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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상룡선생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무력으로 독립쟁취” 만주 항일투쟁 이끌어/한일 합방직후 망명,신흥무관학교 등 설립/독립군단체 통합 주도… 임정국무령도 역임/의병활동·교육자로 평생 구국활동… “광복전 유해 옮기지 마라” 유언도 선열들의 애국·애족사상을 길이 본받기 위해 서울신문사가 마련한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역임한 이상룡선생이 선정됐다. 5월의 독립운동가 이상룡선생은 1896년 경북지역의 의병으로 활동하다 한일합방이후인 1911년 만주로 망명,그곳에 한인사회를 건설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독립전쟁을 위한 인재양성과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1926년 1월 국무령을 사임한 이 선생은 32년 5월12일 74세의 노령으로 중국 길림성에서 서거했다. 이 선생의 생애와 사상 업적을 되새겨 본다. 1925년 3월23일 상해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은 미국의 위임통치안을 제안한 이승만대통령을 탄핵면책하고 국무총리 박은식을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박은식대통령은 임시정부헌법을 대통령중심제에서 내각책임제로 개헌하고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국무령에 만주지역에서 가장 큰 독립운동단체인 한족회와 통군부를 이끌던 이상은선생을 지명했다. 1911년 만주로 이주한 이 선생은 만주에 항일독립운동기지를 만들어 청년들에게 군사교육을 시키는 한편 동포들에게 독립운동의식을 고취,신망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이 국무령은 만주에서 독립군을 지휘하며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서온 김좌진·오동진·김동삼 선생들을 국무위원에 임명하고 임시정부가 활발한 무장독립투쟁을 이끌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국무위원들은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창조파와 개조파,국내파와 해외파 등으로 나뉘어 임시정부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1926년 1월 이 선생은 초대 국무령을 사임하고 다시 만주에 돌아와 독립운동조직인 의정부·신민주·참의부의 통협에 심혈을 기울이고 힘썼다. 윤봉길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일본 군국주의 지도자들을 살해한 뒤 12일만인 1932년 5월12일 이 선생은 74세로 만주 길림성 소성자에서 『외세때문에 좌절하지 말고 더욱 면려하여 독립을 관철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노환으로 선거했다. 70평생중 반세기에 걸친 이 선생의 일관된 구국노력은 의병활동·민족계몽운동·독립군지도자·임시정부 정치지도자·교육자·사상가 등 당시의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32년 74세로 별세 이 선생의 깊은 학식과 큰 인품은 조국은 되찾겠다는 의지와 정열로 승화되어 민족진영이나 사회주의 진영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많은 추종자들을 낳았다. 이 선생은 1858년 11월24일 경북 안동에서 유학자 이승목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명문가의 후예로 태어난 이 선생은 유학자로서의 학문적인 수업을 쌓다가 1896년 일자 명성왕후를 시해하자 영남지방의 의병에 참가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지방유지들과 합자,가야산에 군사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계획을 세웠으나 자금부족과 일본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선생은 김동삼 등 동지들과 안동에 대한협회 안동지부를 결성,민족각성과 청소년 교육등 민족자강운동에 헌신했다. 1910년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자 이 선생은 국내최대의 항일비밀경사 신민회에 가입했다. 신민회는 전국 13개 도의 유지들과 부호들을 규합,만주에 거대한 조선인 자치구를 설립할 목적으로 이민을 모집하고 있었다. 이시영·이회영·이동영·주진수·김창환 등 구한말의 관리와 양반·선비들은 가산을 정리하고 무인지경이던 만주로 이민을 떠났다. 1911년 4월 53세의 이 선생은 52명의 대가족을 인솔하고 만주로 이주했다. 이 선생은 만주의 땅을 매입하여 조선인 촌락을 만들고 학교와 교회를 설립,청년들을 교육시키고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전쟁을 일으킬 목적으로 동지들과 함께 개척이민의 선두에 섰다. 이 선생은 만주에 도착하자마자 유하현 삼원포에 거류민단조직인 경학사를 설립,사장에 취임했다. 경학사는 1914년 부민단으로 발전되고 신흥학교를 설립,인재를 양성했다. 이 선생은 3·1운동직후에는 한족회를 설립,동포들에게 민족자긍심과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한인청년들을 신흥무관학교에 입교시켜 1천여명에게 군사교육을 받게 했다. 이 선생은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는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독립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서로군정서를 설립,총재에 취임했다. 부총재에는 여준,정무청장은 이탁,참모부장은 김동삼,독립군사령관엔 지청천을 임명,일제에 항거하는 한편 국내 진공작전계획도 세웠다. ○서로군정서 총재 당시 만주에는 3·1운동이후 일제의 탄압과 만행에 시달린 조국의 열혈청년들이 대거 이주해와 2천여명을 무장킬 수 있었다. 이 선생의 서로군정서 조직은 당시 해외독립운동단체중 최대규모였다. 1919년 4월13일 이동영·이시영선생이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자 이 선생은 『한민족에 두개의 정부가 있을 수 없고 광복운동에는 단결이 가장 큰 선결조건』이라는 이유를 들어 참모들을 대동하고 임시정부 산하의 군사조직으로 들어갔다. 이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외교와 내치·재정을 담당하고 만주의 항일무장세력은 단결해서 군사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부하들을 설득,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북만주와 시베리아에서 활동중인 홍범도·이동주 등과 항일연합전선을 펼 것을 모색했다. ○통군부 확대개편 이선생은 1920년초 북경에서 개최된 조선인 군사통일회에 참가,박용만·신숙 등과 군사기구의 통합방안을 협의하고 22년 6월에는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이룬 통군부를 조직했다. 그뒤 이 선생은 통군부를 다시 확대개편하여 17개 독립운동단체로 하여금 통의부를 구성하는 등 독립군의 군세확장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전통깊은 유학자집단에서 태어나 성장한 이 선생은 다른 독립운동가들과는 달리 외교나 교육에 치중하지 않고 일생동안 무력항일투쟁만을 주장했다. 조국광복을 위해서는 일본제국주의와 무력으로 싸워서 이기는 수 밖에 없고 이를 위해서는 중국·소련 등과 연합해서 독립군을 조직,화력과 무장을 갖추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1925년 3월 미국에 체류하면서 위임통치를 주장하던 이승만대통령이 탄핵되자 국무령에 취임한 이 선생은 임시정부를 독립군지휘관으로 구성,활발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려고 작정했다. 그러나 이 선생의 구상은 내분으로 결실을 보지 못하고 지리멸렬하게 되자 26년 1월 국무령직을 사임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만주에 돌아와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지도하던 이 선생은 일본이 만주국을 설립한 32년 5월12일 노령으로 별세했다. 『국토를 찾기전에는 내 유해를 고국에 싣고 가지말라』고 한 유언을 남김으로써 이 선생의 유해는 광복된지 45년만인 90년 9월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중국 흑룡강성에서 봉환,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유족으로는 증손자인 항회·범회씨가 서울에 살고 있으며 선생의 기념사업회 결성을 준비중이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역사적 평가/20년대 독립군총사로 불멸의 업적 석주 이상룡 선생은 70생을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민족지도자였다. 이 선생은 1896년부터 1910년까지 향리에서는 의병의 지도자로서,민족계몽운동가 또 2세교육자로 활동했으며 1911년 만주로 이전해서는 민족의 선구자로서 역할을 다했다. 이 선생은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교육·산업운동과 항일무장투쟁을 병행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이를 동지들과 함께 실행에 옮겼다. 그는 만주의 한인사회에서산업과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동포들의 법적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중화민죽회에 진정서를 제출하는등 외교적인 노력을 통해 한인들의 권익옹호에 앞장섰다. 이 선생은 이주한인들의 생업을 위해 벼농사를 적극 권장,지도해 만주에서 쌀을 생산했으며 경제적인 기반이 마련된뒤 독립군을 조직했다. 그는 경학자·부민단·한족회·군정부·통의부·정의부·혁신의회 등으로 이어지는 항일 민족독립운동단체를 직접 지도해 만주지역의 민족지도자로서 불멸의 자취를 남겼다. 이 선생은 노년에는 김동삼을 위시한 여러 혁명가들을 지도함으로 써 항일대열에 영향을 끼쳤다. 그는 1923년 해외 항일독립운동단체의 책임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상해의 국민대표회의에 김동삼을 파견,6개월동안 의장을 활동시켜 항일독립운동의 전략·전술을 수립하게 했다. 유학자로서,의병으로서,때로는 민족의 교육자요 지도자로서 다양한 역할을 하던 이 선생은 1932년 5월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망명지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조국을 위해 헌신한그의 혁명가적인 행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귀감이 되어 남을 것으로 확신한다.
  • 부산 남항 폐유 오염/활어등 큰 피해

    【부산=이기철기자】 27일 상오 10시부터 2시간동안 부산시 중구 남포동 자갈치시장 앞 하수구에서 폐유 50드럼가량이 흘러나와 남항일대를 크게 오염시켰다. 폐유는 자갈치시장과 영도대교 중간에 위치한 하수구에서 쏟아져 나와 반경 1㎞이내의 바다를 뒤덮었다. 남항 일대가 폐유로 오염되는 바람에 이곳에 정박중인 연근해 어선들이 4백여개의 통발에 넣어 바닷물 속에 보관중이던 각종 활어가 오염될 것을 우려,통발을 옮기는 등 일대 소란이 벌어졌고 이중 40∼50개 통발에 보관중이던 활어는 이미 폐유에 오염돼 수천만원의 피해를 본 것으로 알려졌다.
  • 북송동포 수탈의 「인질굴레」 벗을까(오늘의 북한)

    ◎일인처 방일허용설 계기,그 가능성과 실상 점검 김일성의 80회 생일행사(4·15)가 끝난 직후인 지난 17일 로이터등 외신들은 일본사회당의 다나베 마코토(전변성)위원장의 말을 인용,『북한이 북송일본인처들의 고향방문을 허용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고 보도.그 실현 가능성이 점쳐지면서 그들과 함께 북한으로 들어간 북송재일동포들의 실상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다.세계 여론은 한때 북한에 의해 「인도주의의 승리」로 선전돼온 재일동포북송사업은 재일동포들을 「배반의 낙원」으로 끌어들여 외화획득의 도구로 삼은 「인질극」에 다름아니라고 지적하고 있다.북송 일본인처의 방일 허용설을 계기로 북한당국의 냉대와 수탈에 시달리고 있는 북송재일동포들의 참상을 알아본다. ◎“외화벌이”… 59∼84년 10만명 유인/대부분 「동요계급」 분류… 감시에 시달려/“편한직장 보장”… 재일가족에 헌금 협박/“참상 알려지면 체제손상” 불허할듯 북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의 귀국 사업」이라고 불리는 재일동포북송은 지난 59년 「캘커타협정」에 의거,시작된 비극적인 「민족의 대이동」이었다. 캘커타협정이란 일·북한이 인도 캘커타에서 맺은 「재일조선인의 귀국에 관한 협정」. 이 협정에 따라 59년 12월14일 1차로 9백75명의 재일동포들이 일본 니가타(신석)항을 출발,청진항에 도착한 것을 시발로 84년까지 1백87회에 걸쳐 북송된 재일동포는 모두 9만3천3백39명(일본적십자사 조사)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북송 교포의 숫자는 62년을 고비로 크게 줄어들기 시작,71년부터는 연1백∼4백여명에 지나지않다 84년 30명이 북송선을 탄 이후엔 거의 끊어진 상태인데 이는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고 북송동포들의 비참한 실상이 알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재일동포 북송사업은 북한이 이들 동포들을 통해 그들의 공장기재자와 자금을 확보하려했던 「경제적 목적」과 북한을 「지상의 낙원」으로 선전하려했던 「정치적 목적」달성을 위해 손 댄것이라는게 당시 북송실무를 담당했던 조총련 간부들의 증언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북한으로 건너간 동포들의 「비참한 실상」이 밖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한국인 남편을 따라 북한으로 건너간 이후 한번도 일본땅을 밟아보지 못한 일본인처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애절한 편지를 일본의 친지들에게 보내오기 시작한 74년쯤부터였다. 특히 지난 84년 북한을 방문,북송동포들의 눈물겨운 생활현장을 목격한 조총련 「조국방문단」의 증언담이 일본의 주간 아사히(조일)에 게재되면서부터 북송에 장래를 맡길수 없다는 불신분위기가 교포사회에 팽배하게 되었다.그후 90년에 들어서는 장명수씨(전조총련니가타현본부 부위원장)등 조총련간부로 북송사업에 앞장섰던 「일꾼」들의 실상고발과 「공화국 귀국자문제대책협의회」결성 등을 통한 일본내 반금일성운동전개로 양상이 뒤바뀌고 있다. 장명수씨는 15년간 자신이 부추겨 「만경봉」호에 태워 북으로 보냈던 많은 동포들이 행방불명된 사실을 알고 직접 북한을 방문,이를 확인한 뒤 「배반당한 낙토」란 책을 펴냈다. 장씨는 대부분의 북송동포들이 「동요계급」으로 분류돼 감시를 받고있으며 특히 학자·의사·조총련 활동가등 엘리트층의 동포들은 끊임없이 스파이 의심을 받은 뒤 연행돼 소식이 끊긴 예가 많다고 자신의 저서에서 증언했다. 그는 또 북송동포들이 일반주민들로부터는 「귀포」(귀국동포)라는 경멸적인 별명으로 불리며 이방인 취급을 당하고 있는 참상을 목격했다고 전했다. 장씨의 부모형제와 함께 62년 북송선을 탄 조호평이란 동지대 생리학도가 그의 부친 조화평씨에게 보내온 편지 내용의 변화는 큰 기대를 걸고 북한땅에 들어갔던 그가 점차 궁지로 몰려가고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인 케이스다. 『이곳은 경공업제품이 부족하다는 점 말고는 모두 만족한 수준입니다.쓸데없는 고생하시면서 흰머리 늘리지 마시고 어서 이곳으로 오세요』(62년7월 조호평).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부탁드립니다.모포 30장,시계 10개,아이들 옷감,못쓰는 헌옷(뭐든 좋습니다.아이들 옷으로 쓰거나 뒤집어서 쓸 수 있으니까요)』(65년 히데코·조씨의 일본인 아내). 『처자식들이 낡은 옷차림에 변변치 않은 음식을 먹어도 나라와 혁명,노동자계급을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버티어 왔습니다.지금 나오는 것은 쓴 웃음과 한숨뿐입니다』(67년9월 조호평) 니가타현의 부모가 자식에게서 받은 편지는 이것이 마지막이었다.그뒤 편지가 없었던 것은 조호평씨가 북한에서 하루 아침에 행방불명이 됐기 때문이었다. 재일 조선인 오사카부(대판부)교육회 회장을 지낸 한학수씨는 세 아이들을 먼저 북한에 보내고 62년 조총련의 지시에 따라 아내 이명자씨를 남겨두고 단신 입북했다.한때 중립적 상공인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았다가 「기회주의자」 「타협주의자」로 지탄을 받은 적이 있는 한씨는 입북후 1∼2년간 신의주시에서 교육부장을 맡아 일하다 지방으로 배치된 뒤 82년쯤 형무소로 끌려간 뒤부터는 감감 무소식이었다. 또 B라는 친구의 동생은 귀국한 뒤 항일빨치산 영화를 보고나서 『그 시대상황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말을 했다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버리기도 했다. 장씨는 또 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른 북한당국은 「귀국동포」를 인질로 엔화를 수탈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굶주림과 열악한생활환경에 견디다 못한 북송동포들은 자신들이 일본에서 가져간 가재도구등을 식량과 바꾸어 근근히 살아가다 이마저 떨어지면 일본에 있는 친지들에게 식료품과 바꿀 수 있는 물건이나 엔화를 요구하고 있는게 요즘의 실정.북한은 평양의 「낙원상점」처럼 외화만 취급하는 백화점이나 식당을 만들어 놓고 합법적으로 북송동포들의 엔화를 긁어모으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에 있는 북송동포의 친지가 북한당국에 거액의 「기부금」을 내 줄 경우 그 귀국동포는 좋은 직장에 배치되고 편리한 생활을 보장받는다는 것은 북송동포들과 일본의 그들 친지·가족에게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재일 조선인 상공회 부회장인 이삼규씨는 입북한 자신의 두 아들을 위해 1인당 1억5천만엔씩 3억엔을 할 수없이 기부했다고 폭로한 바 있다. 최근들어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개선 의사표명,핵사찰 수용과 관련한 긍정적 자세등 대서방유화제스처를 취하고 있는 것은 사실.그러나 북송 일본인처의 일본방문은 어떤 형태로든 그들 체제에 심각한 대미지를 줄 것이 불을 보듯 뻔해이를 허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 대규모 군사행진/85년이후 처음

    【도쿄 내외 로이터 연합 특약】 북한은 25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이 참석한 가운데 인민군창설 60주년기념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를 벌였다고 북한관영 중앙통신이 이날 보도했다. 김부자를 비롯해 북한 당·정 고위간부들과 캄보디아국가수반 노르돔 시아누크를 포함한 외국경축사절및 군사 대표단 등이 참관하는 가운데 21발의 예포로 시작된 이날 군사퍼레이드에는 항일혁명투사 6·25참전 노병들과 북한 육해공군·인민경비대·노농적위대·붉은청년 근위대·기계화부대 등이 참가했다고 이 통신은 전했다. 이 통신은 또 이날 김일성광장에 운집한 1백만명의 시민들이 색종이와 테이프를 던지며 퍼레이드에 참가한 인민군들을 열렬히 환영했다고 보도했다. 평양에서 군사퍼레이드가 벌어진 것은 지난 85년이후 7년만의 일인데 북한은 지난 20일 원솔칭호를 수여받은 김정일의 군최고통수권자로서의 권위를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해 지난 1월부터 열병 예행연습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 북 군장성 6백64명 승진/「김정일 원수」,첫 군권행사

    【내외】 북한의 김정일은 23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원솔로 진급한 인민무력부장 오진우를 비롯,차솔 진급자 8명에게 원솔별과 차솔별을 달아주고 16명의 대장을 포함,모두 6백64명에게 장성급 「군사 칭호」를 수여함으로써 지난해 말 군 최고 사령관으로 추대된 이후 첫 군권을 행사한 것으로 중앙방송이 이날 보도했다. 김정일은 오진우와 군 총참모장 최광,호위총국장 이을설,사회안전부장 백학림,인민무력부 부부장 김광진·김봉율,국방위원 주도일, 당중앙군사위원 이두익,김일성군사대학 총장 최인덕 등 차솔 진급자 8명에게 직접 원솔별과 차솔별을 달아주고 군사 칭호(우리의 「군 계급」)를 수여했다. 김정일은 이날 발표된 「중앙인민위 정령」에 의거,항일혁명 1세대 노투사들인 오진우,최광,김철만 등 14명에게 「2중 영웅」칭호를,박성철,서철 등 7명에게 「영웅」칭호를,그리고 허창숙,왕옥환 등 29명에게는 「노력영웅」칭호를 각각 수여했다고 이 방송은 전했다.
  • 김정일 「원수」 칭호 부여 안팎/김부자 권력승계 예비조치

    ◎당·정이어 군까지 「완전장악」 의미/원로 8명 승진은 반발무마 포석 북한이 21일 「중대방송」을 통해 김정일당비서의 「원수」추대를 발표한 것은 그가 당정에 이어 군부내에서도 후계자에 걸맞는 실권을 장악했음을 의미한다. 이로써 지난 80년 로동당 6차대회에서 김정일을 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비서·중앙군사위원으로 선출함으로써 공식화된 김일성·김정일 세습체제는 92년 4월 현재 「불동의 현실」로서 완결단계에 이른 것으로 평가된다. 김정일은 사실 80년 당의 제2인자에 오른 이후 「당중앙」이란 이름으로 당정의 모든 사업을 관장,후계체제의 완결을 꾀해왔으나 군부에서의 위상이 불투명해 군부의 장악여부가 권력승계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라는 관측을 낳았었다. 때문에 김일성주석은 90년대들어 후계구축의 막바지 조치로서 김정일비서의 군부내 위상강화에 역점을 두어왔는데 90년 5월의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선출,91년 12월의 군최고 사령관추대에 이은 이번 조치는 부자권력이양에 따른 끝내기 수순인 것으로 풀이된다.특히 북한은 이번에 김정일을 원수로 추대하면서 명목상 북한권부의 제3인자인 차솔 오진우를 원수로,최광총참모장등 빨치산출신 대장8명을 차솔로 추대했는데 이는 항일 유격혁명정신의 계승을 부르짖는 군부내 원로보수그룹들을 예우,혹시 있을 수도 있는 군내부의 반발을 무마하면서 권력승계에 따른 군의 지지 강화를 유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정권수립 47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군요직을 장악하고 있는 이를 혁명1세대들을 무더기로 차솔로 승진시킴으로써 이들을 군일선에서 퇴진시키려는 의도 또한 내포된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주석에 대한 지난 13일의 「대원수」추대에 이은 김정일의 이번 원수추대가 곧 권력승계로 이어질지는 지극히 불투명하다. 그럼에도 북한의 이번 조치는 모택동이 『모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했듯이 국가권력 장악의 핵심고리의 하나인 군부에 대해서 김정일이 완전에 가까운 통수권을 장악했음을 내외에 천명했다는 점에서 향후 북한의 정책전개방향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 김정일,인민군 완전 장악할까(오늘의 북한)

    ◎25일 창군기념일 계기로 점검 해본다/원수계급 받으면 사실상 군지배/「권력승계」관련 보수파 숙청 예상/당군사위장·국방위장 맡을지는 불투명 북한의 「붉은 군대」「조선인민군」이 오는 25일로 창설 60주년을 맞는다.김정일의 50회생일(2·16),최고인민회의 제9기3차회의(4·8∼10),김일성의 80회생일(4·15)등 굵직한 행사에 이어 치러지게 될 이번 인민군 창군60주년기념행사는 김정일의 명실상부한 군권력장악과 관련,또다시 내외의 관심을 끌고 있다.현역병 1백만명의 규모를 자랑하는 「조선인민군」은 『조선노동당의 혁명적 무장력』이란 북한의 명문규정대로 로동당의 절대적 지배하에 있는 「당의 군대」「혁명의 군대」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동시에 이러한 당적·혁명적 성격은 김일성의 유일체제와 연관되어 이제까지 조선인민군을 철저한 「김일성의 군대」로 각인시켜 왔다. ○매년 기념행사 요란 지난 1977년까지 2월8일을 인민군창건일로 기념해 오던 북한은 1978년부터 김일성이 항일유격대를 창설(1932)했다는 4월25일로 일자를 변경,해마다 요란한 기념행사를 벌여오고 있는데 이같은 결정 역시 인민군의 김일성 사병화와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북한은 김일성의 생일 이틀전인 지난 13일 「중대방송」을 통해 당중앙위원회,당군사위원회,중앙인민위원회,국방위원회 공동명의로 「김일성주석에게 대원솔칭호를 수여한 데 대한」「결정」을 발표,지난해말 인민군최고사령관에 취임한 이후 예측돼왔던 김정일에의 원솔계급수여가 오는 25일 현실화될 것임을 강하게 시사했다. 북한군의 장성서열은 소장·중장·상장·대장·차솔·원솔로 올라가는데 원솔의 자리는 6·25전쟁이 끝날 무렵인 지난 53년2월부터 김일성주석이 지켜오고 있으며 차솔는 오진우인민무력부장이 올라있다. 북한군은 최고사령관아래 「모든 군사정책을 마련하고 군산업발전에 관한 사업을 조직·지도하며 전인민군을 지휘하는 최고 군사기관」(당규약 27조)인 당군사위원회와 이를 심의·집행하는 국가기구차원에서의 국방위원회를 최상위에 두고 있다. 실제적인 군정은 최고 당·정협의체기구인 중앙인민위원회직속의 인민무력부가 위 두기구의 통제 아래 인민군총참모부(총참모장 최광)를 통해 시행하도록 되어있는데 김일성주석은 당군사위원장과 국방위원장을 모두 맡고 있어 정책결정의 정점에 서 있다. 한편 김정일은 그의 권력승계작업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지난 80년 당중앙위 6기 제1차 전원회의에서 「정치국상무위원」「정치국원」「비서」로 선출됨과 동시에 오진우에 이어 두번째 위치로 당중앙위 군사위원에 올랐다. 이어 81년 후계자호칭이 공식적으로 나오면서 군사업의 70%이상을 직접 지시하기 시작했고 90년5월 최고인민회의 제9기 1차회의에서 중앙인민위원회와 동격의 위치로 확대개편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에 선출됐으며 지난해 12월 당6기 19차 전원회의에서 인민군최고사령관에 추대되기에 이르렀다. ○현재 계급은 소좌 따라서 실질적으로 군을 장악하고 있으나 공식계급은 73년 당조직선전부 근무당시의 소좌계급에 머물고 있는 김정일이 차솔인 오진우위의 원수계급에 올라간다는 사실은 군내 위계질서를 명확하게 확립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볼 수 있다. 북한전문가들은 이와 함께 실제 군을 통제하는 국방위원회위원장과 당군사위원회 위원장을 이번 25일 군창설기념식에서 김일성으로부터 물려받을 것인가의 여부가 김정일의 명실상부한 군권장악을 측정하는 관건이 될것이며 이는 또한 「총비서」 「주석」직이라는 공식권력승계를 점칠수 있는 자대가 될 것으로 분석한다. ○대폭 인사개편 될듯 이와관련,서재진민족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북한군은 심각한 인사적체에 직면,50세의 「김정일원수」가 들어섬으로써 이을설등 연로하고 무기력한 혁명빨치산1세를 솎아내 군의 신진대사를 꾀함과 동시에 권력승계와 관련한 군의 지지강화를 꾀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기대하는 것 같다』고 분석하고 『따라서 25일 행사이후 대대적인 군인사개편과 김정일의 양위원장 취임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내다봤다. ○헌법 일부개정 검토 북한헌법 93조는 그러나 주석이 전반적 무력의 최고사령관과 국방위원회위원장이 된다고 규정해놓고 있기 때문에 김정일의 당군사위와 국방위 위원장직승계를 위해서는 헌법개정이 불가피하다. 바로 이 대목이 지난 10일 폐막된 최고인민회의 제9기 3차회의에서 제기된 「헌법수정」안의 내용에 관심을 갖게하는 부분이다. 그 구체적 내용이 전혀 알려지지 않고있는 이 헌법수정안에 대해 서실장은 『북한이 공개한 내용이 「김일성동지와 로동당이 새롭게 제시한 사상과 이론,그 밑에 인민이 이룩한 성과를 반영해」라고 돼있어 애매하긴 하지만 「포괄적」이라는 측면에서 헌법 93조의 수정등도 점쳐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북한연구소의 김창순이사장은 『지난해 이뤄진 김정일의 인민군최고사령관 추대가 위헌사항이므로 이를 바로 잡기위해 주석=전반적 무력의 최고사령관이라는 고리를 끊었을 수도 있다』고 밝히고 『이번에 김일성에 수여된 대원솔계급을 새로 만드는 안도 포함될수 있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그러나 김이사장은 최근 일부 북한 전문가들 사이에서 논의되고 있는 「제1부주석제 신설」가능성에 대해서는 『원래 제1부주석제가 북한에 존재하고 있었으며 과거 김동규와 김일(76·4)이 그 자리에있었다』고 지적,『김정일은 왕위계승자로서의 동궁의 개념에 드는 이상,영의정·우의정과 같은 개념의 제1부주석등 행정의 수위자리를 꼭 거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유석렬교수(외교안보연구원)는 『원수가 국방위원회와 당군사위원장을 맡는 것이 상식이긴 하지만 신설된 대원솔의 성격에 따라 달라질것』이라며 김일성의 대원솔계급이 단순한 상징적 계급이 아닌 스탈린식의 실질적 권한을 갖는 것이라면 군을 통제하는 양 위원장자리는 당분간 김정일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으로 전망 했다. 김일성이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엔 결코 최고권력의 지위를 김정일에 넘겨주지 않을 것으로 보고있는 전문가들 역시 인민군의 현계급제도에 없는 「대원솔」계급 신설은 향후 김정일에게 「총비서」 「주석」 등의 자리를 물려주더라도 김일성이 더 「상위」의 지위를 만들어 눌러 앉을 것이라는 추론을 가능케 하는 대목이라고 말하고 있다.
  • 일 「적기」 전 평양특파원 하기하라 료씨 폭로(인터뷰)

    ◎“김일성 「조선해방설」은 날조”/45년9월까지 소군서 복무… 인민군 지휘한적 없어/「김정일 백두산 출생」도 허위,하바로프스크 태생 『김정일에게 젖을 먹였던 이재덕여사를 만나 그가 백두산에서가 아니라 구소련 하바로프스크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지요』 북한 김일성의 과거 경력의 허구성을 집중적으로 조사·연구하고 있는 일본인 하기하라 료(추원료)씨는 최근의 조사내용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밝혔다. 일본 공산당기관지 「적기」의 마지막 평양주재 특파원을 지낸 그는 지난해 모스크바,타슈켄트에 이어 금년엔 북경등을 오가며 김일가의 과거를 집중 취재해왔으며 현재는 워싱턴을 중심으로 미정부문서기록보관소의 한국전쟁관련문서를 샅샅이 뒤지고 있다. 『김일성은 항일투쟁중 백두산에서 김정일을 낳았다고 말하고 있으나 실제는 42년4월 하바로프스크에서 낳았지요.김일성이 소련극동방면군 보병88여단의 대위로서 제1대대장을 맡고 있을 당시 그의 처 김정숙과의 사이에 정일을 낳았으며 그때 젖이 모자라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았던 이재덕여사가 대신 젖을 먹여주었다더군요』 그는 지난1월 북경으로 이여사를 찾아가 당시의 상황을 소상히 들었는데 올해 75세인 이여사는 자신이 88여단의 통신대에 근무했기 때문에 그때의 일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하기하라씨는 북한교과서엔 김일성이 45년8월 조선인민혁명군에 총공격명령을 내려 조국을 해방시켰다고 돼있지만 당시 김은 북한에 있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작년 11월 그는 모스크바에서 소련군사 역사가인 그레고리 쿠주민교수를 만나 88여단의 군사문서기록을 접할 수 있었다. 그 내용 가운데 당시 이 여단엔 김일성을 비롯,66명의 한국인대원이 있었고 45년 8월15일 일본이 항복한후 한달여만인 9월에 이 여단이 해산되면서 훈장수여식이 있었는데 김일성은 이 자리에서 「전투적기훈장」을 받았던 것으로 기록돼있다는 것이다.따라서 김은 적어도 45년9월까지는 소련에 있었지 북한엔 있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작년말 하기하라씨는 해방후 북한에 진주했던 소련군사령부의 서열3위였던 니콜라이 데베제프장군(90)을 만나 김일성의 과거 즉 13세때부터 항일투쟁에 참가,조선인민혁명군을 지휘했다는 사실이 날조된 것임을 알수있었다고 말했다.
  • 레베지예프 구소장성 증언/“소군장성 3인이 김일성 발탁”

    ◎치시차코프등 독자결정… 크렘린에 보고 김일성은 스탈린의 지시에 의해 북한지도자로 임명된 것이 아니라 당시 평양에 주둔했던 소련군 최고지도부에서 그의 옹립이 결정됐다고 김일성정권 수립에 깊이 관여했던 니콜라이 레베지예프 전소련군소장(90)이 증언했다.그는 산케이(산경)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히고 김은 전설적인 항일투쟁의 영웅 김일성과는 별개의 인물이라고 말했다.산케이신문이 14일 보도한 인터뷰내용을 요약한다. 『김일성은 소련군 대위로 소련극동방면군 보병제88여단(주로 한국·중국인으로 구성)에 소속되어 있었다.김이 소련군 소속이었다는 사실은 군공식문서에 남아있다.그는 2차대전이 끝나자 45년9월 하순경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소련배로 원산에 상륙,평양에 도착했다. 김은 약 3주후인 10월14일 평양 모란봉에서 열린 「조선해방축하집회」에서 갑자기 북한지도자로 국민앞에 등장했다.그는 이미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나는 「조선인민의 영웅 김일성」이 연설한다며 그를 소개했다.그러자 집회에 참가한5만여명의 군중들이 흥분,김이 있는 곳에 몰려들었다. 그러나 집회가 끝나자 군중들 사이에서는 의혹의 소리가 나타났다.김일성(당시33세)이 그렇게 젊을리가 없다는 것이었다.당시 북한사람들은 항일투쟁의 영웅 김일성은 초로의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당황한 소련군 지도부는 김이 항일투쟁의 영웅이라는 것을 「합리화」시키기위해 김의 조부모가 살고 있던 평양근처 고향을 방문하는 여행단을 구성,김의 할아버지·할머니를 만나게 했다.그러나 김은 독립운동가 김일성이 아니며 그의 본명은 김성주다』 김을 북한지도자로 옹립한 것은 당시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김일성의 이름을 이용하고 북한에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것이다.북한에는 당시 조만식선생등 민족지도자가 있었으나 소련은 공산주의자가 필요했다.평양주둔 소련군의 치시차코프사령관과 나,그리고 군사평의회의 시치코프등 3인이 46년 여름 김을 북한지도자로 정식 결정하고 크렘린에 보고했다.그러나 스탈린으로부터 반대가 없었다.김의 옹립은 평양 현지 소련군지도부의독자적인 결정이었다. 『북한을 김의 아들 김정일이 백두산에서 출생했다고 말하지만 김정일은 구소련 하바로프스크 근처에서 태어났다.김정일은 김이 41년부터 45년까지 소련군인으로 하바로프스크 주변에서 근무할 당시 태어났다.김은 처음 88여단의 소련군 중위였지만 후에 대위로 승진,사령관의 한사람이 되었다』
  • 어제 임정수립 73돌/유공 2백여명 포상

    정부는 13일 상오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정원식국무총리등 3부요인과 임시정부관련인사및 유족·정당대표·시민등 1천5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73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기념식을 갖고 독립유공자 2백명을 새로 포상했다.기념식에서는 임정 교통차관을 지내고 군무부 참모차장으로 광복에 헌신한 김철남선생등 3명에게 건국훈장 독립장,광복군 정훈조장과 임정 문화부 선전부 위원을 지낸 독립운동가 송면수선생등 7명에게 건국훈장 애국장,그리고 일제고관을 살해하고 탄약제조및 제조기술자 양성과 흥사단항일활동을 했던 김공즙선생등 10명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서훈했다. 이밖에 독립유공자 가운데 민병두선생등 13명에게는 건국포장,강대년선생등 1백67명에게는 대통령표창등이 수여됐다.
  • 외언내언

    김일성은 누구인가.일본월간지 문예춘추(4월호)와 주간문춘(3월26일호)이 새삼스레 그의 정체를 밝히는 특집을 실어 주목을 끈다.일공산당기관지 적기의 평양주재특파원이었던 필자 등이 동원되고 개방된 중소와 미국의 자료까지 종합취재한 정체여서 가장 사실에 가까운 내용이 아닌가 생각도 든다.◆항일의 영웅 김일성이 아닌 소련군용병의 대위출신이라는 것이 요지.45년 10월 집회에서 처음 본 북한주민들의 입에선 「가짜다」「로스케(소련인)의 앞잡이다」「어린애 아냐」(34)등의 수군거림이 터졌었다고 전한다.그가 영웅대접을 받으며 「경애하는 수령」이 되어 50년을 군림하고 천수를 누려 80회생일(4월15일)을 맞으려 하고 있다.◆백성들은 초근목피로 연명을 한다는데 요란한 생일잔치 준비로 법석이다.2월의 아들 생일에 이은 아버지의 생일도 국경일.세상에 이런 나라가 어디 있는가.일제 천황생일의 천장절생각이 난다.주체사상이 일제를 모방한 것인가.소련이나 중국도 수령의 생일을 국경일로 삼은적은 없다.◆선물을 진상토록 백성의 등골을 짜고있단다.친북한의 해외동포에게도 「선물보내라」「돈보내라」주문이 많은 모양.죽기전 부모형제 얼굴만이라도 한번 보게해 달라는 이산가족의 절규는 외면한채.외화벌이로 그나마 허용하던 해외동포들의 방북길도 막으려한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그런 김일성의 생일 잔치를 축하하러 일본집권 자민당의 사절이 파견된다는 소식을 우리는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북의 혈맹이란 중국도 김일성의 우상화나 권력세습,생일잔치 같은것은 달가워 않는다.김일성을 숭배하겠다는겐가.아니면 우매한 노인을 구슬러 한건(?)하겠다는겐가.북한은 일자민당의원도 김일성숭배한다 선전할것이다.어울리지 않는다.기왕의 생일잔치,선물·축하받지만 말고 이산가족상봉의 큰 선물한번 해보게 권유함이 어떨까?
  • “김일성 「조섬해방설」 날조된것”/일 문예춘추

    ◎45년8월 당시 일개대위로 구소련서 복무/김정일은 백두산아닌 하바로프스크출생 일본의 월간 「문예춘추」(4월호)와 「주간문춘」(3월26일자)은 북한 김일성의 과거 경력의 허구성을 집중적으로 다룬 장문의 특집기사를 실었다. 문예춘추사는 19일 이같은 김일성의 과거 정체를 파헤치는 특집기사를 다루게 된 것은 『김일성의 거짓된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생존자들이 사망하기 전에 그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올바른 기록을 남겨두려는 데 목적이 있다』고 말했다. 일본 공산당 기관지 「적기」의 마지막 평양주재 특파원이었으며 현재 워싱턴에서 활동하고 있는 언론인 하기하라씨(추원료)는 「주간문춘」에 게재한 「20세기 최대의 수수께끼 김일성의 정체」라는 기사에서 자신은 김일성의 항일투쟁이 날조된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워싱턴·모스크바·타슈켄트·북경 등을 오가며 입체적인 취재를 했다고 밝혔다. 하기하라씨는 취재 결과 현 김일성은 진짜 김일성이 아닌 「김성주」라는 것을 확인하게 됐다고 밝히고 『북한의 각종 역사서는 ▲김일성이 13세 때부터 항일투쟁에 참가,조선인민혁명군을 지휘했으며▲김일성이 45년 8월 조선인민혁명군에 총 공격 명령을 내려 조국을 해방했다고 밝히고 있으나 김일성은 북한에 있지도 않았다』고 반박했다. 하기하라씨는 『당시 ▲중국 공산당의 지도하에 만주에서 항일 게릴라 활동을 하고 있던 한국인과 중국인은 일본군에 밀려 소련으로 후퇴를 하게 됐으며 ▲소련이 이들을 규합,조직한 것이 소련 극동방면군 보병 88여단이었고,김일성은 이 부대의 대위로 제1대대장을 맡았을 뿐이다 ▲88여단은 정규 부대라기보다 첩보부대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김정일에 대해서도 『김일성은 항일 투쟁중 비밀기지인 백두산에서 김정일을 낳았다고 말하고 있으나 42년 4월 구소련 하바로프스크에서 출생했다』는 사실을 어릴적 사진과 함께 공개했다.
  • 김정일 찬양 수사 1백여가지 선전(북녘 사회상)

    ◎담배도 지위따라 5등급 구분/양질 컬러 TV 대량생산 독려 ○「붉은 태양」등 대대적 “발굴” ○…북한은 최근 선전기관을 통해 지난 87년부터 「발굴」하고 있다는 「구호문헌」에 김정일에 대한 존칭·수식사가 근 1백여가지에 달한다고 대대적으로 선전. 「구호문헌」이란 북한이 김일성의 항일빨치산투쟁경력을 사실화하고 김정일이 태어날때부터 김일성의 후계자로 예정(?)됐었음으로 선전하기 위해 지난 87년 2월 김정일의 45회 생일무렵부터 조작해 오고 있는 것으로 김일성의 추종인물들이 항일빨치산투쟁 당시 나무껍질을 벗겨 새겨넣었다는 찬양구호. 이들중 몇가지만 예를 들면 「김일성대장 계승인」「애기장군별」「2천만의 아들」「조선독립대장 김일성 대이을 백두광명성 여기출연 42」「2세의 대장군」「절세의 위인」「5대양 6대주에 비친 붉은 태양」「2세 영걸」「2세 대통령」「김일성 대장을 하늘림으로,녀장수 김정숙 녀신으로,백두광명성 2세영걸로 천만년 높이 모시자」「조국=2세영걸 광명성만세」등. ○김부자전용품이 최고급 ○…북한에서는 담배까지도 ▲김일성­김정일 전용 ▲고급 ▲준고급 ▲보통 ▲막담배 등 5등급으로 구분돼 사회적 지위에 따라 지급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최근 월남한 한 귀순자에 따르면 북한에서 피우고 있는 담배만 보아도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을 대개 짐작할 수 있으며 일부 청년들은 여자친구 앞에서 허세를 부리기 위해 암시장에서 비싼 가격으로 좋은 담배를 구입해 피우고 있다는 것. 5등급으로 구분된 담배를 구체적으로 보면 김일성­김정일 전용 담배는 기초과학연구소(만수무강연구소)에서 생산한 「백두산」「영광」등이다. ○서브·드라이브가 주특기 ○…최근 북한에서는 남자탁구 간판스타인 김성희·이근상을 이을 선두주자로 홍준일 선수(13)가 주목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정부기관지 민주조선 최근호에 의하면 홍준일은 평양시 모란봉구역 체육구락부 소속으로 지난해말 「전국소년탁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하여 강력한 회전서브와 드라이브로 모든 경기를 무실세트로 승리(6전6승),우승함으로써 『전도유망한 선수로 주목받았다』는 것이다. 특기는 상대의 오른쪽 깊숙이 밀어 넣는 강한 스카이서브와 다양한 좌우드라이브인데 게임당 평균 6점의 서브포인트를 얻어내며 좌우드라이브에 의한 득점률이 80∼90%에 달한다고 이 신문은 덧붙였다. ○연산 24만대… 대부분 흑백 ○…북한은 2일 평양 대동강 TV수상기공장서 종업원들의 궐기모임을 열고 질좋은 컬러TV양산을 강조했다. 김정일이 지난달 26일 새로 건설된 애국천연색텔레비전 조립공장시찰시 제시한 과업실천 명목으로 열린 이날 집회서 북한은 질좋은 컬러TV 수상기를 양산,텔레비전공업의 수준을 일층 제고시키기 위해 전자소재 및 부품의 전문화·대량생산화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중앙방송이 이날 보도했다. 북한은 90년말 현재 대동강 TV·청진TV공장(각 10만대)을 비롯,원산·나진·남포공장 등에서 연간 총 24만대 내외의 TV수상기를 생산하고 있으나 대부분이 흑백수상기이며 컬러수상기의 경우 구소련·루마니아 등에서 부품을 도입,대동강TV공장에서 조립생산해왔는데 이번에 조총련의 헌금으로 「애국컬러TV수상기 조립공장」을 건설하게 됐다.
  • 유관순열사 추모/어제 14회 봉화제

    【천안】 유관순열사의 항일독립만세운동을 기리는 제14회 봉화제가 29일 하오8시부터 2시간여 동안 충남 천안군 병천면 병천리 일대에서 윤병렬 천안군수등 관계인사및 이 지역 청년회의소 회원,주민등 1천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베풀어졌다.
  • “「정신대의 한」 뭘로 보상 받나요”

    ◎심미자… 이 할머니 오늘에야 말하다/16살때 끌려가 일 헌병 첩노릇 수모/그 질곡서도 독립자금 모아 전하기도/“한맺힌 삶 3·1절 앞두고 털어놓으니 가슴후련” 우리 민족에게 너무나 잔혹했던 역사를 생각하게 하는 3월이 온다.말로만 들어온 3·1독립만세의 평화적 시위 앞에 총칼을 들이댄 일제의 만행과 여기에 맞선 독립운동가들.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금광2동의 심미자할머니(69·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에 1월24일 신고)는 일제에 의한 피해자로 역사의 질곡속에서 누구보다 한맺힌 삶을 살아왔지만 3·1운동의 주역들을 도왔다는 뿌듯한 감회 속에 살고있다. 『정신대로 끌려갔다는 부끄러운 과거 때문에 모든 것을 숨기고 살았습니다.그런 가운데도 푼푼이 모은 돈으로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던 시절도 있었습니다.세상에 알리고 싶었지만 과거를 떠올리면 진저리치고 부끄럽기도 해서 묻어 두었던 일들입니다』 황해도 봉산군 덕제면 적성리가 고향인 그는 1940년 3월 중순 일제에 의해 강제로 연행돼 정신대라는 기구한 운명을 산 현대사의 증인이다.봉산소학교 5학년 때였습니다.담임인 나카무라선생이 우리집에 와서 무궁화 꽃수가 놓인 지도를 보고 예쁘다고 칭찬하며 자기네 일본지도에도 꽃수를 놓아 달라고 부탁해 나팔꽃 수를 정성껏 놓아 주었습니다.그것이 내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일 인줄도 모르고…. 그로부터 며칠후 일본순사에 의해 경찰서로 끌려가 『일본땅을 그린 지도에 일본의 국화인 벚꽃을 놓지 않고 나팔꽃을 수놓은 이유가 무엇이냐?』는 심문을 받게됐다.어린 나이였지만 마음속에 품고 있던대로 『아침이면 지는 나팔꽃처럼 일본도 빨리 망하라고 나팔꽃을 수놓았다』고 홧김에 내뱉어버렸다. 그 말에 화가 난 일경으로부터 대꼬챙이로 왼손 엄지손톱 밑이 찔리고 불에 익은 인두로 어깨와 목을 지지는등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곧 정신대로 보내져 16살의 어린 나이로 일본의 후쿠오카 근처 군부대 위안소에 도착했다.그후 오카야마·오사카·고베를 유전하는동안의 호칭은 「7번」이었다.1년반동안 일군의 위안부로 치욕의 삶을 살던 그는 헌병대장 스즈키의 눈에 들어 위안소를 빠져나왔다. 「하루코」라는 이름으로 헌병대장의 첩살이가 시작된 것이다.운신의 폭이 넓어진 그는 오사카에서 일본인 행세를 하며 지하조직으로 독립운동을 하던 부대앞 팥죽장사 아주머니를 만났다.그리고 부대에 채소를 납품하던 그 팥죽장사 아주머니의 남편 김상길씨를 통해 독립운동 조직도 알게 됐다. 『스즈키의 소개로 여러 군인들의 빨래와 자수등 닥치는대로 일을 했습니다.그 대가로 받은 돈 3백원씩을 매달 독립운동 자금으로 전달하구요.그 돈은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김마리아와 만해 한용운등 각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여러분들에게 보내진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하루코」,그가 도운 일은 금전뿐이 아니었다.헌병대장 처라는 직분을 이용,일본을 거쳐가는 독립운동가들의 통행증도 발급받을 수 있었고 옥고를 치르는 항일투사들에게는 김밥속에 종이를 말아 넣어 독립운동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22살에 해방을 맞기까지 3년 반동안 계속해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해 주었지만 일본인의 첩살이를 한것 때문에 선뜻 조국땅을 밟지도 못했다.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살다 54년에야 귀국,생활보호대상자로 혼자 살고 있다. 『나의 한을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겠습니까.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제야 한 많은 사연을 세상에 털어놓게 되어 가슴이 후련합니다』 그는 3·1절날 오키나와에서 베풀어지는 정신대 위령제에 참석하고 일본사람들에게 역사의 진실을 증언하기 위해 한국교회여성연합회의 「정신대 발자취를 따라서」팀과 함께 28일 출국했다.
  • 급변하는 북녘의 관광정책과 현황(오늘의 북한)

    ◎외국관광객 유치 안간힘/체제손상 안받는 범위서 변신을 모색/개성을 문화도시로… 외국사진출 “손짓”/국토 40%가 출입제한 구역… 「관광입국」실현은 미지수 북한은 최근 해외동포 및 외국관광객들의 주요 관광코스에 들어있는 개성시를 「현대적 문화도시」로 조성한다는 방침아래 도로와 주택 건설에 주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북한의 「관광개발」움직임과 관련,관심을 모으고 있다. ○도로·주택건설 현장 북한은 지난 6일 중앙방송을 통해 최근 몇년 동안 개성시의 운학·송전·통일거리 등 7개소에 현대적 도로를 신설하고 매년 1천2백가구분의 주택을 신축하는 등 수많은 상점과 편의시설,교육문화 보건기관을 신설해 도시의 변모를 일신했다고 선전했다. 북한은 이와함께 개성시가 고려의 수도였다는 특성을 살리기 위해 남대문으로부터 만월대까지의 1㎞구간에 수백채의 한옥을 복원하고 통일관 민속여관 등 한옥여관들도 새로 건설할 것이라고 중앙방송이 전했다. 북한이 이처럼 관광쪽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사정이 비슷한 중국이 외국관광객 유치를 통해 외화수입을 늘려나가고 있는데 크게 자극을 받은 때문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북한은 지난해 말 국영관광회사인 조선국제여행사의 조직을 일본담당의 1사,동남아 담당의 2사,기타 3사로 확대개편했으며 일본교통공사(JTB)가 개발한 평양∼개성∼판문점 연결 패키지 상품판매를 허용하기도 했다. 또 오는 4월부터는 남포∼원산∼백두산∼김강산을 연결하는 새로운 상품판매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최근 북한의 대남·대일·대미관계개선 움직임과 맞물려 시사하는 바가 큰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북한이 개방에 따른 체제붕괴위험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관광사업개발에 역점을 두는 것은 2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는 밑천없이도 당장 외화벌이가 가능한 관광사업을 통해 악화일로의 외화사정을 타개하자는 것이며 둘째는 「주체사상」의 선전과 함께 외국인들에게 그들의 「개방이미지」를 심어줌으로써 대외관계개선과 경협추진에 도움을 받고자 해서이다. 북한은 종래 관광에 대해 「낭비적이고 안일한 생활을 추구케하는 비생산적인것」이라는 부정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그러나 경제침체로 외화사정이 악화되자 84년 9월 제정된 합영법이 규정하고 있는 외국과의 합작사업 5개분야에 관광사업을 포함시켜 이를 적극 추진해왔으며 86년 5월에는 정무원에 「국가관광지도총국(약칭 관광총국)」을 설치,이때부터 호주·홍콩등지의 여행알선기관을 통한 외국관광단 유치에 발벗고 나서기 시작했다. 이어 북한은 세계관광기구(WTO)에도 가입,외국과의 관광교류에도 힘써왔고 제3차 7개년계획(1985∼92)의 주요사업에 관광지개발계획(백두산·묘향산·명사십리해수욕장·몽금포해수욕장·금강산종합개발)을 포함시키기도 했다. 북한의 대외관광사업실무는 관광총국이 맡고 있으며 그아래 여행알선업을 전담하는 조선국제여행사와 청년여행사 조교여행사를 두고 있으나 조선국제여행사가 모든 업무를 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외교부서 입국심사 외국관광객에 대한 입국심사는 외교부의 통제 아래 실시되며 실무를 맡고있는 조선 국제여행사에서 외국관광객으로부터 신청서를 받아 1차심사한 후 외교부의 2차심사를 거친다.문제가 없을 경우 해외공관을 통해 비자를 발급해 주고 있다. 북한과 외교관계가 없는 나라의 사람들이 북한을 여행하고자 할 때에는 국경검문소에서 비자를 발급해주며 이 경우에도 조선국제여행사로부터 미리 승인을 얻어야 한다. 북한은 90년도부터 관광객 1인당 미화50∼1백달러의 입국세를 징수,이를 주요 관광외화 수입원으로 삼고 있다. 해외에 소개되고 있는 북한의 관광호텔은 22개이며 수용능력은 8천실 정도로 추정된다.특급호텔로는 고려호텔(5백실)과 현재 건설중인 유경호텔(3천실·미준공),국제호텔을 들 수 있는데 모두 평양에 위치해 있다.이외에 향산호텔(묘향산),금강산호텔(금강산)등 1∼2급 호텔을 전국의 관광명소에 세워놓았다. 북한의 관광자원은 대략 6가지로 분류된다. 김일성­김정일찬양 및 정치선전용 관광코스로는 김일성생가인 만경대,보천보,왕재산,백두산 밀영,삼지연등에 있는 항일투쟁기념물(혁명박물관·동상·전적지등)및 서해갑문(혁명치적물)등이 있으며 북한에서 가장 중시되는 관광자원이다.최근에는 2월16일로 50회 생일을 맞는 김정일의 이름을 딴 「김정일화」온실까지도 그 대상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외 사찰·성문 등 유물·유적을 일컫는 문화사적지와 대안중기계공장·청산리 협동농장 등 산업시설이 있으며 백두산·칠보산·묘향산·금강산 등 7개 명산의 명승지와 모란봉·백령굴등 60개 지정명승지·복장노루·풍산개(견)등 30여종의 천연기념물을 관광자원으로 지정,개발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관광개발사업 노력과 관광자원이 갖고 있는 무한한 잠재력에도 불구,북한의 관광사업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는 북한이 군사지역,주요공업지대,생활이 낙후된 지역 등 전체 면적의 40%정도를 외국인 출입 제한구역으로 설정해 놓고 있는데다 자동차로 여행할 수 있는 구간도 6개 도로망에 한정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같은 규제와 엄격한 주민통제등이 완화되지 않는한 북한의 「관광입국」꿈은 실현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 미 팝그룹 「뉴키즈」 일행 어제 내한/10대소녀들 공항서 대소동

    ◎전국서 5백여명 몰려 울음·괴성… 사인 공세 10대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미국의 5인조 팝그룹 「뉴키즈 온더블럭」이 내한한 16일 10대 소녀 5백여명이 김포공항청사에 한꺼번에 몰려들어 입국장의 기능이 한때 마비되는 등 큰 소동을 빚었다. 이날 공항에는 서울은 물론 부산 대구 등 전국에서 상경한 10대들이 새벽부터 몰려와 국제선 1청사를 메우고 고함과 괴성을 질러댔으며 이 그룹의 히트곡을 합창하면서 도착을 기다렸다. 이들의 대부분은 카메라를 손에 쥐고 20∼30명씩 떼지어 그룹의 사진과 포스터를 흔들며 법석을 피웠다. 이 그룹을 태운 유나이티드항공 808편기가 하오1시40분쯤 도착하자 이들은 그룹의 이름을 연호하며 일부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소리내어 울기까지 했다. 그룹멤버들이 한시간뒤 입국장 출입문에 나타나면서 소녀들은 경찰이 제지하는데도 불구하고 사진을 찍거나 사인을 받기 위해 밀고 밀리는 등 아우성을 쳤다. 이 과정에서 이들과 다른 승객들이 한데 엉켜 넘어지면서 10여명이 가벼운 상처를 입었고 공항에 나온 사람들이 『학생들이 철없이 이러면 되느냐』며 얼굴을 찌푸리며 나무라는 모습도 보였다. 이 그룹이 가까스로 입국장을 빠져나와 전세버스를 타자 극성팬들은 버스앞에 드러누워 버스출발을 지연시켰고 이들이 숙소인 인터콘티넨탈호텔로 떠난후 1백여명의 소녀들이 택시를 타고 이들을 뒤따랐다. 이들 10대들이 모두 빠져나간뒤 공항일대는 버리고 간 신발 옷가지 휴지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숙소인 인터콘티넨탈 호텔앞에는 밤늦게까지 몇십명의 소녀들이 진을 치고 있었으며 아예 호텔에 투숙한 여대생 팬들도 있어 보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한편 이들 팝그룹 가운데 일부 가수는 사진취재를 요청하는 보도진들에게 5백달러씩의 개런티를 요구하기도 했다. 17일 잠실체조경기장에서 한차례 열릴 이 그룹의 공연 관람권은 예매한지 사흘만에 매진됐으며 30만∼50만원씩에 암표가 거래된다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다.
  • 80년대이후 주체문학에 변화 조짐(북한 문화실상:6)

    ◎문학/남대현의 「청춘송가」 베스트셀러/당선전과 무관한 작품나와 이채/1급작가들은 부수상급 대우받아 북한의 문학활동은 주체문예이론이라는 독특한 문예논리에 따라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서서히 변화의 조짐을 내비치고 있다.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문학론에 반영한 주체문예이론은 남북문화간의 이질화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으로서 북한체제에서 문학이 갖는 의미의 온전한 파악없이 그에 대한 이해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당이 제시하는 절대진리를 무조건 따르는 「자주적 인간」의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주체문예이론은 북한에서 숱한 미학논쟁과 숙청 끝에 60년대초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와 마르크스­레닌 사회주의를 뒤잇는 문예이론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주체문예이론에 입각한 북한문학작품은 김일성이 지도한 항일혁명문학을 근간으로 현장성의 중시와 대중성,낙관주의를 특징으로 하며 집체창작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북한의 「조선문학예술총동맹」(위원장 백인준)과 「조선작가동맹」(위원장 김병훈)등의 단체에는 1천2백여명의 작가가 소속되어 있는데 이들은 지난 90년 한해에 20여편의 중·장편소설과 1백90여편의 단편소설,그리고 2천6백여편의 서정시 및 가사를 포함,총3천3백여편의 문학작품을 창작했다. 작가에 대한 대우는 후해서 1급작가의 경우 부수상급의 생활비에 해당하는 2백원을 받으며 별도로 원고료를 지급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해방이후 북한문단을 주도했던 납·월북문인들이 고령으로 사망하거나 은퇴함으로써 세대교체가 진행되고 있다. 한편 80년대 이후 북한문학에서 나타나는 여러 색다른 징후들은 북한의 주체문학이 완화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87년 발표되어 유례없던 충실한 사랑묘사로 북한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던 남대현의 장편소설 「청춘송가」가 그 한예. 대학 하키선수 출신의 제철소 청년기사 진호와 출판사기자인 현옥간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통해 청춘남녀의 이상과 현실,북한사회의 모습과 함꼐 부조리까지도 드러내보인 「청춘송가」는 당의 노선과 젊은이의 사랑을 등가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북한문학사에 큰 획을 긋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이밖에 「야금기지」「탄부」「소설 김옥균」등 당의 노선을 구현하면서 사랑과 연애문제를 함께 다루는 이른바 복합주제의 소설들이 북한문학을 새롭게 주도해나가고 있다. 또한 당선전과 무관한 작품들이 발표되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예를들어 문예총 기관지인 「조선문학」90년8월호에 실린 김용한의 단편소설 「마지막 낚시질」은 김일성 우상화나 당선전과는 직접적 관계가 없이 현대자본주의의 물질편향을 잔잔한 회고조로 비판하는 작품이다. 이밖에 80년대 이후 김일성 또는 김정일의 교시에서 보여지는 시에서의 서정성의 제고와 생활세부묘사에 대한 강조,평범한 영웅상과 개성 등의 강조도 이같은 북한문학의 새로운 변화의 범주에 포함될 수있다.
  • 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편강열의사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의성단 조직,만주벌 항일무장투쟁/장춘 일 영사관 습격,7명이 일경 60명 사살/하얼빈역 광장서 포위된채 치열한 총격전/중과부적으로 피체… 옥중고문 후유증으로 37세에 순국 선열들의 애국·애족사상을 길이 본받기 위해 서울신문사가 마련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애사 편강열의사가 선정됐다.황해도 연백에서 출생,2일로 탄신 1백주년을 맞은 편강열열사는 만주에서 항일무장독립운동단체 의성단을 조직,장춘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는등 항일투쟁을 벌이다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다 일제의 고문으로 얻은 척수염으로 29년 37세의 나이로 순국했다.편의사의 생애와 사상·업적을 되새겨 본다. 일제하인 1924년8월 만주 하얼빈역 광장에서 완전무장한 일본경찰들이 무장항일독립운동가 편강렬의사를 체포하기 위해 겹겹이 포위하고 있었다. 만주일대에서 3백여명의 조선청년들을 이끌고 독립운동을 하던 편의사는 군자금과 무기를 조달한뒤 길림으로 돌아가는 열차를 타기 위해 하얼빈역으로 왔다가 밀정 김성곤의 밀고로 일본경찰의 포위망에 들게 되었다. 편의사는 길가 상점에 뛰어들어 장시간 총격전을 벌이다가 중과부적으로 왜경에 체포됐다. ○만철병원도 습격 편의사는 1924년 대원 5명을 데리고 봉천의 만철병원을 습격한뒤 같은해 대원 6명과 함께 장춘의 일본영사관을 습격,7시간에 걸친 격전끝에 적 60여명을 사살해 일본경찰의 추적을 받아왔다. 일경에 체포된 편의사는 25년 평양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신의주 감옥에서 복역중 고문으로 인해 생긴 지병으로 29년1월16일 안동현 적십자병원에서 37세의 나이로 숨졌다. 편의사는 병상에서 『내가 죽거든 유골을 내가 활동하던 만주땅에 묻고 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고국으로 이장하지 말라』는 비장한 유언을 남겼다. 편의사는 1892년 2월2일 황해도 연백군 봉서면 현죽리 목동에서 편상훈씨의 4남중 3남으로 태어났다. 편의사는 어려서부터 애국심과 충의심이 깊어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14세의 어린 나이에도 의분에 떨어 1주일간 항의 금식했다. 1907년 전국 각지에서 일본에 복수를 주장하며 의병이 봉기하자 경상·충청일대에서 활약하던 의병대장 이강년대장을 방문,이대장 휘하에 들어가 소집장 및 선봉장으로 활동했다. 이듬해 의병을 인솔하고 경기도 양주에서 3일간 격전을 벌이다 부상을 입은 편의사는 1909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편의사는 평양의 숭실학교에 입학,항일운동에 정진하다 1911년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사내정의)암살미수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5년 선고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뒤에는 의병동지들과 무장결사대 광복회를 조직,친일파·민족반역자·일본경찰을 처단하는 격렬한 투쟁을 전개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황해도일대의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고 동생 덕렬씨를 상해임시정부에 파견,국내조직과 긴밀한 연락망을 구축했다. 그해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최명식이 군자금을 모집하고 무기를 조달한뒤 항일무장투쟁을 할 거점을 마련키위해 군사준비단을 조직하자 편의사는 황해도 대표로 활동했다. ○밀고자 즉결처분 1919년 9월 다시 일본경찰에 체포된 편의사는 징역1년을 선고받고 21년에 출옥했다. 23년1월 편의사는 동지 김경배·김태규·조종호등과 함께 중국의 독립운동상황을 살피기위해 북경으로 가 상해·만주등지를 전전했다. 무장투쟁으로 일관한 편의사의 눈에는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어 논쟁만 일삼던 임시정부의 무력함이 도저히 성에 차지 않았다. 23년 10월 만주로 돌아와 강진지·양기탁·남정동지들과 무장항일투쟁비밀결사인 의성단을 조직,단장에 피선됐다. 의성단의 활동무대는 길림성과 장춘일대의 넓은 평야지역이었다. 편의사는 이 지역에 이주한 동포들에게 『조선인단체를 조직해 이민족에게 억압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며 민족적 공감대를 넓혀갔다. 재만동포들의 물적 인적지원을 받은 편의사는 2백50명의 의성단원을 무장시켜 장춘·봉천일대의 일본인 병원·영사관·우체국·경찰서·철도·군수기지를 습격,혁혁한 공을 세웠다. 일본은 경찰력과 헌병·밀정등을 총동원해 편의사를 체포하려고 했으나 신출귀몰하는 그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편의사는 의성단활동을 하는 한편 만주지방의 각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하기 위해 전만통일의회를 조직했다. 편의사는 만주지역의 비밀항일무장단체들을 통합해서 강력한 군사조직으로 만드는 공작을 하던중 24년8월 하얼빈역에서 밀정 김성곤의 밀고로 일본경찰에 포위됐다. 당시 이범석장군은 비분함을 참을 수 없어 밀고자 김을 즉결처분했다. 편의사가 체포되자 의성단활동은 위축되고 2∼3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단원들도 뿔뿔이 헤어져 소멸됐다. 옥고를 치르는동안 편의사는 일제의 악랄한 고문으로 척수염을 얻어 불구의 몸이 됐다. ○왜놈치료는 싫다 혼자 일어설 수도,앉을 수도 없는 지경이된 편의사는 병보석을 얻어 28년 선천의 미동병원에 입원했으나 별효과가 없었다. 친지와 가족들이 의료시설이 구비된 일본인 병원으로 옮길 것을 권고했으나 『죽어도 왜놈에게는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완강히 거절했다. 28년9월 동생이 있는 만주의 안동으로 옮겼으나 4개월만인 1929년1월16일 순국했다. 편의사의 묘소는 중국 요령성 단동시 원보구 인충가 진강산 장군봉 뒤편에 있었으나매장후 61년이 지나는 동안 이 지역이 시가지로 개발되어 비석은 커녕 묘소의 흔적조차 남지않게 됐다. 지난해 가을 국가보훈처와 편강렬의사 탄신1백주년 기념사업회가 「편의사유해봉환반」을 구성,현지답사한 결과 밝혀진 사실이다. 편의사는 후사가 없어 동생 덕렬씨의 2남인 충무씨를 양자로 입양했으나 충무씨도 지난 80년대초 미국으로 이주했다. 정부에서는 62년 편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역사적 평가/“마지막 의병장” 불굴의 절개 빛나/17세때 13도창의군의 서울탈환대작전 참가 편강렬의사에게는 지난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됐다. 그러나 편의사의 이름을 아는 이가 드물고 역사적 평가도 높지 못한 실정이다. 구한말의 의병전쟁에서 20연대 중반의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큰 운동에 참가해 청춘을 불살라버린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책에서는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가 없다.이때문에 편의사는 이름없는 독립운동가로 오늘에 이르고 있고 무덤마저 정확한 자리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편의사는 중국단동 공동묘지 어디인가에서 압록강과 강건너 신의주를 바라보며 조국통일을 애타게 염원하고 있을 것이다. 편의사가 13도 창의군의 서울대탈환 작전에 참가한 것은 17세때이다.여기서 그는 부상을 입었으니 이 사실만으로도 독립운동가로 치부될 수 있다.그러나 이 부상은 37세로 순국할때까지 20여년간의 항일투쟁의 시작일 뿐이었다.1910년 압록강철교 준공식에 참석하던 사내총독암살음모사건으로 연루되어 최초의 옥고를 치르게 된 것은 나머지 그의 투쟁사와 기묘한 일치를 보여준다. 「양양한 압록강물은 흘러서 어드메로 가는가」라는 그의 옥중시에서 보듯 편의사의 일생은 압록강과 숙명의 관계를 맺고있다. 3·1운동후 두번째 옥고를 치르고 압록강을 건넜을 뿐아니라 세번째 마지막 옥고를 치를때도 압록강을 건느며 망국의 한을 달랬다. 한국인의 성품 가운데 끈기를 제일로 드는 이가 많다. 편의사야말로 독립운동 하나를 위해 일생을 바친 끈기의 대명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를 위대한 독립운동가로 평가하는 것은 불요불굴의 절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마지막 재판정에서 7년 징역형이 내려졌을때 파안대소했는데 이는 그가 의병정신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의병정신이란 나라와 겨레를 위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하고야 마는 정신이다. 이런 의미에서 편의사는 한국의 마지막 의병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편의사의 탄신 1백주년이기도한 2월을 맞아 새삼 조국통일로서 망국한을 달래드려야 되겠다는 마음이 간절하다.
  • 설/4년전 부활… 민속놀이 보급(오늘의 북한)

    ◎민족고유명절 북녘에선 어떻게 보내나/혁명정신·집체역량 강화에 활용/널뛰기·활쏘기·씨름·윷놀이 권장/아이들은 단천지방서 유래한 단심줄놀이 즐겨 「봉건적 잔재」란 이유로 민족명절에서 제외됐던 음력설이 북한에서 부활된지 올해로 4년째를 맞는다. 지난 88년 추석을 민족명절로 복원한 북한은 89년에는 설날(음력설)·한식·단오등 우리 고유명절을 모두 되살린데 이어 「민속놀이」의 보급을 크게 장려하고 있다. 특히 지난 89년 제13차 평양세계청년학생축전때는 대성산유원지에 건국 이후 최초로 「국제민속놀이장」을 건설,씨름·그네뛰기등의 행사를 펼치기도 했으며 이후 매 명절때마다 선전매체를 통해 북한주민들이 민속놀이를 즐기는 모습을 자주 보도해왔다. 북한에서의 민속놀이는 「건전한 취미」의 기능과 함께 「문화성」「인민성」「집체성」의 내용이 강조되면서 상당부분 변형되거나 없어진 것이 사실.그러나 「민속」만큼 민족공동체의 동질성회복을 부축해 줄 요소도 그리 많지 않다는게 민속학자들의 견해다. 우리민족 최대의명절인 음력설을 계기로 살펴본 북한의 민속놀이는 다음과 같다. 북한에서 민속놀이는 지난 61년 9월 로동당 4차대회에서 김일성주석이 『선조들이 남겨놓은 아름답고 진보적인 것을 찾아내어 그것이 우리시대에 활짝 꽃피도록 하여야겠습니다』라고 교시한 이후 인민의 「생산력과 전투력향상」에 복무하고 혁명사업과 관련,「집체성」을 강조하는데 중점이 주어져 발굴·장려돼오고 있다. 북한의 민속놀이는 가무놀이 경기놀이 겨루기 아동놀이로 구분돼 있으며 세시풍속에만 국한되지 않고 정권수립일(9·9절),국제노동자의 날(5·1절)등 각종 「사회주의 명절」행사나 군사훈련·체육경기종목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농악◁ 전통명절뿐 아니라 기념행사·생산현장 등에서 흥겹고 일체적인 분위기 고조를 위해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다.특히 협동농장에서는 추수가 끝난 다음 볏짚을 쌓아두고 농민들이 농악대와 함께 한판 춤판을 벌이기도 한다. 북한에서는 농악을 「인민의 낙천적·전투적 기질」을 반영하는 민족의 자랑스런 유산을 해석,당·정차원에서 장려하고 있다. ▷돈돌라리◁ 푸른 바다와 소나무,깨끗한 해변으로 유명한 함경남도 북청·신창군 등지의 모래밭에서 전래적으로 행해져온 군중가무놀이인데 88년초 북한체제에 맞도록 새롭게 개작,전체 주민들이 즐기도록 장려하고 있다. 한식 단오등 명절때 모래판에 군중들이 둘러앉는다.그중 여러사람이 춤판의 한복판에 뛰어들어가 춤을 추고 주위사람들은 피리 퉁소로 반주를 맞추면서 노래 손뼉으로 흥을 돋운다.본격적으로 흥이 돋워지면 모두 춤판에 뛰어들어 둥그렇게 원을 짓는 흥겨운 놀이.이 춤의 특징은 우리나라 민족무용동작인 날씬하고 우아한 춤사위와는 대조적으로 움직임이 잦고 경쾌한 것.팔을 옆으로 들고 고개를 숙인채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며 다리를 뒤로 살짝살짝 들어주는 재미난 춤. ▷그네뛰기◁ 전통명절이나 8·15해방기념일,5·1절등 북한이 기념하는 중요명절때마다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흥겹게 행해지고 있는 대표적인 민속놀이의 하나. ▷널뛰기◁ 북한은 널뛰기놀이를 봉건적 속박을 반대한 여성들의 염원및 봉건사회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특이하게 풀이하고 있다.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게된 이 놀이에 대해서 북한은 민속절에 여성뿐아니라 남성들도 즐길수 있도록 당국이 앞장서 문화·체육정책적 차원에서 발전시키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널뛰기는 북한이 자랑하는 평양곡예단의 곡예의 한 종목으로도 인기가 높다. ▷윷놀이◁ 음력설과 대보름날 가정이나 동네공터에서 주로 판이 벌어지는 윷놀이는 「손가락꼽기」「산가지따기」(자강도 희천지방),「콩따기」(함경북도 무산)등 고장에 따라 불리는 이름이 다른게 특색. ▷단심줄놀이◁ 주로 아이들이 즐기는 놀이로 함경남도 단천지방에서 유래.대보름날 소나무에 여러가닥의 줄을 드리운 다음 아이들이 한끝씩 쥐고 돌아가면서 노래하고 춤추는 원무형태의 가무다.북한에서는 항일무장혁명투쟁시기 유격대원들과 그 근거지 아이들이 혁명정신을 고양하면서 함께 즐긴 놀이로 풀이, 지금도 주요 행사때 집단체조형식의 아동유희로 행사장 무대위에서 자주 공연하고 있다. ▷씨름◁ 북한에서는 씨름을「수박·태껸·날파람등과 함께 옛날 인민들이 평소에 신체를 단련하고 부지런히 무예를 닦아 유사시에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창안한 경기」라 하여 지금도 적극 권장하고 있으며 특히 지난 89년 평양축전때 그네뛰기·널뛰기와 함께 시범경기를 해보여 참가한 외국인들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활쏘기◁ 활쏘기도 장려되고 있으나 미국을 표적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이밖에 수박따기,진놀이등 전체 성원이 긴장한 가운데 행동통일 훈련과 집체적 역량 강화에 초점을 맞춘 민속놀이등이 아이들에게 장려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최근 북한이 발굴·보급하고 있는 민속놀이가 상당부분 그들의 체제논리에 꿰어맞춰져 해석되고 있긴 하지만 더러는 원형대로 온전히 보존되고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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