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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일·반독재·저항… 신동엽의 수식어 깨고 싶다

    통일·반독재·저항… 신동엽의 수식어 깨고 싶다

    올해는 신동엽 시인 탄생 90주년을 맞는 해다. 독자들의 뇌리에 서사시 ‘금강’과 서정시 ‘산에 언덕에’, ‘진달래 산천’, ‘껍데기는 가라’ 등으로 남아 있는 선생의 작품 세계는 오랜 금기의 세월을 뚫고 이제 우리 시대의 최전선에 서 있다. 선생의 작품은 분단과 독재 시대에 민족과 저항의 키워드로 줄곧 소환됐고 또 그러한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로 빚어진 인류 문명의 위기에 즈음해서 선생의 시적 사유와 실천과 형상은 어떤 대안적 지평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장남 신좌섭 서울대 의예과 교수를 통해 이러한 선생의 현재적 가치와 그 확장성을 들을 수 있었다.●토착정서의 핵심 가치, 전경인 정신 아들의 입장에서 신동엽 선생의 가장 중요한 저력이랄까 자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가난한 농민으로 태어나 스스로 농사를 짓지는 않았지만, 토착정서랄까 농경정신을 가장 기본으로 생각하신 것이 하나고요. ‘백제’라는 멸망했으나 끊임없이 정신이 호출되는 나라가 다른 하나라고 할 수 있지 않나 싶어요.” 아닌 게 아니라 선생은 토착정서를 통해 동학을 비롯한 민중종교 사상을 소화해냈고, 사회주의나 아나키즘도 자기 것으로 거르고 녹여 받아들였다. 이러한 힘으로 선생은 전쟁과 독재 치하에서도 정결하고도 견고한 삶으로 일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시인 김수영이 선생을 두고 한 “너무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지 않은 시인”이라는 평이 떠올랐다. 1950년대 한국 시단을 유행병처럼 휩쓴 모더니즘 열풍에서 비켜서면서 신동엽 선생은 등단작 제목처럼 ‘이야기하는 쟁기꾼’으로 훤칠하게 등장한 것이다. 1959년 신춘문예 입선작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를 두고 신동엽문학관장 김형수 시인이 “케이팝 경연대회에 판소리를 들고 나간 격”이라고 한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선생이 강조한 ‘전경인(全耕人) 정신’은 이러한 토착정서의 핵심 가치가 된다. “얼마 전 돌아가신 김종철 선생께서 생태를 이야기하려면 신동엽 시의 도가적 상상력을 읽으라고 한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만큼 아버님은 단순 기능자를 벗어나 온전하게 대지에 뿌리를 내린 정신을 강조하셨죠. 스물두 살에 쓰신 ‘엉뚱한 이론’이라는 산문에서는 두뇌 운동의 탈선과 과잉을 비판하셨는데, 문명의 맹목적 확장을 경계하신 거지요.” 선생의 사유 저변에는 초기부터 노장사상, 원시반본 정신 같은 것이 흐르고 있었던 셈이다. 신 교수는 아버지의 현재적 의미를 이러한 대안적 사유 곧 ‘대지적 상상력’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심층적 원천에서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민족과 저항을 넘어 ‘시인 신동엽’으로 이렇게 신동엽 선생은 ‘민족시인’이라는 그간의 규정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대지, 전경인, 흙 같은 원초적 개념을 통해 아버지의 시가 새로 걸어오는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지향으로 말미암아 선생의 작품은 어떤 시인들보다 내구성과 확장성이 크게 다가온다. 그는 “아버지 앞에 붙었던 통일, 반독재, 저항이라는 호칭이 한 시대의 요청에 의해 주어졌다”면서 이제 수식어가 달라질 때가 온 것 같다고 했다. ‘산문시’나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등을 읽어 보면 신동엽 시인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광범위한 스펙트럼은 사유 체계에서만이 아니라 장르 선택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다양한 장르를 통한 실험정신이 선생을 폭넓은 ‘시인 신동엽’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신 교수는 “해방 직후에 가난한 민중들에게 깨달음을 주려면 시와 음악과 무용 같은 종합적인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다”고 떠올렸다. 기타를 끼고 살았고, 노래도 잘 불렀던 아버지는 오페레타 ‘석가탑’,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 같은 동시대 누구도 꿈꾸지 못한 양식들을 남겼다. 선생은 서정시, 서사시, 장시, 산문시, 오페레타, 시극, 연극, 방송대본 등에 모두 진력했다. ‘금강’을 술회하는 인터뷰에서는 교향시극 쓰듯이 썼다고 토로했고, 타계 직전에는 서사시 ‘임진강’을 구상하기도 했다. 이 작품이 완성됐다면 한국문학은 빼어난 분단 서사시 하나를 더 간직하게 됐을 것이다. 이제 신동엽 시인의 텍스트는 시전집과 산문전집, 그리고 몇 종의 평전으로 완미하게 정리된 듯하다. 하지만 아들로서는 미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더 방대하고 정치한 자료를 망라한 본격 평전이 나와야 합니다. 쓰는 시절의 한계가 있을 수 있고, 자료의 한계도 있었을 겁니다. 약전(略傳)을 넘어 보완된 자료를 텍스트로 한, 그때는 안 보이던 것을 담은 평전이 나오길 고대합니다.”●외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의 트라이앵글 신 교수의 할아버지는 경북 분이었는데 부여로 흘러들어와 극진한 사랑과 전적인 신뢰로 외아들 신동엽의 큰 힘이 돼 주었다. 그 사랑과 신뢰는 신동엽의 인생 갈피마다 회복과 의지의 원천이 됐을 것이다. 1990년에 돌아가셨으니 아들이 떠난 후 21년을 더 부여를 지키신 것이다. 신 교수의 외할아버지는 사회주의에 바탕을 두고 이론을 전개했던 농업경제학자 인정식 선생이다. 일제강점기 말에 전향을 했고, 해방 후에는 북으로 가셨다. 남쪽에 남겨진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이때부터 힘겨운 생을 사셨다. “어머니를 매개로 외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연결되는 것을 느껴요. 외할아버지 전집을 읽으면 사라져 가는 농촌문화를 안타까워하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아버지의 생태학적 견지와 어머니의 짚풀문화가 연결되면서, 세 분이 아스라하게 연결되는 것을 느낍니다.” 신 교수의 어머니 인병선 여사는 ‘짚풀문화’에 애정을 가지고 전국을 다니면서 실물적 자료들에 대한 섭렵과 고증과 수집을 마다하지 않았다. 짚풀문화와 관련한 자료 연구로 짚풀문화가로서 입지를 세우기도 했다. 1993년에 개관한 짚풀생활사박물관이 바로 그 결실이다. “그것들은 빨리 삭아 오래 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진이나 녹화로 다 기록해 세월이 흘러도 재현할 수 있도록 만드셨어요. 이제 박물관장도 제가 맡았어요. 저희 가계(家系)가 모두 제게로 흘러 들어왔습니다.” ●오랜 생애의 빛과 빚을 품은 ‘시인 신좌섭’ 신 교수는 서울대 의예과에 입학한 1978년, 의사라는 안정된 비전을 던지고 10년간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군대를 포함해 13년간 바깥에서 내면을 다지고 돌아왔다. 지금은 어떻게 하면 사회에 기여하는 의사를 양성할 수 있을까에 최선의 관심을 두고 있다. “제가 주로 하는 일은 가르치는 일과, 숙의민주주의에 퍼실리테이션(facilitation)을 결합하는 일입니다.” 퍼실리테이션은 사람들 사이에 소통과 협력이 활발하게 일어나 합의에 도달하도록 하는 행위를 말한다. 신 교수는 이러한 범주가 부모님의 생과 어긋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때 우리는 아버지라는 거대한 산그늘에서 벗어나 아버지와 어머니의 짐을 지고 그것을 완성해 가는 ‘숙의민주주의자 신좌섭’의 모습에 가닿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전경인’ 정신의 현대적 실현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에게 이처럼 오랜 생애의 빛이자 빚으로 우뚝하시다. 신 교수는 생애에서 두 번의 큰 고통을 겪는다. 2014년에 겪은 참척의 슬픔과 최근에 겪은 병고가 그것이다. 그 과정에서 2017년에 첫 시집을 냈고, 작년에는 아버지 50주기로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이제부터는 차분하게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 일은 시작(詩作), 아버지와 어머니의 남겨진 일들, 퍼실리테이터로서의 활동일 것이다. 신 교수는 몇 번이고 ‘차분하게’라는 말을 반복했다. 신동엽 선생과 자신의 작품 중 애착이 가는 시편을 들려 달라는 부탁에 신 교수는 아버지의 ‘좋은 언어’와 그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인 자신의 ‘좋은 언어를 주소서’를 조심스럽게 건넨다. 1970년 유고로 발표된 ‘좋은 언어’는 “때는 와요/우리들이 조용히 눈으로만/이야기할 때”라면서 언어 과잉의 세계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들려준다. ‘좋은 언어를 주소서’는 시집 ‘네 이름을 지운다’ 마지막에 배치한 작품으로서 “이승엔 더 이상/아름다움을 담을 그릇이 없나니”라면서 아버지에 대한 경모(敬慕)를 숨기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의 작품은 이상적인 새로운 세상에 관해 암시를 주는 작품이어서 정말 아끼고 있다”고 했다. 인병선 여사의 “그의 시는 지금도 살아 있는 생명체로 우리 속에서 힘차게 날갯짓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들에게도 그대로 해당했던 것이다. 신동엽 시인의 ‘전경인’ 정신을, 아들의 웅숭깊은 사유를 통해 새로 만날 수 있었던 한여름 어느 날이었다. 한양대 교수·문학평론가 [용어 클릭] ■전경인(全耕人) 정신은 ‘온전히 토지에 발을 붙이고 사는 존재’라는 뜻으로, 서구사상이나 외래문명에 대응해 온 신동엽 시인의 철학 사상을 뜻한다.
  • 통일·반독재·저항… 신동엽의 수식어 깨고 싶다

    통일·반독재·저항… 신동엽의 수식어 깨고 싶다

    올해는 신동엽 시인 탄생 90주년을 맞는 해다. 독자들의 뇌리에 서사시 ‘금강’과 서정시 ‘산에 언덕에’, ‘진달래 산천’, ‘껍데기는 가라’ 등으로 남아 있는 선생의 작품 세계는 오랜 금기의 세월을 뚫고 이제 우리 시대의 최전선에 서 있다. 선생의 작품은 분단과 독재 시대에 민족과 저항의 키워드로 줄곧 소환됐고 또 그러한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로 빚어진 인류 문명의 위기에 즈음해서 선생의 시적 사유와 실천과 형상은 어떤 대안적 지평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장남 신좌섭 서울대 의예과 교수를 통해 이러한 선생의 현재적 가치와 그 확장성을 들을 수 있었다.●외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의 트라이앵글 신 교수의 할아버지는 경북 분이었는데 부여로 흘러들어와 극진한 사랑과 전적인 신뢰로 외아들 신동엽의 큰 힘이 돼 주었다. 그 사랑과 신뢰는 신동엽의 인생 갈피마다 회복과 의지의 원천이 됐을 것이다. 1990년에 돌아가셨으니 아들이 떠난 후 21년을 더 부여를 지키신 것이다. 신 교수의 외할아버지는 사회주의에 바탕을 두고 이론을 전개했던 농업경제학자 인정식 선생이다. 일제강점기 말에 전향을 했고, 해방 후에는 북으로 가셨다. 남쪽에 남겨진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이때부터 힘겨운 생을 사셨다. “어머니를 매개로 외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연결되는 것을 느껴요. 외할아버지 전집을 읽으면 사라져 가는 농촌문화를 안타까워하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아버지의 생태학적 견지와 어머니의 짚풀문화가 연결되면서, 세 분이 아스라하게 연결되는 것을 느낍니다.” 신 교수의 어머니 인병선 여사는 ‘짚풀문화’에 애정을 가지고 전국을 다니면서 실물적 자료들에 대한 섭렵과 고증과 수집을 마다하지 않았다. 짚풀문화와 관련한 자료 연구로 짚풀문화가로서 입지를 세우기도 했다. 1993년에 개관한 짚풀생활사박물관이 바로 그 결실이다. “그것들은 빨리 삭아 오래 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진이나 녹화로 다 기록해 세월이 흘러도 재현할 수 있도록 만드셨어요. 이제 박물관장도 제가 맡았어요. 저희 가계(家系)가 모두 제게로 흘러 들어왔습니다.”●오랜 생애의 빛과 빚을 품은 ‘시인 신좌섭’ 신 교수는 서울대 의예과에 입학한 1978년, 의사라는 안정된 비전을 던지고 10년간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군대를 포함해 13년간 바깥에서 내면을 다지고 돌아왔다. 지금은 어떻게 하면 사회에 기여하는 의사를 양성할 수 있을까에 최선의 관심을 두고 있다. “제가 주로 하는 일은 가르치는 일과, 숙의민주주의에 퍼실리테이션(facilitation)을 결합하는 일입니다.” 퍼실리테이션은 사람들 사이에 소통과 협력이 활발하게 일어나 합의에 도달하도록 하는 행위를 말한다. 신 교수는 이러한 범주가 부모님의 생과 어긋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때 우리는 아버지라는 거대한 산그늘에서 벗어나 아버지와 어머니의 짐을 지고 그것을 완성해 가는 ‘숙의민주주의자 신좌섭’의 모습에 가닿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전경인’ 정신의 현대적 실현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에게 이처럼 오랜 생애의 빛이자 빚으로 우뚝하시다. 신 교수는 생애에서 두 번의 큰 고통을 겪는다. 2014년에 겪은 참척의 슬픔과 최근에 겪은 병고가 그것이다. 그 과정에서 2017년에 첫 시집을 냈고, 작년에는 아버지 50주기로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이제부터는 차분하게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 일은 시작(詩作), 아버지와 어머니의 남겨진 일들, 퍼실리테이터로서의 활동일 것이다. 신 교수는 몇 번이고 ‘차분하게’라는 말을 반복했다. 신동엽 선생과 자신의 작품 중 애착이 가는 시편을 들려 달라는 부탁에 신 교수는 아버지의 ‘좋은 언어’와 그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인 자신의 ‘좋은 언어를 주소서’를 조심스럽게 건넨다. 1970년 유고로 발표된 ‘좋은 언어’는 “때는 와요/우리들이 조용히 눈으로만/이야기할 때”라면서 언어 과잉의 세계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들려준다. ‘좋은 언어를 주소서’는 시집 ‘네 이름을 지운다’ 마지막에 배치한 작품으로서 “이승엔 더 이상/아름다움을 담을 그릇이 없나니”라면서 아버지에 대한 경모(敬慕)를 숨기지 않는다. 그는 “어버지의 작품은 이상적인 새로운 세상에 관해 암시를 주는 작품이어서 정말 아끼고 있다”고 했다. 인병선 여사의 “그의 시는 지금도 살아 있는 생명체로 우리 속에서 힘차게 날갯짓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들에게도 그대로 해당했던 것이다. 신동엽 시인의 ‘전경인’ 정신을, 아들의 웅숭깊은 사유를 통해 새로 만날 수 있었던 한여름 어느 날이었다. 한양대 교수·문학평론가 ●토착정서의 핵심 가치, 전경인 정신 아들의 입장에서 신동엽 선생의 가장 중요한 저력이랄까 자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가난한 농민으로 태어나 스스로 농사를 짓지는 않았지만, 토착정서랄까 농경정신을 가장 기본으로 생각하신 것이 하나고요. ‘백제’라는 멸망했으나 끊임없이 정신이 호출되는 나라가 다른 하나라고 할 수 있지 않나 싶어요.” 아닌 게 아니라 선생은 토착정서를 통해 동학을 비롯한 민중종교 사상을 소화해냈고, 사회주의나 아나키즘도 자기 것으로 거르고 녹여 받아들였다. 이러한 힘으로 선생은 전쟁과 독재 치하에서도 정결하고도 견고한 삶으로 일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시인 김수영이 선생을 두고 한 “너무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지 않은 시인”이라는 평이 떠올랐다. 1950년대 한국 시단을 유행병처럼 휩쓴 모더니즘 열풍에서 비켜서면서 신동엽 선생은 등단작 제목처럼 ‘이야기하는 쟁기꾼’으로 훤칠하게 등장한 것이다. 1959년 신춘문예 입선작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를 두고 신동엽문학관장 김형수 시인이 “케이팝 경연대회에 판소리를 들고 나간 격”이라고 한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선생이 강조한 ‘전경인(全耕人) 정신’은 이러한 토착정서의 핵심 가치가 된다. “얼마 전 돌아가신 김종철 선생께서 생태를 이야기하려면 신동엽 시의 도가적 상상력을 읽으라고 한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만큼 아버님은 단순 기능자를 벗어나 온전하게 대지에 뿌리를 내린 정신을 강조하셨죠. 스물두 살에 쓰신 ‘엉뚱한 이론’이라는 산문에서는 두뇌 운동의 탈선과 과잉을 비판하셨는데, 문명의 맹목적 확장을 경계하신 거지요.” 선생의 사유 저변에는 초기부터 노장사상, 원시반본 정신 같은 것이 흐르고 있었던 셈이다. 신 교수는 아버지의 현재적 의미를 이러한 대안적 사유 곧 ‘대지적 상상력’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심층적 원천에서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민족과 저항을 넘어 ‘시인 신동엽’으로 이렇게 신동엽 선생은 ‘민족시인’이라는 그간의 규정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대지, 전경인, 흙 같은 원초적 개념을 통해 아버지의 시가 새로 걸어오는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지향으로 말미암아 선생의 작품은 어떤 시인들보다 내구성과 확장성이 크게 다가온다. 그는 “아버지 앞에 붙었던 통일, 반독재, 저항이라는 호칭이 한 시대의 요청에 의해 주어졌다”면서 이제 수식어가 달라질 때가 온 것 같다고 했다. ‘산문시’나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등을 읽어 보면 신동엽 시인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광범위한 스펙트럼은 사유 체계에서만이 아니라 장르 선택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다양한 장르를 통한 실험정신이 선생을 폭넓은 ‘시인 신동엽’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신 교수는 “해방 직후에 가난한 민중들에게 깨달음을 주려면 시와 음악과 무용 같은 종합적인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다”고 떠올렸다. 기타를 끼고 살았고, 노래도 잘 불렀던 아버지는 오페레타 ‘석가탑’,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 같은 동시대 누구도 꿈꾸지 못한 양식들을 남겼다. 선생은 서정시, 서사시, 장시, 산문시, 오페레타, 시극, 연극, 방송대본 등에 모두 진력했다. ‘금강’을 술회하는 인터뷰에서는 교향시극 쓰듯이 썼다고 토로했고, 타계 직전에는 서사시 ‘임진강’을 구상하기도 했다. 이 작품이 완성됐다면 한국문학은 빼어난 분단 서사시 하나를 더 간직하게 됐을 것이다. 이제 신동엽 시인의 텍스트는 시전집과 산문전집, 그리고 몇 종의 평전으로 완미하게 정리된 듯하다. 하지만 아들로서는 미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더 방대하고 정치한 자료를 망라한 본격 평전이 나와야 합니다. 쓰는 시절의 한계가 있을 수 있고, 자료의 한계도 있었을 겁니다. 약전(略傳)을 넘어 보완된 자료를 텍스트로 한, 그때는 안 보이던 것을 담은 평전이 나오길 고대합니다.” 한양대 교수·문학평론가
  • ‘이승만 박사’로 부른 보훈처장에… 지상욱 “문재인 변호사라 써야”

    ‘이승만 박사’로 부른 보훈처장에… 지상욱 “문재인 변호사라 써야”

    박삼득 국가보훈처장이 이승만 전 대통령 서거 55주기 추모식에서 이 전 대통령을 ‘박사’로만 지칭한 것과 관련, 지상욱 미래통합당 여의도연구원장이 “보훈처는 문재인 변호사란 호칭을 함께 사용하라”고 지적했다. 지 원장은 19일 밤 페이스북에 “보훈처장은 추모사 중 약력을 설명할 때를 제외하고는 전부 ‘박사’라는 호칭을 사용했다”며 “또한 보훈처 공식 페이스북에도 ‘오늘은 이승만 박사 서거 55주기’, ‘정부는 1949년 이승만 박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고 했다”고 밝혔다. 보훈처장이 추모사에서 이 전 대통령에 대해 대통령 대신 박사 호칭을 써 논란이 일자 보훈처는 “통상적으로 박사와 대통령 모두 이 전 대통령을 칭하는 맞는 표현이기 때문에 박사·대통령 호칭을 함께 사용했다”고 해명했다. 지 원장은 이 같은 보훈처 해명에 대해 “참으로 치졸하기 그지없다”며 “이 전 대통령이 박사학위 소지자가 아니었다면 ‘이승만씨’라고 호칭했을 것인가. 앞으로 보훈처는 문재인 대통령과 문재인 변호사란 호칭을 함께 사용해야 쓰겠다”고 말했다. 지 원장은 또 “약산 김원봉선생의 건국훈장 수여 시도, 백선엽 장군의 동작동 국립현충뭔 안장 논란에 이어 이 또한 자랑스러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역사 무너뜨리기의 일환인가”라며 비판을 이어갔다. 앞서 이날 오전 서울 종로구 이화장에서 열린 추모식에는 이 전 대통령의 양아들인 이인수 박사 부부 등 유족을 비롯해 박 보훈처장, 독립운동 관련 단체장 등 70여명이 참석했다. 통합당에서는 주호영 원내대표를 비롯해 김기현·박진·배준영·배현진·신원식·윤창현·조명희·지성호·한기호·한무경·허은아 등 소속 국회의원들이 참석했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은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조화만 보냈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부끄럽고 미안하다”…박원순 의혹에 민주당 의원들 뒤늦은 반성

    “부끄럽고 미안하다”…박원순 의혹에 민주당 의원들 뒤늦은 반성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의혹 관련해 더불어민주당 내에서도 의원들이 개별적으로 ‘반성’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3선 박완주 의원은 19일 입장문을 내고 “연이은 광역단체장의 성범죄 사건으로 많은 국민이 분노했고 상처받았다”며 “굉장히 참혹하고 부끄러운 심정이다. 민주당 의원으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혔다. 박 의원은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의혹을 있는 사실 그대로 냉정하게 확인해야 할 것”이라며 “피해자를 피해자라고 부르지 않았던 부끄러운 성인지 감수성에 대해 국민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피해자의 호소를 묵살하거나 방조하지 않았는지도 철저하게 조사해야 한다”며 “수사내용 유출 의혹도 국회와 정부가 투명하게 국민 앞에 무한책임의 자세로 진상 규명에 나서야 한다”고 말하며 20일 김창룡 경찰청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 임하겠다고 했다.이날 최고위원 도전을 선언한 3선 이원욱 의원도 민주당 지지율 하락의 원인에 대해 “인천국제공항 사태에 대한 청년층의 분노에 대해 ‘조중동류의 가짜뉴스 때문’이라거나 부동산 문제 특히 고위공직자와 국회의원의 다주택소유에 대한 당의 대처,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의혹 고발 사건에 대한 당의 모호한 태도 등이 원인이었다”라고 지적했다. 이 의원은 박 전 시장 의혹 피해자의 호칭 논란에 대해 “민주당은 정치적 반대 세력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매우 강도 높게 비판했다”며 “민주당과 함께한 세력이라고 해서 무죄추정 원칙으로 (재판 결과를) 기다려야 된다는 것은 내로남불식 태도”라고 비판했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이원욱, 민주 최고위원 출마 선언…“내로남불식” 반성문(종합)

    이원욱, 민주 최고위원 출마 선언…“내로남불식” 반성문(종합)

    “민주당이 민주당다워져야 한다”“청년들에게 공정의 가치 보여줘야”이원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8·29 전당대회 최고위원 경선에 출마한다고 19일 선언했다. 3선인 이 의원은 이날 국회 기자회견에서 “한번 결정하면 해내고야 마는 이원욱의 힘을 정권 재창출을 위해 쏟겠다”고 밝혔다. 그는 최근 당 지지율 하락 이유에 대해 인천국제공항공사 정규직 전환 사태, 정의기억연대 사태 등을 언급하며 “민주당 최고의 가치였던 공정함이 흔들렸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민주당이 자성해야 할 지점은 바로 ‘민주’”라며 “민주당이 민주당다워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저성장시대 컵밥과 높은 등록금, 미래를 만들기 위해 종종걸음을 걷는 청년들에게 불공정이 아닌 공정의 가치를 보여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 이 의원은 원외 지역위원장에게 가장 먼저 공천을 주도록 공천 시스템을 손보겠다고 밝혔다. 그는 “공천 때면 가장 불안한 사람이 원외 위원장”이라면서 “어려운 지역에서 위원장을 맡아 선당후사의 정신으로 당에 봉사한 것이 죄가 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이 의원은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의혹의 피해자 ‘호칭 논란’과 관련해 “민주당은 정치적 반대새력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매우 강도 높게 비판했다”며 “민주당과 함께한 세력이라고 해서 무죄추정 원칙으로 (재판 결과를) 기다린다는 것은 내로남불식 태도”라고 말했다. 이 의원은 또 “젊은 여성층이 민주당에서 이탈한 여론조사 결과가 나온다”며 “내로남불의 태도를 가지면 당은 계속 힘들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편 이 의원은 원외 지역위원장에게 가장 먼저 공천을 주는 방식으로 공천 시스템을 손보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그는 “공천 때면 가장 불안한 사람이 원외 위원장”이라면서 “어려운 지역에서 위원장을 맡아 선당후사의 정신으로 당에 봉사한 것이 죄가 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박원순 사건 ‘셀프 조사’ 논란에…서울시 “외부전문가로 구성”

    박원순 사건 ‘셀프 조사’ 논란에…서울시 “외부전문가로 구성”

    독립성 보장 위해 ‘민관합동조사단’ 방침 포기‘성희롱·성추행 진상규명 위한 합동조사단’ 구성박원순 전 시장 이름이나 직함은 거론하지 않아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 진상규명을 위해 ‘민관합동조사단’을 구성하기로 했던 서울시가 ‘셀프 조사’ 논란이 일자 조사단을 전원 외부전문가로 구성키로 했다. 이번 사건에서 서울시도 책임이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만큼 ‘관’에 해당하는 서울시 관계자의 참여를 배제하겠다는 것이다. 서울시는 17일 보도자료를 통해 “성희롱·성추행 피해 고소사건에 대한 사실관계 규명과 재발방지대책 수립의 객관성,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전원 외부전문가로 구성된 합동조사단을 구성한다”고 밝혔다. 시는 “조사단을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구성해 시민 요구에 응답하고, 향후 유사사례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구조적인 개선방안을 마련해 시행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조사단의 명칭은 ‘서울시 직원 성희롱·성추행 진상규명을 위한 합동조사단’이다.앞서 서울시가 지난 15일 ‘민관합동조사단’을 구성하겠다고 밝혔지만 조사 대상인 서울시가 ‘셀프’로 조사단을 꾸리고, 조사단에 강제 수사권도 없어 시작 전부터 논란이 됐다. 이어 ‘민관합동조사단’ 구성을 맡은 서울시 현직 간부가 피해자 측 기자회견 연기를 시도한 사실이 드러나 조사단의 객관성과 공정성에 의문이 제기됐다. 서울시가 합동조사단을 9명의 외부 조사위원으로 구성키로 한 데에는 이런 지적을 의식한 것으로 풀이된다. 조사단은 여성권익 전문가 3명과 인권 전문가 3명, 법률 전문가 3명으로 구성되며, 조사단장은 조사단에서 호선으로 선출한다. 여성권익 전문가는 피해자 지원단체(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 등 여성단체에서 추천을 받고, 인권 전문가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법률 전문가는 한국여성변호사협회, 민변 여성인권위원회, 한국젠더법학회의 추천을 각각 받을 계획이다. 아울러 서울시는 주무부처인 여성가족부가 명칭을 정리함에 따라 ‘피해호소 직원’에 대한 호칭을 ‘피해자’로 표기한다고 밝혔다. 서울시는 그 동안 박 전 시장 피소 사건에 대해 ‘성희롱’, ‘성추행’ 등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으나, 외부 전문가로 조사단을 구성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하면서 명칭을 ‘서울시 직원 성희롱·성추행 진상규명을 위한 합동조사단’으로 정했다. 다만 이번에도 박원순 전 시장의 이름이나 직함은 발표문에서 거론하지 않았다.합동조사단의 역할은 사실관계 조사를 통한 실체적 진실 규명, 위법·부당 행위자에 대한 징계 또는 고소·고발 등 권고, 제도개선 및 조직문화개선 등 재발 방지대책 제시다. 조사범위는 성추행 고소사건과 관련한 사실관계, 서울시 방조 여부, 서울시 사전 인지 여부, 정보유출 및 회유 여부 확인 등이다. 조사 기간은 최초 구성일로부터 90일 이내로 한다. 안건은 재적 인원 과반수 찬성으로 의결하고, 직무수행 중 알게 된 비밀유지 서약을 통해 보안을 유지할 계획이다. 다만, 필요 시 조사위원 합의에 의해 추가 연장이 가능하다. 서울시는 합동조사단이 철저하게 독립성을 유지하도록 최선을 다해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시는 원활한 조사를 위해 시장 권한대행 명의로 전 직원에 대해 조사단에 협조할 것을 명령하고 정당한 사유 없이 비협조할 경우 명령불이행으로 징계 조치를 내리기로 했다.최선을 기자 csunell@seoul.co.kr
  • 김부겸 “노무현 대통령이라면 지금 어떻게 하실지”

    김부겸 “노무현 대통령이라면 지금 어떻게 하실지”

    8월 전당대회에 당대표로 출사표를 던진 김부겸 전 의원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언급했다. 김 전 의원은 17일 대전시의회에서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그러면서 김 전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노무현 대통령님의 2000년 총선, 출근길 유세 영상을 다시 보았다”고 전했다. 이어 김 전 의원은 “‘안녕하세요! 노무현입니다.’라고 인사하며 거리를 걷습니다. 손을 잡아주는 시민도 있지만 대부분 그냥 지나쳐 갑니다. 대통령님은 터벅터벅 걷습니다. 특유의 어깨를 약간씩 좌우로 흔들며, 땅을 꾹꾹 눌러 밟듯 걷는 모습입니다. 걸으며 ‘선봉에 서서’라는 운동권 노래를 흥얼거리십니다.”라며 영상을 묘사했다. 그러면서 김 전 의원은 “내일 아침 일찍 봉하에 간다”라며 “선거에서 지고 나서 찾아뵌 후 두 달 만이다”라고 밝혔다. 그는 “여사님이 아침을 해주신다고 한다”라며 “아침밥 먹고 힘이 팍팍 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노무현 대통령님이라면 지금 어떻게 하실지 너력바위 앞에서 여쭙고 오겠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김 전 의원은 “당 대표에 출마하며, ‘재집권의 선봉장’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라며 “요즘 저도 모르게 속으로 ‘선봉에 서서’를 부른다. 저에겐 ‘노 최고’란 호칭이 입에 익다. 부대변인이던 제가 모시던 대변인이자, 최고위원이셨기 때문. ‘노 최고’님 앞에서 ‘선봉에 서서’ 한 번 부르고 오겠다.”고 말했다. 신형철 기자 hsdori@seoul.co.kr
  • 민주 “‘박원순 피해호소인’ 아니고 ‘피해자’” 뒤늦게 호칭 정정

    민주 “‘박원순 피해호소인’ 아니고 ‘피해자’” 뒤늦게 호칭 정정

    민주 “여가부서 ‘법상 피해자’라고 해서”더불어민주당이 17일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전직 비서에 대한 호칭을 ‘피해 호소인’이 아닌 ‘피해자’로 통일해 부르기로 했다. ‘피해 호소인’이라는 호칭이 2차 가해를 가한다는 사회적 여론과 함께 피해자 측에서도 피해호소인이라는 호칭을 쓰지 말아달라고 요청하면서 뒤늦게 호칭을 바꿔 부르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허윤정 대변인은 이날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피해자로 호칭을 통일하기로 했나’는 질문에 “오늘 최고위원회의에서 그렇게 논의됐다”고 밝혔다. 당 관계자는 언론을 통해 “최고위원회의에서 진성준 전략기획위원장이 여성가족부가 전날 ‘고소인을 법상 피해자로 본다’는 입장을 냈다고 보고했다”면서 “정부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으니 당도 따르자는 공감대를 이뤘다”고 말했다. 여가부 “법상 피해자인데 기관별 가치 차” ‘피해 호소인’ 가이드리안 제시 안해 빈축 성범죄 피해자 보호 업무의 주무부처인 여성가족부는 전날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의혹 사건을 수사기관에 고소한 전직 비서 A씨에 대해 “피해자로 본다”는 공식 입장을 내놨다. 여가부의 이러한 입장은 당초 전 비서를 ‘고소인’으로 칭했던 기존 시각과는 달라진 것으로 호칭 사용에서부터 A씨에게 2차 가해가 빚어진다는 여성계 등의 지적을 일정 부분 수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민주당과 서울시의 잇단 ‘피해 호소인’ 발언에 대해서는 여가부는 “기관별로 차이가 있다”고 언급하며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 않아 빈축을 샀다. 황윤정 여가부 권익증진국장은 지난 16일 정부서울청사에서 A씨의 호칭을 둘러싼 논란과 관련해 “피해자 지원 기관을 통해서 보호·지원받는 분들은 피해자로 본다”면서 “‘고소인’도 중립적인 용어로 봤다. 상황 기술 방식은 기관에 따라 차이는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피해자 지원 기관에 도움과 보호를 요청한 A씨는 이런 의미에서 분명한 법령상의 피해자라는 설명이다. 여가부는 이 사건과 관련해 지난 14일 공식 입장문에서 A씨를 ‘고소인’이라고 칭했으나 이틀 만에 ‘피해자’로 입장을 바꿨다. 그러나 정치권이나 다른 정부기관에서 사용한 호칭의 적절성에 대해서는 평가하지 않았다.민주당·청와대·서울시도 줄곧 “피해 호소인” 이해찬 “고인 부재로 당 진상조사 어려워”서울시 “피해자가 시에 공식 제기 안해서” 앞서 이해찬 민주당 대표와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은 A씨를 호칭하면서 ‘피해 호소인’이라는 표현을 썼고, 이낙연 의원은 ‘피해 고소인’이라고 했었다. 이 대표는 지난 15일 최고위원회의에서 “피해 호소인에 민주당 대표로 다시 한번 통렬한 사과를 말씀드린다”면서도 거듭 피해 호소인이라고 지칭했다. 이 대표는 박 전 시장 성추행 의혹에 대한 진상조사 문제와 관련, “피해자 입장에서 진상규명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고인의 부재로 당으로서는 현실적으로 진상조사가 어렵다”면서 “피해 호소인의 뜻에 따라 서울시에서 사건 경위를 철저히 밝혀달라”고 말했다. 또 박 전 시장이 몸담았던 서울시 역시 피해자 대신 ‘피해 호소인’이라는 표현을 고수해왔다. 서울시는 피해자가 공식적으로 서울시에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피해 호소인이라 부른다는 애매한 답변을 내놓기도 했다. 이를 두고 박 전 시장의 혐의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을 부각하려는 꼼수라는 비판이 제기됐다.여가부 장관도 “피해자 2차 피해 심각” 이정옥 여성가족부 장관도 17일 전직 비서를 피해자로 명명하며 “마음이 무겁고 책임감을 가진다” 밝혔다. 이 장관은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여성폭력방지위원회 긴급회의를 열고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사건을 향해 “최근 피해자가 겪고 있는 심각한 2차 피해 상황이 몹시 우려스럽다”면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터넷 상에서 피해자 신원공개가 압박되고 있고 지나치게 상세한 피해상황 묘사 등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또 “피해자가 현재 겪을 정신적 압박감과 심리적 고통에 정말 마음이 안타깝고 깊은 걱정이 된다”면서 “여가부는 피해자가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실효성 있는 지원대책을 마련하고 제2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재발방지 대책 마련에 최선을 다 하겠다”고 강조했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경찰 ‘서울시가 박원순 성추행 사건 묵인’ 고발사건 수사 착수

    경찰 ‘서울시가 박원순 성추행 사건 묵인’ 고발사건 수사 착수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비서인 피해자를 성추행·성희롱한 사실을 알고도 서울시 관계자들이 이를 묵인·방조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경찰이 범죄혐의 유무를 확인하기 위한 수사에 착수했다. 서울경찰청은 17일 “서울시 관계자들의 (박 전 시장 사건) 방임 및 묵인 혐의와 관련하여 오늘 오후 고발인인 ‘가로세로연구소’(가세연) 관계자들을 조사하는 등 본격 수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앞서 가세연은 2016년 7월부터 최근까지 차례로 박 전 시장의 비서실장을 지낸 허영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김주명 서울시 평생교육진흥원장, 오성규·고한석씨, 그리고 2018년 1월~지난해 4월 서울시 행정1부시장을 지낸 윤준병 민주당 의원을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강제추행 방조,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전날 경찰에 고발했다. 가세연은 고발장에서 “전직 비서실장들은 피해자의 업무상 중간관리자인데 피해사실을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묵살하는 식으로 방조했다”면서 “윤 의원은 전직 부시장으로 피해자로부터 피해 신고를 받은 비서실 직원들로부터 보고를 받거나, 실제로 본인이 피해자를 알았고 어려운 상황을 인지했음해도 이를 묵인하고 방조했다”고 주장했다. 박 전 시장 사건 피해자를 지원하는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여성의전화는 전날 배포한 보도자료를 통해 “전직 비서실장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상한 낌새를 채지 못했다’고 말했는데, 무엇을 몰랐던 것인가. 시장실과 비서실은 일상적인 성차별, 성희롱 및 성추행 등 성폭력이 발생하기 쉬운 업무 환경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 피해자는 2016년 1월부터 매 반기별 인사 이동을 요청했고, 번번이 좌절된 끝에 지난해 7월에서야 근무지를 이동했다. 그런데 올해 2월 다시 비서 업무 요청이 왔고, 피해자는 인사담당자에게 ‘성적 스캔들 등의 시선이 있을 수 있으므로 고사하겠다’고도 얘기했으나 인사담당자는 문제 상황을 파악조차 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이에 피해자 지원단체들은 “경찰은 서울시청 6층에 있는 이 사건 증거를 보전하고 수사 자료를 확보해야 한다”면서 “서울시, 민주당, 여성가족부 등 책임 있는 기관은 피해자의 피해에 통감하고 진상규명 필요성을 말하면서도 피해자를 ‘피해 호소인’ 등으로 호칭하며 유보적, 조건적 상태로 규정하고 가두는 이중적인 태도를 멈추라”고 요구했다. 서울경찰청은 “여성단체 등에서 추가로 제시한 각종 의혹에 대해서도 사실관계를 확인하겠다”면서 “압수수색영장 발부 등 강제수사가 가능한지 여부 등에 대해서도 철저히 검토해 수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편 박 전 시장의 사망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 성북경찰서는 현재 참고인 조사를 통해 박 전 시장이 사망에 이르게 된 경위를 수사하고 있다. 경찰은 임순영 서울시 젠더특별보좌관(젠더특보)에게도 출석 조사를 요구해 현재 출석 일자를 조율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임 특보는 지난 8일 박 전 시장 성추행 사건 피해자가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오후 4시 30분쯤)하기 전인 같은 날 오후 3시쯤 박 전 시장에게 ‘시장님과 관련한 불미스러운 일이 있다는 이야기를 외부 인사들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또 같은 날 밤 9~11시쯤 박 전 시장과 회의를 했다. 임 특보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회의 당시 박 전 시장의) 피소 사실은 몰랐다”고 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박원순 시장 기분 좋게 만드는 ‘기쁨조’ 역할 강요받았다”

    “박원순 시장 기분 좋게 만드는 ‘기쁨조’ 역할 강요받았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전직 비서 A씨 측이 16일 피해 사실을 추가로 폭로했다. 피해자 A씨는 박 전 시장의 비서로서 시장의 기분을 좋게 유지하는 ‘기쁨조’ 역할을 강요받았다고 주장했다. 피해자 A씨를 돕는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여성의전화는 이날 오후 입장문을 통해 “서울시장 비서 업무의 성격은 시장의 기분을 좋게 하는 것이었으며 상식적인 업무 수행이 아닌 여성 직원의 왜곡된 성역할 수행으로 달성됐다”면서 “이는 사실상 성차별이며 성폭력 발생과 성역할 수행에 대한 조장, 방조이자 묵인과 요구에 해당한다”고 비판했다. 피해자 측은 ‘시장이 마라톤을 할 때 여성 비서가 오면 기록이 더 잘 나온다’는 이유로 주말 새벽 출근해야 했고, 서울시 인사들이 결재를 잘 받을 수 있게 시장의 기분을 살피라며 심기 보좌 또는 기쁨조 역할을 강요했다고 밝혔다. 시장이 운동을 마치고 시장실 샤워실에서 씻을 때 비서가 속옷을 가져다줘야 했으며 샤워를 마친 시장이 벗어둔 운동복과 속옷을 챙기는 일도 비서 업무였다고 피해자 측은 밝혔다. 피해자는 아침저녁으로 시장의 혈압을 재야 했는데 박 전 시장으로부터 “자기(피해자)가 재면 내가 혈압이 높게 나와서 기록에 안 좋아”라는 성희롱 발언을 듣기도 했다. 성추행 피해를 호소하는 피해자를 서울시는 철저히 무시했다. 피해자는 2016년 1월부터 반기마다 인사이동을 요청한 끝에 지난해 7월에야 비서실을 나갔다. 올해 2월 다시 비서 업무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피해자는 인사 담당자에게 “성적 스캔들 등의 시선이 있을 수 있어 고사하겠다”고 얘기했지만 인사 담당자는 문제 상황을 파악조차 하지 않았다고 피해자 측은 밝혔다. 피해자 측은 A씨 외에도 서울시에서 발생한 성추행 피해 제보를 받았다고 했다. ▲회식 때 노래방에서 허리 감기 ▲술 취한 척 뽀뽀하기 ▲집에 데려다준다며 택시에서 추행하기 ▲바닥 짚는 척 다리 만지기 등이 여성 직원들을 상대로 일상적으로 벌어졌다는 것이다. 피해자 측은 “성폭력 사안 발생 시 원스트라이크 아웃 제도를 도입했지만 지난 4월 행정직 비서관에 의한 성폭력 사건에 이를 적용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피해자가 지난 8일 박 전 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경찰에 고소한 뒤 전현직 고위 공무원과 임기제 정무 보좌관, 비서관 등이 피해자에게 연락을 시도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정치적 진영론과 여성 단체에 휩쓸리지 말라’, ‘힘들었겠지만 기자회견은 아닌 것 같다’, ‘확실한 증거가 나오지 않으면 힘들 거다’라는 식의 위로를 가장한 2차 가해성 메시지로 피해자를 심리적으로 압박한 것으로 확인됐다. 피해자 측은 “서울시가 전날 내놓은 진상규명 대책으로는 사건을 제대로 규명할 수도, 할 의지도 없어 보인다”면서 “서울지방경찰청이 서울시청 6층(비서실)에 있는 증거를 보전하고 수사 자료를 확보하라”고 요구했다. 서울시와 더불어민주당, 여성가족부 등에는 “진상규명 필요를 말하면서도 피해자를 피해 호소인 등으로 호칭하는 이중적 태도를 멈추고 적극적인 성폭력 문제 해결과 문화 개선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이근아 기자 leegeunah@seoul.co.kr
  • 피해호소인? 여가부 “박원순 고소 직원, 법상 피해자가 맞다”

    피해호소인? 여가부 “박원순 고소 직원, 법상 피해자가 맞다”

    여성가족부가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을 경찰에 고소한 전직 비서 A씨에 대해 “법상 피해자로 본다”고 입장을 밝혔다. 황윤정 여가부 권익증진국장은 이날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기자들을 상대로 여가부 입장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A씨의 호칭을 둘러싼 논란과 관련해 “피해자 지원기관을 통해서 보호·지원받는 분들은 피해자로 본다”고 말했다. A씨에 대해 여권 일부 인사들과 서울시 등에서 ‘피해자’가 아닌 ‘피해 호소인’ 등으로 부르는 것이 2차 가해라는 지적이 일자 여가부의 견해를 물은 것이다. 여가부도 지난 14일 공식 입장문에서 A씨를 ‘고소인’이라고 칭해 성범죄 피해자 보호 주무부처로서 적절치 못하다는 지적이 일각에서 나오기도 했다. 이날 ‘법상 피해자’라는 여가부의 입장은 이런 지적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개별 사건은 비밀 엄수…여가부 보고받지 않는다” 황 국장은 A씨가 박 전 시장을 고소한 사실을 여가부가 언제 인지했는지에 대해 “피해자 보호 차원에서 (피해자) 지원기관에서 이뤄지는 사건은 비밀 엄수 원칙에 의해 개별 보고는 받지 않고 있다”고 답했다.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의혹이 서울시를 통해 여가부에 보고된 사실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시스템상 확인이 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여가부가 각 공공기관이나 지자체로부터 보고 받는 사안은 제도 전반에 관한 것이나 매뉴얼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 등 절차 이행과 관련한 부분이며, 구체적 사건에 관한 내용은 보고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황 국장은 박 전 시장이 2018년 서울시 내부에서 진행한 성희롱 예방 교육에 기관장 자격으로 참가한 사실은 확인했다고 밝혔다. 황 국장은 “각 기관의 (성범죄) 예방 조치가 잘 되었는지에 대해 전산과 서면으로 제출받게 돼 있고 필요하면 현장 점검도 하게 돼 있다”면서 “서울시에 대해서는 가급적 이른 시일 안에 현장 점검을 실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어 “특히 지자체장과 선출직에 대해서는 여가부에서 (현행 제도상) 사건을 처리하는 데에 한계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면서 “관련 사건이 발생했을 때 대응을 적절히 할 수 있도록 필요한 대책을 보완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황 국장은 피해자 지원과 보호가 실질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여가부가 (예산 등을) 지원하는 민간 기관에서 지원하고 있다”면서 “지원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안희정 때와 대처 다르다’ 지적엔… 여가부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 성폭행 사건을 포함한 미투 운동이 한창 벌어지고 있던 2018년에 ‘성희롱 성폭력 사건처리 메뉴얼’과 ‘공공기관의 장 등에 의한 성희롱·성폭력 사건처리 매뉴얼’을 발표한 바 있다. 메뉴얼에서 말하는 공공기관의 장은 공직유관단체의 장을 의미하며 여기에는 선출직인 지방자치단체장이 빠져있는 상황이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성범죄 사건 때 신속하게 피해자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던 것과는 달리 이번 사태에서는 책임을 방기한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2018년 2월 공공부문 성희롱·성폭력 근절 대책 등을 발표하면서 그 계획의 일환으로 충남도도 같이 포함돼서 진행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당시 여가부가 공공 부문 성희롱·성폭력 근절 보완 대책을 발표해 관련 정책을 이행하는 와중에 공교롭게 안희정 전 지사의 성폭력 사건이 벌어져 맞물렸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황 국장은 “(서울시에 대해서는) 점검 중이고 이른 시일 내에 점검을 나가는 한편 추가 조사가 필요한지도 검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박원순 성추행 의혹을 마주한 ‘권력’의 네 가지 오류 [아무이슈]

    박원순 성추행 의혹을 마주한 ‘권력’의 네 가지 오류 [아무이슈]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비서 성추행 의혹은 우리 사회에 작동 중인 ‘권력’의 힘이 얼마나 공고한지를 다시금 실감하게 했다. 180석의 거대 여당은 피해자를 ‘피해 호소인’, ‘피해 고소인’으로 불러 논란을 샀으며, ‘피해자 중심주의’를 외쳤던 여권 인사들은 일제히 침묵했다. 일부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이번 의혹이 정치적 용도로 기획됐다는 ‘공작설’까지 제기 되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박 시장의 사례를 언급하며 업무나 회식 등에서 적극적으로 여성을 배제하자는 ‘펜스 룰’이 화제에 올랐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행위가 “앞으로 이어질 고발을 ‘입막음’하려는 행위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권력형 성범죄를 마주한 권력이 어떤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 각종 논란을 종합했다.하나, 언어의 함정… 2차 가해 ‘피해 호소인’ 더불어민주당은 피해 여성을 꾸준히 ‘피해 호소인’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서울시의 입장 발표 자리에서도 ‘피해 호소 직원’이라는 표현이 나왔다. 여성가족부와 이낙연 의원 등은 ‘고소인’이라는 단어를 썼다. 민주당 송갑석 최고 위원은 이러한 용어 사용에 대해 “특별한 입장이 없다”고 말했지만 ‘호소인’에는 피해자의 ‘일방적 주장’이라는 판단이 내포된 용어라는 지적이 나온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이 자체를 ‘2차 가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과거 학교나 여성운동 등에서 피해 호소인 이라는 용어가 쓰인 적은 있지만 미투(me too) 운동이 확산 되면서 피해자를 호소인 등으로 언급한 경우는 거의 없다. 피해 호소인은 가해자 측에서 주로 사용했던 단어다. 법무법인 현백의 김보람 변호사는 “법률적으로 피해호소인 등의 표현은 생소한 단어”라면서 “수사단계에서도 피고소인 혹은 피해자라고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2018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재판부 역시 당시 고소인 김지은씨를 ‘피해자’로 불렀다. 청와대는 논란이 일자 ‘피해 호소인’ 호칭을 ‘피해자’로 바로잡았다. 둘, 선택적 분노… 내 편 가르기로 입막음 ‘선택적 분노’가 피해자를 고립시키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과거 검찰·연극계 등의 미투 운동에 지지를 보냈던 여권 인사들의 미온적인 반응 때문이다. 성범죄 기준도 진영 논리에 따른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민주당의 고인 감싸기가 ‘연대’를 기반으로 힘을 얻었던 미투 운동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비판이 쏟아지자 민주당 여성 의원들은 14일, 당 대표는 15일에서야 조사가 철저히 이뤄져야 한다며 입장을 밝혔다. 당 대표의 사과는 사태 발생 후 5일 만이다. 2018년 미투 운동을 촉발한 서지현 검사의 폭로 당시 기자회견을 열고 기민하게 움직였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당시 민주당 여성 의원들은 ‘더 많은 말하기가 필요하며, 고백과 증언 그리고 폭로로 이어지는 여성들의 행동과 움직임에 연대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서지현 검사법무부 양성평등 정책 특별자문관 검사 역시 ‘공황장애’를 이유로 이번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피했다. 김형준 명지대 인문교양대학 교수는 “진보의 가치는 존중돼야 하는데 진보의 가치를 실현하는 사람들이 도덕적 신뢰성을 상실해 가는 장면을 목격하고 있다”면서 “위기와 충격을 다루는 과정에서 비합리적인 행동을 보인 민주당이 앞으로 지지층을 모으기위해 무리수를 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셋, 펜스 룰… 피해자에게 책임 떠넘기는 혐오 “기관장의 비서진 중 여성 인력을 모두 배제하자”다는 식의 ‘펜스 룰’도 고개를 들고 있다. 펜스 룰은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의 인터뷰에서 유래한 용어로 성추문을 피하기위해 적극적으로 여성과의 교류를 끊는다는 의미다. 펜스 룰은 범죄의 책임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전가하는 것을 전제로 할 뿐 아니라, 여성의 자유로운 사회진출을 가로막는 핑계로 작용할 수 있다. 펜스 룰이 언급 되는 것 자체가 여성 혐오를 부추긴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국회 여성 근로자들이 만든 페미니스트 조직 ‘국회페미’는 지난 12일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린 입장문에서 “국회 내부에서 여성 보좌진 채용을 앞으로 고심하겠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오가고 있다”면서 “성별을 이유로 업무를 제한해 여성을 조직에서 더 낮은 지위에 가둔다면, 위력에 의한 성폭력은 사라지기는커녕 더 음성적이고 악질적으로 퍼져 나갈 것”이라고 우려했다. 김 변호사는 “펜스 룰의 함정은 성범죄의 피해자가 늘 여성이라는 편견에 기초한다는 것”이라면서 “성범죄는 사회적 지위의 차이를 악용해 약자를 착취하는 범죄의 한 형태라는 점에서 남성도 얼마든지 피해자가 될 수 있으며, 여성만 배제하는 것은 결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넷, 공작설… 합리적 의심이라 믿는 가짜뉴스 SNS에서는 “박 시장을 성폭행 혐의로 고소한 사람이 나경원 전 의원 비서. A일보 문모씨가 알려준 내용”이라는 글이 퍼지기도 했다. 가짜 뉴스였다. 이번 사건이 여권 대선 주자를 제거하기 위한 보수진영의 기획이라는 ‘꽃뱀 설’도 유튜브,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를 통해 확대·재생산 되고 있다. “고소인의 신상을 공개해야 한다”거나 “4년간 침묵한 이유를 모르겠다”는 식의 2차 가해에 해당하는 글도 적지 않았다. ‘합리적 의심’이라는 말로 포장되어 있지만, 이는 절실함으로 고발에 나선 성폭력 피해자들을 모욕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는 비판이 따른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여성학 교수는 “이러한 행위는 피해자에 대해 사회적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다”면서 “앞으로 나올 여러 고발에 입마개를 씌우는 행위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명희진 기자 mhj46@seoul.co.kr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아무 : [관형사] 어떤 사람이나 사물 따위를 특별히 정하지 않고 이를 때 쓰는 말. 아무이슈는 서울신문 기자들이 분야,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사회 전반의 이슈에 대해 자유롭게 취재해 이야기를 풀어놓는 공간입니다.
  • 경기도의회 갑질행위 예방교육 실시

    경기도의회 갑질행위 예방교육 실시

    경기도의회(의장 장현국)가 15일 직원 간 상호 존중하는 조직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갑질행위 예방교육’을 실시했다. 이날 오후 의회사무처 1층 대회의실에서 ‘갑·을에서 동행으로’라는 주제로 2시간 동안 진행된 강연에는 의회사무처 직원 50여명이 참석했다. 참석 직원 전원은 체온을 측정한 뒤 마스크를 착용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유지하는 등 코로나19 확산 방지에 만전을 기하며 강연을 청취했다. 강사로 나선 국방부 육군사관학교 김효광 감찰실장(중령)은 현 국민권익위원회 청렴연수원 전문강사로 2018년 권익위 ‘청렴교육 강의 경연대회’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이날 강연에서 김효광 감찰실장은 “가까운 사이일수록 원칙을 지키지 않고 방심하면 나타나는 게 갑을관계”라며 “적절한 호칭, 존대표현 등 지킬 것은 지키면서 건강한 조직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 강연을 기획한 경기도의회 관계자는 “이번 강연을 통해 직원 스스로 무심코 일삼아 온 갑질행태를 점검하고, 갑질 없는 ‘청정의회’를 만드는 데 함께해 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메밀밭’ 지나 만난 모던보이… 평창에 깃든 이효석 문학혼

    ‘메밀밭’ 지나 만난 모던보이… 평창에 깃든 이효석 문학혼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이상한 일도 많지. 거기서 난데없는 성 서방네 처녀와 마주쳤단 말이네. 봉평서야 제일가는 일색이었지.” (소설 ‘메밀꽃 필 무렵’ 중에서)한여름 밤의 객줏집 토방 더위를 견디다 못해 등목을 하러 나간 개울가에서 하필이면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물레방앗간으로 들어가고야 만 허생원이란 사내가 있다. 지금에야 허생원이라는 호칭이 어울리지만 20여년 전에는 어디 그랬을까. 여름도 여름이거니와 혈기 왕성한 젊음 자체가 더위를 한층 더 못 견디게 했을 밤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 대체 달이 얼마나 밝으면 한밤중에 개울가에서 옷도 못 벗을 정도였을까. 아니면 그곳에 있는 어떤 여인의 기척을 듣고 끌리듯 들어가게 된 사내의 겸연쩍고 뒤늦은 핑계였을까. 달보다 더 환한 그이가 하필이면 ‘봉평서 제일가는 일색’이고 우는 낯빛이니 그야말로 선뜻 달래 주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어쩌면 뻔한 운명. 그런 밤에는 그 여인이 아닌 누구라도 우는 모습을 달래 줬을 터이지만, 하필 그 여인이라는 이 얄궂은 소설적 장치라니. 소설은 그 둘을 밤새 물레방앗간에 머물게 한 뒤에 다음날 아침이 채 밝기도 전에 허생원을 도피시킨다. 둘만의 꽃잠을 뒤로하고 줄행랑친 사내 대신 홀로 남겨진 여인은 달도 차지 못한 아이를 낳고 친정에서마저 내쳐진다. 핏덩이 아이와 함께 도망 나온 미혼모의 삶이야말로 우리가 흔히 짐작할 수 있는 고난 그 자체였을 터. 지금이라면 온갖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나 배드 파더스 같은 사이트에 올려라도 두겠지만, 때는 바야흐로 1920년. 장돌뱅이는 장돌뱅이대로, 객줏집 주모가 된 애 딸린 여인은 여인대로의 신산한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애석한 소설의 흐름이 있다. 그리고 그 문장들을 내내 달빛과 그것을 되비춘 메밀꽃밭이 있다.●여름이면 생각나는 ‘메밀꽃 필 무렵’ 달 아래서 소금을 흩뿌려 놓은 듯 빛나는 메밀밭을 뒷배로 둔 물레방앗간 서사가 올여름에도 돌아왔다. 아니 메밀꽃이 피는 시기여야 하니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노을을 등에 지고 걸어오는 장터의 당나귀들처럼 슬며시 오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달빛이 너무 이지러져서 메밀밭이 소금을 흩뿌려 놓은 듯이 밝았던 까닭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사 모든 일들은 다 햇빛 아래서, 달빛 밑에서 이루어지는 것들 아니겠는가. 개울가와 메밀밭이 오밤 중에도 대낮처럼 밝았던 까닭이라는 미문을 등에 지고 허생원과 동이가 왼손을 휘두르며 아직도 길을 걷고 있는 중이다. 강원도 평창 아니 봉평의 풍경이다. 순전히 소설가 이효석이 그려 놓은 메밀꽃밭을 찾으러 객줏집과 개울가 그리고 물레방앗간을 보러 다녀왔다. 호는 가산, 평창 봉평면에서 출생한 이효석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숭실전문학교,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로 재임했다. 1928년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구인회에 합류하기도 했다. 미문을 활용한 심미주의적 문학관과 프롤레탈리아적 세계관으로 고향 마을 농민들의 신산한 삶을 여실히 그려 낸 작품들로 유명하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메밀꽃 필 무렵’과 ‘수탉’, ‘돈’을 포함해 ‘해바라기’, ‘황제’, ‘화분’, ‘벽공무한’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평창·평양·서울 오가며 인간 배경에 천착 이효석의 삶은 고향인 평창과 서울 그리고 평양으로 이어지는데 그는 서울 살이의 피폐함과 도시민의 향수 그리고 고향을 주요 배경으로 한 향토적인 내용의 소설을 주로 쓰며 인간의 삶과 배경에 관해 천착했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세계는 시가지와 농촌, 향수와 도시의 삶에 대한 동경이 교차해 나타난다. 어느 한 가지에 집중된 시선보다는 사회의 여러 모습에 고루 눈을 돌렸으며, 고향 마을의 가난하고 피폐한 삶일지언정 그들의 삶을 바라보는 데 어떤 잣대를 들이대지도 않았다. 미학적인 문장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보다 깊이 있게 드러내고자 했다. ‘동반자 작가’ 운동에도 참여하면서 유진오, 채만식, 유치진 등과 함께 한국에서도 계급주의 문학 운동이 왕성하게 일어나게 기여했다. 그의 소설이 핍진한 삶과 인간 군상들이 주변의 풍경과 어우러져 보다 매혹적인 문장으로 그려지는 이유인 셈이다. 봉평과 경성을 오가며 보낸 유년기와 경성과 평양을 오가며 직접 경험한 삶의 여러 모습들이 대상에 대한 감각적이고도 섬세한 묘사 능력이 뛰어난 소설을 쓰게 하는 데 큰 지향점이 돼 주었던 듯싶다. 1942년 5월 25일 병으로 세상을 뜨기 전까지도 그는 소설을 썼고,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했다. 그가 인간에 대한 애정과 삶에 대한 진정성을 놓지 않은 작가로 추앙되는 이유다. 그에 대해 이리 자세히 쓰는 이유는 ‘나는 과연 작가 이효석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 때문이었다. 작가가 되기 전에는 국어 교과서의 지문과 언어영역 문제집에서 문제를 풀었고, 한컴타자교사의 ‘메밀꽃 필 무렵’을 타자 연습 삼아서 필타했다. 또 효석 백일장에서는 땡볕에 앉아 시제를 기다리던 습작 시절의 일도 뇌리를 스쳤다. 살면서 이래저래 너무 많이 들은 작가의 이름과 작품명,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는 ‘메밀밭’의 서사 덕분에 오히려 소설가 이효석을 더 모르고 지내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소설을 쓰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이 돼서도 그 사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이효석 문학상 수상 작품집’의 작품들을 찾아 읽거나 ‘효석 백일장’에서 학생들이 몇 명 정도 입상을 했는지 묻는 사람이 돼 있기도 한 실정이었다. 그래서 더 가보고 싶었다. 아니 가봐야 했다. 내가 아는 소설가 이효석은 원두 커피를 아주 사랑해서 서울과 평양, 평창을 오가며 원두를 구했다는 커피 애호가이자 축음기로 LP를 듣는 것이 취미고 프랑스 여배우를 좋아하기도 한, 스키가 취미인 멋쟁이였다. 이효석 선생의 커피 이야기는 내 단편소설 ‘커피 다비드’(‘유빙의 숲‘, 문학동네)에도 실려 있다. 직접 로스팅을 하고 커피를 내려 마시는 내가 이효석 선생을 만난다면 가장 먼저 건네고 싶은 원두는 케냐AA 피베리다. 홀빈(Hole Bean)인 까닭에 숙성도 오래 걸리지만 커피의 진주 혹은 에센스라고 불릴 정도로 맛과 향미가 뛰어난 원두이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봉평 메밀꽃 주변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질문을 하고 싶다. “그 여인을 꼭 그렇게 불행하게 만들어야 했나요.” “그런데 나중에 허생원이랑 다시 잘 되나요?”●마을 어귀서부터 느껴지는 ‘이효석 마을’ 봉평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곳이 이효석의 고장, 메밀꽃 군락이구나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봉평 장터와 효석문화마을 어귀에서부터 달려드는 여러 가지 글자들은 모두 이효석과 ‘메밀꽃 필 무렵’을 가리켰다. 동이네, 물레방앗간, 메밀꽃, 충주집, 허생원, 효석로, 효석공원 등등의 상호명들이 즐비해 있던 탓이었다. 그야말로 ‘이효석을 위한, 이효석에 의한’ 마을이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는 괴테 생가와 괴테 로가, 체코의 프라하에는 카프카 생가와 그 마을이 있다. 셰익스피어와 몽고메리, 헤르만 헤세, 카뮈 등 세계적인 문호들이 나고 자란 곳에는 어김없이 그들을 기리는 거리와 생가, 도서관을 비롯해 그의 문학을 경외하고 기념하려는 것들로 넘쳐난다. 나 역시도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꼭 빼놓지 않고 찾아보았던 여행지들 중에 하나가 작가들의 생가와 그들이 특히 자주 드나들었다던 카페(그곳에서 마시던 음료)와 거리였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러한 장소를 꼽는다면 단연 평창의 이효석 문화마을이 아닐까. 문인들의 거리를 따라 대한민국 작가 로드맵을 만들어 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코로나19로 생활과 마음이 위축돼 있어 ‘코로나 블루’라고 불리는 시대다. 선뜻 어디를 나서기도, 습관처럼 방학 때마다 미리 사둔 비행기 티켓을 꺼내 볼 수도 없는 날들이 돼 버렸다. 그때 책장에 있는 이효석의 책 한 권을 뽑아 들고 문득 평창으로 ‘홀로라도’ 훌쩍 떠나 보는 것은 어떨까. 격리를 해야 하는 때에는 책으로 여행을, 그리고 잠시 바람을 쐬어야 할 적에는 그 책을 배경으로 한 마을에서 작가와 작품을 보다 현실감 있게 만나 볼 수 있는 기회를 추천해 본다. 선뜻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대에 문득 어디라도 가고 싶을 적에는 봉평으로 그리고 이효석의 문장 속으로 물레방아가 물을 휘감아 돌듯이 그렇게. 그러다 보면 길 위에서 허생원을 만날 수도, 왼손잡이 동이를 만날 수도 있겠다. 그들과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면 넌지시 고향을 물어볼 수도 있는 일 아니겠는가. 혹시 어떤 인연을 만나게 될 수도 있잖은가. 어떤 사랑은 그렇게 시작될지도 모른다. 그 옛날의 허생원과 성처녀의 그 마음처럼 말이다. 활짝 핀 메밀꽃밭을 배경으로, 달빛 아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 한없이 휘도는 물레방앗간에서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겠다. 올여름과 가을에는 각자의 메밀꽃밭과 물레방앗간으로 떠나보시길. 소설가 이은선
  • ‘매니저 갑질 논란’ 신현준, “큰 충격…격식없는 친구였다”(공식입장)

    ‘매니저 갑질 논란’ 신현준, “큰 충격…격식없는 친구였다”(공식입장)

    배우 신현준(51)이 전(前) 매니저 김모 대표가 자신으로부터 ‘갑질’을 당했다고 폭로한 데 대해 “큰 충격을 받았다”며 공식 입장을 밝혔다. 신현준은 9일 소속사를 통해 “풀지 못한 응어리나 불만이 있었다면 직접 만나서 대화를 가질 수 있었는데 아쉽다”며 “김 대표는 매니저이기 전에 스무살 때부터 알고 지낸 동갑내기 친구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격식 없는 사이였다. ‘이 자식아’ 같은 호칭은 허물없이 자연스러웠고 그 친구도 역시 그렇게 대했다”며 “또 친구 사이라 서로의 어머니께도 자주 인사드렸고, 김 대표 가족 중 아픈 분을 위해 개별적 도움을 주기도 했다”고 밝혔다. 앞서 김 모 대표는 연예매체 스포츠투데이에 신현준으로부터 13년간 부당대우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신현준과 일하면서 월급을 적정 수준으로 받지 못했고, 폭언과 신현준 가족의 갑질에도 시달렸다고 호소하며 신현준과의 카카오톡 채팅 내용을 공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신현준 측은 “매니저가 20여 명이라는 보도도 사실이 아니다. 현재 같이 생활하는 코디, 메이크업 등 스태프는 모두 10년 이상 변함없이 관계를 맺어오고 있는 소중한 동료”라고 해명했다. 이어 “이런 상황에 대해 많은 분께 심려를 끼쳐 송구하다. 앞으로 더욱 성실하게 임하겠다”고 전했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자살하게 한다” 故최숙현 폭행 팀닥터 누구?…“정보 없다”(종합)

    “자살하게 한다” 故최숙현 폭행 팀닥터 누구?…“정보 없다”(종합)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팀에서 선수생활을 하면서 지속적인 가혹행위를 받다가 세상을 떠난 고(故) 최숙현 선수의 동료들이 6일 기자회견을 열고 감독, 주장, 팀닥터 등의 추가 가혹행위를 증언했다. 최 선수의 동료들에 따르면 김모 감독은 최 선수와 다른 선수들에게 상습적인 폭행과 폭언을 일삼았으며, 장모 주장 선수도 김 감독과 같은 태도로 선수들을 대했다. 특히 김 감독은 2016년 8월 점심 때 콜라를 한잔 먹어서 체중이 불었다는 이유로 빵을 20만 원어치 사와 최 선수와 다른 선수들이 새벽까지 먹고 토하게 만들고 또 먹고 토하도록 시켰다. A 피해 선수는 2019년 3월 복숭아를 먹고 살이 쪘다는 이유로 김 감독과 안모 팀닥터가 술마시는 자리에 불려가서 맞았다. 가해자들은 선수가 견과류를 먹었다는 이유로 견과류 통으로 머리를 때리고 벽으로 밀치고, 뺨과 가슴을 때리기도 했다. 이런 폭력을 당할 때마다 선수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잘못했다고 빌었지만, 가해자들은 이를 무시하고 같은 행위를 반복했다. 최 선수의 동료였던 A 피해 선수는 “경주시청 선수 시절 동안 한 달에 10일 이상 폭행을 당했으며 욕을 듣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로 하루하루를 폭언 속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고 증언했다. A 피해 선수에 따르면 선수들이 국제대회에 나갈 때마다 지원금이 나오는데도 김 감독은 80만~100만 원가량의 사비를 주장 선수 이름의 통장으로 입금을 요구하기도 했다. B 피해 선수의 증언에 따르면 장 주장 선수의 가혹행위는 김 감독 못지않았다. B 피해 선수는 “24시간 주장 선수의 폭력·폭언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고, 제3자에게 말하는 것도 계속 감시를 받았다”며 “주장 선수는 최 선수를 정신병자라고 말하며 이간질을 해 다른 선수들과 가깝게 지내지 못하게 막았고 아버지도 정신병자라고 말하며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했다”고 말했다. 안 팀닥터의 경우에는 치료를 이유로 선수들의 가슴과 허벅지를 만지는 등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했다. 심지어 심리치료를 받는 최 선수를 향해 “극한으로 끌고 가서 자살하게 만들겠다”고 말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져 충격을 안겼다. 문체부 “팀닥터 정보 전혀 없어”대한체육회 “닥터 자격증 없이 감독 친분으로 고용”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의원들은 6일 전체회의를 열고 문체부와 대한체육회 등 관련 기관에 최숙현 선수 사건 가해자로 알려진 팀닥터와 관련한 사항 등에 대한 추궁에 나섰다. 이 자리에는 민주당 의원들과 윤상현 무소속 의원이 참석했다. 상임위원 배정을 완료하지 못한 통합당은 회의 중반 보임이 확정된 이용 의원만이 참석했다. 박양우 문체부 장관은 최 선수 사건에 대해 “주무장관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마땅히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책임져야 할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을 것이고, 기존 시스템은 새로 보강될 여러 시스템과 잘 작동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이기흥 대한체육협회장도 “최 선수 부모님과 가족, 그리고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체육계 대표로서 사과의 말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며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는 발생되지 않도록 철저히 조사하고 규명하겠다”고 말했다. 윤상현 무소속 의원은 “지금은 조사할 때가 아니라 수사를 해야 할 때다. 누가 은폐했는지 책임자를 수사해야 할 상황”이라며 “조사단만으로 될 일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윤 의원은 “면허증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팀닥터가 되느냐. 이런 일이 가능하냐. 정보가 없는데 어떻게 여기에 와서 보고하느냐. 이게 바로 은폐”라며 “6월 26일 0시27분 최 선수의 마지막 메시지, 이것은 우리 모두의 숙제다. 고인이 던진 숙제를 못 풀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고 강조했다. 최숙현 선수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전인 지난달 26일 새벽 자신의 모친에게 “그 사람들 죄를 밝혀줘”라는 마지막 메시지를 남긴 바 있다.도종환 위원장은 “어떻게 주요 정보가 하나도 없느냐. 주요 폭력 가해자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다고 말하느냐”라며 “지금 다른 선수들은 폭력 외에도 성적수치심을 느끼는 행동을 했다고 하는데 주요 정보가 없으면 어떻게 회의를 진행하나. 앞으로 무슨 조사를 하겠다는 것이냐”라고 언성을 높였다. 이상헌 민주당 의원은 “선수들의 건강을 관리해야 할 사람이 반대로 선수를 구타했다.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맞았다는 내용도 있다. 어떤 방법으로 성인여성이 갈비뼈에 금이 가도록 구타당한 것이냐”라며 “고문기술자, 구타기술자라고 뉴스에 나오는데 왜 없다고 하나”라고 비판했다. 같은 당 임오경 의원은 “트레이너를 요청하지 않고, 선수들의 돈을 차출했나”라며 “선수를 보호해야 할 의무는 감독에게 있다. 예산 부족이라고 선수 월급을 차출하면서까지 해야 했느냐”라고 비판했다. 임 의원은 부적절한 통화 논란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전 짜깁기를 한 적 없다. 자식 잃은 부모의 심정으로 어떤 것이 진실인지 하나하나 알고 싶었다”며 “짜깁기식 보도에 대한 사과를 요청한다. 진상규명이 두려워 물타기 하려는 체육계 세력과 보수언론이 결탁했다고 본다. 무엇이 두렵나”라고 반발했다. 박양우 문체부 장관은 팀탁터 문제에 대해 “개인적 신상은 파악하지 못한다. 치료사 자격증도 없다는 보고는 받았다”고 답했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도 “물리치료사나 트레이너는 있지만 팀닥터는 없다. 그런 사람은 다 등록돼 있다”며 “이 분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또한 대한체육회 관계자는 “제가 아는 팀닥터는 감독과 선·후배 사이다. 실제로 닥터는 아니고 자격증이 없다. 일반 개인병원에서 운동 처방을 하고 잡일하는 사람”이라며 “언론에서 정보를 얻었다. 구체적으로 팀닥터에 대해 조사해서 안 것은 아니다. 감독 친분으로 고용해 월급은 선수들이 모아서 준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경주시체육회 관계자는 “그런 사실 없다. 호칭을 닥터라고 선수들이 부른 것이지 팀닥터가 아니다”라며 “전혀 저희와 관계 없다. 급여는 선수 부모님, 각자 선수들 면담 후에 개인적으로 받아낸 것으로 안다. 조사 과정에서 자격증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폭행 부인하며 끝내 사과 거부한 가해자들… “죽은 건 안타깝지만 사죄할 건 없어” 전체회의 도중에 참석한 이용 통합당 의원은 감독과 동료 선수들에게 “혹시 피해자들과 또는 최 선수에게 사죄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감독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고 지도했던 애제자다. 이런 사안이 발생한 데에 대해 부모 입장까지는 제가 말씀을 못드리지만 너무 충격적이다. 가슴 아픈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경찰 조사를 받고 있고 그 부분에 대해 성실히 임했다”고 말했다. 이어 “감독으로서 관리 감독, 선수 폭행에 무지했던 부분들에 대해 제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하겠다”고 했다. 또 이 의원이 “관리, 감독에 대해서만 사과한다는 뜻인가. 폭행과 폭언을 전혀 무관하다는 것인가”라고 재차 묻자 “그렇다”고 답하며 끝내 최숙현 선수에게는 사과하지 않았다. 가해자로 지목된 한 동료선수도 “폭행한 적 없다”고 부인했고, 또 다른 동료선수도 폭행이나 폭언 의혹을 부인하며 “죽은 것은 안타까운데 사죄할 것은 없다. 폭행한 사실이 없으니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일 뿐”이라고 말했다. 2017년 2019년 경주시청 소속으로 활동한 최숙현 선수는 그간 감독과 팀 닥터, 선배 등으로부터 가혹 행위를 당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최 선수에게 강제로 음식을 먹이거나 굶기는 행위, 구타 등을 가했고 팀 닥터는 금품을 요구한 의혹을 받고 있다. 최숙현 선수는 생전 경찰, 검찰, 경주시청, 경주시체육회, 대한체육회, 대한철인3종협회에 가혹행위가 벌어졌다는 것을 알렸지만 당시 관련 기관들은 어떠한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결국 지난달 26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고 최숙현 선수 폭행 의혹 팀닥터…의협 “의사 아니다”

    고 최숙현 선수 폭행 의혹 팀닥터…의협 “의사 아니다”

    폭언, 폭행 등 가혹행위에 시달리다 23살의 나이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 국가대표·청소년 대표 출신 트라이애슬론(철인3종 경기) 선수 고 최숙현씨가 지목한 가해자 가운데 한 명인 팀닥터는 정식 의사가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경주시는 이 가해 당사자를 고발 조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대한의사협회는 3일 보도자료를 내고 “가해자로 지목된 팀닥터는 의사가 아닐 뿐만 아니라 의료와 관련된 다른 면허를 보유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며 언론에 정확한 명칭을 사용해 달라고 요청했다. 의협은 “의사가 아닌 사람을 팀닥터라고 호칭하는 체육계 관행이 근본적인 잘못이라 하더라도 언론이 그대로 인용하는 것도 잘못”이라고 지적했다.최 선수는 “감독, 팀닥터, 선배 2명에게 가혹행위를 당했다”며 수사기관과 대한체육회, 대한철인3종경기협회, 경주시청 등에 호소하다가 지난달 26일 부산의 숙소에서 “그 사람들의 죄를 밝혀줘”라는 마지막 메시지를 어머니에게 남기고 짧은 생을 마감했다. 경주시장 “치료사 고발할 것” 최 선수가 생전에 남긴 녹취록과 징계신청서에 따르면 가해자로 지목된 팀닥터는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팀이 임시 고용한 운동처방사로 알려졌다. 최 선수는 2015년, 2016년, 2019년 뉴질랜드 전지훈련 기간 운동처방사로부터 심리치료비 명목 등의 돈을 요구받았다고도 했다. 최 선수와 가족들이 치료사에게 이체한 총액은 1500여만원으로 알려졌다. 주낙영 경주시장은 이날 애도문을 발표하고 “경주시와 직접 계약관계가 없는 처방사에 대해서도 추가 조사 후 고발 조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전날 경주시는 가해자 중 한명인 감독에 대해 직무정지 처분을 내렸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고 최숙현 선수 가해자 ‘팀 닥터’ 행방묘연…의사도 아냐

    고 최숙현 선수 가해자 ‘팀 닥터’ 행방묘연…의사도 아냐

    대한의사협회는 트라이애슬론 국가대표 출신 고 최숙현 선수 사망 사건과 관련해 해당 팀 감독과 함께 가해자로 등장하고 있는 ‘팀 닥터’는 의사가 아니라고 3일 지적했다. 의협은 “가해자로 지목되고 있는 이 ‘팀 닥터’는 의사가 아닐 뿐 아니라 의료와 관련된 다른 면허도 보유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며 “의사가 아닌 사람을 ‘팀 닥터’라고 호칭하는 체육계의 관행은 잘못”이라고 밝혔다. 박종혁 의협 대변인은 “특히 이번처럼 국민적 공분을 사는 사건의 경우 연루된 가해자가 마치 의사인 것처럼 보도됨으로써 수많은 ‘의사’들이 모욕감을 느끼고 있다”고 강조했다. 고 최숙현 선수에게 전지훈련 중 가혹행위를 한 것으로 알려진 40대 ‘팀 닥터’ A씨는 2일 열린 인사위원회에 지병을 이유로 출석하지 않았다. 최 선수의 전 소속팀 감독과 선수들은 인사위원회에 참석했다.A씨는 지병인 암이 재발해 건강이 좋지 않아 출석할 수 없다고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40대 후반으로 알려진 A씨는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팀 B감독의 고향 선배로, 소속 선수들과 꾸준히 관계를 맺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팀은 해외훈련이나 전지훈련 등 필요에 따라 ‘팀 닥터’를 불러 참가시킨 것으로 전해졌다. 고 최숙현 선수는 경북체고를 졸업한 후 2017년 경주시청 직장운동부에 입단했으나 이듬해 컨디션 저조로 1년간 쉬었고 2019년 운동을 다시 시작했으며, 올해 1월 부산광역시체육회로 자리를 옮겼다. 최 선수는 경주시청 입단 이후 감독과 ‘팀 닥터’, 선배들로부터 폭력과 폭언 등 가혹행위에 시달리다 지난달 26일 부산의 숙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 어머니에게 보낸 “엄마 사랑해, 그 사람들 죄를 밝혀줘”라는 메시지가 공개되면서 국민적 분노가 일고 있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구청장 아저씨’의 성북천 사랑 “코로나 블루, 꽃 보며 날려봐요”

    ‘구청장 아저씨’의 성북천 사랑 “코로나 블루, 꽃 보며 날려봐요”

    바람마당 40㎡에 25종·2700본 심어 운동복 차림 물 주니 ‘아저씨’ 호칭도 “관리 잘돼 스트레스 싹~” 주민 호평“장기화한 코로나19로 우울감을 호소하는 주민이 많은데 성북천에서 잠시라도 힐링하고 코로나19 극복에 대한 의욕과 희망을 충전하시길 바랍니다.” 지난 23일 이승로 서울 성북청장은 트레이닝 바지에 운동화 차림으로 출근했다. 성북구가 지난 3월 성북천변 바람마당에 조성한 ‘치유화단’에 물을 주고 성북천 정화 활동에 나서기 위해서다. 그는 식물의 종류에 따라 물의 양도 세심하게 조절했다. 구는 40㎡ 공간에 제주목향, 산앵도 등 관목류와 천일홍, 델피니움 등 초화류 25종 2700본을 심었다. 치유화단이란 이름은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지역 경제 어려움 등 다양한 스트레스 상황에 놓인 주민을 위로한다는 취지로 붙였다. 이 구청장은 “치유화단에 형형색색 싱그러운 꽃과 풀이 가득하다 보니 자연스레 성북구의 명소가 됐다”며 “운동하러 나왔다가 발길을 멈추고 식물을 감상하는 노인부터 화단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연인, 가족까지 많은 주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소개했다. 운동복 차림으로 화단에 물을 주다 보니 이 구청장을 ‘아저씨’라고 부르며 꽃 이름을 묻는 주민도 많다. 이 구청장은 친절하게 천일홍, 일일초, 버베나, 델피니움, 세이지 등을 알려주고 습성도 설명했다. 이 구청장이 애지중지하는 또 한 곳이 성북천이다. 성북천은 성북동 북악산에서 발원해서 청계천으로 합류하는 생태하천으로 수변에 갯버들, 수크령, 풀억새 등이 식물 군락을 형성했다. 다양한 어류는 물론 왜가리, 백로, 야생오리 등도 서식한다. 이날 이 구청장은 무릎까지 오는 장화를 신고 빗자루를 쥔 차림으로 성북천으로 직접 들어가 돌이끼를 닦거나 천변 쓰레기를 주웠다. 성북천과 인접한 삼선·동선·안암·보문동 주민과 돈암초 ‘아름다운 봉사단’ 등 60여명이 함께했다. 이 구청장은 땀을 비 오듯 쏟아내면서도 바위에 엉겨 붙은 돌이끼를 닦아냈다. 주민 홍모(34)씨는 “최근 코로나19로 친구들을 만나거나 실내에서 운동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성북천을 걸으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운동이 돼 자주 찾는데 지금처럼 관리가 잘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구청장은 “성북천 정화 활동에 함께한 주민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더욱 쾌적하고 아름다운 성북천을 만끽하실 수 있도록 앞으로도 ‘성북천 아저씨’로 남겠다”며 “장마철이 본격 시작된 만큼 주민이 성북천을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관리하겠다”고 덧붙였다.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 [조영학의 번역과 반역] ‘꽃며느리밥풀’에 대한 보고서

    [조영학의 번역과 반역] ‘꽃며느리밥풀’에 대한 보고서

    한국 야생화에 재미있는 이름이 많다. 열매가 갈고리처럼 달라붙어서 ‘도둑놈의갈고리’, 지린내가 나니까 ‘쥐오줌풀’, 열매가 개의 성기를 닮았다고 ‘개불알풀’…. 그 밖에 ‘광릉요강꽃’, ‘도둑놈의지팡이’, ‘개털이슬’, ‘족도리풀’들도 특이한 모양이나 특성을 따라 이름을 붙인 경우다. 사연을 담은 이름도 적지 않다. 사위질빵은 사위를 향한 장모의 사랑이 담뿍 담겨 있다. 사위가 처가에 와서 나무를 하러 가는데 너무 많이 지면 힘들다며 장모가 이 덩굴식물로 질빵을 만들어 주었다. 사위질빵은 쉽게 끊어지는 특성이 있다. 아름다운 미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며느리밑씻개는 잎과 줄기에 작고 딱딱한 가시가 촘촘히 나 있는 풀이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미워해서, 볼일을 본 뒤 휴지 대신 밑을 닦으라고 이 풀을 내주었단다. 이름만으로도 며느리에 대한 증오가 배어나오는 듯하다. 이현세의 만화, ‘며느리밥풀꽃에 대한 보고서’에 등장하는 꽃도 며느리밑씻개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옛날에 며느리가 밥이 잘 됐나 보려고 밥풀 몇 알을 입에 넣다가 시어머니한테 들켰다.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밥을 훔쳐 먹는다며 때려 죽였는데 그 후 며느리 무덤가에 밥풀을 닮은 꽃이 피었다. 실제로 꽃을 보면 피처럼 붉은 꽃잎 한가운데 밥풀 무늬 두 개가 선명하다. 유형은 비슷하건만, 사위질빵은 장모의 사랑을, 며느리밑씻개 등은 시어머니의 서슬 푸른 증오를 담고 있다. 백년손님 사위는 씨암탉까지 잡아 고이 모시고, 며느리는 몸종 정도로 여기던 풍습을 꽃 이름에서까지 확인하는 듯해 늘 씁쓸한 기분이다. 얼마 전 태백산에서 기생꽃을 보았다. 기생꽃은 멸종위기 2급의 희귀식물이다. 이 꽃 역시 모양 때문에 이름을 얻었는데, 희고 고운 꽃이 기생의 고운 얼굴이나 장신구를 닮았다는 것이다. 나는 귀한 꽃을 만난 기쁨에 SNS에 꽃 사진을 올리고 이름까지 달아 주었다. 얼마 후 한 여성이 댓글을 달았는데 창피하게도 난 그 댓글을 읽고 나서야 기생꽃이라는 이름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름 성차별이나 여성비하 언어에 민감한 편이라 여겼건만 나 역시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댓글은 “꽃 이름에 꼭 이렇게 여성비하 개념이 들어가야 할까요?”였다. 꽃 이름 갖고 웬 호들갑이냐 할지 몰라도, 호칭은 부르거나 불리는 대상의 존재를 규정하므로 모든 차별의 기본이라 할 수 있다. 며느리가 남편 식구들을 서방님,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게 온당치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노예제 시대에 흑인들을 학대하고 죽이고 강간하고 매매하는 게 가능했던 이유도, 노예를 사람이 아니라 가축으로 분류했기 때문이라 들었다. 꽃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기 위해서라지만 그 이름이 “잔치나 술자리에서 노래나 춤, 풍류로 남성의 흥을 돋우는 일이 직업인 여성”을 뜻한다면 여성 입장에서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며느리밑씻개의 어원은 일본 이름 “마마코노시리누구아”에서 비롯했다. 마마코는 의붓자식이란 뜻이고 시리누구아는 밑씻개를 뜻한다. 일본에서 왜 “의붓자식”이 미움의 대상인지 모르겠으나, 그걸 우리말화하면서 작명자가 굳이 며느리로 바꾸었다면 그 “남자”가 평소 여성을 어떤 존재로 여겼는지 짐작할 만하다. 우리 삶 속에는 여전히 며느리밥풀꽃, 며느리밑씻개 같은 차별의 언어들이 차고도 넘친다. 낙엽을 화냥기에 비유하고 ‘인어상 찌찌’ 운운하는 글을 쓰거나 읽고도 아무렇지 않고 심지어 박수갈채를 보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기생꽃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아름다움을 칭송했는데 무슨 문제냐는 투다.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는 퍼포먼스가 유행인가 보다. 거대담론에 대한 문제제기도 좋지만 내 주변에, 내 생활에, 내 의식ㆍ무의식 속에 남아있는 차별의 잔재도 한번쯤 돌아볼 일이다. 그런데 이현세는 며느리밥풀꽃이라는 이름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그 꽃의 정확한 이름은 꽃며느리밥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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