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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 세진 자위대… 日 이지스함 개조해 탄도·대함 미사일 동시 요격

    일본이 이지스함에 탄도미사일과 대함미사일을 동시에 감시·요격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이지스함의 행동반경을 크게 넓혀 나갈 계획이다. 아베 신조 정권이 추진 중인 집단자위권 행사나 자위대의 국외 파견 활동 확대 구상과 맞물려 이를 대비하려는 조치로 풀이된다. 14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일본 방위성은 해상자위대 이지스함 6척 가운데 현재 개량 중인 2척과 건조 중인 2척 등 모두 4척에 탄도미사일 및 대함미사일을 동시에 감시·요격하는 기능을 갖추도록 할 예정이다. 또 건조 중인 이지스함에는 적 미사일의 위치 정보를 이지스함이나 조기경계기 등과 공유하는 공동교전능력(EC) 시스템을 장착하기로 했다. 탄도 및 대함미사일을 동시에 포착할 수 있게 컴퓨터 능력을 향상시켜 별도 호위함 없이도 공격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한다는 구상이다. 현재의 이지스함은 탄도미사일을 경계하는 도중에는 전투기나 대함미사일 공격을 막기 어려워 방위성은 이지스함을 지킬 별도의 호위함을 배치하고 있다. 일본은 이지스함의 탄도미사일 탐지능력 확대도 추진 중이다. 레이더의 탐지 범위를 넓혀 이지스함 2척으로 일본 전역을 탄도미사일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겠다는 구상도 밝혔다. 한편 나카타니 겐 방위상은 지난 12일 중의원 ‘평화안전법제특별위원회’에 출석해 “안전보장환경의 변화에 근거해 수륙기동단을 가능한 한 조속히 새로 편성하겠다”며 “수륙양용차 취득과 교육훈련시설 등의 정비뿐만 아니라 조기 전력화를 위해 요원 양성에도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수륙기동단은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등 외딴섬이 무장세력에 의해 점령당했을 때 대처하기 위해 미국 해병대를 본떠 창설되는 군 조직이다. 도쿄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 軍도 ‘가뭄과의 전쟁’

    軍도 ‘가뭄과의 전쟁’

    해병대 제2사단 장병들이 11일 인천 강화군 교동도에서 급수차를 이용해 가뭄 피해를 겪고 있는 논에 긴급 급수지원을 하고 있다. 해병대는 이날 급수차 5대와 병력 30명을 동원했다. 해병대 제공
  • [피서지 안전 긴급점검] 해상안전 업무 떠안은 지자체… 해수욕장 사고, 비상구 있는가

    [피서지 안전 긴급점검] 해상안전 업무 떠안은 지자체… 해수욕장 사고, 비상구 있는가

    7일 전국 시·도에 따르면 올해부터 해수욕장 안전관리 업무가 해양경비안전본부(해경)에서 지자체로 이관돼 지역마다 해경을 대체할 민간 전문인력과 구조장비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예산 부족에 피서철에만 근무할 수상구조 전문가 채용이 어려워서다. 제주도는 예년보다 10일가량 늦은 다음달 1일 해수욕장 19곳을 개장한다. 개장일수를 줄여 해경 철수로 인한 안전 공백을 메우려는 것이다. 개장 연기사태는 확산되고 있다. 개장일수가 줄어들면서 피서철 특수를 기대하던 지역경제도 직격탄을 맞게 됐다. 해경 철수는 119수상구조대의 업무 가중을 가져온다. 부산 해운대 119수상구조대는 4교대 근무를 지난 1일 해수욕장 개장에 맞춰 3교대로 바꿨다. 다른 지자체들의 고민도 깊다. 시간에 쫓기면서 아르바이트생을 채용하거나 해병전우회의 도움을 받는 곳도 생긴다. 울산 동구청 관계자는 “3600만원의 긴급 예산을 마련했지만 안전요원을 뽑기도 어려운 데다 인건비 때문에 주간에만 배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구조장비 확보는 엄두도 못 낸다. 경북 포항시는 필요한 인명 구조선 7척과 구명보트 15대 중 2척과 2대만 확보했다. 지난 5일 부산 해운대해수욕장. 수백명의 피서객들이 바닷물에 발을 담그거나 파라솔 아래에서 때 이른 더위를 식힌다. 몇몇 젊은이들은 차가운 물에 몸을 던지기도 한다. 같은 시간 백사장 망루에 오른 119구조대원들의 눈은 백사장 곳곳을 훑으며 안전사고 위험 요소를 찾는다. 해변에는 수상 오토바이를 탄 구조대원들이 해수욕객들을 따라 쉴 틈 없이 움직인다. 국민안전처는 지난달 ‘해수욕장 안전관리 종합대책’을 통해 “전국 해수욕장의 해경 인력 감소분(하루 평균 463명)을 메우기 위해 소방 구조대원을 하루 평균 297명을 추가로 투입하고, 나머지 166명은 민간 안전요원을 충원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현장은 여전히 혼란을 거듭하고 있다. 지자체가 민간 안전요원 충원에 나섰지만, 예산 부족과 전문가 구인난으로 늦어지고 있다. 이는 119수상구조대의 업무 과부하로 이어지고 있다. 이날 해운대해수욕장을 찾은 피서객들은 예년과 다름 없이 물놀이를 즐겼다. 그러나 119수상구조대와 구청 파견 직원들이 근무하는 임해행정봉사실은 더위만큼이나 후끈했다. 피서객들이 몰려들기 전에 현장 중심의 안전대책을 찾기 위해서다. ●해운대, 때이른 개장에 3교대 전환 등 피로도 커 이에 따라 해운대해수욕장 119수상구조대(63명)는 ‘주간 근무’→ ‘비번’→ ‘당직’(24시간)→ ‘비번’으로 돌아가던 기존의 4교대 근무를 ‘주간 근무’→ ‘당직’(24시간)→ ‘비번’의 3교대로 바꿨다. 해수욕장 안전관리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이틀 연속 주야간 근무에 이은 짧은 주간 휴식은 대원들의 피로도를 높일 수밖에 없다고 호소한다. 이런 상황에 이안류(역파도)까지 발생하면 속수무책이다. 이안류는 2곳 이상에서 다발적으로 발생하기도 한다. 40여명의 주간 근무자가 파도에 휩쓸린 해수욕객 구조와 망루 감시, 응급처치 등을 한꺼번에 처리하기는 어렵다. 해경과 함께했던 지난 3년간 해운대해수욕장에서는 연간 24회부터 최대 64회의 이안류가 발생했다. 파도에 휩쓸린 피서객만 최소 60명에서 최대 235명에 이른다. 조영복 해운대 119수상구조대장은 “오는 7월 16일 민간 안전요원 30명이 투입될 때까지, 구조대원들이 수상 구조와 해변 순찰, 망루 감시 등 모든 업무를 맡아야 한다”면서 “그때까지 버티려면 소방구조대원이라도 충원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수상구조, 응급처치, 동력장비 조정 등이 가능한 민간 전문가를 구하기 쉽지 않다”면서 “민간 안전요원은 연간 1개월만 근무하는 일시적 처방인 만큼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해운대구에서 파견된 공무원들도 바쁘긴 마찬가지다. 1개월 이내 민간 안전요원 30명을 선발해 실무교육까지 마치고 현장에 투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안전관련 학과 대학생을 중심으로 선발할 예정이지만, 확정된 것은 없다. 해운대구 관계자는 “안전요원 충원을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면서 “이안류로 인한 대형 사고를 막으려고 해수욕장 앞바다에 22만㎥의 모래를 투입했다”고 말했다. 반면 상인들은 예년보다 이른 해수욕장 개장이 반갑다. 올해는 백사장이 두 배로 넓어져 더 많은 피서객이 찾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개장 첫날인 지난 1일 이후 피서객이 점차 늘고 있다. 음식점 주인 이문자(52·여)씨는 “젊은 피서객들의 입맛에 맞추려고 퓨전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면서 “야간 안전문제 얘기가 많아 살짝 걱정도 된다”고 귀띔했다. ●울산, 예산부족으로 민간 수상전문가 선발 ‘난항’ 울산 동구와 울주군도 이날 주말·휴일을 앞두고 일산, 진하 해수욕장을 찾은 피서객 안전관련 대책을 수립하느라 분주했다. 동구 일산해수욕장에는 지난해 12명의 해경이 24시간 근무했지만, 올해는 4명이 주간순찰만 한다. 동구는 민간 수상구조 전문가(8~12명) 선발에 나섰지만 쉽지 않다. 울주군도 진하해수욕장에 긴급 투입할 6명의 민간 구조대원을 선발하려고 긴급예산을 편성했다. 그러나 예산이 부족해 민간 안전요원을 주간과 저녁 근무에만 투입기로 했다. 또 개장이 1개월도 남지 않아 실무교육이 제대로 이뤄질지도 걱정이다. 전문가들은 최소 3개월 이상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제주도, 야간개장 폐지 ‘고육지책’… 상인들 반발 국내외 관광객이 몰리는 제주도는 더 심각하다. 해수욕장 개장을 10일가량 늦췄을 뿐 아니라 이호, 함덕서우봉, 협재, 삼양검은모래 등 4곳은 야간 개장을 없애기로 했다. 해수욕장 상인과 주민들은 6년 만에 야간 개장이 폐지될 위기에 처해 반발하고 있다. 이호해수욕장은 2009년 처음 야간 개장한 후 축제와 멸치잡이 체험, 야외영화 상영, 백사장 촛불 수놓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인기를 누렸다. 올해 야간 개장 폐지가 결정되자 주민과 상인들의 민원이 잇따르고 있다. 상인들은 “야간 개장 폐지에 따른 경제적 손실이 클 수밖에 없어 시청을 항의 방문했다”면서 “야간 개장 폐지가 확정되면 실력행사를 하겠다”고 밝혔다. 전국 유명 해수욕장은 피서객 유치로 연간 100억원에서 많게는 1조원이 훌쩍 넘는 경제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따라서 해수욕장 개장 기간 단축과 야간 개장 폐지는 지역 주민들에게 큰 손실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새달 개장 앞둔 동해안, 해경인력 감소로 협조 난색 경북 동해안의 해수욕장들도 다음달부터 문을 열고 피서객을 맞는다. 하지만, 시·군들은 그 어느 해보다도 안전 관련 인원 및 시설 확보에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지난해 350만여명의 피서객이 해수욕장을 방문한 포항시의 경우 현재 인명구조선 2척과 구명보트 2대만 확보했다. 이는 지난해 해수욕장 이용객의 안전을 위해 구조정과 수상오토바이 등을 대대적으로 투입했던 것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난다. 따라서 시는 해양경비안전서에 구조정 등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해경의 인력 감소 및 예산 사정 등으로 협조에 난색을 보이고 있다. 그나마 해경은 가용장비인 수상오토바이 2대, 인명구조선 4대 등을 지원하기로 해 급한 불은 껐다. 야간 바다파출소를 운영하지 않기로 했다. 전남 완도군은 올해 명사십리해수욕장에 인명구조 자격증을 가진 해병전우회 회원 등 24명을 안전요원으로 배치키로 했다. 지난해는 해경 24명이 해수욕장에서 안전관리 업무를 맡았지만, 올해 모두 철수했다. 군은 민간 전문가 채용 예산을 확보하지 못해 해병전우회에 자원봉사 형태의 인명구조 활동을 요청했다. ●태안, 구조장비 구입 등 7억원 소요 ‘부담’ 또 충남 태안군 해수욕장은 2년 전 ‘해병대캠프 사고’ 후유증으로 한산하다. 푸른 바다와 하얀 모래사장이 넓게 펼쳐진 태안군 안면읍 창기리 안면도 백사장해수욕장은 피서지 매력을 잃었다. 2013년 7월 공주사대부고 학생들이 참가한 해병대캠프에서 5명이 파도에 휩쓸려 숨진 뒤 줄곧 이렇게 썰렁하다. 윤현돈 백사장해수욕장 번영회장은 “사고가 난 뒤 관광객이 60% 정도 줄었다. 태안 기름유출 사고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면서 “마을 주민 80%가 장사를 하는데 타격이 엄청나다. 민심까지 흉흉해 주민들끼리 싸움과 고소를 일삼는다”고 혀를 찼다. 해병대캠프를 운영하던 유스호스텔도 문을 닫았다. 윤씨는 “사고 이듬해 학생 수련회를 유치하려고 했는데 ‘사고가 난 캠프’라는 인식 때문에 고객이 없자 문을 닫았다”면서 “마을에서 가장 큰 건물은 흉물처럼 방치되고, 주민들은 죽을 지경이고…”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유스호스텔 이용객이 마을 음식점 등을 찾아 호황을 누리던 현상이 사라진 것이다. 문제의 유스호스텔은 휴업 후 경매에 부쳐졌으나 건물 12동 가운데 일부만 낙찰된 것으로 알려졌다. 태안군은 올여름 백사장해수욕장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피서객은 거의 없을 것으로 보면서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32개 해수욕장을 보유해 해수욕장 안전관리요원 확보에 애를 먹고 있다. 가창돈 군 주무관은 “백사장해수욕장에 피서객이 오지 않아도 해경에서 자치단체로 이관된 안전관리요원을 배치해야 한다”면서 “게다가 모든 관내 해수욕장에 요원을 배치하고 장비 등을 사려면 7억원이 들어 재정 부담이 무척 크다”고 말했다. 심경보 동부산대 해양산업잠수과 교수는 “해상 안전업무는 수십년간 경험과 기술을 가진 해경만이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면서 “준비가 제대로 안 된 채 지자체로 이관해 혼란을 가져왔다”고 지적했다. 심 교수는 “피서철 해수욕장 안전관리 업무에 관심을 둘 민간 전문가는 없다”면서 “안전관리 업무는 인명과 직결되는 만큼 아르바이트 수준의 일자리가 돼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부산 박정훈 기자 jhp@seoul.co.kr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태안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 [열린세상] 통영함, 그 이름의 의미를 묻다/강순주 건국대 건축학부 교수

    [열린세상] 통영함, 그 이름의 의미를 묻다/강순주 건국대 건축학부 교수

    해군이 최신예 해상 구조함의 이름을 통영함으로 명명해 진수시킨 건 2012년의 일이었다. 통영함이라는 명칭은 6·25 전쟁 때 한국 해군 및 해병대가 최초로 단독 상륙작전을 펼쳐 북한의 공격을 저지한 통영상륙작전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정신을 기리고 적극적으로 알리기 위해서 붙였다. 통영은 충무의 옛 이름이다. 그래서 우리는 통영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반사적으로 이순신 장군을 떠올린다. 그분의 헌신과 희생으로 나라를 되찾은 기억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통영함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국민들은 무엇을 떠올릴까. 6·25 전쟁일까? 국군의 최신예 구조함일까? 이순신 장군일까? 아니면 국방과 관련된 비리일까? 어쩌다가 천문학적인 혈세를 퍼부으며 국방을 튼튼히 하고 호국 영령과 이순신 장군을 기리려 했던 이름이 ‘부패’를 연상시키는 주체가 되었을까. 해상 구조함으로 전쟁이나 재난에서 국가와 국민을 보호한다는 이미지를 지녀야 할 군의 함정이 방산 비리의 상징이 됐는지 안타깝다. 국방의 의무를 위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군대를 가고, 이 뜨거운 여름에도 강도 높은 훈련을 받는다. 모두가 국방을 위해서다. 그러나 학업을 중단하고 군대로 가는 젊은이들만 있다고 나라가 지켜지진 않는다. 그보다 첨단의 무기가 관건인 시대인데, 장비와 무기는 비리로 구멍이 뚫리고 있다. 통영함의 레이더는 정확한 레이더의 군사용이 아닌 1970년대 성능의 어군 탐지기로, 2억원짜리를 41억원에 들여왔다고 한다. 모든 해군을 지휘해 국가를 보호하고 장병들의 생사를 결정하는 참모총장이 두 명이나 통영함 납품 비리 때문에 구속되는 사회가 과연 정상적인 사회이고 나라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또 가짜 백수오 사건은 어떠한가. 건강에 이롭다는 백수오를 넣었다고 홍보한 제품들의 대부분이 백수오 대신 그와 비슷한 모양의 이엽우피소를 넣었다는 것이다. 무려 3000억원어치의 가짜 백수오가 팔려 나갔다고 한다. 한 달 넘게 그 뉴스가 전국을 술렁이게 하고, 주식시장에까지 충격을 주었다. 식약처가 실시한 백수오 제품 전수조사 결과 전체 207개 중 진짜는 10개였다고 하니 실로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부패의 실태이고 현주소다. 국제투명성기구의 평가에서 한국은 지난해 투명성 순위에서 43위를 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국가 가운데서는 27위로 평가되기도 했다. 부패가 개선되지는 않고 계속 제자리에 머물고 있는 듯하다고 느끼는 국민들의 감정이 국제적인 평가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선진국과 부패는 공존할 수 없다. 부패를 떠안은 채 첨단 기술을 개발하고, 깨끗하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며, 나라의 돈을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부패를 단호히 없애는 일이 어떤 기술 개발이나 정치적 구호, 혹은 정권 차원의 슬로건보다 중요하다고 믿는다. 나라가 부패하면 실제의 경제 발전이란 허위와 거짓으로 포장되고, 국가의 재정이 새나가며, 국민들은 불신과 의심으로 괴로워하게 된다. 부패한 나라치고 선진국으로 진입한 역사가 없다. 현재 정부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들도 부패 사건이 터질 때마다 적폐(積幣)라 하며, 그것을 과거에서 내려온 부담으로 여길 것이 아니다. 그것을 끊어 달라고 지도자를 택한 국민들이 모두 부패의 척결을 염원하고 있다. 대통령의 추상같은 의지와 전문가들의 지혜가 결합돼야 할 듯하다. 과거로부터 내려온 부패의 구조를 밝히고, 끊어 버리는 데는 정치적 지도자의 결단과 현실을 꿰뚫고 있는 전문가들의 노하우가 필요하다. 깨끗하고 투명한 나라를 만들어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힘 있는 사람들을 의심하고 질시하지 않으며, 그들의 노고에 경의도 표하며 사는 사회를 만들어 가자. 그런 나라를 만드는 게 우리가 그렇게 말로 이야기하는 국격을 높이는 일이고, 국가경쟁력도 높이는 지름길이 된다. 6월은 호국 영령들을 기리는 현충의 달이다. 우리는 그분들의 죽음을 어떻게 기리고 승화시킬 수 있을까. 통영함이라는 이름 앞에 다시금 고개를 숙이게 되는 6월이다.
  • [밀리터리 인사이드] 이순신만 아는 당신을 위한 전쟁영웅 이야기

    [밀리터리 인사이드] 이순신만 아는 당신을 위한 전쟁영웅 이야기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의미를 담고 있죠. 그렇다면 여러분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전쟁영웅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나요. 이런 질문을 하면 대다수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부터 거론할 겁니다. 풍전등화의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지금도 성웅(聖雄)으로 불리는 존경받는 위인이죠. 하지만 교과서에 단 한 줄만 언급된, 아니 우리가 따분하다고 덮어버린 역사책 속에 숨겨진 전쟁영웅은 수없이 많습니다. 저는 이번에 우리가 몰랐거나 지나쳤던 6·25 전쟁의 영웅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독일의 영웅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처럼 웅장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지치고 각박한 삶이지만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해 준 그분들을 한번 쯤은 되새길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국민 성금으로 산 중고 초계정, 첫 승전보를 올리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19만명(한국군 10만명)의 병력과 소련이 제공한 T-34 전차 240여대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불과 사흘만인 28일 수도 서울을 빼앗게 됩니다. 전차는 커녕 변변한 대전차 무기조차 갖추지 못한 우리 군은 눈물을 머금고 후퇴를 거듭할 수 밖에 없었는데요. 전쟁발발 다음날 깜짝 놀랄 만한 승전보가 전해졌습니다. 전쟁 직전 손원일 초대 해군참모총장과 해군 지휘부는 장병들의 월급과 국민 성금 1만 5000달러와 정부지원금 4만 5000달러를 합한 6만 달러를 들여 미 해군의 450t급 중고 초계정을 구입했는데요. 초계정은 연안을 감시하는 작은 전투함입니다. 참고로 우리 최신 이지스함 세종대왕함 배수량이 7500t(만재 배수량 1만t)이니 정말 작은 함정이죠. 선박이 진해 해군기지에 들어온 시기가 전쟁 발발 불과 두 달 전인 4월 10일입니다. 무장조차 없었던 선박에 3인치 함포 1문과 포탄 100발을 어렵게 갖췄습니다. 드디어 27일에는 ‘PC-701’이라는 함명을 받고 ‘백두산함’으로 불리게 됐습니다. 전쟁 당일 진해 해군본부는 백두산함에 동해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백두산함은 초계임무 중 울산 앞바다에서 덩치가 두 배인 1000t급 괴선박을 발견합니다. 깃발이나 표식이 없었지만 함정을 북한군 상륙함으로 판단한 백두산함 지휘부는 해군본부로 “600명의 북한군이 승선한 채 전속력으로 남하하고 있다”고 긴급보고했습니다. 부산항을 노려 남하한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위협사격을 가하자 적선이 중기관총과 주포로 대응했고, 곧 백두산함의 3인치 주포가 불을 뿜었습니다. 4시간의 교전 끝에 26일 오전 1시 30분쯤 적선은 포탄에 명중돼 물 속으로 가라앉았고, ‘대한해협 해전’이라는 이름으로 6·25 전쟁 첫 승전으로 기록됐습니다. 치열한 교전 끝에 장전수 전병익 중사, 조타수 김창학 하사가 전사했습니다. 김창학 하사는 침몰 위기에 놓인 적함이 집중적으로 조타실을 공격해 중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조타실 키를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백두산함 함장이었던 최용남 중령은 태극무공훈장을 받았고, 소장으로 진급해 해병대 1사단장에 오른 뒤 1998년 타계했습니다. ●수류탄과 화염병 뿐…적의 자주포를 육탄공격하다 6·25 전쟁 영웅으로 또 심일 소령이 있습니다. 심 소령은 함경남도 단천군 출신으로, 서울대 사범대 재학 중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학한 당시로서는 엘리트 군인이었는데요. 전쟁 발발 당일 6사단 7연대 대전차포대 2소대장(소위)으로, 춘천·홍천지구 전투에서 남하하는 10여대의 SU-76 자주포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적이 가까이 다가오길 기다렸다가 2문의 57mm 대전차포 발사를 명령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했죠. SU-76은 이름만 자주포이지 전면에 35mm 장갑을 갖춰 당시 우리 군 입장엔 전차나 다름없었습니다. 초라한 무기에 좌절감을 느낀 것도 잠시, 그는 포탑을 돌리지 못하는 자주포의 특성상 좌우 측면이 취약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5명의 특공대를 편성합니다. 이어 수류탄과 화염병을 들고 적의 포탑 위로 돌진하는 육탄 공격을 감행해 자주포 3대를 격파하는 성과를 거뒀죠. 이런 방식은 전차에 대한 공포심을 사라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전선 곳곳에서 적 전차를 효과적으로 저지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이후 충북 음성군, 경북 영천군 등지에서 벌어진 전투에 잇따라 참전했고 1951년 1월 26일 7사단 수색중대장으로 강원 영월군에서 정찰 활동을 하던 중 북한군의 총에 맞아 안타깝게 전사했습니다. 심 소령에게는 사후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됐습니다. 심 소령의 동생으로 셋째 동생 심익은 1952년 17세의 어린 나이로 학도병으로 참전했다가 실종됐고, 경찰관이었던 둘째 동생 심민은 1960년 32세의 나이로 과로사하는 아픈 가족사를 남겼습니다. 보훈처는 올해 6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세 형제의 어머니인 고(故) 조보배 여사를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훈장 하나 못 받았지만…북한군 간담을 서늘하게 한 ’구월산 여장군’ 여성 전쟁영웅으로는 ‘구월산 여장군’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이정숙 여성유격대원이 있습니다. 그의 활약상은 1965년 최무룡 감독의 영화 ‘피어린 구월산’과 고우영 화백의 만화 ‘구월산 유격대’를 통해 알려지기도 했는데요. 6·25 전쟁 직전 북한군에 의해 부모와 남편을 잃은 그는 1950년 10월 황해도 안악군에서 처음 ‘서하무장대’를 결성, 적의 후방에서 게릴라 활동을 벌였습니다. 이후 그는 중공군에게 많은 부하를 잃고 고향 황해도로 돌아온 육군본부 김종벽 대위의 ‘구월산 유격대’에 합류했고, 김 대위의 보좌관으로 많은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1951년 1·4 후퇴 당시에도 후퇴하지 않고 구월산에 남았는데요. 제대로 된 보급을 받지도 못한 채 적의 후방을 기습공격해 탈취한 물자로 생존해야 했지만 늘 그들의 가슴은 뜨거웠습니다. 같은 달 18일 고립된 재령유격부대를 구출하기 위해 촌부로 가장한 채 밤새 100여 리를 걸어 적 포위망을 뚫고 89명을 구출하는 전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올해 여군으로는 처음으로 보훈처가 선정한 2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됐습니다. 지금도 일부 대원이 생존해 있지만 유격대를 이끌던 이정숙씨조차 훈장하나 받지 못했고 올해 뒤늦게 아들이자 구월산유격대 청장년회장인 김광인(60)씨가 참전 유공자 증서를 받았습니다. 6·25 전쟁 훈·포장은 1953년 12월 31일부로 종결한다는 이승만 정부 당시 법 조항이 걸림돌이 됐다고 합니다. 북한이 2013년 42일간 억류했다가 추방한 미국인 메릴 뉴먼(당시 85세)씨는 6·25 전쟁 당시 이 구월산 유격대와 함께 활동했다고 밝히면서 유격대의 활약상에 관심이 집중됐는데요. 그는 추방 뒤 공식 성명을 통해 북한 가이드에게 구월산 유격대원 생존 여부를 묻고 “구월산도 가고 싶다”고 말했다가 오해를 받고 억류됐다고 밝혔습니다. 6·25 전쟁에서는 유엔군, 특히 압도적 다수였던 미군의 희생도 많았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흥남철수’도 사실 미군이 목숨을 걸고 중공군의 진격을 저지해 이뤄졌습니다. 역사상 미군이 가장 고전한 전투 중 하나인 ‘장진호 전투’입니다. 당시엔 미국 언론의 조롱까지 받았지만 종전 후에는 전략적으로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한국군과 미군은 압록강을 목표로 북진을 거듭했죠. 동부전선을 맡았던 미 10군단은 1950년 11월 해병대 1사단을 주력으로 한국군과 함께 함경도 개마고원의 장진호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이 때 이미 중공군이 장진호 북쪽까지 진출한 상태였고, 병력은 1만 5000명인 한미 연합군의 8배에 가까운 12만명에 달했습니다. 7개 사단으로 구성된 중공군 제9병단은 미군이 주력인 연합군을 장진호 계곡으로 몰아넣고 섬멸작전에 돌입했습니다. ●중공군에 패해 후퇴하면서도 피난민을 구한 그들 11~12월 이 지역에는 영하 20~32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해발 1000m 산악지대여서 살을 에는 추위가 전투만큼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전체 미 해병대 1사단 사상자 7200명의 절반인 3600명이 동상으로 쓰러졌을 정도였습니다. 부상자에게 사용할 약품이 얼어터지고 총은 사용하지 않으면 얼어붙어 작동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니 당시 추위는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는 수준이었을 겁니다. 침낭 속에 들어가 잠을 청하고 싶었겠지만 중공군의 기습을 대비해야 해 강제로 지퍼를 올리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미군을 에워싸고 단숨에 전멸시킬 기세였던 중공군은 미 해병대의 악착같은 반격에 사망자만 2만 5000명, 부상자 1만 2500명의 극심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결국 중공군 제9병단은 이곳 동부전선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입어 서부전선의 제13병단과 합류하지 못하고 부대 재편을 위해 휴식기를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중공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성공적으로 후퇴해 흥남에 도착한 미군은 전세계가 깜짝 놀랄만한 결정을 했습니다. 김백일 1군단장과 의사 출신 민간인 고문관 현봉학씨의 설득으로 에드워드 알몬드 미 10군단장이 민간인 피난민까지 모두 철수시키기로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공로로 현씨는 ‘한국의 쉰들러’라는 별명을 얻었죠. 그는 종전 뒤 미국 버지니아대, 콜롬비아대, 펜실베니아대에서 의대 교수로 활약, 의학 발전에 공헌했고 2007년 미국 뉴저지주 뮐렌버그병원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부두를 떠날 때 미군이 시설과 군수 물자를 폭파하면서 일부 민간인이 희생돼 논쟁이 있긴 합니다만, 흥남 철수 작전은 2차 세계대전의 ‘됭케르크 철수 작전’과 더불어 가장 성공한 철수 작전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흥남 철수 당시 피난민들을 도왔던 또 한 명의 영웅이 있는데요. 라루 선장은 배에 실었던 무기를 모두 버리고 1만 4000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인원의 피난민을 태우라고 지시합니다. 가장 많은 사람을 구한 배로 기네스 기록을 수립하기도 했죠. 배 안에서 5명의 새 생명이 태어날 정도였습니다. 그는 이후 아픔을 겪은 한국인들을 떠올리며 ‘마리너스’라는 이름을 얻어 가톨릭 수도회인 베네딕토회 수사가 됐습니다. 그는 당시 항해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작은 배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태울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한사람도 잃지 않고 그 끝없는 위험들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그해 크리스마스에 황량하고 차가운 한국의 바다 위에 하느님의 손길이 우리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명확하고 틀림없는 메시지가 내게 와 있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밀리터리 인사이드] 이순신 장군만 아는 당신을 위한 전쟁영웅 이야기

    [밀리터리 인사이드] 이순신 장군만 아는 당신을 위한 전쟁영웅 이야기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의미를 담고 있죠. 그렇다면 여러분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전쟁영웅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나요. 이런 질문을 하면 대다수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부터 거론할 겁니다. 풍전등화의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지금도 성웅(聖雄)으로 불리는 존경받는 위인이죠. 하지만 교과서에 단 한 줄만 언급된, 아니 우리가 따분하다고 덮어버린 역사책 속에 숨겨진 전쟁영웅은 수없이 많습니다. 저는 이번에 우리가 몰랐거나 지나쳤던 6·25 전쟁의 영웅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독일의 영웅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처럼 웅장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지치고 각박한 삶이지만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해 준 그분들을 한번 쯤은 되새길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국민 성금으로 산 중고 초계정, 첫 승전보를 올리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19만명(한국군 10만명)의 병력과 소련이 제공한 T-34 전차 240여대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불과 사흘만인 28일 수도 서울을 빼앗게 됩니다. 전차는 커녕 변변한 대전차 무기조차 갖추지 못한 우리 군은 눈물을 머금고 후퇴를 거듭할 수 밖에 없었는데요. 전쟁발발 다음날 깜짝 놀랄 만한 승전보가 전해졌습니다. 전쟁 직전 손원일 초대 해군참모총장과 해군 지휘부는 장병들의 월급과 국민 성금 1만 5000달러와 정부지원금 4만 5000달러를 합한 6만 달러를 들여 미 해군의 450t급 중고 초계정을 구입했는데요. 초계정은 연안을 감시하는 작은 전투함입니다. 참고로 우리 최신 이지스함 세종대왕함 배수량이 7500t(만재 배수량 1만t)이니 정말 작은 함정이죠. 선박이 진해 해군기지에 들어온 시기가 전쟁 발발 불과 두 달 전인 4월 10일입니다. 무장조차 없었던 선박에 3인치 함포 1문과 포탄 100발을 어렵게 갖췄습니다. 드디어 27일에는 ‘PC-701’이라는 함명을 받고 ‘백두산함’으로 불리게 됐습니다. 전쟁 당일 진해 해군본부는 백두산함에 동해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백두산함은 초계임무 중 울산 앞바다에서 덩치가 두 배인 1000t급 괴선박을 발견합니다. 깃발이나 표식이 없었지만 함정을 북한군 상륙함으로 판단한 백두산함 지휘부는 해군본부로 “600명의 북한군이 승선한 채 전속력으로 남하하고 있다”고 긴급보고했습니다. 부산항을 노려 남하한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위협사격을 가하자 적선이 중기관총과 주포로 대응했고, 곧 백두산함의 3인치 주포가 불을 뿜었습니다. 4시간의 교전 끝에 26일 오전 1시 30분쯤 적선은 포탄에 명중돼 물 속으로 가라앉았고, ‘대한해협 해전’이라는 이름으로 6·25 전쟁 첫 승전으로 기록됐습니다. 치열한 교전 끝에 장전수 전병익 중사, 조타수 김창학 하사가 전사했습니다. 김창학 하사는 침몰 위기에 놓인 적함이 집중적으로 조타실을 공격해 중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조타실 키를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백두산함 함장이었던 최용남 중령은 태극무공훈장을 받았고, 소장으로 진급해 해병대 1사단장에 오른 뒤 1998년 타계했습니다. ●수류탄과 화염병 뿐…적의 자주포를 육탄공격하다 6·25 전쟁 영웅으로 또 심일 소령이 있습니다. 심 소령은 함경남도 단천군 출신으로, 서울대 사범대 재학 중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학한 당시로서는 엘리트 군인이었는데요. 전쟁 발발 당일 6사단 7연대 대전차포대 2소대장(소위)으로, 춘천·홍천지구 전투에서 남하하는 10여대의 SU-76 자주포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적이 가까이 다가오길 기다렸다가 2문의 57mm 대전차포 발사를 명령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했죠. SU-76은 이름만 자주포이지 전면에 35mm 장갑을 갖춰 당시 우리 군 입장엔 전차나 다름없었습니다. 초라한 무기에 좌절감을 느낀 것도 잠시, 그는 포탑을 돌리지 못하는 자주포의 특성상 좌우 측면이 취약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5명의 특공대를 편성합니다. 이어 수류탄과 화염병을 들고 적의 포탑 위로 돌진하는 육탄 공격을 감행해 자주포 3대를 격파하는 성과를 거뒀죠. 이런 방식은 전차에 대한 공포심을 사라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전선 곳곳에서 적 전차를 효과적으로 저지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이후 충북 음성군, 경북 영천군 등지에서 벌어진 전투에 잇따라 참전했고 1951년 1월 26일 7사단 수색중대장으로 강원 영월군에서 정찰 활동을 하던 중 북한군의 총에 맞아 안타깝게 전사했습니다. 심 소령에게는 사후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됐습니다. 심 소령의 동생으로 셋째 동생 심익은 1952년 17세의 어린 나이로 학도병으로 참전했다가 실종됐고, 경찰관이었던 둘째 동생 심민은 1960년 32세의 나이로 과로사하는 아픈 가족사를 남겼습니다. 보훈처는 올해 6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세 형제의 어머니인 고(故) 조보배 여사를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훈장 하나 못 받았지만…북한군 간담을 서늘하게 한 ’구월산 여장군’ 여성 전쟁영웅으로는 ‘구월산 여장군’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이정숙 여성유격대원이 있습니다. 그의 활약상은 1965년 최무룡 감독의 영화 ‘피어린 구월산’과 고우영 화백의 만화 ‘구월산 유격대’를 통해 알려지기도 했는데요. 6·25 전쟁 직전 북한군에 의해 부모와 남편을 잃은 그는 1950년 10월 황해도 안악군에서 처음 ‘서하무장대’를 결성, 적의 후방에서 게릴라 활동을 벌였습니다. 이후 그는 중공군에게 많은 부하를 잃고 고향 황해도로 돌아온 육군본부 김종벽 대위의 ‘구월산 유격대’에 합류했고, 김 대위의 보좌관으로 많은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1951년 1·4 후퇴 당시에도 후퇴하지 않고 구월산에 남았는데요. 제대로 된 보급을 받지도 못한 채 적의 후방을 기습공격해 탈취한 물자로 생존해야 했지만 늘 그들의 가슴은 뜨거웠습니다. 같은 달 18일 고립된 재령유격부대를 구출하기 위해 촌부로 가장한 채 밤새 100여 리를 걸어 적 포위망을 뚫고 89명을 구출하는 전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올해 여군으로는 처음으로 보훈처가 선정한 2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됐습니다. 지금도 일부 대원이 생존해 있지만 유격대를 이끌던 이정숙씨조차 훈장하나 받지 못했고 올해 뒤늦게 아들이자 구월산유격대 청장년회장인 김광인(60)씨가 참전 유공자 증서를 받았습니다. 6·25 전쟁 훈·포장은 1953년 12월 31일부로 종결한다는 이승만 정부 당시 법 조항이 걸림돌이 됐다고 합니다. 북한이 2013년 42일간 억류했다가 추방한 미국인 메릴 뉴먼(당시 85세)씨는 6·25 전쟁 당시 이 구월산 유격대와 함께 활동했다고 밝히면서 유격대의 활약상에 관심이 집중됐는데요. 그는 추방 뒤 공식 성명을 통해 북한 가이드에게 구월산 유격대원 생존 여부를 묻고 “구월산도 가고 싶다”고 말했다가 오해를 받고 억류됐다고 밝혔습니다. 6·25 전쟁에서는 유엔군, 특히 압도적 다수였던 미군의 희생도 많았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흥남철수’도 사실 미군이 목숨을 걸고 중공군의 진격을 저지해 이뤄졌습니다. 역사상 미군이 가장 고전한 전투 중 하나인 ‘장진호 전투’입니다. 당시엔 미국 언론의 조롱까지 받았지만 종전 후에는 전략적으로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한국군과 미군은 압록강을 목표로 북진을 거듭했죠. 동부전선을 맡았던 미 10군단은 1950년 11월 해병대 1사단을 주력으로 한국군과 함께 함경도 개마고원의 장진호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이 때 이미 중공군이 장진호 북쪽까지 진출한 상태였고, 병력은 1만 5000명인 한미 연합군의 8배에 가까운 12만명에 달했습니다. 7개 사단으로 구성된 중공군 제9병단은 미군이 주력인 연합군을 장진호 계곡으로 몰아넣고 섬멸작전에 돌입했습니다. ●중공군에 패해 후퇴하면서도 피난민을 구한 그들 11~12월 이 지역에는 영하 20~32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해발 1000m 산악지대여서 살을 에는 추위가 전투만큼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전체 미 해병대 1사단 사상자 7200명의 절반인 3600명이 동상으로 쓰러졌을 정도였습니다. 부상자에게 사용할 약품이 얼어터지고 총은 사용하지 않으면 얼어붙어 작동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니 당시 추위는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는 수준이었을 겁니다. 침낭 속에 들어가 잠을 청하고 싶었겠지만 중공군의 기습을 대비해야 해 강제로 지퍼를 올리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미군을 에워싸고 단숨에 전멸시킬 기세였던 중공군은 미 해병대의 악착같은 반격에 사망자만 2만 5000명, 부상자 1만 2500명의 극심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결국 중공군 제9병단은 이곳 동부전선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입어 서부전선의 제13병단과 합류하지 못하고 부대 재편을 위해 휴식기를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중공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성공적으로 후퇴해 흥남에 도착한 미군은 전세계가 깜짝 놀랄만한 결정을 했습니다. 김백일 1군단장과 의사 출신 민간인 고문관 현봉학씨의 설득으로 에드워드 알몬드 미 10군단장이 민간인 피난민까지 모두 철수시키기로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공로로 현씨는 ‘한국의 쉰들러’라는 별명을 얻었죠. 그는 종전 뒤 미국 버지니아대, 콜롬비아대, 펜실베니아대에서 의대 교수로 활약, 의학 발전에 공헌했고 2007년 미국 뉴저지주 뮐렌버그병원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부두를 떠날 때 미군이 시설과 군수 물자를 폭파하면서 일부 민간인이 희생돼 논쟁이 있긴 합니다만, 흥남 철수 작전은 2차 세계대전의 ‘됭케르크 철수 작전’과 더불어 가장 성공한 철수 작전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흥남 철수 당시 피난민들을 도왔던 또 한 명의 영웅이 있는데요. 라루 선장은 배에 실었던 무기를 모두 버리고 1만 4000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인원의 피난민을 태우라고 지시합니다. 가장 많은 사람을 구한 배로 기네스 기록을 수립하기도 했죠. 배 안에서 5명의 새 생명이 태어날 정도였습니다. 그는 이후 아픔을 겪은 한국인들을 떠올리며 ‘마리너스’라는 이름을 얻어 가톨릭 수도회인 베네딕토회 수사가 됐습니다. 그는 당시 항해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작은 배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태울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한사람도 잃지 않고 그 끝없는 위험들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그해 크리스마스에 황량하고 차가운 한국의 바다 위에 하느님의 손길이 우리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명확하고 틀림없는 메시지가 내게 와 있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美 태평양함대 최신예 핵잠수함 미시시피호를 타다

    美 태평양함대 최신예 핵잠수함 미시시피호를 타다

    북한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사출시험 성공에 이어 중국이 최근 해군력 강화 방침을 골자로 한 국방백서를 발표하면서 태평양 지역에서의 잠수함 전력 경쟁이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보유 함정의 60%를 아·태 지역에 배치한다는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 정책’과 일본의 전후 체제 탈피 시도에 맞선 중국의 대응으로 긴장감이 감도는 상황에서 미 태평양통합사령부(PACOM)가 지난 21일 미 태평양함대 보유 최신예 핵잠수함인 미시시피호(SSN 782)를 한국 언론에 전격 공개했다. 사거리 1000㎞가 훨씬 넘는 토마호크미사일과 어뢰로 중무장한 미 해군의 주력인 버지니아급(7800t) 공격형 핵잠수함 미시시피호의 내부가 한국 언론에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는 하와이 진주만히컴합동기지에서 위용을 드러낸 미시시피호는 2012년 6월 취역한 9번째 버지니아급 핵잠수함으로, 지난해 11월 태평양함대사령부에 배치됐다. 올 하반기나 내년 상반기 첫 작전 투입을 앞두고 시험 운행과 정비가 한창이었다. ●토마호크 미사일 12기 동시 발사 ‘수직발사대’ 설치 미시시피호 선상에서 한국 기자들을 맞은 21년 경력의 함장 마이클 러킷 중령은 잠수함 앞머리를 가리키며 “토마호크 미사일 12기를 동시에 발사할 수 있는 수직발사대가 설치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미시시피호는 적의 잠수함과 함정을 탐지, 격퇴하고 특히 연안 근해에서 특수부대원의 상륙 및 철수 작전을 지원한다”고 임무를 설명했다. 이어 지휘통제실과 핵심 시설인 어뢰실, 특수부대원 수중 침투용 시설인 록아웃트렁크(Lock Out Trunk) 등으로 안내했다. 좁은 통로를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니 복도 양옆으로 승조원들의 숙소가 나왔다. 양쪽으로 3층 침대가 비좁게 놓여 있다. 6명이 한 방을 쓴다. 생각보다는 여유가 있는 복도를 지나 한쪽 끝에 위치한 록아웃트렁크를 둘러봤다. 성인 가슴팍 정도 높이에 위치해 있어 작전에 투입되는 특수부대원 9명이 동시에 원통형 출구를 통해 근해에서 잠수함 밖으로 나갔다 들어올 수 있는 설비다. 같은 층에는 승조원과 장교들을 위한 식당이 있다. 공간이 한정돼 있어 승조원들이 조를 짜 번갈아 가며 식사를 한다. 벽면에 걸린 삼성TV가 눈에 띄었다. 산소와 물, 전기는 모두 자체 생산해 쓰고 있다. 문제는 식량이다. 과일과 채소 등 신선식품은 7~10일밖에 버티지 못해 이후부터는 통조림과 건조식품을 주로 먹지만 “맛은 괜찮다”며 웃었다. ●자동항법장치·터치스크린… 모든 장치 디지털화 한 층을 더 내려가니 잠수함의 중심부인 지휘통제실이 나왔다. 정면에 조타수와 부조타수가 앉아 잠수함을 조종할 수 있는 대형 모니터들이 있고 왼쪽에 수중음파탐지기(소나), 오른쪽에 토마호크와 어뢰 등 무기 발사 시스템이 자리했다. 소나는 5개 목표물을 동시에 추적할 수 있다고 한다. 잠수함은 모든 장치가 디지털화돼 있었고, 터치스크린과 조이스틱으로 조종하도록 돼 있었다. 러킷 함장은 “기존의 잠수함들은 잠망경 때문에 지휘통제실이 지하 1층에 있었는데 버지니아급은 잠망경 대신 디지털카메라가 장착된 무잠망경 시스템으로 설계됐다”며 “덕분에 통제실이 지하 2층으로 내려와 공간에 훨씬 여유가 생겼다”고 말했다. 러킷 함장은 잠수함의 특성상 최정예 병사들을 선발한다고 했다. “해군 수병들 중에서 철저한 검증을 거쳐 선발된 병사들은 6개월에서 1년의 훈련 과정을 마친 뒤 승선하며, 작전에 투입되기 전에 1년 이상 실무 훈련을 또 받는다”면서 “지휘통제실에는 최소 6년 이상 된 부사관들이 근무하며 조타수와 부조타수는 8~12년 경력의 베테랑”이라고 밝혔다. 데니스 밀솜 부함장(소령)은 상위 10%가 선발된다고 덧붙였다. 러킷 함장은 미시시피호가 5번째 잠수함이며 최장 56일간 잠수 작전을 폈던 기록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 작전은 90일까지 진행되기도 한다고 전했다. 이 때문에 잠수함 승조원은 강인한 체력 못지않게 정신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장 90일 잠행작전… 승조원 체력·정신력 필수 지하 3층에는 외부에 잘 공개하지 않는 핵심 시설인 어뢰실이 위치한다. 24문의 어뢰를 이동시키기 쉽게 레일이 설치돼 있었다. 방문 당시 2문의 어뢰가 장전돼 있었다. 오렌지색은 연습용이고 초록색은 실제 어뢰였다. 좌우에 2문씩 어뢰발사장치 4문이 보였다. 러킷 함장은 어뢰의 파괴력을 묻는 질문에 “어뢰 한 발에 배 한 척이죠”라고 답했다. 여기에 적의 소나에 걸리지 않는 스텔스 기능까지 갖췄다. 북한의 잠수함 능력을 묻는 질문에는 웃음으로 대신했다. 그는 “어뢰실은 필요에 따라 레일을 걷어 내고 장비를 더 싣거나 특수부대원들이 머무는 공간으로 변경할 수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한번 작전에 나가면 한 달에서 길게는 석 달간 바다에 머무는데, 체력 관리가 궁금했다. 승조원들은 “조금이라도 공간이 나면 (접이식) 자전거를 놓고 수시로 운동한다”고 밝혔다. 물론 잠수함 내에서 술·담배는 금물이다. 미 해군은 현재 총 73척의 핵잠수함을 보유하고 있다. 오하이오급(1만 8000t급) 전략핵잠수함(SSBN, SSGN) 18척, 버지니아급 핵잠수함 11척, 시울프급 3척, 로스앤젤레스급 41척 등이다. 이 가운데 태평양 지역에 전략핵잠수함 8척과 공격형 핵잠수함 55척 가운데 27척이 배치돼 있다. ●美 태평양통합사령부(PACOM)는 하와이 진주만에 위치한 미 태평양통합사령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47년 1월 1일 태평양 지역의 평화 유지와 안보 강화를 위해 설립된 가장 오래된 미국 통합군사령부 가운데 하나다.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 사령부를 통합해 지휘하고 있다. 지난 27일 태평양통합사령관에 취임한 신임 해리 해리스 해군 대장은 상원 청문회와 취임식을 빌려 북한의 위협을 매우 중시한다는 입장을 밝혀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 전 지구 면적의 52%를 관할한다. 관할 지역 안에 36개국과 16개의 시간대가 있다.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이 지역에 집중돼 있다. 미국이 상호군사조약을 체결한 7개국 중 5개국이 위치해 있을 정도로 군사·안보 전략 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진주만(미 하와이주) 김균미 기자 kmkim@seoul.co.kr
  • 어디서나 적을 도청한다...미 해군, ‘미니 글라이더 드론’ 공개

    어디서나 적을 도청한다...미 해군, ‘미니 글라이더 드론’ 공개

    우리 속담에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여기에 드론도 추가해야 할지 모른다. 미 해군 연구소(NRL: Naval Research Lab)는 시카다(CICADA, 매미라는 의미도 되지만 Close-In Covert Autonomous Disposable Aircraft의 약자)라는 이름의 글라이더형 미니 드론을 개발 중이다. 그 목적은 적진에 조용히 침투해서 적을 도청하거나 센서를 이용해서 주변을 감시하는 것이다. 현재 다양한 프로토타입을 개발 중인 이 미니 드론은 크기가 수십 cm 정도에 불과하다. 따라서 C-130 같은 수송기에 대량으로 탑재해 공중에서 뿌리거나 혹은 아군기가 작전하기 위험한 지역에서는 풍선에 매달아 투입할 수 있다. 최대 1만 8,000m 고도에서 투하된 시카다는 자체 동력 없이 글라이더처럼 날아간다. 하지만 높은 고도에서 날아가는 만큼 최대 56km의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다. 엔진이 없다는 것은 언뜻 생각하기에는 큰 단점인 것 같지만, 사실 몇 가지 큰 장점이 있다. 일단 엔진이 없어서 아주 조용하고 열도 발산하지 않는다. 여기에 크기가 작아서 레이더로도 감지가 곤란하다. 생산 단가가 더 저렴한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미니 드론은 GPS와 2축 자이로스코프만 이용해서 4.5m 범위의 목표에 정확히 착륙할 수 있다. 탑재되는 센서는 적을 감청하기 위한 음향 센서를 포함해서 다양한 화학, 방사선 센서들이 사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적의 진지 근처에 투하해서 적을 도청하거나 적의 이동 경로에 숨어서 차량의 이동 소음을 포착할 수 있다. 또 화생방전 상황에서는 센서를 이용해서 독가스나 방사선 농도를 측정해서 아군에게 알려줄 수 있다. 시카다의 프로토타입은 1,000달러 미만으로 매우 저렴하며 대량 생산 시 더 저렴해질 수 있다. 아직 최종 디자인은 확정되지 않은 상태지만, 저렴한 가격의 미니 글라이더를 이용해서 다양한 상황에서 활용하겠다는 개념은 그럴듯해 보인다. 개발은 미 해군 연구소가 주도하고 있으나 실제로 유용한 것으로 증명될 경우 해병대나 미 육군도 채택해 사용할 수 있다. 소리 없이 다가와서 몰래 엿듣는 미니 드론의 존재는 한편으로는 소설 '1984'를 생각나게 하지만, 미래전의 양상을 바꿀 수 있는 신무기가 될 수도 있다. 현재 개발 중이므로 실전 배치 여부는 미정이지만, 미래전에서는 점차 이런 무인 기기들의 역할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고든 정 통신원 jjy0501@naver.com
  • 軍, 기술특기병 선발 때 최종학력 성적 안 본다

    군 당국이 해군, 공군과 해병대의 기술특기병(모집병) 선발 전형 때 최종 졸업한 학교의 성적을 배제할 계획이다. 기술특기병 선발 제도가 전공 우수자보다 단순히 고등학교 때 성적이 우수했던 명문대 재학생들에게 유리하다는 지적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병무청은 현역 모집병 전형 배점과 평가 항목을 조정하는 내용을 담은 업무규정(훈령) 개선안을 마련해 의견을 수렴 중이라고 밝혔다. 각 군과 협의를 거친 개선안은 올해 12월 지원자부터 적용된다. 이들은 내년 2월 입영 대상자다. 해·공군, 해병대에서 전기, 전산, 통신, 화학, 군악 등 주특기를 담당하는 기술특기병 선발 평가 요소는 현재 100점 만점에 최종학교 성적 35점, 최종학교 재학 당시 출결석 45점, 가산점 20점으로 고등학교 성적이 사실상 당락을 좌우할 정도로 높다. 병무청은 이를 자격 40점, 전공 35점, 가산점 15점, 출결석 10점으로 개편해 명문대 재학생들의 쏠림현상을 막고자 한다. 다만 육군은 현재 실시하고 있는 자격 40점, 전공 35점, 가산점 15점, 신체등위 10점 등의 전형체계가 내년에 바뀌지 않는다. 병무청은 이미 시행 중인 일반병 전형은 최종학교 성적 35점, 출결석 45점, 가산점 20점 등이 적용된다고 밝혔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와우! 과학] 무인기, 인간을 구하다

    [와우! 과학] 무인기, 인간을 구하다

    -초기 군용 정찰기서 다양한 변신 21세기는 무인기의 시대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다양한 무인기가 여기저기에서 활약하고 있다. 초창기 무인기는 소형의 군용 정찰기였지만, 이제는 크기도 다양해지고 담당하는 임무도 그 폭이 매우 넓어졌다. 일부에서는 앞으로는 유인기가 종말을 고할 것이라는 다소 성급해 보이는 의견도 내놓을 정도다. 미군은 무인기 도입에서 가장 선두에 선 국가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위험한 임무에 사람 대신 무인기를 투입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다. 이런 무인기들은 새롭게 무인기로 개발된 것도 있지만, 아예 기존의 유인기를 무인기화 시켜 투입하는 경우도 있다. 카만 K-MAX 1200 무인 헬기가 후자에 속하는 대표적인 경우로 2011년부터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 전방 기지에 군수 보급을 담당하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바 있다. 이 무인 헬기는 3년의 작전 기간 중 1,900회 이상의 수송 업무를 수행했는데, 총 수송 화물량은 약 2,000t에 달한다. 아프가니스탄전에서 미군을 골치 아프게 한 문제는 탈레반이 견착식 휴대용 대공 미사일이나 혹은 간단한 대공화기를 이용해서 보급용 헬기를 공격하는 문제였다. 도로 사정이 열악하고 산악 지형이 많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헬기는 이상적인 보급 수단이지만, 그런 만큼 적군에게는 쉽게 노출되는 공격목표였다. -위험한 산불이나 화재 진화 미국은 K-MAX 1200 헬기를 무인화시켜 이 문제를 해결했다. 두 개의 로터가 엇갈리게 회전하는 독특한 외형의 이 헬기는 비교적 저렴한 수송헬기로 최대 이륙 중량 5.4t에 최대 수송 능력은 2.7t 정도 되는 중소형 헬기이다. 동체 밑에 줄을 연결해서 화물을 실어나르는 1인승 헬기이기 때문에 동체 크기가 작은데, 이는 대공 화기 공격에서 더 유리한 특징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유리한 점은 사람이 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조종사가 없으니 만약에 격추되더라도 인명 손실은 없다. 그리고 헬기 자체도 비슷한 임무를 수행하는 군용헬기 대비 저렴한 편이다. 따라서 이런 위험한 수송임무에는 훨씬 적격인 셈이다. 이 무인헬기는 예상 이상으로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여기에 고무된 록히드 마틴과 미 당국은 더 많은 영역에서 이 헬기를 투입하는 테스트를 진행 중이다. 일단 사람이 타지 않아도 된다는 점 때문에 이 헬기는 무엇보다 위험한 임무에 제격이다. 그런 임무 중에 하나가 바로 산불 진화다. 2014년, 산불 진화용으로 개조된 K-MAX 무인기는 첫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헬기 밑에 매달은 물탱크를 이용해서 시간당 10t 정도의 물을 뿌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앞으로 사람이 직접 헬기를 조종해서 진화하기 위험한 산불 진화에 이 무인 헬기가 투입될 가능성이 있다. -실종자 수색·화물 수송도 미군 역시 이 헬기를 더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려고 준비 중이다. 그중 하나는 부상병 및 고립된 병사를 구출하는 임무이다. 적진에 뛰어들어 아군을 구조하는 일은 매우 위험하다. 헬기는 이착륙 시에 가장 공격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구조하러 갔던 헬기와 병력을 모두 잃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미 해병대는 이 헬기 동체 양측에 사람이 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무인 헬기로 부상병이나 고립 지역에 있는 병사를 구출하는 테스트를 2015년 3월에 진행했다. 첫 테스트는 일단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조종사가 있는 상태에서 진행했는데, 성공적으로 모의 부상병을 수송했다. 사실 무인기로 개조된 유인기는 이 헬기 하나만이 아니다. 앞으로 다양한 헬기가 무인기로 개조되거나 혹은 유무인 겸용기로 제작되어 인간을 위험한 임무에서 해방할 것으로 보인다. 과연 무인기의 끝이 어디가 될지는 지금 알 수 없지만, 미래에 그 역할이 지금보다도 더 커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고든 정 통신원 jjy0501@naver.com
  • 4개월 만에… 이번엔 해병대 포신 폭발 사고

    해병대가 서해 백령도에서 포 사격훈련을 실시하는 도중 포신이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지난 1월 21일 해군 유도탄고속함의 76㎜ 함포가 사격 도중 오작동과 오발 사고를 낸 지 불과 4개월 만의 일로 군 장비 관리에 비상이 걸렸다. 해병대 관계자는 20일 “해병 6여단이 19일 오후 8시 8분 서해 백령도 방공진지에서 야간 방공포 훈련을 실시하던 도중 20㎜ 벌컨포 포신 6개 가운데 1개가 파열됐다”면서 “6m 뒤에서 훈련을 지휘하던 중대장 이모 소령의 오른쪽 정강이에 2㎝ 크기의 파편이 박혀 이 소령이 국군수도병원으로 후송됐다”고 밝혔다. 이 소령은 20일 파편 제거 수술을 받았고 생명에 지장은 없는 상태로 확인됐다. 폭발 사고가 난 20㎜ 벌컨포는 두산 DST에서 생산해 군 당국이 1998년 도입한 제품이다. 이번 사고의 원인에 대해 노후화된 포 자체의 결함이나 정비 불량 등 여러 가능성이 제기됐다. 군 당국은 2019년부터 이를 대체할 30㎜ 신형 대공포를 실전 배치할 예정이다. 이 관계자는 “사고가 난 벌컨포는 지난해 정비 작업을 했고 지난달 사격 훈련 당시에도 이상이 없었다”면서 “국방부에서 사고 경위를 조사하고 있고 정확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유승준 인터뷰 “군대 가겠다” 긴급 여론조사 결과보니

    유승준 인터뷰 “군대 가겠다” 긴급 여론조사 결과보니

    유승준 인터뷰 유승준 인터뷰 “군대 가겠다” 긴급 여론조사 “입국허용 반대 66.2%” 병역 기피 논란으로 입국금지된 가수 겸 배우 유승준(39)이 19일 인터넷방송에 출연해 “시간을 돌이킬 수 있다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군대를 가겠다”며 “어떤 방법으로도 아이들과 함께 떳떳하게 한국땅을 밟고 싶다”고 밝혔다. 유승준은 이날 밤 10시30분 영화제작자 신현원 감독이 진행하는 아프리카TV(afreeca.com/shinpro) 생방송에 출연해 병역기피 논란으로 국내 무대에서 퇴출된 심정을 밝혔다. 유승준의 인터뷰는 감독이 질문하면 유승준이 답변하는 방식으로 1시간 10분동안 진행됐다. 방송에 앞서 무릎을 꿇고 흐느낀 유승준은 “제 어눌한 말솜씨 때문에 제 마음을 잘 전달할 수 없을 거 같아 무릎을 꿇었다”며 “이 자리는 제 심경 고백도 아니고, 변명의 자리도 아니고, 여러분께 제 잘못을 사죄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줄곧 울먹이는 목소리로 13년 만에 방송에 출연한 계기를 설명했다. 유승준은 “솔직히 용기가 안 났고 제 마음을 전할 수 있을만한 마음의 준비가 안 됐었다”며 “또 작년까지는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잘못은 제가 해놓고 마치 제가 억울한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이어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이 저의 잘못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우치고 이 자리에 나오게 됐다”고 덧붙였다. 그는 돈 때문에 심경고백에 나섰다는 소문을 강력하게 부정하며 “중국 진출 5년 만에 영화 14편을 찍고 60부 드라마에 출연했다”면서 “절대로 돈 때문에 여기에 나온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유승준은 자신이 현재까지 입국금지 명단에 올라가 있다는 사실에 안타까움도 표했다. 그는 “지금도 입국 금지 명단에 제 이름이 있어 한국땅을 밟을 수 없다”면서 ”제가 알기에는 사상범 아니면 오사마 빈 라덴과 같은 정치범과 입국금지 명단에 이름에 올라와 있다고 한다”고 말했다. 또 지난해 7월에는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귀화해 군대에 가겠다는 뜻을 한국 측에 전달했지만 나이 제한으로 무산됐다고 덧붙였다. 유승준은 이제라도 군대를 가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를 재차 밝혔다. 법무부와 병무청이 그러한 제안을 해오면 망설임 없이 받아들일 의향이 있다며 “어떤 방법으로라도 한국 땅을 꼭 밟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제가 내린 결정이 이렇게 큰 물의를 일으킬 지 몰랐다”며 “제 아이뿐만 아니라 저를 위해 군대를 가 아이들과 떳떳하게 한국 땅을 밟고 싶다”고 흐느꼈다. 하지만 병무청은 13년 전과 달라질 건 없다는 입장이다. 병무청 관계자는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논할 가치도 없다. 다시 얘기할 필요도 없는 사항이다”면서 “스티브유(유승준)가 병역기피를 목적으로 미국시민권을 획득했는데 우리 법률상 국적을 회복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우리 국적법 제9조에 따르면 병역 기피를 목적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상실한 사람은 국적회복을 할 수 없도록 돼 있다. 긴급 여론조사에서도 국민 약 3명 중 2명은 병역 기피 논란으로 입국금지된 가수 유승준(39)의 입국을 허용하는 데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에 따르면 19일 전국 19세 이상 5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유승준 입국 허용에 대해 ‘반대한다’는 의견이 66.2%로 집계됐다. 이번 여론조사에서 입국 허용에 ‘찬성한다’는 의견은 24.8%였으며, 9.0%는 ‘잘 모른다’고 답했다. 성별로는 남성이 찬성 24.4%, 반대 71.0%, 여성이 찬성 25.1%, 반대 61.4%로, 남성의 반대 비율이 더 높았다. 반대 비율을 연령대별로 보면 20대(찬성 21.6%, 반대 76.4%)에서 가장 많았고, 이어 60대 이상(70.2%), 50대(69.0%), 40대(63.5%), 30대(52.3%) 순으로 조사됐다. 이번 조사의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4.4%포인트이며, 응답률은 5.6%다. 다음은 유승준과의 일문일답이다. -- 만 38세가 군대에 갈 수 있는 최대 연령이다. 이제 만 39살이 돼 무엇인가를 밝힌다는 것에 의구심이 든다. 이 타이밍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제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비난, 질타의 말씀이 많아서 솔직히 복귀하는 게 자신 없었다.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라서 13년간 한국을 거의 안 보고 살았다. 그래야 살 거 같았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아이들이 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제 문제로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제 마음도 평온하지 못한 게 옳지 못하다고 생각해 작년 7월 시민권을 포기하고 귀화해서 군대를 가고 싶다고 한국에 연락했다. 그게 만 38살이었다. 당시 청룽(成龍) 영화를 찍고 있었는데 청룽에게 지금 군대를 가겠다고 하니 저보고 대뜸 결정 잘했다고 하더라. 그런데 만 38세까지 군대에 갈 수 있는 건 1980년 이후 태어난 사람에게만 적용되더라. 저처럼 1970년대생들은 만 36세가 징집 최대연령이라고 해서 그 계획은 무산됐다. -- 처음부터 군대 갈 생각이 있었나. ▲ 저는 군대에 대해 전혀 거부반응이 없다. 어릴 때부터 건강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좋아했고 아버지도 군대에 가야된다고 말씀하셨다. 어릴 때부터 가야 된다고 생각하고 가려고 했다. -- 신체검사에서 4급을 받았다. 허리문제였나. ▲ 제가 5집 활동하고 조용필 선배님 곡 리메이크 할 때였다. 뮤직비디오 촬영하다가 무대에서 떨어져서 허리를 다쳤다. 병원에 가서 CT 촬영하니 디스크가 문제라고 했다. 지금 수술해야 한다고 했지만 겁이 나 수술을 안 받았다. 그때부터 병역기피 기사가 나더라. 저는 ‘허리를 다쳤는데 병역기피 기사가 왜 날까’하고 의아했다. 아버지가 인생에서 건강이 최고라고 설득하셔서 결국 수술받았다. -- 당시 해병대 홍보대사를 한 건 사실인가. ▲ 사실이 아니다. 금연 홍보대사 외에는 다른 홍보대사를 한 기억이 없다. -- 해병대에 자진입대한다고 기사도 났었다. ▲ 당시 집 앞에서 기자 한 분이 ‘체격도 좋은데 해병대 가도 되겠네’라고 하셔서 ‘그렇죠’라고 대답한 것이 다음 날 1면에 기사화됐다. -- 2002년 입대 앞두고 미국 시민권 취득을 위해 일본 공연을 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 전혀 아니다. 시민권 관련 인터뷰가 원래 2001년 10월경에 있었다. 아버지가 인터뷰를 하고 시민권을 취득하라 하셨지만 저는 국민과 약속한 상태였기 때문에 끝까지 안 간다고 했다. 그런데 9·11 테러 사건 이후 시민권 한번 거부하면 다시 재발급이 어려워졌다. 일본 공연 갈 때 절묘하게 시민권 인터뷰가 또 잡혔다. 저는 전혀 마음의 흔들림 없이 군대에 간다고 했지만 아버지가 인터뷰 거절하면 너는 한국 국적 되고, 우리는 미국 국적 되니 만나기 어려워진다고 하시더라. 군대 가기 전에 얼굴만 보고 가라고 하셔서 일본 공연 후 미국에 가게 됐다.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돌아오는 계획이었다. -- 그런데 시민권을 취득한 이유는 무엇인가. ▲ 부모님 설득이 가장 컸다. 가족들이 다 미국에 있고, 기반도 미국에서 잡았는데 네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때 저는 앨범을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6, 7집을 계약을 37억 원에 했고, 제가 일을 안 하면 회사도 문을 닫아야 했다. 제가 군대에 가는 것조차 이기적일 수 있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시더라. 이건 제 개인적인 문제고 부모님을 탓하는 게 아니다. 제 사인 한 장에 수십억이 오가는 상황에서 저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 그때 결정을 되돌아보니 어떤가. ▲ 참 교만했고, 정신이 없었던 거 같다. 부족하고, 그런 걸 감당할만한 성숙함이 없었다. 제 나이 스물다섯 때였다. -- 미국에서 시민권 취득하고 한국행 비행기를 타며 무슨 생각을 했나. ▲ 왜 군대 가려다 심경에 변화가 왔는지 밝히려고 63빌딩에서 기자회견도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어떻게 상황이 돌아가는지 전혀 몰랐다. -- 공항 도착 후 어떤 상황이었나. ▲ 비행기에서 내리니 기자들이 게이트 앞까지 나와 기다리더라. 저에게 시민권 왜 취득했는지 반말로 다그치며 물어봤다. 출입국 관리하는 데까지 갔는데 어떤 분이 영어로 ‘문제가 됐으니 돌아가라’고 말했다. 법에 근거해 입국금지라고 하더라. -- 입국금지 소식을 듣고 어떤 기분이었나. ▲ 당황스러웠다. 다른 나라에 온 거 같았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던지 입국금지 된 거 알면서 지금의 아내인 여자친구에게 전화해 쉰다고, 일을 안 한다고 좋아했다. -- 미국에 가서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간다고 느꼈나. ▲ 한참을 모르다가 제가 찍은 방송이 ‘불방’되면서 제가 생각했던 거보다 상황이 멀리 간다는 걸 알게 됐다. -- 한국에서는 ‘거짓말쟁이’, ‘매국노’, ‘배신자’라는 비난이 끊이질 않는다. ▲ 한국 쪽을 거의 안 봤다. 그래야 살 거 같았다. 누군가가 코미디 프로그램에 나와 저를 미국으로 도망간 계집애라고 하더라. 근데 시청자들이 그걸 보고 같이 웃는 걸 가족들과 함께 봤다. 그 이후로 아무것도 안 봤다. -- 대한민국 국민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나. ▲ 시간이 오래 지나 이렇게 사죄 말씀을 드려 죄송하다. 일찍 나와서 용서를 구해야 했다. 용기가 없어 나오지 못했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다시금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 유승준이란 이름을 다시 회복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다.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고 크게 실망하셨던 부분 사죄드린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유승준 인터뷰 심경 고백, 무릎 꿇고 “해병대 홍보대사 사실 아냐…군대 가고 싶다”

    유승준 인터뷰 심경 고백, 무릎 꿇고 “해병대 홍보대사 사실 아냐…군대 가고 싶다”

    유승준 인터뷰 심경 고백 유승준 인터뷰 심경 고백, 무릎 꿇고 “해병대 홍보대사 사실 아냐…군대 가고 싶다” 병역 기피 논란으로 입국금지된 가수 겸 배우 유승준(39)이 19일 인터넷방송에 출연해 “시간을 돌이킬 수 있다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군대를 가겠다”며 “어떤 방법으로도 아이들과 함께 떳떳하게 한국땅을 밟고 싶다”고 밝혔다. 유승준은 이날 밤 10시30분 영화제작자 신현원 감독이 진행하는 아프리카TV(afreeca.com/shinpro) 생방송에 출연해 병역기피 논란으로 국내 무대에서 퇴출된 심정을 밝혔다. 유승준의 인터뷰는 감독이 질문하면 유승준이 답변하는 방식으로 1시간 10분동안 진행됐다. 방송에 앞서 무릎을 꿇고 흐느낀 유승준은 “제 어눌한 말솜씨 때문에 제 마음을 잘 전달할 수 없을 거 같아 무릎을 꿇었다”며 “이 자리는 제 심경 고백도 아니고, 변명의 자리도 아니고, 여러분께 제 잘못을 사죄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줄곧 울먹이는 목소리로 13년 만에 방송에 출연한 계기를 설명했다. 유승준은 “솔직히 용기가 안 났고 제 마음을 전할 수 있을만한 마음의 준비가 안 됐었다”며 “또 작년까지는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잘못은 제가 해놓고 마치 제가 억울한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이어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이 저의 잘못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우치고 이 자리에 나오게 됐다”고 덧붙였다. 그는 돈 때문에 심경고백에 나섰다는 소문을 강력하게 부정하며 “중국 진출 5년 만에 영화 14편을 찍고 60부 드라마에 출연했다”면서 “절대로 돈 때문에 여기에 나온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유승준은 자신이 현재까지 입국금지 명단에 올라가 있다는 사실에 안타까움도 표했다. 그는 “지금도 입국 금지 명단에 제 이름이 있어 한국땅을 밟을 수 없다”면서 ”제가 알기에는 사상범 아니면 오사마 빈 라덴과 같은 정치범과 입국금지 명단에 이름에 올라와 있다고 한다”고 말했다. 또 지난해 7월에는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귀화해 군대에 가겠다는 뜻을 한국 측에 전달했지만 나이 제한으로 무산됐다고 덧붙였다. 유승준은 이제라도 군대를 가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를 재차 밝혔다. 법무부와 병무청이 그러한 제안을 해오면 망설임 없이 받아들일 의향이 있다며 “어떤 방법으로라도 한국 땅을 꼭 밟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제가 내린 결정이 이렇게 큰 물의를 일으킬 지 몰랐다”며 “제 아이뿐만 아니라 저를 위해 군대를 가 아이들과 떳떳하게 한국 땅을 밟고 싶다”고 흐느꼈다. 하지만 병무청은 13년 전과 달라질 건 없다는 입장이다. 병무청 관계자는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논할 가치도 없다. 다시 얘기할 필요도 없는 사항이다”면서 “스티브유(유승준)가 병역기피를 목적으로 미국시민권을 획득했는데 우리 법률상 국적을 회복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우리 국적법 제9조에 따르면 병역 기피를 목적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상실한 사람은 국적회복을 할 수 없도록 돼 있다. 긴급 여론조사에서도 국민 약 3명 중 2명은 병역 기피 논란으로 입국금지된 가수 유승준(39)의 입국을 허용하는 데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에 따르면 19일 전국 19세 이상 5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유승준 입국 허용에 대해 ‘반대한다’는 의견이 66.2%로 집계됐다. 이번 여론조사에서 입국 허용에 ‘찬성한다’는 의견은 24.8%였으며, 9.0%는 ‘잘 모른다’고 답했다. 성별로는 남성이 찬성 24.4%, 반대 71.0%, 여성이 찬성 25.1%, 반대 61.4%로, 남성의 반대 비율이 더 높았다. 반대 비율을 연령대별로 보면 20대(찬성 21.6%, 반대 76.4%)에서 가장 많았고, 이어 60대 이상(70.2%), 50대(69.0%), 40대(63.5%), 30대(52.3%) 순으로 조사됐다. 이번 조사의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4.4%포인트이며, 응답률은 5.6%다. 다음은 유승준과의 일문일답이다. -- 만 38세가 군대에 갈 수 있는 최대 연령이다. 이제 만 39살이 돼 무엇인가를 밝힌다는 것에 의구심이 든다. 이 타이밍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제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비난, 질타의 말씀이 많아서 솔직히 복귀하는 게 자신 없었다.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라서 13년간 한국을 거의 안 보고 살았다. 그래야 살 거 같았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아이들이 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제 문제로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제 마음도 평온하지 못한 게 옳지 못하다고 생각해 작년 7월 시민권을 포기하고 귀화해서 군대를 가고 싶다고 한국에 연락했다. 그게 만 38살이었다. 당시 청룽(成龍) 영화를 찍고 있었는데 청룽에게 지금 군대를 가겠다고 하니 저보고 대뜸 결정 잘했다고 하더라. 그런데 만 38세까지 군대에 갈 수 있는 건 1980년 이후 태어난 사람에게만 적용되더라. 저처럼 1970년대생들은 만 36세가 징집 최대연령이라고 해서 그 계획은 무산됐다. -- 처음부터 군대 갈 생각이 있었나. ▲ 저는 군대에 대해 전혀 거부반응이 없다. 어릴 때부터 건강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좋아했고 아버지도 군대에 가야된다고 말씀하셨다. 어릴 때부터 가야 된다고 생각하고 가려고 했다. -- 신체검사에서 4급을 받았다. 허리문제였나. ▲ 제가 5집 활동하고 조용필 선배님 곡 리메이크 할 때였다. 뮤직비디오 촬영하다가 무대에서 떨어져서 허리를 다쳤다. 병원에 가서 CT 촬영하니 디스크가 문제라고 했다. 지금 수술해야 한다고 했지만 겁이 나 수술을 안 받았다. 그때부터 병역기피 기사가 나더라. 저는 ‘허리를 다쳤는데 병역기피 기사가 왜 날까’하고 의아했다. 아버지가 인생에서 건강이 최고라고 설득하셔서 결국 수술받았다. -- 당시 해병대 홍보대사를 한 건 사실인가. ▲ 사실이 아니다. 금연 홍보대사 외에는 다른 홍보대사를 한 기억이 없다. -- 해병대에 자진입대한다고 기사도 났었다. ▲ 당시 집 앞에서 기자 한 분이 ‘체격도 좋은데 해병대 가도 되겠네’라고 하셔서 ‘그렇죠’라고 대답한 것이 다음 날 1면에 기사화됐다. -- 2002년 입대 앞두고 미국 시민권 취득을 위해 일본 공연을 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 전혀 아니다. 시민권 관련 인터뷰가 원래 2001년 10월경에 있었다. 아버지가 인터뷰를 하고 시민권을 취득하라 하셨지만 저는 국민과 약속한 상태였기 때문에 끝까지 안 간다고 했다. 그런데 9·11 테러 사건 이후 시민권 한번 거부하면 다시 재발급이 어려워졌다. 일본 공연 갈 때 절묘하게 시민권 인터뷰가 또 잡혔다. 저는 전혀 마음의 흔들림 없이 군대에 간다고 했지만 아버지가 인터뷰 거절하면 너는 한국 국적 되고, 우리는 미국 국적 되니 만나기 어려워진다고 하시더라. 군대 가기 전에 얼굴만 보고 가라고 하셔서 일본 공연 후 미국에 가게 됐다.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돌아오는 계획이었다. -- 그런데 시민권을 취득한 이유는 무엇인가. ▲ 부모님 설득이 가장 컸다. 가족들이 다 미국에 있고, 기반도 미국에서 잡았는데 네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때 저는 앨범을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6, 7집을 계약을 37억 원에 했고, 제가 일을 안 하면 회사도 문을 닫아야 했다. 제가 군대에 가는 것조차 이기적일 수 있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시더라. 이건 제 개인적인 문제고 부모님을 탓하는 게 아니다. 제 사인 한 장에 수십억이 오가는 상황에서 저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 그때 결정을 되돌아보니 어떤가. ▲ 참 교만했고, 정신이 없었던 거 같다. 부족하고, 그런 걸 감당할만한 성숙함이 없었다. 제 나이 스물다섯 때였다. -- 미국에서 시민권 취득하고 한국행 비행기를 타며 무슨 생각을 했나. ▲ 왜 군대 가려다 심경에 변화가 왔는지 밝히려고 63빌딩에서 기자회견도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어떻게 상황이 돌아가는지 전혀 몰랐다. -- 공항 도착 후 어떤 상황이었나. ▲ 비행기에서 내리니 기자들이 게이트 앞까지 나와 기다리더라. 저에게 시민권 왜 취득했는지 반말로 다그치며 물어봤다. 출입국 관리하는 데까지 갔는데 어떤 분이 영어로 ‘문제가 됐으니 돌아가라’고 말했다. 법에 근거해 입국금지라고 하더라. -- 입국금지 소식을 듣고 어떤 기분이었나. ▲ 당황스러웠다. 다른 나라에 온 거 같았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던지 입국금지 된 거 알면서 지금의 아내인 여자친구에게 전화해 쉰다고, 일을 안 한다고 좋아했다. -- 미국에 가서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간다고 느꼈나. ▲ 한참을 모르다가 제가 찍은 방송이 ‘불방’되면서 제가 생각했던 거보다 상황이 멀리 간다는 걸 알게 됐다. -- 한국에서는 ‘거짓말쟁이’, ‘매국노’, ‘배신자’라는 비난이 끊이질 않는다. ▲ 한국 쪽을 거의 안 봤다. 그래야 살 거 같았다. 누군가가 코미디 프로그램에 나와 저를 미국으로 도망간 계집애라고 하더라. 근데 시청자들이 그걸 보고 같이 웃는 걸 가족들과 함께 봤다. 그 이후로 아무것도 안 봤다. -- 대한민국 국민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나. ▲ 시간이 오래 지나 이렇게 사죄 말씀을 드려 죄송하다. 일찍 나와서 용서를 구해야 했다. 용기가 없어 나오지 못했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다시금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 유승준이란 이름을 다시 회복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다.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고 크게 실망하셨던 부분 사죄드린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유승준 인터뷰] 아프리카 TV 방송 “군대가겠다” 병무청 입장 들어보니

    [유승준 인터뷰] 아프리카 TV 방송 “군대가겠다” 병무청 입장 들어보니

    유승준 인터뷰, 유승준 아프리카 [유승준 인터뷰] 아프리카 TV 방송 “군대가겠다” 병무청 입장 들어보니 병역 기피 논란으로 입국금지된 가수 겸 배우 유승준(39)이 19일 인터넷방송에 출연해 “시간을 돌이킬 수 있다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군대를 가겠다”며 “어떤 방법으로도 아이들과 함께 떳떳하게 한국땅을 밟고 싶다”고 밝혔다. 유승준은 이날 밤 10시30분 영화제작자 신현원 감독이 진행하는 아프리카TV(afreeca.com/shinpro) 생방송에 출연해 병역기피 논란으로 국내 무대에서 퇴출된 심정을 밝혔다. 유승준의 인터뷰는 감독이 질문하면 유승준이 답변하는 방식으로 1시간 10분동안 진행됐다. 방송에 앞서 무릎을 꿇고 흐느낀 유승준은 “제 어눌한 말솜씨 때문에 제 마음을 잘 전달할 수 없을 거 같아 무릎을 꿇었다”며 “이 자리는 제 심경 고백도 아니고, 변명의 자리도 아니고, 여러분께 제 잘못을 사죄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줄곧 울먹이는 목소리로 13년 만에 방송에 출연한 계기를 설명했다. 유승준은 “솔직히 용기가 안 났고 제 마음을 전할 수 있을만한 마음의 준비가 안 됐었다”며 “또 작년까지는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잘못은 제가 해놓고 마치 제가 억울한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이어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이 저의 잘못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우치고 이 자리에 나오게 됐다”고 덧붙였다. 그는 돈 때문에 심경고백에 나섰다는 소문을 강력하게 부정하며 “중국 진출 5년 만에 영화 14편을 찍고 60부 드라마에 출연했다”면서 “절대로 돈 때문에 여기에 나온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유승준은 자신이 현재까지 입국금지 명단에 올라가 있다는 사실에 안타까움도 표했다. 그는 “지금도 입국 금지 명단에 제 이름이 있어 한국땅을 밟을 수 없다”면서 ”제가 알기에는 사상범 아니면 오사마 빈 라덴과 같은 정치범과 입국금지 명단에 이름에 올라와 있다고 한다”고 말했다. 또 지난해 7월에는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귀화해 군대에 가겠다는 뜻을 한국 측에 전달했지만 나이 제한으로 무산됐다고 덧붙였다. 유승준은 이제라도 군대를 가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를 재차 밝혔다. 법무부와 병무청이 그러한 제안을 해오면 망설임 없이 받아들일 의향이 있다며 “어떤 방법으로라도 한국 땅을 꼭 밟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제가 내린 결정이 이렇게 큰 물의를 일으킬 지 몰랐다”며 “제 아이뿐만 아니라 저를 위해 군대를 가 아이들과 떳떳하게 한국 땅을 밟고 싶다”고 흐느꼈다. 하지만 병무청은 13년 전과 달라질 건 없다는 입장이다. 병무청 관계자는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논할 가치도 없다. 다시 얘기할 필요도 없는 사항이다”면서 “스티브유(유승준)가 병역기피를 목적으로 미국시민권을 획득했는데 우리 법률상 국적을 회복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우리 국적법 제9조에 따르면 병역 기피를 목적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상실한 사람은 국적회복을 할 수 없도록 돼 있다. 다음은 유승준과의 일문일답이다. -- 만 38세가 군대에 갈 수 있는 최대 연령이다. 이제 만 39살이 돼 무엇인가를 밝힌다는 것에 의구심이 든다. 이 타이밍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제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비난, 질타의 말씀이 많아서 솔직히 복귀하는 게 자신 없었다.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라서 13년간 한국을 거의 안 보고 살았다. 그래야 살 거 같았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아이들이 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제 문제로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제 마음도 평온하지 못한 게 옳지 못하다고 생각해 작년 7월 시민권을 포기하고 귀화해서 군대를 가고 싶다고 한국에 연락했다. 그게 만 38살이었다. 당시 청룽(成龍) 영화를 찍고 있었는데 청룽에게 지금 군대를 가겠다고 하니 저보고 대뜸 결정 잘했다고 하더라. 그런데 만 38세까지 군대에 갈 수 있는 건 1980년 이후 태어난 사람에게만 적용되더라. 저처럼 1970년대생들은 만 36세가 징집 최대연령이라고 해서 그 계획은 무산됐다. -- 처음부터 군대 갈 생각이 있었나. ▲ 저는 군대에 대해 전혀 거부반응이 없다. 어릴 때부터 건강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좋아했고 아버지도 군대에 가야된다고 말씀하셨다. 어릴 때부터 가야 된다고 생각하고 가려고 했다. -- 신체검사에서 4급을 받았다. 허리문제였나. ▲ 제가 5집 활동하고 조용필 선배님 곡 리메이크 할 때였다. 뮤직비디오 촬영하다가 무대에서 떨어져서 허리를 다쳤다. 병원에 가서 CT 촬영하니 디스크가 문제라고 했다. 지금 수술해야 한다고 했지만 겁이 나 수술을 안 받았다. 그때부터 병역기피 기사가 나더라. 저는 ‘허리를 다쳤는데 병역기피 기사가 왜 날까’하고 의아했다. 아버지가 인생에서 건강이 최고라고 설득하셔서 결국 수술받았다. -- 당시 해병대 홍보대사를 한 건 사실인가. ▲ 사실이 아니다. 금연 홍보대사 외에는 다른 홍보대사를 한 기억이 없다. -- 해병대에 자진입대한다고 기사도 났었다. ▲ 당시 집 앞에서 기자 한 분이 ‘체격도 좋은데 해병대 가도 되겠네’라고 하셔서 ‘그렇죠’라고 대답한 것이 다음 날 1면에 기사화됐다. -- 2002년 입대 앞두고 미국 시민권 취득을 위해 일본 공연을 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 전혀 아니다. 시민권 관련 인터뷰가 원래 2001년 10월경에 있었다. 아버지가 인터뷰를 하고 시민권을 취득하라 하셨지만 저는 국민과 약속한 상태였기 때문에 끝까지 안 간다고 했다. 그런데 9·11 테러 사건 이후 시민권 한번 거부하면 다시 재발급이 어려워졌다. 일본 공연 갈 때 절묘하게 시민권 인터뷰가 또 잡혔다. 저는 전혀 마음의 흔들림 없이 군대에 간다고 했지만 아버지가 인터뷰 거절하면 너는 한국 국적 되고, 우리는 미국 국적 되니 만나기 어려워진다고 하시더라. 군대 가기 전에 얼굴만 보고 가라고 하셔서 일본 공연 후 미국에 가게 됐다.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돌아오는 계획이었다. -- 그런데 시민권을 취득한 이유는 무엇인가. ▲ 부모님 설득이 가장 컸다. 가족들이 다 미국에 있고, 기반도 미국에서 잡았는데 네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때 저는 앨범을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6, 7집을 계약을 37억 원에 했고, 제가 일을 안 하면 회사도 문을 닫아야 했다. 제가 군대에 가는 것조차 이기적일 수 있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시더라. 이건 제 개인적인 문제고 부모님을 탓하는 게 아니다. 제 사인 한 장에 수십억이 오가는 상황에서 저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 그때 결정을 되돌아보니 어떤가. ▲ 참 교만했고, 정신이 없었던 거 같다. 부족하고, 그런 걸 감당할만한 성숙함이 없었다. 제 나이 스물다섯 때였다. -- 미국에서 시민권 취득하고 한국행 비행기를 타며 무슨 생각을 했나. ▲ 왜 군대 가려다 심경에 변화가 왔는지 밝히려고 63빌딩에서 기자회견도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어떻게 상황이 돌아가는지 전혀 몰랐다. -- 공항 도착 후 어떤 상황이었나. ▲ 비행기에서 내리니 기자들이 게이트 앞까지 나와 기다리더라. 저에게 시민권 왜 취득했는지 반말로 다그치며 물어봤다. 출입국 관리하는 데까지 갔는데 어떤 분이 영어로 ‘문제가 됐으니 돌아가라’고 말했다. 법에 근거해 입국금지라고 하더라. -- 입국금지 소식을 듣고 어떤 기분이었나. ▲ 당황스러웠다. 다른 나라에 온 거 같았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던지 입국금지 된 거 알면서 지금의 아내인 여자친구에게 전화해 쉰다고, 일을 안 한다고 좋아했다. -- 미국에 가서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간다고 느꼈나. ▲ 한참을 모르다가 제가 찍은 방송이 ‘불방’되면서 제가 생각했던 거보다 상황이 멀리 간다는 걸 알게 됐다. -- 한국에서는 ‘거짓말쟁이’, ‘매국노’, ‘배신자’라는 비난이 끊이질 않는다. ▲ 한국 쪽을 거의 안 봤다. 그래야 살 거 같았다. 누군가가 코미디 프로그램에 나와 저를 미국으로 도망간 계집애라고 하더라. 근데 시청자들이 그걸 보고 같이 웃는 걸 가족들과 함께 봤다. 그 이후로 아무것도 안 봤다. -- 대한민국 국민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나. ▲ 시간이 오래 지나 이렇게 사죄 말씀을 드려 죄송하다. 일찍 나와서 용서를 구해야 했다. 용기가 없어 나오지 못했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다시금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 유승준이란 이름을 다시 회복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다.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고 크게 실망하셨던 부분 사죄드린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생생영상] 유승준, 13년 만에 첫 공식 심경 고백

    [생생영상] 유승준, 13년 만에 첫 공식 심경 고백

    병역 기피 논란으로 입국금지된 가수 겸 배우 스티브 유(39·한국명 유승준)가 19일 인터넷방송에 출연해 인터뷰를 가졌다. 유승준은 이날 밤 10시 30분부터 영화제작자 신현원 감독이 진행하는 아프리카TV 생방송에 출연해 병역기피 논란으로 국내 무대에서 퇴출된 심경을 밝혔다. 인터뷰에 앞서 무릎을 꿇고 흐느낀 유승준은 “제 어눌한 말솜씨 때문에 제 마음을 잘 전달할 수 없을 거 같아 무릎을 꿇었다”며 “이 자리는 제 심경 고백도 아니고, 변명의 자리도 아니고, 여러분께 제 잘못을 사죄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줄곧 울먹이는 목소리로 13년 만에 방송에 출연한 계기를 설명했다. 유승준은 “솔직히 용기가 안 났고 제 마음을 전할 수 있을만한 마음의 준비가 안 됐었다”며 “또 작년까지는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잘못은 제가 해놓고 마치 제가 억울한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이어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이 저의 잘못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우치고 이 자리에 나오게 됐다”고 덧붙였다. 그는 돈 때문에 심경고백에 나섰다는 소문을 강력하게 부정하며 “중국 진출 5년 만에 영화 14편을 찍고 60부 드라마에 출연했다”며 “절대로 돈 때문에 여기에 나온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유승준은 자신이 현재까지 입국금지 명단에 올라가 있다는 사실에 안타까움도 표했다. 그는 “지금도 입국 금지 명단에 제 이름이 있어 한국땅을 밟을 수 없다”며 “제가 알기에는 사상범 아니면 오사마 빈 라덴 같은 정치범과 입국금지 명단에 이름에 올라와 있다고 한다”고 말했다. 또 지난해 7월에는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귀화해 군대에 가겠다는 뜻을 한국 측에 전달했지만 나이 제한으로 무산됐다고 덧붙였다. 유승준은 이제라도 군대를 가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를 재차 밝혔다. 법무부와 병무청이 그러한 제안을 해오면 망설임 없이 받아들일 의향이 있다며 “어떤 방법으로라도 한국 땅을 꼭 밟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제가 내린 결정이 이렇게 큰 물의를 일으킬 지 몰랐다”며 “제 아이뿐만 아니라 저를 위해 군대를 가 아이들과 떳떳하게 한국 땅을 밟고 싶다”고 흐느꼈다. 다음은 유승준과의 일문일답. Q. 만 38세가 군대에 갈 수 있는 최대 연령이다. 이제 만 39살이 돼 무엇인가를 밝힌다는 것에 의구심이 든다. 이 타이밍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유승준: 제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비난, 질타의 말씀이 많아서 솔직히 복귀하는 게 자신 없었다.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라서 13년간 한국을 거의 안 보고 살았다. 그래야 살 거 같았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아이들이 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제 문제로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제 마음도 평온하지 못하고 옳지 못하다고 생각해 작년 7월 시민권을 포기하고 귀화해서 군대를 가고 싶다고 한국에 연락했다. 그게 만 38살이었다. 당시 청룽(成龍) 영화를 찍고 있었는데 청룽에게 지금 군대를 가겠다고 하니 저보고 대뜸 결정 잘했다고 하더라. 그런데 만 38세까지 군대에 갈 수 있는 건 1980년 이후 태어난 사람에게만 적용되더라. 저처럼 1970년대생들은 만 36세가 징집 최대연령이라고 해서 그 계획은 무산됐다. Q. 처음부터 군대 갈 생각이 있었나. 유승준: 저는 군대에 대해 전혀 거부반응이 없다. 어릴 때부터 건강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좋아했고 아버지도 군대에 가야된다고 말씀하셨다. 어릴 때부터 가야 된다고 생각하고 가려고 했다. Q. 신체검사에서 4급을 받았다. 허리문제였나. 유승준: 제가 5집 활동하고 조용필 선배님 곡 리메이크 할 때였다. 뮤직비디오 촬영하다가 무대에서 떨어져서 허리를 다쳤다. 병원에 가서 CT 촬영하니 디스크가 문제라고 했다. 지금 수술해야 한다고 했지만 겁이 나 수술을 안 받았다. 그때부터 병역기피 기사가 나더라. 저는 ‘허리를 다쳤는데 병역기피 기사가 왜 날까’하고 의아했다. 아버지가 인생에서 건강이 최고라고 설득하셔서 결국 수술받았다. Q. 당시 해병대 홍보대사를 한 건 사실인가. 유승준: 사실이 아니다. 금연 홍보대사 외에는 다른 홍보대사를 한 기억이 없다. Q. 해병대에 자진입대한다고 기사도 났었다. 유승준: 당시 집 앞에서 기자 한 분이 ‘체격도 좋은데 해병대 가도 되겠네’라고 하셔서 ‘그렇죠’라고 대답한 것이 다음 날 1면에 기사화됐다. Q. 2002년 입대 앞두고 미국 시민권 취득을 위해 일본 공연을 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유승준: 전혀 아니다. 시민권 관련 인터뷰가 원래 2001년 10월경에 있었다. 아버지가 인터뷰를 하고 시민권을 취득하라 하셨지만 저는 국민과 약속한 상태였기 때문에 끝까지 안 간다고 했다. 그런데 9·11 테러 사건 이후 시민권 한번 거부하면 다시 재발급이 어려워졌다. 일본 공연 갈 때 절묘하게 시민권 인터뷰가 또 잡혔다. 저는 전혀 마음의 흔들림 없이 군대에 간다고 했지만 아버지가 인터뷰 거절하면 너는 한국 국적 되고, 우리는 미국 국적 되니 만나기 어려워진다고 하시더라. 군대 가기 전에 얼굴만 보고 가라고 하셔서 일본 공연 후 미국에 가게 됐다.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돌아오는 계획이었다. Q. 그런데 시민권을 취득한 이유는 무엇인가. 유승준: 부모님 설득이 가장 컸다. 가족들이 다 미국에 있고, 기반도 미국에서 잡았는데 네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때 저는 앨범을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6, 7집 계약을 37억 원에 했고, 제가 일을 안 하면 회사도 문을 닫아야 했다. 제가 군대에 가는 것조차 이기적일 수 있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시더라. 이건 제 개인적인 문제고 부모님을 탓하는 게 아니다. 제 사인 한 장에 수십억이 오가는 상황에서 저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Q. 그때 결정을 되돌아보니 어떤가. 유승준: 참 교만했고, 정신이 없었던 거 같다. 부족하고, 그런 걸 감당할만한 성숙함이 없었다. 제 나이 스물다섯 때였다. Q. 미국에서 시민권 취득하고 한국행 비행기를 타며 무슨 생각을 했나. 유승준: 왜 군대 가려다 심경에 변화가 왔는지 밝히려고 63빌딩에서 기자회견도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어떻게 상황이 돌아가는지 전혀 몰랐다. Q. 공항 도착 후 어떤 상황이었나. 유승준: 비행기에서 내리니 기자들이 게이트 앞까지 나와 기다리더라. 저에게 시민권 왜 취득했는지 반말로 다그치며 물어봤다. 출입국 관리하는 데까지 갔는데 어떤 분이 영어로 ‘문제가 됐으니 돌아가라’고 말했다. 법에 근거해 입국금지라고 하더라. Q. 입국금지 소식을 듣고 어떤 기분이었나. 유승준: 당황스러웠다. 다른 나라에 온 거 같았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던지 입국금지 된 거 알면서 지금의 아내인 여자친구에게 전화해 쉰다고, 일을 안 한다고 좋아했다. Q. 미국에 가서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간다고 느꼈나. 유승준: 한참을 모르다가 제가 찍은 방송이 ‘불방’되면서 제가 생각했던 거보다 상황이 멀리 간다는 걸 알게 됐다. Q. 한국에서는 ‘거짓말쟁이’, ‘매국노’, ‘배신자’라는 비난이 끊이질 않는다. 유승준: 한국 쪽을 거의 안 봤다. 그래야 살 거 같았다. 누군가가 코미디 프로그램에 나와 저를 미국으로 도망간 계집애라고 하더라. 근데 시청자들이 그걸 보고 같이 웃는 걸 가족들과 함께 봤다. 그 이후로 아무것도 안 봤다. Q. 대한민국 국민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나. 유승준: 시간이 오래 지나 이렇게 사죄 말씀을 드려 죄송하다. 일찍 나와서 용서를 구해야 했다. 용기가 없어 나오지 못했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다시금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 유승준이란 이름을 다시 회복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다.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고 크게 실망하셨던 부분 사죄드린다. 사진 영상=아프리카TV, TM tvc(유튜브)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병역기피’ 유승준 인터뷰 일문일답

    ‘병역기피’ 유승준 인터뷰 일문일답

    병역 기피 논란으로 입국금지된 가수 겸 배우 스티브 유(39·한국명 유승준)가 19일 인터넷방송에 출연해 인터뷰를 가졌다. 유승준은 이날 밤 10시 30분부터 영화제작자 신현원 감독이 진행하는 아프리카TV 생방송에 출연해 병역기피 논란으로 국내 무대에서 퇴출된 심경을 밝혔다. 인터뷰에 앞서 무릎을 꿇고 흐느낀 유승준은 “제 어눌한 말솜씨 때문에 제 마음을 잘 전달할 수 없을 거 같아 무릎을 꿇었다”며 “이 자리는 제 심경 고백도 아니고, 변명의 자리도 아니고, 여러분께 제 잘못을 사죄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줄곧 울먹이는 목소리로 13년 만에 방송에 출연한 계기를 설명했다. 유승준은 “솔직히 용기가 안 났고 제 마음을 전할 수 있을만한 마음의 준비가 안 됐었다”며 “또 작년까지는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잘못은 제가 해놓고 마치 제가 억울한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이어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이 저의 잘못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우치고 이 자리에 나오게 됐다”고 덧붙였다. 그는 돈 때문에 심경고백에 나섰다는 소문을 강력하게 부정하며 “중국 진출 5년 만에 영화 14편을 찍고 60부 드라마에 출연했다”며 “절대로 돈 때문에 여기에 나온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유승준은 자신이 현재까지 입국금지 명단에 올라가 있다는 사실에 안타까움도 표했다. 그는 “지금도 입국 금지 명단에 제 이름이 있어 한국땅을 밟을 수 없다”며 “제가 알기에는 사상범 아니면 오사마 빈 라덴과 같은 정치범과 입국금지 명단에 이름에 올라와 있다고 한다”고 말했다. 또 지난해 7월에는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귀화해 군대에 가겠다는 뜻을 한국 측에 전달했지만 나이 제한으로 무산됐다고 덧붙였다. 유승준은 이제라도 군대를 가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를 재차 밝혔다. 법무부와 병무청이 그러한 제안을 해오면 망설임 없이 받아들일 의향이 있다며 “어떤 방법으로라도 한국 땅을 꼭 밟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제가 내린 결정이 이렇게 큰 물의를 일으킬 지 몰랐다”며 “제 아이뿐만 아니라 저를 위해 군대를 가 아이들과 떳떳하게 한국 땅을 밟고 싶다”고 흐느꼈다. 다음은 유승준과의 일문일답. Q. 만 38세가 군대에 갈 수 있는 최대 연령이다. 이제 만 39살이 돼 무엇인가를 밝힌다는 것에 의구심이 든다. 이 타이밍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유승준: 제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비난, 질타의 말씀이 많아서 솔직히 복귀하는 게 자신 없었다.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라서 13년간 한국을 거의 안 보고 살았다. 그래야 살 거 같았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아이들이 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제 문제로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제 마음도 평온하지 못한 게 옳지 못하다고 생각해 작년 7월 시민권을 포기하고 귀화해서 군대를 가고 싶다고 한국에 연락했다. 그게 만 38살이었다. 당시 청룽(成龍) 영화를 찍고 있었는데 청룽에게 지금 군대를 가겠다고 하니 저보고 대뜸 결정 잘했다고 하더라. 그런데 만 38세까지 군대에 갈 수 있는 건 1980년 이후 태어난 사람에게만 적용되더라. 저처럼 1970년대생들은 만 36세가 징집 최대연령이라고 해서 그 계획은 무산됐다. Q. 처음부터 군대 갈 생각이 있었나. 유승준: 저는 군대에 대해 전혀 거부반응이 없다. 어릴 때부터 건강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좋아했고 아버지도 군대에 가야된다고 말씀하셨다. 어릴 때부터 가야 된다고 생각하고 가려고 했다. Q. 신체검사에서 4급을 받았다. 허리문제였나. 유승준: 제가 5집 활동하고 조용필 선배님 곡 리메이크 할 때였다. 뮤직비디오 촬영하다가 무대에서 떨어져서 허리를 다쳤다. 병원에 가서 CT 촬영하니 디스크가 문제라고 했다. 지금 수술해야 한다고 했지만 겁이 나 수술을 안 받았다. 그때부터 병역기피 기사가 나더라. 저는 ‘허리를 다쳤는데 병역기피 기사가 왜 날까’하고 의아했다. 아버지가 인생에서 건강이 최고라고 설득하셔서 결국 수술받았다. Q. 당시 해병대 홍보대사를 한 건 사실인가. 유승준: 사실이 아니다. 금연 홍보대사 외에는 다른 홍보대사를 한 기억이 없다. Q. 해병대에 자진입대한다고 기사도 났었다. 유승준: 당시 집 앞에서 기자 한 분이 ‘체격도 좋은데 해병대 가도 되겠네’라고 하셔서 ‘그렇죠’라고 대답한 것이 다음 날 1면에 기사화됐다. Q. 2002년 입대 앞두고 미국 시민권 취득을 위해 일본 공연을 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유승준: 전혀 아니다. 시민권 관련 인터뷰가 원래 2001년 10월경에 있었다. 아버지가 인터뷰를 하고 시민권을 취득하라 하셨지만 저는 국민과 약속한 상태였기 때문에 끝까지 안 간다고 했다. 그런데 9·11 테러 사건 이후 시민권 한번 거부하면 다시 재발급이 어려워졌다. 일본 공연 갈 때 절묘하게 시민권 인터뷰가 또 잡혔다. 저는 전혀 마음의 흔들림 없이 군대에 간다고 했지만 아버지가 인터뷰 거절하면 너는 한국 국적 되고, 우리는 미국 국적 되니 만나기 어려워진다고 하시더라. 군대 가기 전에 얼굴만 보고 가라고 하셔서 일본 공연 후 미국에 가게 됐다.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돌아오는 계획이었다. Q. 그런데 시민권을 취득한 이유는 무엇인가. 유승준: 부모님 설득이 가장 컸다. 가족들이 다 미국에 있고, 기반도 미국에서 잡았는데 네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때 저는 앨범을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6, 7집을 계약을 37억 원에 했고, 제가 일을 안 하면 회사도 문을 닫아야 했다. 제가 군대에 가는 것조차 이기적일 수 있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시더라. 이건 제 개인적인 문제고 부모님을 탓하는 게 아니다. 제 사인 한 장에 수십억이 오가는 상황에서 저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Q. 그때 결정을 되돌아보니 어떤가. 유승준: 참 교만했고, 정신이 없었던 거 같다. 부족하고, 그런 걸 감당할만한 성숙함이 없었다. 제 나이 스물다섯 때였다. Q. 미국에서 시민권 취득하고 한국행 비행기를 타며 무슨 생각을 했나. 유승준: 왜 군대 가려다 심경에 변화가 왔는지 밝히려고 63빌딩에서 기자회견도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어떻게 상황이 돌아가는지 전혀 몰랐다. Q. 공항 도착 후 어떤 상황이었나. 유승준: 비행기에서 내리니 기자들이 게이트 앞까지 나와 기다리더라. 저에게 시민권 왜 취득했는지 반말로 다그치며 물어봤다. 출입국 관리하는 데까지 갔는데 어떤 분이 영어로 ‘문제가 됐으니 돌아가라’고 말했다. 법에 근거해 입국금지라고 하더라. Q. 입국금지 소식을 듣고 어떤 기분이었나. 유승준: 당황스러웠다. 다른 나라에 온 거 같았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던지 입국금지 된 거 알면서 지금의 아내인 여자친구에게 전화해 쉰다고, 일을 안 한다고 좋아했다. Q. 미국에 가서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간다고 느꼈나. 유승준: 한참을 모르다가 제가 찍은 방송이 ‘불방’되면서 제가 생각했던 거보다 상황이 멀리 간다는 걸 알게 됐다. Q. 한국에서는 ‘거짓말쟁이’, ‘매국노’, ‘배신자’라는 비난이 끊이질 않는다. 유승준: 한국 쪽을 거의 안 봤다. 그래야 살 거 같았다. 누군가가 코미디 프로그램에 나와 저를 미국으로 도망간 계집애라고 하더라. 근데 시청자들이 그걸 보고 같이 웃는 걸 가족들과 함께 봤다. 그 이후로 아무것도 안 봤다. Q. 대한민국 국민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나. 유승준: 시간이 오래 지나 이렇게 사죄 말씀을 드려 죄송하다. 일찍 나와서 용서를 구해야 했다. 용기가 없어 나오지 못했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다시금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 유승준이란 이름을 다시 회복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다.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고 크게 실망하셨던 부분 사죄드린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유승준 인터뷰 심경 고백 “한국 땅 밟고 싶다” 국민 대상 여론조사 해보니 결과가

    유승준 인터뷰 심경 고백 “한국 땅 밟고 싶다” 국민 대상 여론조사 해보니 결과가

    유승준 인터뷰 심경 고백 유승준 인터뷰 심경 고백 “한국 땅 밟고 싶다” 국민 대상 여론조사 해보니 결과가 병역 기피 논란으로 입국금지된 가수 겸 배우 유승준(39)이 19일 인터넷방송에 출연해 “시간을 돌이킬 수 있다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군대를 가겠다”며 “어떤 방법으로도 아이들과 함께 떳떳하게 한국땅을 밟고 싶다”고 밝혔다. 유승준은 이날 밤 10시30분 영화제작자 신현원 감독이 진행하는 아프리카TV(afreeca.com/shinpro) 생방송에 출연해 병역기피 논란으로 국내 무대에서 퇴출된 심정을 밝혔다. 유승준의 인터뷰는 감독이 질문하면 유승준이 답변하는 방식으로 1시간 10분동안 진행됐다. 방송에 앞서 무릎을 꿇고 흐느낀 유승준은 “제 어눌한 말솜씨 때문에 제 마음을 잘 전달할 수 없을 거 같아 무릎을 꿇었다”며 “이 자리는 제 심경 고백도 아니고, 변명의 자리도 아니고, 여러분께 제 잘못을 사죄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줄곧 울먹이는 목소리로 13년 만에 방송에 출연한 계기를 설명했다. 유승준은 “솔직히 용기가 안 났고 제 마음을 전할 수 있을만한 마음의 준비가 안 됐었다”며 “또 작년까지는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잘못은 제가 해놓고 마치 제가 억울한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이어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이 저의 잘못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우치고 이 자리에 나오게 됐다”고 덧붙였다. 그는 돈 때문에 심경고백에 나섰다는 소문을 강력하게 부정하며 “중국 진출 5년 만에 영화 14편을 찍고 60부 드라마에 출연했다”면서 “절대로 돈 때문에 여기에 나온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유승준은 자신이 현재까지 입국금지 명단에 올라가 있다는 사실에 안타까움도 표했다. 그는 “지금도 입국 금지 명단에 제 이름이 있어 한국땅을 밟을 수 없다”면서 ”제가 알기에는 사상범 아니면 오사마 빈 라덴과 같은 정치범과 입국금지 명단에 이름에 올라와 있다고 한다”고 말했다. 또 지난해 7월에는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귀화해 군대에 가겠다는 뜻을 한국 측에 전달했지만 나이 제한으로 무산됐다고 덧붙였다. 유승준은 이제라도 군대를 가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를 재차 밝혔다. 법무부와 병무청이 그러한 제안을 해오면 망설임 없이 받아들일 의향이 있다며 “어떤 방법으로라도 한국 땅을 꼭 밟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제가 내린 결정이 이렇게 큰 물의를 일으킬 지 몰랐다”며 “제 아이뿐만 아니라 저를 위해 군대를 가 아이들과 떳떳하게 한국 땅을 밟고 싶다”고 흐느꼈다. 하지만 병무청은 13년 전과 달라질 건 없다는 입장이다. 병무청 관계자는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논할 가치도 없다. 다시 얘기할 필요도 없는 사항이다”면서 “스티브유(유승준)가 병역기피를 목적으로 미국시민권을 획득했는데 우리 법률상 국적을 회복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우리 국적법 제9조에 따르면 병역 기피를 목적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상실한 사람은 국적회복을 할 수 없도록 돼 있다. 긴급 여론조사에서도 국민 약 3명 중 2명은 병역 기피 논란으로 입국금지된 가수 유승준(39)의 입국을 허용하는 데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에 따르면 19일 전국 19세 이상 5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유승준 입국 허용에 대해 ‘반대한다’는 의견이 66.2%로 집계됐다. 이번 여론조사에서 입국 허용에 ‘찬성한다’는 의견은 24.8%였으며, 9.0%는 ‘잘 모른다’고 답했다. 성별로는 남성이 찬성 24.4%, 반대 71.0%, 여성이 찬성 25.1%, 반대 61.4%로, 남성의 반대 비율이 더 높았다. 반대 비율을 연령대별로 보면 20대(찬성 21.6%, 반대 76.4%)에서 가장 많았고, 이어 60대 이상(70.2%), 50대(69.0%), 40대(63.5%), 30대(52.3%) 순으로 조사됐다. 이번 조사의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4.4%포인트이며, 응답률은 5.6%다. 다음은 유승준과의 일문일답이다. -- 만 38세가 군대에 갈 수 있는 최대 연령이다. 이제 만 39살이 돼 무엇인가를 밝힌다는 것에 의구심이 든다. 이 타이밍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제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비난, 질타의 말씀이 많아서 솔직히 복귀하는 게 자신 없었다.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라서 13년간 한국을 거의 안 보고 살았다. 그래야 살 거 같았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아이들이 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제 문제로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제 마음도 평온하지 못한 게 옳지 못하다고 생각해 작년 7월 시민권을 포기하고 귀화해서 군대를 가고 싶다고 한국에 연락했다. 그게 만 38살이었다. 당시 청룽(成龍) 영화를 찍고 있었는데 청룽에게 지금 군대를 가겠다고 하니 저보고 대뜸 결정 잘했다고 하더라. 그런데 만 38세까지 군대에 갈 수 있는 건 1980년 이후 태어난 사람에게만 적용되더라. 저처럼 1970년대생들은 만 36세가 징집 최대연령이라고 해서 그 계획은 무산됐다. -- 처음부터 군대 갈 생각이 있었나. ▲ 저는 군대에 대해 전혀 거부반응이 없다. 어릴 때부터 건강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좋아했고 아버지도 군대에 가야된다고 말씀하셨다. 어릴 때부터 가야 된다고 생각하고 가려고 했다. -- 신체검사에서 4급을 받았다. 허리문제였나. ▲ 제가 5집 활동하고 조용필 선배님 곡 리메이크 할 때였다. 뮤직비디오 촬영하다가 무대에서 떨어져서 허리를 다쳤다. 병원에 가서 CT 촬영하니 디스크가 문제라고 했다. 지금 수술해야 한다고 했지만 겁이 나 수술을 안 받았다. 그때부터 병역기피 기사가 나더라. 저는 ‘허리를 다쳤는데 병역기피 기사가 왜 날까’하고 의아했다. 아버지가 인생에서 건강이 최고라고 설득하셔서 결국 수술받았다. -- 당시 해병대 홍보대사를 한 건 사실인가. ▲ 사실이 아니다. 금연 홍보대사 외에는 다른 홍보대사를 한 기억이 없다. -- 해병대에 자진입대한다고 기사도 났었다. ▲ 당시 집 앞에서 기자 한 분이 ‘체격도 좋은데 해병대 가도 되겠네’라고 하셔서 ‘그렇죠’라고 대답한 것이 다음 날 1면에 기사화됐다. -- 2002년 입대 앞두고 미국 시민권 취득을 위해 일본 공연을 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 전혀 아니다. 시민권 관련 인터뷰가 원래 2001년 10월경에 있었다. 아버지가 인터뷰를 하고 시민권을 취득하라 하셨지만 저는 국민과 약속한 상태였기 때문에 끝까지 안 간다고 했다. 그런데 9·11 테러 사건 이후 시민권 한번 거부하면 다시 재발급이 어려워졌다. 일본 공연 갈 때 절묘하게 시민권 인터뷰가 또 잡혔다. 저는 전혀 마음의 흔들림 없이 군대에 간다고 했지만 아버지가 인터뷰 거절하면 너는 한국 국적 되고, 우리는 미국 국적 되니 만나기 어려워진다고 하시더라. 군대 가기 전에 얼굴만 보고 가라고 하셔서 일본 공연 후 미국에 가게 됐다.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돌아오는 계획이었다. -- 그런데 시민권을 취득한 이유는 무엇인가. ▲ 부모님 설득이 가장 컸다. 가족들이 다 미국에 있고, 기반도 미국에서 잡았는데 네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때 저는 앨범을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6, 7집을 계약을 37억 원에 했고, 제가 일을 안 하면 회사도 문을 닫아야 했다. 제가 군대에 가는 것조차 이기적일 수 있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시더라. 이건 제 개인적인 문제고 부모님을 탓하는 게 아니다. 제 사인 한 장에 수십억이 오가는 상황에서 저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 그때 결정을 되돌아보니 어떤가. ▲ 참 교만했고, 정신이 없었던 거 같다. 부족하고, 그런 걸 감당할만한 성숙함이 없었다. 제 나이 스물다섯 때였다. -- 미국에서 시민권 취득하고 한국행 비행기를 타며 무슨 생각을 했나. ▲ 왜 군대 가려다 심경에 변화가 왔는지 밝히려고 63빌딩에서 기자회견도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어떻게 상황이 돌아가는지 전혀 몰랐다. -- 공항 도착 후 어떤 상황이었나. ▲ 비행기에서 내리니 기자들이 게이트 앞까지 나와 기다리더라. 저에게 시민권 왜 취득했는지 반말로 다그치며 물어봤다. 출입국 관리하는 데까지 갔는데 어떤 분이 영어로 ‘문제가 됐으니 돌아가라’고 말했다. 법에 근거해 입국금지라고 하더라. -- 입국금지 소식을 듣고 어떤 기분이었나. ▲ 당황스러웠다. 다른 나라에 온 거 같았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던지 입국금지 된 거 알면서 지금의 아내인 여자친구에게 전화해 쉰다고, 일을 안 한다고 좋아했다. -- 미국에 가서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간다고 느꼈나. ▲ 한참을 모르다가 제가 찍은 방송이 ‘불방’되면서 제가 생각했던 거보다 상황이 멀리 간다는 걸 알게 됐다. -- 한국에서는 ‘거짓말쟁이’, ‘매국노’, ‘배신자’라는 비난이 끊이질 않는다. ▲ 한국 쪽을 거의 안 봤다. 그래야 살 거 같았다. 누군가가 코미디 프로그램에 나와 저를 미국으로 도망간 계집애라고 하더라. 근데 시청자들이 그걸 보고 같이 웃는 걸 가족들과 함께 봤다. 그 이후로 아무것도 안 봤다. -- 대한민국 국민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나. ▲ 시간이 오래 지나 이렇게 사죄 말씀을 드려 죄송하다. 일찍 나와서 용서를 구해야 했다. 용기가 없어 나오지 못했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다시금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 유승준이란 이름을 다시 회복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다.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고 크게 실망하셨던 부분 사죄드린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유승준 인터뷰] 아프리카 TV 방송 “군대 가겠다” 병무청 입장은?

    [유승준 인터뷰] 아프리카 TV 방송 “군대 가겠다” 병무청 입장은?

    유승준 인터뷰, 유승준 아프리카 [유승준 인터뷰] 아프리카 TV 방송 “군대 가겠다” 병무청 입장은? 병역 기피 논란으로 입국금지된 가수 겸 배우 유승준(39)이 19일 인터넷방송에 출연해 “시간을 돌이킬 수 있다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군대를 가겠다”며 “어떤 방법으로도 아이들과 함께 떳떳하게 한국땅을 밟고 싶다”고 밝혔다. 유승준은 이날 밤 10시30분 영화제작자 신현원 감독이 진행하는 아프리카TV(afreeca.com/shinpro) 생방송에 출연해 병역기피 논란으로 국내 무대에서 퇴출된 심정을 밝혔다. 유승준의 인터뷰는 감독이 질문하면 유승준이 답변하는 방식으로 1시간 10분동안 진행됐다. 방송에 앞서 무릎을 꿇고 흐느낀 유승준은 “제 어눌한 말솜씨 때문에 제 마음을 잘 전달할 수 없을 거 같아 무릎을 꿇었다”며 “이 자리는 제 심경 고백도 아니고, 변명의 자리도 아니고, 여러분께 제 잘못을 사죄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줄곧 울먹이는 목소리로 13년 만에 방송에 출연한 계기를 설명했다. 유승준은 “솔직히 용기가 안 났고 제 마음을 전할 수 있을만한 마음의 준비가 안 됐었다”며 “또 작년까지는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잘못은 제가 해놓고 마치 제가 억울한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이어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이 저의 잘못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우치고 이 자리에 나오게 됐다”고 덧붙였다. 그는 돈 때문에 심경고백에 나섰다는 소문을 강력하게 부정하며 “중국 진출 5년 만에 영화 14편을 찍고 60부 드라마에 출연했다”면서 “절대로 돈 때문에 여기에 나온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유승준은 자신이 현재까지 입국금지 명단에 올라가 있다는 사실에 안타까움도 표했다. 그는 “지금도 입국 금지 명단에 제 이름이 있어 한국땅을 밟을 수 없다”면서 ”제가 알기에는 사상범 아니면 오사마 빈 라덴과 같은 정치범과 입국금지 명단에 이름에 올라와 있다고 한다”고 말했다. 또 지난해 7월에는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귀화해 군대에 가겠다는 뜻을 한국 측에 전달했지만 나이 제한으로 무산됐다고 덧붙였다. 유승준은 이제라도 군대를 가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를 재차 밝혔다. 법무부와 병무청이 그러한 제안을 해오면 망설임 없이 받아들일 의향이 있다며 “어떤 방법으로라도 한국 땅을 꼭 밟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제가 내린 결정이 이렇게 큰 물의를 일으킬 지 몰랐다”며 “제 아이뿐만 아니라 저를 위해 군대를 가 아이들과 떳떳하게 한국 땅을 밟고 싶다”고 흐느꼈다. 하지만 병무청은 13년 전과 달라질 건 없다는 입장이다. 병무청 관계자는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논할 가치도 없다. 다시 얘기할 필요도 없는 사항이다”면서 “스티브유(유승준)가 병역기피를 목적으로 미국시민권을 획득했는데 우리 법률상 국적을 회복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우리 국적법 제9조에 따르면 병역 기피를 목적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상실한 사람은 국적회복을 할 수 없도록 돼 있다. 다음은 유승준과의 일문일답이다. -- 만 38세가 군대에 갈 수 있는 최대 연령이다. 이제 만 39살이 돼 무엇인가를 밝힌다는 것에 의구심이 든다. 이 타이밍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제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비난, 질타의 말씀이 많아서 솔직히 복귀하는 게 자신 없었다.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라서 13년간 한국을 거의 안 보고 살았다. 그래야 살 거 같았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아이들이 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제 문제로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제 마음도 평온하지 못한 게 옳지 못하다고 생각해 작년 7월 시민권을 포기하고 귀화해서 군대를 가고 싶다고 한국에 연락했다. 그게 만 38살이었다. 당시 청룽(成龍) 영화를 찍고 있었는데 청룽에게 지금 군대를 가겠다고 하니 저보고 대뜸 결정 잘했다고 하더라. 그런데 만 38세까지 군대에 갈 수 있는 건 1980년 이후 태어난 사람에게만 적용되더라. 저처럼 1970년대생들은 만 36세가 징집 최대연령이라고 해서 그 계획은 무산됐다. -- 처음부터 군대 갈 생각이 있었나. ▲ 저는 군대에 대해 전혀 거부반응이 없다. 어릴 때부터 건강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좋아했고 아버지도 군대에 가야된다고 말씀하셨다. 어릴 때부터 가야 된다고 생각하고 가려고 했다. -- 신체검사에서 4급을 받았다. 허리문제였나. ▲ 제가 5집 활동하고 조용필 선배님 곡 리메이크 할 때였다. 뮤직비디오 촬영하다가 무대에서 떨어져서 허리를 다쳤다. 병원에 가서 CT 촬영하니 디스크가 문제라고 했다. 지금 수술해야 한다고 했지만 겁이 나 수술을 안 받았다. 그때부터 병역기피 기사가 나더라. 저는 ‘허리를 다쳤는데 병역기피 기사가 왜 날까’하고 의아했다. 아버지가 인생에서 건강이 최고라고 설득하셔서 결국 수술받았다. -- 당시 해병대 홍보대사를 한 건 사실인가. ▲ 사실이 아니다. 금연 홍보대사 외에는 다른 홍보대사를 한 기억이 없다. -- 해병대에 자진입대한다고 기사도 났었다. ▲ 당시 집 앞에서 기자 한 분이 ‘체격도 좋은데 해병대 가도 되겠네’라고 하셔서 ‘그렇죠’라고 대답한 것이 다음 날 1면에 기사화됐다. -- 2002년 입대 앞두고 미국 시민권 취득을 위해 일본 공연을 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 전혀 아니다. 시민권 관련 인터뷰가 원래 2001년 10월경에 있었다. 아버지가 인터뷰를 하고 시민권을 취득하라 하셨지만 저는 국민과 약속한 상태였기 때문에 끝까지 안 간다고 했다. 그런데 9·11 테러 사건 이후 시민권 한번 거부하면 다시 재발급이 어려워졌다. 일본 공연 갈 때 절묘하게 시민권 인터뷰가 또 잡혔다. 저는 전혀 마음의 흔들림 없이 군대에 간다고 했지만 아버지가 인터뷰 거절하면 너는 한국 국적 되고, 우리는 미국 국적 되니 만나기 어려워진다고 하시더라. 군대 가기 전에 얼굴만 보고 가라고 하셔서 일본 공연 후 미국에 가게 됐다.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돌아오는 계획이었다. -- 그런데 시민권을 취득한 이유는 무엇인가. ▲ 부모님 설득이 가장 컸다. 가족들이 다 미국에 있고, 기반도 미국에서 잡았는데 네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때 저는 앨범을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6, 7집을 계약을 37억 원에 했고, 제가 일을 안 하면 회사도 문을 닫아야 했다. 제가 군대에 가는 것조차 이기적일 수 있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시더라. 이건 제 개인적인 문제고 부모님을 탓하는 게 아니다. 제 사인 한 장에 수십억이 오가는 상황에서 저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 그때 결정을 되돌아보니 어떤가. ▲ 참 교만했고, 정신이 없었던 거 같다. 부족하고, 그런 걸 감당할만한 성숙함이 없었다. 제 나이 스물다섯 때였다. -- 미국에서 시민권 취득하고 한국행 비행기를 타며 무슨 생각을 했나. ▲ 왜 군대 가려다 심경에 변화가 왔는지 밝히려고 63빌딩에서 기자회견도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어떻게 상황이 돌아가는지 전혀 몰랐다. -- 공항 도착 후 어떤 상황이었나. ▲ 비행기에서 내리니 기자들이 게이트 앞까지 나와 기다리더라. 저에게 시민권 왜 취득했는지 반말로 다그치며 물어봤다. 출입국 관리하는 데까지 갔는데 어떤 분이 영어로 ‘문제가 됐으니 돌아가라’고 말했다. 법에 근거해 입국금지라고 하더라. -- 입국금지 소식을 듣고 어떤 기분이었나. ▲ 당황스러웠다. 다른 나라에 온 거 같았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던지 입국금지 된 거 알면서 지금의 아내인 여자친구에게 전화해 쉰다고, 일을 안 한다고 좋아했다. -- 미국에 가서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간다고 느꼈나. ▲ 한참을 모르다가 제가 찍은 방송이 ‘불방’되면서 제가 생각했던 거보다 상황이 멀리 간다는 걸 알게 됐다. -- 한국에서는 ‘거짓말쟁이’, ‘매국노’, ‘배신자’라는 비난이 끊이질 않는다. ▲ 한국 쪽을 거의 안 봤다. 그래야 살 거 같았다. 누군가가 코미디 프로그램에 나와 저를 미국으로 도망간 계집애라고 하더라. 근데 시청자들이 그걸 보고 같이 웃는 걸 가족들과 함께 봤다. 그 이후로 아무것도 안 봤다. -- 대한민국 국민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나. ▲ 시간이 오래 지나 이렇게 사죄 말씀을 드려 죄송하다. 일찍 나와서 용서를 구해야 했다. 용기가 없어 나오지 못했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다시금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 유승준이란 이름을 다시 회복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다.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고 크게 실망하셨던 부분 사죄드린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유승준 인터뷰, 13년 만에 심경 고백 “군대가고 싶었지만 갈수 없었던 이유는..” 무릎꿇고 사과

    유승준 인터뷰, 13년 만에 심경 고백 “군대가고 싶었지만 갈수 없었던 이유는..” 무릎꿇고 사과

    유승준, 13년 만에 심경 고백 “군대가고 싶었지만 갈수 없었던 이유는..” 무릎꿇고 사과 ‘유승준 인터뷰 유승준 심경 고백’ 가수 유승준이 13년 만에 병역기피 논란에 대해 입을 열었다. 유승준은 19일 인터넷 생방송을 통해 13년 전 군 기피 및 병역 문제와 관련한 당시 상황과 자신의 심경을 고백했다. 유승준은 심경을 묻는 질문에 “무슨 말을 먼저 드려야 할지 솔직히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먼저 국민 여러분께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다”고 말한 뒤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유승준은 “어떤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국민 여러분과 법무부 장관, 병무청장님, 출입국 관리소장님, 한국의 젊은이들에 물의를 일으키고 또 허탈하게 해드린 점 사죄하겠다”고 공식 사과했다. 유승준에 따르면 그는 13살인 1989년 이민을 갔다. 이후 한국에서 가수로 데뷔했고 1999년 3집 ‘열정’ 활동 당시 병역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그는 바른 청년 이미지라서 해병대 홍보대사였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사실이 아니고, 나는 내가 홍보대사 한 것은 금연 외에는 한 것 없다”고 밝혔다. 유승준은 “군대에 대해서 거부 반응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께서 규칙적인 생활을 좋아해서, 군인이 되라고 내게 늘 말씀하셨다. 어릴 때부터 가려고 했었다.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셨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 당시로 시기를 돌이킨다면 군대를 가야한다. 시간이 이렇게 큰 무리를 일으킬 줄 몰랐다. 돌이킬 수 있다면 2번 생각 안하고 간다”며 “지난해 7월에 시민권을 포기하고 군대를 가고 싶다고 했다. 만으로 38살이었는데 성룡 등 주위 분들이 ‘그 길 밖에 없는 것 같다’면서 결정을 잘 했다고 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도 군대를 가겠다고 했다”고 군대를 가고 싶었던 의욕을 전하기도 했다. 유승준은 “어떤 방법으로라도 한국땅을 밟고 싶다. 아이들과 떳떳하게 밟고 싶다. 예전에 ‘아름다운 청년’ 유승준이라고 했는데, 아름답지 않았는데 아름답고자 노력했고, 좋은 영향을 끼치고 싶어서 몸부림치는 모습 때문에 어르신들이 좋아해주셨다”고 울먹였다. 2002년 1월 군입대를 앞두고 일본 공연에 임했던 유승준은 “거짓말쟁이라는 얘기가 있는데, 시민권을 취득할 계획을 짜 놓고 그런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군대를 가겠다고 했기 때문에 간다고 말한 것이다. 시민권 선서가 2001년 10월경에 나왔다. 영주권은 아버지가 신청한 것이 나왔고 끝까지 거절했다. 당시 군대 가려고 했었고 시민권 인터뷰 참석을 하지 않았다. 9·11 테러 이후 시민권을 재발급 받는 것은 어려웠다. 일본 공연 갈 당시 시민권 인터뷰 날짜가 나왔고, 아버지가 오라고 설득하셨다”고 시민권을 취득하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유승준은 “병역 기피하기 위해 미국으로 향한 것은 아니다. 가족들이 모두 미국에 있는데, 아버지가 ‘너가 그러면 안 되지 않느냐’고 말했고 6, 7집을 37억 원에 계약해서 이행해야 하는 조건도 있었다. 부모님을 20살부터 모셨다. 회사에서도 직원이 많았는데, 다른 연예인이 없어서 내가 일을 안 하면 회사가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버지가 군대 가는 것조차 이기적일 수도 있다고 설득했다. 시민권 획득은 부모님의 설득, 계약 문제로 벌어졌다. 하지만 그들을 탓할 순 없다”고 털어놨다. 미국에 돌아가서 심각해진 여론에 대해서는 “한참 동안 몰랐다. 찍어 놨었던 방송도 불방이 됐다. 점점 멀어져 갔다. 한국 쪽 반응을 보지 않았다. 그래야 살 것 같았다. 누군가가 나를 소재로 코미디 소재로 삼더라. 시청자들이 웃었다. 가족들과 같이 봤는데, TV를 껐다. 그 이후부터 한국 쪽 기사를 보지 않았다. 그렇게 해야 살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힘들었던 시기를 회상했다. 그는 시민권 취득 후 입대를 생각했느냐는 질문에 “당시 상황 판단이 잘 되지 않았다. 내가 피해자인 줄 알고 있었다. 마음을 바꾸라는 사람이 아내였다. 한국땅 밟고 싶으면 군대를 가라고 한다. 자존심이 상해서 번복하기 꺼려했고 그저 도망가고 싶어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혈통과 유승준이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이런 문제가 나를 감싸고 있는 것 자체가, 가족을 봐서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섰다”고 고백했다. ‘한국 국적을 회복하기 위해 미국 국적 포기에 대한 제의를 받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선 “그렇게 선처를 해주셨으면 한다”고 간절함을 드러냈다. 끝으로 유승준은 병무청 관계자들에게 “어떤 방법으로도 선처를 해주셔서, 한국 땅 밟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으면 한다. 젊었을 때의 잘못에 사죄드린다”면서 “국민 여러분, 시간이 오래 지나서 사죄드려서 죄송하다. 용기가 없어서 쉽게 나오지 못했다. 늦게나마 사죄의 말씀을 전하게 됐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 제가 유승준이라는 이름을 회복하고 싶다. 물의 일으켜 죄송하다. 많은 허탈감을 드려 죄송할 뿐이다”라고 거듭 사과를 전했다. 한편 유승준은 지난 1997년 3월 데뷔앨범 ‘west side’의 타이틀곡 ‘가위’로 데뷔해 ‘아름다운 청년’이라는 수식어를 얻으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2002년 입대를 3개월 여 남긴 시점에 해외 공연을 이유로 출국한 뒤, 약혼녀 오모 씨의 미국 영주권 취득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 가족이 거주 중이던 미국에서 시민권을 취득했다. 결국 병무청은 출입국 관리법 11조(대한민국의 이익이나 공공의 안전을 해치는 행동을 할 염려가 있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사유가 있는 사람에 대해 입국 금지조치를 내릴 수 있다)에 의거 입국 금지 조치를 내렸고, 유승준은 지금까지도 관광비자가 아니면 한국에 들어올 수 없게 됐다. 이후 그는 중국으로 건너가 성룡이 이끄는 엔터테인먼트사와 전속 계약을 맺고 활발히 활동을 이어왔다. 유승준이 한국국적을 재취득하려면, 미국 국적은 포기해야 한다. 또한 귀화가 아니라 국적 재취득이라면 만 37세가 넘지 않은 경우 병역의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런데 유승준은 1976년 12월15일 생으로, 현재 만 38세. 지난해 12월15일 부로 병역의무는 소멸된 셈이다. 따라서 그가 다시 한국 국적을 취득하더라도 군대에 갈 염려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사진=방송 캡처(유승준 인터뷰 유승준 심경 고백)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유승준 심경 고백 “한국 땅 밟고 싶다” 여론조사 “입국허용 반대 66.2%”

    유승준 심경 고백 “한국 땅 밟고 싶다” 여론조사 “입국허용 반대 66.2%”

    유승준 심경 고백 유승준 심경 고백 “한국 땅 밟고 싶다” 여론조사 “입국허용 반대 66.2%” 병역 기피 논란으로 입국금지된 가수 겸 배우 유승준(39)이 19일 인터넷방송에 출연해 “시간을 돌이킬 수 있다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군대를 가겠다”며 “어떤 방법으로도 아이들과 함께 떳떳하게 한국땅을 밟고 싶다”고 밝혔다. 유승준은 이날 밤 10시30분 영화제작자 신현원 감독이 진행하는 아프리카TV(afreeca.com/shinpro) 생방송에 출연해 병역기피 논란으로 국내 무대에서 퇴출된 심정을 밝혔다. 유승준의 인터뷰는 감독이 질문하면 유승준이 답변하는 방식으로 1시간 10분동안 진행됐다. 방송에 앞서 무릎을 꿇고 흐느낀 유승준은 “제 어눌한 말솜씨 때문에 제 마음을 잘 전달할 수 없을 거 같아 무릎을 꿇었다”며 “이 자리는 제 심경 고백도 아니고, 변명의 자리도 아니고, 여러분께 제 잘못을 사죄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줄곧 울먹이는 목소리로 13년 만에 방송에 출연한 계기를 설명했다. 유승준은 “솔직히 용기가 안 났고 제 마음을 전할 수 있을만한 마음의 준비가 안 됐었다”며 “또 작년까지는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잘못은 제가 해놓고 마치 제가 억울한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이어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이 저의 잘못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우치고 이 자리에 나오게 됐다”고 덧붙였다. 그는 돈 때문에 심경고백에 나섰다는 소문을 강력하게 부정하며 “중국 진출 5년 만에 영화 14편을 찍고 60부 드라마에 출연했다”면서 “절대로 돈 때문에 여기에 나온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유승준은 자신이 현재까지 입국금지 명단에 올라가 있다는 사실에 안타까움도 표했다. 그는 “지금도 입국 금지 명단에 제 이름이 있어 한국땅을 밟을 수 없다”면서 ”제가 알기에는 사상범 아니면 오사마 빈 라덴과 같은 정치범과 입국금지 명단에 이름에 올라와 있다고 한다”고 말했다. 또 지난해 7월에는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귀화해 군대에 가겠다는 뜻을 한국 측에 전달했지만 나이 제한으로 무산됐다고 덧붙였다. 유승준은 이제라도 군대를 가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를 재차 밝혔다. 법무부와 병무청이 그러한 제안을 해오면 망설임 없이 받아들일 의향이 있다며 “어떤 방법으로라도 한국 땅을 꼭 밟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제가 내린 결정이 이렇게 큰 물의를 일으킬 지 몰랐다”며 “제 아이뿐만 아니라 저를 위해 군대를 가 아이들과 떳떳하게 한국 땅을 밟고 싶다”고 흐느꼈다. 하지만 병무청은 13년 전과 달라질 건 없다는 입장이다. 병무청 관계자는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논할 가치도 없다. 다시 얘기할 필요도 없는 사항이다”면서 “스티브유(유승준)가 병역기피를 목적으로 미국시민권을 획득했는데 우리 법률상 국적을 회복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우리 국적법 제9조에 따르면 병역 기피를 목적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상실한 사람은 국적회복을 할 수 없도록 돼 있다. 긴급 여론조사에서도 국민 약 3명 중 2명은 병역 기피 논란으로 입국금지된 가수 유승준(39)의 입국을 허용하는 데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에 따르면 19일 전국 19세 이상 5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유승준 입국 허용에 대해 ‘반대한다’는 의견이 66.2%로 집계됐다. 이번 여론조사에서 입국 허용에 ‘찬성한다’는 의견은 24.8%였으며, 9.0%는 ‘잘 모른다’고 답했다. 성별로는 남성이 찬성 24.4%, 반대 71.0%, 여성이 찬성 25.1%, 반대 61.4%로, 남성의 반대 비율이 더 높았다. 반대 비율을 연령대별로 보면 20대(찬성 21.6%, 반대 76.4%)에서 가장 많았고, 이어 60대 이상(70.2%), 50대(69.0%), 40대(63.5%), 30대(52.3%) 순으로 조사됐다. 이번 조사의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4.4%포인트이며, 응답률은 5.6%다. 다음은 유승준과의 일문일답이다. -- 만 38세가 군대에 갈 수 있는 최대 연령이다. 이제 만 39살이 돼 무엇인가를 밝힌다는 것에 의구심이 든다. 이 타이밍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제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비난, 질타의 말씀이 많아서 솔직히 복귀하는 게 자신 없었다.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라서 13년간 한국을 거의 안 보고 살았다. 그래야 살 거 같았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아이들이 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제 문제로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제 마음도 평온하지 못한 게 옳지 못하다고 생각해 작년 7월 시민권을 포기하고 귀화해서 군대를 가고 싶다고 한국에 연락했다. 그게 만 38살이었다. 당시 청룽(成龍) 영화를 찍고 있었는데 청룽에게 지금 군대를 가겠다고 하니 저보고 대뜸 결정 잘했다고 하더라. 그런데 만 38세까지 군대에 갈 수 있는 건 1980년 이후 태어난 사람에게만 적용되더라. 저처럼 1970년대생들은 만 36세가 징집 최대연령이라고 해서 그 계획은 무산됐다. -- 처음부터 군대 갈 생각이 있었나. ▲ 저는 군대에 대해 전혀 거부반응이 없다. 어릴 때부터 건강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좋아했고 아버지도 군대에 가야된다고 말씀하셨다. 어릴 때부터 가야 된다고 생각하고 가려고 했다. -- 신체검사에서 4급을 받았다. 허리문제였나. ▲ 제가 5집 활동하고 조용필 선배님 곡 리메이크 할 때였다. 뮤직비디오 촬영하다가 무대에서 떨어져서 허리를 다쳤다. 병원에 가서 CT 촬영하니 디스크가 문제라고 했다. 지금 수술해야 한다고 했지만 겁이 나 수술을 안 받았다. 그때부터 병역기피 기사가 나더라. 저는 ‘허리를 다쳤는데 병역기피 기사가 왜 날까’하고 의아했다. 아버지가 인생에서 건강이 최고라고 설득하셔서 결국 수술받았다. -- 당시 해병대 홍보대사를 한 건 사실인가. ▲ 사실이 아니다. 금연 홍보대사 외에는 다른 홍보대사를 한 기억이 없다. -- 해병대에 자진입대한다고 기사도 났었다. ▲ 당시 집 앞에서 기자 한 분이 ‘체격도 좋은데 해병대 가도 되겠네’라고 하셔서 ‘그렇죠’라고 대답한 것이 다음 날 1면에 기사화됐다. -- 2002년 입대 앞두고 미국 시민권 취득을 위해 일본 공연을 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 전혀 아니다. 시민권 관련 인터뷰가 원래 2001년 10월경에 있었다. 아버지가 인터뷰를 하고 시민권을 취득하라 하셨지만 저는 국민과 약속한 상태였기 때문에 끝까지 안 간다고 했다. 그런데 9·11 테러 사건 이후 시민권 한번 거부하면 다시 재발급이 어려워졌다. 일본 공연 갈 때 절묘하게 시민권 인터뷰가 또 잡혔다. 저는 전혀 마음의 흔들림 없이 군대에 간다고 했지만 아버지가 인터뷰 거절하면 너는 한국 국적 되고, 우리는 미국 국적 되니 만나기 어려워진다고 하시더라. 군대 가기 전에 얼굴만 보고 가라고 하셔서 일본 공연 후 미국에 가게 됐다.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돌아오는 계획이었다. -- 그런데 시민권을 취득한 이유는 무엇인가. ▲ 부모님 설득이 가장 컸다. 가족들이 다 미국에 있고, 기반도 미국에서 잡았는데 네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때 저는 앨범을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6, 7집을 계약을 37억 원에 했고, 제가 일을 안 하면 회사도 문을 닫아야 했다. 제가 군대에 가는 것조차 이기적일 수 있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시더라. 이건 제 개인적인 문제고 부모님을 탓하는 게 아니다. 제 사인 한 장에 수십억이 오가는 상황에서 저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 그때 결정을 되돌아보니 어떤가. ▲ 참 교만했고, 정신이 없었던 거 같다. 부족하고, 그런 걸 감당할만한 성숙함이 없었다. 제 나이 스물다섯 때였다. -- 미국에서 시민권 취득하고 한국행 비행기를 타며 무슨 생각을 했나. ▲ 왜 군대 가려다 심경에 변화가 왔는지 밝히려고 63빌딩에서 기자회견도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어떻게 상황이 돌아가는지 전혀 몰랐다. -- 공항 도착 후 어떤 상황이었나. ▲ 비행기에서 내리니 기자들이 게이트 앞까지 나와 기다리더라. 저에게 시민권 왜 취득했는지 반말로 다그치며 물어봤다. 출입국 관리하는 데까지 갔는데 어떤 분이 영어로 ‘문제가 됐으니 돌아가라’고 말했다. 법에 근거해 입국금지라고 하더라. -- 입국금지 소식을 듣고 어떤 기분이었나. ▲ 당황스러웠다. 다른 나라에 온 거 같았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던지 입국금지 된 거 알면서 지금의 아내인 여자친구에게 전화해 쉰다고, 일을 안 한다고 좋아했다. -- 미국에 가서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간다고 느꼈나. ▲ 한참을 모르다가 제가 찍은 방송이 ‘불방’되면서 제가 생각했던 거보다 상황이 멀리 간다는 걸 알게 됐다. -- 한국에서는 ‘거짓말쟁이’, ‘매국노’, ‘배신자’라는 비난이 끊이질 않는다. ▲ 한국 쪽을 거의 안 봤다. 그래야 살 거 같았다. 누군가가 코미디 프로그램에 나와 저를 미국으로 도망간 계집애라고 하더라. 근데 시청자들이 그걸 보고 같이 웃는 걸 가족들과 함께 봤다. 그 이후로 아무것도 안 봤다. -- 대한민국 국민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나. ▲ 시간이 오래 지나 이렇게 사죄 말씀을 드려 죄송하다. 일찍 나와서 용서를 구해야 했다. 용기가 없어 나오지 못했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다시금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 유승준이란 이름을 다시 회복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다.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고 크게 실망하셨던 부분 사죄드린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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