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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속옷 입지 말고 사진 찍어 보내라”...日여성의원이 유권자에게 받은 편지 [김태균의 J로그]

    “속옷 입지 말고 사진 찍어 보내라”...日여성의원이 유권자에게 받은 편지 [김태균의 J로그]

    “(내가 보낸) 이 T셔츠를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고 입은 뒤 사진을 찍어 보내라.” 일본 도쿄도의 한 기초자치단체 여성 의원 A씨는 선거에서 당선되고 몇달 후 이렇게 황당한 요구가 담긴 우편물을 유권자로부터 받았다. 보낸 사람은 지역에서 나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인사였다. 기겁을 한 A씨는 받은 물건을 돌려보냈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성폭력, 폭언, 멸시 등 여성·신인 정치인들에 대한 유권자 및 동료들의 괴롭힘 행태가 갈수록 심각해지면서 일본 정부가 국가 차원의 개선 방안을 마련 중이라고 31일 보도했다. 아사히는 “정부는 괴롭힘 등의 실태와 폐해를 드라마 형식의 동영상으로 만들어 정치인과 유권자에게 배포, 정치에 대한 인식을 개선할 방침”이라고 전했다. 일본에서는 오래 전부터 정치인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괴롭힘이 문제로 지적돼 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그 정도가 한층 더 심각해지고 있다. 많은 전문가들이 현 상황을 ‘정치의 위기’라고 지적한다고 아사히는 전했다. 간토 지방의 40대 자민당 초선 국회의원 B씨는 지난해 한 선배 의원으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그는 “우리 쪽과 다른 입장의 발언을 했는데 조심하라. 이건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다”라고 B씨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B씨가 곰곰히 생각해 본 결과 육아 지원과 관련해 대정부 질문을 한 것에 대한 지적이었다. 그것이 ‘자민당 의원답지 않은 것’으로 당내 주류 인사들에게 받아들여진 것이다.특히 여성 정치인에 대한 남성들의 괴롭힘은 위험수위를 넘어선 지 오래다. 일본 내각부가 2017년 여성 지방의원 약 4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30% 정도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이나 학대를 당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젊은 여성 정치인의 SNS에서 남성 유권자들이 “남자친구가 있느냐”고 묻는 것은 다반사이고, 일부는 성관계에 대한 경험을 자신의 고민 상담인 것처럼 가장해 늘어 놓기도 한다. 심야에 집으로 전화를 걸어오는 경우도 많다. “둘이서만 만나 상담을 받고 싶다”, “집에서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듣고 싶다”와 같은 요구도 들어온다. 선거 때가 되면 ‘표’의 힘을 등에 업고 횡포를 부리는 사례는 더욱 늘어난다. 거리유세 도중 갑자기 껴안고 가는 것은 물론이고 여성 후보의 선거벽보에 입에 담기 힘든 성적 표현으로 낙서로 하기도 한다. 유권자 수가 적은 지방에서는 몇 표라도 잃는 것이 당락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후보자들이 피해를 당해도 참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사이타마현의 기초단체 의원 C씨는 아이를 낳고 복귀한 뒤 “일은 하지 않고 아이만 만들었나”라는 비난을 유권자로부터 받았다. 한 지방의원 D씨는 임신으로 입덧이 심해져 회의에 결석하자 동료 의원으로부터 “아이를 이유로 자꾸 결석하면 우리 모임에서 제명시키겠다”는 협박을 받았다.일본에서는 지난해 6월 ‘정치분야 남녀 공동참여추진법’이 개정돼 국가나 지자체에 정치인들에 대한 괴롭힘 방지 대책을 수립하도록 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지방의원들에 대한 실태 조사를 벌여 1324건의 사례를 취합했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학자, 변호사, 상담 전문가 등의 감수를 받아 동영상을 제작했다. 에토 도시아키 다이쇼대학 교수(지방자치)는 “여성 의원이나 의견이 다른 사람에 대한 성희롱, 괴롭힘은 소수자에 대한 배제로 이어진다”며 “의회가 다양성을 상실하면 논의나 정책의 질적 저하가 나타나 지방 정치의 위기를 초래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 강도 엄마의 황당한 절규 “착실히 강도질하는 내 아들을 왜 죽였냐”

    강도 엄마의 황당한 절규 “착실히 강도질하는 내 아들을 왜 죽였냐”

    불행하게 아들을 잃은 여자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정의를 요구하면서 쏟아낸 여자의 발언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궤변에 가까운 탓이다. 과테말라에선 최근 강도미수사건이 발생했다. 권총으로 무장한 2인조 강도가 시내버스에 올라 승객들을 털려다 발생한 사건이다. 버스에 오른 강도들이 총을 꺼내 들고 승객들을 위협하는 순간 버스에선 총성이 울렸다. 순간 강도 중 1명이 고꾸라졌다. 돌발 상황에 화들짝 놀란 공범은 버스에서 내렸지만 마침 순찰을 돌던 경찰차와 마주쳤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줄행랑을 치다 발목을 삐는 바람에 현장에서 검거됐다. 버스에서 강도에게 총을 쏜 사람은 총을 갖고 있던 한 승객이었다. 경찰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버스에 올랐을 때 이 승객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후였다. 사건이 속보로 TV에 보도되면서 총을 맞고 사망한 강도의 엄마는 현장으로 달려갔다. 여자는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기자들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며 "아들을 죽인 승객을 꼭 붙잡아 정의를 구현해 달라"고 절규했다. 하지만 그러면서 그가 쏟아낸 발언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여자는 "아들은 여느 때처럼 일찍 일어나 버스를 털러 나간 것뿐인데 그런 아들을 죽였다"고 했다. 마치 평범하고도 정상적인 일상에 열심이던 아들을 누군가 죽였다는 투였다.  이어 그는 "아들은 그저 강도였을 뿐 그 누구에게도 피해를 준 적이 없다. (지금까지 범죄를 저지르면서) 누구에게도 총을 쏴본 적 없다"고 했다.  이 같은 발언은 과테말라 사회의 공분을 샀다.  네티즌들은 "사회의 악이 어떻게 자라는지, 범죄자 가정이 어떤 환경인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라며 한목소리로 여자를 비판했다.  한 네티즌은 "강도였을 뿐이라니 아무리 아들의 죽음이 안타까워도 어떻게 저런 말을 하는지 캐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다른 네티즌은 "아무에게도 피해를 준 적이 없다는 말에 말문이 막힌다. 권총강도가 사람에게 얼마나 큰 트라우마를 남기는지 모른다는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일각에선 강도에게 총을 쏜 승객을 찾아 용감한 시민으로 표창장을 주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경찰에 따르면 사망한 강도는 교도소를 뻔질나게 드나들던 전과자였다. 무장강도, 공갈협박, 마약 투약 등으로 전과가 여럿이었다. 
  • 10대 男대학생 소녀 사칭해 30대 男에 1억 갈취

    10대 男대학생 소녀 사칭해 30대 男에 1억 갈취

    10대 남성 대학생이 소녀인 것 처럼 속여 성매수 남성에게 접근, 1억원이 넘는 돈을 갈취했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인천 서부경찰서는 31일 공갈과 사기 혐의로 대학생 A(18)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A씨는 지난해 4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미성년자와 이른바 조건만남을 하려고 한 B(35)씨를 협박해 7개월간 1억 800만원을 빼앗은 혐의를 받고 있다. 그는 미성년을 사칭해 SNS로 B씨에게 접근해 연락처를 받은 뒤 이를 빌미삼아 협박하며 합의금 명목으로 현금을 요구한 것으로 조사됐다. A씨는 같은 방식으로 알게 된 C(35)씨에게도 경찰관을 사칭해 사이버 성폭력 고소 사건을 수사하는 것처럼 속여 5만원을 챙겼으며,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휴대전화를 판다는 허위 판매 글을 올리고 2명에게서 현금 71만원을 받아 가로챈 혐의도 받고 있다. 경찰은 A씨로 부터 압수한 휴대전화를 디지털 포렌식해 여죄를 조사할 계획이다.
  • 건설현장 불법행위 근절방안 마련

    건설현장 불법행위 근절방안 마련

    건설 현장의 불법행위를 근절하기 위해 전국 지역별로 관계부처 실무협의체가 상시 운영되고 정기적인 점검이 이뤄진다. 정부는 31일 김부겸 국무총리가 주재한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에서 이같은 내용을 담은 ‘채용 강요 등 건설현장 불법행위 근절방안’을 심의, 확정했다. 앞서 정부는 노조의 채용 강요, 금품 요구, 폭행·협박 등으로 공기 지연과 비조합원의 채용기회 상실 등의 문제가 고착화되고 있다고 보고 지난해 10월 관계부처 합동으로 건설현장 불법행위 근절 TF를 꾸린 바 있다. 이날 확정된 방안에서는 건설현장에 문제 상황이 발생할 경우 신속히 대처할 수 있도록 국토교통부와 경찰청, 고용노동부, 공정거래위원회 등 관계부처 실무협의체를 전국 지역별로 상시 운영하기로 했다. 또 전국 건설현장 불법행위 일제 점검을 연 2회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집중관리 건설현장을 선정하는 등 현장 점검을 강화한다. 건설업 내 인력부족과 불법체류자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건설현장 실태조사도 진행할 계획이다. 정부는 “조사 결과를 토대로 건설업계가 외국인 인력을 원활히 활용할 수 있도록 고용허가제 개선방안을 검토하고 건설업 주요 직종별 인력양성을 지원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건설업체가 직접 채용이나 계약에 대한 압력을 받지 않도록 지역별·업종별 공통의 플랫폼을 이용해 계약, 채용하는 방안도 검토하기로 했다. 김 총리는 회의에서 “채용 강요 등 불법행위가 반복되고 고착화되면 건설현장내 안전과 경쟁력을 더 이상 담보할 수 없게 된다”면서 “노동계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노동자 안전을 위해서라도 불법행위 근절에 동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 총리는 또 불법행위 발생시 엄정하고 철저하게 법을 집행하도록 관계부처에 당부했다.
  • 북촌리 너븐숭이 아기무덤의 비극… 이름도 없이 잠들어 있다

    북촌리 너븐숭이 아기무덤의 비극… 이름도 없이 잠들어 있다

    ‘국가 공권력에 의한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인권유린’을 한, 그 날이 다시 돌아왔다. 벌써 74주년. 올해 제주는 특별한 봄을 맞고 있다. 제주4·3특별법 개정으로 올 하반기부터 4·3희생자에게 국가 차원의 피해 보상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며칠 전엔 직권재심과 특별재심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희생자 73명이 무죄를 선고받기도 했다. 그러나 억울한 것은, 그 날,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죽어간 어린 영혼들이 있다. 818명. 아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4·3의 비극을 다시 소환한다. #1949년 1월 17일, 북촌리 집단 대학살 지난 29일, 제주도 조천읍 북촌 너븐숭이 4·3 위령성지로 향했다. 함덕해변 옆동네라고 하면 대충 알게 되는 그 해안마을 북촌리는 1949년 1월 17일 대규모 집단학살이 자행된 곳이다. 너븐숭이 4.3위령탑 앞에는 벚나무 3그루가 시리도록 하얀 꽃망울을 터뜨리고, 그 옆에선 토종 동백꽃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2019년 12월 발간된 ‘제주4.3추가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북촌리는 세계사적으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448명(2021년 기준)이 희생된 곳이다. 그 슬픈 역사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위령비 옆 마늘 밭에는 노인네가 코발트빛 푸른바다를 배경 삼아 한가롭게 농삿일을 하고 있었다. 멀리 토벌대를 피해 배를 타고 나가 숨기도 했던 ‘다려도’가 아른거렸다. 그날 아침, 군인들을 태운 트럭이 북촌리를 경유해 함덕 대대본부로 가던 도중, 북촌국민학교 서쪽 고갯길 속칭 ‘마가리 동산’에서 무장대의 습격으로 군인 2명이 사망했다. 주민들이 사망한 군인의 시신을 수습해 함덕국민학교 대대본부로 싣고 갔다. 군인들은 주민들이 보초 경비의 책임을 물어, 시신을 운구해 간 주민 중 경찰 가족 한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8명을 함덕리 고두물로 끌고 가 구타 후 총살했다. 그리고 군인들이 북촌리 마을을 덮쳤다. 오전 11시 전후, 무장 군인들이 마을을 포위하고 집집마다 들이닥쳐 총부리를 겨누며 전부 학교운동장으로 내몰고는 온 마을을 불태웠다. 400여 채의 가옥들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했다. 쇠막(외양간)에 있던 소들이 울부짖는 소리에 북촌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인 1300명의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어린 학생 등을 일으켜 세워 ‘빨갱이 가족’을 찾아내라고 들볶던 군인들은 이 일이 여의치 않자 주민 몇십 명씩 끌고 나가 학교 인근 밭에서 사살하기 시작했다.#강요배 화백의 ‘젖먹이’ 그림은 북촌 학살 비극의 상징 4·3사건으로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고모를 한꺼번에 잃은 제주4·3희생자유족회 감사인 이상언(59·북촌리 4·3유적지 해설사)씨는 너븐숭이4.3기념관으로 안내하며 마치 그날의 비극이 눈앞에서 펼쳐지듯 설명했다. “강요배 화백이 그린 ‘젖먹이’ 작품은 북촌국민학교운동장에서 실제 있었던 상황이에요. 학교운동장에서도 무장대와 내통한 사람을 찾기 위해 사람들을 협박했어요. 군인들이 기관총을 난사하는 바람에 애기 업은 한 아주머니가 총에 맞아 죽어갔어요. 아주머니 등에 업혀 있던 애기가 쓰러진 엄마 품에서 빠져 나와서 젖을 물고 있는 비참하고 안타까운 그림인데, 정말 그날 엄마는 죽고, 아기는 살았어요.” 이어 그는 “그림 속에 묘사된 여자 아이는 현실 속에서는 네 살 된 한경림이란 남자 아이로 40대에 세상을 떠났다”며 “북촌에는 한씨의 누님 두 분이 살고 있지만, 이 그림을 보면 가족사가 생각나는 듯 한동안 그림을 내려 달라며 눈물을 하염없이 흘린 적이 있다”고 덧붙였다. 4·3사건으로 제주의 아이들은 세상에 나와 빛을 보기도 전에 무참히 살해당했다. 도내 10세 미만의 아이들 818명이 4·3사건때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 너븐숭이 애기무덤에는 4·3사건 당시의 아이들 3~8기의 봉분과 함께 4·3사건 이전에 병사한 아이들의 12기 봉분 등 총 20기가 있다. #너븐숭이 아기무덤엔 어린 넋들을 위로하는 바람개비, 동백꽃, 그리고 ‘맛동산’ 이씨는 이곳 너븐숭이에서 영화 ‘폭낭의 아이들’을 촬영한 사유진 감독이 2020년 12월 16일 제주4·3평화공원 내 각명비 174개 중에서 10살 미만의 어린이 희생자 약 818의 이름을 각각 천에 적고 그 이름 적힌 천(이하 ‘위패’)을 인근 ‘평화의 숲’ 폭낭(팽나무)에 열명(列名)하고 그 이름 불러주었던 사연도 전했다. 심지어 제작팀은 제주4·3평화공원에서 북촌 너븐숭이 애기무덤까지 818명의 어린이 희생자 위패를 모시고 5시간을 도보 순례해 북촌리 희생자 유족회 회장 고완순(84)에게 인계했다. 유족회장은 위패 담긴 함을 받아 소나무에 묶어 넋을 위로했고 할머니들이 와서 가마솥에 밥을 해서 제대로 먹지 못해 죽은 아이들을 위해 주먹밥을 동백꽃 모양으로 만들어 위로했다. 우연하게도 취재 현장에 간 날도 때마침, 너븐숭이 아기무덤 앞에선 4·3사건 74주년에 즈음해 추모 영상물을 촬영하고 있었다. 그 때 희생된 아이를 재연하는 예닐곱살된 아이가 흰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고 동백꽃을 무덤에 바치고 묵념하는 장면을 찍고 있었다. 너븐숭이의 애기무덤은 이렇다할 조경이나 장식도 없다. 그러나 다크투어를 하는 사람들은 이 곳에 올 때마다 아기무덤에 누군가는 동백꽃을 바치기도 하고, 누군가는 ‘귀천’이란 시를 바치고, 또 누군가는 바람개비를 바치고 추념했다. 이날은 누군가가 ‘맛동산’ 과자들을 모든 무덤에 바치고 갔다. 초라할 지 모르지만 더없이 소중하고, 애달프다 못해 먹먹해지는 추모의 공간이었다. 오는 3일에도 ‘폭낭의 아이들’ 제작팀은 이곳에서 어린영혼들을 위한 추념식을 연다고 했다. 왜 하필 북촌 주민들은 밭일을 하다가 돌아올 때 쉬어가던 ‘너븐숭이’(넓은 언덕)에 어린아이들을 묻었을까. 아마도 소나무로 둘러싸여 있어 농작물을 심어도 자랄 수 없는, 쓸모 없는 땅이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옴팡밭에는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 비가 죽은 자들을 위로하듯 누워있다 너븐숭이 언덕 뒤엔 옴팡밭이 있다. ‘오목하게 쏙 들어가 있는 밭’이라는 뜻인 이곳도 ‘마치 무를 뽑아 널어 놓은 것 같이’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고 한다. 100여명 희생됐다. 고완순 회장의 기억에 따르면 여자들은 하늘을 보고 죽고, 남자는 엎어져서 죽어 있었다. 한겨울이지만, 오후 4시쯤 해가 기울 때 햇빛에 비친 밭이 피가 땅 속으로 흐르다 대지 위로 흘러 나와 핏빛이었다는 것이다. 너븐숭이의 비극은 현기영의 ‘순이삼촌’이라는 소설로 세상에 알려졌다. 옴팡밭은 ‘순이삼촌’의 장면 장면을 돌 위에 비문처럼 새겨 놓았다. 마치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 하듯 누워있다. 북촌사람들은 4·3은 입밖에 낼 수 없는 금기어였다. 왜냐하면 북촌대학살이 있은 지 5년 후인 1954년 1월 23일 세칭 ‘아이고 사건’이 그 발단이 됐다. 이 날 전몰장병인 북촌 출신 김석태의 고별식을 끝내고 4·3 당시 허무하게 죽어간 주민들의 혼을 함께 달래려고 술 한 잔 올리고 ‘아이고’ 통곡한 것이 제주경찰서에 알려져 마을이장 등 많은 사람들이 고초를 당했다. 그 후 사람들은 한날한시 지내는 위령제도 마음대로 지내지 못하고 침묵 속에 살았다. ‘…마당에 하얗게 깔려 있던 것도 싸락눈이었다. 그 시간이면 이집 저집에서 그 청승맞은 곡성이 터지고 거기에 맞춰 개짖는 소리가 밤하늘로 치솟아오르곤 했다. 한날한시에 이집 저집 제사가 시작되는 것이었다.…음력 섣달 열여드렛날.’ 그러나 이 ‘순이삼촌’(1978년) 소설이 나온 뒤 사람들이 용기를 내 그 아픈 사연들을 하나씩 하나씩 꺼내놓기 시작했다. 너븐숭이 4·3기념관에 새겨진 희생된 443명의 명단이 그것이다. 거기엔 네글자 이름도 있다. 아버지 이름 뒤에다 자식 子가 붙어 있었다. 홍영삼자, 고두필자, 김상순자…. 그들은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이름없이 스러져간 어린 영혼들이었다.
  • “난 트랜스젠더, 성별 위화감 진단 받았다”…英하원의원의 고백

    “난 트랜스젠더, 성별 위화감 진단 받았다”…英하원의원의 고백

    “나는 트랜스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게 되고 싶다. 성별 위화감 진단을 받았고, 어렸을 때부터 아주 이렇게 느껴왔다.” 30일 영국 웨일스 지방의 브리젠드 지역구 출신 제이미 월리스(38) 보수당 하원의원은 블로그를 통해 자신이 트랜스젠더임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는 “나는 이 사실을 공개할 생각이 없었다”면서 “나는 항상 내가 이 말을 하기 전에 정계를 떠나게 될 것이라고 상상했다”고 밝혔다. 윌리스 의원은 지속해서 누군가에게 협박을 당해왔다고 고백했다. 그는 “어떤 협박범이 2020년 4월 가족들에게 사진을 보내 내 정체성이 공개될 뻔한 긴급 상황도 있었다”면서 “의원으로 일하며 이런 사실을 숨기는 건 항상 힘들었다. 거만하게 ‘난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그는 2021년 9월 온라인에서 만난 남성에게 성폭행당한 일, 2011년 11월 자동차 사고를 내고 도망친 일 등을 나열하며 “이런 사건들 이후 제정신이 아니었고, 다시 회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월리스 의원은 전날 보수당 의원 모임에서 트랜스젠더에 관한 농담을 듣고 글을 쓰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존슨 총리는 전날 웨스트민스터 호텔에서 주재한 만찬에서 동료 의원들에게 “안녕하십니까, 신사 숙녀 여러분, 혹은 키어스타머(노동당 대표)의 표현대로 태어날 때 여성 또는 남성으로 지정된 사람들”이라고 인사했다. 스스로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남성이 성전환 수술을 받지 않았더라도 트랜스 여성으로 대우받아야 한다고 했던 스타머 대표의 발언을 조롱한 것인데, 이를 두고 부적절한 발언이었다는 비판이 일었다. 존슨 총리는 이날 트위터에 월리스 의원의 글을 공유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공유하기까지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을 텐데 감사하다”며 “내가 이끄는 보수당은 당신과 다른 모든 사람이 자신이 되기 위해 필요한 애정과 지지를 주겠다”는 글을 올렸다. 윌리스 의원의 고백 이후 그를 응원한다는 반응이 쏟아지자, 윌리스 의원은 “지난 몇 시간 동안 받은 다정한 지원에 감동했다”며 “정체성에 관해 가져왔던, 앞으로도 가져갈 어려움을 솔직하고 정직하게 공개한 것이 자랑스럽다”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러면서 윌리스 의원은 “나는 어제와 같은 사람”이라며 “당분간 남성 대명사를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 “돼지껍데기로 연습까지 했다”…전 여친 흉기로 위협한 30대

    “돼지껍데기로 연습까지 했다”…전 여친 흉기로 위협한 30대

    폭행 혐의로 자신을 고소한 전 여자친구를 차량에 감금한 채 흉기로 위협한 30대 남성에 징역형이 선고됐다. 30일 법조계에 따르면 A(37)씨는 지난해 11월 과거 연인 사이였던 B씨로부터 폭행 혐의로 고소를 당하자 앙심을 품었다. A씨는 흉기와 청테이프 등을 준비해 렌터카를 타고 대전 유성구의 B씨 집을 찾아갔다. 그는 현관문 앞에서 기다리다 기회를 틈타 집에 침입한 뒤 안에 있던 B씨를 마구 때리고 렌터카로 데려와 몸을 결박한 것으로 조사됐다. 대전 대덕구의 한 건물 인근으로 차량을 몰고 가면서 A씨는 B씨에게 “돼지 껍데기를 사서 (흉기 쓰는 법을) 연습했다”라거나 “어차피 감방에 갈 거면 매스컴 크게 타고 가야지” 등의 말을 하며 흉기로 찌를 듯이 위협했다. 그러나 B씨 지인의 신고를 받고 차량 추적을 통해 뒤따라온 경찰에 A씨는 체포됐다. 경찰 조사 결과 A씨는 지난 2020년 11월에도 사실혼 관계에 있다가 별거하게 된 다른 여성을 상대로 신체에 위해를 가할 것처럼 반복적으로 문자 메시지를 보냈던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살인예비,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 보복감금과 보복협박, 주거침입, 폭행, 협박 등의 혐의로 A씨를 기소했다. 그러나 A씨는 재판 과정에서 “돼지 껍데기를 산 적도 없고 그냥 말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등 혐의를 일부 부인했다. 대전지법 형사12부(부장 나상훈)는 “피고인이 말한 해악의 내용은 유죄로 인정되기에 충분하다”며 “죄질이 매우 불량하고, 피해자들이 느꼈을 공포를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고 판시하며 A씨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다.
  • “형량 줄여달라”…남자 아이들 성착취에 체액까지 먹인 최찬욱

    “형량 줄여달라”…남자 아이들 성착취에 체액까지 먹인 최찬욱

    초·중 남학생 수십명의 성 착취물을 전송받아 유포한 죄로 징역 12년을 선고 받은 최찬욱(27)이 항소심에서 형량을 줄여달라고 호소했다.최씨의 변호인은 30일 대전고법 형사1-1부(부장 정정미)의 심리로 열린 항소심 첫 공판에서 “최씨가 ‘형량이 너무 무겁다’고 양형부당 주장을 하고 있다”면서 “2심 재판부에서 이를 살펴 달라”고 말했다. 반면 대전고검 공판검사는 “최씨가 지은 죄에 비해 형량이 너무 가볍다”며 “1심에서는 강제추행 부분에 대해 상습성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범행 기간을 고려할 때 이는 사실을 오인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최씨는 2016년 5월부터 지난해 4월까지 남자 초·중생 70명을 협박해 알몸으로 찍은 등 성착취 사진·영상물 6954개를 제작해 이 중 14명의 것을 유포해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상 상습 성 착취물 제작·배포 등 혐의로 지난해 6월 구속됐다. 최씨는 또 남자 초등생 3명을 각각 찾아가 집 밖으로 유인한 뒤 자신의 차 안에서 유사 강간도 저질렀다. 최씨가 인터넷에서 여자 아동이나 축구 감독인 것처럼 속이자 전국 남자 초·중생이 걸려들었다. 만 11세 초등학생도 있었다. 최씨는 이들을 이른바 ‘노예’로 삼아 성적인 동작에 대변·체액까지 먹도록 강요한 것으로 드러났다. 최씨는 1심 재판 과정에서 “남자 아이들이 스스로 성착취 영상을 제작한 것”이라면서 “일부 아이들은 ‘노예와 주인’ 놀이 역할을 바꾸자며 오히려 나에게 상황극을 강요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최씨를 면담한 프로파일러는 “여성을 사귄 적이 없어 이성과의 성관계를 두려워한 반면 남자 아이에 대한 죄의식은 적었다”며 “지배적인 위치에서 대상을 찾다보니 아이들이 대상이 된 것 같다”고 밝혔다. 최씨는 검찰 송치를 위해 대전 둔산경찰서를 나오면서 “멈출 수 없었던 악마의 삶을 멈추게 해줘 감사하다”고 한 ‘박사방’의 조주빈처럼 “더 심해지기 전에 구해줘 감사하다”고 발언해 공분을 일으켰다. 항소심 다음 공판은 5월 11일 열린다.
  • 심부름센터 사장에 ‘황산 테러 협박‘ 40대女 구속

    경기 부천 소사경찰서는 29일 심부름센터 사장을 상대로 ‘황산 살포’ 협박을 한 40대 여성 A씨를 협박 및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경찰에 따르면 A씨는 지난달 하순 부천시에서 심부름센터를 운영하는 30대 남성 B씨에게 전화를 걸어 “황산을 뿌리겠다”고 협박한 혐의를 받는다. 또 B씨에게 여러 차례 전화하거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남긴 혐의도 받고 있다. A씨는 평소 앙심을 품고 있던 경찰관 C씨의 소재지 등을 알아봐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하자 범행한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은 A씨의 주거지를 조사했으나 황산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앞서 A씨는 2016년 4월 서울 관악경찰서에서 경찰관 C씨에게 황산을 뿌려 상처를 입혔으며 징역형을 선고받아 복역한 뒤 지난해 출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당시 재물손괴 혐의로 수사를 받던 중 안면이 있던 C씨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가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고 황산을 뿌려 2도 화상을 입힌 것으로 드러났다. 다른 경찰관 3명도 A씨를 제지하는 과정에서 황산이 튀어 부상했다. 그는 이 사건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고,교도소에 수감된 상태에서도 C씨와 가족 2명에게 협박 편지를 보냈다가 재차 징역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경찰 관계자는 “A씨는 여전히 C씨의 소재지를 파악하려는 이유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있다”며 “사건을 정리해 조만간 A씨를 검찰에 송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 20년째 문턱 못 넘은 ‘장애인 이동권’… “모든 전철 엘리베이터 설치”

    20년째 문턱 못 넘은 ‘장애인 이동권’… “모든 전철 엘리베이터 설치”

    ‘휠체어 추락’ 20년 지나도 그대로2006년 교통약자법도 지지부진전국 저상버스 보급률 겨우 27% ‘장애인 대 비장애인’ 대립 안 돼이동권 보장돼야 교육·노동 참여“이 시위를 왜 20년째 하냐고요? ‘검토·추진하겠다’는 원론적인 말만으로는 달라지는 게 없어서입니다.” 지하철 출근길 시위를 주도하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는 시위 재개 닷새째인 28일 시위를 이어 가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이들의 출근길 시위를 비판해 논란이 불거진 와중에도 이날 오전 8시쯤 경복궁역에서 25차 지하철 시위에 나선 전장연의 박경석 상임공동대표는 “2001년 1월 70대 장애인이 오이도역에서 휠체어 리프트를 타다가 추락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 이후 21년이 지났지만 장애인들은 여전히 기본권인 이동권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고 성토했다. 그는 “대선 전 모든 정당에 장애인 권리 예산 보장을 요구했으나 대통령 당선인은 답변이 없다”면서 “인수위가 장애인 권리 예산 보장을 약속하지 않는다면 시위는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장애인의 이동권 투쟁은 목숨을 건 싸움이었다. 1999년에 이어 2001년에도 지하철역 휠체어 리프트 추락 사고가 잇따르자 장애인들은 거리로 나와 ‘안전하게 이동할 권리’를 외쳤다. 이 외침이 결실을 맺어 2006년 1월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교통약자법)이 시행됐다. 장애인뿐 아니라 노인, 임산부, 영유아 동반자, 어린이와 같은 교통약자가 교통수단을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교통체계를 구축하는 일을 목표로 제정된 법이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정부는 법을 근거로 저상버스 도입 확대를 약속하고 스스로 목표를 제시했지만 달성하지 못했다. 2013년까지 전국 시내버스의 절반 이상을 저상버스로 하겠다는 약속, 목표를 낮춰 2016년까지 시내버스의 약 41%를 저상버스로 바꾸겠다는 약속, 다시 지난해까지 시내버스의 약 42%를 저상버스로 하겠다는 약속이 다 허언이 됐다. 저상버스 도입률은 2013년 16.4%, 2016년 22.3%, 지난해 27.8%로 아직도 30%에도 못 미친다.서울 지하철(1~8호선) 역사 중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역사의 비율도 2017년 89.9%, 2019년 91.4%, 지난해 93.0%로 더디게 늘고 있다. 김필순 전장연 기획실장은 “오전 8시에 대중교통을 타는 휠체어 이용자를 많이 보지 못했을 만큼 장애인 이동권 제약이 큰 것이 현실”이라며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이동권을 보장하려는 정부와 정치권의 노력을 촉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전장연은 장애인권리보장법·장애인탈시설지원법·장애인평생교육법 제정 및 특수교육법 개정 등 4대 입법을 정치권에 요구하고 있다. 자립을 위해 배우고, 일하고, 탈시설을 위한 필수적인 입법이지만 이동권 보장없이는 달성할 수 없는 목표라고 강조했다. 전장연은 29일 출근길 시위를 마친 뒤 국회로 이동해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등을 만나 법안 제·개정을 촉구할 예정이다. 이 만남은 민주당 측 제안으로 성사됐다. 전문가들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대립 구도 대신 문제 해결 관점에서 사안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는 “협박메일이 오는 등 자칫하면 장애인이 혐오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라면서 “정치권이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노금호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부회장은 “대중교통은 성별, 인종, 장애와 상관없이 모두가 이용 가능해야 하는 교통수단”이라며 “자유로운 이동권이 보장돼야 장애인들도 노동에 참여해 일상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밝혔다.
  • [단독] 인수위 이어 민주당도 ‘지하철 시위’ 장애인 단체 만난다(종합)

    [단독] 인수위 이어 민주당도 ‘지하철 시위’ 장애인 단체 만난다(종합)

    장애인 단체가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에게 “장애인 권리 보장을 위한 예산 편성을 확실히 약속하라”면서 지난 24일부터 ‘지하철 출근길 시위’를 재개한지 28일로 5일째를 맞았다. 이 시위를 연일 비판하고 있는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를 향한 당 안팎의 비판이 제기된 후로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인수위)가 29일 시위 현장을 방문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더불어민주당도 전장연을 만나기로 하면서 지하철 시위가 새 국면을 맞았다.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는 이날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대선 기간뿐만 아니라 대선 후 출범한 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에도 장애인 권리 보장을 위한 법안들을 통과시켜줄 것을 요구한 상태였다”면서 “민주당이 관련 법안 통과를 중요 의제로 채택해 책임 있게 이행할 것을 약속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번 만남은 민주당이 전장연에 먼저 제안한 것으로 전해졌다. 전장연은 29일 오전 출근길 시위를 마치고 바로 국회로 이동해 같은 날 오전 10시 민주당의 박홍근 원내대표와 최혜영 의원 및 비상대책위원회 위원들을 만날 예정이다. 전장연은 장애인권리보장법·장애인탈시설지원법·장애인평생교육법 제정 및 특수교육법 개정 등 4대 입법을 요구하며 지하철 시위를 하고 있다. 장애인이 배우고, 일하고, 시설 밖으로 나오기 위해 필수적인 입법들이지만 이동권이 보장돼야 달성 가능한 목표들이라고 전장연은 설명했다.인수위도 전장연과 만나기로 했다. 인수위는 이날 오후 “임이자(국민의힘 의원) 사회복지문화분과 간사와 김도식(서울시 정무부시장) 위원이 29일 전장연 출근길 시위에 참석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임 간사는 이날 오후 서울 종로구 인수위 사무실에서 브리핑을 통해 “(전장연의) 요구사항을 잘 정리해서 정책에 반영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설명했다. 전장연은 인수위와 민주당 모두 ‘향후 추진하겠다’와 같은 원론적인 말이 아닌 구체적인 이행 약속을 해야 한다면서 이 약속이 전제되지 않으면 시위를 계속하겠다는 입장이다.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는 이날 오전 8시쯤 경복궁역에서 25차 지하철 시위에 나서면서 “2001년 1월 70대 장애인이 오이도역에서 휠체어 리프트를 타다가 추락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 이후 21년이 지났지만 장애인들은 여전히 기본권인 이동권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면서 “대선 전 모든 정당에 장애인 권리 예산 보장을 요구하였으나 윤 당선인은 지금까지 답변이 없다. 인수위가 장애인 권리 보장을 약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장애인들의 이동권 투쟁은 목숨을 건 싸움이었다. 1999년과 2001년에 지하철역 휠체어 리프트 추락사고가 잇따르자 장애인들은 거리로 나와 ‘안전하게 이동할 권리’를 외쳤다. 외침이 결실을 맺어 2006년 1월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교통약자법)이 시행됐다. 장애인뿐만 아니라 노인, 임산부, 영유아 동반자, 어린이와 같은 교통 약자들이 교통수단을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교통체계를 구축하는 일을 목표로 제정된 법이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정부는 법을 근거로 저상버스 도입 확대를 약속하며 스스로 목표를 제시했지만 달성하지 못했다. 2013년까지 전국 시내버스의 절반 이상을 저상버스로 하겠다는 약속, 목표를 낮춰 2016년까지 시내버스의 약 41%를 저상버스로 바꾸겠다는 약속, 다시 지난해까지 시내버스의 약 42%를 저상버스로 하겠다는 약속이 다 허언이 됐다. 실제 저상버스 도입률은 2013년 16.4%, 2016년 22.3%, 지난해 27.8%로, 아직도 30%에도 못 미친다. 서울 지하철(1~8호선) 역사 중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역사의 비율도 2017년 89.9%, 2019년 91.4%, 지난해 93.0%로 더디게 늘고 있다.김필순 전장연 기획실장은 “시민들이 평소 오전 8시에 대중교통을 타는 휠체어 이용자를 많이 보지 못했을 만큼 장애인 이동권 제약이 큰 것이 현실”이라면서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이동권을 보장하려는 정부와 정치권의 노력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이날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 당시 일부 시민들은 “아침부터 왜 이러냐”면서 짜증 섞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위를 찬성하는 목소리도 많다. 직장인 박모(30)씨는 “누가 사람들한테 미움받으려고 시위를 하겠나. 그만큼 절박하니까 저렇게 시위하는 것 아니냐”면서 “장애인들이 거리로 나와서 시위를 하도록 만든 정부를 비판해야 한다”고 밝혔다.전문가들은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를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대립 구도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며 정부와 국회가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는 “2000년대 중반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될 때도 지금처럼 반대 목소리가 높았지만 이제는 장애인, 비장애인 모두 엘레베이터를 당연하게 이용한다”면서 “모든 교통수단과 여객시설, 도로를 차별 없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용하여 이동할 수 있는 권리인 이동권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가 당연히 누려야 하는 권리“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하철 시위 이후로 현재 전장연에 협박 메일 등이 수도 없이 오고 있다. 자칫하면 장애인이 혐오범죄 대상이 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라며 “상황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정치권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풀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노금호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부회장은 “대중교통은 성별, 인종, 장애와 상관 없이 모두가 이용 가능해야 하는 교통수단“이라면서 ”저상버스 도입률, 지하철역 엘리베이터 설치율이 100%여야 모두가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자유로운 이동권이 보장돼야 장애인들도 원하는 곳에서 교육을 받고 노동을 할 수 있다”면서 “장애인 권리 보장 예산을 장애인만을 위한 예산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모두 보편적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예산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 ‘경찰관 황산테러’ 40대女, 출소 후 심부름센터 사장에도 “황산 뿌린다!”

    ‘경찰관 황산테러’ 40대女, 출소 후 심부름센터 사장에도 “황산 뿌린다!”

    피해 경찰관 소재파악 의뢰 거절당하자 범행수감 중 경찰관 가족에 “10억 가져와” 협박피해 경찰 찾으려는 이유에 대해선 함구 중경찰관에게 황산을 뿌려 다치게 해 징역형을 받은 전력이 있는 40대 여성이 이번에는 심부름센터 사장에게 ‘황산 살포’ 협박을 한 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경기 부천 소사경찰서는 28일 협박 및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40대 여성 A씨를 입건·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A씨는 지난달 하순 부천시에서 심부름센터를 운영하는 30대 남성 B씨에게 전화를 걸어 “황산을 뿌리겠다”고 협박한 혐의를 받는다. A씨는 평소 앙심을 품고 있던 경찰관 C씨의 소재지 등을 알아봐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하자 범행한 것으로 조사됐다. 앞서 A씨는 2016년 4월 서울 관악경찰서에서 C씨에게 황산을 뿌려 다치게 했으며 징역형을 받아 복역한 뒤 지난해 출소한 것으로 알려졌다.수사 받던 중 자기 안 도와주자 황산 뿌려 경찰관에 2도 화상 A씨는 당시 재물손괴 혐의로 수사를 받던 중 안면이 있던 C씨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가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고 황산을 뿌려 C씨에게 2도 화상을 입힌 것으로 드러났다. 다른 경찰관 3명도 A씨를 제지하는 과정에서 황산이 튀어 부상을 입었다. 그는 이 사건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교도소에 수감된 상태에서도 C씨와 가족 2명에게 ‘보상금 10억원을 가져오고, 2000만원 상당의 공탁금을 반환하지 않으면 출소 뒤 가만두지 않겠다’는 내용의 협박 편지를 보냈다가 재차 징역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경찰은 A씨를 상대로 정확한 사건의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A씨는 C씨의 소재지를 파악하려는 이유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면서 “자세한 내용은 수사 중이어서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상대방의 의사에 반해 정당한 이유 없이 상대방에게 접근하거나 일상 공간에서 기다리거나 지켜보는 행위, 우편·전화 등을 하거나 물건을 전달해 상대방에게 불안감 또는 공포심을 일으킬 경우 3년 이하 징역이나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만약 흉기 등 위험한 물건을 이용해 범죄를 저지를 경우에는 5년 이하 징역이나 5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으로 형량이 가중된다. 사람을 협박했을 때에도 형법에 따라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 “황산 뿌린다” 스토킹女 잡고보니 2016년 진짜 황산테러

    “황산 뿌린다” 스토킹女 잡고보니 2016년 진짜 황산테러

    2016년 10월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현용선 부장판사)는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 등 혐의로 구속기소된 38세 여성 전모씨에게 징역 6년을 선고했다. 전씨는 그 해 4월 서울 관악경찰서 사이버수사팀을 찾아가 A 경사를 흉기로 찌르려다 제지당하자 준비해 온 황산을 뿌렸다. 재물손괴 혐의로 수사를 받던 중 사건 상담을 위해 안면이 있던 A 경사에게 전화를 했는데 제대로 받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A 경사는 얼굴과 목 등에 3도 화상을 입었고, 그를 부축하려고 현장에 도착한 다른 경찰관 두 명도 황산에 닿아 화상을 입었다. 이 사건이 발생한 지 약 6년이 지난 28일 40대 여성 전모씨가 경기 부천 소사경찰서에 협박 및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입건됐다. 2016년 A 경사에게 황산 테러를 저지른 장본인이었다. 전씨는 지난달 부천시에서 심부름센터를 운영하는 30대 남성 B씨에게 전화를 걸어 “황산을 뿌리겠다”고 협박한 혐의를 받는다. 전씨가 B씨를 협박한 이유는 6년 전 황산테러의 피해자인 경찰관 A씨 소재를 알아봐 달라는 요청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A씨에게 황산테러를 저질러 징역형을 선고 받고도 뉘우치지 않고 또다시 그의 소재를 파악하려 했던 것이다. 전씨는 지난해 출소하기 전 교도소에 수감된 상태에서도 A씨와 가족 두 명에게 ‘보상금 10억원을 가져오고, 2000만원 상당의 공탁금을 반환하지 않으면 출소 뒤 가만 두지 않겠다’고 협박 편지를 보냈다가 재차 징역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경찰은 전씨를 상대로 정확한 사건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전 씨가 A씨 소재지를 파악하려는 이유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 “장애인 권리 보장”…출근길 지하철 시위, 멈출 수 없는 이유

    “장애인 권리 보장”…출근길 지하철 시위, 멈출 수 없는 이유

    장애인 단체가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에게 “장애인 권리 보장을 위한 예산 편성을 확실히 약속하라”면서 지난 24일부터 ‘지하철 출근길 시위’를 재개한지 28일로 5일째를 맞았다. 이 시위를 연일 비판하고 있는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를 향한 당 안팎의 비판이 제기된 후로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인수위)가 29일 시위 현장을 방문하기로 하면서 지하철 시위가 새 국면을 맞았다. 지하철 시위를 주도하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김필순 기획실장은 이날 “인수위 사회복지문화분과 간사인 임이자 국민의힘 의원이 29일 시위 현장인 경복궁역을 방문할 예정”이라면서 “인수위가 어떤 말을 하는지 들은 후 전장연 입장을 발표하겠다”고 말했다.인수위 29일 시위 현장 방문…“진정성 보여야” 그러나 전장연은 ‘검토하겠다, 추진하겠다’는 원론적인 말이 아닌 구체적인 정책 이행 약속이 필요하다면서 이 약속이 전제되지 않으면 시위를 계속하겠다는 입장이다.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는 이날 오전 8시쯤 경복궁역에서 25차 지하철 시위에 나서면면서 “2001년 1월 70대 장애인이 오이도역에서 휠체어 리프트를 타다가 추락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 이후 21년이 지났지만 장애인들은 여전히 기본권인 이동권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고 성토했다. 그는 “대선 전 모든 정당에 장애인 권리 예산 보장을 요구하였으나 윤 당선인은 지금까지 답변이 없다”면서 “인수위가 권리 보장을 약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애인들의 이동권 투쟁은 안전을 담보로 하는 절실한 싸움이다. 1999년과 2001년에 지하철역 휠체어 리프트 추락사고가 잇따르자 장애인들은 거리로 나와 ‘안전하게 이동할 권리’를 외쳤다. 외침이 결실을 맺어 2006년 1월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교통약자법)이 시행됐다. 장애인뿐만 아니라 노인, 임산부, 영유아 동반자, 어린이와 같은 교통 약자들이 교통수단을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교통체계를 구축하는 일을 목표로 제정된 법이다.정부가 어겨온 약속 그러나 법 뿐이었다. 정부는 법을 근거로 저상버스 도입 확대를 약속하며 스스로 목표를 제시했지만 목표는 달성되지 못했다. 2013년까지 전국 시내버스의 절반 이상을 저상버스로 하겠다는 약속, 목표를 낮춰 2016년까지 시내버스의 약 41%를 저상버스로 바꾸겠다는 약속, 다시 지난해까지 시내버스의 약 42%를 저상버스로 하겠다는 약속 모두 허언이 됐다. 실제 저상버스 도입률은 2013년 16.4%, 2016년 22.3%, 지난해 27.8%로 아직도 30%에도 못미친다. 서울 지하철(1~8호선) 역사 중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역사의 비율도 2017년 89.9%, 2019년 91.4%, 지난해 93.0%로 더디게 늘고 있다. 전장연은 장애인권리보장법·장애인탈시설지원법·장애인평생교육법 제정과 특수교육법 개정 등 4대 입법을 요구하며 지하철 시위를 하고 있다. 장애인이 배우고, 일하고, 시설 밖으로 나오기 위해 필수적인 입법들이지만 이동권이 보장돼야 달성 가능한 목표들이라고 전장연은 설명했다. 이날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 당시 일부 시민들은 “아침부터 왜 이러냐”면서 짜증 섞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위를 찬성하는 목소리도 많다. 직장인 박모(30)씨는 “누가 사람들한테 미움받으려고 시위를 하겠나. 그만큼 절박하니까 저렇게 시위하는 것 아니냐”면서 “장애인들이 거리로 나와서 시위를 하도록 만든 정부를 비판해야 한다”고 밝혔다.“이동권은 보편적 권리…누구나 누려야” 전문가들은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를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대립 구도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며 정부와 국회가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는 “2000년대 중반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될 때도 지금처럼 반대 목소리가 높았지만 이제는 장애인, 비장애인 모두 엘레베이터를 당연하게 이용한다”면서 “모든 교통수단과 여객시설, 도로를 차별 없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용하여 이동할 수 있는 권리인 이동권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가 당연히 누려야 하는 권리“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하철 시위 이후로 현재 전장연에 협박 메일 등이 수도 없이 오고 있다. 자칫하면 장애인이 혐오범죄 대상이 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라며 “상황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정치권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풀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노금호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부회장은 “대중교통은 성별, 인종, 장애와 상관 없이 모두가 이용 가능해야 하는 교통수단“이라면서 ”저상버스 도입률, 지하철역 엘리베이터 설치율이 100%여야 모두가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자유로운 이동권이 보장돼야 장애인들도 원하는 곳에서 교육을 받고 노동을 할 수 있다”면서 “장애인 권리 보장 예산을 장애인만을 위한 예산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모두 보편적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예산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 박초롱, 학폭 제보자와 만나 화해…“모든 고소 취하”

    박초롱, 학폭 제보자와 만나 화해…“모든 고소 취하”

    그룹 에이핑크 박초롱(31)이 학교폭력 의혹 제기자와 오해를 풀고 서로 고소를 취하한다고 밝혔다. 28일 소속사 IST엔터테인먼트는 “지난해부터 걱정을 끼쳤던 일련의 사안과 관련해 박초롱과 A양은 그간의 오해를 모두 풀고, 그동안 서로에게 제기했던 모든 소송을 취하하기로 뜻을 모아 현재 고소 취하 절차 진행 중임을 알려드린다”고 밝혔다. 소속사는 “최근 두 사람은 주변인을 모두 배제한 가운데 따로 만나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의미 있는 시간을 가졌다. 13년 만에 이뤄진 이번 만남을 통해 두 사람은 그동안 서로에게 지녔던 서운함, 서로에 대해 가졌던 불편했던 속마음도 모두 털어놓는 등 허심탄회한 대화를 이어갔다”고 설명했다. 이어 “뜻깊은 대화 끝에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오해를 모두 풀고, 그간의 힘겨웠던 다툼과 소모전을 모두 털어내자는 것에 뜻을 함께 했다. 나아가 서로에게 제기했던 모든 소송도 취하하고,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앞서 지난해 3월 박초롱에게 학폭을 당했다고 주장한 A씨는 다수의 언론사에 제보 메일을 보냈다. 메일에는 박초롱이 자신을 보고 웃었다는 이유로 친구들과 자신을 폭행했으며 무리 중 한 명이 성적 수치심을 들게 하는 발언도 했다는 주장 등이 담겼다. 이에 지난해 4월 박초롱 소속사는 “허위사실적시 명예훼손죄와 강요미수죄로 A씨에 대한 형사 고소장을 강남경찰서에 1차 접수했다”고 밝혔다. 소속사는 A씨가 사실이 아닌 폭행과 사생활 등의 내용으로 박초롱을 협박하고, 연예계 은퇴를 종용했다고 밝혔다. 이후 학폭 의혹을 제기한 A씨는 협박 혐의로 검찰에 기소의견으로 송치됐다. 하지만 A씨는 지난해 하반기 몇몇 언론사를 통해 허위사실 협박죄는 사실이 아니고, 박초롱에게 집단 폭행 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박초롱 측은 다시 입장을 내고 A씨가 협박 혐의를 받고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됐다며, 협박에 따른 가해를 일으키고 있는 것에 대해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후 A씨 측은 박초롱이 2차, 3차 가해를 이어가고 있다며 명예훼손 혐의로 추가 고소를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박초롱 측은 A씨가 오히려 사실 관계를 왜곡하고 있다고 맞섰다. 지난해 12월 박초롱 측은 재차 입장을 내고 “서울 강남경찰서는 8개월 간 다각적인 수사 끝에 박초롱에 대해 혐의없음 불송치 결정을 했다”고 밝혔다. 불송치 결정서에는 “A씨의 주장 외에 달리 박초롱의 혐의사실을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다”는 내용이 담겼다.
  • ‘스토킹 살인’ 김병찬 피해자 유족 “딸 가슴에도 못 묻어” 울분

    ‘스토킹 살인’ 김병찬 피해자 유족 “딸 가슴에도 못 묻어” 울분

    ‘스토킹 살해범’ 김병찬의 피해자 유족이 법정에서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해달라”며 눈물로 간곡히 호소했다. 피해자 A씨의 아버지는 28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6부(정진아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김씨의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보복살인 등) 등 혐의 사건 속행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가정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며 “저희도 저 살인마에게 죽임을 당한 거나 마찬가지고, 숨만 쉬고 있을 뿐 산목숨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아버지에 이어 증인석에 앉은 A씨의 어머니는 “평소 딸은 어떤 자녀였느냐”는 검찰의 질문에 “오늘도 죽은 딸이 사준 신발을 신고 왔다”며 오열했다. 어머니는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고 하지만 가슴에도 묻히지 않는다”며 “딸이 죽은 줄 모르고 중매가 들어올 때마다 가슴이 멘다”고 했다. 이날 법정에는 A씨의 부모 외에도 고인의 여동생, 친척 등이 방청석에서 고개를 떨군 채 눈물을 흘렸다. 유족들의 호소를 들은 재판부는 재판 말미에 “유족의 마음을 감히 헤아릴 수 없을 것 같다. 건강 잘 추스르시기를 바란다”며 위로를 건넸다. 수의를 입고 출석한 김씨는 증언 내내 피고인석에서 두 눈을 감고 동요하지 않았다. 김씨는 지난해 11월 19일 서울 중구 한 오피스텔 주차장에서 30대 여성 A씨를 흉기로 여러 차례 찔러 살해한 혐의를 받는다. 당시 A씨는 김씨를 스토킹 범죄로 네 차례 신고한 후 경찰의 신변 보호를 받던 중이었다. 김씨는 법원으로부터 접근금지 등 잠정 조치를 받은 상태였다. 김씨는 첫 재판에서 A씨를 범행이 우발적이었다며 보복성은 부인했다. 또 2020년부터 하반기부터 지난해 11월까지 지속해서 A씨의 집에 무단 침입하고 감금·협박한 혐의로 추가 기소됐으나, 이날 공소사실 대부분을 부인했다. 재판부는 다음 달 11일 김씨의 세 번째 공판을 연다.
  • [STOP PUTIN] 바이든 아홉 단어 잘못 썼다가 홍역, 유약함 떨치려다 실언

    [STOP PUTIN] 바이든 아홉 단어 잘못 썼다가 홍역, 유약함 떨치려다 실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겨냥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발언이 갈수록 거칠어지는 가운데 연설 원고에 없던 짧은 애드리브 탓에 백악관과 미국 국무부가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일간 워싱턴 포스트는 대선 후보 시절 대통령의 단어는 사람을 전쟁터에 보낼 수 있을 정도로 무겁다고 언급했던 바이든 대통령의 즉흥적인 아홉 단어가 세계적인 소동을 일으켰다고 지적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유럽 순방의 마지막 일정이던 지난 26일(이하 현지시간)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댄 폴란드에서 연설하던 중 원고에 없던 “그야말로, 이 사람이 권력을 유지해선 안 된다”(For God‘s sake, this man cannot remain in power)고 발언한 것이 러시아 정권의 교체를 시사한 발언이란 미국 언론의 대서특필로 이어졌다. 그는 이날 우크라이나 피란민을 만난 뒤에는 푸틴 대통령을 ‘도살자’라고 일컬었다.  앞서 지난 17일에는 푸틴 대통령을 향해 ‘살인 독재자’, ‘순전한 폭력배’라고 비난했다. 그 전날에는 ‘전쟁 범죄자’로 규정했다.  푸틴 대통령이 권좌에 머물러선 안된다는 취지의 발언은 러시아 정권의 인위적인 교체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미국 행정부의 기조에서 정면으로 벗어난 것이어서 큰 논란을 초래했다. 백악관은 대통령의 발언이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설명하는 자료를 내야 했다.  바이든 대통령 본인도 27일 워싱턴에서 일요 예배를 마치고 나오면서 ‘러시아의 정권 교체를 요구하는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이스라엘을 방문 중이던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전쟁을 하거나 침략할 권한을 부여받지 않았다는 뜻”이라며 “우리는 다른 어떤 (국가의) 정권교체 전략도 갖고 있지 않다”고 해명했다. 줄리앤 스미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주재 미국 대사도 CNN 방송에 출연해 바이든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만나 들은 일들에 대해 인간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라고 진화하려 했다.  크렘린궁의 드미트리 페스코프 대변인은 “그것은 바이든 씨가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 오직 러시아연방 국민의 선택”이라고 강력 반발했다.  유럽 언론의 반응도 엇갈렸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한 방송에 출연, 러시아를 멈춰 세우려면 단어 사용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꼬집은 뒤 “난 이런 종류의 말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외교로 러시아군이 철수하도록 하길 원한다면 말로나 행동으로나 긴장을 고조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의 패트릭 윈터 외교담당 에디터는 “우크라이나를 지키는 전쟁이 미국의 침략으로 비화할 위험이 있다”며 “러시아 대통령을 바꾸는 것은 러시아의 문제이지 미국 대통령의 일이 아니다”고 비판했다. 이어 바이든 대통령의 발언이 미국을 ‘제국주의적 협박자’라 묘사하는 데 능숙한 러시아 정부에 ‘몹시 필요한 선물’이라며 터키와 카타르, 중국 등이 푸틴 대통령을 설득하기가 더 어려워졌다고 덧붙였다.  물론 바이든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의 독재정치를 부각해 유럽과 NATO 동맹국들의 단일 대오를 지키려는 의도적이고 전략적인 발언으로 보는 이도 있다. 싱크탱크 미국외교협회의 찰스 쿱찬은 바이든 대통령의 여러 메시지와 관련해 뉴욕 타임스(NYT)에 “유럽이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메시지는 푸틴을 향한 것”이라며 “계속 싸우자는 독려는 우크라이나인을 향해, 침착함을 유지하자는 메시지는 유럽인들을 향한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이 빽빽한 일정을 소화하다 분위기에 취해 실언한 것이란 해석이 주를 이룬다. 문제의 발언 직전에 폴란드와 가까운 우크라이나 서부 르비우에 러시아군이 폭격을 가한 사실을 보고 받고 감정이 격해져 수위 조절에 실패한 것이라고 CNN은 지적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말 실수는 폴란드 방문 내내 이어졌다. 미군 장병을 만난 자리에서 그는 우크라이나 주민들의 결사 항전을 치켜세우면서 “현장에 가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에 미군을 절대 파병할 수 없다던 기존 미국의 입장이 달라진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고, 백악관 대변인은 우크라이나 투입은 없다고 다시 한번 강조해야 했다.  또 러시아의 화학무기 사용 가능성에 대해 바이든 대통령은 비례해서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미국도 화학무기를 쓸 수 있다는 발언으로 비치자 백악관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화학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명해야 했다.  같은 실수가 이어지면 실력으로 간주된다. 의도적으로 위험한 발언을 일삼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각국 지도자들이 바이든을 우습게 여긴다”는 취지로 공격한 것도 완전히 터무니 없어 보이지 않는다. 워낙 유약한 지도자란 의심의 눈초리를 받으니까 강한 어조로 얘기한다는 게 실언으로 이어지는 측면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 우크라 간 탈영 해병, 폴란드서 ‘DP’ 만났다

    우크라 간 탈영 해병, 폴란드서 ‘DP’ 만났다

    우크라이나를 돕겠다며 탈영, 폴란드를 거쳐 국경까지 갔던 해병대원 A씨가 폴란드에서 군무 이탈 체포조(D.P.)를 만났다고 밝혔다. 현재 폴란드에 머물고 있는 A씨는 이른 시일 내 귀국할 의사는 없으며 “들어가도 내 발로 간다”며 당국의 입국 권유를 거부했다. A씨는 당초 21일까지 휴가를 보내고 부대로 복귀할 예정이었지만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했고, 비행기를 타고 폴란드로 출국해버렸다. 해외로 무단 출국한 것도 문제지만, 현역 군인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간 전쟁에 참여할 경우 외교적 문제가 초래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사안은 심각했다. 우크라이나 측이 우리 정부의 협조 요청으로 입국을 제지하면서 A씨는 폴란드에서 ‘버티기’를 하고 있다. A씨는 28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익명 인터뷰에서 “한국 법을 어기고 온 건 사실이지만, 우크라이나를 돕기 위해 왔다”라며 “군인 신분으로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게 마음이 아팠다. 포로로 잡힐 경우 자폭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다”라고 말했다.“신고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A씨는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 “군대 갔다가 부조리란 부조리도 다 당해봤다”라는 글을 올렸다. 그는 처음에는 선임들에게 예쁨 받고 인정받았지만 부사관을 준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기수 열외’ 등 투명인간 취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마음의 편지’를 썼지만 부대 차원의 경위서를 작성하는 게 전부였고, 신고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고 했다. A씨는 “선임들에게 맞선임을 신고한 새끼다. 사람도 아니라며 욕을 먹었다. 답이 없다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탈영병을 잡는 군무 이탈 체포조(D.P.)를 폴란드에서 만났다고도 했다. A씨는 “신고했을 때 들은 체도 안 하던 사람들이 저 한 명 잡으러 바로 와서 깜짝 놀랐다. 우리가 신고했던 걸 더 빨리 조치해줬다면 부대가 바뀌었을 텐데, 도와주지도 않고 (폴란드에) 무작정 오니까 이상했다”고 말했다. A씨는 폴란드까지 온 DP와 “한 번 얘기는 했다”며 “이분들이 협박 아닌 협박, 계속 달래주는 척 하면서 협박을 하는데 들어가도 자진 귀국할 것이고 제가 책임질 것이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하고 저는 저 자신을 잘 지키는 사람이니까 너무 걱정 안 해 주셔도 될 것 같다”며 우크라이나를 도운 뒤 귀국하겠다고 밝혔다.
  • “네가 나를 고발해”… 비리폭로 직원 폭행 어린이집원장 벌금형

    “네가 나를 고발해”… 비리폭로 직원 폭행 어린이집원장 벌금형

    자신이 운영하는 어린이집 내부 비리를 고발했다는 이유로 직원에게 수십 차례의 협박성 문자를 보내고, 폭행한 어린이집 원장에게 벌금형이 선고됐다. 울산지법 제1형사단독 정한근 판사는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등에 관한 법률 위반과 폭행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60대 여성 A씨에게 벌금 100만원을 선고했다고 28일 밝혔다. 경남 양산에서 어린이집을 운영하던 A씨는 2020년 8월 직원 B씨가 시청 감사실에 어린이집 비리를 고발하자,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을 받겠다는 취지의 문자 등을 23차례나 보냈다. A씨는 또 B씨의 주거지로 찾아가 “어떻게 나를 고발할 수 있느냐”며 따지며 머리채를 잡는 등 폭행을 했다. 재판부는 “공포심이나 불안감을 유발하는 문자를 반복적으로 보내고, 피해자의 집 거실까지 들어가 폭행한 점이 모두 인정돼 피고인에게 벌금형을 선고했다”고 밝혔다.
  • 가난했던 대구 소년, 헌법학에 불멸의 발자취 남기고 떠나다

    가난했던 대구 소년, 헌법학에 불멸의 발자취 남기고 떠나다

    ‘한국 헌법학의 태두’ 김철수 서울대 명예교수가 89세를 일기로 26일 별세했다. 서울신문은 2013년 5월 ‘명사가 걸어온 길’이라는 인물탐구 기획 코너를 통해 고인이 밟아온 삶의 궤적을 2회에서 걸쳐 집중적으로 조명한 바 있다. 고인은 당시에도 만 80세 고령이었지만, 스트레이트로 5시간에 걸친 짧지 않은 인터뷰를 정력적으로 소화해 냈다. 자신의 인생을 채워온 수많은 사건들과 사람들을 대부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인터뷰 전문을 그대로 소개한다. ========================== [명사가걸어온 길] (11) 한국 헌법학의 태두 김철수 해방·전쟁·좌우 분열… 격동의 시대, ‘책벌레 소년’ 헌법에 눈을 뜨다유신헌법 참여 협박에도 정치권 러브콜에도… 학자의 양심 지켰다열두 살 되던 해 일제가 패망했다. 환희에 천지가 요동쳤다. 해방. 어렸지만 그게 뭔지 너무도 잘 알았다. 그러나 조국의 운명은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혼돈과 분열이었다. 국토는 남북으로 찢기고 민중은 좌우로 갈렸다. 얼마 전까지 ‘조국 해방’을 외치며 함께 어깨를 걸었던 동지들이 생각이 다르다고, 처지가 다르다고 원수가 돼 등을 돌렸다. 어제까지 한 교실에서 공부했던 친구가 좌익 프락치로 몰려 책상을 비웠다. 해방 공간의 극심한 무정부 상태를 보며 소년은 결심했다. 국가 시스템의 뼈대가 되는 헌법을 공부하겠노라고. 그 다짐대로 헌법 연구는 평생의 업이 됐고, 소년은 우리나라 헌법학의 ‘태두’(泰斗)가 됐다. 지난 10일 서울 동작구 상도동 한국헌법연구소에서 만난 김철수(80) 서울대 명예교수는 5시간에 걸친 긴 인터뷰에도 피로한 기색 없이 꼿꼿하게 여든 성상의 인생과 철학을 얘기했다. 유복한 친구 둔 덕에 책 실컷 읽고...극렬한 좌우 대립 지켜보며 성장1933년 7월 대구에서 빈농(貧農) 집안의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책 읽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다. 유복한 친구를 둔 덕에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책 읽느라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다. 통학 기차 안에서도 그의 손에는 항상 책이 들려 있었다. “친구 아버지가 당시 대구지역 마사회 회장이었어요. 경마장에는 일본 사람들이 자기들 나라에서 가져온 세계 문학대전집, 세계 사상대전집 같은 책들이 그득그득 꽂혀 있었지요. 그때 읽은 책 중 가장 감명 깊었던 게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었어요. 강의 중에 ‘레 미제라블’을 말하면 학생들은 ‘아 장발장이 빵 하나 훔쳤다가 탈옥하는 거요?’ 정도의 반응이 대부분이었지만 사실 이 책은 대단한 책입니다. 무려 260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 형벌, 정치, 법철학 등 다양한 사회 문제와 고민이 담겨 있으니까요.” 책에 빠져 살던 김 교수의 관심이 사회로 옮겨가기 시작한 것은 나라가 광복을 맞으면서였다. ‘민주국가 건설’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어떤 민주주의를 택하느냐를 두고 극심한 분열 양상이 온나라를 휩쓸었다.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나라가 완전히 엉망이었지요. 특히 제가 살던 대구는 당시 공산주의의 총본산인 모스크바(소련의 수도)에 빗대어 ‘한국의 모스크바’로 불렸을 정도예요. 좌익의 활동이 국내 어떤 도시보다도 활발하고 강했어요. 그러다 보니 저는 극렬한 좌우 대립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며 큰 충격을 받았어요. 경찰이 사람을 잡아가고 때리고, 또 반대되는 공공기관 테러가 일어나고. 우리 사회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바로 헌법이었던 것이지요.” 1947년 제헌(制憲) 헌법을 만든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법대생이나 학자들이 보던 고시 잡지 등을 읽으며 헌법학자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때가 우리 나이로 열다섯이었다.시력 나빠 전쟁터 끌려가지 않아...대학 입학 천막 강의실 공부 1950년 전쟁이 터졌다. 고도근시로 고생하던 그는 전쟁터로 끌려가지 않았다. 1952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전쟁 탓에 서울의 대학들이 부산으로 피란 온 터였다. 부산의 허름한 판자촌에서 법학 강의를 들었다. 법학도들이 ‘천막 강의실’에서 힘겹게 공부하던 이 시기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불법적인 개헌을 추진한다. 이른바 ‘발췌개헌’의 시작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부산으로 피란 가 있는데 거기에서 임기 4년이 만료됐어요. 이 대통령은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헌법을 고치려 들었는데, 이걸 야당이 반대했고 그 결과로 야당 의원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어요” 이 대통령은 “전시에 부산에 침투한 간첩이 많으니 소탕을 해야 한다”는 이유를 대며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이내 속셈을 드러냈다. 간첩을 잡겠다던 당초 주장과 달리 야당 의원과 무고한 시민에 대한 검거와 폭력이 이뤄졌다. “야당 지도자였던 장면 선생도 잡아넣었어요. 3명 이상 모이면 잡아갔어요. 국회로 출근하는 버스가 있었는데 버스에 탄 채로 계엄사령부에 끌려 가기도 했어요. 옛 경남도청에 무덕관이라고 해서 유도 연습장 같은 곳을 국회의사당으로 썼는데 그 일대에 ‘백골단 깡패’들이 쫙 깔려 있었어요. 이 대통령에 반대하는 의원은 전부 계엄사령부로 소환했다고 보면 될 겁니다.” 김 교수는 해방 이후 우리 사회의 질곡의 상당 부분은 친일파 등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지만 일부 불가피한 대목도 있었다고 말했다. “광복 이후 친일파 척결은 예견된 수순이었습니다. 그래서 친일파를 처벌하는 법률도 만들었는데 법률로 처벌하려다 보니까 당시 정부관료, 경찰, 군인 등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걸렸던 거죠. 일제강점기 때는 외국 유학자를 비롯해 능력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이 대통령이 보기에 친일파를 다 쫓아내면 행정이나 정치를 못하겠다 싶었던 거죠. 반민특위에 걸렸던 경찰들을 풀어주고, 결국 그 경찰들이 치안 등 최소한의 사회 시스템을 유지해 전쟁통에 질서를 유지했다고 볼 수 있죠. 일부 사람들은 이 대통령이 반민특위를 없앴다는 이유로 친일파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당시의 사정도 일부 헤아릴 필요는 있을 겁니다.”이 대통령은 연임에 성공했고 1953년 전쟁이 끝났다. 김철수는 스무 살의 청년이 됐다. 김철수는 한 살 아래 학과 동기를 만나 사랑을 키워갔다. 궁핍과 혼돈의 시대에 서울대 법대 커플의 사랑은 주위의 부러움과 시샘을 샀다. 하지만 당사자들을 포함해 그 누구도 이들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날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대화 주제가 ‘첫번째 아내’로 옮겨가자 김 교수의 목소리톤이 낮아졌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첫 아내’ 전혜린과 캠퍼스 커플...뮌헨대 유학중 결혼 김 교수의 첫 번째 아내는 한국 문학계와 여성 예술인들 사이에서 ‘불꽃처럼 살다간 여인’으로 회자되는 전혜린이다. 두 사람은 부산에서 맺은 인연을 서독(독일 통일 전) 뮌헨에서 키워나갔다. 전혜린이 1955년 먼저 뮌헨대 유학길에 올랐고 김 교수는 이듬해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이역만리에서 기쁨과 고통을 나눴다. 문학가가 꿈이었지만 아버지의 성화로 법대에 진학했던 전혜린은 독문학과에 입학해 그토록 바랐던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체계적인 법 공부에 목 말랐던 김 교수는 법학 공부를 이어갔다. 하지만 전쟁국가 출신 동양인에게 서독은 마음 놓고 공부만 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은 아니었다. 당시 누구나 그랬듯 너무도 가난했다. 나라를 벗어나 공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선택받은 삶이 됐던 시절이었다. 대통령의 허가가 있어야만 외국 송금이, 그것도 최고 50달러까지만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두 사람은 장학금과 통·번역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계를 꾸렸다. 전혜린은 훗날 유학생활의 궁핍에 대해 “물을 마시니까 죽지는 않더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인에 대한 시선은 싸늘했다. 지구상에 한국, 코리아라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사람들에게 한국에서 왔다고, ‘코리아’라고 그러면 아프리카 콩고에서 왔냐고 그랬어요. 그 나라에 기차는 있느냐, 뭘 먹고 사느냐 등 질문을 해대는데, 미개인 취급을 하더군요. 교수들도 저를 보며 전쟁 중인 나라에서 공부는 무슨 공부를 했겠느냐며 일본 학생들과도 크게 차별을 뒀습니다. 약소국 국민의 설움이란 게 뭔지 당해 보지 않고서는 알기 어렵습니다.”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소외감은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했다. 1957년 그들은 뮌헨에서 결혼을 했다. 생활은 결혼 전과 다름 없이 곤궁했지만 함께한다는 것만으로 의지와 위안이 됐다. 그러던 중 전혜린은 1959년 딸을 낳고 한국으로 돌아가 이듬해 성균관대에서 강사로 둥지를 틀었다. 김 교수는 2년 뒤 모교 교수 자리를 제안받고 서울로 돌아왔다.이혼 1년 뒤 전혜린 작가 스스로 목숨 끊어 배 고프고 힘들었던 서독 생활을 정리하고 고국에 왔지만 서울에서는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귀국하자마자 5·16 쿠데타가 터졌다. 박정희 당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이 무력으로 청와대를 장악했다. 당시 박정희 군부가 취한 여러 조치 가운데 ‘군 미필자는 공무원이 되지 못한다’는 게 있었다. 시력이 나빠 군대에 못 간 김 교수는 공무원인 서울대 교수에 임용되지 못했다. 서울대는 물론 어디에서도 군 미필자인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아내와의 관계도 벌어지기 시작했다. 먼저 입국한 전혜린은 대학에서 강의하며 서울의 문인들과 어울렸다. 밤 늦게까지 명동에서 삶과 죽음, 예술을 논했다.“아내가 언제부턴가 문인의 죽음을 동경했어요. 처음에는 나는 사회규범과 질서를 중시하는 법학자이고 아내는 사회의 틀보다는 자유와 이상을 갈망하는 문학가라서 서로 다르겠거니 했는데 이 사람이 자꾸 ‘니체도 카프카도 일찍 죽었다’ 이러면서 빨리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거예요. 수면제도 많이 갖고 다니고. 그러다 보니 저도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결국 두 사람은 1964년 합의이혼을 했다. 그리고 1년 뒤 전혜린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그는 교수 임용 제한이 풀리면서 서울대 법대 학생과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고교 교사와 재혼...꼬박꼬박 ‘그 사람’ 제사 챙기는 아내 그로부터 2년 뒤 김 교수는 고교 교사와 재혼을 했다. “아내는 지금도 꼬박꼬박 그 사람(전혜린)의 제사를 지내고 있어요. 자기가 낳은 아이들에게도 제사에 꼭 참석하라고 그러고. 참 고마운 사람이죠.” 그는 사별한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반평생 이상을 함께하고 있는 지금의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함께 표했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큰 시련을 겪고 난 그는 다시 연구에 매진했다. 체계적인 헌법학 이론과 정력적인 강의, 활발한 저술활동으로 헌법학계에서 빠르게 자신의 입지를 굳혀갔다. 이는 박정희 군사정권이 새롭게 부상하는 법학자에 대해 점차 날카로운 감시의 눈초리를 들이대도록 만드는 빌미가 됐다. 드디어 등장한 유신헌법의 시대. ‘학자 김철수’는 어떻게든 이 난국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3년 12월 17일부터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스러진 1979년 10월 26일까지 15년 10개월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잘살아보세~”라는 한목소리 외의 다른 의견과 생각은 용납되지 않는 시대였다. ‘지성인의 전당’인 대학에는 사복 경찰과 정보원들이 교수와 학생들을 감시하며 일거수 일투족을 ‘상부’에 보고했다. 이런 박정희 정권에도 대학과 언론의 비판이 제한적이나마 가능했다. 적어도 잡아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1962년부터 3년간 서울대 학생과장...‘중정’과 맞서“군대에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수로 임용되지 못하고 학교에서 무급 조교로 일하다가 1962년 9월 취업 제한이 풀리면서 학생과장을 맡았어요. 요즘 같으면 학생담당 부학장쯤 되는데 그걸 만 3년 했어요. 3년 동안 중정(중앙정보부) 사람들이랑 참 많이도 싸웠었죠. 학교에 출입하던 중정 사람 중 훗날 안기부(중정의 후신 국가안전기획부)의 장까지 하고 그랬는데 이 사람들은 어느 교수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뭘 가르치는지, 어떤 말을 하는지 낱낱이 기록해 상부에 보고했어요. 그때 중정의 한 간부가 ‘당신에 대한 기록이 엄청 쌓여 있다. 중정에서는 당신이 학생들 선동하는 걸로 보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하기도 했었죠. 하긴 그땐 법대 학생들이 제일 열심히 데모했고, 그 학생들에게 우리 법이 잘못됐다고 가르친 것도 나였으니….” 교수들로부터 정의와 바른 법치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학생들은 거리로 나갔다. 김 교수의 말대로 당시 서울대에서는 법대생들을 중심으로 학생운동이 조직됐다. 이때 서울대 총학생회장도 법대 소속이었다. 이명박 정부에서 대통령 실장을 지낸 정정길(71)씨다. 서울의 대학생들은 연합해 정권의 부당함에 맞섰다. 대표적인 사건이 1964년 한일기본 협정 반대 시위다. 박 대통령이 일본과의 외교관계 정상화를 위한 협정을 추진하자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굴욕 외교’라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시위 세력은 들불처럼 번지면서 그해 ‘6·3 사태’가 터졌다. 1964년 한일협정 반대시위 선봉 고려대 이명박-서울대 정정길 박 대통령은 6월 3일 시위대 해산을 위해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서울 시내에 4개 사단병력을 투입해 시위 학생들을 잡아들였다. 이때 시위대 선봉에서 정정길 서울대 총학생회장과 함께 나선 인물이 이명박 고려대 상대 회장이다. 김 교수는 “당시 단과대 회장은 훗날 대통령이 되고 다른 학교 총학생회장은 그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됐는데 어찌 보면 거꾸로 된 거 같기도 하고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재미있는 인연이죠. 노태우 정권에서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13~15대 국회의원)도 시위단 사이에서 격문 쓰고 그랬던 시절이 있었죠”라며 웃어 보였다. 학생들을 거리로 이끈 것은 바른 정치와 민주화를 향한 학생들의 뜨거운 열망과 굳은 의지였지만, 중정에 끌려간 그들을 빼오는 것은 교수들의 몫이었다. 6·3사태로 정정길을 비롯한 수많은 서울대생들이 중정과 경찰 등에 잡혀갔다. 법대 학장이 학생들에 대한 보증서를 써 주고 김 교수 등이 중정 등을 찾아가 사정해 수감된 학생들을 빼왔다. “그땐 시위가 끊이지 않았는데 시위만 했다 하면 학생들이 청와대로 가야 한다고 해서 중앙청(현 경복궁 자리)으로 가곤 했죠. 저는 학생 관리도 제 일이었으니까 관리 차원에서 같이 중앙청으로 따라가고 하면서 치안국 보안과장과 서울 정보분실장과도 자주 마주쳤죠. 한 놈은 중학교 동기고 또 한 놈은 대학 동기였는데 그놈들이 저한테 ‘너는 학생 과장이라면서 왜 학생 선도도 못하냐’고 난리를 피우고 그러면 저는 ‘니들이나 똑바로 해라’며 목소리를 높이곤 했어요.” 정보요원이 수업을 감시하고 학생들이 중정과 경찰서 유치장 등을 드나들었어도 김 교수는 ‘그나마 괜찮았던 시절’이라고 했다. 여기에 더해 1960년대에 몇 없었던 ‘낭만적인 에피소드’도 소개했다.창경궁 통째로 빌려 이대생들과 미팅 주선 “그때라고 해서 학생들이 시위만 하고 돌 던지고 그렇지만은 않았어요. 하루는 총학생회장 정정길이 우리가 종합대학이니까 종합대 축제를 하자면서 서울대생 전원과 이화여대생 전원 미팅을 제안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지만 청춘 남녀들에게 좋은 일이겠다 싶어서 제가 창경원(현 창경궁)을 빌려볼 생각으로 창경원장을 찾아갔어요. 창경원장도 학교 선배였거든요. 창경원장도 암울한 시대에 젊은이들에게 좋은 일이라며 흔쾌히 승낙하면서 날을 잡아 ‘창경원 오후 휴원’이라고 걸어놓고 두 학교 학생들만 무료 입장시켰죠. 지금 보면 대규모 미팅 같은 것인데 순 남학생 판에 여학생은 몇 없고 그런 모습도 어찌나 재밌던지… 그래도 훗날 그 만남을 계기로 결혼한 사람이 10쌍도 넘더라고요. 우리한텐 재미고 낭만이었지만 다음 날 청소하시는 분들 애 많이 먹었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캠퍼스의 소소한 낭만도, 학자 김철수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도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1972년 10월 박 대통령은 유신헌법을 선포한다. 박정희 정권은 김철수에게 유신헌법에 근거한 탄압에 앞서 유신헌법 제정 공신이 되기를 강요했다. “정권이 유신헌법 만들려고 여러 가지 작업을 했어요. 몇몇 교수는 해외에 보내서 자료 수집을 담당하게 하고 나를 포함한 야당 성향 교수들도 법무부 자문위원회라는 걸 만들어 그걸 하라고 강요했죠. 나는 절대로 못한다고 했더니 정부 쪽에서는 쉽게 말해 까불지 말라는 식이었고 일부는 참여를 거부하면 항명죄라며 협박까지 했죠. 그게 다 나중에 유신헌법이 각계의 자문위원들이 참여해 만든 것이라는, 정당성 부여를 위한 계략이었던 거죠.” 김 교수는 갖은 협박성 설득에도 학자의 양심을 지켰다. 하지만 이어 유신헌법 홍보에 나서 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말이 제안이지 명령과 강압이었다. 정권은 중정을 통해 김 교수가 방송과 라디오에서 유신헌법 홍보를 맡도록 압박했다. 유신헌법 찬양 글·홍보방송 안하고 버텨 “하루는 학교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분이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해서 나갔는데 식사 마치고 저를 TBC(동양방송) 앞에 내려주더군요. 방송에 출연하라는 뜻이었죠. 결국 정문으로 들어가 바로 후문으로 빠져나갔죠. 방송은 저 대신 다른 분이 출연했는데 중정에서는 방송 펑크 냈다고 난리가 났고, 그때 제대로 찍혀 저에 대한 탄압도 시작됐습니다.” 당시 김 교수는 한 언론사의 논설위원을 겸하고 있었다. 역시 유신헌법을 찬양하는 글을 쓰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김 교수는 학자의 양심에 반하는 글은 쓸 수 없었다. 결국 해당 언론사의 정치부장이 찬양 글을 대신 썼다. 이후 김 교수를 대신해 유신을 찬양했던 한 인사는 국회 배지를 달았고, 또 한 인사는 장관까지 올랐다. 반면 김 교수에게는 정권의 보복이 시작됐다. 가장 먼저 저술 활동이 금지됐다. “청와대 쪽 사람들과 법학자들과 저녁 식사 자리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저한테 ‘절대로 책 쓰지 말라. 책 쓰면 큰일 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때 이미 제3공화국에 관한 헌법책을 다 써놨고 유신헌법이 나오면서 유신헌법의 문제점까지 다 정리한 상태였거든요. 출간을 강행했죠. 그게 1973년 1월 10일이었습니다.” 저술활동 금지당한 후 미·독 떠돌아 하지만 책은 출간 즉시 전량 몰수됐고 김 교수는 중정에 끌려갔다. 일주일간 회유와 압박이 이어졌다. 박 대통령을 ‘독재적인 대통령’, 유신헌법을 ‘현대판 군주제’라고 비판한 대목에 대해서는 북한과 내통한 것 아니냐는 억지도 부렸다. 결국 김 교수는 정권이 문제 삼은 부분의 수정을 약속하고 풀려났다. 1년간 집필이 금지됐고, 연구비도 끊겼다. 김 교수는 더 이상 한국에 머무를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국과 독일 등지의 방문 교수를 지원해 국외를 떠돌며 박정희의 시대가, 유신의 시대가 저물기만을 바랐다. 철권(鐵拳) 같았던 박정희의 시대가 저물고 1980년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유신헌법으로 유린된 헌법을 바로잡을 논의가 시작됐다. 이때 김 교수도 헌법 개정에 참여했다. 김 교수 등이 제안한 개정안은 최규하 당시 대통령도 만족했다. 그러나 곧 전두환이라는 걸림돌을 만나 헌법도 정치적 의도로 변질됐다. 그래도 김 교수는 1987년 헌법재판소 설치를 ‘유신 이후 헌법적 발전’으로 꼽았다. 대화는 자연스레 헌법재판소에 대한 평가로 이어졌다. 김 교수는 애정 어린 쓴소리를 늘어놨다. “요즘 헌재의 결정을 보면 재판관들이 얼마나 헌법을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어요. 야간 옥외집회 금지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인터넷 실명제는 위헌 결정을 내렸는데 이런 것들은 또 질서 유지의 관점으로 보면 필요하거든요. 판검사들이 재판관이 되는데 판검사 때는 헌법을 읽을 일이 없어요. 오히려 연구관들이 재판관보다 헌법을 더 잘 알아요. 재판관 임명 시 헌법에 대한 이해도를 반영할 필요가 있어요.” 최근 긴급조치 위헌에 대한 해석 권한을 놓고 헌재와 대법원이 갈등을 빚은 데 대해서는 헌재의 주장에 손을 들어줬다. “독일은 최고 사법부가 헌법재판소입니다. 학자들은 우리나라도 헌법 만들 때 헌재를 대법원보다 우위로 둬야 한다고 주장해 법원에서 결사반대했던 건데 헌법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헌법 해석권한을 가진 헌재를 대법원보다 우위에 두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유신시절 정권에 저항했던 모습에 비하면 상당히 보수적으로 변했다는 대중의 평가에 대해서는 ‘공동체 주의’를 강조했다. “30대에 진보적이지 않고 40대에 보수적이지 않으면 이상하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아무래도 젊을 때는 개인이 절대적이라는 생각을 갖기 쉽죠. 그런데 나이가 들다 보면 아무리 똑똑하고 잘해도 개인은 모래알 같은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경찰을 2만명 증원하겠다고 했는데 생각해 보면 국민이 질서를 지킨다면 이런 사회 비용을 쓰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결국 개인주의에서 공동체 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재판관 임명시 헌법 이해도 반영 필요”여든의 노학자는 헌법 연구에만 매진한 인생을 조용히 돌아봤다. 그는 학자가 대통령이 될 게 아니라면 정치권에 진출하는 것에 회의적이다. 학자가 정계에 발을 들이는 순간 학자의 소신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 교수는 1980년대 여야를 막론하고 정부에서도 관료로 ‘러브콜’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저는 대학교수가 관료나 정계로 가는 걸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어요. 학자나 언론인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말을 할 수 있지만 관료나 정치인이 되면 조직 논리가 우선하거든요. 소신을 지키려면 쓴소리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공직에서 그런 사람은 살아 남기 힘들죠. 정치권은 특히 더 심하고요. 어떤 정치인이 공천권을 쥐고 있는 당수와 싸울 수 있겠어요” 장시간의 인터뷰는 젊은 기자도 피로감을 느낄 정도였지만 김 교수는 여전히 생기가 넘쳤다. 헌법과 사회 질서에 대한 고민에서는 좌익 프락치로 몰려 잡혀가는 친구들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소년 김철수의 고민도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인터뷰를 마치며 책장 가득한 그의 저서를 보며 “인세도 많이 받으셨겠다”는 농담 섞인 질문을 던졌다. “옛날엔 꽤 들어오더니만 요즘은 학생들이 책을 안 사긴 참 안 사네요”라며 웃어 보였다. ■김철수가 걸어온 길 1933년 경북 대구 출생(6남 1녀 중 장남) 1956년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1957년 서독 뮌헨에서 전혜린과 결혼 1961년 서독 뮌헨대 졸업 1962년 서울대 법과대학 조교수 1967년 미국 하버드대 법과대학원 수료 1971년 서울대 법학박사 1972년 서울대 법과대학 교수(~1998년) 1988년 한국공법학회 회장(~1989년) 1990년 한국헌법연구소 소장(~2001년) 1995년 한국법학교수회 회장, 국제헌법학회 이사 1998년 제주 탐라대 총장(~2000년)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1998년~) ■주요저서 헌법학(1972) 현대헌법론(1979) 비교헌법론(1980) 법과 사회정의(1982) 한국헌법사(1988) 법과 정치(1995) 정치개혁과 사법개혁(1998) 헌법정치의 이상과 현실(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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