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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낯설게 포장된 비윤리적 사랑의 모습들

    지난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로 서울에 터를 닦은 광주출신 극단얼·아리가 두번째 작품 ‘바이러스 10√2’(김은숙 작,윤영선 연출)를 대학로 혜화동1번지 소극장에서 공연하고 있다.제목의 숫자는 영문알파벳 ‘LOVE’의 모양을 본딴 것.그러나 사랑을 온갖 미사여구로 추켜세우는 대다수의작품과 달리 한번 걸리면 치유가 불가능한 바이러스에 비유한 시각이 독특하다. 극에는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등장한다.여자를 성적 대상으로만 보는 남자,미혼모가 돼서도 남자를 잊지 못하는 여자,여자에게 사랑을 느끼는 여가수,그리고 여가수를 집요하게 좇아다니는 극성 팬….미혼모,근친상간,스토커,아동학대 등 배신과 집착,욕망으로 얼룩진 우리 주변의 비합리적 사랑들이 뚜렷한 줄거리나 일관된 구성없이 의도적으로 낯설게 포장돼 무대위를 오간다.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판도라의 상자 맨 밑바닥에 남겨진 것은 희망이 아니라 사랑이었으며,때문에 사랑은 에이즈나 감기처럼 치유불가능한 질병,혹은죄악이라는 결말이 섬짓하면서도 여러가지를 생각케 하는 연극이다.27일까지.(02)764-6597이순녀기자 coral@
  • 총선연대 ‘국민주권의 날’ 시민반응

    제1회 시민행동 국민주권 실천의 날 행사가 열린 30일 서울역 앞 광장에는영하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유권자 혁명’을 다짐하며 나온 4,000여명의 시민들로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행사장에 미리 나온 시민들은 호주머니에서 푼돈을 꺼내 낙천·낙선운동 지지 모금함에 넣거나 ‘공천반대’라고 적힌 노란색 엽서를 샀다. 행사는 인기가수 엄정화의 ‘페스티발’과 이정현의 ‘바꿔’를 개사한 노래가 나오자 열기가 더했다.이어 통기타 연주그룹 ‘혜화동 푸른섬’이 ‘아침이슬’ 등을 연주하자 30대 참석자들은 “6월 항쟁이 생각난다”며 감회에젖었다. 70대 할아버지는 김기식(金起式)사무처장에게 다가가 “김기식씨 아니냐”라고 물은 뒤 “젊은이가 이런 뜻깊은 일을 하다니 대견하다”고 격려했다. 장원(張元)대변인 사회로 행사가 시작되자 4,000여명의 시민들은 ‘공천반대’라고 적힌 노란카드를 흔들며 “퇴출 낡은 정치,퇴출 부패정치”를 힘차게 외쳤다. 이균우(73·서울 종로구 창신동)씨는 “지금 정치를 바꾸지 않으면 우리 후세들이 고생한다”면서 “부정부패 정치와 군사정권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시민들이 더 힘을 모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가족 단위 참여자들도 많았다. 부인 및 8살 아들과 함께 나온 송솔(40·서울 강남구 개포동)씨는 “아이들에게 바른 정치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나왔다”면서 “시민들의 작은 힘이모여 정치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데 큰 희망을 느낀다”고 말했다. 휠체어를 타고 행사에 참가한 장애인 정지영(27·서울 노원구 상계동)씨는“낡은 정치를 바꿔보기 위해 장애인 10여명과 함께 나왔다”고 말했다. 행사에 참여하지 못한 시민들도 정치개혁을 원하는 마음은 하나였다. 회사원 정지석(鄭芝錫·30)씨는 “일부 정당이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정치공세에만 몰두하고 있어 한심하기 그지없다”면서 “정치권이 정신을 차릴때까지 시민들이 표로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역 광장에서의 장외행사가 끝난 뒤 명동성당까지 행진을 하는 동안 버스에 타고 있던 시민들은 창문을 열고 박수를 쳤다.“차가 막혀도 좋으니더열심히 하라”고 성원하는 모습도 보였다. 한편 이날 부평역에서 열린 ‘인천 시민 행동의 날’ 행사장에서 낙천·낙선 대상 의원 4명은 성명서를 통해 “총선연대가 발표한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음에도 우리를 선정한 것은 잘못”이라고 반발했다.그러자 인천행동연대는낙천·낙선 선정 기준을 조목조목 밝히는 등 인천지역에서도 명단 발표와 관련해 시민단체와 정치인 사이에 대립 양상을 보였다. 김재천 이랑기자 patrick@
  • [연극 리뷰] ‘메디아 왈츠’

    극단 표현과 상상의 ‘메디아 왈츠’는 억압적인 현실에 갇혀 지내는 한 주부와 자신을 옭아맨 굴레를 과감히 벗어던진 신화적 인물 ‘메디아’의 대조적인 삶을 통해 ‘새로운 여성상’의 화두를 던지는 여성연극이다. 유리피데스의 희랍극에 등장하는 메디아는 남편이 자신을 배반하자 남편의새 애인과 아이들을 독살하고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나는 강인한 여성.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이탈리아 작가 다리오 포는 다섯편의 독백으로 구성한 희곡‘여성의 역할’에서 메디아를 새롭게 조명했다.연극 ‘메디아 왈츠’는 다리오 포의 희곡가운데 두 편을 선택해 재구성한 작품. 극은 여자와 메디아의 얘기를 오가면서 희화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동시에 전달한다.전신마비로 누워있는 시동생과 아기를 돌보느라 정신없는여자는 건너편에서 자신을 훔쳐보는 남자,수시로 걸려오는 음란전화,그리고이기적인 사랑에 집착하는 연하의 청년에 둘러싸여 숨막히는 일상을 보낸다. 게다가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만 여기는 남편은 여자가 집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자물쇠를 채워뒀다.여자는 이러한 자신의 처지를 앞집 아주머니에게 수다로 털어놓을뿐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날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한편 메디아는 고통의 굴레를 끊어낸 댓가로 죽음의 위협을 받지만 스스로얻어낸 자유와 해방감에 희열을 느끼며 과거를 회상한다. 연출자 손정우는 “여자가 메디아로 동화되는 과정을 통해 2000년대 우리에게 다가올 진정한 여성상에 대한 비전을 시각화했다”고 말했다.이미지극을지향하는 극단답게 무대를 간략히 세우는 대신 음악과 시각적 움직임에 초점을 맞추었다. 다리오 포의 특기인 익살스런 대사가 주제의 무거움을 많이 덜어냈지만 메디아의 독백은 비장함이 지나쳐 부자연스런 느낌이다.12월19일까지 대학로혜화동1번지.(02)763-6238이순녀기자 coral@
  • 10년이상 미집행 도로 일제 정비

    공원이나 도로 등 도시계획시설로 지정된 뒤 10년 이상 시설이 들어서지 않은 서울시내 장기미집행 도시계획시설 가운데 도로가 내년 초까지 일제히 정비된다. 서울시는 4일 도시계획시설로 묶은 뒤 오랫동안 방치하는 바람에 시민의 재산권 행사를 침해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 등 장기미집행 도시계획시설 관련민원을 해소하기 위해 10년 이상 집행되지 않은 도로시설 가운데 개설 필요성이 없어졌거나 지역여건상 개설이 불가능한 지역을 도시계획시설에서 해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종로구 평창동과 은평구 진관내동의 북한산국립공원내 도로,종로구 무악동∼서대문구 홍제4동간 인왕산 자연공원내 도로 등 공원 안에 위치해 환경을 훼손할 우려가 있는 지역의 도로계획을 전면 폐지하기로 했다. 또 서강대로가 지나는 마포구 구수동 일대와 송파구 복정사거리∼상일IC 등이미 대규모 도로가 건설돼 별도로 도로를 만들 필요가 없어진 곳,종로구 혜화동∼동숭동∼성북구 삼선동을 잇는 서울 도성 성곽도로,광진구 능동 어린이대공원 연접도로 등 문화재 및 지역환경 보호를 위해 도로개설계획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는 곳 등도 과감하게 도시계획시설에서 해제할 방침이다. 이와 함께 천호대로 구의동∼광장동 및 길동∼상일IC 구간 등 도시계획선보다 좁은 면적에 도로가 개설돼 있는 지역은 나머지 토지를 도시계획시설에서해제하고, 종로구 송현동 덕성여고 관통도로와 성동구 왕십리역 철도부지내도로 등 공공시설을 가로질러 도로가 들어서도록 돼있는 지역도 해제할 계획이다.용산구 이태원동 육군경리단 관통도로 등 군사시설을 지나도록 계획돼있는 지역은 도로선형을 변경·폐지하거나 대체시설 설치를 검토하기로 했다. 서울시는 이같은 내용의 정비기준을 각 자치구에 통보하고 다음달 말까지폐지 또는 변경 대상을 확정한 뒤 내년 2월중 도시계획 변경을 마칠 계획이다. 서울시는 도로에 대한 일제정비와 함께 내년에 시행될 예정인 개정 도시계획법에 맞춰 공원·녹지·학교·운동장 부지 등 모든 도시계획시설에 대한재정비도 2001년 말까지 추진할 방침이다. 한편 지난해말 현재 서울시내장기미집행 도시계획시설은 2,178건에 5,956만7,000㎡에 이르며 이 가운데 도로시설은 1,694건 629만6,000㎡에 달한다. 김재순기자 fidelis@
  • [문명자 회고록] 비화 3공의 실체들 (5) 5‘16 막후

    케네디는 죽기 전 마지막 국무부 기자회견에서 “한국에 민주주의가 만발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당시 조선일보 워싱턴 특파원이었던 필자는 그 한마디에 흥분하여 “박정희 쿠데타는 오래가지 못한다”라고 단정하는 기사를 본사에 송고했다.케네디가 결코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당시 30대 초반의 나로선 젊은 케네디의 이상,정의감,프런티어정신,그 모든 것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미국의 국익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5·16 당시 미국의 행적에는 의문스런 점이 한두 가지가아니다.주한 미 대사관의 대리대사로서 맥그루더 유엔군사령관과 함께 5·16 반대성명을 발표했던 마셜 그린은 그후 미국으로 돌아와 케네디 행정부의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를 역임했다.필자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물은 적이있다. “왜 미국은 5·16을 진압하지 못했나요?” “코리안 전체가 한물 갔어요.모두 기회주의자요.내가 쿠데타군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자고 하니까 윤보선(尹潽善·작고)대통령이 ‘우리 군끼리 충돌하면 언제 북괴가 쳐들어올지 모른다’며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긴 쿠데타와 같은 국가위기의 순간에 총리라는 사람이 수녀원에 숨어서나오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5·16은 장면(張勉)정부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필자는 지난 95년 위컴 당시 주한미군 부사령관의 측근으로부터 5·16 당일 반도호텔에 있던 장면을 지프에 태워 혜화동 깔멜수녀원으로 이동시킨 것이 바로 위컴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그는 직책은 부사령관이었지만계통은 정보라인이었다.박정희의 쿠데타를 뒤에서 봐줄 수 있는 위치였던 것이다.위컴은 당시 반도호텔에 장기투숙하고 있었는데, 5·16 직후 반도호텔에 피신한 장면으로 하여금 반도호텔 뒷문으로 나가서 준비된 지프에 타고깔멜수녀원으로 옮겨가게 했다는 것이다.그런데 장면이 미8군이 아닌 깔멜수녀원으로 간 것이 누구의 의사였는지는 아직까지 미스터리다. 필자는 어쨌든 위컴이 장면을 미8군으로 데려가지 않은 것은 미국측의 의사에 따른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그 사실은 미국측이장면을 그리 달갑게여기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위컴의 측근에 의하면 5·16직후 당시 연평도에주재하며 사목하던 한 유명한 미국인신부를 가톨릭신자인 케네디에게 보내 5·16군사쿠데타 세력들을 인정해주라고 호소하게 한 것도 바로 위컴이었다. 바로 그런 위컴의 행적을 미 국무부 사람들이 몰랐을까? 미국이란 나라의생리상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결국 표면적으로 주한 미국대사관과 미8군 사령관은 쿠데타 반대성명을 내 합헌정부인 장면 정부를 지지했다는 명분을 확보하는 한편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은밀히 쿠데타세력을 지원했다고 볼수밖에 없다.이제와서 돌이켜보면 5·16을 둘러싸고 미국인들이 서로 짜고쇼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정부가 장면 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노력한 것은 사실이다.미 국무부는 ‘부산정치파동’ 이전부터 장면을 지지했으며 4·19혁명으로 장면이 집권한 이후에도 장면을 도와주었다.그런데 5·16후 미 국무부의 한 관리가 “장면 박사가 무력했기 때문에 한국내에서 쿠데타를 꾸미던 세력이 다섯이나되었다”고 말한 것을 볼 때 미국은 5·16직후 장면 정권에게 쿠데타 기도에 맞서 내부를 단합시킬 수 있는 최후의 기회를 주는 동시에 그렇게 안될 경우 (쿠데타에) 성공한 군부인사들과 협력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후 워싱턴에서 5·16군정 승인문제,공석이던 주한 미대사 부임(새뮤얼 버거),박정희 장군 방미 등 주요 외교문제가 거침없이 수행된 것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63년 11월 케네디 암살후 그의 죽음을 애도했던 나의 기사를 생각하면 지금도 부끄럽다. 언젠가 나는 케네디 행정부와 존슨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역임한 딘 러스크에게 “한국이 언제 통일되겠는가”라고 질문한일이 있다.그는 “당신이 살아서는 못 본다”고 대답했다.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으나 그로부터 45년이 지났다.그의 말이 사실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그와 얘기중에 ‘38선’문제가 나왔다.놀랍게도 그는 “38선은 내가 그었다”고 말했다.그에게 자세한 설명을 요청했다. “1944년 나는 미 전쟁성 작전국 전략정책단 정책과에서 대령으로 근무하고 있었다.일본이 ‘포츠담선언’을 수용하겠다고 발표한 날 밤 일본군에 제시할 항복문서중 한반도와 극동지역 부분들에 대한 초안을 작성해서 30분 안에 올리라는 긴급과제가 정책과에 떨어졌다.그때 우리가 가장 먼저 생각해야할 일은 소련이 수용할 수 있는 선을 그어 그 이남으로는 소련의 진주를 저지하는 것이었다.나는 정책과장 본스틸 대령과 상의한 끝에 38도선 정도라면 (한반도)절반을 공평하게 분할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경성(서울)과 미군포로수용소,주요 항만시설이 (38선 이남에) 있다는 것이 유리한 점이라고 판단,38선을 그어 전략정책단에 보냈다.그런데 소련이 그걸 수용해 뒷날 38선이 됐다” 엄청나고도 어이없는 얘기였다.우리 민족의 운명을 좌우할 분단문제를 일개 미 육군 대령들이 30분만에 처리했다는 것이다.뒤에 이와 관련된 국무부 문서가 공개돼 당시 내가 소속됐던 동아일보에 이를 송고했던 기억이 난다. 정리 정운현기자 jwh59@
  • 金대통령, 탄생100주년 기념미사 참석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27일 서울 혜화동성당에서 열린 운석(雲石) 장면(張勉)박사 탄생 100주년 기념미사에서 고인에게 최고의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고 뜻을 기렸다.고 장면박사가 역사에 새롭게 자리매김한것이다. 김대통령은 훈장을 추서하면서 “장박사는 군사 쿠데타 세력의 세뇌작업으로 오랫동안 부당한 평가를 받았다”면서 “장박사의 위대함은 역사에 영원히 빛날 것”이라고 추모했다. 김대통령은 추모사에서 “젊었을 때는 영예와 찬사를 받다가 사후에 엄중한 심판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생존 당시에는 비판받던 사람이 사후에 평가를 받는 경우도 있다”면서 “의인은 불멸”이라고 강조했다.이어 “5·16을 한 사람들은 ‘장면정권이 너무 유약하다.약한 정권이다.나라를 지탱할수 없다’는 식으로 쿠데타를 정당화했다”고 지적한 뒤 “내가 옆에서 본 장총리는 결코 약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실례로 민주주주의에 대한 강한 신념과 실천의지,민주적 경선을 통한 총리 당선,지방자치 실시,소급입법 반대,야당인사를 포함한 연립내각 구성 등을 적시했다. 김대통령은 그러면서 “고 박순천(朴順天)여사가 지적했듯이 장면정권 출범 한달도 안돼 쿠데타세력이 충무로에서 정권전복을 모의한 사실이 5·16 혁명사에 들어있다”고 전하고 “한달도 안된 상태에서 어떻게 부패와 무능을알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또 “무능한 정권이라면 어떻게 지방자치와 나라경제 바로잡기 5개년 계획을 추진할 수 있었겠느냐”고 되물었다.“당시신문은 장면정권이 부패했다고 보도했으나 재판결과 출장중 헌 냉장고를 받은 장관만 유죄판결을 받고,모두 무죄로 풀려났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김대통령은 “장면박사는 위대한 인격과 경륜을 가진 정치인으로서 건국의공로자”라며 “역사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지도자”라고 말했다.“한국의대통령으로서 훌륭한 지도자가 오랫동안 부당한 평가와 누명을 받던 것을 벗기고 건국의 어른으로 훈장을 수여하게 돼 기쁘다”고 추모사를 맺었다. 김수환(金壽煥)추기경은 강론을 통해 “장박사를 복자나 성인으로 올리는운동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고인을 기렸다. 장박사의 아들 장익(張益)주교가 집전한 이날 미사에는 1,000여명의 교인들과 국민회의 김상현(金相賢)·이길재(李吉載),자민련 한영수(韓英洙),한나라당 한승수(韓昇洙)의원 등이 참석했다. 양승현기자 yangbak@
  • 오늘 張勉박사 탄생100주년 기념 학술행사

    제2공화국의 총리를 지낸 운석 장면(張勉·1899∼1966)박사의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행사가 27일 오전 10시 50분∼오후 5시까지 혜화동 가톨릭대학 진리관 강당에서 열린다. 운석기념회(회장 강영훈 전총리)와 운석연구회(회장 조광 고려대 교수)가 ‘운석 장면의 생애와 업적’이라는 주제로 마련한 이날 행사에는 장면 박사의 생애와 정치사상·외교활동 등을 비롯,제2공화국의 정치사적 평가도 곁들여진다. 이날 행사에서는 조광 고려대 교수의 ‘장면의 생애와 신앙에 관한 연구’를 비롯해 총 7명의 연구자들이 주제발표를 한다. 조 교수는 발표문에서 “장면 박사에 대한 연구는 1980년대를 전후하여 한국정치학계에서 진행돼 왔으나 기존의 연구성과는 상당수가 결과론에 입각한연구였다”면서 “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해 제2공화국을 무능하고 부패한정권이라거나 장면을 두고 우유부단하다는 비난은 당연히 재검토돼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 “제2공화국은 단군 이래 처음으로 민주주의라는 신화를 이 땅에실현했던 정권이자 민주주의의 희열과좌절을 거의 동시에 경험한 정권이었다”며 “장면 박사에 대한 연구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구현해 나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밖에도 이날 행사에서는 허동현 경희대 교수(장면의 정치사상에 관한 연구),재불학자 유태호씨(유엔의 대한민국정부 승인과 장면의 역할),최운상 도쿄 국제대학 교수(장면의 외교활동에 관한 연구),다카사키 소지 일본 쓰다주쿠대학 교수(일본 정계의 제2공화국관),정대성 경희대 교수(제2공화국과 대일정책),김기승 순천향대 교수(민주당 정권의 사회·경제정책과 장면)등 국내외 연구자들이 주제발표를 한다.(02)765-8237정운현기자 jwh59@
  • [인터뷰] ‘-사랑의 형식’ 주연 뮤지컬 배우 임선애씨

    내달 2일 문예회관 소극장 무대에 오르는 연극 ‘바보각시-사랑의 형식’에서 주연을 맡은 뮤지컬 배우 임선애(29). 그녀는 요즘 해질무렵부터 새벽 3∼4시까지 혜화동 지하 극단연습실에서 날밤을 샌다.‘바보각시’등 4개 작품을 동시에 진행하는 연출자 이윤택의 바쁜 스케줄 탓에 이시간에야 비로소 연습이 가능하다. “데뷔 6년만에 처음 출연하는 정극인데다 이전보다 주인공(바보각시)의 비중이 커져서 부담이 많이 돼요”‘바보각시’는 우리 전통의 살보시 설화를 모티브로,자신의 모든 것을 세상에 베푸는 바보각시의 순수한 사랑을 통해 세기말적 구원을 그린 작품. 이윤택의 우리극 형식 3부작중 하나로,93년 초연당시 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으나 관객들에게는 외면받았다.이 작품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던 이윤택은 올초 부산과 서울에서 재공연을 가졌고,매회 객석을 가득 메우는 대성공을 거뒀다. 이번 공연은 1일 개막하는 제23회 서울연극제 공식초청작으로 다시 띄우게된 것.작곡가 원일의 음악을 보강하고,초연때 구음(口音)을 맡았던 김민정이 출연하는 등 미학적 완성도를 한층 높였다.바보각시역에 뮤지컬 배우인 그녀를 캐스팅한 것도 음악적인 측면을 고려해서다. “지난 봄 리어왕 시연회에 갔다가 바보각시 이미지에 어울린다고 하시길래선뜻 하겠다고 했어요”이윤택과는 지난해 ‘눈물의 여왕’이후 두번째 만남.연출스타일이 너무 꼼꼼해 연습할때는 힘들지만 극중 배우의 장점을 가장 잘 드러나게 하는 연출자여서 마음이 든든하단다.하지만 무게가 만만치않은 꼭두각시 인형을 처음부터 끝까지 손에 들고 연기해야 하는데다 우리 고유의 음악인 정가(正歌)를 익혀야 하는 등 어려운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맑고 순수한 바보각시의 모습을 보여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그리고 이 작품을 계기로 ‘뮤지컬 배우’가 아닌 그냥 ‘배우’로 기억되길 바랍니다”94년 ‘코러스라인’으로 데뷔한 그녀는 96년 한미합작 뮤지컬 ‘브로드웨이42번가’오디션에서 주인공으로 뽑혀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이후 ‘웨스트사이드스토리’‘하드록카페’‘바리’등에 출연했다.15일까지.(02)763-1268이순녀기자 coral@
  • 매주 수요일은 페미니즘 영화 보는날

    연말까지 매주 수요일 저녁 서울 종로구 혜화동 혜화여고 맞은편 카페 ‘파라문의 정원’을 찾아가면 갖가지 페미니즘 영화를 보고 토론을 나눌 수 있다. 해마다 여성영화제를 개최하는 여성문화예술기획이 마련한 ‘수요 시네마’가 열리는 것.이 행사가 처음 시작된 지난 7일 오후 7시30분 이 곳에는 많은관객들이 몰렸다. 첫 상영작은 샐리 포터 감독의 79년작 ‘스릴러’.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을 페미니스트적 시각에서 재조명했다. 다음 작품은 14일 ‘침묵에 대한 의문’.마를렌 고리스 감독의 82년 작으로 3명의 여성이 한 남성을 살해한 이유를 캔다.또 21일에는 제인 캠피온의 ‘피아노’가,28일에는 샹탈 액커맨의 ‘나,너,그,그녀’가 상영된다.‘피아노’는 한 불구여성이 자기를 확인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으며 ‘나…’는 일상생활 속의 어긋나는 남녀관계를 담았다.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는 자정부터 다음날 아침 6시까지 영화 3편을 심야상영한다.상영작은 참석자들이 다시 보고 싶어하는 영화나 최신작 중에서 고른다.아울러 매주 목요일 오후 7시30분에는 사진강좌도 열리는데 오는 22일의 첫모임에서는 ‘사진의 현대적 의미와 이미지론’이 주제이다. 이들 행사에는 대학의 사진학 강사인 박영숙씨,비디오 아티스트 윤동경씨,대학로 소극장 ‘오늘 한강 마녀’의 안미라 극장장,중앙대 영화학 강사인김선아씨 등이 참여한다. 행사를 기획한 안미라씨는 “페미니즘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연말까지 다양한영화를 상영할 것”이라면서 “남녀 성차별 철폐의 논리를 넘어서 페미니즘적인 배려와 수용의 논리를 펼치고자 행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영화 관람료나 행사 참여료는 없다.(02)3476-0662박재범기자
  • 혜화동1번지 페스티벌 새달15일 개막

    “연극 특유의 현장감을 살려 영화나 텔레비전보다 훨씬 으시시한 무대를꾸밀 겁니다”. 잘나가는 ‘386세대 연출가’ 손정우 이성열 최용훈 박근형 김광보가 서울대학로의 여름을 서늘하게 만들겠다고 다짐하고 있다.연극동인 ‘혜화동 1번지’의 2기생인 이들은 올 ‘혜화동 1번지 페스티벌’의 테마를 ‘공포’로잡았다.이는 지난 해 “내년 여름에는 공포물을 해보자”는 이성열의 제의에 다른 동인들이 선뜻 동조한 데 따른 것이다.무대에 올리는 연극은 ‘꿈’‘귀신의 똥’ ‘다림질하는 사람들’ 등 5편. ‘연극만의 독자성’과 ‘실험성’이라는 공통분모 위에서 톡톡 튀는 개성을 발휘하고 있는 이들을 지난 24일 서울 대학로 소극장 ‘혜화동 1번지’에서 만났다. 먼저 막내인 김광보(35·극단 청우 대표)가 연극 ‘꿈’에 관한 설명으로 말문을 열었다. “2차대전 후 전범(戰犯)이라는 사회적 억눌림을 묘사한 독일의 귄터 아이히의 ‘꿈’을 선택했는데 원작이 라디오 드라마인지라 청각적 이미지나 상상력만으로도 충분히 무서운 느낌이 들 겁니다”.유혈이 낭자한 장면이나 괴기스런 장면을 직접 보여주기 보다 보이지 않는 효과음이나 느낌으로 전율을 유발한다는 것이다.‘꿈’은 두편의 옴니버스로 엮어져 있다.우선 ‘흰 개미’는 먹이를 속에서 부터 ‘사각사각’ 갉아먹어 겉껍질만 남긴다는 점을부각했고 ‘기차놀이’는 인육(人肉)을 소재로 한 영화 ‘델리카트슨 사람들’처럼 컬트적인 요소가 강하다. 이어 최근 ‘청춘예찬’으로 두터운 저력을 보여준 박근형(36·극단 76단상임연출)이 진지하고 조심스러운 말투로 한마디 거들었다.“‘귀신의 똥’은 정신·물질이 모두 빈약하면서도 ‘자신이 뭔가 대단하다’고 느끼는 허위의식을 깨려는 작품입니다.귀신에게 시달리는 거지가족과 강간 당한 여인의 사연을 현재 일어날 수 있는 상황으로 묘사했습니다”.구체적 시놉시스보다 배우들의 순발력과 즉흥성에 무게를 두어,‘돌발적 비명’이 장면 곳곳에 툭툭 튀어나올 것으로 보인다. 동인 중 최고참인 손정우(38·극단 표현과 상상 대표)는 현대인의 정신병리 현상인 집착을 주제로 삼았다.“고립과 소외가 쌓일수록 그것을 해소하려스피드나 인터넷 등에 집착하는 경향이 짙은데 작품 ‘다림질하는 사람’은좁은 세탁소에서 고립된 주인공이 여자에 빠져들면서 벌이는 행각을 다룬 것입니다.광적인 집착 끝에 주검을 다림질하면서 자멸해가는 과정을 그렸습니다”. 이들 세명의 작품이 오는 7월15일부터 8월1일까지 먼저 선을 보인뒤 8월5일부터 같은달 22일까지 이성열(37·극단 백수광부 대표)의 ‘심야특식’과 최용훈(36·극단 신화 대표)의 ‘아빠!’가 바통을 이어 받는다.아직 구체적틀은 안 잡혔지만 ‘심야특식’은 농담이나 장난으로 주고받던 귀신얘기가자기의 얘기로 나타나고 그 속에 빠져드는 상황의 무서움을 다룬다.최용훈의 ‘아빠!’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모티프로 하여 살부(殺父)욕구나 근친상간 등 내면에 잠재된 욕구를 발견하는 공포심리를 담는다. 이들은 “간접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나도 저렇게 될 수 있겠구나’라는 연상작용으로 더 ‘소름끼치게’ 하겠다”고 장담했다.(02)764-3375이종수기자 vielee@
  • [제2공화국과 張勉](16)혁신계의 浮沈/4·19이전의 상황

    4월혁명후 새 세상이 열렸다고 믿은 정치세력 가운데 하나가 혁신계다.이승만(李承晩)정권 12년 동안 철저히 탄압받은 혁신계 인사들은 ‘4월혁명이 완수해야 할 과업이야말로 혁신세력이 책임진 역사적 과업의 주요한 일부’라고 판단했다.그리고 4월혁명이 열어놓은 정치적 공간에 그들의 활동무대도포함된다고 확신했다. 이 무렵 혁신계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혁신계’로 규정된 제(諸)정치세력의 노선·뿌리가 다양한데다,사회적으로 공인받은 정당으로서 맥을이어온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조봉암(曺奉岩)이라는,카리스마와 전국적인 지명도를 갖춘 인물을 잃은 점도 크게 작용했다. 따라서 4월혁명 후 혁신정당 창당은 명망가들의 이합집산에 좌우됐다.첫 단계로 이들은 4월30일 부산에 모여 ‘한국혁신세력집결촉진회’를 구성한다. 이어 통합신당인 ‘사회대중당’을 결성키로 하고 5월17일 창당준비위원회를 갖춘다.민주혁신당의 서상일(徐相日)이 대표를 맡고 진보당계의 김달호(金達鎬) 윤길중(尹吉重)과 혁신계 원로인 장건상(張建相) 이동화(李東華) 정화암(鄭華岩) 등이 참여한다. 그러나 통합을 주장하던 혁신세력은 곧 핵분열을 한다.사회대중당이 창당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장건상이 혁신동지총연맹을 만들어 갈라서는가 하면 전진한(錢鎭漢) 김철(金哲)의 한국사회당,고정훈(高貞勳)의 사회혁신당 등 군소 혁신계 정당들이 줄지어 등장했다. 이같은 분열이 이념이나 정강정책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장건상 스스로 회고록에서 밝힌 것처럼 “혁신계가 통일되지 못하고 분산된 근본적인 원인은 이론의 차이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인물 중심의 파벌에 의한 것”이었다. 4월혁명을 맞아 혁신계가 창당을 서두른 까닭은 그해 7월29일로 예정된 총선에서 다수의석을 확보해 제도권에서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였다.그런데도혁신계는 통합하지 못하고 사분오열된 채 후보를 내는 바람에 후보자가 233개 선거구에서 156명에 달했다.혁신정당 후보가 2명 이상 출마해 서로 다툰선거구도 24곳에 이르렀다. 혁신정당에 지식인들이 활발하게 참여한 점도 각 당이 나름대로 자신을 가진 요인이 됐다.예컨대 사회대중당은 창당준비 단계인데도 대구 5개 선거구모두에 ‘반(反)이승만독재 투쟁’으로 유명한 인사들을 공천했다. 제헌의원을 지낸 혁신계의 대표주자 서상일을 비롯해 독립운동가이자 혁신계 원로인 이동화,대구매일신문사 주필 최석채(崔錫采),월간 ‘사상계’ 편집위원 출신인 양호민(梁好民),훗날 국회의장을 지내는 김수한(金守漢) 등이 그들이다.부산에서도 역시 독립운동가에 혁신계 원로인 장건상이 혁신동지총연맹 공천으로 출마해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사회대중당 공천자 121명 중에서 서상일·윤길중(강원도 원성)·박권희(朴權熙,경남 밀양)·박환생(朴煥生,전북 남원) 등 4명이,한국사회당 공천자 18명 가운데 김성숙(金成淑,남제주)만이 원내에 진출했다.이 5명을 제외한 나머지 혁신계 후보는 전멸한다. 함께 치른 참의원 선거에도 58명이 나서 사회대중당의 이훈구(李勳求,충남)와 혁신동지회의 정상구(鄭相九,경남) 2명만 당선됐다. 혁신계는 이처럼 선거에서 참패한 까닭을 ▲유권자들이 아직도 금력·권력에 영향받는 상태였고(申相楚 주장) ▲혁신계를 공산주의자와 동일시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반면 한승주(韓昇洲) 고려대 교수는 저서에서 “국민이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것은 독재적인 지배를 거부한 것이지 반공·보수주의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고 분석했다. 어쨌든 지도부 거의 전원이 원내 진출에 실패함에 따라 혁신계는 원외 세력으로 남아 장외투쟁에 집중할 수밖에 없게 됐다.그 와중에서 혁신계는 민주당의 신·구파 싸움과 다름없는 주도권다툼 끝에 갈라서게 된다. 먼저 혁신정당 통합을 목표로 창당을 준비하던 사회대중당은 김달호를 중심으로 한 진보당계만으로 축소 형성됐다.총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방조직을 선점(先占)하는 데 성공한 진보당계는 사회대중당 창당을 진보당의 재건으로 여겼다. 이에 반발해 서상일·윤길중·이동화·정화암 등 비(非)진보당계는 김성숙·고정훈과 손잡고 통일사회당을 형성한다.사회대중당은 60년 11월24일,통일사회당은 61년 1월20일 정식 출범한다. 사회대중당과 통일사회당은 혁신정당의 두 기둥으로 떠오르지만 그 성격에는 차이가 있었다.사회대중당이 급진적인 반면 통일사회당은 온건한 서구의민주사회주의에 가까웠다. 사회대중당은 61년 들어 일선조직인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民自統)’을 만든 뒤 통일과 한·미관계를 이슈로 대대적인 실력행사를 벌인다.‘민자통’의 통일론은 ‘자결의 원칙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이며 북한과의 무조건적인 협력을 주장했다. 이에 견줘 통일사회당은 민자통의 경쟁세력인 ‘중립화통일연맹(中立統聯)’을 지지했다.중립통련은 남북한 전역에서 민주적인 선거를 해 통일을 이루고,통일된 한국에는 중립을 보장해야 한다는 원칙을 견지했다. 장면(張勉)정부가 반공임시특례법과 데모규제법을 제정하려고 하자 혁신계는 61년 3월22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2대 악법 반대 궐기대회’를 연다. 오후 2시에 시작된 시위는 날이 어두워지면서 난동으로 변했고 횃불을 든 시위행렬이 중앙청에서 혜화동까지 서울시가를 누볐다. 횃불시위는 제2공화국 최후의 대규모 시위였다.장면 정부는 곧바로 김달호·고정훈 등 주요 혁신계인사들을 체포한다. 장면 정부하에서 혁신계는 국회 진출에 실패해 장외 세력으로 남게 된다.그들은 급진적인 학생들과 일부 소외계층의 지원을 받아 거리투쟁에 나서지만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5·16쿠데타를 맞아 다시 기나긴 잠에 빠져든다. - 4·19이전의 상황-曺奉岩 중심 진보당 두각 대한민국 출범후 국내 정치무대에서 ‘혁신계’는 항상 소수파 또는 이단이었다.남북에 분단정부가 각기 들어서 ‘6·25전쟁’까지 치른 뒤 이 땅에는‘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보수우익 정당 아니고는 발붙이기 힘든 것이현실이었다.따라서 이에 속하지 않는 사회주의자,민주사회주의자,무정부주의자,조합주의를 따르는 노동운동가 들을 구분짓지 않고 통틀어 혁신계라고 불렀다. 4월혁명 이전 혁신계를 대표한 지도자는 죽산 조봉암(竹山 曺奉岩)이다.조선공산당 창당멤버인 조봉암은 1946년 박헌영(朴憲永)을 비판한 서신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를 신문에 발표하고 공산당과 결별한다. 48년 제헌의회 선거에 무소속으로 나와 당선되며 이승만(李承晩)정권에는초대 농림장관으로 참여한다.이어 2대 국회에서 부의장이 된 조봉암은 52년대통령선거에 진보적인 강령을 내걸고 출마해 79만표를 얻는다.비록 이승만의 523만표에는 크게 못미쳤지만 그로서는 정치적 입지를 굳힌 계기가 됐다. 55년 통합야당(민주당) 결성 움직임이 일자 조봉암은 참여를 강력하게 희망하지만 신익희(申翼熙) 장면(張勉) 등으로부터 거부당한다.이에 서상일(徐相日)계와 합쳐 혁신정당인 진보당 창당에 나선다.55년 12월22일의 창당준비위원회에는 조봉암·서상일 말고도 이동화(李東華) 박기출(朴己出) 윤길중(尹吉重) 등이 동참한다. 진보당은 창당에 앞선 56년 3월 대통령 후보에 조봉암,부통령 후보에 박기출을 선출한다.이들은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인 신익희·장면과 야당후보 단일화 협상을 벌이지만 두차례 만에 결렬된다.조봉암이 대통령 후보를 사퇴하는 조건으로 ▲부통령 후보를 진보당에 양보하고 ▲집권시 조병옥(趙炳玉)김준연(金俊淵)을 중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진보당 강령 일부를 수용하라고 요구한 것이다.민주당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들이었다. 56년 3대 대통령선거는 신익희가 급서한 가운데 이승만과 조봉암의 싸움으로 진행됐다.결과는 이승만 504만표,조봉암 216만표로 나타났다.이후 조봉암은 이승만 정권에게 실재(實在)하는 위협이 된다. 한편 정·부통령 선거가 끝난 뒤 서상일계가 진보당에서 이탈한다.노선상의차이보다는 대통령후보 선출 당시의 주도권싸움 탓이었다.서상일이 후보로추대받기를 원한 반면 조봉암은 투표로 뽑을 것을 주장했고 선출 결과 부통령후보로 지명된 서상일이 고사해 박기출이 대신 후보가 된 것이었다. 진보당은 56년 11월10일 창당대회를 열어 조봉암을 위원장으로,박기출 김달호(金達鎬)를 부위원장으로,윤길중을 간사장으로 각각 선출했다.정치강령으로 ▲책임있는 혁신정치 ▲수탈없는 계획경제 ▲민주적 평화통일을 내세웠고 특히 ‘공산독재를 배격한다’고 강조했다.서상일계도 57년 10월15일 민주혁신당을 창당해 독립한다.58년 5월의 국회의원 총선을 앞둔 그해 1월13일경찰은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 간부 전원을 간첩죄 등의혐의로 검거했다. 아울러 자유당 정권은 2월25일 진보당을 등록취소한다. 조봉암은 1심에서 징역 5년을,2·3심에서 사형을 선고받는다.‘북한 지령에 호응해 진보당을 결성하고 10여차례 자금을 받은 사실이 인정된다’는 판결이었다.대법원이 재심청구를 기각한 다음날인 59년 7월31일 조봉암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진보당과 비슷한 정강정책을 내건 서상일계의 민주혁신당이 어떤 규제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진보당 사건’의 성격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적지않다.조봉암의 죽음으로 혁신계는 치명타를 입어 4월혁명까지 별다른 활동을 벌이지 못한다. 이용원기자
  • 동대문 일대 ‘교통지옥’

    “건물을 빠져나오는 데만 3시간이 걸렸습니다” 회사원 朴모씨(47)는 지난 4일 밤부터 5일 새벽까지 의류쇼핑 센터인 서울동대문구 두산타워 지하주차장에서 꼬박 3시간을 갇혀 있어야 했다.건물 안팎이 모두 차량으로 뒤엉켜 옴짝달싹 못했기 때문이다. 朴씨가 쇼핑을 마치고 지하 6층에 주차돼 있는 승용차에 탄 것은 4일 밤 11시쯤.주차장은 이미 차량들로 꽉 들어찼는 데도 차량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건물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밖으로 나가려는 차와 들어오는 차들이 뒤엉킨 것은 당연한 일.지하 6층에서 한 층을 오르는 데만 무려 1시간30분이나 걸렸다.주차관리요원들도 사태수습을 포기하고 전원 철수해버렸다. 체증은 5일 새벽 경찰이 출동,차량의 건물 진입을 통제하고 출구와 입구로동시에 차들을 내보내면서 풀리기 시작했다.朴씨는 “창문을 꼭꼭 닫아놓았지만 수백대의 차량이 뿜어내는 매연을 견딜 수가 없었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건물 밖으로 나와도 여전히 ‘첩첩산중’이었다.수십대의 대형버스가 건물 주변차도를 점거한 것은 물론 두산타워와 맞은편 동대문축구장간의왕복 6차선 도로도 노선버스와 택시,승용차들이 뒤엉켜 주차장을 방불케 했다.이 때문에 이곳을 벗어나는 데만 또 1시간이 소요됐다.이용자들은 5일 낮에도 몇시간동안 ‘교통지옥’을 겪었다. 그러나 건물주측은 朴씨 등의 항의에 “연휴기간에는 지방 도매상들이 몰려 번잡해지곤 한다”는 대답만 되풀이했다.교통영향평가를 받았는데도 별 문제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 지역은 얼마전 전국에서 처음으로 ‘교통관리 특정구역’으로 지정된 곳이다.두산타워,밀리오레,프레야타운 등 대형 의류타운이 형성되면서 거의 매일 밤 청계고가와 을지로,삼일로,종로,혜화동,신설동에 이르기까지 심각한교통체증을 유발했기 때문이다.서울시는 지난달 ‘동대문주변 교통처리대책’까지 마련,이달 말까지 버스정류장을 옮기고 청계고가에서의 진입금지 등의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경찰은 그러나 “교통에 관한 한 이 곳은 손을 쓰지 못할 정도로 처음부터 잘못 조성됐다”면서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근본적인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 [제2공화국과 張勉](12)少壯派의 도전/新風會 리더 李哲承씨

    張勉정부의 안정을 뒤흔든 내부 요인은 민주당 신·구파의 대립만이 아니었다.당내 젊은 의원들,특히 신파쪽 소장파들의 반발과 도전은 만만치 않았다. 張勉내각 명단이 발표된 1960년 8월23일 밤 민주당 신·구파의 소장파 대표 두 사람이 만나 양 세력이 제휴해 내각을 견제한다는 데 합의한다.다음날신파 소장파의 주요 멤버인 金在淳의원은 “신·구파 소장의원들이 새로운서클을 형성해 정계를 정화해야 한다”는 ‘제3서클론’을 제기하고 “앞으로 구파의 朴浚圭·金泳三의원 등과 본격적으로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金의원은 이어 “우선 신파 중진들의 모임인 13인위원회 멤버를 제거해야겠다”고 발언했다.이날자 신문들은 ‘민주당 소장파가 張내각 무너뜨리기(倒閣·도각)에 나섰다’는 식으로 일제히 보도했다. 8월25일 신파쪽 소장파의원들은 정치혁신을 표방하고 ‘소장동지회’(후에‘신풍회’로 개칭)를 구성했다.참여의원은 모두 36명으로 대표 격인 총무는 李哲承,대변인은 金在淳,간사는 趙淵夏가 각각 맡았다.이들은 “당내당(黨內黨)으로서시시비비를 가리겠다”고 공언했다. 張勉의 첫 내각에는 소장파의원 누구도 장관으로 끼지 못했다.禹熙昌(외무)金載坤(상공)金學俊(체신)등 세 사람이,내각에서 국회쪽 일을 처리하는 정무차관으로 발탁됐을 뿐이다.따라서 정가에서는 “소장파 리더인 李哲承이 국방장관 직을 요구했으나 무산되자 이에 반발한 것”이라는 해석이 그럴듯하게 나돌았다. 그러나 소장동지회도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다.그것은 張총리에 대한 직접적인 불만이라기 보다 그를 둘러싸고 요직을 독점하다시피한 ‘고시파’에의불만이었다.고시파란 일제강점기에 고등문관시험을 통과해 고급관리를 한 사람들을 지칭했다.張勉의 첫 내각에서는 金永善재무 曺在千법무 申鉉燉보사金善太 무임소장관 등이 이에 해당됐다.이 그룹의 지도자는 은행가 출신인吳緯泳 국무원사무처장이었으며 이들을 흔히 ‘원내자유당계’로 불렀다. 실제로 내각이 출범하자 구파의 梁一東은 “張勉내각이 아니라 吳緯泳내각”이라고 깎아내렸고,신문에서도 “혜화동 吳씨 사랑방에 속옷 바람으로 앉아 있던 분들이 전원 입각했다”고 비아냥댔다. 소장동지회는 또 李錫基의원이 원내총무 물망에 오르자 “원내자유당계가내각 요직을 독점한 데 이어 총무까지 차지하려느냐”면서 李哲承을 원내총무로 미는 등 저항을 계속했다. 민주당 신파의 소장파가 하나의 세력을 형성한 것은 ‘7·29총선’직후부터이다.광복이후 우익학생운동을 주도해 온 李哲承은 4·19혁명에서 7·29총선에 이르는 정치적 과도기에 학생운동 동지들을 공천하고 당선시키는 데 앞장섰다.총선이 끝나자 李哲承은 30∼40대 초·재선 의원들을 규합해 리더로 떠올랐다. 하지만 신파 소장파가 이념적인 지향성을 공유(共有)하거나 결속력이 강했던 것은 아니라는 의견도 적지 않다. 초선의원으로서 張勉내각에서 내무차관을 지낸 金永求(79)는 내내 소장파모임의 멤버로 이름이 올라 있었다.그는 “젊은 국회의원들이 ‘힘은 없지만 청신(淸新)한 정치를 해보자’고 만든 모임이지 당내 서클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기억했다. 자신도 고려대교수(정치학 전공)시절 李哲承을 가르친 인연으로 이름을 올렸을 뿐이라는 것.金永求는 “李哲承의 인맥이 많아 그에게 정치적 기반이됐던 것은 사실이고 張박사도 골치아파했다”면서 가끔은 張勉총리가 자신에게 소장파를 설득하도록 지시했다고 공개했다. 어쨌든 소장파는 한때 신파 의원의 절반 가까이를 확보할만큼 세력을 키웠고 그에 따라 張勉내각에 사사건건 공격을 가했다.또 張勉정부에서는 개각이 모두 세차례 있었는데 그때마다 집요하게 물갈이를 요구했다.그렇지만 2차내각에 金在淳 외무차관·金永求 내무차관이,3차 내각에 朴珉基상공차관 등몇몇이 들어갔을 뿐 끝내 장관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1961년 1월24일 소장동지회는 ‘신풍회(新風會)’로 이름을 바꾸고 정식으로 정파의 모습을 띤다.이틀뒤에는 신민당(민주당 구파)과 무소속의 소장파가 합세해 “새생활운동을 전개하겠다”는 기치를 내걸고 ‘청조회(淸潮會)’를 만든다. 신파 지도부와 신풍회사이의 갈등은 61년 2월 ‘중석사건’으로 드디어 폭발한다.26일 신풍회의 咸종빈의원이 기자회견을 열어 “대한중석이 일본 동경식품에 중석 400t을 수출키로 하면서 100만달러의 커미션을 받는 이면계약을 맺었다”고 발설한 것이다.咸의원은 아울러 그 배후에는 吳緯泳 당시 무임소장관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폭로’는 정가에 태풍을 몰고왔다.신민당을 비롯한 야당과 신풍회는張勉정부 최대의 스캔들이 터진 것이라고 흥분했고 언론도 날마다 의혹을 대서특필했다.급기야 배후로 지목된 吳장관은 咸의원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야당 요구대로 국회에는 ‘중석사건 조사위원회’가 구성되는 지경에까지이른다. 사건이 확대되자 咸의원은 “소문을 들었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고 발뺌하고 사과하지만 張勉정부의 이미지는 이미 만신창이가 된 뒤였다.5·16후 쿠데타군은 이 사건을 대표적인 부패사례로 꼽아 철저히 수사하지만 아무런 증거를 찾아내지 못한다.張勉내각이 이 사건과 관련없음을 오히려 쿠데타세력이 입증해준 꼴이 된 셈이다. 쿠데타가 발생한 지 두달여 지나 월간 ‘사상계’가 마련한 좌담회에서 ‘당대의 독설가’로 불리던 申相楚는 張勉정부를 무너뜨린 주범으로 ‘3신(新)’을 꼽았다.‘3신’이란 이름에 신(新)자가 들어간 세가지,곧 ‘정부를무조건 두들겨팬 신문 민주당 구파가 떨어져나가 만든 신민당,그리고 신풍회였다. 張勉총리의 공보비서관을 지낸 故 宋元英(5선의원 역임)은 회고록에서 “(신풍회가)시시비비로 나온다고 하지만 항상 ‘비(非)’쪽이라 과연 당내 서클인가 의심케 하는 경우가 많았다.30년전 신풍회같은 존재가 있었다는 것은 아무리 공개정치를 표방하는 풍토였다고는 하나 지나친 것이 아닐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 - 新風會 리더 李哲承씨 李哲承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상임의장(77)은 제2공화국 때 만40살이 채 되지 않은 ‘젊은’국회의원이었다.그런데도 3선의원인 그는,소장파 의원 30여명이 속한 신풍회의 리더로서 ‘실세’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신풍회가 張勉정부를 흔들었다는 시각은 잘못된 것입니다.구체적으로 정부나 당에 해를 끼친 일이 없어요.다만 당의 명령대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지 않고 의견이나 정책을 낸 것까지 트집잡는다면 할 말은 없소만은” 李의장은,신풍회가 당내에서세력다툼을 벌이는 ‘파벌적’인 성격을 띤 게 아니고 일종의 정책연구 모임이라고 못박았다.“신파 지도자들이 노장층이어서 정치에 새바람(新風)을 불러일으키려고 했다”는 주장이다. “제2공화국이 내각책임제를 택했지만 사실 당에서 내각에 보낼 장관이나정무차관 재목이 충분하질 않았어요.지방자치제도 시행 중이니 시·도의원들도 키워야 했고.신풍회가 사람을 키워 대를 이어주는 연결고리 구실을 했다고 보면 됩니다” 張勉내각이 들어선 뒤 신풍회 멤버들이 정무차관으로 많이 들어간 것도 그때문이라는 설명이다. 李의장은,張내각 출범때 국방장관 자리를 얻지 못해 곧바로 ‘도각 운운’했지 않느냐는 질문에 “뭘 도각까지야….신문들이 과장한 거지”라고 부인했다.그러나 국방장관 자리와 관련해서는 분명하게 입장을 밝혔다. “남들도 다 내가 국방장관이 된다고들 믿었어요.민주당 신파에서 군 인사들이나 국방관계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고.또 나는 그때 이미 장관이 될만한 리더였습니다” 하지만 노장의원들이 결사반대했다고 한다.李의장은 그 까닭을 “내가 소장파 40명쯤을 거느리고 있는데 군까지 쥐게 되면 총리 자리를 노릴까 걱정해서”라고 풀이했다.그러면서 “張박사가 총리를 한두차례하고 난 다음에는소장파가 못할 것도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李의장은 “내가 국방장관이 됐다면 쿠데타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겠느냐”면서 “(쿠데타 세력이)할 생각도 못했고 하려 해도 막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민주당이나 제2공화국,그리고 張勉총리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거부했다.민주당은 비록 파벌과 견해차를 갖고 있었지만 순수한 민주적 정당이었고,張勉정부도 정경유착이 없는 깨끗한 정부였다고 평가했다. “대화와 타협,그리고 법치(法治)가 민주당과 張勉정부의 기본 방침이었다”고 밝힌 李의장은 “통솔력이 부족해 질서를 잡지 못했다고들 하는데 그때는 시위를 단속하는 법이 없어 데모 자체가 불법이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李의장은 5·16쿠데타를 일본 도쿄에서 맞았다.미국에서 열린 제16차 UN총회에 참석하고 귀국하던 길이었다.미국으로 돌아가 망명생활을 하다 1964년귀국하지만 정치활동정화법에 묶여 71년에야 8대 의원으로 정계에 복귀한다. “張박사는 덕망과 인격 면에서는 성직자보다도 깨끗한 분이었습니다.외유내강한 분이기도 하고.부통령 시절 저격당했을 때도 의연했고,형무소나 다름없는 순화동 부통령공관을 끝까지 지켰습니다.그렇지만 난세의 지도자로서는 약했다고 봅니다”李의장은 요즘도 張勉총리가 그립다는 말로 이야기를 끝맺었다.
  • [제2공화국과 張勉](8)尹潽善과의 갈등(下)/윤보선과 평가

    1961년 5월16일 새벽2시쯤 張勉은 총리 숙소로 쓰는 반도호텔 809호실에서경호대장의 다급한 목소리에 일어났다.張都暎 육군참모총장이 급한 일로 전화를 했다는 것이었다. 張都暎은 “육군 30사단이 장난질 하려는 것을 막았고,현재 해병과 공수부대일부가 서울로 들어오려는 것을 한강다리에서 막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어“염려마시고 그저 그런 일이 있다는 것만 아십시오”라고 덧붙였다. 張勉은 와서 직접 보고하라고 지시하고 기다리지만 張都暎은 오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총성이 요란하게 들려오자 張勉은 경호대장 등과 함께 지프를타고 반도호텔을 떠났다.거리가 가까운 미국대사관과 대사관 사택을 찾았지만 문을 열지 않아 들어가지 못했다. 그는 “잠시 몸을 피하려고 아무도 짐작하지 못할 혜화동 수녀원으로 갔다”(회고록 중에서).그리고는 55시간이 지난 18일 낮12시쯤에야 모습을 드러내국무회의를 주재하고 내각 총사퇴를 발표한다. 尹潽善은 새벽 3시30분에서 4시 사이 침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張勉과 마찬가지로 張都暎으로부터 전화가 온 것이었다.張都暎은 “쿠데타가 일어나 헌병을 동원해 한강다리에서 저지하려 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뚫렸다. 쿠데타군이 시내로 들어왔는데 진압될 것같지 않다”고 우려했다(尹潽善 회고록에서). 尹潽善은 “피신하라는 말처럼 들렸지만 일신의 안전만을 위해 300만 서울시민을 버릴 수 없고” 또 “그들하고 사리를 따져볼 수도 있을 것이요, 설령피살이 된대도 그리 부끄러울 것은 없다고 생각해” 자리를 지킨다. 5·16쿠데타가 발생해 제2공화국이 결국 무너지기까지 국무총리 張勉은 몸을 숨겼고 대통령 尹潽善은 현장에 남아 ‘유일한 헌법기관’으로서 쿠데타세력을 상대한다.쿠데타를 적극적으로 분쇄하지 못하고 자기 한몸 피신하는 데 그쳤던 張勉은 제2공화국 붕괴에 변명할 여지가 없다.그렇다면 尹潽善은 제 할일을 다한 걸까. 16일 낮 쿠데타 주역인 朴正熙소장과 柳原植대령이 청와대로 尹潽善을 찾아왔다.이 자리에는 玄錫虎국방장관과 張都暎 등이 함께 있었다.玄錫虎는 쿠데타 소식을 듣고 반도호텔로 가서 張勉을 만나고 헤어진 뒤 쿠데타군에게 체포된 상태였다. 접견실에서 朴正熙 일행을 만난 尹潽善은 “올 것이 왔구나”라는 말로 입을열었다.이 말은 훗날 두고두고 논란거리가 되었다. 尹潽善을 비난하는 쪽은 “쿠데타를 기다렸다는 투의 이 표현이야말로 그가대통령 직에서 물러나기까지 쿠데타세력과 관련해 보여준 행동을 설명하는키워드”라고 풀이했다.현장에 있던 玄錫虎는 회고록에서,尹潽善이 이 말에이어 “나라를 구하는 길은 이 길밖에 없었다”면서 張勉정부에 비난을 퍼붓고 朴正熙의 거사에 찬사를 보냈다고 밝혔다. 尹潽善의 설명은 물론 다르다.“그들(朴正熙 일행)을 대하는 마음이 서글퍼나도 모르게 이 말이 떨어졌고,당시 사회적·정치적 혼란상을 생각할 때 당장 무슨 일이 터지고야 말 것같아서”였다는 것이다. 어쨌든 尹潽善은 “군인들끼리 피를 흘리는 일이 없도록 잘 수습하라”는 말로 발언을 끝낸다.모두 물러갔다가 朴正熙와 柳原植이 다시 들어왔다.柳原植이 “저희는 이 혁명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라면서과거에도 대통령에게 충성을다했고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다짐했다.마치 張勉내각이 물러나면 권력을 尹潽善에게 넘길 것처럼 들리게끔 하는말이었다. 尹潽善은 이 자리에서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지만 미 국무부 자료를 보면,그는 白樂濬 참의원의장을 쿠데타군쪽에 보내 ‘헌법 69조에 따라 尹대통령이 새 총리를 임명한다면 군부가 권력을 이양하고 철수할 것인가’를 타진한다. 한편 朴正熙 일행에 이어 마셜 그린 주한미대리대사와 매그루더 UN군사령관이 함께 尹潽善을 방문한다.두 사람은 이미 “張勉총리 영도 하의 합헌적인정부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뒤였다.두 사람은 “서울시내에 들어온쿠데타군은 4,000명이 채 안되므로 4만 병력만 출동시켜 서울을 포위해 들어가면 쿠데타군이 항복할 것”이라며 무력진압을 주장했다. 그러나 尹潽善은 “국군끼리 전투를 벌여 서울이 불바다가 되면 북한 인민군이 기회를 노려 남침한다”는 논리로 끝내 반대한다.그린은 “각하의 이번결정으로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군부통치가 계속될 것”이라는 ‘경고’를 남기고 돌아간다.매그루더는 尹潽善과의 면담후 본국 합참본부에 전문을 보내“尹대통령은 張총리를 몰아내고 싶어 가능한 법적 절차를 찾고 있다”고 보고한다. 尹潽善은 이날 오후 張都暎이 요청한 계엄령을 승인했으며 17일 오후 2시에는 대국민 성명을 발표해 “군사혁명위원회가 정부 기능을 대신한다”고 밝혀 張내각 퇴진을 기정사실로 만들었다.또 쿠데타를 “애국적인 군사혁명”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한편 張勉은 수녀원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사태의 전개를 알고 있었고 16일아침 그린 대리대사와 통화도 한다(그린의 증언).그는 내각 총사퇴를 결심한 이유를 “미대사관에서 尹씨의 태도를 연락받았는데 그가 쿠데타 진압을 방지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쓰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회고록에서밝혔다.그러나 張勉은 尹潽善에게 직접 연락해 쿠데타 저지를 논의하거나,최소한 그의 뜻이 무엇인지를 직접 알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尹潽善은 張勉의 행방을 알지도 못했지만 그와 상관없이 제2공화국을 지키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는다. 정치적 지향과 인적 구성 등에서 이질적이었던 민주당의 신·구파,그리고 그들의 대표격인 張勉총리와 尹潽善대통령의 갈등과 대립은 갓 피어난 민주주의의 싹을 짓밟히게 하는 크나큰 비극을 초래한다.제2공화국 붕괴의 책임을저울질한다면 張勉과 尹潽善 그 어느쪽으로도 저울추가 결코 기울지는 않을것이다. 이용원- [기고] 張勉과 尹潽善 평가 5·16쿠데타가 일어나 張勉총리의 소재가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尹潽善대통령이 “올 것이 왔다”며 쿠데타를 추인한 것은 두 사람의 비극적 결합을잘 말해준다.우리가 슈뢰더 독일총리는 알아도 대통령 이름은 잘 모르듯 내각책임제 아래 대통령은 명목상 존재에 불과하다.그런데도 尹潽善은 대통령중심제의 대통령처럼 행세하다 막상 단호한 조치가 필요한 때 “올 것이 왔다”며 쿠데타를 추인해 버렸다. 尹潽善에게 쿠데타가 ‘올 것’인 이유는 자신의 파벌이 정권을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당시 집권당은 한민당 후신인 구파와,재야 민주화세력인 신파의 연합으로 구성된 민주당이었다.申翼熙·趙炳玉같은 비중 있는 지도자가사망한 뒤 구파를 이끌게 된 尹潽善은 전형적인 과거형 정치가였다. 구파의 전신인 한민당은 우익민족주의 세력과 친일파 세력이 혼재한 정당이었다.UN한국위원단이 ‘보수적 지주정당’이라고 지적했듯이 해방직후 토지개혁에 반대하고 반민족행위처벌법에도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으며,李承晩의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했다.따라서 한민당이 李承晩과 결별하고 야당의 길을걸은 것은 이념과 정책상의 대립이라기보다 李承晩의 권력독점에 대한 반발때문이었다.한민당은 해방이후 좌익세력의 급진성과 李承晩의 독선이 낳은‘반감(反感)’이란 정치적 공간을 적절히 점유해 생존한 과거형 정당인 것이다. 4월혁명후 ‘대통령=구파,총리=신파’라는 합의 덕에 대통령에 선출된 尹潽善이,자파인 金度演을 총리로 지명한 것은 정치적 합의를 휴지조각으로 여기는 과거형 정치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대통령과 총리를 모두 차지하려던 계획이 실패하자 구파는 결국 민주당을 뛰쳐나가 신민당을 창당한다.尹潽善은대통령으로서 이런 분열적 행위를 제지하기보다는 부추기는듯한 처신을 보였고,정부를 비판하는 담화를 발표해 張勉정부 흔들기에 여념이 없었다.개인과 파벌의 이익을 모든 가치보다 우선시한 행위인 것이다. 반면 신파를 이끈 張勉은 1960년대 한국상황에서는 등장이 너무 빨랐던 미래형 정치가이다.자유민주주의에의 신념과 종교적 경건함이 밴 구도자적(求道者的) 정치가인 張勉은 2000년을 눈앞에 둔 현재에도 시기상조일지 모를 정도로 선진적인 정치가였다.그는 尹潽善이 이끄는 구파의 끝없는 시비를 인내하면서,1960년 10월 제2공화국 경축식에서 말한대로 “정부의 시정목표로서경제제일주의”를 주창한 실질적이고 선각적인 지도자였다. 쿠데타 세력이 마치 자신의 업적인양 내세운 경제개발5개년계획이나 국토건설사업은 모두 張勉정부에서 경제제일주의를 실천하고자 수립한 것들이다.시장경제원리에 입각해 경제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한 張勉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이 실천되었더라면 5·16이후 정경유착으로 성장한 ‘재벌신화’라는 어두운 경제성장사는 ‘국민신화’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5·16후 두 사람의행보도 차이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張勉은 쿠데타를 막지 못한 역사의 죄인이란 죄의식 속에 참회하다가 죽어간 반면,尹潽善은 ‘올 것이 왔다’던 쿠데타세력의 朴正熙 후보와 1963년과 67년 두 차례 대결했으나 패배했다.현실적으로 대통령에 대한 꿈을 접었을 무렵인 1980년대에는 全斗煥 정권에 협력하다가 세상을 떠났다.쿠데타후 두 사람의 삶은 현재우리 정치의 낙후성의 한 원인을 말없이 웅변해준다. [李德 一 역사평론가·문학박사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장]
  • 기업 후원중단… 관객감소… 공연 줄고…/98 공연계 결산

    ◎뮤지컬 ‘명성황후’ 美서 롱런 연극사 큰획/예술의 전당 오페라페스티벌 기획공연 새 모델/최승희 춤 재현 북한국적 백향주 내한 큰 의미 IMF 한파는 국내 공연계에도 어김없이 불어닥쳤다. 기업체들의 후원중단과 관람객 감소로 공연횟수는 감소하는 등 양적빈곤을 겪었으나 뮤지컬 ‘명성황후’는 뉴욕과 LA에서 장기 공연,한국 연극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평을 얻기도 했다. ▷음악◁ 국내 교향악계를 대표하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의 경우 연간 90여회에 달했던 연주회가 올해 70여회로 준 것이 대표적인 사례. 또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와 음악당의 공연횟수는 지난해 1,538회에서 1,414회로 줄었다. 그러나 이같은 양적 빈곤속에서도 오페라 50주년을 맞아 특색있는 기획공연들이 마련돼 공연예술의 질을 높인 것은 평가할 만하다. 특히 예술의 전당이 지난 11월 한달간 펼친 오페라페스티벌은 △출연진 오디션선발 △레퍼토리시스템 도입 △조기예매제 시행 등 기획공연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해 관심을 모았다. 예술의 전당측은 이 공연으로 유료관객 78%,입장료 수입 4억여원이라는 오페라 공연사상 초유의 성과를 거뒀다. ▷연극◁ 연극은 궁핍에 내성이 강해 IMF라고 특별히 더 힘든 것도 없었다. 외형적으론 외국 초청공연이 지난해 33건에서 올 19건으로 줄어들었다. 더 큰 비극은 내부의 냉대. 국립극장이 대관료 수익을 위해 전국대학연극제 공동주최를 포기한 것이 단적인 예다. 하지만 ‘서울국제연극제’와 ‘과천 세계마당극 큰잔치’ 등 국제 행사와 혜화동1번지 페스티벌,예술의 전당의 ‘우리시대의 연극 시리즈’ 등이 펼쳐져 다양한 작품들이 등장했다. 또 외형적으로 총 196개의 작품(창작극 123편 번역극 55편 뮤지컬 18편)이 무대에 올랐다. 창작극의 증가 속에 ‘눈물의 여왕’‘눈물 젖은 두만강’‘목포의 눈물’등 악극이 관객동원 등에서 강세였다.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아,정정화’‘대한민국 안중근’의 기념공연도 두드러졌다. 이와 함께 해외진출도 잇따랐다. 특히 뉴욕과 LA에서 장기 공연한 뮤지컬 ‘명성황후’는 한국 연극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평을 들었다. 프랑스 아비뇽축제에서 한국공연이 호평을 받았다. 뮤지컬 ‘해상왕 장보고’의 유럽 진출도 성공적이었다. ▷무용◁ 공연횟수는 증가했으며 여느해와 달리 학술행사도 활발했으나 내용면에서는 수준에 못미친다는 지적이 많다. 여러 장르중 발레부문 활동이 두드러졌다. 유니버설발레단과 서울발레시어터가 미국·일본공연을,국립발레단의 주연급 무용수들은 아시아 아트페스티벌에 참가,일본 동경발레단과 합동공연을 갖는 등 국제교류를 주도했다. 김지영과 김용걸이 파리 국제콩쿠르 듀엣부문에서 1등상을 수상한 점도 성과다. 올해 새로 기획된 ‘스페인 음악과 우리 춤의 만남’은 춤의 표현영역확대란 점에서 기획의도가 돋보였다. 안애순,박호빈,김은희,홍승엽,이혜경의 작품 등 수작도 많이 나왔다. 그러나 기획공연이 상반기에 몰려있어 겹치기 출연으로 부작용도 많았다. 월북무용가 최승희의 춤을 재현한 북한국적의 무용가 백향주 내한공연과 리틀엔젤스예술단이 평양공연을 실현,실향민의 가슴을 설레이게 했다. 또한 미국 사전전문 출판사인 세인트제임스에서펴낸 98년도 ‘국제현대무용 사전’에 한국 현대무용가 7명이 올라 한국무용을 세계에 알리는데 도움이 됐다.
  • 윤영선작 ‘키스’ 3인3색 연출

    ◎이성열·박상현·김동현씨/각기 다른 작품 해석/한무대서 동시에 감삭 ‘3人3色’.한 대본을 가지고 3명의 연출자가 각각 다른 해석을 달아 한무대에 올린다. 새로운 연극형식을 끊임없이 추구해온 작가 겸 연출가 윤영선의 짧은 희곡 ‘키스’를 가지고 30대 젊은 연출가 이성열 박상현 김동현 등 3명이 각각 다른 형태의 극으로 꾸며 공연한다. 지난해 1월 프로젝트 그룹 ‘작은 파티’를 결성한 이들이 사흘동안 초연한뒤 실험적 형식으로 눈길을 모아 그해 5월 혜화동1번지 무대에 올려 호평을 받았던 작품. 공교롭게도 1,2회때 연출까지 맡았던 윤영선이 동해대 교수로 발령받는 바람에 자연스레 인원교체가 불가피해졌다. 그가 연출했던 ‘키스 그 하나’를 김동현이 맡게 됨에 따라 전체적으로 새로운 분위기를 내게 됐다. ‘키스’의 대본은 의외로 간단하다. 남자와 여자가 끊임없이 대화를 하지만 말은 갈등을 낳고 불화를 양산할 따름이다. 다만 말을 늘어놓는 입술에 마침표를 찍는 키스를 통해 의사불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줄거리. 그러나 동일한 대본으로 빚어내는 ‘키스’는 3명의 연출가가 설정한 전혀 다른 상황에서의 전개로 저마다 다른 감각을 느끼게끔 꾸며진다. 하나의 원작이 어떻게 3개의 다른 무대로 변환되는지를 지켜보면서 연극에서의 연출의 중요성과 묘미를 실감할 수 있는 무대다. 먼저 김동현은 남과 여,둘이서 하는 키스로 해석했다. 데뷔작 ‘꿈,퐁텐블로’를 시작으로 ‘매일 만나기엔 우린 너무 사랑했었다 ‘멕베드’ 등을 통해 감각적인 무대를 만들어온 신예 연출가로 올해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을 졸업한 참신한 얼굴들을 등장시켜 새로운 분위기를 낸다. 박상현은 마임이스트 남긍호의 혼자하는 키스로 ‘키스 그 둘’을 이어가고 이성열은 11명의 배우들이 엮어가는 불특정 다수의 멀티 키스로 ‘키스 그 셋’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17∼29일 오후 4시40분·7시30분.(첫날 낮공연 없음) 문예회관 소극장.(02)813­1674
  • 혜화동 1번지 페스티벌/30대 연출가 5명 릴레이 무대

    ◎국내 초연 번역·창작극 5편 선보여 차세대 우리 연극계를 이끌 기대주로 주목받고 있는 김광보 박근형 손정우 이성열 최용훈 등 30대 연출가 5명이 릴레이식으로 작품을 올리는 ‘98 혜화동1번지 페스티벌’이 2일부터 시작된다. 이들은 도전적 연극정신을 되살려보자는 취지로 93년 100석 남짓한 소극장 혜화동 1번지를 중심으로 창립된 ‘혜화동 1번지 1기’에 이은 2기 동인들.소극장 경영과 함께 연극의 독자성을 지키는 소집단 문화운동을 펴기위해 올해 처음으로 연극 페스티벌을 마련했다. ‘일상과 현실전’을 주제로 한 이번 페스티벌에선 국내 초연인 번역극 3편과 창작극 2편 등 5편이 공연된다.첫 작품은 극단 백수광대의 ‘수족관 가는길’(2∼13일).‘키스’ ‘굿모닝?체홉’ 등 화제작을 내놨던 이성열이 연출했다. 이어 최용훈 연출의 ‘줌 인’(17∼27일),‘만두’(10월1∼11일 박근형 연출),‘열애기(熱愛記)’(10월15∼25일 김광보 연출),‘그림쓰기’(10월29일∼11월8일 손정우 연출)가 차례로 소개된다.이번 페스티벌에선 작품별 입장권(1만2,000원)과 함께 다섯 작품을 모두 감상할 수 있는 종합관람권(3만원)을 별도로 판매한다.764­3375
  • 서양화가 李大源(이세기의 인물탐구:175)

    ◎빛을 데생하는 화단의 신사/때묻지 않고 따뜻한 성품 작품에 그대로/화폭마다 생명력 약동 축제분위기 넘실/‘물방울처럼 영롱한 화경’… 독자 영역 이룩 만약 벚꽃이 만개한 눈부신 봄날에 함박눈처럼 떨어지는 꽃잎을 본 사람이라면 서양화단의 원로 李大源 화백의 그림을 아는 사람이다. 그의 쏘는듯한 붓길은 비로드에 싸인 보석더미와 그 보자기를 펼치는 순간의 차갑고도 투명한 광채(光彩)의 이미지다. 겨울에는 오색 찬란한 꽃망울이 예감되고 무더운 장마에는 무지개빛 서광이 번뜩인다. 눈송이도 빗방울도 온통 색채의 의장(意匠)이 장식되어 못위에 내리는 빗줄기가 송곳처럼 수면에 꽂히는가하면 색채의 향연이 옥구슬처럼 농원에서 굴러다닌다. 광활한 공간에 만약 그의 그림이 한점만 걸려 있어도 그곳에는 생명의 결실과 축제의 분위기가 넘칠 것이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그림은 미술’ 임을 확고히 지켜나간다. 아무리봐도 지루하지 않고 아무리 봐도 행복감에 젖어 그림속에서 흘러나오는 탐미적 향기에 도취하지 않을수 없게 된다. 초기의 여거도(與居島)등 섬이나 산그림을 보면 웅걸(雄傑)한 호방함과 분방함이 도사리지만 그림의 내면은 오늘의 별빛 미래를 산뜻하게 예고했다고 할수 있다. 예를 들어 야트막한 산야와 그 아래 펼쳐진 과수원풍경,수목에서 솟아나는 활기와 생동감은 하루의 아침과 저녁이 다르듯이 ‘늘 같은 것을 보아도 화가의 눈에는 항상 다르게 보인다’는 말대로 가장 신선한 그림을 탄생시킨다. 그가 그림을 통해 추구하려는 것은 자연의 일부를 화폭에 옮겨놓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지니고 있는 생명의 가능성과 미묘한 조율(調律)을 변주로 뿜어내는 것이다. ○자연의 생동감 變奏 그러기 위해서 그때마다 떠오르는 영감과 감상에 의존하기보다 다시한번 새롭게 사물을 관찰하여 이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관용으로 작가의 내면까지 화면에 담아낸다. 이른바 살아있는 힘으로서의 자연을 포착하기 위해 스스로 나뭇잎에 스치는 바람, 연못에 이는 잔물결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자연은 무의미하게 멀리 서있는 부동의 풍경화가 아니라 햇빛에 찰랑거리고 바람에 나부끼는 살아숨쉬는 소우주로서 재현되는 것이 특징이다. 그만큼 그의 붓길은 속도감과 운동감으로 쉴새없이 움직이고 짧은 사선과 직선과 곡선이 그때마다 의외성을 다양하게 표출해 낸다. 평론가 박래경은‘상식적이지 않은 시선과 범상치않은 구도설정은 단순하면서도 참신한 맛을 추가하여 추상화된 그림세계에 연결되고 있다’고 예언한바 있다. 예를들어 지난 60년에 그린 ‘담쟁이’는 불꺼진 창과 밋밋한 벽으로 기어오르는 메마른 덩굴에 머물고 있으나 그로부터 2년후인 62년에는 같은 벽으로 기어오르는 덩굴이라도 빨강과 황금색등 색채의 축연을 조직하는 것이 남다르다. 이른바 12계절이라해도 좋을만큼 시절따라 시간따라 환상적인 보랏빛이 발휘되고 같은 유형의 색깔이 변조되어 맨 마지막 단계에서 오리지널리티의 완결성과 정신적 탐구를 성취해낸다. ○59년 첫 개인전 열어 이경(二耕) 이대원, 가장 흔히 회자되기는 그는 화단의 신사요 멋쟁이다. 그의 그림세계에는 예술가들이 자칫 가질수 있는 퇴폐적인 낭만이나 고뇌나 파토스 대신 아파테이아의 초연(超然)이 깃들여 있다. 그와 경복고 동문에다 절친했던 고고학자 김원룡박사에 따르면 ‘말쑥한 성품으로 태어나서 평탄한 청춘시절을 보내고 만년소녀로 소문난 아름다운 미인의 내조를 받으며 정상의 예술가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대학의 총장을 거쳐 집에서는 딸들과 훌륭한 사위들에 둘러싸여 있으니 과연 이대원은 팔자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여기에다 ‘항상 멋있는 옷을 입어 화단의 드레서로 소문나 있고 미식가애 주가에다 집과 학교와 파주농원에까지 화실이 세군데나 되어 화단의 귀족’ 같은 존재지만 그의 어느 일면에도 ‘속물취(俗物臭)’는 찾아볼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예술가적 면모는 어느장소에서나 시와 정취와 인간미를 잃지 않는다. 지성적 풍모에 단정한 매너로 인해 언뜻 보기엔 날카로운 인상이지만 그와 사귄 사람들은 ‘볼수록 때묻지 않고 따뜻한 성품’ 에 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평소에는 화단의 김흥수 권옥연과 잘 어울리고 최기원과 이만익, 삼성문화재단의 손기상 상무와도 각별한 사이다. 경기도 문산에서 농림회사에다니면서 그 일대 꽤큰 과수원을 가지고 있던 一耕 李鍾林씨와 金善伊씨 사이에서 삼남중 막내. 파주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보통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서울로 이사해서 청운공립보통학교에 다닐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중학교 3학년때 선전에 연속 입선, 경복고를 졸업할때까지 미술공부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던 부친이 미술학교만은 강경하게 반대하여 지금의 서울대인 경성제국대 법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림만을 그렸고 59년에 첫개인전, 한때는 우리나라 화랑의 효시로 기록되는 반도화랑을 운영한 적이 있다. 가족은 의사이던 부인 李鉉金 여사와의 사이에 딸 다섯, 63년간 살고 있는 유명한 혜화동집은 지난 89년 출간된 ‘혜화동 50년’의 바로 그 무대다. ○한때 반도화랑 운영 그의 미술역정은 파리의 저명한 미술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에 의하면 ‘출중하고도 예외적인 인물’로서 ‘이대원은 빛을 그린다기보다 빛을 데생하는 화가’란 말로 압축된다. ‘선과 점과 조직을 사용해서 그것으로부터 그의 붓은 그가 창출한 수많은 색채로 형태를그려내기’ 때문이다. 그의 엄청난 재능들은 레스타니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그의 그림속에 있는 모든 것은 화사함과 고요함과 기쁨’에 틀림없다. 현대작가중에서 이러한 자연적인 교훈을 자신의 창작으로 성취한 사람은 별로 흔치않다. 물방울처럼 튀기는 영롱한 화경에서 그가 이룩한 이대원식 표현이란 바로 ‘이대원 자신의 화창한 인생의 음률’일 것이다. 거기에는 국경이 없으며 범우주적인 진솔한 정서와 삶의 즐거움만이 투영되어 날이 갈수록 싱싱하고 청청한 빛을 발한다. 사람을 반기는 그의 색채점묘화는 보는 이의 가슴에 루비나 사파이어같은 보석의 광채를 언제까지나 눈이 부시게 비춰주게 될것이다. ◎그의 길 ▲1921년 경기도 문산 출생 ▲1938­40년 선전 출품 ▲1945년 경성제대 법과졸업 ▲1959년 첫개인전(중앙공보관화랑) ▲1959­60년 국제자유미술전출품 ▲1962­68년 신상전·동인전출품 ▲1967­86년 홍대 미술대 교수·대학원장·학장·총장 ▲1971년 개인전(반도화랑) ▲1973년 한국근대미술 60년전·한국현역화가 100인전(국립현대미술관) ▲1975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위원 ▲1977년 개인전(현대·신세계) ▲1978년 중화민국 중화예술원 명예철학박사,영국국제하계미술전 출품 ▲1979년 뉴욕 한국화랑초대개인전 ▲1981년 회갑기념전, 성균관대 명예철학박사, 파리 살롱도톤느 출품 ▲1983·85년 현대화랑 개인전 ▲1986년부터 홍대 명예교수 ▲1987년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자문위원, 한국박물관회회장,개인전(강남현대) ▲1988년 부산개인전 ▲1988­91년 국제현대미술제 및 아시아국제미술전 출품 ▲1989년 개인전,대한민국예술원회원 1993년 대한민국 예술원회장 ▲1995년 ‘이대원 1990­95년’개인전(갤러리 현대) 국민훈장목련장(73년) 5·16민족상(88년) 대한민국예술원상(91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94년) 오지호미술상·대한민국금관문화훈장(95년) 역서 柳宗悅저 ‘한국과 그 예술’(74년)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96년) 화집 ‘이대원’(81년) ‘이대원,혜화동 50년’(89년)
  • 추기경의 歸去來/崔弘運 논설위원(外言內言)

    천주교에서 사제(司祭)를 양성하는 신학교를 ‘못자리’라고 표현한다. 라틴어로는 SEMINARIUM이다. 이 못자리에서 다 자란 ‘모들’은 이 세상 곳곳으로 흩어져 신앙의 씨앗을 옮겨 심으며 기쁜 소식을 전하게 된다. 한국 최초의 못자리는 프랑스인 신부 푸르티에가 1855년 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 베론에 세운 성요셉신학당이다. 이 학교는 1866년 대원군의 병인대박해 때 폐교되고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1885년 10월 28일 강원도 원주시 부흥골에 예수성심신학교로 재탄생된다. 이 학교가 이듬해,오늘의 성심여고 자리인 서울 용산구 원효로로 옮겼다가 1942년 일제의 탄압으로 다시 폐교된 뒤 해방이 되던 1945년 오늘의 동성중·고교 뒤편 낙산 기슭에 가톨릭대학 교의 전신인 경성천주공교신학교 즉,성신신학교로 모습을 드러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이던 金壽煥 추기경이 28일 바로 이곳,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사제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제 13대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된 鄭鎭奭 대주교의 착좌식이 있기 하루 전의 일이다. 지난 30년 동안 교구장으로 재직하며 기거하던 명동성당 구내 교구청 사제관을 떠나는 마음이야 이루말할 수 없이 섭섭하겠지만 새로운 기대와 설레임이 가득할 것으로 여겨진다. 金추기경으로서는 실로 48년만에 되돌아가는 못자리며 본가(本家)이기 때문이다. 이 곳을 떠나 그야말로 할 일을 다하고 귀가하는 노사제의 심정은 과연 어떠할 지,궁금하기만 하다. 金 추기경은 지난 41년 소신학교 과정인 동성상업학교 을반을 졸업하고 일본 상지대 철학과에 재학중 학도병으로 끌려가 동남아전선에서 여러 차례 사선(死線)을 넘기도 했다. 해방이 되자 이 곳 성신대신학교에서 6·25전쟁이 나던 50년까지 사제수업을 받은 뒤 피란 길에 올랐다가 51년 9월 15일 대구 성유스티노신학교에서 사제로 서품됐다. 그러니까 金 추기경에게 혜화동 성신교정은 자신을 사제로 키워준 못자리며 언제나 변함없는 고향 집인 셈이다. 金 추기경은 지난 19일부터 교구사제와 수도자,평신도들과의 송별 감사미사를 잇따라 올리며 명동을 떠날 채비를 했다. 추기경은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저는 점점 작아지고 제 뒤에 오시는 분은 점점 더 커지길 기원한다”고 했다. 후임자에 대한 깊은 애정의 표현이다. 비록 현직에서는 떠났지만 언제나 우리 곁에 남아있을 큰 어른의 모습임에 틀림없다.
  • 鄭鎭奭 서울대교구장 착좌식/어제 명동성당서

    金壽煥 추기경에 이어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13대 교구장으로 서임된 鄭鎭奭 대주교 (니콜라오)의 착좌식이 29일 상오 10시 명동 성당에서 거행됐다. 이날 착좌미사는 조반니 바티스타 모란디니 주한 교황청 대사의 교구장 임명선포와 임명장 전달,교구장 착좌,사제단의 순명서약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鄭대주교는 강론을 통해 “부족한 제가 큰 짐을 맡아 감당해낼지 걱정된다”며 사제단과 신도들에게 은총과 도움을 베풀어 줄것을 간청했다. 한편 金추기경은 28일 상오 30년 동안 정들었던 명동성당 사제관을 떠나 서울 혜화동 성신교정 사제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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