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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하얼빈 총영사관 의거 주역들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하얼빈 총영사관 의거 주역들

    국가보훈부는 ‘하얼빈 총영사관 의거’ 100주년을 맞아 만주 지역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유기동·김만수·최병호 선생 등 3명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 하얼빈 총영사관 의거는 중국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 소속 경찰들이 일대 한인들을 가혹하게 탄압한다는 소문이 돌자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의열 활동을 일으킨 일이다. 당시 김만수·최병호 선생은 하얼빈 지역에서 친일파와 일본 경찰을 암살하고 기관을 파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은신하던 중 예전의 동지 유기동 선생과 우연히 만나 함께 의열 활동을 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러나 거사가 실행되기 전 은신처가 발각돼 포위되자 격렬한 항전 끝나 일본 총영사관 순사부장 쿠니요시 세이호를 사살하고 일본 경찰을 비롯한 중국군과 밤새 교전을 벌이다 1924년 4월 8일 장렬하게 순국했다. 1891년 경북 안동 출생인 유기동 선생은 일찍이 만주로 건너가 흥업단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892년 안동 출생인 김만수 선생은 서로군정서와 한족회 등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1903년 경북 울진 출생인 최병호 선생은 만주에서 서로군정서 헌병대 활동을 하며 다양한 독립운동을 추진했다. 보훈부는 “세 청년의 의거는 만주 무장 독립운동 진영에 큰 교훈을 줬고 1924년 6월 이후 독립군단들이 통합되면서 항일무장투쟁이 강화되는 전환점이 됐다”고 평가했다. 정부는 세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각각 추서했다. 보훈부는 또 6·25전쟁 당시 해병대 최초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고길훈 해병 소장을 ‘4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1922년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난 고 소장은 1946년 5월 해군에 입대해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해병대 창설 요원으로 활약했다. 이후 6·25전쟁이 발발하고 1950년 7월 초 충남 천안을 점령한 북한군 제6사단 13연대가 호남 지역으로 남하하자 고 소장(당시 소령)의 부대는 7월 16일 군산에 상륙해 충남 서천군 장항 방면으로 진출하려던 적을 저지했다. 이어 7월 18일부터 다음 날까지 전북 군산, 이리(현 익산) 방면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 해병대 최초 전투에서 승리했다. 고 소장은 또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해 국군 최초로 한강을 건너 북한군의 서울 사수 최후 방어선인 연희고지(현 서대문구 연희동)에서 적을 섬멸하는 등 서울탈환 작전 성공에 결정적인 공훈을 세웠다. 그는 전쟁 기간 동해안 전략도서확보작전, 강원도 양구 부근의 김일성 고지 전투, 월산령지구전투 등 수많은 전투에 참전했다. 정전협정 체결 이후에는 해병대사령관을 지내고 1963년 12월 예편했고, 1981년 별세해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려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했다.
  • [박성원의 직설대담] “오류 판명된 이들이 이승만 부정… 자학사관 벗어나 자부심 가질 때”

    [박성원의 직설대담] “오류 판명된 이들이 이승만 부정… 자학사관 벗어나 자부심 가질 때”

    다큐 영화 ‘건국전쟁’ 관람객 수가 116만명을 넘어섰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생애와 업적에 관해 왜곡되거나 잘못 알려진 얘기들을 실증적 자료 발굴을 통해 다시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한 것이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그동안 이 전 대통령에게 덧씌워졌던 가짜뉴스는 무엇이었으며, 대한민국의 출범과 번영을 가능케 한 역사적 사실은 무엇이었을까.심지연 경남대 명예교수는 ‘건국전쟁’이 공감을 얻게 된 요인으로 “우리의 국제적 위상이 강화되면서 일어난 우리 현대사에 대한 자각”과 “이제는 자학사관에서 벗어나 자부심을 가질 때가 됐다는 시민들의 심리 상태”를 꼽았다. 그는 또 “자유당의 부정부패에 대한 염증이 ‘이승만 정부=친일 정부’라는 매도와 비판의 자양분이 됐다”면서 “이 전 대통령의 현실주의 노선으로 인해 자신들의 논리가 오류라는 게 판명된 쪽에서 이승만을 부정하고 그의 노선을 끈질기게 비난해 왔다”고 말했다. 한국정치외교사학회장, 한국정치학회장 등을 지낸 심 교수는 해방공간 사회주의 계열 인물에 관해 많은 연구 업적을 쌓았다. 한국 정당정치사는 물론 근현대사 연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인터뷰는 지난 22일 서울신문 광화문 사옥에서 이뤄졌다.-왜 지금 이승만 다시보기가 활발해진 것일까. “지금까지 우리 현대사에 대해서는 부정적 담론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북한의 실상이 알려지고, 우리 국력과 국제적 위상이 강화되면서 우리 현대사가 부정적,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었다는 자각이 일어났다. ‘이제는 자학사관에서 벗어나 현대사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도 될 때가 됐다’는 시민들의 심리 상태가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체제를 도입한 이 전 대통령을 재평가하게 만든 것으로 본다.” -이 전 대통령이 4·19 때 부상당한 학생들을 문병하며 울먹이고 장제스 대만 총통에게 보낸 편지에선 학생들의 거사를 칭찬했다. 그런데 이런 사실들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듯하다. “자유당의 부정부패가 너무 심했기 때문에 자유당 총재인 이 전 대통령도 동일시돼 실상을 파악하려는 노력이 없었다. 부정적 담론이 너무 지배적이었기에 사실을 규명하려는 노력도 의지도 없었다.” -이 전 대통령은 미국으로 떠날 때 망명이 아니라 잠시 다녀온다고 하면서 떠났는데,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하와이에서 생을 마감했다. 어떤 상황이었나. “본인은 하야할 때 국민들이 보여 준 높은 지지로 봐서 정국이 안정되면 귀국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으로선 신구파 갈등과 사회적 혼란으로 취약한 권력기반이 더욱 약화될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귀국을 반대했고, 군사정부도 정통성에 의문을 줄 수 있다는 판단에서 귀국을 막았던 것이다.” -하와이에서 한인 소녀들을 데려다 교육을 시킨 일이나 어려운 상황에서도 6년 의무교육을 실시한 일, 여성 참정권 부여에 대한 선각자적 의지를 보여 주는 대목들도 나오는데. “미군정에서 마련한 선거법이 보통선거 요소로 돼 있기도 했지만 이 전 대통령 본인이 평등사상이 체질화된 분이고 미국에서 오래 생활하면서 여성의 참여가 활발할수록 나라가 발전한다는 근대적·개방적 사고를 갖게 됐다고 본다.” -근현대사 연구 학자로서 영화에서 발굴한 새로운 내용 중 가장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대목은. “뉴욕의 환영 퍼레이드가 인상 깊었다. 공산 침략에 굴하지 않고 이를 물리친 것이 미국인들에게 감명을 주었던 것 같다.” -이 전 대통령과 관련해 여전히 제대로 다뤄지지 못해 아쉽게 생각하는 것들은 없는지. “전에 이화장에서 이 전 대통령 관련 자료들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옥중에서 영한사전을 편찬하기 위해 영어단어 밑에 우리말 풀이를 써 놓았던 카드가 많이 있었다. 또 하나는 금전출납부 형식의 장부였는데, 기부금을 받고 발급한 영수증이 많이 있었다. 액수가 아주 적은 것까지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어 독립자금을 유용했다는 일부 주장은 오해이거나 근거가 약할 수도 있겠다 생각된다.” 이화장은 해방 후 미국에서 귀국한 이 전 대통령에게 지인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마련해 준 거처로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 자리해 있다. 이곳에 살면서 정부 수립 운동을 벌였고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장에 당선됐다. 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 대통령에 당선돼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로 이사한 1948년 7월까지 살았다. 사적 제497호. -해방 직후 여러 정치세력이나 지도자들 가운데 우남 이승만은 어느 정도 지지와 영향력을 갖고 있었나. “우익 진영의 한국민주당은 물론 좌익 진영에서 선포한 인민공화국도 주석으로 추대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이런 상황을 감안해서 미군정이나 맥아더 사령부가 해방 후 정국의 안정을 기하기 위해서는 이 전 대통령의 귀국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국제정치의 현실에 대한 분석도 탁월했다.” -독립운동사에서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외교노선과 국내외 무장투쟁, 교육·문화 등을 통한 자강운동 각각의 기여와 역할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각각의 운동이 나름대로 의미와 기여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무장투쟁은 국내에선 소규모 폭탄 투척 등을 제외하곤 불가능했고, 국외의 경우 청산리·봉오동 전투를 제외하고 1920년대 초반 이후에는 일본군의 탄압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 만주에 있던 독립군이 시베리아로 갔으나 자유시 참변으로 대부분 적군으로 흡수되거나 해산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1940년대 들어 중경에서 광복군이 결성되고 연안에 조선의용군이 창설됐지만, 독자적으로 일본군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전개한 게 아니라 중국의 국민당군과 공산당군의 후원 아래 활동한 것이다. 합방 이후 국내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우리말 보급이나 민족의식 고양 등을 위한 신문 발행 등 교육문화사업밖에는 없었다.” -2000~3000명의 독립군으로 700만명의 일본군을 무력으로 이길 수도 없었기에 외교, 특히 미국의 힘을 빌려 해방을 이루는 외교노선이 사실상 유일한 방안이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국내나 중국이 아닌 지역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외교활동뿐이었다. 미국 조야를 상대로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널리 알리는 일은 무장투쟁 못지않게 중요하다. 결국 미국이 참전함으로써 일본이 패망했고, 그 결과 해방을 맞이한 것이기에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대한민국 초대 내각엔 친일파가 없고 독립운동가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반면 북한은 초대 내각에 친일파가 적잖이 기용됐다. 그럼에도 남한은 친일파 정권이고 북한은 친일파 청산을 철저히 했다는 식의 얘기가 지배적으로 돼 온 이유는. “북한의 비난과 남로당의 비판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북한으로서는 김일성의 항일 활동을 부각하기 위해 남한을 친일파 정권으로 매도할 수밖에 없었고, 남로당의 경우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남한 정부를 비판하는 수단으로 친일담론을 꺼낸 게 영향을 미쳤다.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에게는 이런 비판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자양분을 제공한 셈이다. 학계의 무관심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본다.” -1946년 6월 3일 이 전 대통령의 정읍 발언을 두고 그를 ‘분단의 원흉’으로 낙인찍는 비판이 있어 왔다. 이보다 앞선 북한의 정권수립 과정에 관해 러시아의 관련 문서 등이 공개된 뒤에도 이런 주장들이 버젓이 계속된 원인은. “1946년 2월 8일 북한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돼 정부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는 상황이고 북한 스스로도 주권기관이 수립됐다고 하는 마당에 남한도 이에 대응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게 정읍 발언이다. 분단의 원흉이라는 주장이 계속되는 건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는 데 인색한 연구 풍토가 작용한 것이라 생각한다.” -미국을 상대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동맹관계를 구축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던 이승만의 힘은 어디서 나왔다고 보는가. “공산주의의 본질에 대해 누구보다 예리하게 파악했던 분석력과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승부수가 미국으로 하여금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게 만든 것이다.” -이 전 대통령이 없었더라도 누군가 북한 공산주의에 맞서고 근대국가로의 전환을 이끌 수 있었을까. “당시 이 전 대통령만큼 카리스마가 있는 정치인이 없었다. 백범도 그를 깍듯이 형님으로 모셨을 정도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마도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북한에서 이 전 대통령 사후에도 그토록 오랫동안 ‘타도 이승만’을 외치고, 한국에서는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건국대통령이 없는 나라가 돼 온 이유는. “북한은 이 전 대통령이 김일성을 능가하는 카리스마와 업적, 혜안을 갖춘 데다 남침을 막아 냄으로써 자신들의 도발이 무모했다는 게 드러났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다. 남한의 경우 이 전 대통령의 현실주의 노선으로 인해 이상주의자들의 논리가 오류라는 게 판명됐기 때문에 자신들의 주장을 우습게 만든 그를 부정하고 그의 노선을 비난하는 것이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를 ‘공칠과삼’(功七過三)으로 봐야 한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선 이 전 대통령이 공은 없고 과만 있는 인물로 묘사되거나 ‘공3 과7’ 정도로 보고 있다고 생각된다. ‘공7 과3’이나 ‘공6 과4’ 정도로는 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심지연 교수는 ▲76세 ▲서울대 정치학과·대학원 ▲서강대 정치외교학 박사 ▲경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한국정당학회 회장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한국정치학회 회장 ▲국회 입법조사처장 ▲경남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현)
  • “제가 격파합니다”…프로파일러 출신 이수정이 지운 영상 보니

    “제가 격파합니다”…프로파일러 출신 이수정이 지운 영상 보니

    윤석열 대통령의 대파값 논란과 관련해 “875원 그거는 한 뿌리 얘기하는 것”이라는 발언을 했던 이수정 경기 수원정 국민의힘 후보가 양손에 대파를 들고 “대파를 격파하겠다”고 말하는 영상을 올렸다가 삭제했다. 이수정 후보는 지난 26일 ‘육개장에 넣을 대파를 샀습니다!’라는 제목의 영상을 올렸다. 20초 분량의 이 영상에서 이 후보는 양손에 대파를 들고 나온다. 이 후보는 “오늘 제가 아주 대파 격파합니다”라며 “하나는 우리 아버님댁 대파, 요쪽 거는 우리 어머님댁 대파에요”라고 말했다. 이수정 후보는 “요쪽에 한 단에는 7개 들었고요. 요쪽에 한 단에는 8뿌리 들었어요”라며 “가격으로 따지면 한 단에 2500원씩 재래시장에서 두 단 사니까 5000원밖에 안 합니다”라고 했다. 이 영상은 현재 삭제된 상태지만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이 후보 측이 올렸던 영상이 ‘대파 한뿌리 이수정 근황’ 등의 제목으로 떠돌고 있다.앞서 윤 대통령은 “대파 한 단 가격이 875원이면 합리적”이라고 말해 ‘대통령이 현실 물가에 무지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후보는 지난 25일 JTBC ‘장르만 여의도’에 출연해 윤 대통령의 ‘875원 대파’ 발언과 관련 “875원 그거는 한 뿌리 얘기하는 것”이라며 “한 봉다리(봉지)에 세 뿌리냐 다섯 뿌리냐가 중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이수정 후보 캠프 측은 “대파 논란보다 지역 현안 등 본질적인 부분을 봐달라”는 입장이다. 이 후보는 ‘대파 한 뿌리’ 논란에 “반짝 세일 대박 맞네요”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억울함을 표현했다. 이수정 후보는 “‘3호선, 수원재정파탄’은 온데간데 없고 대파만 남았다. 대파유감이다”라며 “비교적 공식적이지 않은 유튜브 방송에서 관련 보도를 정확히 확인하지 못한 채 사회자의 리드에 따라 언급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수정 후보는 “나는 92세 친정어머니와 93세 시아버지의 장까지 본다. 대파 가격을 모를 거라 생각하는지, 그들의 희망사항일 뿐 나는 누구보다 민생에 진심이었고 진심이다. 왜냐하면 선거운동기간 중인 지금도 세 집 장을 내가 보니까. 제발 좀 본질에 집중해주기를 간곡히 바란다”라고 당부했다.
  • [열린세상] 청년 안중근과 빌렘 신부

    [열린세상] 청년 안중근과 빌렘 신부

    빌렘 신부는 영화 ‘미션’의 로드리고 수사와 얼굴이 닮았다. 덥수룩한 수염도 비슷했고, 그의 삶도 그랬다. 알퐁스 도데의 소설 ‘마지막 수업’의 무대였던 알자스로렌에서 태어난 그는 1883년 사제가 됐다. 말레이시아를 거쳐 조선에 도착했을 때 그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황해도 전담 사제가 된 그는 청계동 공소에서 거행된 세례식에서 열여덟 살 안중근을 만났다. 1897년 1월 추운 겨울이었다. 안중근은 순전한 영혼을 지닌 사람이었다. 미사를 드리는 제대에서 사제를 돕는 복사(服事)를 서는가 하면 인근의 공소를 찾아 복음을 전했다. 기울어 가는 나라의 운명이 보이는 상황이었다. 빌렘은 안중근에게 영적인 아버지였다. 신앙으로 그를 키웠고, 프랑스어를 가르쳤으며, 유럽과 미국의 독립 이야기를 들려주고, 대학을 세워야 한다는 대화도 했다. 여섯 살 때부터 할아버지에게 한학과 조선 역사를 배운 청년이 신부를 통해 세계의 흐름을 읽었다. 청년 안중근이 독립과 항일을 너머 세계 평화와 인류의 사랑이라는 경지로 사상을 펼친 배경은 천주교와 빌렘 신부의 영향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동북아의 평화를 위해 공동 은행, 화폐, 평화 군대를 창설하자는 제안을 안중근이 한 시점도 유럽연맹이 창설되기 40년 전의 일이었는데, 이런 생각의 씨앗도 빌렘 신부에게서 전파됐을 가능성이 크다. 알자스로렌은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으로 정복군이 수없이 바뀌었다. 주민들은 평화를 갈망하고 주세페 마치니 같은 유럽 통합의 꿈을 꾸고 있었다. 황해도에서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세워 교육에 매진하던 안중근은 1907년 홀연히 사라졌다.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자 빌렘의 가르침을 내려놓고 무장투쟁을 하기 위해 만주로 망명했던 것이다. 100여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들어와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풍찬노숙이었다. 1909년 10월 의거 후 안중근은 평화와 인권, 그리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정당성을 주장했지만 사형을 언도받았다. 안 의사는 신앙의 아버지에게 전보를 보냈다. 마지막 숨을 거둘 때 천주교에서 행하는 종부성사를 드려 달라는 간청이었다. 1910년 2월 17일. 안 의사의 전보를 받은 빌렘은 주교에게 뤼순 방문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독립투쟁을 지원하거나 일제와 척을 지는 행동이 천주교에 가져올 위험을 주교는 우려하며 강행할 경우 징계를 하겠노라 위협했다. 극심한 갈등으로 고뇌하던 빌렘은 뤼순행을 결심했다. 3월 2일 출발해 닷새 만에 도착한 신부는 감옥 면회실에서 사형을 앞둔 어린 양을 만났다. “나는 냉정한 모습을 보일 작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도마(안 의사의 세례명)가 간수 2명과 방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고 저에게 한국식으로 큰절을 하자 저는 참지 못하고 아버지처럼 그의 두 손을 잡고 일으켰습니다. ‘불쌍한 도마야, 내가 너를 여기서 만나다니.’” 신부는 나흘간 네 번 면회하며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주었다. 도마는 미사를 드리는 응송 구절들을 하나도 잊지 않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장중했다. 3월 26일 안 의사가 순국한 뒤 귀국한 빌렘은 60일 성무정지를 당했다. 사제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목자로서 사제의 본분을 다한 그는 처연했으며 괴로웠다. 알자스로렌으로 돌아간 신부는 훗날 국제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김규식을 도왔고, 로만 칼라를 하고 성경을 읽다 선종했다. 말년에 한국말을 잊지 않으려고 손가락을 접으며 하나, 둘, 셋을 발음하다 하늘나라로 갔다. 안 의사가 순국한 3월. 나는 빌렘 신부 생각이 나면 영화 ‘미션’을 본다. 신앙의 길로 들어서 사랑과 속죄의 삶을 살던 로드리고 수사는 열강 군대에 신자들과 함께 맞서다 숨을 거둔다. ‘가브리엘의 오보에’ 곡이 울려 퍼지고 화면에는 요한복음 1장 5절이 흐른다. ‘빛이 어두움에 비치니, 어두움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 이종수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 오늘 안중근 의사 순국 114주기 추모식

    안중근 의사 순국 114주기 추모식이 26일 서울 중구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열린다고 국가보훈부가 25일 밝혔다. 안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조선통감부 총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뤼순 감옥에서 재판받았으며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고 3월 26일 순국했다. 추모식과 함께 열리는 제4회 안중근 동양평화상 시상식에선 윤자성 미주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장이 수상한다. 윤 회장은 러시아 연해주에서 항일투쟁을 했던 윤능효 애국지사의 손녀이며, 미국에서 안 의사의 애국정신과 평화사상을 알리는 데 힘써 왔다. 강정애 보훈부 장관은 “순국 마지막 순간까지 오로지 조국과 민족을 위하셨던 안 의사의 숭고한 애국충정은 우리 모두에게 남겨진 위대한 유산”이라고 말했다.
  • [최보기의 책보기] ‘따릉이’의 유래를 아시나요

    [최보기의 책보기] ‘따릉이’의 유래를 아시나요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자전거가 나갑니다 따르르르릉 저기 가는 저 노인 꼬부랑 노인 어물어물 하다가는 큰일납니다 1963년 초등학교 음악교과서에 실렸던 동요 <자전거>다. 동요작가 목일신(睦一信 1913~1986)의 대표작인데 일제강점기인 1926년 보통학교 5학년 때 창작, 1932년 <아이생활>에 발표한 작품에 작곡가 김대현(1917~1985 중앙대 교수)이 곡을 붙였다. 작곡가 역시 당시 나이 겨우 열여섯 살, 함흥 영생중학교 2학년이었다. <자전거>는 그때부터 최소한 1970년대 ‘586 세대’가 ‘국민학교’를 다녔던 때까지 아이들의 입에 붙어다녔던 대표 동요였다. 다만, 586 세대가 어렸을 때 즐겨불렀던 <자전거>는 가사가 조금 달랐고, 그 이후의 음악 교과서 사정은 알 수 없다. 저 멀리 남쪽 전라남도 고흥에서 태어났던 은성(隱星) 목일신 선생은 광주학생운동에 참가했던 항일운동가였고, 해방 후에는 시인이자 교육자로서 평생 교직에 몸담았다. 시인께서 주로 활동했던 1930년대는 ‘동요의 황금기’로 불렸는데 <자전거>에 이어 1930년 조선일보, 동아일보 신춘현상문예에 당선되면서 <자전거>를 비롯 <누가 누가 잠자나>, <자장가>, <비눗방울>, <아롱다롱 나비야> 등 수백 편의 동요가사와 시 등 작품을 발표해 일제강점기 나라 잃어 슬픈 국민의 마음을 다독였다. 경기도 부천시 범박동에서 살았던 시인은 주민의 애향심을 높이려고 <범박동가>를 작사하기도 했던 바, 시인의 시비가 부천중앙공원 한가운데 우뚝 서있는 이유다. 전라남도 고흥에는 거금도라는 섬이 있다. 부천시에 사는 거금도 출신 사업가 양재수 씨는 수십 편의 작품이 교과서에 수록됐었건만 <자전거>처럼 작품의 제목은 알아도 ‘목일신’ 이름은 모를 만큼 그의 이름이 소파 방정환 선생이나 노산 이은상 선생에 가렸던 것이 안타까웠을까? <선재교육문화장학재단>을 설립, 운영하며 형편이 어려운 전국의 수재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는 그가 발벗고 나서 <목일신문화재단>을 만들어 그를 기리는 사업을 왕성하게 펼치고 있다. 『목일신 평전』 출판, ‘목일신따르릉예술제’, ‘목일신아동문학상’ 등이 모두 그런 활동의 일부다. 지난 3월 여섯 번째 작품공모를 마감한 제6회목일신아동문학상은 동시, 동화 당선작에 각 2천만 원의 상금과 출판을 지원할 만큼 작가들에게 상당한 ‘주의’를 끄는 문학상이다. 2023년 출판됐던 동시집 『달걀귀신』(문성해 동시, 송선옥 그림), 장편동화 『나의 오랑우탄 엄마』(이영미 동화, 조신애 그림)이 제5회 당선작품이다. 월간 <뿌리 깊은 나무>, <샘이 깊은 물>을 창간, 출간했던 전설의 인물 고 한창기 선생은 ‘좋은 일에는 돈을 불쏘시개처럼 쓸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을 남기셨다. (『특집! 한창기』 2008 창비).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 “이야기만 좋다면 ‘파묘2’ 만들 수 있어”…1000만 돌파 앞둔 ‘파묘’ 장재현 감독

    “이야기만 좋다면 ‘파묘2’ 만들 수 있어”…1000만 돌파 앞둔 ‘파묘’ 장재현 감독

    “재밌고 새로워서죠.” 이번 주 일요일쯤 1000만 관객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되는 영화 ‘파묘’의 장재현 감독이 밝힌 흥행 성공 비결이다. 마니아층이 주로 보는 ‘오컬트(무속)’ 장르 영화가 1000만명을 넘는 건 이례적이다. 21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장 감독은 영화 흥행을 두고 “배우도 스탭도 홍보도 다들 좋아하니 저도 덩달아 좋아하게 되더라. 이런 시간이 평생 또 오겠나 싶은 생각도 든다. 감사하며 즐기고 있다”고 소감을 밝혔다. 영화가 흥행가도를 달리는 이유에 대해서는 “일부러 의도하지 않았다. 영화를 만들 때도 관객을 읽고 타깃층 맞춘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한다”고 강조했다. “시나리오를 쓸 때는 내가 재밌어하는 거 위주로 쓴다. 그리고 이번 영화는 아예 오락영화로 매 신을 재밌게 만들자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없는 새로운 것들을 처음으로 보여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안전한 길을 가지 않은 게 흥행의 요인”이라고 덧붙였다. 영화는 말레이시아에서 봉준호 감독 ‘기생충’(2019)을 넘어 한국영화 최고 흥행을 기록하는 등 외국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다. 장 감독은 “한국 사람의 보편적인, 예컨대 과거에 대한 감정이나 정서를 최대한 안 도드라지게 노력했다. 그야말로 장르적 재미를 95% 끌어내려 했다. 결국 그게 통한 거 같다”고 내다봤다. 훌륭한 배우들에 대한 고마움도 잊지 않았다. “관객이 이렇게 많이 본 건 배우들 덕분”이라며 “저마다 역할을 잘 소화했고 배우들 간 궁합도 잘 맞았다. 마케팅도 적절하게 잘 했다.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고 본다”고 분석했다.영화를 두고 ‘항일’을 의도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일본이 우리 정기를 끊어버리고자 쇠말뚝을 산에 박았다는 괴담을 소재로 하면서다. 장 감독은 “파묘라는 소재 자체에 집중했다. 그런데 그 ‘코어(핵심)’에 집중하고 파고파고 파다보니 과거를 마주하게 됐다. 우리나라만의 ‘한(恨)’이라 해야 할까. 그 끝에 도달하게 되더라”면서 “쇠말뚝 같은 경우 직접 영화 속에 나오면 안 되겠다 싶어 다른 물체로 보여주는 식으로 상징화해 장르적 재미를 높였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과거로 가다보면 이땅의 상처라든가 앙금, 트라우마가 구한 말쯤에서 탁 걸린다. 아무래도 뭔가 정리되지 않은 고름 같은 게 시작된 지점이 아닌가 싶다”고 밝혔다. 등장인물 배역 이름을 항일투사에서 가져온 것, 자동차 번호가 ‘0301’, ‘0815’ 등으로 한 것 등이 화제가 됐다. 이른바 감독이 숨긴 ‘이스터에그’와 같은 것들이 온라인에서 화제가 된 것을 두고는 “영화가 관심을 받으니까 그런 거 아니겠나. 관심을 받는 건 좋은 것”이라며 웃었다. 그러면서 “영화를 해석하게 만드는 건 실패라고 본다. 더 알고 싶으니까 파는 것일 텐데, 일부러 의도하면 오히려 재마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일본에서 영화가 개봉하는 것에 대한 우려에 대해서도 고개를 저었다. “사실 저의 영화적 성장을 도운 게 일본 만화, 애니, 영화 등이다. 사실은 나도 ‘오타쿠’”라면서 “프레임이 그렇게 짜여 있는 것일뿐, 피묻은 우리나라의 땅에 집중하려 한 거지, 반일이나 항일 영화라고는 절대 생각 안 한다”고 했다. 이런 관점에서 앞서 개봉한 영화 ‘건국전쟁’ 김덕영 감독이 ‘좌파영화’로 몰아붙인 것에 대해 “(김 감독이) 관심 가져줘 고마울 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일축했다.영화가 1000만 관객에 가까워지면서 속편에 대한 이야기도 들린다. 장 감독은 “대충 만들면 만들 수 있겠지만, 제 연출관은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이야기에 내실이 없다면, 만들 가치가 없다고 본다. 반대로 좋은 이야기가 있다면 못할 이유는 없다”고 했다. 영화 속 캐릭터를 그대로 살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시리즈로 만드는 것에 대해 “투자사에서 웹툰 등과 같이 하면 좋겠다며 이야기가 실제로 오갔다. 그러나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캐릭터가 매력이 있으니 드라마를 누군가 만들어주면 고마울 거 같긴 하다”고 밝혔다. 전작인 ‘검은 사제들’(2015)과 ‘사바하’(2019)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공포를 다뤘다. 이번 영화에서는 실물의 괴물이 진짜로 등장한다. 누군가는 ‘오컬트’ 장르가 아니라 반박하고, 심지어 전작보다 퇴보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는 이와 관련 “‘사바하’ 개봉 당시엔 ‘검은 사제들’을 기대하고 왔는데 이게 뭐냐고 혹평 하더라. 이번 영화도 ‘사바하’를 좋아했던 사람들이 ‘이건 또 뭐야’ 그러던데”라며 웃었다. “기괴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멜로나 정치를 다루는 등 폭이 컸으면 모를까, 그동안 좁은 범위 안에서 내 나름대로 재미를 찾고 진보하는 거로 봐달라”면서 “‘새로운 것인가’, ‘재밌게 만들었나’ 이 두 가지가 중요하다. 전작에 이어 편하게 가는 건 내 연출관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어두운 이야기에 끌리는 이유에 대해서는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서 그런 거 같다. 기괴한 거, 어두운 거 좋아하지만, 실제 성격은 밝다. 그러다보니 서로 부딪히면서 영화를 만드는 거 아니겠느냐”면서 “어두운 세계관에 빛을 보는 그런 게 좋다”고 밝혔다.
  • 청풍명월(淸風明月) 뒤에 남겨진 아쉬운 이야기들, 의병과 순교의 도시 제천 [한ZOOM]

    청풍명월(淸風明月) 뒤에 남겨진 아쉬운 이야기들, 의병과 순교의 도시 제천 [한ZOOM]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친일내각의 단발령 강행으로 전국적인 항일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을미의병로 불린 이 의병운동 당시 가장 규모가 컸던 의병부대는 제천을 중심으로 충주, 원주 등지에서 활동했던 유인석(柳麟錫·1842~1915)의 ‘호좌의진’(湖左義陣)이었다. 호좌의진은 의병 수가 약 4000명에 달할 정도로 위세와 명성이 대단했다. 한때 홍범도(洪範圖·1868~1943) 장군도 포수부대를 이끌고 호좌의진에 합류한 적도 있었다. 항일 의병운동의 본거지 안타깝게도 호좌의진은 의병부대를 이끌고 있는 양반과 유생, 그리고 실제 전투를 수행하는 평민과 천민 사이에 남아 있는 신분제도에 대한 입장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호좌의진은 재래식 무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반해 일본군은 최신식 무기로 중무장한 정규군이었다는 사실이었다. 1896년 선봉장 김백선이 충주 수안보 점령을 앞두고 중군장 안승우에게 지원병력을 요청했다. 하지만 안승우는 지원병력을 보내지 않았고, 김백선의 수안보 점령은 실패로 돌아갔다. 전투가 끝나고 김백선은 안승우에게 지원병력을 보내자 않은 이유를 물었다. 안승우는 대장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보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화가 난 김백선은 안승우에게 칼을 겨누고 비겁한 태도를 비난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호좌의진 대장 유인석이 김백선을 향해 소리쳤다. “네 이놈, 한낱 포수에 불과한 네놈이 감히 양반에게 칼을 겨누다니, 항명죄로 엄히 다스리겠다.” 김백선은 평민이 양반에게 칼을 겨누었다는 이유로 의병들이 보는 앞에서 처형되었다. 이 사건으로 호좌의진을 이탈하는 병사들이 늘어났다. 호좌의진에서 실제 전투를 수행했던 병사들은 평민과 천민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신분의 귀천이 없는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 의병이 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김백선이 처형되는 것을 보며 그 희망이 꿈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고 의병부대를 떠나기 시작했다. 1896년 제천 남산(南山)에서 호좌의진은 일본군을 맞아 최후의 방어전을 맞이했다. 이 전투에서 수많은 의병들이 목숨을 잃었고, 남은 의병들은 유인석 대장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넘어갔다.역모와 순교의 가운데에서 1791년 전라북도 진산에서 윤지충(尹持忠), 권상연(權尙然) 두 사람이 유교적 제사방식을 거부하여 참형에 처해진 사건이 있었다. 신해박해로 불리는 이 사건 이후 천주교도들은 종교를 버리거나, 신앙의 자유를 찾아 산 속으로 숨어들었다. 봉양읍 주론산 골짜기에도 천주교도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생계를 위해 옹기를 구워 팔면서 신앙공동체를 유지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마을은 지형이 배의 오목한 밑창을 닮았다고 해서 주론(舟論), 다른 말로 ‘배론’이라고 불렸다.1800년 정조(正祖)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순조(純祖)가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수렴청정을 시작한 정순왕후는 정조의 재위기간 동안 성장한 남인들을 뿌리뽑기 위해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천주교도가 많은 남인들을 탄압하는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천주교도 황사영(黃嗣永·1775~1801)이 ‘배론마을’ 이야기를 듣고 이 곳으로 숨어 들었다. 그는 이곳에서 천주교도들이 당한 억울한 학살과 죽음을 하얀 비단 위에 낱낱이 적어 나갔다. 그리고 중국 북경에 있는 구베아(Gouvea) 주교에게 전달하고자 했으나 얼마 후 체포되면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황사영의 편지가 공개되자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편지의 내용에 ‘서양의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조정을 협박해 천주교를 포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사회적 정서로 볼 때 이것은 매국이자 반역이었다. 황사영 편지사건으로 인해 ‘천주교도는 외세의 힘을 이용해 조선사회를 뒤집으려고 하는 매국노이자 반역자 세력’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졌다. 매일 유생들로부터 천주교도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고, 천주교 탄압의 불씨는 전국적으로 번져갔다. 그리고 천주교를 비롯한 서학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이 더 강해지면서 조선은 사회발전을 통한 자주적 근대화의 기회를 스스로 놓쳐버리게 되었다.청풍명월(淸風明月)의 도시 제천 모든 도시는 크건 작건 그 도시가 가지고 있는 아이덴티티(Identity)가 담겨 있는 브랜드가 있다. 제천의 브랜드는 ‘청풍’(淸風)이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따라다니는 이 이름의 시작이 너무 궁금해졌다. 맑은 바람, 청풍(淸風)이 불어오는 이 고장의 원래 이름도 바로 ‘청풍’이었다. 한때는 제천보다 큰 도시였지만 1914년 제천에 흡수되면서 사라졌다. 흡수될 당시 인근 읍내면, 근서면을 합쳐 ‘비봉면’이 되었다가 1917년 ‘청풍’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이름이 ‘청풍면’으로 바뀌었다. 1970년대 정부는 매년 되풀이되는 가뭄과 홍수를 방지하는 동시에 농업용수를 확보해 식량생산을 늘리기 위해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등 4대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종합개발계획을 추진했다. 1970년 정부가 4대강 유역개발 과정에서 남한강에 다목적 댐을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충주댐 공사로 제천과 단양의 많은 마을들이 수몰되고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을 이주민이 되었다. 특히 제천의 피해가 가장 컸었는데, 61개 마을이 사라졌고 청풍면은 27개 마을 중에 25개 마을이 수몰되었다. 그래서 정식명칭인 충주호가 제천에서는 ‘청풍호’(淸風湖)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충주댐이 지어지기 전 1982년부터 3년 동안 수몰지역에 흩어져 있던 보물과 문화재를 모아 청풍호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모아 야외 박물관을 만들었다. 제천에 있는 ‘청풍문화재단지’는 이렇게 탄생했다.
  • 상명대, ‘충남학’ 지역민 자긍심·애향심 높인다

    상명대, ‘충남학’ 지역민 자긍심·애향심 높인다

    상명대학교(총장 홍성태)는 충남원이 천안시 ‘2024 충남학 프로그램’ 위탁 운영기관으로 선정됐다고 11일 밝혔다. 충남원은 시민을 대상으로 역사·문화 등 충남지역 관련 다양한 특강과 현장답사로 구성된 충남학 강좌를 무료로 개설한다. 충남학 강좌는 시민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프로그램은 4월 18일부터 7월 말까지 매주 목요일 오전 10시부터 △충남학이란 △충남지역 항일 독립운동 △k-문화에서 충남의 역할 △충남의 종교문화 등 14회 진행된다. 충남원 김미형 원장(상명대 천안캠퍼스 교학부총장)은 “이번 충남학 강좌는 세미나, 영상 등 다양한 기법으로 접근해 흥미를 높이고 지역을 살리는 시민의 아이디어 발굴 활동도 함께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청풍호반’의 고장 제천에 전해지는 두 개의 설화 [한ZOOM]

    ‘청풍호반’의 고장 제천에 전해지는 두 개의 설화 [한ZOOM]

    의림지에 전해 지는 설화 …심술궂은 부자와 스님 오래 전 충북 제천에 심술궂고 성질이 사나운 부자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스님이 집 앞에 찾아와 시주를 부탁하며 목탁을 두드리고 있었다. 부자는 시주를 하는 척하며 스님이 지고 있던 바랑에 똥을 가져다 부었다. 스님은 화도 내지 않고 인사를 하더니 발을 돌렸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며느리가 급히 달려왔다. “스님 너무 죄송합니다. 제발 아버님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아버님 몰래 가져온 쌀입니다. 이거라도 받으시고 노여움 푸시기 바랍니다.” 며느리가 건넨 쌀을 받아 든 스님은 덤덤한 표정으로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미타불, 곧 이 곳에 비바람과 천둥이 불어 닥칠 것이니, 어서 산 위로 피하시기 바랍니다. 단, 산 위로 피신하는 동안에는 절대 뒤를 돌아봐서는 안됩니다. 명심하십시오. 절대 뒤를 돌아봐서는 안됩니다.” 스님이 돌아간 후, 며느리가 몰래 스님에게 쌀을 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부자는 화가 나서 며느리를 헛간에 가두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스님이 말한대로 비바람과 천둥이 치기 시작했다. 며느리는 헛간을 빠져나와 정신없이 산을 향해 달렸다. 한참을 달리던 며느리는 문득 가족들이 걱정되었다.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했던 스님의 말이 기억났지만 착한 며느리는 두고 온 가족들을 외면할 수 없어 결국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그 순간 며느리의 몸은 돌로 변했다. 그리고 집이 있던 자리는 땅으로 꺼지면서 빗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후대 사람들은 호수가 되어버린 이 곳을 의림지(義林池)라고 불렀다.충북 제천의 이름은 의림지(義林池)에서 비롯되었다. 제천(堤川)을 해석하면 ‘물가에 있는 둑’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물이 바로 의림지를 말한다. 제천이 고구려 영토였을 때는 내토(奈土), 신라 영토였을 때는 내제(奈堤)라고 불렸는데, 모두 커다란 둑이라는 뜻이다. 예전에는 충청도를 ‘호서(湖西)’, 즉 호수의 서쪽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호수가 바로 의림지를 말한다. 전설 속에서 의림지는 자연재해로 인해 만들어진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의림지는 삼한시대에 농사를 지을 물을 끌어오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든 저수지(貯水池)이다.하지만 의림지는 흔히 볼 수 있는 저수지에 머무르지 않는다. 의림지 주변 산책로를 천천히 걸으며 해가 뜨는 모습이나 해가 지는 모습을 본다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일출성지’ 또는 ‘일몰성지’ 해시태그를 붙일 수 있는 근사한 장면을 사진에 담을 수 있다. 얼마 전부터는 ‘야경성지’ 해시태그를 붙일 수 있는 곳으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관광객들에게 의림지란 그저 호젓한 호수이거나 소나무 숲이 우거진 원형 산책로 정도로만 기억되곤 한다. 하지만 의림지의 풍광은 나들이객이 찾아오는 한낮보다는, 아침의 해 뜨는 무렵이나 저녁의 해거름 즈음에 특히 극적이고 근사하다…(중략)…수면에서 물안개 피어올라 솔숲을 감싸는 아침 나절의 모습이나, 노을 지며 용두산과 하늘이 주홍빛에서 다홍빛으로 번져가는 저녁에 물 위로 지는 산그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만 말을 잊게 된다. (정원선의 ‘제천, 스물두 개의 아스피린’에서 인용) 박달재에 전해지는 설화…박달 도령과 금봉 낭자의 러브 스토리 가수 고(故) 박재홍이 부른 ‘울고 넘는 박달재’의 3절 후렴부에는 ‘도라지 꽃이 피는 고개마다 굽비마다 금봉아 불러보나 산울림만 외롭구나’라는 가사가 있다. 박달재에는 가사에 등장하는 금봉 낭자의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박달재 고갯마루에 오르면 이야기에 등장하는 박달 도령과 금봉 낭자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경상도에서 온 박달 도령이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으로 향하고 있었다. 박달재 근처에 도착했을 때쯤 해가 지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근처 마을로 갔고 다행히 하룻밤 재워줄 수 있는 집을 찾았다. 박달 도령은 운명처럼 그 집 딸 금봉 낭자와 서로 눈이 맞아 버렸다. 다음 날 한양으로 떠날 계획이었던 박달 도령은 금봉 낭자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떠나는 날을 하루 이틀 미루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과거시험이 촉박해져서야 비로소 한양으로 올라갈 채비를 서둘었다. “내가 꼭 과거시험에 급제해서 낭자를 데리러 오겠소. 그때까지 조금만 참고 기다려주시오.” 금봉 낭자는 박달 도령이 과거시험에 급제하게 해달라고 매일 밤 정성을 다해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 시간이 가도 박달 도령은 돌아오지 않았다. 애타게 박달 도령을 기다리던 금봉 낭자는 결국 숨을 거두었다. 금봉 낭자가 숨을 거두었다는 소문은 고개와 고개를 넘어 퍼져 나갔다. 이 소식을 들은 박달 도령은 그제서야 돌아왔다. 과거시험에 낙방해 돌아올 면목이 없었다며 금봉 낭자의 무덤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박달 도령은 너무 많은 감정을 쏟아낸 탓인지 그만 미쳐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몇 날 며칠 금봉 낭자를 찾아 고개를 헤매다가 그만 벼랑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노래 ‘울고 넘는 박달재’는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라는 가사로 시작한다. 그래서 처음 박달재 입구에 도착했을 때 ‘이 곳이 바로 노래에 나오는 천등산 이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곳은 천등산(天登山)이 아니었다. 박달재는 ‘천등산’이 아니라 구학산(九鶴山)과 시랑산(侍郞山) 사이에 있고, 천등산과는 약 5~6㎞ 떨어져 있다. 그렇다면 이 노래는 왜 박달재가 천등산에 있다고 했을까? 박달재를 넘어 충주방향으로 가는 길이 천등산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박달재와 천등산이 연결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작사가 고(故) 반야월도 ‘천등산 박달재’라는 가사를 쓴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빠른 걸음보다는 느린 걸음이 어울리는 ‘슬로시티’ 제천에는 도시생활에서 일상을 벗어나 가질 수 있는 휴식(休息)과는 다른 ‘비로소 쉼’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많다. 제천시에서도 물과 산을 벗삼아 느림의 힐링(Healing)을 만날 수 있는 슬로시티(Slow-City)를 표방하고 있다. 그래서 제천에 가면 빠른 걸음으로 더 많은 것을 눈에 사진에 담으려고 하기 보다는, 스마트폰을 주머니 속에 넣고 느린 걸음, 때로는 제자리 걸음으로 쉼을 느끼기를 권하고 싶다. 하지만 슬로시티 제천에서도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생각하며 걸어야 하는 곳들이 있다. 제천은 우리나라 항일 의병활동의 중심지이자, 천주교 박해를 피해 모인 사람들의 성지이기도 했다. 그 역사적 기록들을 만나러 발걸음을 돌렸다.
  • 학생 주도 독립만세운동 ‘면천공립보통학교 3·10 만세운동’ 재현

    학생 주도 독립만세운동 ‘면천공립보통학교 3·10 만세운동’ 재현

    1919년 충남 최초의 학생 주도 독립만세운동으로 평가받는 ‘면천공립보통학교 3·10 학생 독립 만세 운동’이 11일 재현됐다. 당진시에 따르면 이날 면천면 일원에서 지역민과 학생 등이 참가한 가운데 ‘면천공립보통학교 3·10 학생 독립만세 운동 제17회 기념식 및 재현 행사’가 열렸다. 3·10 학생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서울에서 3·1 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온 원용은이 박창신·이종원 등과 함께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이다.당시 이들은 현수막과 태극기를 직접 만들고 독립의 노래를 등사해 배부하며, 학우들과 면천면 일대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다. 일제의 저지로 중도 해산됐지만, 독자적으로 학생들이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이라는 점과 당진지역 항일역사에 도화선이 됐다는 점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날 행사는 독립선언문 낭독과 3.10학생독립만세운동 노래 제창, 만세운동 재현 행진, 기념탑 헌화·분향 등으로 진행됐다. 오성환 당진시장은 “지역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기억하며, 당진이 독립과 호국 의지가 계승되는 보훈의 고장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파묘① 친일파 귀신, 조선총독부와 대한매일신보 (feat. 며느리와 탱고를)

    파묘① 친일파 귀신, 조선총독부와 대한매일신보 (feat. 며느리와 탱고를)

    영화 ‘파묘’(감독 장재현)가 ‘곡성’(감독 나홍진)을 뛰어넘어 한국 오컬트 장르 영화 가운데 최고 흥행작이 됐습니다. 마니아 장르로 분류되는 오컬트물 파묘가 대중적 인기를 끈 데는 역사적 상처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자극한 것이 주효했습니다. 파묘는 일본이 우리 땅에 쇠말뚝을 박아 풍수지리적 맥을 끊으려 했다는 ‘풍수침략’ 가설을 모티브로 합니다. 각본을 겸한 장 감독은 “풍수사들과 땅의 가치를 얘기하다 보면 매번 ‘쇠침’에 다다랐다. 외세에 당한 역사와 그 잔재가 곪아 지금도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과거를 들춰 잘못된 걸 꺼내 없애는 정서가 담긴 파묘처럼, 잔재를 파묘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우리 땅에 상처와 트라우마가 많은데 발톱의 티눈을 뽑듯 파묘해버리고 싶었다”고 영화 제작 의도를 설명한 바 있습니다. 이런 메시지를 담아내기 위해 감독은 다양한 ‘메타포’를 활용했습니다. 곳곳에 사실과 풍문이 혼재된 ‘트리비아’(사소한 정보)도 무수히 펼쳐놓았습니다. 그 수가 너무 많아 다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래서 감독의 의도가 명확하게 읽히는, 꼭 짚어봐야 할 설정과 상징적 장면 몇 가지만 소개하려 합니다. 총 3회 관람을 마친 평범한 관객으로서의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 또 다른 관객들의 역시 주관적인 풀이에 장 감독이 언론에 직접 밝힌 해설을 곁들여 봅니다.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돼 있습니다. 1. 이름 없는 애국자들 (feat. 번호판)극중 김상덕(최민식), 이화림(김고은), 고영근(유해진), 윤봉길(이도현), 무당 오광심(김선영), 박자혜(김지안)은 모두 실제 독립운동가의 이름입니다. 영근의 ‘의열 장의사’ 간판은 비밀항일운동단체 ‘의열단’을, ‘나라를 지킨다’는 뜻의 보국사 주지스님 이름 ‘원봉’은 의열단 단장이었던 김원봉 선생을 떠오르게 합니다. 과거와 현재의 애국자들을 하나로 잇는 철혈단(1920년대 상해에서 활동한 실제 독립운동단체)의 나무 곡괭이에 김정복, 전태환, 임충신 등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독립운동가의 이름이 적힌 것 역시 우연이 아닙니다. 장 감독은 “독립기념관에 갔는데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들이 너무 많더라. 그분들의 이름을 어감을 고려해 되살리려 했다”고 했습니다. 특히 이화림은 실제 윤봉길 의사가 1932년 홍커우공원 거사를 치를 때 삼엄한 검문검색을 통과하도록 도운 여성 독립운동가입니다. 원래 윤봉길과 이화림은 부부로 변장해 식장에 들어 가기로 했습니다. 두 사람은 사전답사를 하며 거사 지점까지 잡아 놓았죠.​ 거사 직전 이화림은 세 살 어린 윤봉길, 김구 앞에서 애국단 단원으로서 선서를 하기도 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서울신문 한인애국단 핵심 3인방 중 ‘여전사’… 윤봉길·이봉창 의거 숨은 조력 참고 https://www.seoul.co.kr/news/plan/ssj_history/2021/02/23/20210223027001) 감독은 등장인물의 차 번호판에도 애국 코드를 심어놨습니다. 상덕의 차는 0815, 화림과 봉길의 차는 0301, 영근의 운구차는 1945 번호판을 달고 나옵니다. 각각 광복절, 3·1절, 광복된 해를 의미합니다. 풍수사 상덕이 파묘 후 ‘이순신 장군’이 새겨진 100원짜리 동전을 던지는 장면 역시 의미심장합니다. 배우 최민식이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을 연기했던 것도 떠오르고요. 이에 대해 장 감독은 “실제 풍수사들은 묘를 꺼낸 후 돈을 던진다. 보통 10원짜리를 던지는데 그날은 100원짜리를 꺼내 던졌다. 스태프들도 ‘너무 이순신을 상징하는 거 아니냐’라고 했는데 그때는 그러려니 했다. 얻어걸린 거다”라고 해명(?)했습니다. 2. 친일파와 그 후손 (feat. 며느리 배정자)영화에는 친일파와 그 후손 박씨 집안도 등장합니다. “그냥 부자” 박씨 집안의 미국 캘리포니아 LA 대저택은 동티한 인부의 달동네 집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대대손손 부를 누리는 친일파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영화 속 친일파 설정은 을사오적에서 가져온 듯합니다. 친일파 귀신 박근현은 군부대신 이근택과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아들 박종순은 외부대신 박제순, 파묘를 의뢰한 손자 박지용은 내부대신 이지용을 상징한다는 풀이가 많습니다. 후손이 파묘를 의뢰한다는 설정이나, 의뢰인의 형이 정신병원에서 자살했다는 설정, 관에서 나온 친일파 귀신이 미국 집에서 며느리 배정자와 정열과 사랑의 춤 탱고를 추는 장면은 학부대신 이완용을 떠오르게 합니다. 실제로 이완용의 증손자 이석형은 1979년 여산 미륵산에 있던 이완용의 묘를 매장 53년 만에 파묘하고 유골을 화장했습니다. 또 과거 이완용의 장남 이승구가 26세 어린 나이에 요절했을 때, 항간에는 이완용이 며느리와 간통해 아들이 극단 선택을 했다는 소문이 퍼진 바 있습니다.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에도 사통을 암시하는 기사가 몇 차례 등장했다고 하고요. 다만 ‘이완용 평전’의 저자 윤덕한은 “당시 신문기사들은 시대 상황과 민중의 정서를 짐작케 하는 사료일 뿐, 그 자체를 사실로 받아들일 것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친일파에 대한 민중적 감정의 표출로 보인다는 설명입니다. 평전에 따르면 이완용은 술과 여자를 멀리하고 독서와 서예를 즐기는 등 사생활이 상당히 건전한 편이었다고 하네요. 한편 영화에선 직계 장손이 아닌 의뢰인의 어머니, 즉 친일파 귀신의 며느리도 화를 입는데요. 아마도 이름이 ‘배정자’인 것과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조선의 비구니였던 배정자(다야마 사다코)는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밀정입니다. 일본의 철저한 첩보원 교육을 받은 뒤 신분을 숨기고 고종에게 접근, 총애를 받으며 고급 정보를 캐냈다고 해요.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로 살았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장 감독은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면서도 “작가의 개입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밝혔습니다. 영화에서 배정자가 연신 들이키는 위스키가 일본산인 것도 우연은 아닌가 봅니다. 3. 대한매일신보와 조선총독부 (feat. 호텔뷰) 영화 초반 등장하는 호텔신에도 여러 상징이 숨어 있습니다. 장 감독에 따르면 호텔 내부는 세트, 창문에 아른거리는 광화문 정경은 서울 중구 더 플라자 호텔에서 촬영한 소스를 활용했는데요. 이 장면에서 의뢰인 박지용과 만난 풍수사 상덕이 창밖을 바라볼 때마다 이순신 장군 동상, 광화문과 경복궁, 청와대 등이 아른거립니다. 이 역시 상징하는 바가 분명합니다. 특히 상덕이 등장하는 장면마다 서울신문 간판이 눈에 띄는데요. 서울신문은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던 암흑기에 겨레의 독립자존을 일깨운 민족의 횃불 ‘대한매일신보’를 뿌리로 합니다. ● ‘구국운동의 횃불’ 대한매일신보대한매일신보는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4년 7월 18일 영국인 배설(본명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과 양기탁 등 민족진영 인사들이 합심해 탄생시킨 당시 유일의 한글 매체입니다. 신문은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 후 그 진상을 파헤친 특집 기사와 함께 황성신문 사장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그대로 실어 일제의 만행을 폭로했습니다. 1906년 1월에는 ‘을사늑약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담긴 고종의 밀서를 대서특필하고,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며 항일운동에 불을 당겼습니다. 단재 신채호, 도산 안창호 선생이 대한매일신보 기자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일제는 이런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배설과 양기탁을 쫓아내기 위해 논설 내용 등 온갖 트집을 잡아 두 사람을 고발했습니다. 결국 1909년 5월 배설이 사망하면서 사세는 기울었고, 통감부는 1910년 비밀리에 대한매일신보의 경영권을 사들인 뒤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에 흡수시켜버렸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서울신문 역사관’ 참고 https://www.seoul.co.kr/news/life/2024/01/16/20240116500082) 올해는 서울신문 창간 120주년인데요. 독립운동가를 상징하는 풍수사 상덕과 구국운동의 횃불 대한매일신보를 상징하는 서울신문 간판이 한 화면에 들어간 것이 반갑기도 합니다. ● 일제 잔재의 상징 조선총독부이 장면에선 창문에 아른거리는 조선총독부도 놓쳐선 안 되는데요. 죽어서도 매국노 기질을 못 버린 친일파 귀신 박근현은 손자인 박지용 몸에 빙의한 후 ‘황군’, ‘대동아전쟁’ 등을 외치며 어딘가를 향해 경례합니다. 그리고 그의 시선 끝에는 조선총독부가 있습니다. 일제는 남산 왜성대의 통감부 청사를 조선총독부 청사로 전용하다가 1926년에 경복궁 흥례문 구역을 철거하고 청사를 신축했습니다. 일제 잔재의 상징인 조선총독부 청사는 1995년 김영삼 정부 때 철거됐는데요. 일각에는 조선총독부 청사가 ‘풍수침략’의 일종이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학교 교수는 소셜미디어(SNS)에 올린 글에서 “일제는 풍수지리에 근거하여 서울을 점령했다. 서울은 사방으로 현무, 청룡, 백호, 주작의 풍수에 맞춰 설계한 도시였다. 일제는 현무 위치에 있는 북악산 앞에 조선총독부를 세워서 경복궁을 눌러버렸고, 주작의 위치인 남산에 조선신궁을 건립했다. 청룡과 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과 낙산에는 그 정상에 쇠말뚝을 박았다”고 했습니다. 감독도 풍수지리에 입각한 일제의 한반도 점령을 표현하고 싶었던 걸까요. 장 감독은 네명의 주인공 의상 설정 때부터 파란색(청룡), 검은색(현무), 빨간색(주작), 하얀색(백호)을 섞어 사방신의 의미를 담자는 얘기가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영화는 친일파 귀신의 입을 통해 가장 중요한 메타포를 던집니다.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고 말입니다.다른 한편에는 풍수침략의 허구성에 대한 지적이 존재합니다. 경복궁 근정전 앞을 조선총독부 자리로 꿰찬 것은 조선 왕조의 정궁을 가려 조선 왕조의 상징물을 훼손하기 위한 목표였을 뿐이라는 반론입니다. 풍수지리와는 무관하다는 해석이죠.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쇠말뚝’ 역시 풍수지리적 배경이 아닌 토지측량적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쇠말뚝이 발견된 지점이 ‘삼각측량’을 위해 표시목으로 박은 위치와 대부분 일치한다는 주장입니다. 한 시사잡지엔 “측량을 위해 산 정상 등에 삼각점을 설치했다”는 당시 측량 기사의 증언도 나옵니다. 그래서 장 감독도 영화에 이런 대사를 삽입했습니다. “(쇠말뚝은) 토지측량용이라고 했잖아. 99%가 가짜잖아.” “그럼 1%는?” 장 감독은 “쇠말뚝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 대사를 넣었다. 영화 속에 실제 쇠말뚝을 안 넣은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내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니까”라고 밝혔습니다. 또 “쇠말뚝을 넣으면 너무 ‘국뽕’일 듯 했다. 그래서 쇠말뚝을 대체할 수 있는 상징성이 있는 걸 넣어보자고 마음먹었다. 그걸 오컬트 장르에 붙여보자고 생각했다”고 설명했습니다. (파묘②에서 계속 https://www.seoul.co.kr/news/life/2024/03/12/20240312500238)
  • [씨줄날줄] 대구 구국운동기념관

    [씨줄날줄] 대구 구국운동기념관

    국채보상운동은 대한제국이 일본에 진 빚 1300만원을 국민성금으로 갚자는 전 국민적 움직임이었다. 대구 대동광문회 사장 김광제와 부사장 서상돈 발의로 시작됐다. 대한매일신보 대구지사를 겸하던 이들은 1907년 1월 29일 국채보상 문제를 논의했다. 서상돈은 “나라가 진 빚을 갚지 못하면 일본에 국토를 내놓아야 할 판이므로 불행한 일을 당하기 전에 우리 이천만 동포가 석 달만 담배를 끊고 그 돈을 모아 갚자”고 제의했다. 김광제는 이 자리에서 담배를 끊기로 하고 석 달치 담뱃값 60전에 10원을 보태 성금으로 내놨다. 이들은 2월 21일 담배를 끊는 모임인 대구민의소를 창립해 서문시장 주변의 북후정에서 국민대회를 열었다. 국채보상운동의 전국 확산을 주도한 서울신문의 전신 대한매일신보는 ‘국채보상 취지서’를 싣고 ‘갚으면 나라가 보존되고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호소했다. 대한매일신보 기사는 삽시간에 전국적인 반향을 불러왔다. 고종 황제도 정부 고위직의 소극적 태도를 꼬집는 기사를 보고는 “우리 국민이 국채를 보상하고자 담배를 끊어 그 값을 모은다는데 짐도 담배를 피울 수 없다”며 담배를 끊었다고 한다. 대한매일신보가 전면에 나선 것은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이면서 발행인이 영국인 베델이어서 성금을 통감부가 손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부채 해마다 불어나니 그 액수 어이 감당하나. 적의 공격 없어도 나라 자연 소멸된다’는 ‘국채보상가’는 국민 애창곡이 됐다. ‘반지빼기모임취지문’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당시 금 모으기 운동을 연상시킨다. 그러니 통감부는 국채보상운동을 반일운동으로 판단하고 와해 공작에 나섰다. 1910년 8월 일본의 대한제국 강제병합으로 국채보상운동은 결국 막을 내렸지만 이후 항일운동의 불씨가 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엊그제 대구에서 가진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 토론회’에서 국립구국운동기념관 건립 계획을 밝혔다. 국채보상운동이 태동한 성지(聖地)인 서문시장에 2030년까지 2530억원을 들여 지을 것이라고 하니 장소가 갖는 의미도 크다. 구국운동기념관이 국채보상운동을 기리고 국민의 자주독립정신을 드높이는 뜻깊은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 600만 돌파 ‘파묘’…이게 왜 좌파? ‘건국전쟁’ 감독 향한 질문

    600만 돌파 ‘파묘’…이게 왜 좌파? ‘건국전쟁’ 감독 향한 질문

    장재현 감독의 영화 ‘파묘’가 개봉 11일 만에 600만 관객을 모으며 천만 영화 고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4일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영화 ‘파묘’는 지난 3일 현재 누적 관객수 603만명을 기록했다. 3·1절 연휴 사흘 동안에만 233만명을 동원했다. ‘검은 사제들’(2015) ‘사바하’(2019) 등을 만든 장재현 감독은 ‘파묘’에서 전통적인 풍수지리와 무속신앙을 다루면서 그 안에 고난에 찬 민족사를 녹였다. 거액을 받고 수상한 묘를 이장해 화장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무당 화림(김고은)과 봉길(이도현)이 이 작업을 풍수사 상덕(최민식)과 장의사 영근(유해진)에게 함께하자고 제안하고, 네 사람이 이 묘를 파헤친 뒤 기이한 일에 직면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이승만 다큐멘터리 ‘건국전쟁’을 만든 김덕영 감독은 ‘파묘’의 흥행에 대해 “반일주의를 부추기는 ‘파묘’에 좌파들이 몰리고 있다”라며 “‘건국전쟁’에 위협을 느낀 자들이 ‘건국전쟁’을 덮어버리기 위해 ‘파묘’로 분풀이를 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김덕영 감독은 ‘건국전쟁’이 100만 관객을 돌파하자 “편 가르기식 민족주의를 떨쳐버리고, 무엇이 사실인지 찾아볼 수 있는 단계로 진입한 것이자 대한민국이 선진 사회로 나아가는 징표라고 생각한다”라며 진영 논리를 비판하는 듯했지만 ‘파묘’의 흥행에 또다시 진영 논리를 들고나오는 모순을 보였다.이를 두고 역사강사 황현필은 3일 ‘파묘’를 보고왔다며 김덕영 감독에게 “독립운동가를 존경하지 않느냐”라고 물었다. 황현필은 주인공들 이름에 독립운동가 이름을 차용한 것, 차량번호에 여러 독립 운동 관련 날짜가 들어간 것, 일제 쇠말뚝 등을 언급하며 “항일적인 영화인데 이게 왜 좌파영화인가”라고 지적했다. 그는 자신을 좌파가 아닌 진보주의자라고 소개하며 “저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싫어하기 때문에 좌파라는 단어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면서도 “독립운동을 존경하는 게 좌파고 일제의 조선 침략과 일제강점기 식민지 수탈에 대해 분노하는 게 좌파라면 좌파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좌파의 반대인 우파는 우리 독립운동가를 존경하지 않는가? 김덕영 감독께 물어보고 싶다”고 말했다.‘파묘’ 숨겨진 항일코드 찾기 극 중 최민식, 유해진, 김고은, 이도현의 이름은 상덕, 영근, 화림, 봉길이다. 상덕은 임시정부 국무위원, 광복 이후 반민특위 위원장을 지낸 김상덕에게서 따온 것으로보인다. 영근은 독립협회에서 활동한 고영근, 화림은 조선의용군에서 활동한 이화림, 봉길은 윤봉길 의사의 이름을 사용했다. 무당 광심(김선영)은 광복군의 오광심, 무당 자혜(김지안)는 신채호의 부인이자 독립운동가 박자혜에서 비롯됐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외세에 당하기만 하고, 잔재가 곪은 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발톱의 티눈을 뽑아내듯 우리 과거의 아픈 상처와 두려움을 ‘파묘’해버리고 싶었다.”장재현 감독은 “많은 독립운동가가 계신데 잘 알려지지 않은 분들의 이름을 알리고 싶었다”라며 이렇게 말했다.주인공들이 타는 차량의 번호판은 0301, 1945, 0815이다. 3.1운동과 광복절을 가리킨다. 영근의 사무실 이름은 ‘의열 장의사’이며 험한 것과 사투를 벌이는 절 ‘보국사’는 ‘나라를 지킨다’라는 뜻이다. 이 절을 만든 주지는 원봉 스님인데 의열단장인 김원봉을 연상케 한다. 쇠말뚝을 뽑으러 다닌 ‘철혈단’도 1920년대 상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 단체의 이름이다. 풍수사 김상덕(최민식)이 묫자리를 볼 때 100원짜리 동전을 던지는 것 또한 관객들의 예리한 눈을 피하지 못했다. 100원짜리 동전엔 이순신 장군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김상덕의 딸이 독일인과 결혼하는 장면은 사죄와 반성없는 일본에 비해 통철한 자기비판을 가졌던 독일과는 서로 화해하고 하나가 될수 있음을 보여주는 엔딩이었다는 평가다.
  • ‘자위대’ 이어 ‘하얼빈 임시정부’…“정신 나갔나?”

    ‘자위대’ 이어 ‘하얼빈 임시정부’…“정신 나갔나?”

    행정안전부가 “만주 하얼빈에서 시작된 임시정부의 3·1 독립선언”이라는 잘못된 내용의 포스터를 제작했다가 뭇매를 맞았다. 행안부는 지난달 29일 공식 소셜미디어(SNS) 계정에 ‘3·1절을 맞아 뜻깊은 명소를 추천한다’는 내용의 카드 뉴스를 올렸다. 여기에서 행안부는 3·1운동을 “1919년 3월1일 만주 하얼빈에서 시작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선언과 동시에 만주, 한국, 일본 등에서 일어난 대규모 항일 독립운동”이라고 소개했다. 명백한 오류였다. 3·1운동은 1919년 3월1일 서울 종로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시작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11일 수립됐고, 장소도 하얼빈이 아니라 상하이였다. 논란이 일자 행안부는 “검수를 통해 유사한 실수가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 깊게 확인하겠다”며 해당 게시물을 삭제했다. 야권에서는 날 선 비판이 잇따랐다. 노무현 정부 당시 행안부 장관을 지낸 김두관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도대체 제정신들이냐. 전직 장관으로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다”고 일갈했다. 조국 조국혁신당 인재영입 위원장도 “처음에는 가짜라고 생각했다. 정신 나간 것 아닌가. 인공지능(AI)이 만든 줄 알았다. 몰랐다고 해도 일부러 그랬다고 해도 문제”라고 비판했다.더불어민주당은 “광복 이전의 독립운동사를 폄훼하기 위한 윤석열 정부의 ‘의도적 실수’”라고 주장했다. 강선우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2일 서면 브리핑에서 “이번 해프닝은 결코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윤석열 정부는 역사를 재단하고 왜곡하려는 시도를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강 대변인은 “문제가 되자 뒤늦게 행안부는 ‘역사적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삭제했다’면서 슬그머니 해당 게시물을 내렸다”며 “행안부는 올해 처음 3·1절을 맞이하는가. 헌법 전문부터 다시 읽어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주요 국가 행사와 의전을 주관하는 행안부가 최소한의 역사적 사실조차 몰랐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지적했다. 민주당은 윤석열 대통령의 3·1절 기념사를 두고도 “노골적으로 극우 친일의 면모를 드러냈다”며 연일 공세를 이어갔다. 강 대변인은 “색깔론과 대일 굴종 외교로 뒤덮인 윤 대통령의 3·1절 기념사는 참담 그 자체”라며 “심지어 윤 대통령은 ‘한일 양국의 새 세상’을 운운하며 ‘일본에 역사적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입장을 또다시 내비쳤다”고 비판했다. 이어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시도부터 노골적인 이승만 대통령 띄우기까지 갈수록 어처구니가 없다”며 “누구도 독점한 적 없는 역사를 윤 대통령은 마음대로 재단하고 훼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윤 대통령이 참석한 3.1절 기념식도 도마 위에 올랐다. 1일 오전 서울 중구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3·1절 기념식 배경은 ‘자유를 향한 위대한 여정, 대한민국 만세’라는 대형 글씨였는데 세로로 읽으면 자위대가 돼 논란이 됐다. 다른 날도 아닌 3·1절에 자위대라는 글자가 기념식 문구에 보이게 한 것은 부주의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 송혜교+서경덕 교수 콤비의 특별한 3·1절…女 최초 의병장 윤희순 알린다

    송혜교+서경덕 교수 콤비의 특별한 3·1절…女 최초 의병장 윤희순 알린다

    3·1절을 맞아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와 배우 송혜교가 함께 여성 최초의 의병장 ‘윤희순’ 알리기에 나섰다. 서경덕 교수는 1일 “삼일절을 맞아 배우 송혜교 씨와 의기투합해 여성 최초의 의병장 ‘윤희순’ 영상을 다국어로 제작해 국내외에 공개했다”며 “이번 영상 역시 ‘서경덕 기획, 송혜교 후원’ 콤비로 진행했으며, 한국어 및 영어 내레이션을 각각 입혀 제작해 국내외 누리꾼에게 널리 전파중”이라고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전했다. 영상은 여성 최초 의병장인 윤희순의 삶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8편의 의병가와 4편의 경고문으로 시작한 항거는 ‘안사람 의병단’을 조직하고, 향후 서간도로 망명한 후 학교를 설립하는 등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의 항일운동을 재조명했다.서 교수는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재조명하고 국내외에 널리 소개하고자 지난해 정정화 영상에 이어 올해 두 번째로 윤희순 영상을 제작했다”면서 “향후 삼일절마다 여성독립운동가들에 관한 다국어 영상을 ‘시리즈’로 제작해 국내외로 꾸준히 알려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서교수와 송혜교는 2007년부터 13년간 대한민국 기념일에 맞춰 해외에 남아있는 대한민국 독립운동 유적지에 한국어 안내서, 한글 간판, 독립운동가 부조작품 등을 35곳에 기증해왔다.
  • 송혜교-서경덕, 삼일절 맞아 첫 여성 의병장 ‘윤희순 의사’ 소개

    송혜교-서경덕, 삼일절 맞아 첫 여성 의병장 ‘윤희순 의사’ 소개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 사랑 모를소냐… 우리도 의병하러 나가보세”(윤희순 ‘안사람 의병가’ 중에서) 삼일절을 맞아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와 배우 송혜교가 우리나라 첫 여성 의병장 윤희순(1860~1935) 의사를 소개하는 다국어 영상을 제작했다. 영상 기획자인 서경덕 교수는 1일 소셜미디어(SNS) “여성 최초 의병장 ‘윤희순’을 알리는 영상은 송혜교가 후원했다”면서 “한국어와 영어 해설을 각각 입혀 제작해 국내외 누리꾼에게 널리 전파 중이며 영상을 다국어로 제작해 국내외에 공개했다”고 밝혔다. 영상은 우리나라 독립 운동 정신의 모태가 ‘의병’이라는 설명과 함께 여성 최초 의병장인 윤 의사의 삶을 상세히 소개한다. 윤 의사는 일본에 항거하기 위해 8편의 ‘의병가’와 4편의 ‘경고문’을 직접 작성했다. 1907년에는 시아버지가 의병을 일으키자 ‘안사람 의병단’을 조직해 독립 정신을 일깨운 뒤 1911년에는 서간도로 망명해 학교를 설립해 교장을 맡는 등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항일운동에 매진했다. 또 남편과 맏아들이 일제의 고문으로 숨지자 스스로 곡기를 끊고 1935년 75살 나이로 중국에서 순국했다. 윤 의사는 지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윤 의사는 2018년 문재인 전 대통령이 제99주년 3·1절 기념사에서 호명한 ‘건국의 어머니’ 6명 가운데 1명이다.영상은 독립 유공 서훈자 가운데 여성 독립운동가는 극히 일부라는 점을 상기시키며 “우리가 누리는 오늘은 역사 속에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이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졌다”는 말로 마무리된다. 서 교수는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재조명하고자 지난해 독립운동가 정정화에 이어 올해는 윤 의사의 영상을 제작했다”며 “여성 독립운동가에 관한 다국어 영상을 시리즈로 제작해 꾸준히 알려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앞서 서 교수와 송혜교는 지난해 삼일절에도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살림을 맡았던 독립운동가 수당 정정화(1900~1991)를 알리는 영상을 한국어와 영어 해설을 넣어 제작했다. 두사람은 지난 13년간 대한민국의 역사적인 기념일에 맞춰 해외에 남아있는 독립운동 유적지 35곳에 한국어 안내서, 한글 간판, 독립운동가 부조 작품 등을 꾸준히 기증해 왔다.
  • 尹, 3·1절 기념식 축사 “기미 독립선언 뿌리에는 ‘자유주의’”

    尹, 3·1절 기념식 축사 “기미 독립선언 뿌리에는 ‘자유주의’”

    尹대통령, 제105주년 3·1절 기념식 축사“기미 독립선언의 정신을 다시 일으켜야”한일 관계 관련 “양국 새 세상 함께 나아가”대북 관련 “통일 노력이 北 주민 희망 돼야” 윤석열 대통령은 1일 1919년 ‘기미 독립선언’의 정신을 강조하며 “3·1운동은 모두가 자유와 풍요를 누리는 통일로 비로소 완결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윤 대통령은 이날 중구 유관순기념관에서 ‘자유를 향한 위대한 여정, 대한민국 만세’라는 주제로 개최된 제105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미 독립선언의 정신을 다시 일으켜, 자유를 확대하고 평화를 확장하며 번영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그 길 끝에 있는 통일을 향해 모두의 마음을 모아야 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어 기미 독립선언에 대해 “선언의 뿌리에는 당시 세계사의 큰 흐름인 ‘자유주의’가 있었다. 3.1운동은 어느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미래지향적 독립 투쟁이었다”라고 덧붙였다. 무장독립운동, 외교독립운동, 교육과 문화독립운동 등을 “선구적 노력”이라고 언급하면서 윤 대통령은 “이 모든 독립운동의 가치가 합당한 평가를 받아야 하고, 그 역사가 대대손손 올바르게 전해져야 한다고 믿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저와 정부는, 독립과 건국, 국가의 부흥에 이르기까지 선열들의 희생과 헌신이 올바르게 기억되도록 힘을 쏟겠다”라고 했다. 윤 대통령은 “수많은 역경과 도전을 극복해 온 우리 국민들의 위대한 여정이 정말 자랑스럽다”며 “저와 정부는, 3.1운동의 정신인 자유의 가치를 지키며, 더 행복하고 풍요로운 대한민국 건설에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약속했다. 윤 대통령은 한일 관계와 관련해 “한일 양국은 아픈 과거를 딛고 ‘새 세상’을 향해 함께 나아가고 있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안보, 산업·금융·첨단 기술 분야, 양국 국민 교류, 중동·아프리카 국민 구출 도움 등 양국 협력 사례를 나열했다. “자유, 인권, 법치의 가치를 공유하며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고,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협력하는 파트너가 됐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한일 양국이 교류와 협력을 통해 신뢰를 쌓아가고 역사가 남긴 어려운 과제들을 함께 풀어나간다면, 한일관계의 더 밝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념사에서 위안부나 강제징용 피해자 등 과거사에 대한 직접 언급은 빠졌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기념사에서는 일본에 대해 “과거의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그리고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협력 파트너로 변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남북관계와 통일관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윤 대통령은 “모든 국민이 주인인 자유로운 통일 한반도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이 최근 대한민국을 제1의 적대국으로 규정한 것에 관해 “참으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통일의 의미에 대해 “북한 정권의 폭정과 인권유린은 인류 보편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다. 자유와 인권이라는 보편의 가치를 확장하는 것이 바로 통일”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은 또한 “우리의 통일 노력이 북한 주민들에게 희망이 되고 등불이 돼야한다”면서 “북한 주민들을 향한 도움의 손길을 거두지 않을 것이며,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한 노력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또한 7월 14일을 ‘북한 이탈 주민의 날’로 제정했다고 알리면서 “우리 국민 모두가 탈북민에게 보다 따뜻한 관심을 가지고 배려해주시기를 부탁드린다”고 했다. 아울러 국제사회를 향해서는 책임있는 자세를 촉구하며 “통일은 우리 혼자서 이룰 수 없는 지난한 과제다. 자유로운 통일 대한민국은, 동북아시아는 물론 인도태평양 지역과 전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할 것”라고 말했다. 기념식은 자주독립을 위한 선열들의 헌신을 시인 타고르의 ‘동방의 빛’으로 형상화한 영상 상영을 시작으로, 주제 영상 상영, 독립선언서 낭독, 독립유공자 5인*에 대한 포상, 기념사, 기념공연, 3‧1절 노래 제창 및 만세삼창의 순서로 진행됐다. 주제 영상에는 종교·계층을 초월한 최초의 대중적‧평화적 항일운동이자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건국의 초석으로서의 3·1 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돌아보고, 외교독립·무장독립·실력양성 등의 분야에서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한 선열들의 정신을 계승하자는 메시지가 담겼다. 기념식에는 독립유공자 유족 500여 명을 포함해 사회 각계 대표와 주한외교단, 학생, 시민 등 총 1200여 명이 참석했다.
  • [씨줄날줄] 이만도와 김도현

    [씨줄날줄] 이만도와 김도현

    조선시대가 저물어 가던 무렵 선비들이 국가적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자세는 의병을 일으켜 적을 물리치는 것(擧義掃淸·거의소청), 은둔해 성리학의 도를 지키는 것(去之守舊·거지수구), 목숨을 끊어 지조를 지키는 것(自靖遂志·자정수지)으로 모아졌다. 향산 이만도(1842~1910)와 제자인 벽산 김도현(1852~1914)은 이 세 가지를 모두 실천했다. 경북 안동은 1894년 갑오의병을 시작으로 1945년 안동농림학교 학생항일운동에 이르기까지 50년 이상 줄기차게 성리학적 질서를 추구하는 유학자들이 주도한 항일운동이 벌어진 지역이다. 향산은 안동 예안 출신으로 1866년 대과에 장원급제해 출세가도를 달렸다. 1882년 통정대부에 올라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했고,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어도 부임하지 않았다고 한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1905년 상소문으로 을사오적을 통렬하게 공박했고, 1910년 일제에 대한제국이 병탄되자 단식에 들어가 24일 만에 순국했다. 백범 김구가 머리글을 쓰고, 위당 정인보가 내용을 지은 ‘향산 이만도 선생 순국유허비’는 예안 인계리 청구마을 앞 향산공원에 있다. 고향집에서 제법 떨어진 이곳에서 순국한 것은 ‘만고의 죄인이어서 편안하게 죽음을 누릴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단식 중 폐위된 황제에게 이런 내용의 유소(遺疏)를 올렸다고 한다. 벽산도 스승처럼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사재를 털어 고향인 영양 청기면 상청리 마을 뒷산에 500m 남짓한 검산성을 쌓았다. 1907년에는 일경에 체포돼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나라를 완전히 빼앗긴 1910년 자결하지 못한 것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결국 아버지 상례를 치른 1914년 11월 동포에게 알리는 유서를 남기고 영덕 산수암에서 바다로 걸어들어가 순국했다. 도해순국(蹈海殉國)이었다. 삼일절인 오늘 사흘 동안의 연휴가 시작된다. 안동 일대로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독립운동’을 테마로 삼아 보면 어떨까 싶다. 이 지역 항일 역사를 보여 주는 안동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과 향산 유허비, 영양 검산성과 영덕 산수암을 묶으면 훌륭한 역사탐방 코스가 될 것이다.
  • “내년 3월 26일 ‘건국전쟁2’ 개봉”

    “내년 3월 26일 ‘건국전쟁2’ 개봉”

    1945년 해방 이후 이승만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건국전쟁’ 속편이 나온다. 김덕영(59) 감독은 29일 서울 용산 CGV아이파크몰에서 열린 ‘건국전쟁2’ 제작보고회에서 “내년 3월 26일 이승만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 ‘건국전쟁2’를 개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영어 제목은 ‘The Birth Of Koreans’이다. 김 감독은 “한국이 어떻게 탄생했는지의 과정에서 건국 1세대가 우리에게 어떤 큰 선물을 줬는지를 이야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이승만 다이어리에 나온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이승만의 개인사, 기독교인으로서의 활동도 포함된다”고 덧붙였다. 2월 1일 개봉한 ‘건국전쟁’은 개봉 3주 만인 27일 누적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승만의 공만 내세우고 과는 제대로 다루지 않거나 왜곡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독재 체제에서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결국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불명예 퇴임한 것에 대해 김 감독은 그동안 “4·19혁명을 촉발한 3·15부정선거는 불법 선거였지만, 이 전 대통령과는 관련이 없다”고 주장해 왔다. 이날 보고회에서 제주 4·3사건에 대한 이승만의 책임을 묻는 질문에 그는 “양민 학살 피해자라고 알려졌던 2명이 알고 보니 살해를 자백한 사람이었다. 이승만은 여러 거짓말에 의한 피해자”라고 반박했다. 김 감독은 소셜미디어(SNS)에 올린 영화 ‘파묘’ 좌파몰이 논란에 배후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는 “‘건국전쟁’ 개봉 후 여러 다양한 인플루언서들의 콘텐츠를 모니터링했는데, 특정 정치 집단에서 이 영화를 보이콧하자는 운동을 하고 있었다”며 “더이상 반일이니, 항일이니 근거도 없는 민족감정을 악용하는 영화보단 대한민국을 구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 진실에 관한 영화에 관심을 돌려 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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