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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해 아마존 인디언 학살사건 있었다”

    “올해 아마존 인디언 학살사건 있었다”

    수백 년 전 있었던 아메리카 대륙 토착민 학살사건이 최근 발생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베네수엘라가 아마존 인디언 학살사건의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검찰, 경찰, 헌병으로 구성된 조사단을 아마존으로 급파했다고 현지 언론이 최근 보도했다. 베네수엘라 정부 관계자는 “7개 인디언 공동체 부족을 방문 확인한 결과 학살사건은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지만 아직 2개 공동체가 남아 있어 조사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야당과 비정부기구(NGO) 등에 따르면 인디언 학살사건은 7월 5일 베네수엘라-브라질 국경이 맞닿아 있는 아마조나 주에서 발생했다. 야노마미 인디언부족이 공격을 당해 최소한 80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베네수엘라 국회의 원주민위원회 관계자는 “광부들이 브라질 국가표시가 돼 있는 헬기를 타고 부족을 공격, 3명만 가까스로 생존하고 나머지는 몰살했다는 정보가 있다.”고 밝혔다. 원주민위원회는 학살사건이 발생한 곳은 아마조나 주 알토 오리노코 지역에 있는 이로타테리 인디언공동체로 야노마미 부족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고 구체적인 사건내용을 공개했다. 검찰은 특수수사반을 설치하고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있다. 사진=자료사진 손영식 해외통신원 voniss@naver.com
  • 큰아버지… 동네 친구도

    7년여 동안 10대 조카를 상습적으로 성폭행한 ‘인면수심’의 큰아버지가 경찰에 붙잡혔다. 경기 평택경찰서는 조카를 상습적으로 성폭행한 혐의(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위반)로 A(58)씨를 구속했다고 3일 밝혔다. A씨는 2005년부터 지난달 중순까지 자신의 집에서 조카 B(17·고교 자퇴)양을 매주 1∼3차례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B양은 처음 성폭행당한 2005년 당시 초등학교 3∼4학년이었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 경찰 조사 결과 B양은 2004년 이혼한 아버지, 친오빠 2명 등 자신의 식구와 큰아버지 식구가 함께 한 집에서 생활해 왔다. B양은 성폭행 피해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은 이유에 대해 ‘아버지한테 혼날 것 같았고, 가족 간에 문제가 생기는 게 싫어서 참았다.’는 취지로 진술했다고 경찰은 전했다. 이 같은 사실은 한 아동보호센터가 B양을 상담하는 과정에서 피해 사실을 전해듣고 지난달 30일 경찰에 수사를 의뢰해 알려졌다. B양은 지난 7월 아이까지 출산하고 현재 이 보호센터에서 머물며 안정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출산한 아이의 친부가 누구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경찰은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B양이 조사과정에서 친부가 누구인지에 대해선 말을 하지 않아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경찰은 B양이 현역 군인인 친오빠 2명에게도 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함에 따라 B양이 안정을 찾는 대로 정확한 피해 사실을 조사한 뒤 군 헌병대에 이첩할 계획이다. 한편 전북 남원경찰서는 3일 등교하는 여고생을 강제로 끌고 가 성폭행하려 한 혐의(미성년자 약취 미수)로 C(17)군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C군은 이날 오전 7시 50분쯤 남원시 월락동의 한 여자고등학교 인근 골목에서 이 학교 학생 D(17)양을 인적이 드문 곳으로 끌고 가려고 한 혐의를 받고 있다. C군은 D양의 입을 틀어막고 골목으로 끌어당겼으나 D양의 완강한 저항으로 범행에 실패했다. 임송학·장충식기자 jjang@seoul.co.kr
  • [씨줄날줄] 불심검문/육철수 논설위원

    구부러진 코, 쑥 들어간 턱, 높은 광대뼈, 부정한 치열…. 19세기 이탈리아의 범죄인간학 학자 롬부로소가 분류한 범죄자의 얼굴 특징이다. 롬부로소는 범죄가 생래적 생김새에 의해 저질러진다고 주장했다. 그는 범죄자의 신체적 특징으로 ▲매우 긴 팔 ▲기형 손가락 ▲나이에 비해 많은 주름살 ▲빈약한 체모 등을 꼽았다. 정신적으로는 ▲도덕성의 결여 ▲무모함 ▲지나친 게으름 ▲충동성 ▲잔혹성 ▲복수심 ▲성 충동의 조숙 등을 나열했다. 또 ▲문신 ▲과도한 몸동작 ▲유창한 화술 ▲과도한 도박·음주 등 행태적 특징을 제시했다. 최근 어느 영화채널에서 범죄수사 드라마에 출연 중인 배우들에게 이런 범죄적 신체특징을 응용한 장치로 ‘범죄형(born criminal) 얼굴 인식도’를 측정했다고 한다. 물론 흥밋거리 방송이었다. 여기에서 여성에게 인기가 높고 미남형인 J씨는 ‘범죄형 근접도 62%’가 나와 시청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반면, 개성이 강하지만 악역을 도맡다시피 하는 K씨는 1%라는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범죄자의 특징은 개연성이 높을 뿐, 딱 들어맞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연구결과도 외모와 범죄와의 상관관계는 별로 없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더구나 간단한 성형수술이면 탈바꿈할 수 있는 시대에 범죄형을 따진다는 자체가 무의미하다. 하지만 경찰이 불심검문 시 이런 범죄적 특징을 숙지하고 과잉 활용한다는 심증은 간다. 지인들 중에 대학시절 시외버스를 타거나 길거리에서 경찰과 헌병의 불심검문에 단골로 걸렸던 편이라고 불평하는 사람이 적지 않아서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흉악범죄 때문에 경찰이 불심검문을 재개한다고 밝혀 논란이 일고 있다. 국민의 인권과 기본권이 먼저냐, 방범과 시민의 안전이 먼저냐는 것인데, 판단하기가 좀 애매하다. 무차별적이고 과잉 불심검문의 전례 탓에 많은 시민이 불쾌감부터 떠올린다. 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범죄예방을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난감하다. 이럴 땐 정말 흉악범만 골라서 걸러내는 ‘노자(子)의 천망(天網)’이라도 있으면…. 불심검문의 남발은 하지하책(下之下策)이다. 그러나 최근의 범죄 행태와 사회 분위기로 보아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검문에 임하는 경찰이 공권력을 절제하고, 선량한 다수 시민에 대한 예의를 잃지 않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뭐든 도를 넘으면 문제가 생긴다.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위안부 증거 있다] “日, 국제법 위반 면하려 軍·경찰 관여 철저히 숨겼다”

    [위안부 증거 있다] “日, 국제법 위반 면하려 軍·경찰 관여 철저히 숨겼다”

    “강제동원 증거가 있느냐고 묻는 것 자체가 잘못된 질문입니다. 일본이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경찰이나 군인이 강제로 끌고 간 적은 없지 않으냐, 국가총동원령 같은 법에 따라 징집하듯 끌고 간 적은 없지 않으냐는 겁니다. 그런데 거꾸로 말하자면 그러니까 점령지가 아니라 식민지인 겁니다. 점령지라면 군대가 전면에 나서겠지만 식민지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거지요. 식민지배 체제라는 큰 틀 아래에서 누가 위안소를 설치, 운영하고 위안부를 모집, 이송했느냐를 봐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맥락을 다 버린 채 ‘강제로 끌고 간 증거가 있느냐’고 묻는 것은 진실을 찾아보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무시하겠다는 말에 불과합니다.” 한·일관계가 급속히 냉각되면서 마침내 일본군 위안부 문제까지 나왔다. 한국은 고노 담화마저 뒤집느냐며 벌집을 쑤신 분위기다. 그래서 위안부 문제 연구자인 윤명숙(50) 박사에게 물었다. 윤 박사는 2000년 일본 히토쓰바시대학에서 ‘일본의 군 위안소제도와 조선인 군위안부 형성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활동에 관여해 왔고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에서 위안부조사팀장을 맡은, 한국에서 몇 안 되는 일본군 위안부 전문가로 꼽힌다. 윤 박사는 고노 담화 자체도 그리 높게 평가하지는 않는다. 처음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는 있지만 외교적 수사에 가려 일본 정부나 군이 주동했다는 부분은 모호하게 처리됐다고 본다. 잘못은 주로 민간에서 저질렀고 정부와 관련해서는 일부 불미스러운 사례가 있었다는 식의 언급으로 뭉뚱그려 놨다는 것이다. 윤 박사는 “1991년 일본 국회에서 위안부 관련 질문이 나왔을 때 당시 일본 정부 측 인사들의 답변 역시 총동원령 같은 명백한 법적 근거에 따라 시행된 게 아니니까 민간업자가 데려간 것 아니겠느냐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일본은 공창제를 법률적으로 인정했고 조선은 식민지로서 공창제가 연장된 것이 위안소라는 논리다. 윤 박사는 1938년 2월 23일 내무성 통첩과 3월 4일 육군성 통첩에 주목한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전선이 확대되면서 위안부가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이 통첩에는 위안부를 모집하되 21세 이상 매춘 경험이 있는 자로 한정하고 매매나 유괴 같은 형태를 엄격히 단속하라는 내용이 담겼다. 그래놓고서는 위안부 모집은 헌병과 경찰이 밀접하게 연관지어 하도록 하고, 민간업자가 징집하도록 하되 경찰의 관여 사실은 되도록 숨기도록 했다. 또 근거자료를 남기지 않기 위해 진행상황 보고 같은 것을 문서가 아니라 전화로 하라는 지침(1938년 11월 8일 내무성 경보국 자료)을 내렸다. 윤 박사는 이를 두고 “1921년에 체결된 ‘부인 및 아동에 매춘을 금지하는 국제조약’ 등 성매매에 관련된 5~6개의 국제법이 있는데 일제도 이를 어기지 않기 위해 무척 노력한 증거”라면서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위안부 모집 과정이 국제법에 저촉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나중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명백한 행정자료를 남기지 않으려 했던 증거”라고 말했다. 국제법에 따르면 성매매한다는 사실을 뚜렷하게 인식하고 동의한 성인 여성만 합법적인 위안부라는 얘기다. 그렇게 못할 게 뻔한 상황에서 위안부 문제의 민감성을 그 누구보다 일본이 더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극력 은폐하려 들었다는 것이다. 이를 유추해볼 수 있는 자료도 있다. 1942년 1월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외무성과 타이완총독부 외사부장이 주고받은 문건이다. 태평양전쟁 발발로 전선이 더욱 확대되자 타이완총독부에서 위안부들의 여권 문제를 본국에 문의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일본 외무성은 “여권 발급은 바람직하지 않으니 군 증명서를 갖고 군용선을 이용하라.”고 답했다. 정식으로 여권을 발급하는 것 자체가 큰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일본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는 증거다. 조선과 관련해서 이런 문건이 나오지 않은 것은 조선총독부가 일왕 직할체제여서 위상이 높아 본국에 굳이 질의하지 않아도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데다, 국제법에 따른 문제 소지를 없애기 위해 철저하게 없앴을 것이라는 게 윤 박사의 추정이다. 윤 박사는 “일본의 경우 오히려 위안부 모집 초기에는 일본 내에서 위안부를 모으면서 현 단위로 몇명씩 할당한다는 내용이 문서로 남아 있다.”면서 “그러나 조선에 이런 자료가 없는데 그것 자체가 식민지배의 본질”이라고 강조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위안부 증거 있다] 15세 그녀 겐삐들에 끌려가고, 막아선 엄마는 짓밟혔다

    [위안부 증거 있다] 15세 그녀 겐삐들에 끌려가고, 막아선 엄마는 짓밟혔다

    “만 열다섯 살인 1939년, 추석을 지낸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엄마와 함께 목화를 따는데, 작은 군용차를 타고 빨간 완장을 찬 일본 헌병 4명이 나타났다. ‘겐삐’(헌병)들은 내가 모르는 일본말로 몰아세웠고, 난 무서워서 반항도 못하고 ‘엄마!’만 외쳐댔다. 엄마가 겐삐의 다리를 붙들고, ‘우리 애기를 데리고 가려면 날 죽여놓고 가라.’고 하자, 겐삐는 발로 엄마를 사정 없이 내리찍었다. 엄마는 밭을 구르면서 휘뜩 자빠지셨고, 그것이 엄마와의 마지막 이별이었다.” (진경팽 할머니) 비극은 도처에서 찾아왔다. 목화 따던 가을에도, 동짓달에도, 헌병들은 집과 학교를 가리지 않고 덮쳤다. 1937년 난징점령 과정에서 대대적인 민간인 학살과 강간을 자행한 일제가 국제 사회의 맹비난을 받던 시점이었다. 1932년 만주에 일본군 위안소를 설치한 일제는 전쟁이 장기전에 돌입하자 강간과 성병 등 군내 성 문제를 체계적으로 관리한다며 위안소를 확대했다. 누구에게도 위안받지 못한 위안부들의 기구한 삶은 그렇게 어긋나기 시작했다. 강제동원 방법은 다양했다. 폭력과 협박은 예사였고, “돈을 벌게 해주겠다.”며 취업사기를 치는 일도 빈번했다. 김분선 할머니는 “일본 사람이 ‘옷도 고운 것 입고 공장에 취직시켜 줄 테니 나물 뜯으며 힘들게 살지 않아도 된다.’고 하며 데려갔다.”고 증언했다. 1992년 우리 정부의 위안부 실태조사에 참여한 한 피해자는 “1938년 일본의 놋그릇 상납요구와 창씨개명에 반대한 아버지가 연행됐다. 애국봉사대에 지원하면 아버지가 풀려날 수 있다고 해서 지원했더니 곧바로 위안부에 끌려갔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위안부의 생활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문옥주 할머니는 “방에는 이불 하나와 요 하나, 베개 둘이 있었다. (내가 머물렀던) 중국 동북부 도안성은 춥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면서 “하루에 20명 내지 30명은 상대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이옥분 할머니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아침 9시부터 밤 12시까지 받았다.”고 증언했다. 종전은 위안부 생활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일본군은 위안소의 존재를 은폐하기 위해 위안부들을 집단적으로 학살하거나 유기했다. 살아 남은 이들 중에는 수치심으로 고향에 돌아오는 대신 현지에 남는 길을 택한 사람도 많았다. 가까스로 고국에 돌아온다 해도 되돌아오는 것은 주변 사람들의 멸시였다. 1992년 6월 1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가네다 기미코’(金田君子)라고 자신을 소개한 할머니 역시 그런 피해자의 한 사람이었다.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피해 보상 청구 소송에서 증인으로 나선 이 할머니는 유일한 생계수단인 파출부일을 할 수 없게 될까봐 가발에 선글라스를 쓴 채 가명으로 증언대에 서 이렇게 말했다. “자식도 낳을 수 없고 결혼도 못하고, 평생 오갈 데도 없이 떠돌아 다니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몸도 마음도 아편으로 썩었다. 일본땅을 다 줘도 내 청춘은 돌아오지 않는다. 내 청춘을 돌려달라.” 당시 위안부는 네덜란드인 100여명과 타이완인 등 최소 5만명에서 30만명에 이르렀다. 현재 생존해 있는 우리나라 위안부 피해자는 61명이다. 배경헌기자 baenim@seoul.co.kr
  • 곽경택 감독 “장편으로 찍고 싶던 내 졸업작품이니 세트 비용 꾸러 다니면서도 버텼지”

    곽경택 감독 “장편으로 찍고 싶던 내 졸업작품이니 세트 비용 꾸러 다니면서도 버텼지”

    1989년 부산 양정의 53사단 헌병대. 훗날 음악평론가와 영화감독이 된 강헌(50)과 곽경택(46)은 군대 선후임으로 이곳에서 만났다. 현역들에게 구박받는 ‘18방’(18개월 복무 방위)의 동병상련, 문화·예술에 대한 공감대로 둘은 퇴근 후 부산 시장통을 돌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당연히 의사가 돼야 하는 줄 알고 의대(고신대)에 들어갔지만, 해부학 수업을 듣고 회의를 느꼈던 곽경택은 제대 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CF 연출을 공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영화를 해 보는 게 좋겠다.”는 영화운동 조직 ‘장산곶매’ 출신 강헌의 꾐(?)에 진로를 틀었다. 23년이 흘렀다. 중견 감독이 된 곽경택이 10번째 장편 ‘미운 오리 새끼’(30일 개봉)를 내놓았다. 1987년 부산 헌병대에서 ‘빡센’ 군생활을 하는 어리바리한 ‘6방’(6개월 방위) 전낙만의 얘기다. 고문을 당해 실성한 아버지 때문에 낙만은 단기사병으로 입대한다. 이발, 사진, 화장실 청소까지 도맡는 ‘잡병’ 신세. 하지만 기원을 하는 할아버지를 둔 덕에 바둑 실력은 끝내 준다. 헌병대장의 총애를 받지만,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신임 중대장은 방위도 영창 근무를 서라고 지시한다. 현역 고참들도 낙만을 못 괴롭혀 안달이다. 말년을 무사히 버텨 어머니가 사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려는 낙만의 고군분투가 시작된다. 낙만의 모습에는 곽경택과 강헌의 ‘18방’ 경험이 촘촘하게 녹아 있다. “에피소드는 대부분 사실이다. 내가 이발병이고, 헌이 형은 바둑병이었다. 이발을 하다가 실수로 다른 병사의 귓불을 자르고, 그걸 닭 모이로 준 것도 사실이다. 나는 영창 근무를 섰고, 헌이 형은 영창에 끌려갔다. 낙만이 영창에서 만난 ‘행자’ ‘여호와’ 캐릭터 또한 모두 실재 인물이다.” 곽 감독의 작품 대부분은 거친 (부산) 사내들의 우정과 배신, 사랑 이야기다. ‘미운 오리 새끼’는 ‘똥개’(2003) 이후 처음으로 편안한 웃음을 준다. 하지만 제작 과정은 악전고투였다. 순제작비는 20억원 수준. 그나마 감독과 팀장급 스태프들은 개런티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 쓴 돈은 10억원 남짓이다. 250억원이 투입된 그의 작품 ‘태풍’(2005)과 비교하면 10분의1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한국의 모든 투자사에서 퇴짜를 맞았다.”고 했다. 서울 독산동 철거를 앞둔 군부대의 촬영 허가를 받아 놓은 터라 급해진 곽 감독은 투자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촬영부터 했다. 그는 “나중에 찍으려면 세트 비용만 10억원은 들 텐데 도리가 없었다. 며칠 찍다가 3000만~1억원씩 지인들에게 돈을 꾸러 다니기를 반복했다.”고 말했다. 이어 “돈이 워낙 조금 들어갔기 때문에 크게 안 터져도 되니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목표가 100만명 이하인 건 이번이 처음”이라며 웃었다(손익분기점은 60만명 정도다). 왜 꼭 지금이어야 했을까. “10억원짜리 세트에 시나리오까지 다 된 상황이다. ‘기적의 오디션’(곽 감독이 멘토로 출연한 SBS 신인배우 오디션)에서 만난 혈기왕성한 친구들이 있었다. (뉴욕대 졸업 작품 ‘영창이야기’를) 언젠가 장편으로 만들 거라면 지금이어야만 한다고 자신을 몰아갔다.”고 했다. 출연진 중 낙만 아버지를 연기한 오달수를 빼면 대부분 ‘기적의 오디션’ 출신이다. 주인공 낙만 역의 김준구는 물론 악질 중대장 역의 개그우먼 조혜련 동생 조지환, 행자 역의 문원주, 권하사 역의 박혜선 등은 ‘기적의 오디션’에서 찾아낸 원석이다. 장동건(‘친구’ ‘태풍’)·정우성(‘똥개’)·권상우(‘통증’) 등 충무로의 미남 배우들을 유독 아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행보다. “기자분이 처지 바꿔 생각해 봐라. 어리바리한 낙만 역을 장동건·권상우가 하겠나. 하하하. 신인 배우만 쓰는 게 부담은 됐지만, 철저하게 캐릭터에 맞춰 이미지 캐스팅을 하고 실수만 줄이면 된다고 봤다.”는 게 곽 감독의 설명이다. 이어 “신인 배우들은 고맙다고 하는데 사실 내가 고맙다. 그 친구들을 보면서 내가 창작의 영감을 얻었다. 조지환을 본 순간 살만 25㎏쯤 찌우면 내 기억 속 중대장과 딱 매치가 되겠더라.”고 했다. 전작 ‘통증’은 곽 감독이 처음 다른 사람의 시나리오로 연출한 작품이다. 서울을 배경으로 부산 사투리를 쓰지 않는 남자(권상우)와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정려원)의 사랑 등 지금껏 그의 작품들에서 크게 벗어나 더욱 주목받았다. 평단은 곽 감독의 변신에 호의적이었는데 흥행(최종 관객 70만명)은 신통치 않았다. “나도 충격받았다. ‘친구’ 이후 쉬지 않고 영화를 찍은 건 크게 까먹지 않거나 본전은 했기 때문인데 100만명을 못 넘길 줄은 몰랐다.” 최근 1200만 관객을 넘어선 ‘도둑들’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들 법했다. ‘친구’는 2001년 820만 관객(공식 통계는 서울 267만명)을 동원했다. 2000년대 들어 멀티플렉스가 본격화된 걸 감안하면 요즘 1000만을 훌쩍 웃도는 기록인 셈. ‘친구’를 넘고 싶은 욕심은 없는 걸까. “이제 포기했다. 하하하. 흥행은 영화만 잘 찍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배급 상황, 사회 분위기, 경쟁작과의 함수관계 등이 맞아떨어져야 나온다. 강형철(‘과속스캔들’ ‘써니’)이나 최동훈(‘타짜’ ‘전우치’ ‘도둑들’)은 대단한 감독이다.” 문득 궁금했다. 의사의 길을 외면한 걸 후회한 적은 없을까. 그는 “안철수 박사처럼 졸업하고 나서 하고 싶은 일을 했다면 모르겠는데, 중도에 그만둔 건 부끄럽다. 하지만 후회한 적은 없다. 아닌가. (미스터리 의학영화) ‘닥터K’ 망하고 나서 잠깐 후회한 것도 같다.”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부고]

    ●김인석(서울신문 편집부 차장)종문·종훈(경기도청 회계과 전기관리 담당)종찬(전주 한일고 교사)씨 모친상 24일 전북 정읍시 유림장례식장, 발인 26일 오전 7시 (063)534-4444 ●유병황(전 삼성캐피탈 상무)병린(농림수산식품기술기획평가원 원장)씨 모친상 박순영(평화약국 대표)씨 시모상 나찬홍(사업)씨 장모상 23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6일 오전 9시 (02)3010-2265 ●김용근(제28대 헌병감)씨 별세 유준(블루인마케팅서비스 대표이사)씨 부친상 용대(동방그룹 회장)씨 형님상 24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발인 27일 오전 8시 (02)2227-7556 ●서경배(한림재활의학과의원 원장·애드보우 대표)용배(CCC 나사렛형제들 서울지구회장·구구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웅배(공인회계사)씨 모친상 24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6일 오전 8시 30분 (02)3010-2231 ●전이수(국가유공자)씨 별세 동주(쿠퍼코리아 사장)광주(한경대 교수)씨 부친상 최창익(캐나다 거주)씨 장인상 24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6일 오전 6시 (02)3410-6903 ●백운찬(기획재정부 세제실장)씨 모친상 24일 진주 경상대병원, 발인 26일 오후 1시 (055)750-8440
  • 佛 북부 빈민 청년층 방화시위

    프랑스가 최근 북부 지역에서 발생한 빈곤층 젊은이들의 소요에 바짝 긴장하고 있다. AFP통신 등에 따르면 지난 13일(현지시간) 밤 북부 아미앵시에서 경찰의 검문 강화에 반발한 청년 100여명과 경찰 간에 물리적 충돌이 빚어졌다. 청년들은 건물과 차량에 불을 지르며 거세게 저항했고, 경찰은 헬기까지 동원해 이들을 제지하는 과정에서 경찰관 16명과 민간인 3명이 부상했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취임 100일째를 맞은 14일 아미앵 사태를 언급하며, 사회질서 확립을 위해 헌병대와 경찰 지원 예산을 늘리는 등 치안 강화에 더욱 힘쓰겠다고 공언했다. 이날 아미앵을 찾은 마뉘엘 발스 내무장관도 “경찰을 향한 공격과 공공기물을 파손하는 행위는 그 어떤 이유로도 용서받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프랑스 정부는 30명에 불과했던 아미앵 경찰의 야간 순찰조를 250명까지 대폭 늘리고 물대포도 배치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아미앵 사태를 ‘범죄문제’로 치부하는 올랑드 정부의 인식과 달리 이번 사태가 실업문제나 차별 등 뿌리 깊은 사회적 문제로 인한 것이라는 의견도 적지 않다. 아미앵 시장인 질 디마일리는 “법치가 무너진 도시 일부 지역의 누적된 사회적 갈등이 분출된 것”이라며 최근 수개월간 중앙 정부에 문제 해결을 요구한 바 있다고 전했다. 오랜 역사와 교육의 도시로 알려진 아미앵의 8월 현재 실업률은 45%에 달한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이달 초 도시 빈민층이 모여 사는 아미앵 북부 지역을 전국 15개 우범 지역의 하나로 선정한 후 검문검색을 강화해 주민들의 불만을 샀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육군사단장, 민간인과 싸우다 특수부대를 투입해

    육군사단장, 민간인과 싸우다 특수부대를 투입해

    강원도 전방부대의 장성급 지휘관이 민간인과의 말다툼 과정에서 폭력 시비를 벌인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물의를 빚고 있다. 3일 강원 화천경찰서와 해당 군부대에 따르면 지난달 29일 오전 1시쯤 화천읍 인근 군부대 복지회관 앞에서 A사단장과 B(44)씨 등 민간인들이 폭력 시비를 빚었다는 112 신고가 접수됐다. 당시 A사단장은 함께 식사를 한 지인들을 숙소인 군 복지회관으로 안내하던 중이었는데 이곳에 투숙 중인 민간인들이 술에 취해 소란을 피우자 “너무 시끄러우니 자제해 달라.”고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 등과 말다툼을 벌이다 B씨를 밀치는 등 폭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태가 험악해지자 A사단장이 군 헌병대 특수임무대원들을 투입해 논란이 일고 있다. 이에 해당 군부대 관계자는 “사단장이 민간인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고 판단한 부관이 경호 차원에서 필요성을 느껴 투입한 것으로 안다.”고 해명했다. 이와 관련, 112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사단장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다는 B씨와 민간인들을 각각 피해자와 참고인 신분으로 조사했다. 경찰 관계자는 “참고인 등의 조사를 마치는 대로 사건을 군 헌병대에 넘길 방침”이라고 말했다. 화천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육군 사단장이 민간인과 폭력시비

    육군 사단장이 민간인과 폭력시비

    강원도 전방부대의 장성급 지휘관이 민간인과의 말다툼 과정에서 폭력 시비를 벌인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물의를 빚고 있다. 3일 강원 화천경찰서와 해당 군부대에 따르면 지난달 29일 오전 1시쯤 화천읍 인근 군부대 복지회관 앞에서 A사단장과 B(44)씨 등 민간인들이 폭력 시비를 빚었다는 112 신고가 접수됐다. 당시 A사단장은 함께 식사를 한 지인들을 숙소인 군 복지회관으로 안내하던 중이었는데 이곳에 투숙 중인 민간인들이 술에 취해 소란을 피우자 “너무 시끄러우니 자제해 달라.”고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 등과 말다툼을 벌이다 B씨를 밀치는 등 폭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태가 험악해지자 A사단장이 군 헌병대 특수임무대원들을 투입해 논란이 일고 있다. 이에 해당 군부대 관계자는 “사단장이 민간인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고 판단한 부관이 경호 차원에서 필요성을 느껴 투입한 것으로 안다.”고 해명했다. 이와 관련, 112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사단장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다는 B씨와 민간인들을 각각 피해자와 참고인 신분으로 조사했다. 경찰 관계자는 “참고인 등의 조사를 마치는 대로 사건을 군 헌병대에 넘길 방침”이라고 말했다. 화천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옴부즈맨 칼럼] ‘미군의 민간인 연행’ 보도를 보고/정윤기 행정안전부 정보기반정책관

    [옴부즈맨 칼럼] ‘미군의 민간인 연행’ 보도를 보고/정윤기 행정안전부 정보기반정책관

    평택 미군기지의 제51비행단 소속 미군 헌병이 우리나라 민간인 3명에게 수갑을 채우고 상당거리를 강제연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이 비무장 민간인에게 수갑을 채워 연행했다면 아무리 고마운 친구라도 민족적 자존심에 상처를 입힐 수 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우정과 자존심 사이에서 미묘한 감정과 정서적 혼란을 일으키기 쉬운 민감한 사안이다. 언론매체들이 일제히 며칠간에 걸쳐 이 사건을 보도했는데, 당사자들의 엇갈린 진술 탓에 어떤 매체에서는 앞선 기사와 다른 내용의 기사를 뒤이어 내보낸 것이 눈에 띄기도 하였다. 서울신문도 여러 번에 나누어 기사를 내보냈는데, 기사에 사용된 어휘와 논조에서 객관적이고 일관성 있게 차분한 입장을 유지했다는 평가를 하고 싶다. 그럼에도 행정분야의 전문지를 지향하는 서울신문의 위상을 고려해 볼 때 몇 가지 아쉬운 점이 보인다. 필자뿐만 아니라 많은 국민이 이 사건을 보면서 2002년도의 효순양과 미선양 사건을 떠올렸던 것 같다. 효순양과 미선양 사건은 일반인의 정서와 법률가들이 지켜야 하는 법 원칙 사이의 괴리를 비롯해서 미국법과 한국법의 차이, 한·미 주둔군지위협정에 따른 특수성 등 많은 쟁점을 일으켰지만 제대로 된 분석과 논의가 없었던 것 같다. 이번 사건에도 같은 쟁점들이 눈에 띄는데, 과거 선례 때문에 이번에는 수준 높은 분석을 통한 냉철한 접근이 필요하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12일 자 8면에 “한·미 주둔군 지위협정(SOFA)에 따라 한국인이 주한 미군의 안전을 위협했으면 미군의 수갑 사용이 가능해서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협정의 정확한 조항과 내용을 인용했어야 했다고 본다. 그러지 않으면 해당 기사가 이른바 ‘카더라’ 하는 전언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둘째, 9일 자 8면에는 “미군 헌병 3명은…이 같은 경우에 수갑을 채우라는 매뉴얼에 따라 정당한 공무집행을 했다고 주장했다.”라고 보도했는데, 매뉴얼에 정말로 그렇게 명시되어 있는지, 매뉴얼이 한·미 주둔군지위협정에 근거하여 작성된 것인지 여부에 접근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이는 해당 진술의 신빙성 외에도 미군 주둔지역의 영외순찰이 양국 간에 어떻게 결정되는지 그 체계를 알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셋째, 현장에 출동한 경찰들이 신병인도를 요구했음에도 미군 헌병들이 150m가량 우리 국민을 연행했다는 부분이다. 서울신문은 다른 언론매체에 비해 이 부분을 소홀히 다룬 감이 있다. 목격자를 통한 당시 상황이 보다 입체감 있게 제공되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다만, 조사가 현재 진행 중임에도 일부 매체들이 경찰이 소극적이었다는 논란을 기사화한 것에 비해 서울신문은 “당시 출동한 경찰에 대해서도 조사하고 있다.”라고 객관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점수를 주고 싶은 부분이다. 넷째, 많은 독자가 한국 경찰과 미군의 합동순찰 체계는 없는지, 그간 미군의 영외순찰은 관행적으로 어떻게 해왔는지에 대해서 궁금증을 가졌을 것 같은데, 서울신문은 이런 궁금증을 해소해 주지 못한 것 같다. 이러한 점들을 알고 기사를 읽으면 보다 명쾌하게 사건의 배경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끝으로, 수갑의 사용에 대해서는 한국과 미국 사이에 상당히 큰 정서적·관행적 괴리가 있는 것 같고, 이러한 차이도 이번 사건의 배경 중 하나가 되지 않았나 생각되는데, 수갑의 사용에 관한 양국 간 규정과 관행의 차이에도 관심을 뒀더라면 싶다. 다행히 주한미군사령관과 미7공군사령관이 공식사과했고 양국의 정부당국이 재발방지를 위한 보완책을 모색하고 있어 이 문제는 발전적인 방향으로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때에 서울신문이 행정뉴스의 권위지로서 수준 높고 심도 있는 정보를 제공한다면 우정도 지키고 자존심도 살리는 쪽으로 문제해결의 방향이 제시되지 않을까 기대된다.
  • ‘수갑 미군’ 혐의입증 난항…평택부대 주변 순찰 강화

    평택 미군기지 소속 미 헌병대가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수갑을 채운 사건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가운데 경찰이 미군 헌병대의 혐의를 입증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평택경찰서는 11일 폐쇄회로(CC)TV와 시민들이 제보한 동영상을 중심으로 미 헌병대 주장과 피해자인 민간인들의 진술을 비교했지만 미 헌병들에게 ‘체포죄’를 적용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라고 밝혔다. 미 헌병대 측이 시민 30여명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 신변에 위협을 느꼈다고 계속 주장할 경우 실제 처벌까지는 어렵다는 것이다. 한·미 주둔군 지위협정(SOFA)에 따라 한국인이 주한 미군의 안전을 위협했을 경우 미군의 수갑 사용이 가능해서다. 이에 따라 경찰은 미 헌병대에 대한 추가 조사를 실시할 예정이나 소환 일정조차 잡지 못하고 있어 수사가 길어질 전망이다. 한편 이번 사건을 계기로 평택시와 주한 미군은 한·미 공조 방범협력 대책회의를 열어 범죄예방 합동 순찰을 강화키로 하고, 평택 신장동 K-55(오산에어베이스) 미군기지 주변 ‘로데오거리’에 대한 한·미 합동 순찰을 위한 합동순찰센터를 운용하기로 했다. 장충식기자 jjang@seoul.co.kr
  • ‘미군 민간인 수갑’ 미온적 대응 논란 경찰 4명 추가조사

    ‘미군 민간인 수갑’ 미온적 대응 논란 경찰 4명 추가조사

    평택 미군기지 소속 미 헌병대가 우리 국민에게 수갑을 채운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은 사실 규명을 위해 민간인과 미 헌병들을 추가 조사하기로 했다. 경찰은 현장 대응이 미온적이었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당시 출동 경찰관 4명에 대해서도 조사하고 있다. 평택경찰서는 10일 피해자 양모(35)씨 등 민간인 3명을 다시 불러 당시 상황이 담긴 폐쇄회로(CC)TV 녹화 화면과 비교하며 사건 경위 등을 조사했다. 경찰은 이후 미 헌병들도 재소환, 엇갈린 양측 진술의 사실관계를 확인할 계획이다. 경찰은 이와 함께 당시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 4명을 상대로 한 조사도 하고 있다. 앞서 경찰청은 당시 시민 30여명이 현장을 둘러싸 분위기가 험악해진 상황이어서 현장 경찰관의 요청에 따라 미군 헌병 7명이 시민 3명에게 수갑을 채워 150m가량 부대 방향으로 끌고 간 뒤 우리 경찰에 인계했다고 밝힌 바 있다. 장충식기자 jjang@seoul.co.kr
  • ‘민간인 수갑’ 미군 체포죄 적용 검토

    평택 미군기지 소속 미 헌병대가 우리 국민에게 수갑을 채운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이 폐쇄회로(CC)TV 분석과 함께 시민들이 제보한 동영상 3~4건도 분석하기로 했다. 한·미 양국은 한국 민간인 수갑 사건에 대한 조사가 끝나는 대로 주한미군 주둔지위협정(SOFA) 합동위원회 산하 법집행 분과위원회에서 미군의 영외순찰 문제 개선 방안 등을 협의할 예정이다. 평택경찰서는 9일 피해자 양모(35)씨의 악기매장 등 당시 상황이 담긴 CCTV 분석과 더불어 양씨에게 수갑을 강제로 채운 로드릭 상병(28) 등 미 헌병 3명을 지난 7일 조사한 데 이어 8일 나머지 4명에 대해서도 추가 조사를 했다고 밝혔다. 로드릭 상병 등은 “먼저 폭행을 당했다. 정당방위 차원에서 한 행동”이었다고 진술했으며, 추가 조사를 받은 4명은 “무전을 듣고 지원을 나온 것이라 명확한 상황은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시민들이 경찰에 제공한 동영상에는 양씨가 밀치는 등 거칠게 저항했다는 미 헌병의 주장과 달리 비교적 순순히 미 헌병의 요구에 따르는 양씨 모습과 양씨가 가게 문을 내리자마자 뒤에서 수갑을 채우는 등 미 헌병의 과도한 행동 장면이 담겨 있다. 경찰은 이 영상뿐만 아니라 당시 현장 상황이 담긴 다른 CCTV 화면도 확보해 사실 관계를 파악 중이다. 경찰은 미 헌병대의 불법 행위가 밝혀질 경우 ‘사람을 체포 또는 감금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형법 276조 1항의 적용을 검토 중이다. 김기용 경찰청장은 이와 관련, “수사를 통해 범죄 사실을 확인하고, 위법한 부분에 대해 처벌할 것”이라며 “미군 관련 사안이라고 해서 정치적인 판단을 하는 것은 아니고 법 해석을 통해 처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외교통상부 당국자는 “검경 수사 결과에 따라 무엇이 문제인지 확인한 뒤 현행 SOFA 규정이 어떤 식으로 보완돼야 할지 미측과 협의할 것”이라며 “미 헌병이 현행 규정을 지켰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텐데 현재로서는 월권으로 보이며, 그렇게 결론이 날 경우 그동안 관행상 지켜지지 않는 부분에 대해 세칙을 만드는 등 규정 보완 작업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평택 미군기지 주변 상인들은 이번 사건으로 영업에 차질이 생기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미군 부대장들이 일방적으로 취할 수 있는 업소 출입금지 ‘오프 리밋’(OFF LIMIT)이 강화돼 외국인관광업소 상인들의 생존권이 위협받을 수 있어서다. 로데오거리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정모(45)씨는 “업소출입금지의 경우 대부분 술집 위주로 이뤄지기는 하지만 명확한 범위가 없어 일반 상점들까지도 불안해한다.”며 “이번 사건으로 인해 미군 출입이 많은 상점에 피해가 가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김미경·장충식기자 jjang@seoul.co.kr
  • 민간인 수갑 채운 미군 “정당한 공무집행” 논란

    민간인 수갑 채운 미군 “정당한 공무집행” 논란

    지난 5일 평택 미군기지 주변에서 주차 문제로 시비를 벌인 한국 민간인에게 수갑을 채워 물의를 빚은 미 헌병 3명이 “정당한 공무집행이었다.”고 주장해 논란이 일고 있다. 8일 평택경찰서에 따르면 이 사건에 연루된 평택 K-55 미군부대 헌병 7명 가운데 3명이 지난 7일 오후 8시쯤 미 헌병대 부대장, 통역(한국인) 등 2명과 함께 경찰서로 자진 출석했다. 이들은 경찰에서 피해를 당했다는 양모(35)씨가 자신들의 이동 주차 요구를 충실히 따르지 않았고 당시 현장에서 시민들도 삿대질을 하고 밀치는 등 위협을 느껴 이 같은 경우에 수갑을 채우라는 매뉴얼에 따라 정당한 공무집행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양씨 등 한국인 3명은 미 헌병의 이동 주차 요구에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따랐고 미 헌병의 불법 체포에 항의하자 강압적으로 수갑을 채웠다고 진술해 양측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이에 따라 경찰은 나머지 4명의 미 헌병과 목격자 등을 상대로 정확한 사건 경위를 더 조사하기로 했다. 경찰은 미 헌병이 불법 행위를 한 것이 드러나면 사법 처리할 방침이다. 이와 관련, 해당 미군부대 측은 재발 방지를 위해 앞으로 부대 앞 ‘로데오거리’에 대한 한국 경찰과의 합동 순찰, 평택시의 상시 주정차 단속을 경찰과 시에 제안해 협의하고 있다.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의 ‘불법 체포’ 규정(22조10항)에 따르면 미군 경찰은 미군시설 및 구역 밖에서 반드시 한국 당국과의 약정에 따라 조치하고 행사해야 한다. 또 미군 경찰권 행사는 미군 구성원 간의 규율과 질서 유지 및 그들의 안전 보장을 위해 필요한 범위 내에 국한된다고 돼 있다. 이 때문에 미 헌병들이 영외순찰을 하다 한국 민간인과 문제가 발생한 이번 사건의 경우 한국 경찰을 불러 조치를 취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편 제임스 서먼 주한 미군 사령관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충격을 입은 분들과 지역사회에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서먼 사령관은 보도자료를 통해 “이번 사건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지시했으며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사건 연루자들의 임무는 정지될 것”이라고 말하고 “미군 자체 조사를 하는 동안에도 현재 진행 중인 대한민국 경찰 조사에 지속적으로 협력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미7공군사령관 장 마크 주아스 중장은 이날 오후 K-55 부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물의를 빚은 데 대해 공식 사과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발표했다. 주아스 중장은 이번 사건의 핵심인 주한 미군의 영외순찰 권한 등에 대해 “미군과 그 가족의 안전을 위해서는 모든 지역에서의 순찰이 가능하지만 영외순찰 과정 전반에 걸쳐 SOFA 규정에 어긋나는 부분은 없는지 등을 재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앞서 정부는 지난 7일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합동위원회 위원장 간 긴급 협의회를 열어 미국 측에 항의의 뜻을 전달했다. 정부 당국자는 “미군 측은 진상 규명 후 필요시 관련자 처벌도 검토하겠다고 밝혔으며 한·미 양측은 SOFA 산하 분과위 등 적절한 협의 채널을 통해 향후 유사한 사건이 재발되지 않도록 방지책을 마련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김병철·김미경기자 kbchul@seoul.co.kr
  • 美 헌병, 민간인 3명에 강제로 수갑 채워

    영외 순찰 중이던 미 헌병대원들이 주차 문제로 시비가 붙은 시민과 이를 제지하는 행인 등 민간인 3명에게 강제로 수갑을 채우고, 부대까지 끌고 가 논란이 되고 있다. 이들은 “수갑을 풀어 주라.”는 경찰의 요구도 무시했다. 6일 경기 평택경찰서에 따르면 평택 신장동 미군기지 정문 주변 로데오거리에서 악기상점을 운영하는 양모(35)씨는 지난 5일 오후 8시 순찰하던 평택 미군기지(K55) 제51비행단 소속 헌병대원 3명으로부터 가게 앞에 주차된 승합차량을 이동해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당시 양씨는 짐을 옮기기 위해 가게 앞에 잠시 차량을 주차해 놓은 상태로, 미군 헌병들의 요구에 “하던 일을 끝내고 옮기겠다.”고 영어로 말했고, 헌병들이 더욱 강하게 요구하자 이동 주차를 했다. 양씨는 “미 헌병들이 가게 안까지 따라 들어와 강제로 수갑을 채우려 했다.”고 말했다. 양씨가 저항하자 주변에 있던 미군 헌병 4명이 합세해 모두 7명의 헌병이 양씨를 제압했다. 양씨는 “엎드려 두 팔이 뒤로 꺾인 상태에서 수갑이 채워졌으며, 이 모습을 보고 항의하는 행인 신모(42)씨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수갑을 채웠다.”고 밝혔다. 특히 미 헌병들은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송탄파출소 소속 경찰관 4명이 현장에 도착해 수갑을 풀 것을 요구했으나 이를 무시하고 양씨와 신씨를 150여m 떨어진 부대 정문까지 끌고 갔으며, 이에 항의하는 양씨의 동생(33)에게까지 수갑을 채웠다. 양씨 등은 미 헌병대원들과 40여분간 실랑이를 벌였고, 미 헌병들은 결국 양씨 등 3명의 수갑을 풀어 주고 부대로 복귀했다. 경찰은 이날 미 헌병대원들의 행동이 영외 순찰 목적과 권리에 부합하는지 등을 조사하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경찰 출석을 요구했으나 미 헌병들은 모두 응하지 않았다. 한편 해당 부대 측은 자체 조사와 법률 검토 등 대책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장충식기자 jjang@seoul.co.kr
  • “이승만 집권 때도 독립운동가 수감했다”

    “이승만 집권 때도 독립운동가 수감했다”

    서울 통일로 ‘서대문형무소’는 1905년 을사늑약 때일제가 만든 경성감옥이었고 1912년 서대문형무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이 형무소의 신세를 졌다. 해방 이후 독립운동가들이 다 떠난 서대문형무소에는 누가 수감됐을까? 왜 곧바로 일제의 악행을 고발하는 역사박물관으로 직행하지 못했을까? 김삼웅(69) 전 독립기념관장은 4일 오후 2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독립관 무궁화홀에서 열리는 ‘이승만 집권기의 서대문형무소’란 학술대회에서 ‘1948~1959년 서대문형무소’란 제1주제 논문을 통해 서대문형무소 수감자들의 변천사를 밝혔다. 김 전 관장은 “1948~1959년 12년은 이승만의 1인 통치와 자유당의 전횡기였다.”면서 “1949년 1월 반민특위의 검거활동으로 서대문형무소가 악질적 친일파인 소설가 이광수, 일제경찰관 노덕술 등 친일파로 가득했지만, 겨우 1개월 만인 그해 2월 15일 이승만이 반민특위 활동을 비난하고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등으로 서대문형무소가 다시 독립운동가들로 가득 차게 됐다.”고 탄식했다. 소설가 이광수는 수감 20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고, 노덕술은 이승만 대통령이 “경찰의 기술자이며 경험자이므로 그를 제거하고는 국가의 치안을 유지하기 어렵다.”면서 석방을 요청하던 중 그해 6월 6일 반민특위가 와해되자 풀려났다. 1949년 6월 ‘국회프락치사건’이 발생했다. 신의주 등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김약수 의원과 반민법 제정에 남다른 열정을 보인 노일환·서용길 의원 등 13명의 의원이 체포됐다. 김 전 관장은 “헌병사령부 산하에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이들을 심하게 고문해 ‘자백’을 받아 냈다.”면서 “당시 헌병대에는 친일경찰 김정채, 윤우경, 최운하, 김호익 등이 핵심이었다.”고 말했다. 노일환은 재판 과정에서 “남로당 가입 사실과 남로당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는 자백이 고문을 못 이긴 허위 자백”이었다고 진술했다. 즉 반민특위 활동이 와해된 후 서대문형무소에는 일제강점기와 비슷하게 독립운동가들이 가득해졌다는 것이다. 1947~1954년 제주 4·3사건으로 2530여명이 일반재판 및 군정재판, 군법회의 등을 통해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 중 16~30세 여자 수감자 70여명이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됐다. 제주도에는 형무소가 없어서 전국 각지 형무소에 분산·수감된 탓이다. 김 전 관장은 “일제강점기에 총독부가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수감하기 위해 특별히 여사(女舍)를 지어서 관리했기 때문”이라면서 “6·25전쟁으로 이 중 일부는 인민군에 편입되거나 여맹에 들어갔고, 또 일부는 잡혀서 총살됐다.”고 설명했다. 6·25전쟁 직후부터 3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는 북한군이 사용했다. 반공·친미 인사라고 추정되는 사람들을 투옥하고, 후퇴할 때는 대량 학살하거나, 북으로 끌고 갔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이승만 정부는 서울시민 중 북한군에게 협조한 부역자들을 색출해 서대문형무소에 가두기 시작했다. 당시 서울시민은 대략 145만명이었고, 이 중 40만명만이 피란을 떠났다. 김 전 관장은 “서울시민은 안심하라는 라디오방송을 거듭하다가 한강다리를 폭파시켜 피난도 못하게 해 놓고는 잔류한 서울시민을 부역자로 모는 것은, 임진왜란 때 한성을 떠난 선조나 병자호란 때 인질로 잡혀 갔던 처자를 ‘환향녀’라며 비난했던 인조와 다를 바가 없다.”고 비판했다. 실제 사형에 처해진 사람은 다소 줄었지만, 당시 부역자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자는 867명에 이르렀다. ‘종로의 협객’ 김두한은 1947년 4월을 시작으로 1954년 5월, 1965년, 1966년 ‘국회오물투척사건’ 등으로 4차례 수감됐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80년대 씨름장사 아들 병역비리 수사

    1980년대 씨름판을 호령하며 한라장사까지 올랐던 L(51)씨가 아들 병역 비리 의혹과 관련돼 군 당국의 수사 대상에 오른 것으로 확인됐다. 1일 수사당국에 따르면 제2군작전사령부 헌병대와 군 검찰은 L씨가 아들의 보직 이동 청탁과 함께 군 간부 H씨에게 돈을 건넨 정황을 포착, 지난달 27일 L씨 본인 및 가족 등 8~9명의 계좌추적 영장을 발부받아 자금흐름을 추적하고 있다. L씨는 지인 P씨를 통해 H씨에게 “보병인 아들 보직을 운전병으로 바꿔 달라.”는 청탁과 함께 금품을 제공했고, 그 뒤 L씨 아들은 운전병으로 보직이 바뀐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당국 관계자는 “돈의 출처와 전달 규모 등을 확인하기 위해 관계자들의 계좌를 살펴보고 있다.”고 말했다. L씨는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아들이 군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나는 아직 조사를 받은 적이 없다.”면서 “아들의 보직 변경을 청탁하거나 돈을 준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그는 또 “아들은 보병으로 있다가 현재 운전병으로 근무하고 있지만 당초 아들은 운전병으로 바뀌는 것을 꺼려했다.”면서 “(로비를) 하려면 군 면제를 위해 하지 군에 간 뒤 왜 그런 청탁을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L씨는 이만기, 이봉걸씨 등과 함께 1980년대 민속씨름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현재 모 지방자치단체 씨름단을 이끌고 있다. 김승훈·홍인기기자 hunnam@seoul.co.kr
  • 씨름장사 출신 L씨, 병역비리 연루충격

    씨름장사 출신 L씨, 병역비리 연루충격

    1980년대 씨름판을 호령하며 한라장사까지 올랐던 L(51)씨가 아들 병역 비리 의혹과 관련돼 군 당국의 수사 대상에 오른 것으로 확인됐다. 1일 수사당국에 따르면 제2군작전사령부 헌병대와 군 검찰은 L씨가 아들의 보직 이동 청탁과 함께 군 간부 H씨에게 돈을 건넨 정황을 포착, 지난달 27일 L씨 본인 및 가족 등 8~9명의 계좌추적 영장을 발부받아 자금흐름을 추적하고 있다. L씨는 지인 P씨를 통해 H씨에게 “보병인 아들 보직을 운전병으로 바꿔 달라.”는 청탁과 함께 금품을 제공했고, 그 뒤 L씨 아들은 운전병으로 보직이 바뀐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당국 관계자는 “돈의 출처와 전달 규모 등을 확인하기 위해 관계자들의 계좌를 살펴보고 있다.”고 말했다. L씨는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아들이 군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나는 아직 조사를 받은 적이 없다.”면서 “아들의 보직 변경을 청탁하거나 돈을 준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그는 또 “아들은 보병으로 있다가 현재 운전병으로 근무하고 있지만 당초 아들은 운전병으로 바뀌는 것을 꺼려했다.”면서 “(로비를) 하려면 군 면제를 위해 하지 군에 간 뒤 왜 그런 청탁을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L씨는 이만기, 이봉걸씨 등과 함께 1980년대 민속씨름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현재 모 지방자치단체 씨름단을 이끌고 있다. 김승훈·홍인기기자 hunnam@seoul.co.kr
  • 女軍 신고합니다! 해병대 첫 여성 소령 3人

    女軍 신고합니다! 해병대 첫 여성 소령 3人

    해병대 창설 63년 만에 처음으로 영관급 여성 장교가 탄생했다. 해병대는 김윤전(36)·한경아(34)·조윤정(35) 대위가 1일 각각 소령으로 진급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2001년 7월 사관후보생 96기생으로 해병대에 첫발을 내디딘 최초의 여군 장교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해병대사령부 군수참모처에서 근무 중인 김 소령과 정보참모처의 한 소령은 임관 이후 해병대 장교교육대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하며 후배들을 양성하기도 했다. 특히 김 소령은 2006년 해병대 여군 최초로 전투부대 중대장직을 맡기도 했다. 해병대 1사단 헌병대 수사과에서 근무하던 조 소령은 이번 진급으로 여단급 부대의 헌병대장직을 맡아 해병대 최초의 여성 헌병대장이라는 또 하나의 경력이 추가된다. 김 소령은 “영관급은 위관장교와 달리 합당한 전문지식을 갖춰야 하기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면서도 “육아와 일을 병행하기 어려워 아이들에게 좀 더 신경을 못 써 미안하다.”고 밝혔다. 한 소령은 “남자 군인보다 더 잘해야 한다는 기대를 충족시켜야 하기에 부담도 느낀다.”며 “군인으로서 초심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장교 90여명과 부사관 120여명의 여군이 해병대에서 복무하고 있다. 하종훈기자 art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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