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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신한 여성변호사 강제 휴직’ 檢 수사 나선다

    ‘임신한 여성변호사 강제 휴직’ 檢 수사 나선다

    임신을 이유로 소속 변호사에게 강제 휴직명령을 내린 것으로 알려진 법무법인 대표에 대해 검찰이 수사에 들어갔다.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부장 이정회)는 남녀 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청년변호사협회에 의해 고발된 J법무법인 임모(47) 대표변호사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고 21일 밝혔다. 검찰은 조만간 고발인을 불러 고발 경위와 내용을 확인한 뒤 피고발인에 대한 조사에 들어갈 방침이다. 검찰 관계자는 “출산이나 임신 등을 이유로 회사에서 부당해고를 당한 사건에 대한 수사는 간혹 있었지만 이번처럼 변호사와 법무법인이라는 특수 관계의 사례는 극히 이례적”이라면서 “황 변호사와 법무법인의 업무상 특성 및 고용관계 등을 파악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J법무법인 소속인 황모(31) 변호사는 결혼과 임신 사실을 알린 직후 2차례에 걸쳐 유례없는 업무실사를 당했고 2차 업무실사 일주일 만에 일방적으로 휴직명령을 통보받았다. 그러자 황 변호사는 법무법인을 상대로 서울중앙지법에 휴직무효확인 청구소송을 제기했고 이어 청년변회가 대표 변호사를 형사고발했다. 현행법상 사업주는 근로자의 교육·배치 및 승진에서 남녀 차별이 금지되며, 이 규정을 위반한 사업주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해당하는 형사처벌을 받는다. 청년변회는 “임신과 출산을 이유로 한 부당해고, 휴직명령에 대해 앞으로도 적극 대응할 것”이라며 “위법사실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통해 진위를 밝혀 이를 개선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 변호사들에 대한 차별과 부당한 처우는 취업 단계부터 이뤄지고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올 들어 2차례 여성변호사 360명을 상대로 실시한 고용환경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8%가 취업하는 데 남성보다 불리하다고 했다. 출산·육아 등 가정과 일의 양립이 어렵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55%로 가장 많았다. 여성 변호사는 가정이 생기면 장시간 근무가 어렵다는 인식과 출산휴가시 대체인력이나 급여에 대한 부담이 여성 변호사 채용을 꺼리게 하는 이유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여성 변호사들은 채용 과정에서 연애·결혼·자녀 계획 등에 관한 질문을 예외 없이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변호사에 대한 차별에는 주당 60~80시간 일해야 하는 로펌업계의 근무 환경도 영향을 미친다. 근로시간에 대한 조사 결과 주당 40시간 이상 근무가 절반 정도였지만 60시간 이상 근무한다는 비중도 42.4%로 상당히 높았다. 물론 자신이 맡은 사건은 다른 사람과의 공유가 어렵다는 점 등 고유한 업무 특성 때문에 장시간 근무가 불가피한 측면도 있지만, 로펌 업계에 자리 잡고 있는 관행이라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야근과 함께 장시간 근무하는 것이 독하고 능력 있는 변호사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여성 변호사 A씨는 “가정이 생기면 야근도 많이 못하고, 출산은 유급으로 휴가를 줘야 하는 부담 때문인지 채용을 꺼리더라.”고 전했다. 로펌에서 인사 업무를 담당했던 B씨는 “아이 있는 여성 변호사는 처음부터 채용에서 배제했다.”면서 심지어 결혼 예정이라는 것을 알고 채용을 취소한 사례도 있다고 전했다. 자궁암 수술을 받은 변호사 C씨는 “출산 휴가 3개월을 쓰고 나서 자궁에 혹이 생겼는데 휴가 직후라 수술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면서 “추석 연휴 기간에 몰래 수술받았다.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하염없이 울었다.”고 털어놨다. 홍인기기자 ikik@seoul.co.kr
  • 내곡동 매입 실무자 소환 윗선지시 여부 집중 추궁

    내곡동 매입 실무자 소환 윗선지시 여부 집중 추궁

    이명박 대통령 내곡동 사저 부지 매입 의혹 특별검사팀(특검 이광범)은 18일 부지 매입 실무자인 청와대 경호처 계약직 직원 김태환씨를 피의자성 참고인 신분으로 소환, 밤늦게까지 조사했다. 지난 16일 특검 수사 착수 이후 첫 소환자인 김씨는 부지 매입과 대금 정산을 주도, 내곡동 실체를 밝힐 핵심 인물 중 한 명이다. 김씨가 입을 열 경우 임태희(56) 전 대통령실장, 김인종(67) 전 경호처장, 김백준(72) 전 총무기획관을 비롯해 이 대통령 내외의 불법 개입 여부까지 드러날 수 있어 특검도 주목하고 있다. ●‘임의적’으로… 사저용 싸게, 경호처는 비싸게 매입 검찰에 따르면 김씨는 지난해 5월 내곡동 사저·경호 부지 9필지(2604.9㎡, 788평)를 54억원에 매입했다. 내곡동 20-17번지, 20-30번지, 20-36번지 등 3필지(848.1㎡, 257평)는 이 대통령 아들 시형(34)씨와 경호처 공동 소유로, 내곡동 20-2번지, 6-90번지, 20-15번지, 30-8번지, 30-9번지, 19번지 등 6필지(1756.8㎡, 531.4평)는 경호처 소유로 구입했다. 김씨는 필지별로 대금을 정산하지 않고 ‘임의적으로’ 나눠 구매 금액을 책정했다. 김씨의 대금 분배에 따르면 시형씨는 3필지 중 사저용인 462.8㎡(140평)를 11억 2000만원에 구입했다. 취득 당시 감정평가액인 17억원보다 훨씬 싸게 매입했다. 경호처는 6필지와 3필지 중 일부(385.3㎡, 116.5평) 등 2142.1㎡(648평)를 42억 8000만원에 샀다. 대지는 224.8㎡(68평)뿐 대부분(1917.3㎡, 580평)이 그린벨트로, 당시 감정평가액(25억원)보다 훨씬 비싸게 매입했다. ●참여정부 경호부지 매입 담당… ‘자의적 짜집기’ 의혹 김씨는 부지 매입을 위해 전문계약직으로 특채됐다. 김 전 처장이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경호 부지 매입을 담당한 김씨의 전문성을 활용하기 위해 뽑았다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하지만 전문성보단 권부의 입맛에 맞는 ‘자의적 짜깁기’ 결과로 이 대통령 일가에 이익을 줬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최교일 서울중앙지검장도 “김씨가 필지별로 정산하지 않고 특정 필지(3필지)를 지분으로 나눠 돈을 지불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면서 “김씨는 구체적인 근거가 아니라 경험과 미래 개발 이익 등을 따져 산정했다.”고 밝혔다. 특검팀도 이날 김씨를 상대로 시형씨와 경호처 공동소유 필지의 비용 산정 기준, 비용 배분 과정에서의 임 전 실장 등 개입 여부, 부지 매입 및 비용 산정을 최종 결정한 인물 등을 집중 추궁했다. 한편 특검팀은 내곡동 부지 매매에 관여한 부동산 중개업자 2명을 19일 오전 10시 참고인 신분으로 소환한다. 김승훈기자 hunnam@seoul.co.kr
  • 글로벌 리더 손지애의 자녀 교육법

    글로벌 리더 손지애의 자녀 교육법

    CNN을 통해 한국 소식을 전 세계에 알렸던 손지애(49)는 주요 20개국(G20) 서울정상회의 대변인과 청와대 비서관을 거쳐 아리랑 국제방송 대표로 활동 중이다. 동시에 세 딸 미나(23), 유나(13), 지나(11)를 둔 어머니다. 많은 여대생의 롤모델이자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글로벌 리더인 손지애의 어머니로서의 모습은 어떨까. 12일 밤 10시 40분 EBS ‘어머니 전’에서 만나 본다. 네 딸 중 맏딸인 손지애는 전통적인 교육보다는 개방적인 신식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1950년대에 줄리아드 음대에 유학을 간 뒤, 평생 피아노를 연주하고 가르쳤던 어머니는 결혼 뒤에도 여자가 일을 가지는 길은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손지애에게도 첼로를 가르쳤다. 하지만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는 손지애의 선택은 달랐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외교관이던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 갔다. 4년을 머무른 게 전부였지만 완벽한 영어를 구사했고, 훗날 세계적인 언론사의 구애를 받았다. 외신기자와 결혼한 그는 기자로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유축기를 회사에 갖고 다니며 2시간에 한 번씩 모유를 받았다. 세 딸을 모두 모유 수유로 키웠다. 퇴근해서는 밤마다 동화책을 꼭 읽어 주는 자상한 엄마였다. 세 딸이 손지애에게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네가 알아서 해.”다. 무엇이든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게 하는 손지애는 자녀가 주체적으로 삶을 살게끔 해 주고 싶었다. 자신이 지킬 수 없는 일들은 아이들에게도 강요하지 않는 게 손지애식 교육법이다. 사람들은 손지애의 자녀 영어 교육법을 궁금해할 테지만, 그는 영어 공부를 억지로 시키지 않았다. 평생 가져가야 할 영어를 혹 교과목이라 생각하고 거부감을 느낄까 봐 걱정해서다. 책을 좋아하는 첫째에게는 영어책으로, 음악을 좋아하는 둘째에게는 팝송으로 영어에 대한 흥미만 북돋아 주고 그다음은 딸에게 맡겼다. 영어책을 읽고 혼자 일기를 쓰며 영어에 재미를 붙이게 된 큰딸 미나는 지금 어머니보다 실력이 더 출중하다. 한 달에 두 번씩은 꼭 세 자매의 손을 잡고 서점에 간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균형 잡힌 시각, 사람에 대한 이해 등 기자로서, 글로벌 리더로서 자신을 키운 8할이 책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큰딸 미나가 취업이 부담스러워 사학과 전공을 망설일 때에도 적극적으로 지지해 줬다. 인문학적 소양이 바탕이 된 사람만이 사람과 세상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로 성장할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아 준 것이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음주운전男, 벌컥벌컥 브레이크 오일 마신 이유?

    벌컥벌컥 브레이크 오일 마신 남, 이유는? 음주운전을 한 남자가 교통사고를 내자 브레이크 오일을 마시고 병원으로 실려간 사건이 아르헨티나에서 최근 발생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사고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근교 아벨랴네다에서 발생했다. 클럽에서 밤을 지새고 즐기다 귀가하던 25세 청년이 3중 추돌사고를 냈다. 사고로 최소한 3명이 다쳤다. 만취 상태에서 핸들을 잡았던 청년은 사고를 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음주 사실이 드러나면 가중처벌을 받을 궁지에 몰린 청년은 엉겁결에 재치(?)를 발휘했다. 혹시나 혈중알코올농도가 낮아질까 갖고 다니던 브레이크 오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하지만 사고현장에 출동한 경찰이 이 모습을 목격하면서 황당한 음주은폐 시도는 미수에 그쳤다. 청년은 병원으로 긴급 후송돼 위세척을 하는 등 응급조치를 받았다. 한편 현지 언론은 “조수석에 동승했던 여자도 병원에서 검진을 받은 결과 남자와 비슷한 증상을 보였다.”면서 브레이크 오일을 함께 마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남미통신원 임석훈 juanlimmx@naver.com
  • 지구상 단 1마리 ‘하얀 혹등고래’ 근접 포착

    지구상 단 1마리 ‘하얀 혹등고래’ 근접 포착

    지구 상에 1마리 밖에 없는 흰 혹등고래가 최근 호주 앞바다에 다시 나타났다. 29일 영국 데일리메일 등 외신 보도에 따르면 지난 26일 오전 10시께 호주 세븐네트워크 방송 카메라가 ‘미갈루’로 추정되는 흰색 혹등고래를 최근접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호주 원주민 언어로 ‘하얀 친구’를 뜻하는 미갈루는 색소 결핍에 의한 백색 변종인 희귀한 알비노 고래로 전 세계에 단 1마리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고래 전문가들은 미갈루가 예년처럼 호주 퀸즐랜드 북부 앞바다에서 남극해를 향해 이동 중이라고 전했다. 혹등고래들은 먹이를 찾기 위해 호주 앞바다와 남극해를 오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갈루는 지난 1991년 호주 앞바다에서 최초로 목격됐으며 당시에는 다 자라지 않은 상태로 어미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었다. 한편 미갈루가 발견된 호주 동부 해역에는 혹등고래 1만 7,000마리가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세븐뉴스 윤태희기자 th20022@seoul.co.kr
  • 잘 보세요, 누드 맞지요?

    잘 보세요, 누드 맞지요?

    이 세상의 모든 색깔을 다 빼내고 남은 것이라곤 도트 단위로 분해된 회색으로만 가득한 독특한 풍경 사진을 선보여 왔던 사진작가 민병헌(57)이 이번엔 나체 사진을 한데 모은 사진집 ‘누드’(난다 펴냄)를 내놨다. ●직접 손으로 뽑아내는 프린트 작업 고집 혹시 입에 침이 괼까 싶어 미리 말해 두자면, 누드집 하면 흔히 기대하는 너무 직설적이고 적나라해서 민망한 장면은 없다. 그의 누드 작품들은 대개 윤곽선이 희미하고 뿌옇게 흐려져 있거나, 거꾸로 특정 부위를 과도하게 확대해 세밀하기 찍어 나가는 방식이다. 그래서 희뿌옇게 나와서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거나, 한참을 들여다봐야 겨우 ‘아, 이거 어디 부위겠다.’ 할 수 있거나, 아무리 봐도 이게 사람의 몸이기나 한 건지 알쏭달쏭한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사진이란 매체와 누드라는 소재가 만났을 때 품게 마련인 기대감을 배반한다. 아날로그 방식으로 여전히 자신이 직접 손으로 뽑아내는 프린트 작업을 고집하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톤만 달리한 다양한 회색들이 층층이 쌓이면서 묘한 효과를 빚어 낸다. 그래서 이전의 풍경 사진들과 이번의 인물 사진이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비슷하냐는 질문에 대한 작가의 대답은 시원시원하다. “별 다른 차이가 없다.” 그는 인물과 풍경 사진을 계속 병행해서 찍다 보니 “처음에는 스튜디오에서 사람을 찍는 것은 연출이고 자연을 찍는 것은 말 그대로 자연이라 생각했는데 자연이란 것도 결국 연출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사람 사진은 사람이 도와줘야 찍을 수 있는 사진이듯 자연 사진도 자연이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있는데 자기가 가서 찍는 게 아니라 자연이 도와줘야 찍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작가가 이번 작업을 두고 “내가 평생 미친 듯이 찍으러 다닌 잡초도, 산등성이도, 바다도, 폭포도 죄다 몸을 닮았음을 알겠다.”고 표현한 이유다. ●주변에서 괜찮은 일반인을 모델로 써 작가의 작업 방식을 보면 실제로도 그렇다. 일단 주변에서 괜찮은 일반인들을 모델로 쓴다. “절대 직업적인 모델을 기용하지 않지만, 선이 곱게 표현되려면 피부가 깨끗해야 한다.”는 것 외엔 별 다른 조건이 없다. “즉흥적으로 몰아붙이는 자유분방함 속에 오히려 내재하는 미적인 질서”를 드러내 보이고 싶어서다. ‘몸의 어떤 부분이든 살짝살짝만 보여 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누드 작업이라 일반인들이 좀 망설일 것도 같은데 의외로 망설이는 것은 처음에 한두 번 정도다. 작품 사진 한두 번 체크하고 나면 모델들이 더 열성적으로 사진 작업에 나선다고 한다. ●10여년간 작업해온 작품 133점 실어 책에 실린 작품은 모두 133점. 지난 10여년간 풍경 작업을 해 오던 중에 중간중간 찍은 작품들을 모은 것이다. 사진 컬렉션으로 지명도가 높은 미국 샌타바버라미술관에서 지난여름 동안 전시됐던 작품들이다. 책 표지는 그 전시에서 가장 호평받았던 사진이기도 하다. 지난해 11월 프랑스 파리 갤러리파티쿨리에 전시 때도 호평을 받았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인도-마지막 샹그릴라 라다크(Ladakh)

    인도-마지막 샹그릴라 라다크(Ladakh)

    마지막 샹그릴라 라다크 Ladakh 신이 세상 곳곳에 흩어져 있는 절경을 한곳에 모두 모아놓고 자신의 정원으로 삼으려고 했던 게 아닐까. 추위와 폭설, 분쟁 등의 이유로 긴 세월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고 지금도 일 년에 고작 3개월 정도만 여행자들의 자유로운 방황이 허락되는 곳.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샹그릴라’라는 수식어를 겸허히 인정하게 되는 그곳, 에디터 트래비 글 Travie writer 김수진 사진 Travie photographer 지성진 취재협조 인도정부관광청 www.incredibleindia.co.kr 1 카르길-스리나가르 이동 구간에는 유목민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드넓은 자연을 터전 삼아 살아가는 그들은 소박하지만 실로 위대하다 2 레-카르길 이동 구간에는 웅장한 사막, 협곡, 바위산의 절경이 이어진다 3 꼬마아이부터 10대, 80대까지, 라다크 여행에서는 다양한 모습의 승려들을 만나게 된다 4 바람에 휘날리는 ‘타르촉’이 무미건조한 라다크 지역에 화려한 색감을 더해 준다 5 라마유르 곰파 축제를 찾은 라다키 할머니들. 잠시 졸기도 하지만 정성을 다해 불교 의식을 참관하고 있다 인도지만 인도가 아닌, 라다크 뉴델리공항에 도착해 새벽녘 몇 시간을 뜬 눈으로 보낸 후, 인도 국내선을 타고 라다크로 향하는 길. 비행기 안에서 눈을 붙이고 피곤함을 달랠 계획이었다. 하지만 라다크의 레Leh 공항까지 창밖으로 펼쳐지는 화려한 풍경에 잠 따위는 잊어버린 지 오래. 만년설로 뒤덮인 황홀한 산맥들이 손에 닿을 듯 발바닥을 간질이는가 하면, 벌거벗은 모래산, 바위산이 자신만만하게 요염한 자태를 드러낸다. 게다가 도무지 생명체라고는 존재할 수 없을 듯한 메마른 땅에 불쑥불쑥 나타나는 미지의 초록세상. 이제껏 그 어느 비행기 안에서 봤던 영화보다 한층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인 장면들이 쉴 새 없이 이어진다. 거짓말 같은 풍광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즈음, 산 위를 배회하던 비행기는 3,500m 높이의 공항에 우리를 내려놓는다. 눈부시도록 파란 하늘(진부하지만 가장 적합한 표현인 듯하다)과 코를 감치고 드는 알싸한 바람이 반갑게 맞이한다. 인도어를 모르는 가이드 라다크가 속해 있는 잠무카슈미르 주는 중국, 티베트, 파키스탄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전략적인 요충지라는 이유로 오랜 세월 여행자들의 출입이 금지되었다가 1974년경에야 외부에 개방됐다. 그나마도 1년 중 라다크 여행이 가능한 시기는 6월부터 9월까지 정도. 혹독한 추위와 폭설로 인한 도로 통제 때문에 일반인들이 라다크를 여행할 수 있는 기간은 1년에 길어야 고작 3~4달 정도가 전부다. 라다크는 인도 가장 북쪽에 위치한 잠무카슈미르 주에 속하나, 단지 행정구역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만큼 라다크는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인도와는 내적, 외적으로 참 다른 모습을 품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라다크는 아주 오래 전에는 티베트의 일부였으며 10세기경에는 9백년 정도 독립된 왕국을 유지했다. 그러다 19세기 무렵 힌두 도그라스의 침입을 받으면서 인도에 속하게 되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라다크는 인도 라다크라기보다 그냥 라다크다. 역사적이니 행정적이니 하는 복잡한 내용보다는 직접적으로 라다크의 상황을 깨닫게 했던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게 낫겠다. 우리 팀을 안내하는 가이드는 라다키(라다크 사람)였다. 함께 차를 타고 가는데 신나는 인도 노래가 나온다. 노래가 하도 흥겨워서 “이거 무슨 내용이에요” 하고 물으니 “인도 가수가 인도어로 노래하는 거라 저도 모르겠어요” 한다. 공식적으로 인도에는 14개의 공용어가 있고 영어가 상용어이며 수백 개에 달하는 지역 언어가 있다. 인도어는 그렇다 하더라도 같은 주에 속해 있는 카슈미르 지역에 갔을 때도 라다크 사람인 가이드가 그들과 언어가 전혀 달라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가이드의 영어가 완벽하지 않아 오히려 이방인인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인도 사람들끼리 언어가 통하지 않아 한국인이 그들의 소통을 도와주는 웃지 못할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언어뿐이 아니다. 종교적으로 보더라도 인도는 힌두교도가 80%가 넘고 이슬람교도가 13% 정도에 달하며 불교도는 1% 정도다. 최근에는 불교도가 기독교도보다도 숫자가 적어진 상황이다. 하지만 라다크에서는 다르다. 카르길Kargil을 제외한 거의 전 지역의 라다키들이 티베트 불교도이며, 곳곳에 ‘곰파’라고 불리는 불교사원이 가득하다. 1 연륜이 느껴지는 노승의 손. 척박한 땅에서 삶을 이어가는 라다키들에게 종교는 어떤 의미일까 2 고지대에 위치한 곰파들은 하늘과 맞닿아 더욱 신성하게 느껴진다 3 곰파를 방문하면 마니차(겉에는 만트라가, 안에는 경문이 들어 있는 통으로, 크기와 모양이 다양하다)를 돌리는 경험은 필수. 꼭 곰파만이 아니라 라다크 곳곳에서 마니차를 만나게 된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라다크의 ‘조용한 곳’ 곰파에 가다 라다크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곰파를 둘러보는 것. 해발 약 3,500m 높이에 위치한 레는 라다크의 수도로 예전에는 히말라야 설산을 지나는 대상들이 머물렀던 실크로드 요충지이자 인도에서 불교가 전파될 때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다. <왕오천축국전>을 저술한 신라시대 혜초 스님과 <대당서역기>를 남긴 중국 당나라 현장 스님 역시 인도로 가던 길에 이 지역에 들렀다고 한다. 그런 역사를 반증하듯 라다크에는 오래되고 유명한 곰파가 많다. 그래서 라다크에서 곰파 탐방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 여행 코스. 단순히 종교적인 의미를 떠나 이 지역의 역사와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스폿들이기 때문이다. 곰파는 티베트어로 ‘조용한 곳’을 뜻하는데, 그에 걸맞게 다소 외떨어진 산 위에 위치해 있는 경우가 많다. 라다크에서 가장 유명하고 규모가 큰 헤미스 곰파Hemis Gompa에 이르는 길 역시 만만치 않다. 헤미스 곰파는 큰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멀리서는 그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다. 거의 입구까지 가야지만 건물이 보이는데, 이는 사원으로의 접근이 어려울수록 참된 경지에 이른다는 종교적인 믿음 때문이다. 헤미스 곰파는 1630년 남걀 왕조 때 건립됐으며 매년 6월 열리는 ‘헤미스 축제’가 유명하다. 특히 12년에 한 번씩 원숭이 해마다 특별한 ‘탕카(티베트 탱화)’가 공개되는데, 이때는 세계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레에서 남쪽으로 17km 떨어진 틱세 곰파Tiksey Gompa는 주변 자연환경과 어우러진 엽서 같은 풍경이 멀리서 봐도 눈에 띈다. 라다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곰파로 손꼽히는데, 느낌은 사뭇 다르지만 그리스 산토리니 같은 분위기도 얼핏 풍긴다. 언덕에 펼쳐진 곰파 자체의 풍경도 아름답지만 이곳에서 내다보는 전망 또한 기가 막히다. 잠시 아무 곳에나 걸터앉아 히말라야 산맥의 운치를 즐겨 봐도 좋다. 라다크에서 가장 큰 20m 높이의 미륵불이 모셔진 전각도 놓치지 말고 살펴보자. 곰파 중에 드물게 평지에 위치한 알치 곰파Alchi Gompa도 인상적이다. 라다크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곰파 중 하나로 카슈미르 양식이 티베트 양식과 결합된 유일한 사원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독특한 건축 양식은 물론, 내부의 프레스코화도 마음을 사로잡는다. 전각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좁고 내부는 어둡지만 그 속에서 빛을 발하는 벽화와 불상들은 입장객들의 마음을 경건하게 만든다. 특히 독특한 3층 건물로 이뤄진 숨첵Sumtsek 전은 꼭 들러 보자. 관세음보살상과 1,000여 개에 달하는 소형 좌불상이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레-스리나가르 고속도로 인근에 위치한 라마유루 곰파Lamayuru Gompa를 찾았을 때는 운이 좋게도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라마유루 승려들이 모두 모여 가면춤을 추는 축제로 어떻게 알고들 모였는지 세계 각지의 여행자들부터, 동네 꼬맹이들과 할머니들까지, 나이와 국적을 불문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경건하고도 흥겨운 축제 한판이 벌어진다. 승무복의 화려한 빛깔은 색이 바랬어도 공들인 손짓 몸짓 하나하나는 눈부시기 그지없다. 하늘과 가까워 더욱 따갑게 느껴지는 태양 아래서, 그들의 정성 어린 춤사위를 바라보면서 라다키들에게 종교와 곰파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조금씩 이해할 것 같았다. 카르길에서 스리나가르로 가는 길에 만나는 그림은 또 다르다. 이제껏 라다크에서 쉽게 보지 못했던 푸르른 초원이 등장하며 곳곳에는 꽃까지 피어 있고 멀리로는 만년설의 모자를 쓴 산들이 덤덤하게 자리를 지켜내고 있다. 라다크로 가는 3개의 관문 곰파 여행과 함께 라다크 여행의 핵심은 레-스리나가르Srinagar 이동 구간이다. 라다크 여행은 주로 스리나가르나 레에서 시작되고 끝난다. 육로가 아닌 항공으로 라다크를 여행하기 위해서는 스리나가르 공항이나 레 공항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스리나가르는 라다크가 속해 있는 잠무카슈미르 주의 주도이며, 레는 라다크의 수도이다. 잠무카슈미르 주는 라다크 지역, 잠무 지역, 카슈미르 지역으로 이뤄지는데, 3개 지역 모두 문화와 언어, 생활방식이 다르다. 레와 스리나가르만 방문하더라도 그 차이는 확연하다. 고산지대에 형성된 레는 라다크 여행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돌로 지어진 9층짜리 레 왕궁을 중심으로 형성된 소박한 시내에는 작은 상점들과 시장이 들어서 있다. 시장에는 척박한 자연환경을 잊게 해주는 싱싱한 채소와 과일들이 가득하고 불교 관련 용품과 히말라야 지역의 특산품들이 많이 보인다. 또한 티베트 망명자 시장과 네팔 시장 등 소규모 특색 있는 시장들은 라다크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황량하고 험준한 땅에 삶의 터전을 꾸려낸 이들이라 그런지 레에서 만나는 라다키들은 당차고도 위대해 보인다. 레와 스리나가르를 잇는 도로는 총 434km 정도로 오가는 데 이틀 정도가 소요되기 때문에, 레에서 출발하든 스리나가르에서 출발하든 보통 하룻밤은 카르길Kargil 마을에서 묵게 된다. 카르길은 대단한 볼거리는 없지만 라다크에서 유일하게 이슬람 구역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시간이 된다면 카르길 시장에 가보길 권한다. 레의 시장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승복을 입은 라마승이나 라다크 전통 복장을 한 여성들 대신 히잡을 쓴 여성들과 마주하게 된다. 곰파와 타르촉(불교 경전 등을 적어 놓은 갖가지 색의 깃발), 라마승들이 가득하던 라다크의 모습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한편, 카슈미르 지역 해발고도 1,585m에 위치한 스리나가르는 풍경, 언어, 풍습, 종교, 문화 등 모든 면에서 라다크와 완전히 다르다. 고도가 레와는 약 2,000m 정도 차이가 나니 풍경이 다른 것도 당연하다. 또한 인구의 97%가 이슬람교도로 티베트 불교문화가 전반에 깔려 있는 레와는 생활 문화면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라다크가 회색빛 천지라면 스리나가르는 초록이 반기는 곳이다. 어둠이 깔릴 무렵 스리나가르에 도착했을 때, 달 호수Dal Lake는 풍선을 든 아이들, 노천카페, 야시장 등으로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막 라다크를 떠나온 사람이라면 물이 풍성한 호수의 풍경도, 여름밤 호수 주변으로 펼쳐지는 유원지 같은 풍경도,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 이유로 고산병 방지를 위한 고도 적응 측면으로 본다면 스리나가르로 들어가 레로 이동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으나 기후, 문화 적응 측면에서 본다면 레로 들어가 스리나가르를 거쳐 델리로 가는 게 나을 듯하다. 레에서 바로 델리나 서울로 간다면 찌는 듯한 무더위에 몸은 힘들고, 번잡한 도시 풍경에 마음은 답답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스리나가르는 레보다는 덥고 델리나 서울보다 시원한 기후에, 레보다는 번잡하지만 델리나 서울보다는 한가로와 어찌 보면 도시인의 라다크 여행에 완충지 같은 역할을 해준다. 1 스리나가르는 라다크와 인접해 있지만 종교도 사는 모습도 아주 다르다. 라다크에서는 볼 수 없는 커다란 호수가 있어 인상적이다. 이른 아침, 노를 저어 어디론가 향하는 여자들의 자태가 한 폭의 그림 같다 2 달 호수에서 노를 저어 가는 노인의 모습이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 3 카르길 시장의 이발소 풍경 4 시장의 과일 가게. 푸근한 주인아저씨의 미소가 넉넉하다 ▶travie info 스리나가르 여행의 백미, 하우스보트와 시카라 스리나가르에는 달 호수 등 3개의 유명한 호수가 있어, 물 위에서 즐길거리 또한 다양하다. 그중 하우스보트 체험은 꼭 한번 해봐야 한다. 하우스보트는 이름처럼 배를 집으로 사용하는 공간. 과거 식민지 시대에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물 위에서 배를 집 삼아 살았던 것인데, 지금은 여행자들을 위한 숙박시설로 이용되는 곳이 많다. 일반 호텔처럼 모던하고 깔끔하지는 않지만, 특별한 고택에 머무는 기분을 낼 수 있다. 물 위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갖가지 보트 상점들을 만나게 된다. 음료수와 과자 등을 실은 매점 같은 작은 배부터, 기념품, 꽃 등을 파는 배들이 오가는 풍경이 정겹기 그지없다. 또, ‘시카라’라고 불리는 작지만 화려한 배를 타고 달 호수를 떠다니는 경험도 멋지다. 1 높은 낭떠러지 길을 지나는 양떼들. 보는 사람은 조마조마한데 양들은 의외로 여유로워 보인다. 양치기 아저씨에 업혀 가는 녀석은 말썽을 핀 걸까, 아픈 걸까? 2 카르길-스리나가르 구간에서는 양떼, 산양떼, 말떼 등 다양한 가축들의 이동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3 도로 양 옆으로 높이 쌓여 있는 만년설이 위용을 뽐낸다 길에서 만나는 최고의 여행 Every Moment, Best Memory 세계적인 명산인 히말라야와 카라코람을 끼고 위치한 라다크는 어찌 보면 여행 목적지라는 개념이 따로 없다. 고로 목적지를 향한 이동이라는 개념도 무의미하다. 어디를 향해 가든 여정의 모든 순간이 최고의 여행이 된다. 장시간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도 지치거나 지루하지 않은 이유는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너무나도 다이내믹하기 때문이다. 스리나가르에서 레로 여행하는 사람도 많지만, 우리는 레에서 스리나가르로 이동했다. 하루는 레에서 카르길까지 234km를, 또 하루는 카르길에서 스리나가르까지 204km를 이동했다. 이따금씩 쭉 뻗은 도로를 달리기도 했으나 주로 좁고 험한 길을 내처 달렸다. 울퉁불퉁, 덜컹덜컹, 꼬불꼬불, 아슬아슬 달리는 길, 어질어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것은 고지대에서 일어나는 고산병이나 아찔한 질주로 인한 불안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로 지칠 줄 모르고 순간순간 모습을 바꾸는 절경이 어지럼증을 배가시킨다. 레에서 카르길로 향하는 첫째 날, 고산지대 사막과 오아시스, 바위산, 협곡 등 거칠고도 웅장한 풍경이 이어졌다. 어느 하나 놓치기 아쉽지만, 특히 포투 라Fotu La(스리나가르-레 고속도로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위치한 산길로 해발 4,108m)와 나미카 라Namika La(해발 3,700m 높이의 산길)에서는 반드시 차를 세우고 대자연과 교감해야 한다. 그곳에 서면 누구나 마음 속 잡념을 모두 내려놓고 오로지 내 눈 앞에 존재하는 자연에만 집중하게 된다. 이튿날, 가르길에서 스리나가르로 향했다. 초원을 지나 얼마를 달리다 보면 거짓말처럼 빙하가 코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추운 지역, 드라스Drass’라는 표지판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이 길의 클라이맥스는 조지 라Zoji La. 산을 따라 꼬불꼬불 나 있는 이 도로는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산길이 해발 약 3,528m까지 이어진다. 차창으로 아래를 쳐다보면 끝없는 낭떠러지다. 물론, 안전 펜스 같은 것도 없다. 육로로 스리나가르와 레를 오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이다. 하지만 설사 다른 길이 있다 하더라도 많은 여행자들이 이 길을 택할 만큼 이 길의 매력은 치명적이다. 길 위에서 바라보는 히말라야 산악지대의 웅장한 자태와 멀리서 바라보는 조지 라 패스, 그 길의 신비로운 그림은 일생에 한번 마주할까말까 한 위대한 순간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레에서 스리나가르로 가는 길, 마음은 수백 번 요동쳤다. ‘바그다드 카페’가 홀홀히 나타날 듯한 풍요롭고(사막은 보통 황량하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만난 라다크의 사막은 한없이 풍요로웠다) 단단한 사막을 만나는 순간, 철퍼덕 주저앉아 <바그다드 카페>의 주제곡인 제베타 스틸Jevetta Steele의 ‘콜링 유Calling You’를 미치도록 듣고 싶었다. 그랜드캐니언에서 봤음 직한 층층이 쌓인 단층과 위용 있는 바위산과 절벽을 불쑥 마주했을 때는 그대로 그 자리에 몇 시간이고 서서 마냥 바라보고 싶었으며, 설산을 배경으로 꽃향기 가득한 푸른 초원이 펼쳐지는 순간에는 ‘알프스 소녀 하이디’처럼 마구 들판을 뛰어다니고 싶었다. 어디 그뿐이랴. 산악빙하를 만지는 순간에는 그만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어 버릴 정도로 감동에 벅찼다. 사막, 바위산, 협곡, 초원, 빙하를 하루 이틀 사이에 모두 접하면서, 눈에 와 닿는 시각적인 풍경에 더해, 자연이 만들어내는 그 경이로운 질감 때문에 더욱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1 카르길 마을에서 만난 행복한 여인들. 한 손에 아이를 안고 한 손으로는 머리에 인 짐을 붙잡고 어디론가 향한다. 맨발의 발걸음이 사뿐사뿐하다 2 카르길 시장 치킨집 앞에서 만난 그녀는 델리대학교에 재학 중이란다. ‘이 집 닭이 정말 맛있다’며 꼭 먹어 보라고 추천한다 3 라다크에서 차들은 모두 과격하게 달린다. 하지만 운전자들은 하나같이 해맑은 표정의 순수한 사람들 4 라다크로 가족여행 온 시크교 아이들 풍경 때문만은 아니었으리 아찔할 정도로 찬란한 풍광만으로도 감흥은 충분했지만 그곳에서 만나는 순수하고 행복한 사람들은 여행의 순간을 감동으로 만들었다. 그곳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가슴에 계속 새겼던 말은 ‘동정금물’. 현대문명사회의 기준으로 그들의 삶을, 행복을 감히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질 중심적인 사회에 길들여진 나 자신이 물질이라는 잣대로 그들의 행복도를 가늠하는 실수를 범할까 두려웠다. 그들이 물질적으로 덜 가졌다고 해서, 덜 행복하다 그 누가 얘기할 수 있겠는가. 사람 사는 곳 중에 세계에서 시베리아 툰드라 다음으로 춥다는 라다크 지역에서 유목민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그들을 만났을 때, 가슴이 울컥했다. 그들은 안락한 보호막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보다 강인하고 자유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이는 초원을 배경으로 한 유목민들의 삶의 모습은 이방인의 ‘철없는’ 시각으로는 낭만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물론 초원을 벗어나자마자 찾아오는 빙하 지역의 풍경은 그들의 혹독한 겨울을 상기시켜 주었으나 적어도 그 순간만은 참 평화로워 보였다. 혹독한 겨울을 반증하듯 볼이 발그스레하게 튼 꼬맹이 승려부터 연륜이 느껴지는 노승까지…. 자줏빛의 승복 하나로 고귀해 보이던 라마승들. 낯선 이방인들을 바라보던 라다키들의 순순한 눈망울. 라다키 전통 복장을 입고 총총히 걸어가던 할머니들. 카르길에서 아기를 업고 머리에 짐을 이고 맨발로 지나던 한 무리의 여성들. 그들은 모두 환하게 웃고 있었다. 참 이상했다. 우리가 보기엔 물질적으로 가진 것도 없고 척박하고 혹독한 터전에서 살아가는 그들이건만, 모두들 웃고 있었고 행복해 보였다. 라다크에서 서울로 돌아온 날, 서울 거리의 사람들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하고 지친 얼굴들. 그 순간, 라다크를 세계에 남은 ‘마지막 샹그릴라’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travie info 라다크 스타일 운전에 익숙해지기 경적을 울려주세요! 처음 라다크에서 차를 타면 당혹스러운 경우가 많다. 트럭이나 버스의 후면에는 ‘Horn Please’, ‘Horn OK Please’, ‘Blow Horn’ 등의 글자가 붙어 있다. ‘please’라는 단어까지 붙여 가며 경적을 울려 달라고 하는 이유는 좁은 길 때문에 아예 왼쪽 사이드미러를 닫고 다니는 차들을 많기 때문이다. 연신 이어지는 경적소리와 추월에도 불구하고 거리에 다니면서 사고가 발생하거나 시비가 붙는 경우는 거의 없다. Speed thrills but kills 라다크 산길을 달리다 보면 기발한 교통 표지판이 눈에 띈다. ‘스피드는 짜릿하지만, 목숨을 앗아갑니다Speed thrills but kills.’, ‘인생은 짧습니다. 워낙에도 짧은 인생을 더 짧게 만들지 마세요Life is short. Don’t make it shorter.’, ‘고양이는 목숨이 아홉 개라고 하지만 당신의 목숨은 단 하나A cat has nine lives. But you have one only.’, ‘서두르지 않으면 걱정도 없습니다.No hurry, no worry.’ 등 재치 넘치는 문구들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라다크 가는 길에 델리 서울에서 라다크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델리Delhi에 내려 국내선으로 갈아타야 한다. 인도를 바라보다 인디아 게이트 뉴델리의 중심도로인 라즈파트Raj Path를 따라 한쪽으로는 대통령관저가 자리하고 있고 다른 한쪽으로 전쟁기념물인 인디아 게이트India Gate가 자리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인도 병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기념물로, 벽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9만명에 달하는 인도 병사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새겨져 있다. 아픔과 환희를 품고 있는 곳 붉은성 붉은 사암으로 지은 높은 벽 때문에 ‘붉은 성Red Fort’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무굴 제국의 샤 자한 황제가 아그라 성에서의 천도를 목적으로 공들여 지었던 건축물이다. 화려하고 정교한 치장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곳이었으나, 세포이 항쟁 당시 영국군에 의해 크게 훼손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 초대 총리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던 곳도 여기다. 시장과 어우러지는 모스크 자마 마스지드 델리 최대의 이슬람 사원. 사원 주변으로 ‘찬드니 초크Chandni Chowk’라는 대규모 시장이 형성돼 있는데, 번잡한 시장과 성스러운 모스크가 어우러져 독특한 풍경을 자아낸다. 붉은 사암으로 지은 자마 마스지드Jama Masjid는 웅장하고 화려하다. 인도와 이슬람 양식이 융합된 건축 형태로, 무굴 제국 최고의 건축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 뜨거운 태양 아래 화려한 역사 꾸뜹 미나르 델리를 대표하는 상징물 중 하나로, 높이 5층 규모(72.5m)의 웅장한 탑이다. 인도 최초 이슬람 왕조의 술탄이었던 꾸뜹우드딘 에이백이 세운 승전탑이라 꾸뜹 미나르Qutb Minar(탑이라는 뜻)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돼 있는 의미 있는 유적지. 승전탑 외에도 모스크 등 여러 건축물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흔적만 남았다. 흔적만 남은 유적군을 돌아보더라도 이슬람 왕조의 번성기를 상상할 수 있다. 원래는 탑 꼭대기 전망대까지 입장이 가능했으나 1970년대 사망사고가 발생하면서 내부 관람은 금지된 상태다. 델리에서 만나는 타지마할 후마윤 무덤 후마윤 무덤을 보면 누구나 타지마할을 떠올린다.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실제로 타지마할은 후마윤 무덤Humayun’s Tomb을 모델로 지은 건축물이다. 무굴 제국 왕비 하지 베굼이 남편이자 2대 황제였던 후마윤을 기리기 위해 건설한 묘 건축물로, 페르시아 양식이 곁들여진 무굴 제국 건축물의 초기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붉은 사암으로 된 건물에 흰색 대리석 돔이 어우러진 풍경이 세련미가 넘친다. 건물 안에는 후마윤 무덤 외 150여 명의 무덤이 함께 안치돼 있다. 델리 시민들이 여유롭게 휴식을 취하는 정원의 평화로운 분위기와는 상반되게 건물 안은 대리석으로 된 묘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어 경건하면서도 으스스한 분위기가 감돈다. 인도 라다크 여행자를 위한 ★★★★★ Travie writer 김수진의 ‘주관적인’ 여행 정보 Ladakh 1 레의 따뜻한 인심이 느껴지는 휴식처 라피카 호텔Hotel Rafica ★★★☆ 단아하고 정겨운 표정이 레와 잘 어울린다. 작은 정원까지 있어 마치 집 같은 느낌이다. 사장을 비롯해 직원들도 친절하고 정감 있다. 여행 중 궁금하거나 필요한 사항에 대해 도움을 요청하면 정성껏 응대해 준다. 틀에 박힌 도시 호텔의 서비스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정이 넘쳐난다. 레의 주요 시장 거리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여서, 걸어서 시내를 둘러보기도 좋다. 주소 Fort Road Leh-Ladakh 문의 +91 1982 252258 www.hotelraficaluh.com Ladakh 2 소박한 식당, 화려한 전망 니란자나 호텔 레스토랑Hotel Niranjana Restaurant ★★★ 라마유르 곰파 바로 옆에 위치한 호텔. 이름은 호텔이지만 게스트하우스 같은 느낌이다. 간소한 스타일의 식당을 운영하고 있어 라마유르 곰파를 방문한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다. 인도 음식과 티베트 음식 등을 판매하며, 점심은 뷔페식으로 제공되기도 한다. 소박한 가게지만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이곳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예술이다. 위치 라마유르 곰파 바로 옆 문의 +91 1982 224555 가격대 1인 기준, Rs.70 정도 Delhi 럭셔리한 궁전에서의 하룻밤 릴라 호텔The Leela Palace New Delhi ★★★★ 40도를 넘는 델리의 한여름 폭염을 피해 릴라 팰리스 호텔에 들어서자 딴 세상이 펼쳐진다. 폭염을 잊게 해주는 시원한 환경과 델리 도심의 소음을 잊게 해주는 고즈넉한 분위기. 인테리어에서 인도 정통 양식을 살린 품격 있는 모던함이 묻어난다. 고급스럽고도 시크한 레스토랑과 바도 유명하다. 인도풍 정원과 전망 좋은 야외 인피니티 풀은 보너스. 주소 Chanakyapuri, Diplomatic Enclave New Delhi 문의 +91 (11) 3933 1234 www.theleela.com Srinagar 호수 위에 떠 있는 특별한 호텔 빌루 하우스보트Habib-Ullah Billoo & Sons ★★★☆ 스리나가르 달 호수에는 꽤나 많은 하우스보트들이 모여 있는데, 여러 업체들이 운영하고 있어 저마다 이름도 다르고 스타일도 조금씩 다르다. 이곳은 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하우스보트로, 내부에서 그 역사를 느껴 볼 수 있다. 달 호수 선착장에서 시카라를 타고 들어가게 되며 보트 안에서 아침, 저녁 식사를 제공한다. 보트 안에 주방이 따로 마련돼 있어 직원이 즉석에서 식사를 만들어 내놓는다. 하우스보트 특성상 습하고 다소 꿉꿉한 느낌도 있지만, 다른 곳에서 체험하기 어려운 특별한 경험이므로 놓치지 말자. 주소 Nehru Park, Dal Lake, Srinagar 문의 +91 9858070475 라다크 가는 길 라다크로 들어가는 방법은 항공과 육로 중 선택해야 한다. 델리에서 레로 가는 항공편은 매일 이용이 가능하며 에어인디아, 제트에어웨이즈, 킹피셔에어라인이 운항된다. 스리나가르-레 항공편도 일주일에 1~2회 운항 중이다. 육로를 이용할 경우에는 마날리로 들어가 버스나 지프로 레까지 이동한다. 단, 마날리에서 레로 가는 버스는 6월에서 9월 정도까지만 운행되는데 그나마도 날씨가 좋지 않으면 운행이 중단되기 때문에 사전에 확인하고 이용해야 한다. 24시간 정도 소요. 고산병 라다크는 고산지대이기 때문에 여행 전 고산병에 대비해야 한다. 항공편으로 레에 도착하면 첫날은 무리하게 움직이지 말고 휴식을 취하면서 고도에 적응하는 것이 좋다. 여행시에도 뛰거나 지나치게 빨리 움직이는 행동은 금물. 항상 여유를 갖고 천천히 움직여야 한다. 고산병 예방약이나 1회용 산소를 준비하면 도움이 된다. 주의사항 라다크는 오지이기 때문에 전기, 수도 사정이 좋지 않다. 호텔에서도 가끔 정전이 되거나 수압이 약할 때가 있다. 인도 정부 관광청 Indiatourism 주소 Tokyo Isei Building,7~8Fl.1-8-17,Ginza,Chuo-ku,Tokyo,Japan 문의 +81-3-3561-0651/52 www.incredibleindia.org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서울광장] 강남 스타일과 우리 안의 ‘자학 DNA’/구본영 논설실장

    [서울광장] 강남 스타일과 우리 안의 ‘자학 DNA’/구본영 논설실장

    싸이의 ‘강남 스타일’ 뮤직비디오를 다운로드 받아 시쳇말로 ‘즐감’했다. 금세 컴퓨터 자판 위에서 저절로 두 손목이 엇갈리게 주먹이 모아졌다. 자신도 모르게 요즘 세계인을 중독시키고 있다는 싸이의 ‘말춤’ 자세를 취한 것을 보고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스스로 B급이라고 고백한 그의 음악이 팝음악의 최대 시장인 미국에서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니…. 그러나 ‘강남 스타일’이 유튜브 조회수 1억을 돌파한 지 이미 오래다. 저스틴 비버, 브리트니 스피어스 등 톱뮤지션들조차 앞다퉈 강남 스타일을 입에 올리는 판이 아닌가. 혹자는 “오빤 강남 스타일”이란 후렴구가 영어권에선 ‘오픈 콘돔 스타일(Open condom style)로 들려 인기가 폭발했다는 농담 같은 분석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다니엘 알레그레 구글 아·태지역 사장의 인터뷰를 보고 생각을 바꿨다. 그는 “콘텐츠만 좋으면 전세계로 통할 수 있음을 보여준 완벽한 사례”라고 했다. 토종 음악을 한 수 아래로 보던, 스스로의 패배주의를 되돌아봤다. 최근 국제신용평가사 피치는 한국의 신용등급을 일본보다 한 단계 높은 ‘AA-’로 상향 조정했다. 그런데도 일제하에서 배태된 “엽전은 안돼.”라는 식의 자학 습성을 버리지 못하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대선 레이스가 바람직하지 않은 양상으로 흐르고 있다. 후보들이 비전을 놓고 경쟁하는 대신 각 후보 진영에서 상대 후보를 깎아내리는 게임에만 열을 올리고 있지 않은가. 여야 간에는 박근혜 후보의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놓고 삿대질이 이어지고 있다. 민주통합당 경선은 후보들끼리 친노(친 노무현 대통령)와 비노로 갈려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다. 이런 과거지향적 싸움이 유권자를 움직여 승패를 좌우할 것으로 보긴 어렵다. 민주당이 끝없이 죽은 박정희를 손가락질하며 박근혜의 이미지 추락을 시도하지만 지금껏 득을 보는 쪽은 장외의 안철수 교수뿐이다. 박근혜 캠프의 정준길 전 공보위원의 최근 돌출행위는 더 한심하다. 안철수 캠프의 금태섭 변호사에게 친구끼리 사적인 대화를 나눈 것인지, 안 교수의 금전이나 여성 스캔들을 들춰내 협박한 것인지 주장은 엇갈린다. 하지만 결국 대선판을 뒷조사 수준으로 타락시킨 꼴이다. 어느 서방 학자는 한국정치를 소용돌이 정치라고 했다. 영욕이 뒤엉킨 근·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상처 없는 무결점의 지도자는 드물 수밖에 없다. 박정희를 근대화를 성공시켜 절대 빈곤을 추방한 구세주로 보는 국민들이 많지만, 독재자로 미워하는 유권자들도 엄존한다. 노무현을 권위주의를 청산한 소탈한 면모로 기억하는 국민들도 있지만, 그의 좌충우돌 언행에 넌더리를 낸 이들도 적잖다. 어디 우리만 그러랴. 안철수가 벤치마킹하려는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대통령을 보자. 그의 사생활은 부인인 엘리노어가 평생 속앓이를 할 정도로 문란했다지만, 미국민들은 대공황의 늪에서 미국을 건져낸 그의 뉴딜정책만 기억하고 있다. 당시 미국경제의 회생이 뉴딜정책이 아닌,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유효수요의 창출 때문이라는 반론은 있지만…. 존 F 케네디가 역대 미 대통령 평가에서 늘 상위 랭커인 까닭은 뭔가. 국민들에게 희망을 줬기 때문이다. 메릴린 먼로와의 염문 등 그의 사생활이나 베트남전 확산 같은 정치적 과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는 더는 개척할 서부가 없는 미국인들에게 우주라는 ‘뉴 프런티어’(새로운 변경)를 제시했다. 그의 비전은 말로 그치지 않았다. 교육과학기술에 대한 투자와 개혁으로 얼마 전 타계한 암스트롱이 달에 첫발을 내디디는 쾌거로 이어졌다. 우리의 과거사에 대해 자성은 필요하지만, 자학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을 듯싶다. 대선 레이스도 누가 상대 후보의 과거 흠집을 잘 들춰내느냐가 아니라 미래 청사진과 그 실현 역량을 보여주는 경쟁이어야 한다. 유권자들도 그런 후보에게 결국 마음을 열 것이다. kby7@seoul.co.kr
  • 30대도 대장암 위험군…17.9%가 용종 가져

    30대도 대장암 위험군…17.9%가 용종 가져

    대장암으로 발전할 수 있는 용종의 발생 비율이 30대에서 급증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제시됐다. 지금까지 대장 용종은 50대 이후에 잘 생기는 것으로 알려져 검사도 이 연령대에 집중돼 왔다. ●조기 발견이 최선 대장 용종은 가능한 한 조기에 찾아내 제거해야 한다. 대장암의 80~85%가 용종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용종(폴립)이란 장 점막의 일부가 돌출해 혹처럼 형성된 조직이다. 인체에서 이런 용종이 가장 잘 생기는 곳은 대장으로, 국내 성인의 30%가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대장 용종은 특별한 증상이 없어 모르고 지나치기 쉽다. 물론 용종 자체는 양성이지만 그중 조직학적으로 선종성 용종(선종)으로 불리는 악성 종양이 대장암으로 진행되기 쉽다. 물론 모든 용종이 대장암으로 진행되지는 않으며 내시경검사를 통해 쉽게 찾아 제거할 수 있다. ●30~40대 새로운 위험군 대한대장항문학회(회장 전호경)가 7개 대학병원(강동경희대병원·국립암센터·삼성서울병원·서울성모병원·서울아산병원·세브란스병원·전남대병원)에서 2009~2011년 사이에 대장 내시경검사를 받은 14만 9363명을 조사했다. 그 결과 30대의 용종 발견율이 17.9%로 나타났다. 분석 결과 전체 조사 대상자 중 용종(35.9%) 또는 대장암(0.5%)으로 진단받은 환자가 36.4%(5만 4359명)에 달했다. 대장내시경검사를 받은 일반인 3명 중 1명은 대장에 문제가 있는 셈이다. 특히 눈길을 끈 대목은 30~40대의 용종 발견율이다. 지금까지 비교적 안전한 연령대로 꼽혔던 30대의 용종 발견율이 17.9%로 매우 높았다. 40대도 29.2%가 용종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연령대라도 남성의 용종 발견율이 높아 30대는 21.1%, 40대는 35.4%에 달했다. 이는 같은 연령대 여성의 13.2%, 20.1%를 크게 웃도는 수치다. 이에 대해 학회 측은 “이제 30대도 대장암의 위험에 노출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라며 “이는 대장 내시경검사 권고 대상 연령인 50대 이전에도 조기 검진 및 치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30~40대 이외 다른 연령대의 용종 발견율은 10대 4.1%, 20대 6.8%, 50대 39.5%, 60대 50.2%, 70대 59.5%, 80대 이상 60.3% 등이었다. ●정기 내시경검사 필요 이런 가운데 전 연령대를 통틀어서도 최근 3년간 용종 발견율이 해마다 1.5%(3000명가량) 증가하고 있었다. 성별로는 남성의 용종 및 대장암 발견율이 42%로 여성(26%)에 비해 1.6배 많았다. 학회 유창식(서울아산병원 대장암센터 교수) 이사는 “최근 3년간 대장 용종이나 대장암 발견율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국내 대장암 위험도가 심각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대장암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대장 내시경검사를 통해 조기에 발견, 치료하는 것이 최선의 대책”이라고 강조했다. 심재억 전문기자 jeshim@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5) 흥선대원군 ‘척화’ vs 명성황후 ‘친러’ (하)

    [선택! 역사를 갈랐다] (25) 흥선대원군 ‘척화’ vs 명성황후 ‘친러’ (하)

    법부고문 그레이트하우스(Clarence R. Greathouse, 具禮)는 1896년 4월 15일 을미사변 관련 히로시마 재판소 결정서와 함께 흥선대원군에게 한 통의 문서를 보냈다. 그레이트하우스는 “올해 1월 20일에 일본 히로시마 재판소에서 결정서를 작성했는데, 그 결정서 내용 중 전하의 행동이 많이 언급되었다.”며 “전하와 관련된 내용을 해명하실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아직도 이 문제가 세간에 걱정거리로 남아 있다 하니 참기 어려운 일이며 한스럽기 그지없다. 작년 을미사변에 대해서는 여론이 제멋대로인데 나의 말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나는 잠잠히 있을 뿐이다.”라고 답변했다. 흥선대원군은 을미사변과 관련하여 해명보다는 침묵을 선택했다. 그 침묵은 오랫동안 그 시기를 흥선대원군(1820~1899)과 명성황후(1851~1895)의 대립구도로 만드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1895년 10월 8일(양력) 새벽 1시. 전 군부고문 오카모토는 마포에서 일본 영사관보 호리구치 등을 대동하고 숨가쁘게 달려 흥선대원군의 저택에 도착했다.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그의 아들 이재면과 손자 이준용은 낯설지 않은 불청객을 맞이했다. 오카모토의 회고록을 살펴보면 당시 흥선대원군은 스스로 의관을 갖추고 일본이 의도한 것처럼 경복궁으로 순순히 향했다. 하지만 오카모토의 기록과는 달리 흥선대원군은 그날 새벽 1시에 곧바로 출발하지 않고 2시간 동안 자신의 저택에서 지체했다. 을미사변 직후 주한 외교관을 포함한 외국인 대부분은 을미사변의 배후로 흥선대원군을 지목했다. 그것은 1882년 임오군란 당시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첨예한 대립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의 을미사변 주도와 관련되어 당대 주한 외교관 및 외국인의 기록에서도 판단이 상호 엇갈렸다. 동일한 자료조차도 흥선대원군의 주도설과 관련되어 모순된 기록의 사례가 많았다. 을미사변 직후 주한 프랑스 주교 뮈텔, 주한 미국공사대리 알렌, 주한 영국총영사 힐리어, 주한 러시아공사 베베르 등은 흥선대원군이 사건의 배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판단은 오래가지 못했다. 일본인의 경복궁 침입, 흥선대원군의 경복궁으로의 출발 지체, 일본공사관의 문서위조 등 흥선대원군을 배후라고 볼 수 없는 많은 사실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을미사변 직후 흥선대원군은 고종과 분리되면서 정치현안에 개입하지도 못했다. 흥선대원군을 배후로 내세운 세력에 대한 혐의가 자연스럽게 일본공사관으로 옮겨졌다. ●명성황후, 고종의 충실한 조언자 명성황후 민씨는 1866년 왕비로 선택되어 운현궁에서 가례(嘉禮)를 치렀다. 명성왕후에게는 4남 1녀가 있었지만 1874년에 태어난 왕세자(순종)만이 생존했다. 명성황후는 고종의 조언자와 후원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종은 명성황후가 “경서와 역사를 널리 알고 옛 규례에 익숙하여 나를 도와주고 안을 다스리는 데 유익한 것이 많았다.”고 기록했다. 고종은 명성황후가 “사변에 대처해서는 정상적인 방도와 임시변통을 잘 배합했다.”며 위기에 대처하는 그녀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고종은 “일찍이 왕비가 말한 것마다 모두 들어맞았다.”며 명성황후의 판단력에 대한 강한 신뢰감을 표시했다. 명성황후는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의 정치적 격변 상황에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명성황후의 행록(行錄)에는 “임오군란 당시 왕비는 온화한 태도로 임시방편을 써서 그의 목숨을 보존했다.”고 기록돼 있다. 갑신정변 당시 고종은 명성황후가 “역적 박영효를 타일러 그 음모를 좌절시켰다.”고 주장했다. 또한 명성황후는 “이 무리들이 거짓말을 했다.”고 의심했으며 “이 무리들을 죽이면 자연히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판단했다. 고종은 “왕비가 성의 동쪽에 피해 있으면서 자성(慈聖)을 호위하고 세자를 보호하였는데 시종한 사람들이 한 명도 흩어져가지 않았다.”며 위기에 대처하는 결단력 및 정치적 결집력을 높이 평가했다. 명성황후는 대원군과 연결된 임오군란 등 혁명의 상황에서도 살아남았다. 그녀는 모든 어려움을 해결한 후 잠시 상실한 권력을 다시 회복하는 집념을 보여주었다. ●일본의 치밀한 을미사변 조작 기존 일본에서는 자국의 치부를 드러내는 사건이기 때문에 을미사변에 관한 연구를 오랫동안 기피했다. 일본에서는 주로 사실 정황에 대해서 을미사변과 관련된 인물인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 주한 일본공사관 서기관 스기무라, 한성신보 편집장 고바야카와 등의 기록을 참고했다. 그런데 이들은 사건 당일에 관한 행적을 매우 소략하게 기록했다. 또한 이들의 기록은 철저하게 그 시기를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대립 구도로 부각시켰다. 최근 소설가 쓰노다 후사코는 을미사변 관련 일본 외무대신 무쓰의 의혹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명성황후의 심리 묘사에 집중하여 을미사변에 관한 일본의 정치적 의도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그 결과 그녀는 일본의 사상가 고야스 등의 찬사를 받으며 을미사변에 관한 일본정부의 책임에 면죄부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사건 초기 주한 일본공사관은 여론의 시선을 따돌리기 위해서 대원군을 철저하게 이용했고, 대원군을 음모의 배후자로 주목받게 만들었다. 일본은 대원군을 책임자로 희생시킨다면 을미사변에 관련된 자국의 중요인물을 보호할 수 있고, 일본의 책임을 최소화시킬 수 있었다. 이미 미우라를 비롯한 일본공사관은 을미사변 이후 수습방안 중 사건의 책임자로 대원군을 설정했다. 그래서 스기무라는 대원군이 자발적으로 4개조의 밀약까지 동의한 것으로 기술했다. ●명성황후를 향한 죽음의 그림자 사건이 발생한 10월 7일 밤 궁궐에서는 민영준이 궁중에 등용된 것을 축하하는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잔칫날 명성황후는 자신의 측근인 민영준의 기용, 훈련대의 해산 등으로 주도권이 다시 왕실로 집중되는 것에 대해 만족했다. 그날 밤 그녀는 궁녀들과 함께 궁궐 후원으로 달구경을 나갔다. 대궐 내부에는 정변을 예측하는 여러 징후가 있었다. 1895년 9월 초 백작 이노우에는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 “왕족이나 혹 다른 조선 사람이 역모를 꾀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일본정부에서 군사의 힘으로 왕실을 보호하여 국가의 평안함을 보전한다.”며 고종과 명성황후를 안심시켰다. 특히 명성황후는 정변이 발생하면 오히려 대궐이 안전하다는 농상공부협판 정병하의 주장을 믿었다. 왕실의 신뢰를 받아 재정을 도맡았던 정병하는 “일본군대가 대궐에 들어옴은 성체를 보호코자 함인 줄로 아옵나니, 의심하실 바가 없사온즉, 피하여 나가시지 마옵소서.”라며 명성황후의 피신을 막았다. 대궐에서 성대한 잔치가 끝나자 새벽녘 명성황후는 고종과 함께 “곤령전의 전각문 북쪽의 작은 난간(干)”을 산책했다. 그런데 고종과 왕비는 일본군대와 훈련대가 대궐을 포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신속히 곤녕합으로 이동했다. 그날 왕비는 궁궐 내에서 침입자에 대비할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대와 훈련대가 경복궁을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비가 궁궐 밖으로 도피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리고 왕비는 침입자의 목표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대원군의 선택과 침묵 흥선대원군은 을미사변 당일 왜 경복궁으로 향했을까? 그 이유는 두 가지 정도로 추정된다. 첫째, 1880년대부터 대립했던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는 1894년 9월에도 정국 주도권을 둘러싸고 심각하게 갈등했다. 따라서 흥선대원군은 청일전쟁 이후 발생한 삼국간섭 이후 정국을 주도한 명성황후의 영향력을 단절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둘째, 흥선대원군은 1895년 4월 ‘이준용 역모사건’ 당시 특별법원의 심리 기간 중 강력하게 항의했고, 5월 이준용이 강화도 교동도에 유배당하자 교동도까지 방문하려고 시도했다. 이렇듯 흥선대원군은 그의 손자 이준용에 대해 강한 애착을 보였다. 스기무라는 이러한 손자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애착을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스기무라를 비롯한 일본공사관은 만약 흥선대원군이 4개조 약속 초안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이준용의 신변을 보장할 수 없다고 흥선대원군을 위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날 흥선대원군은 일본 자객이 자신의 목숨보다도 소중한 손자 이준용을 위협하자 일정한 타협을 진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일본과의 결탁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이미지에 커다란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을미사변 당일 오카모토가 새벽 1시에 찾아왔지만 흥선대원군은 새벽 3시까지 출발하지 못하고 고심했고, 그 후 침묵을 선택했다. 인간은 자신의 잘못으로 혹은 타인의 잘못으로 생의 불행을 겪게 되었더라도 적어도 침묵할 줄 알아야만 한다. 대원군은 최소한 불행을 감출 줄 아는 사람이었다. 김영수(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서울신문·푸른역사 아카데미 공동기획
  • 전면 개장 앞둔 서울국제금융센터 외국社 유치 부진…국내용 전락

    오는 11월 전면 개장을 앞두고 있는 서울 여의도 서울국제금융센터가 당초 건립 목적과 달리 국내 금융기관만 이용하는 국내용이 될 처지에 놓인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투자유치 당시 지적됐던 각종 계약상의 특혜의혹 등으로 여전히 먹튀 논란이 우려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서울시를 상대로 정보공개청구 등을 통해 취재한 결과 드러났다. 28일 서울시에 따르면 서울국제금융센터는 7월 현재 금융기관은 7개국 20곳(국내 기관 8곳), 비금융기관은 3개국 8곳(국내 기관 4곳) 등 모두 28곳이 입주해 있다. 입주율은 95.9%에 이른다. 하지만 6개층이나 임대해 가장 넓은 면적(2만 8023㎡)을 차지하는 딜로이트는 대부분 안진회계법인이 사용하므로 사실상 국내 금융지원기관으로 분류해야 한다. 결국 임대율을 다시 계산해 보면 국내 회사 13곳의 임대 면적이 5만 4703㎡로 임대면적 비율은 64.7%나 된다. 반면 외국계 기업은 필립모리스나 소니 등 비금융사 4곳(1만 4524㎡)을 포함하더라도 15곳 2만 9849㎡이며 임대면적 비율은 35.3%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뉴욕멜론은행, 다이와증권, ING자산운용 등은 서울에서 이미 사업을 하다가 이전비용 지원과 1년치 임대료 미납 등 파격적인 지원 조건을 보고 입주한 것에 불과하다. 해외에서 국내로 새롭게 유치한 실적은 4건이다. ●신규 유치 실적 4건뿐 운영권을 갖고 있는 AIG는 정작 아시아·태평양본부가 홍콩에 있으며 서울국제금융센터에 입주한 것은 한국에서 영업 중인 여타 계열사에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는 AIG서비스㈜가 전부다. 입주 면적도 서울국제금융센터에 입주한 28곳 가운데 가장 적은 230㎡다. 이에 대해 서울시 관계자는 “금융기관이 이전을 쉽게 결정하진 않는다. 하루아침에 집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 아니겠느냐.”는 궁색한 변명만 늘어놨다. 이어 “여의도가 국제금융 중심지가 되려면 외국 기업만 있어도 안 되고 금융기업만 있어도 안 된다. 다양한 기업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애초에 수요 예측이 과장됐던 것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수요 예측이란 게 원래 쉽지 않은 작업이다. 금융위기로 어려움도 있었다.”고 밝혔다. 특히 국제금융센터의 투자 및 개발·운영권을 따낸 미국 금융그룹 AIG가 서울시와 계약을 맺으면서 모든 관계 서류를 영어로만 작성, 또 다른 부실 계약 의혹을 일으키고 있다. 취재 결과 서울시는 기본협력계약(2004년 6월 9일), 개별임대계약(2005년 8월 18일), 수정계약(2007년 1월 17일) 등 모든 계약서를 한글이 아닌 영어로 작성했다. 계약 내용을 해석하는 것은 무조건 영어 계약서가 기준이 되기 때문에 계약 단계부터 불리한 입장을 자초했다는 지적이다. 서울시 관계자에 따르면 국문 계약서는 아예 처음부터 없었다. 관련 공무원들조차 계약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영어 사전을 뒤지고 있다. 국문 번역본이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시의 참고용이고, 그마저도 전문가도 아닌 임시직들에게 시켜서 만든 것이다. ●계약서도 영문… 부실 의혹 공공기관이 민간과 맺은 계약서가 영문인 경우는 전례가 없다는 지적이다. 최근 방위사업청이 FX사업을 입찰하는 과정에서 록히드마틴이 국문 입찰제안서를 제출하지 않아 결격 사유가 돼 입찰을 연기한 사례도 있다. 서울시 관계자들도 “왜 그렇게 했는지 우리도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다. 최성식 변호사(법무법인 화우)는 “가령 재판정에서는 언제나 한국어가 기준이 되는 것처럼 공공기관이 맺는 계약을 한국어로 한다는 것은 법 이전에 상식에 속한다.”고 지적했다. ●낮은 토지임대료 등 특혜 확인 이 밖에도 계약 당시 특혜 시비를 불러일으켰던 낮은 토지 임대료(공시지가의 1%)와 2016년 이후 매각 가능 등도 이번 취재 결과 사실로 확인돼 정치권이나 시민단체 등이 꾸준히 제기했던 론스타형의 먹튀 우려 논란이 재현될 가능성도 점쳐진다. 한편 서울국제금융센터는 이명박 대통령이 시장으로 재임할 당시 여의도를 동북아 금융허브로 육성하겠다는 명분으로 외국 기업을 대상으로 투자유치한 것으로 대지 면적 3만 3058㎡에 총 4개의 빌딩(최고 54층), 연면적 50만 4880㎡에 이른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전자발찌 ‘무용지물론’… 개선책 없나] ‘전자발찌 착용자’ 관리 왜 제대로 안됐나 했더니…

    전자발찌(위치추적 전자장치)를 착용한 채 성폭행을 저지르는 사건으로 ‘전자발찌 무용론’이 떠오르는 가운데 비난의 화살이 법무부와 경찰에 쏟아지고 있다. 두 기관이 ‘전자발찌 착용자 명단’을 공유하는 문제를 두고 볼썽사나운 신경전을 벌이는 바람에 치안 공백이 생겼다는 지적이다. 양측은 뒤늦게 발찌 착용자 신상 정보 공유 등 대책 마련에 나섰지만 이미 가정주부 등 평범한 이웃이 희생당한 터라 국민적 불신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23일 법무부와 경찰청에 따르면 경찰과 검찰은 앞서 2차례 명단을 나눠 볼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부처 이기주의의 덫에 발목이 잡혀 무산됐다. 먼저 명단 공유를 요청한 쪽은 경찰이었다. 경찰청 여성청소년계가 2010년 3월 법무부에 공문을 보내 “전자발찌 부착자 성명과 거주지 등 신상 정보를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강력사건 수사 때 참고할 목적이었다. 경찰은 당시 성범죄 우범자 2만여명을 자체 관리했으나 이 가운데 누가 전자발찌 착용자인지 가려낼 길이 없었다. 하지만 경찰청에 돌아온 답은 “불가하다.”였다. 정보를 공유할 법적 근거가 없고 정보를 열람하려면 영장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2년 뒤인 지난 5월 8일에는 법무부가 먼저 공유 제안을 했다. ‘특정 범죄자 전자발찌 업무 관련 협조 요청’이라는 공문을 경찰청에 보냈다. 이번에는 경찰이 거절했다. “전자발찌 착용자 정보를 받으면 이들의 동향을 파악해 관리, 감독을 해야 하는데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를 댔다. 한 경찰 고위 관계자는 “명단을 넘겨받은 뒤 전자발찌 착용자가 재범을 저지르면 우리가 책임을 떠안을 수 있다. 경찰이 우범자 심층 접촉 등 뾰족한 관리 수단을 보장받지 못한 상황에서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경찰 관계자는 “우리가 달라고 할 때는 안 주더니 오원춘 사건 등으로 성범죄에 대한 우려가 고조되니 혹을 떼어 내려 한다.”고 비판했다. 이에 법무부 측은 “경찰이 명단 공유를 요청했을 때는 착용자 수가 지금은 3분의1도 되지 않았다. 사회적 논의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 거절한 것”이라고 말했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4)흥선대원군 ‘척화’ vs 명성황후 ‘친러’ (상)

    [선택! 역사를 갈랐다] (24)흥선대원군 ‘척화’ vs 명성황후 ‘친러’ (상)

    19세기 후반 세계는 해양과 철도로 연결되었다. 제국주의 열강의 외압이 조선을 변화시켰다. 정치적·군사적 외압을 바탕으로 열강은 자국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상호 연대와 대립을 반복하면서 치열한 외교전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조선 측의 대응도 있었다. 외압에 대응해 조선 역시 열강과 외교라는 수단을 통해 국권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당시 러시아는 극동지역에서 일본과 대립하는 하나의 축이자 조선과 국경을 맞댄 나라였다. 조선은 러시아의 외교정책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당시 영국, 일본, 청국은 자국의 조선 침략을 합리화하려는 전략으로 공러(恐)의식을 조작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원군과 명성황후도 민감하게 반응했고 대응책을 마련하려고 노력했다. ●대원군, 러 견제위해 佛신부와 접촉도 1863년 12월 철종(哲宗)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군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했다. 흥선군 이하응은 대원군에 봉작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섭정 초기 국왕과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다양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최고의 권력기구로서 외척이 권력을 독점하는 기반이 되었던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복설하였다. 그리고 의정부와 동일한 위상을 갖는 최고의 군사기관으로 삼군부를 설치하였다. 을미사변의 주역인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는 “흥선대원군이 국제 정세만 정확히 파악하면 동양의 뛰어난 외교가로서 손색이 없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1860~1870년대 서구열강과의 접촉에서 외세의 영향력을 직접 경험했고, 러시아 또는 미국 등 서구열강 일국에 편중하지 않는 외교정책을 펼치려고 노력했다. 그 배경에는 흥선대원군이 외교관계의 미묘한 변화와 흐름을 꿰뚫어 보는 안목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세기 후반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는 격변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1860년 북경조약(北京條約)으로 연해주(沿海州)를 획득함으로써 조선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조선과 새로 국경을 접한 러시아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흥선대원군은 조선에 잠입해 있던 프랑스 신부들과 접촉하기도 하였다. 프랑스 신부들과의 접촉은 프랑스 및 영국과의 제휴도 염두에 둔 파격적인 시도였다. 프랑스와 미국의 군사적 도발은 흥선대원군의 강렬한 척화정책을 북돋았다. 거기에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E. J. Oppert, 吳拜)가 대원군 아버지 남연군(南延君)묘를 도굴한 사건은 흥선대원군의 서양에 대한 적개심을 강화시켰다.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를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외세를 물리쳤다는 강한 자부심을 얻었으나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한 유연한 접근성은 정권 초기보다도 경직되었다. 두 차례의 양요(洋擾)를 겪으면서 흥선대원군정권은 강력한 군사력 편성의 필요성을 더욱 느끼게 되었다. 그 결과 전국에 3만명 정도로 추산되는 포군을 설치하였다. 그 후 흥선대원군은 임오군란에서는 청나라와, 갑오개혁 때는 일본과 각각 대립했다. 흥선대원군은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고종으로부터 사태수습을 위한 전권을 위임받고 권력을 장악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청나라 군대에 의해 톈진(天津)으로 납치되었고 1885년 겨우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894년 7월 23일 일본군대의 ‘경복궁침입사건’ 당시 흥선대원군은 주한 일본공사 오토리(大鳥圭介)와 함께 참여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의 개혁정책을 반대하다가 주한 일본공사 이노우에에 의해 정계 은퇴를 강요당했다. ●1895년 개국기원절 日인사 초청 놓고 반일친러 분위기 형성 명성황후는 외교 분야의 현안에 간접적으로 개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행록(行錄)을 살펴보면 “짐이 근심하고 경계하는 것이 있으면 대책을 세워 풀어 주었다.”, “심지어 교섭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는 나를 권해서 먼 곳을 안정시키도록 했다.” 등이 기록되었다. 1895년 9월 4일 왕실은 조선왕조 504년 건국 기념일인 ‘개국기원절’ 행사를 준비했다. 이날 행사의 준비위원회에서는 외국인 중 궁내부 고문관(宮內府 顧問官) 러젠드르 장군, 러시아공사 베베르의 부인의 자매이자 궁내부에 소속된 손탁 여사, 그리고 러시아 건축기사 사바친도 포함되었다. 그래서 러젠드르 장군은 사무장(事務長)이라는 명예위원으로 외국인들을 접대하였고, 손탁 여사는 음식과 식탁 준비를 담당했으며, 사바친은 식장의 장식 부분을 총괄했다. 당시 러시아공사 베베르는 조선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손탁을 궁내부에 고용하도록 추천했다. 독일 엘자스(Elsass) 출신인 손탁은 궁궐에서 유럽식 향연을 준비하면서 명성황후를 자주 만나 2~3시간씩 연속으로 황후와 대화했다. 이날 회의에서 행사와 관련된 한 명은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식탁 시중을 위해서 일본 급사를 초청하는 문제를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일본인들의 이름이 나오자, 손탁 여사는 얼굴을 찡그렸고, 일본인들 전체를 비난하기 시작하면서, 심지어 침까지 내뱉었다. 그러자 러젠드르 장군은 마치 귀부인에게 시중드는 유명한 기사처럼 웃으면서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손탁 여사는 왕실로부터 자신의 개인 집을 짓기 위해 약 1만 달러를 받았고, 그녀의 지도 아래 조선 여인들이 다양한 수공예를 배울 수 있는 학교 설립을 약속받았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에서 사바친은 일본공사관의 외교관 및 일본과 연대하고 있는 조선 관료들의 명성황후를 향한 적개심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때 사바친은 “이것이 언뜻 보기에는 별일 아닌 작은 사건 같지만, 이와 비슷한 작은 사건들이 점점 더 많아져서 어떤 음모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 손탁과의 관계 속에서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지원을 예상하고 평소의 신중한 태도를 버리고 반일적인 행동을 취하면서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명성황후는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둘러싸고 일본이 외교적으로 패배하자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고 노력했다. 당시 명성황후 주변의 미국인도 자국의 이권과 특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일본의 영향력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조언했다. 만일 황후가 유럽인들로부터 보호를 기대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자신의 위험을 피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준비했을 것이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자신을 보호해 주겠다는 유럽인들의 약속을 받았고, 유럽인들이 궁궐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신뢰했다. 신은 조심하는 자를 보살필 뿐이었다. ●명성황후, 왕실 日세력 제거… 日 ‘친러’ 비판하며 을미사변 개국기원절 행사 이후 왕실은 1895년 9월 재정, 법률, 내각, 군대 등에 대한 조직 개편을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그 과정에서 주한 일본공사관과 연대하는 정치 세력을 점차 제거했다. 주한 일본 공사관의 서기관 스기무라도 공사 이노우에 공사가 9월 17일 귀국길에 오르자 왕실이 갑오개혁 이후 설치된 “신제도와 신군대의 파괴에 착수했다.”고 분노했다. 왕실은 1895년 9월 20일 기존 법률과 칙령 번호를 무시하고 새롭게 칙령 1호를 발표했다. 왕실은 궁내부의 핵심인물인 이범진을 농상공부 대신으로 임명하면서, 반대세력인 농상공부 대신 김가진을 파면하고 내무협판 유길준을 의주관찰사로 전출시켰다. 무엇보다도 왕실은 일본 장교에 의해 교육받은 훈련대를 약화시키기 위해서 왕실의 신임을 받고 있는 홍계훈을 훈련대의 연대장으로 임명했다. 명성황후는 훈련대를 해산, 김홍집 내각을 약화시켜 갑오개혁 이전 왕실의 권위를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우라 공사는 히로시마재판소에서 1895년 9월 1일 주한 일본공사로 부임한 이후 “궁중에 온전한 권세가 날로 심하여, 망령되게 나라 정사를 간섭했다.”며 왕실의 권력 장악을 비난했다. 그는 “훈련대를 흩어지게 하며 그 사관을 내치고자 하는 무리가 일본을 박대했다.”며 궁중의 일본 ‘박대론’을 주장했다. 그는 “독립의 실상을 실행하는 내각 관원들을 내치고, 혹 살육하여 정권을 궁중에 거두고자 하는 계교가 있었다.”며 궁중이 김홍집 내각을 제거하려는 ‘음모론’을 제기했다. 그는 “우리나라도 해를 받음이 적지 아니하니, 일본의 위엄과 믿음을 보존할 것을 생각했다.”며 일본의 ‘국익’을 위한 정변 실행을 결심했다. 그는 ‘박대’와 ‘계교’라는 용어를 쓰면서 궁중을 비난하고 일본의 국익을 위한 불가피한 행동이었다고 강변했다. 미우라 공사는 황후의 ‘친러정책’에서 일본의 ‘국익 보존’으로 을미사변 원인에 관한 초점을 옮겼다. 일본은 명성황후의 ‘친러정책’을 언급하면서 명성황후 암살을 변명했다. 하지만 그 본질은 일본의 국익 보존이었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는 국제세력에 맞서 왕실 보호를 위해 독자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했다. 그런데 상층부 두 인물의 핵심 세력은 각각 전주 이씨와 여흥 민씨로 갈렸다. 하지만 들판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나 있는 법이다. 김영수(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 [길섶에서] 밀가루 똥배/노주석 논설위원

    어느 외국작가가 지은 ‘밀가루 똥배’라는 책을 보니 밀가루에 대한 좋지 않은 얘기가 쫙 깔렸다. 밀가루가 이른바 똥배의 주범인 이유는 밀에 들어 있는 강력한 식욕촉진제 때문이고, 빵의 혈당지수는 사탕수수보다 높고, 밀가루는 안전도가 확인되지 않은 유전자 변형식품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밀을 담배의 니코틴, 술의 알코올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았다. 국수와 빵을 즐기는 필자로선 참으로 곤혹스럽다. 통밀 빵 두 조각이 설탕 두 숟가락보다 더 혈당을 높인다니 겁부터 난다. 시장에 가보면 세상은 온통 밀가루 가공식품 천지다. 외식이 잦은 처지에 다른 먹거리를 찾기조차 쉽지 않다. 생활 속에서 밀을 제거하면 건강 혜택을 누릴 수 있다지만 무슨 낙으로 사나. ‘중년의 혹’ 똥배는 떼어버리고 싶지만, 밀가루 음식을 먹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40대에 담배 끊은 것을 최고의 업적으로 내세우듯, 50대 최고의 업적을 밀가루 끊기로 정해야 하나. 밀과의 단호한 이별이 필요한 시점에서 목하 고민 중이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데스크 시각] 국민의 검찰로 거듭나려면/박현갑 사회부장

    [데스크 시각] 국민의 검찰로 거듭나려면/박현갑 사회부장

    “올해에는 전국의 공안검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선거 혁명의 주역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금품선거 사범을 발본색원하고, 흑색선전 사범을 척결해야 합니다.” 지난 1월 16일 전국 공안부장검사 회의에서 한상대 검찰총장이 한 발언이다. 한 총장 지적대로 올해는 20년 만에 총선과 대선이 동시에 있는 해다. 하지만 한 총장이 척결하겠다고 강조한 선거 부정과 부패, 혼란과 혼탁의 고리는 지금도 여전하다. 부산지검에서 수사 중인 새누리당 공천 헌금 의혹 수사 흐름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조기문 전 새누리당 부산시당 홍보위원장을 구속한 검찰의 다음 타깃은 현영희 의원이다. 현 의원에 이어 4·11 총선 공천위원인 현기환 전 의원까지 사법처리 대상에 오를 경우, 여당은 물론 정치권에 미칠 충격파는 적지 않다. 특히 공천 개혁을 강조해온 새누리당의 대권후보 가운데 한 명인 박근혜 의원에게도 큰 상처를 안길 수 있다. 오는 20일 전당대회에서 새누리당 대선후보로 선출이 유력한 박 의원은 이와 관련, “금품수수는 개인비리 그런 것이지 당에서 헌금을 받은 것이 아니지 않으냐.”며 과거 ‘차떼기당’의 이미지가 되살아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그만큼 이번 사건의 여파가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야권으로선 검찰이 현 전 의원에 대한 범죄 혐의를 입증해 내지 못하면 특검 도입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여당은 물론 검찰로서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범죄 혐의를 인지하고서도 ‘미래권력’에 눈치를 봤다는 비아냥이 쏟아질 게 뻔하다. 총선도 그렇지만 대선을 둘러싼 여야 간 신경전은 검찰로서는 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여야 대선 후보 가운데서 검찰 조직의 인사를 좌우할 대통령이 나오게 되는데 ‘법대로’만을 외치기란 쉽지 않다. 역대 대선과정이 이를 보여준다. 15대 대선을 두달 정도 남겨둔 1997년 10월 7일 강삼재 당시 신한국당 사무총장은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의 670억원대 비자금 사건을 폭로, 고발한다. 그런데 김태정 당시 검찰총장은 대검 중수2과에서 이 사건 수사에 착수한 지 하루 만에 긴급기자회견을 통해 대선 이후로 수사를 유보한다고 밝힌다. 대선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였다. 대선 전에 수사를 한다 하더라도 끝낼 수 없고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비자금도 같이 다뤄야 한다는 형평성 문제도 고려했다는 게 검찰의 설명이었다. 2002년 대선에서는 이회창 신한국당 대선후보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으로 여야가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으나 똑 부러지는 수사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2007년에는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의 BBK 의혹을 둘러싼 공방으로 선거판이 뜨거웠으나 마찬가지였다. 오는 12월 18대 대선에서도 온갖 마타도어가 여야 간에 난무할 것으로 보인다. 검찰이 강조하는 공명선거, 맑고 깨끗한 선거는 여전히 거리가 먼 셈이다. 검찰로서는 대선 수사에 있어 인사권자인 대통령과 미래권력의 속내까지 염두에 둬가며 숙고에 숙고를 거듭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일반 국민들은 생각이 다르다. 살아 있는 권력이든, 다음 정권을 잡게 될 실력자든, 범죄 혐의를 포착하고 인지하게 되면 법대로 처리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혹 생길지 모를 사회적 혼란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기회비용으로 봐야 한다. 이렇게 할 때, ‘권력의 시녀’라는 비아냥을 받는 검찰도 명예를 회복할 수 있다. 검찰은 인사권자와 조직 보호에 대한 셈법도 필요하겠지만 기본적으로 국민에 대한 태도가 중요하다. 수사를 함에 있어 경제력이나 학력, 그리고 연고의 유무를 떠나 무엇이 대한민국을 발전시키는 데 바람직한지 따져볼 일이다. 기소독점권을 가진 ‘서초동’의 미래는 국민의 이익에 부합하는 검찰권 행사를 고민할 때, 밝을 것이다. 한상대 검찰총장은 얼마전 취임 1주년 기자간담회에서 국민의 시각과 의사를 유념한 검찰권 행사로 신뢰를 높이겠다고 발힌 바 있다. ‘검찰 조직’을 위해 현명한 선택을 하기보다 국민을 위해 올바른 선택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검찰 가족이 많아지기를 기대해 본다. eagleduo@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3) 노론 명문 가문 박지원 vs 남인 몰락 가문 정약용

    [선택! 역사를 갈랐다] (23) 노론 명문 가문 박지원 vs 남인 몰락 가문 정약용

    연암은 아무런 관직도 없이 중국에 갔다. 집안 덕이었다. 건륭제의 칠순 생일을 축하하는 사신단 책임자(정사)로 금성도위 박명원이 임명되었는데 그가 연암의 삼종형(팔촌)이어서 따라갈 수 있었던 것이다. 다산은 중국에 한 번도 가지 못했다. 연암(1737~1805)과 다산(1762~1836)은 모두 영조 시대에 태어났다. 다만 연암이 다산보다 25세 위다. 연암의 집안은 반남 박씨로 노론 명문가로 꼽혔다. 다산의 집안은 압해 정씨로 정치적으로 실세한 남인 몰락 가문이었다.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 두 사람은 대표적인 실학자로 나란히 거론된다. 그런데 두 사람은 같다고 보면 문득 다르고 다르다고 보면 문득 같다. 연암은 당대의 주류 다수파에 속했으면서도 비주류 소수파의 모습이 보인다. 다산은 당대의 비주류 소수파에 속했으면서도 주류 다수파의 모습이 보인다. 연암은 16세에 결혼해 장인의 지도를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학업에 임했다. 공부가 늦은 감이 있다. 다산은 어린 시절부터 잘나갔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아버지의 지도를 받으면서 일찌감치 학업에 정진했다. 7세에 시를 쓰기 시작하고 10세에 시집을 만들 정도였다. 연암은 몇 차례 과거를 봤지만 이내 단념하고 말았다. 다산은 과거 공부를 열심히 했다. 과거에 합격해 22세에 성균관에 들어갔고 28세에 벼슬길에 나갔다. 과거를 통과하지 않았던 연암은 50세가 넘어서야 정조의 배려와 친구의 천거로 벼슬에 나아갔다. 55세에 첫 지방수령직으로 안의현감에 임명되었다. 지방관 경력을 잠시 비교해보자. 다산은 36세의 나이에 곡산부사로 나갔다. 같은 해에 연암은 61세에 면천군수로, 그 후 64세에 양양부사로 승진되었다. 다산은 30대 부사, 연암은 60대 부사였다. 아무튼 문과에 급제하지 않고도 양양부사에 임명된 사람은 연암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과거 단념·서얼들과 교류… 연암의 ‘강남 스타일’ 과거를 단념한 연암은 30대였던 1760년대 후반부터 탑골공원 근처에 살면서 홍대용,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과 교유했다. 주로 노론 출신이라는 점과 이덕무 등이 신분상 천대받은 서얼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이들은 이른바 ‘북학파’ ‘연암그룹’ 또는 ‘백탑시사’ 등으로 불린다. 10대의 다산은 줄곧 둘째 형 정약전과 함께 다녔고 성호 이익의 가르침을 받은 권철신, 이가환 등을 만나고 한국 천주교를 스스로 일으킨 이벽, 이승훈과 어울렸다. 이들은 ‘성호학파’ 또는 ‘기호남인’으로 불린다. 다산은 15세에 결혼한 후 서울 남촌에서 살았다. 연암은 고관대작들이 많이 사는 서울 북촌에 살았으니 요즘으로 치면 연암은 강남, 다산은 강북에 산 셈이다. 두 사람은 문장가, 학자로서 스타일이 사뭇 다르다. 사마천의 ‘사기’를 읽을 때 연암은 사마천의 마음을 읽으라 했다. 다산은 연표를 꼼꼼히 챙기라 했다. 연암은 사물을 제대로 보기 위해 마음을 비우라 했다. 다산은 글을 쓰려면 속을 꽉 채우라 했다. 연암은 시를 별로 남기지 않았는데 다산은 마치 일기 쓰듯 많은 시를 남겼다. 연암은 글쓰기엔 요령이 있다고 가르치는데 다산은 문장학이야말로 유학의 큰 해악이라고 내쳤다. 연암은 문장가, 다산은 학자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진다. 글쓰기에는 두 방법이 있다고 하는데 은밀하게 감추는 방법과 들춰내 드러내는 방법이 그것이다. 연암의 글은 감추는 방법을 잘 활용했다. 다 읽고 나서도 그의 뜻을 제대로 포착했는지 돌아보게 한다. 다산의 글은 명징하게 드러내는 방법을 주로 했다. 읽노라면 곡진한 느낌을 준다. 연암은 인상파 화가인 듯하고, 다산은 사실주의 작가인 듯하다. 연암은 정조에 의해 당시의 자유분방한 문체를 주도한 죄인으로 지목되었다. 다산은 정조의 우등생이요 모범생이었다. 다산은 정조의 순정한 문체 주장에 적극 동조했다. 다산은 당시 사교라 불린 천주교에 감화돼 적극 동조했다가 나중에 태도를 바꾸어 거리를 두었다. 반성문도 썼다. 연암은 천주교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 폭력적 탄압에는 반대했다. 이렇듯 다르다 보니 동시대 인물인데도 두 사람이 만났는지조차 의문스럽다. 나이도 차이나고 사는 동네도 달랐지 않은가. 두 사람을 연결하는 인물로 박제가(1750~1805)를 생각할 수 있다. 그는 규장각 검서관으로 낮에는 규장각에서 다산과 함께 근무했고 저녁에 퇴근하면 연암그룹과 어울렸을 것이다. 박제가를 통해, 또 베스트셀러 작가 연암의 이름이 이미 높았기에 다산은 연암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혹 길 가다 우연히 마주치면 다산이 손위인 연암에게 먼저 인사를 했을 것이다. 인사를 받은 연암은 어떻게 대꾸했을까? 젊은 친구가 누군지 몰라 심드렁하게 인사만 받았을까, 자신보다 품계가 높은 관리라 공손하게 인사를 받았을까. 다산이 18년 유배 기간이 끝날 무렵에 마무리한 ‘경세유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규장각 검서관 박제가가 지은 ‘북학의’ 6권을 보았으며 유신(儒臣) 박지원이 저술한 ‘열하일기’ 20권을 보았다. 그런데 거기에 실린 중국의 기구 이용 제도는 보통 사람이 헤아리기 힘든 것이 많았다.” 다산의 ‘경세유표’는 유가적 이상에 입각한 국정 전반의 제도 개혁안이다. 여기서 다산은 청나라 문물을 배우자는 북학(北學)의 의견에 적극 동조하여 오로지 그것을 직무로 하는 관청을 별도로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이른바 ‘이용감’이었다. 다산은 ‘경세유표’에서 제안한 제도 중 꼭 그대로 시행되길 바라는 열다섯 가지를 꼽았는데 이용감 설치는 그중 하나다. ●저자와 독자 그 이상의 연결고리 ‘열하일기’ 이로 볼 때 두 사람은 ‘열하일기’로 연결되고 있었다. 물론 저자와 독자의 관계였지만. ‘열하일기’는 연암이 중국에 다녀와서 쓴 책이다.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며 깨달음을 얻었다는 ‘일야구도하기’ 또는 유명한 소설 ‘허생전’을 교과서에서 읽었을 텐데 모두 ‘열하일기’에 실려 있다. 그래서 ‘열하일기’를 여행기 또는 문학작품으로만 생각할지 모른다. 그 해 여름, 44세 연암은 붓 두 자루, 먹 하나, 작은 공책 네 권 등 간단한 행장으로 중국을 향했다. 압록강을 눈앞에 두고 자객 형가를 생각했다. 진시황을 죽이러 적국이며 강대국인 진나라로 강을 건너가기 직전의 형가가 하필 떠올랐을까! 연암은 국경을 넘어 살림살이가 넉넉해 보이는 여염집을 보고서는 질투심이 끓어올랐다. 변방의 촌마을이 이 정도라니. 연암은 중국에서 정말 볼 만한 것은 큰 누각이나 성곽이 아니라 깨진 기왓장과 똥거름이라고 했다. 민간의 이용후생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연암은 도중에 목격한 수레, 벽돌, 목축, 선박 등 여러 제도들을 소개했다. 허구적이고 자폐적인 북벌론의 미몽에서 깨어나 북학을 해야만 북벌도 가능할 터. 대내용 북벌만 강경하게 외칠 뿐 민생은 나아지지 않는 조선 현실에 대한 분노였다. ‘열하일기’를 통해 연암은 여정의 진행에 따라 보고 들은 것들을 전하면서 갖가지 주제를 넘나들었다. 형식 또한 일기 형식으로 시작해 다양한 산문 형식을 시도했다. 이러한 다양한 주제와 형식에도 불구하고 ‘열하일기’ 전체에 흐르는 주제의 하나는 ‘천하의 정세를 살피는 것’이었다. 연암은 사신의 일행이면서 공식 임무가 없었다. 새벽이면 일행보다 먼저 출발해 여기저기 많은 곳을 둘러보려고 했고 저녁이면 몰래 숙소를 벗어나 중국 지식인들과 만나 필담을 나누다 새벽에 들어오곤 했다. 청 황실의 대내외 통제 술책을 간파하면서 지금 태평연월을 누리고 있는 천하가 장차 어찌 될지 변역의 기미를 살폈다. ‘열하일기’는 현실적 존재인 청 왕조를 오랑캐라 외면하고 무시하는 자폐에 대한 질타였다. 다양한 주제를 통해 조선의 식자층 내지 지배층에 고정관념과 좁은 소견에서 벗어나 열린 마음을 갖도록 촉구하는 것이었다. 내 눈으로만 보는 자폐와 남의 눈으로만 보는 자아 상실의 극단은 늘 경계할 병통이다. 또한 천하대세를 전망하고 변역의 기미를 놓치지 않는 예민함은 지금도 절실하다. 아, 아깝다. 또 다른 위대한 저술가 다산은 해외 여행 갈 기회가 한 번도 없었다. 그도 외국에 다녀왔다면 필시 굉장한 저서를 낳았을 터이다. 다산이 유배 18년 동안에 육경사서와 정치·경제·행정·역사·지리·언어·국방·의학 등 다방면에 걸쳐 이룬 저서가 모두 500권이 넘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라. 그는 다만 ‘열하일기’를 비롯하여 중국과 일본에 관한 책을 부지런히 찾아 읽었을 뿐이다. 그러나 당대에 큰 반향을 일으킨 연암의 역저 ‘열하일기’는 점차 위축되었다. 그릇된 문체의 본산으로 지목되고 오랑캐 연호를 사용한 원고라는 비난을 들으면서 후손조차 문집 간행을 보류했을 정도다. 나라를 잃은 1911년에 와서야 활자로 간행되었다. 다산의 역저 ‘경세유표’ 등도 빛을 보지 못하다가 조선왕조가 망할 때에 가서야 주목을 받았다. 연암은 문체 문제로, 다산은 천주교 문제로 각각 정조의 지적을 받았지만 두 사람 다 정조에게 능력을 인정받았다. 정조가 죽자 다산은 유배를 가고 연암은 몇 년 후 세상을 떴다. 조선왕조는 망하기 직전인 1910년 다산과 연암에게 시호를 내렸는데 둘 다 ‘문도공’(文度公)이었다. 만시지탄. 그들은 글로써 세상을 바꾸고자 필생의 역저를 남겼다. 그 진가는 뜻있는 독자들에게 달렸다. 김태희(다산연구소 기획실장)
  • [사설] 열대야 정전사고 전기료 인상이 무색하다

    서울지역의 낮 최고기온이 36.7도까지 치솟아 18년 만의 기록적인 폭염이 들이닥친 그제 밤 강남·서초·서대문·마포·노원구 등 10여곳에서 전기가 갑자기 나갔다. 저녁시간대 아파트 밀집지역과 주택가에서 두세 시간씩 정전되면서 열흘째 이어진 열대야에다 경기침체로 말미암은 생활고로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시민들의 ‘정전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 한전 측은 “열대야로 전력사용량이 급증해 변압기에 문제가 생긴 때문”이라며 불가항력의 상황이라고 해명했다. 전력거래소는 어제 오전 한때 전력경보를 발령했다. 예비전력이 300만㎾ 미만으로 떨어지면서 지난해 사상초유의 9·15 대정전사태 이후 처음으로 ‘주의’ 경보가 발령됐다. 정전사고가 발생한 다음 날인 어제는 마침 전기료가 오른 날이다. 정부와 한전은 이날 전기료를 평균 4.9% 올렸다. 지난해 4월 이후 세 차례에 걸쳐 15%나 요금을 올렸지만 아직 멀었다고 한다. 연말에 또 한 차례 인상을 예고하고 있다. 그동안 한전은 우리 국민이 전기를 물쓰듯 펑펑 쓰고 있으며 이는 요금이 너무 저렴한 탓이라고 주장해 왔다. 절전을 유도하기 위한 전기료 현실화 필요성에 공감하지 않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사고만 나면 요금 인상 타령을 하는 한전이 제구실을 다하고 있는지 미덥지 않은 측면이 있다. 올 들어 고리 1호기와 월성 1호기가 잇따라 멈춰선 데 이어 지난달 30일에는 영광 원전 6호기가 발전정지 상태가 됐다. 보령화력 1·2·5호기와 태안화력 2호기에서 화재 등 안전사고로 근로자가 4명이나 숨졌다. 혹독한 구조조정이나 통폐합 등을 통한 경영혁신 없이 전기요금만 올리는 것은 해법이 아니라고 본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발전소의 고장과 사고 은폐, 각종 안전사고 등 부실한 관리는 물론 뇌물사건까지 더해져 한전과 자회사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깊다. 얼마 전 대한전기협회가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보니 현재의 전기요금 수준이 적정하다는 응답이 47.7%였고 비싼 편이라는 대답은 37.4%였다. 국민의 85% 정도가 현재의 전기요금이 적정하거나 오히려 비싸다고 생각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 고전 속 효성·절개 불편한 진실을 들추다

    고전 속 효성·절개 불편한 진실을 들추다

    그림 형제 동화라고 부르지만 널리 알려졌다시피 이때 동화의 원제는 ‘메르헨’이다. 메르헨의 원뜻을 따지자면 일종의 민속보고서쯤 된다. 공자가 ‘시경’이란 이름으로 주나라 민속보고서를 남겼다면, 그래서 후대의 근엄한 성리학자들이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늘어놔야 했을 정도로 남녀상열지사를 내다버리지 않고 굳이 채록해 뒀다면, 그림 형제의 동화도 매한가지다. 성욕과 잔혹함 같은 인간의 어두운 심연을, 나름대로 숨기고 내쳤으나 다 지울 수는 없었다. 공자의 시경이 후대 들어 중국 언어를 통일시켰다는 평을 받듯, 그림 형제가 원래는 독일어의 문법 통일과 사전 제작에 관여한 언어학자였다는 점도 이채롭다. ‘가족기담’(유광수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은 이런 맥락 위에 서 있다. 민속보고서 작성이 그냥 단순히 시중에 떠돌아다니는 얘기들을 모아 두기만 한 것이 아니라 권력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고 보는 관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사실 시경이나 그림 형제 동화에 대한 이런 분석들은 심심찮게 눈에 띄는데, 우리 전통에 대한 이런 식의 접근은 그다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 역사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는 이유로 양반 사대부들에 대한 얘기는 고독한 사상가나 철인정치의 이상향만 넘쳐나고, 민중들에 대한 얘기에서는 오늘날 노곤해진 도시인들을 다독거리기 위해 푸근하고 정감 넘치고 소박한 농촌 공동체의 이상향을 그려내는 경우가 다반사다. 아무래도 ‘우리’ 얘기이다 보니 예쁘고 곱게 채색하려는 욕망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최대 매력은 ‘교훈적 얘기들 아니었나.’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들을 뒤집어 본다는 데 있다. 저자는 국문학자로서 우리 전통 소설이나 민담을 다룬다. 그런데 ‘가족기담’, 그러니까 가족을 둘러싼 오싹하고 희한한 얘기라는 제목을 붙여 뒀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기괴한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인가 보다 짐작했다면 틀렸다. 홍길동전, 사씨남정기, 구운몽, 흥부전, 심청전, 옹고집전 등 매우 잘 알려졌거나 한번쯤이라도 이름은 들어본 얘기들을 다뤘다. 이런 얘기들이 왜 ‘가족기담’일까. 가령 ‘장화홍련전’을 보자. 생모는 죽고 계모가 들어왔다. 장화 홍련 자매는 구박을 받는다. 그런데 구박하는 이유가 납득하기 어렵다. 생모가 살아 있는 것도 아니다. 계모는 아들까지 낳았다. 전처 소생 딸년 둘이니, 가장 간단한 처리 방법은 시집보내기다. 어쨌든 출가외인이니까. 그런데 아버지 배 좌수는 끝내 딸들을 놓아 주지 않는다. 그렇게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던 배 좌수는 장화가 음란한 여자라는 계모의 속임수에 장화를 죽인다. 홍련은 언니 뒤를 따라 자살한다. 배 좌수는 왜 장화에게 단 한 번도 자초지종을 묻지 않았을까. 계모는 왜 그다음 차례인 홍련을 죽일 음모를 꾸미지 않았을까. 귀신이 되어 억울함을 호소할 때도 가장 큰 피해자인 장화는 묵묵히 뒤에만 서 있을 뿐 홍련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다. 혹시? 머릿속에는 ‘근친상간’이라는 단어가 떠돌아다닌다. 배 좌수가 놓아 주지 않고, 단 한 번도 자초지종을 설명해 보라고 요구하지도 않고, 계모가 그토록 질투했던 이유가 혹시 그것이었을까. 하지만 저자는 그렇다라고 딱 부러지게 확답하지 않는다. 임수정·문근영 두 배우가 출연한 영화 ‘장화, 홍련’에서 선보인 김지운 감독의 해석과 비교해 봐도 좋다. 생모의 죽음, 그리고 그 빈자리를 대신하려는 맏딸의 심리에 집중한 영화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의 장르는 호러이고 역시 가족기담이다. 저자는 이런 방식으로 생산력이 낮던 가혹한 생존조건 아래 가부장제가 드리웠던 어두운 그림자를 한 꺼풀씩 벗겨나간다. 어머니가 먹을 게 없으니 멀쩡한 아들을 생매장하려 들었던 얘기를 아들의 효도로 상찬한 삼국유사의 ‘손순매아’ 얘기를 ‘헨젤과 그레텔’에 비교하고, 손가락쯤은 예사로 끊고 허벅다리쯤은 너끈히 베어다 바쳐야 하고, 툭하면 목매달고 은장도로 찔러 자살하고야 말았다는 얘기들을 잔뜩 묶어 효자니 열녀니 하는 식으로 숭상하는 것이 얼마나 비인간적인지를 조목조목 지적해나간다. 홍길동전도 마찬가지다. 홍길동이라면 의협심과 용맹함을 흔히 떠올린다. 그런데 저자가 보기엔 이상하다. 알려졌다시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처지 때문에 홍길동은 율도국을 세우기에 이른다. 그런데 홍길동도 율도국을 세우고서는 첩을 거느린다. 자기 같은 서자를 만들어 내는 길을 택한 것이다. 아버지는 차별하니까 안 되고 홍길동은 차별 안 할 테니까 된다? 아버지는 강간해서 여자를 취했으니 안 되고, 홍길동은 그러지 않았으니까 된다? 저자는 이렇게 써놨다. “남자들은 자신들만의 향락과 쾌락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길동이 이놈도 역시 남자였던 것이다.” 김만중이 쓴 사씨남정기와 판소리 소설 춘향전의 비교도 흥미롭다. 사씨남정기는 첩인 교씨가 간악한 술수를 부리다 결국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춘향전은 기생 주제에 임금에게서 정렬부인으로 표창까지 받는다. 저자는 교씨와 춘향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무시한다. 어차피 그럴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몰아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결과가 극과 극인 것은 “교씨를 바라보는 시선은 양반의 시선이고, 춘향을 바라보는 시선은 민중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양반은 첩을 품기는 하되 존중하지 않는다.” 반면 “민중에게 첩은 남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이다.” 저자는 결국 뒤틀리지 않은 정상적인 가족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 놓는다. 그래서 만약 심리학자와 함께 책을 썼다면 어땠을까, 혹은 심리학자가 이런 접근을 해 봤다면 어땠을까 궁금해진다. 아, 이 책을 다 읽고 난다면 “쥐뿔도 모르면서~”라고 내뱉긴 어려울 것 같다. ‘쥐 변신 설화’, ‘옹고집전’, 김동인의 ‘배따라기’에 이르기까지 쥐와 성적인 이야기의 상관관계를 쭉 설명해 놨는데 잔혹하다가도 웃기고, 웃기다가 의미심장하다. ‘19금’ 내용이니 직접 읽어 보는 수밖에 없다. 1만 4000원.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생명의 窓] 우리나라 사람들의 경쟁심/오동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생명의 窓] 우리나라 사람들의 경쟁심/오동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우리나라에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는 속담이 있다. 이 속담이 말하는 바는 내가 잘 알고 있는 바로 옆 사람이 잘되면 기분이 나빠진다는 것이다. 이 속담 속에 우리나라 사람의 심성을 엿보는 것 같아서 씁쓸하다. 혹자는 이 속담은 원래 좋은 의미로 사용됐다고 주장한다. 원래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라도 아프다.’라고 했다고 한다. 사촌이 땅을 샀으니 축하는 해야겠는데 가진 것이 없으니 배라도 아파 설사라도 해서 거름을 주겠다는 좋은 의도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일본은 이 속담을 정반대의 의미로 바꾸어 놓았다. 이웃이 잘되는 꼴을 못 보는 심보가 있다는 뜻이 됐다. 우리에게는 이런 놀부 심보가 없는데 일본이 속담의 뜻을 바꾸었고, 그 이후 변질돼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본 때문에 바뀐 속담이 아직 쓰이는 이유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심리를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현대에 사는 우리에게 이런 심리가 없다면 아무리 일본인들이 속담의 뜻을 바꾸었어도 저절로 없어지거나 원래 뜻으로 사용됐을 것이다. 이런 시기와 질투심이 정말로 우리나라 사람에게 특징적일까. 최근 EBS에서 기능성 자기공명촬영(f-MRI)으로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한국 주부와 미국 주부에게 어떤 상황에서 기쁨을 느끼는지 카드 게임을 하게 했다. 카드 게임에서 미국 엄마들은 자신이 점수를 땄을 때에만 기쁨을 느끼는 뇌에 보상 시스템(보상중추)이 활성화되는 반응을 보였다. 상대방의 이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반면 한국 엄마들은 자신이 점수를 땄을 때가 아니라, 상대방보다 더 좋은 점수를 냈을 때에만 보상 뇌가 활성화됐다. 우리나라 엄마는 절대적 이익보다 상대적 이익에 기뻐했다. 자기가 잘돼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남보다 잘됐을 때 행복을 느끼는 것이 한국 엄마들이다. 미국 엄마들은 남과 비교하기보다는 자신의 절대적인 이득에 만족하는 반응을 보였다. 왜 우리는 미국인과 다르게 남과 비교하면서 일희일비하는가. 자원은 제한돼 있고, 그 자원을 원하는 사람이 많아 경쟁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나라는 미국에 비해 좁은 땅덩어리에 빈약한 자원을 갖고, 밀집된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그만큼 더 경쟁을 벌이게 됐다. 미국 사람도 제한된 것을 갖고 경쟁을 한다. 하지만 미국은 더 넓은 땅을 갖고 있다. 미시간주에서 직장을 못 구하면 플로리다주에 있는 회사에 지원서를 낼 수 있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영국이나 호주로 이민 갈 수도 있다. 이도 저도 안 되면, 한국에 와서 영어 강사라도 할 수가 있다. 선택의 폭이 넓기 때문에 미국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보다 덜 경쟁적인 것 같다. 우리나라 사회는 급격히 변해 왔다. 6·25전쟁 이후 폐허가 돼 버린 우리는 미국의 원조가 없이는 살 수가 없었다. 1960년대 후반 초등학생 때 필자도 미국에서 원조받은 옥수수로 만든 빵을 무료로 얻어먹었다. 대부분 아이는 가난했고, 도시락 반찬으로 계란을 싸오면 남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 이후 현재까지 정말로 우리나라는 세계가 놀랄 만큼이나 눈부시게 변했다. 그렇게 변하는 동안에 강남에 살고 있던 가난한 농사꾼이 벤츠를 타고 다니는 졸부가 됐다. 처지가 비슷한 동창생이 아파트를 몇 번 사고팔더니 수십억원대 부자가 돼 있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동안 우리 사회는 심한 변화를 겪었고, 그러는 동안 수준이 비슷했던 주변 사람이 인생 역전되는 것을 보고 배 아파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속담의 뜻이 바뀌어 계속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천지가 개벽하는 것 같은 변화 속에서 경쟁에 뒤처지지 않을까 항상 노심초사한다. 지금 기회를 놓치게 되면 영영 낙오자로 남을 것 같아 불안해진다. 지나치게 경쟁적인 사회에서 살면서 생긴 조급증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긴장을 늦추지 못한다.
  • 요금 못내 전기끊긴 부에노스 아이레스

    요금 못내 전기끊긴 부에노스 아이레스

    남미의 파리로 불리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전기료를 못내 굴욕을 겪고 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전기료 체납으로 전기가 끊겨 공원시설에 조명을 켜지 못하고 있다고 현지 언론이 25일(현지시각) 보도했다. 단전으로 조명을 켜지 못하고 있는 시설은 센테나리오공원, 아일랜드공원 등 7개 공원에 있는 분수다. 라바르덴이라는 길에 있는 시 부속건물도 완전히 전기가 끊겨 사용이 불가능한 상태다. 혹독한 조치를 취한 전기회사 에데수르에 따르면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내지 못하고 있는 전기료는 5090만 페소, 우리나라 돈으로 1116만원 정도다. 망신스러운 사태에 대해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전기료에 대한 중앙정부의 보조금 지급이 부당하게 중단된 탓”이라고 해명했다. 아르헨티나 중앙정부는 예산 절감을 위해 지난해 10월 공공서비스요금에 대한 보조금 삭감을 결정했다. 공공기관도 대상에 포함돼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내는 전기료는 단번에 263%나 올랐다. 사진=노티오 임석훈 남미통신원 juanlimmx@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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