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마을 영수촌(압록강 2천리:18)
◎「인민공사」 설립… 제철 등 20개 공장 직영/이익금 주민복지에… 식량주택 싼값 공급/병원·유치원 무료… 농민에 퇴직금 실시/340 가구 “한가족”… 범죄자엔 촌민자격 박탈
요령성 심양시 우홍구 조화향 영수촌.그 전설적인 인물 황용세가 살았다는 20간 벽돌 기와집은 폐허의 기념물마냥 간신히 몸꼴을 지탱하고 서 있다.이에 비해 길을 마주하고 자리한 5채의 아파트는 마냥 산뜻했다.그리고 가로수가 늘어선 아스팔트길 한 가운데를 분리선 대신 화단으로 꾸며 마을 인상은 정갈했다.
○1인당 연소득 5천원
영수촌은 하남성 탑하시 임경향 남가촌과 더불어 중국에서 소문난 공산주의 마을이다.남가촌처럼 「모택동 사상으로 모든 것을 통솔하자」는 따위의 요란한 표어가 내걸리지 않았을뿐 영수촌은 인민공사중심으로 뭉쳐있다.중국대륙전체가 모택동의 극단적 사회주의는 멀리하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나가는 마당에 웬 인민공사란 말인가.신기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마을 3백40호 1천3백여명의 인구 가운데 조선족은 1백50호 6백여명이고 나머지는 시버족과 몽골족이 차지했다.인민공사 자산은 논 7백무(2만1천평),양어장 5백무(1만5천평),양식장 3군데,양계장과 양돈장이 각각1군데로 되어있다.이밖에 전구공장,신발공장,강철제련공장등 20개 기업을 운영중인 인민공사는 특수전구공장 하나만을 한국기업과 합작했다.그러니까 개인소유는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영수촌청사는 제법규모가 컸다.장백현이나 관전현 청사와못지 않은 5층건물이었는데,촌지부 당무실에는 가죽소파까지 갖추었다.벽에는 심양시에서 내어준 「모범촌」이니 「문명촌」이니하는 따위의 인정서와 부유한 마을이라는 뜻의 「소강촌」이라는 증서가 붙어있다.평안북도가 선대의 고향인 촌 당지부 김광일서기가 마을을 찾아온 나그네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지난 78년 개혁개방정책이 나와서리 82년까지 심양시 모든 농촌에서도 개체화를 실시했디요.그런데 영수촌은 지시를 따르지 않았던 것입네다.지금 우홍구 양식국장으로 가 있는 한족인 서정봉서기가 위에서 지시한 도급제를 마다하고 인민공사를 지켰디요.그 무렵에 마을 소득은한사람 연평균 1백80원밖에 안됐댔습네다』
중국 전역에 개혁개방이 한창일 때 삼양시에 건축붐이 일었다.서정봉서기는 이른바 사원(모택동시대에 농촌을 인민공사화 하고 농민을 사원이라고 불렀음)들을 이끌고 사방에 널린 모래를 파서 외지에 팔았다.1982년 한해에 모래를 판 돈 30만원을 들여 인철공장을 세웠다.공장을 가동한 첫 해에 1백30만원의 이윤을 올려 그 돈으로 주물공장,육식품 가공공장 등을 세우는데 재투자했다.
○대학생 전원이 조선족
그리고 공업수익을 농업분야에도 투자하여 볍씨 발아실,육모실,이앙기,수확기,탈곡기를 갖추는 등 영농기계화를 서둘렀다.지난해 영수촌의 농공업 총생산량은 8천여만원으로 1인당 연간 5천원꼴의 소득을 올렸다.현재 농업에 종사하는 사원은 전체 노동력의 6%를 웃도는 30명이다.80년대 까지만해도 공장일을 선호했으나 기계화영농을 실현한 이후는 사정이 달라졌다.어디서일을 하든 매달 4백∼5백원꼴의 노임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도시 사람들에 비해 돈쓸 이유가 별로 없다.식량의 경우 탈곡이 끝나면 국가 수매량을 팔고나서 나머지는 창고에 입고한 뒤 가공비나 보관비 없이 일정한 분량을 싼값에 배급받는다.또 주택은 아파트를 지어 시가의 33%를 쳐서 사원들에게 분양했다.본래살던 단층집들은 1간당 3천원을 보상해준 터라 오히려 아파트에 입주하고도 돈이 남았다.아파트도 여유가 많아 3개씩 가진사원도 여럿 있다.
겨울 난방비는 올해부터 1㎡당 4원을 책정했다.지난해 2원 보다는 비싸다고 하나 도시지역 18원에 비하면 거저다.그리고 병원도 공사에서 직영,치료비가 없는데다 소학교는 물론 탁아소와 유치원도 무상으로 운영하고 있다.다만 유치원도 무상으로 운영하고있다.다만 유치원에서는 식비 10원을 받는다.마을에 사는 학생들이 대학을 가는 경우는 연간 5백원의 장학금을 주는데,대학진학생 15명은 모두가 조선족이라 조선족들의 긍지가 대단했다.
중국에서 보기가 드문 농민퇴직금제를 도입한 이 마을은 촌에 호적을 둔 주민들이 나이만 차면 퇴직금으로 살아가게 만들었다.현재 퇴직인원은 1백20명으로 한해에 지급되는 퇴직금은 7만∼8만원에 이른다.그리고 지난 91년도에 18∼45살에 이르는 주민들을 모두 양로보험에 가입시키고 촌에서 보험금 40%를 보조해오고 있다.또 위지할곳이 없는 노인들에게는 돈을 대어 유료양로원에 보내는 것도 이 마을의 자랑이다.
토지나 기업을 집체화한 것은 물론 모택동의 공산주의를 모델로 한 것이다.다만 영수촌의 집체화는 모택동이 계급투쟁을 앞세워 경제를 소홀히 한데서 온 총제적 빈곤에서 탈피했다는 점이 다르다.그러니까 튼튼한 경제기초 위에서 촌민의 복리를 우선하고 있는 영수촌은 모택동시대와 등소평시대의 장점을 혼합한 제도적 창신을 실현한 것이다.시장경제를 전적으로 배척한 전통사회주의도,그렇다고 몇몇이 기업을 독점한 전통자본주의도 아니었다.
김서기는 뼈 있는 말을 던졌다.『세상의 길은 많디요.부득부득 외통길을 걸어야 할 이유가 없습네』라고….그러면서 자신의 마을을 자랑이라도 하듯 육유의 시 한구절을 읊조렸다.
「산이 첩첩/물이겹겹/길 없나했더니/버드나무 우거지고 매화만발한 곳에/또 마을이 있네」
영수촌의 여러민족은 한집안처럼 화목하다.절도나 도박등 나쁜 풍속은 물론 다른 형사범죄가 없는 마을이다.하남성 탑하시 임경향의 공산당마을 남가촌은 모택동 저서를 한달에 한번씩 학습하면서 자아비평을 통해 마을을 정화한다고 하나 영수촌은 그런 일을 하지않았다.영수촌에서는 다만 마을 기풍을 어지럽히는 사람에게는 벌금을 물리고 연속적으로 못된일을 저지르거나 형사처벌을 받는 사람은 촌민자격을 박탈하고 있다.
○개인도 승용차 소유
김서기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점심시간이 기울었다.김서기와 함께 당서기와 촌장의 정용차인 일제 도요타 승용차에 올랐다.이 마을에는 80여대의 자동차와 트랙터를 가지고 기동운수대를 운영하고 있다.그리고 공장마다 몇대씩의 트럭과 승용차를 보유한 이외에 10여가구의 촌민들은 개인소유 승용차를 굴린다는 것이다.외길만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향수촌의 실상을 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