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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儒林(581)-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17)

    儒林(581)-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17)

    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17) 따라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알성시의 책제(策題)들은 대부분 정치와 관련된 질문들이었다. 예를 들면 ‘그대가 공자라면 어떻게 정치를 하겠는가.’하고 조광조에게 물었던 중종의 책문을 위시하여 세종대왕은 ‘법의 폐단을 고치는 방법은 무엇인가.’, 혹은 ‘어떻게 하면 좋은 인재를 구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정치적인 질문을 알성시를 통해 묻고 있는 것이다. 또한 명종은 ‘육부의 관리를 어떻게 개혁하여야 하는가.’를 묻고 있는가 하면 ‘교육이 나아갈 길은 무엇인가.’라고도 묻고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치른 후 선조는 ‘(일본과)화친하는 것이 좋으냐, 정벌하는 것이 좋으냐.’는 나라의 생사가 걸린 양자택일의 책문을 던지고 있고, 가장 책문을 즐겨했던 임금은 조광조를 총애하다가 마침내 사약을 내려 죽게 하였던 중종으로 알려져 있다. 중종은 ‘그대가 공자라면 어떻게 정치를 하겠는가.’하는 책문 이외에도 ‘외교관은 어떤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가.’,‘처음부터 끝까지 잘 하는 정치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정치적인 질문을 던졌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조광조를 발탁하였던 이듬해 1516년 ‘별시문과’에서는 다음과 같은 시험문제까지 내고 있다. ‘술의 폐해는 참으로 오래되었다. 술의 폐해가 문제되었던 것은 어느 시대부터인가. 우임금은 향기로운 술을 미워했고, 무왕은 술을 경계하는 글을 지었으며, 위나라의 무공은 술 때문에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는 시를 지었다. 이토록 오래 전부터 술의 폐해를 염려했으나 아직까지 뿌리를 뽑지 못한 까닭은 무엇인가.’라는 ‘술의 폐해를 논하라.’는 내용의 책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임금이 내린 책문 중에서 가장 유니크하고 독창적인 것은 광해군이 내린 책문이다. 훗날 반정으로 폐위가 된 광해군은 그로 인해 후세의 사가들로부터 변덕스러운 군주로 낙인찍혀 죽은 후에도 임금의 칭호를 받지 못하고 폭군 연산군과 더불어 ‘군(君)’으로 격하하였지만 광해군은 실제로 개혁에 투철한 선각자였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지금 가장 나라에 시급한 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러나 1616년 겨울 증광회시에서는 조선 역사상 가장 돌발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면 반드시 돌아오니 해이고, 밝으면 반드시 어두워지니 밤이로다. 그런데 섣달그믐밤에 꼭 밤을 지새우는 까닭은 무엇인가. 또한 소반에 산초를 담아 약주와 안주와 함께 웃어른에 올리고 꽃을 받치는 풍습(椒盤頌花:두보의 시에 나오는 노래의 한 구절)과 폭죽을 터트려 귀신을 쫓아내는 풍속은 섣달 그믐밤에 밤샘하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침향나무를 산처럼 얹어서 쌓고 거기에 불을 붙이는 화산(火山)풍습은 언제부터 생긴 것인가. 섣달그믐 전날 밤 하던 액막이행사인 대나(大儺)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함양의 여관에서 주사위놀이를 한 사람은 누구인가.(두보는 今夕行이란 시에서 홀로 긴 밤을 지새우며 여관에서 주사위놀이를 하며 자신의 고독을 달래었다고 노래한 적이 있다.) 여관에서 쓸쓸하게 깜빡이는 등불을 켜놓고 잠을 못 이룬 사람은 왜 그리하였을까.…”
  • 고도 경주의 봄을 찾아

    고도 경주의 봄을 찾아

    신라의 천년 고도(古都)인 ‘경주’가 ‘확’ 달라졌다. 불국사, 첨성대, 석굴암 등 고전무대가 여행의 전부였던 경주에 흥겹고 새로운, 즐기고 볼거리들이 많이 생겨났다. 또한 4월의 경주에는 각종 축제로 열기가 넘쳐난다.천년의 숨결과 함께 덤으로 숨겨진 보물을 찾으러 경주로 떠나본다. 글 사진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경주에는 대개 초등학생인 아이들과 함께 가는 경우가 많다. 신라의 찬란한 문화를 보여주는 유물과 유적이 많아 역사공부하기에 좋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연인들이나 젊은이들은 경주를 다소 멀리해 온 점이 없지 않다. 하지만 경주에 새로운 놀거리가 생겼다. # 허리 꽉 잡아, 달린다 “미정, 내 허리 꽉 잡아. 몸 좀 더 붙여.”라는 이경수(26·부산 금정)씨,“오빠 이거 어떻게 운전하는지 알아.”라고 반문하는 김미정(25·부산 사하)씨.“이 오빠를 믿어. 간다.”라며 부와∼왕 시끄러운 굉음과 함께 쏜살같이 ATV(4륜 오토바이)가 튀어 나간다.“꺄∼악”하는 비명과 함께 그들은 벚꽃이 가득한 보문단지로 사라졌다. 경주 보문단지에서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보다 ATV나 전기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들이 더욱 많다. 자전거보다 편하기도 하지만 연인끼리 몸을 밀착시키며 타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비록 속도는 시속 30㎞ 미만이지만 고속도로를 내달리는 것 같다. 향긋한 벚꽃 향기가 가득한 보문단지를 쉬엄쉬엄 다니며 사진을 찍거나 쉬기도 하면 시간이 금방 흘러간다. 바람과 함께 흩날리는 벚꽃을 맞으며 뒤에서 허리를 꼭 잡고 있는 그녀에게 날리는 한 마디 멘트.“자기야, 평생을 내 뒤에 있어.” 이 정도면 작업 끝이 아닐까. 242만평에 달하는 보문단지를 다 돌아보기는 힘들다. 혹시 해질 녘이라면 보문 호수로 가보자. 호숫가에 ATV를 세워놓고 황금빛으로 물드는 호수를 바라보며 어깨에 기대있는 사랑스러운 그녀를 바라보자. 세상에 그런 미인은 없을 것이다. 자. 이젠 빨리 ATV를 반납하러 가야 한다.1시간에 2만원. 무지하게 비싸지만 그래도 서로 친해졌으니까 후회는 없을 것이다. 보문단지내는 콘도나 대여점 모두 가격이 똑같다. 하지만 “아저씨 2시간 탈 테니까 좀 깎아주세요.”라는 애교 섞인 목소리면 3만원에도 해준다. 혹시 시간이 남는 사람들을 위해 보문호에서는 페달을 돌리는 오리보트도 탈 만하다. 또한 ‘로스트 메모리즈’의 장동건을 기억하는가. 영화처럼 권총으로 ‘탕, 탕, 탕’하고 사격을 할 수 있는 실탄 사격장이 있다. 애인에게 군대 갔던 무용담만 들려 줄 것이 아니라 사격 실력도 뽐내보면 어떨까. 스트레스는 물론 기분까지 좋아진다. 여자들도 쉽게 쏠 수 있다.10발에 2만원. 경주 보문실탄사격장(054)741-4007,kjshooting.com # 온천수로 즐기는 물놀이 따사로운 봄볕에 모두들 수영복을 입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화콘도 내에 오픈한 워터파크인 스프링 돔이다.1200평 규모의 스프링 돔은 일반 워터파크와 수질이 다르다. 지하 750m에서 끌어올린 온천수를 100% 사용한다. 표출 온도도 35℃로 약알칼리성이다. 어린이 풀 한쪽에서 멋진 청년이 마이크를 잡고 아이들과 신나게 놀이를 한다. 음악에 맞춰 “하나 둘” 구령을 붙이며 수영장에서 아이들과 춤을 춘다. 뒤이어 “자 우리 물대포를 만들어 볼까.”라며 펌프와 빈 병으로 아이들과 물대포를 만들어 날린다.“와 신기하다.”라며 즐거워하는 아이들. 수중탈출, 왕자님 모시기 등 다양한 게임은 1시간 동안 진행된다. 공짜인가 궁금했다.“고객들을 위한 무료 서비스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저들이 바로 PO(Program Organizer). 클럽메드의 GO를 벤치마킹한 한화리조트의 ‘놀이도우미’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PO들이 아이들과 놀아주는 동안 부모들은 아이들 손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쉴 수 있다.“항상 워터파크에 오면 아이들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했는데 1시간 동안이나 아이들과 놀아 주니 남편과 오랜만에 편하게 즐길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라는 전지영(35·서울 성북)씨. 그뿐 아니다. 스프링 돔은 초등학생 자녀를 둔 가족들의 눈높이에 맞췄다. 물놀이 시설도 야외와 실내에 두 곳을 마련했다. 야외의 어린이 풀에는 동물분수대와 물레방아, 물미끄럼틀까지 준비돼 있다. 또한 ‘신라 전설’이란 컨셉트로 만들어 아기자기하고 멋진 노천탕과 물놀이 시설이 많다. 금장대는 신라시대 정원인 안압지에서 착안해 아일랜드 형식으로 조성된 스파시설. 중앙에 연꽃을 상징한 다양한 기능 풀과 마사지 등을 받을 수 있고 포석정을 형상화한 유수풀인 화랑대, 문무대왕 수중릉을 형상화한 이견대 등이 있어 하루가 짧다. 주말은 어른 2만 3500원, 어린이 1만 7500원. 투숙객은 1만 8500원,1만 4000원으로 할인해 준다. 혹시 비싸다는 생각이 들면 오전 관광을 하고 오후에 이용하는 것도 방법. 오후권은 30% 정도 할인된다.(054)745-8060. # 울긋불긋 꽃대궐 전국에는 많은 민속마을이 있지만 경주 강동면 양동 민속마을처럼 오래된 고택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은 없다.4월부터 6월까지가 양동마을을 돌아보기가 가장 좋다. 반가(班家)와 초가, 골목할 것 없이 어디를 가나 수백년 된 향나무와 산수유, 매화, 목련 상사화 등 화초가 있어 멋과 여유가 느껴지는 곳이다. 현재 140가구 400여명이 살고 있는 양동마을. 아이들과 타임머신을 타고 500년 전으로 여행을 해보자. 마을 전체를 천천히 돌아보려면 2시간 이상 걸리므로 중요한 집들을 먼저 돌아보는 것이 좋다. 조선 성리학의 선구자인 회재 이언적의 여강 이씨 종가인 ‘무첨당’(보물 411호)과 우리나라에서 사람이 사는 가장 오래된 살림집으로 560년쯤 된 월성 손씨 종택 등 명문대가의 건물이 남아 있다. 또 99칸 건물이었다가 한국전쟁으로 허물어져 56칸으로 개조돼 최근 영화 ‘음란서생’을 촬영했다는 ‘향단’(보물 412호),200년 이상 된 고가 54호 등 15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세워진 조선 중기 이후 집들이 즐비하다. 마을 자체가 문화재로 국보급 1개와 보물 4개가 있다. 특히 양동마을에는 ‘관가정’(보물 442호)과 영화 ‘취화선’의 무대인 심수정 등 정자만 해도 10개가 된다. 전국 어디를 가도 한 마을에 이렇게 많은 정자가 밀집된 곳은 찾기 힘들다. 영화 ‘내마음의 풍금’의 무대 배경이었던 빨간 양철지붕의 양동교회는 이전을 앞두고 있다. 양동마을에는 문화유산 해설사가 있다. 이지호(017-522-8097)씨로 한옥에 깃든 철학과 역사를 자세하게 설명해준다. 양동마을 대표적인 산책코스는 향단코스(관가정∼향단∼정충비각∼수운정)로 아이들과 함께 돌아본다면 1시간 30분이면 넉넉하다. 경주역에서 국도 7호선을 타고 포항방면으로 승용차를 이용해 약 40분 걸린다. 경주시 문화관광과 (054)779-6396. # 축제와 공연이 가득 오는 15일부터 20일까지 ‘경주 한국의 술과 떡잔치 2006’축제가 경주 황성공원에서 열린다. 타임머신 술 담그기, 제1회 전국창작 떡 만들기 대회 등 먹을거리와 볼거리가 가득한 이벤트가 열린다. 또 24일부터는 야경이 아름다운 안압지 경내에 만든 특설무대에서 매주 토요일마다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다양한 문화예술공연이, 보문관광단지 야외 상설공연장에선 전통 국악 공연이 펼쳐진다.
  • 22일 20여명이 봄맞이 단장

    “저 향나무는 언제부터 저곳에 있었을까.”“꼭 길 한복판에 둬야 할까.” 누구나 한번쯤은 서울 대법원 옆 서초동사거리를 지나면서 떠올려 보았음직한 의문이다. 생물학적으로 측정한 서초동 향나무의 나이는 868살이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터줏대감인 셈이다. 서울에서 가장 키가 크고 나이가 많은 나무이기도하다. 고려 인종 때 묘청의 난이 마무리되고 2년째 되는 1138년에 싹을 틔운 셈이다. 또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쓴 시기이기도 하다.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개국을 지켜봤으며 1457년에는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강원도 영월로 귀양을 가던 모습도 지켜봤다. 단종은 이 길을 지나 영월로 유배를 갔다. 이후 인근에 사는 백성들이 이 나무를 수호신으로 삼아 각별히 관리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 정도면 향나무가 교통에 불편(?)을 주면서도 그 자리에 굳건히 서 있을 만한 이유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향나무는 측백나무과의 상록침엽수로 높이는 15.5m, 둘레 3.35m이다. 서울시 지정보호수이다. 서초구는 22일 이 향나무의 봄단장을 한다. 나무가 큰 만큼 고가사다리차 등 장비와 20여명의 직원이 동원된다. 청소와 함께 10여병의 수간주사도 놓을 예정이다. 김성곤기자 sunggone@seoul.co.kr
  • 반신불수의 서예가 유희강씨

    반신불수의 서예가 유희강씨

    왼손으로 붓글씨를 쓰는 서예가가 탄생했다. 그것도 태어날 때부터의 왼손잡이는 아닌 인물이 바른 손의 기능이 마비되자 집념을 왼손에 옮겨 불사조 처럼 되살아 난 것이다. 사람의 의욕은 끝없는 가능성을 안고 있다고 무언 중에 말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재기 불능이라던 중풍을 집념으로 이기고 첫작품 劍如 柳熙綱(검여 유희강•59•서울 영등포구 화곡동 61의99 주택207호)씨는 딸 小英(소영•23•홍익대미대 동양화과 졸) 양의 부축을 받아 아침 저녁 뜰을 거닐면서 생각에 잠기곤 한다. 창백한 얼굴. 쇠약해서 바람이 불면 날려갈듯한 몸이다. 한쪽 편을 못 쓰는 조각 난 몸에 뜰의 분홍장미들 보다 더 뜨거운 것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짐작할 사람은 몇명이나 될까? 왼손으로 붓글씨를 써서 다시 세상에 나가겠다는 꿈틀거림이 그것이다. 그 의지의 싸움에서 그는 일단 승리했다. 6월 20일부터 25일까지 서울 국립공보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서예가협회 전시회」에 다른 서예가와 함께 씨의 작품 1점도 나란히 출품되었다. 원래 바른 손으로 붓을 잡던 씨가 중풍인 몸을 채찍질해서 왼 손으로 써낸 작품이다. 세상은 그를 재기불능이라고 평했다. 그는 작년 9월7일 동양화가 霽堂 裵廉(제당 배렴)씨의 장례식에 참례한 뒤 집에 돌아오자 뇌일혈로 쓰러졌었다. 다행히 큰일이 나지는 않았지만 죽음의 선고와 같은 증상에 빠졌다. 몸의 오른 쪽 부분을 못 쓰게 된 것이다. 고요히 잊혀져 가는 인물로 처졌다. 세상은 그 재능을 아까와 했고 그 기골있는 붓글씨에 다시 접할 수 없게 되었음을 안타까와 했다. 그는 우리나라 서예가로서는 드물게 젊을 때 淸國(청국)에 건너가 上海(상해)미술학교에서 서양화와 서예를 공부했다. 서양화로 출발해서 서예로 전향했다. 처음엔 한字를 써도 떨려 그만 붓을 놓아버리더니 제2회 國展(국전) 때 서양화부와 서예부에 동시에 출품한 뒤로는 서예 하나에만 전념, 특히 大朝(대조)시대의 隸書體(예서체)에 있어서 독특한 경지를 이룩해 왔고 해마다 海印寺(해인사)의 숲 우거진 계곡에서 붓글씨를 닦고 갈았다. 1955년 이후로는 國展 서예부 심사위원을 연임해 왔다. 그의 글씨를 평자는 꿋꿋하고 근엄한 힘이 응결된 서예양식이라고 했다. 또 어떤 평자는 천진절벽에 홀로 꽂힌 마른 향나무를 둔한 도끼로 마구 찍어 우틀두틀한 자국을 내었는데 그윽함을 느끼게 하는 필력- 이라고도 비유했다. 幽玄美(유현미)가 있다고도 했다. 왼손으로 쓴 글씨가 옛날의 기골을 가지게 될 것인가에 대해 세상은 상당한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이다. 줄곧 병시중을 들어 온 딸 小英양은 『아버지가 낱말도 많이 잊으시고 글뜻도 모르시게 된 것이 많은데 차차 연습을 거듭할수록 필법이 옛날과 닮아 가신다』고 신기해 하고 있다. 『글씨도 옛날에 닮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요즘 화곡동 자택에서 小英양의 부축을 받으면서 서울시내 모 한의에게 매일 침을 맞으러 다닐 정도는 회복이 되었다. 안마사의 치료도 받고 있다. 그러한 사이사이에 매일 30분씩 화선지 2분의 1절 크기의 종이 5장에다가 왼손으로 연습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잔 글씨 쓰기부터 시작했다. 그것을 두 서너 글자만 써도 팔 다리가 떨려서 그만 붓을 놓아 버리기를 열흘 이상이나 거듭했다. 더욱이 창립에 참여한 한국서예가협회의 전시회를 목전에 두고 의욕을 불태웠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제자들의 작품전서 자극 이튿날 紙墨(지묵) 가져오라고 그는 별로 말이 없다.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말을 아직도 제대로 하지를 못한다. 입은 낱말을 분명히 소리내기는 한다. 그런데 여러 낱말들이 연결이 되지 않는다. 낱말이 온전한「센텐스」를 이루지 못해 듣는 이에게 뜻이 전달되지 않는다. 겨우 기동을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몸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연습시간이 오면-대체로 하오이지만- 그는 병상에서 상반신을 도움받아 일으켜 세운다. 그 앞에 책상과 종이가 놓여진다. 그는 왼 손에 붓을 들고 글씨를 써 나간다. 그러다가 지치면 누워 버린다. 연습을 시작한 것은 금년 4월부터였으니 3개월 남짓한 짧은 기간에 출품작을 제작해 낸 셈이다. 4월부터 연습을 시작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닌 듯 하다. 4월1일~7일 사이의 1주일 간 상업은행 화랑에서는 금년들어 최초의 서예전시회가 열렸었다. 그것이 劍如書院展(검여서원전)이었다. 문하생들이 자기들만의 힘으로 전시회를 연 것이었다. 오랫동안(7개월간) 스승의 직접지도를 받지는 못했지만 그런대로 제자들 끼리 부지런히 공부해왔다는 증거들이었다. 이 때 출품작은 모두 40점이었다. 바퀴의자에 실려 회장에 나타난 그는 제자들의 부축으로 방명록 제1호로 자기 이름을 적었다. 그에 앞서 왼손에 가위를 쥐고 간신히 회장의「테이프」를 끊는 늙은 서예가의 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케 했다. 小英양 얘기로는 劍如는 그다음 날인 2일 하오에 딸을 병실에 불러 몸을 붙들어 일으키게 하고 글씨쓰는 시늉을 하면서 붓과 종이를 청했다. 그의 서숙 劍如書院(서울 안국동)에서는 그가 건강했을 때와 다름없이 제자들이 모여 스승없는 精進(정진)에 몰두하고 있다. 한편 그 스승은 스승대로 반신불수의 몸을 움직여 한국서예사상 최초인 右手(우수)에서 左手書(좌수서)에로의 기적을 창조해내고 있다. 그는 언젠가 가까운 동연배의 서예가에게 淸나라에서 글씨 배웠을 때의 경험을 말한 일이 있다. 왼손글씨 없지는 않아도 중풍 이기는 名筆은 처음 『그 스승이 가르치는 방법을 가만히 보았더니 제자들에게 일일이 지도를 하지는 않았다. 제자들 스스로가 자기 것을 개척해 나가는 것을 옆에서 지켜 보고만 있었다. 그러면서도 말없는 지도를 하였다』 그 기풍이 劍如의 제자들에게도 배어 스승없이 서예전을 열어 스승을 격려했고 그 역시 홀로 새 경지를 헤쳐 여는데 집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 왼손글씨의 전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골의 사당에는 左手書라는 단서가 찍힌 현판이 걸린 곳이 여러군데 있다. 그러나 그 左手書는 원래가 왼손잡이의 글씨 아니면 바른 손도 쓰면서 餘技(여기)삼아 왼손을 움직여 본 글씨들이다. 劍如의 경우와 같이 처음에는 바른 손으로 높은 봉우리를 이룩한 뒤 더욱이 환갑을 1년 앞두고 그 손의 기능을 잃어서 붓을 다시 왼손에 고쳐 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서예사상 처음 있는 일을 그 병상에서 묵묵히 쌓아 올리고 있다. [ 선데이서울 69년 6/22 제2권 25호 통권 제39호 ]
  • 인기스타들 얼마나 잘사나

    인기스타들 얼마나 잘사나

    ◇ 김진규(金振奎) 요리집「희원(喜苑)」경영, 문화영화 제작사도 <집> 서울 한남동에 건평 1백평의 2층 저택. 아래층은 한식, 2층은 양식, 40평 가량의 넒은「홀」. 잘 꾸며지기로는「스타」중 최고. <자가용> 2백 50만원짜리「닷지」1대 <부업> 한식요정「희원」을 경영하고 문화영화「센터」를 갖고 있다. 「아리프렉스」촬영기와 5백mm「줌·렌즈」도 있고. 한동안 광산에 투자했으나 오래 전에 중지. <동산> 값비싼 골동품, 그림, 글씨를 갖고 있다. 가구는「톱·스타」답게 1류. 현금액수는 밝히기를 꺼리고. <가족> 3남 3녀와 부인 김보애(역시 배우)씨 등 8식구. 김씨 전속이 운전사 포함 3명. <출연료> 1편에 50만원. <사족>「예총」부회장직을 내놓은 뒤 영화촬영에 전심하고 있는데 공직 때문에 지난 해에 못 번 몫을 올해엔 보충할 심산인 듯. 교외에 목장, 과수원을 낀 농장을 물색 중인데 아직 적지를 못 잡고 있다. ◇ 김지미(金芝美) 건평 4백 20평 집에 보석 3천만원 어치 <집> 정릉의 8백평 대지에 건평 4백 20평,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배우 중 가장 큰 집. 김지미·최무룡 부부가 3년 걸려 지었고 지금도 공사가 진행 중인데 지하실은「스튜디오」로도 쓸 수 있을 정도. 아래층「홀」은 50쌍의 남녀가 어울려「댄스·파티」를 열어도 충분한 넓이. <자가용> 남색「크라운」은 김지미양이 쓰고「밀크」색「코로나」는 최무룡씨가 탄다. <부동산> 부군의 영화사. <동산> 김지미양이 취미로 모은 보석·귀금속 90점 가량, 싯가 3천만원 상당. <가족> 어머니, 부부, 자녀 5명, 동생 1명에 운전사 등 동거인이 9명, 모두 18명. 이 밖에도 평균 10여명의 식객이 있고. <출연료> 김지미 50만원, 최무룡 40~50만원. 부군은 감독, 제작을 겸하면서 영화출연은 별로 않는다. <사족> 한국배우 중 돈을 제일 많이 만지지만 지출도 최고. ◇ 신성일(申星一) 남이섬엔 별장 하나, 극장 신축할 계획도 <집> 이태원 2층 양옥을 4층으로 증축. 3백 50만원짜리 공사를 지금 한창 벌이고 있다. 1백평 가량의 뒤뜰 잔디밭이 명물. <자가용>「코로나」가 2대, 부부가 각 1대씩 쓴다. <부동산> 화곡동에 극장용 대지 8백평을 샀으나 착공은 못했고 남이섬에 2층 별장이 하나. <동산> 상업은행에 액수 미상의 예금이 있고 배우 중 제일 화려한 응접실을 갖고 있는데 명물은 왕궁용의 호피(虎皮). <출연료> 1편 40~45만원. <사족> 상반기 납세액 2백 40만원으로 한국배우 중 최고액 납세자. 「톱·스타」의 위치를 가장 오래 누려온 신성일은 치부 면에서도 첫손 꼽힐 것으로 추측되지만 표면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게 또한 특징. 약수동 처가댁과 정릉 어머니집 생계비를 대주고 있다니 그 방면 지출도 적지 않을 듯. ◇ 윤정희(尹靜姬) 6백만원 집을 사고 자가용 자동차 2대 <집> 석관동에 석조 1층의 아담한 양옥. 대지 70평, 건평 25평. 차고와 창고, 방이 4개. 작년에 6백만원에 사서 손질. <자가용> 영국산 초록색「오스틴」과「코로나」. 「코로나」는 월부로 샀고「오스틴」은 지난해에 1백 80만원에 샀는데 임자 나서면 팔 예정. <부동산> 퇴계로 모처에 가게를 살 예정이었으나 미결. <동산> 피아노, TV 2대, 전축, 전화 등 갖출 건 다 갖췄으나 보석류는 즐기지 않는다. 옷은 3백여 벌. 2백만원짜리 적금을 붓고 있다. <가족> 부모, 6남매 포함 8식구에 운전사,「스케줄·맨」, 식모 등 윤양 전속 4명. 월 인건비 지출이 10만원 이상. <출연료> 1편에 30~35만원. <사족> 배우되기 전인 3년 전엔 가회동서 전셋집. ◇ 신영균(申榮均) 극장·빌딩 주인으로, 관광호텔 지을 계획 <집> 쌍림동에 대지 2백 30평, 건평 70평의 2층 양옥. 넙은 정원과「뜰」이 특색. 응접실은 향나무「세트」로 향내가 흐른다. 싯가 3천만원 상당. <자가용> 흑색「크라운」1대. <부업> 금호동의 금호극장, 충무로의「아데네」극장 등 2개 극장주였는데「아데네」는 팔았다. 인현동에 있는 6층「빌딩」(지하 1층 포함) 주인인데 지하다방, 1층의 명보제과 등 모두 자영(自營). 치과의사인 그는 4층에 치과병원도 개설할 예정. 관광「호텔」을 짓기 위해 광나루에 4천평 대지를 샀다. 3억 5천만원짜리 명동의 국립극장을 차지하고 싶어하기도. <동산>「스타」중「재산관리인」을 두고 있는 유일한 재벌(?). 동산은 밝히기를 거부. <가족> 편모와 부인 김선희씨, 슬하에 남매 합해 5식구. <출연료> 1편에 50만원. <사족> 금년도 상반기 납세액이 사업소득세 포함해서 3백여 만원. 배우 중 최고. ◇ 문 희(文 姬) 백만원 들여서 집 고쳐, 미장원 차릴 궁리도 <집> 장위동에 2층 양옥을 7백만원에 샀는데 1백만원을 들여 개수했다. 길가여서 아래층은 가게로도 쓸만한 곳. 미장원이라도 내어볼 생각. 세 번 이사했는데 그때마다 집이 커진다. <자가용> 계속 애용한 독일제「베이지」색「폴크스·바겐」과 새로 산「크라운」이 있다. 「폴크스·바겐」은 팔려고 내놓았고. <동산>「피아노」, 2대의 TV, 보석류 약간. 아직은 집, 가구 등에 신경을 쓰고 치부를 위한 투자는 않는다. <부동산> 별로…. <가족> 부모, 5남 1녀의 외동딸인데 큰오빠는 분가해서 7식구. 문양 전속이 4명. <출연료> 1편에 30~35만원. <사족> 한때 겹치기 출연편수 38편으로 국내배우 중 최고였으나 요즘은 작품 위주로 가려서 출연한다. 돈보다는 작품에 욕심이 많아서 돈벌이는 천천히 하겠다는 것. ◇ 김희갑(金喜甲) 동산 없다고 하지만 영화계에선 알부자로 <집> 광희동에 한양절충식 2층, 건평 70평, 대지 1백평. 신당동, 약수동 등에 5, 6개의 가옥을 갖고 있었는데『모두 팔고 지금은 2개 뿐』이라고. <자가용>「코티나」1대. <부동산> 부평에 5만평 가량, 광나루에 또 2만평 정도의 토지를 갖고 있었는데『지금은 모두 팔았다』고. <동산> 모 은행의 은행원이 불친절하다고 예금을 모두 찾겠다는 바람에 은행장이 와서 무릎을 꿇었다는 소문이고 보면 상당한 저축이 있는 듯. 그러나 본인 말로는『동산이 전혀 없다』. <출연료> 10~20만원. <사족> 영화계의「알부자」중 한 사람. 적어도 5위 이내의 실속파란 게 주변의 얘기지만. 생활은「스타」의 화려함보다 수수하고 평범한 걸 즐기는 성미. 이런 알찬 생활태도는 악극단 출신의「스타」가 지닌 공통점. 김희갑씨는 그 대표적인 예. ◇ 남정임(南貞妊) 2천만원 새집 짓고 땅 2천평도 사들여 <집> 홍제동에 있는 단층양옥에 살고 있다. 홍은동에 1천만원짜리를 지었다가 너무 커서 팔아버렸는데 얼마 전엔 미아리에 2천만원짜리를 또 지었다니 살기 위한 것은 아닌 듯. <자가용> 녹색「코로나」1대. <부동산> 영등포에 대지 2천평을 샀는데 자동차 교습소를 낼 예정. 오빠가 독립적으로 운수업을 하고 종로에 있는「피아노」가게는 어머니 소관. <동산> 단골 미용사를 통해 금전관리를 시킨다는 소문이었는데 요즘은 모종관계로 해제하고 주로 은행을 이용한다. 집에는「피아노」, 영사기 등 화려한 가구와 3백여 벌의 의상이 있다. <가족> 어머니와 단 두 식구지만 남양 전속이 4명. <출연료> 1편에 30~35만원. <사족> 재산관리를 독립적으로 한다. 「스타」중 2위의 고액납세자. ◇ 구봉서(具鳳書) 3천만원짜리 집과 부동산 투자 소문도 <집> 지난해 여름 신축한 동선동의 검정 벽돌집. 앞면은 검정, 뒷면은 붉은 벽돌로 멋을 부렸다. 2층 양옥, 싯가 3천만원. <자가용>「베이지」색「크라운」1대. <부동산>『집이 전부』 <동산>「피아노」, TV 2대, 기타 가구는 모두 고급. <가족> 양친, 아내, 자녀 4남매 포함 8식구. 운전사 등 구씨 전속이 5명, 월 지출 인건비 7만원. <출연료> 20~25만원. <사족> 광고「모델」료로 국내 최고액인 1백만원을 제일 먼저 받았다. 방송, TV, 영화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가장 수입이 다채롭지만 본인의 말은『벌어서 먹고 세금내기 빠듯하다』. 희극배우 중「개런티」도 제일 비싸고 출연편수도 많으며 소문은 부동산 투자가 상당하다는 것. ◇ 서영춘(徐永春) 궁궐 같은 한옥 비롯, 숨은 재벌이란 말도 <집> 제기동과 종암동에 궁궐 같은 한옥 3채. 모두 20간 정도의 싯가 1천만원짜리. <자가용> 검정색「크라운」1대. <부동산> 3채의 집. 그동안 모은 돈으로 사업을 벌일 예정이지만 업종은 미정. <동산> 모 은행에 상당한 예금이 있으나 액수는『밝힐 수 없다』. <가족> 부부, 자녀 3, 운전사 포함 8식구. <출연료> 20~25만원. <사족>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방송「쇼」, 영화에서 상당한 수입을 올렸다. 한번 손에 넣으면 다시는 내놓지 않는 꼼꼼한 성미여서 숨은 재벌이란 소문도. 요즈음은 방송, TV에서보다 지방「쇼」나 영화출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인기판도가 서울에서보다 지방에 치중되어 지방극장의 흥행사들은 아직도 그의 이름을「달러·박스」로 알고 있다. [ 선데이서울 69년 5/11 제2권 19호 통권 제33호 ]
  • 든든한 겨울나기 청국장으로!

    든든한 겨울나기 청국장으로!

    어린시절 차갑게 언손을 비비며 집안으로 들어섰을 때 우릴 반기던 그 퀴퀴한 청국장 냄새는 참으로 괴로웠다. 하지만 요즘 집에서 청국장을 만드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제 청국장은 음식이 아니라 ‘보약’대접을 받고 있다. 다이어트와 노화방지는 기본이고 항암효과도 있다고 알려지면서 더욱 인기다. 더욱이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게 말려서 곱게 간 분말이나 환(丸) 형태로 먹기도 한다. 또 청국장 요리도 찌개를 벗어나 쌈밥, 롤과 각종 소스 등 퓨전음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추운 겨울날씨, 건강도 챙기고 추억 한 조각까지 느끼게 하는 청국장을 먹어 보자. 글·사진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역사-청국장은 어느 나라 음식일까. 청국장은 중국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다. 신라시대 이전부터 내려온 우리 고유의 음식이다. ■ 효능-청국장은 장을 건강하게 해준다. 변비는 물론 또한 각종 성인병을 예방하는데도 한 몫 한다. 인스턴트 음식을 많이 먹는 현대인에게는 섬유질, 비타민, 미네랄이 부족하게 마련이다. 이런 영양소가 부족하면 열량을 내는 탄수화물이나 단백질이 완전분해가 되지않아 지방으로 축적되고, 비만과 고혈압 등 각종 성인병의 원인이 된다. 반면에 청국장에 포함된 레시틴이나 사포닌은 혈액 속의 과도한 지방이나 콜레스테롤 성분을 흡수, 배출하며 각종 미생물과 효소 등이 몸의 신진대사 기능을 활발하게 해 성인병은 물론 자연스럽게 살을 빼는데도 도움을 준다. 인터넷에 보면 청국장으로 암을 이겼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잘 발효된 청국장을 젓가락으로 떠 보면 끈적끈적한 거미줄 같은 실들이 엉켜있는데 이것의 주성분이 폴리글루터메이트이다. 폴리글루터메이트는 탁솔이라는 항암물질을 체내로 운반하는 중요한 작용을 하며 그 자체가 항암작용을 한다. 또 대두 사포닌은 대장암 세포의 성장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인터넷이나 홈쇼핑 등에서 팔고 있는 청국장 기계는 3만원부터 8만원정도. 청국장 기계를 살 때 따져봐야할 것은 바닥은 물론 옆면 모두 가열되는 제품을 골라야 한다는 것. 그래야 진이 많은 청국장을 만들 수 있다. ■ 만들기 (1)흠집이 없고 노란빛이 도는 메주콩(백태)을 준비한다.팁:수입콩은 방부제 등을 사용해 발효가 되지 않을 수 있으니 국내산 햇콩을 고른다. (2)깨끗이 씻은 메주콩 한 컵반을 용기에 담은 뒤 5컵의 물을 붓고 12시간 정도 불린다. (3)찜솥에 콩을 4∼5시간동안 찐다. 찬 공기가 들어가지않도록 뚜껑을 열지말 것.팁:콩을 삶으면 영양분의 손실이 많아지므로 찌는 것이 좋다. 압력밥솥을 사용하면 콩 껍질이 가스배출구를 막아 사고의 위험이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4)완전히 익은 콩을 소쿠리에 놓고 식혀준다. 전통적인 방식은 볏짚을 이용하는데 그냥 공기 중에서 두기만해도 균이 접종된다. (5)약 40℃의 온도와 80% 정도의 습도를 유지시켜 발효시킨다.팁:제대로 발효가 되지않는다면 콩이 완전히 무르도록 익혔는지, 공기 중에 충분히 노출시켰는지 확인할 것. ■ 보관 잘 발효된 청국장은 냉장실에 보관할 경우 한 달 정도 저장할 수 있다. 단 6개월정도 보관하려면 일주일 정도 먹을 분량씩 랩으로 싼후 냉동실에서 보관한다. ■ 요리-이런 청국장 요리 어때요? 청국장을 이용한 다양한 요리를 만들어보자. 새싹이나 양배추 등에 청국장을 살짝 넣어 먹는다면 아이들도 거부감없이 청국장을 먹을 수 있다.풀무원의 브랜드 참마루 메뉴개발실 박경리씨는 맛있고 먹기 편한 청국장 요리를 제안한다. (1) 새싹 청국장 밥 재료:모듬 새싹, 공기밥 400g(2공기), 참깨 5g, 흑임자 5g, 소금 1g, 참기름 3g, 청국장 약간, 상추 약간, 깻잎 약간 만드는 법:(1)새싹, 상추, 깻잎을 깨끗이 씻어 물기를 제거 한다.(2)밥에 참깨, 흑임자, 소금, 참기름을 넣고 잘 버무린다.(3)상추, 깻잎 위에 밥을 한 술 올리고 청국쌈장, 새싹을 올려 먹는다. (2) 두부구이 재료:두부 1모, 단호박 200g, 고구마 1개, 새송이 2개,청국장 구이 소스(청국장 70g, 꿀 20g , 잣 으깬 것 5g, 땅콩 으깬 것 15g, 참깨 2g) 만드는 법:(1)두부를 통째로 전자레인지에 2분간 돌린 후 무거운 것을 올려놓아 씹히는 맛이 좋아지게 한다.(2)야채류는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다.(3)두부도 야채의 크기에 맞추어 자른다.(4)대나무 꼬치에 두부, 단호박, 고구마, 새송이버섯을 꽂는다.(5)오븐에서 앞 뒤 노릇노릇하게 굽는다.(오븐이 없을 경우 팬에서 구워도 된다.) (6)다 구워지면 청국장 구이 소스를 발라 접시에 담아 낸다. (3) 양배추 롤 재료:두부 1개, 양파 150g, 당근 40g, 부추 20g, 곱게 다진 쇠고기 70g, 마늘 5g, 밀가루 10g, 소금 2g, 밥 200g(1공기), 양배추 1/2개, 달걀 1개, 미나리 약간, 후추 약간, 정종 약간 만드는 법:(1)두부는 물기를 꼭 짜둔다.(2)양파는 다진 후 살짝 볶아둔다.(3)당근, 대파도 다져둔다.(4)다진 쇠고기는 후추, 정종을 조금 뿌려 재어운다.(5) (1)에 (2)∼(4), 밀가루, 달걀, 밥을 넣고 잘 섞고 소금으로 밑간을 맞추어 놓는다.(6)양배추는 반으로 자른 후 심을 제거하고 찜기에 넣어 10분간 찐다.(7)양배추 한겹 위에 두부밥을 올린 후 청국쌈장을 올려 잘 만 뒤 데친 미나리로 묶는다.(8)접시에 담아 낸다. (4) 두부 버거 스테이크 재료:두부 1모, 백일송이 버섯 100g, 곱게 다진 소고기 80g, 달걀 1개, 빵가루 30g, 부침가루 10g, 양파 1개, 대파 1/2개, 삶은 감자 1개, 양상추 50g, 파프리카 30g, 드레싱 약간, 소금 약간, 후추 약간, 굴소스 15g,청국쌈장 버거 소스(청국쌈장 50g, 진간장 10g, 마요네즈 20g, 토마토 케첩 10g, 설탕 5g, 물 20g) 만드는 법:(1)두부의 물기를 꼭 짜고, 양파와 대파는 곱게 다져 놓는다.(2)팬에 올리브 오일을 둘러 양파와 대파를 넣고 노릇노릇하게 볶는다.(3)백일송이 버섯을 잘게 다진다.(4)준비한 재료를 모두 볼에 담아 골고루 섞은 뒤 소금으로 간을 한다.(5)원하는 크기만큼 덜어낸 후 손으로 잘 치대 동그랗게 만든다.(6)팬에 올리브오일을 두르고 약한 불로 두부 버거를 앞 뒷면으로 노릇하게 굽는다.(7)접시에 두부 버거를 담고 소스를 얹고, 야채와 함께 낸다. (5) 청국쌈장 된장찌개 재료:청국쌈장 50g, 된장 50g, 국물용 멸치 6g(4마리), 감자 70g(1/2개), 애호박 40g, 양파 1/4개, 백일송이 버섯 50g, 청양고추 1개, 다진 마늘 1작은술, 대파 1/2개), 두부 200g(1/2모), 물 600g(3컵), 콩가루 1작은술 만드는 법:(1)감자, 양파, 애호박, 두부는 먹기 좋게 잘라둔다.(2)백일송이 버섯은 밑둥을 자른 뒤 하나씩 떼어 놓는다.(3)청양고추, 대파를 저며놓는다.(4)냄비에 기름을 살짝 두르고 마늘을 볶다가 감자, 양파, 청국장, 된장을 넣고 1분간 잘 볶는다.(5) 물을 붓고 (4)를 넣어 잘 풀어준 뒤 멸치를 넣는다.(6)찌개가 끓기 시작하면 청양고추, 대파, 애호박, 백일송이 버섯을 넣는다.(7)3분간 끓인 후 두부를 넣고 1∼2분간 더 끓인다.(8)불 끄기 직전에 콩가루를 넣는다. ■ 맛집-청국장 맛있는 집을 보자. 삼청동 총리공관 앞에 있는 향나무세그루(02-720-9524)는 마니아들에게 검증받은 청국장집.10여년전, 다양한 한식으로 시작한 이 집은 청국장으로 소문나면서부터 현재는 점심 메뉴는 청국장만 하고 있다. 큰 그릇에 밥과 청국장 한술, 고추장, 참기름을 넣고 반찬으로 나온 싱싱한 콩나물, 무생채, 시금치 등을 넣어 비벼 먹는다. 청국장은 군산에서 가지고 온다.4000원. 중구 필동의 필동면옥 근처에 있는 고향식당(02-2264-0240)의 청국장 찌개는 맛이 깊다. 전라도 할매가 손수 발효시킨 청국장에 묵은 우거지와 돼지고기 사태를 몇 점 넣어 그야말로 담백한 청국장을 맛 볼 수 있다. 분식점과 같은 겉모습만으로 얕보기엔 음식이 너무 맛깔스럽다.4000원.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문 맞은편 한국신용평가건물 지하 1층 진주청국장(02-785-6918)은 한정식집을 연상케 하는 깔끔한 인상처럼 청국장 맛도 부드럽다. 뚝배기에 끓여 담아낸 청국장은 절구에 빻아 통콩이나 콩조각 등 알갱이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서울 사직공원옆 사직파출소 맞은편에 있는 사직분식(02-736-0598)은 문을 여는 순간 구수한 청국장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릇에 담아낸 청국장 찌개는 걸쭉한 국물에 콩이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서울 안국동 풍문여고 뒤쪽 골목에 있는 별궁식당(02-736-2176)의 냄새는 골목 끝까지 느낄 수 있다. 느타리버섯·팽이버섯·호박·두부·파 등을 넣고 하얗게 보글보글 끓여낸 청국장은 꿀맛이 따로없다. 이밖에 공평동 제일은행 본점 뒤쪽 하나로식당(02-733-0678)에서는 가정식백반(5000원)에 무·배추를 듬뿍 넣은 청국장 찌개(5000원)가 나온다. 담백하다. 동교동 제일은행 뒤쪽의 전주식당(334-8500)은 한식 전문이지만 바지락과 두부 호박을 넣은 청국장 찌개(4500원)가 깔끔하다. 냄새때문에 청국장이 싫다면 환이나 분말형태의 청국장을 먹으면 된다. 또 청국장에 클로렐라, 석류, 녹차 등을 섞은 기능성 청국장환도 나온다.콩예원(www.congyewon.com,02-990-2030)은 철저한 품질관리와 기능성 청국장 개발의 선두주자다. 우리 콩을 쓰는 것은 기본. 경기도 포천시 내촌의 깨끗한 물로 어머니표 청국장을 만들고 있다. 청국장의 명가(www.cleanmeal.co.kr), 지리산홍화인(www.honghwain.co.kr) 등도 유명세를 타고 있는 집들이다. 삼청동 총리공관 앞에 있는 향나무세그루(02-720-9524)는 마니아들에게 검증받은 청국장집.10여년전, 다양한 한식으로 시작한 이 집은 청국장으로 소문나면서부터 현재는 점심 메뉴는 청국장만 하고 있다. 큰 그릇에 밥과 청국장 한술, 고추장, 참기름을 넣고 반찬으로 나온 싱싱한 콩나물, 무생채, 시금치 등을 넣어 비벼 먹는다. 청국장은 군산에서 가지고 온다.4000원. 중구 필동의 필동면옥 근처에 있는 고향식당(02-2264-0240)의 청국장 찌개는 맛이 깊다. 전라도 할매가 손수 발효시킨 청국장에 묵은 우거지와 돼지고기 사태를 몇 점 넣어 그야말로 담백한 청국장을 맛 볼 수 있다. 분식점과 같은 겉모습만으로 얕보기엔 음식이 너무 맛깔스럽다.4000원.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문 맞은편 한국신용평가건물 지하 1층 진주청국장(02-785-6918)은 한정식집을 연상케 하는 깔끔한 인상처럼 청국장 맛도 부드럽다. 뚝배기에 끓여 담아낸 청국장은 절구에 빻아 통콩이나 콩조각 등 알갱이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서울 사직공원옆 사직파출소 맞은편에 있는 사직분식(02-736-0598)은 문을 여는 순간 구수한 청국장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릇에 담아낸 청국장 찌개는 걸쭉한 국물에 콩이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서울 안국동 풍문여고 뒤쪽 골목에 있는 별궁식당(02-736-2176)의 냄새는 골목 끝까지 느낄 수 있다. 느타리버섯·팽이버섯·호박·두부·파 등을 넣고 하얗게 보글보글 끓여낸 청국장은 꿀맛이 따로없다. 이밖에 공평동 제일은행 본점 뒤쪽 하나로식당(02-733-0678)에서는 가정식백반(5000원)에 무·배추를 듬뿍 넣은 청국장 찌개(5000원)가 나온다. 담백하다. 동교동 제일은행 뒤쪽의 전주식당(334-8500)은 한식 전문이지만 바지락과 두부 호박을 넣은 청국장 찌개(4500원)가 깔끔하다. ■ 구입-요즘 청국장이 변화하고 있다. 냄새때문에 청국장이 싫다면 환이나 분말형태의 청국장을 먹으면 된다. 또 청국장에 클로렐라, 석류, 녹차 등을 섞은 기능성 청국장환도 나온다.콩예원(www.congyewon.com,02-990-2030)은 철저한 품질관리와 기능성 청국장 개발의 선두주자다. 우리 콩을 쓰는 것은 기본. 경기도 포천시 내촌의 깨끗한 물로 어머니표 청국장을 만들고 있다. 청국장의 명가(www.cleanmeal.co.kr), 지리산홍화인(www.honghwain.co.kr) 등도 유명세를 타고 있는 집들이다. ■ 박경리씨는… 일본 도쿄 조리사전문학교와 식품업체에서 4년간 일본요리를 경험한 전문가. 풀무원 찬마루 브랜드 메뉴개발실에서 일하면서 풀무원 생가득 샐러드 드레싱, 청국쌈장 등 다양한 히트상품을 기획해냈다.
  • [조현석 기자의 맘대路 멋대路] 묘향산 단풍교향곡

    [조현석 기자의 맘대路 멋대路] 묘향산 단풍교향곡

    가을 여인의 자태가 이보다 더 매혹적일까. 묘향산이 내뿜는 화사하고 해맑은 정취가 새삼 가을임을 실감케 한다. 알록달록한 단풍으로 곱게 갈아 입은 묘향산은 마치 단아한 한복을 차려입은 조선의 여인네 형상이다.‘내 평생 소원이 무엇이던가. 묘향산에 한번 노니는 것이었지(平生所欲者何求 每擬妙香山一遊)’라던 조선시대 방랑시인 김삿갓의 노래처럼 가을 묘향산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평양과 묘향산에서의 짧았던 3박 4일. 은행 나뭇잎이 길가를 노랗게 수놓은 평양의 모습도 인상적이었지만 그래도 묘향산의 화사한 가을이 더 진한 여운을 남긴다. 좀더 머물며 그곳의 아름다운 가을을 담았으면 하는 아쉬움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직까지 자유롭게 그 곳에 갈 수 없다는 게 못내 안타까울 뿐이다. 평양 시민과 자유롭게 인사 나누며 묘향산에서 단풍 나들이를 즐길 그날은 언제 올까. 하늘이 유달리 높고 푸르렀던 평양과 묘향산의 가을 속으로 안내한다. 글 사진 평양·묘향산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1 서울에서 평양까지 묘향산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지도상 거리로도 서울∼대구 정도쯤. 서울에서 평양까지 비행기로 55분, 평양에서 묘향산까지 버스로 2시간 정도로 바삐 움직이면 서울에서 당일 여행도 충분할 것처럼 보인다. 22일 오전 9시35분. 한국관광공사를 통해 평양에 제공된 페인트 등 외장재 활용 등을 점검하기 위해 꾸려진 ‘평양·묘향산 방문단’ 130여명을 태운 대한항공 9815편이 인천공항을 떠나 평양으로 출발했다. 서해 직항로를 따라 북으로 기수를 돌린 지 55분.“북한 진남포 지역에 상륙했습니다. 조금 뒤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하겠습니다.”라는 기장의 짤막한 안내 방송에 이어 비행기는 평양 순안공항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자유롭게 갈 수 없는 땅 평양은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짧은 비행끝에 도착했다. 공항은 한적하고 깔끔했다. 활주로에는 구소련 제 투볼레프 기종의 고려항공 여객기 10여대가 눈에 띄었다. 트랩카의 계단을 내려 공항 버스로 갈아탄 뒤 김일성 주석의 사진이 걸린 대합실에 들어섰다. 짐을 찾은 뒤 간단한 수속을 밟고 공항을 빠져 나왔다. 수속은 통일부에서 내준 ‘방문증명서’를 보여주는 것으로 쉽게 끝났다. #2 노랗게 물든 평양 거리 평양 시내로 들어 가는 길은 그리 낯설지 않다. 추수를 막 끝낸 한가한 농촌의 풍경이다. 논밭 사이로 볏짚을 나르는 농부와 논 위에 듬성듬성 쌓여 있는 볏가리는 어린시절 외갓집 가는 길을 연상케 한다. 길가에 하얀 억새가 바람에 한들거리고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오갔다. 멀리 농촌 문화주택지라고 불리는 3∼4층짜리 건물들이 보인다. 버스에 동승한 북측 안내원은 차량 이동중 사진촬영을 하지 말아달라는 당부와 함께 “모르는 것은 정확하게 알도록 안내원에게 물어봐 주십시오. 그리고 떠날 때는 아름다운 추억만 남기고 가시라요.”라며 인사한다. 얼마전 다녀온 개성의 안내원보다는 사뭇 세련(?)돼 보였다. 공항에서 시내까지는 22㎞, 버스로는 20∼30분 걸린다.1998년에 건설된 9·9절 거리를 지나 평양시내 입구인 금성거리에 들어섰다. 멀리 항일투쟁열사들의 묘역이 있는 대성산을 지나자 사람들을 가득 실은 궤도 전차와 무궤도 전차가 분주하게 오갔다. 잿빛 콘크리트 건물뿐일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분홍빛으로 칠한 아파트들도 상당수 눈에 띄었다. 거리의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인상적이다. 중심가인 승리거리에는 인민대학습당(도서관), 김일성광장, 주체사상탑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목재를 안쓰면서 조선시대 건축미를 재현해 놓은 것”이라는 안내원의 자랑이 이어진다. 낮 12시. 숙소인 양각도 국제호텔에 도착했다. 양각도 호텔은 대동강 가운데 있는 양각도 섬에 지어진 호텔.48층짜리 호텔은 특등에서 3등실까지 1001개의 객실을 갖추고 있다.2등실 1박이 150유로다. 호텔앞에는 9홀짜리 골프장을 갖추고 있다. 방에서는 대동강변의 전경과 멀리 둥근 텐트모양의 능라도의 ‘5월 1일 경기장’,170m 높이의 주체탑, 유경호텔 등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평양 관광은 김 주석의 생가인 만경대 고향집,82년 건립된 개선문, 주체탑 등 대부분 김일성 주석의 항일 운동, 혁명 사업 등과 관련돼 있어 남측 사람들은 다소 거부감이 들 수 있다. 밤이 깊어오자 능라도 5·1 경기장에서 열리는 ‘아리랑’ 공연이 시작됐다.10만명이 동원된 대규모 공연이다. 공연을 본 한 남측 관람객은 “일부 이념적인 내용을 빼면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엄청난 스케일의 공연”이라고 촌평했다. #3 평양에서 묘향산까지 23일 오전 8시 버스는 서둘러 묘향산으로 향했다. 일요일이어서 거리는 한적했고, 평양역 등 역들은 등산복 차림의 시민들로 가득했다. 묘향산과 구월산, 원산 성도현, 함경북도 칠보산으로 단풍 구경을 가는 사람들이다. 평양에서 묘향산까지는 160㎞. 버스로 순안공항과 숙전, 안주를 거치는데 왕복 4차선이 깔려 있어 2시간 만에 도착했다. 묘향산의 지명은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묘향천과 청천강이 합쳐지는 곳이다. 숙박시설은 14층 규모의 피라미드식 특급호텔인 향산호텔이 있다. 향산호텔에 짐을 푼 뒤 1.5㎞떨어진 탐밀봉 기슭의 국제친선전람관을 돌아봤다.78년 개관한 세계에서 보기 드문 ‘선물 박물관’이다. 청기와 지붕의 박물관은 김 주석 부자가 북한을 방문한 178개국 국빈 등으로부터 받은 선물 21만 9370여점(2004년말 현재)이 전시돼 있다.“선물을 하나 보는데 1분씩만 잡아도 모두 보려면 1년 6개월이 걸린다.”는 게 안내원 설명이다. 모두 150개의 전시실이 있는데 선물 중에는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지난 98년 방문때 선물한 금 황소와 62년 역도산으로 알려진 김신락이 선물한 ‘벤츠’ 승용차, 펠레가 선물한 축구공 등이 눈에 띈다. 전람관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되며, 입장시 덧신을 신어야 한다. #4 가을향기 그윽한 묘향산 묘향산 등반길을 따라 난 향산천의 물빛이 유리알처럼 투명하다. 바닥에 깔린 조약돌이 파란 하늘 빛을 받아 쪽빛으로 빛난다. 등산로는 5개의 등산로 가운데 만개의 폭포가 있다는 만폭동(萬瀑洞). 입구에서 무릉폭포, 비선폭포,9층폭포까지 4㎞다. 신향산 지구에 있는 이 등산로 사이로 곧게 뻗은 소나무와 그 사이로 빨갛게 물든 단풍 나무가 반긴다. 길가에서는 등산객, 소풍 나온 아이들이 반갑게 손을 흔들어 준다. 입구에는 ‘명승지 입장료금 적용에 대하여’라는 간판과 함께 어른 40원, 어린이 20원, 외국인 25달러라는 간판이 눈길을 끌었다. 허봉순(24) 안내원이 등반길에 함께하며 휴대용 마이크로 설명을 늘어놨다. 묘향산이라는 이름은 이 곳에 많이 자생하는 향나무와 측백나무가 그윽하고 묘한 향기를 내뿜는다 해서 유래됐다고 한다. 최고봉인 1909m의 비로봉을 비롯해 화강암으로 된 웅장한 봉우리와 기암괴석, 맑은 계곡과 폭포가 절경을 이룬다.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서곡폭포. 만폭동의 일만폭포가 시작되는 ‘교향곡’의 서곡이라는 뜻이다. 날이 가물어서 그런지 물줄기가 약했지만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아름답게 빛난다. 이어 하무릉폭포를 지나 나무꾼 총각들이 경치에 취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쉬었다고 해서 붙여진 무릉폭포를 만났다. 폭포 위 무릉소에는 청정어종인 버들치가 산다고 한다. 등산로는 생각보다 가팔랐다. 바위를 파내어 계단처럼 길을 냈다. 40분쯤 산길을 오르자 ‘만폭동 8선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은선폭포가 나오고 여기에 아담한 정자 은선정이 나온다. 정자 앞에는 ‘묘향산은 천하제일 명산’이라는 김 주석의 글이 새겨진 바위가 보인다. 지난 91년 이 곳을 다녀간 김 주석의 지시로 92년 새긴 글귀다. ‘쉬었다 가자.’며 푸념하는 일행을 안내원이 남측에도 많이 알려진 ‘휘파람’을 부르며 달래준다. 감칠맛나는 노랫가락에 다시 힘이 솟아난다.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겨 선녀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유선폭포와 그 사이를 잇는 유선다리, 은정폭포를 지나 장수바위에 이르자 북측 안내원이 다음 일정때문에 여기까지만 오른다며 하산할 것을 종용한다. 유선폭포는 길이가 60m에 이르는데 팔담우에서 비탈진 수직벼랑에서 폭포수가 쏟아진다. 만폭동 절경을 즐기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아쉽지만 2시간의 짧은 등반을 마친 뒤 보현사를 보기 위해 올라간 길을 거슬러 내려왔다. 산 아래있는 보현사는 ‘부처의 도덕’을 맡아본다는 보현보살의 이름으로 명명된 사찰.1042년 정종 8년에 굉확(宏廓)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됐다가 다시 복원한 건물이다. 대웅전으로 들어가려면 조계문, 해탈문, 천왕문 등 3개의 관문을 거쳐야 한다. 첫 관문인 조계문은 불교의 조계파에 속하는 절간문이라는 뜻이며, 두번째 문인 해탈문은 모든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서 벗어나라는 의미다. 보현사 팔만대장경 보존고에는 팔만대장경으로 처음 찍은 판본 6793책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직지심경이 있다. 묘향산에서 내려오는 길 만폭동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한 시인의 글귀가 귓가를 스쳤다.‘만폭동 오름길은 십리도 못되는데 한낮이 기울도록 못다올랐네, 오르자니 무릉폭포 걸음 붙들고, 머물자니 유선폭포 어서 오라 부르네, 저 해를 멈춰세워 백날 보면 다 볼가, 하루해가 짧은 줄 예 와서 알겠구나.’ #5 여행길에 만난 사람들 관광길에 만난 북측 사람들은 강한 인상을 남겼다. 평양 학생소년문화궁전에서 자수를 배우는 최향미(8)양은 수줍음이 많지만 예의가 무척 바른 소학교 2년생. 질문을 던지면 한땀한땀 집중해 만들던 호랑이 자수를 그 자리에 놓고 벌떡 일어나 또박또박 대답한다.“방과후에만 두달반째 만들고 있습니다.” 가야금을 배우는 여중생 김향순(13)양은 사진촬영을 하는 기자가 신기한듯 보며 애써 웃음을 참는 모습이 예쁘다. 평양 민족식당의 종업원 정은심씨는 20대 초반의 처녀. 불고기를 불판에 구워주면서 틈나는 대로 무대에 나가 노래를 불러준다. 그녀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부르는 ‘휘파람’에 손님들이 잠시 젓가락질을 멈춘다.“고등중학교때 학생궁전에서 배웠다.”는 노래 솜씨는 가수 뺨칠 정도로 수준급이다. 묘향산 향산호텔의 종업원 이은실씨는 저녁식사를 하는 손님들과 함께 노래를 하며 흥을 돋워준다. 끝날무렵에는 어깨동무를 하며 ‘다시만나요’라는 북한 가요를 부르며 눈시울을 붉힌다. 역사박물관 안내를 맡은 김옥순씨는 해박한 역사지식과 함께 유머도 풍부하다. 조선시대 유물관을 지날 즈음 “조선시대 유물은 다 남쪽에 있는데 통일되면 그때 유물을 보면서 자세하게 설명해 드릴게요.”라며 재치있게 넘긴다. ●여행메모 북측의 공식 외국환은 유로화지만 상점 등에서는 달러가 통용된다.1유로가 북한돈 170원. 양강도 국제호텔 객실의 TV에는 BBC방송과 일본, 중국 방송 등 여러개의 채널이 나온다. 전화는 남측만 빼놓고 전세계 모든 국가의 통화가 가능하다. 숙박료는 2등실 1박이 150유로다. 향산호텔은 사우나와 안마, 노래방, 당구장 시설 등을 갖췄다. 사우나는 2유로, 안마는 50분에 15유로. 숙박료는 1박에 100∼200유로. 먹을거리는 평양에서는 옥류관의 평양냉면, 평양단고기집의 단고기 등이 유명하고, 묘향산은 향산호텔의 팔색 송어 요리가 유명하다.
  • [서울戀街] (5) 삼청동 거리

    [서울戀街] (5) 삼청동 거리

    북적이는 도심을 뒤로 하고 경복궁 모퉁이를 돈다. 낙엽을 즈려밟으며 발걸음을 옮긴지 10분이 지났을까. 어느새 삼청동 어귀에 다달았다. 좁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옹기종기 늘어선 단층 건물들은 시공(時空)을 뛰어넘은 세상에 있는 듯 하다. 고즈넉한 한옥들은 인사동에 비해 더욱 한국적인 정취를 풍긴다. 동시에 아기자기한 야외 테이블과 벽돌집 앞에 놓여진 꽃들은 유럽의 어느 골목길에 들어선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든다. 최근에는 삼청동 풍광을 담은 사진들이 인터넷을 통해 퍼져나가면서 ‘삼청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모임도 생겼다. 회원은 2만여명에 이를 정도다. 이들이 인정하는 맛집·술집·찻집들을 찾아 떠나보자. 쿡앤하임(Cook´n Heim) 햄버거를 무조건 정크푸드로 여긴다면 오산이다. 이탈리아에서 요리를 배운 조리장이 웰빙을 목표로 화학조미료를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작은 정원에 마련된 식탁에서 식사를 하는 것도 운치가 있다. 이탈리아의 구운빵인 ‘포카차’에 두툼한 패티를 넣은 이탈리안 칠리버거는 8500원.733-1109. 8 steps 식당에 들어가려면 8개의 계단을 올라가야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빵에 훈제연어·버섯샐러드·가지·문어·시금치 등을 올려먹는 스페인 요리인 ‘타파스(tapas)’가 독특하다. 가격은 1만 2000원∼1만 6000원. 저녁에는 타파스를 비롯해 티라미스, 스테이크 등이 포함된 코스(5만원)만 내놓는다.738-5838. 아 따블르(A Table) 프랑스어로 ‘소박한 밥상’이라는 의미다. 메뉴판이 따로 없는 게 특징. 그렇다고 주는대로 먹으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주인이 그날그날 가장 신선한 재료를 골라 ‘오늘의 메뉴(Plats du Jour)’를 짠 뒤 작은 칠판에 요리들을 적는다. 테이블이 6개밖에 없어 한옥만의 아늑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즐길 수 있다. 점심 3만원, 저녁 4만5000원·5만5000원(부가세 10% 별도)736-1048. 추억의 햄버거 스테이크부터 갖가지 고기로 만든 스테이크까지 있다. 올디스 팝송이 나오는 편안한 분위기다. 호주산 쇠고기로 만든 부드러운 안심스테이크(2만 9000원·200g)가 잘 팔린다. 점심 메뉴는 6400∼1만 3000원.733-3535. 청(淸) 통유리창을 통해 인공 폭포와 연못이 있는 아기자기한 숲을 볼 수 있는 중식당. 로맨틱한 정원 풍경과 촛불 아래에서 재즈를 들으며 와인을 곁들여 먹을 수 있다. 연두부에 크림을 같이 반죽해 얇게 튀긴 ‘일품두부와 비타민(1만 5000원)’은 고소하면서 담백하다. 코스 요리는 점심이 2만3000∼6만원, 저녁이 4만5000원∼9만원.720-3396 뺑&빵 쌍둥이 자매가 동부이촌동에 이어 낸 스파게티 전문점. 가게 이름도 이들의 별명에서 따왔다. 둘 다 유학파로 깔끔한 맛의 이탈리아 정통 스파게티를 내온다. 여러 사람들이 찾는 메뉴는 크림스파게티. 느끼하지 않으면서도 구수한 맛을 내면서 스파게티를 싫어하는 남성들도 자주 찾는다. 해물스파게티나 각종 리조또도 맛있다. 가격은 스파게티가 1만5000∼1만8000원으로 약간 센 편.722-5930 콰이민스 테이블(Qwymin’s Table) 미술가 김쾌민씨가 손수 인테리어한 아기자기한 카페. 지난해 2월 문을 열었다. 벽에는 이국적인 골동품, 벽돌 등과 함께 김씨의 설치미술 작품인 ‘벽의 눈물’이 전시돼 있다. 식사와 와인, 차를 함께 즐길 수 있다. 와인은 4만원, 차는 5000원부터.1만 5000원 받는 프랑스식 전골 ‘해물 브야베스’도 특이하다.736-7320 비움(VIUM) 삼청동의 갤러리 카페 가운데 하나다. 지난해 12월 문을 열었다. 그러나 각종 자기들을 전시·판매하는 곳으로 벌써 널리 알려졌다. 컵, 사발 등 뿐 아니라 액자 등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미국 뉴욕, 독일 뮌헨, 일본 나수 등에도 매장과 전시장 등을 운영하고 있다. 먹거리도 전시품 못지 않게 빼어나고 깔끔하다. 특히 삼청동에서 가장 저렴한 값의 와인을 만날 수 있다. 호주산 와인인 노티지힐을 3만원에 내놓고 있다.730-7258. 지난해 새로 문을 연 퓨전 차이니즈 레스토랑이다.‘이리와’라는 뜻의 식당 이름 답게 붉은 색의 조명이 삼청동을 찾은 이들의 발길을 유혹한다. 사천해물밥, 해물잡탕밥, 중국식 물냉면 등이 인기다. 가격은 식사 5000∼1만원, 요리는 1,2만원 선이다.720-3368. 김유영 이두걸기자 carilips@seoul.co.kr ■ 삼청동서 와인 한 잔 트래블러스 행아웃(Traveler’s hangout) 우리말로 풀어쓰면 ‘여행자 소굴’쯤 된다.2년동안 20여개국을 여행한 28세의 젊은 사장이 운영한다. 여행책자도 여러권이어서 주인에게 배낭여행 상담을 하러 가도 된다. 아담하지만 가운데 마당에는 모닥불도 있고, 종종 어쿠스틱 라이브가 열리기도 한다. 원래 구조를 허물지 않아 다락방도 있다. 아르헨티나 차인 마떼가 6000원. 삼청동에서 맛보기 힘든 소주와 라면은 각각 4000원.734-3009. 링가롱가(Linga Longa) 삼청공원 부근 눈에 띄지 않는 골목에 있어서 처음 발견하는 순간 ‘보물찾기’에 성공한 듯한 기분이 든다. 밖에는 갖가지 꽃화분이 늘어서 있어 유럽의 까페같다. 안에 들어서면 낮은 천장 아래 지중해빛 노랑 회벽에 물감으로 그려진 아기자기한 그림들이 정겹다. 목공예가인 주인장과 화가인 아내가 직접 꾸민 것이다. 외국에서 가져온 접시·목각 인형 등 아기자기한 소품들도 눈에 띈다.3만원대의 중·저가 와인들이 많이 있으며 커피는 직접 로스팅한다.730-3223. 라 끌레(La Cle) 프랑스어로 ‘열쇠’란 뜻이다. 사진작가인 주인 문순우씨가 직접 수집한 각종 시계·전화, 카메라 등 소품들은 따뜻한 느낌을 자아낸다. 무늬만 재즈카페가 난무하는 요즘, 도심에서 제대로 된 재즈 연주를 들을 수 있는 곳이다. 매주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후 8시30분부터 2시간30분 동안공연을 즐길 수 있다.4만∼5만원부터 있는 와인도 유명하다.734-7752. 까브(Cave)프랑스어로 깊은 동굴·포도주를 저장하는 지하 창고를 뜻한다. 프랑스의 와인 저장 창고 까브를 그대로 본떠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국내·외에서 접하기 힘든 희귀 와인까지 100여종의 와인으로 가득하다. 비싼 것은 220만원에 달한다. 매일 오후 8시부터 은은한 조명 아래 음식과 와인을 맛보면서 클래식 기타 연주를 들을 수 있다.739-1788. 안(安·Ann) 개조된 한옥의 큰 창 밑으로 와인병들이 무수히 많이 쌓여있다. 담벼락에는 그려진 와인 코르크 마개로 만든 프랑스 지도가 풍취를 더한다.722-3301. TOS 형광색에 가까운 주황색 외벽을 따라 작은 골목을 들어서면 나온다. 다른쪽(The Other Side)의 준말이다. 천정이 뻥 뚫린 미니바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마시는 와인이 일품이다.720-7854. 이두걸 김유영기자 douzirl@seoul.co.kr ■ 삼청동 터줏대감 특유의 맛 지킴이 삼청동은 하룻밤 자고 나면 새로운 가게들이 생길 정도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 하지만 삼청동이 유명해지기 전부터 이곳을 꿋꿋이 지키고 있던 맛집들도 여전히 건재하다. 손맛을 인정받은 삼청동 토박이 맛집들을 소개한다. 눈나무집(雪木杆) 각 테이블마다 시원한 국물에 아삭아삭한 이북식 김치를 얹은 ‘김치말이 국수(4500원)’를 하나씩은 시켜 먹는다. 그릴에 다진 쇠고기와 떡볶이용 떡을 구워 나오는 ‘떡갈비(7000원)’도 인기다. 주말이면 기다려야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공간이 비좁아 올해초 건너편에 분점도 냈다.739-6742. 수와래 파스타 종류가 20여가지로 재로를 듬뿍 넣은 게 특징이다. 주문을 받은 뒤 재료를 다듬고 요리를 만들어 신선하다. 버섯·치즈·크림을 넣은 알프레도와 홍합·오징어·새우를 넣은 페스카토레가 각각 1만 2000원선. 삼청동 음식점으로서는 드물게 전용주차장이 따로 있다.739-2122. 조앤리의 밥집 조앤리 정식(2만 5000원)에는 야생초 겨자무침·모듬전·문어숙회·곰취보쌈·장어구이 등이 나온다.730-7002. 용수산 고려시대 개성음식을 재현했으며 퓨전으로 나온다. 고려정식이 5만 8000원.7399-5599. 지화자 조선왕조 궁중음식 부문에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황혜성씨가 맏딸인 한복려씨와 운영하는 한정식집이다. 궁중정식 9만 9000원.733-5834. 청수정 홍합밥 하나로 명성을 얻었다. 윤기가 차르르 흐르는 홍합밥만 봐도 먹음직스럽다. 여기에 참기름과 간장으로 간하고 한 숟가락 입에 넣으면 사르르 녹을 정도다. 정식에는 호박, 버섯 등을 무친 반찬과 된장·순두부찌개도 함께 나온다. 정식이 부담스러우면 간단한 도시락도 있다. 이밖에도 대구머리로 만든 뽈데기탕은 칼칼한 맛으로 입맛을 돋군다. 홍합밥 정식 1만 3000원, 홍합밥 도시락 6000원.738-8288 향나무 세그루 청국장 맛으로는 서울 시내에서 손꼽힐 만하다. 걸쭉하면서도 비리지 않은 맛은 청국장을 싫어하는 사람도 손이 저절로 간다. 매일 전북 군산에서 갓 담근 장을 올려 끓이는 게 맛의 비결. 청국장에 콩나물, 무생채 등 각종 나물을 넣고 쓱쓱 비비면 천하진미가 따로 없다. 두툼하게 나오는 전북 함평산 돼지목살도 일품이다. 육질이 씹히는 맛이 그만이다.11년 동안 가격을 한 번도 올리지 않은 것도 이 집만의 미덕이다. 청국장 4000원, 돼지목살 6000원.720-9524. 삼청동 수제비 식사 시간이면 줄이 10m 넘게 늘어설 정도로 유명한 집이다. 멸치와 조개 등으로 우려낸 국물에 해물을 첨가한 한결같은 수제비 맛으로 20년 넘게 단골에 단골을 만든 집이다. 쫄깃한 맛의 수제비와 갓 담은 김치도 궁합이 잘 맞는다. 감자를 직접 갈아 부친 감자전과 파전에 막걸리 한 잔도 일품이다. 항아리 수제비 5000원, 찹쌀수제비 6000원, 감자전 6000원.735-2965. 서울에서 둘째로 잘하는 집 국적을 잃어버린 삼청동에서 20년이 넘게 ‘한옥촌’의 명맥을 잇고 있는 한방찻집이다. 이집의 ‘주 종목’은 단팥죽. 팥과 삶은 밤, 은행, 울타리콩 등이 어우러져 달콤한 맛을 낸다. 죽 안의 찹쌀떡을 씹으면 계피향이 입 안에 가득 찬다. 쌍화탕과 녹각대보탕, 십전대보탕 등 한방차도 그윽한 맛을 자랑한다. 단팥죽 4500원, 녹각대보탕·십전대보탕 5000원, 쌍화탕·생강차 3000원.734-5302. 김유영 김기용기자 carilips@seoul.co.kr
  • ‘동양최대 수목원’ 문 열었다

    ‘동양최대 수목원’ 문 열었다

    동양 최대의 수목원이 경북 포항에서 선을 보였다. 경북도는 23일 포항시 북구 죽장면 상옥리 경상북도수목원 현지에서 이의근 경북도지사와 조연환 산림청장을 비롯한 관계 기관장과 주민 등 3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원식을 갖고 일반에 공개했다. 평균 해발 630m의 고지대에 들어선 이 수목원은 면적이 3222㏊로 프랑스 바실리수목원(6070㏊)에 이어 세계 두 번째다. 국내에서 지금까지 가장 넓은 경기 포천의 국립수목원(1150㏊)의 2.8배나 된다. 수목 전시실을 비롯해 식물원, 온실, 연못, 잔디광장 등을 갖춘 수목원에 각종 나무와 풀, 꽃 등 1510종에 17만 9226그루를 심었다. 이 수목원은 2001년 9월 개장 당시 55㏊에 온실, 전시실, 관리사 7동, 연못 3곳, 잔디광장만 갖췄으나 이후 두 차례 확장공사로 규모가 커졌다. 특히 수목원은 동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를 비롯해 4계절 꽃을 볼 수 있는 한국형 정원, 관목원, 방향식물원, 약용식물원, 연못 및 창포원, 울릉도식물원, 활엽수원 등 다양한 테마를 두고 조성됐다. 주요 식물원의 하나로 꼽히는 고산식물원에는 희귀 및 멸종위기의 식물인 구상나무, 설앵초, 눈향나무, 종비나무, 설악눈주목, 용담 등이 선보여 관람객들의 발길을 붙잡을 것으로 기대된다. 또 수목원은 인근에 내연산 최고봉인 향로봉을 비롯해 매봉, 삿갓봉, 천령산 등 백두대간의 지류인 낙동정맥의 명산을 끼고 있어 관광명소로 떠오를 전망이다. 도는 앞으로 수목 특성에 따라 24개 분야로 나눠 자연체험 학습장과 학술연구 공간으로 활용하는 한편 사업비 100억원을 들여 수목원 내 300㏊에 수목장(樹木葬·나무 밑에 화장한 뼛가루를 묻는 장사 방식)림인 ‘추모의 숲’을 조성할 예정이다. 경북도 관계자는 “경북수목원은 개장 이래 줄곧 산림 식물자원의 탐색 및 수집, 보존, 관리 등을 강화하고 조경, 화훼, 약용 등 경제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꾸준히 확장돼 왔다.”면서 “앞으로도 지속적인 투자를 통해 산림식물종의 다양성 확보와 산림 유전자원의 보존 증식은 물론 세계에서 으뜸가는 전문 수목원으로 육성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이 수목원은 그동안 ‘내연산수목원’으로 불려 오다 지난 6월 ‘경상북도 수목원’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대구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동양최대 수목원’ 문 열었다

    ‘동양최대 수목원’ 문 열었다

    동양 최대의 수목원이 경북 포항에서 선을 보였다. 경북도는 23일 포항시 북구 죽장면 상옥리 경상북도수목원 현지에서 이의근 경북도지사와 조연환 산림청장을 비롯한 관계 기관장과 주민 등 3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원식을 갖고 일반에 공개했다. 평균 해발 630m의 고지대에 들어선 이 수목원은 면적이 3222㏊로 프랑스 바실리수목원(6070㏊)에 이어 세계 두 번째다. 국내에서 지금까지 가장 넓은 경기 포천의 국립수목원(1150㏊)의 2.8배나 된다. 수목 전시실을 비롯해 식물원, 온실, 연못, 잔디광장 등을 갖춘 수목원에 각종 나무와 풀, 꽃 등 1510종에 17만 9226그루를 심었다. 이 수목원은 2001년 9월 개장 당시 55㏊에 온실, 전시실, 관리사 7동, 연못 3곳, 잔디광장만 갖췄으나 이후 두 차례 확장공사로 규모가 커졌다. 특히 수목원은 동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를 비롯해 4계절 꽃을 볼 수 있는 한국형 정원, 관목원, 방향식물원, 약용식물원, 연못 및 창포원, 울릉도식물원, 활엽수원 등 다양한 테마를 두고 조성됐다. 주요 식물원의 하나로 꼽히는 고산식물원에는 희귀 및 멸종위기의 식물인 구상나무, 설앵초, 눈향나무, 종비나무, 설악눈주목, 용담 등이 선보여 관람객들의 발길을 붙잡을 것으로 기대된다. 또 수목원은 인근에 내연산 최고봉인 향로봉을 비롯해 매봉, 삿갓봉, 천령산 등 백두대간의 지류인 낙동정맥의 명산을 끼고 있어 관광명소로 떠오를 전망이다. 도는 앞으로 수목 특성에 따라 24개 분야로 나눠 자연체험 학습장과 학술연구 공간으로 활용하는 한편 사업비 100억원을 들여 수목원 내 300㏊에 수목장(樹木葬·나무 밑에 화장한 뼛가루를 묻는 장사 방식)림인 ‘추모의 숲’을 조성할 예정이다. 경북도 관계자는 “경북수목원은 개장 이래 줄곧 산림 식물자원의 탐색 및 수집, 보존, 관리 등을 강화하고 조경, 화훼, 약용 등 경제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꾸준히 확장돼 왔다.”면서 “앞으로도 지속적인 투자를 통해 산림식물종의 다양성 확보와 산림 유전자원의 보존 증식은 물론 세계에서 으뜸가는 전문 수목원으로 육성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이 수목원은 그동안 ‘내연산수목원’으로 불려 오다 지난 6월 ‘경상북도 수목원’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대구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6)미륵부처의 환생과 ‘정감록’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6)미륵부처의 환생과 ‘정감록’

    영조 19년(1743) 은진미륵불로 유명한 충남 은진의 관촉사에 세워진 사적비에 이런 구절이 있다.“은진미륵불은 국가가 태평하면 온몸에 광채가 나고 상서로운 기운이 공중에 어린다. 그러나 국가의 운수가 흉하거나 난리가 일어나면 온몸에 땀이 흐르고 손에 든 꽃도 빛을 잃는다.” (‘조선금석문총람’ 하) 민중은 은진미륵불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라의 운명을 점친다는 것이다. 도대체 미륵불이 누구이기에 한국 민중에게 미래를 보여주는 것인가. 미륵신앙에 따르면, 장차 미륵불이 지상에 강림해 수많은 사람을 일시에 구원해 준다고 한다. 이런 신앙은 석가모니부처 당대에는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인데, 서기 100년쯤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해 서기 3세기에는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미륵신앙은 북위 때 중국에 전파되어, 당나라 이후 보편 신앙이 됐다. 한국에는 불교가 처음 수용되던 4세기 이후 지속적으로 많은 신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대중은 미륵불을 통해 손쉽게 성불할 수 있고 현세에서 풍요를 누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정감록’ 역시 지상낙원을 약속했다는 점에서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미륵불과 ‘정감록’ 사이엔 흥미로운 접점이 있다. 역사상 스스로를 미륵부처의 환생이라고 주장한 이들은 늘 예언을 빙자했고, 직접 예언서를 조작하기도 했다. 환생 미륵불은 ‘정감록’에 예고된 진인의 원형이었다. 이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런 견해는 ‘삼국사기’를 비롯해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기록이 뒷받침해 준다.20세기에 창립된 여러 신종교의 교리를 조사해 봐도 결과는 역시 동일하다. 신종교 단체들은 자기네 교조를 미륵불로 간주한 경우가 많으며, 이 경우 미륵불은 바로 ‘정감록’이 말한 진인인 것이다. 예컨대 증산교의 교조는 자기 스스로를 천자 미륵이라고 했다. 미륵불인 동시에 세상을 직접 다스릴 최고의 통치권자라고 정의했던 것이다. 강증산은 제자들에게 “나는 미륵이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 미륵불을 보라.”(‘대순전경(大巡經典)’ 초판 13장)고 직접 설파하기도 했다. ●고려후기 이금이 약속한 이상세계 신종교는 19세기 후반부터 역사의 무대 위로 등장한 것으로 다들 알고 있다. 엄밀한 의미로는 그렇지 않았다. 미륵신앙에서 갈라져 나온 신종교는 일찌감치 고려 후기에도 존재했다. 그때의 신종교도 예언과 절대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었다. 고려 후기 신종교의 미륵불은 뒷날 ‘정감록’의 진인으로 변형된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고려 우왕 때였다. 경상도 고성 출신으로 이금(伊金)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자기를 미륵불의 화신이라고 주장했다. 이금은 몇 가지 새로운 주장을 폈다. “무릇 귀신에게 빌거나 제사하는 사람, 말고기나 소고기를 먹는 사람, 돈과 재물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 사람은 모두 죽게 될 것이다.” 이금의 종교적 입장은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민간신앙에 대한 선전포고다. 당시 불교는 토착신앙에 관대했고, 그 일부는 불교 신앙에 흡수됐다. 산신이나 칠성을 모시는 민간신앙이 사찰에서도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이금은 이런 민간신앙을 근원적으로 배격했다. 둘째, 육식을 철저히 금한 것이다. 고려 후기에는 민간신앙의 제물로 고기가 바쳐진 것은 물론이고, 밀교의 승려들도 육식을 금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금은 고대 중국의 도교에서 기원한 채식주의를 강화시키려고 하였다. 셋째, 사회적인 구제활동을 신앙생활의 엄격한 규범으로 정했다. 이금의 신종교는 사회정의의 실현을 강조했고, 그런 점에서 개혁적인 성격이 뚜렷했다. 빈농을 비롯한 대다수 민중의 지지를 받기에 족한 신종교였다. “만일 내가 하려고만 하면 풀에는 파란 꽃이 피고, 나무에도 곡식이 열릴 것이다.” 이금이 말한 파란 꽃은 상상의 꽃이며, 나무에 곡식이 열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전능한 미륵불이기 때문에 자연계의 법칙을 마음대로 바꿔놓을 수 있다고 선전했다. 특히 가난한 민중을 배불리기 위해, 그는 “한 번 씨를 뿌려 두 번을 거둘 수도 있게 한다.”고 주장했다. 이금이 약속한 지상 낙원은 다분히 공상적이지만 ‘미륵하생경’에 묘사된 용화세계를 방불케 했다. 알다시피 미륵신앙은 상생(上生)신앙과 하생(下生)신앙으로 구분되는데, 서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생전에 공덕을 쌓아, 죽은 뒤 미륵보살이 주재하는 도솔천에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상생신앙이다. 그에 비해 하생신앙은 현세에서 법을 깨치고 지상낙원에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장차 석가모니불이 입적한 지 56억 7000만년이 지난 다음 미륵불이 세상에 내려와 세 번의 법회를 열게 되는데 그때 성불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고려 후기의 신종교 지도자 이금이 약속한 이상세계는 20세기 초, 강증산이 말한 “조화선경”과 많이 닮아 있다. 그것은 ‘정감록’의 진인이 실현할 지상낙원이기도 하다. 강증산은 조화선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세상 사람이 하늘에 올라가고 밤과 낮이 막힘없이 환하게 통하고, 백 가지 곡식을 오래도록 거두어들이고 만 가지 과일이 굵고 크며 풍성한 음식이 저절로 생기고, 아름다운 옷이 스스로 이르고” 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천지개벽경’) 실은 강증산의 생각은 ‘미륵하생경’을 표현만 달리해 옮겨놓은 것이다. 이금은 한 발 더 나아가 왜구의 침략으로 지쳐 있던 민중들에게 위안을 주려고 했다.“나는 산과 개울의 신을 동원해 왜적을 포획할 수도 있다.” 이 약속은 그가 사회정의와 더불어 평화로운 삶을 중시했음을 알려준다. 이것은 ‘정감록’에 진인이 나와 일본을 복속시킨다고 예언한 것과 흡사하다. 이금은 자기가 창건한 신종교를 효과적으로 전파시키려고 ‘폭력적인’ 경고도 남겼다. 위에 언급한 세 가지 계율을 어기면 목숨을 잃게 된다 했다. 뿐만 아니라,“만일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오는 삼월에 해와 달이 모두 빛을 잃고 컴컴해지리라.”고 했다. 이금의 가르침을 무시할 경우 세상은 종말을 맞이한다는 것이었다. ●이금의 신앙동지와 적들 이금의 예언은 섬뜩했고 효과도 컸다. 말세에 대한 ‘정감록’의 경고로 인해 수십만명의 정감록 신도가 탄생했듯, 수백·수천명이 이금의 가르침을 따랐다. 어떤 사람들은 후환이 두려워 말이나 소가 죽더라도 감히 고기를 먹을 생각조차 못했다. 잘 믿기지 않을지도 모르겠으나 부자들 중에도 이금의 신도가 생겨, 그들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은 쌀과 베, 금과 은을 이금이 이끄는 신종교에 바쳤고, 활동자금이 풍부해진 이금의 신종교는 삽시간에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이금의 신도 가운데서 이채를 띤 것은 남녀 무당들이었다. 그들은 유난히 이금을 공경하고 따랐다. 그동안 자기들이 섬겨온 성황당이며 사묘(祀廟) 등 민간신앙의 성전을 일시에 허물어 버리고, 이금을 살아 있는 미륵불처럼 정성껏 모셨다. 현세의 복과 이익을 바라는 사람들도 앞을 다투어 이금에게 몰려 왔다. 이 신종교의 신도는 대부분 가난한 민중들이었지만, 부자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고급관리들 중에도 이금의 신도가 있었다. 정확한 수를 알 수는 없지만, 수천명이 이금의 제자가 됐다. 그들은 ‘미치광이처럼’ 열광적으로 전도에 열심이었다. 사회 정의를 선포한 신종교라서 전파속도가 매우 빨랐고, 급속히 사회세력으로 대두됐다. 이금의 제자들은 전국의 여러 곳을 누볐으며, 그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고을 관아에서 융숭한 대접을 베풀어 주었다. 심지어 어떤 고을에서는 수령이 직접 마중을 나와 이금과 고위간부들을 관사로 초청할 정도였다. 물론 이금 일파의 등장을 경계하는 이들도 많았다. 고려 왕실과 일부 귀족들은 이금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사교(邪敎)로 선포해 탄압을 전개할 경우, 도리어 이금 쪽에서 집단적인 무력저항을 펼 가능성이 없지 않아 적극적으로 손을 쓰지는 못했다. 그만큼 이금의 신종교는 성장해 있었다. 이때 청주목사 권화는 은밀한 꾀를 써서 이금을 처치할 생각이었다. 청주는 큰 고을로 중부와 남부지방을 잇는 간선도로상에 위치한 관계로, 이금 일행이 가끔 지나가는 곳이었다. 권화는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이금 일행이 다시 청주에 들르기를 기다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이금은 고위 간부들을 대동해 청주에 들렀다. 청주목사 권화는 이금 일행에게 향응을 제공할 뜻을 보여 그들을 관아로 유인한 다음, 재빨리 체포해 버렸다. 그는 이 사실을 황급히 조정에 알렸다. 개경에선 매우 기뻐하며 각도에 공문을 보내 이금의 신종교에 가담한 인사들을 몽땅 잡아들여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그 바람에 고위관료 양원격 같은 이도 결국 목숨을 잃게 됐다. 과연 얼마나 많은 수의 신도들이 이때의 박해로 희생됐는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미륵불을 자처했던 이금의 신종교가 표면상으로는 완전히 박멸됐다는 점이다.(‘고려사’ 권 107) 이금에 대한 박해는 19세기 말에 있었던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을 연상시킨다. 비록 한때였지만 이금의 신종교가 맹위를 떨친 이유는 무엇일까. 종교지도자로서 이금이 가졌던 카리스마, 부정부패한 고려의 사회 현실, 그리고 내우외환으로 민생이 피폐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당시 사회에는 미륵신앙과 각종 예언이 유행했다고 본다. 미륵신앙과 관련해 특히 향나무를 해변에 묻는 이른바 매향의 풍속이 대단했다. 장차 미륵부처가 세상에 출현하면 그에게 향을 바치기 위해 미리 준비하는 것이었다. 매향은 집단적인 차원에서 이뤄졌으며, 행사 후 그 사실을 바위에 기록하는 경우가 많았다. 매향비를 남겼던 것이다. 강원도 고성의 삼일포를 비롯해 경상남도 사천, 전라남도 영암, 목포 및 충청남도 서산 등 전국의 여러 해안 지방에서는 매향비가 속속 발견되고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삼일포매향비(三日浦埋香碑)다. 그 비문에 따르면, 강원도 각 고을을 다스리는 지방관 10여명이 이 행사에 참가했다. 그밖에 남녀노소 수천명이 동해안 9군데에 모두 1500다발이나 되는 향나무를 땅속 깊이 묻었다고 했다. 위에서 살핀 이금의 신종교는 아마 이런 매향집단과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고 하겠다. 매향비가 만들어진 지방마다 일종의 신종교 집단이 존재했을 법하다. 다만 그들 집단의 활동은 미륵신앙이라는 종교행위에 그쳤을 뿐, 사회 또는 정치적 운동을 자제했기 때문에 역사기록에는 언급되지 않은 것이라 생각된다. 그에 비해 이금이 이끈 집단은 예언을 내세워 사회개혁을 추진했기 때문에 조정의 탄압에 직면했던 것이다.‘정감록’을 믿은 신앙집단은 무수히 많았지만, 정작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켜 공식적인 역사기록으로 남은 경우는 일부에 국한됐던 것과 마찬가지다. ●궁예도 미륵신앙 계통의 신종교 지도자 신종교란 관점에서 고대 한국의 역사를 좀더 바라보자. 미륵불을 자처한 교조가 국가를 직접 통치한 경우도 있었다. 태봉의 궁예 왕이다. 그는 신라 효공왕 5년(901)께 미륵불을 자칭했다. 엄청난 칭호에 걸맞게 왕은 외관을 특별한 모양으로 꾸몄다. 머리에는 금빛 모자를 쓰고 몸에는 승복을 걸쳤다. 왕은 궁성 밖으로 외출할 때마다 흰 말을 탔으며, 무늬가 있는 아름다운 비단으로 말의 갈기와 꼬리를 장식하게 했다. 또한 사내아이와 계집아이들에게 일산을 받쳐 들게 하고, 향과 꽃을 가지고 앞에서 왕의 행렬을 인도하게 하였다. 그밖에 비구 200여명에게 명하여 부처의 덕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며 왕의 뒤를 따르게 하였다. 왕의 화려한 행렬은 ‘미륵하생경’에 예고된 용화세계가 이미 지상에서 실현되고 있다는 점을 상징했다. 확실하진 않지만 궁예 왕은 경문(經文) 20여권을 지었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신종교의 교리서이자 예언서였던 것 같은데, 불교의 가르침과는 어긋나는 대목이 매우 많았다. 이를 참다못해 석총(釋聰)이란 승려는 “이것은 모두 이단의 주장이며 괴이한 말이므로 가르쳐선 안 된다.”라고 반발하였다. 분노한 궁예 왕은 석총을 철퇴로 때려 죽였다고 한다.(‘삼국사기’ 권 50) 결국 미륵불의 화신을 자처한 궁예 왕은 실정을 거듭한 결과, 부하인 왕건 장군에게 밀려났다. 이와 더불어 그가 창립한 신종 미륵불교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한국의 역사에는 수많은 자칭 미륵불이 출현했고 그때마다 예언서가 큰 역할을 차지했다. ●조선후기의 자칭 미륵불 여환과 예언서 조선 후기에도 자칭 미륵불의 전통은 이어졌다. 숙종 14년(1688) 8월 승려 여환(呂還)이 관련된 변란사건이 주목된다. 그의 주된 활동무대는 경기도와 황해도의 몇몇 고을이었다. 여환은 양주목 청송면에 본거지를 두고 여러 곳을 오가며 신도를 포섭했다. 자기 자신을 “신령”(神靈)이라 일컫기도 하고,“수중 노인”(水中老人) 또는 “미륵 삼존”(彌勒三尊)이라고도 했다.“천불산 선인(仙人)”이라고도 하였다. 다양한 칭호에서 보듯, 여환의 신종교는 불교 특히 미륵불교에 기원을 두고 도교적인 측면도 가졌다. 본래 강원도 통천의 승려였던 여환은 “석가모니의 운수가 끝났으니 이제 미륵이 세상을 주관한다.”며 미륵세상을 선포했다. 그는 천지조화를 마음대로 부린다고 했는데, 지관 황회, 평민 정원태 등을 동원해 많은 신도를 끌어 모았다. 여환은 “일찍이 칠성님이 강원도 김화(金化) 천불산(千佛山)에 강림하여 내게 3가지 국(麴·누룩)을 주었는데 국(麴)은 국(國)과 음(音)이 서로 같으니 짐작해 보라.”고 했다. 자기가 바로 새 왕조의 임금,‘정감록’에 기록된 진인과 다름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다만 그때는 아직 ‘정감록’이 출현하기 전이었으므로, 여환은 ‘진인’의 선구로 간주될 만하다. 자칭 미륵불인 여환은 직접 예언서를 만들기도 했다. 이런 구절도 포함돼 있었다.“7월에 큰비가 퍼붓듯 쏟아지리라. 그러면 큰 산도 무너지고 서울도 재난을 입어 쑥대밭이 되리라. 그러면 그해 8월이나 10월에 군사를 일으켜 서울로 쳐들어 가라. 대궐 한가운데 보좌를 차지하리라.” 현재 남아 있는 ‘정감록’에 이같은 구절은 없다. 그러나 유사한 구절은 얼마든지 있다. 따지고 보면, 여환이 지은 예언서는 ‘정감록’의 가까운 조상이었다. 결정적인 해 무진년(1688) 7월15일 여환은 참모들을 비롯해 양주와 영평의 광신자들을 거느리고 서울에 잠입했다. 그러나 기다리던 큰비는 오지 않았고, 쿠데타는 불발했다. 여환을 비롯한 신도 50여명이 체포됐다. 당국의 엄한 취조를 받은 끝에 그 중 11명이 사형을 받았다.(실록·숙종 14년 8월1일 신축) 그 사건이 진압된 후에도 자칭 미륵불은 계속 등장했다. 민중과 미륵불 그리고 예언서는 여전히 불가분의 관계였다.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도 전북 고창의 선운사 동불암의 미륵불 배꼽에서 비장의 예언서가 나왔다고 한다. 고려 때의 미륵불이 정감록에 예언된 ‘진인‘의 선구였다면, 뒷날에는 진인의 별명이 되다시피 했다. 미륵불은 새 세상을 약속하는 영원한 상징이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폐목 재활용 전도사 서초구목공소

    폐목 재활용 전도사 서초구목공소

    8일 오후 3시 서울 서초구 양재동 시민의 숲과 도로 하나 사이로 난 서초문화예술공원 인근은 사람들의 발길이 드물어 조용하기만 하다. 아름드리 나무숲 근처 공원 뒤에서 정적을 깨는 작은 망치소리가 들려왔다. 이 곳에는 180㎡(55평)짜리 목공소와 171㎡(52평)짜리 제재소가 들어서 직원 6명이 바쁘게 손길을 놀리고 있었다.58㎡(18평) 넓이의 장비창고, 그리고 야적장까지 합치면 대지 950여평에 이른다. 지금은 자원 재활용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손꼽혀 자치단체의 벤치마킹 대상이 됐지만 불과 3년 전만 해도 공원 이용객들이 내다버린 쓰레기로 몸살을 앓던 버려진 땅이었다. 서초구는 그해 3월 “관내 청계산과 우면산, 근린공원 등에서 태풍, 폭설과 같은 자연재해나 교통사고로 쓰러지거나 고사(枯死)한 나무들을 재활용해 자원 절약은 물론 주민 편의를 늘리자.”는 뜻으로 목공소를 만들었다. 이어 같은 해 11월 제재소를, 이듬해 11월 장비창고를 설치했다. 목공소에는 고속 만능 둥근톱과 목재 각도절단기, 전동 손대패, 충전식 핸드드릴 등 고급 장비를 갖췄다. 잔가지나 제품을 만들고 남은 것들을 부수어 퇴비, 톱밥 등으로 다시 재활용하는데, 여기에 이용하는 파쇄기의 경우 대당 3800만원이나 하는 고가장비다. 지금 2대를 갖고 있는데, 서초구는 곧 4800만원짜리 신형 1대를 들여올 계획이다. 버려질 위기에 있는 나무들이 이곳에 들어오면 먼저 옷으로 치면 디자인부터 한다. 나무의 크기와 품질에 따라 어떤 물건으로 만들 것인가를 가늠하는 것이다. 예컨대 부러진 나뭇가지는 굵기에 따라 겉과 속 무늬를 살려 작은 안내판으로 다듬는다.‘청계광장 가는 길’이라는 식으로 글을 새기고 니스를 칠하면 작품이 마무리된다. 컴퓨터에서 다운받은 서체로 밑글을 새긴 뒤 일일이 옛날 선조들이 옷을 다릴 때 쓰던 인두처럼 생긴 뾰족한 전기기구로 지져 덮어쓰기를 하는 방식이다. 의자와 같이 큰 제품인 경우 ‘이 의자는 우면산에 쓰러진 나무로 만든 것입니다.(2005.6)’라는 글씨를 새겨놓아 보는 이들에게 자원 재활용이 지닌 뜻을 되새기게 한다. 서초구 공원녹지과 김상천 조경팀장은 “지금까지 우리 목공소에서 생산한 편의시설은 모두 2만 9000여점으로 집계됐다.”고 소개했다. 자세히 뜯어보면 의자 1140여개, 팻말 1000여개, 방향 표지판 940여개, 안내판 274개, 안전 기둥 3160여개, 버팀목 4300여개 등이다. 서초구 본청은 물론 동사무소, 산하 기관의 직원들이 쓰는 업무용 책꽂이와 구청 앞마당에 있는 평상, 의자 등 편의시설도 모두 이 곳에서 만들었다. 목공소 하종연(52) 반장은 “그 덕분에 재활용 전도사로 불릴 만큼 알려졌다.”면서 “2001년엔 돈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청와대에도 납품을 하기도 했다.”면서 “노무현 대통령이 관심을 가진 뒤 직원들이 와서 2002년 5개, 지난해 3개의 의자를 가져갔다.”고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청와대 직원들은 “대통령께 서초구가 설치한 목공소에서 만든 의자라는 보고를 올렸다.”고 말했단다. 글 새기기를 전담하는 여성 1명을 포함한 목공소 직원들은 “등산객의 입을 통해서나 직접 만든 시설들을 가까이 볼 때면 특히 무언가 사회를 위해 이바지하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해진다.”고 하결같이 밝게 웃었다. 값으로 따지면 얼마나 되는가 궁금하다고 슬쩍 물어봤다. 하 반장은 “품질을 떠나 시중에서 보통 의자 하나에 30만원 정도 하더라.”라면서 “언젠가 한 초등학교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45만원 줄 테니 팔라고 요청해온 적도 있다.”고 귀띔했다. 그러나 품질에 대한 이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시설물의 수명은 4∼5년이다. 그런데 수입산 목재로 만든 것이 1∼3년인 데 비해 긴 데다, 다른 국산 목재와 비슷하지만 방부제를 전혀 쓰지 않은 친환경 상품이기 때문이다. 보통 목재에 쓰는 방부제는 독성이 강하다. 재활용할 나무는 우면산과 청계산 등에서 시설물 관리를 담당하는 직원 10여명이 들여온다.1년간 자연광 상태에서 건조하는 과정을 거치면 목재를 다듬기에 좋다. 연간 400∼500그루 정도 공급되며 수종(樹種)은 아카시, 현사시나무, 육송, 버즙나무 등 10여종이다. 산악에서 쓰러진 나무 외에 간벌, 각종 개발로 다른 시설에 장애가 되는 나무, 수종 갱신으로 뽑히는 나무들도 받는다. 하 반장은 “관내에만 해도 수요가 많아 하루 9시간 걸리는 작업이 빠듯하다.”면서 “아카시의 경우 말라버리면 못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기 때문에 일반 업체에서 잘 생산하지 않는 제품을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보람이 크다.”고 뽐냈다. 정기적으로 설치한 시설물을 점검하고, 필요한 경우 곧바로 교체해 안전을 유지하고 미관도 해치지 않도록 애쓴다. 다른 자치단체에서 벤치마킹하려고 하지만 점점 사라지는 업종인 데다, 나무가 많은 곳이 드물어 목공소 창업은 그다지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버리는 나무 돌보는 ‘나무 고아원’ ‘나무 고아원’을 아시나요. 서초구는 또한 지난 3월부터 이사, 주택 재건축, 각종 공사 등으로 베어 없애야 하거나 키우기 어렵게 된 나무들을 시민들로부터 기증받은 뒤 옮겨심어 놓았다가 필요한 사람에게 분양해 주는 나무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다. 나무를 심는 것보다 심은 나무를 잘 가꾸는 게 훨씬 경제적이라는 취지에서 시작했다. 고속버스터미널 맞은편에서 잠원초등학교 구간, 반포천을 따라가면 반포동 주공아파트 2단지 옆으로 길쭉한 ‘나무 터널’이 나타난다. 모두 2400여평에 자리한 나무 고아원에서는 현재 향나무, 단풍나무, 플라타너스 등 4000여 그루의 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나무은행에 기증을 희망하면 담당 공무원이 직접 현장을 방문, 나무의 생육상태 및 수형 등을 판단해 나무은행에 옮겨 심게 되는데, 굴착에서부터 이식비용 일체를 구청에서 부담한다. 나무 고아원은 반포천 조경에도 한몫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정 기간 주인이 나타나지 않거나 요즘처럼 너무 숫자가 많아 솎아낸 나무는 목공소로 보내져 주민들을 위한 소중한 상품으로 다시 태어난다. 나무 고아원이나 목공소에 대한 문의는 (02)570-6395∼7.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우리동네 이야기] 광진구 능동

    [우리동네 이야기] 광진구 능동

    나들이철만 되면 유난히 사람들의 발길이 몰리는 동네 가운데 하나가 서울 광진구 능동이다.1973년 문을 연 어린이대공원이 있기 때문이다. 원래 어린이대공원이 있던 자리에는 1904년 순명황후 민씨(순종황제의 비)의 유릉(裕陵)이 조성됐다. 당시 황태자비의 능이었던만큼 능지기인 참봉(參奉)의 세도와 주민들의 기세가 대단했다고 한다.1926년 순종황제가 승하한 뒤 경기 미금시로 합장되면서 이곳은 능터만 남게 된다. ●원래는 능터… 골프장으로 이용돼 그뒤 능터는 1929년 ‘경성 골프구락부’라는 18홀짜리 골프장으로 바뀌어 조선총독부의 고관과 고급군인, 친일귀족·부호 등이 즐겨 찾았다. 태평양 전쟁 당시 글라이더 연습장으로 사용돼 폐허가 됐던 이곳은 1954년 ‘능동 골프장’으로 다시 문을 열어 주한 미군장성과 유력 정치인, 사업가 등의 고급 사교장으로 이용됐다. 지금은 고인이된 이승만 전 대통령, 박두병 두산그룹 창업자, 김성곤 쌍용그룹 창업자 등이 이곳을 즐겨 찾은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1970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남산2호터널 개통식 때 양태식 전 서울시장에게 골프장을 이전하고 어린이를 위한 공원을 조성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된다. 하지만 약 2년 동안 이전부지와 비용문제 등으로 착공에 어려움을 겪다 공사 시작 180일 만인 1973년 어린이날에 맞춰 개장됐다. 손정목의 ‘서울 도시계획이야기’에는 공사 당시 공사비용이 부족해 현대건설, 삼성, 한진 등에서 자금을 지원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해마다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벚꽃은 한 재일교포가 기증했다고 한다. 1975년에는 남산 어린이회관도 어린이대공원으로 옮겨오게 됐다. 이후 천호대로, 동이로 등 주요 간선도로가 건설되면서 서울 동부지역의 발전도 보다 가속화됐다. 능동은 면적 0.88㎢로 1만 1000여명이 살고 있다. 박유관 광진구 의원은 “능동에는 수령 500년이 넘은 향나무를 모시는 치성당에서 2월과 10월 제사를 지낼 만큼 전통문화도 잘 지켜지고 있다.”고 소개했다. 능동 어린이대공원 부지 일부에는 리틀엔젤스 예술회관을 중심으로 선화예술 중·고등학교, 경복초등학교 등이 위치해 있다. 대공원 정문 옆에는 시민들이 가상으로 설정된 화재나 지진, 풍수해 등 각종 재난상황을 체험하면서 안전교육을 받을 수 있는 서울 시민안전체험관(safe119.seoul.go.kr)도 있다. 이 시설을 이용하려면 예약을 해야 한다.(02)2049-4000. 고금석기자 kskoh@seoul.co.kr
  • “나무은행 아시나요”

    ‘나무 고아원’을 찾으세요. 서울 서초구는 식목의 계절을 맞아 이사, 주택 재건축, 각종 공사 등으로 베어 없애야 하거나 키우기 어렵게 된 나무들을 기증받아 옮겨심어 놓았다가 필요한 곳에 분양도 해주는 나무은행을 운영한다고 5일 밝혔다. 나무를 심는 것보다, 심은 나무를 잘 가꾸는 게 훨씬 경제적이라는 뜻에서다. 반포동 주공2단지 옆 2400여평에 자리한 나무은행에서는 현재 향나무, 단풍나무, 플라타너스 등 1500여그루가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나무은행에 기증을 희망하면 담당 공무원이 직접 현장을 방문, 나무의 생육상태 및 수형 등을 판단해 나무은행에 옮겨 심게 되는데, 굴착에서부터 이식비용 일체를 구청에서 부담한다.(02)570-6395∼7.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1)전국의 길지 (하)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1)전국의 길지 (하)

    ●호남의 길지 호남엔 여느 도 못지않게 길지가 많다며, 성질 급한 독자들은 내게 거세게 항의했다. 그런 줄 내가 왜 모르겠는가? 다만 ‘정감록’의 길지는 태백산과 소백산을 모태로 삼는 까닭에 그 두 산부터 설명을 시작해 점차 주변지역으로 확대시킨 것뿐이다. ‘남격암’에 가장 먼저 언급된 호남의 길지는 무주(茂朱) 덕유산(德裕山)이다. 덕유산 아래서도 무풍(舞豊) 북쪽에 있는 동굴 옆 음지가 으뜸이라 했다. 그곳은 어떠한 환난도 피할 수 있는 명당이라 한다.‘피장처’에선 약간 다른 곳을 지적해, 덕유산 남쪽의 원학동이야말로 숨어 살기 적당하다 했다. ●덕유산 부자마을 한편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덕유산의 성격을 흙산이라 보았다. 지리산과 성질이 같은 것으로 본 것인데 남격암과 마찬가지로 산의 북쪽에 있는 무풍에 주목한다. 이중환은 바로 그 옆의 설천(雪川)도 길지로 간주한다. 그는 남사고가 무풍을 복지(福地)로 파악했던 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는데 덕유산의 미덕을 이렇게 말한다.“무풍의 바깥쪽은 온 산이 비옥해 부자 마을이 많다. 이는 속리산 이북 지역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남사고는 내게 보낸 편지에서도 덕유산의 장점을 장황하게 설명했다.“과연 그렇다네. 실로 덕이 넉넉한 산이 덕유산이요, 풍요로움을 기꺼워하다 못해 저절로 춤이 나오는 곳이 무풍이라네. 우리나라 12대 명산 가운데 하나인 덕유산. 그 주산은 향적봉(香積峰·1614m)이요, 산세의 흐름이 유장해 무풍의 삼봉산(1254m)에서 흘러내린 용맥이 수령봉(933m), 대봉(1300m), 덕유평전 (1480m), 중봉(1594m), 무룡산(1492m) 삿갓봉(1410m), 남덕유(1508m)까지 무려 100리를 굽이쳐 흐르며 영호남을 갈랐다네. 충청, 경상, 전라 3도를 굽어보는 향적봉에 한번 올라보게. 가까이는 북으로 적상산을 발치에 두고 멀리 황악산과 계룡산을 바라보네. 서쪽을 둘러보게나. 운장산, 대둔산이 버티고 서있어. 남쪽은 어떠한가. 남덕유를 코앞에 걸어두었네. 지리산 반야봉도 가물거리네. 동쪽을 어찌 빠뜨릴쏜가. 저 멀리 가야산과 금오산이 보이지 않나? 향적봉 정상에서 흘러내린 옥 같은 샘물줄기가 한참을 흐르다가 구천동 33비경을 만들어 놓았도다. 요즘은 북사면에 무주 리조트가 있다지. 서남쪽의 칠연계곡도 큰 장관일세. 봄의 덕유산은 칠십 리 깊은 계곡에 붉은 철쭉꽃이 불타오르고, 여름이면 짙푸른 녹음이 온 산을 적시네. 가을이면 붉은 단풍이 꼬까옷을 입히지. 겨울이면 설화를 피운 고목이 고요한 은세계를 더욱 빛낸다네. 참 아름다운 곳이야! 길지란 대부분이 이렇게 아름답고 고즈넉하며 은근히 풍요로운 곳에 있기 마련이네.” 덕유산에 대한 남사고의 예찬은 끝없이 이어지지만, 나는 이쯤에서 줄이기로 했다. ‘남격암’은 호남의 명산 내장산(內臧山)도 길지로 손꼽는다. 이른바 호남 5대 명산의 하나라는 내장산은 가을 단풍 하나로만 전국에 유명하다. 이 산의 단풍은 30여종의 나무들이 토해낸 붉고 노란 빛깔이 어우러진 전원 교향악이다. 많은 사람들은 단풍에만 혹할 뿐이나 실은 난세를 피할 길지로서 이만한 곳이 무척 드물다. 임진왜란 때는 전주 사고(史庫)에 소장돼 있던 왕조실록이 내장산에 옮겨져 잠시 화를 피했다. 그 때 만일 내장산이 아니었더라면 오늘날 세계기록문화유산이기도 한 왕조실록은 한 줌의 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내장산은 과연 길지로다.‘피장처’는 내장산에서 별로 멀지 않은 담양 추월산도 숨을 만한 곳이라 추천한다. 추월산은 전남 담양군 용면과 전북 순창군 복흥면 사이에 걸쳐 있는데, 구한말 호남의병운동의 한 거점이었다. ●길지 변산에 웬 도둑 떼가 “그러나 누가 뭐라 해도 호남 굴지의 길지는 부안의 변산(邊山)이야.” 남사고는 그렇게 주장한다.“내 책 ‘남격암’을 살펴보게나. 부안엔 호암(壺岩)이 있고 그 아래 변산 동쪽은 몸을 숨기기에 정말 적합하구나라고 했지. 만일 제주도가 다른 나라 땅이 되고 말면 일은 그릇된다고 했어. 이는 왜 그런가? 제주에서 배를 타고 북상하면 전남 강진, 영광, 또는 전북 부안에 곧장 뱃길이 닿을 테니 위험할 수밖에. 어쨌거나 내 생각은 그래. 기왕 변산을 찾았다면 그 동쪽 계곡까지 들어가라. 하지만 그 산을 빠져나가지는 말라! 언제는 속리산 이북으로 가지 말랬다가 이젠 또 변산 동쪽을 벗어나지 말라고 하니, 자네들이 좀 헷갈리겠군. 내 말의 뜻은 그만큼 속리산 이남이 길하고 변산이 좋다는 말이야. 다른 뜻은 전혀 없다고!” 참 이상한 노릇이지만 좀 조사해본 결과 문학속의 변산은 도둑의 소굴이기도 했다.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을 보면 주인공 허생이 변산의 도둑 떼를 인솔해 무인도로 떠나간 걸로 돼 있다. 어떤 연구자는 이를 두고 영조 때 일어난 ‘무신난(戊申亂·1728년)’ 무렵 변산의 실제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본다.‘이인좌(李麟佐)의 난‘으로도 불리는 무신난의 주체는 남인(南人)·소론(少論)·소북(少北)의 연합세력이었다. 그들은 당시 집권층인 노론(老論)을 몰아내려고 난을 일으켰고 거기에 전국 각지의 도둑들·서얼·상민·천민들이 상당수가 가담했다. 호남 여러 고을의 빈농들과 변산의 도적들도 무리 가운데 끼어 있었다. 사실 그 당시 빈농은 자칫하면 유리걸식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살다 보면 자연히 도적 무리에 포섭되었다. 허생전에 나오는 변산의 도둑 떼는 허생의 영도 아래 각자 배우자와 소 한 마리씩을 이끌고 무인도로 들어간다. 그들은 그 곳에서 열심히 농사 지어 외국과 무역에 종사 하는 등 유족한 삶을 누린다. 변산 도둑들의 입장에서 볼 때 허생은 다름 아닌 ‘진인’이었다. 혹자는 허생이 현실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지 않고 이상향으로 도둑들을 이끌고 숨었다며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미 현실에 순응하며 합법적인 개혁을 꿈꾸던 연암 박지원에게서 허생 이상의 주인공을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요구가 아닐까? 그야 어쨌거나 허생전에 변산이 도둑의 소굴로 설정된 것은 실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변산은 골짜기가 깊고 사방으로 뻗어 있어 은신에 적합했다. 그렇기 때문에 변산이 길지로 손꼽혔다. 하지만 도둑 떼들이 이러한 자연 조건을 적극 이용한 결과, 조선 후기엔 그들의 요새로 둔갑하기도 했다. 남사고는 말하기를,“변산이 중요한 까닭은 그 산세에 국한된 것이 아니야. 좀더 깊은 연유가 있었지.”라며 매우 의미심장하게 운을 뗀다. 그러나 그에 관한 이야기는 별도의 기회를 마련해 경청하기로 한다 ●조계산의 ‘십팔공’ ‘남격암’은 전라도의 또 다른 길지로 조계산(曺溪山·887m)을 예로 든다. 전남 승주군에 있는 이 산엔 고찰(古刹) 송광사(松廣寺)가 있어, 산기운이 예사롭지 않다. 절에서 동북쪽으로 10여리를 올라가면 천자암(天子庵)이란 작은 암자가 있다. 이 암자의 오른편에 곱향나무 두 그루(천연기념물 제88호)가 우뚝하다. 높이가 12.5m, 가슴높이쯤에서 둘레가 3∼4m나 되는 거목인데, 나무에 얽힌 유래가 특이하다. 지금부터 800여년 전 이 절에 머물던 보조국사(普照國師)는 중국에 건너가 황후의 불치병을 고쳐준 다음 그 인연으로 왕자 하나를 제자삼아 데리고 돌아왔다고 한다. 천자암에 오른 그들은 나란히 지팡이를 땅에 꽂았는데 그것이 살아나 차츰 거목으로 자랐단다. 보조국사 일행의 도력도 만만치 않지만, 조계산의 지력도 여간 왕성하지 않은 모양이다. 워낙 명산에 자리잡은 까닭에 송광사의 “松”자는 길한 예언을 담고 있다. 그 글자를 해체하면 “십팔공(十八公)”이 돼,18명의 국사가 나온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보조국사를 비롯해 모두 16명의 국사가 나왔다 한다. 앞으로 2명이 더 나오게 돼 있는데 그때가 되면 모든 중생에게 불법이 바로 전해져 용화세계의 평안을 누리게 된다고 한다. 이 전설에서 유추되듯, 조계산은 최고수준의 길지라 미륵세상의 도래를 약속하는 곳이 된다. 소백산에서 남서쪽으로 곧게 뻗어 내린 용맥이 서해바다를 눈앞에 두고 멈춰선 곳에 한 길지가 있다.‘남격암’이 말한 월출산(月出山)이 그곳이다. 전남 영암군과 강진군의 경계에 불쑥 솟아오른 월출산은 단순히 많은 큰 산의 하나가 아니다. 산 이름 그대로 달맞이하는 산이라서, 이 산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달 신앙의 대명사로 우뚝 솟았다. ●왜적도 못 들어온 팔령산 월출산에서 좀더 남으로 내려가면 한반도 남단의 길지 팔령산(八靈山)이 웅자를 드러낸다.‘남격암’은 이렇게 말했다.“우리나라의 지세를 논할 때 섬이 바라보이는 남쪽은 절대적으로 피할 일이다. 다만 한 예외가 있어 팔령산이 바로 좋은 산이다.” 남사고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소백산 줄기가 고흥반도 동쪽까지 내려오다 끝맺음을 한 것이 바로 이 팔령산이야. 정상의 봉우리가 모두 8개인 산이지. 팔영산(八影山)이라고도 부른다네. 예전엔 팔전산(八顚山), 팔형산(八兄山), 팔봉산(八峰山)으로도 불렸어.‘택리지’에서 이중환은 이 산이 마치 섬처럼 바다로 깊숙이 들어가 있다고 했어. 일찍이 내가 복이 있는 땅이라고 기술했다고도 썼어. 기특한 내 후배 이중환은 늘 중요한 지점에서 내 말을 곧잘 인용한단 말이야! 아는 대로 임진왜란 때는 왜선이 고흥반도를 타고 침입하려고 했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어. 이게 다 팔령산의 지기(地氣)에 힘입은 거야. 고흥의 옛 문헌을 자세히 살펴보면 알겠지만 팔령산의 넷째 봉우리인 사자봉이 대단해. 마치 용이 바다를 향해 치닫는 형상이라고 할까. 사자봉의 혈(穴)은 국왕의 옥쇄인데 마지막 봉우리에서 그만 미완성으로 끝나 여간 아쉽지 않아. 일제시기 그 놈들이 조선의 맥을 끊어버리려고 팔봉에다 큰 쇠막대를 깊이 박았어. 그 놈들은 한국 사람들을 미신적이라고 비웃었지만, 그래도 뒤가 켕겼는지 갖은 못된 짓을 다했어. 이제 와선 멀쩡한 우리 땅 독도를 자기네 섬이라고 주장하지를 않나. 가소롭기 짝이 없어! 한데 말이야, 당시 그 놈들이 혈을 정확히 짚지 못하는 바람에 그 뒤 고흥선 진짜 장군이 나왔다고들 하지.” 팔령산이 명산이란 소문은 진작 전국에 널리 퍼졌다. 각지의 무당이 몰려와 무속신앙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고, 난리가 닥치면 산 속 깊이 은신하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그치지 않았다. 삼십년 전엔 어느 사이비 종교단체가 이 산에 본거지를 두고 사회적 물의를 빚기도 했다. ●경기도의 길지 “나는 주로 속리산 이남인 하3도(충청, 경상, 전라)에서 길지를 찾았지. 속리산 이북인 중부지방엔 별다른 길지가 없다고 보는 편이야. 영산인 태백산에 가까운 강원도 남부지역에 한두 군데 있을까 말까. 그 외엔 사실 주목되는 곳이 하나도 없는 셈이야. 정감록에서도 말했을 걸. 오대산 이북은 몹시 흉하다고 말이야.” 그러나 ‘피장처’와 ‘두사총비결’엔 중부지방의 피난지가 다수 언급돼 있다. 우선 ‘피장처’에 따르면 양주 산내촌에서 북쪽으로 80리를 들어가면 길지가 있다 했다. 또한 양근 소설촌의 북쪽 40리쯤에서 좀더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면 가장 은밀한 곳에 숨은 길지가 있다고도 했다. 요새 설곡리(雪谷里)라 불리는 곳 말인데 고려 말 임제종(臨濟宗)을 개창한 명승 보우(普愚)가 설곡리에서 출생했다고 전해진다. 여주의 사전촌에선 장수와 정승이 나온다고 했고, 광주 율평 동쪽에 있는 동굴은 난리 때 여덟 성씨가 함께 숨어 살 곳이며 장차 56대 동안 장수와 정승이 출생할 곳이라고 했으니 굉장한 명당이다. 또한 ‘피장처’엔 이천 북면의 광복동, 가평의 대아, 도성 등도 피난할 만하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인천의 영종도 역시 복지라 했다. 오늘날은 국제비행장이 들어선 영종도는 고려 말부터 단 한번도 전쟁의 여파가 미치지 않았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도 무사했다는 것이다. ●중국 지관 두사총이 손꼽은 길지 임진왜란 때 이여송을 따라 중국에서 왔다는 지관(地官) 두사총이 쓴 비결로 알려진 ‘두사총비결’에도 경기도의 길지가 두어 군데 언급된다. 그 중 하나는 화약산이다. 가평에서 363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면 나오는 산이 바로 그 산인데 부근엔 집다리골 휴양림도 있어 쉬어 갈 만하다. 그밖에 포천의 도성산도 길지로 말해진다. 도성산은 길가에 가까워 산세가 얕다는 평을 듣지만 전쟁의 기운이 미치지 않고 간사한 기운도 침범하지 못한다고 믿어진다. 고려가 망했을 때 어느 선비는 도성산 밑으로 들어가 시냇가에 대(竹)를 심고 충절을 맹세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그 선비가 지조를 온전히 지킬 수 있었던 것도 도성산의 지기 덕분이라 한다. ‘두사총’은 강화의 마니산(467m)도 길지라 일컫는다. 인천시 강화군(江華郡) 화도면(華道面)에 있는 이 산은 강화섬에서 가장 높다. 마니산은 한반도 남쪽의 한라산, 북쪽의 백두산까지 거리가 똑같아 주목된다. 마니산은 마리산·머리산이라고도 불리는데, 마리란 머리를 뜻한다. 이 산은 강화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 이름이 그렇게 됐다. 마니산이 길지로서 특별한 위치를 주장하게 된 것은 산 정상에 있는 참성단(塹星壇·사적 제136호) 때문이다. 참성단은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사지내기 위해 건립했다고 한다. 높이 5m의 자연석을 포개어 만든 이 단의 기단부는 원형이며 그 상단은 네모꼴이다.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이란 고대 동양인들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이 단이 축조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멀리 고려 때부터 국가가 제관을 파견해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고 전한다. ●황해도의 길지 북부지방엔 길지가 없다는 게 ‘정감록’의 근본 주장이다. 이와 달리 ‘피장처.’는 황해도 곡산의 명미촌을 길지라 한다. 좀더 정확히 말해 명미촌에서 서쪽으로 발길을 재촉해 희령과 잇닿은 경계 지점에 숨으면 어떤 난리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남격암’은 “수양산(首陽山·899m)은 백미(白眉)의 난을 당하면 물 마른 개울의 물고기처럼 되느니라.”라고 했다. 수양산이 좋긴 해도 눈썹 흰 사람이 난리를 일으키면 도리어 흉하다고 경계한 것이다. 수양산은 황해남도 벽성군(碧城郡)과 해주시(海州市)에 걸쳐 있다. 이 산은 남격암이 거론한 서북지방의 유일한 길지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행정도시 예정지에 자고나면 논밭에 나무가 ‘빽빽’

    행정도시 예정지인 충남 연기·공주지역에 보상금을 노린 나무심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23일 공주시 장기면 당암리 주민들에 따르면 최근 1주일 사이 이 마을에 있는 1000여평의 논에 키 2m 정도의 배나무 수천그루가 심어졌다. 굴착기까지 동원돼 심어진 이들 나무는 간격이 20∼30㎝밖에 안될 정도로 지나치게 촘촘해 수확보다는 보상을 받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주민 이모(56)씨는 “땅주인은 외지 사람인데 그동안 벼농사만 짓던 논에 배나무를 심은 건 보상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연기군 남면 갈운리에서도 밭 400여평에 배나무가 심어졌다. 이 마을 주민 최모(64)씨는 “지난주 말 외지에 살고 있는 땅주인이 찾아와 심었다.”면서 “땅주인의 말로는 ‘밭을 놀렸더니 벌금이 나와 뭐라도 심어야 한다.’고 했지만 지난해에 산 토지에 무슨 벌금인지 모르겠다.”고 전했다. 같은 면 나성리에서도 그동안 벼농사만 짓던 1만여평의 논에 최근 향나무와 무궁화·느티나무 등 각종 나무 2만여 그루가 심어졌다. 이밖에도 행정도시 예정지 중심인 남면 진의·양화·종촌리 논과 밭에도 최근 며칠간 보상을 노린 나무심기가 판치고 있다. 신행정수도 후속대책위원회 관계자는 “임야의 수종 변경은 보상을 받을 수 있지만 쌀이나 채소 재배가 목적인 논·밭의 나무심기는 받지 못한다.”며 “항공사진 등도 보상대상 여부를 결정하는 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편 24일 행정도시 예정 및 주변지역 경계공람이 공고되면 토지형질변경, 토석채취 등 개발행위 및 건축행위가 금지되고 보상대상에서 제외된다. 대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수도권플러스] 서초 867살 향나무 23일 ‘목욕’

    서울 서초구는 23일 오전 10시 지하철 2호선 서초역 사거리 중앙분리대에 있는 867살짜리 향나무에 쌓인 먼지를 씻어내는 세척 작업을 실시한다. 공무원과 나무병원 관계자들은 이날 고가 사다리 지게차와 분무기 등을 동원, 세척을 마친 뒤 나무가 잘 자라도록 나뭇잎에 질산칼슘 등 비료를 주고, 나무줄기에 영양제 주사를 놓는다. 이 나무는 서울시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향나무로 높이 15.5m, 둘레 3.53m이며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 [안동환기자의 현장+]시신과 함께한 하루… 삶에 눈뜨다

    [안동환기자의 현장+]시신과 함께한 하루… 삶에 눈뜨다

    언제나 그렇지는 않겠지만, 장례식장은 소란스럽고 흥청거리게 마련이다. 이청준의 소설 ‘축제’나 박철수 감독의 영화 ‘학생부군신위’에서도 죽은 자는 뒷전이다. 적당한 슬픔과 절제된 흥겨움이 앙상블을 이루는 우리네 장례식장. 인생 버스를 종점까지 내달린 망자(亡者)는 오히려 엑스트라에 불과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망자는 몸을 정갈히 하고 의관을 갖추는 염습(殮襲)실에 이르러 비로소 주인공이 된다. 이곳에서 죽은 자를 주인공으로 마지막 리허설을 준비하는 사람이 ‘장례지도사’다. 기자는 고려대 안암병원 장례식장에서 일일 인턴사원으로 장례지도사의 일상을 체험했다. 지난 29일 오전 9시, 장례식장에 출근하자마자 장아름(26)씨의 지시가 떨어진다. 그녀는 1999년 국내에서 처음 생긴 서울보건대학 장례지도과 1기 졸업생.4년의 경력을 쌓은 이 장례식장의 유일한 여성 장례지도사이다. 미혼인 그녀는 한달 평균 30∼40명, 그동안 멀고 먼 저승길을 가는 1500여명의 시신을 단장했다. “안치실 청소부터 하세요. 입관은 9시부터 1시간 간격이에요.” “저 염습실은 언제 들어가나요?” “오전과 오후에 한번씩 들어가면 충분하겠죠?”“헉∼두 번씩이나….” 염습실은 안치실 옆에 있다. 시신을 22구까지 보관할 수 있는 냉장고는 온도가 0∼1도로 자동 유지된다. 옆방에는 향나무며, 오동나무로 만들어진 관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장씨를 따라 들어간 염습실은 7평 남짓한 크기다. 앞에는 투명한 유리창으로 된 별도의 공간이 있다. 유족들이 고인과 작별인사를 하는 곳이다. 그녀와 냉장고에서 암으로 숨진 50대 남자의 시신을 조심스레 꺼낸 뒤 염습실로 옮겼다. 유족이 오기 전 준비를 마쳐야 한다. 관을 가져다놓고 수의는 버선, 아랫도리, 윗도리의 순서대로 놓아둔다. 상주가 시신의 얼굴을 확인한다.“이제 시작합니다.” 장씨는 유족들에게 정중히 목례를 올린다. 기자도 따라서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그녀는 시신의 얼굴조차 마주치지 않으려는 기자에게 “머리를 꽉 잡으라.”고 지시한다. 장씨는 솜으로 손가락부터 팔, 다리 순으로 닦았다. 출혈도 있었지만 경건해 보일 만큼 정성껏 닦아나갔다. 수분을 잃은 피부는 건조했다. 그녀는 시신의 입꼬리를 올리려 애쓰고 있었다.“미소를 만들고 있어요. 고인이 웃는 것처럼 보여야 유족들도 마음이 편하거든요.” 여성 특유의 손길을 거치면서 고통의 흔적이 지워지고 자연스러운 표정이 만들어진다. 고인의 얼굴에 비로소 평안이 깃든다. 여기에 남성이라면 면도를 하고 얼굴에 밀크로션을 바른다. 여성은 화장을 한다. 아름씨의 화장법은 독특하다. 로션을 바르고, 눈썹을 그리고, 입술을 바르는 과정은 똑같지만 마음이 다르다.“거울 앞에서 제가 화장하듯 해요.” 유족들은 “평생 화장 한번 안 하신 어머니를 가시는 길이나마 예쁘게 해줘서 고맙다.”고 연신 인사한다. 고인의 얼굴에는 살아온 인생이 나타난다고 한다. 장씨는 삶에 찌든 얼굴을 볼 때마다 “욕심부리고 살지 말자.”고 다짐을 한단다.“등을 잡으세요.” 수의를 입힐 때는 고인의 몸이 뒤척이지 않도록 조심한다. 무거운 시신을 건사하는 것도 쉽지 않다.21차례의 매듭을 짓고 시신을 관에 담는다.40분은 너무나도 긴 시간이었다. 장례지도사는 스스로를 ‘3D 전문직’이라고 부른다. 장례식의 실질적인 지휘자로 24시간 근무하며 시신을 직접 다루지만 보수는 낮은 편이다. 무엇보다 시신을 다루는 일은 위험하다. 병원에서 온 시신은 더욱 주의해야 한다. 결핵이나 에이즈로 사망한 시신은 병원에서 미리 통보한다. 에이즈로 숨진 시신도 6개월에 한번 꼴로 들어온다. 지도사의 손에 상처라도 있으면 2차 감염이 되는 탓에 온몸을 중무장한다. 시신을 닦은 솜 등 감염성 폐기물은 모두 전문업체가 처리한다. 지난해 4월 장씨는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한다. 병원에서 내려온 시신에 수시(收屍)작업을 했다. 수시는 막 운명한 시신의 몸이 굳기 전에 손발을 주물러 곧게 펴주는 일이다. 부검을 한다는 통보를 받고 시신을 옮기자 의사와 간호사는 온 몸을 중무장하고 들어섰다. 알고 보니 시신의 주인공이 급성호흡기증후근(사스) 의심환자였던 것. 누군가의 실수로 미리 통보를 하지 않은 것이다. 다행히 사스는 아니었다. 특히 곤혹스러운 것은 시신의 부패. 약물 투여가 많은 시신은 냉장고 안에서도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살갗이 쉽게 벗겨지는데다 고약한 냄새로 염을 할 때면 온 몸은 땀으로 젖는다. 장례지도사는 특별한 시신이 아니더라도 염습을 할 때 마스크를 하고 얇은 수술용 고무장갑을 낀다. 기자 역시 고무장갑을 꼈고, 단단히 각오를 했음에도 염습이 끝난 뒤 소독약으로 6차례 이상 손을 씻는 등 극도로 민감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인생의 종착역인 장례식장에도 각박한 세태는 그대로 투영된다. 장씨는 “돌아가신 분에게 잘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무슨 한이 쌓였는지 모르지만 아버지의 시신을 화장하고 “새 모이 준다.”고 말하는 상주를 본 적도 있다는 것이다. 눈치보며 곡소리를 내는 며느리는 인지상정이라지만 노인을 씻기지 않아 온 몸에 덕지덕지 때가 묻은 시신도 많다고 한다. 경제적으로 성공한 자녀도 다를 것이 없다. 장례식장을 찾은 유족들의 첫마디는 대부분이 “가장 싼 것을 달라.”이다. 수의나 관을 정하면서 물건조차 보지 않고 무조건 싼 것을 찾는다. 분수에 넘치는 허례허식은 경계해야 하지만 마지막 가는 길조차 인색하고 각박한 자녀들을 보면 장씨가 더 서운하다. 최근에는 삶에 지친 시신도 많다. 산 자에게 세상 짐을 떠맡긴 시신은 표정도 평화롭지 않다. 조용균(54) 관리실장은 “1주일에 한건 정도 자살한 시신이 들어온다.”고 전했다. 쪼들리다 세상을 버린 사람들의 장례식은 더욱 쓸쓸할 수밖에 없다. 이 세계에서 여성은 아직 생소한 존재이다. 장씨가 장례 상담에 나서면 상주들은 남자 직원을 찾기 일쑤다. 하지만 그녀의 섬세한 손길을 경험한 유족들은 절대로 무시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자신의 ‘사후’를 일찌감치 부탁하는 노인들도 있다고 한다. 죽음은 일상 곳곳에서 우리를 응시한다. 죽음이 보내는 소환장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할 뿐 모두에게 평등하다. 짧은 체험이었지만, 장례지도사가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이 느껴졌다. 날마다 죽음을 접하면서 삶의 소중함에도 눈을 뜬 것인가. 장례지도사는 죽음이 아닌 삶을 다루는 직업이었다. ■ 장례지도사란 장례지도사(Funeral Director)는 장의사를 대체하는 용어이다. 장례 상담에서 시신안치, 염습, 발인까지 장례식의 모든 과정을 책임진다. 장례지도사는 정규 대학과정에서 양성된다.1999년 서울보건대학이 장례지도과를 설치한 이후 대전보건대학과 창원전문대학에 학과가 개설됐다. 졸업생의 90%는 전공을 살려 대학병원 장례식장 등에서 일하고 있다. 여성도 해마다 10여명씩 배출돼 전국에서 40여명이 활동하고 있다. 커리큘럼은 기본적인 상·장례부터 보건법규, 방부처리, 사체화학, 훼손된 시신를 복구하는 회복기술학, 해부학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문직이라는 인식이 자리잡으면서 2년 과정에서 올해부터 3년 과정으로 개편됐다.2003년 현재 전국 623개 장례식장에서는 해마다 24만여구의 시신이 처리된다. 전국에서 활동하는 장례지도사는 2400명 안팎이다. sunstory@seoul.co.kr
  • 서울시 보호수 6그루 지정

    키 13m, 둘레가 최대 250㎝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180살짜리 살구나무가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됐다. 서울시는 28일 은평구 응암1동 54의 2 주택가의 살구나무 등 100년 넘은 나무 5종 6그루를 보호수로 지정·고시했다고 밝혔다. 이들 가운데 살구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기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이다. 서울시 박인재 조경과장은 “살구나무의 직경은 보통 20∼30㎝가량 되는데 이번 살구나무는 80㎝로 보통 나무의 3배에 이르는 등 나무가 크고 우수한 종이어서 보호수로 지정됐다.”고 말했다. 경술국치 뒤 출세욕에 눈멀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괴롭히며 자리를 보전한 것으로 알려진 법조계의 고위직 인사였던 김모씨가 스스로 저지른 민족반역에 대해 이 살구나무 아래서 고뇌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또 경복궁 증축시 징목(徵木)으로 지정됐다가 주민들이 흥선대원군에게 간청해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성동구 성수1가 208의 300살짜리 느티나무도 보호수로 지정됐다. 이밖에 나무 속에 큰 뱀이 살고 있다는 구로구 가리봉2동 13의 25 500살짜리 측백나무, 성북구 장위동 223의 33 200년 된 향나무, 마포구 대흥동 51 용강초등학교내 150년 된 비술나무 2그루도 보호수의 영예(?)를 안았다. 시는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에 대해서는 따로 관리자를 두며 시비나 구비로 유지관리비를 지원한다. 보호수 지정 때에는 수령을 감안하는 것은 물론 자태가 아름다운 나무를 풍치목으로, 고사(故事)나 전설을 지닌 나무를 명목(名木)으로 이름을 매긴다. 박성권 조경관리팀장은 “보호수를 꺾거나 훼손하면 삼림법 117조에 따라 10년 이하의 처벌을 받는다.”면서 오래될수록 멋을 더하는 나무 보호에 동참해 줄 것을 당부했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35)금강산 삼일포의 매향비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35)금강산 삼일포의 매향비

    고려 충선왕 원년(1309년). 금강산 삼일포에 강릉도 존무사(存撫使·관찰사) 김천호를 비롯, 강릉부사 박흥수, 판관 김관보 등 동해의 지방관리들이 승려 지여(志如)와 함께 모였다. 의관 정제한 이들이 먼길 마다않고 이른 아침에 모인 것을 보면 필경 곡절이 있을 법하였다. 석수장이가 지게에 비석을 지고 다가왔다. 김천호는 아무 말없이 눈길로 배를 가리켰다. 비석이 먼저 배에 실렸다. 이어 김천호를 비롯해 박흥수 등이 차례로 배에 올랐다. 다행히 날씨는 좋았다. 지여가 “날짜 하나는 참으로 잘 잡았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으나 좌중은 묵묵부답이었다. 응답할 분위기가 아닌 듯했다. 배는 삼일포를 향해 노를 저어갔다.“단서암에 배를 대게나.” 김천호는 단호히 말했다. 삼일포에 있는 4개의 섬 중에서 단서암(丹書岩)을 택한 것이다. 단서암을 선택한 데는 연유가 있었다. ●고려 충선왕 원년, 단서암에 매향비를 세우다 신라 화랑들이 삼일포를 다녀간 기념으로 남겼다는 기록,‘영랑 일행이 남석을 다녀가다.’(永郞徒南石行)는 여섯 글자가 전해지고 있음을 이들은 잘 알고 있었다. 예로부터 미륵의 당래하생(當來下生)을 서원하면서 은밀하게 찾아들던 비밀스러운 곳임도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매향비를 세우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 아닌가.“호숫물이 가로막고 미륵도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곳이니, 누군들 이 매향비를 함부로 옮기지는 못하리라.”라고 내심 확신하면서. 이상의 기록은 삼일포 매향비의 40행,369자를 풀어서 매향비 세우던 광경을 재구성해본 것이다. 당시 강원도 각 포구에 향나무를 베어 물 속에 넣은 뒤 그 증표로 삼일포에 매향비를 세웠다. 매향비가 건립된 1309년으로부터 40년이 지난 1349년 가을, 이곡(李穀)이 삼일포를 다시 찾았다.‘죽부인전’의 작가로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올라 있는 이곡은 ‘동문선’에 전해지는 동유기(東遊記)에 이렇게 썼다.‘초사흘에 일찍 일어나 삼일포에 이르렀다. 성에서 북쪽으로 5리쯤에 있는데, 배에 올라 서남쪽 조그만 섬에 이르니, 덩그런 큰 돌이 있다. 그 꼭대기에 돌벽장이 있고 석불이 있으니, 세칭 미륵당이다.’ 이곡이 찾을 당시에는 매향비는 물론 석불까지 있었고 미륵당도 현존해 이곳이 미륵신앙의 ‘메카’였음이 틀림없다. 그 뒤로도 매향비를 직접 보았다는 기록은 곳곳에 있다. 농암 김창협(1651∼1708)은 1671년 여름에 금강산을 유람한 뒤 삼일포에서 배를 타고 호수의 섬으로 들어갔다가 이런 글을 남겼다.‘배를 옮겨대고 사선정 남쪽의 작은 바위 봉우리에 오르니 짤막한 비석이 있는데 마멸되어 글자를 볼 수가 없었다. 이를 세상에서 말하기를 미륵 매향비라고 한다.’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김상성 주관하에 1746년부터 1748년 사이에 그려진 시화첩 ‘관동십경’에는 매향비가 선명하게 나타나며,‘매향비 아래에서 짐짓 배를 돌리네.’라는 시구까지 확인된다. 박종(1735∼1793)은 1767년 경주 구경을 떠났다가 삼일포에 들러서 쓴 ‘동경기행(東京紀行)’에서 이 비를 침향비(沈香碑)라고 하여 향을 묻었음을 분명히 하였다.‘단서암에 올라 침향비를 보고는 배를 타고 오른쪽 언덕에 이르러 걸어서 솔숲을 빠져나와 돌아보니, 중은 노를 저어 돌아가고 있는데 풍경이 한적하기로는 그만이다.’ 이처럼 삼일포 매향비는 후대인들의 인구에 회자되던 비석이었으며 금강산 순례의 필수 코스였다.20세기에는 위당 정인보 선생이 금강산을 다녀오며 기록을 남겼다.‘관동 해안에 향을 묻은 곳이 많으니, 이는 불사(佛事)라. 미륵하생할 때 같이 용화회(龍華會)에 나게 해달라는 발원이라 한다. 호수 위에 매향비가 있었는데 근재(謹齋)의 단갈사제(斷碣沙際)라는 시어가 이를 이름이다.’ ●향 묻고 미륵 오기를 바란 민중들 매향비가 세워지던 충선왕 원년이면 고려가 저물어가던 때가 아닌가. 숫처녀와 내시를 공물로 바치는 등 원나라의 횡포가 자못 극심하였고, 불교의 타락상도 극에 달하고 있었다. 당대 불교가 보여주었던 그릇된 행실을 새삼 탓해서 무엇하랴. 그러한 시대에 동해의 변방에서 지방관리들에 의해 매향의례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당시 민중의 염원을 형식적으로나마 풀어주려는 노력의 일환은 아니었을까. 삼일포 매향비는 1926년에 일본인 등전량책(藤田亮策)에 의해 소개되었다. 그런데 그 뒤로 매향비가 간 곳 없이 사라지고 탁본한 비문만이 전해지고 있을 따름이다. 어떤 경로로 이 매향비가 사라졌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높이 60㎝에 불과한 작은 비였으니 집어가려고 마음만 먹는다면야 손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어디선가 박복한 여생을 쓸쓸히 보내고 있든가, 아니면 그 누군가가 미륵의 당래하생을 서원하면서 향을 묻듯 비 자체를 삼일포 깊은 물 속에다 던져버렸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사람들의 비밀스러운 서원이 담겨 있는 매향비(埋香碑)란 무엇일까. 매향비란 글자 그대로, 향을 묻고 미륵이 오기를 기원하면서 세운 비석을 말한다. 그러나 그 실체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다. 불교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가 하면 금석문의 숨겨진 비밀 혹은 글씨로 새겨진 비밀문서라고 하는 이들도 있고, 미륵세상을 찾아가는 해법이라고 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 모든 의문의 열쇠가 매향비에 있다. 나라가 좁다보니 비밀스러운 것이 별반 없는데, 매향비만큼은 우리들의 지적 호기심과 궁금증을 더해주기에 충분한 탐구 대상이 된다. 금강산 매향비문을 보고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현장을 찾아 나선다면 실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삼일포 매향비문에는 삼척현 맹방촌(孟方村)에 향나무 150그루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맹방촌은 지금의 동해안 맹방해수욕장에 해당되며, 산봉우리가 아름답게 솟고 백사장이 좋아 예로부터 명승지로 알려진 곳이다. 삼일포 매향비에서 지적한 맹방에 가면 지금도 매향의례에 대한 촌로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다. 그야말로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는 매향비의 신화다. ●‘침향’은 새로운 세상에의 희구 상징 매향비는 흡사 해적들이 남긴 ‘보물지도’처럼 미륵신앙의 비밀과 맞닿아 있다. 그들은 왜, 무슨 마음에서 그런 비의(秘儀)를 열려고 했을까. 지금까지 발견된 매향비는 모조리 바닷가, 그것도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기수대에 자리잡고 있다. 그 비밀은 향을 바다에 묻는 침향(沈香)에 있다. 사찰에서 피우는 향은 그을음이 생기므로 해마다 불상을 닦아주어야 한다. 그러나 침향은 그을음이 없어 귀하게 치며 약재로도 쓰인다. 부적에 영험이 있다고 믿듯이, 침향의 신성성에 기대어 고급 약재로 인정되었던 것 같다. 침향이 얼마나 소중했던가는 사리함에서 잘 드러난다. 금동으로 감싼 사리함 안에는 옥함이 있는데, 그 옥함 속 사리와 직접 닿는 부분만큼은 침향으로 만들었을 정도다. 명품이라고 부를 만한 불상 중에도 딱딱한 침향을 파서 조각한 것이 다수 있다. 침향을 예사롭지 않게 대한 옛사람의 경외심이 배어나온다. 갯펄에 묻은 향목은 침향이 되면 물 위로 떠오른다고 한다. 이무기가 천년이 되면 용이 되어 승천하듯, 단순한 향목도 침향이 되면 이런 ‘승천의식’을 거친다고 믿었던 것. 미륵하생을 기다리는 민중들에게 침향의 부상은 바로 새로운 세상의 떠오름이 아니었을까. 매향비는 반드시 강물과 바닷물이 합수하는 바닷가에 세워졌다. 한반도 최고의 절경으로 불리는 해금강에 연한 삼일포는 석호의 으뜸으로, 신라시대 화랑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왔다. 아름다운 삼일포 안에 세워진 매향비는 미륵을 기다리며 집단적으로 서원하던 당대 민중들의 장엄, 그 자체를 웅변해준다. 미륵을 기다리는 민중의 서원은 하나의 운동 양상으로 발전하곤 하였다. 가까운 중국에서도 미륵에 의탁한 ‘동양식 천년왕국운동’이 자주 벌어졌다. 청조를 타도하고자 한 ‘백련교의 난’ 따위가 그것이다.‘천하가 난(亂)하면 미륵불이 강생한다.’,‘미륵불이 바로 천하를 지킬 것이다.’,‘천지를 바꾸자, 세상을 바꾸자, 반란의 해, 미결(未決)의 해’ 같은 슬로건에서 새 세계의 열망과 미륵신앙과의 관련성이 잘 드러난다. 우리의 경우에도 궁예가 스스로 미륵불을 자칭하였고, 강증산도 미륵불에 의탁하였다. 불교가 시작된 이래로 미륵신앙은 하나의 운동, 미래불의 기다림 그 자체였다. 무슨 확신이 민중들로 하여금 미륵의 당래하생을 서원하게 만들었을까. 그만큼 현실의 고통이 심했다는 증거이리라. ●통일시대 오면 비밀스러운 자태 드러내려나 남쪽 사람들이 연일 금강산 관광에 나선다. 관광에 나선 남쪽사람들에게 삼일포와 해금강은 필수 코스이지만 정작 안내문에는 매향비에 관한 기록이 없다. 남한은 물론이고 북쪽의 안내자들도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매향비를 설명하지 않는 듯하다. 그래서 삼일포의 가장 신비로운 대목인 매향비의 내력을 전혀 모르고 돌아오기 마련이다. 마음 속으로만 삼일포를 그리워하다가 실제로 삼일포에 갔을 때, 필자는 삼일포 호수 안의 섬들을 바라보면서 매향비 생각에 가슴이 벅차 잠시 숨이 막혔던 적이 있다. 사라진 삼일포 매향비가 혹시나 말법의 상징처럼 존재하는 분단상황이 종식되고 통일시대가 오면 비로소 그 비밀스러운 자태를 세상에 드러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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