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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24)

    ◎소년시절:5/“만경대서 야학개설” 새 전기에 삽입/한문독음 미숙… “동료학업 지도” 어불성설/“일재수업 거부”­“모범생” 상반된 기술/“외조부담당 성경·한문과목 질색” 동급생 증언 김일성이 팔도구소학교에서 전학한 창덕학교는 조선에서 제일 먼저 포교를 시작한 개신교인 북미 장로파에 속하는 대동군용산면하리교회가 1909년에 설립한 5년제 사립학교이다.학생수가 1백명이 넘는 당시로서는 큰 학교였는데 하리교회를 세우는데 공로가 있었던 그의 외조부 강돈욱이 교감으로 있었다.북한에서 부주석을 지낸 강양욱도 당시 교원을 하고 있었던 모양으로 회고록에서 김일성은 그가 담임을 한 학급에 편입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강양욱학급 편입 현재 보존되어 있는 학교를 보면 ㄱ자형인 기와집으로 교실이 세개 있고 그 모통이는 직원실로 되어 있다. 북한에서는 창덕학교시절에 대한 우상화를 극단적으로 하고 있다.「무지개 비낀 만경대」의 속편은 「조선을 알아야 한다」인데 이 책의 창덕학교시절은 크게 두 체계로 나뉘어 그의 「언행」을소설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 첫째 체계는 그가 부친의 말을 「명심」하여 둘도 없는 수재며 모범생이 되었고 지덕체가 겸비되고 있었다는 선전이다.그 중 전자만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⑴공부:그는 교실에서는 학습규율을 잘 지키고 집에서는 깊은 밤까지 남포등을 켜서 공부하였다. ⑵학습조:「학습조」를 조직하여 자주 결석하는 학생의 집에 가서 학교에 나오라 하였다.또 그들을 데리고 뒤산에 올라 그들이 배우지 못한 내용을 가르쳐 주었다. 밤에 잠 자지 않는 것은 항일무장투쟁시기 이후의 김일성의 습성이다.어용학자들은 그의 이러한 후천적특성을 소년시절에까지 거슬려 올리고 있다. 「학습조」이야기는 83년에 나온 「조선을 알아야 한다」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이야기인데 「세기와 더불어」에서는 새로 「야학」까지 등장시켰다. ○처음 한글 배운듯 「나는 가난 때문에 학교에 못 다니는 아이들을 생각하여 방학때 만경대에 가서 야학을 열었다.처음에는 1학년용 조선어독본을 가지고 우리 글부터 시작하였다.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되는 소박한 계몽운동이었다」 이러한 우상화를 식민지시대의 현실과 관련하여 생각해보면 당시는 일제가 한국어와 한국의 역사와 지리를 어느 정도 가르치게 하고 있었다.만주의 팔도구소학교에서 한글을 배우지 못한 김일성은 전기들에서 과대 선전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아마도 이때 처음으로 창덕학교에서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을 것이다.「사인의 김일성」에는 창덕학교시절의 그의 동급생이 한 증언을 싣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성주는 별로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특히 그의 외조부가 가르치고 있던 성경공부는 싫어하는 것같았다.그분이 가르쳤던 한문도 그에게는 질색이었다」 만경대에서 우리 말로 한문을 읽어 5세때 불학이문장이었다고 선전되고 있는 김일성은 중국학교인 팔도구소학교에서 정과목인 국문(한문)을 배웠는데도 불구하고 창덕학교시절의 그의 동급생들이 보면 대체로 이런 정도의 한문실력밖에 없었다.그 원인의 하나는 한문을 중국어로는 읽어도 우리 말로는 읽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따라서 한글을 다른 아이에게 가르칠만한 실력은 그에게는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가 이렇게 추측하는 것은 또 다른 예가 있기 때문이다.북한에서는 창덕학교가 당시 사용하고 있었던 국어독본의 「국」자를 김일성이 「일」자로 고쳐서 일어독본으로 하였다고 선전하고 있었는데 이번 회고록에서는 「나는 일본말을 익히느라고 애쓰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조선사람은 응당 조선말을 해야 한다고 깨우쳐 주었다」고 강조했다는 말이 나온다. 이 일화는 애국심의 관점에서 보면 공감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일제시대는 학교 수업은 일본어로 하고 있었다.그는 교수용어가 일본어인 식민지 학교에서 일본어교과서를 거부하고,배우는데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며,학생들이 일본말을 할때마다 일일이 조선말을 하라고 막았다. 그렇다면 결국 일본말로 진행되는 수업도 소홀하게 하지 않을 수가 없다.자연 그의 학업은 떨어지게 되고 학과성적도 불문가지로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학업면에서 뒤진 그가 「학습조」나 「야학」을 연다는 것도 어불성설로 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대일행적에 치중 창덕학교시절에 대한 우상화작업을 위하여 어용학자들이 설정한 체계중 둘째 체계는 김일성이 일제와 지주,자본가를 증오했다는 이야기들이다. 빈민들이 사는 평양의 보통강가 토성랑을 보았다든가 창덕학교가 있는 칠곡에 전깃줄을 치러 오는 자동차가 다니지 못하도록 길 복판에 큰 돌을 놓았다든가,요컨대 「왜놈과 지주 자본가는 한 배속이다」는 증오심 일변도의 계급교양이다.다 아는 투이기 때문에 그 설명은 생략하겠다. ①「위대한 수령 김일성원수님의 영광스러운 어린시절2」 부제 「조선을 알아야 한다」 1983년 간 35∼57면 ②「4인의 김일성」 2백37면 ③「세기와 더불어」 85면
  • 김일성회고록 제3권 「세기…」 출간(북한 이모저모)

    ◎강냉이밭 시비·김매기 농기계 개발 ○주민사상 강화교재 활용 ○…북한은 김일성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1부 항일 혁명편)제3권을 출간했다고 중앙방송이 최근 보도. 북한 노동당출판사가 출간한 이 책은 항일 투쟁시기인 19 33년 2월부터 35년 2월까지를 3개장으로 나누어 다루고 있으며 이를 다시 △보금자리 △소비에트냐,인민혁명정부냐 △밀림속의 병기창 등 18개의 소제목들로 꾸몄다고 이 방송은 소개. 한편 북한은 지난 4월 김일성의 80회생일을 계기로 김의 회고록 1·2권을 출간한 바 있는데 최근까지 △각 지역·조직별 학습모임 △방송매체의 낭독·해설프로 △대량 재판발행 등을 강력히 추진하면서 이를 북한주민들의 대금부자 충성심제고를 위한 주민사상교양 교재로 활용해왔다. ○천리마호 트랙터에 연결 ○…북한은 최근 강냉이밭 김매기와 속층 비료주기에 사용할 수 있는 고성능 농기계를 새로 개발,도입했다고 평양신문 최근호가 보도. 농업기계화연구소 과학자들이 개발한 이 농기계는 비료통 1개,시비장치,골째기날,후치날을 각각5개씩 설치하고 「천리마」호 트랙터에 연결해 사용하는데 경제성과 작업능률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 평양신문에 따르면 이 농기계는 강냉이를 심은 산경사지밭,평지밭 할 것 없이 트랙터가 높은 속도를 내면서 하루 15정보의 밭에 시비와 김매기를 할 수 있으며 필요에 따라 시비와 김매기를 동시에 또는 따로따로 진행할 수 있다고.
  • 조항래해제 「유방집」/독립지사 조소앙선생의 대표적 서술

    ◎민족수난기 애국선열 81인 전기수록 「유방집」은 항일독립지사 조소앙선생이 19 05년부터 19 32년까지의 민족수난기에 활동한 애국선열 81인의 사적과 당시 독립운동의 목표·행동등 민족정신을 수록한 대표적 저술물. 이 책은 19 32년 5월 중국 남경의 대동학회에서 간행되었으나 그동안 전해지지 못하다가 이번에 국내에 단 한권 남은 유일한 소장본인 조명하의사의 유독자 조혁래씨의 본을 영인해 출판한 것.신라시대 김대문의 「화랑세기」가 있었기 때문에 후세에 화랑정신이 전해진 맥락과 같이 독립의사·열사들의 전기를 남김으로써 이들의 민족투혼을 계승코자한 조소앙선생의 집념어린 산물이다. 이 책의 내용은 ▲중국인들의 서문과선생이 직접 쓴 유방집서 ▲중국인들의 휘호 ▲단군의 사진,의사·열사의 사진등50여장의 사진이 게재된 조편 ▲암살당요목표 ▲사건을 중심한 독립운동일람표 ▲의사·열사의 전기인 유방전등 크게 6부문으로 구성됐다.이가운데 핵심부문은6번째 유방열전으로 민영환,이봉창,조명하등 81인을 다시 9개로 나눠 인물별로살펴보고 있다. 「열전제9」부문중 윤봉길전의 일부와 이회영전이 낙정된 상태여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 아쉽긴하다.그러나 19 05년 을사조약으로 국권을 상실당한뒤 순국한 민영환으로부터 19 32년 윤봉길의 상해홍구공원의거에 이르기까지를 기록했다.자결로 항거한 의사·열사·반일의병전쟁을 전개한 인물,헤이그 특사,만주지역의 독립군,일제 요인및 관계당국에 폭탄을 투척한 선열들의 생애와 활동 그리고 업적등을 각 인물별로 정리한 전기가 담겨져 있다. 조소앙선생은 18 87년 경기도 교하군(현 파주군)에서 태어나 성균관과 명치대학을 졸업한뒤 19 13년 중국 상해로 망명,독립운동에 참가한 독립투사이자 이론가.3균주의를 창안하였으며 대한독립선언서등을 기초하였다.임시정부의 외무부장과 한국독립당의 핵심간부로도 활동했다. 특히 이 책에는 지금까지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조명하지 못한 독립투사들의 전기가 다수 실려 있어 사료부족에 허덕이는 우리나라 항일민족독립운동사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조소앙지음,조항래해제,아세아문화사 1만원.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22)

    ◎소년시절:3/허위로 가득한 「배움의 천리길」/외조부경영 창덕학교로 3학년에 편입/“5학년때 단독 평양행”은 날조… 부모 동행/전학기념사진엔 김일가 유복함 노출 「세기와 더불어」를 읽고 있으면 우리는 거기에서 김일성우상화의 목적에 저촉되지 않는 한에 있어서는 한국이나 일본 학자들의 견해까지도 북한 어용학자들이 슬며시 추인하거나 제멋대로 자기 주장처럼 만들어 버리는 행위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필자의 경우로 한정하고 예를 하나만 들면 김시우가 백산무사단의 재무였다든가 김형직이 백산무사단에 관계하였다는 회고록의 주장이 그런 경우이다.또 강진석이 1920년 9월에 임강의 김형직 집에 있다가 백산무사단에 입단하였다든가,21년 4월에 평양에서 체포되었다고 하는 것도 모두 필자가 처음으로 밝힌 것이다. ○한·일학자 주장 삽입 북한의 어용학자들은 필자가 밝힌 이러한 자료를 부정할 수가 없어서 이번 회고록에서는 이것을 거꾸로 이용하며 김일성우상화 자료로 충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 여기서는또 하나 소위 「배움의 천리길」의 출발날짜를 들어 본다.김일성이 부친의 말을 듣고 창덕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하여 팔도구를 떠나 만경대로 갔다는 날짜이다. 필자는 그 출발날짜의 상이점을 평전에서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었다. ①팔도구의 4년제소학교를 졸업한 그해 여름에 창덕학교에 가서 5학년에 다녔다(1960년의 기록). ②열세살 때(1962년 전기). ③열두살 때,1923년 1월30일(1971년 기록). ④1923년 3월16일(1982년 전기). 필자는 이상과 같이 열거한 후 1923년 3월16일은 음력으로는 1월29일이라고 지적하였다.그런데 이번 회고록에서는 김일성이 「1923년 음력 정월 그믐날(양력 3월16일)」에 팔도구를 떠났다고 종래의 주장을 수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주장은 음력을 양력으로 고치는 일에 주안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김일성은 이런 계절이 아니라 1960년에 나온 「항일무장투쟁 전적지를 찾아서」에서 나오고 있는 것처럼 여름철에,그러나 연도는 23∼24년이 아닌 1922년에 팔도구를 출발하였다고 분석하였다. 이 분석은 지금의 김일성우상화를 깨뜨리는 주장이어서 북한이 묵살하고 있으므로 여기에 다시 소개해 놓는다. 필자가 김일성의 평양행을 23년 3월이 아니라 1922년 여름이라고 한 것은 이상의 북한자료 이외에 김형직의 가족사진과 두명의 한국측 증인이 있기 때문이다. ○동창생증언과 모순 먼저 한국측 증인 2명은 창덕학교시절 자기들이 제각기 김일성의 3학년과 4학년의 동급생들이라고 증언하고 있다.이 증언은 5학년에 편입되었다고 하는 김일성의 말을 부인하는 것으로 된다.또 이 증언은 팔도구소학교를 4학년으로 졸업했다는 그의 주장도 번복하고 있다. 다음으로 당시 창덕학교는 5년제학교였다. 그런데 김일성은 23년 봄 5학년에 편입되어 25년 1월에 졸업을 앞두고 창덕학교를 중퇴했다는 무리한 주장을 하고 있다. 25년초에 5년제학교의 5학년을 중퇴한 것 같으면 23년 4월에 그는 4학년에 편입되어야할 것이다.이렇게 되면 4학년때 동창생이라는 한국측의 증언에 신빙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 3학년 시절의 동창생 말이 가령 옳은 것 같으면 김일성은 적어도 23년 3월 이전에 창덕학교에 있어야 한다. 김형직이나 강돈욱은 교육가이므로 그들은 적어도 학기초나 학년초에 맞추어 김일성을 전학시킬 것이다. 마지막으로 북한에서 공공연하게 소개되면서 아무런 설명도 붙이지 않는 이상한 가족사진이 있다.어떤 한옥 앞에 김명주를 안은 김형직과 강반석이 의자에 앉아 있고 김형직의 왼쪽에 김일성,부모 사이에 김철주가 각각 서있는 구도로 되어 있다.당시로서는 아주 호화로운 몸차림을 한 유복한 김형직 일가 사진이다. 이 사진에 대한 필자의 추리는 다음과 같다. ①1922년생인 김영주가 강보에 싸여 있는데 생후 7∼8개월로 보인다. ②김일성의 모자에는 교장이 있고 김철주 모자에는 그것이 없다.따라서 그들은 각각 다른 학교의 제복을 입고 있다. ③중국에서는 1921년 11월에 학제가 미국식인 6·3·3제로 바뀌었고 1922년 8월 하순에 신학기가 시작되었다. 김형직은 일본식 학제때 중국학교에 들어간 김일성이 학제 변경으로 학업리수가 늦어지는 것을 싫어하였을 것이다.마침 창덕학교는 김형직의 장인 강돈욱이 경영하고 있었다. ④이 때문에 김형직은 22년 8월경에 가족을 데리고 평양에 갔다.그는 처가집에 가서 김일성이 창덕학교에 전학하도록 부탁하고 얼마간 평양지방에 있었다가 팔도구로 돌아가게 되었다. ⑤그는 창덕학교에 전학한 김일성과 1916년생으로 8월에 팔도구소학교에 입학하게 될 김철주에게 각각 학생복을 사 입히고 김일성과 헤어질 기념사진을 찍었다. ⑥김일성은 22년 8월까지에 팔도구소학교 3학년 1학기를 수료했는데 9월에 들어가면 미국식학제로 다시 3학년 1학기를 이수해야 하였다.그러나 창덕학교에 전학함으로써 그는 일본식 학제대로 3학년 2학기를 이수할 수 있게 되었다. 김일성의 학업과 이상의 여러 문제들을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는 22년 8월경.자기 혼자가 아니라 부모와 같이 팔도구에서 평양으로 간 것으로 보인다.김일성 평양 단독행이란 결국 우상화작업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①「세기와 더불어 1」61면 ②평전 86면 기타 ③평전 47면 ④「세기와 더불어1」77면 ⑤「사인의 김일성」236면⑥「역사사전Ⅱ」 ⑦724면 ⑧평전 46면 이하 참조
  • 북한,경제개혁·개방 가속화 예상/정무원총리 경질의 언저리

    ◎경제난 타개위해 중국모델 따를듯/김정일의 측근 중용… 세대교체 시사 북한의 이번 인사는 개혁·보수파간의 노선투쟁과 관련한 평양당국의 정책조정이 끝났음을 의미한다.그리고 이같은 노선투쟁의 결과 북한은 강성산의 총리재기용으로 상징되는 대외경제개방과 대내적 경제개혁의 길을 체제수호의 대안으로 선택한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강성산의 총리기용은 그가 지난 84∼86년 총리재직시 중국의 경제개방을 본떠 합영법을 제정하는등 북한경제의 개혁·개방을 시도했으며 총리에서 해임된 후 함북도당책겸 인민위원장의 자리를 지키며 두만강경제특구개발을 주도해왔다는 점등을 고려할때 향후 북한의 정책초점이 경제개혁·개방에 맞춰질 것임을 강력히 시사하는 것이다. 강은 앞서 총리시절 합영법을 제정하면서 중국이 1978년8월부터 제정·시행한 중외합작기업법을 상당부분 원용했던 것처럼 북한경제문제해결을 위한 포괄적 방안으로써 중국식 경제개혁개방의 모델을 크게 따를 것으로 예상된다. 강은 그러나 대남관계에 있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북한경제개혁·개방의 실효성을 보장하는 중요한 고리가 되고 있는 남북관계의 개선이라는 또 하나의 선택에 있어 어느 정도의 적극성을 발휘할지는 두고볼 일이다. 강의 총리기용과 함께 이번 인사에서 눈여겨볼만한 대목은 대외경제위원장인 김달현과 당국제담당비서 김용순의 당정치국후보위원 선출.각각 경제와 외교분야에 있어 개방파의 선두주자로 꼽혀온 이들의 부상은 북한이 남북경협의 활성화 및 대미·일관계개선 추진을 둘러싸고 빚어졌던 보수파의 반발을 잘 극복해나가고 있음을 대변하는 것이다. 또한 올해 나이 53세인 김달현과 58세인 김용순의 당정치국 후보위원진출은 북한의 권력구조가 김정일의 친위세력인 혁명2세대들로 세대교체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중앙위 간부부장인 김국태와 선전선동부장 김기남의 당비서선출 또한 김정일사단의 권력 핵으로의 진출을 입증하는 또다른 실례.김국태는 만경대혁명학원 1기생이자 전부수상 김책의 큰아들로 당에서만 성장한 전형적인 당료.당사상이론가의 한사람인 그는 68∼73년 선전선동부장시절 당내 유일사상체제 확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김정일의 정적인 계모 김성애와 당시 당조직부장이던 삼촌 김영주의 위상을 격하하는데 앞장서 후계자 김정일의 사람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89년부터 당선전선동부장을 맡아온 김기남은 당내 최고문장가로 개인적으로는 김정일이름의 노작관리와 축하문·연하장등을 대필해주며 공적으로는 북한의 모든 보도와 선전을 총지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선전선동부 부부장시절 사회초년병인 김정일을 만나 도움을 주면서 김과 친해졌는데 「우리식대로 살자」 「학습도 항일유격대식으로」등 북한 유명 구호의 대부분이 그의 손을 거쳐 나온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의 이번 인사는 경제난 타개에 초점을 맞춘 것이며 그 방향 또한 보다 전향적인 형태로 나타날 것임을 예고한 것으로 볼수 있다.그러나 북한의 경제개혁·개방은 단기적으로는 「체제내의 경제활성화」에 그칠 수 밖에 없을 것으로 관측된다.대외개방정책의 구체화 시기 또한 미국 및 남한의 정권교체가 공식적으로 이뤄진 뒤인 93년 3월 이후가 될 것으로 보인다.
  • 여객선 운항 55회 늘려/해항청/연말연시 맞아 승객 13만 수용

    해운항만청은 이달 30일부터 내년 1월3일의 연말연시 여객운항선박과 운항횟수를 늘리는 등 연안여객선 특별수송대책을 마련했다. 7일 해항청이 마련한 연말연시 특별수송대책에 따르면 이 기간 중 목포와 포항항에 여객선을 각 한척씩 추가로 투입하고 부산,인천,동해,목포,포항 등 5개 항구에서 출발하는 여객선의 운항횟수도 평상시보다 55회를 늘리기로 했다. 이에 따라 국내 연안항로 운항 여객선은 특별수송기간 동안 1백26척에서 1백28척으로,전체 운항횟수도 1천6백53회에서 1천7백8회로 각각 늘어나게 됐다. 해항청은 이같은 증선,증회를 통해 이번 연말연시 기간 중 지난해 같은 기간의 11만5천명보다 13%가 늘어난 13만명의 여객을 실어나른다는 방침이다. 해항청은 이 기간 중 여객 서비스 개선대책의 하나로 수송능력이 충분한 항로에는 1백% 예매제를 실시하고 수송능력이 부족한 항로에는 출항일 이전에 90%, 출항당일에 10% 범위내에서 예매할 계획이지만 항로별 특성에 따라 지방청이 재량을 갖고 출항일 이전과 출항당일의 예매 비율을 정할 수있도록 할 방침이다.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17)

    ◎유년시절:5/“7세때 3·1운동 참여” 우상화 극치/“총탄속에 짚신 벗어들고 독립만세”/온가족이 함께 육탄투쟁한듯 기술/생부 투옥때 면회내용도 날조 투성이 김일성이 만6세때 만경대에서 행동했다는 「사적」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군함바위:만경대 집 건너편 산 밑에 군함같이 생긴 바위가 있었다.김일성은 이 바위의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가 같이 탄 아이들에게 대장칼을 휘두르며 『원수 왜놈들을 베어버리자』고 돌격명령을 내렸다.그들은 만경봉 아래에 있었던 일제의 해각까지 돌격하였다.그래도 그는 부친을 투옥한 「왜놈」에 대한 증오를 삭일 수 없었다. ○“평생의 감명” 회고 ②김일성이 평양감옥에 부친을 찾아가서 면회했다는 이야기는 「세기와 더불어」에 나오므로 이것을 발췌해 놓는다. 우리가 들어간 면회실은 햇빛조차 잘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이었다.아버지는 나를 보자 반가워하면서 어머니더러 잘 데려왔다고 말씀하셨다. 수의를 입은 아버지의 모습은 상해서인지 알아보기 힘들었다.얼굴 목 손 발 할것없이 살이란 살은 온통 멍이 들고 상처가 나 있었다. 『네가 그새 컸구나.집에 돌아가면 어른들의 말씀도 잘 듣고 공부도 잘해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나는 『예,아버지도 집에 빨리 돌아오세요』하고 대답하였다. 그날 나는 아버지의 불굴의 모습에서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감명을 받았다. 그때 감옥에 가서 아버지를 만나고 온 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큰 사변이었다.아버지의 상처는 항일혁명투쟁 전기간 잠시도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1918년 가을에 형기를 마치고 감옥에서 나왔다. 필자는 김일성이 김형직의 감옥살이를 1919년이라 했다가 16년으로 변경한 후 17년이라고 다시 고친 사실을 앞에서 지적하였다.그런데 면회 갈때의 나이까지 몰랐던 그가 회고록에서는 면회실에서의 회화내영까지 선명하게 떠올리고 있다. 이런데서 이 면회극은 역시 창작이라고 밖에 볼수 없지만 어쨌든 북한의 어린이들은 이런 식으로 「원수에 대한 증오」와 「김부자에 대한 효성」으로 자체를 무장하고 있는 것이다. 김일성의 유년시절 우상화의 하이라이트는 만7세때 그가 3·1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야기이다.「회고록」에서는 일부러 「독립만세의 메아리」라는 1절을 설정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3월 1일 평양에서는 낮 12시에 종소리를 신호로 수천명의 청년학생과 시민들이 장대재에 있는 숭덕여학교 운동장에 모여들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선이 독립국가라는 것을 엄숙히 선언한 다음,「조선독립 만세」「일본인과 일본군대는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격렬한 가두시위를 벌였다.시위대열이 거리로 밀려나오자 수만명 군중이 이에 합세하였다. ○수만명 시위 주장 만경대와 칠골 인민들도 대열을 지어 평양으로 밀려갔다.우리는 이른 새벽에 조반을 지어먹고 온 집안식구가 독립만세 시위에 나섰다.떠날때 수백명에 불과했던 시위대열이 나중에는 수천명으로 불어났다.군중은 북과 징을 울리고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보통문쪽으로 밀려갔다. 그때 여덟살이던 나도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시위대열에 끼어 만세를 부르면서 보통문 앞에까지 갔다.성안을 향해 노도와 같이 밀려가는 어른들의 걸음을 나로서는 비슷이 따라 잡을수가 없었다.그래서 어떤때는 너덜거리는 신발짝이 거치장스러워 짚신을 벗어서 손에 들고 뜀박질로 대열을 따라갔다.어른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면 나도 함께 만세를 불렀다. 적들은 기마경찰대와 군대들까지 동원시켜 도처에서 군중에게 칼을 휘두르고 총탄을 마구 퍼부었다.숱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다.그러나 군중은 두려움을 모르고 원수들과 육탄으로 대항하였다.보통문 앞에서도 치열한 육박전이 벌어졌다. ○“양철통 두드렸다” 이날은 내가 나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처음으로 본 날이며 우리민족의 유혈을 처음으로 본 날이었다.어린 나의 가슴도 분노로 끓어 번졌다.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지자 마을사람들은 횃불을 들고 만경봉에 올라가 또다시 나팔을 불고 북을 치고 양철통까지 두드리면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런 투쟁이 여러날 계속되었다.나도 형복고모와 함께 어머니를 따라 만경봉에 올라가 만세를 부르며 밤늦게까지 있다가 내려오곤 하였다. ①무지개 비낀 만경봉 110∼119면 ②「세기와 더불어1」 30∼33면 ③같은책 36∼37면
  • 10년째 물난리겪는 목포시 저지대(심층취재)

    ◎매월 2차례 상습침수… 보름·그믐이 지겹다/만호때마다 역류… 오·폐수 악취 진동/영해 등 6개동 연간 재산피해만 17억/문턱 높이 쌓고 연탄부엌은 사용못해/“영산강하구언 축조때문” 보상 주장도 한달에 2∼3번씩 반복되는 목포시 저지대의 바닷물 범람을 막을 수 없는 것일까.목포시 영해동등 6개동 1천3백여가구는 10년째 바닷물과 싸우고 있다.지난 82년 영산강 하구둑 축조이후 매월 음력 보름과 그믐 때마다 바다수면 높이가 지면보다 높아져 바닷물이 넘쳐들고 있다.이로인해 주민들이 겪는 정신적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물적 피해는 엄청나다.주민들 추산으로는 재산패해만도 연간 17억원을 넘는다는 주장이다.그런데도 항구적인 피해방지대책은 커녕 해수면이 왜 예전보다 높아지는지 원인조차 규명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피해실태◁ 목표시 바닷물 침수피해지역은 영해동을 비롯,동명·서산·만호·온금·유달동등 6개동 28㏊에 이르고 있다.이곳은 특히 각종 어구상과 건어물상 철물점등이 들어찬 밀집상가로 목포경제활동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1천2백58가구 5천여 주민들은 매월 음력 보름과 그믐만 되면 수방훈련(?)으로 지치기 일쑤다. 올들어 바닷물이 가장 많이 들었던 지난 9월28일부터 31일까지 4일동안 이일대 도로와 상가는 80㎝까지 물이 차올라 한때 교통이 마비되고 상가와 주택가의 진열상품및 가재도구가 모두 물에 잠겨 엄청난 피해를 냈다. 이때 측정된 해수면 조위는 최고 5.07m나 됐으며 바닷물이 호안벽에 설치된 24개의 하수구를 통해 역류한데다.호안벽을 범람,상가가 물바다를 이루었다. 이곳에서 30여년동안 어구점을 경영해온 김동윤씨(45)는 『지난 9월 바닷물 침수때만도 6백여만원의 재산피해를 입었으나 보상 받을 길이 막막하다』며 특별대책을 호소했다. 또 송애용씨(59·여 숙박업·영해동1가2)는 『바닷물이 재래식 화장실을 통해 안방과 부엌등으로 넘쳐 들어오는 바람에 오·폐수가 냉장고·세탁기·장농등을 덮쳐 4백여만원의 재산피해를 있었으며 집안청소를 하는데도 이틀이나 걸렸다』고 털어놨다. 이곳 바닷물 침수지역 주민들은 바닷물 범람에 대비,방 한쪽에50∼60㎝높이의 물치장을 따로 만들어 이불등 가재도구를 보관하고 있는 실정이다.이곳에서 연탄아궁이는 이제 거의 쓸모가 없고,대문 문턱과 방문턱이 20∼30㎝가량 높아진 것도 이곳에서만 볼수 있는 진풍경이다. 주민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백중사리나 만조때 마다 하수구를 통해 오물이 거꾸로 집안으로 넘쳐드는 것.악취가 심하고 가재도구를 버리기 때문이다.이같은 바닷물 침수피해는 바다건너 영암군 삼호면 용당리 선창마을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목포 저지대는 상업지역으로 비좁아 대지면적 15평이하는 신·개축이 불가능한 도시계획에 묶여 주민들이 의도대로 건축물을 고치거나 집을 높일수 없다는데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침수원인◁ 목포 바닷물 침수는 영산강 하구둑 축조가 원인이라는 주민들의 주장과 지구 온난화로 인한 바다수면 상승설이 팽팽히 맞서 있다. 주민들은 영산강 하구둑이 완공되기전인 81년까지만해도 만조때도 바닷물이 넘치는 일은 없었다고 말했다. 목포해양대 정명선교수(항해학)는 공학박사학위 논문을 통해 영산강유역 개발이 해수면 조위상승 원인이라고 주장했다.이 논문에 따르면 영산강 하구둑 축조에 이어 현재 영산강개발 3단계 사업으로 추진중인 영암·금호방조제가 완공되면 목포항 인접지역은 물론 내항의 수위가 20∼40㎝가량 더 불어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실제 교통부 수로국 조위표에 따르면 둑설치 이후인 82년부터 목포항 인근만조위가 4·94m로 무려 38㎝나 상승했다.주민들은 따라서 목포바닷물 침수는 인재이므로 국가가 피해를 보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농어촌진흥공사 영산강사업소측은 이에대해 『하구둑 건설이후 조위가 어느정도 상승한 것은 사실이나 침수피해가 하구둑 공사에 따른 조위의 변화 때문만으로 단정하기 어렵고 전반적인 지구온난화 현상,해수밀도변화등 복잡한 원인에 기인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사업소 임채영관리부장(55)은 『교통부 수로국의 조위변화분석을 보면 군산12㎝ 여수10㎝ 목포19㎝등 서해안 일대 최고 조위가 지난 80년이후부터 꾸준히 상승해 왔다』며 『목포 내항일대의 침수피해가 영산강종합개발로인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영산강 개발사업은 현재 하구둑 완공에 이어 3단계 사업인 영암군 삼호면 삼포리(목포에서 15㎞위치)∼해남군 산이면 구성리를 잇는 2.2㎞구간의 영암방조제(Ⅲ­1지구)공사가 내년 10월 완공을 앞두고 있는데다 영암군 삼호면 달도∼해남군 산이면 금호도를 잇는 2.1㎞의 금호방조제(Ⅲ­2지구)연결공사가 5백여m를 남겨두고 있어 이 공사가 완공되면 수위가 더 높아질까 주민들은 벌써부터 걱정이 태산이다. ▷방지대책◁ 목포시는 1단계 응급대책으로 지난 10월30일부터 28억원을 들여 해안 1.6㎞에 차수벽을 설치하고 2백34m의 파도방지벽과 2백31m의 안벽정비,24m의 하수구를 16개로 통폐합하는 등 호안정비 공사를 시작,내년 말까지 완공예정이다. 또 2단계로 영해동·만호동·온금동 등 3개 지구에 50여억원을 들여 배수·펌프장을 만들어 만조때 차수벽 설치로 인해 빠져나가지 못하는 생활하수를 뽑아 낼 공사도 서두르고 있다. 한편 전남도는 해수면조위상승원인을 과학적으로 규명,대책을 세우기 위해 지난 6월한국 해양대학교부설 항만연구소에 「목포항주변 조위상승 원인분석및 항구대책 수립」에 관한 용역을 의뢰해 놓고 있다. 도는 이와함께 영해동등 상습침수 피해지역 주민들의 이곳에 대한 재개발지역 지정요구에 대해 현행법상 불가능하다고 판단,이 지역을 국토개발종합계획법에 따른 특정지역고시여부를 관계부처와 협의하고 있다. ◎관계기관 대책/“물막이 설치·낮은 지반 돋우겠다”/간선도로 만수위보다 높이고 하수구 정비/이만의 목포시장 『지난 10여년간 주기적으로 계속해온 목포시 저지대의 바닷물침수사태는 그동안 부분적으로 외부에 숨겨온 것도 사실입니다.그러나 이제부터는 쉬쉬하고만 있을게 아니라 중개적으로 외부의 자문과 지원을 얻어 이를 적극 해결해 나갈 계획입니다』 목포시정을 책임지고 있는 이만의시장은 『지난9월 발생한 남해방조제 붕괴사고로 목포의 「물문제」가 전국에 알려져 시정 책임자로서 부끄럽게 생각하지만 이는 근본대책마련을 위해 오히려 다행한 일』이라 말하고 재임기간동안 피해주민들의 입장에서 바닷물 침수지역의 항구대책을 세워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이시장은 이를위해 1단계로 내년말까지 침수지역에 해수차수벽을 설치하고 호안벽보다 낮은 영해동 일대 도로 8백90m를 만수위 수면높이로 높일 계획이다. 그는 특히 『이번 기회에 목포시 전체의 하수구를 재정비하고 저지대 지반을 높이는등 해수 침수피해문제를 새 도시계획 차원에서 해결해 나갈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이시장은 이와함께 침수피해지역을 특수지역으로 지정하고 관련조례를 제정,건축물 증·개축을 쉽게할수 있는 방법을 신중히 검토중임도 밝혔다. 그는 또 지난6월 한국해양대학 「항만연구소서에 의뢰한 해수조위상승원인 규명」용역결과를 토대로 목포인근 방조제축조등 물막이 공사가 조위상승원인으로 밝혀지면 이에 대한 특별대책을 마련해 관계부처에 건의할 계획도 세워두고 있다. 이시장은 『목포시가 최근 중국 연운항시와 자매결연을 하는등 대중국 무역전진기지로서 서해안 시대의 중추적 도시로 떠오르고 있다』며 목포의 명성을 되찾는 차원에서 바닷물 침수피해문제를 해결할 작정이라고 덧붙였다.
  • 설창수씨 진주 원로시인·76(대상)

    ◎진주개천예술제 43년간 이어와 『향토문화 창달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모든 분들을 대신해 상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서울신문사제정 제8회 향토문화상 대상 수상자로 뽑힌 설창수옹(76·경남 진주시 칠암동 56)은 앞으로 남은 삶도 우리 전통의 문화예술을 지키는데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1949년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제전인 개천예술제를 창제해 전국 종합예술제전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회장및 제사장을 맡아 헌신적 공헌을 해온 그는 평생을 두고 진주를 지키면서 지방문화운동을 벌여온 경남예술계의 원로.청년시절부터 희수를 맞은 지금까지 꾸준히 창작활동도 계속하면서 7백여편의 시와 1백여편의 수필을 발표했고 지난 47년 영남문학회를 만들어 14년간 운영하는등 경남지역 예술문화 발전에 디딤돌 역할을 해왔다. 일제시대 때 왜정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투옥돼 2년간 옥고를 치르는등 항일애국운동가로도 활동,지난77년 독립유공자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한 그는 현재 광복회 경상남도 지부장을 맡아 애국충절의 정신운동을 지도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지난 46년부터 16년동안 신문사 주필등 언론인 활동을 통해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대쪽같이 곧은 성격을 펜으로 표현해 왔으며 지금도 한달에 한번씩 논설을 기고하고 있다. 『앞으로 살아있는 동안 우리의 전통문화 계승운동과 함께 제대로 된 시 한편을 쓰고 싶다』는 그는 현재 「낙동강 1천3백리」라는 장편서사시 창작을 준비하고 있다고 노익장을 과시했다. 그는 『향토문화를 지키고 가꾸는 것이 곧 전통문화계승의 밑거름이 된다』며 『이를 위해서는 우리 것에 대한 우리 모두의 관심과 애착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언론입국에 생애바친 선각자/서울신문 초대사장 위창 오세창선생

    ◎독립운동·저술 등서 뚜렷한 발자취/23세에 첫발… 필봉으로 민족혼 고취/팔순고령에도 본지서 해방조국 정론기개 불태워 『매일신보는 이제 혁신되어 이름조차 새로운 「서울신문」으로 냅떠 나서게 되었다.…우리는 일당일파에 기울이지 않고 언론보도에 공정하고 적확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민족총력의 집결통일과 독립완성의 시급한 요청에 맞추어 단호매진하는 동시에 국내를 비롯하여 연합우방의 동업기관과 더불어 민주주의적 질서수립을 위해 상응한 노력을 기울이려 한다…』19 45년 11월22일 혁신사란 이름의 서울신문 창간사중 일부이다. 언론입국의 기치를 이같이 내걸고 새로 태동한 서울신문에 초대사장으로 추입,격랑의 그 어려운 시절을 이끌던 이는 바로 위창 오세창선생이었다. 큰 체구에 근엄한 표정,그리고 절고의 기품과 해박한 지성으로 명성 높은 원로 민족인사였다.위창은 33인(3·1운동)의 한사람이자 불굴의 독립투사로 더 이름이 높다.또 근대미술사의 한 획을 긋는 탁월한 서예인이었다.그의 행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개화사상 일찍 눈떠 개화운동및 개화사상가,언론인,종교인,전각가·저술가·고서화 수집가를 덧붙여야 할 만큼 다각적인 발자취를 남긴 민족근대화의 선각자였다.특히 개화사조의 계몽과 주권의식의 고취를 민족에 불어넣기 위해 벌였던 개화및 언론활동은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인식을 새롭게 할 만큼 빛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위창은 개화사상에 일찍이 눈을 뜬 부친 오경석과 은사 유대치의 감화를 받아 일찍부터 개화및 진보적 사고를 지니게 되었다.자신의 개화사상이 곧 민족의 근대화를 이루는 지름길로 여겨 개화운동의 전면에 나선 것이 약관 23세이던 18 86년의 일이다.박문국의 주사로서 당시 관보였던 「한성주보」의 기자를 겸하면서 처음 언론을 대했다. 정치적 격변의 시대이기도 했던 그무렵 위창은 지위를 높여 영화를 누릴 기회도 많았으나 이를 마다하고 필봉의 길을 택했다.언론을 통해 민족에 개화의식을 심어 끝내는 국권회복의 길을 앞당기려는 깊은 뜻을 품었기 때문이었다.기자생활은 18 88년 7월 한성주보가 폐간될때까지 1년8개월간에 불과했다.그러나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민족을 일깨우는데 집념을 불태운 그 세월은 결코 짧은 것이 아니었다. 그뒤 31세이던 18 94년 국군기무처의 낭청(총재비서관)자리에 관직을 얻은 그는 당시 영의정이던 김홍집의 3차내각이 무너지기까지 의정부주사·농상공부 참사관·통신국장을 지내면서 줄곧 정부시책을 통해 또다른 민족근대화 작업을 집요하게 폈다. 위창의 민족개화운동은 도쿄 망명중 동학교주 손병희를 만나 입교하면서 그 날개를 더 달았다.19 06년에는 항일구국운동을 위한 신문 「만세보」를 손병희의 재정적 후원으로 창간,사장에 취임하면서 본격화 하기 시작했다.당시 위창은 주필로 국초 이인직을 취임시켰다.이인직의 신소설 「혈의 누」가 처음 발표된 것도 바로 「만세보」지면을 통해서였다. ○「만세보」 사장 취임 그러나 만세보는 경영난에 빠져 이듬해에 폐간되는 비운을 겪었다.위창은 권동진·장지연·김가진등과 「대한협회」를 조직,사회개혁과 항일운동을 계속했다.그러면서 이상재·김규식·안창호등과 「대한학회」발기인으로활동한 위창은 19 05년 5월 대한협회의 기관지 성격으로 「대한민보」를 창간,다시 사장으로서 항일언론을 지속하는등 민족을 위한 투쟁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대한민보는 창간 이듬해 한일합병으로 사라지고 말았으나 당시 매우 획기적이고 용기있는 신문편집을 단행한 것으로 유명하다.창간호부터 1면에 청년화가 이도영이 붓으로 그린 비판적 시사만화를 연재한 것도 이때다.시사만화는 미련한 놈이 도끼로 나무를 찍다가 자루가 빠지는 바람에 도끼날이 제 발등에 떨어져 찍히는 내용이었다. 이 만화의 설명은 당시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이미완용(이미완용)자부상피(자부상피)」라는 설명이 그것인데 당시 「매국대신 이완용이 자부와 상피붙었다」는 소문을 풍자한 내용이다.대한민보에는 이밖에도 일제통감의 침략행위와 일인들의 악행을 풍자한 만화도 등장했다.또 우리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당한뒤에도 군복을 입고있는 이완용내각의 군부대신 이병무의 모습을 그려놓고 「벌거벗고 군도차기」라고 꼬집은 만평이 게재되기도 했다. 이 모든 비판적 만평은 위창의 항일언론정신에 바탕한 것은 물론이다.당시 그같은 통렬한 설명도 위창이 직접 붙인것으로 알려져 있다.매우 엄격하고 불의에 타협않는 단호한 성품의 소유자였던 위창은 과묵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기도 했다.말과 행동을 늘 은인자중하여 심중을 알기 어려울 정도였으나 기회를 얻으면 결코 방관하지 않는 기민성을 보이기도 했다. 생전에 술과 담배는 즐겼다.19 19년 3월 민족대표 33인중 한사람으로 왜경에 체포,실형을 받은뒤 술을 끊기까지 두주불사에 줄담배였다. 한국서화사연구의 혁혁한 공로자로서도 언론인 못지않게 이름이 높다.김석학의 대가이던 부친 적매 오경석의 아들답게 근대적 미술가단체의 효시인 서화협회의 발기인이자 민족서화계의 정신적 지도자로 큰 폭의 활동을 했다.위창이 서화사연구와 전서쓰기및 전각에 전념하기는 통한의 국망을 본 이후 천도교도사로 은거하면서였다. ○서화사연구에도 열성 그리고 고서화수집가로도 유명했다.한학과 김석학에 깊은 조예가 없이는 손대기 어려운 전서에 뛰어났다.전서로당대의 일인자였던 그는 예서를 씀에도 고격하여 독보적인 존재이기도 했다.전서의 높은 경지와 함께 전자를 돌도장에 새기는 전각에서도 근대이후 일인자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남긴 미술사적 공적은 「근역서화징」의 편저이다.「근역서화징」은 삼국시대이후 3백92인의 화가와 5백76인의 서가,그리고 시·화를 겸했던 1백49인의 기록을 시대순으로 정리한 책자를 말한다.필생의 대업적인 「근역서화징」은 오늘에도 그 방면의 유일하고 거의 완벽한 사전으로 학계와 사회의 길잡이가 돼있다. 육당 최남선은 이 책자가 출간되었을때 『암흑한 운중의 전광』이라는 표현으로 그 업적을 극찬할 정도였다.위창은 또하나의 편저업적인 「근역인수」를 남겼다.조선시대 초기부터 근대에 이르는 서화가 8백56인의 성명·아호·별호·자·이명의 도장 약3천8백종을 실제의 날인본으로 모은 것이다.한국전각예술의 역사적 흐름과 실제 사용의 행적을 보여주는 최대의 자료집성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밖에도 1천1백16점의 글씨와 그림을 묶은 「근묵」이며삼한의 와당을 모은것등 많은 문화재를 수집 정리했다.위창이 명현석유를 비롯한 옛서화가들의 필적을 이처럼 모아 정리한것은 단순한 취미에서가 아니었다.선인들의 문화유품이야말로 민족의 정신적 생명으로 인식,이를 아끼는 마음에서 였다.그것은 위창의 애국애족정신과도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그의 이러한 정리작업은 광복을 맞기까지 지속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뒤 일제가 패망하고 국권을 찾으면서 위창은 팔순의 고령으로 서울신문 사장에 추대되었다.광복의 땅에서 우리말로 정론을 펴는 서울신문 초대사장에 취임한 그는 얼마 안되는 세월이었지만 노후의 기개를 불태웠다. 8·15 1주년을 맞아 지난날 일제에 빼앗겼던 대한제국 황제의 옥쇄를 민족을 대표하여 인수했던 위창­.그는 6·25로 가족과 함께 내려간 피란지 대구에서 1953년 4월 세상을 떠났다.그때의 나이 천수를 다한 90세였다.
  • 중국서 항일독립운동/황병길선생 유해 봉환

    일제때 독립군으로 만주등지에서 항일운동을 하다 중국에서 순국한 황병길선생(건국훈장독립장)의 유해가 천인호편으로 천진항을 출발,18일 상오 인천항으로 봉환되었다.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11)

    ◎김형직의 사망신화:2/“아사·타사·동사 3대각오 지시” 등 꾸며/사실은 급사… 많은 재산 남긴것엔 함구 김일성은 부친 김형직이 죽기 직전에 「유언」을 받았다고 선전하고 있다.「세기와 더불어」는 이 유언을 김일성이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전유산」이라 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원의 사상,3대 각오,동지획득에관한 사상,두자루의 권총,이것이 내가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유산의 전부였다」
  • “대륙의 은인” 교과서에도 실려/김우종(특별기고)

    ◎올 추모오페라 공연·사료집 편찬중 안중근은 하얼빈과 여순 뿐 아니라 온 중국인들이 잊을수 없는 인물로 떠올리고 있다. 1919년 5·4운동 전후의 중국을 보면 「안중근」연극이 널리 상연될 정도로 높이 추앙되었다.주은래총리와 등영초여사도 천진남개대학시절에 「안극」의 배우로 등장하였다고 한다.1920년대 중기부터 중국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립으로 10년 내전의 참화를 겪었으나 안중근은 이연히 국공양쪽에서 다같이 숭배하는 인물이었다.1937년 7월 국공합작으로 항일전쟁에 뛰어들었을 때 주은래와 곽말약이 지도하는 극단 「남사」는 무한과 장사등지에서 「안중근」연극을 연출하였다.그때 항전에 나선 중국청년들을 크게 고무하였다.중화인민공화국 건국초기에도 안중근은 소학교 교과서에 실린 애국영웅인물이었다.특히 중국의 조선민주들에게 있어서 안중근은 정신적 지주로 마음에 자리잡아 왔다.독립군,항일유격대,의용군,광복군들은 다같이 그를 숭배하면서 또 노래하였다.중국사람들은 예로부터 의사를 숭배해왔다.안의사는 의사 중에서도 걸출한 분이다.그의 행동은 조국독립을 수호하기 위한 애국의 거사이고,동양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정의의 거사였다.오로지 민족과 조국을 위함이고 자기자신은 버렸다. 오늘 우리들은 안의사를 연구하고 그의 정신과 사상을 재조명하고 있다.동양의 평화를 위해서는 안의사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그래서 하얼빈의 학자들은 안중근관계사료를 중·한·일과 협력하여 발굴,「안중근사료집」을 편찬중에 있다.연구사업을 더욱 추진시키기 위해 안중근연구회를 만들게 되었다.또 문예계에서는 금년 3월 국내외 각계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하얼빈시 문화국장 왕홍빈 창작 오페라 「안중근」을 공연,관중들의 찬양을 받았다.그리고 흑용강성혁명박물관에도 안의사의 사진과 휘호도 전시하였다. 중국인은 항일투쟁에서 수많은 국제적 벗들을 만났다.그리고 지지와 동정을 받았다.중국인민들은 이 소중한 친선의 역사를 후대들에게 전해주는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생각한다.안중근의사의 의거지점인 하얼빈에서는 더 뜻있게 그를 기념하는 문제를 여러가지로 생각하고있다.
  • 북한판 「범죄와의 전쟁」(북한 이모저모)

    ◎방화 살인·식량약탈 잇따르자 공안당국 나서 ○김일성 관심 큰 목란꽃 지난해 4월 국화 지정 ○…북한이 목란꽃을 국화로 지정한 것은 지난해 4월 10일인 것으로 밝혀졌다. 조총련기관지 조선신보 최근호에 의하면 북한에서 목란꽃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지난 65년 이후로 그해 5월 정방산에서 목란꽃을 본 김일성이 과거 창덕학교시절 수학여행차 정방산에 올랐을때 이 꽃을 처음 목격했다며 관심을 나타내면서 부터라고. 그후 김일성은 항일 빨치산시절 이 꽃을 통해 조국을 그리워 했다고 술회한데 이어 68년 7월 평양중앙식물원을 방문한 자리에서 다시 한번 목란에 얽힌 이야기를 했으며 직접 금수산의사당에서 이 꽃을 키우고 번식방법도 알려주었다고 이 신문은 소개했다. ○…최근들어 북한주민들의 범법행위가 점증,심각한 사회불안요인으로 등장하자 북한 공안당국이 범법자 일제 검거에 나서 주목되고 있다. 북한판 범죄와의 전쟁이랄 수 있는 범법자 일제단속은 살인·강도·절도범 등 중범죄자는 물론 소매치기범·불량청소년·식량약탈범 검거색출에 중점을 두고 실시되고 있다. 북한이 이처럼 범법자 집중단속에 나선 것은 최근 사리원시에서 절도범에 의한 가정집 방화사건과 남포시에서의 일가족 4명 살해사건 등 강력 범죄가 북한 전역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데도 북한 공안당국이 범인검거보다는 사상범 적발에 더 신경을 써 이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된데다 『외화(달러·엔화)면 안되는 것이 없다』는 외화숭배사상이 주민들에게 만연되어 평양을 방문한 외국인을 상대로 한 소매치기 사건이 빈발,관광객들의 항의 신고가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북한 공안당국의 치안무능에 따른 주민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김정일은 최근 각 공안기관에 범법자 소탕및 범죄재발방지대책 강구지시를 내렸는데 범죄의 경중에 관계없이 3회 이상의 누범자는 산간오지 강제수용소에 격리 수용토록 지시를 내렸다고. ○수정같이 깨끗한 얼음 천지의 겨울풍경 소개 ○…백두산 천지의 겨울풍경은 지형적인 특성과 고산지대특유의 기후변화로 인해 유달리 신비롭고 아름답다고 평양신문 최근호가 소개했다.약 19억㎥의 맑고 깨끗한 수양이 항상 넘쳐 흐르는 천지는 대개 9월부터 얼기 시작하여 이듬해 6월까지 결빙상태를 유지하면서 백두산의 설경을 한껏 북돋워 준다. 천지의 물이 맑고 깨끗한 만큼 천지의 얼음도 수정같이 정갈하고 그 색조 또한 아름답기 그지없다. 천지의 얼음 두께는 평균 1.5m나 되지만 20여m 깊이의 바닥에 깔린 흰 부석들이 선명하게 들여다 보인다.
  • 삼고초려에 “국가가 부른다면 수락”

    ◎「중립내각」 이끌 현승종총리 스토리/교단46년 학생사랑·직언 일관/정도 어긋날땐 단호하게 질책/평남 개천출신… 2개대학총장 역임 14시간의 대장고끝에 내린 결정이었다.「국가와 국민이 부르므로…」.하오10시에 춘천집에 도착한 「신임총리」는 밖의 수많은 보도진이 몰려있음에도 아랑곳없이 이튿날 낮12시가 되어서야 대문을 나섰다. 현승종교총회장에 대한 국무총리 지명과정은 삼고초로의 고사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헌정사상 신기원인 중립내각을 출범시키려는 노태우대통령의 의지와 46년간 교직을 떠나본적이 없는 원로교육자 현회장의 총리직 수락에 대한 번민은 결국 역사의 소명앞에 하나가 됐다. ○“역사적 소명” 번민 현회장은 총리직 수락을 여러차례 고사했다.천직으로 알고 살아왔던 교직생활과 역사적책임 사이에서 신임총리는 번민했다. 그러나 결국 『국가의 부름이라면 기꺼이 나서겠다』고 결정했다. 국가는 「학생사랑과 직언」으로 한평생을 살아온 노교육자를 세상에 나오도록 강요한 것이다. 현신임총리는 역시 교육자출신 총리이다. 6공들어 이현재·강영훈·노재봉·정원식 전임총리도 모두 교단에 섰었다. 항간에는 이번 중립내각의 총리가 단명할것이라느니 잘해야 본전일것이라는 얘기들도 나돈다.물론 과도기의 중립내각임에는 틀림없다.그러나 60년 4·19이후 허정총리의 과도내각이 불과 3개월여기간이었지만 당시 총선을 훌륭히 치러냈던 역사적 경험이 우리에게는 있다. 따라서 이번 「현승종 내각」에 거는 기대도 여느때와는 다르다. 그는 일제치하인 43년 경성대법과를 졸업한뒤 고려대전임강사를 시작으로 고대교수·학생처장·성균관대총장·한림대총장에 이르기까지 단 한번도 교직을 떠나본 적이 없다. ○강직한 선비 품성 성균관대총장이던 80년 「서울의 봄」당시 총장실복도에서 농성하던 제자들의 모습에 실망,즉각 사표를 제출해 선비다운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제자들은 스승을 생각할 때면 항상 깐깐하고 소신있는 선비의 모습과 함께 학생들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몸을 아끼지않는 자상한 모습을 떠올린다. 4·19당시 팔을 뿌리치며 달려나가는 제자들의 옷자락을 잡고 『제발 몸조심하라』며 눈물을 흘리던 모습은 두고두고 고대 4·18세대의 화제로,「눈물교수」의 추억으로 간직된다. ○주말등산 노익장 3·1운동직전인 1919년 평남 개천에서 출생,항일의병장이었던 조부가 개설한 서당(삼수재)에서 한문을,개천보통학교에서는 신학문을 공부했다.평양고보시절 그의 성적은 뛰어났고 특히 수학·자연과학분야에서는 「독불장군」으로 불리기도 했다. 대학졸업후 학병에 징집당한 그는 견습사관시절 중국 남경에서 해방을 맞았다.그러나 그의 귀국은 해방 이듬해인 5월이었다.귀국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으나 병든 동포들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이들 뒷바라지 때문에 늦어졌던 것이다. 현총리는 올해 73세의 고령이면서도 비상한 기억력과 등산으로 다진 건강을 과시하고 있다. 부인 홍영표여사(70)와의 사이에 3남1녀를 두고있으며 한림대총장 취임후부터 춘천의 32평아파트에서 부인과 단둘이 생활해왔다. 「다시 한번 태어난다해도 학원에서 한평생 일하고 싶다」는 현총리의 학자적 소신과 교육행정경력,강직한 성품은 새역사 현장을 지켜보는 국민들의 기대와 겹쳐 내일을 궁금하게 하는것이다.
  • 민자는 「새정치」 창출 주역(사설)

    노태우대통령이 9·18단안의 정치적 실천과정으로서 5일 민자당 탈당절차를 끝냈다.대통령으로서는 그 자신 불퇴전의 공명선거관리의지를 내외에 행동으로써 극대화하는 요식절차일 수 있으나 이날 민자당 중앙당사의 분위기는 어딘가 매우 가라앉은 것 같았다고 전해졌다. 지금부터 민자당은 이렇게 해야한다.즉 안정을 중시하는 국민들의 시선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원내 제1당인 민자당의 결속과 안정은 개별정당의 차원을 넘어서 정국전반과 국정의 안정에 직결돼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는 말이다. 노대통령의 탈당은 결코 민자당이 원하던 방향은 아니었으나 정책정당 민주정당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체질개선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다른 기회가 될 수 있다.우리가 이 난에서 누차 강조했듯이 민자당은 노대통령의 탈당을 계기로 삼아 자전자활의 의연한 새 면모를 보여주어야 한다.막강한 집권여당에서 단순 다수당으로 위상이 바뀐 민자당의 홀로서기는 우리 정치사상 처음으로 여당의 자생력이 시험되는 케이스다.민자당이 이 도전을 성공적으로 극복할때 우리 선거문화와 정당정치는 새로운 발전단계로 접어들 수 있다. 그러자면 민자당은 노대통령의 탈당을 자성과 결의의 두 측면에서 수용하는 것이 마땅하다.이른바 밀어붙이기식의 당운영이 아니라 번거롭더라도 공조직을 통한 당론수렴 절차를 존중함으로써 화합과 당내 민주화를 더욱 다져나가야 한다.노대통령과의 차별화가 불가피하겠지만 주요 국가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된다. 정부와 제1당간의 협조관계가 원활하지 않을 경우 국정은 난항일 수도 있다.따라서 중립내각의 공정성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내에서 정부와 다수당간의 긴밀한 정책협조는 바람직하다는 것이 우리의 견해다.더욱이 노대통령이 여당후보로 당선됐고,또한 정책과 이념의 차이로 당을 떠난것이 아닌 이상 민자당은 노대통령의 국정운영과 임기 마무리에 적극 협조하는 것이 도리라고 본다. 그동안 민자당은 관례화된 당정협의를 통해 정부의 장단기 정책검토자료와 방대한 정보를 공유 할 수 있었다.그러나 노대통령의 중립선언으로 이러한 특수관계 유지가 어려워진만큼 이제 민자당은 과거의 안일한 정부의존에서 벗어나 독자적 정책개발을 강화해 나가야할 것이다. 노대통령의 당적이탈이 정치적 현실로 굳어진 이상 민자당은 그야말로 패전의 각오와 결의아래 스스로의 힘을 다지고 결연한 「공명의지」를 키워나가야 한다.그것이 이제 과거와 위상이 바뀐 다수당에 대한 기대와 격려인 것이다.
  • 임정청사를 독립운동 성지로/김학준 대통령공보수석비서관(특별기고)

    ◎선열의 나라사랑 배울 민족도장 가꾸자 백범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는 감격스러운 대목이 많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읽는 이의 마음을 울리는 대목은 『감옥에서 소제를 할 때에 내가 하나님께 원하기를 생전에 한번 정부의 정청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게 하여 줍소사 하였다』는 술회일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백범의 겸허하면서도 진솔한 인품을 새삼 확인하게 될뿐만 아니라 백범이 얼마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존중하였는가를 실감하게 된다.백범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조국광복의 성업을 이끌어갈 민족의 심장부이면서 기관차였던 것이다. ○백범,문지기 자청 그리하여 백법은 3·1운동 직후에 임정에 참여하면서 『임시정부의 문 파수를 보게 하여 달라』고 청원했다.그때 임정은 총장제를 채택하고 있었다.총장이 오늘날의 장관에,차장이 오늘날의 차관에 각각 해당됐는데 백범 스스로의 표현으로 「새파란 젊은이들」이 차장으로 총장의 직무를 대행하는 경우가 흔했다.그런데도 그때 이미 만 43세로 독립운동의 선배인백범은 낮고 낮은 문 파수 일을 자청했던 것이다. 그때 내무총장으로 국무총리를 대리하던 도산 안창호는 백범의 청원을 의아스럽게 여겼다.그러자 백범은 『나는 실력이 없는 하명을 탐하기를 두려워한다』면서 문 파수 자리를 고집했다.이에 도산은 『나이 많은 선배로 문 파수를 보게 하면 젊은 차장들이 드나들기에 거북하니 경무국장으로 하자』고 우겼다.그래서 백범은 마지못해 임정의 경무국장에 취임했다. 백범이 문 파수 일만 할 수 있어도 영광이라고 생각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운명은 참으로 기구한 것이었다.여기저기로 옮겨 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고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게다가 우리 겨레 사이에서도 기대가 많이 줄어들었다.일본이 임시정부를 가정부라고 깎아내린 것은 논외로 한다고 해도 좌익은 좌익대로 임정을 아예 무시했고 우익 가운데서도 일부는 임정을 인정하는 데 인색했다.국내의 백성들도 임정을 잊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백범의 표현으로는 『그때로 말하면 임시정부라고 외국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한인으로도 국무워원과 십수인의 의정원 의원 밖에는 와 보는 자도 없었다.그야말로 이름만 남고 실상은 없는 임시정부』였다. ○집세 못내 큰 곤욕 이러한 형편인지라,다시 백범의 회고에 따르건대 『경제의 곤란으로 정부의 이름을 유지할 길도 망연하였다』임정사무실의 집세가 30원이요 심부름꾼 월급이 20원 미만이었으나 이것도 낼 힘이 없어서 집 주인에게 여러번 송사를 겪었다.뒷날 임정의 주석이 된 백범은 이 사무실에서 자고 밥은 전차회사의 차표 검사원 직업을 가진 동포의 집으로 이집 저집 돌아다니면서 얻어 먹었다. 이처럼 비참한 상황이었지만 임시정부는 여전히 일제 아래서의 항일 독립운동의 정신적 구심점이었다.이 임정이 뒷날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도 하고 마침내는 좌우익의 연립내각을 세워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는 모체가 되는 것이니 우리 대한민국이 그 출발점을 임시정부에 두고 있음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백범이 주석으로 이끌던 임정의 청사는 그때의 주소로는 상해 프랑스조계 마랑로 보경리 4호에 있었다.여기서 백범은 「백범일지」상권을썼으며 이봉창 의사및 윤봉길 의사와 각각 모의하기도 했다.한 마디로 민족독립운동의 성지라고 할 것이. ○윤 의사 거사 모의 노태우대통령은 중국공식방문의 마지막 날인 지난 9월30일 귀국길에 상해에 들러 이 성지를 방문했다.현재의 주소로는 상해시 노만구 마당로 306 농 4호이다. 말이 청사이지 그것은 넉넉하지 않은 인구밀집지역의 동네 골목길 어느 어간에 있는 허름한 연립주택이었다.건평 약30평의 크기로 중국인 다섯 가구가 살고 있었다. 이 건물을 우리 쪽에서 임정 청사로 공식 확인한 것은 지난 88년이었다고 한다.그 뒤에 상해시는 이 건물을 노만구의 문화재로 지정했으며 상해시 노만구 숭산로 가도문물보호관리소장으로 하여금 관리하도록 했다. 대통령을 비롯한 수행원 일행은 외형의 초라함에 놀라면서도 경건함과 숙연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선열들의 조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새삼 확인하면서 그 거룩한 정신을 오늘에 사는 우리겨레 모두가 본받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되새기게 되었다.그러한 뜻에서 이 청사가 앞으로 잘 복원되고 성역화됨으로써 민족교육의 새로운 도장이 될 것을 기대한다.
  • 새 전기 「세기와 더불어」를 보고(신고 김일성 자서전연구:1)

    ◎연재를 시작하며/역사의 고비마다 갈이입은 「사상의 옷」/통일 앞두고 그의 정체 정통하게 알아야/52년 40세때 초간후 수없이 개작/이번엔 “이민위천이 좌우명” 주장 김일성은 이번 80회 생일에 「세기와 더불어」란 회고록을 냈다.그가 태어난 1912년 무렵부터 항일유격대를 조직했다는 1932년까지를 2권으로 나누어 회고한 자서전이다. 따라서 이 회고록은 앞으로 1932년부터 해방된 1945년까지,또 해방후 1992년까지를 구분해 합계 십몇권 정도 나올 것이 예상된다.제1권이 3백61페이지이므로 적어도 5천페이지 정도되는 방대한 김일성 일대기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김일성은 여느 공산국가 독재자들과는 달리 자기의 「전기」를 즐겨 출판하는 것으로 유명하다.출판하기만 하면 그것을 국내는 물론 해외에까지 보급하는데도 열심이다. 그는 또 유달리 꺾어지는 해의 생일을 중시하여 이 때 공식전기를 출판한다.이 전기들은 다음과 같이 시대가 내려 올수록 그 분량이 방대하게 되는 특성도 있다. ○62년엔 중공계 숙청 1952년(40세 생일)「김일성장군의 전기」1권 68면.1972년(60세 생일)「김일성동지 작전」1권 8백60페이지.1982년(70세 생일)「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전기」3권 합계 1천5백페이지. 이상을 보면 그가 50세 생일을 맞은 1962년에는 공식전기가 나오지 않았다.52년의 전기가 나온 후 북한에서는 남로당파·소련파·연안파·국내파들이 모두 숙청되었으므로 김일성은 62년에는 중공계 항일빨치산이었던 그와 그 일당만을 「진정한 공산주의자」로 둔갑시키는 「공식전기」를 출판하여야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일당조차 진정한 공산주의자로 취급하는 아량은 없었다.그는 1967년에는 식민지시대 보천보전투에 참가한 박금철 등을,그리고 69년에 그와 가장 가까운 빨치산시대의 전우인 최광등을 숙청하였다. 이 숙청과정인 1968년 그는 자기만을 진정한 공산주의자로 둔갑시킨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을 출판하였는데 이 두권짜리 책이 또 대폭적으로 내용이 바뀌어 나온 것이 72년 전기인 것이다. 김일성유일독재는 1980년 제6차당대회에서 김일성부자 독재체제로 굳어졌다.김일성자신뿐이 아니라 김정일의 「충성」과 「효성」도 반영된 것이 82년 전기로 된다. 북한에서 김일성의 전기들이 출판되는 이유의 하나는 이것이 그의 우상화작업이기 때문이다.그는 자신의 우상화를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을 얼마든지 은폐하고 왜곡하며 날조한다.그는 해방직후부터 일관되게 그렇게 해왔다.46년 김일성의 기요과장이었던 연안파의 고봉기는 그로부터 이러한 명령을 받은 일이 있었다. 「보고문이나 회의록 같은 건 다 앞으루 역사적 문건으로 남겨야 할 거니까…이제라두 늦지 않았으니…없는 건 만들어 놓구 또 있다 하더라두 기록이 잘못됐거나 한 건…다 고쳐 놓을 필요가 있단 말이요.해방전의 자료들두 그렇지,필요한 것만 남겨두구 필요찮은 건 다 없애치우는게 좋잖을까?」 이와같은 은폐·왜곡·날조 같은 행위는 그의 전기가 새로 나올 때마다 첨가되어 현재의 우상화된 김일성이 생겨 났다.실상을 제쳐두고 허상만 요란하게 선전하는 이러한 우상을 위하여 북한의 당원들과 대중들은 갖은 「충성」을 다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에서 김일성의 전기들이 출판되는 또하나의 이유는 그 유일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주민들에게 강요하는 김일성의 사상정신적 억압수단이 바로 「주체사상」과 「혁명전통」이기 때문이다.그의 전기는 혁명전통의 핵심자료로 되어 있다. 1986년 5월31일 김일성은 「조선로동당건설의 역사적경험」이란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의 위업을 계승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당이 이룩한 혁명전통을 옳게 계승해나가는 것입니다.우리 당이 계승하여야 할 혁명전통은 주체의 혁명전통입니다….혁명전통을 계승하는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혁명전통의 순결성을 보장하는 것입니다.…오직 우리 당이 이룩한 주체의 혁명전통만을 인정하고 그것을 계승발전시켜 나가며 이 밖에는 그 어떤 다른 「전통」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민정신 개조 수단 한때 우리 당안에 기어들었던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은 항일빨치산의 전통만이 혁명전통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느니,혁명전통의 폭을 상하좌우로 넓혀야 한다느니 하면서 우리 당의 혁명전통에 오가잡탕을 섞어 넣으려고 하였습니다.그들이 우리 당의 혁명전통과 인연이 없는 것을 들고 나와 혁명전통과 뒤섞어 놓으려고 한 것은 혁명전통을 거세하고 자기들의 종파적야욕을 실현하기 위한 책동이었습니다.앞으로 우리 당의 혁명전통을 흐리게 하거나 말살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허용하지 말아야 하며 우리 당의 혁명전통을 대를 이어 순결하게 계승해 나가야 합니다」 여기서 김일성이 「주체의 혁명전통」이니,「혁명전통의 순결성」이니 하고 있는 것은 모두 그의 사상과 그 자신의 행적을 말하고 있다.「주체」란 다른 중공계 항일빨치산이 갖고 있었던 사상은 아니며 「순결성」이란 김일성 이외에는 아무도 지닐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10년에 한번씩 나오는 김일성의 공식전기란 그의 사상과 행적을 서술한 책이다.따라서 김일성이 「우리 당의 혁명전통을 대를 이어 순결하게 계승해」나가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이 전기에 실린 자신의 사상과 행적을 철저히 옹호하고 그 내용대로 알아서 행동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공식전기들에 반영된 그의 사상과 행동이란 전기마다 달라서 거기에는 일관성을 찾아보기 어렵다.예를 들어 52년 전기에서의 그의 사상이란 마르크스·레닌주의사상에서도 최악의 사상인 스탈린주의였다.72년 전기의 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라는 그가 창시했다는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지도사상인 주체사상」이었다.그런데 82년 전기의 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근본이 다른 사상이 주체사상인 것처럼 되어 있다.김일성은 역사의 고비고비에서 자신의 사상을 바꾸어 나가는데 그것이 그대로 이러한 전기들에 반영되는 것이다. 이번에 나온 「세기와 더불어」도 그 사상은 다시 달라지고 있다.머리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이는 것이다. 「이민위천,인민을 하늘같이 여긴다는 이것이 나의 지론이고 좌우명이었다.인민대중을 혁명과 건설의 주인으로 믿고 그 힘에 의거한데 대한 주체의 원리야말로 내가 가장 숭상하는 정치적 신앙이며…생활의 본령이었다」 그는 이번에는 주체사상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비교하는 대신 「이민위천」사상을 가져와서 이와 동일시하고 있다.뿐만 아니라 주체의 원리를 자신의 「정치적신앙」이라고까지 하였다. 세계의 마르크스·레닌주의국가들이 붕괴되어 가는 길위에서 그는 이제 사상을 「신앙」으로 바꾸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그는 현재 주체의 원리와 혁명전통으로 북한주민을 세뇌시킨데 만족하지 않고 그들의 세뇌된 사고를 김일성부자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의 차원으로 유도하고 있다.이러한 현실이 김일성의 입으로 나온 것이 앞의 말이 아닌가 싶다. 사상 뿐 아니라 김일성의 행적도 전기마다 다른 것이 얼마든지 있다. 현재 한반도에는 통일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통일은 몇년 후에 현실로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압도적 다수가 내다보는 근미래이다. ○“정치적 신앙” 강조 그런데 한국국민은 지금 김일성이나 김정일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북한체제는 전혀 경험하지 못한채로 지내고 있다.김일성만을 알고 따르는 북한주민과 김일성의 정체를 거의 모르는 한국국민이 다같이 통일을 「열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남북 양측 주민이 서로 상대방의 사상과 행동에 정통하여야 할 것이다.그 중에서도 특히 한국국민의 책임이 무겁다.한국에서는 국민들이 북한체제와 김일성부자의 정체및 북한주민의 정신상태를 알아야만 그들과 대화를 하여 사상적으로 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할 시점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본지에서 시작되는 「세기와 더불어」의 분석비판은 한국국민과 앞으로의 북한주민에게 다같이 김일성과 그 독재체제의 진상을 알리는 공통의 장을 제공하기 위하여 기획되었다. 필자는 1987년에 김일성평전과 그 속편을 출판한 일이 있는데,연구를 시작한 1983년부터 이 무렵까지는 근본자료와 연구서적들이 태부족하였다.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는데 이 어려운 작업에 다시 도전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따라서 필자는 진실을 위해서는 과거의 자신의 학설도 버릴 부문은 대담하게 버릴 작정이다.다만 버릴 때는 일일이 그 이유를 열거하겠다. □주 해 ①「김일성의 비서실장」고봉기의 유서 1989년 천마사간,17면 ②「조선로동당 건설의 력사적경험」김일성,1986년 단행본,조선로동당출판사간(이하 「당간」이라고 함)1백12∼1백13면 ③「세기와 더불어 1」.1992년 4월9일 당간 2면 ④「김일성평전」 「김일성평전 속」,1987년 북한연구소간(이하 평전,혹은 평전(속)이라고 함)
  • “인천 닭소리 산동까지” 인접성 강조(노 대통령 방중여로)

    ◎“북방외교 북경서 매듭짓게돼 보람”/양 주석,「손에 손잡고」 연주맞춰 손뼉 ▷단독정상회담◁ ○…노태우대통령과 양상곤중국국가주석은 28일상오 단독·확대회담의 순서로 1시간45분간에 걸쳐 정상회담을 갖고 경제협력을 중심으로한 양국관계와 한반도를 중심으로한 동북아정세 그리고 국제정세에 대해 폭넓게 의견을 교환. 이날 정상회담은 당초 상오 10시15분(한국시각 상오 11시15분)부터 10시45분까지 30분간 단독회담,10시45분부터 11시35분까지 50분간 확대회담의 순서로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두 정상간의 단독회담이 10시20분부터 11시40분까지 80분간이나 진행되는 바람에 확대회담은 11시40분부터 12시5분까지 25분만에 종료. 이 때문에 단독회담에서 양국관계,확대회담에서 동북아정세와 국제정세를 논의키로 했던 당초 계획과 달리 두 정상이 단독회담에서 이 문제를 대부분 논의하고 확대회담에서는 논의결과를 정리하는 형태로 마무리. 인민대회당의 복건청에서 열린 단독회담에서 노대통령은 중국방문초청에 사의를 표명하고 『북경시민의 역동적인 모습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고 소감을 피력했고 양주석은 『많은 북경시민들이 노대통령을 환영하기 위해 연도에 나왔다』고 소개하며 『이번 방문을 환영한다』고 언급. 노대통령은 『북방외교를 북경에서 매듭짓게 되어 보람으로 생각한다』고 말하고 두 나라간의 교류와 협력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양국간에 분야별로 정기적 각료회의를 개최할 것을 제의했고 양주석은 『바람직하다』며 찬성의 입장을 표시. ▷오찬연설◁ ○…노대통령은 28일 하오 숙소인 조어대 방▦원에서 한중경제인 1백여명과 오찬을 함께 하며 양국간의 오랜 역사적 관계를 상기시키고 전통적 우호관계의 회복등 새로운 협력강화방안등에 대한 입장을 피력. 노대통령은 1시간30분간 계속된 이날 오찬에서 『산동지역에서 「이른 아침이면 한국의 인천에서 닭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우스개가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그렇다면 한국의 서해안에서는 맑은 날이면 청도항의 공장굴뚝이 보일 것』이라고 두나라의 지리적 인접성을 강조한뒤 『이런 두나라 사이가 비행기로 1시간 남짓한 거리로 좁혀지는데 수십년이 걸렸다는 것은 역사의 모순』이라고 지적. ▷자금성 시찰◁ ○…노대통령은 28일 하오 부인 김옥숙여사와 함께 청나라말까지 5백년간 역대 중국왕의 거처및 집무실이었던 자금성을 공식수행원들과 함께 간소복 차림으로 약1시간동안 시찰. 노대통령 내외는 고궁박물원장의 영접을 받으며 자금성 제2문인 태화문앞에 도착,『한중수교가 이뤄지자마자 한국의 국가원수를 손님으로 맞게되어 영광으로 생각한다』는 인사를 받고 『세계적으로 위대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중국에서 제일 잘 보관된 건축물을 보게되어 감회가 깊다』고 방문소감을 피력. 노대통령은 자금성내 옛왕의 집무실,연회장,침실등을 구석구석 돌아보면서 곳곳에 얽힌 옛 얘기를 경청했는데 왕이 과거를 주재했다는 설명등을 듣고는 『우리 조선시대에도 똑같은 제도가 있었다』며 옛날의 인재등용방법에 깊은 관심을 표시. ▷만찬◁ ○…노대통령은 이날 저녁 8시30분(한국시각) 인민대회당 서대청에서 열린 양주석 주최 공식만찬에 참석,양국 우의를다지는 것으로 방중 이틀째 일정을 마감. 노대통령과 부인 김옥숙여사는 이날 만찬장 입구에서 양주석및 진모화인민상무위원회부위원장(여)과 반갑게 악수를 나눈뒤 참석자들의 박수를 받으며 입장. 애국가와 중국국가의 연주에 이어 연단에선 양주석은 『본인은 노대통령 내외분의 중국방문을 환영하고 중한 양국 우호관계를 위해,노대통령 내외의 건강을 위해,이 자리에 참석한 숙녀신사 동지들과 함께 잔을 들 것을 제의합니다』며 건배. 이에대해 노대통령은 『양주석의 따뜻하고 성대한 환영에 감사하며 양국간 수교와 오늘 정상회담은 역사의 순리요 지도자를 위시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위대한 결단으로 생각한다』면서 『지금부터 양국의 번영과 동북아번영을 위해 선도적 역할을 해나가자』고 강조. 노대통령은 이어 『우리는 결코 불행했던 역사를 되풀이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양주석의 건강과 중화인민공화국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건배합시다』고 답사. 이날 공식만찬은 취재가 허용된 적이 없다는 중국외교부의 주장과 한국언론은 모든행사를 취재해야 한다는 우리측 입장 사이에 줄다리기가 벌어진 끝에 5분정도 취재가 허용됐고 만찬사도 중국측은 관례가 없다며 난색을 표명했으나 우리측 요구로 간략한 건배사로 대체돼 진행. ○…만찬이 끝날 무렵에는 88서울올림픽 주제가인 「손에 손잡고」가 연주되자 양주석이 박수를 치기 시작,참석자 전원이 박수를 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으며 하진량 중국국가체육위원회 위원장과 장백발 북경시 부시장은 노대통령에게 잔을 권하며 2000년 올림픽의 북경유치에 대한 지원을 은근히 요청. 한편 중국국가의 작곡자는 정율성이라는 한국인으로 밝혀져 화제. 이 곡은 항일전쟁당시 작곡돼 애창되다 건국후 중국국가로 정식 채택됐다.
  • 롯데월드부지 「가처분신청」 기각/서울민사지법

    ◎“비업무용과 무관”… 오늘 3차공매 서울민사지법합의50부(재판장 정지형부장판사)는 28일 롯데그룹이 잠실 제2롯데월드부지 3차공개매각입찰과 관련,성업공사와 상업은행을 상대로 낸 공매절차중지가처분신청을 『이유없다』며 기각했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롯데측이 문제의 부지는 비업무용 부동산이 아니며 매각위임계약도 강박에 의한 것이어서 무효라고 주장하나 계약자체는 비업무용부동산여부와 관련이 없으며 불가항력에 의해 이루어진 계약이라고 믿을만한 증거도 없다』며 기각이유를 밝혔다. 재판부는 또 『2차공매까지 낙찰자가 결정되지 않을 경우 부지를 분할매각하기로 했다는 주장도 단지 협조사항일뿐 상업은행측이 계약내용자체를 위반한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롯데측은 2만6천6백여평에 이르는 잠실제2롯데월드에 대한 1·2차 공매가 유찰된뒤 성업공사와 상업은행이 29일 3차공매를 실시하려하자 지난 18일 공매절차중지가처분신청을 냈었다. 법원의 기각결정에 따라 성업공사는 이 부지에 대한 3차공매를 예정대로 29일 실시키로 했다. ◎롯데월드 어떻게 되나/5차까지 유찰땐 토개공서 수용/롯데측,정식소송 제기할지 관심 서울민사지법이 28일 롯데의 롯데월드 부지에 대한 공매중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함으로써 이땅은 예정대로 다시 공매에 붙여지게됐다. 법원의 이번 기각 결정은 「3차공매 이후 필지분할을 통해야 한다」는 롯데측의 매각협조 요청을 계약조항으로 볼수 없으며 이땅에 대한 비업무용 여부에 상관없이 상업은행과 성업공사측의 매각절차가 정당함을 인정한 것이다. 나아가 이번결정은 정부가 재벌의 비업무용 땅을 강제매각토록한 5·8 조치에 법적하자가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기각결정에 대해 은행감독원과 상업은행측은 『당연한 결과』라며 환영하는가 하면 롯데그룹측은 『막대한 재산손실을 입게돼 유감』이라는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롯데측은 29일 3차공매를 앞두고 낸 가처분 신청이 기각됨으로써 앞으로 감정가격이 1조원에 달하는 2만6천6백여평의 제2롯데월드땅을 계속 성업공사의 공매처분에 맡겨둘수밖에 없게됐다. 지난90년 5·8조치로 국세청과은행감독원의 비업무용부동산으로 판정받은 이땅은 지난해 11월28일 롯데측이 상업은행과 협의,1∼5차까지의 공매가격과 조건을 정해 성업공사에 매각을 의뢰했었다. 당시 감정가는 9천9백70억원으로 지난해 12월23일 1차공매시 유찰돼 올1월22일 2차공매때는 값이 10% 떨어진 8천9백73억원이었고 2차공매에서도 유찰됨에따라 29일의 3차공매에는 이보다 10% 더떨어진 8천76억원에 내놓게 됐다. 그러나 이땅은 덩치가 워낙 큰데다 재력이있는 50대재벌은 이를 살수 없게 묶여 있어 분할을 하지않는한 3차 공매에서도 팔릴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때문에 현재로서는 4차공매때 6천8백64억원,5차공매때는 감정가의 절반인 4천9백85억원에도 팔리지 않을 전망이어서 이경우 토개공이 연7%의 토지채권으로 수용할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롯데측은 그동안 법인세·양도세·토지초과이득세등의 세금과 이자손실등으로 7백69억∼2천5백68억원의 손실을 입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롯데측은 가처분 신청의 기각으로 당초 이땅에 대한 비업무용부동산 판정이 잘못됐다는 본안소송을 내려던 계획에 차질을 빚게됐으며 그룹에 대한 여신규제 가능성등 각종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과연 본안소송을 낼수 있을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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