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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섶에서] 헌책방의 진화/이종락 논설위원

    일본 도쿄 진보초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헌책방 거리가 있다. 가로세로 약 2㎞에 걸쳐 있다. 헌책방만 160여곳이 성업 중이다. 1000만여권의 책이 이곳에 진열돼 있다. 가장 오래된 고서점은 1877년에 문을 연 유히가쿠다. 일본 좌익과 리버럴리즘의 보고인 이와나미 출판사도 이곳에 있다. 우리나라에도 진보초 같은 헌책방 거리가 있다. 서울 청계천과 부산 국제시장 근처 보수동에 있는 헌책방 거리다. 책방이 20~30개에 불과해 진보초와 비교하기가 민망하다. 그런데 지난달 말 서울 잠실나루역 인근에 대형 헌책방이 문을 열었다. 서울시가 신천유수지 내 옛 암웨이 창고를 리모델링해 전국 최초의 공공 헌책방 ‘서울책보고’를 개관한 것이다. 1465㎡ 규모의 초대형 헌책방에는 독립출판물과 명사의 기증도서 컬렉션까지 총 13만여권의 책을 만날 수 있다. 공연과 토크, 마켓 등이 열리는 아카데미 공간과 북카페도 갖춰져 있다. 지난해 말 오픈한 롯데 프리미엄 아울렛 기흥점에도 중고서점 예스24가 골프장이 보이는 테라스 등 최신 시설을 뽐낸다. 326평 규모의 매장에는 6만여권의 중고도서가 비치돼 있고, 유명가수 공연 등 문화행사가 수시로 열린다. 규모에서는 일본에 뒤지지만 시설 면에서는 최첨단을 구가하는 우리나라 헌책방의 현주소다. jrlee@seoul.co.kr
  • “정보의 홍수 속 가려낼 힘 길러주는 것이 새 과제”

    “정보의 홍수 속 가려낼 힘 길러주는 것이 새 과제”

    신천동 공공헌책방 7일 만에 2만 다녀가 올해 서울 권역 5곳에 도서관 분관 건립 “시민 삶 변화 위한 시도·고민 계속할 것”“도서관법 제1조에 도서관의 역할은 국민의 알 권리와 정보접근권을 보장하는 데 있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서울도서관이 단순히 도서 대여 시설의 기능에 멈추지 않고 시민들이 지식을 통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다양한 시도와 고민을 계속하는 이유지요.” 지난 3일 서울 중구 세종대로 서울신문사 옆 서울도서관에서 만난 이정수(56·여) 관장은 “지난해 2차 도서관발전종합계획을 발표하면서 도서관과 멀리 떨어진 사람들을 끌어오기 위한 고민을 담았고, 올해도 같은 기조로 여러 가지 정책을 펼 것”이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달 27일 송파구 신천동에 문을 연 국내 최초의 공공 헌책방 ‘서울책보고’다. 이 관장은 “무조건 신간이 좋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헌책이 가진 그 시대의 활자, 인쇄, 디자인 등이 그 자체로 역사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모두가 항상 미래와 속도와 편리함을 이야기하는 세상에서 과거를 머금은 느리고 불편한 경험을 즐길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 헌책방을 마련했다”며 활짝 웃었다. 서울책보고는 신천유수지 내에 비어 있던 창고를 리모델링해 1465㎡ 규모로 조성됐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헌책방 협동조합인 전국책방협동조합을 비롯해 모두 25개의 헌책방이 참여했다. 헌책방에서 직접 가격을 책정한 책을 제공하면 서울시에서 이를 전산화해 위탁 판매하는 형태다. 개관 일주일 만에 방문객수 2만명을 훌쩍 뛰어넘을 만큼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길을 잃고 헤매다 보물을 발견하는’ 경험을 선사하기 위해 일반 서점과 달리 서적을 분야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지 않은 것도 특징으로 손꼽힌다. 이 관장은 “매월 다른 주제로 북 큐레이션이 진행되며 작가와의 토크콘서트, 독립출판물 제작 아카데미, 독립출판물 마켓, 시민참여형 벼룩시장 등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도 구상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올해 시내 권역별로 서울도서관 분관 5곳을 설립하는 작업도 한창 진행 중이다. 이 관장은 “구립도서관이 지역주민 친화적인 문화공간의 역할을 담당한다면 서울도서관 분관은 쉽게 찾아보기 힘든 서적까지도 만나 볼 수 있는 대형 공공도서관 본연의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치구에서 신청한 17곳과 서울도서관이 자체 발굴한 8곳을 포함해 후보지 25곳 중 이달 안에 대상지를 선정하는 게 목표다. 이 밖에도 장애인, 노인, 다문화가정 등 누구나 도서관을 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는 ‘지식정보취약계층 지원센터 시범사업’도 이달 말까지 자치구 5곳을 선정해 운영에 들어간다. 이 관장은 “도서관의 역사는 권력이 대중에게로 확장되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며 입을 앙다물었다. “고대 왕립도서관에서 수도원, 대학을 거쳐 근대를 맞으면서 시민들이 쉽게 방문하는 공공도서관이 등장했어요. 권력이 정보를 독점하던 시기에서 누구나 정보를 향유할 수 있는 시기로 오면서 도서관의 역할도 커진 거죠. 활자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다고들 하지만, 정보가 홍수처럼 넘치는 지금 소외되는 이 없이 정확한 정보를 가려낼 수 있는 힘을 길러 주는 게 도서관에 새롭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글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사진 박지환 기자 popocar@seoul.co.kr
  • [길섶에서] 서울책보고/이순녀 논설위원

    대형 컨테이너 같은 삭막한 외형과 달리 실내는 웬만한 대형 서점의 인테리어를 뺨칠 만큼 세련됐다. 터널 모양으로 디자인한 긴 통로의 양옆으로 설치된 32개의 철재 서가마다 세월의 흔적이 깃든 헌책들이 빼곡하다. 기다란 책상을 배치해 누구나 자유롭게 서가에서 책을 가져다 읽을 수 있게 배려하고, 아이들이 신발을 벗고 올라가 앉을 수 있는 널찍한 공간을 마련한 것도 신선하다. 서울시가 송파구 신천유수지 물류 창고를 리모델링해 최근 개관한 공공 헌책방 ‘서울책보고’ 얘기다. 헌책 애호가들에겐 그야말로 보물창고나 다름없는 이곳을 지난 주말 다녀왔다. 동아서점, 공씨책방 등 서울 시내 25개 헌책방이 각자 서가를 분양받아 총 12만여권의 책을 진열했다. 컴퓨터로 책 검색이 가능하지만 헌책방의 묘미는 뭐니 뭐니 해도 우연한 발견의 기쁨 아니겠는가. 다만 과욕은 금물이다. 워낙 규모가 크다 보니 주마간산으로 대충 ?어보는 데만도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책값은 출판연도나 상태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3000원이 일반적이다. 나도 이날 책 3권을 9500원에 샀다. 그중에 한권은 리처드 부스의 ‘헌책방 마을 헤이온와이’. 마지막 서가에서 극적으로 발견한 나만의 보물이다.
  • [김기중 기자의 책 골라주는 남자] 헌책 마케팅 새바람 분다

    지난해 11월 부산 수영구에 있는 ‘F1963’에 들렀습니다. 고려제강이 2008년까지 와이어로프를 생산하다 비워 둔 곳을 문화예술공간으로 바꾼 곳입니다. 전체 면적 2만 2279㎡(약 6740평) 규모에 여러 시설이 들어 있습니다. 특히 8만여권의 헌책을 갖춘 ‘YES24 F1963점’이 인기가 많습니다. 한 달에 무려 5만여명 가까이 방문합니다. 서울 강남 코엑스 별마당 도서관은 헌책을 기부받아 만든 독특한 공간입니다. 전체 2800㎡(약 850평) 복층으로, 5만여권의 장서를 갖췄습니다. 책 표지가 보이도록 수십 층을 쌓아올린 외벽은 그야말로 장관입니다. 헌책을 20여m 가까이 쌓아 두고, 곰의 머리에서 춤추는 고양이와 눈 언덕을 내려오는 토끼, 사슴 등을 그린 대형 작품을 전시해 한참을 쳐다봤습니다. 마이크 스틸키가 그린 ‘원더랜드’ 시리즈라 하더군요. 처음 방문했을 때 ‘여기 땅값이 얼만데!’라고 속물스런 생각을 했지만, 이 생각은 몇 차례 방문하고 나서 ‘아이디어 정말 좋네!’로 바뀌었습니다. 지난 27일 송파구 지하철 잠실나루역 근처에 1465㎡(약 440평) 규모 초대형 헌책방인 ‘서울책보고’가 문을 열었습니다. 한 기업이 물류창고로 사용하다 10년 가까이 비워 둔 건물을 서울시가 헌책방으로 만들었습니다. 천장이 높은 이점을 충분히 살리고, 철재로 만든 32개의 서가를 마치 터널처럼 조성한 게 멋지더군요. 서울시내 25개 헌책방이 각자 서가를 분양받아 모두 12만권의 책을 비치했습니다. 차곡차곡 쌓인 헌책은 사람들을 이끄는 매력이 있습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이기도 합니다. 헌책 마케팅의 새로운 경향으로 봐야 할까요. 이런 시도들은 반갑습니다. 중고 서적 유통을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있긴 합니다만, 책 유통 문제를 떠나 이런 곳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gjkim@seoul.co.kr
  • 국내 첫 공공 헌책방 ‘서울책보고’

    국내 첫 공공 헌책방 ‘서울책보고’

    27일 서울 송파구 신천유수지 창고를 리모델링해 개관한 공공 헌책방 ‘서울책보고’에서 시민들이 책들을 둘러보고 있다. 잠실철교 아래에 자리한 이곳은 암웨이가 1465㎡(약 443평) 규모 창고를 지어 쓰다 2014년쯤 이전한 시유지다. 서울시는 ‘책벌레’를 형상화한 구불구불한 긴 통로를 따라 양옆으로 철제 서가 32개를 설치해 국내 최초의 공공 헌책방을 만들었다. 청계천 헌책방 거리를 지켜 온 동아서점 등 25개 헌책방이 각자의 서가에서 12만여권의 책을 위탁 판매한다. 연합뉴스
  • [박상익의 사진으로 세상읽기] 사브리나의 아버지

    [박상익의 사진으로 세상읽기] 사브리나의 아버지

    영화 ‘사브리나’를 기억하시는지. 빌리 와일더 감독이 1954년에 만든 로맨틱 드라마(오드리 헵번 주연)를 1995년 시드니 폴락 감독이 리메이크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연출자 시드니 폴락은 ‘인디아나 존스’의 톱스타 해리슨 포드와 ‘가을의 전설’ 등으로 급부상한 줄리아 오몬드를 전격 캐스팅해 한 편의 아름다운 로맨틱 드라마를 완성했다. 일부 평론가들은 오드리 헵번이 맡았던 사브리나 역을 줄리아 오몬드에게 맡긴 것은 역사상 최악의 캐스팅이라면서 리메이크 작품을 혹평했다. 세기의 여우(女優) 오드리 헵번에 대한 흠모가 줄리아 오몬드에 대한 폄하로 이어졌으리라. 하지만 나는 ‘각별한 이유’로 원작보다는 리메이크 작품에 주목한다. 리메이크 작품에는 1954년 원작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인상적인 장면이 추가됐기 때문이다. 사브리나의 아버지 페어차일드는 부잣집 운전기사다. 영화에서 그는 딸 사브리나에게 옛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자신이 왜 자가용 운전기사로 취직했는지를 설명한다. 그가 젊은 날 직업 선택에서 고려한 조건은 오직 하나, ‘독서할 시간적 여유’를 많이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영화에서도 그는 대부분 독서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고용주가 살림집으로 내준 별채도 온통 책으로 가득하다. 부잣집 운전기사 일을 하면서 틈만 나면 책을 손에 드는 그의 모습은 무척 낯설고 신기하다. 한국 사회의 통념과 상식으로 보면 지극히 이질적이고 운전기사답지 않은(!) 모습이다. 리메이크 ‘사브리나’의 특별한 대목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한국 영화에서도 ‘독서할 시간적 여유’만을 직업 선택의 기준으로 삼는 페어차일드 같은 캐릭터를 설정할 수 있을까? 물론 가능하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감, 즉 리얼리티가 뚝 떨어질 것이다. 책과 점점 멀어지고 있는 우리네 풍토에서는 대단히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설정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은 2005년 대전의 헌책방 모습. 그러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한때 신간을 먼저 읽으려는 학생들로 북새통을 이루던 대학가 서점들도 폐업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 더이상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부자연스러운 풍경이기에.
  • 휴일 맞이 전통시장 나들이 어때요?

    휴일 맞이 전통시장 나들이 어때요?

    시장은 지역의 삶이 담긴 공간이다. 그 지역의 입맛을 담은 특산품과 먹거리에서부터 주민들의 소식과 정보, 희로애락이 모이는 곳인 까닭이다. 서울시내에도 곳곳에 세월과 이야기를 간직한 전통시장이 자리잡고 있다. 편의성에 밀려 쇠락해왔지만 최근에는 과거의 향수를 추억하려는 중장년층과 숨은 ‘맛집’을 찾아 나서는 젊은층의 나들이 장소로 다시금 각광받기도 한다. 명절 연휴를 맞아 마치 여행을 떠나듯 도심 속 시장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영등포구 대림중앙시장 지하철 7호선 대림역 12번 출구 인근에 위치한 대림중앙시장은 서울의 ‘차이나타운’으로도 명성이 높다. 근처 구로공단에서 일하는 중국인 노동자들이 대림동 일대에 모여 살면서 자연스레 중국의 문화가 자리잡게 됐다. 대림역에서 중앙시장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한글보다 한자로 적힌 간판이 더 많을 정도다. 좌판에 펼쳐진 중국식 만두와 소시지, 연변 순대 등 이국적인 음식에 눈과 코를 빼앗기고 중국어로 흥정하는 소리를 듣다보면 마치 중국으로 여행을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최근 영화 ‘범죄도시’의 배경이 되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함께 가면 좋아요 문래 창작촌 : 지하철 2호선 문래역 7번 출구로 나와 걷다 보면 철재 기계나 부품들로 만들어진 독특한 조형물을 맞닥뜨리게 된다. 문래 창작촌은 2000년대 초·중반부터 대학로와 홍대 등의 비싼 임대료를 피해 철공소가 밀집한 문래동으로 이주해 온 예술가들이 형성한 자생적 예술가 마을이다. 미로처럼 이어진 골목마다 낡은 철공소와 예술가들의 공방, 카페, 음식점들이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동작구 남성사계시장 지하철 4호선 총신대입구역 14번 출구 바로 앞에 자리잡은 남성시장은 아파트단지와도 인접해 평일에도 찾는 사람이 많은 활기찬 시장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테마로 시장을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시장의 시작점인 봄 구역은 공산품을 주로 판매하고, 여름 구역은 과일, 채소, 정육 등 식료품을 파는 점포가 늘어서있다. 가을 구역은 아파트 단지로 가는 길목에 자리해 간편한 먹거리들이, 겨울 구역은 먹자골목이 각각 들어섰다. 이곳에는 팥앙금과 버터, 백설기로 만든 ‘앙버떡’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정애맛담’과 알록달록한 ‘사색 인절미’가 유명한 ‘몰랑이수’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입소문을 탄 명물 떡집 두곳도 자리잡고 있다. △함께 가면 좋아요 국립서울현충원 : 국가와 민족을 위해 순국한 이들이 안장된 국립묘지.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의 묘역도 자리하고 있다. 봄이면 흐드러지게 피는 수양벚꽃 때문에 꽃구경 명소로 유명하지만, 산책로가 잘 조성돼있어 겨울철에도 차분하게 거닐기 좋다.■서대문구 영천시장 영천시장은 안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냇가 위에 만들어진 곳이다. 옛부터 안산의 약수가 질병을 고치는 효험이 있다고 해 ‘신령한 물이 흐르는 샘’이라는 뜻으로 영천이라는 지명을 얻게 됐다. 과일부터 해산물까지 다양한 식자재를 판매할 뿐 아니라 문구점, 헌책방까지 한데 어우러진 것이 특징이다. 또 다양한 길거리 음식으로도 유명한데, 특히 ‘영천시장 꽈배기’는 저렴한 가격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맛으로 SNS에서 입소문을 탄 명물이다. 수산시장에서나 볼 법한 신선한 킹크랩, 랍스타 등을 판매하는 이색 점포도 인기다.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4번 출구에서 5분 정도 걸으면 된다. △함께 가면 좋아요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독립 투사들을 투옥하기 위해 만들었던 서대문형무소를 활용해 1998년 11월 역사교육의 장으로 개관했다. 3·1운동 직후 유관순 열사가 투옥돼 숨을 거둔 지하 옥사와 감시탑, 고문실, 역사전시관 등을 실감나게 재현해놨다.■은평구 연서시장 연서시장은 지하철 3호선 연신내역 2번 출구 바로 앞에 위치해 인근 주민과 함께 북한산을 오고가는 사람들로 늘 북적인다. 미로처럼 복잡한 시장 곳곳에는 생선이나 홍어회, 족발 등을 비롯해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잔치국수, 김밥 등 다양한 먹거리가 즐비해있어 허기를 달래준다. 현미와 귀리를 각각 넣어 만든 현미가래떡과 귀리현미가래떡은 이곳의 명물이다. △함께 가면 좋아요 은평한옥마을 : 북한산 자락에 자리해 한옥을 체험할 수 있는 장소다. 전통 한옥과 현대 주택의 장점을 혼합한 ‘퓨전 한옥’을 구경할 수 있다. 역사박물관, 문학관, 한옥 카페 등도 마련돼 있어 마을의 정취를 느끼며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에도 적합하다.■성동구 금남시장 금남시장은 한국전쟁 이전부터 금호동에 터를 잡아 지금까지 이어져온 시장이다. 금호동 일대가 재개발되는 와중에도 금남시장과 그 주변은 90년대의 풍경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이곳에는 지장수를 이용해 떡을 만드는 떡집 ‘백미당’이 유명하다. 지장수는 황토에 구덩이를 파서 물을 붓고 기다린 뒤 입자들이 가라앉으면 위에 뜬 물만 건져내는 것을 말한다. 해독 작용이 좋다고 동의보감에 실려있다. 지하철 3호선 금호역 1번 출구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위치해있다. △함께 가면 좋아요 응봉산 : 서울에서 가장 먼저 개나리를 볼 수 있는 곳 중 하나로도 유명하다. 해발 94m의 작은 바위산이지만 중랑천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정상에서 보는 풍경이 아름답다. 성수대교와 동호대교 일대의 한강 풍경이 훤히 내려다보여 장관을 이룬다.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포토 다큐] 낭만도 힐링도 뽑아 쓰세요…지금은 자판기 시대

    [포토 다큐] 낭만도 힐링도 뽑아 쓰세요…지금은 자판기 시대

    편의성과 첨단기술이 만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담배, 음료만 판매하던 기존의 자판기 개념이 다시 쓰여지고 있다. 첨단 정보기술(IT)을 접목한 신기술과 가속화된 가족분화로 인한 편의성 추구가 만들어 낸 이색 자판기는 생활 전반에 걸쳐 이용되고 있다. 최근 인건비 상승으로 이러한 경향은 가속화되고 있다.밤늦은 시각, 꽃집을 찾아 헤매던 기억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이젠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24시간 다양한 꽃묶음을 살 수 있다. 생화를 특수 보존 처리 용액으로 가공하여 최장 5년간 생기 있는 모습이 유지되는 꽃을 파는 자판기가 등장했다. 젊은이들이 붐비는 홍익대 일대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농협안심축산은 국내 5곳에 스마트 고기자판기를 운영하고 있다. HACCP 공정시설에서 만든 포장육을 냉장시설이 완비된 자판기에서 판매한다. 최첨단 사물인터넷(IoT) 기술을 접목한 자판기는 스마트폰 앱으로 판매가격, 내부온도 실시간 확인, 입고·판매·재고, 유통기한·이력을 확인하여 원격 조절할 수 있다. 250g 내외의 소포장이라 1회용으로 적당할 뿐만 아니라, 한우는 시중가격보다 20%나 할인되어 싱글족이나 맞벌이 부부들에게 특히 인기가 있다. 자주 이용한다는 안모씨는 “간편하고 가격도 저렴해서 특별히 장 볼 필요 없이 퇴근길에 자주 이용한다”고 애찬론을 폈다. 일상사에서 흔히 접하는 상처 난 마음에 작은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자판기도 있다. 단돈 500원으로 상처 난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마음약방 자판기는 매월 1000키트 이상이 판매될 정도로 인기 있다. ‘미래막막증´, ‘의욕상실증´. ‘작심삼일증´ 등 20가지의 상처증상에 따라 버튼을 누르면 키트를 받을 수 있다. 휴식과 감동을 주는 시, 그림, 영화 등 예술 작품이나 비타민제 등 소소한 재미와 스토리가 담긴 처방을 받을 수 있다.대학로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대학생 주모씨는 “가끔씩 이용하는데 500원으로 위로받을 수 있어 좋다”고 한다. 점점 사라져 가는 청계천 헌책방 거리를 살리기 위한 책 자판기도 있다. ‘설렘자판기´로 명명된 이것은 헌책방 주인들이 추천한 8가지 카테고리로 이루어져 있다. 7000원을 넣고 원하는 카테고리의 버튼을 누르면 포장된 헌책이 나온다. 고양스타필드에 마련된 자판기는 월 120권 정도의 책이 팔려 나가고 있다고 한다.자판기 판매에 가장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업체는 유통업체들이다. 이들은 기존의 가공식품 공급만이 아니라 건강을 중시하는 세태에 부응하여 신선식품으로 승부를 걸고 있다. 풀무원은 사무실 밀집지역에 ‘스마트 벤딩머신’을 설치하여 25가지 신선식품부터 간편식까지 판매한다. 기존 자판기에 정보통신기술(ICT)을 접목해 앱과 기계가 송신이 가능하여 유통기간이나 재고를 실시간 관리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들 제품들은 편의점보다 15% 싼 가격으로 공급되고 있다. 이마트24는 기존의 편의점에 80여 제품을 탑재할 수 있는 대형 자동자판기를 설치하여 24시간 운영함으로써 고객의 편의성을 돕고 있다. 바나나 수입업체인 돌코리아는 지하철 역사에 바나나 자판기를 설치하여 식사를 거른 출근족을 대상으로 판매하고 있다. 세븐일레븐 또한 자판기형 편의점을 시범 운영하고 있다.내리막길로 치닫던 자판기 시장에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매김하는 이 같은 진화는 놀랍고 편리하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결혼을 꺼릴 수밖에 없는 팍팍한 현실을 살고 있는 싱글족의 애환과 바쁜 현대인들의 뒷모습이 드리운 듯하여 마음 한켠이 무겁다. 글 사진 김명국 선임기자 daunso@seoul.co.kr
  • 해묵은 건물 사이, 켜켜이 쌓인 열강의 흔적…오래된 골목 사이, 틈틈이 쌓인 동심

    해묵은 건물 사이, 켜켜이 쌓인 열강의 흔적…오래된 골목 사이, 틈틈이 쌓인 동심

    건축물은 시간과 공간을 담는 그릇입니다. 건축물을 둘러본다는 것은 그 안에 쌓인 시간과 공간의 역사를 헤아린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인천 개항장 역사문화의 거리의 건물에는 개항 후부터 지금까지 130여년의 시공간이 담겨 있습니다. 모르고 보면 낡은 일본식 목조건물과 서양의 르네상스식 건물에 불과하지만, 알고 보면 1883년 개항 당시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려 했던 열강들의 세력 다툼과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아픔이 읽힙니다. 적산가옥이 늘어선 거리를 거닐자 오늘과 당시의 시간이 겹쳐집니다. 세월에 빛바랜 건물에서 과거를 들여다보고, 또 다른 기억이 덧씌워지는 중인 현재를 마주합니다.뚜우우우. 뱃고동이 울린다. 배에서 치파오를 입은 중국 상인이 내린다. 부두에는 쌀가마니를 발밑에 내려놓은 나가사키 상인들이 모여 있다. 1883년 인천 제물포항이 개항하자 한적하던 어촌에 외국의 신문물이 쏟아진다. 외국인 전용 거주지, 바다 건너온 물건을 파는 가게,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무역회사와 호텔이 들어선다. 일본은 조선 수탈을 위한 방편으로 일본 제1국립은행 인천지점, 일본 제18국립은행 인천지점 등을 세운다. 개항장 역사문화의 거리 일대는 인천의 개항기를 간직한 건축물로 가득하다. 거리 전체가 한국의 근현대사를 훑어 볼 수 있는 역사문화공간인 셈이다. 인천역 부근의 인천아트플랫폼부터 신포국제시장 인근의 답동성당까지 찬찬히 걸으면 반나절도 걸리는 거리지만 핵심 장소는 일본풍 거리를 중심으로 모여 있다. 개항기 역사가 오롯이 담긴 거리의 건물은 오늘날 박물관, 아트플랫폼, 카페로 변모해 사람들을 끌어당긴다.●개항기 인천의 모습을 겹쳐 보다 개항장 역사문화의 거리 여행의 출발점은 인천아트플랫폼이다. 세월이 깃든 건물과 아티스트의 예술적 기운이 만난 공간이다. 인천시는 1888년에 지어진 일본우선주식회사(등록문화재 제248호)를 비롯해 개항기와 1930~40년대 건축물을 리모델링해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했다. 국내와 일본의 물류 운송을 담당하던 일본우선주식회사 건물은 인천아트플랫폼 사무실, 해방 후에 지어 최근까지 대한통운 창고였던 건물은 공연장, 1940년대 문인과 예술가들의 사랑방이었던 금마차다방은 생활문화센터로 재단장했다. 전시장, 공연장, 창작 스튜디오 등 총 13개 동이라 규모가 상당하니 홈페이지에서 관심 있는 전시를 확인하고 가는 편이 좋다. 인천아트플랫폼 뒤편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과거의 시공간이 펼쳐진다. ‘혼마치도리’라고 불리던 은행 거리다. 길가에 일본 제1국립은행 인천지점, 일본 제18국립은행 인천지점, 일본제58은행 인천지점 등 이국적인 석조 건축물이 나란하다. 초가집이 대부분이었을 개항기에 멀끔한 외국 건축물이 들어섰으니 조선인이 느끼는 웅장함은 지금의 수십 배였으리라. 인천개항박물관은 당시 일본 제1국립은행 부산지점 인천출장소였다. 은행의 설립 목적은 조선 수탈이었다. 은행은 조선에서 나는 금괴와 사금을 사들였고 인천항에 들어오는 무역 상인에게 해관세를 받는 업무도 병행했다. 개항기 인천을 갈무리하는 박물관으로 문을 연 것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인 2010년.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회인 내리교회,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 우편제도 등 개항 후 인천으로 들어온 다양한 근대문물을 전시한다. 건물을 구경하는 재미도 크다. 좌우대칭을 이룬 르네상스식 석조건물 내부는 붉은 벨벳 커튼, 아치형 창문, 샹들리에 조명으로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물씬하다.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은 개항장 일대의 건물 모형을 한데 모았다. 이곳의 전신은 일본제18국립은행 인천지점. 일본이 조선 쌀을 싼값에 사서 되파는 일을 했던 나가사키 상인들을 지원하고자 설립한 금융기관이었다. 일본, 청나라 등 각국의 건축양식으로 지은 조계지 건물부터 지금은 소실된 건물, 개항장 거리에 현존하는 건물까지 살펴볼 수 있어 흥미롭다. ●계단으로 나뉜 일본 조계지와 차이나타운 은행 거리의 이국적인 분위기는 일본식 목조주택이 늘어선 거리, 일본풍 거리로 이어진다. 인천 중구청 앞은 개항기 일본인이 거주하던 일본 조계지였다. 가옥은 점포가 딸린 2층 목조주택과 나가야식(일본식 다가구주택) 1층 목조주택이 대부분이다. 목재 골조, 반듯한 직사각형 창, 검은 기와의 어울림은 언뜻 봐도 우리의 것이 아니다. 거리에는 조계지 시절에 지어진 건물과 최근에 세워진 근대식 건물이 뒤섞여 130여 년 전의 아픔을 말없이 전해준다. 건물의 역사성은 유지하되 쓰임새는 달리해 과거와 현재를 잇는 일도 한창이다. 개항기 하역회사 사무실이던 건물은 2011년, 원형에 가까운 복원을 거쳐 카페 ‘팟알’로 문을 열었다. 목조 골격을 살린 카페 내부는 낮잠이 들 만큼 아늑하다. 팟알 바로 옆의 관동갤러리 역시 목조가옥의 외관을 유지한 채 갤러리가 됐다. ‘1883년 일본이 조계지를 만들자 1년 후 청나라는 반대편에 차이나타운을 형성한다.’ 이 역사적 사실을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일본풍 거리와 차이나타운이 맞닿은 지점에 자리한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이다. 청국과 일본 조계지의 경계가 되는 계단을 중심으로 왼쪽은 중국식 건물, 오른쪽은 일본식 건물이다. 계단 양쪽 석등도 모양이 다르다. 30여개 계단 끝자락에는 중국 칭다오에서 기증한 공자상이 서 있다. 뒤를 돌면 차이나타운의 오색찬란함과 일본풍 거리의 차분함이 한눈에 담기고 저 너머 인천항이 펼쳐진다.●배다리 헌책방 골목 읽혔으나 누군가에게 다시 읽히길 기다리는 책을 우리는 ‘헌책’이라고 부른다. 인천의 배다리 헌책방 골목은 빛바랜 책이 모인 거리다. 헌책방의 향수를 그리워하는 이, 절판된 책을 찾아 헤매는 이, 오래된 책의 종이 냄새에 파묻히고 싶은 이를 품어 주는 골목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배다리에 헌책방 골목이 들어선 것은 한국전쟁 후. 남루한 마을에 책을 쌓은 리어카가 모이고 책이 주는 지혜에 목마른 이들이 몰려들며 헌책방이 하나둘 생겨났다. 한때 헌책방이 40여곳까지 늘며 서울의 청계천, 부산의 보수동과 함께 전국 3대 헌책방 골목으로 불리기도 했단다. 세월이 흐른 지금은 아벨서점, 한미서점, 삼성서림 등 다섯 곳만이 남아 배다리를 지킨다. 45년 전 6.6㎡(두 평) 남짓 쪽방에서 시작한 아벨서점은 오늘날 헌책방 골목의 터줏대감이다. 내년이면 일흔을 바라보는 주인은 찾는 책이 없어 헛걸음하는 손님이 없도록 ‘어느 책방이 문을 닫는다더라’ 하는 소식을 들으면 한달음에 달려가 책을 사들였다. 그렇게 모은 것이 4만여권, 창고에는 그의 세 배가 넘는 책이 쌓여 있다. 도서 검색대 대신 책장마다 ‘프랑스 문학’, ‘여행’ 등의 견출지가 붙어 있고 비범한 기억력의 주인이 책을 찾아준다.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하다.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시 낭송회는 어느덧 100회를 넘겼다. 최근에는 인천 출신의 이설야 시인이 시를 읊었다. ‘살아 있는 글들이 살아 있는 가슴에.’ 아벨서점 간판 옆에 붙은 글귀다. 손때 묻은 책을 뒤적이며 살아 있는 글과 정신을 호흡하는 곳, 배다리 헌책방 골목이다.●동심 한 조각을 되찾다, 송월동 동화마을 동화 줄거리가 가물가물해진 어른이 됐다. 꿈속에서 피터 팬과 같은 편이 돼 후크 선장을 물리치던 때도 있었는데. 차이나타운의 북쪽 끝과 맞닿은 송월동 동화마을은 고마운 공간이다.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동화 속 주인공들을 되살려 냈으니 말이다. 송월동 동화마을은 세계 명작 동화를 테마로 조성됐다. 입구의 아치형 조형물을 지나면 도로시 길, 빨간 모자 길, 전래동화 길 등 열한 가지 테마의 골목이 발길을 붙잡는다. ‘미녀와 야수’의 주인공이 담벼락에 들어가 있는가 하면 벤치에 피터 팬이 앉아 있고 계단은 색색의 무지개다리다. 사람들은 포토 존에서 사진을 찍으며 동화 속 공주님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개항 후 독일인이 주로 거주하며 부촌이던 송월동은 1970년대 젊은이들이 인천 주변 도시와 서울로 빠져나가며 노인만 남게 됐다. 낙후된 마을은 2013년 중구청의 주거 환경 개선 사업을 통해 동화마을로 되살아났고 인천의 새로운 명소로 자리매김했다. 알록달록한 동화 세상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건 주민들의 생활상과 동화 속 장면이 뒤얽힌 면면이다. 가스계량기는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양철 나무꾼의 몸통이고, 전봇대는 ‘잭과 콩나무’의 콩나무다. 가스 사용량을 재는 생활은 현실이고 동화는 비현실이다. 현실과 비현실이 중첩되는 순간은 동화를 잊지 말아야 할 이유를 알려 준다. 전봇대에서 하룻밤 새 하늘까지 자라던 콩나무를 상상할 때 우리의 현실은 그렇게 팍팍하지만은 않을 수 있다. 글 이수린(유니에스 여행작가) 사진 장명확(사진작가) ■여행수첩(지역번호 032) →가는 길:서울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경인고속도로와 인천대로를 지난다. 경인고속도로 신월IC 통과 후 경인고속도로를 따라 17㎞가량 이동한다. 인천항사거리에서 제2외곽고속도로 방면으로 우회전한 후 수인사거리에서 중구청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인중로와 제물량로218번길을 지나 신포로23번길을 따라가면 개항장 역사문화의 거리의 시작점, 인천아트플랫폼이다. →맛집:인천의 맛을 이야기할 때 짜장면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식 짜장면은 1883년 인천 개항 후 중국인들이 인천 부두 근로자에게 국수에 볶은 춘장을 비벼 먹는 음식을 팔며 시작됐다. 붉은 간판과 홍등이 수놓은 거리, 차이나타운의 만다복(773-3838)은 하얀 짜장으로 유명하다. 취향대로 고기장과 육수를 넣어 먹는 것이 특징이다. 동인천 삼치거리에는 삼치와 막걸리를 파는 생선구이 집 10여개가 모여 있다. 인천집(764-6401)은 삼치구이와 조림을 반반씩 맛볼 수 있는 ‘반반 삼치’가 대표 메뉴다. 쌀밥에 겨울이 제철인 삼치 한 점 올려 먹으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다. →잘 곳:인천중구청 뒷길에 자리한 호텔아띠(772-5233)는 차이나타운, 자유공원, 개항장 역사문화의 거리 등과 가까워 인천의 대표 여행지를 둘러보기 수월하다. 베니키아 월미도 더 블리스 호텔(764-9000)은 월미 문화의 거리에 자리한 호텔이다. 비즈니스센터와 세미나룸이 있어 출장 시 묵기 편리하며 객실에서 인천대교와 영종대교가 한눈에 내다보인다.
  • [뉴스 in] 인천, 130년 전 개항을 말하다

    [뉴스 in] 인천, 130년 전 개항을 말하다

    인천에 130여년의 시공간이 담긴 거리가 있다. 개항장 역사문화의 거리다. 1883년 개항 당시의 역사가 오롯이 새겨진 거리에서 과거를 들여다보고, 또 다른 기억이 덧씌워지는 중인 현재와 마주할 수 있다. 시간이 더디 흐르는 배다리 헌책방 골목, 동화 속 세계가 현실에 구현된 송월동 동화마을 등을 묶어 돌아보는 재미도 아주 각별하다.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5만 고시생의 성지는 ‘인생 고시생’ 안식처 됐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5만 고시생의 성지는 ‘인생 고시생’ 안식처 됐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30회 신림동(대학촌과 고시촌) 편이 지난 24일 관악구 신림동 일대에서 진행됐다. 이날 오전 10시 30분 서울대학교 정문을 출발한 참석자들은 서울대 관악캠퍼스 안 예술관(서울미래유산)과 규장각을 둘러본 뒤 캠퍼스를 빠져나와 첫눈이 제법 소담스레 쌓인 관악산 둘레길을 따라 걸었다. 또 서울미래유산이지만 지난해 폐차된 콜럼버스 스넥카와 폐가 일보 직전의 조각가 전뢰진 가옥에서 서울미래유산의 지속가능한 미래에 대해 생각을 나눴다.고시촌과 녹두거리, 지난해 조성한 민주열사 박종철 거리, 임대료를 견디지 못해 자리를 옮긴 사회과학 전문서점 ‘그날이 오면’에서 투어를 마무리했다. 1981년 이후로 가장 많은 양의 첫눈이 펑펑 쏟아진 날, 지하철 서울대입구역에서 서울대 정문까지 버스가 끊기는 바람에 출발 시간이 30분 지연됐다.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가 시작된 이래 첫 ‘천재지변’이 발생했지만 참가자들은 불평 없이 미끄러운 고갯길을 걸어서 올라왔다. 그리고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첫눈을 즐겼다. 관악산은 어떤 장소의 역사를 갖고 있을까. 서울을 정치·지리학적으로 설명할 때 역사도심은 한양도성이 에워싸는 내사산(內四山·백악산-인왕산-남산-낙산) 안쪽을 가리킨다. 도성 안에 내수(청계천)가 흐르고 외수(한강)가 도성 밖을 감싸고 있다. 도성 바깥의 북쪽 삼각산(해발 836m), 서쪽 덕양산(125m), 남쪽 관악산(629m), 동쪽 용마산(348m)을 외사산(外四山)이라고 부른다. 외사산은 내사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성저십리(성 밖 십리)와 외사산 영역은 다르다. 성 밖 십리의 북쪽은 비봉~정릉동, 동쪽은 미아리~용답동, 남쪽은 한강변, 서쪽은 역촌동~모래내를 이른다. 도성 밖 십리는 서울의 통치 영역인 반면 외사산은 경기도에 속했다. 한강 이북의 성 밖 십리와 외사산의 영역은 겹치는 곳이 많지만 한강 이남은 소외됐다. 서울에 식자재를 공급하는 생산기지이자 문화적으로 서울권에 속하는 강남지역은 관악산 안쪽에 있으면서도 서울에 속하지 않았다. 서울의 풍수개념에서 삼각산은 백두산의 정기를 이어받은 조상산(祖上山)이요, 지리산에서부터 뻗어 오른 관악산은 임금이 아침마다 알현하는 조산(朝山)이었다. 서울의 남과 북을 잇는 축선(軸線)은 삼각산과 관악산 선상에 있다. 광화문네거리에서 보면 서울의 주산 백악산과 경복궁이 직선 라인에 있지 않은 걸 알 수 있다. 서울의 남북 간 축선은 삼각산~백악산~경복궁~숭례문~관악산으로 그어졌기 때문이다. 관악산 정상은 마치 큰 바위기둥을 세워 놓은 듯했다. ‘갓 모습의 산’이란 뜻의 ‘갓뫼’라고 부르고, 관악(冠岳)이라고 썼다. ‘벼슬 산’이라는 이름도 쓰였다. 조선 개국 초 무학대사는 관악산이 화산(火山)이고, 목멱산(남산)은 목산(木山)이어서 관악산 화기가 목멱산 나무를 불쏘시개 삼아 도시를 태운다고 예언했다.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신진사대부들은 관악산의 화기를 막고자 남대문(숭례문) 편액을 세로로 세워 부적을 삼았고, 남대문 앞에 남지(南池)라는 큰 연못을 파서 방화수를 채웠다. 불이 길을 따라 올라오지 못하도록 직선도로(세종대로)를 닦지 않고, 숭례문에서 지금의 남대문로를 따라 보신각까지 둘러간 뒤 운종가(종로)에서 꺾여 육조대로(광화문광장)에 이르도록 정(丁)자형 길을 닦았다. 그것도 모자라 지금의 광화문네거리에는 황토마루라는 낮은 언덕을 쌓아 관악산의 불길이 대궐에 미치지 못하게 막았다. 불을 먹고 산다는 상상 속 동물 해치 두 마리에게 광화문 앞을 지키게 했다. 모두 5겹의 방화장치를 할 정도로 관악산 화기를 두려워했다. 관악산 기슭 지금의 신림동, 봉천동과 금천구 시흥동 일대는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금주, 조선시대엔 금천이라고 불렸다. 고려 강감찬 장군의 5대조 강여청이 터를 잡았으며, 부친 강궁진은 고려 창업과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에 책봉됐다. 장군이 태어난 관악구 낙성대동 218의 14번지 생가 앞마당에 탄생기념 삼층석탑을 세울 정도의 떵떵거리는 호족이었다. 신림동(新林洞)이라는 지명은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신림리에서 비롯됐다. 서울대 캠퍼스 안 자하연이라는 연못은 의성 김씨가 모여 사는 자하동이라는 집성촌에서 따온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야영장 등 군사시설로 썼고, 1963년 서울에 편입되면서 해방촌, 청계천, 이촌동, 대방동 등지에서 쫓겨난 판자촌 주민을 수용하는 철거민 정착촌을 형성했다. 1970년대까지 도시빈민의 무허가 건물이 난립하는 기반시설 부재의 우범지대였다. ‘돼지막’이라는 절간 분위기의 하숙방 몇 채가 고시촌의 원조이다. 1969년 서울대를 ‘한강 이남 수원 이북’으로 옮기는 관악캠퍼스 건립계획이 확정됐다. 태릉, 신갈 일대, 과천, 안양 등이 후보지 물망에 오른 끝에 관악컨트리클럽이 있던 골프장 용지가 낙점된 것이다. 일부에선 “서울대 종합화는 구실이고, 데모 막으려고 한곳에 모아놓은 것”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1975년 2월 28일 동숭동에서 관악산 중턱으로 옮긴 서울대의 시위와 저항정신은 1980~1990년대 민주화운동의 열풍으로 타올랐다. ‘관악산의 화염이 나라를 태울 것’이라던 무학대사의 예언이 들어맞은 셈이다. 서울대 정문과 신림동 일대를 중심으로 동맹휴업, 수업거부, 시위, 이념서클활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시인 김지하는 ‘숨죽여 흐느끼며/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타는 목마름으로/타는 목마름으로/민주주의여 만세’라고 노래했다.학사주점 ‘녹두집’을 중심으로 학생들이 이용하는 주점, 인쇄소, 당구장, 서점, 사진관, 슈퍼 등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오늘날 유흥가로 바뀐 녹두거리다. 독재정권에 저항하던 젊은 지성의 의식화 공간이요, 은신처였으며, 화염병 제조 공장지대였다.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 끝에 숨진 박종철의 하숙집이 있던 골목이었다. 1980년대 말 고시학원이 등장하고, 사법고시를 통해 법조인을 대거 선발하던 1990년대가 되자 전국의 고시생이 신림동으로 모여들면서 신림동 고시촌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녹두거리는 ‘녹두 베가스’로 불렸다. 녹두거리의 인문사회과학서점들은 서울대 학내 시위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1980~1990년대 ‘그날이 오면’, ‘전야’, ‘열린글방’ 등은 녹두거리의 서점 트로이카로 꼽힌다. 주민의 절반 이상이 고시생이었고, 전국에서 몰려든 고시생 5만명이 북적거리던 호시절이었다. 흔히 신림동이라고 불리던 신림9동은 2013년 행정명이 바뀌면서 대학동이 됐다. 고시촌은 2008년 로스쿨 도입을 꼭짓점으로 절반 이하로 줄었다. 고시생들은 떠나기 시작했고, 고시 특수 때 신축한 고시원과 원룸의 공실률은 40%를 넘어섰다. 수많은 서점, 헌책방, 복사집, 고시식당, PC방이 문을 닫았다. 그러나 관악구는 여전히 서울에서 1인 가구 비율이 가장 높은 동네다. 10집 중 3집 이상이 1인 가구다. 서울 전역의 고시원 6곳 중 1곳이 관악구에 있다. 고시생들이 떠난 자리에 공무원시험이나 국가고시 준비생, 외국인 유학생이나 취업자, 새내기 직장인, 일용직 노동자, 기초생활대상자들이 스며들었다. 집값이 싸고, 물가가 저렴하고, ‘혼밥 혼술’ 시설이 잘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창문이 없고, 발조차 뻗을 수 없는 1평짜리 고시원은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 취약계층의 안식처로 풍속도가 변했다. 2018년 신림동 고시촌은 등껍데기가 없는 달팽이처럼 일정한 주거지가 없는 ‘민달팽이족’들이 잠시 머무는 밀실이다. 소설가 박민규는 단편 ‘갑을고시원 체류기’에서 “누구에게나 인생은 하나의 고시와 같은 것이 아닐까…인간은-누구나 밀실에서 살아간다. 그것은 고시를 패스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다”고 고시촌 시대의 아픔과 자기성찰을 얘기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 :후암동 (문화주택단지의 어제와 오늘) ●일시: 12월 1일(토) 오전 10시~낮 12시 30분 ●집결장소 : 지하철 1호선 서울역 5번 출구 연세재단 세브란스빌딩 앞 ●신청·안내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 (http://futureheritage.seoul.go.kr)
  • 서울시, 미래유산 심포지엄 개최

    서울시와 서울연구원은 30일 서울도서관 사서교육장에서 미래유산 제도의 성과와 향후 과제 모색을 위한 자치단체 심포지엄을 연다고 28일 밝혔다. 서울미래유산은 시민들이 함께 만들어 온 서울의 근현대 유산으로, 2013년부터 현재까지 모두 451개의 유·무형 유산이 선정됐다. 대표적인 서울미래유산으로는 서울역, 보신각 타종행사, 명동 예술극장 등이 있다. 서울시는 올해도 관련 연구기관을 통해 미래유산 선정 대상을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있다. 아울러 시민들이 미래유산을 즐길 수 있도록 시 공모전, 미래유산 답사 프로그램 등 시민참여 프로그램, 청계천 헌책방 축제와 같은 행사를 열기도 했다. 시는 이번 심포지엄에서 전문가, 자치단체 미래유산 담당자, 시민을 초청해 미래유산 제도에 대한 성과를 발표하고 향후 과제에 대해 의견을 나눌 예정이다. 성북문화재단은 미래유산 관련 우수사례로 장위동 봉제마을에 젊은 대학생의 새 숨결을 불어넣는 ‘봉제 양명 프로젝트’에 대해 소개한다. 또 전북 전주시는 1952년 문을 열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다방으로 꼽히는 ‘삼양다방’의 보존 사례를 발표할 예정이다. 주제발표 후 토론은 정재정 서울시립대 명예교수의 사회로 진행되며 김종헌 배재대 교수, 문승현 문화유산국민신탁 보전관리실장 등이 참여한다. 서영관 서울시 문화정책과장은 “이번 심포지엄은 문화유산 보존 방안과 상생 발전을 위한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라며 “미래유산에 대한 시민 공감대를 높일 수 있는 다양한 의견이 수렴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서가에 기대어 만추를 보내다

    서가에 기대어 만추를 보내다

    여행하기 좋은 11월은 책 읽기에도 좋은 계절이다. 한국관광공사가 책방으로 떠나는 가을여행지 6곳을 추천했다. 때로는 도시 한복판 책거리에서 때로는 자연을 벗 삼은 작은 책방에서 책의 향기에 취해보면 어떨까.1. 서울 마포의 경의선책거리 경의선숲길의 일부인 경의선책거리는 늦가을 오후를 즐기기 좋은 곳이다. 경의중앙선 홍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와우교까지 250m가량 이어진 길 옆 폐철도 용지에 문학·여행·인문·예술 등 분야별 책방 6곳이 들어서 있다. 전철역에서 나오면 경의선책거리 운영사무실 건물을 먼저 만난다. 안내지도를 챙기면서 월별 행사 일정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작가와의 만남이나 북 콘서트도 이곳에서 열린다. 책방을 하나씩 둘러보면서 소소한 이벤트에 참여해 봐도 좋다. ‘여행 산책’에서는 가고 싶은 여행지와 그 이유를 메모지에 적어 붙이면 추첨을 통해 가이드북을 선물로 준다. 책방 외에 ‘미래 산책’, ‘창작 산책’, ‘문화 산책’은 전시와 체험 공간이다. 전통 제본, 미술 심리, 목공, 향초 만들기 등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바로 옆 경의선숲길의 ‘연트럴파크’에는 소문난 맛집, 카페, 공방 등 트렌디한 명소가 즐비하다. 경의선책거리 (02)324-6200.2. 경기 파주의 출판도시 파주출판도시에서는 책과 관련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 동시에 휴식과 힐링을 즐길 수도 있다. 출판도시 중심에는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가 있다. 센터 내 높이 8m 대형 서가인 ‘지혜의숲’에는 13만여권의 책이 꽂혀 있다. 출판사나 박물관 또는 개인이 기증한 도서다. 널찍한 공간에서 독서삼매경에 빠져보기 좋다. 견학·체험 중심의 ‘활자의 숲’에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인쇄기를 구경하고 활판인쇄 체험을 할 수 있다. 센터를 나서면 광인사길과 회동길을 만난다. 1884년 한국 최초로 설립된 근대식 민간 인쇄소 광인사와 1897년에 설립된 근대 서점인 회동서관을 기념해 지어진 이름이다. 아이와 함께 왔다면 어린이책 전문 출판사를 찾아가는 것도 좋다. ‘보림책방’과 ‘보리책놀이터’가 대표적이다. 아이들이 책을 편하게 볼 수 있는 책방과 인형극장이 결합된 독특한 공간이다. 극장에서는 인형극이 정기적으로 상연된다. 출판도시안내센터 (031)955-5959.3. 강원 원주의 작은 서점 원주에는 오붓한 분위기의 작은 책방이 여럿 있다. 골목 뒤쪽에 한적하게 둥지를 튼 책방에서는 책방 주인이 소박한 책꽂이를 채운다.‘터득골북샵’은 흥업면 대안리의 산골에 터를 잡았다. 2년 전 문을 연 산골 책방은 도심을 벗어난 작은 쉼터로 자리매김했다. 시골길을 따라 굽이굽이 가야 찾을 수 있지만 책방은 외지인을 반긴다. 마음과 닿는 책을 지향하는 책방에는 베스트셀러 대신 주인이 엄선한 책이 꽂혀 있다. 판부면 매봉길의 ‘스몰굿씽’은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집 ‘대성당’에 실린 단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 이름을 따왔다. 살가운 외관의 책방 마당은 골든 리트리버 종의 반려견 ‘감자’가 지킨다. 드립 커피와 홍차를 맛볼 수 있고 1000종이 넘는 책이 서가를 채우고 있다. 매달 마지막 금요일 밤에는 인문학 등을 주제로 한 심야책방이 열린다. 원주시청 관광과 (033)737-5133.4. 충북 괴산의 숲속작은책방 훌쩍 여행을 떠나기 좋은 계절 가을, 책방으로 가을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괴산군 칠성면 미루마을에는 동화 속에 나올 것 같은 ‘숲속작은책방’이 있다. 야트막한 나무 담장 뒤에는 잔디 깔린 마당이 아담하고, 분홍색 벽 위로는 테라코타 기와가 얹혔다. 오른쪽으로는 피노키오가 조각된 커다란 오두막이, 왼쪽에는 해먹 걸린 정자가 있다. 간판만 없으면 서점인지 모를 정도다. 사방 벽에 책이 빼곡한 실내는 어느 작가의 서재 같은 분위기다. 과거 작은 사립도서관을 열었던 주인은 2011년 도서관을 정리하고 책 1만권과 함께 괴산으로 왔다. 지금은 인문·교양서와 에세이 등 주인 부부가 좋아하는 책이 많다. 편히 앉아서 책을 보다가 주인에게 추천받기도 한다. 들어오면 책 한 권을 사야 하지만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는 이는 없다. 서점에서 나온 뒤에는 괴산의 명승지인 화양구곡 등을 둘러봐도 좋다. 숲속작은책방 (043)834-7626.5. 전남 광양의 농부네텃밭도서관 이름처럼 농부네 텃밭에 자리 잡았다. 이름과 달리 도서관보다 놀이터에 가깝다. 광양시 진상면에 있는 ‘농부네텃밭도서관’에선 주변 모든 것이 놀잇감이 된다. 야트막한 언덕에서 사계절 썰매를 타고, 꽃반지를 만들고 강아지랑 놀기도 한다. 연꽃 사이로 아담한 연못을 가로지르는 줄배는 최고 인기 놀잇감이다. 감나무와 느티나무를 잇는 줄을 타고 연못을 건널 수도 있다. 마당 위로는 미니 짚라인도 지난다. 과거 지역 마을문고를 운영하던 관장이 수만권의 장서를 수천권으로 정리하고 놀이 위주 공간을 만들었다. 도서관은 입장료도, 놀이기구 이용료도 없다. 단 평일에 단체로 찾아오는 어린이집·유치원 손님에게 1인당 2000원의 입장료를 받는다. 지금도 장독대를 가득 채운 항아리에는 직접 농사지은 매실로 담근 장아찌와 된장, 고추장 등이 익어간다. 입소문을 듣고 오는 사람이 늘다 보니 요즘은 민박과 식당 운영을 겸한다. 농부네텃밭도서관 010-4606-5025.6. 대구의 물레책방 2010년 문을 연 수성구 ‘물레책방’은 어느덧 동네서점의 터줏대감이 됐다. 헌책방이지만 수험서나 일반 잡지는 찾아볼 수 없다. 책방지기의 관심사가 인문학, 사회과학 책이기 때문이다. 책방지기가 발품을 팔아 모은 책도 상당수다. 책방 이름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물레가 돌면서 순환하듯 책이 순환하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대구 지역 출판물에 관심이 있다면 물레책방은 필수 코스다. 지역 문인이 쓴 책과 지역 출판사에서 낸 책을 모아놓은 서가가 따로 있다. “기형도 시인은 대구를 ‘시인들만 우글거리는 신비한 도시’라고 표현하기도 했다”는 게 책방지기의 말이다. 물레책방은 복합문화공간이기도 하다. 유료 행사도 있지만 대다수는 헌책 한 권이면 올 수 있는 무료행사다. 행사 때 모은 책은 필요한 기관에 기증해 순환하게 한다. 수성구청 관광과 (053)666-4911.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미래유산 톡톡] 1970년 신촌 거리 품은 카페 미네르바…그시절 낭만주의 청춘들과 커피 한잔

    [미래유산 톡톡] 1970년 신촌 거리 품은 카페 미네르바…그시절 낭만주의 청춘들과 커피 한잔

    신촌 초입 홍익문고는 1957년 리어카 행상으로 시작한 헌책방을 반세기 넘게 영업을 이어 가고 있다. 신촌을 들락거렸던 세대들이 이곳에서 약속을 잡아 책을 보고, 친구와 연인을 만났듯이 지금은 그 자녀들이 이곳을 드나들고 있다. 박인철 대표가 2009년 작고한 뒤 연세대 출신으로 대기업에서 간부로 있던 아들 박세진씨가 이어받았다. 주인도 세대교체요, 손님도 세대교체인 셈이다. 2012년 도시환경정비구역으로 편입돼 헐릴 위기에 처했을 때 홍익문고를 아끼는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살아남았다. 신촌에서 가장 오래된 명물거리 골목에는 1975년에 개업한 원두커피 카페 미네르바가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커피색 나무 천장과 격자형 유리창이 손님을 맞이한다. 카운터에 놓인 공중전화처럼 신촌의 변화를 아쉬워하는 사람들에게 타임머신을 타고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온 것처럼 개업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원두의 짙은 커피 향이 카페를 가득 채우고 있다. 소설가 성석제는 “클래식 음악보다는 커피 향이 더 인상적이고, 더 인상적인 것이 커피를 끓이는 알코올 램프이고, 그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구석자리에서 눈을 감고 인상을 쓰고 있는 70년대식 낭만주의자들이다”고 묘사했다. 2000년에 가게를 인수한 현인선 사장은 “인수할 때 받은 노트에 빼곡하게 메모된 원두추출 비법 등을 전수받아 초창기의 커피 맛을 선사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도 전위적이라 생각되는 알코올 램프로 끓이는 사이펀커피(기압과 온도 차이를 이용해 커피를 추출하는 방식)의 향을 맡으며 눈을 감으면 어느덧 그 시절로 돌아가 있을 것이다.이화여대에 들어서면 정문 앞 운동장을 지하화, 강의실과 휴식 및 문화공간으로 만든 이화캠퍼스복합단지(ecc)가 맞이하지만 이대의 얼굴은 뭐니 뭐니 해도 대강당이다. 1956년 이대 설립 70주년을 기념, 동양 최대 크기로 지었다. 세종문화회관이 들어서기 전 큰 공연이 이곳에서 열렸고, 1969년 팝가수 클리프 리처드의 공연 당시 속옷 투척사건으로 화제가 됐던 곳이다. 이대가 신촌으로 옮긴 직후인 1936년 학교 교훈 ‘진선미’(眞善美)를 딴 진선미관은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을 따듯하게 맞아준 기숙사였다. 한세화(해설자·서울도시문화지도사)
  • [이광식의 천문학+] 천문학책 번역, 유감 있습니다!

    [이광식의 천문학+] 천문학책 번역, 유감 있습니다!

    요즘 천문학책들이 활발히 출간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천문지인 <월간 하늘>이 창간된 1990년대 초, 더 거슬러올라가 <코스모스>가 처음으로 한국에 선보였던 80년대만 해도 천문학책은 찾아보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러니 종로에 지하철 1호선 공사가 한창이던 70년대에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다들 입에 풀칠하기가 바빠, 하늘, 우주에 눈길을 줄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 무렵 나는 사회 초년병으로 월 2000원짜리 변두리 사글셋방에서 자취하며 출판사 편집부에서 밥벌이를 하고 있었는데, 내 머리속에는 늘 하나의 화두가 자리잡고 있었다. - 내가 살고 있는 별 반짝이는 이 우주란 동네는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걸까? - 나는 이 우주에서 어떤 존재일까? - 이런 거 좀 속시원히 알려줄 책이 없을까? 그래서 하루는 날을 잡아 청계천으로 나갔다. 그때만 해도 청계로 양쪽으로 수백 개의 헌책방들이 즐비하게 있었는데, 온종일 다리 아프도록 책방들을 뒤지며 그런 천문학책을 찾아보았지만 종내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최초로 의미있는 천문학책을 대하게 된 것은 80년대 초 학원사판 <코스모스>였다. 누런 중절지에 찍은 책이지만 올컬러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처럼 천문학책이 귀했던 시절이었다. 그때에 비해 요즘 천문학 독자들은 참 행복한 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읽을 만한 책이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외국책 번역이 많다 보니, 몇 가지 문제점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오역과 오류가 그것들이다. 이런 점들에 대해 독자로서 나 역시 불만이 없을 수 없지만, 출판 밥을 오래 먹은 처지에 이를 언급한다는 것도 조심스럽고 또 한편으론 귀찮은 일이기도 해서 모른 체 지내왔는데, 요즘 ‘그게 최선입니까?’ 하는 자문이 떠올랐다. 그렇다. 최선은 아니다. 오래 전 노자 선생께서 말씀하신 ‘세상의 시비에 얽혀들지 마라’는 충고를 잠시 외면하고, 천문학과 그 독자들을 위해 짚을 것은 짚어주는 게 독자이자 작가인 나의 할 도리라는 생각으로 몇 가지 짚어보려 한다. 근래 읽었던 책 중 <마우나케아의 어떤 밤>이란 천문학책이 있는데, 베트남 출신의 미국 천문학자 트린 주안 투안이 하와이 마우나케아에서 하룻밤 관측하면서 느낀 바를 책으로 쓴 것이다. 특별히 새로운 내용이나 재미있는 대목은 눈에 띄지 않지만, 화려한 화보, 우주 감수성이 돋보이는 에세이풍의 천문학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번역에서 눈에 밟히는 구석이 적지 않아 약간 짜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예컨대, 몇 개만 간추린다면, -27쪽/ 일식을 말하면서 태양과 달의 겉보기 크기가 같다는 대목에서 ‘이 두 별은 크기가 똑같다’는 표현. (달은 별이 아니라 위성이다) -89쪽/ 유성우를 말하면서 ‘이때 유성이 어찌나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지, 유성을 거의 1분에 하나씩 볼 수 있다.’ (시간당 떨어지는 유성의 수(ZHR)를 말하는 거라면 ‘높은 빈도’라고 해야 한다) -91쪽/ ‘이따금 소행성은 중력의 영향으로 근처에 있는 별이나 소행성과 충돌하여 (...) 태양계 안쪽으로 내던져진다.(근처의 별과 충돌할 수 있나요? '섭동을 일으켜'라고 하는 게 낫다) -92쪽/ [그림] 장기간 동안의 혜성 궤도. 장주기 혜성을 이렇게도 말할 수도 있나? -103쪽/ 큰곰자리의 별들은 북두칠성을 제외하곤 다른 별들은 육안으로 볼 수 없다.(별자리가 원래 육안으로 보이는 별로 만든 건데 정말 볼 수 없을까?) -109쪽/ ’용자리에 속한 알파라는 별...‘(알파가 별이름? 알파는 그 별자리의 수성(首星)을 말한다) -112쪽/ ’태양은 (...) 2억 2천만 년 동안 우리 은하 핵을 중심으로 공전한 것이다.‘(2억 2천만 년 동안 1회 공전하는 것이고, 46억 년 동안 약 20회 공전한 것이다) -157쪽/ 공허空許의 개념(空虛가 아닐까?) -172쪽/ 만일 별들이 무한히 연속된다면 하늘의 배경은 은하가 보여주는 것 같은 균일한 광도를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배경에는 별이 존재하지 않으니 점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이 문장 이해가 되나요?) -196쪽/ 1,001종에 달하는 (지구상의) 동물과 식물(수백만, 수천만 종은 될 것이다) (이밖에도 많은 오류들이 눈에 띄지만 여기서 줄인다) 눈썰미 있는 천문학 독자라면 이 책의 번역자가 천문학에 대한 기본 개념이 거의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비전문가가 천문학책을 번역하는 데 있는 셈인데, 보다 좋은 천문학 책을 읽을 권리가 있는 독자로서, 다음과 같은 문제해결책을 제안한다. 1. 가능하면 천문학책 번역은 검증된 전문가에게 맡기는 편이 좋다 2. 외국어를 안다고 다 번역할 수 있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출판사 편집자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3. 천문학책 편집-교정자도 천문학 기본지식은 갖추는 게 바람직하다. 박학다식이 편집자의 기본덕목이다. 4. 불가피하게 비전문자에게 번역을 의뢰하더라도 ’책임있는 감수‘를 거치는 게 안전하다. 단, 이럴 경우에도 편집부에서 스크린은 필수적이다. (위의 책도 감수자가 천문학 전공자인데, 제대로 감수한 것 같지 않다.) 번역이란 사실 인문학적 해박함, 해당분야 전문지식, 외국어 실력, 게다가 모국어 문장력까지 갖춰야 하는 고도의 작업으로 제2창작이라고까지 하는데, 너무 쉽게들 생각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하는 듯하다. 어쨌든 이상은 천문학책을 백 수십 권 읽은 우주 덕후로서, 서투른 번역이 독자의 우주에 대한 관심을 꺾지 않게끔 보다 좋은 천문학책을 위해 올리는 고언으로, 전혀 사적 감정이 개재된 것이 아님을 밝히며, 이 점 널리 해량하기 바란다. 이광식 칼럼니스트 joand999@naver.com
  • “고서 수집 38년… 세월 품은 기록의 소중함 알리고 싶어”

    “고서 수집 38년… 세월 품은 기록의 소중함 알리고 싶어”

    18세기 자료 등 책만 2만권 넘게 소장 “집 몇 채 값 들어갔지만 멈출 수 없어”9일 충북 청주시 운천동 한국공예관 2층 전시실. 청주직지코리아국제페스티벌의 하나로 마련된 ‘나는 수집왕 시민기록전’이 한창이다. 안으로 들어가자 오랜 세월을 품은 수많은 고서와 자료가 눈에 들어왔다. 1758년 임금이 신하에게 준 임명장부터 1913년판 훈몽자회, 1935년 제작된 조선중부지방지도, 1982년 영화 ‘만추’ 포스터 등 650점이다. 시간의 침식으로 빛이 바랬지만 조용히 숨을 쉬는 것 같다. 역사를 마주하게 하는 책들과 자료는 청주시청 공무원으로 퇴직한 남요섭(68)씨 소장품이다. “충북 증평군에 컨테이너 박스 두 개와 가건물 창고가 하나 있는데 책만 2만권이 넘어요. 일부를 골라 기록전을 열고 있습니다.” 그가 수집을 시작한 것은 1980년부터다. 책읽기를 좋아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헌책방을 다니다 1958년판 김소월 시집을 구매했다. 언젠가 가치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이때부터 그의 ‘과거사냥’이 시작됐다. 고서, 신문과 잡지 창간호, 지도, 담뱃갑, 영화 포스터, 오래된 사진 등 옛것이면 물불 가리지 않고 모았다. “청주시내 헌책방은 물론 서울 청계천 등 전국을 다녔습니다. 일본도 몇 차례 다녀왔죠. 희귀한 자료를 만나면 희열을 느껴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2005년 남씨는 독도가 우리 땅임을 증명하는 ‘초등지리서부도’를 공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책은 조선총독부가 1934년 만든 지리교과서용 부도다. ‘중부조선’ 편을 보면 울릉도 옆 독도가 죽도(竹島)로 표시됐다. 이 책에 수록된 일본지도에는 독도가 등장하지 않는다. 수집은 남씨 인생의 전부다. “아파트 몇 채 값은 들어갔을 겁니다. 한 달치 월급을 주고 산 책도 있어요. 책값을 마련하기 위해 자동차도 사지 않았죠. 고서 수집가들은 대부분 차가 없더라고요.” 남씨는 지금도 얼마 남지 않은 헌책방을 찾아다니며 수집을 계속하고 있다. 6·25전쟁 자료에 꽂혀 있다. “지자체 등이 전시공간을 마련해 주면 무상 기증할 생각입니다. 제 자료들이 기록의 소중함을 알리며 옛 문화를 이해하는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습니다.” 이번 전시회는 오는 21일까지 진행된다. 남씨는 전시회장을 지키며 방문객들의 추억여행을 돕고 있다. 글 사진 청주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자치광장] ‘상가 임대차법 개정’ 지금이 적기/정원오 서울 성동구청장

    [자치광장] ‘상가 임대차법 개정’ 지금이 적기/정원오 서울 성동구청장

    90개와 2만 2000개. 한국과 일본의 100년 이상 존속한 장수 가게 숫자다. 이처럼 일본이 245배 많은 배경에는 1921년 제정한 차지차가법(借地借家法)이 있다. 정당한 사유가 있을 때만 임대인이 계약 갱신을 거부할 수 있고, 임대료도 임대인과 임차인 간 합의가 없으면 재판을 통해 조정하도록 했다. 평생 마음 편하게 영업할 수 있도록 임차인을 최우선 보호하는 것이다.우리나라 소상공인과 영세 자영업자들은 치솟는 임대료, 원자재값 상승,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인건비 부담 탓에 곪을 대로 곪았다. 정부는 문제점을 풀기 위해 카드 수수료 경감, 일자리안정자금 증액 등 다양한 지원책을 내놓는다. 대표적인 게 올 1월 서울지역 환산보증금을 6억 1000만원으로 늘리고, 임대료 인상률 상한을 9%에서 5%로 내린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 시행령 개정이다. 임대료는 기반이 부족한 이들에겐 생계를 걸어야 할 요소다. 그러나 최근 임대차보호기간 종료 후 건물주가 임대료를 한꺼번에 4배나 올려 폭력사태로 번진 궁중족발 사건을 계기로 임차인 보호 필요성이 다시 제기됐다. 우리 임대차보호법은 임대차보호기간이 5년으로 임차인의 안정적인 영업기반 마련에 턱없이 부족하다. 5년이 지나 임대인이 임대료를 급격히 올리고 계약 갱신을 거부하면 임차인들은 터전을 잃을 수밖에 없다. 상권 활성화로 폭등한 임대료를 못 견뎌 기존 상인들이 쫓겨나가는 젠트리피케이션 지역은 더욱 심각하다.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는 이런 소상공인, 사회적기업, 청년 기업가, 소셜벤처 등을 지원하기 위해 전국 최초로 조성한 ‘성동안심상가’가 있다. 이곳 임대료는 주변 시세의 70~90%로, 임대기간은 기본 5년에서 최장 10년까지 가능하다. 법적 한계를 넘은 임차인 보호에 성동구가 ‘착한 건물주’로 나선 셈이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되고도 문을 닫을 뻔했던 1세대 헌책방 ‘공씨책방‘도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중앙부처와 국회의 관련법 개정 및 특별법 제정이 겉도는 사이에 영세 소상공인들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제2 궁중족발 비극을 없앨 골든타임은 지금이다. 서민경제가 무너지지 않도록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이 이번 국회 문턱을 꼭 넘길 바란다.
  • [흥미진진 견문기] 흔한 벽돌 건물을 명소로 바꾼 ‘재치 있는 행정’

    [흥미진진 견문기] 흔한 벽돌 건물을 명소로 바꾼 ‘재치 있는 행정’

    서울숲 바닥분수에 모여 성동구 지명의 유래와 함께 구 변천사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한양으로 공급되는 채소가 재배되던 너른 들판은 전쟁 후 제조업체들이 모여들면서 공장들이 지어졌고, 세월이 흘러 공장이 이전하고 덩그러니 남은 빈 공장들이 탈바꿈했다고 한다.김은선 해설사를 따라 서울숲을 빠져나오니 성동구에서 지정한 붉은 벽돌 마을이 시작됐다. 흔하게 볼 수 있는 건물인데 명소화를 통해 의미를 부여했다. 신·증축 때 공사비를 지원해 주어 붉은 벽돌 건물 군락을 조성한 것은 구의 ‘재치 있는 행정’이 아닐 수 없다. 카페, 양복점, 예술품 가게, 레스토랑이 주택 1층을 개조해 들어서 있었다. 최신 감각의 공간으로, 70~80년대 추억을 소환하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었다. 한때 전국 최대 규모의 헌책방으로 위상을 떨쳤던 서울미래유산 공씨책방이 젠트리피케이션을 겪으며 창천동에서 터를 이전했다. 단지 사람들이 도보로 다니기보다는 차를 타고 지나가는 곳이라는 것이 아쉬웠다. 사람들이 지나가다 들를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일부러 찾아와야 들를 수 있는 곳이다. 수제화거리로 이동하는데 해가 졌다. 고층 빌딩과 고가도로 사이로 해가 지는 풍경을 보며 낯선 나라의 어느 도시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수제화거리 중간에 희망플랫폼이라는 곳에 들어가 구두 장인들의 작품을 감상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신으셨던 구두도 볼 수 있었다. 인생구두를 장만하고 싶을 때 이곳에 들러 편하고 아름답고 튼튼하고 개성 있는 신발을 하나 구입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수제화거리를 걷다가 도로를 건너니 성수동 카페거리가 펼쳐졌다. 인쇄소, 정미소, 대중목욕탕, 양품점 등이 카페로 다시 태어나 있었는데 특이한 것은 이곳이 전에는 어떤 곳이었는가를 알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옛 기억을 인테리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카페거리를 지나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경찰기마대였다. 평창동계올림픽에서 사랑받았던 경찰기마대다. 건강하게 윤기나는 말 12필을 보고, 만지고, 먹이를 줄 수 있었다. 다양성이 경쟁력으로 받아들여지는 이 시대에 성동구 성수동이 언젠가는 서울의 중심으로 떠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여름밤 마실을 마쳤다. 박정아 책마루독서교육연구회 연구원
  • [미래유산 톡톡] “이런 책 어때요?” 권해주던 공씨책방의 추억

    지난 18일 성수동 밤마실에 나선 투어단이 찾은 서울미래유산은 공씨책방과 성수동 수제화거리 그리고 서울경찰기마대 등 3곳이었다. 1세대 헌책방 공씨책방은 23년간 자리를 지켰던 서대문구 창천동에서 성동구 성수동1가로 옮겨 문을 열었다. 건물주가 월 임대료를 터무니없이 올려 달라고 하면서 소송 끝에 쫓겨나다시피 했다. 성동구가 운영하는 안심상가는 원래 있던 곳에서 밀려난 상인들에게 평당 임대료를 주변보다 최대 70% 저렴하게 공간을 제공하는 상가다. 공씨책방은 1972년 창업주 공진석씨가 경희대 근처에서 문을 열었던 대학서점이 모태이다. 광화문과 신촌을 거쳐 1995년 창천동에 정착했다. 창업주 공씨는 인문사회과학 책이 들어오면 모두 읽고 나서야 손님에게 판매했고 손님에게 적절한 책을 추천해 단골이 많았다. 처조카 장화민(62)씨가 대를 이어 운영하고 있다. 성수동수제화거리는 수제화 제조를 위한 원재료 판매점, 제조공장까지 체계적으로 밀집돼 있는 한국형 근현대 산업노동의 현장이라는 점이 인정받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됐다. 1980년대 말에는 전국 수제화 생산량의 90%가량을 제조했다. 제조에 적합한 공장, 저렴한 임대료, 지하철역과의 근접성 등의 조건들이 구두 제조업체들에 적합했다. 수제화의 어제와 오늘을 볼 수 있는 ‘수제화 역사박물관’, ‘구두테마공원’, ‘구두특화거리’ 등이 조성돼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됐다. 성수역 인근의 수제화 공동판매장에서는 저렴하면서 질 좋은 명품 구두들을 직접 신어 보고 고를 수 있으며 수제화 거리장터인 ‘슈슈마켓’도 열려 다양한 문화행사 등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지난해 말 새로 선정된 서울경찰기마대는 우리나라 최초의 경찰기마대이다. 1946년 2월 종로구 수송동에서 경찰관 100명과 말 90마리를 보유하고 발족했으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서울시 경찰국 기마경찰대로 편제됐다. 1972년 성동구 현재의 부지로 청사 건립과 함께 이전해 오늘에 이른다. 2010년 이후에는 공원 및 관광특구 거리에서 홍보활동을 펼치고 있다. 말 관련 전문 경찰관 6명, 의경 6명, 일반직 공무원 2명, 말 14마리로 운영된다. 기마대에 소속된 말은 경주마 출신이 많으며 평균 나이가 10세(평균 수명 30년) 정도이다. 매주 수요일과 주말에 승마체험교실을 운영한다. 서울미래유산연구팀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우리 문화재, 우리 손으로 파괴한 것 많아 통탄스러워”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우리 문화재, 우리 손으로 파괴한 것 많아 통탄스러워”

    문화재 수난사 연구하는 정규홍씨가 말하는 ‘문화재’“우리 문화재의 과거사를 정리하다보면 ‘정말 이럴 수가 있을까’ 하는 가슴 아픈 일이 많아요. 예를 들면 일제 강점기 골동품상 이희섭(李禧燮)은 1934년부터 1941년까지 일본에서 조선대공예전람회를 7차례 엽니다. 전람회 한 번에 우리 문화재 1500점에서 3000점을 도쿄와 오사카에서 전시하고 모조리 팔아치웁니다. 이희섭은 도록을 7권 만들었지요. 도록에 실린 문화재 일부가 일본 국보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됐습니다. 7차례 전람회에 진열된 문화재가 1만 4516점입니다. 이뿐 아니라 이희섭은 서울에 ‘문명상회’라는 본점을 두고 도쿄와 오사카에 지점을 개설해 우리 문화재를 상설 전시해 팔아먹었습니다. 이렇게 일본으로 팔려나간 문화재가 최소 3만점에서 5만점에 이를 겁니다. 한 나라의 문화재가 통째로 옮겨진 것인데요, 한 개인이나 상인이 그렇게 한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습니다. 통탄할 일이지요.” ●“조씨 문중, 가전 서적 700여권 일본에 스스로 갖다바쳐” 우리 문화재 수난사를 30년째 연구해 정리하는 정규홍(62)씨는 광복절 다음날인 16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문화재의 우수성을 알아본 일본이 빼앗아 간 것도 있지만 더 충격적인 것은 우리나라 사람이 스스로 갖다바친 것이 부지기수”라고 말했다. 이완용(1858~1926)은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갑옷과 투구를 바쳤다는 기록도 나온다고 설명했다. “어느 조씨 가문에서는 일본 도쿄대박물관에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서적 700여권을 아주 싼 값에 넘겼다는 기사가 고고학 잡지에 나옵니다.” 어느 문중이냐고 묻자 정씨는 “기사에서 그것은 언급되어 있지 않고, 한자로 조나라 조(趙)가 적혀 있더라.”고 소개했다.정규홍씨는 1981년 교직 연수를 받으면서 석굴암에 대한 일본인들의 참담한 취급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 후 헌책방 등을 돌아다니면서 본격적으로 우리 문화재와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 문화재 수난일지와 우리문화재 수난사, 유랑의 문화재 등을 펴낸 수난 문화재 전문가다. 문화재 수난사를 깊이 있게 연구하기 위해 중학교 교사직도 그만뒀다. 그동안 정부나 관계당국의 지원은 전혀 없었다. 경북지역 문화재 수난사를 쓰면서 용역 의뢰받은 것이 당국의 지원 전부였다. - ‘돈 안 되는’ 우리 문화재 역경사를 정리하는 이유는.☞ 무슨 엄청난 사명감이나 그런 것이 있어 하는 건 아닙니다. 이 일이라는 게 희한하게도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희열감도 있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자존감이랄까 자존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측면도 있고···. 일종의 중독성이 있어요. 한번 빠져들면 잠자면서도 술마시면서도 그 생각이 들고, 꼬투리가 잡히면 잊으려해도 그게 안돼요. 강단에 있는 사람들은 강의 때문에 중도에 끊기는데, 난 그런 것도 없기에 이것 하나만 파고 들어갑니다. ●“문화재 수난사 정리 이유?···중독성에 희열감이죠”- 많이 힘들겠다.☞ 돈 안되는 일을 하니깐 무엇보다 집사람에게 미안하죠. 교직에 있을 때 월급받아 상당액을 이것 연구에 쏟아부었으니깐. 지방에 한번씩 현지 조사 다니면 교통비에 숙박비도 만만찮죠. 책도 사고, 도서관에서 자료 복사도 엄청 합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할때 복사비가 한장에 3원이었는데 이젠 50원으로 16배가 됐어요. 문화재 수난사에 관한 책을 냈는데, 잘 팔리는 분야가 아니라서···. 출판사에서 저자에게 책 몇 권 주고 그걸로 끝이예요. 그래도 도서관에서 살다시피하니 시간은 잘 갑니다. - 그만 하고 싶었던 적은 없었나.☞ 이번에 ‘요것만 정리하고 손 떼야지’하는 생각이 들 때도 가끔 있지요. 그런데 한 건을 정리하다 보면 다른 게 파생되어 나오고, 그기에서 또 다른 게 파생되어 나오고···. 그러다보면 숙제처럼 이만치 쌓입니다. 그러니깐 계속 손을 놓지 못하고 이러고 있습니다.- 수난 문화재가 그동안 왜 공식적으로 정리가 안 됐나.☞ 1945년 해방 직후에 박물관 관계자들이 우리 문화재에 대해 정리해 뒀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이 우리 문화재와 관련된 고적조사와 유적연구 등에 한국인의 근접을 못하게 했어요. 일본인들이 독점했거든. 해방 이후 이 분야에 관한 지식을 가진 한국 사람이 없었어요. 일본이 떠나고 나니깐 총독부박물관과 경주박물관에 남은 고적조사, 발굴보고서 등의 정리를 전혀 못한 채 박물관에 쳐박혀 있었던거지요. 아직도 다 정리가 안 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유물 목록과 실물과의 대조가 정확하게 안 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인력 부족 탓이지만 국가적으로 재원을 투입해서라도 빨리 했어야 했는데···. 참, 안타까운 일이예요. ●“일제시대 한국인 유적연구 차단···유몰 목록과 사료 대조 못 해”- 문화재 수난 분야, 처음 연구는 어떻게 했나.☞ 처음엔 마땅한 자료가 없으니 헌책방을 많이 기웃거렸죠. 1981년 이후 헌책방에 다니면서 문화재 관련 책을 사모았죠. 그리고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축쇄본을 돋보기로 보면서 자료를 모았죠. 또 일본인이 남긴 조사자료와 잡지 이런 것을 위주로 연관지어 보죠. 연관성이 있으면 메모를 해두는 거죠. 예컨대 발굴사업 보고서가 나오면 이게 당시 신문 기사에도 나옵니다. 기사와 고적조사 보고서가 약간 차이가 날 경우가 있거든요. 무덤 발굴의 경우 일본인들이 1차적으로 유물명을 기록하고 바로 박물관에 수장시키지 않고 1년간은 걔네들이 연구를 해요. 그 기간 유물이 분실될 수가 있어요. 실제로 분실이나 망실 그런 문헌이나 문서가 나와 있어요. 이를 비교해서 불법적인 것들을 찾아내는 것이지요. - 당시 일본이 얼마나 우리 문화재에 혈안이 됐나.☞ 일본의 각 대학이 잔치를 벌이듯이 우리문화재를 진열해 놓고 경쟁적으로 전람회도 가졌지요. 낙랑 유물부터 그때까지. 도쿄대 공과대와 문과대가 별도로 진열할 정도였으니. 당시 전람회 도록이나 기록들이 감춘 게 없이 매우 정확해요. 일본이 우리나라를 영구 통치할 줄 알았던 게지. 식민지 정착을 위한 하나의 사료로 삼기 위해 우리 문화재를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수집해 가져갔지. 그때 조선에는 1908년 설립된 ‘이왕가박물관’ 뿐이었거든. 1915년 12월에서야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생기면서 법으로 유물 반출이 금지돼 있었지만 자신들이 보고서 작성을 핑계로 얼마든지 일본으로 가져갔지. 이런 단체로는 조선고적연구회가 대표적이지요. 당시 일본 도굴꾼들이 대거 몰려들어 우리나라 무덤을 다 파헤쳤죠. 1908년 이전에 고려 무덤의 경우 거의 다 파괴됐다고 보면 됩니다. 조선실록을 보면 수시로 어느 무덤이 파괴되고, 어떤 무덤은 4~5회에 걸쳐 도굴됐지요. 심지어 대낮에 총칼을 갖다놓고 후손들이 보는 앞에서 도굴하고···. ●“고려 무덤 마구 도굴···日대학들, 우리 문화재 진열 경쟁도”- 해방이 되면서 문화재 수난이 줄었나.☞ 1945년 9월8일 미군이 인천에 진주합니다. 그리고 9월20일 미군 300명이 부산항에 들어오지요. 미군은 가장 먼저 일본 군인의 무장해제와 퇴출이예요. 미군이 부산에 들어오기 전에 눈치빠른 일본인들이 문화재를 잔득 가지고 일본으로 나갔던 거죠. 미군이 10월 말쯤부터 일본 민간인을 퇴출시키죠. 그때 귀국 일본인에게 돈 1000원과 작은 옷보따리 정도만 허용하고 귀중품은 모두 압수했든거죠. 그러니깐 일본인들은 어선같은 것을 빌려서 밀항을 합니다.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와 이치다 지로(市田次郞), 공주에 있던 가루베 지온(輕部慈恩) 같은 이들이 어마어마한 유물을 가져간 것이지요. 이들에 빌붙어 밀한을 도운 게 한국사림이예요. - 미군에 의한 문화재 유출도 있었나.☞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귀국을 원활히 하기 위해 ‘세화인회(世話人會)’이라는 것을 만들었죠. 일본인들의 물품 같은 것을 맡아서 일본으로 보내는 일을 맡은거지요. 당시 서울역에서 화물을 부산으로 보내면 중간인 대전역에서 미군이 화물을 압수해 물자영단(物資營團)에 넘겨버리는 것이지. 그 물자영단 창고를 미군이 관리했는데, ‘우리 문화재나 귀중품은 박물관에 넘기고 나머지는 P.X에 넘긴다’고 말하지만 미군들이 마음대로 가져가거나 처분해버린 경우도 많았죠. 해방전후 골동계에서 유명한 이영섭이 부산에서 미군들과 친하게 지내며 물자영단에 있는 그림 1000점 이상을 싼 값에 샀지. 그가 샀던 그림들이 어떻게 흩어졌는지 알 수 가 없어. 또 한때 현재 심사정(1707~1769)의 그림으로 잘못 알려진 ‘맹호도’ 출처는 흥미롭지. 1946년 한 미군이 골동품 상인 두명을 일본인 창고로 데려갔지요. 골동품 상인들에게 감정을 요청해 감정해 주니 미군이 그 댓가로 주었던 게 맹호도이지요. 나중이 국립중앙박물관이 거금을 주고 사들였지만 미군에 의해 흩어진 문화재도 부지기수예요. ●“미군정기와 6·25 전쟁서 문화재 수난도 어머어마”- 6·25 한국전쟁 때도 문화재가 많이 파괴·유출되었다.☞ 6·25 때도 어마어마하게 많이 파괴됐지. 성보문화재(불교문화재) 파괴가 가장 심했지요. 유엔군이 주민 소개령을 내리고 초토화작전을 펼쳤던거죠. 소개령이 떨어지니 사찰에선 중요 유물들을 갖고 나옵니다. 작전이 끝나고 돌아가보면 절은 없어지고 재만 남은 거예요. 그러면 그 유물들이 절로 들어가지 못하고 흩어진 것이죠. 전국을 돌아다녀보면 오래된 절인데 건물만 새로 짓고, 유물이 없는 사찰이 많아요. 또 부산으로 피난 간 문화재는 극히 일부인데, 이마저도 용두산 대화재로 많이 불타버렸지요. 미처 피난하지 못한 우리 문화재는 미군들이 찾아내 저희들끼리 나눠 가졌습니다. 예를 들면 종묘에 있는 옥새와 금보(金寶·선왕이나 선비에게 올리는 추상존호를 새긴 도장) 이런 것이 상당히 분실됐지요. 1952년 신문을 보면 미군들이 옥새와 금보를 금은방에 가져와 감정해달라고 하다가 다른 미군에 의해 검거되는 그런 기사가 몇건 나옵니다. - 그 이후엔 문화재 수난이 더 없었나.☞ 1960~70년대에는 왠 도굴이 그렇게 많았는지 모르겠어요. 그때, 일본인 밑에 따라다니면서 도굴을 배운 기술자들이 그렇게 많이 도굴을 해요. 일재 잔재지요. 심지어는 집 짓는다하고 장막을 두르고 밤에 도굴을 하기도 했어요. 이런 유물은 1970년대엔 이삿짐으로 위장해 미국에 갖다나르다 적발된 경우가 많지요. 유물을 모조품처럼 가장해서 밀수출하다 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본 밀수전문가들과 한국의 중간 브로커들하고 짜고 가져간 것도 감당을 못할 정도로 많지요.- 지금까지 수난당한 문화재는 몇 점이 되나.☞ 1981년부터 올 4월까지 조사해 파악한 국외유출 문화재는 17만 2300여점에 이릅니다. 이것은 관공서·도서관·박물관 등 공식기록을 비교 조사한 것입니다. 임진왜란 당시를 포함한 것으로 낙랑시대부터 구한말까지의 유물입니다. 제 조사는 관공서 위주여서 개인소장은 거의 포함돼 있지 않거든요. 오구라가 반출한 문화재의 경우에는 극히 일부인 1100여점만 도쿄박물관에 기증됐고, 나머지 수천점은 일본 전역에 흩어져 있어요. 이런 식으로 개인이 소장한 것을 포함하면 100만점이 해외에 떠돌고 있지 않겠느냐고 추산합니다. ●“파악된 수난 문화재 17만 2300여점···실제론 100만점 넘을듯”- 국외 유출 문화재를 환수하려면 어떻게.☞ 현재 파악된 17만 2300여점은 물론이고 앞으로 소재가 확인되는 문화재에 대해 정부와 민간단체가 합심하여 경로 추적에 나서야 할 것입니다. 개인이 하기엔 너무 벅차지요. 어떤 과정을 거쳐 발굴해 소장했느냐는 경로 파악을 위해 고적 조사자료, 잡지에 실린 논문, 신문기사 한 줄까지도 축적해 종합적으로 정리해야 합니다. 이렇게 계속 쌓아나가다 보면 불법성 드러날 것입니다. 불법성이 드러난 것은 환수 운동을 펼칠 수가 있는 것이지요. 한일협정 때의 ‘청구권 포기 규정’ 때문에 정부가 일본에 공식적으로 나서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면 환수 부분은 민간단체가 적극 나서야지요. 정씨는 “문화재는 미래 세대에 전해야 할 귀중한 유산”이며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혼이자 공동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남아 있는 문화재 가운데 우리 손으로 파괴하는 것 즉, 함부로 관리하고 방치한 것은 없는지 반성해야 한다”며 일침을 가했다. 글·사진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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