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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독재정권 시절 민주화투쟁 주도 ‘정치9단’

     86세로 생을 마감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한국 현대 정치의 산증인이다. YS라는 애칭으로 더 자주 불렸던 김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DJ·1926~2009)과 함께 독재 정권 시절 민주화 투쟁을 주도했던 ‘쌍두마차’였다. 김 전 대통령이 정치적 고비마다 보여준 승부사 기질은 그가 ‘정치 9단’이라는 별칭을 얻은 이유이기도 했다.    ●유년기-거제도서 출생, 한인학생 차별 일본인 교장 골탕먹이다 정학 처분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 20일(음력) 경남 거제도 장목면 외포리 대계마을에서 멸치잡이 어장을 소유한 부친 김홍조(2008년 작고)씨와 모친 박부연(1960년 작고)씨 사이에서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장목초등학교를 나온 김 전 대통령은 당시 경남 지역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몰리던 동래중에 응시했다가 낙방했으며, 1년 뒤 통영중에 진학했다. 통영중 재학 시절에는 한인 학생을 차별하는 일본인 교장의 이삿짐을 훼손하는 등 골탕을 먹인 일화가 유명하다. 이로 인해 경찰 조사를 받고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후 김 전 대통령 스스로 모교로 꼽는 경남중으로 전학한 것은 해방을 맞은 1945년 11월이다. 대통령의 꿈은 이 때부터 비롯됐다. 당시 부산 하숙방 책상머리에 붓글씨로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써붙이고 뜻을 키운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경남고를 거쳐 만 20세인 1947년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에 진학했다. 그는 정치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하고, 우익 학생단체인 ‘순학회’를 결성하는 등 정치 입문을 위한 사전 준비에도 힘을 쏟았다.    ●청년기-한국전때 학도의용대 가담, 동갑내기 손명순 여사와 맞선 한달만에 결혼  정계 진출의 기회는 대학 2학년 때 찾아왔다. 정부수립 기념 웅변대회에서 외무부 장관상(2등)을 수상, 당시 장택상 외무부 장관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1950년 5·30 총선에서 경북 칠곡에 무소속 출마한 장택상 후보의 당선을 돕기도 했으나, 6·25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학도의용대에 가담했다.  김 전 대통령이 손명순 여사를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1951년 2월 ‘할아버지 위독’이라는 전보를 받고 고향에 내려간 그가 만난 사람이 바로 동갑내기 손 여사였고, 선을 본 지 한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를 하기로 했던 목사가 날짜를 착각해 결혼식장에 오지 못하는 바람에 주례를 즉석에서 구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혼 당시 이화여대 약학과 3학년생이었던 손 여사는 당시 교칙에 따라 결혼하면 퇴학을 당할 처지였지만, 결혼 사실을 비밀에 부쳐 무사히 졸업했다. 손 여사는 결혼 초기 시댁이 있는 거제로 내려가 멸치 말리는 법부터 배웠다. 당시 익힌 ‘시래깃국에 갈치 한 토막’은 이후 손 여사의 ‘대표 메뉴’가 됐다.  김 전 대통령은 2011년 결혼 60주년을 기념하는 회혼식에서 “내 인생에서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민주화를 이뤄낸 일이고, 다른 하나는 손 여사를 아내로 맞이한 일”이라고 했고, 이에 손 여사는 “좋아서 살았지예”라고 화답하기도 했다.  ●정치적 성장기-26세때 최연소의원에, 최연소 원내총무 최다선 의원등 숱한 기록  김 전 대통령은 1952년 5월 장택상 당시 국회 부의장이 국무총리에 발탁되면서 총리실 인사담당비서관에 기용됐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장 총리가 ‘고시진 사건’으로 물러나자 1954년 3대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 고향인 거제로 낙향했다.  그는 3대 총선에서 당시 여당이었던 자유당 공천을 받아 최연소 의원(26세)이 됐다. 이후 최연소 원내총무(38세), 최다선 원내총무(5회), 최연소 총재(46세), 최다선 의원(9선) 등 숱한 기록들을 쏟아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의 정치 행보는 이 같은 화려한 꼬리표와 달리 고난의 연속이었다.  1954년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으로 유명한 이승만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표를 던지고 자유당 입당 7개월여 만에 탈당했으며, 이는 야당 정치인으로서 30여년 동안 고난의 길을 걷는 출발점이 됐다.  1958년 4대 총선에서는 고향인 거제를 떠나 부산에서 출마했다 고배를 마셨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뒤 치러진 5대 총선에서 원내에 복귀했으나, 같은 해 9월 어머니가 무장간첩에 의해 살해된 데 이어 이듬해에는 5·16 쿠데타로 정치 활동이 전면 금지되는 등 시련이 잇따랐다.  1963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군정 연장 결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다 수감되는 등 굵직굵직한 정치 현안에 저돌적으로 맞서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 나갔다.    ●민주화 투쟁기-3선개헌 반대하다 초산테러, 10·26 신군부시절 가택연금 단식투쟁  1965년 통합 야당인 민중당의 최연소 원내총무에 올랐으며, 1969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다 상도동 자택 앞 골목길에서 괴한에 의해 ‘초산 테러’를 당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김 전 대통령은 야당 지도자로서 입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1970년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지만, 당시 김대중 후보에 밀렸다.  김 전 대통령의 승부사적 기질은 유신 체제에 대한 정면 돌파로 이어졌다. 1974년 5월 신민당 총재로 선출된 후 유신 체제에 맞서다 결국 2년 뒤 ‘각목 전당대회’를 계기로 당권을 내주기도 했다.  특히 1979년 5월 총재직에 재당선되고 2개월 만에 ‘YH무역 사건’이 터졌다. YH 여성 근로자들이 신민당사에서 폐업 반대 농성을 벌이면서 시작된 이 사건은 국내 정당 사상 처음으로 법원에 의해 총재 직무가 정지되고 의원직마저 박탈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 때 김 전 대통령이 남긴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표현은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1979년 10·26 사태를 계기로 신군부가 등장하자, 김 전 대통령은 가택연금 상태에서 23일 동안 목숨을 건 단식투쟁으로 맞섰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한발짝도 나가지 않겠다”고 한 그의 결단은 정치 흐름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1985년 2·12 총선 직전 신민당을 창당해 돌풍을 일으키는 등 전두환 정권에 대한 끈질긴 압박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냈다.    ●대권 도전과 성공-1990년 3당합당, 1992년 대선 당선 ‘문민정부’ 시대로  민주화 이후 처음 치러진 1987년 대선에 김 전 대통령 역시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러나 이른바 ‘1노·3김(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맞붙은 선거에서 야권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며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이듬해 4월 13대 총선에서는 제1야당의 자리마저 DJ의 평민당에 내줬다.  이런 상황에서 김 전 대통령은 대권을 향한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1990년 여당인 민정당과 제2·제3 야당인 민주당과 공화당을 합쳐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출범시키는 ‘3당 합당’을 결행했다. 35년 야당 생활을 접고 여당의 대권 주자로 탈바꿈한 것이다.  결국 1992년 대선에서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되며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다. 재임 기간 중 금융실명제 도입, 옛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하나회 해체,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수사와 처벌 등 굵직굵직한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하지만 임기 말 불어닥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비판을 받았다.  김영삼 정부는 서민적인 청와대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칼국수가 대표적이다. 칼국수가 당시 청와대 대표 메뉴가 되면서 대통령의 영양 관리라는 뜻밖의 고민거리도 생겼다. 청와대 방문객들이 한번쯤 맛보는 별미지만, 대통령 입장에서는 임기 내내 칼국수로 점심을 때워야 했기 때문이다.    ●뚝심과 감의 정치인  김 전 대통령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관철시키는 ‘뚝심의 정치’를 보여줬다. 정치적 고비마다 국민 여론을 읽고 행동으로 옮기는 능력이 탁월해 ‘감(感)의 정치인’으로도 불렸다.  김 전 대통령의 화법은 단순 명료했다. 돌려가며 얘기하는 법이 없다. 직설적인 화법 탓에 ‘말실수의 달인’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공정한 인사를 해서 부패 인사를 척결하겠습니다”라고 해야 할 표현을 “공정한 인사를 척결하겠습니다”라고 하거나, ‘결식 아동’ 문제를 언급하려다 ‘걸식 아동’이라고 발음하는 식이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쿠’의 이름을 잊어버려 회의석상에서 ‘차씨’라고 발언한 사례도 유명하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말실수에 핑계나 변명을 하지 않았기에 친근감과 인간미를 느끼게 했다.  김 전 대통령과 DJ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민주화 동지에서 1987년 대권을 놓고 경쟁하기 시작하며 불편한 관계가 됐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2009년 DJ의 서거를 불과 일주일여 앞두고 병원을 전격 방문, 22년간의 반복과 갈등에 마침표를 찍었다. 김 전 대통령은 화해로 이해해도 되느냐는 기자 질문에 “이제 그럴 때가 됐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면서 “제6대 국회 때부터 동지적 관계이자, 경쟁 관계로 애증이 교차한다”고 애틋한 감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장세훈 기자 shjang@seoul.co.kr
  • [주말 하이라이트]

    ■다큐멘터리 3일(KBS2 일요일 밤 10시 50분) 대구 북성로는 한때 1970년대 산업화 시기 국내 거의 모든 공구가 모인다고 할 만큼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지금은 불황 탓에 한산하기만 하다. 한편 공구상가들이 문을 닫는 오후 6시면 북성로 골목은 맛있는 변신을 시작한다. 연탄 내음이 북성로 골목에 조금씩 차오르면 곳곳에 포진해 있던 14개의 포장마차가 하나둘, 톡톡 피어난다. 북성로에 들어서는 대부분의 포장마차 메뉴는 연탄불고기와 우동 단 두 가지. 많이 가진 자도, 그보다 좀 덜 가진 자도 단 두 가지 메뉴만을 선택할 수 있는 이곳에서는 밤새 사람 사는 이야기가 흘러나오는데…. ■서바이벌 오디션 K팝 스타 5(SBS 일요일 오후 6시 10분) 시즌 5로 더 강력해진 시스템과 개성 있는 참가자들, 3인의 터줏대감 심사위원 YG 양현석, JYP 박진영, 작곡가 유희열이 함께한다. 또한 역대 K팝스타 출신 아티스트들과 3사 캐스팅 전문가들이 직접 심사하는 객원 심사위원 제도를 강화해 지난 시즌과 다른 차별화된 오디션이 시작된다. ■내 딸, 금사월(MBC 토요일 밤 10시) 금사월(백진희)이 복수와 증오로 완전히 해체된 가정 위에 새롭게 꿈의 집을 짓는 드라마. 득예(전인화)의 계획대로 혜상(박세영)의 인터뷰 내용을 보고 분노한 만후(손창민). 한편 민호(박상원)는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혜상(박세영)에게 왜 자신을 속인 거냐고 따져 묻는다.
  • [스타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스칼렛 오하라 역 ‘바다’

    [스타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스칼렛 오하라 역 ‘바다’

    ‘뮤지컬의 디바’ 바다(35·본명 최성희)가 뮤지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이하 바람사)로 관객들을 찾아왔다. 지난 1월 초연에 이어 내년 1월 31일까지 서울 송파구 샤롯데씨어터 무대에 오르는 이번 재공연에서도 스칼렛 오하라 역을 맡았다. “초연 때보다 더 숙성됐다고 할까요. 이제는 스칼렛이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왜 그런 행동을 해야만 했는지 알 것 같아요. 제 안에 스칼렛의 ‘에고’가 형성돼 있는 듯해요. 무대에 서면 제 자신이 스칼렛이라고 느껴져요. 무대에 선 저를 보고 어느 누구도 당신이 왜 스칼렛이냐고 반문하지 않을 정도로 스칼렛이 됐어요.” 뮤지컬 ‘바람사’는 미국 소설가 마거릿 미첼이 1936년 출간한 동명소설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다. ‘로미오 앤 줄리엣’ ‘십계’ 등을 만든 프랑스 뮤지컬팀이 원작을 토대로 노예 해방, 자유, 인본주의 메시지를 담은 프랑스 뮤지컬로 제작했다. 2003년 프랑스 초연 때 9개월간 90여만명을 동원하며 흥행 신화를 썼다. 바다는 “‘바람사’ 초연 때 아쉬웠던 점은 없다”고 했다. “후회 없이 했어요. 저는 ‘오늘은 있다, 내일은 모른다’는 신념으로 살아요. 오늘에 집중하고 최선을 다해요. 제 공연을 보면 제가 최선을 다하는 데서 느껴지는 감동도 있을 거예요.” 실제 바다는 프랑스 오리지널 제작진으로부터 “스칼렛 그 자체”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그는 스칼렛은 타고난 미인이 아니라고 했다. “스칼렛은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말을 해야 예뻐 보이는지를 아는 여자예요. 스칼렛을 연기하며 ‘온 동네 남자들이 어떻게 이 여자를 좋아할 수 있었을까’, ‘어떤 여자이기에 남자들이 이 여자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으려 할까’를 많이 생각했어요. 그녀의 매력은 자신감이었던 것 같아요.” 바다는 2002년 걸그룹 S.E.S 해체 이후 뮤지컬계에 발을 내디뎠다. 연기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고 노래도 계속하고 싶어서다. 안양예고 시절 연극에 푹 빠졌다. 1학년 때부터 학교 공연에서 ‘산불’, ‘코카서스의 백묵원’ 등 국내외 유명 작품의 배역을 맡아 열연했다. 그때 친구들이 붙여준 닉네임이 ‘바다’다. 장차 연극배우가 돼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무대에서 연기하는 게 꿈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갑자기 편찮아지시면서 집안이 힘들어져 꿈을 접어야 했다. 대학 학비를 전액 지원받는 조건으로 SM과 가수 계약을 체결했다. “당시엔 가수들이 돈을 많이 벌었어요. 아버지께서 창을 하셔서 노래는 곧잘 했어요. 노래를 하면서도 연기에 대한 목마름이 컸어요. 가수 겸 영화배우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처럼 매력 넘치는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SM과 계약 종료 후 연기와 노래, 두 개를 모두 살릴 수 있는 뮤지컬의 길을 걷게 됐죠.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죽기 전에 연극이 됐든 뮤지컬이 됐든 최고의 연출가와 함께 꼭 무대에 오르고 싶어요.” 2003년 첫 데뷔 작품으로 뮤지컬 ‘페퍼민트’를 택했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었다. 잘나가던 아이돌 여가수가 해외 유명 작품이 아닌 국내 순수 창작물을 데뷔작으로 택했기 때문이다. “주위 사람들이 미쳤다고 했어요. 하지만 소신이 있었어요. 첫 작품은 무조건 창작물로 해야겠다는 믿음이었죠. 당시 뮤지컬 시장엔 아이돌도 없었고 지금과 달리 너무 척박했어요. 개척정신이 없으면 뮤지컬계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었어요. 프런티어 정신으로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야 더 큰 뮤지컬 배우로 커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첫 작품 이후 4년여간 뮤지컬 무대에서 바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가수 활동 등 여러 가지 일로 바쁘기도 했지만 둘도 없는 친구의 죽음에 충격이 컸기 때문이다. “제 주변인 중 가족 같은 사람이 죽은 게 처음이었어요. 2년간 외부 활동을 안 했어요. 외국에 봉사활동을 나가거나 하며 고통을 견뎌냈어요.” 아픔의 긴 터널을 빠져나온 바다의 행보는 파죽지세였다. 2007년 뮤지컬 ‘텔미 온 어 선데이’로 무대에 다시 선 이후 ‘노트르담 드 파리’, ‘미녀는 괴로워’, ‘브로드웨이 42번가’, ‘금발이 너무해’, ‘모차르트’, ‘스칼렛 핌퍼넬’, ‘카르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 매년 뮤지컬 흥행 기록을 세워 오고 있다. “‘텔미 온 어 선데이’는 제 인생에서 결코 잊지 못할 작품이에요. 무대 등장과 동시에 48곡을 혼자서 다 부르는 ‘모노 뮤지컬’이었어요. 공연이 끝나야만 무대에서 내려올 수 있었어요. 한국 공연 당시엔 한참이나 시대를 앞선 뮤지컬이었죠. 배우로서의 실력을 길러 줬어요. 그 뮤지컬을 하며 많이 성장했고 어떤 무대든 두려움이 없어졌죠. 기회가 되면 꼭 다시 하고 싶어요.” 2008년 말에서 2009년 초까지 뮤지컬 ‘미녀는 괴로워’에 출연했을 때가 연예계 인생 통틀어 체력적으로 가장 힘들었다. 뮤지컬 출연 횟수도 적지 않았고 방송활동 등 다른 스케줄도 많아 몸이 버티지를 못했다. 무대에서 혼신의 힘을 다한 뒤 지쳐 쓰러진 적도 여러 번이었다. 영양주사를 맞으며 겨우 버텼다. “당시 저와의 싸움이었어요. 정신력으로 버티며 무대에 섰어요. 하루하루 힘든 공연을 하며 ‘성희야 너 살아 있어?’, ‘괜찮겠어?’라고 묻고 또 물었어요. 정말 처절했던 나날들이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공연을 마치고 배우 대기실에 쓰러져 있을 때였다. 나이 지긋한 여성이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전갈이 왔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을 만나러 올 사람이 없었다. 너무 힘들었지만 이상한 예감이 들어 만났다. “대기실로 들어오는 그분을 딱 봤는데 ‘아우라’가 장난이 아니었어요. 단아한 느낌의 그 귀부인이 말했어요. ‘오늘 공연 너무 잘 봤다. 난 판사인데 돈도 명예도 다 얻었다. 내 인생에서 더이상 바랄 것도 이룰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근데 오늘 당신의 열정을 보고 내 생각이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난 당신 나이에 당신처럼 열정적으로 살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 내게 이런 뉘우침을 준 사람은 인생 통틀어 당신뿐이다. 당신 덕분에 꺼져 가는 인생의 불꽃이 살아나게 됐다’고. 그때 배우로서 가장 큰 보람과 감동을 느꼈어요. 제 열정을 통해 새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얻는 분이 있다면 오늘 당장 쓰러져 죽는다 해도 삶의 의미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가슴 벅찼어요. 힘들 때마다 그분이 생각나요.” 바다는 내년엔 더 바쁠 것 같다고 했다. “차기 뮤지컬 작품으로 하고 싶은 게 있어요. 그 작품을 하게 된다면 내년에도 뮤지컬을 하게 될 거고 그러지 않으면 음반을 내고 중국 활동에 주력하려 해요. 음반을 오랫동안 내지 못했어요. 10개월 전에 음반을 내려 했는데 그때 ‘바람사’ 제의가 들어와 못 냈어요. 그 이후 ‘불후의 명곡’에 출연하고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렀고요. 고교 시절 푹 빠졌던 연극도 다시 해보고 싶어 좋은 작품을 생각해 보고 있어요.”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당신의 책]

    [당신의 책]

    조선의 엔터테이너(정명섭 지음, 이데아 펴냄) 엄격하게 신분을 구분했던 조선 시대. 신분이 낮아도 한참 낮은 노비가 몰래 글을 깨치려다가 윗사람에게 들켜 경을 치는 일은 사극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런데 노비가 글을 익히는 것도 모자라 양반 자제들을 가르치고, 또 과거에 여러 명을 급제시켰다면 믿을 수 있을까? 정조 때 요즘으로 치면 국립대학인 성균관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정학수라는 하인이 실제 그랬다. 마치 오늘날 입시 학원의 스타 강사처럼 말이다. 저자는 양반, 상놈 등 신분을 넘어 당대의 권위, 위선, 엄숙함에 도전했던 32명의 삶에 대한 편린을 조선 후기 학자들의 문집에서 찾아내 현대적 시점에서 흥미롭게 풀어낸다. 쉽게 말해 이 책은 조선시대 기인열전이다. 240쪽. 1만 5000원. 인간의 품격(데이비드 브룩스 지음, 김희정 옮김, 부키 펴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보보스’를 통해 디지털 시대 새로운 엘리트 계층의 도래를 예견하는 등 사회문화 현상 전반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과 분석을 보여 줬던 저자가 이번엔 인생을 돌아본다. 또 그간 자신이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여겼지만 내적 성장이 동반되지 않은 껍데기에 불과했다고 고백하며 내적 결함을 딛고 내면을 키우기 위해 분투했던 아이젠하워, 아우구스티누스, 조지 엘리엇, 새뮤얼 존슨 등 역사적 인물들의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이를 통해 저자는 성공을 위해 나를 부풀리는 ‘빅 미’(Big Me)의 시대를 벗어나 자신을 낮추고 대의에 헌신하는 ‘리틀 미’(Little Me)의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496쪽. 1만 6500원. 책들의 그림자(최은주 지음, 엑스북스 펴냄) 시와 함께 문학을 대표하는 분야인 소설이 등장한 것은 18세기. 신이나 왕, 영웅을 벗어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며 인기가 높아졌지만 외려 편견을 일으켜 사람에게 해악을 끼친다는 종교계의 비난을 받았다. 문학은 덩달아 운신의 폭이 좁아지며 죄가 되는 행위이자 어리석은 취미가 됐다. 과연 그럴까. 저자는 문학이 틀에 박힌 삶의 한계를 벗어나게 해 준다고 강조한다. 또 여러 시점에서 사건을 진단해 볼 수 있는 경험을 갖게 해 준다고 덧붙인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문학이 실용적인 학문이 될 수 있다고 강변한다. 또 문학에서 어떻게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지 길라잡이가 되기 위해 이 책을 통해 색다른 문학 수업을 선물한다. 216쪽. 1만 3000원. 어리석음(아비탈 로넬 지음, 강우성 옮김, 문학동네 펴냄) 여성의 정체성이 학자의 길을 오히려 가렸던 자크 데리다의 애제자 아비탈 로넬의 대표 저서이자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책이다. 대담한 사유와 독창적인 문체로 기존의 권위를 논리적으로 해체한다. 책은 미국 문명의 억압성을 비판하고, 이성을 중심에 둔 서구 사상이 ‘어리석음’의 범주 아래 다양한 대안적 사유들을 포섭해 온 과정을 담아냈다. 특정한 지식에 대한 무지가 아니라 우리의 어리석음에 대한 무지야말로 가장 근원적인 무지인 만큼 로넬에게 어리석음은 진정한 앎의 기반이 되는 것이다. 한 학술대회 청중으로서 자크 데리다에게 도발적인 질문을 연신 던진 뒤 데리다가 이름을 묻자 ‘형이상학’이라고 대답한 일화는 그의 자존감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544쪽. 3만원. 비난게임(벤 대트너·대런 달 지음, 홍경탁 옮김, 북카라반 펴냄) 두뇌를 쓰는 업무 수행자일수록 인정과 평가에 민감하다. 단순히 경제적 보상만으로 그들의 업무를 추동할 수 없다. 어설픈 경제적 보상은 오히려 역작용을 초래한다. 마찬가지로 조직 내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에서 상사는 공적으로 부하를, 부하는 ‘뒷담화 형태’로 상사를 비난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저자는 비난이 횡행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분위기 및 배경을 소개한 뒤 개인의 성격에 따른 비난의 방식과 대응 방법을 유형화한다. 궁극적으로는 책임져야 할 상황에서 남을 비난하거나 책임을 외부로 돌리지 않는 리더와 조직 구성원이 어떻게 혁신을 추동했는지 생생한 사례와 함께 보여 준다. 문제의 책임을 묻는 조직과 문제의 대안을 찾는 조직의 미래는 금세 나뉠 수밖에 없다. 260쪽. 1만 4000원.
  • 유엔 수장 세 번째 방북… ‘빈손 귀환’ 전철 밟을 수도

    유엔 수장 세 번째 방북… ‘빈손 귀환’ 전철 밟을 수도

    유엔 대변인이 18일(현지시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북한 방문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고 공식 확인함에 따라 반 총장의 방북은 시기만 남은 것으로 보인다. 반 총장의 평양 방문이 성사될 경우 역대 유엔 수장으로서는 3번째다. 과거 두 명의 총장은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회담을 갖고 남북관계, 평화협정 그리고 핵 문제 등을 논의했다. 전례에 비춰볼 때 반 총장의 방북 때도 비슷한 의전과 비슷한 형식의 회담 등이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북한을 최초로 방문한 유엔 사무총장은 오스트리아 출신인 쿠르트 발트하임 총장이다. 그는 1979년 5월 2~3일 평양을 방문해 당시 김일성 주석과 회담하고, 이어 5일엔 서울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남북한 모두 유엔에 가입하기 전이고, 동서 냉전과 그에 따른 남북 대치가 첨예할 때였다. 당시 주석궁에서 열린 회담에서는 유엔 측 4명이 배석했고 북측에서는 허염 북한 외무상 등 10명이 자리했다. 발트하임 총장은 김 주석과의 3시간에 걸친 회담에서 “한반도 문제 해결 과정에서 당사자인 한국을 제외하는 건 불가하다. 유엔 사무총장 자격으로 제3자로서 조력할 용의가 있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 주석도 발트하임 총장이 평양을 떠나기 전 마련된 오찬에서 “30년 이상 분단된 우리나라는 이제 조국의 통일이 한민족의 가장 큰 민족과업”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발트하임 총장도 한국에 와서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김일성이 ‘북한은 남침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고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유엔 옵서버 역할론’ 등 중재안은 같은 해 10월 박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면서 이뤄지지 못했다. 두 번째로 방문한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 총장은 북핵 위기가 고조되던 1993년 12월 24∼26일 판문점을 통해 북으로 넘어가 김 주석을 만났다. 그러나 당시는 기대만큼이나 실망도 컸다. 김 주석은 25일 부트로스갈리 총장과의 40분간 단독면담에서 “북한은 미국과 핵 문제에 관해 협의를 계속하고 있다. 유엔이 이 문제에 직접 개입할 필요가 없다”며 “유엔사령부를 해체하는 것이 유엔과 북한 간 비정상적인 관계를 바로잡는 길”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북핵 문제 해결의 중재자 역할을 하러 갔다가 ‘유엔사부터 해체하라’는 공격을 받은 셈이다. 앞서 김영남 북한 정무원 부총리 겸 외교부장도 전날 만수대의사당에서 개최된 부트로스갈리 총장 환영 만찬사를 통해 ‘대화와 협상을 통한 핵 문제 해결’을 강조하기도 했지만 북한 측 입장만 일방적으로 전달하면서 ‘김빠진’ 방문이 됐다. 이렇듯 두 총장 모두 가시적인 성과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 그 원인은 기본적으로 북한의 태도와 직결돼 있다. 북한은 여전히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전환, 핵·미사일 문제 등은 북·미 간 해결 사안이란 인식이 강하다. 이 때문에 반 총장도 ‘빈손 회귀’가 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반 총장이 전임자들과 달리 한국인이란 점에서 눈을 마주 보고 직접 소통한다면 핵·미사일, 인권 등 무거운 주제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성 이슈들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란 관측도 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IS, 텔레그램으로 美 정보당국 따돌렸다

    파리 테러는 ‘세계의 보안관’을 자인하는 미국 정보기관의 완벽한 실패로 규정되는 분위기다. 테러의 배후인 이슬람국가(IS)가 범행에 앞서 모의 훈련을 한 것은 물론 무기 수송, 폭발물 지원 등과 IS 동조자들의 움직임을 사전에 전혀 포착하지 못했다. 전 미국 국가안보국(NSA) 직원인 에드워드 스노든이 NSA의 무차별 도·감청 실태를 폭로한 이래 IS를 비롯한 테러 단체가 암호화한 애플리케이션(앱)이나 메신저를 이용해 테러를 모의하는 사이 이들의 저력을 과소평가한 미국 정보당국은 암호 해독·추적에서 무능을 드러냈다. 17일(현지시간) CNN머니 등에 따르면 IS의 새로운 선전장으로 ‘텔레그램’이 주목받고 있다. IS는 사용자들이 사진, 영상 등을 무수히 많은 구독자에게 전파할 수 있도록 텔레그램이 만든 ‘채널’이라는 서비스를 소통의 주요 수단으로 삼고 있다. 이곳에서 테러를 모의하는 것은 물론 하루에 10∼20개에 달하는 공식 성명과 동영상을 공개한다. 최근 러시아 여객기 폭파 테러와 파리 테러가 자신들이 소행임을 주장하는 동영상을 텔레그램을 통해 발표했다. 텔레그램이 IS의 ‘사이버 은거지’가 된 것은 트위터, 페이스북 등 경쟁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보다 보안 기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러시아 출신의 파벨·니콜라이 두로프 형제가 2013년에 만든 텔레그램은 최대 200명과 그룹 채팅을 할 수 있고 메시지, 사진, 동영상 등 주고받은 콘텐츠가 일정 시일이 지나면 자동 삭제되는 비밀 대화방도 운영할 수 있다. 당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정권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던 형제는 러시아 정보기관의 감시를 피하고자 복잡하게 설계된 의사소통 수단을 만들었다. 수익이 아니라 정권의 탄압에서 벗어날 목적으로 만든 텔레그램은 이중 암호화로 철통 보안이 보장되는 것으로 평가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해 정부 기관의 카카오톡 사찰 논란이 불거지면서 많은 사용자가 텔레그램으로 옮기기도 했다. IS의 사이버 속도전은 놀라울 정도다. 앞서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적극 활용해 서구 유럽의 10대 및 젊은 여성을 유인해 온 데 이어 신참 대원을 모집하기 위한 ‘24시간 온라인 상담데스크’(help desk)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NBC 방송은 미 육군 대테러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상담데스크에는 6명의 고위 조직원이 상시 대기하며 통신 내용 암호화 기술을 비롯해 사이버 공간에서 정보 당국의 감시망을 피하는 요령 등 요원들의 궁금증을 즉시 풀어주고 있다고 보도했다. 에런 브랜틀리 테러 분석가는 “IS는 ‘대면 통신시대’를 넘어 ‘사이버 시대의 속도’로 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속수무책에 빠진 각국 정보당국을 대신해 일단 국제 해킹그룹 ‘어나니머스’가 나섰다. 이 그룹은 전날 예고한 대로 17일 IS를 상대로 사이버 공격을 개시, IS 조직원 트위터 계정 5500개를 폐쇄했다고 밝혔다. 또한 유럽 지역 IS대원 모집인의 이름과 그가 사용하는 컴퓨터 하드웨어의 실제 주소 등도 공개했다. 아울러 IS의 해킹을 방지하기 위한 지침도 텔레그램을 통해 배포했다. 외교 전문매체 포린폴리시에 따르면 지금까지 어나니머스는 IS와 연관된 웹사이트 149곳, 트위터 계정 10만 1000개, 선전용 비디오 5900건을 해체했다. 박상숙 기자 alex@seoul.co.kr
  • [파리 연쇄 테러] “테러리즘 뿌리 뽑을 것”… 헌법 개정 카드까지 꺼낸 올랑드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16일(현지시간) 파리 테러 배후인 이슬람국가(IS)에 강하게 맞서겠다고 천명했다. 우유부단한 성격 탓에 ‘몰랑드’(Mollande·말랑말랑한 올랑드)로 불렸던 올랑드 대통령이 단호하게 변신한 것은 지난 1월 샤를리 에브도 테러 이후 두 번째다. 올랑드 대통령은 이날 베르사유궁에서 열린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프랑스는 전쟁 중”이라며 “프랑스는 IS를 파괴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우리는 테러리즘을 뿌리 뽑을 것”이라면서 “그들이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해도 우리의 조국, 가치, 삶은 무너뜨릴 수 없다. 그들은 절대로 프랑스의 영혼을 망치지 못한다”고 말했다. 연설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40분간 진행됐다. 올랑드 대통령은 IS를 ‘다에시’라고 낮추거나 야만인, 적 등으로 과격하게 불렀다. 다에시는 IS의 아랍식 이름으로,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프랑스 의회는 상·하원(국민회의) 양원제다. 평소에 상원은 뤽상부르궁전, 하원은 부르봉궁전에서 열리지만 헌법 개정과 같은 중대사를 논의할 땐 베르사유궁에 함께 모인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공화정이 설립된 1848년 이후 베르사유궁에서 대통령이 연설한 것은 프랑스 역사상 세 번째”라며 이번 연설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했다. 연설이 끝난 뒤 모두 기립 박수를 보내 지지를 표했으며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합창했다. 대외적으로 올랑드 대통령은 미국과 러시아에 테러와의 전쟁에 힘을 보태 줄 것을 촉구했다. 조만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날 예정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소집을 요구했으며, 유럽연합(EU) 차원의 대응책도 요구했다. 올랑드 대통령은 “EU가 외부 국경을 좀 더 효율적으로 통제하지 않으면 국가별로 국경을 통제할 수밖에 없으며, 결국 EU를 해체할 수밖에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EU 회원국들은 17일 프랑스 정부의 요청에 따라 파리 테러 대응과 관련, 군사작전을 포함해 가능한 한 전면적 안보 구호와 지원에 나서는 데 만장일치로 의견을 모았다고 페데리카 모게리니 EU 외교안보 고위대표가 밝혔다. 국내 대책도 밝혔다. 우선 자생적 테러리즘 근절을 위한 개헌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법 개정을 통해 테러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거나 테러를 저지를 위험이 있는 이중 국적자의 국적을 박탈하거나 추방하고, 요주의 인물에 대해 영장 없이 임의 수색하거나 가택연금에 처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또한 2년간 경찰을 5000명 증원하는 등 군대와 사법부 대테러 인력을 늘릴 예정이다. 이를 위해 국방예산 증액이 필요하다며 의회의 도움을 요청했다. 테러 직후 선포한 국가 비상사태를 3개월 연장하겠다고도 밝혔다. ‘프랑스 역사상 가장 인기 없는 대통령’이라는 굴욕을 맛봤던 올랑드 대통령은 지난해만 해도 지지율이 20%를 채 넘지 못했다. 그러나 샤를리 에브도 테러에 단호하게 대처하면서 지지율이 40%까지 올랐다. 파리는 테러 이후 차분한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테러범에 대한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프랑스는 16일 밤부터 17일 새벽 사이 IS 본거지인 시리아 락까를 이틀째 공습했다. 올랑드 대통령은 연설에서 휴전이나 중단은 없다며 자비심 없는 공격을 맹세한 상태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16일부터 사랑 모으는 강북

    강북구는 오는 16일부터 내년 2월 15일까지 석 달 동안 ‘2016 희망온돌 따뜻한 겨울나기 사업’을 한다. 해마다 겨울이면 강북구는 서울시 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함께 주민들의 기부금품을 모아 어려운 이웃에게 전달하고 있다. 구는 앞으로 석 달 동안 구청 민원실과 각 부서, 강북구 도시관리공단과 관계 기관 등에 ‘사랑의 열매 모금함’을 설치해 모금 활동을 펼친다. 박겸수 구청장은 12일 “구민들의 작은 정성을 어려운 이웃들에게 사랑과 희망으로 전해 ‘희망복지도시 강북구’가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강북구는 지난해에도 성금과 물품 19억 9888만원어치를 모았다. 이는 서울시 25개 자치구 가운데 강남구, 관악구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수준이다. 인구 50만명이 넘는 강남구와 관악구에 비교하면 강북구의 인구는 34만명에 불과해 조건은 불리하지만 ‘인정이 넘치는 따뜻한 동네’란 자부심이 높다고 구 관계자는 귀띔했다. 구에서 모은 성금과 성품은 서울시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실직과 질병 등으로 가족 해체의 위기에 놓인 가정, 홀몸어르신, 저소득 장애인 등 소외계층에게 전달할 계획이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1918~2015 Helmut Schmidt’ 헬무트 슈미트 前 독일 총리 별세

    ‘1918~2015 Helmut Schmidt’ 헬무트 슈미트 前 독일 총리 별세

    “그는 하나의 정치 기관 그 자체다. 그의 조언과 판단력은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국가가 그에게 큰 빚을 졌다.” 10일(현지시간) 저녁 독일 전역에선 TV 생중계로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추모 연설이 흘러나왔다. 전날 96세로 타계한 헬무트 슈미트 전 독일 총리를 기리려는 것이었다. 독일 dpa통신은 “헬무트 전 총리가 혈전증으로 함부르크 자택에서 사망했다”고 밝혔다. 그의 자택은 조문객들이 갖다 놓은 양초와 꽃다발로 둘러싸였다. 독일인이 가장 존경하는 총리로 꼽히는 슈미트 전 총리는 서독의 경제와 안보 위기를 타개했으며, 유로화와 유럽 통합의 기초를 마련한 정치인으로 기억된다. 전임자인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을 이어받아 독일 통일의 초석을 다졌다. 빌리 브란트 내각에서는 재무장관으로서 ‘라인강의 기적’을 이끌었다. 슈미트 전 총리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좌파 사회민주당(SPD)에 가입했다. 사민당에 들어간 후 그의 정치 인생은 탄탄대로를 걸었다. 1953년 처음으로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됐고, 1974년 자유민주당(FDP)과의 연정으로 총리에 올랐다. 당시 독일은 경기 침체와 안보 불안을 겪었다. 슈미트 전 총리는 공공부문 투자를 늘려 일자리 16만개를 창출했다.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당시 프랑스 대통령과 독·불 정상 협력으로 유럽 통합을 이끌었다. 이런 노력으로 1975년 세계경제정상회의(G6)가 출범했고,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로 이어졌다. 안보 분야에서도 외교력을 발휘했다. 1977년 10월, 독일 적군파(RAF)가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과 함께 루프트한자 항공기를 납치했다. 그는 국경경비대를 급파해 승객 86명을 모두 무사히 구출해 냈다. 구소련이 유럽을 겨냥해 중거리 핵미사일을 배치했을 때도 소련과 협상하면서 실패할 경우 서유럽에 중거리 핵미사일을 배치한다는 ‘투트랙 전략’을 구사했다. 그는 1976년, 1980년 재선됐지만 1982년 연정이 해체되면서 총리에서 물러났다. 퇴임 후에도 원로 정치인으로서 독일인의 존경과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그와 절친한 독일계 유대인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종종 “슈미트보다 먼저 죽고 싶다. 그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애정을 드러냈다. 세계 각국의 정상들은 애도를 표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슈미트 전 총리는 평화롭고 민주적인 유럽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고 밝혔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도 “그는 위대한 유럽인”이라며 “독일인들에게 유럽에서 해야 할 역할에 대해 설명했다”고 그를 평가했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슈미트 전 총리는 나의 아버지(피에르 트뤼도 전 총리), 그리고 캐나다의 위대한 친구”라며 고인을 애도했다. 지독한 애연가였던 그는 TV 인터뷰나 정상회담에서도 항상 담배를 입에 물었다. 국회 토론 중에도 욕을 할 정도로 거침없고 직설적인 성격이었던 그를 독일인들은 ‘슈미트 주둥이’라고 불렀다. 1936년까지 히틀러 소년단에 있었고 군 복무를 한 것에 대해선 ‘유대인 할아버지를 뒀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뛰어난 피아노 연주가였던 그는 런던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협연 음반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美해변에 쓸려온 23m 대왕고래 사체…범인은 엘니뇨?

    美해변에 쓸려온 23m 대왕고래 사체…범인은 엘니뇨?

    최근 미국 오리건주 해변에 거대한 고래 한마리가 사체로 파도에 쓸려온 채 발견됐다. 현지언론이 한 마리 고래의 죽음에 관심을 쏟는 것은 이 고래가 멸종위기종인 대왕고래이기 때문이다. 흰긴수염고래라고도 불리는 대왕고래(Blue Whale)는 이름에서 풍기듯 지구상에 있는 포유류 중 가장 큰 종이다.  이번에 사체로 발견된 대왕고래는 길이 약 23m, 몸무게 100톤의 어마어마한 크기지만 다 큰 대왕고래 중에서는 그나마 평균적인 덩치에 속한다. 현지 해양 생물학자 캘럼 스티븐슨은 "대왕고래가 무척 쇠약해진 상태에서 죽어 전반적으로 외형이 좋지않다" 면서 "죽기 직전 혹은 죽은 후 여러 상어가 달려들어 고래의 살점을 뜯어먹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의 관심은 역시나 이 대왕고래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이다. 부검을 실시하지 않아 정확한 사인을 밝혀내지는 못했으나 전문가들의 추측한 범인은 바로 엘니뇨. 스페인어로 아기 예수를 뜻하는 엘니뇨(el Niño)는 페루와 칠레 연안에서 일어나는 비정상적인 해수 온난화 현상을 의미한다. 이같은 현상은 대기에도 영향을 미쳐 폭염과 가뭄 뿐 아니라 슈퍼 태풍까지 만들어 낸다. 세계기상기구(WMO)에 따르면 올해 엘니뇨 관측 지역의 해수면 온도가 평년보다 2도 이상 높으며, 우리나라의 마른 장마와 가을 가뭄 등도 그 영향으로 풀이되고 있다.   스티븐슨은 "엘니뇨 현상으로 해수의 온도가 올라가 대왕고래의 먹잇감인 크릴새우 서식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면서 "충분한 영양분을 흡수못한 대왕고래가 쇠약해진 상태에서 바다를 떠돌다 나중에는 상어 등의 포식자의 먹잇감이 됐을 것" 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대왕고래의 사체는 해체돼 뼈대는 원형 그대로 박물관에 전시될 예정" 이라고 덧붙였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당신의 책]

    [당신의 책]

    국사 교과서 논란 넘어서기(조동일 지음, 지식산업사 펴냄) 저자는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이다. 5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한국문학사와 세계문학사 비교연구에 천착해 ‘한국문학통사’ 등 불멸의 저서를 남긴 원로 국문학자다. 그는 ‘문학사는 역사의 문화사이고, 역사는 총체사여야 한다’는 주장을 견지한다. 조 명예교수는 ‘삼국통일과 후삼국 통일은 어떻게 다른가’, ‘함석헌이 해방은 도둑처럼 왔다고 한 말에 동의하는가’ 등의 질문을 던지면서 학생들이 발견해야 하는 문제를 미리 말하는 것은 월권이고 교육을 망치는 배신행위라고 일갈한다. 현 정부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이 부족해 극우파로 기울어진다는 사자후와 함께 총체사적인 역사 교육, 다양성, 창의성의 존중의 대안은 오히려 현실적이다. 200쪽. 1만 3000원. 엄마들(마영신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우리네 엄마들의 삶은 헌신적인 어머니로, 지혜로운 아내 언저리로 박제화됐다. 그 고정된 역할의 경계 바깥으로 발을 내밀어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 하면 곧바로 사회의 불편한 시선들이 쏟아진다. 건물 청소노동자로 일하며 부당한 처우와 해고 위협에 조심스럽지만 분연히 싸우는 엄마, 20대 못지않게 사랑의 감정 앞에 흔들리며 마음앓이하는 엄마, 변변히 모은 재산은 없지만 소박한 행복을 꿈꾸는 엄마 등 엄마들의 사생활이 고스란히 펼쳐진다. 만화가 마영신의 그림체는 세련되지는 않지만 장면마다 담은 묘사는 핍진하기만 하다. 작가의 어머니가 직접 적은 연애, 우정, 노동, 가족의 이야기를 초안 삼았기에 작품 속 서사의 진정성이 더욱 절절하다. 372쪽. 1만 5000원. 펜으로 길을 찾다(임재경 지음, 창비 펴냄) 임재경은 1961년 조선일보로 입사해 대한일보, 한국일보 등을 거쳐 한겨레 부사장을 지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8·15, 6·25전쟁, 4·19 등 현대사의 한복판을 직접 몸으로 겪은 원로 언론인인 임재경이 팔순을 맞아 쓴 자서전이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해직과 투옥 등을 겪었지만 그의 출발은 시대의 주변인이었다. 서울대 문리대 시절 모두가 데모할 때 차마 끼지 못한 채 어슬렁거렸고, 6·25전쟁 관련 소설을 써보려 했지만 시대와 전쟁에 대한 통찰이 부족했다고 회고한다. 그가 경제부 기자 시절인 1967년 쓴 삼성 기사 대신 광고가 들어간 사연 등 언론과 자본의 문제를 비롯해 수습기자 제도, 기자단 문제, 그리고 언론과 정치권력의 관계에 대한 통찰이 빼곡하다. 440쪽. 1만 8000원. 헌법의 발견(박홍순 지음, 비아북 펴냄) 1987년 체제가 만들어낸 총체적 결과물인 헌법의 뿌리를 인문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1조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로 시작하는 헌법은 모두가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법학 전공자 등이 아니면 전문을 읽어본 이는 극히 드물다. 저자는 ▲대한민국의 기본정신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자유 보장 ▲차별받지 않는 공평한 삶의 보장 ▲인간다운 생활의 보장 등 네 영역으로 크게 묶어서 이해를 높인다. 철학과 역사를 넘나드는 헌법 조문에 대한 해석을 보면 헌법이 왜 ‘시민의 교과서’인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플라톤의 ‘법률’,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루소의 ‘사회계약론’ 등 7권을 필독서로 꼽는다. 356쪽. 1만 5000원. 비싼 원전 그만 짓고 탈핵으로 안전하자(오시마 겐이치 지음, 장영배 옮김, 이매진 펴냄) ‘원전’과 ‘안전’은 한 획 차이지만 그 작은 차이가 불러오는 후폭풍은 하늘과 땅 차이다. 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 참사를 겪은 일본 리츠메이칸대 교수인 저자는 원전이 값싼 에너지라는 것은 환상에 불과할 뿐이라며 사회적 비용과 환경 피해를 고려하면 비용 측면에서 결코 값싸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그는 정계, 관계, 경제계, 노동계, 학계, 언론계 등으로 구성된 원자력 관련 이해공동체 집단의 관계 및 실태를 고발하며, 그들의 원자력 복합체를 ‘원자력 마피아’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를 해체하고 재생 가능 에너지를 중심으로 하는 탈핵 안전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240쪽. 1만 2000원.
  • 해외여행 | 다시 피가 돈다-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바이칼 호수까지

    해외여행 | 다시 피가 돈다-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바이칼 호수까지

    ‘러시아’라는 세 글자가 내 속에서 퍼 올리는 건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음습하고 도덕적인 문학적 상념, 아침이면 의례처럼 볼륨을 높이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2번,축축한 자조에 딱 들어맞는 ‘안나 게르만’의 로망스, 시적인 위로를 주는 ‘샤갈’의 그림들, 어감마저 차가운 ‘소련’이라는 이름, 저항의 로커 ‘빅토르 최’ 그리고 뜻도 모른 채 외던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과 무자비한 해체의 역사…. 그 거대한 땅덩이의 체취를 맡고서야 알았다. 러시아의 실체는 도표화된 관념보다 몽롱하고, 드물게 아름답다는 것을. 편협한 인식을 뒤로한 채 ‘떠난다’는 것이 얼마나 심장 뛰는 일인지를.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 아시아도 유럽도 아닌, 러시아 “‘스파시바спаси?бо’라고 해요!”블라디보스토크 도착 사인이 떴을 때, ‘고맙습니다’가 러시아어로 무엇이냐고 묻는 타이완 승객에게 스튜어디스가 말했다. 그녀는 친절하게 ‘시’에 강세를 줘야 한다는 설명도 빼놓지 않았다. 그 순간부터 ‘스파시바’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롭스크를 거쳐 이르쿠츠크를 지나 바이칼에 이르기까지 내가 아는 유일한 러시아어가 되었다. 지도 위에서만큼 러시아연방이 기세등등해 보일 때도 없다. 호주보다 두 배 이상 큰, 세계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가진 이 나라에서 프리모르스키 지방을 찾을 때는 손가락 방향을 오른쪽으로 한참 이동시켜야 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연해주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프리모르스키 지방의 중심도시다. 분명 이국인데, 거리에는 늘씬한 금발의 미녀들이 넘치는데, 왠지 낯설지가 않다. 그건 아마 DNA에 박힌 기억 때문일 게다.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시대를 지나고 1900년대 초 민족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도 여기니까. ‘동방을 지배하라’는 뜻에서 짐작하듯 작은 변방도시에 불과했던 블라디보스토크에 러시아가 부여한 의미는 노골적이다. 겨울에도 연안이 심하게 얼지 않는, 부동항 블라디보스토크는 1년 내내 항만의 기능을 유지할 수 있어 전략적 항구도시와 군항으로는 적격이었다. 극동함대 사령부 등 해군기지가 주둔하고, 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원조물자가 옮겨지는 거점이기도 했으며, 극동 지역 외교와 상업의 중심지로도 활약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함정 10여 대를 격침시켰다는 잠수함 C-56(‘C’는 러시아어로 ‘에스’라고 읽는다. ‘중형급’이라는 표시)은 찬란했던 전장을 회고하는 구소련의 늙은 해군처럼 해양공원 앞 뭍에서 긴 휴식에 들어 있었다. 길이 77m의 이 강철 영웅에겐 엔진을 돌리던 승조원들의 함성은 사라지고 그들이 남긴 훈장과 어뢰, 기관총을 자랑하는 게 유일한 일과가 되었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6.5m 좁은 폭, 그 안의 희박한 공기 탓인지 머리가 띵해져 잠수함에서 나왔다. 옆으로 용사들의 넋을 위로하는 ‘영원의 불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누군가 붉은 카네이션을 놓고 머리를 조아리는데 마침 뒤편 기도소에서 종이 울린다. 1941년과 1945년을 오르내리던 그 소리는 전쟁이 가당키나 하냐는 듯 평화로웠다. 1891년,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였던 니콜라이2세의 황태자 시절, 그의 방문을 기념해 세웠다는 개선문은 불과 몇 걸음 뒤다. 왜소한 풍채를 화려하게 치장한 그 건축물은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천성을 숨기고 자신만만한 ‘척’했다는 황제의 운명과 닮아 보였다. 혁명 후 파괴된 것을 고증을 거쳐 복원했다 해도 원형을 되찾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나 보다. 제정러시아의 문장이던 쌍두 독수리는 개선문 꼭대기에서 볼 수 없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장 세련되고 번화한 스베트란스카야 거리Svetlanskaya Street. 횡단보도의 초록 불은 바뀌는 순간 이미 9를 세고 있다. 으름장 놓는 선생님 같은 신호등을 째려보며 잰 발길을 놀려야 하는 일이 잦았다. 100년도 넘는 바로크양식의 건물들이 자리한 가로수 길을 걷고 있자니 막연히 ‘여긴, 유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거만하리만치 딱딱한 표정의 러시아인들을 보고 그 생각은 접기로 한다. 유라시아주의를 바탕으로 강대국을 재건한다는 국가의 외교정책에 이바지하듯, 아시아도 유럽도 아닌 이곳은 오로지 극동 러시아라는 자존감을 유지하고 있다. 스베트란스카야로부터 두 블록 떨어져 자리한 중앙광장은 소비에트 정권 수립을 위해 싸운 병사들을 기리는 동상만이 생생할 뿐, 혁명전사광장이라는 옛 이름은 의미 없어 보였다. 금요일이면 주말시장이 열리고 신년축제와 기념일 퍼레이드 등 이벤트의 무대가 된 지 오래다. 과거에도 지금도 이곳에서 집회는 계속되지만 혁명에서 놀이로 그 주제는 완전히 바뀌었다. 전설만 남은 영웅들의 흔적 블라디보스토크 둘째 날, 신한촌부터 찾았다. 신한촌은 일본에 의해 침탈된 국권회복을 위해 국내외 지식인들이 모여 결의를 다졌던 장소다. 고종이 파견한 헤이그 특사 중 한 명인 이상설,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였던 이동휘, 전설의 의병장이었던 홍범도를 비롯해 신채호, 안중근, 안창호 등 수많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 아파트촌 어귀에 도착했을 때, 그곳이 신한촌 터라는 것을 눈치 챌 길은 보호 철책에 둘러싸인 ‘연해주 신한촌 기념탑’이 전부였다. 한인들이 살길을 찾아 연해주 땅을 처음 밟은 것이 1863년. 블라디보스토크가 극동 해군기지로 부상하면서 그들은 군항에서 작업인부로 일했다. 처음 자리 잡은 곳은 시내 중심부였다. 하지만 콜레라가 발생하자 시당국은 1893년 서쪽 아무르만 해안가로 한인들을 이주시키고 그곳을 ‘까레이스카야슬라보드카한인촌’, 우리말로는 개척리開拓里로 불렀다. 이후 1911년, 또 한 번의 위생 문제로 북쪽 2km 떨어진 라게르 산비탈로 이주한 한인들은 ‘노바야까레이스카야슬라보드카신한촌’를 형성했고, 이전의 거주지는 구한촌이라 불리게 되었다. 1914년, 신한촌은 3,000명이 거주하며 점차 자리를 잡아 갔지만 1937년, 스탈린이 극동에 살던 한인 17만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키면서 신한촌의 한인들 역시 카자흐스탄 등지로 이송되고 그 자리는 유럽과 러시아 노동자들의 차지가 되었다. 길이가 다른 커다란 세 개의 석조물. 가운데는 한국, 왼쪽은 북한, 오른쪽은 고려인을 포함한 해외 한민족을 상징한다는 기념탑 앞에서 조국의 미래를 밤새워 고민했을 독립 영웅들의 절절함을 가늠해 보기란 쉽지 않았다. ‘민족의 최고 가치는 자주와 독립…’이라는 기념탑의 글귀는 길 잃은 아이처럼 애처롭고 속상했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블라디보스토크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독수리 둥지’라는 뜻의 오리노예 그네즈도 산 정상은 214m에 불과하지만 도시에서 가장 높다. 계단을 올라서니 러시아의 키릴문자를 만든 아우 키릴로스와 형 메소디오스 형제의 동상이 십자가를 들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굽어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가니 바다 위에는 2012년 APEC 정상회담에 맞춰 완공한 루스키섬까지 이어진 금각만 대교가 장쾌했다. 서울 남산에서처럼 연인들이 자물쇠를 걸며 사랑을 맹세하는 건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결혼 촬영이 한창인 신랑신부가 난간 틈을 비집고 자물쇠를 채우는 동안 신부보다 예쁜 들러리는 뭇 남자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아무르만 해변공원까지는 걸었다. 노천카페에 앉아 블라디보스토크의 명물인 메드베드카곰새우를 주문했다. 비릿하고 고소한 맛이 찬 맥주와 묘하게 어울렸다. 체 게바라가 그려진 티셔츠에 네덜란드 맥주를 마시는 청년들, 일본산 오토바이를 타고서 CF의 한 장면처럼 등장한 처녀들, 낚시를 즐기는 부부…. 히죽대며 그들의 모습을 훔치는 사이 새우껍데기만 자꾸 쌓여 갔다. ●하바롭스크Khabarovsk 시베리아횡단열차에서의 하룻밤 하바롭스크까지 가는 열차 출발 시간은 저녁 9시. 서둘러 짐을 챙기고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으로 향한다. 지는 해에 순종하며 기차역이 차분히 물들고 있었다. 1907년부터 5년에 걸쳐 지어졌다는 기차역은 제정 러시아의 건축양식으로 제법 낭만적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시베리아횡단철도의 출발지이자 종착지다. 이곳에서 모스크바까지의 거리는 9,288km. 플랫폼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철로를 달렸다는 증기기관차도 보였다. 출발은 저녁 9시인데 플랫폼의 시계는 오후 2시를 가리킨다. 철도역의 모든 시간표는 모스크바가 기준이라는 것을 깜빡했다. 난민처럼 바닥에다 가방을 열어 젖히고 주섬주섬 필요한 물건만 미리 챙겼다. 출발시간이 다가오자 승무원은 여권과 승차권을 확인하고 탑승을 종용했다. 9번 칸, 객실번호 6호 23번. 4인 1실, 양쪽으로 2층 침대가 놓인 객실 ‘쿠페’는 좁았지만 불편함은 없었다. 서서히 열차가 움직이고, 시간이 지나야 시원해질 것이라는 차장의 말처럼 에어컨은 30분이 지나서야 제 기능을 발휘했다. 하바롭스크 도착은 내일 아침 8시. 무궁화호보다 더 느린 기차를 타고 밤새 11시간을 달려야 한다. 하얀 자작나무숲, 영화 <닥터 지바고>에 나올 법한 눈보라, 잠들지 않는 백야. 시베리아횡단열차에 엄청난 로망을 품은 사람들은 흔히 이런 것들을 상상한다. 러시아에 오기 전, 몽골을 거쳐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탔다는 친구는 말했다. “러시아 애들은 책만 읽고 얘기도 가족들끼리 소곤소곤. 같이 보드카 마시자던 러시아 아저씨 아니었으면 심심해서 아마 미쳐 버렸을 걸!” 모스크바까지 꼬박 달리는 이들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열차에서의 하룻밤만으로 그 기분은 짐작하고도 남았다. 낮도 아닌 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래야 반사되는 객실 내부가 전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산 가이드북을 뒤적이다 음악을 듣고, 러시아 사람들은 무엇을 하나 복도를 기웃대다가, 키릴문자가 새겨진 맥주를 마시고 남은 소시지 3개를 승무원에게 내미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은 없었다. 다행히 수다 떨 일행들이 있어 시간은 잘 갔다. 잠자리는 생각보다 아늑했다. 꺾이는 철로마다 침대가 심하게 덜컹대긴 했다. 하지만 낮에 흘린 땀이나 미처 못 지운 바지의 소스 자국, 떡진 머리도 문제될 게 없는데 그게 무슨 대수라고. 잠결에 2층 침대로부터 커튼콜처럼 내려왔다 올라가는 이불에 깜짝깜짝 놀라거나, 변기가 막힌 줄도 모르고 30분을 화장실 문 앞에서 참던 일만 빼면. 창문 너머 흘러가는 자작나무 사이로 스미는 햇빛을 보고 잠에 빠졌는데, 곧 정차한다는 소리에 허둥지둥 이불을 박차고 객실 문을 열어젖힌다. 열차가 멈춘 곳. 하바롭스크였다. 조금 더 머물고 싶던 도시 하바롭스크는 1991년 블라디보스토크가 개방되기 전까지 극동지역의 중심지였다. 이제는 그 영광을 물려줬지만 하바롭스크는 마치 권세를 내려놓은 자가 여유를 즐기듯 유유자적했다. 이 도시에서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레닌광장 북쪽에 자리한 청동 레닌상이다. 레닌이 사망한 이듬해인 1925년에 세워졌다는데 러시아 대부분의 지역에서 레닌의 동상이 철거된 데 반해 블라디보스토크와 이곳에서는 아직 건재하다. 레닌이 굽어보고 있는 광장은 하바롭스크의 행정 중심지다. 동쪽으로 하바롭스크주 정부청사가 보였다. 아침을 맞은 광장에는 벤치에서 조용히 휴식을 즐기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비둘기가 사람보다 많았다. 레닌광장 아래로 아무르스키 거리를 쭉 따라가면 길은 아무르 강변의 콤소몰 광장까지 잇닿는다. 콤소몰은 구소련 시절 공산주의 청년 정치조직의 이름이다. 광장에는 혁명 전사들의 모습이 조각된 오벨리스크가 굳건하고, 꼭대기에 소비에트를 상징하는 별이 있었다. 눈에 띄는 것은 광장 위 우스벤스키 성당이다. 성모승천성당으로 불리는 그곳은 소비에트 시절 파괴된 후 2001년 다시 동화 같은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아무르강이 눈앞인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걸음을 재촉했다. 총 길이만 2,800여 킬로미터. 몽골에서 발원해 하바롭스크를 거쳐 오호츠크해로 흐르는 아무르강은 중국에서는 흑룡강이라 부르는 그 강이다. 전망대 앞에는 강에 이름을 제공한 시베리아 초대 총독 무라비요프 아무르스키의 동상이 있는데, 여행지에서 만난 아무르라는 이름들은 죄다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향토박물관은 잠시 비를 피하기에는 맞춤이었다. 연해주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박물관으로 본래 이름은 ‘그라제코프 주립 자연사박물관’. 이 역시 설립자의 이름을 딴 것이다. 122년의 전통이 축적된 내부에는 시베리아 메머드, 아무르 호랑이, 원주민인 나나이족과 우데게이족의 생활모습 등 하바롭스크주의 역사와 자연, 민속 등 자료 15만 점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구관에는 소비에트 시절과 관련한 물품들만 전시되어 있는데, 포스터부터 장신구까지 세월의 때가 묻은 낯설고 이색적인 소소함이 눈길을 끌었다. 강을 따라 북쪽에 다다르니 또 다른 아름다운 러시아정교회 성당이 자리했다. 프레오브라젠스키 성당은 황금색 돔과 새하얀 성당이 질서정연했고 내부는 황홀했다. 천장에 그려진 그리스도와 네 명의 사도, 정면 6층 제단의 성모와 성인들의 모습을 새긴 이콘(성상화)은 다른 세상의 것인 듯 신비롭고 이질적이었다. 이콘에 향했던 눈길은 머리를 가리고 촛불을 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서 한참을 머물렀다. 진지하고 경건했다. 그 경배의 몸짓 뒤에서 할 것이라고는 숨소리를 죽이는 것 외에는 없었다. 시베리아횡단철도TSR. Trans Siberian Railroad시베리아횡단철도는 모스크바에서 시작해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결하는, 총길이 9,288km의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다. 1891년에 착공해 1916년에 완공됐다. 90여 개의 도시를 거치는 동안 시간대만 7번이 바뀌고, 지나는 역만 60여 개다. 급행열차를 타면 일주일이 걸린다. 열차의 출발과 도착시간은 모스크바가 기준이다. 열차의 객실 등급은 1등석인 2인 1실의 ‘룩스Lyux’, 2등석 4인 1실의 ‘쿠페Kupe’, 3등석 6인실의 ‘플라츠카르타Pratskartny’와 지정 번호가 없는 8인 좌석의 ‘옵스치Obschy’로 나뉜다. 룩스와 쿠페는 객실이 분리되어 있지만 3등석은 객실 구분 없이 개방되어 있다. 콘센트가 있는 것은 1등석 객실뿐이다. 2등석은 객실 내부 말고 복도에 네 개, 화장실 밖과 안에 각 한 개씩 있다. 멀티 탭을 가져가면 도움이 된다. 열차 칸마다 뜨거운 물이 비치되어 라면이나 커피를 먹을 수 있다. 열차 한 칸당 두 명의 승무원이 교대근무하며 객실을 살피고 간단한 먹을거리도 판매한다. 술과 담배는 규정상 금지되어 있지만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다. 흡연자들은 보통 역에 정차할 때마다 내려 담배를 피우고 재빨리 오른다. 러시아 철도청 www.rzd.ru 러시아정교회 러시아정교회는 988년 블라디미르 대공에 의해 비잔티움의 동방정교를 받아들여 민족신앙과 결합한 종교다. 러시아정교회 건축양식의 가장 큰 특징은 독특한 양파 모양의 돔 ‘루꼬비짜’다. 눈이 많이 오는 러시아에서 눈이 쌓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 외에도 기도가 하늘에 닿는다는 의미를 지닌다. 흰색과 황금색은 러시아정교회 초기의 가장 기본이 되는 색채로 흰색은 평화와 순결, 황금색은 신성을 상징한다. 예배는 사제는 있지만 설교는 하지 않고, 의자 없이 서서 참여한다. 또 악기의 반주 없이 오로지 사람의 목소리만으로 성가를 부른다. 러시아정교회가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된 것은 고르바초프에 의해 1990년 소련 최고회의에서 양심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법을 의결한 후부터다. ●이르쿠츠크Irkutsk 아! 바이칼 비행기가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시간은 자정 무렵이었다. 이르쿠츠크는 바이칼 호수를 가기 위한 관문. 둘러 볼 겨를 없이 아침이면 또 길을 떠나야 한다. 설렘과 염려를 교차시키느라 잠은 쉬 들지 못했다. 이르쿠츠크에서 바이칼호의 들머리까지는 버스로 3시간 반. 부리야트족 자치구인 우스찌아르다를 스치는 동안에는 가을을 준비하는 스텝짧은 풀로 뒤덮인 초원이 길게 이어졌다. 어렴풋이 호수가 시야에 들어올 무렵 버스가 멈춘 곳은 사휴르따 선착장이다. 목적지인 알혼섬을 가기 위해 철부선에 올랐다. 배는 물살을 가른 지 30분도 되지 않아 사람들과 자동차를 섬에 부려놓았고, 세상사 다 겪은 아이처럼 옹골찬 ‘우아직러시아 군용차량을 개조한 4륜 승합차’이 벌써 마중 나와 있었다. 운전기사 안톤은 숙소가 있는 후지르 마을까지 한 시간을 달려야 한다며 돌투성이 길을 망설임 없이 내달렸다. 요란한 진동 모터 위에 앉은 듯 엉덩이는 시종 덜덜거렸다. 바이칼 호수가 품은 22개의 섬 중 알혼은 가장 크고, 유일하게 사람이 사는 섬이다. 거제도의 두 배쯤 되는데, 다섯 개 마을의 주민 1,500명 가운데 대부분은 후지르 마을에 모여 산다. ‘알혼’은 부리야트 원주민어로 ‘태양이 비추는 땅’이라는 뜻이다. 연 강수량이 200mm에 불과해 스텝과 사막 그리고 화강암과 침엽수림이 전부다. 그 황량함을 심장처럼 품은 바이칼호수를 향해 원주민들은 ‘바이칼은 서 있는 불. 아직도 그 불은 식지 않고 있다’며 경외심과 두려움을 표현해 왔다. 숙소에 짐을 내리고 부르한Burkhan 바위가 보이는 언덕으로 갔다.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13개의 세르게 신목. 조상신들이 모이는 곳을 지나니 검푸른 호수 앞으로 정좌한 두 개의 지엄한 바위가 보였다. 샤머니즘의 성지로 알려진 바로 그 자리다. 주위에는 히말라야에서 방금 내려온 성자 같은 복장을 한 외국인들이 손을 맞잡고 명상에 잠겨 있었고, 가부좌를 튼 채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는 이도 보였다. 무엇이 그들을 이곳으로 이끈 건지 모르겠지만 초자연적 존재와의 교류도, 북방 몽골인종의 시원이 서린 곳이라는 학설도, 부리야트인의 피를 이어받은 칭기즈칸의 무덤이 있다는 전설도, 그 순간 눈앞에 펼쳐진 바이칼 호 자체보다 신성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우아직은 섬의 가장 북쪽 하보이곶으로 달렸다. 날카로운 송곳니 모양을 한 절벽. 그곳에서 보는 바이칼은 호수가 아니라 바다, 그것도 대양이었다. 경계도 모른 채 펼쳐진 호수는 텅 빈 채 근원에 닿을 듯 아스라해서, 차라리 공허했다. 그날 밤, 호숫가에 앉아 마신, 수심 200m의 바이칼호 물로 만들었다는 보드카는 파도소리와 함께 목젖을 뜨겁게 타고 흘렀다. 떠나기 전 호수를 꼭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새벽 5시 혼자 숙소를 나섰다. 인기척 없는 마을을 두리번대며 방향을 가늠하고는 그 언덕에 다시 올랐다. 부르한 바위 앞, 잠이 덜 깬 호수는 몸을 뒤척였고 바람은 초연했다. 그리고…. 영원한 작별인 양 호수에 건넨 말은 이것뿐이었다. “스파시바… 바이칼.” ▶travel info AIRLINE대한항공에서 블라디보스토크와 이르쿠츠크 노선을 운항하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노선의 출발편은 매일 인천에서 오전 10시10분에 출발해 오후 1시50분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고, 귀국편은 오후 2시50분에 출발해 오전 7시10분에 인천에 도착한다. 이르쿠츠크 노선은 12월25일부터 1월15일까지 동계노선을 주 2회(월·금요일)씩 총 6회 운항할 예정이다. 출발편은 저녁 8시50분 인천에서 출발, 밤 12시5분에 이르쿠츠크에 도착하고, 귀국편은 새벽 2시30분 출발, 오전 7시10분 인천에 도착한다. 인천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는 2시간 10분, 이르쿠츠크까지는 3시간 40분이 소요된다. SHOPPING알까기 인형 ‘마트료시카’19세기 말에 탄생한 나무로 만든 러시아 인형으로 엄마를 뜻하는 러시아어 ‘마티’에서 유래했다. 일본 전통인형인 ‘다루마’에서 영감을 얻어 1891년 러시아 민속공예화가 세르게이 말루틴이 처음 디자인했다고 전해진다. 둥근 몸통 안에는 작은 인형들이 겹겹이 들어 있는데, 일본정부에 선물하려고 만든 1세트 72개가 들어있는 대형 마트료시카는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 시대에 따라 외형도 변해서 만화영화의 캐릭터나 대중음악가, 스포츠 스타나 정치인의 얼굴을 담은 마트료시카도 볼 수 있다. 가격은 싼 것은 대개 400~700루블 정도이지만 디자인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FOOD국민음식 ‘보르쉬’와 ‘샤슬릭’ 러시아의 음식은 슬라브 전통에 서유럽과 몽골, 중앙아시아와 카프카스지역의 영향을 받아 대개 짜고 달고 신, 자극적이고 복합적인 맛이다. 대표적인 슬라브 전통음식인 ‘보르쉬’는 감자, 당근, 양배추에 비트와 토마토로 색을 낸 스프다. 샤슬릭은 러시아어로 ‘꼬치구이’라는 뜻이다. 이름보다는 맛 ‘오물‘오물은 바이칼호에서만 서식하는 토착 물고기다. 생긴 것은 우리의 청어와 닮았다. 회나 탕, 튀김, 샐러드 등 다양하게 먹는 방법이 있는데 자작나무에 훈제한 오물이 가장 인기다. 이르쿠츠크에서 바이칼로 가는 길에 있는 작은 항구 마을 리스트비얀카에는 오물을 파는 가게들이 잔뜩 있다. 가시가 적고 비리지 않아 담백하다. 39°도 41°도 아닌 40° ‘러시안 보드카’러시아를 대표하는 술, 보드카Vodka는 러시아어 ‘물voda’에서 유래되었다. 감자나 옥수수, 보리 등을 원료로 한 증류수로 무색, 무취, 무미다. 러시아 속담에 ‘4,000km는 길도 아니고 영하 40도는 추위도 아니며 40도가 아니면 술도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19세기 후반, 원소주기율표를 만든 러시아의 화학자 멘델레예프가 가장 입맛에 잘 맞고 숙취를 일으키는 불순물이 제일 잘 걸러지는 최상의 알코올 도수가 40%라는 것을 발견했다. 보드카의 나라 러시아에서도 밤 11시부터 오전 8시까지 공공장소에서의 음주를 금지하고 있으며, 밤 10시부터 오전 10시까지는 도수 15% 이상의 주류 판매도 금하고 있다. MUSEUM연해주의 모든 것 ‘아르세니예프 향토박물관’1890년 개관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장 규모가 큰 박물관이다. 1906년 구시베리아 상업은행 건물로 옮겨졌는데, 아르세니예프는 연해지방을 서방에 알린 탐험가의 이름이다. 3층 건물 안에 연해주의 자연과 지리, 민속학, 고고학 사료들과 동식물 표본집, 화폐 등 약 20만 점이 전시되어 있는데, 주제가 딱히 구분되지는 않았지만 한국관에서는 지역에서 발굴된 발해의 유물을 볼 수 있다.20 Svetlanskaya Str. Vladivostok +7 4232 414 082 100루블평일 09:00~18:00, 토·일요일 09:00~17:30 HOTEL바이칼호 바로 옆 ‘바이칼로프 오스트록’알혼섬의 후지르 마을 입구에 있는 나무로 된 시베리아 전통가옥 형태의 숙소다. 2013년 문을 열었는데 114개의 객실에 250명을 수용할 정도로 알혼섬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깔끔하다. 특히 바이칼 호수 바로 앞에 위치해서 객실과 레스토랑에서 호수가 보이고 새벽에도 밤에도 산책을 할 수 있는데다, 부르한 바위까지도 도보로 20분 거리다. 7, 8월 성수기 스탠다드 트윈룸의 경우, 아침식사 포함 1박에 4,500루블(약 8만원), 화장실과 샤워실은 객실 3개가 있는 한 층에서 공동으로 사용한다. 욕실용품은 비치되어 있지 않다. 호숫가에서 바비큐를 할 수 있도록 그릴과 장작, 숯 등 일체의 도구도 대여해 준다. 666137, Russia, Irkutsk Region, Olkhonskyi District, Village Khuzir, Street Pribreznaya, 3+7 3952 404 202 www.baikalovostrog.ru 에디터 천소현 기자 글·사진 Travie writer 이세미 취재협조 대한항공 www.koreanair.com 참좋은여행 www.verygoodtour.com
  • 불국사 석가탑 원형 복원… 되살아난 ‘신라의 미’

    불국사 석가탑 원형 복원… 되살아난 ‘신라의 미’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국보 제21호)이 다음달 3년 4개월간의 전면 해체·보수 작업을 마무리짓고 일반에 공개된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4일 불국사 석가탑 보수 현장에서 보수 추진 경과 설명회를 열고 3층 옥개석(屋蓋石·지붕처럼 덮은 돌)을 설치했다. 연구소는 이달 안에 상륜부까지 조립을 완료하고 12월 중 가설덧집을 철거한 뒤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석가탑은 742년(경덕왕 원년) 불국사 창건 때 조성됐다. 백제 석공 아사달과 아사녀의 슬픈 사랑의 전설이 담겨 있는 석가탑은 간결하면서 비례와 균형이 완벽해 통일신라 조형예술의 백미로 꼽힌다. 2010년 12월 정기 안전점검에서 상층 기단 갑석이 깨져 있는 게 발견됐다. 길이 1320㎜, 폭 5㎜ 정도의 균열로, 기단 내부의 적심(積心·20여t에 이르는 탑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채운 흙더미)이 비바람 등으로 유실된 게 원인이었다. 곧장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보수정비사업단이 꾸려졌고 2012년 9월 전면 해체 보수 작업에 들어갔다. 해체한 석가탑은 가설덧집에 보관하면서 지의류·균류, 철산화물, 염류 등 탑 표면 오염물 세척 작업을 했다. 화학약품을 사용하지 않고 대나무 스틱으로 긁어내거나 스팀을 분사해 씻어냈다. 부식된 철제 은장은 열팽창과 열전도율이 낮고 내부식성과 연성이 뛰어난 티타늄 은장으로 대체했다. 갈라지거나 떨어져 나간 부분은 티타늄 핀 3~5개를 박아 고정시켜 붙이거나 에폭시수지로 틈새를 메웠다. 김덕문 국립문화재연구소 건축문화재연구실장은 “이번 해체 수리의 특징은 원형 보존과 역사적 진정성 확보, 과학 기술에 근거한 구조 보강과 보존 처리, 자료 제작과 기술 보급”이라면서 “과거와 현재 기술을 융합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석가탑은 1966년 도굴 미수 사건에 따른 후속 조치로 부분 해체·보수 작업이 이뤄졌다. 해체 당시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비롯해 사리장엄구(사리함과 사리병을 비롯해 사리를 봉안하는 일체의 장치), 사리를 담은 금동제외합과 은제내합, 중수문서 등 유물 45건 88점이 수습됐다. 석가탑은 고려 현종 15년(1024) 해체 수리, 정종 2년(1036)과 4년(1038) 지진 피해 보수, 조선 선조 20년(1596) 우레로 탑 꼭대기의 뾰족한 부분인 상륜부 파손(이때 파손된 상륜부는 1972년 복원)에 따른 보수 등 여러 차례 보수를 한 적이 있지만 석탑 기단까지 전부 들어냈다 다시 세우는 전면 해체는 창건 이래 처음이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사설] 그렇게 떠들던 군 가혹 행위 대책 다 어딨나

    병영 안에서 선임병들의 가혹 행위로 또 젊은 병사가 희생됐다. 온 국민들에게 충격을 안겨 준 윤 일병 사망 사건이 아직 뇌리에 남아 있지만 유사한 반인권적 사건이 툭하면 터지고 있다. 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병영문화를 개선해 폭력이 없는 선진 강군을 만들겠다고 한 국방부의 약속이 또다시 공수표가 된 셈이다. 군 당국은 최근 경기도 파주의 전방부대에서 수류탄을 떠뜨려 자살한 병사는 선임병들의 가혹 행위 때문으로 판단돼 관련자 3명을 구속, 조사 중이라고 그제 밝혔다. 선임병들이 숨진 병사의 엉덩이를 파리채로 때리며 욕설과 함께 잠을 못 자게 하는 등 비인간적인 행위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초 선임병들의 지속적인 가혹 행위로 숨진 윤 일병 사망 사건과 별반 다르지 않다. 특히 이번에는 병사들의 올바른 병영생활을 지도해야 할 초급 간부까지 연루된 것으로 알려져 더욱 충격을 주고 있다. 국방부는 병영에서 가혹 행위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대책을 내놓았지만 실효성도 없고 제대로 이행하지도 않고 있다. 정치권과 국방부 등은 윤 일병 사망 사건이 터지자 병영문화를 획기적으로 바꾸겠다며 군 인권개선 및 병영문화 혁신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대책을 내놓았다. 그것이 지난해 말 국방부에 제시한 ‘병영문화 혁신 권고안’인데 국방부는 수용은 했지만 제대로 실천하지 않고 있다. 특히 위원회가 군 인권 옴부즈맨(군 인권보호관)을 신설해 인권위원회 등에 설치하자는 제안을 국방부는 달가워하지 않고 있다. 현재 군 사법제도 개선안과 함께 국회에 상정돼 있으나 입법화 여부는 불투명하다. 더욱이 국방부는 특별위원회가 활동을 종료하며 권고한 7개 분야 39개 정책 과제에 해당하는 사업의 상당수를 내년도 예산안에 포함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국방부가 병영문화 개선을 위해 편성한 내년도 예산은 2259억원에 이르지만 용도가 해체·이전 예정부대 생활관 리모델링, 특수지 근무수당 인상, 격오지 부대 풋살 및 농구 경기장 설치 등으로 가혹 행위 예방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병영 내 가혹 행위를 막으려면 인권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전환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 상대방의 인권을 존중해 주는 병영 분위기를 만들고 부모나 외부의 공적인 조직이 언제든지 병사들의 생활을 들여다볼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것을 다시 한번 촉구한다.
  • 日, 위안부 지원금 확대 검토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지원사업에 대해 정부 지원금을 연 1억엔대로 늘리고 지원 프로그램을 다양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3일 “일본 정부가 1965년 한·일 협정으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은 소멸됐고 관련 개인의 청구권 문제도 해결됐다는 입장이지만 기본 인권을 유린당한 여성에 대한 인도적 지원에 충실한다는 측면에서 이 같은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신문은 일본 정부가 이번에 서울에서 진행된 한·일·중 3국 정상회의 및 한·일 정상회담의 후속 조치를 준비하면서 이 같은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 관련 민간기구에 재정 지원을 확대해 나가는 것은 인도적인 차원의 배려를 강조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특히 2007년 해산된 아시아여성기금의 활동을 잇는 후속 활동을 확대하겠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러나 신문은 일본의 사죄나 책임 인정 등 위안부 문제의 해법과 관련, 한국 정부의 입장과는 여전히 차이가 있어 협의 진전에 난항이 예상된다고 지적했다. 도쿄의 외교 소식통들은 “일본 정부가 주한 일본대사가 직접 피해자들을 면담하고 유감을 표하는 방식도 함께 고려 중”이라면서 일본 측은 이 문제에 대한 한국 측의 최종 해결의 보증 등을 원하고 있다고 전했다. 일본 정부 관계자는 “아베 신조 총리가 종전 70주년 담화 등에서 여성 인권이 훼손되는 일이 없는 세기로 만들어 나가겠다고 약속한 이상 새로운 지원 방식 등 제3의 해결책이 제시될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군과 정부의 위안부 모집 및 운영 등에 대한 개입을 인정하지 않고 있어 아베 총리의 사과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일본 외무성은 올해 1500만엔 등 아시아여성기금 해체 이후 2008년부터 군 위안부 피해자를 지원하는 비영리조직(NPO)들을 위한 지원금을 책정하고 있다. 이들 NPO는 피해자들에게 의약품 및 생필품 등을 지원하고 있다고 신문은 덧붙였다. 신문은 이와 함께 내년도 한·일·중 3국 정상회의는 의장국인 일본이 하반기가 아닌 상반기로 개최 시기를 조정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일정대로 되면 박근혜 대통령은 내년 상반기에 취임 이후 처음 일본을 방문하게 된다. 도쿄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 정책보다 패기·외모… 40대 꽃미남 리더 뜬다

    정책보다 패기·외모… 40대 꽃미남 리더 뜬다

    ‘용팔이’의 주원과 ‘두번째 스무살’의 이상윤이 드라마 종영과 함께 자리를 비운 새 둘 곳 없던 기자의 시선을 해외 채널 속 인물들이 사로잡았다. 그것도 미국 드라마 전문 채널인 HBO가 아니라 뉴스 전문 채널 CNN에서다. 29일(현지시간) 미국 권력 서열 3위인 하원의장에 40대가 선출됐다. 운동 마니아인 폴 라이언 하원의장은 몸짱에 얼굴도 준수한 ‘조각 미남’으로 꼽힌다. 앞서 지난 20일 캐나다에서 43세의 꽃미모를 뽐내는 쥐스탱 트뤼도(승리 직후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정치인’으로 부각됐다) 자유당 대표가 총선 승리를 거두더니 비슷한 시기 중국과의 정상회담으로 분주했던 영국에선 44세 재무장관 조지 오즈번(이름마저 영국 첩보영화 주인공을 연상시킨다)이 카메라를 점령했다. 올여름까지만 해도 서너 시간에 한번꼴로 CNN에 얼굴을 비추던 41세 그리스 총리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재집권 달성 뒤 출연을 자제(?)하던 차에 외신 정치 뉴스는 다시금 섹시해졌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기성 질서가 한 차례 무너진 뒤 호감형 얼굴, 탄탄한 몸매, 빠른 정책 집행 능력을 보여주는 미모의 40대 정치인은 낯선 풍경이 아니다. 47세였던 2008년에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버락 오바마(54)는 각종 사진마다 엿보이는 미끈한 ‘간지’에 힘입어 레임덕 위기에서 한발 비켜서 있다. 2010년 집권한 마르크 뤼터(48) 네덜란드 총리는 유니레버 직원 출신 특유의 깔끔한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다. 잘생긴 외모만큼 동성애 결혼으로도 유명한 룩셈부르크의 그자비에 베텔(42) 총리 역시 2013년 야 3당 연립을 이뤄내 집권에 성공했다. 청바지 차림으로 경차를 몰고 출근하며 깨끗한 정치를 선보이는 마테오 렌치(40) 이탈리아 총리도 2013년 새 정권을 창출한 인물이다. 주요 7개국(G7) 정상회담이라도 열린다면 ‘역대급 최강 인증샷’이 기대된다. ●SNS 등 특유의 소통 능력으로 급부상 글로벌 정상들의 외모 업그레이드 배경은 뭐니 뭐니 해도 ‘젊음’이다. 20여년 넘게 이어진 신자유주의 열풍의 결과가 글로벌 금융위기로 폭발하고, 양극화로 귀결되고, 청년 실업 문제로 곪아 터진 가운데 각국에서 ‘기성 정치 타파’를 외친 40대 정치인이 부상했다. 이들은 패션과 외모를 ‘경쟁 자본’으로 중요하게 여긴 엑스(X)세대에 해당한다. 정치 스타일에서도 이들은 새로운 길을 걷고 있다. 과거 주요 정치인들이 당내 영향력(계파), 매스미디어의 평가 등에 힘입어 지지세를 규합했다면 최근 급부상한 40대 정상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정제되지 않은 생각을 드러내며 팬을 확보해 간다. 매스미디어 시절 유권자들이 정치인을 정책과 스캔들에 한정 지어 소비했다면 뉴미디어에 익숙한 지금의 유권자들은 정치인의 모든 것을 소비하고 있다.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멘토처럼 접근하는 40대 정상들이 급부상할 때 잘생긴 외모는 확실히 ‘묘약’이 됐다. ●보혁 이슈 해체… 뒤섞은 정책 내놔 근래 외신과 SNS를 점령한 캐나다의 트뤼도와 영국의 오즈번은 특히 유명인에 대한 대중의 환상을 충족시켜 주는 모델이다. 명문가 출신으로 명문대를 졸업한 둘은 ‘금수저 정치인’이란 공통점을 지녔지만 성장 과정을 살펴보면 다른 점도 많다. 예컨대 부모의 이혼을 겪은 트뤼도가 당초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다가 막내동생이 사망하는 불운을 겪고 정계에 본격 입문하는 ‘비극적 영웅 서사’를 따른다면 오즈번은 안정된 환경에서 준비된 정치인의 길을 걷는 ‘엄친아 판타지’를 충족시켰다. 트뤼도는 1984년까지 15년 동안 캐나다 총리를 지낸 피에르 트뤼도의 3형제 중 장남이다. 방송인 출신이었던 트뤼도의 어머니 마거릿 싱클레어는 트뤼도가 6살이던 1977년 별거를 시작했고 1984년 이혼할 때까지 영국 록그룹 롤링스톤스와 파티를 즐기고 미국 상원의원 에드워드 케네디와 염문을 뿌렸다. 아버지 트뤼도 역시 미국 가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등과의 염문에 휩싸였다. 트뤼도는 젊은 시절 바텐더, 연기자 등을 전전했지만 아버지의 정치 후계자로 지목되던 막내동생이 1998년 눈사태로 숨진 뒤 눈사태 안전 홍보 대변인으로 활동하면서부터 정치에 뜻을 두기 시작했고, 2008년 하원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했다. 트뤼도가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을 겪고 동생의 죽음이라는 비극을 계기로 정계에 입문한 반면 오즈번은 결격 사유 없는 정치 행로를 밟고 있다. 오히려 지나치게 엘리트 코스를 밟은 것이 오즈번의 흠으로 지목될 정도다. 역시 엑스세대인 데이비드 캐머런(49) 총리 취임에 편승해 젊어진 영국 내각 분위기에 힘입어 38세였던 2010년 124년 만의 최연소 재무장관이 된 오즈번은 귀족 가문의 일원으로 남작 집안 귀족의 딸과 결혼했고 옥스퍼드대를 졸업한 백만장자다. ●트뤼도 ‘같이 자고 싶은 총리’ 논란도 오즈번이 긴축재정, 공적연금 축소,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 등을 외치는 강경 보수 정치인이라면 총선 승리 일성으로 “대이슬람국가(IS) 연합군에서 캐나다 전투기 철수”를 천명한 트뤼도의 공약은 재정지출 확대를 통한 경제 성장, 부자 증세, 난민 수용 확대 등으로 진보 정책 일색이다. 이처럼 급부상 중인 40대 정상급 정치인들의 이념 스펙트럼은 보수부터 진보까지 다양해 하나로 묶기 어려울 정도다. 오히려 이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내는 장치는 ‘생활 방식’에 있다. 특유의 소통 능력을 활용해 급부상한 뒤 좌고우면하지 않는 돌파력을 발휘해 세를 키우고, 정치적으로 파격적인 승부를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금슬에 기반한 단란한 가정’과 같은 바른 이미지를 버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국경을 초월해 이들은 비슷하다. 정치적 파격과 바른 생활 이미지를 병존시킨 대표적인 예는 EU와의 구제금융 협상 과정에서 그리스의 EU 탈퇴(그렉시트) 국민투표, 조기 총선과 같은 정치적 승부수를 잇따라 던지면서도 동거녀인 페리스테라 베티 바치아나 앞에선 애처가의 면모를 감추지 않는 치프라스가 대표적이다. ●전문가 “이제부터 존재감 증명·평가” 이들의 정치·생활 방식은 엉뚱한 팬덤 현상을 일으켜 ‘정치의 주변화’를 부르기도 했다. SNS에서 회자되는 트뤼도의 별명은 ‘필프’(Pilf)인데 이는 ‘같이 잠자고 싶은 총리’(Prime minister I’d Like to F**k)란 뜻이어서 성추행 논란을 불렀다. 캐나다 방송이 ‘세계는 트뤼도의 외모를 좋아한다’고 비중 있게 보도하는가 하면 호주 뉴스 앵커는 트위터에 “자유당에 미안하지만 트뤼도가 너무 잘생겨서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잊어버렸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오즈번의 별명 역시 그의 원래 이름에서 기인한 ‘giddy’(발음은 ‘지디’가 아니라 ‘기디’이다)인데 ‘아찔하게 좋다’는 뜻을 담고 있고, 오즈번이 스타워즈 광선검 마니아라는 점 등도 시시각각 보도되고 있다. ‘앙팡 테리블’(무서운 신예)처럼 등장해 엔터테이너처럼 소비되는 이들의 정치는 정치 신인에서 권력의 정점에 오르기까지 시간을 단축시킨 요인이지만 이들의 존재감 증명은 지금부터라는 평가가 많다. 소통, 파격, 개인적인 매력을 무기로 든 새로운 정치법만 검증됐을 뿐 금융위기 이후 국제 리더십 공백 속에서 이들이 선보일 2008년 이전 기성과 다른 정책 실험은 이제 시작이기 때문이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 떨어지는 軍

    ★ 떨어지는 軍

    국방부가 내년부터 단계적으로 육·해·공군 장군 숫자를 총 40명가량 줄이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군 당국이 병력 감축을 진행하면서도 장군 정원은 유지해 밥그릇 지키기에만 관심 있다는 비판을 의식한 조치지만 지난 정부의 60명 감축 계획보다 후퇴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MB정부 60명 감축 계획보다 후퇴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은 29일 “(이명박 정부 당시) 상부지휘구조 개편이 좌절되면서 중단됐던 장군 정원 조정 계획을 다시 검토하고 있다”며 “올해 안에 구체적 감축 규모와 시기 등 계획을 수립하고 내년부터 본격 추진한다는 방침으로 구체적 감축 인원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군의 관계자는 “감축 규모는 육·해·공군을 합해 장군 40여명 수준이 유력하다”면서 “내년부터 매년 장군 진급 인원을 줄이는 식으로 2020년대 중반까지 감축 작업이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장군 정원은 441명으로 이 가운데 육군이 316명, 해군·해병대가 65명, 공군 60명 등이다. 이 가운데 육군 30여명, 해군 5~6명, 공군 7명 수준을 줄이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관계자는 “육군의 장군 숫자가 해·공군에 비해 많기 때문에 군별 감축 비율을 놓고 내부 논의가 더 필요하다”면서 조율이 쉽지 않음을 시사했다. 앞서 이명박 정부는 2011년 상부지휘구조 개편을 핵심으로 하는 ‘국방개혁 307 계획’과 국방개혁 ‘2011~2020’을 발표하면서 장군 정원을 2020년까지 15%(60여명) 줄이기로 했다. 하지만 군 작전을 총괄하는 합참의장에게 일부 인사권도 부여하는 상부지휘구조 개편이 좌절됨에 따라 장군 감축 계획도 흐지부지됐다. ● 육·해·공 감축 비율 놓고 내부 진통 많을 듯 군 당국은 2005년 이후 구조개편 계획에 따라 2개 군단, 6개 사단, 4개 여단 등 12개 부대를 해체했고 68만여명 수준이던 병력은 올해 63만명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장군 정원은 2006년 442명에서 2008년에 444명으로 늘었다가 2013년 441명으로 줄어드는 등 거의 변동이 없었다. 군은 2030년까지 전체 장병 수를 50여만명 수준으로 줄일 계획이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사랑하세요 궂은날에도 좋은날처럼

    사랑하세요 궂은날에도 좋은날처럼

    국민배우 김혜자(74)가 1년여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온다. 작품 선정에 까다롭기로 유명한 그가 심사숙고 끝에 택한 연극은 극단 로뎀의 ‘길 떠나기 좋은 날’이다. 나날이 퇴색해져만 가는 가족의 의미와 사랑의 가치를 일깨우는 작품이다. “요즘 해체되는 가족들이 많아요. 조건이 좋을 땐 사랑하고 불행해지면 사랑의 언약을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그러면 안 되잖아요. 약간 진부한 얘기로 느껴질 수 있겠지만 그래서 더더욱 이번 연극을 하고 싶었어요. 사람들이 잊고 사는 가족의 의미, 사랑의 가치를 알리고 싶어서요. 사랑을 절대 가치로 두지 않고 돈, 환경, 외적 요소를 너무 따지는 현실이 안타까워요.” ‘길 떠나기 좋은 날’은 다리 부상으로 삶의 전부였던 축구를 접고 절망에 빠진 남편 ‘서진’, 남편이 실의를 딛고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도록 희망이 돼주는 아내 ‘소정’, 그리고 두 사람의 딸 ‘고은’ 가족의 애환을 시적인 언어로 그린 작품이다. 김혜자는 하늘이 그 어떤 불행을 내려도 기꺼이 이겨내며 남편과 딸의 버팀목이 돼주는 소정 역을 맡았다. “소정은 절망에 빠진 남편과 세상의 편견으로부터 상처받는 딸을 격려해주고 가족을 위해 끝없이 헌신하는 역할이에요. 남편을 사랑으로 품어 유명한 사진작가로 거듭나게 하고, 가난한 나라의 피부색 검은 청년과 결혼하려다 편견의 벽에 부딪힌 딸에겐 그 모든 걸 이겨낼 사랑이 있지 않느냐며 위로해줘요.” 남편 서진은 딸의 애인을 싫어한다. 딸이 왜 하필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딸은 결혼을 반대하는 아버지에게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한다. 그런 딸에게 어머니는 말한다. “아빠가 싫다고 다른 데로 보낼까, 아빠를 갈아치울까, 아버지는 고운이가 잘못한다고 고운이를 버릴까, 고운이는 잘못한 게 없을까”라고. 김혜자는 “이 대사가 참 좋다”고 했다. “가족은 그런 거예요. 절대 바뀔 수 없어요. 아무리 아들이 못생겼다고 해도 아들을 버릴 수는 없잖아요. 세상엔 정말 우리가 지켜야 할 아름다운 가치가 있어요. 항상 옳은 것도 있고요. 바로 소정이 몸소 보여주는 사랑이에요. 성경에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는 말이 있어요. 사랑은 정말 많은 걸 덮을 수 있어요. 그런데 이걸 잊고 살아요. 옳은 게 뭔지는 알고 살아야죠.” 이번 작품의 백미 중 하나는 한국적 정서로 가득한 아름다운 대사다. “대사가 참 고와요. 시적이에요. 우리말이 이렇게 아름답구나 하는 걸 새삼 깨닫게 됐어요. 관객들도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해드리기 위해 애를 많이 쓰고 있어요.” 지난해엔 1인 11역을 소화하는 모노드라마 ‘오스카, 신에게 보내는 편지’에 출연했다. 백혈병에 걸린 10살 소년 오스카와 소아 병동의 외래 간호사인 장미 할머니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제 가슴을 정말 뛰게 한 연극이었어요. 소년은 신에게 계속 물어요. 나는 왜 죽을 병에 걸렸는지. 그러다 내 삶은 잠깐 빌린 것이고 죽음은 내가 본래 있던 곳으로 간다는 걸 깨닫게 돼요. 죽음은 또 다른 세상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두려움을 이겨내죠. 이번 작품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어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세상의 아름다움을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번 작품은 연출가 하상길이 처음부터 김혜자를 염두에 두고 극본을 썼다. 하 연출가는 “김혜자를 위한 작품을 쓰고 싶었고, 대사의 리듬이 그에게 가장 잘 맞도록 썼다”고 말했다. “연출가가 저를 위한 작품이라고 말해 더 부담스러워요. 연륜도 있고 이름도 있으니 이름값을 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소정이 돼 무대에 올라야죠. 부부나 온 가족이 오셔서 이번 공연을 보셨으면 좋겠어요. 보시고 난 뒤 정말 좋은 연극을 봤다고 느낄 수 있도록 해드릴게요.” 다음달 4일부터 12월 20일까지, 서울 중구 정동 이화여고 100주년기념관 화암홀, 3만 5000원~5만원. (02)765-8880.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씨줄날줄] 정화 & 장보고/구본영 논설고문

    정화(鄭和)는 장구한 중국사에서 수수께끼 같은 인물 중의 하나다. 명나라 영락제의 환관 출신 제독인 그는 7차례나 대양 원정(1405∼1433년)에 나섰다. 색목인, 즉 중동계 혈통인 그가 이끈 대선단은 많을 때는 240여척의 배에 승선 인원이 3만명에 육박했다. 선단 중의 일부가 콜럼버스보다 먼저 신대륙에 도달했다는 믿기 어려운 얘기도 전해진다. 다만 ‘정화함대’가 동남아~인도~동아프리카를 잇는 바닷길을 연 건 과장 없는 사실(史實)이다. 이를 통해 명은 시쳇말로 ‘자원무역’의 헤게모니를 쥐었다. 하긴 정화보다 앞서 통일신라엔 장보고가 있었다. 장보고 역시 청해진을 설치해 해적을 소탕하면서 갖게 된 제해권을 토대로 동북아시아의 해상 무역을 독점하지 않았던가. 두 인물이 진취적 자세라는 키워드를 공유한 만큼 그들의 몰락 이후 대제국 명이나 신라가 모두 쇠락해지기 시작했다는 것도 음미할 만한 대목이다. 국가의 부침이 ‘먼바다로 진출하느냐, 마느냐’의 차이로 갈리는 경우는 세계사에서 비일비재했다. 정화함대 해체 이후 중국의 600여년은 굴욕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은가. 미국 해군대학에서 전쟁사를 강의한 앨프리드 세이어 머핸은 그럼 점에 주목했다. 지금은 고전이 된, 1889년 출간한 명저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을 통해서다. 머핸은 해외 해군기지와 파나마 운하 건설, 하와이 합병 등을 제안해 ‘팍스 아메리카나’의 초석을 놓았다고도 할 수 있다. 중국의 해양굴기(海洋?起)가 본격화하는가. 마오쩌둥 시대까지 대륙의 울타리 안에서 자족하던 중국이었다. “중국의 영토는 둥사군도, 시사군도, 난사군도를 비롯해 인근의 모든 도서를 포함한다”는 법령을 공포한 덩샤오핑 시대만 해도 은밀히 해양력을 키우는 듯했다. 시진핑 주석의 5세대 지도부는 대놓고 남중국해 제해권을 선포하려는 기세다. 필리핀·베트남 등과 영유권 분쟁 중인 난사군도의 암초에 인공섬 건설을 강행하면서다. ‘섬을 점령하면 주변 바다는 그 나라 차지가 된다’는 머핸 식 전략을 답습하는 모양새다. 남중국해에서 미·중 간 군사적 긴장이 비등점을 향하는 느낌이다. 미국의 이지스구축함 래슨호가 중국 인공섬 주변 12해리 내로 진입하면서다. 중국의 ‘영토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필리핀 등 주변국의 편에 서서 미국이 ‘자유항행권’을 명분으로 벌이는 무력시위다. 여기엔 우리도 사활적 이해가 걸려 있다. 난사군도 경유 수송로로 해운 물동량의 30%, 원유 수송량의 90%를 실어 나르고 있을 정도다. 문제는 미·중 충돌 국면에서 우리의 외교적 입지가 넓지 않다는 점이다. 당장엔 “남중국해 분쟁이 국제 규범에 따라 평화적으로 해결돼야 한다”(청와대 관계자)는 어정쩡한 자세가 불가피하겠지만, 더 늦기 전에 장보고와 같은 혜안을 갖고 우리의 해양 전략을 다시 짜야 한다. 구본영 논설고문 kby7@seoul.co.kr
  • ‘나눔 세상’ 여는 강북

    강북구 직원들이 가정이나 사무실에서 쓰지 않는 물품을 기증하는 ‘중고 물품 기증의 날’ 행사를 29일까지 연다. 올해로 5년째인 이번 행사는 중고 물품을 수집해 판매하는 시민단체에 기증한다. 기증 물품은 의류, 모자, 가방, 신발, 책, 장난감, 기타 생활용품 등 재활용이 가능한 물건이다. 모인 물품은 시민단체인 ‘수유2동 녹색가게’에 기증돼 일반 주민에게 판매된다. 물품 판매 장소는 수유2동 주민센터 3층 매장 및 강북문화예술회관 광장 등이다. 지난해에는 중고 물품 판매 수익금 50만원을 ‘따뜻한 겨울나기’에 모두 기증했다. ‘따뜻한 겨울나기’는 서울시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실직, 질병 등의 사유로 가족 해체의 위기에 놓인 가정, 법적 지원을 받지 못하는 저소득 주민 및 복지 사각지대 계층, 홀몸 노인, 저소득 장애인, 한부모 가정 등 소외계층에게 성금을 전달한다. 이번 행사를 통해 얻은 수익금도 상반기 수익금과 합해 연말에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할 예정이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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