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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옴부즈맨 칼럼] 튀는 제목… 정확한 제목/최광범 한국언론재단 미디어진흥팀장

    하루치 신문이 전달하는 세상소식은 아무리 많아도 200건을 넘지 못한다. 수많은 사건이나 소식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것들만을 취사선택해 보도하는 것은 종이신문의 숙명이다. 선택의 절차를 거치기 때문에 신문은 일정한 권력을 갖고 있다. 이런 힘을 이용해 입맛에 맞는 것만 편식함으로써 독자의 질타를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신문을 만드는 언론인들의 입장에서는 독자들이 신문을 읽지 않아 걱정들이다. 같은 상품이라도 포장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것처럼, 편집이라는 이름의 포장을 통하여 독자들의 시선을 끌기에 온힘을 쏟는다. 가끔 기사를 쓴 취재기자와 표제를 뽑는 편집기자의 다툼도 일어난다. 취재기자는 제목이 자신의 기사취지와 맞지 않는다고 항변한다. 반면에 편집기자는 상품보다는 포장이 좋아야 고객(독자)의 이목을 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양쪽 모두 일리가 있다. 하지만 독자의 눈을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표제가 기사내용보다 먼저라는 건 분명하다. 지난주 월요일(10월31일)부터 토요일(11월5일)까지 6일치 서울신문의 기사표제들을 살펴보면 눈에 띄는 점이 있다. 의문부호를 단 제목들이 많았다. 이런 의문부호식 표제는 1면 머리기사(11월2일자) “‘기생충 김치’ 정말로 한국산?”에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월요일자에는 2면의 “정책·신임 연계 국민투표?”를 포함해 4건, 화요일 3면 “남북 공무원 ‘호칭 통일?’” 등 2건, 수요일 5면 “反盧측 ‘할 말 다했으니’ 불씨 全大로?” 등 4건, 목요일 12면 “위안화 추가절상 신호?” 등 2건, 금요일 12면 “‘反美 동반자’ 쿠바·베네수엘라 맹방 넘어 연방으로?” 등 2건, 토요일자에는 6면 “소나무 재선충 백두대간 습격?”으로 끝을 맺었다. 총 15건이 의문부호식 표제들이었다. 편집자는 독자의 관심을 끌기 위한 기법의 하나라고 주장하겠지만 독자가 받아들이기엔 자신없는 표제들이다. 기사의 신뢰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런 제목달기는 일부 신문이 정치 기사에서 즐겨 쓴 이후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독자들에게 서울신문의 제목 브랜드로 각인될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 신중하게 사용해야 할 것이다. 한편 서울신문은 ‘강정구 교수 사건’과 관련해 합리적인 공론장 형성에 기여했다.10월18일자 ‘국기문란 논쟁 확대 경계한다’와 19일자 ‘정쟁이 아니라 성찰이 필요하다’라며 이틀 연속 사설을 통해 우리 사회의 비이성적인 논쟁구조를 질타했다. 나아가 25일에는 “‘강정구 교수 사건’과 언론”이란 고려대 김민환 교수의 칼럼을 통해 이념관련 보도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짚음으로써 미디어관련 비평프로그램의 호평을 받았다. 또 지난 3일자 “‘평준화’ 소모전 그만하자”라는 신연숙 논설실장의 칼럼도 서울신문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판단된다. 장점만을 부각해 벌이는 논쟁보다 부작용의 크기를 비교해 논거를 이끌어낸 점이 독자의 판단에 도움을 주었다. 주제와 직접 연관된 문제는 아니지만 10월31일자 25면에 실린 ‘법조인 3남매 탄생’이란 연합통신 전재기사는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기자의 정성이 아쉬웠다. 해직기자의 5남매 가운데 3명이 법조인이 됐다고 전하면서도, 해직기자가 누구인지 언급하지 않았다.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부정적인 기사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름을 밝혀주는 것이 좋았다. 단순히 해직기자라는 표현은 집이 어디냐는 질문에 서울이라고 답하는 것과 비슷하다. 지난 10월27,28일 양일간 한국신문윤리위원회는 ‘신문 표제의 기능과 조어 제목의 문제점’이란 주제로 편집부장단 세미나를 열었다. 발제자인 남기심 국어연구원장은 ‘亞찔한 살인’ ‘칼의 노래를 佛러본다’등을 예로 들며 신문표제의 문제점을 낱낱이 지적했다. 제목이 눈에 들어와야 기사를 읽는다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튀는 표제’와 ‘정확한 표제’가 다르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최광범 한국언론재단 미디어진흥팀장
  • [생각나눔] 남북 공무원 ‘호칭 통일’?

    “A분야는 김○○ 선생님 담당이시고요,B업무는 이△△ 선생님한테 물어 보세요. 그리고 C문제는 박□□ 선생님한테….” 31일 기자가 통일부의 모 부서에 전화를 걸었다가 여직원으로부터 들은 말이다. 계급이 엄격한 공무원 사회에서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생경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런 호칭이 통일부 내에 상당히 일반화돼 있었다. 왜일까. 한 직원은 “하위직에 대한 마땅한 호칭이 없어서….”라고 했다.6∼7급 주사나 8급 이하 기능직을 지칭할 말이 적당치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주사’라는 호칭은 고리타분한 데다 말단직이란 인상이 강해서 선뜻 입에 올리기 어렵다고 한다.그런 점에서 선생이라는 호칭은 무난하다. 듣는 사람도 좋고, 쓰는 사람도 별로 거부감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선생’일까. 한 직원은 “우리가 자주 접촉하는 북한 사람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귀띔했다. 실제 북한에서는 선생이라는 호칭이 전 분야에 걸쳐 일반화돼 있다. 북에 가서 식당종업원을 부를 때는 그냥 ‘선생’이라고 하면 무난하다. 북측 당국자가 남측 인사를 부를 때도 ‘철수 선생’,‘영희 선생’하는 식이다. 남측도 그들을 ‘∼선생’이라고 부르다 보니 입에 붙게 됐고, 나이나 직함을 번거롭게 따질 필요없이 편하다는 측면에서 자연스럽게 정착됐다는 것이다. 적어도 호칭에서는 이미 남북의 공무원들이 ‘통일’에 근접했다고도 볼 수도 있을까.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무덤가에 쌓이는 분홍빛 편지

    무덤가에 쌓이는 분홍빛 편지

      망우리 공동묘지, 차중락의 무덤가에서 때때로 밤샘을 하는 소녀가 있다. 도심지가 아득히 내려다 보이는 호젓한 산골짜기에서, 망령이 되살아날 것 같은 무덤들 사이에서 눈오는 밤을 혼자 새우는 여고3년생. 단순한「팬」이라기엔 실로 엄청난 집념이 아닐 수 없다. 무덤 옆 쌓아놓은 돌성(城)엔 아가씨들 편지 자꾸 쌓여 그 소녀는 차중락의 무덤가에 돌을 모아 조그마한 돌성을 쌓아놓았다. 성이라기보다는 편지를 넣기 위한 우체통이다. 그 돌로 된 우체통에는 고인에게 바치는 연서(戀書)들이 수북이 쌓여있다. 묘를 쓴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잔디도 엉성한 무덤. 우체통은 겨우 비를 가릴 수 있을 정도고 편지는 펼쳐볼 수 있게「노트」로 엮어졌다. 『눈이 오기에 달려왔지요. 오빠 얼굴에 흰 눈이 소복. 하얀 눈을 조용히 쓸어드렸죠. (중략) 해가 저물었군요. 저번「크리스마스·이브」처럼 밤을 샐 용기가 나질 않는군요. H올림』 차중락을 오빠라고 부르는 H란 소녀. 첫「페이지」가 1월 14일자로 시작됐으나 그 다음 장에는 또 다른 필적의 글이 실려있다. 역시 오빠란 호칭. 『귓전에 맴도는 노랫소리에 끌려 오늘도 왔습니다. 오빠가 그리울 때면 아니 마음이 산란해지면 찾아 뵙겠습니다 - X옥』 『오빠 오랫동안 찾아 뵙지 못해서 죄송한 마음 금할 수가 없군요. 하지만 오빠의 미소가 그리운「화(花)」는 이렇게 찾아왔잖아요? 백설만이 오빠를 대신해서 반겨주는군요. 저는 결코 울지 않겠어요 - X화』 『오빠의 노랫소리가 귓전을 울리기에 찾아왔어요. 그 옛날이 너무도 그리워서- 오늘도 경이는 오빠가 그리워 이렇게 찾아왔어요. 누가 뭐래도 울지 않겠어요 - X경』 『눈 오던 어느 날 환히 웃던 개구장이씨, 짓궂은 놀림을 못받는 게 서운하군요. 하얀 눈망울 속에 어여쁜 꿈이나 꾸셔요 - 여X』 산책길에 나선 사람이라도 그 무덤의 주인공이 차중락임을 알고는 몇 마디씩 써놓고 가는 것일까? 문학소녀적인 애절한 글귀가 아닌 것도 몇 가지 있다. 그러나「H」「X옥」「X경」「X화」란 이름은 흡사 경쟁이라도 하듯「그리운」사연을 적고 있다. 차중락은 그토록 많은 소녀들에게 아픈 사연을 심어 놓고 갔던가? 소녀들의 사연은 자못 한이 담겨 있다. H라는 이름의 아가씨는 하루도 안 빠지고 날마다 특히 H란 이름의 아가씨는 일기를 적듯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써넣었다. 그 중에는 봉함편지도 한 장. 수신란은「서울특별시 면목동 망우리1호 차중락 귀하」「H가 천국에 계신 오빠에게」라고 쓰여있다. 죽은 사람은 수신 불능임을 그도 알고 있다는 듯 우표는 안붙였고 그 대신 잡지에서 오려낸 듯한 차중락의 사진이 붙어있다. 이 H란 아가씨의 집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는 차중락이 입원했을 때에 거의 빠짐없이 병원에 왔고 임종도 지켜봤다. 2월 16일, 망우리에서 열린 차중락 묘비 제막식에는 50여명의 아가씨들이 몰려와 눈물을 뿌렸다. 거의가 중3에서 고3정도의 교복입은 소녀들. 폭설로 뒤덮인 망우리 공동묘지가 꽃봉오리 같은 소녀들의 눈물방울로 꽤나 질척거렸다. 그 중에서도 5, 6명의 소녀는 계속 손수건을 얼굴에서 떼지 않았고 한구석에서 오열하는 소녀도 보였다.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등 주로「센치」한 노래를 불러 소녀「팬」을 많이 가지고 있던 차중락이긴 하지만 죽은 현재까지도 그토록 많은 소녀가 그를 잊지 못해 애태우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보통 일이 아닌 것 같다. H란 소녀는 이날 일기체로 된 3권의 연서를 무덤 앞에 내놓았다.(이「노트」는 유족의 양해 아래 기자가 입수했다) 「오빠」가「임」으로 변하고, 그 아가씨는 고교 3년생 「펜」으로 또박또박 일기체로 쓴 연서는 차중락이 숨진 68년 11월 10일부터 시작하여 69년 2월 9일까지 쓰여 있다.「오빠」호칭은 일기 속에서「임」으로 변모되었다. 『임께서 가시는 곳에 저도 따라갈까요. 이젠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임께서 가신 길 - 11월 10일』 『이젠 꽃을 사와도 볼 사람이 없어졌군요. 이젠 누구에게 편지를 써야 하나요. 낙엽을 따라서, 그것도 첫눈 오는 날 아침. 모두가 나의 가슴을 찢어지게 만드는 것 뿐』 이쯤되면 보통「팬」으로서의 관계 이상이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아가씨는 교지(校紙)원고를 쓰고 대학입학자격시험을 걱정한 여고3년생. ”저는 숙녀가 되었답니다” 무덤 옆에서 밤을 새우기도 『지금 다섯째 시간이랍니다. 오늘 아마 일기를 못쓸 것 같아요. 방과 후 엄마한테나 가볼까 해요』 『오늘, 대학입시 예비고사를 치른 날. 어제 오빠의「그대의 미소」가 절 마중 나와 주셨더군요』 교복차림의 소녀라 해서 인기가수에 연정을 품을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이 소녀가 무덤가에서 품는 꿈을 상당히「핑크」빛이다. 『달은 밝은데 혼자 있으려니 정말 귀신이 나올 것 같이 무섭더군요. 하지만 24일 밤 같진 않았어요. 그땐 무덤 옆으로만 내려갔으니. 꼭 하얀 귀신이 목덜미를 꽉 잡는 것 같아서 집에 가서도 한동안 떨었답니다』 『오빠는 지금 정말 하늘에 계신가요? 아닐 거예요. 금호동 건넌방에 계시지 않으세요? 그 빨간「커튼」이 드리운 그 차갑던 방에』 『저는 이제 어엿한 숙녀가 되었답니다. 전날같이 그런 자그마한 여학생이 아니고 하나의 성숙한 여자예요. 오빠, 전 오빠를 얼마나 갈망했는지 모릅니다』 차중락 기념사업회장 최희준은『차중락은 죽은 게 아니고 살아있다. 여기「팬」들 그리고 전국의「팬」들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동생 차중광(24)과 사촌형인 차도균(28)은 저마다『중락의 뒤를 이어 휼륭한 가수가 되겠다』고 다짐, 제2, 제3의 차중락이 속속 탄생했다. 영화계에서는 이 차중락「붐」을 타고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2편이나 만들어 찍고 있다.『그의 요절은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그만큼 행복한 죽음도 없을 것』이란 게 묘비제막식에 모인 한 사람의 얘기. 그러나 인기인과「팬」과의 관계는 어느 한계선을 유지할 때 아름답고 바람직한 일로 여겨진다. 고인의 무덤에 꽃을 꽂는 소녀의 마음은 더없이 아름답지만 밤샘하는 소녀에겐 그 나름의 사연이 있게 마련인 것. 그의 무덤가에서 밤새우는 소녀에게 차중락은 어떤 노래를 들려줄 것인지? [ 선데이서울 69년 2/23 제2권 제8호 통권 제22호 ]
  • [녹색공간] 에코캠퍼스에 대한 어떤 거부감/이도원 서울대 환경대학원 환경계획학 교수

    김치를 ‘기무치’로 말하는 외국인을 만나면 어떤 기분이 들까? 나는 썩 유쾌하지는 않겠다. 일본 사람들이 김치라는 발음을 할 수 없어 기무치라 했으리라 짐작하지만 만약 그들의 경제와 문화가 한 수준 높은 시절이 계속되면 김치가 기무치로 알려질 가능성은 크다. 지난 여름 비단길 여행을 떠나기 전에 홈페이지에 일정을 공지한 적이 있다. 어느 날 그것을 읽은 한 학생이 물었다.“비단길이 무엇인데요?” “흔히 실크로드라고 한단다. 중국과 중앙아시아….” “아, 예.” 나는 설명을 더 할 생각이었는데 그는 이미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비단길은 모르고 실크로드는 안다는 뜻이다. 비단 무역의 길이 되었던 사실을 강조하여 1877년 자이덴슈트라센(Seidenstrassen)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던 독일인 지리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Ferdinand von Richthofen)이 대화를 들었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다산 정약용 선생이 사시던 시절의 식자들 사이에도 거슬리는 언어 풍토가 있었던 모양이다.‘바른 말로 그릇된 점을 깨닫게 한다.’는 뜻을 지닌 선생님의 책 ‘아언각비(雅言覺非)’는 이렇게 시작한다. “장안과 낙양은 중국 두 서울의 이름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를 서울의 일반적인 이름으로 삼아 시문이나 편지를 쓸 때에 의심하지 않고 쓴다.” 생각하기에 따라 비유하여 사용한 경우로도 볼 수도 있는데 선생님은 걱정하는 마음을 드러내셨다. 남의 말을 우리 것인 양 쓰고 있는 세상이 안타까워 굳이 남의 나라 말을 흉내내는 문제점을 바로 잡으려는 노고를 작정하신 것이다. 녹색공간을 꿈꾸는 대학인들이 근래에 에코캠퍼스라는 말을 쉽게 쓰는 모습도 다산 선생님의 지적을 피해가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만들어놓은 에코캠퍼스에서 서구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는 생각도 든다. 이는 경관 조성 작업에 우리가 쓰는 말의 힘이 굳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겠는가? 나는 에코캠퍼스라는 말에 거부감을 가진다. 비슷한 뜻이 될 생태교정이라고 하면 어째 좀 세련되지 않은 것처럼 들린다. 우리는 이미 그렇게 되었다. 그렇다면 좀더 아름다운 우리말을 찾아나서는 노력을 해볼 만도 한데 쉬운 길을 택한 셈이다. 요즘 음식점에서 ‘아가씨’ 대신 등장한 ‘언니’라는 호칭처럼 여기저기 붙는 수식어가 되어 생태의 깊은 뜻이 왜곡될까 두렵다. 에코의 우리말인 생태를 연구하는 학문의 깊은 바닥에는 다양성에 대한 배려가 깔려 있다. 사람을 거의 고려하지 않은 자연 중심의 생태학에서는 마땅히 생물다양성이 주요어가 된다. 나아가 생태는 우리 삶의 다양성 또한 담아야 한다. 이는 한층 성숙한 현대 생태학이 꿈꾸는 길이다. 녹색공간이 그러한 생태학과 어딘가 닿아 있다면 생물과 공간 그리고 우리의 삶은 별개의 사안이 아니라 함께 묶어서 다루어야 할 대상이다. 왜냐하면 생물다양성은 우리의 삶 속에 담긴 다양성과 무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의 태도 안에 깃든 다양성이 경관다양성을 낳고 그래야 생물다양성이 유지된다. 그런데 우리는 서구화와 함께 전통적인 삶과 경관 안에 깃들어 살던 많은 생물들을 몰아내었다. 이를테면 서구를 닮고자 정겨운 울타리와 작은 흙 도랑을 밀어내어 그곳에 기대어 살던 생물은 이 땅에서 설 곳을 잃었다. 결과적으로 지구 차원의 생물다양성을 위축했다. 그리고는 지난 일이 아쉬워 에코캠퍼스를 꾸미려고 한다. 실상은 생태학의 철학 안에는 삶의 다양성도 들어 있다. 그렇다면 언어의 다양성도 유지되어야 마땅하다. 삶을 구성하는 마음과 말 그리고 실천은 함께 가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생태를 고려하는 우리의 언어마저 생태 철학과 멀리 있는 모습을 보여 걱정이다. 부디 이 문제와 관련하여 내가 작은 것을 너무 부풀려 걱정하고 있는 사람이길 빈다. 이도원 서울대 환경대학원 환경계획학 교수
  • 자유부인에서 0호부인 시대로

    자유부인에서 0호부인 시대로

      아내는 아니다.「세컨드」는 더욱 아니다. 애인이라기에는 두 사람의 관계가 너무 깊고 첩(妾)이란 단어와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관계, 이름하여 0호부인. 2호나 1호보다 훨씬 상위대접을 받는 이 0호부인이 최근 국산영화의 총아로 등장하고 있다. 남녀평등이「프리·섹스」시대를 초래하고 그런 사회현상이 재빨리「스크린」에 담겨지는 때문일까? 아내도 아니고 첩도 아닌 위치에서 사랑의 권리를 주장하며 56년도의「히트」작「자유부인」은 서재 속의 꽁생원 같은 대학교수 남편에게 불만을 품고 바깥바람을 쐰다. 그녀가 뛰어든 세계는 10년간 밀려온「아메리카니즘」이 범람하는 허영의 세계. 남편과 가정이 생활의 전부였던 자유부인은 그 새로운 세계에서 이제까지 맛보지 못한 재미를 느끼고 모험을 즐긴다. 남편의 제자와「키스」도 하고 사기꾼형의 사업가와「랑데부」도 한다. 춤바람에 휩쓸린 자유부인은 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남편의 권능까지 침해, 교수에겐 양심의 상징 같은 학생의 성적표를 살짝 고쳐놓기도 한다. 그러나 자유부인이 피운 바람은 어디까지나 동인(動因)이 바깥에 있다. 자신의 의지에 의해 행동하는 게 아니고 세상 추세에 그대로 말려들 뿐이다. 자신의 위치를 자각할 때 쯤은 이미 비극 속에 떨어진 이 자유부인을 관객은 내심 동정하면서도 박수를 했다. 이 사회풍자극이 당시 성공한 이유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현재, 여성의 위치는 달라졌다. 여자의 바람기, 불륜의 남녀 관계는「스크린」속에서 상당히 합리화하고 있다. 지난해 37만의 관객동원으로 방화사에 기록된『미워도 다시 한번』(정소영 감독)에서 이를 보자. 문희는 처자 있는 남성 신영균을 사랑하고 아이까지 얻는다. 그러나 그는 과거 사회가 생산했던 첩은 아니다. 선량하고 사랑할 권리를 주장하는 하나의 여성이다. 남성의 생활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사랑할 권리를 누리려는 여인, 이 2호부인의 비극에 관객은 온통 눈물바다를 이룬 것이다. 현대관객은 이 2호 또는 0호부인을 사랑하고 동정하는 것일까? 0호부인의 본격적 등장으로 볼 수 있는『당신』(전병순 원작『또 하나의 고독』·이성구 감독)에서 그 위치를 보자. 주인공 수진은 지성, 교양, 미모를 갖춘 여성이다. 그는 끈질기게 구혼하는 남자를 외면하고 처자 있는 중년남성을 사랑한다. 실질적인 부부관계나 다름없는 생활을 5년간이나 계속하면서 결코 남자측의 도움을 안받는다. 이점에서 첩과는 다르다. 그들의 정사는 매주 토요일 여자의「아파트」에서 이뤄지고 피차 그들만의 비밀보전에 안간힘을 쓴다. 결혼해서 남자에게 예속되기보다 자유로운 사랑을 위하여 여자가 결혼해서 남자에게 예속된다는 종속관계를 완전히 무너뜨려 버리고 1대1의 자유로운 사랑을 누린다는, 이런 관계는 어쩌면 현대여성이 원하는 가장 이상적인 남녀관계일까? 원작자 전병순씨는「사르트르」와「보봐르」의 관계에 이를 설명한다.『결혼이란 것으로 사랑을 구속하는 관계는 비판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사르트르」「보봐르」의 관계를『가장 차원 높은 결합양식』이라고 말하는 전씨는『현재 존속하고 있는 결혼양식이 남녀결합의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라고는 볼 수 없다』고 단언한다. 영화에서는 오히려 0호부인이 관중들의 동정을 사기도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고 경제적으로 독신여성의 자립이 가능해진 시대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섹스」의 평등권 주장일까? 남성이 2호, 3호로 그들의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사이 여성도 그대로 있지만은 않는다는 것. 이것은 사회문제로 증가하고 있는 여성의 탈선, 불륜한 성관계가 이를 증명한다. 그중에서 타산적이고 지적인 현대여성이 자기대로의 애정자세를 가지고 자각된 경지에서 처할 수 있는 위치가 말하자면「0호부인」(성대교수 강신항씨 말)인지도 모른다. 사실상 남녀 3각관계의 비극은 국산「멜로드라마」의 중요한 소재가 되어왔다. 그것도 한 남성을 둘러싼 두 여인의 관계가 공식적인 설정이다. 축첩제도가 가능하던 시대에 악녀로 등장하던 2호는 현대에 와서 반대로 동정의 주인공으로 바뀌었다.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못하는 사랑에 오히려 갈채를 보내는 관객심리 때문이다. (시나리오작가 이은성씨 말) 남자의 가정을 파탄시키는 일 없이「당신」이라 부르는 사이 그런데 2호보다, 1호보다도 한 차원 위인 0호부인의 위치는? 영화『당신』속의 주인공 수진의 독백에서 이를 들어보자. 『나는 그의 무엇일까, 부인? 아니다.「세컨드」? 천만에, 나는 결코 그에게 매여 있지 않다. 그에게 부담을 줄 때 우리의 관계는 끊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애인? 풋사랑이나 하는 설익은 그런 관계는 결코 아니야. 나는 오직 그의「당신」일 뿐이야 - 』 재미있는 것은 부부관계를『결혼이란 굴레에 얽매여 억지로 웃고 사는 생활』로 생각하는 주인공이 호칭은, 부부관계의 호칭인「당신」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호칭」으로나마 부부간의 친밀감을 유지하자는「콤플렉스」의 소산을 아닐지? 국문하자 강신항씨는 이에 대해『평상부부의「당신」칭호는 너무 평범하고 흔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당신」「여보」일 수 없는 사이에서는 이 호칭이 가장 친근한「뉘앙스」를 주게 마련』이란 것. 「스크린」이 사회의 한 단면을 그리는 것이라면 현대사회는 어쩌면 0호부인시대인지도 모를 일이다. 자녀, 아내를 가진 남성이 자신의 가정을 지키면서 또 다른 사랑을 즐기려는 욕구가 사라지지 않는 한 0호부인은 가장 이상(?)적인 이성이 될 것 같다. 이런 관계에서는 최소한「자유부인」의 비극은 없을 테니까. 작가 전병순씨는『또 하나의 고독』이 실존인물을「모델」로 한 것은 결코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도『그 주인공이 실존인물이 아니냐?』는 질문을 수많은 남녀에게서 받았다는 것. 가정파탄을 일으키고 가정법원에 제기되는「자유부인」과는 달리 사회표면에 노출되지 않는 게 0호부인의 특징이다. 사회 이면엔 보다 많은 0호부인이 존재하고 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 선데이서울 69년 2/16 제2권 7호 통권 제21호 ]
  • 전·현직 두 교장 ‘한지붕 참교육’

    전·현직 두 교장 ‘한지붕 참교육’

    평교사로 돌아온 전직 교장과 그를 교감자리에서 도운 현직 교장이 손을 잡았다. 사람들은 그들이 ‘동거’에 들어갔다고 한다. 서울 한성여중의 이광우(59) 교장과 고춘식(58) 전 교장. 지난 8월30일 이·취임식 전까지 4년 10개월간 교장과 교감으로 호흡을 맞춘 이들은 이제 교장과 평교사로 한지붕 아래서 지내고 있다. ●임기후 평교사로…새 교장은 교사들이 추대 정의여고에서 근무하던 고 전 교장은 교장 공모를 통해 2000년 10월 한성여중으로 왔다.“임기를 마치면 평교사로 돌아가겠다.”는 약속대로 그는 2학기부터 1·2학년 한문과 도덕심화 12시간을 가르치고 있다.‘원로교사’라는 호칭으로 예우는 받지만 엄연히 평교사다. 한 번 교장이 되면 퇴직할 때까지 교장직을 유지하는 것이 보통인 우리 교단 풍토에선 극히 드문 일이다. 이 교장은 교사들의 추대를 받아 취임했다. 사립학교법상 교장 임명권을 가진 이사회가 “구성원들의 의견을 모아 보라.”고 주문을 했고, 교사들이 한달반가량 격론을 벌여 만장일치로 이 교장을 추대했다. ●한지붕 아래 다른 꼴 닮은 꼴 새 학기에 접어든 지 20여일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들은 틈틈이 학교 일을 의논하며 아이디어를 낸다. 당장 이달 말부터 독서교육 계획을 짜는 데 힘을 합치기로 했다. 이 교장이 국어과 전공인 고 전 교장에게 “체계적으로 책을 읽힐 수 있는 방법을 찾아달라.”고 SOS를 쳤고, 고 전 교장 역시 “당장 도서실 관리부터 직접 해 보겠다.”며 팔을 걷어붙였다. 5년 가까이 함께 일한 두 사람의 ‘찰떡궁합’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지만 따지고 보면 둘은 확연히 다른 성향을 지녔다. 고 전교장이 전 교조 분회장 출신인 데 비해 이 교장은 “교육개혁을 위해 전교조가 노력해온 점은 인정하지만, 교사가 노동자임을 내세워서는 안 된다.”고 단호히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학생을 위한 학교여야 한다.”는 데에는 생각이 같아 이견을 조정하고 힘을 모아 부장교사 추천제, 교사 안식년, 주말 교내야영 등의 성과를 일궈냈다. 아무리 찰떡궁합이라도 전직 교장과 함께 일하는 것이 불편하지 않을까. 이 교장은 “교장으로 모실 때도 서로 할말 다 하는 진솔한 관계였는데 새삼 부담스러울 게 있겠느냐.”면서 “전임자가 가장 좋은 조언을 줄 수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고 전 교장 역시 “임기 중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는데, 이제 내가 도울 차례”라고 응수한다. ●학생 개개인에 관심이 최선 고 전 교장은 “오랜 만에 수업을 하니 목이 조금 아프다.”면서도 “교사로 일하는 동안 ‘작은 학년제’를 꼭 실현해 보고 싶다.”고 했다. 그의 아이디어인 ‘작은 학년제’란 한 학년을 2∼3개의 작은 학년으로 나눠 5∼6명의 교사가 3년간 담임을 맡는 방식으로, 올 4월 ‘교육혁신 아이디어 공모’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중학교는 너른 들판에서 진로를 결정하는 시기’라는 생각에 동아리 활동을 지원해 온 이 교장 역시 “늘 학생을 향해 있는 교사가 될 것”이라고 다짐한다.“조만간 술이라도 한잔 기울이며 긴 얘기를 나누자.”며 굳게 손을 잡는 이들의 ‘아름다운 동거’는 시작됐다. 이효용기자 utility@seoul.co.kr
  • [총선압승 고이즈미의 日](상)리더십의 원천은

    [총선압승 고이즈미의 日](상)리더십의 원천은

    |도쿄 이춘규특파원|“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자민당이 일본열도를 삼켜버렸다.” 11일 치러진 중의원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고이즈미 총리에 대한 일본 언론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1942년 1월8일 도쿄 인근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 출신. 키 169㎝, 체중 60㎏의 말라깽이 체격. 별명 ‘준짱(짱은 이름·호칭 뒤에 친밀감을 표시하기 위해 붙이는 말).´ 36세부터 4년간의 짧은 결혼생활 끝에 이혼, 이후 독신생활 23년.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은 3대 세습정치가. 존경하는 인물은 히틀러와의 전쟁에서 불굴의 정신을 보여준 처칠 전 영국 총리와 19세기 중반 에도막부 혼란기에 생명을 걸고 사심 없이 인재를 배출했던 교육자 요시다 쇼인이다. 최근 선거전에서는 비정한 혁명가로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오다 노부나가를 존경하는 인물로 꼽기도 했다. 무모하다는 평가 속에 중의원을 해산하는 정치적 도박을 성공으로 이끈 고이즈미 총리에게는 ‘생명을 걸거나’ ‘불굴의 정신’ 혹은 ‘비정한’ 승부사의 정신이 흐르고 있다. 비정한 승부사 고이즈미 총리가 애용하는 전략은 단순화다. 선거전략이 아주 단순하고, 어법도 논리보다는 감정에 호소하는 단순어법을 즐긴다. 이는 거꾸로 ‘포퓰리즘’을 구사한다는 비판론의 근거로 활용된다. 이번 선거전도 단순화 전략을 구사했고, 이것이 철저히 유권자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우정민영화 찬성, 반대’ 또는 ‘개혁 대 반개혁’의 단순 대치구도로 선거전을 획정했다. 구호도 “개혁을 멈출 수 없다.”였다. 그는 또 당내 계파별 의원보다는 국민과 당원을 직접 상대하는 대중정치 스타일이다. 선거 직전에도 ‘고이즈미 메일 매거진 201호’를 통해 200만명에 가까운 유권자들에게 이메일로 직접 호소했다. 고이즈미는 여기서 자신의 정책을 알리거나 관저생활상, 관저 정원에서 매미 울음소리를 들은 소회 등을 감성적으로 전달해왔다. 파벌정치와 원칙주의, 관료주의적 사고에 익숙한 일본인들에게 신선할 수밖에 없었고, 대중과 함께하는 이같은 정치스타일로 결국 일본정치의 정점에 오른 것이다. 이번에도 치밀하면서 전광석화 같은 대중교류 선거전략이 10년 이상 장기불황의 터널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일본인들을 사로잡은 것으로 평가된다. 고이즈미 총리는 ‘독재자’라는 비판을 받을 만큼 독선적인 정치스타일과 리더십이 한층 강화돼 문자 그대로 ‘대통령형 총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주위의 관측이다. 하지만 12일 오후 기자회견에서 승부사 고이즈미 총리는 단호하지만 가슴 한 구석이 비어 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실제로도 고이즈미 총리는 외롭다. 올 봄 입주한 관저에 가족이라고는 여섯살 위의 독신 누나인 노부코밖에 없다. 양복, 와이셔츠, 넥타이 등 고이즈미 총리의 의상은 노부코가 정한다. 노부코는 30년 이상을 고이즈미 총리의 정책비서로 일하며 때로는 누나로서, 때로는 정책참모로서 정치적 고비 때마다 도움을 줬던 것으로 알려진다. 33년간 분신처럼 고이즈미 총리를 보좌한 비서관 이지마 이사오도 고이즈미를 있게 한 숨은 인물로 꼽힌다. 두 사람은 단순명쾌한 화법,‘선과 악’으로 양분하는 이분법 등이 빼닮았다는 평이다. taein@seoul.co.kr ■ 가까워진 美·日 담 높아진 中·日 |베이징 오일만특파원|일본 자민당의 압승으로 향후 중·일 외교 관계가 더욱 악화될 전망이다. 중국 외교가와 언론들은 12일 자민당을 중심으로 일본 보수파 세력이 결집해 신사참배, 중·일 국경분쟁 등 두 나라 외교 마찰이 더욱 거세질 것으로 내다봤다. 중국 안보 전문가들은 향후 부시-고이즈미의 미·일 동맹이 강화될 경우 타이완 문제를 둘러싸고 중국과의 대결구도 고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중국사회과학원 일본연구소 펑자오쿠이(馮昭奎) 연구원은 이날 “고이즈미 총리가 이번 재집권을 계기로 제5차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강행할 것이며 이는 중·일의 교착 상태를 더욱 불안한 방향으로 이끌 것”으로 내다봤다. 동중국해를 둘러싼 중·일간 영유권 분쟁 문제는 물론 일본의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역사교과서 왜곡 등을 놓고 강경 보수파들이 힘을 얻을 것이란 분석도 지배적이다. 중국 신문신보(新聞晨報)는 이날 미·일동맹 강화로 타이완을 둘러싼 중국과의 대결 강화, 아시아태평양에서의 중국위협론 고조 등을 우려하면서 “고이즈미 총리의 승리는 조지 부시 미 대통령에게 기쁨을 줄 것이나 주변국들에는 보다 큰 어려움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한편 부시 대통령이 부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에 앞서 11월 15일이나 16일쯤 일본을 방문하는 방향으로 양국이 의견조정에 착수했다고 교도통신이 이날 보도했다. 부시 정부는 자민당 압승에 따라 후덴마 비행장 문제 등 주일미군 재편 문제와 자위대 이라크 파견 연장 등에 있어 고이즈미 총리의 지도력을 기대하고 있다고 통신은 전했다. oilman@seoul.co.kr
  • 남자 디자이너 그거 괜찮아요

    남자 디자이너 그거 괜찮아요

      일과(日課)는 여성 접대. 돈도 벌 수 있고 잘하면 인기명사급으로「매스콤」의「스타」가 될 수도 있다. 이런 호조건(好條件)의 남성직업이 어느 이웃나라 아닌 서울 명동의 요즘 화젯거리. 직업의 이름은「패션·디자이너」다. 자영살롱 없어도 월급 4~5만원, 선생님 경칭(敬稱) 들어가며 1월 중순 12명의 남성「디자이너」가 무더기로「데뷔」한 것이 얘기의 실마리. 30 전후의 실무출신(재단·가봉·「디자인」을 할 줄 아는)의 현직「디자이너」들인데 23명의 남녀「디자이너」가 결속한「코페드」(한국「패션·디자인」작가회의·회장 김태산)의 회원.「헬리콥터」기금모금 겸「데뷔·쇼」로 마련한 합동발표회(1월 14일 YMCA회관 강당)에서 탄생된 명사후보들이다. 이들 중 반 이상이 직영의「패션·살롱」을 가지고 있는데 양장점의 전속「디자이너」인 경우라도 월급 4만원~6만원.「선생님」의 경칭으로 불리며 독창적인「디자인」의 예술성을 간섭 받지 않는 칙사대우다. 직영의「살롱」인 경우 최소한 월 15만원의 인건비가 든다. 한 벌 1만원에서 5만원까지의 옷을 적어도 하루 두 벌 만들어 내니까 돈의 회전액이 아무리 적어도 15만원~30만원. 이것만으로 보아도 그리 작은 기업은 아니다. 일반적으로「디자이너」라는 한격 높은 호칭으로 불리는「드레스·메이커」를 찾는 여자 손님들은 옷을 옷 자체로 인정하지 않는다. 옷이 좋아야 할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위광(威光)을 위해서 댈 수 있는「살롱」의 이름도 필요하다. 여자 손님은 여자 디자이너보다는 좋아해… 필수조건 - 유식해 보여야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던가. 양장점마다 옥호(屋號)보다 더 중요한 전속「디자이너」를 고액(高額)으로 채용하고 있는 것은 그런 필요의 발명. 이를테면「디자이너」는 그 양장점의 간판 구실을 한다. 위광의 문제가 최대 관심사인 여성 고객을 끌어 모으는 데는 간판 구실「디자이너」에게 몇 가지 특기가 있어야 한다. 「매스콤」의「스타」가 된다는 것이 그 하나, 대인관계에서 느낌이 좋을 것이 그 둘, 실제로 유식해 보여야 한다는 것이 그 셋, 바느질과「디자인」도 좋아야 한다는 것이 그 넷. 여성「디자이너」라고 이런 조건을 갖추지 말라는 법이야 없겠지만 남성「디자이너」가 더욱 적격이다. 우선「매스콤」의 먹이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최초, 최선, 희소의 가치를 그들은 지니고 있는 셈이니까. 게다가 이성이라는 점에서 생기는 묘한 상상은 고객과의 대인관계를 무척 원활하게 한다. 그 쪽 분야에서 이미 대성했다고 자타공인하는 남성「디자이너」는「앙드레·김」씨. 개업 5년에「패션·쇼」도 10회를 넘겼고 얼마 전에는 미국에 3만 5천「달러」어치「디자인」수출을 했대서「매스콤」의「스타」다운 화제를 던졌다. “남자에게 매력 있게 보이려는 게 여성본능” 그러니 장사 잘될 수밖에 명성은「앙드레·김」씨만 못하지만「살롱」을 두 개나 갖고 기업으로 밀고 나가는「디자이너」가 이용렬(李勇烈)씨. 이밖에도 몇 명 있는 남성「디자이너」에게는 사실 구수한 구설(口舌)도 많았다.「시스터·보이」들이라느니 여성「패트론」이 뒤에 있다느니 하고. 사실이야 어떻든 그동안 이들 남성「디자이너」들이 이른바『해사한 여성적인 성격에 미목이 수려하고「살롱」안에는 현학적이거나「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해 놓은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다분히 외설스런 소문과는 상관없이 영업으로서의 남성「디자이너」소유「살롱」에는 위광을 사랑하는 상류사회의 고객들이 들끓고 있다. 최근 명동에「패션·살롱」을 연 B씨는 남성「디자이너·붐」을 꽤「아카데믹」하게 풀이한다. 『남자에게 매력 있게 보이려는 것이 여성의 본능이란다면 남성「디자이너」의 영업이 잘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죠. 아무래도 여성미(女性美)제작에는 남자가 더 낫지 않을까요. 여성미를 보는 남자의 직관, 대담성에 여성고객이 끌리는 겁니다』 어쨌든「패션·디자이너」라는 것도 어엿한 남성이 가져서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직업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생긴 것만은 확실하다. 복장(服裝)학원엔 남자수련생 수두룩, 거의 대학 나온 인텔리 앞서 든「코페드」회원 12명 밖에도 서울에는 명함에「디자이너」라는 직함을 쓰는 현역 남성「디자이너」는 20여명. 각 복장학원에서「패션·디자이너」의 대망을 품고 공부하고 있는 수련생까지 합치면 대단한 숫자가 된다. 국제(國際)복장학원(원장 최경자)만 해도 지금「디자이너」수련중인 남성이 60여명. 대학 졸업생이 대부분이다. 그들의 전공과목도 다양해서 정외과 체육과 국문과 공과 생물학과 등. 공부하는 열의도 여학생보다 대단하다. 대성해야겠다는 결의가 아무래도 여성보다 굳기 때문인 것 같다는 최경자씨의 말. 지난번「코페드」의 자선「패션·쇼」의 기획진행도 남성회원들이 전담했다는 얘긴데 10여 년간 발표회 뒷얘기에 익은 서수연(徐壽延)씨(코페드자문위원)는 남성의 우수한 기획력을 알았다고 말한다. 원래 합동발표회란 것은 작품이 비교를 당하기 때문에 발표자들간에 잡음이 나게 마련이고 대개는 발표 후에「그룹」자체가 와해되는 것이 보통. 그런 것이 이번「코페드」만은 무사하게 발표도 끝내고「그룹」활동도 계속하겠다고 결의를 굳히고 있다는 상당히 희망적인 서씨의 논평이다. 68년 무역박람회「패션·콘테스트」특선 경력이 있는 손일광씨(「코페드」회원)도 그런 민완의「디자이너」. 『한국에도「피에르·카르당」만한 대가가 나올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우리 젊은「디자이너」들은 진짜 예술활동으로서의 작품을 만들고 있거든요』라고 기염이 대단하다. 이런 남성들의 움직임은 여성「디자이너」에게는 상당한 위협일 수도 있다.「패션」에 관한 한 여성전용(專用)이라고 마음 놓고 있을 시대는 지나갔다는 얘기니까. 어쩌면 몇 년 후에는 여성「디자이너」가 희소가치로서「매스콤」의 먹이가 되는 희극을 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 선데이서울 69년 1/26 제2권 제4호 통권18호 ]
  • 儒林(425)-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1)

    儒林(425)-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1)

    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1) BC 311년. 맹자는 마침내 고향인 추나라로 돌아온다. 이때 맹자의 나이는 61세.(맹자의 생년월일은 분명치 않다.BC 373년 4월 2일생이라는 설도 있고,BC 385년이라는 설도 있고,BC 372년이라는 설도 있다. 여기서는 가장 보편적으로 인용되는 372년으로 통일하려 한다.) 38세 무렵에 주유천하를 시작하였으므로 맹자는 거의 23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이후 BC289년 83세에 숨을 거둘 때까지 맹자는 또다시 고향을 떠난 적이 없었다. 오직 고향에서 제자들과 더불어 책을 저술하고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사기에도 이 무렵의 맹자를 ‘물러와서 제자만장들과 시경, 서경 등을 강술하고 공자의 뜻한 바를 펴서 맹자7편을 저술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후한 때의 학자 조기(趙岐)는 맹자보다 400여년 후대의 유학자인데, 그는 ‘맹자제사(孟子題辭)’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물러나 평소에 제자들과 논의한 것을 모아 공손추, 만장 등의 뛰어난 제자들에게 주고 잘못된 것은 비판하고, 의문이 나는 것은 질문하게 하였으며, 법도의 말을 스스로 골라 7편을 저술하였다.” 이상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맹자는 20여년에 걸친 주유열국에서 돌아와 고향에서 죽을 때까지 책을 저술했으며, 그 일에는 맹자의 뛰어난 제자인 만장과 공손추가 참여했음이 밝혀진다. 특히 ‘맹자’는 문체의 기백이 호탕하고, 문맥이 일관되며, 사상의 전후가 일치되는 것으로 이는 선진(先秦)시기의 문헌으로는 거의 유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청대의 고증학자 최술(崔述)이 ‘맹자사실록(孟子事實錄)’에서 ‘맹자는 맹자의 제자 만장, 공손추 등이 과거의 것을 기억하여 저술한 것이다. 그래서 두 제자의 문답이 7편 중에 유독 많으며, 두 제자는 이 책에서 자(子)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다.’라고 서술함으로써 뛰어난 제자 만장과 공손추의 영향에 힘입은 바 크다고 설명하고 있다. 맹자는 주유열국에서 돌아온 후 세상을 버리고 은둔하였다. 마치 스승 공자가 68세 때 13년간의 천하주유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와 6년 동안 학문에만 정진하였던 것처럼. 공자와 맹자는 이처럼 비슷한 생애를 보냈지만 어떤 면에서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공자의 말년은 제자들의 교육에 힘쓰는 한편 만인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시(詩), 서(書), 역(易), 예(禮), 악(樂), 춘추(春秋) 등 육경의 경서를 편찬하였다. 공자는 실제로 정치를 통하여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킬 수 없는 현실상황을 직시하며 그 이상의 실현을 후대에 기대하기 위해서 교육과 만인의 교과서인 경전에 몰두하였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는 ‘위대한 교육자’라고 부를 만하다. ‘이상의 실현을 후대에 기대’한 공자의 예감대로 유가를 계승한 맹자는 공자의 왕도정치를 현실에 접목시키려고 천하를 주유한다. ‘원하는 것은 오직 공자를 배우는 것(願則學孔子也)’이라고 선언한 자신의 말처럼 맹자는 공자의 뒤를 좇아 유가의 바통을 쥐고 계주(繼走)를 벌였던 릴레이 주자였던 것이다.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4)김위제로 소급되는 ‘정감록’의 기원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4)김위제로 소급되는 ‘정감록’의 기원

    ‘정감록’은 어디서 왔을까? 그 뿌리를 한참 파다 보면, 역사의 삽질이 고려 숙종 때에 부딪힌다. 술관 김위제(金謂 )가 문제의 인물이다. 그는 풍수지리의 대가로 예언에 능했다. 숙종 원년(1096)엔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에 임명됐고, 한참 뒤인 예종 때는 그보다 하급 직책인 주부동정(注簿同正)을 지냈다. 관직은 기껏해야 중하급에 그쳤지만 김위제는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는 숙종에게 글을 올려 남경(조선시대의 한양, 지금의 서울)으로 도읍을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김위제는 새로운 예언서들을 발굴해 인용했고, 결과적으로 왕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숙종은 연이은 자연재해로 정치적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흉년과 실정이 겹치는 바람에 고려의 민심은 국가를 이반했다. 숙종은 정치적 돌파구가 필요했고, 궁지에 처한 왕을 돕기 위해 김위제는 남경천도론을 제시했다. 이런 근본적인 배경과는 무관하게 그의 천도론에는 ‘정감록’의 기원에 해당하는 여러 가지 요소가 숨어 있다. 참고로 말하면, 김위제가 한동안 몸을 담았던 위위시(衛尉寺)는 풍수지리와 직접 관계가 없는 부서였다. 이 관청은 의장(儀仗)에 사용되는 예기(禮器)와 병기(兵器)를 관장하였다. 요즘으로 말하면 대통령 경호실과 유사한 기관이었다. 위위승은 이 관청의 중간 정도 벼슬이었다. 김위제는 술관이라 본래 이 관청과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하지만 숙종 원년 그는 남경천도론으로 직무상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이를 표창하는 뜻에서 왕은 위위승동정 벼슬을 주었던 것 같다. ●김위제의 예언서 독법은 아직도 유효 김위제는 통일신라 말기 풍수지리설을 도입한 것으로 유명한 도선국사(道詵國師)에게 학연을 댔다. 그는 도선국사가 저술한 여러 권의 예언서를 손에 넣었다고 한다. 과연 누구를 통해 그가 그런 책들을 접하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정말 도선국사가 여러 편의 예언서를 남겼는지도 실은 모를 일이다. 그야 어쨌거나 김위제는 도선국사의 저술을 통해 풍수와 예언을 배웠다고 주장했고, 많은 사람들은 그 말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숙종에게 올린 글을 보면, 김위제는 ‘도선기’(道詵記)와 ‘도선답산가’(道詵沓山歌)를 주로 인용했다.‘도선기’는 삼경설(三京說)을 주장한 예언서였다. 그것은 고려가 건국된 지 160년 뒤에는 개경의 지기가 쇠해진다, 그 때가 되면 서경(평양)과 남경에 서울을 설치하라, 그래야만 고려의 국운이 다시 회복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도선답산가’는 남경으로 천도하는 것이 옳은 해결책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남경을 수도로 삼으면 천하가 고려에 조공을 바치게 된다고 예언했다. 두 권의 예언서는 남경의 풍수지리적 조건을 높이 평가한 점에서 일치한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 보면 내용상 큰 차이점도 있다.‘도선기’는 남경을 3경의 하나로 보고 있지만,‘도선답산가’는 남경이야말로 개경을 대체할 다음 번 수도로 예언했다. 여기서 확인되듯 이들 예언서는 도선국사 한 사람의 저술로 보기 어렵다. 도선국사는 둘 중의 어느 하나를 저술했거나, 또는 이들 예언서와는 아예 무관했다고 봐야 한다. 김위제를 비롯한 고려의 술관들은 옛 문헌에 대해 비판적인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들은 걸핏하면 도선국사를 저자로 둘러댔고 그런 주장이 잘 먹혀들었다. 인종 때 서경천도론을 폈던 묘청만 해도 도선국사의 후계자를 자청했다. 만일 그들의 견해를 액면 그대로 인정한다면, 도선국사는 3경설, 서경천도론, 남경천도론을 동시에 폈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논리상 모순투성이였다. 하지만 누구도 그런 약점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고려의 왕과 신하들은 예언서를 대할 때 지나칠 정도로 관대했다고 할까. 이런 전통은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진다.‘정감록’ 신봉자들은 예언서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차이점에 대단히 둔감하다. 그 이유가 궁금하지만 정확히 짚어내기란 쉽지 않다. 이것은 한 가지 억측에 불과하지만, 예언서의 신봉자들은 자기가 원하는 답을 책에서 발견해 내는 데만 관심을 두기 때문인 것 같다. 비유하면 예언서란 온갖 색깔의 사탕이 섞인 사탕봉지와 같다. 노랑사탕을 먹고 싶은 사람은 그것이 손가락에 잡힐 때까지 몇 번이고 다시 골라낸다. 그것으로 그만이다. 중간에 파랑사탕이나 빨강사탕이 몇 개나 나왔지만 그것은 그 사람에게 아무 문제도 안 된다. 이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언서를 상대하는 공통된 관점이다. ●‘삼각산명당기’는 묘청에 앞선 ‘정감록’의 기원 남경천도론을 펼 때 김위제는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란 새로운 예언서를 인용해 관심을 끌었다. 이 예언서는 모든 구절이 7자씩 돼 있어 칠언율시(七言律詩)를 연상케 하는데 배율(排律 12행)보다 더욱 길다. 엄밀한 의미에서 시는 아니지만 그 비슷한 느낌을 준다. 고려시대의 귀족들은 유달리 한시를 즐겼다. 그런 까닭에 예언서마저도 시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달리 말해,‘삼각산명당기’는 고려중기 귀족문화의 산물이다. 신라 말에 저술된 예언서로 보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내용상으로 보더라도, 이 예언서는 고려 때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다. ‘삼각산명당기’를 이용해 김위제는 남경천도의 긍정적인 효과를 뚜렷이 부각시키려고 했다. 그는 삼각산의 지세를 검토한 결과 명당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물샐틈없이 방어되고 있으므로, 이곳에 왕궁 터를 정하면 절대 반역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했다. 또한 청룡과 백호의 모양으로 점쳐 볼 때 신하들 사이에도 파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안과 바깥의 장사꾼이 각기 보배를 바쳐” 왕실의 재정도 풍부해진다고 보았다. 사방의 인재들이 조정에 가득차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이치이고,“재상(輔國)과 바른 임금(匡君)이 모두 한 마음”이 되어 국정운영이 순조롭다고 예언했다. 김위제는 남경천도의 시기도 못 박아 두었다.“임자 년에 만일 궁전 지을 공사를 시작하면, 정사 년에는 성스러운 아들을 얻으리라.”고 하여 성군(聖君)이 출현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삼각산에 의지하여 황제의 서울을 지어라. 아홉 해만에 사해가 조공을 바쳐 온다.” 했다.(‘고려사’, 권122) 지난 호에선 묘청의 서경천도론을 다루었다. 그것이 ‘정감록’에 예언된 계룡산천도론의 모태가 된다는 점을 밝혔다. 그런데 이제 알고 보니 김위제는 묘청보다 한 세대 앞서 천도론을 폈다. 물론 묘청의 주장은 좀더 새로운 면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국태민안(國泰民安)과 사해조공설(四海朝貢說·천하가 고려에 복종한다는 뜻)을 폈던 점에서 묘청은 김위제의 남경천도론을 계승한 셈이다. 국운상승의 힘을 천도론에서 찾은 점에서 김위제는 ‘정감록’의 보다 심원한 뿌리였다. ●‘삼각산명당기’는 풍수설의 인기를 반영 김위제가 찾아냈다는 ‘삼각산명당기’의 내용을 자세히 뜯어 보면, 고려시대에 풍수지리설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돼 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비록 단편적인 기록이긴 하지만 고려초기에는 형국론(形局論·명당의 모양이 닭, 소, 말 등과 닮았다는 설)의 우세를 반영하는 사례가 압도적이었다. 그런데 ‘삼각산명당기’는 좌향론(坐向論·용맥이나 명당의 방향을 중시하는 풍수설)에 기울어 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눈을 들고 머리를 돌려서 삼각산의 모습을 보라. 북북서(壬)를 등에 지고 남남동(丙)을 향하니 이가 곧 신선의 자라(仙鼇 명당)다. 음양의 꽃이 서너 겹으로 피었구나.” 인용문에서 보듯, 명당의 위치와 주변 조건이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마치 한 편의 풍수지리 교과서마냥 ‘삼각산명당기’는 명당의 성립조건을 하나씩 세부적으로 거론했다. 우선 삼각산을 에워싼 외청룡과 외백호의 형상에 대해 “친히 한쪽 옷소매를 벗고 산을 떠메면서 수호에 임하는구나.”라고 했다. 한쪽 옷소매를 벗는 것은 정중하게 예의를 갖춘 모양을 상징한다. 스님들이 가사를 입은 모양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또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명당의 조건에 대한 이해가 좀더 정밀해졌다는 점이다. 단순히 용맥(龍脈)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산세에 대한 종합적인 관찰이 강조되었다. 예컨대 명당 앞을 막아선 안산(案山)과 조산(朝山, 안산의 남쪽에 자리한 산), 그리고 현재의 풍수서적에서는 찾아보기도 어려운 “고모부산”까지 자세히 언급했다. “안산 앞으로 조산이 대여섯 겹이다. 고모부와 부모산이 용솟음친다. 안팎의 문을 각기 개 세 마리가 지키고 있다.” 삼각산의 본 줄기에서 갈라져 나간 여러 산들을 친족의 호칭을 써가며 세분하고, 이들 산자락이 믿음직하게 명당을 호위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삼각산명당기’는 풍수설을 구체적으로 전개한 점에서 이채를 띤다. 이것은 그 이전 시기의 역사에 보이는 여느 예언서와도 다른 점이다. 그만큼 고려시대에는 풍수설이 크게 유행했다는 증거다. 조선시대에도 풍수설은 더욱 인기를 끌어 ‘삼각산명당기’는 ‘정감록’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감결’에 보면,“곤륜산(崑崙山)의 내맥(來脈)이 백두산에 이르고, 그 원기가 평양(平壤)에 이르렀다. 그러나 평양은 이미 천년(千年)의 운수가 지나 그것이 송악(松嶽)으로 옮겨졌다.”는 구절이 있다.‘삼각산명당기’만큼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용맥의 줄기를 마디마다 더듬은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정감록’의 일부가 되어 있는 ‘북두류노정기’(北頭流路程記) 역시 ‘삼각산명당기’를 닮았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자세하다. 잠시 인용해 보겠다.“평강읍(平康邑)으로부터 우량장(右梁場)에 이르러 20리를 가면 우량(右梁)이요,(중략) 태산의 긴 골짜기를 따라 40리를 들어가면 태산이 앞을 가로막는다. 그곳에 두어 칸 불당(佛堂)이 있고, 천장폭(千丈瀑)이 있다.” 이런 방식으로 ‘북두류’는 명당 찾아가는 길을 친절하게 일러준다. 조선 후기에 등장한 ‘북두류’에 언급된 명당은 실제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엔 고려 때의 ‘삼각산명당기’를 실제적인 목적에 맞게 변형시킨 것처럼 여겨진다. 요점을 정리하면,‘삼각산명당기’는 풍수지리의 유행을 타고 후대의 예언서인 ‘정감록’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겠다.‘감결’처럼 명당의 용맥을 더듬어 간 것이 있는가 하면, 길지의 소재를 세세하게 묘사한 ‘북두류노정기’ 도 있다. ●‘신지비사’와 국토 유기체설의 시작 ‘정감록’의 ‘십승지설’엔 국토 유기체설이 깔려 있는데, 이것은 묘청이 주장한 ‘대화세’(大華勢)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생각의 연원을 좀 더 깊이 추구해 보면 그 줄기가 김위제에게로 이어진다. 그가 역사상 맨 처음으로 인용한 ‘신지비사’(神誌詞)의 내용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다.‘신지비사’는 멀리 고조선 때 저술되었다 한다. “한 나라의 서울은 비유해서 말하면 저울대(枰), 저울추 및 저울머리(極器)와 같다. 저울대는 부소의 기둥이다. 저울추는 오덕(五德)을 갖춘 땅을 말하며, 저울머리란 백아(白牙) 언덕이다.”(‘고려사’, 권 122)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국토의 요충지를 저울대와 저울추 및 저울머리로 나눠서 상정한 것은 틀림없다. 이런 유기적 관계를 잘 유지하면, 달리 말해 저울의 머리와 꼬리가 수평을 이루게 되면 “70나라들이 조공을 바치고 항복해올 것이다. 땅의 덕에 힘입고 신령의 보호를 입으리라.”고 했다. 나라의 융성과 평화를 보장하는 힘은 땅의 기운에 달려 있으며, 특히 저울추, 저울대 그리고 저울머리의 균형이 중요하다고 했다. 김위제는 이 예언에 언급된 저울추 등에 대해 좀더 알기 쉽게 풀이해 준다.“송악(개경)은 부소산이 있어 예언서에 언급된 저울대에 해당합니다. 서경(평양)은 백아 언덕이라 하겠고, 따라서 저울머리에 비유됩니다. 삼각산 남쪽에는 오덕을 갖춘 언덕이 있어, 비유하면 저울추가 됩니다. 오덕 가운데 하나는 중앙의 면악(面嶽 북악산)으로서 둥근 모양을 이루므로 토덕(土德)에 해당합니다. 북쪽에 있는 감악(紺嶽)은 구부러진 모양이라서 수덕(水德)이라 할 만합니다. 그런가 하면 남쪽에 위치한 관악(冠嶽)은 뽀족한 모양이라 화덕(火德)이 되고, 동쪽에 있는 양주 남행산(南行山 아차산)은 수직으로 서 있어 목덕(木德)에 해당됩니다. 끝으로, 서쪽에 위치한 수주(수원) 북악(北嶽)은 네모난 모형이라 금덕(金德)이라 하겠습니다.” 얼핏 보면 고려의 3경을 설명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가운데서도 남경의 풍수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개경과 서경은 고려초기에 이미 알려진 명당이었으나 남경은 새롭게 부상한 길지라서 그랬을 것이다. 여기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5덕이란 개념이다. 김위제는 명당의 조건으로 그 주위에 오덕이 조화롭게 배치돼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좌향론과는 성격이 좀 다르지만, 이 역시 고려시대 풍수설의 주요 개념이었다. 그런데 ‘정감록’에서는 길지를 논할 때 5덕을 자세히 따지는 경우가 없다. 풍수설에도 시대에 따른 변천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수도의 풍수를 전체 국토라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살핀 것은 ‘정감록’도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김위제가 인용한 ‘70개국 조공설’ 같은 것은 묘청의 ‘36국조공설’을 거쳐 현대의 ‘정감록’ 신봉자들에게도 계승되었다. ●김위제, 단군조선에 대한 관심 높아 참고로 여기서 한 가지 밝혀둘 사항이 있다.‘신지비사’의 저자에 관해서다. 예언서의 저자 신지(神誌)는 실존인물이 아니라, 단군을 도와 고조선을 함께 다스렸다는 전설적인 존재다. 두 말할 나위 없이 고조선 때는 ‘신지비사’에 보이는 풍수지리설이나 음양오행설 등이 아직 형성되지 못했다.‘신지비사’는 후대의 위작이 분명하다. 그것은 아마도 김위제 자신이나 그 주변 인사들이 조작한 것으로 믿어진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하필이면 김위제가 고조선의 전설적인 예언가를 빌렸다는 점이다. 그밖에 다른 역사기록이 없어 함부로 단정하기는 어렵지만,11세기 후반부터 고조선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깊어졌던 것이 아닐까? 서경이 지배자들의 정치적 관심을 끌게 되면서 과거 평양성에 도읍한 고대 여러 왕조의 역사에 관해 지식인들이 주목하게 된 것 같다. 고구려, 낙랑 및 고조선의 역사를 연구하는 풍조가 일어나서 결과적으로 ‘신지비사’가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고 보면 훗날 일연(一然)이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지을 때 단군의 전설을 삽입한 것도 한낱 우연은 아니었다. 김위제 등 선배 지식인들이 고조선의 역사를 연구한 덕택에 가능했던 것이다.‘정감록’은 고대사에 관해 술관 김위제가 세운 통을 이어받았다. 일례로 ‘구궁변수’를 보면, 고대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역대 왕조의 운수를 풀이해 놓은 대목이 따로 있다. ●‘정감록‘ 유포 반체제로 인식 국가서 통제 김위제의 생각은 조선 후기까지 이어져 ‘정감록’의 모태가 된 것 같다. 그러나 김위제의 입장은 조선후기 술사들과 견주어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김위제는 국가의 보호를 받아 전문직종에 종사한 관리였다. 그의 예언서 조작 또는 예언서 해석은 고려왕조를 위한 것이었고, 왕을 비롯한 지배층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달리 말해, 고대로부터 예언은 국가의 통제 아래 놓여 있었고, 김위제처럼 탁월한 술관도 국가권력에 철저히 예속돼 있었다. 그러나 조선 각지에 ‘정감록’을 유포시킨 조선후기의 술사들은 국가를 전복시킬 뜻을 품고 있었다. 한 마디로 반체제지식인들이었다. 체제수호적인 김위제의 예언 해석이 그와 정반대 입장에서 저술된 ‘정감록’에 녹아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우리가 알면 알수록 인간의 역사는 이 같은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여성 직장생활 성적보다 인간관계”

    여대생들이 취업 후 회사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는 도서관에서 토익책이나 전공서적과 씨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다양한 인간관계를 쌓는 게 더 절실한 것으로 지적됐다.연세대 여성인력개발연구원은 26일 ‘여대생의 재학 중 직업체험 효과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통해 이렇게 밝혔다. 오경자 여성인력개발연구원장은 “사법고시를 포함한 각종 국가고시에서 여성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지만 여성 취업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시험에서 고득점을 얻는 것 외에 인간관계를 맺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란 사실이 연구에서 확인됐다.”고 말했다. 연세대 재학 여학생 50명을 대상으로 올초 ‘인턴십’ 프로그램을 진행한 뒤 이 중 12명을 심층면접한 결과 이들은 인간관계를 맺는 방법과 조직 구성원 간 의사소통법을 익히는 것이 직업현장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꼽았다. 이들은 ▲‘언니’‘오빠’가 아닌 조직내 구성원들에게 공식적인 호칭 부르기 ▲공식적인 호칭이 의미하는 사회적 책임감 인식 ▲구성원간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공동의 목표를 수행하는 과정 연습 ▲주어진 임무에 대한 부담감 의식 ▲외부에서 보는 기업 이미지와 실제 조직문화의 차이 인식 ▲조직내 리더십과 상황 판단력 훈련 등이 취업 준비에 동반돼야 한다고 답했다. 인턴십 프로그램에서 국내 모컨설팅 회사의 고객관리 업무를 담당했던 정모(경영학과 3학년)씨는 “7명 남짓한 팀 구성원이 기획에서부터 영업까지 일을 완수하려면 조직 구성원 간의 갈등이나 오해를 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면서 “구성원간의 관계를 잘 맺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다.”고 전했다. 이들은 또 자신의 취업준비 방법에도 변화를 줘야 할 것이라고 답했다. 학점이나 시험점수만 관리하며 혼자 공부하기보다는 선·후배와 교수 등 주변 인맥을 동원하는 것이 취업 준비에 훨씬 이로울 것이라고 답했다. 장서영 책임연구원은 “남성들이 20대 초반 군대에서 사회를 경험하는 것과 달리 여성들은 취업과 동시에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기 때문에 잘못된 취업 준비로 입사 후 갈등을 겪는 경우가 많다.”면서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직무능력 중심의 취업 교육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 관한 교육도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이효연기자 belle@seoul.co.kr
  • [학술·종교플러스]

    ●멕시코 한인 이주 100주년을 기념해 재외동포재단과 단국대 아시아아메리카문제연구소가 주최하는 ‘멕시코이민 100주년, 회고와 향후전망’이 29∼30일 이틀 동안 서울 프레스센터 19층에서 열린다.1905년 일군의 조선인들이 멕시코 유카탄 반도 끝에 있는 에네켄 농장에 첫발을 디디면서 시작된 멕시코 이민의 배경과 한인들의 독립운동, 그리고 후손들의 생활에 대한 한·멕시코 양국 학자들의 발표가 이어진다.(02)709-2350.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여성위원회와 한국여신학자협의회 등 기독교 여성단체들이 구성한 ‘주기도 새번역안 여성연구특별위원회’는 오는 30일 서울 명동 기독교회관에서 ‘주기도 새번역안 공청회’를 개최한다. 발제자로 최영실 성공회대 교수, 송순열 한신대 교수, 박혜숙 새문안교회 집사, 이근복 새민족교회 목사 등이 나선다. 앞서 KNCC 여성위는 KNCC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새 번역을 추진 중인 주기도문에서 가부장적인 이미지인 ‘아버지’라는 호칭을 빼자고 제안한 바 있다.(02)745-4943. ●천주교 서울대교구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는 다음달 3일 서울 동성고등학교 대강당에서 ‘제2회 청소년을 위한 순교자 현양 문화축제’를 개최한다. 사회와 교회의 미래인 청소년들을 위해 교회의 전통인 순교 신심을 신앙 유산으로 계승하고자 마련한 행사로,‘자 일어나 가자! 그대들도 순교자처럼’이라는 주제로 열린다. 공연과 애니메이션 발표, 콘서트 등으로 구성된다.(02)2269-0413∼4.
  • 7·9급 공무원 시험 완전정복

    # 독도가 우리 영토인 근거 (문헌,지도) 1. 삼국사기:(신라본기) 지증왕 13년조와 (열전) 이사부조에 오늘날 우리가 독도로 인정하는 우산도에 대한 기록이 있음. 2. 세종실록지리지:강원도 울진현조에 ‘우산과 무릉 두 개의 섬이 현(울진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는 기록이 있음. 3. 신증동국여지승람:강원도 울진현조에 ‘우산도, 울릉도가 현의 정동 바다 한가운데 있다’하여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을 잇고 있음 4. 팔도총도(동람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있는 우리나라의 전도 -우산도(독도)가 울릉도의 안쪽에 그려져 있음(정상기의 동국지도에서 위치가 수정됨) 5. 장한상 울릉도사적기 -1694년 삼척청사 장한상이 울릉도의 300여리 근처에 울릉도의 3분의 1 크기의 섬을 발견한 기록이 있음. -한국 문헌에 나오는 울릉과 우산(독도)의 지명은 모두 울릉도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일본의 주장에 대해 울릉도와 그 부근에 있던 독도를 우리가 17세기에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 6. 문헌비고, 통문관지, 매천야록 등 # 독도의 역사1.512년:이사부가 신라영토에 귀속시킴(신라 지증왕 13년) 2.930년:고려에 귀속(고려 태조 13년)→백길과 태두가 토산물을 바침(고려사) 3.1401년:공도정책(조선 태종) 4.1407년:대마도주 종정무가 동해 무릉도(울릉도)에 마을을 옳겨 살게해 달라고 간청함에 조의를 거쳐 거절(태종실록) 5.1425년:우산도로 호칭(조선시대에는 독도를 ‘우산도’,‘삼봉도’,‘가산도’,‘가지도’ 등으로 호칭) 6.1693년:울릉도와 독도를 둘러싼 영토분쟁이 있었으나 안용복의 활약에 의해 일본측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의 문서를 보내옴으로써 일단락(숙종실록) 7.1881년:울릉도 개척령의 반포(고종 18년) 8.1883년:조선 태종 이후 실시해온 공도정책을 폐지하고 54명을 울릉도에 들여보냄. 9.1900년:울릉도를 군으로 승격시키고 울릉도, 죽도, 석도(독도)를 관할하게 함(대한제국 광무 4년) 10.1905년 2월:시마네현 고시로써 일본 영토로 불법 편입(러·일전쟁 때) 11.1906년:울릉군수 심흥택에 의해서 ‘독도’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사용. 12.1914년:경상북도에 편입. 13.1946년:연합군 최고사령관이 항복문서의 시행을 위해 일본정부에 보낸 각서에서 울릉도, 독도, 제주도를 일본의 통치권에서 제외(SCAPIN 제677호) 14.1953년:독도의용수비대가 창설되어 독도를 수호. 15.1982년:천연기념물로 지정(제336호) 16.1998년:‘신한일어업협정’의 체결(독도를 한일어업공동위원회의 관리를 받는 수역에 포함) 17.2005년:민간인의 출입 허용 ●문제 독도에 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1)‘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지증왕 때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하여 신라에 복속시켰다. (2)‘고려사’에는 우산국 사람들이 고려에 토산물을 바친 기록이 나온다. (3)‘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울릉도와 독도를 경상북도 울진현 소속으로 구분하고 있다. (4)일본 막부는 1699년에 독도를 조선 영토로 인정하는 문서를 조선 조정에 보냈다. (5)독도가 우리 영토로 표기된 최초의 지도는 팔도총도(동람도)이다. ●풀이 및 정답 정답 3번. 울릉도와 독도는 하슬라주(신라) 또는 강원도(조선)에 편입되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14년부터 경상북도에 편입됐다. 심태섭 남부행정고시학원 강사
  • [씨줄날줄] 장준하와 박정희/이용원 논설위원

    제7대 국회의원 선거를 며칠 앞둔 1967년 6월 초 어느날 서울 동대문구의 한 초등학교 교정. 연단에 오른 신민당의 장준하 후보는 “내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박정희씨는 일본군 장교로서…”라는 첫마디로 사자후를 토했다.‘박정희씨’라니….‘대통령 각하’를 부르는 불손한 호칭에다 ‘일본군 장교’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 때문에 그는 처음 이상한 사람으로 기억되었다. 그러나 4년 뒤 출간한 그의 자서전 ‘돌베개’를 읽고나서 그 이름 석자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무엇이 되고 말았다. 한국사에서 역사의 라이벌을 거론할 때 박정희의 대척점에는 늘 장준하가 서게 된다. 일본군 학병으로 끌려간 장준하가 목숨을 건 탈출 끝에 중경 임시정부에 합류하는 동안 박정희는 일제의 허수아비 정부인 만주국에서 장교로 복무했다. 장준하는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비행기 편으로 광복된 조국 땅을 밟아 열렬히 환영받은 반면 패잔군 장교인 박정희는 피란민 틈에 섞여 겨우 귀국선을 탔다. 1953년 월간 ‘사상계’를 창간, 한국의 지식사회를 이끈 장준하는 4·19혁명의 결과로 장면정부가 출범하자 국토건설본부장을 맡아 새 조국 건설을 진두지휘했다. 올곧은 지식인의 표상인 그의 명성 덕에 국토건설사업은 지식인·대학생 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한편 박정희는 광복된 조국에서 다시 군에 입문하지만 남로당 간부임이 드러나 겨우 목숨을 건진 대신 군에서는 쫓겨났다.6·25 발발로 군복을 되찾은 박정희는 장면정부 출범 직후부터 쿠데타를 모의, 이듬해 정권을 탈취했다. 박정희가 집권하면서 두 사람은 정면 충돌을 하게 된다. 유신 시절 ‘긴급조치 1호’의 첫 대상자가 된 장준하는 3차례나 옥고를 치르는 탄압 아래서도 박정희 독재에 대한 공격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다 30년전 오늘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장준하의 삶을 정리하면 그는 독립군 출신에 통일운동가, 민주주의 수호자, 양심적인 지식인이었다. 그 반대쪽에는 박정희가 서 있다. 이 시절 장준하는 잊혀가고 박정희는 한창 인기를 누린다. 하지만 역사의 법정은 늦더라도 정확한 판결을 내리는 법이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seoul.co.kr
  • “종교초월한 봉사기쁨 나눠요”

    “종교초월한 봉사기쁨 나눠요”

    “교무님과 신부님, 목사님, 수녀님, 스님 모두 이웃을 위해 봉사와 나눔을 함께 실천하는 좋은 친구랍니다.” 원불교 라디오방송 ‘원음방송’(FM 89.7MHz)에는 특별한 프로그램이 있다. 매일 오후 4시부터 1시간동안 방송되는 ‘둥근 소리 둥근 이야기’는 이웃 종교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하는 국내 유일의 종교협력 프로그램이다. 서울에서 전파를 탄 지 다음달이면 4주년을 맞는다. 원음방송에서 최장수, 최고 수준의 청취율을 자랑한다. 이 프로그램의 프로듀서이자 작가,DJ로서 ‘1인3역’을 맡고 있는 송지은(36) 교무는 각종 신문과 인터넷 등을 통해 다른 종교 소식을 꼼꼼히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4년 전 프로그램을 맡은 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생방송을 진행하면서 이웃 종교의 새로운 소식과 성직자들의 훈훈한 나눔활동을 소개해왔다.“그동안 스튜디오로 초대한 이웃 종교의 성직자분들만 해도 200명쯤 됩니다. 이와 함께 다양한 활동을 하는 종교단체들도 150∼160개 정도 소개했지요. 다른 종교 성직자들과 친해질 수 있다는 것은 저에게 큰 행운이자 행복입니다.” 종교간 대화를 통해 교리적·문화적 차이를 이해하고, 소외된 이웃에 같이 눈을 돌리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인 만큼 각 종교마다 사회현장 등에서 활동하는 성직자들을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그동안 강원용 목사, 박청수 교무, 법륜 스님, 김성수 주교, 최일도 목사 등 유명인사들뿐 아니라 드러나지 않지만 사회 구석구석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평범한 성직자들의 가슴 따뜻한 사연들이 많이 소개됐다. “노숙인 무료급식, 암환자·장애인 돌보기, 빈민촌 봉사, 수재민 돕기 등에 헌신하는 목사님과 신부님, 스님 등을 만나 베푸는 삶이 무엇인지 배우고 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 동성애, 환경, 성폭력문제 등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서는 각 종교단체 관계자들을 한자리에 초대해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함께 풀어가는 방법을 모색하기도 합니다.” 이와 함께 요일별로 각 종교의 경전과 상식, 뉴스 등을 소개하고, 종교계 행사와 문화공연 등을 직접 취재해 전달하는 등 모든 종교의 다양한 정보와 소식을 한꺼번에 들을 수 있다. 또 종교가 없는 일반인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마련한 ‘함께 하는 기도’코너는 청취자들의 고민거리나 기도사연을 받아 각 종교의 절대자 호칭을 함께 사용해 기도를 해줘 인기가 높다. 송 교무는 “종교계가 이기적으로 자기 종교만 챙기거나 봉사와 나눔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는 상황에서 이웃 종교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함께 봉사를 실천할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는 데 의미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아무리 교리를 많이 알고 기도에 전념해도 실천하지 않으면 참된 종교인이라고 볼 수 없다.”면서 “종교계가 연합해서 결식아동, 난치병어린이 돕기 등을 꾸준히 펼쳐 모범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높은 청취율과 종교계 안팎의 높은 관심에 힘입어 프로그램 개편이 이뤄지는 9월부터 방송시간이 오전 10시로 바뀐다. 송 교무는 “다음달부터 종교별 봉사활동·행사뿐 아니라 개별 사찰과 성당, 교회 등을 찾아 성직자들을 소개하고 예배와 법회, 미사 등 의식에 대한 정보를 알리는 새로운 코너를 진행할 것”이라며 의욕을 보였다. 글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서기원 前서울신문사장 별세

    서기원 前서울신문사장 별세

    소설가이자 전 서울신문 사장을 지낸 서기원(75)씨가 30일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숙환으로 타계했다. 1930년 서울 종로구 송월동에서 태어난 고인은 경복중학교를 거쳐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으로 졸업은 하지 못했다.1956년 동화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딘 이후 서울신문 주일특파원, 중앙일보 논설위원 등으로 활동했다.73년부터 공직에 몸을 담아 경제기획원 대변인, 국무총리실 공보비서관, 청와대 공보수석 비서관 등을 맡았다. 이어 서울신문 사장을 비롯,KBS 사장,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 한국신문협회장,‘문학의 해’조직위원장, 한국공연예술진흥협의회장 등 다양한 직책을 거치며 언론계와 문화계를 이끌어왔다. 소설가로서도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56년 ‘현대문학’에 단편 ‘암사지도’를 발표, 이듬해 소설가 황순원씨의 추천으로 문단에 정식으로 데뷔했다. 데뷔작과 함께 ‘오늘과 내일’(60년) ‘잉태기’(60년) ‘이 성숙한 밤의 포옹’(61년) 등을 발표할 때까지는 전쟁의 이면에 숨어 있는 젊은이들의 방황과 가치관의 혼란, 세태와 풍속 등을 주로 그렸다. 1960년대 중반 이후 근대 역사와 인물을 소재로 정치ㆍ사회의 변화상과 사회적 비리 등을 강하게 풍자하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혁명’(64년) ‘조선백자 마리아상’(71년), 단편 연작 ‘마록열전’(71년) ‘왕조의 제단’(82년),‘광화문’(94년) ‘징비록’(96년) 등이 있다.91년 KBS 사장으로 재직시 평소 즐기는 취미인 낚시 이야기를 수필집으로 엮어 ‘물따라 고기따라’를 펴내기도 했다. 현대문학상(60년), 동인문학상(61년), 한국문학상(75년), 은관문화훈장(96년), 대한민국예술원상(2004년) 등을 받는 등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현직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언론계와 문단의 후배들이 줄줄이 고인을 방문, 술자리를 나눌 정도로 포용력과 인간미를 갖춘 이 시대의 지성인이었다. 유족으로는 성기원 여사와 3남1녀.3남 동철(현 사업기획부장)씨가 서울신문에서 기자생활을 하며 고인의 뒤를 잇고 있다. 장남 동준씨는 미국 연방기상청 책임연구원으로, 차남 동한씨는 도시공영 이사로, 사위 조일영씨는 교원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02)2072-2016. 발인 2일 오전 7시. 장지는 충북 옥천 선영.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소설가 이호철의 추모사 서기원 형. 서기원 인(仁)형. 지금 이 시각 저는 지난 50년간 수백 번, 아니 수천 번 노상 스스럼없이 익숙하게 불러왔던 이 호칭을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진정 억장이 무너지는 아픔 섞어 당신을 향해 부릅니다. 어찌 하루 사이에 별안간 형과 나 사이가 이승과 저승 사이로 이렇게도 멀어질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제 이 시각을 끝으로 그렇게 늘 익숙했던 그 호칭,‘기원 형, 기원 형’ 호칭을 이제부터 그 어디에서도 이전처럼 쓸 수가 없다는 이 크나큰 상실감을 대체 무엇으로 채울 수가 있단 말입니까. 몇년 전 황순원 선생과 신동문 형 등 50,60년대 그 어렵던 명동시대를 살았던 선배 동료들이 줄줄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만 이제 서기원 형, 당신이 우리 곁을 떠나고 보니 저 같은 사람으로서는 제 몸뚱이의 어느 반쯤이 뎅겅 잘려나가는 듯 갑자기 싱숭해지지 않을 수 없고 새삼 우리 주위를 휘둘러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것은 1957년 폐허 속 명동의 돌체 다방이었지요. 시인 박시진의 소개로 형과 첫 대면했을 때, 첫 악수를 나눴을 때 형의 그 따뜻하고 기품 있었던 손아귀의 감각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렇게도 선연하게 떠오르고 약여(躍如)하게 느껴집니다. 그때 형은 26세로 동화통신사에 몸담고 있었으며 저는 24세였습니다. 그 뒤로 거의 매일 저녁 술타령이었지요.4·19,5·16 같은 시대의 소용돌이를 겪으면서도 우리 사이는 별 상흔 없이 이어졌습니다. 형은 언론계에 몸담으며 서울신문 주일특파원으로 혹은 서울신문 사장으로,KBS사장으로, 관계에까지 뻗으며 활동무대가 넓어져 갔고, 저도 저대로 소위 재야에 몸담고 있으면서 경찰서 유치장으로 혹은 구치소를 드나들기도 하였습니다. 웬일이었을까요? 우리는 그 전처럼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50년대에 처음 만났던 그 피차의 인연만은 깊이, 끈질기게 이어올 수가 있었지요. 우리 사이는 본원적으로 전혀 상처를 입지 않았죠. 우리 사이에는 바로 문학이 있었던 것입니다. 서기원 형. 서기원 형. 바야흐로 형을 영겁의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면서 나는 지금 이 순간 저 1957년 명동의 널찍했던 그 지하다방에서 처음 형을 만났을 때의 그 드물게 예쁘고 균형잡혀 있던, 무척 품위있게 생겼던 그 당신의 손, 열 손가락과 그 손톱 끝까지 새삼 절절하게 떠올리고 있습니다. 아픔으로, 그리움으로 떠올리고 있습니다. 부디 좋은 세상으로 가시길 손모아 빌면서….
  • 힐, 김정일을 체어맨으로 불러

    |베이징 오일만특파원|제4차 6자회담의 미국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체어맨(Chairman)’으로 호칭했다.27일 열린 수석대표 기조연설에서다. 힐 차관보는 국방위원장이라는 직책을 염두에 두고 ‘체어맨’이라는 호칭을 쓴 것이며 이는 북한이 김 위원장을 영문으로 지칭할 때 쓰는 공식 명칭이기도 하다. 지난 4월29일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김 위원장을 ‘폭군(tyrant)’으로 비난한 지 4개월 만에 김 위원장의 공식 명칭을 사용했다. 거칠기만 했던 북·미 상호간 수사(修辭)가 갈수록 유화적이고 ‘상호존중’의 표현으로 바뀌었다. 폭군에 이어 등장한 ‘미스터(Mr.)’라는 표현보다 진전된 것으로 북·미간의 접근도를 대변하는 것이다. 체어맨은 북한을 주권국가로 인식하고 있다는 미국의 방침과도 맥이 닿는다. 이날 기조연설 후에 이뤄진 남북 양자회동에서 미측의 ‘체어맨’ 호칭에 대해 북한 대표단이 만족을 표시했다는 것이 우리 대표단의 전언이다. 우여곡절 끝에 재개된 6자회담에서 미국 대표가 김 위원장을 ‘체어맨’이라고 깍듯하게 칭한 데 대해 북한이 어떻게 화답할지 주목된다. oilman@seoul.co.kr
  • [씨줄날줄] 촌수/이용원 논설위원

    한국에 들어와 사는 외국인이 신기하게 여기는 것 가운데 하나가 촌수(寸數) 문화이다.1950∼60년대를 농촌에서 보낸 외국인 선교사가 남긴 글을 보면, 한마을 아이들이 모여 노는데 그 호칭이 신분에 따라 제각각인 데다 싸움이라도 붙으면 원인에 상관없이 ‘서열 높은’ 아이가 자리를 간단하게 제압하더라는 것이다. 이유를 캐보면 아이들은 자신과 상대방의 관계를 촌수를 들먹이며 설명하는데 그 뿌리는 결국 몇대조 할아버지에 연결되더라고 했다. 그는 한국처럼 혈통을 정확하게 따지는 사회가 없으리라고 놀라워했는데 그 추정은 정확한 것이다. 혈통상의 거리를 숫자로 표시하는 촌수는 중국에도 없는 우리만의 제도이기 때문이다. 촌수의 촌(寸)은 마디라는 의미로 부모·자식간의 한마디(1촌)가 촌수의 기본이다. 이를 토대로 계산하면 형제간의 촌수는 나와 아버지의 1촌, 아버지와 형제의 1촌을 합해 2촌이다. 나와 아버지가 1촌, 아버지와 할아버지 역시 1촌이므로 나와 할아버지는 2촌간이다. 촌수는 친족간의 거리를 표현하는 한편 호칭으로도 기능해 아버지의 형제를 보통 삼촌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팔촌까지는 자주 사용하는 말인데 실제로 일촌·이촌이란 표현은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다. 부모·자식, 형제·자매, 조손(祖孫)은 워낙 가깝기에 굳이 촌수로 말하지 않는 법이다. 이제 촌수를 제대로 계산하는 젊은이가 많지 않게 된 세상에 느닷없이 ‘1촌’‘2촌’이란 말이 뉴스에 등장했다. 여당은 기초생활보장 대상자 선정기준에서 부양의무자 범위를 축소키로 하는 내용의 관련법 개정안을 마련한다고 어제 밝혔다. 현행법은 2촌인 혈족, 곧 손자·손녀가 할아버지·할머니에 대해, 또 형제·자매간에 부양 의무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데 앞으로는 부모·자식과 배우자 사이에만 부양 의무를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법을 바꾸면 3만 3000명이 새로이 혜택을 보게 될 것으로 추정된다. 법 개정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손자가 조부모 모시기를 소홀히 하고 생활 넉넉한 이가 어려운 형제·자매를 못본 척하는 세태가 법률에도 반영된다는 사실이 못내 씁쓰름하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seoul.co.kr
  • 美 ‘통큰 보상’… 北 ‘저울질’

    |베이징 김수정특파원| 북한과 미국이 25일 오후 베이징 모처에서 공식 회담을 가졌다. 지난 2003년 8월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시작된 6자 회담에서 양자가 사전 접촉을 가진 것은 처음이다. 체면이나 형식보다 실질을 따져 성과를 내겠다는 미측의 의지가 감지되는 부분이다. ●美 “성과 내기 위해 왔다” 미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한·미 협의가 끝난 뒤 북·미가 만날 것이라고 밝히는 자리에서 “협상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서로를 알기 위한 자리로, 각자가 갖고 온 노트를 비교, 회담 진전 방안에 대해 얘기를 나눌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측에 대해 공식 명칭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으로 호칭했다. 이어 “성과를 내기 위해 왔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베이징 극비 회동 이후 2주 만에 만난 힐 차관보와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은 양측의 ‘의지’ 확인에 주력했다. 미국은 북한이 핵폐기에 대한 ‘전략적 결단’을 하고 나왔는지, 북한은 미국의 대북 안전보장 및 에너지 지원 의사가 있는지 집중 탐색했다. 진정성을 확인하면 핵폐기와 대북 안전보장 및 경제지원이라는 큰 그림, 즉 ‘출구’를 만들자는 게 서로의 복안이다. 미측은 북측이 전날 남북 양자협의에서 제기한 것으로 알려진 핵보유국 지위 인정과 군축회담 주장의 강도, 그리고 고농축우라늄(HEU)프로그램에 대한 입장이 여전한지를 확인하는 데 주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관심을 끄는 것은 미국이 북핵 폐기 때 제시할 수 있는 ‘대가’의 내용이다. 특히 미국은 대북 안전보장과 관련, 상당히 진일보한 안을 갖고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엔 핵프로그램 포기 조치를 확실히 하면 평양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할 수 있다는 입장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지난달 10일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 북한이 핵 폐기를 할 경우 “보다 정상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밝힌 데 이어 조지프 디트러니 대북 핵담당 특사가 의회에 출석,“핵폐기를 할 경우 영구적 안전보장을 할 수 있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도 지난달 17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나 다자안전보장의 유용성을 설명했다. ●“인권·미사일은 核다음 이야기” 정부 관계자는 “인권 문제나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WMD), 마약·위조지폐 등 불법행위 등 문제가 해결돼야 관계정상화를 할 수 있다는 게 미국의 기본 입장이었다.”면서 “그러나 이런 문제는 북핵 다음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crystal@seoul.co.kr
  • [시론] 6자회담 ‘창의적 전략’ 필요하다/양무진 경남대 북한대학원 교수

    [시론] 6자회담 ‘창의적 전략’ 필요하다/양무진 경남대 북한대학원 교수

    오는 27일을 전후해 베이징에서 개최될 6자회담은 13개월 만의 만남인 만큼 국내외의 관심이 높다. 북한의 6자회담 복귀 발표는 북·미 양자간 합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미국과 북한, 중국, 한국의 인내와 노력의 결실임에 틀림없다. 특히 한국은 지난 연말부터 중재자를 넘어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해 왔다. 노무현 대통령은 순방외교를 통해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국제사회에 호소하였다. 미국의 대북 강경책에 의한 한반도의 위기설을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진정시키기도 하였다. 부시 대통령을 끈질지게 설득해 ‘미스터 김정일’이라는 호칭과 함께 “북한은 주권국가”라는 언급을 이끌어 냄으로써 북한의 대미 접촉 실마리를 마련해 주었다. 정동영 통일부장관을 대북특사로 파견해 국제사회의 우려를 전달하고 ‘중대한 제안’ 즉,‘핵을 포기하면 남한의 전력을 공급하겠다.’고 함으로써 북측의 전향적 변화를 이끌어냈다. 북한은 이번 제4차 6자회담 복귀 발표에 이르기까지 형식, 명분, 실리 등 모든 것을 염두에 두면서 결정하고 행동해 온 것으로 보인다.6자회담 개최를 북·미 양측의 수석대표 접촉에 의한 양자 합의형식을 취했고, 미국측 수석대표로부터 주권국가의 인정과 6자회담 틀 속에서 쌍무회담 개최를 이끌어냄으로써 핵문제 해결의 주요 당사자가 북·미 양자라는 명분을 확보하였다.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한·중·일을 방문하기 전에 발표함으로써 3국 방문에서의 대북압박이나 제재보다 협상 진전의 대안마련을 유도하였다. 중국의 대북특사 탕자쉬안의 방북에 앞서 발표함으로써 암묵적으로 자주성을 내비치면서 중국의 압박을 우회적으로 사전 봉쇄하는 효과도 거둔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중재하에서 북·미간 협의·결정하는 모양새를 갖춤으로써 중국의 체면을 살려주기도 하였다. 남북 경추위 시작 시점에 발표함으로써 남측의 대북식량지원에 대한 정치적 및 국민적 여론 부담을 덜어주는 효과도 예측한 것 같다. 김정일 위원장이 6·17 대북특사 면담에서 천명한 7월 중 회담 복귀 약속을 지킴으로써 남측 및 국제사회로부터 신뢰를 확보하는 한편 미국을 압박하는 효과를 의도한 측면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라는 목표를 향해 행동의 단계로 나아가는 느낌을 주고 있다.“한반도 비핵화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고 강조한 것은 북측 내부의 설득용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미 핵문제 해결을 위한 군부 및 인민들에 대한 설득은 시작된 것으로 해석된다. 최근 미국도 나름대로 유연성을 보이고 있다. 국무부 관계자는 3차회담에서 내놓은 미국의 제안은 ‘요구’가 아닌 ‘제안’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북한의 어떠한 제안도 논의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제4차 6자회담은 중요하면서도 좋은 기회임에 틀림없다. 참가국들의 반응도 신중하다. 미국과 중국은 기대치를 낮추는가 하면, 북한은 신중함 속에서도 실질적 진전에 대한 기대를 내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참가국 모두가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의 원칙’ 하에서, 해결에 대한 ‘의지’와 ‘주고 받는 식’의 협상 자세를 가진다면 반드시 성과는 있게 마련이다. 한국의 적극적이며 창의적인 대응전략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다. 한국은 미·일·중·러와의 긴밀한 협의를 통해 ‘남한의 전력 공급’이 해결의 접점 마련과 단계적 동시행동의 기본 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지금까지 6자회담은 실무회의와 전체회의를 중심으로 운영해 왔다. 이러한 회담운영을 좀 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안전보장을 다루는 정치분과, 보상과 경제협력을 다루는 경제분과, 핵사찰과 검증을 다루는 기술분과 등 분과위원회 설치를 제안해 본다. 특히 한국은 해결의 접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되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최소한 6자회담의 모멘텀은 유지시켜야 함을 잊어서는 안된다. 양무진 경남대 북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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