까닭은 원숭환의 위협이었다. 정묘호란 당시 후금군이 조선으로 쳐들어가면서 가장 우려했던 것은 명군이 자신들의 배후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미 살폈듯이 1626년 누르하치가 영원성을 공격했다가 실패한 이후, 후금군의 서진은 좌절되었고 오히려 영원성에 주둔하는 원숭환으로부터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실제로 정묘호란 당시 명의 병부는, 후금군이 조선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간 틈을 이용하여 후금 지역을 공격하자고 건의한 바 있다. 산해관과 영원의 병마와 모문룡의 병력을 동원하여 배후를 협공함으로써 조선을 원조하자는 내용이었다. ●답장 내용 놓고 설전 후금이 화의를 제의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조선 조정은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양사(兩司) 관원들은 ‘평안감사 윤훤이 엄한 말로 오랑캐의 서신을 물리치지 못하고 답장을 주겠다.’고 응답한 것을 비난하고 인조에게 신중히 대처하라고 촉구했다. 이윽고 후금 측은 강홍립의 종자인 언이(彦伊) 등을 다시 윤훤에게 보내 ‘화의를 논의하기 위해 사람을 서울로 보내겠다.’고 협박했다. 윤훤의 장계를 통해 두번째 화의 제의를 받자 인조는 비변사 신료들을 불러모았다. 인조는 “서신을 받자마자 화친을 허락하면 우리가 겁을 내서 그런다고 여길 것”이라고 우려했다. 신흠(申欽)은 ‘명나라도 그들과 화친하려는 판에 우리만 화친을 피할 수 없다.’고 했고, 이귀는 ‘적이 평양으로 진격해 오면 사태 수습이 불가하다.’며 답서를 꾸며 강홍립의 아들 강숙 편에 부치자고 했다. 최명길의 의견은 달랐다. 그는 먼저 서신을 보낸 주체가 후금의 한 홍타이지가 아니라 사령관 아민임을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도체찰사 장만의 명의로 답하되, 무고하게 침략하여 군민들을 도륙한 허물을 따지고 ‘위협적인 맹약은 죽어도 따를 수 없으며 침략 사실을 명에 알리겠다.’는 내용을 집어넣자고 했다. 명을 이용하여 후금군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담긴 의견이었다.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후금 측의 화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지만 반대론도 만만치 않았다. 대사헌 박동선(朴東善), 사간 윤황(尹煌) 등 삼사 신료들은 인조가 강화도로 떠나기 전부터 반정공신들을 맹렬히 비난했다. 윤황 등은 ‘전하께서 총애하는 김류 이귀 이서 신경진 김자점 등 반정공신들은 해도(海島)로 들어가거나 산성으로 올라가고, 혹은 호위(扈衛)를 칭하거나 검찰(檢察) 직책을 맡아 안전하고 편안한 자리를 차지하고 오로지 힘없고 배경이 없는 장만만을 맨손으로 적진에 보냈다.’고 성토했다. 그들은, 맨 처음 도성을 떠나자고 주장한 자의 목을 베고 인조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친정(親征)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여하튼 강숙 등은 조정의 답서를 가지고 1월27일 후금군 진영에 도착했다. 후금군은 이미 중화(中和)까지 남하해 있었다. 답서의 핵심은 이러했다.‘조선은 명을 200년 이상 섬겨왔고 임진왜란 때 명에서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입었기 때문에 그들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민은 조선의 답서 내용에 반발했다. 그는 ‘조선은 명의 은혜만 강조하는데 과거 후금도 조선에 커다란 은혜를 베푼 적이 있다.’고 맞받았다. 바야흐로 ‘은혜’를 둘러싼 설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 [병자호란 다시 읽기] (36) 정묘호란 일어나다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 (36) 정묘호란 일어나다Ⅰ

    홍타이지는 1627년 1월8일 대패륵(大貝勒) 아민(阿敏)에게 조선을 정벌하라고 명령했다. 홍타이지는 “조선이 오랫동안 후금에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한 뒤 모문룡도 제압하라고 지시했다. 모문룡이 조선의 비호 속에 가도에 머물면서 후금을 탈출하는 반민(叛民)들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의주·정주·안주성 차례로 함락 후금군은 1월13일 압록강을 건너 의주성으로 들이닥쳤다. 당시 후금군은 다국적군이었다. 만주족 병사들뿐 아니라 한족과 몽골 출신 병사들도 있었다. 사령관은 아민이었고, 한족 출신의 이영방(李永芳), 조선 출신의 강홍립과 한윤(韓潤)도 지휘부에 끼어 있었다. 이영방은 1618년 누르하치가 무순을 공격했을 때 투항했고, 강홍립은 1619년 심하(深河) 전역에 참전했다가 투항했다. 한윤은 이괄과 함께 난을 일으켰던 한명련(韓明璉)의 아들이었다. 후금군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한윤은 변장하고 몰래 의주성으로 들어왔다.14일 새벽 후금군이 성을 포위하여 전투가 시작되자 한윤은 병기고에 불을 질렀다. 혼란한 와중에 후금군에 내응하는 자들이 성문을 열었고 후금군은 수월하게 성 안으로 들이닥쳤다. 성을 지키던 의주목사 이완(李莞)은 사로잡혀 피살되었다. 의주성 함락 후 후금군은 정주(定州)의 능한산성(凌漢山城)을 포위했다. 성을 지키는 조선 병사들은 일제히 조총을 쏘았지만 다시 탄환을 재기도 전에 돌격해 들어간 후금군에 의해 제압되었다. 선천부사 기협(奇協)이 전사하고, 정주목사 김진(金搢)과 곽산군수 박유건(朴惟建)은 포로가 되었다. 성 함락 후 후금군은 저항했던 군사들을 전부 살해했다. 백성들은 적에게 포로로 잡힌 뒤 전부 머리를 깎였다. 머리를 깎은 것은 포로들이 이제 자신들의 소유가 되었음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후금군은 1월21일 청천강을 건너 안주(安州)로 들이닥쳤다. 안주는 당시 청북 지방에서 가장 중요한 방어 거점으로 조선이 나름대로 오랫동안 방어태세를 점검해 왔던 곳이었다. 성 안의 군민도 3만 6000이나 되었다. 평안병사(平安兵使) 남이흥(南以興)은 성 밖의 민가를 불태우고 결전을 준비했다. 적의 돌격이 시작되자 대포와 화살을 일시에 발사하여 저지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삼남(三南)의 농민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던 조선군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후금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후금군의 대병력이 순식간에 성을 넘어왔고, 조선군은 우왕좌왕했다. 방어선이 붕괴되어 성의 함락이 임박하자 남이흥은 부하들과 함께 불붙은 화약 더미 속으로 몸을 던졌다. 장렬한 순국이었다. 안주 함락 후 아민은 병사들에게 4일간 휴식 시간을 주었다. 그들은 느긋했다. 반면 안주성이 함락된 후, 숙천(肅川)과 평양의 조선 관민들은 풍문만 듣고도 무너졌다. 후금군의 승승장구였다. ●당황하는 조선 조정 후금군의 침략 소식이 서울의 조정으로 날아든 것은 1월17일이었다. 인조는 급히 신료들을 불러보았다. 인조는 신료들을 보자마자 “이들이 모문룡을 잡아가려고 온 것이냐? 아니면 우리나라를 침략하려고 온 것이냐?”고 물었다.‘모문룡 문제’를 빼놓으면 후금과 원한을 살 만한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료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쟁 자체를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뾰족한 대책이 있을 리 없었다. 장만(張晩)은 속히 하삼도에서 병력을 징발하고, 황주(黃州)와 평산(平山)에 별장(別將)을 보내 방어 태세를 갖추자고 촉구했다. 이귀(李貴)는 황해도를 방어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며 강화도를 피란처로 정해 놓았다가 안주에서 패전 소식이 들어오면 곧바로 강화도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치 패전을 이미 기정사실로 설정해놓고 대응하려는 자세 같았다. 최명길은 임진강을 방어할 계책을 속히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른 비변사 신료들도 무신 신경진(申景 )을 임진강으로 보내자고 했다. 하지만 인조의 마음은 이미 강화도로 들어가 있었다. 인조는 강화도 방어를 위해 삼남 지방에서 1만의 병력을 동원하고 수사(水使)들을 시켜 수군을 이끌고 강화도로 들어오게 하라고 지시했다. 인조의 우선 관심사는 자신의 호위(扈衛:궁궐을 지킴) 문제였다. 인조는 아마도 ‘이괄의 난’ 당시 권력을 잃어버릴 뻔했던 아찔한 기억을 떠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사헌부와 사간원 관원들은 강화도로 들어가려는 계획에 반대했다. 그들은 궁벽한 강화도로 들어가면 조정의 명령이 통하지 않고, 조운(漕運)도 어렵다고 우려를 제기했다. 그럼에도 굳이 강화도로 들어가려면 분조(分朝)를 설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조는 강화도로 가되, 왕세자를 삼남으로 보내 민심을 수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흠(申欽)은 인조에게 민심 수습을 위해 백성들에게 ‘애통해 하는 교서(敎書)’를 내려야 한다고 건의했다. 일종의 ‘사과 성명’을 발표하라는 것이었다. 인조는 건의를 받아들여 장유(張維)에게 교서를 짓도록 했다. 인조는 교서에서 ‘반정 직후 민생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 채 백성들을 기만한 것’,‘옥사(獄事)가 빈발하여 억울하게 처벌받은 사람들 때문에 화기(和氣)가 손상된 것’,‘모문룡을 접대하기 위해 세금을 혹독하게 거둔 것’,‘호패법(號牌法)을 가혹하게 시행하여 백성들을 괴롭힌 것’ 등 ‘실정’에 대해 사과했다. 이어 자신을 ‘임금답지 못한 임금’이라고 자책한 뒤 ‘부디 열성(列聖)의 은혜를 생각하여 기댈 곳 없는 자신을 도와달라.’고 백성들에게 호소했다. 위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사과하는 굴욕까지 감수했던 것이다. 인조는 10년 뒤에도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1637년 병자호란이 항복으로 끝난 뒤에도 백성들에게 다시 사과 성명을 발표했던 것이다. ●강화도 이외의 방어를 포기하다 조정이 강화도로 들어가기로 결정하면서 여타 지역에 대한 방어는 거의 방기되었다. 인조는 신료들과 가졌던 대책 회의에서 장만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임명했다. 방어를 총괄하는 직책이었다. 장만은 황해도의 임지로 떠나기에 앞서, 적과 조우할 경우에 대비하여 어영군(御營軍) 가운데 사격술이 뛰어난 포수 100명을 데려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인조는 거부했다. 호위에 충당할 어영군의 병력을 덜어낼 수는 없다고 했다. 비변사의 논의를 주도하고 있는 반정공신들 또한 극도로 몸을 사렸다. 강화도로 피란하기로 결정한 직후 논란이 된 것은 임진강을 방어하는 문제였다. 훈련도감과 어영군의 병력을 호위에만 투입하게 되자 임진강 방어에 충당할 병력을 차출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김류는 이시백(李時白) 휘하의 수원부 군사들을 임진강 방어에 투입하자고 했다. 그러자 이귀가 발끈했다. 이귀는 ‘군량이 궁핍한 상황에서 수원의 병력을 임진강으로 보내면 오직 죽음 뿐’이라고 반발했다. 이시백은 이귀의 아들이었다. 이귀는 수원의 병력도 인조를 호위하는 데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류는 반박했다.‘적병이 이미 깊숙이 들어왔는데 장강(長江)의 요새를 버리고 나라를 도모할 수 있겠냐?’고 힐문했다. 인조는 결국 이귀의 손을 들어주었다. 수원의 군병도 강화도로 들여보내라고 했다. 보다 못한 보덕(輔德) 윤지경(尹知敬)이 상소를 올렸다. 그는 “적이 아직 천리 바깥에 있음에도 먼저 도성을 버릴 궁리만 하고 있다.”고 통탄하고 인조에게 경솔히 파천하지 말라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병력 500명만 주면 임진강을 사수하겠다고 다짐했다. 1월26일 인조는 결국 강화도로 가기 위해 노량(露梁)으로 거둥했다. 하지만 배가 부족하여 강을 건너기가 여의치 않았다. 인조는 말에서 내려 모래밭에 앉았다. 이괄의 반란군을 피해 한강변으로 나왔던 이래 두 번째 맞는 파천이었다. 다음날 인조는 김포를 경유하여 저녁에 통진(通津)에 도착했다. 조정이 강화도로 옮겨가면서 임진강을 포함한 다른 지역의 방어는 거의 방기되었다. 평안도와 황해도를 포함하여 한강 이북 지역의 백성들은 후금군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그들은 사실상 정권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제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지켜야만 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35) 명과 후금의 정세 Ⅲ

    [병자호란 다시 읽기] (35) 명과 후금의 정세 Ⅲ

    1626년(인조4, 천계6) 1월23일 누르하치는 영원성으로 들이닥쳤다. 그가 이끄는 병력은 20만이라는 설도 있고,13만이라는 설도 있다. 어쨌든 누르하치의 대병력이 나타나자 영원성의 전면에 머물던 명의 관민(官民)들은 경악했다. 대릉하(大凌河), 소릉하(小凌河), 행산(杏山), 탑산(塔山) 등지의 명군 지휘관들은 가옥과 곡식을 불태우고 도주했다. ●영원대첩(寧遠大捷)의 실상 누르하치는 영원성에 대한 공격에 앞서 자신이 데리고 온 한인(漢人) 포로를 풀어 성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를 통해 누르하치는 원숭환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우리는 20만의 대군이다. 성은 분명히 함락될 것이다. 여러 관인들이 항복한다면 높은 관작을 주겠다.”고 했다. 원숭환의 회답은 간단했다.“그대는 무슨 까닭으로 갑자기 공격해 왔는가? 나는 성을 사수할 것이다.” 1월23일, 누르하치는 공격을 명령했다. 후금이 자랑하는 철기(鐵騎)의 돌격이 시작되었다. 방패를 손에 쥔 경보병(輕步兵)들을 비롯하여 후금군 병사들이 성을 향해 개미 떼처럼 몰려들었다.20만이라고 큰 소리치는 대병력이었다. 영원성의 원숭환 병력은 대략 1만 정도에 불과했다.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병력 수만 보면 승패는 이미 끝난 셈이었다. 성으로부터 홍이포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사격은 정확했다. 포탄은 벽력같은 굉음을 내며 돌격해 오는 누르하치 병사들의 대열 중간으로 떨어졌다.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성벽을 기어오르던 병사들도 쏟아지는 화살 앞에 나가 떨어졌다. 후금군의 사상자가 속출했다. 1월24일, 누르하치는 전차(電車)를 투입해 다시 총공격에 나섰다. 포격을 피하기 위해 참호를 파야 했지만 날은 춥고 땅은 꽁꽁 얼어 있었다. 다음날에도 후금군은 희생을 무릅쓰고 돌격을 계속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누르하치는 흥분했다. 그는 병사들의 선봉에 서서 전투를 독려했다. 홍이포의 포탄은 누르하치라고 해서 피해가지는 않았다. 굉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누르하치는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스물 다섯부터 전장을 주유했던 누르하치였다. 그동안 누르하치는 명군보다 몇 배나 많은 병력을 집중시키는 방식으로 연전연승했다. 거기에 철기의 기동력이 더해지면서 명의 오합지졸들은 후금군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1619년 사르후 전이 그러했고, 이후 줄곧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달랐다. 홍이포의 가공할 위력 앞에서는 후금군의 신속한 기동과 병력의 집중 전략이 통하지 않았다. 더욱이 원숭환은 그동안 상대했던 명군 지휘관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인물이었다. 그 스스로 영원성을 점찍어 성벽을 수축하고 군량을 비축해온 ‘준비된 지휘관’이었다. 그는 전투가 시작되기 전, 여러 장수들과 혈서를 써서 수성(守城)을 맹세했다. 원숭환의 탁월한 영도 아래 만계(滿桂), 조대수(祖大壽) 등 부하 장수들도 선방했다. 연이은 공격에도 함락되지 않자 누르하치는 병력을 거둬 심양으로 철수 길에 올랐다. 청실록에서는 유격(遊擊) 2명, 비어(備禦) 2명이 전사하고 500명의 병사들이 죽었다고 적었다. 영원성의 승리가 남긴 영향은 컸다. 이후 후금은 함부로 산해관을 넘보지 못했다.1641년(崇禎 14) 홍승주(洪承疇)가 송산과 행산전투에서 무너질 때까지 산해관 앞의 영원을 거쳐 금주(錦州)에 이르는 요새와 성채들은 후금의 서진(西進)을 차단했다. ●전투 부상 후유증으로 누르하치 사망 1626년 8월, 누르하치는 영원성에서 입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윽고 후금의 버일러(貝勒)들은 홍타이지(皇太極)를 새로운 한(汗)으로 옹립했다. 그는 누르하치의 여덟번째 아들이었다. 우여곡절이 없지 않았지만 여덟 번째 아들이 최고 권력자로 즉위했다는 사실 자체가 명이나 조선의 눈으로 보면 이채로운 것이었다. 무조건 장자가 계승하는 관행으로 보면 말이다. 홍타이지(1592~1643)는 잘 알려진 것처럼 훗날 제위에 올라 태종(太宗)이 되고, 병자호란을 일으켜 인조에게서 치욕적인 항복을 이끌어냈던 인물이다. 그의 모친은 몽골족 여자였다. 누르하치가 1615년 황(黃), 홍(紅), 남(藍), 백(白) 등 사기(四旗)를 확대하여 팔기(八旗)를 창설했을 때, 스물 두 살의 홍타이지는 정백기(正白旗)를 관할하는 버일러가 되었다. 그는 이 무렵부터 다이샨(代善), 아민(阿敏), 망굴타이(莽古爾泰) 등 그의 형들과 더불어 ‘사대 버일러(四大貝勒)’로 불리면서 정무에 공동으로 참여했다. 홍타이지는 누르하치를 수행하여 전장을 누비면서 탁월한 전공(戰功)을 쌓았다. 특히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그가 세운 전공은 혁혁하여 누르하치는 ‘내 아들 홍타이지는 사람들이 의지하기를 인체로 치면 마치 눈과 같은 존재’라고 찬양했다. 홍타이지는 무략(武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여진족의 지도자로서는 드물게 한문에도 능통했다. 홍타이지가 개인적으로 탁월한 인물이고, 추대에 의해 한으로 즉위했지만 즉위 직후 그의 위상은 보잘것이 없었다. 일견 만장일치에 의해 옹립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속사정은 달랐다. 즉위 직후 당장 그의 사촌형 아민이 삐딱하게 나왔다. 아민은, 홍타이지를 한으로 인정하지만 자신은 소속 기인(旗人)들을 이끌고 독립하겠다고 통보했다. 홍타이지는 긴장했다. 아민의 독립을 허락하면 나머지 각 기들도 전부 이탈하려 들 것이고, 그럴 경우 후금의 연맹 조직이 붕괴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즉위 직후 그는 아민을 설득하는 데 진땀을 흘려야 했다. ●권력강화를 위한 홍타이지의 노력 아민을 겨우 설득했지만 홍타이지의 앞길은 첩첩산중이었다. 누르하치 시대 만주족은 분권(分權), 합의제(合議制)에 기초한 전통적인 부족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누르하치의 권력이 강화될수록 각 버일러들은 자신의 권력이 왜소해지지 않을까 두려워했고, 당연히 누르하치를 견제하려 들었다. 부족제의 전통이 강한 상황에서 홍타이지는 더욱이 서열상 사대 버일러 가운데 맨 꼴찌였다. 나머지 버일러들이 누르하치의 후계자로서 막내인 홍타이지를 옹립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한의 권력을 억제하고 전통적인 부족제 본래의 통치체제로 돌아가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즉위 직후 홍타이지는 백관들로부터 조하(朝賀)를 받을 때 세 명의 형들과 나란히 앉아 남면(南面)했고, 제례(祭禮)를 거행할 때도 그들과 동렬(同列)에 섰다. 그것은 사실상 공동 집정이었다. 홍타이지는 이름만 한일 뿐 실제 가지고 있는 권력 면에서는 세 명의 버일러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홍타이지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나섰다. 그 과정에서 그는 한인(漢人)과 몽골인들에게 주목했다. 당시 후금 사회에는 많은 한인과 몽골인들이 있었다. 정복 과정에서 포로로 획득하거나 귀순해 온 사람들이었다. 누르하치는 한인들을 좋게 봐주지 않았다. 그들을 복속시키려고 위해 탄압을 일삼았다. 만주인들이 그들에게 약탈을 자행해도 그다지 문제삼지 않았다. 자연히 만주인들과 한인들 사이에 갈등이 불거졌다. 한인들은 침학을 피해 도망치는 것은 물론, 만주인 관인들을 암살하거나 우물에 독을 풀기도 했다. 무리를 지어 반란을 일으켰다. 홍타이지는 한인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정책을 바꾸었다. 만주인 귀족이나 관원들이 한인들을 함부로 약탈하는 것을 금지했다. 한인과 만주인들을 분리시켰다. 한인들의 거주 지역에 만주인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한인 관리들을 시켜 그들을 통제하도록 했다. 능력 있는 한인들을 발탁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홍타이지의 포용정책에 힘입어 많은 한인들이 관직에 진출했다. 한인 관료들의 경륜과 지식을 활용할 수 있게 됨으로써 홍타이지의 권력은 강화되었다. 1627년 무렵, 홍타이지는 산해관을 향한 서진을 잠시 멈추고 내실을 다지기 위해 힘썼다. 동시에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그것은 조선에게 위기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21) 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Ⅲ

    [병자호란 다시 읽기] (21) 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Ⅲ

    광해군이 명의 파병 요구를 거부하려 했던 것은, 폐모논의와 궁궐 건설 문제 등 내정(內政)의 현안들을 해결하는 것도 벅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명의 압력과 내부의 채근에 밀려 군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1619년(광해군 11) 2월, 조선군은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갔다.1만 5000 가까운 병력이었다. 광해군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했던 심하 전역(深河戰役)이 시작된 것이다. 중국사에서는 이 전역을 보통 사르후(薩爾滸) 전투라고 부른다. 명군과 후금군 주력 사이의 전투가 벌어졌던 전장(戰場)이 사르후 지역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투에서 명군은 거의 궤멸될 정도로 참패했고 두 나라의 향후 운명도 확연히 갈렸다. 사르후 전투는 명청교체(明淸交替)의 분수령이었던 것이다. ●광해군, 강홍립을 발탁하다 광해군은 심하 전역의 향방에 대해 거의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그는, 명군이 동북(東北)의 오지인 허투알라(赫圖阿拉)까지 장거리 원정에 나서는 것의 위험성을 간파했다. 실제로 명군 가운데는 내륙 지역인 쓰촨(四川)에서 출발하여 산하이관(山海關)을 통과하고, 랴오양(遼陽)과 선양(瀋陽)을 거쳐 허투알라에 이르는 수천㎞의 거리를 행군해야 하는 병력도 있었다. 장거리 행군에 지친 명군이, 가만히 앉아 대비할 수 있는 후금군을 상대하기란 버거운 것일 수밖에 없었다. 광해군은 또한 명군 지휘부가 조선군을 몹시 닦달할 것이란 사실도 예측했다. 그가 조선 원정군의 도원수(都元帥)로 문관 출신의 강홍립(姜弘立)을 임명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강홍립은 어전통사(御前通事:왕의 직속 통역관)를 역임할 정도로 중국어 실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명의 강요에 밀려 ‘내키지 않는’ 출병을 단행한 이상, 병력의 손실을 최소화하려면 적어도 명군 지휘부와 직접 대화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다. 그래야만 작전권을 틀어쥔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리지 않을 수 있었다. 광해군은, 출정하기 직전 강홍립에게 지침을 주었다.‘그대는 조선군의 정예 병력을 이끌고 있으니 명군 지휘부의 명령을 일방적으로 따르지 말고 신중하게 처신하여 패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명군 지휘부는 조선군이 평안도에 머물 때부터 닦달을 시작했다. 총사령관이었던 경략(經略) 양호(楊鎬)는 강홍립에게 조선군 화포수(火砲手)부터 속히 도강(渡江)시키라고 요구했다. 조선군 부대 가운데 명군 지휘부가 가장 크게 탐냈던 병력이 바로 화기수였기 때문이다. 강홍립은 양호의 명령대로 화기수 5000명을 미리 들여보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명군의 우익남로군(右翼南路軍) 사령관인 유정(劉綎)의 휘하에 배속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광해군은 강홍립을 질책했다. 명군 지휘부의 명령을 일방적으로 따르지 말라는 자신의 지침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광해군의 질책은 당연했다.3월4일, 유정 휘하의 명군이 후금군으로부터 기습을 받아 궤멸될 때 배속된 조선군도 대부분 전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낯선 땅에서의 행군, 또 행군 평안도 창성(昌城)을 출발한 조선군 본진은 1619년 2월23일 압록강을 건넜다. 조선군은 좌영(左營), 우영(右營), 중영(中營) 등 3개 진영으로 구성되었다. 조선군 가운데는 항왜(降倭)들도 참전했다. 항왜는 임진왜란 당시 투항했던 일본군 출신의 병사들을 말한다. 그들은 조총을 잘 다루고, 검술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용맹함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 정예 병력이었다. 압록강을 건넌 후 허투알라에 이르는 조선군의 행군로에는 산악과 강이 널려 있었다. 날씨 또한 좋지 않았다. 양마전(亮馬佃)이란 곳에 도착했던 25일에는 눈이 내리고 강풍이 불어 날씨가 몹시 추웠다. 병졸 가운데 얼어죽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런데 무엇보다 문제는 군량 운반을 맡은 수송 부대가 본진을 제 때 따라오지 못하는 점이었다. 2월26일, 진자두(榛子頭)라는 곳에 이르러 강홍립은 유정을 만났다. 강홍립은 유정에게, 군량 운반이 제대로 안 되고 있는 사정을 설명하고, 조선군의 행군을 잠시 늦춰 달라고 요청했다. 유정은 거부했다.‘약속한 시간은 정해져 있고 군율은 지엄한 것이기에 허락할 수 없다.’고 했다. 조선군은 할 수 없이 계속 걸었다. 2월27일, 진자두에서 50리 정도 떨어진 배동갈령(拜東葛嶺) 부근에 도착했을 때 조선군 3영의 장졸들은 모두 휴대했던 군량이 떨어졌다. 보병들 가운데는 행군에 지쳐 정강이와 발 뒤꿈치에 유혈이 낭자한 병사들이 많았다. 계속 행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명군 ‘고문관’ 우승은(于承恩)이 달려왔다. 그는 강홍립에게 칼을 빼서 휘두르며 ‘조선군이 뒤처지면 자신의 목이 날아간다.’고 소리쳤다. 당시 명군 지휘부는 ‘조선군이 군량이 없는 것이 아니라 관망하려 하기 때문에 일부러 천천히 걷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래서 유격 교일기(喬一琦)와 우승은을 고문관 겸 감시자로 붙여 강홍립을 계속 몰아붙였다. 3월2일, 허기와 명군 지휘부의 채근에 시달린 끝에 조선군은 심하에 도착했다. 허투알라까지는 60리 정도 떨어져 있었다. 이곳에서 조선군과 명군은 약 600명의 후금군 기병과 조우한다. 적병은 높은 산 쪽에서 화살을 쏘아댔지만 조선군이 조총으로 응사하여 물리쳤다. 서울 포수 이성룡(李成龍)은 적장을 쏘아 맞혔고, 병사 한명생(韓明生)은 그의 목을 베어왔다. 조명연합군이 최초로 거둔 작은 승리였다.‘만주실록’에 보면 ‘토부(托保)와 에르나(額爾納)가 이끄는 병력이 유정에게 패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성룡이 사살한 장수는 둘 가운데 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강홍립의 투항 작은 승리의 기쁨도 잠시 뿐,3월3일 조선군은 다시 ‘굶주림과의 전투’를 치러야 했다. 강홍립은 병사들을 풀어 주변의 후금인 부락을 뒤져 숨겨진 양곡을 찾아냈다. 그것을 돌로 빻아 죽을 만들어 병사들에게 먹게 했다. 3월4일 아침, 조선군은 계속 행군하여 부차(富車)라는 곳에 도착했을 때 세 발의 대포 소리를 듣는다. 이윽고 교일기 등이 강홍립에게 달려와 유정이 이끄는 명군 본진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지난 밤, 무리하게 행군을 감행하다가 귀영가(貴盈哥)와 홍타이지, 아민(阿敏)이 이끄는 3만 후금군의 매복, 습격에 휘말린 것이었다. 명군의 궤멸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조선군도 후금군의 공격에 휘말렸다. 좌영과 우영이 먼저 후금군 철기(鐵騎)의 공격을 받았다. 조선군은 조총을 쏘며 저항했지만 두 번 째 탄환을 장전하기 전에 철기는 두 영을 유린했다. 선천(宣川) 군수 김응하(金應河), 운산(雲山) 군수 이계종(李繼宗), 영유(永柔) 현령 이유길(李有吉) 등이 전사하고 두 영은 무너졌다. 이민환(李民 )의 ‘책중일록(柵中日錄)’은 ‘강홍립이 거느리던 중영은 좌우영과 불과 1000보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달려가 구원할 겨를도 없이 두 영이 무너졌다.’고 당시 상황을 적었다. 후금군 철기의 가공할 파괴력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후금군의 포위 속에서 중영의 조선군 지휘부에서는 ‘마지막 결전을 치르자.’는 논의가 나왔지만 병사들 가운데는 아무도 움직이려는 자가 없었다. 눈앞에서 두 영이 무너지는 참상을 목도한 데다, 굶주림에 지친 병사들은 이미 전의를 잃었던 것이다. 싸울 의지가 없는 병사들을 거느리고 포위를 뚫을 수는 없었다. 이윽고 강홍립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투항한다. 그런데 투항 상황에 대한 기록들은 서로 상당히 다르다.‘광해군일기’와 ‘책중일록’은, 강홍립이 진퇴양난의 처지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 후금군이 먼저 통사를 보내와 항복을 종용했다고 적었다.‘만주실록’은, 후금군이 조선군 진영을 공격하려 할 때, 강홍립이 먼저 사람을 보내 항복을 제의했다고 적었다. 양자의 기록에는 분명 각각의 주관적 서술과 윤색이 가해졌을 것이다. 따라서 어느 쪽이 당시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적었는지를 명확히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강홍립이 남은 생령(生靈)들을 살리기 위해 항복을 선택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3월5일 허투알라로 들어가 누르하치에게 항복했다. 곧 이어 항복 소식이 서울로 날아들었다. 조야를 막론하고 사대부들은 ‘매국노’ 강홍립의 가족들을 수금하라고 아우성이었다. 광해군은 그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강홍립의 항복과 함께 그의 정치적 운명도 조락(凋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12)누르하치, 명(明)에 도전하다 Ⅳ

    [병자호란 다시 읽기] (12)누르하치, 명(明)에 도전하다 Ⅳ

    1618년 4월15일 푸순성을 포위한 누르하치는 성주 이영방(李永芳)에게 항복하라고 종용했다. 이영방이 망설이자 후금군은 공격을 시작했고, 상대가 될 수 없음을 깨달은 이영방은 항복했다. 푸순성을 접수한 누르하치는 성안에 있던 한인(漢人) 상인들을 풀어 주었다. 그들에게 ‘칠대한’이 적힌 문서를 들려주고, 고향으로 돌아가 내용을 알리라고 했다. 자신의 거병이 정당하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4월21일 광녕총병 장승음(張承蔭)이 푸순성을 구원하려고 달려왔다. 만주 주민들을 세거지에서 쫓아내고 수확을 금지시켰던 바로 그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병력은 1만명에 불과했고,6만명까지 불어난 후금군에 참패해 전사하고 말았다.‘명실록(明實錄)’은 ‘장승음이 힘이 다하여 죽었다.(力屈死之)’라고 적었다. ‘중화(中華)의 대국’이 ‘오랑캐의 소국’에 밀리기 시작했음을 상징하는 대목이다. 이후 누르하치가 요동의 명군을 공략하는 방식은 한결같았다. 각 지역에 분산배치돼 있던 명군을, 대규모의 병력을 집중시켜 격파하는 것이었다. ●명, 충격 속에 대책을 모색하다 푸순성 함락과 장승음 전사 소식에 명의 조야는 술렁거렸다. 특히 이영방이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다는 소식은 ‘경악’ 그 자체였다. 요동 전체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요동이 무너지면 산하이관이 흔들리고, 궁극에는 베이징까지 위협받게 된다. 명 조정을 더욱 불안하게 한 것은 누르하치가 코르친 등 몽골 부족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몽골 지역으로 진입하면, 명이 요동에 설치한 변장(邊牆)을 우회해 명군을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신료들은 상소를 올려 산하이관의 방어를 강화하라고 촉구했다.‘사납고 건방진 오랑캐’를 즉각 응징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타났다. 하지만 당시 요동에 배치된 명군의 전력은 미덥지 못했다.1618년 6월 병부좌시랑(兵部左侍郞) 최경영(崔景榮)은 ‘요동의 방어선은 2000리나 뻗어 있는데 병력은 고작 8만∼9만명 정도뿐’이라고 했다.9만명이라고 해봤자 광활한 지역에 분산배치돼, 개별 지역이 팔기병으로부터 집중공격을 받을 경우 위태롭기 그지 없었다. 더욱이 당시 요동의 명군은 군량 등의 지원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푸순 함락 직후, 병부상서 설삼재(薛三才)는 요동에 대한 군수지원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1617년 가을부터 당시까지 요동 방어를 위해 지출했어야 할 군비(軍費)가 은 50만냥인데, 그것을 집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요향(遼餉·요동으로 보내는 군비)을 확보하고, 병력을 확충하려면 엄청난 비용을 염출해야만 했다. 설삼재는 호부(戶部)의 창고가 비었음을 실토하고 만력제(萬曆帝)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황제의 ‘사금고(私金庫)’인 내탕(內帑)에 쌓여 있는 은화를 좀 풀어 달라는 것이었다. 설삼재뿐만이 아니었다. 상소를 올린 신하들은 거의 한결같이 내탕을 풀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만력제는 내탕에 수백만냥을 쌓아 놓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인색한 황제의 대답이 걸작이었다.“짐의 내탕이 공허해 요동의 군사비를 대기가 곤란하다.”고 했다. ●만력제란 인물은 역사가들의 만력제에 대한 평가는 냉혹하다.‘명은 숭정제(崇禎帝) 대에 망했지만, 망하는 데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만력제’라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가들은 만력제의 정치적 행태를 ‘태정(怠政)’‘파공(罷工)’이라 부른다.‘정사를 돌보는 데 게으르고, 황제의 역할을 포기했다.’는 뜻이다. 만력제는 1573년 열 살에 즉위해 1620년 쉰여덟 살로 죽을 때까지 48년 동안 제위에 있었다. 그가 처음부터 정치를 팽개친 것은 아니었다.1584년 무렵까지는 뛰어난 재상이자 ‘스승’이었던 장거정(張居正)의 보좌를 받아 상당한 수준의 치적을 이뤘다. 조정의 기강이 잡혔고, 세입(稅入)이 앞 시기보다 두 배 가까이 늘어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척계광(戚繼光)과 이성량의 활약으로 남방의 왜구(倭寇)나 북방의 몽골, 여진의 위협도 잠재웠다. 1584년 장거정이 죽은 뒤부터 만력제는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왜 그랬을까? 중국인 역사학자 옌충녠(閻崇年)은 만력제가 즉위 과정에서 이렇다 할 경쟁자가 없이 순조롭게 황제가 되었던 것, 누군가의 부축을 받지 않고는 혼자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비만인 데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것,1599년까지 임진왜란을 비롯한 세 차례의 큰 전쟁(萬曆三大征)을 치른 것을 주요 원인으로 꼽는다. 만력제는 융경제(隆慶帝)의 셋째 아들이라,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제위에 오를 가능성이 거의 없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두 형이 유년 시절에 죽는 바람에 여섯 살에 황태자로 책봉됐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 융경제 또한 재위(在位) 6년 만에 서른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만력제는 황태자가 된 지 불과 4년 만에 자연스럽게 즉위했다. 누르하치나 홍타이지를 비롯한 청의 역대 군주들이 후계자로 선택되는 과정에서 왕자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했던 것, 조선의 광해군이 왕세자로 책봉된 뒤 16년 동안이나 부왕(父王)의 견제 때문에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던 것과 비교하면 만력제는 그야말로 ‘행운아’였다. 역경을 모르고 일찍이 권좌에 올라 안일에 빠지기 쉬웠던 데다, 비만과 신병(身病) 때문에 움직이기를 싫어했던 것, 나아가 만력삼대정에서 모두 승리함으로써 방종에 빠지게 됐다. 이같은 상황에서 자신을 대신해 정사를 거의 도맡다시피 했던 장거정마저 사라지자 만력제의 한계는 곧바로 현실로 나타났다. ●‘태정’의 실상은 푸순성이 함락될 무렵 만력제가 보였던 ‘태정’의 실상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그는 1600년 이후 20년 가까이 조정의 회의를 거의 주재하지 않았다. 신료들은 만력제에게 ‘조정에 나와 정사를 재결(裁決)해 달라.’고 수없이 주청했지만 그야말로 마이동풍이었다. 최고 관직인 대학사(大學士) 가운데는 심지어 3년 동안 만력제의 얼굴을 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만력제는 신료들이 자신에게 올린 상소나 건의에 대해 회답을 주지 않았다. 상소문은 ‘불보(不報)’ ‘유중(留中)’이라 하여 회답이 없는 상태로 궁중에 방치됐다. 당사자의 사망이나 사직 때문에 고위 관직이 비어도 후임자를 임명하지 않았다. 푸순성 함락 직후 대학사 방종철(方從哲)이 ‘누르하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으로 가장 먼저 언급한 것이 바로 비어 있는 관직을 채우라는 것이었다. 황제가 조정에 나오지 않고, 신료들의 결원을 보충하지 않으며, 상소나 건의의 내용을 재가하지 않는 상황에서 국가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할 리 없었다. 정사를 팽개친 만력제는 도대체 무엇을 했을까? 주색(酒色)에 빠지고 토목공사에 몰두했다. 죽은 뒤에 묻힐 정릉(定陵·현재의 명 13릉 가운데 하나)을 미리 짓기 위해 은 800만냥을 쏟아 부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내탕이 축나는 것이 아까워 환관들을 전국 각지로 보냈다. 백성들로부터 비용을 뜯어내기 위해서였다. 환관을 앞세운 마구잡이식 수탈에 백성들은 아우성을 쳤다. 푸순성이 함락될 무렵 만력제가 보인 행보는 누르하치와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설삼재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내탕을 풀 수 없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이미 명의 앞날에 낙조(落照)가 드리워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병력을 운용할 비용이 없으면 누르하치를 제대로 막을 수 없고, 그를 막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 나라가 망하면 자신이 황제 자리에 있을 수도, 수백만냥의 내탕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과연 몰랐던 것일까? 누르하치가 한창 떠오르고 있을 때, 최고 권력자가 만력제였다는 사실이 명에는 불행이었던 셈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읽기] (11) 누르하치, 명(明)에 도전하다 Ⅲ

    [병자호란 다시읽기] (11) 누르하치, 명(明)에 도전하다 Ⅲ

    누르하치가 만주의 패자(覇者)로 등장하기 전까지, 명이 상대하기에 가장 버겁고 까다롭게 여긴 대상은 예허였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누르하치가 하다, 호이파, 울라를 멸망시킴으로써 예허는 고립되었다. 명은 이제 예허를 다독여 누르하치의 후금을 견제하려 했고, 위기에 처한 예허도 명에 의지하여 생존을 도모하는 수밖에 없었다. 흔히 누르하치를 청 태조(太祖)라고 부르지만, 그가 애초부터 명에게 도전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명과 후금 사이의 현저한 국력 차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명과 맞서는 것을 애써 피하려 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명, 예허와 결탁해 만주 견제 누르하치에게 복종과 배신을 거듭했던 부잔타이는 1613년 울라가 망하자 예허로 망명한다. 같은 해 9월, 누르하치는 예허에 세차례나 사자를 보내 부잔타이를 송환하라고 요구했다. 예허가 자신의 요구를 일축하자 누르하치는 4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예허 정복에 나섰다. 다급해진 예허의 국주 긴타이시(錦台什)는 명에 사자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누르하치가 예허를 정복하고 나면 랴오양(遼陽)을 쳐서 수도로 삼고 개원(開原)과 철령(鐵嶺)을 목초지로 만들 것’이라는 ‘경고’까지 곁들였다. 명은 누르하치에게 사자를 보내 예허를 공격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한편, 병력 1000명을 예허로 파견했다. 누르하치를 견제하기 위한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한 것이다. 황제의 ‘명령’을 접한 누르하치는 명에 보내는 국서에서, 과거 예허가 주동이 된 해서(海西)연합군이 자신을 먼저 침략했던 것과 부잔타이가 배신을 거듭했던 사실을 적고 자신의 예허 공격은 정당하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명이 예허만 편드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했다. 주목되는 것은 누르하치가 국서를 들고 명군 주둔지인 푸순성(撫順城)까지 직접 가서 전달했던 점이다. 당시 누르하치는 명에게 여전히 공손한 자세를 보였던 것이다. 명과 정면으로 부딪히지 않으려는 누르하치의 바람과는 달리 명의 견제와 압박은 갈수록 커져갔다. 1615년, 명의 광녕총병(廣寧總兵) 장승음(張承蔭)은 시하(柴河), 무안(撫安), 삼차(三 ) 등지에 대대로 살았던 만주의 농민들을 내쫓고, 수확을 금지하는 조처를 취했다. 허투알라와 푸순 사이에 위치한 세곳은 누르하치가 공들여 경작하고 있던 땅이었다. 명은 경작과 수확을 막아 경제적 기반을 차단함으로써 누르하치의 숨통을 조이려 했던 것이다. 누르하치는 격렬하게 반발했다. 사실 그는 격분할 만했다. 누르하치는 1608년 푸순 지역의 명군 지휘관들로부터 과거부터 대대로 살아온 자신의 거주영역을 존중해 준다는 약속을 받아낸 바 있다. 당시 백마를 잡아 하늘에 맹서하고,‘만일 약속한 경계를 침범하면 침입자를 죽일 수 있고, 침입자를 그대로 두면 묵인한 사람이 재앙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 누르하치는 명의 사자를 만난 자리에서 장승음이 맹서를 어겼다고 성토하고,“대국이 소국이 될 수 있고, 소국이 대국이 될 수도 있는 것이 하늘의 이치”라며 ‘뼈 있는’ 말을 남겼다. 명과의 정면 대결을 암시하는 발언이었다. ●‘공격´ 주장 신료 말리며 역량 키워 1615년, 명이 일방적으로 예허의 편을 들고 경작까지 금지하는 조처를 취하자 누르하치의 신료들은 격앙됐다. 그들은 당장 명을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누르하치는 신중했다. 그는 신료들에게 ‘명을 치려면 하늘이 우리를 인정하여 도울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는 충분한 저축이 없기 때문에 명을 공격하여 약간의 승리를 얻어봤자, 백성들만 고달프게 될 뿐’이라고 공격론을 일축했다. 스스로에 대한 냉철한 진단이자 평가였다. 당시 아무리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해도 명은 여전히 대국이자 강국이었다.‘썩어도 준치’라고 했던가? 명의 인구는 만주보다 수백배나 많았고, 명의 대군은 만주가 갖추지 못한 화포(火砲)로 무장하고 있었다. 장승음의 ‘견제 조처’가 나온 직후의 ‘만주실록(滿洲實錄)’을 보면, 내실(內實)을 다지기 위해 애쓰는 누르하치의 모습이 부쩍 많이 나타난다. 만주의 각 니루(牛 )에서 장정 열명과 소 네 마리씩을 내게 하여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경작에 힘쓰도록 한 것, 창고를 세워 식량을 저장하고 그것을 관리하기 위해 전담관원을 임명한 것, 신료들에게 쓸 만한 인재를 추천하라고 강조한 것, 백성들이 소송(訴訟)을 제기한 사안을 공정하게 처리하여 억울함을 없애라고 강조한 것 등이 그것이다. 이 무렵 국가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누르하치가 보인 행보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몽골과의 동맹관계를 더욱 굳게 했던 점이다.1614년 4월부터 1615년 1월까지 10개월 남짓한 기간 만주는 몽골과 모두 다섯 차례나 혼인관계를 맺는다. 1614년에는 홍타이지를 비롯한 누르하치의 네 아들들이 몽골의 자루트( 特)와 코르친(科爾沁) 부족의 딸들을 아내로 맞았다.1615년에는 누르하치가 코르친 부족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1617년 1월, 누르하치의 장인인 코르친 부족의 밍간(明安) 국주가 자신을 찾아온다는 소식이 오자, 누르하치는 왕비와 모든 신료들을 대동하고 허투알라에서 100리나 떨어진 곳까지 마중을 나갔다. 밍간은 누르하치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허투알라에서 한달을 머물다가 돌아갔다. 이렇게 중첩된 사돈관계를 통해 우호를 유지했던 것은 만주에게 큰 힘이 되었다. 실제 1618년 누르하치가 명에게 선전포고하고 푸순을 공략할 때, 원정군 가운데는 그의 몽골인 사위들도 끼어 있었다. 당시 몽골은 남쪽으로 명, 동쪽으로 만주 사이에 위치한 전략 요충이었다. 누르하치가 명에 대한 섣부른 공격 대신 몽골을 회유하고 우대하는 정책을 취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7대 원한´ 내걸고 명에 선전포고 누르하치는 명과의 격돌을 피하면서 내실을 다지려 했지만 상황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가 후금(後金)의 건국을 선포하고, 칸(汗)으로 즉위했던 1616년. 명 조정은 광녕 순무(巡撫)로 이유한(李惟翰)이란 인물을 임명했다. 광녕 순무는 사실상 요동의 군사업무를 책임지는 자리이자, 누르하치 등 여진 부족들과 교섭하는 최고위급 ‘채널’이었다. 누르하치는 이유한이 새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자 신료 강구리(綱古里)와 팡기나(方吉納)를 인사차 파견했다. 그런데 이유한은 강구리를 비롯한 후금의 사절 11명을 쇠사슬로 묶어 구금해 버렸다. 이어 사자를 보내, 누르하치가 경계를 넘어온 한인(漢人)들을 죽인 것을 질책하고 ‘한인 살해’에 가담한 자들을 넘기라고 협박했다. 누르하치는 과거 ‘월경한 자들을 죽이지 않으면 재앙이 자신에게 미친다.’고 비석에 새겼던 내용을 상기시키며 사자를 설득하려 했지만 되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결국 광녕에 억류된 강구리 등을 살리기 위해 편법을 쓴다. 후금이 구금하고 있던 예허의 포로 10명을 ‘한인 살해자’로 이유한에게 넘겼던 것이다. 강구리 등은 약속대로 풀려났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누르하치는 명을 공격할 결심을 굳히게 된다.1618년 4월13일. 누르하치는 신료와 장수들을 모아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누르하치는 그 자리에서 명을 공격해야만 하는 ‘일곱가지 원한’, 이른바 칠대한을 제시했다.1583년, 이성량이 자신의 부조(父祖)를 살해했던 것이 첫 번째 원한이었다. 나머지 여섯 가지는 명이 예허를 편든 것, 맹서를 어기고 한인들의 월경을 방조한 것, 만주인들을 세 주거지에서 내쫓고 경작과 수확을 금지한 것 등이 골자였다. 명이 자신과 후금을 능멸하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이윽고 제천의식이 끝나자 기병과 보병 2만명으로 편성된 원정군이 푸순성을 향해 진격했다. 바야흐로 동아시아 전체를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던 명청교체(明淸交替)의 서막이 올랐던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9) 누르하치,명(明)에 도전하다 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 (9) 누르하치,명(明)에 도전하다 Ⅰ

    앞에서 언급한 대로 명의 지배 아래 있던 여진족은 크게 건주, 해서, 야인의 세 종족으로 구분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강했던 종족은 해서여진이었다. 해서여진은 다시 예허부(葉赫部), 하다부(哈達部), 호이파부(輝發部), 울라부(烏拉部) 등 네개의 부족으로 나뉘어졌다. 임진왜란이 벌어지던 무렵까지 가장 강한 부족은 예허부였다. 이렇게 여진족이 서로 갈라져 있던 상황 아래서 명의 전통적인 대외정책인 ‘이이제이(以夷制夷)’가 가능할 수 있었다. 그것은 고만고만한 여진 부족들이 서로를 견제하게 만듦으로써 패자(覇者)의 출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시스템이었다. 1583년,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던 누르하치는 1589년 건주여진을 통일했다. 건주여진 내부에서 누르하치라는 ‘패자’가 등장하자 ‘견제 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누르하치와 해서여진의 격돌로 나타났다. ●누르하치, 해서연합군을 물리치다 1593년 6월, 예허부의 지배자였던 부자이(布齊)와 나림불루(納林布祿)는 누르하치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누르하치가 불손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부자이는 하다부의 지배자 멩게불루(蒙格布祿), 울라부의 지배자 만타이(萬泰), 호이파부의 지배자 바인다리(拜音達 )를 끌어들였다. 누르하치를 치기 위한 원정군에는 해서여진 뿐 아니라 몽골의 코르친(科爾沁)부족 등도 가담했다. 모두 아홉개 나라, 대략 3만 가까운 병력이 누르하치를 치기 위해 연합군을 구성했다. 누르하치는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당시 한창 뻗어 오르고 있었던 그의 기세는 쉽게 꺾이지 않았다. 자카( 喀)라는 험준한 요새에 진을 쳤던 누르하치의 건주군은 지형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연합군을 효과적으로 요리했다. 이 전투에서, 누르하치는 부자이를 비롯하여 연합군 4000여명을 죽이고, 말 3000필, 갑주 1000개를 획득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울라부의 지배자 만타이의 동생 부잔타이(布占泰)를 생포했다. 아홉개 나라의 연합군으로도 누르하치를 제압하지 못하는 결과가 나타나자 상황은 급변했다.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있던 몽골족 가운데서 누르하치에게 귀부(歸附)하는 종족이 나타났다. 연합군에 가담했던 코르친 부족과 다른 몽골부족 칼카부(喀爾喀部)가 누르하치에게 사신을 보내 복종을 다짐했다. 코르친과 칼카 몽골의 귀부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후 몽골과 건주여진의 관계는 비록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건주여진이 더욱 성장하여 후금(後金), 청(淸)으로 변신하고, 중원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몽골과의 제휴는 커다란 힘이 되었다. 훗날 누르하치의 아들 홍타이지가, 철옹성으로 여겨졌던 산하이관(山海關)을 우회하여 베이징의 명나라 황궁(皇宮)을 공략할 수 있었던 것은 몽골의 협조 덕분이었다. 곧 몽골 부족이 만리장성 외곽에서 베이징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이같은 인연 때문에 명을 멸망시킨 이후 청은 이번원(理藩院)을 설치하고, 열하(熱河)에 행궁(行宮)을 두어 몽골족을 우호적으로 통제하려고 시도하는데 그 단초는 바로 누르하치 시절에 마련되었던 것이다. ●해서여진, 누르하치에게 손을 내밀다 해서연합군의 공격을 물리친 뒤부터 누르하치는 만주 전체에서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자신감이 넘친 누르하치는 1595년 6월, 군대를 이끌고 호이파부를 공격했다. 뿐만 아니라 포로로 잡은 부잔타이를 주물러 울라부의 내정(內政)에까지 관여했다. 1596년 7월, 울라부에서는 내분이 일어나 만타이와 그의 아들이 피살되었다. 누르하치는 억류하고 있던 부잔타이를 송환했고, 부잔타이는 형의 뒤를 이어 울라국의 국주(國主)로 즉위했다. 누르하치에게 은혜를 입은 부잔타이는 누이 후나이를 건주여진으로 보냈고, 누르하치는 그녀를 동생 스르가치(舒爾哈齊)와 혼인시켰다. 당시 누르하치는 해서와 몽골의 여러 부족들을 공격하는 한편, 그들 부족과 혼인을 맺어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양면적인 전략을 폈다. 실제 누르하치의 첫째 부인인 나라씨(納喇氏)는 예허 출신이다. 누르하치는 16명의 부인들과의 사이에 모두 16남8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부인이 이렇게 많았던 것은 바로 혼인정책의 소산이었던 셈이다. 누르하치의 세력이 커지자 해서여진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1597년 예허, 울라, 하다, 호이파부는 일제히 누르하치에게 사신을 보내, 자신들이 부도했음을 사과한 뒤 우호를 다시 맺자고 요청했다. 누르하치는 느긋하게 이들과 화약(和約)을 맺었다. 바야흐로 누르하치가 만주의 패자로 떠오르려는 순간이었다. 명의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방향으로 사태가 전개되고 있었다. 명은 개입하여 누르하치를 혼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럴 처지가 못되었다. 바로 이 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시 조선을 침략했기 때문이었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났던 것이다. 잠시 랴오양(遼陽), 광닝(廣寧) 등지로 물러나 있던 명군은 대거 조선으로 들어갔고, 명 조정의 관심은 온통 일본군에게 쏠렸다. 이나바 이와기치가 ‘누르하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떠벌렸던 데는 이런 까닭이 있었다. 해서여진과 화약을 맺어 여유를 얻은 누르하치는 1598년 1월, 자신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몽골의 안출라쿠(安楚拉庫)를 공격하여 1만여에 이르는 인축(人畜)을 획득했다. 정복 전쟁을 통해 인구도 늘고, 재물도 늘었다. 임진왜란 시기 누르하치의 행보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누르하치, 내실을 다지고 정체성을 강조하다 이미 말했듯이 누르하치는 뛰어난 군사지휘관일 뿐 아니라 탁월한 상인이기도 했다. 그는 군사적으로 성공을 거두면서 모피와 인삼의 유통로를 장악했고, 그것을 기반으로 명나라라는 대시장(大市場)과 연결되었다. 처음에는 명 상인들을 통해 소금, 직물 등 생필품이 유입되다가 점차 은(銀)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은은 여진족 내부에서 화폐로 유통되었고, 유통경제에 눈을 떴던 누르하치는 1599년 만주 지역에서 금은 광산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수렵과 채집 위주의 여진족 경제에 변화가 일어났고, 화폐의 확보를 위해서 주변국과의 무역의 중요성은 점점 커져갔다. 어느 집단이나 국가든 규모가 커지고 힘이 강해지면 자의식도 따라서 커지게 마련이다. 임진왜란 무렵, 누르하치는 자신이 통일한 건주 부족을 만주(滿洲)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만주’의 어원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문수(文殊)’라는 말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즉 만주는 ‘문수보살의 도(徒)’를 의미한다. 누르하치는 이제 ‘만주’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해서나 야인여진은 물론 명에 대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내세우고 싶어했던 것이다. 정체성을 찾고 싶은 열망은 문자(文字)를 만들려는 노력으로도 나타났다.1599년 누르하치는 만주 문자 개발에 착수한다. 당시까지 만주는, 서신을 주고받는 등의 일상생활에서는 몽골 문자를 사용했다. 명이나 조선 등과 주고받는 외교문서에서는 한문을 사용했다. 누르하치는 이같은 현실에서 몽골 문자를 토대로 만주 문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오늘날 석촌동에 남아 있는 삼전도비(三田渡碑)에 만주어, 한문, 몽골어 등 3개국 문자가 같이 쓰여져 있는 것은 이같은 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났다. 일본군이 조선에서 물러나자 명군 역시 철수를 시작했다. 명은 다시 만주로 감시의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누르하치로서는 ‘좋은 시절’이 끝난 것을 의미했다. 명의 압력이 누르하치에게 미칠 기미가 보이자 당장 세력판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화약을 맺은 이후 잠시 잠잠했던 하다와 예허가 누르하치에게 다시 싸움을 걸었다. 만주와 하다, 예허, 명 그리고 궁극에는 조선까지 얽힌 격변의 또 다른 막이 올랐던 것이다.
  • [병자호란 다시 읽기] (2) 여진족과 만주1

    [병자호란 다시 읽기] (2) 여진족과 만주1

    조선 사회에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 남긴 병자호란의 발발은 16세기 후반∼17세기 중반 중국 대륙에서 벌어진, 이른바 명청교체(明淸交替)의 여파가 조선으로 밀어닥친 결과였다. 명청교체의 주역은 여진족(女眞族)이었다. 그들은 병자호란 7년 뒤인 1644년 베이징을 접수하고 마침내 중원을 차지하게 된다. 병자호란을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먼저 여진족과 누르하치의 성장과정을 살펴본다. ●여진족, 만주, 그리고 한국사 여진은 상고 시기 숙신(肅愼), 말갈(靺鞨) 등으로 불리던 퉁구스 계통의 소수민족이다. 그들의 발상지이자 활동무대는 우리가 보통 만주(滿洲)라고 부르는 오늘날의 중국 동북지방이었다. 만주란 과연 어떤 곳인가? 많은 한국인들은 만주 하면 먼저 고구려를 떠올린다. 동시에 그곳은 독립운동가들이,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말을 달리던 벌판이기도 하다. 해마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고구려의 옛 수도인 지안(集安)을 찾고, 백두산 천지(天池)에 오른다. 한국인들은 광개토대왕비와 장군총을, 그리고 천지의 푸른 물결을 바라보며 잃어버린 ‘고구려의 영광’을 추억한다. 한국인들에게 이렇듯 각별한 의미를 지닌 만주는 지난 1000년 동안 그야말로 풍운의 땅이었다.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한 뒤 만주는 한국인들과는 멀어졌다. 이후 19세기까지 만주에서는 거란, 여진, 몽골, 한족, 그리고 다시 여진족의 순으로 주인이 바뀌었다. 19세기 후반부터는 만주를 놓고 일본과 러시아가 치열한 다툼을 벌였고,1945년 이후에는 공산당과 국민당의 격전이 벌어진 뒤, 만주는 중국 땅이 되었다. 만주에서 일어나 대제국 청을 세운 여진족은 오늘날의 중국에 커다란 선물을 남겨 주었다. 청나라가 차지했던 광대한 땅이 고스란히 오늘날 중국의 영토로 계승된 것이다. 명나라 시절, 한족 지식인들은 여진족을 야만인이자 ‘금수(禽獸)’라고 멸시했다. 하지만 청은 1644년 명을 접수한 이래 영토를 확장하여 신장(新疆), 티베트, 내몽골 지역을 자신들의 판도 속으로 집어넣었다. 청나라의 지배 아래서 중국의 영토는 과거 명나라 시절보다 거의 40% 가까이 불어났다. 그뿐만이 아니다. 1644년 베이징을 접수할 무렵, 여진족의 인구는 대략 50만, 한족의 인구는 1억 5000만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었다. 이후 여진족은 자신들보다 300배 가까이 많은 한족들을 300년 가까이 지배한다. 좀처럼 믿기 어려운 사실이자, 동시에 여진족과 청조 지배층의 정치적 역량이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오늘날 만주에서는 700만 정도의 여진족이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고유의 말과 문자를 말하고,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실상 한족에게 동화되어 버린 것이다. 조선은 비록 병자호란에서 청에 항복했지만 한(韓)민족은 여전히 살아남아 독자적인 국가와 민족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조선을 굴복시킨 청 태종 홍타이지가 지하에서 이같은 사실을 안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병자호란은 비록 치욕의 역사였지만, 중국의 무시무시한 동화력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자부심만은 우리의 ‘엄청난 자산’이라는 사실을 환기하면서 글을 이어간다. ●아구다(阿骨打)의 추억 오늘날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신빈(新賓)에 있는 만족(滿族) 자치현(自治縣)에 가면 허투아라(赫圖阿拉)라는 성이 남아 있다. 이곳은 바로 누르하치와 홍타이지가 태어나고 자랐으며, 장차 청 제국을 건국하는 기반이 되었던 흥경노성(興京老城)의 옛터이다. 왕궁이 있었던 곳의 면적은 기껏해야 우리나라 시골의 여느 초등학교 넓이 정도에 불과하다. 최근 과거 누르하치와 홍타이지가 집무했던 한왕전(汗王殿)을 비롯한 몇 개의 건물을 복원해 놓았다. 왕성(王城)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소박한 허투아라성의 모습은 16세기 후반까지 중화제국 명의 지배를 받으며 만주의 이곳저곳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들의 초라한 상황을 상징한다. 하지만 누르하치의 먼 조상들은 결코 초라하지도, 호락호락하지도 않았다. 926년 발해가 거란에 멸망당한 이후 여진족들은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만주 각지에 흩어져 살았다. 거란족은 요(遼)를 세워 10세기부터 12세기 초까지 만주와 화북일대를 차지하는 제국이 되어 남쪽의 송(宋)과 각축을 벌였다. 1115년 그런 와중에 여진족 내부에서는 아구다(阿骨打)라는 영걸이 나타났다. 그는 주변의 여진 부족들을 아울러 나라를 세웠는데 국호를 금(金)이라고 했다. 훗날 누르하치도 나라 이름을 한때 대금(大金)이라 지칭했는데, 사람들은 보통 후자를 아구다가 세웠던 금과 구별하여 후금(後金)이라고 부른다. 아구다의 금은 이후 더욱 세력을 키워 요를 멸망시키고 1127년엔 한족 왕조 송을 양자강 남쪽으로 밀어냈다. 송의 흠종(欽宗)과 휘종(徽宗)은 금의 포로가 되었고, 이후 남송(南宋)은 금에 세폐를 바쳐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한족들에게는 굴욕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금은 비록 1234년 몽골에 의해 멸망했지만, 이후 한족들에게 아구다와 금의 존재는 기억 속에서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368년 중원에는 다시 한족 왕조 명(明)이 들어섰다. 중원을 지배했던 몽골족의 원(元)나라는 베이징을 버리고, 북으로 도주하여 고비사막 방면까지 쫓겨갔다. 명은 다시 만주 쪽으로 세력을 뻗치면서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던 여진족들을 통제하기 위한 방책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한다. ●너무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게 하라 1279년 남송 멸망 이후 거의 백년 만에 중원을 되찾아 한족들의 자존심을 회복한 명의 여진정책은 분명한 목표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여진족을 통제하되 그들을 너무 강하지도 않게, 그렇다고 너무 약하지도 않게 ‘섬세하게’ 길들이는 것이었다. 명은 흩어져 있는 여진족들 사이에서 과거 아구다와 같은 패자(覇者)가 출현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그렇게 되면, 여진족이 다시 커다란 세력으로 뭉치게 될 것이고 송나라가 겪었던 ‘끔찍한 경험’을 되풀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여진족들을 뿔뿔이 흩어진 상태로 방치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명은 북으로 도망간 몽골의 원나라(보통 北元이라 부름)를 여진족을 이용하여 견제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명은 몽골을 견제하기 위해 이이제이(以夷制夷) 방식을 고려한 셈이다. 그러려면 여진족이 어느 정도까지는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한마디로 명의 여진정책은 일종의 ‘딜레마’였다. 명은 고심 끝에 14세기 후반부터 만주의 여진족들을 분할지배 방식으로 통제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명은 랴오허(遼河)를 기준으로 서쪽, 즉 오늘날 랴오닝성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요동도사(遼東都司)라는 기구를 설치, 지역의 한족들을 직접 통치했다. 그리고 요동도사가 관할하는 산하이관(山海關) 부근부터 관전(寬奠)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변장(邊牆)이라 불리는 담을 쌓았다. 여진족들은 이 담을 넘어 서쪽으로 올 수 없었다. 랴오허 동쪽, 오늘날 지린(吉林)성과 헤이룽장(黑龍江)성에 해당하는 광대한 지역에는 노아간도사(奴兒干都司)라는 기구를 두어 여진족을 통치했다. 그 아래에는 위소(衛所)라는 기관을 두어 여진족 출신을 우두머리로 임명하고 자치를 허용했다. 하지만 위소의 우두머리를 임명할 때나, 여진족 내부에서 분쟁이 생겼을 때에는 명의 지휘부가 개입했다. 여진족의 자치를 허용하되, 여진족 유력자들을 명의 행정체계에 포섭하여 통제하는 전형적인 ‘분할통치(divide and rule)’였다. 건국 직후부터 16세기 중반까지 명의 여진정책은 그럭저럭 성공적이었다. 비록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 기간 동안은 명 내부의 정치가 그런대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6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만력제(萬曆帝)의 정치적 태만과 무능, 그에 더하여 임진왜란과 같은 명 외부의 격변까지 맞물리면서 여진정책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침 이 무렵부터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던 누르하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아픈 역사에서 배운다-병자호란 다시 읽기] 10만 포로의 눈물

    [아픈 역사에서 배운다-병자호란 다시 읽기] 10만 포로의 눈물

    조선은 왜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비참한 환란을 겪어야 했을까. 한마디로 17세기초 명·청 교체기의 격랑 속에 조선 지배층이 국제정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2007년은 병자호란이 끝난 지 370년이 되는 해이다. 북핵 문제를 놓고 6자 회담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듯, 지금 이 순간에도 한반도를 둘러싼 안팎의 정세는 예측불허다. 우리가 과연 북한은 물론 미국과 중국·러시아·일본 등과의 숨가쁜 외교전에서 북핵이나 자유무역협정(FTA) 등의 난제를 슬기롭게 풀어가며, 미래를 당당하게 개척해 나갈 수 있을까. 병자호란을 살피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자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와 한민족의 운명에 외교가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되짚어보기 위해서이다. 지대 사학과 한명기 교수의 눈을 통해 ‘병자호란´의 안과 밖을 살펴본다. 역사평설 ‘병자호란´이 매주 목요일 연중기획으로 독자를 찾아간다. 편집자 주 ●준비 없이 전쟁을 선택하다 1636년(인조 14년) 봄. 조선 조정에서는 청나라를 황제국으로 인정하느냐의 여부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같은 해 3월, 청의 수도인 선양(瀋陽)에서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 홍타이지(皇太極)가 황제로 즉위한다는 소식이 조선에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척화파(斥和派) 신료들은 “개·돼지만도 못한 오랑캐 추장에게 황제 칭호는 가당치도 않다.”며 “정묘년(丁卯年,1627년)에 그들과 맺은 맹약을 파기하고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들은 이어 ‘황제 운운’하는 내용을 담은 국서를 가져온 청나라 사신 용골대(龍骨大)의 목을 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주화파(主和派) 신료들은 “청이 명을 능멸할 정도로 세력이 강해진 현실을 인정하여 그들의 요구를 무조건 배척하지 말고, 사신을 박대해서도 안된다.”고 맞섰다. 최종 결정권자인 국왕 인조는 양자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척화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곧 이어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조정이 청과 맺은 맹약을 파기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장차 발생할지도 모르는 청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내용으로 인조가 평안감사에게 보내는 극비교서(敎書)를 가져가던 금군(禁軍) 전령이 용골대 일행에게 교서를 빼앗긴 사건이었다. 자신의 목을 치라는 험악한 분위기에 놀라 황급히 달아나고 있던 용골대 일행에게, 다른 곳도 아닌 조선 영토 안에서 국왕의 밀찰(密札)을 빼앗긴 것이다. 척화냐, 주화냐를 놓고 정쟁만 무성했던 와중에 정작 중앙에서 지방으로 이어지는 정보 전달체계가 부실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1636년 12월6일. 청군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질풍같이 내달렸다. 병자호란이 시작된 것이다. 모든 병력을 의주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대로(大路) 바깥에 위치한 산성들 속으로 집결시켰던 조선군은 청군의 침입 사실을 제때 알아차리지 못했다. 청군이 조선군과의 접전을 피해, 곧장 서울로 진격하는 속전속결의 전략을 취했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임진강 이북의 방어를 책임진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은 청군이 침입했다는 최초의 보고를 묵살하고 조정에 제때 알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적이 다가오자 싸우지도 않고 도주해 버렸다. 청군이 이미 개성을 지나 양철평(良鐵坪-지금의 은평구 녹번동)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전해진 12월14일. 서울 도성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아이들과 노약자들, 부녀자들의 울부짖음속에 피란행렬이 줄을 이었고, 조정 신료들도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렸다. 인조는 왕실 가족들과 종묘에 모셔져 있던 역대 국왕의 신주(神主)들을 강화도로 먼저 옮기도록 했다. 이어 자신도 강화도로 들어가려 했으나 청군이 이미 김포에서 강화로 이어지는 길을 차단해 버렸다. 인조는 어쩔 수 없이 남대문까지 갔다가 강화도 행을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돼지´에게 무릎을 꿇다 1637년(인조 15년) 1월 중순. 준비 없이 들어왔던 남한산성의 상황은 참혹했다. 청군이 산성을 완전히 포위했고, 삼남으로 이어지는 모든 도로를 차단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군량이 점점 바닥을 드러냈다. 청군은 연일 서양식 최신 대포인 홍이포(紅夷砲)를 쏘아대면서 항복하라고 종용했다. 조선 조정이 목이 빠져라 고대하던 지원군은 오지 않았다. 혹독한 추위 때문에 동상에 걸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성을 지킬 의욕을 잃은 장졸들 가운데는 항복하자고 시위를 벌이는 자들까지 나타났다. 그 와중에도 신료들은 척화와 주화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인조는 눈물을 보이며 대책을 호소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1월26일.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청군은 바다에 익숙하지 못하여 수전(水戰)을 치를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강화도 조선군 지휘부의 방심이 불러왔던 결과였다. 청군은 이에 앞선 1월22일, 조선에서 노획한 선박에 홍이포까지 싣고 강화도에 대한 상륙작전을 벌였다. 조선군이 변변한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 강화도는 함락되었고, 피란했던 왕실 가족과 중신들은 전부 포로가 되었다. 강화도의 함락 소식은 남한산성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1월30일. 인조는 남한산성의 서문을 나와 현재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삼전도(三田渡)로 향했다. 이윽고 그는 높다란 수항단(受降壇) 위에 앉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의 예를 바쳤다.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세번 큰절을 올리고, 한번 절할 때마다 세번씩 머리를 바닥으로 조아리는 오랑캐식 항복 예식이었다. 원래 조선의 지식인들은 홍타이지를 포함한 여진족들을 인간이 아닌 ‘금수(禽獸)’로 경멸했다. 일부 인사는 심지어 청 태종을 ‘황태극(皇太極)’ 대신 홍태시(紅泰豕)라고 불렀다.‘붉고 큰 돼지’란 뜻이다. 그런데 인조가 ‘인간’도 아닌 ‘돼지’에게 무릎을 꿇는 치욕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청 태종은 인조로부터 항복을 받은 뒤 사로잡은 포로들을 이끌고 철수길에 올랐다. 그러면서 인조에게 또 다른 다짐을 받아냈다. “내가 끌고 가는 조선인 포로들 가운데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도망치는 자는 불문에 부친다. 하지만 압록강을 건너 단 한발짝이라도 청나라 땅을 밟은 뒤에 도망쳐 오는 포로는 조선 조정이 도로 잡아 보내야 한다.” 무시무시한 약조였다. 날이 갈수록 영토는 넓어지는데 인구가 부족했던 청은 조선인 포로들을 보배로 여겼다. 그들은 훌륭한 노동력이자 값을 받고 팔 수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청은 10만이 훨씬 넘는 조선인 포로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인조로부터 이같은 다짐을 받아냈던 것이다. 훗날 실제로 청에 끌려갔다가 탈출해 왔던 포로들은 이 ‘약조’ 때문에 청으로 다시 박송(縛送)되었다. 그리고 그 포로들은 청군에 끌려가 발뒤꿈치를 잘리는 혹형에 신음해야 했다. 호란 후에도 인조는 어렵사리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수많은 조선인 포로들의 통곡소리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누가 안추원의 비극을 책임질 것인가? 1664년(현종 5년). 항복 후 27년이 지나 한 남자가 청에서 도망쳐왔다. 마흔한살의 안추원(安秋元)이 그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개성 부근에서 살았던 열세살의 소년 안추원은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피란했다. 하지만 이듬해 강화도가 함락될 때 그는 청군의 포로가 되었고, 선양으로 끌려갔다. 그는 선양에서 한족 출신 대장장이에게 팔린 신세가 되었다. 호란이 끝난 뒤, 포로로 끌려왔던 조선인 가운데 적지 않은 숫자가 몸값을 치르고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하지만 안추원은 그렇지 못했다.1644년 명이 멸망하자 청은 베이징에 입성한다. 베이징을 새로운 수도로 정한 청 조정은 선양의 거주민들에게 베이징으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스물한살이 된 안추원은 그의 주인에게 이끌려 베이징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18년이 지난 1662년(현종 3). 서른아홉의 장년이 된 그는 조선으로의 탈출을 결행한다. 산해관(山海關)을 통과하여 만주 벌판을 가로질러야 하는 일생일대의 모험이었다. 하지만 산해관에서 청군에 붙잡히고 말았다. 베이징으로 송환된 그는 이마에 글자가 새겨지는 묵형(墨刑)에 처해졌다. 하지만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그의 비원(悲願)은 처절했다. 다시 2년이 지난 1664년, 안추원은 마침내 청을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정확히 27년 만의 귀향이었다. 그가 사선을 뚫고 조선에 도착했을 때 조정은 고민에 빠졌다. 여전히 조선인 포로들의 탈출을 금지하고 있던 청의 존재 때문이었다. 하지만 27년만에 목숨을 걸고 탈출한 자국 백성을 어찌 차마 돌려 보내겠는가. 청이 알까봐 쉬쉬하는 가운데 안추원은 내륙으로 옮겨졌다. 안추원은 고향을 찾았다. 하지만 고향에는 아무도 없었다. 병자호란으로 그의 가족은 풍비박산 나고 말았다. 목숨을 걸고 다시 찾은 고향이었지만 그는 당장 생계조차 막막했다. 조정은 그를 받아주었을 뿐 생계대책을 마련해 주지는 않았다. 귀향의 감격도 잠시 뿐 배고픈 그에게 아무런 피붙이도 남아 있지 않은 고향은 그저 또 다른 이역이었을 뿐이다. 안추원은 절망 끝에 베이징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청으로의 귀환은 탈출보다 훨씬 위험했다. 1666년(현종 7). 그는 결국 고국을 탈출하려다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후 그가 어찌 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아마도 처형되었을 것이다.2번이나 탈출을 시도했던 그가 온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백성 도탄에 빠뜨렸던 김자점 영의정까지 올라 안추원의 이야기는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다. 하지만 위정자들의 오판에 떠밀려 나락으로 떨어진 그의 비극은 과연 누가 책임져야 할까? 병자호란을 통해 수많은 ‘안추원’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비극’을 불러왔던 최고책임자인 인조는 왕위를 유지했고, 책임을 져야할 신료들의 상당수도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전쟁 발생 사실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적과의 싸움마저 회피하여 국왕과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던 김자점은 인조 말년 최고위직인 영의정까지 올랐다. 오늘날. 병자호란의 참상을 떠올리면서 현실을 돌아본다. 꼭 10년전 ‘IMF 외환위기’가 불러온 칼바람 속에서 스러져갔던 수많은 민초들. 비극을 초래한 책임자들의 과실 또한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 수많은 생령들을 도탄에 빠뜨려 놓고도 자신의 과실을 책임지지 않는 정치인들의 ‘무책임’은 시공을 초월하여 유전되는 것일까. 비극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내지 못하면 또 다른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된다고 했던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소용돌이치고 정치권의 난맥상과 민생의 어려움 때문에 걱정이 쌓여가고 있는 오늘, 370년전 병자호란의 비극을 되돌아보는 마음은 여전히 착잡하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교수> ●필자 한명기 교수는 ▲1962년생 ▲1985년 서울대 인문대 국사학과 졸업 ▲1997년 서울대 대학원 국사학과 졸업(문학박사) ▲1998∼2001년 서울대 규장각 특별연구원 ▲현재 명지대 사학과 교수. 계간 ‘역사비평’ 편집위원 ▲논저 ‘임진왜란과 한중관계’(1999),‘광해군’(2000) 외 다수 ●청태종 송덕비(위 사진) 병자호란 이후 청이 조선에 강요해서 세운 청 태종 송덕비. 병자호란의 전말을 적었다. 사진은 일제시대에 촬영된 것으로 당시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송파리 삼전도에 있었다. 현재도 삼전동에 있으며 사적 101호로 지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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