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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신문 2010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붉은 코끼리/이은선

    [서울신문 2010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붉은 코끼리/이은선

    할머니가 사라졌다. 노인정과 공판장을 지나 경찰서로 뛰어가던 엄마가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뭐라고? 할머니가, 어디? 엄마, 잘 안 들려요! 모퉁이를 돌아서자 팀장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얼결에 여자 화장실로 들어가 재빨리 칸막이를 닫았다. 어느새 전화가 끊어져 있었다. 아침 식사 시간 전부터 기숙사에 와 잔소리를 해대는 팀장과 이러저러한 일들이 겹쳐 오후 두 시가 다 되도록 한 번도 자리에 앉지 못했다. 내친김에 변기 위에 걸터앉아 엄마에게 전화를 걸려는데, 옆구리에 차고 있던 무전기가 울렸다. 곧 리허설을 시작하겠다는 팀장의 목소리였다. 그건 안 됩니다. 코끼리들 상태가 좋질 않아요. 오늘은 무조건 쉬게 해야 합니다. 내가 대답했다. 팀장은 무전기에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당장 달려오라고 했지만 당장은 가기 싫었다. 무전기의 전원을 끄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런데 할머니가 어디 가셨다는 거지? 몸도 안 좋으시면서.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두 시간이 지나서야 삼촌의 이름이 전광판에 떴다. 울고 있던 가족들이 황망히 수골실로 내달렸다. 나는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삼촌의 유골은 대리석 탁자 위에 새카맣게 탄 못들과 뒤엉켜 있었다. ‘냉각’을 거쳤다고는 하나 아직 열기가 식지 않은 유골이었다. 할머니가 탁자 모서리에 가슴을 짓찧었다. 망연히 서 있던 아버지가 서둘러 할머니를 일으켜 세우려 했을 때, 나는 할머니가 작은 뼛조각 하나를 움켜쥐는 것을 보았다. 탁자 옆에 서 있던 나도 얼른 새카맣게 탄 못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아무도 못 본 건가. 주위를 둘러보니 고모들은 아예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내내 울음을 참던 아버지도 할머니를 부둥켜안고 소리 내어 울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못을 내 몸에 박아두기라도 할 것처럼 그러쥐었다. 출장에서 돌아온 나는 공항에서 곧바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나를 데리러 온 사촌 동생의 차를 탈 때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는데도 어쩐지 집으로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장례식장 앞에서 선뜻 안으로 들어서지 못해 머뭇거리고 있는 나에게 둘째 고모가 내 몫의 상복을 내밀었다. 장례식장 안팎에 삼삼오오 모인 가족들은 삼촌이 왜 죽었을까 답답해했고 삼촌의 동료와 친구들은 경찰서를 오가고 있는 중이었다. 무당이라도 불러 알아볼 수 없을까? 사촌 동생이 불쑥 꺼낸 말이었다. 삼촌의 방에 널브러진 술병들, 불에 탄 이부자리, 종류가 다른 담배꽁초들. 어떤 추측은 가능할 테지만 진실은 아무도 몰랐다. 그날 밤 대체 어떤 일들이 일어났던 것일까.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삼촌은 각기 다른 이유들로 죽고 또 죽었다. 효원 장례식장 국화실에 놓인 영정사진 속 삼촌은 너무나 밝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무릎에 올려놓은 상복이 자꾸 무겁게 느껴졌다. 할머니는 삼촌의 죽음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바로 눈앞에서 삼촌의 시신을 보았다는데도. 거의 녹아내린 새카만 못과 유골을 분리하는 일은 아버지의 몫이었다. 뼈가 상하지 않게 하려는 아버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누군가 내게 다가와 그만 잠에서 좀 깨어나라고 흔들어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런데 나는 어쩌려고 못을 집어든 것일까. 할머니가 두 주먹을 옹골차게 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 덩달아 나도 주먹에 힘을 주었다. 내 손이 못과 함께 타들어 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하설 조장님, 본부 운영실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원내 방송이 들려왔다. 잠깐 눈만 감고 있었던 것 같은데……. 재빨리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나는 그 순간 내가 숫자를 거꾸로 보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득달같이 일어나 문을 박차고 뛰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이하설 조장님, 본부 운영실로 와’달라는 방송은 계속 되었다. 운영실이 가까워질수록 방송이 더 자주 들려왔고, 느려터진 두 발은 점점 더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내가 도착하기만 하면 저 공손한 팀장의 말투는 야수로 변해 나에게 돌진할 것이었다. 그때 가로수 사이로 한 여자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남색 기지바지와 연두색 스웨터, 복고풍의 파마머리까지. 혹시 할머니인가 싶어 가던 방향을 바꿔 전속력으로 달려갔다가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뒤돌아섰다. 팀장이 의자를 발로 걷어찼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두루마리 휴지가 창문 쪽으로 날아갔고, 내 가슴팍에 내리꽂힌 전화기는 바닥에 떨어지면서 박살이 났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고 속으로 되뇌었다. 원내 방송 담당 아나운서가 시디 데크를 만지작거리는 게 보였다. 팀장이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사무실 안을 둘러보니 악단장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악단장의 발치에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노란색 나비넥타이가 떨어져 있었다. 기어이 팀장과 한바탕 한 것 같았다. 오전에 병원으로 실려 간 러시아 무용수는 응급 수술을 해야 할 상황이라고 했다. 하혈이 심해 개복 수술을 해야 한다고. 악단장과 팀장의 관계를 가장 잘 알고, 더듬거리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러시아 말을 할 줄 알았던 내가 그 ‘중요한’ 시기에 사라졌다는 것이 팀장이 화를 내는 이유였다. 앞으로 바짝 다가온 팀장의 손이 내 뺨을 향해 날아왔다. 그때 태국인 조련사 푸앙이 운영실 안으로 들어왔다. 푸앙은 코끼리들의 상태가 좋지 않으니 퍼레이드를 취소해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코끼리의 설사 따위는 팀장에게 먹혀들 만한 이유가 되지 못했다. 나는 푸앙의 손을 잡아끌고 코끼리 우리로 갔다. 쏘냐는 계속 설사를 했고, 아프리카 산 일 년 생 코끼리 튀라는 쏘냐의 엉덩이 쪽에 대가리를 박고 누워 있었다. 제때 검사를 하며 건강을 돌보아 주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야생과는 달리 동물원 우리 안에 갇혀 있는 동물들은 잔병치레가 잦았다. 그래서 예방 접종, 먹이, 변의 상태 등을 확인하여 제때 사료 혹은 건초 더미를 바꾸어 주는 것들은 무척이나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일들이었다. 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팀장은 번번이 동물원의 재정 상태를 운운하며 우리가 올리는 건의사항들을 묵살했다. 이하설, 오늘 제대로 하지 않으면 너부터 자를 줄 알아! 나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무전기를 꺼내들었다. 팀장님, 직접 오셔서 코끼리들을 살펴보시란 말이에요! 무조건 데리고 나가는 일이 능사가 아니란 말입니다. 뭐야? 푸앙이 눈물을 흘리며 내게 말했다. 코끼리 나가지 마, 나 죽어. 푸앙, 그러기 전에 내가 먼저 어떻게 되겠어. 그러니 나한테 제발 좀 이러지 마! 그러나 푸앙은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삼촌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내가 아는 한 삼촌은 아픈 동물은 절대로 퍼레이드에 내보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외국인 조련사들의 고충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해 주었고, 윗사람들에게도 최선을 다했다. 그 사람이 원하는 선에 맞추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못을 만졌다. 잠깐이지만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울고 있는 푸앙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오늘은 이틀 앞으로 다가온 퍼레이드의 리허설이 열리는 날이었다. ‘우리를 나온 동물들의 퍼포먼스’라는 이름으로 한 달 전부터 신문 및 지역 방송에 광고를 내보내고 있었다. 나날이 쇠락해가는 테마랜드의 혁신을 위해 팀장이 삼 개월 넘게 심혈을 기울인 행사였다. 만약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삼촌은 일급 코끼리 조련사이자 동물 쇼의 사회자였다. 공휴일이나 특별한 행사가 있기 한 달 전이면 삼촌의 얼굴이 실린 포스터가 동네 곳곳에 나붙었다. 지역 방송국에서는 매일 테마 랜드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고 또 어떤 쇼가 진행 중인지 보도해 주었다. 삼촌은 방송에도 자주 나왔다. 나도 삼촌에게 꽃을 건네는 어린이 중 한 명으로 텔레비전에 나온 적이 있었다. 십 년이 지나 스무 살이 된 나도 테마 랜드에 조련사 보조로 들어왔다. 그러다 조련사가 되었지만 그 삼촌에 그 조카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 내내 업무에 허덕이다 시간이 되면 퇴근하기에만 급급한 나날이었다. 삼촌처럼 되기를 원했지만 그를 뛰어넘을 재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동물 구입 차 태국과 러시아에 출장을 간 사이 삼촌은 직원 기숙사 방문 손잡이에 목을 맸다.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할머니는 삼촌의 시신이 병원으로 옮겨지고 하루가 지난 뒤 실신한 채 삼촌이 있는 병원으로 실려 왔다. 어린이 날 행사를 며칠 앞두고 일어난 일이었다. 바쁘게 행사를 준비하면서 이래저래 악단장과 팀장 사이에 생긴 일들을 조율하고 동물원 곳곳의 문제들을 해결하며 별 탈 없이 생활을 했다는 진술들이 이어졌다. 내가 아는 바와 다를 것이 없었다. 장례식 도중, 나는 삼촌이 행사를 진행할 때 입던 붉은색 조련복을 챙겨두었다. 팀장은 동물원에 사람들이 오지 않는 이유가 사육사들이 동물 관리를 잘하지 못한 탓이라고 말했다. 그는 동물 구입의 명목으로 예산을 타갔지만, 그 돈이 어디에 쓰였는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단란주점에서 여자애들과 놀아났다는 소리가 들려왔고 어느 날에는 실내 경마장에서 누군가와 게임을 했다는 말도 들렸다. 건의서를 제출하면 가지고 있는 동물 관리나 잘하라며 번번이 우리의 의견을 무시했다. 그는 한 달에 한 번씩 동물이 죽었다는 보고서를 제출한 후 사체처리비로 외유를 떠났다. 이사장이 바뀌고 줄을 잘 섰다는 소문이 돌았다. 얼마 후 악단의 인원이 대폭 감소되었다. 게다가 이러저러한 꼬투리를 잡아 악단장의 연봉도 삼십 퍼센트나 감봉시켰다. 대부분이 계약직인 연주자들은 불만을 표시할 수가 없었다. 곧 재계약 기간이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하나 둘, 동물원을 떠나는 연주자들이 늘자 참다못한 악단장이 팀장에게 항의했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기는 것 같았다. 악단장은 내게 불만을 털어놓았다. 나는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소주를 마시고, 매일 두 갑의 담배를 피웠다. 테마랜드는 죽을 날만 기다리는 병든 짐승들과 관리되지 않은 채 잡풀이 번다한 식물원, 날만 흐리면 전기가 오르는 범퍼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놀이기구만 모아 놓은 부상 랜드였다. 사육조장에게선 늘 술 냄새가 났다. 비가 오면 비가 온다는 이유로, 날이 더우면 덥다는 이유로, 동물들이 발정이 나면 수컷이 없다는 이유로 그는 늘 술을 마셨다. 나도 간간이 그와 함께 술을 마시곤 했지만 어쩐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다. 그는 술만 취하면 내게 삼촌의 이야기를 하려고 들었다. 삼촌의 성격과 그와의 관계, 동물들을 아끼던 마음, 은밀하게 나누곤 했던 농담들. 하지만 나도 다 아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사육조장과 함께 술을 마시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반쯤 마신 매실 주스에 소주를 타먹곤 하는 버릇이 있었다. 오늘도 그는 코끼리 우리를 나오면서 빈 매실 주스 병 두 개를 쓰레기통에 넣었다. 엄마의 목소리는 처음보다 많이 진정되어 있었다. 할머니는 아직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집에서 없어진 할머니를 이곳에 있는 내가 어찌해 볼 도리는 없었다. 엄마, 내가 나중에 전화할게요, 지금 좀 바빠! 통화를 끝내자마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조장님, 홍학 우리에 고양이가 들어와 새끼들을 물어뜯고 난동을 부렸어요. 뭐라고? 홍학 한 마리가 다리를 크게 다쳤어요. 알았어, 곧 갈게. 안 그래도 행사 준비 때문에 신경이 무척 곤두서 있는 홍학무리였다. 허겁지겁 바쁘게 뛰어가다 보니 남색 기지바지가 또 눈에 띄었다. 오늘은 동물원에 남색 기지바지가 유난히 많았다. 그 바지들은 여기서도 나타났고 저기로도 지나갔다. 동물원에 온 할머니들은 대부분 남색 기지바지 혹은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모두들 엇비슷한 파마머리를 한 채 손차양으로 햇빛을 가리고 느릿느릿 걷거나 그늘에 앉아 김밥을 먹었다. 납골당은 노인들이 게이트볼을 치고 있는 공원을 지나 한참 더 올라가는 산 중턱의 후미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한적한 공터인 줄 알았던 공원도 지나가며 살펴보니 있어야 할 것들은 다 있었다. 그물이 벗겨진 하나밖에 없는 축구 골대, 녹슨 시소, 줄 끊어진 그네. 곳곳에 놓인 페인트칠이 벗겨진 벤치와 그곳에 누워 있는 사람들. 공원을 지나 한참을 걸었는데도 납골당이 나오질 않아 잘못 찾았나 하고 두리번거리는 나와는 달리 할머니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따름이었다. 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산길을 따라 삼십여 분쯤 더 걸어가다 보니 자그마한 분지 위에 지어 놓은 건물이 하나 보였다. 우리는 곧장 유골 안치실로 들어갔다. 삼촌의 위패에 쓰여 있는 이름이 낯설었다. 이선빈이 아닌 고(故) 이선빈은 내게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알 수 없는 수학공식 같았다. 그렇다면 그것은 저쪽 세계의 풀 수 없는 문제 같은 것인가. 돌아갔으나, 되돌아 올 수는 없다는 낙인? 오늘만큼은 할머니가 글자를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 퍽이나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할머니는 귀신같이 아들 있는 곳을 찾아냈다. 가져간 술과 포를 놓고 준비되어 있는 향을 피웠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훌쩍이는 소리에 혹시나 싶어 뒤돌아보니 할머니는 대꾼한 두 눈을 슴벅이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계시라 해도 한사코 일어서서 창문 쪽으로 얼굴을 돌린 채. 술이 넘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잔을 쥐고 향 위에 세 번을 돌린 후 상에 올렸다. 두 뺨이 경련이 이는 것처럼 제멋대로 움직였다. 옆 칸에서 제를 지내던 사람들이 담배에 불을 붙여 제상 위에 올려놓는 것이 보였다. 분향실의 향내에 짓눌려 있던 나는 생담배 타는 매캐한 냄새가 차라리 반가웠다. 우리도 한 대 필까, 삼촌? 부검 결과 별다른 타살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악단장과 몇몇의 연주자들, 팀장에 대한 조사가 차례대로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가족들은 알지 못하던 우울증이 새로 생겨났으며, 사육조장과 함께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알코올 중독이란 말이 덧붙여졌다. 추측성 발언들이었지만 조서에 쓰인 것들은 그대로 사인(死因)이 되었다. 분개한 가족들이 사건 수사를 계속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곧바로 장례 일정이 잡혔다. 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발인 날짜를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할머니는 발인 전날 신발도 신지 못하고 영안실로 달려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할머니의 발걸음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납골당 쪽을 다시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쉽게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할머니가 저쪽의 삼촌을 아직 내려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까. 할머니의 어깨가 잔뜩 내려앉아 있었다. 듬성듬성하던 머리칼은 그 사이 더 빠졌는지 머릿속이 훤히 다 보일 지경이었다. 올라오는 길을 잘 찾았던 할머니가 돌아가는 길을 헷갈렸다. 납골당에 들어서는 길은 우리가 걸어온 길 하나밖에 없는데도 할머니는 분향실에서부터 출구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헤맸다. 내가 앞장서 걸을 수도 있었지만 갈피를 잡지 못하는 할머니의 마음이 그렇게 이끌고 있는 것만 같아 가만히 뒤를 따랐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지난 주말에 할머니와 내가 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납골당에 가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내가 만약 그곳에 할머니를 모시고 간 것을 알면 크게 혼이 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버지의 기억에는 할머니가 한 번도 삼촌에게 다녀온 적이 없다는데, 처음이라는 할머니는 삼촌의 자리를 잘도 찾았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홍학 우리 안의 소동이 잠잠해진 뒤였다. 고양이에게 물려 다리를 다친 홍학은 다행히 퍼레이드에 나갈 녀석이 아니라 두 달 전에 알에서 깬 새끼였다. 놀란 홍학들을 진정시키느라 껍질 깐 호두와 아몬드를 두 자루나 뿌려주었다. 어느샌가 팀장도 홍학 우리 앞에 와 있었다. 그는 퍼레이드에 나갈 녀석들을 좀 더 밝은 빨간색 형광 안료로 칠하라며 조련사들을 다그쳤다. 나는 홍학들에게 빨간 안료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해 보았지만 팀장은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것 같았다. 나는 물끄러미 팀장과 조련사들을 바라보다 문득 이제 여기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삼촌을 보내고도 꿋꿋하게 나오던 곳이고, 그가 하던 일만은 내 손으로 이어받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도저도 아니었다. 조련사들이 빨간 형광 안료 통을 들고 사육실 안으로 들어갔다. 퍼레이드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나는 옷장에서 삼촌의 조련복을 꺼내 입었다. 오랫동안 묵혀둔 것이라 혹시 곰팡이라도 슬었으면 어쩌나 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가 의자 위에 놓아둔 전기 총을 집어 들자 푸앙이 비명을 지르며 울어댔다. 미안해, 푸앙.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우리 얼른 끝내버리자. 나는 입을 앙다문 채 쏘냐의 뒷다리에 총을 쏘았다. 쏘냐가 움찔하며 왼쪽 다리를 들었다. 재빨리 엉덩이에도 총을 갖다 댔다. 한참 만에 쏘냐가 일어섰다. 푸앙이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다 울부짖으며 내 왼팔에 매달렸다. 쏘냐의 몸에 멋을 내느라 발라놓았던 노란색 형광안료가 설사에 섞여 줄줄 흘러내렸다. 바닥에 형광 선을 긋는 것 같았다. 무전기에서는 팀장의 목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무전기 소리를 무시하니 그 뜻 없는 말들은 점차 행진곡 풍으로 변해갔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괜찮다고, 얼른 끝내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진흙탕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호두를 쪼아 먹고 있던 홍학들이 코끼리 우리 앞에 나와 있었다. 온몸에 빨간색 형광 안료를 잔뜩 바른 홍학 무리였다. 등에 홍학을 둘씩 태운 코끼리들이 정문으로 출발했다. 붉고 노란 머리들이 공중에다 점을 찍었다. 휴대전화와 무전기에서 팀장과 사육조장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어차피 코끼리들이 도착하지 않으면 행렬을 완성할 수 없고 또 사회자인 내가 가지 않으면 시작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동물들의 건강을 살피는 것 역시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허리에 차고 있던 무전기를 뺐다. 팀장님, 지금이라도 리허설을 취소해 주세요. 뭐, 뭐야? 이대로 가단 코끼리들이 죽습니다.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얼른 데리고 나와! 시에서 사람들이 나와서 지켜보고 있단 말이야! 그런데 지금, 니가 나한테, 대든 거냐? 쏘냐와 튀라는 절뚝이고 비틀거리면서도 앞만 보고 걸었다. 푸앙이 코끼리 배에 손을 얹고 함께 걸었다. 저렇게라도 가주기만 한다면 크게 문제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쏘냐는 설사를 하고 있었다. 코끼리, 죽어. 나도 죽어. 푸앙이 울며 말했다. 푸앙, 나도 어쩔 수가 없잖아, 미안해! 니가 살려! 푸앙, 죽어가는 것들을 일으키고 이미 죽은 것도 살려낼 수만 있다면야 오죽이나 좋겠니. 푸앙이 이를 악물고 우는 소리와 코끼리들의 거친 숨소리가 마치 한 덩이처럼 느껴졌다. 정문 쪽에 노란 나비넥타이를 한 악단장의 모습이 보였다. 전보다는 풀이 죽은 모습이었지만 잘 다려진 연미복을 입은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심벌즈 연주자가 그만두는 바람에 탬버린을 담당했던 사람이 심벌즈를 잡고 있었다. 다섯 명이던 작은 북 담당 연주자들은 둘밖에 없었고 심지어 트럼펫 연주자는 보이지도 않았다. 행렬이라도 완성해야 한다는 팀장의 고집 때문에 음악은 녹음해둔 것으로 대체되었다. 연주자들이 항의했지만 오늘은 ‘리허설’ 날이니 그렇게 해도 된다는 악단장의 말에 조금 누그러지는 듯했다. 하지만 연주자들의 얼굴 표정은 괜찮아진 것 같지 않았다. 안 그래도 불안한 처지인데 악단장마저 번번이 자신들 앞에서 팀장에게 무시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손에 익지도 않은 악기를 든 사람들의 얼굴이 굳어갔다. 악단장은 연신 나비넥타이만 고쳐 맸다. 동물원 곳곳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정문으로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카메라를 꺼내들고 환호성을 지르거나 직접 코끼리를 만지려고 다가갔다. 놀란 사육사들이 그들을 말리는 사이, 나는 희뿌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날이었다. 눅눅한 공기와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 동물들의 우는 소리들이 마구잡이로 내 가슴속에 맺혔다. 그 사이 ‘시’에서 나왔다는 사람들이 정문 쪽으로 다가왔다. 행사를 하는 날도 아닌데 무슨 일로 온 거지? 팀장은 ‘시’ 사람들에게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했다. ‘시’ 사람들은 악단장에게도 다가갔다. 팀장이 활짝 웃으며 악단장의 오른팔을 잡아끌었다. 팀장에게 이끌린 악단장이 지휘봉을 잡고 있지 않은 손으로 엉거주춤하게 그들과 악수를 했다. 허리를 제대로 굽히지 않은 채 인사를 하는 악단장을 바라보는 팀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팀장은 악단장에게 당장 연주를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악단장은 시디를 틀기로 되어 있지 않느냐며 반문했다. 빨리 하라니까! 팀장 자신도 모르게 나온 큰 소리에 본인이 더 놀라고 있는 사이, 악단장이 뒤돌아섰다. 그러나 내내 굽실거리거나 팀장에게 할 말을 다 못하고 돌아서던 악단장의 얼굴이 아니었다. 악단장은 맨 앞줄의 연주자가 들고 있던 바이올린을 넘겨받았다. 지휘봉을 연미복 허리춤에 찔러 넣은 악단장이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축배의 노래였다. 멍한 얼굴의 팀장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 악단장의 바이올린 선율에 맞춰 다른 연주자들의 악기도 조금씩 리듬을 탔다. 때마침 비가 내렸다. 당황한 팀장이 재빨리 ‘시’에서 나온 사람들을 이끌고 자리를 벗어나는 와중에 악단이 연주하는 축배의 노래는 점점 절정으로 향해 갔다. 어느새 굵어진 빗방울들이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원숭이와 코알라, 나뭇가지에 걸쳐 놓은 채 들고 나온 나무늘보들을 적셨다. 문제는 코끼리 등 위에 빨간 형광 안료를 덕지덕지 바르고 올라 앉아 있는 홍학들이었다. 진회색의 코끼리 등에 붉은 물이 들어갔고, 악단이 연주하는 축배의 노래는 점점 더 크게 울려 퍼졌다. 나는 열심히 연주를 하는 악단장과 ‘시’ 사람들을 서둘러 본관으로 끌고 가는 팀장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비바람이 거세지자 동물들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며 작은 소란이 일었다. 그때 푸앙이 코끼리 등에 앉아 있던 홍학의 다리를 잡아챘다. 푸덕, 푸흐드덕! 홍학이 거센 날갯짓을 했지만 푸앙의 손아귀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푸앙이 정문과 반대쪽을 향해 뛰었다. 마치 홍학 연을 타기라도 한 것처럼 재빠른 속도였다. 홍학 한 마리가 사라지자 코끼리 등에 앉아 있던 다른 홍학 네 마리도 푸앙이 사라진 쪽을 향해 날아갔다. 푸앙은 홍학의 습성도 잘 알았다. 아마도 어미를 데려갔을 거였다. 홍학이 날아가면 코끼리들은 그 자리에 앉아 무릎을 굽혀 반쯤 앉거나 선 채 왼발을 들어 쇼의 시작을 알리게끔 훈련되어 있었다. 내가 말려볼 틈도 없이 정문에서가 아니라 정문으로 가는 도중에 코끼리 퍼레이드가 시작되었다. 붉은 꽃 한 송이를 등에 얹은 코끼리들이 추는 군무가 악단이 연주하는 축배의 노래와 함께 어우러졌다. 그때까지도 정문 앞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던 사람들은 박수를 치거나 사진을 찍어댔다. 쏘냐와 튀라는 설사를 좍좍 갈기면서도 춤을 추었다. 코를 양 옆으로 흔들면서 왼발과 오른발을 차례대로 접고 자리에 앉았다 일어나며 엉덩이춤을 추었다. 코를 하늘 위로 높게 치켜세웠다가 쿵쿵 땅을 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다시 왼쪽 오른쪽으로 두 차례씩 긴 코를 하늘로 들어올렸다. 빗줄기를 쏟아붓는 하늘을 향해 코를 쏘아 올리기라도 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한 번 쇼를 시작하면 끝이 날 때까지 절대로 멈추지 않게 훈련된 코끼리들이었다. 홍학과 함께 한 군무가 오 분, 코끼리만 하는 쇼가 십오 분이었다. 나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코끼리들 옆에 전기 총을 든 채 무력하게 서 있었다. 코끼리의 군무가 점점 더 활기를 띠기 시작할 때쯤 다시 축배의 노래가 들려왔다. 악단장은 마치 무한 반복이라도 할 것 같은 완강한 표정이었다. 코끼리들은 덜렁덜렁 코를 흔들며 리듬에 맞춰 춤을 추었다. 차례대로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한 후 푸앙이 쏘냐의 어깨 위에 올라가 커다란 횃불을 치켜세우는 것으로 끝이 날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푸앙이 없다. 그는 어디로 간 것일까. 홍학들은 왜 하나도 돌아오지 않는 거지? 본관으로 갔던 팀장이 호루라기를 불며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정문을 가로지르는 팀장의 뒤쪽으로 익숙한 남색 기지바지가 지나갔다. ……할머니? 축배의 노래에 맞춰 자박자박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 할머니였다. 나는 재빨리 할머니를 향해 뛰었다. 할머니, 할머니이! 그러나 할머니는 멈춰 서지 않았다. 내 등 뒤에서 악단장이 연주하고 있던 바이올린이 바닥에 내팽개쳐지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뒤따라 전기 총을 쏘는 소리도 들려왔다. 코끼리들이 거세게 날뛰며 질러대는 울음과 구경하던 사람들의 비명이 뒤섞였다. 돌아서서 잠시 주춤하던 나는 다시 있는 힘껏 할머니 쪽을 향해 뛰어갔다. 빗물이 자꾸 눈 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삼촌의 뼛조각을 손에 쥔 할머니를 바라보고 있어서인가. 내 손은 자꾸만 할머니의 몸을 움켜쥐려고 했다. 아버지가 못을 골라내자 화장장 직원은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바로 삼촌의 뼈를 유골함에 넣어주었다. 고모들은 자신의 혈육이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이 기막힌 듯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촉망받던 조련사였으며, 사람 좋던 막내 삼촌은 그렇게 몇 줌의 유골이 되었다. 옥색 유골함 위에는 삼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제 삼촌은 옥함 겉면의 금박 이름으로만 남게 될 모양이었다. 할머니가 움켜쥐고 있던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크게 우시려는가 싶어 나는 고개를 돌려 유골함 쪽을 쳐다보았다. 할머니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단단히 쥐고 있던 두 주먹이 텅 비어 있었다. 나는 할머니의 두 손을 자세히 살폈다. 그러는 사이 할머니는 천천히 입을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수골실의 모든 것이 잠깐 멈춘 것 같았다. 할머니는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도 하던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할머니가 갑자기 상체를 숙였다. 입 속의 것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는가. 나는 의자에 걸터앉아 오랫동안 할머니 뒤쪽의 흰 벽을 바라보았다. 집으로 돌아온 할머니는 잘 움직이지 않았고 무엇을 먹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할머니를 병원으로 모셔가려고 했지만 한사코 거절했다. 그러지 말고, 동물원에 가보자. 집으로 돌아온 후 할머니가 우리들에게 처음으로 한 부탁이었다. 나는 내가 잘못 들었나 했지만 그것은 분명 동물원이라는 말이었다. 아버지가 동물원에 데려다주지 않자 할머니는 살아 있는 사람이 해야 하는 모든 행위들을 다시 거부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기세와 할머니의 고집 사이에서 가족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나는 밤마다 할머니 방으로 가서 할머니의 몸을 쓰다듬었다. 여기 어디쯤 삼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할머니의 몸이 무척 단단하게 느껴졌다. 삼촌은 할머니의 쇄골 위에 올라 있었다. 할머니가 들이쉬고 내쉬는 숨 속에서도 삼촌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어느 날엔가 삼촌은 할머니의 팔목을 그러쥔 채 죽이 담긴 숟가락을 할머니의 입 속으로 밀어 넣어주기도 했다. 먹은 음식이 어쩌다 얹히기라도 하면 조용히 할머니의 등을 쓸어주었다. 나는 삼촌이 그렇게라도 여기서 할머니와 함께 있다는 것이 참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삼촌, 좋아? 나는 탄 못과 할머니의 무릎을 번갈아가며 만졌다. 할머니는 오래 울었다. 가족들 모두 마음을 진정시키고 일상으로 돌아간 다음에도 할머니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새벽에 홀로 깨어 화장실에 다녀올 때도, 물에 만 밥 한 그릇을 다 먹고 난 뒤에도 삼촌의 베개를 쓰다듬으며 울었다. 어쩌다 밥상에 삼촌이 좋아하던 창란젓이라도 올라오면 그걸 바라보며 오래 울었다. 눕거나 앉거나 간신히 일어서거나 벽에 등을 기대거나. 언제 어디에서건 어떤 자세로든 할머니는 울고 있었다. 소리가 나지 않게 속으로 울고 있었지만 나는 할머니가 울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어쩌면 울다 지쳐 손으로 몸을 짚기라도 하면 어디에서건 삼촌이 만져져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그러는 것인지도 몰랐다. 살아 있는 유골함이 되는 일은 무척 힘겨워 보였다. 그래도 할머니는 식구들 앞에서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고,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난 오늘 할머니는 혼자서 동물원에 온 거였다. 우리가 걸음을 멈춘 곳은 식물원 입구였다. 할머니를 막 따라잡으려다가 도대체 왜 동물원에 왔고 또 어디로 가려는 것인지 궁금해 뒤를 따랐던 참이었다. 할머니의 남색 기지바지 속에서 끊임없이 휴대전화 벨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원내 방송이 나왔다. 이하설 조장님, 운영실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식물원 뒤쪽에는 고사한 나무들이 즐비했다. 희귀한 꽃이나 과실수들은 이미 다른 곳으로 팔려가거나 누군가가 빼돌린 뒤였다. 테마 랜드를 재정비한다면 가장 먼저 손을 대야 할 곳도 여기였다. 할머니는 왜 하필 이곳으로 온 것일까. 마침내 할머니가 걸음을 멈추고 단풍나무 둥치에 기대앉았다. 집에서 동물원까지 걸어왔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을 텐데……. 나는 천천히 할머니에게로 다가갔다. 집으로 모셔 갈 작정이었다. 그때 할머니가 손을 뻗어 땅바닥에 흩어져 있는 나뭇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내 새끼손가락만 한 나뭇조각이었다. 주저할 새도 없이 할머니는 그것을 입에 넣은 후 가슴을 쳤다. 그러다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크으헉, 으흑. 그것은 그동안 가슴에 쌓였던 울음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듯한 소리였다. 나는 다가가 말리지 않았다. 할머니도 얼마간은 큰 소리로 울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주먹으로 툭툭 땅을 쳤고, 나무 둥치에 등을 짓찧었다. 돌로 만든 조형물에 얼굴을 갖다 박았고 두 손으로 머리채를 쥐어뜯었다. 할머니는 그동안 속으로만 쌓였던 울음들을 모조리 뱉어내려는 것 같았다. 그때 식물원 어디선가 커다란 새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푸앙? 그는 나에게 다른 한국인들과 구별되는 나만의 향기가 있다고 말하곤 했다. 내가 자기를 찾는 거라 여기고 또 달아나버리면 어떡하지? 푸드덕거리는 새소리와 할머니의 울음이 식물원 안을 가득 채웠다. 죽은 나무들도 잔잔한 바람을 타며 울음소리와 박자를 맞췄다. 나는 할머니가 울고, 푸앙이 새들과 함께 마음을 삭이고 있는 여기가 아주 잠깐 동안만이라도 누군가에게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눈물을 그친 할머니가 다시 걸었다. 나는 할머니를 뒤따라갔다. 할머니는 여전히 뒤에 있는 나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참 동안 동물원 곳곳을 걷던 할머니는 코닥 필름 사진관 앞에서 멈춰 섰다. 우두커니 서서 문 닫힌 사진관의 창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코끼리 등에 올라 탄 삼촌이 붉은 조련복을 입고 활짝 웃는 사진이 붙어 있었다. 테마랜드 30년의 모습을 한꺼번에 볼 수 있도록 전시된 사진들이었다. 오래되어 빛이 바랬을 뿐, 사진 속의 모든 것들은 충분히 식별이 가능했다. 할머니는 손을 뻗은 채로 창가에 바짝 다가섰다. 삼촌의 사진이 언제부터 저곳에 걸려 있었던 걸까. 테마랜드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저 사진을 그곳에 걸어 놓지는 못했을 것이다. 할머니! 그제야 내가 큰소리로 할머니를 불렀지만 할머니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멀찍이 떨어져서 코끼리 등 위에 앉아 밝게 웃고 있는 삼촌과 그것을 향해 말 없이 손을 뻗는 여인을 찍은 한 장의 사진을 쓸쓸히 바라보았다. 내가 보고 있는 이 사진 속으로도 빗방울들이 쏟아져 내렸다. 정적을 깬 것은 다름 아닌 푸앙이 우는 소리였다. 푸앙은 팀장에게 멱살을 잡힌 채 이쪽으로 끌려오는 중이었다. 여전히 홍학 한 마리를 품에 안고 있었다. 야, 이하설! 나는 갑작스러운 그들의 등장에 놀라 나도 모르게 할머니!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내내 그렇게 멈춰 있을 것만 같던 사진 속 초로의 여인이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나 여인의 핏발 선 두 눈이 멈춘 곳은 내가 입고 있는 삼촌의 조련복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단추를 달고 솔기를 여며준 이 옷을 할머니는 단번에 알아차린 것 같았다. 어느새 창틀에서 떼어 낸 삼촌의 사진을 안고 있는 할머니가 다른 한 손으로 내 옷을 가리키며 다가왔다. 팀장과 푸앙도 이쪽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들의 발걸음 소리가 코끼리 울음소리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쏘냐와 튀라는 우리로 돌아갔을까.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나는 주머니 속에 있던 못을 꺼내 쥐었다. 나는 어느 쪽으로도 가지 못했다. 누군가 먼저 잡아당기지 않는다면 나는 언제까지라도 그렇게 서 있을 것만 같았다. <끝> ■ 당선소감 - “기꺼이, 조금 더 말랑해지겠습니다” 타슈켄트 동물원에는 코끼리 두 마리가 살고 있습니다. 초원을 훑어야 할 우묵한 눈들이 녹슨 푸슈킨 동상을 바라보고 있지요. 어느 날 저도 모르게 코끼리 우리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야 말았습니다. 늙고 병든 코끼리의 두툼하고 너덜너덜한 귓불을 한참 동안 쓰다듬어 주었어요. 그 코끼리들이 저와 함께 아랄 해를 지나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 할머니는 요즘 노인정에서 한글을 배우고 계십니다. 손녀가 쓴 글을 읽겠다고 약속을 하셨어요. 저는 아주 오랫동안 천천히 글을 써나갈 작정이므로 할머니는 기필코 200세 장수하셔야 합니다. 기꺼이, 조금 더 말랑해지겠습니다. 이 소식을 누구보다도 기뻐해주신 ‘동인, 그 섬’의 대장 임철우 선생님(‘그 섬에 가고 싶다’를 필사하던 그 순간이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잘 견디고 천천히 나아가겠습니다.), 치열하고 엄중한 소설쓰기가 일상의 진부함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그 방향을 제시해주신 최수철 선생님(선생님의 조언과 응원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 마음에 누가 되지 않도록 살고, 쓰겠습니다.), 검룡소에서 풀솜대를 뜯어주신 최두석 선생님(돌아가지 못하는 시의 자리가 아직도 제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글 쓰는 손가락은 절대적으로 겸손해야 함을 일깨워주신 서영채 선생님(밤새 꺼지지 않던 선생님 연구실의 불빛을 바라보며 술 취한 저는 도서관에서 잠들곤 했지요.), 사물을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법을 가르쳐주신 주인석 선생님(아, 이제 오디오 튜닝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10년 전 홍성여고 문예반 수업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제가 없었을 겁니다, 이정록 선생님. 좋은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저의 행운입니다. 그 운명을 결정지어주신 어머니, 아버지께 이 영광을 돌립니다. 제가 무너지려 할 때마다 옆에서 바로잡아주고 격려해준 권오영 시인께는 미처 다 갚을 수도 없는 마음들을 받았습니다. 함께 공부하는 동안 내내 소설 쓰기의 치열함을 온몸으로 가르쳐주던 김도연 선배께 맥주 한 잔 사드리고 싶습니다. 철없는 저를 뒤치다꺼리해 주느라 고생한, 제일 먼저 축하해준 이진희 시인. 정말 고맙습니다. 부족한 작품을 끝까지 손에 들고 계셨던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같이 힘들어도 조금 더 기운을 낼 수 있는 뚝심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얼른 ‘리보통(Ly-botong)’으로 달려가 그곳에 계신 분들과 커피 한 잔 내려 마시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 약력 -본명:이미선. 1983년 충남 보령 출생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한신대학교 문예창작대학원 소설전공 수료 -한국국제협력단(KOICA) 단원으로 우즈베키스탄 세계언어대학 한국어 강사 역임 ■ 심사평 - ‘현대인 삶의 축도’ 동물원… 상징적 압축미 탁월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은 모두 열 편. 이 가운데 다시 세 편의 작품을 어렵게 추려 놓고 생각했다. 신춘문예가 필요로 하는 소설은 어떤 소설인가? 우리 소설은 어디로 가야 하나? 단편소설은 산문 양식임에도 언어의 경제성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는 영역이다. 우리는 이 짧은 언어로는 ‘모든 것’을 쓸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양식은 이 ‘모든 것’을 내놓으라고 한다. 어떻게? 수사학, 즉 기교가 우리를 지상적인 삶에서 초월적 의미의 세계로 순간이동시켜 준다. 그러니 기교가 모든 것이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답할 수도 있다. 상징적 깊이나 환유적 지시 체계를 갖추지 못한 훌륭한 단편소설이란 일종의 형용모순과도 같다. 하이준씨의 ‘은행나무가 있는 풍경’은 현대적 일상을 사건으로 만들어 가는 문체가 돋보였다. 강남의 한 미장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조그만 사건은, 일상의 소소함이 그 한계 내에만 머무르지 않도록 만든 장점도 갖추었다. 김명진씨의 ‘뷰티플 원데이’는 베트남에서 온 아버지와 아버지의 젊은 여인과 ‘나’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나’의 내면의 섬세함이 다문화라는 문제를 사회성 이상의 차원으로 끌어 올렸다. 그러나 ‘은행나무가 있는 풍경’은 의미를 구성하는 사건이 너무 희박하고, ‘뷰티플 원데이’는 사건을 보편적인 의미로 상승시키는 힘이 부족하다. 이은선씨의 ‘붉은 코끼리’는 상징적 압축미가 뛰어나다. 동물원 코끼리 조련사의 이야기 안에 많은 것을 담았다. 동물원이라는 배경 자체가 어떤 상징성을 띤, 현대인의 삶의 축도로 이해하게 한다. 여기서 동물원을 지배하는 어떤 메커니즘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세계의 어떤 축도와도 같다. 이 작품은 쓴 것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면서 독자에게 시적인 울림을 선사한다. 재능과 생각을 겸비한 이은선씨에게 축하의 말씀과 함께 정진을 당부 드린다.
  • 리얼리즘으로 승화된 엇갈린 욕망

    리얼리즘으로 승화된 엇갈린 욕망

    사실주의 연극의 대가 안톤 체홉의 탄생 150주년을 맞아 그의 대표작인 ‘바냐아저씨’가 연극 무대에 오른다. 새해 1월7일부터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되는 이 작품은 ‘갈매기’ ‘세자매’ ‘벚꽃동산’과 함께 안톤 체홉의 4대 작품으로 꼽힌다.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체홉의 작품은 러시아 근대 리얼리즘을 완성하며 20세기 현대연극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어렵고 지루하다.’는 대중의 편견이 있는 것도 사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100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국적과 시대를 뛰어넘어 각국에서 공연될 만큼 보편성을 갖추고 있다. 특히 ‘바냐아저씨’는 작품 속의 등장인물이나 갈등 관계가 가족에게 상처받고 사랑에 좌절하는 우리네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작품보다 이해가 용이하다. 주인공 바냐는 누이동생이 죽은 뒤 교수인 매부를 가족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성심껏 대했지만 배신당하고 괴로워한다. 교수는 은퇴한 뒤 독선과 아집이 더욱 세지고, 바냐가 교수의 애인 엘레나에 대한 연정을 품게 되면서 극의 갈등은 최고조에 이른다. 갑갑한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엘레나, 짝사랑에 괴로워하는 교수의 딸 소냐, 열심히 살지만 마음의 등불이 없어 괴로워하는 의사 등 등장인물 모두가 소외되고 단절된 관계를 상징한다. 특히 이 작품은 비현실적이고 최소화된 무대 공간을 통해 각 장면이 갖는 메시지와 인물들의 감정선을 전달한다. 무대 가장자리를 둘러싸고 있는 8개의 자아공간은 스스로에겐 자유롭지만 외부와 단절되어 있는 등장 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표현하며, 대화와 소통이라는 작품의 주제를 은유한다. 마지막에서 8개의 자아공간이 무대 중앙으로 회전하는 장면은 ‘삶은 또 다시 반복되고 계속 이어진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심재찬 연출자는 “인간의 심리와 이중성을 꿰뚫는 체홉의 연극을 제대로 구현하고, 무엇보다 바냐라는 인물에 중점을 두고 실험적인 무대를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바냐 역은 연극 ‘햄릿’, ‘파우스트’를 비롯해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천추태후’ 등에 출연했던 연기파 배우 김명수가 맡았다. 김명수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한 기대 속에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과거에 얽매인 현대인의 자화상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이 ‘바냐아저씨’”라며 “그동안 선 굵은 연기를 많이 해왔는데,이번에 인간의 나약함을 밀도 있게 표현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영화리뷰] 위핏-드류 베리모어의 감독 데뷔작… 결코 가볍지 않은

    일탈은 매력적이다. 쳇바퀴 같은 일상에 얽매인 현대인들에게 일탈은 큰 해방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말처럼 쉽진 않다. 그에 상응하는 벌칙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일탈은 어렵다. 단지 꿈꿀 뿐. 그래서일까. 일탈을 소재로 한 영화는 그 진부함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인기를 얻는다. 동시에 관객들은 영화를 보며 일종의 대리 만족을 얻는다. 이지라이더(1969)와 델마와 루이스(1993), 즐거운 인생(2007) 등은 모두 일탈을 소재로 흥행에 성공했던 영화들이다. 영화 ‘위핏’은 과감히 일탈을 시도하는 한 소녀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블리스(엘렌 페이지)는 미인대회에 우승해야 인생이 풀린다고 ‘설교’하는 부모님이 지겹다. 이런 블리스에게 ‘롤러 더비’(프로 롤러스케이트 경기)는 인생을 바꿔줄 만한 새로운 세계다. 블리스는 롤러스케이트 팀에 지원, 재능을 인정받지만 단아한 여성상에 익숙한 부모님은 이를 ‘일탈’로 규정한다. 여기서 갈등은 시작된다. 사실 새로울 건 없다. 모범생인 블리스가 터프한 롤러 더비 선수가 된다는 점에서 분명 ‘일탈 영화’고, 일탈 속에서 세상을 배운다는 점에서는 ‘성장 영화’다. 또 일탈로 인한 갈등 속에서 가족의 사랑을 발견한다는 점에서 ‘가족 영화’로도 말할 수 있겠다. 이런 식의 구성은 너무나 많이 봐 왔다. 하지만 할리우드 영화 특유의 경박함이 덜하다. 예를 들어 브링잇온(2000)은 치어리더들의 경쟁을 통한 성장담을 주된 골격으로 하고 있지만 성장을 방해하는 주체를 노골적으로 비열한 캐릭터로 설정했다. 게임을 보듯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 하지만 위핏은 그렇지 않다. 가령, 설정 자체로만 보면 블리스의 일탈을 방해하는 부모님이 과도하게 세련되고 때론 괴팍한, 무척이나 비현실적 모습으로 그려질 것으로 예상되지만 실제로는 평범한 인물로 묘사된다. 나름의 철학도 있다. 블리스가 미인대회를 강요하는 엄마에게 “50년대에나 통했던 여성상”이라 쏘아 붙이는 부분은 할리우드 영화답지 않은 여성주의(?)의 면모를 드러낸다. 만일 한국 영화에서 이렇게 직설적으로 여성 해방을 부르짖었다면 높은 점수를 줄 수 없었을 게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철학의 깊이가 얕은’ 할리우드 영화가 이런 고민을 했다는 점은 높이 살만하다. 하나 더. 이 영화는 할리우드 최고 여배우 드류 베리모어의 감독 데뷔작이다. 미국의 평론가들은 이 영화에 높은 점수를 부여하며 그녀의 데뷔를 축복했다. 하지만 롤러 더비 경기 장면들이 감독의 의도와는 다르게 생각만큼 화려하거나 스피디하지 않다. 그녀의 짧은 감독 경력을 들먹이고 싶지 않지만 아무래도 초보 감독의 한계를 절감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새달 7일 개봉.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TV 비평] 22일 종영하는 ‘천사의 유혹’

    [TV 비평] 22일 종영하는 ‘천사의 유혹’

    막장 드라마 논란에 다시 불을 지폈던 SBS 월화드라마 ‘천사의 유혹’이 22일 종영한다. 이 드라마는 다른 방송사의 저녁 9시 메인뉴스마저 제치며 30%에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 화제를 낳기도 했다. ‘천사의’는 최근 드라마가 즐겨쓰는 ‘복수 코드’를 주된 골격으로 삼았다. 하지만 기존의 복수와는 선을 그었다. 복수의 주체와 대상을 늘리는 식으로 ‘양적 진화’를 시도한 것이다. 드라마의 모태가 된 ‘아내의 유혹’은 주인공 민소희(장서희)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전(前) 남편 정교빈(변우민)에 대한 일방적 복수를 기본 축으로 했다. 하지만 ‘천사의’는 쌍방향 복수다. 신우섭(한진희)에 의해 가족을 잃은 주아란(이소연)이 신우섭의 아들 신현우(한상진)와 결혼해 감행하는 복수, 이를 안 신현우가 안재성(배수빈)으로 성형수술을 한 뒤 벌이는 복수, 주아란의 내연남 남주승(김태현)이 생모인 신우섭의 부인 조경희(차화연)에 대한 복수, 여기에 아란을 짝사랑하다 자살한 정상모(이종혁)의 친누나 정상아(최지나)의 아란에 대한 복수까지…. 이 드라마에 나오는 수많은 캐릭터는 모두 복수의 끈에 얽히고설켜 있다. 하지만 다양한 복수 코드는 드라마의 또 다른 굴레가 돼 버렸다. 복수의 양에 집착한 나머지 다양한 복수 코드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감당해 내지 못했다는 평이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단지 복수 코드를 활용했다는 이유로 비난 받아선 안된다. 복수는 인간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법으로 문학에서 무척 매력적인 소재”라면서도 “모든 캐릭터의 복수는 큰 무게감을 갖고 있음에도 스토리를 빠르게 전개하려다 보니 이야기는 누락되고 개연성은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이어 “결국 뒤엉킨 복수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자극의 강도를 높이는 방법뿐이었다. 막장 드라마란 수식어는 이 지점에서 탄생됐다.”고 진단했다. 문제는 현대인의 삶이 치열해질수록 복수의 강도가 더 자극적으로 변모한다는 사실이다. 복수 코드를 수면 위로 부상시켰던 2003년 MBC 드라마 ‘인어아가씨’에서 지금의 ‘천사의’까지 복수에 대한 성찰은 서서히 뒤로 빠지는 양상이다. 대신 자극적인 복수신이 전면에 부각되며 드라마 고유의 문학성은 도태되고 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천사의 유혹 시청률이 높게 나온 것은 드라마에 대한 공감이라기보다 자극에 둔감한 현대인들이 ‘이 파국이 어디까지 치달을까.’에 대한 호기심의 결과”라면서 “영화와는 달리 언제, 누구나 볼 수 있다는 방송에서 가족 간의 복수를 과다하게 담아내는 것은 현대인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고 냉소했다. 이런 추세라면 결국 드라마는 퇴행할 것이라는 경고다.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책꽂이]

    ●아쌈 차차茶(김영자 지음, 이비락 펴냄) 꼬박 90일을 인도 아삼 지역에 머물며 그곳 농장에서 차밭의 여인들과 부대끼며 생활한 내용을 꼼꼼히 적어나간 기록이다. 영국 귀족들이 누리는 우아한 ‘오후의 홍차’에 인도 여인들이 차밭에서 흘린 땀과 고단한 노동이 스며 있는 듯하다. 1만 2000원.●여행기자들이 다시 찾고싶은 여행지 베스트34(김형우 외 11인 지음, 안그라픽스 펴냄) 일주일이면 2~3일을 인적 드문 해안길에서, 고즈넉한 산모퉁이에서, 또는 봉긋이 솟아 있는 꽃 앞에서 보내는 일간지 여행기자 12명이 추천하는 우리나라 구석구석 좋은 곳들이다. 취재수첩에 빼곡히 적힌 것 중 정수들만 모아놓았다. 전문가의 솜씨로 빚어낸 풍경 사진 역시 책 읽는 재미를 더한다. 1만원.●현미밥 채식(황성수 지음, 페가수스 펴냄) 병 안 걸리는 식사법을 말한다. 의사인 저자는 동맥경화증, 고혈압, 당뇨, 비만, 심장혈관병, 대장암, 치매 등 거의 모든 질환의 원인은 고기, 우유, 계란 등 동물성 식품의 과다 섭취에 있다고 말하며 ‘완전식품’에 가까운 곡식인 현미를 강력하게 권하고 있다. 1만 2000원. ●내 몸 살리는 건강블랙박스(김길원 지음, 연합뉴스 펴냄) ‘내 몸 살리는’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보통의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건강하게 지키고 가꾸는 법을 소개하고 있다. 의학 전문기자답게 최근 신종플루에 대한 예방법부터 시작해 암, 심혈관계 질환 등의 대처 방법, 눈과 귀 관리법 등을 얘기한다. 특히 현대인의 스트레스, 우울증 등 마음의 병까지 잘 다스릴 수 있는 법을 제시한다. 1만 2000원.●할아버지 무릎에 앉아서(이현주 지음, 작은 것이 아름답다 펴냄) 저자는 감리교 목사이면서 유교와 불교, 노장 사상을 두루 섭렵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동문학가이면서 생태운동가이기도 하다. 저자가 생태환경문화월간지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5년 동안 인연을 맺으며 연재했던 글을 모은 책이다. ‘마음은 무엇인가요.’, ‘시험은 꼭 봐야 하나요.’등 어린아이들이 세상과 삶에 대해 던지는 갖가지 궁금증에 대해 할아버지의 지혜를 들려주고 있다. 1만 1000원. ●정재승+진중권 크로스(정재승·진중권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편의점에서 아무 생각 없이 사 마시는 생수에, 즐겨 읽는 만화책 하나에 세상을 움직이는 무엇이 있다면? 과연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 따뜻한 상상력의 과학자와 이 시대의 대표적인 논객인 미학자가 21세기 대중의 일상을 구성하는 요소의 이면을 씨줄날줄로 들여다 보며 시대를 이해하는 통찰력을 제공한다. 브랜드 취향이 만드는 21세기 공동체, 과학 기술과 예술적 상상력이 뒤엉킨 21세기 예술, 검색 학문의 탄생, 자아도취와 외로움 사이에서 진화하는 디지털 등이 조명된다.1만 3800원.
  • 10년후 전망 쾌청… 난 신설학과로 간다

    신설된 대학 학과의 ‘1회 입학생’은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며 매사를 몸으로 부딪쳐 이겨내야 한다. 때로는 선배 없는 서러움을 겪을 때도 있다. 하지만 학교생활을 마치고 ‘1회 졸업생’이 될 때에는 어느 과보다 든든한 동기와 후배, 개척정신으로 다져진 용기와 창의력, 그리고 새로운 학문을 전공했다는 희소성을 갖추게 된다. 신설학과 자체가 새로운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학과이기 때문이다. 수험생들이 신생학과를 눈여겨 볼 만한 이유다. 비상교육 공부연구소는 최근 2년 동안 새로 생긴 학과 가운데 10년 후에 전망이 밝을 것으로 예측되는 학과 10곳을 선정했다. 융복합 학문을 배우거나 선진국형 사회에서 필요한 새로운 직업인을 기르는 학과 등이 포함됐다. 성균관대 글로벌학과는 전자의 대표적인 사례다. 글로벌 시장에서 활약할 수 있는 능력과 자질을 갖춘 국제적 수준의 인재 육성을 목표로 다양한 분야의 전공을 결합했다. 미국 인디애나 대학과 제휴해 복수학위를 수여한다. 덕성여대 Pre-Pharm·Med 전공은 이학 계열에 속해 있다. 약학대학과 의학·치의학 전문대 진학에 유리한 교육과정으로 꾸려졌다. 건양대 국방공무원학과는 국방공무원을 체계적으로 양성하기 위해 신설된 학과다. 현역병 감축 정책이 추진되면서 국방공무원 역할이 갈수록 커질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장교·부사관·기타 군과 관련한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유망한 미래의 직업에 맞춰 특화한 학과도 있다. 한국외대 중국어대학은 중국어 실력뿐 아니라 정치·경제·문학·예술 등 중국에 대한 지식과 이해력을 지닌 인재 양성에 초점을 맞췄다. 부산대 관광컨벤션학부는 문화·관광·컨벤션 분야에 대한 이론과 실습교육을 조화시켜 전문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만들었다. 인천가톨릭대 시각디자인학과는 사회가 선진화될수록 사람들의 취향이 다양해진다는 점에 착안해 만들어진 학과. 시각디자인의 전반적인 영역을 깊게 다뤄 졸업한 뒤 기업 내 디자인 부서·광고대행사·방송국 등으로 진출할 수 있다. 한국국제대 조선해양공학과에서는 조선해양기술과 해양엔지니어링 분야에 대한 기초이론과 산업체 실무교육을 반영한 복합적 실무 기술을 가르친다. 졸업한 뒤 조선산업과 해운·해양산업 분야에 진출하거나 정부 관련 부처와 출연 연구기관 등에서 활동할 수 있다. 한서대 컴퓨터정보공학부는 IT분야 기초 이론을 바탕으로 정보시스템을 개발할 수 있는 응용력을 기르도록 학생들을 육성한다. IT산업의 전망이 밝아 학과의 전망도 밝다는 분석이다. 복지 관련 학과도 여전히 주목받고 있다. 경주대 노인복지학과가 대표적인 예이다. 고령화시대가 도래하면서 졸업한 뒤 다양한 분야로 진출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탐라대 상담심리학은 심리적 문제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이 많아 주목받고 있는 과이다. 졸업한 뒤 상담심리 관련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각종 상담 및 심리치료기관과 사회복지기관 등으로 진출할 수 있다. 비상교육 공부연구소 박재원 소장은“신생학과의 경우 지원가능 점수에 대한 전망을 배치표 등으로 제한된 상태에서 하는 게 수험생의 공통적인 반응”이라면서 “적성과 흥미에 맞춰 소신지원해 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13일 TV 하이라이트]

    ●SBS 스페셜(SBS 오후 11시20분) 브래지어를 오랫동안 착용하고 있으면 유방에 어떠한 변화가 나타날까? 브래지어를 전혀 착용하지 않으면 가슴 모양이 망가지거나 처지지는 않을까. 브래지어에 대한 오해와 진실. 브래지어에 대한 불편한 진실. 과연 우리는 브래지어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불편하지만 유쾌하고 재미있지만 슬픈 브래지어 이야기를 들어본다. ●KBS 스페셜(KBS1 오후 8시) 미 의회를 움직이는 유대인 최대의 로비 단체 ‘유대인공공정책위원회’(AIPAC). 3박4일간의 밀착 취재를 통해 유대인 정치 파워의 현주소를 알아본다. 세계금융의 중심 뉴욕의 맨해튼과 월스트리트. 세계 최상급의 투자증권 회사로 명성을 떨쳤던 리먼 브러더스가 취재를 통해 가난했던 유대인 이민 세대에서부터 21세기 월가의 신화에 이르기까지를 추적해 본다. ●일요일 밤으로(KBS2 오후 11시35분) 개그콘서트의 ‘남성인권보장위원회’가 인기다. 데이트 과정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상황들을 남성의 입장에서 풀어내며 남성들의 인권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외친다. 데이트 비용은 정말 남자가 낼까? 실제 커플들을 대상으로 데이트비용을 누가 내는지 실험해본다. ●신비한TV 서프라이즈(MBC 오전 10시45분) 1940년대 말 미국과 구소련 우주개발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1961년 첫 번째 우주인이 탄생했고 1969년에는 달 탐사에 성공하게 된다. 하지만 우주개발 그 이면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었다. 과연 그 진실은 무엇일까. 또 세기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에 관한 비밀도 밝힌다. ●일요일 일요일 밤에(MBC 오후 5시20분) 24시간을 날아 아프리카 잠비아에 도착한 단비군단은 물 때문에 고생하는 주민들의 사연을 들으며,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우물 파기에 적극 동참한다. 하지만 단비군단은 쏟아지는 폭우에 발이 묶이고, 기계를 실은 차량이 웅덩이에 빠지는 등 본격적인 우물 파기에 앞서 난관에 부딪히는데…. ●그대 웃어요(SBS 오후 10시) 술에 잔뜩 취해 대문을 두드리며 소란 피우는 한세 때문에 온 가족이 각자의 방에서 나와 주정하는 그를 황당하게 지켜본다. 한세는 현수에게 다가가 괴롭다며 와락 안고 정인까지 끌어안고는 너희 둘 나한테 이러면 안 된다며 현수에게 사랑한다고 소리를 지른다. ●인류가 사라진 세상 1부(OBS 오후 1시) 인간이 없는 세계는 과연 어떤 세상일까.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세계의 모습을 보여준다. 지구상에서 인간이 모두 사라졌을 경우를 가정해 그 후에 어떠한 일들이 벌어질 것이며, 그 영향과 결과는 어떠할 것인지에 대해 분석했다. 과연 현대인들이 만든 고층빌딩과 핵발전소는 어떻게 될 것인가.
  • 그 이름을 부르면… 모든 상처가 아물거야

    그 이름을 부르면… 모든 상처가 아물거야

    연극계의 ‘엄마 열풍’이 심상치 않다. 소설 ‘엄마를 부탁해’와 영화 ‘애자’ 등 올해 문화계 전반에서 ‘엄마’가 키워드로 떠올랐다. 연극 무대에서는 해를 넘겨서까지 이를 소재로 한 연극이 이어질 태세다. 이처럼 연극계가 ‘엄마’라는 소재에 집중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엄마’에 대한 다양한 조명 올해 연극계의 ‘엄마 열풍’은 탤런트 강부자와 전미선 주연의 ‘친정 엄마와 2박 3일’에서 비롯됐다. 눈물을 쏙 빼는 두 배우의 절절한 모녀 연기로 화제를 모은 이 작품은 연극 흥행의 여파로 김해숙·박진희 주연의 영화 ‘친정엄마’로도 제작중이다. 김상경·김성수 등 쟁쟁한 TV 스타들이 출연해 화제를 모은 연극 ‘엄마, 여행갈래요?’도 암에 걸린 어머니와 함께 제주도 여행을 떠나는 철없는 아들을 통해 모성애를 조명한 작품. 출간 10개월만에 100만부를 돌파한 베스트셀러 ‘엄마를 부탁해’ 역시 내년 1월 연극 무대에 오른다. 여성으로서 엄마의 존재를 조명한 작품들도 잇따른다. 10일 개막한 손숙·추상미 주연의 ‘가을소나타’는 강한 자기애를 가진 어머니가 딸과 갈등하는 모습을 통해 모성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깬다. 18일 선보이는 ‘엄마들의 수다’는 출산과 육아 등을 겪은 주부들의 삶과 애환을 코믹하게 접근한다. ●위로와 치유로 다가오다 연극계에서는 이처럼 엄마를 다룬 작품이 쏟아지는 이유를 불안한 시대에 엄마라는 존재가 주는 위로와 치유에서 찾았다. ‘가을소나타’를 제작하는 신시컴퍼니의 최승희 홍보팀장은 “계속되는 경기침체로 마음의 여유를 잃어가는 현대인들이 엄마를 통해 위로받고 싶어하는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 같다.”면서 “직장이나 가정에서 쉽게 눈물을 보일 수 없는 중장년층 관객들에겐 엄마가 감정을 발산하는 치유의 의미로 다가서고 있다.”고 말했다. 연극과 엄마의 1차원적인 친밀감에서 공통점을 찾는 분석도 있다. 연극배우이자 ‘연극열전3’의 프로그래머로 활동하고 있는 배우 조재현은 “연극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 온 가장 원초적인 예술장르이고, 모성애 역시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감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엄마들의 수다’에서 인간적인 엄마 역을 맡은 ‘똑순이’ 김민희도 “다른 기교 없이 맨몸으로 부딪히는 연극은 내면에서 모성애가 나오지 않으면 관객들이 답답해할 수 있기 때문에 어려운 연기”라고 설명했다. ●여심을 공략해라 마케팅 관점에서는 관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여성 관객들의 티켓 구매력을 겨냥했다는 의견도 있다. 이 때문에 작품 홍보도 면세점, 백화점 문화 센터를 통해 알리거나 여성 전용 카드사와 제휴하는 방식을 이용하기도 한다. 공연 전문 기획사인 오디뮤지컬컴퍼니의 신은 대리는 “연극이나 뮤지컬 관객의 대부분은 20~30대 여성이기 때문에 모성애를 주제로 한 작품은 어머니와 함께 관람하거나 효도용 티켓으로도 판매율이 높다.”고 전했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상처입은 애인 폭약안고 뛰어들어

    상처입은 애인 폭약안고 뛰어들어

    [선데이서울 73년 1월 8일호 제6권 2호 통권 제 222호] A=현대인들은 너무 극단적인 사고를 하는 게 한가지 병폐인 것 같아. 서울 창신동 방앗간집의 폭사사건만 하더라도 그런 극단적인 사고가 빚은 비극이 아니겠어. 사랑에도 은근한 멋이 없어지고 단도직입적이거든. 쇠처럼 달았다가 금세 식어 버리고 이게 잘 조화되지 않으면 죽이고 죽는 등 제멋대로 해치우고 만단 말이야. 현대인의 심리적 결함이겠지. 신문에 보면 애인을 죽이고 자폭한 청년은 평소 부지런한 모범청년이었다지 않아. B=어쩌면 모범청년이었기 때문에 외곬으로 치달아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지도 모르지. E=현장은 그야말로 처참하더군. 두 시체가 갈가리 찢겨 있었어. 사건은 구랍 27일 아침 7시50분쯤 서울 동대문구(현 종로구) 창신3동 C방앗간(주인 김(金)모·55)집 안방에서 벌어졌는데 방앗간 종업원 권(權)모씨(25)가 「다이너마이트」를 안고 들어가 잠자고 있던 이집 셋째딸 김양(19·운동구점 점원)을 덮치며 폭사한 거였어. 이때 이 방에는 문간방에 세든 문(文)모씨의 4살짜리 아들이 함께 자고 있었으나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았으며 이 방에서 잤던 김양의 어머니는 일찍 일어나 푸줏간에 고기 사러 가고 없었어. D=위에서 덮치며 폭발시켰기 때문에 파편이 튀지 않았겠군. F=원인은 처음 둘이 깊은 관계까지 맺으며 사랑을 하다 여자가 변심했기 때문인 것 같아. 권씨가 이 방앗간에 들어온 것은 70년 6월인데 그동안 김양의 오빠와 한방에 거처하며 마치 아들같은 대우를 받아왔다고 하더군. 둘이 언제부터 눈이 맞았는지는 모르지만 사건 뒤 발견된 일기장에 의하면 그해 10월 4일에는 깊은 관계를 맺었던 모양이야. 여자의 일기에『고마워, 고마워…첫 경험』이라고 쓰여 있으니 말이야. 그해 8월부터 시작되어 71년 말까지 쓰인 이 일기장이라는 게 또 묘하더군. 대학「노트」에 한쪽은 여자, 다른 쪽은 남자가 함께 쓴 그런 것이었어. 그러니깐 둘 사이의 사랑의 경험, 속삭임같은 게 적힐 수밖에. C=그때 김양의 나이 겨우 17살인 셈인가. E=그러니까 문제였던 것 같아. 김양도 꽤 예쁜 편이지만 권씨도 상당한 미남형이었어. 김양은 어린 나이에 단순한 사랑에 대한 동경이랄까 호기심 같은 걸로 권씨를 진짜 사랑했다기 보다 열렬히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게 아닌지 모르겠어. A=그런 점에서 성교육 같은 게 문제가 되겠지. E=아무튼 경찰조사로는 재작년 음력설 때 권씨가 방앗간에서 일하다 손가락 3개를 잘렸는데 그때부터 김양의 마음이 변했다는 거야. F=손가락 없는 병신은 사랑할 수 없다, 그런 뜻인가? E=그 뒤 권씨가 운동구점으로 김양을 찾아가『죽이겠다』는 등 위협한 사실이 드러났어. 또 충북 영동에 있는 사촌형에게 『화약을 구해 달라』고 편지한 사실도 나타났지.「다이너마이트」1개를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는 아직 밝혀내지 못하고 있어. C=앞길이 창창한 젊은 사람들이…좀더 멋있게 사랑할 수 없었는지…
  • 고단한 현실 이겨낼 힘 얻으려… 허상에 좀 기대 살면 안 되나요?

    ‘오즈의 마법사’의 주인공 도로시와 친구들은 기나긴 모험 끝에 오즈의 마법사를 만난다. 하지만 천신만고 뒤에 만난 오즈의 마법사는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기는커녕 아무 힘도 없는 늙은이인 것으로 밝혀진다. 그래도 도로시와 친구들은 꿈을 이뤄줄 ‘오즈의 마법사’라는 존재를 믿고 있었기에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고, 어찌 됐든 결말에는 모두 꿈을 이룬다. 제1회 자음과모음 문학상(계간지 자음과모음 주최) 수상작인 소설가 안보윤의 ‘오즈의 닥터’는 그 제목에서부터 이미 ‘오즈의 마법사’의 오마주 낌새를 비춘다. 그렇지만 ‘오즈의 닥터’는 ‘오즈의 마법사’만큼 아름답거나 희망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더 처절하고 현실적인 시각으로 오즈의 마법사와 같은 ‘실체가 없는 믿음’, 즉 허상과 거기에 기대 살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정신치료 상담하며 허상 끝없이 지어내 제목대로 소설에는 마법사 대신 의사가 등장한다. 책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기도 한 ‘팽 닥터’라는 이름의 기묘한 의사다. 환자가 “속이 울렁거려요, 토할 거 같아요.”라고 할 정도로 기괴하고 부조화스런 모습이다. 주인공 화자(話者) 김종수가 만난 그는 두꺼운 목과 각진 어깨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가는 어깨끈의 홈드레스를 입고 나타난다. 턱을 덮고 있는 거뭇한 수염자국과 치맛자락 아래로 드러난 검은 털에 덮힌 굵은 다리, 거기다 보라색 입술과 보라색 손톱까지. 그런 꼴을 하고도 팽은 “취미야, 자기한테 피해가 가는 것도 아니잖아?”라며 오히려 당당하다. 김종수는 정신과 의사인 이 팽 닥터에게 상담을 받는다. 고등학교 교사인 김은 한 학생의 모함 탓에 성 추행범으로 몰리고, 결국 유죄 판결과 함께 정신치료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소설은 그가 팽 닥터 앞에 앉아 풀어내는 상담 내용을 바탕으로 회상이 섞여 들며 진행된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에는 일관성이 없다. 처음 김은 춤바람이 난 엄마 얘기를 꺼내지만, 뒤에 다시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엄마가 아닌 누나가 된다. 하지만 또 그 뒤에서는 그가 실은 외아들이고, 엄마는 그가 태어날 때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치료를 거듭할수록 그의 앞뒤 맞지 않는 이야기는 진실이 아니며, 결국은 그가 이야기를 털어놓던 팽 닥터까지도 허상임이 드러난다. 엄마와 누나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강한 욕구, 자신의 이야기를 한없이 풀어내고 싶다는 충동 등으로 김은 현실과 망상의 경계에 머문다. 그 경계에서 고단한 현실을 이겨낼 힘을 얻기 위해 ‘오즈의 마법사’와도 같은 존재를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닥터 팽인 것이다. 이 길고 달콤한 환상이 끝난 뒤 김은 위대한 환상의 힘에 대해 부르짖는다. “현실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환각이 보이는 상태로 좀 살면 안 되는 건가요? 현실이라고 해봐야 좋을 것도 없잖아요. (…) 나는 이제 환각도 현실도 상관없어요.”라는 그의 고백은 눈에 보이는 진실 만으로는 도저히 삶을 이어갈 수 없는 현대인의 나약함, 또 그 현대인을 억누르는 현대사회의 폭력성 등을 보여준다. ●진실한 삶 살 수 없는 현대인의 나약함 고발 이러한 모습은 “이야기를 못해 몸져누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발사의 모습이 나와 너무도 닮았다.”고 하면서 문학적 거짓, 즉 허구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작가 자신과도 맞닿는다. 소설이라는 허구를 통해 팍팍한 생활에 새 힘을 얻고자 책장을 넘기는 독자들도 마찬가지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서울현대도예공모전] “안팎의 대조적 느낌은 자신 숨기는 우리 모습”

    ■ 대상 이혜진씨 지난해 첫 출품작 ‘투영’으로 우수상을 받은 이혜진(27) 작가는 올해 두번째 도전해 영광의 대상을 받았다. 그는 “작업에만 집중했던 대학원 시절은 잊을 수 없는 즐거웠던 시간이었고, 졸업을 앞두고 이런 큰 상을 받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고 실감이 나지 않는다.”며 수상 소감을 밝혔다. 지난해 우수상을 받은 이혜진 작가의 작품에 대해 심사위원 권오훈 교수는 “작품이 지난해에 비해 완숙의 단계에 접어들었다.”면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 평가했다. 하나의 얼굴 형상 안에 또 다른 해체된 얼굴이 보이는 ‘Face’는 웅장하고 압도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 높이 140㎝정도로 크게 제작하였으며, 안팎의 얼굴을 각각 따로 제작하여 조립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안팎의 대조적인 느낌은 현대의 일상에서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무표정함으로 때로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자신을 방어하려 하지만 그 내면에는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고, 이율배반적이고 계산적인 현대인의 심리적 모순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려고 했다고 이 작가는 전했다. ■ 우수상 황지혜씨 “제가 만든 바다생물 통해 추억·동심 떠올려 보세요” 조형 부문에서 우수상을 받은 황지혜(27) 작가는 “부족한 것이 많은 저에게 뜻 깊은 상을 주셔서 감사하고, 타지에서 지내는 딸을 위해 항상 기도해주시는 부모님과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라며 수상 소감을 전했다. ‘몽환의 海林-그녀를 만나다’는 황 작가의 기억과 감정을 바다생물의 이미지를 통해 재창조하여 주관적으로 표현하였다. 동시에 잊혀 가는 꿈이나 추억들을 아름답게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지나간 추억과 동심을 더듬어 보고 싶다고 말한다. 바다는 황 작가에게 아주 중요한 추억의 한 부분이고 상상력을 지니게 할 수 있는 요소이며 끝없는 관심과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여 바다에 대한 아름답고 신비스러움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 우수상 김선민씨 “반구·타원 기초 도형으로 생성·소멸되는 변화 표현” 세라믹디자인 부문에서 우수상을 받은 김선민(32) 작가는 “개인적으로 올 한해는 많은 것을 새로이 시작하는 어수선한 한 해였는데, 그 마무리를 이렇게 뜻 깊게 할 수 있어서 내년은 더욱더 알찬 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김 작가는 “흙과 함께했던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흙은 많은 것을 대신해 주었고 가끔은 친구로, 가끔은 조언자로, 또 가끔은 좌절감을 안겨주는 매개체로 변하기도 했지만 언제나 그 좌절감을 극복하게끔 도와주는 것 또한 흙의 몫이었다.”라고 덧붙였다. 작품명 ‘more and more’ 는 무언가 변화되었고, 변화되고 있으며 변화되어 간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세상 모든 것들은 변화하기 마련.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물리적, 심리적 자극이 존재하고, 이러한 자극들은 인간과 자연을 여러 방향으로 변화시켜나가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이 김 작가의 생각이다. 그는 이번 작품에서 “이런 자극을 기본 개념으로 반구, 타원 등 기초 도형의 변화를 디자인해 점점 더 사라지거나 생성되는 변화를 표현하고 싶었다.”라고 전했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서울현대도예공모전] “기술적 완성도 높은 대형작품 많았다”

    ●도자조형 부문 올해는 예년과 비슷한 107점이 출품되어 대상 1점, 우수상 1점, 특선 7점과 다수의 입선작이 선정되었다. 기술적으로 어려운 대형의 작품들이 두드러졌으며 완성도 또한 갈수록 발전하는 느낌을 받았다. 예년과 같이 추상적인 성향의 것이 주를 이루었으나 인체와 기타 사물들을 소재로 하는 작품들도 상당수 출품되어 우리나라 현대도예의 분화작용을 읽을 수 있었다. 대상 수상작인 이혜진의 ‘Face’는 해체되기 시작하는 무표정한 두상 안에 또 하나의 해체된 두상이 존재하는 이중적 구조의 작품으로 현대인의 복잡한 심성을 그려낸 작품이었다. 크기는 물론 완성도 그리고 표현력 등에서 심사위원들의 높은 점수를 받았다. 우수상 수상작인 황지혜의 ‘몽환의 海林-그녀를 만나다’는 유기적인 난형(形)의 기본구조의 표면에 산호나 조개를 연상하게 하는 바다의 생명체를 형상화한 후 치밀하게 붙여 완성한 것으로 견고한 볼륨감은 물론 표면처리의 독특한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이외 특선작들에서도 색화장토의 기교적 구사, 타 재료와의 접목, 원료의 물성을 이용한 작품 등 새로운 조형적, 기술적 시도가 이루어졌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세라믹 디자인 부문 이 부문이 신설되어 3년이 지난 오늘의 작품들은 아이템이 다양하게 다루어졌고, 다른 재료와 함께 조화를 시도하는 등 해가 거듭될수록 유약이나 장식기법의 수준이 높아지고 있어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총 50점이 출품되어 우수상 1점, 특선 3점이 선정되었다. 우수상인 김선민의 ‘more and more’는 과감한 형태의 다섯 종류 단위체로, 다양한 연출이 가능한 디자인으로 평가 받았다. 특선작은 테이블웨어(식기)를 중심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심사위원장 권오훈 (단국대 도예과 교수)
  • [서울현대도예공모전] 大賞에 이혜진씨 ‘페이스’ 우수상 황지혜·김선민씨

    [서울현대도예공모전] 大賞에 이혜진씨 ‘페이스’ 우수상 황지혜·김선민씨

    28년 전통의 최고 권위 공모전인 ‘제28회 서울현대도예공모전’ 대상에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에 재학 중인 이혜진씨의 ‘페이스(얼굴)’가 선정됐다. 대상 상금은 1000만원이다. SK텔레콤, 하나금융그룹, 한국도자기가 후원하는 ‘서울현대도예공모전’은 한국 도예의 발전과 도예 인구의 확대를 위해 서울신문사가 주최하는 행사다. 대상 수상작인 ‘페이스’는 하나의 얼굴형상 안에 또 다른 해체된 얼굴이 보이는 구조다. 높이가 140㎝에 달해 웅장하고 압도적인 느낌을 주며 안팎의 얼굴을 각각 따로 제작하여 조립하는 방식이 사용됐다. 무표정한 겉의 얼굴과 대조적으로 혼란과 불만으로 가득한 안의 얼굴은 도자기 특유의 견고한 재질감이 더해져 근엄함이 두드러진다. 안팎의 얼굴은 일상에서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무표정하지만 때로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자신을 방어하려 하나 내면에는 불안감이 가득한 현대인의 심리적 모순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상금 각 300만원의 우수상은 ‘몽환의 海林-그녀를 만나다’를 출품한 황지혜씨와 ‘모어 앤드 모어(more and more)’를 제작한 김선민씨에게 돌아갔다. 황지혜씨의 ‘몽환의 海林-그녀를 만나다’는 바다 생물의 이미지를 통해 재창조한 개인의 기억과 감정을 통해 추억과 동심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김선민씨의 ‘모어 앤드 모어’는 반구, 타원 등 도형의 변화를 통해 점점 더 사라지거나 생성되는 변화를 표현하고 있다. 상금 50만원의 특선작에는 조형 부문에 변수현씨 등 7명이, 세라믹 디자인 부문에 김아롱씨 등 3명이 선정되어 모두 10명에게 상이 돌아갔다. 올해 공모전에는 현대도예 부문에 107점, 세라믹 디자인 부문에 50점이 출품됐다. 심사위원으로 권오훈 단국대 도예학과 교수, 우관호 홍익대 도예유리과 교수, 김미경 이화여자대학 조형예술대학 교수, 곽태영 건국대 디자인조형대학 교수, 김종인 서울여대 공예학과 교수 등 5명이 참여했다. 수상작은 18일부터 28일까지 서울 마포구 서교동 ‘자이 갤러리’에서 전시되며 시상식은 18일 같은 장소에서 열린다.(02) 338-0067.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2012’ 돌풍 CG의 힘?

    ‘2012’ 돌풍 CG의 힘?

    벌써 360만이다. 영화 비수기로 통하는 11월, 그것도 여름에 빛을 발한다는 재난 영화임에도 ‘2012’의 성공 가도를 막을 수 없었다. 지난주와 이번주 국내 스크린 가운데 3분의 1에 해당하는 900여곳을 확보하며 거센 흥행몰이를 했다. 하지만 뭔가 찜찜하다. 재난의 규모만큼이나 시나리오의 구멍도 큰 아쉬움 때문이라고 할까. 사실 재난 영화에서 철학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일 수 있다. 안 그래도 고달픈 현대인들이 영화를 매번 심각하게 볼 이유는 없다. 스트레스라도 확 날려주는 걸로 족하다. 하지만 재난 영화도 영화다. 내용 전개에 개연성이 없다든가 손발이 오그라드는(?) 노골적인 휴머니즘으로 점철돼 있다면 아쉬움이 남는 건 당연하다. 적어도 “돈만 있으면 나도 만들겠다.”는 관객의 비아냥이 나오지는 말아야 한다. ‘2012’가 그렇다. 이 영화는 기존 재난 영화의 기본 ‘공식’을 그대로 따랐다. 재난 영화의 공식은 단순하다. 우선 재난을 겪을 표본집단을 산출한다. 보통 ‘가족’이 사용된다. 다음으로 온갖 컴퓨터 그래픽(CG)로 치장한 재난으로 표본집단이 겪는 위기를 표현한다. 마지막으로 가족 혹은 이웃을 위한 숭고한 희생을 통해 휴머니즘을 이야기한다. 재난 영화가 이 틀을 벗어나기란 어렵다. 다만 시나리오를 통해 다른 재난 영화와 차별성을 부여할 수 있는 부분은 마지막 절차인 휴머니즘이다. 이 휴머니즘을 어떻게 독창적으로 구현할지, 그 안에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어떻게 담아낼까가 감독이 부릴 수 있는 최대한의 기교다. 이런 면에서 ‘2012’의 휴머니즘은 구태의연하다. 지나치게 직설적이다. 가령, 양심적인 지질학자 헬슬리 박사(치웨텔 에지오포)가 구조선에 사람을 더 태울 수 없다는 당국자를 비난하며 ‘우리는 하나’라는 식으로 각국 정상들을 설득하는 장면이나 미국 대통령의 자기 희생 등은 너무나 많이 봐온 장면들이다. 자기만 살려고 했던 러시아 출신 기업가의 비극적 최후는 기원전에도 통했다던 ‘권선징악’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쉽게 말해 시나리오를 너무 쉽게 만들었다. 엄청난 자본을 쏟아부은 CG로 치장된 이 영화는 작품성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중소영화 제작자들의 힘을 빼놓는다. 하지만 막강 CG의 힘은 시나리오의 한계를 어느정도 상쇄하고 있는 분위기다. 사실 ‘2012’는 대단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인류 멸망 시나리오 가운데 가장 피부에 와닿는 ‘자연재해 종합세트’라 부를 만 하다. 인도양 쓰나미와 태풍 카트리나, 쓰촨성 지진을 경험한 우리에겐 너무나 현실감있는 소재들이기 때문이다. 여기 올해 국내 영화계를 강타한 또 다른 재난영화가 있다. 1000만 관객을 끌어모으며 한국의 재난영화사를 다시 쓴 ‘해운대’가 그것. ‘해운대’ 역시 재난 영화의 공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차이가 있다면 표본 집단을 산출하는 과정이 구구절절하다는 것. 해운대에서 살고 있는 평범한 이웃들 삶의 긴 나열, 여기에 쓰나미라는 위기 소재를 대비시키되 재난은 영화 말미에 짧게 나타날 뿐이다. 우리 이웃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위트있게 꾸며내는 데 중점을 뒀다. 물론 이들의 평범한 삶과 재난의 개연성을 연결하는 부분이 어색하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재난 영화의 영원한 주제인 휴머니즘을 조금은 달리 표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2006년 개봉한 ‘괴물’은 재난 영화가 휴머니즘 말고도 풀어낼 스토리가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괴물의 탄생과 위기 해결 과정 속에 담긴 당국의 무능함과 정보 독점자의 야속함(?), 그리고 봉준호 감독 특유의 해학을 자연스럽게 녹여냈다. 단골 손님인 가족 휴머니즘도 빼놓지 않았다. 할리우드 재난 영화에 이런 ‘냉철한 통찰력’을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까.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무엇을 먹을까… 식탁위 6가지 비밀

    무엇을 먹을까… 식탁위 6가지 비밀

    ‘건강이 최고’란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건강에 좋다면 사람들은 무엇이든 구해다 먹을 기세다. 하지만 좋은 음식을 선별하는 것도 어렵다. 우리는 무엇을 먹고, 먹지 말아야 할까. MBC는 28일 오후 11시55분부터 6주간 ‘음식에 숨겨진 6가지 비밀’을 방송한다. 영국 BBC가 제작한 6부작 다큐멘터리로 원제는 ‘The Truth about Food’다. 방송은 음식에 관한 정보가 널려 있지만 바쁜 현대인들이 좋은 정보를 골라내기 어렵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음식에 관한 진실을 밝히는 것이 현대과학의 시급한 숙제인 만큼 각 분야 전문가들의 의견을 통해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구해보겠다는 의도다. 프로그램은 체질을 바꾸는 법, 섹시하게 사는 법, 아이들의 입맛을 바꾸는 법, 날씬해지는 법, 젊고 아름답게 사는 법, 스트레스 줄이는 법 등 총 6개 시리즈로 구성된다. 1편 ‘체질을 바꾸는 법’은 ‘원숭이들의 식사가 건강을 찾아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첫 번째 실험에서는 아홉 명의 실험 참가자들이 12일 동안 동물원에서 채소와 과일만 먹게 된다. 실험 전 받았던 검사에서 높은 콜레스테롤 수치를 보였던 이들의 몸에 변화가 생길까? 또 ‘식이섬유가 변비치료에 효과가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실험도 진행한다. 심각한 변비에 걸린 이들에게 고섬유식을 이용한 식이요법을 적용해 보는 식이다. 마늘이 정말 정력에 좋은가에 대한 질문도 흥미를 끈다. 이번 실험에 참가한 7명은 매일 생마늘을 네 쪽씩 먹게 된다. 그 가운데 6명이 발기불능을 완치한다. 도대체 마늘의 어떤 성분이 발기불능을 치료하는지, 그리고 발기불능을 단순한 남성의 성 능력 저하로 인식해도 괜찮은지 파헤친다.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옛 대우빌딩 세계최대 미디어아트 건물로

    옛 대우빌딩 세계최대 미디어아트 건물로

    오후 6시 사방은 깜깜한데 서울역 앞 서울스퀘어 건물(옛 대우빌딩)은 환하게 빛난다. 굵고 검은 선으로 단순화된 현대인들이 건물 외벽의 전면 위를 걸어다니고, 르네 마그리트의 ‘우산을 쓴 사람’이 줄줄이 외벽을 타고 내린다. 서울역에서 빠져나온 시민들은 한동안 발걸음을 멈추고 휴대전화 카메라를 꺼내 도시의 장관을 담는다. ●줄리언 오피·양만기 비디오작품 등 상영 서울스퀘어의 모든 공공미술을 시공한 가나아트갤러리 측은 23일 “작품을 선보인 지 약 일주일 됐는데 1시간에 10분씩 상영하는 시간을 더 늘려달라고 요청하는 등 시민들의 반응이 매우 좋다.”고 소개했다. 한국 근대화의 상징인 대우빌딩이 세계 최대의 미디어아트 건물로 새롭게 태어났다. 지난 18일부터 서울스퀘어 건물의 4층부터 23층까지의 외벽은 가로 99m에 세로 78m의 미디어 캔버스가 됐다. 발광다이오드(LED) 전구 6만개를 촘촘히 박아 1년10개월 동안 30억원을 들여 만들었다는 후문이다. 겨울에는 오후 6시부터 11시10분까지 정시마다 10분씩 LED로 줄리언 오피와 양만기의 비디오 작품이 서울스퀘어 외벽에서 상영된다. 영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줄리언 오피는 영국 록 밴드 블러의 앨범 ‘더 베스트 오브’의 표지 작업으로 친숙하다. 한국에서는 그의 굵고 검은 선으로 움직임이 강조된 인물이 등장하는 신용카드사 TV 광고로도 소개됐다. 앤디 워홀 이후의 팝 아티스트로 칭송받고 있지만 줄리언 오피는 자신의 작품을 ‘사실주의’라고 말한다. 인터넷 홈페이지(www.julianopie.com)를 통해 아기 턱받이 등의 예술 상품을 팔 정도로 대중적인 작가이기도 하다. 한국의 대표적인 미디어 아티스트인 양만기는 남산을 중심으로 시간과 계절별로 시시각각 변화하는 서울의 모습에 르네 마그리트의 대표적인 이미지인 중절모에 우산을 쓴 사람이 중첩된 환상적인 화면을 선보인다. 기네스북에도 오를 예정인 서울스퀘어의 미디어 캔버스는 건물 외벽을 대형 스크린처럼 꾸미는 서울시의 미디어 파사드 심의를 통과한 1호 작품이다. 서울시는 브뤼셀의 덱시아타워나 도쿄의 샤넬타워처럼 서울스퀘어가 서울의 랜드마크가 될 수 있지만 빛 공해나 광고화를 우려해 두 달이 넘도록 신중하게 심의했다. 결과적으로 서울스퀘어의 미디어 캔버스는 반사체 표면의 밝기인 휘도가 적당해 야간 운전자의 시야에 빛 번짐 현상 등을 일으키지 않는다. 한 달 전기료는 아파트 두 채에서 쓰는 정도의 수준이라고 한다. 현재 서울스퀘어의 소유주는 미국 투자은행인 모건 스탠리다. 기차를 타고 상경한 지방 출신들에게 1970년부터 위압적인 서울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던 서울스퀘어는 대우그룹 ‘세계 경영’의 상징이기도 했다. 건물의 리모델링은 끝났으며 입주사들을 위해 내부를 정비 중이다. ●시민들 “상영시간 늘려달라” 뜨거운 반응 건물 5층에서 힐튼호텔로 이어졌던 구름다리와 한국을 대표하는 조각가 고(故) 김수근씨가 일부 설계한 외벽은 선컨 가든 형태로 여전히 남아 있다. 선컨 가든 입구에는 데이비드 걸스타인의 대담한 색상의 자전거를 타는 사람, 나무 등이 설치됐고 배병우의 소나무 사진과 론 아라드, 지니서, 박선기, 김은주의 작품이 서울스퀘어 곳곳을 장식하고 있다. 서울스퀘어에 설치된 미술 작품들의 총 가격대는 60억원 수준이다. 줄리언 오피의 작품을 시작으로 2010년부터 서울스퀘어에 미디어센터가 설치되어 서울시와의 협의를 통해 작품들이 지속적으로 상영될 예정이다. 서울스퀘어에서 상영되는 줄리언 오피의 작품 속에서는 익명의 군중이 강처럼 걸어간다. 오피는 “인간에게 움직임은 매우 중요하다.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은 항상 움직이고 움직임으로 인해 살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그래픽 강미란기자 mrkang@seoul.co.kr
  • 잘못된 운동 피로골절 부른다

    잘못된 운동 피로골절 부른다

    현대인에게 운동은 부족한 활동량을 보완해 체력을 키우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등 많은 이득을 준다. 하지만 운동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무리한 욕심이 역효과를 낼 수 있어서다. 무리한 운동이 주는 후유증은 다양하지만 특히 초보자들이 겪기 쉬운 후유증이 바로 피로골절이다. ●피로골절이란? 뼈가 부러지지 않은 골절이 피로골절(Stress Fracture)이다. 피로골절은 무리한 운동으로 반복되는 충격을 근육이 흡수하지 못하고 뼈가 대신 받을 때 생긴다. 인체의 한 곳에 반복적으로 스트레스가 쌓여 골절 상태에 이르는 것. 피로골절은 부러지는 골절과 달리 뼈에 가느다란 실금이 간다. 주로 무릎 아래쪽 하퇴부의 발가락과 발목 사이, 발 뒤꿈치, 발목과 무릎 사이 정강이뼈에서 생긴다. 운동선수에게 많은 피로골절은 군대 신병들에게도 흔해 ‘행군골절’이라고도 불린다. 특히 평발이나 까치발을 가진 사람에게 많이 생기는데, 이는 평발이나 까치발이 충격을 잘 흡수하지 못해서다. ●별다른 외상 없어 방치하기 쉬워 피로골절은 대부분 약간의 부기와 견딜 만한 통증 정도만 있을 뿐 다른 외상이 없다. 이 때문에 대부분은 얼음찜질이나 파스를 붙인 뒤 운동을 계속하게 된다. 원인이 됐던 운동을 계속하면 통증이 다시 나타났다가 휴식을 취하면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이 때문에 단순 염좌로 여기기 쉽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반복하는 동안 골절 부위에 지속적으로 외력이 가해져 나중에는 뼈가 스스로 붙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피로골절은 X-레이상으로 잘 보이지 않아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는 첫 통증 유발 후 3주쯤 지난 뒤 MRI(자기공명영상촬영)나 골스캔, CT(컴퓨터단층촬영) 등으로 검사를 해봐야 판별이 가능하다. 따라서 운동 후 통증이 1∼2주 이상 계속되거나 불편감과 찜찜한 상태가 계속된다면 전문의의 검진을 받아보는 것이 좋다. 피로골절로 진단을 받으면 상태에 따라 단순한 안정요법부터 부목 또는 석고 고정까지 다양한 치료가 이뤄진다. 치료는 약물요법과 물리치료를 병행할 경우 대부분 4주 정도면 마무리된다.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수술을 받아야 하는 경우에는 이미 자생력을 잃은 경화골을 긁어내고 엉덩이뼈를 이식하는 방법이 주로 사용된다. ●피로골절 예방법 피로골절을 예방하려면 우선 자신의 신체 조건에 맞는 운동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운동능력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적당한 운동’을 규정하기는 쉽지 않으나 운동 중 가슴팍이 아프고, 힘겹다고 느껴지며, 식은땀과 함께 어지러운 증상이 나타나면 운동량을 줄여야 한다. 운동 전 충분한 준비운동도 필수. 준비운동은 긴장된 근육과 관절을 유연하게 하며, 혈액순환을 촉진해 운동에 적당한 체온을 만들어 준다. 무리하게 한 가지 운동만 하면 쉽게 피로골절이 오므로 순차적으로 다양한 운동을 하는 크로스트레이닝을 적용하도록 한다. 이때 운동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운동에 필요한 근력이 생길 때까지 서서히 운동량을 늘려야 한다. 운동 강도는 일주일에 10%씩 올리는 게 적당하다. 운동 후에는 감열법(cooling down)과 마무리운동을 빠뜨리지 않도록 한다. 감열법은 운동을 마치면서 서서히 체온을 낮추는 것을 말한다. 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칼슘과 비타민D를 충분히 섭취하도록 한다. 피로골절은 갑자기 늘어난 운동량을 뼈가 감당하지 못해 생기므로 운동 전에 칼슘과 비타민D 보충제를 충분히 섭취해 주면 도움이 된다. 운동 후 휴식도 필수. 휴식을 통해 신체의 리듬을 회복하려면 1시간의 격렬한 운동 후에 최소한 24시간의 휴식이 필요하다. 유비스 스포츠과학센터 공관우 센터장은 “운동 중 근육이나 인대, 관절 등을 다치면 치료와 휴식을 통해 완전히 회복시킨 뒤 다시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며 “피로골절을 예방하려면 무엇보다 무리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 춤추며 그림을… ‘드로잉 퍼포먼스’ 화가 송승호

    춤추며 그림을… ‘드로잉 퍼포먼스’ 화가 송승호

    “구불구불한 소나무, 온갖 풍파에도 쓰러지지 않는 우리네 인생과 닮지 않았습니까?” 허리까지 내려오는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현란한 몸짓으로 소나무를 그리는 화가가 있다. 바로 ‘드로잉 퍼포먼스’로 알려진 송승호 작가다. 송 작가는 지난 3월 타악솔리스트 최소리씨와 함께 쿠웨이트 국왕 초청으로 열린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의 기념행사에 참가했다. 그는 여기서 둔탁하고 리드미컬한 타악 연주에 맞춰 춤을 추며 국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드로잉 퍼포먼스라 부르는 그의 ‘화법’(畵法)은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기에 충분했다. 그의 현란한 몸짓과 금방이라도 향긋한 솔 냄새를 풍길 것 같은 소나무 그림을 직접 보려고 화실을 찾았다. ◆그의 퍼포먼스는 거칠고 강한 작가의 첫 인상과 닮았다 송 작가가 쿠웨이트에서 선보인 퍼포먼스는 국왕을 상대로 한 것인 만큼 거대하고 화려했다. 음악에 맞춰 온 몸을 흔들며 선을 완성해가는 그의 퍼포먼스는 긴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 때문에 어디서나 눈길을 사로잡는 그의 인상과 매우 닮아 있었다. 마치 붓과 한 몸이 된 듯 한 느낌의 퍼포먼스를 본 뒤, 그에게 작품에서 퍼포먼스가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그러자 그는 다소 강한 인상과는 반대로 ‘쿨’하게도 “아무 의미 없어요. 그저 저는 다양한 방법으로 드로잉을 시도하고 싶을 뿐 이예요.”라고 답했다. 그는 “굳이 부여하고 싶은 의미가 있다면, 음률에 몸을 맡기고 자연스럽게 어깨춤을 추고 흥을 느끼며 선을 완성하는 과정을 보여줬을 때, 처음 그림을 접하는 사람들도 즐겁게 감상할 수 있길 바란다는 겁니다.”라고 말하며, 첫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그가 그린 소나무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그의 화실에 들어서면 벽면 한 가득 매달린 소나무 사진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다양한 크기의 화선지를 물들인 것도 대부분 소나무다. 드로잉 퍼포먼스의 시작은 인물화였지만, 지금은 소나무를 더 많이 그린다. 그가 그토록 소나무에 빠진 까닭은 “내 인생과 매우 비슷해서”이다. “소나무는 다른 나무와 달리 척박하고 험한 곳에서 자생해요. 토양이 좋은 곳에서는 위로 잘 뻗지만, 낙후된 곳에서는 구불부불하게 자라죠. 어렵게 자란 소나무가 사람들 눈에는 멋져 보이지만 안에서는 매우 힘들었을 거예요.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고된 일을 많이 겪은 우리 모습 같죠.”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화선지 속 소나무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의 몸짓에서 뿜어져 나온 구불거리는 소나무는 현대인의 자화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의 그림은 치열한 현실에서 다친 마음을 위로한다 그가 그린 소나무는 상처가 많아 보인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소나무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소나무는 뼈가 뒤틀린 듯한 느낌을 준다. 그밖에 높은 하늘에 기댄 소나무들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외롭다. “사람들이 제 그림을 보고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어요. ‘현실에 치여 아픈 것이 나 혼자만이 아니구나, 나만큼 아픈 것이 여기 또 있구나.’하고 느끼면 위로가 될 것 같거든요.”그가 직접 밝힌 관전 포인트다. 송 작가는 현재 소나무와 드로잉 퍼포먼스에 빠져 있지만, 국한된 분야의 전문작가로 불리는 것은 싫다고 말한다. “하고 싶은 건 서슴없이 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어디로 튈지 몰라요. 앞으로 더 다양한 드로잉법에 도전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고 싶습니다.” 그의 소나무 그림을 모은 전시회는 오는 25일부터 다음달 1일 까지 인사동의 갤러리 이즈에서 열린다. 직접 갤러리를 찾아 그림이 주는 위로를 받아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 될 것이다. 더불어 운이 좋다면 그의 드로잉 퍼포먼스를 직접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글·사진=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영상=서울신문 나우뉴스 김상인 VJ bowwow@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이현우·박진희 친환경생활 일주일 도전

    이현우·박진희 친환경생활 일주일 도전

    지구가 점점 더워진다. 무차별한 개발로 아마존의 정글은 사라져가고 석유 사용량은 매해 최고치를 찍는다. 하지만 ‘개발의 유혹’은 달콤하다. 과연 현대인들은 개발로 생겨난 안락함을 포기할 수 있을까. MBC 스페셜 ‘북극곰을 위한 일주일’은 바로 이 물음에서 출발한다. 석유·전기·플라스틱 등 지구 온난화를 일으키는 주범들, 하지만 현대인의 안락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들 없이 단 일주일만이라도 견뎌 보자는 것이다. 일주일간의 프로젝트에는 가수 이현우와 탤런트 박진희가 도전했다. 이들은 대한민국 대표 ‘에코 셀레브리티(echo celebrity)’, 쉽게 말해 ‘친(親)환경 유명인사’다. 이현우는 야생동물 지키기 운동을 비롯해 태안 앞바다를 위한 노래 ‘기적’을 만드는 등 환경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고, 박진희는 4년째 환경영화제 홍보대사를 자청하고 있다. 이번에는 지구 온난화를 극복하기 위한 ‘리얼 생활 체험기’에 나섰다. 이들은 일단 자동차를 끊었다. 집의 두꺼비 집도 내렸다. 칫솔과 반찬통 등 생활 곳곳에 쓰이는 플라스틱 제품도 없앴다. 이현우는 단풍이 절정인 북한산의 정상 백운대에서 “케이블카로 야생동물이 도망간다면 좋아할 수만 있을까요. 결국 사람들에게도 고통스러운 공간이 되지 않을까요.”라며 담담히 말했다. 박진희는 닭 3마리와 동거를 시작했다. 아침과 저녁마다 닭으로부터 달걀을 받아내고 태양열로 계란을 부쳐먹을 요량이다. 그는 “제 평소 생각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에 참여하게 됐어요.”라고 참가 이유를 밝혔다. 먹고 싶다면 키워서, 필요하다면 직접 나가 구해서 생활해야 하는 이 실제상황에 그들은 어떻게 대처해 나갈까. 지금까지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이 ‘초절전’ 다큐멘터리는 20일 오후 10시55분 방송된다.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영웅 없는’ 재난영화…패러다임의 변화

    ‘영웅 없는’ 재난영화…패러다임의 변화

    재난영화는 지금까지 두 번의 큰 변화를 맞았다. 첫 번째는 지난 2004년 개봉한 ‘투모로우’고 두 번째는 얼마 전 개봉한 ‘노잉’과 최근 개봉한 ‘2012’다. 재난의 종류나 강도 혹은 CG(컴퓨터그래픽)의 비약적인 발전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재난을 바라보는 시각자체가 달라졌고 재난을 담아내는 서사구조가 바뀌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투모로우’ 이전까지의 재난영화들은 인간에 의한 재난이건 천재지변에 의한 재난이건 재난이 발생하면 영웅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극복하며 가족애를 일깨워줬다. ‘트위스터’, ‘볼케이노’, ‘아마겟돈’, ‘딥임팩트’, ‘코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재난의 발생원인만 다를 뿐 궁극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영화에서 주인공이나 문제해결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은 대부분 과학자나 엔지니어다. 이들 중 대부분은 괴짜 아니면 왕따를 당하는 입장이라 재난을 사전에 경고해도 정부 관료나 관계자들의 웃음거리가 된다. 재난이 닥치면 그들 중 한 사람이 희생을 하거나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모면한다. 이는 자연에 대한 두려움임과 동시에 어떤 위기상황도 극복해낼 수 있다는 인류의 자신감을 내포하고 있다. 이처럼 매번 비슷한 구성을 고집해왔던 재난영화는 이야기보다 화려한 볼거리에만 관심이 집중돼 왔다. 하지만 ‘토모로우’에서 기존의 통념이 깨졌다. 전체적인 구성은 크게 다를 바 없지만 ‘투모로우’는 영웅으로 대변되는 누군가에 의해 재난이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재난이 스스로 ‘소멸’해 버린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했어도 천재지변에 맞닥뜨린 인간은 자연 앞에 나약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 무분별한 개발로 파괴된 자연이 대재앙을 몰고 올 수 있음을 경고만 하고 스스로 물러났다면 이젠 인류를 집어 삼키고 멸망을 고한다. 멸망에서 인류를 구원해줄 영웅은 이미 ‘투모로우’에서 사라졌다. ‘2012’는 재난이 누군가에 의해 해결되거나 스스로 물러나지 않고 재난에 의해 파국을 맞는 인류의 모습을 담았다. ‘노잉’은 결정된 종말론을 말한다는 점에서 여타 재난영화들과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재난으로 인해 인류멸망을 맞는다는 점에서 비슷한 맥락이다. 두 영화에서도 극소수의 인류가 살아남아 새 출발을 암시하긴 하지만 이는 자연의 분노가 극으로 치달았음을 암시함과 동시에 현대인의 자신감 상실을 의미한다. 관객들이 재난영화에 환호하는 이유는 단순히 특수효과를 이용한 시청각적 볼거리 때문만이 아니다. 재난영화는 경외감조차 갖게 되는 자연이라는 외부적인 요소와 끊임없는 인간의 욕망이 몰고 오는 과실과 징벌이라는 내부적인 요소가 만나 한 번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특히 엄청난 난관을 극복하는 인간 의지야말로 관객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재난영화만의 관객 흡입 요소다. 하지만 영웅도 사라졌고 재난도 파국까지 치달은 상황에서 앞으로 어떤 재난영화가 등장해 관객들을 환호하게 만들지 궁금하다. 사진 = 각 영화 포스터 서울신문NTN 정병근 기자 oodless@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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