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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대도 대장암 위험군…17.9%가 용종 가져

    30대도 대장암 위험군…17.9%가 용종 가져

    대장암으로 발전할 수 있는 용종의 발생 비율이 30대에서 급증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제시됐다. 지금까지 대장 용종은 50대 이후에 잘 생기는 것으로 알려져 검사도 이 연령대에 집중돼 왔다. ●조기 발견이 최선 대장 용종은 가능한 한 조기에 찾아내 제거해야 한다. 대장암의 80~85%가 용종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용종(폴립)이란 장 점막의 일부가 돌출해 혹처럼 형성된 조직이다. 인체에서 이런 용종이 가장 잘 생기는 곳은 대장으로, 국내 성인의 30%가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대장 용종은 특별한 증상이 없어 모르고 지나치기 쉽다. 물론 용종 자체는 양성이지만 그중 조직학적으로 선종성 용종(선종)으로 불리는 악성 종양이 대장암으로 진행되기 쉽다. 물론 모든 용종이 대장암으로 진행되지는 않으며 내시경검사를 통해 쉽게 찾아 제거할 수 있다. ●30~40대 새로운 위험군 대한대장항문학회(회장 전호경)가 7개 대학병원(강동경희대병원·국립암센터·삼성서울병원·서울성모병원·서울아산병원·세브란스병원·전남대병원)에서 2009~2011년 사이에 대장 내시경검사를 받은 14만 9363명을 조사했다. 그 결과 30대의 용종 발견율이 17.9%로 나타났다. 분석 결과 전체 조사 대상자 중 용종(35.9%) 또는 대장암(0.5%)으로 진단받은 환자가 36.4%(5만 4359명)에 달했다. 대장내시경검사를 받은 일반인 3명 중 1명은 대장에 문제가 있는 셈이다. 특히 눈길을 끈 대목은 30~40대의 용종 발견율이다. 지금까지 비교적 안전한 연령대로 꼽혔던 30대의 용종 발견율이 17.9%로 매우 높았다. 40대도 29.2%가 용종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연령대라도 남성의 용종 발견율이 높아 30대는 21.1%, 40대는 35.4%에 달했다. 이는 같은 연령대 여성의 13.2%, 20.1%를 크게 웃도는 수치다. 이에 대해 학회 측은 “이제 30대도 대장암의 위험에 노출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라며 “이는 대장 내시경검사 권고 대상 연령인 50대 이전에도 조기 검진 및 치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30~40대 이외 다른 연령대의 용종 발견율은 10대 4.1%, 20대 6.8%, 50대 39.5%, 60대 50.2%, 70대 59.5%, 80대 이상 60.3% 등이었다. ●정기 내시경검사 필요 이런 가운데 전 연령대를 통틀어서도 최근 3년간 용종 발견율이 해마다 1.5%(3000명가량) 증가하고 있었다. 성별로는 남성의 용종 및 대장암 발견율이 42%로 여성(26%)에 비해 1.6배 많았다. 학회 유창식(서울아산병원 대장암센터 교수) 이사는 “최근 3년간 대장 용종이나 대장암 발견율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국내 대장암 위험도가 심각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대장암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대장 내시경검사를 통해 조기에 발견, 치료하는 것이 최선의 대책”이라고 강조했다. 심재억 전문기자 jeshim@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5) 흥선대원군 ‘척화’ vs 명성황후 ‘친러’ (하)

    [선택! 역사를 갈랐다] (25) 흥선대원군 ‘척화’ vs 명성황후 ‘친러’ (하)

    법부고문 그레이트하우스(Clarence R. Greathouse, 具禮)는 1896년 4월 15일 을미사변 관련 히로시마 재판소 결정서와 함께 흥선대원군에게 한 통의 문서를 보냈다. 그레이트하우스는 “올해 1월 20일에 일본 히로시마 재판소에서 결정서를 작성했는데, 그 결정서 내용 중 전하의 행동이 많이 언급되었다.”며 “전하와 관련된 내용을 해명하실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아직도 이 문제가 세간에 걱정거리로 남아 있다 하니 참기 어려운 일이며 한스럽기 그지없다. 작년 을미사변에 대해서는 여론이 제멋대로인데 나의 말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나는 잠잠히 있을 뿐이다.”라고 답변했다. 흥선대원군은 을미사변과 관련하여 해명보다는 침묵을 선택했다. 그 침묵은 오랫동안 그 시기를 흥선대원군(1820~1899)과 명성황후(1851~1895)의 대립구도로 만드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1895년 10월 8일(양력) 새벽 1시. 전 군부고문 오카모토는 마포에서 일본 영사관보 호리구치 등을 대동하고 숨가쁘게 달려 흥선대원군의 저택에 도착했다.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그의 아들 이재면과 손자 이준용은 낯설지 않은 불청객을 맞이했다. 오카모토의 회고록을 살펴보면 당시 흥선대원군은 스스로 의관을 갖추고 일본이 의도한 것처럼 경복궁으로 순순히 향했다. 하지만 오카모토의 기록과는 달리 흥선대원군은 그날 새벽 1시에 곧바로 출발하지 않고 2시간 동안 자신의 저택에서 지체했다. 을미사변 직후 주한 외교관을 포함한 외국인 대부분은 을미사변의 배후로 흥선대원군을 지목했다. 그것은 1882년 임오군란 당시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첨예한 대립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의 을미사변 주도와 관련되어 당대 주한 외교관 및 외국인의 기록에서도 판단이 상호 엇갈렸다. 동일한 자료조차도 흥선대원군의 주도설과 관련되어 모순된 기록의 사례가 많았다. 을미사변 직후 주한 프랑스 주교 뮈텔, 주한 미국공사대리 알렌, 주한 영국총영사 힐리어, 주한 러시아공사 베베르 등은 흥선대원군이 사건의 배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판단은 오래가지 못했다. 일본인의 경복궁 침입, 흥선대원군의 경복궁으로의 출발 지체, 일본공사관의 문서위조 등 흥선대원군을 배후라고 볼 수 없는 많은 사실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을미사변 직후 흥선대원군은 고종과 분리되면서 정치현안에 개입하지도 못했다. 흥선대원군을 배후로 내세운 세력에 대한 혐의가 자연스럽게 일본공사관으로 옮겨졌다. ●명성황후, 고종의 충실한 조언자 명성황후 민씨는 1866년 왕비로 선택되어 운현궁에서 가례(嘉禮)를 치렀다. 명성왕후에게는 4남 1녀가 있었지만 1874년에 태어난 왕세자(순종)만이 생존했다. 명성황후는 고종의 조언자와 후원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종은 명성황후가 “경서와 역사를 널리 알고 옛 규례에 익숙하여 나를 도와주고 안을 다스리는 데 유익한 것이 많았다.”고 기록했다. 고종은 명성황후가 “사변에 대처해서는 정상적인 방도와 임시변통을 잘 배합했다.”며 위기에 대처하는 그녀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고종은 “일찍이 왕비가 말한 것마다 모두 들어맞았다.”며 명성황후의 판단력에 대한 강한 신뢰감을 표시했다. 명성황후는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의 정치적 격변 상황에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명성황후의 행록(行錄)에는 “임오군란 당시 왕비는 온화한 태도로 임시방편을 써서 그의 목숨을 보존했다.”고 기록돼 있다. 갑신정변 당시 고종은 명성황후가 “역적 박영효를 타일러 그 음모를 좌절시켰다.”고 주장했다. 또한 명성황후는 “이 무리들이 거짓말을 했다.”고 의심했으며 “이 무리들을 죽이면 자연히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판단했다. 고종은 “왕비가 성의 동쪽에 피해 있으면서 자성(慈聖)을 호위하고 세자를 보호하였는데 시종한 사람들이 한 명도 흩어져가지 않았다.”며 위기에 대처하는 결단력 및 정치적 결집력을 높이 평가했다. 명성황후는 대원군과 연결된 임오군란 등 혁명의 상황에서도 살아남았다. 그녀는 모든 어려움을 해결한 후 잠시 상실한 권력을 다시 회복하는 집념을 보여주었다. ●일본의 치밀한 을미사변 조작 기존 일본에서는 자국의 치부를 드러내는 사건이기 때문에 을미사변에 관한 연구를 오랫동안 기피했다. 일본에서는 주로 사실 정황에 대해서 을미사변과 관련된 인물인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 주한 일본공사관 서기관 스기무라, 한성신보 편집장 고바야카와 등의 기록을 참고했다. 그런데 이들은 사건 당일에 관한 행적을 매우 소략하게 기록했다. 또한 이들의 기록은 철저하게 그 시기를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대립 구도로 부각시켰다. 최근 소설가 쓰노다 후사코는 을미사변 관련 일본 외무대신 무쓰의 의혹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명성황후의 심리 묘사에 집중하여 을미사변에 관한 일본의 정치적 의도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그 결과 그녀는 일본의 사상가 고야스 등의 찬사를 받으며 을미사변에 관한 일본정부의 책임에 면죄부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사건 초기 주한 일본공사관은 여론의 시선을 따돌리기 위해서 대원군을 철저하게 이용했고, 대원군을 음모의 배후자로 주목받게 만들었다. 일본은 대원군을 책임자로 희생시킨다면 을미사변에 관련된 자국의 중요인물을 보호할 수 있고, 일본의 책임을 최소화시킬 수 있었다. 이미 미우라를 비롯한 일본공사관은 을미사변 이후 수습방안 중 사건의 책임자로 대원군을 설정했다. 그래서 스기무라는 대원군이 자발적으로 4개조의 밀약까지 동의한 것으로 기술했다. ●명성황후를 향한 죽음의 그림자 사건이 발생한 10월 7일 밤 궁궐에서는 민영준이 궁중에 등용된 것을 축하하는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잔칫날 명성황후는 자신의 측근인 민영준의 기용, 훈련대의 해산 등으로 주도권이 다시 왕실로 집중되는 것에 대해 만족했다. 그날 밤 그녀는 궁녀들과 함께 궁궐 후원으로 달구경을 나갔다. 대궐 내부에는 정변을 예측하는 여러 징후가 있었다. 1895년 9월 초 백작 이노우에는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 “왕족이나 혹 다른 조선 사람이 역모를 꾀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일본정부에서 군사의 힘으로 왕실을 보호하여 국가의 평안함을 보전한다.”며 고종과 명성황후를 안심시켰다. 특히 명성황후는 정변이 발생하면 오히려 대궐이 안전하다는 농상공부협판 정병하의 주장을 믿었다. 왕실의 신뢰를 받아 재정을 도맡았던 정병하는 “일본군대가 대궐에 들어옴은 성체를 보호코자 함인 줄로 아옵나니, 의심하실 바가 없사온즉, 피하여 나가시지 마옵소서.”라며 명성황후의 피신을 막았다. 대궐에서 성대한 잔치가 끝나자 새벽녘 명성황후는 고종과 함께 “곤령전의 전각문 북쪽의 작은 난간(干)”을 산책했다. 그런데 고종과 왕비는 일본군대와 훈련대가 대궐을 포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신속히 곤녕합으로 이동했다. 그날 왕비는 궁궐 내에서 침입자에 대비할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대와 훈련대가 경복궁을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비가 궁궐 밖으로 도피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리고 왕비는 침입자의 목표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대원군의 선택과 침묵 흥선대원군은 을미사변 당일 왜 경복궁으로 향했을까? 그 이유는 두 가지 정도로 추정된다. 첫째, 1880년대부터 대립했던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는 1894년 9월에도 정국 주도권을 둘러싸고 심각하게 갈등했다. 따라서 흥선대원군은 청일전쟁 이후 발생한 삼국간섭 이후 정국을 주도한 명성황후의 영향력을 단절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둘째, 흥선대원군은 1895년 4월 ‘이준용 역모사건’ 당시 특별법원의 심리 기간 중 강력하게 항의했고, 5월 이준용이 강화도 교동도에 유배당하자 교동도까지 방문하려고 시도했다. 이렇듯 흥선대원군은 그의 손자 이준용에 대해 강한 애착을 보였다. 스기무라는 이러한 손자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애착을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스기무라를 비롯한 일본공사관은 만약 흥선대원군이 4개조 약속 초안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이준용의 신변을 보장할 수 없다고 흥선대원군을 위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날 흥선대원군은 일본 자객이 자신의 목숨보다도 소중한 손자 이준용을 위협하자 일정한 타협을 진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일본과의 결탁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이미지에 커다란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을미사변 당일 오카모토가 새벽 1시에 찾아왔지만 흥선대원군은 새벽 3시까지 출발하지 못하고 고심했고, 그 후 침묵을 선택했다. 인간은 자신의 잘못으로 혹은 타인의 잘못으로 생의 불행을 겪게 되었더라도 적어도 침묵할 줄 알아야만 한다. 대원군은 최소한 불행을 감출 줄 아는 사람이었다. 김영수(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서울신문·푸른역사 아카데미 공동기획
  • 전면 개장 앞둔 서울국제금융센터 외국社 유치 부진…국내용 전락

    오는 11월 전면 개장을 앞두고 있는 서울 여의도 서울국제금융센터가 당초 건립 목적과 달리 국내 금융기관만 이용하는 국내용이 될 처지에 놓인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투자유치 당시 지적됐던 각종 계약상의 특혜의혹 등으로 여전히 먹튀 논란이 우려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서울시를 상대로 정보공개청구 등을 통해 취재한 결과 드러났다. 28일 서울시에 따르면 서울국제금융센터는 7월 현재 금융기관은 7개국 20곳(국내 기관 8곳), 비금융기관은 3개국 8곳(국내 기관 4곳) 등 모두 28곳이 입주해 있다. 입주율은 95.9%에 이른다. 하지만 6개층이나 임대해 가장 넓은 면적(2만 8023㎡)을 차지하는 딜로이트는 대부분 안진회계법인이 사용하므로 사실상 국내 금융지원기관으로 분류해야 한다. 결국 임대율을 다시 계산해 보면 국내 회사 13곳의 임대 면적이 5만 4703㎡로 임대면적 비율은 64.7%나 된다. 반면 외국계 기업은 필립모리스나 소니 등 비금융사 4곳(1만 4524㎡)을 포함하더라도 15곳 2만 9849㎡이며 임대면적 비율은 35.3%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뉴욕멜론은행, 다이와증권, ING자산운용 등은 서울에서 이미 사업을 하다가 이전비용 지원과 1년치 임대료 미납 등 파격적인 지원 조건을 보고 입주한 것에 불과하다. 해외에서 국내로 새롭게 유치한 실적은 4건이다. ●신규 유치 실적 4건뿐 운영권을 갖고 있는 AIG는 정작 아시아·태평양본부가 홍콩에 있으며 서울국제금융센터에 입주한 것은 한국에서 영업 중인 여타 계열사에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는 AIG서비스㈜가 전부다. 입주 면적도 서울국제금융센터에 입주한 28곳 가운데 가장 적은 230㎡다. 이에 대해 서울시 관계자는 “금융기관이 이전을 쉽게 결정하진 않는다. 하루아침에 집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 아니겠느냐.”는 궁색한 변명만 늘어놨다. 이어 “여의도가 국제금융 중심지가 되려면 외국 기업만 있어도 안 되고 금융기업만 있어도 안 된다. 다양한 기업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애초에 수요 예측이 과장됐던 것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수요 예측이란 게 원래 쉽지 않은 작업이다. 금융위기로 어려움도 있었다.”고 밝혔다. 특히 국제금융센터의 투자 및 개발·운영권을 따낸 미국 금융그룹 AIG가 서울시와 계약을 맺으면서 모든 관계 서류를 영어로만 작성, 또 다른 부실 계약 의혹을 일으키고 있다. 취재 결과 서울시는 기본협력계약(2004년 6월 9일), 개별임대계약(2005년 8월 18일), 수정계약(2007년 1월 17일) 등 모든 계약서를 한글이 아닌 영어로 작성했다. 계약 내용을 해석하는 것은 무조건 영어 계약서가 기준이 되기 때문에 계약 단계부터 불리한 입장을 자초했다는 지적이다. 서울시 관계자에 따르면 국문 계약서는 아예 처음부터 없었다. 관련 공무원들조차 계약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영어 사전을 뒤지고 있다. 국문 번역본이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시의 참고용이고, 그마저도 전문가도 아닌 임시직들에게 시켜서 만든 것이다. ●계약서도 영문… 부실 의혹 공공기관이 민간과 맺은 계약서가 영문인 경우는 전례가 없다는 지적이다. 최근 방위사업청이 FX사업을 입찰하는 과정에서 록히드마틴이 국문 입찰제안서를 제출하지 않아 결격 사유가 돼 입찰을 연기한 사례도 있다. 서울시 관계자들도 “왜 그렇게 했는지 우리도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다. 최성식 변호사(법무법인 화우)는 “가령 재판정에서는 언제나 한국어가 기준이 되는 것처럼 공공기관이 맺는 계약을 한국어로 한다는 것은 법 이전에 상식에 속한다.”고 지적했다. ●낮은 토지임대료 등 특혜 확인 이 밖에도 계약 당시 특혜 시비를 불러일으켰던 낮은 토지 임대료(공시지가의 1%)와 2016년 이후 매각 가능 등도 이번 취재 결과 사실로 확인돼 정치권이나 시민단체 등이 꾸준히 제기했던 론스타형의 먹튀 우려 논란이 재현될 가능성도 점쳐진다. 한편 서울국제금융센터는 이명박 대통령이 시장으로 재임할 당시 여의도를 동북아 금융허브로 육성하겠다는 명분으로 외국 기업을 대상으로 투자유치한 것으로 대지 면적 3만 3058㎡에 총 4개의 빌딩(최고 54층), 연면적 50만 4880㎡에 이른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전자발찌 ‘무용지물론’… 개선책 없나] ‘전자발찌 착용자’ 관리 왜 제대로 안됐나 했더니…

    전자발찌(위치추적 전자장치)를 착용한 채 성폭행을 저지르는 사건으로 ‘전자발찌 무용론’이 떠오르는 가운데 비난의 화살이 법무부와 경찰에 쏟아지고 있다. 두 기관이 ‘전자발찌 착용자 명단’을 공유하는 문제를 두고 볼썽사나운 신경전을 벌이는 바람에 치안 공백이 생겼다는 지적이다. 양측은 뒤늦게 발찌 착용자 신상 정보 공유 등 대책 마련에 나섰지만 이미 가정주부 등 평범한 이웃이 희생당한 터라 국민적 불신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23일 법무부와 경찰청에 따르면 경찰과 검찰은 앞서 2차례 명단을 나눠 볼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부처 이기주의의 덫에 발목이 잡혀 무산됐다. 먼저 명단 공유를 요청한 쪽은 경찰이었다. 경찰청 여성청소년계가 2010년 3월 법무부에 공문을 보내 “전자발찌 부착자 성명과 거주지 등 신상 정보를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강력사건 수사 때 참고할 목적이었다. 경찰은 당시 성범죄 우범자 2만여명을 자체 관리했으나 이 가운데 누가 전자발찌 착용자인지 가려낼 길이 없었다. 하지만 경찰청에 돌아온 답은 “불가하다.”였다. 정보를 공유할 법적 근거가 없고 정보를 열람하려면 영장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2년 뒤인 지난 5월 8일에는 법무부가 먼저 공유 제안을 했다. ‘특정 범죄자 전자발찌 업무 관련 협조 요청’이라는 공문을 경찰청에 보냈다. 이번에는 경찰이 거절했다. “전자발찌 착용자 정보를 받으면 이들의 동향을 파악해 관리, 감독을 해야 하는데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를 댔다. 한 경찰 고위 관계자는 “명단을 넘겨받은 뒤 전자발찌 착용자가 재범을 저지르면 우리가 책임을 떠안을 수 있다. 경찰이 우범자 심층 접촉 등 뾰족한 관리 수단을 보장받지 못한 상황에서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경찰 관계자는 “우리가 달라고 할 때는 안 주더니 오원춘 사건 등으로 성범죄에 대한 우려가 고조되니 혹을 떼어 내려 한다.”고 비판했다. 이에 법무부 측은 “경찰이 명단 공유를 요청했을 때는 착용자 수가 지금은 3분의1도 되지 않았다. 사회적 논의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 거절한 것”이라고 말했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4)흥선대원군 ‘척화’ vs 명성황후 ‘친러’ (상)

    [선택! 역사를 갈랐다] (24)흥선대원군 ‘척화’ vs 명성황후 ‘친러’ (상)

    19세기 후반 세계는 해양과 철도로 연결되었다. 제국주의 열강의 외압이 조선을 변화시켰다. 정치적·군사적 외압을 바탕으로 열강은 자국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상호 연대와 대립을 반복하면서 치열한 외교전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조선 측의 대응도 있었다. 외압에 대응해 조선 역시 열강과 외교라는 수단을 통해 국권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당시 러시아는 극동지역에서 일본과 대립하는 하나의 축이자 조선과 국경을 맞댄 나라였다. 조선은 러시아의 외교정책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당시 영국, 일본, 청국은 자국의 조선 침략을 합리화하려는 전략으로 공러(恐)의식을 조작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원군과 명성황후도 민감하게 반응했고 대응책을 마련하려고 노력했다. ●대원군, 러 견제위해 佛신부와 접촉도 1863년 12월 철종(哲宗)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군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했다. 흥선군 이하응은 대원군에 봉작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섭정 초기 국왕과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다양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최고의 권력기구로서 외척이 권력을 독점하는 기반이 되었던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복설하였다. 그리고 의정부와 동일한 위상을 갖는 최고의 군사기관으로 삼군부를 설치하였다. 을미사변의 주역인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는 “흥선대원군이 국제 정세만 정확히 파악하면 동양의 뛰어난 외교가로서 손색이 없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1860~1870년대 서구열강과의 접촉에서 외세의 영향력을 직접 경험했고, 러시아 또는 미국 등 서구열강 일국에 편중하지 않는 외교정책을 펼치려고 노력했다. 그 배경에는 흥선대원군이 외교관계의 미묘한 변화와 흐름을 꿰뚫어 보는 안목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세기 후반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는 격변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1860년 북경조약(北京條約)으로 연해주(沿海州)를 획득함으로써 조선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조선과 새로 국경을 접한 러시아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흥선대원군은 조선에 잠입해 있던 프랑스 신부들과 접촉하기도 하였다. 프랑스 신부들과의 접촉은 프랑스 및 영국과의 제휴도 염두에 둔 파격적인 시도였다. 프랑스와 미국의 군사적 도발은 흥선대원군의 강렬한 척화정책을 북돋았다. 거기에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E. J. Oppert, 吳拜)가 대원군 아버지 남연군(南延君)묘를 도굴한 사건은 흥선대원군의 서양에 대한 적개심을 강화시켰다.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를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외세를 물리쳤다는 강한 자부심을 얻었으나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한 유연한 접근성은 정권 초기보다도 경직되었다. 두 차례의 양요(洋擾)를 겪으면서 흥선대원군정권은 강력한 군사력 편성의 필요성을 더욱 느끼게 되었다. 그 결과 전국에 3만명 정도로 추산되는 포군을 설치하였다. 그 후 흥선대원군은 임오군란에서는 청나라와, 갑오개혁 때는 일본과 각각 대립했다. 흥선대원군은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고종으로부터 사태수습을 위한 전권을 위임받고 권력을 장악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청나라 군대에 의해 톈진(天津)으로 납치되었고 1885년 겨우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894년 7월 23일 일본군대의 ‘경복궁침입사건’ 당시 흥선대원군은 주한 일본공사 오토리(大鳥圭介)와 함께 참여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의 개혁정책을 반대하다가 주한 일본공사 이노우에에 의해 정계 은퇴를 강요당했다. ●1895년 개국기원절 日인사 초청 놓고 반일친러 분위기 형성 명성황후는 외교 분야의 현안에 간접적으로 개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행록(行錄)을 살펴보면 “짐이 근심하고 경계하는 것이 있으면 대책을 세워 풀어 주었다.”, “심지어 교섭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는 나를 권해서 먼 곳을 안정시키도록 했다.” 등이 기록되었다. 1895년 9월 4일 왕실은 조선왕조 504년 건국 기념일인 ‘개국기원절’ 행사를 준비했다. 이날 행사의 준비위원회에서는 외국인 중 궁내부 고문관(宮內府 顧問官) 러젠드르 장군, 러시아공사 베베르의 부인의 자매이자 궁내부에 소속된 손탁 여사, 그리고 러시아 건축기사 사바친도 포함되었다. 그래서 러젠드르 장군은 사무장(事務長)이라는 명예위원으로 외국인들을 접대하였고, 손탁 여사는 음식과 식탁 준비를 담당했으며, 사바친은 식장의 장식 부분을 총괄했다. 당시 러시아공사 베베르는 조선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손탁을 궁내부에 고용하도록 추천했다. 독일 엘자스(Elsass) 출신인 손탁은 궁궐에서 유럽식 향연을 준비하면서 명성황후를 자주 만나 2~3시간씩 연속으로 황후와 대화했다. 이날 회의에서 행사와 관련된 한 명은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식탁 시중을 위해서 일본 급사를 초청하는 문제를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일본인들의 이름이 나오자, 손탁 여사는 얼굴을 찡그렸고, 일본인들 전체를 비난하기 시작하면서, 심지어 침까지 내뱉었다. 그러자 러젠드르 장군은 마치 귀부인에게 시중드는 유명한 기사처럼 웃으면서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손탁 여사는 왕실로부터 자신의 개인 집을 짓기 위해 약 1만 달러를 받았고, 그녀의 지도 아래 조선 여인들이 다양한 수공예를 배울 수 있는 학교 설립을 약속받았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에서 사바친은 일본공사관의 외교관 및 일본과 연대하고 있는 조선 관료들의 명성황후를 향한 적개심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때 사바친은 “이것이 언뜻 보기에는 별일 아닌 작은 사건 같지만, 이와 비슷한 작은 사건들이 점점 더 많아져서 어떤 음모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 손탁과의 관계 속에서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지원을 예상하고 평소의 신중한 태도를 버리고 반일적인 행동을 취하면서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명성황후는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둘러싸고 일본이 외교적으로 패배하자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고 노력했다. 당시 명성황후 주변의 미국인도 자국의 이권과 특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일본의 영향력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조언했다. 만일 황후가 유럽인들로부터 보호를 기대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자신의 위험을 피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준비했을 것이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자신을 보호해 주겠다는 유럽인들의 약속을 받았고, 유럽인들이 궁궐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신뢰했다. 신은 조심하는 자를 보살필 뿐이었다. ●명성황후, 왕실 日세력 제거… 日 ‘친러’ 비판하며 을미사변 개국기원절 행사 이후 왕실은 1895년 9월 재정, 법률, 내각, 군대 등에 대한 조직 개편을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그 과정에서 주한 일본공사관과 연대하는 정치 세력을 점차 제거했다. 주한 일본 공사관의 서기관 스기무라도 공사 이노우에 공사가 9월 17일 귀국길에 오르자 왕실이 갑오개혁 이후 설치된 “신제도와 신군대의 파괴에 착수했다.”고 분노했다. 왕실은 1895년 9월 20일 기존 법률과 칙령 번호를 무시하고 새롭게 칙령 1호를 발표했다. 왕실은 궁내부의 핵심인물인 이범진을 농상공부 대신으로 임명하면서, 반대세력인 농상공부 대신 김가진을 파면하고 내무협판 유길준을 의주관찰사로 전출시켰다. 무엇보다도 왕실은 일본 장교에 의해 교육받은 훈련대를 약화시키기 위해서 왕실의 신임을 받고 있는 홍계훈을 훈련대의 연대장으로 임명했다. 명성황후는 훈련대를 해산, 김홍집 내각을 약화시켜 갑오개혁 이전 왕실의 권위를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우라 공사는 히로시마재판소에서 1895년 9월 1일 주한 일본공사로 부임한 이후 “궁중에 온전한 권세가 날로 심하여, 망령되게 나라 정사를 간섭했다.”며 왕실의 권력 장악을 비난했다. 그는 “훈련대를 흩어지게 하며 그 사관을 내치고자 하는 무리가 일본을 박대했다.”며 궁중의 일본 ‘박대론’을 주장했다. 그는 “독립의 실상을 실행하는 내각 관원들을 내치고, 혹 살육하여 정권을 궁중에 거두고자 하는 계교가 있었다.”며 궁중이 김홍집 내각을 제거하려는 ‘음모론’을 제기했다. 그는 “우리나라도 해를 받음이 적지 아니하니, 일본의 위엄과 믿음을 보존할 것을 생각했다.”며 일본의 ‘국익’을 위한 정변 실행을 결심했다. 그는 ‘박대’와 ‘계교’라는 용어를 쓰면서 궁중을 비난하고 일본의 국익을 위한 불가피한 행동이었다고 강변했다. 미우라 공사는 황후의 ‘친러정책’에서 일본의 ‘국익 보존’으로 을미사변 원인에 관한 초점을 옮겼다. 일본은 명성황후의 ‘친러정책’을 언급하면서 명성황후 암살을 변명했다. 하지만 그 본질은 일본의 국익 보존이었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는 국제세력에 맞서 왕실 보호를 위해 독자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했다. 그런데 상층부 두 인물의 핵심 세력은 각각 전주 이씨와 여흥 민씨로 갈렸다. 하지만 들판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나 있는 법이다. 김영수(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 [길섶에서] 밀가루 똥배/노주석 논설위원

    어느 외국작가가 지은 ‘밀가루 똥배’라는 책을 보니 밀가루에 대한 좋지 않은 얘기가 쫙 깔렸다. 밀가루가 이른바 똥배의 주범인 이유는 밀에 들어 있는 강력한 식욕촉진제 때문이고, 빵의 혈당지수는 사탕수수보다 높고, 밀가루는 안전도가 확인되지 않은 유전자 변형식품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밀을 담배의 니코틴, 술의 알코올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았다. 국수와 빵을 즐기는 필자로선 참으로 곤혹스럽다. 통밀 빵 두 조각이 설탕 두 숟가락보다 더 혈당을 높인다니 겁부터 난다. 시장에 가보면 세상은 온통 밀가루 가공식품 천지다. 외식이 잦은 처지에 다른 먹거리를 찾기조차 쉽지 않다. 생활 속에서 밀을 제거하면 건강 혜택을 누릴 수 있다지만 무슨 낙으로 사나. ‘중년의 혹’ 똥배는 떼어버리고 싶지만, 밀가루 음식을 먹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40대에 담배 끊은 것을 최고의 업적으로 내세우듯, 50대 최고의 업적을 밀가루 끊기로 정해야 하나. 밀과의 단호한 이별이 필요한 시점에서 목하 고민 중이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데스크 시각] 국민의 검찰로 거듭나려면/박현갑 사회부장

    [데스크 시각] 국민의 검찰로 거듭나려면/박현갑 사회부장

    “올해에는 전국의 공안검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선거 혁명의 주역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금품선거 사범을 발본색원하고, 흑색선전 사범을 척결해야 합니다.” 지난 1월 16일 전국 공안부장검사 회의에서 한상대 검찰총장이 한 발언이다. 한 총장 지적대로 올해는 20년 만에 총선과 대선이 동시에 있는 해다. 하지만 한 총장이 척결하겠다고 강조한 선거 부정과 부패, 혼란과 혼탁의 고리는 지금도 여전하다. 부산지검에서 수사 중인 새누리당 공천 헌금 의혹 수사 흐름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조기문 전 새누리당 부산시당 홍보위원장을 구속한 검찰의 다음 타깃은 현영희 의원이다. 현 의원에 이어 4·11 총선 공천위원인 현기환 전 의원까지 사법처리 대상에 오를 경우, 여당은 물론 정치권에 미칠 충격파는 적지 않다. 특히 공천 개혁을 강조해온 새누리당의 대권후보 가운데 한 명인 박근혜 의원에게도 큰 상처를 안길 수 있다. 오는 20일 전당대회에서 새누리당 대선후보로 선출이 유력한 박 의원은 이와 관련, “금품수수는 개인비리 그런 것이지 당에서 헌금을 받은 것이 아니지 않으냐.”며 과거 ‘차떼기당’의 이미지가 되살아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그만큼 이번 사건의 여파가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야권으로선 검찰이 현 전 의원에 대한 범죄 혐의를 입증해 내지 못하면 특검 도입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여당은 물론 검찰로서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범죄 혐의를 인지하고서도 ‘미래권력’에 눈치를 봤다는 비아냥이 쏟아질 게 뻔하다. 총선도 그렇지만 대선을 둘러싼 여야 간 신경전은 검찰로서는 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여야 대선 후보 가운데서 검찰 조직의 인사를 좌우할 대통령이 나오게 되는데 ‘법대로’만을 외치기란 쉽지 않다. 역대 대선과정이 이를 보여준다. 15대 대선을 두달 정도 남겨둔 1997년 10월 7일 강삼재 당시 신한국당 사무총장은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의 670억원대 비자금 사건을 폭로, 고발한다. 그런데 김태정 당시 검찰총장은 대검 중수2과에서 이 사건 수사에 착수한 지 하루 만에 긴급기자회견을 통해 대선 이후로 수사를 유보한다고 밝힌다. 대선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였다. 대선 전에 수사를 한다 하더라도 끝낼 수 없고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비자금도 같이 다뤄야 한다는 형평성 문제도 고려했다는 게 검찰의 설명이었다. 2002년 대선에서는 이회창 신한국당 대선후보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으로 여야가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으나 똑 부러지는 수사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2007년에는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의 BBK 의혹을 둘러싼 공방으로 선거판이 뜨거웠으나 마찬가지였다. 오는 12월 18대 대선에서도 온갖 마타도어가 여야 간에 난무할 것으로 보인다. 검찰이 강조하는 공명선거, 맑고 깨끗한 선거는 여전히 거리가 먼 셈이다. 검찰로서는 대선 수사에 있어 인사권자인 대통령과 미래권력의 속내까지 염두에 둬가며 숙고에 숙고를 거듭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일반 국민들은 생각이 다르다. 살아 있는 권력이든, 다음 정권을 잡게 될 실력자든, 범죄 혐의를 포착하고 인지하게 되면 법대로 처리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혹 생길지 모를 사회적 혼란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기회비용으로 봐야 한다. 이렇게 할 때, ‘권력의 시녀’라는 비아냥을 받는 검찰도 명예를 회복할 수 있다. 검찰은 인사권자와 조직 보호에 대한 셈법도 필요하겠지만 기본적으로 국민에 대한 태도가 중요하다. 수사를 함에 있어 경제력이나 학력, 그리고 연고의 유무를 떠나 무엇이 대한민국을 발전시키는 데 바람직한지 따져볼 일이다. 기소독점권을 가진 ‘서초동’의 미래는 국민의 이익에 부합하는 검찰권 행사를 고민할 때, 밝을 것이다. 한상대 검찰총장은 얼마전 취임 1주년 기자간담회에서 국민의 시각과 의사를 유념한 검찰권 행사로 신뢰를 높이겠다고 발힌 바 있다. ‘검찰 조직’을 위해 현명한 선택을 하기보다 국민을 위해 올바른 선택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검찰 가족이 많아지기를 기대해 본다. eagleduo@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3) 노론 명문 가문 박지원 vs 남인 몰락 가문 정약용

    [선택! 역사를 갈랐다] (23) 노론 명문 가문 박지원 vs 남인 몰락 가문 정약용

    연암은 아무런 관직도 없이 중국에 갔다. 집안 덕이었다. 건륭제의 칠순 생일을 축하하는 사신단 책임자(정사)로 금성도위 박명원이 임명되었는데 그가 연암의 삼종형(팔촌)이어서 따라갈 수 있었던 것이다. 다산은 중국에 한 번도 가지 못했다. 연암(1737~1805)과 다산(1762~1836)은 모두 영조 시대에 태어났다. 다만 연암이 다산보다 25세 위다. 연암의 집안은 반남 박씨로 노론 명문가로 꼽혔다. 다산의 집안은 압해 정씨로 정치적으로 실세한 남인 몰락 가문이었다.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 두 사람은 대표적인 실학자로 나란히 거론된다. 그런데 두 사람은 같다고 보면 문득 다르고 다르다고 보면 문득 같다. 연암은 당대의 주류 다수파에 속했으면서도 비주류 소수파의 모습이 보인다. 다산은 당대의 비주류 소수파에 속했으면서도 주류 다수파의 모습이 보인다. 연암은 16세에 결혼해 장인의 지도를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학업에 임했다. 공부가 늦은 감이 있다. 다산은 어린 시절부터 잘나갔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아버지의 지도를 받으면서 일찌감치 학업에 정진했다. 7세에 시를 쓰기 시작하고 10세에 시집을 만들 정도였다. 연암은 몇 차례 과거를 봤지만 이내 단념하고 말았다. 다산은 과거 공부를 열심히 했다. 과거에 합격해 22세에 성균관에 들어갔고 28세에 벼슬길에 나갔다. 과거를 통과하지 않았던 연암은 50세가 넘어서야 정조의 배려와 친구의 천거로 벼슬에 나아갔다. 55세에 첫 지방수령직으로 안의현감에 임명되었다. 지방관 경력을 잠시 비교해보자. 다산은 36세의 나이에 곡산부사로 나갔다. 같은 해에 연암은 61세에 면천군수로, 그 후 64세에 양양부사로 승진되었다. 다산은 30대 부사, 연암은 60대 부사였다. 아무튼 문과에 급제하지 않고도 양양부사에 임명된 사람은 연암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과거 단념·서얼들과 교류… 연암의 ‘강남 스타일’ 과거를 단념한 연암은 30대였던 1760년대 후반부터 탑골공원 근처에 살면서 홍대용,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과 교유했다. 주로 노론 출신이라는 점과 이덕무 등이 신분상 천대받은 서얼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이들은 이른바 ‘북학파’ ‘연암그룹’ 또는 ‘백탑시사’ 등으로 불린다. 10대의 다산은 줄곧 둘째 형 정약전과 함께 다녔고 성호 이익의 가르침을 받은 권철신, 이가환 등을 만나고 한국 천주교를 스스로 일으킨 이벽, 이승훈과 어울렸다. 이들은 ‘성호학파’ 또는 ‘기호남인’으로 불린다. 다산은 15세에 결혼한 후 서울 남촌에서 살았다. 연암은 고관대작들이 많이 사는 서울 북촌에 살았으니 요즘으로 치면 연암은 강남, 다산은 강북에 산 셈이다. 두 사람은 문장가, 학자로서 스타일이 사뭇 다르다. 사마천의 ‘사기’를 읽을 때 연암은 사마천의 마음을 읽으라 했다. 다산은 연표를 꼼꼼히 챙기라 했다. 연암은 사물을 제대로 보기 위해 마음을 비우라 했다. 다산은 글을 쓰려면 속을 꽉 채우라 했다. 연암은 시를 별로 남기지 않았는데 다산은 마치 일기 쓰듯 많은 시를 남겼다. 연암은 글쓰기엔 요령이 있다고 가르치는데 다산은 문장학이야말로 유학의 큰 해악이라고 내쳤다. 연암은 문장가, 다산은 학자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진다. 글쓰기에는 두 방법이 있다고 하는데 은밀하게 감추는 방법과 들춰내 드러내는 방법이 그것이다. 연암의 글은 감추는 방법을 잘 활용했다. 다 읽고 나서도 그의 뜻을 제대로 포착했는지 돌아보게 한다. 다산의 글은 명징하게 드러내는 방법을 주로 했다. 읽노라면 곡진한 느낌을 준다. 연암은 인상파 화가인 듯하고, 다산은 사실주의 작가인 듯하다. 연암은 정조에 의해 당시의 자유분방한 문체를 주도한 죄인으로 지목되었다. 다산은 정조의 우등생이요 모범생이었다. 다산은 정조의 순정한 문체 주장에 적극 동조했다. 다산은 당시 사교라 불린 천주교에 감화돼 적극 동조했다가 나중에 태도를 바꾸어 거리를 두었다. 반성문도 썼다. 연암은 천주교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 폭력적 탄압에는 반대했다. 이렇듯 다르다 보니 동시대 인물인데도 두 사람이 만났는지조차 의문스럽다. 나이도 차이나고 사는 동네도 달랐지 않은가. 두 사람을 연결하는 인물로 박제가(1750~1805)를 생각할 수 있다. 그는 규장각 검서관으로 낮에는 규장각에서 다산과 함께 근무했고 저녁에 퇴근하면 연암그룹과 어울렸을 것이다. 박제가를 통해, 또 베스트셀러 작가 연암의 이름이 이미 높았기에 다산은 연암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혹 길 가다 우연히 마주치면 다산이 손위인 연암에게 먼저 인사를 했을 것이다. 인사를 받은 연암은 어떻게 대꾸했을까? 젊은 친구가 누군지 몰라 심드렁하게 인사만 받았을까, 자신보다 품계가 높은 관리라 공손하게 인사를 받았을까. 다산이 18년 유배 기간이 끝날 무렵에 마무리한 ‘경세유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규장각 검서관 박제가가 지은 ‘북학의’ 6권을 보았으며 유신(儒臣) 박지원이 저술한 ‘열하일기’ 20권을 보았다. 그런데 거기에 실린 중국의 기구 이용 제도는 보통 사람이 헤아리기 힘든 것이 많았다.” 다산의 ‘경세유표’는 유가적 이상에 입각한 국정 전반의 제도 개혁안이다. 여기서 다산은 청나라 문물을 배우자는 북학(北學)의 의견에 적극 동조하여 오로지 그것을 직무로 하는 관청을 별도로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이른바 ‘이용감’이었다. 다산은 ‘경세유표’에서 제안한 제도 중 꼭 그대로 시행되길 바라는 열다섯 가지를 꼽았는데 이용감 설치는 그중 하나다. ●저자와 독자 그 이상의 연결고리 ‘열하일기’ 이로 볼 때 두 사람은 ‘열하일기’로 연결되고 있었다. 물론 저자와 독자의 관계였지만. ‘열하일기’는 연암이 중국에 다녀와서 쓴 책이다.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며 깨달음을 얻었다는 ‘일야구도하기’ 또는 유명한 소설 ‘허생전’을 교과서에서 읽었을 텐데 모두 ‘열하일기’에 실려 있다. 그래서 ‘열하일기’를 여행기 또는 문학작품으로만 생각할지 모른다. 그 해 여름, 44세 연암은 붓 두 자루, 먹 하나, 작은 공책 네 권 등 간단한 행장으로 중국을 향했다. 압록강을 눈앞에 두고 자객 형가를 생각했다. 진시황을 죽이러 적국이며 강대국인 진나라로 강을 건너가기 직전의 형가가 하필 떠올랐을까! 연암은 국경을 넘어 살림살이가 넉넉해 보이는 여염집을 보고서는 질투심이 끓어올랐다. 변방의 촌마을이 이 정도라니. 연암은 중국에서 정말 볼 만한 것은 큰 누각이나 성곽이 아니라 깨진 기왓장과 똥거름이라고 했다. 민간의 이용후생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연암은 도중에 목격한 수레, 벽돌, 목축, 선박 등 여러 제도들을 소개했다. 허구적이고 자폐적인 북벌론의 미몽에서 깨어나 북학을 해야만 북벌도 가능할 터. 대내용 북벌만 강경하게 외칠 뿐 민생은 나아지지 않는 조선 현실에 대한 분노였다. ‘열하일기’를 통해 연암은 여정의 진행에 따라 보고 들은 것들을 전하면서 갖가지 주제를 넘나들었다. 형식 또한 일기 형식으로 시작해 다양한 산문 형식을 시도했다. 이러한 다양한 주제와 형식에도 불구하고 ‘열하일기’ 전체에 흐르는 주제의 하나는 ‘천하의 정세를 살피는 것’이었다. 연암은 사신의 일행이면서 공식 임무가 없었다. 새벽이면 일행보다 먼저 출발해 여기저기 많은 곳을 둘러보려고 했고 저녁이면 몰래 숙소를 벗어나 중국 지식인들과 만나 필담을 나누다 새벽에 들어오곤 했다. 청 황실의 대내외 통제 술책을 간파하면서 지금 태평연월을 누리고 있는 천하가 장차 어찌 될지 변역의 기미를 살폈다. ‘열하일기’는 현실적 존재인 청 왕조를 오랑캐라 외면하고 무시하는 자폐에 대한 질타였다. 다양한 주제를 통해 조선의 식자층 내지 지배층에 고정관념과 좁은 소견에서 벗어나 열린 마음을 갖도록 촉구하는 것이었다. 내 눈으로만 보는 자폐와 남의 눈으로만 보는 자아 상실의 극단은 늘 경계할 병통이다. 또한 천하대세를 전망하고 변역의 기미를 놓치지 않는 예민함은 지금도 절실하다. 아, 아깝다. 또 다른 위대한 저술가 다산은 해외 여행 갈 기회가 한 번도 없었다. 그도 외국에 다녀왔다면 필시 굉장한 저서를 낳았을 터이다. 다산이 유배 18년 동안에 육경사서와 정치·경제·행정·역사·지리·언어·국방·의학 등 다방면에 걸쳐 이룬 저서가 모두 500권이 넘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라. 그는 다만 ‘열하일기’를 비롯하여 중국과 일본에 관한 책을 부지런히 찾아 읽었을 뿐이다. 그러나 당대에 큰 반향을 일으킨 연암의 역저 ‘열하일기’는 점차 위축되었다. 그릇된 문체의 본산으로 지목되고 오랑캐 연호를 사용한 원고라는 비난을 들으면서 후손조차 문집 간행을 보류했을 정도다. 나라를 잃은 1911년에 와서야 활자로 간행되었다. 다산의 역저 ‘경세유표’ 등도 빛을 보지 못하다가 조선왕조가 망할 때에 가서야 주목을 받았다. 연암은 문체 문제로, 다산은 천주교 문제로 각각 정조의 지적을 받았지만 두 사람 다 정조에게 능력을 인정받았다. 정조가 죽자 다산은 유배를 가고 연암은 몇 년 후 세상을 떴다. 조선왕조는 망하기 직전인 1910년 다산과 연암에게 시호를 내렸는데 둘 다 ‘문도공’(文度公)이었다. 만시지탄. 그들은 글로써 세상을 바꾸고자 필생의 역저를 남겼다. 그 진가는 뜻있는 독자들에게 달렸다. 김태희(다산연구소 기획실장)
  • [사설] 열대야 정전사고 전기료 인상이 무색하다

    서울지역의 낮 최고기온이 36.7도까지 치솟아 18년 만의 기록적인 폭염이 들이닥친 그제 밤 강남·서초·서대문·마포·노원구 등 10여곳에서 전기가 갑자기 나갔다. 저녁시간대 아파트 밀집지역과 주택가에서 두세 시간씩 정전되면서 열흘째 이어진 열대야에다 경기침체로 말미암은 생활고로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시민들의 ‘정전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 한전 측은 “열대야로 전력사용량이 급증해 변압기에 문제가 생긴 때문”이라며 불가항력의 상황이라고 해명했다. 전력거래소는 어제 오전 한때 전력경보를 발령했다. 예비전력이 300만㎾ 미만으로 떨어지면서 지난해 사상초유의 9·15 대정전사태 이후 처음으로 ‘주의’ 경보가 발령됐다. 정전사고가 발생한 다음 날인 어제는 마침 전기료가 오른 날이다. 정부와 한전은 이날 전기료를 평균 4.9% 올렸다. 지난해 4월 이후 세 차례에 걸쳐 15%나 요금을 올렸지만 아직 멀었다고 한다. 연말에 또 한 차례 인상을 예고하고 있다. 그동안 한전은 우리 국민이 전기를 물쓰듯 펑펑 쓰고 있으며 이는 요금이 너무 저렴한 탓이라고 주장해 왔다. 절전을 유도하기 위한 전기료 현실화 필요성에 공감하지 않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사고만 나면 요금 인상 타령을 하는 한전이 제구실을 다하고 있는지 미덥지 않은 측면이 있다. 올 들어 고리 1호기와 월성 1호기가 잇따라 멈춰선 데 이어 지난달 30일에는 영광 원전 6호기가 발전정지 상태가 됐다. 보령화력 1·2·5호기와 태안화력 2호기에서 화재 등 안전사고로 근로자가 4명이나 숨졌다. 혹독한 구조조정이나 통폐합 등을 통한 경영혁신 없이 전기요금만 올리는 것은 해법이 아니라고 본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발전소의 고장과 사고 은폐, 각종 안전사고 등 부실한 관리는 물론 뇌물사건까지 더해져 한전과 자회사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깊다. 얼마 전 대한전기협회가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보니 현재의 전기요금 수준이 적정하다는 응답이 47.7%였고 비싼 편이라는 대답은 37.4%였다. 국민의 85% 정도가 현재의 전기요금이 적정하거나 오히려 비싸다고 생각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 [생명의 窓] 우리나라 사람들의 경쟁심/오동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생명의 窓] 우리나라 사람들의 경쟁심/오동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우리나라에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는 속담이 있다. 이 속담이 말하는 바는 내가 잘 알고 있는 바로 옆 사람이 잘되면 기분이 나빠진다는 것이다. 이 속담 속에 우리나라 사람의 심성을 엿보는 것 같아서 씁쓸하다. 혹자는 이 속담은 원래 좋은 의미로 사용됐다고 주장한다. 원래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라도 아프다.’라고 했다고 한다. 사촌이 땅을 샀으니 축하는 해야겠는데 가진 것이 없으니 배라도 아파 설사라도 해서 거름을 주겠다는 좋은 의도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일본은 이 속담을 정반대의 의미로 바꾸어 놓았다. 이웃이 잘되는 꼴을 못 보는 심보가 있다는 뜻이 됐다. 우리에게는 이런 놀부 심보가 없는데 일본이 속담의 뜻을 바꾸었고, 그 이후 변질돼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본 때문에 바뀐 속담이 아직 쓰이는 이유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심리를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현대에 사는 우리에게 이런 심리가 없다면 아무리 일본인들이 속담의 뜻을 바꾸었어도 저절로 없어지거나 원래 뜻으로 사용됐을 것이다. 이런 시기와 질투심이 정말로 우리나라 사람에게 특징적일까. 최근 EBS에서 기능성 자기공명촬영(f-MRI)으로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한국 주부와 미국 주부에게 어떤 상황에서 기쁨을 느끼는지 카드 게임을 하게 했다. 카드 게임에서 미국 엄마들은 자신이 점수를 땄을 때에만 기쁨을 느끼는 뇌에 보상 시스템(보상중추)이 활성화되는 반응을 보였다. 상대방의 이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반면 한국 엄마들은 자신이 점수를 땄을 때가 아니라, 상대방보다 더 좋은 점수를 냈을 때에만 보상 뇌가 활성화됐다. 우리나라 엄마는 절대적 이익보다 상대적 이익에 기뻐했다. 자기가 잘돼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남보다 잘됐을 때 행복을 느끼는 것이 한국 엄마들이다. 미국 엄마들은 남과 비교하기보다는 자신의 절대적인 이득에 만족하는 반응을 보였다. 왜 우리는 미국인과 다르게 남과 비교하면서 일희일비하는가. 자원은 제한돼 있고, 그 자원을 원하는 사람이 많아 경쟁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나라는 미국에 비해 좁은 땅덩어리에 빈약한 자원을 갖고, 밀집된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그만큼 더 경쟁을 벌이게 됐다. 미국 사람도 제한된 것을 갖고 경쟁을 한다. 하지만 미국은 더 넓은 땅을 갖고 있다. 미시간주에서 직장을 못 구하면 플로리다주에 있는 회사에 지원서를 낼 수 있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영국이나 호주로 이민 갈 수도 있다. 이도 저도 안 되면, 한국에 와서 영어 강사라도 할 수가 있다. 선택의 폭이 넓기 때문에 미국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보다 덜 경쟁적인 것 같다. 우리나라 사회는 급격히 변해 왔다. 6·25전쟁 이후 폐허가 돼 버린 우리는 미국의 원조가 없이는 살 수가 없었다. 1960년대 후반 초등학생 때 필자도 미국에서 원조받은 옥수수로 만든 빵을 무료로 얻어먹었다. 대부분 아이는 가난했고, 도시락 반찬으로 계란을 싸오면 남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 이후 현재까지 정말로 우리나라는 세계가 놀랄 만큼이나 눈부시게 변했다. 그렇게 변하는 동안에 강남에 살고 있던 가난한 농사꾼이 벤츠를 타고 다니는 졸부가 됐다. 처지가 비슷한 동창생이 아파트를 몇 번 사고팔더니 수십억원대 부자가 돼 있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동안 우리 사회는 심한 변화를 겪었고, 그러는 동안 수준이 비슷했던 주변 사람이 인생 역전되는 것을 보고 배 아파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속담의 뜻이 바뀌어 계속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천지가 개벽하는 것 같은 변화 속에서 경쟁에 뒤처지지 않을까 항상 노심초사한다. 지금 기회를 놓치게 되면 영영 낙오자로 남을 것 같아 불안해진다. 지나치게 경쟁적인 사회에서 살면서 생긴 조급증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긴장을 늦추지 못한다.
  • 고전 속 효성·절개 불편한 진실을 들추다

    고전 속 효성·절개 불편한 진실을 들추다

    그림 형제 동화라고 부르지만 널리 알려졌다시피 이때 동화의 원제는 ‘메르헨’이다. 메르헨의 원뜻을 따지자면 일종의 민속보고서쯤 된다. 공자가 ‘시경’이란 이름으로 주나라 민속보고서를 남겼다면, 그래서 후대의 근엄한 성리학자들이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늘어놔야 했을 정도로 남녀상열지사를 내다버리지 않고 굳이 채록해 뒀다면, 그림 형제의 동화도 매한가지다. 성욕과 잔혹함 같은 인간의 어두운 심연을, 나름대로 숨기고 내쳤으나 다 지울 수는 없었다. 공자의 시경이 후대 들어 중국 언어를 통일시켰다는 평을 받듯, 그림 형제가 원래는 독일어의 문법 통일과 사전 제작에 관여한 언어학자였다는 점도 이채롭다. ‘가족기담’(유광수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은 이런 맥락 위에 서 있다. 민속보고서 작성이 그냥 단순히 시중에 떠돌아다니는 얘기들을 모아 두기만 한 것이 아니라 권력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고 보는 관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사실 시경이나 그림 형제 동화에 대한 이런 분석들은 심심찮게 눈에 띄는데, 우리 전통에 대한 이런 식의 접근은 그다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 역사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는 이유로 양반 사대부들에 대한 얘기는 고독한 사상가나 철인정치의 이상향만 넘쳐나고, 민중들에 대한 얘기에서는 오늘날 노곤해진 도시인들을 다독거리기 위해 푸근하고 정감 넘치고 소박한 농촌 공동체의 이상향을 그려내는 경우가 다반사다. 아무래도 ‘우리’ 얘기이다 보니 예쁘고 곱게 채색하려는 욕망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최대 매력은 ‘교훈적 얘기들 아니었나.’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들을 뒤집어 본다는 데 있다. 저자는 국문학자로서 우리 전통 소설이나 민담을 다룬다. 그런데 ‘가족기담’, 그러니까 가족을 둘러싼 오싹하고 희한한 얘기라는 제목을 붙여 뒀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기괴한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인가 보다 짐작했다면 틀렸다. 홍길동전, 사씨남정기, 구운몽, 흥부전, 심청전, 옹고집전 등 매우 잘 알려졌거나 한번쯤이라도 이름은 들어본 얘기들을 다뤘다. 이런 얘기들이 왜 ‘가족기담’일까. 가령 ‘장화홍련전’을 보자. 생모는 죽고 계모가 들어왔다. 장화 홍련 자매는 구박을 받는다. 그런데 구박하는 이유가 납득하기 어렵다. 생모가 살아 있는 것도 아니다. 계모는 아들까지 낳았다. 전처 소생 딸년 둘이니, 가장 간단한 처리 방법은 시집보내기다. 어쨌든 출가외인이니까. 그런데 아버지 배 좌수는 끝내 딸들을 놓아 주지 않는다. 그렇게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던 배 좌수는 장화가 음란한 여자라는 계모의 속임수에 장화를 죽인다. 홍련은 언니 뒤를 따라 자살한다. 배 좌수는 왜 장화에게 단 한 번도 자초지종을 묻지 않았을까. 계모는 왜 그다음 차례인 홍련을 죽일 음모를 꾸미지 않았을까. 귀신이 되어 억울함을 호소할 때도 가장 큰 피해자인 장화는 묵묵히 뒤에만 서 있을 뿐 홍련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다. 혹시? 머릿속에는 ‘근친상간’이라는 단어가 떠돌아다닌다. 배 좌수가 놓아 주지 않고, 단 한 번도 자초지종을 설명해 보라고 요구하지도 않고, 계모가 그토록 질투했던 이유가 혹시 그것이었을까. 하지만 저자는 그렇다라고 딱 부러지게 확답하지 않는다. 임수정·문근영 두 배우가 출연한 영화 ‘장화, 홍련’에서 선보인 김지운 감독의 해석과 비교해 봐도 좋다. 생모의 죽음, 그리고 그 빈자리를 대신하려는 맏딸의 심리에 집중한 영화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의 장르는 호러이고 역시 가족기담이다. 저자는 이런 방식으로 생산력이 낮던 가혹한 생존조건 아래 가부장제가 드리웠던 어두운 그림자를 한 꺼풀씩 벗겨나간다. 어머니가 먹을 게 없으니 멀쩡한 아들을 생매장하려 들었던 얘기를 아들의 효도로 상찬한 삼국유사의 ‘손순매아’ 얘기를 ‘헨젤과 그레텔’에 비교하고, 손가락쯤은 예사로 끊고 허벅다리쯤은 너끈히 베어다 바쳐야 하고, 툭하면 목매달고 은장도로 찔러 자살하고야 말았다는 얘기들을 잔뜩 묶어 효자니 열녀니 하는 식으로 숭상하는 것이 얼마나 비인간적인지를 조목조목 지적해나간다. 홍길동전도 마찬가지다. 홍길동이라면 의협심과 용맹함을 흔히 떠올린다. 그런데 저자가 보기엔 이상하다. 알려졌다시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처지 때문에 홍길동은 율도국을 세우기에 이른다. 그런데 홍길동도 율도국을 세우고서는 첩을 거느린다. 자기 같은 서자를 만들어 내는 길을 택한 것이다. 아버지는 차별하니까 안 되고 홍길동은 차별 안 할 테니까 된다? 아버지는 강간해서 여자를 취했으니 안 되고, 홍길동은 그러지 않았으니까 된다? 저자는 이렇게 써놨다. “남자들은 자신들만의 향락과 쾌락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길동이 이놈도 역시 남자였던 것이다.” 김만중이 쓴 사씨남정기와 판소리 소설 춘향전의 비교도 흥미롭다. 사씨남정기는 첩인 교씨가 간악한 술수를 부리다 결국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춘향전은 기생 주제에 임금에게서 정렬부인으로 표창까지 받는다. 저자는 교씨와 춘향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무시한다. 어차피 그럴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몰아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결과가 극과 극인 것은 “교씨를 바라보는 시선은 양반의 시선이고, 춘향을 바라보는 시선은 민중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양반은 첩을 품기는 하되 존중하지 않는다.” 반면 “민중에게 첩은 남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이다.” 저자는 결국 뒤틀리지 않은 정상적인 가족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 놓는다. 그래서 만약 심리학자와 함께 책을 썼다면 어땠을까, 혹은 심리학자가 이런 접근을 해 봤다면 어땠을까 궁금해진다. 아, 이 책을 다 읽고 난다면 “쥐뿔도 모르면서~”라고 내뱉긴 어려울 것 같다. ‘쥐 변신 설화’, ‘옹고집전’, 김동인의 ‘배따라기’에 이르기까지 쥐와 성적인 이야기의 상관관계를 쭉 설명해 놨는데 잔혹하다가도 웃기고, 웃기다가 의미심장하다. ‘19금’ 내용이니 직접 읽어 보는 수밖에 없다. 1만 4000원.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요금 못내 전기끊긴 부에노스 아이레스

    요금 못내 전기끊긴 부에노스 아이레스

    남미의 파리로 불리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전기료를 못내 굴욕을 겪고 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전기료 체납으로 전기가 끊겨 공원시설에 조명을 켜지 못하고 있다고 현지 언론이 25일(현지시각) 보도했다. 단전으로 조명을 켜지 못하고 있는 시설은 센테나리오공원, 아일랜드공원 등 7개 공원에 있는 분수다. 라바르덴이라는 길에 있는 시 부속건물도 완전히 전기가 끊겨 사용이 불가능한 상태다. 혹독한 조치를 취한 전기회사 에데수르에 따르면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내지 못하고 있는 전기료는 5090만 페소, 우리나라 돈으로 1116만원 정도다. 망신스러운 사태에 대해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전기료에 대한 중앙정부의 보조금 지급이 부당하게 중단된 탓”이라고 해명했다. 아르헨티나 중앙정부는 예산 절감을 위해 지난해 10월 공공서비스요금에 대한 보조금 삭감을 결정했다. 공공기관도 대상에 포함돼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내는 전기료는 단번에 263%나 올랐다. 사진=노티오 임석훈 남미통신원 juanlimmx@naver.com
  • 車 냉각수 떨어져 값비싼 생수를 넣었더니…

    車 냉각수 떨어져 값비싼 생수를 넣었더니…

    무더위가 이어지는 7월, 당신은 보양식으로 원기를 회복하고 더위를 피한다고 계곡과 바다로 떠난다. 이런 당신을 모시고 다니는 ‘애마’도 더위에 지치기는 마찬가지다. 폭염속 수십도로 달궈진 아스팔트, 거친 장대비를 헤치고 달려야 하는 자동차도 특별한 여름철 보양식이 필요하다. 휴가철 고속도로에서 하얀 연기를 거칠게 내뿜으며 지쳐 쓰러진 자동차를 본다면 그동안 부려 먹기만 하고 돌봐 주지 않은 주인을 탓해야 할 것이다. 이런 낭패를 당하지 않으려면 타이어와 각종 벨트 등의 점검은 필수다. 여름철에 가장 먼저 체크할 것은 ‘냉각수’다. 차량의 시동을 건 상태에서 평평한 곳에 주차시키고 엔진룸에 있는 냉각수 보조 탱크를 본다. 냉각수의 양이 탱크의 로(low)와 풀(full) 사이에 있으면 된다. 냉각수의 양이 모자라면 수돗물을 보충한다. 생수는 철분이 있어 피해야 한다. 다만 겨울철에는 수돗물이 얼어 낭패를 당할 수 있으니 부동액을 넣어주는 것이 좋다. 장거리 주행 때는 차량 계기판의 엔진 온도 게이지를 살피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게이지 바늘이 중간 정도를 가르키는 것이 정상이다. 온도가 평소보다 상승한다면 즉시 차를 세우고 엔진룸을 열어야 한다. 냉각수가 정상인데도 엔진 온도가 올라간다면 긴급 출동서비스를 불러 점검을 받아야 한다. 또 엔진룸을 보면 보통 3~4개의 벨트가 있다. 낡아서 갈라지지는 않았는지 꼼꼼히 살펴보고 손으로 눌러 장력도 점검한다. 벨트가 느슨하면 차량의 발전 및 냉방 능력이 떨어지고 반대로 강하면 ‘삑~삑’하는 소리가 난다. 브레이크는 당신과 가족의 생명에 직결된 만큼 세심하게 점검해야 한다. 브레이크 이상 여부는 쉽게 알 수 있다. 페달을 밟았을 때 평소보다 깊이 들어가면 브레이크 패드나 오일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또 핸드 브레이크를 당기지 않았는데도 계기판에 주차 브레이크 경고등이 들어오거나 페달을 밟을 때 ‘삑삑’ 소리가 나지 않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여름에는 전조등, 에어컨, 와이퍼 등의 작동이 많아져 배터리가 빨리 소모 된다. 일반 배터리의 경우 전해액이 적정 수준인지 주기적으로 체크하고 필요하면 증류수를 보충하는 게 좋다. 또 차량 앞유리를 닦아주는 와이퍼도 중요하다. 와이퍼 작동 여부는 물론 앞유리와 접촉상태, 워셔액 분사노즐의 상태와 각도 등도 눈여겨본다. 워셔액도 가득 채우고 떠나는 게 좋다. 비가 오면 무엇보다 속도를 평소보다 20~25% 줄이는 ‘감속 운전’이 필수. 누구나 다 알지만 실천하는 운전자는 많지 않다. 비가 오는 도로는 평상시보다 미끄러워 차량의 제동 거리가 길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장대비는 운전자의 시야를 가릴 수 있어 더욱 조심해야 한다. 때문에 차간 거리도 평소보다 1.5배 이상 길게 유지하는 것이 좋다. 뙤약볕 아래 주차된 차는 숨이 막힐 듯한 고온이 문제다. 그늘에 주차한 차와는 달리 차량 실내 온도가 70도 가까이 상승할 수도 있다. 차량 실내 온도를 낮추기 위해서 반대편 창문을 내리고 차 문을 4~5회 정도 여닫기를 반복하면 공기가 순환돼 온도가 금방 떨어진다. 게릴라성 집중 폭우로 일시에 하천이나 계곡물이 범람해 자동차가 훼손되는 경우가 많다. 침수 피해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자동차보험의 자기차량 손해에 꼭 가입해 두는 것이 좋다. 자차 보험을 들어두면 주차뿐 아니라 운행 중 피해도 보상받을 수 있다. 혹시 자차보험에 들지 않았다면 중간에 가입할 수도 있으니 보험사로 문의해 보는 게 좋다. 중요한 것은 차량의 문이나 선루프 등을 열어놓아 생기는 침수 피해는 보상이 되지 않다. 또 트렁크나 차 안에 둔 물건에 대해서도 보상이 되지 않는다. 가급적 차 창문을 닫고 차내에는 아무것도 두지 않는 편이 좋다. 혹시 출발하면서 점검을 하지 못했다면 국내 보험사들이 휴가지에서 펼치는 무상점검 서비스를 이용해도 좋겠다. 삼성화재는 28일부터 다음 달 11일까지 남해 상주해수욕장 등에서, 현대해상은 27일부터 사흘간 부산 해운대 등에서, 동부화재는 30일부터 다음 달 10일까지 인천 영종도 기념관 휴게소에서, LIG손해보험은 16일부터 다음 달 17일까지 강원 강릉 경포대 등 12개 해수욕장에서 30여개 항목을 무료로 살펴주고 시원한 생수 등도 나눠준다.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땡볕에선 애마도 車빙수 땡긴답니다

    땡볕에선 애마도 車빙수 땡긴답니다

    무더위가 이어지는 7월, 당신은 보양식으로 원기를 회복하고 더위를 피한다고 계곡과 바다로 떠난다. 이런 당신을 모시고 다니는 ‘애마’도 더위에 지치기는 마찬가지다. 폭염속 수십도로 달궈진 아스팔트, 거친 장대비를 헤치고 달려야 하는 자동차도 특별한 여름철 보양식이 필요하다. 휴가철 고속도로에서 하얀 연기를 거칠게 내뿜으며 지쳐 쓰러진 자동차를 본다면 그동안 부려 먹기만 하고 돌봐 주지 않은 주인을 탓해야 할 것이다. 이런 낭패를 당하지 않으려면 타이어와 각종 벨트 등의 점검은 필수다. 여름철에 가장 먼저 체크할 것은 ‘냉각수’다. 차량의 시동을 건 상태에서 평평한 곳에 주차시키고 엔진룸에 있는 냉각수 보조 탱크를 본다. 냉각수의 양이 탱크의 로(low)와 풀(full) 사이에 있으면 된다. 냉각수의 양이 모자라면 수돗물을 보충한다. 생수는 철분이 있어 피해야 한다. 다만 겨울철에는 수돗물이 얼어 낭패를 당할 수 있으니 부동액을 넣어주는 것이 좋다. 장거리 주행 때는 차량 계기판의 엔진 온도 게이지를 살피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게이지 바늘이 중간 정도를 가르키는 것이 정상이다. 온도가 평소보다 상승한다면 즉시 차를 세우고 엔진룸을 열어야 한다. 냉각수가 정상인데도 엔진 온도가 올라간다면 긴급 출동서비스를 불러 점검을 받아야 한다. 또 엔진룸을 보면 보통 3~4개의 벨트가 있다. 낡아서 갈라지지는 않았는지 꼼꼼히 살펴보고 손으로 눌러 장력도 점검한다. 벨트가 느슨하면 차량의 발전 및 냉방 능력이 떨어지고 반대로 강하면 ‘삑~삑’하는 소리가 난다. 브레이크는 당신과 가족의 생명에 직결된 만큼 세심하게 점검해야 한다. 브레이크 이상 여부는 쉽게 알 수 있다. 페달을 밟았을 때 평소보다 깊이 들어가면 브레이크 패드나 오일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또 핸드 브레이크를 당기지 않았는데도 계기판에 주차 브레이크 경고등이 들어오거나 페달을 밟을 때 ‘삑삑’ 소리가 나지 않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여름에는 전조등, 에어컨, 와이퍼 등의 작동이 많아져 배터리가 빨리 소모 된다. 일반 배터리의 경우 전해액이 적정 수준인지 주기적으로 체크하고 필요하면 증류수를 보충하는 게 좋다. 또 차량 앞유리를 닦아주는 와이퍼도 중요하다. 와이퍼 작동 여부는 물론 앞유리와 접촉상태, 워셔액 분사노즐의 상태와 각도 등도 눈여겨본다. 워셔액도 가득 채우고 떠나는 게 좋다. 비가 오면 무엇보다 속도를 평소보다 20~25% 줄이는 ‘감속 운전’이 필수. 누구나 다 알지만 실천하는 운전자는 많지 않다. 비가 오는 도로는 평상시보다 미끄러워 차량의 제동 거리가 길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장대비는 운전자의 시야를 가릴 수 있어 더욱 조심해야 한다. 때문에 차간 거리도 평소보다 1.5배 이상 길게 유지하는 것이 좋다. 뙤약볕 아래 주차된 차는 숨이 막힐 듯한 고온이 문제다. 그늘에 주차한 차와는 달리 차량 실내 온도가 70도 가까이 상승할 수도 있다. 차량 실내 온도를 낮추기 위해서 반대편 창문을 내리고 차 문을 4~5회 정도 여닫기를 반복하면 공기가 순환돼 온도가 금방 떨어진다. 게릴라성 집중 폭우로 일시에 하천이나 계곡물이 범람해 자동차가 훼손되는 경우가 많다. 침수 피해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자동차보험의 자기차량 손해에 꼭 가입해 두는 것이 좋다. 자차 보험을 들어두면 주차뿐 아니라 운행 중 피해도 보상받을 수 있다. 혹시 자차보험에 들지 않았다면 중간에 가입할 수도 있으니 보험사로 문의해 보는 게 좋다. 중요한 것은 차량의 문이나 선루프 등을 열어놓아 생기는 침수 피해는 보상이 되지 않다. 또 트렁크나 차 안에 둔 물건에 대해서도 보상이 되지 않는다. 가급적 차 창문을 닫고 차내에는 아무것도 두지 않는 편이 좋다. 혹시 출발하면서 점검을 하지 못했다면 국내 보험사들이 휴가지에서 펼치는 무상점검 서비스를 이용해도 좋겠다. 삼성화재는 28일부터 다음 달 11일까지 남해 상주해수욕장 등에서, 현대해상은 27일부터 사흘간 부산 해운대 등에서, 동부화재는 30일부터 다음 달 10일까지 인천 영종도 기념관 휴게소에서, LIG손해보험은 16일부터 다음 달 17일까지 강원 강릉 경포대 등 12개 해수욕장에서 30여개 항목을 무료로 살펴주고 시원한 생수 등도 나눠준다.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일본통신] 이대호의 오릭스는 대체 어떤 팀일까 ①

    [일본통신] 이대호의 오릭스는 대체 어떤 팀일까 ①

    인터넷을 포함한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안방에서 해외야구를 즐기는 시대가 된지 오래다. 이제 웬만한 야구팬들은 메이저리그 팀은 물론, 선수에 대한 정보는 손 쉽게 찾아볼수 있게 됐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인 박찬호(한화 이글스)의 영향이 컸다. 그래서 아직도 박찬호가 처음 뛰었던 LA 다저스를 버리지 못하고 팬으로 남아 있는 야구팬이 많다. 메이저리그 팀과의 첫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세월이 흐른 지금 박찬호가 뛰었던 LA 다저스 뿐만 아니라 이젠 추신수가 활약하고 있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역시 한국 야구팬들에겐 친숙한 팀이 됐다. 그리고 추신수로 인해 메이저리그 팬이 된 사람도 그만큼 늘고 있다. 그런데 야구가 대중적인 스포츠로 인정 받은지 오래인 지금, 메이저리그에 비해 일본 프로야구(NPB)를 알고 있는 팬들은 적다. 이것은 상대적인 것에 기인한다. 메이저리그 라고 하면 최고의 선수들이 뛰는 무대라고 자연스럽게 인정을 하지만 일본은 국제대회에서의 영향 때문인지 우리와 비교해 한번 해볼만하다는 생각이 대중들의 머리속에 박혀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한국과 일본이 맞붙는다면 질 확률은 높지만 그래도 A클래스 선수들끼리 만난다면 충분히 이길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가 마음속에 내포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메이저리그에 비해 일본 프로야구를 알고 있는 야구팬들이 적다. 또 하나는 일본야구 하면 세밀한 야구라는 보편적인 인식이 팬들의 머리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도 이유 중 하나다. 혹자들중 메이저리그 하면, 힘을 바탕으로 한 호쾌한 야구 그리고 일본야구 하면 번트와 작전이 많은 또한 분석력이 뛰어난 야구를 한다고 정답처럼 말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이건 잘못된 편견이다. 일본보다 메이저리그가 훨씬 더 분석적이고 그 분석 속에서 나오는 수많은 데이터는 일본에 비할 바가 아니다. 야구가 기록의 스포츠라는 관점에서 봤을때 77년의 일본 야구가 140년이 훌쩍 넘은 메이저리그의 시스템을 따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마도 일본 야구에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던 야구팬들 중, 상당수는 이러한 이유(작전이 많은 야구는 재미가 없다는) 때문이다. 동경의 대상이란 비교할수 없는 미지의 대상이지 번트를 비롯한 작전이 많고, 상대를 분석하려고만 하는 일본야구는 그 ‘동경의 대상’과는 거리가 멀다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덧붙여 벌써 수 많은 한국인 선수들이 일본에서 뛰었고, 그리고 지금도 활약하는 선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프로야구를 제대로 알고 있는 팬들은 생각보다 적다. 물론 현재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는 이대호(오릭스 버팔로스)나, 임창용(야쿠르트 스왈로즈), 그리고 김무영(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영향으로 인해 관심이 큰 것은 당연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한국인 선수들의 활약을 보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 오릭스의 경기가 끝나면 이대호의 성적을 알아보려는 팬들은 부지기수지만 이대호가 소속돼 있는 오릭스 버팔로스 선수들의 기록이나 특정 선수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성적에 관심을 두는 팬들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과거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했던 선수들 중 성공한 이는 별로 없다. 기껏해야 과거 구대성과 선동열, 그리고 임창용 정도만 성공 했다고 평가할만 하다. 만약 이대호마저 일본에서 실패를 한다면 당분간 일본에 진출해 성공 할 타자는 없다. 라는 인식, 그리고 이대호가 성공해야만 향후 일본에서 바라보는 한국 프로야구에 대한 평가 역시 긍정적이란 건 누구나 알고 있다. 즉, 현재 이대호는 이대호 본인 뿐만이 아니라 후배 선수들의 미래까지 책임을 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올 시즌 이대호는 초반 부진을 뒤로 하고 가면 갈수록 맹타를 휘두르고 있다. 이대호에 관한 이야기는 밑에서 하기로 하고 서론에서 언급한 일본 프로야구, 그리고 오릭스 버팔로스 팀에 대해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지금 이대호가 어떠한 리그에서 뛰고 있는지, 그리고 일본 프로야구는 도대체 어떻게 시작돼 지금에 이르게 됐는지, 덧붙여 만년 하위권이란 오명을 뒤집어 쓰고 있는 오릭스 버팔로스의 올 시즌 성적은 어떻게 될 것인지는 반드시 알고 가야 한다. 왜냐하면 단지 이대호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그 나라의 야구 역사와 풍토, 그리고 우리가 보편적으로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들이 좋은 회사에 취직을 했는데 그 회사가 뭘 하는 회사인지를 모른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또한 이해함에 있어서 덧셈 뺄셈을 하지 못하면 곱하기 나누기를 할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일본 프로야구의 태동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그 중심엔 일본 최고의 인기 구단인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결코 빼놓을수 없다. “미국의 현대사를 알고 싶다면 메이저리그 역사를 알면 된다.” 라는 것도 미국 야구 역시 미국 현대사와 함께 그 궤를 같이해 왔고 일본 또한 상황이 전혀 다르지 않다. 특히 그중에서도 요미우리의 역사를 알면 그것은 곧 일본 프로야구 역사를 아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다. 요미우리는 1931년 ‘대일본 동경야구 구락부’ 이라는 이름으로 창단됐다. 그리고 본격적인 프로리그가 시작된 1936년 ‘도쿄 교진군’이란 이름으로 정식적으로 출범한다. 요미우리가 프로리그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미국의 영향 때문이다. 1931년 메이저리그 대표팀이 일본 대표팀의 초청으로 친선경기를 가진적이 있는데 그 경기 이후 일본 대표팀 선수들이 야구에 관심이 많던 요미우리 신문사 사장(쇼리키 마쓰타로)에게 프로 야구팀을 창설할 것을 강력하게 건의했고 그해 12월 ‘대일본 동경야구 구락부’ 라는 팀을 모체로 일본 최초의 팀이 창설되었다. 이후 1935년 요미우리는 미국으로 원정 경기를 떠나는데 팀 이름이 너무나 길다는 미국 측의 요청으로 ‘대일본 동경야구 구락부’ 대신 ‘도쿄 자이언츠’로 급작스럽게 팀 명을 변경했고 일본으로 귀국한 후 다시 ‘도쿄 교진군’으로 변경해 이듬해인 1936년 ‘도쿄 교진군’ 이란 정식 팀명을 사용한다. 그러니까 지금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시작인 셈이다. 그해 미국으로 2차례 원정 경기를 떠났던 요미우리는 일본으로 돌아와 7개팀이 모여 만든 ‘일본 직업 야구 연맹’을 결성한다. 일본 프로야구 역사를 언급할때 올해로 77년의 역사라고 일컫는 것도 1936년 ‘도쿄 교진군’으로 출발한 요미우리를 기준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후 일본은 1949년까지 단일리그를 시행하다 이듬해인 1950년에 지금의 양대 리그(센트럴리그, 퍼시픽리그)체제로 출범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단일리그 시절엔 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1945년 딱 한 차례 시즌이 열리지 않았을 뿐이다. 단일리그의 7개팀은 도쿄 교진군을 포함해 오사카 타이거즈(지금의 한신 타이거즈), 나고야군(지금의 주니치 드래곤스), 한큐군(지금의 오릭스 버팔로스), 도쿄 세네터스, 나고야 긴코군, 다이도교군 이렇게 7개팀이 있었는데 이 기간동안 요미우리가 8차례 우승을 차지, 명실상부한 일본 최고의 인기팀으로 부각되기 시작한다. 지금 현재 최고의 투수에게 수여되는 사와무라 에이지상 역시 당시 도쿄 교진군(1937-1943년)에서 활약했던 사와무라 에이지를 기리기 위한 상으로 사와무라는 도쿄 교진군 시절 최고의 에이스였다. 1950년 양대리그 출범 후 현재 각 리그 별로 6개팀이 있는데 그 세월만큼 팀 이름도 자주 변경돼 왔다. 먼저 센트럴리그를 보면, 요미우리는1947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주니치는 1948년부터 주니치 드래곤스(중간에 한번 나고야 드래곤스로 바뀌었음)로, 오사카 타이거즈는 몇번 팀명이 바뀐 후 1961년부터 지금의 한신 타이거즈로, 야쿠르트 스왈로즈는 1974부터 이어오다 2006년부터 지금의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그리고 히로시마는 양대리그 첫 해인 1950년 히로시마 카프에서 1968년부터 지금까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요코하마는 수없이 많이 팀 명이 변경돼 오다 1993년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에서 올해부터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로 바뀌었다. 퍼시픽리그의 소프트뱅크는 난카이 호크스 등 여러번 팀 명이 변경됐지만 2004 시즌 후 다이에 호크스가 재일교포인 손정의 회장에 매각되면서 2005년부터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가 됐다. 지바 롯데 역시 1992년부터 지금까지 지바 롯데 마린스, 세이부는 니시테츠 라이온스 등을 거치며 2007년까지 세이부 라이온스에서 2008년부터는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로 불리고 있다. 이대호의 소속팀인 오릭스 또한 여러번 팀명이 변경돼 오다가 2004년 시즌 후 긴테츠 버팔로스와 오릭스 블루웨이브가 합병하며 지금의 오릭스 버팔로스로 불리고 있다. 니혼햄도 수없이 많이 팀 명이 변경돼 오다 니혼햄 파이터스에서 2004년부터 지금의 홋카이도 니혼햄 파이터스로 팀 명이 바뀌었다. 한때 김병현의 소속팀이었던 라쿠텐은 2004년 긴테쓰와 오릭스의 합병 당시 통합 구단의 지명을 받지 못한 선수들로 구성된 팀을 가지고 2005년 신생팀으로 창단해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2편에서 계속) 일본야구통신원 윤석구 http://hitting.kr/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86)삼척 도계리 긴잎느티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86)삼척 도계리 긴잎느티나무

    다큐멘터리 영화 ‘말하는 건축가’로 관심을 모은 건축가 고 정기영 선생은 생전에 펴낸 책 ‘서울 이야기’(현실문화 펴냄)에서 “나의 집은 백만 평”이라고 했다. 집을 소유의 의미로가 아니라, 삶을 누리는 공간, 혹은 시선이 머무는 공간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또 자주 찾아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명륜동 성균관 앞 마당을 꼽으며, 그곳을 자신의 정원이라고 했다. 성균관 앞마당은 자신만큼 아끼는 사람들이 여럿 있으니, 홀로 즐기는 공간이 아니라, ‘함께 향유하는 정원’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건축물에 삶의 향기, 시간의 풍진, 자연의 생명을 담으려 애쓴 그는 자연이 지은 풍경을 해치지 않고, 자연에 기대어 지은 집이어야 건강한 삶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무 앞의 공원은 아이들의 정원 “나무 앞의 공원이 바로 우리 아이들의 정원이에요. 세상에 이만큼 좋은 정원이 어디 있겠어요. 그야말로 최고의 느티나무 그늘이잖아요. 이 아름다운 정원에서 아이들이 책도 읽고, 노래도 부르며 노는 걸 바라보는 게 제일 큰 행복이죠. 하늘이 지어준 정원에서 사람을 짓는다고 할까요.” 강원 삼척 도계읍 도계리, 우리나라의 느티나무 가운데 가장 먼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가 있는 마을이다. 나무 앞에 나지막이 자리 잡은 파란 슬레이트 지붕의 지역아동센터에서 아이들을 보살피는 시설장 이이순(62)씨는 서슴없이 나무를 ‘우리 나무’ 나무 앞의 공원을 ‘우리 정원’이라고 말한다. 20년 째 자원봉사활동을 이어온 이씨가 나무 바로 앞에 지역아동센터를 건축한 건 2004년, 처음 자리 잡을 때부터 큰 나무가 있는 곳이어서 아이들을 건강하게 보살피기 위해서는 더 없이 좋은 위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도계리 느티나무에는 ‘긴잎’이라는 접두사가 붙어있다. 느티나무는 잎의 생김새에 따라 긴잎느티나무와 둥근잎느티나무로 나누기도 한다. 속리산 지역에서 발견되는 비교적 동그란 잎의 나무는 둥근잎느티나무로, 강원과 경남 지역에서 발견되는 좁고 길쭉한 잎을 가진 나무를 긴잎느티나무라고 구분한 이름이다. 하지만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그들의 구별은 쉽지 않다. 도계리 느티나무를 처음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일제 식민지 때의 조사에서는, 긴잎느티나무를 ‘조선의 특산’이라고까지 했다. 그러나 이는 생육 환경에 따른 약간의 차이로, 굳이 이를 나누지 않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실제로 산림청의 국가식물표준목록에서도 긴잎느티나무, 둥근잎느티나무를 모두 느티나무 동일종으로 취급했다. ●키 20m·줄기둘레 9m 국내 最大·最古 느티나무 키 20m, 줄기둘레 9m라는 거대한 덩치의 도계리 긴잎느티나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느티나무에 속한다. 1988년 태풍을 맞아 나무 줄기의 윗 부분이 부러져 수형의 균형이 흐트러지고, 키도 조금 줄었지만, 여전히 가장 큰 키의 느티나무다. 1910년대에 이 나무를 조사한 일본인 연구자들은 당시 나무의 키를 26m로 기록에 남겼다. 땅에서 4m쯤 올라온 자리에서 일곱 개로 나뉜 가지는 동서로 25m, 남북으로 24m를 펼치며 넓은 그늘을 드리웠다. 보호 울타리가 있어서 그늘 깊숙한 곳으로 들어설 수야 없지만, 울타리 바깥에서도 나무그늘은 충분히 즐길 수 있다. 태양의 방향에 따라 주변에 골고루 삽상한 그늘을 드리우며 나무는 찾아오는 모두를 품어 안는다. 나이는 무려 1000년을 넘었다. 우리나라의 모든 느티나무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 된 나무라는 이야기다. 줄기 곳곳에 두드러지게 드러낸 혹과 몇 차례에 걸친 외과수술 흔적에는 나무가 겪어온 세월의 풍진이 고스란히 담겼다. 나이를 거꾸로 계산해보면 고려 말, 조선 건국 즈음에도 이미 400살 가까이 된 큰 나무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건국 당시 정치적 혼란을 피해 고려의 선비들은 이 나무를 은신처로 삼아 훗날을 기약하며, 자손과 후학을 양성했다는 이야기는 그래서 맥락에 닿는다. 학문 도야의 현장이었다는 이야기 탓에 예전에는 입시 철만 되면 학부모들이 찾아와 치성을 올리는 나무였다고도 한다. 물론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운 풍습이다. 마을의 평안을 지켜주는 서낭당 나무로서 살아오던 나무였는데, 한때에는 이 자리에 도계중학교가 있었다. 학교 운동장에서 서낭제를 올리는 데에 적잖이 불편함을 느끼던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다른 나무로 서낭당을 옮기려고 했다. 그때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 내리치며 노여움을 표시하는 바람에 서낭당은 그대로 두고 나중에 학교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나무의 기를 받아 건강하게 자라는 아이들 “아이들과 글쓰기를 할 때도 있어요. 특별히 주제를 지정해 주지 않으면 우리 나무를 주제로 글을 쓰는 아이들이 많아요. 아이들은 ‘느티나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그늘이 되는 너그러운 사람’이라든가, ‘우리 느티나무처럼 크고 뜸직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내용의 글을 많이 써요.” 느티나무 그늘에 들어서 느티나무를 바라보며 자신의 정원처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느티나무의 너그러움과 생명력이 자연스레 닿은 결과이지 싶다. ‘받은 만큼 베푼다’는 삶의 이치가 아이들의 글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자연의 큰 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아이들이어서인지, 심성이 고운데다 마음 씀씀이가 참 너그러워요.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자라는 것도 느티나무의 기운을 받은 탓 아니겠어요.” 이씨는 비가 새는 허름한 집에서 아이들의 잠자리 걱정으로 날을 새워야 하지만, 느티나무 정원에서 도담도담 자라나는 아이들을 돌볼 수 있는 것은 더 없이 즐거운 일이라고 강조한다. 하늘이 지은 천상의 느티나무 정원에서 펼치는 생명 예찬이다. 글 사진 삼척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 가는 길 강원 삼척시 도계읍 도계리 287-2. 중앙고속국도의 제천나들목으로 나가서 영월 태백 방면으로 간다. 태백시의 황지교사거리에서 국도 38호선을 이용해 14㎞ 가면 도계읍에 닿는다. 도계삼거리에서 도계강교를 건너서 도계역 앞에서 좌회전하여 400m 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에서 오른쪽으로 난 다리를 이용해 개울을 건넌 뒤 우회전한다. 다시 400m 가면 오른쪽으로 도계전산정보고등학교가 나오고, 학교 맞은편의 마을 공원에 나무가 있다. 자동차는 도로변의 노견주차장에 세우면 된다.
  • 지방의장단 선거 곳곳서 ‘구린내’

    지방의장단 선거 곳곳서 ‘구린내’

    지방의회에 구린내가 진동하고 있다. 의장단 선거를 하면서 금품 살포가 난무하고 담합과 자리 나눠 먹기 등도 물밑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비리 연루 예천 군의원 자살 이로 인해 지난 10일 경북 예천군의회 A의원이 목을 매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A의원은 군의회 의장단 선거에서 자신이 의장에 선출되도록 도와 달라며 다른 의원에게 1000만원을 건넨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아 왔다. 예천군 주민들과 의원들은 충격에 빠진 채 이번 기회에 의장단 선거를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 같은 금품 살포는 예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최근 실시된 경북도의회 의장단 선거에서도 부의장에 출마한 후보 2명이 동료 의원들에게 금품을 건넸다는 제보가 경북도선관위에 접수됐다. 도선관위는 도의회 전체 의원 16명을 참고인으로 불러 조사를 벌였다. 민주통합당 충남도당은 10일 논산시의회 의장단 선거 금품수수 의혹에 대해 검찰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후보로 나섰던 민주당 김형도 의원이 “모 정당 관계자가 모 의원에게 1차 500만원, 2차 4000만원을 제공했으며 또 다른 의원에게도 금품이 살포됐다는 얘기가 시의회에서 돌고 있다.”고 주장한 데 따른 것이다. 경남 의령군 의회 의장 선거와 관련해서도 금품살포 의혹이 제기됐다. 의령진보연합 회원 10여명은 지난 10일 기자회견을 갖고 이와 관련한 진상조사를 촉구했다. 전주지검 남원지청은 지난 3일 남원시의회 B의원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검찰은 B의원이 의장선거에서 도와 줄 것을 부탁하며 동료 의원에게 500만원을 건넨 정황을 잡고 수사 중이다. ●경북도·논산시 등 금품살포 의혹 의장 선거과정에서 담합과 나눠 먹기도 심각한 수준이다. 대구 달서구의회에서 후반기 의장단 임기를 나눠 맡기로 밀약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김주범 의원은 “최근 의장 선거와 관련, 한 의원이 자신을 지지해 주면 ‘의장직을 일정기간 맡은 후 자리를 물려주겠다’는 제안을 한 사실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지난 2일 치러진 후반기 부산시의회 의장단과 상임위원장 선출과정에서도 의원간 ‘줄세우기’ 구태가 반복됐다. 의장단과 상임위원장 후보로 모두 17명이 난립하면서 의원 간 ‘네편 내편’을 확인하거나 혹은 ‘내 사람 만들기’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변칙선거로 전락해 버렸다. 선거의 후유증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경북 구미시의회는 최근 의장단을 선출하려 했으나 의장과 부의장만 선출하고 3명의 상임위원장은 선출하지 못했다. 의장과 부의장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두 패로 나뉜 시의원들이 상임위원장 자리를 놓고 대립하며 합의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천 서구의회는 지난 8일 일부 의원만 모인 채 기습적으로 후반기 의장단을 구성해 구설수에 올랐다. 당시 민주당 소속 의원 6명은 회의가 속개될 줄 모른 채 의회사무실에 대기한 상태였으며 새누리당 의원 7명만 모여 의장단을 선출했다. 부산 연제구의회는 지난 2일 예정됐던 하반기 의장선거가 의원들 간 의견이 엇갈리면서 무산됐다. 10명의 의원 중 6명이 출석하지 않았다. 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하면서 처리될 예정이었던 행정사무감사보고서 채택과 회계연도결산 등의 안건 처리가 연기됐다. ●구미시·인천 서구 등 상임위 놓고 두쪽 의장 선거에 목을 매는 것은 의장에 당선될 경우 엄청난 혜택이 있어서다. 모든 행사 때 의회 대표로 단체장과 같은 예우를 받는다. 의장 직위를 이용한 정치적인 행보도 넓힐 수 있다. 운전기사와 함께 전용 관용차가 제공되고 수행비서뿐 아니라 매달 420만원(광역의회 기준)의 업무추진비를 쓸 수 있다. 의회 전문의원에 대한 인사권도 행사할 수 있다. 부의장은 의장의 절반 정도의 업무추진비를 받고 일반의원은 별다른 지원이 없다. 대구 한찬규기자·전국종합 cghan@seoul.co.kr
  • “말뚝테러 항의” 日대사관에 1톤트럭 돌진

    “말뚝테러 항의” 日대사관에 1톤트럭 돌진

    일본 극우파의 ‘위안부 소녀상 말뚝 테러’와 집단자위권 행사 움직임 등으로 반일 감정이 높아진 가운데 60대 남성이 화물차를 몰고 주한 일본대사관으로 돌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日정부 항의… 외교부 “유감” 서울 종로경찰서는 9일 위안부 소녀상 말뚝 테러에 항의하기 위해 화물차로 일본대사관 정문을 들이받은 김모(62)씨를 붙잡았다고 밝혔다. 김씨는 이날 오전 4시 55분쯤 1t 화물차를 몰고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정문을 들이받았다. 이 사고로 대사관의 미닫이형 철제문이 1m가량 뒤로 밀렸지만 인명 피해는 없었다. 경찰은 이날 김씨에 대해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김씨는 경찰 조사에서 “일본 사람은 소녀상 앞에 말뚝까지 박았는데 내가 내 나라에서 이 정도도 못하냐.”면서 “대사관 정문을 뚫고 들어가 ‘말뚝을 박은 일본인을 구속하라’고 외치려 했지만 문이 안 열려 실패했다.”고 진술했다. 김씨는 ‘위안부 소녀상 앞에 말뚝을 박은 너희의 행위는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 혹 내가 죽으면 화장해 독도 앞바다에 뿌려 달라.’는 내용의 메모지 2장을 갖고 있었다. 김씨는 “정부가 일본 극우파의 만행에 너무 미온적으로 대응해 실망했다.”면서 “나라도 응징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덧붙였다. 골동품 수집상인 김씨는 지난달 28일과 지난 2일, 5일 등 3차례에 걸쳐 대사관 주변을 살폈으며, 김씨의 트럭 옆면에는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적힌 대형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경찰은 “김씨가 일본과 관련한 집회·시위 등에 참가한 전력이 없고 특정 단체 소속도 아니다.”라고 밝혔다. ●외교부, 말뚝테러 일본인 입국 불허 일본 정부는 주한 일본대사관을 통해 외교통상부에 항의의 뜻을 전달하고 재발 방지를 요구했다. 후지무라 오사무 일본 관방장관도 기자회견에서 엄중히 항의하고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라고 요구했다고 밝혔다. 외교통상부는 이에 대해 “주한 일본대사관에 유감을 표했다.”면서 “대사관 앞 경비 강화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할 방침”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말뚝 테러를 저지른 일본인 스즈키 노부유키에 대해 입국 불허조치가 내려졌다.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 안신권 소장은 이날 “지난 4일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10명이 서울출입국관리소에 제출한 스즈키에 대한 입국 불허 신청이 받아들여졌다고 오늘 연락받았다.”고 밝혔다. 김동현·김미경기자·도쿄 이종락특파원 moses@seoul.co.kr
  • [씨줄날줄] 부모 역할/주병철 논설위원

    우리 속담에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이 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이르는 말이다. 부모는 자식이 못나도 끊임없이 사랑하지만, 자식은 그러지 않을 때가 많다. 물론 치사랑이 없는 건 아니다. 어느 노()배우가 종교 방송에 나와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다. “ 몸이 불편한 어머니의 대소변을 받아낼 때 정말 냄새가 구수했다.”며 울면서 말했다. 그러고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어머니가 저를 낳아 대소변을 받아낼 때 너무 구수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떠올랐습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역할은 어떻게 하면 잘하는 걸까. 한도 끝도 없는 얘기지만 1962년 미국 심리학자 토머스 고든이 개발해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17명의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처음 실시한, 부모를 위한 훈련프로그램인 ‘효과적인 부모 역할 훈련’이 해답의 출구가 될지 모르겠다. 이 프로그램은 책으로도 나왔는데, 고든은 ‘부모 역할 대화법’이라는 주제를 통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라. 하나가 되기보다 ‘함께’하라. 적극적인 듣기로 말문을 열어라.” 등을 제시했다. 옛 성현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황은 ‘퇴계집’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했다. “대개 집안의 자식은 부모가 미리 가르치고 억제하지 않으면 반드시 방자하게 되고, 이어 끝없이 방자하다가 혹 어미를 꾸짖는 데까지 이르나, 이것은 자식도 물론 자식의 도리를 못한 것이지만 자식을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한 부모 또한 잘못이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행복의 철학’에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애정이 가치가 있다는 것은, 주로 그것이 다른 어떤 애정보다도 믿을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식한테 부모가 가장 의지가 되는 것은 불행한 때이다. 이를테면 병에 걸렸 때 같은. 만일 올바른 부모라면 자식이 죄에 빠졌을 때도 그러하다.” 얼마 전 정부가 지적 능력이나 의사소통 능력이 떨어지는 발달장애인을 지원하기 위해 퇴직교사, 사회복지사, 법무사, 변호사 등을 이들의 성년후견인으로 위촉해 ‘부모 역할’을 대신해 주는 제도를 추진하기로 했다고 한다. 발달장애 성인을 대상으로 국가가 보호해 주겠다는 것이다. 발달장애인은 전국적으로 18만 3000명가량인데, 10명 중 9명은 혼자서 일상생활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후견인들이 정말 친(親)부모처럼 역할을 잘 해줬으면 좋겠다. 정부는 제도의 실효성을 위해 이들의 자립에 필요한 대책 등을 더 챙기고, 후견인제 악용 사례가 없도록 각별히 유의해야겠다. 주병철 논설위원 bcjoo@seoul.co.kr
  • [서울광장] 대선용 ‘꼼수정당’ 더이상 안된다/최광숙 논설위원

    [서울광장] 대선용 ‘꼼수정당’ 더이상 안된다/최광숙 논설위원

    요즘 강릉 단오제가 한창이다. 지금이야 단오제는 유네스코까지 인정한 문화유산이지만 어릴 적만 해도 왁자지껄한 시골 장터 수준이었다. 오락이 없던 그 시절 유랑 서커스단의 공연은 단연 인기 최고였다. 자리가 꽉 차 서서 구경할 정도로 사람들로 붐볐다. 하지만 단오가 끝나면 모든 것이 변했다. 강릉시내 남대천변의 유랑 서커스단이 먼저 사라졌다. 둥글고 높게 쳐놓았던 서커스단의 가설무대 천막이 걷히면 왠지 가슴이 휑했다. 며칠 내내 불을 밝히고 요란한 음악으로 사람을 홀리다가 짐을 꾸려 어디론가 떠나버린 서커스단이 어린 마음에는 야속했다. 요즘 정치권을 보면 혹 단오철마다 손님을 유혹하던 유랑 서커스단 같은 ‘유랑정당’이 또 등장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얼마 전 이종걸 민주당 최고위원이 안철수 서울대 교수의 대선 출마를 놓고 ‘가설정당’(서류로 등록된 페이퍼정당) 방식을 통한 민주당과의 합당 가능성을 제시했다. 안 교수가 민주당에 들어오지 않으니 제3의 가설정당을 만들어 민주당원들이 그곳으로 입당하고, 안 교수와 지지세력들도 그리 들어와 거기서 대선 경선을 치르자는 것이다. 다행히도 민주당 내에서 “무슨 정당이 떴다방이냐.”등의 호된 질책이 나오면서 가설정당 얘기는 쏙 들어갔다. 그렇지만 실체 없는 정당을 한시적으로 만들면서까지 안 교수를 끌어들이고 싶은 이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무리 정권 창출에 몸이 달았어도 공당에서 가설정당까지 운운하는 것은 도를 넘었다. 현행 선거법상 경선은 같은 정당 내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당끼리 경선하는 방식의 국민경선제는 법적 근거가 없다. 이를 우회해 가설정당을 만들자는 것은 누가 봐도 편법이고 꼼수다. 문제는 그런 가설정당이 처음 거론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선 막바지에 가설정당의 진화된 새 형태가 나올지, 또는 제3의 신당이 창당될지도 모를 일이다. 진보의 얼굴, 조국 서울대 교수도 이미 ‘진보 집권 플랜’의 실천 방법으로 가설정당 경선 방식을 모델로 제시한 바 있다. 정당이란 정치적 이념을 같이하는 이들이 정치적 목적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조직한 결사체다. 그런데 어느 날 정당 밖 사람의 지지율이 높다는 이유로 그를 위해 정당을 만든다면, 그것은 정당의 존립 기반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고 정당정치를 훼손하는 것이다. 지향점이 같은 사람들이 뭉친 정당에서 공정한 절차를 거쳐 대선 후보를 내지 않고, 인물 중심으로 정당을 급조했다가 흔적 없이 사라진 일들을 벌써 잊었는가. 대통령의 큰 꿈을 품고 대선을 불과 한달 앞두고 창당했다가 참담한 실패를 맛본 이들이 여기 있다. 이인제 의원은 15대 대선을 코앞에 둔 1997년 11월 국민신당을 창당했지만 당은 다음 해 9월 자진 해산했다. 정몽준 의원도 16대 대선에 나간다며 2002년 11월 국민통합21을 창당했지만 다음 해 6월 대표에서 물러났다. 당은 정당법상 시도당이 적어도 5곳 이상 돼야 한다는 규정에 못 미쳐 2004년 9월 등록이 취소됐다. 17대 대선 출마를 위해 2007년 11월 창조한국당을 만든 문국현 전 의원도 2009년 비례대표 후보 공천 헌금을 받은 혐의로 의원직을 상실하면서 당을 떠났다. 이 당은 지난 4·11 총선에서 국회의원을 한 명도 당선시키지 못해 다음 날 등록이 취소됐다. 정당의 확고한 지지기반 없이는 대통령이 되기 쉽지 않다. 지금까지 대선에서 경험한 바다. 역대 대통령 선거를 통틀어 그것도 여당(기호 1번)과 제1야당(기호 2번)이 아닌 무소속이나 군소정당 후보가 당선된 경우는 한번도 없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이 되려면 기호 1번이나 2번은 돼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대선 때만 되면 선거용 정당을 만드는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은 꼭 나타난다. 오는 12월 대선에서도 그런 일이 또 벌어질지 모른다. 그러나 국민은 선거 때 급조된 후 바로 사라지는 뜨내기 정당에 더 이상 눈길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bor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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