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 뜨거운 61살 국회
‘국회 농성장의 차이콥스키.’
제 61주년 제헌절을 표현하는 아이러니가 될지 모른다.
한 갑자(甲子)를 돌아 맞은 제헌절이, 차이콥스키의 ‘장엄서곡 1812년’으로 더욱 민망해지려 하고 있다. 프랑스 나폴레옹군의 침공을 물리친 모스크바의 승전곡과 헌정사에 오욕의 기록을 남긴 여야의 본회의장 동반 농성이 엇박자를 내는 국회. 제헌절인 17일 오후 금난새 지휘의 경기필하모닉 연주와 여야의 본회의장 농성은 부조화의 극치를 이룰 것이다. 본회의장 앞에서 연주회가 열리는 것도, 여야가 본회의장을 동반 점거한 것도 헌정사상 최초다.
●쑥쓰러운 ‘의장배 대학생 토론회’
국회가 낯 뜨거운 자화상을 드러내고 있다. 16일 온갖 화려한 행사로 61주년을 기념하려 했지만, 그럴수록 점거·농성과 대비됐다. 국회는 이날 본회의장 맞은편 예결위 회의장에서 1710만원의 상금을 내걸고 1박2일짜리 ‘제1회 국회의장배 대학생 토론회’를 열었다. 예선부터 전국 69개 대학에서 219개팀 1300명 이상이 참여한, 전국 최대 규모였다. 주제는 ‘대한민국의 바람직한 권력’. 농성과 대치의 난장판에 학생들을 불러들여 논의하자고 하기에 쑥스러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국회 점거는 한국만의 독특한 현상”
국회 헌정기념관에선 대형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프랑스의 ‘문화 대통령’으로 불리는 자크 랑 전 문화부 장관까지 초빙했다. 그는 “다른 나라에서는 법안 처리를 저지하기 위해 이런 식으로 회의를 진행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국회 점거는 한국만의 독특한 현상인 것 같다.”는 표현이 우리 국회를 더욱 부끄럽게 했다. 학술대회의 주제는 개헌. 제 앞가림도 못하는 국회에 ‘글로벌시대의 역동적 변화와 새로운 헌법질서’란 제목의 학술대회는 어색했다.
17일에는 김형오 국회의장이 경축기념식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성과물로 삼으려 하는 ‘개헌 구상’을 천명할 계획이다.
입법부를 비롯해 각계 각층 국민대표, 주한외교사절 및 외빈 등 1600여명에게 초청장이 발송됐다. 대한민국 어린이국회, 국가재정포럼, 국민대표에 위촉장을 수여하는 초청행사 등도 마련됐다. 그러나 아무런 정치력이나 중재력도 보여 주지 못한 채 그저 개헌과 기념행사에만 몰두하는 국회의 모습에 의원들 사이에서도 비판이 제기된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김 의장이 ‘협의하고 합의하라.’는 말 빼고 어떤 정치력을 보여 준 적이 있나. 제헌절 정신을 훼손하면서 대규모 제헌절 행사로 ‘자기 정치’에 몰두하고 있지 않느냐.”고 꼬집었다. 여당 의원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오늘 낮 12시까지 두명씩 남기고 한시 철수
여야의 태도에는 변화가 없다. 제헌절을 맞아서도 ‘신사협정’을 지키지 못하는 여야는 무능·불신 국회의 전형을 보여 주고 있다. 여전히 네 탓 논쟁이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비난여론을 의식, 16일 밤 10시부터 제헌절 행사가 열리는 17일 낮 12시까지 한시적으로 양쪽 원내부대표단 두 명씩만 남기고 본회의장을 비웠다. 부끄러운 것을 알기는 아는 모양이다.
이지운 김지훈 허백윤기자 jj@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