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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9)박영효 vs 유길준(하)

    [선택! 역사를 갈랐다] (29)박영효 vs 유길준(하)

    1895년 봄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요동치고 있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막대한 배상금과 랴오둥 반도, 타이완 등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곧 이어 러시아, 독일, 프랑스 삼국의 간섭에 굴복하여 랴오둥 반도를 반환하였다. 이러한 사태의 진전은 러시아가 동아시아 문제에 본격적으로 개입을 시작 하겠다는 것과 일본이 아직 그에 맞설 만한 힘을 갖지는 못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노출했다. 이러한 정세의 변화는 조선의 왕실과 개혁관료들이 힘을 합하여 일본의 간섭을 배제한 근대개혁도 가능한 상황이 왔음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박영효와 유길준이 택한 방법은 왕실을 무력화시키거나 일본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왕실의 반격으로 박영효와 유길준은 권력에서 쫓겨나 오랜 일본 망명생활을 했다. 박영효는 삼국간섭 이후의 정세변화를 이용하여 일본 측의 반대에도 김홍집을 총리대신에서 몰아냈다. 그리고 박정양, 이완용과 같은 친미근왕적 관료들과 함께 박정양-박영효 연립내각을 출범시켰다. 한편, 일본이 강요했던 차관교섭에 대해서도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이때 박영효는 왕실과의 긴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개혁을 주도할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당시 그는 조선협회를 조직하여 개화세력의 정치조직화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박영효, 왕실 무력화 계획 드러나 ‘몰락’ 그러나 여기서 그는 과욕을 부리다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1895년 6월 말 박영효는 당시 궁궐을 지키던 시위대를 자신이 장악하고 있었던 훈련대로 교체하려는 시도를 감행했다. 왕실마저도 자신의 통제 하에 두려고 했던 것이다. 고종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였으나 박영효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모종의 과격한 조치’를 취하려 하였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최소한 무력으로 왕실을 제압하고 왕비를 폐비시키는 정도는 되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사전에 일본인 장사의 편지가 유길준에게 입수되어 고종에게 보고되었고, 7월 6일 궁정회의를 통해 박영효의 체포가 결정되었다. 결국, 박영효는 일본 공사관의 협조를 얻어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하늘을 찌르던 그의 권력은 8개월 만에 좌절되고 만다. 이후 왕실은 본격적으로 왕권 회복을 시도하였다. 근왕세력들을 내각에 포함하는 한편, 유길준을 의주부 관찰사로 좌천시켰다. 왕실 측근 홍계훈을 훈련대 연대장에 임명한 것도 일본의 지휘를 받는 훈련대를 장악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보호국화 정책을 포기하는 대신 무력을 이용한 권력의 재탈환을 위해 외교 경험이 전무했던 군 출신의 미우라 고로를 공사로 파견했다. 그가 중심이 되어 일본군과 민간인이 주도하고 조선의 훈련대가 협력하여 왕비를 시해하고 김홍집-유길준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것이 바로 을미사변이었다. 유길준이 여기에 직접 개입했다는 흔적은 찾기 어렵지만, 그는 왕비를 폐서인시키는 일에 앞장서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이 이 사건과 관계가 없다고 정당화시켜 주는 데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그는 왕비를 ‘세계 역사상 가장 나쁜 여자’라고 하면서 시해를 정당화하는 편지를 미국의 모스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왕비 시해사건의 방조자로서 공범이나 다름없었다. ●유길준, 단발령 반대 의병운동 부딪쳐 ‘추락’ 이후 유길준은 내부대신으로서 김홍집 총리대신과 버금가는 권력을 누리며 개혁을 주도하여 이 시기를 김홍집-유길준 내각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는 불과 1년 만에 주사에서 대신으로 파격적인 승진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주도했던 단발령의 시행은 결국 갑오개혁은 물론 그 자신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단발령에 반대하여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유길준은 한성을 수비하고 있던 병력을 지방으로 출동시켜 진압하려고 하였다. 이 상황을 이용하여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일어난 것이었다. 유길준은 체포의 위기에서 겨우 벗어나 일본으로 망명길을 떠났다. 결국, 박영효를 왕실에 고발하여 몰락시킨 유길준은 왕실에 의해 자신도 역시 몰락하고 말았다. 박영효와 유길준, 두 사람은 일본 망명 시절에도 계속해서 정변을 일으키려는 시도를 하였다. 당시 일본 측 정보문서에 의하면 두 사람은 각각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였다. 이들은 고베에서 회동을 한 적이 있었으나 망명 기간 내내 별개로 활동하였다. 박영효는 독립협회 활동을 이용하여 권력을 되찾으려 시도하였다. 그는 핵심 측근세력을 귀국시켜 만민공동회를 과격화하고 이를 통해 조성된 정치적 위기를 틈타 정권을 장악하려 시도하였으나 일본정부의 제지로 실패하였다. 이때 독립협회 내의 추종세력들이 중추원에서 투표를 통해 대신으로 임명할 만한 인물을 추천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그 가운데 박영효가 포함돼 있었고 이는 그동안 참고 있었던 고종의 위기의식을 자극했다. 고종은 결국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고 말았다. 한편, 유길준은 박영효와 별개로 일본 육사에 유학했던 장교들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려는 혁명일심회 사건을 주도하였다가 1902년에 발각되었다. 이로써 그는 일본의 외딴섬에서 유배생활을 4년 정도 경험해야 했다. 고종은 망명자들을 소환하기 위해 여러 차례 교섭을 벌였으나 일본은 고종의 요구에 응하는 척하면서 이들을 이용해 고종이 추진하는 자주적 개혁에 제동을 걸었다. 두 사람은 모두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이후에도 바로 돌아오지 못하다가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를 전후하여 일본의 주선으로 귀국하였다. 박영효는 고종의 강제퇴위 이전에 1907년 6월 비밀리에 귀국하였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그의 특별사면을 주선하여 이완용 내각의 궁내부 대신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그는 이완용을 암살하려 했다는 이유로 제주도 유배생활을 하기도 했다. 강제병합 후 박영효는 후작 작위를 받고 조선귀족회 회장이 되었으며 일제의 지배 아래서 대표적 친일파로 활동하다가 1937년 79세로 생을 마쳤다. 한편, 유길준은 고종이 강제로 퇴위된 이후인 1907년 8월 순종의 특사령에 따라 귀국한다. 그는 귀국 후 일본이 보호조약을 맺은 진의는 평화에 있고, 대한제국이 자초한 일이라고 못 박았다. 그리고 통감정치는 한국외교의 대변이며 내정의 지도라고 옹호하였다. 또한, 헤이그 특사사건은 경거망동이었고 의병운동은 시국을 오해한 오합지졸이라 비난하였다. 그는 철저히 일본의 통감정치에 협력하였다. 유길준은 다시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계몽활동에 주력하면서 친일적 활동을 계속하였다. 한성부민회를 조직하여 일본 통감의 부임 환영행사에 학생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안중근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사살되자 이완용 등과 함께 중국까지 가서 조문하였고, 이토의 국장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까지 찾아갔다. 하지만, 그는 대한제국이 강제병합을 당한 후 주어진 작위를 반납하였다. 그가 지향한 것은 일본의 지도로 자강을 이룩하는 것이었지 식민지배까지 원한 것은 아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1914년 59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나마 부끄러움을 알았던 그의 처신은 오늘날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리지 않는 결과로 나타났다. ●朴 끝까지 친일·兪 식민지배 반대 박영효와 유길준 두 사람은 당대에 가장 깊이 있는 문명개화론을 바탕으로 갑오개혁을 주도했던 개화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막상 현실개혁을 주도했던 시기는 각각 1년 내외에 불과했고 나머지 세월은 대부분 망명과 유배생활로 보내야만 했다. 그나마 권력의 핵심에 서게 된 것도 일본의 절대적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일본을 모델로 근대국가를 수립하려고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왕권과 대립하게 된다. 그 이유는 명목상의 군주였던 일본의 천황과 달리 조선의 국왕은 국가권력의 실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왕권을 조선 근대화의 걸림돌로 생각하여 끊임없이 무력화시키려 하였고 전복하려 했다. 하지만, 일본의 힘에 의존하여 왕권을 제약한다는 것은 곧 일본의 침략이 확대됨을 의미했다. 따라서 그들의 개혁시도는 친일매국으로 치부되었고 몰락을 초래했던 것이다. 당시 대한제국이 자주적 근대국가를 수립하여 국권을 유지한다는 것은 어려운 과제였다. 따라서 왕권과 개혁관료들이 일치단결하여 외압에 맞서면서 근대개혁을 추진하였다 해도 성공 가능성이 높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박영효와 유길준은 서로 끊임없이 반목하면서도 공통으로 왕권과 대립하고, 일본에 의존한 근대개혁을 선택하였다. 그 결과는 대한제국의 개혁사업 실패와 보호국화 그리고 식민지로 전락하는 역사를 가져왔다. 근대지상주의가 민족의식과 유리되었을 때 국가는 물론 개인들에게 어떤 비극이 나타나는지를 박영효와 유길준의 삶이 잘 보여주고 있다. 주진오(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서울신문·푸른역사 아카데미 공동기획
  • [사설] 3사관학교 여생도 입교 막을 명분 약하다

    육군3사관학교의 여생도 입교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3사관학교는 2010년부터 여생도의 입교를 건의했지만, 정작 국방부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국방부는 “2020년까지 여군 장교 비율을 7%로 늘리는 것이 목표인데, 작년부터 학군단(ROTC) 여성후보생을 매년 250명씩 선발하면서 2015년에 목표를 조기 달성하게 됐다.”고 불가 이유를 설명한다. 또 성범죄 발생 우려와 출산 휴가 및 육아 휴직으로 인한 인력 수급 차질 등도 국방부가 3사관학교 여생도 불가 방침을 고수하는 이유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여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남성만의 영역은 대부분 사라졌다. 군도 마찬가지다. 육·해·공군사관학교와 학사장교, ROTC, 간호사관학교 모두 남녀를 차별하지 않고 생도를 뽑고 있다. 2003년 공사, 2004년 해사에 이어 올해는 육사에서도 여성 수석졸업자가 배출되기도 했다. 여성도 얼마든지 장교로서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셈이다. 그런 만큼 유독 3사관학교만 여생도의 입교를 막는 것은 남녀평등이나 여성의 직업 선택 차원을 떠나서도 온당한 처사라고 보기는 어렵다. 국방부는 3사관학교에도 여생도의 입교를 허용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옳다. 물론, 국방부의 입장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3사관학교 출신 장교는 대부분 전투 중대장으로 보임되는데, 우리 육군의 현실을 감안할 때 여군 장교가 야전에 배치돼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어려움이 크다는 것이다. 현재 전투 중대장으로 복무 중인 여군 장교는 10여명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대의 전쟁은 기술전으로 진화하고 있고, 군의 임무도 평화 유지나 재난상황에서의 구조 등으로 다변화되고 있다. 따라서 국방부는 3사관학교의 문을 여성에게도 열어주되, 여성 장교 인력을 좀 더 탄력성 있게 운용하는 방안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경제 브리핑] 외환銀 군인 등 대상 ‘가디언론’ 출시

    외환은행이 군인 등 특정직 공무원을 대상으로 한 ‘가디언론’을 2일 출시했다. 저금리 신용대출 상품으로 경찰직 공무원과 직업군인(군무원 포함), 소방직 공무원, 교정직 공무원 등이 대상이다. 대출 원금에 대한 상환보장 보험, 개인당 3000만원의 상해사망 보험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한다. 최고 1억 5000만원까지 대출이 가능하다. 금리는 최저 4.76%로 중도상환 수수료는 없다.
  • 내리막길 ‘해적산업’

    악명 높았던 소말리아의 해적산업이 국제적인 해적 소탕 노력과 해운사들의 자체 방어력 확보 덕분에 사양길로 접어들었다고 AP통신이 2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유럽연합(EU) 해군은 소말리아 해적이 납치한 선박은 2009년 46척, 2010년 47척에서 2011년 25척으로 급감했으며, 올 상반기에는 5척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재클린 셰리프 EU 해군 대변인은 “소말리아 해적의 급감은 EU와 미국, 중국, 인도, 러시아 등 국제적인 공조 덕분”이라면서 “EU 해군이 최근 소말리아에 상륙해 해적들의 무기와 배, 연료를 파괴하고, 일본 항공기가 해적들의 동향을 주변 군함에 전달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설명했다. 해운사의 자구노력도 해적 감소의 원인 중 하나다. 아덴만을 통과하는 상선들은 해적을 발견하는 즉시 주변을 순찰하는 해군에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 특히 무장 보안요원을 배에 태우거나 배 주위에 철조망을 두르고, 물대포, 대피실 등을 설치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고 AP통신이 전했다. 이 때문에 해적들의 선박 납치 성공률이 과거에 비해 낮아지면서 납치 시도 횟수도 줄고 있다. 국제해사기구에 따르면 올 상반기 해적의 공격 건수는 69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163건에 비해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유엔은 현재 1045명의 소말리아 해적들이 미국과 이탈리아 등 21개 국가에 구금돼 있으며, 이보다 많은 숫자가 해양 사고나 기상 악화 등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영국 해상보험사인 로이드의 피터 돕스는 “전체적인 해적의 납치 횟수는 줄고 있지만 반대로 피랍된 선원들의 몸값은 더 올라가는 추세”라면서 “해적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긴 이르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해 4월 소말리아 해적에 피랍된 싱가포르 선박 ‘제미니호’의 한국인 선원 4명은 아직도 풀려나지 못한 채 510일 넘게 억류중이다. 최재헌기자 goseoul@seoul.co.kr
  • 태풍 복구 軍警지원 220억 가치

    지난달 말부터 이달 초까지 한반도를 강타했던 태풍 볼라벤과 덴바, 산바는 역설적으로 풍수해보험과 경찰·군인의 중요성을 새삼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됐다. 태풍 피해의 신속한 복구에는 군인·경찰의 적극적인 참여와 함께 정책보험인 풍수해보험에 힘입은 바가 컸다. 25일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재난현장의 피해 복구에 군인 20만 3429명, 경찰 1만 6584명 등 모두 26만 2532명이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다. 또 덤프트럭, 굴착기 등 군에서 지원한 장비 6300여대가 피해 긴급 복구에 투입됐다. 이번 태풍으로 10명이 숨졌고, 3577가구 9848명의 이재민이 발생했고, 경제적 피해로 따지면 아직 집계되지 않은 태풍 산바를 제외해도 6653억원의 손실이 발생했다. 하지만 응급 복구는 대부분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 정도로 빠르게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군인과 경찰이 없었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속도다. 임승빈 명지대 행정학과 교수는 “군인, 경찰 등 자원봉사자들의 피해 복구 참여는 신속한 복구는 물론 초기 복구비용 절감에도 크게 기여했다.”면서 “군과 경찰에서 투입된 인건비, 장비 등을 단순 환산해도 최소 220억원의 비용 절감 효과를 거둔 셈”이라고 말했다. 피해 복구의 숨은 일꾼은 풍수해보험이었다. 제주 서귀포시에 사는 김모씨는 지난 7월 풍수해보험에 가입해 188만원을 납입했다. 이번 태풍으로 온실이 완전히 부서져 보험사로부터 8800만원을 보험금으로 받았다. 같은 마을에서 풍수해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이웃들은 망연자실하고 있는 상황에서 김씨는 그나마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번 태풍으로 인한 풍수해보험 가입자의 피해 신고는 모두 3879건에 274억원에 이른다. 풍수해보험이 2006년 도입된 이후부터 지난 7월 말까지 지급된 보험금이 2700여건, 73억원에 불과한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다. 이번 태풍으로 풍수해보험의 진가를 톡톡히 발휘했다. 지금까지 지급된 피해 보험금은 140건에 12억원 정도다. 전국에 손해사정인이 3000명밖에 안 돼 손해사정, 평가 등에 어려움이 많은 상황이다. 소방방재청은 보험사들에 협조를 요청해 태풍 볼라벤과 덴바로 인한 피해 보험금은 추석 전까지, 산바로 인한 피해 보험금은 다음 달 중순까지 지급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왕리쥔 15년형… 보시라이 형사처벌 가능성

    지난 2월 미국 총영사관으로 망명을 시도해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重慶)시 당서기 부인 구카이라이(谷開來)의 영국인 살해사건이 공개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왕리쥔(王立軍) 전 충칭시 부시장 겸 공안국장이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로써 ‘보시라이 스캔들’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처리가 일단락됐다. 이제 관심은 보 전 서기가 어떤 처분을 받을지에 모아진다.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시 중급인민법원은 24일 직무유기, 반역도주, 직권남용, 뇌물수수 등 4개 혐의로 기소된 왕리쥔의 유죄를 인정하고 징역 15년형을 선고했다고 관영 신화통신이 보도했다. 왕리쥔은 선고 직후 항소를 포기, 형이 확정됐다. 법원은 왕리쥔이 구카이라이의 영국인 사업가 닐 헤이우드 살해 사실을 인지하고도 형사적 책임을 묻지 않았고(직무유기), 이 문제로 상관인 보 전 서기와 갈등을 빚자 미국 총영사관으로 망명을 시도(반역도주)했으며, 공안국장 재직 당시 무차별적인 도청을 실시(직권남용)했다고 밝혔다. 다롄스더(大連實德)그룹의 쉬밍(徐明) 회장으로부터 285만 위안(약 5억원) 상당의 베이징 아파트 2채를 받은 혐의(뇌물수수)도 인정됐다. 법원은 왕리쥔이 구카이라이 범죄사건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보시라이 일가의 비리 증거를 제공한 점 등을 감안해 비교적 관대한 형을 선고했다고 강조했다. 당초 출당 등 당내 처분만 받을 것으로 전망됐던 보 전 서기는 왕리쥔 재판에서 이름이 거론되면서 형사처벌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실제 왕리쥔 재판에서는 구카이라이의 살인 은폐 과정에 보 전 서기가 가담한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다만 신화통신은 관련 보도에서 보 전 서기의 역할을 명확히 서술하면서도 그를 ‘충칭시 공산당위원회 주요 책임자’라고만 지칭했다. 보 전 서기가 공산당 최고위직인 정치국 위원이었다는 점에서 최고지도부의 합의에 따라 그의 운명이 최종 결정될 예정인 가운데 보 전 서기 문제 처리를 놓고 여전히 의견이 분분한 것으로 알려졌다. 베이징 주현진특파원 jhj@seoul.co.kr
  • “학폭 안 적은 학교 학생에 자필확인서 받아라”

    교육과학기술부가 2013학년도 입시에서 학교폭력 가해사실을 학교생활기록부에 기재하지 않은 고교의 수험생들에게 자필 확인서를 받으라고 각 대학에 요청했다. 확인서를 받지 않는 대학은 내년 재정지원에서 불이익을 주겠다는 것으로 사실상 ‘명령’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대학들은 모집요강에서 사전에 고지하지 않은 서류를 추가로 받는 것에 대해 난색을 나타내고 있다. 학교폭력을 기재하지 않은 고교는 경기 8개교, 전북 12개교 등 전국 20개교다. 교과부와 한국대학교육협의회는 지난 20일 입학사정관 전형으로 정부 지원을 받고 있는 전국 66개 대학의 입학처장과 가진 간담회에서 올해 입시생 중 학교폭력 미기재 고교의 3학년 수험생을 상대로 별도의 확인서를 받으라고 요청했다. 교과부는 “학교폭력 관련 내용이 학생부에 기재되지 않는 것은 입학사정관 전형의 필수 서류가 누락된 것으로 볼 수 있는 만큼 확인서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대학 모집요강에 없어 논란 예고 대교협이 각 대학에 전달한 확인서 양식은 학교폭력 가해사실 여부와 사회봉사·전학 등 학교폭력으로 학생이 받은 가해조치를 학생이 직접 적고 서명하도록 돼 있다. 허위 내용을 적을 경우 합격취소 등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경고문도 표시돼 있다. ●“고등교육법에 어긋나” 의견도 하지만 일부 대학은 이런 조치에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서울지역의 한 사립대 관계자는 “교과부가 확인서를 받지 않는 대학은 내년 입학사정관 사업 지원에서 제외할 수 있다고 한 것은 강요와 협박”이라며 “각 대학의 자율성을 강조하면서 일괄적으로 방침을 내려보내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인성을 중시한다면서 특정 학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각서 형태인 별도의 확인서까지 쓰게 하는 것은 비교육적인 처사라는 내부 의견이 만만찮다.”고 덧붙였다. 확인서가 고등교육법에 어긋난다는 의견도 있다. 고등교육법 시행령은 각 대학이 대입전형 시행계획을 수립, 사전에 공표한 뒤 예고없이 바꿀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당초 모집요강에 확인서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확인서를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교협 관계자는 “확인서를 받지 않고 면접을 통해 확인하겠다는 대학들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우선 미기재 학교 출신 지원자 추이를 본 뒤 결정하겠다는 대학들도 상당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피해자만 7명…10살 미만 여아만 노린 성폭행범

    10살 미만의 어린이만 골라 성폭행하던 베네수엘라 남자가 체포됐다. 어린 나이에 씻지 못할 상처를 입은 피해자는 최소한 7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현지 사회가 경악하고 있다. 마라카이보의 빌랴 에스페란사라는 동네에서 상습적으로 여아들을 납치해 성폭행한 19살 남자가 경찰에 붙잡혔다고 현지 언론이 최근 보도했다. 남자는 맛있는 걸 주겠다고 아이들을 꼬여 산으로 데려간 뒤 범행을 저지르곤 했다. 8살과 9살 된 여아 두 명을 한꺼번에 성폭행하려다 미수에 그친 게 마지막 사건이다. 경찰에 따르면 남자는 음료수와 과자를 주겠다며 두 아이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산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이들이 크게 울기 시작하면서 남자는 범행을 포기했다. 아이들을 납치한 곳까지 데려가 내려주고는 사라졌다.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두 아이의 부모는 사건을 경찰에 신고했다.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자 경찰엔 또 다른 피해자 신고가 들어왔다. 이번에도 피해자는 10살 미만이었다. 피해자 부모는 “9살 된 딸이 오토바이를 탄 남자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신고했다. 연쇄사건임을 직감한 경찰은 대대적인 체포작전을 벌인 끝에 용의자를 검거했다. 경찰이 조사에서 여죄를 추궁하자 남자는 “‘지금까지 10살 미만의 어린이를 최소한 7명 성폭행했다.”고 털어놨다. 경찰은 피해자가 더 있을 것으로 보고 피해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한편 현지 언론은 “오토바이를 타고 여아들을 성추행한 남자가 평소 ‘동네의 괴물’로 불렸다.”면서 “일부 피해자의 부모는 어린 딸의 인생을 망친 범인을 찾아 복수하기 위해 경찰에 신고도 않은 채 남자를 추적해온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했다. 임석훈 남미통신원 juanlimmx@naver.com
  • 英 왕세손비 노출사진 보도 피소·폐간 역풍맞는 언론사

    영국 윌리엄 왕세손의 부인 케이트 미들턴의 노출 사진을 보도했던 언론사들이 영국 왕실의 강경 대응에 따른 거센 후폭풍을 맞고 있다. 프랑스 법원은 18일 미들턴의 노출 사진을 처음 게재한 프랑스 잡지 ‘클로제’를 상대로 영국 왕실이 제기한 사생활 침해사건 민사 소송에서 잡지사 측에 노출 사진의 추가 보도와 배포를 금지하고, 24시간 내에 모든 사진 파일을 왕실에 돌려주는 한편 2000유로(약 290만원)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법원은 잡지사가 이를 지키지 않을 경우 하루에 1만 유로의 벌금을 내도록 했다고 AFP는 보도했다. 영국 왕실은 또 사진을 제공한 프랑스 파파라치들을 프랑스 검찰에 고소했다. 영국 언론들은 왕실의 이 같은 강경 대응이 1997년 윌리엄 왕세손의 어머니인 다이애나비가 파파라치들의 사생활 침해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건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와 별개로 영국 왕실은 26쪽에 걸쳐 노출 사진을 게재한 이탈리아 잡지 ‘키’와 관련,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이탈리아 총리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기로 했다. 언론 재벌이자 성추문으로 유명한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는 현재 클로제와 키를 소유한 몬다도리 그룹의 대표다. 지난 14일 클로제에 이어 미들턴의 노출 사진을 두 번째로 보도한 아일랜드 신문 ‘아이리시 데일리스타’는 폐간 위기에 처했다고 가디언이 보도했다. 이 신문을 소유한 인디펜던트 뉴스 앤드 미디어(INM)의 최대 주주인 노던 앤드 샐의 리처드 데스먼드 회장은 “왕세손비의 노출 사진을 보도한 신문사의 결정에 대단히 화가 났으며, 투자를 철회하고 사업을 정리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최재헌기자 goseoul@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7) ‘지조’ 황현 vs ‘매국’ 이완용

    [선택! 역사를 갈랐다] (27) ‘지조’ 황현 vs ‘매국’ 이완용

    1910년 9월 8일 밤, 시문(詩文)으로 인근에 조금 알려진 한 시골 선비가 단정한 자세로 앉아 그 평생의 마지막 시가 될 글을 써 내려갔다. “추등엄권회천고(秋燈掩卷懷千古)난작인간식자인(難作人間識字人)” (가을밤 등잔 밑에서 책 덮고 옛일을 되돌아보니, 사람 세상에서 글 아는 이 노릇하기 어렵구나) 시 넉 수를 다 쓴 그는 다시 자식들에게 남기는 유서를 쓴 후 소주에 아편을 타 마시고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 56세, 대한제국이 사라진 지 열흘 뒤의 일이었다. ●지조 굽히라는 세상에 날 세운 ‘황현’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1855년 전라남도 광양의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출생했다. 그는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는 천품(天品)을 타고 났으나, 재주와 뜻을 펼치기에는 출생시대, 출생지, 가문 중 어느 하나도 그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여러 대에 걸쳐 서울에서 벼슬을 한 ‘경화사족’(京華士族) 출신이 아니고서는 과거에 합격하기 어렵고, 설령 어렵사리 합격한다 해도 고위직에 오를 생각은 하지도 못하게 된 시대가 이미 100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어찌 입신출세(立身出世)의 꿈이 없었겠는가마는 세상은 그에게 꿈을 접으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그가 그런 현실을 확연히 깨달은 것은 나이 30이 넘어 향시(鄕試)에 합격한 뒤였다. 1888년 성균관 생원이 되어 서울에 올라온 그는 말로만 듣던 과거(科擧) 부정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보고 느꼈다. 세도가 자제들이 글 써주는 사람과 글씨 써주는 사람을 다 따로 고용하여 대리시험을 치는 관행은 더 이상 비난거리도 아니었다. 돈과 연줄 없이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하기를 바라는 것은 고목에서 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았다. 그는 과거에 더 연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의 인생의 첫 번째 ‘선택’이었다. 이는 자식들도 자기와 같은 출발점에 세우겠다는 절망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그는 서울에서 강위, 김택영, 이건창 등 마음이 통하는 명사(名士)들을 사귀며 배울 수 있었다는 것만 위안으로 삼고 낙향했다. 서울에 올라오기 얼마 전에 구례로 집을 옮겼던 그는, 그곳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시를 짓는 한편 자기가 보고 들은 당대의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를 용납하지 않았던 세상, 선비에게 지조를 기르라고 당부하는 대신 지조를 굽히라고 요구하는 세상을 보는 그의 시선은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그가 보기에, 그의 시대를 이끄는 사람들은 모두 부패하고 타락한 자들이었다. 대원군도, 왕후와 그 친척들도, 왕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부패하고 타락한 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혼탁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는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을 것이요, 더러우면 발을 씻을 것’이라는 옛 어부의 말대로 처신했다. 그의 귀에는 전기나 기차 같은 문명의 이기(利器)들에 관한 소식이 계속 들려왔지만, 그는 그것들이 세상을 맑게 바꿔주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생애 두 번째 ‘선택’을 했다. 그를 버렸던 나라이자 그가 경멸하고 증오했던 더러운 자들이 지배한 나라였지만, 그는 이 뒤에 그를 기다릴 세상은 더 더러운 세상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자식들 앞으로 남긴 유서에 “나라가 망했으나 내가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나라에서 500년이나 선비를 길렀는데, 나라가 망할 때에 죽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어찌 원통치 않겠는가?”라고 썼다. 그는 나라의 녹을 먹지 않았으니 나라를 위해 죽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은 자들이 나라를 팔아넘기는 데에 앞장서는 세상에서, 그런 자들이 계속 위세를 부릴 세상에서,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찾지 못했다.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시구는 “증무지하반연공(曾無支廈半椽功) 지시성인불시충(只是成仁不是忠)”(일찍이 나라를 위한 공이 없었으니, 내 죽음은 다만 인(仁)을 이루고자 함일 뿐 충(忠)은 아니로다)이었다. ●日·러·美 연줄 없던 이완용 처세로 부귀 누려 황현이 목숨을 끊던 바로 그 무렵, 일당(一堂) 이완용(李完用)은 일왕에게서 백작의 작위와 15만원의 은사금(恩賜金)을 받았다. 대한제국 황실과 친인척 관계가 없는 인물로서는 가장 높은 작위였다. 그는 며칠 전까지 대한제국의 총리대신이었으나 어차피 허울뿐인 자리였다. 그에겐 남은 생애를 부귀 속에서 보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족했다. 이완용은 황현보다 3년 늦게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서울에서 가까운 편이었으나 가문은 황현 집안보다 그리 나을 것이 없었다. 그 역시 어려서 남달리 총명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 집에서 그대로 살았더라면 그의 일생도 황현과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11세 때, 그의 운명을 바꿀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집안 어른들의 ‘선택’에 의해 먼 친척 아저씨인 이호준의 양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에게 새 삶의 기회를 준 양부모를 지극정성으로 모셨으며, 서형(庶兄)인 이윤용(李允用)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1882년, 당시 이조판서이던 양부 덕에 과거에 급제한 그는, 규장각 대교, 홍문관 수찬, 세자시강원 사서 등 출세가 보장된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친 뒤 1886년 신설된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입학했다. ‘나라에서 영재를 기르는 곳’이라는 뜻의 육영공원은 미국인 교사가 영어와 신학문을 가르치는 신식 학교였다. 때는 갑신정변 2년 뒤였고, 조야(朝野)에 개화파에 대한 적개심이 넘치던 때였다. 그러나 그는 모험일 수도 있는 육영공원 입학을 ‘선택’했다. 양부가 비록 고관이었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가문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면, 다른 것으로 만회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왕의 뜻이 있는 곳, 왕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있기로 결정했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이 그의 출세길을 활짝 열어주었다. 짧은 기간이나마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배운 덕에, 그는 주미 한국공사관 참찬관과 주미 공사 대리로 두 차례나 미국에 다녀올 수 있었고, 국내 정치에서 계속 영향력을 키우던 미국인들과 교분을 쌓을 수 있었다. 1890년 귀국 후 관계에서 승승장구한 그는 1894년 모친상을 당했다. 일본군을 배경으로 수립된 개화파 내각은 그에게 입각(入閣)을 제의했으나, 그는 모친상을 핑계로 일단 거절했다. 이듬해 학부대신으로 내각에 들어갔지만 을미사변(명성황후 살해사건) 이후 실각했다. 친일 내각의 적으로 지목되어 미국공사관에 피신해 있던 그는 일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목숨을 건 정치적 도박에 가담했다. 왕을 미국공사관으로 옮기려던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으나,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려 한 두 번째 시도는 성공했다. 아관파천을 계기로 그는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그는 외부대신, 농상공부대신 서리 등을 지내면서 한때 독립협회 회장도 맡았다. 독립협회는 애초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세워 조선이 독립국임을 세계만방과 만백성에게 알릴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독립협회 회원들이 ‘충군애국’(忠君愛國)을 넘어 내심으로 ‘군민동치’(君民同治)와 ‘입헌정체’까지 요구하기 시작하자, 그는 독립협회를 떠났다. 러시아와도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국왕은 일본을 견제하려고 러시아의 지원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고, 러시아는 이 기회에 한국을 자기 세력권 안에 넣으려 했다. 미국인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교육, 군사, 경제 각 부문의 주도권이 러시아로 넘어갔다. 그는 러시아의 침탈에 반발했으며, 러시아 공사는 그를 증오했다. 고종은 그를 전라도관찰사로 좌천시켜 안전을 보장해 주었으나, 그 자리조차 오래 지킬 수 없었다. 1901년 양부 이호준이 죽자, 그를 핑계로 낙향하여 시묘살이를 했다. 1904년 초,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고종은 그를 다시 궁내부 특진관으로 불러들였다. 이때 이완용은 또 한 차례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일본도, 러시아도 그의 배경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 배경에 충실한 결정을 내렸다. 미국은 일본 편이었고, 이후의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분명해 보였다. 그는 미국의 선택을 따랐다. 주지하듯이, 을사늑약 이후의 그는 ‘친일 매국노’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신임을 얻어 대한제국의 마지막 총리대신이 되었으며, 그 자격으로 한일병합 조약에 도장을 찍었다. 일제 강점기 공중변소들에는 흔히 ‘이박식당’(李朴食堂)이라는 낙서가 씌어 있었다고 한다. ‘이완용과 박제순이 밥 먹는 곳’이라는 뜻으로, 이들을 똥개 취급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완용 자신은 자기가 시세의 흐름을 잘 살펴 처신한 덕에 계속 부귀를 누릴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역사의 주요 고비마다 그가 한 ‘선택’은 언제나 옳았다. 사실 그는 그 험악한 정변의 시대를 귀양살이 한 번 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는 이재명의 칼에 맞은 자리가 쑤시고 아플 때마다, 자신이 동포들의 저주 대상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문득문득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은 그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스펙·연줄·기회 강조 現사회, 제2이완용 키우나 대형서점 자기계발서 코너에서 아무 책이나 몇 권 집어들어 훑어 보았다. 스펙을 쌓아라, 인맥을 다져라, 시세의 흐름을 살펴라, 기회를 놓치지 마라 등. 다들 이완용처럼 살라고 가르친다. 지조를 지켜라, 기개를 길러라 따위를 가르치는 책은 없다. 누구나 이완용을 욕하면서도 다들 이완용을 본받으려 드는 시대다. 물론 100년 전과 지금은 다르다. 그러나 이완용처럼 살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찬 나라가, 모두에게 계속 안전할 수 있을까? 전우용(역사학자)
  • [시론] 학교폭력 학생부 기재, 무엇이 문제인가/장원경 이화여대 스크랜튼학부 조교수

    [시론] 학교폭력 학생부 기재, 무엇이 문제인가/장원경 이화여대 스크랜튼학부 조교수

    1990년대 후반, 유명인이 만나고 싶은 사람을 찾아주는 KBS의 프로그램 ‘TV는 사랑을 싣고’는 그 유명인의 인간적인 모습을 가감 없이 방송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방송 중 그 유명인의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가 공개돼 재미를 선사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학생부에 학교폭력 가해사실을 기재하여야 할 것인지 여부가 현재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학교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피해학생을 보호하고 가해학생을 선도·교육하기 위해 학교폭력 가해학생 조치사항을 학생부에 기재하는 방안을 채택했다. 이에 대해 일부 교육 관계자들은 학생 당사자에 대한 심각한 인권 침해와 입시 불이익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학생부 기재의 문제는 단순히 찬반을 논의하기에 앞서 학교폭력의 개념에 대한 인식과 그 처리절차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를 요하는 문제라고 생각된다. 첫째, 학교폭력의 개념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학생부에 기재된 학교폭력 조치사항은 일종의 범죄 경력으로 인식될 수 있다. 즉, ‘학교폭력’이라는 용어에는 상대방에게 물리력을 행사한다는 의미의 ‘폭력’이라는 단어가 포함돼 있어 ‘학교폭력=범죄’라는 등식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다면 학교폭력이 모두 범죄 내지 범죄에 준하는 행위인가? 현재 학교폭력은 ‘학교 내외에서 학생을 대상으로 발생한, 학생의 자유를 침해한 행위’로서 폭력의 정도가 아니라 폭력의 발생 장소와 대상에 의하여 정의되고 있다. 따라서 ‘장난을 치다가 친구 옆구리 한 번 찌른 행위’에서부터 ‘급우를 상습적으로 구타하고 괴롭힌 행위’에 이르기까지 모두 학교폭력이라는 용어의 개념에 포섭돼 동일하게 인식되고 있다. 이와 같이 광범위하고 다양한 학교폭력 가해사실을 모두 학생부에 기재한다면, 이는 전과가 아닌 사실조차 전과처럼 인식돼 억울한 ‘전과자’를 만들어내는 심각한 인권 침해를 야기할 것이고, 과도한 제재의 낙인효과로 인해 새로운 비행의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행의 예방을 위하여 학교폭력 가해사실을 학생부에 기재할 필요가 있다 하더라도 그 대상이 되는 가해행위는 일정한 기준에 따라 세분화하여 명확히 규정하여야 할 것이다. 둘째, 학교폭력 처리절차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현행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학폭법)에 의하면 학교폭력이 신고 접수되면 교감, 전문상담교사 등으로 구성된 학교폭력 전담기구에서 먼저 사안을 조사한다. 조사를 통해 밝혀진 사실을 바탕으로 자치위원회에서 피해학생의 보호와 가해학생의 선도 및 징계에 관한 사항을 심의·의결하게 된다. 그리고 학교장은 자치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의결 사항에 해당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현재 논란이 되는 것은 자치위원회에서 심의·의결한 내용을 학생부에 기재할지 여부이므로 먼저 ‘자치위원회’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자치위원회는 학폭법 제13조에 따라 위원장 1인을 포함하여 5인 이상 10인 이하의 위원으로 구성되고 전체위원의 과반수는 학부모 전체회의에서 직접 선출된 학부모 대표여야 한다. 이렇게 구성된 자치위원회의 결정에 대하여 가해학생과 피해학생을 포함한 다수가 수긍하기 위해서는 절차적 정당성, 결정 내용의 구체적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이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자치위원회 구성의 절차적 정당성을 높이기 위해 사안을 객관적 입장에서 공정하게 처리할 수 있는 전문가를 필수적으로 위원회에 포함시키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논란은 필요충분 조건이다. 그러나 그 논란이 얼마나 사회에 기여할 것인가는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문제이다. 학교폭력 가해사실의 학생부 기재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있으므로 그에 관한 단순한 찬반 논란에서 벗어나 학교폭력에 대해 세분화되고 명확한 개념 정의와 시스템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논의의 초점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 55년 추적… 美 7세 유괴살해범 법정에

    1950년대 미국을 충격에 빠뜨렸던 7살 여자아이 유괴·살해사건 용의자가 반세기 만에 법정에 섰다. 살인죄 공소시효를 25년으로 규정한 한국과 달리 미국은 와이오밍 등 7개 주를 제외하고는 살인죄 공소시효가 없다. 10일(현지시간) 시카고트리뷴에 따르면 지난 1957년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모어에서 마리아 리덜프(당시 7세)를 유괴해 살해한 뒤 시신을 유기한 혐의를 받고 있는 잭 대니얼 매컬러프(72·본명 존 테시어)의 재판이 일리노이주 디켈브 주법원에서 시작됐다. 리덜프는 실종 다섯달 만에 집에서 160㎞ 떨어진 고속도로 옆 숲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초기 수사에서 ‘이웃집 오빠’인 매컬러프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됐지만, 양부모가 “(아들은) 그 시각에 입대를 위해 시카고행 열차 안에 있었다.”고 거짓 알리바이를 대줘 체포를 면했다. 영구미제로 남을 뻔한 사건은 매컬러프의 전 여자친구의 증언으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녀는 지난 2010년 “시카고행 열차표는 가짜”라는 취지로 경찰에게 이야기했다. 리덜프의 가족들은 “55년이 지났지만 그날의 슬픔은 지금도 여전하다.”며 재판 회부를 환영했다. 반면 매컬러프의 변호인은 “유죄를 증명할 물리적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50년 전의 희미한 기억에만 의존해 판단할 수는 없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최재헌기자 goseoul@seoul.co.kr
  • 나로호 새달 26일 ‘마지막 도전’

    나로호 새달 26일 ‘마지막 도전’

    두 차례 발사에 실패한 한국 최초의 우주발사체 나로호(KSLV-Ⅰ)의 마지막 3차 발사일이 결정됐다. 교육과학기술부는 11일 나로호 발사 관리위원회를 열어 10월 26~31일 사이 3차 발사를 하기로 하고 국제민간항공기구 및 국제해사기구 등 국제기구에 통보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발사예정일은 관례상 발사 가능기간의 첫 번째 날인 26일이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26일에 발사하고, 기상상황이나 기술적 문제 등으로 여의치 않으면 발사예비일인 27~31일에 발사하게 된다. 발사 시간은 오후 3시 30분~7시로 예정됐다. 한국과 러시아 연구진이 러시아에서 제작한 1단 로켓을 이달 말까지 점검한 뒤, 다음 달 2~4일 국내에서 제작한 2단 로켓 및 위성과 최종 결합한다. 조립된 나로호는 이후 발사대에 설치돼 수평으로 이송한 뒤 이렉터(erector)를 이용해 수직으로 세워 발사패드에 고정시킨다. 나로호가 발사대에 설치되면 발사를 위한 연료와 전기 계통을 중심으로 점검한다. 모든 기기가 정상을 유지하고 기상과 주변환경에 문제가 없으면 발사 준비가 완료된다. 연료와 산화제 주입은 발사 약 4시간 전부터 시작하며, 발사 15분 전부터는 자동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나로호 3차 발사의 목표는 무게 100㎏급인 ‘나로과학위성’을 지구 저궤도에 올려놓는 것이다. 앞서 두 차례 발사에서는 지구 원격 탐사 등 정교한 과학 임무를 수행하는 ‘과학기술위성 2호’를 탑재했지만 이번 발사에서는 예산 제약 등으로 궤도 진입 성공 여부를 파악하고 기초적인 임무만 수행할 수 있는 나로과학위성을 새로 제작해 사용한다. 나로호 발사는 이번이 끝이다. 앞서 2009년 8월과 2010년 6월 두 차례 발사에서 모두 궤도에 진입하지 못하고 실패했다. 1차 발사 당시에는 위성 덮개에 해당하는 페어링이 제대로 분리되지 않아 위성이 추락했고, 2차 땐 137초 만에 통신이 두절된 뒤 공중폭발했다. 3차 발사는 ‘두 차례 발사 중 한 차례라도 실패하면 한 차례 추가 발사한다.’는 한국과 러시아 간 사전계약에 따라 이뤄진다. 하지만 3차 발사 역시 성공을 장담할 수 없다. 2차 발사 실패 이후 한국과 러시아는 18개월에 걸쳐 원인 분석에 나섰지만 서로 책임을 미뤘을 뿐 정확한 원인을 찾지 못했다. 실패 원인을 모르는 상태에서 추진하는 3차 발사는 같은 문제가 재연될 가능성이 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측은 “1·2차를 통해 드러난 문제의 가능성을 모두 보완하는 방법으로 성공 가능성을 높였다.”면서 “페어링 기폭장치를 보다 안정된 저전압 방식으로 바꿨고, 비행 종단시스템 제거 등 총체적으로 보완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성공을 100% 장담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교과부는 3차 발사가 마무리되면 성공여부와 상관없이 연구팀을 전면 개편, 2021년 발사를 목표로 한 KSLV-Ⅱ 개발에 진력할 계획이다. KSLV-Ⅰ을 러시아와의 합작으로 개발한 것과 달리 KSLV-Ⅱ는 엔진 개발부터 전체 발사체 조립까지 순수 국내 기술로 개발한다. 1조 5449억원을 투입한 3단형으로 1.5t급 인공위성을 고도 600~800㎞ 우주궤도에 실어나르는 것이 목표다. 엔진의 지상 시험과 시험발사체 개발이 끝나는 2018년 첫 시험 발사를 하고 2021년엔 실제 발사를 할 계획이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뉴스&분석] 학생 ‘인질’로 싸우는 교육자님들

    [뉴스&분석] 학생 ‘인질’로 싸우는 교육자님들

    학생, 학부모가 불안에 떨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와 일부 시도 교육청 간 교육정책을 둘러싼 갈등때문이다. 교육 당국이 시국선언 참여 교사에 대한 징계, 교원평가 문제를 놓고 입씨름을 할 땐 교육발전을 위한 진통으로 이해할 만했다. 하지만 학교폭력 가해문제를 대학입시에 반영하겠다는 교과부 방침에 일부 진보 교육감들이 반기를 들면서 학생, 학부모의 불안은 극에 달하고 있다. 이런 양상은 앞으로도 재현될 가능성이 많다. 교육감 주민 직선제 도입 이후 독자적인 중등교육 정책을 펴려는 교육감과 중앙정부의 교육철학이 다를 경우, 충돌은 불가피하다. 교과부와 시도 교육감의 소통 활성화에서부터 교육감 직선제 제도보완 등 근본적인 대책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교과부와 시도교육청 간 갈등이 학교폭력 가해사실의 학생부 기재 문제로 최고조로 치닫고 있다. 2009년 교육감 주민 직선제 도입 이후 교과부가 벌이는 소송(행정심판)은 지난 7월 말 현재 41건에 이른다. 이 중 지난 2년간 교과부와 서울·경기·전북·전남교육청 사이에 벌어진 행정소송만 11건이다. 1949년 교육감 제도가 처음 도입된 뒤 임명제·교육위원회 간선제·학교운영위원회 간선제 등을 거치는 60여년간 정부와 시도교육청 간 소송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진보성향 교육감의 의견이라면 무조건 무시하는 정부와 정부정책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는 진보성향 교육감이 정면충돌한 결과다. 학생인권조례, 특별채용 교사 임용거부, 시국선언 참여교사 징계, 교원평가, 자율형 사립고 지정 취소 등 보혁 간의 시각차는 100% 법정 다툼으로 이어졌다. 교육 당국 간 정면충돌에 따른 최대 피해자는 다름 아닌 학생과 학부모다. 2013학년도 대입 수험생과 학부모는 믿을 구석이 없다. 대학들이 교과부에서 학교폭력 미기재 학교의 명단을 받아 이들 고교 출신 수험생을 집중적으로 살피겠다는 말은 이 학생들을 ‘취조’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반면 학교폭력 여부를 기재하는 대다수 학교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일부 학교의 기재 거부로 인해 치열한 입시경쟁에서 혹시나 불이익을 받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주요 사립대의 수시모집 경쟁률은 20대1을 훌쩍 넘는다. 서류의 오·탈자 하나에도 민감한 상황에서 당락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학교폭력 기재 논란은 학생과 학부모 입장에서는 ‘핵폭탄’이나 마찬가지다. 직선 교육감과 대통령이 임명하는 교과부장관 간 신경전은 계속될 전망이다. 김상곤 경기교육감은 10일 학교폭력 가해 사실 등을 삭제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아동청소년인권법 제정을 도교육청 이름으로 국회에 공개청원했다. 교과부의 학교폭력 가해사실 학생부 기재가 학생들의 인권침해이며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한 셈이다. 교과부 관계자는 “학교폭력 학생부 기재문제는 전적으로 교육감들이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학생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책임지겠다.”고 밝혔다. 학교와 학생들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지 난감할 따름이다. 박건형·윤샘이나기자 kitsch@seoul.co.kr
  • 대교협 “올 수시에 학적·출결 사항만 반영”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는 10일부터 대입 수시전형이 시작됨에 따라 올 대입에서 학교폭력 관련 인성평가를 반영하겠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대교협은 “올해는 입학사정관 전형에 한해 학교폭력 가해사실을 반영할 것”이라면서 “면접 등에서 학교폭력 가해학생이 반성하는 등 긍정적인 변화가 확인되면 이 점도 충분히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학교폭력 가해사실 미기재 고교 명단은 14일부터 각 대학이 공유해 수시 전형에 차질이 없도록 할 방침이다. 이에 따라 올 수시모집 전형에서는 지난 7일까지 기재해야 하는 학적 및 출결사항은 반영하되 오는 12월 1일 마감되는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사항은 반영하지 않는다. 한편 전남교육청은 이날 교과부와 진보 성향 교육감들의 입장을 반영한 절충안을 내놓았다.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학폭위)에서 학교폭력 사안을 처리할 경우 기록을 잠정 보류한 뒤 일정 기간 가해학생의 태도와 행동을 관찰, 개선됐다는 판단이 들면 학생부에 기록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박건형·윤샘이나기자 sam@seoul.co.kr
  • “학교폭력 기재 이주호 탄핵·형사고발”… 진보측 ‘반기’

    진보진영이 학교폭력 가해사실을 학생생활기록부에 기재하도록 한 교육과학기술부의 지침에 본격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이주호 교과부 장관의 탄핵과 검찰 고발 등 법적 공세도 시작했다. 하지만 교과부는 학교폭력을 예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효율적인 조치라며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김승환 전북도교육감은 3일 “학교폭력 사실의 학생부 기재 방침을 거부한 전북교육청에 대한 교과부의 특별감사는 감사를 빙자한 폭력”이라면서 “이 장관을 상대로 탄핵 추진 등 법적 투쟁을 전개하겠다.”고 밝혔다. 김 교육감은 “헌법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고 있고 법률로만 이를 제한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는데 현행 법률 어디에도 학생부에 학교폭력 사실을 기재해야 한다는 조항이 없는 만큼 법치국가의 원칙을 유린한 행위”라고 탄핵 사유를 설명했다. 김 교육감은 이런 내용을 4일 대구에서 열리는 전국 시도교육감협의회에 정식 안건으로 올려 공동 대응책을 모색하기로 했다. 진보성향 교육감이 재직 중인 서울시교육청·경기교육청·강원교육청 등은 이번 교육감협의회를 통해 교과부에 대한 압박을 본격화할 계획이다. 하지만 보수성향 교육감들이 다수인 데다 이들이 대부분 교과부 방침을 지지하고 있어 대립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등 진보 성향 단체 11곳은 교과부가 상위법 근거 없이 학생 기본권과 교육감의 지도·감독 권한을 침해한다며 4일 이주호 장관을 직권남용 등 혐의로 검찰에 고발키로 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과 민주주의 법학연구회도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교과부 지침은 공·사립학교는 교육감의 지도·감독을 받는다고 규정한 초중등교육법 제6조를 위반하며, 초중등교육법 제25조에서 열거하는 학교생활기록 대상 자료의 범위도 벗어났다.”고 주장했다. 교과부는 여전히 타협은 없다는 입장이다. 3일 오후 6시 현재 학교폭력 가해사실을 학생부에 기재하지 않은 학교는 경기 1곳·강원 5곳·전북 18곳 등 24곳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 2일 경기 4곳·강원 10곳·전북 19곳 등 33곳에 비해 9곳이 감소한 것이다. 앞서 교과부는 학생부 기재 기준일인 지난달 31일까지 학교폭력을 기재하지 않은 학교 37곳에 3일까지 방침을 따르지 않으면 교장·교감·해당교사를 징계하겠다는 공문을 내려보낸 바 있다. 교과부 측은 “한국교육학술정보원으로 학생부 정보가 최종 넘겨지는 7일까지는 일단 설득작업을 계속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전북 등 37개 고교, 학교폭력 학생부 기재 거부

    경기·강원·전북지역의 37개 고등학교가 올해 대입 수시전형에 활용되는 학교생활기록부 작성 마감기한인 지난달 31일까지 학교폭력 가해사실 기재를 끝내 거부한 것으로 나타났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최종 기한을 3일까지로 연장하고 기재하지 않을 시에는 해당학교 교장과 교감을 징계하기로 했다. 교과부는 경기 6곳, 강원 12곳, 전북 19곳 등 37개 고교에 초·중등교육법 등 관련법령 위반으로 교장과 교감, 해당 교사를 징계하겠다고 2일 밝혔다. 교과부는 당초 지난달 31일까지 담당교사가 학생부 기재를 마치면 학교장과 한국교육학술정보원(KERIS)의 승인을 거쳐 14일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나이스)에 탑재할 계획이었다. 각 대학은 나이스를 통해 각 지원자의 학생부를 내려받아 입시에 활용할 수 있다. 교과부는 37개 학교에 공문을 보내 “학교폭력 가해사실 학생부 기재를 거부 또는 보류한 교육감의 지시는 교과부 장관 직권취소로 효력이 상실됐다.”고 통보하고 3일까지 기한을 연장해주기로 했다. 공문은 3일까지도 기재하지 않으면 교과부 장관의 권한으로 교장의 중임을 제한하고 교감의 경우 교장 승진임용을 막겠다는 사실상의 ‘최후통첩’이다. 교과부 관계자는 “수시전형이 시작되면서 학교폭력 가해사실을 기재한 학교와 그렇지 않은 학교 간 형평성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면서 “징계권한이 교육감에 있는 교사에 대해서는 형법상 직무유기 혐의로 고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교과부에 맞서 학생부 기재 보류를 지시했던 경기도교육청은 지난달 27일 교과부가 직권취소와 시정명령을 내리자 곧이어 29일 대법원에 해당 조치에 대한 취소청구 소송을 내는 등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도교육청은 “교과부의 시정명령이나 직권취소는 법령위반일 경우에만 가능하다.”면서 “교과부가 학교폭력을 기재하라는 근거는 법령이 아니라 학교생활기록 작성 관리지침이라는 훈령이기 때문에 교과부의 처분은 위법하다.”고 주장했다. 일부 학교가 끝내 학교폭력 가해사실 기재를 거부하자 올해 입시에서 인성평가를 강화하겠다고 밝힌 대학들은 난감한 입장이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는 학교폭력을 기재하지 않은 학교명단을 교과부에 요구해 해당고교 출신 지원자에 대해서는 학교폭력 가해 여부를 별도로 확인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일선 대학들은 “학교폭력을 일일이 확인하기 어렵다.”면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서강대 관계자는 “학생부에 기록돼있지 않는 이상 학생 개개인에 대해 학교폭력 가해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워 면접이나 평가를 통해 학교폭력 여부를 반영하기는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윤샘이나기자 sam@seoul.co.kr
  • ‘한국대표명시선100’ 1차분 5권 발행

    올 9월은 만해 한용운의 옥중시 ‘무궁화를 심으라’가 잡지 개벽 27호에 실린 지 90돌이 되는 해다. 내년은 또한 안서 김억이 최초의 현대 시집인 ‘해파리의 노래’를 발간한 지 90돌이 된다. 시인생각에서 ‘한국대표명시선100’ 1차분 5권을 펴낸 이유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활짝 꽃피우기 시작한 모국어의 시는 그 엄혹한 시대에 민족혼을 일깨우고 민족 정서를 발양시켰다고 이근배 시인은 말했다. 그러니 온 겨레가 두고두고 읽어야 할 경전이 바로 오래된 시집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김소월, 한용운, 조운, 정지용, 이병기, 김기림, 노천명, 백석, 이상, 서정주, 김성옥, 이육사, 윤동주 등의 시집인데 정작 서점의 시집 코너에서 눈에 띄지 않는다. ‘시집은 넘쳐나도 서점가에 시집은 없다.’고 주장하는 배경이다. ‘만해사상실천선양회’가 기획·편집해 제작과 지원을 하는 사업으로 1차분 5권은 한용운, 윤동주, 김남조, 신달자, 도종환 편이다. 9월 중에 김소월, 서정주, 정지용, 노천명, 박재삼, 천상병, 정진규, 오세영, 김영랑 편 등이 출간된다. 이번 사업은 한국 시문학의 전편을 집대성하고 시문학사를 바로 세우는 데 그 뜻을 두고 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인사]

    ■방송통신위원회 △해외진출추진팀장 김승모△와이브로〃 최병택△위성전파감시센터장 이동정△부산전파관리소장 정규연△강릉〃 오형근△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파견 신종철(이상 9월 3일자)△중앙전파관리소 전파보호과장 박준국(9월 6일자) ■국토해양부 △항공자격과장 유세형△국토해양인재개발원 교육과장 오용제△대전지방국토관리청 관리국장 조효상△〃 논산국토관리사무소장 이상곤△익산지방국토관리청 관리국장 홍길순△부산지방항공청 제주항공관리사무소장 박현철△〃 항공관제국장 정은영△중앙해양안전심판원 조사관 황의선 ■교육과학기술부 ◇교장 △서울대사범대부설초등학교 황장범△서울대사범대부설 중학교 정문호△한국우진학교 박주열△한국경진학교 이영숙△국립인천해사고 김명식◇장학관△교육과학기술연구원 박희동△서울시교육청 김승익△대변인실 박중재△교육과학기술연수원 홍기춘△인천시교육청 김동원◇원로교사△인천해사고 이강복◇교육연구관△인재정책실 장홍재 노유경△학생지원국 김범수△학교지원국 권종원 김화중△연구개발정책실 정용호△국립특수교육원 김은숙△한국교원대 이성주△국사편찬위원회 유대균△강원도교육청 기광로△충북도교육청 이유수◇교감△한국경진학교 정은영△서울대사범대부설고 차혁성△서울대사범대부설중 임길선△서울시교육청 조동석 이수성 ■문화체육관광부 ◇과장 △디자인공간문화 서영길△문화예술교육 정상원△도서관정책 김대현△국제체육 강정원△방송영상광고 강석원△문화도시정책 금기형△한국예술종합학교 기획과 류근태△국립국악원 기획관리과 김용섭△한국정책방송원 황두연◇파견△국무총리실 정향미△국가지식재산위원회 하윤진 ■지식경제부 △정책기획관 이인호△정보화담당관 신성필◇과장△유통물류 박영삼△소프트웨어융합 안창용△원전수출진흥 채규남 ■산림청 △산림자원국장 김용하◇고용 휴직△아시아산림협력기구(AFoCO) 박종호 ■경북도 ◇4급 승진 △문화재과장 이성규△산림비즈니스〃 김욱동△종합건설사업소장 직무대리 양정배 ■대한상공회의소 ◇인력개발사업단 <승진>△능력개발실장 전성규△충북인력개발원장 장인창<전보>△부산인력개발원장 조경원 ■매일신문 ◇부장 <편집국>△편집1 홍헌득△편집2 배성훈△정치 이재협△경제 이춘수△사회1 이대현△문화 이동관△체육 김교성△사진 이채근△정보관리(선임기자 겸임) 박노익<독자서비스국>△판매관리 김병필△유통사업(전단사업부장 겸임) 정석희<광고국>△관리 오영호△기획 도수성△산업 이진화 ■YTN ◇보도국 △선거방송TF팀장(취재1부국장 겸임) 이기정△취재2부국장 김장하△편집〃 채문석<부장>△사회2 류제웅△편집1 오인석△편집2 김진호△편집3 이동우△편집4 박병한 ■단국대 △천안캠퍼스 부총장 최학근△〃 공학대학장 권경희△보건진료소장 진건△교무처 부처장 박범조 ■성신여대 △생활과학대학장 김현경△융합문화예술〃 송승환△SWANS센터장 김영주△Brickwall Sound관장 이병우 ■성공회대 △부총장 이종구△기획처장 김덕봉△학생교류〃 장화경△입학홍보〃 진영종△대학원 교학〃 신정완△총무〃 김영회 ■연세대 △기획실 산학협력단 파견 김현정△총무처 총무부처장 김효성△국제캠퍼스 총괄본부 종합행정센터소장 김광수△총무처 재무부처장 이희갑△대학원 부처장 윤창한 ■한국해양대 △국제대학 학장 이기환△〃 부학장 정진성△〃 동아시아학과장 김태만△〃 유럽학과장 최진철△해양과학기술대학 에너지자원공학과장 윤지호△세계해양발전전략연구소장 김재봉 ■충북대 △인문대학장 최세만△자연과학〃 정용제△사범대〃(교육대학원장 겸임) 김진식△도서관장 김승렬 ■포스텍 △교무처장 이인범△학술정보〃 김대진△교육개발센터 및 리더십센터장 권순주 ■한맥투자증권 ◇이사 선임 △법인영업본부 부본부장 김승욱
  • [사설] 일본 전쟁범죄 국제공조로 해결하자

    일본 정부가 역사 망각이라는 집단 최면에 걸린 듯한 분위기다. 노다 요시히코 총리가 일제가 강제동원한 ‘일본군 성노예(위안부)’의 증거를 대라며 앞장서자 겐바 고이치로 외무상이 뒤를 받쳤다. 마쓰바라 진 국가공안위원장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죄를 했던 1993년 ‘고노 담화’의 존폐 여부를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명백한 역사적 사실도 눈감아 버리는 그들의 맹목성에서 2차 대전 시 가미카제(자살 특공대)가 연상된다. 일본은 제국주의의 길을 걸으며 아시아·태평양에서 온갖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여성들을 끌고가 군인들의 성노리개로 이용한 것은 물론 만주 주둔 731부대의 생체실험, 필리핀 바탄에서의 전쟁포로 죽음의 행진 사건 등 부지기수다. 성노예 희생자에는 한국, 중국, 필리핀, 타이완, 태국 등의 여성이 포함돼 있다. 1990년에는 인도네시아에 있던 네덜란드 여성까지 끌려갔다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731부대는 산 사람을 대상으로 무기와 세균의 성능을 실험하고 장기까지 해부해 나치 독일의 유대인 가스 학살 못잖은 잔혹한 일을 저질렀다. 그러나 그 주역들은 전후 전범재판에서 도조 히데키 등 내각과 일부 군인들이 교수형에 처해졌을 뿐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유럽에선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이 전승국이자 피해자여서 독일을 단죄했지만, 아시아에선 한국·중국·필리핀 등 피해국이 배제된 채 전승국 미국 주도 하에 재판이 이뤄진 탓이다. 2차 대전 참전 책임이 큰 히로히토 일왕에게 면죄부가 주어지고 난징 대학살이나 731부대 사건도 상징적 인물에 대한 처벌만 이뤄졌다. 그러나 일제의 전쟁범죄 진상규명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2005년 8월 중국 하얼빈일보는 생체실험대상자 명단 1463명을 발굴, 공개했다. 여기에는 한국인 6명도 포함됐다. 한국, 중국, 필리핀 등 아시아 피해국들은 일본의 역사 역주행에 서로 힘을 모아 함께 대응해야 한다. 전쟁범죄 피해사례를 공동 연구하고 자료를 공유하는 것은 물론 미국, 유럽, 유엔 등 국제사회에 꾸준히 알려 주의를 환기시켜야 한다. 전쟁범죄와 역사 왜곡에 대해서 공동대응하는 협약을 맺어 일본이 또다시 역사를 망각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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