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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셔요]첫 해외 TV 녹화 다녀온 꽃집 아줌마 정혜선(鄭惠先) 양

    [안녕하셔요]첫 해외 TV 녹화 다녀온 꽃집 아줌마 정혜선(鄭惠先) 양

    KBS-TV의『꽃집 아줌마』(이근삼(李根三)작 이성재(李聖宰)연출)가 한국 TV로선 처음으로 일본에 출장 녹화를 했다.「타이틀·롤」정혜선양(28)으로선 첫 외국나들이기도 하지만 이번 일본 여행에는 여러 가지로 잊을 수 없는 일이 많았단다. 코로나 차(車) 탄채 일본(日本)까지 가까운 나라라는 실감을 8월16일 KBS 방송국 앞을「코로나」로 출발, 경부 고속도로를 단숨에 달려 부산에서「부관 페리」를 타고 일본「시모노세끼」항에 도착하고 보니 일본이란 나라가 바로 이웃에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고.「시모노세끼」에서「오사까」까지 19시간 동안을 자동차로 달리며 일본의 농촌, 중소 도시를 둘러보며 강행군했는데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그네들의 부(富). 『정말 모두 잘 살고 있어요. 우리나라 같으면 소나 외양간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자동차와 차고가 있고 초라한 초가지붕 같은 건 눈을 씻고볼래야 볼 수가 없어요. 약오를 만큼 잘 살고 있어요』 또한 아무리 깊은 산골이라도 길이 모두「아스팔트」포장이 돼있어 흙길은 구경할 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한결 여행하는 맛이 나고 짜증스럽거나 지리하지가 않았단다. 『또 부러운 것은 산에 그렇게 나무가 많더군요.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우리나라의 산을 보고 현해탄을 건너가서 일본의 산을 보니 도대체 비교가 안 될 지경이에요. 어디를 가든 빽뺵이 들어선 나무, 정말 부럽더군요』 반드시 그것만으로 일본과 우리나라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만큼 여유가 있고 풍성함이 있을 것이 아니냐고. -함께 여행한 사람은 누구 누구죠? 『「꽃집 아줌마」를 연출하는 이성재씨, 함께 출연하는 이치우(李致雨)씨「카메라맨」권유철(權有哲)씨 그리고「짐·가우어씨」이렇게 모두 5명이었어요』 -며칠동안이었죠? 『나는 영화 전우열(全右烈 감독「인정 사정 보지 마라」) 촬영「스케줄」때문에 20일에 다른분들보다 먼저 왔어요. 비행기를 타고 부산에 와서 관광호 편으로 서울에 왔는데 이번 일본 여행은 그러니까 자동차 배 비행기 기차 모두 탄 셈이죠. 다른 분들은 8월26일에 돌아왔어요』 -일본을 여행하면서 특별히 우리나라와 다르다고 본점은? 『어디를 가나 조용하더군요. 농촌을 가도 그렇고 도시를 가 보아도 그렇고 도무지 거리에 나다니는 사람이 없어요. 물론「오사까」같이 큰 도시는 서울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많지만 그의 도시는 아주 조용해요. 왜 그런지 궁금했지만 일본말을 할줄 모르니 물어 볼 수도 없고. 아마 모두 일터에 나가 일을 하느라고 한가한 사람이 없기 때문인 것 같아요』 -「엑스포 70」을 보고 느낀점은? 『시간이 없어서 제대로 구경을 할 수가 없었어요. 내부구경을 한 건「한국관」뿐이었는데 굉장히 외국 사람들의 인기를 모으고 있었어요. 그때까지 일본에 대해 부러운 것만 보아서 우울했던 마음이 으쓱해지더군요. 다른 나라 전시관들은 대강 외양만 훑어보아서 잘 모르지만 어쨌든 굉장하구나 하는 생각이었어요』 교포들의 환대를 받으며 새삼스럽게 조국애 느껴 -일본에서 지내는 동안 제일 어려웠던 점은? 『말이 통하지 않은 점이죠. 그리고 우리나라 운전면허가 일본에서 통하지가 않더군요. 우리나라가「국제 면허회」회원국이 아니기 때문에 인정을 못 받고 있어서 그렇대요. 그래서「시모노세끼」임시「넘버」를 달고 다녔는데 화가 나는 일이에요. 서울 거리에는 일본「넘버」를 단 차가 마음대로 다니는데 일본거리에선 왜 우리나라 넘버가 통하지 않는지』 『「꽃집 아줌마」의 녹화는 예정대로 성공했습니까?』 이번『「꽃집 아줌마」일본 녹화의 의의는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보다는 첫번째로 해외에서 녹화를 했다는데 있는게 아닐까요? 제대로 여건을 갖추지도 않았는데 해외에서 녹화했다고 해서 좋은 작품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해요. 모두들 열심히 했고 고생도 많이 했죠』 -제일 잊을 수 없었던 일은? 『재일교포들이 정말 환대를 해 주었어요. 어디를 가나 친절하게 안내해 주고 어려운 점을 보살펴 주고 정말 신세 많이 지고 왔어요. 해외에 나가니까 참 조국애라든가 민족애라는 걸 느낄 수가 있더군요』 1942년 서울태생. 60년 서울 수도여고를 졸업하고 6개월동안 충남 대전 방송국에서 성우생활을 한 것이 연예계와의 첫 인연. 61년 KBS-TV「탤런트」1기로 TV계에 진출하여『그날이 오면』「데뷔」작『상아의 노래』『실화극장』『녹슨 단검』등「셀 수 없을 만큼」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지금은『꽃집 아줌마』 외에『박쥐』에 출연중. 3년 전에『제3지대』로 영화계에로 진출하여『홍콩에서 온 마담장』『여자의 길』 등 20여편에 출연. 연극에도 관심이 있어『해물리트』(동인극장)『유리 동물원』(동인극장) 분례기(糞禮記)에 출연하기도. 그러나 역시 TV가 제일 마음에 든다고. 연극은 너무 딱딱한 것 같고 영화는 호홉의 연결성이 없어서 어쩐지 썩 당기지 않는다는 말. 그리고 무엇보다 방송국의 분위기가 마음에 맞아서 TV가 최고란다. 부부「탤런트」“오히려 서로 도움커요” 64년 같은 KBS-TV 동기생이 박병호(朴炳浩)씨 (현재 TBC-TV「탤런트)와 3년 동안의 연애 끝에 결혼, 1남(4) 1녀(6)를 두었다. -두 사람이 같은「탤런트」생활을 하자면 곤란한 점이 많을텐데? 『웬걸요. 저는 오히려 도움이 돼요. 만약 전혀「탤런트」실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부인이 밤을 새운다. 지방에 나간다. 외박한다 하는 걸 이해해 주겠어요? 아빠는 같은 처지이니까 다 이해해 주죠. 부부가 함께「탤런트」를 해서 곤란한 건 오히려 남자 쪽인 것 같아요. 아내 몰래 뭘 하고 싶어도 빤하니까 못하게 되죠. 만약 했다가는 금방 알게 되고 속일 수가 없죠』 -박병호씨는 TBC에 있고 정양은 KBS에 있으니 서로「라이벌」의식 같은 건? 『아무래도 경쟁방송국이니까「라이벌」의식이 있게 되죠. 빤히 억지인줄 알면서도 서로 우리 방송국 것이 최고다 하고 우길 때가 많아요』 첫번째 외국 나들이로 닷새 동안에 3천km를 여행한 정양의 꿈은 역시 훌륭한「탤런트」가 되는 것뿐. 서울 동숭동 기자「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선데이서울 70년 9월 6일호 제3권 36호 통권 제 101호]
  • [25일 TV 하이라이트]

    ●수요기획(KBS1 오후 11시40분) 운동은 하면 할수록 좋다는 인식으로 늘어가는 운동 인구. 그런데 기록과 승부에 대한 지나친 욕심은 건강을 망친다. 우리는 어떻게 운동을 해야 좋을까? 운동에 빠진 세 사람의 좌충우돌 운동중독 탈출기를 통해 혼자만의 운동이 아닌, 우리 모두가 함께 행복해지는 운동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마왕(KBS2 오후 9시55분) 순기는 호텔로 찾아와 희수에게 형수님을 만나게 해달고 말한다. 하지만 희수는 그럴 필요 없다고 순기의 청을 거절한다. 희수에게 말을 해서는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순기는 석진에게 제주도 카지노 운영을 자기에게 맡겨 달라고 말한다. 석진에게 자신이 나희와 석진의 사이를 알고 있다는 것을 폭로하는데…. ●클로즈업(YTN 오후 1시30분) 흔히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고 얘기를 한다. 정의구현을 위해 법대로 하자는 표현도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강하게 느껴진다. 최근 한·미 FTA 타결로 법률시장에도 큰 지각변동이 있을 예정이다. 법의 날을 맞아 김성호 법무부장관과 함께 법의 존엄성과 필요성을 들어 본다. ●다큐 여자(EBS 오후 9시20분) 강원도 양구군에는 13년차, 일본인 며느리가 있다. 한국인 남편 하나만 믿고 현해탄을 건너온 여자. 낯선 곳에 시집 와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아이 셋을 낳고 살았다. 게다가 부모와 떨어져 있는 조카 두 명까지 돌보면서 열심히 살았다. 행복도 잠시, 남편은 너무 일찍 세상과 손을 놓아버렸다. ●생방송 TV 연예(SBS 오후 8시55분) 뮤직비디오에 함께 출연하는 윤계상·박시연 커플이 솔직하게 털어놓는 실제 사랑과 이별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정준호의 휠체어 마라톤 도전기,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임채무의 변신 이유 등을 전한다. 이날 오후 6시부터 중계된 43회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의 이모저모를 보도한다. ●내곁에 있어(MBC 오전 7시50분) 은호가 사기를 치고 달아난 기획사 사장을 찔렀다는 얘기에 은주는 혼절한다. 은호의 생일을 축하해 주러 간 자리에서 은호의 소식을 접한 지애. 집으로 돌아와 이같은 소식을 용기와 선희에게 전하고, 둘은 안타까워한다. 은주는 사표를 내지만 용기는 한 달만 시간을 갖고 생각해 보라며 보류한다.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고서적 수집 25년 외길 박대헌 영월책박물관장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고서적 수집 25년 외길 박대헌 영월책박물관장

    고서(古書)가 헌책이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기록이요, 그 진실의 두께를 켜켜이 담아낸 정의로운 보물이다. 또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 냈던 선조들의 온갖 지혜가 녹녹하게 발라져 있어 미래를 비춰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다.‘고서 속에는 만가지 봉록(俸祿)이 다 들어있다. 다만 그것은 아는 자만의 것이다.’라고. 이밖에도 금과옥조 같은 여러가지 표현으로 고서의 소중한 가치를 깊이 새기게 한다. 박대헌(54) 영월책박물관장.‘백수’로 지내던 20대의 젊은 나이 때부터 25년 가까이 고서적만을 옹골지게 수집해온 특별한 삶의 밭을 일구고 있다. 흙속의 진주 캐기라고나 할까. ●영월의 폐교에 책박물관 열다 1998년, 그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강원도 산골의 한 폐교에 ‘책박물관’을 떡 하니 열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사람, 자연, 책이 함께 어우러지는 그런 ‘그림 같은 문화마을’에 대한 평소의 동경과 신념이 작용했다. 이와 함께 1983년부터 서울에서 운영해 오던 고서점 ‘호산방’ 또한 아예 두메산골로 옮겼다. 그는 여기에서 300∼400년 전의 조선시대 희귀본 등 수백권의 고서를 찾아내 빛을 보게 했고 박물관을 찾는 많은 관광객들에게는 문화적으로 여러 신선한 충격을 안겨다주었다. 영월지역을 다녀온 이들은 한결같이 “정말, 대단한 분이다.”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 영월에 있던 ‘호산방’을 서울 도심 한복판인 태평로1가의 한국프레스센터 지하로 옮겼다. 고서점이 점점 사라지는 현실을 감안할 때 다소 의아해지는 대목이다. 궁금증을 풀기 위해 지난주 ‘호산방’에서 박 관장을 만났다. 입구에는 ‘호산방은 30년 후를 생각합니다.’는 글귀가 인상깊게 걸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200년 전의 ‘의방활투’를 비롯,‘추사문집’ 초판본, 조선후기의 ‘우병치방법’ 등 세월의 때가 잔뜩 묻은 희귀 고서 500여권이 눈에 들어온다. 특히 ‘우병치방법’은 소가 병들었을 때 치료하는 요령이 상세히 담겨 있어 당시 우리 선조들이 소를 어떻게 대했는지 짐작하게 했다. ●프레스센터 지하에 고서점 열어 특히 한쪽에 진열된 1960∼1970년대의 국민학교 교과서들은 당시의 추억 어린 향수를 떠올리게 했다. 아울러 월북 시인 임화의 ‘현해탄’, 박두진의 ‘해’, 그리고 소월의 스승 안서 김억의 육필원고 등도 소중하게 다가온다. 박씨가 10년 전 펴낸 필생의 역작 ‘서양인이 본 조선’도 눈에 들어온다. 이 책은 17∼20세기에 걸쳐 조선에 다녀간 서양인들이 조선에 관해 쓴 책들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펴 새롭게 정리했다. 이를 위해 그가 모은 원본만 모두 287권. 세계 각국의 고서점을 구석구석 뒤지고 다닌 발품의 결과물이기에 학계에서도 소중한 사료가치로 인정한다. 그가 ‘서지(書誌)학자’로 불리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서울시내 중심가에 둥지를 새롭게 마련한 지 두달 됐다는 그는 “영월에 있는 책박물관 운영이 어려워져 이곳에 일을 저질렀다.”고 했다. 하기야 산골에서 박물관을 운영하기란 그리 쉽지는 않았을 터. “영월의 책박물관도 살리고 또 수도 서울 한복판에 고서문화의 한 중심축을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도 들었지요. 지금은 약간 어렵겠지만 내년에는 정상궤도에 오를 것으로 희망합니다.” ●고서, 작은 마을의 희망이 되는 물건 ‘30년 후를 생각합니다.’라는 글귀의 뜻을 물었더니 “고서를 통해 이전과 현세대, 그리고 미래 세대를 연결시키는 공간을 의미한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러면서 “30년 후를 생각해 보면 주위에 남을 만한 책들이 얼마나 될지 걱정도 된다.”고 부연했다. 이어 “대형마트에서 팔지 않는 물건, 작은 마을의 희망이 되는 물건, 그게 바로 고서의 가치”라고 거듭 강조한다. 웬만한 강원도 여행객치고 박씨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의 책사랑은 소문이 나 있다. 그가 서울에서 영월로 향했을 때만 해도 강과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마을에 서점과 음악·연극 공연장, 문화 예술인의 작업실, 화랑, 카페가 있는 마을을 구상했다. 그래서 ‘영월 책축제’만 7회나 여는 등 나름대로 온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책과 문화에 대한 주변 사람들과의 시각차이를 좁히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결국 박물관을 잠시 폐관했다가 얼마전 다시 재개관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생긴 책마을은 영국의 ‘헤이 온 와이’입니다. 웨일스의 작은 마을이지요. 폐광 등으로 1960년 초만 해도 쇠락해가는 마을이었는데 어느날 리처드 부스라는 한 젊은이의 노력으로 지금은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이 찾는 유명한 책마을로 변모했습니다.” 평소 박씨의 철학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영월책박물관은 옛 학교터(여촌분교)와 건물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다. 이 학교는 1962년 개교해 1998년 문 닫기까지 36회에 걸쳐 400여명이 졸업했다. 현재 박물관에는 3만∼4만여점이 소장돼 있다. 박씨의 책사랑은 고교 때부터 시작됐다. 어느날 은사에게 옛 책의 소중함을 듣고 용돈을 아껴 시간날 때마다 청계천 등지에서 한두 권씩 책을 사모았다. 원래의 꿈은 도예가. 그래서 홍익공업고등전문학교에서 요업을 전공했다. 고교과정 3년과 대학 2년과정을 합친 5년제 학교였다. 군 제대후에는 도예학원을 운영했으나 아무런 성과를 이룰 수가 없었다. 백수생활로 접어들면서 방황이 시작됐다. 국립중앙박물관과 도서관, 그리고 서울의 여러 고서점을 들르는 일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 많은 유물을 눈감고도 줄줄 꿸 정도였다. 덕분에 도자기뿐만 아니라 고미술 전반에 대한 안목이 높아졌다. 고서적도 마찬가지. 결국 곰곰이 생각하던 끝에 서울 장안평 고미술상가에 고서점 호산방(壺山房)을 열었다. 이때가 1983년 서른 살의 나이였다. 호산방이라고 한 것은 조선 말기 서화가 우봉 조희룡의 호 호산(壺山)에서 비롯됐다. 고서점을 연 후에는 주로 필사본과 간찰, 또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 때의 역사와 문학 관련 양장본들에 관심을 쏟았다. ●수집에 미쳐 가족엔 ‘미안한 아빠´ 1992년 장안평 고서점을 광화문 인근으로 옮겼다. 이때 인사동의 한 고서점 주인은 “인사동에서도 안 되는 고서점이 광화문에서 되겠어? 1년도 못버틸 걸.” 하고 말렸다. 하지만 꽤 유명세를 탔고 번창해 나갔다. 그 사이 방송통신대학을 9년만에 졸업했고 동국대 정보산업대학원에서 출판잡지를 전공, 석사과정까지 마쳤다. 이때가 1998년 나이 마흔 여섯이었다. 박씨네 가족이 현재 거주하는 곳은 책박물관 한쪽에 있는 허름한 관사. 말이 관사이지 한겨울에 연탄난로를 두 개씩 피워도 거실의 물이 얼고 수도관이 터지기 일쑤. 그러다 보니 박씨는 무능한 가장으로 전락했다. 초등학교 5학년, 중학교 1학년이던 두 아들은 이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서울에서도 학원 한번 보내지 못하고 시골에 데려왔지만 큰아들은 현재 한국과학기술원(KAIST) 4학년에 재학중이고, 둘째는 내년 대학에 진학할 예정이다. “누가 그러더군요.‘고서수집을 하는 것은 독립운동하는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말입니다.” 어쩌면 이 말은 그동안 산골마을에서 외롭게 문화독립운동을 해온 박씨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그는 고서에 관심있는 사람들을 위해 “고서는 열번 잘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한번 잘못 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내년 초 그동안의 고서수집 노하우와 에피소드를 담은 ‘서창야화-어느 고서점 주인의 잠꼬대(가제)’라는 책을 발간한다. km@seoul.co.kr
  • ‘5000만원짜리 만년필’

    희귀 보석이 사용돼 가격이 5000만원에 이르는 초고가 만년필세트가 들어왔다. 만년필업체 워터맨은 4일까지 롯데백화점 명품관 에비뉴엘에서 자사 한정판 제품인 ‘세레니떼 콜렉션 다르’를 전시한다고 2일 밝혔다. 내년 1월까지 주문받아 3세트만 국내에서 판매한다. 깃털처럼 생긴 유선형의 몸체를 가진 세레니떼는 워터맨의 대표 브랜드. 편안하게 펜을 잡을 수 있도록 가운데보다는 펜 양쪽 끝부분이 더 두껍게 생긴 게 특징이다. 전시 중인 ‘콜렉션 다르’는 창조의 근원인 물·공기·흙·불을 상징하는 네 자루의 만년필로 구성돼 있다. 현해탄에서 채취한 진주 등 희귀보석이 장식됐다. 또 프랑스·일본의 장인이 보석세공을 맡았다. 금·은가루로 칠기(漆器) 표면에 무늬를 넣어 제작돼 소장가치가 매우 높다고 회사측은 전했다. 모두 161개가 제작됐으며 구입자에게 평생 애프터서비스가 보장된다.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영화 ‘괴물’ 제작사 ‘청어람’ 최용배 대표

    [김문기자가 만난사람]영화 ‘괴물’ 제작사 ‘청어람’ 최용배 대표

    골뱅이? 아니 망둥이일걸? 영화 ‘괴물’을 놓고 네티즌들이 설전을 벌인다. 제작사측은 양서류와 파충류의 중간단계로 보면 된다고 일축한다. 진짜 흥미를 끄는 네티즌들의 설문조사 결과가 최근에 나왔다. 즉 ‘괴물’이 해외에서 리메이크될 경우 드림팀은 어떻게 구성될까. 그랬더니 강두(송강호)의 역할에는 톰 크루즈가 1위였다. 이어 희봉(변희봉)역에는 ‘반지의 제왕’의 이안 매컬린, 남일(박해일)역에는 ‘캐리비안의 해적’의 조니 뎁, 남주(배두나)역에는 ‘킬빌’의 우마 서먼, 현서(고아성) 역에는 ‘우주전쟁’의 다코타 패닝이 뽑혔다. 생각만 해도 가히 환상적이다. ●할리우드 리메이크땐 강두役에 톰 크루즈 아무튼 한강에서 잉태된 ‘괴물’은 이제 바다를 향한다. 이미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어 태평양과 대서양으로 무섭게 돌진할 태세다. 지난 2일 일본에서 개봉돼 첫주 박스오피스 7위를 마크하는 등 선전하고 있다. 태국과 싱가포르에서는 지난 7일 개봉됐다. 오는 14일에는 홍콩,15일에는 타이완, 그리고 10월과 11월에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각각 개봉될 예정이다. 내년 2월에는 미국개봉이 약속돼 있다. 특히 미국 메이저 제작사들이 리메이크 판권에 대한 끊임없는 러브콜을 보내고 있으며 조만간 이와 관련된 계약을 맺게 된다. ‘괴물’은 이래저래 많은 화제를 낳고 있다. 영화 개봉 이후 8월 31일까지 이마트에서는 골뱅이 통조림 판매량이 작년 동기보다 56.1%나 늘었다. 주요 촬영지인 한강에 대한 관심 또한 증가하고 있다. ‘괴물’은 흥행세가 계속 이어져 추석시즌까지 상영될 예정이다. 그야말로 1500만,2000만 관객까지 돌파할지 초유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쯤 되면 이 시대에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떳떳하게 나서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다름아닌 ‘괴물’ 제작자 청어람 대표 최용배(44)씨. 토론토영화제에 참석하던 날인 지난 7일 오전 서울 강남구 청어람 사무실에서 만났다. 최 대표는 토론토영화제 ‘미드나잇 섹션’에 초청을 받아 봉준호 감독과 동행,14일에 귀국할 예정이다. ●토론토영화제 초청받아 봉준호 감독과 동행 먼저 미국 리메이크 얘기가 나왔다.“토론토 현지에서 할리우드 메이저 제작사 관계자들과의 미팅이 약속돼 있다.”면서 현재로서는 좋은 결과가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 계약금액과 관련해서는 “보통 50만∼200만달러 사이에서 정해진다.”고 대답했다. 또한 독일과 이탈리아 제작사 관계자들도 만나기로 돼 있다고 귀띔했다. 이어 속편 제작여부를 묻자 “대개 2편이 제작되면 1편보다 못하다는 평을 자주 듣게 된다.”면서 “이런 우려를 불식시키면서 제작하려면 단순하게 해보자가 아니라 1편보다 업그레이드되는 것이 반드시 전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영화 한편을 만들려면 대개 3년정도 걸린다.”면서 당장은 현재 준비 중인 차기작에 정열을 쏟을 생각이라고 부연했다. 우선 내년 1월부터 촬영에 들어갈 ‘낙랑클럽’ 제작이다. 이 영화는 한때 한국의 마타하리로 화제가 됐던 여간첩 김수임을 소재로 했다. 일제시대와 해방공간을 무대로 이강국과의 비극적인 로맨스를 다뤘다. 감독은 ‘영원한 제국’과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만들었던 박종원씨가 맡았다. 그 다음으로는 ‘효자동 이발사’의 임찬상 감독,‘용서받지 못한자’의 윤종빈 감독 등과 차기작을 준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괴물’의 봉준호 감독과의 합작품에 대해서는 “봉 감독 또한 다음 작품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어떤 식으로 구체화될지 의논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구상 중인 것과 합하면 10여편(준비작)은 된단다. 아울러 10월초부터 ‘괴물’이 만화로 변신해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연재된다고 했다.“영화와는 전혀 다른 내용” 이라면서 반응이 좋을 경우 ‘괴물’ 2탄 제작을 검토해볼 생각이라고 밝혔다. 만화가는 ‘귀신’으로 잘 알려진 석정현씨. 여기에는 세 명의 남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또한 괴물도 여러 마리 출현한다고 귀띔했다. 영화에는 왜 괴물이 한 마리만 나오느냐고 하자 “그런 의견들이 있었지만 감독이 그냥 가자고 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과연 ‘괴물’로 얼마 벌었을까.“딱히 얼마라고 얘기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며 웃어넘긴다. 다만 초기 제작비가 150억원 들어갔으며 투자단계에서 일본과 320만달러의 수출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고 했다. 아울러 봉준호, 송강호, 박해일, 변희봉 등 실력파들이 포진해 있어 투자하려다가 괴물이 등장한다니까 망설이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고 했다. “제작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 컴퓨터그래픽(CG)이었습니다. 미국 영화계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네트워크를 총동원했지요. 당초 CG 제작비용보다 20만달러가 더 추가됐습니다. 솔직히 CG작업이 완성될 때까지 걱정과 불안이 앞서더군요. 투자가들에게 안심을 시키는 것도 그랬고요. 봉 감독도 마음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이미 관객들이 할리우드 영화를 많이 봤기 때문에 CG완성도는 99%가 아닌 100% 이상이어야 했지요.” 영화가 1000만 관객을 돌파할 즈음, 봉 감독과 점심을 같이하면서 “서로 의기투합했던 작업이 이제야 결실을 맺게 됐다.”며 격려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야 비로소 성공을 실감했다고 털어놨다. 봉 감독에 대한 평가를 해달라는 질문에 “한국 최고의 감독이다. 다른 감독과 경험하지 못했던 그 무엇인가를 느끼게 한다.”고 칭찬했다. ●‘완벽형´ 봉감독 “한국 최고” 봉 감독과의 인연에 대해서는 “시네마서비스 배급담당 이사로 재직했을 때 ‘플란다스의 개’를 제작하면서 봉 감독의 열정에 매료됐다.”면서 나중에 제작사를 차린다면 봉 감독과 꼭 한번 작업을 하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봉 감독은 모든 일을 철저히 추구하는 완벽형이라고 부연했다. 최 대표는 서울에서 태어나 신일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대에서 서양사학을 전공했다. 영화 제작에 뜻을 품고 다시 서울예대 영화과를 졸업했다. 고교때 국어선생님한테 영화얘기를 자주 들으며 영화에 대한 호기심을 키웠다. 시력이 워낙 안좋아 군면제를 받은 그는 곧장 조감독으로 영화촬영 현장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감독보다는 제작자가 적격이라고 판단한 그는 94년 (주)대우 영화사업부 제작투자담당으로 입사했다. 이어 97년 시네마서비스 투자·배급 이사로 자리를 옮겨 경험을 쌓은 뒤 2001년 지금의 청어람을 설립했다.‘청출어람’에서 회사이름을 따왔으며 ‘늘 새로운 영화를 만들자’는 뜻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그의 부인 역시 영화에 대한 관심도가 높다. 최 대표가 어느날 영화 워크숍 강의를 나갔다가 수강생인 부인을 만났다. 그는 “(부인은)취미보다 높은 수준이며 주위에서 항상 도와주는 든든한 후원자.”라며 활짝 웃는다.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63년 서울 출생 ▲82년 신일고 졸업 ▲86년 서울대 서양사학과 졸업 ▲89년 서울예대 영화과 졸업 ▲89∼94년 정지영, 신승수 감독 연출부 ▲94∼97년 (주)대우영화사업부 제작투자담당 ▲97∼2001년 시네마서비스 투자·배급이사 ▲01년 청어람 설립, 대표이사 ●주요 작품 효자동이발사, 작업의 정석, 흡혈형사 나도열, 괴물 등
  • [한민족 문화유전자를 찾아서] 사회·생활상징(중)

    한·중·일 삼국의 문화를 비교할 때 일본은 날(生)문화, 중국은 불(火)문화, 한국은 비빔밥 문화라 할 수 있다. 일본은 날 것을 주로 먹는다. 대표적인 것이 생선회이다. 소나 돼지처럼 네발 달린 동물을 주로 먹기 시작한 것은 메이지(明治)유신 이후라 한다. 중국 음식은 거의가 높은 온도에 순간적으로 데치거나 튀겨 먹는다. 물론 이는 기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 비빔밥- 조선 3대음식중 하나로 멋·맛 듬뿍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가. 일본처럼 날 것을 먹거나 그렇다고 중국처럼 전적으로 튀겨 먹거나 데쳐 먹는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특징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 음식은 비빔밥처럼 여러 가지를 섞었을 때 본래의 재료와는 다른 독특한 맛을 낸다. 그래서 한국 문화를 비빔밥 문화라 한다. 이 같은 삼국의 문화 차이는 집과 탑들을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일본은 날 것을 주로 먹듯이 집들의 재료도 하나같이 나무를 써 집도 깔끔하고 반듯하다. 그래서 탑도 목탑이 주류를 이룬다. 중국의 전통 집들은 거의가 불로 구운 벽돌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탑도 구운 벽돌로 만든 전탑이 주류를 이룬다. 반면 우리나라 집은 일본이나 중국과는 달리 나무, 돌, 벽돌을 두루 써 탑도 목탑, 석탑, 전탑 등 종류가 다양하다. 우리문화는 한마디로 다양한 문화가 섞인 비빔밥 문화라 할 수 있다. 우리 문화의 특징처럼 비빔밥은 쌀과 달걀, 참기름, 나물, 쇠고기, 김 등 온갖 재료를 넣어 고추장에 비벼 먹는 복합음식이다. 비빔밥의 특징은 간단하게 먹을 수 있으면서도 가격에 비해 영양과 내용물이 풍부하다는 점이다. 거기에 특별히 저항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없고 또 저 열량이면서도 맛과 멋의 흥취를 느낄 수가 있어, 기능성 식품 또는 다이어트식품으로도 개발이 가능하다. 비빔밥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전주비빔밥이다. 전주비빔밥은 평양의 냉면, 개성의 탕반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음식의 하나로 꼽힌다. 그 이유는 천혜의 지리적 조건하에서 생산된 질 좋은 농산물의 사용과 거기에 장맛과 깊은 정성이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전주비빔밥에 포함되는 자료는 무려 30여 가지에 이르며, 모두 음양오행에 근거를 두고 오색오미의 맛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후기 고추가 들어오면서 우리의 음식문화에 혁명을 가져온다. 강렬하고 매운 맛의 고추장은 김치와 함께 한국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고추와 소스는 여러 나라에서 먹지만 고추장은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음식이다. 정작 고추를 우리나라에 전한 일본도 먹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도 부족해 매운 고추장에 고추를 찍어 먹는다. 맛 중 가장 오래 기억되는 것이 매운맛이라 한다. 그래서 고추장과 김치는 중독성이 강해 한번 맛을 들이면 쉽게 잊지 못한다. 고추장은 강렬한 맛으로 그 자체로도 훌륭한 반찬이 된다. 이를 이용한 비빔밥은 물론 각종 반찬과 국, 찌개, 심지어 떡볶이에 이르기까지 사용범주는 반찬 가지 수 만큼이나 무한하다. ■ 된장 - 식물성 단백질 문화의 정수 김치와 밥처럼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것이 된장이다. 거기에 항암효과까지 있다하여 웰빙 식품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마디로 된장은 식물성 단백질문화의 정수이다. 장맛은 그 집안 음식 맛의 척도다. 그래서 ‘광속에서 인심 나고 장독에서 맛 난다.’,‘장맛 보고 딸 준다.’고 했다.‘동의보감’에 의하면 “장은 모든 어육·채소·버섯의 독을 지우고, 또 열상과 화독을 다스린다.”고 하였다. 된장의 주원료는 콩이다. 우리는 콩으로만 된장을 만드나 일본에서는 콩과 쌀누룩으로 빚는다. 만주어로는 장을 미순이라 하고, 우리는 메주라고 하며 일본에서는 이를 미소라 부른다. 장은 고구려 때부터 있어와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우리의 장은 현해탄을 건너가 일본의 된장, 미소가 된다. 우리가 즐겨먹는 청국장은 삶은 콩을 짚에 감싸서 온돌 방의 뜨끈한 아랫목에 모셔놓고 발효시킨 ‘즉석된장’이다. 볏짚에 붙어 있는 야생 고초균이 번식하여 실 모양의 끈끈한 점물질을 생성하여 일종의 항생물질이 된다. 장기적으로 먹는 저장식품인 된장과는 달리 즉석된장이지만 그 영양가와 항암효과는 대단하다고 하겠다. ■ 김치 - 한국문화 상징 ‘미래의 식품’ 이제 김치를 빼놓고 한국문화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김치하면 한국, 한국인하면 김치라 할 정도로,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상징이 되었다. 김치는 배추김치를 비롯해 무김치, 오이김치, 해조류 파김치 등 가지 수가 무려 187종이나 된다. 김치의 독특한 맛과 영양학적 가치가 과학적으로 입증되면서 많은 국내외의 영향학자들에게 ‘미래의 식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더욱이 조류독감이나 다이어트에 효능이 있다고 알려지면서 빠른 속도로 세계인의 음식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김치는 무, 배추, 오이 등을 소금에 절여서 고춧가루, 마늘, 파, 생강, 젓갈 등의 양념을 버무려 담가놓고 먹는 반찬이다. 김치에 있는 고추를 먹으면 ‘캡사이신’이라는 성분에 의해 몸의 많은 에너지를 사용토록 하여 체지방을 분해시킨다. 고춧가루가 범벅인 김치를 오래 먹으면 자연히 다이어트가 된다. 또한 김치는 담근 직후보다도 완전히 익었을 때 비타민이 가장 많이 함유된다고 한다. 그래서 김치는 채소가 나지 않는 겨울철 비타민 A,B,C 등의 공급원으로, 김치에 첨가된 부재료와 함께 다양한 영양성분을 공급해 주는 한마디로 종합 영양식품이라 할 수 있다. 불고기는 세계에 가장 널리 알려진 한국의 대표적인 음식이다. 자극적이지도 않으면서 맛이 있어 누구라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불고기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때 고기구이인 맥적(貊炙)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어 역사가 아주 길다. 고기를 불에 구워 먹는 음식문화는 세계 여러 나라에도 있지만 우리처럼 양념에 저민 고기를 불로 연기를 내며 구워 먹는 곳은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 삼계탕- 여름철 보양식의 백미 우리나라처럼 음식종류가 다양하고 철에 따라 체질에 따라 달리 먹는 나라도 없다. 여름철의 보양식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삼계탕이다. 삼계탕은 100일쯤 자라 볏이 돋아 제 빛을 띠어갈 무렵에 영계를 잡아 뱃속에 수삼, 마늘, 대추, 찹쌀 등을 넣어 배를 실로 아물려놓고 푹 끓여 먹는다. 삼계탕에는 허한 기를 보충해주는 인삼, 몸속의 혈액을 보족해주는 보혈(補血)식품인 대추, 양(陽)이 허한 것을 보해주는 보양식품인 닭고기 같은 요소들이 음양조화를 이루면서 서로 궁합을 맞춰 몸에 더 좋다. ■ 냉면 - 담백·고상한 민족적 풍미 삼계탕 못지않게 사랑을 받는 것이 냉면과 자장면이다. 냉면은 겨울철에는 이열치열의 음식으로, 여름철에는 그 자체 시원한 국수 맛으로, 가히 사계절음식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메밀가루를 반죽하여 국수틀로 뽑은 면발을 펄펄 끓는 물에 넣어 삶아 찬물에 바로 씻어내 국수사리를 만든다. 여기에 육수를 부으면 물냉면, 비벼서 먹게 되면 비빔냉면이 된다. 소고기, 돼지고기, 김치, 배, 파, 마늘, 깨소금 등 다양한 재료가 들어가는 냉면은 뛰어난 맛과 높은 영양가, 고상한 민족적 풍미로 입맛을 돋운다. 국수를 주재료로 한 음식은 이웃 중국이나 일본에도 많지만 냉면처럼 영양가가 복합적이고 담백한 맛을 내는 국수는 많지 않다. 소주와 막걸리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즐겨 마시는 술로 대중·서민문화를 상징한다. 소주는 태워서 만든 술이라는 뜻으로 증류방식에 의해 만든 술로서 노주(露酒)·화주(火酒)·한주(汗酒)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 도입된 시기는 고려 충렬왕 때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가 일본 원정을 하기 위해 고려 왔을 때 전해졌다고 한다. 소주는 특히 몽골의 주둔지이던 개성, 전진 기지가 있던 안동, 제주도에서부터 소주 제조법이 발달하였다고 한다. 이에 반하여 막걸리는 한국에서 개발된 전통술로 빛깔이 뜨물처럼 희고 탁하며, 도수가 낮으며 탁주(濁酒)·농주(農酒)·재주·회주라고도 한다. 고려 때에는 이화주(梨花酒)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이는 배꽃이 필 무렵 누룩을 만든데서 유래되었다. 막걸리는 술밥에다 누룩을 섞어 빚은 술을 오지그릇 위에 #자 모양의 체다리를 걸치고 체로 막 걸러 만들었다. 막걸리라는 이름은 ‘막걸렀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라 한다. 정종수 국립춘천박물관장 협찬: 삼성
  • 먹기연습 한창인 大食 챔피언

    먹기연습 한창인 大食 챔피언

    부산(釜山)의 동아대(東亞大) 체육과 1학년에 적을 두고 있는 (24·부일(釜一)체육관사범)씨는 요즘 1주일에 1,2회씩 서면(西面)「로터리」가까이에 자리잡은 「살롱·미라노」에 들러 「오트밀」 먹어치기 연습을 하고 있다. 일본의 「후지TV」에 출연키 위한 「리허설」이다. 매주 1·2회씩 연습 최신 기록은 73그릇 그의 「오트밀」먹어 치기 작업의 최신기록은 22분에 37그릇. 약 33초에 한 그릇 꼴이다. 먹는 「스피드」도 「스피드」지만 그 만한 양을 집어 삼키는 위(胃)는 어떻게 생긴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지난 8월 영국에서 있은 「오트밀」먹기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세계 「챔피언」 으로 뽑힌 영국인 「존·코일」씨의 신기록이 23그릇이었다. 그것도 「코일」씨는 23그릇을 먹고 난 뒤에 졸도를 했다는데 김정덕씨는 14그릇이 더 많은 37그릇을 처분하고도 거뜬했다. 이 실력 아닌 위력(胃力)을 갖고도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은 내년 일본(日本)에서 열리는 만국 박람회를 기념해서 인기방영 중인 「후지TV」의 특별 「프로」인 「만국깜짝놀라기·쇼」에 출연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그의 「22분에 37그릇」의 기록도 어느정도 세계공인기록으로 접근하는 셈. 그러니 만큼 연습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金씨 위(胃)의 위력(偉力)을 발굴해낸 장본인은 「살롱·미라노」의 주인 이상호(李相鎬)(32)씨였다. 이씨는 이 서양식 음식점을 내면서 늘 불만인 점이 있었다. 그것은 「오트밀」이 귀족적 음식이라는 인상때문인지 서민층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 마침 정부에서는 분식 장려다 잡곡혼식이다 해서 「오트밀」을 서민화시키는데 앞장서기로 마음먹었다. 전파로 기록 알려져 「후지TV」 PD 비래(飛來) 그는 5만원을 들여 「오트밀」먹기대회를 연다는 광고를 내었다. 대회당일인 지난 11월 2일 23명의 대식가가 참가한 자리에서 김씨가 거뜬히 우승을 차지했다. 이 날의 대회에서는 만약의 사고에 대비해서 위장관계전문의 朴모씨가 입회했는데 金씨가 37그릇 째의 마지막 숟가락을 「테이블」에 조용히 놓자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면서 金씨의 배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보았다는 얘기. 의사 朴씨의 말에 의하면 사람의 위가 받아 들일 수 있는 용량은 최소 1천5백cc. 「살롱·미라노」에서 내는 「오트밀」한 접시의 용량은 약 1백5cc 이다. 황소 4마리가 먹어내는 양이라는 것이다. 의사 朴씨는 金씨를 해부대에 올려놓고 「메스」를 휘둘러 보고 싶은 눈치 마저 보였다. 金씨의 세계신기록이 전파를 타고 현해탄(玄海灘)을 건너 갔다. 지난 11월 24일 일본(日本) 「후지TV」의 「프로듀서」인 中尾正男(35)씨가 비행기로 부산(釜山)에 날아 왔다. 中尾씨 앞에서 또 「오트밀」먹기대회가 재연되었다. 그 「오트밀」은 국제규격대로 만든 것이었다. 30그릇이 비워지고 31 그릇 째가 金씨 앞에 놓였을 때 中尾씨는 몇 번이나 손을 휘저으면서 그만해도 충분하다고 「레프리·스톱」을 요청했다. 金씨는 세계육체미대회에 출전하는 것이 유일한 꿈이란다. 1m75cm 의 키에 80kg의 몸무게. 「미스터 영남(嶺南)」과 「미스터·동아인(東亞人)」의 왕관을 가진 육체파. 직장인 부일(釜一) 체육관에서 육체미 연마에 여념이 없다. 이만한 그의 경력이면 평소에 먹는 양도 짐작이 간다. 「미스터·월드·콘테스트」 출전에 앞서 「오트밀」먹어치기 「쇼」에 나가게된 것이다. 내년 만국 박람회서 일본 「챔피언」과 대결 金씨는 이 「후지TV」 「프로」에서 일본(日本)「챔피언」과 대결하게 되어 있다. 매주 연습을 하는 것도 이 때문. 아무리 저 편이 「홈·그라운드」의 잇점을 갖는다고 해도 질수야 있겠느냐 하는 투지다. 연습용 「오트밀」은 모두 공짜다. 「살롱·미라노」의 주인 이상호(李相鎬)씨는 金씨가 많이 먹으면 먹을수록 손해가 더하는 셈이 되지만 이해를 초월해서 되도록 푸짐하게 되도록 빨리 접시를 비워주길 언제나 그의 옆에 서서 응원한다. 이상호(李相鎬)씨는 김씨가 일본에 갈 때 후견인으로 따라가게 되어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후지TV」가 출연시킨 깜짝 놀라게 하는 진지한 기술(?)은 30여가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별난 짓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다. 여기에 김정덕(金正德)씨가 한 몫 끼여 실력을 겨룬다. 金씨는 50그릇을 처리하는 것이 최종목표라면서 씽긋 웃는 품이 여유가 만만하다. <부산(釜山)=최정환(崔正換) 기자>[선데이서울 69년 12/7 제2권 49호 통권 제 63호]
  • 장훈과 모국색시 “몰랐지 3년”

    장훈과 모국색시 “몰랐지 3년”

    일본 「프로」야구 동영(東映)「플라이어즈」의 강타자 장훈(張勳)이 모국의 아리따운 아가씨를 아내로 맞기 위해 12월 3일 어머니 박분남(朴粉南) 여사와 함께 귀국했다. 3년 연속 일본 「패시픽·리그」수위타자로 동영(東映)「팀」의 「스타·플레이어」인 장훈(張勳)을 남편으로 맞게 된 행복한 아가씨는 67년도 준「미스·코리어」선(善)이었던 김영화(金英華)(23·제일은행 영업부 근무)양. 67년 11월초 어느 날 동영(東映) 「플라이어즈·팀」의 한국친선방문경기가 끝난 이틀 뒤였다. 실업야구 4차 「리그」기은(企銀)대 상은(商銀)의 「게임」이 한창 진행도중 노총각 장훈(張勳)은 아리따운 한국아가씨 2명을 동반하고 본부 귀빈석에 나타났다. 장훈(張勳) 바로 옆에 앉은 아가씨는 김영화(金英華)양, 그 옆엔 약간 나이가 든 아가씨가 일어(日語)를 모르는 김양을 위해 통역을 해주고 있었다. 어떻게 나왔느냐는 질문에 장훈(張勳)은 기은(企銀) 선수중 「스카우트」해 갈 선수가 있어 보러 나왔노라고 했다. 결혼은 언제 할 생각이냐니까 빙그레 웃기만 하고 옆에 앉은 김양을 돌아다 보았다. 통역을 맡고 있던 아가씨가 『일본에 계신 어머님의 최종 승낙을 맡아야 한다나 봐요』하고 귀띔을 해 주었다. 김양은 야구 「룰」에 전혀 백지인 모양이어서 「스퀴즈·플레이」가 벌어지자 장훈(張勳)은 그 요령을 자세히 설명해 주기도 했다. 당시 장훈(張勳)은 이미 김양을 일생의 반려로 점 찍어 놓았던 모양. 두사람이 처음 사귀게 된건 67년 11월이었다. 역시 동영(東映)「팀」의 한 사람으로 친선방한(親善訪韓) 경기에 출전하고 있던 장훈(張勳)이 제일은행 야구부감독인 박현식(朴賢植)씨를 만나 농반 진반으로 『중매 좀 서라』는 말에서 시작, 朴감독이 『마침 우리 은행에 새로 들어온 행원중 「미스·코리어」가 있는데 만나 보겠느냐?』고 제의하기에 이르렀다. 朴감독의 안내로 장훈(張勳)은 손님을 가장, 창구에 앉아있는 김양을 보 수 있었다. 호쾌한 「홈·런」왕(王) 장훈(張勳)도 미녀앞엔 약했다. 첫눈에 반해 버렸다. 결혼할 의사를 밝히자 박감독의 주선으로 그해 12월말 반도「호텔」에서 김양과 김양의 아버지 김상택(金尙澤)(55)씨와 공식적인 첫 선을 보았다. 김양의 집안에서도 「프로」야구의 「스타·플레이어」이자 백만장자인 장훈(張勳)을 사위감으로 마다 할 리가 없었다. 이래서 장훈(張勳)과 김양의 현해탄을 넘나드는 사랑의 편지는 한 주일도 거르지 않게 되었다. 올 해 다시 동영(東映)「팀」이 내한했을 때는 김양의 온가족이 총출동, 장래의 사위 장훈(張勳)이 호쾌한 「홈·런」을 날리는 것을 구경하기도 했다. 장훈(張勳)이 이번 어머니를 모시고 모국에 나온 것은 김양의 부모와 최종 협의 확실한 약혼날짜나 결혼날짜를 정하기 위한 것으로 이번 방한(訪韓)길에 최소한 약혼은 끝낼 모양이다. 양가 부모들이 합의한다면 결혼식까지 끝낼지도 모른다. 경남(慶南) 창녕(昌寧)이 고향인 장훈(張勳)은 1958년 8월 「오사까」대판(大阪) 랑화상고(浪華商高)의 학생으로 제3회 제일교포학생야구단의 일원으로 그리던 모국에 첫발을 디뎠다. 장훈(張勳)의 어머니 朴여사는 장훈(張勳)이 4세때 남편을 여의고 홀몸으로 3남매를 기르면서 「히로시마」서 한국음식점을 경영해왔다. 朴여사는 3남매에게 늘 배필은 한국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해 왔으며 큰 아들 세치(世治)(40)씨는 이징자(李澄子) 양에게, 또 사위도 한국인인 민대기(閔大基)씨를 맞았다. 그러니까 장훈(張勳)마저 金양에게 장가 들면 朴여사의 숙원은 모두 이루어 지는 셈. 장훈(張勳)이 일약 인기상승의 「스타·플레이어」가 되자 그의 주위엔 숱한 염문이 뒤따르기 시작했다. 인기여배우 김지미(金芝美), TV 「탤런트」선우용녀(鮮于龍女)등이 장훈(張勳)의 이름과 함께 화제를 뿌리기도 했었다. 또 현재 장훈(張勳)의 소유로 되어있는 「도꾜」명치신관(明治神官)앞 6층짜리 「맨션·아파트」를 관리하고 있는 모 일본여인이 장훈(張勳)과 동거중이라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었다. 그러나 장훈(張勳)은 이런 지난 일들을 깨끗이 씻고 모국아가씨를 조강지처로 맞게 된 것이다. 3년 연속 수위타자도 결혼에 관한한 몇차례 범타(凡打)끝에 회심의 「홈·런」을 때리게 된 것. 張군의 신부가 될 金양의 집안은 원해 평북(平北) 철산(鐵山) 출신. 8·15해방후 월남, 아버지는 서울 용산(龍山)에서 미곡상을 경영하다가 현재는 동두천(東頭川)에서 미곡상을 차리고 있다. 4남매의 외동딸이자 맏딸인 金양은 서울서 상명여고(祥明女高)를 졸업, 경희대(慶凞大) 사학과(史學科)에 진학했으며 대학(大學) 2학년이던 67년 「미스·코리어」에 출전, 준「미스·코리어」 선(善)으로 뽑히고 이 때문에 제일은행에 특채되었다. 지금은 서울 용산(龍山)구 신계(新契)동 25의 9에서 남동생 셋과 함께 자취생활. 장훈(張勳)이 3일, 어머니 朴여사와 함께 귀국하기전만 해도 金양의 어머니 원정숙(元貞淑)(47)여사는 『전혀 사전에 알지도 못했으며 더군다나 12월 10일 결혼식 얘기는 터무니 없는 얘기』 라고 펄쩍 뛰었다. 실상 신계(新契)동 김양의 집은 결혼을 1주일 앞둔 신부의 집이라고 보기엔 너무도 준비가 없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金양은 『곧 어머니와 함께 귀국한다는 소식은 전해왔어요』라면서 그동안 계속 장훈(張勳)과 사랑의 편지가 오고 간 사실은 시인. 그러면서 金양은 『그이가 하도 효자라서 자기 자신의 의사는 결정되지만 최종결정은 어머님 朴여사가 하게 될 것이라고 했어요』하며 朴여사가 金양을 만나보고 마음에 들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12월3일 「노스웨스트」편으로 어머니와 함께 입국한 장훈(張勳)선수는 그의 반도(半島)「호텔」 840호실에 투숙, 약 20일간 머무를 예정이라고 말했다. 어머니와 함께 귀국한 표면상의 이유는 이모를 만난다는 것. 그는 반도(半島)「호텔」에서 기자와 만나 김영화(金英華)양과의 약혼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성인 김영화(金英華)양에게 대단히 미안하게 됐다. 나는 金양의 이름을 입밖에 낸 일조차 없다. 金양은 내가 만난 몇몇 여성 중에서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결혼은 내 한 사람의 의사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단계니만큼 긍정도 부정도 하기 싫다. 金양에 대해서는 이 이상 물어주지 말아달라. 나도 빨리 결혼을 하고싶은 것은 사실이다』 [선데이서울 69년 12/7 제2권 49호 통권 제 63호]
  • 스포츠가 맺어준 부부

    스포츠가 맺어준 부부

    식은 정각에 열렸다. 순서대로 주례가 정면연단에 섰다. 체격이 좋은 신랑의 입장.「웨딩•마치」가 울렸다. 이 날의 여주인공 智惠子(지혜자)양이「웨딩•드레스」로 감싼 몸을 엄숙한 표정을 짓고 앞으로 움직였다. 옆에는 이모부 方舟(방주)씨가 따랐다. 方舟씨는 신랑이 이쪽을 보고 초조하게 기다리는 장소에 이르자 왼 손에 쥐었던 신부의 오른 손을 분명히 신랑의 왼 손에 건네 주었다. 순간 식장안에는 요란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애정은 국경과 편견과 오해를 뛰어 넘었읍니다. 그것은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어쩌면 영원히 어울릴 일 조차 없었을지도 모를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마음을 하나로 여물게 하여 이 곳 서울에 하나의 가정을 낳게 했읍니다. 신랑•신부의 앞날에 축복을 보내는 사람은 오늘이 자리에서 주례를 맡은 저 한사람만이 아닐 것입니다…』崔致煥(최치환•대한 축구협회회장)씨의 주례사가 계속되는 동안 신부는 그 말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숙인채 감격의 눈물만 떨어뜨리고 있었다. 퇴장하는 신부의 얼굴은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11년전 학생축구「팀」으로 일본에 원정가서 알게 돼 식은 약 30분으로 끝나고 일본인 여성 小野智惠子(26)양은 한국인의 아내가 됐다. 신랑 朴景和(박경화•31•서울 성북구 성북동 1가)씨와 智惠子양이 알게 된 것은 지금부터 꼭 11년 전인 1958년. 20세의 朴씨는 연세대의 1학년이었고 智惠子양은 15세로 일본 栃木縣 足利市에 있는 모여고1학년이었다. 한국인학생 朴군은 학생 축구「팀」의 일원으로 일본에 원정 갔었다. 이때 그는 재일교포인 方舟(栃木縣足利市)씨에 초대되어 그 자택을 방문했다. 方舟씨는 일본에서 사업을 크게 벌이고 있는 재일교포. 축구「팬」이었다. 朴군은 方舟씨댁에서 여학생복 차림의 앳된 일본인 소녀를 소개 받았다. 方舟씨의 일본인 아내의 언니의 딸, 바로 오늘의 智惠子양이었다. 智惠子양은 그 날 이모부의 나라에서 축구선수가 왔다기에 어린 호기심을 가득안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이모부는「스포츠•시즌」이되면 밤낮 없이 한국축구를 자랑삼아 콧대를 저 일본 최고봉이라는 富士山보다 더 높게 했었다. 이 우연스러운 만남이 두 사람의 운명을 이토록 바꿔 놓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었다고 신랑 朴군과 신부 智惠子양은 식이 끝난뒤에 말하고 있다. 朴군은 이 때 귀국한 뒤 方舟씨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方舟씨 轉交(전교)로 智惠子양에게도 서툰 영어로 간단한 인사치레의 글을 동봉했다. 이것이 두 사람의 교제의 시초다. 현해탄 오간 戀書(연서) 5백통 임 보고파 대표선수 되고 그 후 朴군은 연세대를 졸업하자 축구의 국가대표선수로 활약하게 됐다. 朴군의 형 景浩(경호•39•建大(건대)체육강사•축구「코치」)씨 역시 54년에서 58년까지의 5년간 우리나라의 축구선수로 활약했다. 朴군은 형이 은퇴한 뒤를 이어 59년에 국가대표선수로 발탁되어「인사이드」와「윙」을 맡아 이름을 떨쳤다. 그는 이해 국가대표선수로 처음으로 일본에 원정갔다. 누구 보다도 朴군을 반겨 준 사람이 바로 智惠子양이었다. 朴군과 智惠子양 사이에는 그 이후 영어와 일어로 편지가 오고 가게 됐다. 한 달에 두번 이상은 꼭 편지를 쓰고 또 받았다. 11년 사이에 주고 받은 편지는 약 5백통에 이르렀다. 朴군은 智惠子양과「펜•팰」이 된 이후 智惠子양을 만나기 위해 축구에 더 열을 올렸다. 국가대표선수의 자리를 유지해야 일본에 갈 수가 있고 일본에 가야 小野 智惠子양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朴군은 24세가 될 때 까지 1년에 1~2회 일본에 원정했다. 그러나 그의 앞길에는 행운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나친 연습으로 말미암아 다리를 다쳐 상처를 입고 대수술을 해야했다. 이 바람에 선수생활을 눈물을 머금고 단념해야 했다. 그 사이에도 항공우편은 현해탄의 하늘을 쉴새없이 날아갔다. 朴군은 일본에 가기 위해 한 때는 근무하던 第一毛織(제일모직)을 그만둔 일까지 있다. 일본가는데 미쳐 버렸다고 온 집안이 야단이었다. 그러나 선수생활을 그만둔 이후로는 일본으로 건너갈 기회는 오지 않았다. “한국의 풍습 빨리 익혀서 좋은 아내가 돼 보겠어요” 다시 기회가 온 것은 올해 7월. 그는 세계축구연맹이 일본에서 연「코치•아카데미」에 나가게 되었다. 약3개월동안 그는「도꾜」에서 축구의「코치」에 관해 공부를 했다. 아마 이 사이에 이들은 글을 통해서 알고 지낸 서로를 더 깊이 이해라는 기회를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한국인의 아내가 된 小野 智惠子양은 외롭지가 않다. 그녀에게는 남편도 있지만 서울 수유리에는 이모보의 부모님이 계시다. 그래서 그녀는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한국에 올 때도 이모 부부가 양친대신 한국까지 따라 나왔다. 지난달 15일 朴군과 함께 한국에 와서 결혼준비에 바빴던 그녀는 식이 끝나자마자「비자」관계로 식 다음날인 5일에 이모 부부와 함께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에 가서 한국으로의 입적수속을 마치고 한국에서 새 살림을 꾸밀 준비를 하기 위해서다. 한국인의 아내가 된 일본이 신부 智惠子양은 한국을 떠날 때 이렇게 말했다. 『제가 한국으로 시집간다고 했을때는 집안이 반대했고 친구들도 말렸읍니다. 그러나 저는 편지를 통해서 알게된 그이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이곳으로 올것을 결심했읍니다. 저는 한국음식을 한국사람 보다 좋아합니다. 한국의 풍습을 익히면서 좋은 한국인의 아내가 되어 보겠읍니다.』 智惠子양 옆에서 새 며느리를 가진 신랑 朴군의 어머니는 웃음으로 얼굴의 주름살을 더 깊이 패게 하면서 한국말을 모르는 일본인 며느리를 귀여운듯 지켜 보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국가대표「스포츠」선수로서 일본인 아내를 얻은 사람은 朴씨에 앞서 韓銀(한은)에 근무하는 李秉求(이병구)씨가 있다. 李씨도 국가대표 농구선수로서 일본에 원정가서 알게된 일본인 여성 田村倭子씨와 오랜「펜•팰」끝에 맺어졌고 田村倭子씨는 현재 서울에서 딸 하나를 낳았고 KBS의 대일방송에서「아나운서」로 활약하고 있다. 智惠子양은 결혼전에 田村倭子씨의 소문을 들었다고 말했다. 일본여성은 한국의「스포츠맨」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선데이서울 69년 11/9 제2권 45호 통권 제 59호]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한·일서 ‘희망 전도 회고록’ 내는 박치기왕 김일 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한·일서 ‘희망 전도 회고록’ 내는 박치기왕 김일 씨

    영화 ‘시네마천국’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인생은 네가 본 영화와는 달라, 인생이 훨씬 힘들지….’ 그곳엔 영웅을 노래하는 시(詩)가 있었다. 고난과 감동의 파노라마, 눈물과 회한이 켜켜이 쌓인 흑백필름이 소리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현해탄이 대수로냐 타작질이 대수로냐/땀방울 핏방울로 모진 세월 이겨냈다/백두호랑이 포효하니 온 세상이 잠잠하다/박치기 한번, 맺힌 속 뚫어지고/박치기 두번, 주린 배 불러오고/박치기 세번, 대한이 하나된다’(시인 최석우) 그랬다. 살아 있는 전설로 여긴다. 배고프고 암울했던 시절, 희망과 용기를 선사하며 한 시대를 풍미한 국민적 영웅이었다. ‘박치기 왕’으로 유명한 김일(78) 전 프로레슬러. 손바닥만한 이마 하나로 세계 무대를 쥐락펴락했다. 지금의 40대 이상에겐 ‘김일’이라는 말만 들어도 여전히 찐한 전율로 다가온다. 압둘 자바, 안토니오 이노키 등 내로라 하는 세계 거인들과 싸우다 결정적 순간에 박치기 한방으로 때려눕히는 장면은 단연 압권이었다. 특히 호랑이 모습에 삿갓과 곰방대가 그려진 가운을 입은 김일 선수가 일본 선수를 때려눕히는 광경은 민족적 울분을 씻어주는 대표적 카타르시스였다. 1960∼70년대 흑백TV조차 귀했던 시절, 마을 이장이 “오늘 저녁에는 김일 선수가 레슬링을 하는 날입니다. 밭일을 마치고 테레비가 있는 아무개 집으로 오세요.”라는 동네방송까지 할 정도였다. 또 당시 어린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김일 선수처럼 힘세고 용감한 사람이 될 거야.”라는 대답이 나오곤 했다. ●14년 투병에도 후배 시합땐 꼭 격려 이런 김씨가 영광의 세월을 뒤로 하고 14년째 투병 중이다. 박치기 후유증으로 뇌혈관 질환, 당뇨와 고혈압, 임파부종, 그리고 작년에는 거대결장으로 대장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휠체어에 의존할 만큼 거동 또한 불편하다. 그럼에도 후배들의 시합이 있을 때마다 아픈 몸을 이끌고 현장을 찾아 격려해준다. 지난 10일 천안 유관순체육관에서 열린 세계프로레슬링대회(WWA)에도 참석, 많은 관중들로부터 케이크와 꽃다발 세례를 받았다. 특히 김씨는 최근 동화 속의 주인공으로 등장해 어린이들에게 희망의 전도사로 나섰으며, 올해 안에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회고록을 펴낼 계획이어서 관심을 끈다. 서울 노원구의 모병원 7층 병실에서 김씨를 만났다.3평 남짓한 병실 벽에는 팬들이 그려준 초상화, 김씨를 칭송하는 시, 외신 인터뷰 기사, 그리고 왕년의 사진들이 쭉 붙어 있었다. 근황을 물었더니 먼저 일본에 다녀온 얘기부터 나왔다.“지난 3월 말인가 그래. 일주일 동안 머물면서 과거 레슬링을 같이하던 사람 100여명을 만났어. 반갑게 파티도 열어주더군.”이라며 웃는다. 스승인 역도산의 같은 문하생이었던 안토니오 이노키(63) 등과도 반갑게 해후했다. 또 역도산의 묘를 찾아 참배하고 부인 다나카 게이코(64)도 만나 옛날 얘기를 나눴다. 한 출판사 대표와는 올 연말까지 한·일 양쪽에서 회고록 발간을 약속했다. ●日 이노키와는 10년동문이자 라이벌 이어 동료 레슬러였던 장영철(73)씨와 41년만에 만난 얘기도 자연스럽게 나왔다. 국내 레슬링계를 주도했던 김씨와 장씨는 65년 11월 ‘레슬링은 쇼’ 파문 이후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응어리진 것 풀어야지, 그래서 부산으로 직접 갔어. 실로 오랜만이었지. 그도 나처럼 병원에 입원해 있어. 희한한 것은 치매증도 있는데 나를 보더니 금방 알아보더군.‘형님 내가 옛날에 철이 없어서 그랬어요.’라고 해 손 붙잡고 울었지 뭐….” 장씨는 파킨슨병과 중풍, 약간의 치매증세로 입원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한때 180㎝의 키에 100㎏의 몸무게였으나 지금은 65㎏으로 줄어들었다. 김씨 역시 1m85㎝의 키에 130㎏의 몸무게가 75㎏로 줄어들었다. 또 현역 때 한 끼에 생선 99마리까지 먹기도 했지만 지금은 죽과 같은 가벼운 음식을 먹고 있다. 비록 김씨가 병상에서 쓸쓸히 노년을 보내고 있지만 팬들의 방문은 여전하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남 지만씨가 얼마전 결혼식 직후 다녀갔다.“박 전 대통령이 서울 정동에 ‘김일체육관’을 지어주셨지. 그런데 전두환 대통령이 문화체육관으로 바꿔버렸어. 강제로 뺏어갔지….” ●박 전 대통령이 ‘김일체육관´ 지어줘 할아버지 손잡고 오는 어린이도 있다. 최근에는 병마와 싸우는 한 어린이와의 만남을 전해들은 동화 작가 고정욱씨가 ‘박치기왕과 울기대장’(대교출판)이란 제목으로 책을 펴냈다. 김씨가 동화속의 주인공으로 등장해 한 어린이와 진솔하고 희망이 담긴 대화를 나누는 광경이 훈훈하다. 다음달 초 출판 기념회에 참석할 예정이다. 우문 하나 불쑥 던졌다. 시합 때 피가 나면서까지 왜 박치기를 했느냐고 하자 “이마는 조금만 긁혀도 피가 나와.”하면서 피식 웃는다. 박치기는 피눈물 나는 훈련을 거듭한 끝에 얻어진 기술이라고 했다. 재떨이, 벽, 나무 등 닥치는 대로 이용해 이마 근육을 단련시켰다고 했다.“다른 선수와 달리 독특한 기술을 익혀야 해.”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열심히 따랐다. 일화 한토막.“링 로프에 있는 상대 선수에게 다가가 박치기를 했는데 피해버렸어. 때마침 로프의 고무가 벗겨져 있어서 내부에 있는 와이어에 부딪혔지. 이때 눈알이 튀어나왔어. 급한 김에 손으로 밀어넣고 시합했지. 끝나고 집에 가서 소고기로 마사지를 했어. 그 후유증으로 시력이 안 좋아졌지.” ●선수시절 시합중 눈알 나온 적도 있어 국내 레슬링이 왜 시들해졌느냐고 하자 “TV 중계가 필요해. 축구나 야구는 매일 하는데 레슬링은 방송에서 멀어지고 있어. 한달에 한두번이라도 중계를 해주었으면 좋겠는데….”하고 아쉬워했다. 스포츠를 워낙 좋아하는 김씨는 요즘 독일 월드컵 기간이어서 축구중계를 보느라 TV 앞에 있는 시간이 더욱 많아졌다. 일본에서 활약 중인 최홍만의 이종격투기 시합도 자주 본다. “희망이 있어야 인생이 아름다워져. 그걸 버리면 안 되지, 허허허….” 불치병 어린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전도하는 박치기왕 김일 할아버지. 그의 미소에는 세계를 제패한 불굴의 투혼이 여전했다. ■ 그가 걸어온 길 ▲1929년 전남 고흥 출생 ▲57년 역도산 문하생 1기입문 ▲58년 ‘오오키 긴다로’라는 이름으로 데뷔 ▲63년 WWA세계 태그챔피언 획득 ▲64년 북아메리카 태그챔피언 ▲65년 극동헤비급챔피언 ▲67년 WWA세계챔피언 ▲72년 도쿄 인터내셔널 세계헤비급챔피언 ▲95년 도쿄돔에서 은퇴식 ●상훈 국민훈장석류장(94년), 체육훈장맹호장 (2000년) 주말매거진 We팀장 km@seoul.co.kr
  • [눈에 띄네 이 얼굴] ‘청연’의 한지민

    [눈에 띄네 이 얼굴] ‘청연’의 한지민

    조선 최초의 민간인 여류비행사 박경원을 이야기하는 영화 ‘청연’(감독 윤종찬)에는 말 그대로 ‘샛별’이 반짝인다. 여주인공 박경원(장진영)과 애증을 나눴던 여자 이정희 역의 한지민(24). 얼핏 톱스타 최진실의 데뷔 무렵의 풋풋한 이미지가 오버랩되는 그녀는 인기 TV드라마 ‘대장금’에서 신비 역을 맡아 주목받았던 그 얼굴. 스크린 데뷔작인 ‘청연’에서의 역할 몫은 기대치 이상이었다. 낯선 일본땅에서 비행사로 이름 날리는 박경원을 경외하다 한 남자(김주혁)를 사이에 놓고 결국 애증의 관계로 돌아서는 농도짙은 연기를 맺힌 데 없이 소화했다. 윤 감독이 “이번 영화의 가장 큰 수확은 한지민의 발견”이라고 거침없이 말했을 정도. 악천후 속에 복엽기에 올라 현해탄 상공을 돌진하는 박경원의 마지막 길이 그토록 비감할 수 있었던 것은…. 가슴 밑바닥을 긁는 한지민의 눈물연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얘기다.16일부터 방영되는 월·화 TV드라마 ‘늑대’에 여주인공으로 안방을 사로잡을 기세다.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부산~오사카 ‘팬스타 크루즈’

    부산~오사카 ‘팬스타 크루즈’

    20세기 초, 호화여객선 타이타닉에 오른 잭과 로즈는 선상에서 운명의 상대를 찾았고,‘사의 찬미’를 부른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은 현해탄에서 사랑을 이루었다. 비록 그들 사랑의 끝은 비극이었지만…. 21세기초. 우리는 대한해협을 오가는 선상에서 사랑을 이룬다. 사랑만으로 뭉친 진실로 행복한 사랑을. 부산 연안여객터미널에 정박한 ‘팬스타 드림호’ 로비에는 은은한 관현악 선율이 울려퍼진다. 일본 오사카를 향해 가는 200여명의 여행객이 몰려 로비는 번잡했지만, 우리에게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다. # 떠나자, 타이타닉 연인처럼 부산과 일본 오사카를 오가는 2만 2000t급의 페리선인 팬스타 드림호는 지난해 12월부터 부산 연안 크루즈 상품을 선보이며 대표적인 국내 크루즈서비스로 손꼽혔다. 이 여세를 몰아 최근 부산과 오사카를 잇는 ‘팬스타 크루즈 페리 서비스’를 시작했다. 크루즈 여행객 정원은 40명.200여명의 일반 여행객과 다른 차별화된 서비스를 받는 크루즈 여행객은 선택받은 이들의 진수를 느낄 수 있다. 일반실과 구분된 별도의 ‘크루즈 존’ 객실에 들어섰다. 크루즈 여행객의 방은 별도의 욕실을 갖춘 트윈베드룸이다. 여객·화물 운반 전용 페리선을 그대로 사용해 시설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커다란 창문 너머로 넘실대는 바다를 보는 것만으로도 설렌다. 오후 4시를 조금 넘어 승객을 실은 팬스타 드림호가 파도를 가르며 바다를 향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드넓은 바다로 나간다. # 환상의 검은 바다 갑판 위에 올랐다. 바람에 희미하게 바다냄새가 섞여있다. 오륙도를 지나면서부터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진한 주황색에서부터 짙은 파란색까지, 변화무쌍한 색상의 노을이 하늘을 덮었다. 선상에서 보는 아름다운 낙조가 사라질까 갑판 위에선 10여명의 남녀들이 셔터를 누르느라 분주하다. 바다가 보이는 레스토랑에서 기대 이상으로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한 뒤 다시 갑판으로 올랐다. 바다를 향한 나무 의자에 앉아 무슨 말인가를 속삭이는 연인, 선상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느라 분주한 사람들에게는 겨울 바다 한가운데서 불어오는 바람은 차지 않은가보다. 온통 검은 바다를 비추는 달 아래 사랑하는 사람과 단 둘이 있을 수 있으니 몸도 마음도 더욱 근거리일 테지. 밤 9시쯤, 크루즈 여행객을 위한 이벤트가 펼쳐졌다. 우크라이나 출신 공연단이 펼치는 다양한 퍼포먼스다. 분위기있는 관현악 연주 뒤에 현란하고 관능적인 댄서들의 춤사위, 고양이 복장을 한 여인의 아슬아슬한 아크로바틱, 피에로 분장을 한 남녀의 흥겨운 저글링, 귀여운 마술사의 진지한 마술쇼 등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공연이 끝난 밤 10시쯤 배는 일본 시모노세키로 진입했다. 여기서부터는 파도가 조금씩 잦아든다. 규슈와 혼슈를 잇는 거대한 관문대교, 총연장 12.3㎞의 세계에서 두번째로 긴 세토대교를 지나 아카시대교(2㎞)를 거치면 일본 오사카항에 도착한다. 글 일본 오사카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4시간 30분 오사카의 낭만 맛보기 아침식사를 끝내고 아카시대교를 거쳐 오사카항에 들어갔다. 이 크루즈 여행에서 오사카에 머무르는 시간은 4시간30분 정도다.9만원을 추가하면 13종류의 온천탕이 있는 ‘야마토노유 온천’과 ‘오사카성’에 들르는 일정에 참가할 수 있다. 야마토노유 온천(www.yamatonoyu.co.jp)은 지하 800m에서 끌어올린 천연온천을 그대로 즐길 수 있는 노천온천과 온천물에 비초탄(숯의 종류)을 섞은 음이온수 욕탕, 혈액순환을 돕는 바이블 욕탕, 강력한 물살이 옆구리 엉덩이 허벅지에 분사되는 셰이프업 욕탕 등 다양한 온천을 즐길 수 있다. 점심식사 후에는 16세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완성한 오사카성에 들른다. 몇번의 소실과 재건을 거쳐 제 모습을 찾은 천수각과 묘한 조화를 이루는 주변의 최신식 건물들, 꽃놀이 명소답게 우거진 나무와 6만㎡의 잔디공원 등 볼거리가 많다. 길지 않은 오사카 일정을 뒤로 하고 다시 오사카항에 들러 배에 올랐다. 오후 5시. 이제 다시 부산으로 향한다. 새벽에 지나느라 놓쳤던 세토대교나 멋진 웅장한 야경을 만들어내는 관문대교는 부산으로 향하는 선상에서 볼 수 있다. 돌아가는 길에는 전날 설렘으로 미처 즐기지못했던 배 안의 편의시설을 이용해도 좋다. 와인을 곁들인 저녁식사를 하고 통유리로 된 선상카페에서 차나 맥주를 즐길 수 있다. 면세점은 규모가 작지만 다양한 술과 간단한 선물도 살 수 있다. 오사카 짧고 굵게 즐기기 짜여진 일정 외에 다른 방법으로 짧은 시간동안 일본 오사카를 즐기고 싶다면 이곳을 추천한다. # 젊음의 거리, 신사이바시 오사카 최대의 번화가인 신사이바시는 오사카항에서 지하철로 약 30분 거리에 있다. 미도스지 거리 서쪽에 있는 ‘산카쿠 공원’을 중심으로 헌옷을 파는 가게, 잡화점, 갤러리 등이 몰려있는, 서울의 압구정에 비교된다. 여기서 ‘요트바시’ 거리까지 걸치는 일대는 ‘아메리카무라’로 묶어 오사카의 특이한 유행을 느낄 수 있다. 지하털 미도스지선·나가호리 트루미료쿠지선에서 신사이바시역에 하차하면 된다.# 과거와 현재가 있는 우메다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연상시키는 고층 건물 우메다 스카이 빌딩과 웨스틴호텔을 중심으로 한 우메다는 오사카 경제의 중심지이다. 이 건물 지하에는 19세기 말 일본의 오사카를 재현한 음식점 거리 ‘다키미 고우지’가 있다. 한큐 엔터테인먼트 파크에서 우메다의 명소로 꼽히는 헥프파이브 대관람차를 타고 오사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낮보다는 야경이 더 좋다.JR 오사카역이나 한큐·한신전철, 지하철 미도스지선의 우메다역에서 내리면 된다. # 온천 대신 쇼핑 기존 일정의 야마토노유 온천 대신 근처 대형 쇼핑센터 ‘지시마 가든 몰’에 가보는 것도 좋다. 생활용품점, 서점, 식품점 등이 거대한 규모로 자리잡고 있다. 일본의 국민브랜드로 불리는 ‘유니클로’ 매장과 다양한 슈즈 브랜드를 만날 수 있는 잡화점, 화장품점 등이 특히 눈에 띈다. # 일정은 어떻게 매주 일·화·목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승선 절차가 시작된다. 첫날 오후 4시 운항→7시 저녁식사+와인서비스→9시 공연→둘째날 오전 8시 아침식사→10시 하선→11시∼오후 3시 일본 오사카 관광+점심식사→3시30분 승선→7시 저녁식사→9시 공연→셋째날 오전 8시 아침식사→10시 하선. 기상상태에 따라 조금씩 시간이 달라진다. 크루즈 이용요금(왕복)은 29만 9000원부터 139만원까지 4가지 등급으로 나뉘어져있다. 보통 성인이 이용할 수 있는 딜럭스 스위트는 42만 9000원(1인·터미널 이용료 및 세금 별도). 선내 석식·조식 각 2회, 이벤트 관람, 와인 서비스, 운항 체험 등을 무료로 제공한다. 문의 ㈜팬스타라인닷컴 서울 (02)775-6811, 부산 (051)462-5482,www.panstarline.com # 일본이 부담스럽다면 부산연안 크루즈도 2박3일 코스가 부담스럽다면 17시간의 비교적 짧은 시간의 크루즈를 이용해도 좋다. 매주 토요일 오후 4시부터 일요일 오전 9시까지 부산 해안선을 따라 운항하는 코스다. 부산 연안여객터미널을 출발해 태종대를 거쳐 낙조 관람의 명소로 꼽히는 몰운대에서 일몰을 감상한다. 해운대의 야경을 보며 저녁식사를 한 뒤 색소폰 연주, 벨리댄스, 통기타 라이브 등 다양한 공연을 즐긴다. 머리 위에서 터지는 불꽃쇼도 펼쳐진다. 정상운임은 객실에 따라 1인당 9만 1000원부터 27만 5000원까지다.
  • [숫자로 본 2005 스포츠] (2) 2에 웃고 울고

    ‘둘째 가라면 서럽다.’란 말도 있지만 사실 ‘2’라는 숫자는 ‘1’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닐 때가 많다. 올해도 수많은 스포츠 스타들이 숫자 ‘2’에 울고 웃었다. ●2년 만에 되찾은 자존심 ‘아시아 홈런킹’ 이승엽(29·롯데 마린스)이 열도 정벌의 포부를 안고 현해탄을 건넌 건 지난 2004년 1월. 그는 일본무대 첫 해 30홈런과 타율 .290을 목표로 삼았지만 기록은 당초 목표에 턱없이 모자랐고, 다이아몬드에서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채 지명타자와 대타를 전전했다. 그러나 2년째 되던 해 그는 달라졌다. 머리까지 밀어버린 뒤 한겨울 ‘와신상담’ 끝에 두번째 시즌을 맞은 이승엽은 전반기 종반∼센트럴리그와의 인터리그 중반까지 5경기 연속홈런을 쏘아올리는 등 싸늘하게 식었던 방망이에 불을 붙였다. 결국 그는 올시즌 30홈런 106타점을 올리며 한국인 타자로는 처음으로 일본올스타전 무대에 나서는 영예도 안았다. ●1000만달러 소녀 2벌타에 눈물 미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삼성월드챔피언십 3라운드가 열린 지난 10월15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팜데저트의 빅혼골프장.1000만달러라는 대박을 터뜨린 뒤 첫 프로무대에 나선 ‘천재 소녀’ 미셸 위(16)가 7번홀(파4)에서 날린 세컨드샷이 덤불 속에 들어간 뒤 두 차례 드롭을 시도했다. 공을 떨군 곳이 제 자리보다 홀에 가까워 규정을 위반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모른 채 미셸 위는 이날에 이어 다음날까지 경기를 계속하며 결국 단독4위로 데뷔전을 마치는 듯했다. 그러나 결과는 청천벽력 같은 실격 처리. 전날의 ‘오소플레이’로 2벌타가 추가돼야 했지만 스코어카드를 파로 적어내 거짓말을 한 꼴이 된 것. 결국 미셸 위는 대망의 데뷔전에서 생애 첫 상금인 5만 3126달러는 물론, 경기 기록까지 날리며 눈물을 삼켰다. 이 데뷔전은 미국 NBC가 선정한 ‘올해의 가장 불행한 스토리’로 남았다. ●선동열의 삼성, 두번째 KS정복 현역 시절 ‘국보급 투수’였던 선동열(42) 감독이 이끈 삼성이 한국시리즈(7전4선승제)에서 두산을 상대로 4전 전승의 기록을 세우며 지난 2002년 이후 3년 만에 두번째 정상을 탈환했다. 선 감독은 자신의 전매특허인 ‘지키는 야구’를 앞세워 사령탑 취임 첫 해 우승을 일궈내며 ‘명장’의 반열에 올라섰다. 삼성은 100억원에 가까운 돈을 쏟아부으며 자유계약선수(FA) 시장 최대어인 심정수(30)와 박진만(29) 등을 영입, 시즌 전부터 다른 구단에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힌 것이 사실. 그러나 선 감독은 2개 이상의 포지션에서 수비가 가능한 ‘멀티 포지션 전략’과 ‘지키는 야구’로 내실을 다졌고, 투타의 완벽한 조화까지 일궈낸 끝에 시즌 마지막 그라운드를 제패, 비난을 탄성으로 탈바꿈시켰다. 최병규기자 cbk91065@seoul.co.kr
  • 5분 데이트 (17) - 정순자

    5분 데이트 (17) - 정순자

      『보통 퇴근시간이 밤 10시, 10시 반이니까「데이트」할 시간이 없어요.「올드·미스」로 늙기 꼭 알맞죠?』 우선 쾌활하다. 자칫하다간「왈가닥」소리를 들을 정도로. 그러나 정순자(23)양 자신은 『보기하곤 달라서 집에 들어가면 요조숙녀가 되죠』 수산청장 비서실 근무 1년. 고향은 제주도이나 태어나긴 일본의「오사카」. 해방된 다음 다음해, 그러니까 정양이 두 살 때 귀국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넜다. 『일본서 살던 기억, 하나도 없어요. 하지만 어머님이 아직도 순 일본식이라 꽃꽂이며 예의범절, 손님접대 등 어머님께 배우는 게 많죠』 광주여고를 거쳐 수도여사대(首都女師大) 영문과 졸업. 2남 3녀의 셋째. 키 166cm에 54kg의 후리후리한 몸매. 올해엔 결혼을 꼭 해야 할 텐데 아직 애인이 없어 큰일이라는 정양은 『상대방을 이해해 줄 수 있는 남자면 OK. 제 키보다 적어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마음은 커야죠』 끼고 있는 진주반지가 눈에 띄어 누가 선물한 것이냐니까, 『우리 수산청에서 기른 양식진주예요. 예쁘죠?』 하며 슬쩍 PR. 월급을 타면 봉투째 어머님께 상납(上納)하지만 하루 5백원씩 타다 쓰고 또 옷까지 해 입으니 어머님이 항상 적자라고. 「잉그리드·버그만」「제니퍼·존스」등 옛 여배우들이 제일 좋고 음식은 단연 전골. 전골 만드는 솜씨도 1류「쿡」뺨칠 정도라고. 무슨 향수를 쓰냐니까 『아직 젊은데 향수 쓸 수 있나요?「젊음」이란 향수 뿐이죠』 ※ 뽑히기까지 수산청에서 후보로 뽑아놓은 아가씨는 무려 11명. 우선 이중에서 8명을 추려내고 심사위원단을 구성,「엘리베이터」를 타고 12층 건물을 오르락 내리락 하며 면접 채점. 결국 세 아가씨를 선발했는데 이중에서 1명을 고르는 덴 30분을 요했다. 결국은 정양이「눈이 커서」「미스·수산청」의 영광을 차지. [ 선데이서울 69년 1/26 제2권 제4호 통권18호 ]
  • [인간시대] 주청노 성유물산 사장

    [인간시대] 주청노 성유물산 사장

    “(루디아의 집)어머니들께 김치를 드리면서 오히려 제가 행복했습니다. 손수 김치통을 들고 찾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지난 1일 송파구 가락동 ㈜성유물산 사무실에 들어섰다.10평 남짓한 사무실 한쪽에는 뜻밖에도 시원한 맥주가 기다리고 있었다. “더운 날에는 맥주가 최고죠.” 알싸한 맛이 혀 끝에 닿자 온 몸의 갈증이 한 순간에 달아났다. 주한미군에 김치를 공급하는 유일한 사업자이자 불우 이웃들에게 ‘김치 공양’을 하고 있는 성유물산 사장 주청노(64·오금동)씨는 다른 이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CEO’였다. ●주한 미군에 김치등 독점 공급 주씨가 김치 공장을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1998년. 청춘을 바쳐 몸담았던 미8군을 상대로 한 한 용역업체가 IMF 환란으로 문을 닫은 뒤였다. 평생을 상대했던 미군이었지만 물건을 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결국 정직과 실력을 무기로 그해 미 국방부 식품위생검사를 통과해 주한미군에 ‘반딧불 김치’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김치 공급의 이면에는 남다른 노력이 필요했다. 전북 무주군 안성농공단지에 있는 공장은 언제나 ‘비상’ 상태다. 주한미군 의무사령부의 불시 검사가 언제 떨어질 지 모르기 때문이다. “수질 검사, 기계 위생 검사 등 하나도 간단한 게 없어요. 하나만 잘못돼도 검사 도중 그냥 가버려요. 공장에 파리 한 마리 있어도 ‘아웃’이지요. 그래서 저도 일주일에 한 번씩 공장을 불시에 방문합니다.” 올해 초에는 쟁쟁한 대기업도 검사에서 탈락했다. 덕분에 주씨는 연간 김치 200여t을 비롯해 야채와 김, 두부, 된장, 쌈장, 고추장 등을 주한미군에 독점적으로 공급할 수 있게 됐다. 반딧불김치의 명성은 현해탄과 태평양을 넘었다. 일본 오키나와와 영국, 프랑스, 독일 등에까지 수출한다. 직원 20여명의 식품회사지만 연매출 30억여원을 올리고 있다. ●영국등 외국에 수출… 성공 비결은 정직 주씨의 성공 비결은 정직이다. 김치 가격도 대기업보다 싼 ㎏당 4000원만 받는다. 주씨는 “양심적인 회사로 인정받으니 대기업과의 경쟁에서도 밀리지 않았다.”면서 “앞으로는 국내 소비자들에게도 반딧불 김치를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주씨의 또 다른 본업은 ‘김치 봉사’다. 동사무소에 갔다가 ‘이웃 사촌을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시작했다. 매달 20∼40㎏의 김치를 들고 시각장애 할머니들이 사는 오금동 ‘루디아의 집’과 지체장애인 시설인 ‘소망의 집’을 찾는다. 지난 7년 동안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 그것도 손수 운전해서 갖다준다. 명절 때 떡과 한과 등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그들과 어느새 한 가족이 됐다. 문정동 등 지역의 어려운 가정에도 몇 년째 김치를 주고 있다. “여러해 동안 할머니들을 보다보니 이제는 어머니 같고, 아이들은 친자식 같다.”면서 “김치를 건네면서 코 끝이 찡한 게 한 두번이 아니다.”고 말했다. ●아침엔 성내천 쓰레기 청소 2년 전부터는 집 근처 성내천 청소부로 나섰다. 오전 6시30분부터 8시까지 성내교∼올림픽선수촌아파트 구간 왕복 4㎞를 커다란 비닐봉지를 들고 쓰레기를 치우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처음에는 창피해하던 부인 김영숙(56)씨도 요즘엔 함께 나선다. 봉사 활동은 헐벗은 다른 이들의 삶을 외면하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삶의 철학에서 비롯됐다.“내가 갑자기 죽어도 김치 봉사는 계속하라.”고 자식들에게 당부할 정도다. 주씨는 “소외된 이들을 돕고 먹이는 것은 사지 멀쩡한 사람들의 의무”라면서 “욕심을 버릴수록 마음의 행복은 더욱 커진다.”고 환하게 웃었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롯데그룹(1)-신격호 회장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롯데그룹(1)-신격호 회장家

    신격호 롯데 회장은 빚을 몸속의 열에 비유하곤 한다. “몸에 열이 오르면 병이 나고 심하면 목숨이 위태롭다. 과다한 차입금은 만병의 근원이다. 특히 잘하지도 못하는 업종에 빚을 내 사업을 벌이는 것은 사회적으로 죄를 짓는 일이다.”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의 과다한 차입경영이 논란이 되고 있는 요즘, 신 회장의 말은 울림이 크다. 일각에서는 “껌 팔아 부자됐다.”며 롯데의 국가경제 기여도를 얕잡아 보기도 하지만, 기여도가 높다는 삼성·현대·LG 등이 저마다 골칫덩이 자식 한두 개 때문에 국가경제에 고통을 줄 때도 롯데는 어느 계열사 하나 그런 곳이 없었다.“실패하더라도 빚을 돌려줄 수 있는 범위에서만 투자한다.”는 신 회장의 무차입 경영 덕분이다. 롯데그룹의 부채비율은 지난해 말 현재 70.3%. 삼성(50.0%) 다음으로 재무구조가 튼실하다. 단돈 83엔을 들고 일본땅에 건너가 ‘조센징 장사꾼’이라는 멸시를 받아가며 부(富)를 일군 신 회장. 그렇게해서 번 돈으로 고국에서 다시 기업을 일으킨 그는 한·일 양국에 사업체를 갖고 있지만 지금껏 과실송금을 한번도 한 적이 없다. 한국에서 번 돈은 고스란히 한국에 재투자하고 있다. 고(故) 정주영 현대 창업주가 중후장대 기간산업을,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경박단소 첨단산업을 일으켰다면, 신 회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서비스산업을 개척한 선구자다. 몇 안되는 생존 창업주인 그는 여든을 훌쩍 넘긴 지금에도 여전히 서울과 도쿄를 오가며 ‘셔틀경영’을 하고 있다. ●또다른 이름 시게미쓰상 그는 홀수달에는 신격호, 짝수달에는 시게미쓰 다케오(重光武雄)가 된다. 홀수달에는 한국에서, 짝수달에는 일본에서 일한다. 그의 셔틀경영이 언제쯤 시작됐는지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주위에서는 모국 투자가 시작된 1960년대 말부터라고 짐작한다. 벌써 30년째다. 월말이 되면 수행원도 없이 혼자 공항에 나가 훌쩍 비행기를 탄다. 생활철학인 거화취실(去華就實·화려함을 멀리하고 실속을 추구)이 엿보이는 단면이다. 한국에 머무를 때면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34층을 쓴다. 집무실 겸 숙소다. 외출은 거의 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바로 옆의 롯데백화점 매장을 둘러보는 정도다. 올빼미족에게 반가운 얘기 한가지. 신 회장은 창업주 총수로는 드물게 ‘새벽형 인간’이 아니다. 오전 8시쯤 일어나 9시에 호텔방에서 아침식사를 한다. 그를 오랫동안 지켜본 임원들은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라고 입을 모은다. 우선, 말수가 적다. 칭찬에도 인색하다.“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이 지론”이라고 스스로 말할 만큼 완벽주의자다. 타고난 내성적 성격에 오랜 일본생활까지 겹쳐 웬만해서는 ‘혼네’(속내)를 내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때로 냉정하다는 얘기도 듣는다. 둘째아들인 신동빈 롯데 부회장이 “결단코 자상한 분은 아니다.”라고 했을 정도다. 언론에도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단돈 83엔 들고 일본으로 신 회장은 1922년-원래는 1921년생이지만 호적에 1년 늦게 올랐다-경남 울주군 삼남면 둔기리에서 5남5녀의 맏이로 태어났다. 울산농업보습학교를 나와 경남도립 종축장에 기수보로 취직했지만 “박봉의 삶이 싫어” 1941년 일본행 관부연락선을 탔다. 이 때가 열아홉살. 고향친구 자취방에 얹혀 살며 신문·우유 배달 등 닥치는 대로 잡일을 했다. 돈이 모이면 헌책방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작가 지망생의 꿈은 오래 가지 못했다. 문학으로는 먹고 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기술을 배워야 했다. 와세다고등공업학교(현 와세다대 이학부) 화학과에 입학했다. 일본 패전의 기색이 짙어가던 1944년 어느날, 조선인 청년의 성실성을 평소 눈여겨보던 한 일본인 노인이 “커팅오일(기계를 갈고 자르는 선반용 기름) 사업을 해보라.”며 선뜻 6만엔을 내놓았다. 그러나 첫 사업체는 공습을 맞아 완전히 불타버렸다.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친구들은 “귀국선을 타자.”고 종용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고는 살 수 없는 게 그였다. 빚을 갚으려면 돈을 벌어야 했다.1946년 5월 도쿄 스기나미구(區)의 낡은 창고에 가마솥을 내걸었다. 그럴 듯한 간판(히카리특수화학연구소)도 달았다. 커팅오일을 응용해 만든 비누와 크림이 불티나게 팔리면서 1년반만에 노인에게 진 빚을 모두 갚았다. 내친 김에 비누를 만들던 가마솥과 국수를 뽑아내던 기계로 껌을 만들었다. 또다시 대박. 신주쿠 허허벌판에 종업원 10명의 주식회사 롯데가 탄생했다. 껌회사에 소설 여주인공(‘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샬로테) 이름을 붙인 발상이 생뚱맞아 보이지만, 못다한 문학청년의 꿈은 그렇게 해서 다소 풀렸다.1948년 6월28일의 일이다. 신 회장은 훗날 “롯데라는 이름은 내 일생일대의 최대수확이자 최고의 선택”이라며 흡족해했다. 그가 1967년 한국에 롯데제과를 설립했을 때, 일각에서는 “고국에 대한 첫 투자가 겨우 소비재 사업이냐.”며 비판했다. 신 회장은 이렇게 항변한다.“한·일 수교로 모국 투자길이 열리자 당시 정부는 내게 종합제철소를 지어달라고 했다. 그래서 후지제철소(현 신일본제철)의 도움을 받아 설계도까지 만들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정부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직접 제철소(포항제철)를 짓겠다고 했다.” 어찌됐든 그렇게 ‘성공한 재일교포 사업가’로 고국에 진출한 그는 한국롯데를 국내 재계서열 5위의 ‘유통 명가’로 키워냈다. 지난해 말 현재 자산 29조 7000억원, 계열사수 41개, 종업원수 3만 5000명이다. 일본롯데에 비교도 안됐던 매출액(26조원)은 7대3 규모로 역전됐다. ●일본인 아내와 재혼 신 회장은 조혼 풍습에 따라 1940년 둔기리의 고향처녀(노순화)와 결혼했다. 신혼생활은 신 회장의 일본행 가출로 1년여만에 끝났다. 노 여사는 남편의 금의환향을 끝내 보지 못하고 1951년 29살에 요절했다. 신주쿠 허허벌판에서 일본 1위의 껌업체 하리스와 10년 상전(商戰)을 벌이는 동안, 신 회장에게 큰 힘이 돼준 이는 1952년 재혼한 일본인 아내 다케모리 하쓰코(竹森初子·78)씨였다. 결혼후 남편성을 따 시게미쓰로 바꿨다. 당시 일본 외무성 대신의 여동생이었다. 경영에 일절 참여하지 않는 시게미쓰 여사는 성품이 온화하다는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우리말을 잘 하지는 못하지만 알아듣기는 한다. 신 회장은 노 여사와의 사이에 맏딸 영자씨를, 시게미쓰 여사와의 사이에 동주·동빈 두 아들을 두었다. 롯데가의 한 인사는 “동주와 동빈이는 일본에서 나고 자라 집안에서는 히로유키, 아키오라는 일본이름으로 더 친숙하게 불렸다.”고 전했다. ●백화점 주역 신영자 부사장 모녀 신 회장의 맏딸 영자(63)씨는 롯데쇼핑 총괄 부사장 겸 호텔롯데 면세점 총괄 부사장을 맡고 있다. 부산여고와 이화여대 가정학과를 나왔다. 유통업계의 라이벌 이명희 신세계 회장과는 대학 동창이다. 지난해 말 롯데면세점 모델인 ‘욘사마’ 배용준씨의 사진전에 직접 참석했을 만큼 회사일에 적극적이다. 유통 사업가답게 의상과 화장이 화려하다. 다소 깐깐하다는 지적도 있지만 새어머니인 시게미쓰 여사와는 팔짱을 끼고 다닐 정도로 사이가 좋다. 1967년 장오식 전 선학알미늄 회장과 결혼해 1남3녀를 두었으나 지금은 독신이다. 가장 눈에 띄는 자녀 혼사는 막내딸 정안(31)씨. 지난해 5월 영국계 로펌 클리포드&챈스의 이승환(37) 변호사와 결혼했다. 이 변호사는 한국케이블TV 대구방송 회장과 영남일보 주필을 지낸 이종명씨의 아들.‘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 모임’의 회원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외아들 지만씨의 변호를 맡기도 했다. 잡화 바이어(차장)로 일하던 정안씨는 결혼후 휴직, 남편과 함께 해외에 머무르고 있다. 친구 소개로 이 변호사를 만나 2년간 연애했다. 주례는 시아버지의 절친한 ‘지기’ 한완상 한성대 총장이 맡았다. 한 총장과 이 전 회장은 미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함께 하기도 했다. 신 부사장이 사업적으로 가장 의지하는 이는 둘째딸 선윤(34)씨다. 미국 하버드대 심리학과를 나와 97년 롯데쇼핑에 입사, 올해 초 이사로 승진했다. 명품관 ‘에비뉴엘’ 개관의 일등공신이다. 외할아버지를 닮아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다. 성격도 소탈해 직원들 사이에 평이 좋다. 인테리어 회사 사장과 결혼했으나 지금은 독신이다. 외아들 재영(38)씨는 롯데에 포장지를 납품하는 인쇄업체 ‘재영상공’의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맏딸 혜선(36)씨는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선윤씨처럼 독신이다. ●일본롯데 이끄는 큰아들 동주 동주(51)씨는 일본롯데 부사장이다. 결혼이 다소 늦었다. 서른여덟살이던 92년 3월 서울 잠실 롯데호텔에서 재미교포 사업가 조덕만씨의 둘째딸 은주(41)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동주씨가 일본롯데의 미국법인 지사장으로 발령나면서. 아버지를 닮아 내성적인 그는 의외로 열살 연하의 거래처 여직원에게는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남덕우 전 경제부총리가 주례를 본 두 사람의 결혼식은 이례적으로 언론에 공개됐다. 아들(정훈·12)만 하나다. 현재 일본에 살고 있는 동주씨는 아오야마(靑山)학원과 같은 대학원에서 경영공학을 전공했다. 롯데와 무관한 미쓰비시 상사에서 10년간 샐러리맨 생활을 하다 87년 한국롯데에 입사했다.“순수하고 학자 같다.”는 게 주위의 공통된 평가다. ●한국롯데 이끄는 둘째아들 동빈 동빈(50)씨는 형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나고 자랐다. 역시 형이 다닌 아오야마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미국 컬럼비아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MBA)를 받았다.88년 일본 롯데상사의 이사로 롯데에 합류하기까지,8년을 다른 회사(노무라증권)에서 일한 것도 형과 같다. 한국무대에 데뷔한 것은 90년 호남석유화학 상무를 맡으면서. 증권사에 오래 있어서인지 수치에 매우 밝다.97년 2월 한국롯데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이중국적자이던 그는 한국생활을 시작하면서 일본 국적을 정리했다. 처음엔 우리말이 서툴렀으나 지금은 발음이 조금 어색할 뿐, 대화를 주고받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와인을 즐기지만 폭탄주는 좋아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문학 기질을 이어받아 사석에서 가끔 괴테의 시를 영어로 읊기도 한다. 이승엽 프로야구 선수가 뛰고 있는 일본 롯데 지바 마린스의 구단주 대행도 맡고 있다. 세간에는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알려져 있으나 집안 인사의 얘기는 다소 다르다.“형인 동주보다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 적극적인 성격은 아니다. 원래 신씨 집안 남자들이 활달한 편은 못된다.” ●한·일 넘나든 현해탄 혼맥 롯데가는 물론 재벌가를 통틀어 화려한 혼맥의 정수로 꼽히는 게 동빈씨의 결혼이다.85년 형보다 먼저 일본에서 다섯시간에 걸친 일본전통 혼례식을 치렀다. 신부는 일본의 대형 건설사 다이세이의 오고 요시마사 부회장의 둘째딸 마나미(眞奈美·46)씨. 일본 귀족학교인 가쿠슈잉(학습원)을 졸업한 재원이다. 일본황실의 며느리감 후보로도 거론됐다. 후쿠다 다케오 전 일본 총리가 중매를 서고 주례까지 맡았다. 결혼식에 나카소네 당시 총리를 비롯해 전·현직 일본 총리가 세 명이나 참석해 한·일 양국에서 떠들썩한 화제가 됐다. 마나미씨를 만나본 한 인사는 “평범하고 참한 인상”이라고 전했다. 아들 유열(19)군과 규미(17)·승은(13) 두 딸을 두고 있다. 부인과 자녀들은 일본에 살고 있다. 한달에 두세번 신 부회장이 일본으로 건너간다. 신 회장이 ‘셔틀 기업경영’을 하고 있다면, 신 부회장은 ‘셔틀 가족경영’인 셈. 수행원 없이 다니는 것은 부자(父子)가 똑같다. ●남다른 고향사랑과 초고층 건물에의 꿈 해마다 5월이면 신 회장은 울산시 울주군 둔기리 호숫가의 너른 잔디밭에서 사재를 들여 잔치를 벌인다.69년 대암댐 건설로 고향마을이 물에 잠기자 전국에 흩어진 고향사람들을 수소문,1971년 5월 돼지머리에 막걸리를 기울인 것이 시초가 됐다. 이후 지금껏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있다. 모임 이름도 고향에서 따 ‘둔기회’라고 지었다. 처음엔 수십명이던 회원수가 아들·며느리·손자의 가세로 지금은 수백명으로 불어났다. 고향 못지 않게 신 회장에게는 애틋한 대상이 있다. 파리 에펠탑 같은 세계 최고층 건물이다. 여든살이 되던 해인 2002년,112층 건물 청사진을 내보이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언제까지나 고궁만 보여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교통영향 평가 등에 걸려 지금껏 삽도 떠보지 못했다. 신 회장은 ‘건설통’ 서울시장에게 기대를 걸며 초고층 건물을 재추진하고 있다. ●유통명가 떠받치는 롯데맨들 롯데에는 사장단 회의가 따로 없다. 지난해 신설된 정책본부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계열사간 조정자 역할을 한다. 호텔롯데 소속의 김병일(62) 사장이 신동빈 부회장(본부장)을 도와 부본부장을 맡고 있다.73년 호텔롯데 경리부장으로 입사해 81년 그룹 기획조정실 이사를 시작으로 20년 이상 신 회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신 회장 부자의 심중을 가장 정확히 읽어낸다는 핵심참모다. 짧은 스포츠형 머리가 트레이드 마크. 그룹 내 손꼽히는 재무전무가로 말수가 적다. 그룹의 모태인 롯데제과는 경리분야에서 20년 잔뼈가 굵은 한수길(64) 사장이 맡고 있다. 자일리톨껌 등 ‘연타석 홈런’으로 경영성과를 끌어올렸다. 호텔롯데와 롯데쇼핑은 삼성 출신의 장경작(62) 사장과 ‘젊은’ 이인원(58) 사장이 각각 이끌고 있다. 신세계백화점과 조선호텔 사장을 지낸 장 사장은 올 2월 롯데맨으로 변신했다. 수익사업의 귀재라는 수식어를 달고다닌다. 평균 연령이 60대인 롯데 경영진 사이에 드물게 50대인 이 사장은 97년 CEO(최고경영자)로 파격 발탁돼 8년간 장수하고 있다. 관리·영업·매입 등 백화점 3대 요직을 모두 거쳤다. 의심나면 끝까지 파헤친다. 할인점 업계 최초로 중소기업 박람회를 연 롯데마트 이철우(62) 사장과 정통 엔지니어 출신으로 현대석유화학 인수 주역인 호남석유화학 이영일(64) 사장도 눈에 띈다. 신 회장의 가족 가운데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이는 친동생인 신준호(64) 롯데햄·우유 부회장과 5촌조카 신동인(59) 롯데자이언츠 구단주 대행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지금의 롯데를 일구는데 일조했으나 지금은 한발 물러나 있다. 음료업계 최초로 순 매출액 1조원 돌파의 대기록을 세운 롯데칠성음료 이종원(61) 대표이사 부사장, 스피드 경영으로 유명한 롯데건설 이창배(58) 대표이사 부사장, 워커홀릭(일중독자)으로 불리는 롯데삼강 이광훈(57) 대표이사 전무 등도 빼놓을 수 없는 롯데맨이다. 황각규(51) 롯데쇼핑 상무와 강현구(45) 롯데닷컴 상무 등은 신 부회장의 관심사업을 보좌하고 있다. ●“평창면옥에 해답이 있다” 이철우 사장의 회고다. “잠실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의 일이다. 백화점을 짓기는 했는데 신세계의 세 배인 드넓은 매장을 채울 일이 걱정이었다. 회장님은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며 타박하시더니 평창면옥에서 해답을 찾으라고 했다.” 당시 서울 평창동에 있던 평창면옥은 5000원짜리 밥맛이 워낙 좋아 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사람들이 왜 굳이 시간과 비용을 들여 그곳까지 가겠는가. 이유는 단 하나다. 바로 상품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고객에게 꼭 필요하고 훌륭한 상품을 만들면 문제는 절로 해결되기 마련이다.” 신 회장의 이 얘기는 지금도 롯데 임직원들 사이에 자주 회자된다. hyun@seoul.co.kr ■ 절친했던 신격호·정주영 회장 신격호 회장은 생전의 정주영(왕회장) 현대 창업주와 절친했다. 왕회장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직접 추도사를 쓰기도 했다. 신 회장이 일곱살 아래다. 흥미롭게도 두 사람의 인생 역정은 매우 닮았다. 우선 대가족의 장남이다. 신 회장은 동생이 9명, 왕회장은 7명이다. 중농·빈농의 아들로 농사규모는 달랐지만 식솔이 워낙 많아 삶이 퍽퍽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성공 신화의 시작이 가출이라는 것도 같다. 두 사람 모두 열아홉살 때 “앞이 안보인다.”며 집을 뛰쳐나왔다. 사업 시작후 최대의 시련도 ‘불’이었다. 신 회장은 처음 차린 커팅오일 공장이 불에 몽땅 타버려 빚더미에 올라 앉았다. 왕회장도 첫 사업인 자동차수리공장이 불에 타는 바람에 고초를 겪어야 했다. 신 회장은 이 때문에 지금도 임직원들에게 자나깨나 불조심을 외친다. 롯데호텔 준공 때 멀쩡한 새 건물의 복도 천장을 뜯게 한 뒤 손전등으로 직접 방화 장치를 확인한 일화는 유명하다. 공교롭게도 죽을 고비도 한차례씩 넘겼다. 여든이 다 될 때까지 직접 운전을 하고 다녔던 신 회장은 언젠가 밤길에 귀가하다가 트럭과 정면으로 부딪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왕회장도 새벽에 울산공장을 시찰하러 직접 운전하고 가다가 차가 바닷물에 빠져 죽을뻔 했다. 발상도 기발하다. 신 회장은 풍선껌에 대나무 대롱을 함께 포장해 장난감처럼 불 수 있게 했다. 왕회장은 겨울 골프에 빨간 골프공을 도입한 주인공이다. 이 유명한 빨간공 일화를 남긴 1970년 초봄 라운딩의 동반자가 바로 신 회장이었다. 신 회장은 훗날 “폭설이 내려 (하얀 골프공을 찾을 수 없는 만큼)의당 약속이 취소된 것으로 여겨 하마터면 큰 실수를 할 뻔했다.”고 회고했다. M&A(인수합병)보다는 직접 공장말뚝 박기를 즐겼던 것이나 귀향잔치(둔기회·소떼방북)를 벌인 점도 똑같다. 다만, 신 회장은 언제나 소리가 나지 않았고 왕회장은 늘 요란했다. 대선 출마 등 말년에 한눈을 판 왕회장과 달리 신 회장이 사업에만 전념하는 것도 결정적 차이다. hyun@seoul.co.kr ■ 신동빈 부회장 ‘큰어머니’ 제사 해마다 직접 지내 지난달 21일 저녁 서울 성북동 신영자 롯데쇼핑 부사장의 자택. 검정 옷차림의 신씨가문 후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이 날은 종손인 신격호 회장의 첫 부인 노순화 여사의 기일이었다. 신동빈 부회장은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어머니’의 제사를 주관했다. 누나인 신 부사장은 말없이 ‘생모’의 제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여느 재벌가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다. 신 회장이 재혼한 아내와의 사이에서 얻은 동빈씨는 한국에 정착한 이후 노 여사의 제사를 꼬박꼬박 지내고 있다. 집안에서나, 그룹에서나,‘후계자’로서의 입지를 빠르게 굳혀가고 있는 모습이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후계구도와 관련해 “정해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며 언급을 회피하던 그룹측은 이제 공공연하게 “후계구도 작업은 끝났다.”고 단언한다. 신 부회장이 일본인 아내를 맞은 점 등을 들어 일본롯데를, 신동주 일본롯데 부사장이 장남인 점 등을 들어 한국롯데를 맡을 것이라는 분석이 한때 유력했지만 현재로서는 뒤집힌 셈이다. 신 부회장은 지난해 10월 신설된 정책본부의 장(長)을 맡으면서 후계자 논란을 확실하게 잠재웠다. 재계는 “그룹 대권을 둘째아들에게 넘기겠다.”는 신 회장의 의지로 해석했다. 신 부회장은 온라인쇼핑몰·편의점 사업 등에서 이렇다할 실적을 내지 못했지만,KP케피칼·현대석유화학 등을 성공적으로 인수함으로써 아버지의 신임을 굳혔다. 현장을 중시하는 것은 아버지의 영향을 그대로 받았다. 지난 4월에는 롯데마트 금천점에 불쑥 나타나 한 시간 동안 매장을 둘러보기도 했다. 현장에서 지시한 내용은 나중에 꼭 확인한다. 상장(6개사)에 인색한 기업 문화와 보수적인 토양을 어떻게 바꿔나갈지 주목된다. hyun@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공연포커스]현해탄 넘는 우정의 타악무대

    한·일 전통 예술음악의 최정상 뮤지션들이 뭉쳤다. 사물놀이의 창시자 김덕수와 일본 다이코(큰 북)의 명인 하야시 에데스는 11,12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환상의 타악 콘서트를 연다. 이번 공연은 한·일 타악기 최고의 연주자들이 한 무대에 서고, 이들이 25년 전부터 ‘타악 우정’을 쌓아온 특별한 인연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특히 최근 독도문제, 역사왜곡 교과서 문제 등 양국간의 불행한 과거사로 갈등의 골이 깊은 상황에서 이뤄지는 이번 공연은 양국간의 문화적인 교류는 지속돼야 한다는 취지에서 공감을 얻고 있다. 이 때문에 이들 타악 연주자들은 반목의 역사를 넘어 신명나는 사물놀이와 다이코로 평화와 화합의 메시지를 전해줄 예정이다. 김덕수는 사물놀이의 대명사로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통해 사물놀이를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상품으로 끌어올린 장본인이다. 하야시 에데스는 일본 최고의 타악그룹인 ‘고동’ 창단 이후 일본 최초의 다이코 솔리스트로서 카네기홀에서 공연하는 등 일본을 대표하는 타악 연주자이다.(02)2232-7952. 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 儒林(354)-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54)-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결론부터 말하면 퇴계가 종명하던 날 아침, 제자들이 스승의 운명을 점쳐보았을 때 나온 ‘군자유종’이란 점괘는 신통하게 들어맞는다. 바로 그날 밤 퇴계는 수를 다해 죽었지만 주자와 정이천의 풀이처럼 그 후광은 세월이 갈수록 찬연하게 빛나는 것이다. 우선 선조가 부음을 듣고 곧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이라 작호를 내렸으며, 우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토록 하였다.5년 후에는 도산서원을 세워 사액까지 하고, 시호를 문순(文純)이라 내렸으니, 이것만으로도 유종의 후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빛나는 것은 그의 제자와 문인들이 그 뒤 제제다사(濟濟多士)로 이어 나와 그의 학통을 계승한 것과, 퇴계가 심혈을 기울인 모든 저서들이 학술사상사에 한 획을 그었을 뿐 아니라 그 빛이 현해탄을 넘어 일본에까지 뻗쳐 퇴계학파의 결실을 맺은 것! 그리고 사후 500년이 흘러도 빛바래지 않는 퇴계의 사상이 바로 군자 퇴계가 남긴 진정한 광배(光背)인 것이다. 이처럼 주역에 몰두한 퇴계는 21세 때 용수사에서 내려와 허씨 부인과 결혼하였으며,24세 때 첫아들 준을 낳는다. 잠시 서울에 올라와 태학에 유학하였으나 도학을 기피하는 성균관의 경박한 풍조에 크게 실망한 후 두 달 만에 고향에 내려와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더욱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때 퇴계는 자신의 생활을 산거(山居)라는 제목으로 짧게 시를 짓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산중에 사는 사람이라고 아무 할 일 없다 말을 마오.(莫道山居無一事) 내 평생 하고 싶은 일 헤아리기 어려워라.(平生志願更難量)” 26살 때 지은 이 짧은 시는 퇴계의 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때까지 퇴계는 벼슬에 관심 없이 오직 ‘헤아리기 어려운 평생 하고픈 일’, 즉 이학(理學)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퇴계가 어머니와 형의 권유로 지방에서 실시하는 진사시에 수석으로 합격한 것이 그 다음해인 27세 때 일이었으니, 이 시를 지을 무렵에는 그야말로 초야에 묻혀 사는 산중거사(山中居士)였던 것이다. 12살 때 논어에 나오는 이(理) 자의 화두를 얻음으로써 문리(文理)를 터득한 퇴계는 오직 14년 동안 스승이나 벗도 없이 혼자서 거경궁리하였던 것이다. 거경(居敬)이란 말은 일찍이 송대의 대유였던 정이천과 주자가 주장하였던 ‘마음의 긴장상태를 정신통일의 경지로까지 유지’하는 일종의 심법(心法)이었다. 퇴계는 이를 지경(持敬)이라고도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일종의 불교에서 말하는 선(禪)과 같은 것이었다. 즉, 몸과 마음을 일심으로 몰두하여 밥을 먹을 때는 밥을 먹을 뿐이며, 잠을 잘 때는 오직 잠을 자는 일에만 열중하는 참선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분산시키고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잡다한 일에서 벗어나 마음을 단순화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방법이었다. 이에 대해 퇴계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 있다. “화려하고 시끄럽게 떠드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가장 쉽게 빠져들게 한다. 나는 일찍부터 여기에 힘을 써서 이러한 일에 거의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 ‘은둔형 총수’ 스타일? 경영전략

    ‘스타일인가, 경영 전략인가.’ 10대 그룹 총수 가운데 유독 롯데 신격호 회장과 GS 허창수 회장 등이 대외 활동에 나서기를 꺼려 궁금증이 일고 있다. 세간에는 이들을 놓고 ‘은둔형 총수’라 부르기도 한다. 다른 10대 그룹들은 총수 이미지가 사실상 기업 이미지를 좌우한다고 판단, 긍정적인 ‘PI(President Identity·최고경영자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적극적인 마케팅을 펼치는 것과 비교하면 대조적이다. 재계에서는 이들 오너 스타일 자체가 조용하고, 번잡한 것을 싫어해 그런 것 아니냐고 해석한다. 또 PI보다 품질과 서비스로 승부를 걸겠다는 기업 경영 전략과도 맥이 닿아 있다고 분석한다. 이 때문에 이들 그룹 문화도 오너 성향에 따라 내성적이고 보수적인 측면이 강하다. 창업 1세대로 ‘노익장’을 과시하는 롯데 신 회장은 여전히 현해탄을 오가며 ‘셔틀 경영’을 해오고 있지만 신변잡기가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하지만 수행원도 없이 혼자 백화점을 둘러볼 정도로 ‘현장 경영’을 중시한다. 최근에는 신 회장의 차남인 신동빈 부회장이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모임에 참석하는 등 대외 행사에 자주 얼굴을 내보여 눈길을 끌고 있다. 그룹 출범과 함께 현장 경영에 활발하게 나서겠다고 공언한 GS 허 회장도 아직까지 주목할 만한 대외 행보를 보이지 않고 있다. 지난달 GS칼텍스 여수공장을 방문하면서 현장 경영에 적극적으로 나설 뜻을 밝혔지만 이후 계열사 사업장이나 물류센터 방문이 거의 없다. 일각에서는 허 회장이 ‘2인자 역할’에 충실했던 LG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아니냐는 진단이다. 앞장서는 것보다 사후 처리에 익숙하다는 지적이다.GS 관계자는 “허 회장은 다음달 GS 비전을 내놓고 본격적인 활동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기고] 일본우익의 ‘선물’/하종문 한신대 일본지역학과 교수

    2001년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하 새역모)은 0.039%의 채택이라는 참패에도 굴하지 않고 4년 후의 ‘복수’를 공언했다. 이후 고이즈미 내각의 각료를 비롯한 우파 정치가는 노골적으로 새역모 편들기에 나섰다. 게다가 소위 납치 사건 이후 일본 사회에 몰아친 ‘북한 때리기’ 광풍은 새역모와 일본의 우익들에게 애국심과 국가주의를 부추기는 절호의 찬스로 비쳤다. 우리가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 동안 새역모의 복수극 준비는 빈틈없이 진행되었다. 4월5일 새역모가 펴낸 후소샤 역사교과서는 재차 일본 문부과학성의 검정을 통과했다.4년 전에 137군데의 수정을 거친 누더기 교과서로도 검정에 합격했듯이, 이번에도 120여 군데의 오류가 지적된 함량미달의 교과서였다. 마치 월드컵처럼 4년 뒤에도 우리는 또 후소샤 교과서 등장이라는 뉴스를 봐야 할 것인가? 4년 전의 상황과 비교해 보자. 먼저 한국 정부의 경우,2001년에는 1998년의 한·일 파트너십 선언에서 ‘과거사는 청산되었다.’고 밝힌 것이 결정적으로 정부의 발목을 붙잡았다. 들끓는 국민감정에 떼밀리듯이 주일대사의 소환이나 재수정의 요구 같은 강공책을 뒤늦게 내놓았지만 그 효과는 그다지 없었다. 성급한 미봉책으로 탄생한 한·일역사공동위원회가 역사화해에 기여한 바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올해는 조금 다른 듯하다. 검정 발표 이전에 독도 문제로 양국 관계는 경색 국면으로 접어든 지 오래다. 국가안전보장회의의 대일 신 독트린이나 대통령의 담화에서 나와 있듯이, 인류보편적인 원칙이 한·일관계의 새로운 틀로서 천명된 바 있다. 그 구체적 실천의 장으로 주어진 것이 바로 역사교과서 문제이다. 따라서 분리 대응이라는 원칙이 결코 역사교과서 해결을 위한 한국 정부의 의지를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 문부과학성의 생색내기 검정을 통해 2001년도 수준에 턱걸이한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에는 일본호의 우향우가 너무 심각하다. 문제가 되는 기술내용에 대한 재수정 요구뿐만 아니라 재발 방지를 위한 일본 정부의 명확한 대처방안을 따지고 촉구할 일이다. 독도 문제와 마찬가지로 역사교과서 문제는 ‘역사 주권’을 위협하는 도발이라는 확고한 인식과 대응이 필요한 것이다. 시민사회의 대응도 짚어야 한다. 독도 문제는 뒤틀린 한·일관계의 현주소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사건이었지만, 우리의 정당한 ‘공분’의 표출이 결코 다케시마를 노리는 일본의 우익과 같을 수는 없다.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내셔널리즘을 선동하는 일군의 한국인들은 작년 내내 친일청산 반대를 부르짖는 대열에 서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지난 2001년은 국경과 민족으로 갈라진 한·일 양국의 ‘좋은 타자’를 발견하는 기회였으며, 그 결과 새역모의 참패를 이루어냈다. 바람직한 한·일관계와 동아시아의 미래를 걸고 벌어질 올해의 싸움은 ‘한국’이라는 틀에 시선을 가하고 그 외연을 넓히는 일과 결부되어야 한다. 지난 시절의 군사독재가 일본 보수정권과의 야합에서 자양분을 얻었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현해탄을 사이에 둔 좋은 일본인과의 연대는 우리 내부에 대한 비판적 성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식민지지배와 침략전쟁으로 얼룩진 과거사를 청산하는 작업은 패자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모한 갈등과 대립으로 내몰려야 했던 보통 사람들의 해원이기 때문이다.4년 만에 새역모는 또 우리에게 소중한 선물을 주었다. 하종문 한신대 일본지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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