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형제
    2025-12-21
    검색기록 지우기
  • 국무위원
    2025-12-21
    검색기록 지우기
  • 격투기
    2025-12-21
    검색기록 지우기
  • 건조
    2025-12-21
    검색기록 지우기
  • 한·중 정상회담
    2025-12-21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8,217
  • ‘행방불명’ 9살 소년, 초코파이 쥐어준 경찰이 수용소로 데려갔다 [형제복지원 생존자, 다시 그곳을 말하다]

    ‘행방불명’ 9살 소년, 초코파이 쥐어준 경찰이 수용소로 데려갔다 [형제복지원 생존자, 다시 그곳을 말하다]

    <9>1983~1987, 형제원 강제수용된 박재형씨 진술서“집에 데려다주겠다”던 경찰이 형제원 끌고가초등학생에게 시멘트·돌 나르는 강제노동 시켜생기부엔 ‘행방불명’, “집 보내달라” 호소 외면퇴소 후에도 생활고·차가운 시선에 트라우마12년간 수용인원 총 3만 8000여명, 공식 사망자 513명. 1970~1980년대 국가 최대 부랑인 수용시설이었던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벌어진 인권 유린 사태는 1987년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34년이 지난 지금,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이는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진상 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생존자 13명은 지난 5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에 나섰다. 법원에 낼 진술서를 쓰는 과정 또한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반드시 쓰여져야 할 글이었다. 서울신문은 매주 1명씩 이들의 증언을 기록으로 남긴다. 친구 집 다녀오던 길, “집 데려다 주겠다”던 경찰이 끌고간 형제원 박재형(가명·47)씨는 형제복지원에서의 기억을 잊으려 애쓰며 살았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지옥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형제원 주소(부산시 북구 주례2동 산18번지)와 그가 형제원에 끌려 간 날짜는 끝까지 잊혀지지 않았다. 1983년 1월 12일, 9살 소년이었던 박씨는 친구 집에서 자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경찰에게 붙잡혀 형제원에 보내졌다. 초코파이를 사 주며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한 경찰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이후 박씨는 1987년 3월 형제복지원이 폐쇄될 때까지 4년간 그곳에 갇혀 있었다. 집과 학교에서는 박씨가 행방불명된 줄로만 알고 있었다. 형제원에선 굶주림과 매질이 일상이었고, 어린 소년들도 교회 증축 공사나 운동장 공사에 강제 동원돼 무거운 건설 자재를 날라야 했다. 하루는 박씨의 숙소 안에 있던 환풍기 통로로 일부 수용자들이 탈출했다. 탈출에 실패한 박씨는 양손이 묶인 채 기절할 때까지 구타를 당했다. 그때 생긴 흉터가 부끄러워 박씨는 한여름에도 반팔을 입지 못했다. 박씨는 돌아갈 집이 있다고 호소했지만 모두가 외면했다. 퇴소 후에도 소년의집과 갱생원에 강제로 보내졌다. 갱생원에서 취업 알선을 해준 기업에서는 박씨가 ‘고아’라며 제대로 임금을 주지 않았다. 박씨는 한참 후에야 집을 찾았다. 그러나 이미 폭력과 착취로 얼룩진 유년기의 흔적을 그의 삶에서 지우긴 쉽지 않았다. 아래는 박씨의 진술서 전문. ※원문에서 일부 표현만 다듬어 그대로 옮겼습니다.[진 술 서] 제목: 형제복지원 피해자 진술서 성명: 박재형 진술내용: 많은 세월이 흘렀고, 너무나 고통스러운 그때의 일이라 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지금은 거의 단편적인 기억들 뿐이네요. 이글을 쓰면서 다시금 옛 기억을 하나둘씩 떠올리려니 많이 힘드네요. 1983년 1월 12일 (이 날짜와 형제원 주소는 90년이 지나도 기억에서 잊혀지질 않아요.) 이른 아침으로 기억됩니다. 친구 집에서 자고 집으로 가고 있는데 경찰 아저씨가 “어디 가느냐” 물으시길래 집에 간다고 했습니다. “집이 어디냐. 데려다 주겠다” 하시면서 초코파이를 사주셨습니다. 그리고 데려간 곳이 바로 형제복지원이였습니다. 그 길로 기나긴 악몽이 시작되었네요. 너무나도 아프고 힘든 생활, 정말 하루하루가 지옥과도 같은 생활이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먹는 것도 잘 못 먹고 기합에 매질. 어린나이에 들기도 힘든 시멘트 푸대와 모래자루와 돌 등을 (나르며) 교회 증축과 운동장 공사···.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자다가도 일어나 기합을 받았고 밥 먹을 때도 선착순 몇 번까지만 먹고 그 뒤로는 기합과 매질에 밥을 굶기도 수없이 하였네요. 그리고, 그곳에서 가장 큰 악몽은 도망 가다가 잡혔을 때였습니다. 심하게 두드려 맞아서 팔에 심한 상처가 남았고 머리에는 아직도 가끔 통증이 오는 혹이 있습니다. 탈출 주모자로 몰려 기절할 때까지 구타···“집 찾아달라” 호소 외면 탈출을 시도할 때 환풍기 구멍으로 탈출을 했는데 몇 명은 빠져나가고 정작 환풍기가 있던 침대자리가 내 자리라 저는 탈출을 못했습니다. 주모자로 몰려서 소대 입구에 있는 파란 물통에 몇시간 담겨져 있다가 매질을 당했습니다. 그때 양손을 묶어서 때렸는데 뭔가에 잘못 맞았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양쪽 팔에 피가 무지 흘렀습니다. 기절을 한 듯 합니다. 그 뒤 치료도 마취 없이 대충 했고 밥도 친구가 몇일을 먹여주었습니다. 다행히 팔이 완치는 되었지만 너무 심한 흉터가 남아서 어릴 땐 이게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나중에 사회에 나와서도 전부 이상한 눈으로 쳐다 보는 게 힘들어 여름에도 반팔을 못 입고 다녔습니다. 지하철 수사대에도 이유없이 끌려 간 적도 두어번 됩니다. 지금은 오랜 세월이 흘러 흉터가 많이 옅어져서 그나마 좀 낫지만 아직도 사람들의 그 시선이 너무 힘듭니다. 그곳은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어서 나쁜 것도 많이 배웠던거 같네요. 10살 나이에 그곳에서 담배도 처음 배웠으니까요.밤마다 혹시나 불려가지 않을까 공포에 떨었던 기억이 납니다. 소대장, 서무, 조장들이 밤이면 얼굴이 이쁘장하게 생긴 애들을 불러다 성학대를 했습니다. 수차례 분교(형제복지원 내 학교) 담임 선생님에게도 전에 다니던 학교가 있으니 그쪽 담임 선생님께 말씀 드리면 집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상의 드렸지만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쉽게도 예전에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형제원에서 하는 개금분교로 전학만 되어 온 상황이었습니다. 이번에 자료를 받아보니 생활기록부에도 ‘행방불명’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학교 측에서 왜 집으로 연락을 안해주었는지 그것도 묻고 싶습니다. 저는 어린시절이 없습니다. 그저 악몽과 같은 기억들 뿐이 없어요. 아직 학력도 초졸이구요. 먹고 살기 힘들어(집도 그리 넉넉하지 않음) 검정고시를 볼 엄두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형제원에서 소년의집으로, 소년의집에서 다시 갱생원으로(갱생원도 형제원이랑 비슷한 환경) 보내졌습니다. 갱생원에서 사회 취업을 했는데 그 취업되어 간 곳에서도 고아라고 임금도 제대로 주지 않고 일만 했습니다. 그렇게 정처 없이 이곳저곳 여러곳 떠돌아 다니다 운좋게 좋으신 분 만나 예전에 다니던 학교 정보를 토대로 집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알려주셔서 그렇게 집을 찾아갔습니다. 집을 찾고도 집안 형편이 그리 좋지를 못해서 바로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었고 여지껏 정신없이 살았네요. 이글을 적으면서도 기억 저 구석에 꼭꼭 닫아둔 감당하기 어려운 기억들이 쏟아져 나올까 겁이 나기도 하네요. 부디 저희들의 이 억울한 사연들을 잘 살펴주시고 검토 해주시길 바랍니다. 형제복지원 사건 어디까지 왔나 형제복지원을 운영한 고(故) 박인근 원장은 1989년 특수감금 혐의에 대해 무죄가 확정됐다. 2018년 문무일 전 검찰총장은 무죄 판결을 취소해 달라며 비상상고를 신청했지만 지난 3월 대법원에서 기각됐다. 다만 재판부는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했고 정부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당부했다. 형제복지원 사건과 관련해 국가를 상대로 첫 손해배상 소송에 제기한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는 현재 2차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1차 소송에 참여한 13명은 모두 입·퇴소 증빙자료가 준비돼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이러한 증거가 없어 피해사실 입증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는 비용 부담 때문에 소송 참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피해자들을 위해 후원금을 모금하고 있다.
  • “서울대 세미나서 본 기억 없어” 조국 딸 친구 증언

    “서울대 세미나서 본 기억 없어” 조국 딸 친구 증언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딸 조민씨의 고교 시절 친구가 2009년 5월 서울대 학술대회에서 조씨를 본 기억이 없다고 재차 법정에서 증언했다. 조 전 장관 측은 “증인의 기억은 검찰이 제시한 자료를 보고 추론해낸 것”이라고 반박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1부(마성영 김상연 장용범 부장판사)는 23일 조 전 장관과 부인 정경심 동양대 교수의 속행 공판을 열고 박모씨를 증인으로 소환했다. 박씨는 당시 대원외고 학생으로 문제의 학술대회에 참석했는데, 박씨의 아버지가 조 전 장관과 서울대 법학과 동창이기도 해 두 집안 사이 친분이 깊었다. 박씨는 지난해 정 교수의 1심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동영상 속 여학생이 조씨와 닮긴 했지만 조씨는 아니다”라고 증언한 바 있다. 그는 이날도 “세미나 당일 조민을 본 사실이 없느냐”는 검찰의 질문에 “네”라고 답했다. 그는 세미나 동영상 여학생이 조씨와 닮았지만 조씨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어진 반대신문에서 변호인 측은 박씨의 기억이 2009년으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러 명확하지 않다는 점에 초점을 맞췄다. 변호인은 “처음부터 기억하고 있었던 사실, 수사 과정에서 자료를 보며 새로이 기억해낸 사실, 추측한 사실들이 혼재돼있는 거 같다”고 지적했다. 이어 “세미나장에서 조씨를 본 기억이 없다는 것은, 친하니 있었다면 알은 체했을 텐데 안 했으므로 없던 것 아니냐는 논리적 추론 아니냐”고 물었다. 박씨는 “10년이 더 된 일이라 세 가지 정도 장면 외에 크게 기억나는 점이 없다”며 이 같은 주장에 대체로 수긍했다. 한편 이날 조 전 장관 부부는 직접 발언권을 얻어 박씨에게 질문을 했다. 조 전 장관은 고교 재학 당시 두 가족이 종종 식사하면서 자신이 인권동아리 활동을 권유한 것이 기억나냐고 물었고, 박씨는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 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다고 답했다. 정 교수는 딸 조씨가 세미나 저녁 자리에 참석하는 바람에 박씨가 홀로 자신을 찾아와 함께 밥을 먹었고, 집에도 들어와 조 전 장관 서재에서 책 몇 권을 빌려 갔다고 주장했다. 이에 박씨는 “(정 교수와) 저녁을 먹은 경우가 몇 번 있었지만, 그게 세미나 당일인지는 명확한 기억이 없다”고 했다. 정 교수는 조씨가 세미나에 참석하는 등 관련 인턴 활동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1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 전 장관은 이날 재판에서 딸 조민씨가 참석한 것을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며 관련 인턴활동 확인서는 “절차에 따라 발급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 전 장관은 2013년 6월 딸이 서울대 의학전문대학원 지원할 때 서울대 공익인권법센터 인턴확인서 등을 허위로 발급·제출한 혐의를 받는다. 조 전 장관 측은 조민씨가 2009년 5월 공익인권법센터가 주최한 ‘동북아시아의 사형제도’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하는 등 제대로 된 인턴활동을 마쳐 확인서를 발급받았다는 입장이다.
  • [열린세상] 뉴스페이스 시대, 민간의 우주개발 확대해야/이은우 건양대 교수

    [열린세상] 뉴스페이스 시대, 민간의 우주개발 확대해야/이은우 건양대 교수

    푸른 하늘을 날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1903년 12월 라이트 형제가 ‘플라이어 1호’를 타고 인류 최초의 동력 비행에 성공한 것을 시작으로 오늘날과 같은 하늘을 나는 여행의 보편화를 가져왔다. 1957년 10월 구소련은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 올리고 1961년 4월에는 유리 가가린이 최초의 유인 우주선 ‘보스토크 1호’를 타고 108분 동안 지구를 한 바퀴 돌고 지구로 귀환했다. 엄청난 충격을 받은 미국인들에게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은 1960년대 내에 사람을 달에 보내겠다고 공언했으며, 드디어 1969년 닐 암스트롱이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 표면에 인류 최초의 발자국을 남기게 된다. 우주 공간에 떠 있는 아름다운 푸른 지구와 무중력 상태를 체험할 수 있는 우주관광에 대한 수요는 날로 증가하고 있으며, 최근 우주관광 사업의 가능성에 대해 괄목할 만한 성과들이 나오고 있다. 지난 11일 영국의 억만장자 버진그룹 회장 리처드 브랜슨이 2004년 창업한 버진갤럭틱의 모선 비행기 ‘이브’에 실린 우주 비행선 ‘VSS 유니티’를 타고 고도 88.5㎞에 도달해 약 4분간의 미세 중력 상태를 체험하고 1시간 뒤에 무사히 귀환했다. 미 항공우주국(NASA)은 고도 80.5㎞ 이상을 우주로 본다고 한다. 한 장에 2억 9000만원 하는 버진갤럭틱 우주관광 티켓이 이미 600장이나 예약됐다고 한다. 아마존의 창업자이며 2000년 블루오리진을 창업한 제프 베이조스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52주년 기념일인 지난 20일 ‘뉴셰퍼드’ 로켓에 실린 ‘블루오리진 우주캡슐’을 타고 고도 106㎞까지 도달하고 3분여간 무중력을 체험하는 총 10분 18초의 준궤도 우주여행에 성공했다. 국제항공연맹은 고도 100㎞, 즉 카르만 라인을 넘는 공간을 우주로 정의하고 있다. 이번 우주비행의 유일한 유료 탑승자의 티켓 경매 가격은 약 320억원이라고 한다. 테슬라의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가 2002년 창업한 스페이스X도 우주관광을 위해 오는 9월 ‘펠컨9’ 로켓에 실린 우주선 ‘크루 드래건’에 일반인을 탑승시켜 지구 궤도를 공전시키는 계획과 국제우주정거장까지 가는 우주관광 계획 등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국제우주정거장까지 가는 비용은 무려 1인당 631억원 수준이라고 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창업에 성공한 갑부들이며, 어릴 적부터 우주의 신비에 대한 호기심이 크고 우주 관련 사업을 이윤을 추구하는 비즈니스 시각에서 추진해 자기의 꿈은 실현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핵심적인 사항은 이들은 로켓과 우주선을 여러 번 재활용해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수익 모델을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냉전이 끝난 후 체제 경쟁의 필요성이 줄어들자 국가 주도의 고비용 우주개발이 주춤해졌다. 그러나 우주개발이 민간으로 확대되자 비용을 크게 줄이는 방법이 고안돼 국가 주도의 고비용 우주개발 계획도 민간의 저비용 서비스를 활용하면서 상호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 실제로 NASA는 민간 우주개발 기업의 서비스를 도입해 비용를 절감하고 남는 재원으로 화성 탐사 등 새로운 우주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정부는 1989년 항공우주연구원을 설립하고 국제 협력을 통해 발사체 기술을 개발해 나로호를 성공적으로 쏘아 올렸다. 오는 10월에는 순수 우리 기술로 누리호를 발사할 예정이라고 하며, 조만간 국가 우주 정책을 지원하기 위한 전담 연구기관인 ‘국가우주정책연구센터’를 출범시킨다고 한다. 지난 5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미 미사일 지침을 종료하기로 함에 따라 탄두 중량과 최대 사거리, 사용 연료 제한이 없어져 국내의 발사체 개발 환경이 새롭게 조성됐다. 최근 국내 한 대기업 그룹이 우주항공 조직을 강화하고 코스닥에 상장된 인공위성 전문 기업인 쎄트랙아이를 인수했으며, 한국항공우주(KAI)는 스페이스X와 발사체 계약을 하는 등 민간 기업의 우주산업 활동도 활발해지고 있다. 국내외적으로 민간이 더 많이 참여하는 새로운 뉴스페이스 시대가 열리고 있다. 국내 우주산업의 획기적인 활성화를 위해 현재와 같이 정부가 주도하고 민간 기업이 용역 형태로 참여하는 우주개발 방식에서 정부와 민간이 협업하는 방식으로 전환해 나가는 것을 진지하게 검토할 때라고 생각된다.
  • “카겜 공모가 누가 비싸다했나?”…‘오딘’ 앞세워 10만원 벽 깼다

    “카겜 공모가 누가 비싸다했나?”…‘오딘’ 앞세워 10만원 벽 깼다

    연일 고공행진을 벌이고 있는 카카오게임즈의 주가가 마침내 10만원의 벽을 뚫었다. 22일 카카오게임즈의 주가는 전날보다 13.35% 뛰어오른 10만 200원에 거래를 마쳤다. 지난해 9월 상장한 이후 카카오게임즈의 종가가 10만원대로 마감한 것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다. 장중에는 전날보다 14.82% 10만 1500원까지 치솟으면서 신고가를 새로 썼다. 이로써 카카오게임즈의 시가총액은 7조 4784억원으로 불어나 코스닥시장에서 시총 2위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카카오게임즈는 지난달 29일 출시된 신작 게임 ’오딘’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주가가 급등하고 있다. 오딘은 출시 이튿날부터 앱스토어 게임 매출 순위 1위를 차지했고, 구글플레이에서는 지난 2일 1위로 등극한 이후 지금까지 정상에 자리잡고 있다. 출시 전날인 6월 28일의 종가가 5만 5100원이었는데 그 이후 한달도 안 되어서 82% 급등한 것이다.오딘의 1위 등극이 업계에서 주목받는 것은 철옹성 같았던 ‘리니지 형제’를 제대로 제친 게임이 4년 만에 처음 나왔기 때문이다. 엔씨의 ‘리니지M’은 2017년 6월 출시 직후 곧바로 매출 순위 정상에 등극했으며, 2019년 11월에는 후속작인 ‘리니지2M’까지 가세해 두 게임이 1~2위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리니지 형제는 이 기간 동안 숱한 신작 게임들의 도전에도 구글플레이 매출 정상 자리를 단 한번도 놓친 적이 없다. 올초에 ‘불매운동’이 벌어지면서 이용자수가 감소했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이 때도 순위표 상단을 지켰고, 넷마블이 출시한 게임 ‘제2의 나라’에게 지난달 17일 1시간가량 선두를 뺏겼다가도 곧바로 회복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오딘이 21일째 ‘리니지 형제’를 따돌리고 있다.이로써 카카오게임즈에 따라 붙던 ‘주가 거품’ 논란도 ‘옛일’이 될 것으로 보인다. 카카오게임즈는 지난해 9월 상장 당시 공모가 2만4000원에서 상장 첫날 2배 가격인 4만 8000원에 시초가를 형성한 뒤 상한가로 직행했다. 하지만 이후에는 4만~5만원대에서 횡보를 거듭했는데 공모 당시 시장이 너무 과열된 것 아니냐는 논란도 있었다. 이후 카카오게임즈가 야심차게 내놓은 게임 ‘엘리온’이 흥행에 크게 실패하면서 이러한 논란은 더욱 커졌다. 오딘이 앞으로도 인기 게임으로 안착하면 흥행작 ‘가뭄’에 시달리던 카카오게임즈 입장에서는 확실한 수익원을 보유하게 된다. 이를 놓고 게임 업계에서는 카카오게임즈가 오딘 출시를 계기로 중견급 게임사에서 벗어나 대형 게임사로 발돋음 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 기내식 빵에 유통기한 지난 버터…아직도 음식으로 장난을?

    기내식 빵에 유통기한 지난 버터…아직도 음식으로 장난을?

    기내식 빵에 유통기한이 지난 버터가? 유통기한이 5년이나 지난 빙수용 시럽이? 아직도 먹거리로 장난을 치는 사람들이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21일 식품위생법과 식품 등의 표시·광고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업체 4곳을 적발해 행정처분 및 수사 의뢰 조처했다고 밝혔다. 식약처는 일부 업체가 식품 제조에 부적합한 원료를 사용하거나 유통기한을 변조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들 업체를 대상으로 지난달 말부터 이달 초까지 불시 단속을 벌였다. 구체적인 적발 사례로 식품제조가공업체 ‘게이트고메코리아’(GGK·인천 중구 소재)는 유통기한이 올해 2월까지인 버터 약 1.4t으로 지난달까지 기내식 구성품인 빵과 케이크 약 8만 3000개를 만들어 항공사에 납품했다. 이 회사는 이들 식품을 판매해 56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GGK는 지난 3월부터는 ‘소고기 돈부리’ 등 20가지 즉석섭취식품 약 35만인분(7억원 상당)을 품목제조보고 없이 만들어 기내식으로 납품했다. 다른 식품업체 ‘아담스팜코리아’(경기 평택 소재)는 유통기한이 6개월 지난 빙수용 멜론 시럽을 제조해 유통기한 등을 표시하지 않은 상태로 보관했다가 거래처에서 주문이 들어오면 유통기한을 520일 연장해 표시한 뒤 약 15.6㎏을 판매했다. 이 업체는 유통기한이 최대 2092일(약 5년 9개월) 지난 빙수용 딸기시럽 등 11가지 제품 1441개(총 1073㎏·288만원 상당)를 판매 목적으로 보관했다. 또 부산 북구의 즉석판매 제조가공업체 ‘떡공방형제’는 지난해 6월부터 인터넷 쇼핑몰 3곳에서 유통기한을 표시하지 않은 ‘쑥인절미’ 등 70가지의 떡류 제품, 약 36만 3353㎏(14억원 상당)을 판매했다. 이 업체는 또 떡류를 제조하는 작업장을 오랫동안 청소하지 않아 벽면·천장·에어컨·배관 등에 곰팡이가 피어 있는 등 위생적 취급기준도 어긴 것으로 드러났다. 식약처는 적발된 업체들이 보관하던 제품을 전량 압류·폐기하는 한편 유통기한이 지난 원료를 식품에 사용하거나 유통기한을 임의로 위·변조하는 부정행위를 근절하기 위해 지속해서 단속을 벌일 계획이다. 식약처는 “식품안전 관련 위법 행위나 불량식품으로 의심되는 제품에 대해서는 불량식품 신고전화 1399 또는 스마트폰 ‘내손안(安) 식품안전정보’ 앱으로 신고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와 관련, 먹거리로 장난을 치는 사람들에 대해 당국의 제재와 처벌이 더 강화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제재 수위가 터무니없이 낮기 때문에 이 같은 행위가 되풀이된다는 것이다.
  • [정승민의 막론하고] 대입의 문, 여럿보다는 하나/북유튜버

    [정승민의 막론하고] 대입의 문, 여럿보다는 하나/북유튜버

    아이가 고3이다. 모의고사를 치르고 담임 선생님과 진학 상담을 했다. 원점수로는 우등생이라는데 수시 전형으로는 ‘인서울’이 불확실하단다. 내신 성적이 좋지 않으니 지방 국립대에 응시해 보라는 권유를 당최 납득할 수 없었다. 서울의 중하위권 대학보다 부산대 등지의 커트라인이 높았던 기억 때문이다. 하지만 입시기관의 발표를 접하니 수긍이 갔다. 명문으로 통했던 지방 국립대의 44개 학과에 지원한 수험생 전원이 합격했다. 수학 8등급이 국립대 수학과에 입학했다는 ‘개그’가 ‘다큐’인 셈이다. 2020년 대입 기준으로 인문계 상위 300개 학과 중에 지역의 9개 국립대를 통틀어 달랑 한 학과만 포함됐다. 의예과 등을 제외한 자연계 상위 300위 학과에도 3개에 불과하다. ‘말은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고릿적 속언이 제4차 산업혁명 시대까지 유효기간을 연장하고 있어서 씁쓸하기만 하다. 여하튼 수험생 입장에서 대학은 더이상 ‘좁은 문’이 아니다. 경쟁을 피할 순 없지만 진학 자체는 어렵지 않다. 문제는 학교나 학과를 정하는 경우의 수가 너무 복잡하고 다양해서 선택장애를 일으키는 데 있다. 불량한 학부형으로서 뒤늦게 알아본 바로는 대학 입학의 길은 크게 두 가지, 수시 전형과 정시 전형이 있다. 수시는 교과 성적이라는 정량적 방법 혹은 그것에다 수행평가나 동아리 활동 등을 포함한 종합적 평가로 신입생을 선발한다. 정시에서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이 합격 결정력을 쥔다. 예전엔 단순했다. 1970년대의 예비고사와 본고사, 80년대 학력고사처럼 관건은 시험이었다. 단 한 번의 평가로 당락이 갈렸다. 점수 위주의 입시 현실에서 목숨까지 끊는 학생들이 나왔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와 같은 영화가 인기를 끈 배경이다. 적성을 무시하고 몇 점이냐에 맞춰 대학과 학과를 들어갔던 ‘86세대’에게 대학은 시험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강하다. 현재 사회적 의사결정 과정을 주도하는 그들에게 대학이란 점수가 아니라 공부하고 싶은 학생이 가는 곳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대다수 학생이 의예과를 원한다. 외환위기 이후 불과 몇 년 만에 전국의 모든 의대가 서울대 자연계열의 합격선을 넘어섰다. 입학 정원을 배분할 합리적이고 공정한 잣대가 시험 말고 무엇인지 궁금하다. 게다가 수만 가지 직업이 존재하는 세상살이에서 학생 개개인의 진로를 안내하고 인도하는 맞춤형 진학 서비스를 제공할 고등학교가 실제로 많지 않다. 이른바 ‘대입 스펙’을 형성하는 데 필수적인 독서 이력, 자기 소개서, 교내 대회, 봉사 활동, 수행평가, 동아리 활동을 스스로 할 수 있는 학생은 거의 없다. 부모의 재력과 정보력, 학교의 배려가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시험으로 인생이 결정되는 획일적 입시의 폐단을 고치겠다고 만든 다양한 전형들이 오히려 학생, 학부모, 학교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역설이다. 서울과 지방의 교육 양극화를 부채질하는 것도 불문가지다. 따져 보면 입시는 어느 정도 획일화될 수밖에 없는 사회적 관습이다. 대학의 문을 여기저기 열어 놓은 것이 하나로 만든 것보다 반드시 효율적이라고 단언하기 힘들다. 사실상 모든 대입 제도가 장단점이 있는 이상 해결책은 분명하다. 대학을 가든 안 가든, 전공을 무엇으로 하든 열심히 일하고 실적에 따라 성과를 누리는 사회를 만들면 된다. 그럼에도 발등의 불은 꺼야만 한다. 김대식, 김두식 두 형제 교수는 대담집인 ‘공부논쟁’에서 학생들이 좀 덜 피곤하게 느끼는 대입 전형을 제시하고 있다. 수천 가지 입학 방식과 특목고에 대한 ‘은근한’ 배려로 수험생 자신의 역량만 온전히 평가받기 힘든 현실을 감안해서 시험 하나로 단순화하자는 것이다. 물론 지역 간, 계층 간 교육 격차를 심화시킨다는 우려와 반론이 예상되지만 쥐를 생각해 주는 고양이 격이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간격은 확대되고 있으니까 뭐라도 줄여 보자.
  • 원하는 과목 고르고, 꿈 키우고…이젠 학생이 교실의 주인입니다

    원하는 과목 고르고, 꿈 키우고…이젠 학생이 교실의 주인입니다

    미래교육의 나침반이 될 ‘2022 개정교육과정’은 학생 개개인의 ‘자기 주도성’을 이끌어 내는 교육 체제의 대전환을 예고하고 있다. ‘고교학점제’로 대표되는 ‘학생 개별 맞춤형 교육과정’이 본격화되며 급변하는 사회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미래 역량’이 강조된다. 교육부는 학생과 학부모, 교사, 일반 시민 등이 참여하는 ‘대국민 공론화’를 통해 차기 교육과정의 밑그림을 그릴 계획이다. 서울신문은 미래교육을 한발 앞서 구현하고 있는 학교들의 사례를 통해 차기 교육과정이 가져올 교육의 변화를 두 차례에 걸쳐 내다본다.“초등학생에게도 선택과목이 있다면 어떨까?” 경남 양산 가남초등학교는 2019년 학생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배울지’ 스스로 선택하도록 하는 실험을 시작했다. 국어, 수학, 과학, 미술 등 각 교과의 내용을 심화해 놀이와 체험으로 배우는 ‘교과 선택활동’이 그중 하나다. 지난해 2학기 4학년 학생 21명은 자신의 마음을 글과 삽화로 표현해 ‘나만의 그림책’을 만들었다.(국어·미술) 6학년 학생 20명이 참여한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수업에서는 무인도에서 식수를 얻고 전구에 불을 켜는 등 온갖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왔다.(과학·실과) 3~6학년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수업은 학년별로 6~7개에 달했다. 일회성 수업이 아닌 16차시의 ‘장기 프로젝트’다.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을 원하는 방법으로 탐구하도록 합니다. 학생들은 스스로 선택한 과제를 끝까지 수행하려 노력하죠.” 안은진 가남초 부장교사는 “정해진 것을 배울 때보다 더 큰 성취감을 얻는다”고 말했다. 가남초는 올해로 3년째 ‘SRC 선택활동’을 운영해 오고 있다. ‘교과’(Subject)와 ‘관계주제’(Relation), ‘진로’(Career)의 머리말을 따 ‘맞춤형 선택 학습’을 추구하는 가남초만의 교육과정이다. ‘관계주제 선택활동’에서는 소통과 공감, 배려, 협동과 같은 역량을 학생들 저마다의 경험과 연관지어 성찰한다. “부모와 친구, 형제·자매 간 갈등 중 한 가지 상황을 선택해 해결 방법을 찾기” 같은 주제를 다룬다. 학생들이 선택하는 건 ‘무엇을 배울지’에 국한되지 않는다. ‘자기소개를 그림 또는 마인드맵으로 할지’, ‘나의 어떤 재능을 친구들과 나눌지’ 등 학습의 모든 과정에서 고민하고 결정한다. 안 교사는 “배움의 내용이 학생들 개인의 삶과 맞닿아 있다”면서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자신을 이해하고 관리해 나가는 역량을 키워 나간다”고 말했다. ‘진로 선택활동’에서는 적성검사 등을 통해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직업체험과 직업 탐색, ‘꿈멘토’ 특강을 거치며 꿈을 구체화한다. 학생들이 스스로 배움을 만들며 성장해 온 과정은 ‘행복한 꿈자람 이야기’라는 카드에 차곡차곡 기록된다. 안 교사는 “중·고등학교에 비해 초등학교는 학생 개개인의 흥미와 적성에 맞춰 배움을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많지 않다”면서 “학생들이 자율성과 선택권을 발휘할 때 배움의 즐거움도 커진다”고 강조했다.●“다양한 꽃처럼 존중해 줘야 선진국형 교육” “각기 다른 꽃이 피어나는 환경을 마련해 주는 게 미래 교육입니다.” 홍원표 연세대 교육학과 교수는 “다양한 꽃을 동일한 잣대로 비교하고 서열화하는 교육은 선진국형 교육이 아니다”라면서 “개인의 행복에 대한 관심이 커진 시대에는 개인의 흥미와 특성, 배움의 속도를 존중하는 교육 체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학습의 개념을 ‘학생’을 중심으로 재설정하려는 움직임은 세계적인 흐름이다. 2022 개정교육과정 역시 ‘학생 개개인의 성장’을 핵심 가치로 내세우고 있다. 학생들의 개별성과 다양성을 존중하고 저마다의 진로와 적성, 학습 속도와 맞물린 ‘맞춤형 교육’으로의 변화를 지향한다. 이 같은 변화의 정점에는 2025년 고등학교 1학년부터 전면 시행되는 ‘고교학점제’가 놓여 있다. 고교학점제는 학생들이 지망하는 진로에 맞춰 다양한 과목을 선택해 이수하고 학점을 취득해 졸업하는 제도다. 권오현 서울대 독어교육과 교수는 “고교학점제는 자신이 잘하는 것과 도전해 보고 싶은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며, 그에 맞춰 교육과정을 스스로 ‘디자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핵심은 과목 선택권 보장… 자원 확대 필요 한발 앞서 고교학점제를 도입한 학교들은 학생들이 스스로 교육과정을 설계하도록 돕는 ‘코디네이터’ 역할에 주력한다. 2018년부터 고교학점제를 운영해 온 대구 다사고등학교는 신입생들이 입학하기 전부터 진로 탐색의 기회를 제공한다. 입학 전 2월에 실시되는 ‘진로 상담의 날’을 통해 학생들은 기본적인 진로 상담을 받고, 이후 지속적인 진로교육을 거치며 3년간의 ‘학업계획서’를 작성한다. 김병연 다사고 부장교사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과목을 선택할지를 놓고 혼란스러워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다”면서 “진로교사는 물론 모든 담임·부담임이 ‘진로·학업설계 전담 교원’이 돼 코로나19 상황에서도 온·오프라인을 통해 수시로 상담을 제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학교는 학생들의 진로상담과 과목 선택, 생활지도까지 학습의 모든 과정을 돕는 ‘교육과정 이수 지도팀’을 만들었다. 교사들은 학생들의 학업계획서를 바탕으로 어떤 과목을 선택할지,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에는 어떤 활동을 할지 조언해 준다. 수업이 없는 공강 시간에 자기주도 학습을 이어 가는 방법도 알려주며 심리적·정서적 어려움을 보듬는 상담도 진행한다. 고교학점제는 학생들의 ‘과목 선택권’을 폭넓게 보장하는 게 핵심이다. 다사고는 한 학년에 5학급으로 규모가 비교적 작은 편이다. 대규모 학교에 비해 다양한 과목을 개설하는 데 불리하다. 그러나 학교는 10명 안팎의 학생들이 선택한 과목이라도 교사 한 명이 서너 과목을 가르치는 수고를 자처하며 최대한 개설한다는 데 뜻을 보았다. 작은 학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학교는 인근 학교와 손을 잡고 울타리를 허물었다. ‘전자회로’, ‘융합독서’, ‘지식재산 일반’과 같은 이색 과목들을 인근 학교에 가거나 온라인으로 수강하는 한편 외부 강사를 초빙하기도 했다. 김 교사는 “다양한 과목을 개설하는 데에 교원 수급 등 자원의 한계가 있다”면서도 “학생들이 자기 주도성을 발휘해 자신만의 교육과정을 설계해 나가는 과정에서 쌓아 가는 역량이 학생의 삶과 사회에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말했다. ●학교 자율성 커져… “학부모·학생과 소통 중요” 2022 개정교육과정은 이처럼 학생 개개인을 위한 ‘맞춤형 교육’이 확산되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교육부는 고교학점제가 다양한 학습 경험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학교 간의 온·오프라인 공동교육과정과 학교장 선택과목을 활성화할 계획이다. 대학과 기업, 지역사회 등 학교 밖에서의 학습 기회도 늘린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도 고교학점제의 취지를 구현할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개발한다. 초·중학교 시기에 쌓아야 할 기초 소양 교육을 강화하면서도 학생들의 필요에 맞춰 교육과정을 유연하게 재구성할 수 있게 된다. 이 같은 맞춤형 교육은 학교의 자율성 위에서 실현 가능하다. 홍 교수는 “교육과정에서 학교가 결정해야 할 몫이 커진다”면서 “학교와 학부모, 학생 간 소통과 합의를 통한 민주적인 학교 운영이 중요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학생을 ‘수동적인 객체’에서 ‘능동적인 주체’로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도 뒷받침돼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권 교수는 “학부모와 학교, 사회 모두 학생을 ‘스스로 선택하며 성장하는 주체’로 인정해야 한다”면서 “교실에서 주인공이 돼 스스로 정답을 찾아갈 수 있도록 자신감과 행복감 같은 내면의 근육을 어릴 때부터 키워 줘야 한다”고 말했다.
  • 가격 낮춘 삼성, 폴더블폰으로 주도권 잡나

    가격 낮춘 삼성, 폴더블폰으로 주도권 잡나

    “폴더블(접히는)폰의 대중화 시대를 열겠다!” 삼성전자가 틈만 나면 강조하는 말이다. 지난해 1월 삼성전자 스마트폰 부문의 수장이 된 노태문 무선사업부장(사장)은 같은 해 2월 취임 후 첫 기자간담회와 지난해 12월 기고문을 통해 폴더블폰 대중화를 화두로 꺼냈다. 고동진 삼성전자 IM(정보기술&모바일)부문 대표이사(사장)도 지난 3월 주주총회에서 “폴더블폰 대중화를 추진하겠다”고 강조했다. 2019년 갤럭시폴드를 출시해 시장을 연 삼성전자는 올해야말로 폴더블폰의 ‘대중화 원년’을 이루겠다며 칼을 갈고 있다. 20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다음달 11일 신작 폴더블폰인 ‘갤럭시Z폴드3’와 ‘갤럭시Z플립3’의 공개행사(언팩)를 연다. 갤폴드3에는 폴더블폰 최초로 모바일 필기구인 ‘S펜’이 적용될 전망이다. 업계에서는 ‘그냥 S펜’이 아니라 기능이 대폭 개선된 ‘S펜 프로’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 보고 있다. 또 갤폴드3에는 갤럭시폰 최초로 디스플레이 밑으로 카메라를 숨기는 ‘UDC’ 기술이 적용되는 등 회사의 역량이 총결집될 전망이다. 그동안 하반기 언팩의 주인공이었던 ‘갤럭시노트’는 이번에 등장하지 않는다. 갤노트는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약 1000만대 가량 팔릴 정도로 팬층이 두터웠기에 ‘폴더블폰 형제’의 어깨가 더 무거워진 것이다. 시장조사업체 카날리스에 따르면 올 2분기 글로벌 스마트폰 점유율 19%(1위)를 기록한 삼성전자는 중국 샤오미(17%·2위)에 2%포인트로 추격당하고 있다. 여기에 애플이 오는 9월에 나올 아이폰13의 초도물량을 기존 7500만대에서 9000만대로 늘리며 압박을 가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폴더블폰을 200만대가량 팔았는데 이번엔 갤폴드3 300만대, 갤플립3 400만대 등 700만대 판매를 목표로 잡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는 제품의 흥행을 위해 그동안 폴더블폰의 약점으로 꼽혔던 가격을 대폭 낮췄다. 두 제품 다 전작보다 약 40만원 낮게 나올 전망이다. 갤폴드3는 199만원대, 갤플립3는 128만원대로 예상된다. 업계 관계자는 “애플이 생산하지 않는 폴더블폰이 대중화된다면 삼성이 시장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 경기도청·이천시청 각 1명 또 확진

    경기도청·이천시청 각 1명 또 확진

    경기도는 20일 수원에 있는 도청사 구관 3층에 근무하는 A씨가 코로나19에 확진됐다고 밝혔다. A씨는 지난 10일 자택에서 동생과 접촉했는데 동생이 19일 확진됨에 따라 밀접 접촉자로 분류돼 진단검사를 받은 결과 이날 양성 판정을 받았다. A씨는 지난 12~14일 출근하고 15일부터 휴가를 낸 상태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도는 A씨와 공간을 함께 사용하는 2개 부서 사무실을 폐쇄하고 부서 직원 80여명에게 진단검사를 받게 한 뒤 전원 자택대기 조치했다. 앞서 경기도청에서는 지난 15일 같은 층 다른 부서에 근무하는 직원 1명이 확진된 바 있다 경기 이천시도 청사 9층에 근무하는 직원 B씨가 추가로 확진 판정을 받았다고 20일 밝혔다. 이에 따라 지난 14일 형제 공무원 2명을 시작으로 일주일 새 확진된 이천시 공무원은 모두 7명(청사 6명,증포동행정복지센터 1명)이 됐다. 이날 확진 판정을 받은 B씨는 먼저 확진된 형제 공무원 중 1명과 같은 부서 소속으로 밀접접촉자로 분류돼 자가격리 중이었다. 방역 당국은 해당 부서 사무실을 일시 폐쇄하고 동료 직원 30여명에 대해 추가로 진단검사를 진행 중이다. 앞서 이천시는 형제 공무원 확진 이후 직원 1200여명을 대상으로 전수검사를 벌인 바 있다.
  • 40만원 싸진 ‘삼성 폴더블폰’…노트 빈자리 채울 수 있을까

    40만원 싸진 ‘삼성 폴더블폰’…노트 빈자리 채울 수 있을까

    “폴더블(접히는)폰의 대중화 시대를 열겠다!” 삼성전자가 틈만 나면 강조하는 말이다. 지난해 1월 삼성전자 스마트폰 부문의 수장이 된 노태문 무선사업부장(사장)은 같은 해 2월 취임 후 첫 기자간담회와 지난해 12월 기고문을 통해 폴더블폰 대중화를 화두로 꺼냈다. 고동진 삼성전자 IM(정보기술&모바일)부문 대표이사(사장)도 지난 3월 주주총회에서 “폴더블폰 대중화를 추진하겠다”고 강조했다. 2019년 갤럭시폴드를 출시해 시장을 연 삼성전자는 올해야말로 폴더블폰의 ‘대중화 원년’을 이루겠다며 칼을 갈고 있다. 20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다음달 11일 신작 폴더블폰인 ‘갤럭시Z폴드3’와 ‘갤럭시Z플립3’의 공개행사(언팩)를 연다. 갤폴드3에는 폴더블폰 최초로 모바일 필기구인 ‘S펜’이 적용될 전망이다. 업계에서는 ‘그냥 S펜’이 아니라 기능이 대폭 개선된 ‘S펜 프로’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 보고 있다. 또 갤폴드3에는 갤럭시폰 최초로 디스플레이 밑으로 카메라를 숨기는 ‘UDC’ 기술이 적용되는 등 회사의 역량이 총결집될 전망이다.그동안 하반기 언팩의 주인공이었던 ‘갤럭시노트’는 이번에 등장하지 않는다. 갤노트는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약 1000만대 가량 팔릴 정도로 팬층이 두터웠기에 ‘폴더블폰 형제’의 어깨가 더 무거워진 것이다. 시장조사업체 카날리스에 따르면 올 2분기 글로벌 스마트폰 점유율 19%(1위)를 기록한 삼성전자는 중국 샤오미(17%·2위)에 2%포인트로 추격당하고 있다. 여기에 애플이 오는 9월에 나올 아이폰13의 초도물량을 기존 7500만대에서 9000만대로 늘리며 압박을 가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폴더블폰을 200만대가량 팔았는데 이번엔 갤폴드3 300만대, 갤플립3 400만대 등 700만대 판매를 목표로 잡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삼성전자는 제품의 흥행을 위해 그동안 폴더블폰의 약점으로 꼽혔던 가격을 대폭 낮췄다. 두 제품 다 전작보다 약 40만원 낮게 나올 전망이다. 갤폴드3는 199만원대, 갤플립3는 128만원대로 예상된다. 업계 관계자는 “애플이 생산하지 않는 폴더블폰이 대중화된다면 삼성이 시장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 “유흥식 대주교님은 뚝배기 같아…교황청 장관 잘해내실 것”

    “유흥식 대주교님은 뚝배기 같아…교황청 장관 잘해내실 것”

    “유흥식 대주교님은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그 특유의 온화하고 친화력 가득한 미소를 유지하는 분이며, 된장국이나 여러 찌개류를 끓이거나 담는 뚝배기 같은 분입니다.” 20일 충남 당진 솔뫼 성지에서 유흥식 라자로 대주교의 교황청 성직자성 장관 임명을 감사하는 미사가 봉헌됐다. 이용훈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수원교구장)은 미사 강론에서 “유 대주교가 누구에게나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고, 만나는 이들에게 오랜 영성적 여운과 향기를 발하시는 분”이라고 말했다. 이어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하나로 만드는 친교와 화합의 다리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실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미사에는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 이 의장, 동료 사제, 신자 등이 참석해 이달 말 교황청이 있는 로마로 떠나 장관직 수행에 들어가는 유 대주교에 격려와 지지를 보냈다. 이 의장은 “전 세계 사제들의 신명 나는 사목 활동을 위해, 남북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우리나라 순교자들의 시복 시성을 위해 주어진 소임에 행복하게 정진하실 것을 잘 알기에, 한국 교회와 사제들, 신자들은 기도와 함께 전적인 후원과 응원을 드릴 것”이라고 덧붙였다. 염 추기경도 미사에 이어 열린 축하식에서 “유 대주교의 임명에 이제 대주교님처럼 좋은 목자를 멀리 로마로 보내는 대전교구 사제, 수도자, 평신도 여러분의 아쉬움이 제게도 전해지는 거 같다”고 아쉬워했다. 그러면서도 “이제 (유 대주교는) 세계 교회를 위해 애쓰시며 기도와 희생을 바치게 됐다. 축하와 더불어 앞으로 노고에 더 힘을 내시도록 응원을 보내드린다”고 지지를 보냈다. 유 대주교는 답사를 통해 “저의 성직자성 장관 임명을 기뻐하고 기도해 주시는 모든 가톨릭교회 형제·자매님들과 많은 성원을 해주신 국민 여러분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라고 말했다. 이어 “저는 교황청에서 교황님께서 성 베드로 후계자의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하시도록 저의 작은 힘을 보태며 기쁘게 살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사제의 쇄신을 위해 전 세계 사제들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약속했다. 앞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달 11일 교황청 성직자성 장관에 유 주교를 임명하며 대주교 칭호를 부여했다. 성직자성은 전 세계 사제와 부제들의 모든 직무와 생활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는 교황청 부처다. 사목 활동을 감독·심의하는 것은 물론 신학교 관할권도 갖고 있다. 한국인 성직자가 교황청의 차관보 이상 고위직에 임명된 것은 처음이다.
  • 감자칩 봉지 지혈로 칼 맞은 피해자 구한 ‘맥가이버’ 뉴욕 경찰

    감자칩 봉지 지혈로 칼 맞은 피해자 구한 ‘맥가이버’ 뉴욕 경찰

    미국 뉴욕 경찰(NYPD)이 감자칩 포장봉지와 테이프 만으로 칼에 찔린 20대 남성의 상처를 지혈, 생명을 구해냈다. ‘맥가이버 경찰’로 화제를 모은 당시의 구조 장면을 담은 바디캠 영상이 18일(현지시간) 공개됐다고 NBC뉴스가 보도했다. 사건은 지난 7일 뉴욕 퀸즈의 밤거리에서 발생했다. 29세 남성이 가슴에 칼을 맞아 쓰러지자 로널드 케네디 경관이 주변에 웅성대던 시민들에게 감자칩과 테이프를 요구했다. 케네디 경관은 감자칩을 받아 내용물을 모두 쏟은 뒤 포장지를 반듯하게 접어 남성의 상처 위에 덮었다. 이어 주변 시민 두 명에게 피해자를 잡게 한 뒤 포장지 위로 테이프를 덧대 지혈했다. 곧 구조대가 도착해 응급치료를 한 뒤 피해자를 병원으로 옮겼다. 케네디 경관은 전문장비 없이 응급처치를 하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숨을 쉬어봐, 친구”라거나 “내가 옆에 있어, 형제”라고 말을 걸며 피해자를 계속 안심시켰다.병원으로 옮겨진 남성은 위독하지만, 생명엔 지장이 없는 상태다. 의료진은 케네디 경관의 빠른 조치 덕분에 남성이 살아날 수 있었다고 밝혔다. NYPD는 사건 나흘 뒤인 11일 칼을 휘두른 범인 에릭 로드리게스(38)를 살인미수, 폭행, 흉기소지 등의 혐의로 붙잡았다. 이렇게 사건이 일단락된 뒤 NYPD는 케네디 경관의 구조 장면이 찍힌 바디캠을 공개했다. 로드니 해리슨 NYPD 순찰국장은 트위터에 영상을 공개하며 “이 장면은 NYPD 경찰들이 매일 하는 영웅적인 일들의 한 사례에 불과하다”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 [우주를 보다] 달 표면에 선명히 보이는 ‘뽀로로 크레이터’

    [우주를 보다] 달 표면에 선명히 보이는 ‘뽀로로 크레이터’

    어린이들에게 엄청나게 사랑받고 있는 만화 캐릭터 ‘뽀로로’가 달 표면에 나타났다. 19일 밤과 20일 밤 뜨는 상현 반달의 밤낮 경계선 부근에 뚜렷이 보이는 알폰소수스와 아르차헬 크레이터가 뽀로로의 모습과 흡사해 별지기들 사이에 ‘뽀로로 크레이터’란 별명을 얻었다. 동그란 두 눈 사이에 코처럼 보이는 또 다른 작은 크레이터가 자리잡고 있어 흡사 팽귄 같은 캐릭터의 얼굴을 하고 있다. 캐릭터의 두 눈처럼 보이는 크레이터들은 사실 달의 ‘구름의 바다’ 북동쪽 해안에 있는 고대 충돌 분화구이다. 둘 중에서 큰 편인 알폰수스는 지름이 119㎞, 깊이가 2.7㎞나 된다. 한라산 높이를 훌쩍 넘는다. 태양이 낮은 각도로 비칠 때 분화구 중심에 솟은 높이 1.5㎞ 봉우리가 드리우는 어두운 그림자를 선명하게 볼 수 있다. 1965년 아폴로 우주선의 달 착륙 예정 지점을 정찰하던 미국의 달 탐사선 레인저 9호가 중앙 산의 북동쪽 분화구에 추락하기 전 이 지역의 근접 촬영 사진을 지구로 보내왔다. 오른쪽 크레이터 아르차헬은 알폰수스의 남쪽에 위치한 것으로, 그 지름이 약 96㎞로 알폰수스보다 조금 작다. 깊이 3.6㎞의 크레이터 벽들 형상이 비교적 뚜렷하고 중앙부에 역시 높은 산이 있다.알폰수스와 아르차헬 사이에 있는 알페트라기우스 크레이터는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바닥과 지나치게 큰 중앙 묏부리를 가진 특이한 형태의 충돌구로, 뽀로로 캐릭터의 귀여운 코처럼 보인다. 지름은 40㎞, 깊이는 3.9㎞다. 알폰수스의 북쪽으로는 지름 150㎞인 프톨레마이오스 크레이터가 있는데, 알폰소스와 아르차헬 세 크레이터를 통틀어 '알폰소스 삼형제'라고 일컫는다.
  • 창작·번역 이중주로… ‘세계문학으로서의 한국문학’ 지휘한다

    창작·번역 이중주로… ‘세계문학으로서의 한국문학’ 지휘한다

    곽효환 시인은 우리 시단에서 ‘북방’이라는 상징적 키워드를 발굴하고 개척해 온 선구자로 유명하다. 그동안 펴낸 네 살 터울의 4형제 시집 ‘인디오 여인’(2006), ‘지도에 없는 집’(2010), ‘슬픔의 뼈대’(2014), ‘너는’(2018)에서 그는 인류의 시원(始原)을 찾아나서는 기행과 편력을 통해 이면의 역사를 탐구했고, 서정과 서사의 균형적 결속을 통해 궁극적 자기 긍정의 주제를 담아 왔다고 할 수 있다. “저는 북방을 단순한 심상지리 차원이 아니라 기원, 사랑, 존재 등과 동의어로 생각해 왔습니다. 북방을 통해 역사적 개인과 공동체의 삶 그리고 그 밑바닥에 잔뜩 웅크리고 있는 주변인들의 비극성을 두루 천착해 온 것이지요.”#북방의 시인이 맞은 구체적 확장의 순간 그는 우리 시단의 공백 지대였던 이른바 탈경계의 상상력으로 새로운 민중성을 탐색해 보려 했다고 한다. “이때 민중성이란 백지 상태에서 바라본 민중 서사를 함축한다”는 그는 “가는 곳마다 펼쳐져 있는 이산(diaspora)과 울음의 흔적을 수습하면서 제 가슴도 한없이 뜨거워졌다”고 했다. 그런데 이러한 북방은 이제 한국문학번역원장이라는 직책에 맞게 더욱더 구체적인 확장의 순간을 맞을 것 같다. 북방을 넘어 세계로 나아가는 최전선에 그가 서게 된 까닭이다. “그동안 해 왔던 일의 연장선에 있으니 낯설지는 않아요. 그러나 보다 공공성을 갖추어 효율성과 절차적 합리성을 동시에 추구해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세계문학으로서의 한국문학 얼마 전 곽효환 원장은 기자간담회를 열어 임기 동안 추구해야 할 목표와 전략을 정성 들여 소개했다. “제가 생각하는 한국문학의 상황은 어느 때보다 가능성으로 충일합니다. 임기를 마칠 즈음에는 ‘세계문학으로서 한국문학’의 기초를 확실히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동안 귀에 익숙한 ‘한국문학의 세계화’가 아닌 ‘세계문학으로서의 한국문학’이라는 표현에서는 번역원의 임무가 단순한 해외 소개를 뛰어넘겠다는 강한 의지가 읽힌다. 그는 “세계화라는 말은 한국문학을 바깥에서 알아 달라고 애원하던 시대의 술어”라면서 “세계문학, 출판시장의 당당한 일원으로서 그 위상과 가능성을 3년 임기 동안 ‘세계문학으로서 한국문학’으로 귀착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세계문학으로서 한국문학 개척 작업은 곽 원장이 30년 가까이 대산문화재단에서 지속적으로 해 왔던 일들과 그대로 연동된다. 그는 1999년 한국문학과 세계문학 교류의 담론장으로 서울국제문학포럼을 기획했고, 프랑스를 방문해 르 클레지오, 이스마엘 카다레 등 프랑스의 주요 문인들을 만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때 만남을 인연으로 2001년 르 클레지오를 서울에 초청했고, 이후 지속적 교류를 통해 르 클레지오는 서울국제문학포럼의 주요 참석자이자 세계적인 지한파 작가가 됐다. 2000년에는 피에르 부르디외, 월레 소잉카, 개리 스나이더 등 세계적 문호들을 초대한 2000년 서울국제문학포럼의 실무를 맡았다. 이후에도 서울국제문학포럼의 조직위원 겸 집행위원장을 맡아 세계문학의 상호 교류와 새로운 담론 생산을 담당하는 허브 역할을 했다. 2008년에는 한중일 동아시아문학포럼을 통해 첫 동아시아문학포럼의 서울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러한 오랜 기초공사를 통해 이제 ‘세계문학으로서의 한국문학’을 구축하고 확장해 가는 지휘자의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곽 원장은 한국문학 저작권 상시 거래 온라인 플랫폼 운영, 번역대학원대학 설립 추진, 한국어 콘텐츠 번역 지원 및 번역 인력 양성, 한국문학 해외 소개 맞춤형 전략 수립 및 시행 등을 세부적인 중점 추진 과제로 강조했다.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한국학 열풍을 제때 활용해야 하는데, 특별히 번역대학원대학 같은 사업은 매우 중요하고 시급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시인 곽효환의 기원과 궁극 곽효환 시인은 1967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잠업검사소 소장으로 재직해 유복한 가정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거듭된 사업 실패로 집안은 점점 어려워져만 갔다. 끝내는 서울 사당동 달동네로 이사해 그곳에서 6개월여를 살았다. “이후 어머니는 낮에는 건강식품 외판원, 밤에는 재봉 공장 미싱사 등을 하며 놀라울 정도로 집안을 일으키셨어요. 반면 아버지는 친구와 술과 담배로 세월을 보내며 집에선 점점 폭군이 돼 가셨어요.” 아버지를 이해하려 노력했지만 결국 아버지를 인생의 반면교사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고등학생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나는 아버지처럼/쉽게 흔들리지도 그렇게/일찍 지지도 그렇게/흘러가지도 않을 것이다’(‘늙은 느티나무에 들다’, ‘슬픔의 뼈대’에 수록)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의 삶은 시인에게 이처럼 분명한 역상(逆像)으로 존재했다. ‘사당동 산 17번지. 78년은 몰락한 소시민의 피난처이자 안식처. 거듭되는 사업 실패로 추락한 아버지의 종착지’(‘물 길러 가는 길’, ‘인디오 여인’에 수록), ‘삼십 주기 기일을 며칠 앞두고 낡고 해진 아버지의 사진첩을 편다’(‘아버지의 사진첩’, ‘지도에 없는 집’에 수록)라는 표현도 한없이 이어져 간다. 불우하고도 애틋한 생을 마감한 아버지를 다시 떠올리며 그는 자신만은 단단하고도 오랜 시간으로 깃들이고 말 것이라고 다짐한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시인 곽효환’의 허기와 총기와 결기는 모두 아버지라는 그리움의 수원에서 나온 것들인지도 모른다.대학에 들어간 청년 곽효환은 최서해의 소설을 읽으며 밤새 뜨거운 눈물을 흘렸고, 김수영의 시를 읽으며 자유의 정의를 향한 퓨리턴의 초상과 부정한 시대에 응전하는 불온성에 매료됐다고 한다. “대학신문 주간 조남현 교수의 균형 있고 깊이 있는 글과 시선, 온화하고 합리적인 성품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평생의 스승으로 삼을 것을 결심했다”는 그는 지금도 자신의 문학적 스승으로 조남현 선생, 언제나 학문적 지남이 돼 준 유종호 선생, 대학원 지도교수인 최동호 선생을 꼽는다. 세 사람의 문학적 편폭이 자신에게 긍정적으로 갈무리돼 지금까지 시 쓰기와 연구와 문학행정을 두루 감당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짧은 언론사 생활을 마치고 대산문화재단에 들어가 30여년의 시간을 문화사업 기획과 실천에 쏟았다. 그러는 동안 꾸준히 습작도 했다. “신춘문예에 투고했는데 번번이 본심 진출 정도에 그쳤습니다. 그러다가 1996년 조용호 기자의 권유로 세계일보에 ‘벽화 속의 고양이 3’을 발표했습니다. 공식적인 첫 지면이었지요.” 그 후 2002년 계간 ‘시평’에 다섯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곽효환은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곽효환의 시는 이 세상은 어쩔 수 없이 비속하고 남루하며, 그 어딘가에는 그 비속함과 남루함을 벗어난 신성하고 근원적인 세계가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시를 써 간다. 이때 우리는 그가 세상살이의 신산함에 내던져진 채 비극적 삶을 살아갔던 “그들이, 그들의 삶이 시라고 믿는”(‘지도에 없는 집’ 뒤표지 글) 시인이라는 점을 소중하게 기억하게 된다. 그것이 그의 시가 가지는 기원과 궁극일 테니까 말이다.#머나먼 시간과 공간으로의 세계 곽효환은 여전히 완강하고 지속적으로 자신의 존재론적 기원이라 할 수 있는 세계를 하염없이 형상화해 간다. 옹색한 한반도를 떠나 북방을 찾아 나서면서 그는 시대와의 불화를 방법론적으로 확산해 간 것인지도 모른다. “그곳에는 인간의 순수 원형이 존재하거나 존재했을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가지고 다녔어요. 길과 여행이야말로 현실 원리가 지배하는 시공간으로부터의 과감한 탈주를 수행하게끔 해 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시가 역사의 비주류 정서가 숨쉬고 있는 북방에 대한 경험 및 상상을 취하고 있음에 주목하는 것을 넘어 그러한 속성이 그로 하여금 더욱 성숙한 시인의 존재론적 기반을 갖추게끔 해 주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시집 ‘너는’에서 그는 잃어버린 것들을 회복하고 탈환하는 사랑의 대상으로 친근하고도 머나먼 ‘너’를 호명했다. 여기서 ‘너’란 시인의 말을 빌리면 “시원이면서 궁극”이고 “끝내 닿을 수 없는 내 안의 타자”다. 그 ‘너’를 찾아 그는 앞으로도 머나먼 시간과 공간으로 자신의 세계를 펼쳐 갈 것이다. 창작과 번역이라는 이중 범주를 한몸에 안고 그가 ‘세계문학으로서의 한국문학’을 오롯이 착근시켜 가기를 함께 희망해 본 한여름의 만남이었다.
  • 24년 전 베르사체 살해된 곳에서 나온 두 남성 주검, 극단 택한 듯

    24년 전 베르사체 살해된 곳에서 나온 두 남성 주검, 극단 택한 듯

    이탈리아 패션 디자이너 잔니 베르사체의 24주기를 하루 앞두고 그가 총격범에게 살해된 호화 맨션을 개조한 럭셔리 호텔 객실에서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된 두 남성은 극단을 선택한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자살 동기를 파악하고 있다고 야후! 엔터테인먼트가 17일(현지시간) 전했다.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비치에 있는 빌라 카사 카수아리나란 이름의 럭셔리 호텔 겸이벤트 센터는 패션 명가를 일군 베르사체가 1992년 구입해 3200만 달러를 들여 리모델링한 맨션으로 그는 1997년 7월 15일(이하 현지시간) 이 맨션의 계단에서 광적인 팬이자 연쇄 살인마였던 앤드루 커내넌의 총격을 받고 불귀의 객이 됐다. 그런데 그의 24주기를 하루 앞둔 지난 14일 체크아웃을 하지 않아 문을 따고 호텔 객실 안에 들어간 하우스키퍼가 두 남자가 의식이 없는 채 침대에 나란히 누워 숨져 있는 것을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두 남성의 신원이나 자살 동기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두 주검 옆에는 각자의 유서가 놓여 있었다. 한 쪽이 상대의 머리에 권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긴 뒤 자신의 머리에도 같은 짓을 한 것으로 보인다. 둘 다 우울증 등 정신 문제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24년 전으로 시계를 돌리면 베르사체는 그날 아침 산책을 나가 잡지들을 사서 집에 돌아오던 길에 커내넌과 맞닥뜨렸다. 커내넌은 벌써 여러 카운티를 넘나들며 4명의 남성을 살해한 상태였다. 그는 베르사체의 머리에 총을 갖다 붙이다시피 해 방아쇠를 당겼다. 열렬한 팬이었다는데 왜 그랬는지 의문이었다. 그는 베르사체가 죽은 지 여드레 만에 극단을 선택했다. 베르사체가 눈을 감았을 때 나이 쉰 살 밖에 안 됐다. 그가 살해된 사연은 2018년 텔레비전 드라마 ‘잔니 베르사체의 암살- 아메리칸 크라임 스토리’로 제작돼 방영됐다. 최근에는 라이언 머피 감독이 FX의 범죄물 시리즈로 여러 부문 에미상을 수상한 ‘아메리칸 크라임 스토리’의 두 번째 에피소드로 다뤄 눈길을 끌었다. 베르사체는 ‘접대부 패션’이란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초창기에는 번쩍거리는 디자인을 과시했지만 나중에는 이를 누그러뜨려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비가 입은 의상처럼 세련되면서도 화려하고 섹시한 앙상블을 만들었다. 모델들에게 많은 급여를 지급해 언론들이 ‘슈퍼모델’이라고 불렀는데 베르사체가 사망할 무렵 형제인 산토가 최고경영자를 맡고, 누이인 도나텔라는 디자이너이자 부사장으로 그의 기업은 남성복·여성복·아동복만이 아니라 핸드백·보석·향수·가정용품까지 생산하고 있었으며, 많은 패션 애호가들이 그의 25년 디자이너 경력이 바야흐로 절정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는 시점에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 비극 언제까지…6세 아이, 美 패스트푸드점서 총에 맞아 사망

    비극 언제까지…6세 아이, 美 패스트푸드점서 총에 맞아 사망

    미국의 한 패스트푸드점 앞에서 또 한 건의 충격적인 총기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6세 어린이 한 명이 사망하고 성인 5명이 부당을 당했다. 현지 언론의 17일 보도에 따르면 현지시간으로 16일 밤 11시경 워싱턴DC의 파파이스 매장 인근에서 총성이 울렸다. 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했을 때, 현장에 있던 6세 소녀는 이미 사망한 후였다. 성인 남성 3명과 여성 2명도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됐으며, 현재 건강 상태는 확인되지 않았다. 현지 경찰은 총기를 난사하고 현장을 도주한 용의자를 쫓고 있지만, 정확한 인상착의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다만 당시 용의자 또는 용의자들이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색의 자동차를 타고 있었다는 사실만 확인됐다. 워싱턴DC 당국은 ”총에 맞은 6세 어린이는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사망선고를 받았다. 사망한 6세 어린이 희생자와 가족에게 조의를 표한다“면서 ”도심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총격도 용납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우리는 총격에 영향을 받거나 희생되는 어린이들에 대한 신고 전화를 매우 많이 받고 있다“면서 ”(현장에서 도주한) 용의자들을 재판에 넘길 수 있도록 도와달라“며 제보를 호소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봉쇄가 완화되면서, 미국 각지에서는 총격사건 및 총기사고가 급증하고 있다. 지난 4월에는 맥도날드 매장 드라이브스루 구역에서 7세 어린이가 차 안에 있다가 괴한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같은 달 코네티컷에 사는 3세 아이는 어머니가 운전하는 차량을 타고 지나가다가, 옆 차선을 달리던 차량에서 마구잡이로 쏜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총기사고도 빈번하게 발생한다. 지난 4월 텍사스주에서는 생후 8개월 된 아기가 세 살배기 남자 형제가 쏜 총에 맞아 숨지는 비극도 발생했다. 한편 미국 내 모든 총기 사고 정보를 기록하는 비영리단체 ‘총기 폭력 아카이브’에 따르면 올해 1~4월 18일 기준 미국에서 총기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5553명이다. 희생자 가운데 11세 이하 어린이는 90명, 12~17세 청소년도 323명에 달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최근 잇따라 발생한 무차별 총기 사고로 인해 총기 규제에 대한 시민들의 요구가 커짐에 따라 총기 규제를 주제로 의원들과 회동을 가졌다. 바이든 대통령은 불법적인 총기의 규제뿐만 아니라 주류, 담배, 총기 등의 판매자들이 허가증을 취득하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 유괴당해 52만원에 팔려간 中 쌍둥이, 28년 만에 아버지 상봉

    유괴당해 52만원에 팔려간 中 쌍둥이, 28년 만에 아버지 상봉

    5세 때 유괴당한 뒤 28년 만에 친부와 상봉한 쌍둥이의 기구한 사연이 공개됐다. 중국 산시성 시엔양 우공현 공안국은 인신매매된 뒤 28년 만에 친부와 상봉한 쌍둥이 형제의 안타까운 가족 사연을 언론에 공개했다. 지난 1993년 거주지 인근 시장 골목에서 유괴된 쌍둥이 형제는 28년이 흐른 후 30대 청년의 모습으로 친부와 눈물의 상봉을 했다. 유괴될 당시 쌍둥이 형제의 친부모는 인근 전통시장 야채 가게를 운영했고, 유괴 당일 형제는 부모님이 있는 가게로 향하던 길목에서 인신매매단에 유괴된 뒤 서로 다른 가정에 입양된 채 지금껏 살아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집에서 불과 5분 거리의 친부의 야채 가게로 향하던 중 인신매매를 당했던 것이다. 사건 직후 친부 류 씨는 쌍둥이 형제의 유괴 사건을 관할 공안국에 의뢰했으나, 당시 쌍둥이 남매의 사진이 한 장도 없었던 류 씨의 사건 접수는 사실상 흐지부지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관할 공안국은 사라진 쌍둥이 형제의 인상착의와 나이 등의 정보로 유괴 장소를 수색했으나 사실상 뚜렷한 단서를 찾지 못했다.  사건 이후 류 씨 부부는 아이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이혼 후 각자의 길을 걸어왔다. 류 씨는 “쌍둥이 형제가 사라진 이후 우리 부부는 모두 제정신으로는 버틸 수 없었다”고 당시 분위기를 회상했다. 하지만 친부 류 씨는 이후에도 줄곧 쌍둥이 형제를 찾기 위해 유괴 장소 인근에 거주하면서 28년 동안 아이들의 행방을 찾아 수소문했다.  주로 유괴 장소를 오고가며 전단지를 배포하고 지역 언론에 형제의 인상착의와 유괴 당시의 사건 내역을 공개 수소문하는 방법이었다. 이 시기 친부 류 씨가 제작해 전국에 뿌린 전단지만 수십만 장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 사이 장 씨 부부는 현지 방송에도 출연하고 보육시설을 뒤졌지만, 아들을 찾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류 씨는 사건 이후 줄곧 인근 상점에서 아르바이트와 계약직으로 근무, 수익의 대부분은 아이들의 전단지를 제작해 배포하는데 사용했다. 그러던 중 무려 28년 만에 쌍둥이 형제를 찾았다는 관할 공안국의 연락을 받은 류 씨는 뛸 듯 기뻐했다.  이번 사건은 지난 2009년 창설된 공안국 부설 전국 실종아동구조센터가 진행한 전국적인 규모의 실종 아동 찾기 운동으로 28년 만에 극적인 상봉에 성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지난 2015년 류 씨와 그의 전부인이 제출한 DNA 샘플을 활용, 쌍둥이 형제의 신원과 비교 대조한 결과 이들 사이의 친부 관계가 성립한 것이 확인되면서 극적으로 상봉할 수 있었다. 특히 이번에 공안국이 공개한 수사 내용에 따르면, 지난 1993년 인신매매단에 의해 봉고차에 실려 사라진 쌍둥이 형제는 각각 허난성 지역의 무자녀 가정에 입양됐다. 사실상의 인신 매매단에 의한 조직적인 유괴와 아동 매매 사건이었다.  쌍둥이 형제 중 첫째는 허난성 소재의 한 가정에 4000위안(약 71만 원)에 팔렸고, 둘째는 인근 마을의 또 다른 가정에 3000위안(약 52만 원)에 입양됐다. 서로 다른 가정에 입양된 쌍둥이 형제는 이후에도 같은 초중등학교에 입학해 재학하는 등 기구한 인생을 살았다. 더욱이 두 사람은 자신들이 쌍둥이라는 사실도 지금껏 인지하지 못한 채 같은 학교 동급생으로 살아왔다.  다만 쌍둥이 중 첫 째인 A씨는 1993년 인신매매단에 유괴됐을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관할 공안국의 신원 확인을 위한 연락을 받은 A씨는 사건 당시 기억에 대해 “어린 시절 부모님은 매우 가난했는데, 집이 좁고 몹시 무더워서 동생과 함께 아버지가 있는 야채 가게로 가던 중 유괴당했다”면서 “그날 따라 유난히 날씨가 더웠고, 어머니는 두 살 정도 된 동생을 낳고 몸이 상당히 약한 상태였다. 우리 형제는 아버지를 찾아 가게로 가던 중이었는데 당시 20대 젊은 여성이 접근해서 아이스크림을 준다면서 내 손을 잡고 갔는데, 그 후에 한 봉고차에 탑승한 후 다른 가정에 입양돼 지금껏 살아왔다”고 회상했다.  한편, 중국에서는 수 십년 동안 조직적인 인신매매단에 의한 아동 유괴와 거래가 횡행해 문제가 되고 있다. 정부가 공개한 공식 통계는 없으나 홍콩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는 지난 2015년 기준 매년 2만 명의 아동이 유괴돼 사라지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와 관련, 중국 공안국은 지난 2009년부터 전국적인 DNA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유괴된 실종 아동 사건을 재수사 해오고 있다. 이를 통해 7월 현재 총 6천 건 이상의 관련 사건을 해결한 것으로 알려졌다.
  • 이천시 공무원 1명 추가 확진…모두 4명으로 늘어

    경기 이천시는 청사 6층에 근무하는 직원 1명이 추가로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고 16일 밝혔다. 이에 따라 최근 사흘 새 확진된 이천시 공무원은 모두 4명이 됐다. 앞서 지난 14일 청사 7층과 9층에서 근무하는 공무원 A씨 형제가 확진된 뒤 15일에는 이들 중 1명과 접촉한 증포동행정복지센터 직원 1명도 확진 판정이 났다. 방역당국은 이에 따라 직원 1200여명에 대한 전수검사를 벌였으며 확진자들의 세부 동선과 추가 접촉자를 파악하고 있다.
  • “담 넘다 붙잡힌 아이...야구방망이로 때려 사망하니 눈앞에서 질질 끌고갔어요”[형제복지원 생존자, 다시 그곳을 말하다]

    “담 넘다 붙잡힌 아이...야구방망이로 때려 사망하니 눈앞에서 질질 끌고갔어요”[형제복지원 생존자, 다시 그곳을 말하다]

    12년간 수용인원 총 3만 8000여명, 공식 사망자 513명. 1970~1980년대 국가 최대 부랑인 수용시설이었던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벌어진 인권 유린 사태는 1987년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34년이 지난 지금,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이는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진상 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생존자 13명은 지난달 20일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에 나섰다. 법원에 낼 진술서를 쓰는 과정 또한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반드시 쓰여져야 할 글이었다. 서울신문은 매주 1명씩 이들의 증언을 기록으로 남긴다.할머니 집서 매맞기 싫어 엄마 찾아가다 더한 지옥 끌려간 남매 “야 얘 죽었다. 치워라.” ‘한국판 홀로코스트’로 불리는 형제복지원에서는 아이들을 상대로 견디기 힘든 구타와 학대가 자행됐다. 아이들은 자신의 키에 몇 배가 되는 형제복지원의 높은 담을 넘어 탈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야구방망이를 든 경비들에게 번번이 붙잡히기 일쑤였다. 한번은 담을 넘으려던 한 남자아이에게 덩치 큰 남자 경비 대여섯 명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아이를 포댓자루에 돌돌 말아서 방망이로 마구 내리쳤다. 한 명이 “잠깐만”이라고 외칠 때까지 한참 동안 폭행이 이어졌다. 그는 야구방망이로 아이를 툭툭 건드렸다. 아이가 반응이 없자 “얘 죽었다. 치워”라고 말했고, 남자들은 그 아이를 질질 끌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김승연(45·가명)씨가 7살의 어린 나이로 목격한 잔혹한 광경은 3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1983년 그녀는 5살짜리 동생 김승준(가명)씨<3일 자 ‘[형제복지원 생존자, 다시 그곳을 말하다 6화] 엄마 만나려 기차탔다 형제원행...자식 찾아 8년 헤맨 아버지는 빚더미>와 함께 엄마를 만나려 기차를 탔다가 잘못 내린 부산역에서 경찰들에 의해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다. 4년간 폭행과 학대가 매일같이 자행됐다. 김씨 남매는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수많은 동료들의 죽음을 목격해야 했다. 어떤 날은 김씨가 있던 23소대에 연탄가스가 누출됐다. 밖에서 걸어잠근 문 때문에 제때 피신하지 못한 김씨는 의식을 잃고 끌려나갔다. 김씨는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소대에 동료 몇 명이 사망했다. 또 한 번은 전염병이 돌았다. 열이 40도를 넘었고 생사를 넘나들던 김씨는 다행히 회복했지만 동료 한 명을 잃었다. 김씨 남매는 8년이 흐르고서야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갔지만 어린시절 겪은 죽음의 공포는 잊히지 않고, 트라우마도 여전하기만 하다. 그러나 국가는 여전히 “우리의 억울한 일을 국가는 왜 외면하는가? 우리는 왜 여전히 고통받고 살아야 하는가?”라는 김씨의 질문에 제대로 답을 주지 않는다. 아래는 김씨의 진술서 전문. ※원문에서 일부 표현만 다듬어 그대로 옮겼습니다. [진 술 서] 제목: 형제복지원 피해자 진술서 성명: 김승연 진술내용: 전 1983년에 형제복지원에 잡혀갔습니다. 그때 제 나이 7살이었어요. 제 남동생은 5살이었고요. 저와 남동생은 서울 영등포 신길동 친할머니 집에서 태어나 7살까지 살았어요. 엄마랑 아빠는 제가 5살 때쯤 이혼하시고 저랑 남동생은 신길동 친할머니 집에 살았고, 언니는 큰고모 집에서 살게 되었어요. 그때 아빠는 돈을 벌어야 해서 사우디아라비아에 가셔서 일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우릴 키울 수 없어서 각각 친척집에 살게 되었어요. 그런데 할머니나 막내 삼촌은 말을 잘 안 듣는다고 매일 나랑 동생을 구박하고 때렸어요. 전 참다못해 대전에 있는 외할머니 집으로 가서 엄마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으로 남동생의 손을 잡고 영등포역으로 가서 외할머니 집에 갔다가 막내 이모가 아빠한테 연락하여 다시 친할머니 집으로 보냈어요. 영등포에 도착하니까 아빠랑 막내 삼촌이 저희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때 아빠한테 혼났는데, 아빠가 미안하다고 백화점에 가서 원피스 한 벌 사주시고 남동생도 옷 한 벌 사주고 언니 옷까지 사줬어요. 맛있는 것을 사서 먹으라며 그 당시 사백 원 정도의 용돈도 줬어요. 아빠는 우리한테 평소에 언니랑 나는 똑같은 옷을 입히는 것을 좋아했고 남동생도 항상 정장 옷에 모자 씌웠어요. 전 늘 공주처럼 옷을 입고 다녔고 애들한테 자랑했어요. 저희가 용돈을 받은 당일 아빠가 막내 삼촌을 혼냈더니 삼촌이 화가 많이 났어요. 아빠는 그 후 사우디아라비아에 가셨어요. 막내 삼촌은 저희 째려보면서 “집으로 가 있어. 삼촌 친구들 만나고 갈 테니까”라고 했는데 마치 ’너흰 내가 가면 죽었어’ 하는 표정이었어요. 너무 무서워서 집에 도저히 못 들어가겠더라고요. 들어가면 맞아 죽을 것 같아서 다시 뒤돌아서 대전 외할머니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에 동생의 손을 잡고 다시 영등포역으로 가서 대전가는 기차표를 끊고 기차를 탔어요. 엄마 만나려 기차탔다 잘못 내린 부산역서 경찰들 손에 형제원행그런데 모르고 잠이 들어버려서, 그대로 부산에 도착하게 되었고 밤에 어린아이 둘이 내리니까 역무원 아저씨가 엄마는 어디 갔느냐고 묻기에 대전에 내려야 하는데 잠들어서 여기 부산까지 왔다고 하니까 역무원 아저씨가 부산역 앞에 있는 파출소에 데려다 줬어요. 경찰 아저씨가 어떻게 됐는지 물어서 “기차 안에서 잠이 들어 대전에 못 내리고 여기까지 왔다”고 했더니 집 주소를 아느냐고 묻기에 외할머니 집 주소랑 전화번호에 약도까지 그려줬어요. 그랬더니 경찰 아저씨가 “알았다. 집에 연락해서 데려다 준다. 기다리라”고 해서 파출소에서 기다리다 잠들었어요. 깨보니 집에 데려다 준다면서 차에 타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차를 봤는데 차가 이상한 거에요. 냉동 탑차 같은 데 타라고 하기에, “집에 가는 차 맞느냐”고 물으니, “맞다. 데려다 줄게”라고 해서 차를 타려는데 어두 컴컴한 차 안에 몇 사람이 타고 있더라고요. 속으로 ‘아 저 사람들도 다 집에 데려다 주나 보다’하고 동생과 차에 탔더니 차 문을 잠그고 출발했어요. 그래서 전 ‘집에 가는구나’하고 차에서 또 잠들었어요. 갑자기 저와 동생을 깨우더니 “집에 다 왔다”면서 내리라고 했어요. 거대한 철문 앞에 차가 서더니 안으로 들어가라고 했어요. 어른들이 들어가기에 따라 들어갔더니 철문을 밖에서 걸어버리는 소리가 났어요. 그러더니 또 다른 누군가가 따라오라고 해서 위쪽으로 한참을 올라가니 작은 철문을 또 열쇠로 따더라고요. 문을 3번 정도 열쇠로 따더니 (저와 동생을) 툭 집어넣으면서 “저 안쪽으로 들어가서 자”라고 하고는 문을 밖에서 걸어 잠갔어요. 진짜 무서웠지만 제 나이가 그때 7살, 동생은 5살밖에 안 돼서 무슨 말도 못하고 그저 자라고 하기에 안쪽으로 들어가서 자려고 갔어요. 컴컴한 데서 어렴풋이 보니 2층 침대가 쭉 일자로 있더라고요. 나와 동생은 한쪽 침대에서 잤고, 아침이 돼서 일어나라고 해서 깨어보니 어마어마하게 길게 뻗어 있는 2층 식 침대들과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어서 놀랐어요. 그러더니 누군가가 불러서 파란 운동복과 검정 고무신을 주며 갈아입으라고 해서 갈아입었어요. 제게 앉으라더니 제 긴 머리를 막 자르더라고요. 전 울면서 동생과 나를 집에 데려다 달라고 했더니 막 때렸어요. 조용히 하라고. 그때부터 저희에 지옥 같은 삶이 시작되었어요. 처음에 잡혀들어가면 아무 이유없이 막 때려요. 한마디만 해도 때리고, 울어도 때리고. 그제야 눈치를 채고 여기서 나랑 동생은 평생을 살아야겠구나 하고 포기를 하다시피 하면서 생활에 적응 아닌 적응을 하기 시작했어요. 맨 처음에 시키는 게 있더라고요. 세 가지를 무조건 외워야 한대요. 국민교육헌장, 주기도문, 사도신경 이 세 가지를 1주일을 주면서 외우라고 하더라고요. 아니면 맞아 죽는다고. 전 너무 무서워서 그 어린 나이에도 무조건 암기를 해야 하는구나 하고 한대라도 덜 맞으려고 최대한 빨리 암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취침시간에도 잠도 못 자고 소대 안에 난로가 있어서 그 앞에서 추우니까 다들 딱 달라붙어서 외우기 시작했어요. 신입들은 그걸 외워야 한다기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먼저 잡혀온 사람들은 이미 암기 다했다고 재우고···. 우린 그 어두운 데서 아주 조용하게 그 세 가지를 외워야 했어요. 눈앞에서 아이 때려 죽이고는 “치워라”...잔혹하고 무서운 공포진짜 매일 맞았어요. 하루하루가 지옥의 삶이었고 무서웠고 고통이었지만 버텨야 했어요. 저희 23소대가 여자 아동소대라서 맨 위쪽에 있어서 별걸 다 봤어요. 높은 담에 (아이들이) 도망 못 가게 경비들이 야구 방망이 같은 걸 들고 맨날 서 있어요. 근데도 사람들이나 특히 남자들이 도망을 엄청 시도했어요. 전 그걸 보면서 느낀 게 도망가다 잡히면 매를 맞아 죽는데 왜 가는지···. 그때 제 나이가 너무 어렸기에 전 (도망) 시도나 생각도 안 했어요. 아니 그냥 포기하고 살았어요. 어떤 날은 어떤 남자가 도망가다가 잡혔어요. 소대 사이에서 사람들 다 보라는 듯 그 남자를 포댓자루에 돌돌 말더니 대여섯 명이 마구 때리기 시작하더니 한참을 때리다가 때리던 어떤 남자가 “잠깐만”이라고 하더니 맞고 있는 남자를 몽둥이로 툭툭 쳤어요. 그리고는 “야 애 죽었다 치워라”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곤 그 죽은 사람을 교회 쪽으로 질질 끌고 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요. 저에겐 너무나 잔혹한 장면이었고 무서웠고 공포였어요. 제가 그 뒤로 사회생활 하면서 교통사고 나서 머리가 터져 죽은 사람들을 봐도 아무렇지 않고 심지어 밥도 잘 먹어요. 난 “내가 왜 이렇게 독하지”하며 살았고,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들이 저보고 독하다고 할 때 그냥 제가 마냥 그런 성격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정신과 치료를 받아보니 그 트라우마 때문에 익숙해져서 몰랐을 거라고 했어요. 그 소리를 딱 듣는 순간 “그렇구나. 내가 어릴 때 사람 죽어나가고 그런 것들만 보고 컸으니 그런 것이구나”하는 생각을 했어요. 내 자신이 너무 싫었어요. 내 자신이 무서웠어요. 그렇게 거기서 매 맞아 가는 사람들을 보는 게 다반사였어요. 어떤 날은 우리 23소대에서 연탄가스가 누출되어서 자다가 끌려 나온 적도 있어요. 소대는 잘 때 되면 밖에서 문을 잠그기 때문에 안에서 큰일이 발생해도 바로 피신도 못해요. 그러다 연탄가스 마셔서 쓰러지고 깨어보니 누가 저에게 김칫국물 같은 걸 먹이고 있더라고요. 전 가까스로 살아났고 그날 23소대에서 죽은 애들도 몇몇 있었어요. 그 장면이 아직도 생생해요. 끔찍해요. 그리고 어느 날 제가 아주 아팠거든요. 그때 열이 40도가 넘었었거든요. 그때 처음으로 사회 병원 갔었는데, 병원에서 가망이 없으니 그냥 데려가라고 해서 다시 형제복지원으로 복귀했어요. 소대 안에 목욕탕이 있는데 그 탕 안에 얼음을 왕창 넣고 절 집어넣어서 열을 내린다고 난리가 났어요. 그 다음 날 저는 좀 정신을 차려서 깨어났는데 저 때문에 23소대 사람들이 다 전염이 되었더라고요. 마지막에 걸린 애가 있었는데 그 애는 결국 죽고 말았어요. 지금도 그 애가 나 때문에 죽은 것 같아서 죄책감에 시달리고 살아요. 매맞다 머리에 못박히고...함께 끌려온 동생은 매일같이 멍들어 거긴 정말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었어요. 밥도 제대로 주지 않고 말 안 들으면 굶기는 건 늘 있고 내 남동생은 바로 옆에 있는 24소대에 살았는데 한 번씩 얼굴 보면 맨날 멍이 들어 있고 다리도 부러지고···. 진짜 매일같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면서 살았어요. 저도 형제복지원 안에서 엄청 맞고 아직도 내 머리 뒤쪽에는 조장 언니가 때리면서 박힌 못 상처가 아직도 그대로 있어요. 그때도 죽다 살아났어요. 지금 이걸 쓰면서도 화도 나고 짜증도 나고···. 형제복지원에서 지내왔던 4년 6개월을 일일이 쓴다는 자체가 저한테 다시금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는 고통스러운 일이에요. 그런 지옥 같은 삶을 살다가 1987년에 부산형제복지원이 폐쇄됐어요. 다들 급하게 정리한다고 옷가지 몇 개 챙겨서 빨리 봉고차에 타라고 난리였고 그렇게 줄지어 있던 봉고차들이 애들을 한 차에 수십 명씩 태워서 뿔뿔이 흩어졌고, 저와 동생은 부산남광아동복지원으로 또 가게 됐습니다. 형제복지원보다는 나았지만 노동일은 시키는 것은 똑같았어요. 지금도 부산에 내려가다 보면 마지막 부산 톨게이트에 다와 갈 때쯤 산이 하나 있는데, 그 어린 나이에 산 한쪽이 불이 나서 나무를 등에 메고 꼭대기까지 심으러 얼마나 왔다 갔다 했는지···. 아직도 그 산을 보면 눈물이 나요. 저랑 동생은 할머니 집에서 매 맞는 게 싫어서 엄마를 보러 갔다가 잠들어서 형제복지원으로 잡혀갔어요.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그런 곳에서 살게 됐어요. 제 남동생은 두 번째 고아원으로 갔을 때 형제복지원에서 갇혀 산 기억 때문에 맨날 고아원에서 도망갔다가 잡혀오고 또 도망갔다가 잡혀오고···. 저와 지도 선생님은 맨날 남동생 잡으러 다니는 일이 일과였을 정도였어요. 공주 옷만 입히던 아버지는 8년간 자식 찾아 다니다 판자촌으로 그렇게 형제복지원 4년 6개월에 두 번째 남광아동복지원 3년 4개월, 모두 8년을 살았어요. 그러다 8년간 우리를 찾아다닌 아빠를 만나서 집으로 가게 됐어요. 근데 막상 집에 와보니 놀랬던 건 우리 집이 그렇게 잘살았었는데 (아빠가) 판자촌 같은 데서 살고 있더라고요. 그때 내가 그랬죠. 우리 집 왜 이러냐고. 그땐 아빠가 말을 안 해줬어요. 차라리 다시 고아원으로 보내달라고 얘기한 적도 있어요. 나중에 커서 알게 됐는데 그때 우리 남매를 잃어버리고는 우리를 찾으러 다닌다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돌아오셔서 벌어놓은 돈을 다 썼더라고요. 8년 동안 전국 고아원이라는 데는 다 가서 찾았데요. 형제복지원도 두 번이나 갔었는데, 우리 없다고 아빠를 막 때리기도 했대요. 그래서 우리 집이 가난해진 거에요. 그때 내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찢기는 마음이었고 너무 미안했어요. 남동생은 집에 와서도 매일 도망 나가고 아빠는 맨날 집을 나가는 남동생을 찾으러 다니고···. 나도 막상 집에 왔는데 적응을 못 해서 너무 힘들었어요. 남동생은 5살 때부터 갇혀 살아서 그게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으면 집에 와서도 아빠와 언니한테 정을 못 붙이고 살았어요. 저도 마찬가지로 똑같고···. 어떨 땐 우리 둘이만 식구 같았어요. 전 그곳에서 하도 매질을 당하고 기합받고 해서 안 아픈 곳이 없어요. 10년째 우울증과 불면증으로 지금껏 살고 있고요. 전 자살 시도한 적도 많아요. 2017년엔 정신병원에 끌려가서 자살한다고 난리 피다가 병원에 3일간 강제입원 당한 적도 있어요. 작년에도 죽음 문턱까지 갔었는데 가까스로 살아나서 지금도 마지못해 살아가고 있어요. 형제복지원에서 유년기 시절을 보내서 그런지 아직도 그때의 행동이나 습관들이 자리 잡혀 있고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어요. 기자들이 인터뷰를 하자고 하거나 형제복지원 피해자들끼리 만나면, 형제복지원 생활 얘기를 해서 잊으려고 해도 잊히지가 않아요. 이 고통을 죽을 때까지 안고 살아야 합니다. 죽을 때까지 안고 살 고통...인권유린 사건 제대로 바라봐 달라근데 왜 우리의 이 억울한 일들을, 이 인권유린의 사건을 제대로 바라봐주지 않는 겁니까? 이 고통을 배보상해주거나 트라우마 치료에 힘써주지 않고 국가는 왜 외면하는 겁니까? 우리가 왜요? 무엇을 잘못했기에 그 어린 시절에 버젓이 부모님이 살아계셨는데 부모님 품으로 돌려보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왜 고통받고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그때 물건이 아니었어요. 사람이었어요. 어떻게 사람을 공무원들이 돈 받고 사람을 팔아요? 진짜 짐슴만도 못한 짓을 사람들이 하나요? 왜 부모님들과 생이별을 시켜서 유년시절을 그렇게 고통 속에서 살게 했나요? 다시 묻고 싶어요. 우리한테 왜 그랬는지. 저는 이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해 인터뷰할 때 꼭 하는 말이 있어요. 경비들이 총만 안 들고 있었지 형제복지원은 우리나라에 아주 작은 북한이었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때의 일들을 자신의 아들딸, 부모님, 혹은 본인들이 당했다면 가만히 있었겠어요? 권력에 힘이 있었다면요? 본인들 일이라고 다 생각해보세요. 그때는 예외가 없었어요. 갓난아기부터 아주 나이 드신 분들까지 잡혀갔어요. 그때 운이 좋아서 안 잡혀갔던 거지 그 당사자가 본인들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제발 우리 나머지 인생을 고통 속에서 살지 않게 해주세요. 8년간 맞은 몸 후유증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제발 우리의 억울한 한을 풀어주세요!!! 형제복지원 사건 어디까지 왔나 형제복지원을 운영한 고(故) 박인근 원장은 1989년 특수감금 혐의에 대해 무죄가 확정됐다. 2018년 문무일 전 검찰총장은 무죄 판결을 취소해 달라며 비상상고를 신청했지만 지난 3월 대법원에서 기각됐다. 다만 재판부는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했고 정부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당부했다. 형제복지원 사건과 관련해 국가를 상대로 첫 손해배상 소송에 제기한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는 현재 2차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1차 소송에 참여한 13명은 모두 입·퇴소 증빙자료가 준비돼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이러한 증거가 없어 피해사실 입증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는 비용 부담 때문에 소송 참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피해자들을 위해 후원금을 모금하고 있다.
  • 伊디자이너 베르사체 살해된 맨션에서 24주기 전날 두 남성 주검

    伊디자이너 베르사체 살해된 맨션에서 24주기 전날 두 남성 주검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비치에는 빌라 카사 카수아리나란 이름의 럭셔리 호텔 겸 이벤트 센터가 있다. 예전에 베르사체 맨션으로 불렸던 곳이다. 그렇다. 패션 명가를 일군 이탈리아 잔니 베르사체가 1992년 구입해 살던 맨션이었다. 베르사체는 1997년 7월 15일(이하 현지시간) 이 맨션의 계단에서 광적인 팬이자 연쇄 살인마였던 앤드루 커내넌의 총격을 받고 살해됐다. 그런데 그의 24주기 전날에 이 호텔 객실을 정리하던 하우스키퍼가 두 남자의 주검을 발견해 경찰이 수사에 들어갔다고 인사이더 닷컴 등이 15일 전했다. 에르네스토 로드리게스 마이애미 비치 경찰 대변인은 호텔 객실을 봉쇄했지만 이 호텔의 다른 시설들은 개방돼 있다고 밝혔지만 그 외는 일절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다. 베르사체는 그날 아침 산책을 나가 잡지들을 사서 집에 돌아오던 길에 커내넌과 맞닥뜨렸다. 커내넌은 벌싸 여러 카운티를 넘나들며 4명의 남성을 살해한 상태였다. 그는 베르사체의 머리에 총을 갖다 붙이다시피 해 방아쇠를 당겼다. 열렬한 팬이었다는데 왜 그랬는지 의문이었다. 그는 베르사체가 죽은 지 여드레 만에 극단을 선택했다. 베르사체가 눈을 감았을 때 나이 쉰 살 밖에 안 됐다. 그가 살해된 사연은 2018년 텔레비전 드라마 ‘잔니 베르사체의 암살- 아메리칸 크라임 스토리’로 제작돼 방영됐다. 그는 ‘접대부 패션’이란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초창기에는 번쩍거리는 디자인을 과시했지만 나중에는 이를 누그러뜨려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비가 입은 의상처럼 세련되면서도 화려하고 섹시한 앙상블을 만들었다. 모델들에게 많은 급여를 지급해 언론들이 ‘슈퍼모델’이라고 불렀는데 형제인 산토가 최고경영자를 맡고, 누이인 도나텔라는 디자이너이자 부사장으로 베르사체가 사망할 무렵 그의 기업은 남성복·여성복·아동복만이 아니라 핸드백·보석·향수·가정용품까지 생산하고 있었으며, 많은 패션 애호가들은 25년의 디자이너 경력이 바야흐로 절정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는 시점에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