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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드광고(외언내언)

    한때 「벗는 연극」이 우후죽순처럼 기승을 부리더니 요즘엔 신문에 누드광고가 판을 치고 있다.에로티시즘광고로 불리는 이들 알몸광고는 독자의 시선을 끌어잡는 흡인력 때문에 광고주들이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최근 일간지 전면컬러로 나가고 있는 스포츠웨어업체인 안티구아 코리아의 광고는 매우 충격적이다.백인여자 흑인남자 황인종꼬마가 전라의 뒷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이 광고는 여인의 둔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라자가구의 흑백전면광고는 발가벗은 두 남녀가 무릎을 깍지낀채 쭈그리고 앉아있는 모습을 실었다. 다분히 선정적인 포즈다.곁들여 사용한 선전문구도 「훌훌벗은 가격을 보름간 공개합니다」. 알몸광고가 처음 등장한 것은 지난해 2월,에바스화장품이 보디샴푸광고를 내면서부터.목욕탕에서의 전라의 남자 뒷모습과 여자의 뒷모습을 차례로 내보냈다.물론 온몸에 샴푸칠을 한 뒷모습이긴 하지만 이 광고는 즉각 외설시비를 일으켰으며 시민단체들은 「누드광고 중지」를 요청하고 나섰다.광고업계는 『광고의 영역을 넓히고 표현의 자유를 확인하는 계기』라고 누드광고를 옹호했다. 외국에서도 누드광고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청바지로 유명한 캘빈 클라인사가 전라의 남녀가 엉켜있는 장면을 광고로 사용하여 외설시비에 휘말린 적이 있다.패션브랜드인 게스나 베네통도 경영주의 누드를 비롯해 기묘한 모습의 남녀알몸을 게재해 사회적 논란을 야기시켰었다. 여성단체들은 알몸광고를 「섹스의 상품화」라 해서 맹렬하게 비난한다.그러나 광고주들은 이것이 최대의 효과를 가져오는 방법임을 의심치 않는다.삐삐의 월사용료가 내렸다는 광고에서 삐삐가 허리춤에 달린 청바지를 발목까지 벗겨내릴 정도였으니까….누드광고는 아직은 우리국민정서에 거부감을 심어준다.무작정 「정서파괴」는 삼가야 할 것이다.
  • 연변동포작가 류연산씨 한·중 국경르포(두만강 7백리:1)

    ◎화룡 8순노인 “강 건너 뼈 묻었으면”/중국땅에 이주했지만망향의 한 때문에 못떠난다/강너머 들려오는 고국 기차소리… 그리움 사무쳐 사연많은 두만강 민족의 성산 백두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동북으로 달려 7백리.이름하여 두만강이다.중국과 북한의 국경선으로서 중국 조선족과 북한 동포들이 강물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국적을 지닌채 살아 가고 있다.서울신문은 그 강 유역에 얽힌 사연들을 현지 연변 조선족 작가 류연산(38)씨가 엮는 「두만강 7백리」를 새로 연재한다.두만강 양안(양안)에서 한쪽은 변화의 회오리 바람속에 놓여 있고 다른 한쪽은 극도로 폐쇄된 삶을 살아야 하는 우리 민족의 이야기다.이 시리즈 집필을 위해 작가 류연산씨는 2개월 남짓 두만강 7백리를 답사했고 사진은 본사 김윤찬 차장이 촬영했다. 배낭을 등짐삼아 두만강 7백리를 굽이굽이 돌아 가노라니 깊은 정회가 가슴에 스며들고 마음은 곧 애수에 젖는다.나뭇잎이 져 버린 산야가 사뭇 허전한데 밤새 강물도 꽁꽁 얼어붙었다.물결이 넘실댈 두만강의 봄은 아직 멀어서 보이지 않는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김정구 선생의 흐느끼는 목소리에 얹혀 한민족 가슴에 설움을 심어준 이 노래는 답사길에 오른 내 가슴을 적신다.이주민 3세인 젊은 심정이 이러할진대 그 당시 조상들이 살아온 고난의 시대를 구태여 말해서 무엇하랴. 광복전 김정구 선생이 연변공연에서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르자 장내는 눈물바다로 변했다.그 이튿날 도문(오늘의 연변조선족 자치주 도문시)에서는 한 여인이 두만강에 몸을 던졌다.기약도 없이 돈벌이를 떠난 남편을 기다리다 못한 여인이 삶의 종지부를 찍었던 것이다.그만큼이나 한많은 사람들이 두만강가에서 모진 삶을 살았다다. 화룡시 노과진 노과촌(화용시 노과진 노과촌)을 찾았을 때 조창렬(85·함경북도 경선군 주을면 봉파리 태생)노인은 피맺힌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 주었다. 『부모님이 낳은 지 일곱달되는 나를 업고 이곳으로 이사왔디요.그때 증조부님은 굶어 죽더라도 조상산소를 버리고 갈 수 없다고 불호령을 쳤다지 뭡니까.막무가내로 자식의 등허리에 업혀 고향을 떠나온 노인은 운명을 앞두고 조상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수다.사람이 팔십이면 쌀벌레라는데 죽어서도 고향땅에 묻히지 못할 걸 생각하면 나는 잠이 안오우다.저 강이 야속하고 인생이 원통할 뿐이외다』 아버지 시신까지는 귀향시키고 외롭게 떨어져 늪골(노과의 원명)을 지키고 있는 노인은 쓸쓸해 보였다. 『삐익』 그 집앞 두만강건너에서 증기기관차가 끄는 열차가 기적을 뽑는다.노인은 그 쪽에 망연한 눈길을 주고는 한숨 짓는다.열차는 조선 삼형제굴을 지나 남촌굽이로 뱀같이 구불구불 흘러온다.애달프다.저 기찻길은 서울도 통하고 중국도 통하건만 고국 땅 허리의 군사분계선과 국경선이 발목을 잡고 있다. 두만강에 얽힌 32년전 19 63년 12월27일의 이야기 하나를 꺼내고자한다.무산쪽으로 달리는 99 31호 열차에서 청년 둘이 뛰어 내렸다.쇠처럼 굳은 언 땅에 나뒹굴던 그들은 벌떡 일어서면서 옷을 벗어 던지고 강쪽으로 달려갔다.그들은 얼음장이 둥둥 떠내리는 물에 서슴없이 첨벙첨벙 뛰어들었다.바로 조선 청진철도국 백암열차구 차장 김형호와 함북 무산 임산사업소 공무직장 선반공 최상현이었다.이수촌(지금의 노과진 이수촌)에서 5백여m 떨어진 두만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여자 아이들을 구하러 물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때 물에 빠졌던 여자 아이 가운데 하나가 지금 중국 화룡시 팔가자진(화용시 팔가자진) 부진장의 부인인 한친선(원명 한순자·45)이다. 19 64년 1월9일 화룡인민영화관에서는 중조 인사 7백여명이 김형호·최상현의 살신성인적 용기를 기리기 위한 대회를 거행했다.이 자리에서 한순자의 부친 한창도는 구명은인한테 감사드리는 의미에서 딸의 이름을 한친선으로 고쳐 부를 것을 약속했다.그날 저녁 연변가무단은 김형호·최상현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각색한 가극 「친선의 물결」을 공연했다. 이러한 옛날 일을 회상하는데는 나름대로 까닭이 있다.30여년전 이른바 중조 친선의 미담은 오늘날에 와서 많이 퇴색해 버릴만큼 세월이 변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다.십년 대동란으로 일컬어지는 중국 문화대혁명 당시 한때 중국과 북조선관계에 틈이 생겼다.조선의 은인들과 빈번한 편지거래를 가졌던 한친선은 처녀시절에 수정주의 조선간첩 혐의를 받기도 했다.중조관계가 완화된 후엔 연락처를 몰라 문안편지 한장 전하지 못하고 살았다. 그런데 나는 지난 연말 두만강 답사길에서 북조선에 사는 김형호 소식을 들었다.용정시 백금향(용정시 백금향)의 최몽필(48)문화잠장이 북조선에 갔다가 그를 우연히 만났다는 것이다. 『재작년 가을 웅기로 친척방문을 가게 됐드랬습니다.도문해관을 넘어 북조선 남양에 이르렀더니 뉘엿뉘엿 해가 지더군요.그곳에서 밤을 나고 이튿날 웅기행 열차를 탈 수 밖에 별도리가 없었디요.기래서 짐들을 보관시키고 갖고 간 쌀과 고기며 술을 가방에 넣고는 무작정 아무 집이나 찾아갔습니다.남양군 남양읍 42반이라고 쓴 벽돌집이었는데,방에 앉아 유심히 집안을 뜯어보다가 깜짝 놀랐댔시요.북조선 정부에서 발급한 라성교(조선전쟁 당시 물에 빠진 어린이를 구하고 희생된 중국 지원군 병사)식 영웅이라는 훈장과 중국 정부에서 발급한 상장들이 액틀속에 정히 넣어져 벽에 걸려 있었댔습니다.그 전에 두만강에서 우리 조선족 처녀들을 구해준 김형호 그 사람이었습네다.우리는 밤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습네다. 나는 김형호의 이야기를 들은 대로 화룡시 팔가자진에 사는 한친선 여인에게 전했더니 퍽 감격스러워 했다. 오늘 우리는 도문에 가면 중조교두를 마주하고 선 친선탑을 볼 수 있다.문화대혁명시기 이 자리에는 모택동 사상이 조선에 비치라는 의미에서 조선쪽을 향해 선 모택동의 거대한 동상이 세워졌었다.문화대혁명이 끝난 70년대 말에 모택동 동상을 폭파하고 거대한 두 손이 악수하는 모양의 친선탑을 세웠다.자초에는 중국과 조선의 혁명적 친선을 상징하는 뜻이었으리라.하지만 시대의 발전에 따라 이제는 그 이미지가 폭을 넓혀 두만강 건너 한반도전부를 포함하게 되었다. 연변의 친선탑은 군사분계선에 의해 대립된 남북한 통일의 그날을 고대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작가약력 ▲중국 길림성 화룡시 서성진 북대촌출생 ▲연변대 조선어문학부 졸업 ▲중산대 철학부 연수 ▲단편소설「푸른매」로 문단데뷔,「아 쪽박새」「인생숲」 등 중·단편소설 60여편 발표 ▲「해란강」「청춘무대」등 문학상과 전국소수민족 우수도서 편집상 수상 ▲현재 연변작가협회 이사,연변조선족 문화연구회 회장,연변 인민출판사 문예부 편집위원
  • 경주 금령총 출토 기마인물상토기(한국인의 얼굴:17)

    ◎미적감각 뛰어나고 이목구비 뚜렷/마상의 인물·말·말갖춤 기묘하게 조화/말탄 종붙여 사후 편안한 저승길 배려 우리나라 고대 기마인물상 토기 중에서 미적 감각이 뛰어난 걸작은 아무래도 경북 경주시 노동동 금령총 출토품일 것이다.그래서 일찍 국보(제91호)지정을 받았다.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이 유물은 주인과 종이 한쌍을 이루고 있다. 국보답게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신라 조형예술품이다.마상의 인물과 말,말갖춤이 기묘하게 조화되었다.고개를 들어 머리를 뒤로 약간 젖힌 주인공은 의젓한 자세다.관이 앞으로 흘러내리는 것을 미리 막을 요량으로 머리를 젖혔다는 생각이 들 만큼 관이 살짝 얹혀있다.관은 앞뒤가 뾰족한 보관인데,끈을 달아 턱에 매달았다. 머리를 젖힌 탓에 눈은 내리깔린 모습이다.눈이 기다란 것으로 미루어 치떴더라면 꽤나 큰 눈이었을 것이다.코는 굵고 높게 표현되었다.입은 아주 작지만 또렷하다.그러고 보면 이목구비가 분명한 인물상이라 할 수 있다.입은 옷은 확실치 않으나 가로 세로로 띠를 둘러 말을 타는데 필요한 복장을 제대로 갖춘 듯 싶다.가죽신발을 신은 발을 발거리(자)를 살짝 걸쳤다. 말은 통통하고 작지만 말갖춤은 화려하다.장식이 붙은 가슴걸이,띠드리개가 달린 말치끈,재갈멈치,깃대꽂이(기생),말방울 등이 그것이다.가리개가 뚜렷한 안장을 언치 위에 얹고 다래(장니)를 늘어뜨렸으니,대단한 말치장이다.말발굽에 다는 신발까지 신겼다.이 기마인물상이 신라 기마풍속과 마구연구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까닭을 알고보면 이같은 말갖춤에 있다. 이 기마인물상토기가 나온 무덤은 고신라시대 고유의 무덤 형태인 AD 5세기쯤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1924년 우메하라(매원말치)라는 일본인 학자가 발굴한 무덤이다.이 때에 기마인물상토기 한쌍 말고도 구슬을 박은 금방울 드리개(수하식)가 달린 금관이 발견되어 금령총(금방울무덤)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말과 관련한 유물로는 금동안장틀,발걸이 등이 출토되었고 배모양토기(주형토기)한쌍도 나왔다. 금관과 관드리개·관모·금제귀고리·목걸이·금제허리띠와 띠드리개·금제팔찌·금동고리칼(김동환두대도)등은 주인공이 몸에 지니고 묻힌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밖에 철제무기류·금동제 합·청동거울을 거두었다.무덤 자체는 규모가 작았는 데도 이처럼 많은 유물이 나와 무덤에 묻힌 주인공은 나이가 어린 지배자의 후예로 여겨왔다.널의 크기(세로 1백50㎝,가로 60㎝)도 역시 작아 이를 뒷받침 했다. 금령총 출토 기마인물상토기는 일찍 이승을 하직한 무덤의 주인공을 위해 만들었을 것이다.다시 말하면 무덤의 주인공을 말에 태워 저승길로 편히 보내고자 하는 염원을 담았다는 이야기다.거기다 말을 탄 종 한사람을 붙여주어 더욱 편한 저승길이 되도록 배려했다.무덤에서 나온 배모양토기도 똑같은 의미를 지닌 유물이다.배 또한 사람을 태울 수 있으니까….이 토기의 배고물(선미)에는 성기를 내민 알몸의 뱃사공이 노젓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신라 신화에 등장하는 말은 하늘과 교통하는 영물이다.초자연의 세계와 감응하거나,또 승천할 수 있다고 믿었다.말은 「삼국유사」박혁거세 신화에서 찾아지는 동물이기도 하다.
  • 법의학 쌍벽「법정대결」싱겁게 끝나/부산 국교생 유괴살해공판 스케치

    ◎허리수술 이교수 들것에 누워 증언/검찰­변호인 막판까지 유·무죄 공방 ○…부산 강주영사건 결심공판이 열린 20일 부산고법 제103호 법정에는 개정전 30여분전부터 피고인들의 친인척을 비롯,경찰·검찰 등 4백여명의 방청객들이 자리를 꽉 메워 이번 사건에 대한 큰 관심를 반영. 이날 결심공판에서 첫번째 증인으로 나선 서울대 법의학교실 이정빈교수가 허리디스크 수술로 몸이 불편한 점을 고려해 재판부가 고등법원 2층 204호 소법정으로 자리를 옮겨준 배려로 들것에 누운채 2시간동안 신문에 답변.증언에 앞서 이 교수는 『2차 감정결과를 컴퓨터에 입력해 놓았으나 이날 증언자료를 출력하다 조작실수로 애석하게도 감정결과 데이터가 모두 지워져 버렸다』며 『빠른 시일내에 다시 정리해 2차 감정결과를 법정에 제출하겠다』고 답변. ○…이날 검찰측과 변호인측 증인으로 나온 서울대 법의학교실 이정빈교수와 고려대 법의학교실 황적준교수는 법의학계의 양대산맥으로 유전자감식에 대한 과학적인 실체규명을 놓고 불꽃튀는 공방이 예상됐으나 이교수가 자신의 판독과정에 오류가 있었다는 점을 인정함에 따라 싱겁게 끝나. 한편 피고인측의 박근수 변호사는 이교수가 유전자판독에 일부 잘못이 있었다고 시인하자 『유명 대학의 교수가 한생명의 목숨이 달려있는 이같이 중요한 사건에 대해 무책임하게 잘못된 자료를 함부로 내놓을 수 있냐』며 이교수를 신랄하게 비판. ○…재판부는 이날 지난달 24일 있었던 구형공판에서 피고인들의 최후진술및 변호인의 변론이 충분히 개진됐던 점을 지적,검찰과 변호인측이 간단히 변론을 해줄 것을 요구. ○…그러나 변호인측 『처음부터 경찰의 초동수사가 잘못돼 무고한 시민을 범인으로 몰아 세웠다』며 『쟁점이 된 사진조작여부와 유전자 감식결과는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공판과정에서 드러났다』며 이들에게 당연히 무죄가 선고돼야 한다고 목청. ○…반면 검찰은 『변론재개이후 제출된 자료중 가장 의미있는 것은 유전자 감정결과』라고 전제,『자료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보면 이들이 진범이라는게 명확해진다』며 1차 결심공판 때의 형량을 그대로 적용해사형과 무기징역을 각각 구형.
  • “중소제조업이 경제의 뿌리”/강선중(중기인 발언대)

    경제의 뿌리는 제조업이다.그중에서도 중소제조업의 기반이 얼마나 튼튼하냐가 가장 중요하다. 우리 경제는 30여년간 고도성장을 해오며 규모는 커졌으나 뿌리가 불안한 구조가 됐다.물론 과거 대기업 위주의 경제정책이 불가피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중소기업이 점점 기반을 잃어가는 것 또한 사실이다.우리 경제를 신체에 비유하면 머리만 있고 허리는 없는 상태인 셈이다. 중소기업정책은 적어도 10년 앞을 내다보고 근본적인 치유책을 세워 강력히 추진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구호만 있고 실천은 없는 용두사미가 돼 문민정부 이전의 전철을 밟을 우려가 있다. 문민정부가 중소기업의 중요성을 인식,육성방안을 강구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예전처럼 일과성 자금지원과 같은 미봉책이 돼서는 근본적인 치유가 어렵다.중소기업이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야 나라 경제가 경쟁력을 갖추게 된다. 이같은 환경을 만들려면 생산직 사원의 인력난 해소와 대기업보다 상대적으로 불리한 중소기업의 두뇌인력 확보,대기업과의 협력관계문제가 해결돼야 한다.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힘을 합쳐 경제를 이끌어가도록 해야 중소제조업이 발전할 수 있다. 이탈리아와 같은 나라는 정치권이 부패해 정정이 불안하고 경제가 악화되고 있지만,그래도 제조업의 80%이상을 차지하는 중소제조업이 튼튼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전문기업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법인세감면과 금리인하 및 공장부지를 지금의 절반정도의 값으로 조성하는 등 중소제조업을 하는 기업인이 의욕을 갖고 사업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 이데올로기는 무너지고 경제가 국력을 대변하는 시대가 왔다.경제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뿌리가 되는 중소기업부터 튼튼해야 한다.그것이 경쟁력을 키우고 세계화로 나가는 길이다.
  • 남성 정장/체형별 멋내기 이렇게

    ◎긴허리/웃옷 길지않고 바지는 홀쭉하게/비만형/품 여유있게… 조끼 곁들이면 “맵시” 「성공하고 싶으면 첫인상에 투자하라」­남자들에게 있어서도 옷차림은 전체적인 인상을 좌우한다.키가 크고 어깨가 떡벌어진 역삼각형의 체형에 고급정장차림을 한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보다도 시간을 조금 더 들여서 자신의 체형에 가장 잘 맞는 옷차림을 개발하는 것은 어떨까. 다리가 짧거나 어깨가 빈약해 왜소하게 보이는 남성들도 자기 체형의 단점을 파악,옷차림에 조금만 신경을 쓰면 오히려 「옷 잘 입는 남자」로 통하게 될 수 있다.남성복업체인 서광모드가 마련한 가이드북은 이런 몇가지 「체형별 옷차림」요령을 알려주고 있다. 허리가 길어 상대적으로 다리가 짧게 보이는 체형을 가진 사람은 전체적으로 일자형의 느낌이 나도록 옷을 입는 것이 좋다. 긴 허리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신사복 정장 상의의 길이가 히프선 아래까지 길게 내려오지 않도록 하며 어깨선이 너무 넓은 것은 피하도록 한다.여기에 기본적인 직선 실루엣의 스트레이트형 바지나홀쭉한 느낌을 주는 담배파이프형 바지를 입으면 좋다.세로줄 무늬의 바지도 효과적인 연출법.상·하의를 따로 조화시키는 세퍼레이트 슈트도 시선을 분산시켜 보이게 하므로 바람직한 차림이다.작곡가 안익태씨는 다리가 짧은 동양인의 단점을 통이 약간 좁은 바지로 보완해 멋쟁이로 불린 바 있다. 아랫배가 나온 「비만형」도 신사복의 옷맵시를 살리기 어려운 체형. 너무 꼭 맞는 옷을 입어 몸매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면 뚱뚱한 느낌이 강조되므로 항상 자신의 치수보다 약간 여유있는 품을 입어주는 것이 좋다.뻣뻣한 질감을 지닌 소재,큰 무늬가 있는 옷이나 가로확대형의 스타일은 피하도록 한다.조끼를 곁들여 스리피스로 입어주면 아랫배가 시각적으로 가려질 수 있으므로 한결 옷맵시가 살아난다.
  • 키질 천불동/무자트강 40m벼랑위 석굴236개(서역문화기행:10)

    ◎석가 고행 그린 미륵설법도 등 “벽화의 보고”/인도불교문화 동점 중간역… 쿠차·위구르·중국 3가지 문자·풍속 엿보여 쿠차에서 키질천불동을 찾아가는 73㎞는 감탄의 협곡이었다.쿠차에서 서쪽 바이청(배성)까지 그 중로에는 두개의 천불동이 있었다.기암절벽을 병풍으로 두른 염수 계곡을 따라 잠시 북상하면 문득 뻘겋고 황량한 촐타크산을 만나는데 그 바른쪽에 쿠무투라(고목토랍)천불동이 열린다.이곳 사람들은 「아래쪽 천불동」으로 부른다.여기서 다시 미국의 그랜드캐니언을 방불케하는 도깨비 형상의 뻘건 바위의 협곡을 빠져나오면 활짝 트인 고비사막.그 건너편으로 하얀 눈 모자를 눌러 쓰고 서쪽으로 달리는 천산산맥과 동행한다. 거기서 만난 고비사막 그 대부분은 회백색의 황량이지만 쿠차강 언저리는 기름진 초원이었다.바른편으로 하얀 천산,왼편으로 빨간 촐타크산,그렇게 선연한 색채의 무한속을 덜커덩거리다 필자는 불현듯 서울에 두고온 대칸짜리 집 한채와 반생을 넘게 일심전력 주워모은 만권의 책이 아침 햇살에 희끈거리는 먼지에 지나지 않다는 생각이 났다. 다시 좌회전,촐타크산의 지맥인 밍우타크산(명옥달격산)의 허리를 넘어 서면 동에서 서로 흐르는 무자트강(목찰제하)이 보인다.산과 강사이에는 기름진 총림에 갈대가 우거졌고,그 북쪽 벼랑 40m쯤의 높이로 비둘기집처럼 네모난 석굴들이 일렬,혹은 이렬·삼렬 횡대로 서 있는데 그 2백36개의 석굴군을 통틀어 「키질천불동」으로 불렀다. ○모래돌 퇴적 벼랑이뤄 그것들은 몇 만년전 모래돌이 퇴적한 벼랑이었다.그것들이 석굴로 개착된 것은 기원1∼2세기 동한후기,불교의 동점때 시작해서 13세기 이슬람교에 밀려나기까지 1천여년에 걸친 일이다.바로 승려와 불도들이 불상을 모시고 종교의식을 올리는 불전으로서의 지제굴,승려들이 기도하면서 고행하는 선굴,그리고 승려들이 생활하는 승방으로서의 비가라굴,그리고 물건을 저장하는 창고굴등의 구실을 했었다. 키질석굴은 카슈가르에 남은 삼선동보다 약간 늦지만 돈황의 막고굴보다 1세기 이상 앞선 것으로 판명된 중국서북지역 최초의 천불동이었다.그 규모나 가치로 보아돈황의 그것보다 초라하고 엉성하지만 키질천불동의 석굴 양식이나 벽화의 내용,기법에 있어 인도의 불교문화가 동점하는 중간역이 분명했다.그속에 쿠차·위구르·중국등의 세가지 문자와 풍속이 출현하는가하면 서역의 간다라미술의 동점이 역력했다.예를 들어 타원형의 얼굴에 가는 눈썹과 높은 코,넓은 턱에 엷은 입술,그리고 물결치는 헤어스타일,그러한 불상이 곧 간다라의 그것이었다. 석굴은 2㎞의 벼랑에 동서로 분포되어 있었다.그 가운데쯤 남북을 움푹 자른 작은 골짜기를 중심으로 서쪽에 81개,골짜기에 55개,동쪽에 1백개의 석굴이 분포되었는데 형체가 온전하거나 벽화를 보유한 것은 1백군데에 미치지 못했다. 석굴의 양식으로 볼때 그 절대다수가 지제굴이었는데 지제굴은 인도에서 전래한 원초적인 형태로 석굴의 안쪽에 기둥을 두고 기둥뒤로 반원형,기둥밖으로 사방형,곧 말굽모양의 중심주형과 다만 네모뿐인 방형,리고 불전을 전후 2개실로 나뉘고 전실 중앙에 입불을 모신 대상형 등 세가지가 있는데 중심주형으론 4호·7호·8호·13호·17호등 40개굴,방형으론 3호·9호·14호·39호·40호등 23개굴,대상형으론 47호·48호·60호·1백36호 등 4개굴이 있었다.용도와 내실을 갖춘 승려의 생활 공간인 비가라굴로 2호·5호·6호·10호·15호 등 31개굴이 있었다. 그러나 키질 천불동의 영혼은 석굴에 있지 않고 거기 벽면마다 그려진 벽화임을 누구나 부인하지 않는다.그 벽화가 자그마치 1만㎡에 달했다.그중 가장 보편적인 주제로 석가모니 전생에 노루나 곰·토끼등 짐승이 되었던 사적을 그린 본생고사가 70여종,석가모니의 일생에 있었던 각양각색의 형을 그린 불전고사가 60여종,다시 인과보응의 설법을 도해한 인연고사가 40여종이 있었다.이밖에도 약간의 천궁기락도·비천도·동물도·천상도 등이 있었지만 그림 자체가 불법을 설명하는 시각적인 강론인만큼 그 중요성은 말할 나위가 없다. ○오현의 구자비파 발견 필자는 서쪽 벼랑의 석굴부터 순례를 시작했다.그 최서단의 8호굴은 중심주형 지제굴로 높이 6m쯤의 비교적 큰 석굴이었다.비록 그 벽화의 대부분이 벗겨지거나 탈색되었지만 마름모의 무늬,곧 능격화아래 희미하게나마 오현의 비파,곧 당시에 나오는 구자비파를 발견했을 때의 감격은 대단했다.안내자의 손전등을 빌려 그 높은 벽면을 열심히 비추었지만 오현은 더욱 가물가물 침침한 것이 안타까웠다. 8호굴과 비슷한 서쪽 벼랑을 사다리로 10m쯤 올랐을 때 거기 17호굴이 있었다.키질에서는 특굴로 알려져서인지 그 입장료도 곱으로 비쌌다.거기는 키질 특유의 문양인 마름모 무늬의 천장 아래 정병을 가진 미륵보살이 많은 협시 보살을 거느린 「미륵설법도」를 비롯해 석가모니의 생전 고행을 그린 본생고사가 널려 있다. 17호굴의 아래로 역시 특굴로서의 38호굴은 「음악동」으로 불릴만큼 많은 보살이 피리·공후·북·비파등의 악기를 들거나 원형의 천장에는 기다란 낙천도가 흐르는 선율처럼 그려져 있었다.그런가 하면 선연한 마름모 바탕에 두마리 꿩의 「쌍치도」도 눈에 띄었다. 다시 그 옆으로 나란히 있는 47호굴과 48호굴은 모두 대상형의 지제굴이었는데 18m가 넘는 높은 석굴속에 16m의 불상이 버티고 서 있고,그 좌우로 다섯렬의 좌불들이 빽빽했지만 휑하게 쓸쓸한 공간에서 망망했던 찰나,필자는 그 왼쪽 벽면에서 호랑이에게 몸을 바치고 그 먹이가 되는 「사신사호」의 본생고사에 옷깃을 여밀 수밖에 없었다. ○독일인이 훔쳐간 흔적 서쪽 벼랑 중앙쯤의 76호굴은 궁융굴,석굴은 직방형이지만 천장은 활모양의 반원형,그런데 그 천장엔 공작의 현란한 날개만 남아 있었다.물론 독일사람에게 절도당한 것이다.이 천장에 저토록 현란한 공작의 날개가 온전한 모습으로 거드름을 펼 수 있더라면 얼마나 광채로울까. 바로 그 옆에 대상형 지제굴 77호굴.그 널따란 석굴의 천장은 너울너울 신나게 춤추는 보살의 무기도,격렬한 선율을 타고 무녀의 귀고리·면사·스카프·치마등이 물결치고 있었다.그리고 후실의 용도에는 꿩·양·사슴·오리·말·호랑이·원숭이등 열한가지 동물이 칙칙한 색상으로 생동했다. 그 옆으로 80호석굴,거기 본생고사와 인연고사에는 한마당 지옥이 그려졌는데 석가모니 앉은 땅밑으로 누군지 사람의 머리를 불로 태우는 끔찍한 장면이 자못 리얼했다. 이밖에 화랑식인 석굴로는 석가모니일생의 각종 형상을 종합한 불전고사 50여폭의 1백10호굴과 호랑이·사자·사슴·개·오리·꿩·토끼·뱀·말·곰·기러기등 열여덟가지 동물이 사실적으로 혹은 인상적으로 그려진 2백24호 굴은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키질천불동에서 잊을 수 없는 두 사람이 있다.그 하나는 인도사람으로 정승의 자리를 마다하고 쿠차로 도망왔던 구마라옌(구마라염)의 아들인 구마라주바(구마라십·Kumarajuva 344∼413)가 여기서 나서 출가하여 「대품반야」,「법화」,「유마힐」 등 74부 3백84권을 중역함으로써 남조의 진체,당의 현장등과 함께 중국 삼대불경번역가로 지위를 굳힌 사람이다.마침 지난해 가을 9월17일부터 키질천불동에 있는 키질석굴연구소에서는 그의 1천6백50주 탄신을 기념하는 국제세미나를 개최하고 그 동상을 세웠다. 또 하나는 우리 교포 화가인 한낙연씨(?∼1947).1946년 이곳에 와서 벽화를 임모하다가 결국 석굴의 미술을 고증하는 전문가가 되어 오늘의 69호굴을 발견하고 각 석굴의 벽화를 통일,정리하여 일련번호를 만든 공을 남긴 사람이다.두번째의 정리작업을 마치고 돌아가던 1947년6월,그는 비행기사고로 조난당하고 지금 10호석굴에는 그의 작업일지가 석각되어 있다.
  • 조선족 장단점/최인학(연변 조선족 1백년:15·끝)

    ◎“상다리 휘게” 흥청풍습 버려야/“교육열 높고 가장 예의바른 민족이다” 평가 연변조선족 100년 이 연재를 통해서 중국조선족의 보편적인 생활문화를 관찰해왔다.나름대로 객관성을 가지고 평가하려 했으나 현지답사와 자료의 부족으로 소홀히 다루어진 분야가 있었다고 생각한다.국내를 다루는 문제라면 막힐 때 달려가거나 전화로도 확인하는 방법이 있었겠지만 연변은 사정이 다르다.그리고 또 하나 유의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은 국내를 보는 잣대로 조선족을 보아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중국조선족은 엄격히 말해서 우리 민족이면서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다.한족을 포함한 56개 민족중 하나의 민족이다.국내인들 중에는 중국조선족은 삶터를 중국에 두고 있기 때문에 성격이나 생활습성이 중국과 같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물론 중국화하려는 노력은 꾸준히 있어왔고 차세대로 갈수록 그러한 경향은 더욱 증폭될지 모르겠지만 한족과 조선족 사이에는 현격한 성격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문화적으로 우수 56개 민족중에서도 한족이 가장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앞섰다고들 한다.그러나 얼마전 곤명에서 개최된 중국 최초의 소수민족 국제연구토론회에서는 조선족이 가장 문화적으로 우수하다는 평을 받은 사실이 있다.물론 과학적 뒷받침이 어느 만큼 입증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몇차례 중국을 답사하는 동안 중국인 학자를 많이 사귈 수 있었다.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조선족의 뛰어남을 말해주었다.평가는 비교적 고무적이었다. 「조선족은 교육열이 높다」,「조선민족은 노인을 극진히 대하는 경로사상이 투철하다」,「조선족은 예의 바르고 복장이 단정하다」는 정도의 찬사는 흔히 듣는 상투적 인사말 치례다.물론 이러한 찬사를 들을 때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그러나 기탄없이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사이라면 좀더 심층적인 말이 오갈 수 있다.그래서 짓궂게 더 물어보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음식·의복 사치 심해 누구와 비교해서 뛰어나단 말인가? 한족(한주)과 비교해서는 어떤가?를 되풀이 물어보면 결코 한족보다 우수하다는 말이 아님을 이내 알 수 있었다.소수민족들중에서 상위권이라는 것이다.「그럼 그렇지,설마 저희보다 우수하다고 할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퍼스널리티문제로 깊이 이야기하다보면 그들의 입을 통해서 『조선족은 소비성향이 있다』는 말을 듣는다.아마도 먹는 것에 많은 투자를 하는 조선족,손님대접을 할 때 실컷 먹고 남아야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식사풍토가 그들에게는 소비성향으로 비쳤을 것이다.계절에 따라 자주 갈아 입는 의복을 보고 「겉치레가 심한 조선족」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사실 중국서민들은 옷을 갈아입는 법도 별로 없고,꾀죄죄하게 입기가 일쑤다.먹는 것도 우리에 비하면 보잘 것 없다.중국인 입장에서 우리 식문화를 보면 우리쪽이 훨씬 소비성향이 짙은 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뉴욕이나 요코하마·서울의 차이나타운에서 부호가 된 화교들은 모두 이러한 생활차이에서 축적된 부라고 할 수 있다. 다음 「조선족은 성급한 편이다」라는 말을 듣는다.전성호씨가 쓴 「조선족과 한족의 생활문화비교」라는 글 속에 이런 대목이 있다.「확실이 한족들은 모든 일에서 조선족처럼 서두르지 않고 느리다.밭김을 맬 때도 그들은 조선족처럼 자루가 짧은 호미를 쥐고 허리를 굽힌 채 발딱거리면서 매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키만큼 긴 자루의 호미를 쥐고 꿋꿋이 서서 서로 잡담을 해가며 김을 맨다.밥 먹을 때도 그들은 조선족처럼 말없이 자기 몫을 먹어치우고 입을 닦고 일어서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이야기하며 천천히 먹는다. 중국인의 대명사가 「만만디」라는 것은 세계가 인정하고 있다.서두르지 않는 태도를 두고 대륙적 기질이라고 한다.서두르긴 해도 약삭빠르게 서두르면 국물이라도 있지만 실속없이 서두르는 것이 반도기질이다.더 약삭빠르게 서두르는 것은 섬기질이다.일본은 약삭빠르게 서두른 탓으로 경제가 앞섰다.물론 이러한 토양기질차는 과학성이 없는 스테레오타입이다. ○천한 직업 기피 뚜렷 「천직을 기피하는 조선족」이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곰곰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조선족이 사는 연변에서도 돈줄이라 할 수 있는 건축업·탄광업·임업등에는 조선족보다는 한족이 지배하고 있다.이는 천직을 피하려는 조선족의 성향 때문이라고 본다.천하고 힘든 노동을 기피하는 관계로 조선족이 지배해야 할 중요경제분야가 한족의 손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이상 몇가지 부정적 심증을 엿듣긴 했지만 이게 어디 조선족만의 문제인가.조선족인들,우리민족의 핏줄인 것을.그래서 우리 민족인 이상 중국에 산다고 중국인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한국민족이 어디를 가나 현지문화에 적응하는 속도가 중국인보다,일본인보다 느린 것은 확실하다. 한국인의 성급한 민족성은 단점도 되지만 장점도 될 수 있다.이 성급함을 긍정적으로 유도할 때 새 개혁에 빨리 적응할 수 있었고,잿더미에서 경제회복이 이루어져 세계무역국이 될 수도 있다.고쳐야 할 점은 한국인의 겉치레와 소비성향이다.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차려야 직성이 풀린다는 것은 이미 전세기적 산물이다.하루속히 개선의 필요가 있다.손님대접을 미덕으로 여기는 데서 흥청망청 먹어치우는 식문화가 생겨났지만 이제 물질적 손님대접의 시대는 과거의 산물이 되었다.건전한 식생활의 식문화가 하루속히 정착돼야 할 것이다. 중국조선족도 예외는 아니다.분명 한족(한주)의 라이벌이며 경쟁상대인 조선족이 자존심을 살려 보다 예절 바르고 지혜스러운 중국조선족이 되어주기를 기대하여 마지 않는다.
  • 설 상차림/전통음식으로 정갈하게

    ◎윤숙자 교수가 말하는 상차림 메뉴와 마음가짐/조랭이 떡국/절반 굵기 떡 뽑아 허리에 칼집/밤·대추초/껍질벗긴 밤·대추를 꿀에 조려 전통명절 설이 사나흘 남짓하다.이번 주말엔 온 가족이 함께 집안팎을 깨끗이 정리,명절맞이 채비를 하고 주부들은 장보기를 서둘러야 한다. 배화여전 전통조리과 윤숙자 교수는 『많은 주부들이 명절때마다 무슨 음식을 준비해야할까 고민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올 설엔 사라져가는 우리의 전통 음식들로 정식 명절 상차림을 해보라』고 권한다. 예를들면 그냥 평범한 떡국보다는 개성지방의 전통 설 음식으로 가느다란 떡의 굵기가 맛깔스럽게 느껴지는 조랭이떡국이라든가 집에서 만드는 일이 적어진 약식과 인절미를 비롯,화양적·원소병·밤초와 대추초,각종 다식류 등이 그런 종류에 속한다.또 새해 첫날 귀밝이술이라 하여 남녀노소가 모두 한잔씩 마셨던 세주도 청소년들에게 음주문화를 가르친다는 차원에서 한번쯤 재현해볼만 하다고 밝힌다. 윤교수는 특히 명절 연휴에 여행을 가느라 간혹 콘도에서 차례를 모시는가정이 있다며 자녀들의 예절교육을 생각해 설날만큼은 예를 갖춰 정중히 집에서 차례를 모신후 친척 어른들을 찾아뵈며 인사를 드리는것이 옳다고 역설한다. 윤교수의 도움말로 전통 설 상차림 메뉴를 알아본다. 먼저 조랭이떡국은 일반 가래떡의 절반 굵기로 떡을 뽑아 약간 따뜻할때 1·5∼2㎝ 길이로 자른후 곧추세워 가운데를 누르듯하여 살짝 칼자국을 낸다.이때 칼은 대나무칼을 이용하는데 그렇게하면 허리가 잘록 들어간것이 마치 누에고치처럼 모양이 아주 예쁘다.떡은 흰떡외에 약식과 인절미를 마련하고 전유어는 고기와 당근 움파에 통도라지를 끼우는 화양적으로 준비한다. 설 음식 가운데는 손님맞이 술안주상의 용도로 편육도 뺄 수가 없는데 양지머리나 사태를 펄펄 끓는물에 삶아건져 보자기에 싸서 무거운것을 눌러 물기를 뺀다음 얇게 저며 내면 맛이 아주 담백하다.녹두를 찬물에 불려 믹서에 갈아 고사리 돼지고기 숙주 등을 넣어 빈대떡을 부치고 나물은 고사리 도라지 시금치 등 삼색으로 장만한다. 볶은깨와 흑임자 콩가루 송화가루 녹말가루를 조금씩 준비,꿀이나 조청에 반죽,약과틀에 박아 각색의 약과를 만들고 밤과 대추의 껍질을 깨끗이 벗기고 꿀이나 설탕물에 조린 밤초와 대추초도 만들어 한두개쯤 먹게하면 명절 분위기가 고조된다. 음료는 식혜와 수정과·유자화채 가운데 준비하고 찹쌀가루를 경단처럼 익반죽한후 동그랗게 빚어 가운데 잘게 썰어 설탕에 조린 대추를 소로 넣고 다시 오무려 끓는물에 삶았다가 찬물에 잠깐 식혀 시원한 꿀물에 잣과 함께 띄워내는 원소병도 한번쯤 시도해볼만 하다.
  • 설빔 한복/화려함 보다 입기 편해야/물빨래 가능한 화학섬유가 무난

    설에는 우리옷을 입어보면 어떨까.고유명절인 설을 앞두고 입기 편하고 만들기 쉬운 우리옷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고 있다. 우리옷협회 회장 이리자씨는 『설에는 화려한 예복보다는 활동성이 좋고 간편한 생활복으로 한복을 입는 것이 바른옷입기』라면서 『생활복인 만큼 물빨래가 가능하고 질감이 좋은 화학섬유로 된 옷이 무난하다』고 말했다.특히 여성들의 경우 허리끈을 하나 준비해 간편하게 추스리고 일을 하는모습이 보기좋다고 귀띔한다. 요즘에는 금박,수,그림 등 화려한 문양을 쓰지 않고 한복지의 바탕무늬를 살린 전통적인 형태의 복고풍 한복이 인기를 끌고 있다.색상도 차분한 중간색으로 전통적인 색상을 애용하는 편.어린이들의 설빔에는 조그만 복주머니를 매달아 주거나 여자아이들에게는 머리에 씌우는 아얌같은 장신구도 설분위기를 돋우는데 좋다. 지난 10여년간 우리의 것 찾기운동을 해온 이기연씨(민족생활문화연구소 소장)도 우리옷의 맵시를 살리면서도 일상생활에 전혀 불편함이 없도록 만들어진 옷을 선보여 젊은층들로부터 좋은반응을 얻고 있다. 여성 저고리의 길이를 허리선까지 늘리고 고름대신 매듭을 달았으며 소매폭도 시원하게 줄였다.치마는 단추로 허리폭을 조정할 수 있도록 통치마로 만들었고 길이도 발목 윗부분까지 잘라 치렁치렁한 감을 없앴다. 남자옷도 바지허리에 고무줄과 끈을 달아 입고 벗기 편하게 만들었으며 바지주름을 고정시키고 끝단에 단추를 달아 대님을 매는 번거로움도 없앴다.설빔가격은 시중옷보다 훨씬 싸 한벌에 10만원 안팎이고 설빔옷이 아닌 평상복은 웃도리가 보통 1만3천원,바지가 1만8천원부터 3만원까지 한다.파커대용으로 입을 수 있는 누비겹덮개의 경우는 6만3천원이면 살 수 있다. 행사기간 동안에는 집에 두고 거의 입지 않는 전통한복을 일상생활에서 입을 수 있도록 고쳐주기도 한다.오래되거나 유행이 지나 정 못입을 옷은 소파쿠션이나 베갯잇 등으로 만들어 주기도 한다.전통 저고리 한벌을 실용적으로 만드는데 드는 돈은 5천원.자락치마를 통치마로 바꾸는데는 2만원에서 3만원 정도 주면된다.
  • “인공섬「포트 아일랜드」는 무사했다”/일지진 견뎌낸 경이의섬 르포

    ◎진앙지서 20㎞… 「직격탄」 맞고도 “거뜬”/가재도구 일부만 넘어져 피해 경미 20일 상오 고베(신호)시 주오구 남단 1㎞에 위치한 포트 아일랜드. 세계최초의 국제해상도시이자 인공섬으로 81년 완공된 포트 아일랜드는 지난 17일 새벽 여명속에서 간사이(관서)지방을 덮친 진도 7.2라는 엄청난 지진을 맞았다. 포트 아일랜드의 입구에서 약 2백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한신고속도로는 허리춤이 주저앉아 여전히 흉물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진앙지인 아와지섬에서 불과 20㎞정도 떨어져 있어 「직격탄」을 얻어맞은 포트 아일랜드. 그러나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첨단공법으로 지은 유선형의 고층빌딩가 다채로운 색깔의 위락기구의 온전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대지진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베시의 여느지역처럼 붕괴되거나 파손된 흔적은 어느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고베시의 자랑거리인 「무인자동전철」포트 라이너(port liner)도 지면위 10m 높이에 떠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달리고 있었다. 총면적 4백36만㎡의 섬 전체를한바퀴 휘감으면서도 레일은 비틀림 하나 없이 온전했다. 붕괴·화재·부상 등으로 얼룩져 「무정형」의 도시로 돌변한 고베시의 상황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이곳은 안전합니다』 섬 중앙부에 있는 고베대학 유학생 기숙사에서 만난 노기덕(43)씨는 『지진이 일어난 순간 책장 등 가재도구 일부만 넘어졌을 뿐 별다른 피해는 없었다』고 말했다. 1시간여동안 순환도로를 따라 돌아보았지만 도로 중간중간 미세한 금이 가 있고 매립된 흙 아래에 있던 뻘이 땅위로 올라오는 「액상화」 현상만 도시이 미관을 조금 해쳤을 뿐이었다. 주민 히요유키(홍지·28)씨는 『지진에 놀아 자국으로 떠나간 외국인들도 곧 다시 찾아와 평소처럼 무역박람회 등 각종 전시회에 참가해 국제해상도시로서의 위상을 되찾게 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일 지진 나흘째 표정/고베민단에 하룻새 구호품 20t 밀물/애태이후 구조대 불러 노파 극적 구조도/일각료 월급서 갹출 1백만달러 모금 ▷민단고베지방본부◁ ○…20일 하룻동안 중앙구 민단고베본부는 모두 20t가량의 각종 구호물자를 전국의 각지부·지회로부터 접수. 지진발생이후 지난 3일동안 구호물자가 주로 식료품·생필품에 집중돼왔으나 이날은 대한기독교회가 발전기를 보내온 것을 비롯,교토·오사카·민단중앙부인회 등지에서는 심한 부족현상을 겪고 있는 유아·여성용품을 보내오기도. ○…고베총영사관에는 수십명의 한국인 불법체류자로부터 『본국에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되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쳐 영사관직원들이 당혹해 하기도. 이에 대해 배우근총영사는 일본정부에 대해 『공항에 임시법무부사무소를 만들어 이들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으나 일본당국은 『그보다는 하루빨리 도시기능을 회복,조사한뒤 내보내겠다』며 원칙을 고수. ▷피해지 표정◁ ○…히가시나다·나다·나가타구 등 대부분이 고베시지역은 「대지진」 나흘째인 20일에도 인명구출작업과 도로·통신보수작업이 계속되고 있으며 하루종일 인명구조차·경찰차 등이 사이렌을 울리며 길 곳곳을 누비는 등 주민들의 생활이 정상회되는 조짐이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 이웃도시로의 「피난행렬」도 계속되고 있는 상황. ○…일 내각 각료 21명은 월급에서 일정금액을 갹출,이번 지진 피해를 입은 효고현에 총 1백만달러를 기부키로 결정했다고 한 TV방송이 19일 보도했다. 일내각은 19일밤 지진 현장을 시찰한 후 귀경한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총리의 주재로 열린 긴급 각료회의에서 이같이 결정. ○…고베시 등에서 구조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구조요원들은 파괴된 건물속에서 3일간의 암흑과 공포를 이겨내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한 다수의 생존자들을 구조, 그중 애견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구조된 아마카와 지요코(65)라는 할머니가 화제. 지난 19일 히가시나다구 소재 아마카와 할머니의 목조주택붕괴현장에서 구조작업을 벌이던 약40명의 경찰과 이웃주민들은 작업을 포기하고 돌아가려 했으나 할머니의 애견이 구조요원들을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구조작업을 계속,할머니를 기적적으로 구조한 것. ▷신원확인 교포사망자◁ ◇고베(신호)시=△김분남(70) △강창향(43) △김한연(84) △강연자(65) △김청자(58) △손오순(76) △고태윤(70) △남궁좌자(70) △배의신(66) △김전실이(70) △임희자(74) △장순직(62) △정우원(56) △정외선(56) △장게리카(50) △박연옥 △이정녀 △이진술씨 부부 및 딸 이혜 이려 △장미화 △성대경 △임미보자(57) △김춘자(59) △김중길(59) △김운학(68) △남묘(61) △임윤삼(62) △임희구미(63) △임야오이(64) △임유리(66) △김본현이(67)
  • 농악무으뜸… 아박무·접시춤 등 창작(연변조선족 1백년:14)

    ◎오늘의 삶에서 억척의 생명력을 다시본다/민속춤/사회주의 영향 마당놀이서 무대예술로 변모 중국조선족의 예술활동을 조감해 보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로 가치있는 일이다.특히 해방전의 이주민들이 펼쳐온 놀이마당을 전통과 변화라는 시각에서 검토하는 것은 한국 전통예술을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주 1백년을 회고해 볼 때 중국조선족의 예술활동은 조국보다 훨씬 복잡한 변화의 과정을 밟았다.우선 해방후 중국 조선족은 소수민족으로서의 「조선족」이란 위상확립을 위해 몸부림을 쳤고 문화혁명시기에는 갖은 탄압을 받아가며 예술활동의 위축을 겪어야 했다.그리고 북한의 끈질긴 교화를 받으면서 지내오다 최근에는 한국의 영향으로 예술활동의 변화라는 파도를 타야만 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에 근거를 둔 전통예술성은 굴절하지 않고 맥을 이었다.특히 이주로부터 해방까지의 예술활동 중에서 춤과 노래를 조명해 보면 조선족의 의식이 가장 잘 표출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신촌마을 농악대 유명 이 시기에 연희되었던 민속춤으로는 승무·농악무·남무·한량무·살풀이·강강술래 등이 있다.이밖에 「아박무」가 있다.구전에 의하면 「아박무」는 1923년 봄,안도현 송강 송화의 한 골짜기에서 발생했다고 한다.그러나 조국으로부터 그대로 옮겨 온 전통춤 중에서는 뭐니뭐니 해도 농악이 으뜸이다.가장 먼저 농악대가 구성되어 연희된 곳은 1928년 왕청현의 어느 마을이라고 하나 규모있고 영향력을 가진 농악대로서는 1938년 길림성 안도현의 신촌마을이다. 경남의 이주민 1백여가구가 1938년 이곳에 자리 잡았다.그들이 올 때 꽹과리·징·장구·북·소고 등 농악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도구를 휴대해 왔다.그들은 낮에는 밭을 일구고 밤에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농악을 울리며 피로를 풀고 망국의 설움을 달랬다.그후 1941년 남사당패에서 농악을 추었다는 광대 이원보씨를 전라도로부터 모셔와 본격적으로 연수를 받았다.이리하여 20명 내외로 구성된 신촌농악대는 마을 마당놀이(지신밟기)·두레굿·집돌이농악의 수준을 넘어서서 무대에로 진출하기에 이르렀다.이에 자극을 받은 농민들은 자신의 마을농악대를 조직하려는 의욕을 보이기 시작했다. 민속춤 중에서는 「쾌지나 칭칭나네」가 가장 많이 추어졌다.특히 정월보름날 줄다리기에 나가기 위한 선행놀이로서 이 춤을 추었다고 하는데 사기를 진작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해방전 동북 3성의 조선족 마을에서 주로 재인들에 의해 추어진 민속춤으로는 승무·탈춤·칼춤·학춤·사자춤·수박춤·양산도 등을 들 수 있다.물론 이것들은 전문 광대들에 의해 무대에서 추어진 것들이 태반이다. ○항일투쟁 춤도 등장 이금덕(1922·전남태생)은 이리 권번에서 노래·기악·춤을 익히고 40년대에 이주하여 「양산도춤」과 「수건춤」을 보급시켰다.김선덕은 14세 때 평양권번에 들어가 음악과 무용을 익히고 이주후 「칼춤」과 「남무」를,김재산(1890·강원도출생)은 1914년 길림성 안도현으로 이주하여 「학춤」과 「거북춤」을 퍼뜨렸다.조정숙(1928·평양출생)은 8세부터 기예를 배워 활동하다가 해방후 이주하여 「승무」 「한산춤」 「봉산탈춤」등을 추었다.이밖에 박정록과 김학천 같은 예인이 있다. 특히김학천의 「수박춤」은 유명하다.김씨네 집안에서 5백년이나 전승된 춤이라고 한다.알몸으로 허리엔 짐승가죽을 두르고 맨발로 추는 이 춤은 악기라고는 물을 담은 큰 함지안에 작은 함지박을 엎은 것인데,이를 두드리는 정도이다.이 두닥거리는 소리에 박자를 맞추어 연희자가 두 어깨를 으쓱거리며 두 손으로 자기 몸을 치면서 추는 춤이다.도중 갖가지 새소리와 짐승소리를 낸다.사냥꾼의 모의춤이라 할 수 있는 이 춤의 끝은 맹수를 정복한 사냥꾼의 희열로 끝난다. 박정록이 전수시킨 「접시춤」은 30년대부터 훈춘지방에서 추어진 것인데 이 지역에서 자생된 춤으로 알려졌다. 해방전의 중국조선족의 춤을 말하면서 항일투쟁배경에서 자생한 몇가지 춤들을 빠뜨릴 수 없다.항일 전투가 지속되는 긴박감 속에서 여성대원들이 군복을 누벼나가는 모습을 극화시킨 여성군무인 「재봉대원의 춤」을 비롯해서 「기병대 춤」「무장춤」등이 1930년대부터 항일투쟁 집단에서 연희 되었었다. 그 유명한 무용가 최승희도 중국에서 무용활동을 했다.그로인해 조선족의콧대를 한층 높여준 결과가 되었을 뿐 아니라 춤의 예술적 경지를 한층 높이는데도 몫을 했다.최승희 편력을 살필 여유는 없지만 그녀는 1912년 서울 태생으로 14세 때 도일하여 혀대무용과 발레를 배운 세계적 무용수이다.1930년 조선경성공회당에서 처음 귀국공연을 시작으로 그의 명성은 일약 아시아로부터 유럽·미국으로 번지기 시작했다.최승희가 중국에서 활동을 개시한 것은 1940년부터이다.당시 조선족이 10만여명이 살고 있었던 흑룡강성 목단강시에서 최승희가 공연을 했다. ○최승희 무용 큰 호평 최승희의 창작춤들은 한국전통의 춤사위를 되살려 새로운 감각과 창조성을 가미시킨 것으로 크게 호평을 받았다.당시 중국 경극계에서는 『노래를 위주로 했던 재래의 경극은 최승희무용의 영향을 받아 끝내는 변혁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처음에는 마당놀이에서 출발한 농악이 섬세한 기예의 독창성을 살려 무대 「농악무」가 되었고 따라서 민속춤의 대부분이 무대극으로 공연되기에 이르렀다.이를테면 「탈춤」과 같은 여러 춤들이 무대에오르게 되자,마당놀이로서의 민속춤은 차차 위축되어 「쾌지나 칭칭나네」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사회주의가 민중의 소박한 놀이를 무대예술로 자리바꿈 시켰다는 사실은 오늘의 중국 조선족 예술활동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 올봄 여성복/밝고 화사하게/글래머 룩 유행

    ◎연분홍·노랑색 주조… 마릴린 먼로 분위기 연출 백화점마다 세일행사가 한창이다.이 행사가 끝나는 1월말부터 2월초까지 의류코너의 여성복 매장에는 화사한 봄옷이 선보이기 시작,겨울이 빨리 지나가기를 재촉한다.올 봄 여성복은 특히 밝고 화사하며 앳된 분위기를 띨 것같다.각 디자이너나 의류업계에서 내놓을 예정인 옷들의 경향이 저마다 밝고 투명한 색상과 여성스러움을 강조하는데다 60년대 헐리우드 스타들의 분위기를 딴 글래머룩으로 산뜻하고 건강함이 엿보이는 노출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특징은 바로 90년대 들어 꾸준한 강세를 보였던 나뭇잎 자갈색등의 자연색상이 사라지고 연분홍 노랑 하늘색,형광색등 산뜻한 감각의 색들이 두드러진다는 사실.실루엣은 50·60년대처럼 허리를 잘룩하게 하고 어깨와 치마에 볼륨감을 준 모래시계형이 대거 선보이며 소재 역시 청량감을 주는 비닐 및 은빛소재 등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아나카프리」디자인실 김혜진실장은 『60년대 프랑스 디자이너 앙드레 쿠레주가 추구했던 투명한 우주복느낌의 스타일과 마릴린 먼로,마를린 디트리히등 당시 배우들의 분위기를 딴 글래머 룩이 세계적인 유행경향』이라면서 무릎선을 오르내리는 스커트길이가 큰 흐름을 타는 것도 주목되는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이와함께 액세서리 역시 올 봄부터 큰 변화를 겪게 된다는 것이 김씨의 분석이다. 개구쟁이 소년 이미지를 주는 색(Sack)가방 대신 작고 귀여운 손가방이 유행하고 신발도 투박한 군화류가 사라지면서 핀처럼 가느다란 굽의 하이힐로 다시 돌아간다고 전망한다.또 굵은 허리띠 대신 가느다란 허리띠가 유행의상에 어울리는 소품으로 대체된다는 것. 오는 18일 서울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신강식부티크」·「벵투와」2개 브랜드의 봄·여름 컬렉션을 갖는 디자이너 신강식씨 역시 「천사의 이미지」를 살린 밝은색의 옷들을 제시한다.「기다림」을 주제로 한 3백여점의 옷을 제시할 예정인 신씨는 얇고 투명한 두가지 소재를 서로 섞거나 투명한 비닐 및 여름벨벳 레이스 쉬퐁 소재로 노출패션 가운데서도 청량감 있는 분위기를 주는 작품으로 연출한다.신씨는 『패션전반에서 캐주얼풍이 강해 부인복에도 레이스나 쉬퐁 등 고급소재를 이용한 마린 룩 등의 옷들을 만들었다』면서 우아한 여성미와 경쾌한 분위기를 동시에 살리는 것이 올 봄의 경향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 청바지도 조금 헐렁하게/엉덩이·허리 넉넉하게한 새 스타일

    ◎바지 달라붙지 않아 활동 자유로워 「엉덩이에 걸쳐질 정도로 커다란 허리통과 3∼4년은 입은듯한 허름한 천,깔끔한 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길고 풍성한 스타일의 청바지」­지난해 이른바 X세대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힙 합(Hip Hop)형 청바지다.일면 지저분해 보이는 이 스타일은 배꼽티등 노출패션과 함께 「자기에게 편한 것이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X세대의 부정적인 모습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기성세대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크고 헐렁한 진바지의 유행세는 올해 들어 급격히 수그러들고 편안함을 추구하는 가운데 전통적인 스타일을 기본형으로 한 약간은 절제된 형태가 유행을 끌 것으로 보인다. 「리바이스 코리아」사는 지난 12일 일반적으로 곡선으로 처리되는 허리에서 다리로 이어지는 선을 직선으로 처리,엉덩이 부분을 넉넉하게 한 새로운 청바지 스타일을 제시했다.「리바이스 512」형으로 번호가 붙은 이 스타일은 정통형을 기본으로 하고 같은 치수일경우 허리부분이 1인치정도 더 큰 것이 특징으로바지가 달라붙지 않아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된다.색상은 여전히 오래 입은듯한 느낌을 주는 옅은색 줄무늬가 진 바랜색과 짙은 인디고블루색이 주를 이룬다. 지난 92년부터 10대와 20대 초반까지 연령층 사이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진바지는 소재와 디자인이 다양해진데다 정장재킷과 매치시킬 정도로 폭넓게 응용되고 있는 아이템이다.여성이 착용하기엔 건강에 좋지 않고 불편하다는 기존의 인식을 불식시키는 소프트진 소재와 디자인이 쏟아져나오면서 한때 프랑스 브랜드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디자인이 큰 인기를 누리기도 했는데 캐주얼이 계속 강세를 띠는 95년 역시 젊은 남녀들의 주요패션품목으로 꾸준히 인기를 모을 것으로 전망된다.
  • 타클라마칸사막 동남단 호탄(서역 문화기행:7)

    ◎실크로드 남로 중심… 명주·옥의 명산지/한때 열국우전의 수도… 토기·벽돌 파편 널려/동보고승 법현이 도닦은 찬목묘 유명… 바로 옆엔 이슬람 예배당 우루무치부근을 떠돈지 엿새째,지구의 지붕으로 불리는 천산산맥언저리이건만 또 한번 서역의 깊숙한 벽지로 날고싶었다.호탄(화전)을. 호탄은 곤륜산맥의 북쪽 기슭에 자리잡은 타클라마칸사막의 동남단.세갈래의 실크로드,그중 가장 환상의 코스인 남로의 중간지점이자 한나라때 서른여섯개의 열국중,남로의 최강국이었던 우전나라의 도읍지였고,「한서」의 「서역전」에선 「서성」으로 불렸던 곳이다. 우루무치에서 직항 2시간10분에 도착한 호탄비행장은 온통 잿빛 모랫벌이었다.과연 33만㎦에 달하는 중국 최대의 사막인 타클라마칸사막의 동남단답게 끝이 없는 모랫벌이 이어져 있으며 그 모래는 콩가루같은 미립자로서 바람이 부는 날이면 활주로조차 묻혀 이착륙이 어렵다고 했다. 호탄시내까지 11㎞의 공항로를 달리면서 필자는 깊은 생각에 잠겼었다.창밖에 하늘을 뚫는 포플러나무와 자작나무가서 있는데 그 잎새는 한결같이 잿빛으로 모랫바람이 휩쓸고 지난 자국들이었다.이런 모랫바람속 그 어디쯤에 화사한 꽃들이 피어서 꽃 따는 사람을 불렀고,또 이 사막 어디쯤에 꽃다운 비단을 짜 낸 뽕밭이 숨었을까? 그리고 이렇게 삭막한 모랫벌 그 어디쯤 깊숙한 골에 하얀 구슬,푸른 구슬이 묻혔을까? 그런가하면 인도에서 불경을 구하여 장안으로 돌아가던 현장법사가 기원645년에 이곳을 지났는데 그들의 발길과 그들의 말방울이 울렸던 곳은 어딜까? ○화향 5천여명 수도 수나라때의 시선집인 「전수시」에는 「우전에서 꽃 따기(우전채화)」라는 무명씨의 시가 이렇게 실려 있다. 「산천수이소,초목상동춘. 역여진유지,자유채화인.」 (산천은 비록 멀리 떨어졌지만,초목의 봄은 마찬가지. 하남땅 진이나 유지처럼,여기도 꽃 따는 사람 있어라) 그런가하면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기록된 호탄은 1백여군데의 절에 5천여 화상들이 불도를 닦던 대승불교의 중심지로 그 사방을 둘러싼 뽕밭이 화려한 명주와 주단의 생산지임을 밝혔고,반고의 「한서」「서역전」엔 우전국이 장안으로부터 9천6백70리(4천8백35㎞)떨어진 곳에 3천3백의 호구와 1만9천3백명의 인구를 지닌 나라,특히 옥의 산지로 중원에 알려졌었다.「우전옥」,또는 「곤륜옥」으로 불리는 호탄옥의 성가는 1968년 하북에서 발굴된 한나라 중산왕의 「금루옥의」로 더욱 증명되었다.기원전 154년 2천4백89장의 연녹색 옥판으로 얽어 맨 시의,그것들이 몽땅 호탄의 옥이라 했다. 그래서인지 호탄을 에워 싼 두줄기의 강,백옥강과 묵옥강이 각각 동쪽과 서쪽을 흘렀다.옛날엔 이 두줄기 중간에 또 하나의 강 녹옥강이 있었다고 하니 강 이름으로 미루어서도 백옥·청옥·흑옥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호탄시내에 도착한 필자는 처음으로 이방감을 느꼈다.우선 거리에서 만나는 십중팔구가 까무잡잡하면서 무성한 수염을 단 위구르사람들,그들의 오똑한 콧마루에 쌍꺼풀,달걀모양의 갸름한 얼굴에 푸르딩딩한 눈동자,거기다 다혈질의 말씨에 굴뚝처럼 뿜어대는 담배연기를 보면서 어리둥절했다. 필자는 서역땅에 들어 처음으로 필자가 서 있는 곳이지금 중국의 강토이면서도 중국의 한족이 아닌 서역의 원주민속에 깊숙이 들어왔노라는 사실과 이곳 서역의 남로 도처에서 최근 민족갈등의 충돌이 가끔 일어난다는 생각때문에 얼른 여관문을 두들겼다. 이튿날 우전국의 고도를 찾기로 했다.한나라때는 36개부족국가의 하나였지만 당나라때는 「안서사진」의 하나였던 그 도읍지는 아직도 확실치 않았다.혹자는 호탄시 남쪽 25㎞지점 카스강 서쪽언덕에 지금도 남아 있는 높이 6m,둘러 60m의 석탑근린을 두고 말하는가하면 혹자는 호탄시 서쪽 10㎞지점 요트칸(약특간)마을이라는 설이 있다. 그 두군데가 모두 우전국 도읍일 가능성은 있었다.거기에 남아 있는 폐허는 물론 거기서 지금도 출토되고 있는 기와조각·벽돌·질그릇·철제농구등이 그를 증언하고 있는데,특히 요트칸 유적지의 개울물에선 지금도 벽돌이나 질그릇 파편쯤은 쉽게 주울 수 있다는 말이었다. ○요트칸 유적지 찾아 필자는 그 말에 혹하여 요트칸을 찾기로 했다.호탄시에서 서쪽으로 10㎞라지만 아주 기름진 오아시스.가느니 굽이 굽이 농로요,농로를 따라 출렁이는 관개로,곤륜산에서 녹아 내리는 설수는 파랗고 차가웠다.게다가 농로는 자작나무가 목책처럼 늘어 섰거나 포도덩굴이 푸른 터널을 지어서 홀연 여기가 사막임을 잊게했다. 이윽고 「허톈셴바허치공사(화전현파합기공사)」라는 팻말이 보였다.거기서 좌로 돌아 또 한번 농로를 달렸다.마찬가지로 우거진 자작나무요 포도덩굴인데 길가엔 맨발의 개구쟁이가 흙투성이가 되어 뒹굴고,관개의 수문에는 빗장이 걸린 채 그 안으로 물살이 출렁거렸다.그 무렵 난데없이 「요트칸유적지」란 안내판이 보였다.필자는 습관처럼 사방을 둘러 보았지만 산 한자락도 보이지 않는 편편한 언덕일 뿐이었다. 마치 환토하느라 새흙을 옮겨놓은 논바닥을 방불케 여기저기 울퉁불퉁한 지면이었다.아닌게 아니라 버드나무 사이로 개울이 흘렀다.필자는 얼른 그 개울물에 손을 담았다.어렸을 적 뱀장어나 게를 잡았던 그 몸짓으로 개울을 뒤졌는데 당장 손끝에 잡히는 것은 빨간 토기의 파편이었다.풀잎무늬의 얇은 토기였다.또 한번 소매를 걷어 올리고 개울을뒤졌더니 월척의 붕어를 잡듯 큼직한 벽돌 하나가 잡혔다. 호탄박물관의 설명에 따르면 요트칸일대 10㎦의 유적지에는 그런한 영세한 파편들이 널려 있다고 했다.더구나 그 일대는 일찍이 홍적기의 침적된 지질인만큼 겨우 3m내지 6m의 지층속에는 상당한 질량의 박물이 잠겼을지 모른다고 했다.그동안 발굴된 도기·옥기·전폐등 특히 개원통보 같은 엽전이나 인면·수면의 도기로 보아 기원 3세기로부터 8세기에 이르기까지 중고시대의 궁궐이나 도시의 유적으로,그리고 당시의 주민들이 황색의 한족이 아닌 긴 얼굴,긴 눈썹에 푸른 눈,황갈 피부의 회골족,곧 오늘의 위구르족임을 추정하기에 충분했다. ○인도수행길 머물러 비록 묻히고 무너졌지만 정치의 유적을 답사한지라 이젠 우전국의 종교 유적지를 찾기로 했다.그것은 「커커마르무」(극가마일목)유적,한족들은 「찬목묘」라고 부른다. 그것은 동진때의 고승 법현(337?∼422?)이 기원399년 인도에 갈때 여길 경유하면서 불법을 닦다가 그렇게 명명했다는 작은 암자였다.호탄시에서 남으로 36㎞지점,바로파랗게 굽이치는 카라카스강 동쪽,80m의 벼랑위에 있었다.그 벼랑을 오르느라 그 산의 북쪽을 우회하여 나무 한그루 없는 능선을 탔는데 거기서 굽어보는 카라카스강 유역은 정말 스펙터클한 장관이었다.파랗게 강이 굽이치고 강가로 푸른 오아시스,오아시스는 젖줄 따라 허리띠처럼 뻗는데 그 배경은 온통 황갈색의 구릉들.그림으로는 단조로운 삼원색,그러나 영원의 구도였지만 지세로는 찬목묘가 천혜의 요새였다.발밑으로 벼랑,벼랑아래로 강물,강물밖으론 사막.그렇게 무한히 펼쳐진 곳에서 상과 무상은 날마다 피부로 오득했을 지 모른다. 찬목묘는 천연의 작은 2층석굴이었다.석굴의 높이 겨우 6m남짓,그 한쪽에 사다리를 가설했는데 그 2층까지 기어올라간 필자의 눈에는 침침한 골방 하나쯤의 공간,그러나 아무런 시야도 없었다.법현이 책상다리하고 앉았을 때 그 귓전에 들렸을 법한 강물 소리,유사의 소리를 생각하면서 사다리를 내려섰다. 그 석굴밖으로 이슬람교의 예배당인 마자(마찰) 두어칸이 있었고,산 허리를 돌아 카라카스강가에도 몇군데의 마자가 보였는데,여기 호탄 실크로드에 우뚝 선 커커마르무는 지금 종교의 금석을 한눈에 보여주는 박물관이었다.곧 불교의 유적에 이슬람의 마자가 공존한 사실말이다.바로 기원 10세기를 전후해서 불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했던 것이다.
  • “총맞을 각오하고 범인 덮쳤어요”/국민은 청원경찰 임승재씨

    ◎출근 첫날 무장강도 검거 “수훈” 한 청원경찰이 근무 첫날 생명을 걸고 무장 은행강도에게 몸을 날려 범인을 검거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9일 하오 국민은행 서울 능동출장소에서 발생한 무장 강도사건의 범인 하기룡중위는 이 은행에 첫 출근한 한국보안공사 소속 청원경찰 임승재(27·경기 남양주시 일패동)씨의 용기로 붙잡혔다. 키 1백70㎝,몸무게 70㎏의 다부진 체격인 임씨는 85년 경기도 양서종합고등학교를 졸업하고 88년 보충역으로 제대한 뒤 5년간 모전자회사에 다니다 최근 경비전문업체인 한국보안공사에 입사,어깨에 부상을 입고도 도망가는 범인을 덮쳤다. 『은행문을 닫기 1시간 전 미처 첫 출근의 긴장도 채 가시기도 전이었습니다.갑자기 은행에 K­2소총을 들고 들이닥친 바바리차림의 범인이 저에게 다가와 총구를 들이대고 허리에 차고 있던 가스총을 풀게 한뒤 엎드리게 했습니다』 곧이어 여자고객 한명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창구로 가 여직원을 시켜 가방에 돈을 넣으라고 하는 범인을 보며 임씨는 극도의 긴장속에서도 손님들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일어섰다. 순간 하중위가 개머리판으로 임씨의 얼굴을 내리쳤고 그는 재빨리 피했으나 오른쪽 어깨를 맞아 부상을 입었다. 『검도 학원을 다니며 순발력을 키운 덕에 피할 수 있었지요.재빨리 범인의 총을 붙잡으며 몸을 끌어안고 넘어졌습니다』 범인이 총을 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임씨는 결코 그의 몸을 놓을 수 없었다. 다행히 범인이 돈가방과 총을 그자리에 버리고 은행밖으로 도주하기 시작하자 그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삐었지만 임씨는 통증을 느낄새도 없이 본능적으로 범인의 뒷모습만을 쫓았다. 『제가 「강도야」라고 지르는 소리를 듣고 자신의 차를 몰아 범인붙잡기를 도와준 시민 지영철(31)씨의 도움이 없었다면 결코 범인을 잡을 수 없었을 겁니다』 임씨는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칭찬의 소리를 들으며 부끄러운듯 얼굴을 붉히며 애써 공로를 지씨에게 돌렸다. 어머니 이정수(49)씨는 『어려서부터 얌전하기만 했던 승재가 이같은 용감한 행동을 했다는 것이 전혀 믿기지 않는다』며 『평소 옳지 않은 것을 보고 못 참는 성격이 이처럼 장한 일을 하게 한 것 같다』며 대견해 했다.
  • 개인 특성따라 운동량·시간 조절/「컴퓨터 헬스클럽」 미서 선풍

    ◎부위별 살빼기요령·알맞는 식사법도 소개 『이름과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당신에게 가장 적당한 운동시간은 1회에 30분입니다』.최근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최첨단 몸매관리 컴퓨터 시스템이 이용자들에게 전해주는 정보다. 미 여성전문 월간지「뉴 우먼」최근호는 헬스클럽이나 체육관 등에서 최첨단 컴퓨터를 응용,개인에게 가장 적절한 운동량과 시간 등을 조절해주는 「토털 케어시스템」이 도입돼 비만으로 고민하는 미국여성들의 화제가 되고 있다고 전한다. 컴퓨터 헬스클럽이 보통의 운동센터와 다른 점은 이용자가 단추 몇개만 누르면 운동순서,종류,시간,생체리듬에 따른 날짜별 체크 등을 알아서 해준다는 점이다. 헬스클럽을 많이 이용하는 여성들을 위한 살빼기 프로그램도 물론 준비되어 있다.특정부분의 살이 쪄서 고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리 입력된 이용자의 몸무게,허리사이즈 등을 체크해 가장 적절한 운동방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운동을 처음하는 사람들에게도 역시 입력된 정보를 종합,기초부터 트레이닝을 시켜주기도 하는 이 시스템은 다이어트 프로그램도 지원한다.부위별 운동요령,먹어서는 안될 음식,칼로리를 적게 섭취하는 식사법 등 필요한 모든 정보가 개인의 특성에 맞게 제공된다.
  • 소총 들이대고 “1천만원 담아라”/육군중위 은행강도

    ◎코트에 총숨겨 침입 여직원 위협/청경과 몸싸움… 10분만에 검거/“경마빚 4천만원 갚으려 범행”/대학위탁교육중… 육사내무반서 총훔쳐 「경마에서 진 빚을 갚고 예쁜 여자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이유로 현역 육군 중위가 대낮에 자동소총을 들고 은행에서 강도행각을 벌여 새해 벽두에 시민들을 경악시켰다. 은행직원과 시민들의 용기와 재치로 20대 청년 장교의 허황된 꿈은 물거품이 됐으나 지난해 각종 「군기해이」사건을 목격했던 사람들에게 또 한번 충격을 안겨 주었다. ▷범행◁ 9일 하오 3시20분쯤 범인 하기룡(25)중위는 노란색 바바리코트·청바지차림에 흰색 야구모자와 은테안경을 끼고 마스크를 한채 코트속에 K­2자동소총을 숨기고 서울 성동구 능동 동림빌딩 2층 국민은행 능동출장소로 들어섰다. 하중위는 은행문을 들어서자마자 『손들어』라고 소리치며 은행직원과 손님들에게 총구를 들이대고 모두 엎드리게 한뒤 청원경찰 임승재(27·경기 남양주시 일패동)씨를 위협했다. 순간 사태가 심상찮음을 직감한 직원 10여명과 고객 6여명이모두 카운터와 책상·소파 틈으로 몸을 숨겼다. 하중위는 먼저 임씨가 허리에 차고 있던 가스총 허리띠를 풀게했다.이어 창구로 다가가 22번 창구 여직원 임정아(23)씨에게 대검을 들이대며 『현금 1천만원을 넣으라』고 말하고 미리 준비한 검정색 스포츠가방을 던졌다. 겁에 질린 임양이 책상 서랍에서 현금·수표 7백여만원을 꺼내 가방에 넣어주자 하중위는 달아나기 위해 20대 여자손님을 인질로 붙잡았다.이때 바닥에 엎드려있던 청원경찰 임씨가 일어나려하자 개머리판으로 임씨의 얼굴을 내리쳤다.그러나 임씨는 하중위의 자동소총과 바바리코트 옷깃을 붙잡고 늘어졌다.이같은 상황에서도 하중위가 총을 쏘지않는 사실을 동시에 직감한 이 은행 오육열(37)대리와 은행 운전기사 최정태씨(32)가 카운터를 넘어 범인에게 달려들었고 은행 한구석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손님 백모(45)씨가 달려들어 하중위를 덮쳤다. 조금 앞서 하중위가 돈가방을 들고 돌아서는 순간 엎드려 있던 은행 직원 가운데 누군가가 재빨리 경찰서와 연결된 책상 밑의 비상벨을 눌렀다. ▷검거◁ 심한 격투로 가방에 들어있던 돈이 은행바닥에 쏟아지고 바바리코트가 벗겨지자 당황한 하중위는 30㎝ 길이의 군용대검과 K­2소총,현금이 담긴 가방등을 버리고 범행 2분만에 2층 계단을 뛰어내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청원경찰 임씨와 은행직원 2명은 은행에서 7백m가량 떨어진 어린이대공원 후문까지 하중위를 추격,마침 길을 가던 행인 기영철씨(31)와 합세해 하오 3시30분쯤 격투끝에 하중위를 붙잡았다. 하중위는 은행비상벨이 울린지 5분만에 현장에 출동한 경찰에 인계돼 현역 장교가 벌인 대낮 강도행각은 10여분만에 막을 내렸다. ▷범행준비◁ 하중위는 이날 상오 10시쯤 서울 노원구 공릉동 육군사관학교에서 생도들이 강의를 받는 사이 빈 내무반에 들어가 총번 583346 K­2자동소총과 20발들이 빈탄창 1개·대검 한 자루를 훔쳐나와 범행을 저질렀다. ◎육사소총도난 경위 수사/수방사,하중위 연행 현장검증 하기룡중위의 신병을 넘겨받은 수도방위사령부 헌병단은 이날 하오부터 육군사관학교에서 K­2자동소총이분실된 경위및 하중위의 범행동기등에 대해 철야조사를 벌였다. 헌병단은 우선 하중위를 데리고 육사 생도내무반에서 현장조사를 벌이는 한편 육사관계자들을 소환,K­2소총·대검등이 분실된 경위등에 대해 조사했다. 헌병단은 이날 조사에서 『경마에 빠져 후배에게 빌린 4천7백만원을 갚기 위해 범행을 결심했다』 『멋있는 빨간 승용차와 예쁜 여자친구를 갖고 싶었다』는 하중위의 진술에 따라 군내부문제 때문이 아니라 일단 돈을 훔치기 위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고 있다. 육사측은 이날 상오 K­2자동소총이 분실됐음에도 불구,이날 하오 늦게까지 소총 분실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육군은 하중위에 대한 1차조사가 끝나는 10일 상오 수사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 캉자스먼쯔의 신산(서역 문화기행:6)

    ◎붉은 암벽에 모계사회 생식숭배 그림/기원전 2∼3세기 카자크족 원주민들이 새겨/무도회·인구번식회에 인물 2백명… 여성이 대부분 우고,그들과 싸워서 이기기 위해서라도 생식의 필요는 절실하다. 수렵과 유목을 위해서는 심산유곡과 만경초원이 안성맞춤이다.우랄·알타이산맥 남쪽으로 천산산맥과 곤륜산맥을 등지고,팔카스호 동쪽으로 아라호·아이피호·이리강·카스강·마나스강등을 낀 신강의 서북지대가 바로 최적의 지대로 꼽힌다. 그 지대를 기원전 7세기부터 누빈 것은 오손(오손)·강거(강거)·엄채등 돌궐어족인데,그들은 모두 오늘날 하사크족의 원조민족이었다.지금도 중국 서역에는 백만명을 헤아리는 카자크족이 신강의 서북지역을 물 따라 풀 쫓아 유목하고 있다. 그 유목하는 곳엔 카자크족이 살고 카자크족이 사는 곳,그러니까 팔카스호 동쪽의 초원에는 암화(암화)가 많았다. 지금 독립연합국의 하나인 카자흐스탄을 비롯,신강의 이리강과 초하유역인 쿨자파스산상에는 기원전 6세기에서 3세기로 추정되는 동물암화가 많다.다시 동쪽으로이동하면서 비록 연대는 기원전 3세기 이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리강유역의 훠청(휘성)현 베이간(북간)계곡을 비롯,니러커(이근극)현의 훙광목장등 하미(합밀)의 남산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50여군데에서 발견되었다. ○초원에 천마 노닐어 그중에 위민(유민)현 팔타쿨(파이달고이)과 후투비(호도벽)의 캉자스먼쯔(강가석문자)의 암화도 포함되었지만 여느 암화와 다른 모계사회의 생식숭배를 보였다 한다.특히 최근에 발견된 캉자쯔먼즈의 그것이 보다 사실적인 데다 화면이 또렷하다는 신강사범대학 중문과의 황천(황천)주임의 권고와 안내로 그곳으로 머리를 돌렸다. 우루무치에서 캉자쯔먼즈까지 1백50㎞.위구르말로「도깨비 고을」이라는 후투비까지 70㎞는 시원한 아스팔트길이었지만,후투비에서 그 이름도 시골스런 추이얼거우(최예구)향에 있는 현장까지는 험한 산허리를 뚫고 천산산맥 서쪽의 어디쯤을 덜컹거릴 수 밖에 없었다. 깔딱 어느 고개를 넘어설 때,황주임은 별안간 차를 멈추게했다.일행이 내려서 멀리 산맥을 굽어 보았다.시뻘건 바위산맥이 서남쪽으로 꿈틀거리며 이어져 있는데 그 기상은 수십척의 함대가 파도를 가르며 행진하는 모습이었다.그 산맥은 적어도 20∼30㎞를 쪽빛 하늘밑으로 이어져 있는데 그 한복판에 활짝 열린 대문을 방불케 웅장한 바위가 보였다.그것이 바로 생식 숭배의 암화 현장이라했다.결코 소풍하는 산등성이가 아니라 출렁이는 산맥,어디를 보아도 기운이 넘치는 그러한 암맥들이었다. 후투비에서 거의 80㎞를 달려서 이윽고 골짜기의 초원에 도달했다.초원에는 낙타와 천마들이 떼를 지어 풀을 뜯고 있었다.신산의 어귀에 갔을 때,동그랗고 커다란 눈에 텁수룩한 수염을 기른 청년이 길을 막았다.입장하는 표를 사라했다.아직은 알려지지 않아서 관객은 물론 관리자도 없을 줄 알았는데.그들의 재빠른 상혼이 놀랄만 했다. 문제의 암화가 있는 바위는 깎아 세운듯한 암벽이었다.그 암화는 비록 동서 14m,상하 9m의 크기,화면면적이 1백20㎡쯤되어 보이는 분사암에 그려졌지만,그 암화의 모체는 동서 1백50m쯤에 상하 50여m의 엄청난 바위였다. 필자는 마치 방을 보는 수험생처럼 고개를 들고,마치 숨은 그림을 찾듯 훑었다.거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족히 2백명은 넘었다.보이는 대부분이 여성으로 이곳이 모계중심의 사회였음을 알게 했다.높은 모자를 눌러 쓰고 모자위에는 두개의 깃털을 꽂은 여성이었다.풍만한 가슴에다 둥실한 엉덩이,갸름한 얼굴에 높은 코,커다란 눈에 작은 입술,가느다란 목에 끊어질 듯한 허리,긴 다리에 섬섬옥수.첫눈에 모던한 서구의 처녀들을 연상케했다. 그 화면은 무질서하게 많은 군상이 여기저기 불거져 나왔는데 가만히 살피면 몇가지 화폭으로 분별할 수 있었다.약간 좌측엔 아홉명의 여인이 한결같이 오른팔은 올리고 왼팔을 내리면서 춤의 동작을 보였는데,어찌보면 벌거숭이요,어찌보면 오늘의 발레복처럼 성감적인 복장이었다. ○남자는 까까중머리 윗 그림을 「누드의 무도회」라 한다면 그 좌측으로 「혼무도(혼무도)」에 상당한 그림이 있었다.남녀 각각 10여명씩 춤을 추는데 여성은 위에서와 마찬가지지만 두팔을 모두 내렸고 남성은 모자도 깃털도 없이 까까중머리에다 홀쭉한 배에 뾰족한 그것을 기운 차게 달고 있었다.여기 저기 동체가 달아난 얼굴이 몇개 있는데 가필한 그림이거나 다른 상징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보다 특기할 일은 남성의 가슴과 여성의 가슴에 각각 한 사람의 이성을 품고 있는가 하면 그러한 혼무의 마당을 향해 호랑이 두마리가 달려들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선명한 주제의 그림이 우측 가장자리에 보였다.한 사내가 발기된 길고 둔탁한 그것을 한손으로 들면서 계집의 하체에 조준하고 그 아래로 성숙한 여인 하나와 50명의 꼬마가 상하단으로 나뉘어 마치 기차놀이하듯이 이열 횡대로 서 있는 그림이었다.인구의 번식을 노골적으로 기구하는 강렬한 포스터같았다. 암화에 등장하는 여성은 대체로 갸름한 얼굴에 깊은 눈,높은 코,가는 목,긴 다리,그리고 높은 모자에 깃털,남자는 높은 코에 기다란 생식기,가냘픈 하체에 긴 다리,두건식의 모자에 동그란 얼굴이 인상적이었다.이러한 외모와 복식으로 미루어 한(한)족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카자크의 체모에 가장 근사할 뿐 아니라 그러한 암화가 아직도 카자크족의 집거 부락에서 발견되고 있었다. ○금속도구 이용 음각 마지막 궁금한 것은 연대였다. 현지의 문화국이나 박물관에선 아직 뚜렷한 연구결과를 발표한 게 없다지만 카자흐스탄 팔카스호 동쪽에서 발견되고 있는 카자크족의 암화,그 대부분이 기원전 6세기에서 3세기 사이,더구나 동점(동참)하였다는 사실 외에도 캉자스먼쯔의 암화가 금속도구에 의한 음각이란 방법으로 미루어볼 때 신석기시대의 말기에 시작해서 청동 및 철기시대였음을 단정할 수 있겠다.그렇다면 기원전 2,3세기의 작품으로 추정하는데 무리가 가지 않는다. 이러한 암화를 작품시하는 데도 그 나름의 의의가 있다.첫째는 그 구성이 부호나 도안처럼 단순하지만 감성적이고 질박하다는 것이요,둘째는 그 표현이 비록 과장적이지만 주장이 선명하다는 것이요,셋째는 그 내용이 조잡하지만 당시의 생활을 생생하게 반영한 역사의 단편들이란 점이다. 필자는 돌아오는 길,캉자스먼쯔 바위에 생식 숭배를 그림으로 새긴 그 후손들을 만나고 싶은 충동이 있었다.조금전 들어갈 때,인민폐 몇푼을 쥐어 준 그 청년을찾기 위해 돌아오는데 난데없이 「시집 가는 날」을 만났다.말 세필에 영감과 할멈이 혼수를 실은 행렬.어쩌면 선발대격인듯,영감은 앞에서 말을 끌고 할멈은 말을 타고 깡마른 언덕을 넘고 있었다. 그 청년은 서른여덟살의 마이무라치라고.형제가 다섯인데 모두 분가해서 한마을을 형성했다 한다.조심스럽게 재산정도를 묻자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염소 1백50마리에 낙타·말·황소를 합해서 50마리』라고. 그리고 염소 한마리의 값은 큰 것은 2백위안(한화 2만원상담). 짓궂게 통혼사정을 묻자 그 대답은 자못 단호했다. 위구르족이나 회족,시부족과 통혼할지언정 한족과의 통혼은 싫다고 했다.왜냐면 한족은 이슬람교를 믿지 않기 때문이란다. 주인은 우리 일행을 그들의 흙집에 안내했다.사방이 흙벽,마루나 침대가 따로 없다.물론 안방과 건넌방의 구별도 없이 밋밋한 헛간 비슷한 구조였다.
  • 세계질서의 중추역 꿈꾼다(일본 「21세기 야망」:1)

    ◎돈·기술·정보·인재… “일본은 있다”/하이테크산업에 전력투구… 초일류 유지/군사·정치 대국화로 줄달음/“슈퍼파워 재팬” 냉정한 직시로 「불행한 역사」 반복 막아야 일본이 전후 50주년을 계기로 새로 태어나고 있다.일본은 패전 50주년이 되는 19 95년을 맞아 과거청산을 「선언」하고 유엔상임이사국 진입을 적극화하는등 경제 뿐만아니라 정치·군사면에서도 강대국을 지향하고 있다.광복 50주년과 한·일국교정상화 30주년을 맞아 변화하는 일본과 그들의 21세기 위상을 조망해본다. 일본의 1995년을 여는 아침해는 그동안 움츠렀던 전후 반세기의 역사를 거부한다.경제적 「슈퍼 파워」 일본은 패전후 50년동안 축적한 힘을 바탕으로 이제는 과거 침략사의 굴레로부터 「자유」를 선언하며 국제정치무대의 강대국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한 일본의 하루는 해가 후지산 너머로 진다고 해서 끝나지 않는다.19세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는 빅토리아여왕의 영국이었지만 지금은 일본이다.일본의 첨단기업과 연구소의 하루를 마감하는 불이 꺼지기전에 태평양 건너 미국에 있는 일본 공장과 연구소의 불이 켜진다.지구촌 곳곳의 일본공장에서 세계시장을 압도하는 상품이 쏟아져 나오고 일본의 엔화는 세계경제를 「지배」하고 있다. 패전의 참담한 잿더미속에서 경제신화를 창조한 일본.그러한 저력은 어디에서 나오며 일본은 도대체 어떤 나라인가.일본이란 말처럼 우리에게 착잡한 심정을 불러일으키는 단어도 드물다.가까우면서도 그러나 결코 가깝지않은 나라.냉정한 이성적 판단으로 보려해도 가슴속 감정이 앞서는 나라.그러나 미국·유럽과 함께 21세기 세계질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일본의 변화하는 21세기 위상을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일본이 「세기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오늘의 경제성장을 이룩한 배경은 「군사력 없는 경제대국」 실현이라는 전략적 선택의 성공에서 우선 찾을 수 있다.전후 일본정치의 틀을 만든 요시다 시게루 총리는 국가안보는 미국에 의존하고 경제성장에 집중투자하는 국가정책을 채택했다.일본은 미국의 전략적 우산아래 매년 국민총생산(GNP)의 1% 미만만을 방위비에 지출하며 경제분야 투자에 집중했다. 일본 경제성장의 결정적 도약의 계기는 잘 알려진대로 한국전쟁이었다.한국전쟁이 터지자 미국은 당시 중국·소련등 공산주의세력의 팽창을 막는 방패국가로 일본의 경제건설을 적극 지원했다.미국은 이에앞서 일본군대의 광적인 팽창주의 야심과 그들을 지원했던 재벌의 유착관계가 아시아침략의 원인이었다고 판단하고 일본의 민주화란 이름아래 이들의 해체를 단행했다.재벌해체 이면에는 사실 일본경제체제를 파괴하려는 의도도 있었다는 지적이 있다.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반공·보수주의로 급선회 일본을 아시아 반공국가 지원을 위한 군수기지로 만들기 위해 대대적인 경제지원 정책으로 전환했다. 일본의 경제발전은 그러나 미국의 지원과 군사력 없는 경제대국이라는 적절한 전략적 선택 때문만은 아니다.경제발전의 원동력은 정치적 안정과 관·민협동체제 아래 정말로 열심히 일한 일본의 근면한 손과 과학적 두뇌의 기술인맥이다.그들은 선진기술을적극 받아들이고 미국과 유럽이 지적오만에 빠져있을 때 밤을 밝히며 우수한 상품을 개발·생산해냈다. 일본은 또 미국이나 유럽이 「개인의 현재를 위한 소비」를 즐길 때 「일본이라는 공동체의 미래를 위한 저축」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맺다.전후 일본은 산업시설이 파괴됐을 뿐만 아니라 자본부족도 극심했다.그러나 국내 저축률이 세계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높아지며 많은 돈을 저축했다.미군을 상대로 돈을 벌었던 게이샤(일본기생)들조차도 미군에게서 받은 달러를 암시장이 아니라 은행으로 갖고 갔다고 한다.일본정부는 저축된 자금을 우선순위가 높은 산업발전에 집중 투자했다.지금은 자본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문제가 되고 있다. 일본은 미래를 예비하는데 있어서 저축 뿐만이 아니라 인재를 아끼는데도 탁월했다.일본은 전쟁이라는 극한상황과 전쟁의 패배라는 참담함속에서도 폐허가 된 국가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우수한 인재들을 전쟁의 죽음으로부터 보호했다.그 방패막이 역을 맡았던 것이 일본해군의 단기 장교제도다.일본은 「단기 현역해군주계과사관」이라는 제도로 우수한 인재들을 온존시켰다. 『대학을 졸업한 우수한 인재들이 육군 쫄병으로 징병되어 전장에서 이름없는 병사로 죽어가서는 안된다.그것은 일본의 손실이다.인재를 남겨놓지않으면 일본은 멸망한다』.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이다.단기 해군장교로 임관했던 3천여명의 인재들은 전후 관료·기업·경제계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며 오늘의 일본을 만드는데 크게 공헌했다. 인재를 아끼는 것은 일본의 기업관에서도 잘나타난다.일본은 인간이 제공하는 노동을 단순한 상품으로 보지않는다.인간을 교육을 통해 부가가치가 더욱 높은 상품을 만들 수 있는 「가치창조자」로 보고 있다.인재를 소중히 여기는 기업관을 배경으로 일본기업은 특히 역경을 재도약의 발판으로 활용하는 놀라운 저력을 발휘했다.일본기업은 70년대 1·2차 석유위기를 맞자 에너지 절약형 산업구조로 바꾸고 하이테크화를 서둘러 경쟁력을 강화했다. 1985년 9월 22일.뉴욕 플라자호텔에서 선진 5개국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회의가 열렸다.그 결과는 엔고의 가속화를 알리는 이른바 「플라자 합의」로 나타났다.플라자 합의 직전의 환율은 1달러당 2백40엔이었다.그러나 89년초에는 1달러에 1백20엔으로 엔의 가치가 두배나 올랐다.일본경제를 이끌어온 자동차·전자등 수출기업들은 한때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그러나 일본기업들은 경영의 합리화·하이테크화에 박차를 가하며 엔고를 극복 국제경쟁력을 더욱 높였다.그러한 노력은 지금 더욱 강도를 높이고 있다.플라자 합의는 전후 40여년간 세계경제에 군림해온 「막강한 미국」의 종언을 의미한다. 일본 첨단기업들은 80년대 기술의 스승인 미국을 제치고 세계시장을 석권했다.컴퓨터계의 거인 IBM까지도 일본전기(NEC)·히타치·도시바·후지쓰등 일본 첨단기업들의 도전으로 경영위기를 맞았다.세계의 거리에는 도요타·닛산·혼다등 일본자동차가 질주하고 있다.소니가 미국의 혼이라고 하는 콜롬비아영화사를 구입하고 미쓰비시가 록펠러빌딩을 사들인 것을 비롯,일본기업들은 엔고를 활용,「세계의 부동산」을 사들였다.중소기업에서 일하는 「기술의 광인」들도 세계 일류를지향하며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는데 땀을 흘려왔다.일본은 더욱이 미국의 「정보 슈퍼하이웨이」 구상에 대응,정보분야 투자를 크게 강화하고 있다. 일본의 경제신화는 통계지표(93년)로 더욱 분명해진다.무역흑자 1천4백억달러,해외순자산 7천억달러,1인당 국내총생산(GDP)3만3천7백64달러,외환보유고 9백90억달러,차관공여 2천4백10억달러,그 앞에는 모두 세계 최고라는 접두어가 붙는다.일본의 국민총생산(GNP)은 세계경제의 거의 15%를 차지하고 있다.일본의 93년 GDP는 4조2천75억달러로 미국(6조2천8백억달러)에 이어 세계 2위다.1950년 일본의 GNP는 미국의 20분의 1에 지나지않았었다.그러나 지금은 거의 3분의 2수준이며 2000년대는 미국과 비슷해질 전망이다. 「강대국의 흥망」으로 유명한 폴 케네디 예일대 교수는 그의 새로운 저서 「21세기 준비」에서 「일본은 기술에 의해 주도될 미래 변화에 가장 준비가 잘돼 있는 나라」라고 지적했다.미래학자들은 바다를 중심으로 볼때 과거의 지중해 시대에서 현재의 대서양시대를 지나 앞으로는 태평양시대가될 것으로 전망하며 일본의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국가권력문제의 권위자인 조셉 나이 하버드대 교수는 『과거 4반세기에 걸쳐 세계경제에서의 가장 극적인 변화는 일본의 몫이 두배로 늘어난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얼마전까지만해도 국제질서와 세계경제 게임룰을 만들었다.그러나 지금은 세계 제일의 무역적자국과 채무국이 되며 국가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일본에서 빌려오지않으면 안되는 처지로 전락했다.미국만이 국제룰을 만드는 시대는 지났으며 일본도 경제게임룰을 만드는 강대국이 됐다. 일본의 경제평론가 오마에 겐이치는 『앞으로의 세계는 국경없는 세계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냉전의 이데올로기 전쟁시대가 끝나고 국경없는 경제전쟁시대가 도래하며 일본이 쌓은 부의 축적은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일본은 세계무역기구(WTO) 발족에 따른 자유무역의 확대로 가장 많은 이익을 볼 것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보고서는 예측한다.그러나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일은 일본이 경제대국으로만 안주하지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는 사실이다.경제력에 걸맞는 정치·군사적 영향력도 행사하겠다는 것이 21세기 일본의 국가전략이다. 일본의 그러한 변화를 우리는 냉정한 눈으로 보고 있는가.우리는 일본의 실체를 감정적 판단으로 덮는 오류를 반복해서는 안된다.「일본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오기에 지나지 않는다.일본은 역사속에 존재하며 강대국이 되어 다가오고 있다.일본의 그러한 변화를 바로 보고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되지않도록 대비하는 것이 광복50주년과 한·일국교정상화 30주년을 뜻깊게 하는 참다운 역사인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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