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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제국공사관 간 文 “136년 한·미 관계 굳건”

    대한제국공사관 간 文 “136년 한·미 관계 굳건”

    한·미 정상회담차 방미한 문재인 대통령이 22일(현지시간) 워싱턴DC 주미대한제국공사관 재개관 현장을 방문해 “136년 동안 유지돼 온 (한·미 관계) 역사가 대단하다”며 한·미 동맹의 의의를 강조했다.문 대통령은 조(선)·미수호통상조약에 대해 “열강이 우리를 노리던 시절 우리나라가 자주적으로 체결한 첫 조약”이라며 “자주 외교의 노력으로 중요했던 관계가 136년 동안 유지돼 온 역사가 대단하다”고 말했다. 이날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136년 전인 1882년 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됐다는 점을 언급한 문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사전에 보고를 받았는지 아는 듯했다”고 전했다. 특히 “한·미 정상회담도 잘됐고 이런 날 주미공사(관)가 재개관해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문 대통령은 “우리가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나라가 아니다”라며 근대 외교공간 보존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이날 박정양 초대 주미공사의 손녀 등 공관원 후손들과 만나 “처음 박정양 선생이 공사관으로 왔을 때 정말 막막했을 것”이라며 “당시만 해도 나라의 위세가 기울 때 외교를 통해 힘을 세우려 없는 살림에 큰일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박정양은 귀국 이후 미국 제도와 문물을 정리한 ‘미속습유’와 ‘미행일기’를 남겼다. 초대 공사관 서기관이었던 월남 이상재는 일제강점기 국내 최대 항일민족단체인 신간회를 조직한 대표적 독립운동가다. 문 대통령은 “이런 이야기들이 제대로 기록으로 남아 알려져야 한다”며 “그 시기 개설한 러시아, 영국, 중국, 일본 등 공관들도 확인해 보고 문화재청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대한제국공사관은 1889년 우리나라 역사상 서양 국가에 최초로 설치된 곳으로, 근대 외교공간 중 원형을 간직한 유일한 단독 건물이다. 지상 3층·지하 1층의 미국 빅토리아 양식 벽돌 건물로 워싱턴DC에 남아 있는 19세기 외교공관 중 내·외부 원형이 보존된 유일한 곳이다. 대한제국이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자 일본은 건물을 5달러에 강제로 사들이고 다시 10달러에 미국인에게 매각했다. 이후 2012년 문화재청이 문화유산국민신탁을 통해 미국인 젠킨스 부부로부터 350만 달러에 재매입하고 보수·복원 공사를 마쳤다. 귀국길에 오른 문 대통령은 페이스북 글을 통해 “재개관한 주미공사관 앞길엔 많은 교민들이 갑자기 쏟아진 폭우를 맞으며 태극기를 들고 긴 시간 기다려 줬다”며 “뜨겁게 환영해 주어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서울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워싱턴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허성관의 忠言逆耳(충언역이)] 외화내빈을 경계한다

    [허성관의 忠言逆耳(충언역이)] 외화내빈을 경계한다

    외화내빈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겉으로는 화려하게 일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나 속으로는 부실함을 의미하는 경구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우리 속담과 의미가 같은 말이다. 보수 정권 9년을 지나면서 우리가 감동한 순간이 없었다. 최근 남북한 판문점 정상회담은 우리에게 감동 그 자체였다. 전쟁 위험이 사라지고 남북한 평화 공존을 통해 번영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보았으니 어찌 환호하고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며칠 전 북한이 남북 고위급회담 개최를 갑자기 중단해서 평화와 공존으로 가는 길이 삐걱대고 있지만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는 진통이라고 보자. 남북 정상회담은 그야말로 화려한 정치적 사건이다. 문재인 정부가 이룩한 쾌거다. 모든 대내적인 당면 과제들이 정상회담 소식에 묻혀 버릴 정도다. 대내적인 정책 과제들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면 정상회담에 묻혀 버린들 문제가 없다. 그러나 대통령 취임 1년이 지난 지금 적폐청산과 관련된 혁신은 지지부진하다. 성공한 대통령을 소망하는 필자는 문재인 대통령 정부가 와화내빈이 되지 않도록 혼신을 다할 것을 희망한다. 몇 가지 국내 상황을 짚어 보자. 첫째, 경제가 심상치 않다. 경기선행지수가 100 밑으로 떨어지고, 신규 취업자 증가도 최악이다. 양극화를 개선할 제도 보완도 감감하다. 갑(甲)질도 여전하다. 게다가 우리 경제 최대 뇌관인 1500조원이 넘는 가계부채와 맞물려 있는 금리가 상승 국면으로 들어섰다. 그런데도 경제민주화는 요원하다. 재벌들이 자율적으로 혁신하도록 3년 기한을 주었다고 한다. 3년이 지나도 혁신하지 않으면 강제적으로 혁신하겠다는 것이겠지만 그때는 정권 말기로 힘이 빠져 불가능할 것이다. 둘째, ‘삼성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항간의 헛된 소문에 아무런 대응책을 세우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삼성그룹이 망한다고 나라가 망하지는 않는다. 삼성그룹 주인이 망하면 삼성그룹에 속한 기업은 오히려 초우량기업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특정인 지배권을 강화한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요상한 합병,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논란, 삼성전자의 조직적인 노조 파괴 활동은 정상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가 하는 것은 선이다’라는 삼성 지배자의 탐욕과 오만이 초래한 결과다. 셋째, 민주화 이후 적폐청산 최우선 화두인 검찰 개혁도 잘 되는 것 같지 않다. 기소권과 수사권을 독점한 검찰 권력은 그야말로 무소불위다. 죄지은 것이 없는데도 세상이 무서운 이유는 검찰 권력 때문이다. 이 막강한 권력은 이론적 근거가 없다. 일제강점기 항일 투사들을 쉽게 잡아넣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조선형사령으로 부여한 권력이다. 일제 잔재가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대표적인 사례다. 공직자비리수사처 설치도 답보 상태고, 경찰과 검찰 수사권 조정도 윤곽조차 드러나지 않고 있다. 정의를 망각한 검사들이 여전히 있다. 넷째, 광복 후 청산순위 1호 적폐인 ‘국사 바로 세우기’는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국사 핵심 내용은 조선의 ‘얼’을 말살하고자 조선총독부가 날조한 소위 매국식민사학이다. 대통령의 역사관은 반듯하다. 그러나 중국 동북공정과 일본 극우파 역사관을 우리 국민 세금을 써 가면서 옹호하는 동북아역사재단, 매국식민사학을 비판한 연구 보고서 출판을 금지하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최근 행태는 일반 국민은 설마하겠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교육부가 발표한 검인정 국사교과서 검정기준 1차 시안도 무엇이 달라졌는지 알 수 없다. 다섯째,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들은 개헌을 공약했다. 모두가 필요하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개헌안은 대통령과 국회가 발의할 수 있게 돼 있지만 국회의원 3분의2 이상이 찬성해야 통과된다. 지난달 대통령이 개헌안을 제출했지만 국회에서 심의조차 시작하지 않았다. 여당 정치력이 부족한 탓이다. 위 다섯 중 개헌을 제외한 넷은 장관들과 국무총리 몫이다. 그러나 장관들과 국무총리가 잘 보이지 않는다. 외화내빈을 국민들이 감지하는 순간 정권의 혁신 동력은 사라진다. 그러면 빈 수레가 요란했다는 평가를 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왜놈들에게 우리 불교를 넘길 수는 없소이다! - 조계사(曹溪寺)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왜놈들에게 우리 불교를 넘길 수는 없소이다! - 조계사(曹溪寺)

    “만일 이 건물을 신축하자면 최소한도 100만원은 초과치 아니하면 안 되겠다고 하니 얼마나 훌륭한 집인가.” <한용운, 불교유신 제17호. 1938> 서울의 한 복판, 떡하니 자리 잡은 사찰이다. 그럴 만도 한 이유가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우정국로 55에 위치한 조계사(曹溪寺)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본사(本寺) 및 직할 교구 본산(本産)이자 우리나라 전역에 산재한 사찰들의 얼굴이다. 말 그대로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공간인 셈이다. 얼핏 보아도 수천 년의 세월의 흐름이 묻어날 것 같고, 그리하여야만 할 듯 한 이 절집의 역사는 기실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20세기 초 이후, 우리의 역사가 거쳐 왔던 파란만장한 이야기 속에도 조계사의 흔적은 짙게 남아 있다. 만해 한용운(1879-1944)과 독립을 염원하였던 수많은 승려들의 피눈물이 서린, 민족의 염원으로 만든 사찰, 조계사(曹溪寺)로 가 보자. 조계사의 창건 역사는 각황사(覺皇寺)라는 절에서 시작된다. 각황사는 한양의 중부 박동(薄洞), 즉 지금의 조계사 터 옆에 1910년에 들어선다. 이전까지만 해도 조선은 공식적으로는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취하고 있었기에 천민 계급이었던 승려들의 도성 출입은 표면적으로는 금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대한제국이 들어서면서 승려들의 도성 입성 금지는 해제되었고 이에 더 나아가 한양 도성 내에 절까지 세울 수 있게 되자 대한제국의 황실에 감사한다는 의미를 담는다는 의미로 ‘각황(覺皇)’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는 일화도 전해져 내려온다. 어찌 되었던 순조롭게만 진행될 듯 하였던 조선의 불교 정책은 일제 강점으로 다시금 원점으로 되돌려 진다. 이후 1932년 일본 총독부는 안중근 의사에 의해 사살당한 초대 조선 내각총리대신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모하기 위한 사찰인 박문사(博文寺)를 현재의 서울 중구 장충단 공원 동쪽에 짓는다. 그리고 총독부는 조선 불교를 장악하기 위해 ‘일본불교 진흥 및 일본인과 조선인의 굳은 정신적 결합을 위해’ 전국에 산재한 사찰 중 30본사를 선정, 인가함으로써 조선총독부 직할체제인 30본말사제를 시행한다. 이를 대항하기 위해서 1935년, 만해 한용운을 포함하여 해인사 주지 회광, 마곡사 주지 만공이 주축이 된 '31본산주지회의'가 열리게 되고 이 자리에서 서울의 중심에 있던 각황사 교당 개축을 결의한다. 1937년 정읍에 있던 증산도 계열의 종교였던 보천교(普天敎)의 본당이었던 십일전(十一殿) 건물을 현재의 자리로 이전 개축하여 드디어 1938년 10월 25일 총본산 대웅전 건물의 준공 봉불식이 거행된다. 이 때 절의 명칭은 현재의 조계사가 아니라 삼각산에 있던 태고사(太古寺)를 이전하는 형식을 취하였기에 태고사로 불렸다. 이후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954년 11월 5일, 비구 스님들이 태고사에 들어오면서 조계종의 이름을 따서 조계사라고 간판을 고치게 되었고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조계사(曹溪寺)는 비록 짧은 사찰의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일제에 항거하고 한국 불교의 원형을 되돌려 놓으려던 일제 강점기의 수많은 애국 승려들의 불심(佛心)이 담긴 곳이다. 조계사에 들러 종교를 뛰어 넘은 선조들의 민족혼을 다시금 느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조계사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 한국 불교 조계종의 총본산으로 항일 정신이 서리어 있는 곳이다. 2. 누구와 함께? - 가족들과 천천히 나들이 삼아서. 3. 가는 방법은? - 지하철이 가장 편하다. 1호선 : 종각역 2번 출구로 나와서 70m 쯤 걷다가 횡단보도를 건넌 후 100m쯤에 위치. 3호선 : 안국역 6번 출구로 나와서 50m쯤 걷다가 동덕 갤러리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넌 후 좌측으로 50m쯤에 위치. 4. 감탄하는 점은? - 포교당 수준의 작은 사찰을 가득 메운 엄청난 숫자의 불자들의 모습. 말 그대로 대한민국 조계종의 본당다운 웅성거림이 있다.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이미 유명할대로 유명한 절집. 정치적 이슈와 연결되어 사회면에 많이 등장한 사찰. 6. 꼭 봐야할 전각은? - 대웅전 본당, 회화나무, 불교박물관 7. 관람 예상 소요시간은? - 여유를 가지고 돌아본다면 30분 남짓. 8. 홈페이지 주소는? - www.jogyesa.kr/user/jogye/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덕수궁, 경복궁, 창경궁, 종묘, 운현궁, 청와대, 창덕궁, 삼청동 거리, 인사동 10. 총평 및 당부사항 - 조계사의 역사는 한국 불교의 역사만큼 복잡하다. 그러나 종교를 뛰어넘어 만해 한용운님의 염원대로 일제에 항거한 항일 정신이 깃들어져 있는 사찰이다.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연해주 등 北 접경 유적지 탐방…경기, 대학생 참여자 30명 모집

    경기도가 올해 여름방학 기간중 중국, 러시아 등 북한 접경지에서 진행할 ‘2018 북·중·러 대학생 통일 탐방단’에 참여할 학생을 모집한다. 16일 경기도에 따르면 탐방단은 7월 23일부터 6박 7일간 북한과 접하고 있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우수리스크 등 연해주 일대, 중국 연변 조선족 자치주와 백두산·두만강 일대 항일 및 고구려·발해 역사유적지 등을 둘러본다. 코스에는 최재형 선생 생가, 이상설 의사 기념비,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비, 윤동주 시인 생가, 여순감옥 등이 포함돼 있다. 참가 대상은 경기 북부에 거주하거나 경기북부에 소재한 3년 이상 대학 재학생으로, 모두 30명을 선발할 방침이다. 참가를 원하는 대학생은 오는 31일까지 신청서, 참가 동기서, 통일 에세이 등을 작성해 행사를 주관하는 대진대 홍보협력팀( 031-539-1085)에 제출하면 된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시대의 아픔 비켜서지 않고 예술로 계속 목소리 낼 것”

    “시대의 아픔 비켜서지 않고 예술로 계속 목소리 낼 것”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지 않고 명확하게 드러낸 뒤에야 진정한 평화를 만들 수 있잖아요. 저희는 시대적 아픔을 비켜서지 않고 예술을 통해 계속 목소리를 낼 겁니다.”15일 서울 용산역 앞 광장에서 만난 김서경(53·여)·김운성(54) 조각가 부부는 최근 부산 동구 초량동 일본총영사관 앞 강제징용 노동자상 설치 논란과 관련해 노동자상 작가로서의 신념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했다. 설치에 난항을 겪고 있는 이번 작품은 이들의 네 번째 강제 징용 노동자상이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의뢰로 제작한 첫 노동자상이 2016년 8월 일본 교토 단바망간광산 앞에 세워졌고 지난해 서울과 제주에 연달아 건립됐다. 서경씨는 “이번에 부산에서 이렇게 될 줄 몰랐다”며 지자체가 나서 노동자상 설치를 막는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운성씨도 “새 정부 출범 1년이 지났지만 한·일 위안부 합의는 파기되지 않았고 화해치유재단은 일본에서 받은 돈을 돌려주지 않았다”며 “일본과의 외교 부분에서는 달라진 게 별로 없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부산에서 추진 중인 노동자상은 앞선 동상들과 조금 다른 모습이다. 비어 있던 왼손에는 촛불이 쥐어졌고 표정은 조금 강인해졌다. 서경씨는 용산 노동자상을 가리키며 “광산에서 나오며 햇볕을 가리는 왼손은 한편으로는 과거의 진실이 이제 드러나기 시작한 데 대한 희망을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며 “그런데 일본이나 우리 정부 모두 옛날에 다 정리되지 않았느냐는 식의 똑같은 말을 하니까 (부산 노동자상은) 그에 대한 분노와 의지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국내외 평화의 소녀상 70여점을 제작한 걸로 유명한 이들은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들로 인해 공격을 받기도 한다. 특히 일본 기자들이 집 앞에 수시로 찾아오고 왜곡 보도를 일삼는 일이 많다. 운성씨는 “일본에는 우리가 소녀상을 엄청나게 팔아서 으리으리한 집과 작업실에 산다고 알려져 있다”면서 “그런데 실제로 와 보니 농가주택과 작업실인 작은 비닐하우스뿐이라 옆에는 커다란 비닐하우스를 찍어서 우리 거라고 소개한다”며 웃었다. 소녀상으로 유명해진 뒤 실제로 수입이 많아지지 않았냐는 질문에 서경씨가 “옛날보다는 많아졌다”고 웃자 운성씨가 “늘어난 수입만큼 기증도 많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경씨는 “소녀상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면서 예술의 힘, 문화의 힘을 많이 느꼈다”며 “정의기억재단에 기부하는 것 외에 한베평화재단에 베트남 피에타상을,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 두 할머님 조각상을 만들어 기증한 것 등이 그런 활동”이라고 설명했다. 운성씨는 “이것도 마찬가지”라며 작은 선물을 건넸다. 앞면에는 ‘2018 04 27 남북정상회담기념’이라는 글귀와 함께 태극기 도안이, 뒷면에는 북한 인공기 도안이 그려진 열쇠 모양 기념품을 가리키며 그는 “남북 화해로 평화를 열자는 의미로 만들어 주변에 나눠 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작업을 할 때는 의견이 갈릴 때도 많다. 서경씨는 “개인 작품을 보면 둘의 차이가 뚜렷이 나타나지만 공공작업을 할 때는 서로 잘하는 부분을 인정하고 되도록 존중해 주면서 마음을 모아 작업한다”고 말했다. 이들의 계획에는 앞으로 할 일이 꽉 차 있다. 운성씨는 “내년 3·1운동 100주년에 맞춰 100년간의 여성 운동가들 이야기를 담아낼 항일여성상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경씨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분들이 이제 28명만 살아 계신데 가해자는 피해자가 살아 계실 때 진정한 사과를 해야 한다”며 “강제 징용 문제도 마찬가지로 일본 정부의 진정한 반성과 사과를 끌어낼 수 있도록 노동자상 제작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건봉사, ‘642칸 당우’와 영화·쇠락 함께… 만해, 소실된 ‘正史’ 재발간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건봉사, ‘642칸 당우’와 영화·쇠락 함께… 만해, 소실된 ‘正史’ 재발간

    고성 건봉사는 민통선을 지나지 않고 남쪽에서 접근하면 편안하다. 지난해 완전 개통된 서울·양양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동해 바다에 닿을 때쯤 삼척에서 속초를 잇는 동해고속도로로 갈아탄다. 그렇게 북쪽으로 달리다 고속도로 끝에서 동해안을 따라가는 7번 국도에 진입해 조금만 올라가면 고성 땅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운전하면서 딴생각을 하다 간성읍에서 진부령으로 가는 46번 국도로 접어들어야 하는 것을 잊고 화진포해수욕장까지 내쳐 달렸다. 차를 돌려 조금 내려오니 반갑게도 건봉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거진읍에서 절에 접근하는 길이다.산길로 접어든다 싶더니 바리케이드 너머 소총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검문을 하고 있었다. 주민등록증을 보여 주는 데 그치지 않고 휴대전화 번호까지 알려 주고 나서 통과할 수 있었는데 검문소는 하나가 더 있었고 절차도 반복됐다. 건봉사가 민간인 출입 통제에서 풀린 것은 1988년이다. 일대는 6·25전쟁의 격전지였고, 절 주변에서 특히 전투가 치열했다고 한다. 이번 ‘판문점 선언’에는 군사분계선(DMZ) 주변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건봉사 가는 길’도 그 혜택을 누렸으면 좋겠다.건봉사는 전쟁 이전 대웅전, 극락전, 관음전, 사성전, 보제루, 어실각, 수침실 등 642칸의 당우가 있는 강원 최대 절집이었다고 한다. 1920년대 사진을 보면 신흥사, 백담사, 낙산사를 말사로 거느렸던 시절 위세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수침실(水砧室)은 물레방앗간이다. 하지만 전쟁으로 모두 불탔다. 건봉사는 앞서 1878년(고종 15)에도 산불로 3183칸의 전각이 타 버렸다는 기록도 있다. 사라진 전각은 1879년 개운사·중흥사·봉은사·봉선사·용주사 등이 힘을 합쳐 중건했다고 한다. 지금 건봉사의 전각은 대부분 최근에 다시 지은 것이다. 강당인 봉서루에는 ‘금강산 건봉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건봉사는 금강산 줄기에 자리잡기는 했지만 금강산은 아니다. 그럼에도 금강산 유람에 나선 옛 사람들은 간성을 지나 건봉사에 이르면 누구나 금강산 초입에 들어선 것으로 생각했다. ‘홍길동전’을 지은 교산 허균(1569~1618)은 1603년(선조 36) 궁궐의 마구간을 관리하는 사복시정(司僕寺正)이라는 벼슬에서 파직되자 금강산 유람길에 오른다. 이때 건봉사 스님 방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긴 한시를 남겼는데 여기에도 ‘건봉사가 어드메냐 / 금강산 속에 있어 높고도 아스라하다’는 대목이 보인다.건봉사의 정사(正史)는 ‘건봉사와 그 말사의 사적(事蹟)’이라고 할 수 있다. 고종 시대 대화재로 각종 자료가 대거 사라짐에 따라 새로 수집한 역사를 바탕으로 만해 한용운(1879~1944)이 대표 집필해 1928년 발간한 것이다. 편년체로 절의 연혁을 정리하고 부속 암자, 재산, 유물, 진영, 명소 등의 순으로 기술했다. 만해는 당시 건봉사의 승려였다. 건봉사 사적은 절의 역사가 신라 법흥왕 7년(520)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적었다. 아도(阿道)가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는 것이다. 법흥왕 7년은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기 8년 전이고, 아도는 그 훨씬 이전 고구려에 불교를 전했다는 인물이니 절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역사 끌어올리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많은 절들이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 고승을 창건주로 내세워 역사를 윤색하는 것이 사실이다. 건봉사의 경우도 지리적 위치를 보면 삼국시대 당시 외래 문물을 받아들이는 중심 루트에서 벗어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도는 특정시대 특정인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아미타(阿彌陀)신앙, 곧 정토신앙을 전파하는 승려라면 누구나 아도이고 아도화상이다. 역사책에서 아도나 아도화상이라는 이름이 각각 다른 시대에 등장하는 이유다. 신라가 함경도 일부까지 점령하고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를 세운 것은 진흥왕 시대다. 법흥왕 시대 건봉사 일대는 신라보다 고구려의 영향력이 더 컸을 수도 있다. 신라 중심으로 보면 불교를 공인하기 이전 법흥왕 시대 건봉사의 창건은 조금 어색하다. 하지만 창건을 ‘신라 법흥왕 7년’이 아니라 같은 해인 ‘고구려 안장왕 2년’이라고 보면 논리적 모순은 없다. 건봉사는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가 시작된 절이다. 염불계(念佛契)라고도 하는 염불만일회는 1만일 동안 극락왕생을 위해 아미타 부처의 이름을 마음을 다해 부르는 모임이다. 758년(신라 경덕왕 17) 발징이 절을 중건하면서 염불만일회를 베풀었는데, 신도 1820명이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건봉사에서는 19~20세기에도 세 차례 염불만일회가 열렸다. 조선시대 건봉사는 1464년 세조가 행차해 자신의 원당(願堂)으로 삼으면서 척불(斥佛)시대에도 왕실의 보호를 받는 사찰이 되었다. 금강산을 유람하는 문인과 관료들이라면 거의 예외 없이 건봉사에서 하룻밤을 묵어 갔던 것도 감당할 만한 경제력이 절에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는 서산대사의 명을 받은 사명대사가 이끄는 6000명 남짓한 의승군이 건봉사를 훈련의 근거지로 삼기도 했다. 건봉사는 만해의 존재에서 보듯 일제강점기 교육운동과 항일운동에 매우 활발했다. 깊은 산골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절을 찾는 당대 문인·지식인들과 교유하면서 시대 변화에 눈뜰 수 있었고, 더불어 종교의 역할도 깊이 있게 고민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1909년 당시 건봉사의 말사였던 백담사에서 탈고해 1913년 간행한 ‘조선불교유신론’은 물론 만해 개인의 저서지만, 진취적인 건봉사의 분위기가 응축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불교가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진로를 개척해 본연의 자세로 복귀해야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현실 세계에서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논지다. 무엇보다 염불당을 폐지하고 염불을 개혁해야 한다는 ‘유신론’의 한 대목은 건봉사에 몸담고 있는 승려의 주장으로는 그야말로 파격적이다. 1908년 회향한 염불만일회를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그 문제점을 파악한 결과로 보기도 한다. 만해는 “대낮이나 맑은 밤에 모여 앉아 찢어진 북을 치고 굳은 쇳조각을 두들겨 가며 의미 없는 소리도 대답도 없는 이름을 졸음 오는 속에서 부르고 있으니, 이는 과연 무슨 짓일까”라면서 ‘아미타불’을 부르며 극락왕생을 비는 염불만인회를 정조준했다. 그러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중생들의 거짓 염불을 폐지하고 참다운 염불을 닦게 하겠다는 취지”라고 적었다. 이런 설명을 듣고 절을 둘러보면 삼국시대 고찰의 분위기를 느끼기는 쉽지 않아도 최근의 석물(石物)도 무의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절 마당에 들어서 왼쪽에 보이는 ‘만해당 대선사시비’도 그렇다. 그 옆 ‘사명대사기적비’도 지난해 복원한 것인데, 파손된 옛 비석 조각의 일부가 남아 있다. 사명대사가 왜적에게서 되찾아온 양산 통도사의 진신사리 일부를 건봉사에 안치했다는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건봉사의 성속(聖俗)을 가르는 경계는 불이문(不二門)이다.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고, 결국 삶과 죽음도 다르지 않다는 뜻이라고 한다. 불이문은 6·25 와중에 파괴되지 않은 유일한 건축물이다. 편액의 글씨는 근대 명필 해강 김규진(1868~1933)이 썼다. 불이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시냇물을 건너면 대웅전이고, 곧바로 올라가면 적멸보궁이다. 대웅전 가는 길에 놓인 다리가 능파교다. 조선 숙종 시대 지은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로 2002년 보물로 지정됐다. 절 진입로의 홍예다리도 차를 타고 가면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과거의 흔적이다.우리나라에만 있다는 적멸보궁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일종의 무덤과 그 무덤에 배례할 수 있도록 지은 전각이다. 사명대사기적비에 언급된 진신사리를 모시고자 조성했을 것이다. 지금 불이문에서 적멸보궁으로 오르는 왼쪽의 넓은 터전에는 아직 복구하지 못한 옛 전각의 주춧돌만 가득하다. 이 또한 건봉사의 역사를 보여 준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37세 삶 마칠 때까지… 무력 아닌 문력으로 日에 항거”

    “37세 삶 마칠 때까지… 무력 아닌 문력으로 日에 항거”

    독립 유공자 등 200여명 참석 英대사 “자유 향한 영국인의 노력” 구한말 대한매일신보(서울신문 전신)를 창간하고 항일구국 운동을 벌인 어니스트 베델(한국명 배설·1872~1909) 선생의 109주기 경모 대회가 1일 선생의 묘역이 있는 서울 마포구 양화진의 100주년기념교회에서 열렸다.베델선생기념사업회(회장 최도열) 주최로 열린 이날 대회에는 대회장인 이규택 전 국회의원과 강만희 서울남부보훈지청장, 사이먼 스미스 주한영국대사를 비롯해 광복회, 독립유공자유족회 회원과 시민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최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일제의 온갖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앞장서신 민족의 은인 베델 선생의 은혜에 미력하지만 보답하는 마음으로 정의를 구현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말했다. 이 전 의원은 대회사를 통해 “선생께서는 오대양 육대주가 한집이며, 오색 인종을 한형제로 여기신 큰 철학자이시며 우리나라의 은인이자 겨레의 스승”이라고 추모했다. 정세균 국회의장은 서면으로 보낸 경모사에서 “선생께서는 무력이 아닌 문력으로 일본에 항거하셨고 37세에 짧은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리나라를 지키고자 하셨다”고 말했다. 스미스 대사는 “선생의 고향인 영국 브리스틀은 저의 고향이기도 하다”며 “이 행사에 참석한 것이 개인적으로 영광”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자리에 참석한 분들로 인해 자유를 향한 한국의 투쟁에 숭고한 기여를 한 영국인의 노력이 아직도 기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감사를 표했다. 김영만 서울신문 사장은 이경형 주필이 대독한 경모사에서 “남북 정상회담 등으로 한반도는 분단 73년 만에 드디어 냉전구조를 해체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역사적 기회를 맞고 있다”면서 “대한매일신보의 창간 정신과 지령을 계승한 서울신문은 국내 신문 중 가장 오래된 언론으로서 이념과 정파에 기울어짐 없이 언론의 사명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날 경모대회는 단국대 음악대학 현악합주 솔올오케스트라의 영국 국가와 애국가 연주, 대한독립군가선양회 합창단의 독립군가 합창, 헌시 낭독, 헌화와 분향 등의 순으로 이어졌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오늘의 눈] 아웃링크 시대가 오면…/김민석 산업부 기자

    [오늘의 눈] 아웃링크 시대가 오면…/김민석 산업부 기자

    ‘드루킹 댓글조작’ 사건이 네이버의 뉴스 서비스 방식에 관해 문제의식을 일깨웠다. 지금처럼 네이버뉴스 안에서 뉴스 소비가 이뤄지게(인링크) 하지 말고 포털에서 뉴스를 클릭하면 해당 언론사 사이트로 연결되는 ‘아웃링크’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인링크 기사에 댓글과 공감·비공감 등 기능을 붙이고 기사의 순위를 매기기 때문에 드루킹 김모(49)씨 같은 세력이 악용해 여론을 조작할 수 있다는 진단에서다. 네이버 측은 “과거에 아웃링크 방식으로 뉴스 서비스를 운영할 때 고객 불만이 하루에 수십개씩 접수됐다”고 말한다. 언론사마다 다른 화면 구성과 선정적인 광고 배너 등 때문이라고 했다. 급기야 네이버는 최근 124개 언론사에 공문을 보내 아웃링크 방식 전환에 대한 의견 수렴에 나섰다. 아웃링크가 전환하면 ‘기사 전재료’가 없어진다는 점도 은근히 언급하면서 말이다. 실제 모바일에서 네이버를 거치지 않고 한 뉴스 사이트의 기사를 클릭했더니 온갖 바로가기 배너와 광고창이 동시다발로 떠서 기사를 가렸다. 아웃링크 방식으로 뉴스서비스가 바뀌어도 그에 따라 어뷰징(부정사용) 방법도 진화할 것이다. 네이버의 모니터링을 피해 자극적인 ‘낚시’ 제목을 다는 언론사가 다시 나타날 수도 있다. 아웃링크 방식으로 전환되면 네이버의 주장대로 분명 심한 ‘몸살’을 앓게 될 것이다. 전재료와 ‘손님몰이’가 없어지면 당장 운영이 어려운 언론사가 나올 수도있다. 하지만 네이버라는 ‘가두리 양식장’에서 벗어나면 독자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할 것이다. 뉴스 가치 판단의 잣대를 더이상 독자가 아닌 네이버에 내주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포털의 뉴스정책이 바뀌면 거기에 맞춰 ‘잘 팔리기 위해’ 갈팡질팡할 일도 없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짜뉴스’를 만들고 어뷰징을 하는 언론사는 결국 도태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레기’라고 욕을 먹을 일도 조금씩 줄어들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은 기자의 성급한 희망사항일까. shiho@seoul.co.kr
  • ‘3·1운동 100주년’ 독립운동 산실 안동 임청각 복원

    ‘3·1운동 100주년’ 독립운동 산실 안동 임청각 복원

    경북 독립운동 으뜸마을 선정 충북 임정 대통령 기념관 건립 국채보상운동 아카이브 구축 # 경북 안동시 법흥동에 있는 ‘임청각’은 항일독립운동의 산실로 꼽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1858~1932) 선생의 생가로도 유명한 이곳은 임진왜란보다 앞선 1519년 지어졌다. 현존하는 민가 중 가장 오래된 곳으로 이상룡의 아들 이준형(1875~1942), 손자 이병화(1906~1952)까지 3대에 걸쳐 독립운동가를 배출하기도 했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경북도는 일제강점기 때 강제로 훼손된 임청각의 원형을 복원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연지·사당 배수로를 다듬고 창호나 구들, 기단, 마루 등을 보수할 예정이다. 오는 10월까지 종합정비계획 용역을 마무리하고 전문가와 함께 복원시점·범위 등을 확정한다. # 1894년 청·일전쟁 당시부터 일본은 조선에 대한 적극적인 차관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한국의 재정을 일본에 예속시켜 궁극적으로는 식민지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이를 막고자 1907년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대구시도 이런 민족적 운동을 기념하고자 오는 6월부터 ‘국채보상운동 아카이브 구축사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대구시립 중앙도서관에 관련된 디지털 자료를 전시한다.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을 열람할 수 있는 도서관도 만든다.3·1운동 100주년이 1년 앞으로 다가오자 전국 시도 자치단체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행정안전부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위원회’가 제30회 중앙·지방 정책협의회를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을 주제로 26일 열었다고 밝혔다. 경북도는 임청각 복원사업 외에도 독립유공자를 많이 배출한 전통마을을 ‘독립운동 으뜸마을’로 선정해 육성하는 사업도 계획하고 있다. 경북도가 2016년 시행한 연구용역에 따르면 독립유공자를 11명 이상 배출한 마을이 9개 시군에 21곳이나 됐다. 영덕군 창수면 일대 마을에선 독립유공자가 27명이 나왔다. 충북도는 내년부터 2020년까지 임시정부 대통령 기념관을 건립한다. 백범 김구(1876~1949) 등 임시정부 국가수반을 지낸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재조명하기 위해서다. 임시정부 활동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기록화하고, 독립운동 당시 상황을 가상현실(VR)로 체험하는 공간도 마련한다. 위원회는 앞으로 3·1운동에 대한 각계각층의 참여를 이끌어 국민적인 축제로 만드는 전략을 추진하기로 했다. 아울러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의 가치를 세계적으로 알리는 작업도 해 나갈 계획이다. 오경진 기자 oh3@seoul.co.kr
  • 123년 만에… 종로에 다시 선 녹두장군

    123년 만에… 종로에 다시 선 녹두장군

    동학 농민군 지도자였던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 장군 동상이 순국 123년 만에 서울 종로에 세워졌다.사단법인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는 24일 종로구 서린동 영풍문고 앞에서 전봉준 장군 동상 제막식을 가졌다. 전봉준 장군은 고부군수 조병갑이 농민들로부터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고 재산을 갈취하는 데 항거해 1894년 3월 농민들을 이끌고 봉기했고, 이후 일본이 침략하자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우금치에서 일본군에 패한 전봉준 장군은 서울로 압송돼 전옥서에 수감됐는데, 이곳이 바로 종로 영풍문고 자리다. 전봉준 장군은 1895년 4월 23일 재판소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다음날 교수형에 처해졌다. 동상 설립은 2016년 8월 전북 전주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이 전봉준 장군 순국 터에 동상을 세우자는 동학혁명기념사업 관계자들의 제안을 수용하면서 성사됐다. 송수연 기자 songsy@seoul.co.kr
  • ‘대구 항일 학생운동’ 주도 애국지사 김상길 선생 별세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항일 학생운동을 주도한 애국지사 김상길 선생이 별세했다. 92세. 23일 광복회에 따르면 김 선생은 지난 22일 오후 숙환으로 숨을 거뒀다. 선생은 대구상업학교 학생이던 1942년 동료들과 조국 독립에 헌신키로 맹세하고 항일 학생운동 단체인 ‘태극단’을 결성했다. 태극단은 일본군 입대 반대 등 일제에 대한 항거를 고무하는 유인물을 배포했고 주변 학교로 조직을 확대했다. 학술연구토론회를 비밀리에 여는가 하면 폭발물 제조법을 연구하기도 했다. 태극단 활동은 1943년 일제 경찰에 적발됐고 선생은 수업 중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았고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당시나 지금이나 대구가 특별히 항일 정신, 선비 정신이 강한 곳”이라고 말했다. 유가족으로는 아들 영남·영진·용준씨가 있다. 빈소는 분당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이고 발인은 24일 오전 8시, 장지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이다. 강윤혁 기자 yes@seoul.co.kr
  • [국민의 기업] 한국전력공사, 다문화 청소년들 모국 방문 돕고 인재 교육

    [국민의 기업] 한국전력공사, 다문화 청소년들 모국 방문 돕고 인재 교육

    한국전력공사가 다문화 가정 청소년들이 우리나라에서 자립 기반을 갖고 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고 있다.17일 한전에 따르면 지난달 27일부터 지난 1일까지 고려인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민족 역사 찾기 행사’를 진행했다. 이번 행사에는 광주에 위치한 고려인 자녀 전문학교인 새날학교 학생 24명이 참여했다. 학생들은 항일독립운동 현장인 안중근 의사 단지 동맹비, 러시아 최초의 한인 마을인 ‘지신허’ 등 강제이주 현장, 러시아 사할린의 고려인 문화센터 등을 방문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1937년 강제이주된 아픔을 체험하며, 구소련과 일제의 핍박에 굴하지 않은 한인들의 정신력과 불굴의 의지도 되새겼다. 이어 현지 고등학교를 찾아 러시아 학생들과 소통의 시간도 가졌다. 한전은 5년째 다문화 가정의 모국 방문 행사를 진행해 지금까지 총 347명의 이주 여성과 자녀의 모국 방문을 도왔다. 다문화 가정 100만명 시대를 맞아 단순한 모국 방문을 넘어 다문화 자녀의 성장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청소년 교류 행사와 명문대학 방문, 문화·역사 특강 등 인재 교육에 특화된 행사로 추진하고 있다. 장은석 기자 esjang@seoul.co.kr
  • 훈장 박탈 김성수 고택 국가민속문화재 자격 유지

    지난 2월 독립유공자 서훈이 취소된 인촌 김성수(1891∼1955)가 어린 시절을 보낸 ‘부안 김상만 고택’의 국가민속문화재 자격이 유지됐다. 15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문화재위원회 민속분과는 지난 10일 열린 회의에서 국가민속문화재 제150호 ‘부안 김상만 고택’의 문화재 지정 해제 안건을 검토해 부결했다. 앞서 항일독립운동가단체연합회는 “인촌은 대법원에서 일제강점기 친일 행위에 대한 확정판결을 받아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지금의 대통령장)이 박탈되고 생가와 동상의 현충시설 해제가 결정됐다”며 인촌 김성수와 관련된 고택의 문화재 지정을 해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해 문화재위원회는 “부안 김상만 고택은 거주 인물이 아니라 주거지 관점에서 가치를 평가받아 문화재로 지정됐다”며 “문화재 지정 해제 요인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국가민속문화재는 의식주, 생산, 교통, 교역 등에서 한국 민족의 기본적 생활문화를 나타내는 유물 중 전형적인 것이 지정된다. 전북 부안군 줄포면에 있는 김상만 고택은 안채, 안사랑채, 헛간채 등 건물 8동으로 이뤄졌다. 김상만(1910∼1994)은 인촌의 장남이다. 이 집은 1895년 안채와 사랑채 등이 지어졌고, 1903년 안사랑채와 곳간채가 세워졌다. 문간채는 1984년에 중건됐으며, 전체적인 평면 형태는 ㅁ자형이다. 기와집 못지않게 좋은 부재를 썼지만, 기와지붕이 아닌 초가지붕인 점이 특징이다. 1982년에 보수를 거치고 지붕의 이엉이 억새로 변경됐으나, 전북 고창 지방의 주거양식을 잘 나타내는 근대적 초가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인촌은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고 모금운동을 벌여 고려대를 설립한 교육자이자 부통령을 지낸 정치인이지만, 대법원은 지난해 4월 일제의 징병과 학병을 찬양한 사실을 인정했다. 이에 항일운동가단체들은 인촌 관련 기념물 철거와 후손들의 재산 환수 등을 요구하고 있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3년째…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하는 성남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9주년 기념식이 13일 오전 11시 30분 성남시청 온누리에서 열린다. 경기 성남시는 전국 지방자치단체 중 처음으로 2016년부터 자체 예산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을 하고 있다. 올해로 3년째다 이날 행사는 광복회원과 국가유공자, 이재철 성남시장권한대행, 정해주 경기동부보훈지청장 등 600여명이 참석한다. 기념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영상물 상영, 약사 보고, 기념사, 축사, 만세삼창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기념 공연으로 가천대 예술동아리가 ‘임시헌장 선포 재연’을, 춤자이 예술단이 ‘한국의 빛’을 무대에 올린다.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긴 세월을 풍찬노숙하면서 국권 회복과 항일전선을 이끌었던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내용의 공연이다. 시청 로비에는 18점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 사진전이 마련된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운암 김성숙선생 49주기 추모재

    운암 김성숙선생 49주기 추모재

    독립운동가 운암 김성숙 선생의 49주기 추모재가 오는 12일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항일독립운동가단체연합회(회장 함세웅) 주최로 오전 11시 열린다. 이번 추모재에서는 운암선생 유족, 관련단체장, 회원 등 500여명이 참석하며 개식, 국민의례, 운암 김성숙 선생 약사보고, 내빈추모사, 합창단 추모곡, 헌화 및 분향, 조총발사 및 묵념, 그리고 운암 김성숙 선생 묘소 참배 순서로 진행되며 군악대 반주에 맞춰 부천 석왕사합창단의 추도곡, 역사어린이합창단의 공연으로 진행되며 국방부의장대, 수도방위사령부 군악대가 참여한다. 운암 김성숙 선생은 1898년 평안북도 철산에서 태어나 19세에 경기도 양평 용문사에서 출가했으며, 1919년 ‘조선독립군 임시사무소’ 명의의 격문을 뿌려 옥고를 치르는 등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중국으로 건너간 운암 김성숙선생은 조선의용대, 일제 주요 기관 파괴를 목적으로 결성된 조선의열단에 가입하고 ‘반역사’(反逆社)라는 이름의 학생단체를 조직하고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김원봉 선생과 함께 의열단을 배후 조종하며 항일투쟁 선봉에 서며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하였다. 정세균 국회의장은 기념사업회에 전달한 추도사에서 “다툼을 그치고 서로를 존중하며 대한민국의 앞길을 여는 일이야말로 운암 선생의 고귀한 뜻을 받드는 길일 것입니다. 새로운 대한민국을 향해 나아가는 이 봄에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의 한길을 걸으셨던 선생의 가르침이 우리와 늘 함께하길 바라는 절실함으로 삼가 분양합니다”라고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허백윤 기자의 남과 如] 미투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들

    [허백윤 기자의 남과 如] 미투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들

    1월 말부터 두 달 남짓 설명할 수 없는 불쾌감을 안고 지냈다. 영화 속 성폭행 장면만으로도 일주일 잠을 설치는 예민한 공감 능력으로 매일같이 누군가의 성폭력 피해 경험을 접한다는 게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속내가 꼬인 이유가 단지 그것뿐이었을까. 먼저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상명하복’의 상징인 검찰에서 서지현 검사가 처음 용기를 냈을 때 선뜻 온 마음을 다해 지지하지 못했다. 앞으로 닥칠 일들이 예견됐기 때문이었다. 오만했던 예상은 절반 정도만 맞았다. 파급효과를 틀렸다. 한 검사의 용기가 문화예술, 정치 권력까지 뒤흔들 거라곤 내다보지 못했다. 맞힌 것은 서 검사에게 닥친 일들이었다. 성추행과 그에 따른 부당 인사를 주장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인사’를 가리킨 손가락들, 사라져 버린 서 검사의 책상, 길어지는 쉼. 피해자가 숨죽이고 아파하는 동안 가해자로 지목된 상대는 며칠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 망신을 당했을 뿐이었다. 사과도 처벌도 아직이다. 각 분야 권력자들의 이름이 터져 나올수록 불쾌함 속엔 불안함 또한 자리했다. 서 검사가 물꼬를 튼 소중한 기회가 점점 흐려진다는 걱정이었다. 수많은 용기가 이제서야 터져 나온 것은 상대가 힘 있는 윗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점점 성(性) 문제가 잣대가 됐다. 어리고 힘이 없어 당해야 했던, 그러고도 꿈과 밥줄을 틀어쥔 그 때문에 멈추게 할 수 없었던. 위력에 의한 성폭력이 본질이라 생각했던 미투는 언제부턴가 진실게임에 매몰됐다. 미투(Me too·나도 피해자)가 거듭될수록 마치 가해자를 향해 유투(You too·당신도 변태)라고 비난하고 마는 것으로 변질돼 보였다. 우리의 시선이 그랬다. 보도는 하루하루 피해자를 증언대에 세워놓고 누가 더 수위 높은 가해자인지, 누가 더 처절한 피해자인지를 겨루는 것처럼 이뤄졌다. 가해자에게서 오는 충격이 클수록 피해자의 진심은 의심받았고,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삶이 파헤쳐졌다. 완벽한 삶을 살아야만 피해자의 자격이 주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새로운 가해자가 등장하면 피해자는 사라졌다. 한껏 욕을 먹던 가해자는 곧바로 다른 가해자에 가려졌다. 미투 운동이 성차별과 성폭력의 뿌리는 못 뽑아도 줄기라도 쳐낼 수 있길 간절히 바랐다. 말하지 않는 이들에게도 켜켜이 쌓인 찝찝한 기억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공감받고 싶었다. 영국의 페미니스트 작가인 로라 베이츠가 책 ‘일상 속의 성차별’에 쓴 ‘어쩌다 한 번씩 발생하는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신경을 은근히 거스르는 수백 개의 짧은 순간’이 얼마나 많고, 왠지 잊을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과연 여자들만의 문제일까. 아랫사람이고 약자라면 남자들 역시 모든 종류의 부당함에 짓눌리는 피해자가 될 수 있다. 미투의 불씨를 제대로 키워 누구든 부당함에 맞서 용기를 낼 수 있게 되길 기대하는 것은 너무 거창한 희망 사항일까. 학교와 직장, 사회, 수많은 울타리 안에서 조직 문화에 충실한 우리는 사실 미투의 진짜 이유를 조금은 알고 있지 않나. 그들을 더욱 ‘변태’로 만든 멍든 자리들을. 그 자리에서 사람을 슬쩍 도려내더라도 멍은 그대로 남아 있는다는 것을. baikyoon@seoul.co.kr
  • [부고] 항일 학생운동 이주호 선생 별세

    [부고] 항일 학생운동 이주호 선생 별세

    일제강점기 대구 지역에서 항일 학생운동을 이끈 애국지사 이주호 선생이 지난 1일 오전 별세했다. 97세.2일 광복회에 따르면 선생은 대구사범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0년 교내 비밀결사인 문예부에 가입해 항일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듬해에는 동료들과 조직을 확대해 ‘다혁당’(茶革黨)을 결성했다. 민족차별 반대운동 등을 주도하던 선생은 1941년 7월 교내 비밀결사가 일제 경찰에 적발돼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유족으로는 배우자 최순종씨, 아들 구섭·문섭·명섭씨, 딸 청희·정희씨가 있다. 빈소는 부산보훈병원 장례식장이며 발인은 3일 오전 7시 30분,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이다.
  • [현장 행정] ‘역사가 브랜드’… 100년 전 명동을 불러내다

    [현장 행정] ‘역사가 브랜드’… 100년 전 명동을 불러내다

    “조선시대 가난한 선비들이 모여 살던 ‘명례방’에서 ‘명’을 따와 일제강점기 땐 ‘명치정’이라고 불렸습니다. 각종 상점과 백화점이 들어선 일본인 타운을 거쳐 해방 후 1950~70년대엔 통기타 음이 울려 퍼지는 ‘낭만의 거리’가 됐습니다. 군부정권 시절엔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성지 또는 심장’의 역할도 맡았죠.”지난 20일 서울 중구 명동성당 앞. 이준 문화해설사는 명동 일대의 변천사를 막힘 없이 읊어 나가며 90분짜리 도로탐방 코스인 ‘명동 역사문화투어’의 시작을 알렸다.최창식 중구청장은 이날 구 관계자들과 함께 투어를 신청했다. 그는 “불과 40년 전만 해도 명동에는 숱한 다방이 밀집해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영화인, 작가, 가수 등 다수가 이곳을 찾았다”면서 “명동이 품은 역사, 문화를 되찾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명동성당 맞은편에 지난해 조성된 명동문화공원을 기점으로 유네스코빌딩까지 16개 지점을 지나는 2km 코스다. 지금은 형체 없이 사라진 조선시대 양반의 집터들이 소개됐다. 이 해설사는 “1920년 현재 가치 2조원 상당의 전 재산을 팔아 항일운동을 펼친 우당 이회영 선생의 일가가 만주로 건너가기 전 살았던 집터”라고 했다. 이에 최 구청장은 “그 당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인데 모를 수가 없다. 구청 직원들한테 이회영 선생의 삶은 담은 책도 한 권씩 선물했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밖에도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인 김범우, 조선 중기 문인이자 시인인 윤선도 등이 생전에 머물던 자리를 찾았다. 투어 참가자들은 저마다 100여년 전 명동의 모습을 상상하며 사색에 잠겼다. 근대건축물도 돌아봤다. 조선은행(한국은행 본점), 미쓰코시 백화점(신세계 백화점), 경성우체국(중앙우체국) 등이다. 1920~70년대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사용된 은성주점, 쉘브르, 봉선화 등 술집과 다방도 소개됐으나, 전부 쇼핑시설로 바뀌어 아쉬움을 자아냈다. 최 구청장은 “남아 있었다면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처럼 세계인이 찾는 관광 명소가 됐을 수도 있는데 안타깝다”면서 “지금이라도 명동의 가치를 제대로 알리려고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구는 동방살롱, 문예서림, 오비스캐빈, 은성주점, 국제양장사, 명동예술극장, 명동아동공원 등 40곳을 근현대문화명소로 지정해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로 옛 모습을 구현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김정은 방중단서 최룡해의 ‘애매한’ 역할··· 시진핑과의 양자 회담서 빠져

    김정은 방중단서 최룡해의 ‘애매한’ 역할··· 시진핑과의 양자 회담서 빠져

    북한이 28일 공개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북중 정상회담 수행단의 면면이 관심인 가운데 이번 수행단 내에서 최룡해 당 부위원장의 애매한 역할을 두고 여러 해석이 나오고 있다.앞서 조선중앙통신은 김 위원장의 방중에 부인 리설주가 동행했으며, 최룡해·박광호·리수용·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리용호 외무상, 조용원·김성남·김병호 당 부부장 등이 수행했다고 전했다. 이는 국제무대에 첫 데뷔하는 김정은이 국가수반으로서 위용을 갖추기 위한 것이란 분석이다. 국가 정상 간의 만남이기 때문에 격식을 최대한 맞춘 것이란 설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 북한을 대표하는 고위급들은 다 참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과 김정은의 양자 회담에서 북한측 배석 인사는 리수용·김영철과 리용호 뿐이었다. 정작 북한의 2인자로 평가 받는 최룡해가 보이지 않았다. 이유는 뭘까. 최룡해는 지난해 10월 간부 인사권과 통제·검열 등 내치 권한을 모두 거머쥔 당 조직지도부장에 임명되며 명실상부한 김정은과 김여정 오누이 다음의 권력자로 자리 잡았다. 따라서 김정은의 중국 방문에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정상회담에 그가 빠진 것은 의외의 결과란 지적이다. 그러나 내치를 관장하는 그가 외교나 남북문제, 비핵화를 논의하는 북중 정상회담에 낄 필요는 없었다는 해석도 있다. 또 2015년 9월 항일승리 70주년 기념식 당시 김정은을 대표해 시진핑 주석을 방문했지만, 냉대를 받았던 경험으로 볼 때 대중외교에서 그의 역할이 사라졌을 것이란 분석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를 굳이 해외 순방에 포함시키면서 정작 정상회담에서 뺀 것은 좀처럼 납득하기 어렵다는 설명이다.반면 김정은의 복심으로 통하는 여동생 김여정은 이번 수행단에서 빠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임신 중인 그가 장거리 열차 여행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김정은이 이번처럼 해외 순방으로 부재할 경우 그를 대신해 북한을 통치해야 할 책임 때문에 수행단에 들지 않았을 것이란 해석도 있다. 이 때문에 일부 전문가들은 최룡해가 수행단에 포함됐으나, 결국 정상회담에서 빠진 이유는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최룡해는 김정은 정권에서 군 내 2인자인 총정치국장을 했던 인물이고 현재 당 내 권력 2인자인 조직지도부장을 맡고 있다. 그가 김씨 일가에 충성심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그 자리를 보존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김정은이 자리를 비운 북한에 그를 남겨둘 정도로 신임하지는 않는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한 대북전문가는 “당시 김정일의 현지지도를 수행한다고 해서 다 측근이 아니라는 말이 있었다”며 “김정일 입장에서 곁에 두고 감시를 해야하는 간부들의 경우 굳이 수행단에 포함을 시켜 딴 짓을 못하게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 때문에 북한 간부들 사이에서는 ‘현지지도 수행단에 있다고 다 실세가 아니고, 포함되지 않았다고 다 밀려난 것은 아니다’는 말이 돌았다”며 “김정은 시대에도 비슷한 일이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김정은 방중설에 ‘중국을 믿지 마라’ 김일성 유훈 다시 주목

    김정은 방중설에 ‘중국을 믿지 마라’ 김일성 유훈 다시 주목

    북한 최고위급이 그간 소원해졌던 중국을 전격 방문한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북한 김일성 주석이 과거 중국을 겨냥해 한 발언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김일성의 발언 요지는 ‘중국을 믿지 마라’는 뜻으로 전해졌다.지난 1월 5일 자유아시아방송(RFA)이 현지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한 것에 따르면 북한 당국이 현재 북한이 겪고 있는 고난이 중국의 배신 때문이라는 식으로 주민교양을 했다. 경제난으로 일상생활에서 큰 불편으로 원망이 높아지는 여론을 돌리기 위해 모든 책임을 중국으로 돌렸다는 것이다. 함경북도의 한 소식통은 당시 이에 대해“지난해 12월 중앙의 지시로 열린 청진의 동 단위 여성연맹회의에서 한 간부가 ‘일본은 백년 숙적, 중국은 천년 숙적’이라고 발언하자 참석자들이 술렁였다”고 전했다. ‘일본은 백년 숙적, 중국은 천년 숙적’이란 말은 김일성이 자신의 후계자였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우방인 중국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는 취지로 한 발언으로 알려졌다. 이 소식통은 이어 “여기서 말하는 주변국이 중국임을 북한 주민들은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요즘 북한과 중국의 관계가 좋지 않지만 오랫동안 혈맹관계를 유지해온 중국에 대해 절대 믿지 말라고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중국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한 김일성은 누구보다 중국 지도부의 속내를 잘 아는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북한을 구원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종전 직후 북한 내부에서 벌어진 권력투쟁에서 김일성에 반기들 든 연안파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개입은 김일성의 감정을 건드렸다. 연안파는 중국과 매우 가까운 인사들이었다. 당시 마오쩌둥 중국 주석도 북한의 옛 동지들이 체포되거나 당에서 쫓겨나자 김일성을 겨냥, “스탈린과 다를 게 없다. 귀에 거슬리는 말을 단 한마디도 듣기 싫어한다. 상대가 누구건 반대만 하면 무조건 죽여 없애려 한다”고 직접 비난한 것으로 전해진다. 마오는 이 사태를 해결하고자 한국전쟁 참전 중국군 사령관이었던 팽덕회를 평양에 파견했다. 이를 두고 과거 청나라가 병자호란 당시 조선을 유린한 용골대를 조선 왕조 특사로 파견했던 것과 비교되기도 했다. 팽덕회는 김일성이 내친 연안파 모두를 중국으로 데려왔다. 그런 중국을 경계한 김일성이 자신의 경험을 후계자였던 김정일에게 전했고, 김정일 역시 북한 통치 기간 측근들에게 중국을 믿으면 안 된다고 줄 곧 강조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도 중국과 가까운 인물이었던 자신의 고모부 장성택을 처형했다. 당시 중국은 장성택의 처형을 반대하며 중국 주재 대사관과 대북 핫라인을 통해 이같은 입장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1956년 김일성의 연안파 숙청과 달리 중국은 장성택의 처형을 막지 못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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