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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날아라, 로보트 태권V - 춘천 애니메이션 박물관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날아라, 로보트 태권V - 춘천 애니메이션 박물관

    “S#1 훈: 아버지가 오시기 한 시간 전에 왔어요. 실 가는데 당연히 바늘이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김박사: 영희가 바늘이라고? 그렇지 영희는 매서운 데가 있으니까. S#2 영희: 오늘산책은 정말로 즐거웠어! 훈: 음… 내가 옆에 있으니까…. " 1976년 김청기 감독의 극장용 장편 에니메이션 ‘로보트태권V'는 주인공 훈이가 로봇에 직접 탑승하여 조종하는 동작 트레이스 시스템을 통해 무술 로봇 개념을 선보인 한국 만화영화사상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놀랍게도 무려 40여 년 전에 탑승 로봇 개념의 만화 스토리가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나온 셈이었다. 또한 주인공 훈이는 준수한 외모에 태권도 실력까지 갖추고 있었는데 위의 대사처럼 비록 말투는 무뚝뚝하지만 영희와 주고받는 대화 속에는 자기애(自己愛)의 절정(?)마저 엿볼 수 있는 현대적인 감각의 훈남 캐릭터이기도 하였다.애니메이션의 어원은 이러하다. 라틴어인 ‘아니마(ANIMA)'에서 나온 말로 영혼 혹은 생명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즉 움직이지 않고 고정되어 있는 어떤 물체나 회화에 영혼과 생명을 불어 넣어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애니메이션이다. 우리나라 애니메이션의 영혼을 불어 넣는 곳, 춘천 애니메이션 박물관으로 가 보자.2003년 10월 1일에 개관한 춘천 애니메이션 박물관은 생각보다 자료가 방대하고 유익한 곳이다. 원래부터 박물관의 개관 목적이 ‘우리나라에서 유일한’이라는 슬로건을 갖추고 애니메이션에 관한 모든 것을 전시하려는 목적이 있는 곳이다 보니 관람객들이 찬찬히 전시품목들을 살펴 보다 보면 진귀한 작품들도 많이 발견할 수 있다.애니메이션 박물관은 총 2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1층에는 동굴벽화에서 한국애니메이션 탄생의 시기 역사, 1890년대 유리필름 등 애니메이션의 역사가 담긴 약 6만 여점의 소장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이곳에는 1800년대에 사용되던 환등기와 슬라이드, 1956년에 발표한 최초의 CF애니메이션, 우리나라 최초 장편 애니메이션인 ‘홍길동, 1967’을 비롯하여 각종 애니메이션 필름, 가스영사기, 카메라, ‘황금박쥐, 1968’, ‘전자인간 337’ 등 80여점에 달하는 프린트 필름과 명작 애니메이션 ‘오세암’에 관한 모든 자료들을 보존 전시하고 있다.또한 2층에는 세계애니메이션 역사와 더불어 몸으로 직접 느껴볼 수 있는 판스크린 체험, 주인공 체험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이외에도 애니메이션 전용 극장인 ‘아니마떼끄(Animatheque)’를 2004년 8월에 오픈하여 매월 우수 장편 애니메이션을 개봉하고 있다.특히 2013년에는 토이 로봇체험관을 개관하여 우리나라 18개 회사의 265개의 로봇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여 방문객들에게 색다른 재미를 전달해주기도 한다. <춘천 애니메이션박물관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 어린 자녀가 있다면 권유할 수 있는 공간. 수준과 규모가 기본 이상은 하는 곳이다. 2. 누구와 함께? - 가족 단위, 특히 어린 자녀를 둔 가정이라면 3. 가는 방법은? -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박사로 854 (현암리 367번지 245) - 춘천 시내버스 81, 82, 83번 / 애니메이션 박물관 앞 하차 4. 감탄하는 점은? - 195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다양한 애니메이션 관련 자료들.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주말의 경우 관람객들이 많은 편. 6. 꼭 봐야할 장소는? - 토이로봇체험관 7. 토박이들이 추천하는 먹거리는? - ‘샘밭막국수’, ‘춘천막국수’, 춘천 닭갈비 골목 8. 홈페이지 주소는? - http://www.animationmuseum.com/site/museum/page/index.jsp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김유정 문학촌, 책과 인쇄 박물관, 막국수 박물관, 청평사, 옥광산 10. 총평 및 당부사항 - 어린 자녀를 둔 가정이라면 적극 추천. 박물관과 로봇체험관에서 한 나절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우리들의 밧모섬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우리들의 밧모섬

    로마시대 정치범을 유배 보내던 에게해의 파트모스섬은 세계에서 ‘유배로 악명 높은 10개의 섬’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기독교인들에게는 ‘밧모’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하며, 로마 황제가 사도 요한을 유배 보낸 곳으로 유명하다. 사도 요한은 이곳에서 ‘요한계시록’을 썼고 그래서 유네스코(UNESCO)에서는 1999년 ‘성 요한 수도원과 파트모스섬 요한계시록 동굴’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마르틴 루터는 1520년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파문을 받고 바르트부르크성에 숨어서 지냈다. 이곳에서 루터는 질병과 두려움에 시달리며 교황에서 벗어난 그리스도교를 구상했고, 성서를 번역했으며, 방대한 저작물들을 남겼다. 이곳에서 루터는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열정과 집중력을 발휘함으로써 일약 그리스도교 사상의 정점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이다. 루터는 바르트부르크성을 “나의 밧모섬”이라고 불렀다. 한말의 3대 시인이었던 강위는 제주 유배 중이던 김정희를 찾아가 보고 “달팽이집에서 10년간 가부좌를 트셨다”(蝸廬十載跏趺膝)며 스승의 유배지를 ‘달팽이집’에 비유했다. 윤선도 역시 ‘어부사시사’에서 “와실(蝸室)을 바라보니 백운이 둘러 있다”고 하면서 작고 누추한 자신의 유배지를 에둘러 표현했다. 그러니까 김정희나 윤선도에게 달팽이집은 그들의 ‘밧모섬’이었던 셈이다. 로맹 가리는 가장 권위 있는 프랑스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1956년에는 본명으로, 1975년에는 가명으로 2회 수상했던 특이한 작가다. 그는 굴레를 벗은 자유로운 말이라는 뜻의 ‘시마론’이라는 별장에서 온종일 글을 썼다. 그런데 하수구를 별장 근처에 만들려 하자 홧김에 그 집을 팔아 버린다. 그 후로 그는 햇볕이 작열하는 또 다른 은신처를 찾아 끊임없이 헤맨다. 그의 ‘밧모섬’을 찾아 헤매었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각자의 ‘밧모섬’이 필요하다. 적어도 ‘다른 길과 다른 가치와 다른 세상에 대한 상상’을 원한다면 자신의 ‘밧모섬’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연암 박지원은 “경조사도 폐하고 혹 며칠씩 세수도 않고 혹 열흘간 망건도 쓰지 않고 지냈다”고 했다. “잠이 오면 자고, 깨면 책을 보거나 글을 쓰기도 하고, 막 배운 악기를 연주하기도 하고, 어쩌다 친구가 술이라도 보내오면 마시고 취하기도” 했다. 이렇게 무엇을 해야겠다는 목표를 두지 않고, 몸과 마음이 하자는 대로 지내는 동안 박지원은 이용후생학(利用厚生學)이라는 다른 상상을 할 수 있었다. 혼자 있으면 쓸쓸하다고 이를 달래기 위해 ‘쓸쓸비용’을 지출하는 사람들이 많다. 안 써도 되지만 혼자인 것보다는 나을 거라는 기대 때문에 쓰는 것이다. 반려동물에 대한 지출이 그렇다. 1인 가구 중심으로 관련 시장이 팽창 중이다. 이런 사람들도 있지만 자신의 밧모섬에서 쓸쓸함을 이겨 내는 사람들도 많다. 도서관에서 인생 2막을 준비하는 중년들이 그들 중 하나다. 나만의 서재, 나만의 작업 공간으로 느껴져 자주 찾는다는 그들에게 도서관이야말로 나의 ‘밧모섬’인 것이다. 이렇게 각자의 ‘밧모섬’에서 소위 ‘셀프 유배’를 하는 동안 어느덧 ‘다른 길과 다른 가치와 다른 세상에 대한 상상’을 하게 됨은 물론 더욱이 몸과 마음도 따라서 건강해지니 놀랍고 신기한 일일 수밖엔 없다. 그래서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도 “유배 와서야 세상사 끊고 기쁨 얻었네”(謫來?喜世情?)라고 했었는지도 모른다. 한 해가 화살처럼 가는데 더 늦기 전에 각자의 밧모섬에서 제대로 기쁨을 맛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17살 소녀들의 성장기…‘소녀의 세계’ 예고편

    17살 소녀들의 성장기…‘소녀의 세계’ 예고편

    열일곱 사춘기 소녀들의 성장기를 그린 영화 ‘소녀의 세계’ 메인 예고편이 공개됐다. ‘소녀의 세계’는 알쏭달쏭, 혼자만의 비밀이고 싶은 첫사랑과 특별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열일곱 사춘기 소녀들의 성장기를 그린 영화다. 공개된 예고편에는 평범한 여고생 ‘선화’(노정의)가 전교생이 선망하는 선배 ‘하남’(권나라)과 가까워지면서 핑크빛 일상을 보내는 모습이 담겨 있다. 영화는 제5회 KT 국제 스마트폰 영화제 장편 시나리오 수상을 시작으로 제16회 뉴욕 아시아 영화제, 제42회 서울독립영화제, 제6회 마리끌레르 영화제 등에 초청되며 주목받은 안정민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여기에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에 출연해 많은 사랑을 받은 노정의가 천진난만한 열일곱 소녀 ‘봉선화’ 역을 맡았다. 배우 조수향은 복잡 미묘한 감정을 지닌 여고생 ‘수연’ 역을, 헬로비너스 출신 배우 권나라는 전교생의 우상이자 비밀스런 선배 ‘하남’ 역을 맡았다. 영화 ‘소녀의 세계’는 11월 22일 개봉 예정이다. 영상팀 seoultv@seoul.co.kr
  •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천하에 가장 두려운 존재는 백성뿐”… 민본·신분제 타파 외친 혁명가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천하에 가장 두려운 존재는 백성뿐”… 민본·신분제 타파 외친 혁명가

    “역적 허균, 하인수, 현응민, 우경방, 김윤황을 서쪽 저잣거리에서 사형에 처하였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0년(1618년) 8월 24일 기사에는 허균의 마지막을 이렇게 기록한다. 그의 나이 50세 때의 일이다. 허균의 처형 소식이 전해지자 한때 정치적 동지였던 기자헌은 “예로부터 매를 치며 심문하지도 않고, 사형을 결정하는 최종 문서도 작성하지 않은 채 단지 진술 내용만을 가지고 사형에 처해진 죄인은 없었으니, 훗날 반드시 다른 논의가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의 사관은 기자헌의 이 말을 허균의 죽음에 이어 실록에 기록해 두었다. 이렇듯 당시에도 허균의 역모사건에 대해 많은 의문이 제기됐고, 현재까지도 그 진위에 대해 여러 의견이 존재한다. 그러나 실제 역모를 도모했는지 아니면 억울한 누명을 썼는지를 떠나, 허균의 의식 속에는 분명 당시의 사회질서 체계를 바꾸고자 했던 혁명의 뜻이 있었던 듯하다.#백성을 ‘항민’·‘원민’·‘호민’으로 구분 허균의 ‘호민론’(豪民論)은 “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오직 백성뿐이다(天下之所可畏者 唯民而已)”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 글에서 허균은 백성을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했다. 일상에 매여 순순히 윗사람이 시키는 것을 따르는 ‘항민’(恒民), 수탈에 고통받으며 윗사람을 탓하는 ‘원민’(怨民), 평소에는 본모습을 감추고 있다가 혹 시대적 변고가 일어나면 자신의 바람을 이루려고 일어나는 ‘호민’(豪民). “호민이 나라의 빈틈을 엿보며 일을 실행할 만한가를 살펴 밭두둑 위에서 팔을 치켜들어 한번 소리치면 ‘원민’이란 자들이 그 소리를 듣고 모여 서로 계획하지 않았는데도 함께 소리치고, ‘항민’이란 자들도 살길을 찾아 호미, 고무래, 창 자루 등을 들고 그들을 따라가 무도한 자들을 죽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중략)… 하늘이 임금을 세운 것은 백성을 잘 살게 하기 위함이지 한 사람이 위에서 방자하게 눈을 부릅뜨고서 끝도 없는 욕심을 채우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중략)… 견훤과 궁예 같은 사람이 나와 몽둥이를 휘두른다면 시름하고 원망하던 백성들이 그를 따르지 않는다고 어찌 보장할 수 있겠는가.”(호민론 중) 백성을 위하지 않는 임금은 하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니, 더이상 임금으로서 존재 가치가 없는 혁명의 대상에 불과하다. 허균은 그 혁명의 지도자인 호민의 출현을 갈구했다. 어쩌면 자신이 그러한 호민이 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시대가 품지 못한 주변의 인물들 허균의 아버지인 허엽(1517∼1580)은 대사성, 부제학 등을 지냈다. 큰형인 허성(1548∼1612)은 이조판서까지 지낸 인물이다. 양천 허씨 명문가에서 태어났고 자신 또한 재주가 뛰어났기에 당시 사회 질서에 적절히 순응했다면 높은 벼슬에 오르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것이고, 문장으로도 당대에 이름을 날렸을 것이다. 그러나 허균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고 또 그만큼 허균 자신도 많은 애정을 쏟았던 인물들은 당시 사회가 감당하기 어렵거나 제도적으로 품어 안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허균보다 18살 많았던 둘째 형 허봉은 허균에게는 형님이자 스승이었다. 22세 젊은 나이에 문과에 급제할 정도로 뛰어난 재주가 있었지만, 임금에게까지 바른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었던 강직함으로 인해 결국 귀양을 갔고 더이상 관직을 제수받지 못한 때 술로 세월을 보내다 38세로 생을 마감했다. 바로 위 누이인 허초희는 ‘왜 조선에 태어났는가’, ‘왜 여자로 태어났는가’, ‘왜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는가’라는 세 가지 불행 속에서 자신의 재주를 펼치지 못한 채 27세의 짧은 생을 마쳐야만 했다. 형과 누이를 차례로 보내며 허균은 능력을 펼칠 수 없는 사회에 절망했을 것이다. 또 뜻을 같이해 교유한 사람 중에는 서얼들이 많았다. 서얼 출신의 이달을 스승으로 모시기도 했고, 자신이 영달했을 시절에는 항상 불우했던 서얼 친구들을 후원하며 가까이 지냈다. 허균은 이들과 편견 없이 마음을 주고받으며 시대에 강한 문제제기를 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오랜 시간이 지났고 천하는 넓은데, 서얼 출신이라고 하여 그의 훌륭함을 버렸단 말은 듣지 못하였고, 어머니가 개가하였다고 하여 그 재주를 쓰지 않았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 어머니의 신분이 천하거나 개가한 사람의 자손은 모두 벼슬에 나아갈 수가 없다. …(중략)… 하늘이 내렸는데 사람이 버린다면 이는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하늘을 거스르고서, 하늘에 빌어 나라를 영원히 보존할 수 있었던 자는 있지 않다.”(유재론 중)#‘장생전’ 등 소설 속에서 이룬 이상사회 자신은 정통 양반으로 아무런 제약이 없었지만 신분에 대한 차별 문제를 적극적으로 거론하며 당시의 질서에 도전하고 있다. 허균의 시선은 여기에만 그치지 않았다. 비렁뱅이 천민의 신이한 이야기를 다룬 ‘장생전’(蔣生傳), 중인으로 도술에 능한 인물을 다룬 ‘장산인전’(張山人傳) 등 그가 ‘전’(傳)이라는 양식으로 형상화한 인물들은 모두 신분적으로 미천한 사람이었다. 허균이 꿈꾸던 이상사회는 이러한 사람들에 대한 차별 없는 사회가 아니었을까, 미루어 생각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앞서 언급했듯, 허균이 실제 역모를 도모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의 많은 글과 행적을 살펴보면 그가 혁명을 꿈꾸고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가 그렸던 혁명은 단순히 왕조의 성씨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함께할 동지들은 당시 사회에서 소외됐던 서얼 등이었다. 하지만 공고한 신분제 질서 속에서 꿈을 현실화하지는 못하고 소설이라는 가상 세계에서의 구현에 만족해야만 했다. 작자에 대한 다소의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허균의 삶의 궤적과 주장을 살펴볼 때에 ‘홍길동전’을 허균의 작품이라 하는 데는 무리가 없는 듯하다. 서얼이라는 이유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던 홍길동이 세력을 형성해 정의를 구현하고, 결국 병조판서에 올랐다가 무리를 이끌고 나라를 떠나 따로 율도국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허균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혁명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세상과 타협 거부한 채 ‘자유분방한 삶’ 26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뛰어난 재주로 중국의 문단에까지 이름을 널리 알렸으나, 그의 벼슬길은 순탄치 않았다. 행실이 경박하고 규범에 맞지 않는 처신을 한다고 번번이 파직을 당했다. 삼척부사에 부임했을 때에는 불과 13일 만에 파직되기도 하는 등 부침의 반복이 광해군 집권 초기까지 이어졌다. 이후에는 광해군의 신임을 받아 동부승지, 형조판서, 좌참찬 등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결국 아무런 변명도 소용없는 역모라는 죄명을 받고서 형장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허균은 자신의 호를 ‘교산’(蛟山)이라 했는데, 출생지인 강릉에 있는 뒷산의 이름을 딴 것이다. ‘교’(蛟)는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를 뜻한다. 소설 ‘홍길동전’에서의 홍길동은 아버지 홍 판서가 청룡의 꿈을 꾸고 낳았다고 묘사했는데, 결국 꿈을 이루고 용이 됐다고 하겠다. 허균은 홍길동처럼 용이 돼 하늘에 오르지 못하고 이무기로 남았지만, 세상과의 타협을 거부한 채 끝까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을 걸으며 자신의 삶을 살았다. 예의 가르침이 어찌 나를 구속하리오 禮敎寧拘放 인생의 부침을 그저 마음에 맡길 뿐 浮沈只任情 그대들은 그대들의 법도를 따르시게 君須用君法 나는 스스로 나의 삶을 이루겠노라 吾自達吾生. -‘파직 소식을 듣고서 짓다(聞罷官作)’ 이정원 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성소부부고(惺所覆藁)는 허균이 자신의 글 정리한 문집…총 64권 중 필사본 26권만 남아 문집은 일반적으로 저자 사후에 문인이나 후손들이 남겨진 글을 모아 간행한다. 그러나 허균의 문집은 허균이 생전에 직접 자신의 저작을 간추려 편집하고 문집의 이름까지 지어두었다. 43세인 1611년 귀양지에서 시(詩), 부(賦), 문(文), 설(說)의 4부로 나누어 64권으로 엮어 ‘부부고’(覆藁)라고 명명했다. 이 문집에 ‘호민론’ 등이 실려 있다. ‘성소’(惺所)는 허균의 호이고, ‘부부’(覆)는 장독 덮개라는 말이며, ‘고’(藁)는 원고이니, 성소부부고는 ‘허균이 지은 장독 덮개로나 쓰일 변변치 못한 글들’이라는 뜻이다. 장독을 덮는다는 것은 자신의 글에 대한 일종의 겸사이지만, 실상은 중국의 대문장가인 양웅에게 자신을 빗댄 것으로 볼 수 있다. ‘부부’란 말이 양웅이 지은 ‘태현경’(太玄經)을 지칭해 쓴 말이기 때문이다. 허균은 역모로 탄핵을 받은 50세에 앞날을 예측했는지, 자신의 편집 원고를 사위인 이사성에게 보내 보관하게 했다. 이후 역적으로 몰려 죽은 탓에 정식 간행은 하지 못한 채 필사본만이 남게 됐다. 편차와 수록 내용도 원래의 모습과 다소 달라진 채 26권이 전해진다.
  • 가명정보는 개인 동의 없이도 기업이 사용할 수 있다

    가명정보는 개인 동의 없이도 기업이 사용할 수 있다

    앞으로 개인을 식별할 수 없도록 처리한 가명정보에 대해서는 당사자의 동의가 없어도 기업이 활용할 수 있다. 가명정보를 고의로 개인정보를 식별할 수 있도록 하면 형사처벌이나 과징금이 내려진다. 정부는 이런 내용을 담은 ‘데이터 경제 활성화 규제혁신 방안’을 판교 스타트업캠퍼스에서 과학기술정보통신부·행정안전부 등 관계부처 합동으로 31일 발표했다. 내년까지 빅데이터 센터 100곳을 만들고 중소·벤처기업에 데이터를 구매하고 가공할 수 있는 바우처를 제공하는 등 1조원을 투자한다. 가장 큰 쟁점은 개인정보를 당사자의 동의가 없어도 기업이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정보를 식별할 수 없도록 처리하는 방법은 크게 가명정보와 익명정보로 나뉜다. 익명정보는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개인을 알아볼 수 없어서 기업이 활용해도 문제가 없다. 가명정보는 ‘홍길동(33세·남성)’이란 정보를 ‘임꺽정(30대)’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그 자체로는 개인을 식별할 수 없지만 추가 정보랑 결합하면 알아볼 여지도 있다. 앞으로는 가명정보를 당사자가 동의하지 않아도 기업이 활용할 수 있다. 기존에도 통계작성이나 학술연구에선 사용할 수 있었다. 이제는 기업이 시장조사를 하는 목적으로도 가명정보를 쓸 수 있다. 다만 해당 정보를 가지고 곧바로 영업을 하는 것은 제한된다. 2016년 6월 박근혜 정부에서 마련했던 ‘개인정보 비식별 처리 가이드라인’에도 이런 내용이 담긴 바 있다. 그땐 익명정보와 가명정보를 제대로 구분하지 않았다. 비식별 정보를 무분별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비판이 일자 정부는 이번에 가명·익명정보를 법으로 명확히 규정하겠다고 밝혔다. 하반기 내에 국회 통과를 목표로 개인정보보호법, 정보통신망법 등 관련 법을 개정할 계획이다. 여전히 우려는 있다. 이름을 지운 가명이라도 다른 정보가 주어지면 누구인지 특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는 식별이 안 돼도 앞으로 기술이 발전하면 누군지 알아볼 가능성도 있다. 정부는 일단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정보를 결합할 권한을 줘서 이런 우려가 생기지 않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앞으로 공공기관에서 전문기관까지 확대돼도 기록 등 관리 절차를 엄격히 하겠다는 게 정부 관계자의 설명이다. 누군가 고의로 가명정보를 식별할 수 있도록 하면 형사처벌과 과징금을 받는다. 고의로 하지 않았다면 형사처벌까지는 하지 않고 해당 정보를 즉시 삭제하는 등 안전조치를 취하겠다는 게 정부의 방침이다. 형사처벌의 수위나 과징금의 규모 등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이를 포함해 비식별 조치의 방법과 절차 등은 외부 전문가와 부처 협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정하겠다는 입장이다. 개인정보가 어떤 방식으로도 활용되길 원하지 않는 국민은 기업에 처리 중지를 요청할 수 있다. 정윤기 행안부 전자정부국장은 “현행법엔 자기정보처리중재 요청 권한이 있다”면서 “개인정보를 가명조치하는 것도 원하지 않으면 요구할 수 있는데 이 절차가 아직 상세하게 나와있지 않아 세부 규정 만들 때 (국민이) 쉽게 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오경진 기자 oh3@seoul.co.kr
  • 최태원 회장, 동거녀 명예훼손 재판 증인 출석… “악플 폐해 직접 호소”

    최태원 회장, 동거녀 명예훼손 재판 증인 출석… “악플 폐해 직접 호소”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14일 서울중앙지법 법정에 섰다. 동거인에 대해 악플을 단 네티즌을 고소한 당사자인 최 회장은 악플로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를 증언했다.최 회장은 이날 서울중앙지법 형사5단독 김현덕 판사의 심리로 열린 주부 김모(61·여)씨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김씨의 변호인인 강용석 변호사가 댓글 내용의 사실관계를 가려야 한다며 최 회장을 증인으로 신청했고, 재판부가 발송한 증인소환장에 최 회장이 응했다. 재벌 총수가 형사재판의 증인으로 서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다만 사생활과 관련된 내용인 데다 최 회장 측에서 증인보호신청을 해 증인신문은 모두 비공개로 진행됐다. 재판 기록상 최 회장의 이름도 ‘홍길동’이라는 가명으로 남겨졌다. 최 회장은 한 시간 남짓 이어진 증인신문을 통해 김씨의 댓글 내용은 모두 허위이며, 악성 댓글로 자신은 물론 가족들이 심한 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다고 호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 회장은 증인신문을 마친 뒤 법정을 나서며 “허위로 자꾸 댓글을 달거나 사실을 과장해서 유포하는 행위는 사람을 아프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사실을) 바로잡고 법정에 호소하기 위해 나왔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2016년 말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자신과 동거인, 혼외자녀를 향해 지속적으로 악성 댓글을 단 네티즌들을 경찰에 고소했다. 검찰은 김씨를 벌금 200만원에 약식기소했지만 법원은 직권으로 정식재판을 결정했다. 김씨는 지난해 9월에도 같은 혐의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과 사회봉사명령 160시간을 선고받았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조선 최대 필화사건 일으킨 소설 ‘설공찬전’ 쓴 채수의 정자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조선 최대 필화사건 일으킨 소설 ‘설공찬전’ 쓴 채수의 정자

    속리산에서 흘러내린 이안천이 내려다보이는 경북 상주의 기장리 언덕에는 쾌재정(快哉亭)이 있다. 조선 초기 문장가 나재(懶齋) 채수(蔡壽·1449~1515)가 벼슬길에서 물러난 뒤 부인 안동 권씨 고향에 정착해 지은 정자다. 상주와 점촌을 잇는 경북선 철도가 시내를 건너고 있어 급할 것 없이 달려가는 무궁화호 열차를 바라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채수라면 ‘설공찬전’(薛公瓚傳)이라는 소설을 써서 조선 최대의 필화 사건을 일으킨 인물이다. 쾌재정은 송나라 시인 소동파가 자주 찾았다는 중국 쉬저우(徐州)의 정자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채수와 쾌재정에 얽힌 이야기는 문장과 글씨에 두루 뛰어났던 남곤(1471∼1527)이 지은 나재 무덤 앞 신도비 비문에 보인다.‘병인년(1506년) 반정 때 공이 공신의 맹약에 참여해 관례에 따라 가정대부로 승진하고 인천군에 봉해졌다. 그런데 동료 벼슬아치들이 거의 다 세상을 떠나고 주변에 없는 것을 보고 탄식하여, 이내 가족을 데리고 남쪽으로 돌아가 아무런 욕심 없이 스스로 즐기며 살았다. 사는 집 남쪽에 뚝 끊긴 산봉우리가 흐르는 물가에 자리잡았는데, 그곳에 작은 정자를 지은 다음 편액을 쾌재(快哉)로 붙여 놓고 날마다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면서 다시금 세상의 조그만 일도 마음에 두지 않은 채 여유롭게 노닐며 천수를 마쳤다’이렇듯 나재는 중종반정에 가담해 공신의 반열에 올랐지만 곧바로 낙향했다. 야사에는 여기에 얽힌 일화가 전한다. 반정을 주도한 박원종은 “오늘 일은 덕망 높은 선비로 무게 있는 인물이 없어서는 안 될 터이므로 채수를 청해 오라”고 했다. 누군가 “동참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자 박원종은 “오지 않으면 목이라도 취해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채수의 사위 김감은 위협을 감지해 부인으로 하여금 장인을 만취토록 하여 대궐문 앞에 데려갔고, 나재는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거사에 이름을 올렸다. 나재는 쾌재정에서 글을 쓰곤 했다. ‘늙은 내 나이 예순일곱인데, 지난 일 생각하니 아득히 멀구나’로 시작하는 한시 ‘쾌재정’도 그렇게 태어났다. 나재가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긴 것도 쾌재정에서 지은 소설 ‘설공찬전’ 때문이다. 귀신이 주인공인 이 작품은 죽은 이의 혼령이 현실 세계에 나타나 저승 세계의 소식을 전한다는 이야기다.하지만 ‘설공찬전’은 한동안 제목만 남아 있는 소설이었다. 조정의 공론으로 ‘설공찬전’을 모두 거두어 불살랐기 때문이다. 1511년(중종 4년) 사헌부는 “‘설공찬전’은 화복(禍福)이 윤회(輪廻)한다는 논설로, 매우 요망한 것인데 안팎이 현혹되어 문자로 옮기거나 언어(諺語)로 번역하여 전파함으로써 민중을 미혹시킨다”며 채수를 탄핵했다. ‘언어’는 곧 한글이니 그만큼 인기가 높았다는 뜻이다. 사헌부는 ‘정도(正道)를 어지럽히고 인민을 선동한 율(律)’을 들어 채수를 교수(絞首)에 처해야 한다고 주청했다. 그런데 훗날 영의정을 지낸 만보당 김수동(1457~1512)의 변호가 흥미롭다. 그는 “형벌과 상은 중용을 지키도록 힘써야 한다”면서 “이 사람을 죽여야 한다면 ‘태평광기’나 ‘전등신화’를 지은 자들도 모조리 베어야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태평광기’는 송나라 태종의 명으로 정통 역사책에 실리지 않은 기록과 소설을 500권에 모은 중국 역대 설화집이다. ‘전등신화’는 명나라 구우의 소설로 조선에서도 필독서가 됐다. 매월당 김시습이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금오신화’를 쓴 것으로 알려진다. 결국 “죄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죽이는 것은 지나치다’는 중종의 뜻에 따라 채수는 파직에 그쳤다.‘설공찬전’이 정치적 탄압을 받은 결정적 이유는 다음과 같은 내용 때문일 것이다. 설공찬이 전하는 저승 소식의 일부다. ‘이승에서 비명에 죽었어도 임금에게 충성하여 간하다가 죽은 사람이면 저승에서도 좋은 벼슬을 하고, 비록 여기서 임금을 했더라도 주전충 같은 반역자는 다 지옥에 들어가 있었다.’ 주전충(852~912)은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잔당을 평정해 실력자로 떠오른 뒤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양나라를 세운 인물이다. 중종 임금부터가 가습이 뜨끔했을 것이다. ‘설공찬전’이 다시 햇빛을 본 과정은 이렇다. 국사편찬위원회는 1996년 이복규 서경대 교수에게 이문건(1494~1567)이 지은 ‘묵재일기’의 내용을 살피고, 뒷장에 적힌 한글 기록도 검토해 달라고 의뢰한다. 이 교수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일부가 그동안 사라진 줄 알았던 ‘설공찬전’, 그것도 한글본이었기 때문이다. “언어(諺語)로 번역하여 전파함으로써 민중을 미혹시킨다”는 사헌부의 탄핵 내용 그대로였다. ‘셜공찬이’라는 한글 제목 아래 3472자가 남아 있었다. 필사를 도중에 중단해 전체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이렇게 ‘설공찬전’은 허균의 ‘홍길동전’을 제치고 한글로 적힌 최초의 소설이 됐다. 쾌재정은 중부내륙고속도로 북상주 나들목에서 멀지 않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3번 국도를 타고 문경 방향으로 북상하다 이안교차로에서 왼쪽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을 수 없으니 ‘상주시 이안면 가장리 230-1’이라는 주소를 이용해 찾아가는 것을 권한다. 지금의 쾌재정은 18세기 중반 중건한 건물이다. 벌판 가운데 솟은 봉우리에 있으니 거칠 것 없는 시야를 자랑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무와 풀에 둘러싸여 주변 풍광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이안천 건너에서 바라봐도 지붕의 모습만 어렴픗하다. 채수의 무덤은 쾌재정 남쪽의 공검면 율곡리에 있다. 포털사이트 지도에서 ‘나재채수신도비’를 치면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율곡리 길가에는 최근 것으로 보이는 신도비도 있다. 옛 신도비가 풍우에 시달려 비문을 읽을 수 없게 되자 1996년 후손들이 다시 세웠다고 한다. ‘셜공찬이’의 발굴이 계기가 됐음을 짐작케 한다. 북쪽 야산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면 옛 신도비의 비각이 보인다. 비석은 당당한 모습이다. 상주에 남은 신도비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한다. 인상적인 것은 신도비의 받침돌이다. 대개 거북이 모양인데, 독특하게도 사자다. 커다란 비석을 등에 이고 있는 사자의 모습은 귀엽기만 하다. 조금 더 올라가면 무덤이다. 채수의 위패를 모신 임호서원은 무덤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 너머 동쪽에 있다. 역시 ‘상주시 합창읍 신흥리 377’이라는 주소로 찾아가는 것이 좋다. 서원은 1693년 함창 서쪽 10리 입암산 아래 검암서원으로 출발했다. 1871년 대원군이 훼철한 것을 1988년 지금 자리에 다시 세웠다. 간소한 데다 연륜도 짧은 만큼 서원 특유의 분위기를 느끼기는 어렵다. 사당에는 경현사(景賢祠)라는 편액이 붙었다. ‘설공찬전’의 배경은 전북 순창이다. 학계는 나재가 순창 설씨 족보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과 허구의 인물을 섞은 것으로 보고 있다. 설공찬의 증조할아버지로 나오는 설위는 대사성을 지낸 세종시대 실존 인물이다. 하지만 설공찬이라는 이름은 족보에서 찾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중종실록에는 채수에 대한 탄핵 과정에 검토관 황여헌의 “설공찬은 채수의 일가이니, 반드시 믿고 혹하여 지었을 것”이라는 발언이 실려 있다. 설공찬은 채수의 친척인 실존 인물이었고, 소설 또한 체험담에 근거했을 수 있다는 추정을 가능케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순창군은 순창 설씨 집성촌이 있는 금과면에 ‘설공찬문학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건봉사, ‘642칸 당우’와 영화·쇠락 함께… 만해, 소실된 ‘正史’ 재발간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건봉사, ‘642칸 당우’와 영화·쇠락 함께… 만해, 소실된 ‘正史’ 재발간

    고성 건봉사는 민통선을 지나지 않고 남쪽에서 접근하면 편안하다. 지난해 완전 개통된 서울·양양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동해 바다에 닿을 때쯤 삼척에서 속초를 잇는 동해고속도로로 갈아탄다. 그렇게 북쪽으로 달리다 고속도로 끝에서 동해안을 따라가는 7번 국도에 진입해 조금만 올라가면 고성 땅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운전하면서 딴생각을 하다 간성읍에서 진부령으로 가는 46번 국도로 접어들어야 하는 것을 잊고 화진포해수욕장까지 내쳐 달렸다. 차를 돌려 조금 내려오니 반갑게도 건봉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거진읍에서 절에 접근하는 길이다.산길로 접어든다 싶더니 바리케이드 너머 소총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검문을 하고 있었다. 주민등록증을 보여 주는 데 그치지 않고 휴대전화 번호까지 알려 주고 나서 통과할 수 있었는데 검문소는 하나가 더 있었고 절차도 반복됐다. 건봉사가 민간인 출입 통제에서 풀린 것은 1988년이다. 일대는 6·25전쟁의 격전지였고, 절 주변에서 특히 전투가 치열했다고 한다. 이번 ‘판문점 선언’에는 군사분계선(DMZ) 주변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건봉사 가는 길’도 그 혜택을 누렸으면 좋겠다.건봉사는 전쟁 이전 대웅전, 극락전, 관음전, 사성전, 보제루, 어실각, 수침실 등 642칸의 당우가 있는 강원 최대 절집이었다고 한다. 1920년대 사진을 보면 신흥사, 백담사, 낙산사를 말사로 거느렸던 시절 위세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수침실(水砧室)은 물레방앗간이다. 하지만 전쟁으로 모두 불탔다. 건봉사는 앞서 1878년(고종 15)에도 산불로 3183칸의 전각이 타 버렸다는 기록도 있다. 사라진 전각은 1879년 개운사·중흥사·봉은사·봉선사·용주사 등이 힘을 합쳐 중건했다고 한다. 지금 건봉사의 전각은 대부분 최근에 다시 지은 것이다. 강당인 봉서루에는 ‘금강산 건봉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건봉사는 금강산 줄기에 자리잡기는 했지만 금강산은 아니다. 그럼에도 금강산 유람에 나선 옛 사람들은 간성을 지나 건봉사에 이르면 누구나 금강산 초입에 들어선 것으로 생각했다. ‘홍길동전’을 지은 교산 허균(1569~1618)은 1603년(선조 36) 궁궐의 마구간을 관리하는 사복시정(司僕寺正)이라는 벼슬에서 파직되자 금강산 유람길에 오른다. 이때 건봉사 스님 방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긴 한시를 남겼는데 여기에도 ‘건봉사가 어드메냐 / 금강산 속에 있어 높고도 아스라하다’는 대목이 보인다.건봉사의 정사(正史)는 ‘건봉사와 그 말사의 사적(事蹟)’이라고 할 수 있다. 고종 시대 대화재로 각종 자료가 대거 사라짐에 따라 새로 수집한 역사를 바탕으로 만해 한용운(1879~1944)이 대표 집필해 1928년 발간한 것이다. 편년체로 절의 연혁을 정리하고 부속 암자, 재산, 유물, 진영, 명소 등의 순으로 기술했다. 만해는 당시 건봉사의 승려였다. 건봉사 사적은 절의 역사가 신라 법흥왕 7년(520)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적었다. 아도(阿道)가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는 것이다. 법흥왕 7년은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기 8년 전이고, 아도는 그 훨씬 이전 고구려에 불교를 전했다는 인물이니 절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역사 끌어올리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많은 절들이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 고승을 창건주로 내세워 역사를 윤색하는 것이 사실이다. 건봉사의 경우도 지리적 위치를 보면 삼국시대 당시 외래 문물을 받아들이는 중심 루트에서 벗어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도는 특정시대 특정인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아미타(阿彌陀)신앙, 곧 정토신앙을 전파하는 승려라면 누구나 아도이고 아도화상이다. 역사책에서 아도나 아도화상이라는 이름이 각각 다른 시대에 등장하는 이유다. 신라가 함경도 일부까지 점령하고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를 세운 것은 진흥왕 시대다. 법흥왕 시대 건봉사 일대는 신라보다 고구려의 영향력이 더 컸을 수도 있다. 신라 중심으로 보면 불교를 공인하기 이전 법흥왕 시대 건봉사의 창건은 조금 어색하다. 하지만 창건을 ‘신라 법흥왕 7년’이 아니라 같은 해인 ‘고구려 안장왕 2년’이라고 보면 논리적 모순은 없다. 건봉사는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가 시작된 절이다. 염불계(念佛契)라고도 하는 염불만일회는 1만일 동안 극락왕생을 위해 아미타 부처의 이름을 마음을 다해 부르는 모임이다. 758년(신라 경덕왕 17) 발징이 절을 중건하면서 염불만일회를 베풀었는데, 신도 1820명이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건봉사에서는 19~20세기에도 세 차례 염불만일회가 열렸다. 조선시대 건봉사는 1464년 세조가 행차해 자신의 원당(願堂)으로 삼으면서 척불(斥佛)시대에도 왕실의 보호를 받는 사찰이 되었다. 금강산을 유람하는 문인과 관료들이라면 거의 예외 없이 건봉사에서 하룻밤을 묵어 갔던 것도 감당할 만한 경제력이 절에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는 서산대사의 명을 받은 사명대사가 이끄는 6000명 남짓한 의승군이 건봉사를 훈련의 근거지로 삼기도 했다. 건봉사는 만해의 존재에서 보듯 일제강점기 교육운동과 항일운동에 매우 활발했다. 깊은 산골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절을 찾는 당대 문인·지식인들과 교유하면서 시대 변화에 눈뜰 수 있었고, 더불어 종교의 역할도 깊이 있게 고민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1909년 당시 건봉사의 말사였던 백담사에서 탈고해 1913년 간행한 ‘조선불교유신론’은 물론 만해 개인의 저서지만, 진취적인 건봉사의 분위기가 응축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불교가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진로를 개척해 본연의 자세로 복귀해야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현실 세계에서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논지다. 무엇보다 염불당을 폐지하고 염불을 개혁해야 한다는 ‘유신론’의 한 대목은 건봉사에 몸담고 있는 승려의 주장으로는 그야말로 파격적이다. 1908년 회향한 염불만일회를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그 문제점을 파악한 결과로 보기도 한다. 만해는 “대낮이나 맑은 밤에 모여 앉아 찢어진 북을 치고 굳은 쇳조각을 두들겨 가며 의미 없는 소리도 대답도 없는 이름을 졸음 오는 속에서 부르고 있으니, 이는 과연 무슨 짓일까”라면서 ‘아미타불’을 부르며 극락왕생을 비는 염불만인회를 정조준했다. 그러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중생들의 거짓 염불을 폐지하고 참다운 염불을 닦게 하겠다는 취지”라고 적었다. 이런 설명을 듣고 절을 둘러보면 삼국시대 고찰의 분위기를 느끼기는 쉽지 않아도 최근의 석물(石物)도 무의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절 마당에 들어서 왼쪽에 보이는 ‘만해당 대선사시비’도 그렇다. 그 옆 ‘사명대사기적비’도 지난해 복원한 것인데, 파손된 옛 비석 조각의 일부가 남아 있다. 사명대사가 왜적에게서 되찾아온 양산 통도사의 진신사리 일부를 건봉사에 안치했다는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건봉사의 성속(聖俗)을 가르는 경계는 불이문(不二門)이다.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고, 결국 삶과 죽음도 다르지 않다는 뜻이라고 한다. 불이문은 6·25 와중에 파괴되지 않은 유일한 건축물이다. 편액의 글씨는 근대 명필 해강 김규진(1868~1933)이 썼다. 불이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시냇물을 건너면 대웅전이고, 곧바로 올라가면 적멸보궁이다. 대웅전 가는 길에 놓인 다리가 능파교다. 조선 숙종 시대 지은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로 2002년 보물로 지정됐다. 절 진입로의 홍예다리도 차를 타고 가면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과거의 흔적이다.우리나라에만 있다는 적멸보궁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일종의 무덤과 그 무덤에 배례할 수 있도록 지은 전각이다. 사명대사기적비에 언급된 진신사리를 모시고자 조성했을 것이다. 지금 불이문에서 적멸보궁으로 오르는 왼쪽의 넓은 터전에는 아직 복구하지 못한 옛 전각의 주춧돌만 가득하다. 이 또한 건봉사의 역사를 보여 준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회원 4540명 7등급 나눠 관리…‘최상위’ 운영진엔 전문가 포진

    회원 4540명 7등급 나눠 관리…‘최상위’ 운영진엔 전문가 포진

    “사회적 지위·직업 안 본다”면서 변호사·회계사·IT전문가 중용 파주에 공동체 두루미타운 계획‘더불어민주당원 댓글 조작 사건’을 주도한 ‘드루킹’ 김동원(49·구속)씨가 운영하는 ‘경제적 공진화 모임’(경공모)의 실체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드루킹은 과거 경공모 회원을 모집하는 글에서 “회원의 사회적 지위, 직업 수준, 경제력 유무 따위를 일절 보지 않겠다”고 썼지만, 핵심 운영진에는 전문가들이 대거 포진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운영진은 2009년 경공모 출범 당시부터 드루킹과 함께 현대판 ‘율도국’(홍길동전에 나오는 이상향)인 ‘두루미타운’ 실행 계획을 짰던 것으로 파악됐다. 25일 이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과 경공모 회원들의 말을 종합하면 경공모는 4540명(중복 제외)의 회원을 ‘노비, 달, 열린지구, 숨은지구, 태양, 은하, 우주’ 등 7개 등급으로 나눠 관리했다. 전문가들로 구성된 경공모 운영진은 최상위 등급인 ‘우주’ 회원에 소속돼 드루킹과 함께 주요 의사 결정을 해 왔다. 또 민간 기업처럼 운영, 교육, 인사, 법무, 기획, IT 등으로 조직을 체계적으로 나눠 운영했다. 연간 운영비만 11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드루킹이 김경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일본 오사카 총영사로 추천한 도모(61·필명 아보카) 변호사와 함께 드루킹의 변호를 맡았다가 사임한 윤모(46·필명 삶의축제) 변호사, 장모(40·필명 비파) 변호사는 모두 ‘법무(부) 스태프’로 활동했다. 경공모가 기존 자동화 프로그램인 ‘매크로’보다 성능이 뛰어난 댓글 조작 서버 ‘킹크랩’을 자체 구축했다는 것은 회원 중에 IT 기술자가 적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실제 드루킹이 운영한 주식 온라인 카페 ‘주주인’(jujuin)의 서버 프로그래머(필명 초맘)를 비롯해 최소 5명의 IT 전문가가 운영진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날 댓글 조작의 근거지인 경기 파주의 느릅나무출판사의 담당 회계사도 경공모 회원으로 밝혀지면서 ‘셀프 회계’ 논란에 휩싸인 가운데, 최상위 등급 회원 중에 현직 강력계 경찰관도 포함돼 있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경찰청도 지난 20일 서울경찰청이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경공모 등 3개 카페 회원 명부 중에 경찰관이 포함됐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실정법 위반 여부를 따져 본다는 방침이다. 경찰관이 경공모에서 ‘선플’ 활동을 했다면 공무원법 위반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 드루킹은 이들 운영진과 함께 경기 파주에 공동체(두루미타운)를 세우려 했던 사실도 확인됐다. 2020~2021년 사이 통일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던 그는 남북 통일의 수도로 파주 운정이 가장 적합하다고 주장해 왔다. 두루미타운이라고 이름 지은 것도 운정 지역에 재두루미가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인 ‘드루킹의 자료창고’에서 “이 공동체는 회원들의 주거 문제, 취직을 포함한 사회적 활동, 육아, 교육 등 인생의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칠 것”이라면서 “그 누구도 시도한 적 없는 경제적 혁명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 [김현식 PB의 생활 속 재테크] 달러 약세 기조… ELS 수익 나도 더 많은 환차손 볼 수도

    최근 다시 주가연계증권(ELS) 가입이 사상 최대치를 갱신하고 있다. 특히 원화 ELS 외에 달러 ELS도 폭발적으로 가입액이 증가하고 있다. 예탁결제원에 따르면 달러 ELS 가입 금액은 지난 3월 한 달 동안에만 7억 달러(약 7500억원)가 넘었다. 당분간 증가세는 멈추지 않을 듯 싶다. 지난해 국내외 주식 급등장과는 사뭇 다르게 최근 코스피와 코스닥은 모두 박스권 흐름을 보이고 있다. 미국 금리인상 속도의 불확실성과 미·중 또는 미·유럽 무역전쟁의 불안감 때문이다. 지금은 변동성이 큰 주식형 펀드보다는 5~7% 내외의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ELS 상품 가입이 어쩌면 자연스러운 선택일 수 있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바로 원·달러 환율 변동 위험이다. 예를 들어 홍길동이라는 고객은 연 7%짜리 달러 ELS에 가입하고 6개월 후에 조기 상환되어 기간수익률 3%를 얻었다. 하지만 원화 환산 기준으로 최종 수익률을 따져 보니 2% 내외의 손실을 보고 말았다. 해당 기간 동안 원·달러 환율이 5.5% 하락했기 때문이다. 가입 당시엔 모처럼 7~8%의 높은 수익률에 끌려 기분 좋았었는데 말이다. 참으로 허탈해지는 순간이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가입 시점과 조기 상환 시점 또는 만기 상환 시점의 환율 변동 리스크를 고려하지 않은 탓이다. 지난해 11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을 기점으로 미 달러는 2011년 남유럽 재정위기 이후 6년여간 지속된 강세를 마감하고 약세로 빠르게 전환됐다. 역사적으로 과거 수십년간 공화당 집권기에는 거의 예외 없이 달러의 약세 기조가 나타났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난해나 올해 초까지만 해도 많은 금융기관들이 임박한 미국 금리인상을 언급하며 달러 강세를 주장했고, 이로 인해 환율은 오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의 재정수지, 경상수지 및 트럼프의 대외 경제정책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달러의 약세 기조는 금리인상 추세에도 불구하고 상당 기간 지속될 것 같다. 어쩌면 역사를 반복하듯 달러의 약세 기조는 향후 10년간 지속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미 여유자금으로 달러를 보유하고 있는 고객이 아니라면, 단순히 수익률만 보고 달러 ELS에 가입하는 것은 앞의 사례처럼 ELS 수익률보다 더 큰 환차손으로 인해 결국 투자 손실을 입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을 잊지 말자. 투자자 본인이 ELS 조기 상환 무렵 달러의 원화대비 강세를 확신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좀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 KB국민은행 WM스타자문단 PB팀장
  • [배우고 싶은 사람 모여라] 홍길동전에 푹 빠져볼까

    [배우고 싶은 사람 모여라] 홍길동전에 푹 빠져볼까

    30일까지 학교 추천 뒤 신청서울 중구는 다음달 7~8일 강원 강릉 일대에서 지역 중·고등학생, 학부모, 교사와 함께하는 독서캠프를 연다고 22일 밝혔다. 주제 도서는 류수열 작가의 ‘홍길동전: 춤추는 소매, 바람을 따라 휘날리니’라는 고전 작품이다. 캠프 첫날인 7일 오전 8시 구청 앞 광장에 모여 간단한 일정 안내 및 안전 교육을 받은 후 강릉 녹색도시체험센터로 이동한다. 이어 오후 2시 30분에 기조강연이 열린다. 오후 늦은 시간에는 독서 지도 담당교사가 이끄는 모둠별 이동 토론이 진행된다. 참가자들이 모둠을 돌며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소통하는 방식이다. 8일에는 홍길동전 저자인 허균과 그의 누이 허난설헌의 생가를 방문할 예정이다. 참가 희망자는 오는 30일까지 학교 추천을 받아 신청하면 된다. 선착순 80명을 모집한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상상(想像)의 힘…서울 애니메이션 센터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상상(想像)의 힘…서울 애니메이션 센터

    “한번 만난 것은 잊지 못하는 거다, 단지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뿐이지!”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1941~ )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 불명’(2001)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작품으로 순수 영화 수입으로만 한화 약 3800억 원 이상을 벌어 들였다. 애니메이션이 거대 산업이 되었다. 이후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끄는 지브리 스튜디오는 ‘고양이의 보은’(2002),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 ‘벼랑 위의 포뇨’(2008), ‘바람이 분다’(2013) 등의 작품을 꾸준히 내어 놓으면서 지금도 건재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인 신동헌 감독의 ‘홍길동’(1967)이 관객 10만 명의 흥행을 기록한 이후, 꾸준히 애니메이션 작품들은 이어져 오고 있다. 최근에는 ‘뽀롱뽀롱 뽀로로’(2003), ‘라바’(2011), ‘터닝메카드’(2015) 등 어린이, 유아 대상 애니메이션들이 새롭게 등장하여 전 세계적으로도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의 힘을 단단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라인 프렌즈’(2011), ‘카카오 프렌즈’(2012)와 같은 캐릭터 애니메이션 등도 등장하여 모바일을 탄생 배경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어린 시절 한 번 만난 애니메이션을 기억하기 위한 공간,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로 가 보자. 서울 중구 예장동, 돈가스 집 즐비한 남산 자락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만날 수 있는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는 현재 서울시 산하 기관인 SBA 서울산업진흥원이 관리하고 있다. 이곳은 원래 1999년에 한국 만화 및 애니메이션 산업 진흥과 육성 등을 목적으로 개장한 곳으로 SICAF(서울국제만화에니메이션 페스티벌)을 주관하는 공간이기도 하여 현재도 만화애니메이션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익숙한 장소임은 분명하다. 여기에 더해 지금 서울애니메이션 센터가 들어서 있는 장소는 역사적으로도 사연 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이 바로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본이 한국통감부를 제일 처음 설치한 장소로 1926년까지 조선총독부가 있던 자리였다. 이후 1957년부터 1976년까지 KBS 사옥으로 방송을 송출하던 곳이었으며, 이후 1986년 이후부터는 국가안전기획부의 어두운 역사까지 담고 있던 곳이기도 하였으니 땅이 지닌 지세(地勢)는 만만치는 않았던 듯 하다. 현재 서울애니메이션 센터에서는 내부 복도를 갤러리로 하여 각종 애니메이션 및 만화 등을 주제별로, 시기별로 다채롭게 전시하는 기획 전시관을 비롯하여 국내 최초의 애니메이션 상영 극장,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직접 체험하고 느껴볼 수 있는 VR 가상현실 플레이존, 코스프레 스튜디오, 인형 만들기 체험 공간 등이 있다. 특히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에는 국내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만화의 집’이 있다. 이곳에서는 국내 출판되고 있는 대부분의 만화책들과 만화 관련 서적, 유관 기관 발행자료 등의 도서가 구비되어 있어 만화를 좋아하는 관람객들에게는 훌륭한 만화 독서 체험 공간도 제공하고 있다.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 만화에 관심이 있다면,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어린 자녀가 있다면. 2. 누구와 함께? - 어린 자녀를 둔 가족 나들이,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3. 가는 방법은? - 서울특별시 중구 소파로 126(예장동)/ 4호선 명동역 1번출구로 나와 한국전력 중부지점의 좌측 언덕길 (소월길)을 이용하여 150여 미터 정도 올라가면 된다. - 매주 화요일~일요일 09:00~18:00(매주 월요일, 공휴일 휴관) 4. 감탄하는 점은? - 만화의 집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알려진 이름에 비하여 관람객들은 많지 않다. 6. 꼭 봐야할 장소는? - 만화의 집, 코스프레 스튜디오 7. 관람 예상 소요시간은? - 만화를 좋아한다면 하루 종일도 가능하다. 8. 홈페이지 주소는? - http://www.ani.seoul.kr/index.sba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남산 서울타워, 남산도서관, 주한독일문화원, 남산과학관 등이 있다. 10. 총평 및 당부사항 - 어른들의 눈이 아니라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아이들의 눈높이로 바라본다면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는 한 번은 가봄직한 곳이다. 만화의 집은 적극 추천!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전략적 요충지 강릉에서… ‘김씨 왕국’ 원대한 꿈 품었을까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전략적 요충지 강릉에서… ‘김씨 왕국’ 원대한 꿈 품었을까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인천공항에서 서울과 평창을 거쳐 강릉을 잇는 경강선 고속철도가 개통됐다. 대관령국도에 의존하던 강릉과 영서(嶺西)의 교통은 앞서 1975년 왕복 2차로의 영동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새로운 차원에 접어들었다. 이후 대관령고개를 넘는 대신 여러 개의 터널로 이은 4차로 확장공사가 2001년 마무리되면서 영동고속도로는 훨씬 편안해졌다.이제 서울역에서 KTX 열차에 올라 1시간 40분이면 강릉이다. 하지만 지하터널로 백두대간을 지나는 경강선을 타면 결정적인 여행의 재미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대관령 고개 너머에 펼쳐진 강릉시내와 동해바다의 장관이 그것이다. 대관령에서 강릉을 바라보면 산과 바다가 제법 멀리 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영동지방에서는 드물게 토지는 넓고 비옥하다. 강릉 도심의 서쪽은 태백산맥의 준령이 가로막고 북쪽은 야트막한 산이 동서로 길게 이어져 겨울바람을 차단한다. 그 남쪽으로는 남대천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조선시대 강릉도호부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길지(吉地)다. 그러니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발굴조사에서는 심곡리와 홍제동, 옥계면 현내리와 주수리 등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이 출토됐다. 초당동을 비롯한 신석기시대 유적은 헤아리기 어렵다.강릉은 예(濊)의 옛 땅이었다. 이때부터 하슬라((河瑟羅)라는 이름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후 고구려와 신라가 이곳에서 빈번히 맞부딪친다. 고구려에는 남쪽에 세력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이었고, 신라에도 북방 진출을 위한 전초기지일 수밖에 없었다. 하슬라가 신라의 영역에 완전히 편입된 것은 진흥왕(재위 540~576) 시대라고 한다. 이후 하서소경(河西小京)과 명주(溟州)로 잇따라 이름과 지위가 바뀐다. 하서는 하슬라의 한자식 표기다. 고려시대에는 1263년(원종 4년) 강릉도, 1308년(충렬왕 34)에는 강릉부, 1389년(공양왕 1) 강릉대도호부로 변화를 겪는다. 오늘날에도 흔히 쓰이는 임영(臨瀛)은 공양왕이 붙인 강릉의 별호(別號)다. 대도호부 체제는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강릉은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세계적 해변 휴양도시로 완전히 거듭나고 있다. 강릉은 태백산맥과 동해바다, 경포호만으로도 아름다움의 극치다. 여기에 켜켜이 쌓인 역사와 그 역사가 남겨 놓은 다양한 전통문화, 이 도시의 새롭고도 특별한 경쟁력이라고 할 수 있는 ‘커피 문화’는 여행자에게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오늘은 강릉이 가진 흥미로운 역사 하나를 소개하려 한다. 주인공은 김유정과 김주원 부자(父子)다. 태종무열왕의 후손이라고 한다. 모두 생몰 연대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통일신라가 하대로 접어드는 8세기 중·후반을 살았다. 김유정이라면 낯설어도 김무월랑과 연화부인에 얽힌 설화라면 익숙한 분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 ‘남대천 월화정 설화’를 가장 자세히 적어 놓은 글은 ‘홍길동전’을 지은 강릉 출신 고산 허균의 ‘별연사고적기’(鼈淵寺古迹記)라고 한다. 김무월랑은 강릉에 머무는 동안 연화부인과 사귀었다. 그런데 무월랑은 경주로 돌아간 뒤 소식이 없었다. 연화부인은 편지를 써서 연못에 던졌는데 잉어가 물고 갔다고 한다. 어느 날 경주의 무월랑 집에서는 잉어를 시장에서 사 왔는데 배 속에 연화부인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두 사람은 다시 만나 결혼하게 됐다는 이야기다. ‘고려사’ 악지(樂誌)에 나오는 ‘명주가’(溟州歌)의 배경설화이기도 하다. 강릉 남대천 남쪽의 바위 언덕 위에는 월화정(月花亭)이 있다. 무월랑과 연화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이름 지은 정자다. 1933년 강릉대도호부의 객사인 임영관의 부재를 가져다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의 월화정은 1936년 대홍수 때 남대천이 범람해 휩쓸려 간 것을 2003년 복원한 것이다. 연화부인의 집이 이 주변에 있었다고 한다. 연화정은 남대천을 사이에 두고 강릉중앙시장과 마주 보고 있다. 중앙시장은 이제 강릉을 찾는 관광객이라면 한 번쯤 들러야 하는 명소가 됐다. 남대천을 가로지르는 옛 동해북부선 다리는 최근 인도교로, 철로를 걷어낸 시장 골목은 ‘월화거리’로 새 단장했다. 김유정과 연화부인의 혼인은 중앙귀족과 상당한 세력을 가진 지방호족의 결합을 의미한다. 두 사람의 아들이 강릉 김씨의 시조인 김주원이다. ‘삼국사기’를 비롯해 통일신라를 다룬 각종 사서(史書)에는 그의 이름이 예외 없이 등장한다. 선덕왕이 785년 후사(後嗣) 없이 죽자 군신(群臣)은 김주원을 왕으로 추대했다. 그런데 김주원이 때마침 홍수로 알천(閼川)이 범람해 건너지 못하게 되자, 대신들이 ‘이는 하늘의 뜻’이라며 상대등 김경신을 추대했으니 곧 원성왕이다. 왕위쟁탈전에서 패한 김주원은 명주로 낙향했는데, 원성왕은 786년 그를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책봉했다. 식읍(食邑)은 강릉은 물론 오늘날의 통천·양양·삼척·울진·평해에 이르렀다고 한다.강릉 성산면 보광리 대관령 중턱에는 명주군왕 김주원의 무덤이 있다. 다만 당초의 무덤인지는 확실치 않은 것으로 전한다. 지금의 무덤은 조선 명종 때 강릉 부사와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후손 김첨경이 복원한 것이다. 이름처럼 왕릉을 방불케 한다. 군왕이라는 호칭은 좀 낯설다. 원성왕은 당나라로부터 선덕왕의 ‘검교태위 계림주자사 영해군사 신라왕’(檢校太尉 鷄林州刺史 寧海軍使 新羅王)의 작위를 물려받기도 했던 인물이다. 이를 두고 비정상적으로 왕위에 오른 원성왕이 스스로 황제국의 제후라는 것을 내보여 대외적 입지를 강화하면서 국내적으로는 특정 지역 세력을 군왕에 봉하는 일종의 봉작제(封爵制)로 황제적 지위를 행사하려 했다는 학계의 시각도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김종기는 김주원의 아들인데 작위를 물려받아 왕이 됐다. 김정여는 김종기의 아들인데 처음 조정에 벼슬해 상대등에 이르렀고, 명원공에 책봉됐다. 김양은 정여의 아들인데 김명의 난(亂) 때 신문왕을 도와 사직을 안정시켰고 명원군왕에 추봉됐다’는 대목이 보인다. 김주원 말고도 아들 김종기와 증손 김양이 군왕에 오른 것이다. 김주원 집안이 신라왕의 책봉을 받는 군왕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독립적인 국가를 추구했다는 연구도 있다. 김주원은 당나라의 수도를 모방해 장안(長安)이라는 이름의 수도를 정했는데, 오늘날 남대천 북쪽의 장안동이 그 흔적이라는 것이다. 당나라의 장안은 고유명사이면서 동시에 천자(天子)의 국도(國都)를 통칭하는 일반명사라고 한다. 사실이라면 김주원의 꿈은 원성왕의 그것보다도 컸다. 명주군왕묘는 강릉시가 제작한 관광지도에도 소개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으면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다. 무덤 입구의 숭의재(崇義齋)는 김주원을 기리는 사당이다. 정문에는 삼왕문(三王門)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세 사람의 군왕, 곧 김주원, 김종기, 김양을 기념하는 의미가 있겠다. 무덤 일대를 돌아본 전체적 인상은 이렇다. 강릉 김씨 종중의 기념물이라는 시각을 덜어내고 객관적 역사를 부각시키면 훨씬 더 진정성 있는 문화유산이 되지 않을까 싶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홍길동전 등 ‘고전의 향기’, 평창 외신 기자 사로잡다

    홍길동전 등 ‘고전의 향기’, 평창 외신 기자 사로잡다

    21개 언어 번역서 전시·대여 한강·공지영 등 소설도 관심 전 세계 언론인 6000여명이 평창동계올림픽을 취재하러 강원도로 모인 가운데, 강릉 미디어촌에 전시·대여 중인 한국문학 번역서가 외신 기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홍길동전이나 구운몽 같은 고전을 비롯해 해외 유명 상을 받은 소설이 인기다.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학번역원은 강릉 미디어촌 내에 한국문학 홍보관을 마련하고, 21개 언어로 번역된 한국 작품을 미디어촌 인근 식당에 이번 달 25일까지 전시·대여한다고 8일 밝혔다. 이번 행사는 ‘국경을 넘어 하나 된 문학’을 주제로 지난달 15일부터 시작했다. 160종 4000권의 한국문학 작품과 132종의 현대·고전문학 전자책 대여 서비스를 제공한다. 외국 언론인들이 가장 큰 관심을 보인 책은 허균의 ‘홍길동전’이다. 또 구운몽과 한국고전시 선집 등도 대출 빈도가 높다. 김혜영 한국문학번역원 수석 사서는 “홍길동전 표지가 다른 책에 비해 눈에 띄는 데다가, ‘한국 고전’이라는 사실에 외국 기자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 시 선집은 소설과 달리 흐름이 끊기더라도 막간에 볼 수 있어 많이 빌려간다”고 했다. 소설집 가운데에는 2016년 맨부커상을 받은 한강의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편혜영의 ‘홀’, 배수아의 ‘올빼미의 없음’ 등이 인기다. 시집류는 김혜순 시인의 ‘돼지라서 괜찮아’와 도종환 문체부 장관의 ‘흔들리며 피는 꽃’ 등을 많이 찾는다. 홍길동전을 비롯한 인기 서적은 20권씩 비치해 뒀지만, 모두 대여 중이다. 외신 기자들이 관심을 보이며 관련 기사도 나온다. 뉴욕타임스 기자 앤드루 케는 지난 2일 ‘스포츠 기자의 평창에 대한 첫인상’이라는 제목으로 편 작가의 작품을 대여했던 경험을 보도하기도 했다. 한국문학번역원은 오는 22일부터 나흘 동안 한국문학 번역 작품을 외신 기자들에게 선물하는 이벤트를 벌인다. 22일 한국문학 북리뷰를 남긴 기자 20명을 추첨해 선물도 증정한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근로시간 단축 한달] “지금부터 저는 헬스장에 있는 걸로 해주세요”

    [근로시간 단축 한달] “지금부터 저는 헬스장에 있는 걸로 해주세요”

    사내 시스템에 헬스장 입력 뒤 잔업인력충원 없이 시간 줄어 과부하도부작용도 있다. 일을 하면서도 일을 한다고 얘기하지도, 인정받지도 못하는 이른바 ‘홍길동 근무’다. 삼성전자의 연구직 직원인 A선임은 30일 서울신문과 통화를 마치면서 “저는 이제부터 ‘헬스장’ 갑니다”라며 전화를 끊었다. 실제로 헬스장을 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헬스장에 간 것처럼’ 하고 근무를 이어 가겠다는 얘기였다. 주당 근무는 52시간을 넘길 수 없고 일은 끝나지 않다 보니 회사 근태관리 시스템에 ‘헬스장 이용’이라고 입력한 뒤 일을 계속 하는 것이다. C선임은 “헬스장 이용이나 담배 피우는 시간 등은 정식 근로시간에서 제외되는 만큼 그 시간만큼 일을 마무리 지을 시간을 버는 셈”이라면서 “평소 10시간 걸려 하던 일을 하루아침에 빨리 끝내기는 어렵다 보니 이런 편법이 나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특히 한정된 시간에 개발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연구개발(R&D) 등 관련 직군에서 이런 ‘서비스 잔업’이 많다는 설명이다. 이마트에서 점포 발주 업무를 담당하는 B과장은 “재고 관리는 그때그때 탄력적으로 대응해야 하는데 본사 업무용 PC의 사용시간이 제한돼 있어 난감할 때가 많다”면서 “쉬는 날이나 퇴근길에 급히 처리해야 할 사안이 있으면 집 근처 이마트로 가서 검품장 공용 PC로 몰래 처리한다”고 털어놨다. 정해진 시간에 일을 집중적으로 해야 하다 보니 ‘과부하’를 하소연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15년 경력의 이마트 매장 영업직 사원 이모(50·여)씨는 “점포 근무자 대부분이 고령의 여성 근로자인데 추가 인력 충원 없이 놀리는 시간을 줄여 똑같은 일을 하다 보니 체력에 무리가 간다”고 말했다. 당장은 괜찮지만 장기적으로는 업무 효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전문가들도 근로시간 단축에는 동의하면서도 각론에 있어서는 다른 조언을 내놨다. 양준호 인천대 경제학 교수는 “근로시간 단축이 선순환 구조로 정착되려면 실질임금 상승과 고용량 증가라는 전제조건이 충족돼야 한다”면서 “그러지 않고 근로시간만 줄이게 되면 사측의 비용 절감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석호 경남대 경제금융학 교수는 “근로자가 100시간 덜 일하면 그만큼 몇 명을 더 뽑는다는 식으로 근로시간 단축과 고용 증가가 산술적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라면서 “오히려 최저임금을 올려 근로시간을 줄이고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핵심 전제조건”이라고 말했다. 노동 형태의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문도 나왔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업무 특성을 무시한 채 일괄적으로 출퇴근 시간을 강제하면 비공식적인 잔업 등 또 다른 부작용을 야기할 수 있다”면서 “생산직이나 현장 근로자는 분 단위로 명확히 계산해 초과 근무를 제한하고 제조업이나 사무직은 연차 사용을 자유롭게 하는 등 연간 단위로 노동시간을 유연하게 단축할 필요도 있다”고 제안했다.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윤균상, 2017 MBC 연기대상 ‘역적’ 8관왕에 “축하하고 사랑합니다”

    윤균상, 2017 MBC 연기대상 ‘역적’ 8관왕에 “축하하고 사랑합니다”

    배우 윤균상이 ‘역적’ 팀에게 축하를 보냈다.윤균상은 31일 새벽 “역적. 많이 보고싶고 그립습니다. 너무 축하하고 사랑합니다 -홍길동”이라는 글과 함께 ‘역적’ 촬영 현장에서 찍은 사진을 게재했다. 윤균은 눈을 지그시 감고 미소를 짓고 있다. 앞서 30일 진행된 ‘2017 MBC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역적:백성을 훔친 도적’은 8개 부문을 휩쓸었다. 대상은 주인공 홍길동(윤균상 분)의 아버지 아모개 역으로 열연한 김상중이 차지했으며 ‘역적’은 ‘올해의 드라마’ 상을 받았고 월화극 부문 ‘여자 최우수 연기상’(이하늬), ‘여자 우수연기상’(채수빈), ‘여자 황금연기상’(서이숙), ‘올해의 작가상’(황진영), ‘아역상’(이로운), ‘신인상’(김성현)까지 총 8개 부문에서 수상을 했다. 극의 주인공 홍길동 역을 맡은 윤균상은 이날 시상식에 불참했으며 아무런 상도 못 받았다. 대상 수상자 김상중을 비롯해 ‘역적’으로 상을 받은 수상자들은 윤균상에 대한 언급조차 없어 의아함을 자아냈다. 윤균상은 현재 SBS 드라마 ‘의문의 일승’에 출연 중이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2017 MBC 연기대상 ‘역적’ 대상부터 신인상까지 8관왕..윤균상은 실종?

    2017 MBC 연기대상 ‘역적’ 대상부터 신인상까지 8관왕..윤균상은 실종?

    MBC 연기대상에서 ‘역적’의 주인공 윤균상이 무관에 돌아가 의아함을 낳고 있다.30일 진행된 ‘2017 MBC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역적:백성을 훔친 도적’(이하 ‘역적’)이 8개 부문을 휩쓸며 올 한 해 MBC 드라마 가운데 시청자들로부터 최고의 호응을 받았다. 최고의 영예인 대상은 주인공 홍길동(윤균상 분)의 아버지 아모개 역으로 열연한 김상중이 차지했으며 ‘역적’은 ‘올해의 드라마’ 상을 받았고 월화극 부문 ‘여자 최우수 연기상’(이하늬), ‘여자 우수연기상’(채수빈), ‘여자 황금연기상’(서이숙), ‘올해의 작가상’(황진영), ‘아역상’(이로운), ‘신인상’(김성현)까지 총 8개 부문에서 수상을 했다. 극의 주인공 홍길동 역을 맡은 윤균상은 이날 시상식에 불참했으며 아무런 상도 못 받았다. 대상 수상자 김상중을 비롯해 ‘역적’으로 상을 받은 수상자들은 윤균상에 대한 언급조차 없었다. 윤균상은 현재 SBS 드라마 ‘의문의 일승’에 출연 중이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MBC 연기대상’ 26년차 무명 배우 최교식의 대상 시상이 감동적인 이유

    ‘MBC 연기대상’ 26년차 무명 배우 최교식의 대상 시상이 감동적인 이유

    무명 배우 최교식이 화제의 인물로 떠오르고 있다.26일 MBC는 ‘2017 연기대상’ 대상 시상자로 배우 최교식이 발탁됐다고 밝혔다. MBC 측은 이날 “매년 ‘연기대상’ 대상 부분 시상은 전년도 대상 수상자와 MBC사장 또는 부사장이 시상을 함께했다”면서 “올해 MBC ‘연기대상’에서는 좀 더 의미 있는 시상자가 찾아올 것”이라고 전했다. 이날 공개된 대상 시상자는 배우 최교식이었다. 최교식은 26년동안 배우라는 이름의 옷을 입었지만, 시상식에선 보기 힘든 얼굴이었다. 그는 올해 MBC 드라마 ‘역적:백성을 훔친 도적’, ‘아버님 제가 모실게요’, ‘훈장 오순남’, ‘도둑놈 도둑님’ 등 MBC에서 방영한 드라마 10여 편에 출연한 26년 차 무명배우다. 최교식은 특히 지난 5월 종영한 MBC 드라마 ‘역적:백성을 훔친 도적’에서 의적 홍길동의 조력자이자,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숨진 민초 ‘동춘’ 역을 맡아 열연했다. 그는 드라마 엔딩 장면에 등장, 혼신의 연기로 시청자에 큰 감동을 준 바 있다. 그는 ‘역적’ 종영 후 인터뷰를 통해 “이름 없는 배역으로 26년을 하고 있는데, 윤균상(홍길동 역)이 서럽게 우니 이제껏 연기해 온 것이 교차해 울컥했다. 영혼과 가슴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렀지만 참아냈다”라며 마지막 엔딩 장면을 연기한 비화를 공개하기도 했다. 사진=MBC 김혜민 기자 khm@seoul.co.kr
  • [역사 속 공익신고] 역모보다 무서운 불고지죄

    [역사 속 공익신고] 역모보다 무서운 불고지죄

    상전 부인 통정 묵인했다 교수형연산군 6년(1500년) 충청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대도(大盜) 홍길동이 체포됐다. 그는 평소 정3품 당상관이 입는 옷을 입고 수하들에게 자신을 ‘첨지’라고 부르게 했다. 대낮에도 관아를 자유롭게 출입해 아무도 그가 도적질을 한다고 의심하지 않았다. 고을 수령과 아전들은 그의 정체를 눈치채고도 위세에 눌려 이를 문제 삼지 못했다. 의금부 조사 결과 지역 관리들은 홍길동의 도적 행위를 알고도 뒷감당이 두려워 묵인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모두 홍길동을 고발하지 않은 죄로 변방에 유배됐다. 조정 내에도 당상관 엄귀손이 그와 연루됐던 사실이 확인됐다. 엄귀손은 평소 홍길동이 관리로 행세하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눈감아줬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가 한양에 거처할 집까지 마련해줬다. 엄귀손은 ‘실정을 알고도 죄인을 숨겨준 죄’에 처해져 곤장 100대에 3000리 유배형을 받고 옥사했다. ‘불고지죄’(不告知罪)란 불법 행위를 한 자를 알면서도 관청에 고발하지 않는 범죄를 말한다. 조선 시대 왕들은 이를 중대 범죄로 여겨 엄하게 처벌했다. 특히 역모 범죄의 경우 불고지죄가 큰 위력을 발휘했다. 세조 3년(1457년) 성삼문과 박팽년 등이 주도한 단종 복위가 실패했다.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돼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떠났다. 이때 그를 배웅 나온 환관 안노가 울먹이자 “나도 성삼문의 역모를 알고 있었으나 (세조에게) 아뢰지 못했다. 이것이 나의 죄”라며 환관을 달랬다. 단종도 불고지죄가 얼마나 강력하게 처벌받는지 알고 있었다. 연산 4년(1498년) 실록 편찬과정에서 김일손의 사초가 발단이 돼 무오사화(戊午士禍)가 발생했다. 김일손은 실록에 세조의 왕위 찬탈 과정이 왜곡돼 기술되자 이를 후세에 알리고자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중국 고사에 비유한 단종 애도사)을 사초(실록의 초고)에 적었다. 이 일로 수많은 이들이 죽거나 유배됐다. 특히 강경서와 이수공, 정희량은 불고지죄로 곤장 100대를 맞고 3000리 밖으로 쫓겨났다. 역모죄의 경우 사전에 어느 정도까지 역모 행위를 알고 있었는지가 모호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당시 관리들은 정쟁에 희생되지 않고자 조금이라도 역모와 관련이 있는 사실을 알게 되면 즉시 왕에게 신고해 면책받으려 했다. 불고지죄는 일반 범죄행위에도 광범위하게 적용됐다. 인조 10년(1632년) 관리 김이가 상전의 부인과 통정해 온 사실을 동료 김동이 알고 있었지만 이를 관아에 고발하지 않았다. 나중에 이 사실이 발각되자 사헌부는 김동에게 불고지죄를 물어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왕에게 보고했다. 조선시대 각종 고발 방문을 보면 신고 시 보상 내역과 함께 불고지죄 적발 시 처벌 규정도 명시돼 있다. 영조 4년(1728) 조정을 비방하는 익명의 벽서가 잇따라 붙어 사회가 불안해졌다. 그러자 왕은 벽서를 쓴 사람을 제보한 자에게 은 1000냥을 주겠다고 밝히는 동시에 작성자를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은 자를 엄벌에 처한다고 압박했다. ‘당근과 채찍’을 함께 쓴 것이다.인간이라면 누구나 친한 사람이 죄를 저지르면 이를 덮어주려는 측은지심이 생겨난다. 하지만 역대 왕들은 이를 불고지죄로 엄히 다스렸다. 백성에게 ‘불법 행위를 할 경우 언제 어디서나 고발당할 수 있다’는 경각심을 일깨우려고 노력했다. ■출처:세조 3년(1457년) 6월 22일, 연산군 4년(1498년) 7월, 인조 10년(1632년) 2월 25일 곽형석 명예기자 (국민권익위원회 대변인)
  • 둘리부터 라이언까지... 국내 캐릭터산업 50년사

    둘리부터 라이언까지... 국내 캐릭터산업 50년사

    현재 국내 캐릭터 시장의 절대 강자는 갈기 없는 수사자 ‘라이언’이다. 실적이 좋아 ‘라이언 전무’로도 불리는 이 캐릭터는 지난해 카카오그룹의 캐릭터 전문 자회사 카카오프렌즈가 선보였다. 덩치가 크고 무뚝뚝한 표정이지만 여리고 섬세한 소녀 감성을 지닌 반전 캐릭터로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라이언 외에도 다양한 캐릭터로 이루어져 있는 카카오프렌즈는 2012년 모바일 메신저 카카오톡의 이모티콘으로 등장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한국콘텐츠진흥원이 지난해 실시한 캐릭터 선호도 조사에서 카카오프렌즈는 수년간 인기 정상을 지켜온 ‘뽀로로’를 제치고 1위로 올라섰다. 카카오프렌즈는 라이언 외에도 토끼옷을 입은 단무지인 ‘무지’, 무지를 따라다니는 작은 악어 ‘콘’, 유전자 조작 복숭아 ‘어피치’, 토끼 간을 찾아 무지를 뒤쫓는 두더지 ‘제이지’, 부잣집 잡종견 ‘프로도’, 단발머리의 새침한 고양이 ‘네오’, 겁 많고 소심한 오리 ‘튜브’ 등 8개의 캐릭터로 이뤄져 있다. 하나같이 어딘지 모자라는 인간미 넘치는 캐릭터라는 점이 사람들로부터 친근함을 느끼게 한다는 평가다. 흔히 국산 캐릭터의 원조로는 1967년 제작된 국내 첫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의 주인공 ‘홍길동’을 꼽는다. 그 뒤로 ‘고인돌’(1972), ‘주먹대장’(1973), ‘태권V’(1976), ‘독고탁’(1976), ‘까치’(1983) 등의 캐릭터들이 등장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것은 1983년 김수정 작가의 만화 ‘아기공룡 둘리’에서 탄생한 ‘둘리’로 국내 캐릭터 산업에 이정표를 만들었다. 하지만 1990년대까지도 국내 캐릭터 시장은 ‘미키마우스’, ‘도널드 덕’, ‘톰과 제리’, ‘핑크팬더’, ‘심슨가족’, ‘슛돌이’, ‘드래곤볼’ 등 미국과 일본 캐릭터들이 주를 이뤘다. 그러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인터넷 보급과 함께 ‘마시마로’(2000), ‘졸라맨’(2000), ‘뿌까’(2000) 등의 캐릭터들이 대중적인 인기를 끌면서 국내 캐릭터 산업은 본격적인 성장기를 맞았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연간 1000억원대에 머물던 국내 캐릭터 시장은 1990년대 말 1조원대로 급성장했다. 2003년 웹툰 서비스가 시작되고 2005년 ‘아이들의 대통령’이란 별명을 얻은 ‘뽀로로’가 등장하면서 국내 캐릭터 산업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이어 ‘타요’(2010), ‘라바’(2011), ‘로보카폴리’(2011), ‘터닝메카드’(2014) 등이 등장했다. 스마트폰 문화가 정착된 이후로는 ‘라인프렌즈’(2011), ‘카카오프렌즈’(2012)와 같은 모바일 캐릭터들이 새로운 주인공으로 부상했다. 국내 캐릭터산업 규모(매출액)는 2015년 10조 807억원으로 처음 10조원을 넘어섰으며, 지난해는 전년보다 9.7% 늘어난 11조 573억원을 기록했다. 11년 전인 2005년(2조 759억원)에 비하면 5배 이상으로 커졌으며, 연평균 16% 이상 꾸준히 성장해왔다. 캐릭터 산업은 지난해 국내 전체 콘텐츠 매출액(105조 7237억원)의 10.5%를 차지하는 등 문화 콘텐츠 산업의 핵심 분야로 자리 잡았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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