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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 올랜도시 「워터파크」/인공파도·흘러가는 풀 “환상적”

    ◎90초마다 대형파도 출렁… 육지서 바닷가 만끽/잠수장비 빌리면 누구나 수중세계 감상 가능/국내서도 용인자연농원에 「워터파크」개장 서둘러 세계 최대의 전천후 휴양지인 미국 플로리다. 맑은 햇살과 아름다운 해변으로 대표되는 이곳은 연중 평균 기온이 섭씨 22도를 오르내려 천혜의 관광 명소로 이름 높다.미국인은 물론 유럽과 일본,한국 등지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4계절 붐비는 곳이다. 플로리다에는 자연을 만끽하려는 관광객도 많지만 신기하고 놀라운 최첨단 놀이 시설을 즐기려는 사람도 많다. 플로리다반도 중심부에 위치한 올랜도가 그곳이다.NBA(미국프로농구)「매직」으로도 유명한 올랜도에는 디즈니월드를 비롯한 수십개의 테마공원이 어린이를 꿈의 나라로,어른들을 동심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올랜도의 수많은 놀이공원의 하나가 물을 테마로한 「워터파크」이다.이같은 물놀이 시설은 국내(자연농원)에서도 곧 선보이게 된다. 특히 「풍랑을 만나 흘러들어온 무인도」를 주제로 한 「타이푼 라군」(Typoon Lagoon)이 장관이다. 공원에 들어서자마자 난파된 범선 한척이 인공산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채 기적소리와 함께 배 중앙에서 하늘로 물줄기를 뿜으며 주제를 상징하고 있다. 중앙의 인공 대형 파도풀은 물놀이의 진수를 보여준다.세계 최대 높이인 1.2m,2.4m 2종류의 파도가 90초 간격으로 거세게 일어나 수영객들을 덮친다.수영객들은 즐거운 비명을 목청껏 질러댄다.안전사고에 대비,안전요원은 물론 인공 파도를 즉시 멈출 수 있는 비상스위치도 갖춰져 있다. 파도풀 주위로는 6백40m길이의 유수풀이 있다.튜브를 타고 있으면 흐르는 물을 따라 떠내려간다. 공원 오른쪽에 자리한 폐잠수함도 볼거리. 녹슨 철판,수북한 먼지도 정겹지만 창밖에 펼쳐진 화려한 고기떼와 「조스」의 수중세계는 환상적이다. 스노클링과 잠수조끼를 빌려 직접 물속으로 들어 갈 수도 있다.입장료 30달러.
  • 브라질 원주민 인디언 자살 급증

    ◎82년이래 236건 발생… 대부분 10살 안팎/전통문화 상실에 가난·학대 못 이겨/“영혼안식의 길” 문화적 배경도 한 몫 브라질 남부 작은 마을에 살던 9살박이 인디언소녀 루시아나 오르티즈양은 최근 별다른 이유 없이 나무에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며칠 뒤에는 20세의 안드레 파울로군이 동이 틀 무렵 같은 방법으로 목을 맸다. 브라질 원주민인 구아라니 인디언들이 사는 마을에서는 수년래 이런 자살사건이 그치지 않고 있다.82년부터 지금까지 적어도 2백36건의 자살사건이 일어났고 자살자 대부분은 루시아나 또래의 어린이들이었다.지난해만 보더라도 2만3천명의 구아라니 인디언 가운데 54명이 음독이나 목을 매는 방법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인디언들의 자살이 잇따르자 브라질 국립인디언보호기구등 정부당국은 원인규명에 나서는등 바짝 긴장하고 있다.당국은 인디언들에게 번지는 자살현상을 「조용한 반항」이라고 부르며 대책마련을 서두르고 있다.일단 인류학자등 전문가들은 인디언들의 자살이 선조로부터 내려온 토지의 박탈과 전통문화의 상실에 따른 정신적 고통을 이기지 못한 탓으로 풀이하고 있다.더욱이 인디언들이 겪는 학대와 가난도 주요원인일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한마디로 인디언들은 극단적인 절망에 빠져 자살을 도피구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구아라니 인디언들의 생활은 처참하기만 하다.26만명에 이르는 이들 인디언은 파라과이 이웃에 위치한 섬에서 대부분 살고 있다.이들의 집은 나무로 얼기설기 만든 움막들이다.수입이라고는 하루종일 콩이나 사탕수수 농사일을 하고 받는 3달러16센트가 고작이다.이들은 이 돈을 맥주를 마시는데 다 써버리고는 돈이 떨이지거나 할 일이 없으면 자살을 통해 삶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이들에게 풍부한 것은 오로지 아침에 나무잎새로 비치는 햇살뿐이라고 한 관계자는 말했다. 인디언들의 자살에는 문화적 배경도 한 몫을 하고 있다.이들은 자살만이 그들의 영혼을 「악마없는 땅」(Terra Sem Mal)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인류학자들은 이런 생활고와 문화등을 종합 분석한 결과 인디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자살하고 있다고 풀이했다. 브라질정부는 이에 따라 인디언들에게 더 넓은 땅과 생활자금을 지원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그러나 인디언들의 자살이 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인디언들이 요구하는 것은 자본주의도 산업화도 아닌 자연속의 조용한 삶이기 때문이다.
  • 동양화가 성재휴(이세기의 인물탐구:92)

    ◎“파필과 파묵” 한국화 의 새경지 개척/스승의 필법을 거부… 한때 화단의 반란자로 낙인/해회서 먼저 진가 인정… 60년대 미 화랑서 작품거래/골동서화점서 일하다 소질발견,본격 그림 수업 아침햇살을 받고 먼 항해를 떠나는 풍곡의 「출범」은 언제봐도 찬란하고 의기양양하고 힘차다.청옥타래를 장식한듯 크고 작은 도서를 거느린 그의 돛단배들은 어느 때는 탁하고 어느 때는 눈시린 하늘을 배경한채 이상향을 향한 도도한 항진을 멈추지 않는다.유장하게 흐르는 끝없는 항로는 전에는 그의 미래였으며 이제는 그가 지나쳐온 먼먼 뒤안길이다. 평론가 이구열씨는 『풍곡의 독특한 준법은 웅장하면서도 교만함이 없고 아름답고 부드러우면서도 간사함이 없고 잔재주를 부리지 않아 천박하지 않으며 힘이 넘치는 붓질과 시원스럽게 펼쳐진 화면구성이 특징』이라고 말한다.먹붓을 매끄럽게 다듬기보다 갈라지고 뭉친대로 파필과 파묵을 구사하여 강인하게 풍상을 견딘 천봉만학과 비바람에 마르고 닳은 산간석경을 「붓이 가는대로」 창출해 낸다.여기에 전통적인 원근법을 무시하고 평면성을 강조한 점과 적·황·남청색을 대비시킨 색채의 변환은 소낙비가 세차게 쏟아지는 듯한 방타,먹물이 뚝뚝 떨어지는 선획과 더불어 진취적이고 야인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겨나게 한다. ○야인적 분위기 물씬 이런 풍곡의 세계를 향해 원로 이경성씨는 『전에 듣지 못하고 후에도 본적이 없는 전인미답의 경지』임을 전제,『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작가의 방일은 자신만의 용필과 묵법을 일시에 실현시키고 있다』고 평한다.따라서 『그는 동양화로 불렸던 전통적인 화법을 깨고 그만의 화풍을 이룩하면서 「자연그대로」를 화면에 전개시키는가하면 어느 작품은 거의 추상에 가깝고 어느 작품은 서양화를 방불케 하여 기술적 정신적 측면에서 한국화를 개척하는데 앞장선 동양화 대가』임을 확인시키고 있다. 이른바 『잔잔한 기교에 연연하기보다 한국미의 본질인 대범한 문기에서 우러나온 예리한 필단(붓끝)으로 시기속취를 없앤 묵색의 창윤과 구도의 웅대함을 이룩하고 있다』는 것이다. 풍곡이라고 하면 그를 아는 사람들은그의 활달한 화폭을 곧잘 그의 특기인 남도창에 비유하곤 한다.한량없는 주흥에 겨워 도끼로 찍어내듯 터져나오는 그의 창처럼 중중몰이 휘몰이로 이어지는 그의 화필은 남성적 스케일과 템포와 스피드와 박력을 드넓은 화면에 유창탁발하게 발휘해 낸다.예의「부드러운 우미의 서정성을 배격한 패기와 생명감에 넘친 장미의 의지적 공간」이 그것이다. 그의 술친구이자 한학자인 조규철씨의 「풍곡화실기」에 보면 「한창 술에 취해 노래와 웃음이 집을 흔들흔들하게 하고 방약무인한채 호기가 진탕하여 스스로 제지할줄 모르는 경지에 도달하면 그는 미친듯이 그림에 몰두하여 그 정사와 세심이 삼매지경에 든다」고 쓰고 있다.실제로 그와 허물없이 대화를 나눠본 사람이라면 그의 소탈하고 강렬한 인간적 체취와 즉흥적으로 발설하는 예술의 핵심적 본질론이 그의 작품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뉴욕초대전 호평 받아 풍곡은 경남 창녕에서 십리 못미처 위치한 창락면 어섬(어도)에서 태어났다.글방과 보통학교에 다니다가 창녕읍 골동서화점에서 일한 것이 자신의 그림 소질을 발견한 계기가 되었고 18세 되던 해 대구의 서화가인 석재 서병오에게 사군자와 묵화를 사사,1년도 못되어 스승이 타계하자 이번엔 화법교본인 「개자원화보」로 독학하다가 다음해 호남의 산수화 대가인 의재 허백련문하에서 정통 남종화법과 고전적인 그림 지식을 섭렵해 나갔다. 그러나 그림 수업을 받는 과정에서 그의 고집스럽고 타협을 모르는 외곬의 성격은 지나치게 화보식인 법규를 초탈하여 자신만의 기질적인 필정과 묵취와 생명감으로 독자적 세계를 개척하기에 이른다.사풍의 고법형식을 좇지 않고 스승의 노여움을 받아가면서까지 그만의 화풍을 갖는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반란으로 결국 이 일이 화근이 되어 그는 오랫동안 국내화단에 외면당하는 서러움을 겪기도 했다. 하는 수 없이 홀로 진주에 머물러 현대적인 방법을 모색한 일련의 작품으로 55년 서울에서 첫 전시,동아일보는 『전통을 고수하는듯 하면서도 새로운 선을 느끼게 하는 건실한 선,푸근한 묵운,탈속한 설채』란 호평을 실었으나 국내 화단은 끝내 냉담하기만 했다. 그러다가 57년 뉴욕의 저명한 화랑주인 부세티여사가 한국에 왔다가 때마침 서울 동화백화점에서 열린 그의 두번째 개인전을 보고 뉴욕 월드화랑이 주최한 「한국 현대작가전」에 초대,「형식적 유형에서 이탈된 분방한 먹붓그림」이 서양인들에게 크게 어필하면서 60년대 미국 화단에서 그림이 거래되는 유일한 동양화가로 올라서게 되었다.이렇게 풍곡의 경우는 해외에서 먼저 인정받아 국내에 알려진 케이스로 우리 화단은 그의 예술의 진가를 알아보기에 인색했거나 알아보지 못한 결과를 빚은 셈이다. 정치적인 사교나 계산있는 대인관계에 어두운 그로서는 그후에도 해외 활동 20년만인 78년 중앙미술대전에 초대되었고 평생 처음 사회적 영예인 중앙문화대상을 수상,국내화단은 비로소 노익장의 예경에 대한 경의를 아끼지 않았다. 80년대의 「돛단배」시리즈가 풍부하고 화려한 화면속에서 역동적 낭만성을 드러내고 있다면 90년대의 현실적인 산수풍경이나 호랑이나 새나 물고기를 의인화한 해학적 표현과 묵법 담채의 담대한 표현성으로화면의 신선감과 묘체를 성취,국내화단은 「전통화단의 거인 예술가」로 풍곡을 내세우면서 「지금까지 그의 화풍을 모방하거나 그런 류로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전무하다」고 찬사해 마지않았다. ○외부인 접촉 일체 삼가 그의 일상생활은 지극히 서민적이고 물욕이 없는 야인이다. 그리고 아무리 정성을 담았다해도 마음에 들지않는 그림은 미련없이 찢어버리는 단호한 제작정신을 지키고 있다.전에는 친구들을 만나 말술에 바둑을 두거나 등산을 즐기기도 했으나 3년전부터 거동이 불편하여 말술도 친구도 끊고 요즘은 연희동 자택에 칩거한채 소품에나 손대고 있다.가족은 부인 강신애씨(71)와의 사이에 3남2녀,차남인 종학씨가 동양화가로 활약하고 있다. 『선도 악도 불자체는 아니며 그리로 이르는 과정(불가선불가악)』일뿐 이라는 그의 소신대로 그는 언젠가 『나는 오늘도 그림을 그린다마는 하도 어려워서 붓가는대로 이리저리 칠할따름』이라고 겸허한 자세를 고백한 바 있다.자신의 노추를 남에게 보이지 않고자 사진은 물론 사람 만나기를 일체 꺼리고가족이든 누구든 그의 그림에는 일체 손을 못대게 하는 등 한번 안되는 것은 끝까지 「안된다」「안한다」는 고집은 여전하다. 이제 장렬한 석양 앞에 선 그의 귀범은 모든 구차한 격식을 떨쳐버린채 투묘를 서두로는 시기다.그러나 그의 정박은 잠시의 휴식일뿐 그는 또한번 먼 항해에 앞선 모든 준비를 끝내고 내일 힘차게 닻을 올리게 될 것이다. □연보 ▲1915년 경남 창녕출생 ▲1934년 의재 허백련문하에서 수업 19 38년 이충무공영정제작(충무 착량묘에 봉안),진주에서 작품생활 ▲1950년 대한미술협회회원 ▲1955년 첫개인전(서울 동방살롱)19 57년부터 백양회회원, 개인전(서울 동화백화점),뉴욕 월드화랑주최 「한국현대작가전」초대 ▲1958년 샌프란시스코박물관주최 「아시아미술전」 한국대표 초대 ▲1959년 개인전(서울중앙공보관) ▲1960년 중국 대북·향항미술관초대 「특별전」,뉴욕빌리지미술관 공모전 김상수상, 뉴욕시립도서관초대 개인전 ▲1962년 워싱턴 웨스트엔드화랑초대 개인전 ▲1965년 개인전(서울중앙공보관) ▲1968∼74년 수도여사대교수 ▲1969년 개인전(서울 신문회관) ▲1976년 국립현대미술관주관 「동양화대전」초대, 한국미술대상전 심사위원,백양회이사, 개인전(서울미술회관) ▲1978년 제1회 중앙미술대전초대,개인전(동산방화랑),동아미술제 심사 ▲1982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장 ▲1983년 국립현대미술관주최 「현대미술초대전」 ▲1984년 현대화랑초대 개인전 ▲1987년 서울시주최 「서울미술대전」초대,현대백화점개관기념 초대전 ▲1986년 국립현대미술관준공 개관기념전초대,「서울미술대전」초대 ▲1987년 「풍곡성재휴 회고전」(호암갤러리) ▲ 중앙문화대상 예술상(78년)
  • 차세대 캠핑카 마쓰다 「봉고 프렌디」(자동차 이야기)

    엔화 강세와 국내경기의 장기침체로 일본의 자동차메이커들이 판매 부진에 빠져 있다.특히 마쓰다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조업시간 단축,조직기구의 축소,원가절감,부품공용화 등을 통한 체질개선으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지난 상반기에 회심의 RV(레저용)형 「봉고 프렌디」를 내놓았다.「봉고 프렌디」는 1박스 스타일인 기존 봉고의 차세대 모델로서 1.3박스 타입이다. 자동차와 캠핑문화를 접목시킨 이른바 오토 캠핑카라고 할 수 있다. 1.3박스 타입으로 중간 보닛을 채용하여 정면 충돌에 대한 불안감을 줄였다. 가장 큰 특징은 진동식으로 열리고 닫히는 가변성 루프다.루프에 텐트 기능을 추가해 별도의 텐트를 칠 필요가 없다.특히 루프가 완전히 열렸을 때는 실내 높이가 2m45㎝나 된다.이단 간이침대를 이용하여 성인 5∼6명이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다.낮에는 텐트기능을 하는 루프차양막을 걷으면 자연의 바람과 햇살을 받을 수 있게 설계됐다. 시트는 실내공간의 용도에 따라 3백60도까지 돌리거나 눕힐 수 있어 간이침대 식탁 테이블 등 다양한 연출이 가능하다.특히 가족간의 대화공간을 중요시한 뒷좌석 배치가 돋보인다. 「봉고 프렌디」가 쓰러져가는 마쓰다를 회생시킬 기폭제가 될 수 있을 지 아직은 알 수 없다.그러나 소비자 중심의 제품 전략이나 신 개념의 독창적인 개발의 의지는 인상적이다.
  • 미 러시모어산 4인의 대통령상(세계의 명소/걸작건축감상:26)

    ◎화강암 절벽 깎아 만든 세계최대 조각/14년 동안 작업… 쪼아낸 돌만 무려 45만t/작가 보글럼 완성 직전 숨져 아들이 매듭/햇살받은 모습 장관… 관광객 매년 2백만명 세계의 명소 최근 우리나라의 대통령을 역임했던 사람의 얼굴이 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의 표지로 크게 나온 것을 볼 수 있었다.눈에 고인 눈물을 손가락으로 찍어내는 모습이 표지 전체에 크게 확대되어 나타났었다.이 사람의 얼굴은 요즘 연일 국내외 매스컴에 등장하고 있다.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보게 되는 이 얼굴이 전직 대통령으로서 국민의 존경과 추앙을 받는 얼굴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전직 대통령의 존경스러운 모습을 지켜볼 기회가 전혀 없었다.해방 후 50년이 지나는 동안 모두 여섯명의 전직 대통령이 우리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신문이나 방송매체에 이런저런 이유로 가끔씩 등장하는 이들의 얼굴은 어둡기만 하다.망명하기 직전의 얼굴,암살당하기 직전의 얼굴,대통령직에서 떠밀려나기 직전의 얼굴,국민에게 사죄하는 얼굴. ○로키산맥 발원지 위치 미국 중서부 지방에 사우스 다코타라고 불리는 주가 있다.크기는 우리나라의 두배 정도인데 인구는 약 70만명으로 우리나라 인구의 60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서쪽으로 로키산맥이 시작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고 주요 생산품이라고는 사료용 옥수수뿐인,미국에서도 가장 한적하고 외진 지역이라 할 수 있는 이곳에 놀랍게도 매년 2백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몰린다.사우스 다코타주 남서쪽 러시모어라는 산 어느 절벽에 미국 대통령의 자랑스런 얼굴들이 조각되어 있기 때문이다. 1927년에서 1941년에 이르는 14년동안 굿존 보글럼이라는 조각가는 거대한 화강암 절벽을 깎아내어 역대 미국 대통령 네 사람의 얼굴을 조각해 놓았다.미국의 국부로 칭송되는 조지 워싱턴,미국 독립헌장의 저자이며 초기 미국의 모든 제도를 완성시킨 토머스 제퍼슨,노예해방을 이룩한 미국 민주주의의 아버지 에이브러햄 링컨,그리고 20세기초 미국의 경제·외교 정책을 훌륭히 수행했고 그로 인해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바로 이 자랑스러운 얼굴의 주인공들이다. 이 러시모어 대통령 얼굴상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조각으로 제작 당시 깎아내어야 했던 돌의 무게가 45만t이나 된다.각 대통령의 얼굴은 그 길이가 각각 18m이고,6m의 코,옆으로 5m가 넘는 입,또 3m가 넘는 눈을 가지고 있다.이 얼굴에 비례한 크기의 전신상을 상상해 보면 그 높이가 1백38m에 이르게 된다.이 거대한 대통령 얼굴들이 짙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찬란한 동녘 햇살을 받아 밝게 빛나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라 아니할 수 없다. ○얼굴크기 18m 걸작품 보글럼은 당시 미국 최고의 조각가로서 특히 거대규모의 인물상 제작으로 유명했다.그는 정교하게 아름다운 형태보다는 단순하지만 거대한 덩어리가 더 큰 감동을 자아낼 것으로 믿는 조각가였던 것이다. 사우스다코타주에 미국의 훌륭한 역대 대통령의 인물상을 부탁받은 보글럼은 러시모어산에서 깎아지른듯한 화강암 절벽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이 절벽은 높이가 약 1백20m,폭은 약 1백50m가 되었다.여기에 보글럼은 우선 조지 워싱턴 대통령의 얼굴을 조각하기 시작했다.초대 대통령으로서 워싱턴의 얼굴이 가장 현저한 인상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워싱턴의 얼굴이 완성되기 시작할 때까지도 다른 세명의 대통령의 위치와 모습은 결정되지 않았었다.제퍼슨과 링컨,루스벨트 대통령의 순서로 그때그때 절벽의 모양과 화강석 바위의 형상에 맞추어 이들의 얼굴상이 제작되었다.그러다 보니 실수도 하게 되었다.제퍼슨 대통령의 머리는 처음에는 워싱턴 대통령 머리의 왼쪽에 만들기 시작했는데 하다보니 그곳의 바위가 너무 물러서 도리없이 워싱턴 머리의 오른쪽에 다시 만들어야했다는 숨겨진 이야기도 있다. 단단한 화강석 바위를 깎아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광부와 채석공을 동원해 다이너마이트와 착암기를 써서 우선 바위 덩어리를 달걀같이 둥그스럼하게 깎아내야 했다.이어서 이 덩어리를 얼굴 형상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은 끌과 정을 쓸 수밖에 없었다.연이은 작업으로 끌과 정은 금방 날이 무디어졌고 그래서 대장장이가 24시간 작업현장에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게다가 매일 아침 7백60여개의 계단을 힘들여 걸어 올라가 바위 꼭대기에 닿고,다시 거기서 줄을 타고 내려와 매달린 상태에서 석공작업을 해야했던 사람들의 노고도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조건의 어려움보다는 엄청난 크기의 바위덩어리를 진흙덩이 마냥 이리저리 깎아내어 높이 18m의 얼굴을 입체적으로 정확하게 표현해 내는 일이 더 큰 어려움이었다.거대조각의 제작경험이 많은 보글럼은 아주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도구를 개발해 내었다.그는 우선 실제 들어설 인물상 크기를 12분의1로 축소시킨 모델을 만들었다.이것은 실제 인물상의 1피트가 모델에서는 1인치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그다음 모델의 머리 한 복판에 오늘날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타워크레인 같이 생긴 포인터를 각도를 정확히 잴 수 있는 분도기와 함께 설치했다.포인터 끝에는 그 축을 따라 실을 끌어다가 추를 매달았다. ○대장장이 24시간 대기 추가 포인터에 매달리는 위치와 거기서부터 늘어뜨려지는 실의 길이를 조정하여 추를 얼굴 모델의 어느 한 지점에 닿게 하면 그 지점의 정확한 위치가 포인트의 회전각,추의 수평 위치,또 추의 높이로 정확히 측정될 수 있었다. 모델뿐만 아니라 실제 바위 덩어리 위에도 똑같은 모양의 포인트가 설치되었다.물론 이 포인트는 모델 포인트의 열두배 크기를 가진 것이었다.그래서 현장 한 구석에 지은 막사에 갖다 놓은 모델에서 한 지점을 측정하고 그것을 열두배로 키우면 여기에 대응되는 바위 덩어리 위의 지점을 정확히 표시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이 단순한 측정방식은 14년동안 한치의 오차도 없이 훌륭하게 쓰여졌다. 1927년에 시작된 작업은 제작비의 조달이 어려워지면서 진행과 중단,재개를 거듭하게 된다.1941년 보글럼은 작품의 완성 직전 그만 죽고 만다.대신 굿존 보글럼의 아들 링컨 보글럼이 아버지의 과업을 그대로 이어받아 이 프로젝트를 완성하게 되는데 링컨 보글럼은 이미 15살 때부터 포인트 측정기사로서 아버지를 돕기 시작했다고 한다. 14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보내며,그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큰 돈이었을 1천6백만달러를 투자하며 아버지에서 아들로 대를 물려가며,또한 그 어려운 제작여건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심혈을 기울여 미국의 역대 대통령 4인의 얼굴상을 만들수 있었던 것은 이들에게는 진정으로 존경하고 간직할 수 있는 대통령의 얼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둡고 참담한 전직 대통령의 얼굴들만이 남겨진 우리에게는 이들 미국민들이 부러울 수밖에 없다.퇴임한지 2백년이 지나서도 매년 2백만명의 관광객을 불러들여 어림잡아 2억달러,우리돈으로 1천6백억원의 관광수입을 해마다 올려주는 미국 전직 대통령의 빛나는 얼굴이 재임시절 5천억원의 돈을 국민으로부터 갈취한 우리 전직 대통령의 얼굴과 겹쳐져 우리를 슬프게 한다.
  • 노씨의 「초라한 귀가」/김경운 사회부 기자(현장)

    ◎“아직도 반성 못했다” 이웃 주민들 분통 2일 새벽 노태우 전대통령은 지치고 초라한 몰골로 연희동 집으로 돌아왔다. 16시간에 걸친 검찰조사를 마치고 상오 2시47분 연희동 자택에 도착한 노씨는 수행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승용차에서 내려 정치 후계자로 만들려고 했던 아들 재헌씨에게 안기다시피해 집으로 들어섰다. 전직 대통령으로는 헌정 사상 처음으로 검찰의 소환 조사를 받고 귀가한 하루가 그에게는 5년 동안의 대통령 재임 기간보다 더 길게 느껴진듯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터지는 보도진의 후레시 세례 속에 그의 얼굴은 언뜻 10년은 더 늙어 보였다. 전날 아침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보도진을 따돌리느라 진행 방향을 속이며 골목길로 도망치듯 내달리고 카메라를 향해 눈길 한번 맞추지 못하던 노씨를 바라본 연희동 주민들은 『만감이 교차한다』고 입을 모았다. 2년9개월 전 노씨가 대통령직을 마치고 따뜻한 이웃으로 돌아왔을 때 진심으로 노고에 감사를 표시하고 환영했던 주민들이었다. 한 주민은 당시를 초봄의 아침 햇살이 따스할때였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이번 귀가는 은둔자의 그것이었다.초겨울의 스산함이 귓볼을 할퀴는 시간에 노씨는 누가 볼세라 황급히 들어갔다. 주민들은 노씨가 검찰에서 돌아온 뒤 영양주사를 맞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검찰조사에서도 부인으로만 일관했다는데 부인하기도 힘들었던 모양』이라고 비난했다. 이날 상오 침묵 속에 휩싸인 노씨집을 지나던 한 시민은 『검찰청사를 나서며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해놓고 부인으로 일관한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퇴임 9개월 전부터 지금의 연희동 사저가 초라하다며 2억여원의 시예산을 들여 조경 보수공사를 하는 소란을 피우더니 초라한 것은 집이 아니라 자신이었음을 이제라도 깨달았으면 좋겠어요』 한 주부가 독백처럼 내뱉었다.
  • 「문화 날개론」/안영모

    ◎97년 미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한국실이 문여는데… 뉴욕 센트럴 파크의 울창한 숲을 배경에 깔고 우뚝 서 있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은 수많은 방문객들로 언제나 붐비는 관광명소다.한해 5백만명,휴관일을 빼면 하루평균 1만3천여명의 방문객들이 찾는다니 가히 세계 최고의 박물관이란 평가를 받을만하다. 화창한 가을 햇살이 쏟아진 지난달 22일 하오,주말이라 그런지 박물관 주변은 어느때보다 붐비고 활기차 보였다. 『한국 전시실은 어디 위치해 있죠?』대학 학부생인 듯한 젊은이 너댓명이 안내인에게 묻고 있었다.마음씨 넉넉해 보이는 중년의 여자안내인이 컴퓨터를 두드리더니 『미안합니다.한국전시실은 없군요.하지만 너무 실망하지 말아요.2층 동양미술관으로 가는 발코니에 몇점의 도자기가 전시돼 있으니 감상해 보세요』 일행중에 동양계 두어명이 끼어있는 것을 보니 유학온 한국 젊은이들이 미국 친구들과 어울려 조국의 문화현장을 감상하고 이를 자랑하려 했던 모양이다. 한국예술에 대한 기대를 안고 찾아온 젊은이들이 실망을 안고 발길을 돌린 바로 이틀 뒤인 24일,그 실망감을 충분히 보상할 수 있는 뜻깊은 행사가 박물관에서 열렸다. 「1997년 말 한국유물 전시실 개관」.바로 이 계획을 위한 협약 서명식이 조촐하게 거행됐다.박물관장과 재정지원을 맡은 한국국제교류재단 및 삼성문화재단 대표들이 협약서에 서명,박물관당국과 한국내의 유관기관간에 끌어온 17년간의 협상을 마무리지었다. 서명식은 간소했으나 뜻깊었다.한국문화를 중국이나 일본의 아류 정도로 평가해온 분위기와는 달리 이날 서명식에 나온 박물관 고위인사들은 한국문화의 독창적 우수성을 인정하고 한국실 설치가 늦었지만 현명한 결정이었음을 강조했다. 동양문화에 대한 서구인들의 호기심이 고조돼 온 지난 20여년동안 일본은 막대한 경제력을 동원,세계 유수의 박물관마다 일본유물 전시실을 재빨리 들여앉혀 놓았다. 동양문화의 종주격인 중국은 그 문화유산의 무게와 함께 홍콩 대만과 해외 화교들의 통 큰 투자로 어느 곳을 가나 엄청난 규모의 전시실을 과시하고 있다. 동양3대국의 하나라는 우리는 이 분야에관한한 완전히 소외된 국외자로 남아왔다.세계 굴지의 박물관을 돌아보고 나오는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의기소침해질 뿐이다. 그 씁쓸한 심정은 이내 한탄과 울화로 변한다.하지만 누굴 탓하겠는가.그것은 우리의 탓일 뿐이다. 우리가 일본처럼 미리 서두르지 못한데는 경제력의 한계,해외문화소재에 대한 안목 부족등 많은 이유가 있었다.이젠 사정이 달라져 그 분야에 눈을 돌렸으나 불행히도 우리를 기다리는 문화공간은 벌써 동이 난 지경이다. 메트로폴리탄의 경우도 바로 그랬다.없는 공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일부 중국실 벽을 헐어내고 하늘만 보이는 공간에 지붕을 덮는 난공사를 거쳐야만 할 형편이다.그러니 규모면에서 중국·일본과는 비교가 안된다. 그러나 서울대의 안휘준 교수는 규모면에서의 비교열세론을 단호히 거부한다.『우선 메트로폴리탄에 우리 유물실이 항구적으로 설치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뿐더러 좌우에 들어찬 중국·일본 유물에 비추어 우리의 작은 백자는 언뜻 왜소해 보일지 모른다.그러나 그 백자가 피워내는 심오한 예술성에관람객들은 감탄할 것이다』 이번 한국실 설치는 또다른 측면에서 뜻이 있다.외국박물관에 영구적 전시실을 설치하는데는 많은 예산이 요구된다.그 재정조달을 공공기관과 개인기업이 공동부담한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이같은 형태의 「합작」은 협상이나 사후관리(모니터링)면에서 공공기관이 갖는 행정력과,재정적 후원자로서 기업이 갖는 경제력이 상호 보완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좋은 예를 제시했다. 자기문화를 세계에 알린다는 것은 고상한 예술활동을 넘어서서 실용적인 국가이익,다시 말해서 그나라 상품에 날개를 달아주는 일이다.지난 91년 일본이 엄청난 예산을 투입,유럽에서 「일본문화 대축제」를 가진 직후 대유럽수출고가 껑충 뛴 통계가 이를 뒷받침한다. 메트로폴리탄은 결코 우리의 유일한 대상이 아니다.영국의 대영박물관,프랑스의 기메 박물관에도 멀지않아 한국유물전시실이 설치될 것이다. 『한국전시실을 찾으신다고요? 물론 있고 말고요』­굴지의 외국박물관을 찾는 방문객들은 멀지 않은 장래에 안내인들의 자신에 찬 안내말을듣게 될 것이다.
  • 단합 가능성 보인「흑인 대행진」/나윤도 워싱턴특파원(오늘의 눈)

    16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워싱턴 한복판에서 계속된 1백만 흑인 대행진 행사는 경찰당국과 언론의 혼란및 폭도화 우려가 무색할 정도로 질서정연하게 끝났다.이날 높은 가을하늘에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쪼이는 가운데 몰광장 잔디밭에 모여든 흑인들의 차림새나 표정에서는 어떤 긴장감보다는 가을소풍을 나온 듯한 경쾌함이 느껴졌다. 의사당 앞에 마련된 연단을 향해 2㎞정도 떨어진 워싱턴기념탑까지 폭8백m의 잔디밭을 꽉 메운 인파의 모습을 언론들은 「인간 카펫」이라고 묘사했다.참가규모에 대해 주최측은 1백50만이라고 주장했으나 경찰과 공원관리국측은 40만으로 추정했다. 그들은 잔디위에 의자를 빌려 앉기도 하고 가져온 자리를 펴고 앉기도 하며 삼삼오오 모여앉아 중간중간에 설치된 대형화면을 주시하며 스피커에 귀를 기울였다.잔디밭 양옆으로는 각종 음식은 물론 서적,T셔츠,기념품 가게들이 늘어섰다.하루종일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참가자들은 자유롭게 음식을 사먹기도 하고 잠깐씩 바로 옆 스미소니언 박물관을 관람하기도 하고 워싱턴기념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하는등 자유로우면서도 이성적으로 행동했다.검은 양복에 붉은 완장을 찬 자경대원들이 군데군데 서있었지만 참가자들의 행동에 제재를 가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새벽 5시 기도회를 시작으로 연설과 토론,그리고 음악과 무용등 예술행사로 밤 8시까지 계속된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주최측인 「이슬람 국가」 의장인 루이스 패러컨의 연설이었다.2시간30분 동안의 연설에서 그는 흑인이 처해있는 모든 문제들이 백인우월주의에서 비롯된 것임을 역설하고 그에 맞서기 위한 흑인들의 단합을 호소했다. 그러나 극단적인 반유태,반백인,반가톨릭,반여성의 입장에 서있는 그의 과격한 주장 때문에 이날 행사는 시작 전부터 흑인지도자들을 참석과 불참으로 분열시켰으며 백인에 대한 흑인의 피해의식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단합의 대행진」이 아니라 「분열의 대행진」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날 대행진에 참석한 흑인들도 패러컨의 연설에 동조하기보다는 흑인의 자조와 자립,그리고 가정과 사회에 있어서의 책임을 강조하는 모임의 성격 자체에 더 관심을 쏟는 모습이었다.결국 이날 대행진의 승자는 패러컨이 아니라 단합의 저력과 가능성을 보여준 흑인 전체였다.
  • BAM철도 시발지/타이셰트(시베리아 대탐방:31)

    ◎마을 간격 수백㎞… 끝없는 삼림지대로/쿠즈바스탄전 연결 철도,지난 65년 건설/9월초까지 휴가시즌… 가족 여행객 많아 시베리아 여행중 관광지마다 졸업여행을 온 단체학생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중학교만 졸업하면 여학생의 경우는 곧바로 결혼적령기(16∼18세)가 되고 남자는 어엿한 사회인이 되니 졸업여행이다 사은회다 해서 요란하게 기념식을 갖는 것이다. 모스크바를 떠난지 꼭 열흘째 되는 날 현지시간으로 상오10시10분 크라스노야르스크역을 떠났다.모스크바에서 출발한 특급 「러시아2호」를 다시 탔다.다음 행선지는 세계최대의 담수호를 만날 이르쿠츠크.시베리아여행중 최고의 경관을 구경할 구간을 지나게 된다.이르쿠츠크주로 진입하면서 모스크바와의 시차는 5시간으로 늘어나 마침내 한국과 같은 시간대가 됐다.모스크바와 한국과의 시차는 원래 6시간이지만 러시아전역에서 3월말부터 9월말까지 서머타임을 실시하기 때문에 시차가 지금은 5시간이다. ○차창밖은 초봄 풍경 크라스노야르스크 역을 벗어나며 차창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본격적인 타이가지대이다.크라스노야르스크 이전에 나타난 타이가는 숲이 아주 촘촘했다.반면 이제는 아주 성긴 숲이 계속되고 있다.베료자는 아직 잎을 달지 못해 헐벗은 겨울나무 풍경이다.체료무하도 꽃을 달지 못했고 타이가 침엽수 「리스트니차」는 이제 갓 연푸른 잎을 내밀기 시작했다.크라스노야르스크 시내를 벗어나며 차창밖으로는 갓 초봄의 정경이 펼쳐지고 있다.숲의 밀도가 떨어진 타이가 곳곳에 산불흔적이 보이고 철로변 양지쪽의 잔디밭에는 점심휴식시간인듯 철도노동자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초봄의 따스한 햇살을 즐기고 있다.동시베리아로 접어들며 느끼는 여행의 또다른 맛은 곧은 철길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기차는 구릉과 산허리를 이리저리 휘감으며 나아가 전혀 지루함을 느낄 수 없다.서시베리아에서는 그저 막막한 숲,대지만 보며 길이 일직선으로만 나있었다. 차창밖 타이가지대에는 사람의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시베리아 인구의 80%는 중소,대도시에 모여있다.그래서 철로변에도 인가를 보기가 점점 더 힘들어진다.타이가지대로 들어가면 작은 마을들이 같혹 있지만 마을간 간격이 보통 수백㎞씩 된다.대시베리아철도가 완공되기 전인 18 90년 시베리아횡단여행을 했던 작가 안톤 체호프는 여행기에서 『타이가의 위력과 신비는 그것의 무서운 침묵이 아니라 그 끝을 알고 있는 생명체가 철새들 뿐 이라는 사실에 있다』고 썼다.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탄 열차는 객실 한칸에 양옆 2층으로 된 4명이 타는 침대차였다.2명씩 타는 최고급보다는 한결 서민적이고 값도 싸다.그런 탓인지 양옆으로 러시아인 이웃들이 많이 탔다.대부분 휴가를 받아 다른 도시의 부모친척을 만나러 가는 가족단위 여행객들이었다.러시아에서 휴가철은 보통 5월말부터 시작해 9월초까지 이어진다.직장마다 차이는 있지만 1개월∼2개월씩의 휴가가 주어진다. ○최고 2개월간 휴가 출발 30분만에 남부 아바칸에서 BAM철도의 출발점인 타이셰트로 연결되는 지선과 만나는 우야르역을 지났다.우야르에서 타이셰트까지는 두 선로가 1백㎞거리를 두고 거의 평행되게 달려가 타이셰트에서 합쳐진다.남쪽의 이 아바칸­타이셰트선은 시베리아철도가 붐비면서 지난 19 65년 건설됐는데 서쪽으로 쿠즈바스탄전과 연결되는 매우 중요한 산업철도다.아바칸에서 서쪽으로 사이아나산맥을 넘어 쿠즈바스까지의 구간은 많은 터널을 지나며 주변 경관이 빼어난 것으로 특히 유명하다. 아바칸을 지나고 얼마 안 있으면 칸스크역이 나타난다.「칸강변의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인구 10만명 내외의 작은 마을이지만 16 28년 요새로 건설돼 매우 오래된 마을로 유명하다.처음에는 변경수비를 맡은 에니세이 코작이 살았으나 17 17년부터 모스크바∼이르쿠츠크를 연결하는 시베리아 트랙(길)이 통과하면서 급작히 발달했다.「스파스카야」「페트로파블로프스카야」등 유서깊은 교회건물들이 많은데다 섬유·양초·비누 생산지로 꽤 이름높은 곳이다.아울러 이글스트롬·모자렙스키·살라비요프·발렌베르크등 이름난 데카브리스트들이 이르쿠츠크 유형길에 머문 것으로도 유명해진 마을이다. ○바이칼호 부근 도착 이튿날 상오8시30분 마침내 「자(뒷쪽)오제르느이(호수)」지역에 진입했다.드디어 바이칼호수와 연관된 이름이 나타난 것이다.낮12시40분에 클루치역을 지났다.모스크바로부터의 거리는 44 67㎞를 가리켰다.클루치는 「열쇠」라는 뜻으로 크라스노야르스크주가 끝나는 마지막역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마침내 여행을 시작한 뒤 13번째 주인 이르쿠츠크주로 들어섰다.비류사강을 지나며 곧바로 타이쉐트역을 지났고 이어서 기차는 다시 방향을 틀어 이르쿠츠크까지 한동안 남진을 계속한다.차창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도 훨씬 따뜻해졌다. 옆칸에는 북극해에 연한 튜멘주 영토내 야말­네네츠키 자치구에서 일하는 노동자 일가족이 타고있었다.부부가 8살난 딸아이를 데리고 있었는데 휴가를 맞아 하바로프스크에 사는 노부모를 찾아가는 길이라고 했다.47살이라는 이 건장한 노동자는 북부 혹한지대에 사는 노동자들의 애환과 생활을 재미있게 들려주었다.사진을 찍자고 하니까 기다리라고 한 뒤 문을 걸어잠그고는 무려 30분 이상 전가족이 옷치장을 하고난 뒤에야 사진촬영에 응하는 순박한 사람들이었다. 그는 지난 77년 콤소몰(청소년동맹)로부터 튜멘북부 건설현장에 참여하라는 요청을 받고 그곳에 간 뒤 도로·철도·공항건설·유전·가스개발등에 참여했는데 점점 더 북쪽으로 올라가 지금은 거의 북극해 바로 밑인 노브이 우렌고이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당시 오지 건설공사장 참여자들은 「까라차예바」라고 불렀는데 모두들 건설영웅 대접을 해주어 우쭐한 기분으로 일했다고 했다.지금도 「시베리아 나트바브카」라고 부르는 오지 특별수당 덕분에 타지역에 비해 월급이 2백50%나 된다.그러나 그동안 힘들게 벌어 저축한 돈이『최근 몇년 사이의 인플레로 제로가 됐다』고 그는 한탄했다. 그곳은 지금도 겨울이면 영하 50도를 밑도는 날이 많다고 했다.반면 한여름에는 영상 40도나 되는 무더위에 모기가 들끓어 일하기가 보통 힘드는 게 아니라고 했다.겨울에는 자고 나면 눈치우는 게 제일 큰 일이고 공기중 증기가 얼어붙어 불과 2∼3m앞도 내다볼 수 없는 날이 많다고 한다. 이런 오지에 살면서도 전가족이 구김살 없이 활달하고 친절한 심성을 지키고 있는 게 퍽 인상적이었다.발랴라는이름의 어린딸은 학교에서 배운 푸슈킨의 시를 졸졸 외워보였다.
  • 우랄산맥을 넘어(시베리아 대탐방:22)

    ◎유럽·아시아의 분수령… 정상엔 경계비 우뚝/모스크바 떠난지 30여시간만에 첫 기착/140만 인구 에카테린부르크에 여장 풀어/2차대전뒤 군수공장 대거 이전… 산업 중심지로 우랄의 역사는 곧 옛날 러시아 정복자들의 침략사다.침략은 15세기에 시작돼 16세기에 마무리됐다.철길 대신 카마강의 물길을 따라 동진해온 러시아 정복자들은 페름주와 스베르들로프주의 경계지대인 우랄 산자락까지 와서 그곳에서 산맥을 넘었다.그리고 우랄북쪽에서부터 도시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첫번째 도시는 카마강변의 솔리캄스크.「카마강의 소금채취장」이란 뜻을 가진 마을이다.우랄산맥을 넘어 에카테린부르그 북쪽에 베르하투라가 두번째로 건설됐다.「투라강 상류의 마을」이란 뜻.정복자들은 이후 투라강을 따라 동남진하며 70∼80여개의 도시를 건설해나갔다.피터대제는 메탈 매장량이 많은 이곳에 작은 금속공장을 계속 만들었다.튜멘주의 수도 튜멘은 투라강이 시베리아철도와 교차하는 지리적 요건 덕분에 융성한 대표적 도시가 됐다. ○피터대제 부인 이름 따 도시건설은 두 갈래 방향에서 추진됐다.하나는 메탈공장 건설이고 다른 하나는 상업중심지를 만드는 것이었다.1720년대에만 17개의 새 공장이 우랄에 건설됐다.스베르들로프스크주의 두번째 도시 니즈니타길도 이때 건설됐고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가 되는 페르보우랄스크도 이때 세워졌다.그러다가 드디어 1723년 모든 우랄공장의 총괄본부로 에카테린부르그가 건설됐다.정숙한 피터대제의 부인 에카테리나의 이름을 딴 것이다. 에카테린부르그로 진입하기 전 만나게 되는 명물은 페르보우랄스크의 유럽·아시아 분수령에 서 있는 대리석 경계비. 우랄의 산정역 베르시나역을 지난 뒤 5㎞,모스크바에서 1천7백77㎞ 떨어진 지점에 이 오벨리스크는 서 있다.철로에서 불과 10여m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높이 7∼8m의 수수한 돌조각물 상단에 「아시아·유럽」이라고 쓰인 선명한 글씨가 두 대륙의 경계를 알린다.승객들은 차창가에 몰려 이 역사적 기념물을 카메라에 담느라 법석이다. 러시아인들도 이 산정 경계를 우리와 똑같이 「바다라즈젤(분수령)」로 부른다.산정에서 물이 한쪽은 유럽으로 다른 한쪽은 아시아로 흘러들어가는 말뜻 그대로 분수령인 것이다.추사바야강은 왼편 유럽으로 흘러들어가고 타길·네바·살바·투라강 등은 아시아로 흘러들어간다. 페르보우랄스크에는 유난히 금속튜브공장이 밀집돼 있는데 1920년대 우랄에서 첫번째 튜브생산품이 이곳에서 나오자 이를 기념해 「페르보우랄스크(우랄에서 첫번째)」라고 부른 것이 그대로 도시이름이 됐다. ○금속튜브 공장들 밀집 이곳에서 50㎞를 더 나아가 마침내 스베르들로프주의 수도 에카테린부르그역에 도착했다.모스크바를 출발한지 꼭 29시간30분만에 처음으로 짐을 꾸려 기차에서 내렸다.이웃들이 모두 복도로 몰려나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91년 도시이름을 스베르들로프스크에서 에카테린부르그로 바꾸면서 주이름은 그대로 두어 다소 혼란을 일으킨다.이름을 바꾼 이유는 스베르들로프가 볼세비키의 이름을 딴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도시는 혁명 뒤 볼셰비키들의 총애를 받아 번창한 전형적 사회주의 행정·산업중심지이다.현재 인구가 1백40여만명에 이르는 우랄의 비공식 수도이다.1723년 이셰치강변의 작은 메탈공장으로 도시가 출범한 이래 우랄지역 각종 광산들의 관리소가 이곳에 들어섰다.그러나 혁명 전까지 우랄의 행정·지리적 수도는 페름이었고 이곳은 단순한 산업도시 기능만 했다.이를 볼세비키들이 혁명 뒤 모든 행정·문화중심을 이곳으로 옮겨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그것은 옛 전통을 끊고 프롤레타리아의 새 전통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특히 이곳은 반혁명부대인 체코백군의 본거지가 됐던 곳이다.혁명 뒤 23년 이곳을 우랄의 행정수도로 정하면서 볼셰비키들은 그 이듬해 도시이름을 스베르들로프로 바꾸었다.그 뒤 극장·박물관·대학·과학아카데미·연구소 등이 줄이어 들어서기 시작했다.2차 대전중 모스크바,레닌그라드 등 유럽쪽에 있던 군수공장들이 대거 이곳으로 피난와 본격적 산업중심지로 자리잡았다. 소비예트 시절 시베리아에는 크게 두가지 타입의 도시가 존재했다.하나는 오랜 학문·예술전통을 가진 도시들로서 페름·옴스크·톰스크 등이 바로그들이다.이들은 혁명 뒤 볼세비키정권에 의해 무대 뒷전으로 밀려나 과거의 명성을 잃게 된다.다른 하나는 새로 각광받은 노동자 도시들이다.에카테린부르그·노보시비르스크·이바노바 등이 단적인 예이다.오랜 정치·문화·학문전통을 억누르고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전통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거역할 수 없는 판도의 역전이었다. ○옐친이 태어난 곳 지금 크렘린의 안방을 차지한 사람들은 「스베르들로프 마피아」들이다.옐친 대통령을 비롯해 일본의 옴진리교로부터 뒷돈을 받고 이들을 러시아로 진출시켜주었다는 로보프 안보위서기와 부르불리스 장관 등이 그 멤버들.이외에 15∼20명의 이곳 출신 인사가 현재 옐친 주위에서 일을 하고 있다.옐친 대통령은 에카테린부르그에서 동쪽으로 1백㎞ 떨어진 스탈리차에서 출생해 이곳에서 학교를 다녔고 에카테린부르그시당 제1서기,주당 제1서기를 거친 다음 고르바초프가 불러올려 모스크바시당 제1서기를 지냈다. 에카테린부르그는 예부터 돈많은 광산주들이 많았던 탓에 대부호의 저택들이 유난히많이 남아 있다.또 전형적인 우랄 통나무집들도 곳곳에 보존돼 있다.이들 전통가옥들이 스탈린시대 때 건설된 웅장한 대리석 건물들과 조화를 이뤄 매우 아름다운 도시풍경을 만들고 있다.전형적인 우랄 통나무집은 보통 2층인데 1층은 반지하로 만들어 시멘트,돌 등으로 아주 견고하게 만든 것이 특징이다.겨울에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지반이 흔들리는데 대비하기 위함이다.거기다 창문주위에 갖가지 문양을 새긴 나무장식을 해놓아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우랄사람들은 이 창문장식을 「날리치니키(얼굴)」라고 부른다.집의 얼굴이라는 뜻. 쨍쨍 내리쬐는 5월의 햇살 속에 거리구경을 하는데 갑자기 굵은 소나기가 한바탕 지나갔다.우리가 「여우비」라고 부르는 이 자연현상을 우랄사람들은 「버섯비」라고 불렀다.이 비가 지난 뒤면 숲의 버섯이 쑥쑥 자라기 때문이다.
  • 최명석군 11일만의 생환 후 첫 아침 표정

    ◎초인적 의지 감복… 축하메시지 봇물/“자고나니 「국민영웅」… 환상열차 탄 기분”/악몽 되새기며 “남은 생존자 구조” 당부 『어릴 때부터 평범하고 정직하게 살겠다는 생각 뿐이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나를 보는 세상의 눈이 너무 달라져 있어 당황스럽습니다』 10일 상오 서울 서초구 강남성모병원 3층 중환자실.삼풍백화점의 폐허더미에서 「2백30시간의 탈출드라마」를 엮어낸 최명석(20)군은 사지에서 벗어나 지상에서 맞는 첫 아침을 이렇게 표현했다. 하룻밤 사이 세계언론도 칭찬을 아끼지 않은 「국민적 영웅」이 된 최군은 『마치 환상 특급열차를 탄 기분』이라며 소년티를 못벗은 얼굴에 쑥스러운 듯 천진한 미소를 띠었다. 하늘색 환자복차림에 머리에는 보호용 모자를 쓴 최군은 11일간의 악몽을 말끔히 떨쳐낸 듯 보였다. 중환자실 앞에는 그의 초인적인 의지에 감복한 각계각층이 생환을 축하하고 그의 쾌유를 비는 꽃바구니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최군의 병상을 찾은 시민 김정애(35·주부·강남구 신사동)씨는 『지난해 8월 암선고를 받았었는데 신앙의 힘으로 극복했다』며 최군의 손을 꼭 잡고 생환을 감사하는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또 이동진(46) 총무이사 등 LG건설 임원 3명도 부실공사의 희생자가 될 뻔했던 최군에게 학비와 직장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돌아갔다. 이신행 기산 사장도 최군을 졸업과 동시에 취업시키기로 하고 장학금과 입사예정서를 전달했다.이사장은 『최군의 생환은 건설회사들에게 매우 충격적이고도 상징적인 사건』이라며 『완벽시공을 이루겠다는 의지로 최군의 취업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민들의 격려와 성원이 답지하는 가운데서도 최군의 야윈 몸과 얼굴에 남은 상처들이 웅변해주듯이 마음 한켠에는 악몽의 시간이 드문드문 되새겨지는 듯했다. 『며칠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손으로 콘크리트를 두드려 구조신호를 보내면 어디선가 똑같은 횟수로 두드리는 응답신호가 여러차례 있었다』고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는 최군.아직도 붕괴현장에 생존자가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는 최군은 『구조대원들이 남은 생존자를 하루빨리 찾아내 가족들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구조에 모든 힘을 써주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간밤에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천둥과 번개로 잠을 설쳤다』는 그는 『두터운 먹장구름을 가르고 밝은 햇살이 비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며 실종자 가족들이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기를 바라는 표정이었다.
  • 우랄의 옛도시­페름시(시베리아 대탐방:21)

    ◎인구 1백만… 우랄 최대의 문화중심지/「러」 3대 발레극장·베르샤긴 미술관이…/실바강 따라 1시간동안 절경 펼쳐/별장 지붕위 “매물” 페인트 표시 눈길끌고 페름시에 도착하면서 여행출발 이후 처음으로 인구 1백만명이 넘는 대도시를 밟아보게 된다.이곳은 프리 우랄 최대의 문화중심지로 혁명전까지 우랄의 행정수도는 에카테린부르크가 아니라 페름이었다.우랄의 공장지대에서 생산된 각종 물품들은 육로로 이곳까지 와서 배로 카마강∼볼가강을 따라 러시아중부의 각 도시로 운반돼 나갔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발레단(키로프발레단의 새이름),모스크바의 볼쇼이와 함께 러시아 3대 발레극장으로 꼽히는 페름발레단이 이곳에 있다.그러나 너무 추운 환경탓에 우수한 발레리나들이 서쪽도시로 빠져나가 지금은 그 명성이 많이 바랬지만 전유럽에 명성을 날렸던 발레학교는 지금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그리고 20세기초 화가 베르샤긴의 작품 60여점을 소장한 베르샤긴미술관을 자랑한다.특히 이 도시는 카마강변의 언덕위에 건설돼 체코의 프라하 같이 언덕위에서 강을 내려다보는 정경이 일품이다. ○5㎞ 얼음동굴로 유명 페름은 또한 역대 소련 외상들 중 가장 유명했던 몰로토프가 이곳에서 혁명운동을 한 인연으로 40년부터 57년까지 시 이름이 몰로토프였다.러시아 전역에는 유명한 볼셰비키라면 어김없이 그의 이름을 딴 도시·대학이 5∼6개는 되는 게 보통이다.57년 도시 이름이 페름으로 바뀐 것은 몰로토프가 카가노비치·쉬필로프등과 함께 반흐루시초프 음모에 가담했다가 실각했기 때문이다.카가노비치는 스탈린 때 철도상을 지낸 스탈린의 최고 심복중 한명으로 이름난 킬러.러시아인들은 지금도 그를 가리켜「아이언(철혈) 카가노비치」라고 부른다. 페름역을 출발해 조금 나아가면 실바강이 나오고 강과 철길이 만나는 지점에 쿵구르역이 있다.쿵구르인들은 러시아에서도 손재주가 좋기로 이름난 사람들이다.쿵구르 구두·쿵구르 케이크·쿵구르 악기등 손재주가 필요한 정교한 제품들로 이름난 도시다.1759년까지는 우랄전체자보드(공장)의 행정본부가 있었을 정도로 번창했던 도시였으나 이후 시베리아철도가 건설돼 다른 도시가 커지며 상대적으로 쇄락의 길을 걷고 있다.이곳을 제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로 「쿵구르스키 리제나야 피쉐라(쿵구르 얼음동굴)」라는 지하동굴이다.길이 5㎞가 넘는 동굴안에 60여개의 호수가 서로 연결돼 있는데 항상 영하의 기온으로 얼어 있는 곳이다. ○야생능금꽃 눈부셔 길이 5백㎞의 실바강을 따라 1시간여 동안 그림같은 우랄의 절경이 펼쳐진다.강,강안의 바위,그위의 나무숲….페름주에서 우랄의 중심부에 위치한 스베르들로프스크주로 넘어가기 전 마지막 역은「코르간」이다.입산신고대란 뜻의 이름인데 숲이 많은 우랄지대라 이런 마을 이름이 유난히 많다. 왼편 차창밖으로 맑게 내리쬐는 5월 햇살아래 폭 1백여m의 실바강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우랄산맥의 정점에 있는 유럽·아시아 분수령에서 발원해 유럽쪽으로 흘러내리는 강이다.시베리아횡단열차구간중 최고로 꼽히는 절경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강변에는 잎이 갓 돋아나 연두색을 띤 베료자와 겨울을 지나 검붉게 뻗은 소나무·옐나무들이 같은 비율로 뒤섞여 고도로 세련된 색의 하모니를 연출해내고 있다.강변에 늘어선 별장 지붕에 흰 페인트로 커다랗게 「프로다유(팔겠다는 뜻)」라고 써놓은 글씨가 눈길을 끈다. 기차가 산정을 향해 숨가쁜 행진을 계속해 본격적으로 우랄의 수중으로 들어서자 지금껏 보이지 않던 새로운 수종들이 나타났다.야생능금꽃이 눈꽃을 덧씌운 것처럼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1시간여를 달린 뒤 스베르들로프 경계를 넘어 첫번째 역인 샬랴역을 지나갔다.갑자기 잎을 달지 못한 베료자나무들이 나타나 산 곳곳이 민둥산처럼 보이기 시작했다.우랄은 아직 봄의 첫문턱을 넘지 못한 것이다. 우랄산맥은 서쪽으로는 페름주의 쿵구르에서 시작해 동쪽으로 에카테린부르크시 직후 산세가 끝이나며 동서거리의 최장은 2백㎞,남북길이는 2천㎞에 이른다.전체적으로 완만한 산세를 보이지만 북쪽 코미공화국에 있는 최고봉 나로드나야산은 해발 1천8백95m에 이른다. 페름에서 에카테린부르크로 연결되는 현재의 직선노선은 1905년에 건설됐다.그 전에는 1875년에 건설된 북쪽 우회도로가있었을 뿐이다.이 직선노선이 건설되기전 우랄과 모스크바를 잇는 노선은 에카테린부르크에서 남으로 첼리야빈스크를 경유해 서쪽으로 사마라를 거쳐 모스크바로 연결됐다.따라서 시베리아횡단열차노선도 첼리야빈스크에서 동쪽으로 쿠르간∼페트로파블로프스크(카자흐영토)∼옴스크로 이어졌다. 현재 이 북부 카자흐경유 노선은 매우 아름다운 절경을 지나긴 하지만 승객들이 기피하는 노선이다.카자흐스탄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양국 국경세관에서 거의 1시간 이상씩 짐검사를 해 승객들을 귀찮게 굴기 때문이다.러시아인들은 노비자이지만 외국승객의 경우 이 노선을 이용하자면 미리 카자흐정부로부터 통과비자를 얻어야한다. ○희귀금속 무진장 매장 마침내 러시아 최대 산업지구 우랄지구로 들어섰다.우랄은 최대 공업지대이면서 메탈·희귀금속의 최대 매장지다.이 금속들을 발달된 기계공업기술로 묶어 아주 밀접한 단일 경제지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현재 우랄로 통칭되는 이 산업지대에는 페름주·코미자치공·스베르들로프주·첼리야빈스크주를 비롯해순수농업지대인 쿠르간주·바시코르토스탄주·우드무르티공화국등이 속한다. 우랄의 가장 큰 자랑은 역시 무궁무진한 금속이 매장돼 있다는 것이다.지질학적으로 오래된 산은 완만하지만 희귀석·메탈·알루미늄 등 귀중한 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돼 있고 반면 지진대로 분류되는 신생 산맥은 산세가 가파르고 아름다운 반면 자원이 매장돼 있지 않다.우랄은 전자의 전형적인 예이다.
  • 급류타기/계곡 누비며 스릴·스피드 “만끽”

    ◎4∼8인용 고무보트 타고 모험·협동심 키워/6월말∼8월 적기… 한탄강·내린천 등 명소로 6∼8명이 탄 고무보트가 빨라지는 물살을 타고 협곡 사이를 누빈다.급류에 휩싸이면 보트는 요동을 치고 돌출된 바위에 부딪혀 중심을 잃고 그자리를 맴돌기도 하며 때로는 뒤집힌다.사람들은 눈을 감거나 비명을 터뜨린다. 한차례 격랑을 넘어 한숨 돌릴 때면 상큼한 공기와 맑은 햇살속에 협곡의 비경이 펼쳐져 있다. 대자연속에서 스릴과 스피드를 만끽할 수 있는 「수상레포츠의 꽃」 래프팅(급류타기·뗏목타기)이 본격 시즌을 맞았다. 한탄강·내린천 등 래프팅 명소에는 성급한 래프터들이 몰리고 있으나 적기는 장마철이 시작되는 6월말∼8월.래프팅의 짜릿한 묘미를 제대로 맛보기 위해서는 강물이 불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급류타기는 무동력 고무보트를 타고 4∼8명이 팀워크를 이뤄 난관을 뚫고 목적지에 도달하는 모험심과 혐동심을 기르는 레포츠.목적지까지 급류를 타고 내려오는 과정에서 여럿이 호흡을 맞춰야 하고 힘의 조화가 요구된다.힘껏 노를 저어야 하기 때문에 운동량도 많다. 한탄강,영월 동·서강,내린천,홍천강 등 10여곳이 급류타기에 알맞은 장소다.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한탄강상류 순담계곡에서 경기도 포천군 관인면 근홍교에 이르는 13㎞구간이 대표적인 래프팅코스로 2시간 남짓 소요된다.30∼40m 깊이의 협곡은 수직절벽과 기암괴석이 많아 미국의 그랜드 캐니언을 연상케할 정도로 주변경관이 빼어나다. 급류타기는 원시시대에 뗏목을 타고 수렵이나 이동을 하던 데서 유래됐다.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보트는 2차대전의 부산물인 군용 고무보트에서 나왔으며 60년대 말 미국여행사들이 여행자들을 많이 실어 나르기 위해 대형 고무보트를 이용하면서 세계적으로 붐이 일기 시작했다. 국내에는 80년대 초 도입된 뒤 90년대 들어 전문레저업체와 대학 동아리등을 중심으로 래프팅인구가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급류타기 가이드 이순호씨(32)는 『고무보트는 30인승까지 있으나 동호인들이 즐기기에는 6∼8인승이 적당하며 구명조끼와 헬멧착용이 필수』라면서 『비가 오거나 기온이 떨어질 경우에 대비해 갈아입을 긴소매옷과 장갑·운동화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무보트는 90만∼1백50만원선으로 비싼 편이어서 레저이벤트사에서 빌려 이용하는 것이 좋다.비회원이 이용할 경우 장비대여·점심식사·교통비를 포함해 4만원정도 든다.한국레저이벤트협회(02­722­8811),코니언(02­723­7237),점보클럽(02­543­4330).
  • 시인 박두진(이세기의 인물탐구:75)

    ◎신·자연·인간을 노래한 “해의 시인”/불의·적당주의·시속과 타협 단호히 거부/독학으로 인생행로 개척한 극기의 인물/등산·수석채집 30여년… 붓글씨·서화에도 능해 「해야 솟아라.해야 솟아라.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산넘어 산넘어서 어둠을 살라먹고,산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혜산 박두진의 「해」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우리나라 대표적 시인의 한 사람인 그를 일컬어 문단은 「해의 시인」으로 부르고 있다.이에 대해 문학평론가 김인환(고대교수)은 『밤과 밤을 몰아내는 해와의 대조위에 전개되는 「해」에는 혜산이 희망하는 세계가 투영되어 있다』고 전제하고 『그 세계는 꽃과 새와 사슴과 칡범과 인간이 한 자리에 앉아 앳되고 고운 동심을 이루고 있지만 과연 현실이 기다림만으로 극복될 수 있는가,그의 시적 변모는 이러한 질문에 연관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혜산 박두진의 시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한 줄기 정신은 신과 자연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신앙의 영향은그로하여금 인간중에서 가장 많이 고통받고 가장 위대하게 사랑한 예수의 생애를 통해 언덕과 하늘과,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집단이 감동속에 결속되고 있음을 「갈보리의 노래」로 절규하고 있다. ○“위선과 탐욕 버려야” 「마지막 내려덮는 바위같은 어둠을 어떻게 당신은 버틸 수가 있었는가? 뜨물같은 치욕을,불붙는 분노를,에어내는 비애를,물새같은 고독을,어떻게 당신은 견딜 수가 있었는가,꽝꽝 쳐 못을 박고,창끝으로 겨누고 채찍질해 때리고,입맞추어 배반하고 매어달아 죽이려는,어떻게 그 원수들을 사랑할 수 있었는가」 여기에 멈추지 않고 「우주의 생명과 우주의 질서」에 눈을 돌려 「이제 사물과 인간은 우주적 무도에 참여하는 하나의 과정,하나의 사건이 되고,가식과 위선과 탐욕을 버리기만 하면 누구나 생명의 환희를 체험할 수 있음」을 단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그의 특징은 작품에서 개인적인 감상을 추구하지 않는 점이다.86년 한 신문에 발표한 칠순기념 특별기고에서 「가난이라든가 개인적인 슬픔,사람에 대한 배반감이나 기쁨을 시로 승화시킬 수는 있다.그러나 문학은 인간 누구나가 느끼는 인류공동의 문제 이전에 근본적인 문제로 천착하여 진실에 대한 투시력을 보여야 한다」고 논한 바 있다.즉 「시의 사상,시의 윤리,시의 심미적 창조가치는 언제나 그 창조의 주체인 시인에 의해서만 시적 진실이 획득된다」는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쓰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개탄하면서 「나이든 사람은 젊은 사람의 눈치를 보고 젊은 사람은 나이든 사람을 업고 나와 학연·지연을 앞세워 설쳐대는 것은 문학의 권위와 문학인의 자존심을 잃는 일」이라고 우려해 마지않았다. 혜산의 생애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를 일컬어 「극기의 인물」로 평하는 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앙상하리만큼 야윈 체구에 오랜 등산과 수석채집으로 다져진 강단은 일상생활에서도 불의에 굴하거나 적당주의나 시속의 타협이 없이 무엇을 하든 정의감과 선비적 자세를 지켜왔고 그의 시의 소재들은 이런 다양한 지란을 이겨낸 심혼의 결정으로 해석되고 있다. 시인 신대철은 팔순을바라보는 나이에도 언제나 꼿꼿한 자세와 순수무결한 시심을 잃지 않는 혜산을 향해 『자기초월의지를 가진 인격과 고고한 학자의 기풍과 시인의 기상을 흐트리지 않아 문단에서는 물론 대학에서도 제자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다』고 자랑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는 경기도 안성 「고장치기」로 불리는 빈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청렴한 선비이던 선친으로부터 일찍이 한문과 붓글씨를 배우고 안성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것 외엔 그는 혼자서 독학으로 인생행로를 개척해온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24세때 「문장」지에 등단 24세에 「문장」지의 시 추천을 거쳐 문학활동을 전개하기 이전까지 그는 측량소·경성부청·금융조합원 생활을 전전했고 45년 해방과 함께 그 당시 유일한 출판사이던 을유문화사에 입사한 것이 조지훈·박목월과 만나 「청록집」을 출간하는 계기가 된다.이후 자연과 신을 주제로 하는 시들을 끊임없이 발표하더니 60년대말부터 수석취미에 침몰하여 「돌」 하나만을 주제로 하는 「수석열전」시리즈를 「현대문학」지에 수년간 연재,지금은 「돌의 시」로써 시인만의 청복을 누리는 시기다. 서대문구 창천동 그의 집에 가보면 마당과 거실과 서재와 베란다는 「뇌뢰낙락하고 고하고 괴하면서 관용자수 한 명석」들이 일사불란하게 도열해 있고 그의 돌에 대한 사랑은 3천여편 이르는 시작 외에도 서화나 수필에 넘치도록 표현되어 있다. 「작은 한개의 돌이 갖는 형태미와 색채미는 어떤 조각품에도 견줄 수 없는 묘막한 조형미가 갖춰져 있다.난이 정의 극치라면 수석은 의 극치,난이 부드러우면서 의연하다면 수석은 웅혼섬세하고 표일 불기이면서 차라리 성자롭다」등,그리고 「시를 쓸 때의 사무사의 맑은 마음,맑은 눈만이 석격이 심웅하고 석품이 우귀」한 것을 찾을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혜산의 취미는 다양하다.시를 쓰는 것과 동시에 30년남짓 등산을 하고 난을 키웠으나 그는 이를 굳이 「취미」라고 하지 않는다.붓글씨와 서화에 능하여 앞을 향해 질주하는 듯 한 아름다운 필체는 「혜산체」로 일가를 이루고 있으나 서도를 감히 취미라고 하지 않는다.「어떤 것은 너무 높은 경지라그렇고,어떤 것은 나 자신이 족히 미치지 못해 모자라는 것을 취미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시를 좋아하면서 산을 좋아했는지 산을 좋아하다가 시를 좋아했는지는 모르나 산은 심약한 그를 「의지적 인간」으로 바꾸어놓았고 일목일초에 기울이는 정서적·감각적 운치를 알게 했으며 「한개의 돌에 얽힌 정신적 파동」은 그의 시심을 한층 심화시켰다고 돌아본다. 문단의 교분은 다양하진 않지만 월탄이 생존해 계실 때는 종로구 충신동 월탄댁에 가끔 모여 「문주반생기」의 무애 양주동,「명정사십년」의 수주 변영로,공초 오상순,연포 이하윤등 문단의 주호들과 맥주 두잔의 술실력으로 「도도한 무애의 웅변,월탄의 호통,공초의 무언,수주의 독설속에서 시를 주고받고 휘호를 치면서 철저하게 밤을 새운 이야기」는 문단사의 향기로운 추억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지금도 새벽에 일어나 수석에 물을 뿌리고 돌보면서 가슴속에 들끓는 정열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린다.그럼에도 자신을 「시인으로 자처하거나 그렇게 의식해 본 일이 없다」고 끝내 도도하다.다만 「시는 한낱 감상이 아닌 인간이 신의 손길에 의해 생명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덕윤과 경외의 념」이라는 한 평자의 말에 공감할 뿐이다.언제나 쓸 것이 밀려 있고 생각에 쫓겨 「한없이 즐겁고 한없이 탄력을 느끼면서 고양된 감정,맑은 생각,투지와 저항,여유와 절박감이 뒤섞인 속에서」 그는 총체적으로는 어떤 즐거움과 보람같은 것을 느껴왔다고 수필집 「돌과 사랑」에서 밝히고 있다. 연세대 교수 정년퇴직후엔 일주일에 두번 추계예술대 강의,그외엔 2박3일정도로 수석채집을 위한 여행길에 오르고 수석을 알고자 하는 사람을 만나면 수석의 아름다움을 설명하는 데 지루해 하지 않는다.가족은 동화작가인 이희성 여사와의 사이에 아들만 4형제. 『시인은 자신의 감정과 의지를 기꺼워하고 다른 사람들보다도 내부의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한 워즈워스의 말은 그를 두고 적절하다.혜산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성 속에는 시가 있고 시를 상실한 사람은 인간의 순수성을 상실한 사람이며 시는 본질적으로 진실이며 선이며 아름다움이며 신의말씀」이라는 그의 시론을 시로써 실천해냈고 마지막 붓끝까지도 신과 자연과 인간의 결속을 불후의 명시로 성취할 이 시대 진정한 시인이기 때문이다. ◎연보 ▲19 16년 경기도 안성출신,호 혜산 ▲39년 「향현」「묘지송」등이 정지용에 의해 「문장」에 추천 ▲46년 첫시집 조지훈·박목월등과 「청록집」(을유문화사)출간 ▲48년 한국청년문학협회 시부위원장,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중앙위원 ▲49년 제2시집 「해」(청만사)출간,한국문학가협회 중앙위원 ▲51∼81년 연세대 교수 ▲65년 우석대 조교수 ▲70년 이화여대 부교수 ▲81년 단국대 초빙교수 ▲86∼현재 추계예대 전임대우교수 시집 「오도(오도)」(54년)「박두진 시선」(56년),수필집 「시인의 고향」(58년),시론집 「시와 사랑」(60년),시집 「거미와 성좌(성좌)」(61년)「인간밀림(인간밀림)」(63년)「하얀날개」(67년)「청록집·기타」「청록집 이후」(68년),시론집 「한국현대시론」,수상집 「생각하는 갈대」(70년),영역시선집 에드워드 W 포이트라스역 「Sea of Tomorrow」(71년),수상집 「언덕에 이는 바람」,시집 「고산식물」「사도행전」「수석열전」,시론집 「현대시의 이해와 체험」,한국현대시문학대계 「박두진」(73년),시집 「속·수석열전」(76년)「야생대」(77년),시선집 「예레미야의 노래」,시집 「포옹무한」「하늘까지 닿는 소리」「박두진 전집」(범조사 81년)「나 여기에 있나이다,주여」(82년)「청록시집」(83년),수상집 「돌과의 사랑」「그래도 해는 뜬다」,시선집 「일어서는 바다」(86년) 「불사조의 노래」(87년),시집 「빙벽을 깬다」(90년),산문전집 「햇살,햇볕,햇빛」(91년)「박두진 전집」(신원문화사 95년) 아세아자유문학상(56년) 서울시문화상(63년) 3·1문화상 예술상(70년) 대한민국예술원상(76년) 인촌(인촌)상(88년) 지용문학상(89년)
  • 선글라스/렌즈 작고 복고풍 디자인 유행

    ◎색상 다양… 재키·헵번스타일 인기/갈색·청색·녹색렌즈 햇살차단 효과적/값은 1만∼20만원… UV코팅 제품 선택을 햇빛도 가려주고,헤어밴드로도 사용하고,멋스럽고…. 강한 햇빛을 가려주고 눈을 보호해 주는 고유기능외에 개성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선글래스가 초여름의 가장 인기있는 패션소품으로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거리에선 크게 부담없는 가격으로 유행을 따를 수 있는 선글래스를 헤어밴드 대용으로 머리에 꽂은 젊은 여성들의 모습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올해 선글래스 디자인은 렌즈 크기가 더욱 작아졌고 모양이나 렌즈 색상이 예년보다 다양해 진 것이 특징.디자인은 패션의 복고풍 추세에 맞춰 복고형이 유행이다. 그중에서도 재클린 케네디가 즐겨 썼던 플라스틱 소재의 크고 두꺼운 사각형(재키 스타일),영화배우 오드리 헵번이 유행시킨 타원형으로 끝이 살짝 올라간 모양(헵번 스타일),강한 색상의 둥글고 두꺼운 플라스틱테(라거펠드 스타일)가 인기있는 아이템이다.한때 크게 유행했던 금속테에 알이 동그랗고 작은 「아르마니 스타일」은 요즘에 좀 퇴조하는 양상을 보인다. 유행도 유행이지만 선글래스는 무엇보다 얼굴형태에 어울리는 것을 선택하는게 가장 중요하다. 얼굴형이 동그란 사람은 깔끔한 은테나 진한 감청색이 산뜻한 느낌을 준다.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둥그런 역삼각형 스타일이 얼굴을 갸름하게 보이게 하고 작은 타원형도 무난하게 어울린다. 렌즈는 자외선 차단처리가 된 UV코팅 렌즈를 선택하고 너무 진한 색의 렌즈는 눈의 피로를 가중시키므로 피하는 것이 좋다.뜨거운 여름햇살을 차단하기에는 갈색,청색,녹색이 좋고 요즘 새로 선보이고 있는 노랑,핑크 등은 햇살이 강한 바닷가나 산에서는 그다지 큰 효과를 보기 어렵다. 가격은 1만원대부터 20만원까지 천차만별.길거리에서 파는 선글래스는 렌즈속에 미세한 기포가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아 빛의 굴절때문에 눈의 피로를 가중시키고 시력을 해칠 수 있으므로 착용보다는 장식용 액세서리로 구입하는 것이 좋다.
  • 호텔형/그린형/생활형/아파트 구조 혁신 바람

    ◎삼성·현대·대우 “파격”주도/호텔형/1층전체 호텔 로비식 설계/그린형/자체 정수시설… 맑은물 공급/생활형/가족공간 주방·거실 남쪽에 네모 반듯한 단순 주거형에서 「뭔가 다른 색깔」로 치장한 차세대 아파트가 선을 보이는 등 아파트에 「구조 창조」의 바람이 일고 있다.아파트의 기존 관념을 과감히 탈피한 「혁신 설계」로 시장을 특화,수요를 창출하려는 것이다. 분양가 인상의 요인이 있으나 변화를 바라는 소비자의 욕구에 부합,확산되는 조짐이다.변화의 대상은 주방이나 거실,욕조 등 내부구조 이외에 관리시스템과 아파트 단지의 구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특히 주부들과 신세대의 취향에 맞춰 편리성을 강조한 「생활형 아파트」와 수질과 소음 등 환경문제에 신경을 쓴 「클린 아파트」가 변화의 주류를 이룬다.이 가운데 아파트 1층 전체를 로비처럼 꾸민 파격적 스타일의 「호텔형」과 서라운드 스피커 시스템이 내장된 「살롱형」도 눈길을 끈다. 혁신설계의 선두주자는 삼성건설,현대건설,(주)대우 등 3두마차.삼성건설이 오는 연말부터 수원 율전동에 짓는 1천2백여 가구의 아파트 1층을 모두 호텔 로비식으로 설계했다. 입주자들의 휴식 공간과 내방객을 맞는 만남의 장소를 위해 특별 고안된 것으로 고급 소파와 조각물들을 전시,호텔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도록 했으며 인터폰으로 각 세대와 연결,집안에서 손님을 구분할 수 있게 했다. 최고층에는 스카이 라운지를,중간층에는 헬스클럽 등 주민공동 시설도 갖추도록 했다.삼성건설 장 준 주택설계팀 과장은 『아파트의 단점은 외부와 단절됐다는 것』이라며 『입주자들이 자기만의 공간을 지키면서도 주민 또는 외부 손님과 편안한 만남을 가질 수 있도록 설계했다』고 설명했다. (주)대우가 분당에 전시한 33평형 아파트는 주방과 거실을 남향으로 돌렸다.많은 시간을 주방에서 보내는 주부들을 위한 전면 배치이다.기존 아파트가 주방을 거실과 분리,북향으로 돌린 것에 비하면 이례적이다. 동아건설은 한걸음 더 나아가 중·소형 아파트의 경우 주방과 거실은 남향으로,침실은 아예 북향으로 돌렸다.아침 햇살을 맞으며 잠에서 깨길 바라는 사람에게는 충격적인 설계이다. 이 회사 고성혁 주택기획팀 과장은 『침실은 가족 전체보다 부부만을 위한 기능이 강하지만 주방과 거실은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대화의 광장』이라며 『침실보다 주방과 거실의 기능을 더욱 살리는 게 가정을 위해 바람직하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수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맑은 물을 공급하는 아파트도 늘고 있다.「그린 홈,클린 아파트」를 내세우는 (주)대우는 식수전용 시스템을 도입,필터와 자외선 살균한 물을 식수로 공급하고 있다.선경건설은 안산 단지내에 약수터를 개발,정수시스템을 거쳐 각 가정에 공급하고 있다.
  • 어른들 잘못 용서를…/한찬규 전국부 기자(현장)

    ◎영남중 합동추모식장엔 흐느낌만 『상화·승호·민철·병광·석술·성호·지훈·삼곤·재형·동훈…우리는 오늘도 그 지옥같았던 사고현장을 지나다니며 너희들을 생각한다』 대구 도시가스폭발사고로 숨진 43위의 합동추모식이 치러진 6일 상오10시 영남중학교 운동장. 학생회장 나형진군(15)이 『눈에 보이는 것에만 안주하는 어른들을 용서해라.너희들이 못다한 효도,공부는 우리들이 대신하겠다』며 추모사를 읽어내려가자 유가족과 학생,교사 등 4천5백여명이 자리한 교정에 흐느낌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길우 교장은 『아무리해도 고칠줄 모르는 어른들의 나쁜 버릇을 바로잡기 위해 너희들이 온 몸을 던졌는지도 모른다.지금 너희들의 고귀한 희생을 계기로 자성의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다.너희들의 희생이 우리 사회의 어둠을 밝히는 촛불로 타오르고 아침을 알리는 종소리로 울리고 있다』며 추도사를 읽었다. 이 교장은 『사랑하는 제자들아,함께 가신 이종수 선생님과 그 곳에서 더 좋은 학교를 만들어 못다한 공부,못다 펼친 꿈을 가꾸고 다듬어 커다란 열매를 맺길 두손 모아 빌고 있다』며 제자들의 넋을 위로했다. 『교문밖으로 아스라히 떠나던 너희들의 모습,무엇으로 잡을 수 있으랴.한없이 포근한 엄마 아빠의 품으로도,스승의 간절한 말씀으로도,눈물어린 친구들의 우정으로도 잡을 수 없어…』구본석 교사는 42명의 제자들을 보낸 심정을 추모시로 대신했다. 『친구야,우리는 영남에서 만났지.영남의 동산에 청운의 꿈 심었지.우리가 함께 한 그 자리,그 교실.아 봄날 햇살속 꽃피고 새우는데,친구야 너는 왜 보이지 않니.푸르른 봄하늘 너의 모습 피우리』 구석봉선생이 작사 작곡한 추모가가 울음속에 메아리졌다. 「동생들아 친구들아 모두 잘 가,너희들 모습은 우리들 가슴에 영원히 남아있을 거야」 모든 학생들이 눈물로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교정밖 사고현장에선 이 날도 크레인 소리가 요란했다.
  • “꽝”순간 공사구간 6백여m “폭삭”/대구 가스참사 상보

    ◎복강판 1백개 50m 치솟아/군·경 1천여명 구조 “비지땀” 【대구=특별취재반】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대 참화였다.28일 상오 대구시 상인동에서 일어난 지하철 공사장 폭파 참사현장은 나뒹구는 피투성이의 사체,폭격을 맞은듯 흩어진 지하철 구조물,불타버린 시내버스,고꾸라진 승용차의 잔해 등으로 생지옥을 방불케 했다.화사한 봄햇살속에 4월을 마감하려던 국민들은 『서울 마포 지하철참사가 일어난지 얼마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참사가 되풀이 될 수 있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사고순간◁ 사고현장 근처에서 교통정리를 하던 시민 김중기씨(73)는 『하늘이 무너져 내릴 듯한 폭발음과 함께 불기둥이 치솟았으며 지하철공사장의 철제 복공판 1천여개가 50m 높이로 튕겨진뒤 공사구간 2백여m가 내려 앉으면서 주변이 아수라장이 됐다』고 말했다. 승용차를 몰고 출근하다 현장을 목격한 이주창씨(31·대명9동)는 『신호대기를 하다 폭음에 놀라 눈을 감았다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앞서가던 승용차 위에 철제빔이 떨어져 있었고 운전자는숨져있었다』고 말했다. ▷현장◁ 사고주변은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이었다.우일교통 소속 대구5자5116호 시내버스가 불이 붙은 채 20m 아래의 지하공사장으로 추락하는 등 신호대기를 하고 있거나 통행하고 있던 80여대가 순식간에 공사장 바닥으로 떨어졌다. 또 이웃 건물 80여채가 폭격을 맞은 듯 크게 부서졌으며 주변 20여개의 전주가 무너져 내리고 동서신경외과 건물 등 사고현장 주변 일대 건물이 폭발 충격으로 기울어져 대규모 지진이 지나간 듯 보이기도 했다. 사고현장 지름 1㎞안의 아파트 및 건물의 유리창들이 깨어져 나갔으며 공중으로 튀어오른 가로 75㎝ 길이 2.7m 두께 20㎝의 복공판이 주변 차량을 덮쳐 1백여대의 차량이 크게 부서졌다. 복공판이 튕겨져 나간 사고현장 곳곳에는 학생들의 책가방과 신발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데다 화재로 철제빔이 꺼멓게 그을린 모습으로 당시의 참상을 증언했다. ▷수습·구조◁ 사고가 난 뒤 한시간 뒤까지 일부 가스관에서 계속 가스가 유출된데다 러시아워로 도로가 막혀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상오9시30분쯤부터 경찰과 군인 1천여명이 투입돼 구조작업을 벌였다. 구조작업이 시작되면서 뒤늦게 사고소식을 듣고 달려온 학부모들과 지역 주민들이 몰려들어 사상자들이 들것에 실려 나올때마다 주민들은 한숨과 함께 곳곳에서 사상자들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 소리로 주변은 아수라장 그대로였다. ▷피해자주변◁ 가장 많은 사상자가 생긴 영남중은 45명이 사망한 것은 확인됐으나 상당수의 학생들이 등교하지 않아 또다른 사망여부를 확인하느라 이날 늦게까지 부산한 모습이었다. 경찰은 이날 사고가 현장에서 10여m 떨어진 대구백화점 상인점 신축공사를 하고 있던 표준개발측이 지반안정을 위해 구멍을 뚫다 가스관을 건드려 일어났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으나 지하철 공사현장에서 부주의로 사고를 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사고원인및 수사◁ 도시가스측은 『상오7시30분쯤 가스누출신고가 들어와 현장에 출동한 순간 폭발했다』면서 『월배쪽으로 난 직경 2백㎜의 도시가스관과 상인동쪽으로 분기되는 1백50㎜가스관의 누출로 사고가빚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주요 가스폭발사고 일지 ▲85년5월6일=서울 마포·서대문구 14개동 도시가스 연쇄폭발,가옥 20채 파손. ▲90년7월22일=경남 울산시 유공에틸렌공장 부탄가스저장탱크 폭발,재산피해 1억원. ▲92년2월24일=광주 해양도시가스저장탱크 폭발,9명 중상. ▲93년11월9일=전남 여수시 삼성전자판매장 LP가스 폭발,20명 부상. ▲93년11월29일=경남 울산 현대미포조선소 LP가스운반선 폭발,10명 부상. ▲94년1월9일=광주 무등주유소 LP가스 폭발,3명 사망,5명 부상. ▲94년4월27일=전남 나주군 신진냉동가스 폭발,5명 사망,2명 부상. ▲94년8월30일=서울 도봉2동 4층건물 LP가스 폭발,5명 사망,2명 부상. ▲94년12월7일=서울 아현동 가스중간기지 폭발,12명 사망,1명 실종,65명 부상,이재민 6백여명.
  • “발리섬/무공해 휴양지”… 한국 관광객 급증

    ◎작년 6만명 다녀와… “해변 일몰 환상적”/투명한 바닷물·색색의 산호초도 절경 「지상최후의 낙원」으로 일컬어지는 인도네시아 발리섬.지구 구석구석의 자연이 날로 파괴되고 오염돼가는 상황에서 그나마 가장 태고의 모습을 고이 간직한 곳으로 문명에 찌든 현대인들을 푸근하게 맞아주고 있다.세계인들의 휴양지 발리는 지난해 한국인 방문객이 6만여명에 달했다.또한 연내에 인도네시아 국영 가루다항공과 대한항공이 서울∼발리간 직항로를 개설할 예정이어서 더욱 관광객이 몰릴 것으로 보인다. 서울에서 비행기로 9시간거리,총 5천7백여㎦의 면적에 2백80여만명이 살고있는 발리는 쏟아져 내리는 황금빛 햇살,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빨려들듯한 투명한 바닷물,곧게 솟아오른 야자수등 열대의 이색정취가 지상의 낙원임을 실감케한다. 발리는 섬안 곳곳에 볼거리도 많지만 누사두아·쿠타·사누르등 환상적인 해변이 역시 장관이다.이들 해변에는 윈드서핑·카누·패러세일링등 수상스포츠가 바다를 점점이 수놓고 일광욕을 즐기는 반라족들도 심심찮게눈에 띈다. 발리 남쪽 부킷반도에 위치한 누사두아는 넓은 백사장,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깨끗한 물과 색색의 산호초가 절경을 이루며 스킨스쿠버하는 이들이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쿠타는 발리의 국제공항 덴파사에서 가장 가까운 해변으로 숙박시설이 비교적 값 싸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다.모래가 검고 수영에는 부적합하지만 파도타기에는 안성맞춤.주변에는 식당,상점,디스코장등 편의시설이 고루 갖춰져 있고 일몰 또한 아름답다.또 덴파사 인근의 사누르는 하얀 모래사장과 달리는 보트에 매달려 낙하산으로 공중을 비행하는 패러세일링을 비롯,윈드서핑·보트타기등 해양스포츠를 즐기기에 좋다.가까운 곳에 마이에르박물관이 있어 발리의 「어제」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이들 발리주변의 해변에는 격조높은 숙박시설이 많은데 특히 누사두아해변에 위치한 「클럽메드 빌리지」가 큰 사랑을 받고 있다.세계적인 리조트체인인 클럽메드가 운영하는 빌리지는 일단 이 빌리지내에 들어서면 먹고 자는 것은 물론 각종 시설을 거리낌없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독특한 운영스타일을 갖고있다.각종 레저시설을 이용할때 별도로 돈을 낸다거나 예약등의 절차가 필요없어 자신이 주인이 된듯한 느낌을 맛보며 즐기게 한다. 더구나 철저한 휴양지를 지향해 제트스키나 모터보트 등 소음을 유발하는 레포츠는 완전 배제하고 있다.
  • 암보셀리 국립공원(아프리카 기행:6)

    ◎사파리 트럭에 배고픈 원숭이 몰려/킬리만자로 야영… 쌓인 여독 말끔히 씻겨/코끼리떼·치타 발견… 가까이 가도 “모른척”/작년 가뭄으로 검은 코뿔소 수백마리 희생 케냐에서 가장 인기있는 암보셀리 국립공원은 1899년에 세워진 우캄바금렵지(Ukamba Game Reserve)와 남쪽의 마사이 보호구와 닿아있다.1961년에는 사람과 야생동물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공존할 수 있는 계획이 수립되어 마사이족의 족장에게 8천5백파운드의 연금까지 지급하여 마사이들이 멀리 가지 않고 이 지역을 중심으로 살도록 권유했다.1973년에는 뉴욕의 동물협회에서 4만9천파운드를 출자해서 이 지역의 야생동물들이 일년 사시사철 걱정없이 풀을 뜯을 수 있도록 킬리만자로 산자락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이곳 초원지에 관개수로를 놓았던 적도 있었다.그러나 암보셀리 호수는 나트륨 호수로서 물이 메말라 있기 십상이어서 가끔씩 먼지폭풍이 일어나거나 신기루 현상까지 나타나 수많은 종류의 세떼들을 유혹한다.사실 암보셀리라는 말은 이곳 원주민들의 말로 「먼지가 많은 곳」이란 뜻을 가진다. ○코끼리를 템보라 불러 암보셀리 로지에서의 하룻밤은 근래에 경험할 수 없었던 숙면이었다.초저녁 베란다에 앉아 어둠에 잠긴 킬리만자로를 바라보며 많은 양의 위스키를 마셨지만 해뜰무렵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 오장육부의 기능이 20대에 경험했던 활력으로 되살아난 듯하였다.킬리만자로 산자락을 타고 내리는 맑은 공기 때문이었다.하룻밤의 숙면으로 사오일 여독을 한꺼번에 떨쳐버린 우리는 해뜰무렵의 사파리를 위해 차에 올랐다.그리고 로지 바로 곁에 있는 숲에서 아침햇살을 받으며 풀을 뜯고 있는 코끼리떼를 만났다.아프리카에서는 코끼리를 템보(Tembo)라고 부른다.이곳 동아프리카에서 서식하는 코끼리들은 21개월의 임신기간을 거쳐 세상에 태어난다.몸무게가 3t이나 나가는 초식동물이다.태어난 코끼리는 스무살이 되기까지 어미곁을 떠나지 않고 평균수명 60세를 누린다.수명을 다한 코끼리들은 자기들만의 은밀한 공동묘지가 있어서 죽음의 장소가 따로 있는 것으로 흔히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이들은 어린코끼리들을 무리의 가운데로 몰아넣고 둘러서서 이동하거나 생활한다. 코끼리떼를 버리고 초원으로 나간 상오11시경,우리들 앞에 이제 막 활동을 개시하려는 치타가 나타났다.우리들이 가까이 다가갔지만 사람들은 거들떠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치타를 이곳에서는 두마(DUMA)라고 부르는데,표범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다리가 더 길고 몸의 얼룩무늬가 표범에 비해 훨씬 작고 동글동글하다.그리고 몸체에 비해 머리의 크기가 표범보다 작다.치타는 대개 낮에 사냥하고 순간 속도 시속 1백12㎞까지 달릴 수 있다. ○6개월이면 먹이 사냥 그러나 전형적인 단거리 주자여서 최고속도를 유지할 수 있는 거리는 3백m이내다.날씬한 몸매로 전력질주하는 모습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동물이다.치타의 기다란 꼬리는 치타가 움직일 때 방향타의 구실을 하고 사냥할 목표를 향해 초고속으로 달릴 때는 몸의 균형을 잡아준다.먹이를 향해 달려간 치타는 먹이감의 목부근을 물어 일격에 질식시킨다.그들은 대규모의 집단을 이루며 사는 법이 없는 고독한 동물이다.질병에도 약해서다른 어떤 동물보다 심각한 멸종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임신기간은 3개월정도고 대개 3∼5마리의 새끼를 낳는다.이 새끼들의 활동은 매우 활달하고 공격적이다.자기들끼리 치고받으며 싸움을 하기도 하는데 이런 행동은 장차의 생존을 위한 훈련에 해당한다.어미 치타는 새끼가 태어난 지 6개월쯤 되면 살아 있는 먹이감을 새끼에게 던져준다.새끼가 직접 그 먹이감을 사냥하도록 교육하거나 어미가 먹이감을 직접 죽이는 모습을 새끼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다.그러나 그 새끼가 직접 초원으로 나가서 먹이를 포획할 수 있기까지는 태어나서 15개월이 지나야 한다.우리앞에 나타난 치타는 마침 구릉 아래서 느릿느릿 이동하고 있는 대여섯마리의 콩고니(KONGONI)를 지켜보고 있었다.하트형의 뿔을 가진 콩고니는 달리는 거리가 대단히 넓어 이들을 뒤쫓을 수 있는 동물은 치타뿐이라 한다.우리는 그 공격의 순간을 기다렸으나 치타는 그들의 이동을 지켜보고만 있을 뿐 좀처럼 공격을 시도할 낌새가 아니었다.기다리기 진력난 우리가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공격할땐시속 30마일 점심식사와 휴식을 위해 로지로 돌아가는 구릉지 계곡근처에서 우리는 코뿔소들을 만났다.사납게 생긴 겉보기와는 달리 파루(FARU)로 불리는 이 코뿔소 역시 코끼리와 마찬가지로 초식동물이다.코뿔소는 시야도 좁고 시력도 나쁘지만 일단 공격할 마음만 먹으면 시속 30마일의 속도로 대상을 향해 돌진한다.그러나 공격의 대상을 금방 잊어버리거나 자신이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돌진하다 말고 문득 멈춰서 유순하게 풀을 뜯곤 하여 대단히 멍청한 동물로 알려져 있으나 그건 사실과 다르다.검은 코뿔소는 그동안 너무나 많이 남획되어서 지금 케냐에 남아 있는 숫자는 1년분 사냥감도 안된다는 얘기다.운전사의 말을 빌리면 검은 코뿔소 수백마리가 작년의 가뭄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우리는 이들을 코뿔소라고 부르고 있지만 이들의 콧등에 날카롭게 솟아 있는 돌기는 사실 뿔이 아닌 응집된 털일 뿐이다. 일단 로지로 돌아와 사파리트럭에서 내려 먼지를 털고 있는데 사방에서 원숭이떼가 모여들고 있었다.아침이나 점심시간에 맞춰로지지붕과 잔디를 메울 정도로 많은 원숭이가 사방에서 모여든다.여행자로부터 음식찌꺼기나 과자부스러기를 얻어먹기 위한 것이다.그래서 식사때만 되면 로지의 종사원과 원숭이간에 쫓고 쫓기는 다툼이 벌어지곤 한다.그들은 여행자가 허용만 하면 객실까지도 서슴없이 뒤따라 들어올만큼 뻔뻔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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