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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용진의 역사를 보는 눈] 영구평화/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홍용진의 역사를 보는 눈] 영구평화/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2024년이 밝았다. 하지만 새해란 단지 숫자에 불과할 뿐일지도 모르겠다. 이전의 많은 문제들이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무고한 양민을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은 러시아ㆍ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ㆍ하마스 전쟁이 대표적이다. 게다가 중국과 대만 간의 갈등, 특히 한반도 문제 등 무시할 수 없는 국제적 갈등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인류는 언제나 평화를 기원했지만, 인권과 민주주의를 당연한 목표로 설정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도 국가 간 충돌과 갈등은 반복돼 왔다. 사실 국가 간의 끊임없는 경쟁과 충돌은 근대 서구사회에서 극심하게 전개됐다. 14세기에 시작된 프랑스와 잉글랜드 간의 백년전쟁 이후 양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서구 각국은 줄기차게 전쟁을 벌였다. 그렇기에 서구의 근대국가는 기본적으로 전쟁 국가라는 성격을 지닌다. 17세기까지 서구에서 승전은 국왕이나 여타 집권 세력에게 정치적 영광과 물질적 보상을 의미했다. 하지만 18세기 초에 이르러 이러한 생각에 근본적 이의를 제기하는 사상가가 등장하기도 했다. 바로 프랑스의 샤를이레네 카스텔(1658~1743)이라는 생피에르 수도원장이었다. 그는 1708년 ‘유럽 영구평화 확립안’을 저술했다. 전 유럽 내 각국이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이라는 국제전에 국력을 총동원하고 있을 때였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전쟁광으로 평가받았던 루이 14세의 왕국 프랑스에서 이른바 ‘영구평화’가 주장됐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전쟁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에서 탈피해 전쟁을 백해무익한 것으로 규정했다. 이어서 전쟁은 국가에 영광과 전리품을 보장해 준다기보다는 막대한 인구 및 경제상의 손실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각국은 번영과 발전을 위해 최대한 전쟁을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전쟁을 어떻게 억제할 것인가. 유럽 각국이 대표를 파견해 일종의 회의체를 구성하며 이를 통해 각국의 이해관계를 조정함으로써 전쟁을 막자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 회의체에 가입하지 않는 국가는 유럽 공동의 이익을 해치는 세력으로 간주하고 가입국이 이 국가를 제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서로가 으르렁대며 싸울 기회만 엿보던 18세기 유럽에서 과연 가능한 것이었을까. 실제로 계몽사상가 볼테르는 그의 영구평화론을 순진한 이상주의로 폄하하기도 했다. 그리고 서양에서 갈등과 전쟁이 멈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카스텔의 사상이 당대에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한 채 사장된 것은 아니었다. 루소는 그의 사상을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저작을 출간했고, 루소의 영향을 받은 칸트 또한 1795년 ‘영구평화론’을 저술했다. 그뿐인가. 영구평화라는 ‘이상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윌슨이 제창한 국제연맹으로, 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루스벨트가 조직한 국제연합(UN)으로 현실화했다. 오늘날 영구평화라는 이상은 또다시 등장한 각자도생의 국제적 이해관계 앞에서 무력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그럼에도 카스텔의 이상이 현실화되기까지의 지난한 역사를 기억한다면 평화에 대한 희망을 포기할 수는 없다.
  • [홍용진의 역사를 보는 눈] 세계박람회와 인정투쟁/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홍용진의 역사를 보는 눈] 세계박람회와 인정투쟁/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월드 엑스포’, 한국어 공식 명칭으로 ‘세계박람회’라는 전 세계적 행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1993년 대전 엑스포와 2012년 여수 엑스포로 낯이 익다. 하지만 이 두 행사 이전에 세계박람회는 세계사 교과서나 역사책에 종종 등장하는, 일본어에서 유래하는 ‘만국박람회’라는 명칭으로 널리 소개됐다. 19세기에는 주로 영국과 프랑스, 미국을 중심으로 개최됐고 여기에서 서양 각국은 산업화를 바탕으로 이뤄 낸 문명의 진보를 과시했다. 최초의 세계박람회는 1851년 산업혁명의 종주국인 영국의 수도 런던에서 개최됐다. 이 행사는 사실 1798년부터 1849년까지 총 11회에 걸쳐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됐던 ‘프랑스 산업제품 박람회’에 기원을 둔다. 정치적 격변을 거치면서 체제가 바뀌면서도 꾸준히 개최된 프랑스 박람회가 오직 프랑스 국내 행사였다면 1851년 세계박람회는 이후 공식적인 국제 행사로 발돋움해 나갔다. 빅토리아 여왕 치세에 개최된 이 박람회에서는 10헥타르(약 3000평)에 달하는 드넓은 부지에 주 전시관인 유리로 만들어진 수정궁을 비롯한 다양한 전시관이 지어졌고, 영국을 포함한 25개 국가가 서양의 ‘진보한’ 산업 문명의 결과물을 과시했다. 이후 영국은 제3회 세계박람회를 끝으로 더이상 개최국이 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1970년 일본 오사카에서 세계박람회가 개최되기 전까지 총 45회에 걸친 세계박람회는-1953년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오로지 서유럽과 미국에서만 개최됐다. 하지만 비서양국가들이 이 서양중심주의적 세계박람회에 참가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일본은 이미 1867년에 파리에서 개최된 세계박람회에 참가했는데, 흥미롭게도 이 당시 일본의 참가 방식은 일본의 정치적 위기와 긴장 상태를 여실히 드러냈다. 일본을 대표하는 막부 정부 전시관과 별도로 사쓰마번은 자신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류큐국을 내세워 별도의 전시관을 운영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듬해 막부군과 사쓰마번이 참가한 신정부군 사이에 보신전쟁(戊辰戰爭)이 발발했고, 이후 메이지 유신이 전개된 사실은 널리 알려진 바다. 이때 일본이 세계박람회에 참가한 이유는 아직 산업화가 본격화되기 이전이었던 만큼 자신들의 산업화를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세계 무대에서 막부와 사쓰마가 서로 일본을 대표하는 세력으로 인정받기 위해서였다. 이미 19세기 말부터 세계 각국은 자신만의 문화와 생활방식을 보여 주는 다양한 전시물을 세계박람회에 선보이고 있던 차였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운이 풍전등화와도 같았던 1900년 대한제국은 프랑스 외교관의 주선으로 재차 파리에서 개최된 세계박람회에 처음으로 참가했다. 경복궁 근정전을 본뜬 전시관에는 다양한 전통 공예품과 악기, 예술품, 가구, 의복 등이 전시됐다. 전 세계 외교 무대에서 독자적인 주권국가로 인정받고 싶었던 처절한 인정투쟁이었다. 세계박람회는 단순한 신문물 전시의 장이 아닌 치열한 국제 외교무대라는 점을 스러져 가는 대한제국도 명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 [홍용진의 역사를 보는 눈] 세상의 아픔을 품은 의사들/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홍용진의 역사를 보는 눈] 세상의 아픔을 품은 의사들/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의사는 아픈 사람을 고친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역사 속에서 몇몇 개인을 넘어 사회의 아픔을 고치고자 고군분투한 의사들을 만난다. 독일의 알베르트 슈바이처(1875~ 1965), 캐나다의 노먼 베순(1890~ 1939), 아르헨티나의 에르네스토 게바라(1928~1967)가 그들이다. 슈바이처는 루터교 신학자이자 목사이면서 음악가이기도 했다. 다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한 그는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서 역사적으로 늘 문제가 돼 왔던 알자스 출신이다. 실제로 그는 독일인으로 태어나고 성장했으나 44세가 되던 해인 1919년부터는 프랑스인이 됐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이 패전하면서 알자스가 프랑스령이 됐기 때문이다. 종교적으로도 알자스에서는 다양한 개신교와 가톨릭, 유대교가 공존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슈바이처는 특정한 민족이나 종교적 정체성에 매몰되지 않고 다양한 정체성을 존중하는 보편적 세계시민으로 거듭났다.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 평화주의에 대한 열망은 그를 아프리카로 이끌었고 그는 가봉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숭고하고 희생적인 의료활동을 전개했다. 슈바이처가 아프리카에서 정열적인 활동을 하고 있던 1920년대에 캐나다에서는 노먼 베순이라는 젊은 의사가 결핵 치료법을 찾는 데 열성을 다하고 있었다. 결핵 문제가 빈곤 문제와 직접 연관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사회문제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사회주의 정책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대공황으로 피폐해진 민중들을 돌보던 그는 1930년대에 국적과 상관없이 세계적인 분쟁 지역에 뛰어들어 의료 봉사활동을 전개했다. 파시스트 프랑코의 쿠데타가 발발한 에스파냐에서, 또 군국주의 일본의 침략을 받고 있던 중국에서 그는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의료활동을 펼치다 안타깝게 사망하고 말았다. 에스파냐 내전을 피해 아르헨티나로 망명한 공화주의자들과 친하게 지냈던 의사 에르네스토 게바라에게는 같은 이름의 아들이 있었다. 그 아들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의대로 진학했지만 극단적인 빈부격차에 시달리던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현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사람을 고치기 전에 사회를 고쳐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쿠바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고 ‘체 게바라’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쿠바에서의 안정적인 삶을 버리고 콩고와 볼리비아에서도 혁명 운동을 전개했지만, 소련과 갈등을 빚어 버림받고 결국 전사했다. 정치적으로 실패한 삶이었지만 가난하고 핍박받는 자들을 위한 그의 대의는 아직도 전 세계에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이뿐이겠는가. 자신의 목숨보다도 보편적인 인류애를 중요하게 여기며 어려운 사람들을 대상으로 의료활동을 실천한 의사들은 우리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남태평양을 비롯한 저개발 국가의 빈곤 환자에 대한 의료활동으로 ‘아시아의 슈바이처’라 불린 이종욱(1945~ 2006), 신부이면서 의사로서 현 남수단 톤즈에서 헌신적인 의료활동을 전개한 이태석(1962~2010)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이 보여 준 보편적인 인류애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와닿는다.
  • [홍용진의 역사를 보는 눈] 단호했으나 무능했던 왕 헨리 8세/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홍용진의 역사를 보는 눈] 단호했으나 무능했던 왕 헨리 8세/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영국 왕 헨리 8세(재위 1509~1547)는 종교개혁과 여섯 차례의 결혼으로 드라마나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이다. 활달하고 호방하지만 때로는 과격한 다혈질적 성격을 보여 준 헨리 8세는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꽃을 피우던 당대에 문무(文武)에 뛰어난 자질을 보여 준 왕재(王才)였다. 하지만 그를 괴롭게 한 것은 뛰어난 자질과 재능에도 불구하고 그가 ‘고작’ 영국의 왕일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당대에 명성이 자자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나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어 했다. 이 두 군주는 서유럽 최고의 라이벌로 많은 전쟁을 치르면서도 서로를 크게 존중했다. 하지만 이 둘의 관계에 헨리 8세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헨리 8세는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 북부를 장악했던 헨리 5세(재위 1413~1422)를 동경했다. 그래서 그처럼 프랑스에 대한 대승과 영토 획득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개인적 자질로만 본다면 헨리 8세는 100년 전의 헨리 5세 못지않았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이전과 같지 않았다. 백년전쟁 이후 강력한 군사력과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다져 놓은 프랑스를 영국이 전처럼 장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헨리 8세는 반프랑스 동맹을 내세우며 카를 5세에게 접근했지만 거절당했고, 이에 복수한다며 다시 카를 5세를 공격했지만 별 소득 없이 재정만 낭비했다. 헨리 8세는 유럽 무대에서 우월함을 보여 주기 위해 끝없이 전쟁을 도발했고 많은 승리도 거두었다. 하지만 그런 승리가 그의 명성을 드높였을지는 몰라도 실질적 소득을 보장해 주지는 않았다. 재정은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됐다. 헨리 8세는 대를 이을 왕세자가 없다는 사실을 왕권의 불안 요소로 여겼다. 그는 아버지가 구축한 외교정책의 일환으로 에스파냐 공주 카탈리나(캐서린)와 결혼했다. 하지만 아들이 태어나지 않자 이혼과 앤 불린이라는 여성과의 재혼을 추진했다. 그러나 캐서린은 카를 5세의 이모였고 황제의 기세에 눌려 있던 교황은 이혼을 허가해 줄 수 없었다. 이에 그는 교황청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국왕을 영국 교회의 최고 수장으로 삼는 종교개혁과 재혼을 추진했다. 이때 그가 추진한 종교개혁에는 수도원 해산도 포함됐다. 강제 해산된 수도원 소유의 토지는 모두 국왕에게 몰수됐고, 의회의 주역을 이루고 있던 대지주인 젠트리에게 싼값에 매각됐다. 이로써 그는 재정도 충분히 메우고 의회의 지지도 적극적으로 받았다. 자신감을 회복한 헨리 8세는 또다시 전장이라는 도박장으로 향했고, 역시나 큰 소득 없이 막대한 재정을 탕진하고 말았다. 대내적으로 헨리 8세는 강력한 왕권으로 거침없이 자신의 전례 없는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그의 절친이자 국상이었던 토머스 모어마저도 종교개혁에 반대했기에 일벌백계 차원에서 사형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그의 원대한 이상에 따른 대외 정책은 큰 성과 없이 막대한 재정적 출혈만 초래했다. 실리 없는 대외 정책은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휘어잡은 내정을 파국으로 몰아갈 뿐이었다.
  • [홍용진의 역사를 보는 눈] 서로마제국의 소멸/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홍용진의 역사를 보는 눈] 서로마제국의 소멸/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476년은 로마제국이 멸망한 해로 기록된다. 정확히 말해 사라진 것은 서로마제국이었다. 개설서에서는 멸망의 원인을 종종 게르만인의 이동 또는 침입으로 돌린다. 문명화된 로마가 야만적인 게르만인의 거대하고도 갑작스런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는 서술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몽골과 같은 유목민의 고려 침입과 오버랩돼 잔상을 남기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 사실 로마와 게르만인의 인연은 훨씬 오래되었다. 로마가 제국으로 확장되면서 게르만 부족과 조우하고 충돌하는 일은 기원전 1세기부터 수시로 벌어졌다. 서로마의 소멸과 직접 관련된 사건만 보더라도 중앙아시아의 훈족에게 쫓겨 서고트인이 로마로 망명하듯 밀려 들어간 해는 376년, 무려 로마 멸망 100년 전의 일이었다. 로마 정부가 어떤 관심도 주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서고트인은 기아에 방치됐고 때론 악독한 로마인에게 속아서 노예로 팔려 가기도 했다. 서고트인의 봉기와 이에 대한 진압 또는 회유와 평화를 위한 약속이 이어졌지만 결국 410년 서고트인이 로마를 장악하는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그사이 로마제국은 동서로 분할됐고(395년), 5세기 초 서고트인은 서로마의 서쪽 끝인 히스파니아에 로마의 동맹세력으로 정착했다. 이 동맹은 황제가 허가한 영역에서 고유한 문화와 법을 유지하되 로마에 군사력이 필요한 경우 이를 지원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했다. 이후 로마로 유입하거나 국경 근처에 거주하던 여러 게르만 부족이 유사한 동맹을 맺었다. 450년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 부대가 동유럽을 넘어 동로마와 서로마 모두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특히 국력이 약했던 서로마가 주요 먹잇감이 됐다. 이에 맞서기 위해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로마군과 게르만군을 결집했고 451년 아에티우스 장군의 지휘 아래 로마ㆍ게르만 동맹군이 훈족에 대승을 거두었다. 다음해 아틸라는 사망했으며, 로마는 훈족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누가 뭐라 해도 이때 게르만인은 서로마를 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면 서로마는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 시작은 인기 많은 장군에 대한 군주의 의혹과 시샘이었다. 황제 발렌티니아누스는 아에티우스를 암살했고 자신도 암살당했다. 이후 26년 동안 서로마에서는 제위를 둘러싼 투쟁이 처절하게 벌어졌다. 9명의 황제가 길어야 4년, 짧으면 1년 안에 쫓겨나거나 목숨을 잃었다. 475년 장군 오레스테스는 자신의 아들을 꼭두각시 황제로 옹립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그는 용병들을 고용했는데, 거사 성공 후 그에게 어떠한 비용도 지불하지 않았다. 다음해 용병 수장인 오도아케르가 봉기를 일으켜 오레스테스와 그의 아들을 축출했고, 동로마 황제 제노의 허락으로 이탈리아의 왕이 됐다. 이후 서로마에서 황제가 되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제국 전역의 일상은 별다를 바 없었다. 포악한 야만인의 살육과 방화, 약탈도 없었다. 제국 각지는 그저 다양한 게르만 왕국이라는 민낯을 드러낼 뿐이었다. 서로마제국 소멸의 가장 큰 원인은 내부에 있었다. 남 탓할 것 전혀 없다.
  • [홍용진의 역사를 보는 눈] 보어전쟁과 스카우트운동/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홍용진의 역사를 보는 눈] 보어전쟁과 스카우트운동/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19세기 제국주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나라가 영국이다. 영국 식민지 팽창의 마지막 지점은 남아프리카였다. 1487년 바스쿠 다가마가 희망봉에 처음 도착한 이래 남아프리카는 인도양으로 향하는 뱃길의 요충지였다. 그래서 16~18세기에는 인도양 교역을 장악한 포르투갈인, 뒤이어 네덜란드인이 이 지역을 장악했다. 19세기 식민지 경쟁에서 영국의 가장 큰 경쟁 세력은 프랑스였다. 이집트에서 남하하며 식민지를 정복하던 영국은 모로코·알제리에서 마다가스카르까지 횡단하며 식민지를 장악하던 프랑스와 충돌 직전까지 갔다. 이것이 바로 1898년의 파쇼다 위기였는데 드레퓌스사건 등 국내 문제로 시끄럽던 프랑스의 양보로 영국은 남아프리카 장악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1881년 남아프리카 보어인과 충돌을 빚은 적이 있던 영국은 1899년에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했다. 이른바 ‘보어전쟁’이다. 보어인은 16세기 이후 남아프리카에 정착한 백인 후손의 통칭인데 네덜란드어로 ‘농민’을 뜻한다. 이들은 대부분 네덜란드 출신이었지만 영국이나 프랑스 등 유럽 내 다른 지역 출신들도 많았다. 300년 동안 남아프리카에서 토착화한 이들 보어인은 19세기 중반에 가서야 트란스발공화국과 오라녀자유국이라는 국가를 세웠다. 하지만 1884년 남아프리카에서 새로운 금광이 발굴되고 유럽 각국의 식민지 경쟁이 격화되면서 영국은 남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기득권을 확고히 장악하고자 했다. 이렇게 해서 예전에 정착한 백인과 새로 온 백인 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3년 동안 벌어진 보어전쟁은 끔찍하고 잔혹한 전쟁이었다. 막대한 병력을 동원한 영국은 게릴라전으로 응수하는 토착 보어인에게 가까스로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이루어진 무자비한 초토화 전술과 (훗날 나치 독일에서 되살아나게 될) 열악하고 비인간적인 강제수용소 정책은 대영제국의 도덕성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그런데 보어전쟁이 낳은 결과가 이렇듯 참혹하고 부정적인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전쟁 초 현재 마히켕이라 부르는 소도시에 주둔하던 영국군은 217일이나 이어진 보어군의 포위 공격을 막아 낸 적이 있다. 이때 병력에서 열세였던 영국군은 일종의 ‘소년군’을 조직해 보급품 관리나 간호, 전령 및 정찰 활동에 활용했다. 아이들은 아직 정식 군인이 될 수 있는 체격을 지니지는 않았기에 비교적 쉽게 보어군에 대한 전령 및 정찰 업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당시 지휘관이었던 로버트 베이든 포월은 전쟁 직전에 정찰 교본을 집필하기도 했다. 그 책은 전후 그의 성공담과 더불어 영국 소년 단체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에 부응해 그는 1908년 ‘소년을 위한 정찰활동’이라는 책을 집필하기도 했다. 이후 전 세계에서 스카우트운동 열풍이 일었고, 식민지 조선에서도 1922년 ‘조선소년군’이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참혹한 재앙이었던 보어전쟁의 끝자락에 스카우트운동이라는 희망이 꽃피었다고 해야 할까. 문득 판도라의 상자가 떠오른다.
  • [홍용진의 역사를 보는 눈] 영국 의회의 탄생과 그 의미/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홍용진의 역사를 보는 눈] 영국 의회의 탄생과 그 의미/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영국의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17세기에 벌어진 의회와 왕의 갈등에 대해 익숙하게 들어 봤을 것이다. 비단 영국뿐만 아니라 서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왕권과 대의제(의회)를 놓고 벌어진 줄다리기가 정치사의 주요 흐름을 장식하곤 한다. 그중에서도 영국은 확고한 의회주의를 확립한 나라로 유명하다. 그런데 영국의 의회는 영어로 ‘팔러먼트’(Parliament)라고 한다. 학창 시절 영어 단어를 외우다가 왜 이 단어가 의회를 뜻하는지, 그것도 콕 집어서 ‘(영국) 의회’라고 하는지 배경이 궁금했던 사람이 꽤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한국에서 ‘국회’는 영어로 ‘National Assembly’라고 번역한다. 또 미국에서는 의회를 ‘United States Congress’라고 쓴다. 이때 ‘assembly’나 ‘congress’는 모두 모임이나 회합을 의미하기 때문에 의미를 바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팔러먼트’라는 단어에는 어떤 의미가 숨어 있는 것일까. 그 뜻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프랑스로 넘어가 ‘파를르망’(Parlement)이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이 단어는 프랑스 혁명 당시 방아쇠 역할을 했던 ‘고등법원’을 의미한다. 사실 ‘Parliament’라는 단어는 이 프랑스어에서 기원한다. 그렇다면 의회와 법원, 즉 입법부와 사법부가 별 차이가 없었다는 말인가. 단어의 이동이 일어난 시기는 13세기인데, 이때는 몽테스키외가 삼권분립을 제창하기 500년 전이다. 프랑스어 ‘파를르망’은 ‘말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파를레’(parler)에서 파생했다. 즉 프랑스의 ‘파를르망’이나 영국의 ‘팔러먼트’는 모두 참석한 사람에게 발언권을 주는 회합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영국에서 이 ‘팔러먼트’라는 말이 ‘의회’라는 의미로 확고히 정착된 때는 바로 13세기 중반 프랑스 출신 귀족 시몽 드 몽포르가 국정을 주도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때는 영국 왕이 아키텐 지역과 관련해 프랑스 왕의 봉신이기도 했던 만큼 두 나라의 귀족사회도 뒤얽혀 있었는데, 몽포르는 아버지로부터 영국 땅을 상속받아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무능하고 독단적인 국왕 헨리 3세에 맞서 귀족 봉기를 이끌었다. 무엇보다 약 50년 전에 작성됐던 ‘마그나카르타’(대헌장)의 정신에 따라 국왕이 의회의 동의하에서만 세금을 걷고 국정을 운영하도록 했다. 또한 의회에 고위 성직자나 대귀족뿐만 아니라 중소 귀족이나 도시 대표도 참석하게 되면서 의회는 명실상부한 대의제 기구로 거듭날 수 있었다. 1265년 세자 에드워드는 왕권을 위협하는 몽포르를 제거했고 결국 의회는 유명무실화됐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1세는 1295년부터 ‘모범 의회’를 주기적으로 개최하면서 영국 의회주의의 기틀을 다졌다. 그는 내치에서는 정적의 정책까지도 통합과 화합의 정치로 계승하며 적보다는 친구를 만드는 정치를 펼쳤다. 비록 700년도 더 전인 남의 나라 군주정 시대 일이라지만, 대화와 포용으로 요약되는 중세 영국 의회의 탄생 과정은 현재 우리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 세상을 읽는 새로운 시선…독자 여러분 찾아갑니다

    세상을 읽는 새로운 시선…독자 여러분 찾아갑니다

    거짓 정보와 가짜뉴스가 범람하면서 갈수록 세상 읽기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객관적 사실과 다양한 관점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혼돈의 시대, 세상을 읽는 안목을 보다 높여 줄 새 필진 14명이 새달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분야별 학계 인사와 전현직 관료 등 정책 전문가 120여명이 참여한 사단법인 K정책플랫폼(이사장 전광우 전 금융위원장, 원장 박진 KDI 교수·정태용 연세대 교수)이 월 1회 노동개혁 등 각 국정 현안에 대한 전문가들의 탁월한 분석과 견해를 찬반 토론 형식으로 제시합니다. 유재웅(전 대통령홍보기획비서관) 을지대 교수와 양성일(전 보건복지부 차관) 고려대 특임교수 등 관료 출신 교수와 고학수 개인정보보호위원회 위원장, 김형배 한국거래조정원장 등 현직 기관장, 임정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 이종수 연세대 행정대학원장, 최우선 국립외교원 교수, 김숙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 김보름 한성대 문학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장남원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 홍용진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김별아 소설가, 최여정 작가 등도 참여해 외교안보에서부터 문화예술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에 걸쳐 풍성한 시선을 제공할 것입니다. 아울러 서울신문 3040 기자들이 쓰는 젊은 현장 칼럼 ‘서울 on’도 신설합니다. 명쾌하면서도 다양한 시각을 담아 한 걸음 더 독자 여러분 곁에 다가서겠습니다.
  • 가난은 죄가 아냐… 인권침해의 시작일 뿐

    가난은 죄가 아냐… 인권침해의 시작일 뿐

    서양사 속 빈곤과 빈민/민유기·홍용진 외 지음/책과함께/448쪽/2만 5000원 프랑스 파리 트로카데로 광장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진 동판이 있다. “인간이 빈곤 상태로 살아가도록 강제된 곳은 인권이 침해당하는 곳이다. 빈민이 존중받도록 연대하는 것은 신성한 의무다.” 1960년대부터 1988년 삶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빈민 인권 운동에 앞장 선 브레진스키 신부가 평소 자주 언급했던 말이다. 그는 극빈층이 근본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그들의 인권을 위한 국제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사회적 연대를 향한 그의 줄기찬 호소는 차츰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모았고 여러 사회 정책에 반영됐다. 이제 사람들이 좀 먹고살 만한 사회가 됐을까. 현실은 단순하지 않다. 2011년 미국 경제의 심장인 월가를 점령한 시위대는 ‘상위 1%’의 부를 향한 탐욕과 갈수록 심화되는 불평등에 거세게 분노했다. 한국 역시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전체 가구의 25~35%가 빈곤 경계선에 있고 실업, 질병 등 위기를 극복하지 못해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직전이다. 빈곤층의 기본적 소득을 보장하는 등 적극적인 정책이 필요하지만 재원 확보를 위한 진지한 노력은 찾아보기 힘들다. 책은 총 4부 12장에 걸쳐 고대부터 현대까지 서양사 속에서 가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쫓고, 다양한 분야의 사회 활동가들이 빈곤 퇴치를 위해 펼친 노력들을 고찰한다. 저자들은 “전 세계적으로 절대적·상대적 빈곤이 눈에 띄게 불거지는 상황이 초래된 원인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면서 “빈곤층의 빈곤 탈출을 도울 각종 공공서비스와 경제·사회정책이 확대되기를 바란다”고 설명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한국 사회 공정성·공론장을 말하다

    한국서양사학회는 28일 서울 안암동 고려대학교 인촌기념관에서 ‘서양역사 속의 공공성과 공론장’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연다. 공공성은 최근 크게 호응을 얻고 있는 개념. 이명박 정부가 내세운 공정사회론과도 맥이 닿아 있고, 최근 우리 학계에서 일고 있는 공화주의에 대한 깊은 관심과도 연결되어 있다. 공적인 영역이란 무엇이고, 어떤 것이 공적으로 성취되어야 할 일인가라는 얘기다. 보통 공공성, 공론장하면 많이 거론되는 인물이 독일의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였다. 궁정문화에서 부르주아 공론장으로 어떻게 이동했는가, 그리고 그렇게 탄생했던 부르주아 공론장이 어떤 식으로 식민화되고 있는가, 그렇기에 지금 시대에 공론장을 어떤 식으로 되살려야 할 것인가라는 게 하버마스의 문제의식이었다. 하버마스가 공론장의 위축에서 가장 우려했던 것 가운데 하나는 시장권력이 공론장을 침탈할 가능성이었다. 먼 얘기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흔히 벌어지는 얘기다. ‘경제는 경제논리에 따라’라는 이데올로기를 금과옥조로 삼은 이들이 경제 논리 이외의 접근방식으로 공동체적 가치를 논의하는 것을 무조건 반경제적이라 몰아붙이는 세태가 그것이다. 기조발표자는 조승래 청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서양 근대 공사 구분의 지적 계보’를 발표한다. 조 교수는 자유시장주의 논리가 전체주의에 맞서는 것을 강조하다보니 공동체적 가치를 무너뜨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입장에 서 있다. 무엇이 전체 공동체에게 이득이 되는지 따져보는 지혜를 찾기 위해 공화주의가 되살아나야 한다고 보는 입장인 것이다. 이어지는 토론에서는 정일준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가 ‘공론장, 서양과 동양, 과거와 현재’를, 홍용진 고려대 교수가 ‘14세기 프랑스 봉건왕국의 통치이념과 ‘공’개념을, 조용욱 국민대 교수가 ‘근대 영국에서의 공공영역: 임의단체와 도덕개혁’을 각각 발표한다. 또 노명환 한국외대 교수는 ‘공공성과 공론장으로서 기록보존소의 활용; 그 역사와 현황, 그리고 미래 발전방향’을 발표한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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