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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라이베리아에 파병/해병대 자국민 철수작전 개시

    【워싱턴ㆍ제네바 로이터 AFP 연합】 미 해병대가 5일 상오 라이베리아의 수도 몬로비아에 상륙,미국인들을 철수시키기 시작했다고 말린 피츠워터 백악관대변인이 말했다. 피츠워터대변인은 2백25명의 해병대원이 헬기를 이용,몬로비아에 상륙했다고 말하고 그러나 이것이 라이베리아 내전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전했다. 그는 몬로비아를 떠나기를 원하는 모든 미국인들을 철수시키기 위해 4척의 선박이 몬로비아 인근 해상에 머무르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라이베리아 반군 지도자 프린스 존슨은 4일 라이베리아의 유혈내전에 외국의 개입을 유발시키기 위해 몬로비아에 있는 모든 외국인들을 체포할 것을 명령했는데 미국인ㆍ영국인ㆍ레바논인 및 인도인들을 먼저 체포할 것이라고 말했다. 몬로비아에는 레바논및 인도 무역업자들을 포함,적어도 2천여명의 외국인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미,90년대 중반까지 50만 감군/주한군 1개사만 유지

    ◎부시,국방관계 연설 【워싱턴=김호준특파원】 조지 부시 미대통령은 2일 국방관계 연설을 통해 앞으로 5년내 미군의 25% 감축을 제의했으나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은 세계가 여전히 위험한 곳임을 입증하고 있다고 지적,미군이 계속 강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지도 미국방성이 작성한 「90년대 미국 군사전략」 청사진에 따라 미국은 해외주둔 미군도 대폭 감축,주한미군은 1개사단 규모만 유지하고 유사시에는 하와이와 알래스카 배치병력을 동원지원하고 전술공군력으로 한국 등을 방어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미군의 감축은 소련 및 동유럽의 변화와 미국방예산의 계속 삭감 등 새로운 정세전개를 감안하여 계획된 전략이며 태평양 주둔 미군사력은 해상전략을 근간으로 전술공군력이 한국과 일본 및 여타 아시아맹방들을 방어키로 되어있다고 이 신문이 전했다. 태평양전략은 ▲육군의 경우 한국에 1개사단만 두고 유사시에 하와이나 알래스카에 배치된 병력을 보강지원하며 ▲공군력은 태평양기지에 3∼4개 전술전투비행단을 유지시키고 ▲해군력은 6개 항공모함을 포진,그중 1개는 일본에 배치시키며 ▲해병대는 4개여단을 일본과 하와이에 각 1개,미국 본토에 2개를 배치시킨다는 내용이다.
  • 이라크 14개사 한밤 기습… 수도까지 탱크진공

    ◎쿠웨이트 전격 함락되기까지/탱크 3백50대 앞세워 왕궁ㆍ공항 점령/무장헬기도 호화주택가 무차별 폭격/국영방송,“아랍국지원ㆍ국민 궐기”호소 ○…2일 새벽 쿠웨이트에 대한 침공을 감행한 이라크군은 쿠웨이트 국왕(수장)의 거처인 다스만궁을 점령했으며 이라크군 탱크들이 쿠웨이트 시가지에 들어와 있다고 한 쿠웨이트 관리가 말했다. 이 관리는 로이터통신과 전화 인터뷰에서 『이라크군이 왕궁,공항을 점령』 했으며 『이는 치밀한 준비끝에 이루어진 작전』이라고 말하면서 『이라크군이 현재 쿠웨이트 주요 관공서를 점령한 뒤 시가지 일부지역의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쿠웨이트는 아랍국가들에 이라크군의 야만적인 침공을 격퇴하기 위해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쿠웨이트는 이날 국영 라디오 방송을 통해 『아랍국가들이여! 쿠웨이트의 남녀,그리고 어린이들은 그들이 야만적인 침공으로부터 구출될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요청한다』고 말하고 『쿠웨이트인들의 명예는 짓밟혔으며 피를 흘리고 있다. 긴급히 도와주기를 바란다』고 말해 이번 사태로 희생자가 발생했음을 처음으로 시사했다. ○…이에 앞서 쿠웨이트 라디오방송은 전투가 치열해지자 군가방송 도중에 『시민들이여 여러분의 조국이 야만적인 침공을 당하고 있다. 이제 나라를 지켜야 할 시간이다』고 말했다. 목격자들은 상오 8시45분(한국시간 하오2시45분)쯤 자비르 알 아마드 알 사바 국왕의 거처중 한 곳인 다스만궁 부근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고 전했다. ○3개사단 추가 동원 ○…쿠웨이트 공항관리들은 2일 쿠웨이트 국제공항이 이라크군의 침공후 폐쇄됐다고 밝혔다. ○…쿠웨이트 관리들은 이라크군이 2일 미명에 국경을 침공,북동부에 산재한 여러 지역을 장악했다고 밝혔다. 바레인에서 전화로 접촉한 이란 관리들은 쿠웨이트가 현재 중포 등을 이용,이라크군을 격퇴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하고 있다고 알렸다. ○…이라크는 쿠웨이트침공을 위해 14개 육군사단을 동원한데 이어 1개 장갑차사단을 포함한 3개 사단을 더 동원하기 시작했다고 이라크의 육군사령부가 2일 발표했다. 국영 바그다드라디오를 통해 발표된 한 육군 코뮈니케는 또한 알 완와르 해병대도 소집되기 시작했다고 밝히고 지난 1월이후 전역한 장병들에게 원대복귀를 촉구하고 국내자원병들에게는 3일이내에,해외거주자일 경우 15일내에 합류하라고 발표했다. 이 코뮈니케는 또 집권여당인 바트당내 민병대 출신들로 구성된 인민군도 재소집되고 있다고 말했다. 인민군은 지난 1988년 9월 종식된 이란­이라크전 당시 35만명에 이르렀다. ○쿠웨이트군 산발저항 ○…이라크군이 2일 쿠웨이트를 점령한 가운데 숫적으로 훨씬 열세에 있는 쿠웨이트군은 이라크군에 산발적인 저항을 하고 있으며 쿠웨이트의 고층건물 사이로 폭발음과 포격소리가 진동하고 있었다. 자동차를 탄 이라크군 병사들은 국기를 흔들면서 환호성을 올리며 쿠웨이트 시가지를 질주하고 있고 하늘에는 이라크 헬리콥터들이 비행하고 있었다. 자비르 아마드 알 사바국왕의 주거지인 다스만궁 부근의 언덕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져 이 지역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으며 목격자들은 큰 폭발음과 기관총 소리가 요란했다고 전했다. ○…런던에 있는 50여명의 쿠웨이트인들은 『쿠웨이트인들을 위한 쿠웨이트 국왕 만세』등의 구호를 외치며 영국주재 쿠웨이트대사관으로부터 이라크대사관으로 행진한후 이라크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들은 국왕의 초상화가 그려진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했으며 전통의상을 입은 많은 쿠웨이트여인들은 시위도중 울부짖으며 이라크의 무력침공을 비난. ○양국군 미사일 공방 ○…목격자들은 다스만궁에 이라크탱크가 진입했으며 이라크 무장 헬리콥터들이 호화 주거지를 폭격했다고 전했다. 이들은 이라크군이 다스만궁을 점령한 것처럼 보인 순간 쿠웨이트 병사들이 새로운 저항을 시도했다고 전했다. ○…쿠웨이트 주재 이탈리아대사는 일부 정부청사에 매복해 있는 쿠웨이트병사들이 이라크군에 저항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마르코 콜롬보대사는 이탈리아 국영TV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혔으나 이 정부청사들의 이름은 공개하지 않았다. 그는 또 쿠웨이트시에서 벌어진 양측 군대간의 전투에서 미사일이 발사됐으나 사상자나 피해정도를 밝히지는 않았다. ○터키국경 일방적 폐쇄 ○…이라크는 2일 새벽 터키와의 주요 국경초소를 일방적으로 폐쇄하고 이라크를 떠나는 차량의 통행만 허용했으며 터키는 앙카라주재 이라크 대사를 소환,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우려」를 나타냈다. 터키의 아나톨리아통신은 터키 남부 하부르 초소와 이라크의 자코 초소 사이를 연결하는 국경통로가 「이라크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폐쇄됐다고 전했다. 이 통신은 터키에서 이라크로 들어가는 모든 차량의 입국이 거부되고 있다고 전하면서 그러나 외국 차량들은 이라크를 떠날 수 있다고 전했다.
  • 여야 상설 협의기구 제의/평민총재와 회담도 추진

    ◎김영삼 대표최고위원 회견 김영삼 민자당대표최고위원은 16일 상오 중앙당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지자제를 포함한 국가보안법ㆍ안기부법 등 현안 정치법안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논의,9월 정기국회에서 마무리짓기 위해 여야 상설협의기구의 구성을 야당측에 제의한다』고 밝히고 『평민당 김대중총재와 만나 진솔한 논의를 하겠다』며 여야 대표회담을 거듭 제의했다. 김대표는 또 야당의원들의 의원직 사퇴결의와 관련,『책임있는 정당과 정치인이 헌법에 보장된 임기를 중도에서 그만두는 행위는 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하고 『이미 제출된 일부 의원들의 사퇴서는 수리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고 밝혀 야권의 의원직 사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했다. 김대표는 쟁점법안들의 일방처리와 관련,『방송관계법은 그간 반대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여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은 모두 삭제하고 단지 민방허용과 KBS교육방송 독립이라는 두가지 내용밖에 없어 문제될 것이 없다』면서 『민방허용은 국민 다수가 원하고 있으며평민당도 최근까지 당론으로 민방허용을 주장해왔다』고 말했다. 김대표는 이어 『국군조직법도 야당의 요구를 대폭 수렴하여 통합사령관의 명칭변경,실시시기 연기,부대이동시의 국방장관 승인,해병대의 참여보장 등의 수정을 가함으로써 군사목적외에 다른 정치적 의도가 없음이 증명됐다』고 강조하고 『90년 추경예산도 치안ㆍ교통ㆍ환경 등 시급한 민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느 하나도 지체할 수 없는 것』이라고 밝혔다. 김대표는 또 지자제 실시문제에 대해 『여야 상설협의기구를 설치해 오는 정기국회에 관련법안을 상정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해 협상과정에서 야당측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 있을 것임을 시사했다. 김태식 평민당대변인은 이날 민자당 김영삼대표의 기자회견과 관련한 논평을 발표,『날치기 통과된 법안들을 백지화하고 지자제실시 약속을 지킨다는 보장을 할 경우 상설기구설치및 김대중총재와의 회담제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밝혀 사실상 김대표의 제안들을 거부했다.
  • 「광주」보상법등 국회 통과 22개 법률안 요지

    ◎대기업의 민방참여 전면금지 명문화 방송관계법/「광주」유족엔 보상금외 생활비도 지급 광주보상법/1백만원이하 월급자 급여의 40% 세액공제 소득세법 14일 국회를 통과한 22개 법률안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광고물 설치 신고제로 ◇광고물등관리법 개정 법률안=대통령령이 정하는 광고물을 표시ㆍ설치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시ㆍ도지사의 허가를 받거나 신고토록 한다. 옥외광고업을 하고자 하는 자는 시ㆍ도지사에 신고하도록 한다. ○음주 측정 불응땐 체형 ◇도로교통법중 개정법률안=술에 취한 상태에서 자동차등을 운전한 사람이나 경찰공무원의 음주측정에 응하지 아니한 사람에게는 2년이하의 징역이나 3백만원 이하의 벌금의 형으로 벌한다. 주ㆍ정차를 위반한 때에는 5만원이하의 과태료에 처한다. 자동차 운전사는 운전할 때 좌석안전띠를 매어야 하며 그 옆좌석의 승차자에게도 안전띠를 매도록 해야 한다. ○7월분부터 소급 적용 ◇소득세법중 개정법률안=월급여가 1백만원이하인 자는 월급여액의 1백분의 40에 상당하는 금액을,월급여가 1백만원을 초과할 경우 1백분의 30에 상당하는 금액을 산출세액에서 공제하되 연간 80만원을 공제한도로 한다. (90년 7월1일이후 발생하는 소득분부터 적용) ○재해농가 지원 의무화 ◇농업재해대책법개정법률안=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재해대책에 소요되는 비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보조하고 재해를 입은 농가 및 어가에 대한 지원을 해야 한다. 다만,풍수해대책법 기타의 법령에 의하여 재해의 예방,피해의 경감,재해의 복구 및 지원의 조치를 받은 농가 및 어가는 보조와 지원대상에서 제외된다. 농업재해에 관한 사항을 심의하기 위해 농림수산부에 농업재해대책 심의위원회를,어업재해에 관해서는 수산청에 어업재해대책 심의위원회를 각각 두도록 한다. ○유료낚시터 개장 허용 ◇수산업법개정법률안=어촌계는 공동어장에 유료낚시터를 지정받아 어민의 소득원으로 개발ㆍ운영할 수 있고 수산청장은 수산자원의 번식ㆍ보호등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 일부 수면을 낚시제한구역으로 지정할 수 있도록 한다. ○승마투표법 7종으로 ◇한국마사회법 개정법률안=승마투표방법은 단승식ㆍ복승식ㆍ쌍승식ㆍ연승식ㆍ삼복승식ㆍ중단승식 및 특별승마식의 7종으로 한다. 마사회의 사업범위에 대통령령이 정하는 농어촌 사회복지 증진을 위하여 필요한 사업등을 추가한다. 조교사ㆍ기수 및 마필관리원이 업무에 관하여 부정한 청탁을 받고 재물 기타 재산상의 이익을 약속한 때는 5년이하의 징역 또는 5백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환경보전위원회 신설 ◇환경정책기본법안=환경보전에 관한 정부의 주요시책등을 심의하기 위해 국무총리 산하에 환경보전위원회를 둔다. 환경보전에 관한 기술적 자문에 응하기 위해 환경처장관 소속하에 중앙환경보전자문위원회를,시ㆍ도지사 소속하에 지방환경보전자문위원회를 둔다. 환경보전에 영향을 미치는 사업을 하려는 자는 사업계획안과 환경영향평가서를 작성,미리 환경처장관에게 협의를 요청해야 하며 평가서에는 주민의 의견을 반드시 첨부해야 한다. ○공해배출업자엔 징역 ◇대기환경보전법안=배출시설 및 방지시설의 비정상운영행위자에 대해서는 5년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환경처장관은 배출시설이 아닌 시설등에서 발생되는 악취를 규제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명할 수 있다. 자동차제작자는 제작하고자 하는 자동차의 배출가스가 배출가스 허용기준에 적합하다는 인증을 환경처장관으로부터 받은 후에 자동차를 제작할 수 있다. ○수질관리지 지정 가능 ◇수질환경보전법안=폐수의 수탁처리를 위한 영업을 하고자 하는 자는 자본금,기술능력,시설 및 장비를 갖추어 환경처장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환경처장관은 특정 호소의 수질보전을 위해 특정호소수질관리 구역으로 지정해야 한다. ○자동차의 소음도 단속 ◇소음ㆍ진동규제법안=환경처 장관은 항공기소음 측정결과,환경기준의 유지 및 달성을 위해 관계기관의 장에게 항공기 소음의 감소 및 피해방지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요청할 수 있다. 자동차를 운행하는 자는 소음허용기준에 적합하게 운행해야 하고 환경처장관은 소음허용치를 초과할 경우 개선을 명할 수 있다. 이 경우 개선에 필요한 10일 이내의 범위에서 자동차의 사용정지를 함께 명할 수 있다. 채석장ㆍ공사장 등을 운영ㆍ관리하는 자가 폭약을 사용하고자 할 때는 관할 시ㆍ도지사에게 신고해야 한다. ○유해업소는 이전 명령 ◇유해화학물질관리법안=환경처장관은 유독물사업장의 돌발사고로 인한 인근의 인명과 재산의 피해요인을 제거하기 위해 당해 사업장의 이전을 명할 수 있다. ○환경분쟁 조정위 설치 ◇환경오염피해분쟁 조정법안=환경분쟁조정의 전담기구로서 환경처에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회를,시ㆍ도에 지방환경분쟁조정위원회를 둔다. 위원회에는 환경피해조사 및 분쟁조정업무를 행하는 심사관을 둔다. 분쟁조정절차로서 알선ㆍ조정ㆍ제정의 절차를 둔다. ○노사교육실시등 전담 ◇한국노동교육원 법안=교육원은 노사교육의 실시,각급 노사교육기관의 지원과 건전한 노사관계의 정착을 위한 홍보,교재개발 및 보급업무등의 사업을 한다. ○체육ㆍ학술교류등 허용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안=남북교역을 할 수 있는 자는 국가기관ㆍ지방자치단체ㆍ정부투자기관이나 무역업의 허가를 받은 자로 하고 거래형태ㆍ대금결재방법등에 관해 국토통일원장관의 승인을 얻어 물품을 반출,반입할 수 있다. 남북한 주민은 통일원장관의 승인을 얻어 공동으로 문화ㆍ체육ㆍ학술ㆍ교류등에 관한 활동을 할 수 있다. 남북의 물품 반입,반출에는 관세ㆍ방위세ㆍ기타 수입부과금을 부과하지 않는다. 남북간 왕래ㆍ교역ㆍ협력사업과 통신역무의 제공등에 관해서는 다른 법률에 우선해 적용된다. ○협력사업 융자에 사용 ◇남북협력기금법안=남북협력기금의 재원은 정부출연금등 출연금과 장기차입금ㆍ채권의 발행으로 조성된 자금등으로 한다. 남북협력기금은 남북간 제반교류와 협력사업에 소요되는 경비의 지원 및 융자등에 사용한다. 기금은 통일원장관이 운용ㆍ관리하도록 하되 그 운영ㆍ관리에 관한 사무를 금융기관에 위탁할 수 있다. ○합동참모본부를 신설 ◇국군조직법중 개정법률안=각군의 전투를 주임무로 하는 작전부대에 대한 작전지휘ㆍ감독과 합동 및 연합작전의 수행을 위하여 국방부에 합동참모본부를 두고 합동참모의장은 군령에 관해 국방장관을 보좌하며 합동작전을 위한 합동부대를 지휘ㆍ감독한다. 단,평시 독립전투여단급 이상의 부대이동등 주요 군사사항은 국방장관의 사전승인을 얻어야 한다. 합동참모회의는 합동참모의장과 각군 참모총장으로 구성하며 해병대등 특정작전부대에 관련된 사항을 심의할 때는 작전사령관을 배석시킬 수 있다. ○민족통일문제 연구 ◇민족통일연구원법안=연구원은 통일문제와 관련되는 제반사항의 연구 및 이론개발,국내외 연구기관ㆍ단체등과의 공동연구등의 사업을 한다. ○재원은 수신료로 충당 ◇한국방송공사법중 개정법률안=주재원을 TV방송수신료로 충당하되 목적업무의 적정한 수행을 위해 필요한 경우 광고방송수익으로 충당할 수 있다. 설립목적이 적정하고 효율적인 달성을 보장하기 위해 이사회로 하여금 매년 경영평가를 실시한다. ○시한부 방송정지 가능 ◇방송법중 개정법률안=방송법인의 주식 또는 지분 소유는 총수의 1백분의 30을 초과할 수 없다. 특수방송이 허가받은 목적에 충실한 방송을 하도록 그 편성기준을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대기업과 계열기업 및 특수관계에 있는 자는 방송법인의 주식 또는 지분을소유할 수 없다. 방송심의규정을 위반한 방송순서에 대한 방송중단 및 시한부 방송정지권,광고방송정지명령권 및 방송국 재허가 제한의 조치요청권등은 방송위원회에 부여한다. ○공익자금관리위 설치 ◇한국방송광고공사법중 개정법률안=공익자금은 방송진흥사업과 문화ㆍ예술진흥사업의 지원 및 언론의 공공성과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독립된 일정한 기관의 운영경비지원에 사용한다. 또 공정하고 효과적인 관리를 위해 공익자금관리위원회를 설치,운영한다. 공사는 수입금중 수수료와 공사운영경영비를 제외한 금액을 방송진흥사업 및 문화ㆍ예술진흥사업을 위한 자금을 조성한다. ○호프만식으로 지급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등에 관한 법률안=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에 대한 보상등을 지원하기 위해 국무총리 소속하에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지원위원회를 두고 보상 등의 심의결정을 위해 광주직할시에 광주민주화운동관련자 보상심의위원회를 둔다. 관련자 및 유족에 대해서는 호프만식의 보상금과 생활지원금을 지급토록 한다. 광주민주화운동과관련,생계지원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하여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지원금을 지급할 수 있다. ○허위등기땐 체형 가능 ◇부동산등기 특별조치법안=부동산의 소유권이전 계약은 쌍방계약인 경우 반대급부의 이행이 완료된 때로부터,증여등 편무계약인 경우 효력발생 60일이내에 이전등기를 해야 한다. 등기신청의무를 위반한 자는 등록세액의 5배이하에 상당하는 과태료를 처한다. 등기원인을 허위로 기재,등기를 신청하거나 가등기 등을 신청한 때에는 3년이하의 징역이나 1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고침◁ 서울신문 15일자 5면 국회통과법률안 요지중 「방송법중 개정법률안」은 방송위원회의 방송국에 대한 시정및 제재조치 부분이 삭제,수정되었기에 바로잡습니다.
  • 합동군 작전 효율성 극대화 겨냥/새 「국군조직법」을 보면

    ◎기구조정… 연 백70억 절감기대/현대전 부응하게 「통제형 합참제」로 지난 3월12일 국회국방위에서 변칙통과됐던 국군조직법 개정안이 4개월만인 7월11일 일부 수정된 채 국방위를 재통과,본회의 통과과정만 남겨두고 있다. 이 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 오는 10월1일 국군은 창군이래 최초로 육ㆍ해ㆍ공군ㆍ해병대 등 각군의 작전ㆍ정보기능을 통합한 합동군제인 통제형 합참본부제도로 새출발하게 된다. 정부는 당초 군구조개편작업을 추진하면서 국민적 안보공감대가 형성된 이후 여야합의를 거쳐 새 제도를 출범시키려 했으나 야권의 강한 반발로 변칙통과시켰다가 야당의 주장을 일부 수용,이번 임시국회에 재상정하게 됐다. 정부가 지난 88년 8월 장기국방태세 발전을 위한 방편의 하나로 군조직개선을 주요과제로 삼았던 이유는 2차대전이 끝난 40년대 후반 미국의 자문형 합참의장제를 본뜬 우리나라의 군제가 현대전을 수행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군제는 합참의장이 국방장관의 군령권을 단순히 보좌하는것에 그쳐 합참의장이 군령에 관한 아무런 권한이 없으며 따라서 유사시에 국방장관을 보좌하는 국군최고위장교이긴 하지만 작전지휘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돼있다. 지난 78년 한ㆍ미 연합사령부 창설이후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이 부분적으로 한ㆍ미 공동으로 행사하고 있으나 합참의 참모편성이 군령계선상에서 제외됨으로써 한국군의 자주적인 지휘체제가 미흡한 실정이다. 또 육ㆍ해ㆍ공군 3군병립체제로 돼있어 국군의 종합적인 기획및 통제기능이 미약해 통합전력구축및 전투즉응성 발휘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미국의 합참의장제도는 미 본토에서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아래 범세계적 전략을 수행하기 위한 제도로 우리 여건에 맞지 않아 유사시에 군의 효과적인 작전지휘를 할 수 없다는 지적이 있어 왔다. 미국도 합참기능을 끊임없이 강화하여 86년부터 전세계 각 지역의 미군 주요사령부를 통합군으로 편성,육ㆍ해ㆍ공군의 통합작전이 가능한 통제형 합참의장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새 법에 따라 오는 10월1일 창설될 예정인 새로운 합동참모본부는 국방부장관 산하기구로 단순한 자문기구에서 벗어나 한국군의 모든 작전지휘권을 갖는 막강한 기구가 된다. 합동참모본부의 창설로 국방장관은 군정 군령권을 모두 통괄하며 군령권은 합참의장을 통해,군정권은 참모총장을 통해 행사하게 된다. 명실공히 한국군 최고 선임장교이며 지휘관인 합참의장은 문민인장관의 명을 받아 전국 10여개의 각군 주요사령부의 작전을 지휘통제하게 되며 각군 총장은 작전권을 제외한 인사ㆍ예산ㆍ군사법ㆍ감사권ㆍ군기및 사기유지ㆍ개인교육 및 부대훈련 등의 책임과 권한만을 행사하게 된다. 국방부는 국방정책의 수립및 자원획득과 배분ㆍ집행및 통제업무를 수행하고 합참본부는 국방부에 군사력 소요제기와 운용업무를 담당하며 각군 본부는 군사력의 유지발전과 인사를 포함한 행정ㆍ군수지원을 담당하게 된다. 국방부는 이 제도가 시행될 경우 국방부및 각군 본부로부터의 감군인원 규모를 약 5천1백명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이중 2천2백여명은 합참본부및 37개 직할부대창설에 충당하고 나머지 3천여명은 전투부대의 전력증강에 활용함으로써 연간 1백70억원의 국방예산을 절감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있다. 또 현재 충남 대전지역의 계룡대에 이전해 있는 육군본부와 공군본부중 작전ㆍ정보기능이 합참본부에 이관됨으로써 현재 대방동에 그대로 남아 있는 해군본부가 계룡대지역으로 이전할 수 있게 되어 육ㆍ해ㆍ공군 3군이 한자리에서 효과적인 양병과 군정권을 행사하게 된다. 국방부는 새로운 합참본부의 창설로 각군의 기능중 40%가 축소되어 합참본부로 결집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다시말해 국군의 상부구조중 중장급 참모들이 수명 늘어나는 한편 상부구조는 능률위주로 간편하게 편성되며 하부구조는 기술집약형과 전투력과 기동력ㆍ화력위주로 중무장 편성되게 된다. 국방부는 이번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는대로 시행령을 만들고 군인사법등 관련법도 일부 개정할 방침이며 각군의 작전부대및 합동부대의 범위와 작전지휘ㆍ감독권의 범위를 명시,합참의장및 각군총장의 권한과 기능수행을 확실하게 구분할 방침이다. 국방부는 새로운 합참본부가 오는 10월1일창설된다고 해도 새로운 청사마련과 새제도에 의한 인원보충등 본격적인 기능을 수행하려면 2∼3년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 전쟁의 발발과 전개(새 실록 6ㆍ25 김학준:중)

    ◎“북한 남침은 소의 적화음모”… 미,1주만에 파병/중국,유엔군 38선 넘자 16개사단 급파/소선 항공ㆍ기갑사단 만주에 전진배치/7월에 대전서 새 한ㆍ미협정… 군지휘권 유엔군에 넘겨(서울신문 6.25 40주 특집) 한국전쟁은 전쟁의 국면의 전개양상에 따라 5개의 기간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제1기는 50년 6월25일부터 50년 9월 중순까지의 시기로,남침을 개시한 북한의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대구와 부산 일대를 제외한 남한 전역을 석권했던 시기이다. 제2기는 50년 9월 중순부터 50년 10월 하순까지의 시기로,국제연합군의 인천 상륙작전의 극적인 성공을 계기로 국련군이 반격을 계속해 한ㆍ만 국경으로까지 접근함으로써 북한정권이 붕괴 직전까지 이르렀던 시기이다. 제3기는 50년 10월 하순으로부터 51년 4월 초순까지로,중공군이 개입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고 국련군이 다시 후퇴하던 시기이다. 제4기는 51년 4월 초순부터 51년 6월 중순까지로,국련군이 「대량보복」을 통해 전투의 주도권을 다시 장악하여 군사적 균형을 이룬시기이다. 제5기는 51년 6월 중순부터 53년 7월27일까지의 시기로,전쟁과 함께 휴전회담이 진행된 화전양상의 시기이다. 이번의 제2회에서는 제1기부터 제3기까지를 다룬다. ○3일만에 서울점령 ▷제1기◁ 50년 1∼2월 이후 38도선 주변에서 소규모의 군사력 충돌을 계속 일으켜오던 북한은 6월25일 새벽 드디어 전면남침을 개시했다. 북한의 공격은 빨라 6월27일 서울의 외곽인 창동과 미아리에 방어선을 설정한 한국군을 붕괴시켰다. 이에 따라 이 날짜로 육군본부는 수원으로 후퇴했고 정부는 대전으로 천도했다. 6월28일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다. 그런데 북한군은 서울 점령 3일동안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는데,이 3일은 생사의 갈림길에 있던 남한을 살려 준 귀중한 시간이었다. 북한군이 남침 사흘만에 서울을 점령한 여세로 그대로 밀어붙였다면 남한으로서는 최악의 상태를 맞았을지도 모른다. 북한군의 기습에 대한 놀라움 속에서도 트루먼 미국대통령은 즉각적인 응전을 결심했다. 북한의 남침을 소련의 세계적화 시도의 일환으로 보았으며,직접적으로는 미일 군사안보체제에의 대항조치로 인식하여 한반도가 공산화하는 경우 그것이 일본의 국내정치에 미칠 영향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곧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에 대해 긴급회의의 소집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6월25일 일요일 하오 3시에 열린 안보리에서 미국은 북한이 남한에 대해 「무력공격」을 가했다고 주장하고 그 「무력공격」은 「평화파괴행위」라고 비난한 다음 북한군이 즉각적으로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군사력을 38도선 이북으로 철퇴시킬 것을 요청했다. 미국의 제안은 9대0으로 가결됐다. 때마침 소련 대표는 장기결석중이어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안보리의 결의는 북한의 군사행동을 정지시킴에 있어 아무런 효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그리하여 6월27일 안보리는 『군사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결의했다. 이와 더불어 트루먼은 도쿄의 미극동군 총사령관 맥아더에게 대한민국에 대한 해ㆍ공군의 지원을 개시하라고 명령하고,미 제7함대로 하여금 중공군이 대만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으면서 동시에 대만의 장개석정부가 중국 본토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조처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6월30일 트루먼은 맥아더 총사령관에게 ①해ㆍ공군뿐만 아니라 지상군을 투입할 권한과 ②군사상 필요한 경우에는 38도선 이북의 군사목표를 공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이튿날 주일 미 제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가 부산에 상륙함으로써 미 지상군의 개입이 시작됐다. 바로 이날 안보리는 국제연합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국제연합 회원국들의 무력원조를 미국의 단일지휘 아래 둔다는 내용의 공동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노르웨이 출신의 국제연합 사무총장 트리그브리는 국제연합기를 미국에 전달했으며 트루먼은 즉시 미극동군 총사령관 맥아더를 국련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미국의 단호하고 신속한 결정은 대한민국을 크게 고무시켰다. 비록 남침에 쫓겨 피난길에 들어선 형편이지만 국련군의 반격으로 오히려 통일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6월29일 맥아더가한강전선을 시찰하고 곧바로 수원에 내려왔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모든 협력을 약속했다. 실제로 7월14일 대전에서 맺은 협정을 통해 이대통령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에게 위임했다. 이어 7월19일 이대통령은 『국련군의 작전목표가 전전원상의 회복,즉 38도선에서의 진격정지에 그쳐서는 안되며 북진통일을 완수해야 한다』는 내용의 친서를 트루먼에게 전달했다. 한미간의 이러한 협력속에서도 전세는 계속 불리해 후퇴에 후퇴를 거듭 했다. 그리하여 맥아더는 한때 최악의 경우에는 한국에서 손을 떼고 한국정부를 괌이나 하와이로 후퇴시킨다는 계획마저 세웠다. 이대통령은 분노속에 강경하게 거절했다. 마침 9월5일부터 13일까지 경주와 영천일대의 사활을 건 전투에서 국련군은 북한군 제15사단을 궤멸시켰다. 국련군의 반격이 전개될 수 있는 상황이 비로소 형성된 것이다. ○소대사가 대화 제의 ▷제2기◁ 국련군 반격의 결정적 계기는 확실히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었다. 9월12일 극비리에 부산을 출발한 2백61척의 대수송선단은 9월15일 인천항에서의 작전개시와 동시에 곧바로 인천시 남부에 상륙했다. 북한군은 2개 사단병력으로 서울방위사령부를 편성했으나 한국군의 해병대가 9월27일에,이어 국련군이 9월28일에 서울을 완전히 수복했다. 이에 따라 9월29일 이대통령은 맥아더와 함께 공로로 서울에 도착하여 서울을 대한민국정부의 관할아래 넘기는 수도 탈환식에 참석했다. 국련군의 성공적인 반격이 확고해지면서 서방진영 및 중립국가들의 일각에서는 전전원상의 회복이라는 조건아래 즉 북한군을 38도선 이북으로 철퇴시키는 조건아래 국제연합군의 진격을 멈추게 하고 이 테두리 안에서 한국전쟁을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제기됐다. 8월1일 안보리의 의장이 되는 것을 계기로 삼아 안보리에 복귀한 소련대사 말리크도 남북한 대표를 국제연합에 동시 초청하여 한반도문제를 해결하자고 제의했다. ○북한에 “항복”요구 그러나 미국의 태도는 확고하여 북한정권의 완전한 붕괴,즉 대한민국에 의한 한반도 통일만이 국련군의 목표임을 선언했다. 대한민국 정부도 『38도선의 존재를 부인한다』고 선언하면서 국련군의 북진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을 강조했다. 이때 서방 7개국이 미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공동결의안을 제출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무력을 써서라도 국련군의 주도 아래 한반도를 통일시킨다는 태도를 밝혔다. 그러나 국련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해도 좋다는 최종적인 결정은 내려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10월1일 우선 한국군은 드디어 38도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했다. 이튿날 맥아더는 국련군이 38도선을 넘어서도 좋다는 미국정부의 최종결정을 한국정부에 알리면서 북한정권의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발표했다. 그러나 다시 말하거니와 국련군이 38도선 이북으로 진격해도 좋다는 서방의 공동결의안이 아직 국련을 통과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국련군의 38도선 북상을 막으려는 공산진영 외교적 노력이 시도됐다. ○주은래 “방관 않겠다” 우선 중국 총리겸 외무장관 주은래는 10월2일 깊은 밤에 주중 인도대사 파니카르를 외무부로 불러 『만일 국련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하는 경우 중국은 조선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그러나 한국군만이 38도선을 넘는 경우 중국은 그러한 조처를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파니카르대사는 주의 발언을 본국정부에 즉시 알렸으며,인도정부는 그대로 미국정부에 알렸다. 트루먼은 주의 발언이 국련군 북상안이 통과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국련을 협박하려는 「대담한 시도」로 판단하여 그것을 무시했다. 이에 따라 국련은 10월7일 국련군의 38도선 북상을 허용하는 서방쪽의 공동결의안을 통과시켰으며 여기에 근거해 국련군은 7∼8일 드디어 38도선을 넘어 북진하기 시작했다. 이제 중국이 주사위를 던질 차례가 되었다. 10월10일 주은래는 『조선전쟁은 처음부터 중국의 안전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고 규정하고 이 전쟁에서 『중국인민은 수수방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주의 이 선언은 중국의 모든 유력지들에 보도되었는데 그것은 중국의 참전에 대비하여 중국인민들을 동원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되었다. 이처럼 중국의 참전 가능성이 커지자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트루먼은 10월5일 태평양의 웨이크도로 맥아더를 불렀다. 회담에서 맥아더는 중국의 참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대답했다. 이 무렵 국련군의 북진은 계속되고 있었다. 북한군이 곳곳에서 무너지자 김일성은 10월12일 스탈린에게 소련의 지원을 요청하는 친서를 보냈다. 그러나 소련은 미국과의 직접적 대결을 피하려는 자세만 보일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김일성은 가을비가 세차게 내리던 10월16일 새벽 2시 소련제 고급승용차 볼가를 타고 평양을 빠져 나가 10월26일 만주와의 접경지대인 평양북도 강계군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바로 이날 이대통령은 원산시에 그 모습을 나타내 열광적인 원산시민들을 격려했다. 이어 10월30일 평양을 방문하고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공산당을 몰아내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고 호소했다. ○스탈린,중국에 찬사 ▷제3기◁ 이 무렵 중국의 군사적 개입이 극비리에 시작되고 있었다. 국련군의 38도선 북상을 허용한 서방결의안이 10월7일 국련총회를 통과하자 모택동 중국공산당 주석은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직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팽덕회을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마침 북한으로부터 파병을 요청하는 밀사들이 와 있었으며 그리하여 팽은 10월13일 북한으로 들어가 김일성을 만난 뒤 전투에 참가하여 전황을 살핀다음 그 결과를 모에게 보고했다. 그때로부터 엿새뒤 중국군은 마침내 은밀하게 압록강을 건넜다. 중국이 참전을 최종 결정하던 어느 시점에 스탈린은 『김일성동지는 장래 중국 국경 안에 망명정부를 세울 것』이라고 모에게 알리면서 이처럼 위급한 상태에 빠진 북한정권을 구출하려던 중국이 적어도 6개 사단을 파견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러나 중국은 일단 행동을 개시한 뒤 16개 사단을 출동시켰다. 중국쪽 설명에 따르면 중국의 이러한 결정을 보고 『처음에는 우리들을 민족주의자가 아닌가 의심했던 스탈린은 눈물을 흘리며 우리들이 가장 좋은 동지임을 인정했다』 중국군의 개입을 전혀 모르는 채 한국군은 10월25일 마침내 압록강변의 초산을 점령했고 미 제24사단은 북한의 임시수도 신의주에 접근하고 있었다. 이제 대한민국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은눈앞에 닥쳐온 것 같았다. 그러나 바로 그날에 있었던 한국군과 중국군의 첫 교전은 상황을 완전히 바꾸었다. 맥아더는 11월5일 중국군의 참전을 국련에 보고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음을 알렸다. 중국군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한국전쟁은 국련군 총사령관의 권한 범위를 벗어나 국련과 세계 여러 나라들의 정치수뇌급에서 해결책이 제시돼야 할 전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중국 외무부도 11월11일 중국군의 참전을 공개적으로 처음 시인했다. 이와 더불어 중국군은 대대적인 공격을 취하면서 계속 남쪽으로 쳐내려 왔다. 이때로부터 약 2개월 동안 미군은 미군의 역사상 가장 장기의 후퇴를 경험하게 되었다. ○영서 종전모색 제의 그 결과 중국군은 12월26일 38도선을 넘고 12월말까지 38도선 이북의 북한 전역을 점령하고 51년 1월4일에는 서울을 점령했다. 이에 따라 국련군은 평양철수(12월4일 완료)와 흥남철수(12월24일 완료) 및 서울철수(1ㆍ4후퇴)를 경험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만주에 소련의 1개 항공사단이 배치되어 북한군과 중국군의 배후를 지원했고,전투상황의 악화에 대비하여 5개 기갑사단을 북한에 파견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중국군이 개입하면서 서방세계의 일각에서는 휴전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미 중국을 승인한 영국은 국련 대표권을 대만에 줄 것이 아니라 중국에 준뒤 중국과 종전을 모색하자고 제의했으며,애틀리 총리는 12월4일 워싱턴에서 트루먼과 회담한 뒤 『두나라는 협상을 통해 종전을 추구한다』는 합의를 끌어냈다. 여기에 발맞춰 아시아ㆍ아랍권 13개국도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골자로 하는 결의안을 국련에서 통과시켰다. 그러나 미국 안의 반공분위기는 매우 높아 하원과 상원은 각각 51년 1월19일과 1월23일 국련이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국련의 휴전 분위기에 실망하던 한국 정부는 다시한번 무력통일에 대한 기대를 걸게 됐다. 북한은 북한대로 다시 한번 적화통일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됐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구출된 김일성은 12월4일 강계군에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정기회의를 열고 「미제의 완전한 축출」을 다짐했다. 이와 동시에 무정을 비롯한 주요한 도전자들을 숙청했다.
  • 합동군제/전군 통합지휘…「즉응방위체제」 구축

    ◎유럽 3개국의 운영실태 점검/2차대전후 도입… 각군 균형발전에 크게 도움 영/4군작전권 보유ㆍ임기 2∼5년… 대통령이 임명 불/전략방위개념 수립ㆍ정부의 군사조언자 역할 독 현재 각 군참모총장이 행사하고 있는 군정ㆍ군령권중 작전등 군령권을 합동참모본부의장에게 넘기는 것을 주요골자로 하고 있는 국군조직법개정안이 임시국회가 열리면서 또다시 정치권의 쟁점이 되고 있다. 정부ㆍ여당은 합동참모본부제가 3군을 통합지휘함으로써 전투력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반해 야당측은 군지휘권을 한곳에 집중시켜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고 문민통제를 어렵게 한다며 반대하고 있다. 현재 세계각국의 군사지휘체제는 그나라의 전략적인 환경,국경의 형태,위협의 성격 및 가상적군의 규모,무기체제 등 여러 요인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해양국가가 많은 서양문화권은 대체로 지휘관 한 사람에게 권한을 집중시키지 않는 합동군제인 국방참모총장제로 발전하는 추세인 반면 대륙국가의 동양문화권은 작전의 효율성과 능률을 중시하는 통합군제인 단일참모총장제를 채택하고 있다. 육ㆍ해ㆍ공군 3군 본부를 운영하면서 작전ㆍ정보ㆍ인사ㆍ운영ㆍ예산 등의 군령권은 국방참모총장을 통해 행사하고 있으며 우리군 구조개편의 모델이 되고 있는 영국ㆍ프랑스ㆍ서독의 군사지휘체제를 살펴본다. ○국방성은 민간위주 ▷영국◁ 1923년 육군과 해군의 균형발전과 작전의 효율성을 위해 세계 최초로 합동참모본부를 창설한 영국은 2차대전이 끝나고 공군이 독립하자 국방참모본부로 개편,3군의 작전을 통괄하는 체제를 갖추었다. 63년에는 각군의 정책ㆍ행정 및 재정 등 군정상의 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3군 국방위원회를 발족시키고 64년에는 각군성을 폐지하고 국방부로 통폐합 하는 한편 현역의 최고위직인 국방참모총장의 권한을 대폭 강화했다. 국방장관은 군의 규모ㆍ조직편성 및 전개에 대한 권한을 갖고 국방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각군에 대한 자원의 분배와 군의 운용 및 관리를 하는 한편 소장급이상 장군의 진급 및 상벌에 대한 책임을 진다. 현재 공군원수인 국방참모총장은 군의 최선임 장교로 국방장관의참모이며 긴급시에는 수상에 직접 보고할 수 있다. 국방참모총장은 국내와 해외주둔군의 작전부대를 지휘할 뿐만 아니라 핵정책을 포함한 국방정책을 수립하고 기본군사작전 명령을 작성,하달한다. 각군 참모총장은 4성장군으로 국방참모총장의 위임하에 평시작전권을 행사하며 전투의 효율ㆍ관리ㆍ자군의 육성 및 편성을 유지하는 군정권을 행사한다. 2차대전 기간동안 모두 5백60만명의 장병을 동원했던 영국은 현재 병력이 31만8천7백명이며 그중 9만1천명은 서독 등 해외에 배치되어 있고 국내에는 22만8천명이 있다. 육군 15만8천명과 해군 6만6천5백명,공군 9만3천5백명의 현역으로 편성된 영국군은 항공모함ㆍ잠수함 등에 전략핵을 보유하고 있어 NATO를 중심으로 미국과 대서양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민간인 위주의 국방성에는 1만9천여명의 관리와 3천여명의 현역이 근무하고 있으며 현역 지휘관 중심의 국방참모본부에는 원수 1명,대장 1명,중장 3명,소장 11명 등 1천여명의 현역이 일하고 있다. 영국군의 모든 작전지휘는 국방위원회의 의결에 따라 국방참모총장이 수행하고 있다. ○감찰기능 대폭강화 ▷프랑스◁ 1953년 국방참모부를 창설한 프랑스는 58년 군 총사령부,61년에는 통합군사령부로 개칭했다가 62년부터 지금까지 국방참모부로 전군을 운영,지휘하고 있다. 육군 29만8천2백명,해군 6만6천2백명,공군 9만5천5백명,헌병군 8만6천7백명,병기본부 4천4백명,군무원 14만2백명 기타 등 70만2백명의 군사력을 갖고 있는 프랑스군은 육ㆍ해ㆍ공군ㆍ해병대ㆍ전략핵군 등 4개 부문으로 나누어져 있으나 전ㆍ평시를 막론하고 전군의 작전권은 국방참모총장이 행사한다. 독자적인 핵군을 유지하면서 NATO의 군사위원회에서는 탈퇴했으나 군사적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서독에 1개군단과 3개 기갑사단 4만9천명의 병력을 배치하고 있는 프랑스는 국방참모총장을 중심으로 전군을 단일지휘체제안에 두고 있다. 국방참모총장은 전 군사력의 조직과 운용의 책임을 지며 위기발생시 총사령관으로 전군의 작전지휘권을 행사,즉시 방위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평시에도 해외주둔군을 직접지휘하는 국방참모총장은 국방에 관한 중장기계획을 수립하고 장성급 장교의 임명 및 보직에 대해 장관을 보좌하면서 권리를 행사하고 육ㆍ해ㆍ공군에 대한 감찰권까지 갖고 있다. 각군 참모총장은 위기시 총사령관의 작전보좌관으로 평시에는 전투준비태세유지와 장성의 임명보직에 대해 장관에게 의견을 제시하는 보좌기능을 하고 있다. 국방참모총장과 각군 참모총장 병기본부장등이 참석하는 합동참모회의는 국방부장관이 주재하며 국방참모본부에서 작성된 군사력운영계획을 논의한다. 국방참모총장은 국방장관이 대상자를 선정,수상의 재가를 받아 대통령이 임명하는데 임기는 2∼5년이며 지금까지 육군 11명,공군 4명이 국방참모총장을 지냈다. 해외보안방첩국(안기부)과 군보안국(보안사)은 장관 직속으로 편성되어 있고 국방참모본부는 정보활용본부를 직할기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감찰기능이 강화되어 육ㆍ해ㆍ공군ㆍ헌병군ㆍ의무군에 대장급 감찰감실이 있으며 핵 작전은 대통령의 결정에 따라 국방참모총장이 공군전략사령관을 통해 수행한다. ○지휘계통 갈등없어 ▷서독◁ 2차대전 패전국인 서독은 육군 34만5천명,해군 3만9천명,공군 11만1천명등 49만5천명의 군사력을 갖고 있으나 미국ㆍ영국ㆍ프랑스ㆍ벨기에 등 NATO 7개국의 외국군 40만1천7백여명이 주둔하고 있다. 서독의 국방조직은 국방장관밑에 사무차관과 정무차관이 인사ㆍ행정ㆍ예산ㆍ시설ㆍ복지 등 일반업무를 수행하며 군의 작전지휘는 대장인 국방참모총장이 각군 참모총장회의 의장자격으로 행사한다. 연방군참모총장이라고도 불리는 국방참모총장은 독일의 군사방위개념을 수립하고 연방정부에 대한 군사조언자로 연방군의 기획과 작전업무와 참모총장회의를 주재한다. 각군참모총장은 군특성에 맞는 전투준비태세를 유지하기 위해 교육훈련ㆍ군수 등 군정권을 행사하며 작전ㆍ기획업무는 국방참모총장의 통제를 받는다. 국방부는 민간인 3천7백명과 현역 1천7백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연방군본부는 5백30명,각군본부는 3백50명으로 편성되어 있다. 연방군본부와 각군본부는 모두 인사ㆍ정보ㆍ작전ㆍ조직ㆍ군수ㆍ기획ㆍ군비 등 7개국으로 편성되어 있으며 같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국방 참모총장의 임기는 3∼5년이며 군별 순환보직규정은 없으나 역대 9명은 육군이 6명,해군 2명,공군이 1명이었다. 본부의 편성은 육군3 공군2 해군1의 비율로 되어 있다. 연방군본부는 정보본부ㆍ보안사ㆍ통신정보사ㆍ군사지리청물자사령부ㆍ연구 및 연습총국ㆍ군사연구소ㆍ연방국대학ㆍ지휘참모대학ㆍ정신전력ㆍ심리전ㆍ군수ㆍ정보ㆍ체육학교 등 14개 직할부대를 두고 있다. 평시 방공부문을 제외하고 모든 작전권은 연방군본부의 국방참모총장이 행사하고 전시에는 야전군은 나토사령관이 책임지며 연방군은 후방지역 방어책임을 맡고 있다. 정부수집은 각 군본부에서 하지만 연방군정보본부에서 종합분석판단하며 국방참모총장이 국방정보ㆍ기획ㆍ작전의 책임을 진다. 국방참모총장의 계급은 대장이며 각군총장의 계급은 중장이어서 지휘계통상의 갈등은 없다.
  • 미 종군기자 「6ㆍ25 40년」 기고/맥스 데스포

    ◎당시 AP통신 종군기자/“대동강교 넘던 「자유정신」 서울에 생동”/남하행렬 의미 이제야 이해 나는 1950년 서울을 처음 방문했다. 당시 적으로부터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시가전을 벌이는 미군과 함께 걷거나 차를 타고 서울을 들어오게 됐는데 그 방문은 나에게 우울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이제 40년이 흘러 다시 방문한 서울은 나를 사로 잡을 만큼 황홀하다. 이처럼 변한 서울을 보니 40년전에 일어났던 수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간다. ○개전 2주에 서울 특파 1950년,나는 로마주재 AP통신기자로 일하다 귀국명령을 받았다. 6월 중순 뉴욕에 도착한 나는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일하도록 전보됐다. 25일 북한군이 38선을 넘었고 전쟁이 시작됐다. 나는 즉각 본사로 달려가 종군취재를 자원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하지만 며칠후 본사는 나를 소환해서는 『아직도 종군취재를 원하느냐』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나는 즉각 「그렇다」고 대답했고 15분뒤에 내 여권은 군허가를 받기 위해 워싱턴으로 보내졌다. 여권을 받고 이틀뒤 나는 도쿄로 향발했다. 도쿄에서 종군취제에 필요한 승인절차와 군복지급을 받기 위해 오래 기다렸다. 이윽고 전쟁발발 2주만에 나는 한국에 도착,서울에서 후퇴하는 군대와 합류했다. 그뒤 나는 3년동안 진퇴를 거듭하는 유엔군을 따라서 전장을 누비벼 수많은 일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내가 전투를 취재하기 시작한 것은 미군 제24사단 34연대의 대전전투였다. 대전에서는 시가전이 어지럽게 벌어지고 있었다. 좁은 가로에서는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모를 저격탄이 날아다녔다. 가장 치열한 시가전은 인천상륙작전후 서울에서였다. 서울로 진격하는 곳곳에서,그리고 서울시내에서는 한걸음을 진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치열한 전투를 치러야 했다. 나는 여기서 하나의 비극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화선이 교차하는 주택가의 길가운데 한 가족이 갇힌 채 전투지역을 벗어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들이 갖고 있던 물건들은 길위에 어지럽게 흩어졌다. 한 늙수그레한 남정네가 당황한 표정으로 길가운데 있었고 그 옆에는 아내로 보이는 여자가 아들을 어르고 있었다. 나에게는 그 모습이 영영 잊혀지지 않는다. ○철교사진으로 퓰리처상 미 해병들은 간선도로에서 조차 터널 방공호 참호 등을 폭파시키면서 진격해야 했다. 어떤 도로에서였다. 저격탄에 해병대원이 쓰러지면서 진격이 멈췄다. 처음에는 어디서 저격탄이 날아왔는지 몰랐으나 곧 나무등걸뒤에 숨어있는 군인의 어깨와 머리가 발견됐다. 그는 재빨리 총을 쏘고 나무 뒤로 숨는 것이었다. 그를 향해 집중사격이 가해졌고 마침내 그가 갖고 있던 탄약대가 폭발하면서 그는 끝장났다. 내가 서부전선에서 영국군대와 함께 있을 때였다. 공륜작전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급히 지프를 타고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저녁 늦게 도착하자마자 제187전투연대 본부에 종군취재를 신청했다. 새벽 5시 정각 공수부대원들과 함께 0630기에 올랐다. 출발하기까지의 짧은 시간동안 카메라등 장비를 안전하고 사용하기 편리하게 보관할 장비를 마련해야 했다. 비행기에 오르자 곧 공수부대원들을 인터뷰했다. 나는 취재수첩을 조종사에게 주면서 가까운 AP특파원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뒤 내 옆자리의 젊은 대원으로부터 낙하방법을 배웠다. 그는 나에게 점프한 뒤에 해야 할 일을 알려주었다. 고공 7백피트 상공에서 적후방으로 낙하했다. 낙하에는 30초가 걸렸다. 나는 이전에 단 한번도 점프한 적이 없었지만 안전하게 내렸다. 임무는 북한군이 북송하는 한국군및 미군포로를 실은 기차를 가로채는 것이었으나 기차는 예정보다 일찍 통과해 버렸다. 우리는 그곳에서 대규모 적들을 만나 전투를 치렀다. 1주일동안 버틴 끝에 탱크를 앞세우고 진격하는 미군을 만나 구조되기도 했다. 승리하는 쪽에 있는 것은 기분좋은 일이다. 내가 3사단을 따라 동해안을 북진할 때 그랬다. 3군은 평양에 입성한 뒤 안주를 거쳐 압록강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중국군이 몰라닥쳐 공격해 왔다. 미군과 한국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모든 군수송차량은 부교를 이용,대동강을 건넜다. 나도 3명의 특파원과 지프를 타고 건넜다. 얼마뒤 강하류에 수많은 피란민이 밀려 들었다. 이들이 그곳을 피할 수 있는 길을 폭격으로 교판이 부서진 대동교의 아치를 이용하는 것 뿐이었다. 그들은 마침내 아치를 기어오르내리며 폭격으로 뒤틀어진 아치를 따라 건너기 시작했다. 당시는 지독하게 추웠다. 나는 장갑을 끼고 있었지만 손가락이 곱아 카메라는 겨우 겨우 작동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그 처절한 피란행력의 뜻이 새삼스럽게 이해된다. 지금 남한에는 그들의 땅도 재산도 친척도 남겨두고 자유를 찾아 월남한 많은 이북사람들이 살고 있다. 부서진 대동강 철교난간을 타고 피란길에 오른 그 사진으로 나는 나중에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이제 나는 그 사진이 다른 사진들과 함께 한국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한국인에게 낮익은 것이 된 것을 알게 돼 더욱 영광스럽다. ○활기와 확신의 한국으로 나는 53년 상처로 가득한 한국을 떠났다. 나는 77년 다시 한국을 방문,달라진 한국의 모습을 보았다. 건축공사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었고 거리에는 생동감이 넘쳤다. 하지만 이제 다시 한국을 보니 내 눈을 의심할 지경이다. 나는 한국의 또다른 면모를 보고 있다. 새빌딩들의 모습은 정말 멋있다.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다. 교통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흠이기는 하지만 거리에는 차량의 홍수가 이어지고 있다. 거리는 생동감과 활기로 넘치고 있다. 이번에 관공서와 군부대를 방문하면서 나는 특히 관리들과 군장교들의 당당한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노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눌 때나 민간기업,혹은 정부의 관리들을 만났을 때 확신에 찬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월남하도록 만든 그 정신과 원칙이 남쪽에 살아 있음을 느꼈다. 이것이 40년전 겪어야 했던 역경을 극복하는 밑거름이었음이 분명하다.
  • 홍종문 수협회장 구속/대검/회장 직선때 5천만원 뿌린 혐의

    ◎조합장등 조사… 증거 확보/특명사정반/각종 선거타락 철저조사 대검중앙수사부(최명부검사장ㆍ이명재부장검사)는 23일 수산업협동조합중앙회 홍종문회장(61)을 수산업협동조합법위반(선거운동 제한)혐의로 구속,서울 구치소에 수감했다. 검찰은 홍씨를 22일 새벽 서울 종로구 구기동 168건덕빌라 3동 301호 자택에서 연행,철야조사를 벌인데 이어 홍씨로부터 돈을 받은 수협단위조합장등 10여명을 불러 증거조사를 했다. 홍씨는 지난 4월19일 실시된 수협중앙회장선거에 앞서 전남 장흥군 단위조합장 이행기씨(52)에게 선거때 자신을 지지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5백만원을 주는등 수협단위조합장 11명에게 선거에서의 지지를 조건으로 3백만∼1천1백만원씩 모두 5천1백만원을 준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그러나 『홍씨로부터 돈을 받은 단위조합장 11명은 현행법에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이 없어 입건하지 않고 모두 돌려 보냈다』고 밝혔다. 검찰은 지난달 17일 홍씨와 경쟁한 다른후보의 지지자인 전남 신안군의 한 수협단위조합장으로부터 홍씨의 비리를 폭로한 진정서를 접수,수사를 벌인 끝에 홍씨를 구속하게 됐다고 밝혔다. 홍씨는 지난 4월 직접선거로 처음 실시된 수협중앙회장 선거에서 당시회장 박희재씨(58)및 전부회장 이종휘씨(58)등과 함께 출마,1차투표에서 투표인단 74명 가운데 31표를 얻었으나 과반수에 못미처 이씨와 결선투표를 벌인 끝에 42표로 회장에 당선됐었다. 홍씨는 지난 64년 해병대사령부 조달감을 지낸뒤 73년 해병준장으로 예편,76년 부산공동어시장장,79년 간선제에서의 수협중앙회장,82년 대우개발주식회사 대표를 지냈으며 이번 선거에 출마하기 전까지 방교실업 대표로 있었다. 수산업협동조합법 제55조는 「선거운동과 관련해 금품ㆍ향응 기타 재산상의 이익이나 공사의 직을 제공 또는 청약할 경우 2년 이하의 징역이나 1백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내리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 수협의 선거법에는 「회장이 징역 또는 30만원 이상의 벌금형을 받으면 당선무효가 되고 3개월 안에 회장을 다시 선출」하도록 돼있어 형이 확정될 경우 수협회장의 재선거가 불가피하다.한편 수협중앙회는 전날 검찰에 소환된 홍회장이 구속되자 이날 안중철부회장이 긴급간부회의를 열어 대책등을 숙의하는 등 부산한 모습을 보였다.
  • 북한 고위관리 지낸 재소동포의 「6ㆍ25증언」

    ◎“김일성,6ㆍ25새벽 내각 소집… 남침비준 강요”/4월초 군관학교간부 전선에 미리 배치/전쟁 한달전 강동학원서 통치요원 육성/폐쇄적인 북한체제는 「수용소적 사회주의」로 불러야 한때 북한의 권력 핵심에서 활약하다가 소련으로 망명했던 재소교포 18명이 분단이후 처음으로 조국을 찾아왔다. 이들의 대부분은 6ㆍ25전쟁 전후 북한의 고위직에 있었으나 50년대말부터 60년대초까지 김일성 1인지배체제에 반발,소련으로 망명했던 「역사의 증인」들이다. 대부분이 70을 넘긴 고령인 이들은 22일 MBC시사토론에 참석,북한정권의 성립과 6ㆍ25전쟁의 발발 그리고 김일성 1인통치체제의 구축과정 등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이날 토론에 나온 사람은 강상호(80ㆍ전 북한 내무성차관) 장학봉(71ㆍ전 북한 군관학교부교장) 박병률(82ㆍ전 북한 강동정치학원원장) 송진파(76ㆍ전 북한 문화성국장) 정상진(73ㆍ전 북한 문화성차관)등 5명이다. ­6ㆍ25당시 그리고 소련으로 망명하기전까지 북한에서 어떤 일을 했는가. ▲박병률=47년 12월부터 50년 6월25일까지 남로당원 양성기관이었던 강동정치학원 원장으로 일했다. 당시 훈련시킨 제자는 3천명에 이르는데 지리산 빨치산대장이었던 이현상과 제주도 폭동주역인 김달삼도 포함돼 있다. ▲강상호=김일성과 마찬가지로 해방후 소련에서 북한으로 돌아왔다. 6ㆍ25당시 내무성 차관이었는데 북한의 내무성은 경찰권 탐정권등의 권한을 행사했다. 나는 여러명의 차관중 당정치교양사업ㆍ문화사업을 맡았으며 김일성을 도와 북한정권수립에 참여했다. 당시 내무성장관은 현사법상인 방학세였다. ○「김정권」수립에 참여 ▲정상진=6ㆍ25직전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러시아문학을 강의했다. 해방전에는 소련에 있었으며 45년 3월에서 8월까지 소련해병대원으로 5개월간 훈련을 받고 소련의 대일전쟁에도 참여했다. ▲장학봉=군관학교부교장으로 군장교양성교육사업을 맡았으며 6ㆍ25전쟁이 일어나자 당시 상좌(우리의 준장)계급장을 달고 전투에 참가했다. 1988년까지 남한의 소식을 거의 듣지 못했는데 포항제철,울산자동차공장 등을 둘러보니,경제ㆍ문화적으로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조국임을 실감,자부심을 느끼게 되었다. ○콘크리트장벽 없어 ▲송진파=북한의 문화성국장,잡지 「새조선」의 주필을 맡았고 망명후에는 소련에서 발행되고 있는 한글신문 「레닌기치」의 주필을 맡았으며 현재는 은퇴했다. ­휴전선도 돌아보았을텐데 콘크리트장벽을 보았는가. ▲정상진=북한에서 선전하는 콘크리트장벽은 만리장성을 연상시키는데 대전차장벽은 있었으나 다른 것은 없었다. 그러나 콘크리트장벽이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다. 베를린장벽과 같은 물리적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심리적 장벽」이 문제이다. 몇년전만해도 한국에 대해 잘 몰랐으나 고르바초프등장이후 소련언론이 진실을 보도하기 시작해 정세를 바로 알게됐다. ­올해는 6ㆍ25발발 40주년이 된다. 6ㆍ25에 대한 연구도 많고 주장도 엇갈리는데 당시 내각에 참여한 사람으로 진상을 말해 달라. ▲강상호=그때 나는 병으로 평양중앙병원에 입원해있었으며 6월25일은 퇴원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중앙당비서가 그날 새벽전화를 걸어와 퇴원즉시 내각에 참석하라는 연락이 있었다. 내각회의에는 국가보위상인 최용건만 빠지고 전원이 참석했다. 회의에서 김일성은 『지금부터 2∼3시간전 38선 전역에서 남조선괴뢰군이 북침을 해왔다. 나는 최고사령관으로 즉시 반격을 명했다. 전쟁과 평화에 관한 사항은 내각의 비준이 있어야 하니 이를 비준해 달라』고 말했다. 김일성의 이 제안은 토론없이 1백%찬성으로 통과했다. 그리고 나에게는 지금 곧 원산행차에 올라 강원도당회의를 열고 전쟁에 대비한 과업을 수행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서울이 해방됐다는 소식과 함께 3ㆍ8선이 남의 강원도를 책임지라는 지시가 있어 춘천으로 출발했다. 이때 나는 북침이 아닌 남침이라는 생각을 처음 갖게 됐다. 그 이유는 첫째 3ㆍ8선을 넘어 산굽이를 돌면서 국군포대를 관찰해보니 국군의 포와 포탄이 흩어져 있었는데 탄피는 몇개 없었다. 북침을 했다면 숱한 사격의 흔적이,공격의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둘째 전선지대의 이북 농촌에는 파괴된 집도 없었으며 농민들은 들판에서 김을 매고 부녀자들은 길거리를 오가고 있었는데 국군의 포격이 있었다면 그럴수 있겠는가. 셋째 미국무장관 덜레스가 이승만에게 북침을 명령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미국이 왜 하나의 사단도 남겨놓지 않고 군대를 철수했으며 딘소장이 포로가 될 정도로 전쟁초반에 패퇴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박병률=김일성이 도발한 것이라는 구체적 자료를 갖고 있지 못했지만 감지할 수는 있었다. 남한에서 월북한 사람들이 전쟁발발 1개월전부터 강동학원장인 내게 보내져 집중 훈련을 받았다. 또 전쟁이 발발하기 몇시간전에 서울 함락후 서울시 인민위원회위원장을 맡았던 이승엽이 『자기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면서 강동학원을 떠났다. ○스탈린이 전쟁 묵인 ▲장학봉=당시 군관학교에는 인민군지도자 25명의 그룹반이 있었는데 50년 4월에 이미 이 그룹반이 해산돼 소속원들 모두가 전선으로 배치됐다. 50년 8월까지 북한의 신문 라디오 등 모든 선전기관은 남조선이 북침을 했고,북한이 이에 반격을 가했다는 선전을 거듭했고 나 또한 전선에 나가지않아 이를 그대로 믿었었다. 8월초 전선에 투입됐을 때는 정의의 전쟁에 참가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싸웠다. 그러나 흐루시초프의 회고록이 나오면서 진실이 밝혀지게 됐다. 이 회고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50년이전에 스탈린에게 수차례 전화를 걸어 남조선해방과 전조선의 자유를 위해 남침을 호소했으나 스탈린은 남조선침입의 대가로 미국이 참전하면 다음은 소련이 이에 대응해야 하는데 준비가 안됐다며 이를 반대했다. 그후 6ㆍ25발발 5∼6일을 앞두고 김일성은 이 문제를 다시 스탈린에게 제기,스탈린은 「좋다 나쁘다」는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으며 묵인했다. 이와 관련,흐루시초프는 내가 스탈린의 입장이었더라도 작은 나라가 통일을 하겠다는데 대해 어떠한 승인도 지시도 않았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전쟁이틀후 열린 유엔안보이사회에서 소련대표가 유엔군의 참전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퇴장한 것은 내막을 뻔히 아는 스탈린의 고육지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정권 수립때의 실정은 어떠했는가. ▲강상호=김일성일파가 만주에서 유격활동중 일본군의 토벌강화로 상황이 어려워지자 중국공산당이 소련측에 이들의 보호를 제의했다. 김일성부대는 소련정찰여단으로 편입돼 아무르강유역의 비밀지역에 있었고 해방후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원산으로 귀국했다. 나는 소련 제25군 정치부 지도원이어서 김일성을 해방전에는 본 적 없었는데 해방후 소련군 상위(대위)로 귀국한 김일성을 본적이 있다. ­이 자리에는 김일성 1인독재체제를 구축하는데 도움을 주신분들이 많은데(일동 웃음) 지금 북한 체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정상진=김일성은 북한에 들어오면서부터 정권에 욕심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개인숭배주의자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1956년 소련 공산당 20차전당대회에서 스탈린격하운동이 벌어졌다. 이 대회에 북한 노동당대표로 참석한 최용건이 돌아와 귀국보고를 했을 때 김일성은 우리 당에는 과거 박헌영이란 개인숭배자가 있었지만 지금은 개인숭배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뒤 연안파 윤공흠 이필규 등이 반김일성 움직임을 보였는데 이들은 곧 숙청됐다. 이후 김일성은 「이단」숙청을 결심,대대적인숙청작업에 나섰고 1인지배체제를 구축했다. 6ㆍ25당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군고위간부ㆍ당간부 등이 모두 숙청당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도 반당분자로 몰렸고 이것이 우리가 소련으로 망명하게 된 이유다. ▲박병률=김일성은 북한체제를 「주체주의적 사회주의」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북한체제를 「수용소적 사회주의」라고 부르고 싶다. ○남측서 통일 주도를 ­북한에 있을때 남로당출신들을 많이 만났을텐데…. ▲정상진=당시 나는 문화성차관 및 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이어서 홍명희 이태준 김남천 임화 최승희 등 많은 남쪽예술인들과 알고 지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이 비참한 운명을 맞았다. 작곡가 김순남선생은 전쟁전 박헌영외상 취임 축하파티에서 피아노를 쳤는데 이것이 죄가 됐다. 김순남선생이 궁지에 몰렸을 때 나를 찾아와서 「이제 어떻게 해야되느냐」라고 탄식하면서 춘향전을 가극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었고 그 분은 모든 창작활동이 금지된 채 숙청되고 말았다. ­마직막으로 남북통일을 위해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겠는가. ▲장학봉=화해의 물결은 그 누구도 억제할 수 없다. ▲강상호=오늘날에는 무력으로 누구를 굴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국이 세계적 여론을 일으켜 북한측에 평화통일의 압력을 가해야 한다. 남북통일을 하루라도 지연시키는 것은 정치지도자들의 죄악이며 우리도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 미 CNN TV 지구촌 뉴스의 총아로(특파원코너)

    ◎개국 10년… 90국 지도자가 시청/챌린저호 폭발ㆍ상항대지진 등 숱한 특종/세계의 뉴스현장마다 빠짐없이 “출동” 미국의 뉴스전문방영 유선텔레비전인 CNN(Cable News Network)이 처음 방송을 내보냈을 때 험담가들은 「Chicken Noodle News」(닭고기국수 뉴스)라고 조롱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후 CNN은 무서운 경쟁자가 되었다. 1980년 6월1일 세계 최초로 24시간 영상뉴스서비스를 개시한 CNN은 지금세계 TV저널리즘의 주역,지구촌 정보혁명의 핵심 엔진으로 부상했다. CNN의 앵커가 위기 지역으로 달려가 그곳 지도자와 인터뷰를 하면 세계가 이를 지켜본다. 이 인터뷰가 끝나면 CNN은 다른 초점지대로 카메라를 들이댄다. 이처럼 CNN은 독특한 커뮤니케이션 방법으로 정보의 세계화 시대를 열고 있다. 소련과 동구의 민주화는 텔레비전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촉진됐다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CNN 그 내부이야기」의 저자인 행크 위트모어는 『세계가 지켜 보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면 동구의 자신들 개혁에 대해 그런 낙관과 용기를 갖지못했을 것』이라며 『세계가 지켜 보는데 어떻게 유태인 학살이나 스탈린 시대 숙청과 같은 잔인한 사태가 일어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텍사스 A&M대 저널리즘 교수 돈 톰린스는 『CNN의 세계화가 바로 소련과 동구를 변화시킨 주요 요인의 하나』라고 주장한다. 『지구촌이 돌아가는 얘기를 알자면 제일 먼저 눈을 돌려야 할 곳이 CNN이다』라는 말이 많은 사람의 입에서 나올 정도로 CNN은 지구촌 뉴스의 열쇠로 자리를 굳혔다. 지난 35년간 빅 스리,즉 ABCㆍCBSㆍNBC의 싸움판이었던 미TV 방송시장에서 시청자들에게 「생기있는 새 채널」이란 인식을 심는데 성공한 것이다. 유선TV가 연결된 미국의 5천5백만 가정 가운데 야간에 CNN에 다이얼을 돌리는 가정은 21만9천∼38만4천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ABC의 「오늘밤의 세계 뉴스」는 1천만 이상의 가정이 시청한다. 그러나 금년 1ㆍ4분기중 미국인들이 TV 뉴스 시청에 소비한 총 시간에서 CNN이 차지한 비중은 27%에 달했다. ABC는 28.3%,CBS는 27.5%,NBC는 17.2%였다. 샌프란시스코 지진,미국의 파나마 침공,중국 천안문 사태 등 보도에서 CNN은 숱한 특종으로 경쟁자들을 압도했고 쟁점을 부각시키는데 앞장 섰다. 그러나 CNN에 대해 뉴스처리에 깊이가 없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CNN은 미국 밖에서 각국의 유선TV 시청 가정 1천호와 호텔 25만개소,그리고 수많은 기업체 및 정부 청사ㆍ대사관ㆍ증권 거래소 등에 연결돼 있다. 극동과 중남미는 미국내와 같은 CNN 프로그램을 시청하고,유럽 소련 아프리카 중동 동남아에선 CNN의 해외보급 판매망인 CNNI(CNN International)가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시청한다. CNN은 세계 90개국의 정책결정자에게 중요한 뉴스 공급원이 되고 있다. 폴란드 자유노조지도자 레흐 바웬사,쿠바 수상 피델 카스트로,유엔 사무총장 페레스 데 케야르,요르단 국왕 후세인,리비아 국가원수 무아마르 카다피는 단골 시청자로 알려져 있다. 금년초 CNN이 소련 공산당서기장 고르바초프의 사임설을 보도하자 고르바초프가 직접 나서서 이를 부인해야 할 만큼 CNN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지난해 선거 참관차 파나마에 머무르고 있던 지미 카터 전미대통령은 호텔방을 나서면서 싸움이 벌어진 것을 보았다. 길 건너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그는 다시 호텔방으로 들어가 미 애틀랜타에서 방영되는 CNN을 틀었다. 지난해 여름 천안문 시위사태 때 부시 미 대통령은 CNN이 방영한 탱크와 시위 학생간의 대치상태를 보고 북경의 무력진압에 반대하는 경고 성명을 내놓았다. 개국 프로그램의 첫 광고 방송을 민권 지도자 버논 조단 암살기도사건에 관한 긴급 보도 때문에 중단했던 CNN은 그후 미상원 청문회 생중계,레이건 미대통령 및 바오로교황 암살기도,영왕실 결혼식,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살해사건 등 인상적인 보도를 많이 남겼다. CNN은 1983년 KAL007기 피추사건,베이루트 미해병대 사령부폭파사건,미국의 그레나다 침공사건 보도로 언론상을 수상했다. 충격적인 첼린저호 폭발참사사건을 생중계로 보도한 유일한 방송도 CNN이었다. 미 애틀랜타에 본부를 둔 CNN은 지금 1천7백명의 종업원과 23개 지사를 거느리고 있다. CNN로고를 쓰지 않고 일반 보도물을 제공하는 자매회사로 있다. 일부 전문자들은CNN의 시청률이 한계점에 달했다고 말한다. CNN은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빅 스리의 저녁 뉴스에 대항하는 「오늘의 세계」와 추적 조사 프로를 개시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극적 결과는 낳지 못하고 있다. CNN의 뉴스담당 부사장 에드터너는 『「오늘의 세계」가 고정 시청자를 확보하려면 최소한 2년은 걸릴 것』이라고 여유를 보인다.
  • 수협 첫 민선회장 홍종문씨/2차투표서 56% 득표… 당선 확정

    수협중앙회 첫민선회장에 홍종문전회장(61ㆍ사진)이 당선됐다. 19일 상오 10시 인천시북구 효성동 수협연수원강당에서 실시된 수협중앙회장 선거에서 홍전회장이 재적선거인 74명 전원이 참가한 2차 결선투표에서 과반수가 넘는 42표(득표율 56%)를 획득,32표를 얻은 이종휘전부회장을 누르고 당선됐다. 결선투표에 앞서 실시된 1차투표에서는 홍전회장이 31표,이전부회장이 21표,신석봉경남정치망조합장이 14표,박희재현회장이 8표를 각각 획득,모두 과반수 득표에 실패했다. 이에 따라 최고득표자와 차순위득표자인 홍전회장과 이전부회장을 대상으로 2차결선투표를 실시했다. 또 상임감사선거에는 고달익제조조합장(58)이 40표(54%)를 얻어 장필남현비상임이사를 누르고 당선됐다. ◇홍회장 약력 ▲강원도 삼척출신 ▲고려대 경제학과졸업 ▲해병대 준장예편 ▲부산공동어시장장
  • 변재일 수원지검장/새 검찰간부(얼굴)

    ◎소탈한 성격에 군법무 업무 밝아 소탈한 성격이면서도 업무처리에는 치밀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서울법대를 나와 68년 대구지검 검사로 첫발을 내디뎌 서울지검1차장,제주지검장,법무부 보호국장,마산지검장 등을 역임했다. 해병대 법무관과 해군본부 법무감을 역임,검찰고위인사 가운데서도 특히 군법무업무에 조예가 깊다. 경남 의창출신으로 고시15회. 부인 강계숙씨(46)와 2남.
  • “군 사조직 근절”/이국방,지휘서신

    이상훈국방부장관은 22일 육ㆍ해ㆍ공군ㆍ해병대 여단장급 이상 지휘관및 참모들에게 보낸 90년도 지휘서신 제1호를 통해 『대북군사우위를 확보할 수 있도록 각 군은 예산 사용에서 시설ㆍ부동산과 같은 불요불급한 것은 최대한도로 억제하고 탄약ㆍ장비 등 실질적 전력증강에 최우선을 두고 전력소요및 투자 우선순위를 전면 재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이장관은 또 최근 군의 기강과 관련,『어떠한 명분으로든 사조직이나 파벌을 조성하는 행위는 근절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장관은 이어 『군 일부에서 최근 정치권의 동향이나 비군사영역에 필요이상의 관심을 표명하거나 무분별한 언동을 하는 행위가 없지 않다』고 지적하고 『군 본연의 임무에 헌신하는 천직의식과 위국헌신을 본분으로 삼고 복무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경호실 근무 20년… 10ㆍ26땐 총상도/박 평통사무차장(얼굴)

    과묵한 데다 일에 철두철미한 대통령경호실 최고참. 해병대위로 예편하면서 경호실에 몸담아 20년간 근무. 10ㆍ26사건 당시 궁정동에서 총상을 입었으나 경호원들 가운데 유일하게 생존했고 아웅산사건 때는 수행과장으로 위기를 넘겼다. 공적으로는 매우 엄격하나 개인적으로는 너그럽다. 명사수에 합기도 7단. 부인 정명희씨(46)와의 사이에 2남1녀. ▲충북 옥천출신 49세 ▲고대법대졸 ▲경호실수행과장ㆍ경호처장
  • 홍성철 통일원(새 장관ㆍ청와대 비서진의 얼굴)

    ◎친화력 특출,이북도민의 대부 원만한 인간관계로 한번 인연을 맺었다 하면 누구하고나 잘 어울리는 특출한 친화력을 지녔다. 수영못하는 해병대(대령)출신으로 3공때부터 내무ㆍ보사장관을 역임한 다채로운 경력의 소유자. 대통령비서실장시절 여야를 두루 접촉,청와대와의 뛰어난 가교역할을 해냈다. 이북5도민의 대부로 남북이산 가족대표로 평양을 방문, 누님과 만나 한때 화제가 되었다. 78년 상배한뒤 재혼한 김수영여사(43)와의 사이에 2남2녀.
  • 정치권 배경,폭력계 대부 행세/구속된 이승완씨 스토리

    ◎태권도로 두각… 한때 3천명 거느려 수배된지 1년4개월만에 별다른 충돌없이 경찰에 검거된 전 「호청련」총재 이승완씨가 과연 「용팔이사건」으로 알려진 통일민주당 지구당창당방해폭력사건을 배후 조종했는지,그가 조직한 「호청련」은 정치적 배경을 업고 있는지,그리고 그는 도대체 어떤 인물인지 등에 괸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수배중임에도 각종 공식행사장에 버젖이 참석,항간으로부터 「경찰이 못잡느냐 안잡느냐」라는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이씨는 「정치깡패」 「주먹계의 대부」 등으로 알려졌으나 원래는 태권도 국가대표선수 출신의 무도인. 전주출신인 이씨는 전주북중 2년때부터 태권도를 시작,전주고 재학시절 전국대회를 휩쓰는 등 빼어난 기량을 보였으며 현재는 태권도 공인 9단에 올라 있다. 전북 이리원광대 법학과 2년을 중퇴하고 군복무를 한뒤 해병대 태권도팀 창설코치를 맡았으며 이 팀이 대통령배 쟁탈 태권도대회에서 5연패의 신화를 이룩함으로써 태권도지도자로서의 성가를 높였다. 그는 이를 발판으로 중고 태권도연맹회장ㆍ전국고단자 회장ㆍ전국지도관총관장직을 역임해 태권도계에서 막강한 영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이씨의 주먹계 진출은 지난 70년대 중반 서울 명동에서 주류유통업에 손을 대면서부터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는 70년대말 서울 국산양주류 판매조합장직을 맡은 뒤로 상당한 재산을 축적했다는 것이 주변의 얘기이다. 그는 당시 사재 1천마원을 털어 유흥업소종업원 친선축구대회를 열기도 하는 등 의리를 내세운 보스기질을 발휘,주먹세계에서 차츰 자리를 잡아 휘하에 3천여명의 주먹들을 거느린 「대부」가 됐다. 이씨는 ▲절대 흉기를 사용하지 않으며 ▲파렴치안 행동도 않으며 ▲경제적 독립을 이룩한다는 모토아래 자신의 조직을 다른 조직폭력배와는 다른모습으로 키워나갔다. 더욱이 『패밀리 보호를 위해서는 정치 울타리가 필요하다』고 주장,고향선배인 거물정치인 L모씨와 「밀접한」관계를 맺었으며 이때문에 다른 호남폭력배들로부터 경원을 받아온 것으로 전해졌다. 이씨가 L씨 등의 친분을 배경으로 전국폭력배 두목들을 모아놓고 호국청년연합회(호청련)을 결성,총재에 취임한 것은 수배직전인 지난88년7월. 경찰에 따르면 이 단체는 「소수의 폭력배들과 일부 운동권 학생들이 사회를 혼란시키는 것을 막고 이들을 선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으나 사실은 전국최대 폭력계보라는 것. 이씨는 수배후에도 지난해 4월 호학련 결성대회와 같은해 10월 해외주재 태권도 사범초청연회에 보디가드 20여명을 데리고 참석했다가 사라져 경찰의 수배망을 조롱하는 듯 했다. 한편 경찰은 이씨를 잠복 끝에 검거했다고 밝히고 있으나 이씨가 지나 1월 『주위를 정리하고 곧 자수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뒤 지난 22일 호청련을 공식해체 하는 등 신변정리를 끝내고 조용히 검거됐다는 점에서 미리 짜여진 검거각본이 있었지 않았는가 하는 의혹을 사고 있다.
  • 차모로 니카라과 대통령 당선의 의의와 앞날

    ◎「선거혁명」으로 민주화장정 시작/미 외교 승리… 중미 좌익세력 큰타격/산디니스타 지지 군 향배가 변수로/새정부,경제난 타개 못할땐 도전 받을듯 25일 실시된 니카라과대통령선거에서 전국야당연합(UNO)의 비올레타 바리오스 데 차모로후보와 미국이 승리를 거두었다. 패배자는 지난 10여년동안 좌익 산디니스타정부를 이끌어 온 다니엘 오르테가후보와 중미의 좌익전체주의. 오르테가는 불과 선거 하루전만해도 각종 여론조사에서 10%를 훨씬 웃도는 큰 폭의 우세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패배는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선거결과가 나온 뒤 정치관측통들은 차모로후보가 낙승을 거둘 만큼 산디니스타정권의 존립기반이 취약해져 있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우선 산디니스타정권은 10여년동안 농지개혁ㆍ문맹퇴치ㆍ보건수준향상등에 적지않은 성과를 남겼지만 다른 한편으로 미국의 지원을 받는 콘트라반군과의 내전과 그로인한 경제난으로 지친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국민들은 경제난과 내전의 원인이 미국에 있다는 산디니스타정권의 주장보다는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야당측 주장을 선택한 것이다. 또한 차모로후보 승리의 뒤에는 미국의 지원이 크게 작용했음을 부인키 어렵다. 미국은 인구 3백50만에 불과한 니카라과선거에 5백만달러 이상의 자금을 투입,차모로후보를 지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극우로부터 극좌에 이르기까지 무려 13개정파가 모인 UNO와 정치적 경험이 일천한 차모로후보가 비교적 성공적으로 선거캠페인을 벌일수 있었던 배경에는 미국의 지원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또 미국을 중심으로 구성된 유엔,미주기구,카터 전 미대통령이 중심이된 국제선거감시단 등의 선거감시활동도 산디니스타정권의 선거부정을 봉쇄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미국은 국내외의 거센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레이건 전대통령이 85년2월 『현 니카라과정부가 물러나지 않거나 반혁명세력에 항복하지 않는 한 미국의 정책목표는 니카라과의 현정부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밝힌 것이나 부시대통령이 니카라과를 「가든 파티장의 스컹크」라고 비유한데서 보듯이일관되게 산디니스타정권 제거를 목표로 삼아 왔다. 미국이 지난해 12월 파나마를 무력침공,친미정권을 세운 것이나 니카라과에서 반군군사지원과 야당선거지원을 통해 친미정권을 세운것은 「미국의 뒷마당」중미에서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반미정권을 용납할 수 없다는 미국의 강력한 의지를 읽게 해 준다. 1926년 농민군을 이끌고 미해병대를 물리친 아우구스트 세자르산디노(산디니스타라는 명칭은 산이노를 기념키 위해 붙여진 것)를 1934년 암살한 소모사를 지원하면서 미국은 46년간의 우익독재정권을 지원해 준 대가로 미국의 이익을 보호받아 왔다. 따라서 이번 선거에서 미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은 차모로가 승리함으로써 미국의 대중미 지배력은 일층 공고해질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동안 농촌을 중심으로 하는 민중혁명노선을 추구해 온 중남미지역 좌익혁명세력은 정치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커다란 타격을 받을 것이다. 이들의 민중혁명노선이나 「선거를 통한 혁명」(칠레와 니카라과)노선이 모두 결정적인 타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차모로정권이맞닥뜨려야 할 가장 심각한 문제는 경제난. 비록 내전과 미국의 경제제재조치 때문이라고는 해도 산디니스타정권은 1인당 GNP 7백70달러(87년),실업률 25%,인플레 1천7백%,외채 57억달러(89년)의 피폐된 경제를 유산으로 남겨 놓았다. 오는 4월25일 출범할 차모로정권으로서는 미국으로부터의 경제지원과 미국으로 빠져나간 전문인력의 재유입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차모로정권은 콘트라와의 휴전,야당이 된 산디니스타와의 정쟁등 정치적ㆍ군사적 갈등을 풀어나가야 하고 13개 정파의 연합체인 UNO의 허약체질도 차모로의 정치적 약점이다. 콘트라반군의 경우 미국의 지원을 받는 세력이기 때문에 휴전이 어려워 보이지는 않지만 반군의 귀환,정착문제는 적지않은 부담이 될 것이다. 산디니스타와의 문제는 더욱 복잡하다. 정권인수과정에서 공식명칭이 「산디니스타민중군」인 니카라과정부군의 충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산디니스타에 의해 장악돼 있는 노동조합등 사회제세력과의 마찰을 어떻게 처리해 나갈 것인가,최대 단일야당이 될 산디니스타로부터의 정치적 도전을 효율적으로 막아낼 것인가 등등 풀기에 쉽지 않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군이 선거를 통해 들어서는 정권에 제동을 걸기도 쉽지 않겠지만 차모로가 군을 장악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차모로정권이 빠른 시일내에 가시적인 경제성과를 보여주지 못할 경우 변화를 바란 국민과 군,산디니스타로부터의 도전은 거세어질 것이고 그럴수록 미국에 대한 차모로의 의존도는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니카라과 최근 10년 일지 ▲1979년 7월17일=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아나스타시오 소모사 장군의 독재정권 전복. ▲7월19일=오르테가와 차모로를 포함,5인으로 구성된 국가재건평의회 마나과에 도착. 다당정부 구성. ▲1980년 4월19일=차모르 여사와 알폰소 로벨로,산디니스타정권 비난하며 평의회 위원직 사임. ▲1981년 3월4일=온건파들이 평의회에서 제거되고 오르테가가 부각. ▲4월1일=미정부,니카라과정부가 살바도르 반군을 지원한다며 경제원조 중단. 미국은 뒤이어 산디니스타를 반대하는 콘트라 반군에 대한 지원을 공언. ▲1984년 11월4일=오르테가,집권당 산디니스타와 함께 총선에서 승리. ▲1985년 5월1일=미,니카라과가 중미지역에서 침략을 자행했다는 이유로 대니카라과 전면 금수 조치 단행. ▲1986년 8월13일=미상원,콘트라반군에 대한 1억달러의 원조를 가결함으로써 오르테가 정권과 「사실상의 전쟁선언」감행 ▲1986년 후반∼1987년 초반=온두라스에 본거지를 둔 콘트라반군의 니카라과 침공 격화. ▲1987년 8월7일=중미 5개국 정상,코스타리카 대통령이 제의한 협상에 의한 무력분쟁 종결과 외국원조 중단에 의한 니카라과 평화안에 서명. ▲1989년 2월14일=오르테가대통령,중미정상회담에서 90년 2월25일까지 총선을 실시키로 하는 등의 니카라과 민주화조치를 발표.참가국들은 인접국들내 콘트라반군 기지들의 해체에 동의.
  • 신데탕트 발맞춘 「감군」타진/체니 미국방 서울 왜 오나

    ◎방위비 분담증액 성장률과 연계 논의 지난해 3월11일 미국방장관에 취임한뒤 11개월만에 처음으로 한국과 일본ㆍ필리핀등 극동지역을 방문하는 리처드 체니장관의 순방목적은 이 지역의 군사ㆍ안보상황을 확인하고 미의회의 넌­워너수정안에 대한 향후 5년간 이지역에서의 미군사력 재배치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나라로서는 최근 거론되고 있는 주한미군 철수문제와 관련,체니장관의 방한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체니장관은 이번 방한기간동안 노태우대통령과 이상훈 국방부장관을 만나 90년대 한미 안보 협력관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중요한 몇가지 제의를 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세계적인 신데탕트 분위기와 재정적자로 인한 국방예산의 삭감으로 해외기지 폐쇄와 주둔군 감축 등 세계 군사배치를 수정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국방부 관게자들은 이번 양국 장관회담에서는 주한 미지상군의 일부 감군과 연계된 한국측의 방위비 분담증액과 용산기지의 지방이전,미군이 갖고 있는 작전통제권의 한국군이양 등이 논의될것으로 보고있다. 미국측은 지난해 7월부터 동서화해무드와 미국방예산의 절감등을 이유로 주한미군감축과 연결지어 방위비 분담의 증액을 요구해 왔으며 한국측도 이에 대한 대응책을 준비해 왔다. 미국측은 이번회담을 통해 한국이 약속한대로 한국의 경제성장에 상응하며 한국측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안에서의 방위비분담 증액을 요구해 올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방관계자들은 미국이 우리의 부담 능력을 넘어선 파격적인 방위비증액을 요구해 올 경우 이를 수락하기 보다는 차라리 전투력을 현저하게 저하시키지 않는 범위안에서의 비전투 행정지원병력의 감축을 택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90년 2월8일 현재 미국은 육군 3만1천8백41명,공군1만1천4백19명,해군ㆍ해병대4백59명등 4만3천7백19명을 우리나라에 주둔시키고 있으며 이중 약 절반이 비전투 행정지원요원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미2사단의 중무장된 화력과 기동력은 한국의 수개사단을 합한 군단규모의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데다 서부전선 휴전선 일부에서 공산군과 직접 대치하고 있어 공산군의 무력남침시 인계철선으로 연결되어 미국의 자동 전쟁개입으로 대한방위공약의 실체로서 존재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이 부담하고 있는 연간 22억달러 규모의 경비중 3억달러의 직접비를 5억달러로 늘리고 주한미군기지에 근무하는 한국인근로자 2만여명의 연간급료 2억4천만달러도 직접 현금 부담하도록 요구할 것으로 보이나 우리경제 형편상 한꺼번에 직접비의 2백50%를 늘려 부담할 능력이 없어 적절한 선에서 타결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일본보다 경제력에서 4분의1밖에 안되는 수준이나 병력은 자위대보다 3배이상 많아 현재의 병력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것부터 미국의 세계방위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미양국은 지난 88년 서울에서 개최된 한미안보협의회의에서 90ㆍ91ㆍ92년도에 각각 4천만달러의 직접 경비를 방위비 분담금으로 늘리기로 합의했으나 지난해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안보협의회의에서는 90년도에 3천만달러,92년도에 1천만달러의 추가증액을 약속해 이미 경제성장만큼의 방위비 분담증액에 합의한상태이다. 이번 회담에서는 이밖에 용산기지 이전문제와 한국군의 작전권이양문제 등이 논의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작전권이양 문제와 관련,루이스 메네트리 주한미군사령관은 지난 8일 미상원 군사위원회에서 『한미 연합사령부 예하의 한미지상군 구성군사령관직을 한국군장성에 넘겨주거나 한미장성이 교대로 지휘하는 방법이 검토되고 있다』며 『작전통제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간표가 올해안에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 전장에서의 단일 지휘관」또는 「한국가 안에서 같은 민족의 지휘관」문제에 대한 한미간의 협의가 현재 진지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오는 7월1일 창설을 목표로 하고있는 국방참모본부가 발족되면 보다 본격적인 지휘권이양문제가 제기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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