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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종 전날까지 화상전화…日코치 2주째 행방불명

    실종 전날까지 화상전화…日코치 2주째 행방불명

    KBO리그에서도 뛰었던 일본인 투수 카도쿠라 켄(47) 전 주니치 드래건스 2군 투수코치가 실종됐다. 신고 2주째인 현재까지 그의 행방을 아는 이는 없는 상태다. 카도쿠라는 지난 15일부터 주니치 2군 선수단 훈련에 무단 결근하면서 사라졌다. 16일 가족들이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지만 2주가 되도록 행방을 알 수 없다. 카도쿠라가 쓴 문서가 지난 20일 전달됐고, 편지에는 ‘개인 사정으로 팀 코치직을 그만두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가족이 친필임을 확인한 뒤 주니치 구단은 퇴단을 결정했다. 지난 2009~2011년 SK 와이번스와 삼성 라이온즈 선수로, 2013~2015년 삼성 코치로 활약해 친숙한 이미지였던 카도쿠라를 국내 팬들도 걱정하고 있다. 그의 아내는 실종 전날인 14일 밤까지 화상전화로 평소처럼 이야기를 나눴던 남편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충격이 큰 상태다. 그는 일본 후지TV ‘바이킹 MORE’와의 전화인터뷰를 통해 “정신이 없다. 이유도, 원인도 모르겠다. 설마 하는 느낌도 든다. 무슨 일이든 빨리 연락 왔으면 좋겠다. 혹시 근처에 계신 분들이 계시다면 빨리 연락해주길 바란다. 가족과 친구들 모두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그는 “사이도 정말 좋다. 언제나 함께였다. 꼭 옆에 있어줬으면 하는 사람이다. 소중한 존재”라고 애정을 드러내며 울먹였다. ‘석간후지’ 등 일본 일부 매체는 카도쿠라의 실종 사유로 금전과 여자 문제를 추측하고 있다. 2019년 주니치 코치 부임 전부터 수년간 빚 독촉에 시달렸고, 올해부터 구단에도 전화가 걸려왔다는 내용이다. 석간 후지는 “여러 야구계 관계자에 따르면 이미 (실종 이전에) 많은 조짐이 보였다고 한다. 선수와 코치로 한미일을 경험한 카도쿠라는 2018 오프시즌에 친정 팀 주니치 지도자로 복귀했다. 당시 계약 과정에서 구단은 그의 금전 문제를 파악했다고 한다. 하지만 요다 쓰요시(56) 현 주니치 감독의 강한 영입 의지에 따라 빚을 청산한 상태로 사인했다”고 설명했다. 매체는 한 측근의 말을 빌려 “카도쿠라 코치가 사건에 연루됐을 가능성이 있다. 그와 친분이 있는 한 여성과 갈등을 비롯해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는 것 같다”고 밝힌 뒤 “실제로 그는 금전적으로 늘 어려움을 겪었다. 3억엔(한화 약 30억원) 짜리 대저택으로 소개된 그의 자택은 2008년 준공 이후 두 차례 압류를 거쳐 최근에는 한국계 은행에 약 8000만(약 8억 2000만원)엔 저당권이 설정돼 있다. 현역 코치가 시즌 중에 행방불명되는 전대미문의 미스터리한 사건이 발생한 가운데, 과연 진실이 밝혀질 것인가”라고 썼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포항 男간호사 한달째 행방불명…“현재까지 제보 없다”

    포항 男간호사 한달째 행방불명…“현재까지 제보 없다”

    경북 포항에서 20대 남성이 한 달 넘게 행방이 묘연해 경찰이 수사를 벌이고 있다. 남성 간호사 윤모씨(28)는 대낮에 운동복 차림으로 기숙사를 나선 뒤 숙사와 멀지 않은 곳에서 휴대폰 신호가 끊어진 뒤 현재까지 연락두절 상태다. 지난달 7일 오후 3시, 거주 중이던 기숙사를 나선 윤씨는 인근 주유소에서 마지막으로 포착된 후 실종됐다. 윤씨의 가족은 윤씨 거주지 주변과 친구 집 등을 샅샅이 뒤졌지만 그를 찾지 못해 지난달 9일 경찰에 신고했다. 부친 말에 따르면 윤씨가 근무하는 병원에서 “윤씨가 출근하지 않았다”는 연락을 받고 계속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았고, “지난달 10일 오전부터는 완전히 연락이 끊긴 상태”라고 설명했다. “봤거나 행적을 알고 있다는 제보가 없다” 윤씨가 거주하는 기숙사 인근에는 왕복 6차선 도로가 있어 지나다니는 차량은 물론 고등학교, 교회, 음식점 등도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윤씨를 봤다는 제보가 없다. 윤씨의 휴대전화 신호가 마지막으로 잡힌 곳은 종적을 감춘 곳에서 2㎞ 정도 떨어진 포항공대 기지국이다. 윤씨의 통화기록을 조회해 본 결과 실종 직전 누구와도 통화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이 윤씨가 실종된 장소를 중심으로 500여 명에 달하는 인력을 투입해 8회에 걸쳐 수색 작업을 했으나, 여전히 찾지 못한 상태다. 경찰 관계자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철저히 수사하겠다”며 “윤씨의 계좌와 통화 내역 등 모든 부분을 면밀하게 수사하고 있으며 며칠 내로 실종 지역을 재수색할 방침”이라고 했다. 한편 윤씨는 실종 당일 검은색 운동복을 입었으며, 키 174㎝에 몸무게 72㎏의 보통 체격의 남성이다. 김채현 기자 chkim@seoul.co.kr
  •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 스카프 두른 묘비

    미얀마 시민 연대·희망 메시지 울려퍼져외신기자 기증자료 특별전 등 기념행사도 5·18민주화운동 41주년인 18일 오전 10시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서는 기념식이 열린다. 이번 행사에는 유족과 시민·여야 정치인 등 99명이 참석한다. 국가보훈처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참석 인원을 대폭 축소했다. ‘우리들의 오월’이란 주제로 열리는 이번 기념식은 헌화·분향·기념공연·기념사·‘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순으로 45분간 진행된다. 기념 공연에는 올해 처음 사진이 발견된 전재수군과 5·18 당시 ‘투사회보’ 필경사를 맡았던 박용준 열사의 사연을 담은 영상과 비올라 5중주의 ‘바위섬’ 추모 연주가 이어진다. 41주년 기념일을 하루 앞둔 17일 오후 7시 30분 동구 금남로와 5·18민주광장(옛 전남도청) 일대에서는 5·18 기념행사의 꽃으로 불리는 전야제가 열렸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을 감안, 99명이 초청됐다. 전야제는 ▲연대의 장 ▲항쟁의 장 ▲계승의 장 등 3부로 나뉘어 진행됐다. 합창, 연극, 미디어아트, 노래패, 일렉트로닉 등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 공연이 펼쳐졌다. 민주화 투쟁을 벌이고 있는 미얀마 시민들에 대한 연대와 5월의 희망 메시지 등이 항쟁 현장인 금남로에 울려 퍼졌다. 앞서 이날 오전 5·18민주묘지에선 5·18민주유공자유족회가 진행하는 추모제도 열렸다. 국립 5·18민주묘지는 올해 처음 희망을 상징하는 ‘연두색 스카프’로 묘비를 둘러쌌다.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스카프는 미래 세대에게 오월 정신을 전달하자는 뜻과 유족들 스스로 행방불명자들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담고 있다. 5·18묘지 출입로인 민주로 양옆의 가로수에서는 사회 각계·단체가 내건 형형색색의 추모 현수막이 나부꼈다. ‘기억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잊지않겠습니다’. 이런 추모의 글귀가 적힌 수천 개의 리본들도 참배객을 맞았다. 코로나19의 확산 우려와 비가 오락가락하는 궂은 날씨인데도 방문객들은 삼삼오오 묘지를 둘러보며 그날을 기억했다. 대학생 이모(23·전북 전주)씨는 “미디어 영상을 통해서만 접했던 5·18묘지를 직접 와 보니 희생자들의 고통이 그대로 느껴진다”면서 “5·18의 완전한 진상규명이 이뤄지고 다시는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5·18추모 열기 고조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5·18추모 열기 고조

    5·18민주화운동 41주년인 18일 오전 10시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서는 기념식이 열린다. 이번 행사에는 유족과 시민·여야 정치인 등 99명이 참석한다. 국가보훈처는 예년과 달리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참석 인원을 대폭 축소했다. ‘우리들의 오월’이란 주제로 열리는 기념식은 헌화·분향·기념공연·기념사·‘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순으로 45분간 진행된다. 기념 공연에는 올해 처음 사진이 발견된 전재수군과 5·18당시 ‘투사회보’ 필경사를 맡았던 박용준 열사의 사연을 담은 영상과 비올라 5중주의 ‘바위섬’ 추모 연주가 이어진다. 41주년 기념일을 하루 앞둔 17일 오후 7시 30분 동구 금남로와 5·18민주광장(옛 전남도청) 일대에서는 5·18기념행사의 꽃으로 불리는 전야제가 열린다. 지난해 코로나19 여파로 전야제가 취소됐고, 올 역시 펜데믹 상황을 감안, 99명만 초청됐다. 전야제는 ▲연대의 장 ▲항쟁의 장 ▲계승의 장 등 3부로 나뉘어 진행된다. 합창,연극,미디어아트,노래패,랩,일렉트로닉 등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 공연이 펼쳐진다. 민주화 투쟁을 벌이고 있는 미얀마 시민들에 대한 연대와 5월의 희망메시지 등이 항쟁 현장인 금남로에 울려 퍼진다. 초청받지 못한 시민들은 도로에 설치된 대형 전광판 또는 유튜브를 통해 전야제를 관람할 수 있다. 5·18 41주년을 맞아 국립5·18민주묘지와 시내 일원에서도 5월 정신을 기리는 탐방·문화행사가 잇따랐다. 묘지에선 이날 오전 5·18유족회의 추모제가 열리는 등 추모 분위기가 고조됐다. 국립5·18민주묘지는 올 처음으로 묘지마다 연두색 스카프를 둘러 희망을 상징하는 ‘연두색’으로 물들었다.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스카프는 미래 세대에게 오월 정신을 전달하자는 뜻과 유족들 스스로 행방불명자들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놓치지 말자는 다짐의 의미를 담고 있다. 민주묘지 출입로인 민주로 양옆의 가로수에 줄지어 내걸린 사회 각계단체의 추모 현수막이 나부꼈다. ‘기억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잊지않겠습니다’. 이런 추모의 글귀가 적힌 수천 개의 리본이 참배객을 맞았다. 코로나 펜데믹에다 비가 오락가락한 궂은 날씨인데도 방문객들은 삼삼오오 묘지를 둘러보며 그날을 기억했다. 대학생 이모(23·전북 전주)씨는 “미어어 영상을 통해서만 접했던 5·18묘지를 직접 와 보니 희생자들의 고통이 그대로 느껴진다”며 “5·18의 완전한 진상규명이 이뤄지고, 우리 역사에서 다시는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온라인에서도 5월 영령을 추모하는 분위기는 점차 달아오르고 있다. ‘41주년 5·18민중항쟁기념행사위원회’ 홈페이지의 온라인 5·18추모관과 5·18기념재단홈페이지 사이버참배 코너란에도 추모의 글들이 쇄도하고 있다. 옛 전남도청 별관 2층에서는 5·18을 취재한 외신기자 ‘노먼 소프’의 기증자료 특별전이 오는 7월 31일까지 열린다. 그가 찍은 사진에는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에서 최후 항전했던 시민들의 처참한 주검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밖에 미술,음악,공연 등 5월을 추모하는 다양한 문화행사가 시내 곳곳에서 펼쳐진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5·18 41주년] 41구·6구·8구… 계엄군의 고백… 그날, 암매장 진실 파헤쳐질까

    [5·18 41주년] 41구·6구·8구… 계엄군의 고백… 그날, 암매장 진실 파헤쳐질까

    “뼛조각이라도 찾아 묻어 주고 싶을 뿐입니다.” 5·18 행불자 가족인 김금희(76·여·전남 무안)씨는 “매년 이맘때면 가슴이 미어터질 것 같다”면서 “가족들이 한꺼번에 사라진 진실만은 꼭 알고 싶다”며 고통의 세월을 되새겼다. 1980년 5월 20일 김씨의 어머니(당시 57세)와 남동생(당시 23세), 또 다른 남동생(당시 14세), 자신의 아들(당시 5세) 등 4명이 모두 광주역 인근에서 실종됐다. 이들은 당시 의정부에 살고 있는 김씨의 언니 집에 가기 위해 무안 몽탄역에서 오전 10시 30분 열차를 타고 광주역으로 향했다. 광주역에서 내려 1㎞쯤 떨어진 광주종합터미널에서 의정부행 고속버스를 갈아탈 예정이었다. 10여일 후 의정부의 언니로부터 “왜 엄마가 안 올라오시냐”는 전화를 받은 이후 41년째 행방이 깜깜하다. 5월 20일은 3공수가 광주역에서 시민 시위대와 대치 중이었고, 같은 날 밤 인근 주택가에 무차별 사격으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루 뒤인 21일은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 상황으로 이어지는 등 시내는 시위 군중과 계엄군 간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때이다. 이 기간, 김씨 가족을 비롯 초등학교 1학년 이창현(당시 7세), 계엄군을 피해 조선대 뒷산으로 숨었던 고교 1학년 임옥환, 학동 삼거리에 나갔던 10세 문미숙 등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들처럼 5·18 이후 종적이 묘연한 수많은 실종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16일 광주시에 따르면 5·18을 전후해 행방불명자로 신고된 이는 242명이다. 심사를 거쳐 관련자로 인정된 사람은 84명이다. 이 가운데 6명은 2002~2006년 ‘무명열사 묘지’ 11기를 파묘한 뒤 DNA 감식으로 신원이 밝혀졌다. 4세가량의 아이를 포함한 나머지 5명은 지금껏 무명열사 묘역에 묻혀 있다. 5·18 공식 행불자로 인정된 사람은 모두 78명이다. 행불자 70여명에 대한 행방 추적이 41년동안 이뤄졌으나 단 한 명의 흔적조차 나오지 않고 있다. 수치상 약간의 오차를 감안하더라도 ‘암매장 의혹’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 조사위원회(조사위)는 최근 중간조사 결과 발표를 통해 “최소 55구의 시신을 추적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각각 광주교도소 일대 41구, 주남마을 6구, 송암동 8구 등이다. 국가기관이 행불자에 대해 구체적 수치를 적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조사위는 “이런 정황은 현장에서 암(가)매장을 지시·실행·목격했다는 계엄군 중 제3공수여단 51명의 제보와 진술 등을 기초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또 주남마을에 주둔했던 제11공수여단 4개팀(1팀 3~4명)이 5·18 직후 광주에 다시 내려와 시체 수습에 참여했다는 증언도 확보했고, 이후 수년간 군과 정보기관의 주도로 ‘시체처리반’이 운용됐다는 의혹도 확인 중이라고 덧붙였다. 추가 사망자 증언이 집중된 곳은 광주 외곽의 북구 옛 광주교도소와 동구 주남마을, 남구 송암동 등지이다. 이들 지역에서는 계엄군의 광주 봉쇄 기간(5월 21~27일)에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광주교도소는 5·18 직후 계엄사령부가 ‘폭도들이 6차례에 걸쳐 교도소를 습격했고, 이 과정에서 시민 등 28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던 곳이다. 당시 교도소 안팎 야산 등지에서 11구의 시체가 가매장 또는 암매장된 채 발견됐다. 하지만 나머지 17명의 행방도 묘연하다. 조사위는 “광주교도소 동서쪽의 광주~순천 간 고속도로와 광주~담양 간 국도를 오가는 차량과 민간인에 대해 최소 13차례 피격이 이뤄졌고, 신혼부부를 태운 차량을 저격·사살했다는 복수의 장·사병 증언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계엄사 발표와 달리 피격 또는 교전 횟수가 2배 이상 차이 나는 만큼 사망자도 늘 것이란 추측이다. 광주~전남 화순 길목인 동구 지원동과 주남마을은 그동안 알려진 마이크로버스와 구급차 피격 사건 이외에 또 다른 승용차와 구급차 등 최소 5대의 차량이 피격됐다는 증언이 잇따르고 있다. 광주와 나주를 잇는 남구 송암동 일대는 1980년 5월 24일 오후 1시 30분쯤 주둔지 교체 과정에서 계엄군끼리 오인 사격으로 장교와 사병 등 9명이 숨진 곳이다. 계엄군은 이 교전 직후 인근 마을 청년 등 주민들을 무차별 사살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 3곳에서만 최소 55구의 사망자에 대한 추가 제보가 이뤄지면서 추적 조사가 진행 중이다. 앞서 광주시는 2000~2009년 ‘행불자 소재찾기사실조사위’를 꾸려 242가족 440여명의 혈액을 유전자 분석용으로 채취했다. 암매장 제보지 64곳 중 옛 광주 군통합병원 담장 밑·건설현장 등 신빙성이 있는 9곳을 발굴해 유골 150여점과 유류품 등을 발굴했으나 관련성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어 5·18기념재단도 2017년 옛 광주교도소 안팎·광주~화순 간 너릿재 구간 등 11곳에서 암매장 발굴을 시도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조사위 관계자는 “계엄군의 ‘시체처리반 운용’ 진술 등을 토대로, 사망자(실종자) 일부가 헬기·군 수송기 등에 실려 제3의 장소로 옮겨진 뒤 매장 또는 소각됐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면서 “전국 화장장을 전수조사하고 증언의 사실관계를 확인하다 보면 언젠가 행불자 소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나 국군포로인데…” 그들은 왜 유령이 됐나 [밀리터리 인사이드]

    “나 국군포로인데…” 그들은 왜 유령이 됐나 [밀리터리 인사이드]

    “무슨 일로 전화하셨죠?”(주중 한국대사관 직원) “나 국군포로인데 한국대사관 아닙니까?”(장무환) “맞는데요.”(주중 한국대사관 직원) “내가 지금 중국에 와 있는데 좀 도와줄 수 없는가. 이래서 묻습니다.”(장무환) “(한숨 내쉬며) 하…없죠.”(주중 한국대사관 직원) “내가…”(장무환) “아 없어요.”(주중 한국대사관 직원) “국군 포론데…”(장무환) “뚜뚜…”(전화 끊어짐)1998년 한 방송에서 보도돼 큰 파문을 일으켰던 ‘대사관 직원 전화 사건’입니다. 최근 이 내용이 방송에서 다시 다뤄지면서 국군포로 문제가 여론의 조명을 받았습니다. 국군포로는 당시나 지금이나 ‘잊혀진 역사’입니다. 어렵게 탈출해 남한으로 온 극히 일부 인원을 제외하면 남북한 양쪽에서 ‘유령’ 취급을 받았습니다. 정부는 1999년 대사관 사건 영향으로 ‘국군포로대우법’을 만들었고, 2006년에는 ‘국군포로송환법’을 제정해 국군포로와 가족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군포로의 안전한 송환을 방해할 때 처벌하는 조항이 만들어진 건 불과 10년 전인 2010년입니다. ●‘강제억류’ 인정하지 않는 北 북한은 지금도 국군포로 강제억류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남북한 정상이 여러차례 만났지만, 극히 일부 국군포로 직계가족이 이산가족 행사장에 나왔을 뿐, 포로들은 여전히 북한 국민으로 분류됩니다. 국군포로 장무환(1926~2015)씨는 23세에 국방경비대에 입대했다가 소집 만료로 고향 경북 울진으로 돌아왔습니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뒤엔 북한 인민군에 강제 징집됐습니다. 후퇴하는 인민군에서 천신만고 끝에 탈출해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이번엔 국군에 징집됩니다. 기구한 운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3사단에 배치된 그는 정전 협정을 불과 일주일 앞둔 1953년 7월 20일 강원 철원 금화지구 전투에서 중공군에 포로로 잡혔습니다. 북한의 ‘적’이었던 장씨는 북한 최북단 함경북도의 탄광으로 끌려갔습니다.그곳에서 45년을 살다 72세였던 1998년, 죽음을 각오하고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왔습니다. 한국의 가족들은 당시 거액인 1만 달러(한화 1129만원)를 밀고를 빌미로 협박하는 중국인에게 주고 중국 국경을 탈출합니다. 또 외교당국의 외면에 천신만고 끝에 여권을 한국에서 만들어 고향 울진으로 돌아왔습니다. 영화보다 기구한 이런 운명은 왜 만들어졌을까. 16일 통일연구원에서 발간한 ‘2020년 북한인권백서’에 따르면 1953년 정전 당시 유엔군 사령부가 집계한 국군실종자는 8만 2000명에 이릅니다. 그렇지만 1954년 1월까지 포로교환으로 남한에 돌아온 인원은 8343명에 불과했습니다. 남한은 북한군 7만 5000명을 돌려보냈습니다. ●포로교환 송환자 불과 ‘8343명’ 북한은 “강제억류한 국군포로는 단 1명도 없다”고 합니다. 북한에 있는 국군포로들은 모두 귀순해 정착했다는 것이 그들의 일관된 주장입니다. ‘제네바 협약’은 북한 정권엔 휴짓조각에 불과했습니다. 우리 정부는 유족에게 보훈혜택을 주기 위해, 전투 중 행방불명자를 일정 기간이 지나면 전사 처리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군 인사법’에 근거해 모든 미귀환 국군포로를 ‘전사자’로 처리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령’이 됐습니다. 그러나 조창호 중위(1930~2006)가 1994년 귀환하면서 처음으로 국군포로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됩니다. 2019년 기준으로 귀환한 군군 포로는 80명. 이 가운데 56명이 이미 사망했습니다. 북한 인권단체에 따르면 국군포로 대부분이 85세를 넘긴 고령이어서, 현재 생존자는 200명도 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됩니다.2011년 이후엔 귀환한 국군포로가 없습니다. 그 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최고 권력자에 오르면서 국경지역 탈북 경계가 강화됐고, 국군포로들이 연로해지면서 자력으로 국경을 넘기 어렵게 됐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사연도 있었습니다. 국군포로 한만택(1932~2009)씨는 1953년 6월 금화지구 전투에서 실종됐습니다. 그러다 2004년 12월 극적으로 두만강을 넘어 중국으로 탈북, 가족을 만나려다 중국 공안에 체포됐습니다. 한씨는 북한 평안남도의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됐고 2009년 한 많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가족들은 외교부 등 정부가 탈북 계획을 전달받고도 묵살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정부를 상대로 1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 1심에서 승소했으나, 2심에선 ‘5년’인 민법상 소멸시효가 지나 패소했습니다. 지난해엔 국군포로 한모씨가 북한과 김 위원장을 상대로 낸 손배 소송에서 2100만원을 지급하라는 승소 판결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국군포로 가족들이 분노하는 건 남북의 외면 속에 그들 대부분이 강제노역에 시달렸기 때문입니다. 북한인권백서에 따르면 국군포로들은 휴전 이후 1954년부터 1956년 사이에 탄광, 농촌, 기업 등에 배치돼 ‘전후복구’라는 명목으로 강제노동을 하게 됩니다. ●잊혀지는 것이 고통…늘 기억해야특히 북한 최북단 함경북도와 함경남도에서 하루 12시간씩 2교대로 탄광일을 하는 포로가 대부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956년 전후로 집단수용소에서 나온 뒤 ‘공민증’을 받고 사회로 복귀했지만, 출신성분 때문에 억압과 차별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아내와 자녀는 남편, 아버지의 출신을 꼭꼭 숨기며 산다고 합니다. 그러나 북한이 국군포로 억류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아직도 체계적인 조사는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평화무드’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외면한 사례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귀환 국군포로에 대한 지원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잊혀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남북관계,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게 우리는 늘 그들을 기억하고 예우하며, 귀환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올해 2월에는 54년간 강제노역을 하다 귀환한 카투사 출신 이기춘(1931~2021)씨가 90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2004년 고령인 73세의 나이로 무려 3번의 시도 끝에 북한을 탈출했다고 합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6·25 전쟁 70주년’이라는 거창한 타이틀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입니다. 이 글이 그들을 조금이라도 더 기억하고 조사하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대중음악 ‘직관’ 사라지니… 장비·현수막·경호업체도 ‘휘청’

    대중음악 ‘직관’ 사라지니… 장비·현수막·경호업체도 ‘휘청’

    남양주에서 음향 및 조명 장비를 대여하는 업체를 운영했던 A씨는 지난해 코로나19로 수입이 끊기면서 큰 타격을 받았다. 전문 음향 및 조명 장비는 워낙 고가라 기본적으로 대여업체마다 적지않은 빚을 안고 운영한다. 그래서 잠깐이라도 수입이 끊기면 바로 부채의 압박에 짓눌린다. A씨는 초기 어려움을 사채로 막았다. 두어 달이면 코로나19 사태가 지나갈 줄 알았지만 코로나19는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지난해 6월 중순 행방불명된 A씨는 결국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코로나19로 대중음악 공연업계가 휘청이면서 공연기획사를 포함해 장비 대여업체, 공연장은 물론 현수막 제작업체, 경호업체 등 부대사업들도 큰 타격을 입었다. 대중음악 공연업계는 인원을 100명으로 제한하는 방역 기준을 최소한 연극이나 뮤지컬 등 다른 공연업계와 같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당장 공연이 열리는 숫자가 줄어들면서 매출이 10분의 1 수준으로 뚝 떨어졌다. 고기호 인넥스트트렌드 이사는 “공연 예매 사이트 대중음악 부분을 살펴보면 매출이 80~90% 가량이 줄었다. 10% 남짓되는 공연도 코로나 이전 1, 2월달 매출”이라고 말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지난 3월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공연기획사의 지난해 매출은 코로나19가 시작되기 전인 2019년 대비 평균 18.0%에 불과했다. 같은 기간 동안 공연 장비 대여 업체의 매출은 전년 대비 평균 21.3%, 공연장은 18.0%, 엔터테인먼트사는 34.4%를 기록했다. 이 때문에 대중음악 공연업계에서 업체를 운영하던 대표들은 배달, 대리운전으로 아르바이트하며 업체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 장비를 다룰 줄 알면 다행히 기술자로 취직하기도 한다. 7년간 공연장비 대여일을 했던 남철호 전 대표는 “연매출 평균 2~3억원을 기록하던 회사였는데, 지금은 신용불량자가 돼서 폐업하고 기술자로 일하고 있다”면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라에서 지원하는 버팀목 자금은 폐업한 사람들에게는 나오지도 않더라”고 토로했다. 이들은 방역본부의 거리두기 방침이 대중음악 공연 업에만 유독 가혹하다고 지적했다. 뮤지컬, 연극, 클래식 등 다른 공연 업은 동반자 간 거리두기 등 방역수칙을 지키는 선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공연할 수 있으나 콘서트 등 대중음악 공연은 100명 이하로만 관객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3월 서울 용산구 블루스퀘어에서 열 예정이던 가수 이소라의 콘서트는 취소됐지만 같은 공연장에서 뮤지컬 ‘위키드’는 예정대로 무대에 올랐다. 고 이사는 “대중음악은 비말 감염이라는 편견과 오해 때문에 더 과도한 기준을 적용 받는다”면서 “다른 공연업과 형평성을 맞춰달라”고 말했다. 손지민 기자 sjm@seoul.co.kr
  • 용산 망루, 미얀마, 어디에도 ‘열흘의 광주’ 불쑥 다시 온다

    용산 망루, 미얀마, 어디에도 ‘열흘의 광주’ 불쑥 다시 온다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한강, ‘소년이 온다’ 중에서)“존엄과 폭력이 공존하는 모든 장소, 모든 시대가 광주가 될 수 있다.” 이 문장은 2017년에 ‘소년이 온다’로 이탈리아 말라파르테 문학상의 수상자로 선정된 소설가 한강의 수상 소감 중의 일부다. 그는 뒤이어 이렇게 전한다. “이 책은 나를 위해 쓴 게 아니며, 단지 내 감각과 존재, 육신을 (5·18광주민주화운동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 살아남은 사람, 그들의 가족에게 빌려주고자 했을 뿐”이라고. 그러기까지 작가가 겪어야 했을 내적 고투와 1980년 광주를 원형으로 하는 이들의 삶의 궤적을 미루어 짐작하는 일은 많은 고통을 수반한다. 그해 봄에 광주에서 일어난 참상을 보거나 겪은 이들의 삶은 그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때로 그 ‘미루어 짐작’하는 일은 얼마나 많은 이해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가. 그의 글을 읽는 다수의 사람들은 ‘그곳’에 있지 않고, ‘그 일’을 자세히 모르고, ‘그 시간’을 겪은 것도 아닌데 무려 “미루어 짐작”이라니. 하지만 소설은, 작가는 그 ‘일들’ 속으로 곧바로 침투해 그 어느 때보다도 침착하게 구술해 나아간다. 그리하여 독자로 하여금 어떤 “짐작”을 가능케 한다. 소설 ‘소년이 온다’의 이야기다.‘소년이 온다’는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와 영과 육, 죽은 자와 산 자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것은 엄연한 현실의 기록이다. 아직도 판결이 끝나지 않은, 피해자들의 참상의 기록이 지금도 덧대어지는 현재형의 실재다.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그때 당시에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이주를 했던 터라 고향의 참혹한 시간에 대하여 ‘뒤늦게 알았다’는 고백과 더불어 ‘소년이 온다’가 출간되기까지 “34년을 건너서 우리에게 한발 한발 걸어오는 그런 이야기였으면” 좋겠다는 소회를 남겼다. 소설의 형식 자체를 여러 명의 시점으로 쓸 수밖에 없던 이유 또한 그것일 터이다. 한 사람의 목소리만으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너무도 많은 이들이 그에게 다가와 울부짖었을 테니 작가로서는 도무지 어찌할 바 몰랐을 시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죽은 자들의 말을 받아 적으며 작가는 영혼의 몸주 노릇을 충실하게 해냈다. 소년과 소년을 둘러싼, 소년이 지나쳤던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소리를 끝내 받아 적었다. 이 모든 것은 다 그 이야기가 80년 봄의 광주에서 있었던 일이기 때문이었을 터. 몸주가 겪어야 했을 고통을, 그리하여 함께 “미루어 짐작”해 봐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이 번역돼 여러 나라로 뻗어나가 읽히고 있는 것 역시 억울한 영혼들의 목소리를 대변한 작가의 힘일 터이다. 이제 ‘소년이 온다’는 나라별로 제목을 달리해 세계의 독자들을 ‘처절하게 고립되어 원통하게 죽어갔던 사람들의 시간’으로 붙들어 놓는다. 이 무시무시한 일을 소설가 한강은 끝내 해내고야 말았다. 소설가 한강은 1970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1993년 ‘문학과 사회’에 시가 당선됐고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뽑히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로는 ‘검은 사슴’, ‘그대의 차가운 손’, ‘채식주의자’,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소년이 온다’, ‘흰’ 등이 있다. 소설집으로 ‘여수의 사랑’, ‘내 여자의 열매’, ‘노랑무늬 영원’ 등을 냈다.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한국소설문학상, 이상문학상, 황순원 문학상, 맨부커상, 말라파르테 문학상, 김유정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광주서 태어난 작가, 기록으로만 알던 그날 열 살 남짓의 광주 출신 소녀는 아버지의 서재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광주 항쟁의 기록물들을 보며 자란다. 그때를 회고하던 한강은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이 직접 겪은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광주 이야기를 쓰게 될 거라고는 짐작하지 못한 채 살았다고 했다. 그렇게 지내오다가 어떻게 하다 보니 이 이야기를 뚫고 지나야 하겠다는, 그렇지 않으면 글을 못 쓰게 될 것 같은 그런 시점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5·18 광주에 관해 쓰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 이야기를 뚫고 지나야 하겠다’는 것은 결국 작가로서 가장 끝까지 밀어붙인, 끝내 해내야만 하는 운명적 이야기인 까닭이 아니겠는가.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처음엔 차디찬 몽둥이 같았던 그것,/ 순식간에 뱃속을 휘젓는 불덩어리가 된 그것,/ 그게 반대편 옆구리에 만들어놓은, 내 모든 따뜻한 피를 흘러나가게 한 구멍을 생각해./ 그걸 쏘아보낸 총구를 생각해./ 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 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소년이 온다’ 중에서) 자국의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누어 쏜 군인들과 그들을 그 자리에 서게 만든 자의 명령이 그 열흘의 광주를 만들었다. 열흘이 훨씬 지나 34년이 흘러도, 2021년이 와도 광주는 계속해서 어디선가 ‘되태어나’고 있다. 인간의 존엄이 짓밟히고 죄 없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산화하는 곳에서라면 그곳이 어디든 ‘광주’라고 한강은 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어느 해의 용산도 그리고 지금의 미얀마까지도 또 다른 ‘광주’가 아닌가.죄없이 죽은 사람이 짐짝처럼 실려가 함부로 불태워지고, 어린아이까지도 총에 맞는 것을 본 자들의 기록은, 실상은 인간의 존엄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망가졌는데, 총을 쏘라고 명령한 자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제 방식대로 편안했으며, 심지어 아직도 잘 살고 있다. 행방불명된 사람들의 가족들이 ‘시체라도 찾게 해 달라’며 광주 전역 여기저기를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녀도, 뻔뻔하게 광주에 찾아가 ‘나는 죄가 없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해대는 그 시절의 명령권자에게도 80년 광주의 시간은 지나갔지만, 아직도 살아있는 그 무엇이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를 치르지 못해,/ 당신을 보았던 내 눈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내 귀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숨을 들이마신 허파가 사원이 되었습니다.”(‘소년이 온다’ 중에서) 가해자들은 처벌받지 않았고, 행불인들은 여전히 행방불명인 채로 그렇게 있다. 매일 장례를 치르는 마음으로 산 까닭에 한 몸이, 집 전체가 사원이 되어 버린 사람들이 매해 맞는 봄의 빛은 어떤 시간이려나. 어떤 빛이어야 하나.●‘소년’을 통해 하고 싶던 말 “죽지 마” 인간이 인간됨을 강제로 잃고, 주검조차 가족들에게 돌아가지 못한 채로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낸 사람들에게 한강은 ‘소년’을 보냄으로써, ‘소년’을 ‘오게’ 함으로써 어떤 위로를 건네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소설 속의 누구의 입을 빌려서라도 이 말을 꼭 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죽지 마./ 죽지 말아요.” 광주의 봄을 기록하는 일은 작가와 독자들의 영혼이 그들과 함께 산화하는 것과도 같은 고통을 동반한다. 그리고 끝내 죄상을 부인하는 가해자들을 보는 일이란, 어떤 면에서는 지옥을 보는 것과도 같아서 그들의 안녕을 확인하는 일은 다시 펼쳐지는 생지옥의 문 앞에 선 것과도 같다. 그러나 작가는 ‘죽지 말’라는, 그 누구도 다시는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끝내 해버리고야 만다. 그해 5월의 봄은 “죽지 마”라는 정언명령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던가. 지금 이 순간에도 ‘광주’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처절하게도 ‘사람답게, 평범하게,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살고 싶을 것인가. 그 일이 그들에게는 왜 그토록 어려운가.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중략) 목이 길고 옷이 얇은 소년이 무덤 사이 눈 덮인 길을 걷고 있다. 소년이 앞서 나아가는 대로 나는 따라 걷는다. (중략) 나를 향해 눈으로 웃는다.’(‘소년이 온다’ 중에서)그렇게 소년이 왔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5월에, 웃으며 우리에게. 소년은 언제까지고 끝내 죽지 않은 얼굴일 것이다. 소설 속에서 그리고 가족들과 독자들의 뇌리에서. 이제 우리가 그에게 ‘네가 와 준 덕분에’ 봄이 더 푸르러졌노라 일러줄 차례다. 덧붙이자면, 지금 이 순간에도 ‘광주’를 살고 있는 미얀마에도 한시바삐 평화의 봄이 오기를 기원한다. 소설가 이은선
  • 마크 저커버그, 조커처럼 하얗게 선크림 바른 이유

    마크 저커버그, 조커처럼 하얗게 선크림 바른 이유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가 일본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귀신 가오나시처럼 온 얼굴에 허옇게 선크림을 바른 이유가 밝혀졌다. 지난해 여름 저커버그는 하와이 파도 위에서 서핑을 하는 장면이 포착됐는데, 마치 흰색 가면을 쓴 것처럼 얼굴에 선크림을 많이 발라 인터넷 ‘밈’(meme·인터넷에서 패러디·재창작의 소재가 되며 유행하는 사진·이미지·영상)으로 인기를 끌었다. 선크림때문에 하얗게 변한 저커버그의 얼굴 사진은 영화 ‘할로윈’에서 살인마 마이클 마이어스가 쓴 가면을 연상시킨다는 평가를 받았다. 영화 ‘미세스 다웃파이어’에서 고 로빈 윌리암스 연기의 한 장면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저커버그는 지난 26일 인스타그램 라이브 채팅에서 아담 모세리 인스타그램 대표와의 대화를 통해 마치 조커처럼 선크림을 발랐던 이유를 털어놓았다.저커버거는 카메라를 든 파파라치가 자신을 뒤따르는 것을 목격했고, 변장을 위해 선크림을 잔뜩 발랐다는 것이다. 저커버그는 “파파라치가 우리를 뒤따르는 것을 알아채고는 ‘오, 그들이 날 알아보는 것이 싫으니 어떻게 할까? 엄청난 양의 선크림을 발라야겠다’라고 생각했던 거였는데, 역효과를 낳았다”고 말했다. 저커버그는 자신이 하와이와 같은 장소에서 야외활동을 하면 쉽게 그을리기 때문에 건강을 위해서라도 선크림을 많이 발랐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저커버그의 기이한 변장은 오히려 더 많은 관심을 끌게됐다. 그는 인터넷 상에서 자신의 얼굴이 ‘밈’이 된 것에 대해서는 오히려 유쾌한 반응을 보였다. “만약 누군가가 선크림 사진을 패러디하는 것은 괜찮다”면서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것은 기쁘다”라고 웃어넘겼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부마민주항쟁 관련자 이달부터 매월 5만원 위로금 지원

    부마민주항쟁 관련자 이달부터 매월 5만원 위로금 지원

    경남도는 경남에 주소를 두고 있는 부마민주항쟁 관련자 16명에게 오는 23일 부터 매달 5만원씩 정기적으로 위로금을 지원한다고 21일 밝혔다.부마민주항쟁 관련자가 사망하면 별도로 장제비 100만원도 지원한다. 위로금 지원은 경남도내에 주소를 두고 거주하는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와 유가족 가운데 한달 소득액이 기준 중위소득 100% 이하(4인 가구 기준 487만 6290원)인 가구를 대상으로 한다. 도는 지난 2월 22일부터 3월 15일까지 집중 신청기간에 신청한 75명에 대해 주소·거소 일치 여부, 재산·소득 조회 등 시·군 행정정보 확인을 거쳐 16명이 부마민주항쟁 위로금 지급대상자로 최종 결정됐다고 밝혔다. 도는 집중 신청기간에 위로금 지원 신청을 하지 않은 도내 주소를 두고 거주하는 부마민주항쟁 관련자를 대상으로 위로금 추가 신청을 받는다. 위로금 및 장제비 신청과 관련해 궁금한 사항은 경남도청 행정과로 문의하면 된다. 경남도는 지난해 시행된 ‘경상남도 부마민주항쟁 기념 및 지원에 관한 조례’에 따라 부산시와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등과 함께 여러차례 실무회의를 거쳐 지원 대상 범위와 지원 금액 등을 정했다. 부마민주항쟁 관련자는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부마민주항쟁으로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사람, 상이를 입은 사람,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질병을 앓거나 구금 또는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 가운데 ‘부마민주항쟁진상 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에서 관련자로 심의·결정된 사람이다. 부마민주항쟁 관련자로 결정된 사람은 모두 187명으로 경남 일원에서 발생한 민주화 운동 관련자가 115명, 부산지역 민주화 운동 관련자가 72명 이다. 이삼희 경남도 자치행정국장은 “부마민주항쟁 관련자 위로금 지원으로 우리나라 4대 민주항쟁의 하나인 부마민주항쟁 관련자들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시민 의식 성숙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16일 부터 10월 20일 사이에 부산·마산·창원 등에서 시민과 학생 등이 유신체제에 항거한 대규모 민주화 운동이다. 2019년 9월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창원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제주4·3연구소, ‘4·3과 여성2 그 세월도 이기고 살았어’ 출간

    제주4·3연구소, ‘4·3과 여성2 그 세월도 이기고 살았어’ 출간

    “살아야 했기에 삶을 이겨야 했다.” 제주4·3연구소가 4·3 시기를 살아낸 여성들의 구술집 ‘4·3과 여성2, 그 세월도 이기고 살았어’를 펴냈다.지난해 4·3여성 생활사를 처음으로 기획, 주목을 끌었던 ‘4·3과 여성, 그 살아낸 날들의 기록’에 이은 두 번째다. 4·3속에서 여성들은 이중 삼중의 고통을 당했으나 거기에 머물지 않고 주체적인 삶의 시간을 살았고, 오늘을 일궈낸 빛나는 존재들이다. 이 책은 10대 소녀시절 4·3의 참혹한 현장을 목격하거나 겪었던 6인의 여성들이 어떻게 그 삶을 뚫고 나갔는지를 날 것으로 보여준다. 무엇보다 자신들이 직접 겪었던 4·3과 당시의 삶, 이후의 생활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4·3이 남긴 트라우마, 고통을 이겨낸 삶의 시간들 속에 그들의 정신사를 추출해 볼 수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살아남은 여성들은 가장의 부재, 가족의 부재 속에 자신들이 삶의 주체로 나서 그 공간을 감당하였다. 살아내는 것이 최우선이었기에 작은 배움의 기회마저 멀었던 그들. 시국 탓이었다고 하면서도 70여년 동안 묻어두었던 내면을 드러내고 있다. “빨갱이”, “폭도” 누명을 벗기 위해 여자도 군인을 가야 했다는 한 여인의 삶에서는 또 하나의 4·3 여성사를 읽을 수 있다. 정봉영(1934년생)은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해 해방 직후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귀향. 마을 이장이던 아버지를 1950년 예비검속으로 잃었다.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고문 후유증으로, 막내 동생은 굶어 죽었다. 6남매의 맏이였던 그는 소녀가장의 삶을 살아야 했다. 가난보다 힘들었던 폭도 가족’이라는 누명. 아버지의 ‘빨간 줄’을 벗기 위해 19살에 여군에 지원했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아버지 ‘빨간 줄’ 때문에 이미 우리 가족은 ‘폭도’ 가족이 돼버린 거야. 나는 폭도 가족이라는 소리도 듣기 싫고.‘내가 군인으로 가서 빨갱이 누명을 벗어야지!’ 그 생각뿐이었어.” 김을생(1936년생)은 제주읍 영평리가 고향으로 4·3당시 열네 살. 집에 불이 붙고 마을이 초토화된 현장을 자신도 겪어야 했으며, 와중에 농사짓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참혹한 고문을 마주해야 했다. 이후 아버지는 대구 형무소에서 행방불명됐다. 4·3 피난처에서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그는 가장 아닌 가장이 되어 남동생을 보살펴야 했다. 2021년 아버지에 대한 4·3행방불명인 재심 재판을 신청,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가시나물서 고지는 멀지 않거든. 긴 소나무들을 비어서 지고 오다보면 억새에 걸려서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몸이 이리저리 돌아가면서 왔어. 어떤 날은 장작해 오면 누가 보면 창피할까봐 집 뒤로 돌아가서 팰 정도였지. 집 뒤에는 큰큰한 토종 복숭아나무 세 개가 있고, 아무도 못 봤거든. 시집가기 전까지 장작 해다 말려서 팔았어.” 양농옥(1931년생)은 제주시 정실마을에서 살다가 9살에 부모가 일하는 일본으로 건너가 16살에 귀향. 4·3시기 아버지 언니 형부 조카를 잃었다. 아버지가 남긴 항아리에 감춘 돈을 밑천 삼아 소녀가장으로 여동생 둘과 삶을 꾸렸다. 60년 대 말 제주를 떠나 성남개발단지 천막생할을 하며 노점 야채상을 시작으로 하숙, 공장 하청 일 등을 하며 자식 4명을 공부시켰다. “살면서 뭐가 제일 부러웠냐면 나는 남이 ‘너 잘못 했어’ 그런 말 듣는 게 소원이었어. 그렇게 부럽더라고. 사람들마다 잘 한다 잘 한다 하는 말, 그게 싫었어. 부모 같으면 잘못한 거 잘못했다고 할 텐데….” 송순자(1938년생)는 4·3당시 용강리에서 살았고, 큰 아버지, 아버지가 행방불명되고 삼촌 등 친인척 여럿이 희생되는 아픔을 겪었다. 6남매가 흩어져 삶을 살았고, 어머니는 만삭의 몸으로 성담 쌓기에 동원됐으며, 어머니와 함께 가족의 삶을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피난과 굶주림에 대한 세밀한 기억을 풀어놓고 있다. 스스로 새끼 꼬아 팔기, 양복점 기술자 등 온갖 일을 하며 생활을 꾸려나갔다. “부잣집 사람들이 쌀 항아리에 막대기를 놔두면 쥐가 그걸 타고 들어가는 거라. 그럴 때면 옆집 어른이 그 쥐를 잡아줬어. 식탈이 난 동생한테는 그 쥐가 약이었어. 배가 차츰차츰 가라앉는 거라. 4·3 때문에 먹을 거 없고 피난 다닐 때 제일 생각나는 게 이 쥐 먹은 거야.” 임춘화(1947년생)는 대정 출생으로 4·3당시 행방불명된 아버지와 어머니의 재가로 인해 어린시절 친척집에 맡겨졌다. 자신의 이름 대신 “양옥이 사촌 누이”라고 불리며 “감자떡 비누가 고구마로 보이는” 애달픈 삶을 살아야 했다. 2021년 ‘징역7년, 목포형무소’ 수형인명부 기록으로만 남아있던 아버지의 군법회의 재심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엄마도 나도 먹고 사는 일이 이렇게도 힘들 수 있을까요? 우리 외할머니 말씀처럼 시국을 잘못 만난 탓이겠죠. 아버지를 잃은 것도… 어머니와 헤어진 것도… 우리 남편이 보안대에 끌려간 것도… 모두 다 시국 탓이겠죠.” 고영자(1941년생)는 해방 전 어려서 일본에서 가족과 함께 귀향. 4·3을 만나 7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70여년 동안 아버지의 유해를 찾지 못해 애태우던 그는 지난 2020년 제주국제공항에서 발굴된 유해 가운데 유전자 감식을 통해 아버지와 상봉했다. 아버지의 부재로 9살부터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평생 노동 속에서 살아야 했다. 열네 살에 모슬포 신영물에서 부추, 갈치장사, 열여덟 살에 등짐지고 동네 여인들과 옹기장사에 나서기도 했다. “열여덟 살 나니까 할망들하고 옹기 장살 다닌 거라. 난 옹기 지고 다니고 할망들은 다니면서 팔고. 사람 하나만 보이면 꼭 짐 하나를 팔고 나왔어. 일 못하는 사람은 써주지 않아. 일을 잘해야해. 무조건 일만 잘하면 살 수 있어.” 허영선 제주4·3연구소장은 “죽을 것 같은 세월을 버티고 견뎌낸 제주4·3의 여성들은 삶이란 이런 것이다를 말없이 보여준 존재들이었다. 삶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혹한을 이겨내고 살아낸 당당하고 위대한 한 인간의 모습을 보았다.”고 말했다.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 섬이 우는 듯 4월의 사이렌 … ‘순이삼촌’ 곁 붉은 위로 피었구나

    섬이 우는 듯 4월의 사이렌 … ‘순이삼촌’ 곁 붉은 위로 피었구나

    “아, 한날한시에 이집 저집에서 터져 나오던 곡소리. 음력 섣달 열여드렛날, 낮에는 이곳저곳에서 추렴 돼지가 먹구슬나무에 목매달려 죽는 소리에 온 마을이 시끌짝했고 오백위(位) 가까운 귀신들이 밥 먹으러 강신하는 한밤중이면 슬픈 곡성이 터졌다.(중략) 우리는 한밤중의 그 지긋지긋한 곡소리가 딱 질색이었다. 자정 넘어 제사 시간을 기다리며 듣던 소각 당시의 그 비참한 이야기도 싫었다. 하도 들어서 귀에 못이 박힌 이야기. 왜 어른들은 아직 아이인 우리에게 그런 끔찍한 이야기를 되풀이해서 들려주었을까?”(소설가 현기영의 ‘순이삼촌’ 중에서) 올해도 어김없이 4월 3일 10시, 제주 전역에 1분 동안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누군가에게는 73년 전으로 돌아가게 하는 신호탄이며 또 다른 누구에게는 그날의 산 지옥이 먼저 펼쳐질 날의 소리들이다. 자신의 귓전에만 울려대는 사이렌을 어찌해 보지 못하고 꼼짝없이 일생을 그 소리에 함몰된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의 귓속 사이렌이, 이젠 시대가 바뀌어 섬 전체에 크게 울린다. 섬이 우는 것 같다. 지천으로 떨어진 끝 무렵의 동백꽃들도 파편처럼 흩어진 채로 그 소리를 듣는다. 이날만큼은 섬이 아니라 죽은 이의 원통한 소리를 담는 커다란 귀가 되는 자리, 제주다.1940년대 말 남측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제주 시민들을 경찰이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당시 제주 인구 27만명 중 3만명가량이 무고하게 희생됐다.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는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적혀 있다. 많은 곳에서 셀 수 없는 사람들이 죽어나간 까닭에 그때 제주의 곳곳에 사람이 죽지 않은 자리를 찾는 게 더 빠를 정도가 돼 버렸다. “아, 떼죽음당한 마을이 어디 우리 마을뿐이던가. 이 섬 출신이거든 아무라도 붙잡고 물어보라. 필시 그의 가족 중에 누구 한 사람이, 아니면 적어도 사촌까지 중에 누구 한 사람이 그 북새통에 죽었다고 말하리라. 군경 전사자 몇백과 무장공비 몇백을 빼고도 삼만 명에 이르는 그 막대한 주검은 도대체 무엇인가.”(‘순이삼촌’ 중에서) 이념과 사상에 관한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너무 많은 사람이 지은 죄 없이 죽임을 당했는데도 엄혹한 시대엔 이를 언급하는 건 금기였다. 살아남은 사람들조차 입에 올리기 꺼리던 그 일을, 소설로 쓴 사람이 있다. 바로 제주 출신의 소설가 현기영이다.그는 1941년 지금의 제주시 노형동 함박이굴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오현고등학교와 서울대 사범대학 영어교육과를 졸업한 후에 서울사대부고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소설가가 됐다. 1979년 첫 소설집 ‘순이삼촌’에서 제주 4·3사건을 정면으로 다룬 죄목으로 1979년 10월 보안사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당한다. 금기를 깬 대가였다. 4·3항쟁을 온몸으로 겪은, 제주 출신 작가가 짊어져야 하는 숙명이 아니었을까. 선생의 용기 덕에 드디어 4·3항쟁이 수면 위로 올라왔고 사람들은 제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순이삼촌’을 시작으로 다른 작품들에서도 4·3사건들이 다뤄졌는데 그 일은 최근까지도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다. ‘순이삼촌’ 이야기를 해 보자면 선생은 소설에서 이렇게 되물었다. “도대체 비무장공비란 것이 뭐우꽈? 무장도 안 한 사람을 공비라고 할 수 이서 마씸? 그 사람들은 중산간 부락 소각으로 갈 곳 잃어 한라산 밑 여기저기 동굴에 숨어 살던 피난민이우다.”(‘순이삼촌’ 중에서)어떤 작품은 문장과 서사 그리고 비유와 상징을 넘어서 그 자체로 하나의 사실이 된다. 사관의 붓이며 판결문의 자리에 선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순이삼촌’이 바로 그런 작품이다. 그리하여 매년 4월이면 어김없이 사람들의 뇌리에 스치는 ‘순이삼촌’ 속의 문장들과 현기영이라는 기표, 그리고 그 속에서 기의들이 펄펄 끓는다. 제주 북촌의 너븐숭이 4·3 기념관에는 현기영 소설가의 저서들이 전시돼 있고, 그 옆 옴팡밭에는 ‘순이삼촌’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북촌이 어떤 곳인가. 한날한시에 양민 400여명이 군인들에게 처참하게 살해된 장소가 아니던가. 그 어느 곳보다 더 처참하게, 끌려간 거의 모두가 죽은 곳이 아니던가. 무덤도 세우지 못하고 모두 모아 묻어버린 곳들이 즐비한 곳이 아니던가. 소설 속의 순이삼촌은 도피한 남편 때문에 입산자 가족으로 분류되어 모진 고문 끝에 집단 학살의 현장으로 끌려갔다. 창졸간에 남매를 잃고도 살고, 옴팡밭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들어내어 그 자리에 고구마 농사를 지으면서도 살았던 사람이다. 순이삼촌은 30년이 지난 후에 어떤 말도 남기지 않고 옴팡밭으로 들어가 목숨을 끊는다. 소설 바깥의 현기영은 4·3사건으로부터 꼭 30년이 지난 후에 소설로 그 사건을 말하기 시작했고 그의 문장들이 끌어올린 사건 덕분에 이제는 모두가 4·3의 실상을 알았다. “(…)그 죽음은 한 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삼십 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당신은 그때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다만 삼십 년 전 그 옴팡밭에서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삼십 년의 우여곡절한 유예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었다.”(‘순이삼촌’ 중에서)순이삼촌비 곁의 붉은 화산송이는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들의 피를 상징하고, 이리저리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돌비는 제대로 안장하지 못한 관들이다. 애기무덤에 올려둔 동백꽃이 여기저기 놓인 옴팡밭과 돌비 사이에 옹송그리고 순이삼촌이 누워 있다.이것은 소설을 읽은 사람이라면, 아니 4·3사건을 겪은 사람이라면 대번에 알 수밖에 없는 모습이다. 이는 소설을 넘어선 그때의 그 현장이다. 소설이 소설이 아니고, 과거가 더이상 과거가 아닌 현재로 공존하는 공간이다. 애기무덤들 위에 놓인 동백꽃이 유독 선연히 빛나는 장소다. 인기척처럼 다가든 파도가 그들을 위무하는 공간이며 사원이 된 곳이다. 제주 토박이이자 제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문학평론가 김동현 박사가 4·3 너븐숭이 기념관에서 행불인묘역까지의 길을 안내해 줬다. 그는 ‘순이삼촌’에 대해 “1978년이라는 시대적인 분위기를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매우 커다란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했다. 이 작품은 문학이 4·3사건의 진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하나의 커다란 질문이 아닐까 한다고도 덧붙였다. 김 박사는 외지인들이 4·3사건과 제주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봤으면 하는가 하는 질문에 “제주의 아픈 역사로만 바라보지 말라”는 당부의 말을 전해 왔다. 이것은 비단 제주의 역사뿐만 아니라 해방정국임을 감안했을 때 한반도 어느 지역이라도 겪을 수밖에 없는 비극이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또 비극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사실들이 존재하는 역사라서 4·3사건은 한마디로 정의 내릴 수 없는 사건이나 진실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지나간 과거가 아닌 앞으로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거울과도 같은 사건이라는 말이었다. 그 거울은 계속해서 닦아 주어야 한다. 먼지가 쌓이지 않게, 누구다 잘 들여다볼 수 있게. 일흔세 해가 지난 4·3사건은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은 것들투성이다. 가장 큰 예로 아직도 집에 돌아오지 못한 행방불명인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4·3 너븐숭이 기념관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행불인묘역이 있다. 그때 사라졌다고 짐작만 할 뿐, 어디서 어떻게 언제 죽었는지조차 몰라서 그들의 몰시는 아직 묘비에 쓰여 있지 않다. 유족들 또한 제삿날을 알지 못해 각자 정한 대로 제사를 지내러 온다.그러는 동안에도 북촌의 애기무덤은 해마다 새로운 동백꽃을 머리에 이고, ‘순이삼촌’의 문장들은 또 누군가에게 4·3사건을 새롭게 일러주고 있을 따름이다. 비단 이 작품뿐만 아니라 제주 전체가 그들의 아픔을 덮거나 도려내려 하지 않고 함께 앓고 보듬어 주려는 노력을 끊임없기 계속했기에 그 섬이 금기의 사월을 터놓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제주의 4월은 동백꽃으로도 유명하다. 문학은 떨어지는 동백꽃만큼도 힘이 없을 때가 있지만 때로 그 꽃 아니 문장은 떨어지는 순간을 영원으로 기록한다. 그 기록의 힘으로 사람들이, 제주가 산다. 옴팡밭의 애기무덤 위로 동백꽃들이 매년 떨어져 내리고 오름마다 새겨진 원통한 마음들에도 꽃은 떨어지겠지만 멀리서나마 제주의 모든 ‘순이삼촌’들에게 붉은 마음의 구절 하나 남긴다. “밑바닥 터진 젯상에 진설할 거라고는/ 봄을 일으켜 세운/ 꽃밥밖에 없어서/ 언 마음 녹이시라고 동백꽃 송이 올립니다.”(홍경희의 시 ‘동백 밥상’) 4월의 사이렌이 동백꽃 속에서 울리는 제주다.소설가 이은선
  • [서울포토] 제주 4·3 희생자 유족 위로하는 문 대통령

    [서울포토] 제주 4·3 희생자 유족 위로하는 문 대통령

    제73주년 제주 4·3 희생자 추념식이 3일 오전 제주 4·3 평화교육센터에서 열렸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추념식이 끝난 뒤 4.3 사건 유족인 손민규 어르신을 위로하고 있다. 오른쪽은 손민규 어르신의 외손녀 고가형 학생. 손민규 어르신은 4.3 사건으로 부모님이 사망하고, 오빠는 행방불명이 됐다. 2021.4.3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 보람이 생일 다음날… 네 번째 DNA도 석씨를 향했다

    보람이 생일 다음날… 네 번째 DNA도 석씨를 향했다

    지난달 10일 구미 상모사곡동 빌라에서 3세 여아가 반미라 상태로 숨진 채 발견됐다. 사건 발생 50일이 지난 31일 검찰은 친모 석모(48)씨와 숨진 여아의 유전자(DNA)가 일치한다고 밝혔다. 앞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세 번의 검사를 통해 석씨가 숨진 여아의 친모임을 밝혔고, 대검 역시 같은 결과를 내놓으면서 석씨가 태도를 바꿔 출산 사실을 인정할 것인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경찰은 석씨가 구미 한 산부인과 의원에서 딸 김모(22)씨가 낳은 아이를 채혈 검사 전에 자신이 몰래 낳은 아이와 바꾼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11일 미성년자 약취 혐의로 석씨가 구속됐고, 딸 김씨는 지난달 12일 이사로 빈집에 아이를 방치해 숨지게 한 혐의(살인)로 구속됐다. DNA는 석씨를 지목했지만, 석씨와 그의 남편은 끝까지 출산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정확도가 99.9999% 임에도 임신한 적도, 출산한 적도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경찰은 대구·경북지역 의원을 뒤졌지만 석씨 출산 기록을 확인하지 못했고, 바꿔치기로 사라진 아이 행방은 단서조차 없는 상황이다. 석씨 부부는 모두 회사원으로 오래전에 결혼해 함께 살아왔다. 조선족이란 소문도 사실이 아니다. 부부 모두 초혼이고 석씨는 제조업 회사에 근무하며 평범한 가정을 꾸려왔다고 경찰은 말했다. 그렇다면 왜 부인하는 것일까. 경찰은 “개인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라며 정신질환자는 아니라고 판단해 정신감정 영장을 받지는 않았다고 부연했다.엄마도, 아빠도 없이… 보람아 미안해 ‘보람이’로 알려진 구미 3세 여아는 엄마도, 아빠도 없이 그렇게 하늘의 별이 됐다. 2018년 3월 30일 태어나 행방불명된 여아를 두고 사단법인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 등 인터넷 카페 게시판에는 “보람아 생일 축하해”라는 제목의 글들이 올라왔다. 회원들은 미역국과 케이크를 차린 상 사진을 올리고 “천천히 먹고 마음껏 누리고 가”라며 3세 여아 사진을 함께 올렸다. 하늘에서는 축복을 받으며 행복한 생일을 보내길 바란다는 글도 있었다.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 대표는 “숨진 아이가 하늘에서 편히 쉴 수 있게 친모가 사실을 말해 실종된 아이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민주화유공자 법안 철회하는 설훈…김종인 “양심 가책 느낀 모양”

    민주화유공자 법안 철회하는 설훈…김종인 “양심 가책 느낀 모양”

    유죄판결도 포함 ‘셀프특혜’ 논란설 의원 “30일 오후 법률안 철회”더불어민주당 설훈 의원이 민주화운동 유공자와 가족에게 취업 혜택을 주는 민주유공자예우법을 결국 철회했다. 설 의원은 “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안에 대한 논란을 감안해 30일 오후 법률안을 철회했다”고 밝혔다. 설 의원은 전날 민주유공자예우법 제정안을 발의했다. 20대 국회 당시 ‘운동권 특혜’ 논란으로 좌초됐던 민주당 우원식 의원이 발의한 법안을 재발의한 내용과 유사하다. 설 의원뿐만 아니라 민주당 의원 68명, 민주당 출신 무소속 3명, 열린민주·정의당 소속 각 1명 등 총 73명이 공동발의했다. 설 의원은 “유신반대투쟁, 6월 민주항쟁 등 국민의 기본권 신장에 기여한 민주유공자에 대한 예우를 실시하는 법률을 제정해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희생하거나 공헌한 사람과 그 유족 또는 가족에게 국가가 합당한 예우를 함으로써 민주사회 발전과 사회정의 실현에 이바지하려는 것”이라고 입법 취지를 설명했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설 의원이 발의했던 예우법은 민주화 유공자와 배우자, 자녀, 부모 등 가족에게 학비 면제, 취업 지원, 의료 지원 각종 혜택을 받는 내용이다. 주택 구입이나 생활안정 목적으로 낮은 금리의 대출도 받을 수 있다. 부양의무자가 없는 경우 양로 및 요양, 양육 지원도 있다. 지원 대상에는 민주화운동으로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사람, 민주화운동으로 상이를 입거나 질병을 앓는 사람, 민주화운동으로 유죄판결·해직 또는 퇴학처분을 받은 사람이 포함됐다. 민주당 운동권 출신 의원 가운데 민주화운동으로 유죄판결을 받을 사람이 적지 않기 때문에 ‘셀프 특혜’라는 비판이 일었다. 20대 당시 우 의원이 발의한 법안은 민주화운동 중 사망, 행방불명, 장애등급을 받은 사람만 유공자로 정했다. 법안 철회 소식이 알려지자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은 “양심의 가책이 되니까 철회한다고 본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대민 민주주의가 특정인이 만든 것이 아니라 국민 전반 노력으로 민주주의가 이뤄진 것인데, 자기네들 혜택 받겠다고 하니깐 국민 눈총이 뜨거운 것을 느낀 모양”이라며 “아마 더 이상 할 수없다고 느낀 모양”이라고 덧붙였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설훈 의원, ‘셀프 특혜’ 민주유공자 예우법 발의 철회

    설훈 의원, ‘셀프 특혜’ 민주유공자 예우법 발의 철회

    ‘운동권 셀프 특혜’ 논란이 불거진 민주유공자 예우법 제정안이 30일 철회됐다. 법안을 대표 발의한 더불어민주당 설훈 의원은 보도자료를 통해 “법안에 대한 논란 등을 고려해 오늘 오후 국회 의안과에 철회 요구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일명 ‘민주화운동 특별법’으로 불린 예우법은 유신 반대 투쟁과 6월 항쟁에 참여한 민주화 유공자와 그 가족에게 학비 면제, 취업 지원, 의료 지원, 주택 구입·임차 대부 등 각종 혜택을 제공하는 것이 골자다. 지원 대상으로 민주화 운동을 이유로 유죄 판결, 해직, 퇴학 처분을 받은 사람까지도 포함했다. 민주당의 운동권 출신 의원 중 이에 해당하는 이력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셀프 특혜’라는 비판이 나왔다. 이 법안은 지난 20대 국회에서도 민주당 우원식 의원의 대표발의로 추진됐다. 하지만 운동권 자녀 등에게 취업 특혜를 준다는 반발이 제기되면서 입법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다만 이 법안은 민주화 운동 관련자 중 사망, 행방불명, 장애등급을 받은 자를 유공자로 정하도록 해 국회의원 중에선 해당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이 우원식 의원 측 설명이다. 지원 대상자 선정 과정이 모호하고, 혜택이 지나치게 많다는 점도 쟁점이었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우 의원 발의안과 관련해 향후 5년간 총 58억원의 재정이 소요될 것으로 분석했다. 설훈 의원이 발의한 법안에는 20대 때보다 더 많은 범여권 의원들이 공동발의자로 이름을 올렸다. 해당 법안에는 김두관, 황운하 의원 등 민주당 의원 68명을 비롯해 민주당 출신 무소속 의원 3명, 열린민주·정의당 소속 각 1명 등 총 73명이 이름을 올렸다. 지난 20대 국회 발의 법안의 공동발의 인원은 20여명이었다. 민주유공자로서 한때 민주당에 몸담았던 김영환 전 의원은 페이스북에서 “이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무너뜨린 자들이 벌이는 이 위선과 후안무치를 어찌해야 하나”라며 “광주 민주화운동 유공자를 오늘로 반납한다”고 적었다. 국민의힘 황규환 중앙선대위 부대변인은 해당 법안에 대해 “역사를 이용해 사익을 꾀하고, 민주화 열사들이 지키고자 했던 공정, 자유, 평등의 가치를 훼손하는 부끄러운 모습”이라고 비판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제주 4·3, ‘완전한 해결’ 위한 화해·상생의 새 여정 시작됐다

    제주 4·3, ‘완전한 해결’ 위한 화해·상생의 새 여정 시작됐다

    4월 제주는 통곡했다. 현대사 최대 비극인 4·3사건으로 4월이면 제주는 슬픔에 빠졌다. 다시 4월이 온다.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한 4·3특별법이 개정된 후 처음 4월을 맞는다. 4·3은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긴 역사의 어둠에 묻혀 있었다. 오랜 인고의 세월이 걸렸지만 다시 4월을 맞아 화해와 상생이라는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다. 정부 차원의 4·3 진상규명 노력이 본격화된 것은 1990년대 말부터다. 이를 공약으로 내세운 김대중 대통령 취임 후 1999년 12월 16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고 2002년에는 1715명이 정부로부터 처음으로 4·3 희생자로 인정됐다.2003년 10월 15일 4·3진상보고서가 확정되자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를 찾아 “과거 국가 권력 잘못에 대해 유족과 도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며 사과했다. 노 대통령은 2006년 위령제에 국가원수로는 처음 참석, 유족들을 위로했다. 이듬해인 2014년 4·3 희생자 추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돼 66주년 추념식이 처음으로 국가 의례로 봉행됐다. 하지만 희생자 배·보상과 명예회복 등 4·3 치유와 완전한 해결에는 부족했다. 20대 국회인 2017년 12월 제주4·3특별법 전부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여야 대립에 폐기됐다. 다시 3년여간의 노력 끝에 4·3특별법 전부 개정안이 지난달 국회를 통과한 데 이어 최근 국무회의에서 의결돼 오는 6월 공포된다. 73년 만에 4·3이 완전한 해결을 위한 전기를 맞았다. 다음달 3일 제주 4·3평화공원에서 열리는 73주년 4·3 국가추념식은 4·3이 상처를 치유하고 화해와 상생으로 가는 대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개정된 제주4·3특별법은 희생자들에 대한 위자료 지급과 수형 피해자들에 대한 명예 회복, 추가 진상조사 등을 담았다. 4·3 유족과 제주도민들의 오랜 바람을 국회가 여야 합의로 통과시켰다. ●2014년 국가기념일 지정… 4·3 국가 의례로 이에 따라 정부는 보상이나 위자료 지급 방안 및 재정 지원을 위한 연구용역을 하고 위자료 지급 등의 예산을 내년 예산안에 반영하게 된다. 연구용역이 끝나면 추가 법 개정이나 별도 입법으로 구체적인 위자료 지급 방안이 마련된다. 특별법 전부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던 오영훈(제주시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보상의 기준을 한국전쟁을 전후해 발생한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의 희생자 및 유족에게 판결로서 지급한 위자료 총액을 평균한 금액으로 제시했다”면서 “위자료 개념상 배상의 용어가 담겨 있고 배상의 용어를 정부가 수용했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특별법 개정에 제주4·3 유족회도 화답했다. 유족회는 앞으로 희생자 등에게 지급될 위자료를 모금해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한 기금을 조성한다는 구상이다. 유족회는 캠페인을 벌여 회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모금한 기금을 희생자 추모와 유족 복지, 진상조사 등 다양한 사업을 전개할 계획이다.●바이든 정부에 공동조사 요구 공개 서한 보내 특별법 개정으로 제주4·3 당시 억울하게 형무소로 끌려간 군사재판 수형인 희생자들은 법무부와 협의해 일괄 직권재심으로 명예 회복이 가능해졌다. 또 일반재판 수형인 희생자는 개별 특별재심을 권고할 수 있다. 3500여명으로 추정되는 행방불명인에 대한 법률적 정리와 더불어 가족관계등록부 정리도 이뤄진다. 특별법 개정으로 제주4·3의 바른 이름(정명)을 찾는 추가 진상조사가 진행된다. 제주4·3은 ‘사건’으로 불리고 있지만 적확한 성격 규정에 맞지 않다고 유족과 학계 등에서 문제를 제기해 왔다. 국회는 추가 진상조사와 관련해 제주4·3 중앙위원회에 여야가 2명씩 추천한 위원을 추가해 진상조사에 관한 사항을 심의 의결하도록 했다. 제주4·3평화재단이 실질적으로 추가 진상 조사하며 결과는 국회에 보고해 공식 보고서가 발간된다. 4·3평화재단은 제주4·3 초기 미군정의 역할을 조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제주4·3범국민위원회와 재일본제주4·3유족회, 미주제주4·3유족회준비위원회,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는 지난달 바이든 정부에 공개 서한문을 보내 4·3 공동 조사 등을 요구했다. ●6차 조사, 희생자 1만 4533명·유족 8만여명 개정된 제주4·3 정의는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서 경찰 발포에 의한 민간인 사망사고를 계기로 저항과 탄압, 1948년 4월 3일의 봉기에서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의 해제까지 무력 충돌과 공권력의 진압과정에서 민간인이 집단으로 희생된 사건’이다. 4·3으로 희생된 인명 피해는 적게는 1만 4000명에서 많게는 3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2000년 6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6차례 희생자 및 유족 신고기간을 운영한 결과 지난해 말까지 희생자 1만 4533명, 유족 8만 452명 등 총 9만 4985명의 4·3희생자 및 유족들이 심의·결정됐다. 지난 23일에는 국가 차원의 제주4·3희생자 및 유족 인정을 위한 심사가 3년 만에 다시 재개됐다. 제주4·3 실무위원회는 이날 7차 심사를 벌여 추가신고한 희생자 75명과 유족 1만 2210명 중 사실조사가 끝난 희생자 3명과 유족 124명을 4·3중앙위원회에 최종 심의·결정을 요청했다. 양조훈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은 “4·3은 가해자와 피해자 간 갈등이 심했지만 2013년 4·3유족회와 제주도재향경우회가 조건 없는 화해 선언을 했다”며 “제주시 애월읍 하귀리에 추모 공간을 마련해 4·3 피해자와 군경희생자 신위를 함께 안치해 참배하는 등 이념 갈등을 뛰어넘어 4·3이 화해와 상생의 길로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 “엄마, 살려줘요”…미얀마군, 총격 후 산 채로 불에 던져

    “엄마, 살려줘요”…미얀마군, 총격 후 산 채로 불에 던져

    쿠데타로 정부를 장악한 미얀마 군경의 무자비한 만행이 연일 이어지고 있다. 무차별 총질로 5세 아이를 포함한 어린이 등 무고한 시민이 최소 114명이 목숨을 잃은 지난 27일(현지시간) 최악의 유혈참사 다음날에도 군경의 만행과 그에 따른 안타까운 희생이 이어졌다. 심지어 군경은 무고한 시민을 총으로 쏜 뒤 여전히 살아있는 그를 불타는 폐타이어로 던져 살해하는 끔찍한 짓을 저지르기도 했다. 시민 향해 총 쏘고 산 채로 불에 던져 현지 매체 미얀마 나우와 이라와디 등은 28일 제2도시 만달레이에서 마을 주민 1명이 총격에 부상한 뒤 불에 타 숨졌다고 보도했다. 미얀마 나우에 따르면 군경은 전날 밤 오후 9시쯤 아웅먀타잔구를 급습했다. 이 과정에서 주민인 아이 코(40)씨가 총에 맞아 쓰러졌다. 군경은 그를 체포한 뒤 치료하기는커녕 불타는 폐타이어더미 위로 던져버렸다. 주민들이 군경의 진입을 막기 위해 설치해 놓은 폐타이어더미였다. 당시 현장을 목격한 주민은 매체에 “불길로 던져진 그는 ‘엄마 살려줘요’라며 울부짖고 있었다”고 말했다. 무고한 시민이 산 채로 불에 타고 있는 것을 눈앞에 두고도 군경이 계속 총을 쏘며 위협하는 바람에 주민들은 그를 구하러 집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매체는 전했다. 이라와디는 이 남성이 마을 자경단원 중 한 명이었다고 전했다. 마을 자경단 소속 한 명은 아이 코 사건 전에 신원미상 남성들이 주택가로 들어와 폐타이어 등으로 만든 바리케이드에 불을 질렀고, 이후 군경이 들어와 총격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당시 아이 코는 바리케이드 불을 끄기 위해 집을 나섰다가 총에 맞았다고 매체는 전했다. 그는 4명의 자녀를 둔 아버지였다. 매체가 전한 사진을 보면 불이 타고 남은 잿더미 속에 새까맣게 탄 뼈만 남은 시신의 형상을 볼 수 있다. 軍총격 희생자 장례식까지 들이닥쳐 발포중부 사가잉주 몽유와 지역에서는 총에 맞아 다친 시위대를 치료하던 20세 간호사 한 명이 군경의 총격으로 사망했다고 이라와디가 보도했다. 이 지역에서는 또 남성 한 명도 군경 총격에 목숨을 잃었다고 매체는 전했다. 미얀마 나우는 밍잔에서도 24세 여성 한 명이 숨지고 두 명이 다쳤다고 보도했다. 매체는 또 이날 오전 양곤 인근 바고 지역의 한 장례식에 모인 시민들을 향해 군경이 총기를 발사했다고 보도했다. 이날 장례식은 전날 군경이 쏜 총탄에 맞아 숨진 스무살 학생을 추모하는 자리였다. 이라와디는 군경이 도망치는 장례식 참석자들을 체포하려 했다고 전했다. 한 장례식 참가자는 “학생을 기리며 민중가요를 부르고 있었다”면서 “보안군은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향해 발포했고, 사람들은 도망쳤다”고 말했다. 매체는 또 최대 도시 양곤의 흘라잉구에서는 이날 군경이 수류탄을 던지고 총기를 난사해 최소 두 명이 다쳤다고 보도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군경은 열차를 타고 와서 내린 뒤 총격을 가했다고 매체는 전했다. 이외에 중부 샨주 주도 타웅지, 북부 카친주 주도 미치나 등지에서도 군경이 발포해 민간인 9명이 숨졌으며, 이 중 4명은 여성이었다고 미얀마 인권단체 정치범지원협회(AAPP)가 밝혔다. 군경 총격에 숨진 민간인 최소 459명 AAPP에 따르면 지난달 1일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뒤 이날까지 군경 총격에 숨진 것으로 확인된 민간인은 최소 459명으로 집계됐다. 그러나 시신이 유기 또는 탈취된 경우나 행방불명 된 뒤 생사를 알 수 없는 경우도 많아 실제 사망자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구미 3세’ 혈액형 이어 ‘끊어진 발찌’ 바꿔치기 증거로

    ‘구미 3세’ 혈액형 이어 ‘끊어진 발찌’ 바꿔치기 증거로

    3세 여아 머리맡에 ‘끊어진 발찌’ 사진 경찰, 신생아 바꿔치기한 증거로 추정경북 구미 3세 여아 사망 사건과 관련해 끊어진 발찌가 아기 머리맡에 있는 사진이 확인됐다. 사건을 수사 중인 검·경은 28일 석씨와 주변인을 상대로 이 사진을 보여주며 사건 경위를 파악하고 있다. 사진은 김모(22)씨가 출산 후 아기를 돌보면서 휴대전화로 찍은 것으로 알려졌다. 산부인과에서는 신생아에게 인적 사항을 담은 발찌를 부착한다. 경찰은 고의로 발찌를 풀거나 끊은 것으로 판단하고 김씨 어머니 석모(48)씨가 신생아를 바꿔치기한 증거로 봤다. 또 김씨가 2018년 3월 30일 출산한 뒤 다음 날인 31일 석씨가 처음으로 산부인과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됐다. 석씨는 경찰조사에서 출산 다음 날부터 퇴원할 때까지 매일 산부인과를 방문했다고 진술했다. 직장 생활을 하던 석씨는 매일 퇴근 후 남편 김모 씨와 함께 산부인과를 찾아 딸 김씨와 아기를 살펴본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출산 후 1주일 뒤에 퇴원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사건을 수사 중인 경북 구미경찰서는 친모 석씨가 구미의 한 산부인과 의원에서 신생아 채혈 검사 전에 두 신생아를 바꿔치기한 것으로 보고 당시 산부인과 근무자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계속하고 있다.산부인과 의원 기록상 아기의 혈액형은 A형이고, 김씨는 B형, 김씨 전남편 홍씨는 AB형이어서 아기는 김씨나 홍씨 자녀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B형과 AB형 사이에서는 자녀 혈액형이 A형으로 나올 수 없다. 따라서 석씨가 산부인과 의원이 혈액형 검사를 하기 전 자신이 낳은 아이를 의원에 데려다 놓는 바꿔치기를 한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경찰은 혈액형뿐만 아니라 유전인자 검사 등에서도 김·홍씨의 자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부터 통보받았다. 국과수는 숨진 여아와 김·홍씨 부부의 유전인자 및 혈액형을 검사한 후 ‘불일치’라고 통보했다. 행방불명인 여아는 출생신고가 됐지만, 혈액형은 확인되지 않았다. 경찰은 이 아이가 김·홍씨의 딸이 맞을 것이라고 했다. 경찰은 석씨가 출산 직후 의원에서 두 신생아를 바꿔치기한 점에서 ‘계획적인 범행’으로 판단하고 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한일 우정 상징”…‘강릉이’ 일본서 죽은채 발견, 사인 추측 불가

    “한일 우정 상징”…‘강릉이’ 일본서 죽은채 발견, 사인 추측 불가

    한국과 일본에서 잇따라 발견돼 양국 우정의 상징이 됐던 황새 ‘강릉이’. ‘강릉이’ 가 최근 일본에서 죽은 채 발견됐다. 27일 일본 효고현립 황새고향공원에 따르면, 최근 요사노쵸 야마다변전소 부근 산림의 송전탑 아래에서 황새로 추정되는 백골과 발찌가 발견됐다. 발찌의 고유번호 J0136을 통해 백골의 주인은 강릉이로 확인됐다. 죽은 지 몇 개월이 지나 백골화한 두개골과 허리·다리뼈의 일부와 약간의 깃털이 남았으며 사인은 추측 불가로 알려졌다. 공원 측은 뼈가 주변에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사망한 후 짐승에게 먹혔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강릉이는 2016년 5월 일본에서 태어나 같은 해 7월에 방사된 수컷 황새다. 방사 후 1년 넘게 행방불명됐다가 2017년 12월 강릉 남대천 하구에서 관찰됐다. 2018동계올림픽을 앞두고 강릉에 귀한 손님에 찾아왔다는 소식이 일본까지 전해지자 방사 당시 지역 초등학생들은 황새에게 ‘스스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도 확인됐다. 스스무가 강릉에서 발견됐다는 소식에 현지 학생들은 감사 편지를 강릉시청에 보내기도 했다. ‘강릉이’와 ‘스스무’라는 2개의 이름을 가진 황새는 양국 어린이들에게 우정의 다리를 놓았다. 강릉이를 처음 발견한 박효재 강릉시청 주무관은 “야생에 더 오래 적응하기 기대했지만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돼 마음 아프다”고 말했다. 김채현 기자 ch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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