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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 단체·교포들에 韓國 투자 당부/訪日 사흘째 이모저모

    ◎예상밖 환영인파에 “일서 선거해도 자신” 농담 【오사카=梁承賢 특파원】 방일 사흘째인 9일 金大中 대통령은 도쿄와 오사카를 오가며 바쁜 일정을 보냈다. ▷오사카 도착 표정◁ ○…金대통령은 오후 오사카에 도착,숙소인 시민·학생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金대통령이 탄 차량 행렬이 숙소인 데이코쿠호텔 인근에 이르자 기다리던 시민과 학생들이 태극기와 일장기를 흔들며 환호했고,길가던 시민들도 손을 흔들었다. 뜻밖의 환영인파를 만난 金대통령은 일본 경호측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차를 세우고 이들에게 다가가 흐뭇한 표정으로 10여분간 악수를 나누기도. ▷동포간담회◁ ○…한·일 정상회담 후 金대통령은 오사카(大阪)를 방문,동포들과 간담회를 가졌다.金대통령은 방일 성과에 고무된 듯 편안한 모습으로 유머가 섞인 인사말로 간담회장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金대통령은 오사카 시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은 사실을 지적,“이 정도 인기면 일본에 와서 선거해도 문제가 없겠다고 생각했다”고 농담을 던져 폭소가 터졌다.이어 ‘천황’ 호칭을 예로 들면서 “따질 것은 따지되 대범하게 넘어갈 것은 그렇게 하는게 세계속에서 인정받는 길”이라며 자신의 정치관을 소개. 金대통령은 재일동포들이 국내의 외환위기에 3억여달러를 송금하고 수재구호금을 보낸 것에 감사하면서 “사실 그동안 정부가 교포들의 투자를 유치하지 못한 것은 해외에 보물단지를 놓고도 못 써먹은 것”이라며 활발한 투자유치 의사를 피력했다.이어 재일동포들의 모국 투자를 요청한 뒤 “여러분이 고국에 투자하려면 공무원들이 규칙을 핑계로 지치게 했다는 것을 잘 안다”며 행정개혁에 대한 의지를 피력. ▷관서지역 주요단체 만찬◁ ○…金대통령은 오사카 데이코쿠호텔에서 관서지역 주요단체가 공동주최한 만찬에 참석,적극적 ‘세일즈 외교’에 나섰다. 金대통령은 만찬사에서 “이번에 제정된 ‘외국인 투자촉진법’으로 외국인에 대한 투자환경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고 운을 뗀 뒤 “한국이 투자대상으로서 관서 경제계에 큰 매력을 줄수 있으리라 확신한다”고 강조. ▷정계지도자 초청오찬◁ ○…金대통령은 이날 낮 일본의 전직 총리 7명과 각당 대표 5명 등 정계 지도자들을 오찬에 초청했다. 金대통령은 “양국 국민들이 바라는 우호와 협력을 증진해 나갈 수 있도록 일본 정치지도자들이 앞장서 힘써 달라”고 참석자들에게 당부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총리는 “20세기에 일어난 일을 20세기 안에 마무리 짓고 21세기를 맞이하자는 金대통령의 결의에 감명을 받았다”고 밝혔다.도이 다카코 사민당당수는 “기적은 기적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씀에 감명받았다”고 말했고 다케시타 노보루 전총리는 “대통령이 돼 일본에 오신 것은 정말 감동스럽다”고 말했다. 하시모토 류타로 전총리가 “국회 연설때 여야의원 부인들이 참석해 경청한 것은 과거에 없던 일”이라고 말하자 申鉉碻 한·일 협력위원장은 “일본 국민이 이처럼 진심으로 우리 대통령을 환영한 것은 처음”이라고 받았다.
  • 일본 콤플렉스 벗어날 때다(林春雄 칼럼)

    金大中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중이다. 金대통령의 이번 방일(訪日)은 개인적으로도 감회가 자못 크겠지만 외교적으로도 과거 어느 대통령의 방일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무엇보다 아직도 양국이 극복치 못하고 있는 두나라간의 그 칙칙한 과거사 문제를 金대통령의 방문외교를 통해 한 고비를 넘길 수 있을 것인가 하는게 관심사다. 金대통령은 대일(對日)문제에서도 비교적 진취적 인식을 갖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는 이번에 양국이 발표하기로 된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을 위한 공동선언’도 항용 하고 넘어가는 한낱 행사에 불과할 수도 있는 일이다. 벌써부터 우리의 관심은 일본이 전례없이 구체적으로 하겠다는 ‘사과’의 수준이다. 반세기 동안이나 싸매고 실랑이를 해도 풀리지않는 난해한 문제다. 양국간의 이러한 국민감정의 문제를 푸는 데는 우리쪽에서도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따지고 보면 사과니 반성이니 하는 것들은 실은 일본의 문제다. 우리와 관련이 있으나 우리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과거를 바로 보지못해서 잘못을 반복하는 우를 범하는 일이나,진실에 눈을 감아서 새 지평을 열지 못하는 일들은 다 일본 자신의 일인 것이다. ○사과·반성은 일본의 문제 사과를 해야 할 일에 사과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굳이 하지 않겠다는 사람에게 왜 사과하지 않느냐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것도 피해자의 콤플렉스가 아닌가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에게 보다 중요한 것은 일본의 사과가 아니라 우리가 다시는 일본의 침략을 받지않기 위해 힘을 기르는 일이다. 천황(天皇)에 대한 호칭문제도 그렇다. 천황 호칭은 일본 내에서도 적지않이 논란이 돼온 문제다. 천황이란 제국주의적 발상이고 그 제국주의의 직접적 피해자인 한국이 천황이란 호칭에 거부감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그 또한 일본의 문제인 것이다. 일본사람들은 일본의 왕을 천황이라 부르기로 한 것이다. 다소 치기(雉氣)가 있긴 하나 그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고 있으면 그대로 불러주는게 상식이다. 우리나라 축구선수 중에 이장관이란 이름을 가진 선수가 있다. 이장관이라했다 해서 그사람이 장관인 것은 물론 아니다. 이름이 장관일 뿐이다. 서양 사람들은 일본이 그들의 왕을 천황이라 부르는 데 아무런 이의를 달지 않는다. 그들이 천황이라 부르기 때문에 그렇게 불러줄 뿐이다. 앞서도 지적했듯이 우리에겐 특별한 사연이 있긴 하지만 남의 호칭을 우리 생각에 맞춰 바꿔 부르려 하는 것은 억지다. 미국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미국과 다른나라를 비교할때 미국을 앞세우지만 중국의 경우만은 예외로 해 중국을 앞세워 중미(Sino­America)라 한다. 그렇게 해온 일반적 관례를 따르는 것이다. 그렇다고 중국이 미국보다 강력한 나라라고 믿는 사람은 중국에도 없다. ○문화개방 왜 꺼리나 金大中정부는 선거공약으로 일본의 대중문화를 개방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정부 내에서마저 일본문화 개방에 적지않이 제동이 걸리고 있다고 한다. 양국간 문화교류의 불균형문제,일본 저질문화의 유입을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콤플렉스의 범주에 속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미국문화는 일방적으로 들어와도 괜찮고 일본문화가 들어와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문제는 없는가. 균형감각의 문제다. 또 현실적으로 인터넷으로 세계가 열려있는 시대에 일본문화 유입만 막을 방법이 있는가. 우리도 이제 일본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 어르신/任英淑 논설위원(外言內言)

    동서를 막론하고 옛 속담에서 노인은 긍정적으로 표현된다. “나라 상감도 늙은이 대접은 한다”는 우리 속담은 물론이고 “집안에 노인이 있다는 것은 좋은 간판이다”라는 히브리 격언과 “노인에게는 그가 구하는 대로 주어라”는 콩고 속담은 노인을 절대적인 공경의 대상으로 분명히 하고 있다. “노인의 말은 맞지 않는 것이 별로 없다”(영국)“노인을 모신 가정은 길조가 있다”(이스라엘)“집에 노인이 안계시면 빌려서라도 모셔라”(그리스)“젊은이는 용모가,노인은 마음씨가 예쁘다”(스웨덴)“훌륭한 노인은 앙금을 제거한 좋은 포도주와 같다”(페르시아)는 속담은 인생살이의 희로애락을 거친 노인의 지혜와 원숙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미 그리스 시대부터 문학작품에서는 노인의 또 다른 측면이 묘사되고 있다. 소포클레스는 노인을 “두번째의 아이”로,라 로슈푸코는 “젊은 사람들의 청춘의 즐거움을 방해하려는 폭군”으로 묘사했다. 심지어 예이츠는 “늙은이는 다만 하나의 하찮은 물건,막대기에 꽂힌 다 떨어진 옷”이라고 규정했다. 우리현실속의 노인은 이보다 더 참담하지 않나 싶다. 원시 고려장(高麗葬) 시대로 되돌아 간 듯 오늘의 노인들은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가장 소외된 존재다. 부모 유기와 패륜은 이제 놀라운 일이 아닐 정도가 됐다. 오죽하면 ‘효도상속제’ 방안이 나왔겠는가. 하긴 유엔이 내년을 ‘세계노인의 해’로 정한 것이나 우리나라가 지난 해부터 노인의 날(10월2일)을 기리기 시작한 것이나 같은 맥락이다. 노인이 제대로 대접 받는다면 노인을 위한 해나 날이 필요 없을 터이다. 한국사회복지협의회가 ‘노인’이라는 호칭을 대신할 새로운 이름을 현상공모해 ‘어르신’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한다. 처음엔 원숙과 존경의 뜻이 함축됐던 ‘노인’이 지금은 단순히 늙은 사람을 뜻하는 단어로 통용되고 있기 때문에 남의 아버지나 나이 많은 사람을 높여 부르는 ‘어르신’이라는 호칭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미국의 ‘Senior Citizens’,중국의 ‘塾年’‘長年’‘尊年’,일본의 ‘高年者’에 해당할 만한 말이라는 것이다. 사회에 대한 공헌과 경륜을 나타내는데다 순우리말이라는 점에서 좋은 결정으로 보인다. ‘어르신’이 다시 ‘노인’으로 격하되지 않으려면 그들을 공경하는 마음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우러나와야 할 것이다. 운전면허증 하나로 어느 곳에서나 ‘Senior Citizens’ 대접을 받는 미국의 노인들이 경로우대증을 받는 우리 노인들보다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듯이 ‘어르신’을 제대로 모시는 제도와 절차도 구비돼야 할 것이다.
  • 민주열사 추모주간 토론회 주제발표/韓忠穆 열사 범추위 집행위원장

    ◎독재가 씌운 범법자 굴레 벗겨야 민족민주열사 추모주간을 맞아 韓忠穆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범국민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은 14일 강연을 통해 열사·희생자의 호칭 구분과 명예회복의 구체적 방향을 제시했다. 60년대 이래 지금까지 4·19,5·18 열사를 제외하고 331분이 민주화투쟁을 위해 몸을 바쳤다.이 분들은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동료와 조직,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숭고한 죽음을 맞았다. 우리는 이 분들을 통칭하여 열사·희생자로 불러왔으나 이 호칭이 너무나 포괄적이어서 민족민주운동 내에서나 국민들에게 설득력을 갖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의 선조들을 살펴볼 때 열사와 의사를 구분하는 기준이 죽음의 형태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 열사라는 호칭을 통용하게 된 계기는 4·19였다.그로부터 10년후 청계천에서 분신한 전태일 열사의 죽음은 1970년부터 지금까지 큰 흐름을 만들어 내면서 열사의 호칭이 사회 저변에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이어 朴正熙,全斗煥,盧泰愚로 이어지는 군사독재 정권과 金泳三 정권에 이르기까지 가장 치열한 항거인 분신·할복 등의 투쟁이 잇따르면서 열사라는 호칭이 일반화되었다.이와 함께 호칭상의 문제가 발생했는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중심으로 호칭 구분을 시도할 수 있다. ▲열사(烈士)=동료와 조직,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분신·투신·할복 등으로 자살하거나 투쟁 과정에 운명한 경우.또 민족민주운동 과정에서서 독재와 자본 등에 의해 살해된 것이 명백한 경우. ○죽음의 과정으로 호칭 구분 ▲지사(志士)=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않았지만 한 평생 운동에 매진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던 분이 병이나 사고로 운명한 경우. ▲투사(鬪士)=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않았지만 병이나 불의의 사고로 운명할 때까지 운동에 매진하다가 젊은 나이에 죽은 경우. ▲의사(疑士)=운동 과정 중에 안기부,대공분실,기무사 등 독재정권의 공권력기관이나 자본에 의해 살해된 뒤 자살이나 사고사,병사로 은폐되어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경우. 민족민주 열사·희생자들의 명예회복 방향은 다음 네가지 축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첫째,열사·희생자들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여 목숨을 바쳐가며 이루고자했던 염원들을 살아남은 우리들이 실현하는 일로서,명예회복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둘째,지난 시기에 외세와 독재정권,악덕 자본가 등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그들이 씌워 놓은 범법자의 굴레를 벗겨 내고 국민들에게 숭앙받도록 해야 한다. ○국가차원 기념사업 펼때 셋째,독재 정권의 공안기관과 악덕 자본가들에 의해서 살해된 뒤 자살이나 사고사로 은폐된 의문의 죽음들에 대한 진상 규명이 이뤄져야 한다. 넷째,열사·희생자들의 숭고한 삶과 죽음을 길이 후손에게 전하는 국가 차원의 기념 사업을 전개해야 한다. 현재의 보훈 법령인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과 국가유공자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서 볼 때도,독재정권에 항거하면서 온몸을 던져 이 땅의 민주주의와 자주통일을 위해 몸을 바친 민주열사들의 명예회복과 이에 어울리는 예우는 마땅하다.
  • “민주열사 정신 계승을”/기념주간 선포식

    ◎서울·부산·광주서 동시에… 다양한 행사 펼쳐/국민대토론회·기도회·천도제 등 엄숙히 진행 제3차 민족민주열사 추모 및 기념주간이 ‘이제 살아남은 우리가 나설 때입니다’라는 주제로 14일 하오 조계사 대웅전 앞에서 기념주간 선포식과 함께 개막됐다.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범국민추진위원회(열사범추위)가 주최하고 서울신문사,월간 말,서울지하철공사노동조합이 후원하는 이번 행사에서는 대토론회 및 거리문화제,대국민캠페인 등 열사·희생자의 정신계승과 명예회복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서울 부산 광주에서 동시에 펼쳐진다. 李昌馥 열사범추위 상임대표는 선포식에서 “열사정신이 우리들의 생활과 민주사회를 위한 투쟁 속에 살아 있을 때 진정 열사들의 명예회복이 이루어 질 것”이라며 “열사정신을 더욱 발전시켜 사회 각 분야로 민주화를 확산시켜 나가는 것은 살아 있는 우리들의 몫”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열린 국민대토론회에서는 李相勳 변호사와 韓忠穆 열사범추위 집행위원장이 ‘민족민주유공자 명예회복 및 예우에 관한 법률’ 및 ‘민족민주열사·희생자의 호칭상 구분과 각각에 대한 명예회복의 구체적 방향’이란 주제로 발제를 하고 국민회의 李相洙·한나라당 李在五 의원,許營九 민주노총부위원장이 토론을 벌였다.하오 7시에는 명동성당 앞에서 ‘조성만거리문화제’가 열렸다. 19일까지 계속되는 추모주간에 서울에서는 16일 하오 5시 전태일거리문화제(동대문운동장 앞),17일 하오 4시 목요기도회(기독교회관),18일 하오 3시 범불교 합동천도제(조계사 대웅전 법당),19일 하오 3시 제9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서대문 독립공원) 등이 열린다. 부산에서는 14일 정오 대국민캠페인,15일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양심수 전원 석방의 날,18일 의문의 죽음 진상규명의 날 행사 등이 모두 부산역광장에서 열리고 광주에서는 17일 하오 7시 광주 가톨릭회관에서 열사 명예회복과 의문의 죽음 진상규명을 위한 토론회가 열린다.
  • 日王 천황 호칭 공식화(쟁점)

    ◎찬/상대국 고유 호칭 쓰는게 외교 관례/徐東晩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정부는 일본정부에 대해서 ‘천황(天皇)’을 공식표현으로 쓰기로 최종정리하였다.이번 결정은 옳은 판단이다.한·일 국교정상화 이래 정부는 외교 관례에 따라 모든 공문서에 천황이란 호칭을 사용해 왔으며,역대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도 천황에 대해 의전적인 예의를 갖춰왔다.89년 이래 일시적으로 ‘일황(日皇)’이란 표현을 사용했으나 국내에서의 호칭이지,일본에 대해서는 천황이란 호칭을 써 왔다.외교적 관례나 일관성이란 측면에서 천황이란 호칭을 쓰는 것이 옳다. 한국정부가 천황이란 호칭을 쓸 때,그 이유는 우선 외교적인 배려로서 일본 고유의 호칭을 써 준다는 것이지만,천황이란 한국 내에서도 이미 역사적 존재로서 굳어진 명칭으로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또한 천황이란 일본 역사에서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에서 볼 때,상징적 원수로서 헌법적 의미외에도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일본 황실은 ‘만세일계’란 말로 황실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한·일 관계에서 볼 때에도,천황은 일본의 상징적 국가원수 이상의 역사적 위치를 가지고 있다.일본은 천황제 국가로서 한국을 식민지화했다.현재의 아키히토 일본 천황은 한국을 식민지화했던 히로히토 천황의 아들이다. 한국의 대일 외교에 있어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과거사 청산외교’이다.과거사 청산의 주체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실질적인 국가수반인 일본총리 외에 바로 역사적 존재로서의 천황인 것이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를 할 때,천황의 발언은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된다.일본에서 사죄를 할 때,그토록 어려운 것은 천황의 경우이다.‘천황’으로서 사죄해야 하기 때문에,일본 국민 자신도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나 애매한 표현을 찾아내서 ‘사죄’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천황은 일본정부 못지 않게 우리 과거사 청산 외교의 대상이다.과거사 청산은 어디까지나 천황의 이름으로 이루어져야 한다.천황으로부터 사죄를 받기 위해서도 우리가 천황이란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합당하다. ◎반/일왕 숭배 장식물 따를 필요없어/韓相範 동국대 법학과 교수 일제시대를 살아 본 사람에게 가장 깊은 정신적 상처와 불구화를 남긴 것은 일제의 왕을 신(現人神­아라히토가미)으로 섬기도록 정신세뇌를 당한 후유증이다.다같은 생물을 신(神)으로 둔갑시켜 정치적 주문으로 우민화를 자행한 사연은 메이지유신의 왕정복고 지배구조에도 원인이 있다.이같은 정치적 신화는 군국주의 정신의 온상이 되었고,나아가 아시아 2,000만의 민중을 학살하기도 했다.그런데 이 미신과 신화는 아직도 우익반동의 온상인 채로 과학적·합리적 사고방식을 가로막아 오고 있다.바로 이 봉건적이고 시대착오적,반(反)민주적 정치신화의 상징적 언어가 ‘천황폐하(天皇陛下)’라는 말이다. 일본 왕을 영어로는 emperor라고 하므로 구미 외교계에서는 다른 나라의 군주처럼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그런데 우리말로 부를 경우 ‘왕’이나 ‘군주’라고 하면 그만이다.굳이 일본말인 ‘천황’으로 부를 필요는 없다.원래 ‘천황’이라는 칭호는 일본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이다.현행 일본국 헌법은 주권이 국민에게있다는 국민주권원리에 입각하고 있다.1946년 1월 1일 일본왕은,자신은 신도 아니며 또 일본인만이 우월하다는 편견도 잘못됐다는 내용의 신앙고백을 한 바 있다.그는 자신의 신격화를 부정한 대가로 전쟁범죄의 공격을 교묘하게 벗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점도 있다. 우리가 일본 왕의 칭호를 두고 신중을 기하고자 하는 것은 정부 대표가 사용하는 용어는 역사적·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히로히토는 한국침략에 대해 “통석의 염을 금할 수 없다”고 하는 애매하고도 무성의한 표현으로 과거사 문제에 대한 책임을 비켜 갔다.전후 일관된 일본의 역사왜곡·날조는 왕을 신격화해 무책임의 논리를 구축한 기형적·비합리적 정신구조에서 연유한 것이다. 천황숭배주의의 장식물인 ‘천황’이란 일본식 말 표현을 우리가 따를 것은 없다.우리 말로 ‘왕’이나 ‘국왕’이라고 하면 그만이다.외교통상부 일부에서 말하는 ‘천황’칭호는 일본식 용어이니 따를 것은 아니다.우리 말대로 자연스럽게 부르면 되지 여기에 무슨 외교의례상의 문제가 있겠는가?
  • 신용하 교수 독도·울릉도 명칭 변화 연구

    ◎“독도 삼국시대부터 우리땅”/울릉도 부속섬… 于山島·독섬·독도로 불려/日 고문헌·고지도에도 ‘조선땅’ 기록/외교권 박탈된 1905년 日서 강제 편입 ‘그 누가 아무리 자기내 땅이라고 우겨도 독도는 우리땅…’ 서울대 愼鏞廈 교수는 한국학보 91·92호 합집호에 발표한 ‘독도·울릉도의 명칭변화에 관한 연구’논문에서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으나 독도는 역사적으로 명백한 우리땅이라고 밝혔다. 愼교수는 논문에서 독도는 외교권이 박탈된 1905년 일제가 농간을 부려 일본영토에 편입됐으나 실제로는 삼국시대부터 울릉도의 부속도서였으며 일본도 역사적으로 이를 인정해왔다고 말했다. 愼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우르뫼’로 불린 울릉도에 사람이 거주한 것은 신석기시대부터였다. 우르뫼의 ‘우르’는 ‘어른,우러러’ 등 한국 현대어와 동일한 계통어로 군왕,왕,왕검을 의미한 고대어였으며 뫼는 산,릉을 의미한 고대어였다. 울릉도를 말하는 우산국(于山國)은 우르뫼의 한역(漢譯)으로 우산국의 영토는 울릉도와 독도를 포함 삼선암 등 그부속도서였다. 우산국의 영토인 울릉도와 독도는 서기 512년(신라 지증왕 13년) 신라에 병합된다. 우르뫼에 대한 한자표기는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 于陵,羽陵,鬱陵島로 일반화된다. 조선왕조에 들어오면 울릉도의 한자 표기에 武陵,茂陵이 추가되고 울릉도 사람들이 독도를 부르던 于山島라는 명칭이 정부관리에 의해 채록된다. 세종실록에 관리를 보내 于山島(독도)와 武陵島(울릉도)에 대한 통치권·영유권을 행사했고 우산도와 무릉도 중에서 무릉도가 本島이며 우산도와 무릉도는 타국이 아니라고 천명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19세기 울릉도 개척정책에 따라 울릉도에는 전라도 출신이 많이 이주했다. 이들은 고기잡이 나갔다가 들리는 우산도를 바위돌로 된 돌섬이라는 의미로 독섬이라고 부른다. 전라도 남해안에서는 돌을 사투리로 독이라고 말하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울릉도에서는 우산도라는 정부의 한자명칭보다도 사투리에서 연유된 독도(돌섬)가 널리 불리게 됐다. 한자로 표기하면 石島가 되고 발음을 취해 표기하면 獨島가 되는 것이다. 일본에서 울릉도와 독도가 竹島와 松島라는 호칭으로 문헌에 나오는 것은 1667년이고 그 이후 일본은 고문헌과 고지도에서 두 섬이 모두 조선에 속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표시했다. 일본이 독도를 강탈한 것은 1905년. 일본은 이해 1월 독도에 대해 탐사를 실시한 뒤 타국이 점유한 형적이 없는 ‘무주지’(無主地)라며 무주지 선점(先占)의 국제법상 논리로 이를 자국영토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일본은 이 사실을 관보에 게재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영토를 편입할때 관련국에 통고하는 국제관례를 따르지 않고 한국정부에 조회나 통고를 하지 않았다. 불법적인 사실을 한국정부나 세계 여러나라에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은 1년이 지난 1906년 3월 뒤늦게 이 사실을 울릉군수에게 알려준다. 그 때 우리나라는 전혀 근거가 없다며 반발했으나 당시는 통감정치의 실시로 외교권이 박탈돼 항의외교문서를 일본정부나 국제사회에 보낼 통로와 기구가 없었다. 그러나 독도는 해방 다음해인 1946년 연합국최고사령부 지령에 따라 우리 영토로 편입되고 구한말의 전통에따라 독도로 불려오고 있다. 愼교수는 일본이 1905년을 근거로 영유권 논쟁을 걸고 있으나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짚어보면 독도는 한국영토가 분명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 戰後 평화노력 인정 ‘천황’ 공식 사용키로/日王 어떻게 부를까

    金大中 대통령은 이번 일본 방문에서 아키히토(明仁) 일왕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朴智元 청와대대변인은 11일 金대통령의 일본 국빈방문을 발표하면서 ‘천황(天皇)’이라고 표현하고 앞으로 정부는 천황을 공식적으로 사용할 것이라고 설명했다.그러면서 “상대국 호칭 그대로 불러주는 게 국제외교 관례”라고 덧붙였다. 정부는 그동안 대일 공식문서나 연설 등에서는 천황이라는 표현을 쓰면서도 지난 89년 일본의 재일동포 지문날인 강요문제로 국내의 대일감정이 악화돼 언론이 천황을 일왕(日王)으로 낮춰 부르자 ‘천황’이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비켜 ‘일황(日皇)’이라는 호칭을 사용해왔다. 그러나 정부가 천황이라는 호칭을 공식 사용키로 한 것은 세계평화에 기여한 전후 일본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金대통령의 의지가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여기에 중국과 대만이 천황으로,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도 영어로 황제를 뜻하는 ‘엠퍼러(Emperor)’로 부르고 있는 점도 작용한 것 같다. 하지만 일본의 간헐적인 망언 등을 감안할 때 반일단체 등을 중심으로 찬반 양론이 재연될 것으로 예상된다.
  • 김정일 全權 가진 國防委長에/北 권력 승계 공식 매듭

    ◎국가주석직은 폐지/총리에 洪成南 선출 북한의 金正日 노동당 총비서가 북한헌법상 위상이 강화된 국방위원장에 재추대되는 등 金日成 주석 사망 4년여 만에 세습 권력 승계가 사실상 공식 마무리됐다. 金日成 사망 이후 처음 개최된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0기 1차회의는 5일 헌법 수정 보충,국방위원장 추대,국가지도기관 선거 등 3개 안건을 처리하고 폐막됐다. 관계 당국과 북한 방송 등에 따르면 당초 金正日이 승계할 것으로 예상됐던 국가주석직은 이번 헌법 개정을 통해 폐지됐다. 그러나 楊亨燮 대의원(전 최고인민회의 의장)은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린 회의 개회사에서 국방위원장에 대해 “나라의 방위력과 전반적 국력을 강화 발전시키는 사업을 조직 영도하는 국가의 최고 직책”이라고 언급,사실상 ‘국가수반’직임을 내비쳤다. 개정 헌법은 또 서문에서 죽은 金日成 주석을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호칭,그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주석직을 폐지한 것으로 보인다. 헌법 개정을 통해 종전의 정무원이 내각으로 권한과 위상이강화됐으며,姜成山 후임으로 洪成南 부총리가 총리로 선출됐다.
  • 테레사 ‘聖女’ 추서 추진/오늘 서거 1주기

    ◎추모 열기 본격화… 공인기간 크게 단축될듯 ‘빈자(貧者)의 어머니’로 살다 간 테레사 수녀가 조만간 ‘성녀(聖女;교회가 죽은 자에게 내리는 최고의 칭호)’ 반열에 오를 것 같다. 서거 1주기를 맞아 바티칸 교황청은 테레사 수녀 ‘성녀’ 선포 절차에 들어갔다. 5일 기념미사를 포함한 화려한 1주기 기념식도 마련한다. 비슷한 시기에 사망한 다이애나비의 추모 열기가 빠르게 식어 가고 있는 반면 테레사 수녀에 대한 본격적인 추모는 이제부터인 셈이다. 30대에 인도 캘커타 빈민가에 투신,지난해 9월5일 87세로 명이 다할 때까지 줄곧 병들고 굶주린 이들을 돌봐온 테레사 수녀를 민심은 진작부터 ‘살아있는 성녀’로 불러온 터. ‘성녀’ 공인에는 몇십년씩 끄는게 보통이지만 테레사의 경우 기간이 크게 단축되리라는 전망이다. 캘커타 교구에서 수집한 테레사 생애 자료가 이미 바티칸 심사에 올라 갔다. 최종 결정권을 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주기를 앞두고 그녀를 ‘20세기가 낳은 인물의 하나’로 극찬했다. 사후 5년안에 시성식(諡聖式)을못 치르도록 돼있는 규정만이 ‘성녀’ 승인을 2002년 이후로 미뤄두고 있는 셈. 테레사 수녀가 세운 빈민 쉼터 ‘사랑의 선교회’ 캘커타 지부에선 거창한 1주기 추모식은 없다. 테레사 서거후 원장이 된 니르말라 수녀가 테레사만이 ‘마더’라며 아직껏 ‘시스터’ 호칭을 고집하고 있듯 여기서 추모란 나날의 삶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업혀 들어오는 빈자의 수는 줄지 않고 있다. 니르말라 수녀는 이곳 안마당에 안장된 테레사의 넋이 아직 살아있음을 잊지 말아 달라고 당부한다.
  • 전시회서 본 북한 교과서/金日成 父子 우상화 일색

    ◎95년부터 그림 사라져/남한사회 왜곡·비방 여전 94년까지는 북한 교과서에 삽도(揷圖),즉 그림이 있었지만 95년 이후에는 삽도를 거의 볼 수 없고 설명 위주로 되어 있다.또 95년 이후에는 ‘김일성 원수님’이라는 호칭이 ‘김일성 대원수님’으로 격상됐다. 통일부가 최근 입수해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전시하고 있는 북한 교과서의 내용을 보면 여전히 김일성·김정일 등 김부자(父子) 가계 우상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북한 인민학교의 경우 학급당 교과서 소지 학생은 평균 5명 내외로,교과서가 없는 학생은 개인별로 필사본을 만들어 사용한다.또 학년이 끝나면 교과서를 반납해 대물림을 한다. 통일부가 이번에 새로 입수한 북한 교과서는 인민학교 교과서 8과목 17종과 고등중학교 교과서 22과목 79종 모두 96종 124권.주요 과목으로는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대원수님의 어린시절’‘국어’‘공산주의 도덕’‘도화공작’‘조선력사’‘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선생님’ 등을 꼽을 수 있다.이 책들은 모두 남한사회를 왜곡·비방하고 북한체제 수호를 강조하는 공통점을 지닌다.특히 인민학교 4학년 국어 교과서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의 희생자들을 다룬 ‘누나의 사진’이란 단원이 실려 있어 눈길을 끈다.또한 북한교과서에는 “사회주의는 지키면 승리,버리면 죽음”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북한의 인민학교 4학년과 고등중학교 국어 교과서의 경우 학기 구분 없이 단권으로 되어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한편 통일부는 25일까지 교보문고에서 열리는 전시회가 끝나는 대로 이 북한교과서들을 광화문 우체국 6층 ‘북한자료센터’와 전국 북한관 등에 상설전시,‘북한교육’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다.
  • “세리가 부러워”/공직자 골프해금론 고개

    “박세리가 잘 할 수록 속탄다” 요즘 고위 공무원들은 골프선수 박세리의 잇따른 우승 소식에 기쁘면서도 답답하다. 골프를 좋아하는 공무원들이 사정상 필드에는 나가지 못하지만 TV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골프를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회식자리에서도 눈치보지 않고 박세리를 화두로 골프이야기의 꽃을 피운다. 더욱이 박선수의 일거수 일투족이 언론을 장식하고 金大中 대통령도 ‘영웅’이라고 호칭,골프를 보는 시각이 달라지는 것 같아 ‘공직자 골프 해금령’이 나오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에 부풀기도 한다.그러나 기대가 큰 만큼,속앓이가 심하다. 공직자 골프자유화의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7월초부터 8월말까지 두달간 ‘공직자 기강확립’기간인 점을 들어 각 부처에서는 감사관실을 중심으로 골프 자제를 요청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따라 몇주전 골프 약속을 해놓았던 공직자들도 부랴부랴 약속을 취소하고 있다. 다만 TV를 보며 골프 시늉만 내고 있는 형편이다. 관가에서는 새정부 출범 초기 金鍾泌 총리서리가 근무시간외 자기 돈으로 골프치는 것은 무방하다고 밝혀 골프얘기가 고개를 들었다가 경제난때문에 ‘자제’분위기로 돌아섰었다. 그러나 요즘 또다시 박세리열풍을 계기로 골프해금론이 슬금슬금 나오고 있다고 한 공직자는 전했다.
  • 制憲 50돌을 돌아본다:2(정직한 역사 되찾기)

    ◎잘못된 법 적용/간첩누명 복역수 가족 비탄의 나날/새법 재정 재구금… 가정 풍비박산/정권안보차원 범죄 날조 처형/김 대통령 한때 사형선고 받아/고문조작으로 10여년째 구금도/심장병·신경질환 등 후유증 심각 비가 오는 가운데 초췌한 모습의 한 남자가 푸른 수의를 입고 탑골공원 정문 앞에 앉아 있다.그는 옆에 서 있는 건장한 사내에게 연신 무죄를 호소한다.그러나 전기스위치가 올려지고,그의 코에 물주전자의 물이 거듭 부어진다.그는 눈동자가 풀어진 채 옆의 사내가 불러주는 대로 횡설수설 따라 읊는다. “북한의 우순학이 제 처입니다”“저는 30년간 북한의 공작원이었습니다”. 탑골공원을 무대로 지난 9일(목요일) 상연된 연극의 한 장면이다.건장한 사내는 고문기술자 李根安이고 초췌한 남자는 16년째 간첩죄로 복역중인 咸珠明씨다.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는 매주 목요일 탑골공원에서 집회를 갖는다.이날 집회의 주제는 ‘고문조작 간첩사건 피해자의 석방’.이 자리에는 군사정권 아래서 고문에 의해 간첩으로 조작돼 복역하고있는 14명의 가족들과 민가협 회원 등 50여명이 참가해 새정부의 조속한 석방조치와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법과 동일시되는 것이 정의라고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악법 논란’은 지난 50년간 끊일 날이 없었다.대부분이 아는 것과 틀리게 일찌기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란 말을 한 적이 없다.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전하고자 한 것은 ‘법에 대한 사전 합의와 동의의 중요성’이었다. 지난 61년의 국가재건최고회의나 유신시절의 비상국무회의,80년의 국가보위입법회의 등은 국회가 아닌 비정통적인 대의기구들이다.비상사태가 선포된 상태에서 이런 기구가 쏟아낸 법률들이 사전동의나 합의의 절차를 충실히 거쳤다고 하기는 어렵다.또한 본인의 자백 외에는 증거가 없는,고문에 의한 조작 논란이 많았던 사건들도 정당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71년 통일사회당 위원장 金哲씨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과 ‘북괴를 북한으로 불러야한다’는 발언을 해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 기소됐다.당시 혐의는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했다는 것인데 이조항은 국가보안법 7조에 그대로 편입됐다.그러나 남북한 동시가입은 수년후에 이뤄졌고,지금 북한을 공식적으로 북괴라고 호칭하는 사람이나 단체는 찾아보기 힘들다.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자의적으로 적용돼왔다는 논란 속에 숱한 인권침해와 위헌시비를 일으켰다. 이종·최남규·김중종씨 등은 50∼60년대 남파돼 체포된 뒤 10여년간 복역을 마쳤으나,75년 사회안전법 제정으로 재구금됐다가 89년 이 법의 폐지로 다시 석방된 이들이다.출소후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살다가 새 법이 제정돼 느닷없이 다시 갇히는 사람들의 황당함은 어떤 것일까. 정권안보차원에서의 범죄의 날조·조작은 법 자체 문제보다 더 심각했다. 李承晩 정권은 야당당수였던 曺奉岩 진보당위원장을 간첩으로 몰아 처형했고,金大中 대통령도 80년 신군부로부터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선고가지 받았었다. 고문조작 의혹을 받고 있는 사건으로 수십년째 갇혀 있는 사람들도 많다. 함주명·이장형씨 처럼 고문기술자 李根安으로부터 취조를 받은 사람들도 있다.함씨는 남파된 뒤 즉시 자수했으나 30년후 재구금되어 20년형을 선고받고 16년째 복역중이다. 이씨는 무기형을 선고받고 14년째 구금돼 있는 상태다. 함씨의 누나 함주옥씨(73)는 “너무 억울하다.지금이라도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한다.하루빨리 재심절차가 있기를 바란다”며 눈물을 떨구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도 많다. 74년 일본 유학때 조총련계 인사를 접촉한 것이 빌미가 돼 23년간 복역하다가 올 3월 특사때 나온 유정식씨. 南奎先 민가협 총무는 “현재 유씨는 심장병과 신경질환 등 극심한 고문후유증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전했다. 또 “함께 나온 재일동포 손유형씨도 후두암 당뇨병 등으로 고생하다가 현재 일본으로 건너가 살고 있다”고 전했다. ◎張俊河·白基玩씨 악법철폐 앞장/학생들 민주화투쟁 전위대 역할… 3·4·9차개헌 견인/80년대 후반 민가협 등 수백개 민주단체서 주도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반대·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1974년 1월에 발표된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는 이렇게 시작된다.朴正熙 대통령은 당시 유신헌법에 대한 저항이 거세지자 긴급조치를 발동했다.정권유지를 위한 강경책이었다.과거 군사정권은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헌법과 법을 고치고 그를 정권유지에 이용했다.그러나 온갖 탄압과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법과 헌법에 대한 저항과 투쟁도 끊이지 않았다. 대통령긴급조치가 발표되자 張俊河·白基玩씨 등은 ‘반유신 백만인서명운동’을 벌였다.그러나 서명운동은 심한 탄압을 받았다.두 사람은 구속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긴급조치의 첫 희생자가 된 것이다.당시 판결은 구형과 판결이 일치하는 이른바 ‘정찰제 판결’로,이후 많은 공안사건의 판결 기준이 됐다. 그러나 정의를 위한 투쟁은 계속됐다.그들은 민주화운동과 악법철폐운동에 앞장섰다. 일부 판·검사들의 ‘정의 투쟁’도 있었다.지난 64년 1차 인민혁명당사건에서 이용춘·장원찬·김병리검사는 중앙정보부에서 넘어온 공안사건이 증거가 부족하다며 기소를 거부하고 사표를 냈다.지난 96년 유원석 판사는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된 박충렬·허인회씨에게 잇따라 무죄판결을 내려 공안사건에서도 ‘증거재판주의’원칙에 충실했다는 평가를 받았다.그는 지난해 2월 석연치 않은 이유로 법복을 벗어 많은 사람들의 아쉬움을 샀다. 그러나 누구보다 앞장서서 법의 타락에 맞서 싸운 주체는 학생들이었다.그들은 왜곡된 헌법과 법을 바로 잡도록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지난 60년 이루어진 3·4차 개헌과 87년 민주항쟁에 의해 얻어진 9차개헌도 사실 학생들이 이룬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들은 법의 감시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제도권에 몸담은 기성세대들이 하기 어려웠던 민주주의 투쟁을 위한 ‘전위대’ 역할도 담당했다. 80년대 후반부터 이러한 역할의 중심으로 등장한 것이 수백여개에 달하는 민주시민단체와 비영리전문단체들이다.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및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인권운동사랑방 등이 대표적 단체. 민가협은 양심수 석방운동과 악법철폐운동을 꾸준히 펼치고 있으며,매주 목요일 주제를 정해 정기모임을 갖고 있다.민변 또한 지난10여년 동안 文益煥 목사 방북사건,姜基勳씨 유서대필사건 등 굵직굵직한 시국사건의 진상조사 및 변론을 맡았고,국가보안법 개정·폐지운동에도 앞장서 왔다. 인권운동사랑방은 ‘인권하루소식’지를 통해 법 집행과정에서의 인권침해 사례를 찾아내 공론화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간첩 불고지혐의 무죄판결 받은 咸雲炅씨/“명예실추·정신적 피해 상상 초월 보안법 자의적 적용 빨리 고쳐야” “무죄판결은 받았지만 실추된 명예와 정신적·금전적 피해는 어떻게 보상받습니까.” 간첩을 신고하지 않은 혐의로 기소됐다가 무죄판결을 받은 전 서울대 삼민투위원장 咸雲炅씨(34).“재판중에는 모든 피고인이 무죄로 추정돼야 하나 이것이 지켜지지 않아 당하는 피해가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咸씨는 지난 95년 ‘남파간첩 김동식 사건’과 관련해 불고지 혐의로 1심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으나,지난 12일 열린 항소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그러나 무죄판결을 받을 때까지 겪은 정신적 고통과 이미지 실추로 인한 피해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남북분단 상황에서 일단 간첩사건에 관련돼 체포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사회생활에는 족쇄가 채워집니다.그 점 때문에 역대 정권에서 이를 정치적으로 악용해 왔지요.” 지난 96년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咸씨는 “선거를 불과 몇개월 앞두고 이 간첩사건에 관련돼 조사를 받았다.그리고 그것은 선거에 치명타를 가했다.”고 말했다. 咸씨는 대법원에서 최종 판결이 나면 일부 언론사와 국방부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하고 피해보상도 요구할 방침이다.언론사에는 재판중인 사건임에도 자신을 완전히 범죄자로 기정사실화해 보도한 책임을,국방부에는 자신의 이름과 사진 등을 사병들의 정신교육 자료에 사용한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다. 그는 국가보안법이 수년전보다는 많이 완화돼 과거의 ‘막걸리 보안법’수준은 벗어났다는 점은 인정했다.그러나 여전히 독소조항이 많다고 지적했다. 특히 친척까지도 신고해야하는 불고지죄는 반인륜적이라고 비판했다.유교적 윤리가 중시되는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친척과 친구를 신고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이적단체 찬양고무죄나 이적표현물 제작 및 소지죄 등도 자의적 해석이 가능한 문제의 조항이라고 했다.그는 “새정부 들어서도 여전히 자의적 해석에 의해 보안법이 적용되고 있다”면서 수사기관에 시정을 촉구했다. □특별취재반 ▲특집기획팀=李昌淳 팀장·李穆熙 차장,金聖昊·任昌龍 기자
  • 첫 여성 법정경위 韓修永씨/“딱딱한 법정 부드럽게”

    “소송 관계인들을 친절히 안내해 편안한 법정 분위기를 유지하고 원활한 재판이 진행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법정내 질서 유지 업무를 담당하는 법정경위직에 사법사상 처음으로 여성이 진출했다. 올해 24살인 韓修永씨. 법정경위는 때로 방청인들과 몸싸움을 벌이거나 법정내 소란을 제압하는 업무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그동안 남성들만의 영역으로 간주돼왔다. 실제 전국 법원의 법정경위 344명 가운데 여성은 단 한명도 없었다. 韓씨는 그러나 지난 3월 9명을 뽑는 서울고등법원 경위서기보(9급)채용시험에서 2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합격했다. 95년 고려대 병설 보건전문대를 졸업한 韓씨는 한 때 일반 기업에 다녔으나 공무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꾸준히 공부를 계속해왔다고. 과거 정리(廷吏)로 불렸던 법정경위직은 94년 7월 법원조직법의 개정으로 호칭이 바뀌었으며 법원 일반직 공무원으로 6급(경위 주사)까지 승진할 수 있다. 정년은 57세. 3일부터 행정사건 담당재판부(특별14부)에 배속돼 413호 법정에서 일하게 된 韓씨는 “재판보조라는 특수한 업무를 맡게 돼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면서도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친절함으로 원활한 재판진행을 돕겠다는 다부진 포부를 밝혔다. 법원 관계자는 “韓씨의 근무로 자칫 딱딱해지기 쉬운 법정의 분위기가 한결 온화해질 것으로 기대한다”며 “반응이 좋을 경우 여성 법정경위를 계속 늘려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 대학의 軍紀/李世基 논설위원(外言內言)

    미국에서는 어느 군대에서나 장교와 사병이 가까이 지내지 않는것을 불문율로 삼고있다. ‘친분이 지나치면 경멸’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이른바 장교는 사병보다 우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병사들은 한결같이 상사를 따르고 존경한다. 또한 장교는 잡사역(雜使役)을 하지 않고 사병보다 좋은 숙소나 휴계실등을 사용할 수도 있다. 호칭도 상급자의 성이나 계급에다 반드시 ‘sir(님)’를 붙이고 파티나 모임에서는 상급자가 자리를 떠야만 하급자도 이석한다.상급자 자신도 계급을 과시하지 않고 계급에 상응하는 의무를 명심한다. ‘군기(軍紀)’란 이처럼 일사불란(一絲不亂)한 질서의 원칙을 지킨다. 다른 조직과는 달리 ‘전우애’로 뭉쳐졌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저항이나 도전 대신 복종과 약속을 지킬 뿐이다. 인간사회에서도 상하간의 위계질서가 지켜졌을때 한 조직의 내부는 탄탄해지기 마련이다. 이른바 사회에서의 선후배관계는 바로 질서의 기본인 예의에서 비롯된다고 할수 있다. 최근 초등학생의 몸에다 문신을 새기고 담뱃불로 지지다가 그것도 모자라서 생매장 처벌을 가한것은 선배로서 후배가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다. 지난봄 뉴질랜드에서 그곳에 유학중인 여학생들이 한국인 후배들을 학교인근의 공원으로 끌고가서 3시간동안 폭행협박한 사건 역시 선배로서 ‘군기’를 잡겠다는 것이었다. 이번엔 대학생들이 친목 축구대회 후 뒤풀이행사끝에 선후배간 시비가 붙자 ‘군기를 잡겠다’면서 후배들을 ‘줄빠따’로 때리고 여학생들도 바닥에다 머리를 박는 ‘원산폭격’ 기합을 가했다는 것이다. 만약 ‘친밀할수록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까이해서도 멀리해서도 안되는(不可近不可遠)’ 사무적인 관계에 불과할 것이다. 평생을 함께할 학교 선후배가 지극히 사무적인 사이가 된다면 인간관계는 삭막해질 것이다. 그러나 몽둥이로 다스린 우정은 강요일 뿐이다. 더구나 상대방의 자존심과 인격을 다치는 모멸의 군기는 이미 질서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지성의 전당이라 불리는 대학캠퍼스가 야만의 집단으로 추락하는 것이나 아닐지 심히 우려를 금할수없다.
  • 인문학자의 외로운 몽상/최혜실 KAIST 교수·국문학(굄돌)

    연구실 밖으로 5월의 햇살과 신록이 눈부시다.쾌적하고 아름다운, 그리고 사람이 없는 공간.이제는 친숙해진 이 공간이 7년전의 나에게는 무척 낯설었다.플래카드와 대자보가 나붙고 오가는 학생들로 붐비며 풍물소리,구호,노래소리로 활기찬 대학만을 경험한 나는 일년내내 조용하고 밤이 되면 건물마다 불야성을 이루는 이 연구 중심 대학에 몹시 당황했었다. 내가 낯설어 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먼저 ‘박사님’이라는 호칭.‘선생님’이라며 스승과 제자의 인간적 측면을 강조하는 인문학의 기풍 속에서 자란 나는 어떤 분야에 전문가라는 의미가 강한 이 호칭에도 당황했다.그리고 모든 것을 구체화하고 계량화하여 설명하는 방식,일년에 논문이 몇편이고 어떤 학술지에 게재된 사실이 점수로 구체화하여 그 사람을 평가한다.어느분야에 명성이 있고 평소 대인관계가 무난하여 제자들에게 존경받는다는 식의 평가가 점잖은 것이라고 생각하던 나에게 이 또한 새로운 것이었다.그리고 훨씬 투명한 언어습관.일종의 도제제도의 학문전수 방식에 익숙한 문과에비해 계약을 존중하는 때문인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 훨씬 공개적이고 적극적이다. 처음에 나는 이 경향을 대상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거나 그것과 의사소통하려는 노력이전에 그것을 자신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서 사용하려는 ‘이성의 도구화’경향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이 방식은 적어도 지금 현재로는 산업과 기술 발달을 위해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이라는 이해가 요즈음은 들게 되었다.왜냐하면 전문성,기술,정보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후기산업사회에서 자연과학과 응용과학의 이런 방식은 비단 전공의 특수성뿐만 아니라 현 사회의 한 특징으로 일반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그 현상을 보고 놀라고 그것을 이해하며 해석하려고 애쓰는 것이 한 인문학자의 외로운 몽상만은 아니지 않을까?
  • 발레리나 金純晶(이세기의 인물탐구:170)

    ◎‘동양적 발레’ 자신만의 이미지/타고난 연습벌레… 고난도 테크닉 모두 소화/안무하고 춤춘 ‘신화의 끝’ 발레팬 사로잡아 지난 해는 발레리나 金純晶에게 여러가지로 의미있는 해였다. 87년 국립발레단 창단 25주년 기념으로 무대에 올렸던 ‘노틀담의 꼽추’를 10년만에 다시 춤춘 것과 그가 몸담고 있는 동덕여대에 무용과가 정식 출범한 것.거기다 제자들과 ‘공기의 정(精)’을 공연했고 그가 안무하고 춤춘 창작발레 ‘머물며’가 민속춤제전에서 안무상을 수상했기 때문이다.그중에서도 ‘노틀담의 꼽추’는 표현영역의 확장과 무용수로서의 도약(跳躍)을 보여준 결정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이 무대에서 그는 에스메랄다의 야성과 순결한 여심을 생기발랄과 스며드는 슬픔으로 표현하여 관객을 감동시켰다. 그의 요염함은 이미 86년 ‘튜닉 팬터지’에서 발휘되기 시작하여 그가 춤추었던 우아한 ‘백조의 호수’와는 달리 클래식의 베일을 활짝 벗고 ‘깨끗하고 담백한 느낌과 탄탄한 춤집’을 각인시켰다. ○‘머물며’로 안무상 수상 또한 쌍꺼풀이없는 고전적인 눈매와 긴 팔다리는 ‘동양적 발레’라는 ‘자신만의 이미지’를 만드는데 무리가 없었다.이후 ‘돈키호테’를 마지막으로 프리마의 지위와 호칭,주어진 공간에서는 자신의 내부에 숨겨진 철학과 사색을 쏟아놓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 87년 발레단을 떠나 그는 자신만의 창작발레에 몰두하게 되었다.만약 그가 지금까지 대극장무대에 머물러 있었다면 오늘의 변화된 김순정의 창작발레는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스타를 만들지 않는 국립발레단에서 명실공히 5년간의 프리마시대를 마감하고 이번엔 부군인 朴丙煥씨(외교통상부 근무)를 따라 발레의 본고장인 영국에 유학,런던 라반센터와 로열발레 아카데미에서 마치 춤추지못해 한이라도 된 듯이 밤낮없이 연습에 매달렸고 몸을 회전시키는 필루에트와 푸에테,아티튀드와 바느질 스텝인 부레에 이르기까지 난이도가 높은 갖가지 테크닉들을 몸의 일부처럼 익혀나갔다. ○발레 본고장 런던 유학 그리고 2년만에 영국에서 돌아와서 선보인첫작품 ‘빛깔’은 ‘그의 모든 것이 그속에 다 들어있다’는평을 받을 수있었다.그때도 여전히 무용수로서 특출했던 프리마의 매력을 상실하지 않았고 격조와 힘과 꿈틀대는 생의 갈망이 춤속에 건재하고 있었다.백색 의상에 꽃을 들고 유년기의 환상을 다스리는 그의 빛깔은 거의 발레작품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파격이었으며 국립발레단의 클래식발레를 사랑하던 팬들은 더이상 김순정만의 순백의 감수성과 정결을 만날 수 없게 되었다. 그가 안무하고 춤춘 작품중에서 ‘신화(神話)의 끝’도 빼놓을 수 없는 수작이다.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간주곡과 비제의 ‘카르멘’ 전주곡에 의존한 이 작품은 ‘강렬한 음악으로 극적인 상황을 연출한 드라마틱한 분위기’로 젊은 발레팬들의 눈길을 일시에 사로잡았다. 맨발과 토슈의 대비,발끝에서 튕기는 힘의 배분은 ‘감정처리의 성숙함’과 ‘신성(神性)에서 벗어나려는 인간다운 갈망’을 보여주었고 결국은 신과의 대결이 아닌 자신과의 싸움으로 겸허하게 마무리짓는 것이 특징이다.평론가 김경애는 ‘몸선의 지시언어(指示言語)’는 시종 아름다움을 동반하면서도 필요이상으로 덧칠하지 않고 사유와 성찰,자신의 기질탐구를 세세히 제시하기를 잊지않았다’고 평한다. ○신선한 현대적 무대 창출 과연 정열적이고도 순발력있는 싱그러움으로 그는 젊은 개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끊기듯 이어지는 감정의 전이는 불협화음적인 파괴미(破壞美)마저 창조하는 가하면 억압속에서 자유롭고 싶은 의지를 스타의 카리스마로 온몸에 담아낸다.이 역시 뛰어난 기교없이는 불가능한 표현이며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의 일상적인 모습은 어느때보다 신선한 현대적 무대를 창출해낸다.이른바 성격을 연출하는 춤에서 고난도의 기교를 무기로 하는 고전발레에 이르기까지 전천후로 춤추는 김순정의 기량은 나이에 비해 이미 모든 것을 절차탁마(切磋琢磨)한 차원이라고 할수 있다. 그가 무용을 하게된 것은 어머니 김남숙씨가 딸의 남다른 재능을 발견하여 10살되던 해 남산어린이회관에 있던 부설 무용반에 데려가면서 부터다. 그곳에서 한국무용 현대무용 발레를 배울수 있었고 고3때 이화여대가 주최하는 전국무용콩쿠르에서 최우수상,서울대 사대 체육과에 진학하면서 이대와 경희대로 이어지는 무용계의 인맥에서 다소 소외되는 감이었으나 피나는 연습으로 외로움을 달래면서 ‘하루에도 수십번씩 최고의 발레리나가 될 것을 굳게 다짐했다’고 말한다.대학 3학년때 무용협회가 주최하는 신인무용콩쿠르에서 글라즈노프 작곡의 ‘사계’로 문공부장관상,다음해 동아무용콩쿠르 대상을 수상하면서 교사자격증을 반납한채 지체하지않고 그는 국립발레단에 입단했다. 별로 커보이지 않는 체구에 작고 야무진 얼굴,억척스럽다고나 할만큼 노력에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그는 화려한 세트나 기괴한 몇개의 동작만으로 창작성을 부르짖는 주변을 비웃기라도 하듯 ‘전신에서 땀이 배어나는 춤’으로 삶의 절규를 간절하게 춤추어 낸다.‘일상의 지루함으로부터,정의가 죽어버린 부당함으로부터,위선과 가증스러움이 포장된 이중인격이 판을 치는 속에서’ 오로지 탈출하기 위해 그의 온몸은 솟구쳐 오르는 열기로 무대에서 언제나 활활 타오르고 있다. ○자신의 단점 보완 극복 그런 중에도 끊임없이 자기를 지키고 남의 장점을 존중하며 자신의 단점을 보완,극복하기를 잊지 않는다.가족은 그의 예술을 이해하여 역사와 철학 등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주는 부군과의 사이에 아들(재영·10) 하나.부친은 서울대 경영대 김원수 교수다. 긴 명상속에서 작품을 분석하고 기획하는 그는 디베르시티망과 트릭까지도 철저히 연구하는 학구파로서 내면에 깔린 심성을 건드려 김순정의 춤을 이룩하려는 야심에 차있다.그의 꿈은 러시아의 마야 풀리체스카야나 스승이던 이시다 다네오,불멸의 폰테인 마곳처럼 70세가 넘어서도,아니면 그 이상 무대에서 춤추는 영원한 현역으로 남고 싶은 것이다. □연보 ▲1960년 서울출생 ▲1978년 이대주최 전국학생무용콩쿠르 최우수특기상 ▲1979년 서울예고졸업 ▲1982년 신인무용콩쿠르 발레부문 특상 및 문공부장관상 ▲1983년 서울대사대 체육과졸업(임성남 박혜련 진수인 사사),동아무용콩쿠르 대상,국립발레단초청 ‘백조의 호수’및 ‘세헤라자데’출연 ▲1983­87년 국립발레단에서 ‘처용’‘배비장’‘춘향의사랑’‘고려 애가’외 ‘호두까기인형’‘카르멘 조곡’‘노틀담의 꼽추’등 주역 ▲1985­92년 충남대 한성대 숭의여전등 출강 ▲1987년 이대 교육대학원졸업 ▲1987­89년 영국 라반센터 및 R·A·D(로열 무용아카데미)연수 ▲1990­91년 국립발레단 주역 ▲1991­95년 청주대 동덕여대강사 1993­현재 한국발레연구회이사, 바탕 춤전 ‘빛깔’안무 출연 ▲1994년 개인발표회, 한일댄스 페스티벌 ‘일상의 꿈’안무·출연 ▲1995­현재 동덕여대무용과 교수 ▲1997년 국립발레단 ‘노틀담의 꼽추’,민족춤제전 ‘머물며’안무출연 올해의 안무가상(97년) ‘몽유(夢遊)’‘공주무덤’‘길위에서’‘풀피리의 춤’외 다수
  • 日皇서 天皇으로/朴 외교통상 “天皇” 호칭/전향적 對日정책 분석

    일황(日皇)에서 천황(天皇)으로? 朴定洙 외교통상부장관이 13일 외신기자단과의 간담회에서 “천황 방한을 실현하겠다”고 말했다.이에 일본 기자의 “천황을 공식호칭으로 하느냐”라는 질문을 받고 “천황은 일본의 고유명사이므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했다. 이같은 발언은 정부가 그동안 공식석상에서 ‘일황’이라고 지칭했던 것과 달라 새정부의 전향적 대일(對日)정책의 일환인 것으로 보인다. 朴장관은 이후 이 발언이 파장을 일으키자 “미국 원수를 프레지던트,독일 수상을 챈슬러,영국 여왕을 퀸으로 부르는 것과 같은 연장선상에서 나온 말”이라고 李浩鎭 대변인을 통해 해명했다.이에앞서 金大中 대통령도 일본신문과의 인터뷰 등에서 “천황을 초청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89년 일본이 재일한국인 지문날인작업을 벌이자 국내에서 반일감정이 거세짐에 따라 한국언론들은 ‘일왕(日王)’이라고 썼으며,정부는 ‘일황’을,사용해왔다.
  • 아호 부르기/이계황 전통문화연구회장(굄돌)

    몇년전 모처럼의 기차여행중 고향동창인 듯한 30대 중반의 10여명이 승차하자마자 준비하여온 맥주와 안주를 나누면서 “너도 먹어라”“이 자식 옛날엔 술깨나 처먹더니…”등 스스럼없이 튀어나오는 상스러운 말투를 해 객차내가 어수선하였었다.이는 우리 사회의 언어습관이나 예의범절의 한 면을 드러낸 것이라 생각할 때 갑자기 나라의 장래가 걱정되었다. 어느날 한 친구가 號(호)를 지어달라고 하면서 로터리클럽에서는 회원의 호칭을 아호로 부르게 되어 있다고 하였다.호의 연유는 이름이 내포한 뜻으로 몸을 닦고 귀중히 여겨,인격을 상징하는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호를 대신 사용한 것이다. 오늘날 대중들이 아호를 사용하는 것은 복고적이라거나 호를 폄하한다고 하는 이도 있으나,불교도의 법명이나 천주교의 영세명도 호와 그 의미가 유사하고,호를 사용하면 각자의 자존과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는 풍토가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된다.또한 현대사회는 대중사회이므로 아호는 일부 지식층이나 지도층의 전유물이 아니다. 삭막한 오늘날 동창생간이나 직장과 친교모임 등에서 아호를 서로 불러준다면 언어생활의 순화를 통한 격조높은 인간관계가 이루어지고,예절바르고 품위있는 사회를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고려의 대문장가 李奎報(이규보)의 白雲居士 自號說(백운거사 자호설)은 아호의 의미를 음미할 수 있어 그 일부를 소개한다. 백운은 내가 사모하는 것일세.…한가이 떠서 산에도 머물지 않고 하늘에도 매이지 않으며 그 형적이 구애받은 바 없네.뭉게뭉게 퍼지는 것은 군자가 세상에 나가는 기상이요,유유히 걷히는 것은 高人(고인)이 세상을 은둔하는 기상이며,비를 만들어 가뭄을 구제하는 仁이요,오면 한군데 집착하지 않고 가면 미련을 남기지 않는 道이네…”
  • JP·TJ ‘의도된 만남’/자민련 의총 참석 애써 상호 예우

    【朴大出 기자】 15일 ‘자민련뱃지’들이 모였다.의원총회 형식을 빌었다.金鍾泌 총리서리도 참석했다.당소속 장관 6명도 함께 했다.具天書 총무가 신임인사를 겸해 자리를 만들었다.여의도 한 중국음식점에서 열렸다. 이날 주역은 명예총재인 金총리서리와 朴泰俊 총재였다.두 사람간에는 섭섭함과 불만이 교차하고 있다.이번 수도권 광역단체장 연합공천이 원인을 제공했다.이날 오찬은 이런 감정들을 털어버리려고 의도된 자리로 받아들여졌다. 두 사람도 이를 의식한 듯했다.서로를 예우하느라 애를 썼다.하지만 ‘가시’있는 말도 주저하지 않았다.묘한 신경전은 앙금을 완전히 씻어내지 못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金총리서리는 朴총재에게 힘을 실어주는 언급을 잊지 않았다.‘총재님’이란 호칭으로 예를 갖췄다.金총리서리는 “총재님을 중심으로 여러분이 잘 이겨내줘 마음으로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러나 중간중간 ‘속내’를 보였다.金총리서리는 “수도권 후보선정에 잡음이 있어 안타까웠다”고 지적했다.朴총재 자극을 피하려는 듯 “안타까운것만은 아닌 상황”이라는 토를 달기는 했다.그런 가운데서도 “힘을 보탤수 있는 위치에서 벗어나 안타깝다”고 소외감을 숨기지 않았다. 朴총재는 “이번에 이 사람이 포볼을 많이 내줬다”고 金총리서리의 반발을 현실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의견을 내야 할 때는 내지 않고 결정한 뒤에 이런 저런 얘기해서는 안된다”고 직격탄을 쏘았다.金총리서리가 막바지 단계에서 제동을 건 데 대한 불만으로 해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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