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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한 경쟁 버린 외교원… 예비 외교관들, 자발적 토론·학습 늘었다

    무한 경쟁 버린 외교원… 예비 외교관들, 자발적 토론·학습 늘었다

    과거 외무공무원법은 국립외교원의 외교관 후보자 선발 규모를 ‘채용 인원의 150% 범위 내’로 정해 교육(1년)이 끝나면 기계적으로 일정 인원을 탈락시켰다. 정부는 지난해 입장을 바꿔 “외교관으로 채용할 규모 만큼만 국립외교원 외교관 후보자로 선발해 연수생의 외교관 임용을 보장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외교원 선발 시험이 사실상 외무고시가 됐다”, “100% 채용을 보장받았기 때문에 공부량이 크게 줄어들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그렇다면 현재 외교원의 진짜 모습은 어떨까. 15일 서울신문은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부 청사에서 새내기 외교관 4명을 만났다. ●“자율적 학습 분위기에 독서모임도 활발” 지난해 12월부터 동북아2과에서 일하는 연동현(28) 사무관은 “임용 보장이 안 됐을 시기에 외교원 연수를 받은 게 아니어서 정확히 비교하기는 어렵다”면서도 “(100% 임용을 보장받았음에도) 모두가 적극적으로 학습하는 모습에 놀란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외교원 합격생들이 열심히 공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편견이라는 얘기다. 연 사무관은 “독서모임을 만들어 토론을 하는 등 자율적인 학습 분위기가 만들어졌다”며 “동기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정말 책을 많이 읽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임용 경쟁이 사라지면서 자연스레 동기 간 교류도 많아졌다고 한다. 글로벌환경과학과에서 근무하는 오지영(29) 사무관은 “외교원에서 영어와 제2외국어 등 어학 능력을 키우기도 했지만 가장 큰 수확은 좋은 동기들을 얻은 것”이라며 “경쟁 체제에 있었다면 친해지기 어려웠을 텐데 그런 부담이 없어 쉽게 마음을 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원하는 과목 듣고 현장 실습 활동 외교원에 들어온 합격생들은 꽉 짜인 교육일정 아래 바쁜 나날을 보낸다. 외교원에 들어가면 한 학기에 2개의 선택과목을 고를 수 있다. 나머지는 필수과목으로 일정에 따라 정해진다. 이들은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를 선택해 심도 있게 공부할 수 있어 좋았다고 말한다. 공보팀 용경민(26) 사무관은 “외교문서 작성이라는 수업이 특히 도움이 됐다”며 “수업 시간마다 외교문서 전문을 썼는데 실전에서 도움이 될 만한 부분이 많았다”고 소개했다. 오 사무관은 지역학 수업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는 “미국과 중국 같은 중심 국가가 아닌 중남미나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국가를 공부하는 시간이었다”며 “해당 지역에 대한 선입견을 깨고 교수님의 살아 숨쉬는 경험을 직접 들어서 좋았다”고 미소를 지었다. 외교원에는 실습을 위한 시간도 있다. 오 사무관은 “지난여름 행정고시 합격자와 합동 연수가 있었다. 다른 정부부처와 합동으로 일할 수 있는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밝혔다. 외국에 있는 재외 공관을 직접 찾아가는 과정도 있다. 지난해 5월 말에 시행된 이 교육은 2인 1조로 교육생을 편성해 20개 정도의 국외 공관에서 진행됐다. 인도를 다녀온 문준기(29·정책공공외교과) 사무관은 “베일에 가려진 나라라는 생각에 두려움이 컸지만 파견을 다녀온 뒤로 그런 생각을 모두 지울 수 있었다”며 “실제 외교관이 어떻게 일하고 한국 본부와 어떤 식으로 소통하는지 배울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잠시나마 공부에서 해방돼 숨통을 틔울 기회도 있다. 연 사무관은 “지난해 9월 동기들과 MT를 다녀왔다”며 “공부로 쌓인 스트레스에서 해방될 수 있는 계기였다”고 말했다. 용 사무관은 “동기들과 오케스트라 공연을 준비해 올린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외교원 생활을 마무리한다는 느낌으로 모두가 열심히 준비했다”고 회상했다. ●고시 스트레스로 이명에 대상포진까지 외교원은 올해 일반외교 32명, 중동, 아프리카, 중남미, 러시아 등 지역외교 6명, 외교전문 2명 등 모두 40명을 선발한다. 일반외교는 1차 시험으로 언어논리영역과 자료해석영역, 상황판단영역, 헌법영역을 치르고, 2차 시험으로 국제정치학, 국제법, 경제학 등 전공 평가와 통합논술을 치른다. 지역외교도 일반외교와 마찬가지로 1차 시험을 치르지만 전공 평가와 통합논술은 면제된다. 외교전문 분야는 1차 시험만으로 선발한다. 신입 사무관들은 외교원에 입직하기 위해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과도한 스트레스에 몸이 아픈 이도 많았다. 오 사무관은 “외교관 준비 2년차까지 운동 없이 공부만 했더니 나중엔 이명이 들리고 대상포진까지 왔다”며 “정신력으로 버티면 된다고 하지만 침대에 누워만 있으니 오히려 정신력이 무너졌다”고 말했다. 그는 이후 필라테스 수업을 등록해 운동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오 사무관은 “필라테스 첫날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정신은 오히려 또렷해졌다. 이후 건강 관련 문제 대부분이 해소됐다”고 설명했다. 암기 위주의 잘못된 공부 방식을 고치는 것도 난관이다. 연 사무관은 “내 공부 방법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고 귀띔했다. 학창 시절 객관식 위주로 공부한 탓에 외교관 시험도 암기 위주로 했지만 매번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고 한다. 그는 “외교관 시험은 맥락을 아는 게 중요하다”며 “그 전에는 달달 외우기만 했는데 나중에는 목차를 보면서 이해하는 방식으로 바꿨다”고 소개했다. 용 사무관은 그룹형 스터디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처음 준비할 때 공부량이 너무 많아서 막막했는데 스터디 사람들과 차근차근 정리해 나간 것이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남과 비교 말고… 1년치 계획 세워 공부” 이들은 오랜 기간 수험 생활을 한 덕분에 나름의 공부 비법을 갖고 있다. 문 사무관은 ‘계획파’에 속한다. 그는 하루 단위로 1년치 계획을 미리 세운 뒤 이를 꾸준히 실천하며 수험 생활을 보냈다고 했다. 그는 “계획을 미리 짜놓고 목표를 달성하는 식으로 하면 하루하루 성취감을 느낄 수 있고 수험 생활도 체계적으로 할 수 있다”며 “다만 계획을 세우되 너무 무리한 일정을 짜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연 사무관은 자신만의 ‘반복적인 공부 습관’(루틴)을 세울 것을 권장했다. 그는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분량의 공부를 하면 나중에는 그 시간에 그 공부를 안 하는 게 어색한 느낌이 든다”며 “안 되는 한 과목을 하릴없이 붙잡고 있는 것보다 이 방법이 훨씬 효율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반면 용 사무관은 ‘각개격파형’이다. 그는 “정복하기로 마음먹은 책을 정하면 2주 안에 독파하는 방식으로 공부했다”며 “시한을 정해 데드라인을 넘기지 않고 수험서 하나하나씩을 독파한 게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이들은 외교관에 도전하는 수험생들에게 “다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차근차근 고시 생활에 임하길 바란다”고 조언했다. 연 사무관은 “주변에서 한두명씩 붙기 시작하면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게 된다”며 “모두 각자의 길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마음가짐을 다잡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문 사무관은 “초등학생이 됐다는 심정으로 처음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준비하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는 “수험 생활 초기만 해도 경제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혀 없어 암담했는데 (외교원 시험은) 벼락치기 공부가 아닌 만큼 긴 호흡으로 준비한 게 주효했다”고 설명했다. 신형철 기자 hsdori@seoul.co.kr
  • 환경부도 가리왕산 생태 복원 이행 조치 명령… 강원도 “안 돼”

    원주청, 미이행 과태료 800만원 부과키로 생태복원 기본계획 수립하고 시행 촉구 道·정선군 “곤돌라·운영도로만 존치” 투쟁위 22일 군청 앞에서 대정부 집회 평창동계올림픽 알파인스키 경기장이 들어선 강원 정선군 가리왕산의 전면 복원을 요구하는 정부의 압박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 2일 산림청이 강원도에 복원 명령을 내린 데 이어 환경부 원주지방환경청도 15일 환경영향평가법에 따라 이행조치 명령을 내렸다. 원주청은 이에 더해 사후 환경영향조사와 필요 조치 미이행을 들어 8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하기로 했다. 원주지방환경청은 가리왕산 알파인스키 경기장이 협의 내용대로 복원되지 않고 있다고 판단해 이날 강원도에 이행조치 명령을 내렸다. 지난해 11월 개정된 환경영향평가법에 따르면 협의 당사자가 이행하지 않으면 원상복구 명령이나 고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앞서 강원도는 경기장 조성을 위한 환경영향평가 협의에서 동계올림픽이 끝난 후 곤돌라와 리프트 시설물을 철거하고 훼손된 지형과 물길을 복원하겠다고 합의한 바 있다. 또 신갈나무·사스래나무·분비나무 등 고유 식물을 심어 가리왕산의 본래 모습을 되살리는 데도 동의했다. 그러나 강원도가 곤돌라를 존치·활용하는 것으로 복원 계획을 변경하면서 갈등이 불거졌다. 존치·활용을 담은 생태복원 기본계획이 산림청 중앙산지관리위원회 심의를 통과하지 못한 가운데 지난해 12월 31일 국유림 사용 허가 기간이 만료되면서 산림청이 대집행 절차에 착수했다. 원주청은 강원도에 생태복원 방향과 들어맞지 않는 곤돌라 철거를 포함해 가리왕산 생태복원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할 것을 촉구했다. 또 강원도가 개발 사업 이후 필요한 조치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돼 800만원의 과태료 부과를 결정했다. 지반침하 조사(300만원)와 오수 방류에 대한 피해방지 조치(500만원)를 취하지 않는 게 드러났다. 이 밖에 강원도는 당초 환경영향평가 협의 내용과 달리 올림픽 대체 숙소에 수영장을 설치해 지적을 받았다. 반면 강원도와 정선군은 전면 복원보다 여전히 곤돌라와 도로를 존치하겠다고 밝혔다. 강원도 관계자는 “경기장의 모든 시설을 존치하겠다는 게 아니라 곤돌라와 운영도로만 남겨두고 나머지를 복원하겠다는 것”이라며 “1000억원 이상을 들여 설치한 곤돌라를 또다시 수백억원을 들여 철거한다는 것도 경제 논리로 접근하면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주장했다. 정선군민은 정부의 전면 복원 착수에 대응하고자 지난해 12월 26일 투쟁위원회 조직을 163개 사회단체로 확대했다. 투쟁위는 오는 22일 군청 앞에 모여 대정부 집회를 연다. 세종 신형철 기자 hsdori@seoul.co.kr 정선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MBC ‘1919-2019, 기억·록’ 신혜선, 신하균이 재조명하는 김향화와 김원봉

    MBC ‘1919-2019, 기억·록’ 신혜선, 신하균이 재조명하는 김향화와 김원봉

    MBC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기획한 ‘1919-2019, 기억·록’의 3, 4회 다큐가 14일부터 공개됐다. ‘1919-2019, 기억록’은 한국 근현대사 100년을 대표하는 100인의 인물을 이 시대 대표 샐럽 100인의 ‘기록자’를 통해 새롭게 조명하는 3분 캠페인 다큐 프로그램이다. 김연아가 재조명한 첫 번째 인물 ‘유관순 열사’의 1, 2회에 이어 오늘부터 공개되는 3, 4회 인물은 김향화와 김원봉으로 배우 신혜선과 신하균이 기록자로 등장한다. 배우 신혜선이 기록한 김향화는 수원의 기생으로, 1919년 1월 고종임금의 붕어(임금이 세상을 떠남) 때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소복을 입고 통곡했으며, 3월 29일에는 수원기생 30여명이 자혜의원과 수원경찰서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친 인물이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신혜선은 “독립운동가들이 어렵게 물려준 소중한 환경에서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며 소감을 전했다.배우 신하균이 기억하는 인물은 ‘의열단’, ‘조선의용대’ 등을 이끌며 무장항일투쟁의 선봉에서 활약했던 ‘약산 김원봉’이다. 김원봉은 항일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 ‘조선의용대’를 이끌며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다. 그러나 해방 이후 남과 북의 역사에서 모두 지워져 독립운동가로서의 평가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던 인물이다. 약산 김원봉의 기록자로 나선 신하균은 “자랑스러운 과거가 있으니 많은 분께서 기억해주셨으면 한다. 이런 기록들을 잊지 않고 영원히 기억되었으면 좋겠다.”라며 역사의 기억을 강조했다. 김향화와 김원봉을 기억하여 기록하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MBC 특별기획 ‘1919-2019, 기억록’은 MBC를 통해 수시 방송되고, ‘기억록’ 홈페이지를 통해 만나 볼 수 있다. 영상부 seoultv@seoul.co.kr
  • [나는 너의 야동이 아니다] 불법 촬영물 유통 웹하드 등록 취소 1곳뿐… 범죄 키우는 정부

    [나는 너의 야동이 아니다] 불법 촬영물 유통 웹하드 등록 취소 1곳뿐… 범죄 키우는 정부

    “디지털 성범죄 제로(0), 국민 안심사회 구현”. 2017년 9월 26일 홍남기(현 경제부총리) 국무조정실장이 14개 부처와 함께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고한 ‘디지털 성범죄 피해방지 종합대책’ 슬로건이다. ▲변형카메라 불법 촬영 탐지·적발 강화 ▲불법촬영물 유통 차단 및 유포자 강력 처벌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보호·지원 강화 ▲디지털 성범죄 예방교육 및 국민인식 전환 등 4대 전략과 22개 과제를 통해 ‘청정지대’로 만들겠다고 했다.하지만 지난해를 돌아보면 ‘공허한 메아리’나 다름없었다. 스튜디오 불법 촬영(피해자 양예원 등)과 최종범의 옛 연인 성관계 영상 유포 협박(피해자 구하라) 등의 사건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일명 ‘골프장 동영상’으로 인해 애먼 사람들이 등장인물로 지목받았고, 이들은 죽고 싶은 고통에 시달렸다. 형사정책연구원 모니터링 결과 지난해 8~9월에만 디지털성범죄 영상이 650개나 돌아다닌 걸로 확인됐다. 여성가족부 산하 디지털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가 서울신문 의뢰로 한 피해자의 영상 유출 현황을 파악한 결과, 지난해 5~11월 6개월 동안 2712개가 업로드됐고 40만명이 시청한 것으로 추산됐다. 서울신문이 취재 과정에서 만난 피해자와 지원단체, 웹하드 및 불법촬영물 차단(필터링) 업계 관계자, 법조인 등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정부가 안이하게 대처한 책임이 크다. “연예인도 아닌데 왜 일을 크게 만들어요. 이 많은 업로더를 다 어떻게 처벌합니까. 저 혼자 이 많은 사람 다 처리 못합니다.” 지난해 비동의 유포 성적 촬영물(속칭 리벤지포르노) 피해를 당한 A씨는 경찰서로 갔지만 이런 말을 들었다. 하는 수 없이 변호사를 고용해 검찰에 고소하고, 디지털 장의업체에 수백만원을 내며 영상을 지워야 했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를 찾아가 상담을 한 A씨는 “수사기관에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제 신분증과 영상을 보내는 일이 너무 고통스러웠다”고 털어놨다. 필터링 업체 현직 종사자는 정부부처의 황당한 웹하드 관리 방식을 털어놨다. 신고제로 운용되던 웹하드는 2012년 등록제가 시행되면서 필터링 업체와 의무적으로 계약을 맺고, 불법 콘텐츠를 차단하는 업무를 맡겨야 한다. 해당 필터링 업체는 한 웹하드가 자신들 몰래 필터링을 회피하고 있는 걸 발견하고,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등록 인가 기관인 전파관리소에 신고했다. “그랬더니 전파관리소가 뭐라는 줄 아세요? 우리가 계약을 해지해 버리면 그 웹하드 등록이 취소되니 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정부기관이 오히려 꼼수를 부리는 웹하드 편을 드는 게 말이 됩니까.” 이처럼 정부가 앞장서 웹하드에 ‘온정적인’ 시선을 보이니 감시와 관리가 제대로 될 턱이 없다. 필터링을 회피한 불법 촬영물이 버젓이 올라와 유통되는 일이 빈번하지만, 제재를 받고 등록이 취소된 건 지난해 10월 위드디스크 한 곳에 불과했다. 과태료 처분 역시 최근 3년간 고작 4건뿐이다. 서울신문이 지난달 웹하드를 모니터링한 결과 ‘○○ 업소 화장실 몰카’ ‘노래방 국○ 아줌마들 유출 몰카’ 등 제목만 봐도 불법 촬영물로 보이는 영상이 제휴 콘텐츠로 올라와 있었다. 제휴 콘텐츠란 웹하드와 계약한 콘텐츠 제작·배급업체에 정식으로 등록된 저작물이라는 의미다. 어떻게 해서 불법 촬영물이 합법 저작물로 재탄생한 것일까. 이에 대해 영상물등급위원회(영등위)는 “연령을 기준으로 한 등급 분류만 할 뿐 음란물인지 여부를 놓고 적합성을 따지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즉 누군가가 불법 촬영물에 대해 자신이 저작권자라고 주장하면, 영등위는 ‘19세 이상 관람가’ 등과 같은 판정만 내릴 뿐 음란물 여부를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는 영등위가 심의한 영상에 대해 별다른 이유가 없으면 저작권물로 보고 단속하지 않는다. 영상물 관리 체계의 허점을 보여 준다.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모바일에서도 웹하드를 통해 실시간 영상 재생(스트리밍)이 가능해졌다. 사실상 PC와 같다. 하지만 PC와 달리 모바일 웹하드는 필터링을 적용받지 않는다. 불법 촬영물이 활개를 친다. 이런 문제는 수년 전부터 지적됐지만, 정부가 업계 반발에 밀려 눈감았다. 더불어민주당 권미혁 의원이 문화체육관광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으로부터 받은 자료를 보면, 정부는 2016년 모바일 웹하드도 등록제와 필터링을 적용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그러나 문체부는 저작권 침해 문제를 제기하며 반발하는 업계 의견을 받아들여 과기부(당시 미래부)에 “별도 요청이 있을 때까지 필터링을 연기해 달라”는 공문을 보냈다. 뒤늦게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과기부는 지난달부터 모바일 웹하드 등록제를 실시했고, 방통위도 이달부터 필터링 점검 및 모니터링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장다혜 형사정책연구원 연구원은 “몰래카메라나 비동의 유포 성적 촬영물을 일종의 상업 음란물(포르노)로 간주하는 풍토 속에서 디지털 성범죄가 심화됐다”면서 “불법 촬영자 처벌이나 일시적인 단속활동뿐만 아니라 영리목적으로 촬영물을 이용하는 온라인 서비스에 대해서도 지속적인 규제와 감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이혜리 기자 hyerily@seoul.co.kr
  • [기고] 사람과 사람을 잇는 국제개발협력/송진호 KOICA 사회적가치경영본부 이사

    [기고] 사람과 사람을 잇는 국제개발협력/송진호 KOICA 사회적가치경영본부 이사

    해방 직후 한국은 세계 최빈국이었다. 국제사회는 식민지배에 이어 동족 간 전쟁을 치른 가난한 나라에 127억 달러 규모의 무상원조를 지원했다. 이제 한국의 다른 이름은 연 3조원 규모의 국제개발협력, 공적개발원조(ODA)를 수행하는 ‘공여국’이다. 지난 2015년 국제사회는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사회’야말로 2030년까지 전 인류가 함께 도달해야 할 목표라는 것에 합의했다. 193개 모든 유엔 회원국이 빈곤의 완전한 종식을 첫 번째 목표로 건강과 웰빙, 양질의 교육, 성평등, 기후변화 행동 등 17개의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를 채택한 것이다. 불평등과 부정의가 만연한 오늘날 어쩌면 SDGs의 달성은 요원해 보인다. 목표 이행 4년차의 새해를 맞이해 ‘우리 세계의 전환’을 향한 구체적인 방법이 더욱 더 요청되는 까닭이다.ODA의 올바른 쓰임이야말로 지속 가능한 사회로 탈바꿈하기 위한 중요한 촉진제가 될 수 있다. 양질의 일자리, 사회복지제도 등 사회 안전망으로부터 소외된 이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향유할 수 있도록 ODA 사업을 기획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지 시민사회와 사회적 혁신 기업 등으로 대상을 확대해 참여를 도모해야 한다. 사실 유엔 등 국제사회는 오랫동안 더 나은 사회를 향한 국제개발협력의 역할을 요청해 왔다. 90년대부터 개발협력의 주요 목적이 협력대상국의 인권 증진에 있음을 확인하였고 참여, 책무성, 비차별, 투명성, 인간존엄, 자력화, 법치를 원칙으로 ODA를 수행할 것을 권고했다. 이런 원칙에 기초한 사업 수행은 사회구조적 차별과 소외의 근본원인을 해결해 모든 이가 공정하고 평화롭고 포용적인 사회에서 살아가게끔 돕는다는 것이다. 사람 중심의 발전은 인권이 침해되는 상태를 고착시키고 평화를 저해하는 모든 요인에 대항해 변화를 시도한다. 경제논리로만 해소할 수 없는 빈곤, 불평등, 소외 등 국제사회에 만연해 있는 문제 해결을 위해 사람들 사이에서 공동의 지혜를 모아줄 협력 파트너십을 요청한다. 지난해 한국국제협력단(KOICA)은 ‘인권경영규정’을 제정하고 발전과 인권이 분리될 수 없음을 선언했다. ‘사람·평화·상생번영을 통해 누구도 소외받지 않는 상생의 개발협력’의 실천을 향한 KOICA의 도전에 많은 관심을 바란다.
  • [글로벌 In&Out] 70년 만의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회 신설/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글로벌 In&Out] 70년 만의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회 신설/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2018년은 역사적인 사건이 많은 한 해였지만 한국 매체가 간과한 사건이 있다. 그것은 분단 후 거의 70년 만에 재개된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이다. 본 기사에서는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역사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러시아 정교회 한국선교회의 역사는 조선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선교회는 1897년 고종이 아관파천을 끝내고 대한제국 선포를 준비하던 무렵, 러시아 제국 외교사절단 부영사 대행의 성직자 파송 요청에 따라 공식적으로 창설되었다. 그 선교 활동은 1900년 2월 대수도사제가 한성에 도착한 후에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당시 한국인들은 한국에 새로 들어온 정교회에 큰 관심을 보였다. 선교회는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러시아어, 기독교 교리 등을 가르쳤는데, 그중 한국인 14명이 세례를 받았다. 러시아 정교회 성당은 1903년 재정비한 선교회 부속학교에서 문을 열었고 성 니콜라이 성당으로 명명되었지만 불과 1년 후 문을 닫게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 후 한국에 진주한 일본군은 러시아 선교사들을 추방하는 한편 한국선교회의 활동을 중단시켰다. 러일전쟁 후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활동은 1906년 재개되었다. 1906~1912년 성찬예배가 한국어로 완역됐고 선교회 부속의 새 남학교들과 여학교가 설립되었다. 총 322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그중 최초의 조선인 정교회 성직자도 생겼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 정교회가 대위기를 맞았다. 1918년 종교단체 자금 공급이 중단되고 자산과 토지가 몰수돼 러시아 정교회는 재정난에 봉착했다. 때문에 러시아 정교회의 최고회의기구인 성 시노드가 1923년 그 관할권을 도쿄 대주교 세르기 티호미로프에게 이양했고 재산을 일본 정교회 재단 명의로 등기했다. 조선선교회는 러시아인 일본대주교의 관할하에 발전해 나갔으며 1935년 조선인 정교도는 약 1100명에 달했다. 1940년대에 일본 당국이 조선선교회를 세르기로부터 독립시키려 압력을 가했고, 결국 1941년 10월 초 조선선교회의 전권이 1936년 조선선교회 관리자로 임명되었던 폴리카르프 프리마크 대수도사제에게 이양되었다. 해방 전후 조선선교회는 러시아 정교회의 동아시아 총대주교대리구에 편입되었고 곧이어 1945년 12월 27일부터 폴리카르프 신부의 관리하에 ‘임시자치’가 공인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승리 후 소련의 위신이 극도로 높아지자 그동안 볼셰비키 정권을 받아들이지 않고 망명한 백계 러시아 디아스포라도 친소련파와 반소련파로 분열되었다. 또한 1946년 이후 한반도에 냉전체제가 성립되면서 선교회는 일제강점기 때보다 더욱 공공연한 탄압을 당하게 되었다. 특히 1947년 반소련파 러시아인들과 일부 한국인 정교회 신도가 미소공위 소련 대표단이 폴리카르프 신부를 방문했다는 사실을 이용해 폴리카르프 신부를 쫓아내고 선교회의 소속을 바꾸기로 했다. 그들은 주일본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지지하에 일본 정교회의 관할권을 장악한 북미관구 소속 베냐민 대주교의 협조를 얻었다. 그 결과 한국선교회는 최종적으로 일본 정교회 산하로 들어갔고 폴리카르프 신부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경찰에 체포되어 1949년 6월 말 추방당했다. 선교회는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성당이 파손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으나 한국전쟁에 참전한 그리스 군인들에 의해 복구되었다. 1955년 12월 25일 일본 정교회 산하에서 다시 콘스탄티누폴리스 정교회의 관할로 옮겼다. 이렇게 한국 땅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 활동이 중단된 지 70년 만인 2018년 12월 28일 러시아 정교회 성 시노드 회의가 남북의 신도들을 관리하기 위해 새로운 총대주교대리구를 신설하고 러시아인 신부가 한국에 입국함으로써 한국정교사에 새로운 시대가 개막되었다.
  • 피란수도 중심지 광복동을 보다

    피란수도 중심지 광복동을 보다

    6·25전쟁 피란수도 중심지였던 부산 광복동의 형성과 변화를 재조명하는 연구서가 나왔다.부산임시수도기념관은 이런 내용을 담은 ‘기억의 소환, 광복동을 말하다’를 발간했다고 8일 밝혔다. 부산 원도심인 광복동은 한국 근현대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조선과 일본의 교역 전초기지였으며, 일제강점기 땐 일본인 경제·문화 중심지였다. 해방 이후에도 부산의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 중심지 역할을 놓지 않았다. 한때 인근 부산시청사 등 관공서 이전과 해운대 등 신도시 건설에 밀려 쇠퇴했으나 부산시와 지역상공인, 주민들의 노력으로 활기를 되찾았다. 총서는 ‘광복동 역사 형성과 공간적 특성’(1장), ‘광복동 역사지리와 공간의 기억’(2장), ‘광복동 번화가와 사람들’(3장), ‘광복동 주민들의 구술 생애사’(4장)로 구성됐다. 총서 발간에는 도시사, 역사학, 도시건축, 국문학 교수 등 전문 연구자들이 참여했다. 박미욱 관장은 “피란수도 부산의 역사문화 자산을 생생히 기록하고 확보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총서를 냈다”며 “전쟁기 부산 역사자료 수집 조사와 부산 근현대사 연구에 소중한 실마리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중단과 70년 만의 재개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중단과 70년 만의 재개

    2018년은 역사적인 사건이 많은 한 해였다. 대한민국 올림픽 개최 및 남북 단일팀의 참여, 남북한 관계의 전면적 개선, 남북정상회담과 판문점 선언과 평양공동선언의 채택, 북-미 정상회담 등 사건들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한반도에서 70년 이상 지속되어 온 냉전질서가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뉴스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 매체들은 2018년 말에 일어난 또 한 가지 역사적인 사건을 간과하였다. 그 것은 분단 후 거의 70년 만에 재개된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이다. 2018년 콘스탄티누폴리스 정교회가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독립을 일방적으로 인정한 후 러시아 정교회가 콘스탄티누폴리스 정교회와의 친교관계를 단절하면서 동방 정교회 내 분열이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러시아 정교회는 2018년 말 러시아에서 올레그 넬린 대사제(протоиерей Олег Нелин)를 한국에 파견함으로써 지난 70년 간 중단되었던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활동을 재개하려고 하고 있다. 물론, 2006년 평양에 김정일의 지시로 건설한 러시아 정교회의 성삼위일체 성당, 일명 ‘정백사원’이 있으나 북한의 국가 특성상 선교 활동이 어렵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는 2018년 서울에서 재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본 기사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역사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러시아 정교회 한국선교회의 역사는 조선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선교회는 1897년 고종이 아관파천을 마치고 대한제국을 선포할 준비를 하던 무렵, 러시아 제국 외교사절단 부영사 대행의 성직자 파송 요청에 따라 공식적으로 창설되었으나 그 선교 활동은 1899년 중순 2명의 러시아인 선교사와 1900년 2월 흐리산프 셧콥스키 대수도사제(архимандрит Хрисанф Щетковский)가 한성에 도착한 후에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러시아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싶었던 고종이 1898년 러시아 정교회 성당을 짓도록 서울 정동의 토지 825평을 러시아 외교사절단에 선물하였는데,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자 외교적 스캔들이 되었고 러시아 정부는 결국 땅 값을 한국 정부에 환불함으로써 토지를 사실상 구입하였다.당시 한국인들은 한국에 새로 들어온 정교회에 큰 관심을 보였다. 1900년 4월 9일자 ≪제국신문≫이 정교회 활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최근 희랍교(그리스 정교)는 들어온 지가 수 주일에 불과한데 입교하는 사람이 심히 많다고 하니 어느 교파이던지 천주교(기독교 전반)란 일반적으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듯하다.” 선교회는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러시아어, 기독교 교리 등을 가르쳤는데, 그 중 한국인 14명이 세례를 받아 정교 신도가 되었다.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은 1903년에 재장비한 선교회 부속 학교에서 열렸고 성 니콜라이堂으로 명명되었지만 불과 1년 후 문을 닫게 되었다. 1904년, 일본과 러시아 등 제국주의 열강 간 대립이 첨예해지면서 한반도와 만주가 전장이 되었다. 한국에 진주한 일본군은 러시아 선교사들을 추방하였고 한국선교회의 활동을 중단시켰다. 러일전쟁 후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활동은 1906년 재개되었다. 1906년 ~ 1912년 성찬예배가 한국어로 완역됐고 선교회 부속의 새 남학교들과 여학교가 설립되었다. 총 322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그 중 최초의 조선인 정교회 성직자도 생겼다.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 정교회가 대위기를 맞이하였다. 1918년 인민위원소비에트의 ‘국가와 종교, 교회와 학교의 분리에 관한 법령’ 공포로 종교 단체 자금 공급이 중단되고 그 자산과 토지가 몰수되면서 러시아 정교회가 재정난에 봉착하였다. 소비에트 정부가 조선선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러시아 정교회의 최고회의기구인 성 시노드가 1923년 그 관할권을 도쿄 대주교 세르기 티호미로프에게 이양하였고 일본정부로부터 소유권 보호를 받기 위해 그 재산을 일본정교회 재단의 명의로 등기했다. 조선선교회는 러시아인 일본대주교의 관할하에 발전해 나갔으며 1935년 조선인 정교도는 약 1100 명에 달했다.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본당국이 조선선교회를 러시아인 관구장주교 세르기 티호미로프로부터 독립시키려 압력을 가하였고, 결국 1941년 10월 초 조선선교회의 전권이 1936년 조선선교회 관리자로 임명되었던 폴리카르프 프리마크 대수도사제에게 이양되었다. 해방 전후 조선선교회는 러시아 정교회의 동아시아 총대주교대리구에 편입되었고 곧 이어 1945년 12월 27일부터 폴리카르프 신부의 관리 하의 임시 자치가 공인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승리 후 소련의 위신이 극도로 높아지자 그 동안 볼셰비키 정권을 받아들이지 않고 망명한 백위계 디아스포라도 친소련파와 반소련파로 분열되었다. 또한 1946년 이후 냉전체제가 한반도에서 성립되면서 선교회는 일제강점기 때보다 더욱 공공연한 탄압을 당하게 되었다. 특히 1947년 2차 미소공위 개최시 소련 대표단이 선교회 맞은편에 숙소를 차리고 폴리카르프 신부를 방문한 사실이 알려지자 선교회의 대소관계와 관련된 의혹이 심화되고 반소련파 러시아인들과 일부 한국인 정교 신도가 이를 이용하여 폴리카르프 신부를 쫓아내고 선교회의 소속을 바꾸기로 했다.그들은 주일본 연합군 최고사령부 (SCAP)의 지지 하에 일본정교회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영향력을 일소하고 그 관할권을 장악한 북미관구(현재 아메리카 정교회) 소속의 베니아민 바살리가 대주교(архиепископ Вениамин Басалыга)의 협조를 얻었다. 그 결과 한국선교회는 최종적으로 일본정교회의 산하로 들어갔고 폴리카르프 신부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경찰에 체포되어 1949년 6월말 북한으로 추방당하고 만주를 거쳐 소련으로 귀국하였다. 선교회는 한국전쟁에서 폭격으로 성당이 파손되는 등 커다란 피해를 입었으며 한국전쟁에 참전한 그리스 군인들에 의해 복구되었다. 1955년 12월 25일 북미관구 소속의 일본정교회 산하에서 다시 이탈하고 터키 이스탄불의 콘스탄티누폴리스 정교회의 관할로 옮겼다. 이렇게 한국 땅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 활동이 중단된 지 70년 만인 2018년 12월 28일 러시아 정교회 성 시노드 회의가 남북한의 신도들을 관리하기 위하여 싱가포르 및 동남아시아 주재 총대주교대리구를 신설하고 러시아인 신부가 한국에 입국함으로써 한국정교사에 새로운 시대가 개막되었다. 글·사진 : 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 29세 美 코르테스 의원, 70% 부유세로 SNS 스타로

    29세 美 코르테스 의원, 70% 부유세로 SNS 스타로

    지난 3일 개원한 116대 미국 의회에서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만큼 화제가 되는 인물이 있다. 미 의회 역사상 최연소인 29세로 연방하원에 입성한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의원으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에 대한 공격적 비판뿐 아니라 대학 때 춤 동영상으로 ‘댄싱퀸’ 등 애칭으로 불리며 눈길을 끌고 있다. 이런 코르테스 의원이 이번에는 70% 부유세 주장으로 또다시 주목받고 있다. 코르테스 의원은 6일(현지시간) CBS 시사프로그램 ‘60분’에서 “혁신적인 조세 시스템이 작동했던 1960년대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며 “소득이 1000만달러(약 110억원)를 넘을 경우 60~70%의 세율을 볼 수 있을 것”이라며 강력한 부유세를 주장했다. 즉 부자 감세를 주장하는 트럼프 대통령에 부자 증세로 맞서는 것이다. 그는 이어 “링컨 대통령이 과감하게 노예 해방 선언에 서명했으며, 루스벨트 대통령도 사회보장제도와 같은 대담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며 대담한 생각이 사회를 바꾼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 의장은 “경제 활동을 심각하게 위축시키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될 것”이라면서 “그런 방안은 끔찍한 아이디어”라고 일축했다. 그는 이어 “지금 경제가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가 동시에 발생했던 1970년대를 연상시킨다”며, 적절하지 못한 생각이라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 보스턴대 출신인 코르테스 의원은 민주당 내 모임인 ‘미 민주당 사회주의자’ 소속으로 혁신적인 부유세 도입, 건강보험 전면 확대, 공립대 무상 등록금 도입과 같은 미국식 자본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과감한 정책의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댄싱 영상과 대담한 제안으로 코르테스 의원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면서 그의 트위터 팔로워 수도 213만명을 돌파하는 등 펠로시 하원의장을 추월할 만큼 인기를 얻고 있다고 평가했다. 워싱턴의 한 소식통은 “남미 이민자 2세로 푸에르토리코계 미국인인 코르테스 의원은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진보적인 제안과 함께 스타 의원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워싱턴 한준규 특파원 hihi@seoul.co.kr
  • [김선자의 신화로 문화읽기] 늑대에겐 죄가 없다, 화웨이와 늑대

    [김선자의 신화로 문화읽기] 늑대에겐 죄가 없다, 화웨이와 늑대

    최근 중국을 대표하는 통신장비 분야의 다국적기업 화웨이에 대한 기사가 자주 올라온다. 지난 12월 화웨이 부회장이 캐나다에서 체포됐다는 기사가 뜨면서 화웨이의 기업 문화인 ‘늑대문화’가 재조명된 바 있다.런정페이 회장이 ‘문화혁명’의 광풍을 이겨 내고 대학을 졸업한 후 인민해방군에 입대했고, 그때부터 통신장비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는 이야기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특히 그가 군인 출신이기에 수직적 위계질서를 보여 주는 ‘늑대문화’가 기업의 기본 이념이 됐고, 그것이 지금의 화웨이를 성장시킨 동력이 됐다는 것 역시 여러 번 보도된 바 있다. 화웨이의 그러한 경영 방식은 ‘낭성(狼性)’경영, 즉 ‘늑대경영’(Wolf Management)이라는 이름으로 2000년대를 풍미하는데, 거기에는 장룽(본명 뤼자민)이 쓴 ‘늑대토템’(2004)이라는 책의 인기가 일조했다. ‘중화민족’의 피 속에 잠재된 늑대의 유전자를 되살려 위대한 중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작가의 메시지는 중국 전역을 ‘늑대 신드롬’에 빠뜨렸다. 사실 ‘중화민족’의 ‘토템’이 늑대라는 주장은 매우 생경했다. 늑대를 토템으로 생각하는 것은 대부분 북방 유목민족들이었기 때문이다. 초원의 유목민족은 하늘을 바라보며 우는 늑대가 천신, 즉 ‘텡그리’와 교감한다고 믿었다. 그들의 영혼을 천신에게 인도하는 천신의 대리인이라고 여긴 것이다. 늑대는 가젤을 잡아먹으며 초원의 생태환경을 지켜 주기도 했다. 대장 늑대의 질서 안에서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강인함을 지닌 늑대는 두렵고 무서운 존재이지만, 암컷 늑대는 지극한 모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늑대는 초원 민족들의 수호신이면서 경외의 대상이었고, 흉노나 돌궐, 몽골 등 초원에서 활동했던 민족들은 자신들이 늑대의 후손이라는 신화를 전승했다. 그런 늑대를 ‘중화민족의 토템’이라고 말한 장룽은 그 이유를 소위 ‘중화민족의 시조’라 일컬어지는 ‘황제’(黃帝)에게서 찾았다. 황제가 서북 지역에서부터 흥기했기에 황제의 피 속에 늑대의 유전자가 들어 있고, 그 후손인 중화민족의 피 속에도 강인한 늑대의 유전자가 내재해 있다고 했다. 사실 1990년대에 내몽골자치구 츠펑의 훙산문화 유적지에서 C자 형태의 곡옥(曲玉)이 발견됐는데, 중국 학자들은 그것이 최초의 ‘용’이라고 했다. 중화민족의 토템인 용의 발원지가 바로 그곳이며, 훙산문화의 주인공은 황제족이라고 했다. 심지어 그 옥기의 머리 형태가 ‘곰’과 비슷하다고 하면서 황제의 토템이 ‘곰’이라고 주장했다. ‘중화민족’의 토템이 ‘용’에서 ‘곰’으로, 다시 ‘늑대’로 변한 것이다. 사실 어떤 한 민족의 토템은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다. 민족의 시조에 관한 신화는 그 민족의 시원부터 시종일관 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변화하는 토템에는 이데올로기가 개입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그렇게 ‘늑대토템’이 신드롬을 일으키면서 ‘늑대경영’이 유행했고, 그 선두에 화웨이가 있었다. 그랬던 화웨이가 지금 수세에 몰려 있다. 물론 미국과의 통상마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그들이 자랑했던 ‘늑대경영’이 이제 한계에 도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거칠지만 자유롭고 강인한 늑대의 ‘낭성’을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경영 방식과 동일시하며, ‘늑대경영’을 해야만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생존을 위해 지혜와 용기를 지닌 늑대를 모독하는 일이다. 인간들 때문에 초원에서 밀려나 사라져 가는 늑대는 사실 아무 죄가 없다. ‘늑대경영’ 열풍이 몰아쳤을 때 일각에서 그에 대한 반성으로 ‘양성경영’(Sheep Management)이 제기된 바 있다.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수평적 사고를 하는 리더를 중심으로 ‘착한 경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화웨이는 과연 그렇게 변화할 수 있을까. 자못 궁금하다.
  • [데스크 시각] 혐오 시대, 청년들은 무엇에 분노해야 하나/이창구 사회부장

    [데스크 시각] 혐오 시대, 청년들은 무엇에 분노해야 하나/이창구 사회부장

    “꼰대 같은 소리 집어치우라”는 댓글이 달릴 것으로 예상하면서도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청년들을 훈계하려는 게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 추락이 안타까워서 쓰는 글은 더더욱 아니다. ‘혐오’의 시대에 청년들은 과연 무엇에 ‘분노’해야 하는지 함께 고민해 보자는 취지다.지난달 17일 발표된 리얼미터 여론조사를 보면 20대 남성의 문 대통령 지지율이 29.4%로 전체 남녀별 연령집단 중 가장 낮았다. 대통령의 지지율을 20대 남성들이 앞장서서 끌어내리고 있는 셈이다. 20대 남성들이 문재인 정부와 갈라선 결정적인 원인은 젠더 이슈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학창 시절에는 여학생들이 공부를 더 잘했고, 취업 경쟁과 직장 생활에서는 오히려 군대도 갔다 오지 않은 여성들에게 차별받고 있다고 느끼는 남성들에겐 현 정부의 여성 우대 정책이 실현 여부와 상관없이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리 여성을 혐오해도 우리 사회는 ‘미투운동’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가서도 안 된다. 여성을 적으로 돌린다고 남성 일자리가 늘어나는 것도 아니다. 사회구조를 보면 권력을 휘두르는 다수는 여전히 남성이며, 수많은 여성들이 매일 성폭력에 희생되고 있다. 20대 남성이 분노할 대상은 또래 여성이 아니라 폭력적인 가부장주의다. 많은 남성들이 대법원의 양심적·종교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무죄 판결에 반발하고 있다. 일부는 “그럼 군대 갔다 온 내가 비양심이냐”라는 단순 논리를 들이댄다. 총을 드는 것 대신 다른 방식으로 의무를 다 할 테니 종교적 신념과 양심을 지키게 해 달라는 소수를 포용하지 못하는 국가는 전체주의나 다름없다. 우리가 분노해야 할 대상은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아니라 자신은 물론 아들까지 군대에 보내지 않았으면서 철 지난 반공이데올로기를 외치는 자들이다. 난민과 이주노동자를 혐오하는 양상은 남녀 구분이 없다. 난민을 일자리 도둑 또는 잠재적 성폭행범으로 보는 청년도 적지 않다. 난민을 추방하는 서구의 극우세력을 비판하던 이들까지 막상 제주도에 예멘 난민 480여명이 도착하자 생각이 바뀌었다. 난민과 이주민을 다 몰아내면 ‘좋은 일자리’가 늘까? 정작 청년들이 분노해야 할 것은 경제력 세계 12위인 대한민국이 480여명 중 고작 2명만 난민으로 인정한 옹졸함이다. 정규직에 안착한 청년들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반대한다. 나는 힘들게 공부해 정규직이 됐는데 정부가 나서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구분을 공정한 경쟁의 결과로 인식한 탓이다. 그러나 비정규직을 양산한 것은 신자유주의 체제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낙오자가 아니라 이 체제의 피해자다. 청년들은 정규직화 정책에 분노할 게 아니라 오직 경쟁만 부추겨 대한민국을 각자도생의 전쟁터로 만든 기득권 세력에 분노해야 한다. 해방 이후 친일과 분단으로 기득권을 유지했던 구세대는 4·19세대에 의해 전복됐고, 군사정권과 야합한 4·19세대는 86세대(80년대 학번, 60년대생)에 의해 부정당했다. 그러나 지금 청년들은 정치적 올바름에 경제력까지 움켜쥔 86세대를 향해 욕만 할 뿐 극복하지는 못하고 있다. “당장 먹고살 길이 없는데 무슨 세대 타령이냐”는 항변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을’들의 싸움을 부추기는 구체제의 본질은 간과한 채 자신보다 약한 타자를 향해 ‘메갈녀’, ‘무기(무기계약직)충’, ‘난민충’이란 혐오만 퍼부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window2@seoul.co.kr
  • [황인숙의 해방촌에서] 모든 것이 아름다울 뿐

    [황인숙의 해방촌에서] 모든 것이 아름다울 뿐

    새해 첫 달 달력을 본다. 소한은 지났고 두 주일 뒤에 대한이다. 다음 장을 넘기니 2월 4일 입춘, 19일이 우수. 이렇게 이 겨울도 얼추 가겠다. 봄 또한 머지않으리라 힘이 나려다가 순식간 내년 이맘때 나이만 한 살 더 먹은 채 다시 한겨울이라는 생각에 기가 꺾인다. 아무래도 내가 요즘 비관 모드에 놓인 것 같다. 어제 저녁에도 그랬다.이웃 동네에 사는 후배 시인이 자기 어머니께 드릴 선물로 캐시미어 목도리를 사는 김에 내 것도 함께 샀다고 가지고 왔다.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친정에 들어가 지내는 그는 늘 생글생글 웃으며 힘이 넘친다. 자리에 앉으면서 예의 쾌활한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선생님, 최근에 무슨 좋은 일 있으셨어요?” 자격지심일까. ‘좋은 일’을 생각하고 힘을 내 살라는 뜻을 담아 준비한 질문같이 여겨져 살짝 짜증이 나서 나는 “몰라, 생각 안 나”라고 했다가 내가 퉁명스러웠나 싶어서 묽힐 겸 “너는 무슨 좋은 일이 있었니?”라고 되물었다. “어….” 멈칫거리다 그가 대답했다. “노총각 친구가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됐어요.” “잘됐네.” “그쵸? 그쵸?” “응, 근데 결혼하는 게 꼭 좋은 일인가?” 별 생각 없이 잇는 내 말에 그가 “그쵸? 꼭 좋은 일일까요? 그럴까요?” 대꾸했다. 갑자기 대답을 하려니 노총각 친구의 결혼 건이 일착으로 떠오른 걸 테다. 아마 그 소식을 듣고 제 일처럼 기뻤을 터. 그 기쁨을 내가 좀은 시들하게 만들고 말았다. 누군가에겐 결혼이 꼭 좋은 일이지. 이 말을 했으면 좋았을 걸. 다행히도 후배는 내 썰렁함을 무찌르고 열정적으로 제 밥벌이 계획을 들려주었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제가 소녀가장이잖아요”로 말문을 열며. 마흔이 훌쩍 넘은 저를 ‘소녀가장’이라 이르는 건 아이들뿐 아니라 늙으신 친정 부모의 생계까지 책임지려는 각오이리라. 화훼에 관심이 많아서 꽃집을 운영하는 게 꿈이라는 얘기는 전부터 들은 터였다. 화분갈이부터 열심히 배우리라는 것, 그냥 꽃집으로는 안 되고 책방을 겸할 거라며 이런저런 아이템을 펼쳤는데, 수익성도 있어 보이고 썩 매력적이어서 소개하고 싶지만, 영업기밀이니 입을 다물련다. 그런데 문제는 가게임차다. 후배가 미리 알아본바 임대료가 끔찍하게 비싸다. 그가 사는 동네에 새벽 한 시까지 하는 빵집이 있다. 나도 익히 아는 재래시장 입구 건너편에 있는 가게다. 수십 가지 빵을 만들면서 쌓아 놓고 파는데, 퍽 싼 가격이어서 인근 제과점이 장사가 덜 된다고 한다. 거기 월세가 250만원이라나. 말도 안 된다고 내가 펄쩍 뛰자 후배는 세상 다 산 표정으로 담담히 말했다. “다 그래요. 그래도 남으니까 하겠죠?” 그 집 빵 가격을 생각하면 얼마나 팔아야 250만원이 될지 가늠이 안 된다. 그다지 넓지도 않은 공간에서 두세 명이 일하던데, 대체 얼마나 남는다는 걸까. 후배 말대로 그 집만이 아니다. 건물주들은 정말 끔찍한 마음을 가진 사람뿐인 걸까. 이건 숫제 상노(商奴)다. 상업 지역에 노점을 마구 활성화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건물 임대료가 좀 내려가지 않을까.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지? 음…, 나의 침울한 마음, 비관 모드에 대해 얘기해 볼까 했는데 딴 얘기로 빠지다가 급기야 누구(건물주)를 욕하고 화를 내니까 좀 기운이 난다.내가 요즘 심각하게 우울한가 보다. 이상기온에 대해 생각하다가 내 살아 있는 동안 지구 멸망을 볼 수 있겠다 결론 내리면서 모든 생명체에 암적인 존재인 인류는 자업자득이라 치고 다른 동식물은 무슨 죄인가 싶었다. 그런데 생각이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른 동물들, 그들은 인간이 없었으면 과연 살 만했을까로 이어지면서 아니라고 또 결론을 내렸다. 더 강한 동물에 대한 공포와 굶주림 등등. 결국 태어나지 않는 게 제일이라는. 내가 늙고 병들어서 생각이 이렇게 돌아가는 거겠지. 젊은이들은 부디 달리 느끼기를. 피겨 스타 김연아를 떠올리게 하는 메건 애벗의 장편 ‘이제 나를 알게 될 거야’에 이런 구절이 있다. ‘아픈 모습을 보이면 안 돼. 모든 것이 아름다울 뿐 아픔은 없어야 해.’ 대개 인생은 아픈 것이다. 그럴수록 나의 시는 ‘모든 것이 아름다울 뿐 아픔은 없어야 해’. 부디 그러기를.
  • [명경재의 DNA세계] 과학기술에는 큰 책임감이 따른다

    [명경재의 DNA세계] 과학기술에는 큰 책임감이 따른다

    맞춤형 베이비, 모든 질병에서 해방된 인류의 출현, 슈퍼 휴먼의 출현. SF영화에서나 들어볼 만한 이야기가 지난해 말 과학계에서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중국 남방과학기술대 허젠쿠이 교수는 지난해 11월 28일 유전자 가위 학회에서 자신이 유전자 가위를 이용해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 저항성이 있는 쌍둥이를 만들었다고 발표해 과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유전자 치료의 근본 생각은 질병에 취약한 유전자를 가진 환자의 유전자를 병이 발생하기 전에 미리 고쳐 질병에 걸리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유전자와 질병의 상관관계를 알아내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 의생명과학자들은 유전자 발현이나 유전자 염기서열 변화로 질병을 치료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해 왔다. 선천적 면역결핍증의 유전적 원인이 밝혀진 뒤 1990년대부터 유전자 치료가 행해졌다. 문제는 환자의 면역결핍증은 치료가 됐지만 유전자 치료과정 중에 사용한 바이러스 벡터가 세포의 항암 유전자를 파괴하는 부작용 때문에 환자들은 약 10년 뒤 암으로 사망한다는 것이다. 유전자 치료의 부작용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 없이 임상시험을 진행한 결과였다. 이로 인해 유전자 치료의 연구개발은 상당히 퇴보했고 유전자 치료에 대한 회의 역시 과학계에 자리잡게 됐다. 아직까지 유전자 가위 기술은 안정성이 완전히 증명되지 않은 기술이다. 지금도 이 기술을 사용할 경우 생각지도 않은 부작용이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기도 하고 이를 극복하는 새로운 방법이 보고되기도 한다. 아직까지는 완벽하게 인체실험까지 가기는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이다. 또 유전자 가위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서 만든 가이드라인에는 배아에 행하는 유전자 가위의 유전자 편집은 안전성이 완벽하게 증명될 때까지 금지하기로 돼 있다. 이런 의생명과학 분야의 약속, 그리고 유전자 가위를 이용한 기술의 발전 가능성을 허젠쿠이 교수의 연구결과가 약 20년 전 유전자 치료 때처럼 퇴보시키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과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이 사실이다. 유전자 가위는 현재까지 발견된 생명현상이 만들어 낸 가장 우수한 유전자 편집 기술이다. 이 기술이 안정성 등 여러 측면을 고려해 연구가 진행되면 우리가 SF영화에서나 보던 질병으로부터의 해방, 삶의 질 향상 등 많은 것을 이뤄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책임감 없는 일부 과학자들의 배아 조작 같은 행동은 오히려 발전하고 있는 과학 분야를 저해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번 사건으로 많은 모방성 시도가 있을 수 있고 이로 인해 현재까지 몰랐던 유전자 가위 기술의 부작용이 상당수 발견될 것이다. 이런 부작용들이 세포 실험, 동물 실험으로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인체 실험에서 나오게 된다면 유전자 가위 기술에 대한 부정적 반향은 걷잡을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결과적으로 좋은 기술이 매장당하는 결과가 올 수도 있다. 이번 사건을 보면서 영화 ‘스파이더맨’에서 나온 “큰 힘을 사용하는 데는 큰 책임감이 따른다”라는 대사가 생각난다. 유전자 가위를 가지고 인체 실험을 진행하려는 의생명과학자들, 그리고 다른 기술을 사용하려는 과학자들이 자신이 하려는 실험을 하기 전에, 이 문장을 한 번만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 [정대화의 더 정치] “민생이 국정 기본… 노동계와 대립 말고 野에 끌려가지 말라”

    [정대화의 더 정치] “민생이 국정 기본… 노동계와 대립 말고 野에 끌려가지 말라”

    기해년 황금돼지의 새해가 밝았다. 모든 사람들이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으로 설렐 것이다.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계획을 세우고 결심도 하기 때문이다. 정부도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가볍지는 않을 것 같다. 평창올림픽과 남북 정상회담으로 치솟았던 지지율이 하반기 들어 계속 하락해서 지금은 매치포인트니 데드크로스니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반전의 동력이 잘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그래서 물어보자. 지지율이 왜 떨어질까? 어려운 질문에 쉽게 대답하면 “잘못하니까”라는 즉문즉답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대답은 간단하지만, 해답은 간단하지 않은 상황이므로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우선 다섯 가지 가정을 제시해보자. 첫째, 지지율을 끌어올릴 추동력이 없다. 쓸 만한 엔진이 없거나 있어도 가동되지 않고 있다. 둘째, 소소하지만, 부정적인 인식을 부추기는 악재가 계속되고 있다. 셋째, 경제정책은 무주공산이고 경제라인을 교체했지만, 경제상황은 호전되지 않고 있다. 넷째, 주 엔진인 남북관계가 장기 소강상태에 들어가 언제 재가동될지 불확실하다. 다섯째, 국정운영의 주체인 청와대, 내각, 여당이 너무 조용하다. 왜 갑자기 관전모드로 전환되었나? 이 가정이 맞다면, 지지율이 떨어지는 이유는 설명된 셈이다. 맹물로 가는 자동차가 없는 법이니 지금 상황은 현실을 적절히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정권 내부에 스캔들이 없고 야당의 공세가 여론의 지지를 받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하락세가 완만할 뿐이다. 지지율의 하락 원인이 정권 내부에 있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평가는 엇갈린다. 야당의 투쟁력이 취약한 상황이니 정권 차원에서 심기일전하여 대책을 마련하면 조만간 지지율을 회복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이 있다. 반대로, 정권 내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쉽지 않고 야당의 투쟁력이 강화되면 감당하기 어려워질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도 있다. 양쪽 모두 가능한 전망이다. 질문을 했으니 기초적인 진단에서 시작해보자. 문재인 정부를 대표하는 구호는 “나라다운 나라”이다.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100대 국정과제와 487개 실천과제를 제시하면서 ▲국민이 주인인 정부 ▲더불어 잘사는 경제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 ▲고르게 발전하는 지역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 등을 5대 국정목표로 제시했다. 나는 해방 후 우리 정치사에서 이만큼 훌륭한 국정비전을 제시한 정부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권력이 국민 앞에 진솔하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그러나 문제는 실천이다. 새 정부 집권 20개월이 되었고 올해로 3년차에 접어들었다. 잘하는 것도 있고 못하는 것도 있으니 무조건 잘못했다거나 국정파탄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정부도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나 성과를 보여주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잘하는 것은 어설프고 못하는 것은 답답해 보인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그 상황에서 블루칩인 남북관계가 소강국면에 접어들었으니 지지율 하락은 당연하다. 집권 2년을 넘어서면 개혁이 어렵다는 정치적 통설이 있는데 그 많은 실천과제를 어떻게 감당할지 걱정이다. 세 가지 짧은 질문과 답변. 첫째 지난 20개월 동안 야당이 개혁을 막았나? 그렇다, 야당은 확실하게 개혁을 막았다. 둘째 야당의 저항이 거셌나? 국회 안에서는 거셌지만, 국회 바깥으로 확장되지는 않았다. 셋째 정권은 개혁을 잘했나? 노력은 했지만 잘하지는 못했다. 결론적으로, 야당이 반대한다고 개혁이 완전 불가능한 것은 아니므로 지지율 하락이 정권 내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진단은 정답이다. 현실적인 상황도 점검해보자. 지지율 하락은 사실이지만 위기 국면은 아니다. 위기에 부합하는 내우외환도 없다. 개혁에 대한 저항도 심각하지 않다. 그렇다면 집권 후 2년내 개혁이라는 정치적 통설을 넘어 개혁의 마지노선이 1년 더 연장되어 집권 3년차까지도 개혁이 가능할 것 같다. 다만, 조건이 있다. 정권 초기의 개문발차를 감안해서 국정운영의 시스템을 재구축해야 하기 때문이다. 첫째, 정치적 대립이 불가피하다면 나머지 사회적 대립은 최소화하는 갈등관리가 필요하다. 특히, 최근 고조되는 노동계와의 갈등은 무익하다. 대립적 노동정책보다는 수평적으로 소통하는 노동정책이 문재인 정부답다. 할 일이 태산 같고 싸워야 할 대상이 많은데 굳이 노동자들과 싸워야 할 이유가 없다. 둘째, 경제제일주의, 민생제일주의는 국정의 기본이다. 경제 없이는 남북관계도 없고 남북관계의 스포트라이트도 경제의 뒷받침 없이는 빛이 바랜다. 남북관계 때문에 경제를 소홀히 한다는 인상을 주어서도 안 된다. 특히, 재벌 대기업 중심의 경제구조에서 중소기업가와 자영업자를 노동자와 대립시키는 정책은 피해야 한다. 셋째, 교육혁신은 그 자체로 고유한 가치를 갖는 정책 목표이다. 교육을 등한시하거나 선거의 하위영역으로 도구화해서는 안 된다. 경제만큼이나 교육 역시 전체 국민의 보편적인 관심사인 나라에서 혁신도 없고 믿음도 없는 교육이야말로 불만과 실패의 지름길일 수밖에 없다. 드라마 ‘스카이캐슬’이 왜 주목받는지 생각해야 한다. 넷째, 정치에서 여야관계는 영원한 긴장관계이다. 문제는 정부와 여당의 대응방식인데, 야당과 싸우거나 협력을 구하거나 양자택일의 선택이 필요하다. 필요하다면 당당하게 싸우고 그렇지 않다면 양보와 협력의 실사구시적 선택을 해야 한다. 이도 저도 아닌 야당에 끌려가는 방식으로는 개혁도 어렵고 안정적인 국정운영도 어렵다. 다섯째, 모든 권력에는 탄생설화가 있고 권력의 정당성도 탄생설화에서 비롯된다. 문재인 정부의 탄생설화는 광화문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6개월간 타올랐던 촛불이다. 문재인 정부에게 촛불은 출발점이자 기반이라는 뜻이다. 촛불은 만병통치약이 아니지만, 정권이 촛불정신에서 벗어나는 것은 자기부정이자 실패의 지름길이다. 몇 가지 실무적인 단상. 대통령의 이미지 재설정이 필요하다. 국가 원수인 대통령이 대북특사처럼 인식되는 것은 문제다. 대통령이 특수한 시기에 남북관계에 집중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경제를 비롯한 국내 과제가 최대 현안으로 부각된 상황에서는 역할이 바뀌어야 한다. 청와대와 내각에 대한 전면적인 인사혁신과 심기일전도 필요하고 2019년 정책기조를 사회경제 우선주의로 전환하는 것도 필요하다. 국정동력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대통령과 국무총리 외에도 18개 부처 장관과 각종 장관급 부처의 책임자들이 정례적으로 국민과 직접 소통하는 책임행정도 권할 만하다. 다행히 여론조사를 살펴보면 젊은층은 여전히 대통령과 정부를 신뢰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바람직한 지표인데, 그렇다고 젊은층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국가에서 국민은 선택하는 사람이지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시지탄(晩時之歎)이라는 말처럼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필요하다고 판단할 때 실천해야 한다. 집권 3년차가 연장된 개혁의 시기라고 본다면 지금은 천재일우의 적기다. 격동의 한국 현대사에서 우리가 비단길에 꽃잎 뿌리며 배부르게 걸어갔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풍찬노숙이었고 그 칼바람을 맞으며 겨우 여기까지 왔지만 우리는 여전히 배고프고 힘에 부친다. 찬밥 한술 얻어 걸친 거지가 부자 몸조심 흉내 내다가 굶어 죽었다는 일화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상지대 총장
  • [한국영화 100년의 기록] 비극의 시대에 싹튼 한국영화…세계의 은막서 꽃피다

    [한국영화 100년의 기록] 비극의 시대에 싹튼 한국영화…세계의 은막서 꽃피다

    한국의 영화시장은 2013년을 기점으로 2조원대 매출, 2억명 이상 관객수를 꾸준히 기록하고 있고, 한국영화 관객 점유율도 50% 이상을 유지하는 세계적인 영화 강국입니다. 특히 1인당 연평균 극장 관람 횟수는 4.25회로 세계 최고 수준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영화진흥위원회 ‘2017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 기준). 이 같은 한국 영화산업의 활기는 언제 어디에서부터 기원했던 것일까요. 2019년은 한국영화 탄생 100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해입니다. 서울신문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한국영상자료원 정종화 선임연구원이 쓰는 ‘한국영화 100년의 기록’을 연재합니다. 한국영화의 도전과 성장, 중흥과 불황의 역사를 되돌아봄으로써 한국 영화산업의 역동성의 근원을 탐색하는 흥미로운 기획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첫 회는 한국영화사 100년에 대한 지도 그리기로 시작합니다.●한국영화의 탄생과 도전(1919~1945) 한국영화사의 시작은 언제일까. 중국, 일본 등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한국 역시 서구영화의 수입과 감상으로 영화사(映史)를 시작했다. 첫 영화 촬영이 이루어진 것은 1901년 미국의 여행가 엘리어스 버튼 홈스가 내한한 때로 기록되며, 대중에게 널리 영화가 공개된 것은 1903년 6월 동대문 안에 위치한 한성전기회사 기계 창고의 상영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들이 주도해 제작한 첫 영화는 1919년 연쇄극 ‘의리적 구토’(義理的仇討)다. 연극과 영화가 결합했다는 의미의 연쇄극은 연극 사이사이에 야외의 활극 장면 같은 것을 영화로 보여 주는 방식이었다. 비록 완전한 형태의 극영화는 아니었지만, 상영된 필름에는 서구 활극영화를 염두에 둔 스펙터클한 장면과 서울의 풍경을 촬영한 실사 장면들이 포함됐다. ‘의리적 구토’가 처음 상영된 1919년 10월 27일을 ‘영화의 날’로 지정한 이유다. 본격적인 극영화는 1923년에 등장했다. ‘월하의 맹서’는 조선총독부 문화영화였지만, 조선인 감독 윤백남의 연출로 완결성 있는 극의 형태로 구성됐다는 영화사적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고전소설을 영화화한 ‘춘향전’(1923)과 ‘장화홍련전’(1924)이 이어지며 무성영화 시기를 열게 된다. 조선 무성영화의 기념비적 작품은 바로 나운규의 ‘아리랑’(1926)이다. 당시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처음 영화라는 매체를 알게 된 계기가 이 영화를 통해서였다고 할 정도로 대중적인 파급력이 컸던 작품이다. 이후 조선영화인들은 1935년 ‘춘향전’을 통해 토키영화(발성영화)를 개척하며 영화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지만, 1940년 8월 조선영화령 공포 이후 일제의 전시체제로 편입되면서 민간 차원의 영화 제작은 불가능해졌다. ●성장하는 한국영화(1945~1969)해방 이후 영화를 만드는 것 자체가 힘든 열악한 상황에서도 한국영화인들의 극영화 제작은 멈추지 않았고, 이는 6·25전쟁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영화인들의 열정은 전후 한국영화가 성장하고 1960년대 내내 대중오락의 왕좌를 차지하는 기반이 됐다. 1950년대 한국영화사를 성장기라 일컫는 이유는 무엇보다 영화 제작 편수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1954년 단행된 국산영화 입장세 면세 조치라는 정책적 호재 그리고 ‘춘향전’(이규환·1955)의 흥행 성공이 기폭제가 돼 1954년 불과 18편을 기록했던 극영화 편수는 1959년부터 100편대를 훌쩍 넘어서게 된다.1960년 4·19 혁명과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를 거치며 탄생한 박정희 정권은 반공에 기반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동력 삼아 국가주도의 산업화를 추진했다. 영화산업 역시 급격하게 외양이 넓어졌지만, 이에 비해 영화로 만들 이야기가 그 수요를 받쳐주지 못했던 시기였다. 흡족한 시나리오를 만날 수 없었던 감독들은 이미 예술성을 인정받은 소설을 각색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것이 바로 1960년대 한국영화가 대중성뿐만 아니라 작품성까지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인 ‘문예영화’였다. 유현목의 ‘오발탄’(1961·이범선 원작)을 비롯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1961·주요한 원작) ‘김약국의 딸들’(유현목·1963·박경리 원작), ‘안개’(김수용·1967·김승옥 원작) 등 1960년대의 많은 작품들이 원작 소설을 영화화하는 방식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이만희의 ‘만추’(1966·필름 유실)는 대중과 평단 모두로부터 골고루 지지받으며 한국영화사의 걸작으로 남았다. ●통제와 불황, 암흑 속의 모색(1970~1989)1970~80년대는 한국영화의 침체기였다. 1970년대 한국영화는 TV, 즉 안방극장과 외국영화 사이에 끼어 호스티스 멜로드라마와 국적 불명의 무협영화로 연명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80년대 역시 불황과 침체의 연속이었고, 흥행 방편이었던 에로티시즘 영화가 현대부터 시대극까지 아우르며 시리즈로 양산됐다. 하지만 그 기나긴 통로를 빠져나오는 고통의 시기는 1980년대 후반 ‘코리안 뉴웨이브’ 영화가 등장하고, 1990년대 후반 한국영화의 도약을 준비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1970년대 한국영화의 불황은 수치로 증명된다. 1969년 관객 동원 1억 7300여명으로 정점에 도달했던 영화 관객수는 1974년 1억명 이하로 감소했다. 영화 관객은 늘어나는 TV 보급 대수에 반비례했고, 1969년 229편을 기록했던 제작 편수 역시 1971년 202편에서 1972년 122편으로 급감했다. 1970년대 중반에는 인기 대중소설을 새로운 감각의 젊은 감독을 기용해 영화화한 호스티스 영화들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별들의 고향’(이장호·1974)의 46만명 흥행, ‘겨울여자’(김호선·1976)의 58만명 흥행 성공(모두 단관 개봉 기준)이 대표적이다. 또한 최인호의 인기 소설을 원작으로 하길종의 새로운 감수성과 영화 감각이 화학작용을 일으킨 ‘바보들의 행진’(1975)이 청년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1980년대에는 섹스(Sex), 스크린(Screen), 스포츠(Sports)로 국민을 환각시키는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과 맞물려 에로티시즘 영화가 넘쳐났다. 1982년 서울극장 단관에서만 넉 달 동안의 장기상영으로 31만 관객을 동원한 ‘애마부인’(愛麻夫人, 원래 ‘愛馬婦人’이었으나 공윤 검열에서 뜻이 야한 뉘앙스를 풍긴다고 해 ‘말 마(馬)’ 대신 ‘삼 마(麻)’로 교체)은 남성 중심의 왜곡된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며 1980년대 에로영화의 상징이 됐다. 한편 1980년대 중후반은 ‘고래사냥’(1984), ‘깊고 푸른 밤’(1985) 등 세련된 멜로드라마 화법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배창호를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1988년 ‘칠수와 만수’로 데뷔한 박광수, ‘성공시대’의 장선우, ‘개그맨’으로 데뷔한 이명세, 1988년 할리우드 직배 반대 운동을 주도하며 영화운동가로서도 활약한 ‘남부군’(1990)의 정지영 등 1980년대 후반의 코리안 뉴웨이브 감독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국영화 르네상스(1990~2018)1988년 영화인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UIP 등 할리우드 직배사가 한국시장에 들어왔고, 외화 수입편수가 급증하면서 한국영화 제작 입지는 점점 좁아졌다. 한국영화 점유율은 1983년 39.8%에서 1990년 20.2%, 1993년 15.9%로 하락세를 보였다. 지방흥행사로 불리는 토착 흥행 자본과 연계한 기존 영화사들도 덩달아 한국영화 제작에 등을 돌리고 외화 수입에 열중했던 시기다.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등장한 것이 바로 ‘기획영화’ 세대다. 제작 자유화 정책의 물결을 타고 1980년대 후반 영화판에 들어온 고학력의 젊고 합리적인 영화인들은 비디오 판권 형식으로 대기업 투자를 이끌어 내며, 영화산업 판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1992년 ‘결혼이야기’(김의석)가 개척한 산업의 활기는 ‘접속’(1997)의 명필름, ‘8월의 크리스마스’(1998)의 우노필름 같은 제작명가들이 이어받으며 한국영화의 체질을 바꿔놓았다. 이어 ‘한국형 블록버스터’로 불린 ‘쉬리’(1999)가 620만명의 흥행 대기록을 세운 후, 강우석의 ‘실미도’(2003)와 강제규의 ‘태극기 휘날리며’(2004)가 불가능해 보였던 1000만 관객 시대를 열었다.2000년대 한국영화의 화두는 ‘웰 메이드(well-made) 영화’였다. 2003년 등장한 ‘살인의 추억’(봉준호),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이재용), ‘장화, 홍련’(김지운) 등이 흥행성뿐만 아니라 작품성까지 두루 만족시키자 영화저널과 비평계가 명명한 것이다. 특히 국내에서 3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올드보이’(박찬욱)가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까지 받으며 한국영화의 저력을 과시했다. 국제영화제의 인정을 받는 작가주의 감독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서편제’(1993)의 흥행 성공으로 국민감독 반열에 오른 임권택이 ‘취화선’(2002)으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초록물고기’(1997)로 데뷔한 이창동은 영화 매체에 대한 집요한 탐구를 보여 준 ‘오아시스’(2002)로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2006년을 정점으로 숨고르기에 들어갔던 한국 영화산업은 2012년 이후 관객수, 매출액, 수익성 등을 고루 만족시키며 한 단계 더 도약하고 있다. 또 2013년에는 글로벌 프로젝트 ‘설국열차’가 성공하며 한국영화의 세계로 도약하는 기반이 됐다. 과연 한국영화의 저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한국영화는 언제나 그랬듯이 국가 제도와 긴장관계를 형성하면서도, 흥행성뿐만 아니라 정치적·사회적 고민을 연동시켰고, 상업영화와 예술영화의 경계를 허물며 관객과 비평가의 지지를 동시에 받아냈다. 이것이 바로 한국영화의 힘이자 역동성의 바탕일 것이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 동물원 탈출해 ‘가금류 킬러‘된 비단뱀, 결국···

    동물원 탈출해 ‘가금류 킬러‘된 비단뱀, 결국···

    며칠간의 달콤했던 ‘외출’이 끝났다. 한 농가에 보금자리를 틀고 농장 가축들을 몰래 잡아먹으며 만찬을 즐겨왔던 동물원 탈출 대형 비단뱀 한 마리가 결국 주민들에 붙잡혀 다시 동물원으로 돌아갔다. 이 녀석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뱀과 함께 살고 있었던 주민에겐 공포의 해방일 터. 농가 세탁물 더미 속에 숨어있다 발견돼 자루 속으로 들어가는 생생한 모습을 지난 5일 라이브릭, 뉴스플레어 등 여러 외신이 전했다. 녀석은 지난해 11월 4일 필리핀 알베이주 알베이 공원 야생 동물 센터에서 탈출한 ‘사와’(Sawa)라는 별명을 가진 4.5미터 길이의 뱀. 며칠간 행동이 묘연했던 이 녀석은 한 농가에 들어가 농가 뒷마당 가금류를 잡아먹으며 우리에서의 ‘탈출‘을 만끽하고 있었다. 하지만 꼬리도 길면 잡히는 법. 농장주인이 이 녀석을 발견해 뱀 포획 전문가에게 도움을 청했고 긴 장대로 뱀을 자루에 넣게 됐다. 농가 주인 마콜 볼라노스는 “농장 뒷마당에 키우고 있던 거위 한 마리와 칠면조, 많은 닭이 없어졌다”며 “이 녀석이 범인이 거 같다”며 분통했다. 숨어있던 농가에서 먹이를 골라가며 먹을 수 있었던 이 녀석. 이젠 다시 동물원에서 주는 음식만 먹는 처지가 됐다.사진 영상=바이럴프레스/유튜브 영상부 seoultv@seoul.co.kr
  • 차이잉원, 시진핑 위협에 “국제사회가 대만 도와달라” 호소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대만과의 통일 의지를 적극적으로 밝힌 이후 두 개의 중국은 통일에 대한 극심한 시각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시 주석은 지난 4일 군사공작회의를 열고 싸워서 이기는 강군몽을 다시 강조했다. 연초에 시 주석이 군사공작회의를 연 것은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이는 남중국해와 대만해협에서 미국과 벌어지고 있는 군사적 갈등 강화에 따른 조치로 분석된다. 반면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은 중국과의 대화 의지를 밝히면서도 무력을 배제하지 않고 통일을 추구한다는 시 주석의 연설 내용에 심각한 우려를 표현했다. 차이 총통은 5일 “국제사회가 (시 주석의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우리를 지지하는 목소리를 내고 도와주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과의 대화를 위한 전제조건으로 중국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인정하고 무력 사용을 포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차이 총통은 시 주석이 ‘하나의 중국’과 ‘일국양제’를 강조하면서 대만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대만이 중국을 자극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해 왔지만, 중국은 대만을 억누르고 있으며 아프리카돼지열병 같은 전염병 문제도 협조를 거부하고 있다고 밝혔다. 차이 총통은 “민주주의와 인권 보호의 부족, 중국의 군사 위협은 대만 사람들이 중국을 못 믿는 주된 원인”이라고 전했다. 중국은 대만 독립 성향인 민진당의 차이잉원이 2016년 총통으로 당선되자 대만의 수교국 가운데 5개국이 단교하도록 하는 고립 전략을 쓰고 있다. 한편 중국 학자들은 대만과의 통일을 구체화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전쟁, 평화협상, ‘벼랑 끝 전술’을 통한 위기정책 등이 관변학자들이 제안한 세 가지 통일 방안으로 현 상황에서는 벼랑 끝 전술이 가장 실현 가능한 선택으로 여겨진다. 리페이(李非) 샤먼대 대만연구원 부주임은 관영 글로벌타임스를 통해 “무력 사용 없는 위기정책을 통한 대만 통일은 중국 인민해방군이 대만에서 미국에 대해 압도적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군사적 우위를 가졌을 때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베이징 윤창수 특파원 geo@seoul.co.kr
  • 청소년들, 하루 2시간 인터넷 방송 본다

    10대 청소년들이 하루 2시간 가까이 인터넷 개인방송을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적절한 언어를 사용하거나 선정·폭력적인 인터넷 개인방송 등에 관해 강력한 규제를 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6일 밝힌 전국 만 13~18세 중·고등학생 1058명을 대상으로 벌인 ‘청소년 인터넷 개인방송 이용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청소년들은 하루 평균 114.9분 동안 인터넷 개인방송을 이용한다고 답했다. 플랫폼별로는 유튜브가 36.4%로 가장 높았다. 이어 아프리카TV 16.8%, 트위치TV 16.6%, V앱 11.7%, 네이버TV 11.6% 순이었다. 장르별로는 게임방송이 22.7%로 가장 높았고, 먹방(먹는방송)이 19.7%로 뒤를 이었다. 토크방송 11.6%, 뷰티방송 10.9%, 음악방송 8.2%였다. 노출수위가 높고 음담패설을 주요 소재로 하는 성인방송은 0.4%에 그쳤다. 인터넷 개인방송의 유해콘텐츠 유형별 심각성에 대해서는 비속어·유행어 등 부적절한 언어 사용, 선정성, 폭력성, 사회적 약자 비하나 차별 등 반사회적 콘텐츠, 사생활 침해 순으로 꼽았다. 문제를 일으킨 인터넷 개인방송에 관해 76.3% 청소년이 ‘규제에 동의한다’고 밝혔지만, 반대 의사를 밝힌 청소년은 7.6%에 불과했다. 적합한 규제방안으로는 진행자 완전 퇴출제, 유해방송 표시제, 차단시스템, 형사처벌, 등급제 순으로 꼽았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사기 치고, 100억 빼돌려도…법은 ‘핏줄’을 용서했다

    사기 치고, 100억 빼돌려도…법은 ‘핏줄’을 용서했다

    손자가 88세 조부 치매 판정받게 유도 인감 훔쳐 건물 지분 절반 가로채 대출 법 악용 사례 많은데 가해자 엄벌 못해 배우 신동욱도 조부가 ‘효도사기’ 고발영화배우 신동욱(36)의 ‘효도 사기’ 논란이 일면서 가족과 친족 간 사기에 대한 처벌이 어떻게 될지 관심이 높다. 이런 가운데 30대 손자가 친부모처럼 키워 준 80대 친할아버지의 100억원대 재산을 가로채 경찰에 고소됐으나 ‘친족상도례’(親族相盜例)가 적용돼 엄벌에 처할 수 없을 것으로 보여 논란은 더욱 커지고 있다. 친족상도례는 8촌 이내 혈족이나 4촌 이내 인척, 배우자 사이에 일어난 사기·횡령·배임 등의 재산범죄에 대해 형벌을 면제하는 것을 말한다. ‘법은 문지방을 넘지 않는다’는 고대 로마법 정신에 연원을 둔 조항이다. 우리나라는 해방 후 일본 형법을 모방하면서 유입된 것으로 전해진다. 3일 인천삼산경찰서에 따르면 수백억원대 재산을 모은 A(88)씨가 지난해 말 친손자 B(37)씨 부부를 처벌해 달라며 고소장을 냈다. A씨는 2남 1녀를 뒀다. 장남이 재혼하자 A씨는 계모 손에 자라는 장손 B씨를 안타깝게 여겨 6세 무렵부터 친부모처럼 돌봐 주며 대학을 졸업시켰다. 별다른 직업이 없는 B씨에게 아파트를 사 주는 등 경제적인 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해줬다고 한다. A씨는 키운 정이 있어 B씨에게 의지했다. 몇 년 전에는 부천의 6층 건물 지분 절반을 B씨에게 주고 예금통장·인감도장·상가임대차계약서·등기권리증 등 재산관리를 맡겼다. 이후 B씨의 태도가 돌변했다. A씨에게 치매판정을 받아야 경제적으로 유리하다며 문답훈련을 시켜 지난해 6월 4등급 판정을 받게 했다. 요양보호사가 오자 할아버지 모시기를 소홀히 했다. 이상한 생각이 든 A씨는 인감도장을 돌려 달라고 했지만 듣지 않았고, 새로 만든 인감도장까지 훔쳐갔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자식들이 재산 받는 것에만 관심이 있어 큰 충격을 받고 입원까지 했다. 생일날 자식들이 요양보호사에게 “얼마 살지도 못할 텐데 (공진단과 산삼을) 왜 주느냐”는 험한 말을 했다고 한다. 절망한 A씨는 퇴원하자마자 부동산을 처분하려고 공인중개사사무소에 의뢰했다가 깜짝 놀랐다. 또 다른 빌딩 지분 절반이 B씨 명의로 이전됐고, 건물을 짓겠다고 10억원 가까운 대출을 받은 인천 중심지 토지는 빈터로 있었다. 매월 3000만원 이상 임대료가 들어오는 예금통장 잔고는 1000만원에 불과했다고 한다. B씨와 그의 아내가 증여계약서 등을 위조한 사실도 확인했다. A씨는 “돈이 천륜을 끊어 놓은 것 같아 후회스럽다. 모두 내 탓”이라며 뒤늦게 눈물을 쏟았다. 그러나 법조계는 B씨에게 엄한 처벌을 내리기 어렵다고 한다. 법무법인 영진 이정석 변호사는 “친족상도례를 적용하면 횡령 및 절도는 면책 가능성이 높다”면서 “사문서 위조와 행사, 공정증서원본불실기재 및 행사, 공문서 부정행사 등만 처벌이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 변호사는 “거액을 훔치거나 사기를 저질러도 범인만 법의 보호를 받아 호의호식하는 것은 현실에 맞지 않다”며 “가족의 화평을 위해 내부적으로 해결하도록 한 일종의 특혜가 더는 시대에 맞지 않고 재산권 보호와 행복추구권을 명문화한 헌법에도 위반한다”고 지적했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하나로 뭉친 노령·상하이·한성정부…‘미완의 통합임정’ 세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하나로 뭉친 노령·상하이·한성정부…‘미완의 통합임정’ 세우다

    1919년 3·1운동 뒤로 국내외 곳곳에서 임시정부가 생겨났다. 이 가운데 러시아 대한국민의회(노령정부)는 독립전쟁을 치르기 좋은 위치였지만 일본의 공세에 노출돼 있었다. 중국의 대한민국임시정부(상하이정부)는 정치 활동이 자유로웠지만 국내에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거리가 너무 멀었다. 한성임시정부는 민주적 절차를 잘 지켜 정통성이 컸지만 조선총독부가 자리잡은 서울에 머문다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 세 정부는 각자의 처지를 인정하고 힘을 모으고자 통합에 나섰다.●상하이정부·노령정부 통합 앞서 갈등 표출 지난달 중순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차 찾아간 상하이 상업지역 화이하이중루. 10·20세대가 주로 찾는 거리 한 모퉁이에 글로벌 의류 브랜드 매장이 입점한 6층짜리 건물 하나가 눈에 띄었다. 우리 역사학계에서 ‘하비로 청사’라고 부르는 곳으로 1919년 4월 11일 수립된 상하이정부가 그해 8∼10월 사용했다. 당시 임정이 청사로 쓰던 2층 양옥은 1920~1930년대 철거됐다. 기자와 동행한 이원규(72) 작가는 “수개월간의 논의 끝에 1919년 9월 11일 개헌을 통해 세 임시정부의 통합을 여기서 결정해 선언했을 것이다. 그래서 의미가 남다르다”고 전했다. 상하이정부가 수립된 직후부터 국내외에서는 세 임정이 힘을 모아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한성·상하이정부는 정부 수립을 전후해 양측 인사들이 꾸준히 교류한 터라 통합에 거부감이 적었다. 한성정부 대표 자격으로 상하이정부 안창호(1878~1938)와 협상을 벌인 이규갑(1887~1970)의 증언을 보면 당시 양측의 우호적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나는 도산과 두 정부의 통합을 논의했다. 나는 상하이정부가 먼저 생겼으니 우리 한성정부가 합류하는 것이 맞다고 양보했다. 하지만 도산은 한성정부야말로 국내 13도 대표가 총의를 모아 만든 정부이니 당연히 자신들이 속한 상하이정부를 해체하고 한성정부의 법통에 순응해야 한다며 (내 제안을) 사양했다.”●안창호 “해산 후 한성 밑으로 모이자” 제안 사실상 상하이정부와 노령정부 간 통합 논의만 남았다. 노령정부가 먼저 나섰다. 1919년 4월 29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회의를 열어 연해주 대한국민의회와 상하이 임시의정원을 합치고 러시아에 행정부를 두자는 의견을 정했다. 노령정부는 5월 특사 원세훈(1887~1959)을 중국에 보내 이를 제안했다. 상하이정부에서도 안창호가 본격적인 통합 협상에 나섰다. 6월 17일 상하이정부 국무원(행정부)은 노령정부와의 협의 내용을 반영한 의안을 임시의정원에 제출했다. 임시정부는 상하이에 두되, 새 의회는 러시아로 이전이 가능하도록 여지를 뒀다. 하지만 의정원은 상하이에 계속 남고 싶었던 탓인지 안건을 거부하고 국무원에 돌려보냈다.●노령정부 불만 터져 불완전한 결합 이뤄 협상이 난항에 빠지자 안창호는 새 아이디어를 냈다. 상하이·노령정부를 모두 해산하고 한성정부 밑으로 다시 모이자는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제3지대 창당론’이 될 것 같다. 단, 통합 정부는 ‘한성임시정부’가 아닌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부르고, 상하이에 남기로 했다. ●상하이정부, 한성을 ‘우회 상장’ 통로로 여겨 노령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8월 30일 총회를 열고 의회를 해산했다. 그런데 상하이에서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애초 해산하기로 한 의회와 행정부를 그대로 둔 것이다. 정부 조직만 한성정부 형태로 바꿔놨다. 비유컨대 건설업자가 기존 건물을 부수고 새 건물을 짓기로 약속한 뒤, 실제로는 건물 도면에 맞춰 리모델링만 한 것이다. 당시 안창호는 “한성정부를 (실제가 아닌) 정신적으로 승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상하이 독립운동가들은 정통성은 있지만 실체가 없던 한성정부를 동등한 통합대상으로 보지 않고 서울에서 생겨난 정부라는 법통을 흡수하려는 ‘우회 상장’ 통로로 여긴 듯 하다. 김주용(53) 원광대 교수는 “상하이정부가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지키려다가 생겨난 일”이라고 분석했다. 통합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로 한 문창범(1870~1938)과 이동휘(1873~1935)는 “상하이가 우릴 속였다”며 취임을 거부했다. 문창범은 연해주로 돌아가 1920년 2월 대한국민의회 재건을 선언했다. 통합 임정으로서는 미래 정부 활동 자금줄이자 무장 투쟁 동력을 잃어버렸다. 여기에 신채호(1880~1936)와 박용만(1881~1928)도 새 내각 불참을 선언했다. 임정 통합 중심축 이동휘, 독립자금 좌파세력 유용으로 치명타이승만(1875~1965)이 1919년 2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1856~1924)에게 “국제연맹이 한국을 위임통치할 수 있게 주선해 달라”고 청원한 것을 문제 삼았다. 통합 임정이 시작도 전에 분열 위기를 맞았다. 다행히 이동휘는 안창호의 간곡한 설득으로 11월 3일 통합 임정 국무총리에 복귀했다. 내무총장 이동녕(1869~1940)과 재무총장 이시영(1868~1953), 법무총장 신규식(1880~1922) 등도 함께 취임식을 가졌다. 이렇게 세 임정은 불완전하게나마 통합정부로 다시 태어났다. 일각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을 상하이정부가 생겨난 4월 11일이 아니라 세 임정을 통합한 9월 11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상하이정부가 노령정부를 모두 끌어안아 완전체가 됐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지금과 판이하게 달랐을 것이다.●통합 임정에 힘 실어 준 아전의 아들 이동휘 “그는 키가 크고 힘이 장사였으며 가슴이 떡 벌어졌다. 군인답게 콧수염을 길러 마치 프랑스 원수 같았다. 민족운동의 거성인 동시에 저명한 혁명가였다. 열렬한 행동주의자였으며 불덩이 같은 신념을 지녔다. 천군만마를 노호할 듯한 기개와 위엄을 갖춘 당당한 거인이었다.” ‘아리랑’의 저자 헬렌 포스터 스노(1907~1997)가 이동휘에 대해 내린 평가다. 그는 ‘반쪽짜리’로 전락할 뻔한 통합 임정에 극적으로 합류해 독립운동 중심체로 성장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러시아 소비에트 최고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에게서 받은 통합 임정 운영자금을 자파(自派) 유지비로 돌려써 독립운동 분열도 초래했다. 1873년 함경남도 단천에서 아전 이승교의 아들로 태어나 18살 때 통인(군수의 시중을 드는 하급관리)이 됐다. 23살 때 탐관오리였던 단천군수 홍종후가 잔칫날 어린 기생을 무릎 위에 앉혀 추행하자 이를 참지 못하고 술상 옆에 놓인 화로를 군수에게 끼얹었다고 한다. 불의를 보면 앞뒤 가리지 않고 행동에 나서는 그의 성격을 짐작케 한다. 이동휘는 서울로 도피했다가 함경도 명천 출신 관료 이용익의 도움으로 한성무관학교에 입학해 군 장교가 됐다. 이후 일제가 그의 애국심을 우려해 수차례 체포와 수감을 반복하자 1913년 북간도로 탈출했다. 이후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해 1914년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했다.당시 일본은 러시아 영토를 탐내 시베리아에 주둔해 있었다. 이동휘는 러시아와 손잡고 일제와의 전면전을 벌여 단박에 조선 독립을 쟁취하려 했다. 일본군과 맞서던 러시아 볼세비키(사회주의자)들과 손을 잡았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러시아와 일본이 동맹국이 되는 바람에 그의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그러자 북간도로 넘어가 중국과 연합해 대일 독립전쟁을 치르려고 준비했다. 그러나 중국도 1915년 일본의 ‘21개조 요구안’(제1차 세계 대전 중 일본이 중국에 제출한 권익 확대 요구사항)을 받아들이고 한편이 돼 이 역시 무산됐다. 1918년 5월 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세우고 기관지를 발행했다. 군사학교 설립과 한인적위대 조직에도 나섰다. 애초 이동휘와 한인사회당은 3·1운동 민족대표들과 임시정부 설립자들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들이 한국의 독립에 관심을 가질 리 없고 조선 지식인들이 기대를 건 파리강화회의 역시 식민지 해방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동휘는 “상하이 측과 정치 싸움을 벌여선 대국(일본)을 파괴할 수 없다”며 통합 임정에 뛰어들었다. 그의 결단 덕분에 통합 임정은 ‘이승만(한성)-안창호(상하이)-이동휘(노령)’라는 3대 축을 갖춰 대외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독립자금 전용 탓 신뢰 잃어… 국제사회도 외면 그는 씻기 힘든 과오도 남겼다. 1920년 1월 통합 임정은 이동휘의 측근 한형권(생몰연대 미상)을 러시아 모스크바에 보냈다. 레닌 정부와 접촉해 정식국가로 승인받고 독립 자금도 지원받기 위해서였다. 결국 레닌으로부터 200만 루블을 받기로 하고 1차분 60만 루블을 얻어냈다. 지폐의 양이 많아 20만 루블은 모스크바에 두고 일단 40만 루블을 김립(1880~1922)에게 전달했다. 그런데 그는 이 돈을 통합 임정에 전달하지 않고 한인사회당 등 좌파 운동세력에게 나눠줬다. 일부는 개인 용도로도 썼다. 이동휘는 소련 자금 배달사고의 배후로 지목돼 입지가 좁아졌다. 1921년 1월 총리에서 물러났다. 이 일로 사회주의 계열은 신뢰를 잃고 독립운동 주류에서 배제됐다. 통합 임정도 국제적으로 평판이 나빠져 운영 자금 마련이 더 힘들어졌다. 이후 이동휘는 연해주 일대에서 사회주의 운동에 매진하다가 1935년 1월 31일 62세로 숨을 거뒀다. 서울·상하이·블라디보스토크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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