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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儒林(61)-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61)-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서거정이 지은 ‘필원잡기’에는 유관(柳寬)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문정공(文貞公) 유관은 공정하여 청렴하며,신하로서는 최상의 지위에 있었으나 초가집 한 칸과 베옷과 짚신으로 평생 소박하였다.언젠가 한 달이 넘도록 장마가 져서 비가 삼줄기처럼 새어 내렸다.공은 방안에서 우산을 들고 비를 피하며 부인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우산이 없는 집은 어떻게 견디겠소.’ 이 말을 들은 부인이 말하였다. ‘우산이 없는 집은 반드시 미리 방비가 있을 것입니다.’” 유관이 들고선 우산은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 주는 일산으로 모든 집이 다 일산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유공이 걱정하였던 것이다.유관의 집이 있던 곳은 동대문과 신설동 사이,따라서 이 동네는 ‘우산각골’이라고 불리었던 것이다. 갖바치가 조광조에게 ‘군주는 하늘이니 비가 내려 집이 새면 우산을 받쳐서 온 천하가 새지 않게 하여야 한다.’고 하였던 말은 유관의 일화를 통해 조광조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었다. 특히 오늘날의 언론(言論)에 해당하는 언로가 통해야만 온전한 우산노릇이라 할 수 있다는 갖바치의 충고는 언로의 중요성을 강조한 정도전의 정치사상에서 비롯된 것인데,조광조도 이미 언로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종이 즉위 10년째 되던 해에 왕비로 맞아들인 장경(章敬)왕후가 2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왕비 신(愼)씨를 복위시켜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왕비 신씨는 연산군을 폐위시킬 때 제일 먼저 피살당한 신수근(愼守勤)의 딸로 혁명을 일으킨 훈구파에서는 후환을 없앤다는 이유로 강제로 신씨를 쫓아내어 인왕산 밑에서 살게 하였던 것이다.매일 왕을 그리워했던 신씨는 마침내 인왕산에 올라가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전하는 방법을 발견해 냈는데,그것은 인왕산의 큰 바위 위에 자신의 치마를 벗어 놓는 일이었다.중종 역시 신씨를 잊지 못하여 신씨가 있는 인왕산 쪽을 자주 바라보았는데,어느 순간 그 치마가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처음에 그 이유를 잘 모르다가 비로소 내막을 알게 된 중종은 매일같이 ‘치마바위’를 통해 애틋한 사랑의 언어를 주고받으며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던 차에 장경왕후가 죽자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순창 군수 김정(金淨)이 공동명의로 옛 왕비 신씨의 복위를 청하는 ‘청복고비신씨소(請復故妃愼氏疏)’의 상소문을 올렸던 것이다.이에 훈구파 공신들은 격렬하게 반대하고 나섰는데,무엇보다 언론과 정치와의 상관관계를 잘 알고 있었던 조광조는 왕 앞에 나아가 언로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극간하고 있다. “전하,언로가 통하고 막히는 것은 가장 나라에 관련이 깊은 것이어서 통하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편안하나 막히면 분란이 일어나고 망하게 됩니다.그래서 임금 되는 이는 언로를 넓히기에 힘써서 위로는 공경(公卿)과 여러 관료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시정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언로를 열도록 해야 합니다.그러나 책임지는 언로가 없으면 스스로 뜻을 다할 수 없는 고로 간관(諫官)을 설치하여 이를 주로 하도록 맡기는 것이니,그 말하는 바가 좀 지나치더라도 모두 마음을 비워놓고 우대하여 용납하는 것은 언로가 혹 막힐까 우려하기 때문인 것입니다.근래에 박상과 김정 등이 구언(求言)하심을 당해 진언을 드렸는데,그 말이 만약 지나친 바가 있으면 쓰지 않으면 될 일이지,어찌 다시 죄를 줄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언로를 중요시하였던 갖바치와,언로가 통하고 막히는 것이야말로 나라의 흥망이 달려 있다고 극간한 조광조는 서로 일맥상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광조는 이 갖바치를 어떻게 해서든 관직에 추천하여 등용시키려 하였다.이렇게 뛰어난 인물을 미천한 갖바치로 머물게 하는 것은 국가적 손실이라고 본 때문이었다.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국가의 크고 작은 관직은 모두 양반들이 독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일개 피장의 신분으로는 이 벽을 뛰어넘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 [스포츠 라운지] 모래판 ‘얼·몸짱’ 조준희

    “어,저기 현욱이랑 봉걸이 아닌가?” “맞아,맞아,그런데 저 친구들은 씨름 안하고 왜 앉아만 있는거야?” 지난 12일 경남 함양체육관.민속씨름 나들이를 온 주름살 가득한 어르신들의 대화다.왕년에 모래판을 휘저은 홍현욱(한국씨름연맹 경기실행본부장) 이봉걸(연맹 상벌위원장)장사가 샅바 대신 두루마기를 걸치고 임원석에 앉은 것을 구경하기가 마냥 어색한 듯했다.두런 두런 이어지던 대화는 한 장정이 모래판에 오르자,일순간 멈춰졌다.“어이쿠,잘 생겼네.탤런트 아녀?” ●아마때 들배지기·안다리 명성 자자 올해 프로무대에 뛰어든 조준희(22·LG)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그는 이날 예상을 깨고 2년차 김효인(23·신창)을 잡채기와 안다리로 제압,새내기 9명 가운데 처음으로 첫승을 신고하며 한라급 8강에 올랐다. 씨름선수라고 모두 두툼한 살집을 자랑하는 것은 아니다.눈여겨 보면 ‘얼짱’ ‘몸짱’이 적지 않다.조준희가 그렇다.192㎝ 104㎏.키도 훤칠하고 몸도 잘빠졌다. 그의 등장 덕분에 최근 모래판에 새 풍속도가 생겼다.주로 장년층만 찾던 곳이었는데 중·고 여학생들이 몰리기 시작한 것.지난달 7일에는 같은 스포츠단 소속인 프로농구 LG를 응원갔다가 여성 팬들이 몰려들어 팀 선배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사인을 할 줄 몰랐는데,몇차례 공세에 시달리고 난 뒤 자연스럽게 생기더라고요.” “솔직히 난처할 때도 있어요.선배들 눈치도 보이고,팀 막내라서 할 일도 많거든요.” 머리를 긁적이며 배시시 웃는 그에게는 사실 대학시절부터 팬클럽이 있었다.‘얼짱’이라는 입소문이 번진 결과.그러나 요즘처럼 20∼30명의 여학생들이 ‘공세’를 펼칠 정도는 아니었다.현재 인터넷 팬클럽 회원수도 1800명에 육박하고 있다. ●프로3개월차에 한라급 8강에 올라 어려서부터 운동만 떠올려도 몸이 근질거린 그가 씨름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인천 연수구청 감독으로 있는 윤명천씨의 눈에 띄어서다.하지만 첫 선수 생활은 3개월만에 그치고 만다.당시 키가 180㎝에 이를 정도로 체격이 좋아서 농구부와 유도부 등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가 봇물을 이뤘기 때문.중학교로 진학하면서 농구로 잠시 외도를 하기도 했다.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다시 모래판으로 돌아오고 만다. “샅바를 잡을 때의 팽팽한 긴장감과 상대방을 쓰러뜨릴 때 짜릿함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경기를 시작할 때 상대방의 움직임을 볼 수 없는 스포츠는 씨름이 유일하다.샅바를 잡고 난 뒤 느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상대방의 거친 호흡과 꿈틀거리는 근육 뿐.그것이 바로 씨름의 매력이다. 중학교 3학년 때 출전한 소년체전에서 용사급(80㎏이하) 우승을 거머쥐면서 기량이 일취월장했다.고교 2학년 때 역사급(100㎏ 이하)으로 한체급을 올리면서 슬럼프에 빠진 때를 제외하곤 대학교 3학년이던 지난해까지 정상을 지키며 승부의 긴장감을 즐겨왔다. 아쉬운 점은 씨름 인기가 떨어져 더 많은 사람들이 재미를 함께 나누지 못한다는 것. ●실력으로 말하는 씨름꾼 되고싶어 무명이나 다름없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이 과분하다.기분 좋은 일이지만 걱정도 된다.“어디선가 지켜보는 팬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더욱 분발하게 되지만 성적으로 보답해야 한다는 부담도 듭니다.” 사실 그에 대한 기대는 팬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씨름계에서도 모래판 중흥의 기수로 내심 낙점했다.타고난 유연성과 기술은 물론 ‘스타성’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한라급 최강자인 ‘무적탱크’ 김용대(28·현대)의 뒤를 이을 재목이라고도 한다.또는 ‘폭격기’ 김기태(24)나 모제욱(29·이상 LG)과 비슷하다고도 한다.1∼2년은 쟁쟁한 선배들 틈에 끼여 고전하겠지만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대성할 수도 있다는 평가다. 주변의 격려를 떠올리면 당장 장사의 꿈을 이루고 싶지만 이제 겨우 프로 3개월 차.아마에서는 들배지기와 안다리 등 깔끔한 기술로 이름을 날렸지만 프로는 녹록지 않다. 무엇보다도 선배들의 힘과 체력을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그는 “프로에서는 한판 한판이 모두 결승전”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어렸을 때부터 지고나면 너무 분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는 그는 요즘 서서히 자신감이 붙고 있다.지난 함양대회에서 그토록 목말라 한 프로 첫 승을 따낸 것이다.이어 한라급 8강전에서 한라봉 최고수 김용대와도 한수 겨뤄봤다.비록 단숨에 져버렸지만.“지든지 이기든지,어떤 선수를 만나든지,배울 점이 있습니다.”면서 “선배들,동기들에게 많이 배워 나갈 것”이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직 신인이라 큰 욕심을 부릴 때가 아니라면서도 신인왕은 꼭 해보고 싶다고 했다.또 한계단 한계단 밟아가다가 올 하반기에는 한라장사에 도전하고 싶다는 포부도 전했다. 만남이 끝날 무렵,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팬들에게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처음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서 정말 복받았다고 생각합니다.”면서 “하지만 팬들에게 얼짱이 아니라 씨름꾼으로 남고 싶습니다.” 홍지민기자 icarus@˝
  • 조상 땅 255억 찾아

    미국으로 이민갔다가 최근 돌아온 서울 송파구 신천동 한모(44)씨는 민원서류를 떼려고 구청에 들렀다가 조상 땅 찾아주기 안내문을 읽은 뒤 우연찮게 횡재했다. 혹시하고 조회를 의뢰했는데 공시지가만 해도 10억원에 이르는 2600여평의 땅을 찾아낸 것이다.선친이 갖고 있다가 임종 때 미처 자손들에게 알리지 못한 땅이다. 갖가지 사유로 주민이 모르고 있는 땅 찾아주기 사업을 통해 송파구(구청장 이유택)는 2002년 2월부터 지난 2월까지 2년간 51명에게 32만여평,255억원이라는 거액을 되돌려줬다.전국 토지현황 전산망이 거미줄처럼 연결돼 있기 때문에 누구의 소유인지를 샅샅이 알 수 있다. 이는 구청에 마련된 지적정보센터를 이용해 조상이나 본인 명의의 재산을 찾아주는 사업이다.평소 살기에 바빠 재산관리를 소홀히 했거나,불의의 사고로 본인,직계 존·비속 소유의 토지를 알 길 없는 사례가 적잖은데 착안한 것이다. 땅을 찾으려는 주민은 사망자의 제적·호적등본 등 신청인이 재산상속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서류와 신분증을 갖고 시·군·구 지적과에 신청하면 즉시 확인이 가능하다. 다만,담보물 확인,판결이용 등을 목적으로 할 경우엔 안 된다.사망자 주민등록번호를 모르거나 이름만으로 조회할 땐 토지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의 광역자치단체에 신청해야 한다. 송한수기자 onekor@˝
  • [총선D-29] “표밭 초토화” 野지구당 SOS

    17대 총선을 한달 앞두고 ‘탄핵 정국’이 야권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한나라당과 민주당 중앙당사에는 각 지역구에서 올라오는 ‘SOS’가 빗발치고 있다.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나타난 사상 최악의 지지율이 총선까지 이어질 경우,수도권에서 한 명의 의원도 배출하지 못할 것이란 현장의 위기감을 전하고 있다. 각각의 텃밭이라고 분류되는 영남과 호남에서도 ‘특단의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중앙당이라고 ‘탄핵정국’을 뚫고 총선 판세를 뒤집을 만한 ‘비장의 카드’가 없다.격앙된 여론이 한풀 꺾이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야당 후보들의 불안심리를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한나라,모든 지역 후보들 초비상 한나라당내 수도권 후보자들은 초비상이다.친노(親盧)-반노(反盧) 정국구도 아래 민주당 지지도가 급격히 빠지면서 한나라당이 불리한 형세가 조성되고 있다는 것이다.비교적 탄탄하게 지역구를 다져온 수도권의 한 소장파 의원은 16일 “탄핵안 가결 이후 여론조사에서 판세가 완전히 역전됐다.”며 “지역구민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분위기가 바뀌지 않는다.”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오는 23일 열리는 전당대회에 기대를 걸어보는 목소리도 있었다.대표경선은 당초 박근혜·권오을·박진 의원의 3파전으로 치러질 예정이었으나 ‘흥행 불발’에 대한 위기감이 확산되면서 불출마 의사를 밝혔던 홍사덕 총무와 공천심사위원장을 지낸 김문수 의원까지 뒤늦게 합류했다.‘총선 흥행’을 위한 모양새는 갖춘 셈이다.수도권의 한 초선의원은 “이번 전당대회가 ‘가족 잔치’로 끝날 수도 있고,자칫 의결정족수 부족으로 무산될 가능성까지 있긴 하지만 전대라도 열지 않으면 어떻게 돌아선 여론의 관심을 되돌리겠느냐.”며 절박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러나 영남지역의 한 재선의원은 “당이 단합해도 살아남기 힘든 판에 여론의 무관심 속에 당권 경쟁으로 비쳐질 전대를 여는 것은 ‘혹 떼려다 혹 붙이는’ 격”이라고 주장했다.영남 민심이라도 잘 수습해야지 잘못하면 더욱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당 고위관계자는 “수도권 의원들이 지푸라기라도 잡아야겠다는 심정으로 전대 개최를 주장하는 상황”이라며 “당내 불안심리 해소차원에서라도 전대를 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며 ‘전대 불가피론’을 제기했다. ●민주,불안감 고조속 탈당러시 우려 민주당에도 연일 선거 현장의 절박한 목소리가 올라오고 있다. 호남지역의 한 정치신인은 “탄핵 바람이 거세다.열린우리당 지지율이 올라가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면서도 “그렇다고 탈당할 수도 없고,민주당의 분란을 가속화시킬 수도 없지 않으냐.”고 되물었다.다른 후보는 “중앙당의 지원은커녕 탄핵과 같은 방해나 안 받았으면 좋겠다.”면서 “당이 빨리 정상을 되찾는 게 지역 후보를 도와주는 것”이라며 탄핵을 주도한 당 지도부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민주당은 호남지역 자치단체장 연쇄 탈당으로 더욱 흔들리는 모습이다.이날은 조성준 의원도 탈당했다.‘안방’격인 호남에서도 열린우리당에 완패할 것 같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탄핵 역풍에도 불구하고 담담하게 현실을 바라보는 후보도 있다.서울 강남갑에 출마할 전성철 후보는 “보수층이 운집한 강남의 특수성 때문인지 탄핵 역풍이 그리 강한 편은 아니다.”며 “다만 젊은 층을 중심으로 열린우리당 지지자가 늘고 있다는 것이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서울지역의 다른 후보도 “분위기가 좋지는 않지만 여론조사나 언론보도처럼 완전히 망하는 분위기는 아니다.”며 “지금은 열린우리당 후보가 5∼10%의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지만 총선이 임박하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전광삼기자 hisam@˝
  • [초등학교 선거열병](하)학부모 고백록과 대안. 외국사례

    “10만원,20만원씩 내는 돈도 문제지만,행사 때마다 얼굴을 내밀어야 했습니다.회장 엄마가 이렇게 바쁜 줄 몰랐습니다.” 서울 은평구 A초등학교 5학년인 딸을 둔 주부 오모(45)씨는 “한국의 초등학교는 ‘엄마’들의 지원이 없으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겠다.”며 이같이 말했다.오씨는 이어 “아이에게 다시는 회장 선거에 나가지 말라고 부탁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오씨 등 ‘회장 엄마’들은 지난한해 ‘회장 엄마’로서 겪은 일을 이같이 솔직히 털어놓으며 학생과 학부모에게 부담을 주는 현행 회장제도라면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고 강조했다. ●“제발 회장만 하지 말아줘” 오씨는 지난해 1학기 딸이 처음 회장에 뽑혔을 때만 해도 크게 기뻤다고 말했다.내성적인 성격의 딸이 친구들에게 인정을 받은 것 같아 흐뭇했다.기쁜 마음에 ‘당선턱’도 냈다.다른 임원 어머니와 음료수와 떡,빵을 돌렸다.어머니 3명이 4만원씩 부담했다.그때만 해도 ‘이 정도쯤이야.’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3월말에 교실 환경미화를 한다고 담임이 임원 엄마들을 불렀습니다.교실을 보면서 ‘쓸 만한 비품이 너무 없다.’고 혼잣말을 하더군요.” 이미 몇 차례 회장 엄마를 해봤던 다른 학부모가 눈치를 채고 담임에게 “어떤 것을 준비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그제서야 교사는 책상이 너무 낡아 불편하다고 대답했다.교실을 환하게 꾸미려면 화분도 몇개 필요하다고 했다.결국 오씨는 책상을 사들고 학교로 찾아갔다.담임은 “얼마짜리냐.돈을 주겠다.”고 했지만 오씨가 돈을 받을 수는 없었다.그는 “처음부터 교사가 살 생각이었다면 왜 학부모에게 얘기를 꺼냈겠느냐.”고 말했다. ●스승의 날이 부담스럽다 이후로도 지갑을 열 일은 많았다.4월 봄 소풍 때는 5만원짜리 회 도시락을 준비해갔다.교사들끼리 어느 회장 엄마가 좋은 도시락을 가져왔나를 비교하기 때문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 회장 엄마의 부담은 스승의 날이 있는 5월에 최고조에 이른다.오씨는 “얼마짜리 선물을 해야 할지,혹 쩨쩨하다고 흉 잡히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전했다.고민 끝에 독특한 디자인의 주방용품을 선물했고,역시 주부인 담임 교사가 흡족해하는 것을 본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밖에도 체육대회 때 ‘목욕비’로 10만원을,명절에는 백화점 상품권을 건넸다.연말에는 허브가 들어간 5만원짜리 닭요리 제품을 선물했다.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이렇게 쓴 돈은 1년 동안 200만원이 넘었다. 오씨는 “학년 대표나 전교 어린이회장이 되면 단위가 더 커져 강남에서 전교 회장을 하면 1000만원 넘게 든다는 얘기도 있다.”고 말했다. ●도서관 사서 월급도 학부모들이 마련 서울 강북의 B초등학교 학부모인 황모(37·여)씨는 “은근히 ‘부담’을 주는 교사도 문제고,자녀에게 해가 될까 두려워 잘못된 관행을 버리지 못하는 학부모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꼬집었다.황씨는 단적인 예로 학교 도서관 운영문제를 들었다. 교육부가 도서관을 짓도록 권유하고 있지만 정작 지원금은 턱없이 부족해 학부모가 부담하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이 학교의 경우도 사서 월급 70만원 중 부족한 40만원을 회장 엄마들이 부담한다. 학교운영위원회 밑에 있는 학부모회,명예교사회,녹색어머니회 등 각종 모임도 ‘돈 먹는 하마’나 다름없다.일단 가입비를 10만∼30만원 정도 내고,일이 있을 때면 따로 체면치레를 해야 한다. 황씨는 “에어컨을 설치하자고 학부모 전체에게 20만∼30만원씩 걷는 일도 있고,학교 화장실 청소비에 보태기 위해 강제적으로 어린이신문을 구독하도록 하는 비교육적인 행태도 부지기수”라면서 “사정이 이러니 학부모 사이에는 ‘돈이 없으면 아이를 회장시키면 안 된다.’는 빈정거림이 나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효섭기자 newworld@ ˝
  • 모노드라마 ‘딸에게 보내는 편지’ 주연 최정원

    “연습하면서 많이 울었어요.작품이 슬퍼서도 울었지만,힘들어서 울 때도 많았지요.” 뮤지컬 배우 최정원(35)은 솔직했다.5일부터 산울림소극장에서 공연하는 모노드라마 ‘딸에게 보내는 편지’(아널드 웨스커 작,임영웅 연출)를 준비하는 동안 줄곧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이 힘겨웠다고 고백했다.데뷔 17년 만에 처음 도전하는 정극,그것도 혼자서 1시간30분을 온전히 메워야 하는 1인극인데 어찌 두려움이 없을까. ●데뷔 17년만에 1인극 첫 도전 ‘딸에게 보내는 편지’는 지난 92년 윤석화 주연으로 초연돼 무려 9개월간이나 장기공연했던 흥행작.연출가 임영웅은 윤석화의 뒤를 이을 여배우로 뮤지컬 ‘키스 미 케이트’‘갬블러’ 등에서 눈여겨 봤던 최정원을 낙점했다. “처음엔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고민이 컸죠.그런데 대본을 읽고나선 너무 맘에 들어 ‘일단 해보자.’는 욕심이 앞서더군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녀는 이전에 윤석화가 연기하는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지 못했다고 했다.평소 절친한 선배인 윤석화는 캐스팅이 결정된 뒤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이 작품의 후임은 너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며 용기를 북돋웠다. ‘딸에게 보내는 편지’는 서른 다섯살의 밤무대 재즈가수가 이제 막 여자가 되려고 하는 열한살의 딸에게 들려주는 인생 이야기이다.열정적인 성격의 주인공은 원치 않은 임신으로 딸아이를 얻었고,가수의 꿈을 위해 어린 딸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주인공은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편지를 딸에게 쓰며 참회의 노래를 부른다. 공교롭게도 최정원의 나이는 극중 주인공과 똑같은 서른 다섯이다.게다가 이제 막 여섯살이 된 딸아이(수아)를 둔 엄마다.그래서인지 여자로서,엄마로서 연극의 모든 내용이 가슴에 알알이 박힌다고 했다.“하루 10시간씩 연습하고 밤늦게 집에 들어가 혼자 자고 있는 수아를 보면 엄마로서 참 미안한 생각이 들어요.극중 주인공이 딸에 대해 느끼는 죄책감이 고스란히 저한테도 전해지지요.” 참 솔직하다.주인공의 인생에서 아이 못지않게 가수로서의 꿈이 소중하듯 최정원도 수아와 뮤지컬,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선뜻 무엇을 택할지 대답을 못할 것 같다고 했다.딸은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임에 틀림없지만 뮤지컬 또한 자신의 삶에서 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일이라고 했다. ●밤무대 가수가 딸에게 들려주는 인생 이야기 ‘노래할 수 있는 여배우를 위한 연극’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극중엔 노래가 삽입된다.최정원은 자신이 부를 노래 다섯곡을 스스로 선곡했다.심수봉의 ‘나는 여자이니까’,그룹 ‘사랑과 평화’의 ‘어머니의 자장가’,뮤지컬 ‘캣츠’의 삽입곡 ‘메모리’ 등이 그녀가 인터넷을 뒤져 고른 노래들이다.롯데월드 뮤지컬단 1기로 출발한 최정원은 남경주와 함께 뮤지컬 전문배우 1세대로 꼽힌다.수중분만으로 수아를 낳은 때를 빼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무대에 올랐다.데뷔 이듬해 첫 주역을 맡았던 ‘가스펠’부터 지난해 ‘토요일밤의 열기’까지 섹시하고,예쁜 여주인공은 항상 그녀 차지였다. ●“못한단 소리 들어도 후회 안해요” 화려한 조명,성능좋은 마이크,탄탄한 앙상블 등 기댈 곳이 많은 뮤지컬과 달리 미세한 몸짓,작은 숨소리까지 객석에 전해지는 이번 소극장 무대가 뮤지컬 배우로서의 명성에 혹 마이너스가 될 우려는 없을까.“못한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후회 안 할 거예요.관객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저 스스로에 대한 도전이니까요.실패하면 실패하는 대로 배우로서 제 단점을 깨닫게 되는 것이니 얼마나 좋은 공부예요.”공연은 4월11일까지.(02)334-5915. 글 이순녀기자 coral@ 사진 손원천기자 angler@˝
  • 혹떼려다 혹붙인 ‘소음전쟁’

    한 상가의 지하에 있는 교회와 호프집이 경쟁적으로 ‘소음 전쟁’을 벌이다 배상신청까지 냈으나 “서로 잘못했으니 방음시설을 설치하라.”는 결정을 받았다. 1일 환경부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회(위원장 김영화)에 따르면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S상가에 입주한 A교회와 B호프집은 지난 1월 “소음으로 인해 예배(영업)를 방해받았다.”면서 각각 1500만원과 1000만원의 배상신청을 냈다. 간이 칸막이만 설치한 채 상가 지하 1층에 이웃해서 입주한 이들은 서로의 소음을 탓하며 감정다툼을 해오다 급기야 경쟁적으로 음악을 크게 트는 등 소음 전쟁을 벌여왔다.위원회가 현장조사를 나가 소음도를 조사한 결과 교회는 최고 114㏈,호프집은 106㏈의 소음을 내고 있었다.‘록콘서트’나 ‘전기톱’의 소음과 맞먹는 수치다. 위원회는 이들 교회 전도사와 호프집 주인을 상대로 원만한 타결을 종용했으나 합의가 이뤄지지 않자 결국 “서로 잘못했으니 배상액은 상쇄하고 소음이 환경기준(낮 65㏈,밤 55㏈)을 넘지 않도록 방음시설을 각각 설치하라.”고 직권 명령을 내렸다. 위원회 관계자는 “집합건물 내의 입주자들이 소음피해를 이유로 (위원회에)쌍방이 배상신청을 해 온 첫 사례”라면서 “별도의 방음장치를 설치하지 않고 영업점을 개방형으로 운영하는 상가들이 증가하고 있어 유사 분쟁이 잇따를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박은호기자 unopark@˝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18)조선족의 뿌리를 찾아서(하)

    문:중국의 노예로 살아야 했던 조선인들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徐:당시 청나라는 계속된 전쟁으로 만주족의 인구가 크게 감소되었지요.대부분 남자들이 전쟁터에서 살다 보니 농사 지을 일손이 부족하여 토지가 황폐해졌지요.전쟁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무기만큼이나 양식이 필요했는데,그 농사를 짓기 위해 포로가 필요했지요. 그 포로들을 농장 노예로 만들어 중노동을 시켰는데,조선인들은 주로 심양 부근인 동주보(東州保),둔소(屯所),안산(鞍山),흥경,청룡,풍윤(豊閏) 지역에 집중배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조선인 노예들은 뒷날 어떻게 처리되었을까요? 徐:민족동화 과정을 거쳐 만주적(滿洲籍)에 편입되어 귀화인이 되었는데,만주씨족통보(滿洲氏族通譜)에 올라 만주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문:청나라 포로가 된 조선인은 모두 노예가 되었을까요? 徐:소수지만 군인,지도층에 편입된 흔적도 있지만 대개는 농장노예,만주족 귀족의 노비가 되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문:조선인 포로를 분산시키거나 나누어 가졌다는 말인데,혹 인신매매도 있었을까요? 徐:‘심관록’에 그런 기록이 남아 있어요.이 문헌은 심양으로 끌려 온 조선의 두 왕자가 청나라 군인들에게 포위된 채 살았던 처소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것입니다.조선인들이 노예로 매매되었거나 포로 가족이 돈을 가져 와서 주고 데려가는 속환(贖還)이 있었음을 알 수 있지요. 문:노예라면 상품으로 매매,양도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말합니다.고대 오리엔트,고대 그리스·로마,식민지시대 아메리카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났지요.노예무역선,노예사냥,미국의 흑인노예라는 말이 그 증거지요.그런데 조선인 전쟁포로가 노예로 매매되었으며,그들이 조선족의 원류이고,오늘날 한국에 노동자로 와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피 속에 그런 비극의 역사가 흐르고 있다는 것은 퍽 충격적인 일입니다. 徐:심관록 기록을 그대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청나라 사람들은 포로가 된 사람들을 매매하려고 모여들었다.성문 밖에는 포로가 된 남녀 수만 명이 있었다.어머니와 아들이 서로 상봉하였거나 형제끼리 서로 만나 끌어 안고 통곡하는 데 울음 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잡혀간 사람을 돈을 주고 찾아가기 위하여 날마다 성문 밖에 모였다.포로가 되어 있는 자의 부모나 아내 또는 자식들이 와서 얼마면 데려갈 수 있겠느냐고 가격을 흥정하는데,값이 비싼 경우는 백냥 또는 천냥을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값이 너무 높아 어이없어 통곡하면서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자신을 데리러 올 친척이 없어 홀로 있는 사람은 세자(世子) 관소(館所)에 찾아와서 속환시켜 달라고 울고 있으니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문:세자라면 누구를 말합니까? 徐:조선 인조대왕의 큰아들 이조(소현세자),둘째아들 이호(봉림대군,효종)입니다.병자호란 때 치욕적인 패배를 한 조선의 두 왕자를 인질로 데려왔거든요.노예로 매매당할 가혹한 운명에 놓여진 조선인들이 왕자들의 처소 울타리 밖에서 살려 달라고 호소했지요.두 왕자는 노예로 팔려가는 조선인들의 절규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아무 도움도 못주는 자신들의 처지를 아파하면서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오늘날 중국 조선족 역사에는 이같은 노예 역사의 슬픔이 숨겨져 있습니다. 문:그렇다면 조선인의 중국 이민사를 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으로 여기는 견해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徐:18세기 후반 이전에 중국으로 온 조선인들 대부분이 중국으로 귀화해 버렸기 때문에 조선인으로 부를 수 있는 구체적인 사람이 없었다는 이유일 것입니다. 문:귀화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徐:앞에서 잠시 말씀드렸듯이 오랫동안 전쟁을 치르느라 만주족이 급격하게 감소되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인구를 증가시키고,군인이 될 인원을 보충하며,노예 농장을 확대하기 위해서였습니다.그런 나머지 만주인 호적에 편입될 사람을 모집하는 정책을 발표하며,편입자 숫자대로 상을 주는 제도가 큰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초기에는 조선인들에게 강압적으로 귀화를 시켰지요.그런 연후에 조선인들은 비참한 처지를 벗어나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하여 스스로 귀화하고 만주호적자 모집에 순응하는 자연적 귀화과정을 밟았지요. 헤이룽장조선민족이란 문헌에는 청나라 초기에 만주적에 가입한 조선인의 성씨가 42개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이들의 선조는 대부분 천총(天聰) 연간인 1627∼1635년에 청나라로 온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문:그러니까 17세기 초·중엽에 이미 조선인들은 국적을 바꾸어 청나라 사람이 되고 만주 씨족에 올라 만주인이 되었다는 말씀이군요. 徐:설혹 그런 식으로 귀화를 하지 않고 버틴다 하더라도 오래 가지는 못했을 것입니다.조선인이 다른 민족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릴 수밖에 없는 형편이고,이같은 통혼을 기초로 하여 혈연관계와 친척관계를 맺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민족에게 겹겹으로 포위되어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중국 조선족의 처지임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하북성 청룡현 박씨(朴氏) 조선족에 대한 조사’에 의하면 이 박씨들의 조상은 명나라 말 청나라 초에 중국으로 왔는데 동성동본 불혼 제도를 대대로 이어받았다 합니다. 문:한족,몽골족,만주족으로 국적을 바꾼 사람들은 그 뒤로 조선족으로의 회복이 영영 이뤄지지 않았습니까? 徐:아닙니다.심리적으로는 자신들이 조선인이라는 민족의식이 매우 강하게 존속되어 왔습니다.그러다가 1982년부터 조선족으로 고쳐서 조상이 남겨 둔 민족성을 회복한 사람이 많습니다. 조선 말에서 20세기 일제 때 중국으로 와서 조선족으로 분류된 이들에게 조선은 아직도 그리운 고향입니다.참,마음이 아픕니다. 문:일제 때 두만강,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올 수밖에 없었던 한국인들 중에서도 해방 후 고향으로 가지 못한 채 조선족이 된 사람도 있습니까? 徐:아주 많습니다.우리 민족을 갈라 놓은 것은 공산주의자들보다 먼저 일왕(日王)정권이었지요.한반도의 남과 북은 통일이 되면 그날로 하나가 되겠지만 중국 조선족은 다르겠지요.그러니 일제의 식민통치는 중국 조선족에게는 치유될 수 없는 원한의 상처지요. 문:저는 이곳에 오기 전에 러시아에서 살고 있는 한인들인 카레이츠들의 삶을 둘러 볼 기회가 여러번 있었습니다.특히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의 지방 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우수리스크,하바로프스크 같은 도시의 장마당이라 부르는 난전에서 조선족 장사꾼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그들은 국경의 세관에서 비자를 받고 러시아로 오는데,주로 옷장사를 하더군요.하지만 한달간씩 머물며 장사를 해도 체재비를 빼면 남는 것이 없거나 손해를 보기 십상이라 했습니다.그런 그들이 한결같이 꿈꾸는 것은 한국에 가서 돈을 버는 것이었습니다만,요즘 한국에 온 조선족들의 처지가 참 어렵습니다. 러시아의 카레이츠들보다 중국의 조선족 운명이 더 암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둘 다 우리 민족이 안고 사는 슬픔의 뿌리인데…. 徐:한국이 잘 살게 되어야 합니다.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잘 살게 되어야만 이 아픔의 역사가 통한과 비극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의 조선족,러시아의 카레이츠,일본의 조센징은 모두 350만명 정도라고 한다.이들의 삶을 생각하기 위하여 ‘동북아평화연대’등의 모임이 생겨나고 있지만 중국과 러시아의 조선족,고려인들은 사는 데 어려움이 크다. 그 어려움의 한 원인이 일본의 식민통치가 저지른 잘못이며,식민통치가 옳았다는 발언을 하는 일본의 정치지도자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여전히 친일파 지식인들이 숭배되기도 한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18)조선족의 뿌리를 찾아서(하)

    문:중국의 노예로 살아야 했던 조선인들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徐:당시 청나라는 계속된 전쟁으로 만주족의 인구가 크게 감소되었지요.대부분 남자들이 전쟁터에서 살다 보니 농사 지을 일손이 부족하여 토지가 황폐해졌지요.전쟁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무기만큼이나 양식이 필요했는데,그 농사를 짓기 위해 포로가 필요했지요. 그 포로들을 농장 노예로 만들어 중노동을 시켰는데,조선인들은 주로 심양 부근인 동주보(東州保),둔소(屯所),안산(鞍山),흥경,청룡,풍윤(豊閏) 지역에 집중배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조선인 노예들은 뒷날 어떻게 처리되었을까요? 徐:민족동화 과정을 거쳐 만주적(滿洲籍)에 편입되어 귀화인이 되었는데,만주씨족통보(滿洲氏族通譜)에 올라 만주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문:청나라 포로가 된 조선인은 모두 노예가 되었을까요? 徐:소수지만 군인,지도층에 편입된 흔적도 있지만 대개는 농장노예,만주족 귀족의 노비가 되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문:조선인 포로를 분산시키거나 나누어 가졌다는 말인데,혹 인신매매도 있었을까요? 徐:‘심관록’에 그런 기록이 남아 있어요.이 문헌은 심양으로 끌려 온 조선의 두 왕자가 청나라 군인들에게 포위된 채 살았던 처소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것입니다.조선인들이 노예로 매매되었거나 포로 가족이 돈을 가져 와서 주고 데려가는 속환(贖還)이 있었음을 알 수 있지요. 문:노예라면 상품으로 매매,양도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말합니다.고대 오리엔트,고대 그리스·로마,식민지시대 아메리카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났지요.노예무역선,노예사냥,미국의 흑인노예라는 말이 그 증거지요.그런데 조선인 전쟁포로가 노예로 매매되었으며,그들이 조선족의 원류이고,오늘날 한국에 노동자로 와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피 속에 그런 비극의 역사가 흐르고 있다는 것은 퍽 충격적인 일입니다. 徐:심관록 기록을 그대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청나라 사람들은 포로가 된 사람들을 매매하려고 모여들었다.성문 밖에는 포로가 된 남녀 수만 명이 있었다.어머니와 아들이 서로 상봉하였거나 형제끼리 서로 만나 끌어 안고 통곡하는 데 울음 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잡혀간 사람을 돈을 주고 찾아가기 위하여 날마다 성문 밖에 모였다.포로가 되어 있는 자의 부모나 아내 또는 자식들이 와서 얼마면 데려갈 수 있겠느냐고 가격을 흥정하는데,값이 비싼 경우는 백냥 또는 천냥을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값이 너무 높아 어이없어 통곡하면서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자신을 데리러 올 친척이 없어 홀로 있는 사람은 세자(世子) 관소(館所)에 찾아와서 속환시켜 달라고 울고 있으니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문:세자라면 누구를 말합니까? 徐:조선 인조대왕의 큰아들 이조(소현세자),둘째아들 이호(봉림대군,효종)입니다.병자호란 때 치욕적인 패배를 한 조선의 두 왕자를 인질로 데려왔거든요.노예로 매매당할 가혹한 운명에 놓여진 조선인들이 왕자들의 처소 울타리 밖에서 살려 달라고 호소했지요.두 왕자는 노예로 팔려가는 조선인들의 절규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아무 도움도 못주는 자신들의 처지를 아파하면서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오늘날 중국 조선족 역사에는 이같은 노예 역사의 슬픔이 숨겨져 있습니다. 문:그렇다면 조선인의 중국 이민사를 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으로 여기는 견해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徐:18세기 후반 이전에 중국으로 온 조선인들 대부분이 중국으로 귀화해 버렸기 때문에 조선인으로 부를 수 있는 구체적인 사람이 없었다는 이유일 것입니다. 문:귀화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徐:앞에서 잠시 말씀드렸듯이 오랫동안 전쟁을 치르느라 만주족이 급격하게 감소되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인구를 증가시키고,군인이 될 인원을 보충하며,노예 농장을 확대하기 위해서였습니다.그런 나머지 만주인 호적에 편입될 사람을 모집하는 정책을 발표하며,편입자 숫자대로 상을 주는 제도가 큰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초기에는 조선인들에게 강압적으로 귀화를 시켰지요.그런 연후에 조선인들은 비참한 처지를 벗어나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하여 스스로 귀화하고 만주호적자 모집에 순응하는 자연적 귀화과정을 밟았지요. 헤이룽장조선민족이란 문헌에는 청나라 초기에 만주적에 가입한 조선인의 성씨가 42개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이들의 선조는 대부분 천총(天聰) 연간인 1627∼1635년에 청나라로 온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문:그러니까 17세기 초·중엽에 이미 조선인들은 국적을 바꾸어 청나라 사람이 되고 만주 씨족에 올라 만주인이 되었다는 말씀이군요. 徐:설혹 그런 식으로 귀화를 하지 않고 버틴다 하더라도 오래 가지는 못했을 것입니다.조선인이 다른 민족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릴 수밖에 없는 형편이고,이같은 통혼을 기초로 하여 혈연관계와 친척관계를 맺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민족에게 겹겹으로 포위되어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중국 조선족의 처지임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하북성 청룡현 박씨(朴氏) 조선족에 대한 조사’에 의하면 이 박씨들의 조상은 명나라 말 청나라 초에 중국으로 왔는데 동성동본 불혼 제도를 대대로 이어받았다 합니다. 문:한족,몽골족,만주족으로 국적을 바꾼 사람들은 그 뒤로 조선족으로의 회복이 영영 이뤄지지 않았습니까? 徐:아닙니다.심리적으로는 자신들이 조선인이라는 민족의식이 매우 강하게 존속되어 왔습니다.그러다가 1982년부터 조선족으로 고쳐서 조상이 남겨 둔 민족성을 회복한 사람이 많습니다. 조선 말에서 20세기 일제 때 중국으로 와서 조선족으로 분류된 이들에게 조선은 아직도 그리운 고향입니다.참,마음이 아픕니다. 문:일제 때 두만강,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올 수밖에 없었던 한국인들 중에서도 해방 후 고향으로 가지 못한 채 조선족이 된 사람도 있습니까? 徐:아주 많습니다.우리 민족을 갈라 놓은 것은 공산주의자들보다 먼저 일왕(日王)정권이었지요.한반도의 남과 북은 통일이 되면 그날로 하나가 되겠지만 중국 조선족은 다르겠지요.그러니 일제의 식민통치는 중국 조선족에게는 치유될 수 없는 원한의 상처지요. 문:저는 이곳에 오기 전에 러시아에서 살고 있는 한인들인 카레이츠들의 삶을 둘러 볼 기회가 여러번 있었습니다.특히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의 지방 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우수리스크,하바로프스크 같은 도시의 장마당이라 부르는 난전에서 조선족 장사꾼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그들은 국경의 세관에서 비자를 받고 러시아로 오는데,주로 옷장사를 하더군요.하지만 한달간씩 머물며 장사를 해도 체재비를 빼면 남는 것이 없거나 손해를 보기 십상이라 했습니다.그런 그들이 한결같이 꿈꾸는 것은 한국에 가서 돈을 버는 것이었습니다만,요즘 한국에 온 조선족들의 처지가 참 어렵습니다. 러시아의 카레이츠들보다 중국의 조선족 운명이 더 암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둘 다 우리 민족이 안고 사는 슬픔의 뿌리인데…. 徐:한국이 잘 살게 되어야 합니다.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잘 살게 되어야만 이 아픔의 역사가 통한과 비극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의 조선족,러시아의 카레이츠,일본의 조센징은 모두 350만명 정도라고 한다.이들의 삶을 생각하기 위하여 ‘동북아평화연대’등의 모임이 생겨나고 있지만 중국과 러시아의 조선족,고려인들은 사는 데 어려움이 크다. 그 어려움의 한 원인이 일본의 식민통치가 저지른 잘못이며,식민통치가 옳았다는 발언을 하는 일본의 정치지도자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여전히 친일파 지식인들이 숭배되기도 한다.
  • [이 주일의 어린이 책] 초등학생때 놓치면 평생 후회한다/김자영 지음

    EBS의 인기 프로그램 ‘부모의 시간’을 7년째 진행중인 아나운서 김자영씨가 그동안 방송에서 다뤘던 내용들을 책으로 엮어 냈다.초등학생 5학년 비단이의 엄마이기도 한 지은이는 자신의 경험과 방송을 함께 진행한 각계 전문가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보통 엄마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자녀 교육의 어려움에 대한 다양한 해법들을 소개하고 있다. 김씨는 “교육 전문가도 아니고,딸아이 역시 영재와는 거리가 멀지만 방송을 진행하면서 얻은 소중한 정보들을 여러 부모와 공유하고 싶었다.”고 밝혔다.저자 스스로 엄마로서 직접 보고,듣고,깨달은 바를 토대로 했기 때문에 피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생활에서 곧바로 실천할 수 있는 내용들이라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단짝 친구 전화번호를 못외우는 걸 보며 ‘혹 머리가 뒤지는게 아닐까’고민하는 경험담들은 많은 부모들이 고개를 끄덕일 만한 대목이다.공부습관,영어교육,리더십 등 20개의 주제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구성과 방대한 정보량이 돋보인다.1만 5500원. 이순녀기자˝
  • [Doctor & Disease]서울대병원 강남건진센터 오병희 원장

    언제부턴가 의사들은 고혈압을 ‘소리없는 살인자(silent killer)’라고 불렀다.은밀하게 병증을 키우다 어느 순간,급사(急死)에 이르게 하는 고혈압의 가공할 위험성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그러나 고혈압의 심각성을 알고 적절한 예방조치를 취하거나,효율적인 치료를 받는 사람은 의외로 흔치 않다.증상이 거의 없어 심지어는 중증의 환자조차도 “이거 내가 쓸데없이 병원 좋은 일만 하는 거 아닌가 몰라.”하는 위험한 유혹에 곧잘 빠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대한순환기학회 학술이사를 역임한 서울대병원 강남건진센터 오병희(51) 원장의 지적은 고혈압이거나 그걸 두려워 하는 사람들이 귀담아 들을 만하다.“고혈압이 무서운 것은 직접 인간의 생명을 위협한다는 점 뿐 아니라 뇌졸중,심근경색,뇌경색,신부전 등 갖가지 악성 질병을 초래하는 원인 질환이기 때문입니다.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 심각성을 가볍게 여깁니다.그게 문젭니다.”금방 수술실에서 관동맥중재술(좁아진 관동맥을 넓히는 수술)을 마치고 나온 그를 만나 ‘고혈압 공화국’으로 치닫는 우리나라의 병증을 해부해 봤다. ●70대 절반이 병증 갖고 있어 우리의 경우 심각성은 어느 정도인가. -30세 이상 성인의 25∼30% 정도가 고혈압이며,나이에 따라 유병률이 크게 증가해 70대는 50%가 병증을 갖고 있다.그러나 증상이 거의 없어 적절한 치료를 받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미국도 병원에서 적절한 치료를 받는 사람은 전체 환자의 30∼40%에 불과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상태가 왜 심각한 것인가. -계속 유병률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거의 모든 돌연사는 고혈압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다.합병증 발생 추이도 눈여겨 봐야 한다.예전에는 뇌졸중(중풍)이 주류였으나 최근에는 뇌출혈이나 심근경색이 많다.생활여건의 변화가 반영된 결과다. 이런 상황을 초래한 원인은 무엇인가. -고혈압은 유전적 요인 말고도 환경적 요인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특히 동물성 지방의 과다 섭취와 짜게 먹는 식습관이 문제다.고혈압 예방을 위해서는 1일 염분 섭취량을 6g 이하로 권고하지만 젓갈 등 염장류에 길들여진 우리 국민들이 이를 지키기는 쉽지 않다.우리나라 사람은 1일 평균 염분 섭취량이 20g을 넘는데,이게 하루 아침에 줄여지겠나. ●조기발견이 삶의 질 바꿔 그러면서 그는 급증하는 유병률도 문제지만,고혈압의 잠재적 위험성을 너무 저평가하거나 아예 모르는 상황이 더 문제라고 들었다.“고혈압을 가진 사람도 당장 불편이 없어 치료의 필요성을 못느끼다가 합병증이 나타난 뒤에야 병원을 찾는 경우가 태반이다.심지어는 평생 혈압 한번 재보지 않고 사는 사람도 있다.”며 안타까워했다.“절실한 것은 국민들에게 고혈압의 심각성을 알려 생활습관을 개선하도록 하고,고혈압 조기발견이 개인의 삶의 질을 바꾼다는 점을 소상하게 설명해야 합니다.의사들이 앞장서는 건 당연하지만 정부도 적극적으로 거들어야 ‘호미로 막을 일,가래로도 못막는 사태’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치료는 어떤가.고혈압도 다른 질환처럼 완치 개념을 적용할 수 있나. -치료라기보다 조절이라는 말이 옳다.그 결과 상태가 현저하게 개선되면 약물투여를 중단할 수도 있다. ●수술 필요한 경우는 많지 않아 현재 적용하는 치료법은 어떤 것들인가. -비약물치료로는 생활습관 개선,이를테면 싱겁게 먹고 걷기,수영,조깅 등 규칙적인 운동과 저지방식 위주의 식단으로 혈중 콜레스테롤을 저감시키는 방법이 있다.약물치료는 고혈압과 합병증,거기에서 야기되는 위험요인을 줄여나가는 방법인데,투약 기준은 통상 수축기 혈압 140㎜Hg이상이나 이완기 혈압이 90㎜Hg이상이면 치료 대상으로 본다.수술이 필요한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전체 환자의 2∼3%는 부신에 생긴 혹에서 분비하는 물질이 혈압을 높이거나 스테로이드호르몬이 과다하게 분비돼 혈압을 올린다.또 혈관에 염증이 있는 사람 등은 고혈압의 원인이 명백해 수술요법을 적용하면 예후가 좋다. 혈압 치료기준은 불변인가. -그렇지 않다.과거에는 160㎜Hg을 넘어야 약물을 투여했지만 지금은 140㎜Hg을 경계로 본다.그만큼 치료 범위가 넓어진 것이다. 수술 후유증도 문제가 될 텐데. -그건 일률적으로 말하기가 쉽지 않다.연관된 질환도 많고 경우도 각각이기 때문이다.혈관의 막힌 부위에 철망을 넣어 혈류의 흐름을 유지하도록 하는 관동맥시술의 경우 재협착률이 5%를 넘지 않는다.초기 풍선요법을 적용할 때는 40%,이후 스텐트시술 때는 20∼30%였으나 지금은 약물이 코팅된 스텐트를 사용해 부작용을 크게 우려하는 단계는 아니다. ●싱겁게 먹는 건 기본 약물 부작용은 어떤가. -현실적인 숙제다.고혈압의 특성상 이뇨제와 베타차단제를 장기적으로 복용해야 하는데,더러는 체내 중성지방이 늘었다거나 성기능 감퇴를 호소하는 사람도 있다.이 때문에 의사들이 환자의 상태를 살피면서 적절한 약제를 처방하거나 강도를 조절하는 ‘맞춤요법’을 적용하기도 하는데,미국의 예를 보면 전체적으로는 그다지 주목할만 한 성과가 없는 것 같다.아마 오래 끌어야 하는 싸움 아니겠나. 예방책도 일러달라. -싱겁게 먹고 동물성 지방의 섭취를 줄여야 하는 건 기본이다.일주일에 4∼5일,1일 30분 이상 꾸준히 자신의 몸상태에 맞는 운동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또 질환의 소지를 가진 사람은 무조건 금연하고 과다한 스트레스에 무방비로 노출되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한다. 글 심재억기자 jeshim@ 사진 도준석기자 pado@˝
  • 친일인명사전 모금운동 조문기 민족문제硏 이사장

    “국내외를 망라하고 열심히 자료를 챙기고 있습니다.기존의 백과사전 스타일로 20권짜리 친일인명사전을 2006년에 우선 선보일 예정입니다.최근 벌어진 이승연 누드파문도 친일청산이 안됐기 때문이지요.” 지난 연말 ‘2004년 예산안’ 심의과정에서 국회가 ‘친일인명사전편찬비용’을 전액 삭감하자 민족문제연구소 조문기(74) 이사장은 반신반의하면서 모금운동을 벌였다.혹 ‘친일’ 운운하면서 모금한다는 오해의 두려움도 없지 않았다.목표액(5억원) 달성 시점도 올 8월15일로 멀찌감치 잡았다. 그러나 모금운동이 시작된 지 10일 만에 5억원을 넘더니 두 달도 채 안 된 20일 현재 7억여원에 이르렀다.일반시민과 네티즌이 십시일반으로 모금운동에 적극 동참한 결과였다.모금운동에는 모두 3만여명이 참여했고 회원수도 1000여명에서 3000여명으로 3배나 늘었다. 조 이사장은 21일 오후 5시 들뜬 마음으로 이들과 첫 대면한다.장소는 서울 용산구민회관에서다.모임 명칭이 ‘2004년 신년회 겸 회원총회’이지만 성공적인 모금운동에 대한 평가와 친일인명사전편찬을 위한 새로운 결의를 다지는 의미에서 조 이사장의 감회는 그 어느때보다도 남다르다. “부산에서 고교 선생님으로 계신 김호령(40)씨가 인터넷을 통해 모금운동에 불을 붙였습니다.친일사전 편찬에 이렇게 뜨거운 호응을 얻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지요.” 당초보다 편찬사업을 앞당길 수 있어 의욕이 더욱 커졌다는 그는 “친일파와 그 자손들에 대해 피해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아직도 청산되지 못한 과거의 역사를 바로잡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고 편찬의 의미를 부여했다. 김문기자 km@
  • ‘짱 훈’ 콘서트야 개그야

    ●장훈 콘서트가 잼나는 것은… “도대체 김장훈 콘서트가 왜 재미있는 거야?”그 이유를 김장훈 본인의 입을 통해 들어 봤다. ●’구라’따라 재미삼천리 관객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을 속속들이 보여주려다 보니 노래만큼이나 말이 길어지더라고요.그걸 팬들이 듣고 무척 재미있어 하는 거고요.사실 제가 ‘한 개그’하거든요.일부에서는 ‘구라’(?)라고 하지만,다 팬들의 애정어린 표현이죠.가수가 공연 내내 ‘뻘쭘한’자세로 노래만 부르면 정말 재미없지 않나요? ●’한 개그’ 하지요 노래를 부르며 발차기,찌르기 등 격투기에 가까운 동작을 함께 선보이죠.물건을 객석으로 마구 집어 던지기도 해요.언젠가는 뱀도 한번…(후훗).공연 끝나면 녹초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나? 이젠 참으려 해도 객석에서 먼저 “발차기!”라고 외치는데 도리있나요? ●정성이 느껴져요! “재미를 기대하고 간 공연에서 제일 많이 울었다.”는 말을 관객들로부터 듣고 싶어요.‘감동’과 ‘재미’는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같은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니까요.온갖 정성을 바쳐 준비와 연습을 한 뒤 무대위에서는 자유롭게 노래를 부르는 것이죠. ‘콘서트홀릭(Concert-holic)’ 이 단어만큼 가수 김장훈을 잘 표현한 말이 또 있을까?새 콘서트 준비에 관한 질문을 던지자마자 눈에서 광채가 나며 ‘콘서트 예찬론’부터 쏟아낸다.콘서트를 향한 그의 애정이 집착에 가까운 것으로 느껴진다. ●콘서트에 미친 남자 “대중이 느낄 수 있어야 진정한 예술 아닙니까?” 재생기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노래에서는 진정한 ‘필’을 느낄 수 없단다. 기존의 형식을 모두 파괴하는 기발한 컨셉트,화려한 무대장치와 특수효과,‘배꼽잡기’식 재담에 특이한 퍼포먼스까지….한 편의 행위예술을 연상시키는 김장훈의 콘서트는 관객들을 일순간 무아지경에 빠지게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이같은 그만의 마력이 오는 26일부터 사흘간 서울 현대백화점 압구정점 옥상 무대를 통해 오랜만에 펼쳐진다. ●‘김장훈식’신개념 콘서트 제목부터 심상찮다.‘신진사대부’.도대체 이번엔 또 어떤 ‘사고’를 칠까? “이번 콘서트의 키워드는 ‘일탈’과 ‘자유’에요.왜 조선 건국 당시 ‘신진사대부’가 진취적 성향으로 구질서를 무너뜨리고 개혁을 주도했잖아요.그런 정신을 음악에 도입하자는 거죠.지금은 장르간의 선긋기가 난무하고 있어요.저와 다른 장르에 속한 아티스트들이 뒤섞여 그 장벽을 허물고 대중속으로 한발짝 더 다가갈 겁니다.”콘서트장 곳곳에 그림,조각,사진예술,설치미술 등을 전시해 기존의 공연장과 차별성을 둘 거란다. “관객들이 분장을 하고 마음에 드는 옷을 입은 채 직접 ‘코스튬 플레이’를 펼쳐요.공연장 벽 양쪽에는 미니 바(bar)와 ‘취한’좌석도 만들었고요.재미있고 신날 것 같지 않아요?”‘술과 함께하는 콘서트’,그만의 기발함에 두손 두발 다 들었다.이번 콘서트에서 그만의 ‘히든카드’가 궁금했다.“쉿!이건 기자님한테만 알려주는 비밀인데요.(이 사람,참 순박하다.신문에 나가면 다 알려질 텐데)노래를 부르다 갑자기 ‘가위손’으로 분장해 객석을 누빌 거예요.(혹 관객들의 머리가 모두 잘려나가는 것은 아닌지…)” ●새 앨범 4월 출시 KBS 2FM ‘김장훈의 뮤직쇼’를 통해 7년만에 라디오 DJ로 복귀한 그.역시나 사고(?)가 없을 리 없다.“얼마전 엔딩 2분을 남기고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더라고요.제가 원래 대본은 거의 안 보거든요.할 수 없이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있는 청취자 30여명의 이름과 주소를 차례로 부르며 시간을 때웠죠.유리창 너머 PD와 작가는 안절부절못하고….근데 반응 엄청 좋던데요.그래서 지금도 짬내서 계속 하고 있어요.(웃음)” 새 앨범은 4월 중 내놓을 계획이란다.“이번 앨범의 컨셉터는 ‘흑과 백’이에요.2장의 CD에 잔잔한 발라드와 흥겨운 멜로디 등 정반대되는 느낌의 9곡씩을 나눠 담았어요.” 인터뷰를 접을 즈음,이번 콘서트가 몇번째냐고 물으니(사실 그는 1000번도 넘게 콘서트를 열었다),그가 한마디 던진다.“전 숫자 놀음엔 관심없어요.음반 몇장이 팔렸는지,관객 몇명이 왔는지,라디오 청취율이 얼마나 되는지….늘 이번이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마이크를 잡아요.조금도 흐트러지지 말자는 자기 최면이죠.” 글 이영표기자 tomcat@ 사진 이언탁기자 utl@˝
  • [열린세상] 고구려 연구기금의 함정/김진호 당대비평 주간·목사

    고대 이스라엘사 연구는 한갓 역사적 발명품에 불과했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담고 있는 휘틀럼의 ‘고대 이스라엘의 발견’은 결코 센세이셔널리즘의 산물이 아니다.이 분야에서 가장 명성 있는 연구자의 한 사람인 저자는 고대 이스라엘의 형성에 관한 현대의 가장 대표적인 가설들이 동시대의 정치학과 어떻게 연루되었는지를 꼼꼼하게 분석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현대의 국민국가 이스라엘의 시오니즘과 유럽 중심주의적 가치가 성서의 역사적 맥락을 추적하려는 역사가들의 심성 속에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지를 그는 세심하게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심성이 반영된 연구는 결국 팔레스타인 사람에 대한 인종주의적 편견과 연결되어 있으며,이스라엘과 유럽의 정치·경제적 권력이 미개한 아랍인에게 진보의 축복을 가져다 주리라는,서구인과 유태인의 제국주의적 인식을 역사적으로 정당화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주장한다. 어쩌면 고대 이스라엘사에 대한 연구가 터무니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그러나 그렇지 않다.휘틀럼 같은 특출한 연구자가 아니었다면 여간해서 알아낼 수 없을 만큼,연구는 정교했다.그런 견해를 연구한 자신들도 알아차리지 못해왔던 것이니 말이다. 이와 같은 연구자의 자기 현혹 메커니즘 가운데 하나가 연구기금을 둘러싼 학문 제도다.연구자들이 많이 몰리는 곳은 말할 것도 없이 연구기금이 많이 조성되는 분야다.성서 역사학 분야에서 가장 많은 기금이 투여되는 곳 중의 하나는 고대 이스라엘의 출현과 관련된 분야다.역량 있는 많은 연구자들이 풍부한 연구비를 받아 연구하니 그 성과는 대단하다.한데 바로 그 성과가 함정임을 누가 알았으랴.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오직 고대 이스라엘의 출현에 얽힌 영역만 과도하게 연구되다 보니 의도하지 않았지만 동시대를 산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제거된 역사가 만들어진 것이다.게다가 이스라엘이 출현한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보다 몇 세기 후대에야 비교적 잘 구성된 종족적 결속체로 등장했다. 즉 이스라엘과 비(非) 이스라엘의 구별이 출현기에는 그리 명료하지 않았을 것이니,출현기의 이스라엘 거주 지역이라는 것 자체가 허구적인 산물이라는 건 말할 것도 없다.그럼에도 시간과 공간을 편의에 따라 나누고 연결하면서 엮인 역사적 구상물인 ‘상상의 과거’는 현대 이스라엘의 그 지역에 대한 영역 주장의 근거가 되었고,유럽인과 그리스도 교회의 대(對) 아랍,나아가 대 비 서구사회에 대한 제국주의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자원이 된 것이다. 최근 이른바 ‘동북공정’이라 하는 중국의 고구려 연구 프로젝트가 알려지면서 한국 정부도 상당한 연구 기금을 조성해서 고구려 연구를 지원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한국의 관련 학계와 시민단체들도 중국 정부의 정치적 의도를 둘러싼 각종 해석을 제기하면서 ‘제2의 나당전쟁’ 운운하며,이 연구 기금을 활용하는 방안을 두고 입장에 따라 격론을 벌이고 있는 모양이다. 아무튼 열 손가락이면 충분히 헤아릴 만한 고구려 전문 연구자의 숫자는 이제 꽤 늘어날 것 같다.물론 양만이 아니라 연구의 질도 한층 깊어지리라고 믿는다.그런데 나는 이 대목에서 걱정이 앞선다.내게 익숙한 분야인 고대 이스라엘사가 밟았던 전철을 고구려사 연구가 답습할 가능성이 충분해 보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역사의 과제가 국가 혹은 여타 권력적 체계의 과제와 맞물릴 때 시간을 통한 성찰의 학문으로서 역사학은 위기를 맞는다. 국가 등은 경계의 안과 밖을 나눔으로써 존재가 실현된다.민족주의는 많은 적극적인 의미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경계의 안·밖 이분체계를 강화하는 논리로서 작동하는 장치였다.그런 점에서 역사학은 민족주의를 필요로 할 때조차도 그것과 상대적인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왜냐하면 역사 전쟁이 벌어질 때 민족주의적인 경계의 논리가 예민하게 작동되기 때문이다.혹 역사 전쟁이라는 의식이 우리의 숨겨진 배타성을 자극하는 은밀한 촉진제가 될까 걱정된다. 김진호 당대비평 주간·목사˝
  • [서울광장] 조류독감과 포퓰리즘/양승현 논설위원

    기우(杞憂)이길 바라지만,이번 조류 독감 광풍은 과거와 비교가 안될 만큼 오랫동안 광범위하고,집단적인 행동 양식이 아닐 수 없다.이제 광장의 이중성을 고민할 때다. 조류 독감이 광풍처럼 휘몰아치고 있다.14만 양계 농가는 파산 선고를 한 지 오래됐고,1만여 도심의 통닭 체인점은 아예 문을 닫거나 업종을 변경하느라 아우성이다.2개월째 계속되고 있는 이 광풍이 현기증을 느낄 만큼 공포스럽다. 그런데 현상을 목도하면서 우리 사회에서 한참 진행 중인 ‘광장 논쟁’을 떠올렸다.이제 우리도 광장의 포퓰리즘이 가져다 주는 속도와 파괴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읽었다면,나만의 생각일까.더러는 부인할지 모르겠으나 우리도 정치에서부터 작은 먹을거리에 이르기까지 광장문화 시대에 들어섰다는 방증이 아닐까. 광장은 아직 우리에게 생소한 체험이다.광장 논쟁이 정치의 중심부를 관통하고 어느새 일상의 작은 곳까지 미치고 있으나 여전히 느끼지 못한다.너무 짧은 역사 탓이다.2002년 월드컵 때 붉은악마들이 만들어낸 인터넷 강국의 열린 광장이 최초였다.이제는 순식간에 평범한 주부를 ‘얼짱’,‘몸짱’으로 만들고,끝없는 대글로 보통 사람을 유명 인사로 만드는 공간으로 확대됐다.가히 위협적이고 항구적이라 할 만하다.과거 시민들의 정치적 대규모 군중집회가 더러 있었으나 광장으로 자리매김하지 않는 것은,지속적인 공간이 아닌 까닭이다. 원래 우리 여론 공간의 원형질은 골목이다.아낙네들이 골목에 모여 수군거리면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는’ 여론 문화다.동네 꼬마들의 으뜸도 골목안의 대장이다.골목여론에 의해 서열이 정해지고,새로 이사온 아이는 여기에 편입되어야만 시쳇말로 ‘왕따’를 면하고 진정한 구성원이 된다.먼 동네 사람은 괜찮아도,‘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폐쇄적 공간이기도 하다. 그 오랜 여론 문화가 월드컵을 거치면서 광장으로 나온 뒤 그해 겨울 대통령 선거에서 또 그 위력을 과시하고 오늘에 이른 것이다.그 참여폭과 속도감은 아무도 따라잡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이 광장에 대한 비판도 거세다.‘타락한 광장’이고,저급한 포퓰리즘(인기 영합주의)이라고 지적한다.소설가 이문열씨는 그의 산문집 ‘신들메를 고쳐매며’에서 ‘질낮은 인터넷 광장이 젊은 세대를 호도하고 있다.’며 좌파와 우파의 조화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그의 지적처럼 광장은 집단 최면이나 히스테리,집단 피학과 가학증과 같은 부작용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회사 근처 한 오리고기 음식점 주인은 TV 사극 대장금에서 유황오리의 효험이 소개돼 “이제 유황오리다.”며 좋아했는데,조류 독감으로 된서리를 맞았다고 털어놓았다.그의 설명인즉,세상에 유황을 먹고 살아남을 짐승은 없다고 했다.오리도 마찬가지라고 한다.다만 만 하루 동안 사료에 유황을 섞어 먹이면 60%는 죽고,40%가 그 때까지 살아있다는 것이다.그 하루를 살아남은 오리가 유황오리로 식탁에 오르는 것이라고 영업 비밀을 털어놨다. 흔히들 ‘잘 사용하면 보배지만,잘못 사용하면 독’이라고 말한다.유황처럼 말이다.우리 광장 문화도 이제 비슷한 상황에 도달한 게 아닌가 여겨진다.음식 문화가 소문에 춤을 추는 경향이 짙긴 하지만,골목 수준을 뛰어넘은 지 오래다.혹 음식문화도 광장의 영향으로 집단적 가학 심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아파트 입구에 하루에 3∼4개씩 붙어있는 통닭집 광고를 보고,또 저녁 늦게 할인점에서 “닭 한 마리에 300원,떨이 선착순 10명입니다.”를 듣고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아니,그런데 통닭을 만원씩 받고,밤늦게 아이들을 꾀어 뚱보로 만들었단 말이야.’ 이게 꼭 우리 동네만의 일일까. 기우(杞憂)이길 바라지만,이번 조류 독감 광풍은 과거와 비교가 안될 만큼 오랫동안 광범위하고,집단적인 행동 양식이 아닐 수 없다.이제 광장의 이중성을 고민할 때다. 양승현 논설위원 yangbak@˝
  • [盧 측근비리 청문회] 굿머니 모금책 김진희씨 증언

    12일 국회에서 열린 불법대선자금 청문회에서는 전날 민주당 조재환 의원의 ‘굿머니 자금 여권 전달설’을 뒷받침하는 증언을 내놓은 ‘굿머니 모금책’ 김진희씨의 입에 시선이 집중됐다.김씨는 “확실하게 정치권에 돈이 들어갔으며 신계륜의원에게 보험들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강조했다.김씨는 그러나 질문 의원에 따라 다소 뉘앙스가 다르게 답변하기도 했다. ●“전화내용을 들었다” 김씨는 굿머니 돈을 건네받은 것으로 지목된 신계륜 의원과 관련,“(굿머니) 김영훈 대표와 직원간의 통화내용을 옆에서 들었다.”면서도 “하지만 재판중이라 구체적인 통화내용은 말씀드릴 수 없고,말하고 싶지 않고,말할 수 없다.”며 궁금증을 증폭시켰다.김씨는 ‘신 의원에게 돈이 건네졌다는 것을 들었느냐.’는 민주당 김영환 의원의 질문에 “직접 들은 적 없고 ‘윗분한테 로비했다.’는 말을 두 차례 들었다.”고 말했다.김씨는 뒤에 “‘신계륜 의원이 우리를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다.’는 얘기를 사장한테서 들었다는 거냐.”는 함승희 의원의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신계륜의원 굿머니 위해 뛰어” 김씨는 민주당 조재환 의원이 “노무현 대통령 후보가 당시 김영훈 대표에게 ‘감사하다.’고 한 육성 녹음 보이스펜이 존재한다고 전날 주장한 데 대해 “일부분 들은 내용이 있는데 말씀드리기 곤란하다.”고 답변했다.김씨는 회의 후 만난 기자들이 ‘보이스펜 녹음분량이 얼마나 많기에 CD 6장에 구워졌느냐.’고 묻자 “6장은 같은 내용으로,나도 일부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녹음된 당사자가 조 의원이 주장한 것처럼 노무현 후보였느냐.’는 질문엔 입을 굳게 다물었다.김씨는 보이스펜 내용을 CD에 복사한 이유에 대해 “(사람의) 마음까지는 알 수 없는 것 아니냐.”면서 만일을 대비해 자료를 남겼음을 시사했다. ●민경찬 펀드 축소의혹 의원들은 투자자가 50명 이상이면 범법이라는 금감원 보고서를 청와대가 본 뒤 투자자 숫자가 달라지는 등 청와대와 금감원,민경찬씨와의 조율 의혹을 제기했다.증언에 나선 신해용 자산운용국장 등은 “청와대와 조율했다면 발표내용이 청와대와 금감원이 똑같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박했다. 민주당 함승희 의원은 민경찬 펀드 참여자와 관련,“강남 모 호텔에서 열린 민경찬씨의 누이 민미영씨의 아들 생일잔치에 모인 사람들이 펀딩 중심이라는 얘기도 있다.”고 주장했다. 노무현 후보측에 대한 동원산업의 50억원 제공설과 관련,민주당 김경재 의원은 “양평TPC 골프장 담보대출 후 경영난을 겪은 동원개발이 ‘대지개발’을 만들어 썬앤문그룹 문병욱 회장에게 (골프장을) 넘겼다. 문 회장의 동생 병근씨가 대지개발 대표이사라는 사실은 문 회장과 고리가 있었다는 걸 말하는 것”이라고 동원과 썬앤문의 관계에 의혹을 제기했다.김재철 동원산업회장은 “회사가 10여개가 있어 그런 일은 일일이 알 수 없고,당시 골프장 매매건도 7개나 됐다.그런 일은 최근에서야 알게 됐다.”면서 연관설을 부인했다. 한편 이광재 전 국정상황실장은 “2001년 8월∼2002년 12월 노무현 후보의 카드가 연체되는 상황이 12차례나 있었다.”면서 “대한민국 정치인이 대통령 노무현에게 적어도 돈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이지운 박정경기자 jj@˝
  • 율무·숙주·박하·녹차-정력감퇴說 '누명’

    ‘정력이 뭐기에….’ 회사원 김모(29)씨는 어지간해서 음식을 가리지 않는다.이런 그가 절대 입에 대지 않는 게 딱 하나 있다.바로 율무차다.항간에 떠도는 ‘율무는 남성의 정력을 떨어뜨린다.’는 얘기를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김씨 외에도 같은 이유로 율무차 마시기를 꺼리는 사람들이 많다.사실 율무는 정력 감퇴와는 거리가 멀다.오히려 자양강장의 효과를 지닌 대표적인 스테미나 식품에 속한다.‘본초강목’에 따르면 율무는 위에 좋으며 비장을 튼튼하게 하고 폐를 보한다고 했다.그래서 태음인이 율무를 먹으면 폐 기운이 좋아져 정력이 증가된다.또 ‘동의보감’은 율무를 오래 먹으면 식욕이 증진되고 몸이 가벼워진다고 적고 있다. 정력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누명’을 쓰고 있는 것은 비단 율무만이 아니다.잘못된 상식으로 일부 남성들로부터 외면 당하고 있는 몇 가지 음식의 속을 들여다 보자. ●숙주,열 많은 사람에게는 오히려 정력제 정력을 저하시킨다고 소문난 대표적 음식 중 하나가 바로 숙주다.어떤 이들은 주부들이 해장국 재료로 숙주 대신 콩나물을 애용하는 이유가 정력 때문이라고까지 주장한다.하지만 숙주는 몸에 생긴 열을 없애는 작용을 해 열이 많은 사람이 먹을 경우 정력을 증가시킨다. 혹자는 숙주를 많이 먹으면 몸에 독이 쌓인다고까지 말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오히려 숙주는 약을 먹고 체했을 때나 음주 후에 몸의 독을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 식사 후 입가심을 하는 데 그만인 박하사탕.다른 사람들 모두 식당 문을 나서며 하나씩 집는 와중에 고개 내저으며 발길 돌리는 남성들이 있다.하지만 그럴 필요 없다.눈과 머리를 맑게 해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박하.정력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잘못된 상식에 지나지 않는다. 건강에 ‘이보다 좋을 수 없다.’는 녹차.이런 녹차도 정력 문제에서만큼은 오해의 화살을 피하지 못한다.금욕 생활을 하는 스님들이 즐겨 마신다는 이유로 정력에 영향을 줄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스님들이 녹차를 즐겨 먹는 이유는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유지시켜 공부에 매진하기 위해서다.게다가 녹차는 비록 서늘한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몸이 찬 사람들이 마셔도 정력이 저하되지 않는다.그만큼 정력이 떨어지는 것과 관계 없다는 얘기다. ●성욕 저하와 정력 감퇴는 천지차이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날 리 없는 법.그렇다면 이런 오해를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율무,숙주,박하,녹차는 음식의 성질은 각각 다르지만 모두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다스리는 식품이다. 때문에 일시적으로 성욕을 낮추는 경향이 있다.이런 이유로 정력을 떨어뜨리는 음식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성욕 저하’와 ‘정력 감퇴’는 엄연히 다르므로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성욕이 넘치지 않으면 허리가 튼튼해지고 정자 생성 능력이 좋아진다.아울러 지구력이 생기게 돼 결과적으로 성 기능이 증진된다. 반면 정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성욕이 있더라도 몸에 기가 부족한 탓에 성 생활을 하는데 힘에 부치는 상태를 말한다.얼핏 보기엔 비슷해 보이지만 이 둘은 극과 극인 셈이다.항간에 스님들의 정력이 좋다는 얘기는 맞다.다만 녹차나 박하차를 애용해 성욕이 낮을 뿐이다. ‘정력의 적’으로 알려진 율무,숙주,박하,녹차는 일시적으로는 성욕을 떨어뜨릴 수는 있다.하지만 장기적으로 본다면 도리어 정력을 강화시키고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건강을 증진시킨다.결코 꺼릴 이유가 없다. 나길회기자 kkirina@ ■ 도움말 곽노규 강남 동일한의원 원장˝
  • [녹색공간] 수선화와 금잔옥대/이지누 시인·사진작가

    며칠 전 제주도에 다녀왔다.돌담아래 그윽이 피어났을 수선화를 보고싶은 욕심 때문이다.마침 가던 날이 삼동이 물러가고 봄이 찾아온다는 입춘이었지만 꽃샘바람이던가,그곳에 머무는 내내 콧잔등에 모진 바람을 달고 다녔다.꽃이 피면 바람불어 그르치고 달이 뜨면 구름이 앞을 가린다더니 때맞추어 눈까지 흩날린 탓에 포근한 봄에의 기대는 간데없이 사라졌다.하지만 길을 걷다가 문득 만나는 수선화 몇 송이는 제 아무리 바람이 모질어도 봄이 고개를 내밀고 있음을 넌지시 일러주는 듯했다. 곁에 두고 읽는 시 중에 이규보의 ‘꽃샘바람(妬花)’이 있다.앞부분은 조물주가 비단을 가위질해 만든 듯한 꽃에게 모진 바람을 일으켜 다시 지게 하는 데 대해 원망하는 투이다.하지만 이내 “바람의 직책은 만물을 고무하는 것(鼓舞風所職)/만물에 입히는 공덕 더하고 덜함이 없는 걸세(被物無私阿)/만일 꽃을 아껴 바람이 불지 않는다면(惜花若停?)/그 꽃 영원히 생장할 수 있을까(其奈生長何)/꽃 피는 것도 좋지만(花開雖可賞)/꽃 지는 것 또한 슬퍼할 일 아니네(花落亦何嗟)/피고 지는 것 모두가 자연일 뿐인데(開落摠自然)”라며 자연의 이치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가하면 선가(禪家)에서도 차갑지만 아름답기 그지없는 화두 하나가 전해져 온다.중국의 재가 선사로 이름을 드높인 방온거사가 눈송이를 보며 무심히 말한다.“참으로 아름다운 눈송이로구나.”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또 누구나 함부로 할 수 없는 말이기도 하다.그 속에는 눈은 아무런 의식에 구애받지 않고 무위(無爲)의 모습으로 떨어진다는 뜻을 되새기고 있다.이를 두고 ‘호설편편불락별처(呼雪片片不落別處)’라 하는데 이는 눈송이가 한 군데도 빼놓지 않고 고르게 떨어져 쌓이는 것을 말한다.눈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는 무작정 흩날리며 떨어지는 듯하지만 들판에는 땅이 생긴 모양대로 분별하지 않고 그저 고요하게 쌓이기 마련 아니던가.그러니 그들은 무질서 속의 질서이고 자연이란 바로 그렇게 어긋나지 않으며 제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방온거사 또한 자연의 이치에서 큰 깨달음을 얻은 셈이고 그것은 지금껏 납자들이 선방에 들며 참구하는 화두로 남았다.꽃이 진다고 어찌 그를 말릴 수 있을까.꽃이 피지 않는다고 또 그를 활짝 피게 하는 것도 해서는 안 될 노릇이다.바람이 불어 꽃을 피게 하고,지게 하는 것을 그냥 두어야 하듯 제 철에 제 자리를 찾는 것은 더 없이 중요한 것이다. 거뭇한 돌담 아래 피어난 연노랑 금잔옥대가 늦은 눈에 한풀 꺾여 고개를 숙였을지라도 그것에는 언제나 겨울의 찬바람이나 눈을 견뎌내야 하는 안타까운 아름다움이 있지 않겠는가.상처 입은 꽃이라고 해서 그것이 어찌 꽃이 아닐 수 있을까.혹 그를 꽃으로 어여삐 여기지 못하면 그것은 내 마음에 모진 상처가 있는 것이리라.겨우살이에 지친 뭇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다 어느덧 시들어가는 수선화를 어루만지고 돌아오는 길.공항에는 터질 듯이 탐스러운 금잔옥대가 큼지막한 화분에 담겨 봄을 뽐내고,부산에서 들른 어느 호텔의 식탁에도 화병에 꽂힌 수선화가 눈을 즐겁게 해 주었지만 그들과 돌담 아래에서 바람에 흔들리던 상처입은 그것과는 서로 아름다움을 견주지 않았다.제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은 탓이다.사람 사는 일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제자리를 지키며 산다는 것,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테지만 눈여겨 자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 속의 찌든 욕심은 눈 녹듯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지 않을까 싶다. 이지누 시인작가˝
  • ‘한상궁’과 떠나는 북한요리기행/특집 ‘MBC 스페셜’ 31일 방영

    ‘수라간 최고 상궁’ 양미경이 북한을 다녀왔다.드라마에서는 요리를 만들기만 한 그이지만 오는 31일(오후 11시10분) 방영될 MBC 스페셜 ‘북한 전통음식 기행’에서는 북한의 다양한 요리를 두루 맛본다. 지난 20일부터 24일까지 방북한 양미경은 북측 리포터와 평양,개성,원산,함흥 등 북한 4대 도시의 명승지를 둘러보고 향토 음식을 섭렵했다.국내 방송사가 북한을 찾아가 명승지와 음식을 소개하기는 처음으로,조선중앙TV와 공동으로 촬영했다. 양미경은 이 프로그램에서 먼저 평양을 찾는다.을밀대와 대동강을 유람하면서 남녘 사람들에게도 비교적 익숙한 평양냉면과 온반,어복쟁반을 소개한다.대동강 숭어국과 최근 북한에서 뜨고 있다는 타조고기도 맛본다. 고려의 옛 도읍인 개성에서는 정몽주의 혼이 서린 선죽교를 찾아가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인삼닭곰,정성이 듬뿍 배인 약과와 편수에 대해 알아본다.해산물이 풍부한 원산의 대표적 유적지는 송도원이다.얼큰한 가자미냄비탕에 털게찜으로 속을 채운다. 혹한에 시달리는 함흥 주민들은 어떤음식을 먹으며 겨울을 견딜까.꽁꽁 언 감자로 만든 언감자송편,가자미식혜에다 원조 함흥냉면은 빠질 수 없는 고유의 맛.‘함흥차사’라는 말이 유래한 함흥 본궁과 만세교는 덤이다. 또한 북한 최고의 요리 학교인 ‘장철구 상업대학’의 수업장면,그동안 남쪽에서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북한 가정의 설맞이 모습도 엿볼 수 있어 먹거리뿐 아니라 볼거리도 풍부하다.북한의 먹거리를 살펴봄으로써 단절된 남과 북이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을 갖자는 것이 제작 취지.실향민들에게는 고향의 맛을 다시 새길 수 있는 기회가,늦은 밤 출출한 시청자들에겐 간식 생각이 간절해지는 즐거운 ‘고민의 시간’이 될 것이다. 박상숙기자 alex@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8)연기스님 前상사리(중)

    스님.저는 스님을 제비 연()자 연기라고 보려 합니다.신화적인 요소를 많이 지닌 분이지요.화엄사에서 전해 내려오는 말을 존중하려고 합니다.그 말에 따르면 연기스님은 어머니를 모시고 인도에서 오셨다고 합니다.백제로 올 때는 배를 탄 것이 아니라 연()이라는 동물을 타고 왔다는군요.물론 어머님과 함께 타셨겠지요.이 동물은 육지에서도 살고 바다에서도 살 수 있는데 주로 남방에서 서식한다 합니다.거북 비슷하게 생겼는데 이마에 외뿔이 달렸고 날개도 있어서 공중으로 날아다닐 수 있었다고 합니다.그 연을 타고 오셨다 해서 연기(起)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합니다.스님이 타고 오셨다는 그 연은 지금의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에 있는 연곡사(谷寺)에 있는 연기조사탑(組師塔)의 귀부(龜趺)에 그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이 귀부의 생김새를 자세히 살펴보면 거북과 유사하지만 거북과는 다른 모양임을 알 수 있습니다.연곡사는 스님과 함께 백제로 오셨던 어머님을 모시기 위해 스님께서 별도로 지으셨다는 얘기도 전해옵니다.일단 있는 그대로를 두고 저의견해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백제 - 화엄사상 관련없다” 잘못된 것일 수도 스님.이쯤에서 저는 화엄사상 또는 화엄경에 관한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견해가 신라 중심으로만 정리되어 있어서 백제와 화엄사상은 그다지 깊은 관련이 없다는 기존 입장이 잘못된 것일 수 있다는 점부터 지적하려 합니다.백제와 화엄경의 관계를 추정하기 위해 384년 백제 침류왕 1년에 전라도 법성포(法聖浦)를 통해 백제로 들어온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전라도 영광 땅의 모악산 기슭에다 불갑사(佛甲寺)를 창건한 사실부터 얘기하겠습니다. 백제에 온 마라난타는 과연 백제인들과 어떤 언어를 이용하여 대화를 했을까요? 대화가 가능했으므로 백제인의 도움을 받아 사찰을 짓고 포교활동을 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인도 불경을 최초로 한문으로 번역한 이는 파르티아(Parthia)인 안세고(安世高)였지요.148년 뤄양에서 한역한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입니다.그 후 인도 출신 승려 불도징(佛圖澄·232~348)의 맨 첫 번째 중국 제자인 도안(道安·312~385),도안의 제자 혜원(慧遠·334~416)이 인도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하여 불교의 중국화를 시작했지요. 도안과 혜원은 유교와 도가사상에 정통했던 승려로서 동진(東晋)시대 중국 불교를 주도하면서 세속적 정치권력에 대한 승가의 독립성을 주창하는 데까지 나아갔지요.그후 남북조시대(420~581)를 통해 왕실의 지원을 받으면서 중국 불교가 번창했습니다.다시 수나라에 의한 중국의 통일(589),인도 유학에서 귀국한 정통 중국인 승려 현장법사(596~664)에 이르면서 불교는 중국의 문화적 풍토에 깊숙이 뿌리를 내려갔습니다. 특히 모든 생명체는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이 존재한다는 평등철학에 근거하여 마음을 닦는 점진적인 수행 전통이 자리잡게 되었는데,이 전통은 5세기 말엽 인도로부터 온 승려인 보리달마(Bodhidarma)에 의해서 들불처럼 번져나갔지요.이렇듯 5세기 말엽에 이르러서부터 중국과 인도 승려들의 교류는 매우 활발해져서 웬만한 승려들은 중국어와 인도어 즉 한문과 산스크리트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지요. 여기서 저는 마라난타 존자가 백제에 온연대가 384년 즉 4세기 말엽이며,그 시기는 중국의 도안,혜원이 인도 불교의 중국화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이미 4세기말쯤이면 한문을 능통하게 구사할 줄 아는 인도 승려들이 많았음을 짐작할 수도 있게 합니다.따라서 마라난타 존자는 한문을 근간으로 하여 백제에 온 초기의 대화가 가능했을 것으로 짐작하는 것은 큰 모순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마라난타 존자는 혼자가 아니었을 것이며,그 분을 시작으로 여러 사람의 인도 승려들이 백제로 와서 포교 활동을 했을 것입니다. ●선불교 불성사상, 화엄사상과 일맥상통 이와 같은 전제 위에서 연을 타고 왔다는 연기스님의 백제 입국이 544년경이라고 본다면 보리달마가 중국에서 선불교(禪佛敎)를 본격적으로 확산시킨 시기와 엇비슷하다는 점을 알 수 있지요. 선불교의 불성사상(佛性思想) 즉 모든 생명체에는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이 존재한다는 평등철학은,모든 존재는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는 화엄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화엄사상을 일컫는 화엄경은 중국에서 세 가지로 번역되었지요.동진 때인 420년에 60권으로 번역한 진본(晉本),당나라 때인 699년 80권으로 번역된 주본(周本),당나라 정원(貞元) 연간인 798년에 40권으로 번역된 정원본(貞元本)입니다. 화엄경은 불교의 중심 경전이어서 불교사상의 전파에는 무엇보다 중요했지요.마라난타 존자가 백제에 올 무렵에는 아직 중국에 화엄경이 번역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어서 혹 마라난타 존자가 화엄경을 갖고 들어왔다면 어떤 방법으로 백제 승려들에게 전파했을 것인지 짐작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그러나 연기스님이 백제에 온 544년에는 이미 진본 60화엄경이 중국에 널리 보급되어 있었습니다.따라서 연기스님이 화엄경을 가지고 들어와서 백제 승려들에게 가르치는데는 그다지 큰 어려움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백제 땅으로 온 인도 승려들에 의하여 보급되기 시작한 화엄경이지만 신라에서는 그렇지 못했지요.고구려와 백제를 경유하지 않고는 해외의 고급 문화가 신라에 전해지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이 점이 신라로 하여금 백제를 자주 침공하게 만든원인이지요.백제를 넘어 직접 중국과 교류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인도 승려들이 백제에 화엄경 보급 실제로 화엄사상을 최초로 신라에 소개한 인물은 자장율사(慈藏律師·590~658)인데,그는 636년에야 당나라에 가서 7년 동안 머물다가 643년에 귀국하면서 화엄경을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귀국한 2년 뒤 645년에는 신라가 처해있는 백제와의 갈등에서 백제를 꺾고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황룡사에다 9층탑을 세웠는데 정작 그는 신라가 백제를 정복하기 두 해 전에 죽었습니다.그런 자장율사가 백제 영토인 전라도 구례 땅의 화엄사와 어떤 관련이 있었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면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보여집니다.더구나 600년 이후부터는 백제와 신라 관계가 극도로 나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가 국경을 넘어 백제로 들어와 종교활동을 하기는 불가능했다는 점을 중시해야 합니다. 백제 불교의 우수성에 대한 신라의 열등의식은 매우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백제가 국가적인 열망으로 정립했던 미륵신앙을 배워가서 화랑제도를 강화시킨 점이나 백제 정복 후 백제의 화엄사상에 대한 언급을 일절 하지 않은 점이 그렇습니다. 신라는 깊은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몹시 잔혹해질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3∼4세기 가야국과의 관계에서 보듯이 가야의 우수한 도자기 문명과 남방불교가 지닌 평등관에 대하여 신라의 열등의식은 매우 컸겠지요.가야의 그릇 문명을 모방한 초기 신라의 토기류와 생활들에서 충분히 그런 점을 유추해볼 수 있고,가야를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보여준 집단학살이나 가야 문명의 씨를 말리기 위한 철저하고도 집요한 유린,가야의 재기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가야 지배층의 귀화정책은 신라의 열등의식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증거라고 봅니다. ●신라, 백제 불교에 열등감 컸을 듯 가야의 그릇 문화에는 인도 문명의 영향이 매우 크게 작용했습니다만 신라가 백제문화에 대해 가졌던 열등의식을 극복하는 과정 또한 가야를 멸망시킬 때 보여준 그 잔혹함이 더욱 더 명료하게 드러났습니다. 아무튼 신라의 화엄사상은 자장율사에 뒤이어 의상(義湘·625~702)이 본격화시켰지요.의상은 661년에야 중국으로 갈 수 있었는데 671년까지 10년 동안 중국 유학을 했습니다.의상이 신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백제가 신라에게 정복당한 뒤였습니다.의상이 중국에서 배운 화엄경은 진본 60화엄이었는데,귀국하여 원효를 만났을 때 원효는 이미 그 화엄경을 알고 있었으며 화엄사상의 요체인 무애(無碍)를 실천하고 있었지요. 스님.원효가 어떻게 그토록 화엄경을 배울 수 있었을까요? 혹시 백제의 인도 승려와 교류하지는 않았을까요? 저는 그럴 가능성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의상과 원효가 화엄사상을 펼치는 방법에서도 원효는 민중 중심이었는데 반해 의상은 귀족 중심이었지요.그렇게 볼 때 의상이 화엄사와 어떤 관련을 가졌을 수는 있으나 백제 유민들의 슬픔을 치유시키기 위한 화엄사상의 실천자로서 화엄사를 중창했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따라서 의상을 연기(緣起)라고 보는 견해는 자칫 백제역사를 신라기년(新羅紀年)으로 바꿔버린 정복자 중심 사관일지도 모릅니다.스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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