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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북 영동 모부대 탄약창 앞에서 하사 숨진 채 발견

    28일 오전 6시 8분쯤 충북 영동군 육군 모 부대 간이 탄약창 앞에서 A(26) 하사가 숨진 채 발견됐다. 발견 당시 A 하사는 머리에 총상을 입고 있었고, 가슴에 총을 안은 채 피를 많이 흘린 상태였다.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A 하사는 전날 밤부터 이날 오전 6시까지 이 부대 중대 당직사관으로 근무한 것으로 전해졌다. A 하사는 2015년 임관했다. 군 헌병대는 부대 병사 등을 상대로 정확한 사고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군 관계자는 “가족과 협의해 부검 여부 등을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영동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이화여대, 유관순 열사 이화학당 시절 사진 2점 최초 공개

    이화여대, 유관순 열사 이화학당 시절 사진 2점 최초 공개

    유관순 열사 이화학당 재학 시절 친구들과 찍힌 모습“앨범 내력, 사진 촬영 시기, 인물 생김새로 볼 때 유관순 확실”24일까지 대중에 사진 공개 3·1 운동 당시 일제에 맞서 만세 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1902~1920)의 이화학당 시절 사진 2점이 최초로 공개됐다. 이때까지 알려진 유 열사의 모습 중 가장 앳된 모습이다. 이화여대는 21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이화역사관에서 이때까지 발견되지 않은 유관순 열사의 사진 2점을 선보였다. 이번에 공개된 사진은 유관순 열사가 이화학당에 재학하던 때로 추정된다. 첫 번째 사진은 유관순 열사가 이화학당 보통과에 입학한 직후(1915~1916년), 두 번째 사진은 고등과에 재학하던 시절(1918)로 추정된다. 당시 유 열사의 나이는 15~16세로 알려졌다. 사진 검토 작업에 참여한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사학과)는 “두 사진 모두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사진 속 모습으로 연대를 추측할 수 있다”면서 “앨범의 내력과 사진 촬영 시기, 인물 생김새로 봤을 때 유관순이 확실하다”고 말했다.기존에 공개된 유 열사의 사진은 1920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찍힌 옥중 사진과 1918년 보통과 졸업 당시 찍은 단체사진 등 3장이 전부다. 정혜중 이화역사관장은 “이번에 발견한 사진들은 현재까지 알려진 유 열사 사진 중 가장 앳된 모습으로 추측된다”고 설명했다. 또 정 관장은 “이화학당은 창립기념일 등 특별한 날에 흰 옷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면서 “이런 점을 미루어볼 때 촬영일은 5월 31일 이화학당 창립기념일이나 다른 특별한 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번 사진은 이화여대가 창립 133주년 및 3·1 운동 100주년을 기념한 특별전시 ‘이화의 독립운동가들’을 준비하며 이화역사관에서 소장한 사진첩(‘Ewha in the past’)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발견했다. 총 89권에 달하는 이 사진첩에는 1886년 이화학당 창설 시기부터 1960년대까지의 학교 관련 사진이 정리돼 있다. 1권부터 8권까지는 이화학당 창설 시기부터 1945년 해방 이전 이화여자전문학교 시기의 사진이 있는데, 이 중 유관순 열사의 사진은 1번과 4번 사진첩에서 발견됐다. 유관순 열사는 1915~1916년경 이화학당에 편입해 1918년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했고, 1918년 4월 고등과 1학년에 진학해 1919년까지 학교를 다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 헌병대에게 체포됐고, 1920년 9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영양실조와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했다. 이화역사관은 이번에 발견된 사진 원본을 오늘부터 이달 24일까지 4일간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
  • 독립투쟁 다룬 첫 영화 ‘자유만세’… 월북배우 편집된 ‘반 토막 필름‘

    독립투쟁 다룬 첫 영화 ‘자유만세’… 월북배우 편집된 ‘반 토막 필름‘

    해방을 맞이한 1945년 8월 15일부터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기까지 5년간은 한국영화사에서 ‘해방기’로 부르는 시기다. 해방기 영화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일제 말기 국책영화사에 소속되어 군국주의 선전영화를 만들던 영화인들과 그 영화사에 소속되지 않고 영화 작업을 쉬었던 영화인들이 다시 조우해 함께 영화를 만든 점이다. ‘조선영화가 계속 만들어질 수 있을까’라는 생존의 문제 앞에 친일부역 문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해방기 문화예술계의 상위 조직들이 좌우 진영의 논리로 이합집산을 거듭할 때 이에 따른 영화계 조직의 구성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좌익 진영의 주도로 우익까지 아우른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소속으로 1945년 9월 24일 조선영화건설본부가 설립되었을 때, 그 구성원은 일제 말기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에 참가했던 영화인들이 대부분이었다. 11월 5일에는 좌익 강경파의 주도로 조선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이 설립되었는데, 최고 지도부를 제외하면 역시 이데올로기와 관계없이 참가한 기술 파트 영화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한 달여 만인 12월 6일 두 조직은 조선영화동맹으로 통합되는데 이 때 지도부 면면만 보더라도 친일부역과 이념 성향을 초월한 인선임을 알 수 있다. 영화 작업의 특성상 인적 관계나 기술적 전문성을 더 중요하게 고려한 결과였다. 어지러운 해방 정국 그리고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전후한 시기, 최인규의 ‘자유만세’(1946)를 통해 ‘조선영화’가 어떻게 ‘한국영화’로 거듭나게 되었는지 살펴본다. ●미국영화의 범람과 열악한 제작 환경 해방기 영화계 상황은 미국영화의 장악과 조선영화의 위기로 요약된다. 1948년 4월 23일자 서울신문 기사에 의하면 1945년 11월부터 1948년 3월까지 미국 극영화가 422편, 미국의 뉴스영화는 289편이 수입되었는데 그중에서 극영화 400편, 뉴스 250편이 중앙영화배급사(CMPE)의 영화였다. 미국 9대 영화사의 배급 대행을 담당한 중앙영화배급사는 실질적으로 미군이 관장한 단체였다. 1946년 2월 일본에 도쿄사무소를 설립한 것에 이어 4월 조선사무소를 설치하고, 미국영화가 조선 영화시장을 장악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처럼 미국영화가 극장가를 독식하는 가운데 같은 시기 조선 극영화는 17편이 제작되는 데 그쳤다. 해방 후 첫 극영화로 이규환의 ‘똘똘이의 모험’(1946)이 개봉하고, 최인규의 ‘자유만세’가 상징적인 의미에서 ‘해방영화’로 인정받으며 흥행에 성공했지만, 당시 영화계는 영화 필름을 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아 극영화 제작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연극 무대에 영화 장면을 덧붙여 공연하는 연쇄극이 다시 만들어지는가 하면 일반적인 상업영화용 필름인 35㎜ 대신 16㎜ 영화가 만들어졌고, 변사를 써야 하는 무성영화가 만들어질 정도로 기술적으로도 퇴보했다. 현재 필름이 보존되어 있는 영화 중에서 16㎜ 무성으로 만들어진 ‘검사와 여선생’(윤대룡·1948), 16㎜ 발성으로 제작된 ‘청춘행로’(장황연·1949)가 대표적인 예다. 미국영화에 비해 상영할 영화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보니,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영화들도 다시 개봉했다. 1946년 2월 서울극장(해방 전 경성극장)에서 일제의 국책영화 ‘군용열차’(서광제·1938)가 ‘낙양의 젊은이’라는 제목으로 재편집 후 상영되어 물의를 빚었고, 3월에는 일제의 검열로 창고에 있던 ‘신개지’(윤봉춘·1942)가 빛을 보았다. 5월 우미관에서는 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안종화·1934)가 다시 상영되기도 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앞둔 시점, 영화계는 건국이라는 절대적 과제와 궤를 같이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으로 ‘경찰 영화’와 독립운동가들을 내세운 영화를 들 수 있다. 조선해양경비대의 지원을 받은 ‘바다의 정열’(서정규·1947)을 위시로, 경찰 조직의 후원을 받은 ‘수우’(안종화·1948) ‘밤의 태양’(박기채·1948)이 정부 수립 직전 속속 공개되었다. 가장 대중적인 범죄액션 장르를 통해 경찰의 기능과 밀수 근절을 선전하는 영화들이었다. 또한 계몽문화협회를 주축으로 ‘의사 안중근’(이구영·1946), ‘윤봉길 의사’(윤봉춘·1947) 등 일제치하 애국지사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이처럼 계몽과 건국을 키워드로 한 극영화의 등장은 새로운 국가·국민 만들기와 맥을 함께하는 것이었다. 물론 괴기물 ‘목단등기’(김소동·1947)처럼 순수한 오락영화도 만들어졌지만, 최은희의 영화배우 데뷔작 ‘새로운 맹서’(신경균·1947)처럼 대중이 좋아하는 멜로드라마 장르를 빌어 건국과 관련된 주제를 담아낸 영화들이 선보였다.●해방기 영화인들이 총출동한 ‘자유만세’ 해방 1주년을 기념해 ‘해방 경축 영화’로 기획된 ‘자유만세’는 일제강점기 조선영화계를 대표하던 영화인들이 모여 의기투합한 프로젝트였다. 전창근(‘복지만리’(1941) 감독)의 각본으로 최인규가 연출을 맡았고, 촬영은 한형모(‘태양의 아이들’(1944)로 촬영기사 데뷔), 조명은 김성춘(‘살수차’(1935)의 조명 기사), 편집은 양주남(‘미몽’(1936)의 감독)이 맡았다. 또한 고려영화주식회사의 배급으로 고려영화협회가 제작을 맡았고 사회사업 단체인 ‘향린원’(‘집 없는 천사’(1941년)의 배경)이 공동제작으로 참가했다. 1930년대 중후반 조선영화계를 대표하던 고려영화사의 인맥이 그대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단 고려영화사의 대표였던 이창용이 빠지고, 최인규의 형인 최완규가 기획과 제작을 맡았다. 또한 감독 안종화, 안석영, 윤봉춘, 이규환도 ‘연출응원’으로 이름을 올린 것에서 당시 영화계를 대표하던 인물들이 모두 나선 것을 알 수 있다. ‘자유만세’는 어떤 내용으로 해방의 기쁨을 담아냈을까.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일제의 패망이 짙어지던 1945년 8월 어느 날, 독립운동을 하다 친구 남부(일본어 발음으로 나베·독은기)의 배반으로 투옥되었던 최한중(전창근)은 동료(박학)와 함께 탈출을 감행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동료는 사살되고, 그 혼자 탈출에 성공한다. 한중은 대학병원 간호사 혜자(황려희)의 집으로 은신해 지하조직의 무장봉기를 다시 주도한다. 동료 박(김승호)이 다이너마이트를 운반하다 일본 헌병에 붙잡히자 한중은 그를 구출한 후, 우연히 남부의 애인인 미향(유계선)의 아파트로 피신한다. 한중을 숨겨준 미향은 그에 매료되어, 지하조직이 있는 지하실로 찾아가 정보와 자금을 전달한다. 그 뒤를 밟은 헌병대에 의해 미향은 사살되고 한중 역시 총상으로 대학병원으로 옮겨진다. 한중을 사모하던 혜자는 헌병이 잠든 틈을 타 그를 탈출시킨다. ‘자유만세’는 해방 이후 한국영화에서 일제치하의 무장독립운동을 묘사한 첫 번째 작품으로 기록된다. 제목처럼 해방의 감격을 활극·멜로드라마 장르에 잘 녹여내 해방기 극장가에서 최고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 영화는 1947년까지 계속해서 상영되었고 “조선영화 최초 외국판으로 ‘자유만세’(고영 작품) 중국판이 만들어져 중국으로 수출”되기도 했다(경향신문 1947년 6월 15일자). 흥미로운 대목은 1948년 이후에는 영화의 상영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 점이다. 이후 ‘자유만세’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 필름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한국영화’가 된다는 것의 문제 ‘자유만세’가 다시 공개된 공식적인 기록은 1975년 ‘흘러간 명화 감상회’에서였다(동아일보 1975년 7월 5일자). 영화진흥공사가 8·15 광복 30주년을 기념해 해방 이후 한국영화 12편을 선정하고 상영회를 개최한 것이다. 한편 당시 기사는 1940년대 작품으로 유일하게 ‘자유만세’가 포함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고려영화사 사장 최완규가 프린트 1벌을 지금까지 보관해 온 덕분이라고 설명하며 “월북한 연기자가 출연진에 들어 있어서 그 상영 당시 많은 장면이 가위질을 당했고 현재 남아 있는 프린트는 상영시간으로 50분밖에 되지 않는다”는 흥미로운 내용을 전한다(경향신문 1975년 6월 28일자). 즉 원래 개봉 버전인 100분의 러닝타임이 당시 삭제 검열 등을 거치며 한국영상자료원에 보존 중인 51분 버전과 비슷한 분량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문제가 된 월북 배우는 바로 박학과 독은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보존된 버전에서 두 배우의 모습은 삭제되었지만 둘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 역시 가능하다. 먼저 영화의 시작부, 한중(전창근)과 그의 동료(박학)가 서대문 형무소를 탈출하는 장면이다. 박학의 얼굴이 잘 드러나지 않는 빠른 편집으로 구성된 숏들의 경우 그대로 살리고 총에 맞아 죽은 그의 얼굴의 클로즈업은 당시 검열에서 삭제되었다. 이렇게 파악할 수 있는 이유는 현재 필름에는 나중에 촬영한 다른 배우의 얼굴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헌병대 형사 남부(독은기)의 경우 시나리오상 그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다른 인물의 클로즈업으로 완전히 교체되었다. 그런데 그가 애인 미향(유계선)의 집에서 그녀를 만나고 가는 장면에서는 삭제되지 않은 그의 뒷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새로운 배우들의 모습이 들어간 필름은 과연 언제 만들어졌을까. 현재로서는 구체적인 정황을 파악하기 힘들지만, 현재 보존본의 오프닝 크레디트에 나오는 정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영화 처음에 등장하는 해설 자막이다. “29년을 경과하는 동안 6·25사변 등 역사의 격동을 겪으면서도 기적적으로 보존”되었다는 문구에서 이 영화의 재공개를 결정한 1975년 시점을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녹음은 특히 전반에 있어서 실패”(경향신문 1946년 10월 24일자)라는 당시 기사 내용에도 불구하고, 현재 보존된 ‘자유만세’ 프린트가 매우 선명한 녹음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특히 인물들의 대사 중 시나리오상 자주 등장하는 ‘조선’이라는 말은 전부 ‘한국’으로 바뀐 것에서 새롭게 녹음한 버전임을 확신할 수 있다. 이는 오프닝 크레디트에서 현상, 인화를 ‘한국영화문화협회’에서 담당했다는 정보와 연결해 봐야 한다. 한국영화문화협회는 미국의 민간원조기구인 아시아재단으로부터 기증받은 영화기자재를 관리하기 위해 1956년 7월 설립된 단체인데, 카메라부터 녹음기까지 각 기재들은 1957년 1월 개소한 정릉스튜디오에 설비했다. 즉 다시 녹음한 프린트의 제작은 1957년 이후의 어느 시점에 이루어졌다는 말이 된다.정리하면 ‘자유만세’의 필름은 1948년 시점 검열을 받아 상당한 장면들이 삭제되었고, 1957년부터 1975년 재공개 사이 새로운 장면의 촬영과 편집, 재녹음 등 각 단계를 거쳐 새로운 프린트가 만들어졌다. 현재로서는 각 단계가 한 번에 이루어졌는지 별개로 진행되었는지 구체적인 과정과 시점을 특정하기 힘들지만, 새로운 ‘자유만세’의 프린트 제작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한국 사회가 ‘한국영화’를 규정하려고 고민하던 시기와 맞닿아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자유만세’는 당국의 검열로 월북 영화인들의 출연 장면이 삭제된 후 다시 편집되고 녹음된 후에야 비로소 ‘한국영화’가 될 수 있었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 ‘마블민국’ 역대급 흥행질주… 다시 불붙은 스크린 독과점 논란

    ‘마블민국’ 역대급 흥행질주… 다시 불붙은 스크린 독과점 논란

    2008년 ‘아이언맨’부터 11년간 강력 팬덤 암표 거래에 군인 무단 이탈까지 진풍경 개봉 첫날 수익 98억원으로 中 이어 2위 24시간 풀상영… 누적 매출액만 871억원 첫날 상영점유율 80.8%… 4일째 2835개 일각에선 ‘스크린 상한제’ 도입 목소리도‘마블민국’이라 불릴 정도로 한국 관객의 ‘어벤져스’ 사랑은 유별나다. 박스오피스 모조에 따르면 한국은 지난달 24일 ‘어벤져스: 엔드게임’(이하 어벤져스4)을 하루 먼저 개봉한 25개국 중 첫날 수익 기준으로 중국(1억 720만 달러·약 1254억원)에 이어 840만 달러(약 98억원)로 2위를 기록했다. 5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어벤져스4’가 한국에서 거둔 누적 매출액은 871억원에 이른다. ‘어벤져스4’ 개봉 이후 연일 이색적인 일도 벌어진다. 개봉 전날 접속자가 몰려 극장 예매 애플리케이션이 다운되고 아이맥스와 같은 특별관 티켓이 암표로 거래되는가 하면 개봉 첫날 영화를 보러 휴가까지 냈다는 직장인들의 후기가 잇따랐다. 최근에는 대민 봉사활동차 부대 밖으로 나왔다가 현장을 이탈해 영화를 관람한 공군 병사가 헌병대에 넘겨지는 촌극도 벌어졌다.러닝타임이 3시간 57초이다 보니 극장은 상영 회차를 늘리려 사실상 ‘24시간 상영 체제’를 가동 중이다. 26시(오전 2시), 28시(오전 4시)대에 영화가 시작하는 전례 없는 상영 시간표도 등장했다. 스포일러를 차단하려고 영화를 보기 전까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끊고, 사람이 몰리는 극장 화장실이나 인근 식당을 이용하지 않는 등 관람 요령이 인터넷에서 공유된다. 강력한 팬덤과 맞물리면서 2D에 이어 3D, 4DX, MX, 아이맥스 등 특별관에서 영화를 다시 보는 ‘N차 관람’ 열풍도 이어진다. 전문가들은 한국인들이 어벤져스에 열광하는 이유를 ‘마블 타임’에서 찾는다. 2008년 ‘아이언맨’을 시작으로 마블 스튜디오가 선보인 22편의 작품과 함께 11년간 쌓아 온 기간을 뜻한다. 김형호 영화시장분석가는 “마블 시리즈가 다른 시리즈와 다른 점은 관객들이 영화와 함께 시간을 연속적으로 소비해 왔다는 것”이라며 “2014년 ‘겨울왕국’이 남녀노소에게 두루 인기를 얻으며 1000만 관객을 모은 것과 달리 이 영화가 흥행한 배경에는 연령보다 그간 마블 시리즈와 함께한 관객인지 아닌지 여부가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다”고 설명했다.앞서 케빈 파이기 마블 스튜디오 대표가 이 영화를 “마블이 선보인 21편을 집대성한 작품”이라고 했듯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에 대한 관객의 기대 역시 흥행을 견인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강유정 영화평론가는 “마블은 지난 11년간 이야기의 끝을 궁금하게 만드는 포석을 깔아 두며 관객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학습효과를 구축했는데 그 효과가 이번 영화에서 증명됐다”면서 “이야기의 대단원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되도록 빨리 즐기고 싶어 하는 관객들의 본능도 흥행을 이끌었다”고 분석했다.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 다양한 히어로들에게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이입할 줄 아는 세대가 등장한 점도 흥행 요인으로 꼽힌다. 허남웅 영화평론가는 “어릴 때부터 스마트폰과 가상 세계에 익숙한 젊은 세대는 영화나 만화 속 캐릭터에 거리감을 두지 않는 데다 자신도 그 세계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짚었다. 실제로 CGV리서치센터에 따르면 ‘어벤져스4’ 개봉주인 4월 24~28일 이 영화를 본 관객은 연령별로 20대가 36.5%로 가장 많고 30대(29.1%), 40대(24.5%)가 뒤를 이었다. ‘어벤져스4’는 전작인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마찬가지로 또다시 스크린 독과점 논란에 불을 붙였다. 전체 상영횟수 중 특정 영화 상영 비중을 뜻하는 상영점유율이 개봉 첫날 80.8%를 기록하며 독점 논란을 불렀다. 개봉 첫날부터 스크린 2760개를 확보했고 개봉 4일째이자 주말이었던 지난달 27일에는 무려 2835개 스크린이 배정됐다. 극장 측은 관객 수요에 맞춰 스크린을 편성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일각에서는 시장 논리가 영화 다양성을 해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박양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최근 “‘스크린 상한제’ 도입을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영화 산업 양극화 현상을 막고 영화의 다양성을 확보하고자 특정 영화에 배정하는 스크린 비율을 법으로 제한하는 조치다. 배장수 반독과점영화인대책위 운영위원은 “역대 1000만 영화 개봉 당일 상영점유율을 보면 10%가 2편, 20%가 4편, 30%가 5편”이라면서 “‘어벤져스4’처럼 개봉 당일 상영점유율이 80%에 이르지 않아도 1000만 관객을 동원할 수 있다”며 강력한 규제를 주장했다. 수입·배급사인 씨네룩스의 김상윤 대표는 “스크린 상한제를 실시한다고 해서 독립예술영화들이 즉각적으로 이득을 보는 데는 한계가 있다”면서 “오히려 의무적으로 독립예술영화 전용관을 늘리는 등 다른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박형식, 6월 10일 입대..군입대 전 마지막 작품은 ‘배심원들’

    박형식, 6월 10일 입대..군입대 전 마지막 작품은 ‘배심원들’

    그룹 제국의 아이들 출신 박형식이 오는 6월 10일 입대한다. 29일 박형식 소속사 UAA 측은 “박형식이 오는 6월 10일 논산 신병훈련소에 입소하며, 헌병대 수도방위사령부에서 군복무한다”고 밝혔다. 박형식은 입대 전 마지막 작품인 영화 ‘배심원들’ 홍보 활동을 마치고 군복무에 임할 계획이다. 지난 2010년 그룹 제국의 아이들 멤버로 데뷔한 박형식은 이후 가수와 연기 활동을 병행했다. 드라마 ‘상속자들’, ‘가족끼리 왜 이래’, ‘상류사회’, ‘화랑’ 등에 출연한 그는 2017년 제국의 아이들 해체 이후 본격적으로 배우로 전향했다. 이후 박형식은 드라마 ‘힘쏀여자 도봉순’, ‘슈츠’ 등에 출연하며 주연의 자리에 올랐다. 사진=연합뉴스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뉴스 전에 책이 있었다] 깊은 슬픔에 빠진 파리 위고를 읽으며 달래네

    [뉴스 전에 책이 있었다] 깊은 슬픔에 빠진 파리 위고를 읽으며 달래네

    지난 16일 안타깝게도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이 화마에 휩싸였다. ‘노트르담은 프랑스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프랑스 사람들은 깊은 슬픔에 빠졌고, 전 세계도 실의에 빠졌다. 노트르담 대성당을 본 사람은 본 사람대로, 못 본 사람은 못 본 사람대로 슬픔이 크다. 깊은 정취를 남긴 그곳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슬픔과, 진짜를 볼 수 없다는 슬픔이 같을 수는 없지만 안타까워하는 마음만큼은 한마음으로 크다. 파리를 자주 오가는 지인은 이제 파리를 여행해야 할 중요한 이유 하나가 사라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노트르담 대성당이 오늘의 명성을 갖기까지 적잖은 공헌을 한 작품이 있다. 대문호라는 식상한 칭호로는 그 가치를 다 알 수 없는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으로, 흔히 ‘노틀담의 꼽추’로 알려진 바로 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영화·뮤지컬·애니메이션 등으로 제작됐는데, 앤서니 퀸 주연으로 1956년 개봉된 영화가 유명했다. 몇몇 기록에 따르면 무려 70회 이상 영화로 제작됐다고 한다. 이야기의 구조는 간단하다. ‘괴물’로 불릴 만큼 흉측한 외모의 꼽추 카지모도와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의 슬픈 사랑 이야기다. 사랑 이야기는 방해하는 인물이 등장하게 마련인데, 헌병대장 페뷔스 드 샤토페르는 위선적인 바람둥이다. 클로드 프롤로 부주교는 종교와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이다. 그는 이 소설의 가장 현실적인 인물로, 인간적 욕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지만 에스메랄다를 본 이후 깊이 감춰둔 욕망을 분출하며 생의 끝자락까지 내몰린다. 에스메랄다도 전형적인 인물이긴 마찬가지다. 프롤로의 사랑을 단지 못생겼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잘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샤토페르에게 매달린다. 천대받는 집시였음에도 에스메랄다는 외모·춤·노래 다 되는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지나치게 과신한 것이다. 사실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주목해 봐야 할 대목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15세기 파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유럽의 생활사다. 빅토르 위고는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15세기 파리 서민들의 생활상을 세밀하게 포착한다. 사법제도며 대혁명의 기운까지, 유럽의 시대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내용들이 선보인다. 웅장하면서 아름다운, 한편으로는 어둡고 음울한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은 그 자체로 15세기의 유럽을 대변한다.한 발 더 나가 보자. 빅토르 위고의 소설들은 대개 사랑을 모티브로 시대상을 유려하게 풀어낸다. ‘레미제라블’보다 더 애착을 가졌다고 하는 ‘웃는 남자’는 17세기 영국 귀족 사회와 하층민의 삶을 대비시키면서, 유럽의 역사 한 자락을 보여 준다. 특히 ‘콤프라치코스’라는 유아 납치단의 실체는 여느 역사서보다 적확하게 설명한다. 그런가 하면 ‘레미제라블’은 19세기 혁명의 기운을 장발장의 기구한 삶,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사랑을 통해 풀어낸다. ‘파리의 노트르담’, ‘웃는 남자’, ‘레미제라블’ 순서로 읽으면 큰 틀에서의 유럽 역사를 훑는 셈이다. 급하게 결론으로 되돌아온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노트르담 대성당 복원을 5년에 이루겠다고 장담한 모양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20년도 부족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바라기는 노트르담 대성당이, 할 수 있는 한 천천히 복원되기를 기대한다. 급하게 복원해서 더 엉망이 된 문화유산들을 우리는 너무 많이 봐오지 않았던가. 장동석 출판평론가·뉴필로소퍼 편집장
  • 100년 첨탑의 눈물, 물길 따라 흐른다

    100년 첨탑의 눈물, 물길 따라 흐른다

    첫인상을 바꾸는 건 어렵습니다. 첫인상이 탐탁지 않던 사람이 좋아지려면 특별한 계기나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할 겁니다. 여행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충남 공주를 입에 올릴 땐 ‘백제의 수도’라는 말이 따라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배운 공주의 첫인상이지요. 공주에서 백제를 걷어내고 새로움을 찾으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걸어야 할 겁니다. 오늘의 발걸음은 공주 원도심을 가로지르는 하천, 제민천으로 향합니다. 제민천 주변의 근대 건축물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뾰족한 종탑을 인 고딕식 성당, 옛 충남도청에 들어선 박물관, 유관순 열사의 흔적이 남은 교회 등 공주의 근대를 증언하는 건축물이 차례로 나타납니다. 그러고 보면 여행자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장소가 아니라 새로운 시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백제 문화의 중심지로만 알려진 공주의 새로운 모습을 찾으러 간다. 기점은 금강에서 발원한 하천, 제민천으로 삼는다. 아담한 하천 주위에 공주중동성당, 충남역사박물관, 공주 제일교회 등의 근대 건축물이 모여 있다. 건물 간 거리는 도보로 10분 남짓. 슬렁슬렁 걸어도 부담스럽지 않은 거리다. 하천 따라 피는 벚꽃과 따사로운 햇살이 길동무가 돼 준다. 근대 건축물을 통해 공주의 100년 전을 들여다보고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다. 건축물을 매개로 떠나는 시간 여행이다. ●중세 고딕 양식의 장엄함… 공주중동성당 제민천 근처의 국고개 길, 언덕 위 뾰족한 종탑이 보인다. 공주 최초의 성당인 공주중동성당이다. 천주교가 서해안을 통해 충청도로 들어오면서 현대식 성당이 만들어졌는데 공주중동성당도 그중 하나다. 1936년에 착공해 1년 만인 1937년에 완공됐으니 바지런히도 지었다. 붉은 벽돌의 외관, 뾰족한 아치형의 창과 출입구, 하늘로 치솟은 종탑에서 알 수 있듯 성당은 서양 중세의 고딕 양식을 따른다. 성당 안 천장은 회백색 6각형 돌기둥이 받치고 있다. 내부는 미사 시간 전후로 잠깐씩만 개방해 상시 관람이 어렵다. 성당 앞마당에 서면 맞은편 충남역사박물관과 공주 시가지가 보인다. 아득한 옛날의 백제 대신 근대와 현대가 어우러진 공주의 모습이다. 공주중동성당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충남역사박물관이다. 옛 국립공주박물관이던 건물은 현재 충청남도의 역사·문화를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거듭났다. 박물관에 들어서려는데 벚나무 30여 그루가 발을 붙잡는다. 이맘때면 박물관 앞마당은 벚꽃 동산이 된다. 벚꽃 감상 최적의 포인트는 안내소 옆 언덕. 벚나무들이 성당 쪽으로 기울어 자라 우거진 벚나무와 성당이 훌륭한 구도를 빚는다. 봄바람에 흩날리는 벚꽃 잎이 공주의 봄이 한창이라고 속살댄다. 충남역사박물관의 1층 기획전시실은 ‘우리가 찾은 역사, 땅속 이야기’ 전시가 한창이다. 공주 수촌리 고분군, 아산 명암리 밖지므레 유적, 예산 가야사지 등 충남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을 모았다. 공주 수촌리 고분군의 백제 시대 무덤에서 발굴된 금동신발은 아직 금빛이 영롱하다. 동판을 금으로 도금한 신발을 신고 금동관모와 함께 잠들었으니 신발 주인의 권위를 짐작할 만하다. 2층 상설전시실에서 눈길을 끄는 건 충남도청 옛 도지사실. 1932년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한 이래 충남도지사가 도정 업무를 보던 공간을 재현했다. 도지사 사무인계서, 충청남도의회속기록, 휴대용 주판, 타자기 등 충남도민들의 삶을 뒷받침한 행정도구들이 가득하다.●공주 항일운동거점지… 공주 제일교회 제민천교 근처의 빨간 벽돌 건물은 공주 제일교회다. ‘수원 이남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라는 수식어가 붙은 교회는 현재 기독교박물관으로 운영된다. 2층짜리 박물관은 교회 역사, 선교사의 옛 사진과 물품, 공주 항일운동을 주도한 교회 목사이자 독립유공자의 발자취 등을 전시한다. 100여년밖에 되지 않은 건물이지만 교회를 둘러싼 이야기는 길고도 깊다. 1902년 한 채의 초가집으로 시작해 1931년에 지금 모습을 갖추었다는 이야기, 6·25전쟁으로 폭격을 받았지만 굴뚝과 지하는 멀쩡해 교회 건축사적으로 가치가 높다는 이야기, 우리나라 스테인드글라스의 개척자 고(故) 이남규 선생의 작품이 있다는 이야기 등등.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교회 외벽의 앳된 소녀와 외국인 선교사의 벽화다. 소녀의 정체는 유관순 열사, 외국인 선교사는 이곳에서 활동한 사애리시 선교사다. 둘은 천안 지령리 교회(현 매봉감리교회)에서 처음 만났다. 유관순 열사의 총기와 신앙심을 알아본 선교사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한다. “관순양이 공부를 하고 싶으면 내가 서울의 이화학당에 보내 줄게요. 우선 영명학교에서 교육을 받아보는 게 어때요?” 소녀는 이튿날 선교사를 따라 영명학교 보통과에 입학, 2년 과정을 수료한다. 영명학교는 공주 제일교회에서 설립한 학교다. 당시 교회가 선교와 교육 사업을 병행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교회와 유관순 열사의 인연이 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당시 교회는 사회와 호흡했다. 영명학교를 비롯해 방은두병원, 공주유치원, 중앙영아원을 건립하고 공주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교회에 깃든 사연을 알고 나면 평범한 고딕식 교회가 달리 보인다. 원도심의 붉은 벽돌 건물이 묻는다. 시간이 오래될수록 좋은 건축물인가. 백제와 근대를 견주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백제의 문화유산도 공주의 근대 건축물도 소중한 우리의 보물이다. 공주의 근대 건축물은 그대로 아름답다.●소박한 시가 피는 풀꽃문학관 제민천 서쪽, 낮은 언덕에 진갈색 목조건물 한 채가 있다. 건물의 이름은 풀꽃문학관.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라는 시 ‘풀꽃’으로 유명한 나태주 시인의 문학관이다. 시인은 이곳에서 꽃을 가꾸고 풍금을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고 문인들과 소통한다. 시인은 공주와 인연이 깊다. 충남 서천 출신의 시인은 공주사범대에 입학한 뒤 언젠가 공주에서 살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그 바람이 현실이 된 곳이 2014년 문을 연 풀꽃문학관이다. 공주시는 1930년대 초에 지어진 적산가옥을 사들여 문학관으로 단장했다. 일본 헌병대장의 관사가 문학관이 되자 공간을 둘러싼 공기도 변했다. 꾸밈없는 그의 시어만큼이나, 자세히 보아야 예쁜 풀꽃만큼이나 소박한 분위기다. 가장 큰 방인 강의실에는 12폭 병풍이 있다. 한 폭마다 시인의 대표작과 그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려 살펴볼 만하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마루 복도를 따라 시가 담긴 액자가 쪼르르 놓여 있다. 4월의 풀꽃문학관은 꽃으로 눈부시다. 앞뜰에 수선화, 할미꽃, 부채붓꽃 등 소담한 봄꽃이 앞다투어 핀다. 여름에는 애기원추리와 옥잠화가, 가을이면 쑥부쟁이와 상사화가 그 자리를 이을 것이다.●가장 많은 천주교 순교자가 나온 황새바위성지 국내에서 가장 많은 천주교 순교자가 나온 곳이 공주라는 사실을 아는가. 공산성 맞은편 언덕에 있는 천주교 순교 유적지, 황새바위성지가 바로 그곳이다. 1801년 신유박해 후 수많은 천주교인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만도 337위에 이른다. 공주에 천주교 순교자가 유독 많은 이유는 무얼까. 조선 시대 선조 때인 1603년, 공주에 관찰사가 근무하는 관청인 충청감영이 들어섰다. 오늘로 말하면 충청도청인 셈이다. 경상도·전라도·충청도에서 잡혀 온 천주교 신자들은 충청감영으로 이송됐고 배교를 거부하면 사형판결 권한을 위임받은 관찰사의 명령에 따라 참수를 당했다. 공개 처형이 있는 날이면 사람들이 공산성에 몰려와 구경을 하고, 순교자들 의 시신이 제민천을 피로 물들였단다. 오늘날 황새바위성지는 200여년 전의 슬픈 역사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하다. 성지에 얽힌 사연을 모르면 꽃구경하기 좋은 뒷동산 같다. 순교자 광장은 순교탑, 무덤경당, 열두 개의 빛돌이 삼각형 구도를 이룬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순교탑 안에는 로마서의 한 구절과 성지 부근을 발굴하다 나온 십자가가 걸려 있다. 열두 개의 빛돌은 예수의 열두 사도를 상징함과 동시에 이곳에서 순교한 337위와 무명 순교자들을 기리는 비석이다.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 간 황새바위 광장의 끝에 야외제대가 있다. 12개의 비석 뒤에는 337위 순교자들의 이름을 새겼다. ‘이존창 루도비코’처럼 이름과 세례명이 알려진 이가 있는가 하면 ‘이씨’, ‘강서방’처럼 이름이 없는 이들도 있다. 평범하지만 용감한 사람들, 믿음이 두려움을 이긴 사람들의 이름이다. 위대한 이름 위로 후두두 벚꽃이 떨어진다. 글 이수린(유니에스 여행작가) 사진 정철훈(사진작가) ■ 여행수첩 (지역번호 041) →가는 길 : 서울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경부고속도로와 천안논산고속도로를 지난다. 천안논산고속도로 천안분기점을 통과해 공주IC 교차로에서 ‘공주보 시청’ 방면으로 우회전한다. 웅진로를 거쳐 중동교차로에서 ‘대전 논산’ 방면으로 좌회전한 뒤 성당길을 따라가면 공주중동성당이다. →맛집 : 고가네칼국수(856-6476)는 농약을 쓰지 않은 우리 밀로 만든 칼국수를 낸다. 먹는 방식이 전골과 닮았다. 한우 사골육수에 갖가지 채소를 넣고 끓이다가 면을 넣는다. 시장정육점식당(855-3074)은 날밤을 육회에 버무린 육회비빔밥이 대표 메뉴다. 아삭한 밤과 쫀득한 육회가 잘 어울린다. →잘 곳 : 공주한옥마을(840-8900)은 기와집과 초가가 어우러진 한옥 리조트다. 개별 숙박동은 작은 마당과 담장을 갖춘 독채로 운영된다. 참나무 장작으로 불을 지피는 구들장 방식이라 전통 난방을 체험할 수 있다. 제민천 부근의 정중동호스텔(010-6360-4653)은 여관을 리모델링한 게스트하우스다. 회백색 벽돌의 외관에서 근대 건축물이 연상된다. 1인실, 2인실, 패밀리룸 모두 개별 욕실이 딸려 있다.
  • 日오키나와서 또다시 미군의 日여성 살해…반미정서 부글부글

    日오키나와서 또다시 미군의 日여성 살해…반미정서 부글부글

    일본 주둔 미군기지의 74%가 몰려 있는 오키나와에서 또다시 미군의 현지여성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헤노코 미군 비행장 건설을 놓고 일본 정부와 미군에 대한 주민들의 반감이 한껏 고조돼 있는 상황에서 이런 일이 발생함에 따라 미군은 현지 최고사령관이 사과의사를 밝히는 등 긴급진화에 나섰다. 오키나와현 당국은 여느 때보다 강도높은 항의의 뜻을 전했다. 지난 13일 오키나와현 자탄정의 아파트에서 이 집에 사는 일본인 여성(44)과 미군 해병대 병사(32)가 피를 흘린채 사망한 상태로 발견됐다. 숨진 여성의 몸에는 저항하면서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상처가 발견됐다. 오키나와 경찰은 미군 병사가 일본인 여성을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최근 헤노코 미군기지 건설을 둘러싸고 일본 정부와 오키나와현이 갈등을 겪고 있는 가운데 또다시 현지주민들이 가장 우려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오키나와에서는 2016년 30대 미군 군속이 스무살 회사원 여성을 성폭행하려고 둔기와 흉기로 폭행해 살해한 뒤 시신을 유기한 사건이 발생해 반미 여론이 거세진 바 있다. 같은해 11월에는 미군 해병대원이 새벽에 음주운전을 하다 60대 일본인을 치어 숨지게 하기도 했다. 이번에 숨진 여성이 해당 미군의 폭력행위에 대해 과거 헌병대에 신고를 한 적도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 주민들의 분노가 더욱 커졌다. 다마키 데니 오키나와현 지사는 15일 오키나와 주둔 미군의 최고 책임자인 에릭 스미스 해병대사령관(중장) 등을 현청으로 초치, “3년 전 미군 군속에 의한 여성 살인사건에 이어 또다시 이런 사건이 일어나 귀중한 오키나와현 주민의 목숨이 희생된 데 대해 매우 유감이며 격한 분노를 느낀다”고 강하게 항의했다. 이어 “사건·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강구한다던 미군의 기강확립과 인권교육은 전혀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여성으로부터 미군의 폭력 사실을 신고받은 뒤 헌병대의 대응이 적절했는지에 대해서도 따져 물었다. 스미스 사령관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사죄를 드린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분노와 슬픔을 낳은 이번 일의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고 사과했다. 헌병대 신고 사실과 관련해서는 “여성으로부터 폭력문제에 대한 통보가 있긴 했으나 얼마후 여성이 ‘지금은 괜찮다’고 철회를 해 당장의 문제는 아니라고 판단했다”고 해명했다. 오키나와현 경찰 조사에 적극 협조할 뜻도 비쳤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휴가 미복귀 병사, 버스터미널 화장실서 숨진채 발견

    휴가 미복귀 병사, 버스터미널 화장실서 숨진채 발견

    강원 속초시 시외버스터미널 화장실에서 육군 병사가 숨진 채 발견돼 군 당국이 수사에 나섰다. 15일 군당국에 따르면 A일병(20)은 지난 14일까지 휴가기간이었으나 복귀하지 않았다. 이에 헌병대가 수색 활동을 벌이던 중 화장실에서 숨져 있는 A일병을 발견했다. A일병은 지난해 11월 입대 후 올해 1월 자대배치를 받았고, 관심사병은 아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군 당국은 정확한 사고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창원 해군 간부 아파트 쓰레기장서 탄피 10개 발견

    해군들이 모여 사는 경남 창원의 한 아파트에서 탄피가 발견돼 해군이 조사에 나섰다. 10일 해군에 따르면 최근 해군 간부 숙소로 쓰이는 창원 진해구의 한 아파트 쓰레기 분리수거장에서 탄피 10개가 발견됐다. 해군은 이 곳에 거주하는 중사의 신고를 받고 헌병대를 현장에 보내 탄피를 수거했다. 또 경찰 등과 합동 정보조사팀을 구성해 현장 조사를 벌였으며 이 아파트에 살고 있는 군 간부를 탐문 수사 중이다. 분리수거장에서 발견된 탄피는 고속정에서 사용하는 20mm 총탄으로 해군은 추정하고 있다. 탄약은 지휘관 허가를 받은 부사관이 반출과 보관 업무를 맡는다. 해군 관계자는 “조사 결과 탄약 관리 허술함이 드러나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잡고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엄격히 단속하겠다”고 말했다. 창원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곽병찬의 역사앞에서 묻다] 전쟁 중에도 정쟁 올인 이승만… 산불도 정치에 활용하는 보수 야당

    [곽병찬의 역사앞에서 묻다] 전쟁 중에도 정쟁 올인 이승만… 산불도 정치에 활용하는 보수 야당

    전쟁엔 관심 없다, 정쟁에 ‘올인’할 뿐. 1951년 7월 초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휴전협상이 시작됐다. 교착된 전선에서는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한 고지전이 전개됐다. 지난 1년 전면전 때보다 더 많은 군인이 희생당하는 처절한 전투였다. 전선에서 500여킬로미터 떨어진 임시수도 부산. 이승만 대통령은 다른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시산혈해의 전선에는 관심이 없었다. 국민을 현혹한 ‘북진통일’, ‘휴전협상 반대’는 당시 한국군으로는 이룰 수 없는 허황한 구호였다. 당시 그에게 절박한 것은 야당이 압도하는 2대 국회를 전복시키거나 장악하는 일이었다. 1950년 5월 30일 치러진 2대 총선에서 이승만 세력은 궤멸했다. 전체 210석 가운데 57석만 차지했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제헌의회의원 선거에 불참했던 지사들이 대거 출마해 당선됐다. 과반이 훨씬 넘는 126석이 무소속이었다. 당시는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했다. 이승만의 재선은 불가능했다.총선 결과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국민은 제주4·3과 여순 사건 학살의 배후, 백범 김구와 몽양 여운형 등 민족지도자의 잇따른 암살의 배후에 이승만이 있다고 믿었다. 동족의 고혈을 일제에 바친 자들을 처단하기 위한 반민족행위자처벌특별위원회(반민특위)를 강제로 해산시킨 것도 이승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민심은 이승만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는 2대 총선을 미루려 했다. 그는 이미 지방의회의원 선거도 무산시킨 터였다. 제헌의회가 1949년 7월 지방자치법을 제정해 8월 15일 이후 지방의회를 구성하도록 했지만, 이승만은 제주4·3, 여순 사건 등을 핑계로 미뤘다. 12월에는 아예 지방의회 구성을 무기한 유보하도록 지방자치법을 개정해버렸다. 미국 정부가 눈치 챘다. 한반도에서 소련과 각축하고 있던 미국은 국제여론에 민감했다. 제주4·3 문제로 소련에 된통 당한 터였다. 딘 구더햄 애치슨 국무장관이 나서서 이승만에게 경고했다. 총선을 연기한다면 대한군사경제지원을 철회하겠다! 앞서 1월 태평양 미국 방위선에서 한반도를 빼버린 애치슨이었다. 미국이 경제지원까지 중단한다면 이승만은 끝장이었다. 이승만은 꼬리를 내렸다. ‘미국의 등쌀에 밀려’ 그렇게 울며 겨자 먹기로 실시한 총선이었다.이후에도 악재가 잇따랐다. 6·25전쟁이 터졌고, 27일 새벽 몰래 서울을 버렸고, 대전에서 ‘국군이 북진 중’이라고 거짓 방송을 했다. 1951년 1월엔 간부들이 식량과 피복을 빼먹고 뜯어먹어 장정 1000여명이 얼어 죽고 굶어 죽고, 수만명이 영양실조로 죽어가던 국민방위군 사건이 터졌다. 간부들은 이승만의 사조직 대한청년단 단원들이었다. 2월엔 국군이 어린이 359명을 포함해 민간인 719명을 학살한 거창양민학살 사건이 터졌다. 그렇다고 포기할 이승만이 아니었다. 1951년 7월 휴전협상으로 어수선한 틈을 타 본격적인 정치공작에 나섰다. 2대 대통령 선거를 8개월여 앞둔 1951년 11월 말 개헌 추진을 선언했다. 29일 공비 소탕을 명분으로 지리산 주변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북도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날 국무회의는 대통령직선제를 뼈대로 한 개헌안도 의결했다. 30일 국회에 개헌안을 제출했다. 대통령을 국민 직접선거로 뽑자는 것이었다. 군사, 경찰, 행정권이 압도하는 전시체제였으니 직접선거로 한다면 승산은 충분했다. 북의 남침처럼 그야말로 전격전이었다. 11월 당시 교착된 160여마일 전선에서는 근접전이 격렬해지고 있었다. 11월 19일 국군은 동부전선의 요충지 월비산을 적에게 내줬다. 11월 30일엔 양구 북방 어은산과 백석산 사이의 바위 하나(크리스마스고지)를 두고 유엔과 중공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졌다. 대규모 전투의 전초전이었다. 펀치볼,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백석산, 백마고지, 화살머리고지, 교암산, 지형능선, 벙커고지, 삼각고지 등은 차라리 병사의 거대한 무덤이었다. 1952년 1월 18일, 국회는 정부 개헌안을 부결시켰다. 찬성은 14표에 불과했고, 반대는 개헌선을 넘는 143표였다. 야당은 이승만이 도발하지 못하도록 내각제 개헌안을 제출했다. 대통령 직선제 도발로 벌어진 정쟁은 전면전으로 발전했다. 그날도 유엔군의 대대적인 북폭이 있었고, 고지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승만은 ‘플랜2’를 꺼냈다. 여순 사건을 핑계로 미뤘던 지방의회의원 선거를 전쟁 중에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지방의회를 앞세워 국회를 압박하려는 것이었다. 경찰, 행정권은 물론 군까지 동원할 수 있는 전시체제에서 여당의 지방의회 장악은 여반장이었다. 1952년 4월 25일과 5월 10일 시읍면, 도 의회의원 선거가 실시됐다. 예상대로 이승만계가 싹쓸이했다. 관제 선거로 들썩이던 4월 23일 중부전선에선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유엔군이 연천을 내줬다. 평강과 금성에선 대규모 근접전이 벌어졌다. 5월 8일 중공군은 모든 전선에서 공세를 펼쳤다. 연천 탈환을 위한 교전이 7일째 계속됐다. 유엔군은 평양, 사리원, 희천, 정주, 청진, 수안 등 후방의 병참기지 철교 등을 폭격했다. 5월 이승만의 국회 침공이 본격화했다. 지방의원들이 피란지 부산의 국회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민족자결단, 백골단, 땃벌떼 등 정체불명의 폭력배들이 가세해 국회를 무력화시켰다. 이들의 요구는 하나, 국회 해산이었다. 경찰은 수수방관했다. 5월 25일 이승만은 부산·경남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공비 소탕과 병참기지 방어가 명분이었다. 그러나 공비 소탕은 1951년 11월 25일 창설된 백야전투사령부가 4단계 작전을 통해 1952년 3월 14일 종료를 공식 선언한 터였다. 계엄군은 25일 새벽부터 소탕에 나섰다. 공비가 아니라 야당 의원이었다. 26일 아침엔 국회의원 통근버스를 크레인으로 끌고 헌병대로 연행했다. 이어 국제공산당 프락치 사건을 발표했다. 국회의원 10명이 구속됐다. 국회 기능은 마비됐다. 6월 4일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에 내각제 요소를 짬뽕한 발췌개헌안을 발의했다. 6월 11일 지방의원들이 다시 국회로 몰려와 직선제 통과 시위를 벌였다. 미국 대사관 난입을 시도하기도 했다. 전선에서는 6월 14일 중공군이 중부전선 철의 삼각지에 무려 7000여발의 포탄을 유엔군 진지에 퍼부었다. 5일 동안 중공군 1000여명이 사망했고, 그로부터 3개월간 아군 971명이 전사하고 3120명이 부상했다. 철의 삼각지대는 말 그대로 주검이 산을 이루고 피가 바다를 이룬 ‘시산혈해’였다. 6월 20일 김성수 이시영 김창숙 등 원로들의 반독재호헌구국선언대회가 폭력배들에 의해 피로 얼룩졌다. 국회에서는 발췌개헌안이 상정됐지만, 정족수 미달로 의결할 수 없었다. 이승만은 구속 의원들을 석방했다. 국회 표결에 참여하라는 것이었다. 30여개 고지전은 더욱 격렬해지고 있었다. 7월 초부터 중공군은 수도고지와 지형능선을 장악하기 위해 대대 규모의 공격을 해왔고, 7일엔 탱크 14대를 앞세우고 유엔군 진지를 공격했다. 유엔군은 판문점 동쪽 북한군 3개 진지를 공격했다. 수도고지 공방은 8월 초 사단 규모의 대규모 전투로 발전했고, 하룻밤에 주인이 다섯 번이나 바뀌기도 했다. 미국은 7월 9일 한국전 희생자가 전년도(1951년)보다 552명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임시수도 부산에선 7월 초부터 미군이 군정을 다시 실시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신익희 의장, 조봉암 부의장 등이 도피 중인 의원들에게 국회 등원을 설득했다. 7월 4일 헌병이 국회의사당과 회의장을 포위한 가운데 발췌개헌안에 대한 표결이 이루어졌다. 185명 출석 166명 찬성, 기권 3명, 반대 0명으로 통과됐다. 미국의 간섭이 주효했다. 미국은 휴전협상에 반대하는 이승만과 타협을 하고, 직선제를 지지했다. 이승만은 전쟁과 재난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권력 장악을 위한 정쟁 승리에 ‘올인’했다. 지난주 강원도 시민과 소방관들은 산불과 사투를 벌였다. 그 와중에 자유한국당 안팎에선 ‘북한과 협의? 빨갱이 정부!’라고 색깔론을 제기하거나 ‘촛불 정부? 산불 정부!’라고 이죽거렸다. 원내에서는 재난 컨트롤타워인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을 국회에 잡아뒀다. 재난은 외면하고 정쟁에 몰두하는 것이 이승만의 후계 집단답다. 논설고문 kbc@seoul.co.kr
  • 윤두준, 상병으로 3개월 조기진급 “솔선수범하는 모습”

    윤두준, 상병으로 3개월 조기진급 “솔선수범하는 모습”

    하이라이트 윤두준이 상병으로 3개월 조기진급했다. 5일 윤두준 소속사 어라운드어스 엔터테인먼트는 “지난 2018년 8월 24일 현역으로 입대하여 육군 제12보병사단에서 헌병으로 군복무 중인 그룹 하이라이트 리더 윤두준이 4월 1일자로 상병으로 3개월 조기진급했다”고 밝혔다. 소속사는 이어 “윤두준은 입대 후 맡은 임무에 성실하고 솔선수범하는 모습으로 다른 군인들에게 모범이 되어 이같은 진급이 이뤄지게 됐다”고 덧붙였다. 한편, 윤두준은 지난해 8월 24일 육군 현역으로 입대, 강원도 인제군에 위치한 12사단 헌병대로 자대배치를 받았다. 사진=뉴스1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외제차로 靑 돌진’ 육군 소령, 軍 조사 중 도주했다 체포

    육군사관학교 출신 현역 소령이 외제차를 몰고 청와대로 돌진하려다 경찰에 검거됐다. 이 소령은 군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던 중 도주했다가 다시 체포되기도 했다. 4일 경찰과 군 당국에 따르면 육군 소속 김모(45) 소령은 전날 오후 10시 30분쯤 자신의 BMW승용차를 타고 청와대에 무단침입하려다 동문 초소 앞 차단장치를 들이받고 멈춰 섰다. 김 소령은 이날 앞서 두 차례 청와대 진입을 시도했다. 오후 5시 10분쯤 “분실된 휴대전화를 찾아달라”며 청와대에 차로 진입하려다 제지당했다. 오후 8시 5분쯤에도 “청와대 회의에 참석하겠다”며 횡설수설하는 등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수방사 헌병대에서 조사를 받던 그는 “담배 피우고 오겠다”며 밖으로 나가 한 간부의 차량을 얻어 타고 부대 밖으로 도주했다. 헌병대는 곧바로 추적해 오후 4시 28분 서울 지하철 7호선 논현역 화장실에서 김 소령을 검거했다. 군 관계자는 “김 소령은 오는 6월 전역예정자로 현재 국방전직교육원에서 전직교육을 받고 있다”면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국방부는 김 소령에 대한 신병관리에 허술했다는 지적에 대해 “철저히 수사해 사건 경위를 밝힐 것”이라고 했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 BMW 몰고 청와대 춘추관으로 돌진한 육군 소령…“음주 아냐”

    BMW 몰고 청와대 춘추관으로 돌진한 육군 소령…“음주 아냐”

     BMW 승용차를 몰고 청와대로 돌진하던 육군 소령(46)이 경찰에 붙잡혔다. 이 소령은 정신질환을 앓는 것으로 전해졌다. 4일 서울 종로경찰서에 따르면 전날 오후 10시 30분쯤 육군 령 A씨는 초소의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BMW 승용차를 몰고 청와대 춘추관에 무단으로 들어가려다 차량 진입을 저지하는 차단장치를 들이받고 멈춰섰다. 101경비단은 현장에서 A씨를 검거해 특수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종로경찰서로 인계했다. 제지 과정에서 경찰 한 명이 다쳐 병원으로 옮겨졌다. 경찰은 A씨에 대한 기본적인 조사를 마친 뒤 이날 오전 4시 30분쯤 헌병대에 A씨를 넘겼다. 경찰 관계자는 “A씨는 6월 전역 예정자로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군 관계자로부터 전해 들었다”며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힘들어 정확한 동기는 파악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범행 당시 A씨는 음주 상태는 아니었다고 경찰은 전했다. 경찰은 A씨를 군 당국에 인계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온몸 난자당하면서도 “독립만세”… 익산 1만명 핏빛 저항 이끌다

    온몸 난자당하면서도 “독립만세”… 익산 1만명 핏빛 저항 이끌다

    이틀 후면 ‘익산 4·4만세운동’ 100주년이 된다. 전북 익산 지역민들이 장터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일제의 수탈을 규탄한 만세운동이다. 그 중심인물인 문용기 열사를 취재하러 익산을 찾았다. ‘익산4·4만세운동기념사업회’ 전영철 회장이 마중을 나왔다. 만세운동 현장에서는 100주년 행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만세운동의 전말에 대한 설명을 듣고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았다. 전 회장은 “문 열사와, 함께 순국한 다섯 분의 열사들은 긴 세월 묻혀 있었다”면서 “기념공원이나 기념관 하나도 없는 현실이 죄스럽고 부끄럽다”고 말했다.만세운동이 벌어졌던 솜리장터를 돌아보고 운동의 중심체 역할을 한 남전교회를 방문했다. 남전교회는 산이 보이지 않는 너른 들판 한가운데에 있었다. 박종규 장로는 “살아남은 주동자들도 일제의 탄압을 견딜 수 없어 만주 등지로 뿔뿔이 흩어져 최근 재판기록을 통해서야 김치옥 열사 등의 존재를 확인했다”고 했다. 차를 타고 왠지 쓸쓸한 겨울 벌판을 달리니 문 열사의 고향 마을인 관음마을이 나타났다. 열사의 생가는 사람이 살지 않는 듯 마치 폐가처럼 보였다. 생가임을 알려 주는 표지판도 없어 찾기가 쉽지 않았다.전북 지역에는 19세기 말부터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견한 선교사들에 의해 일찍이 교회가 들어섰다. 남전교회는 1897년 문 열사의 고향 이웃마을인 익산 오산면 남전리에 미국인 선교사 전킨이 세운 교회다. 오산면의 위치는 익산 도심의 서쪽, 호남평야의 북쪽이며 아래로 만경강과 접해 있다. 기름진 옥답을 일제가 가만둘 리 없었다. 궁벽한 농촌이었던 익산을 일제는 신도시로 만들어 수탈 기지로 이용했다. 일본인들은 빼앗은 토지에 농장을 세워 한국인을 소작농으로 부리며 착취했다. 문 열사는 1878년 5월 19일 오산면 오산리에서 태어났다. 한학을 공부해 서당에서 훈장을 하던 열사의 인생에 전환점이 된 것은 기독교 귀의였다. 남전교회 평신도로 교회 일을 돕다 군산영명학교 보통과에 입학했다. 이때 나이가 24세였다. 훈장 경력을 인정받아 한문 교사를 겸했다. 30세 되던 해에는 목포 왓킨스 중학교에 진학해 늦깎이로 신학문을 공부했다. 열사는 이승만과 인연이 있다. 선생보다 세 살 위인 이승만은 미국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YMCA 활동을 하면서 지방 강연을 다녔는데 이때 열사와 만났다. 두 사람은 여관방에서 시국을 토론했으며 이승만의 강연에 열사는 찬조 연설을 했다고 한다. 이승만은 광복 후 익산으로 가서 열사를 찾았지만, 순국한 사실을 알고 몹시 애통해하면서 일필휘지로 순국열사비 비문을 썼다. 1911년 학교를 졸업한 열사는 상당한 영어 실력을 갖추게 됐다. 함경도 갑산의 미국인 금광에 취직해 통역사로 일한 것도 영어 실력 덕이었다. 열사는 8년 동안 근무하며 받은 적지 않은 보수를 만주와 상하이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보냈다. 금광에서 열사는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열사는 급히 고향으로 내려왔다. 독립운동을 돕던 그가 만세 시위를 주도적으로 모의한 것은 당연했다. 남전교회 집사 김치옥과 박성엽이 열사를 찾아왔다. 기다렸던 일이었다. 두 집사는 거사를 조직화하는 일을 맡았고 열사는 도남학교 학생 박영문, 젊은 교인들과 재학생들을 설득했다. 익산 인근의 교회에도 연락해 동참하겠다는 응낙을 받았다. 거사일은 솜리(이리·裡里) 장날인 4월 4일로 정했다. 사흘 밤낮을 뜬눈을 새우다시피 하며 수천 개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만들었다. 드디어 1919년 4월 4일 오전. 남전교회에 교인과 마을 사람들 150여명이 모였다.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한 묶음씩 받아 여자들은 허리춤에, 남자들은 바짓가랑이 속에 숨기고 솜리장터로 향했다. 먼발치서 지켜보았던 아낙네는 뭉게구름이 들녘을 하얗게 뒤덮는 듯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고 증언했다. 몇 시간 후 정오. 장터 네거리에 빨간 글씨로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이 펄럭였다. 교회 교인들, 천도교 지도자, 민족운동지도자들도 참가했다. 도남학교 등 수백명의 어리고 젊은 학생들도 모여들었다. 이들은 모여든 장꾼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눠 주었다. 군중은 금세 1000여명으로 불어났다. 낮 12시 30분쯤. 흰색 두루마기를 걸친, 기골이 장대한 40대 남성이 군중 앞에 섰다. 문용기 열사였다. 오른손에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들고 있었다. 열사는 우렁찬 목소리로 연설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 군중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열사는 시위대를 이끌고 수탈의 핵심부 대교농장으로 향했다. 군중은 순식간에 1만여명으로 불어났다. 농장을 지키던 헌병대는 군중이 정문으로 접근하자 공포를 쏘았다. 급기야 맨손으로 만세를 부르던 군중을 향해 실탄 사격을 시작했다. 일본인 소방대와 농장원 수백명도 칼과 곤봉, 갈고리를 닥치는 대로 휘두르고 찍어댔다.군중은 일시 흩어지며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열사는 군중을 독려하며 더 큰 목소리로 만세를 불렀다. 이때 일본 헌병이 칼을 빼 들더니 태극기를 들고 있던 열사의 오른팔을 내리쳤다. 순간 비명을 질렀으나 열사는 왼팔로 태극기를 집어 들고 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헌병은 왼팔마저 자르고는 가슴과 복부를 찔러 열사를 숨지게 했다. “여러분 여러분, 나는 이 붉은 피로 우리 대한의 신정부를 음조(陰助)하여 여러분들이 대한의 신국민이 되게 하겠소”라고 힘겹게 외치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열사의 나이 41세였다. 일제도 보고서에 “수모자(首謨者)의 1인이 절명에 이르기까지 만세를 창(唱)했다”고 적시했으니 그가 문 열사였다. 열사의 죽음을 목격한 지도자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시위대를 이끌었다. 도남학교 학생 박영문과 남전교회 청년 신도 장경춘이 총에 맞아 “억” 하면서 쓰러졌다. 54세로 춘포면의 어른이었던 ‘박참봉’ 박도현과 서정만도 총탄에 맞았다. 이충규도 순국했다. 20여명은 크게 다쳤고 39명이 체포됐다. 유족들은 일경이 방해하는 바람에 한밤중에 도둑처럼 시신을 거둬 거적에 말아 묻었다. 살아남은 주모자 가족들은 일경의 감시를 피해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며 유랑생활을 하다시피 했다.“나물 많이 캐 오세요.” 거사일 아침, 집을 나서는 노모와 아내에게 열사는 이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사망 소식을 들은 부인 최정자 여사는 남편의 시신을 거둬 뒷산에 묻었다. 피로 얼룩진 한복 저고리와 두루마기는 보관하고 있다가 해방 후 멍석에 펴 놓고 가족들과 예를 올리고 대성통곡했다. 열사가 최후의 순간에 입었던 이 혈의(血衣)는 며느리 정귀례 여사가 기증해 현재 독립기념관에 보관돼 있다. 그런데 옷소매가 잘린 흔적이 없다. 양팔이 잘렸다는 내용은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들어 있다. 이에 대해 주명준 전주대 명예교수는 “이준 열사가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할복하여 내장을 꺼내어 던지고 순국했다는 말과 동일한 경우”라면서 “과장 어린 표현을 써서 민족감정을 불러일으켰으니 터무니없다고 나무랄 일은 아니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어쨌든 여러 군데를 난자당해 숨진 것은 분명하다. 김치옥, 박동근, 전창여, 강성원 등 주동자들은 목숨을 건졌지만 체포돼 재판을 받았다. 이들은 법정에서 “우리가 조선의 독립만세를 부른 것이 죄가 되는가”라고 부르짖었다. 김치옥은 잔인한 고문으로 사경에 이르자 석방됐지만, 후유증으로 정신이상을 일으키고 반신불수가 됐다고 한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봉오동전투의 잊혀진 영웅, 최운산 장군을 아시나요”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봉오동전투의 잊혀진 영웅, 최운산 장군을 아시나요”

    ‘장군의 손녀’ 최성주가 말하는 잊혀진 장군 ‘최운산’“99년 전 봉오동전투는 당시 세계 최강이라던 일본 정규군과 싸워 이긴 빛나는 전과입니다. 굶주리고 헐벗은 파르티잔 특히 홍범도(1868~1943)·김좌진(1889~1930) 같은 영웅이 화승총으로 매복을 잘 해서 이긴 것이 아니라 우리 독립군이 체계적으로 훈련받고 무기와 군장비를 잘 갖췄기 때문에 이긴 겁니다. 수천 명에 달하는 우리 독립군이 어떻게 무장하고, 체계적으로 훈련받을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는 잊혀진 영웅 최운산(崔雲山·1885~1945) 장군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당시 사진사를 동원해 전쟁 현장을 촬영했던 준비된 전쟁이었습니다. 만주 무장독립운동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해야 하는 이유이지요.”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최성주(61) 이사를 최근 한 모임에서 우연히 만났다. 자신이 장군의 손녀라며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의 최운산 장군의 역할에 대해 설명했다. 학교에서 익히 배웠던 ‘홍범도·김좌진 장군의 영웅담’과는 결이 달랐다. 기자만 최운산 장군에 대해 모르나 싶었지만 최 이사는 “역사학자조차 최운산 장군의 역할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하기에 지난 22일 서울신문사에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에서 최 이사는 노트북을 들고와 현장에 다녀왔던 사진과 관련 서류들을 보여줬다. 이 봉오동 전투의 총사령관은 그의 형인 최진동(崔振東·1883~1941), 참모장은 최운산이고, 홍범도·김좌진은 그 부대의 연대장이었다고 말했다. 최 이사는 “그동안 우리 학계에서는 봉오동 전투 현장이 수몰됐다고 했지만 실제 전투가 있었던 곳은 봉오저수지를 10km 정도 거슬러 올라간 곳”이라고 말했다. 최 이사는 거의 해마다 전투지를 답사한다고 했다. “봉오동전투 사진사 동원한 준비된 전쟁전투 모습 3장…임정에 보냈다는 기록만”- 봉오동전투 당시 현장을 촬영했다고?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 최진동이 국민회에 보낸 공문(‘기안104’) 기록만 남아 있습니다. 그때 찍은 사진은 전해지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기록을 보면 ‘봉오동전쟁 전황 촬영사진 3매, 상해를 보낼 예정. 별지 전쟁 촬영 사진 3매는 제2남지방의 박준재씨가 전쟁 당시 실시 전황을 보고 촬영한 것이다. 이것은 임시정부로 보내서 석판으로 인쇄하여 세계에 선전하려는 것인데 보신 뒤에 반송하기 바란다.’고 적혀 있습니다. 번역해서 문서로 남아있는 것을 역사자료실에서 찾은 것입니다. 최운산 장군은 당시 종군기자라고 할 수 있는 전문 사진사를 동원해 기록을 남기도록 했던 겁니다. 그만큼 준비가 철저했던 거지요.” - 당시 돈이 있다고 무기를 살 수는 없었을 겁니다. 우리 독립군이 어떻게 무장했을까. “최운산 장군이 러시아와 무역거래를 하고 있던 관계로 지속적으로 무기를 구입해 왔습니다. 그러나 뒷거래로 수천명이 무장할 무기를 확보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을 겁니다.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우리 독립군은 소련에 배속됐던 체코 군의 무기로 무장한 겁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소련은 체코군을 동쪽 끝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귀국시킵니다. 이들이 장기간에 걸쳐 러시아 대륙을 횡단해 1918년 말에 동쪽 끝에 도착합니다. 체코군은 무기는 필요 없고,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반면 우리 독립군은 대량의 무기 확보가 절실한 상태였습니다. 무기가 있어도 돈이 없었거나, 돈이 있어도 무기를 파는 데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겠지요. 하늘의 뜻인지 최운산 장군에게 재력이 있었고, 체코군은 무기보다 현금이 더 필요했지요. 체코군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산 무기로 무장했다고 하니 우리 독립군도 당시로서는 최신의 미국 무기를 갖췄다고 봅니다.” “독립군들, 귀향하는 체코군 무기로 무장독립군들의 무기 구매 대금 출처는 최운산1920년 토지 팔아 5만원 마련… 무기 매입”- 막대한 무기 구입 대금은 어디에서 나왔나. “이 부분이 만주 무장독립운동 연구에서 가장 미진한 부분입니다. 우리 집안에서는 최운산 장군이 지원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의병 수준의 독립군 통합 부대원들을 훈련하고 무장시키기 위해 1920년 1월 최운산 장군이 석현의 대규모 토지를 5만원에 팔아 그 돈으로 대한북로독군부 부대원 전원을 완전무장시켰습니다. 당시 5만원은 전투기 한대 가격이라 합니다. 최운산 장군의 부인인 김성녀(金性女·1894~1975) 할머니가 1969년 남편의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하면서 밝힌 장비를 보면 ‘대포 10여문, 기관총 수십정, 수류탄 수천개, 장총 천여정, 권총 수백정, 실탄 수만 발’을 갖췄다고 합니다. 당시 훈련소 격인 사관연성소 병사 1인당 무장 상태를 보면 ‘소총 1정, 실탄 500발, 수류탄 1개, 좁쌀 6되, 짚신 1족이었다’는 일제의 밀정보고서도 있습니다.” - 최운산 장군, 얼마나 부자였나. “간도 제1의 거부였죠. 부를 일군 배경으로 중국이 토지 정리사업을 할 때 엄청난 규모의 황무지를 헐값에 불하받았습니다. 이를 조선 동포들과 함께 개간해 옥토로 바꿔 신한촌(新韓村)을 만들었습니다. 김성녀 할머니가 생전에 말씀하시길 ‘우리 땅은 사흘을 둘러봐도 다 못 본다.’고 하셨습니다. 1960년대 우리가 부산에 살 때 봉오동전투에 참전한 부하 한 사람이 국제시장에서 우연히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그 사람이 할머니께 인사와 우리에게 이야기하길 ‘최운산장군의 땅 면적이 이 부산의 6배였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콩기름공장·국수공장·주류공장·성냥공장·비누공장·과자공장을 비롯한 다수의 생필품 기업을 운영했습니다. 또 대곡상이자 축산업자로 한 번에 수백 마리의 소를 창춘이나 훈춘으로 몰고 가서 팔았답니다. 이 소떼와 곡물은 러시아 군대 식량으로 들어갔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이게 연결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최재형(1858~1920) 선생이 소고기를 러시아군에 공급했다고 하는데 두 분의 관계를 유추해볼 수 있겠습니다. 최운산 장군은 오늘날 삼성과 비견 되는 재벌이었지만 40여년에 이르는 무장 독립운동으로 그 막대한 재산을 거의 다 소진했습니다. 말년에 남은 것이라고는 살고 있던 집과 그에 딸린 수남촌 토성리 일대의 땅 뿐이었습니다.” “최운산… 간도 최고의 갑부이자 대지주부산 6배 넓이 땅 소유…무장투쟁에 소진”- 최운산 장군, 정확한 이름은 어떻게 되나. “일본군의 눈을 속이자면 변장이 필수였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여러 개를 썼습니다. 어릴 때는 최명길(崔明吉), 장작림 군벌에 있을 땐 중국식의 최풍(崔豊), 간도 제1의 거부로서 경제활동을 할 때는 최만익(崔萬益), 무장투쟁을 할 때는 최문무(崔文武)·최빈(崔斌)·최운산(崔雲山)을 사용했고, 러시아에서 무기를 밀매할 때는 최고려(崔高麗), 중국 장사꾼으로 위장해 첩보활동을 할 때 최복(崔福)을 사용했습니다. 8개의 이름을 가졌지만 모두 한 사람입니다. 얼마나 복잡다단한 삶을 사셨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청년 시절, 장작림 군벌서 군사지식 습득중국군 이직시 자위대 조직…私兵 100여명” - 무법천지 만주에서 대규모 재산 지키자면 자위대가 필수였겠다. “최운산 장군은 청년 시절, 중국 동북3성 지배세력인 장작림(張作霖·1875~1928) 군벌에 들어갔습니다. 전투에서 장작림의 목숨을 구해준 적도 있어 장작림의 절대적 신임을 얻었습니다. 이때 형 최진동, 동생 최명순과 함께 3형제가 중국군에 복무하면서 군사 지식과 군조직 운영을 익히며 만주군벌과 혈맹의 관계를 맺은 겁니다. 최운산은 조선인과 중국인의 다리 역할을 하면서 양쪽의 신뢰를 다졌습니다. 그러다가 1912년 최운산 장군이 중국군을 이직하고 마적떼로부터 조선인의 생명과 재산 보호 명목으로 자위부대 구성하겠다고 했을 때 장작림이 기꺼이 허락해준 겁니다. 그가 사병(私兵)을 모집할 때 1개 중대 이상의 병력이 따라 나왔다 합니다. 100명이 넘는 규모라 처음부터 정규 군대와 같은 편제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어찌보면 몇 명의 중국 사병이 포함된 이 자위부대가 대한민국 국군의 작은 씨앗일지도 모릅니다. 도독부(都督府)의 복장은 중국군과 같은 색깔이어서 잘 구별되지도 않았답니다. 독립군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자 1915년엔 봉오동 산중턱을 벌목하고 개간해 연병장과 막사를 지어 독립군들을 훈련시켰습니다. 이때가 500명이 넘었습니다.” “3·1운동 후 열혈청년들 간도로 몰려 들어6개월 과정 군사학교인 사관연성소도 창설안무·홍범도 등과 함께 대한북로독군부 창설”- 대한북로독군부 창설 과정은. “1919년 3·1운동 이후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수립되었습니다. 최운산 장군은 임시정부를 받아들이고 자신이 운영하던 670명의 자위부대를 대한민국 첫 정식 군대 대한군무도독부(大韓軍務都督府)로 재창설합니다. 그때 중국 지방정부에서 일하고 있던 최진동, 최치홍 두 사람도 대한군무도독부에 합류합니다. 사령관인 부장(府長)에 형인 최진동 장군을 추대했습니다. 자신은 참모장으로 재정 등 군대 운영의 전반을 책임졌지요. 병참을 맡은 겁니다. 동생 최치홍도 참모로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소유지인 서대파에 대한북로군정서를 창설합니다. 3·1운동 이후 간도로 들어오는 열혈 청년들은 계속 늘어났습니다. 이들을 모두 받아들여 다음해에 6개월 과정의 군사학교인 사관연성소를 십리평에 설립했습니다. 최운산 장군은 북로군정서 무장과 사관연성소 운영에 필요한 비용을 군자금으로 상당한 규모의 재산을 소진하였습니다.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언했습니다. 일본군과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치르려면 대군단을 이루어야 한다는 판단을 한 최운산 장군은 만주의 독립군 모두에게 무기와 식량, 군복 등 군자금 일체를 제공하기로 약조하여 본격적인 대통합을 이뤄냈습니다. 북만주의 대소 독립군부대가 모두 합류했고 최종적으로 안무(1883~1924)의 국민회군,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에 최씨 형제의 군대를 합쳐 독립군 통합부대를 만들었습니다. 명칭은 大韓北路督軍府(대한북로독군부)였고, 통합 서약서에 서명 날짜는 대한민국 2년 즉 1920년 5월 19일이었습니다. 국민회, 신민회, 광복단 등을 비롯한 크고 작은 독립부대가 대한북로독군부 기치로 모였습니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군인의 신분으로 전투에 임했던 것입니다.” - 봉오동전투 상황은.“통합을 이룬 대한북로독군부는 두만강을 건너 일본 헌병대를 습격하는 등 국내 진공작전을 펼치며 실전 훈련을 쌓아갔습니다. 봉오동을 중심으로 통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의 세력이 커지고 있었기에 당시 일제는 독립군 토벌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정보전으로 이를 파악한 우리 독립군은 마을 주민을 미리 대피시키고, 연대별로 각 산에 주둔하고 산능선을 따라 참호를 파고 매복했습니다. 거의 100년이 지난 지금도 봉오동전투 현장에 가면 낙엽이 가득 차있는 참호를 볼 수 있습니다. 1920년 6월 7일 새벽 일본군 1개 연대 이상의 병력이 봉오동으로 쳐들어왔습니다. 봉오동을 둘러싼 산에서 맹렬한 총격전이 벌어졌고 이어서 봉초봉 아래에선 백병전까지 벌어졌습니다. 이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억수같이 내렸습니다. 돌멩이만한 우박이 떨어지고 뿌연 안개가 앞을 가렸던 거죠. 우리 독립군이 짙은 안개와 비,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승세를 굳힐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후퇴하던 일본군이 지원부대 일본군을 독립군으로 오인해 서로 총격전을 가해 더욱 많은 사상자가 났습니다.” “봉오동전투서 적군 500여명 사살…기존보다 많아청산리전투는 봉오동전투 연장… 6일간 교전”- 봉오동 전투 전과는. “전과에서도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차이가 많이 납니다. 김성녀 할머니가 낸 진정서를 보면 ‘적군 사살이 500여명, 중상자 700여명, 경상자 1000여명입니다. 노획물자는 대포 4정, 기관총 수십 정, 장총 500여정, 탄환 수만 발에 수류탄 다수’라고 기록합니다. 홍범도 일지에도 일본군 사망자가 50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의 기록에는 여전히 일본군 전사 157명, 중상 200여명, 경상 100여명으로 축소돼 있습니다. 우리의 피해가 거의 없다고 했지만 독립군도 사망자 수십명과 다수의 부상자를 냈다고 김성녀 할머니가 증언합니다. 총상 환자 치료를 위한 의사가 부족해 애를 태웠고, 용정 제창병원에 의사를 보내달라는 공문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독립군 지도부는 주민들의 무고한 희생을 줄이고, 더 많은 독립군이 편하게 활동하기 위해 연해주로 이동할 것을 결정합니다. 4000여 명에 이른 독립군들이 부대별로 이동하던 중 일본군이 그해 10월 21일 청산리에서 따라 잡아 전투를 벌인 게 청산리전투입니다. 청산리전투는 하루 전쟁이 아니라 대한북로독군부의 여러 부대가 6일 동안 치른 전쟁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청산리전투가 별개의 전투가 아니라 봉오동전투의 연장전이라 생각합니다.” “최운산, 6차례 옥고…이름 8개 사용광복 40일 전 평양 장남 집에서 사망”- 최운산 장군, 역할에 비해 많이 잘못 알려졌다. “만주 무장독립운동이 몇몇의 영웅담 위주로 신화화 한 것이 가장 큰 잘못이라 생각합니다. 굶주리고 헐벗은 파르티잔들이 겨우 화승총으로, 청나라 및 러시아에도 이긴 세계 최강의 일본군에 승리했다는 것이 우리 역사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역사학계도 언론도 처음의 잘못된 기록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류의 논문을 낸 역사학자를 직접 만나 물어보면 ‘앞선 논문을 인용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역사학계가 정말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최운산 장군 그 뒤 어떻게 됐나. “연해주에서 자유시참변을 겪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무장독립운동을 계속합니다. 1930년대에도 우수리강전투, 나자구전투, 대황구전투, 도문대안전투, 안산리전투, 대전자령전투에 참전했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에 유학 중이던 장남 최봉우(일명 최치영·1922~2001)가 학도병 징집을 피해 고향 봉오동으로 돌아왔다가 일제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러다 죽을 지경에 이르자 장례나 치르라며 내주었습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최봉우가 평양으로 숨어들자, 아버지 최운산장군이 아들을 보러 왔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해방 40일 전인 1945년 7월5일 평양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최운산장군은 1924년~1926년 3년간 투옥된 것을 시작으로 1939년 일본 경찰서 습격과 군자금 모집, 창씨개명 거부 등으로 10개월간 감옥에 갇힌 것까지 일생동안 모두 6번 옥고를 치렀는데, 매번 심하게 고문을 당해 수레에 실려 나오곤 했습니다. 가족들도 그가 언제 감옥에 갔다 왔는지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유공자 인정 조건 뒷돈 요구에 주먹 날려1977년 서훈…동생 최치홍은 여태 안 돼”- 정부는 최운산 장군의 역할 일찍 인정해줬나. “1961년 1월 최운산이 독립유공자로 선정됐다는 통보를 정부로부터 받고 총무처로 아버지 최봉우가 갔더니 담당공무원이 ‘뒷돈’을 요구하더랍니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모든 가산을 독립군 무장에 썼는데…. 참을 수 없는 모욕감에 아버지가 그 공무원에게 주먹을 날렸습니다. 그 이후론 독립유공자 선정에 번번히 밀려났습니다. 십수년동안 미운털이 박혔던 게지요. 아버지는 생전에 ‘내가 욱하는 성질을 못 이겨 할아버지의 독립운동을 가렸다’며 후회하곤 했습니다. 그 후 할머니가 1969년에 진정서를 냈지만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 못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2년 뒤인 1977년에야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셨습니다. 같이 독립운동한 동생 최치홍은 100년이 지난 올해까지도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 못했습니다.”- 설명을 듣고 보니 김성녀 할머니도 큰 역할을 했다. “저도 할아버지의 삶을 살펴보다보니 할머니의 역할이 과소평가됐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할머니는 독립운동가를 내조한 차원을 넘어 무장 독립운동의 한 축이었습니다. 할머니가 남편의 독립유공자 선정을 위해 낸 진정서를 보면 독립운동을 내조한 정도에서는 알 수 없는 당시 북로독군부의 조직 현황과 봉오동전투의 전과를 꿰뚫고 있었습니다. 봉오동전투를 바로 앞두고 최운산 장군이 집에 계시지 않을 때 도착한 중요한 정보는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가 없어 직접 산속의 본진으로 올라가 정보를 전달했습니다. 또한 군사들이 없을 때 집으로 쳐들어 온 마적들을 향해 직접 총을 쏘고 일꾼들을 독려해 무장 강도들을 물리쳤다고 합니다. 물론 주민 부녀자들을 동원해 군복제작과 세탁 등 의복을 조달하고 식사를 준비했지만, 한 끼에 3000명분의 식사를 마련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지난해 김성녀 할머니에 대해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장군의 부인 김성여도 무장독립운동 한 축무장독립운동사, 영웅담서 벗어나야 할 때”-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가 결성됐다. “우리 5남매는 만주 무장독립 운동의 역사가 제대로 정리되기를 기다렸습니다. 후손들의 주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역사가들의 연구가 깊어지면 언젠가 역사가 바로 서리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난 여태까지 바로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잘 못된 기록이 반복되고,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저희가 직접 일제 문서를 찾고, 봉오동전투와 최운산 장군의 삶을 역사학자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반가워하면서 학술적 재조명이 필요한 일이니 기념사업회를 설립하라고 조언해주었습니다. 셋째인 제가 60대입니다. 독립전쟁의 현장을 직접 본 사람의 증언을 들은 마지막 세대일 것입니다. 우리 남매들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만주 무장독립운동의 역사를 올바로 기록하고자 뜻이 맞는 분들을 중심으로 2016년 기념사업회를 설립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집안 자랑이 아니라 수많은 독립군들이 함께 지켜낸 만주의 무장독립전쟁의 진실을 전하고 싶을 뿐입니다. 영웅담 위주의 독립운동사를 넘어서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내년이 봉오동전투 100주년이다. 계획한 행사는. “사실 최운산 장군이 잘 알려진 분이 아니라 정부 지원금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5남매가 비용을 갹출해서 학술세미나 개최나 봉오동 답사 등 필요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손주들도 나이가 들어 경제활동에서 물러나 있으니 기념사업회 활동에 필요한 기금을 마련이 어려워 필요한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못하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올해는 당시 독립군이 사용한 무기를 살펴보는 학술세미나를 열고 7월 5일 국립현충원에서 순국 74주기 추도식을 개최합니다. 100주년이 되는 내년엔 봉오동전투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행사와 최운산 장군을 연구한 책을 한 권 펴내려고 준비 중에 있습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카투사, 통금 넘겨 ‘만취’ 복귀…1개월 자택 머무르기도

    카투사, 통금 넘겨 ‘만취’ 복귀…1개월 자택 머무르기도

    주한미군에 배속된 한국군 ‘카투사’(KATUSA)들의 군무이탈 행위가 또 적발됐다. 24일 육군에 따르면 주한미군 평택기지에 근무하는 김모(24) 병장과 이모(21) 상병, 배모(22) 일병 등 카투사 3명은 지난달 20일 새벽 만취 상태로 복귀했다가 미군 헌병대에 체포됐다. 이들 병사는 전날 저녁 부대를 빠져나와 술을 마신 뒤 다음 날인 20일 새벽 1시가 넘어 복귀했다. 미군 병사도 이들과 함께 적발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부대 내 한국군 통행금지 시간은 오후 9시다. 주한미군의 야간통금 시간은 오전 1시부터 5시까지로 알려졌다. 미군 헌병이 새벽 1시가 넘어 복귀한 이들 병사를 체포한 것으로 전해졌다. 육군 관계자는 “카투사 3명은 현재 영창에 보내졌다”며 “영창 기간을 마치면 4월 초에 우리 육군부대로 원복하는 심의위원회에 회부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밖에 서울 용산기지에 근무하는 이모(21) 병장은 올 초 미군이 허락한 외박과 한국군 측에서 받은 포상 휴가를 한꺼번에 쓰는 방법으로 1개월간 자택에 머문 사실이 드러났다. 다음 달 전역 예정인 이 병장의 군무이탈 행위는 지난 2월에 발각됐다. 육군 관계자는 “지난달 중순 동두천에 있는 주한미군기지 캠프 케이시에서 근무하는 카투사 병장 5명이 군형법상 군무이탈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사건 이후 카투사 전 부대를 전수조사했다”며 “이 과정에서 두 사례가 뒤늦게 드러났다”고 전했다. 그는 “이번 전수조사에서 외출·외박 규정을 어긴 사례가 여러 건 적발되어 처벌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앞서 군 검찰은 지난달 중순 동두천에 있는 주한미군기지 ‘캠프 케이시’에서 근무하는 카투사 병장 5명을 군형법상 군무이탈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이들은 짧게는 보름, 길게는 한 달까지 부대를 이탈해 집 등에서 머문 혐의를 받고 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외박 나온 군인, 여자화장실에서 몰카 찍다 적발

    외박 나온 군인, 여자화장실에서 몰카 찍다 적발

    외박 나온 현역 육군 병사가 술집 여자 화장실에서 불법촬영을 한 혐의로 검거됐다. 18일 경기 파주경찰서와 육군 등에 따르면 지난 16일 오후 9시 10분쯤 파주시의 한 상가건물 여자 화장실에서 군인이 몰카를 찍었다는 112 신고가 접수됐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확인한 결과 해당 군인은 육군 모부대 소속 A 일병으로, 외박을 나와 범행한 것으로 조사됐다. 조사 결과 A 일병은 술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다가, 술집에 들어온 피해 여성 B씨가 화장실에 가는 것을 보고 따라 나간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A 일병은 “잠깐 만세를 한 것”이라고 진술하며 범행을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불법촬영 피해 여성인 B씨는 연합뉴스에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누군가 따라 들어온 것처럼 이상한 느낌이 들어 천장을 봤더니 휴대전화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면서 “옆 칸에 대고 나와보라고 하자 누군가 여자 목소리를 흉내 내며 ‘잠시만요’라고 했다”며 당시 상황을 전했다. B씨는 이어서 “(A씨가) 심지어 군복을 입고 있었다”며 “요즘엔 휴대전화를 군부대로 가지고 들어갈 수도 있다고 하던데, 몰카를 안에서 돌려보려고 한 건 아닌지 너무 소름이 끼치고 트라우마가 생길 것 같다”며 불법촬영물 공유에 대한 두려움도 호소했다. 경찰은 A씨의 신분이 군인이어서 바로 군 헌병대에 사건을 넘겼고, 군은 A씨의 휴대전화를 압수해 디지털포렌식 작업을 의뢰하는 등 여죄가 있는지 등을 조사 중이다. 군 관계자는 “본인의 혐의 인정 여부와 상관없이, 이번 사안에 대해 엄중하고 철저하게 조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승리, 성매매 알선 혐의 입건…군 입대 연기 가능성은?

    승리, 성매매 알선 혐의 입건…군 입대 연기 가능성은?

    승리 25일 육군 현역병사 입대…경찰 재소환 예정 ‘해외 투자자 성접대’ 의혹으로 경찰에 입건된 빅뱅 멤버 승리(본명 이승현·29)가 오는 25일 군 입대를 앞두고 있는 가운데 향후 수사 방향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승리는 오는 25일 육군 현역병사로 입대할 예정이다. 그는 앞서 지난 1월 의무경찰에 지원했지만 결과와 무관하게 육군에 입대하는 것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앞으로 승리가 입대하기까지 보름 정도 남은 셈이다. 경찰은 압수물을 최대한 빨리 분석하고 승리를 피의자 신분으로 다시 소환해 조사할 방침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지난 10일 오전 11시 서울 강남의 대형클럽 아레나에 수사관 20여명을 보내 압수수색을 벌였다. 압수수색은 약 3시간 만인 오후 2시쯤 종료됐다. 경찰은 승리의 성매매 알선 의혹과 관련한 자료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수사에 속도를 낸다는 계획이지만 승리가 군인 신분으로 수사를 받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4일 이내에 승리가 구속되면 입영이 연기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예정대로 입대한 뒤 헌병대와 군 검찰이 이번 사안을 다룰 가능성이 높다.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승리의 성접대 의혹이 담긴 카카오톡 대화 내용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자 내사를 벌여왔다. 최근에는 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승리를 입건했다. 다만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분석 결과 필로폰, 엑스터시, 아편, 대마초 등의 마약류 분석에서는 모두 음성 반응이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한 인터넷 매체는 승리가 서울 강남 클럽들을 각종 로비 장소로 이용하고 투자자에게 성접대까지 하려 했다며 2015년 12월 승리가 설립을 준비 중이던 투자업체 유리홀딩스 대표, 직원이 나눈 카카오톡 대화 내용을 공개해 파장이 일었다. 한편 승리는 지난달 27일 서울청 광역수사대 출석에 앞서 취재진에게 “저에 대한 엄중한 수사를 촉구하는 탄원서를 경찰에 제출했다”며 “하루 빨리 모든 것들이 진상 규명될 수 있도록 조사에 임하겠다”고 밝혔다. YG엔터테인먼트는 “본인 확인 결과, 해당 기사는 조작된 문자 메시지로 구성됐으며 사실이 아님을 밝힌다”라고 카톡 내용을 부인한 바 있다. 유리홀딩스도 “승리와 회사에 앙심을 품고 있는 누군가가 허위로 조작된 카톡 내용을 제보하고 있고 이는 확인 절차 없이 보도된 허위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사설] 3·1운동 100주년 아침에 되새기는 민주주의의 가치

    3·1운동 100주년 아침이다. 100년 전 선대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던 독립만세의 현재적 의미를 곱씹어 볼 만하다. 더는 식민지가 아니라고 해서, 독립된 나라에서 산다고 해서 그저 3·1운동을 과거의 일로 박제화해 역사 교과서에 가둬서는 안 된다. 정부는 2월 26일 3·1운동의 상징처럼 여겨진 유관순 열사에게 독립유공자 1등급 서훈을 추가했다. 유관순 열사 외에도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이상룡, 영화 ‘암살’의 김원봉 등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독립유공자들의 공훈 및 삶을 재조명하는 것 또한 반드시 해야 할 일 중 하나다. 3·1운동 정신의 정수는 평화와 국민 화합, 민주주의에 있다. 이는 21세기에 더 심화해야 할 가치들이다. 100년 전 오늘 서울 탑골공원 앞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됐고, 전체 인구의 10분의1가량인 200여만명이 참가한 사실 등을 학자들이 새로운 역사적 증거로 찾아냈다. 총칼로 진압한 일본 헌병대에 맞서 비폭력으로 항거했던 탓에 7509명이 숨졌고 1만 5850명이 다치는 등 희생이 컸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제국주의 식민 지배를 받던 여러 나라 민중들에게 민족자주에 대한 깊은 감화를 주었다. 특히 인도의 비폭력 독립운동, 중국의 반제 반봉건 5·4운동 등은 3·1운동에서 비롯된 도미노 효과였다. 한반도는 66년간 ‘전쟁 중단’ 상태지만, 한반도에 평화의 뿌리를 내리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평화 통일은 3·1운동 정신의 정수와 맥이 닿는다. 실제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로 시작하는 100년 전 독립선언문은 인류공영의 지혜를 담은 세계평화 선언문이다. 독립선언문 후반부에서 ‘동양평화로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 평화, 인류 행복에 필요한 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선언했다. 이는 과거 우익세력들이 강조했던 민족주의와는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음을 보여 준다. 향후 새롭게 만들어질 동북아 평화질서의 패러다임 속 한국이 해내야 할 역할을 고스란히 적시한 100년 전 가르침이다. 어제 베트남 하노이에서 만난 북미 정상은 기대했던 ‘종전선언’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하지만 한반도는 물론 지구촌 어느 곳에서도 더이상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되며 평화의 가치를 통해 공영을 추구해야 한다는 과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국민 통합의 과제 또한 3·1운동으로부터 반드시 되새겨야 할 가르침이다. 3·1운동에 나선 이들은 남녀노소, 직업, 계급, 지역, 종교의 구분도 없었다. 각자의 처지와 이해관계는 서로 달랐지만, 독립이라는 지상명제 앞에서 화합하고 일치단결했다. 진보와 보수, 종교, 노사, 남녀 등 여러 형태의 갈등과 대립이 얽혀 국가의 에너지를 하나로 모아 내지 못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크다. 각자가 가진 차이를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범국가적 과제 앞에서는 국민 통합을 이뤄 내야 한다는 당위성은 3·1운동이 우리에게 준 또 다른 교훈이다. 특히 평범한 장삼이사들이 자발적으로 떨쳐 일어났다는 점은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민주주의를 확인하는 과정으로도 인식된다. 나라의 주인은 왕이나 양반과 같은 특권 계층이 아닌, 바로 국민이라는 인식은 2016년 대통령 탄핵의 촛불집회까지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헌법 전문에서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의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밝히고 있듯 3·1운동으로부터 시작한 민주주의를 더욱 발전시키고 심화시켜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지난 100년 우리는 민족과 국가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왔다. 그 결과 변방에서 세계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경제와 문화, 정치 등에서 한국의 저력을 세계에 알리며 ‘한국식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이 아침 100년 전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화합과 평화, 민주주의의 가치를 다시 한번 되새기며 또 다른 100년을 향해 민주주의적 가치를 실천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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