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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광주시 공무원 이틀 새 7명 확진…직원 전수검사

    경기 광주시 공무원 이틀 새 7명 확진…직원 전수검사

    경기 광주시와 이천시 공무원 10명이 이틀 새 잇따라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아 두 지자체가 직원들을 대상으로 전수검사에 들어갔다. 광주시는 15일 본청 5명과 오포읍 행정복지센터 1명 등 직원 6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다고 밝혔다. 앞서 광주시는 전날 본청 직원 A씨가 양성 판정을 받자 본청 전체 직원 860여명을 대상으로 진단 검사를 해 처음 확진된 직원과 같은 부서 4명 등 5명이 추가로 감염된 사실을 확인했다. 오포읍 행정복지센터 직원의 경우 배우자가 확진돼 별도로 진단검사를 받았다. 광주시는 이에 따라 확진자가 집단발생한 본청 8층을 폐쇄하고 13개 읍·면·동 행정복지센터 직원 400여명에 대해서도 이날 진단검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이천시에서도 증포동 행정복지센터 직원 1명이 이날 추가로 확진돼 공무원 누적 확진자가 3명이 됐다. 이 직원은 전날 확진된 형제 공무원 2명 중 1명과 접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천시 본청 7층과 9층에 근무하는 형제 공무원 2명은 전날 차례로 확진 판정을 받아 이들의 이동 동선에 포함된 본청 직원 등 400여명이 진단검사를 받았다. 이천시는 청사 7층과 9층을 폐쇄한 채 이날 본청과 읍·면·동행정복지센터 직원 800여명을 대상으로 추가 검사에 들어갔다.
  • 제자와 茶맹세 아직도 그윽… 민초의 한 머금은 길따라 뚜벅뚜벅

    제자와 茶맹세 아직도 그윽… 민초의 한 머금은 길따라 뚜벅뚜벅

    올봄 영화 ‘자산어보’가 개봉하면서, 손암 정약전과 다산 정약용 형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극중 ‘강진 선생’으로 불리는 다산(류승룡 분)의 학자적, 철학자적 모습이 관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당대 세상을 호령하던 고관대작(형조참의) 자리에 있다가, 머나먼 전남 강진 땅에 유배를 와 묵묵히 학문 연구에 몰두하는 정약용의 인품은 주인공 정약전(설경구 분)의 극중 비중에 견주어도 결코 모자람이 없었다. 대선을 앞둔 최근엔 소설 ‘대통령 정약용’이 눈길을 끌고 있다. 타임슬립을 통해 현대로 온 다산이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간다는 유쾌한 상상을 담았다. 대통령 다산이 추진한다는 ‘실학21’의 바탕이 된 1표2서(‘목민심서’·‘흠흠신서’·‘경세유표’)를 저술한 땅, 강진을 다시 돌아보니 그동안 보고 알았던 것보다 많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역사상 한반도 최고의 천재로 꼽히는 다산은 그야말로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였다. 그는 유학자이면서 실학을 주도적으로 연구했으며 행정가이자 정치가, 그리고 법학과 법의학을 두루 전공한 법률가였다. 또한 의학과 지리학, 건축학에 통달한 과학자요, 발명가였다. 게다가 언어학자, 아동 교육자, 걸출한 시인에다 차 전문가, 동서양사를 넘나드는 역사 철학 이론가이기도 했다. 18세기 말 조선은 만사‘다’통이었다. 다산을 거치면 안 될 게 없었다. 15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의 다빈치처럼. 아, 공교롭게도 다산과 다빈치, 둘 다 이름 첫 자에 ‘다’자가 들어간다. 마침 다빈치도 유배는 아니지만 1516년 고향을 떠나 프랑스 루아르 강가의 앙부아즈 궁에서 살며 ‘모나리자’ 등 역작을 남겼다. 그런 다산이 강진에 내려왔다. 조용한 강진에 유배를 오는 바람에 그의 눈부신 업적이 꽃을 피웠다고 하는 것도 맞겠다. 18년 동안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수많은 저서와 서간, 일화, 대한민국 차문화가 탄생했다. 당시 조선의 유형(流刑)은 명나라의 대명률을 따랐다. 죄의 경중에 맞춰 2000리, 2500리, 3000리 등으로 올려가며 유배를 보내는 거다. 1리가 400m쯤이니 1000리면 한양에서 직선거리로 전남 완도까지도 갈 수 있다. 조선에선 이런 거리가 나올 수 없는 터라 일부러 여러 지역을 거치며 행로를 늘렸다. 세종이 ‘실정에 맞게’ 600, 750, 900리로 조정하기 전까지 1년 가까이 돌고도는 유배길을 떠났다. 유배는 많은 것을 남겼다. 깡시골인 유배지로 한양의 높은 지식과 문화 산업이 수혈됐다. 당쟁이 치열했던 조선 때 이름난 관직자는 대부분 유배를 다녀왔을 만큼 유배는 ‘일상’이었다. 정조는 창덕궁 부용정에 인공 섬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신하들과 시 짓기 내기를 하다가 ‘잠시 쉬는’ 벌칙으로 인공 섬에 유형을 보내기도 했다. 블루마블 게임에서 ‘무인도’ 같은 의미다. 그만큼 유형은 고급 관리를 대상으로 했다는 뜻이다. 시에 능한 다산이 ‘인공 섬’에 유배를 갔는지 알 수는 없지만 다산을 친애하던 정조가 승하한 후, 정말 강진 땅으로 기나긴 유형을 떠나게 됐다. 그나마 강진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축에 속했다. 예나 지금이나 유형을 가기도, 여행하기도 딱 적당한 거리다. 프로야구의 옛 넥센 히어로즈(현 키움 히어로즈)는 2군 구장을 강진에 뒀는데 당시 1군 선수가 2군에 내려가면 “유배간다”고 자조했다. 당시 몇몇 선수들은 강진에서 2군 생활을 경험하며 다산의 후예가 됐다.다산이 처음 도착한 곳이 강진읍의 사의재다. 다산의 인품을 알아본 주막 동문매반가(東門賣飯家) 주모의 호의로 여기서 4년간 생활했다. 다산은 이 주막에 사의재(四宜齋)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생각과 외모, 말, 움직임을 네(四) 가지 덕목으로 삼아 마땅히(宜) 바로잡는 집이란 뜻이다. 다산의 일기에 따르면 1803년 겨울의 일이다. 초가 주막이던 본래 사의재 건물은 사라졌지만 2007년 강진군청은 이를 복원해 한옥체험 숙소, 식당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남도 강진 음식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사의재는 아욱국이 맛있기로 소문났다. 다행히 유배지 주위에 가시나무를 심어 외부인과의 접촉을 막는 ‘위리안치’는 아니었다. ‘강진 선생’ 다산은 고성사 보은산방, 제자 이청의 집 등을 전전하다 47세이던 1808년 봄에 귤동리 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산의 외가 쪽 집안인 해남 윤씨 윤단과 윤규로의 선처 덕분이었다.(해남 윤씨 윤선도는 무려 25년을 유배지에서 생을 보낸 ‘유배의 왕’이다.) 다산은 산정 초당을 고쳐 다산초당이라 이름 짓고 그곳에서 윤규로의 네 아들과 조카 둘을 가르쳤다. 다산은 18년 유배 기간 중 다산초당에서 약 11년을 머물며 다양한 연구와 저술 활동을 했다. 저서는 ‘목민심서’, ‘경세유표’를 비롯한 500여권에 달한다. 이를 총정리한 ‘여유당전서’는 철학, 법제, 종교, 악경, 의술, 천문, 측량, 건축 등 모든 기초학문과 실용학문을 총망라하고 있다. 애초의 초당은 무너지고 1958년 강진 다산유적보존회가 현재 초당을 다시 지었다. 다만 원래 초당 건물이 아니라 목조 기와건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추사 김정희가 쓴 ‘다산초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초당 뒤 바위에는 다산이 직접 깎은 글자 ‘丁石’(정석)이 새겨져 있으며 앞뜰에는 차를 달였다는 ‘청석’이 있고 한켠에는 ‘약천’이라는 약수터가 있다. 초당 왼쪽에는 작은 연지가 있다. 초당에 관어재(觀魚齋)란 현판이 따로 있는 것으로 봐, 연지에 잉어를 키웠을 것으로 유추된다.초당 뒤 가파른 길은 만덕산 백련사로 이어진다. 꿀럭꿀럭한 산길을 15분 정도 걸으면 동백숲으로 유명한 고찰 백련사로 갈 수 있다. 이 길이 ‘사색의 길’이다. 다산과 백련사 혜장선사의 만남이 이뤄진 길이다. 다산은 차와 바다를 찾아 백련사로 향했고 혜장은 스승과 책을 찾아 초당을 오갔다. 유배 와 제자를 가르치며 산중칩거하던 다산이 다른 철학(불교)을 통해 학식과 견문을 넓힐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당대의 학승 혜장 덕분일 수도 있다. 산중 차향은 그렇게 피어나 학문으로 승화됐다.다산은 강진의 아름다운 산(만덕산, 월출산)과 강(탐진강), 바다(강진만) 등 자연을 사랑했다. 특히 월출산 옥판봉을 바라보는 백운동 원림과 그 인근에서 생산되는 야생차를 각별히 좋아했다. 월출산의 남쪽 월남(베트남이 아니다) 마을에 이르면 다산의 차를 재배했던 다원이 나온다. 전남 최대 가람이었던 월남사지 앞에 차를 재배하며 제다(製茶)해온 다부 이한영 가문의 생가 다향산방과 다원, 전통차문화원이자 시음장이 함께 있다. 이한영의 선조는 다산의 제자인 이시헌이다. 1830년 해배 후 광주(현 경기 남양주)로 올라간 다산은 제자 중 막내인 이시헌에게 편지를 보낸다. “지난번 보내준 차는 잘 받았다. 고맙다. 내 몸이 좋지 않아 오직 떡차(餠茶)만 의지하고 있는데 다시 곡우가 되었으니 차를 또 보내 달라”고 했다. “지난번 보내준 차는 거칠었다. 반드시 세 번 찌고 세 번 말려 곱게 빻아야 한다. 알아들었느냐?”며 나무라기도 했다.‘목민심서’를 집필한 ‘강직한 공직자’ 다산이었지만 제자에게는 단호하게 차를 보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제자와 맺은 다신계(茶信契) 때문이다. 다산이 강진을 떠나더라도, 제자들은 매년 공부한 글과 차를 보내기로 약속했다. 이시헌은 이 약속을 평생 지켰다. 약속은 100년 이상 대를 이어 전해졌고 마지막으로 이를 지킨 사람이 이한영이다. 평생 차를 위해 살아온 그는 일제강점기에 우리 땅에서 난 차가 일본 차로 바뀌어 유통되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우리 고유 상표를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백운옥판차’(白雲玉版茶)로, ‘백운동 옥판봉에서 딴 차’라는 뜻이다. 그는 하마터면 끊어질 뻔한 한국 전통차의 맥을 이었고, 백운옥판차와 금릉월산차는 다시 100여년의 세월을 지나 현 이현정 전통차문화원장에 이르고 있다. 다산이 즐기던 차가 바로 백운옥판차다. 사제 간의 다신계가 정녕 200여년 지속된 셈이다.생가 옆에는 백운동 원림(園林)이 있다. 국내에서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전통 원림이다. 이곳에도 다산의 흔적이 있다. 다산은 평소에도 백운동 원림을 찾았고 1812년에는 초의선사와 함께 백운동 12경을 방문한 후 각각 그림 같은 풍경에 대한 시(백운동 12승사)를 남겼다. 여기에 초의선사가 그린 그림(백운동도)을 묶은 것이 바로 백운첩이다. 옥판봉, 산다경, 백매오, 홍옥폭, 유상곡수, 창하벽, 정유강, 모란체, 취미선방, 정선대, 운당원 등 백운동 12경이 널리 알려지게 된 일화다.람사르 협약 생태습지로 유명한 남포 습지에도 다산과 관련된 사연이 있다. 강진만과 탐진강 물길이 만나는 남포마을은 제주, 완도 등 섬과 육지의 교역 중심지로 예부터 번성했는데 다산초당 만덕산에서 내려오면 닿는 곳이라 다산의 행차도 잦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남포마을의 옛 이름은 갈대밭이란 뜻의 갈밭마을. “강진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그 포구를 바라볼 수 있었고, 강진만의 색다른 정취는 그 포구에서 우러나오고 있었다.” 조정래의 소설 ‘한강’에 등장하는 문구다. 다산은 이곳에서 탐관오리들이 민초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세리들은 세금을 징세하기 위해 죽은 이와 갓난아이까지 군적(軍籍)에 올리는 백골징포, 황구첨정 등의 횡포를 부렸다. 도저히 군포를 감당할 수 없어 이에 항의하던 한 백성은 “아이를 낳은 내 잘못”이라며 스스로 거세하기에 이르렀다. 다산은 이 안타까운 사연을 ‘애절양’(哀絶陽)이라는 시로 남겼다.‘시아버지는 상복 벗은 지 오래고, 갓난아이는 배냇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들 삼대의 이름이 군적에 모두 실렸네/ 억울한 사연 호소하려 해도 관가 문지기는 호랑이 같고/ 이정은 크게 포효하며 외양간 소마저 끌고 갔네/ 남편이 칼 들고 들어간 방에 피가 흥건하고/ 남편은 스스로 아이 낳은 죄를 한탄하네’ ‘애절양’ 시구는 강진만 생태공원을 조망할 수 있는 남포호 전망대에 선명히 적혀 있다. 강진만 생태공원은 3282만㎡(813만평)에 이른다. 자전거와 도보를 이용한 에코 투어 코스가 마련돼 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고급 정보와 신문물을 일찍 받아들인 덕인지, 강진에는 특이한 맥주 소비 트렌드가 있다. 인구 3만 5000명 정도의 작은 도시지만 신기하게도 술집마다 미국 맥주 브랜드인 ‘버드와이저’를 팔고 있다. 서울 등 다른 도시에선 보기 힘든 풍경이다. 심지어 생맥주 체인점에서도 버드와이저를 주문하면 따로 내올 정도다. 20여년 전 강진에는 주류를 공급하는 회사가 하나밖에 없었다. 당시 이 회사가 상대적으로 고급제품이었던 버드와이저 마케팅을 펼쳤는데, 뜻밖에 이게 먹혀들어 누구나 버드와이저를 즐겨찾게 됐다는 것이다. 실제 강진은 전남에서도 주류소비량이 높은 편이라 주류회사들의 주요 마케팅 대상지였다. 이런 시장 상황이 지속되며 버드와이저가 국산 맥주보다 좋다는 이미지를 남겼고 마침내 ‘군민 맥주’로 인정받게 됐다. 싱가포르에서 ‘싱가폴 슬링’을 찾아 마시듯 무더운 여름날 강진에 간다면 시원한 버드와이저 한 잔 마셔 보는 것도 여행의 작은 즐거움이 될 듯하다. 다산이 18년이나 살며 많은 흔적을 남긴 강진 땅. 농가체험숙박 ‘푸소 프로그램’과 역사문화 체험, 청정 생태 여행 1번지로 변모한 이 청잣빛 푸른 땅에 스스로 ‘아름다운 유배’를 떠나보는 것도 역병으로 우울한 이 여름, 참 좋은 선택이 아닐까 한다. 놀고먹기연구소장 demory@naver.com■ 강진 여행 체크리스트 무엇을 볼까 이한영전통차문화원은 이현정 원장의 재미있는 해설을 들으며 백운옥판차 등 다양한 전통차 시음과 차를 구입할 수 있는 곳이다. 월남사지 잔디밭에 앉아 다식을 들며 차 소풍을 즐길 수도 있다. 민화박물관에선 민중의 삶을 그대로 녹인 민화를 통해 조상의 삶과 철학을 엿볼 수 있다. 2층에선 성문화를 표현한 한중일 3국의 춘화를 만날 수 있다.뭘 먹을까 은행나무는 한정식 미향(味鄕) 강진에서도 이름난 한정식집이다. 반찬 그릇 위에 또 그릇이 올라가는 ‘강진한정식이층탑’ 별칭이 있을 정도다. 해물과 고기 등 종류도 다양하지만 음식의 면면이 훌륭해 어느 하나 손이 안 가는 것이 없다. 토종닭과 전복, 문어를 넣고 끓인 회춘탕(해천탕)도 여름철 복달임으로 좋다. 설성식당은 한 상 가득 돼지불고기 백반상을 받는 집이다. 조선 중후기 육군 사령부가 있던 병영면에 돼지불고기 거리가 형성돼 있다. 불맛 가득한 양념 돼지고기는 물론 각종 곁들임 찬만 해도 12가지가 넘는다. 1인 1만원꼴로 값도 저렴하다.
  • 목축이던 주막선 군민맥주 캬~ 다산 걷던 동백숲서 시름 털털

    목축이던 주막선 군민맥주 캬~ 다산 걷던 동백숲서 시름 털털

    올봄 영화 ‘자산어보’가 개봉하면서, 손암 정약전과 다산 정약용 형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극중 ‘강진 선생’으로 불리는 다산(류승룡 분)의 학자적, 철학자적 모습이 관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당대 세상을 호령하던 고관대작(형조참의) 자리에 있다가, 머나먼 전남 강진 땅에 유배를 와 묵묵히 학문 연구에 몰두하는 정약용의 인품은 주인공 정약전(설경구 분)의 극중 비중에 견주어도 결코 모자람이 없었다. 대선을 앞둔 최근엔 소설 ‘대통령 정약용’이 눈길을 끌고 있다. 타임슬립을 통해 현대로 온 다산이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간다는 유쾌한 상상을 담았다. 대통령 다산이 추진한다는 ‘실학21’의 바탕이 된 1표2서(‘목민심서’·‘흠흠신서’·‘경세유표’)를 저술한 땅, 강진을 다시 돌아보니 그동안 보고 알았던 것보다 많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역사상 한반도 최고의 천재로 꼽히는 다산은 그야말로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였다. 그는 유학자이면서 실학을 주도적으로 연구했으며 행정가이자 정치가, 그리고 법학과 법의학을 두루 전공한 법률가였다. 또한 의학과 지리학, 건축학에 통달한 과학자요, 발명가였다. 게다가 언어학자, 아동 교육자, 걸출한 시인에다 차 전문가, 동서양사를 넘나드는 역사 철학 이론가이기도 했다. 18세기 말 조선은 만사‘다’통이었다. 다산을 거치면 안 될 게 없었다. 15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의 다빈치처럼. 아, 공교롭게도 다산과 다빈치, 둘 다 이름 첫 자에 ‘다’자가 들어간다. 마침 다빈치도 유배는 아니지만 1516년 고향을 떠나 프랑스 루아르 강가의 앙부아즈 궁에서 살며 ‘모나리자’ 등 역작을 남겼다. 그런 다산이 강진에 내려왔다. 조용한 강진에 유배를 오는 바람에 그의 눈부신 업적이 꽃을 피웠다고 하는 것도 맞겠다. 18년 동안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수많은 저서와 서간, 일화, 대한민국 차문화가 탄생했다. 당시 조선의 유형(流刑)은 명나라의 대명률을 따랐다. 죄의 경중에 맞춰 2000리, 2500리, 3000리 등으로 올려가며 유배를 보내는 거다. 1리가 400m쯤이니 1000리면 한양에서 직선거리로 전남 완도까지도 갈 수 있다. 조선에선 이런 거리가 나올 수 없는 터라 일부러 여러 지역을 거치며 행로를 늘렸다. 세종이 ‘실정에 맞게’ 600, 750, 900리로 조정하기 전까지 1년 가까이 돌고도는 유배길을 떠났다. 유배는 많은 것을 남겼다. 깡시골인 유배지로 한양의 높은 지식과 문화 산업이 수혈됐다. 당쟁이 치열했던 조선 때 이름난 관직자는 대부분 유배를 다녀왔을 만큼 유배는 ‘일상’이었다. 정조는 창덕궁 부용정에 인공 섬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신하들과 시 짓기 내기를 하다가 ‘잠시 쉬는’ 벌칙으로 인공 섬에 유형을 보내기도 했다. 블루마블 게임에서 ‘무인도’ 같은 의미다. 그만큼 유형은 고급 관리를 대상으로 했다는 뜻이다. 시에 능한 다산이 ‘인공 섬’에 유배를 갔는지 알 수는 없지만 다산을 친애하던 정조가 승하한 후, 정말 강진 땅으로 기나긴 유형을 떠나게 됐다. 그나마 강진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축에 속했다. 예나 지금이나 유형을 가기도, 여행하기도 딱 적당한 거리다. 프로야구의 옛 넥센 히어로즈(현 키움 히어로즈)는 2군 구장을 강진에 뒀는데 당시 1군 선수가 2군에 내려가면 “유배간다”고 자조했다. 당시 몇몇 선수들은 강진에서 2군 생활을 경험하며 다산의 후예가 됐다.다산이 처음 도착한 곳이 강진읍의 사의재다. 다산의 인품을 알아본 주막 동문매반가(東門賣飯家) 주모의 호의로 여기서 4년간 생활했다. 다산은 이 주막에 사의재(四宜齋)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생각과 외모, 말, 움직임을 네(四) 가지 덕목으로 삼아 마땅히(宜) 바로잡는 집이란 뜻이다. 다산의 일기에 따르면 1803년 겨울의 일이다. 초가 주막이던 본래 사의재 건물은 사라졌지만 2007년 강진군청은 이를 복원해 한옥체험 숙소, 식당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남도 강진 음식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사의재는 아욱국이 맛있기로 소문났다. 다행히 유배지 주위에 가시나무를 심어 외부인과의 접촉을 막는 ‘위리안치’는 아니었다. ‘강진 선생’ 다산은 고성사 보은산방, 제자 이청의 집 등을 전전하다 47세이던 1808년 봄에 귤동리 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산의 외가 쪽 집안인 해남 윤씨 윤단과 윤규로의 선처 덕분이었다.(해남 윤씨 윤선도는 무려 25년을 유배지에서 생을 보낸 ‘유배의 왕’이다.) 다산은 산정 초당을 고쳐 다산초당이라 이름 짓고 그곳에서 윤규로의 네 아들과 조카 둘을 가르쳤다. 다산은 18년 유배 기간 중 다산초당에서 약 11년을 머물며 다양한 연구와 저술 활동을 했다. 저서는 ‘목민심서’, ‘경세유표’를 비롯한 500여권에 달한다. 이를 총정리한 ‘여유당전서’는 철학, 법제, 종교, 악경, 의술, 천문, 측량, 건축 등 모든 기초학문과 실용학문을 총망라하고 있다. 애초의 초당은 무너지고 1958년 강진 다산유적보존회가 현재 초당을 다시 지었다. 다만 원래 초당 건물이 아니라 목조 기와건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추사 김정희가 쓴 ‘다산초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초당 뒤 바위에는 다산이 직접 깎은 글자 ‘丁石’(정석)이 새겨져 있으며 앞뜰에는 차를 달였다는 ‘청석’이 있고 한켠에는 ‘약천’이라는 약수터가 있다. 초당 왼쪽에는 작은 연지가 있다. 초당에 관어재(觀魚齋)란 현판이 따로 있는 것으로 봐, 연지에 잉어를 키웠을 것으로 유추된다.초당 뒤 가파른 길은 만덕산 백련사로 이어진다. 꿀럭꿀럭한 산길을 15분 정도 걸으면 동백숲으로 유명한 고찰 백련사로 갈 수 있다. 이 길이 ‘사색의 길’이다. 다산과 백련사 혜장선사의 만남이 이뤄진 길이다. 다산은 차와 바다를 찾아 백련사로 향했고 혜장은 스승과 책을 찾아 초당을 오갔다. 유배 와 제자를 가르치며 산중칩거하던 다산이 다른 철학(불교)을 통해 학식과 견문을 넓힐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당대의 학승 혜장 덕분일 수도 있다. 산중 차향은 그렇게 피어나 학문으로 승화됐다.다산은 강진의 아름다운 산(만덕산, 월출산)과 강(탐진강), 바다(강진만) 등 자연을 사랑했다. 특히 월출산 옥판봉을 바라보는 백운동 원림과 그 인근에서 생산되는 야생차를 각별히 좋아했다. 월출산의 남쪽 월남(베트남이 아니다) 마을에 이르면 다산의 차를 재배했던 다원이 나온다. 전남 최대 가람이었던 월남사지 앞에 차를 재배하며 제다(製茶)해온 다부 이한영 가문의 생가 다향산방과 다원, 전통차문화원이자 시음장이 함께 있다. 이한영의 선조는 다산의 제자인 이시헌이다. 1830년 해배 후 광주(현 경기 남양주)로 올라간 다산은 제자 중 막내인 이시헌에게 편지를 보낸다. “지난번 보내준 차는 잘 받았다. 고맙다. 내 몸이 좋지 않아 오직 떡차(餠茶)만 의지하고 있는데 다시 곡우가 되었으니 차를 또 보내 달라”고 했다. “지난번 보내준 차는 거칠었다. 반드시 세 번 찌고 세 번 말려 곱게 빻아야 한다. 알아들었느냐?”며 나무라기도 했다.‘목민심서’를 집필한 ‘강직한 공직자’ 다산이었지만 제자에게는 단호하게 차를 보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제자와 맺은 다신계(茶信契) 때문이다. 다산이 강진을 떠나더라도, 제자들은 매년 공부한 글과 차를 보내기로 약속했다. 이시헌은 이 약속을 평생 지켰다. 약속은 100년 이상 대를 이어 전해졌고 마지막으로 이를 지킨 사람이 이한영이다. 평생 차를 위해 살아온 그는 일제강점기에 우리 땅에서 난 차가 일본 차로 바뀌어 유통되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우리 고유 상표를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백운옥판차’(白雲玉版茶)로, ‘백운동 옥판봉에서 딴 차’라는 뜻이다. 그는 하마터면 끊어질 뻔한 한국 전통차의 맥을 이었고, 백운옥판차와 금릉월산차는 다시 100여년의 세월을 지나 현 이현정 전통차문화원장에 이르고 있다. 다산이 즐기던 차가 바로 백운옥판차다. 사제 간의 다신계가 정녕 200여년 지속된 셈이다.생가 옆에는 백운동 원림(園林)이 있다. 국내에서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전통 원림이다. 이곳에도 다산의 흔적이 있다. 다산은 평소에도 백운동 원림을 찾았고 1812년에는 초의선사와 함께 백운동 12경을 방문한 후 각각 그림 같은 풍경에 대한 시(백운동 12승사)를 남겼다. 여기에 초의선사가 그린 그림(백운동도)을 묶은 것이 바로 백운첩이다. 옥판봉, 산다경, 백매오, 홍옥폭, 유상곡수, 창하벽, 정유강, 모란체, 취미선방, 정선대, 운당원 등 백운동 12경이 널리 알려지게 된 일화다.람사르 협약 생태습지로 유명한 남포 습지에도 다산과 관련된 사연이 있다. 강진만과 탐진강 물길이 만나는 남포마을은 제주, 완도 등 섬과 육지의 교역 중심지로 예부터 번성했는데 다산초당 만덕산에서 내려오면 닿는 곳이라 다산의 행차도 잦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남포마을의 옛 이름은 갈대밭이란 뜻의 갈밭마을. “강진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그 포구를 바라볼 수 있었고, 강진만의 색다른 정취는 그 포구에서 우러나오고 있었다.” 조정래의 소설 ‘한강’에 등장하는 문구다. 다산은 이곳에서 탐관오리들이 민초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세리들은 세금을 징세하기 위해 죽은 이와 갓난아이까지 군적(軍籍)에 올리는 백골징포, 황구첨정 등의 횡포를 부렸다. 도저히 군포를 감당할 수 없어 이에 항의하던 한 백성은 “아이를 낳은 내 잘못”이라며 스스로 거세하기에 이르렀다. 다산은 이 안타까운 사연을 ‘애절양’(哀絶陽)이라는 시로 남겼다.‘시아버지는 상복 벗은 지 오래고, 갓난아이는 배냇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들 삼대의 이름이 군적에 모두 실렸네/ 억울한 사연 호소하려 해도 관가 문지기는 호랑이 같고/ 이정은 크게 포효하며 외양간 소마저 끌고 갔네/ 남편이 칼 들고 들어간 방에 피가 흥건하고/ 남편은 스스로 아이 낳은 죄를 한탄하네’ ‘애절양’ 시구는 강진만 생태공원을 조망할 수 있는 남포호 전망대에 선명히 적혀 있다. 강진만 생태공원은 3282만㎡(813만평)에 이른다. 자전거와 도보를 이용한 에코 투어 코스가 마련돼 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고급 정보와 신문물을 일찍 받아들인 덕인지, 강진에는 특이한 맥주 소비 트렌드가 있다. 인구 3만 5000명 정도의 작은 도시지만 신기하게도 술집마다 미국 맥주 브랜드인 ‘버드와이저’를 팔고 있다. 서울 등 다른 도시에선 보기 힘든 풍경이다. 심지어 생맥주 체인점에서도 버드와이저를 주문하면 따로 내올 정도다. 20여년 전 강진에는 주류를 공급하는 회사가 하나밖에 없었다. 당시 이 회사가 상대적으로 고급제품이었던 버드와이저 마케팅을 펼쳤는데, 뜻밖에 이게 먹혀들어 누구나 버드와이저를 즐겨찾게 됐다는 것이다. 실제 강진은 전남에서도 주류소비량이 높은 편이라 주류회사들의 주요 마케팅 대상지였다. 이런 시장 상황이 지속되며 버드와이저가 국산 맥주보다 좋다는 이미지를 남겼고 마침내 ‘군민 맥주’로 인정받게 됐다. 싱가포르에서 ‘싱가폴 슬링’을 찾아 마시듯 무더운 여름날 강진에 간다면 시원한 버드와이저 한 잔 마셔 보는 것도 여행의 작은 즐거움이 될 듯하다. 다산이 18년이나 살며 많은 흔적을 남긴 강진 땅. 농가체험숙박 ‘푸소 프로그램’과 역사문화 체험, 청정 생태 여행 1번지로 변모한 이 청잣빛 푸른 땅에 스스로 ‘아름다운 유배’를 떠나보는 것도 역병으로 우울한 이 여름, 참 좋은 선택이 아닐까 한다. 놀고먹기연구소장 demory@naver.com■ 강진 여행 체크리스트 무엇을 볼까 이한영전통차문화원은 이현정 원장의 재미있는 해설을 들으며 백운옥판차 등 다양한 전통차 시음과 차를 구입할 수 있는 곳이다. 월남사지 잔디밭에 앉아 다식을 들며 차 소풍을 즐길 수도 있다. 민화박물관에선 민중의 삶을 그대로 녹인 민화를 통해 조상의 삶과 철학을 엿볼 수 있다. 2층에선 성문화를 표현한 한중일 3국의 춘화를 만날 수 있다.뭘 먹을까 은행나무는 한정식 미향(味鄕) 강진에서도 이름난 한정식집이다. 반찬 그릇 위에 또 그릇이 올라가는 ‘강진한정식이층탑’ 별칭이 있을 정도다. 해물과 고기 등 종류도 다양하지만 음식의 면면이 훌륭해 어느 하나 손이 안 가는 것이 없다. 토종닭과 전복, 문어를 넣고 끓인 회춘탕(해천탕)도 여름철 복달임으로 좋다. 설성식당은 한 상 가득 돼지불고기 백반상을 받는 집이다. 조선 중후기 육군 사령부가 있던 병영면에 돼지불고기 거리가 형성돼 있다. 불맛 가득한 양념 돼지고기는 물론 각종 곁들임 찬만 해도 12가지가 넘는다. 1인 1만원꼴로 값도 저렴하다.
  • 이천시 공무원 형제 확진…광주시 공무원도1명 양성

    이천시 공무원 형제 확진…광주시 공무원도1명 양성

    경기 이천시는 본청에서 근무하는 공무원 A씨 형제가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고 14일 밝혔다. 이날 오전 7층에서 일하는 형 A씨가 먼저 확진된 뒤 9층에 근무하는 동생 B씨도 오후에 확진 판정이 났다. 방역 당국은 이에 따라 청사 7층과 9층 등을 폐쇄한 채 확진된 형제 공무원과 접촉한 직원 등 300여명에 대한 진단검사를 진행 중이다. 이천시 관계자는 “형제 공무원이 한집에 사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이들의 감염경로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며 “역학조사가 진행 중이라 검사 대상자는 더 늘 수 있다”고 말했다. 이날 오전 광주시청 청사 8층에서 근무하는 공무원 1명도 확진돼 방역 당국은 8층을 폐쇄한 채 청사에서 근무하는 직원 800여명에 대한 전수검사를 벌이고 있다. 광주시 관계자는 “본청에서 확진자가 나오기는 이번이 처음이라 직원 전체를 대상으로 선제적으로 검사를 벌이기로 했다”고 말했다
  • “살려 주세요” 외침에 몸 던졌다… 초등생 3명 구한 ‘둑방길 히어로’

    “살려 주세요” 외침에 몸 던졌다… 초등생 3명 구한 ‘둑방길 히어로’

    8·9살 형제 등 수심 2m 하천에 빠져운동 중이던 이동근씨 바로 뛰어들어“구조 시간 3~5분… 1시간 더 걸린 느낌”“‘살려 주세요’라는 외침에 이끌려 하천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수심 2m가 넘는 하천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던 초등학생 형제 등 3명을 이동근(46)씨가 무사히 구했다. 13일 경남경찰청과 경남소방본부에 따르면 지난 12일 오후 6시쯤 경남 함안군 칠원읍 삼호길 광려천에서 8·9살 형제와 12살 어린이 등 같은 동네 초등학생 3명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때마침 주변을 지나가던 이씨가 물속으로 뛰어들어 모두 무사히 구조했다. 이씨는 “퇴근한 뒤 운동을 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나와 하천 둑길을 지나가고 있는데 ‘살려 달라’는 아이들 소리가 들리고 30m쯤 떨어진 하천 물속에서 어린이들이 허우적거리고 있었다”면서 “어린이들이 위험한 상황이라는 생각에 자전거를 던져 버리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고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어린이들이 허우적거리고 있던 하천 지점은 수심이 어른 키 높이보다 깊었다. 이씨는 아이들이 허우적거리고 있는 지점으로 헤엄쳐 들어가 한 명씩 차례로 물 밖으로 구조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구조한 어린이는 구조된 직후에 코에서 피가 나오는 등 조금만 늦었더라면 목숨이 위험할 뻔한 아찔한 상태였다”면서 “정신없이 물속을 헤엄치며 마지막 한 명을 구조하고 난 뒤에는 저도 기운이 모두 빠져 기진맥진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씨는 “3명을 구조하는 데 걸린 실제 시간은 3~5분 남짓이지만, 마치 1시간도 더 걸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구조된 3명은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았으며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 “살려주세요” 소리에 40대 수심 2m 하천 뛰어들어 초등생 3명 구조

    “살려주세요” 소리에 40대 수심 2m 하천 뛰어들어 초등생 3명 구조

    수심 2m가 넘는 하천에 빠져 목숨을 잃을 뻔한 초등학생 형제 등 3명을 지나가던 40대 주민이 뛰어들어 구조해 3명 모두 귀중한 생명을 건졌다. 13일 경남경찰청과 경남소방본부에 따르면 지난 12일 오후 6시쯤 경남 함안군 칠원읍 삼호길 광려천에서 8·9살 형제와 12살 어린이 등 초등학생 3명이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것을 때마침 주변을 지나가던 이동근(46·함안군 칠원읍)씨가 보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모두 무사히 구조했다.이씨는 “퇴근한 뒤 운동을 하기 위해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나와 하천 둑길을 지나가고 있는데 ‘살려달라’는 아이들 소리가 들리고 30m쯤 떨어진 하천 물속에서 어린이들이 허우적 거리고 있었다”며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어린이들이 물에 빠져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자전거를 밀쳐놓고 하천으로 달려가 물속에 뛰어들었다. 어린이들이 허우적 거리고 있는 하천 지점은 수심이 어른 키 높이보다 깊었다. 이씨는 아이들이 허우적거리고 있는 지점으로 헤엄쳐 들어가 한명씩 차례로 물밖으로 구조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구조한 어린이는 구조된 직후에 코에서 피가 나오는 등 조금만 늦었더라면 생명이 위험할뻔한 아찔한 상태였다”고 말했다. “정신없이 물속을 헤엄치며 마지막 한명을 구조하고 난 뒤에는 저도 기운이 모두 빠져 기진맥진했습니다” 이씨는 “3명을 구조하는데 걸린 실제 시간은 5분 남짓 했지만 마치 1시간이 더 걸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당시 힘든 구조상황을 전했다. 그는 “어린이들이 학교에서 생존수영을 익혔는지 당시 물속에서 드러누운 상태에서 발로 물을 차며 떠 있은 덕분에 그나마 물을 많이 들이키지 않은 것 같다”며 “평소 학교에서 생존 수영을 비롯해 위기상황에 대비한 안전교육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구조된 3명은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았으며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과 119 구조대에 따르면 당시 같은 학교 초등생 7~8명이 하천에서 물놀이를 하다 3명이 잘못해 수심이 깊은 쪽으로 들어가 갑자기 물이 깊어지는 바람에 빠져나오지 못했다. 얕은 지점에 있던 아이들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친구들을 보고 구조를 시도했지만 접근을 할 수 없어 ‘살려달라’고 외치며 주변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씨는 “10여년전에 부산에서 사람이 바다에 빠지는 광경을 목격하고 주변에 물에 빠지는 사람을 보면 구조할 수 있을 정도의 수영능력을 갖추어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수영장을 다니며 꾸준히 수영을 익혔다”고 말했다. 그는 “긴박한 상황에서 물속을 오가며 어린이들을 구조하다 보니 단순한 수영하고는 다르게 체력이 금방 떨어졌다”고 털어놨다. 이씨는 “처음에는 어린이들이 물속에서 장난을 하는 줄 알았는데 ‘살려달라’는 소리를 듣고는 위급한 상황으로 판단돼 빨리 구조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며 “중3년과 고2년생인 딸 2명도 생각이 났다”고 말했다.
  • “살려주세요” 외침에 하천 뛰어든 40대…초등생 3명 구조

    “살려주세요” 외침에 하천 뛰어든 40대…초등생 3명 구조

    40대 남성이 하천에 빠진 초등생 3명을 발견하고 물속에 뛰어들어 구조한 사실이 13일 알려졌다. 12일 오후 6시 19분쯤 경남 함안 광려천 둑길에서 자전거를 타던 이동근(46)씨는 어린아이의 고함을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물놀이하는 줄만 알았던 남자아이 3명이 허우적대면서 “살려주세요”라고 구조 요청을 하고 있었다. 이씨는 자전거를 내팽개치고 지체 없이 물속으로 뛰어들어 아이들을 순차적으로 구했다. 한 명 한 명 아이들을 구하면서도 혹시나 귀중한 생명을 잃을까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이었다고 이씨는 전했다. 이씨는 “3명을 모두 구할 때까지 5분도 채 안 걸렸지만, 체감상 훨씬 오래 걸린 것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이씨의 신속한 구조 덕분에 무사히 물에서 빠져나온 아이들은 119 구조대를 통해 인근 병원으로 이송됐다. 아이들 모두 기력 저하, 오한 등 증상 외에 생명에 큰 지장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소중한 생명을 구하고 탈진한 이씨 역시 현재 몸살 기운과 근육통이 있지만, 건강상에 큰 문제는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8·9살 형제와 12살 동네 친구인 이 아이들은 또래 친구들과 광려천에서 물놀이하다가 수심이 2m가량으로 깊은 곳에 빠지자 도움을 요청했다. 수영 경력 10년인 이씨는 자녀 2명이 어렸을 때 ‘우리 아이들이 물에 빠지면 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수영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씨는“모두 안전하게 구조해 다행”이라며 “어린이들이 큰 부상을 입지 않아 더 기뻤다”고 전했다.
  • 배달로봇이 엘리베이터 타고 현관까지 음식 전달

    한화건설이 우아한형제들(배달의 민족)과 손잡고 국내 아파트 최초로 ‘실내 로봇 배달 서비스’를 시작했다. 배달 애플리케이션으로 음식을 주문하면 배달 로봇 ‘딜리타워’가 아파트 1층 공동현관에서 배달 라이더로부터 음식을 받아 각 가구에 전달하는 방식이다. 두 회사는 12일부터 서울 영등포구 ‘한화 포레나 영등포’에서 이 같은 서비스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한화 포레나 영등포에 도입된 딜리타워는 모두 3대로, 아파트·오피스텔을 포함해 총 293가구가 로봇 배달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딜리타워는 무선통신으로 공동현관문을 열고, 엘리베이터를 호출, 층수를 입력해 원하는 층으로 이동할 수 있다. 음식이 도착하면 고객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거나 메시지를 보내 안내한다. 한화건설은 이 서비스 도입을 위해 건물 내 단차를 없애고, 여닫이문을 자동문으로 교체했다고 설명했다.
  • “전기·식량 달라”… ‘62년 독재’ 쿠바도 반정부 시위

    “전기·식량 달라”… ‘62년 독재’ 쿠바도 반정부 시위

    60년 이상 공산주의 독재가 지속되고 있는 쿠바에서 ‘전례 없는 규모’의 반정부 시위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카스트로 형제의 ‘혁명 통치’가 공식적으로 막을 내린 지 약 3개월 만이다. 11일(현지시간) 쿠바의 수도 아바나를 비롯해 산티아고, 팔마소리아노 등 전국 14개 이상 도시에서 식량, 연료, 의약품 부족과 계속되는 정전 등 생활고에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독재 타도”, “자유, 자유” 등 구호를 외쳤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사회 통제와 반체제 인사 감시가 삼엄한 쿠바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전했다. 한 시위자는 AFP통신에 “전기와 식량 부족을 견딜 수 없어 시위에 나섰다”고 말했다. 산안토니오 데 로스바뇨스의 경우 1주일 이상 지속된 정전이 시위의 기폭제가 됐다. 거리 곳곳에서 시위 참가자들이 경찰에 연행되는 장면이 목격됐고, 기관총을 장착한 특수부대 차량들도 눈에 띄었다. 시민들은 시위 현장을 찾은 미겔 디아스카넬(61) 쿠바 대통령 겸 공산당 총서기에게 “쿠바는 당신의 것이 아니다”라며 야유를 보냈다. 쿠바 출신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미국 마이애미 등 나라 밖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이번 시위는 오랜 경제난에 코로나19가 겹치면서 국민들의 인내심이 바닥난 가운데 발생했다. 미국의 경제제재 속에 터진 코로나19는 주된 수익원인 관광산업을 극도의 침체로 몰고 갔다. 최근에는 코로나19 상황까지 급격히 나빠지며 하루 확진자가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디아스카넬 대통령은 이날 오후 예정된 축구 중계를 중단하고 내보낸 긴급 담화에서 “이번 소요 사태는 반혁명적 도발”이라며 현재 쿠바가 겪고 있는 위기와 혼란을 미국의 제재와 소셜미디어 여론 조작 탓으로 돌렸다. 그는 “누구도 우리의 상황이 악화되도록 조작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모든 혁명가와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도발 시도에 맞서 거리로 나서라”고 촉구했다. 이에 시위 참가자들은 정부의 무능과 공산당 일당독재야말로 위기의 근본 원인이라며 맞섰다. 디아스카넬 정부는 연초 페소화 평가절하와 민간자율 확대 등 경제개혁을 시도했으나 생필품 가격 상승과 품귀 현상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이번 사태는 지난 4월 최고 지도자 라울 카스트로(89)가 공산당 총서기직에서 사임하면서 피델 카스트로(2016년 사망)에 이은 카스트로 형제의 62년 독재가 막을 내린 가운데 일어났다. 권력 승계로 발생한 구심력 저하와 정치적 유동성 증대가 극심한 경제난과 맞물리면서 국민적 저항으로 이어진 셈이다.
  • [단독] 진실화해위, 부랑인 시설 13곳 조사… ‘제2 형제복지원’ 진실 밝힌다

    [단독] 진실화해위, 부랑인 시설 13곳 조사… ‘제2 형제복지원’ 진실 밝힌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형제복지원, 선감학원처럼 인권 침해가 발생한 집단 수용시설을 추가로 파악하기 위해 전국 단위의 실태조사에 나섰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 집권 시절 설립, 운영된 전국의 부랑인 집단 수용시설을 상대로 하는 인권 침해 조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12일 서울신문 취재 결과 지난해 12월 출범한 2기 진실화해위는 부랑인을 수용한다는 명목으로 권위주의 정권 때 운영된 부산 형제복지원, 경기 안산시 선감학원뿐만 아니라 전국의 다른 부랑인 수용시설에서 인권 침해가 있었는지 살펴보고자 연구용역에 착수했다. 실태조사는 1945년 해방 이후부터 문민정부가 수립된 1993년 이전까지 수도권(서울 5곳, 인천 1곳, 경기 3곳)과 강원 지역(4곳)에서 운영된 부랑인 집단 수용시설 13곳을 대상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각 시설의 설립 및 운영 근거가 된 당시 법령과 설립 목적, 수용 인원, 수용자의 특성 등 시설 현황, 시설 관계자 및 피해자에 대한 조사와 시설 관련 문헌자료 조사가 이뤄질 전망이다. 진실화해위는 “형제복지원, 선감학원의 시설 운영 상황과 인권 침해 피해 규모에 대해서는 국가기관의 조사가 진행됐지만 다른 집단 수용시설이 언제 생겼고 어떻게 운영됐는지, 잠재적인 피해 규모가 얼마나 큰지 등에 대해서는 조사가 이뤄진 적이 없다”면서 “사건의 특성상 많은 피해자가 오랜 기간 정신적, 신체적, 경제적 어려움에 노출돼 피해자들이 직접 진실 규명을 신청하는 일도 어려울 것으로 추정된다”며 조사 착수 배경을 밝혔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1975~1987년 당시 수용 가능 인원이 3000명이 넘는 전국 최대 규모의 부랑인 수용시설인 형제복지원에 시민들이 강제로 끌려가 강제노역과 구타, 학대, 성폭력, 암매장 등의 인권유린을 당한 사건이다. 선감학원 사건은 1942년 일제가 안산시 선감도에 설립한 아동 수용시설인 선감학원에서 1982년까지 최소 4691명(누적 수용 인원)의 원생들이 강제노역과 고문, 영양실조 등 지속적인 인권 침해를 당한 사건이다. 진실화해위는 두 사건은 앞서 민관 차원에서 진행된 실태조사와 각종 언론보도 등을 통해 인권 침해 사실이 드러난 만큼 그동안 조명되지 않은 다른 부랑인 수용시설에서도 인권 침해가 발생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이번 실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집단 수용시설 인권 침해 피해자들에 대한 위원회의 직권조사 개시 필요성을 향후 검토할 예정”이라며 “전국 부랑인 수용시설 41곳 중 13곳을 올해 먼저 조사하고 나머지 28개 시설은 내년부터 차례로 조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난 5월 27일부터 본격적인 조사 활동에 돌입한 2기 진실화해위는 지난 2일까지 1079건의 사건에 대해 조사 개시를 결정했다. 진실화해위의 활동 기간은 2024년 5월 26일까지이며 1년 이내의 범위에서 활동 기간을 연장할 수 있다.
  • [단독] 2기 진실화해위, 제2의 형제복지원·선감학원 찾는다

    [단독] 2기 진실화해위, 제2의 형제복지원·선감학원 찾는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형제복지원, 선감학원처럼 인권침해가 발생한 집단 수용시설을 추가로 파악하기 위해 실태조사에 나섰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 집권 시절 설립, 운영된 전국의 부랑인 집단 수용시설을 상대로 하는 인권침해 조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12일 서울신문 취재 결과 지난해 12월 출범한 2기 진실화해위는 부랑인을 수용한다는 명목으로 권위주의 정권 때 운영된 부산 형제복지원, 경기 안산시 선감학원뿐만 아니라 전국의 다른 부랑인 수용시설에서 인권 침해가 있었는지 살펴보기 위해 연구용역에 착수했다. 진실화해위는 “형제복지원, 선감학원 등의 시설 운영 상황과 인권침해 피해 규모에 대해서는 국가기관의 조사가 진행된 것과 달리 다른 집단 수용시설의 연혁과 운영 상황, 잠재적인 피해 규모 등에 대해서는 조사가 이뤄진 적이 없다”면서 “사건의 특성상 많은 피해자가 오랜 기간 정신적, 신체적, 경제적 어려움에 노출돼 피해자들이 직접 진실규명을 신청하는 일도 어려울 것으로 추정된다”며 조사 착수 배경을 밝혔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1975년~1987년 당시 수용 가능 인원이 3000명이 넘는 전국 최대 규모의 부랑인 수용시설이었던 형제복지원에 시민들이 강제로 연행돼 강제노역과 구타, 학대, 성폭력, 암매장 등의 인권유린을 당한 사건이다. 선감학원 사건은 1942년 일제가 안산시 선감도에 설립한 아동 수용시설인 선감학원에서 1982년까지 최소 4691명(누적 수용 인원)의 원생들이 강제노역과 고문, 영양실조 등 지속적인 인권침해를 당한 사건이다. 진실화해위는 두 사건은 앞서 민·관 차원에서 진행된 실태조사와 각종 언론보도 등을 통해 인권침해 사실이 드러난 만큼 그동안 조명되지 않은 다른 부랑인 수용시설에서도 인권침해가 발생했는지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실태조사는 1945년 해방 이후부터 문민정부가 수립된 1993년 이전까지 수도권(서울 5곳, 인천 1곳, 경기 3곳)과 강원 지역(4곳)에서 운영된 부랑인 집단 수용시설 13곳을 대상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각 시설의 설립 및 운영 근거가 된 당시 법령과 설립 목적, 수용 인원, 수용자의 특성 등 시설 현황, 시설 관계자 및 피해자에 대한 조사와 시설 관련 문헌자료 조사가 이뤄질 전망이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이번 실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집단 수용시설 인권침해 피해자들에 대한 위원회의 직권조사 개시 필요성을 향후 검토할 예정”이라며 “전국 부랑인 수용시설 41곳 중 13곳을 올해 먼저 조사하고 나머지 28개 시설은 내년부터 차례로 조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난 5월 27일부터 본격적인 조사 활동에 돌입한 진실화해위는 지난 2일까지 1079건의 사건에 대해 조사 개시를 결정했다. 진실화해위의 활동기간은 오는 2024년 5월 26일까지고, 1년 이내의 범위에서 활동기간을 연장할 수 있다.
  • 6·25 전쟁때 희생된 ‘산청·함양사건’ 유족에 생활보조비 지원

    6·25 전쟁때 희생된 ‘산청·함양사건’ 유족에 생활보조비 지원

    한국전쟁 당시 국군에 의해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산청·함양사건’ 희생자 유족에게 매월 생활비가 지원된다. 경남 산청군과 함양군은 산청·함양사건 희생자 유족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생활안정을 돕기 위해 희생자 유족에게 매월 10만원의 생활보조비를 지원한다고 12일 밝혔다.희생자가 2명 이상인 유족에게는 한달에 20만원을 지원한다. 지난달 부터 유족에게 생활보조비 지원을 시작했다. 산청군과 함양군이 산청·함양사건 희생자 유족에게 생활보조비를 지원하는 것은 두 지방자치단체가 지난해 제정한 ‘산청·함양사건 희생자 유족에 대한 생활보조비 지원에 관한 조례’에 따른 것이다. 두 지자체는 올해 초 사실조사를 하고, 희생자 유족 신청을 받아 유족 46명에게 생활보조비를 지급한다. 산청군이 30명(희생자 2인 이상 유족 14명), 함양군이 16명(희생자 2인 이상 유족 5명)이다. 지원대상은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따라 선정된다. 등록된 유족 가운데 신청일 현재 6개월 전부터 산청군이나 함양군에 주민등록이 돼 있는 유족 가운데 실제 거주자로 배우자, 부모, 자녀, 형제자매, 손자(녀)로 한정한다. 희생자 유족이 사망하거나 국외이주, 관외로 주민등록 전출 등으로 지역외 거주자가 되면 자격이 상실된다. ‘산청·함양사건’은 제주 4·3사건, 거창사건과 같이 한국전쟁 당시인 1951년 2월7일 국군의 공비토벌 작전 수행 과정에서 벌어진 양민 희생사건이다. 당시 산청군 금서면 가현, 방곡마을과 함양군 휴천면 점촌마을, 유림면 서주마을 등에서 민간인 705명이 영문도 모르고 통비분자(공비와 내통한 사람)로 간주돼 집단 학살됐다. 산청·함양사건 민간이 전체 희생자 가운데 가운데 산청군 주민이 291명, 함양군 주민이 95명으로 조사됐다. 비슷한 시기에 거창군 신원면에서도 719명이 목숨을 잃었다. 산청군과 함양군은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민주·인권·평화의 가치를 되새기기 위해 산청군 금서면에 희생자 합동묘역인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을 조성해 운영한다. 지난해에는 유족들의 증언과 시청각 영상물 등을 활용해 추모공원 전시관을 새롭게 단장했다. 전시관에는 희생자 명패를 천장에 설치하고 이를 조명으로 비춰 어둠에서 빛으로, 지리산의 별로 기억됨을 표현했다. 산청군은 추모공원 전시관 시청각 자료를 현대화해 당시 역사를 배우고 희생자를 추모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고 밝혔다. 산청·함양사건 양민희생자 유족회는 해마다 추모공원에서 합동위령제와 추모식을 개최한다.
  • 한화건설·배달의 민족 “배달로봇이 엘리베이터 타고 현관 앞까지”

    한화건설·배달의 민족 “배달로봇이 엘리베이터 타고 현관 앞까지”

    한화건설이 우아한형제들(배달의 민족)과 손잡고 국내 아파트 최초로 ‘실내 로봇 배달 서비스’를 시작했다. 배달 애플리케이션으로 음식을 주문하면 배달 로봇 ‘딜리타워’가 아파트 1층 공동현관에서 배달 라이더로부터 음식을 받아 각 가구에 전달하는 방식이다. 두 회사는 12일부터 서울 영등포구 ‘한화 포레나 영등포’에서 이 같은 서비스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한화 포레나 영등포에 도입된 딜리타워는 모두 3대로, 아파트·오피스텔을 포함해 총 293가구가 로봇 배달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딜리타워는 무선통신으로 공동현관문을 열고, 엘리베이터를 호출, 층수를 입력해 원하는 층으로 이동할 수 있다. 음식이 도착하면 고객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거나 메시지를 보내 안내한다. 딜리타워의 적재 가능 무게는 최대 20㎏이다. 한화건설은 이 서비스 도입을 위해 건물 내 단차를 없애고, 여닫이문을 자동문으로 교체했으며 ‘원 패스키’를 배달 로봇에 탑재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했다고 설명했다. 양사는 지난해 7월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서비스 도입을 준비해왔다. 한화건설 관계자는 “신규 단지별 적용환경을 고려해 서비스 제공 범위를 넓혀 나가겠다”고 했다.
  • ‘진보 독수리 5형제’ 이홍훈 전 대법관 별세

    ‘진보 독수리 5형제’ 이홍훈 전 대법관 별세

    이홍훈 전 대법관이 11일 별세했다. 75세. 전북 고창군 출신인 이 전 대법관은 경기고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1977년 서울지방법원 영등포지원에서 법관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서울고법 부장판사, 서울중앙지법원장 등을 거쳐 2006년 참여정부 때 대법관에 임명됐다. 이 전 대법관은 ‘법조 내 재야’로 불린 개혁적 인물로,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고 사회적 약자를 옹호하는 판결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법관 시절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진보 성향의 소수의견을 자주 내 김지형·박시환·전수안·김영란 전 대법관과 함께 ‘독수리 5형제’로 불리기도 했다. 2011년 퇴임 후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와 법조윤리협의회 위원장, 화우공익재단 이사장, 서울대 법인 이사장 등을 지냈다. 빈소는 분당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2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13일이며, 장지는 전북 고창군이다.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대법관 퇴임 후 10년째 정원 가꾸던 이홍훈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대법관 퇴임 후 10년째 정원 가꾸던 이홍훈

    11일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등진 ‘법조의 재야’ 이홍훈 전 대법관이 고향인 전북 고창에 꾸미고 있던 정원을 우연히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통해 봤다. 대법관으로서 많은 진보 성향의 판결을 내렸던 그가 고향에 돌아와 부인, 딸과 함께 정원을 가꾸는 모습을 정원의 사계 변화와 함께 담아낸 그 프로그램을 본 것이 지난 5월 6일이었는데 두 달 만에 비보를 들었다. 고인은 이날 오전 6시 50분 눈을 감았으며 빈소는 분당서울대병원에 마련됐다. 발인은 13일 오전이며 장지는 그의 손때가 묻은 정원이 굽어 보이는 선영이다. 유족은 근조 화환은 정중히 사양하며 11일 오후 1시 이후 조문은 가능하지만 12일부터는 사회적 거리 두기 4단계가 수도권에 시행됨에 따라 친족 문상만 가능하다고 밝혔다. 사망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는데 아마도 이 프로그램에서 털어놓은 대로 4년 전에 담도암 진단을 받고 두 차례 대수술을 받아 “하루가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살고 있다고 털어놓은 것에 비춰보면 될 것 같다. 그가 10년째 가꾼 정원은 미완성으로 이제 큰딸 유진 씨와 부인 박옥미 여사의 손에 맡겨지게 됐다. 언젠가 그 정원을 찾아가 인터뷰해보고 싶다는 바람을 가졌는데 세상을 이렇게도 빨리 등졌다니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다. 아래는 연합뉴스가 이날 보도한 부고 기사 일부다. 고인은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후 사법연수원 4기로 1977년 판사로 임관했다. 그 뒤 서울고법 부장판사·서울중앙지법원장을 거쳐 2006년부터 2011년까지 대법관을 지냈다. 정통 엘리트 법관이면서도 ‘법조 내 재야’로 불릴 만큼 진보·개혁 성향으로,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과 사법 정의에 중점을 두고 판단해 기본권 보호에 충실하면서도 사회적 약자를 옹호하는 판결을 많이 내렸다는 평가를 들었다.  판사 시절 이적표현물 제작·배포의 처벌과 관련한 국가보안법 조항은 국가의 존립과 안전을 위태롭게 하거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줄 명백한 위험이 있을 때만 적용해야 한다며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무급 휴직원을 내고 출산을 했더라도 근로기준법상 출산휴가 2개월의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면서 근로자의 기본권을 옹호한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대법관 시절에는 다양한 진보·개혁 성향의 소수 의견을 내면서 전수안·김지형·김영란·박시환 전 대법관과 함께 ‘독수리 5형제’로 불렸다. 근로자들의 파업을 무조건 업무방해로 간주해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판결을 내리며 단순 파업도 당연히 업무방해죄에 해당한다고 여겼던 기존 대법원 판례를 수정했다.  특히 2011년 4월 22일 ‘4대강 사업 집행정지 신청’ 전원합의체 사건에서 그가 내린 신청 기각 반대의견은 법조계에서 지금도 회자될 정도다. 이 사건 주심인 이 전 대법관은 “환경문제가 포함된 이 사건을 처리하면서 미래의 세대인 우리 자손의 중요한 삶의 터전이 될 환경이 오염되거나 훼손되지 아니하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며 4대강 사업 중단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대법관 퇴임 뒤에는 법조윤리협의회 위원장과 화우공익재단 이사장, 신문윤리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2017년부터 2년 동안 서울대학교 법인 이사장을 지냈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사법개혁 방안 마련을 위해 설치한 ‘국민과 함께하는 사법발전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맡는 등 법조계 원로로 활동했다. 이렇게 큰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면서도 조용히 고향의 정원을 가꾸며 역시 큰병을 이겨낸 큰딸 유진 씨, 둘째 딸 유봉 씨와 살뜰한 부녀의 정, 부인과 알뜰한 정을 나누는 모습은 적지 않은 시청자들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아래 KBS 다큐 인사이트의 ‘아버지의 정원’ 동영상을 한번 찬찬히 둘러 보시길 권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유족의 슬픔에 심심한 위로의 말 건넨다.
  • 김정은·시진핑 친서 교환...“전략적 의사소통 강화·양국 관계 발전”

    김정은·시진핑 친서 교환...“전략적 의사소통 강화·양국 관계 발전”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총비서 겸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북중우호조약 체결 60주년을 맞아 친서를 교환하고 양국관계를 더욱 발전시킬 의지를 드러냈다. 11일 조선중앙통신은 김 위원장과 시 주석이 ‘북중 우호협조 및 상호원조조약’(이하 북중우호조약) 체결 60주년을 맞아 교환한 친서 전문을 공개했다. 친서에서 시 주석은 “총비서동지와 함께 전략적 의사소통을 강화하여 중조관계의 전진 방향을 잘 틀어쥐고 두 나라의 친선협조 관계를 끊임없이 새로운 단계로 이끌어나감으로써 두 나라와 두 나라 인민에게 더 큰 행복을 마련해줄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이어 “지난 60년간 중조쌍방은 조약의 정신에 따라 서로 굳건히 지지하고 손잡고 어깨겯고 투쟁하면서 두 당, 두 나라 사이의 형제적인 전통적 친선을 강화하여 왔으며 사회주의 위업의 발전을 추동하고 지역과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수호하였다”면서 양국 관계를 치켜세웠다. 그러면서 “최근년간 나는 총비서동지와 여러 차례의 상봉을 통하여 두 당, 두 나라 관계 발전 전망을 설계하고 중조친선의 시대적 내용을 풍부화하는 일련의 중요한 공동인식을 이룩하였다”고 말했다. 시 주석은 “중국은 조선이 경제와 인민 생활을 발전시키며 사회주의 건설 위업을 힘있게 추진하고 있는데 대하여 견결히 지지한다”고 덧붙였다. 김 위원장도 “최근년간 전례 없이 복잡다단한 국제정세 속에서도 조중 사이의 동지적 신뢰와 전투적 우의는 날로 두터워지고 있으며 전통적인 조중친선은 새로운 추동력을 받아안고 정치, 경제, 군사, 문화를 비롯한 각 분야에서 보다 높은 단계로 전면적으로 승화 발전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조중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은 적대 세력들의 도전과 방해 책동이 보다 악랄해지고 있는 오늘 두 나라의 사회주의 위업을 수호하고 추동하며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보장하는 데서 더욱 강한 생활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앞으로도 두 나라의 귀중한 공동 재부인 조중친선을 더없이 소중히 여기며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건설하는 성스러운 한길에서 중국공산당과 중국 정부, 중국 인민과 굳게 손잡고 나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조중 친선협조 관계를 새로운 시대적 요구와 두 나라 인민의 염원에 맞게 끊임없이 강화 발전시켜나가는 것은 우리 당과 정부의 확고부동한 입장”이라고 덧붙였다. 북중우호조약은 한 국가가 군사적 공격을 받으면 다른 나라도 전쟁에 자동 개입한다는 내용이 담긴 조약으로, 1961년 7월 11일 김일성 주석과 저우언라이 총리가 베이징에서 체결했다.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아코디언 연주할 사람? 거짓으로 손 든 그녀 96세에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아코디언 연주할 사람? 거짓으로 손 든 그녀 96세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가 자행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를 운영하던 나치 친위대(SS) 경비원들이 여성 오케스트라의 아코디언 연주자를 찾는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그녀는 자원했다. 사실은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방법은 몰랐지만 무거운 돌을 나르는 중노동보다는 낫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선택이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 남은 마지막 생존자 중 한 사람인 에스터 베자라노가 10일(현지시간) 독일 함부르크에서 9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헬가 오벤스 아우슈비츠위원회 이사는 한 유대인 병원에서 “새벽에 평화롭게 영면에 들었다”면서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고 dpa 통신에 알렸다. 영국 BBC 보도에 따르면 1924년 독일 자루이스에서 유대인 성가대 지휘자 겸 교사인 아버지 아래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베자라노는 1941년 부모가 나치에 의해 리투아니아에서 살해당하고 언니마저 세상을 떠난 뒤 수용소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1943년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베자라노는 당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여성 오케스트라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해야 한다고 손을 들고 나서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당시 열여덟 살이었다. 40명으로 구성된 여성 오케스트라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유대인들을 가득 실은 기차가 도착할 때마다 연주해야 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오케스트라의 일원이었던 셈이다. 그녀는 2014년 한 인터뷰를 통해 “그들이 가스실로 보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기 서서 연주하는 것뿐이었다”고 돌아봤다. 나중에 그녀는 여성들만 수감하는 라벤스부르크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는데 그곳에서 탈주에 성공했다. 전쟁이 끝난 뒤 이스라엘로 이주했던 베자라노는 가수가 됐다. 1960년 함부르크로 돌아와 극우주의와 외국인 혐오에 항거하는 활동에 앞장 섰다. 여러 학교를 방문해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이디시 노래들과 유대인 저항 노래들을 어린이들과 함께 부르기도 했다. 그녀는 언젠가 “학교들을 돌아다니는 일이 내 복수다. 그 때로 돌아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그 때로 돌아가는 일이 절대 있어선 안된다고 사람들에게 얘기한다”고 말했다. 나치 범죄자에 대한 재판이 열리면 빠지지 않고 얼굴을 내밀었다. 쾰른의 힙합 밴드 마이크로폰 마피아와 함께 독일 전국을 돌며 파시즘에 반대하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하이코 마스 독일 외무장관은 트위터에서 “인종주의, 반유대주의와의 싸움에서 중요한 목소리를 내온 베자라노는 생명력과 놀라운 이야기로 확신을 심어줬다”면서 “우리는 그의 목소리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고 추모했다. 안네 프랑크 교육센터의 메론 멘델 센터장은 “에스터 베자라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오케스트라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했다는 이유로 살아 남았다. 일생을 음악에 헌신했고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에 맞서 싸웠다”고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 아들 찾으려다 함께 ‘지옥’에 갇힌 아버지의 붉은 눈시울[형제복지원 생존자, 다시 그곳을 말하다]

    아들 찾으려다 함께 ‘지옥’에 갇힌 아버지의 붉은 눈시울[형제복지원 생존자, 다시 그곳을 말하다]

    <7>1982~1987년, 형제원 강제수용된 정용태씨 진술서동네 형과 영문도 모른채 순경한테 끌려가곡괭이 자루·연탄 집게 빳다에 성폭행까지아들 찾아 나선 아버지까지 형제원에 감금 12년간 수용인원 총 3만 8000여명, 공식 사망자 513명. 1970~1980년대 국가 최대 부랑인 수용시설이었던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벌어진 인권 유린 사태는 1987년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34년이 지난 지금,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이는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진상 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생존자 13명은 지난달 20일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에 나섰다. 법원에 낼 진술서를 쓰는 과정 또한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반드시 쓰여져야 할 글이었다. 서울신문은 매주 1명씩 이들의 증언을 기록으로 남긴다.동네 형과 부산역 앞에 갔다 붙들려…순경이 태운 탑차에 갇힌채 형제원으로 39년 전 어느 날, 친구를 마중하러 간다던 동네 형을 따라 집을 나섰던 정용태(49·가명)씨는 그날의 가벼운 발걸음이 자신을 지옥으로 향하게 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집으로 다시 보내 준다던 파출소 순경의 말은 새빨간 거짓이었다. 탑차를 타고 형제원에 도착함과 동시에 시작된 구타와 학대는 10살짜리 어린 아이였던 정씨에게 맞설 수 없는 공포를 느끼게 했다. 도대체 왜, 누가 자신을 형제원으로 보냈는지 모른채 시작된 형제원 생활은 고문에 가까웠다고 정씨는 말한다. 강제 노역은 일상이었다. 각종 작업에 동원돼 시간 안에 작업량을 달성하지 못하면 매질을 당해야 했다. 작은 체구로 몸집만한 돌덩이를 등에 지고 옮겨 나르는 일은 예사였다. 매일 밤 음악 선생이라는 명분으로 자신을 불러낸 30대 남성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해도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었다. 소리를 지르거나 하면 기절할 정도로 맞았다. 30년 넘는 세월이 지났어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고 고통스러운 기억들이다. 정씨가 형제원을 나온 뒤에도 평범한 인생을 되찾을 수 없었던 이유다. 정씨에게 더 큰 충격은 실종된 아들을 찾기 위해 파출소에 항의한 아버지까지 형제원에 끌려온 것이었다. 아버지는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1987년 형제원 생활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씨는 형제원을 나왔지만, 그의 삶은 여전히 형제원에 갇혀 있다. 피해자들은 국가를 향해 이제 그만 자신의 삶이 형제원에서 나올 수 있도록 해달라며 힘겨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아래는 김씨의 진술서 전문. ※원문에서 일부 표현만 다듬어 그대로 옮겼습니다.[진 술 서] 제목: 형제복지원 피해자 진술서 성명: 정용태 진술내용: 1982년 9월23일 목요일 저녁 9시쯤 부산 초량동 부산역 앞 화단에서 평소 친하게 지내던 옆집에 사는 형과 함께 광주에서 오는 형의 지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파출소 순경 두명이 우리를 보고 다짜고짜 파출소로 끌고갔습니다. 파출소에서 ‘우리는 지금 누굴 마중 나왔으니 빨리 보내달라’고 하니 순경 한사람이 ‘곧 보내 줄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 탑차 한 대가 파출소 앞으로 왔습니다. 알고보니 형제복지원 차였습니다. 건장한 남성 두 명이 우리를 인계받아 강제로 탑차 뒤 칸에 실고 밖에서 문을 잠궜습니다. 얼마후 철문을 여는 큰 소리가 났고, 우리는 형제원 안으로 잡혀 왔습니다. 당시 국민학생이었던 나는 아버지와 누나가 너무나 보고 싶었고 창고같은 건물안에서 옷도 입지 않은채 얼차려를 받고 있으니 너무나 무섭고 겁이 났습니다. 같이 잡혀온 일행이 집에 연락해달라고 항의하자, 형제원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몽둥이와 발길질로 마구 때렸습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어서 시키는대로 고무신과 형제원 마크가 박힌 츄리닝으로 갈아입고 그때부터 수형번호 82-2167 번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작업속도 쫓겨 피 흘려도 방치···밤마다 불러내 성폭행 한 음악선생, 소리 지르면 샌드백 치듯 때려 형제원에서는 인권이라는 것은 없이 짐승같은 대우를 받으며 지냈습니다. 눈뜨면 낚시 공장에서 낚시바늘 포장작업을 했습니다. 낚시 바늘을 낚시줄에 감아서 네모난 종이에 곱게 감는 작업인데, 10분 안에 10개 이상을 포장하지 못하면 곡괭이 자루와 연탄 집게로 못채운 갯수만큼 빳다(몽둥이)를 맞았다. 어느 날은 낚시 바늘이 손톱 뒤쪽에 박혀 뺄수가 없는데 그 바늘을 생으로 뽑아서 손톱이 반쯤 빠지고 또 낚시 바늘이 볼 뒤쪽 귀밑에 박혔는데 그것도 그냥 뽑아서 피가 철철 흘렀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도 치료 해주지 않았습니다. 장난감 공장에서는 장난감 권총을 포장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포장 도구인 아크릴에 호치케스를 찍는 일이었는데, 이 작업도 시간 안에 못하면 맞으니까 빨리 하려고 하다보니 손등과 손가락에 호치케스를 박는 일이 하루에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또 형제원 안에 있는 교회 확장 작업을 한다고 열두살 어린애가 등에 20㎏이 넘는 돌을 지고 형제원에서 제일 높은곳에 위치한 교회까지 200미터 남짓한 거리를 매일 몇 개월 동안 날랐습니다. 이모든 일들이 지금은 글로 표현하려니 한계가 있지만 격어보지 않고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 고통이었습니다. 13소대. 13소대는 음악소대였습니다. 70명이 한방에서 생활하는데 음악 선생은 밤만 되면 나를 자기 침대로 불러서 성폭행을 했습니다. 자기 성기를 내 항문에 찌르고 아파서 참다 못해 소리를 지르면 거의 기절할 만큼 폭력을 가했습니다. 아직도 치가 떨리고 그때가 생생합니다. 너무나 수치스럽고 입에 담기도 그렇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매일 당했습니다. 30대의 건장한 남성의 힘으로 그 어린 나를 샌드백 치듯 때렸으니 죽고 싶었습니다. ‘아들 찾아달라’고 항의하다 끌려온 아버지…형제원 생활 후유증으로 3년 만에 세상 떠나 1984년 10월 정확히는 며칠인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점심인지 저녁인지 밥을 먹으려고 줄을 맞춰 식당으로 이동 중 이었다. 저쪽에서 14소대 소대원들도 식당으로 이동중 이었습니다. 그런데 14소대 소대원중에 저의 아버지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우리 아버지였습니다. 부친께서는 저를 찾아 달라고 파출소에 항의하다 저처럼 형제원에 끌려와 감금되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게 됐습니다. 부친께서는 저를 보고 당신이 무능해 부자가 함께 갇혀있는 게 속상하신지 가끔 스쳐 지나치실 때 마다 눈시울을 붉히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속상하고 힘드셨을지. 제 아버지는 1년에 한번 명절 날이면 1인당 하나씩 나눠주는 노란 시루떡을 당신은 드시지 않고 가슴 안쪽에 감추고 계시다가 식당 앞쪽에서 마주칠 때면 몰래 손에 쥐어주고 가시곤 하셨습니다. 지금도 시루떡만 보면 화가 치밀고 눈물이 납니다. 아버지는 1987년 4월 사건이 터지고 사회로 나와서 형제원의 폭력과 작업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그해 1987년 10월 14일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1982년 9월 형제복지원이 국가의 ‘내무부훈령410호’로 강제노동·강금·폭행 등 인권유린을 당하고, 가족도 잃었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설곳이 없습니다. 부모와 자식을 한 곳에 가둬두는 이런 일이 세상에 있을 수 있습니까. 형제복지원을 나와 혼자서 안해본 일이 없습니다. 신문팔이, 중국집 배달원, 김 양식, 구두닦이 등 직업을 전전했습니다. 그 때의 고문같은 생활로 인해 올바른 직업 한 번 갖지 못하고 악몽과 트라우마로 점철된 30년을 살았습니다. 지금도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하며 살고 있습니다. 국민을 위해 있어야 할 이 나라, 이 국가가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이 억울함과 분노·고통을 국가가 보상해야 함이 마땅하지 않을까요. 형제복지원 피해자 정용태형제복지원 사건 어디까지 왔나 형제복지원을 운영한 고(故) 박인근 원장은 1989년 특수감금 혐의에 대해 무죄가 확정됐다. 2018년 문무일 전 검찰총장은 무죄 판결을 취소해 달라며 비상상고를 신청했지만 지난 3월 대법원에서 기각됐다. 다만 재판부는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했고 정부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당부했다. 형제복지원 사건과 관련해 국가를 상대로 첫 손해배상 소송에 제기한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는 현재 2차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1차 소송에 참여한 13명은 모두 입·퇴소 증빙자료가 준비돼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이러한 증거가 없어 피해사실 입증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는 비용 부담 때문에 소송 참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피해자들을 위해 후원금을 모금하고 있다.
  • “마약단속이다!”…아이티 대통령 피살, ‘미국소행’ 비치도록 치밀 위장

    “마약단속이다!”…아이티 대통령 피살, ‘미국소행’ 비치도록 치밀 위장

    사저 밖 무장요원들 모습 영상진위 확인은 안 돼… 카리브해 아이티의 조브넬 모이즈(53) 대통령이 지난 7일(현지시간) 사저에서 암살됐다. 크로드 조제프 아이티 임시 총리는 “고도로 훈련되고 중무장한 이들에 의한 매우 조직적인 공격”이었다고 살해 용의자들에 관해 설명했다. 조브넬 모이즈 아이티 대통령이 암살됐을 당시 사저에서 찍힌 것으로 보이는 영상과 음성 파일이 소셜미디어에 게시됐다고 CNN과 마이애미헤럴드 등 미국 언론이 8일 보도했다. 범행 현장을 촬영한 영상엔 소총으로 무장한 용의자들이 미국 마약단속국(DEA) 요원 행세를 하는 모습이 담겼다. 영사을 보면 거리에 차량 여러 대가 세워져 있고 그 인근에서 무장한 남성들이 총기를 들고 움직이는 모습을 담고 있다. 길 한가운데 사람으로 보이는 누군가가 누워 있는 모습도 보인다. 영상은 모이즈 대통령 피살 직후 보안요원들이 사저 밖에서 대응하는 모습을 찍은 것이라고 전해졌지만, 진위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CNN은 설명했다. 역시 진위가 파악되지 않은 음성도 함께 보도됐다. 이 음성 파일에서는 누군가가 “DEA(미국 마약단속국) 작전! 모두 물러서라!”고 반복해서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DEA 작전!”…‘미국 소행’으로 비치도록 치밀하게 위장 7일 새벽 사저에서 총격을 받은 모이즈 대통령은 숨졌으며 부인 마르틴 모이즈 여사는 곧바로 인근 병원에 옮겨졌다가 미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병원에 이송됐다. 당시 집에 있던 대통령의 딸은 형제 방에 숨어 있었으며, 가사도우미와 직원 한 명은 괴한들에 포박된 상태였다고 아이티의 카를 앙리 데스탱 판사는 현지 신문 르누벨리스트에 전했다.암살범 6명 체포…加대사관 경호원 출신 美시민권자도 포함 아이티 대통령을 암살한 용의자들 중 6명이 경찰에 붙잡혔다. 그중 2명은 미국 시민권자로 알려졌으나 구체적인 신원은 공개되지 않았다. AP통신에 따르면 아이티 경찰은 암살 사건 이틀째인 8일(현지시간)까지 용의자 6명을 체포하고 7명을 사살했다. 레옹 샤를 아이티 경찰청장은 기자회견에서 “범인 6명이 경찰 손에 있다”며 “실제로 범행을 저지른 이들은 붙잡았고 배후 주동자를 찾고 있다”고 밝혔다. 아이티 경찰은 전날에도 용의자 2명을 검거했다. 모이즈 대통령은 피살 당시 총알 12발을 맞은 것으로 파악됐다. 암살 사건 조사에 참여한 카를 앙리 데스탱 판사는 아이티 현지 일간 르누벨리스트에 “대통령의 시신에서 총알 자국 12개를 발견했다”며 “대구경 소총과 그보다 작은 9㎜ 총기의 흔적이 모두 있었다”고 밝혔다. 아직 암살 동기와 목적, 배후 세력 등은 알려지지 않았다. 클로드 조제프 임시 총리는 “고도로 훈련되고 중무장한 특공대가 투입된 것으로 본다”고 언급했다. 범인들은 ‘미국 소행’으로 비치도록 치밀하게 위장했다. 이와 관련해 미국 국무부는 DEA와의 연관성을 전면 부인했다.
  • 日도요타, 美바이든 당선 부정하는 국회의원들 대규모 후원했다가…

    日도요타, 美바이든 당선 부정하는 국회의원들 대규모 후원했다가…

    일본 도요타가 지난해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 의원들에 대한 후원을 끊기로 했다. 도요타는 8일 성명을 내고 “지난해 11월 선거 결과에 이의를 제기한 의원에 기부를 중단한다”고 밝혔다. 도요타는 “우리가 운영하는 정치활동위원회(PAC)가 선거 결과에 이의를 제기한 의원을 지원하면서 일부 주주들을 곤란하게 한 점을 인지했다”면서 “올해 후원금의 대부분은 대선 결과를 지지하는 민주당과 공화당 의원들에게 냈다”고 말했다. 이날 결정은 ‘지난 대선 결과에 이의를 제기한 의원을 가장 많이 후원한 기업이 도요타’라는 시민단체의 비판이 나온 뒤 이뤄졌다. 비영리단체 ‘워싱턴의 책임과 윤리를 위한 시민들’(CREW)이 지난달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도요타는 지난 1월 상·하원 합동회의의 대선결과 인증 표결 때 반대표를 던진 의원 38명에게 올해 5만 6000달러(약 6430만원)를 후원했다.이는 레이놀즈아메리칸(3명), 보잉(2명), 월마트(2명) 등은 물론이고 공화당의 큰손인 석유재벌 데이비드·찰스 코흐 형제의 코흐인더스트리스(7명)보다도 월등히 높은 수치다. 합동회의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공화당 의원은 총 147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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