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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밍웨이·엘리엇 드나든 100년 헌책방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코로나에 휘청

    헤밍웨이·엘리엇 드나든 100년 헌책방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코로나에 휘청

    프랑스 파리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헌책 전문서점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가 코로나19 여파에 휘청이고 있다. 101년째 같은 이름으로 이어져 온 서점은 센 강변에서 70년간 순례객들을 유유히 맞았지만, 프랑스 전역이 2차 봉쇄에 들어가면서 경영난이 가중되자 결국 고객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나섰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이 28일(현지시간) 전했다. 서점 측은 이날 고객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많은 기업처럼 우리 역시 손해를 감수하며 어려운 시기에 나아갈 길을 찾고 있다”며 “관심 있는 여러분의 온라인 주문이 (서점 존립의) 감사한 수단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자사 웹사이트에서 책 주문 및 서비스 구독을 대신해 달라는 간청이다. 서점 대표인 실비아 휘트먼은 “지난 3월 파리 1차 봉쇄조치 여파로 방문객 및 관광객이 줄면서 매출이 80% 가까이 감소했다”면서 “당시 두 달간 문을 닫았고, 정부 지원에도 불구하고 임대료가 상당히 밀린 상태”라고 전했다. 1919년 처음 문을 연 서점은 영문 서적을 전문 취급하며 20세기 초 스콧 피츠제럴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TS 엘리엇, 제임스 조이스 등 영미권 문인들이 드나들던 아지트였다. 이후 문학가들을 후원했던 조지 휘트먼이 서점 이름을 이어받아 1951년 노트르담 대성당 맞은편 현재의 자리에 정착해 오늘날까지 이어졌고 딸이 서점을 물려받았다. ‘서점을 가장한 사회주의 유토피아’로 불렸던 이곳에서 가난한 문학인들은 일을 거들어주고 낡은 서가 한켠에서 숙식을 제공받았다. 책방 안에는 “위장한 천사일지 모르니, 낯선 이들을 불친절하게 대하지 말라”는 아일랜드 시인 윌리엄 예이츠의 시 구절이 붙어 있었다. 관광객들은 여행 후기 사이트에 “책방이라기보다는 전설에 가까운 곳”이라는 평을 남기던 곳이다. 서점의 공지 이후 고객들의 지원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한 독자는 웹사이트 3개 계정을 구독하며 1000유로 상당 주문을 했다. 휘트먼 대표는 “사람들에게 ‘지갑을 열고 우리에게 돈을 달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면서 “대신 ‘우리가 가진 희귀본을 당신이 얻을 수 있다면 놀랄 것’이라고 권하고 싶다”고 했다. 이런 가운데 코로나19 파고가 다시 유럽을 뒤덮으며 유럽연합(EU) 양대국인 프랑스·독일이 5개월 만에 재봉쇄에 들어가는 등 전역이 통제 불능 상황에 빠지고 있다. 프랑스는 30일부터 최소 한 달간 전국에서 식당·술집 등 비필수 사업장이 모두 문을 닫고 외출도 제한된다. 독일 역시 다음달 2일부터 학교, 공공서비스를 제외하고 요식업종, 여가 시설 대부분이 문을 닫는 봉쇄 조치에 들어간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설날 맞아 이벤트 풍성한 서점가 놀러갈까

    설날 맞아 이벤트 풍성한 서점가 놀러갈까

    설날을 맞아 온·오프라인 서점들이 다양한 이벤트를 진행한다. 연휴 기간 가족, 친척들과 함께 잠시 짬을 내 방문해보는 것도 좋겠다. 인터넷 영풍문고는 27일까지 ‘새해 福 도서교환권’ 이벤트를 진행한다. 영풍문고 북클럽 회원이라면 온라인 주문 시 최대 8000원까지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배송을 하지 않는 설 연휴 기간 온라인 주문 후 매장에서 책을 받을 수 있는 ‘나우드림’ 서비스에도 쓸 수 있다. 이번 달 31일까지 영풍문고가 추천하는 문학 신간 10종에 관한 서평을 쓰면 추첨을 통해 경품을 제공한다. 영풍문고 오프라인 지점도 행사를 진행한다. 지난 20일 신규 오픈한 사당역점에서는 구매 고객 대상 최대 3000원 도서교환권과 사은품을 증정한다. 31일까지 경품 추첨 행사도 연다. 개점 3주년을 맞은 분당 서현점에서는 3만원 이상 구매 고객에게 ‘어니스트 헤밍웨이’ 머그잔을 증정한다. 교보문고는 ‘설레는 선물 골라보쥐’ 행사를 열고 있다. 오는 27일까지 2가지 상품 가운데 1개를 선택한 뒤 참여완료 버튼을 클릭하면 e-교환권, 도서 바로드림 e-교환권, 교보문고 eBook 등 1000원 교환권을 받을 수 있다. 이 기간 일부 사용자들에게는 ‘법정스님 인생응원가’ 등 무료 이북도 준다. 오프라인 서점 일부에서는 휴대전화로 주문하고 매장에서 바로 받을 수 있는 바로드림 서비스도 그대로 제공한다. 인터넷서점 예스24에서는 ‘숨은 복을 찾아라’ 이벤트를 진행한다. 예스24 공식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에 올라온 이미지에서 ‘복’이라는 글자가 몇 번 들어갔는지를 맞히면 된다. SNS를 팔로우 하고 정답을 보내면 모두 30명에게 예스24 굿즈(상품)를 제공한다. 당첨 발표는 다음 달 4일이다. 알라딘에서도 SNS 팔로우 이벤트를 진행한다. SNS 팔로우한 뒤 설 연휴기간에 읽고 싶은 책 제목을 댓글로 달면 된다. 당첨자에게는 새해 굿즈를 증정한다. 기존 팔로워라면 친구들을 태그하면 된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패권의 차가운 동반자, 따뜻한 감성 메이트로 돌아왔다

    패권의 차가운 동반자, 따뜻한 감성 메이트로 돌아왔다

    ‘극단의 시대.’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진단한 20세기의 모습이다. 세계는 무수한 갈래로 나뉘어 저마다 극한 경쟁을 벌였다. 그 역사를 오롯이 반영하는 소품이 있었으니, 바로 만년필이다. 둔탁하고 육중한 만년필은 패권을 쟁취한 자의 손에서 그들의 의지대로 역사를 기록했다. 그랬던 만년필이 이제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더 가볍고 더 컬러풀하게. 만년필 소비의 새로운 주역으로 떠오른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다.●역사의 궤를 같이한 미국의 만년필 현대적인 만년필은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발명됐다. 1883년 미국의 보험판매원 루이스 워터맨이 모세관 현상을 이용해 고안한 것이 시작이다. 제품이 인기를 끌자 이듬해 특허를 받고 본격적인 사업에 착수한다. 글로벌 만년필 브랜드 ‘워터맨’의 탄생이다. 그가 만년필을 개발하게 된 일화가 전해진다. 중요한 계약을 앞둔 워터맨은 실수로 계약서에 잉크를 쏟는다. 정리하러 자리를 비운 사이 경쟁자가 나타나 계약을 가로챈다. 절치부심한 워터맨이 ‘절대로 잉크가 쏟아지지 않을 필기구를 만들겠다’고 다짐했고 그 결과가 만년필이라는 것. 물론 이야기의 진위는 확인 불가다. 분명한 것은 ‘발명신화’까지 만들 만큼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회사를 키운 워터맨이 탁월한 수완을 지닌 사업가라는 점이다. 패권은 서명으로 완성된다. 만년필이 20세기 역사 곳곳에서 중요한 소품으로 등장하는 이유다. 만년필의 발전은 미국이 패권을 확립하는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1898년 ‘미서전쟁’은 만년필이 처음으로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 사건이다. 쿠바섬을 둘러싸고 미국과 스페인이 벌인 전쟁이다. 4개월 만에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 양국은 같은 해 12월 파리에서 ‘파리 평화조약’에 서명한다. 스페인이 쿠바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한다는 내용이다. 스페인 제국의 몰락과 미국의 부상. 두 가지 의미에서 세계인들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위대한 미국’의 서막을 알린 이 사건에서 사용된 필기구는 워터맨의 경쟁사인 미국의 ‘파커’ 만년필이다. 미국산 만년필은 20세기 역사를 통째로 수놓았다. 한반도를 둘러싼 ‘러일전쟁’(1904~1905)이 끝나고 맺은 ‘포츠머스 조약’에선 워터맨 만년필이 쓰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9년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한 영국 총리 로이드 조지 손에도 워터맨 만년필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파커의 전성시대였다. ‘20세기 최고의 만년필’이라는 찬사를 듣는 ‘파커51’이 가장 유명하다. 회사의 트레이드마크인 화살 모양의 클립과 심플하면서도 날렵한 디자인이 특징이다. 이는 창공을 가르는 항공기의 모습을 본뜬 것이라고 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하고 훗날 미국 대통령까지 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애용했다. 한국전쟁 정전협정에 서명한 마크 클라크 장군도 파커51을 썼다. 다른 제품도 있었다. ‘인천 상륙작전’의 주인공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보다 중후한 느낌의 ‘파커듀오폴드’를 사용했다. 1970년대 ‘베트남 전쟁’, 1987년 미국과 소련이 체결한 ‘중거리핵전력조약’(INF)에서는 ‘파커75’가 쓰였다. 미국이 세계의 패권을 잠식하던 시기였다. 중요한 서명은 언제나 미국산 만년필의 차지였다.●표준에 인문을 담다… 독일의 만년필 뼈를 깎는 노력에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래도 쉽게 좌절하지 않았다. 조용히 반격의 기회를 기다렸고 마침내 성공했다. 독일 만년필 회사 ‘몽블랑’ 이야기다. 몽블랑은 후발 주자였다. 미국 회사들이 19세기 후반부터 시작한 반면 몽블랑은 1900년대 와서야 비로소 회사의 꼴을 갖추고 필기구 사업에 뛰어들었다. 기술 혁신은 매번 한 발짝씩 늦었다. 미국에 밀려 언제나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역전의 순간은 운명처럼 다가왔다. 전 세계인의 이목이 독일 만년필에 집중된 순간. 바로 1990년 동·서독의 통일이었다. 서독 헬무트 콜 총리와 동독 로타어 데메지에르 총리는 몽블랑 ‘마이스터스튁149’를 손에 쥐고 통일 조약에 서명했다. ‘마이스터스튁’은 걸작이라는 뜻의 독일어다. 몽블랑이 스스로 걸작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엔 그만 한 이유가 있다. 1952년 출시한 마이스터스튁149는 당대 모든 만년필 기술의 총합이었다. 후발주자 몽블랑은 앞서가기보다는 ‘제대로’ 완성하기를 목표로 삼았다. 당대의 기술들을 모아 하나의 제품에 집약시켰다. 그렇게 ‘걸작’이 탄생했다. 당시에는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제품을 조금씩 계속 발전시켰다. 자신들만의 입지를 다졌다. ‘조용한 혁명’의 진가는 훗날 발휘됐다. 애호가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탔고 독일 통일을 계기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출시된 지 40년 만에 빛을 본 것이다. 고급스러운 검은 광택에 둥그렇고 두툼한 몸체. 마이스터스튁149는 이제 ‘만년필의 표준’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자신감을 얻은 몽블랑은 만년필의 외연을 확장한다. 만년필에 ‘예술적 감수성’을 덧씌우기로 한 것이다. 1990년대 초반 ‘작가 에디션’을 선보인 이유다. 기실 만년필은 많은 인문학적 영감의 원천이요 문학의 산실이었다. 몽블랑은 여기서 착안했다.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이 반드시 만년필을 소유해야 할 이유를 제시한 것이다. 1992년 작가 에디션 첫 번째 주인공은 미국의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간결한 문장으로 인물과 세계의 진실을 담은 ‘하드보일드 문체’로도 잘 알려진 그를 몽블랑은 첫 번째 작가로 선택했다. 헤밍웨이가 몽블랑 만년필을 사용했다는 증거도 없다. 그저 자신감의 발로였던 것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토마스 만, 프란츠 카프카 등 다양한 작가들을 콘셉트로 한 한정판 만년필을 내놓으면서 애호가들의 소장 욕구를 들끓게 했다. 에디션이 거듭되면서 작가의 영역도 넓혔다. 미국의 만화영화 제작자 월트 디즈니, 영국의 록 밴드 비틀스, 미국의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 등을 주제로 한 만년필이 나오면서 더욱 풍성해졌다.●가벼움에 컬러를 입히다… 여성의 만년필 그동안 만년필은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최근 이런 고정관념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만년필의 주요 소비층으로 여성이 새롭게 등장한 것. 캘리그래피 문화가 인스타그램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유행한 2015년을 기점으로 삼을 수 있다. 변화를 제대로 감지한 회사는 몽블랑의 영원한 맞수인 독일의 ‘펠리컨’이다. 2015년 기존 모델보다 가볍고 흰색과 분홍색을 조화롭게 배치한 ‘소버린 M600 핑크’를 출시해 여심을 사로잡았다. 펠리컨은 지난해에도 여성들을 타깃으로 은은한 컬러감이 돋보이는 ‘소버린 M600 퍼플화이트’를 선보였는데 며칠 만에 동이 날 정도로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박종진 만년필연구소 소장은 앞으로 만년필 시장의 전망을 이렇게 내다봤다.“만년필은 시대를 반영합니다. 최근 펠리컨의 성공은 만년필 시장의 주도권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넘어가는 전주곡이었죠. 여성들의 소비력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면 천하의 몽블랑조차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기존의 둔탁하고 무겁고 차가운 만년필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금속이 덜 들어가서 가볍고 따뜻한 재질의 감촉이 좋은 만년필이 앞으로 유행할 거라고 봅니다. 그것에 발맞춰서 제품을 내놓을 수 있는 브랜드가 결국은 살아남을 것입니다.” 오경진 기자 oh3@seoul.co.kr
  • 얼쑤~ 소리로 무대서 만나는 ‘노인과 바다’… 관객도 소리꾼

    얼쑤~ 소리로 무대서 만나는 ‘노인과 바다’… 관객도 소리꾼

    작열하는 태양 아래 야자수 한 그루가 길쭉하게 솟는다. 그 풍경 너머 검푸른 바다가 거센 파도를 일으키며 일렁인다. 파도 한가운데 떠 있는 낚싯배 한 척. 구릿빛으로 그을린 노인이 억센 손으로 낚싯줄을 잡고 있다. 툭! 툭! 입질이 왔다. 손끝으로 깊은 바닷속 엄청난 무게감이 전해진다. 노인과 거대 청새치의 한판 싸움이 벌어진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종이 위에 그려 낸 쿠바의 바다가 서울의 한 지하 소극장에서 다시 생명을 얻고 선명하게 되살아 났다. 관객이 둘러싼 무대에 오른 사람은 두 명. 갓을 쓴 남자는 너른 도포 자락 휘날리며 북을 치고, 댕기 머리 곱게 땋은 여성은 부채를 휘두르며 걸쭉하고 차진 소리로 관객을 파고든다. 소리꾼 이자람(사진 왼쪽·40)의 판소리 신작 ‘노인과 바다’는 관객도 소리꾼이 되고, 장단을 맞추며 추임새를 넣는 고수가 되는 한 편의 소리 마당이다. 올해 상반기 창극 ‘패왕별희’에서 작창·음악감독으로, 하반기 총체극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에서 극중 예술가 유진을 연기했던 이자람이 본연의 무대 화문석 위로 돌아왔다. 부채를 쥐고 고수 앞에 선 이자람은 열도의 바다에서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솟구치는 청새치 같았다. 희곡이나 근현대 소설을 판소리의 다양한 소재와 형식으로 개발해 온 이자람이 오롯이 소리만으로 소설을 무대 위로 구현해 냈다. “노인과 바다를 통해 관객을 만나고, 더욱 넓은 바다가 그려지기를 기원한다”던 소리꾼의 바람은 이미 실현된 듯했다. 26일 개막해 다음달 1일까지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무대에 오르는 이번 공연은 이미 티켓 오픈 3분 만에 전회차 매진됐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권성우의 청파동 통신] 진보적 지식인의 운명

    [권성우의 청파동 통신] 진보적 지식인의 운명

    2005년에 번역 출간된 폴 존슨의 ‘지식인의 두 얼굴: 위대한 명성 뒤에 가려진 지식인의 이중성’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인류 사상사와 예술사에서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대가들의 위선과 모순을 탐사한다. 예를 들어 장자크 루소, 마르크스, 톨스토이, 헤밍웨이, 사르트르, 조지 오웰, 촘스키 등의 인간적 약점이 서술되는데, 주제에 따라 그들 각자의 기만, 사기, 불륜, 이중성, 위선 등이 적나라하게 파헤쳐진다. 물론 이 책의 의도가 이들을 매장하는 데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지식인의 이중성’을 읽다 보면 이들에 대한 환상과 기대치가 다소간 낮아지는 건 인지상정이지 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거둔 빛나는 성취와 업적이 무시되어야 할까. 오히려 이런저런 인간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혹은 자신의 비루함과 한계를 극복하면서 그들이 인류 문화사에서 거둔 탁월한 성취와 자산을 높이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지금 이 시대의 시각이나 페미니즘의 관점으로 보면 이들의 업적과 성취가 재평가될 여지도 분명 존재하리라(이는 또 다른 중요한 논점이겠다). 당연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성자, 평생을 이타적으로 살아 온 사람조차도 오류나 성격적 결함에서 자유롭기가 쉽지 않으리라. 뛰어난 인성을 갖추고 대의에 헌신하는 인물이라도 알려지지 않은 내밀한 흠결과 약점이 존재하지 않을까. “순교는 배교(背敎)와 종이 한 장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거니와, 따지고 보면 진보와 보수 사이에 놓인 강(江)폭은 그다지 넓지 않다. 한 시대의 진보에서 인정 욕망을 충족하지 못한 사람 중에 보수로 전향해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채운 사람도 존재한다. 민중과 함께했던 양심적 진보의 표상이 극우의 전위가 되기도 한다. 이런 현실을 직시한다면 진보적 지식인(공인)은 한층 겸허해질 필요가 있다. 그들은 숙명적으로 현실과 이상 사이에 놓인 존재일 수밖에 없으며, 상대적으로 일관성을 지키기 힘든 상황에 놓여 있다. 그의 과거와 현실 사이, 가족의 욕망에는 그 이상을 지키기 힘들게 하는 무수한 지뢰밭이 놓여 있다. 때로 진보의 대의와 이상을 향한 열정은 그 지뢰밭을 과감하게 제거하게 만들 테지만, 항상 그 작업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리라. 어느 순간 자신의 발밑을 보는 데 둔감해지는 때가 온다. 사람들은 진보적 지식인의 허위의식과 이중성에 한층 민감하게 반응한다. 기존의 반듯하고 좋은 이미지가 오히려 그들의 약점을 한층 도드라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개혁을 추진하는 주체는 자신의 과오(過誤), 무관심, 이중성이 한순간 개혁에 대한 환멸을 불러올 수 있음을 냉철하게 인식해야 한다. 진보를 표방하는 공인이 자신의 발밑까지 면밀하게 조회하지 않는다면, 대중들은 그 개혁 과정에 마음을 내주지 않으리라. 이번 조국 법무부 장관을 둘러싼 과정은 바로 이런 준엄한 사실을 환기한다. 물론 이번 사태를 불러온 요인 중에 언론의 편향적인 보도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만 말하면 진보가 성장하지 못한다. 이 사건에서 뼈저리게 배우면서, 한발 한발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개혁적이며 정의롭고 상대방은 저열하며 형편없다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우리도 많이 부족하지만 여기서 조금씩 더 진전하려 한다는 태도로 임해야 한다. 당연히 그 과정에 조 장관의 최근 인터뷰처럼 “죽을힘을 다해” 개혁을 추진해야 하며, 때로 자기 자신을 치는 마음으로 수모와 모욕을 견뎌야 하리라. 모든 걸 건 정치는 짐승의 비천함을 감내해야 한다. 용기와 겸허함으로 그 시간을 온몸으로 통과했을 때, 세간에서 주장하는 조 장관의 한계와 위선이라는 멍에는 어느새 자신의 존재 기반을 극복하려는 필사적인 헌신에 자리를 내줄 것이다. 부디 그런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산문시 1/신동엽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산문시 1/신동엽

    산문시 1 / 신동엽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인가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 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데거 러셀 헤밍웨이 장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 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뒤집어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소, 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레 자기 사무실 문 열고 들어가더란다.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개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트럭을 두 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 패거리에도 총 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놀이 안 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 내는 미사일 기지도 탱크 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 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 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사색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 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 병을 싣고 삼십 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 올로프 팔메는 스웨덴의 대통령이었다. 석양 무렵 퇴근길에 가족의 손을 잡고 시장도 가고 레스토랑에도 가고 영화관에도 갔다. 대통령이지만 그를 둘러싼 경호원들은 없었다. 냉전 시대에 그는 철저히 등거리 외교를 했다. 미국의 편도, 소련의 편도 들지 않았으며 누군가의 편을 꼭 든다면 자신이 사랑하는 스웨덴 국민 편을 들었다. 자국의 역사와 국민을 철저히 사랑했던 그는 결국 암살자의 총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스웨덴의 등거리 외교 정책은 더욱 공고해졌다. 나도 꿈꾼다. 우리나라의 석양 대통령이 자전거에 막걸리 병을 싣고 삼십 리 시인의 집에 찾아오는 꿈. 곽재구 시인
  • [책꽂이]

    [책꽂이]

    처칠, 끝없는 투쟁(제바스티안 하프너 지음, 안인희 옮김, 돌베개 펴냄) 독일인으로 태어나 영국으로 망명, 언론인으로 일했던 저자가 독일을 잿더미 속으로 밀어넣은 전쟁 영웅 처칠의 일대기를 그렸다. 1940~1941년 처칠이 없었다면 히틀러의 거대 게르만 국가가 세계를 지배했을 것이라고 상찬하는 한편, 처칠이 기실 파시스트에 가깝고 정치인으로서는 네빌 체임벌린보다 하수라고 냉정하게 평가하기도 한다. 336쪽. 1만 6000원.첨성대의 건축학적 수수께끼(김장훈 지음, 동아시아 펴냄) 첨성대는 천문관측소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과연 그곳에서 어떻게 하늘을 관측했을지 의문이 무수히 제기돼 왔다. 김장훈 아주대 건축학과 교수가 옛 문헌 기록과 실측도·복원도를 실어 얼개와 기울기 등 첨성태의 건축 양식을 탐구했다. 240쪽. 1만 6000원.작가라서(파리 리뷰 엮음, 김율희 옮김, 다른 펴냄) 1953년 창간한 미국의 문학 잡지 ‘파리 리뷰’가 작가 303명을 인터뷰해 얻은 919개의 생각을 실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귄터 그라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같은 대문호들이 어디에서 제목을 떠올리는지, 어떻게 원고를 퇴고하고 슬럼프를 극복하는지 그들의 작업 방식과 감성, 삶의 편린을 엿볼 수 있다. 616쪽. 2만 6500원.불평등의 세대(이철승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계급 대신 세대라는 틀로 한국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분석한 저작.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인 저자는 386세대가 한국 사회의 정치권력과 시장권력을 독점해 온 과정과 그로 인해 어떻게 세대 간 불평등을 야기해 왔는지를 다양한 데이터 분석으로써 드러냈다. 361쪽. 1만 7000원.두 얼굴의 법원(권석천 지음, 창비 펴냄) ‘사법농단, 그 진실을 추적하다’라는 부제가 붙은 사법농단 심층 기록.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의 베일을 벗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탄희 전 판사와의 인터뷰를 시작으로 법조기자를 하며 만났던 다양한 취재원의 증언, 재판 취재 등을 통해 사법농단은 몇몇 인물들의 일탈 때문이 아니라 대법원장 중심의 법원 시스템에서 파생된 것임을 역설한다. 420쪽. 1만 8000원.1945(배삼식 지음, 민음사 펴냄) 식민지 시대의 절망과 혼란을 담은 희곡 2편을 담은 희곡집. 해방 후, 만주에 살던 조선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열차를 타기 위해 머물렀던 전재민 구제소를 배경으로 민족과 국가 바깥으로 밀려났던 이들의 귀환 스토리를 곡진하게 담아냈다. 232쪽. 1만 3000원.
  • 위고·크리스티… 작가판 사랑과 전쟁

    위고·크리스티… 작가판 사랑과 전쟁

    미친 사랑의 서/섀넌 매케나 슈미트·조니 렌던 지음/허형은 옮김/문학동네/416쪽/1만 5800원 #1. 1926년 12월 한 유명 추리소설가가 자신의 소설 속 미스터리한 사건처럼 갑자기 사라졌다. 영국 전역이 난리가 난 가운데, 알고 보니 그녀는 한 고급 호텔에 머물며 태연자약하게 쇼핑과 스파를 즐기고 있었다. 호텔 직원의 제보로 발견된 그녀는 실종 기간 남편의 내연녀 이름으로 호텔에 투숙했다. #2. 한 대문호에게 50년 동안 2만여통의 연서를 보낸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그녀가 쓴 구절을 그가 고대로 베껴 다른 연애 상대에게 보냈다는 걸 꿈에도 몰랐다. 1번의 주인공은 애거사 크리스티, 2번은 빅토르 위고다. 이 미친 ‘작가판 사랑과 전쟁’은 놀랍게도 모두 실화다. 책 ‘미친 사랑의 서’는 각각 ‘내셔널 지오그래픽 트래블러’, ‘더 라이터’ 등 다양한 매체에 기고해 온 저널리스트 섀넌 매케나 슈미트와 조니 렌던의 집요한 취재 결과물이다. 출전과 참고문헌만 38쪽에 달하는데, ‘카더라 통신’이 아니라 꼼꼼하게 고증했다는 얘기다. 작가들의 러브 스토리에서 삼각관계, 사각관계, 불륜은 애교 수준이다. 55세 차이가 나는 연상연하 커플(아서 밀러), 이중 결혼(아나이스 닌), 부인의 등에 실제로 칼을 꽂은 남편(노먼 메일러), 근친상간(바이런·아나이스 닌) 등이 속출한다. “결과가 어찌 되건 일단 사랑에 빠져 있는 동안은 그만한 가치가 있지”라고 한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사연에는 ‘남자가 한을 품으면’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헤밍웨이는 몇 년을 주기로 배우자 교체를 밥 먹듯이 하다가 마침내 자신보다 더 활화산 같은 열정을 가진 저널리스트를 만나 그녀를 집에 눌러앉히려 갖은 술수를 부린다. 책은 어설픈 연애 지상주의나 정신 이상 예술가들을 말하는 게 아니다. 책의 미덕은 이들의 ‘미친 사랑’이 작품에 어떻게 투영됐는가를 보여 주는 데 있다. 첫날 밤 탈장 증상이 온 신랑과 생리가 터진 신부의 ‘황무지’ 같은 결혼 생활은 T S 엘리엇의 대표작 ‘황무지’가 됐다. 책을 책임편집한 이연실 문학동네 편집팀장은 “책 덮고 나면 언급된 문호들의 작품을 찾아보고 싶어진다”며 “치정으로 범벅이 된 연애사, 난투극에 가까운 결혼 생활 후 작가들은 그 지질한 일상에서 스스로를 건져 내 작품으로 승화시켰다”고 했다. 대문호의 사랑에서 모종의 용기를 얻을 수도 있다. 또는 작품으로 옛 연인에게 복수한 치졸한 그들을 맘껏 욕해도 좋을 것이다. 김훈 작가는 이 책더러 ‘40금(禁)’이라고 했단다. 지독하다, 이 책.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어린이 책] 잃어버린 나를 찾는 선장…마치 ‘노인과 바다’ 읽는 듯

    [어린이 책] 잃어버린 나를 찾는 선장…마치 ‘노인과 바다’ 읽는 듯

    잭과 잃어버린 시간/스테파니 라푸앵트 글/델피 코테라크루아 그림/이효숙 옮김/산하/96쪽/1만 3000원 너른 바다만큼이나 광막한 이야기다. 소싯적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볼 때의 기분이 이러했던 것 같다. 세계적인 대문호의 소설이래서 읽기는 하는데 어려서는 좀 이해하기 힘든 감정의 결.‘잭과 잃어버린 시간’도 읽는 데 생각 근육이 꽤 필요한 책이다. 잭은 단 하루도 허투루 지낸 적이 없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선장이었다. 물고기가 그물에 걸리면 바다에 놓아 주는 괴짜 선장. 사람들이 “미쳤다”고 비웃는 잭은 사실 늘 한 가지만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등지느러미에 상처가 있는 회색 고래를 찾는 일. 잭의 전부였던 아들 쥘르를 삼킨 고래다. “누구나 길을 잃을 수 있다. 어디에서나.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잭은 배 위에서 길을 잃었다는 사실이다. 잭은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책에서 가장 단호하게 화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이 부분은 갑자기 들이닥친 시련 앞에 자기 안에 웅크려 자신마저 잃어버린 잭에 대한 논평이다. 책에서 잭의 아내는 유일하게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잭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아들을 혼자 힘으로만 찾아나선다. 상의는커녕 자신의 결정을 아내에게 알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책장을 천천히 넘기면서 망망대해에서 아들을 잃어버린 아비, 아들과 더불어 남편도 잃어버린 아내, 고래 뱃속으로 덜컥 들어간 아들 등 여러 인물들의 심정을 가늠해 보는 것이 광막한 책을 읽는 열쇠다. 막다른 길에 몰렸을 때, 자기만의 동굴로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주변인들에게 얼마나 폭력적인지도 책은 역설한다. 잭이 잃어버린 것은 비단 시간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문화마당] 단순해질 용기/강의모 방송작가

    [문화마당] 단순해질 용기/강의모 방송작가

    더위와 일에 지쳐 돌아온 저녁, 소파에 널브러져 습관적으로 TV를 켠다. 늘 그렇듯 방송마다 음식 천지다. 매일 저렇게 돌아다녀도 최고의 맛집이 계속 등장한다는 게 참 놀랍다. 먼저 성우의 구수한 멘트가 한껏 기대를 부풀린다. 입이 미어져라 음식을 넣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손님들 뒤로 주방에선 또 다른 자랑이 한창이다. “우리 집 맛의 비결은요~” 하면서 육수나 소스에 들어가는 재료들을 펼쳐 놓는다. 익숙한 양념 외에 한약재며 과일이며 온갖 향신채가 얼마나 많은지, 열대여섯 가지는 보통이다. 대체 그 많은 재료들을 섞으면 어떤 맛이 살아남을까. 궁금증보다는 그렇게까지 애쓰는 모습이 딱하다. 허기가 잔뜩 차오른 상태이건만, 구미는 동하질 않는다. ‘맛의 배신’이라는 책을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난다. 환경다큐 전문 PD인 저자 유진규의 조사와 분석에 따르면 요즘 공장식으로 길러 낸 식재료들은 본래의 맛을 잃었다고 한다. 책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향미가 희석되는 현상은 현대 농업 전반에 걸쳐 발생하는 문제다. 종자 개량, 화학비료, 비닐하우스, 지력 쇠퇴, 토양 미생물 감소 등 다양한 원인이 밍밍한 음식을 만들어 냈다. 닭고기는 향미를 잃었다. 토마토는 밍밍해졌고, 옥수수, 밀, 딸기, 상추도 각각의 고유한 맛이 약해졌다. 모든 음식이 묽게 변했다.’ 그러니 자꾸 무언가를 많이 넣어서 혀를 속일 수밖에. 나이 든 사람들에게 흔히 듣는 ‘요즘 음식은 옛날에 먹던 그 맛이 아냐’ 하는 불평이 괜한 까탈은 아닌 것이다. 와중에 손님들 입맛을 끌고자 분투하는 요리인들의 노고도 눈물겹다. 지인 한 분은 은퇴 후 아내와 함께하는 새로운 취미를 만들었다고 했다. 맛집 소개 방송을 즐겨 보고 매주 한두 곳을 찾아다니는 게 요즘 사는 낙이라 한다. 역시 방송의 힘은 대단하고, 사람의 식욕은 위대하다. 운동도 열심히 하지만, 뱃살은 나날이 두둑해지고 콜레스테롤 수치도 오르고 있다니, 그분에게 ‘맛의 배신’에서 다음의 구절을 문자로 보내 드릴까 생각 중이다. ‘음식은 그것이 경험되는 것과 같은 방식, 즉 향미라는 렌즈를 통해서 처음부터 다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가 막대한 돈과 시간을 쓰면서 해결하려고 애쓰는 비만 문제 같은 음식의 위기는 광범위한 미각 질환으로 이해될 수 있다. 문제는 칼로리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잘못된 음식을 원한다는 것이다. 맛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맛의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다.’ 엊그제 아버지 기일을 보내며 생전에 즐겨 드시던 가지냉국을 만들었다. 췌장암으로 투병하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떠나는 날에도 어머니에게 가지냉국을 청해 드실 만큼 그 음식을 좋아하셨다. 쪄낸 가지를 잘게 찢고, 집간장에 다진 마늘과 송송 썬 실파를 넣어 조물조물 무친 다음 냉수를 붓고 통깨를 뿌린다. 이게 전부인 단순한 요리. 마침 시골에서 동창이 몇 가지 채소들을 보내 준 터라 심심한 가지의 속맛이 더욱 깊게 느껴졌다. 친구가 챙겨 준 재래식 오이지도 곁들였다. 길쭉하게 썰어서 물에 담가 소금기만 살짝 빼고 어머니가 좋아하던 방식으로 고추장을 발라 먹었다. 재료에만 충실한 두 가지 반찬이 달아나던 입맛을 불러냈다. 글도 그러하지 않겠나. ‘헤밍웨이의 글쓰기’에 ‘산문은 건축이지 실내장식이 아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기본이 부족하면 쓸데없는 서사가 길어진다. 이 책 저 책 기웃거리고 이 말 저 말을 끌어모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다. 지금 이 글처럼. 요리도, 글도, 단순해지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알면서도 실패하는 이유는 비겁함과 조급함이다. 맹물 한 잔을 천천히 마시며 반성하련다.
  • [책꽂이]

    [책꽂이]

    고구려의 국제정치 역사지리(이정훈 지음, 주류성 펴냄) 중국의 동북공정을 처음 고발했던 언론인인 저자가 고구려의 뿌리와 중국과의 투쟁에 대한 취재를 더해 쓴 고구려 대중(對中) 투쟁사. 수도 평양이 어디인지, 고구려가 대륙 세력과 혈투를 벌여 차지한 요동이 어디인지에 대한 추적과 증명도 시도했다. 504쪽. 2만 1000원.건강의 배신(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조영 옮김, 부키 펴냄) 현대 의학의 장밋빛 약속과 건강 열풍의 민낯을 신랄히 비판했다. 비대해진 헬스케어 산업은 우리에게 몸과 마음에 대한 통제를 제안하지만 이들의 주장과 근거는 제대로 검증된 적이 없다. ‘약간의 불량 세포만으로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마당에 정밀한 식단 관리와 러닝머신이 의미 있는가’라고 일갈한다. 292쪽. 1만 6000원.1918(다니엘 쇤플루크 지음, 유영미 옮김, 열린책들 펴냄)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을 무대로 역사적 인물 25명의 삶을 좇는 역사서. 베를린 자유대학 역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이 시기 등장인물들이 쓴 회고록, 일기, 편지, 자서전 등을 토대로 100년 전 양차 세계 대전의 전간기, 그중에서도 종전 협정 전후 4~5년을 생생하게 펼쳤다. 344쪽. 1만 8000원.페이크(로버트 기요사키 지음, 박슬라 옮김, 민음인 펴냄) 전 세계적으로 4000만부 이상 판매된 재테크 서적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시리즈 최신작. 부채담보부채권(CDO), 주택저당증권(MBS) 등 현재 시장에 만연한 ‘가짜 돈’으로 말미암아 앞으로는 2008년 금융위기를 뛰어넘는 1200조 달러 수준 대붕괴가 초래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584쪽. 1만 8000원.해러웨이 선언문(도나 해러웨이 지음, 황희선 옮김, 책세상 펴냄) 페미니즘 이론가이자 생물학자인 도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1985)·‘반려종 선언’(2003)과 라이스 대학 영문과 교수 캐리 울프와의 대담을 한데 모은 저작선. ‘인간’이라는 신화,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개, 사이보그 등 다양한 친족들과 반려종으로서 살아갈 것을 권고한다. 372쪽. 1만 9000원.이 소년의 삶(토바이어스 울프 지음, 강동혁 옮김, 문학동네 펴냄) ‘우리 시대의 헤밍웨이’라 불리는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자 회고록. 의붓 아버지의 감정적, 육체적 폭력에 시달리는 소년 토비는 성적증명서와 추천서를 위조해 멀리 떨어진 도시의 명문 기숙학교에 합격한다. 사춘기 시절의 혼란과 좌절,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환경에 노출된 소년의 내·외면 풍경을 섬세하게 그렸다. 464쪽. 1만 5800원.
  • ‘미친’ 산 페르민 축제 첫날 황소 뿔에 받혀 셋 중상, 한 명 수술대에

    ‘미친’ 산 페르민 축제 첫날 황소 뿔에 받혀 셋 중상, 한 명 수술대에

    비좁은 골목길에 황소들을 풀어놓고 사람들이 쫓겨 미친 듯이 내달리는 산 페르민 축제가 7일 시작됐는데 올해도 어김없이 첫날부터 셋이나 황소 뿔에 받혔다. 스페인 북부 팜플로나에서 해마다 많은 부상자를 양산하는 이 전통의 축제 첫날 미국 켄터키주에서 온 23세, 캘리포니아주에서 온 46세, 스페인 40세 남성이 푸에르토 드 산 로렌초 목장에서 데려온 황소떼에 받혔다고 영국 BBC가 전했다. 캘리포니아주 출신 남성은 목을 다쳐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AP통신은 전했다. 물론 다친 사람은 훨씬 더 많다. 다른 둘이 머리를 다쳐 입원했고 적십자사에 의해 치료를 받은 이는 48명이나 됐다. 오는 14일까지 매일 아침 8시 흰옷에 붉은 스카프를 두른 남자들이 850m 좁은 골목길을 황소들에 쫓겨 달려 내려오는 미친 질주가 이어져 부상자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매일 황소떼는 골목을 질주한 뒤 투우장에 들어서 프로 투우사의 보복 공격을 당한다. 이 축제는 1910년 기록이 처음 시작돼 지금까지 16명이 목숨을 잃었다. 가장 마지막에 숨진 이는 다니엘 지메노 로메로로 2009년 축제의 넷째 날 뿔에 받혀 목이 부러져 운명했다. 동물권 보호를 외치는 애니마 내추랄레스와 PETA 소속 활동가들은 축제를 이틀 앞둔 지난 5일 팜플로나 골목길에 그려진 황소 그림 안에 머리에 가짜 뿔을 달고 등에 가짜 창이 박힌 채로 누워 이 축제 개최를 반대하는 시위를 펼쳤다. 사실 축제는 종교 퍼레이드, 파티, 콘서트 등으로 구성되는데 이렇듯 세계 각국 관광객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1926년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 묘사되면서였다. 18세 이상의 남자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2016년 축제 도중 집단 성폭행이 벌어져 스페인 전국에서 규탄 시위가 이어졌고 성폭행 관련 법률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에 영향을 미쳤다. 스페인 남성 5명이 18세 여성을 집단 성폭행하고 이를 촬영해 ‘늑대 떼’라고 이름 붙인 자신들의 메신저 대화방에 올리는 사건이었다. 1심과 2심에서는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해자들에게 가벼운 형량이 선고돼 세계적으로 공분을 일으켰다. 스페인 대법원은 지난 6월에야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가해자들에게 징역 15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한편 빌바오의 폭동 진압 경찰부대는 물론 프랑스와 이탈리아 경찰, 미국대사관 요원들이 축제 현장에 투입되고 여성가족 전담 요원들을 배치해 성범죄 등을 예방하도록 했다. 지난 5일 설치된 인포메이션 센터에서는 성범죄 대처 훈련을 받고 스페인어, 영어, 프랑스어, 바스크어 등을 구사하는 직원들이 여성 민원인들을 돕고 있다. 아울러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앱)을 통해 성범죄 처리와 신고 방법을 알리고, 도시에서 벌어지는 각종 상황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등 시 당국은 “남성과 여성 모두 자유롭고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축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씨줄날줄] 헤밍웨이와 트럼프/박록삼 논설위원

    [씨줄날줄] 헤밍웨이와 트럼프/박록삼 논설위원

    단문(短文)은 중요하다. 여러 사람이 오만 글쓰기 책에서 강조해 왔다. 직접적 메시지 전달에 단문은 안성맞춤이다. 중문(重文)이나 복문(複文)은 둘 이상의 문장으로 구성돼 전달하는 과정에서 뜻이 엉킬 가능성도 높다. 단문이 글쓰기의 정답은 아니다. 어설픈 단문의 조합들은 유치하고 투박한 글이 되기 십상이다. ‘관촌수필’의 소설가 이문구같이 유장한 맛이 나는 글을 쓰는 자는 찾기 어렵다. 논리적인 글을 단문으로 쓰려면 치밀해야 한다. 초겨울 새벽녘 찬물 세수와 같은 짧고 강렬한 단문의 글은 쉬 찾기 힘들다. 미국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는 좀 달랐다. 기자 출신으로 이른바 ‘하드보일드 문체’였다. 형용사, 부사 등 수식어를 최소화했고, 사물과 현상을 객관적으로 표현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그를 ‘단문의 대가’로 꼽는 이유였다. 일화도 있다. 어느 날 친구들이 술자리에서 헤밍웨이에게 여섯 단어 소설 쓰기 내기를 제안했다. 쩔쩔매는 모습을 기대했던 친구들 앞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팝니다. 한 번도 안 신은 아기 신발) 가슴 먹먹한 문장이다. 세상의 빛을 못 본 아이를 둔 부모인지, 집안의 반대에 헤어져야 했던 비운의 연인인지, 아니면 아기 신발까지 내다 팔아야 하는 가난한 부모인지 알 수 없다. 읽는 이에 따라 상황과 좌절감은 무한 변주된다. 21세기에는 트위터가 헤밍웨이의 글쓰기 형식을 따랐다. 초장에 딱 140자만 허용했다. 이후 경쟁 소셜미디어에 맞서려고 2017년 11월 280자로 늘렸다. 워터게이트 특종 기자 밥 우드워드가 쓴 책 ‘공포: 백악관의 트럼프’를 보면 이때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아쉽다. 나는 140자의 헤밍웨이인데…”라고 말했다고 한다. 시쳇말로 “헐~”을 외치며 기함할 독자도 있겠다. 이 ‘트럼프 자뻑썰’에 대한 평가는 보류하더라도 그가 트위터 예찬론자임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는 지난달 29일 새벽 자신의 트위터에 ‘김 위원장이 이걸 본다면 DMZ에서 만나 악수하고 싶다’는 글을 올렸다. 전 세계가 발칵 뒤집혔다. 거짓말처럼 다음날 오후 DMZ에서 김정은 위원장을 만났다. 북한 땅을 밟은 첫 미국 대통령으로 기록됐고, 문재인 대통령도 동행해 남북미가 판문점에서 처음 회동했다. 남북미가 한반도 평화의 주체임을 전 세계에 천명했다. 사실상 3차 북미 정상회담이라 할 만했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다시 희망적인 국면으로 돌아섰다. 이쯤 되면 트럼프 대통령은 ‘단문의 마법사’에 가깝다. 무덤 속 헤밍웨이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짧은 트윗을 날릴 것 같다. “유 윈!”(You win)
  • [전문]文 “스웨덴과 가장 큰 공통점 평화의지”

    [전문]文 “스웨덴과 가장 큰 공통점 평화의지”

    문재인 대통령은 14일(현지시간)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와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남북 간, 북한과 국제사회 간 ‘신뢰’ 구축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스웨덴을 국빈방문 중인 문 대통령은 이날 스웨덴 의회 연설에서 “북한의 평화를 지켜주는 것은 핵무기가 아닌 대화”라며 “완전한 핵폐기와 평화체제 구축 의지를 국제사회에 실질적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국제사회는 북한이 진정으로 노력하면 즉각적으로 응답할 것이며 제재 해제는 물론이고 북한 안전도 국제적으로 보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서로의 체제는 존중되어야 하고 보장받아야 한다. 그것이 평화를 위한 첫 번째이며 변할 수 없는 전제”라고 천명했다. 다음은 문 대통령의 연설 전문. 존경하는 국왕님, 안드레아스 노를리엔 의장님과 의원 여러분, 내외 귀빈 여러분, 구 모론! (안녕하십니까) 노벨평화상 수상자 알바 뮈르달 여사는 바로 이 자리에서 전 세계 군축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처음으로 선언했습니다.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도 노벨평화상 수상 직후 바로 이 자리에서 한반도 평화 비전을 재차 천명했습니다. 그로부터 19년이 흘렀는데, 한반도 평화에 얼마나 진전이 있었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유서 깊은 스웨덴 의사당에서 연설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따뜻하게 반겨주시고 연설의 기회를 주신 스웨덴 국민과 국왕 내외분, 의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스웨덴은 대한민국의 오랜 친구입니다. 한국전쟁 때 야전병원단을 파견해서 2만 5000명의 UN군과 포로를 치료하고, 한국의 국립중앙의료원 설립을 도왔습니다. 민간 의료진들은 전쟁 후에도 부산에 남아 수교도 맺지 않은 나라의 국민을 치료하고 위로했습니다. 스웨덴은 한국인에게 오랫동안 이상적인 나라였습니다. 1968년, 한국이 전쟁의 상처 속에서 민주주의를 꿈꾸던 시절 한국의 시인 신동엽은 스웨덴을 묘사한 시를 썼습니다. 그 시의 일부를 읽어보겠습니다.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데거, 럿셀, 헤밍웨이, 장자, 휴가 여행 떠나는 총리는 기차역 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있을 때, 그걸 본 역장은 기쁘겠소라는 인사 한마디만을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 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그 중립국에서는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더란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 내는 미사일 기지도 탱크 기지도 들어올 수 없는 나라, 황톳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 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가더란다.” 한국인들은 이 시를 읽으며 수준 높은 민주주의와 평화, 복지를 상상했습니다. 지금도 스웨덴은 한국인이 매우 사랑하는 나라입니다. 한국인들은 한반도 평화를 돕는 스웨덴의 역할을 매우 고맙게 여기고 신뢰합니다. 스웨덴은 서울과 평양, 판문점 총 3개의 공식 대표부를 둔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입니다. 북한 역시 스웨덴의 중립성과 공정함에 신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지난 70년 동안, 한반도 평화를 위해 변함없는 성의를 보내준 스웨덴 국민과 지도자들께 경의를 표하며, 한국 국민의 뜨거운 우정의 인사를 전합니다. 의원 여러분, 내외 귀빈 여러분, 스웨덴과 대한민국은 유라시아 대륙의 반대편에 위치한, 지리적으로 아주 먼 나라이지만 서로 닮은 점이 많습니다. 대륙과 해양이 만나는 반도에 위치하여 역사적으로 많은 전쟁을 치렀고, 주권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습니다. 스웨덴은 18세기부터 100년간 대기근으로, 한국은 20세기 식민지와 전쟁을 거치며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시기도 있었습니다.그러나 위대한 국민의 힘으로 어려움을 이겨냈다는 점이 특히 닮았습니다. 근면과 불굴의 의지를 가진 양국 국민은 제조업을 중심으로 가난한 나라를 잘 사는 나라로 일으켰습니다. 잘 교육받은 청년들은 혁신과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양국 정부는 이들이 마음껏 도전할 수 있도록 창업과 스타트업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습니다. 문화를 사랑하는 양국 국민이 이룬 예술적 성취 역시 놀랍습니다. 양국의 문화예술은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세계인은 아바(ABBA)와 방탄소년단(BTS)의 음악을 좋아하고, 스웨덴 작가 린드그렌의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과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한국 작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습니다. 무엇보다 두 나라의 가장 큰 공통점은 평화에 대한 강한 의지입니다. 스웨덴 국민의 훌륭함은 단지 자국의 평화를 지키는데 그치지 않고, 다른 나라의 평화에도 관심을 가졌다는 점입니다. 스웨덴은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인류를 보호하는 국제사회의 평화 수호자가 되었습니다. 고통받는 인류를 향해 기꺼이 손을 내밀어 온 스웨덴의 역사는 한반도의 완전한 평화를 꿈꾸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지난해 4월, 스웨덴의 여름만큼 아름답고 화창한 봄날의 판문점을 세계인들이 주시했습니다.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사상 최초로 군사분계선을 넘어와 남북의 정상은 10년 만에 다시 얼굴을 마주했습니다. ‘다시는 전쟁으로 인한 불행을 겪지 않겠다’는 국민들의 간절한 열망이 분단의 상징 판문점을 일순간에 평화의 산실로 되돌렸습니다. 어렵사리 만난 남과 북은 진심을 다해 대화했고, 평화와 번영, 공존의 새로운 길을 열기로 약속했습니다. 남북군사합의서를 체결하여 적대행위 중지, 비행금지구역 설정, DMZ 내 감시초소 철수와 공동 유해 발굴 등에 합의했습니다. 그날의 만남으로 드디어 남북 사이에 오솔길이 열렸습니다. 정전협정 후 65년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던 비무장지대의 숲에 11개의 오솔길이 생겼습니다. 이제 곧 남북 국민들이 오가는 수많은 길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올해는 DMZ ‘평화의 길’이 열려 군인이 아니면 갈 수 없었던 비무장지대를 일반인들도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국 국민들은 이런 변화가 평화를 바라는 세계인의 지지와 성원, 국제적 연대 덕분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한반도 평화를 만들 당사국들이 만나고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 스웨덴의 역할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스웨덴 국민의 응원으로 한반도 평화에 대한 희망을 더욱 크게 키울 수 있었습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부터 역사적인 1·2차 북미 정상회담까지 스웨덴이 했던 큰 역할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의원 여러분, 내외 귀빈 여러분, 스웨덴의 오늘을 만든 힘은 ‘신뢰’라고 생각합니다. 스웨덴 국민은 서로를 신뢰하고 정부와 기업을 신뢰합니다. 1938년 역사적인 쌀트쉐바덴 협약과 같이 노사가 합의를 거쳐 결정을 도출하고, 결정이 내려지면 모두가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지혜가 정착되어 있습니다. 스웨덴의 쉰들러라고 불리는 라울 발렌베리와 ‘하얀 버스’로 2차 세계대전 전쟁포로를 구출한 폴케 베나도트의 활약은 개인이 어려움을 겪을 때, 누군가가 나서서 도울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왔습니다. 스웨덴의 국민은 ‘좋은 사회가 되려면 구성원 모두가 기여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지구촌의 평화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지구촌의 평화를 위해서도 모든 나라의 기여가 필요합니다. 스웨덴은 개발 기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핵무기 보유를 포기했습니다. 새로운 전쟁의 위협에 대한 대처 방안으로 핵으로 무장하기보다 평화적인 군축을 제시하고 실천한 것은 스웨덴다운 선택이었습니다. 스웨덴이 어느 국가보다 먼저 핵을 포기할 수 있었던 데는 인류가 새로운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신뢰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세계가 궁극적으로 ‘평화를 통한 번영’을 선택할 것이라는 신뢰였습니다. 핵확산방지 활동, 최고 수준의 공적개발원조(ODA) 등을 통해 스웨덴은 자신의 신뢰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는 스웨덴을 따라 서로에 대한 신뢰를 키우고 있습니다. 인류애와 평화에 앞장서고 있는 스웨덴 국민께 경의를 표합니다. 의원 여러분, 내외 귀빈 여러분, 저는 스웨덴의 길을 믿습니다. 한반도 역시 신뢰를 통해 평화를 만들고 평화를 통해 신뢰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남과 북 간에 세 가지 신뢰를 제안합니다. 첫째, 남과 북 국민 간의 신뢰입니다. 평화롭게 잘 살고자 하는 것은 남북이 똑같습니다. 헤어져서 대립했던 70년의 세월을 하루아침에 이어붙일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차이가 크게 느껴질 때도 있고, 답답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북은 단일 민족 국가로서 반만년에 이르는 공통의 역사가 있습니다. 대화의 창을 항상 열어두고, 소통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오해는 줄이고, 이해는 넓힐 수 있습니다. 세 차례 남북 정상회담을 통한 대화는 이미 여러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군사분계선에서의 적대행위가 중단되었습니다. 남북의 도로와 철도가 연결되고 있습니다. 접경지역의 등대에 다시 불을 밝혀, 어민들이 안전하게 고기잡이에 나설 수 있게 됐습니다. 작지만 구체적인 평화, 평범한 평화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런 평범한 평화가 지속적으로 쌓이면 적대는 사라지고 남과 북의 국민들 모두 평화를 지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항구적이고 완전한 평화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둘째, 대화에 대한 신뢰입니다. 세계는 남과 북이 평화롭게 공존하기를 원합니다. 어떤 나라도 남북 간의 전쟁을 원하지 않습니다. 한반도의 평화가 무너지면 동북아 전체의 평화와 안정이 무너지고 전 세계에 엄청난 재앙이 될 것입니다. 어떤 전쟁도 평화보다는 비싼 비용을 치르게 된다는 것이 역사를 통해 인류가 터득한 지혜입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지지하는 것은 남북은 물론 세계 전체의 이익이 되는 길입니다. 평화는 평화로운 방법으로만 실현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대화입니다. 북한의 평화를 지켜주는 것도 핵무기가 아닌 대화입니다. 이는 한국으로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북 간의 평화를 궁극적으로 지켜주는 것은 군사력이 아니라 대화입니다. 서로의 체제는 존중되어야 하고 보장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평화를 위한 첫 번째이며 변할 수 없는 전제입니다. 북한이 대화의 길을 걸어간다면, 전 세계 어느 누구도 북한의 체제와 안전을 위협하지 않을 것입니다. 북한은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을 신뢰하고, 대화 상대방을 신뢰해야 합니다. 신뢰는 상호적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대화의 전제입니다. 한국 국민들도 북한과의 대화를 신뢰해야 합니다. 대화를 불신하는 사람들이 평화를 더디게 만듭니다. 대화만이 평화에 이르는 길임을 남북한 모두 신뢰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국제사회의 신뢰입니다. 반만년 역사에서 남북은 그 어떤 나라도 침략한 적이 없습니다.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눈 슬픈 역사를 가졌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발적인 충돌과 핵무장에 대한 세계인의 우려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국제사회의 제재를 풀기 위해서는 이 우려를 불식시켜야 합니다. 북한은 완전한 핵 폐기와 평화체제 구축 의지를 국제사회에 실질적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을 때까지 양자 대화와 다자대화를 가리지 않고 국제사회와 대화를 계속해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남북이 합의한 교류협력 사업의 이행을 통해 안으로부터의 평화를 만들어 증명해야 합니다. 국제사회는 북한이 진정으로 노력하면 이에 대해 즉각적으로 응답할 것입니다. 제재 해제는 물론이고 북한의 안전도 국제적으로 보장할 것입니다.한국은 국제사회의 신뢰 회복을 위해 북한과 함께 변함없이 노력할 것입니다. 또한 남북 간의 합의를 통해 한국이 한 약속을 철저히 이행함으로써 한반도 평화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를 더욱 굳건하게 할 것입니다. 남북이 함께 국제사회의 신뢰를 회복하면 더 많은 가능성이 눈앞의 현실이 될 것입니다. 국제사회의 제재에서 벗어나 남북이 경제공동체로 거듭나면 한반도는 동북아 평화를 촉진하고, 아시아가 가진 잠재력을 실현하는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남북은 공동으로 번영할 수 있습니다.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평화는 세계 핵확산방지와 군축의 굳건한 토대가 되고, 국제적·군사적 분쟁을 해결하는 모범사례로 자리 잡을 것입니다. 남과 북은 한반도의 평화를 넘어서서 세계 평화에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존경하는 국왕님, 안드레아스 노를리엔 의장님과 의원 여러분, 내외 귀빈 여러분, ‘냉전시대의 첫 열전’이었던 한국전쟁으로 남북뿐만 아니라 참전국의 장병들까지 수많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전쟁 개시 3년 만에 정전이 성립되었지만, 비극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종전이 아닌 정전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은 냉전에 갇혀 70여 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평화와 공존을 위한 노력은 냉전질서에 압도돼 번번이 좌절되었고 한반도의 겨울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평화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평창동계올림픽의 지독한 추위 속에서 한반도의 평화는 시작되었고 한반도의 봄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스웨덴 국민시인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트란스트뢰메르의 시는 오늘의 우리를 격려하는 듯합니다. “겨울은 힘들었지만 이제 여름이 오고, 땅은 우리가 똑바로 걷기를 원한다“ 트란스트뢰메르가 노래한 것처럼 한반도에 따뜻한 계절이 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국제사회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언제나 똑바로 한반도 평화를 향해 걸어갈 것입니다. 지난 70년간 함께 해주신 것처럼 스웨덴 국민께서 함께 걸어주실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탁 소 뮈케(감사합니다.) 스톡홀름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재미있는 원자력] 노벨상과 방사선/박정훈 한국원자력연구원 책임연구원

    [재미있는 원자력] 노벨상과 방사선/박정훈 한국원자력연구원 책임연구원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주인공은 파리의 늦은 밤 시간여행을 한다. 고인이 돼 책에서만 볼 수 있던 예술가들을 직접 만나게 된 것이다. 헤밍웨이와 피카소, 드가와 고갱을 만난다. 주인공은 대가들을 만나 자신이 집필 중인 소설에 대한 지도를 받으며 무한한 기쁨을 느낀다. 방사선 과학을 연구하는 필자가 영화 속 주인공처럼 시간 여행을 한다면 누구를 만날 수 있을까. 드가와 고갱의 시대인 1890년대 물리학계에는 원자는 더이상 나눠지지 않는다는 돌턴의 원자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뢴트겐이 엑스선을 발견하고 베크렐이 우라늄에서 방출되는 방사선을 발견하면서 돌턴의 원자설에 의문이 제기되고 물리학계가 요동친다. 쪼개지지 않는 가장 작은 알맹이인 줄 알았던 원자에서 뭔가가 방출된다는 것은 원자 역시 무언가의 집합체란 뜻이고 더 쪼갤 수 있다는 의미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작이었다. 이 업적으로 뢴트겐이 1901년 첫 노벨 물리학상을, 뒤이어 1903년 베크렐이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베크렐의 발견에 관심을 가졌던 마리 퀴리는 1898년 역청우라늄석에서 방사능을 가진 새로운 원소 ‘폴로늄’과 ‘라듐’을 분리해 냈다. 이 성공으로 1903년과 1911년 2차례 노벨상을 수상한 최초의 과학자가 된다. 마리 퀴리는 뛰어난 과학자일 뿐 아니라 당시 여성에 대한 편견을 깬 주인공이다. 당시 과학계의 편견으로 여성인 마리 대신 남편인 앙리 피에르 퀴리만 노벨상 수상자로 거론됐지만 남편의 필사적인 설득으로 공동 수상을 하게 된다. 이후 딸인 졸리오 퀴리는 알루미늄에 알파선을 쏘아 방사성동위원소를 발견한 연구로 1935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면서 2대가 노벨상을 받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기게 된다. 원자력·방사선에 대한 연구로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는 퀴리 가족만이 아니다. 톰슨, 러더퍼드, 애스턴, 보어, 채드윅, 오토 한…. 모두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1901년 노벨상을 시작으로 1940년대까지 원자력 및 방사선 분야의 수많은 과학자들이 2~3년 주기로 노벨상을 받았다. 이런 성과는 과학 교과서의 필수 부분이 됐고 산업과 의료 분야에서 활용되며 일상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있다. 모든 물질의 시작은 원자에 있다. 이처럼 원자력·방사선 분야 과학자들은 모든 것의 시작을 연구하고 있다.
  • [핵잼 사이언스] ‘핵인싸 냥냥이’ 릴 버브의 ‘메롱’, 분석해보니…

    [핵잼 사이언스] ‘핵인싸 냥냥이’ 릴 버브의 ‘메롱’, 분석해보니…

    ‘SNS 스타 고양이’로 유명한 ‘릴 버브’(Lil Bub)의 시그니처 표정에 대한 과학적 원인이 공개됐다. 마치 메롱을 하듯 혀를 살짝 내민 채 깜짝 놀란 표정으로 전 세계 애묘가들을 사로잡은 릴 버브는 인스타그램에서 200만 팔로워를 거느린 인기스타다. 사실 24시간 내민 귀여운 혀와 깜찍한 표정 뒤에는 안타까운 사연이 숨겨져 있다. 2011년 6월 미국 인디애나의 한 시골 마을에서 암컷 들고양이로 태어난 릴 버브는 선천적으로 뼈 기형 장애가 있어 입을 다물지 못한 채 혀를 내밀어야 한다. 또 발가락이 정상적인 고양이보다 2개 더 많은데다 다리도 기형적으로 짧아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고 오래 걷기도 어렵다. 릴 버브가 남다른 기형을 갖게 된 원인을 찾기 위해, 독일 베를린에 있는 의료시스템바이올로지 연구센터가 릴 버브의 주인으로부터 혈액 샘플을 기증받아 유전적 구조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연구진이 릴 버브의 유전자 구조를 분석한 결과, 이 고양이에게는 두 가지 선천적 결함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첫 번째는 악성 유아 골화석증으로, 뼈를 흡수하기 위한 세포의 기능부전으로 발생하는 유전적 질병이다. 이 질병이 진단될 경우 뼈의 형성과 재형성 과정의 손상으로 뼈가 부러지기 쉽고 성장 장애를 초래한다. 연구진은 이번 연구를 통해 고양잇과 동물에게서도 악성 유아 골화석증이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확인했으며, 이 질환 탓에 다리가 짧은 증상이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마치 '메롱' 하는 듯 혀를 밖으로 내밀고 있는 것 역시 아래턱 뼈가 제대로 자라지 못한 것과 연관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두 번째로 발견된 선천적 결함은 다지증이다.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정상보다 더 많이 존재하는 선천적 기형인 다지증의 경우 선조부터 유전적으로 내려오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유명한 다지증 고양이는 미국의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플로리다에서 키웠던 발가락 6개의 고양이 ‘스노 화이트’가 있으며, 현재까지 스노 화이트의 후손으로 알려진 고양이는 총 54마리다. 연구진은 유전적 특징으로 보아, 다지증을 가진 릴 버브와 스노 화이트가 공통의 조상을 가졌을 확률이 높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우리는 릴 버브의 유전자 지도를 매우 보고 싶었다. 포유류는 뼈 형성과 같은 발달과정이 고스란히 몸에 보존돼 있기 때문에, 돌연변이의 원인을 찾아내면 이 희귀 질환에 대한 인간의 이해를 높일 수 있다고 가설했다”면서 “릴 버브의 게놈에서 발견한 특정 유전 질환들은 인간이 걸리는 희소병의 치료법을 찾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자세한 연구결과는 생명과학 분야 논문을 정식 출간 전에 수록하는 온라인 저널 ‘바이오아카이브‘(bioRxiv)에 먼저 공개됐다. 송현서 기자 huimin0217@seoul.co.kr
  • 피츠제럴드의 미친 아내? 그녀는 시대의 ‘플래퍼’였다

    피츠제럴드의 미친 아내? 그녀는 시대의 ‘플래퍼’였다

    ‘위대한 개츠비’를 쓴 스콧 피츠제럴드의 뮤즈이자 아내로만 알려진 젤다 피츠제럴드(1900~1948)를 재조명하는 책이 나왔다. 단편소설 5편, 산문 9편을 엮은 ‘젤다’(HB PRESS)는 한국에서 그의 이름으로 출판하는 첫 책이다.“스콧은 그녀가 정말 미쳤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좋은 글을 쓸 수 있었다”는 헤밍웨이의 혹평처럼 지금까지 젤다는 남편의 뮤즈를 넘어 그의 창작을 방해하는 정신이상자로 그려졌다. 그러나 최근 전기 작가들이 재조명한 젤다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스콧이 작가로서 젤다의 성격과 재담, 심지어 그녀의 일기와 편지에 의지했다는 것. 공저 혹은 스콧의 이름으로 실린 작품 중 대부분이 젤다의 작품이라는 설도 있다. 훗날 젤다는 뉴욕트리뷴에 이렇게 썼다. “피츠제럴드는 표절은 집 안에서 시작된다고 믿나 봐요.” 표지에 ‘피츠제럴드’라는 글귀가 희미하게 지워져 있는 책 ‘젤다’는 ‘피츠제럴드’ 없이 홀로 선 젤다를 조명한다. 수록한 단편 ‘오리지널 폴리스 걸’, ‘남부 아가씨’, ‘재능 있는 여자’는 자전적 성격이 짙다. 런던 연극 무대를 꿈꾸는 코러스 걸(‘오리지널 폴리스 걸’), 천부적인 재능의 댄서(‘재능 있는 여자’)는 꿈의 실현에 바짝 근접했다가 돌연 방향을 틀어 버린다. 어려서부터 재능을 보였던 발레에 다시 도전해 유명 발레단 입단의 문턱에서 좌절했던 젤다의 삶과 겹친다. 산문 중에서는 ‘플래퍼 예찬’이 눈에 띈다. 플래퍼는 1920년대 등장한 미국 신여성을 가리킨다. 젤다는 이렇게 썼다. “그녀는 추파를 던지는 것이 재미있어 추파를 던졌고, 몸매가 좋았기에 원피스 수영복을 입었다. … 그녀는 자신이 하는 일을 늘 하고 싶었던 일과 의식적으로 일치시켰다.” 젤다는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았지만, 나쁜 일에 관한 책임은 남편 몫까지 뒤집어써야 했던 시대의 플래퍼였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이한용의 구석기 통신] 91억 9263만 1770번

    [이한용의 구석기 통신] 91억 9263만 1770번

    감옥에 갇힌 죄수가 등장하는 소설이나 무인도에 표류한 사람이 등장하는 영화에서는 언제든지 벽이나 바위를 긁어 날짜를 표시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오늘 며칠이더라? 지금 몇 시지? 하는 질문을 늘 달고 다니는 게 요즘 현대인의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항상 시간을 궁금해한다. 날짜를 알아야만 마음이 놓이는 존재가 인간인 것이다. 시간을 안다는 것은 사실 인류생존의 기본조건이었다.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눈물겨운 적응과정을 거치던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가여운 존재였던 초기 인류에게 머리 위를 빙빙 도는 콘도르를 보고 동물 사체의 위치를 찾아낸 그 순간부터 하이에나가 들이닥치기 전 한 조각의 고기라도 뜯어내어 도망치기까지의 시간은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사자가 사냥 후 지친 틈새 시간을 노려 온갖 눈칫밥을 먹어가며 근근이 살아남아 석기를 만들고, 불을 피우고, 사냥하며 서서히 뇌의 크기를 키워나가던 인류는 언제부턴가 해가 지면 달이 뜨고 아침이 오면 따뜻한 바람이 불고 여러 번 달이 찼다 기울면 들소가 찾아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를 알아야만 했다. 그날에 맞춰 돌창촉을 다듬고 깊은 함정을 파야 했다. 눈칫밥 먹을 필요 없이 마음껏 사냥할 수 있는 그때를 알아야만 했다. 그때가 언제일까? 그때를 알기 위해서는 시간을 기록해야 했다. 최초의 시계는 아마도 특별한 도구가 없어도 시간을 알 수 있었던 해시계였을 것이다. 발 딛고 살던 지구 자체가 시계였던 셈인데 몇시 몇 분이 아니라 대략적인 때를 알려 주었을 것이다. 지금은 석영 결정이 3만 2768번 진동하는 시간을 1초라고 하던 때도 지나 세슘 원자가 91억 9263만 1770번 양자 진동하는 시간을 1초라고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실로 대단한 과학의 시대다.오늘날로 치면 달력 같은 유물이 등장한 때는 대개 3만 년을 전후한 후기구석기시대로 알려지고 있다. 손바닥만 한 뼛조각 등에 이상한 점들을 찍은 유물들이 이 시기에 등장하는데 학자들에 따라서는 이 점들이 달의 운행을 표시하는 달력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론도 만만치 않지만, 이 시기의 동굴벽화에 털갈이 시기 들소의 특징을 정확히 묘사한 그림들도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후기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확실히 계절과 시간의 변화에 주목하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사냥감을 찾아 이동 생활을 했던 이들에게 시간의 변화를 알아야 한다는 것은 필수적인 생존의 기술이었을 것이다. 언제나 시간은 우리 인류에게 삶 자체와 같이 중요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언제나 흘러만 간다. 되돌아가지는 않는다. 수백만 년 전 인류가 두발로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더 멀게는 지구의 탄생 그리고 우주의 폭발서부터 언제나 시간은 앞을 향해 흘러만 갔다. 우리에게 시간은 유형이면서도 무형인 존재가 아닐까 싶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잠자리를 찾아가는 소년이 노인에게 ‘할아버진 제 자명종이예요’라고 말하자 노인이 ‘내게는 나이가 자명종이지, 나이 든 사람은 왜 일찍 깨는 걸까? 하루를 그나마 좀 더 길게 보내려고? 저는 잘 몰라요? 하는 장면은 참 정겹다. 어떤 때는 시간이 빨리 가기도 하고 느리게 가기도 하는 궁금증에 대한 연구가 있었다고 한다. 느리게 가기도 하고 빨리 가기도 하는 시간은 마음의 시간이었다는 결론이 날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유형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늘 똑같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 현재 미래는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우리 마음속에서 모두 현재다. 과거는 지금 우리의 기억 속에서 존재하며, 미래는 우리의 기대와 전망 속에서 존재한다’고 했다. 유형의 시간은 그저 흘러갈 뿐이지만 무형의 시간은 언제나 현재라니 참 멋진 말이다. 2019년 기해년 새해는 우리 모두의 하루하루가 즐거운 현재가 되길 소망해 본다. 글: 전곡선사박물관장
  • [길섶에서] 과거의 나를 이기는 삶/문소영 논설실장

    대학을 졸업한 23살에 백수였다. 졸업을 했으나 백수답게 교정을 배회하던 시절이라 점심을 먹고 돌아오던 길에 후문 고가 밑에 자리잡은 한 할아버지가 수상을 본다고 해서 재미삼아 손바닥을 내민 적이 있었다. 5000원이었다. 당시 할아버지 왈, “사시를 보면 붙겠어”라고 했다. “몇 살에요?” “35살에.” “네?” 그 당시부터 12년이나 공부를 해서 사시에 붙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서 뒤도 안 돌아보았다. 목표를 정해놓고 달성할 때까지 인생의 즐거움을 유예하고 사는 고시생들의 삶을 살아낼 자신도 의욕도 없었다. 잠깐 학원 강사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는데, 중고생에게 학원서 선행학습을 시키는 것에 죄의식 같은 것이 올라와 그만두었다. 취업 재수생 시절에 신문을 읽으면서 “되기만 하면 좋은 기자가 될 수 있을 텐데”라고 했는데, 얼마만큼 그 각오를 지키며 살아왔나 생각해 본다. 과거의 나는 어땠는가를 돌아보고, 현재는 어떠하며, 미래에는 어떨 것인가를 생각한다. 아마도 연말연시인 탓이리라. 헤밍웨이는 나이가 많아진다고 현명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또한 과거의 자신을 이기는 때만이 진정 승리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이만큼 현명해지고 과거의 나를 이기는 새해를 기대해 본다. symun@seoul.co.kr
  • “좋은 작가이기 전에 좋은 독자 돼야”

    “좋은 작가이기 전에 좋은 독자 돼야”

    中 위화 “위대한 작품들 많이 읽어야” 美 설터 “삶의 중요한 순간 잊지 않길”세계적인 작가들의 글쓰기 비법서가 나란히 출간됐다. ‘가장 세계적인 중국 작가’ 위화(1960~)의 ‘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푸른숲), 미국 최고의 문장가로 꼽히는 제임스 설터(1925~2015)의 ‘소설을 쓰고 싶다면’(마음산책)이다. 둘 다 독자 대상의 문학 강연 내용을 엮었다. 소설 ‘허삼관 매혈기’, ‘제7일’ 등을 히트시킨 위화는 작가가 되기 전에는 치과 의사였다. 남의 입안이나 들여다보는 일이 지겨워서 한가해 보이는 문화관에 들어가 일하려면 작가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단다. 루쉰과 마오쩌둥 이외에는 문학이 금지됐던 문화대혁명(1966~1976) 시대에 성장한 작가는 스무 살이 넘어 책을 읽으면서 동시에 글을 썼다. 그맘때 읽은 책 중 위화가 첫손에 꼽는 문학 스승은 일본의 가와바타 야스나리다. 그는 ‘설국’, ‘이즈의 무희’ 등을 언급하며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책이) 디테일을 다루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말한다. 가와바타는 확정의 방식이 아닌 불확정의 방식으로 디테일을 묘사함으로써 한 가지 디테일의 이면에 다른 디테일이 있음을 알려 주었다. 그는 ‘바이런의 시를 한 행 읽는 것이 문학 잡지를 백 권 읽는 것보다 낫다’는 말을 인용하며, 위대한 작품을 읽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위화가 생각하는 훌륭한 독자는 “평범한 작품 말고 위대한 작품을 많이 읽어 취향과 교양의 수준이 높아져서 글을 쓸 때 자연히 스스로 아주 높은 기준을 요구하게 되는 사람”이다. 훌륭한 작가가 되려면 먼저 훌륭한 독자가 되라는 이야기다.한국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사냥꾼들’(1956) 등을 썼던 제임스 설터는 “소설 쓰는 법은 따로 없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그가 다른 이들의 작품을 읽어내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의 소설 작법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다. 가령 오노레 드 발자크가 ‘고리오 영감’에서 어떻게 인물과 배경을 묘사하고 시점을 이동했는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무기여 잘 있거라’에 어떻게 녹아 들어갔는지를 고민하는 식이다. 설터는 소설 쓰기와 삶은 결코 분리될 수 없고, 그래서 삶의 중요한 순간은 더욱 의미 있게 기억돼야 한다고 말한다. “위대한 장편·단편소설은 전적으로 꾸며낸 게 아니라 완벽하게 알고 자세히 관찰한 것에서 비롯했다.” 삶이 곧 소설이고 소설이 곧 삶이라는 게 ‘작가들의 작가’의 한결같은 결론이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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