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해체
    2026-01-11
    검색기록 지우기
  • 수색
    2026-01-11
    검색기록 지우기
  • 한일
    2026-01-11
    검색기록 지우기
  • 우주
    2026-01-11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5,326
  • [프로야구] 현대 유니콘스 농협서 ‘보쌈’

    통산 4차례 한국시리즈를 제패한 프로야구 명문 현대 유니콘스가 농협중앙회에 매각된다. 농협은 연고지 서울 이전과 내년 시즌 전면 드래프트 실시 등 구체적인 인수 조건을 즉각 들고 나왔다. 농협은 15일 오후 하일성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총장과 만나 올시즌부터 프로야구에 참여하기 위한 전제 조건을 이같이 제시했다. 농협은 또 오는 3월17일 시작되는 시범경기부터 목동야구장을 홈 구장으로 사용하고 싶다는 뜻도 밝혔다. 매입 대금은 역대 최저 수준인 134억원을 제시했다. 하이닉스의 현대 야구단 지분 76% 매입에 80억원, 현대가 인천을 양보하는 조건으로 SK에서 받은 54억원 ‘환불’ 등이다. 신상우 KBO 총재는 이날 KBS-1 라디오 ‘안녕하십니까, 이몽룡입니다’에 출연,“이번주 안에 결론이 날 것 같다.”고 말했다. KBO는 현대 구단의 원활한 매각을 위해 농협의 요구를 긍정적으로 검토할 방침이지만 순탄치 않을 전망이다. 우선 목동구장은 서울시야구협회에서 연간 500경기 이상을 치르고 있고, 전면 드래프트는 현대가 최근 이사회에서도 주장한 내용이지만 대다수 구단의 반대로 무산되는 등 8개 구단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현대는 2000년 SK가 창단되자 서울 입성을 위해 연고지인 인천·경기 지역을 SK에 양보했다. 그러나 모그룹의 유동성 위기로 이후 수원을 임시 연고지로 사용해왔다. 이에 따라 현대는 2003년부터 5년째 1차 지명에 참여하지 못했다. 농협은 이날 오전까지 “실무선에서 검토 중”이라며 조심스럽게 반응했지만 오후에는 보도자료를 내는 등 인수 의지를 적극 표명했다. 농협은 보도자료에서 “농산물 유통 및 종합식품 그룹의 성장동력의 일환으로, 농협 계열사를 컨소시엄 참여 대상으로 검토하고 있다.”며 “특히 과거 실업야구에서 빛을 발했던 경험을 되살려 농협그룹 도약에 따른 새로운 이미지 제고를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농협은 1959년 전신인 농업은행 야구단을 창단, 한국실업야구 탄생의 견인차 역할을 해오다 1993년 팀을 해체했다. 그러나 현대구단 인수는 벌써 농민 단체 등이 크게 반발해 진통이 예상된다.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는 보도자료를 내고 “프로야구단 운영이 농민 등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불투명한 데다 열악한 국내 스포츠 현실을 감안할 때 ‘밑빠진 독에 물붓기’식 운영이 우려된다.”며 즉각 철회를 주장했다. 농림부도 “농협의 본분이 아니다.”는 입장이다. 자유무역협정(FTA)과 도하개발어젠다(DDA) 등 현안이 산적한 상황에서 야구단 인수가 그렇게 서두를 일이냐는 것. 농림부는 농협중앙회 자회사의 사업에 대한 법률 검토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회 고위직 몇사람이 KBO와 의견을 주고받아 추진할 일이 아니라고 꼬집는 시각도 엄존한다.김영중기자 jeunesse@seoul.co.kr
  • 그리스 美대사관에 로켓탄 공격

    |파리 이종수특파원|그리스 아테네 중심가에 있는 미국대사관이 12일 대전차용 수류탄 공격을 받았다고 AP통신,CNN 등이 보도했다. 미국 국무부와 그리스 경찰은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커티스 쿠퍼 미 국무부 대변인은 “아테네 중심가 바실리스 소피아스 거리에 위치한 미국 대사관에서 현지시간으로 오전 5시58쯤 폭발사건이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비론 폴리도라스 그리스 내무장관은 이날 그리스 좌익단체인 ‘혁명투쟁’이 경찰에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고 밝혔다.극좌파 성향의 ‘혁명 투쟁’은 2002년 ‘11월17일’이라는 테러조직이 해체된 후 급부상한 단체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5월30일 요르고스 불가라키스 문화장관 자택 부근에서 일어난 폭탄테러도 이들 소행으로 전해졌다. 이날 수류탄은 건물 3층에서 터졌으며, 폭발 당시 충격으로 인근 건물의 유리창이 파손됐다. 그리스 경찰 관계자는 “도로에서 날아든 것으로 보이는 폭발물이 건물 화장실에서 폭발했다.”면서 “테러 행위”로 규정했다. 경찰 당국은 증거 확보를 위해 대사관 인근 아파트와 병원 등의 수색 작업을 벌이고 있다.아테네의 중심 도로에 위치한 대사관 주변을 경찰이 봉쇄하면서 도심 일대에서는 큰 교통혼잡이 빚어졌다.vielee@seoul.co.kr
  • ‘극단의 시대’ 뒤켠의 희망

    영국계 유대인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자신이 산 20세기를 “가장 별스럽고 끔찍한 세기였다.”고 회고한다.‘미완의 시대’(이희재 옮김, 민음사 펴냄)는 저자가 온몸으로 체험한 이 20세기의 이면사를 자서전 형식을 빌려 들려주는 책이다. 홉스봄은 1936년 케임브리지대학 시절 공산당에 가입,1990년대 초반 동유럽권의 몰락과 함께 영국 공산당이 해체될 때까지 끝끝내 공산당원으로 남을 만큼 자기 원칙과 소신에 투철한 마르크스주의자였다. 하지만 현실을 보는 눈은 더없이 유연했다. 홈스봄은 어디에서나 유대인이었지만 이스라엘에서도 ‘왕따’를 당했다. 호전적인 이스라엘 민족이 작은 땅덩어리 안에 모여 살기보다는 흩어져 사는 것이 오히려 인류를 위하는 길이라는 게 그의 믿음이다. 홉스봄에게 역사란 세계를 변화시키는 메커니즘을 발견하는 것, 인간이 참여해 만들어나가야 할 미완의 것이었다. 이 책의 원제 ‘Interesting Times’를 미완의 시대로 옮긴 것은 그런 뜻에서다.2만 5000원.김종면 기자 jmkim@seoul.co.kr
  • 노대통령 ‘신당’ 입장변화 조짐

    노무현 대통령이 여당 지도부에 개헌에 대한 협조를 부탁하면서 “(지역당 회귀를 뜻하는)‘도로 민주당’만 아니라면 여당이 통합신당을 추진하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친노(親盧)세력이 주축인 열린우리당 사수파도 최근 신당파의 ‘통합신당’ 요구를 전향적으로 수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상호 교감 속에 나온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노 대통령과 사수파가 비슷한 입장변화 조짐을 보이고 있는 형국이다. 이에 따라 노 대통령이 개헌을 매개로 여당의 정계개편 틀을 짜려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노 대통령이 11일 청와대로 여당 지도부를 초청해 오찬을 갖기 전,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장과 김한길 원내대표와 따로 가진 비공개 회동에서 이같이 말했다고 여권의 핵심관계자가 12일 밝혔다. 이 관계자는 “노 대통령의 발언은 ‘통합신당은 도로 민주당’이라고 비판하며 반대하던 기존 태도와는 180도 다른 것”이라면서 “개헌을 매개로 여권의 정계개편 논의가 바뀔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노 대통령은 최근 여권 핵심 관계자와 만난 자리에서도 비슷한 맥락에서 ‘통합신당 추진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통합신당에 반대해온 여당의 사수파가 입장을 선회하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여당의 핵심관계자는 12일 “사수파측에서 최근 산자부장관을 그만두고 당에 복귀한 정세균 의원을 당의장에 합의추대하는 것을 전제로 전당대회 의제 등 신당파의 핵심 요구사항을 상당수 수용할 뜻을 밝혔다.”고 말했다.‘당 해체’ 등의 단정적 표현만 사용하지 않는다면, 중재에 나선 중도파가 전대 의제로 내놓는 안을 전향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사수파의 한 의원은 “노 대통령의 개헌안을 여당이 뒷받침하기 위해선 당이 지금 한 목소리를 내줄 수 있어야 한다.”며 “그런 필요성이 전대 의제를 둘러싼 논쟁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대 준비위원회에 사수파 대표로 참여 중인 김태년 의원은 “서로 합의하기 위해 중도파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지만 전대 의제는 논의 중인 사안이며, 신당파 요구를 수용한 적도 없다.”고 부인했다.김 의원은 또 “협의 과정에서 ‘정세균 의원을 당의장으로 합의추대한다.’는 단서를 붙인 적도 없다.”면서 “당의장 추대 방식에 대해선 전대 준비위에서 본격적으로 논의한 바도 없다.”고 반박했다. 반면 신당파 내 강경기류도 거세지고 있다.‘희망21포럼’ 등 중도보수 성향의 4개 모임은 “신당 추진 동력을 마련하기 위해 ‘국민대통합신당추진 의원협의회’를 구성키로 했다.”고 이날 발표했다.전대가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 민주당이나 고건 전 총리 등도 협의회에 참여토록 확대시킬 계획이어서 탈당준비기구 역할을 담당할 가능성도 있다.황장석기자 surono@seoul.co.kr
  • 대한씨름협회, 연맹과 결별

    대한씨름협회(회장 최창식)가 한국씨름연맹(총재 김재기)과 결별을 공식선언했다. 씨름협회는 또 독자적인 민속씨름대회를 치르기로 결정했다. 씨름협회는 10일 르네상스 서울 호텔에서 민속씨름위원회 발대식을 갖고 협회 소속 선수 가운데 120명을 선발해 올해 7개 대회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최창식 회장은 “연맹과 최대한 협조해 대회를 운영하려 했으나 연맹측이 나를 사기 혐의 등으로 고소하는 등 더 이상 함께 갈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또 “앞으로 현재 2개인 실업팀을 8개 정도로 늘려 민속씨름위원회가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대회를 열 것”이라고 덧붙였다. 프로팀이 잇따라 해체된 뒤 그동안 유일한 프로팀 현대삼호중공업과 함께 협회 소속 선수들을 출전시켜 대회를 치르던 연맹은 이번 결별로 대회 개최를 하지 못하게 됐다. 하지만 씨름협회의 정상적인 씨름대회 개최 여부는 아직 불투명한 상태다. 협회는 2월 설날대회를 첫 대회로 열겠다고 밝혔지만 대회 진행 방식이나 장소 물색,TV중계 등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프로배구] 외국인코치 1호 대한항공 슈파

    [프로배구] 외국인코치 1호 대한항공 슈파

    “브라질 배구를 한국 배구에 접목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최근 프로배구 대한항공의 비상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부상을 이겨낸 ‘젊은 피’들의 약진과 문용관 감독의 용병술 등이 가장 큰 요인으로 분석되지만 프로배구 1호 외국인 코치 슈파(46)의 몫도 상당 부분 작용했다. 대한항공의 아킬레스건이라던 세터를 깎아 만든 ‘조각가’다. 본명은 아디우손 갈라스 잠봉. 슈파는 13살 배구를 시작할 때 선배가 지어준 닉네임이다.30세까지 18년간 브라질 코트를 누비던 그는 현재 국가대표팀 주전 세터 마우리시우를 키운 주인공이기도 하다. 브라질에 애인을 두고 혈혈단신 한국코트를 밟은 ‘노총각’ 슈파의 눈에 비친 한국 배구는 어떤 모습일까. 또 그가 접목시키려는 브라질 배구는 어떤 것일까. 한국전력과의 경기를 하루 앞두고 수원체육관에서 선수들과 호흡을 맞추고 있는 그를 찾았다. ●레안드로와 보비, 우열은? 슈파는 지난해 10월20일 대한항공과 6개월간의 계약을 맺고 한국에 왔다. 그가 방한 직전까지 하던 일은 최근 해체된 브라질 프로배구팀 위저드의 코치 겸 트레이너였다.‘특급 용병’ 대결이 한창인 레안드로(삼성화재), 보비(대한항공)와 함께 ‘삼바 배구 삼총사’인 셈이다. 사실 슈파는 브라질에서 레안드로와 보비를 가르친 스승이다.16세의 레안드로를 1996년부터 2년간 지도했다. 감독으로 있던 클럽팀 포트상파울루에서다. 또 보비와는 코치로 있던 인텔브라스에서 03∼04,04∼05 두 시즌을 함께 생활했다. 둘 다 자신의 제자인 만큼 말을 아낀다.“둘은 스타일이 비슷한 공격수다. 서브와 스파이크가 강하고, 수비에서는 처진다는 공통점이 있다.”면서 “하지만 레안드로는 보비에 견줘 성장 가능성이 더 많은 선수이고, 브라질 성인대표팀에 충분히 낄 만한 선수”라고 말했다. 이어 “보비는 나이가 레안드로보다 5살이나 많은 만큼 경험이 풍부하고 위기 대처 능력이 뛰어나다.”면서 “지난해 브라질 슈퍼리그에서 소속팀 시메드를 정상으로 이끈 선수로 결코 레안드로가 얕잡아 볼 선수는 아니다.”고 덧붙였다. ●폭발력, 그리고 스피드 본론이 시작됐다. 브라질 배구의 특징을 말해 달라는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명쾌했다.“강한 서브와 폭발력 있는 공격이 브라질이 이탈리아와 함께 세계 정상을 다투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그는 강조했다.“정확한 블로킹과 디그는 두번째, 그보다는 일단 바운스시킨 공을 스파이크로 응축해 연결시키는 스피드가 브라질 배구의 특징”이라고 잘라 말했다. 석 달 남짓 경험한 한국 배구에 대해 슈파는 “모든 선수들의 기량이 좋다.”고 전제한 뒤 “그러나 훈련방식에는 뒤떨어진 감이 있다.”고 토를 달았다. 달리기 등 사전 인터벌 훈련은 브라질에서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것. 그는 “각 선수의 포지션에 맞는 ‘맞춤식 훈련’을 통해 기량을 특성화시키는 게 중요하다.”면서 “배구는 격투기 다음으로 부상이 많이 발생하는 종목으로 불필요한 훈련은 체력 소비는 물론, 시즌의 성패를 좌우할 잔 부상을 낳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글 사진 수원 최병규기자 cbk91065@seoul.co.kr ■프로필 ●생년월일 1961년 8월27일 ●출생 브라질 캄피나스 ●체격 181㎝ 75㎏ ●가족 미혼,4남1녀 중 둘째 ●배구입문 13살때 ●포지션 세터 ●주요경력 클럽 포트상파울루 선수·코치·감독, 브라질 1부리그 사지아·우니자·팔레스트라·텔레스피, 이탈리아 여자배구 세리에A 시리우 코치·감독
  • 美 “한반도 전쟁때 대규모증파 어렵다”

    |워싱턴 이도운특파원·서울 이세영기자|미국은 한반도에 전쟁이 발생할 경우에도 대규모 전시증원군을 파병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한국측에 전달했다고 워싱턴 소식통이 8일(현지시간) 밝혔다. 미국의 군사 당국은 최근 한국측과 한·미연합사령부 해체와 전시작전통제권 이전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이같은 방침을 전했다고 소식통이 말했다. 현재 한·미연합사 ‘작전계획 5027’에 따르면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미군은 100일 이내에 본토와 일본, 괌 등으로부터 모두 65만명의 병력을 투입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한·미연합사가 해체되면 작전계획 5027도 소멸되기 때문에 전시증원군의 추가 파병 근거도 사라진다는 것이 미군측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군은 한반도 유사시에 대비한 독자적인 작전계획을 수립, 미군의 파병을 결정할 것이라고 한국측에 밝혔다고 소식통은 말했다. 미국측은 구체적인 파병 규모와 관련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작전계획 5027이 규정했던 65만명 수준의 대규모 병력은 보내기 어렵다는 사실을 우리측에 분명히 밝혔다고 소식통은 전했다. 그러나 미국측은 대규모 지원군 파병이 이뤄지지 않더라도 기동성을 갖춘 병력과 최신형 군 장비 등을 투입, 대북 전쟁 수행 능력이 약화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입장을 피력했다고 소식통은 덧붙였다. 미국측은 이와 함께 작전계획 5027의 소멸과는 상관없이 최근의 미군 병력 부족 현상 때문에 한반도에 대규모 증원군을 보낼 수 없다고 우리측에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과 미국은 당초 오는 25일 서울에서 안보정책구상(SPI) 회의를 열어 전시작전권 이양 시기 및 후속 대책 등을 협의할 예정이었으나, 미국측의 요청으로 회의를 다음달 8일로 연기했다고 소식통은 전했다. 이와 관련, 국방부 관계자는 “실제 미국이 우리측에 이같은 의사를 전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논리적으로 근거가 없는 시나리오”라고 일축했다. 이 관계자는 “미국이 전시증원군을 보내지 않는다는 것은 연합사 해체에 이어 미군이 한국에서 완전히 철수해 ‘개념적 동맹’만 유지되는 상태를 가정한 논리”라면서 “미국의 공식입장은 한·미연합사 해체 이후에도 전시에는 ‘압도적 전력’으로 한국군을 지원한다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엄연히 효력을 발휘하고 한국 땅에 미군이 주둔하는 상황에서 전시증원군을 보내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면서 “국내 보수진영이 제기하는 전작권 환수 반대논리의 복사판”이라고 평가절하했다. dawn@seoul.co.kr
  • 모래판 내분 재연

    모래판이 다시 분열 양상이다. 당장 새달 설날 대회를 비롯해 올해 민속씨름대회 개최가 불투명해졌다. 한국씨름연맹(프로)과 대한씨름협회(아마추어)의 주도권 다툼으로, 씨름판이 사실상 공멸하는 분위기다. 한국씨름연맹은 8일 “민속씨름대회를 함께 치러왔던 대한씨름협회가 2월 설날대회부터 협회 소속 선수들을 출전시키지 않겠다는 공문을 지난 2일 보내왔다.”면서 “협회가 입장을 바꾸지 않는다면 이번 대회는 사실상 무산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연맹은 또 “이는 2005년 연맹과 협회가 체결한 협의문에 반하는 행위로 대회 무산에 대한 책임 소재를 분명하게 가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2004년 말 LG와,2005년 신창건설 씨름단이 거푸 해체되고 프로팀이 단 1개만 남아 와해 위기에 몰렸던 연맹은 협회와 2005년 9월 ‘민속씨름 활성화를 위한 공동 협의문’을 채택해 활로를 찾았다. 지난해부터 유일한 프로팀인 현대삼호중공업과 아마추어팀인 지방자치단체 씨름단을 함께 출전시켜 대회를 꾸려왔던 것. 하지만 세미 프로 형식의 대회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협회는 기존 1억 2000만원이던 아마추어 육성 지원금을 3억 2000만원으로 인상하고, 현재 협상중인 KBS 중계권을 공동 명의로 계약하는 한편, 공동 명의로 대회를 열 것을 요구했다. 이에 연맹은 스폰서가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지원금을 대폭 올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제3자의 이해가 걸려 있는 중계권에 대해서도 난색을 드러내 불협화음을 내왔다. 연맹은 특히 협회의 일부 요구가 연맹 존립 자체를 흔드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반면 협회 내에선 연맹이 프로씨름단을 새로 창단하지도 않고, 지자체 씨름단 위주로 대회를 치르는 마당에 연맹 주도로 대회가 개최되는 것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협회 관계자는 “당초 한시적으로 선수를 지원키로 했으나, 언제까지 선수를 파견할 수 있을지 명분이 부족하다.”면서 “협회도 대회 개최 역량이 충분하고, 이제 씨름을 일원화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연맹과 협회가 재연한 샅바싸움에 팬들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다. 한 씨름팬은 “2년 전 밥그릇 싸움이 다시 재연돼 안타깝다.”면서 “씨름 발전을 위해 통 크게 힘을 모아야 하는 상황인데 이젠 뭉칠 수 없는 모래성이 될 것 같다.”며 분통을 터뜨렸다.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뒤집어 본 대선 여론조사 5대포인트

    뒤집어 본 대선 여론조사 5대포인트

    신년초부터 쏟아져 나오고 있는 올해 대선 관련 여러 여론조사에서 드러나지 않은 민심의 향배는 무엇일까?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각종 여론조사에서 부동의 1위로 나온 게 1차적 메시지라면 호남표 분화, 유권자의 보수화 현상 등은 별도의 심층 분석이 필요한 영역이다. 대선 승리를 꿈꾸는 각 대권주자 진영에서는 이러한 ‘2차 메시지’에 더 비중을 두지 않을 수 없다. 새해 주요 여론조사 결과에 숨어 있는 5대 포인트를 집중 분석한다. ●진보정권에 대한 평가? 본지와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KSDC) 여론조사에서 유권자들의 정치이념은 대체로 중도 보수화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현상은 국민의 정부에서부터 참여정부에 이르는 지난 9년의 국정운영에 대한 평가로 봐야 한다는 지적이다.KSDC 김형준 부소장은 이에 대해 “과거에는 추상적인 변화와 개혁주장으로도 표가 쏠렸으나 이제는 그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음을 유권자들이 알게 됐다.”고 지적했다. 이어 “지금은 후보들이 사후 검증과 실천이 가능한 경제 공약을 내놓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코리아리서치 김덕영 소장은 “최근 조사결과가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라는 지적은 맞지만, 유권자 성향이 보수화됐다고는 보지 않는다.”면서도 “유권자 입장에서는 ‘나를 잘살게 해주는 정권이 최고’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말해 대선주자들의 실용주의적 접근을 주문했다. ●네거티브 캠페인도 옛말? 네거티브 캠페인의 효과는 과거에 비해 약해질 전망이다. 역대 대선에서는 이른바 진보세력이 보수세력을 공격해 재미를 봤으나 이번 대선에서는 보수·진보간 여론몰이층이 팽팽해 그런 현상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여권이 과거와 달리 ‘당 따로, 정부 따로’인 점도 네거티브 선거전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후보별로는 이 전 시장보다는 박근혜 전 대표가 네거티브 전략에 취약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 전 시장의 경우, 주된 이미지가 ‘추진력’이어서 추진한 게 잘못됐다고 해야 성공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민주당 조순형 의원은 “이 전 시장은 청계천 복원 사업, 버스 전용차로제 등 눈에 보이는 실적을 보여줘 적임자라는 기대를 받고 있는 것 같다.”고 평가, 이런 관측을 뒷받침했다. ●막판 뒤집기는 옛말? 대선주자들은 대체로 이번 대선전이 양자구도로 갈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여권에서는 막판 뒤집기를 기대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16대 대선 1년 전 지지율이 2.5%였으나 막판에 당선됐듯이 이번에도 극적인 드라마 연출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권의 바람대로 되려면 몇가지 전제조건이 충족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서강대 이현우 교수는 정당은 지도자의 정서적 일체감, 지역적 기반, 유력한 대권후보가 있을 때 지지받는다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여권 대선후보들의 낮은 지지도는 이해할 수 있다. 여권 전체를 아우를 인물 부상은 여전히 불투명하고 호남·충청 등 기존의 지지기반은 해체되거나 붕괴되고 있어 16대 대선 때와 같은 극적인 드라마 연출은 어렵다는 것이다. ●지역주의는? 대부분의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지역주의는 과거에 비해 옅어지겠지만 여전할 것으로 예상했다. 미디어리서치 김 이사는 “이명박 지지가 호남에서도 10% 이상 나오는데 이것만 보면 지역적 표 쏠림 현상이 많이 희석됐다 할 수 있다.”면서 “향후 선거구도와 이슈 전개 양상에 따라 약해지기는 하겠지만 여전히 중요한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부동층도 한나라당 지지? KSDC 여론조사 결과, 부동층이 43%로 나왔으나 부동층을 대상으로 지지후보를 물은 결과, 기존 지지도에 큰 변화가 없었다. 바꿔 말해 부동층도 한나라당 지지층이 강하다는 것이다. 박현갑기자 eagleduo@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 추사 김정희, 중인들과 만나다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 추사 김정희, 중인들과 만나다

    시곗바늘을 조선 후기,200여년 전으로 돌려보면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들을 오늘에 새롭게 접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전문기술자 신분인 중인(中人), 즉 위항인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위항(委巷)은 좁고 지저분한 거리, 현재의 골목길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한양의 창덕궁을 중심으로 옥인동, 통의동, 누하동 등의 인왕산 자락과 청계천 언저리에는 궁중 기술자들이 살았다. 이들은 60여개의 시사(詩社)를 만들어 ‘위항문학’을 꽃피웠다. 특히 이들은 서양의 문물을 가장 먼저 접한 신지식인들이었다. 조선 후기 근대화로 가는 과정에서 이들의 실용주의적 역할이 지대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과연 이들이 어떻게 살았으며, 또 그 발자취들이 어떻게 남아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매우 흥미있는 일이다. 이들의 문화를 재발견하는 것 또한 의미있는 일이다. 연세대 허경진 교수의 눈을 통해 연중기획으로 이들의 궤적을 추적해 본다. 조선 최고의 서예가이자 실학자인 추사 김정희는 누구 못지않게 19세기초 중인들과 교류를 가진 양반 선각자였다. 그는 중인들의 모임터인 송석원의 글씨를 써주는가 하면 조수삼·이상적·오경석과 같은 중인들과 교류를 갖기도 했다. 한양 인왕산의 서당 훈장 천수경(千壽慶·1758∼1818)은 집안이 가난했지만 글 읽기를 좋아하고, 시를 잘 지었다. 옥류천(玉流泉) 위 소나무와 바위 아래에 초가집을 짓고, 호를 송석도인(松石道人)이라고 했다. 아들 다섯의 이름은 일송(一松), 이석(二石), 삼족(三足), 사과(四過), 오하(五何)이다. 첫째 소나무와 둘째 바위는 자기 집 이름을 아들에게 붙여준 것이고, 셋째는 아들 셋이면 넉넉하다는 뜻에서 ‘삼족’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아들 하나가 더 생기자 너무 많다는 뜻으로 ‘과(過)’라 했는데, 하나가 더 생기자 “이게 웬 일이냐.”는 뜻으로 ‘하(何)’라고 했다. 창덕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양반 사대부들이 살았고, 그 오른쪽 인왕산 자락과 청계천 일대에는 역관이나 의원 같은 중인, 경아전들이 많이 살았다. 지대가 높고 외져서 집값이 쌌기 때문에, 가난한 서리들이 관청과 가까운 인왕산쪽으로 올라와 살게 된 것이다. 인왕산의 물줄기는 누각골(지금의 누상동)과 옥류동(지금이 옥인동)에서 각기 흘러내리다가 지금의 옥인동 47번지 일대에서 만났다. 깊은 산속에서 옥같이 맑게 흐르는 이 시냇물을 옥계(玉溪)라고 했다. 인왕산에서 태어나 함께 자란 친구들이 옥계 언저리에서 자주 만나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놀았는데,1786년 7월16일 옥계 청풍정사에 모여 규약을 정하고 시사(詩社)를 결성했다. 달 밝은 밤 솔숲에 흩어져 앉아 술을 마시며 거문고를 뜯고 시를 읊다가, 정기적으로 모여 시를 지으며 공동체를 구성하자는 것이다.13명이 모여 이날 지은 글들을 모은 ‘옥계사(玉溪社)’ 수계첩에 ‘차서(次序)’가 실려 있어 구성원의 이름과 나이를 알 수 있다. 장혼은 발문에서 “장기나 바둑으로 사귀는 것은 하루를 가지 못하고, 술과 여색으로 사귀는 것은 한 달을 가지 못하며, 권세와 이익으로 사귀는 것도 한 해를 넘지 못한다. 오로지 문학으로 사귀는 것만이 영원하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문학으로 사귀는 것에 최상의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이들은 한달에 한번씩 모였고, 그때마다 제목을 정해 시를 지었다. 주로 정월 대보름, 삼짇날, 초파일, 단오, 유두(6월보름), 칠석, 중양절(9월9일), 오일(午日), 동지, 섣달그믐에 모였다. 또 기쁘거나 슬픈 일이 생기면 돈을 모아 축하해 주기도 했다.1791년 6월 보름날에도 옥계에 모여 시를 지었는데, 달밤에 술 마시며 시 짓는 모습을 이인문(李寅文·1745∼1821)이 그림으로 그렸다. 솔숲 큰 바위에 ‘松石園’이라 쓴 곳이 바로 이들의 모임터인데, 이날은 풍악 없이 조촐하게 모였다. 제시(題詩)는 여든을 바라보는 마성린(馬聖麟·1727∼1798)이 썼는데, 옥계사 동인이 아니라 선배격인 백사(白社) 동인으로 격려한 것이다. ●당대 문인들 송석원서 교류하다 승문원(承文院·외교문서 관장) 서리였던 마성린은 살림이 넉넉했기에 위항(委巷) 시인들의 후원자 노릇을 했다. 평생 인왕산 일대를 떠나지 못하고 몇차례 집을 옮겨가며 살았다. 그는 늘그막에 ‘평생우락총록(平生憂樂總錄)’이라는 자서전을 지었다. 제목 그대로 기쁘고 슬픈 한평생이다. 그의 집에 수많은 시인 화가 음악가들이 모여 풍류를 즐겼으며, 이제 친구들이 다 세상을 떠나자 후배들의 시첩에 와서 그림에 글씨를 써주며 격려했다. ‘송석원시사’가 장안의 화제가 되자, 문인들이 이 모임에 초청받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해마다 봄가을이 되면 남북이 모여 큰 백일장을 열었는데, 남쪽의 제목은 북쪽의 운(韻)을 쓰고, 북쪽의 제목은 남쪽의 운을 썼다. 날이 저물어 시가 다 들어오면 소의 허리에 찰 정도가 됐다. 그 시축을 스님이 지고 당대 제일의 문장가를 찾아가 품평받았다. 장원으로 뽑힌 글은 사람들이 베껴 가면서 외웠다. 무기를 가지지 않고 흰 종이로 싸우는 것이라서 백전(白戰)이라고 했는데, 순라꾼이 한밤중에 돌아다니던 사람을 붙잡아도 “백전에 간다.”고 하면 놓아 주었다. 송석원시사가 커지자, 천수경이 60세 되던 해에 당대의 명필 추사 김정희에게 글씨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추사는 송석원시사가 결성되던 해에 태어났는데, 어느새 그에게 글씨를 써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이름이 났던 것이다. 추사의 집은 충남 예산 용궁리에 있는 추사고택이 잘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인왕산 건너편의 통의동에 주로 살았다. 수령 600년의 통의동 백송(白松)이 10여년 전에 수명을 다해 쓰러졌는데, 이 나무가 바로 추사의 집 정원수였다. 추사의 증조할아버지 김한신이 영조의 둘째딸 화순옹주에게 장가들어 월성위에 봉해지자, 영조가 통의동에 큰 저택을 하사했다. 너무 큰 집이어서 월성위궁(月城尉宮)이라고 불렸다. 추사는 김한신의 장손, 큰아버지 김노영에게 양자로 들어가 대를 이었는데,12세에 양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이어 할아버지 김이주(형조판서)마저 세상을 떠나 큰 집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었다. ●추사 32세에 송석원을 쓰다 송석원시사의 부탁을 받은 추사는 예서체의 큰 글자로 ‘松石園’을 쓰고, 그 옆에 잔 글씨로 ‘정축(丁丑) 청화(淸和) 소봉래서(小蓬萊書)’라고 간기를 쓴 뒤에 낙관했다. 정축년은 1817년이니, 추사의 나이 32세. 청화는 음력 4월(또는 2월)이고, 소봉래는 추사의 또 다른 아호이다. 예산 고향집 뒷산을 소봉래라 했는데, 청나라에 다녀온 뒤부터 호를 자주 바꾸는 습관이 생겼다. 1809년 10월에 호조참판으로 있던 생부 김노경이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가게 되자,24세 되던 추사도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따라나섰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는 중국과 우리나라 사이에 사신뿐만 아니라 상인·학자·승려들이 자유롭게 오가며 교류했지만, 조선초부터는 국경을 폐쇄하고 사신만 오가게 했다. 합법적으로 가볼 기회는 사신, 또는 사신의 수행원이 되는 길밖에 없었다. 사신들은 자기의 자제를 개인 수행원으로 데리고 가서 견문을 넓혀 주었는데, 이를 자제군관이라고 했다. 추사의 스승 박제가가 자제군관으로 가서 청나라의 앞선 문물을 보고 돌아와, 추사에게 반드시 청나라를 구경하라고 당부했다. 청나라의 문인 학자들에게는 이미 추사를 한껏 자랑해 놓았다. 추사는 연경에서 당대 최고의 학자 완원(阮元)을 만나 완당(阮堂)이라는 호를 받았다. 추사는 이때부터 상황에 따라 당호와 아호를 새로 짓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나 추사로서는 금석학자이자 서예가인 옹방강(翁方綱)을 만난 것이 더 큰 행운이었다. 그의 서재 석묵서루에는 희귀본 금석문과 진적(眞蹟) 8만여점이 소장되어 있었는데, 추사는 조선에서 전혀 볼 수 없었던 진본들을 맘껏 보았고, 모각본까지 선물받았다. ●청 문물 경험후 서체 달라져 청나라에서 돌아온 뒤에 그의 글씨가 달라졌을 것은 당연하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추사의 글씨가 바뀐 과정을 논하면서, 청나라에 다녀온 뒤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완옹(阮翁)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書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董其昌)에 뜻을 두었고,(청나라에 다녀온 뒤) 중세에는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그의 글씨를 열심히 본받았다.(그래서 이 무렵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꺼운데다 골기(骨氣)가 적다는 흠이 있었다.” 이러한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글씨가 바로 ‘松石園’ 석 자이다. 장중하면서도 아름답다. 박제가의 제자였던 추사는 신분의 벽을 넘어서 송석원시사의 조수삼과 가깝게 지냈으며, 이상적이나 오경석 같은 역관 제자, 조희룡이나 전기 같은 중인 화가들을 길러냈다. 위항시인의 시가 순수하다는 성령론(性靈論)이나 ‘인재설(人才說)’도 그러한 생활 속에서 나왔다. 송석원은 위항시인들의 모임터로도 이름났지만 김수항(안동 김씨), 민규호(여흥 민씨), 윤덕영(해평 윤씨) 등의 권력가들이 서로 집을 넘겨주며 살았던 곳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지금은 이 일대가 고급 주택가로 바뀌었지만, 시멘트 벽속에 ‘松石園’ 글씨가 아직도 남아 있고, 복개된 길 밑으로는 옥계가 흐르고 있다. 인왕산 재개발을 앞두고, 이 일대의 문화를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 허경진 연세대 교수 > ■ 중인이란 중인(中人)이란 신분계급으로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의 사이를 말한다. 중인이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좁은 의미로는 주로 중앙의 여러 기술관청에 소속되어 있는 역관(譯官)·의관(醫官)·율관(律官)·산관(算官)·화원(畵員) 등 기술관원을 총칭했다. 이들은 잡과(雜科) 시험에 합격, 선발된 기술관원이거나 잡학 취재(取才)를 거쳐서 뽑혔다. 넓은 의미로는 중앙의 기술관을 비롯하여 지방의 기술관, 그리고 서얼(庶孼), 중앙의 서리(胥吏)와 지방의 향리(鄕吏), 토관(土官)·군교·교생·경아전 등 여러 계층을 포괄적으로 일컬었다. 양반 사대부 계층에 비하여 차별대우를 받았으며, 신분과 직업은 세습됐다. 육조(六曹)와 삼사(三司) 등의 일반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고, 한품서용제(限品敍用制)에 의해 관직 승진에도 제한이 가해졌다. 또 이들은 지방 양반의 명단인 향안(鄕案)에 등록되지 못했고, 향교(鄕校)에서도 양반의 아래에 앉아야 하는 등 천시를 받았다. 하지만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전문적인 기술지식이나 행정경험을 통해 양반 못지 않는 능력과 경제력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그 가운데 특히 오늘날의 통역관에 해당되는 역관(譯官)들은 17세기부터 청(淸)나라와의 무역이 왕성해짐에 따라 자주 청나라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밀무역을 하거나, 상인들의 무역업무를 교섭해주고 돈을 받아 부자가 된 자들도 많았다. 이들은 전문적인 기술지식과 특수한 문서양식, 그리고 독특한 시문(詩文)인 위항문학(委巷文學)을 발전시켰으며 외세에 의한 변동기에 민감한 정세판단으로 전통문화의 해체와 근대화 과정에서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 필자 허경진은 ▲1952년 목포 출생 ▲70년 제물포고 졸업 ▲74년 연세대 국문학 학사 ▲84년 연세대 박사 ▲84년∼93년 목원대 교수 ▲93∼2001년 미 하버드대 동아시아학과 연구교수(한국한시) ▲01년∼현재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저서=우리 옛시(80년), 허균의 시화(82년), 평민열전(89년), 다산 정약용 산문집(94년), 연암 박지원 산문집(94년), 매천야록 매월당집(95년), 선조독살 전말기(95년), 조선위항문학사(97년), 허균평전(02년), 악인열전(05년) 등 다수.
  • [외환위기 그후 10년] 외환위기가 남긴 교훈·과제

    [외환위기 그후 10년] 외환위기가 남긴 교훈·과제

    외환위기가 발생한 지 올해로 10년이 됐다.6·25 전쟁 이후 최대의 국난으로 일컬어지지만 역설적으로 우리 경제에는 ‘기회’로 작용하기도 했다. 기업과 금융 부문의 구조조정으로 ‘대마불사’의 신화는 깨졌고 노동집약적 산업구조에 국내·외 자본과 기술이 접목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모든 게 ‘미완(未完)’으로 끝나 지금은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지적도 없지 않다. 성장 단계에서 당연히 나타날 수밖에 없는 양극화에만 몰두하는 것도 시장 경쟁을 저해시키는 요인이다. 노동의 유연성이 개선되지 않은 상태에서 비정규직만 늘어 성장 동력에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 외환위기가 남긴 교훈과 앞으로의 과제를 짚어본다. ●미흡한 구조조정, 성장동력 떨어뜨려 외환위기를 1년만에 극복한 나라는 세계에서 거의 없다. 보통 2년 6개월은 걸린다. 특히 국제통화기금(IMF) 및 세계은행과의 합의에 따라 추진된 각 부분의 구조조정은 시장 시스템을 경쟁체제로 전환시키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다. 건전성 규제를 통해 주먹구구식이던 금융기관의 대출관행을 없앴고 부채비율 감축과 결합재무제표 도입 등으로 기업의 지배구조와 경쟁력을 한 단계 높였다. 이 과정에서 부실 은행과 기업들이 정리됐고 샐러리맨의 신화를 창조했던 대우그룹은 해체됐다. 공기업 민영화도 가속화했고 외환자유화도 추진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국가신용등급은 투자적격으로 올라섰고 바닥이 드러났던 외환보유고도 1999년 6월 말 600억달러를 넘었다. 하지만 구조조정의 추진력은 급속히 떨어졌다. 금융시장이 안정되기 시작한 99년 하반기부터는 청와대가 남북관계 개선에 더 관심을 보였다. 한국금융연구원의 최흥식 원장은 “구조조정을 하다가 말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 경제가 그 후유증을 앓고 있다.”면서 “특히 중소기업의 경우 퇴출될 기업까지도 지원해 성장력 저하의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현정택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도 “지금이라도 기업과 서비스 분야의 구조조정은 지속해야 한다.”고 했다. ●양극화 부각 복지에 주안점 둬선 곤란 외환위기로 중산층이 무너진 것은 사실이다. 통계청의 조사에도 우리나라 가구주의 45.2%는 하류계층이라고 대답했다. 이는 3년전보다 2.8% 늘어난 것이다. 외환위기 이전 가구당 가처분 소득 증가율은 10.5%였으나 환란 이후에는 4%로 급락했다. 상위 20% 계층은 가처분 소득 증가율이 10.2%에서 4.5%로 떨어진 반면 하위 20% 계층은 10%에서 2.3%로 급락, 큰 차이를 보였다. 최흥식 원장은 “구조조정의 결과 소득격차는 더 벌어졌고 외환위기가 기폭제가 된 것은 사실”이라면서 “하지만 양극화 문제는 경제 발전단계에서 늘 제기되는 과제”라고 말했다. 따라서 양극화 문제를 부각시켜 복지에만 정책의 주안점을 둬서는 곤란하다고 했다. 우리의 성장 규모에 비춰 복지가 크게 낙후됐기 때문에 복지정책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하지만 성장이 우선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나아가 전문가들은 시장의 경쟁시스템을 강화하는 데에 무게중심을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경제연구원의 배상근 박사는 “경제 주체들간 신뢰와 결합력이 약해지면서 정부정책을 신뢰하지 못하게 됐다.”면서 “창구지도나 주택담보대출 축소 등 과거와 같은 정책은 통하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정책 추진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과감한 인센티브를 주는 시장 친화적 정책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우리 경제는 아직 성장에 배고픈 단계” LG경제연구원은 외환위기 이후 우리 경제의 가장 큰 문제로 설비투자 부진을 꼽았다. 유형자산 증가율의 경우 외환위기 이전에는 15.4%였는데 최근에는 1.8%로 뚝 떨어졌다는 것. 배상근 박사는 “우리 경제를 자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비교해서는 안 된다.”면서 “사실 우리 경제는 아직도 성장에 배고픈 단계”라고 말했다. 이규성 전 재정경제부 장관은 최근 펴낸 ‘한국의 외환위기’라는 저서에서 “저출산과 고령화에 따른 생산가능인구의 감소는 성장잠재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라면서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유아보육과 교육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노인에 대한 사회적 부양시스템을 정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백문일 기자 mip@seoul.co.kr
  • [외환위기 딛고 일어선 근로자·기업들] 샘솔정보기술 양태준 사장

    [외환위기 딛고 일어선 근로자·기업들] 샘솔정보기술 양태준 사장

    서울 구로디지털단지의 한 사무실. 샘솔정보기술 양태준(40)사장의 출근길은 활기차다. 그에게 구조조정 대상자라는 어두운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다. 10년 전 외환위기 한파 속에 정든 직장을 떠나야 했던 그는 오늘날 우수 중소기업인으로 성장했다. 1988년 현대전자에 입사한 양 사장은 94년 현대정보기술로 자리를 옮긴 뒤 영상기기와 네트워크 영업을 해왔다.97년 말 외환위기가 몰아닥치자 현대정보기술은 그가 몸담았던 영상팀을 해체했다. 하루아침에 10여년을 몸담았던 직장에서 쫓겨난 그는 막막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 옛 직장에서 동고동락하던 동료 5명과 퇴직금을 모은 1억원으로 빔 프로젝터를 판매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이렇다 할 아이템이나 기술도 없이 의지만으로 출발했던 그들에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결국 2년만에 사업을 접어야 했다. 탈출구는 ‘블루오션’을 찾는 것이었다.“믿을 만한 것은 몸뿐이고 열심히 뛰는 것”이라는 양 사장은 실패에 좌절할 틈도 없이 방방곡곡을 누볐다. 그는 종합상황 관제시스템 분야에 도전하기로 했다. 국내산 장비가 없어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따라서 일본기업의 신뢰를 얻는 일이 최우선이었다. 하지만 외환위기 여파로 한국기업과 금융기관에 대한 일본기업의 불신의 벽은 높기만 했다. 지인이었던 일본 전문가와 일본기업의 문턱이 닳도록 찾아다녔다. 양 사장과 샘솔정보기술이 도입한 관제시스템은 방재센터, 재난센터에 50·70인치 대형스크린 6개를 기본세트로하는 대형스크린디스플레이(LSD)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었다. 2002년 본격적으로 관제시스템 시장에 뛰어든 샘솔정보기술은 선발주자들을 제치고 선두로 나섰다. 지난해 매출액은 106억원.5명이었던 직원들은 40명으로 늘어났다. 그가 내세운 경영원칙은 신뢰, 책임, 권한이다. 양 사장은 “자신이 잘하는 일만 하고 나머지는 나보다 잘하는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양 사장은 스스로를 “내 회사가 아닌 우리의 회사에서 월급을 받는 직원의 한 사람”이라고 겸손해했다. 양 사장은 10년 전의 아픈 기억을 잊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를 지탱해준 것은 가족들의 믿음이었다. 양 사장의 아내는 “언젠가 그만둘 일이 오히려 잘됐다.”며 해고당한 남편에게 용기를 줬다. 그는 “멀지않아 수입국인 일본에 역수출하는 기업으로 성장하겠다.”는 다부진 포부를 밝혔다. 박경호기자 kh4right@seoul.co.kr
  • [시론] 부동산과 세밑 거리의 아이들/김지우 소설가

    [시론] 부동산과 세밑 거리의 아이들/김지우 소설가

    한차례 눈도 지나가고 이른바 세밑이다. 유난히 가족애가 강조되고 그 어느 때보다 가슴이 훈훈해지는 온정적인 달이다. 그러나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인해 상대적 박탈감에 절대적 빈곤감까지 가세되어 세밑이 온통 아우성이다. 화두도 부동산이요, 딜레마도 부동산이요, 오로지 부동산만이 생의 증거인 것처럼 자발없다. 그리고 가출 청소년들은 여전히 차가운 겨울 밤거리를 헤매고 있다. 가정과 학교를 완전히 떠나 ‘거리의 아이들’로 소위 독립생활을 하고 있다. 거리의 아이들은 먹고살기 위해서 무엇이든 한다. 속칭 ‘삥뜯기, 자판기 털이, 차털이’ 등 범죄의 유혹에 빠져 들기도 한다. 원조교제 등 성매매를 통해 생활비를 벌기도 한다. 가출한 미성년자라는 불안한 신분 때문에 20만∼30만원에 불과한 아르바이트 돈을 떼이는 일도 허다하다.PC방이나 찜질방을 전전하거나 1평도 채 안 되는 쪽방에서 하루를 한 끼니로 때우거나 굶으면서 산다. 이런 거리의 아이들이 적게는 10만, 많게는 100만명이라고 한다. 더욱 놀라운 건 가출 청소년 4명 중 1명이 초등학생이다. 급속한 가족해체의 단면을 보여준다. 가출 유형도 옛날과는 너무 다르다. 집 바깥의 세상에 마음을 빼앗겨 세상을 향해 나가는 추구형 가출이나 시위형 가출, 부모의 과도한 통제나 기대로부터 자유롭기 위한 도피형 가출은 서랍 속 고전이 됐다. 유희추구형 가출은 더더욱 아니다. 가정 내 폭력을 피하기 위한 탈출형 가출이나 가정이 파괴되면서 거리로 나선 버려진 가출인 경우가 태반이다. 말하자면 생계곤란형 가출인 셈이다. 그러나 정부의 청소년정책은 가정과 학교에 소속된 아이들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아무 소속이 없는, 존재하면서도 존재감이 없는, 유령같은 존재인 거리의 아이들은 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쉼터나 그룹 홈 같은 시설은 수용 위주의 정책으로 통제와 관리가 우선이다. 따라서 거리 생활로 지친 아이들에게 그다지 쉴 만한 공간이 되지 못한다. 집과 가족에게서 탈출했음에도 거리의 아이들은 ‘가족적인’ 공간과 ‘집 같은’ 공간을 너무도 절실히 원한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그리운 게 가족이라고 눈시울을 붉힌다. 그나마도 단기쉼터는 한두 달 정도밖에 머물 수 없다. 결국 아이들은 다시 거리에서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가정이 해체됐기 때문에 돌아갈 가정, 부모도 없고 학교도 다니지 못한다. 기능적으로 해체된 가정이 많아 집으로 돌려보내도 가출을 반복한다. 그들에게 진정한 의미의 집은 없다. 이들의 장래가 염려스럽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회의 몰락한 계층, 낙오자 계층을 이룰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이들을 각종 범죄의 세계로 유혹하는 인터넷 ‘청소년가출’ 관련 카페가 한둘이 아니다. 이들이 홈리스나 부랑아가 되느냐 안 되느냐는 사회적 관심과 실질적 도움에 달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단순 숙식제공과 보호로는 이 복잡하고 다양한 위기의 아이들을 가정과 사회로 복귀시키기 어렵다. 가족적 분위기에서 학업 등 일상생활을 유지하며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중장기 쉼터나 그룹 홈이 필요하다. 세밑 화제가 단연 부동산인 작금, 부동산을 소재로 시를 쓰겠다는 시인까지 나서고 있는 실정이고 보면 할 말 다 하지 않았는가. 집은 없고 온 천지에 부동산만이 있을 뿐이니, 집과 부동산 사이의 머나먼 갭 속에서 이 세밑에 집을 나와 집을 찾는 아이들, 그들이 돌아갈 집은 어디인가. 김지우 소설가
  • [사설]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더욱 확산돼야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기업과 내수기업,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으로 일컬어지는 양극화문제는 이제 우려의 수준을 넘어 시급히 해소하지 않으면 안될 국가적인 병리현상으로 진전됐다. 양자간에 연결고리가 단절됨에 따라 사회통합을 저해함은 물론, 성장잠재력까지 좀먹고 있다.‘고용없는 성장’도 아랫목의 온기가 윗목으로 전파되지 않은 탓에 나타난 현상이다. 따라서 양극화 해소를 위한 ‘상생’과 ‘협력’은 잘 나가는 쪽의 시혜나 곤궁한 측의 필요가 아니라 국가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필요충분조건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밑을 앞두고 어제 참여정부 들어 네번째로 열린 대기업·중소기업 상생협력 성과보고회는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더구나 노무현 대통령은 그제 부산 지역인사들과의 오찬에서 정부 바깥에서 제일 센 특권구조로 재계를 지목하며 해체의 대상으로 지목했던 터다. 노 대통령으로선 양극화의 최대 수혜층인 대기업이 정서적으로 대척점에 있지만 상생을 위해 협력의 손길을 내밀 수밖에 없는 존재로 파악하는 듯하다. 노 대통령이 보고회에 앞서 4대그룹 회장과 전경련·대한상의 회장을 별도로 접견하고 그간의 노력을 격려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그럼에도 우리는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보고회 개최 이후 대기업의 협력업체에 대한 현금결제비중 확대, 기술 전수, 해외시장 공동 개척 등 동반자적 협력노력이 확산되고 있는 점에 주목한다. 타의로 출발했지만 글로벌 경쟁시대에 상생과 협력만이 ‘윈-윈’의 유일한 해법임을 대기업 스스로가 인식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상생과 협력은 일부 대기업에 한정된 초보적인 단계라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이러한 공존의 노력이 중견기업으로까지 확산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세제상의 혜택 등 정책적인 뒷받침이 반드시 병행돼야 한다.
  • [사설] 노 대통령의 언론관 문제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제 부산에서 밝힌 편협하고 비뚤어진 언론관은 일일이 반박하기조차 민망하다. 재벌과 언론을 특권세력으로 규정하고는 자신을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이들과 싸워 나가는 자리에 세웠다. 전날 국무회의에서 “앞으로 할 말 다 하겠다.”고 한 것이 결국은 이렇게 현실을 호도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립을 부추기면서 자신의 입지를 넓혀 나가려는 뜻이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노 대통령은 “정부에선 검찰이 좀 세고, 밖에서는 아무래도 재계가 세고 다음이 언론 아니냐. 특권구조, 유착구조를 거부하고 해체하자는 민주주의 발전전략을 갖고 있기 때문에 특권집단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경언(經言)유착의 고리를 자신이 끊으려 하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부당한 비판을 받고 있다는 주장이다. 참여정부의 실정과 이에 대한 언론의 정당한 비판을 싸잡아 오도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허물을 덮고 비판을 비켜가려는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노 대통령은 심지어 “아직도 기업에다 손 벌리는 사람이 있다.”“재벌회장이 구속되면 언론사가 재미 보는 구조 아니냐.”고도 했다. 노 대통령식 거친 표현을 빌자면 언론을 마치 기업 등쳐 먹는 집단쯤으로 매도한 것이다. 이는 대다수 언론에 대한 모욕이다. 경제정의 실현을 위해 법을 어긴 경제인을 엄히 단죄할 것을 주장한 것이 언론이며, 일반 국민과의 형평을 무시하고 불법 정치자금을 건넨 경제인들까지 사면하며 손을 내민 쪽이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임을 되돌아봐야 한다. 노 대통령은 언론에 대한 무분별한 공격으로 국면 전환을 꾀하려 해선 안 된다. 국민에게 적개심을 부추기고 편을 가르려 하지 말아야 한다. 이념과 지역으로 갈라졌던 4년 전으로 나라를 돌리려 하지 않기를 바란다. 국민이 용납하지 않는다.
  • 앞 못보는 전제덕, 그가 연주하는 하모니카의 영롱한 선율

    앞 못보는 전제덕, 그가 연주하는 하모니카의 영롱한 선율

    마음으로 부는 하모니카. 육체적으로 시각장애우임은 분명하지만, 음악에 있어서만큼은 자신의 핸디캡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장애로 인한 연민보다는 자신의 음악으로 평가받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이자 최고의 재즈 하모니카 연주자 전제덕.2년 만에 2집앨범 ‘왓 이즈 쿨 체인지(What Is Cool Change)를 들고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1집은 하모니카의 청승맞은 이미지를 변화시키고, 대중과의 친밀감을 높이기 위해 멜로디 중심으로 만들었어요. 어쿠스틱한 사운드로 따뜻함과 정감 등을 강조했죠. 이에 반해 2집은 일렉트릭과 어쿠스틱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음악으로 확 바꿨어요. 앨범 제목에서 느껴지듯, 음악과 음악가는 항상 변해야 하니까요. 간단한 리듬에 양념처럼 여러 악기의 소리를 얹은 펑키 사운드 등 리듬을 중시한 차가운 음악을 추구했죠.” 작은 악기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선물하는 그는 197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생후 보름 만에 찾아온 원인모를 열병은 그의 시력을 앗아갔다.7살 되던 해, 시각장애자 특수학교인 인천 혜광학교에 입학한 그는 입학하자마자, 교내 브라스 밴드에서 북을 연주하며 음악과 처음 만나게 된다. 그러다 중학교 1학년때 재정문제로 밴드가 해체되자, 이번엔 사물놀이에 입문해 ‘장구잡이’로 활동하게 된다.“태생적으로 타악기에 관심이 있었나 봐요. 타악기는 리듬이고, 음악은 리듬으로 귀결되죠. 리듬의 변화는 곧 장르의 변화라는 말과도 같고요. 전 이 리듬에 일찍 눈을 뜬 것 같아요.” 하모니카에 천착하게 된 것은 단순히 취미 때문. 이후 재즈를 이해하면서부터는 점점 연주에 깊이를 더해가게 된다.“사실 처음엔 쉬운 악기라고 생각했고, 실제 그랬죠. 하지만 한 걸음 더 나가 보니 음악의 세계, 전문가의 영역이더군요. 쉽게만 생각했다가 큰코 다친 격이죠.”그의 하모니카 세계가 한단계 도약하게 된 계기는 1996년 라디오 방송을 통해 벨기에 출신 재즈 하모니카 연주자 투츠 틸레망의 연주를 듣고 나서부터. 투츠의 연주에 감동을 받은 전제덕은 그의 음반을 모두 섭렵, 스승도 악보도 없이 독학으로 재즈 하모니카를 익혀 나간다.“서적 등 자료를 통해 받아들이는 음악에 관한 정보가 남들보다 많이 늦죠. 일반인들은 텍스트 북을 한번 보면 금방 아는데, 전 볼 수가 없으니 몸으로 깨우칠 수밖에 없었어요. 전공서적 1권을 점자책으로 만들자면 수십권이나 될 테니, 그런 걸 만들겠다는 사람도 없었고요.CD를 사서 듣고 또 듣고, 라디오의 재즈 프로그램이라면 밤이건 새벽이건 기를 쓰고 들었죠. 녹음을 해서 다시 들어 보기도 하고요.” 그리고 마침내 2003년. 재즈 보컬 말로의 3집 음반 ‘벚꽃지다’에 음반 세션으로 참가해 평단과 언론으로부터 “영혼까지 흔들 만큼 짜릿하고 영롱한 소리”라는 극찬과 함께 ‘한국의 투츠 틸레망’이란 별명까지 얻게 된다.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장애우들의 고민을 일반인들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워요. 저 역시 음악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안마사 등의 일을 하고 있겠죠. 후배들에게 성공한 역할모델이 되고 싶어요. 그러려면 내 자신이 먼저 치열한 삶을 살아야겠죠. 프로의 세계에 동정이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으니까요.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김근태·정동영 28일 ‘신당 추진’ 발표

    당 진로를 놓고 ‘장외싸움’을 해온 열린우리당 신당파와 당 사수파, 중재파가 27일 처음으로 의원워크숍을 통해 맞붙었다. 격론 끝에 2월 14일 전당대회 개최에 합의한 것을 제외하곤 ‘합의이혼’과 ‘노무현 대통령 탈당 요구’ 얘기까지 나오는 등 핵심의제에 대한 간극은 좁혀지지 않았다. 당 지도부는 추후 이 문제를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워크숍은 각 정파를 대표해 나온 의원들의 지정토론으로 불붙었다. 사수파의 김형주 의원은 “정치공학적으로 시도하는 통합은 감동을 줄 수 없다.”며 신당파를 비난했다. 그는 “전대에서 보다 치열한 토론을 하되 전대 준비위원회가 실질 권한을 갖고 하자.”고 말했다.‘전대 규칙’인 당헌·당규를 지도부가 기간당원제에서 기초당원제로 개정한데 대해선 인정할 수 없다고 했고,‘3월로 전대를 미루자.’는 주장도 고수했다. 신당파는 대대적으로 반격했다. 양형일 의원은 “전대의 절차 문제는 본질적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민심이 우릴 떠났다는 것이다.”고 말했다. 전대에 대해선 “통합신당을 결의하고 실질적 권한을 위임받는 지도부를 선출하는 전대여야 한다.”고 못박았다. 그는 “진정으로 합의가 이뤄지기 어려우면 (사수파와)합의이혼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임종석 의원은 “평화개혁세력은 사분오열돼 있고 열린우리당이 중심이 아닌 만큼 통합신당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면서 “신당을 창당, 평화개혁세력이 재결집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반면 중재파 오영식 의원은 “전대에선 평화개혁세력 대통합을 결정하고 지도부를 합의추대한 뒤, 지도부에 전권을 위임해 통합을 추진하게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뒤이은 자유토론에서도 입장이 명확히 갈렸다. 신기남 전 의장은 “전대가 당 해체를 전제로 하는 요식행위여서는 안된다.”고 했고, 정청래 의원은 “‘누구는 어느 쪽, 어느 파다.’ 같은 ‘쪽파 논쟁’은 안 된다.”고 말했다. 신당파에선 노 대통령에 대한 비판도 쏟아냈다. 문학진 의원은 “퇴임 후 구상 얘기하지 말고 퇴임 전까지 국정에 몰두해달라.”고 했고, 임종석 의원은 “적어도 전대가 끝난 뒤엔 대통령은 당 일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송영길 의원은 통합신당 추진을 ‘도로 민주당’으로 비판한 노 대통령을 가리켜 “신지역주의 도그마에 빠진 게 아니냐.”고 비판했다. 이와 관련, 김근태 의장과 정동영 전 의장은 28일 긴급 조찬회동을 갖고 당 진로와 관련, 통합신당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을 제안하는 내용의 합의문을 발표할 예정이다. 황장석 나길회기자 surono@seoul.co.kr
  •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52·끝) 에필로그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52·끝) 에필로그

    이것이 마지막 회의 글이다. 이미 1년이 경과했다. 그 동안 이 졸고들을 성실하게 읽어주신 독자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올린다. 그리고 철학산책과 같은 칼럼을 기획해 주신 서울신문사에도 역시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철학은 별로 대중성이 없는데, 이렇게 과감하게 신문 한쪽 지면을 할애한 것은 천학비재한 나에게 큰 짐이었고 동시에 행운이었다. 철학이 대상학이 아니고 사유학이라고 한다면(50회 글 참조), 서울신문사의 기획은 아마도 독자들에게 사유하는 철학의 맛을 알리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신문에 연재되는 철학적 글쓰기는 쉬우면서도 깊이가 우러나와 사색의 자료가 되어야 하는데, 나의 모자라는 재주로는 그런 복합적 요구를 만족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보려고 했으나, 평가는 독자들의 몫이겠다. ●철학공부는 전공 틀 벗어나 사유의 날개 펴야 내가 한 평생 철학공부에 매진해 오는 도중에 조금 깨달은 바가 있다. 한국의 일반적 철학의 풍토에 대한 자기 반성과 유사한 것이다. 철학은 과학과 달라서 전공의 벽에 갇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과학은 대상학이기에 전공으로 세밀화될 수 있으나, 철학은 그렇게 공부해서 결코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일반적 철학의 풍토가 너무 전공의 벽에 갇혀 사유의 날개를 펴지 못한다는 것이다. 동서고금에 그 이름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철학자치고 좁은 전공의 벽에 갇혀 천착한 이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둘째로 한국의 철학 풍토는 사유는 적게 하고, 개념적 지식을 쌓는 일을 능사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지식은 과학지식처럼 실용성이 없어서 철학교실을 벗어나면 별로 여운을 남기지 못한다. 이것이 한국에서 철학의 소멸을 가져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셋째로 한국의 철학 풍토는 각자가 전공하는 그 영역의 이론을 중심으로 한국의 현실을 증발시키므로 늘 현재완료진행형인 한국의 역사적 업(業)은 은폐되고, 이론적 당위성만으로 한국현실을 재단하는 안이한 길을 간다. 불행히도 우리에게 늘 당위적 주장은 넘치도록 많으나, 우리의 운명적 업을 풀고 우리를 훨훨 자유스럽게 하는 철학적 지혜의 출현이 너무 아쉽다. 당위적 주장은 실제로 약이 안 된다. 우리를 행복하고 자유스럽게 하는 철학사상의 출현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괴이한 사설적(私說的) 처방전이 아니고, 한국의 역사적 운명 속에서 움텄으면서 그 운명으로부터의 해방을 인류의 깊은 지혜로 등록됨 직한 정신적 깊이를 지녀야 하겠다. 히말라야 고봉이 하루아침에 솟은 것이 아니고 점진적인 높이가 쌓여서 그렇게 되었듯이, 한국의 철학적 사유의 깊이도 그런 과정을 밟아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도 우리는 죽어서 다음 세대가 우리의 무덤 위에 높이 올라서게 하는 발판이 되어야 하겠다. 우리는 마음이 아프기 때문에 철학을 공부한다. 헤겔의 지적처럼 인간은 아픈 동물인지 모른다. 모든 철학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두 가지의 종류밖에 없는 것 같다고 지적되었다(50회 글 참조). 그 두 가지는 구성 철학과 해체 철학이다. 즉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도(道)는 구성과 해체의 두 가지 계열이 있는 셈이다. 그런데 왜 철학이 역사적으로 그렇게 다양한가? 그 까닭은 병을 낳는 시대적 역사적 인연들의 결합이 각각 다르게 출현하기 때문이다. 인연들의 결합이 제각기 다르더라도, 그 기본본질의 계열로 보면 단 두 가지가 있을 뿐이지만, 현실적으로 다양한 철학사상이 결합되어 나타난다. ●한국 철학의 業은 유교·순수주의 그래서 철학의 질병진단은 역사적 인연들을 무시하면 안 된다. 나는 인류가 그동안 너무 구성을 많이 축적해서 그 구성의 짐에 짓눌려 인류가 고생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의 연재를 통하여 해체주의적 시각에서 철학적 산책을 걸어갔었다. 구성주의의 철학에서 보면, 내가 연재한 글들이 납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의 시대가 해체를 결행해야 할 그런 시절인연에 이르렀다고 믿는다. 더구나 한국의 역사적 업이 너무 많이 쌓여 있어서 이 무거운 업을 용해시켜 나가는 것이 한국철학의 길이라는 생각을 나는 한시라도 놓친 적이 없었다. 우리의 역사적 업보는 유교적 구성주의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 우리는 유교시대를 살지도 않고, 그것이 생활의 희미한 흔적으로서만 남아있지만, 실로 우리의 집단무의식의 흐름에서 아직도 그것이 강력히 작용하고 있음을 나는 도처에서 느낀다. 유교적 구성주의의 업 가운데 나는 특히 대표적인 한국적 업이라고 여겨지는 순수주의를 예로 든다.‘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성낸 까마귀 흰빛을 새오나니/창파에 좋이 씻은 몸 더럽힐까 하노라.’ 누구나 다 아는 정몽주의 시조다. 순수성을 아끼고 찬양하는 의미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순수성의 가치가 우리의 무의식의 맥락에 연면히 흘러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윤동주의 ‘서시(序詩)’가 한국인이 가장 애송하는 시로 꼽히고, 서정주의 시 ‘동천(冬天)’도 한국적 서정의 순수함을 반영하기에 사람들에 의하여 널리 회자되고 있다. 순수함을 그토록 사랑하기에 한국문화는 잡된 것을 싫어하고 순정품을 고귀한 것으로 여긴다. 고려말기의 충신 우탁으로부터 조선 중기의 기생 송이에 이르기까지 150수의 시를 조사하면서, 순수성을 애착하는 시가 무려 50여수가 되는 것을 나는 보았다. 즉 이화/명월/광백/백월/광명/은한(銀寒)/고죽/청풍/창랑/시냇물/백로/백골/백운/매화/청산/풍월/청초/청운/은구(銀鉤)/연화/명주/송죽 등과 같이 깨끗하고 순수하고 절개를 지키는 의미를 상징하는 의미소들이 50여수의 시조를 채우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의 심신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순수성의 정신이 또한 역설적으로 매우 편협하고 배타적인 성향으로 흐를 수 있는 위험성을 지닌다.20세기 프랑스의 의학철학자 캉길렘의 주장처럼 병은 정상적인 것의 부재나 고장이 아니고, 정상적인 생리의 과잉이나 과소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우리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순수성의 생리적 과잉이나 과소가 오히려 병이 된다는 것이다. 한국병은 저 순수성의 과잉에 기인하는 것 같다. 순수성의 과잉이 곧 흑백논리로 세상사를 재단하는 병이 된다. 순수성이 과잉적이면, 그 순수라는 원리적 가치에 사람들의 생각이 집착되어서 일체의 창조적 변용을 사람들이 잡된 것이라고 여기기 쉬워진다. 그래서 주어진 사상의 근본적 핵심에 사람들의 사고가 응결되어 버리면, 그것 이외에 다른 일체를 불순한 것으로 배척하는 생리가 또한 흐른다. 이런 교조적 순수를 지키려는 생리가 한국인의 사고방식에 근본주의적 사고방식(fundamentalism)을 뿌리내리게 하는 것 같다. 주자학이 한국에 유입되어도 근본주의적 주자학이 판을 치면서 주자학적 근본원리와 조금이라도 맞지 않는 것을 이단으로 배척하는 사고방식이 중국이나 일본에 비하여 대단히 강력했다. 그래서 조선 유학사에서 양명학이나 순자학이 발붙일 여유가 없어졌고, 심지어 노장사상이나 불교는 공식적으로 완전히 추방되기에 이르렀다. 그것만이 아니다. 공산주의가 들어와도 일본공산당은 자국의 이익에 따라서 가변적으로 융통성 있게 공산주의를 운영했었는데, 조선 공산당은 온전히 국제적 코민테른의 지시를 철칙으로 삼는 근본주의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나는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도 근본주의적 태도를 벗어난 것이 아니라고 본다. 민주주의의 불변적 정신을 살리면서 어떻게 가변적으로 유효하게 그 민주주의를 구체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애시당초부터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민주주의의 순수성을 훼손시키는 잡생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의 종교도 그런 근본주의의 요인을 안고 있다고 생각한다. ●구시대적 관습 새판짜기보다 수정 중요 한국만큼 종교를 근본적으로 바꾼 나라도 드물겠다. 불교국에서 유교국으로 조선시대에 바뀌더니, 지금에서는 기독교국으로 개변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보통 종교와 관습은 쉽게 바뀌지 않는데, 급변하게 종교가 바뀌었다는 것은 근본주의적 마음의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우리는 구시대의 관습법도 완전히 뜯어고쳐야 직성이 풀리는 급진성을 노출하고 있는 것 같다. 근본주의와 성질 급한 급진주의는 같이 간다. 종교나 관습이 시대의 요구에 미흡한 점이 있으면, 구체적으로 상황에 따라 점진적으로 수정하면 될 일을 근본적으로 새판을 짜려고 한다. 이것은 정당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마도 한국처럼 정당이 시시각각 부침하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우리의 정신문화는 이 근본주의적 요구 때문에 늘 외국 선진국의 수준에 기준을 둔 당위의 주장들로 채워져 있을 뿐, 이 땅의 사실과 운명에 따른 구체적 진단으로 병에 따른 약이 되는 사실적 처방과 상응하는 식견과 지혜가 움틀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지 못하고 있다. 정신문화적으로 어떤 사상이 우리의 정신풍토의 병을 치유하는 약이 되는지 심사숙고하는 자기소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어떤 사상이라도 자기 것으로 소화시키는 오랜 숙고의 시간을 통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사상이 다 공허한 당위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정신문화는 ‘유마경’에 나오는 ‘응병여약(應病與藥·병 따라 약을 줌)’의 철학을 견지해야 하겠다. 추상적 원론이 쉽게 흑백논리를 부르고, 그것이 우리의 급진적 급한 성격과 우리의 잠재적인 광기와 만나면, 미증유의 단순 소박한 추상적 구호가 광풍의 회오리바람을 불러일으키면서 온 나라를 단순 무식하게 만들어 버릴 위험성을 띤다. 거기서 깊은 사유와 구체적 처방의 창의가 죽어버린다. 하이데거가 역사를 공동존재로서 민족에게 파송된 ‘공동운명’(common destiny)이라고 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역사는 단순한 과거지식 아닌 유산을 깨닫는 것 역사는 각 민족의 공동업의 존재양식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역사의 반성은 각 민족의 공동마음의 생리와 병리를 읽는 순간이다.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지식이 아니라, 현재완료진행형으로 살아 있는 과거의 유산을 깨닫는 것이다. 그 공동운명으로서의 업이 곧 생리와 병리다. 생리와 병리는 분리되어 있지 않고, 생리 즉 병리다. 생리의 다과(多寡)가 곧 병리를 불러온다는 캉길렘의 지적을 잊지 말자. 역사의 치유는 과거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우리에게 지나치고 모자라는가를 아는 자각에서 이루어진다. 그동안 우리는 한편으로 지나치게 과격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 지나치게 모자랐다. 이것을 뼈저리게 깨닫자.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철학
  • 노대통령 “부동산 말고 꿀릴것 없다”

    노대통령 “부동산 말고 꿀릴것 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27일 참여정부 4년간의 공과와 관련,“부동산 말고 꿀릴 것은 없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부산북항 재개발 종합계획 보고회를 끝낸 뒤 부산 롯데호텔에서 가진 지역 인사 등 270여명과의 오찬에서 “정부정책에 시행착오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제일 큰 게 부동산”이라고 밝혔다.‘강남이 불패면 대통령도 불패´라고 밝힐 정도로 강력하게 추진했던 부동산 정책의 실패를 현시점에서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노 대통령은 그러나 “부동산 시행착오가 있다고 말씀드리지만 이 이상 악화 안 되도록 반드시 잡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3·30대책을 내놓고 한 고비 넘었나 싶어 한숨 돌리고 잠시 먼산 쳐다보고 담배 한대 피우고 딱 돌아섰더니 사고가 터져 있었다.”면서 “그런데 큰 사고는 아니다.”라고 해명했다.“금융시스템이나 경제위기로 전이 안되도록 타이트하게 관리하고 있다.”고도 말했다. ●“증세, 차기정권서 결정해도 돼” 노 대통령은 ‘비전 2030’으로 촉발된 증세 논란에 대해 “제 임기 동안 안해도 되고 다음 대통령때 토론해서 그 다음 선거때 선택해도 된다.”면서 “그러나 다만 계획을 안 세울 수 없고, 국민에게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국민들이) 굳이 ‘싫다.’고 하면 폐기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영남권의 숙원사업인 남부권 신공항 건설과 관련,“비공식적으로 여러 가능성을 검토했지만 이렇다 할 결론을 못냈다.”면서 “책임있는 정부부처가 공식 검토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건교장관에게 바로 하명하겠고, 지금부터 공식 검토해서 가급적 신속하게 어느 방향이든 해보도록 하자.”고 대안을 제시했다. ●“언론, 아침 저녁으로 관점 바꾸며 두드려” 언론을 겨냥해서는 “대안 없는 비판을 하지 말고 비판 관점을 일관되게 가져라.”고 지적한 뒤 “오늘은 타고 간다고 긁고, 내려서 걸어서 간다고 긁고, 아침 저녁으로 관점이 바뀌면서 두드린다.”며 불만을 쏟아냈다. 또 “아직도 기업에 와서 손 벌리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협찬 하시죠.”라고 자문한 뒤 “재벌 회장이 구속되면 언론사가 재미보는 구조 위에 있지 않느냐. 제가 어찌할 방법도 없다.”고 공격했다. 심지어 “(언론과) 손 잡으라면 내일부터 손 잡을게요. 그러나 제가 갖고 있는 모든 개혁의 과제는 포기해야 한다.”며 결과적으로 언론을 ‘반개혁 세력’으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그것 좀 이해해달라.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면서 언론과 각을 세우는 이유를 든 뒤 “그러니까 제가 막말을 잘 한다.”고도 했다. ●“반칙·특혜의 시대 청산할 것” 노 대통령은 특권 구조를 해체하려는 노력에 대해 “지금 얼추 다 되어가지 않았나.”라고 자평했다. 또 “정부에서는 검찰이 좀 센 편이고, 정부 바깥에서는 아무래도 제일 센 것이 재계, 그 다음이 언론이지 않은가.”라면서 “특권구조, 유착의 구조를 저는 거부하고 해체해 나가자는 민주주의 발전전략을 갖고 있기 때문에 특권을 갖고 있는 집단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박홍기기자 hkpark@seoul.co.kr
  • [이현세 만화경] 드디어 앙코르와트를 보다

    [이현세 만화경] 드디어 앙코르와트를 보다

    지난 11월24일부터 캄보디아의 시엠 리아프에서는 ‘신들의 도시 앙코르와트’와 ‘신라천년의 도시 경주’가 2006문화 엑스포를 공동으로 개최하고 있다. 때를 맞춰서 ‘고도 경주를 어떻게 보존 복원 발전시킬 것인가’를 연구하고 있는 ‘경주 고도 보존회’는 시엠 리아프를 방문했다. 나 역시 고도 보존회 멤버이고 회장인 이정락씨는 ‘천국의 신화 필화 사건’으로 6년 동안 법정투쟁을 할 때 그 재판을 승리로 이끌어 준 담당 변호사이자 고교 선배이다. 고도 경주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선배님이 수장이다 보니 이래저래 앙코르와트 답사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시엠 리아프는 600㎞에 이르는 지역 내에 100개의 사원이 발견된 앙코르 왕국의 근거지로서 9세기에서 13세기에 이르러 인구 150만명이 살았던 그 당시 세계 최대의 도시이다. 그 중에서도 수리야 바르만 2세(1113∼1150)의 시기에 건립된 앙코르와트와 앙코르톰은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지칭될 만큼 웅장하고 신비롭다. 내가 앙코르 왕국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40년 전 내 나이 13살 때 소년잡지 ‘새 소년’의 화보에서였다. 거대한 부처님 얼굴 석상을 크고 기괴한 팜나무의 뿌리가 파고들면서 칭칭 감고 있는 모습의 사진과 함께 ‘정글속의 고대도시 앙코르와트’에 대한 기사가 그것이었다. 깊고 어두운 열대의 정글 속에 단 한구의 시체도 남기지 않고 어느 날 지도상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고대 왕국의 도시이며 어느 때 어떤 사람들이 살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자극적인 기사는 어린 내게 무한한 상상과 경이로움을 주었다. 그리고 그때 언젠가는 ‘꼭 한번 가고 싶다’라는 동경이 생겼다. 그 다음호 ‘새 소년’에서는 고우영 선생의 ‘정글 300 리’라는 만화가 실렸는데 재빠르게도 그 만화의 소재는 바로 앙코르와트였다. 세상에…! 앙코르와트를 배경으로 한 만화라니. 나는 쿵쿵거리는 가슴으로 그 만화에 매료되었다. 한국의 고고학 박사 부부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앙코르 왕국의 유적을 답사하느라 길도 없는 밀림을 경비행기로 날던 중 기관고장으로 불시착한다. 겨우 혼자 살아난 어린소년이 정글속의 원숭이 소년을 만나 우정을 쌓아가며 모험을 하는 이야기였는데 눈빛이 사나운 새까만 원숭이 소년이 원숭이들과 함께 거대한 나무뿌리에 점령당한 고대 사원을 다람쥐처럼 뛰어다니는 장면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통속적인 이야기였지만 워낙 선생의 이야기 솜씨가 좋은 데다 내 동경이 워낙 컸던 탓에 오랫동안 내 영혼을 사로잡고 있었다. 나는 40년 만에 기어코 앙코르와트 앞에 서 있었고 내 눈앞에서 새까만 원숭이 소년이 수백의 원숭이 떼와 함께 눈부신 햇살 속의 사원 위로 춤을 추듯이 날아다녔다. 사원의 여러 겹 문 저 깊숙한 어둠속에서 흰 수염을 한 노인의 번쩍이는 지혜로운 눈빛까지…. 그것은 감동적인 만남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인간의 왕이 신의 딸을 배반했던 앙코르 왕국에 신은 세 가지 저주를 주었다. 그 첫 번째 저주는 앞으로 앙코르 왕국은 단 한명의 인간도 살 수 없는 완벽한 멸망을 하게 되리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멸망한 도시는 모든 세상사람들로부터 영원히 잊혀지게 될 것이며, 마지막으로 그 도시를 다시 찾아내는 자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저주다. 실제로 1868년 앙코르와트를 발견한 프랑스의 탐험가 앙리 무오는 이 저주를 증명이라도 해주듯이 그 다음해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그 오래된 동경에도 불구하고 신들의 도시 앙코르와트를 답사하는 내내 내 마음은 답답하고 불편했다.‘지자체 문화 이벤트 수출 1호’라는 요란한 홍보와 함께 40억원의 돈을 쓴 이번 행사에서 천년 고도 경주의 모습은 찾기 어려웠고, 세계의 기술들이 모여 해체복원을 했다는 앙코르 왕국의 유적들은 가는 곳마다 복원이 잘못되어 사원 천장이 뻥뻥 뚫려있었고 시멘트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마치 일제 시대때 경주의 석굴암이 시멘트로 졸속 복원되어 지금까지 그 원래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듯이 앙코르 왕국의 유적 또한 그렇게 방치되어 있었다. 이 졸속 복원의 에피소드 정점에는 일본의 기술자들이 복원을 끝낸 날 ‘만세정종’을 마시던 순간에 탑이 무너져 내려버린 기가 막힌 일화가 있다. 캄보디아는 16세기 이전에는 동남아시아의 최강국이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고 돌아서 지금 캄보디아는 동남아시아 최빈국 중 하나이고, 가장 위대한 조상에 가장 초라한 후손이 되어있다. 유적지마다 어린 꼬마들이 팔찌나 피리 등을 들고 서서 호객 행위를 하며 졸졸 꽁무니를 따라다닌다. 말리는 사람도 없고 아이들은 버스에 탈 때까지 지치지도 않는다. 새까맣고 큰 눈동자는 마주치면 물건을 사주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맑고 선하다. 나이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은 키와 황토 흙을 뽀얗게 뒤집어쓴 맨발을 보면 괜히 히죽히죽 웃고 다니는 캄보디아의 운전기사에게 분노가 일어난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나의 얼굴.40년도 더 전에 경주의 나와 꼬마들도 반월성의 깨진 기왓장이나 토우들을 들고 일본 관광객들의 꽁무니를 따라다녔다. 단 돈 10원이 절실했던 그때의 우리들…. 애잔한 마음으로 이 아이들에게서 조잡한 물건이 아닌 사진집을 몇 권 샀다. 현대인의 눈으로 앙코르왕국의 유적을 보면 광인의 흔적이다. 수리야 바르만 2세는 평생을 이웃 나라와 전쟁을 해서 영토를 넓혔고 잡아온 노예들의 피와 땀으로 그 땅에 신의 이름으로 끝없이 사원을 만들었다. 사원에 국고를 몽땅 낭비한 왕국은 힘이 약해졌고, 모든 업보가 증명하듯이 끌려온 노예들의 나라에 의해 왕국은 결국 멸망했다. 돌아오는 날 버스는 어느 금빛 사찰 뒷마당에 있는 작고 높은 유리탑 앞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탑 속에는 해골들이 가득 차 있었다. 1975년, 미국이 사주하고 크메르 루주군이 벌인 ‘3차 킬링필드’의 대학살극은 300여만명의 캄보디아인을 학살했다. 크메르 루주군의 지도자 폴 포트는 적어도 캄보디아의 역사를 40년은 뒷걸음치게 해 놓았고, 국민이 잘못된 지도자를 선택하면 그 결과가 어떤지 유리탑의 해골들은 증명하고 있었다. 이 탑은 그 당시 시엠 리아프에서 학살된 사람들의 유골을 모아둔 탑이다. 수리야 바르만 2세는 수많은 노예들의 피로 위대한 앙코르 와트를 남겼고 폴포트는 자국민의 피로 세상에 영원히 남을 해골탑을 남겼다. 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지평선 너머로 붉게 타는 노을이 보였다. 핏빛의 하늘만큼 캄보디아는 내게 전쟁과 피와 가난의 모습으로 남았다. 하지만 나는 유적지에서 본 크고 맑고 선하고 총명해 보였던 그 눈동자들을 더 크게 생각한다.40년 전, 내 어린 꼬마 친구들의 눈동자가 오늘의 한국을 만들었듯이 어차피 캄보디아의 미래는 그 아이들의 것이니까. 만화가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