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김씨 표류기’ 그만의 생존법
먼저 자신있는 항목에 ○표 해보자. 사루비아 꽃 따먹기, 풀밭에서 똥 누기, 해변에 누워 별 세기, 밭 갈아서 농사 짓기, 허수아비와 친구 먹기, 반년 동안 혼자 살기, 팬티만 입은 채 지내기. 자, ○표가 몇 개나 되는가. 7개 만점이라고? 그렇다면 무인도에서 살아남을 가능성 90% 이상이다. 3개 이하라고? 그렇다면 당장 ‘김씨’를 수소문해 생존법을 배워라.
영화 ‘김씨 표류기’(감독 이해준, 12세 이상 관람가)의 주인공 김씨가 36.5도의 체온을 얻은 건 주연 배우 정재영(39) 덕이다. 개봉(14일)을 앞두고 만난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한 도시인으로 돌아와 있었다. “특별한 사건이 없어서 지루해 하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했어요. 다행히 김씨에게 공감하면서 재미있게 봐주시더라고요. 이젠 됐다 싶어요.”
●도심 속 무인도 생존기… 현대사회 은유
‘김씨 표류기’는 한강에 빠져 자살하려던 남자 김씨(정재영)가 무인도인 밤섬에 불시착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다시 강물에 빠져죽자니 무섭고, 목 매달아 죽자니 배앓이가 훼방을 놓는다. 자살 타이밍을 놓친 남자는 ‘어차피 죽을 거 나중에 죽어도 되지, 뭐.’라는 심정으로 야생 생활에 적응해나간다. 그렇게 마음을 돌린 결정적 계기는 바로 사루비아 꽃 따먹기이다. “사루비아를 따먹던 김씨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잖아요? 달콤한 맛에 과거 생각이 확 떠올랐기 때문이겠죠. 군대에서도 그런 경우가 있어요. 고참이 준 초콜릿을 화장실에 숨어서 혼자 몰래 먹다보면 정말 눈물이 나죠.”
외로운 나날을 보내던 김씨. 어느날, 숲속에서 편지 한 통이 담긴 와인병을 발견한다. 망원렌즈를 통해 그를 지켜보던 여자 김씨(정려원)가 보내는 메시지다. 그녀는 3년째 ‘자신의 방’이란 무인도에서 두문불출하는 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다. 이런 두 김씨의 모습은 상처입은 현대인의 삶을 은유한다. 직장에서 쫓겨나고, 거액의 빚을 지고, 애인에게 차인 남자 김씨의 상황은 전혀 낯설지 않다. 여자 김씨처럼 소통의 단절로 고립된 삶을 자초하는 이도 늘어가는 추세다.
정재영도 살면서 위기를 느낀 적이 있다고 했다. “경제적 위기 같은 건 잘 견디는 편이에요. 가장 절망스러웠던 때는 원인 모를 열병을 앓던 때였죠.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 끝나고 나서였는데, 하루에 두번씩 40도까지 열이 오르내렸어요. 한달 열흘 정도 입원을 했죠. 당시 별별 검사를 다 했는데도 원인이 안 밝혀졌어요.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죠. 낫게만 해준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영화 후반부 밤섬은 거의 CG처리
‘김씨 표류기’ 촬영은 지난해 8월부터 12월까지 이뤄졌다. 모래사장과 야생숲이 펼쳐지는 대부분의 풍광은 충주, 청원, 영동에서 촬영했다. 밤섬이 생태경관보전지역이라 입섬이 8회분밖에 허락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후반부에 배경으로 등장하는 밤섬은 거의 CG(컴퓨터그래픽)로 처리한 것이다. 또 정재영 등장신이 모두 야외촬영으로 완성된 점에서 알 수 있듯, 스태프들은 날씨, 광량 등을 맞추느라 고생을 해야 했다. 회차는 80회를 넘겼고, 총 제작비는 50억원(순제작비 32억원)으로 불어났다.
디테일한 부분의 사실적 묘사는 이 영화의 큰 강점이다. 여기에는 정재영의 눈물겨운 ‘자기희생’이 있었다. 우선 2개월 가량을 사각팬티 한장만 입고 지냈다. 처음엔 부끄러웠지만, 김씨처럼 곧 익숙해졌다. 체중은 석달간 7㎏ 정도 뺐다. 손·발톱을 5개월 동안 깎지 않아 1㎝까지 길렀다. 덥수룩한 가슴털은 오히려 깎았다. 상대적으로 과장되게 보인다는 이유에서다. 한강 물을 맛보기도 했다. 먹을 만한데, 약간 구역질이 났다.
영화는 ‘원맨쇼’의 연속이다. 상대역 없이 혼자 내내 ‘북 치고 장구 치고’ 해야 하는 연기는 배우 경력 14년차인 정재영에게도 큰 도전이었다. 감독은 무엇보다 리듬 조절에 중점을 뒀다. 감정표출과 절제, 진지함과 재미 사이를 오가며 시시각각 다른 느낌을 줘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큰 테두리 안에서 정재영은 ‘방목’됐다. “해볼 거 다 해봤어요. 애드리브도 하고 싶은 거 다 해보고요. 틀에 갇혀 있다기보다 리허설을 여러가지로 해보면서 리드미컬한 흐름을 타려고 했죠.”
영화를 본 뒤 자장면 생각이 간절하다면, 영화에 몰입했다는 증거다. 자장면 한 그릇을 지어먹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김씨의 모습은 그만큼 처절하다.
마지막으로 두 남녀 김씨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남들처럼 온전하게 ‘하하하 호호호’ 살긴 힘들겠지만, 어디 조용한 데서 둘이 함께 살아가지 않을까요? 처음 이름을 얘기한 것처럼, 조금씩 상대를 알아가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하게 희망을 얻었으니까요.”
글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사진 도준석기자 pad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