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행운
    2026-08-14
    검색기록 지우기
  • 매니저
    2026-08-14
    검색기록 지우기
  • 콜센터
    2026-08-14
    검색기록 지우기
  • 경매
    2026-08-14
    검색기록 지우기
  • 캠퍼스
    2026-08-14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9,207
  • 美 한국계 여성 963억원 복권당첨

    美 한국계 여성 963억원 복권당첨

    미국의 한 한국계 여성이 1000억원 상당의 복권에 당첨되는 행운을 얻었다. 5일 AP통신과 뉴욕 데일리뉴스에 따르면 뉴욕 스태튼섬에 사는 최진옥(54)씨가 지난달 1일 한 주류판매점에서 산 ‘메가 밀리언스’ 복권 1등에 당첨됐다. 당첨 금액은 8500만 달러(약 963억원)로 최씨는 세금을 빼고 4040만 달러(약 458억원)를 받았다. 당시 최씨는 한국 전통술 한 병을 사기 위해 가게에 들렀다가 거액의 당첨금이 걸린 것을 보고 복권을 샀고, 이틀 뒤 자신이 당첨된 사실을 알게 됐다. 지난 1일 당첨금을 받기 위해 변호사와 함께 나타난 최씨는 “정말 얼떨떨하다.”면서 “조금 더 큰 아파트를 사는 데 상금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최재헌기자 goseoul@seoul.co.kr
  • 이용대-정재성 동메달… 윙크 대신 눈물의 포옹

    이용대-정재성 동메달… 윙크 대신 눈물의 포옹

    4년 전 상큼발랄했던 ‘윙크’는 없었다. 대신 화끈한 포효와 진한 우정이 있었다. 7년 동안 한결같이 손발을 맞췄던 정재성-이용대(이상 삼성전기)가 동메달을 땄다. 5일 런던의 웸블리 아레나에서 열린 남자복식 동메달 결정전에서 쿠킨키드-탄분헝(말레이시아) 조에 2-0(23-21 21-10) 완승을 거뒀다. 지난 6월 세계 랭킹 1위에 복귀한 만큼 ‘금빛 스매싱’을 예감했지만, 둘은 함께 출전한 마지막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걸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여자복식의 고의패배 충격파에 어수선해진 배드민턴 대표팀이 런던에서 따낸 처음이자 마지막 메달이기도 하다. 코트 안팎에서 7년을 함께 동고동락해온 두 남자의 파트너십이 돋보였다. 이용대의 허를 찌르는 네트플레이와 정재성의 후위 공격이 환상의 조화를 이뤘다. 첫 세트는 듀스까지 가며 팽팽하게 전개됐지만, 기선을 잡은 뒤 두 번째 세트는 가볍게 따냈다. 우리 나이로 서른하나인 정재성은 ‘마지막’이라고 못 박은 올림픽에서 첫 메달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정재성은 “최고의 파트너와 최고의 무대에서 최선을 다했다. 살아가면서 오늘 메달이 큰 자부심이 될 것 같다.”며 활짝 웃었다. 끝이란 생각 때문인지 이용대는 그동안 형에게 하지 못했던 얘기를 쏟아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재성이형을 만났는데 그건 행운이었다. 그동안 싫은 소리도 많이 하고, 내 플레이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형한테 강요도 많이 했다. 묵묵히 받아줘서 정말 고맙다.”고 투박하게 마음을 전했다. 정재성은 “파트너는 서로 믿고 맞춰 가는 것이다. 용대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6년 후배에게 공을 돌렸다. 앞서 치러진 남자단식 동메달결정전에선 이현일(요넥스)이 천룽(중국·세계 3위)에게 1-2(12-21 21-15 15-21)로 져 동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배드민턴팀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은1·동1) 이후 8년 만에 ‘노골드’로 아쉬움을 삼켰다. 성한국 대표팀 감독은 “착잡하고 속상하다. 다 떨치고 새롭게 출발할 것”이라고 했다. 런던 조은지기자 zone4@seoul.co.kr
  • 미모의 탈북 女가수, 누구 딸인가 알고보니…

    미모의 탈북 女가수, 누구 딸인가 알고보니…

    평양음악무용대학 출신으로 탈북해 남쪽에서 트로트 가수로 활동했던 명성희(30)씨가 파페라 가수로 변신해 화제다. 탈북자 인터넷 매체 ‘뉴포커스’(www.newfocus.co.kr)는 1일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에 선 명씨와의 인터뷰를 실었다. 명씨는 북한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영화방송음악단에 들어가 영화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 가수로 활동하며 ‘스승과 제자’, ‘당찬 처녀들’ 등 주제가를 부르며 인기를 모았다. 2005년 어머니, 동생과 함께 탈북한 그는 적지 않은 나이에 서울예술대학 실용음악과에 입학했고, 졸업 뒤 음반 회사의 권유로 명가람이라는 이름으로 트로트계에 입문했다. 명씨는 북한에서 유명한 체육인과 예술인을 부모로 둬 주목받기도 했다. 아버지는 북한 남자 국가대표 축구팀을 20년 동안 지휘했던 고(故) 명동찬 감독이다. 북한에서 ‘인민 체육인’ 호칭을 받았던 명 감독은 1990년 남한과 북한에서 번갈아 열린 통일축구 대회에서 북한 사령탑을 맡아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다. 어머니 또한 북한 최고 예술단으로 꼽히는 조선인민군협주단에서 가극 배우로 활약했던 박윤희씨다. 현재 홀로서기를 하는 명씨는 파페라 가수로서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3옥타브의 음역대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그는 올 가을 새 앨범을 낼 예정이다. 다음은 뉴포커스와의 인터뷰 전문. →우선 한국 생활이 어떠신지 궁금하다. -남한사회에서 가수로서 처음 데뷔하기가 어렵네요. 북한에 있을 때 영화방송 음악단 가수로 활동을 했는데, 한국 음악을 너무 하고 싶었어요. 그나마 북한에선 영화 음악에서나 자유스럽게 발성을 낼 수 있어요. 물론 영화 음악에도 김일성, 김정일의 사상이 들어가 있죠. 지금은 음반 회사와 결별하고 혼자서 가는 중이에요. 그 길이 쉽지만은 않죠. 하지만 어렵게 이 땅에 왔기에 가수로서의 저의 꿈을 이루지 못하면 후회할 것 같아요. 남한에서 가수 활동을 준비 한 게 5년 남짓 되는데, 얼마 전 일본 활동도 하고 왔어요. 반응이 좋아요. →특별히 파페라 가수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있는가? -한국에 왔을 때 제 나이 25세였는데 당시 가요계엔 리듬앤블루스(R&B) 음악이 주류를 이뤘어요. 그러던 중 음반 회사의 권유로 트로트 가수로 활동하게 됐어요. 정의성 작곡가님에게서 ‘얄리얄라’, ‘어금니’, ‘어 그래’ 등의 곡을 받기도 했었어요. 회사와 결별한 이후로 파페라 가수로 활동하고 있어요.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서 감사해요. 사실 남한에 앞서 북한에 있었을 당시 파페라 가수로 데뷔했었거든요. 크로스오버 음악인 파페라 가수가 되는 것이 어렸을 때부터 꿈이였어요. →탈북을 결심하게된 배경은? -22살, 영화방송음악단 소속 가수로 활동하는데 우울증이 찾아왔어요. 자유롭게 음악을 하고 싶었거든요. 북한 음악은 주체 발성법으로 노래해야 해서 심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그러던 중 자살 시도도 했었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운명인지, 자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어요. 다시금 마음을 진정시켰죠. 하지만 그때부터 매일 남한으로 가서 자유롭게 노래할 생각만 했어요. 그러던 중 브로커를 통해 남한으로 올 기회를 잡은 거죠. 행운이었어요. →모친 또한 북한에서 유명한 공훈가수로 활동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 가수의 길을 걷는 데 있어, 아무래도 부모님의 영향이 크지 않았나 싶다. -물론 어머니의 영향이 컸어요. 제가 처음 노래할 때 진성 소리를 많이 썼거든요. 그래서 평양음악무용대학에 입학했을 당시, 교수님들이 북한 음악하기 힘든 목소리라고 그러셨어요. 그런데 공훈가수 출신인 어머니께 소리 내는 법을 배운 후 단기간 내에 발성이 클래식에 적합한 창법으로 바뀌었어요. 지금도 어머니는 제 노래의 스승이세요. →가족이 북한에서 중산층 이상의 삶을 살았는데, 탈북을 결심했을 때 부모님의 반대도 컸을듯하다. -제일 먼저 어머니하고 상의했어요. 아버지가 간암으로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북한에서 아이스크림 공장을 크게 하고 있었거든요. 사실 어머님은 가도 좋고 안가도 좋고 그런 입장이었어요. 자유롭게 노래를 하고 싶던 제 꿈에 어머님도 결국 감복하셨죠. →꿈을 찾아 한국에 어렵게 왔는데 소회가 어떠한가. -사실 처음 한국에 왔을 땐 무척 힘들었어요. 북한하고 시스템이 다르니까요. 북한은 예능단체들을 당 차원에서 관리하고 밀어주는데, 남한은 다르더라고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자기 힘으로 해야 했어요. 사기를 당하는 몇 번의 절망적인 과정에서 언제나 스스로 되새긴 건 나는 꼭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이었어요. 지금도 이런 희망을 품고 매일 믿음으로 걷고 있어요. →한국사회에 바라는 점이 있는가. -예술 분야 탈북자들에 대한 지원이 없어서 아쉬워요. 탈북 예술인들을 키워낼 수 있는 제도, 시스템이 절실해요. 능력이 검증된다면 재능 있는 탈북 학생들을 남한 사회의 멘토들과 연결해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원 시스템과 정보가 없는 탈북 학생들이 정상 궤도에 오르려면 5~6년 이상 걸리거든요. →예술인을 꿈꾸는 탈북자들에게 조언을 부탁한다. -아무래도 예능 쪽은 길이 좁다 보니 유혹들도 많거든요. 남한 사회와 자기 분야에 대해 더욱 거시적인 안목과 지혜가 필요한 것 같아요. →끝으로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자신만의 색깔이 있는 파페라 가수가 되고 싶어요. 조수미, 임태경, 임형주씨를 존경하고요. 저도 이들처럼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는 음악인이 되고 싶어요.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저장성 쑤이창현…때묻지 않은 풍경 그리고 사람

    저장성 쑤이창현…때묻지 않은 풍경 그리고 사람

    오감만 만족해도 즐거울 터에 마음까지 행복해지는 여행은 그리 흔치 않습니다. 별로 기대하지 않고 갔던 중국 저장(浙江)성 쑤이창(遂昌)현 여행은 그런 점에서 행운이었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닝보(寧波) 공항을 떠날 때의 느낌은 한마디로 ‘마음까지 부자가 된 듯한 여행’이었습니다. 중국의 여행지들은 우리에게 웬만한 국내 여행지보다 가까워져 있지요. 하지만 쑤이창현은 몸과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는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왔습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동양화 한 폭을 보는 듯한 풍광과 아직 외부의 손길이 닿지 않은 산골 오지 마을 사람들의 순수함은 그동안 잊고 살았던 바쁜 일상들을 뒤돌아보게 해준 고마운 선물이었습니다. ●대나무와 원시림의 심산유곡 셴룽구 저장성 리수(麗水)시 쑤이창현. 해발 1000m가 넘는 700여개의 산에 둘러싸여 있다. 산악지대가 전체 면적의 88%나 된단다. 산 속에 있지만 역사는 깊다. 춘추시대엔 월나라, 삼국시대엔 손권의 오나라에 속했다. 1927년엔 홍군(紅軍)이 일제에 대항해 3년간 유격전을 벌였던 공산혁명의 성지이기도 하다. 집안 신을 모시는 제단에 마오쩌둥(毛澤東) 사진을 걸어둔 주민이 많은 것도 그런 까닭이겠다. 가장 먼저 발걸음한 셴룽구는 대나무와 원시림으로 가득한 보물창고였다. 초록의 숲과 싱그러운 나무 향기, 그리고 계곡의 물소리가 눈과 코와 귀를 즐겁게 해준다. 무엇보다 셴룽(神龍)폭포의 모습이 장관이다. 물이 만든 운무를 헤집고 승천하는 듯한 용의모습을 하고 있다는 폭포다. 위 아래의 낙차는 무려 300m. 중국 내 최고다. 가까이 다가가니 세 개의 폭포가 이어져 쉬지 않고 물을 쏟아내고 있다. 산허리를 따라 트레킹 코스가 조성돼 있다. 숲그늘은 짙어도, 위압감을 줄 만큼 커다란 나무는 없다. 대신 조화롭게 자란 키 작은 관목들이 즐비하다. 멀리서 보는 셴룽폭포는 물줄기가 더욱 길어 보인다. 명나라의 극작가이자 시인이었던 탕현조(湯顯祖)는 이곳을 배경삼아 ‘모란정’이라는 사랑 이야기를 썼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명작에 등장하는 무대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난젠옌에서 바라보는 다랑논과 운무 난젠옌은 기묘한 봉우리와 계단식 논, 이른바 제전(梯田)으로 유명한 명승지다. 이른 아침, 고원지대의 마을 끝자락에서 발아래를 내려다보자니 계곡을 타고 피어오르는 운무가 다랑논을 휘감았다. 운무는 초록빛 바다 위에 흰 물감을 풀어 놓은 듯 천천히 번져 나갔다. 난젠옌 풍경구는 유네스코와 중국 민속촬영협회가 지정한 ‘국제 민속 촬영 창작기지’로 등록되어 있을 정도로 사진작가들에게 인기가 높다. 험한 산등성이에 물을 가둬 벼농사를 짓고 있는 오지 사람들의 생활 터전이 이젠 외지인들을 불러들이는 관광자원이 된 셈이다. 모르긴 몰라도 쌀값으로 버는 돈보다는 관광수입이 월등할 것이다. 해발 1000m의 난젠옌에서 300m의 반링춘(半嶺村)까지 걷는 트레킹 코스는 가벼웠다. 거리는 짧지 않지만 대부분이 내리막길이고 가파른 지형은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비교적 수월했다. 트레킹 내내 대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땀을 식히기에 충분했고 물결치듯 흔들리며 사각거리는 소리는 감미로운 음악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풍광보다 사람이 아름다운 반링춘 대나무 숲 트레킹이 끝날 무렵 후끈한 열기와 습기가 엄습했다. 마치 사우나에 들어온 것과 같은 더운 느낌이 온몸을 감쌌다. 갈증을 풀어줄 찬물을 찾는 순간 낯설지 않은 촌락이 눈에 들어왔다. 난젠옌에서 계곡을 따라 바로 내려가면 만날 수 있는 반링춘이다. 반링춘은 난젠옌에서 내려다보이는 다랑논의 한가운데 있는 마을이다. 약 50 가구에 200여명이 거주한다. 원래 사람이 거의 찾지 않는 마을이었으나 난젠옌 풍경구가 사진촬영의 명소로 떠오르면서 이름이 나기 시작했다. 트레킹을 막 마치고 내려온 나그네에게 기꺼이 녹차를 우려 주던 마을 아낙의 친절이 고맙다. 갈증이 해소될 즈음에야 반링춘의 모습이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집집마다 대문이 활짝 열려 있다. 낯선 이방인들이 집안을 기웃거리며 구경하는데도 주민들은 거부감이 없었다. 적어도 이 마을에서만큼은 도둑이란 단어가 없는 듯하다. 점심 때가 되자 집집마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 올랐다. 주인이건 객들이건, 너나없이 함께 식탁에 앉았다. 푸짐하게 내오는 돼지고기 요리마다 주민들의 넉넉한 인심이 배어 있는 듯하다. 종류도 다양해서, 중국에서 맛볼 수 있는 돼지고지 요리는 모두 다 올라온 것 같다. 중국에서는 손님을 대접을 할 때 푸짐하게 차려내는 것이 예절이라는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다. 식사를 마치고 마을을 떠나는 객들의 손마다 유기농 찻봉지와 말린 고구마가 들려 있다. 순수하고 친절한 사람들의 여운이 아직도 아른거린다. ●또 다른 중국, 황니링 유기농과 훙싱핑 온천 숲과 계곡, 그리고 다랑논을 지나니 어느덧 여정의 마지막이다. 우시강(烏溪江)댐을 지나서 황니링으로 가는 뱃길. 더없이 상쾌한 강바람이 귓불을 스친다. 황니링은 유기농 마을로 유명하다. 농약 가득한 과일이나 화학비료투성이의 채소로 대표되는 중국의 이미지는 마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주민들은 벌레를 잡기 위해 농약대신 고추 삶은 물을 쓰고, 비료 대신 가축 배설물을 발효시킨 액체비료를 사용한다고 했다. 황니링은 이를테면 친환경 유기농의 종합 센터다. 주민들은 전통 농서에 기록된 농법을 스스로 실천할 뿐 아니라 개발하고 전파하는 몫을 담당하고 있다. 아울러 자신들이 생산한 농산물이 대도시의 고급 식탁에 오른다는 자부심 또한 대단했다. 뱃머리를 돌려서 훙싱핑 온천으로 향했다. 훙싱핑은 원래 은광을 개발하려는 광산업자와 개발에 반대하는 원주민 간의 갈등이 심한 곳이었다. 한데 은광을 개발하려다 온천을 발견했고, 온천의 지분을 지방정부와 광산업자가 나눠 갖는 대신 은광 개발을 포기하는 것으로 사태가 수습됐다. 개발을 능사로 아는 우리와 사뭇 다른 모습. 섭씨 41도의 순수 온천수보다 담백한 그들의 개발 스토리가 외려 더 감동적이다. 글 사진 쑤이창현(중국) 박지환기자 popocar@seoul.co.kr ●여행수첩 →진에어가 2013년 6월까지 인천공항과 닝보공항을 잇는 전세기를 운항한다. 월·금요일 출발. →쑤이창현은 열대 기후대에 속해 여름철엔 무척 습하고 덥다. 여행시 물을 항상 소지해야 한다. →연중 200일 이상 비가 내리기 때문에 우산과 비옷을 준비하는 게 좋다. →원시삼림과 대나무 숲 트레킹 때 산모기에 물리지 않도록 몸에 뿌리는 모기약도 준비해야 한다. →중국 오지 전문여행사 레드팡닷컴(www.redpang.com)에서 난젠옌과 첸포산(千佛山) 등을 돌아보는 여행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02)6925-2569.
  • 미모의 탈북 女가수, 누구 딸인가 알고보니…

    미모의 탈북 女가수, 누구 딸인가 알고보니…

    평양음악무용대학 출신으로 탈북해 남쪽에서 트로트 가수로 활동했던 명성희(30)씨가 파페라 가수로 변신해 화제다. 탈북자 인터넷 매체 ‘뉴포커스’(www.newfocus.co.kr)는 1일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에 선 명씨와의 인터뷰를 실었다. 명씨는 북한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영화방송음악단에 들어가 영화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 가수로 활동하며 ‘스승과 제자’, ‘당찬 처녀들’ 등 주제가를 부르며 인기를 모았다. 2005년 어머니, 동생과 함께 탈북한 그는 적지 않은 나이에 서울예술대학 실용음악과에 입학했고, 졸업 뒤 음반 회사의 권유로 명가람이라는 이름으로 트로트계에 입문했다. 명씨는 북한에서 유명한 체육인과 예술인을 부모로 둬 주목받기도 했다. 아버지는 북한 남자 국가대표 축구팀을 20년 동안 지휘했던 고(故) 명동찬 감독이다. 북한에서 ‘인민 체육인’ 호칭을 받았던 명 감독은 1990년 남한과 북한에서 번갈아 열린 통일축구 대회에서 북한 사령탑을 맡아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다. 어머니 또한 북한 최고 예술단으로 꼽히는 조선인민군협주단에서 가극 배우로 활약했던 박윤희씨다. 현재 홀로서기를 하는 명씨는 파페라 가수로서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3옥타브의 음역대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그는 올 가을 새 앨범을 낼 예정이다. 다음은 뉴포커스와의 인터뷰 전문. →우선 한국 생활이 어떠신지 궁금하다. -남한사회에서 가수로서 처음 데뷔하기가 어렵네요. 북한에 있을 때 영화방송 음악단 가수로 활동을 했는데, 한국 음악을 너무 하고 싶었어요. 그나마 북한에선 영화 음악에서나 자유스럽게 발성을 낼 수 있어요. 물론 영화 음악에도 김일성, 김정일의 사상이 들어가 있죠. 지금은 음반 회사와 결별하고 혼자서 가는 중이에요. 그 길이 쉽지만은 않죠. 하지만 어렵게 이 땅에 왔기에 가수로서의 저의 꿈을 이루지 못하면 후회할 것 같아요. 남한에서 가수 활동을 준비 한 게 5년 남짓 되는데, 얼마 전 일본 활동도 하고 왔어요. 반응이 좋아요. →특별히 파페라 가수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있는가? -한국에 왔을 때 제 나이 25세였는데 당시 가요계엔 리듬앤블루스(R&B) 음악이 주류를 이뤘어요. 그러던 중 음반 회사의 권유로 트로트 가수로 활동하게 됐어요. 정의성 작곡가님에게서 ‘얄리얄라’, ‘어금니’, ‘어 그래’ 등의 곡을 받기도 했었어요. 회사와 결별한 이후로 파페라 가수로 활동하고 있어요.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서 감사해요. 사실 남한에 앞서 북한에 있었을 당시 파페라 가수로 데뷔했었거든요. 크로스오버 음악인 파페라 가수가 되는 것이 어렸을 때부터 꿈이였어요. →탈북을 결심하게된 배경은? -22살, 영화방송음악단 소속 가수로 활동하는데 우울증이 찾아왔어요. 자유롭게 음악을 하고 싶었거든요. 북한 음악은 주체 발성법으로 노래해야 해서 심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그러던 중 자살 시도도 했었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운명인지, 자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어요. 다시금 마음을 진정시켰죠. 하지만 그때부터 매일 남한으로 가서 자유롭게 노래할 생각만 했어요. 그러던 중 브로커를 통해 남한으로 올 기회를 잡은 거죠. 행운이었어요. →모친 또한 북한에서 유명한 공훈가수로 활동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 가수의 길을 걷는 데 있어, 아무래도 부모님의 영향이 크지 않았나 싶다. -물론 어머니의 영향이 컸어요. 제가 처음 노래할 때 진성 소리를 많이 썼거든요. 그래서 평양음악무용대학에 입학했을 당시, 교수님들이 북한 음악하기 힘든 목소리라고 그러셨어요. 그런데 공훈가수 출신인 어머니께 소리 내는 법을 배운 후 단기간 내에 발성이 클래식에 적합한 창법으로 바뀌었어요. 지금도 어머니는 제 노래의 스승이세요. →가족이 북한에서 중산층 이상의 삶을 살았는데, 탈북을 결심했을 때 부모님의 반대도 컸을듯하다. -제일 먼저 어머니하고 상의했어요. 아버지가 간암으로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북한에서 아이스크림 공장을 크게 하고 있었거든요. 사실 어머님은 가도 좋고 안가도 좋고 그런 입장이었어요. 자유롭게 노래를 하고 싶던 제 꿈에 어머님도 결국 감복하셨죠. →꿈을 찾아 한국에 어렵게 왔는데 소회가 어떠한가. -사실 처음 한국에 왔을 땐 무척 힘들었어요. 북한하고 시스템이 다르니까요. 북한은 예능단체들을 당 차원에서 관리하고 밀어주는데, 남한은 다르더라고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자기 힘으로 해야 했어요. 사기를 당하는 몇 번의 절망적인 과정에서 언제나 스스로 되새긴 건 나는 꼭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이었어요. 지금도 이런 희망을 품고 매일 믿음으로 걷고 있어요. →한국사회에 바라는 점이 있는가. -예술 분야 탈북자들에 대한 지원이 없어서 아쉬워요. 탈북 예술인들을 키워낼 수 있는 제도, 시스템이 절실해요. 능력이 검증된다면 재능 있는 탈북 학생들을 남한 사회의 멘토들과 연결해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원 시스템과 정보가 없는 탈북 학생들이 정상 궤도에 오르려면 5~6년 이상 걸리거든요. →예술인을 꿈꾸는 탈북자들에게 조언을 부탁한다. -아무래도 예능 쪽은 길이 좁다 보니 유혹들도 많거든요. 남한 사회와 자기 분야에 대해 더욱 거시적인 안목과 지혜가 필요한 것 같아요. →끝으로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자신만의 색깔이 있는 파페라 가수가 되고 싶어요. 조수미, 임태경, 임형주씨를 존경하고요. 저도 이들처럼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는 음악인이 되고 싶어요.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행운을 주는 희귀한 현상 ‘불타는 무지개’ 포착

    좀처럼 보기힘든 희귀한 자연현상인 ‘불타는 무지개’(fire rainbow)가 카메라에 포착됐다. 최근 스코틀랜드 모레이에 사는 알리 베인(61)은 집 인근을 산책하다 하늘 위에 떠있는 놀라운 모양의 무지개를 목격했다. 하늘로 널리 퍼져 불타오르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 무지개는 일명 ‘불타는 무지개’로 북부 유럽에서는 좀처럼 목격되지 않는다. 베인은 “딱 보는 순간 매우 특별한 무지개임을 알아차렸다.” 면서 “내 평생 이렇게 생긴 무지개는 처음본다.” 며 기뻐했다. ’불타는 무지개’는 구름 속 육각형 얼음에 태양빛이 통과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태양 고도가 58도 이상이 아니면 나타나지 않아 좀처럼 관측하기 쉽지 않다. 따라서 서양에서는 이 무지개를 보면 행운을 얻는다는 속설도 존재한다.     베인은 “무지개가 약 20초 정도 지속되다가 사라졌다.” 면서 “특별한 순간을 카메라로 촬영하게 돼 너무나 기쁘다.”고 말했다.   인터넷뉴스팀 
  • 사상 첫 ‘대직’ 파행운영… ‘식물 재판부’

    대법관 4명의 공백 사태에 따라 사법부 사상 처음으로 대법원 소부(小部) 선고에 다른 소부의 대법관이 임시로 투입된다. 또 지난 19일 예정됐던 전원합의체 선고도 무기한 연기됐다. 국회의 임명동의안 처리 지연에 따른 대법원의 파행 운영이 현실화된 것이다. 이른바 ‘대직’(代職)은 본래 업무 이외에 다른 부의 사건을 심리에서부터 재판까지 맡는 일이다. 대법관 대직은 2008년 단 한 차례 이뤄졌지만 당시는 대법관 공석 탓이 아닌, 휴가 간 대법관을 대신해 상고 이유서를 내지 않은 단순 사건을 ‘상고 기각’ 처리하는 비교적 단순한 업무였을 뿐이다. 대법원은 25일 “소부 1부에 대법관이 부족해 2부의 양창수 대법관을 참여시켜 26일 선고를 진행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선고를 마냥 미룰 수 없어 1부에 계류 중인 시급한 사건 심리 및 선고에 1명을 빌리는 고육지책을 쓴 셈이다. 다만 세부적으로 크게 다투지 않는 사건들만 선고 대상으로 삼았다. 대법원 재판은 대법관 4명이 한 부를 이루는 소부 선고와 전원이 참석하는 전원합의체 선고로 나뉘어 있다. 현행 법원조직법상 소부 선고는 대법관 3명 이상이면 가능하다. 1부는 지난 10일 김능환·안대희 대법관이 퇴임해 2명만 남아 재판이 불가능한 상태인 탓에 ‘대법원 사건의 배당에 관한 예규’에서 정한 대직 규정을 통해 사건을 처리할 수 있도록 했다. 양 대법관은 1, 2부 사건 선고에 모두 관여한다. 전무후무하다. 대법원 2, 3부도 26일 선고를 열지만 쟁점이 많은 큰 사건은 모두 후임 대법관 선임 이후로 늦췄다. 대법원장과 대법관 14명으로 구성되는 전원합의체도 매달 셋째 주 목요일에 선고가 이뤄지는데 지난 5일 열린 이후 신임 대법관 4명이 충원될 때까지 선고를 미루기로 했다. 지난 19일에는 선고 기일을 아예 잡지 않았다. 법적으로 전체의 3분의2 이상인 대법관 9명이 있으면 선고할 수 있지만 의견이 첨예하게 갈릴 수 있는 전원합의체 사건의 특성상 현 상태에서의 재판이 부적절하다는 판단에서다. 이에 따라 강창희 국회의장이 대법관 후보 임명동의안을 직권상정하겠다고 밝힌 다음 달 1일에도 임명동의안 통과 여부가 결정되지 않으면 전원합의체 선고 중단을 비롯, 대법관 공백 후폭풍은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대법원에서 ‘식물재판부’ 처지에 놓인 1부의 기능을 위해 결정한 대직과 관련, “사건을 충실히 심리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1, 2심을 거친 사건이 대법원에서 통상 수개월 계류되는 데다 소부 선고를 위해 대법관 3명 이상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나오는 지적이다. 양 대법관이 26일 소부에서 맡은 사건은 1부와 2부를 합해 316건이다. 안석기자 ccto@seoul.co.kr
  • [한·일 프로야구 레전드 매치] ‘미스터 올스타’ 되려면

    ‘별 중의 별’은 누구? 프로야구 올스타전이 21일 오후 6시 30분(OBS 중계) 대전구장에서 화려하게 펼쳐진다. 이번 올스타전은 제10구단 창단과 맞물려 진통을 겪었다. 일부 구단과 프로야구선수협회의 갈등으로 무산 위기까지 치달았지만 막판 조율로 파국은 면했다.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역시 ‘미스터 올스타’(MVP). 실력도 실력이지만 행운이 따라야 MVP의 영예를 안을 수 있다. 1경기 결과를 놓고 기자단 투표로 선정되는 탓에 얼마나 강한 인상을 심어주느냐가 MVP를 좌우할 전망이다. 따라서 한여름 밤 하늘을 하얗게 가르며 승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시원한 홈런포의 주인공이 MVP에 오를 공산이 짙다. 때문에 올 시즌 홈런 1·2위를 달리며 최고의 시즌을 보내고 있는 웨스턴리그 강정호(넥센·19개)와 이스턴리그 최정(SK·18개)의 활약에 시선이 쏠린다. 둘의 대결은 자존심이 걸린 데다 후반기를 앞두고 기선을 제압한다는 점에서 관심을 더한다. 여기에 일본에서 복귀한 김태균(한화)과 삼성의 주포로 떠오른 박석민, 홍성흔(롯데) 등이 다크호스로 꼽힌다. 다만 ‘국민타자’ 이승엽(삼성)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쉽다. 또 하나의 관심사는 팬 투표에서 사상 최다 득표를 기록한 롯데 포수 강민호의 MVP 등극 여부다. 롯데는 역대 올스타전에서 강세를 이어왔다. 원년 올스타전 MVP 김용희를 비롯해 정수근(2004·2007년)과 이대호(2005·2008년)가 2번씩 올랐다. 2006년 두산 유니폼을 입고 미스터 올스타에 선정된 홍성흔은 롯데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2010년 다시 MVP의 영광을 차지했다. 김민수 선임기자 kimms@seoul.co.kr
  • 멕시코서 120억원대 복권 추첨방송 사기 사건

    멕시코서 120억원대 복권 추첨방송 사기 사건

    복권회사 하청업체 직원들이 1등 번호를 미리 알아낸 뒤 100억대 상금을 타낸 대형사건이 멕시코에서 발생했다. 회사는 뒤늦게 이 같은 행각을 파악하고 검찰에 수사를 요청, 계좌동결조치를 내렸지만 이미 막대한 돈이 인출된 뒤였다. 18일(현지시각) 멕시코 일간지 레포르마에 따르면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사건은 지난 1월 발생했다. 멕시코 복권회사와 계약을 맺고 매주 복권번호 추첨을 촬영해 TV에 내보내는 하청업체 직원 4명이 공모를 했다. 수법은 간단했다. 문제의 직원들은 복권추첨이 실제론 녹화방송이지만 생방송처럼 나가 약간의 시차가 나는 점을 악용했다. 직원들은 복권추첨을 녹화하면서 몰래 따로 촬영해 마감 전 1등 번호를 알아냈다. 그리고는 가족과 친척들에게 1등 번호를 찍어 복권을 사게 했다. 두 종류의 복권이 추첨된 1월 22일 백만장자를 탄생시킨 행운의 번호는 06, 12, 15, 24, 25, 49번과 09, 20, 36, 51, 53, 54번이었다. 번호를 미리 알아낸 직원들이 가족과 친지를 통원해 타낸 상금은 1억6000만 멕시코 페소, 우리나라 돈으로 약 137억원에 이른다. 4명은 직원들은 상금을 타낸 뒤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복권회사 측이 검찰에 수사를 요구하면서 뒤늦게 대형 사기행각이 드러났다. 검찰은 상금이 입금된 계좌에 입출금 동결조치를 내렸지만 이미 5000만 페소(약 43억원)이 빠져나간 뒤였다. 사진=자료사진 임석훈 남미통신원 juanlimmx@naver.com
  • ‘괴물 멘붕’ 류현진 2이닝 8실점 최악투

    ‘괴물 멘붕’ 류현진 2이닝 8실점 최악투

    ‘괴물’ 류현진(25·한화)이 2이닝 8실점으로 데뷔 이후 최소 이닝, 최다 실점으로 강판됐다. 류현진은 18일 대전에서 열린 프로야구 삼성과의 경기에 선발 등판, 2회까지 9피안타(2피홈런) 2볼넷 2탈삼진 8실점으로 최악의 피칭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8실점은 데뷔 후 최다 실점이며 한 이닝 6실점은 지난해 4월 8일 대전 LG전에서 4회 6실점한 이후 두번째. 류현진은 지난 5월 2일 잠실 LG전에서는 1회 5실점한 바 있다. 이날 8실점은 2006년 5월 11일 청주 현대전에서 7실점한 것보다 훨씬 나쁜 투구였다. 첫 타자 배영섭에게 좌익수 앞 안타를 허용하며 불안하게 출발한 류현진은 1사 2루 상황에서 이승엽에게 중전 적시타를 맞아 선취점을 내줬다. 이승엽에게 한·일 통산 500호 홈런을 내줄 것을 너무 경계한 듯한 슬라이더였는데 안타를 얻어맞은 것. 뒤이은 타자 박석민과 최형우에게 볼넷을 잇따라 내주며 만루 위기를 자초한 류현진은 진갑용에게 2타점 적시타로 흔들리더니 강봉규에게 왼쪽 담장을 넘기는 3점포를 허용하고 말았다. 진갑용은 역대 36번째 2000루타를 달성했다. 반면 이승엽은 한·일 통산 500호 홈런 대기록 작성을 다음 기회로 미뤘다. 류현진은 체인지업이 밋밋한 데다 공의 움직임도 떨어져 구속이 나오지 않았다. 2회에도 첫 타자 박한이에게 중전 안타(역대 18번째 1500안타)를 내준 류현진은 이어진 2사 2루 위기에서 진갑용에게 또 1타점 적시타를 얻어맞았다. 3회엔 선두타자 조동찬에게 정중앙 담장을 넘기는 1점 홈런을 맞고 송창식에게 마운드를 물려줬다. 류현진과의 좌완 선발 대결로 관심을 끈 장원삼은 5와 3분의1이닝 동안 10개의 안타를 맞았지만 1볼넷 4탈삼진 1실점(1자책) 무사사구로 틀어막으며 8-1로 이긴 상황에서 김희걸에게 마운드를 넘겼다. 팀이 11-1 압승을 거두면서 장원삼은 시즌 11승으로 다승 단독 선두를 질주했다. 광주에선 두산의 니퍼트(31)가 KIA를 상대로 시즌 10승에 도전했으나 2이닝 동안 5피안타 2피홈런, 2탈삼진, 3사사구 6실점하며 패전 멍에를 썼다. KIA는 이용규의 시즌 첫 1회 선두타자 홈런(역대 통산 246호)과 김상현의 시즌 1호이자 쐐기 투런홈런에 힘입어 5회초 7-4 상태에서 시즌 세 번째 강우콜드승을 거뒀다. 소사는 5이닝 동안 4실점하고도 행운의 5승째를 따냈다. 목동에선 롯데가 쉐인 유먼의 7이닝 무실점 호투(시즌 8승)를 앞세워 넥센을 5-0으로 제압하고 3연패에서 벗어나며 2위를 유지했다. 한편 폭우로 세 차례에 걸쳐 1시간여 경기가 중단됐던 잠실에선 LG가 7회 김태완과 8회 작은 이병규(7번)의 1점포를 엮어 SK의 추격을 6-2로 따돌리며 7연패 탈출 후 2연승을 거뒀다. 강동삼기자 kangtong@seoul.co.kr
  • NASA두뇌들 ‘이직난’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우주왕복선 프로그램 종료 1년을 앞두고 플로리다주 케네디우주센터의 고액 엔지니어들이 새로운 직업을 찾는 데 악전고투하고 있다고 AP가 1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우주왕복선은 한번 발사하는 데 평균 4억 5000만 달러(약 515억원)가 들어 ‘돈 먹는 블랙홀’로 불린다. 이에 막대한 재정적자에 시달리는 미국은 지난해 7월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을 접기로 했다.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연구진 가운데 일부는 사우스 캐롤라이나로 가서 항공기 제조업에 종사한다. 반면 아프가니스탄처럼 멀리 가기도 한다. 이들은 유사한 업무의 직장을 갖게 돼 그나마 행운이다. 플로리다에 남기를 원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전문 기술에 훨씬 못 미치고 월급도 훨씬 적은 일자리에 만족해야 했다. 이런 일자리도 구하지 못한 많은 이들은 자가용 이용과 공공 요금 지출을 줄이면서 재취업에 매달리고 있다.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에서 33년간 일했던 전직 프로젝트 매니저 테리 화이트(62)는 “늙은이를 원하는 곳이 아무 데도 없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실직 직전 연봉이 10만 달러(약 1억 1500만원)였지만 지금은 “40마일(64㎞) 떨어진 곳에 시간당 11달러짜리 일자리가 있지만 기름 값 등을 빼고 나면 남는 게 없다.”고 말했다. 우주왕복선 품질감독관이었던 제임스 피크(48)는 2010년 10월 실직 이후 50군데에 이력서를 내밀었지만 모조리 거절당했다. 결국 피크는 올랜도의 한 호텔에서 임시직으로 유리창을 끼우고 경비 일을 하고 있다.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이 폐지된 이후 플로리다에서는 7400명 이상이 일자리를 잃었다. 5년 전만 해도 1만 5000여명이 일했던 케네디우주센터의 인력은 현재 8500명으로 35년 만에 최저 수준이다. 미국 정부는 당분간 우주선을 발사할 계획이 없고, 우주사업을 하는 민간 기업은 이런 실직자들을 모두 흡수할 만큼 규모가 크지 않다. 케빈 해링턴(55)은 “이제는 절망적”이라며 “적어도 우리가 어떤 방면으로 가야 할지는 정부가 생각해 주기를 원한다.”고 대책을 호소했다.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 [일본통신] 이대호의 오릭스는 대체 어떤 팀일까②

    [일본통신] 이대호의 오릭스는 대체 어떤 팀일까②

    지난해까지 일본 프로야구에서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한 팀은 요미우리 자이언츠(리그 우승 42회, 일본시리즈 우승 21회), 퍼시픽리그에선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리그 우승 21회, 일본시리즈 우승 13회)다. 현재 팀당 한 시즌 144경기가 펼쳐지며 중간에 양 리그 교류전(팀당 24경기, 상대 리그 팀과 홈 & 어웨이 2연전)이 있다. 일본의 포스트 시즌은 각 리그에서 3위 팀까지 포스트 시즌에 진출해 2위 팀과 3위팀이 3전 2선승제(2위팀 홈구장에서 3경기를 치름)로 싸운다. 이걸 클라이맥스 퍼스트 스테이지라고 한다. 여기에서 이긴 팀이 정규시즌 1위팀(전 경기를 1위팀 홈 구장에서)과 6전 4선승제(파이널 스테이지)로 일본시리즈에 올라가는 제도다. 그런데 잠깐. 왜 7전 4선승제가 아니고 6전 4선승제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정규시즌에서 우승(1위)한 팀이 먼저 1승을 안고 파이널 스테이지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제도가 탄생된 배경에는 역시 일본 프로야구를 손바닥 안에 올려놓고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는 요미우리의 참담했던 과거 때문에 생겨난 제도다. 2007년 요미우리는 정규시즌에서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당시 2위였던 주니치 드래곤스와의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패하는 바람에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도 일본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주니치는 그해 일본시리즈 패권을 차지했고 이에 열이 받은 와타나베 쓰네오(요미우리 신문 회장 겸 구단주)가 2008년부터 6전 4선승제(1위팀에 1승 어드밴티지를 주는)로 파이널 스테이지 제도를 변경해 버렸다. 물론 당시엔 모든 구단들의 동의를 얻었다고는 하지만 일본 프로야구의 생리를 알고 있는, 그리고 요미우리 구단의 그 엄청난 입김과 영향력을 감안해 보면 이건 와타나베 회장의 일방적인 행패나 다름이 없다. 이제 이대호의 소속 팀인 오릭스에 대해 이야기 해 보자. 오릭스 하면, 만년 꼴찌 팀이란 인식이 뿌리깊게 자리 잡고 있다. 이대호 이전에 오릭스에서 활약했던 구대성, 이승엽, 박찬호를 보면 충분히 그럴만 하다. 하지만 오릭스가 2000년대 들어와서 약체 팀(2000년 이후 꼴찌만 무려 6차례 기록)의 대명사가 됐지 과거 황금시대, 그리고 과거의 성적을 보면 그렇게 막장 팀까지는 절대로 아니다. 이 팀도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이 있었고 그 세월만큼 수많은 스타플레이어를 배출한 팀이다. 지난해와 올 시즌 모두 오릭스의 캐치 프레이즈는 ‘신(新) 황금시대’다. 새로운 황금시대를 열겠다는 의미인데, 오릭스의 황금시대란 1967년부터 1978년까지의 12년간을 일컫는다. 당시 한큐 브레이브스였던 오릭스는 이 기간동안 퍼시픽리그 우승 9회, 일본시리즈 우승 3회를 기록하는 등 리그에서 적수가 없었을만큼 막강한 전력을 과시했었다.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 시절(1963-1973) 리그 우승 5회가 첫번째 황금시대였다면(니시모토 시절엔 일본시리즈 우승은 없었다) 우에다 도시하루 감독 시절(1974-1978) 기록한 리그 우승 4회, 일본시리즈 우승 3회는 두번째 황금시대다. 이 기간동안 한큐의 황금시대를 열었던 가장 대표적인 선수로는 야마다 히사시(현 야구 평론가), 가토 히데지, 후쿠모토 유타카를 결코 빼놓을수 없다. 이 세명의 선수들을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해태 타이거즈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이강철(현 KIA 코치), 김성한, 이종범이 한 시대를 같이 뛰며 팀을 전성기로 이끈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라 평가할수 있다. 야마다는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언더핸드 투수다. 잠수함 투수로 막강한 위용을 뽐냈는데 다승왕 3차례(1972, 1976, 1979) 평균자책점 1위 2차례(1971, 1977) 등 발군의 기량을 과시했다. 야마다는 정규시즌 MVP를 3년연속 수상(1976-1978)했다. 3년연속 MVP 수상 기록은 요미우리 종신 감독인 나가시마 시게오와 일본 최고의 홈런왕인 오 사다하루 밖에 없는 귀한 기록이다. 가토는 정교함과 장타력을 동시에 겸비한 명품 타자였다. 두번의 타율 1위(1973, 1979)는 오릭스 황금시대에 가장 돋보였고 특히 그는 은퇴 후 니혼햄 파이터스에서 타격코치를 맡을 당시 프로 초년병이었던 오가사와라 미치히로(현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타격에 눈을 뜨게 만든 위대한 지도자였다. 후쿠모토는 일본 프로야구 역사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도루왕이다. 1972년 후쿠모토는 106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일본 프로야구 한 시즌 최고 기록을 수립했다. 또한 통산 1,065개의 도루는 역대 1위, 115개의 3루타 역시 역대 1위다. 루상에 나가면 뛴다는 후쿠모토는 투수의 습관과 어떠한 볼카운트에서 뛸지를 감각적으로 파악하며 부단히도 도루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마도 지금의 일본야구에서 도루에 대한 분석과 상대 투수 습관 분석은 후쿠모토가 최초이지 않았나 싶다. 1968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한큐가 야마다 히사시, 가토 히데지, 후쿠모토 유타카를 지명한 것은 엄청난 축복이었고 이 세명의 선수 모두 은퇴 후 일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한큐 브레이브스가 황금시대를 맞이 할수 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이유인 것이다. 과거 이러한 영광을 누렸던 오릭스는 지금 처참한 팀 성적을 기록중이다. 주전 선수들의 잇단 부상이 그 원인 중 하나지만 올 시즌 보여주고 있는 모습들을 보면 특히 팀 타선 침묵이 꼴찌를 달리고 있는 원인이다. 작년 시즌 후 오릭스가 이대호를 선택한 것도 바로 이러한 부분을 염려해서 데려온 측면이 큰데, 그 우려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이대호와 여덟 난쟁이’이란 표현이 딱 어울릴 정도로 이대호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타자들이 기대 이하의 활약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대호는 올 시즌 초반의 부진을 뒤로 하고 5월부터 맹타를 휘두르고 있다. 덕분에 퍼시픽리그 ‘5월 MVP’까지 수상했는데 한국인 선수가 월간 MVP를 수상한 것은 2006년 6월 MVP에 올랐던 이승엽(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이후 최초다. 한때 터지지 않는 홈런과 2할대 초반에 머물렀던 타율도 반등하며 지금은(6월 25일 기준) 타율 2할 9푼 3리(리그 8위), 11홈런(리그 2위), 41타점(리그 2위), 출루율 3할 9푼 1리(리그 2위) 장타율 4할 9푼 8리(리그 4위)로 도루를 제외한 공격 전 부문에서 10위권 안에 들어와 있다. 오릭스 타자 가운데 이대호보다 더 높은 타율과, 홈런, 그리고 장타력을 보여주고 있는 선수가 전무하다. 이것은 이대호 개인으로서는 매우 뜻깊은 결과지만 팀 전체적으로 보면 그만큼 오릭스 전력이 떨어진다는 걸 의미한다. 선수의 성적도 팀 성적이 어느정도 뒷받침 됐을때 빛을 발하는 법이다. 만약 오릭스가 이대로 시즌을 끝내게 된다면 이대호에 대한 스포트라이트는 그만큼 떨어질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오릭스가 인기 팀이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물론 이대호를 응원하는 한국 팬들은 이대호에게 모든 초점이 맞춰질수 밖에 없지만 일본에서 바라보는 이대호에 대한 시선은 ‘잘했다’ 정도로 그칠까 우려된다. “이대호 덕분에 팀이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다.” 거나 “이대호 덕분에 오릭스가 우승할수 있었다.”는 겉으로 보이는 느낌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강력하게 이대호를 원했던 오카다 아키노부 감독은 자신이 선택한 이대호가 만족스러운 활약을 보여주고 있기에 이 부분에 대해선 칭찬을 받을만 하다. 하지만 올 시즌 중반을 향해 달려 가고 있는 지금까지도 꼴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점은 책임을 져야 한다. 올해가 오릭스와 계약 마지막 해라는 점을 감안하면 특히 그렇다. 물론 올 시즌 남은 경기가 많긴 하지만 현재(6월 25일 기준) 24승 4무 36패(승률 4할)로 반등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다는 점은 지금보다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지금 이대호는 이러한 팀에서 뛰고 있다. 타선의 시너지 효과 역시 기대할수 없다.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팀 공격을 이끌어야 하는, 고독한 러너와 같은 모양새다. 과연 언제쯤 오릭스는 강팀이란 소릴 다시 듣게 될까. 그리고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까. 이대호가 오릭스로 왔기에 강팀이 됐다 라는 말을 올해 듣고 싶었다. 하지만 오릭스가 처해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주객이 전도 돼 있는 모양새다. 이대호는 훌륭한데, 팀이 엉망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오릭스의 상승세 속에 이대호의 활약이 돋보이는 야구가 됐으면 좋겠다. 이대호의 앞날에 늘 행운이 깃들길 바라며 한국 야구의 자존심이란 사실을 항상 가슴 속에 품길 바란다. 일본야구통신원 윤석구 http://hitting.kr/
  • “표결은 의원의 가장 중요한 의무” 15년간 5000회 연속 본회의 표결

    “표결은 의원의 가장 중요한 의무” 15년간 5000회 연속 본회의 표결

    수전 콜린스(59·공화·메인) 미국 연방 상원의원이 지난해 어느 날 워싱턴DC의 로널드레이건공항 게이트에서 막 비행기에 오르려 하고 있었다. 그때 의회에서 긴급 표결이 있다는 소식을 전달받았다. 콜린스는 탑승을 포기하고 의회로 직행했다. 숨을 헐떡이며 본회의장에 들어섰을 때 의장이 “혹시 아직 표결을 안 하신 분 있나요?”라고 물으며 표결을 종료하려 하고 있었다. 콜린스는 그날 마지막으로 표결에 참가한 의원이 됐다. ●“놀라운 인내와 직업윤리가 이뤄낸 업적” 콜린스는 12일(현지시간) 상원 본회의에서 5000회 연속 표결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1997년 상원의원에 처음 당선돼 첫 여성 국무장관 후보였던 매들린 올브라이트에 대한 인준 투표를 던진 것을 시작으로 지난 15년 동안 단 한 번도 표결을 빼먹지 않은 것이다. 동료 의원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이날 표결을 마친 뒤 콜린스에게 박수와 함께 찬사를 보냈다. 상원 공화당 원내대표인 미치 매코넬은 “콜린스의 기록은 놀라운 인내와 직업 윤리가 이뤄 낸 업적”이라고 했다. 민주당 원내대표인 해리 리드도 “상대 당이긴 하지만, 그녀의 업무 자세에 경의를 표한다.”고 했다. 이에 콜린스 의원은 “메인주를 대표해 상원에서 봉사하게 된 것은 커다란 영광”이라면서 “표결은 의원의 가장 중요한 의무”라고 말했다. 콜린스의 연속 표결 기록은 미 의회 역사상 세 번째로 긴 것이다. 윌리엄 프락스마이어 전 민주당 상원의원은 1966년부터 1988년까지 22년간 1만 252회 연속 표결을 한 기록을 갖고 있다. 척 그래슬리 공화당 상원의원도 1993년부터 지금까지 6446회 연속 표결을 행사했다. 여성 의원으로는 콜린스가 최장 표결 기록 보유자다. 콜린스는 이날 CNN 인터뷰에서 “처음 의원이 됐을 때 이런 목표를 세운 것은 아니었다.”면서 “2년 정도 지났을 때 내가 한 번도 표결에 빠진 적이 없는 것을 알고 그때부터 기록을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런 기록을 세운 데는 건강과 행운 덕도 있지만,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남모를 노력과 희생… 결혼식도 휴회기간에 실제 콜린스의 대기록 이면에는 남모를 노력과 개인적 희생이 숨어 있다. 그녀는 2007년 상임위가 늦게 끝나는 바람에 본회의 표결에 늦지 않으려 에스컬레이터를 뛰어 올라가다 발목을 삔 적이 있다. 2008년 총선 때 메인주의 한 시장이 그녀에게 지지 선언을 하는 중요한 자리에 본회의 표결 때문에 참석하지 못한 적도 있다. 다른 의원들은 주말에 지역구에 갔다가 월요일 아침에 워싱턴으로 복귀하지만 콜린스는 일요일 오후에 돌아온다. 혹시 월요일에 항공편이 결항돼 표결에 참석지 못하는 불상사를 예방하기 위해서다. 미혼인 콜린스는 오랜 남자 친구인 토머스 데프론(73)과의 결혼 날짜를 다음 달로 잡았다. 그 이유 역시 그때가 의회 휴회 기간이라 표결 불참을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고맙다 최나연! 세리 그 맨발 샷처럼 트리플보기 넘어 US오픈 우승

    고맙다 최나연! 세리 그 맨발 샷처럼 트리플보기 넘어 US오픈 우승

    “세리 언니가 경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줄은 미처 몰랐어요.” 9일 미국 위스콘신주 콜러의 블랙울프런 골프장(파72·6954야드) 18번홀 그린. 최나연(25·SK텔레콤)은 다소 싱거운 챔피언 퍼트를 떨군 뒤 이일희(24·볼빅)를 비롯한 동료들이 뿌려 대는 축하 맥주 세례를 묵묵히 받고 있었다. 큼지막한 샴페인병을 들고 또 한 명이 다가왔다. 박세리(35·KDB산은금융그룹)였다. 맨 뒤에서 거드는 그를 보고 최나연은 생각했다. “언니가 한 일을 나도 해냈어요.” 그게 벌써 14년 전의 일이다. 박세리는 바로 이 코스에서 공이 해저드에 빠져 까먹을 수도 있는 단 한 개의 타수를 아끼기 위해 양말을 벗고 물에 들어가 공을 쳐내는 ‘맨발 투혼’ 끝에 생애 두 번째 메이저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골프에 대한 국내 시각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던 박세리의 그 모습은 14년 뒤 같은 코스에서 최나연에게 ‘빙의’돼 나타났다. 한국여자골프의 ‘에이스’ 최나연이 제67회 US여자오픈 챔피언십 4라운드에서 트리플 보기를 적어내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도 꿋꿋하게 타수를 만회하며 마침내 ‘메이저 퀸’으로 거듭났다. 버디 4개를 솎아내고 트리플보기 1개, 보기 2개를 묶어 1오버파 73타를 쳤지만 최종 합계 7언더파 281타를 기록, 미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통산 6번째 우승을 메이저 트로피로 장식했다. 상금은 58만 5000달러(약 6억 6500만원). 2위 양희영(23·KB금융그룹)을 멀찌감치 6타차로 따돌리고 마지막 라운드를 시작한 최나연의 우승은 낙관적이었다. 그러나 골프는 18번홀 장갑을 벗을 때까지 아무도 모르는 것. 최나연에게 10번홀(파5)은 그렇게 다가왔다. 당겨진 티샷이 왼쪽 숲속 해저드 구역으로 날아가 ‘로스트볼’이 되는 바람에 최나연은 티박스로 돌아가 1벌타를 받은 뒤 세 번째 샷을 날렸다. 러프를 전전하다 6타 만에 그린에 공을 올린 최나연은 2m짜리 보기퍼트까지 놓치는 바람에 이 홀에서만 3타를 까먹었다. 차근차근 쫓아온 양희영과의 거리도 2타차로 좁혀졌다. 낙관은 비관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최나연은 곧바로 몸을 추슬렀다. 11번홀 1.5m 가까이 붙인 버디퍼트를 가볍게 떨궈 버디를 낚은 데 이어 12번홀(이상 파4)에선 깊은 러프에서 빠져나와 5m짜리 파퍼트를 성공시키는 등 침착하게 자신의 길을 다시 걸었다. 13번홀(파3) 워터해저드로 향하던 티샷이 돌을 맞고 코스로 되돌아오는 등 되찾은 평정심은 행운으로 이어졌다. 세계 랭킹에서도 종전보다 3계단 뛴 2위에 오른 최나연은 박세리를 ‘롤 모델’로 삼아 골프를 시작한 ‘박세리 키즈’다. 중 3년 때인 2003년 국가대표에 발탁돼 이듬해 한국여자프로골프투어(KLPGAT) ADT 인비테이셔널 당시 박세리와 맞대결, 주눅 들지 않는 플레이를 펼쳐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2008년 LPGA 투어에 데뷔한 뒤 이날까지 6승째. 그러나 2009년 첫 우승을 하기 전까지 늘 한 방이 부족해 심리상담사까지 고용하기도 했다. 이듬해 투어 상금왕과 최저타수 부문 1위에 올라 ‘에이스’의 모습은 갖췄지만 늘 한구석이 허전했다. 메이저 우승컵. 그러나 마침내 최나연은 자신의 우상 박세리가 우승했던 바로 그 코스에서 박세리의 샴페인 세례를 받으며 ‘메이저 퀸’으로 거듭났다. 최병규기자 cbk91065@seoul.co.kr
  • [일본통신] 日홈런왕 나카무라 복귀…이대호에 빨간불?

    [일본통신] 日홈런왕 나카무라 복귀…이대호에 빨간불?

    야구에서는 남의 불행이 자신에겐 곧 행운이 되는 경우가 많다. 경쟁 선수가 부상으로 이탈하게 되면 자신이 주전으로 나설 확률이 높아지고 특히 타이틀 경쟁을 하는 타팀 선수가 부상이라도 당한다면 손대지 않고 코를 푸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오릭스 버팔로스의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는 이대호(30)가 홈런왕과 타점왕을 향해 가는데 있어 경쟁자가 다시 등장했다. 세이부 라이온스 구단은 10일 3루수 나카무라 타케야(29. 세이부)를 1군에 등록시켰다. 나카무라는 양 리그 교류전이 한참이었던 6월 14일 한신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수비 도중 왼 어깨 견갑골 부상으로 경기 도중 교체돼 지금까지 부상 치료와 짧은 재활 기간을 거쳤다. 당시 나카무라의 부상은 생각보다 심각했던 걸로 알려졌다. 구단 지정 병원의 검진 결과 재활까지 3개월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을 정도다. 이렇게 되면 빨라야 9월초에 1군에 복귀할 것이 유력했다. 하지만 나카무라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26일만에 부상을 털고 일어났다. 지난해 메이저리그 알버트 푸홀스(당시 세인트루이스)가 손목 골절로 인해 시즌이 끝났다 라는 평가에도 단 16일만에 부상에서 회복해 복귀한 것과 같은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카무라의 1군 복귀는 이대호 입장에선 강력한 경쟁자가 또 다시 생긴 셈이다. 현재까지 이대호는 타율 .303 홈런14개, 53타점으로 홈런과 타점 부문에서 퍼시픽리그 1위를 달리고 있다. 당초 올 시즌 강력한 홈런왕 후보는 단연 나카무라였다. 이미 세 시즌 40홈런 이상과 세번의 홈런왕(2008,2009,2011), 두번의 타점왕(2009, 2011)까지 거머쥔 나카무라의 활약은 일본 토종 선수의 자존심이었다. 아무리 메이저리그 물을 먹고 온 외국인 타자라 할지라도 나카무라가 뽑아내는 홈런 생산 능력은 결코 비교대상이 아닐 정도로 슬러거로서의 위용이 남달랐던 선수다. 올 시즌 초 나카무라가 극심한 타격부진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할때, 와타나베 히사노부 감독이 나카무라를 엔트리에서 제외시키지 않고 꾸준히 경기에 내보낸 것도 한번 터지면 걷잡을수 없을만큼 폭발하는 그의 홈런 생산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한때 홈런 1개와 1할대 타율에 머물렀던 나카무라는 교류전이 시작되면서 슬럼프에서 벗어났고 터지기 시작한 홈런으로 인해 단숨에 퍼시픽리그 홈런과 타점 부문에서 선두로 뛰어 올랐던 것도 이러한 나카무라의 능력을 잘 대변해 주는 대목이다. 나카무라의 별명은 오카와리 군(한 그릇 더 군)이다. 밥을 먹더라도 한 그릇 더를 외칠만큼 하나로는 양에 차지 않을 뿐더러 한 경기에서 유달리 멀티홈런이 많아 자연스럽게 생겨난 별명이다. 실제로 일본의 언론들도 나카무라를 칭할때 이름 대신 오카와리 군으로 부른다. 마쓰이 히데키(전 요미우리)가 메이저리그로 떠난 후 일본 프로야구는 토종 홈런타자의 부재로 고민이 많았다. ‘호타준족’ 을 갖춘 선수는 많았지만 홈런에 국한된 진정한 슬러거가 사라졌기에 마쓰이의 대안 찾기에 골몰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교야구의 ‘홈런머신’으로 불렸던 나카무라가 프로에 입단하면서 그 갈증을 해소해 줬다. 나카무라는 야구 명문인 오사카 토인고 시절 83개의 홈런(역대 3위)을 터뜨리며 주목을 받으며 프로에 입단했지만 기대만큼 활약하지 못했다. 나카무라가 홈런에 다시 눈을 뜬 것은 이토 쓰토무(현 두산 코치)가 세이부 감독으로 있던 2005년이었다. 그해 나카무라는 교류전에서만 12개의 홈런을 기록하는 등 22홈런을 쳐내며 홈런에 눈을 떴다. 이후 적응기를 거치며 2008년 홈런왕(46개)에 오르며 거포가 제자리를 잡기까지 누구보다 고생을 했던 선수 중 한명이다. 그때 이후 한번 손맛을 본 홈런감각은 걷잡을수 없을 정도로 이어지며 현재 일본 최고의 홈런타자로 공히 인정받고 있다. 일본 진출 첫해인 이대호가 지금은 홈런을 비롯해 각종 공격부문에서 상위권을 형성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벌써부터 ‘트리플 크라운’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압도적인 성적을 올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부상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나카무라가 다시 복귀 한 지금엔 사정이 다르다. 물론 나카무라가 원래의 타격감을 되찾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도 인간이기 때문에 한달 가까이 떨어진 1군 감각을 되찾기가 쉽지는 않을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나카무라의 복귀는 이대호 입장에선 빨간불임엔 틀림이 없다. 한번 홈런이 터지기 시작하면 무섭도록 몰아치는 나카무라의 타격성향 상 이대호가 독주하는 걸 그냥 지켜만 볼 선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이부 입장에서 봤을때 나카무라가 부상으로 이탈한 가운데 추락하지 않고 4위로 팀 순위가 올랐다는 것도 호재다. 비빌 언덕 중에 가장 확실한 나카무라가 복귀했으니 앞으로 A클래스 진출(3위)에 있어 그만큼 더 탄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대호가 개인 타이틀에 신경쓰는 선수가 아닌만큼 스스로의 타격에 있어 별다른 문제점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난 만큼 선의의 경쟁을 통해 시너지 효과 역시 기대할수 있다. 이대호는 그냥 지금처럼만 하면 된다. 하지만 나카무라의 존재가 워낙 커 보이기에 지켜보는 팬들의 마음이 불안한 것은 어쩔수 없다. 갈수록 치열해질 타이틀 싸움에 있어 나카무라의 1군 복귀가 이대호에겐 어떻게 작용될지 관심이 모아진다. 일본야구통신원 윤석구 http://hitting.kr/
  • [사고] 부산에서 함께 걸어요

    서울신문·스포츠서울 부산지사가 개최하는 ‘제286회 부산시민 걷기대회’가 오는 15일 열립니다. 대회에 앞서 부산시생활체육회 단학연구회의 기공체조 시범이 펼쳐집니다. 추첨을 통해 세탁기, 자전거 등 푸짐한 경품을 드립니다. ●모이는 때·곳 15일 오전 11시 부산진구 초읍동 어린이대공원(성지곡수원지) ●행운상 제공업체 서울신문·스포츠서울 부산지사(세탁기), 부산시생활체육회(자전거), ㈜아모레퍼시픽 부산지사(화장품), ㈜트렉스타(등산화), ㈜세정(인디안패션 셔츠), 배달사(고급 시계), 새한전자(찜질기) ●주최 서울신문·스포츠서울 부산지사, 부산시생활체육회 ●후원 부산시·부산시교육청 ●협찬 ㈜세정(인디안) ●문의 서울신문 부산지사 (051-462-2852)
  • [선택! 역사를 갈랐다] (19) 류성룡과 조헌

    [선택! 역사를 갈랐다] (19) 류성룡과 조헌

    임진왜란을 앞두고 비둘기파였던 류성룡(1542~1607)과 영조 때 영의정에 추증된 매파 조헌(1544~1592)은 원칙주의자로서 서로 갈등했다. 전쟁 후 류성룡은 ‘징비록’을 저술했고,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전사한 조헌은 그의 제자 안방준의 기록 ‘은봉야사별록’을 통해 잘 알려졌다. 이 두 개의 문헌이 일본에 전래되면서 류성룡과 조헌에 대한 해석은 제2라운드를 맞이한다. ●임진왜란 직전의 일본의 망상 100년 이상 이어지던 일본의 분열상태를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는 중국 명나라는 물론 인도까지 정복하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명나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조선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도요토미는 조선과는 싸울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에 자리한 쓰시마(대마도)의 지배자인 소씨(宗氏)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소 요시시게(1532~1589) 등에게 조선 국왕이 직접 자신에게 항복하러 오게 하라고 지시했다. 조선 국왕이 순순히 항복을 하면 조선과는 전쟁을 하지 않고 조선군을 앞세워 명나라를 칠 것이요, 아니면 조선을 공격하겠다는 것이었다. 쓰시마와 조선의 관계는 도요토미가 생각하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그리고 만일 반도와 열도 사이의 관계가 악화된다면, 그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하는 쓰시마로서는 이래저래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될 터였다. 그래서 쓰시마 측은 조선 국왕 대신 조선 측의 사절단을 오도록 하겠다고 도요토미에게 아뢴 뒤, 이번에는 조선 조정측에 사절단의 파견을 간청했다. 사절단만 보내주면 두 나라 사이에서 전쟁은 피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비둘기파와 매파의 이견 사절단을 파견해 달라는 쓰시마 측의 요청을 받은 조선 조정의 의견은 갈라졌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서 거부했지만 쓰시마 측은 끈질기게 매달렸다. 당시 대제학이던 류성룡은 속히 결론을 내려서 두 나라 사이에 틈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현장에서 동분서주한 실무가였다. 그러나 그는 임진왜란이라는 일본의 침략 전쟁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일본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적대 정책을 펴서는 안 되며, 국내적으로는 전쟁을 대비하고 대외적으로는 능숙한 외교로 전쟁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날의 잘못을 징계해서 뒤의 어려움을 대비한다.”는 뜻을 제목에 담은 ‘징비록’의 첫머리에 성종에게 신숙주(1417~1475)가 남긴 “일본과의 화의를 잃지 마소서.”라는 유언을 실은 것이나, ‘징비록’에서 “왜”라는 호칭과 함께 “일본”이라는 정식 국호를 사용한 데에서도 실무가 류성룡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반면, 조헌은 쓰시마 측의 사절단 파견 요구를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조선과 명나라에서는 일본의 상황을 도요토미가 선왕(先王)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조헌은 신하의 신분으로 임금의 자리를 빼앗는 불의를 저지른 도요토미가 통치하는 일본과는 절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1591년 귀국한 황윤길(1536~?)과 김성일(1538~1593) 등이 가져온 도요토미의 국서 내용에 분개한 조헌은 일본 사신을 참수하고 그 시체를 여러 나라에 보임으로써 불의의 일본을 정벌할 연합군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김상헌(1570~1652)의 ‘청음집’에 적혀 있다. 이처럼 전쟁 발발 목전의 조선 조정에서는 비둘기파와 매파가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립은 전쟁의 위기가 현실화된 상황에서 어떤 나라에서든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조선 군사정보, 일본으로 유출 두 사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일어나고 말았다. 조헌은 전쟁이 일어난 1592년에 고경명·영규 등과 함께 의병군을 이끌고 참가한 금산 전투에서 전사했고, 류성룡은 전쟁이 끝난 1598년에 관직을 삭탈당하고 하회로 낙향했다. 전쟁을 막고자 한 두 사람은 전쟁 중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비슷하게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그래도 류성룡은 ‘징비록’을 집필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조헌보다는 행운이었다. 그 대신, 조헌은 비장한 최후를 맞이함으로써 후세에 변호인을 얻을 수 있었다. ‘은봉야사별록’을 쓴 안방준(1573~1654)도 그 중 하나이다. 그는 하늘이 조헌으로 하여금 살아서는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고 죽어서 후세에 이름을 남기도록 했다며 슬퍼했다. 실로 조헌을 대신하여 그의 변론문을 썼다고 하겠다.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한 ‘징비록’과 ‘은봉야사별록’은 임진왜란을 온몸으로 겪은 류성룡과 조헌, 안방준에 대한 귀중한 증언임과 동시에, 전쟁 당시 조선 측의 상황을 생생하게 담은 중요한 군사적 문헌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헌이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약탈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쟁 후 검은 커넥션을 통해 일본으로 유출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두 문헌이 조선국 바깥으로 유출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683년에 작성된 쓰시마의 장서목록에 이 두 문헌이 나란히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유출 시기는 그 이전으로 짐작된다. 유출된 지역은 아마도 왜관으로 생각된다. ●‘징비록’ 17세기 日 지성계에 큰 영향 근세 일본에서 이야기되던 임진왜란 담론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단계는 임진왜란에 참전한 당사자나 그 주변인이 남긴 증언과 문헌에 의거한 것으로, 여기에는 오로지 일본 측 시각만이 담겨 있다. 그러다가 17세기 초기에 중국 명나라에서 제작된 ‘양조평양록’과 같은 문헌이 일본에 유입되면서, 일본인들은 임진왜란 때 자신들과 싸웠던 적국의 내정(內政)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러나 명측의 문헌에는 자국의 군대가 한반도에 진입하기 이전 단계인 1592년의 전황을 비롯하여 조선 측의 상황이 소략됐고, 조선에 대한 명의 편견 역시 상당했다. 그 결과 일본과 명나라의 문헌을 종합해서 편찬된 ‘조선정벌기’ 등의 문헌에서는, 임진왜란은 일본과 명나라 사이의 전쟁이고 조선은 전쟁의 무대이자 수동적인 역할자에 지나지 않았다는 식으로 기록된다. 역사는 반복돼 1895년 청일전쟁 이후에도 되풀이된다. 17세기 중기 조선의 임진왜란 문헌 몇 점이 일본에 유입된다. 그 가운데 일본 지식인들이 주목한 것은 류성룡의 ‘징비록’이었다. ‘징비록’을 통해 명측 문헌에서 보이는 조선 측에 대한 편견 몇 가지가 수정되고, 조선 측에도 전쟁 영웅들이 다수 존재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일본에 알려졌다. 이순신이 일본에서 ‘영웅’으로 인식된 것도 ‘징비록’의 영향이었다. 비록 임진왜란을 명과의 일대 결전으로 바라보고 싶어 한 근세 일본인들의 관점을 ‘징비록’ 하나가 뒤집을 수는 없었지만, ‘징비록’이 근세 일본 사회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인상을 남긴 것 역시 사실이었다. 예컨대, 1695년 교토에서 출간된 일본판 ‘징비록’의 서문을 쓴 유학자 가이바라 엣켄(1630~1714)은 당시까지 일본에 존재하던 임진왜란의 기록 가운데 ‘징비록’과 ‘조선정벌기’만이 ‘실록’(實錄)이며 다른 것들은 번잡하여 볼 것이 없다고 평하였다. ●日 ‘은봉야사별록’으로 ‘징비록’ 비판 물론 인기를 끌면 반발도 생기는 법. 18세기 후기가 되면서 ‘징비록’을 폄하하는 문헌들이 일본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왜관에서 근무한 경험을 지닌 쓰시마의 학자가 쓴 ‘조선정토시말기’라는 책의 서문에서, 아사카와 도사이(1814~1857)는 류성룡이 “당시 중책을 맡고 있으면서 나라를 그르치고 백성에게 해를 입힌 죄를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에 거짓을 적어 사람들을 속였다.”고 주장한다. 그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징비록’을 ‘실록’이라고 칭송한 가이바라 엣켄을 비판하기 위함으로 보이지만, 어쨌든 상반된 견해가 이 시기의 일본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아사카와는 1849년 일본에서 간행된 ‘은봉야사별록’에도 서문을 실었다. 여기서 그는 “임진왜란 직전에 조선 국왕 선조는 음락했고 조정에서는 류성룡·이덕형 등의 간신이 발호했기 때문에 일본군의 침략에 대응하지 못하고, 명나라의 도움을 기다려서 간신히 나라를 되살릴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양조평양록’의 기사를 끌어와 류성룡과 ‘징비록’을 비판한다. ‘은봉야사별록’를 간행한 것은 미토학(水戸学)이라 불리는 에도시대 후기의 일본중심적 학파의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아사카와처럼 ‘징비록’에 대한 불신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은봉야사별록’을 함께 이용함으로써 ‘징비록’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격하시키는 경향을 보였다. 류성룡과 조헌의 대립과 갈등은 ‘징비록’과 ‘은봉야사별록’이라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임진왜란 문헌에 실려 일본 학자들에게 알려졌다. 이 두 사람 중 어느 한 편을 들 필요가 없던 일본 학자들은 두 문헌을 비교하며 냉정한 눈으로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 측 상황을 서술했다. 조선 내부의 갈등이 근세 일본에서 재현되어 저들에게 편리하게 이용된 씁쓸한 역사적 사실이라 하겠다. 예를 들어, 가와구치 조주(1773?~1834)는 임진왜란 관련 문헌을 종합하여 임진왜란을 연대순으로 편찬한 ‘정한위략’을 간행하였다. 그는 이 문헌의 기본틀을 잡기 위해 ‘징비록’의 서술에 크게 의존하면서도, 이이·조헌과 대립한 류성룡을 비판하는 ‘은봉야사별록’의 구절을 여럿 가져와서 ‘징비록’과 류성룡을 비판한다. 예를 들어 류성룡이 간신이었다는 ‘양조평양록’의 글에 대해 ‘은봉야사별록’에서도 류성룡을 마찬가지로 비판하고 있는 걸 보니 이는 사실이었던 것 같다고 적고 있다. 다만, ‘징비록’에서 우국충정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니 류성룡은 처음에는 나라를 그르쳤으나 전쟁이 일어난 뒤에 반성했음을 알겠다고도 적고 있다. 김시덕(고려대 일본연구센터 HK연구교수)
  • “1000원의 행운 잡으세요”

    “1000원의 행운 잡으세요”

    8일 서울 중구 을지로 SKT타워에서 SK플래닛의 오픈마켓인 ‘11번가’가 개최한 ‘행운의 비밀상자 단돈 1000원 판매행사’에서 여성 도우미들이 행사를 홍보하고 있다. 1000원에 판매되는 비밀상자에는 여행상품권부터 주유상품권, 워터파크 이용권, 화장품, 11번가 1100포인트 등이 무작위로 들어있으며 1만 개 한정 판매된다. 박지환기자 popocar@seoul.co.kr
  • 박진영 “결국은 진짜 광대가 꿈”

    박진영 “결국은 진짜 광대가 꿈”

    ‘신인’ 배우 박진영(40) JYP엔터테인먼트 대표는 솔직하고 당당했다. 그는 마치 ‘K팝 스타’의 심사위원처럼 던지는 질문마다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달변이다. “보통 감정이 있고 말과 행동이 뒤따르지만, 저는 나오는 대로 필터를 거치지 않고 바로 말을 하기 때문”이라면서 웃었다. 영화 ‘500만불의 사나이’(19일 개봉)로 스크린 데뷔를 앞둔 그를 지난 3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욕심이 많은 것 같다. 배우까지 도전하다니. -배우를 하고 싶었다기보다 내게 잘 맞는 옷일 거라는 기대가 가장 컸다. 2009년 연말 우연히 내 콘서트를 본 천성일 작가가 내가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을 보고 마치 연기를 하는 것 같았다고 하더라. 천 작가가 나를 모델로 시나리오를 썼다는 것이 가장 힘이 됐다. 두 번째는 공옥진 여사의 ‘심청전’을 보면서 동질감을 많이 느꼈다. 혼자 연기를 하다 노래를 하는 그분의 모습에서 연기와 노래가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멜로디를 붙이면 노래고, 빼면 연기였다. 연기와 마임도 하면서 노래도 기가 막히게 하는 고(故) 백남봉과 남보원, 윤문식 같은 분들이 진짜 광대라고 생각한다. 나도 진짜 광대가 되고 싶다. →연기 경험은 드라마 ‘드림하이’가 전부인데, 첫 영화부터 주연이라니 엄청난 행운이자 부담 아닌가. -가수로 데뷔할 때보다 더 떨린다. 우리 회사 돈을 날리면 다시 벌면 되지만 남의 돈 몇십 억원이 들어가 있고 30~40명의 운명이 달렸으니 걱정된다. 할리우드 대작 ‘다크나이트 라이즈’와 같은 날 개봉하는 것이 좋은 변명이 되겠지만. 최소 손익 분기점은 넘겨 다음 영화를 꼭 찍고 싶다(웃음). →이번 영화에서 자신을 죽이고 돈을 빼돌리려는 상무의 음모를 알게 된 뒤 도망자 신세가 된 회사원 역을 맡았다. 코믹한 캐릭터로 눈길을 끄는데. -일부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정극이다. 영화는 월급쟁이의 처절한 몸부림을 그리고 있다. 대기업 말단 직원부터 시작해 임원이 되신 아버님의 모습을 평생 지켜봤고, 이젠 대기업 부장이 된 친구들의 신세 한탄을 들어 주다 보니 회사원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안다. →신인 배우로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K팝 스타’에서 참가자들에게 ‘공기 반 소리 반’이라는 지적을 자주 했는데, 내가 긴장해서 숨을 참고 공기를 섞지 않은 채 발성을 하고 있더라. 제 유일한 기술은 3분 동안 몰입해서 그 사람이 되는데, 배우는 감독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면 기술로 연기를 해야 된다. 그것이 가장 힘들었다. →18년차 가수 박진영을 생각해 보면 파격과 도전의 연속이었다. 앞으로도 댄스가수로서 은퇴는 없나. -아무리 힘들어도 무대에 불이 탁 켜지고 5000명이 함성을 지르면 그 소리가 귀를 타고 척추까지 흘러간다. 마약을 한다고 그런 효과가 나올까. 내 1차 목표는 나이 60이 돼서도 은발의 댄스를 추는 것이다. →작곡가로서 수많은 히트곡을 냈는데 아직도 끊임없이 영감이 떠오르나. 슬럼프는 없었나. -아직도 머릿속에 네다섯 곡이 밀려 있다. 그동안 주간 1위를 한 곡이 46개다. 사실 작곡가 생활 10년이면 수명이 다하기 마련인데 50곡 가까이 히트곡을 냈다는 것은 운이 따른 것이다. 데뷔곡 ‘날 떠나지마’가 내 마지막 히트곡이라고 여겼고 두 번째는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원더걸스의 ‘라이크 디스’가 마지막일 것으로 생각한다. →예전엔 다소 독선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강한 스타일이었는데 삶의 태도가 바뀐 계기가 있나. -5년 전에 내가 듣고 자랐던 미국 유명 가수들의 앨범에 프로듀서로 참여하게 된 것이 계기였다. 겸손한 말이 아니라 정말 운이 좋아서라는 생각이 들었고 어떤 절대자에게 감사하며 납작 엎드리게 됐다. →최근 한 방송에서 절대자의 존재를 이야기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인가. -2년 전부터 주중에 하루는 온종일 성경, 불경, 코란 등을 연구하고 빅뱅이론이나 양자 역학 등도 공부한다. 그것 역시 내가 찾을 수는 없다. 반대쪽에서 절대자의 깨우침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꿈꾼다. →삶의 목표는 무엇인가. -행복해지는 것이다. 행복은 돈이나 명예로 해결이 안 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자선이 행복에 가장 가깝다. 그 진실을 빨리 알게 돼 너무 다행이다. 행복은 자유이고, 자유는 두려운 것이 없다. 두려움 중 가장 큰 것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이다. 그런 깨달음을 얻고 100% 순도의 행복을 찾고 싶은 것이다. 이제 인생의 하프타임을 넘었는데 돈과 명예, 자선 사업으로 끝까지 갈 수는 없지 않나. →JYP엔터테인먼트가 설립된 지 올해로 15주년이 됐다. 어떤 회사로 키우고 싶은가. -가슴이 뛰고 좋고, 싫음이 명확한 취향(taste)이 있는 회사로 키우고 싶다. 매출 이야기가 오가는 회사가 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취향이 있다고 교만하거나 다른 사람의 취향을 업신여기는 것은 싫다. 회사의 목표는 세상을 즐겁게 하는 멋진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다. 종적으로는 시간이 지나도 촌스럽지 않고 횡적으로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모두가 좋아하는 콘텐츠를 만들겠다. →회사 대표로서 요즘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다음 주에 출시되는 원더걸스의 첫 미국 싱글 앨범이다. 3년 동안 미국 활동을 한 결실이다. 무엇보다 음악과 뮤직비디오가 자신 있다. ‘노바디’가 아시아에서 히트했다면 이번에는 미국 취향에 맞췄고, 멜로디 의존도보다는 몸으로 먼저 느끼는 리듬이 강조됐다. 인기 절정의 시기에 원더걸스를 미국에 진출시킨 것을 패착이라고 보는 시각에는 동의할 수 없다. 젊은 날에 새로운 도전을 해서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지혜를 배운 것을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어차피 대중가수의 인기는 떨어지기 마련이고 긴 인생에서 1~2년 더 활동해서 돈을 버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배우로 출사표를 던졌다. 어떤 배우가 되고 싶나. -여러 가지 면이 공존하는 복잡한 배우가 되고 싶다. 물론 재기 발랄한 신인 감독의 독립 영화에 출연할 의향도 있다. 주저 없이 연락을 달라(웃음).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나비가 나비랑 노네?…고양이와 나비떼 포착

    나비가 나비와 장난치는 재미있는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됐다. 고양이가 나비를 좋아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 그러나 수많은 나비떼와 장난치는 고양이의 보기드문 모습이 생생히 카메라에 촬영돼 눈길을 끌고있다.    최근 러시아 레닌그라드주에 위치한 부모님 집을 찾은 사진가 나탈리아 몰도바노바(20)는 애완묘 레파와 함께 산책에 나섰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족히 수백마리가 넘어보이는 파란색의 나비떼가 목격된 것. 그러나 보기 드문 광경에 더욱 기뻐한 것은 바로 6개월 된 고양이 레파. 레파는 나비떼가 보이자 총알같이 달려나가 나비떼를 쫓기 시작했다. 몰도바노바는 “레파가 나비를 쫓아다니면서 이리저리 뒹굴며 장난치기 시작했다.” 면서 “나비와 레파가 마치 천국속에 있는 것 같았다.”고 밝혔다. 이어 “이같은 장면을 카메라에 담게돼 정말 행운”이라며 웃었다. 한편 이날 촬영된 나비는 ‘상제나비’(black-veined white)로 파란 색깔은 멸종위기인 희귀종으로 알려졌다. 인터넷뉴스팀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