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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부터 전대미답의 길… 일상이 달라진다

    청탁 관행·접대 변화, 공정사회로 한 발짝 다가서길 청탁금지법이 오늘부터 시행된다.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이른바 김영란법이다. 2016년 9월 28일부터 ‘3만원(식사)·5만원(선물)·10만원(경조사비)’이라는 가액기준이 우리 공동체의 행위의 준거로 작용하게 된다. ‘원활한 직무수행이나 사교·의례’의 목적을 벗어나면 가액기준 이하라도 허용되지 않는다. 공무원과 공직유관단체 임직원, 사립학교·언론사 임직원 등 공적 업무 종사자와 그 배우자를 포함, 400만명이 대상이다. 일상의 선의와 미풍양속으로 여겨지던 행위들이 법의 잣대로 규율되는 전대미답(前代未踏)의 길이다. 가 보지 않은 길을 가야 하는 생소함과 불편함은 거부감을 낳기 마련이다. ‘3·5·10’ 가액기준을 둘러싼 현실성 논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농축산업계를 비롯해 경기 위축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대통령 직속 규제개혁위원회가 2018년 가액기준 등을 두고 타당성을 다시 검토키로 한 이유다. 숱한 혼란과 우려 속에서도 청탁금지법을 제대로 안착시켜야 하는 까닭은 명확하다. 연줄을 이용한 공직의 청탁 관행과 고질적인 접대문화, 각종 비윤리와 부패 행위는 사회문화 저변의 응집력과 경쟁력을 갉아먹는 독소로 작용한 게 사실이다. ‘좋은 게 좋다’는 식의 끼리끼리 행태에 힘없고 줄 없는 대다수 서민은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닌가. 후세에까지 부정청탁과 부패 행위를 관행이라는 이유로 물려줄 수는 없는 일이다. 국제투명성기구(TI)의 부패인식지수(CPI)에서도 우리의 민낯을 확인할 수 있다. 2015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CPI는 100점 만점에 56점으로, 조사 대상 168개국 가운데 37위 수준이다. 홍콩 정치경제위험자문공사(PERC)의 2016년 아시아 부패지수를 보면 전체 16개국 가운데 8위로 다른 아시아 주요국에 비해 한참 뒤처져 있다. 한편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16년 뇌물척결보고서는 부패인식지수가 낮은 나라가 높은 나라보다 해외직접투자 유치 확률이 15% 낮은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청탁금지법이 당장은 내수 회복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더라도, 중장기적으로는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청탁금지법은 비정상의 단절, 정상성의 회복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공정하고 투명한 사회로 가는 작지만 큰 발걸음일 수 있다. ‘대한민국은…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라고 규정한 헌법 전문의 정신에도 부합하는 일이다. 박찬구 정책뉴스부장 ckpark@seoul.co.kr
  • “하늘나라 갈 때까지 카메라 앞에 설 것”

    “하늘나라 갈 때까지 카메라 앞에 설 것”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카메라 앞에 설 거예요. 그리고 지금도 꿈을 이루고 있고요.” 한국 영화사를 대표하는 여배우인 윤정희(72)가 자신의 데뷔 50주년을 기념해 22일 막을 올린 특별전 ‘스크린, 윤정희라는 색채로 물들다’의 기자 간담회에서 “50년 동안 300여편의 영화를 찍었는데, 그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작품들을 시대별로 골라 한자리에 모았다고 하니 상상할 수 없이 기쁘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특별전 개막작이자 데뷔작인 ‘청춘극장‘(1967)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홍콩에서 어렵게 발굴했다고 들었는데 50년 만에 다시 보게 돼서 궁금하고 행복하다”고 덧붙였다.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는 윤정희는 특별전에 참석하기 위해 남편인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함께 한국을 찾았다. 윤정희의 대표작 20편을 상영하는 특별전은 서울 마포구 상암동 시네마테크KOFA에서 새달 2일까지 열린다. 특별전 준비 과정에서 윤정희는 ‘안개’(1967)의 하인숙, ‘장군의 수염’(1968)의 신혜, ‘독 짓는 늙은이’(1969)의 옥수, ‘무녀도’(1972)의 모화, ‘화려한 외출’(1977)의 공도희, 가장 최근작인 ‘시’(2010)의 미자를 기억에 남는 캐릭터로 꼽았다는 후문. 지금도 좋은 시나리오를 기다리고 있다는 그는 연기에 대한 열의를 드러냈다. “‘이수’에서 잉그리드 버그먼이 맡았던 역할을 배우 생활을 하면서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는데 이제 나이가 많이 들어서 힘들겠네요. 제 나이 또래에서 인생의 고민을 보여 주는 작품이면 좋아요. 미자 할머니만큼 매력적인 캐릭터라면 당장 카메라 앞에 설 것 같아요. 러브신도 보태지면 더할 나위 없지요.”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지금, 이 영화] ‘연인과 독재자’, 영화 같은 현실서 삶을 연출하고 연기하다

    [지금, 이 영화] ‘연인과 독재자’, 영화 같은 현실서 삶을 연출하고 연기하다

    1978년 1월 홍콩에서 영화배우 최은희가 납치됐다. 같은 해 7월 그녀를 찾기 위해 홍콩에 온 영화감독 신상옥도 납치됐다. 두 사람이 끌려간 곳은 북한이었다. 당시 한국 영화를 대표하던 배우와 감독을 데려오라고 지시한 사람은 김정일이었다. 그는 신상옥과 최은희 앞에서 북한 영화에 대해 불평을 털어놓는다. “왜 우리 영화는 만날 나오는 것이 반복하는 게 많고, 영화 이야깃거리가 새것으로 나가자고 하는, 지향하는 것이 전혀 없단 말입니다. 도대체 왜 장면 장면마다 자꾸 초상난 집처럼 우는 것만 찍게 만드나. 우리 영화 안 우는 영화 안 되겠나. 상가집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만드나.”(김정일 육성이 담긴 녹음 테이프 중 일부) 김정일은 세계 각국의 영화를 즐겨 보는 영화광이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 수준이 떨어지는 북한 영화를 한 단계 발전시키고 싶었던 그는 문제를 빨리 해결할 수 있는 단순한 방법을 실행한다. 영화 잘 만드는 감독, 연기 잘 하는 배우를 북한에서 쓰자는 것이다. 신상옥과 최은희는 권력자가 직접 고른 타깃이었다. 이렇게 보면 ‘가해자 김정일 대 피해자 신상옥·최은희’라는 대립적 구도가 그려진다. 그렇지만 사건과 얽힌 여러 정황을 고려하면 그런 쉬운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이를 다큐멘터리 영화 ‘연인과 독재자’로 만든 영국 감독 로버트 캐넌과 로스 애덤도 그에 대한 판단을 보류한다. 두 감독의 말이다. “한국에서 이 사건은 수많은 루머에 묻혀 사실이 부정되기도, 혹은 목적에 의한 거짓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래서 더욱 이 이야기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았으면 했고, 오직 진실을 증명하고 보여주고 싶었다. 진실 여부나 판단은 관객들의 몫으로 남겨둔다.” 이런 발언 자체가 상투적이기는 해도, ‘연인과 독재자’에 관련된 ‘진실 여부나 판단’을 섣불리 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일어난 일들 사이사이, 해명되지 않은 공백이 많은 탓이다. 예컨대 영화에서 의문부호를 달 수 있는 것은 납치 후 최은희와 신상옥을 대하는 북한의 태도다. 납북되자마자 최은희는 김정일의 환대를 받았고, 신상옥은 곧바로 강제 수용소에 갇힌다. 그로부터 5년 뒤에야 신상옥은 최은희와 재회해 영화를 찍기 시작한다. 신상옥과 최은희가 남긴 수기 등을 참고하지 않고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그리고 연인(The lovers)이 들어간 제목이 신상옥과 최은희의 비극적 사랑을 환기하는 듯하지만, 피랍 이전 이들은 신상옥의 외도를 이유로 이혼한 남남이었다. 또한 이때 박정희 정권에 밉보여 남한에서 영화 활동을 금지당한 신상옥의 처지를 감안한다면, 북한에서 김정일의 전폭적 지원을 받으며 영화를 제작한 신상옥의 심경이 복잡하고 미묘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신상옥과 최은희는 영화 같은 현실에서 삶을 연출하고 본인을 연기했다. 22일 개봉. 12세 관람가. 허희 문학평론가·영화칼럼니스트
  • 이민 가고픈 나라 1위 싱가포르, 한국은?

    이민 가고픈 나라 1위 싱가포르, 한국은?

    이민을 갈 계획이라면 싱가포르를 가장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홍콩상하이은행(HSBC)이 21일 발표한 2016 ‘엑스팻 익스플로러’(Expat Explorer)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싱가포르가 2년 연속 외국인이 살기 좋은 나라로 꼽혔다. 세계 190개국(이하 지역 포함) 출신 국외거주자 2만7000명을 대상으로 한 이 보고서는 실제로 45개국에서 지내고 있는 외국인들의 생활 만족도를 조사해 경제와 경험, 가족이라는 세 가지 주요 지표로 분류해 보여준다. 여기서 경제 부문은 다시 직업보장·일-생활 균형·경력 향상·정치적 안정·기업가 활동·경제 신뢰·저축·임금 인상율·가처분 소득으로 세분된다. 경험 부문은 부동산·의료·금융·보안·통합·친구 사귀기·건강·문화·삶의 질로, 가족 부문은 관용·사회생활·연인(배우자)과의 친밀감·학교의 질·아동 보육의 질·양육 총 비용·삶의 질·건강·통합으로 다시 나뉜다. 특히, 싱가포르는 경제 부문에서 종합 2위를 차지했다. 세부적으로는 정치적 안정과 기업에 관한 만족도가 1위, 이어 경력 향상이 2위였다. 임금 인상율도 6위로 상당히 높았다. 이는 싱가포르에서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다른 모든 국가보다 정치적 안정감이 가장 크고, 기업 활동을 하기에도 가장 좋으며, 외국인 근로자들의 임금 인상 또한 상당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HSBC에 따르면, 실제로 싱가포르 국외 거주자의 62%는 고국보다 싱가포르에서 소득이 더 높다고 답했다. 싱가포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연평균 소득은 13만 9000달러(약 1억 5300만 원)로, 이는 세계 평균 9만 7000달러(약 1억 700만 원)보다 높았다. 경력 향상에서는 62%가 고국보다 좋다고 답했다. 이는 세계 평균인 43%보다 19% 포인트 더 높은 것이다. 또한 경험 부문에서는 싱가포르가 종합 4위를 기록, 치안과 금융 분야가 각각 2, 3위로 나타났다. 이뿐만 아니라 건강과 삶의 질 또한 각각 10위로 상당히 높았다. 싱가포르에 거주하는 외국인 중 84%는 고국보다 싱가포르가 더 안전하다고 평가했다. 이는 세계 평균인 52%보다 32% 포인트 높은 수치인 것이다. 종합 3위를 기록한 가족 부문에서는 학교의 질이 1위로 가장 높았다. 이어 사회적 통합이 2위, 그다음으로는 양육의 질이 4위로 나타났다. 이는 학교에 대한 만족도가 싱가포르에서 가장 크며, 인종 차별도 거의 없고, 아이를 키우기에도 좋은 조건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반면 우리나라는 외국인들에게 36번째로 살기 좋은 나라였다. 이는 45개국 중 중하위권에 속하는 것이다. 그나마 체면을 차릴 수 있었던 것은 치안 때문이었다. 한국은 안전에서 3위를 기록했지만, 삶의 질에서는 39위를 차지해 경험 부문에서 종합 24위를 기록했다. 그다음으로는 가처분 소득(3위)과 저축(6위)에서 높은 점수를 얻었지만, 일과 삶의 균형(44위)과 기업(44위) 분야는 거의 최하위를 기록해 경제 부문에서는 종합 33위에 올랐다. 가족 부문에서는 사회생활(16위)과 학교의 질(18위)이 그나마 높고 양육 비용(27위)과 양육의 질(34위)은 중간이라도 되지만, 외국인에 대한 관용과 사회적 통합은 45위로 가장 낮아 종합 꼴찌를 차지했다. 즉 가족과 함께 한국에 온 외국인들은 만족감이 가장 낮았다는 것이다. 한편 싱가포르 다음으로 외국인이 살기 좋은 나라는 뉴질랜드와 캐나다가 각각 2, 3위를 차지했으며, 이어 4위부터 10위까지는 각각 체코·스위스·노르웨이·오스트리아·스웨덴·바레인·독일인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HSBC(https://expatexplorer.hsbc.com/survey/)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둘 중 누가 진짜 수지 일까요?’

    ‘둘 중 누가 진짜 수지 일까요?’

    배우 배수지가 13일(현지시간) 홍콩 밀랍인형박물관에서 자신의 밀랍인형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AP 연합뉴스/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수지 ‘진짜 제가 누굴까요?’

    수지 ‘진짜 제가 누굴까요?’

    대한민국 여배우 배수지가 13일(현지시간) 홍콩의 밀랍인형박물관에서 자신의 밀랍인형 앞에서 놀라고 있다. AP 연합뉴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수지 ‘홍콩에 제가 또 있어요~’

    수지 ‘홍콩에 제가 또 있어요~’

    대한민국 여배우 배수지가 13일(현지시간) 홍콩의 밀랍인형박물관에서 자신의 밀랍인형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우리 집에 놀러와… 세계로 초대장 보낸 사람들

    우리 집에 놀러와… 세계로 초대장 보낸 사람들

    “고향에서 제2의 인생을 찾았습니다.” 제주 구좌읍 행원리에 사는 오혜성(55)씨는 9일 “누군가 우리 집에 온다는 사실만으로 가슴이 설렌다”고 말했다. 지난 4월 주택 공유 사이트 ‘에어비앤비’에 등록한 새내기 호스트(집주인)인 오씨는 방문객(게스트)을 ‘친구’로 표현했다. 멀리서 친구가 찾아왔는데 어떻게 대접을 안 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바닷가에서 갓 잡아온 문어와 한참 살이 오른 보말(‘고둥’의 제주도 사투리)을 식탁에 내어놓고 오손도손 대화를 하다 보면 밤새는 줄 모르고 시간이 훌쩍 간다고 했다. 오씨가 처음부터 민박업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니다. 그저 어렸을 때 살았던 제주가 그리워서 4년 전 외할머니 집을 헐고 새로 전원주택을 지었다. 2층짜리 지중해풍 주택으로 방은 2개만 만들었다. 오씨 부부 말고는 이용할 사람이 없어서다. 부산에서 사업을 했던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내려와 이곳에서 바람을 쐬곤 했다. 그러다 지난해 오씨는 아내를 설득해 아예 제주로 이사를 왔다. 하지만 부부가 살기에는 적막했다. 한참 일할 나이에 하던 일을 그만두면서 무기력해지는 것도 느꼈다. 이에 그가 내린 결론은 집을 가지고 뭔가를 해 보자는 것이었다. 공들여 지은 이곳에 사람들을 초대하면 활력이 생길 것이란 기대감 때문이었다. 오씨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라면 인원수마다 추가 비용을 받겠지만 우리는 머무는 사람 수에 관계없이 하루 숙박비만 받는다”며 “금전적 관계를 뛰어넘어 경험을 공유하는 데서 오는 만족감이 크다”고 말했다. ●은퇴 후 외롭지 않아요, 시니어 호스트 가정집을 빌려주는 ‘공유 민박’이 단순히 돈을 버는 수단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다. 특히 은퇴를 앞두고 있거나 은퇴를 한 50대 이상 시니어들에게 공유 민박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직장을 그만두면서 단절된 사회적 관계가 호스트와 게스트로 연결되는 새로운 관계로 발전하며 “새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다. 우리나라에서 에어비앤비에 등록된 50대 이상 호스트 수는 1300명을 넘는다. 강원도 속초에서는 50·60대가 전체 호스트의 40%를 이룬다. 연령대별 호스트 증가 속도(전년 대비)에서도 50·60대(129%)가 가장 빠르다. 70대 이상도 92%의 증가율을 보인다. 이는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다. 60세 이상이 전 세계 에어비앤비 호스트 중 10%를 차지한다. 넉넉하지 못한 재정 상황 때문에 부수입을 벌기 위해 호스트를 하는 경우(49%)도 많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활동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차원(43%)에서 방을 내주기도 한다. 지난해 7월부터 부산 남구 대연동에서 공유 민박을 하는 정현숙(52)씨는 “매일 여행 다니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미국, 벨기에, 이스라엘, 홍콩, 대만 등 세계 각지에서 오는 외국인 손님들을 맞이하다 보면 이곳이 한국인지 외국인지 헷갈릴 정도로 이국적인 풍경이 그려질 때가 많다고 했다. 노인복지센터 요양보호사로 근무하는 정씨는 혼자서는 두 가지 일을 모두 감당할 수 없어 지금은 딸의 도움을 받는다고 했다. 그의 집이 ‘부산 마마앤도터’로 불리는 이유다. 정씨는 “나중에 요양보호사 일을 그만두고 나면 온전히 호스트의 삶을 살아가려고 한다”면서 “지금은 차근차근 배우며 준비하는 단계”라고 말했다. 그는 이 일을 하면서 영어 공부를 해야겠다는 자극을 받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라고 했다. “어디서 오셨어요?” “맛있게 드셨어요?” 등 기본적인 영어는 할 수 있지만 대화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샘솟는다는 것이다. 정씨는 “영어에 대한 부담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면서도 “외국인 손님과 함께 산책을 하거나 관광지를 둘러볼 때 영어를 잘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호스트에서 게스트, 다시 호스트로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에 사는 전제우(32)·박미영(31) 부부는 공유 민박을 하면서 삶의 방향을 완전히 틀었다. 같은 회사(SK텔레콤)에서 만나 2014년 결혼을 했을 때만 해도 평범한 직장인들이었다. 그러다 같은 해 9월 신혼집의 방 한 칸을 외국인 손님에게 내주면서 새로운 세계를 맛봤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하는 유목민(디지털 노마드)의 삶에 푹 빠진 것이다. 이듬해 어렵게 들어갔던 회사를 둘 다 그만뒀다. 양가 부모를 모신 자리에서 프레젠테이션도 했다. 세계시장과 국내시장 환경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왜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질의응답 시간도 가지면서 자신들의 생각을 전했다. 단순히 현재의 삶으로부터의 ‘일탈’이 아닌 새로운 ‘경험’을 위한 도전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들은 훌쩍 떠났다. 지난해 7월부터 올 7월까지 1년 동안 말레이시아를 시작으로 태국, 호주, 하와이, 남미, 멕시코, 쿠바, 미국, 유럽 등을 거쳤다. 말 그대로 세계일주를 하고 온 것이다. 숙소는 자신의 집 또는 주변 호스트의 집을 방문했던 외국 게스트들과 연락이 닿아 그들 집에 머물렀다. 지난 7일부터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의 대안예술공간 ‘이포’에서 여행 사진전을 열고 있는 이 부부는 “공유 민박이 일시적 관계에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유대가 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왔다”면서 “공유 민박 등 공유 경제의 핵심은 ‘공유’지 ‘경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돈을 버는 문제로 접근하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없다는 얘기다. 물론 이들이 1년 동안 여행만 한 것은 아니다. 디지털 노마드를 추구하는 이들은 개발자답게 여러 애플리케이션을 만들었다. 짤방(짤림 방지용 인터넷 이미지) 검색기, 여행(AO Trip), 좋카만(‘좋아요’를 부르는 카드 뉴스 만들기) 앱 등 평소 관심 있던 서비스를 내놓았다. 지난 8월부터는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옥집을 구해 이곳을 공유 민박 장소로 쓰기로 했다. 현행법상 주인이 거주를 안 하는 민박은 불법이기 때문에 창천동에 있는 집은 정리할 예정이다. 이들은 “세계 여행을 하면서 한국적인 걸 많이 알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며 “호스트 역시 ‘한국의 얼굴’이란 마음가짐으로 외국인들과 다양한 한옥 체험을 공유할 것”이라고 말했다. ●예술을 입히다… 미술관이 된 민박집 예술인이 많이 모여 사는 서울 홍대에서는 이색적인 장면도 연출된다. 공유 민박 최초로 게스트하우스 공간을 미술 전시관으로 꾸몄다. 조각가 이길래·김민기, 설치미술가 송송, 도예가 한정은이 에어비앤비 호스트 6명과 협업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지난 7월부터 3곳의 게스트하우스가 순차적으로 새 단장에 나섰다. 다음달부터 한정은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는 ‘민즈 하우스’가 마지막으로 문을 연다. 민즈 하우스 호스트인 이민정(39·푸드 칼럼니스트)씨는 “홍대를 찾는 외국인 게스트 상당수가 영화감독 등 예술인”이라면서 “이들에게 한국의 다양한 콘텐츠와 작가를 널리 알리고 싶어 이런 기획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길래 등 국내 유명 작가를 섭외하는 과정에서 어려움도 있었지만 아트 디렉터(미술평론가 김병수)가 발벗고 나서준 덕분에 첫출발이 성공적일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전시 비용은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이 후원한다. 이씨는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시도를 했으면 좋겠다”며 “공유 민박이 한국의 예술을 알리는 또 하나의 창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조각가 김민기와 함께 작업한 ‘우&우 하우스’ 호스트인 최우성(38·이벤트 기획업)씨는 “이달부터 예술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면서 “외국인들의 관심이 기대 이상으로 뜨겁다”고 말했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 수치♡펑더룬, 우리 결혼했어요

    수치♡펑더룬, 우리 결혼했어요

    한국 영화 ‘조폭마누라3’에 출연하고 가수 김민종의 6집 ‘왜’의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한 대만 출신 배우 수치(왼쪽·40)가 홍콩 배우 겸 감독인 펑더룬(오른쪽·42)과 4년 열애 끝에 결혼했다고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등이 4일 보도했다. 수치는 인터넷에 펑더룬과의 웨딩화보를 공개한 뒤 “우리 결혼식은 이렇게 간단해요. 옷은 좀 캐주얼해요. 아주 갑자기 결정했어요. 네 우리 결혼했어요”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펑더룬도 “결혼 연회도, 파티도 없을 것”이라며 “서로 안 지 20년, 사랑에 빠진 지 4년이 지나 조금도 거리낌 없이 수치와 결혼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체코 프라하에서 결혼했으며 정확한 결혼 날짜는 알려지지 않았다. 1997년 영화 ‘미소년의 사랑’으로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20년 이상 친구로 지내 오다 연인으로 발전했다. 수치는 ‘유리의 성’, ‘색정남녀’ 등에 출연하며 한국에서도 인기를 누렸다. 이제훈 기자 parti98@seoul.co.kr
  • 중화권 스타 서기♥펑더룬 결혼 “간단하게” 웨딩드레스는 2년전 옷 ‘소박’

    중화권 스타 서기♥펑더룬 결혼 “간단하게” 웨딩드레스는 2년전 옷 ‘소박’

    중화권 스타 서기(40)가 펑더룬(42)의 스몰웨딩이 알려져 화제다. 4일 서기는 자신의 SNS를 통해 “우리 결혼식은 이렇게 간단해요. 우리 옷은 좀 캐주얼해요. 우린 아주 갑자기 결정했어요. 오, 네, 우리 결혼했어요”라는 글과 함께 깜짝 결혼 소식을 전했다. 펑더룬도 성명을 통해 “결혼 연회도, 파티도 없을 것”이라며 “서로 안 지 20년, 사랑에 빠진 지 4년이 지나 조금도 거리낌 없이 서기와 결혼했다”고 밝혔다. 중화권 스타 서기와 펑더룬은 1997년 로맨스 드라마에 함께 출연하면서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체코 프라하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며 정확한 결혼 날짜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현지 언론은 전했다. 이와 함께 공개된 웨딩사진에서 서기는 펑더룬의 손을 잡고 뛰거나 그에게 업힌 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서기가 결혼할 때 입은 드레스는 2년 전 중저가 브랜드 H&M에서 선물로 받은 옷으로 전해져 더욱 눈길을 끌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중화권 스타 서기 펑더룬의 단출한 결혼은 최근 2천명 하객을 초청하고 수백만 위안(수억 원)을 들여 결혼한 황샤오밍(黃曉明)·안젤라 베이비 커플과 대조를 이룬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한편 서기는 대만 출신으로 홍콩으로 건너가 배우가 됐다. 대만의 거장 감독 허우샤오셴(侯孝賢)의 ‘쓰리 타임즈’, ‘밀레니엄 맘보’, ‘자객 섭은낭’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고 한국 ‘조폭마누라3’, 프랑스 액션영화 ‘트랜스포터’ 등 외국 영화에도 출연한 세계적인 배우다. 펑더룬은 ‘시’, ‘사대천왕’, ‘정무가정’ 등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 겸 감독이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중화권 스타 서기, 펑더룬과 기습 결혼식 “우리 갑자기 결정했어요”

    중화권 스타 서기, 펑더룬과 기습 결혼식 “우리 갑자기 결정했어요”

    대만 출신 중화권 스타 서기(40)가 홍콩 배우 겸 감독인 펑더룬(42)과 4년 열애 끝에 결혼했다. 4일 중국 매체들은 “중화권 스타 서기가 자신의 SNS를 통해 웨딩 화보와 함께 결혼 소식을 전했다”고 보도헸다. 서기는 자신의 SNS를 통해 “우리 결혼식은 이렇게 간단해요. 우리 옷은 좀 캐주얼해요. 우린 아주 갑자기 결정했어요. 오, 네, 우리 결혼했어요”라는 글과 함께 웨딩 사진을 공개했다. 펑더룬도 성명을 통해 “결혼 연회도, 파티도 없을 것”이라며 “서로 안 지 20년, 사랑에 빠진 지 4년이 지나 조금도 거리낌 없이 서기와 결혼했다”고 밝혔다. 중화권 스타 서기와 펑더룬은 1997년 로맨스 드라마에 함께 출연하면서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체코 프라하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며 정확한 결혼 날짜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현지 언론은 전했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서기, 4년 열애 펑더룬과 ‘깜짝’ 결혼

    서기, 4년 열애 펑더룬과 ‘깜짝’ 결혼

    대만 출신 배우인 수치(舒淇·40)가 홍콩 배우 겸 감독인 펑더룬(馮德倫·42)과 4년 열애 끝에 결혼했다는 사실을 웨딩 화보와 함께 공개했다고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가 3일 보도했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캡처=연합뉴스
  • <새영화> 박카스 아줌마 모티브 ‘죽여주는 여자’ 메인 예고편

    <새영화> 박카스 아줌마 모티브 ‘죽여주는 여자’ 메인 예고편

    노인들을 대상으로 성매매하는 이른바 ‘박카스 아줌마’를 모티브로 한 영화 ‘죽여주는 여자’ 메인 예고편이 공개됐다. ‘죽여주는 여자’는 가난한 노인들을 상대로 먹고사는 ‘죽여주게 잘하는’ 여자 ‘소영’이 사는 게 힘들어 죽고 싶은 고객들을 진짜 ‘죽여주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극중 주인공 ‘소영’은 배우 윤여정이 맡았다. 이재용 감독과 ‘여배우들’, ‘뒷담화: 감독이 미쳤어요’에 이어 세 번째 만남으로 파격적인 캐릭터 변신을 예고한다. 공개된 예고편에는 성(性)과 죽음에 대한 복합적인 의미를 담은 설정이 눈길을 끈다. 특히 쾌락을 의미하는 성적인 ‘죽여주는’과 생의 마지막을 뜻하는 ‘죽여주는’을 동시에 내포한 중의적 표현의 제목이 궁금증을 자아낸다. ‘죽여주는 여자’는 제66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제40회 홍콩국제영화제에 이어 제20회 몬트리올 판타지아 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으며 각본상과 여우주연상을 받는 쾌거를 이뤘다. 배우 윤여정은 “노인들의 성매매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을 하는 나이이기 때문에 시나리오를 읽고 같이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남다른 이해와 출연 소감을 전했다. 이어 “‘소영’은 뉴스를 통해서만 봤던 특별한 직업을 가진 할머니다. ‘소영’ 역을 연기하면서 그녀의 삶과 인생,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캐릭터에서 빠져나오기 쉽지 않은 과정을 겪었다”고 밝혔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는 오는 10월 6일 개봉 예정이다. 청소년 관람불가. 111분. 사진 영상=CGV아트하우스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 탕웨이 딸 출산, 중국판 ‘아빠 어디가’ 보며 태교 “성별 알려 주지마”

    탕웨이 딸 출산, 중국판 ‘아빠 어디가’ 보며 태교 “성별 알려 주지마”

    탕웨이 딸 출산 소식과 함께 그의 태교가 재조명됐다. 27일 중국 현지 매체들은 “탕웨이가 25일 홍콩에서 딸을 출산했다”고 보도했다. 탕웨이는 출산 10일 전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만삭의 사진을 공개한 바 있다. 붓기 없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눈길을 끌었다. 엄마가 되는 탕웨이가 요즘 가장 즐겨 보는 프로그램은 중국판 ‘아빠! 어디가?’로 알려진 ‘파파 거나아 시즌3’이다. 프로그램에 출연 중인 중국배우 유엽의 아들 누오이 여러가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며 열혈 팬임을 인증하고 있다. 탕웨이는 중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의사선생님께 딸인지 아들인지 알려주지 말아달라고 했다. 누구라도 좋다”며 출산을 앞둔 설렘을 전했다. 한편 탕웨이는 자신의 SNS를 통해 “그저께(25일) 홍콩에서 딸을 순산했다. 3.41kg이고 건강하다. 울음소리가 이 병원에서 가장 맑고 깨끗하다. 어머니, 아버지, 남편에게 고맙고 출산을 위해 나를 도와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드린다”며 득녀 소식을 직접 알렸다. 사진 = 서울신문DB 연예팀 seoulen@seoul.co.kr
  • 탕웨이 김태용, 딸 출산 “몽골 초원서 3년간 살아보기” 탕웨이의 꿈

    탕웨이 김태용, 딸 출산 “몽골 초원서 3년간 살아보기” 탕웨이의 꿈

    김태용 감독의 아내인 중화권 배우 탕웨이의 딸 출산 소식이 전해지며 ‘탕웨이의 꿈’이 눈길을 끈다. 탕웨이는 최근 본인이 모델로 활동 중인 화장품 브랜드 광고 영상에서 지금까지 공개하지 않았던 자신의 꿈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털어놨다. 어릴 적 꿈은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탕웨이는 “엉뚱하게도 단숨에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것이었다”고 답했다. 탕웨이는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화 감독의 꿈을 위해 대학에 진학했지만 그 길 조차도 맞지 않음을 깨닫고 배우의 길로 들어 현재의 자리에 오게 됐다고 전했다. 당시 임신 중이었던 탕웨이는 현재 자신의 꿈에 대해 “몽골에 있는 넓은 초원에서 아이와 함께 3년 동안 살아 보는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탕웨이는 “제가 가진 작디 작은 꿈들이 제 스스로를 성장시킬 수 있기를 제 삶을 더 좋게 만들 수 있기를 바라요”라고 꿈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을 밝혔다. 한편 27일 탕웨이는 자신의 SNS를 통해 “그저께(25일) 홍콩에서 딸을 순산했다. 3.41kg이고 건강하다. 여러분께 알린다. 그저께 홍콩에서 딸을 순산했다. 3.41kg이고 건강하다. 울음소리가 이 병원에서 가장 맑고 깨끗하다. 어머니, 아버지, 남편에게 고맙고 출산을 위해 나를 도와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드린다”며 딸 출산 소식을 직접 알렸다. 탕웨이는 영화 ‘만추’를 통해 인연을 맺은 김태용 감독과 2014년 7월 결혼했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탕웨이 득녀 “3.41kg 건강한 아이..부모님+남편 김태용 감독 감사”

    탕웨이 득녀 “3.41kg 건강한 아이..부모님+남편 김태용 감독 감사”

    탕웨이 득녀 소식이 전해졌다. 27일 중국 시나연예 등 현지 매체들은 “탕웨이가 25일 홍콩에서 딸을 출산했다”고 보도했다. 이날 탕웨이는 자신의 SNS를 통해 “그저께(25일) 홍콩에서 딸을 순산했다. 3.41kg이고 건강하다. 울음소리가 이 병원에서 가장 맑고 깨끗하다. 어머니, 아버지, 남편에게 고맙고 출산을 위해 나를 도와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드린다”며 득녀 소식을 직접 알렸다. 2007년 양조위와 호흡을 맞춘 영화 ‘색, 계’를 통해 세계적인 배우의 반열에 오른 탕웨이는 2009년 개봉한 ‘만추’에서 김태용 감독과 호흡을 맞추며 인연을 맺었다. 2013년 연인으로 발전한 두 사람은 지난 2014년 7월 홍콩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불륜과 열애 사이…중화권 스타 여배우 3인의 파란만장 결혼사

    불륜과 열애 사이…중화권 스타 여배우 3인의 파란만장 결혼사

    ‘동방불패’ 임청하(林靑霞) 이혼설 원조 미녀 배우인 대만 출신 임청하(61)가 최근 이혼설에 휩싸였다고 중국 아안(雅安)일보의 뉴스포털 북위망(北緯網)이 26일 보도했다. 임청하는 지난 1994년 홍콩 의류재벌 싱리위안(邢李原) 에스프리 회장과 결혼하면서 은퇴했다. 싱리위안과 사이에 아이린(愛林)과 옌아이(言愛) 딸 둘을 두고 있다. 지난 2014년 싱리위안이 임청하의 환갑 선물로 우리 돈 1000억원이 넘는 약 1300평(4465㎡) 규모의 별장을 지어주기로 했다는 보도가 나오는 등 부부 사이에 이상이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매체는 임청하가 싱 회장과 2011년부터 별거 중이며 싱이 상하이 출신의 젊은 여성과 사이에 아들을 낳았다고 보도했다. 임청하는 18세 당시 대만 영화 ‘창밖’의 주연으로 데뷔하면서 대만 배우인 유부남 친한(秦漢)을 만나 결혼을 전제로 오랫동안 사귀었으나 친한이 끝내 이혼을 거부하면서 실패한 경험이 있다. ‘중경삼림’ 왕페이(王菲) 세번째 결혼설 홍콩 영화 ‘중경삼림’(重慶森林)으로 친숙한 중국 배우 왕페이(47)가 홍콩 배우 셰팅펑(謝霆鋒)으로부터 세 번째 청혼을 받았으나 거절했다고 중국 대중(大衆)일보의 뉴스포털 대중망이 보도했다. 매체는 왕페이가 이미 두 번의 이혼을 겪었기에 다시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전했다. 왕페이는 1990년대 후반 록가수 더우웨이(竇唯)와 결혼해 딸을 낳은 뒤 남편의 외도로 이혼했다. 2000년 초반 자신보다 11살 어린 홍콩 배우 셰팅펑과 공개 연애를 시작했으나 2002년 셰팅펑이 홍콩 여배우 장백지(張柏芝)와 돌연 결혼하면서 둘 사이의 인연은 끝나는 듯 했다. 왕페이는 2005년 중국 배우 리야펑(李亞鵬)과 결혼해 딸을 낳고 살다가 지난 2013년 이혼 뒤 2014년 셰팅펑과 재결합해 다시 공개 연애 중이다. 셰팅펑의 전 부인인 장백지는 왕페이와 셰팅펑의 열애설이 끊이지 않는 데 대해 각종 언론에서 괴로운 심경을 호소하고 있다. 섹시스타 종려시(鍾麗緹) 세번째 결혼 확정 주성치(周星馳), 곽부성(郭富城) 등 홍콩 스타의 연인으로도 유명했던 홍콩 섹시 아이콘 종려시(46)가 오는 11월 8일 세번째 결혼식을 올린다고 대만 왕보(旺報) 인터넷판이 보도했다. 상대는 종려시 보다 12살 어린 중국 배우 장룬숴(張倫碩)다. 중국인 아버지와 베트남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살다가 1993년 홍콩에서 열린 한 미인대회에 출전한 것을 계기로 연예계에 입문했다. 1998년 외국인 글렌 로스와 갑자기 결혼해 출산 뒤 몰디브로 이주했다. 사이에 딸 하나를 낳았지만 2년 만에 헤어졌다. 2003년 대만 뮤지션 옌정(嚴錚)과 결혼해 딸 둘을 낳았으나 2010년 성격차이를 이유로 다시 이혼했다. 배우 장룬숴와는 최근 중국 연애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 가상 연인으로 출연하며 인연을 맺은 뒤 백년가약을 맺게 됐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 사투리의 천국 中 “사투리를 살려라”

    사투리의 천국 中 “사투리를 살려라”

    중국 TV 프로그램에는 표준어(普通話·푸퉁화) 자막이 나온다. 베이징 등 북방 지역 중심으로 구성된 표준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시청자가 많기 때문이다. 사투리(方言)가 심한 지방에서 표준어를 쓰는 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하면 교통경찰과 함께 통역까지 찾는 경우도 많다. ●표준어 의무 사용 이후 방언 소멸 위기 이처럼 한 나라에서 전혀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사투리가 심한 중국이 요즘 ‘방언 살리기’에 나서고 있다. 신중국 건설 이후 표준어 의무 사용 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한 결과 방언이 점차 소멸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인민일보는 25일 “당신 자녀는 고향 말을 할 줄 아나요?”라는 제목으로 위기에 몰린 방언 실태를 보도했다. 광저우에 사는 한 할머니는 유치원에 다니는 손자가 “할머니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는다”고 말해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표준어를 잘 못하는 할머니는 손자를 돌보며 줄곧 광둥어를 썼다. 손자가 유치원에 가서 광둥어를 쓰자 친구들이 “촌놈”이라고 놀린 것이다. 고심 끝에 할머니는 표준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푸젠성 출신으로 지역 방언인 민어(?語)를 쓰는 아내와 장시성 방언인 간어(?語)를 쓰는 남편은 아기 출산 이후 방언을 절대 쓰지 않기로 했다. 베이징에 사는 이 부부는 “아이가 언어 혼란을 겪을지 모르고, 혹시 놀림을 받지 않을까 걱정돼 각자 고향 말을 쓰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난징 어린이 절반 “난징 방언 몰라요” 인민일보가 난징시 4~13세 어린이를 표본 추출해 조사한 결과 50%는 난징 방언을 말하지 못하고 알아듣기만 했다. 듣기와 말하기가 모두 가능한 어린이는 30%에 불과했다. 푸젠성의 4대 도시 중학생을 조사한 결과 푸저우시 중학생 가운데 23%만이 푸젠 민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룽옌시 중학생은 17%만 민어가 가능했다. 허난성 사회과학원 언어위원회 왕신위 주임은 “방언은 지역 문화유산의 총체”라면서 “방언의 소멸은 전통문화와 민속의 소멸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전통 없어질라… 1500곳에 연구소 이에 따라 중국 교육부는 지난해부터 전국 1500개 지역에 ‘방언 언어자원 공정’ 거점 연구소를 세우고 방언 살리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광저우시는 초등학교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광둥어 수업을 의무화했다. ‘위에어(?語·광둥어) 살리기 작전’이란 구호 아래 인터넷에서도 광둥어 쓰기 운동이 벌어지는가 하면 일부 기업에선 광둥어 능통자 우선 선발 조건도 내걸고 있다. 그러나 홍콩, 마카오에서까지 쓰이는 광둥어처럼 튼튼한 경제 기반을 갖춘 방언이 아닌 다른 지역 방언들은 위축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전국방언학회 이사인 따이차오밍 교수는 “미래 세대가 쓰지 않는 언어는 도태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베이징 이창구 특파원 window2@seoul.co.kr
  • 잊을 수 없는 그녀-[동방불패] 임청하(포토)

    잊을 수 없는 그녀-[동방불패] 임청하(포토)

    중화권 무협소설가 김용(金庸)의 소설 ‘소오강호’를 1990년 홍콩에서 영화로 만든 ‘동방불패’(東方不敗)에서 사교 교주인 동방불패 역할을 맡았던 여배우 임청하(林靑霞)의 모습. 소설 속 동방불패는 일월신교 교주가 무공을 연마하다가 중성이 된 비호감 인물이지만 임청하가 맡으면서 절세미녀의 캐릭터로 새롭게 태어났다. 대만 연합보는 25일 잊을 수 없는 최고의 고전 캐릭터로 임청하가 연기한 동방불패를 꼽았다. 올해로 61세인 임청하는 최근 중국 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연기할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김원길 바이네르 사장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김원길 바이네르 사장

    그의 웃음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언제부턴가 그 자리에 있었던 듯했다. 좌절과 시련을 이겨내면서 더 커지고 짙어진 것일까. 소박하게 꾸며진 사장실 문을 열면 ‘힘들어도 괜찮아’라고 적힌 액자가 첫눈에 들어온다. 사무실과 공장을 겸하고 있는 경기 일산 본사에서 지난 17일 만난 김원길(55) 바이네르 사장에게서 “힘들어도 괜찮다”고 스스로 되뇌며 넘어지고 일어나 달려온 40년을 들어봤다. -옷가지 몇 벌이 든 작은 가방 하나를 들고 나는 영등포역에 내렸다. 처음 밟은 서울 땅. 또래들처럼 학교에 다녔더라면 고2 새 학기의 시작에 들떠 있었을 1978년의 봄이었다. 당시 영등포는 사람과 상점, 공장, 유흥가로 지금보다 훨씬 더 번잡했다.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들. 겁이 났다. ‘내가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목이 탔다. 화장실에서 벌컥벌컥 수돗물을 마시고 세수를 했다. 시간은 오후 4시. 자, 이제부터 한 집 한 집 내가 있을 곳을 찾아나서 보자. “제가 구두 만드는 기술이 있는데요, 저 좀 써 주시면 안 될까요.” 하지만 땅거미가 내리고 전등에 하나둘 불이 들어와도 나를 받아주는 곳은 나오지 않았다. 퇴짜를 맞은 집이 스무 곳 가까이 되어갈 즈음, 문래동 쪽 허름한 구둣방에서 나를 받아주었다. 월급은 없이 하숙집에서 먹여 주고 재워 주기만 하는 조건이었지만 마다할 수가 없었다. -내 솜씨를 본 구둣방 주인은 좀 놀라는 눈치였다. 열일곱 살 먹은 ‘충청도 촌놈’치고는 실력이 꽤 괜찮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곳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여름이 되자 주인이 불렀다. “장마철이라 물건이 너무 안 팔린다. 더이상 널 먹이고 재워 줄 능력이 안 된다.” 말하자면 정리해고였다. -“구둣방에서 잘렸어요.” 몇 달 동안 하숙하며 친해진 룸메이트 형에게 사정 얘기를 했다. “내가 강원도 양양 출신이어서 잘 아는데, 설악산에 가면 일자리가 있을 거야.” 귀가 번쩍 뜨인 나는 다음날 새벽같이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로 달려갔다. 그날 늦은 오후가 돼서야 도착한 설악산. 몇 달 전 영등포 역전에서처럼 상점과 산장의 문을 한 집 한 집 두드렸다. 하지만 하숙집 형의 말과 현실은 달랐다. 서울로 돌아갈 차비는커녕 김밥 하나 사먹을 돈도 없는데 서늘한 밤이 찾아왔다. 그런데 그냥 죽으란 법은 없었다.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말할 요량으로 찾아간 산장에서 “방 청소하고 손님들 가방 들어 주면 한 달에 5만원을 주겠다”고 제안을 했다. -당시 설악산은 신혼여행이 피크였다.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짐을 들어 주자 팁이란 걸 주는데, 한 번에 2000~3000원은 기본이었다. 새로운 삶의 희망에 들뜬 신혼부부들은 일반 등산객들보다 손이 컸다. 지배인이 보는 데서 받은 팁은 도로 토해내야 했지만, 그렇지 않은 팁은 고스란히 내 주머니에 들어왔다. 팁에 맛을 들인 나는 강아지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가 밖에서 발소리가 나면 누구보다 먼저 뛰어나갔다.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말을 해야 더 많은 팁을, 그리고 지배인이 안 보는 데서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노하우가 쌓여갔다. 한 달이 지나자 다락방에 몰래 감추고 벽돌로 눌러놓았던 팁이 50만원으로 불어났다. 월급의 10배였다. 그 돈을 들고 나는 미련 없이 설악산을 떠났다. -어려서부터 우리 집은 정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1961년 충남 당진에서 5남 2녀의 셋째로 태어났는데, 가족이 의지할 거라곤 손바닥만 한 논 몇 마지기가 전부였다. 나는 초등학교 들어갈 때부터 허약한 형을 대신해 풀 베고, 땔감 구하고, 논에서 피 뽑는 노동의 무게를 다 짊어져야 했다. 그 보상일까. 초등학교까지만 보낸 형, 누나와 달리 아버지는 나를 중학교에 넣어주셨다. 하지만 중학교 3년 동안 수시로 학업 중단의 위기가 찾아왔다. “엄마, 저…학교에서…100원만 가져오래요.” 집안 사정 뻔한데 차마 말 못하고 있다가 어렵게 입을 열면 어머니는 새벽부터 이집 저집 문을 두드리며 돈을 꾸러 다녀야 했다. “진작에 얘기했으면 좀 더 일찍 알아봤을 것 아니니.”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 봐야 어머니의 긴긴밤 잠 못 드는 괴로움만 더 깊어졌을 거란 사실을. 풀이 죽은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물을 애써 외면하며 집을 나서곤 했는데, 나는 울지 않았다. -학교생활은 1977년 2월 중학교 졸업과 함께 마침표를 찍었다. 중학교 3년이 나에게 보장된 최후의 학업이란 걸 이미 다 알고 있었던 터라 고등학교 진학 얘기는 아버지도 나도 꺼내지 않았다. “원길이는 내 밑에서 구두 기술 배워라.” 서산 읍내에서 작은 구둣방을 하시던 작은아버지가 같이 일을 하자고 하셨다. 초등학교 때 지게를 직접 만들기도 했던 조카의 손재주를 익히 알고 있던 작은아버지였다. 하지만 ‘좁은 곳’에서 평생을 ‘족(足)쟁이’로 썩고 싶지는 않았던 나는 그 손을 뿌리치고 ‘넓은 곳’을 찾아 경기 고양군 지축면(현재의 지축동)의 분재농장에 취직을 했다. 하지만, 한 달 1만원을 받아서는 내 한 몸 먹고 자기에도 빠듯했다. 슬슬 염증이 났다. -“돈 번다고 올라가더니 사는 게 그리 만만하더냐.” 그해 9월 추석에 집에 와서 작은아버지를 다시 만났다. “욕심 부리지 말고 우리 가게로 와라. 이 기술 하나면 먹고사는 데 문제없다.” -서산 구둣방에서 처음 배운 것은 가죽과 밑창이 단단히 붙도록 망치질을 하고, 접착면에 ‘뻬빠질’(사포질)을 하는 일이었다. “역시, 원길이 손재주는 대단하구나.” 남들이 1년을 해도 떼지 못한다는 남성용 구두 제작 전 공정을 나는 5개월 만에 마쳤다. “그 재주로 시골에 있긴 아깝다. 서울 가서 서울 기술 배우거라.” 동료 아저씨들의 말이 몇 번 반복되자 마음이 흔들렸다. 작은아버지는 나의 고민을 이해해 주셨다. 그래서 작은아버지가 쥐여주신 차비를 들고 나는 1978년 그 봄에 영등포역 가는 기차를 탔던 것이다. -설악산에서 번 55만원으로 경기 성남 상대원동에 월셋집을 얻고 서울 중곡동 어린이대공원 근처 구두 공장에 취직했다. 당시 제화업계의 판도는 금강제화, 에스콰이아, 엘칸토, 케리부룩의 순이었다. 내가 들어간 곳은 케리부룩에 납품하던 참스제화였다. 본격적으로 여성용 구두 만들기를 익혔는데, 얼마 후 나는 참스제화 안에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최고의 기술을 갖게 됐다. 그렇게 5년이 지났을 즈음 케리부룩에서 나에게 오라고 손짓을 했다. 1983년 9월 스물두 살 때였다. -‘생산라인에 있으면 신발을 20켤레 만들 수 있지만 관리자가 되면 2000켤레, 2만 켤레의 생산을 직접 관장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늘 ‘더 큰 것’, ‘더 높은 곳’에 목말라 했다. 그래서 나를 믿고 부른 케리부룩 김정현 사장님에게 ‘생산직’이 아닌 ‘관리직’에 배치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사장님은 원했지만 주변에서 말들이 나왔다. ‘생산관리를 고작 중졸 출신에게 맡기다니’와 같은 것들이었다. -그래도 나는 계속 관리직의 문들 두드렸고, 얼마 후 포장반에 배치됐다. 구두에 상표를 붙여 사각 박스에 담는 단순노동을 하는 곳이었지만, 그나마 관리직이라는 이름표를 갖고 있는 부서였다. 생산라인에 있을 때 100만원이던 월급이 포장반으로 오니 20만원으로 깎였다. 나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했는데, 그 계산은 적중했다. 몇 달 후 완제품을 최종 검사하는 검수반으로 옮겼다. ‘완벽한 제품’을 강조하며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깐깐하게 검사를 했다. 어느 날 공장 기술자 100여명이 “우리를 괴롭히는 김원길을 자르라”고 대놓고 사장님에게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 하지만 사장님은 나를 지지했다. 제품의 완성도가 높아지는데 그걸 마다할 사장이 어디 있겠나. 나는 ‘시키지 않은 짓’도 자발적으로 나서서 했다. 시장 조사였는데 금강제화, 에스콰이아, 엘칸토 등 경쟁제품 중에 잘 팔리는 건 어떤 게 있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분석해 리포트를 작성했다. -1989년 인천백화점에서 우리 케리부룩 매장을 퇴출시키겠다고 통보해 왔다. 내가 영업관리를 하며 어렵게 입점을 성사시킨 지 한 달여 만이었다. 월 매출이 600만원으로 다른 업체의 5분의1밖에 안 된다는 이유였다. 백화점에 시간을 한 달만 더 달라고 했다. ‘저 많은 걸 나 혼자선 절대로 못 판다. 고객의 입소문을 통해 팔리도록 만들어야 한다.’ 반값 특가 세일과 동시에 내가 백화점 매장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자, 여러분, 케리부룩 CM송 부르시면 구두를 그냥 드립니다.” 당시 ‘허리를 미끈하게 펴고~ 무릎을 쭉 뻗으면~ 케리부룩 케리부룩 예쁘게 걸어요~’라는 우리 TV CM송은 꽤나 인기가 있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한 달 매출이 1억 1000만원으로 거의 20배가 됐다. 그걸 계기로 뉴코아, 롯데, 신세계 등 서울 시내 백화점에 속속 입점을 했고 나는 ‘영업의 달인’으로 통하게 됐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에 대한 시기와 모함도 커져 갔다. ‘사장이 되려고 한다’, ‘회삿돈을 제 맘대로 쓴다’ 악성 루머가 사내에 돌았다. 사람들에게 실망을 하고 분노를 하니 더이상은 회사에 다닐 수가 없었다. -1990년 사표를 던졌다. 언젠가는 예정됐던 일, 그게 조금 앞당겨졌다고 생각했다. 이듬해 케리부룩 퇴직금 280만원과 사장님이 별도로 챙겨주신 200만원을 밑천으로 서울 용산에 선심(구두의 앞코에 들어가는 부속) 제조회사를 차렸다. 간판은 ‘원길’로 내걸었다. 장사는 그럭저럭 됐는데 돈이 안 들어왔다. 못 받은 외상값이 2000만원이 넘어갔고, 빚이 쌓여 갔다. 답답한 마음에 전에 거래했던 롯데백화점 명동 본점의 바이어를 만났다. “아이고, 김 대리 회사 관두고 나서 케리부룩 엉망 됐어요.” 케리부룩 김 사장님에게 전화를 드렸다. “롯데백화점에 물건 한 트럭 보내주세요. 제가 팔아볼게요.” 매출의 10%가 내 몫이었다. -“사장님, 제가 직접 구두 만들어서 케리부룩 상표 붙여 팔겠습니다.” 다시 기세가 오른 나는 케리부룩에 로열티를 주고 하청공장을 통해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호사다마는 이번에도 비껴가지 않았다. 1993년 케리부룩 대표가 된 전문경영인이 케리부룩 상품권을 헐값에 불법 발행해 구속이 됐고 회사는 부도가 나고 말았다. 상품권들은 휴지조각이 됐고 나는 산더미처럼 쌓인 구두와 빚더미에 거리로 나앉을 판이 됐다. 불면의 날이 이어졌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싶은 충동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밀려왔다. 하지만, 20대 때 연탄가스를 마시고도 씩씩하게 출근을 했던 나였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때마침 어떤 고마운 분이 급전을 융통해 줘서 최종 도산에는 이르지 않을 수 있었다. -회사 이름을 ‘안토니’로 바꾸고 그럭저럭 구두회사를 꾸려가고 있던 1994년 뜻하지 않은 전기가 찾아왔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세계 최대 구두 박람회 ‘미캄’에 갔는데 바이네르의 컴포트화가 눈에 들어왔다. 그들에게 “나와 한국 독점판매 계약을 맺자”고 했다. 당시 바이네르는 하루 1만 2000켤레를 생산하는 대형 업체였다. 한국 수출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그들을 나는 어렵사리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예상대로 국내에서 바이네르는 중년 이상의 여성들을 중심으로 날개 돋친 듯 팔렸다. 하지만, 이탈리아 현지에 주문을 넣고 제품을 받기까지 무려 석 달이나 소요되는 문제가 나타났다. 직접 생산이 절실해졌다. -“내가 한국에서 알아주는 구두 기술자다. 바이네르 상표를 붙여서 우리가 직접 만들어 팔면 안 되겠나. 바이네르의 명성에 먹칠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그들을 꼬박 6개월을 설득했다. 나의 한결같은 노력은 바이네르 회장을 감동시켰고, 결국 나는 일산의 아파트형 공장에서 하루 50켤레씩 컴포트화 생산을 시작했다. -바이네르로 가파른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는데 뜻하지 않은 악재가 터졌다. 나를 아껴주었던 이탈리아 본사 회장이 돌아가시고 그 분의 아들이 가업을 물려받았는데, 회계사 출신인 그는 우리에게 무리한 요구를 해왔다. ‘한국에서 그렇게 잘 팔리는데, 로얄티를 이 정도 밖에 안 내나.’, ‘이탈리아 본사에서 수입해 가는 물량을 더 늘려라.’ 아들의 횡포가 갈수록 심해지면서 나는 서서히 바이네르와의 결별을 준비했다. 광고도 바이네르의 비중을 줄이고 우리 자체 브랜드인 안토니에 집중했다. 그런데 2008년 ‘리먼 브러더스 사태’로 대표되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남부 유럽은 특히 충격이 컸다. 거기에서 바이네르라고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게다가 바이네르는 당시 유럽과 홍콩 증시에 상장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투자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극심한 자금난을 겪게 됐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11년, 나는 이탈리아로 가서 아들을 만났다. “너희들 자금난이 심각하다는데, 내가 지원을 해줄 테니 바이네르 브랜드를 나에게 팔아라.” 그들은 나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현재 이탈리아에 바이네르 공장이 10군데 정도 있는데 그들이 쓰는 브랜드 상표권은 내가 갖고 있다. -바이네르 신발이 편안한 비결이 뭐냐고 많은 사람이 묻는다. 그러면 나는 “고객의 마음은 당신이 그 질문을 하는 이 순간에도 변하고 있다는 걸 명심하라”고 일러준다. 고객은 항상 더 예쁘고, 더 편안한 구두를 찾는다. 그걸 떠올리면 절대로 연구개발(R&D)을 게을리하거나, 맘 놓고 쉴 수가 없다. 고객은 혹시 한 번은 몰라도 절대로 두 번은 봐주지 않는다는 걸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김태균 경제정책부장 windsea@seoul.co.kr ■ 김원길 바이네르 사장 발이 편안한 신발을 뜻하는 ‘컴포트화’를 통해 연간 500억원대의 매출을 올리는 업계 3위 바이네르의 최고경영자(CEO)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구두 분야의 장인(匠人)으로, 특히 ‘중졸 신화’의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바이네르는 백화점을 중심으로 전국 60여곳에 매장을 두고 있다. 가난으로 배움을 다하지 못했던 그는 다양한 봉사활동을 통해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안토니 장학회’를 운영하고 있으며 골프 꿈나무에게 연간 2억원 이상을 지원하고 있다. 해마다 5월이면 수도권의 독거노인을 초청해 효도잔치를 열고 있다. 박애원, 벧엘의집 등 수많은 복지시설에 물품을 보내고 있다. 1억원 이상 고액기부자 클럽인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기도 하다. 직원들에게 업계 최고의 급여를 보장하고 이탈리아 밀라노, 미국 라스베이거스 등 다양한 해외 연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1961년 충남 당진 출생 ▲당진 도성초등학교, 미호중학교 ▲1984년 전국기능경기대회 제화부문 동상 수상 ▲1994년 안토니 설립 ▲2008년 국무총리 표창, 2012년 자랑스러운 중소기업인상, 2012년 철탑산업훈장, 2013년 아름다운 납세자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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