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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시 鄭周永”/‘할아버지 람보’

    ◎한때나돌던 건강악화설 일축/회견장에선 순발력·여유까지 계산된 언론플레이에 감탄도 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북한에 갈 때와 올 때의 반응은 극명히 엇갈렸다.재계에서는 그가 가져온 두툼한 대북 경협사업 보따리를 두고 ‘역시 鄭周永’이란 말이 나오고 있다. 鄭회장이 지난 27일 북한에 다시 갈 때 이를 가까이서 지켜보거나 TV를 보는 시청자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지난 6월16일 방북시와 달리 그의 모습이 초췌해 보여 건강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많았다.방북일정이 하루 연장되면서 혹시나 하는 건강악화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31일 귀경직후 판문점 자유의 집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鄭회장의 모습은 전혀 딴판이었다.보따리가 묵직한 탓인지 혈색이 좋아 보였다.鄭회장의 ‘현란한’ 언론플레이도 녹슬지 않았다. 鄭회장은 방북성과로 석유개발사업을 첫손에 꼽았다.그것도 곧 파이프라인을 통해 기름을 남한에 공급할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지난 27일 ‘북한과 석유개발사업을 합의하러 간다’고 말한 대목을 떠올리게 했다.(金潤圭 현대건설 사장은 그때마다 보충설명을 통해 원칙적 합의수준이라고 해명했다) 이를 두고 현대 고위관계자조차 혀를 내두른다.‘鄭회장의 계산된 발언이 언론의 허를 찔렀다’고 감탄했다. 鄭회장은 또 현대의 오너로서 고령에도 불구하고 예전의 총기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의 호칭을 왜 “장군님”으로 했느냐는 질문에 “북한에선 모두가 다 그렇게 하는 데 어떻게 하란 말이냐”고 반문했다.정부의 밀사설 여부에 대해서는 민간경협 차원에서 개인자격으로 간 것뿐이라고 부인했다. 83세의 고령으로 퇴행성 관절염을 앓고 있는 鄭명예회장이 이번 방북성과로 “더 오래 살 것“이란 관측을 낳고있다.
  • 3차원 그래픽의 진짜같은 만화영화

    ◎어른용 애니메이션 ‘개미’­‘난 이상한 사람과 결혼했다’ 곧 개봉 ‘만화영화는 아동용’이라는 고정관념을 깰 만한 애니메이션 2편이 내달 선보인다.7일,14일 각각 개봉하는 ‘개미’와 ‘난 이상한 사람과 결혼했다’는 소재와 주제,기법 등에서 기존 애니메이션과 차별되는 작품들이다. ‘개미’는,드림웍스 공동 설립자인 애니메이션의 대부 제프리 카젠버그의 첫 야심작.‘인어공주’‘미녀와 야수’‘라이온 킹’ 등 어린이 취향의 전작들과 달리 ‘사회와 자아의 대립’이라는 성숙한 주제를 다룸으로써 성인층을 겨냥했다. 여기에 ‘토이스토리’에서 한단계 발전한 3차원 컴퓨터 그래픽의 효과는 혀를 내두레 한다.눈꺼풀의 미세한 움직임을 생생히 잡아내는데다 흰개미와의 전투씬 등은 실사를 방불케할 정도로 정교하다. 뉴욕 센트럴파크에 사는 일개미 ‘Z’는 평생 땅 파고 흙이나 옮기며 살기보다는 개성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삐딱한 개미.술집에 몰래 놀러온 ‘발라’ 공주에게 첫눈에 반해 전투개미 사열식날 친구 ‘위버’대신 참석했다가얼떨결에 전쟁영웅이 된다.그러나 신분위장이 탄로나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발라공주와 함께 바깥세상으로 빠져나와 ‘곤충천국’을 찾아간다. 우디 앨런 특유의 유머와 재치를 그대로 따온 듯한 Z,샤론 스톤의 오만한 섹시함이 묻어나는 발라공주,실베스타 스탤론의 근육질을 연상시키는 전투개미 위버를 통해 대배우의 목소리 연기를 감상할 수 있는 것도 이 영화의 큰 매력이다. 이에 견줘 올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후보에 오른 ‘난 이상한 사람과 결혼했다’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상영되는 성인 애니메이션.성인용답게 섹스와 폭력이 주 메뉴다. 첫 장면에 ‘고상한 취향은 상상력의 적’(파블로 피카소),‘고상한 척하면 쏴버리고 싶다’(헤르만 괴링)는 경구가 떠오르는데 이것이 바로 영화의 주제다.기발한 상상력을 표현하는데 애니메이션만큼 적당한 장르가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신혼인 그랜트는 어느날 TV를 보다 위성수신 안테나에서 발생한 레이저광선을 맞은 뒤 상상을 현실로 바꾸는 이상한 능력을 갖게 된다.TV토크쇼의 카메라 모니터를 통해 초능력의 근원이 목덜미에 난 혹임이 밝혀지면서 이를 빼앗으려는 방송재벌 일당과 그랜트간의 쫓고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진다. 애니메이션계의 악동 빌 플림튼 감독은 군인을 도마뱀으로,미사일을 햄버거로 둔갑시키는 것은 기본이고 탱크들을 흥분시켜 교미하게 만드는 황당한 유머감각을 발휘한다. 그로테스크하고 희화화한 폭력과 섹스장면이 난무하지만 고상한 척하지 않고 새로움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볼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다.
  • 명암/세계의 화약고/중동 또 화약 냄새 코소보 평화 문턱

    코소보는 상황 끝.중동은 아직 계속.최근 잇따른 평화협정 체결로 잠잠해지나 했던 세계 2대 화약고인 코소보와 중동지역에 명암이 크게 엇갈린다.보다 쉽게 평화에 합의했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은 다시 전운이 서서히 감돈다.반면 터지기 직전 시한폭탄이었던 코소보는 예상보다 빨리 평화가 깃들어 가고 있다. ◎중동/이·팔 매파 반발 유혈사태 가능성/협정이행 불투명 중동에 전쟁의 불씨가 되살아나고 있다.요르단강 서안의 땅과 평화를 교환하는 ‘와이 리버’ 협정 체결을 둘러싸고 이스라엘 및 팔레스타인 내 과격파 세력들이 거세게 반발,협정 이행이 불투명해지고 있다.협상 당사자간에도 불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으며 유혈사태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지난주 조인한 ‘와이 리버’협정을 29일 내각에 제출할 계획이었으나,팔레스타인측이 미국에 구체적인 테러방지책을 내놓을 때까지 내각의 협정 심의와 표결을 연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팔레스타인도 마찬가지.과격파 하마스(이스라엘 해방운동) 등 6개 팔레스타인 단체들은 협정에 반대하는 공동성명을 냈다.그들은 이번 협정은 팔레스타인을 무력화하려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음모라며 이스라엘의 완전한 철수없는 화해는 환상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유태인 정착민과 팔레스타인 주민들간의 보복 살해사건은 가장 큰 걸림돌이다.요르단강 서안 북부의 이타마르에서는 팔레스타인 주민 3,000여명이 27일 피살된 팔레스타인 노인의 장례식에 참석,피의 보복을 다짐했다. ◎코소보/나토 공습 유보 세르비아군 철수/戰雲 서서히 걷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가 27일 신유고연방 공습을 유보키로 결정,발칸반도 위기는 완전히 한고비 넘겼다.나토는 최후통첩일인 이날 유고정부가 코소보에서 4,000여 병력을 철수했다며 공습명령을 일단 접는다고 발표했다.유고연방 군과 경찰은 26일부터 코소보에서 철수를 시작했다. 유고 군과 경찰이 철수하면서 알바니아계 반군 코소보해방군(KLA)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20여개의 검문소를 해체했으며,코소보내 많은 도로 검문소에 배치됐던 중무장 경찰은 정규 경찰로 대체됐다.나토 사무총장 자비에르솔라나는 “검문소들이 해체돼고 있고 주둔 보안군수도 지난 2월 분리주의 봉기 이전 수준으로 돌아갔다”고 밝혔다. 하지만 낙관은 이르다는게 이곳의 분위기.밀로세비치 유고연방 대통령은 버틸만큼 버티다 데드라인을 하루 앞둔 26일 철군에 나섰다.철군개시 이후에도 일부지역에서는 총성이 오갔고 사상자도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나토는 전시편제명령을 계속 유지하기로 했다.나토가 언제라도 공습작전에 돌입할수 있다는 의미다.밀로세비치의 또다른 술수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서다.
  • 건설 입찰담합 적발땐 낙찰가 5% 과징금 물려

    ◎田 공정거래위원장 밝혀 앞으로 건설공사의 입찰 담합행위가 적발되면 낙찰가의 5%를 과징금으로 물린다. 田允喆 공정거래위원장은 27일 “부실공사 초래는 물론 국가예산 낭비의 요인이 되고 있는 건설업체들의 입찰 담합행위를 뿌리 뽑기 위해 적발업체에 대해서는 법정 최고 한도액의 과징금을 물릴 방침”이라고 말했다. 담합입찰에 대한 법정 최고 과징금은 낙찰가의 5%이지만 지금까지는 1∼2%의 과징금을 부과해왔다. 앞서 金大中 대통령은 이날 오전 국무회의에서 기업 내부거래와 건설업 등의 담합행위를 철저히 단속하라고 지시했다.
  • 총격요청 수사결과­발표문 요지

    ◎배후 등 공범 수사/한씨 “이회성씨에 보고” 진술 번복/피의자 3인 “총격요청 했지만 보고는 안했다” ▲수사배경=한성기가 안기부 조사 과정에서 이회성에게 무력 시위 요청 계획을 사전에 보고하고 경비 500만원을 지원받았으며 진로그룹 장진호 회장에게도 사전에 보고했다고 진술했다.오정은 한성기등이 이회창 후보 당선 시공을 인정받아 대가를 얻을 목적으로 범행에 이른점에 비추어 볼 때 추진 상황을 사전에 이후보 진영에 보고하였을 개연성이 높다고 판단돼 이회성 장진호 오정은의 비선조직과 통일부 안기부 관계자들을 상대로 배후 및 공범관계 수사를 계속해왔다. ○‘이 후보 지시’ 아직 못밝혀 ▲이회창 후보 수사 결과=오정은은 97년 10월 한성기로부터 진로의 부동산 매각과 화의신청을 도와주면 장진호가 박찬종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해 박찬종을 이후보 진영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사정비서관과 민정비서관에게 부탁했다.11월 하순 한성기와 함께 이후보의 승용차에 동승,박찬종 고문 자택까지 안내해 이후보와 박고문의 회동을주선하는 등 이후보와 지속적으로 접촉했다. 피의자 등이 모두 이후보의 휴전선 무력시위 요청을 지시받거나 보고한 사실이 없다고 극구 부인하고 있어 현재까지의 수사 결과로는 이후보가 지시했거나 보고받았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회성 관련 의혹=이회성은 대선기간동안 조선호텔 객실에서 한성기를 1회 만난 것은 사실이나 10여분 동안 선거에 관한 일반적인 이야기를 했을 뿐 무력 시위 요청 내용에 대해 사전 사후에 보고받은 사실이 없다고 극구 변명했다. 한성기는 안기부 조사에서는 97년 11월 하순 조선호텔에서 이회성을 만나 “이런 식으로 가면 대선에 절대 불리할 것 같다.4·11 총선과 같이 북풍을 일으켜 대선을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야겠다”고 했고 12월 다시 만나 “북경에 가서 북풍을 일으켜 달라고 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아 죄송합니다”라고 했다고 진술했다.그러나 검찰에서는 그 진술을 번복했다. 결론적으로 한성기와 이회성이 단둘이 은밀히 만났다면 한성기가 자신의 공로를 인정받기 위해 출국전에 무력 시위를 요청할계획을 얘기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출국전 계획보고 가능성 또 한성기는 12월8일 조선호텔에서 이회성을 만나 북풍 요청 사실을 말하려고 했으나 사람이 많아 말을 다하지 못했고 이회성의 지시에 따라 진로그룹 장진호 회장을 만나 “북경으로 가서 북한 사람과 만나 무력시위를 요청하려 한다”고 말했다고 진술한 점 등을 종합하면 한성기가 중국 출국전에 이회성을 만나 무력 시위 요청 계획을 보고했을 의심이 가므로 보고 여부에 관해 계속 수사할 필요가 있다. 한성기는 안기부 조사시 이회성고문에게 무력 시위 요청 사건을 사전에 보고하고 경비조로 500만원을 받았다고 진술했으나 검찰에서는 그런 사실이 없다고 번복했다.이회성도 자금 제공 사실을 부인하고 있으나 진위에 관해서는 계속 수사할 예정이다. ○장진호씨가 자금 지원 ▲장진호 관련 의혹=장진호는 97년 10월 한성기 오정은으로부터 이회창 후보를 돕기 위해 비선 조직을 결성할 계획이니 자금을 지원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7,000만원을 지원했으며 12월 초순에는 한성기의 북한 주민접촉 신청에 필요한 각종 서류를 발급해 주고 한성기가 북경에서 북측 인사를 만나기로 했다는 사실을 사전에 보고받은 점이 확인됐다.장진호는 안기부 조사시 97년 12월초 한성기로부터 “12월10일쯤 북경을 방문해 북한측에 모종의 부탁을 하려 하는데 앞으로 휴전선에서 시끄러운 일이 생길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했으나 검찰에서는 진술을 번복했다. 전후 사정을 종합해보면 장진호가 무력 시위 요청 사실을 사전에 인지하였을 개연성이 있으나 장진호가 한성기 등에게 무력 시위를 요청하도록 지시했거나 자금 지원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아 계속 수사할 예정이다. ▲향후 수사 계획=피의자들은 검찰 송치후 배후 관련 부분을 제외한 범행을 대부분 시인했으나 사건이 정치쟁점화되고 신체검증과 구속적부심 등을 통해 자백을 번복하고 배후를 부인하고 있어 계속 수사해 진상을 규명하겠다. ◎범행 동기/이회창 후보 당선땐 승진·채무변제 등 기대 26일 검찰이 발표한 판문점 총격요청사건 중간수사결과 발표의 주요내용을 간추린다. 吳靜恩張錫重은 94년 현대종합상사 부장인 吳모씨의 소개로 알게된 뒤 吳靜恩은 張錫重의 대북 무역업에 관한 편의를 봐주고,張錫重은 북한관련 정보를 吳靜恩에게 제공했다.韓成基와 吳靜恩은 97년 고려대 언론대학원 최고위과정을 다니면서 알게 됐다. 吳靜恩은 별정직 공무원으로서 金泳三대통령 퇴임후의 신분유지에 불안을 느껴 韓成基와 함께 李會昌 후보 선거운동을 위한 비선조직을 구성키로 합의했다.한성기와 오정은은 97년 10월 진로그룹 張震浩 회장의 집을 방문하여 비선조직 운영자금 7,000만원을 제공받아 2,000만원은 韓成基가,5,000만원은 吳靜恩이 조직운영비로 사용했다. 피의자들은 대선 기간중 吳靜恩 韓成基가 李會昌 후보의 대선 승리를 위해 노력했음에도 李후보의 지지율이 답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자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점에 공감했다.이에 따라 張錫重이 97년 10월16일 북의 아세아 태평양평화위원회로부터 방북 초청장을 받고 추진하던 金順權 박사의 방북을 대가로 북한측에 96년 4·11 총선 직전에 발생한 판문점 무력시위와 같은총격전 등을 요청하여 보수세력의 지지를 결집시켜 李후보의 지지율을 제고키로 했다. 李후보가 당선될 경우 오정은은 청와대 별정직 3급 공무원으로서 현직 유지가 가능하고 승진 또는 출신지역에서 정계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는 기회를 삼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한성기는 안기부장 특보직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다. 장석중은 대북사업 중 발생한 현대측에 대한 2억원의 채무변제 유예가 가능하고 앞으로 오정은 등을 배경으로 원활한 대북사업을 할 수 있는 등 충분한 보상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이와 같이 개인적 이익과 영달을 위하여 국기를 위협하는 판문점 총격요청 범행에까지 이르게 됐다. ◎총격요청 공모/“선거 이틀전 터트리면 야당서도 대응 못할것” 장석중은 북한에 농업용 자재를 제공하고 농산물을 받아오는 계약재배 사업을 성사시키기 위해 경북대 김순권박사의 방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오정은에게 김박사의 방북승인을 부탁했다.장석중이 현대에 대한 채무 2억원을 변제하지 못하고 담보물건에 대한 경매를 통보받는 상황에 이르러 오정은에게 그 해결을 부탁하자 오정은은 정·재계에 지면이 넓은 한성기를 장석중에게 소개했다. 오정은의 소개로 한성기 장석중이 만나 김박사의 방북을 고리로 현대의 대북사업을 지원함으로써 장석중의 현대에 대한 채무를 연기받는 방안을 논의하던중 오정은이 북한에 김박사를 보내면 장석중의 사업뿐 아니라 이번 대선과 관련해 활용할 수도 있을 것 아니냐고 제의했다. 이후 97년 11월 하순 오정은과 한성기가 만나 李후보 지지율 문제를 논의하다가 한성기가 국민회의 공작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은 휴전선 총격전인데 시시한 것 갖고는 안되고 한번 ‘쾅’하고 크게 터져야 한다고 말했다.이에 오정은은 만약 그런 사건을 일으키면 오히려 여당이 덮어쓸 가능성이 많다고 하자 한성기는 선거에 임박해 이틀 정도 하면 야당이 대응할 여유가 없다면서 내가 북경에 가서 북한사람들을 만나보겠다고 말했다. 97년 11월말경 삼청동 오복집에서 오정은 한성기 장석중이 만났다.이 자리에서 한성기가 선거가 임박한 시점에서 4·11총선 때처럼 판문점에서 무력시위가 있어야 하며 홍보가 중요하므로 사전에 북측과 약속된 지점에 미리 카메라를 설치하여 북측에서 총기를 난사하고 내려오는 장면을 실감나게 찍어 방영하면 효과가 극대화될 것이라고 말했다.장석중이 그런 문제는 자신있다며 북한측과 한성기를 만나도록 주선해주겠다고 했다.또 장석중이 오정은에게 김박사의 방북승인 일정을 책임져 달라고 하자 오정은은 챙겨보겠다고 약속했다. 오정은은 통일원에서 김박사의 방북승인을 얻어내고 장석중은 한성기를 북경으로 안내하여 북측인물과 접촉을 주선하며,한성기는 북측인사들을 만나 대선 직전 북한군의 휴전선 무력시위를 요청하기로 역할을 분담했다. 97년 12월 초순 장석중이 북경 방문시 대선문제 등을 논의할 목적으로 북경 주재 북한 대외경제위원회 협력처장 리철운에게 전화하여 한성기를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고 소개하면서 김박사의 방북건은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이니 대선관련 요청 사항을 논의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탁했다. 97년 12월9일 삼청동 오복집에서 3인이 만나 무력시위 요청에 관한 북한측과의 접촉상황 등을 최종점검하면서 만약 공안기관에 노출되면 김박사의 방북 등 남북교류 부분에만 목적이 있었다고 이야기하자고 약속했다. ◎권영해씨 직무유기/사건내용 알고도 자료인계 안해 권전안기부장은 97년 12월 한성기가 북경에서 북측 인사들을 만나 북측이 휴전선에 1개 소대를 보내 무력 시위를 일으키거나 김대중 후보의 친북활동 자료를 제공하여 주면 북한에 식량과 비료 등을 지원해주겠다고 언동했다는 보고를 받고 이대성 해외조사실장에게 진상 확인을 지시했다.이대성은 12월12일 중국에서 귀국하는 한성기를 김포공항에서 임의동행해 조사한 결과 한성기는 부인했으나 소지품 등을 통해 첩보가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이대성은 권영해에게 한성기 조사 결과와 동행한 장석중이 안기부 공작원이라는 사실을 보고했으나 권영해의 별도 지시가 없자 한성기를 석방했다. 권전안기부장은 첩보 내용의 신빙성을 확인해 한성기가 국가보안법을 위반했을 것으로 강하게 의심이 가는 상황이었고 특정 후보의지지율 제고를 위해 북과 내통해 휴전선에서의 무력 시위를 요청한 중대한 사안임을 인식했다.그런데도 대공수사실로 관련 첩보 및 증거물을 이첩하여 수사토록 하지 않고 퇴임시까지 아무런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아 사건의 암장을 기도,이후보의 당선을 음성적으로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 ○장석중씨 사전인지 의혹 권영해는 범행의 동기에 대해 함구하고 있으나 특정 후보에게 불리한 사건에 대해 은폐하려한 점에 비춰 피의자에게 어떤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는지 그 동기를 추단해 볼 수 있다.권은 자신의 조사 지시로 범행이 확인됐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정권 교체후 새 안기부 수사팀에 본건 관련 자료를 공식 인계한 사실도 없을 뿐 아니라 부장의 지시가 없을 경우 수사 부서로 이첩되지 않아 수사가 이뤄질 수 없다는 점에 비춰 범의를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이 후보당선 음성적 지원 특히 안기부에서 공작원인 장석중 등이 계획을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이유는 12월12일 귀국하자마자 안기부에서 조사받은 한성기가 다음날 북경에있는 장석중에게 안기부에서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고 알렸음에도 장석중이 상급자 공작관에게 이실직고하지 않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점 등 때문이다.이 점에 대해서도 계속 수사할 예정이다. ◎총격요청 경과/북 박충 만나 무력시위 부탁/“평양에 알아보겠다” 답변 97년 12월10일 오후 장석중 한성기가 중국 북경에 도착해 캠핀스키 호텔에 투숙했다. ▲1차 접촉=12월10일 오후 6시 한성기의 호텔 방에서 장석중의 전화를 받고 찾아온 북한 대외경제위 소속 리철운과 김영수를 만났다.이 자리에서 장석중은 한성기와 같이 북경에 온 목적은 첫째 김순권 박사 옥수수 계약재배건이며,둘째는 대선에 관한 특별한 사업이라고 밝혔다. 리철운이 무엇을 도와 달라는 것이냐고 묻자 한성기는 김대중 후보의 친북자료가 있는지 알아보고 그 자료가 있으면 부탁한다고 말했다.또 판문점 무력시위 요청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사람과의 회담 주선을 부탁했다. ▲2차 접촉=같은 날 오후 8시 캠핀스키 호텔 다방에서 한성기 장석중과 북한의 리철운 김영수,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 참사라고 소개한 박충이 만났다.한성기는 이 자리에서 현재 대선상황은 전쟁상황보다 더 심각하다면서 이회창 후보 특보 자격으로 북한에 왔다고 밝혔다.또 박충에게 우리가 요청하는 사항을 들어달라고 요청,박충으로부터 될 수 있는 대로 도와드리겠다는 답변을 들었다.이어 한성기는 박충과 따로 만나 TV화면이 잘 잡히는 판문점에서 무장군인들이 왔다갔다 하면서 무력시위를 하여 긴장을 조성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요청했다.또 요청을 들어주면 김박사를 북한에 보내주고 신정부 출범 전까지 비료,영농자재 등을 대가로 지원하겠다고 제의했다.박충은 내가 결정할 사항이 아니니 평양에 전문을 보내 출국하기 전에 답변을 주겠다고 말했다. ▲3차 접촉=12월11일 오전 11시쯤 캠핀스키 호텔에서 한성기 장석중과 리철운 김영수 등이 만나 계약재배건 등 대북사업계획을 논의했다. ▲4차 접촉=12월12일 오전 8시30분쯤 같은 호텔에서 한성기 장석중이 북한의 박충 리철운 김영수를 만났다.이 자리에서 박충은 한성기가 말한 부분에 대하여 우리 공화국에 전문을 보냈으나 회답이 없다고 전했다.박충은 또 지금 답변할 수 있는 것은 현재 답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라는 통보를 했다. ◎결론/적과 내통 긴장 조성/자유민주주의 뒤흔든 사건 ▲사건의 성격=이번 ‘판문점 총격요청 사건’은 제15대 대선중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공무원인 청와대 행정관 오정은과 진로그룹 고문 한성기 등이 재벌의 자금지원으로 비선조직을 가동,특정후보의 당선을 위해 북측인물과 내통,판문점에서의 총격까지 요청,국가의 안녕과 자유민주주의 뿌리를 뒤흔드는 가증스러운 사건으로 우리 사회의 기강이 극도로 문란해져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또한,‘권영해 전 안기부장의 특수직무유기 사건’은 국가최고정보기관의장이 총격요청사건을 수사에 착수도 하지 않아 대공정보·수사권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또 하나의 대표적 사건으로 지난 대선기간 중 일어난 ‘북풍’사건과 궤를 같이 한다. ▲검찰의 입장=‘판문점 총격요청 사건’은 적과 내통해 긴장을 조성,보수계층을 결집시켜 대선에서 특정후보의 당선을 기도한 것으로국민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고 국가의 존립·안전을 위태롭게 한 사건으로 역사적 교훈으로 삼기 위해 엄정하게 사법처리 했다. 관련자들은 소속 정당,신분,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엄정하게 수사,배후관계 등과 관련,의심되는 부분이 적지 않았으나 증거법상 인정되는 부분에 대해서만 기소하였다. ▲향후 수사계획=북한과 관련된 사항이 많고,피의자들이 언론에 보도된 후 정치쟁점화되고 신체검증·감정절차,구속적부심 절차와 한나라당 소속 변호인들과 접견한 뒤 자신들의 범행을 부인,배후관계 등에 강한 의혹이 있음에도 수사 애로상 충분히 규명되지 못하고 증거법상의 제약으로 기소를 하지 못한 부분이 있으나,▲혐의자들에 대한 공모,자금 지원 여부 ▲김순권 박사의 방북카드를 대가로 무력시위 요청 경위 ▲권영해의 특수직무유기행위와 정치권과의 연관관계 ▲판문점 총격요청을 전후한 한성기,장진호,이회성 등의 접촉과 관련한 일련의 의혹 등에 대해서는 수사를 계속해 진상을 철저히 규명할 것이다. 아울러,이 사건 수사와 관련해 제기된 가혹행위여부에 대해서도 인권옹호 차원에서 엄정하게 수사하겠다.
  • 親日의 군상:10/前 홍익대 총장 李恒寧씨(정직한 역사 되찾기)

    ◎“부일의 과오 민족앞에 눈물로 참회”/1939년 ‘고교’ 합격… 일제말 하동·창녕군수 4년 역임/군청 직원들 앞세워 죽창으로 농민 위협하며 쌀 공출/해방 후 35년간 교육계서 근신… 기회있을 때마다 사죄 “일제말 27세의 젊은 나이로 하동(河東)군수를 지내면서 저 자신의 출세와 보신(保身)에 눈이 어두워 (군민들을) 죽창(竹槍)으로 위협까지 했던 저를 너그럽고 따뜻하게 맞아주신 하동 군민들에게 진심으로 사죄(謝罪)드립니다” ‘참회’는 아름답다.진솔한 참회는 숭고하기조차 하다.왜냐하면 보통사람들로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일제하에서 고관대작을 지냈거나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소위 ‘친일파’로 불리는 사람 중에서도 더러는 자신의 친일전력을 참회한 바 있다.민족대표 33인중 1인으로 나중에 변절한 崔麟은 반민특위 재판에서 법정을 온통 울음바다로 만들었다.“민족의 이름으로 이 최린을 광화문 네거리에서 처단해 주십시오”.그의 진실한 참회 한 마디가 사람들을 울린 것이다.파인 金東煥은 반민족행위를 뉘우치며 반민특위에 자수하였고,玄錫虎(일제때 충남 광공부장,2공화국에서 국방장관 지냄,88년 작고)는 회고록 ‘한 삶의 고백’을 통해 자신의 친일행적을 고백한 바 있다.친일행적을 한번만이 아니라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참회·사죄한 인사도 있다.홍익대 총장을 지낸 李恒寧(84·학술원 회원)씨가 그 주인공이다.그는 다소 껄끄러운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기자의 인터뷰 요청을 의외로 단번에 허락했다.가을빛이 완연한 정릉 자택으로 그를 찾아가 두어 시간 얘기를 나눴다. ­하동군민들에게 사죄한 것은 언제,어디서 하신 말씀입니까? ▲91년 7월10일 바르게살기운동 하동군협의회 초청 강연회에서 인사말로 한 것인데 여러 신문에 보도가 됐더군요. ­주최측에서 그런 얘기를 해달라고 주문을 하던가요? ▲아닙니다.제 스스로 한 얘깁니다.그 자리에 서니까 50년전의 일이 생각도 나고 군민들을 직접 뵈니까 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얘기가 저절로 나옵디다. ­처음 주최측으로부터 강연요청을 받고서 어떤 감회가 있었습니까? ▲‘하동’이라고 하니까 저로서는 감회가없을 수야 없지요.거기서 군수를 지냈으니까요.해방후에도 더러 하동을 지나친 적이 있었습니다만 ‘죄의식’때문에 (군민들을) 찾아볼 용기가 없었습니다. ○일제 앞잡이로 군민 괴롭혀 ­‘죄’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씀하십니까? ▲일제말기 하동·창녕군수로 재직하면서 일제의 앞잡이가 돼 군민들을 괴롭힌 행위를 말합니다. 李씨는 1934년 경성(京城)제국대학(서울대학교의 전신)에 입학한 후 예과 3년,본과 3년의 6년 과정을 마치고 40년 졸업했다.본과 3학년 때인 39년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한 李씨는 대학 졸업후 1년간 시보(試補)생활을 거쳐 1941년 6월 하동 군수로 첫 발령을 받았다.1년 뒤인 42년 7월 그는 창녕(昌寧)군수로 전보돼 그곳에서 3년간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군수는 어떤 경로로 됐습니까? ▲당시 대학을 나와도 마땅한 취직자리도 없고 해서 재학중에 고시(考試)공부를 해서 (군수가)됐습니다. ­당시 고시공부는 주로 직장을 얻기 위한 방편이었습니까? ▲그런 면도 있지만 입신출세를 위해서 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시보 생활은 어디서 했습니까?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했습니다.국회 부의장을 지낸 尹吉重씨가 저와는 고시 동기생인데 尹씨는 총독부 농림국에서 시보생활을 했습니다. ­군수의 대우는 어땠습니까? ▲당시로선 비교적 많은 봉급을 받았습니다.일제말기에는 일본인에게만 주던 가봉(加俸)을 조선인들에게도 지급해 봉급차이도 없어졌습니다. ­하동군수 시절 식량공출(供出)문제로 고생을 하신 것 같은데… ▲제가 군수로 부임한 이듬해인 1942년부터 ‘공출제도’가 시행됐습니다.그런데 하동에선 생산량보다 할당량이 많아서 무리가 있었습니다. ○1942년부터 공출제 시행 ­공출미 할당은 어디서,누가 결정하였습니까? ▲당시 경상남도 산업부장으로 있던 金大羽씨가 군수회의를 소집한 후 각 군수에게 강제로 할당해 주었습니다. ­하동군에 할당된 공출량은 얼마나 됐습니까? ▲군 양곡담당 기수(技手)에게 물어보니 재고가 6,000석이라고 하더군요.그 내용을 金大羽씨에게 보고했더니 ‘기수 말은 못 믿겠다’며 재고량의 무려 5배인 3만석을 할당하더군요. ­최종 공출량은 얼마나 됐습니까? ▲할당량의 1할 정도인 3,000석 가량을 공출했습니다. ­다른 군의 사정은 어땠습니까? ▲대개 할당량의 절반 정도는 달성했었습니다.그 때 제가 있던 하동군이 꼴찌를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죽창’ 얘기는 왜 나온 겁니까? ▲당시 군민들이 집안 곳곳에 쌀을 감추어 두니까 군청직원들이 죽창을 들고 다니며 창고나 벽 같은 쌀을 숨겨둘만한 곳을 쿡쿡 찔러본 것을 두고 한 얘깁니다. ­죽창으로 사람을 해친 사례도 있습니까? ▲그런 적은 없습니다.그러나 ‘공출독려반’들이 죽창을 들고다니니까 군민들에게 위협은 됐을 겁니다. ­하동군수에서 1년만에 창녕군수로 자리를 옮기셨는데 승진은 아니지요? ▲예,군세(郡勢)로 보면 오히려 좌천인 셈이지요.부진한 공출성적이 문제가 됐을 것으로 봅니다. ­본인의 ‘친일’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말합니까? ▲식량공출이나 노무자 징용,학병권유,징병제 독려 등에 대한 방침이 도의 군수회의에서 결정이 되면 군수는 다시 면장회의를 소집하여 그 내용을 하달,독려했습니다.결국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 셈이지요. ­그같은 일은 당시 군수의 기본적인 직무가 아닙니까? ▲그야 물론이지요.그러나 그같은 직무를 수행하는 군수자리를 직업으로 택했다는 자체가 ‘친일’입니다. ○고등관리 이상 관리는 친일파 ­항간에는 일제말기에 군수 노릇 몇 년 한 사람을 ‘친일파’로 보는 것은 지나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도덕적 평가 이전에 지식인의 민족의식 문제라고 봅니다.아무 생각없이 상부기관의 결정사항을 집행한 것도 그렇지만 더러는 출세목적으로 부풀려 집행한 사례도 있었습니다.당시 군수는 일선 행정기관의 실질적 책임자로 지금보다 훨씬 권한과 재량이 많았습니다.어려운 시험을 거쳐 자발적으로 그런 자리에 앉았다면 이는 재임기간이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적어도 고등관 이상의 관리는 친일파로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인 관리들과의 차별대우는 어땠습니까? ▲고급관리는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일제말기에는 임금차이도 거의 없었습니다.총독부 내에 ‘계림구락부’라는 고등문관시험 출신 고등관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저도 시보 시절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해방후 그는 45년 10월까지 창녕군수로 계속 근무하다가 미 군정청으로부터 경남도청 사회과장으로 발령을 받고는 한 달만에 사표를 썼다.이유는 자신은 일제때 관리를 지낸 몸이라는 것.이후 그가 자리를 옮긴 곳은 부산 동래구 범어사 입구 청룡초등학교였다.“해방후 민족앞에 속죄해야겠다는 생각에 승려가 되려했습니다.그러나 이미 딸린 아이가 다섯이나 돼 혼자 이 문제를 결정할 수가 없었습니다.그래서 낮에는 교사로 근무하면서 밤에는 범어사 河東山 스님 밑에서 수행생활을 했습니다”.지난 81년 홍익대 총장을 그만둘때까지 그는 35년간 교육계에만 몸담았었다.그 나름의 ‘근신’이었다. 60년대초 그는 수필과 신문에 연재한 자전적 소설을 통해 자신의 친일행적을 참회했었다.또 80년 봄에는 조선일보에 ‘나를 손가락질 해다오’라는 글을 발표,지식인 사회에 파문을 던졌다.거듭된 ‘참회’를 두고 일각에서는 ‘상습적 양심선언가’라고 비아냥거렸다.그러나그의 ‘참회’는 앞뒤,체면안가리고 솔직하다.사실왜곡이나 자신을 미화한 구석도 없다. “사죄를 하고나니 마음이 이렇게 후련할 수가 없습니다”. 인터뷰 내내 그는 밝은 모습이었다.묻는 말에 뭘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는 법도 없었다.그의 얼굴 가득히 ‘뉘우친 자’의 평화감과 여유가 넘쳐 흘렀다. ◎日帝下 군수는 어떤 자리였나/군행정 최고 실권 가진 실력자/고등 문관시험 합격자 임용/1년간 시보 거쳐 군수부인/면장·군청직원 인사권 가져/초임은 초등교사의 약 3배 일제하 공직자 관등(官等)은 네 종류였다.최상급은 일황이 ‘친히’ 임명하는 친임관(親任官)으로 조선내에서는 조선총독·정무총감 두 사람뿐.그 다음이 칙임관(勅任官)·주임관(奏任官)·판임관(判任官)순.주임관 이상을 고등관(高等官)으로 쳤는데 현 사무관(5급) 이상에 해당하는 직위다. 군수는 판임관에서 승진하거나 고등문관시험 행정과(현 행정고시)합격자가 임용됐다.고문(高文)출신자의 경우 1년간 시보 시절에는 판임관 6급(군청 과장급)대우를 받다가 군수로 정식 임용되면 주임관 7등급 대우를 받았다.초임 연봉은 1940년 7월1일 기준 1,650원.(당시 초등학교 교사 초봉은 월 45원) 군수는 면장 이하 군청직원에 대한 인사권을 가진 군행정의 최고책임자로 ‘영감(令監)님’으로 불렸고 부인은 ‘마님’소리를 들었다.‘각하(閣下)’라는 용어는 도지사급의 칙임관들에게 붙였다. 李恒寧씨는 “사법과 출신의 법관들은 판결문 작성 등 잡무가 많았으나 군수는 도장찍는 일 밖에 없어 편했다”고 회고했다.
  • 金 대통령 호감도 亞州 지도자중 1위/日人 500명 설문조사

    ◎江澤民 中 주석·마하티르 말聯 총리보다 앞서/세계적으론 클린턴·블레어 다음으로 꼽혀 【도쿄=黃性淇 특파원】 일본인들은 아시아 지도자 가운데 金大中 대통령에게 가장 호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독자적인 정치이념과 결단력,지도력을 두루 갖춘 지도자로 평가하고 있었다. 이는 일본주재 한국 대사관이 20일 일본 최대의 광고회사인 덴츠(電通)에 의뢰해 도쿄의 성인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대통령 이미지 조사’결과에 따른 것이다. 응답자들은 호감이 가는 세계적인 지도자로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56%),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46.6%)에 이어 3번째로 金大中 대통령(36.2%)을 꼽았다. 이어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18.6%),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14.4%)가 뒤를 이었다. 金 대통령의 덕목으로 ‘독자적인 정치이념’이 67.6%로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고 다음은 ‘결단력’(57%),‘지도력’(54.8%),‘철학과 사상’(49.8%) 등의 순이었다. 한·일 관계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82%가 “서로에게 필요한 나라이므로 과거는 청산하고 동반자로서 긴밀한 경제협력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3명에 2명꼴인 67%은 또 “식민지배는 일본이 잘못을 저지른 불행한 시기로 일본은 더 빨리 사죄를 했어야 했다”고 응답하기도 했다. 끝으로 한일 정상회담에서 채택된 ‘21세기 미래지향적 동반자관계’를 골자로 하는 공동선언과 행동계획과 관련,일반 시민이 참가할 수 있는 것으로는 ‘2000년 월드컵 대회 관전’(76.6%)을 첫 손으로 꼽았다.
  • 재벌·언론 분리 빨리 이뤄져야(사설)

    朴智元 청와대 공보수석이 최근 한 강연회에서 ”재벌과 언론을 반드시 분리할 것”이라며 재벌과 언론이 한통속이 되어 부당 내부자거래,무가지 남발 등 시장질서를 교란하는 행위를 계속할경우 공정거래위에 제소해서 가차없는 조치를 취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재벌이 계열언론사를 위해 광고와 판매에 막대한 지원과 혜택을 아끼지 않았던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언론권력’이라는 힘을 부당하게 동원해 공정거래법을 무력화·박제화해 버린 것도 이들 재벌언론이었다.그래서 재벌기업을 등에 업지 않고는 언론이 살아날 방도가 없을 지경이 되었다.이는 동물의 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강자의 횡포논리가 지배하는 꼴이다.이들 언론은 모기업으로부터 특혜를 받으면서 충실한 재벌홍보의 전위가 되거나 정보 접근권을 최대한 활용해 정·관계의 로비스트로 나선 경우도 적지 않았다.따지고 보면 이런 행위가 바로 언론이기를 포기하거나 언론의 순수성을 더럽히는 일이 되는데도 한국적 풍토에서는 마치 특권으로 잘못 인식되기까지 했다. 무가지남발은 도처에서 발견된다.서울의 아파트촌에‘구독사절’이라고 현관에 써붙여 놓아도 계속 강압적으로 배달하는가 하면,일부에선 신문값을 받으러 오지도 않는다고 한다.배달사원에게 신문을 넣지 말라고 당부해도 다음날 어김없이 신문을 넣는다고 혀를 내두르는 시민도 있다. 바로 독자확장을 위한 과당경쟁의 결과며,이런 허수(虛數)를 독자로 계산해 광고료 책정과 사세의 잣대로 활용하는 부도덕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이와 함께 재벌언론은 계열기업에 판매부수를 강압적으로 할당하고 있기도 하다. 광고 지원의 경우도 이들 재벌언론의 지면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모기업 광고가 지나치게 많은데다 광고단가를 터무니없이 높게 책정해주고,행사후원 명목 등으로 음성적인 자금지원을 해주고 있다.공정거래의 ‘모범전시장’이 되어야 할 신문지면이 오히려 공정거래를 앞장 서 황폐화시키고 있는 형국이다.여기서 족벌언론도 예외는 아니다.판매의 과당경쟁과 무가지 살포 등 불공정거래가 재벌언론과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언론 스스로 불공정거래의 화신이 되어 있으면서 어떻게 일반 기업의 불공정 사례를 고발,계도할 수 있는가.특히 재벌언론이 그 도가 심각하다는 점에서 모기업과 명실상부하게 분리시키는 일이 시급하다.시민들도 무가지살포,경품지급 등 불공정 사례를 적극 고발하고,당국은 신고센터를 제도화해 이를 뒷받침해야 할 것이다.자사 이기주의를 천박하게 내보이는 이런 행태는 더 이상 용납돼서는 안된다.
  • “80년도 광주민주화운동/폭동 규정 경찰발표 조작”

    ◎홍종수씨 말誌서 폭로 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폭동을 선동한 간첩으로 경찰에 체포됐던 洪종수씨(68)는 “광주민주화운동이 간첩에 의해 선동된 폭동이었다는 당시 경찰의 발표는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洪씨는 20일 발행된 월간 ‘말’지 11월호에서 인터뷰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洪씨는 자신을 광주사태를 무장폭동으로 유도하기 위해 급파된 간첩이라고 규정한 서울시경의 발표에 대해 “인천에서 암약하고 있던 한 고정간첩을 ‘조직수습’하는 임무를 맡았을 뿐 광주사태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洪씨는 또 “북한에서 떠난 것이 5월11일이었는데 어떻게 18일에 일어난 광주사태에 개입할 수 있었겠느냐”면서 “체포 직후 독약을 먹은 데다 혀를 18㎜나 깨물었기 때문에 한달 가까이 아무런 진술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따라서 체포 다음날의 서울시경 발표는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했다.
  • 朴殷植·申采浩·張道斌 3人의 주필(다시 태어난 ‘대한매일’:4)

    ◎민족사관 巨木 키워낸 ‘둥지’/겨레정신 부활 외친 예리한 필봉/세사람 구국운동·망명 등 공통된 삶/각종 역사서 편찬 근대사학 선구자 白巖 朴殷植과 丹齋 申采浩,그리고 汕耘 張道斌 등 세 사람에게는 여러가지 공통점이 있다.그 가운데 우뚝한 것은 일제의 침략에 맞서 민족의 정기를 벼린 민족주의사학의 거목이라는 사실이다. 아울러 이들은 대한매일의 주필직을 주고 받은 언론사(言論史)적인 인연을 갖고 있다.대한매일은 이들의 필봉에 힘입어 예리하고 격조높은 논조를 일관되게 유지할 수 있었다.대한매일이야말로 이들이 민족사관을 키우고 다듬는데 둥지 구실을 했다고 평가할 만하다. 백암 박은식(1859∼1925)은 성리학자로 이름을 높인뒤 사회·정치활동에 나선다.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만민공동회에서는 문교부장급 간부로 활약한다.이해 9월 ‘황성신문(皇城新聞)’이 창간되자 張志淵과 함께 논설기자(주필)를 맡는다.황성신문은 한일합병후 문을 닫을 때까지 대한매일과 더불어 민족지를 대표했다. 백암이 대한매일과 인연을 맺은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일설에는 대한매일 창간때 이미 梁起鐸의 추천으로 주필에 취임했다고도 하고,황성신문이 정간당한 직후인 1905년 11월에 옮겼다고도 한다. 확실한 것은,일제가 1907년 1월18일자로 파악한 보고서에는 대한매일 사원으로 돼 있지만 1908년 5월28일자 기록에는 빠졌다는 사실이다.따라서 그가 주필로 일한 기간은 1905년 말에서 2년여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대한매일은 을사조약의 전말을 상세히 보도했을 뿐 아니라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게재로 정간당한 황성신문을 찬양한 ‘황성 의무’ ▲을사조약 강제 체결을 다시 비판한 ‘시일에 우(又=다시)방성대곡’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흉계를 비난한 ‘이등후(伊藤侯)’ 등의 논설을 잇따라 실었다.주필인 백암의 민족정신이 그대로 드러나는 글들이다. 단재 신채호(1880∼1936) 역시 26살에 성균관 박사가 된 촉망받는 한학자였다.그러나 벼슬길을 마다하고 황성신문에 들어간다.단재는 박은식에게서 대한매일 주필직을 넘겨받아 1910년 4월 중국으로 건너갈 때까지힘찬 붓자루를 휘둘렀다. 그가 대한매일에 남긴 논설은 ‘일본의 3대 충노(忠奴)’ ‘서호문답’ ‘영웅과 세계’ ‘한국 자치제의 약사’ ‘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 등이다.또 ‘독사신론’ ‘수군 제일 위인 이순신’ ‘동국 거걸(巨傑) 최도통전’등 역사 논문들을 연재했다.이때 이미 민족주의사학자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백암이나 단재의 위명(偉名)에는 다소 미치지 못하지만 산운 장도빈(1888∼1963)이 민족사에 끼친 공헌도 결코 작지 않다.박은식이 한성사범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을 때의 제자인 산운은 그의 추천으로 1908년 봄 대한매일에 입사한다. 20살 나이에 논설위원이 된 그는 양기탁·신채호와 함께 논진을 이룬다.몇달뒤 신채호가 병이 나자 주필직을 대신했고,그가 대한매일을 떠나자 정식으로 주필을 맡아 대한매일의 막바지 성전(聖戰)에 앞장선다.한일합병으로 대한매일이 일제에 넘어가자 산운은 분연히 자리를 떨치고 나온다. 박은식­신채호­장도빈 세 사람은 개인적으로도 인연이 깊은데다 구한말 언론구국운동에서서로를 이끌어주고 뒷받침한 선후배이자 동지였다.그들의 사상적 동질성은 대한매일의 주필직을 차례대로 이어받았다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대한매일을 거쳐 각자의 길로 나선 뒤에도 세 애국자는 하나의 종착점을 지향한다.바로 민족의 바른 역사를 되살려 겨레와 국가를 부활케 하려는 목적을 향해서다. 백암은 1911년 4월 만주로 망명,동지 집에 1년간 머물면서 ‘동명성왕실기’ ‘발해 태조 건국지’ ‘몽배금태조’ ‘천개소문전’등 역사서를 정력적으로 저술한다.이후 상하이(上海) 블라디보스토크 등지로 옮겨다니면서 항일무장독립운동과 신문간행 등을 했으며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등 중임을 맡는다.‘한국통사(韓國痛史)’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등의 역사서를 남겼다. 단재의 삶의 궤적도 백암과 비슷하다.그도 1910년 중국으로 가 항일무장단체 결성,신문발간 등으로 온 삶을 조국광복에 쏟는다.그는 특히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와의 투쟁’으로 파악하는 변증법적 역사발전 인식을 보였고,역사연구에서 실증(實證)을 강조,우리근대사학과 민족주의사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가 첫손에 꼽힌다. 백암과 단재에 이어 산운도 1913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 신채호 등 독립지사들과 일하는 한편 ‘근업신문’의 논설을 쓴다.그러나 1916년 병이 심해져 귀국한뒤 민족혼을 일깨우는 역사서‘국사’를 발간한다.曺晩植이 교장인 오산학교 교사를 거쳐서 출판사를 설립,잡지·역사서를 냈다.‘조선역사대전’ ‘조선위인전’ ‘조선역사록’ 등의 저서가 남았다. ◎대한매일신보 보도 원칙/“공중평화 문란케 하는 기사 받지 않는다”/창간후 1년 가까이 1면 머리에 매일 社告/제작원칙 밝혀 대한매일신보는 창간 후 1년 가까이 1면 머리에 동일한 ‘사고’를 실어 제작원칙을 밝혀왔다.그 전문을 옮긴다. 우리 대한매일신보의 목적은 대한의 안녕질서에 관한 모든 제목에 대하여는 공평한 변론을 주장함이라.우리 통신원의 탐보는 신문 보시는 독자에게 항상 보도하리며 편지를 써보내주시는 이는 성명과 번지를 적어 부치시기를희망하오니 이것을 신문상에 게재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극히 신용하는 증거를 삼고자 하노라.기자는 아무 기사든지 기재함을 퇴각하는 권리를 가졌으나 퇴각하는 이유를 말할 터이오며 공중평화를 문란케 하는 듯한 기사는 의례히 받지 않겠사옵나이다.
  • 여야 합의되면 총재회담/국회의원 50명 감축 적당

    ◎金 대통령 밝혀 金大中 대통령은 19일 영남일보와의 창간기념 회견에서 “국민회의에서 야당과 대화를 진행중”이라고 말하고 “서로 합의가 되면 李會昌 한나라당 총재와 만나 대화하겠다”고 밝혀 여야 총재회담에 대해 긍정적 입장을 피력했다. 이와 관련,청와대 고위관계자는 “가능성은 열어놓고 있지만 여러 조건들이 충족되어 있지 않다”고 말했다. 金대통령은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와 소선거구제를 절충한 선거제도 도입의지를 거듭 확인하고 “국회의원 수는 50명 정도 줄이는 게 바람직하다”고 제시했다.
  • 4개 金監기관 한살림 수업/내년 통합 앞두고 간부 연수

    ◎다른기관 업무·분위기 익혀 내년 1월 통합돼 금융감독원으로 출범하는 4개 금융감독기관이 업무 벽 헐기에 나섰다. 서로 다른 조직문화를 익히고,감독기법도 배우는 등 한 가족이 되기 위한 전초전이다. 금융감독위원회에 따르면 은행·증권·보험감독원과 신용관리기금은 지난 12일부터 11월19일까지 감독기관별로 ‘관리자 업무연수’를 실시한다. 감독기법을 익히는 업무교육 위주로 이뤄지나 컨설팅사 전문가나 금감위 상임위원 등이 금융감독원 출범에 따른 직원들의 자세와 조직통합에 따른 갈등 조기해소 방안을 강의하는 정신교육도 가미된다. 일과시간 이후 하루 1시간20분씩 이뤄지는 업무연수는 가령 은감원의 경우 증권검사,손해·생명보험 감독, 금고 검사감독,유통·발행시장 등 현재 은감원 소관이 아닌 분야의 감독기법을 익힌다. 업무연수 대상은 3급 이상이다. 금융감독원이 출범하면 3급 이상은 ‘출신’ 구분없이 배치한다는 금감위의 복안과 맥을 같이한다. 금감위는 업무연수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최근 412쪽 짜리 ‘금융감독기관 주요업무 해설서’를 펴냈다. 4개 감독기관은 이와 별개로 임원과 1급을 대상으로 17일 금융연수원에서 금감원 통합에 따른 ‘갈등해소 방안 및 감독방향’을 주제로 제2차 워크숍을 가졌다. 금감위 관계자는 “4급 이하 실무자들에게 감독기법을 익히는 것도 중요하나 조직문화의 이질감을 극복,갈등을 해소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판단해 3급 이상을 대상으로 업무연수를 실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 눈길 끈 친분인사 다과회/과거 인연 知人들 ‘감회어린 만남’

    ◎납치사건 구명·민주화 지원 70여명 초청/金九·張俊河 선생 의문사 규명 의지 밝혀 【도쿄=梁承賢 특파원】 金大中 대통령의 방일 행사 가운데 눈길을 끌었던 것은 도쿄를 떠나기 앞서 9일 오전 일본내 친분인사들과의 만남이었다. 지난 70년대 유신 당시 金대통령이 일본에 체류하고 있을 때 음양으로 도왔던 인사들이다. 초청된 지인(知人)은 70여명. 일본 중·참의원과 교수,언론인,목사 등으로 金대통령의 일본 인맥으로 통한다. ‘DJ 도쿄납치사건’,구명활동,민주화 지원 운동으로 인연을 맺어왔다. 이 가운데 덴 히데오(田英夫) 참의원은 납치사건의 진상규명위원장,사사키 히데노리(佐木秀典) 중의원은 실무책임자로 활동했던 인사들이다. 재일동포인 趙活俊씨는 납치사건 당시 金대통령의 비서. 초등학교 친구 金鍾忠씨는 金대통령이 일본 망명 때 자신의 집을 피신처로 제공했다. AP통신 기자인 洪健杓씨는 납치사건의 진상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렸다. 지난 95년 金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납치사건기획물을 제작했던 호타 긴코(堀田謹吾) NHK프로듀서와 월간지 세카이(世界)를 발행했던 고(故) 야스에 료스케(安江良江) 사장 미망인과 오카모토 아쓰시(岡本厚) 편집장도 보였다. 또 도이(土井) 사민당당수를 비롯,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총리,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전 자민당총재,차기총리감으로 꼽히는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중의원 등 金대통령의 일본 정계인맥도 눈에 띄었다. 金대통령이 야당 지도자였던 시절,감시의 눈을 피해 꾸준히 지원한 사람들도 적지않다. 이를 감안한 듯 金대통령은 연설 전 먼저 사회자용 마이크에 서서 깍듯한 예우를 갖췄다. 참석자들을 ‘친구’라고 불렀다. 특히 金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정신대문제 해결을 강조하는 한편 국내문제에도 언급,“金九 선생,張俊河 선생 등 국내에서 의문사한 사건의 진상도 가려져야 한다”고 못박았다. 이에 무사코시 긴히테(武者小路公秀) 훼리스여자대 교수는 환영사에서 “여기 모인 우리는 일본정부가 피해가고 金대통령이 관용으로 넘어가려는 문제에 대해 그냥 넘어갈 수 없다”며 金대통령의 도쿄 납치사건 진상규명 운동을 계속할 뜻을 밝혔다.
  • 서울대 권영민 교수 ‘한국 계급문학 운동사’

    ◎카프문학의 문학사적 위상 규명/프롤레타리아 동맹 조직에서 해체까지/식민지체제 민족문학운동 전개과정 추적/신간회·조선공산당과의 관계도 밝혀 일제 식민지시대 문학을 연구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것 중의 하나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이하 프롤레타리아동맹)을 중심으로 전개된 계급문학운동이다.계급문학운동은 한국문학의 역사적 발전단계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며,그 문학사적 위상은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 서울대 권영민 교수(국문과)가 계급문학의 실천적 주체인 프롤레타리아동맹의 조직과 계급문학운동의 성립과정 등을 살핀 연구서 ‘한국 계급문학 운동사’(문예출판사)를 냈다. ‘카프(KAPF)’라는 약칭으로 잘 알려진 프롤레타리아동맹은 1925년 조직된 사회주의계열의 문예운동단체.이호·이적효·송영 등이 조직한 ‘염군사’와 박영희·김기진 등이 조직한 ‘파스큘라’ 두단체가 모체가 됐다.초기활동은 신경향파문학 또는 자연발생적 프로문학으로 요약된다.이 시기의 주요 논객이 바로 김기진과 박영희다. 그러나 카프는“다만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상실한 것은 예술이다”라는 전향문으로 유명한 박영희 등이 조직에서 이탈하면서 극심한 혼란에 빠진다.1935년 카프는 마침내 공식 해체된다. 식민지 체제에 대한 문학적 대응방식은 민족주의적 색채를 드러내는 국민문학운동과 사회주의적 이념을 지향하는 계급문학운동으로 나뉜다.하지만 그것은 모두 민족문학운동의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권교수는 이러한 맥락에서 계급문학운동이 식민지 상황에 대응해 이루어진 민족사회 문화운동의 일환임을 강조한다. 이 책에서는 1927년 ‘정치투쟁을 위한 투쟁예술 무기’로서의 조직에 역점을 둔 카프의 1차 방향전환에 대해 상세히 다룬다.이것은 당시 신간회의 결성이라는 정치적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다.그러나 무엇보다 일본 조직인 ‘나프(NAPF)’의 변화를 주도했던 ‘후쿠모토(福本)주의’의 영향이 크다.권교수는 1927년 이른바 ‘제3전선파’에 의해 주도된 제1차 방향전환 이후 프롤레타리아동맹이 신간회와 조직적으로 연계돼 있었다는 사실을 새롭게규명한다.나아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거점이 되었다는 사실도 밝힌다. 부록으로 계급문학운동사 연표와 관련 문인의 약전을 실어 카프문학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했다.
  • 금강산 뱃길 월말엔 열리나/현대,이번 訪北서 최종합의 주장

    ◎장전항 편의시설 현대서 맡기로/신변보호 등 미해결 아직 불투명 금강산 관광 뱃길이 이달 말에는 열릴까. 금강산 유람선 첫 배의 출항일은 지난달 25일에 이어 이달 중순에서 다시 이달 말로 연기됐다. 현대측은 성사를 낙관하지만 여전히 불투명하다는 관측이 우세한 편이다. 현대의 대북 실무단장인 金潤圭 현대건설사장 등 일행 4명은 지난 2일 북한을 방문한 뒤 4일 귀국했다. 보름간에 걸친 베이징(北京)에서의 대북 접촉에 이어 양측간 최종 협상을 마무리짓기 위해 평양을 방문한 것이다. 한 관계자는 방북 성과와 관련,“금강산 관광에 큰 걸림돌은 없다”면서 “이르면 이달 말에는 관광이 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북측과의 ‘현안’에 대한 일괄타결 가능성을 내비쳤지만 아직도 구체적인 실무작업은 끝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일정이 늦춰진 것도 준비과정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현대는 이번에 현대측이 할 수 있는 일에는 최종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전항 공사와 통신·수송·관광실무 업무 등이다. 장전항 공사의 경우북측이 이미 조성한 도로공사 등의 대금을 지급하고 추가로 필요한 부두 등 편의시설은 현대 실무진이 맡기로 했다. 통신이용과 수송수단도 원만히 합의,6일 이에 필요한 15명의 실무진이 북한을 방문했다. 이들이 돌아오면 당초 예정한 필요 장비와 인력을 북한에 보낼 예정이다. 또한 당국으로부터 유람선의 내항허가를 받고 경비를 최종 확정,관광객 모집에 나서 차질없이 이달 말 금강산을 밟는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금강산 관광의 실현은 갈수록 힘이 떨어지고 있다. 아직 남북당국간 신변보호나 재난구호체계 등에 대한 합의와 미묘한 정치군사적 요인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訪北 뒷얘기/金潤圭 사장 ‘對北협상자세 3원칙’ 화제/“단추 끼우고 웃지 않고 등 받치지 않는다”/금가산 코스답사때 쓰레기 담아와 北측 감동 현대건설 金潤圭 사장이 지난 4일 북한을 10번째 방문하고 돌아왔다. 그가 대북경협에 임하는 자세는 진지하다. 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으로부터 배웠다. 89년 鄭명예회장과 함께 처음 북한을 방문한 金사장은 이때부터 鄭회장의 가르침을 지키고 있다. 이른바 ‘3원칙’. “아무리 더워도 옷의 단추는 항상 끼우고,상대방이 웃더라도 절대 웃지 않는다. 의자에 앉을 때는 결코 등을 받치지 않는다.” 북측 인사 못지않게 엄격하고 흐트러짐이 없어야 협상에 성공한다는 교훈이다. 金사장은 올 7월 방북시 금강산 관광사업에 대해 밤 10시부터 새벽 3시까지 협상하면서 이를 실천해 북측 인사들이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금강산 관광코스를 답사할 때는 ‘작은 일’을 몸소 실천했다. 등산에 앞서 현대측 실무자들의 주머니를 전부 뒤져 담배와 라이터를 압수했다. 명산에 올라 누리는 끽연의 즐거움을 포기하며 자연보호의 일면을 북측 안내인들에게 보여줬다. 구룡폭포에 오른 뒤 내려올 때는 곳곳에 널린 쓰레기를 봉투에 담아 왔다. 북한 안내인을 감동시킨 일들이었다. 그는 鄭회장의 말에는 토를 달지 않는다. 별로 술을 즐기지 않지만 ‘왕회장’의 ‘명령’이라면 마다하지 않는다. 북한 金容淳 아태위원장 주최 만찬에서 사정을 잘 아는 鄭회장이일부러 金위원장에게 ‘술을 잘한다’고 말하는 바람에 독주를 글라스째 몇잔 마시기도 했다. 金사장의 치밀함은 북한과의 입국료 300달러 합의에서 돋보인다. 북한은 ‘민족의 명산을 분단 이후,그것도 바다로 오는 데 1,000달러면 어떠냐’는 식이었다. 金사장은 이에 세계 100대 관광·명승지의 입장료를 전부 조사,사진을 곁들인 책을 만들어 전달함으로써 현대측 요구를 관철시켰다.
  • 체전참가 입양 美 교포 혈육 상봉/이성원씨

    ◎형 나타나 “동생 분명” 밝혀 제주 전국체육대회에 참가해 부모를 찾아달라고 호소했던 재미교포 이성원씨의 혈육이 나타나 28일 극적으로 상봉했다. 이씨의 형이라고 밝힌 이창현씨(27·삼성전자)와 큰어머니 한윤신씨(55·서울 면목동)는 이날 오후 이씨 숙소인 오리엔탈호텔에서 이씨와 만났다. 이창현씨는 “동생 이름은 이창배이고 내가 세살,동생이 한살 혹은 두살때인 24년 전 가정형편이 어려워 동생을 입양시킨 것으로 안다”며 동생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어릴때의 사진도 없고 아버지는 동생이 입양하던 해에 간경화로,어머니는 5년 전 돌아가셨기 때문에 현재 혈육여부를 입증할 객관적 자료는 없지만 외모 등으로 미뤄 동생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이씨는 74년 3월 대구 백합고아원에 있던중 홀트아동복지회를 거쳐 미국으로 입양됐고 최근 미 해병대를 제대해 곧 대학에 진학할 계획. 이씨는 지난해 시애틀 미주체전에서 체전 재미교포 축구팀대표로 뽑혀 내한,언론사에 “부모를 찾고 싶다”고 호소했다. 한편 이씨 형제는 29일오전 서울로 이동,유전자 감식을 통해 친형제 여부를 확인할 계획이다.
  • 浦鐵 대선자금 제공 조사/金滿堤씨 계열사서 비자금 조성 혐의

    ◎정부 고위관계자 밝혀 지난해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포철과 한국통신 등 주요 공기업들이 조직적으로 거액의 선거자금을 조성,구 여권에 전달한 것으로 안다고 정부의 고위관계자가 25일 밝혔다. 감사원은 지난달부터 계속중인 포항제철에 대한 감사에서 金滿堤 전 회장이 12개 계열사들로부터 기밀비 등의 자금을 모금,구 여권에 전달했는지 여부를 집중 조사중이라고 이 관계자는 밝혔다. 감사원은 이미 예금계좌 추적을 통해 金회장이 연간 28억원의 기밀비와 계열사의 물품 판매대금 조작 등으로 조성한 비자금을 한나라당에 전달한 혐의를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감사원이 법무부에 요청한 출국금지 대상자에는 金회장과 金모사장,金모부사장 등 포철의 전직 경영진 뿐만 아니라 대선당시 회계업무를 담당한 실무자도 포함된 것으로 안다고 관계자는 말했다. 감사원은 이날 金鎭珠 전 포철부사장을 소환 조사했다. 감사원 관계자는 “앞으로 한국전력,가스공사,석유개발공사 등 공기업을 감사하는 과정에서도 기밀비 등이 정치권으로 유입됐는지를 집중 조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 “서울대 대학원 정원 50%/他大 출신에 할당 바람직”

    ◎李海瓚 교육 밝혀 李海瓚 교육부장관은 7일 오는 2002년부터 적용되는 서울대의 구조조정안에 대해 “서울대 대학원의 정원은 이 대학 출신과 지방거점 우수대를 비롯한 타 대학 출신들에게 절반씩 할당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李장관은 구조조정안의 내용과 관련,“일단 서울대의 합의 과정이나 자율성을 존중할 생각”이라면서도 “그러나 논의 자체가 학제개편에만 집중된 탓에 명실상부한 연구중심 대학이 되기 위한 교수인력 확보나 첨단분야 인력 양성 프로그램,산학연계,대학원 입시 등 구체적인 청사진이 없는 것 같다”고 유감의 뜻을 표시했다. 그는 서울대가 법학계열을 전문대학원에서 제외키로 한데 대해서도 “변호사 등 법학 분야의 수요가 꾸준한 만큼 전문대학원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하지만 이를 서울대나 다른 대학에 강요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李장관은 “교육부가 서울대 구조조정안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많은 변화가 생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또 “재정이 한정돼 있어 생명공학,기초과학,전자,첨단기계,정보통신 등 이·공계를 위주로 7∼8개 분야를 선정,집중 양성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對北 기조 유지… 채찍도 가하기로/北 미사일 정부대응

    ◎흥분하면 북 전략에 휘말릴 우려/다각공조로 대북 압박전술 펴기로 “북한이 미사일 발사 시간조차 金正日의 이름과 관련해 상징성이 있는 정오(正午)를 택한 것 같다” 1일 통일관계장관회의를 마친 뒤 한 고위 당국자는 이같은 언급과 함께 혀를 찼다.북한의 미사일 발사실험이 하나부터 열까지 철저히 계산된 다목적 카드임을 절감했다는 투였다. 회의의 결론에도 이같은 기본시각이 반영됐다.차분히 강온을 섞은 다각적 대응방안을 강구키로 방향을 잡은 것이다. 정부는 북한이 빼어든 카드에는 金正日의 주석 취임을 앞둔 대내적 목적도 숨어있다고 본다. 金正日 세력이 북한군부를 보다 확실히 장악하려는 수순의 일환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때문에 지나치게 수선스럽게 대응하는 것이 아무런 실익이 없다고 보고 있다.같이 흥분하는 일 자체가 북한내 강경파의 입지만 강화시킬 것이라는 우려이기도 하다. 화해협력을 골자로 한 대북 정책 기조를 유지키로 한 것도 이 판단의 연장선상에 있다.일단 금강산관광,대북 경수로 사업 등 남북 교류협력 현안들을 일관성있게 추진키로 한 것이다. 그러나 정부로서도 차제에 북한의 ‘벼랑끝 전술’이 그들 스스로에게도 유익하지 않다는 점을 입증시켜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됐다.북한에 대해 국제공조를 통한 일정수준의 ‘채찍’이 불가피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북한의 미사일 실험이 미국 등으로부터 반대급부를 얻어내려는 카드일 수도 있다는 관측에 기초한다.한 당국자는 “북한은 대미 협상에서 중동으로 미사일 수출을 중단하는 조건으로 최소 5억달러 이상을 요구했다”고 귀띔했다. 때문에 미·일 등과의 공조를 통해 그같은 북측의 의도를 차단하는 게 최우선 외교 과제다.요컨대 정부는 북한측에 ‘공갈 외교’보다는 남북 협력으로 상호 실익을 얻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려 하고 있다.
  • “소외계층 지원에 감사 중점”/실적우수 52명 훈장·표창

    ◎韓 감사원장 개원 50돌 기념식서 밝혀 韓勝憲 감사원장은 28일 개원 50주년을 맞아 金鍾泌 국무총리와 辛相佑 국회부의장 등을 삼청동 청사로 초청,리셉션을 가졌다. 행사에는 李元燁·李周一·鄭喜澤·金永駿·李時潤 전 감사원장과 金容俊 헌법재판소장,睦堯相 국회 법사위원장,李在禎 부정방지대책위원장,朴英淑 시민단체협의회대표 등이 자리를 함께 했다. 또 행정부에서는 洪淳瑛 외교통상·朴相千 법무·千容宅 국방·金正吉 행정자치·姜昌熙 과학기술·金成勳 농림·朴泰榮 산업자원·申樂均 문화관광부장관이 참석했다. 또 청와대의 金泰東 정책기획·林東源 외교안보·朴智元 공보수석도 자리를 함께 했으며,田允喆 공정거래위원장,尹厚淨 여성특별위원장,李憲宰 금융감독위원장도 모습을 보였다. 이에 앞서 열린 개원 기념식에서 韓감사원장은 “지금까지 실시해온 경제난 극복을 위한 감사와 함께 정보화체계 구축 및 소외계층 지원을 위한 감사를 새로운 중점감사 목표로 삼겠다”고 밝혔다. 韓원장은 이어 그동안 감사실적이 뛰어난 ▲孫承泰 2국장과 金京德 1국5과장에게 홍조근정훈장 ▲朴義明·金邦燮 감사관과 李龜和부감사관에 근정포장 ▲金永彬·姜耕元 부감사관과 崔大善 토목사무관에 대통령 표창을 각각 수여했다.또 李洋晧 2국1과장이 공명대상을,李世道 감사관과 金炳錫 부감사관이 마패상을 ,吳奎貞·張亮國 감사주사가 모범직원상을,金忠煥 공업서기관 등 39명이 원장표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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