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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시 7·9급 공무원시험 총평

    서울시 7·9급 공무원시험 총평

    올해 서울시 7·9급 공무원시험이 지난 25일 전국 147개 시험장에서 치러졌다. 접수 인원 14만 7911명 중 실제 응시자 수는 8만 9631명으로 실질경쟁률은 53.1대1을 기록했다. 예년에 비해 평이한 수준의 난이도로 출제됐다는 게 수험생과 전문가의 평가다. 박문각 남부고시 학원 강사들에게 올해 서울시 7·9급 공무원 시험의 과목별 총평을 들어 봤다. ●국어- 난이도 하락… 7급 17문제가 문법 국어의 특징 중에서는 문법 문제가 비중 있게 출제된 점을 꼽을 수 있다. 유두선 남부고시학원 강사는 “7급 시험의 경우 국어에서 문법이 17문항이나 출제됐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수험가에선 대체적으로 올해 서울시 국어 시험의 난이도가 지난해보다 하락했다고 평가한다. 출제 범위를 보면 전 영역에 걸쳐 고르게 출제됐다. 9급 시험은 크게 문법 13문항, 소설·국문학사 3문항, 쓰기 1문항, 한자 1문항이 출제됐다. 7급 시험은 문법 17문항, 한자 3문항이 출제됐고, 고전문법이 3문항으로 높은 비중을 보였다. 유 강사는 “기출문제나 특정 주제에 대해 너무 집중하지 말고 기본 이론을 중심으로 기초를 탄탄히 다져가는 학습에 중점을 두고 공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국사- 순서 배열 문제 난도 높여 한국사는 지난해와 비교해 다소 평이한 난이도를 보였다는 게 선우빈 강사의 평이다. 9급 시험은 전근대사 12문제, 근현대사 8문제가 출제됐다. 단원별로 보면 초기국가 1문제, 정치사 14문제, 문화사 4문제가 출제됐는데, 무신정변기 사건의 순서를 나열하는 문제와 현대사 순서를 배열하는 문제가 수험생의 체감 난도를 높였다. 7급 시험은 전근대사 12문제, 근현대사 8문제가 나왔다. 주제별로는 정치사 16문제, 문화사 4문제가 출제됐다. 선 강사는 “특히 개항 이후 외국 시찰단 파견 순서를 묻는 문제나 발해 영광탑, 기유약조, 실학자의 토지개혁론 문제 등은 꼼꼼하게 공부하지 않으면 맞히기 애매한 문제였다”고 평가했다. 특히 이번 시험에서는 내용을 정확히 암기해야만 풀 수 있는 ‘가장 옳지 않은 것’, ‘가장 옳은 것’을 묻는 문제들이 많이 출제됐다. ●영어- 빈칸 추론 문제 비중 높아 영어는 7급과 9급 시험 모두 대체적으로 예상보다 쉬웠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충권 강사는 “문단의 논리를 알면 쉽게 풀 수 있는 문제가 대부분이었다”며 “문법을 공부할 때는 구문과 함께 해석 위주로 공부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어휘 문제는 동의어를 중심으로 공부한 수험생이라면 쉽게 풀 수 있는 수준이었다. 문법의 경우 능·수동 구분, 수의 일치, 강조 용법, 알맞은 접속사를 묻는 문제 등이 출제됐다. 특히 지문에서 실마리를 찾아내 빈칸에 들어갈 내용을 추론하는 문제의 비중이 높았다. ●행정학- 7·9급 모두 기출중심… 고득점 예상 행정학은 7급과 9급 모두 기출문제를 중심으로 출제됐다. 신용한 강사는 “과거 시험들과 비교해 논란의 여지가 없는, 대체적으로 평이한 수준의 출제였다”고 평했다. 9급 행정학은 총론 5문제, 정책론 1문제, 조직론 3문제, 인사행정론 4문제, 재무행정론 4문제, 행정환류 1문제, 지방행정론 2문제가 출제됐다. 7급은 총론 6문제, 정책론 2문제, 조직론 5문제, 인사행정론 2문제, 재무행정론 3문제, 지방행정론 2문제가 출제된 것으로 파악됐다. 신 강사는 “지난해 시험에서도 알 수 있듯 서울시 공무원 행정학 시험은 이론과 기출문제 중심으로 학습하면 된다”면서 “시험장에서 평소 실력만 발휘했다면 이번 시험은 무난히 고득점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행정법- 판례·이론·조문 적절한 배분 올해 행정법 시험 난이도는 중·상 정도의 수준인 것으로 파악됐다. 김진영 남부고시학원 강사는 “판례 위주로 출제되는 지방직 시험과 달리 서울시 시험은 판례와 이론, 그리고 조문을 적절히 배분해 출제됐다”고 평가했다. 수험생에게 다소 익숙지 않은 유형의 문제들이 나오면서 수험생의 체감 난도가 높았을 것이라고 김 강사는 전했다. 9급 시험의 출제 비중은 판례 7문제, 이론 8문제, 조문 5문제였다. 난이도에 따라 구분하면 어려운 문제가 3문제, 평이한 수준의 문제가 4문제, 아예 쉬운 문제가 13문제 정도였다. ●경제학- 계산 비중 줄어 체감 난이도 하락 경제학 시험은 계산문제의 비중이 지난해에 비해 크게 줄어 체감 난이도가 낮아졌다는 평이다. 지난해에는 계산문제가 50%나 출제되면서 많은 수험생들이 시간 부족을 호소했지만 올해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함경백 강사는 “미시경제학 8문제, 거시경제학 11문제, 국제경제학 1문제가 출제됐는데, 거시경제학의 비중이 커진 점이 특징적”이라고 설명했다. 조세부과의 효과를 계산하게 하는 등 꽤 까다로운 문제도 있었지만 최근 10년 동안 자주 등장한 문제들이 그대로 출제됐다는 게 수험가의 반응이다. ●헌법- 사시·변호사시험 같은 박스형 문제 헌법은 전체적으로 난도가 높은 수준으로 출제된 것으로 분석됐다. 조기현 강사는 “최신 판례 출제 경향이 두드러지는 만큼 수험생들은 앞으로 시험 직전까지 최신 판례를 손에서 놓으면 안 된다”며 “실무를 담당할 공무원을 뽑기 위한 시험이라는 측면에서 이 같은 출제 기조는 당분간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고 조언했다. 헌정사 파트에서도 출제됐지만 외국의 이론 등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사법시험과 변호사시험에서 쓰이는 박스형 문제가 나왔다는 점도 특징이다. 박스 안에 여러 지문을 제시하고 이를 조합한 보기 중에서 정답을 고르는 유형이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성북의 자산, 만해 한용운 삶·정신 기리는 사업 하겠다”

    “성북의 자산, 만해 한용운 삶·정신 기리는 사업 하겠다”

    강원 인제·속초 등과 협의회 구성 순례길 운영·문화 콘텐츠 개발 “광복 70주년이었던 지난해 만해 한용운을 기리는 선양사업이 국가적으로 벌어질 것으로 예상했지만 아니었습니다. 역사 앞에서 할 일을 하겠습니다.” 김영배 서울 성북구청장은 29일 성북동 심우장에서 열린 만해 한용운 72주기 추모제를 찾아 “지방정부 차원에서 협의회를 구성해 만해 선생을 기리는 사업을 펼치고 있다”고 소개했다.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시인인 만해는 대표작 ‘님의 침묵’이 유명한데 올해는 이 시가 발표된 지 90주년이다. 성북구의 주도로 만해와 인연이 있는 강원 인제군과 속초시, 충남 홍성군, 서울 서대문구 등 모두 5개 기초 지방정부가 협의회를 만들어 다양한 만해 관련 사업을 하고 있다. 협의회는 만해 순례길 운영, 문화 콘텐츠 개발 등을 함께 한다. 음악 공연, 시 낭송, 추모 법어, 뮤지컬 공연 등이 열린 심우장은 만해가 손수 집을 지어 1944년 입적할 때까지 11년간 살았다. 심우장은 한양도성과 연계한 탐방로로 인기 있는 북정마을 한가운데 자리잡았다. 최근 옛 관리동을 헐어 성북동과 심우장 전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흙마당이 이날 모습을 드러냈다. 심우장이란 이름은 불교에서 본성을 찾는 과정을 소를 찾는 것으로 비유한 데서 땄다. 추모제는 인디밴드 빈티지프랭키와 예술단체 슈필렌이 만해의 시에 음률을 붙여 만든 창작곡을 부르고 이애진 시인이 만해 시를 낭송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어 술 대신 차를 바치는 불교 전통 제례인 다례가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만해가 심우장에서 독립운동가 일송 김동삼 선생의 장례를 치르는 일화를 담은 창작뮤지컬 ‘심우’가 공연됐다. 뮤지컬은 성북구 예술단체인 극단 더늠이 제작했다. 이날 북정마을 일대에는 만해 선사의 시를 주제로 한 글씨 작품 90점이 펄럭였다. ‘님이 침묵’ 발간 90주년을 기념한 공모전 선정작으로 다음달 27일까지 한 달간 전시된다. 그동안 구는 대한민국 홍보 전문가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 서체디자인 전문회사 산돌커뮤니케이션과 함께 만해와 심우장을 알리는 책자를 제작하고 독립운동 관련 역사, 문화 알리기 행사를 펼쳤다. 성북구는 심우장이 있는 북정마을을 포함한 성북동 일대를 전북 군산처럼 근현대사를 보고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조성하고 있다. 이미 2013년 역사문화지구로 지정됐다. 김 구청장은 “성북구가 간직해야 할 소중한 자산인 만해 한용운의 삶과 정신을 사명감을 갖고 알리겠다”고 밝혔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저명한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 타계

    저명한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 타계

    현대사회의 변화상을 예견하며 왕성한 저술활동을 했던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 박사가 27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타계했다고 블롬버그가 전했다. 87세. 토플러의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가장 유명한 미래학자인 그는 제조업 기반의 경제에서 지식 기반의 경제로 이행하는 문화적 변화에 관한 책인 ‘제3의 물결’, ‘미래 충격’ ‘권력 이동’ 등을 수십권 저술했다. 토플러는 그가 만든 용어인 ‘정보시대’의 전개를 예견했고, 정보시대에서 그는 현자 또는 사상가로 통했다. 토플러는 생전에 “어느 누구도 미래를 확실히 할 수는 없다”면서도 “변화가 진행되는 패턴을 인식할 수는 있다”고 말했다. 토플러의 대표적인 추종자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해 중국의 자오쯔양 전 총리, 싱가포르의 리콴유 전 총리를 들 수 있다. 또 1994년 미국 하원의장 뉴트 킹리치는 동료 의원들에게 토플러의 최신작 ‘정치는 어떻게 이동하는가(Creating a New Civilization)’을 읽도록 권하기로 했다. 토플러의 저술은 세계 갑부이자 멕시코 통신재벌인 카를로스 슬림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이 2007년 전했다. 미래 충격은 1500만권 이상 팔렸다. 토플러는 특히 중국에는 ‘충격’을 줬다. 2006년 중국 공산당은 그를 근현대사에 가장 심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 50명에 포함시켰다. 1980년 발행된 제3의 물결과 그 비디오 버전은 중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됐고, 거의 모든 학교에 배포됐다. 토플러는 뒤날 “중국에서 배포된 책과 비디오 모두 해적판이어서 로열티를 받지 못했다”고 말한 바 있다. 미국의 중국사 전문가인 알렉산더 우드사이드는 “중국과 한국, 베트남 혁명세대는 칼 마르크스가 상상했던 파리 코뮈니케를 따르기를 원했지만, 혁명 이후 세대는 토플러가 그렸던 실리콘밸리와 담기를 원했다”고 말했다. 토플러는 1970년에 발간한 미래 충격에서 사회의 발전은 신석기 시대의 농협혁명에서 18세기 산업화, 1950년대 이후의 정보시대로 가는 일련의 물결로 봤다. 미래 충격과 제3의 물결, 권력이동 3부작은 지식이 어떻게 권력과 부를 획득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는지를 국가와 기업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 그는 기술에서 정치까지 모든 분야에서 인간은 변화의 속도에 압도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토플러는 변화의 속도에 적응하는 인간의 능력을 예측하는데 실패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기철 기자 chuli@seoul.co.kr
  • 서울 성북구, “만해 한용운 기리는 사업 하겠다”

    “광복 70주년이었던 지난해 만해 한용운을 기리는 선양사업이 국가적으로 벌어질 것으로 예상했지만 아니었습니다. 역사 앞에서 할 일을 하겠습니다.” 김영배 서울 성북구청장은 29일 성북동 심우장에서 열린 72주기 만해 한용운 추모제를 찾아 “지방정부 차원에서 협의회를 구성해 만해 선생을 기리는 사업을 펼치고 있다”고 소개했다.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시인인 만해는 대표작 ‘님의 침묵’이 유명한데, 올해는 이 시가 발표된 지 90주년이다. 성북구의 주도로 만해와 인연이 있는 강원 인제군과 속초시, 충남 홍성군, 서울 서대문구 등 모두 5개 기초 지방정부가 협의회를 만들어 다양한 만해 관련 사업을 하고 있다. 협의회는 만해 순례길 운영, 문화 콘텐츠 개발 등을 함께 한다. 음악공연, 시 낭송, 추모법어, 뮤지컬 공연 등이 열린 심우장은 만해가 손수 집을 지어 1944년 입적할 때까지 11년간 살았다. 심우장은 한양도성과 연계한 탐방로로 인기있는 북정마을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최근 옛 관리동을 헐어 성북동과 심우장 전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흙마당이 이날 모습을 드러냈다. 심우장이란 이름은 불교에서 본성을 찾는 과정을 소를 찾는 것으로 비유한 데서 땄다. 추모제는 인디밴드 빈티지프랭키와 예술단체 슈필렌이 만해의 시에 음률을 붙여 만든 창작곡을 부르고 이애진 시인이 만해시를 낭송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어 술 대신 차를 바치는 불교 전통 제례인 다례가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만해가 심우장에서 독립운동가 일송 김동삼 선생의 장례를 치르는 일화를 담은 창작뮤지컬 ‘심우’가 공연됐다. 뮤지컬은 성북구 예술단체인 극단 더늠이 제작했다. 이날 북정마을 일대에는 만해 선사의 시를 주제로 한 글씨 작품 90점이 펄럭였다. ‘님이 침묵’ 발간 90주년을 기념한 공모전 선정작으로 다음 달 27일까지 한 달간 전시된다. 그동안 구는 대한민국 홍보전문가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와 서체디자인 전문회사 산돌커뮤니케이션과 함께 만해와 심우장을 알리는 책자를 제작하고, 독립운동 관련 역사·문화 알리기 행사를 펼쳤다. 성북구는 심우장이 있는 북정마을을 포함한 성북동 일대를 전북 군산처럼 근현대사를 보고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조성하고 있다. 이미 2013년 역사문화지구로 지정됐다. 김 구청장은 “성북구가 간직해야 할 소중한 자산인 만해 한용운의 삶과 정신을 사명감을 갖고 알리겠다”고 밝혔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설렘보다 편안함, 내 생애 첫 베트남①천년 고도의 도시 하노이Ha Noi

    설렘보다 편안함, 내 생애 첫 베트남①천년 고도의 도시 하노이Ha Noi

    설렘보다 편안함내 생애 첫 베트남 이제껏 베트남에 큰 관심이 없었다. 수도가 하노이인지 호치민인지 헷갈릴 만큼. 왜 그랬을까? 일생에 한 번뿐일 거라 생각했던 이번 베트남 여행. 그러나 벌써 두 번째를 기약 중이다. 베트남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기내식 한 번 먹고 수다 좀 떨다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났더니 어느새 베트남 하늘이다. 인천을 떠난 것이 5시간 전. 꽤 시간이 걸릴 것이라 여겼는데 막상 도착해 보니 생각보다 가까웠다. 아마도 물리적인 거리보다 마음의 거리가 훨씬 더 멀었던 모양이다. 흐린 상공을 날던 비행기가 서서히 바퀴를 내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활주로에 미끄러지듯 내려섰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이 왠지 모르게 친숙하다. 드문드문 눈에 띄는 베트남어만 없으면 얼핏 보기에 한국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낯선 곳에 닿았다는 설렘보다 편안한 느낌이 먼저 다가왔다.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Ha Noi의 관문은 작년 초 신축 건물로 자리를 옮긴 하노이 노이바이 국제공항Noi Bai International Airport이다. 매끄럽게 이어진 활주로만큼 신 청사는 쾌적함과 편리함을 두루 갖추고 있다. 예전 베트남을 여행했던 누군가로부터 공항 시설이 열악하더란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이젠 다 옛말이 되어 버렸다. 신 청사가 문을 연 후 여행자들의 원성이 자자했던 구 청사는 국내선 전용으로 역할을 바꿨다. 최근 공항과 하노이 시내 간 연결된 도로까지 개선되면서 교통 환경은 물론 경제 성장을 위한 동력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 시원하게 뚫린 도로를 달리며 뉴스로만 접해 왔던 베트남 경제의 성장을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천년 고도의 도시하노이Ha Noi 1010년 리Ly 왕조가 열었던 다이비엣Dai Viet 시대부터 지금까지.하노이는 베트남의 수도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다. 97년 만에 주인을 찾은 나라 도시의 북동면을 따라 흐르는 홍강 안쪽에 하노이 시내가 자리한다. 하노이는 이런 지형에서 기인한 이름이다. 베트남어로 ‘하Ha’는 ‘강’을, ‘노이Noi’는 ‘안쪽’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이 둘을 합쳐 ‘하노이’, 즉 ‘강 안쪽에 세워진 도시’란 뜻을 담은 이름이 탄생했다. 오랜 역사와 문화적 요소들이 겹겹이 쌓인 옛 도시 위로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 문명이 계속 덧칠되고 있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베트남의 발전상에 놀라는 동안 시내를 가로질러 달리던 버스가 바딘Ba Dinh 광장에 멈춰 섰다. 바딘 광장은 1945년 9월2일 호치민 초대 주석이 독립 선언문을 읽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 건립을 공표한 의미 깊은 장소다. 유럽이 식민지 개척에 한창 열을 올리던 때 베트남은 1858년부터 1945년까지 97년간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우리와 같은, 이들의 아픈 역사가 나도 모르는 새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일까. 식민지 시대 종결과 더불어 남북으로 갈려 민족간 이념 전쟁을 치른 역사도 다르지 않다. 베트남과의 첫 조우에서 왠지 모를 친숙함이 들었던 건 우연이 아니었나 보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베트남은 20여 년에 걸친 이념 전쟁 끝에 1976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통일된 것이다. 베트남의 근현대사가 응축되어 있는 바딘 광장 주변으로 호치민 유적지가 있는 주석궁과 국회의사당, 호치민 묘와 박물관 등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샛노란 빛깔에 유럽식 건축 양식이 두드러지는 주석궁은 식민지 시절 프랑스 총독 관저로 지어졌다. 첫눈에 반할 만큼 아름다운 건축물이지만 그 이면에는 베트남인들의 고통과 눈물이 가득 배어 있다. 그렇기에 독립 이후 호치민 주석은 주석궁에 들어가는 것을 거절하고 그 옆 전기수리공이 살던 집에 기거하며 검소하게 생활했다고 한다. 주석궁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작은 집이지만 그곳이 더 빛나고 품격 있어 보이는 건 나만의 착각인지도 모르겠다. 절대 권력자의 집무실과 침실이 어찌 그리 소박한지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겨지지가 않았다. 한평생 독신으로 살며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호치민은 오랜 세월에도 변함없이 전 국민적인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그는 죽은 후 화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국민들의 추앙심이 워낙 높았던 탓에 사망(1969년) 후 그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묘소 안 유리관에 안치됐다. 호치민 영묘 앞은 그에게 헌화하기 위한 사람들로 아침마다 긴 줄이 이어진다. 호치민이 살아 있다면 이 광경을 어떻게 바라볼까. 그런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나 또한 그 줄에 서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영묘는 오전에만 개방되기 때문에 문 앞에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지만, 덕분에 하노이를 다시 찾아야 할 이유가 하나 생겨 버렸다. 하노이 여행의 필수 코스 하노이의 명물인 수상 인형극은 매 공연마다 전 좌석이 매진될 만큼 인기가 높다. 리 왕조 때부터 전해 내려온 수상 인형극은 독특하게도 무대가 물 위다. 즉석 연주에 맞춰 꼭두각시 인형들이 물 위를 자유롭게 누비며 전통적인 베트남의 생활 풍습과 환검 호수에 얽힌 전설을 들려준다. 베트남어를 알아듣지 못해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인형들의 몸짓이 충분히 재미나다. 탕롱 수상 인형극 공연장Thanglong Water Puppet Theatre 57b Dinh Tien Hoang Str., Hanoi, Vietnam www.thanglongwaterpuppet.org 글·사진 Travie writer 정은주 에디터 고서령 기자 취재협조 비엣젯항공 www.vietjetair.com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 서울시의회 이혜경의원 “한복 착용 장려-지원 체감할 수 있도록 하겠다”

    서울시의회 이혜경의원 “한복 착용 장려-지원 체감할 수 있도록 하겠다”

    서울시의회 이혜경 의원(새누리, 중구2)이 대표발의한 「서울특별시 한복착용 장려 및 지원에 관한 조례안」이 6월 27일 본회의에서 통과됐다. 이 조례안은 2013년부터 한복을 착용하면 서울 4대 고궁, 종묘, 조선왕릉 등에 무료입장이 가능해지면서 외국인들과 10대 · 20대 젊은 세대에게도 한복착용이 하나의 트랜드로 자리매김하였으나, 이러한 한복 열풍이 한복 구매로는 이어지지 않고 한복을 코스프레 정도로만 여기는 풍토를 안타까워하며 시 차원에서 한복착용을 적극 장려하고 활성화시키기 위해 한복의 생산 및 보급을 위한 산업을 육성하고 이에 노력하는 단체 등에 예산을 지원하는 등의 실질적인 지원을 하고자 발의했다. 이혜경의원은 “우리 전통문화의 중심인 한복이 고유성을 회복하고 현대사회의 시대적 요구와 흐름에 맞게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제도적 마련이 시급하며, 이 조례를 통해 더 이상 한복이 명절 및 예식에만 입는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옷이라는 생각에서 탈피하여 자랑스러운 우리의 복식 문화로 거듭나고 주변에서 쉽게 한복을 입은 모습을 볼 수 있게 되길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또한 “현재 한복착용 관련 조례가 인천광역시, 전라북도, 경기도, 대구광역시, 서울 은평구에서 제정되어 있으나 조례 제정 후 사업계획이나 방침서도 없고 실질적인 한복착용을 장려하기 위한 노력은 아직 미비한 것으로 나타나 시민이 체감할 수 있는 한복착용 장려 및 지원정책을 마련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을 찾아서] 청계천 물길 끊긴 자리 시장이 아파트를 낳았네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을 찾아서] 청계천 물길 끊긴 자리 시장이 아파트를 낳았네

    # 건물에도 ‘호적’이 있다 사람에게 호적이 있다면 건물에는 건축물 관리대장이 있다. 호적에 양친 부모 이름이 나오는 것처럼 건축물 관리대장에는 건축주, 설계자, 감리자, 시공자 등의 이름을 적는 칸이 있다. 허가일, 착공일, 사용승인일 등 건물의 탄생 과정과 관련된 중요한 날짜뿐 아니라 주차장, 승강기, 심지어 건축물 에너지 소비 정보에 기타 인증 정보까지 모두 적게 되어 있다. 1992년 ‘건축물대장의기재및관리등에관한규칙’이 개정된 이후는 여기에 건축물 현황도면까지 첨부하게 되어 있다. 즉 이 문서만 보면 한 건물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항상 불완전하다. 제도는 제도일 뿐, 그 영향이 모든 건물에 다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래된 건물의 경우 건축물 관리대장의 여기저기에 공백이 있는 경우가 흔하다. 기록만으로 보면 ‘아버지 어머니도 없는’ 건물이 부지기수다. 심지어 생일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람으로 치면 천애고아다. 물론 난리를 많이 겪은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그러나 때로는 단순히 행정력이 못 미친 결과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효자아파트가 바로 그런 경우다. 1960년 말이나 1970년대 초의 건물일 것이라고 짐작은 했다. 그런데 관련 자료 어디에도 믿을 만한 건립 연대가 나와 있지 않았다. 심지어 건축물 관리대장은, 과장해서 말하자면, 채워진 칸보다 빈칸이 더 많아서 텅 빈 벌판 같았다. 호기심 있는 독자들을 위해 이런 경우에 취할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을 제시한다. 바로 구가옥대장을 열람하는 것이다. 구가옥대장은 건축물 관리대장의 전신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현행 건축물 관리대장에 모두 기재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건축물 관리대장은 전산화되어 어디서나 쉽게 인터넷으로 열람할 수 있지만 구가옥대장은 그렇지 않다. 직접 해당 관청을 방문해서 열람신청을 해야 한다. 오래된 서류이므로 관청에서도 매우 신중을 기해서 다루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관청 직원과 함께 오래되어 색이 바랜 서류를 하나하나 뒤지는 것은 매우 독특한 아날로그적 경험이다. 이렇게 해서 어렵게 알아낸 효자아파트, 즉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인동 자하문로변 ‘점포 및 아파트’ 집합건축물의 완공일은 1969년 11월 15일이다. 이 연재에서 얼마 전에 다뤘던 낙원빌딩(상가+아파트), 일부분만 남은 청계천변 삼일아파트, 완전히 사라져 윤동주 언덕에 자리를 내준 청운아파트 등과 동갑이다.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주상복합 건축으로 종종 거론되는 세운상가보다는 단 1년이 늦을 뿐이다. 2016년 현재 기준으로 40대 후반의 건물이다. # 백운동천과 자하문로 이와 맞물린 또 다른 하나의 중요한 기록이 있다. 바로 다름 아닌 효자아파트 앞길, 즉 자하문로에 대한 것이다. 지금의 자하문로는 폭이 25~30m에 달하고 왕복 4~6차선인 넓은 도로다. 하지만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상황은 전혀 달랐다. 우선 청운동에서 시작한 하천이 이 도로의 현재 서쪽 변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이른바 백운동천(白雲洞川)이다. 청계천의 본류이므로 지금도 공사 표지판 등에 ‘청계천 좌안상수’(左岸上水)라는 또 다른 이름이 사용되기도 한다. 이 물길과 지금의 자하문길 동측 사이에는 길게 연결된 수많은 필지들이 있었다. 백운동천은 일제 강점기인 1930년쯤에 복개되었다. 그리고 나란히 늘어선 여러 집들이 철거되면서 현재의 자하문로가 된 것이 1978년의 일이다. 효자아파트가 건립되고 9년 만의 일이다. 이 과정에서 효자아파트가 잘려 나갔을까? 마치 1979년 충정로가 확장되면서 충정아파트의 앞부분이 심하게 훼손되었듯이. 지도를 통해 전후 상황을 보면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일제 강점기인 1936년과 대한민국 시대인 1993년의 지도를 비교해 보면 현재의 자하문로는 길 양옆의 건물들을 잘라내면서 만들어진 도로가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백운동천의 복개와 띠처럼 연속된 여러 필지의 멸실이 결과적으로 현재의 도로폭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효자아파트의 현재 모습을 봐도 별다른 변형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측면이 평활한 벽인데 반해서 전면에는 콘크리트 보와 기둥이 이루는 프레임이 돌출되어 있다는 차이가 있으나, 이것은 조형 언어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 시장과 한 몸을 이룬 본격적인 상가아파트 효자아파트의 가장 큰 특징은 역시 본격적인 상가아파트라는 것이다. 심지어 바로 옆의 통인시장과 아예 한몸을 이루고 있다. 이 연재에서 다룰 예정인 홍제동의 원일아파트가 인왕시장과 한몸을 이루고 있는 것과 유사한 상황이다. 그렇다면 효자아파트와 통인시장은 어떤 관계일까. 간단히 정리하자면 통인시장이 효자아파트를 낳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통인시장은 종종 ‘사대문 안의 유일한 지역형 전통 시장’으로 불린다. 이렇게만 들으면 그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을 것 같지만, 사실 그 기원은 일제 강점기다. 오늘날의 서촌 일대는 일본인들이 가장 빨리 정착한 곳이기도 했다. 통의동 일대의 동양척식회사 사택이 이미 경술국치 다음해인 1911년에 들어섰을 정도다. 이후 총독부와 총독 관저 등이 이 지역으로 옮겨오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통인시장은 결국 이들 식민 지배자와 그 가족을 위한 시설이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1941년 6월 ‘제2 공설시장’으로 개설되었다. 당시 단층의 시장 건물이 있던 자리가 바로 현재의 효자아파트다. 이렇게 시장에 기원을 두고 있는 탓에 효자아파트는 지상 5층 건물이지만 주거 부분은 3개 층에 불과하다. 1층과 2층, 그리고 지하층이 모두 상가다. 건물 전체로 보면 상가와 주거의 비중이 같은 것이다. 아마도 이 연재를 통틀어 세운상가를 제외하고는 가장 상가 비중이 높은 사례일 것이다. 게다가 이 상가는 모두 통인시장의 일부로서 기능한다. 특히 1층은 통인시장과 완벽하게 통합되어 있다. 이 연재에서 소개하는 오래된 아파트들의 공통점은 완공 당시의 인기가 대단했다는 것이다. 특히 연예인, 방송인 등 유명인들의 이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미 소개한 서소문아파트가 그렇고 앞으로 소개할 안산맨션이나 세운상가가 또한 그렇다. 효자아파트도 예외가 아니다. 심지어 멀지 않은 청와대의 직원들도 여기 거주했었다고 전한다. 통인시장 동쪽 입구 바로 오른쪽에 효자아파트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통인시장은 이전부터 생선회로 유명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지금도 이 지하에 생선 가게가 있다. 계단실은 자하문로에 면한 건물의 코너 부분과 건물의 다른 쪽 끝인 통인시장 안쪽, 이렇게 두 군데가 있다. 특이하게도 지하 한쪽에는 광화문 검도장이, 2층에는 합기도보존연구회가 있어 자못 무(武)의 기상이 넘치는 건물이기도 하다. TV 프로그램 ‘비정상 회담’의 독일인 출연자 다니엘 린데만이 이 합기도장을 다니는 탓에 종종 거리에서 그를 목격하는 즐거움이 있기도 하다. 통인시장 안쪽 계단으로 내려가 보면 ‘통인시장 DIY 목공방 & 잡도리 쉼터’라는 공간이 있는데 60년대 말에 지어진 건물치고는 지하실의 층고가 상당히 여유롭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지하를 개발한 이유는 역시 시장과 인접한 건물로서 그 기능의 일부를 수용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두 계단 모두 도로나 시장에서의 접근이 쉬워서 그냥 ‘쓱’ 들어가면 된다. 그리고 걸어 올라가면 바로 아파트다. 계단실마다 경비실, 혹은 관리사무실이 있지만 그나마 통인시장 안쪽은 사용하지 않고 있는 듯하다. 지금 같으면 상가와 주거의 동선을 철저하게 분리했을 것이다. 적어도 이 당시에는 주거의 프라이버시에 대한 생각이 지금과 많이 달랐음을 알려주는 부분이다. 건물의 동남쪽 코너에 있는 자하문로 변 계단은 특이하게도 평면이 삼각형이다. 그래서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피자 조각 같은 구성이 재미있다. 다만 목재 난간이 다소 낮아서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무서운 느낌이 든다. 물론 낙하물 방지를 위한 망이 중간에 설치되어 있다. 두 개의 계단실을 연결하는 복도가 건물 중앙을 가로지르며 이를 중심으로 크게 북향과 남향으로 나뉜다. 다만 자하문로 쪽에 일부 동향 가구가 있고 반대쪽에는 서향 가구도 있다. 코너에 있는 가구는 상당히 개방감이 좋을 것으로 짐작된다. 건물의 모든 방향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3층의 경우 남향 가구의 출입구보다 북향 가구의 출입구가 더 높은데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건물의 북쪽 지역은 마침 인접한 건물들이 높지 않다. 게다가 인왕산과 북악산이 지척이라 경관이 상당히 좋은 편이다. 하지만 남쪽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2005년 설치된 통인시장 아케이드가 3층 일부를 가리고 인근에 건물들이 여럿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답답함을 일거에 날려 주는 곳이 있으니 바로 옥상이다. 이 일대에서는 5층인 효자아파트가 비교적 높은 건물에 속한다. 따라서 그 옥상에 오르면 그야말로 주변의 풍광이 감싸듯이 펼쳐진다. 서쪽을 보면 인왕산이요 고개를 돌리면 북악산이다. 게다가 주민들 간에 어떤 약속이 있는지 옥상이 매우 청결하게 유지되고 있다. 장독, 에어컨 실외기 이외에는 이렇다 할 물건들이 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시원하게 탁 트인 널찍한 공간이 아파트 위에 있는 것이다. 무지개떡 건축 이론에 의하면 이런 옥상은 마땅히 생활공간의 일부로서,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다만 도시형 상가아파트라는 복잡한 상황을 고려하면 거의 백지 같은 지금의 상황이 갖는 설득력도 있을 것이다. 하여간 이 옥상 덕분에 효자아파트는 아주 근사한 전망대를 거느린 건물이 되었다. 특히 해질 무렵 여기서 바라보는 서촌 일대의 풍경은 서울 구도심이 갖는 매력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고 보면 효자아파트는 정동아파트, 회현아파트 등과 더불어 사대문 안에 아직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유서 깊은 아파트 중 하나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2012년에 ‘아트게이트’라는 이름으로 통인시장의 여러 입구를 설계했다. 그중 시장의 얼굴로서 가장 비중이 높은 동쪽 입구가 효자아파트와 바로 인접하고 있다. 한옥의 구조를 응용한 구조물로서 그해 대한민국 공공디자인 대상을 받았다. 설계 당시에는 효자아파트에 대해서 그리 잘 알지 못했으나 이번 연재를 준비하면서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유서 깊은 장소를 대상으로 공공의 영역에서 작업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던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
  • ‘평판’ 만들고 차별하는 빅데이터

    ‘평판’ 만들고 차별하는 빅데이터

    블랙박스 사회/프랭크 파스콸레 지음/이시은 옮김/안티고네/344쪽/1만 6000원 미국의 유통업체 ‘타겟’은 2012년 한 고객으로부터 거친 항의를 받았다. 타겟이 그의 10대 딸에게 출산용품 카탈로그를 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후 그 고객은 타겟에 사과해야 했다. 실제로 그의 딸이 임신 중이었던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부모도 알지 못했던 딸의 임신 사실을 기업이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비결은 빅데이터를 분석한 ‘소비자 프로파일링’에 있다. 타겟은 자사의 ‘산모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산모들과 일반 소비자들 간의 구매 정보를 비교 분석했다. 산모들은 첫 20주 동안 ‘칼슘, 마그네슘, 아연 같은 영양보충제’를, 임신 기간 중에는 무향 비누 등이 공통적으로 구매했다. 만약 애틀랜타에 사는 23세 여성이 3월에 코코아 버터 로션과 대형 손가방, 아연과 마그네슘 보충제를 구입했다면 타겟은 그녀가 임신 중이며, 8월 말에 출산 예정일 확률이 87%라고 추정했다. 이후 타겟은 2014년 1월 1억 1000만명의 데이터를 해킹당하는 최악의 사고를 냈다. 현대사회에서 개인정보와 프라이버시가 더이상 지켜질 수 없다는 건 이제 상식 아닌 상식이 됐다. “완벽한 검색엔진이란 신의 마음과도 같아질 것”이라는 구글 공동창업자 세르게이 브린의 말도 현실이 되고 있다. 쇼핑 취향뿐 아니라 의료, 금융 등 수많은 정보들을 분석하는 빅데이터 기술이 발전하면서 기업들이 앞다퉈 고객 정보를 수집·추적하는 이른바 ‘블랙박스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간 ‘블랙박스 사회’의 저자 프랭크 파스콸레 미 메릴랜드대 교수는 지난 10여년간 우리가 인터넷과 스마트폰, 신용카드 결제를 통해 매일 생산하는 정보들이 어떻게 수집·관리되는지를 수많은 사례들을 통해 생생히 전달한다. 저자는 오늘날 모든 데이터는 블랙박스 시스템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인풋과 아웃풋은 확인되지만, 인풋이 어떻게 아웃풋으로 바뀌는지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알고리즘 시스템’이다. 정보통신(ICT) 기술은 수익 창출을 위해 각종 알고리즘을 개발하고, 정보수집에 점점 열을 올리면서도 이를 통제하려는 규제에는 저항하는 태도로 이 같은 시스템을 구축해왔다. 블랙박스 시스템은 사람들의 ‘평판’을 만든다. 우리가 매일 검색엔진과 온라인 쇼핑몰을 이용하며 제공하는 정보들을 분석하는 알고리즘에 의해서다. 부부 간 문제로 상담을 알아봤다면 이혼 가능성, 이후 닥칠지 모르는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신호를 신용카드 회사에 보내는 식이다. 일반인은 어떻게 산정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은행의 개인 신용등급도 마찬가지다. “블랙박스 사회는 정보가 독점되고 비밀로 유지되어야만 유용하다는 신념하에 돌아가고 있다. 즉, 블랙박스 사회에서 테러리스트들은 위험하므로 감춰져야 한다. 병자들은 의료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감춰져야 한다. 정체불명의 알고리즘에게 우리는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나 병자일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역시 감춰져야 한다.”(94~95쪽) 저자의 이 같은 지적은 블랙박스 시스템이 어떻게 편견과 차별을 낳는지를 보여준다. 알고리즘에는 특정 계층을 불리하게 취급하는 논리적 장치가 숨어 있고, 자칫 엉뚱한 분석은 평생 주홍글씨 같은 낙인으로 찍혀 개인이 바로잡기도 어려워진다. 검색엔진도 결코 공짜가 아니다. 오히려 수익 극대화라는 본래 목적을 위해 검색 순위에 개입하고 데이터를 조작하기도 한다. “우리는 서비스를 사용하는 대가로 마케팅의 원료인 자신의 데이터와 관심을 지불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검색이 객관적이라는 생각도 오산이다. 검색창의 자동완성 기능이나 검색어를 입력했을 때 종종 뜨는 ‘○○○로 검색하시겠습니까’라는 제안은 검색엔진의 알고리즘이 이미 사용자에 대한 관심사를 알고 있다는 점을 뜻한다. 각 사용자에 대한 주관적 판단이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 같은 블랙박스 시스템에 어떻게 대항할 수 있을까. 저자는 공적 영역을 강화하고, 기술을 개방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블랙박스 시스템의 기능 자체가 공공의 영역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검색엔진을 감독할 ‘연방검색위원회’ 신설도 함께 제안했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김남경의 예술마을 기행] 시가 뭐꼬? 시집 낸 할매… 학춤 봤나? 춤 추는 할배

    [김남경의 예술마을 기행] 시가 뭐꼬? 시집 낸 할매… 학춤 봤나? 춤 추는 할배

     경북 칠곡은 참 낯설다. 칠곡과 관련하여 어떤 물건이나 사건 등도 떠오르지 않는다. 어떤 명소가 생각나지도 않는다. 칠곡의 위치도 대략 짐작할 뿐이다. 확인해 보니 칠곡은 대구, 구미, 김천 사이에 위치하고 있고 도시와 농촌의 복합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곳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여행에 있어서 칠곡의 테마는 ‘호국의 고장’이다. 장년층 이상의 세대들에게는 칠곡이 6·25 전쟁 당시 가장 치열한 낙동강 전투가 일어났던 곳이라고 기억될 만 하지만 중년, 청년층에게는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가 겨루었던 어느 격전지보다도 먼 얘기 같다. 실제 칠곡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어서 조선시대는 물론 삼국시대에도 종종 치열한 전투가 일어났던 곳으로 유명하다.  그러던 칠곡이 달라지고 있다. 시(詩)와 연극, 전통춤, 이야기 등이 마을마다 스며들어 말랑말랑한 감성이 살아있는 고장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지난해 가을 첫 시집을 펴낸 칠곡의 할머니들이다. 남계마을을 중심으로 거주하는 칠곡의 할머니 89명이 참여해 펴낸 시집 ‘칠곡 할매들, 시를 쓰다 <시가 뭐고?>’가 7개월 만에 6쇄를 찍고 6500부를 판매하며 조용히 문학, 출판계에 돌풍을 일으켰다.  “사랑이라 카이 / 부끄럽따 / 내 사랑도 / 모르고 사라따 / 젊을 때는 쪼매 사랑해조대 / 그래도 뽀뽀는 안해봣다”(사랑, 박월선)  “논에 들에 / 할 일도 많은데 / 공부시간이라고 / 일도 놓고 / 헛둥지둥 왔는데 / 시를 쓰라 하네 / 시가 뭐고 / 나는 시금치씨 / 배추씨만 아는데”(시가 뭐고, 소화자)    맞춤법이나 운율 등을 따로 배운 것도 아닐 텐데 그들이 걸어온 삶이, 현재의 생활이 고스란히 시 속에 살아있다. 글을 막 배운 아이들 마냥 평균 나이 75세의 ‘할매’들 시가 순수하다. 이러한 감성들이 시 한줄 쓰기는커녕 읽기도 힘든 요즘 사람들 가슴에 무언가 울림을 남긴다.  지난 5월 말에는 칠곡군이 주최하고 이야기경영연구소에서 운영한 ‘시 낭독 열차’가 서울역에서 칠곡군을 향해 떠났다. 초여름의 싱그러움이 넘치던 주말 약 80여명의 도시인들이, 부부시인으로 유명한 장석주· 박연준 시인과 함께 칠곡의 할머니 시인들을 만나러 갔다. 칠곡 남계마을을 대표하는 신유 장군 유적지 마당에 모여 두 시인과 할머니들이 읽어 주는 시도 듣고 남계마을의 저수지 둘레와 솔길을 가볍게 걷기도 했다. 고즈넉한 농촌 마을이 이때만큼은 유명 관광지 부럽지 않은 인기 여행지가 되었다.  칠곡의 감성은 시 뿐만이 아니다. 연극과 춤 등 장르를 넘나든다. 시인 할매들이 ‘전국구’ 스타라면 지역 스타는 연극하는 배우 할매들이다. 60~70대 할머니들이 주축을 이룬 어로리의 ‘보람할매연극단’은 2013년 창단해 지역에서 각종 공연을 갖더니 지난해 10월 서울에서 열린 실버축제에서 최우수상을 타기도 했다. 한글을 배우면서 글맛에 이어 몸으로 표현하는 맛을 알게 된 덕분이다. 2015년에는 독자적으로 연극축제를 열기도 했다.  학상리의 할매, 할배들은 ‘학춤’을 춘다. 마을이름이 ‘학상리’인 것에서 착안해 우리나라의 대표 민속춤인 승무를 변형해 주민들 스스로 학이 되었다. 하얀 도포 입고 검은 갓을 쓰고 학이 되어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을 배경으로 추는 군무는 그 자체가 장관이다. 논 한가운데 있던 폐쇄된 보육센터를 주민들의 커뮤니티 공간이자 외부인들이 편하게 찾아올 수 있는 카페로 개조하기도 했다. 2층 카페 테라스에 앉아 초여름 모내기를 끝낸 연초록의 들판과 가을 벼가 익어가는 황금 들판을 바라보며 마시는 차 한 잔은 도심의 번화가에서는 누릴 수 없는 여운을 남긴다.  칠곡이 ‘인문학 도시’를 선언한 것은 2011년부터다. 10여 년 전 주민 평생교육을 목표로 부문별 학습 프로그램을 실시해왔던 것에서 마을마다 특정 주제를 결합하여 본격적으로 인문학 마을 육성에 앞장 섰다.  칠곡군 교육문화회관 지선영 평생교육담당관은 “주축을 이루고 있는 60~70대의 주민들은 스스로가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관통한 삶을 살아왔지만 당신이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며 “특히 할머니들은 글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한 분 한 분이 주인공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라는 생각으로 ‘인문학 마을’ 사업을 펼치게 됐다”고 설명했다. 지난해까지 19개 마을이 참여했고 올해 5개 마을이 추가로 ‘인문학 마을’ 사업에 참여한다. 마을의 전통 민속축제를 재현하기도 하며 옛날 빨래터에 모여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장르를 국한하지 않으니 매년 가을 ‘인문학 축제’가 열리면 볼거리는 더욱 풍성해진다.  무엇보다 칠곡의 인문학 마을이 인상적인 것은 철저히 마을에 뿌리를 두고 주민 스스로가 꾸려가는 것이다. 외부 전문가는 돕기만 한다. 시인, 배우, 선생님, 합창단, 춤 등은 ‘남의 인생’이겠거니 했는데 생각조차 못했던 늘그막에 주인공이 된 것이다. 주민들의 눈빛과 얼굴표정이 바뀌니 도시에 나갔던 자식들까지 달라졌다. 고향엔 관심조차 없던 자식들도 변화된 부모님과 고향의 모습에 열렬히 응원하며 관심을 보탠다. 세대, 지역 간의 갈등까지 저절로 줄어들고 있다. 글 사진 여행작가 enkaykim@naver.com ■ 여행수첩 (지역번호 054) →함께 가볼 만한 곳:가산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 가산에 삼중으로 축조한 성이다. 학상리 부근에 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은 1952년 설립된 대표적인 가톨릭 성당의 하나로 붉은 벽돌의 서양식 건물이 엄숙하면서도 아름답다. 영화, 드라마 촬영지로도 유명해 조용히 돌아보는 이들이 많다. 왜관역에서 걸어서 갈 수도 있다. →맛집:어로리에선 공연이 열리는 날이면 마을 주민이자 배우들이 손수 밥상을 차린다. 왜관역 앞 우동김밥점(972-8253)은 직접 만든 김밥과 우동의 깔끔하면서도 깊은 손맛이 인상적이다. 칠곡에서 가장 유명한 맛집은 한미식당(974-0390)과 국제식당(973-5333)이다. 옛날 소스맛의 돈가스와 직접 만든 두툼한 패티의 햄버거, 돈가스 샌드위치 등을 판다.
  • [In&Out] 한국영화 100년, 이제 영화박물관이 필요할 때/류재림 한국영상자료원 원장

    [In&Out] 한국영화 100년, 이제 영화박물관이 필요할 때/류재림 한국영상자료원 원장

    1919년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김도산 감독)가 개봉한 이래, 한국영화는 2019년 탄생 100주년을 맡는다. 지난 100년 동안 한국영화는 우리의 근현대사와 함께하며 변화와 발전을 거듭했고, 때로는 국민들로부터 외면을 받는 어려운 시기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 영욕의 시간을 거쳐 우리는 현재 1인당 영화관람 횟수 세계 1위, 3년 연속 영화관람객 2억명 돌파라는 양적 성장과 함께 작품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웰메이드 완성작의 수출편수 지속 증가라는 질적 성장을 이루어내며 세계 5대 영화강국으로 자리매김했다. 영화는 우리가 친근하게 누리는 대중문화이자 예술이고, 당대 기술의 집약체이기도 하다. 또한 한 편의 영화는 개인의 창작물인 동시에 국민의 집단적 의식과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기에 그 자체가 역사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영화 탄생 100주년을 준비하는 우리에게 영화문화와 역사를 풍성하게 정립하고 나아가 영화산업의 현재와 미래를 기념하고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아시아를 비롯한 서구의 많은 나라들은 자국 영화의 역사를 정립하고 이를 세계에 알리는 교두보로서 영화박물관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전통적인 영화강국들은 이미 자국을 대표하는 영화박물관을 운영 중이다. 이 박물관들은 세계 영화팬들의 성지이자 관광객을 위한 랜드마크로 기능한다. 또한 중국은 2007년 베이징에, 2012년에는 상하이에 세계 수준의 첨단 영화박물관을 건립했고, 미국 할리우드는 2017년 완공을 목표로 영화박물관을 건립 중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상황은 어떨까. 우리도 국가가 운영하는 영화박물관이 서울 상암동에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의 영화박물관은 200여평 남짓의 협소한 전시실이 전부이고, 그것마저도 영화에 사용된 소품, 의상 등 전시자료의 부족으로 풍부하고 다양한 전시를 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한국영상자료원은 지난 6월 2일 ‘영화박물관 건립을 위한 공청회’를 열어 영화계와 산업계, 언론 등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한 바 있다. 물론 우리의 영화역사를 전시하는 방식과 규모에 있어서는 모두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지만 국가를 대표하는 영화박물관이 건립되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는 올해 칸영화제에서 176개국에 수출돼 한국영화 최다 국가 판매 기록을 세웠다. 이는 ‘태양의 후예’, ‘런닝맨’ 등 방송 분야에서뿐 아니라 영화 역시 ‘한류’ 바람을 일으키며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다양한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는 점을 반증한다. 필자는 한류의 뿌리를 찾고, 자랑스러운 한국영화 유산의 역사와 전통을 전시하고 국내외에 알리는 일이 지속가능한 한류문화 확산의 길이라 믿는다. 또한 3D, 홀로그램, 가상현실(VR) 등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한국의 IT와 영상기술 역시 지금부터 체계적으로 정립해 후대에 전승해야 한다. 우리 영화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오늘의 모습을 반추하며 미래를 그릴 수 있는 영화박물관의 건립. 한국영화 탄생 100주년을 3년 앞둔 지금 깊게 고민해 볼 과제이다. 과거가 없는 미래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김언호 한길사 대표 ‘삶의 책꽂이’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김언호 한길사 대표 ‘삶의 책꽂이’

    그의 방은 책의 숲이기도 했고, 서화의 숲이기도 했다. 또는 사진의 숲이기도 했다. 파주출판도시의 한길사 건물 3층에 자리한 그곳에는 김언호(71) 대표가 40년 동안 출판인으로서 가꿔 온 철학과 여정이 속속들이 배어 있었다. 벽 한쪽에는 그가 지금까지 써 온 서예 작품들이 1m 정도 높이로 쌓여 훈훈한 묵향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가 물었다. “기자분도 책 많이 보시지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살짝 고갯짓만 하고 말았다. -전국이 비상계엄의 장막에 갇혀 있던 1980년 2월 중순 어느 날, 나는 서울시청 건물에 차려진 계엄사령부를 내 발로 찾아갔다. 총을 둘러멘 군인들을 지나 2층 신문·서적 검열실로 올라가는 내 손에는 ‘판금(판매금지)도서’ 3권이 들려 있었다. “이 책들 제대로 읽어보기는 하셨습니까?” 검열실 담당자들에게 물었다. 다행히 검열의 실무 작업은 군인들이 아닌, 시청 직원들이 하고 있었다. 다소 용기가 났다. “민주주의 국가사회를 건설하려면 이만 한 수준의 논의는 허용돼야 합니다.” 검열실 뒤에는 소령, 중령 계급장을 단 장교들이 진을 치고 있었지만 시청 직원들은 나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김언호 대표님 말씀에 공감은 가지만, 판금된 책에 아무런 수정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저희가 ‘검열필(畢)’ 처리를 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필자들을 설득해 약간씩 내용을 수정했다. 얼마 후 책 3권의 맨 앞 장에 붉은색 검열필 도장이 찍혔다. 그 세 권의 책은 리영희 선생의 ‘우상과 이성’, 박현채 선생의 ‘민족경제론’ 그리고 ‘해방전후사의 인식’(제1권)이었다. 그때 그 책들이 복권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한길사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불을 밝힌 보석과 같은 책들을 세상에 낼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아이로니컬한 일이다. 군홧발과 총칼로 들어선 신군부의 계엄 통치하에서 박현채, 리영희 선생의 책과 민주주의 운동의 교과서로 통했던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은 평생을 검소하고 성실한 농군으로 사셨다. 6·25가 한창이던 1952년 초등학교에 들어가 중학교까지 고향인 경남 밀양에서 나왔는데, 동네에서는 책이란 걸 구경하기가 어려웠다. 우리 수준에서는 수련장이나 영어단어장 정도가 전부였다. 당시 독서에 대한 욕구의 빈 공간을 채워 준 건 부산에서 사범학교에 다니던 큰형이 집에 올 때마다 가져온 잡지 ‘사상계’였다. 중학생이 쉽게 이해할 만한 글들은 아니었지만, 그때는 뭐가 됐든 책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형은 ‘사상계’ 안에서도 함석헌 선생의 글을 자주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의 삶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1961년 부산상고에 입학했는데, 그해 5·16 정변이 났다. 우리 학교가 있던 서면에도 탱크와 군인들이 진주했다. 얼마 후 나온 사상계 7월호에 함석헌 선생의 글이 실렸다. ‘(박정희 님은) 단지 손에 든 칼만을 믿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민중은 무력만으로 얻지 못합니다.’ 선생의 글은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 주는 통쾌함 그 자체였다. -사상과 시국에 관심을 가지면서 언론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됐다. 중앙대 신문학과 64학번으로 입학했다. 2학년 때인 1965년 4월 한·일 기본조약 협정이 체결됐다. 전국이 반대 시위로 물결쳤다. 나도 그 속에 있었다. 어느 날 흑석동 캠퍼스 교문을 나와 한강대교 쪽으로 진출하며 구호를 외치다 경찰에 체포돼 선후배들과 함께 영등포경찰서에 끌려갔다. 우리 12명에 대해 구속영장이 신청됐는데, 그중에서 나를 포함한 3명의 영장이 발부돼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몇 숟가락 안 되는 꽁보리밥에 허여멀건 국물. 아침에 일어나 잠자리에 들 때까지 늘 배가 고팠다. 태어나서 배고픔이란 걸 처음 느꼈다. 사형 집행도 보았다. 옆 방에 있던 2명이 교수대에 매달리던 그날 저녁 구치소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당시 우리 같은 대학생들은 교도소 내에서 꽤 예우를 받았다. 절도, 사기, 폭력 등 화려한 전과 기록의 잡범들과도 형, 동생처럼 친해져 많은 얘기를 나눴다. “범죄를 저지를 조건이 없어야 범죄가 안 일어날 것 아닌가. 이들이 대책 없이 그냥 사회로 나갔다간 언젠가 다시 이곳에 돌아오게 된다.” 이 부분은 나중에 사회부 기자가 된 후 내 취재의 주된 관심사였고, 실제로 나는 이에 대한 기획기사를 많이 썼다. 서울구치소 생활 두 달 만인 6월 중순 형의 도움으로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다. -1975년 3월 나는 해직기자가 됐다. 자유언론실천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송건호 당시 편집국장 등과 함께 동아일보에서 강제 해직을 당했다. 1968년 입사하고 햇수로 8년 만이었다. 1년 정도 다른 직장을 거쳐 1976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한길사를 차렸다. 은평구 불광동의 언덕배기 집 거실이 우리 회사였다. -“왜 멀쩡한 기자는 때려치우고 사서 고생을 하니.” 한길사를 차리고 몇 달 후인 1977년 봄, 결국 고향의 어머니에게 손을 벌리고 말았다. 책을 내려면 종잣돈이 있어야 했지만, 신문사에서 해직된 뒤 경제적인 궁핍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주신 30만원으로 그해 9월부터 ‘오늘의 사상신서’ 시리즈를 냈다. 동아일보 선배인 송건호 선생의 ‘ 한국민족주의의 탐구’를 첫 권으로 해서 고은 선생의 ‘역사와 더불어 비애와 더불어’, 리영희 선생의 ‘우상과 이성’ 등 3권을 차례로 펴냈다. 그러나 이 책들은 발간과 동시에 ‘불온서적’으로 몰려 판매금지를 당했다. 리영희 선생은 출간 직후인 11월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나의 아내 박관순(현 한길사 부사장)도 연행됐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아내가 회사의 대표로 등록돼 있었던 탓이었다. 아내는 얼마 후 풀려났지만, 리영희 선생은 2년간 옥고를 치르고 1980년에야 만기 출소했다. -이후로도 발간하는 족족 ‘판금’의 딱지가 붙었다. 1978년 4월에 나온 ‘민족경제론’이 그랬고 1979년 10월 16일 펴낸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그랬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나오고 10일 후에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10·26이 터졌는데, 그로부터 이틀 뒤인 10월 28일 문화공보부 출판 담당 과장이 나를 불렀다. 그의 책상 위에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펼쳐져 있었다. “친일행위를 좀 했다는 게 뭐 대수냐. 그걸 지금 들춰내서 대체 뭘 어쩌겠다는 거냐”고 엄포를 놨다. 그는 “구속이 당연하지만 이번만 봐 준다”며 그 책의 재고를 전량 문공부로 보내라고 윽박질렀다. 그때 용달차에 500여권을 실어 보냈는데, 그 책들의 ‘생사’는 지금도 알 길이 없다. -1980년 2월에 복권된 3권의 책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나를 포함한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폭발적인 반응이었다. 특히 학생들 사이에 ‘해전사’로 통했던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1989년까지 총 6권이 나오는데, 사회과학 서적으로는 경이로운 40만권 판매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 책을 기획한 것은 1979년 봄이었다. “우리가 외세(미국·소련)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이 됐다고 하지만 이유가 단지 그것뿐일까?” 나의 문제의식의 출발점이었다. 책의 기획안을 송건호 선생에게 맨 처음 보여 드렸다. 무릎을 탁 치더니 “나도 한 편을 쓰고 싶다”고 하셨다. 결국 송건호 선생이 쓰신 첫 번째 장 ‘해방의 민족사적 인식’이 사실상 책의 총론이 됐다. -어두운 시대에 사회과학 서적을 내면서 회사와 나에 대한 위협은 여러 차례 있었다. 그때마다 요리조리 잘 피했다는 생각이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든다. 1981년 8월이었다. 당시 문공부 과장으로부터 “조심하라”는 경고 전화가 걸려오더니 얼마 후 ‘3개월 영업정지’ 조치가 떨어졌다. 3개월이 지나서도 정지가 안 풀리면 등록이 취소되는 수순이었는데, 정부로서는 그걸 노린 조치였다. “진보적이고 비판적인 책들을 낸다는 이유로 출판사를 폐쇄하는 것은 새로운 시대를 만들겠다는 새 정부의 취지에도 맞지 않습니다.” 당시 서울대 정치학교 교수로 있던 김학준 전 동아일보 회장 등이 구명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 주었다. 그런 도움들 속에 영업정지 처분은 일주일 만에 없었던 일이 됐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나는 허문도 정무수석과 광화문의 한 식당에서 만나 ‘올바른 출판인의 길’에 대해 일장 훈시를 들어야 했다. -1988년 작곡가 윤이상 선생을 독일 베를린에서 만나고 돌아온 뒤에는 1년 반에 걸쳐 출국금지를 당했다. 윤이상 선생은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자요 민족문화론자다. 그분은 이렇게 말했다. ‘이데올로기란 가을날 떨어지는 낙엽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민족은 저 푸른 창공처럼 푸르른 것이다.’ 세계가 연구하고 연주하는 음악가인데 그가 왜 자기 조국에서는 나래를 펼 수 없었던 것인지 현대사의 비극이었다. -1995년부터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소설 ‘로마인 이야기’를 펴내 2007년 15권을 완간했는데, 이 책이 400만권 정도 팔렸다. 최명희의 소설 ‘혼불’도 350만권 이상 나갔다. 판권이 바뀌기 전까지 우리가 찍었던 ‘태백산맥’도 약 400만부가 판매됐다. 내가 27권짜리 ‘한국사’를 비롯해 경제성에 약점이 있는 각종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출간할 수 있도록 해준 ‘효자’들이다. ‘로마인 이야기’를 낼 때에는 상업성이 떨어진다며 주변의 많은 사람이 반대했다. 하지만 나는 이탈리아 로마로 저자를 직접 만나러 가 번역 판권을 확보했다. -보편적인 인문주의와 인문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출판 인프라 구축 운동 차원에서 1996년 ‘한길 그레이트북스’ 출간을 시작해 다음달이면 150번째 책이 나온다. 지난해에는 세계의 서점들을 찾아다니는 기행을 신문에 연재했다. 글은 물론이고 그 안에 들어가는 사진들도 모두 내가 찍었다. 그 연재물을 다듬고 보완해서 얼마 전 ‘세계서점기행’이라는 이름으로 냈다. 종이책의 미학과 존엄을 보여 주기 위한 기획이었다. 8만원이나 하는 고가임에도 책을 그리워하고 책의 아름다움에 감동하는 독자들 덕에 두 번째 판을 찍었다. -나는 진보와 보수는 공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진정한 보수와 진정한 진보는 서로 대화를 할 수가 있다. 출판을 결정할 때도 마찬가지 원칙을 적용한다. 책이 정직한가, 정확한가, 최선을 다한 성과물인가가 중요할 뿐 보수인지 진보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있으면 과감하게 일을 벌이는 편이다. 우리 파주출판도시는 전 세계에서 유일한 곳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논의를 시작해서 90년대 초반 위원회를 가동하고 2010년부터 입주를 시작했다. 예술마을 ‘헤이리’ 프로그램도 이끌었다. 지금 내가 절실하게 바라는 것은 종로서적의 부활이다. 1907년 문을 연 그곳이 2002년에 문을 닫았는데, 그건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짧게 살았던 곳도 떠들썩하게 기념관으로 보존하면서 현대사에서 우리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곳이 사라지는 걸 우리는 두 눈 뜨고 그저 바라만 보았다. 서점은 공공적 플랫폼으로 인식해야 한다. 출판사도 마찬가지다. 출판사는 단순히 종이와 잉크로 구성된 물건을 만드는 곳이 아니다. -우리의 모든 삶에 연관되는 것이 책이다. 당장 책을 읽지 않는다고 오늘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10년, 20년 동안 책을 안 읽으면 바보가 된다. 한국 사회가 한 단계 도약하려면 정의로운 사회, 도덕적인 사회가 돼야 한다. 그런 사회는 책을 읽고 건전한 토론을 해야 만들어진다. 책을 안 읽는 사람은 자기주장만 한다. 현재 교육의 가장 큰 문제가 책 읽고 토론하고 생각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관용이 부족한 사회를 만든다. 나만 옳다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김태균 경제정책부장 windsea@seoul.co.kr >>김언호씨 ■언론자유를 위해 싸우다 동아일보에서 강제 해직된 뒤 1976년 한길사를 설립, 인문사회과학 분야를 중심으로 40년간 3000여권의 책을 펴냈다. ‘한 권의 책은 한 시대와 사회의 사상을 담아 내는 아름다운 그릇’이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오늘의 사상신서’, ‘해방전후사의 인식’ 등 현대사의 굽이굽이를 장식한 다양한 책들을 기획하고 펴냈다. 한국출판인회의 창설과 파주출판도시, 예술마을 헤이리 건설을 주도했다. ▲1945년 경남 밀양 출생 ▲밀양 대사초, 동명중, 부산상고, 중앙대 신문학과, 서울대 대학원 언론정보학과 ▲동아일보 기자(1968~1975), 헤이리 이사회 이사장, 한국출판인회의 회장, 동아시아출판인회의 회장, 파주북소리(책축제) 조직위원장,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 ▲‘책의 탄생 Ⅰ·Ⅱ’(1997), ‘헤이리, 꿈꾸는 풍경’(2008), ‘책의 공화국에서’(2009), ‘한권의 책을 위하여’(2012), ‘책들의 숲이여 음향이여’(2014), ‘세계서점기행’(2016) 등 저술 ■한길사를 대표하는 책(가나다順) ▲‘로마인 이야기’(오른쪽·전15권) ▲‘리영희 저작집’(전12권) ▲‘송건호 전집’(전20권) ▲‘오늘의 사상신서’(전172권)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전22권) ▲‘한국사’(전27권) ▲‘한국학술진흥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전100권) ▲‘한길 그레이트북스’ (7월 초 150권째 발간 예정) ▲‘한길역사강좌·한길역사기행’ ▲ ‘함석헌 전집’(전20권) 및 ‘함석헌 저작집’(전30권) ▲‘해방전후사의 인식’(왼쪽·전6권) ▲‘혼불’(전10권)
  • “박정희에게 재혼 권했더니 ‘근혜 때문에…’”

    “박정희에게 재혼 권했더니 ‘근혜 때문에…’”

    지난 5월 타계한 우암 김재순 전 국회의장이 육영수 여사 사후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재혼을 권했던 사실이 21일 출간된 ‘어느 노정객과의 시간여행’(기파랑)을 통해 알려졌다. 이 책은 안병훈 기파랑 대표가 우암과 수차례 대담한 내용을 엮은 것으로 우암의 정치역정과 함께 알려지지 않은 정치 비화를 소개했다. 한·일 국교 정상화를 앞두고 일본 정계의 막후 실력자인 세지마 류조와 당시 정권 2인자였던 김종필(JP) 사이에 다리를 놓은 인물이 우암이었다. 세지마와 친분이 있는 학교 선배가 우암에게 만남을 주선해달라고 부탁한 데 따른 것이다. JP와 세지마는 당시 서울 충무로에 있던 대원호텔에서 만남을 갖는다. 두 사람의 만남은 1965년 6월 한·일 국교 정상화로 이어진 단초가 됐다. 세지마는 육영수 여사 서거 후 우암을 통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재혼을 당부했다는 뒷이야기도 나온다. 세지마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만주군으로 참전했던 박 전 대통령의 직속상관이었다. 우암은 청와대로 들어가 세지마의 말을 박 대통령에게 전했으나 박 대통령은 잠시 침묵하다 “근혜 때문에…”라며 말을 흐렸다고 한다. 우암은 정치인이지만 1970년 창간한 월간 ‘샘터’의 발행인을 맡기도 했는데 그에 얽힌 에피소드도 등장한다. 샘터 창간 무렵 한국일보 장기영 사주가 “잡지는 돈 없이는 안 됩니다. 전부 벗겨야 됩니다. 요새 벗지 않으면 안 봅니다”라고 조언하자 우암이 “벗기는 건 왕초가 벗기시고 나는 입히렵니다”라고 화답한다. 우암은 ‘지식을 입히고 정신적 자양을 주겠다’는 의미였다고 회고했다. ‘입히는 잡지’를 만든 덕에 샘터는 당대 큰 인기를 누렸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주민도 외면하는 돈 먹는 ‘동네 뮤지컬’

    주민도 외면하는 돈 먹는 ‘동네 뮤지컬’

    편당 예산 수십억… 4~5번 공연 단체장 치적·역사적 인물에 의존 작품성·완성도 떨어져 인기 없어 지방자치단체들의 창작 뮤지컬 제작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혈세 낭비’ 논란이 일고 있다. 뮤지컬 한 편당 수십억원의 예산을 쏟아붓지만 고작 4~5번 공연하고 막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 이는 충분한 검토나 사전 준비 없이 만들어지면서 관광객뿐 아니라 지역 주민에게조차 외면받고 있기 때문이다. 경북 구미시는 박정희 전 대통령 뮤지컬 제작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21일 밝혔다. 제목은 ‘고독한 결단’(가칭)으로, 박 전 대통령이 태어난 지 100년째 되는 내년 11월 14일에 맞춰 구미문화예술회관에 올릴 예정이다. 새마을운동을 일으킨 박 전 대통령의 생애와 굴곡진 한국 근현대사를 씨줄과 날줄로 삼아 스펙터클한 무대를 보여 준다는 것이 구미시의 설명이다. 시·도비 등 모두 28억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포항시는 경북도, 경주시와 함께 총 2억 9000만원을 들여 순수 창작뮤지컬 ‘형산강에 잠들다’를 제작하고 있다. 오는 10월 포항과 경주에서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신라 말 해상무역으로 신라를 부흥시킬 꿈을 가진 경순왕의 아들, 태자 김충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경주시는 오는 7월 공연 예정으로 실경(實景) 뮤지컬 ‘만파식적’을 제작 중이다.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신라 문무대왕의 업적을 소개하는 작품으로 도비 및 시비 등 총 2억 9000만원이 들어간다. 실경 뮤지컬은 실내 무대가 아닌 실경을 배경으로 펼치는 뮤지컬을 말한다. 또 올해와 지난해 7억 5000만원을 들여 뮤지컬 ‘별의 여인 선덕’과 ‘최치원’을 각각 제작해 무대에 올렸다. 2013년엔 경주 출신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를 토대로 뮤지컬 ‘무녀도 동리’에 10억원을 투입하기도 했다. 경북 상주의 충의공 정기룡장군기념사업회는 지난 10~12일 3일간 상주시 도남동 경천섬 주차장 특별무대에서 실경 뮤지컬 ‘무인 정기룡’을 초연했고 영덕군은 지난 10~11일 이틀간 창작 뮤지컬 ‘신태호’(의병장 신돌석 장군의 본명)를 무대에 올렸다. 안동시는 2011년부터 ‘왕의 나라’, ‘원이엄마‘, ‘부용지애’ 등 대형 뮤지컬을 제작했고 고령군도 실경 뮤지컬 ‘대가야의 혼 가얏고’를 만들었다. 지자체가 투자한 뮤지컬은 대부분 초연으로 막을 내려 예산 낭비에 그치고 있다. 특히 구미의 뮤지컬 ‘고독한 결단’은 ‘박 전 대통령의 과도한 우상화’라는 시민사회단체의 반발을 사고 있다. 대구 지역 한 뮤지컬 전문가는 “지자체들의 뮤지컬이 단체장의 치적이나 역사적 인물 중심으로 만들어지면서 작품성이나 완성도가 떨어져 실패하는 것”이라면서 “홍보용 작품이 아니라 완성도 있는 작품을 만들어야 지자체 홍보도 가능하고 세금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이에 대해 경북도 관계자는 “지자체들의 뮤지컬 제작이 지역 이야기에 의존하다 보니 대중성에는 다소 취약한 면이 있다”면서도 “전통문화자원을 활용한 뮤지컬 제작이라는 점은 평가돼야 한다”고 말했다. 안동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을 찾아서] 근현대사의 산증인 충정아파트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을 찾아서] 근현대사의 산증인 충정아파트

    이 연재에 충정 아파트를 포함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이 있었다. 한국 도시에 지어진 무지개떡 건축, 즉 주거와 다른 기능이 복합된 건물들을 추적하는 것이 이 연재의 골격이다. 그런데 과연 충정 아파트가 그 기준을 충족하는가? 현재의 충정 아파트는 물론 1층에 상점과 음식점 등이 들어가 있으므로 상가아파트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랬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처음부터 상가아파트였다는 확실한 기록은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정 아파트를 이 연재에 포함하기로 한 것은 두 가지 이유다. 어쨌건 현재 상가아파트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다. 그다음으로는 충정 아파트가 한국 최초의 아파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최초의 아파트 충정공 민영환 이름 딴 거리정작 설계한 일본인 이름 따 ‘도요다 아파트’로 불리워 ‘최고’, ‘최대’, ‘최장’ 등 뭐든지 1등에 민감한 사회에서 ‘최초’가 예외일 리 없다. 아파트가 하도 많아서 ‘아파트 공화국’으로 불리는 한국 사회가 아닌가. 그러니 ‘최초의 아파트’란 타이틀에 대해서 민감한 것 역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그 타이틀을 가져갈 주인공에 대한 합의는 어느 정도 이루어진 듯하다. 적어도 이에 대한 강력한 반대 의견을 아직 보지 못하였다. 다름 아닌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 위치한 충정 아파트가 그 주인공이다. 을사보호조약 당시 분사한 충정공 민영환의 이름을 딴 거리에, 게다가 같은 이름이 붙은 건물이다. 그러나 정작 건물을 설계하고 지은 것은 일본인 도요다 다네오(豊田種松)였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의 이름을 따라 ‘도요다 아파트’ 혹은 ‘풍전 아파트’라고 불렸다고 전한다. 한국 최초의 아파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단 일본의 미쿠니 상사가 조선 주재 일본인 직원들을 위해 지었다고 하는 미쿠니 아파트가 있었다. 심지어 평양에 있었다는 아즈마 아파트까지 이 논쟁에 등장한다. 하지만 회사 직원들을 위한 관사가 아닌 일반 임대용이었다는 점에서 결국 충정 아파트가 우세를 보였다. 주거 연구가인 박철수 서울시립대 교수에 따르면 시기적으로도 1930년에 건립된 충정 아파트가 가장 앞선다. # 영욕의 세월 30년 지상 4층 건립 이후 45년 동포들에 무단 점유 50년 민간인 학살 장소로 한국전쟁 때도 원형 유지 학문적인 논쟁과 별도로 다행스러운 것은, 이 최초의 아파트가 비록 심하게 변형되기는 했으나 21세기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아직도 원래의 기능을 수행 중이다. 다만 그 과정이 보통의 건물에 비해 너무나 험난하다. 실로 한 건물의 인생역정이라 할 만하다. 존중하는 의미에서 연도별로 소개한다. 1930년 일본인 도요다에 의해서 건설되었다. 지하 1층, 지상 4층, 연면적 1050평의 철근 콘크리트 구조였다. 당시 이 지역은 갑신정변 당시 일본 공사였던 다케조에 이치로의 이름을 따서(!) 다케조에초로 불렸다. 이후 호텔 혹은 어묵 파는 술집이 되었다거나, 동아기업으로 소유권이 넘어갔다는 등의 내력이 전해진다. 1933년에는 같은 죽첨정 3가 구역에서 일제 강점기의 유명한 살인사건이었던 금화장 문화주택지 단두 유아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1945년 이후 해외에서 귀국한 동포들에 의해 무단 점유되었다는 설이 있다. 1946년 10월 1일 이 지역의 이름이 충정로로 변경되었다. 민영환은 종로구 공평동에서 순국했는데 왜 이 지역에 그의 이름이 붙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1950년 인민군 재판소가 설치되어 지하실에서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전한다. 이러한 사실은 충정 아파트에 대한 자료라면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온다. 다만 그 이상의 자세한 이야기가 없다는 것도 공통적이다. 추정하자면 그 기간은 서울 함락에서 수복에 이르는 6월 28일에서 9월 28일 사이의 3개월이었을 것이다. 물론 1951년 1·4 후퇴 당시인 1월 4일에서 3월 14일 사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보면 개전 초기였을 가능성이 높다. 정말 인민군 재판소가 여기 있었을까? 그랬다면 이 건물이 당시 우익 인사들이 수용되어 있던 서대문형무소와 마포형무소(지금의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의 중간 지점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그리고 그 학살설이 사실이라면 서울대병원 학살 사건 등과 더불어 인민군의 서울 점령 기간과 관련된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건축사와 전쟁사가 교차하는 중요한 사례로서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하겠다. 이 지역은 한국전쟁 당시 격전지였다. 서울역에서 신촌역으로 가는 경의선 충정로 터널이 인민군의 군수창고로 쓰여 미군 전투기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는 증언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충정 아파트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 것은 바로 한 장의 사진 때문이다. 국방부의 정책 블로그인 ‘NARA’에 따르면 9·28 서울 수복 전날에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이 사진은 AP통신의 맥스 데스퍼 기자가 촬영한 것이라고 한다. 미 해병대가 땅속에 숨어 있던 북한 저격병을 백린 연막탄으로 공격하는 장면을 담고 있는 희귀한 사진이다. 그런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 배경에 바로 당시의 충정 아파트가 등장한다. 층간의 가로줄과 굴뚝이 선명하다. 옥상에는 옥탑으로 보이는 구조물과 경사지붕 등이 보인다. 충정 아파트의 원형을 보여 주는 자료이면서 동시에 한국전쟁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렇게 전쟁통에도 원형을 유지한 충정 아파트가 오히려 전후에 여러 번의 변형을 겪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한편 미군은 서울 수복 후 이 건물을 수용하여 ‘트레머 호텔’이란 이름을 붙이고 유엔군을 위한 시설로 활용했다. 1961년 한국전쟁 당시 아들 6형제를 모두 잃었다는 김병조라는 사람에게 불하되어 5층이 증축되었고 이름이 ‘코리아 관광호텔’이 되었다. 그러나 김병조는 사기꾼으로 판명되어 구속되었다. 당시 상황을 담은 뉴스 영상도 존재한다. 이후 이 건물은 국세청 등 여러 소유주를 전전했다. 1975년 서울은행 소유가 되면서 이름이 ‘유림 아파트’가 되었다. 이후 다시 주민들에게 소유가 넘어갔다. 다만 유림 아파트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던 시점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도 있다. 1979년 충정로가 8차선으로 확장되면서 건물 전면이 잘려 나갔다. 원래 전면이 계단식 평면으로 된 특이한 건물이었다고 전하나 이 부분이 깨끗하게 일직선으로 잘려져 나갔다. 이 과정에서 52가구 중 19가구 270여평이 헐렸다. 1층 전면의 상가는 어쩌면 이 과정에서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2015년 서울시의 미래 유산 후보의 하나로 지정되었다. 건축물 관리대장에 따르면 현재 충정 아파트의 규모는 김병조에 의한 5층 불법 증축과 도로 확장으로 인한 멸실 부분을 종합하여 지하 1층, 지상 5층이다. 5층은 불법 증축 이후 양성화된 것으로 보인다. 연면적은 3550.41㎡, 즉 1074평이다. 도요다가 지었을 때보다 층은 하나가 더 늘었고 연면적은 24평이 늘었다. 총 41가구이다. 물론 오래된 건물들이 종종 그러하듯이, 이러한 공식 기록이 얼마나 현재 상태와 일치하는지는 정밀 실측과 조사를 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 충정 상가아파트? 식당 등 상가 들어선 1층 인도보다 1m 높아 이례적 지하실 채광 위해 올린 듯 녹색 외관도 본래는 타일 현재의 충정 아파트는 상가아파트다. 만약에 처음부터 그랬다면 한국 최초의 아파트는 바로 상가아파트였다는 사실이 확립된다. 지금의 아파트 문화로 보면 매우 생소하게 들릴 이야기다. 즉, 주거동과 상가동이 분리된 요즘의 통상적인 아파트가 아닌 주거와 상가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요즘의 표현을 빌리자면 주상복합 건물에서 한국의 아파트가 시작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반복해서 이야기하지만 기록이 충분치 않아 단언할 수는 없다. 1층의 경우 현재의 건축물 관리대장에 따르면 일부의 상가를 제외하고는 아직 대부분이 아파트다. 전면이 모두 상가인 것을 감안하면 현실과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뿐 아니라 처음부터 이 부분이 모두 상가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그런데 지하실은 이야기가 좀 다르다. 건립 당시부터 지하층은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건축물 관리대장에 따르면 지금도 이 부분은 ‘근린생활시설’(일반음식점)로 되어 있다. 지하실은 어차피 건물이 세워지고 난 다음에는 팔 수도 없다. 환기나 채광 등으로 인해 주거가 들어가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바로 이 지하실의 존재야말로 한국 최초의 아파트는 상가아파트였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래저래 충정 아파트는 이야깃거리도 많고 역사적 의미도 깊은 셈이다. 충정 아파트를 찾아가면 제일 처음 눈에 띄는 것이 흔치 않은 녹색의 외관이다. 원래는 타일로 마감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위에 두껍게 페인트가 발라져 있다. 특이한 색상 때문에 멀리서도 눈에 잘 띈다. 건물 앞이 버스 정류장이라 사람들의 왕래도 활발하다. 그런데 건물과 인도가 만나는 부분이 다소 독특하다. 1층은 모두 상가고 아파트로 들어가는 입구가 별도로 있는데 모두 전면에 1m 정도 높이의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즉 건물이 일종의 기단 위에 올려져 있는 셈이다. 물론 오래된 건물에서 흔히 보는 방식이기는 하다. 그러나 충정 아파트의 경우는 그 높이가 과하다는 느낌이 든다. 특히 상가 입장에서 보면 계단을 올라와 진입하는 것은 매우 불리한 방식이다. 다만 1층이 처음부터 상가가 아니고 주거였다면 그리고 지하실의 환기나 채광을 위한 개구부를 설치하기 위해서 1층을 들어 올렸다면 이해될 수 있는 문제다. 이 역시 건물의 변화 과정을 면밀히 추적해 봐야 풀릴 수 있는 수수께끼다. 나이가 80이 넘었고 풍상을 하도 겪어서 그런지 건물은 매우 낡은 상태다. 그러나 막상 이렇게 써 놓고도 ‘과연 그래야 할까?’라는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건물 나이 80이면 역사적으로 보면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다. 사실 건물의 나이는 현실적으로는 무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구 상 수많은 오래된 건물들이 이를 보여 준다. 물론 애초에 짓기도 잘 지어야 하겠지만 관리가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이 점에서 건물과 사람은 유사하다. 약골로 태어나도 철저한 자기 관리를 통해 건강하게 오래 사는 사람도 있고, 무쇠 같은 몸을 갖고 있지만 험하게 굴려서 망가뜨리는 사람도 있다.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세계적으로도 긴 편이지만 건물은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런 점에서 충정 아파트는 안타까운 예다.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기는 하지만 이제 이 건물을 제대로 돌봐야 할 때가 되었다. 한국 근현대사의 산증인으로 이만 한 건물도 드물다.
  • [이주의 문화 레시피] 전시

    [이주의 문화 레시피] 전시

    ●정세윤 개인전 현대사회의 모습과 문제점을 귀엽고 친근한 레고 블록을 통해 풍자하는 작품들을 선보인다. 작품마다 전동모터를 이용해 각 상황에 맞는 움직임을 갖도록 키네틱적인 요소를 추가했다. 26일까지, 서울 서초동 핑크갤러리. (02)588-7388. ●이누엣 사진전 국내외를 오가며 자연이 빚어내는 장대한 아름다움을 흑백으로 담아내는 작가의 개인전. 북대서양 한가운데 위치한 섬나라 아이슬란드의 풍경과 함께 자연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겸허함과 숭고함을 선사한다. 24일까지, 강남구 역삼동 갤러리 이마주. (02)557-1950.
  • 아이 키우며 함께 성장한 엄마의 기록

    아이 키우며 함께 성장한 엄마의 기록

    독박육아/허백윤 지음/시공사/300쪽/1만 3500원 과거 대가족 시대에도 나름의 고충이 있었겠지만 육아 지식이나 도움을 위 세대가 아닌 인터넷에서 찾아야 하는 핵가족 시대, 현대사회에서 여성이 임신하고 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 분명하다. 제 아이를 낳아 키우는 데 부모로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그깟 고생쯤 무슨 대수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버겁다. 특히 엄마들에게는. 배가 부른 채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자리를 양보받기가 힘들다. 이미 출산을 경험했을 중년의 아주머니, 앞으로 경험해야 할 동생뻘 여성들마저 눈을 감는다. 몸이 무거워 마트 입구와 가까운 곳에 차를 두고 장을 봤다가는 장애인 주차 구역에 주차했다며 딱지가 날라오기 십상이다. 요즘 남편들이, 자신들은 육아에 무심했던 아버지 세대와 다른 ‘21세기형 남편’이라고 자처해도 엄마들에겐 별 대단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난해 3월부터 11월까지 34회에 걸쳐 연재되며 큰 공감대를 이뤘던 서울신문 온라인 칼럼 ‘독박육아일기’가 책으로 묶여 나왔다. 친정과 시댁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딸을 낳아 키우며 설움, 끝없는 외로움과 다퉈야 했던 워킹맘 기자의 생생한 기록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독박’이라는 단어가 한자 ‘홀로 독’(獨) 자에 한글 ‘바가지’를 줄인 ‘박’ 자가 아니라 ‘읽을 독’(讀) 자에 ‘넓을 박’(博) 자를 쓴, 세상을 넓게 읽게 됐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길 바란다고 말한다. 또 아이를 스승 삼아 함께 성장했다고 고백하며 다짐한다. “내가 널 키우며 육아(育兒)를 하는 동안 너도 나를 키우는 육아(育我)를 했다…. 엄마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에 대해 제대로 알려준 사람은 바로 내 딸, 너였다. 엄마를 이렇게 키워 준 네게 평생 고마운 마음을 가지며, 내 첫 사랑, 너를 위해 엄마도 힘을 낸다. 그리고 네가 살아갈 이 세상이 조금 더 행복하고 빛나는 곳이 되기를, 그래도 내가 살아온 세상보다 더 나은 세상을 네게 물려줄 수 있기를 나는 여전히 꿈꾼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시론] 원샷법 쥔 韓경제, 혁신의 환호성 기대한다/이동근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

    [시론] 원샷법 쥔 韓경제, 혁신의 환호성 기대한다/이동근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

    우리 경제 곳곳에서 어렵다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수출은 떨어지고 내수도 좀체 활력을 찾지 못하고 있다. 기업 활동을 통해 벌어들인 이익으로 이자도 갚지 못하는 한계기업 수도 증가하고 있다. 해운, 조선 등은 구조조정을 앞두고 몇만 명이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 한국 경제를 이끄는 주력산업의 체력을 두고 설왕설래했던 게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위기를 사전에 감지해 선제적으로 대비하고 체질 개선과 혁신에 나섰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앞으로 위기에 한발 앞서 기업 스스로 체질을 개선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됐다는 점이다. 기업의 선제적 사업 재편을 뒷받침하기 위한 일명 원샷법인 ‘기업활력 제고를 위한 특별법’이 지난 2월 제정돼 오는 8월 시행에 들어간다. 공급 과잉 업종 기업이 신속하게 사업 재편을 할 수 있도록 관련 규제를 한 번에 풀어 주는 특별법이다. 상법, 공정거래법상 사업재편 절차 간소화와 세제, 금융상 지원을 한꺼번에 받을 수 있다. 원샷법에 대한 경제계의 기대는 크다. 대기업뿐만 아니라 벤처기업, 중소·중견 기업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대한상의 조사에 따르면 대기업의 88%, 중소·중견 기업의 75%가 원샷법 도입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조선, 철강, 석유화학 등 공급 과잉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업종에서 법 제정이 더 절실한 것으로 드러났다. 일본은 원샷법과 비슷한 내용의 산업경쟁력강화법을 도입해 성과를 거뒀다. 일본의 사업 재편 승인 기업들은 상장기업보다 더 많은 인력을 신규 채용했고 생산성 향상치도 높았다. 철강, 조선, 화학 등 대규모 제조업의 구조조정을 촉진해 체질 개선에 도움을 줬다는 평가다. 비슷한 상황에 처한 우리가 원샷법에 거는 기대도 이 때문이다. 선제적 사업 재편은 끊임없는 기업들의 생존전략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GM, IBM 등 글로벌 기업들의 장수 비결도 끊임없는 사업 재편이었다. 트렌드 변화가 심하고, 기술발전 속도가 빠른 현대사회에서 제품과 서비스를 직접 개발하고 판매하는 전통 방식만으론 지속 성장을 하기 어렵다.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저성장 시대에 접어든 만큼 과거 고도성장기에 적용해 온 대기업 규제, 중소기업 보호라는 이분적 기업정책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원샷법이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과감한 혁신을 추구해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학자 슘페터는 ‘혁신은 새로운 결합’이라고 정의했다. 이런 면에서 원샷법은 성장 기반을 재구축하고, 산업 간 융합을 통해 미래 신성장 동력을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얼마 전에는 법의 적용 대상 기준과 사업 재편 목표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담은 실시 지침 초안이 공개됐다. 내용을 보면 과잉 공급의 기준으로 해당 업종의 최근 3년간 영업이익률 평균이 과거 10년간 영업이익률 평균보다 15% 이상 감소한 상태로 제시했다. 또 과잉 공급 징후를 파악할 수 있도록 가동률, 재고율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도록 설계됐다. 사업 재편을 통해 기대되는 ‘생산성 향상’과 ‘재무건전성 개선’ 목표도 기업 상황, 달성 가능성, 제도 도입 취지에 비교적 부합되도록 제시했다. 업태의 특성 등 고유의 사정을 감안해 두 목표를 유연하게 설정할 수 있게 한 점이 눈에 띈다. 원샷법에 명시된 특례들은 여러 정부 부처에 걸쳐 있다. 정부 부처 간 적극적 협조가 필요한 대목이다. 원샷법의 안착을 위해 기업은 냉철한 현실 인식과 과감한 추진력을, 정부 부처는 혁신을 뒷받침하는 촉매제로서 원활한 팀플레이를 펼치는 게 중요하다. 위기를 맞닥뜨린 우리에게는 뼈를 깎는 구조조정과 혁신이라는 선택지만이 주어졌다. 단군 이래 최악의 위기라던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도 극복한 우리다. 처절한 구조조정을 통해 경제효율을 높여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는 계기가 됐다. 2008년 금융위기 때도 정부의 신속한 위기 대응과 기업들의 공격적 행보가 위기 극복의 근인이라는 평가다. 또 한번의 위기를 눈앞에 둔 지금 우리 손엔 원샷법이란 훌륭한 무기가 쥐어졌다. 원샷법을 활용해 위기를 기회로 삼아 혁신의 환호성이 울려 퍼지길 기대한다.
  • 전라도 출신 청년들 생존 위한 ‘광주형 일자리 모델’ 만들겠다

    전라도 출신 청년들 생존 위한 ‘광주형 일자리 모델’ 만들겠다

    “연봉 3600만원을 받는 제3지대 자동차 법인을 세워 ‘광주형 일자리 모델’을 반드시 만들겠습니다. ” 윤장현(67) 광주시장은 지난 7일 시장실에서 한 서울신문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하면서 “자동차 100만대 생산 도시는 2012년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공약이었고, 지난 4월 총선에서 여야가 모두 확인한 정책”이라고 강조했다. 의사 출신인 윤 시장은 군 복무 2년을 제외하고 광주에서 나서 광주에서 자란 토박이로 지난 30여년간 ‘시민운동’을 했다.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안철수 공동대표의 적극적인 지지로 전략공천을 받아 행정가로 전환했다. 그러나 안철수 대표가 국민의당을 창당할 때 따라가지 않았다. 그는 “정치적 변화에 휘둘리기보다는 시민 생활을 꼼꼼히 챙기고 싶었다”고 말했다. 정치인·관료 출신의 역대 민선 시장들과 달리 광주시청의 문턱을 낮추고 관행은 깼지만 행정이 더디고 가시적 성과가 부족하다는 일부의 평가는 돌파해 가야 할 과제이다. 다음은 일문일답. →시민단체 활동하다 광주시장이 돼 보니 어떤 차이가 있나. -한국 사회는 그동안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을 지상목표로 전진했지만, 경제가 한없이 상승곡선을 탈 수 없는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민생에 절실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갖게 됐다. 광주는 역사적 전환의 고비마다 의로운 일을 피하지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소외되고 편견에 휩싸이는 어려움을 겪었는데 정치·사회적 접근뿐 아니라 지역의 자구 노력도 필요하다. 우리는 지방정부로 중앙정부 못지않게 시민의 생명과 재산, 미래를 책임져야 한다. →지난 총선 결과를 어떻게 해석하나. -광주를 포함한 호남은 늘 생존적 선택을 해 왔다. 보이지 않는 차별과 소외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그걸 딛고 일어서려는 정치적 행위와 결정이었다고 판단한다. 그런 선택의 대전제는 누가 광주의 ‘오월정신’이나 가치를 소중하게 인정해 주느냐가 첫 번째였다. 두 번째는 지역의 미래와 민생문제를 책임져 주는 주체가 누구인가이다. 이번 총선도 그런 잣대가 적용됐을 거란 생각이다. →여소야대라는 결과가 나올지 모르고 총선 내내 ‘광주정신이 사라졌다’는 비판이 있었다. -‘먹물 좀 튄 사람’들이 가진 생각과 밑바닥 민심의 차이가 컸다는 걸 확인한 선거였다. 광주시민들의 선택은 늘 웬만한 정치 분석가들도 놓치기 쉬운 그런 면이 있다. 정권교체에 대한 가장 효율적인 구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관심이 반영됐다고 본다. →지역의 주류 정당과 당적이 달라 불편하지 않나. -나는 정치를 해온 사람이 아니다. 개인의 유불리에 따라 정치적인 이슈를 만들거나 주도하지 않겠다. 어느 정당에 소속돼 있든지 광주의 미래에 진정성 있게 응답할 수 있는 태도를 견지하겠다. →당적을 바꿀 가능성은. -‘시장은 살림하는 데 신경을 더 써야 한다’는 시장통의 얘기들을 많이 들었다. 재선에 연연하지 않는다. →지역 살림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는가.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오월대’로, ‘녹두대’로 광주 청년들 할 만큼 했다.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뿐만 아니라 현대사 속에서 광주의 젊은이들은 의롭게 싸웠고 그들의 삶을 희생했다. 그런데 가장 빈궁하게 살고 있다. 충장로와 금남로를 걷고 있는 저 아이들이 전라도 출신, 광주 출신으로 어떻게 생존해 나갈 수 있을지가 본질적인 문제이다. 호남이 기울어진 상태라면 한국 사회는 바로 갈 수가 없다. ‘광주형 일자리 모델’은 이름이 광주형이지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한국의 제조업은 경쟁력을 갖출 수 없다. →광주시장으로 지난 2년 동안 한 일은 무엇인가. -민선 6기를 시작해 보니 에너지 관련 기업들을 유치할 공단도 준비되지 않았다. 한국전력 등이 혁신도시로 해 내려오기로 했으니 민선 5기에서 이주 후속 조치를 마련했어야 했다. 중앙정부의 배려도 중요하지만 스스로 미래를 준비하는 자구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 정권 교체를 통해 예산을 많이 따오는 구조를 만드는 데 역량을 쏟기에는 시대가 너무 변했다. 지금 한국의 현실은 철강·조선·중화학 등 기존 산업이 경쟁력을 상실하고 있다. 우리를 먹여살렸던 모든 구조가 무너져가는 상황에서 느슨하게 정치적 상황 변화만 기대하며 관리형 모드로 일관할 수 없다. 미래의 먹을거리 문제는 정부의 정책 하나로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광주형 일자리 모델’을 만드는 데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 연봉 1억원대의 임금구조 속에서 어떤 제조업체도 어느 대기업도 신규 투자를 꺼리고 있다. 광주 노사정은 광주시민과 합의를 바탕으로 연봉 3600만~4000만원대의 일자리 모델을 만들고 있다. 독일의 슈투트가르트 등의 사례를 연구 중이다. 이를 토대로 최근 중국의 조이롱 자동차와도 2020년에 전기차 등 10만대 생산을 위해 양해각서를 교환했다. 1998년 기아차 부도났을 때도 자동차가 6만 8000대였는데 현재는 62만대 생산하고 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이지만 광주의 노사정은 이를 포기했다. 노사 문제가 가장 안정된 제3지대 법인을 만들면 현대·기아차의 통 큰 결단과 투자를 기대한다. 미국과 일본처럼 제조업이 리턴해야 한다. →‘달빛동맹’을 맺은 대구는 지역적 특수성 덕분인지 국책 사업들을 많이 따가더라. -우리도 기획재정부 사무관들 쫓아다니면서 프로젝트마다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여야 국회의원들의 협력도 필요하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운영 주체는 문화체육관광부이지만 우리 시가 직영하다는 생각으로 접근하고 있다. 전당이 위치한 동구 금남로와 충장로 등 옛 도심과 주변의 재래시장, 예술의 거리, 남구 양림동 근대역사문화권을 도심관광 콘텐츠로 활용할 방침이다. 아직은 관람객이 부족하다. 주말과 휴일 등에 문화전당 주변에서 프린지페스티벌을 정기적으로 펼친다. 코레일 등과 협의해 외지 관람객을 유치하고자 전당 관람객에게 교통비를 할인하는 내용의 ‘문화전당 투어’ 개발도 검토하고 있다. →유치 과정에서 말썽이 났던 2019 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 준비는 잘되나. -유치 때 힘든 과정(정부 공문서 위조 사건 지칭)이 있었지만 정부와 국회가 이미 30여억원의 예산을 반영했다. 1200억원가량의 비용 가운데 정부에 600여억원의 지원을 요청했다. 광주는 전 세계 500개 도시 중 스포츠 영향력이 16위인 도시다. 하계 유니버시아 대회(U대회)를 치르고 월드컵 4강을 치른 덕분 같다. 지난해 재정 부담을 최소화해 치른 U대회 시설을 활용해 저비용 고효율 대회를 치를 수 있다. 당시 대회에 2000억원의 예산을 줄여 모범사례가 아니었나. 국제수영연맹(FINA)과 협상을 진행 중이다. →호남고속철(KTX)이 개통됐고 수서발 고속철도 올 연말 개통한다. -이용객이 늘면서 주변 교통혼잡으로 민원이 많이 발생했다. 광주의 관문인 송정역을 너무 작게 지어서 문제다. 이 일대의 역세권 개발이 절실해 송정역복합환승센터를 내년 중 착공한다. 코레일이 해당 부지를 민간사업자에게 최근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이곳에는 환승센터와 주차장, 판매시설 등 문화복합센터가 들어선다. 광산구도 주변 일대의 전통시장을 단장하고 주차장도 확충한다. →2년 전 광주비엔날레에서 홍성담 작가의 그림을 철거해 논란이 됐다. -시민운동가 출신으로 시장이 표현의 자유를 제어해서는 안 되지만 광주가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지 않도록 하려고 한 일이었다. 홍 작가는 중매까지 섰을 정도로 친한 사이였는데 그 뒤로 만나지 못하고 있어 개인적인 아픔도 크다. →윤 시장에 대한 광주 시민의 평가와 만족도는. -만족도가 많이 상승하고 있는 것으로 자체 분석됐다. 가시적으로 드러난 것은 없는 것 같지만, 지난해 치러진 U대회도 성공적이었고 자동차 100만대 생산기지 조성과 에너지밸리 구축 사업 등도 시민의 호응을 얻고 있다. 소수자·약자 배려로 시의 비정규직 83%를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비정규직 896명 중 743명이다. 서울의 스크린도어 비정규직 사망과 같은 일이 광주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정리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바스러진 ‘L의 운동화’ 우리의 삶도 함께 훼손… 복원 아픔은 치유의 길

    바스러진 ‘L의 운동화’ 우리의 삶도 함께 훼손… 복원 아픔은 치유의 길

    ‘이한열 운동화’ 복원 과정 그려… “운동화는 피해자이자 증인… 복원의 의미 독자에게 묻고 또 물어” 1980년대 삼화고무에서 만든 타이거 운동화는 그 시절 ‘모두의 운동화’였다. 운동화는 1987년 6월 민주화 시위 현장도 디뎠다. 그리고 모두가 그 신을 신고 집으로 돌아갈 때 그러지 못한 한 청년이 있었다. 최루탄 쇳조각이 숨골에 박혀 숨진 스물한 살의 이한열이다. 그해 여름을 영영 건너오지 못한 청년, 주인을 잃고 28년을 홀로 버틴 운동화를 소설가 김숨(42)이 문장으로 복원했다. 새 장편 ‘L의 운동화’(민음사)다. 100여 조각으로 바스러진 이한열의 운동화는 ‘이미 사망 선고가 내려진 환자’나 마찬가지였다. 열, 빛, 산소, 오존, 물, 미생물로 열화된 운동화는 지난해 3월 김겸 미술품 복원가가 3개월간 매달린 끝에 제 모습을 회복했다. 작가는 지난해 4월 김겸 복원가의 강의를 듣다 이한열 운동화 복원에 대한 이야기에 빨려 들어갔다고 했다. “집에 돌아와 ‘써지면 쓰자’고 했는데 써지더라구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제게 왔어요. 인연이 닿았던 거죠.” 원고지 800쪽 분량인 작품에서 작가가 소설의 절반을 할애해 독자들에게 묻고 또 묻는 것은 ‘복원의 이유’다. “L의 운동화를 왜 복원해야 되는지 질문을 끊임없이 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건 곧 ‘왜 우리가 이한열이라는 인물을 기억해야 하는가’와 동등한 질문이거든요.” 이 과정에서 그는 치밀하게 조탁한 문장으로 현대 미술사의 문제작들을 숱하게 거론하며 사유의 재료들을 뿌려놓는다. 폴리우레탄으로 이뤄진 ‘물질’이자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기성품’인 운동화를 왜 복원해야 하는 걸까. “이한열의 운동화는 지금 우리의 삶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묻는 것 같아요. 그의 운동화가 훼손되는 동안 우리의 삶도 많이 훼손됐죠. 개인사도 현대사도요. 그래선지 그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건 우리의 훼손된 삶이나 정신을 복원하는 느낌이었어요.” 작가는 소설로도 답을 건넨다. L의 운동화 복원은 L을 애도하는 행위이자 L을 복원하는 작업이라고. 그건 운동화가 ‘L이라는 한 개인의 유품을 넘어서서 시대의 유품’이기 때문이라고. 복원을 고민하는 화자(복원가)에게 L기념관 관장은 이렇게 말한다. “피해자도, 증인도 없는 법정을 상상해 보았어요. (중략) 피해자가 이미 죽고 없으니, 피해자를 대신할 운동화를 어떻게든 살려야 하지 않을까요? 피해자이자 증인이니, 어떻게든 살아서 증언하도록요.”(55쪽) 작가는 작품에서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진 효순이, 미선이 사건, 제주 4·3사건,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우리 근현대사의 ‘트라우마’로 남은 기억들도 불러낸다. 그가 올 하반기에 낼 장편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다룬 ‘한 명’(현대문학)이다. 고통스러운 사건, 기억을 문장으로 되살린다는 점에서 이번 작품과 맥이 닿아 있다. 김숨의 소설 작업이 ‘복원’과 닮은꼴이라 해도 좋겠다. “복원의 의미가 기억해내는 것, 망각하고 있던 일을 되살리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오랫동안 복원과 훼손의 문제에 대해 흥미를 갖고 있었어요. 복원은 물질에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에요. 트라우마를 겪은 집단이나 개인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기억하는 것 자체가 복원이거든요. 그걸 증언한다는 건 감당하고 아파해야 할 것도 많겠죠. 하지만 치유는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축구의 DNA는 제의성과 공격성

    축구의 DNA는 제의성과 공격성

    축구 종족/데즈먼드 모리스 지음/이주만 옮김/한스미디어/356쪽/2만 5000원 1차 세계대전 때인 1916년 7월 1일 영국군 ‘이스트 서리’ 연대는 프랑스 솜 지역에 있는 독일군 기관총 진지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윌프레드 네빌 대위가 지휘하는 중대가 선봉에 섰고, 그는 4개 소대에 축구공을 하나씩 나눠줬다. 2㎞ 떨어진 적 진지까지 축구공을 차며 돌격하는 전술이었다. ‘축구 종가(宗家)’인 영국군의 발상치고는 무모하기조차 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경기였다. 선봉에 선 네빌 대위는 기관총 세례를 받아 쓰러졌고, 대원들은 분노의 함성을 내지르며 숨이 끊어질 때까지 달렸다. 마침내 골라인 독일군 진지를 백병전으로 함락했다. 전투가 끝나고 독일군 참호에 떨어진 축구공 2개가 발견됐다. 영국군은 그 축구공들을 킹스턴의 연대본부에 승리의 트로피로 영구 보존했다. 축구는 현대사회에서 종교 그 자체다. 승리를 향한 광신은 열광과 환희, 숭배와 폭력까지 낳는다. 전 세계 국가들이 맞붙는 월드컵과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등은 지구촌을 뜨겁게 달구는 축구 축제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축구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축구를 다룬 책도 많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축구라는 놀이 행위를 문화인류학적으로 들여다본 책은 드물다. 인간의 동물적 본성을 도발적으로 다룬 ‘털 없는 원숭이’의 저자인 동물학자 데즈먼드 모리스가 펴낸 ‘축구 종족’은 축구의 인류학적 DNA부터 각종 의례와 절차, 의복과 장신구, 언어까지 축구를 고대 부족들 간의 ‘제의’행위로 접근해 분석했다. 저자는 현대사회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여러 행동 가운데 축구를 가장 독특한 활동으로 꼽는다. 축구 활동의 중심을 차지하는 각각의 ‘축구 클럽’이 하나의 부족처럼 기능하고 있다고 빗댄다. 각각의 부족(축구 클럽)들 안에는 각 부족의 영토(스타디움)가 있고, 수뇌부에는 부족 원로(클럽 이사회)와 주술사(감독 및 코칭스태프)가 존재하며, 부족의 전사들(선수)과 그들을 따르는 신봉자들(서포터스)이 존재한다. 각 축구족에 스타디움은 거대한 신전이며 축구 규칙은 경전이다. 저자에 따르면 축구는 원시시대에서 기원한다. 전략과 전술을 쓰고 협력과 연대가 필요하며 추격전을 위한 단단한 신체와 특별한 기술, 냉정한 판단력 등이 모두 원시시대 사냥 과정과 흡사하다는 점이다. 1만년 전 정착 생활을 시작한 인류는 ‘용맹한 사냥꾼’ 기질을 잊지 못해 사냥 활동을 오락거리로 삼았고, 축구라는 유사 사냥 행위가 인류의 스포츠가 됐다는 설명이다. 거기에 더해 축구는 거대 비즈니스로 스캔들의 대상이기도 하다. 모리스의 이런 독특한 시각에 더해 축구 역사상 가장 성공한 지도자로 평가받는 조제 모리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이 쓴 서문도 인상적이다. 그는 “22명의 남자들이 공을 다투는 것만 보는 사람들은 축구에 내재된 기하학, 발레의 미학, 심리적 깊이, 그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인간 본성을 가장 충실하게 대변하는” 스포츠로 축구를 지목한다. 평생 축구 인생을 살아온 승리자의 자부심이 한껏 드러난다. 축구는 온갖 술수와 폭력이 난무하는 ‘두뇌 게임’이자 고도의 심리전이다. 폭력에 가까운 반칙이 비일비재한 현대 축구에서 저자는 폭력성을 축구의 속성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저자는 축구 전술사 100여년을 돌아볼 때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극단적인 ‘공격 전술’에서 강력한 ‘수비 전술’로 바뀌게 된 점을 꼽는다. 축구 초창기에 선수들은 상처뿐이더라도 승리하는 게 중요했다. 상대에게 득점을 많이 허용하더라도 더 많은 득점을 올리면 이기는 전략이었다. 모두가 공격수이고, 전사들의 모든 전력은 공격을 위해 존재했다. 하지만 현대 축구에 와서는 전사들보다 주술사인 감독의 역할이 더 커졌다. 감독들은 이중 삼중으로 골문을 차단하는 수비 전략에 치중했고, 축구는 과거보다 심심해졌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책은 190여장의 사진을 통해 생생한 경기 장면과 축구 종족들의 모습을 격정적으로 전한다. 그러고 보면 이 책은 축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저자의 인류학적 보고서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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