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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진홍의사 기념관 동상건립 추진

    ◎일제에 항거…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추모사업회,의거 66주년 맞아 왜관에 1927년 10월 18일,단신으로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투척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식민지지배에 신음하던 2천만동포들에게 독립의지를 다져준 창려 장진홍의사(1895∼1930년)의 의거 66주년을 맞아 기념관과 동상건립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이번 사업은 장의사추모기념사업회(위원장 박세직)가 지난해 8월 의거65주기에 맞춰 발간한 장의사의 일대기 「창려 장진홍 의사」에 이은 2번째 추모사업.이를위해 관련인사들은 기념사업회재발족준비위원회(위원장 윤복수)를 구성했다.기념관은 경북 칠곡군 왜관읍 석전동에 세워진 기념비각옆에 건립될 계획이며 규모,착공일등 구체적인 세부계획은 아직 마련되지 않은 상태이다. 장의사는 조선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한뒤 도피생활 14개월만에 일경에 체포돼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사형집행 바로 전날 자결했다.이 사건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8년전의 3·1운동과 2년뒤의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한 장렬한 항일무장투쟁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이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왜관문화원 장재영원장(80)은 『일대기발간을 계기로 뜻있는 사람들끼리 우리 향리를 빛낸 선생의 동상과 기념관을 건립해 후세에 선생의 애국의지를 남기려 하고 있으나 사업비마련에 차질이 생겨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6)

    ◎대한매신의 애국계몽/“축채 갚자” 전국적 담배끊기 전개/의연금 기탁자 명단·사연 연일 보도/「반지빼기」계기 여성동참 적극 유도/“통곡으로 실업가에 고한다” 사설로 참여 촉구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일제는 이듬해 통감부를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하기 시작했다.이에따라 1910년 한일합방 때까지 한반도 전역에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민족의 주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국권수호운동이 활발히 전개됐다. ○신민회 충실 대변 대한매일신보(이하 신보)는 일제가 민족의 목을 죌수록 배일논조를 통해 항일의 기치를 더욱 높이 들었다.그것은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등을 주도한 민족지도자들과 국민들간의 의사소통수단으로 나타났다.또 국채보상운동과 같이 직접적인 대국민캠페인을 통해 국민운동을 주도해나가기도 했다.특히 1907년 양기탁주필을 총감독으로한 민족지도자들의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가 창립되었을때 신보는 역할 하나를 더맡았다.신민회 주관 각종 국민운동의 충실한 대변지로서 신민회 활동을 날카로운구국언론활동을 통해 뒷받침했다.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에 광문사라는 출판사를 설립,국민교육운동에 앞장서고 있던 김광제 서상돈등 10여명이 주도하고 나서는 것으로 불을 댕겼다.1907년 1월31일 당시 일본에 빚지고 있던 국채 1천3백만원을 국민성금으로 갚자는 운동이 그것이었다.「국채 1천3백만원 보상취지서」라는 격문을 전국에 발송한데서 발단한 이 운동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바로 지키기 위해서는 나라빚을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구국운동 이기도 했다. 그 하나로 2천만동포들이 배를 끊자는 방안이 제시됐다.한사람이 한달 담뱃값 20전을 3개월만 모으면 1천3백만원의 차관을 무난히 갚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이는 전국민적으로 비상한 관심을 모아 마침내 20여일만인 2월22일 한성에 중앙총괄기구인 국채보상기성회를 결성시켰다.국채보상서도의성회·국채보상부인회·국채보상경남찬성회·동래부국채보상일심회·대구국채담보회·제주의성회·황해도재령군보성소등 전국적으로 지역별뿐 아니라 직능별 단체들이 우후죽순격으로 결성됐다. 대한매일신보는 당시 어느 신문보다도 앞장서서 국채보상운동을 다뤘다.의연금 기탁자의 명단을 보도함은 물론 기탁에 얽힌 사연들도 소개했다.이들 보도 가운데는 어려운 노동자들까지도 동참하는데 정부관리나 부유층들이 외면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그들의 적극적 참여를 유도하는 내용도 있었다.『국채보상을 위해 3개월씩만 단연하자는 서상돈의 발기에 한성안의 병문(길가)노동인이 충분소격에 연초대금을 서로 다투어가면서 모으고 있다는데 현금 정부대신은 노동자 보기가 어떠할 것인가』(1907년 2월24일자). 이 운동이 단시일내 전국적으로 확산될수 있었던 것은 당시 신문들의 이같은 적극적인 보도에 힘입어서였다.그러나 신보는 초기에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여드는 의연금을 여러 곳에서 다룸으로써 혼선이 빚어질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그래서 의연금을 한곳으로 모을수 있는 중앙수합처가 결정되기 전에는 수전소 역할을 맡을수 없다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그러면서도 3월1일자에는 「한인충애」 표제의 사설로 이 운동을 『일본으로부터 면탈하려는 인민의 제의』로 규정하고 나섰다.이 큰일의 성취를 돕는 것은 신문이 할수 있는 즐거운 일이라고 적극적인 지지를 밝혔다. 대한매일신보가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된 동기는 3월31일자에 특별사고로 다루었다.「이제까지와는 달리 국채보상 의연금을 동사에서 직접 수령키로 했다」는 뜻을 분명히하고 나선 것이다.이에따라 신보는 일부 유지들을 규합,4월1일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결성,그 사무소를 사내에 설치했다.간부진용으로는 양기탁총무를 회계로 하고 윤웅렬소장,김종한부회장,박용규재무등이 추대됐다.전국각지에서 작게는 5전부터 10전·1환·10환,크게는 1백환 이상에 이르기까지 성금이 답지했다.이 운동이 처음 시작된 2월말부터 4월말까지 불과 두달 사이에 4만명이 넘게 참여하는등 큰 호응을 얻었다.신보를 비롯,각 언론기관들도 이들 명단게재및 보도에 호외를 발행하는등 지면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남자들을 위주로한 단연운동으로 시작했던 국채보사운동은 5월들어 신보에 의해 시작된 반지빼기운동등 여자들의 참여로 확산돼 나갔다.신보는「국채보상에 나선 여인의 대열」이라는 반지빼기모임 취지문의 논조는 사뭇 흥미롭다.「우리 2천만중 여자가 1천만이요,1천만중 반지있는 이가 반은 넘을 터이니 반지 한쌍 2원씩만 셈하면 1천만원이 여인 수중에 있다할수 있다.이 운동에 동참을 계기로 남녀동권을 찾자」(4월22일자). 통감부는 이 운동 초기에는 흡연을 즐기는 한국인들에게 단연운동이란 실효성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대수롭지않게 비웃었다.그러나 국채보상운동의 열기가 점차 고조되자 통감부는 3월 들어서면서 영문판 기관지인 「서울프레스」를 비롯한 친일지들을 동원,비난의 강도를 높이기 시작했다.신보는 이에 정면으로 맞섰다.「빚진 사람이 압제하는 채주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라는 논조를 폈다.또 3월24일자 「통곡고대한실업가」 표제의 사설에서는 소극적인 자세로 있던 실업가들에게 자극을 주면서 동참을 촉구했다. 통감부는 급기야 공안을 해친다는 이유로 대한매일신보사장 배설을 영국총영사에게 제소한데 이어 1908년 7월12일에는 의연금 3만환 횡령의누명을 씌워 양기탁을 구속하였다.영국측은 전날 배설 공판때 통감부 외무부장이 영국인피고의 증인으로 출두했던 어떤 한국인도 한제국및 통감부로부터 방해 내지는 탄압을 받지 않는다고 확약한 사실을 내세웠다.그러면서 양기탁의 즉각 석방을 요청,영국과 일본 양국간의 외교분쟁으로까지 비화되었다. ○2백여만원 모금 양기탁은 이른바 국채보상금사기취재사건의 다섯차례 공판끝에 9월29일 증거불충분으로 무죄석방 되었다.그러나 그의 구속과 이후 법정공방으로 비화된 보상금 횡령사건등으로 모금활동은 더이상의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결국 1년반 가까이 계속된 모금운동에서 걷힌 돈은 모두 2백31만9백89원13전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그러나 이 액수는 애당초 목표로 했던 국채 1천3백만원에는 먼 액수였다. *참고문헌:「한국신문사론고」(최준,일조각 1976) 「대한매일신보와 배설」(정진석,나남 1987) 「한국민주독립운동사연구」(신용하,을유문화사 1985) 「대일민주선언」(홍이섭,일우문고 1972)
  • 최익현선생/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을사조약 체결되자 “항일의병” 횃불/74세 거유,“조약은 무효” 전북 태인에서 거병/대마도 유배뒤 순국… 전국적 배일투쟁 “점화”/“나라위해 생사초월” 무성서원연설 민족혼 일깨워 노옹의 항쟁은 열하루밖에 되지 않았다.그가 이끄는 의병의 병력과 무기도 보잘 것 없었고,정부측의 반응도 냉담했다.정부는 일제의 눈치를 보느라 오히려 해산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면암 최익현­1906년 6월4일부터 14일까지의 「뜨거운 날들」은 선생의 이름과 함께 역사에 붉게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한반도에 요원의 불꽃으로 번지게 한 의병항쟁의 불씨를,선생이 지폈다는 뜻만으로서가 아니다.선생은 「나라가 흥하는 것은 우리의 문화 우리의 마음을 잃지 않는데 있으며,인권도 중요하고 민권도 중요하지만 국권 없이는 모든 것을 잃는다」는 진리를 가르치며 이같은 독립정신을 온몸으로 실천한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경기도 포천 출생 당대 유학의 거봉으로 74세나 된 선생이,국권회복을 부르짖고 구국창의의 깃발을 높이 든 것은 일관된 삶의 자세에서 비롯됐다. 1833년 경기도 포천군 가범리에서 출생한 면암은 일찍이 이항로 문하에서 「애국여부 우국여가」의 사상을 이어받고,그 이념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철저하였다. ▲1871년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리자 그 부당함을 상소 ▲고종의 신임을 얻어 호조참판이 된 뒤,누적된 적폐를 바로 잡으려다 오히려 기득권층의 반발을 받아 제주도로 유배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결사반대하며 지부소(도끼를 가지고 상소를 올리며 답을 기다리는 것)를 올렸다가 흑산도로 유배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공표되자 청토역복의제소를 올려 항일운동을 전개 ▲1905년 소위 을사5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화와 박재순·이완용·이근택·이지용·권중현등 「오적」처단을 주장한 청토오적소를 올린 일등은 흐트러짐 없는 인간 최익현의 한 단면이다. 1906년 3월15일.선생은 가묘에 하직을 고하고 집안 사람들과 이별,집을 떠나기로 결심했다.상소만으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러나 선생은 다시 한번 참담함을 맛보지않을 수 없었다.판서 이용원·김학진·참판 이성렬·이남규등에게 서신을 보내 「함께 국란에 대처할 것」을 바랐으나 한사람도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선생은 애제자 고석진의 소개로 「태인사람 임병찬」을 만나게 된다.임병찬은 임실군수까지 지내다가 왜인들의 정치를 마다하고 사퇴한 올곧은 선비였다. 『호남의 선비들이 장차 의병을 일으키려 하는데 모두 선생을 맹주로 생각하고 있으므로 그곳으로 가셔야 하겠습니다』 이후 두달 남짓동안 거의가 준비됐다.시골 포수들로부터 총칼이 모아지고,2백여명의 우국지사가 모여들었다. 6월4일.태인 무성서원에서 있은 선생의 강회는 항일의병의 역사적 분기점을 이룬 날로 기록된다. 『지금 왜적들이 국권을 농락하고 역신들은 죄악을 빚어내 오백년 종묘사직과 삼천리 강토가 이미 멸망지경에 이르렀다.나라를 위해 사생을 초월하면 성공 못할 염려는 없다.나와 함께 사생을 같이 하겠는가!』 불꽃에 민족혼을 일깨운 의병들은 이날 정읍에 무혈입성,총칼과 탄환을 거두고 군사를 모집했다.또한 일제에 16개 죄목을 들어 국권의 침략과 국제적 배신행위를 통렬하게 지적한 장문의 규탄서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후 정읍에서 흥덕으로,다시 순창 구암사에서 순창읍내로 행군하였을 때에는 의병의 수가 5백여명을 넘게 되었다.힘을 얻은 「면암의병」들은 파죽지세로 곡성을 거쳐 남원으로 밀고 들어 가려 했으나,순창으로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남원 방비가 워낙 견고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의병은 8백여명으로 불어났다. 6월11일.광주관찰사 이도재가 사람을 보내 고종의 칙지를 전해왔다.선생은 큰 기대를 갖고 이를 펼쳐 보았으나 그 내용은 엉뚱하게도 『의병을 해산하라!』는 것이었다. 면암은 『이미 소장을 올려 의병을 일으키게 된 연유를 말씀 드렸으니,나의 진퇴는 관찰사의 직권으로 지휘할 바가 아니다』는 답장을 보냈다.그리고 다시 남원진입을 꾀했다. ○고종,의병 해산령 그러나 남원을 지키고 있는 부대가 왜군이 아니고 우리측 진위대임이 확인되었다. 진위대(경군)측은 『대감이 민병을 해산시키지 않으면 전진이 있을 뿐』이라는 통보를 세차례나 보내왔다.선생은 괴로워했다. 선생은 임병찬에게 『동포끼리 서로 박해하는 것은 원치 않으니 즉시 해산시키라』고 명령했다.쉽사리 흐트러지지 않던 의병들은 눈물을 머금고 해산되었다.선생 곁에 끝까지 남은 의병은 12명 뿐이었다. 6월14일.선생일행은 서울로 압송되었다.그리고 우리 사법부가 아닌 일제에 의해 재판을 받게 된다. 「대마도 감금 3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선생은 1907년 1월1일 단식 끝에 한많은 적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선비정신의 귀표 역사학자 박성수교수(정신문화연구원)는 면암의 항일운동과 관련,『선생은 1876년 개항 이후 줄곧 외침을 경고했으며 이에 맞서 나라를 구하는 길은 오로지 국론을 통일해 일치단결하는 것밖에 없다고 부르짖어 온 분이었다』며 『그러므로 선생이 70고령을 무릅쓰고 무기를 들었다는 소식은 단지 그것만으로도 여간 큰 충격이 아니었는데 외딴 섬 대마도에서 순국하셨다는 소식은 온 국민의 가슴에 칼을 꽂은거나 다름없는 슬픔과 분노를 안겨 주었다』고 평가했다. 선생의 항쟁 이후 호남을비롯한 전국 각지에서는 우후죽순처럼 의병들이 일어난 점만 보아도 당시 선생이 위대한 민족주의자로서,국민들의 정신적 지주였다는 점이 입증되는 셈이다. 선생은 순국직전 임병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죽음에 있어 마땅히 죽을 곳에서 죽으면 삶보다 부끄러울 것이 없다.나 이제 죽을 것이니 황상에게 올릴 마지막 소를 비밀히 간직하였다가 본국으로 돌아 가는 날 전해주길 바란다』 고국으로 돌아온 선생의 영구행렬 앞에는 「춘추대의 일월고충」이라는 깃발이 나부꼈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5)

    ◎매신의 수난과 저항/배설 상해투옥에도 항일필봉 건재/일제,영국과 손잡고 공작… 유죄 판결/양기택 등 민족언론투사들이 맥이어/정간 2회·압수 45회 맞서 고종퇴위 기도 등 폭로 일제의 탄압은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더욱 가속화 되었다.신문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민족지를 짓밟기 위한 술책이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그것은 바로 대한제국으로 하여금 신문조례를 만들도록 하는 외교적 강압으로 나타났다.특히 을사보호조약 체결뒤의 언론탄압은 더욱 심한 양상을 띠었다.한반도 침략정책에 방해가되는 기사나 그 부당성을 비판하는 글을 결코 방관하지 않았다.그래서 신문을 압수하거나 정간시키는 동시에 편집인 문책까지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편집인 문책 일쑤 이 시기에 일제의 민족지에 대한 탄압은 황성신문의 정간및 주필 장지연의 구속사건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수 있다.그러나 민족언론탄압에 서슬 퍼런 칼을 갈았던 일제도 배설이 발행하는 대한매일신보에 대해서는 손을 쓸수가 없었다.치외법권의 보호가 늘 걸리적 거렸던 것이다.따라서 일제의 사전검열없이 발행되기는 대한매일신보가 유일한 신문으로 남게 되었다.그 논조는 말할나위도 없이 반일로 일관된 예봉이기도 했다. 핍박과 강압을 외면한채 강경한 논조를 굽히지 않는 신보.그 존재는 마침내 통감부의 집요한 탄압의 대상이 되고만다.신보를 무력화 시키려는 일제의 탄압은 외교경로를 통한 배설의 추방공작으로부터 시작 되었다.배설에 대한 추방공작은 이미 1905년 9월에 제기 되었으나 통감부가 본국정부에 정식으로 요청하기는 이듬해 7월부터이다.이에따라 일제는 본국외무성을 통해 동경주재 영국대사에게 배설을 추방하거나 신보를 폐간토록 요구하고 나섰다. 일제의 끈질긴 요구에 따라 영국측은 1904년에 제정된 「청국및 한국에 대한 추밀원령」을 적용키로 했다.그러나 배설을 제재하기에는 그 근거가 미약했다.그래서 제5조를 개정하여 1907년 2월1일 이를 공포하기에 이른다.개정된 내용의 골자는 『영국국민과 본령시행구역내에 있는 영국과 친선국의 소요 혹은 그 국민과의 사이,그리고 청국정부와 그 국민 또는 한국정부와 그 국민 사이에 불화를 도발하려하는 사항은 본조에 규정하는 선동적인 사항으로 간주한다』는 것이었다. 배설과 신보를 제재하려는 일제의 책동에 영국이 동조한 것이다.그러나 배설은 일제의 억압에 결코 굴하지 않을 것이며 한국국민의 이익을 위해서 일제에 대한 비판을 중단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그의 선언은 신보의 한글판 7월17일자 1면 머리에 『일본이 황제를 퇴위시키고 황제를 일본으로 건너가 사죄케 하려한다』는 폭로기사로 반영됐다. 이어서 이튿날짜 신보는 논설을 통해 『일본이 한국의 황실을 강핍하고 대신을 종으로 부리며 백성을 짐승으로 여기는 행동이 극도에 달했다』고 통렬히 비난하고 나섰다.날이 갈수록 강도 높은 논조로 맞서는 신보의 자세에 통감부는 급기야 1907년 10월 서울주제 영국총영사 헨리 코번에게 배설의 처벌을 요구하는 소장을 제출,외교적 탄압을 본격화 한다. 배설은 10월14일 서울주재 영국총영사관에 설치된 영사 재판정에 출두하지 않을 수 없었다.재판이 열린 다음날 코번은 배설의 유죄판결을 선고했다.신보의 논설이 추밀원령 제83조 공안을 해칠 우려가 있는 사항에 해당된다 하여 6개월간의 근신에 처한 것이다. 배설에 대한 일제의 책동은 이같은 결과를 가져왔으나 사태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특히 배설의 근신기간이 만료된 직후부터 신보는 더욱 강경한 논조로 돌아섰다.민족주의운동을 탄압했던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를 이등박문에 비유한 「백매특날이 불족이압 일이태리」며 「정부당국자의 기량」등의 글로 일제를 규탄하고 통감부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 대한제국의 내각을 신랄히 비판했다. 이렇게 되자 통감부는 또 다른 탄압의 칼을 빼어들었다.1908년 4월29일 이완용내각으로 하여금 신문지법을 개정하여 한국에서 발행되는 외국인의 신문까지도 발매·반포금지 또는 압수할수 있도록 한것이다.광무신문지법이라고도 불리는 신문지법(1907년 7월제정)은 신문에 대한 엄격한 통제와 벌칙이 골자로서 민족지를 탄압하는데 적용된 악법이라 할수 있다.법이 처음 제정 공포된 때에는 한국에서 외국인들이 발행하는 신문과 해외에서 교포들이 발행하는신문에 대한 규제조항이 없어 이를 새롭게 보완한 것이다. 신문지법을 이처럼 개정토록 한데에는 신보탄압이 근본목적이었으나 반일논조의 해외교포신문들이 국내에 유입되는것을 막자는 계략도 포함됐다. ○이완용내각 통박 통감부는 신문지법이 개정된 직후 곧바로 행동을 개시,신보를 압수하기 시작했다.5월1일자 논설 「불필랑경」을 비롯,5월13일자「한국내의 일본」,5월16일자「학계의화」가 통감부 기휘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신보는 잇따라 압수됐다.당시 일제가 집계한 신보압수건수를 보면 1908년 한해동안만도 국한문판 8회,국문판 7회에 이른다.일제는 이같은 신문압수방법외 신보의 구독을 방해하는 행적적 탄압도 병행했다. 뿐만 아니라 통감부 기관지 서울프레스를 동원하여 신보의 기사와 논설을 비난하는등 다각적인 탄압을 자행했다. 그러나 신보의 논조는 좀체 수그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일제는 배설에 대해 어욱 강력한 제재를 가하기 위해 치밀한 사전공작을 벌였다.그리고 영국에 대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외교공세를 펴기 시작했다.이른바 양동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영국은 마침내 배설로 인해 야기된 문제들을 해결키로 하고 배설을 재판에 회부한다는데 동의했다.이렇게 해서 배설의 2차재판은 1908년6월15일부터 3일동안 서울의 영국총영사관에서 열리게 됐다.재판을 진행하기위해 상해고등법원의 판사 본과 검사 윌킨슨이 서울에까지 왔다.이는 한·영·일 3국이 관련된 동양역사상 처음 있는 특이한 재판이었다. 이 재판에서 판사는 배설에게 3주일간의 금고형과 6개월간의 근신을 언도했다.유죄판결을 받은 배설은 잠시 한국을 떠나 상해에서 복역하게 됐다. 그러나 배설이 신보를 떠나 옥고를 치르고 있는 동안에도 이 신문의 항일논조는 변함없이 이어졌다.양기탁을 비롯한 민족언론 투사들이 본래부터 신보의 제작을 주도해온 때문이었다. 배설의 재판직후 통감부의 신보에 대한 감시와 탄압 또한 집요하게 지속됐다.7월2일자 논설 「확실한 언론」을 치안방해로 규정,이날자 신보를 발매금지 처분하는 한편 또 다른 탄압계획을 실행했다.신보사의 총무 양기탁을 국채보상의연금 횡령혐의로 전격 구속한 것이다. 신보의 제작을 실질적으로 총괄하던 양기탁을 구속함으로써 신보의 제작에 타격을 가하는 동시에 전국 규모의 민족운동이던 국제보상운동의 중심기관을 와해시키려는 2중효과의 탄압책략이었다.궁국적으로는 신보를 중심으로한 항일민족세력에 대한 탄압이었다.일제의 신보에 대한 탄압은 이 신문이 한일합방 직후 통감부에 매수되기까지 줄곧 이어져 국한문판 24차례,국문판 21차례의 압수와 2차례의 정간처분을 받은 것으로 기록돼있다 항일구국지 대한매일신보는 이처럼 끝없는 수난과 저항으로 점철된 역사를 살았다. 정진석저)
  • 유고 또 전면내전 위기/크로아서 격전… 정부군,제무니크공항 점령

    ◎신유고연방,전군에 비상령 【자그레브 로이터 AP AFP 연합】 크로아티아 당국의 세르비아계 공격 중단발표에도 불구하고 정부군과 세르비아계 민병대는 25일 유엔감시 중립지역내 주요항구를 장악하기 위한 전투를 계속했으며 크로아티아군은 주요 전략지점인 제무니크공항을 점령했다고 밝혔다. 크로아티아군 대변인은 얀코 보벳코 참모총장이 이날 아드리아해 항구도시 자다르 부근 중립지역내에 위치한 제무니크 공항의 점령을 발표했다고 전하고 공항일원에서 대포·기관총·소형화기등을 동원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됐으며 일단의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투항했다고 말했다. 이 대변인은 또 세르비아계 자체선포 공화국 크라지나 지역 외곽에 있는 전략요충 자다르항에 대한 세르비아계의 산발적인 야포공격이 25일 아침에도 수시간동안 계속됐다고 전했다. 크로아티아 남부에 위치한 크라지나는 현재 세르비아계 수중에 있다. 양측간의 전투발생 보도는 현지와의 통신상태 불량등으로 즉각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현재 정황으로 미뤄 프란요 투즈만 크로아티아대통령의 공격중단 발표에도 불구하고 전투가 더욱 격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크로아티아 당국은 지난 22일 시작된 정부군의 공격은 지난 91년 내전때 파괴된 전략 요충 마스레니차 다리 일원을 재탈환,복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마스레니차 다리는 크로아티아 북부와 남부를 잇는 유일한 통로로 세르비아계는 마스레니차 지역에서 이미 철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편 91년 내전당시 세르비아군을 지휘한 드라간 대위 휘하의 1천명의 자원병력이 정부군에 대한 반격을 위해 24일 밤 크라지나에 도착했다고 탄유그 통신이 보도했다. 한편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공화국으로 구성된 신유고연방은 크로아티아 당국의 공격에 맞서 전군에 비상대기령을 내렸다고 베오그라드의 탄유그통신이 보도했다.
  • 1883∼해방전 신문사진 흐름 정리/「한국신문사진사」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가 창간된 1883년부터 해방이전까지 한국신문사진의 흐름을 정리했다. 현역 사진기자(동아일보 사진부장)인 지은이는 이 책에서 우리 신문사진은 어떤 정신에서 어떤 방법으로 시대정신을 담아내고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전 10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는 이밖에 한성순보에 실린 목판화 「지구전도」,신문지면에 최초로 직접 인쇄된 그리스도신문의 스케치사진 「얼음에 엉긴 배」,을축년 대홍수 사진화보,무장 항일투쟁 사진화보등 귀중한 자료사진 2백점을 실고 있다. 최인진지음 열화당 2만3천원.
  • 김일성테이프 배포 전남대생 1명 구속

    【광주=최치봉기자】 안기부 광주지부는 21일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등의 내용이 담긴 비디오테이프와 유인물을 광주지역 대학가에 배포한 고애순씨(25·여·전남대 생물교육 4년)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30)

    ◎소년시절:11/화성의숙 편입 경위/정의부 재정지원 해온 김형직 피살에/오동진,공범인줄 모르고 그 아들 보호/군사지도자 오를 최근엔 들러리로 격하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정의부 산하의 중대들에서 선발된 현역군인들이 입학하는 군관학교 화성의숙에 군인이 아닌 자신이 「개별인사의 소개」로 들어갔다고 하였다.그는 또 이런 일은 드문 일이었다고도 하였다. ○동급생들 나이많아 「40명 남짓한 학생들 가운데 나만큼 어린 학생은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대부분이 20살 안팎의 청년들로서 그중에는 수염이 검숭검숭하게 난 아이 아버지도 있었다.모두 내 형이나 삼촌벌 쯤 되는 학생들이었다」 회고록은 교실에서 학생들이 김일성을 어느 중대에서 심부름이나 하다가 굴러 온 애숭이 군인이라 여겼다고 쓰고 있다.대부분 김일성보다 5살 정도 손위인 동급생들이었다.이리저리 학교의 격에 맞지 않는 특이한 아이가 들어 왔던 것이다.여기에 박만포선생의 6월전학설을 보태면 이것이 보통 상태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도 짐작할 수가 있다. 부모의 입장만생각해 보더라도 그렇다.한약방으로 성공하여 자식의 학자정도는 문제가 아닌 김형직이었다.먹여 살려주는 대신에 그 중대의 중견으로 정의부가 실컷 부려 먹겠다는 화성의숙에 무엇이 답답해서 자식을 보내겠는가.또 그는 숭실중학교를 중퇴했는데 1910년대 초에는 그래도 인텔리였다.그로서는 자기 자식을 중학교에 보내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였다. 필자는 여태까지 김형직이 자식을 화성의숙에 보낸 일은 그가 민족주의자이며 애국주의자였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었다.자식을 일부러 모국의 창덕학교로 보내고 만주에서도 그를 화성의숙에 보낸 일을 그렇게 본 것이다. 그러나 화성의숙은 공부를 못해서 중대에 입대한 군인들을 정의부가 재교육하는 목적으로 세운 학교이기도 하였다.실제로 회고록에서는 이러한 학생을 김일성이 가르쳐주었다는 이야기도 싣고 있다.김형직은 보통 같으면 소학교 졸업 직전까지 간 김일성을 이렇게 학력수준이 낮은 학교에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그가 자식을 정의부 같은 민족단체에 넣어 간부로 할 생각이 있었더라면 학력수준이 높은 중학교나 그보다 상급인 학교에 보내면 되었다. ○6월 전학설 설득력 이렇게 보면 부친이 죽기 전에 김일성이 화성의숙에 입학했다는 26년 3월 입학설보다 그가 죽은 후에 「개별인사의 소개」로 전학했다는 26년 6월 전학설이 훨씬 설득력을 가진다. 회고록에서는 이 「개별인사」가 오동진으로 되어 있다.그는 「최동오에게 소개신도 보냈으니 화성의숙에 가라.화성의숙에 가서 군사를 배우는 것이 네 포부에도 맞을 것이다.학교를 졸업하면 그 후의 진로문제는 우리가 책임지고 돌봐줄테니 의숙에 가서 마음대로 공부하라」고 한 모양이다.김일성은 그의 이러한 설득을 「쾌히」 승낙한 것으로 되어 있다. 오동진은 독립운동가 속에서도 경륜이 있고 지조가 굳은 위대한 지도자였다.1889년 태생인 그는 1913년 평양 대성중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에 돌아가서 일신학교를 세워 사재를 털어서 교육사업에 종사했지만 18년 일제에 의하여 학교를 폐쇄당하고 말았다. 그후 그는 한동안 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가 3·1운동이 일어나자 의주에서 이를 지도하고 마침내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가로 활약하게 되었다. 그는 19년 11월,대한청년연합회가 조직된 후 생계부장 등을 맡고 있었다가 20년 2월에 광복군 사령부가 성립되자 그 지방영 제2영장으로 되었고 22년에는 광복군 총영장에 취임하였다.22년 8월에 군소독립단체가 대한통의부로 넘어가면서 재무부장,군사위원장을 역임하였고 24년에는 그 군사부장 겸 의용군 사령장을 지냈다.25년 1월 정의부가 결성된 후는 재무부위원장을 거쳐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활약하는 것이다. 오동진은 26년,정의부에서 군사분야의 최고 지도자였지만 군사력을 육성하기 위하여 재정분야에도 관여하고 있었다.그는 당시까지 재정을 일관성 있게 군사문제와 결부하여 다루고 있었으므로 그와 접촉한 후원자들은 자금을 갹출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연히 그의 항일투쟁정신에 감화되어 일제와 총을 들고 싸워야 한다는 뜻을 가졌다.김형직도 그러한 자산가의 하나였다. 북한에서는 이러한 민족주의자의 거룩한 애국활동을 백방으로 도용하고 있다.첫째로 전기작가들은 사망하기 전의 김형직의 「혁명적 업적」으로 오동진의 업적을 가져왔다.예를 들면 1918년 11월에 있었다는 청수동회의인데 평북 의주군 광평면 청수동이란 다름아닌 오동진의 출생지이다.따라서 이러한 회의가 만약 있었더라면 오동진이 불렀고 김형직이 부른것은 아니었다. ○기회이용… 잠시 피신 그들은 다음으로 김형직이 죽은 후의 오동진의 활동을 김일성의 들러리 활동으로 전락시켰다.군사분야에서 정의부의 최고지도자였던 오동진은 재정사업의 대상자 김형직이 살부회의 테러리스트에 피살된 비보에 접하자 15세인 소년이 공범인 줄도 모르고 어른이 할 수 있는 모든 편의를 다 제공하였다. 그런데 김일성은 그가 제공한 기회와 훈계를 반대로 이용하여 이를 「쾌히 승낙」하여 민족주의 군관학교에 잠시 피신한 것이다. ①「세기와 더불어 1」144면 ②평전 76면 ③「세기와 더불어 1」137∼8면 ④한국독립사 334면 이하 기타
  • 근현대인물 재조명 된다/창비,현대인물연구시리즈 기획

    ◎1차 전봉준·김원봉연구 펴내/조봉암·홍명희·여운형도 계획 그동안 식민사관의 영향으로 혹은 이데올로기적 편향 때문에 소홀히 다루어져온 한국 근현대사의 인물들에 관한 새로운 조명이 시도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창작과 비평사가 새롭게 기획한 현대인물연구시리즈의 제1·2권으로 최근 발간한 「전봉준과 갑오농민전쟁」(우윤)과 「김원봉연구」(염인호)는 주로 문헌자료에 의존했던 기존의 평전들과는 달리 학문적으로 전공한 젊은 학자들이 직접 현지답사와 인터뷰등을 통해 새로운 시각으로 분석했다는 점에서 한국현대인물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작업으로 평가되고 있다.이와함께 진보당의 조봉암,일제시대 노동운동가 이재유,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건국준비위원회를 이끈 민족지도자 여운형등에 관한 연구서도 곧 선보일 예정이다.이 작업은 역사인물의 체계적 연구를 통해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고 왜곡된 부분을 바로잡는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전봉준의 연구에서는 갑오농민전쟁의 원인에 대해 단순히 삼정문란이나 지배층의착취,그리고 양반·토호들의 횡포에만 초점을 맞춘 종래의 시각에서 벗어나 조선후기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이를 토대로한 사회변동이 가속화하는 가운데 일어난 것이라는 일관된 관점을 유지했다.특히 주도면밀하고 조직적인 운동전개로 근대 민중운동 역량의 일대폭발을 가져온 전봉준의 역할을 중요하게 다루었으며 그의 인간적 면모도 부각시켰다. 민족주의자 약산 김원봉의 연구는 그의 고난에 찬 투쟁사와 사상을 하나의 일관된 틀로 체계화한 국내최초의 연구서이다.그는 남한에서는 19 48년 월북했다는 이유로,북한에서는 민족해방운동사의 정통성을 만주의 항일무장투쟁에만 한정시키는 또다른 이데올로기적 제약으로 남북한 양쪽에서 배척당해 역사의 뒤켠에 매몰된 인물이었다.이 책에서는 그가 이끈 의열단·민족혁명당·인민공화당등의 활동을 다각적으로 구명,그가 민족독립을 최고의 가치로 삼은 민족주의자였으며 그러면서도 민중의 이익을 일관되게 추구한 진보주의자였음을 밝혀내고 있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4)

    ◎매신의 항일논조/을사조약 다음날 즉각 “무효” 보도/일진회의 합병주장 사흘에 걸쳐 통박/“매국의 자유는 없다”… 친일지 정면비판/황성신문과 공동보조… 민족지의 방향 주도 20세기 초반의 국운은 풍전등화 그것이었다.일제의 만행을 지켜보면서도 그저 「침묵」만이 금과옥조로 여겨지던 암울한 시기이기도 했다.그러나 대한매일신보(이하 신보)가 깨어있는 언론으로 날카로운 배일논조를 통해 사라져가는 민족혼을 불러일으켰다.또 다투어 일제 찬양에 앞장서고 있던 친일지들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논조뿐 아니라 기사는 물론 연재소설까지 총체적으로 일본침략에 맞섰기 때문에 친일적 사회분위기에 늘 경종을 울렸다. ○타지의 논조 감시 1904년 발발한 노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제는 이 땅에 배타적 지배권을 따내는데 성공했다.이듬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통감부를 설치한 일제는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초대 총감에 앉혔다.그리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몰수하고 민족의 분열을 획책하는등 조선을 합병키위한 온갖 탄압통치를 자행하고 나섰다.이같은 상황에서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민족의 자주독립을 주장하며 민족 단합의 기치를 올렸다.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등 민족지들은 이에 동조했지만 국민신보 대한신문등 친일지들은 통감부에 추파를 던지면서 아부까지 일삼았다.민족혼을 일깨우는 일방 친일지들의 논조와 태도를 감시하는것 또한 민족지들의 중요한 임무가 될수밖에 없었다. 신보는 민족지들 가운데 통감정치에 대한 대항과 친일지들을 비판하는데 선봉장 이었다.주필 양기탁을 비롯하여 박은식 신채호 장도빈 황희민등 논설기자를 주축으로한 당시 신보의 필진은 신랄한 필봉으로 통감부및 대한제국의 친일내각 정부를 규탄했다.그래서 신보의 논조는 일제침략의 두려움과 조정의 무능에 실망을 느끼고 있던 국민들에게 각성제가 되었다.결국 환영받는 신문으로 다투어 구독함으로써 당시 다른 신문들의 발행부수가 2천부내외에 불과했던 것과는 달리 신보는 1만부를 돌파하기에 이른다. 1905년 11월17일 을사조약의 체결은 대한매일신보로 하여금 배일논조의 강도를 더높이게 하는계기가 됐다.조약체결 바로 다음날인 11월18일자를 보면,이 조약의 무효를 공공연히 제기한다.『한국황제께옵서는 한국 독립을 중념하사 정대한 의리로써 거절하시고 칙어로써 불윤하셨다』는 대목이 그것이다①. 이어 신보 21일자는 황성신문 20일자에 장지연사장의 사설 「시일야방성대곡」과 을사조약이 강제로 맺어진 경위를 폭로한 기사인 「오건조약청체전말」등의 게재로 벌어진 황성신문사태를 보도한다.이 기사는 황성신문이 일군의 검열을 받지않고 배포함으로써 사장을 비롯한 10여명의 사원이 체포되고 무기정간 당한 사실등을 상세히 보도했다.또 23일자에는 장지연에 대한 수사 속보와 함께 「황성긍지」 제하의 사설에서 황성신문의 매국적들에 대한 규탄을 찬동하면서 일제의 언론탄압과 친일지들의 침묵을 강력히 비난하고 있다. 이같은 대한매일신보의 논조는 통감부가 보면 눈의 가시처럼 여겨졌으나 사장 배설이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섣불리 손을 댈수도 없었다.2년후인 1907년 전국적으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과정에서 신보의 논조는 국민들의항일구국의지에 또한차례 불을 댕겼다.이 문제를 사설로 처음 다룬것은 이해3월1일자 「한인충애」란 표제의 글이다.여기서 신보는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으로부터 면탈하려는 인민의 제의이다.이를 성취시켜야겠다는 것과 신문이 이러한 가찬할만할 일을 돕는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라고 일제의 비위를 긁어버린다.이는 결과적으로 이 운동에 국민들이 적극 동참,애국운동으로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다한다②.일제는 점차 두려움을 느껴 이 운동에는 배일사상이 개재돼 있으며 미국이 이를 배후조정하는 것이라고 공격하면서 탄압을 가중해오거나 회유책을 쓰는등 갖가지 방법을 동원했다.그러나 신보는 이에 정면으로 반발하고 나섰다. ○일제회유책 거부 1909년12월4일 한일합병을 주장해온 일진회가 소위 「일진회합병성명서」를 발표하자 당시 민족지는 물론 일반국민들의 격분은 극에 달했다.이때 신보는 「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이라는 반박사설을 연3일에 걸쳐 실을 정도로 강력히 항의했다. 대한매일신보는 또 1906년 1월 국민신보에 이어 이듬해대한신문,1909년 9월 시사신문등 친일지들이 잇달아 창간되자 그 필봉을 더욱 날카롭게 갈았다.그들의 매국적 보도태도를 감시하고 지적하는데 한시도 눈을 팔지 않았다.1907년 12월17일자에 보도된 「위국민대한양신문초혼」 제하의 사설은 친일지들의 신보 비판에 대한 답신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당시 친일지들이 전국 각지에서 일고 있는 의병을 「폭도」라고 보도하는데 대한 김정익이라는 독자의 반박문을 신보가 게재했다.그러자 친일지들은 「대마두매일보」「대화태매일보」등 사설로 일제히 신보를 비판했던 것이다.장문의 이 신보의 사설은 『공격도 자유고 비판도 자유다.그러나 매국하는 자유는 있을 수 없다』는 논지를 펴며 조목조목 친일지들의 반성을 촉구했다③. 이어 1910년 4월1일자의 「고·시사신문」제하의 사설은 시사신문이 일제에 아부하는 비천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대해 서슴없이 경고한다.특히 시사신문이 사내에 관광계를 설치하여 일본관광단을 모집하고 있는데 대해 강력한 비난을 퍼부었다.『일본관광의 목적이 선진실업을 수입하여 실업개발을 이룩하자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그것은 한국인을 일본인화 시키려는 일제의 획책에 빠져드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그러면서 관광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할것을 촉구했다.그밖의 경고성 사설들을 보면 「본보의 우인과 적혐자」(07·5·11)「부국민신보」(7·18)「대한신문마기자아일람」(12·8)「국민보마기자아」(09·5·21)「국민대한양마두상각일봉」(5·23)「파외파의 담계」(6·6)등 수를 헤아릴수 없이 많다. 대한매일신보의 배일은 논조나 기사를 통해서만 나타난것이 아니라 해학과 풍자가 가득한 신문소설을 통해서도 나타난다.대표적인것으로는 「소경과 앉은뱅이 문답」(1905년 11월17일부터 12월13일까지 연재)이 있다④.무기명으로된 이 작품은 미신타파와 단발령선포등 사회개혁으로 생활기반을 상실당한 소경 점쟁이와 앉은뱅이 망건쟁이의 대화형식을 빌려 구성한 것이다.수구파와 개화파로 갈라지는 신구세력의 대립,외세의 가열한 침투,무능한 정부의 외세의존,자유주의사상 전래등 급격한 변혁으로 인한 현실비판이 주요골격이다.이들의 대화중에는 을사오적에 대한 규탄도 있고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대한 비분강개도 나온다.또 「이태리국 아마치전」에서는 이탈리아의 건국영웅 아마치의 구국투쟁 편력을 서술함으로써 은연중에 애국사상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대한매일신보의 이같은 적극적 배일 태도는 1909년 5월 사장 배설이 죽고 만함(Marnham)이 사장직을 이어받은 후에도 1년여간 계속되었다.그러나 1910년 6월 이장훈에게 양도된 이후 그 예리한 필봉이 비운을 맞는다.그래서 역사는 수레바퀴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①정진석,일제하한국언론투쟁사(정음사 1975)PP26∼32◎최준,한국신문사론고(일조각 1976)PP113∼117 ②이해창,한국신문사연구(성문각 1983)PP405∼406 ③이재선,한말의 신문소설(한국일보 1975)PP40∼47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29)

    ◎소년시절:10/화성의숙 전학 전후/“당시 만주에 공산주의 팸플릿” 필자 「평가」에/“소학교때 「레닌일생기」 읽었다” 92년판 날조/학업 비정상적… 면학문제 언급없어 김일성의 유소년 시절에 대한 우상화의 하나는 그가 어릴 때부터 얼마나 총명하고 공부를 잘했는가를 과장하는데 있었다.그런데 무송소학교 시절부터는 이 방향을 계급적 관점으로 더 강화한다.예를 들어 회고록에서 전기작가는 김일성으로 하여금 『나는 무송에 있을 적에도 「레닌의 일생기」나 「사회주의 대의」와 같은 책을 몇권 읽었다』라고 말하게 하고 있다. ○계급적관점 강화 그런데 우리는 이와같은 주장은 1992년에 출판된 「세기와 더불어」이전에는 그 어떤 김일성 전기에도 실린 적이 없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전기작가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이런 조작을 했을 것이겠는가. 필자는 85년에 일본에서 「김일성평전」을 출판하고 87년에 이것을 한국에서 번역출판하였다.이 책에서 필자는 김일성이 소년시절에 마르크스 레닌주의 서적을 읽었다는 엉터리 주장을 철저히 비판한 일이 있었다.일례로 여기에 그 문장의 일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공산주의문헌은 많지 않았다.1924년에 일본 경찰이 동남만에서 입수한 「불온문서」에는 공산주의 자체를 정면으로 해설한 책은 거의 없었다.1925년에는 이 간도에서 대량으로 공산주의 관계문헌이 압수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선전팸플릿이나 신문이었다.…공산주의를 선전하는 얄팍한 팸플릿으로는 레닌의 이름을 붙인 전기·역사·공산청년회역사·공산역사 등이 있었고 그 외에 「공산독본」「노서아 노동역사」「사회주의대의」「공산당의 선언」등이 있었다.이 팸플릿류는 모두가 소련에서 발행되었고 간도지방에서조차 1∼2점씩밖에 압수되지 않았다』 이것은 일본에서 필자가 「외무성경찰사」란 극비문서를 찾아내어 그 기록을 그대로 옮긴 것인데 여기에는 「레닌의 이름을 붙인 전기」「사회주의 대의」란 어구가 보인다.북한의 전기작가들은 필자가 낸 평전의 이 일절을 표절하여 김일성이 무송에서 「레닌의 일생기」「사회주의 대의」를 「읽었다」는 새로운 날조를 하게 된 것이다. ○얄팍한 선전신문 김일성은 이 시기 학교생활이 비정상적이었다.그 때문인지 종래의 전기에서는 면학문제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고 있었는데 「좌익서적 읽기」신화의 날조에는 엉뚱하게도 필자가 자료를 제공해 준 것으로 되었다. 다음부터는 무송소학교를 중퇴한 후의 일로 넘어가겠다. 1926년 2월14일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이 달에 정의부 중앙의회에서 금년 4월1일부터 군인을 모집하기 위하여 정의부 군인이 될만한 청년을 모집할 위원을 선정하여 만주 각 현에 파견하리라는데 일본과 중국경찰의 주목을 피하기 위하여 중학생을 모집하는 형식으로 할 것이라 하였다」 이 기사는 화성의숙이 창설되는 움직임을 암시하고 있는 점에서 주목된다.여기에는 이때 정의부에서 각 현에 파견될 위원의 명단도 실려 있다. 따라서 그 위원중 누군가가 김형직의 가정에 와서 3∼4월에 김일성을 화성의숙에 입학시킬 것을 상의한 것도 추측이 가능하다.그러나 박만포선생의 의견에 의하면 김일성은 3월이나 4월에는 입학하지 않았었다.필자는 4월 입학설이었으나 이러한 6월 전학설도 앞으로는 고려해 나갈 것이다. 일본 영사관에 계출된 기록에 의하면 화성의숙은 화어연구학교로 수업연한이 1년6개월이며 교원이 2명,생도가 30명으로 26년 3월에 설립 인가가 난 것으로 되어있다. 26년도는 1학년생만이 입학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의부의 진짜 목적은 이 학교를 교포 자제에게 중국말이나 가르쳐주는 정착준비 학교가 아니라 항일군인을 양성하는 군관학교로 경영하는 것이었다.숙장이 최동오,재무가 강제하로 정의부는 유하현 삼원포에 교과서를 찍는 인쇄소까지 마련하여 학업을 보장하였다. 이번 회고록에서는 화성의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화성의숙은 독립군의 간부를 키워낼 목적으로 1925년 초에 세운 정의부 소속의 2년제 군사정치학교였다.화성의숙의 입학대상은 정의부산하 중대들에서 선발된 현역군인들이었다.우에서 입학생수를 쪼개어 내려보내면 중대별로 우수한 청년들을 뽑아 보내는데 2년동안의 학습과정을 마치면 성적에 따라 새 직급을 주어 출신 중대에 되돌려 보내었다.독립군 밖에서도 개별인사들의 소개로 입학하는 청년들이 더러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었다」 ○설립연도 등 조작 여기서는 화성의숙이 26년에 설립된 것을 25년으로,1년 반인 수업기한을 2년으로 바가지씌운 일이 눈에 띈다.화성의숙은 25년에 설립될 계획이었지만 26년으로 지연되었다.그리고 일제의 탄압에 의하여 그 명칭도 26년 8월 경에는 화림학교로,28년 6월경에는 화흥학교로 바뀌어졌다. 그러나 여기서는 김일성이 자기 스스로 화성의숙 전학은 특수한 케이스였다고 인정하고 있는 점이 더 중요하다.그의 전학은 역시 비정상적이었다. ①「세기와 더불어 1」156면 ②평전127∼128면 ③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8)72∼73면 ④평전 73면 ⑤「세기와 더불어1」136면 ⑥평전 74면
  • 공주 중호마을 반촌 탐방(한국정신의 원류를 찾는다:3)

    ◎민족 정체성 확립을 위한 캠페인/“기개가 첫 덕목” 3백년 이어온 선비정신/효종때 거유 이유태선생 후손 모여살아/“학문·덕 갖춘뒤도 때아니면 불출사” 일관/12대 종손 등 일제때도 한학공부… “학교교육보다 도리·예절이 중요” ○노인들은 상투 틀고 계룡산 산자락이 북으로 금강에 치달아 곰나루를 향해 넉넉하면서도 온화하게 팔을 벌린곳에 자리잡은 충남 공주시 상왕동 중호마을의 용문서원.등용의 옛마을로 계룡의 서기를 이어받은 우리의 선비정신이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이다. 조선 중기 당대의 거유로 명성을 높였던 초려 이유태(1607∼1684년)의 후손들이 오순도순 마을을 이룬지 3백년.반촌의 긍지를 이어온 경주 이씨 집성촌으로 20여가구가 모여 산다.공주시내가 지척이지만 아직도 노인들은 대부분 상투를 틀고 있으며 철저하게 예의범절을 지키면서 선비의 기개를 가정교육 최고의 덕목으로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초려정신의 핵심은 선비로서 불출사의 기개를 강조하는데 있다.선비는 우선 학문과 덕식을 갖추고 그 다음일단 나가면 때를 좌지우지 할수있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고향에 돌아와 은거해야 한다는 정신이다.이를테면 진퇴를 분명히 할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그는 이를 몸소 실천,인효현소종 4대왕에 걸쳐 능참봉부터 사조참판·대사헌까지 모두 39가지의 벼슬이 주어졌지만 실제로 관직생활을 한것은 28세때 5개월과 30세때 6개월이 고작이었다. 그같이 짧은 관직생활에도 불구,그는 학문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당시 정계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경세가로서 당대 호서산림 오현의 한사람으로 추앙받았다.그는 금산 노동 태생으로 18세에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 들어가 장년이 된후에는 사계의 아들 집과 교류하며 그들 부자로부터 예학의 법통을 이어받았으며 치국경세에 있어서는 율곡이이를 숭상했다.그에 학문세계를 율사연원으로 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초려는 병자호란후에는 덕유산중에 은거,모든 벼슬을 사양하였다.그후 효종이 북벌의 큰뜻을 품고 산림학자들을 불러모으자 결연히 상경하였다.그러나 조정은 시배들의 반목과 질시속에 온갖 주의주장만분분할뿐이었고 또한 청나라 사신의 위세는 극에 달해 있었다.그같은 분위기에서 친청파의 척결을 알리는 그의 논소는 조정을 소용돌이로 몰아넣었고 마침내 그는 다시 낙향했다. ○대사헌벼슬 물리쳐 그후 효종이 말년에 다시 밀지로 초려를 부르니 그는 북벌을 위한 구체적 국정개혁안으로 2만여언의 장문상소인 「만언봉사를 거의 완성해 가고 있을 때였다.그러나 그해(1960년) 효종은 승하하고 뒤이어 즉위한 현종은 왕명으로 만언공사를 제출케 했다.그 내용은 위민정치를 근간으로한 군사및 내정개혁사상을 삼고있다.그후에도 현종은 초려의 경륜을 사기 위해 벼슬을 높여 불렀으며 숙종때는 대사헌에 제수됐지만 불출사의 뜻은 완강했다.『나의 뜻이 정책에 반영되지 않는 벼슬길 보다는 땅을 일구며 사는 것이 옳다』는 것이 그의 공직관이었던 것이다. 초려의 강직한 정신은 오늘날 후손들에까지 그대로 전수돼왔다.노인들은 상투등 과거의 관습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가운데 후손들에게는 현대식 학교교육도 애써 가르치고 있다.단지 일제때 일본식교육은시키지 않는다는 고집으로 종손인 12대손 정우씨(52)와 그 또래의 집안 사람들은 학교에 가지 못했다.그는 『우리 형제 다섯중 위로 셋은 학교를 가지 못했고 비슷한 나이의 사촌이나 육촌형제 가운데도 학교를 간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회상했다.대신 그는 15세때 대학을 떼는등 한학을 공부했으며 초려의 책을 비롯,집에 보관중인 3천여권의 서책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고있다. 자식들에게는 초려가 남긴 유일한 친필족자글씨인 「징분항선 복례」(분한 생각을 경계하고,나쁜것은 고쳐 착하게 하고,예를 따라 좇으라)를 가훈으로 가르치며 학교공부를 시켰다.학교공부중에도 사서는 반드시 익히도록 했는데 이같은 집안 분위기에서 큰아들 상익씨(30)는 철학교수로,둘째아들 상욱씨(28)는 한문교사로 후학을 가르치는 교단에서게 됐다. 공주향교의 전교를 지낸 정우씨의 당숙 종언씨(70)도 이웃에 산다.그가 해석하는 오늘날 선비정신의 의미는 이러했다. 『선비가 박력이 약하고 경제능력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완고하고 고집불통으로 비쳐지는 것은 잘못입니다.현대식 교육을 받기는 받되 인간의 도리를 먼저 알아야 하고 잘살아야 하되 나혼자만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그것은 이웃과 국가가 함께 잘살아야 한다는 인간의 행동철학을 먼저 배우자는 것으로 요약될 수도 있습니다.부모나 국가지도자는 이신교자지종(몸으로 행해 가르치는 사람을 따른다)으로 자식과 백성을 가르쳐야 하고 숭조사상의 강조도 교육의 한 방편입니다.선비는 부자가 돼도 부자티를 안내고 빈궁해도 빈궁한 티를 안내야 하는 것이지요』 용문서원은 이같은 초려의 선비정신을 구현하는 도장으로 오늘날 활용되고 있다.제사가 올려지는 사우인 명덕사를 제외하고는 일반에게 공개돼있다.강당인 중화당(17평)과 재실인 존성재(〃)는 초려학연구를 위해 강의실과 침실로 제공된다.연구활동을 돕기위해 현대식 입식 부엌도 설치돼 있고 이동식 화장실,난방도 완비됐다. ○내사책 등 유품 전시 또 유물전시관인 징원당(16평)에는 초려의 저서와 함께 임금이 내린 내사책,이씨 가문의 재산분금록,9대손 성암철영의 항일옥중일기등과 초려의 상아호패와 제사날을 기록해 놓는 기일첩,과거문제 요약집인 강경첨통등 많은 유품들도 전시,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용문서원 건립및 유지 보수를 맡고 있는 사단법인 이초로 기념사업회의 이종철회장(73·전공주교대회장)은 올해의 역점사업으로 장서각 건립을 꼽고 있다.현재 3천건에 달하는 책들이 그대로 창고에 쌓여있기 때문에 이의 분류,정리가 시급하기 때문이다.이를 위한 1억원의 충남도예산중 4천만원의 삭감으로 나머지 재원마련이 가장 큰 현안이기도 하다.국역작업등 서둘러야할 과제는 많지만 현재 1백66명의 회원들이 연회비 5천원씩 내는것으로 충당하는 기념사업회의 예산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회장은 『많은 학자들이 초려사상에 대해 자발적인 관심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다.그러면서 『지난 연말 부산대에서 다섯명의 교수·학생들이 와서 나흘동안 목록작업을 하고 갔다』고 덧붙였다. 이같은 어려운 형편에 있으면서도 기념사업회측은 연구를 위해 오는 학생들에게 시설을 무료료 사용케하고 있다.3년째 겨울이면4,5일씩 초려학 연구를 위해 이 서원을 찾고 있는 20여명의 한남대 대학원생들이 이달 중순 올 것이라는 전갈을 받고 중화당과 존성재는 벌써 깨끗이 치워 놓았다.형편이 넉넉하다면 그들이 여유있게 공부할 수 있도록 식사까지 제공했으면 좋겠지만 형편상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장손 정우씨의 마음을 늘 안타깝게 하고 있다. ◎「만언대사」 상소한 당대경세가/후손들이 서원열어 초려정신 대이어/박성수 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조선시대 최대의 국란,병자호란을 만난 것이 1636년(인조14년) 초려 이유태가 29세 되던 해였다.임진왜적이 물러나 대위국교가 재개된지 겨우 30년,또 다시 북쪽의 외적이 몰려와서 나라 안이 쑥밭이 되고 국왕이 삼전도에 나아가 수모를 당하는 그런 역사를 만나게 되었다.국론은 크게 양분되고 당쟁의 고질병이 온 몸을 덮치는 그러한 시대이기도 하였다.치국경세가 그 어느때보다도 시급한 때에 초려는 평소 품었던 뜻을 만언소라는 글로서 국왕에게 구민·구국책을 건의하였다. 그는 이 상소문에서먼저 농촌경제를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농촌을 떠난 농민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여 황폐화된 토지를 일구게 하여야 오늘의 정치혼란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제의하고 고른 세제의 확립과 면세특권층의 일소를 역석하였다.또 농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하기 위해 향약을 실시하여 서로 돕고 사는 사회를 만들고 오가작통으로 범죄없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교육제도의 일대쇄신을 주장하여 양반의 자제들만 교육하는 제도를 고쳐서 모든 양인의 자제를 학문기관에 보내게 하여 그 능력에 따라 직업과 신분을 선택하도록 하자는 획기적인 제언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고루한 지도층은 자신의 권익만을 생각하고 그의 개혁안을 묵살하였다.묵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를 탄핵하여 유배하고 말았다.이 유태는 그 뒤 스스로 초가집(초려)이라는 자신의 호와 같이 모든 관직(이조참판·요즘의 내무차관직)을 마다하고 향리에 웅거하여 나가지 않았다.그 유명한 초려의 불출사 선비정신이 여기 있는 것이다. 그가 남긴 「초려집」 26권은 이유태의 선비정신을 담은 귀중한 문화유산이며 오늘에 되살려야할 국민정신문화이다.다행히 최근 충남 공주 향리에 그 후손들이 용문서원을 세워 자제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하니 외래문화에 질식할 것도 같은 오늘의 세대에 이보다 더 참신한 청량제는 없다 할것이다.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27)

    ◎소년시절:8/백산소학교/“6학년때 교장과 담판,조선여반 개설” 주장/이번에는 “아버지 김형직이 설립” 옳게 바꿔/“개교행사서 연극공연·연설” 왜곡도 없애 무송소학교 시절에 관한 우상화작업은 학업문제에 있어서는 별로 언급한 것이 없다.교우문제도 한인 학생인 고재봉,고재룡,고재림,고재수 등과 가깝게 지낸 일은 정식 전기로서는 이번 회고록이 그 이름만 처음으로 밝혔다. ○학업언급은 적어 전기작가들은 무송소학교시절의 우상화작업을 백산학교문제에 한정하고 있다.그런데 그 경위를 보면 우상화는 59년의 답사단이 그 시초를 뗏다.그들은 무송소학교 선생 마청산의 말을 받아 쓰는 것으로 이 일을 시작한 것이다. 「무송에는 독립된 한인학교가 없었다.김일성이 6학년으로 진급하였을때 그는 교장 사춘태에게 한인학교 설립을 요청하였다.그 요청에 감동한 교장은 임강의 일본영사관으로 수차 출장하여 허가를 받아서 『무송 제1소학교 부속 조선주반』을 설치했다.이 반은 곧 무송현성 함장문가로 이동하여 40여명의 학생을 받아 들였다.어느날 저녁 개교식에 초청받은 나는 연극공연을 보고 김일성의 연설을 들었다」 이러한 마청산의 말이 원인이 되어 북한에서는 한때 「백산학교는 김일성이 교장에게 요청한 결과 창립됐다」라는 신화가 기승을 부린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아래와 같은 잘못이 있었다. (ㄱ)무송에는 오래전부터 백산학교가 있었다.일본기록에 의하면 1916년에 생도 23명을 성락힐이 가르쳤던 백산소학교가 있었고 20년에는 백산무사단이 이 백산학교에 병설되어 있었다. (ㄴ)김일성이 「학교 설립문제」를 가지고 6학년 진급시에 교장과 담판한 것이라면 그것은 1925년 8,9월쯤이다.그러나 일본영사관 모예산분관은 27년 1월에 분관주임이 임명되었지만 이 곳에 있었던 배일운동으로 주임은 분관에 들어가지 못하고 28년 3월에 일본에 소환되었다. 마청산은 교장 사춘태가 소학교 6학년생의 말을 듣고 감동하여 출장했다고 했지만 이것은 1개 중공당원에 불과한 그가 북한의 최고권력자가 보낸 대표단의 위세에 눌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그는 김형직보다 김일성을 입에담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속에 있었다.그러나 가령 그런 일이 있어서 25년에 임강에 갔다 하더라도 그곳에는 일본영사관은 그림자도 없었다. ○마청산 말미 발단 다만 이상과 같은 잘못을 빼면 마청산의 말에는 부정하기 어려운 점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무송소학교에 「조선족 반」이 생겼다든가,새로 함장문가에 교사가 마련되어 그것을 축하하는 개교식이 있었다든가,거기에서 연극공연이 있었다든가 하고 있는 것들이다.4년제 백산학교 개교식에서 다른 학교지만 6학년생 격인 김일성이 연설하는 것도 어찌 보면 있음직하다. 그후 북한에서는 이러한 마청산의 말을 자료로 하여 우상화작업이 본격화되었다.우상화란 사실을 왜곡·날조·은폐하여 턱없이 과장·미화·절대화하는 것이지만 이번에는 우선 백산학교 설립자의 이름이 김일성으로 부터 김형직으로 옳게 바뀌어졌다.전기작가들은 당연한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정으로 김일성이 6학년에 진급했다든가,교장이 임강에 갔다든가,그 후에 「조선족 반」이 생겼다든가 하는 전기 제작상 「귀찮은」무송소학교 문제들이 일체 불필요하게 되었다.그리하여 초점은 김일성이 전학한 무송소학교로부터 백산학교 개교식 쪽으로 옮겨졌다.김일성은 개교식에서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란 연극을 꾸미고 대중을 향하여 연설을 한 후에 자신이 주역이 되어 공연한 것으로 된 것이다. 전기 작가들은 그 위에 큰 왜곡을 하나 더 하게 되었다.전기를 새로 쓸 때마다 그들은 개교식의 날짜를 그의 소학교 전학 시기에 접근하게 한 것이다.1983년에 발간된 김일성 연표에서는 드디어 백산학교 개교식과 무송소학교 전학이 같은 「1925년 봄」으로 되었다.이 왜곡은 김일성을 「효자」나 부친의 「혁명위업」계승자로 조작하는데 필요한 조치였다. 백산학교에 대하여 이번 회고록은 요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백산학교는 무송지방의 망명자·선각자들이 농민들과 함께 설립한 역사가 오랜 사립학교였다.초기는 지금의 농촌집 방 두개를 합친 것만 하였다.그런데 그러한 학교도 운영비의 부족으로 오랫동안 문을 닫지 않으면 안되었다.우리가 무송에이사하였을 때에는 백산학교를 복구하기 위한 운동이 본격적으로 벌어지던 시기였다.일제의 부추김을 받고 있던 군벌당국이 학교를 인가해주지 않아서 아버지는 여간 애를 태우지 않았다. 아버지는 백산학교 명예교장으로서 교편은 잡지 않았으나 교육내용과 후원사업을 보며 학교에 나가 연설도 하고 과외활동 지도도 많이 하였다」 ○회고록 대폭 수정 마청산의 잘못된 이야기를 자료삼아 전기작가들이 더 잘못된 우상화를 하고 있었는데 이번 회고록은 그것을 약간 시정하였다.필자가 백산학교는 역사 있는 학교라고 「김일성 평전」에서 지적한 것이 주효한 것인지 회고록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그리고 개교식때의 공연이나 연설에 언급하지 않아 의미심장한 여운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항일무장투쟁 전적지를 찾아서」15면이하 평전 66면 상동서 67면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 동서 3면 「세기와 더불어1」122∼3면
  • 일 작가,「20만 대학살」 증언록 발간

    ◎“남경의 일제병사 살인을 즐겼다”/당시 미 선교사의 생생한 일기 발굴/세딸 교대난행… 일가 13명 죽이기도 『일본 군인들은 집안에 있던 할아버지(75),할머니(74),한 어머니와 그의 세딸(16,14,?)을 포함해 모두 13명을 죽였다.그들은 딸 한명마다 3차례씩 강간한뒤 가장 소름끼치는 방법으로 죽였다』 남경 대학살 사건을 직접 본 몇 안되는 외국인이었던 미국 개신교 선교사 존 매기씨는 당시 일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20세기에서 가장 잔인했던 이 사건에서 일본군은 남경을 손에 넣은 1937년 12월13일부터 6주동안 모두 20만명의 중국인을 죽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일기는 50년 넘게나 숨겨져 있다 지난 91년 뉴욕 교외에 살던 매기의 한 손자가 집 지하실에서 찾아냈다. 그후 이 일기는 일본의 작가 다키다니 지로가 지난달 발간한 「남경사건 목격자」라는 제목의 책에서 처음으로 햇빛을 보게됐다.이 책은 매기의 일기외에도 이 사건을 겪고 살아남은 당시 중국 군인과 민간인들의 이야기도 곁들여 놓았다. 그 6주동안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는 문제는 일본에서는 여전히 논란거리이다. 집권 자민당의 중의원 의원이자 우익성향의 작가인 이시하라 신타로(석원신태낭)는 지난 90년 미 플레이보이지와 회견하면서 이 사건에 대한 중국측 주장은 거짓이라고 주장했으며 일 교과서는 아무런 내용도 담고 있지 않을 정도이다. 그러나 다키다니씨가 펴낸 이 책을 보면 그 내용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일본군이 1937년 12월13일 중국의 당시 수도인 남경을 손에 넣자 일본당국은 외신기자 5명 등 22명의 외국인만을 그 곳에 남게 했다. 남경이 떨어지기 한달전부터 매기와 다른 사람들은 전투에서 도망쳐온 민간인에게 안전한 은신처와 음식 등을 주기위해 남경 도심에 특수지역을 만들었다.그 곳은 곧 사람들로 터질 지경이었으며 심지어 대학 건물들과 외국인의 가정에까지 수천명의 사람들로 붐볐다. 12월19일께 강간과 살인은 아주 버젓이 벌어졌다고 매기씨는 일기에서 그 때를 회고했다. 『살인과 강간으로 얼룩진 한 주일이었다.일본군은 눈에 띈 죄수들을 죽인 것은 물론 나이가 많건 적건 수없는 민간인들을 죽였다.그들가운데 대부분은 토끼사냥때의 토끼처럼 총에 맞고 죽었다』고 그는 증언했다. 그는 이어 자기가 서있던 곳 가까이에서 일본 군인 2명이 머리에 두차례나 총으로 쏴 사람을 죽였다면서 『그들은 마치 토끼를 사냥하듯 사람을 죽인 뒤 담배를 피우고 웃고 즐겼다』고 덧붙였다. 매기씨는 이와함께 일본군이 죄수들을 집단으로 걸어가게 해놓고 뒤에서 기관총으로 쏴 죽인 뒤 시체들을 한데 모아 불태워 버린 잔혹행위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는 또 안전지역안에서 일본군이 여성들을 강간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면서 성폭행을 벗어날 수 있는 단 한 방법은 여성이 음식물을 토해 방안을 더럽히는 것으로 그러면 군인들이 그들을 내쫓아 버리게 된다고 쓰고 있다. 매기의 일기는 다음해인 38년 2월3일로 끝을 맺고 있다.그러나 그는 남경에 계속 머무르면서 피난민들을 돕기위해 일한다. 그는 또 합쳐서 37분 정도 되는 필름 4통을 지니고 있다가 밖으로 몰래 빼낸다. 여기서 나온 사진들은 지난 38년 미국 언론을 통해 세상에 밝혀졌으나 필름 전체는 지난 91년에서야 비로소 햇빛을 보았다. 이 필름의 사본 한 벌은 당시 남경에서 함께 있던 한 독일인 외교관이 갖고 있다가 91년 베를린에서 발견됐다. 극동 도쿄 전범재판소는 지난 48년 일본군의 남경 대학살때 12월13일부터 6주동안 15만5천명 이상이 숨진 것으로 추정했으나 실제로는 약 2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범재판 당시 중국측 대표는 성폭행과 살인 행위는 중국인의 항일운동을 없애기 위해 생각해 낸 폭력정책의 한 부분으로서 일본 최고위급의 승인을 받은 것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3)

    ◎매신의 인걸들/선각자들 결집… 「국권회복」 구심체로/영국인… 일제탄압에 울타리역할/배설/총무 맡아 항일논조 사실상 주도/양기탁/박은식·신채호는 주필로 민족자부심·독립정신 고취 대한매일신보가 민족의 대변지로서 국권회복운동의 정신적 구심점이 된데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다.그 가운데 하나가 이 신문에 관련 또는 종사했던 사람들의 면면인데 국적과 신분을 뛰어넘어 매우 다채로운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이 신문을 이끈 주역은 영국인 사장 배설과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등 논객이자 사학자이며 항일투사였던 국내 인사들로 돼있다.배설(Ernest T Bethell)은 1872년 11월3일 영국 브리스톨시 북부 애쉴리에서 태어났다.극동상대의 무역상이던 토머스 헨콕과 전도사의 딸인 마서 제인 홀름의 다섯 남매중 장남으로 브리스톨의 머천트 벤처러스스쿨을 나왔다. 이 학교를 졸업한뒤 열다섯살 때인 1888년 일본에 건너와 1904년초까지 16년동안 고베(신호)에 살면서 무역업에 종사했다.1899년에는 동생들과 함께 「베델 브러더스」라는 무역상을설립했다.이 회사는 지금도 런던에 있다.어떻든 배설은 한때 돈을 많이 벌어 러그(rug·깔개)공장을 차리기까지 한것을 보면 사업수완이 대단했던 인물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일인들의 방해로 실패,재산을 모두 날렸다.졸지에 삶의 기반을 잃게 된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성대로 늘 활달한 쾌남아의 풍모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그는 수영 크리켓등 스포츠를 좋아했으며 특히 음악에는 타고난 감수성의 소유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체계적인 음악교육은 받지 않았으나 청중들 앞에서 곧잘 노래를 부를만큼 빼어난 가창력도 지녔다. ○늘 활달한 쾌남아 서양장기를 잘 두었으며 술과 담배 또한 즐기는 편이었다.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문장력도 여간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다. 학력은 비록 고졸에 그쳤으나 이처럼 다채로운 그의 재능과 기질은 언론인으로서 훌륭한 잠재력을 지녔던 것으로 평가된다.이윤추구가 최대의 목표인 무역업보다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고 창의성을 발휘,정치 사회에 직접 영향을 미칠수 있는 사업인 신문발행이그에게는 적격이었던 셈인지도 모른다. 그가 언론과 인연을 맺은 것은 러그사업에 실패한 직후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지의 특별통신원이 되어 한국에 온 것이 계기가 됐다.그리고 그는 불과 4개월 1주일만에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할 수 있었다.배설의 언론입문은 그의 자질이나 성격과 결코 무관치 않다.당시 한국의 실정 역시 배설과 같은 언론인을 절실히 필요로 한 시대이기도 했다. 그가 양기탁을 만나 대한매일신보의 견본판 「양자신문」을 만들기는 1904년 6월29일이었으며 실제로 신문을 창간하기는 20일 뒤인 7월18일이었다.그로부터 1909년 이 땅에 뼈를 묻히기까지 줄곧 한국인의 편에서 일제에 맞선 항일언론의 선봉장으로 또 신보를 이끌고 지킨 울타리 역할을 다 해냈다. 배설이 신보를 지킨 울타리였다면 양기탁은 신보를 떠받친 기둥이요 대들보로 비유해도 좋다.그는 신보사의 전무와 주필 그리고 편집국장을 겸한 위치인 총무로서 제작 및 운영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항일논조를 사실상 주도한 신보의 분신이었다. 양기탁은 호가우강으로 1871년 4월2일 평양태생이다.배설보다는 1년7개월 먼저 태어난 셈이다.부친은 한학자로 그 지방에서 널리 이름이 알려졌던 양시영이었다.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는데 사람됨이 매우 총명하여 보기드문 소년 문장가로 꼽힐 정도였다. 그가 서울에 오기는 배설이 일본에 갔던 같은 나이인 15살 때였다.상경직후 동학및 유림의 명망가이자 우국지사인 나현태를 알게 됐다.이후부터 여러 우국지사들과 접촉하면서 그들의 애국사상에 감화를 받게 되었고 동학당과도 관계하면서 견문과 사상을 확고히 다지게 되었다. 외국과의 교섭이 점차 확대되던 국내외 정세에 영향을 받은 그는 한성외국어학교에 들어가 반년동안 영어를 배우기도 했다.따라서 그의 지식과 사상은 어려서 배운 한학의 토대위에 양학문과 기독교 정신이 접목된 것이 아닌가 한다.또 동학과도 관계함으로써 민족주의 사상의 기틀을 다지게 됐다.일제의 가슴에 예리한 비수를 들이대는 듯 했던 신보의 반일논설 필봉은 그의 이런 사상과 학식에 바탕한 것이다. 그는 한때 부친과 함께 캐나다의 선교사 게일(James S Gale)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한영사전을 편찬하는 일에도 참여했다.이 한영사전은 1897년 6월에 출판됐는데 인쇄소는 요코하마에 있는 복음인쇄합자회사였고 발행소는 서울야소교서회로 되어 있다. 그는 신보를 이끈 항일지사형 언론인의 전형적 인물이다.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신민회를 결성,그 총감독으로 활동한 바도 있으며 나라를 빼앗긴뒤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일제에 대항케한 열혈투사이기도 했다.여러차례의 옥고끝에 만주로 도피한 그는 상해에서 광복운동에 종사하던중 1933년 김구에 의해 법무담당 국무위원에 임명,1년4개월간 재임했다.강소성 담양현에서 그 파란의 삶을 마쳤는데 그 해가 1938년이다. 백암 박은식은 황해도 황주태생의 이름높은 성리학자로서 본래 황성신문의 논설기자였다.이 신문이 정간된 뒤 양기탁의 추천으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논설기자)로 자리를 옮겨 정력적인 항일언론 활동에 나섰다. ○신민회에도 참여 신민회가 결성되자 그 원로회원으로서 교육 및 출판부문을 담당하기도 한 그는 신보를 통해 주로 애국계몽에 관한 글을 집필했다.신교육구국사상·사회관습개혁사상·애국사상·대동사상 등 애국계몽사상을 설파,국권회복운동을 적극 고취하는데 앞장섰던 것이다.한일합방뒤에는 상해로 가서 독립운동에 나서는 한편 「한국통사」「한국독립운동지혈사」등 많은 역사 저술을 통해 민족적 자부심과 독립투쟁정신을 심는데 크게 공헌을 한 인물이었다. 박은식의 뒤를 이어 신보의 주필로 활동한 단재 신채호는 충남 대덕출생으로 명성 높은 사가였다.역시 황성신문의 논설기자였다가 양기탁의 천거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됐다.민중계몽 및 정부편달 중심의 시론과 우리나라 역사관계 사론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1910년 망명할 때까지 그는 대한매일신보에 「일본의 3대충노」「이십세기 신국민」「서호문답」「금일 대한국민의 목적지」등의 논설과 「독사신론」「수군 제일위인 이순신전」등 역사관계 논문및 시론등을 연재,민족의식을 일깨웠다. 신민회조직에 참여했고 국채보상운동에도 가담했다.한마디로 그는 신보의 국권회복운동을 이끈 주역의 한사람으로서 일제에 대한 저항의 논리를 구축하고 민족운동의 방향을 제시한 사람이었다. 이밖에 대한매일신보를 이끌어온 사람들로는 임기정 이교담 옥관빈 강문수등이 있다.이들은 주로 업무분야 종사자들로 신보의 조직을 통해 일본세력을 몰아내려 했던 사람들이다.
  • 곡 조경한옹(외언내언)

    백강 조경한옹.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증 마지막 생존자였다.그가 7일 영면했다.1900년생이니 93세.천수를 누렸다고 하겠다. 이렇게 장수하게 된 것은 독립운동하는 동안 흉악한 적탄이 그를 「피해 갔기」때문이다.「백강 회고록」속에서 『…노획한 전리품의 풍성함과 전멸 당한 적군의 엄청난 수에 있어 나라 망한후 항일전사상 가장 큰 기록』이라고 자평하는 것이 왕청현 대전자대첩.그런데 이 싸움에서 『기이하고 다행한 일은 아군측에 1인의 전사자도 없다』는 사실이었다.그의 바지 저고리를 뚫고간 총알은 세군데.그렇건만 사람은 안다쳤다.그는 광복후 그 전투복을 가지고 귀국했는데 6·25때 없어졌다. 전통적인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네살부터 한문을 배우기 시작한다.문재가 빛났던 듯하다.여섯살 때 촌숙에서 한자 석자씩 모아 한 구절을 만드는 시를 지은 것이 회고록에 적혀 있다.­운기산 하처거 풍동수 하처래 거래자 개자연(구름은 산에서 일어나 어디로 가며 바람은 나무를 흔드니 어디서 왔느냐 가고 오는 것이 모두 자연이어라).14살때 친구한테서 양계초의 「음빙실전집」을 빌려 읽고부터 사상 변화가 싹트기 시작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평생을 애국·우국 일념으로 고고하게 살아온 지사.그의 회고록을 읽느라면 고개가 수그러진다.그는 재작년의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에 기자를 만나 세상을 걱정한다.돈과 권력만 생각하는 세상 풍조를.『정치인들이 권모술수만 부리면 세상은 어지러워지게 마련이지요』『더 늦기 전에 인륜을 바로잡아야 해요』.평소 입만 열면 민주정기를 되찾아야 한다고 강조해 왔던 백강옹.여러해 전 병석에 누워 위독했을 때는 『포용하고 조화하라』고 거푸거푸 되뇌었다.이악스러워지면서 배타로 흐르는 세속을 안타까워함이었으리라. 여섯살 어린 나이로 읊었던 『가고 오는 것이 모두 자연이어라』는 시구 그대로 그 또한 자연으로 돌아 간다.하지만 나라와 겨레 위해 살아 왔던 생애의 빛은 이승에 남아 영원히 귀감으로 되는 것이리라.명복을 빈다.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26)

    ◎소년시절:7/전기마다 다른 무송학교 학력/58년 역사서엔 전학아닌 입학 위장/중퇴사실 감추고 “우등졸업생” 선전/재학땐 토호아들과 절친하게 지내 김일성이 1925년 4∼5월에 간 무송현성에는 당시 중국 소학교가 있었다.그런데 이 학교에 관한 전기의 기술은 아래와 같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학교 이름과 김일성이 들어간 시일 ㉠1924년에 무송제1우급소학교에 입학했다.(1958년의 역사서) ㉡25년 봄에 무송현립제1양급학교에 다녔다.(83년의 김일성연표) ㉢25년 봄에 무송제1소학교에 들어갔다.(83년의 「조선을 알아야 한다」156면) 85년에 김일성평전을 냈을 때 필자는 「조선을 알아야 한다」는 입수하지 못하고 있었다.그러나 필자는 이 점에 대해서 「우급소학교」란 1938년 이후에,그리고 「양급소학교」란 36년 전후에 각각 괴뢰 만주국에서 4년제 초급과 2년제 고급을 병설한 소학교를 호칭한 것이었다고 밝히고,김일성이 들어간 25년에는 그저 「무송제1소학교」로만 불렸다고 하였다. 이번 회고록에는 「무송 제1소학교」로 되어 있다.②수업기간 ㉠25년 봄부터 26년 초봄까지 다녔다.(83년의 김일성연표) ㉡「26년 초봄 무송 제1소학교를 최우등의 성적으로 졸업했다」.(「조선을 알아야 한다」164면) 당시 중국에서는 소학교는 8월20일부터 1월31일까지 제1학기,2월4일부터 6월30일까지가 제2학기였다.따라서 25년 봄 같으면 그는 고급소학교에 입학한 것이 아니라 1학년 제2학기 도중에 전학한 것으로 된다.또 26년의 초봄이라면 3월쯤이다.김일성은 「최우등의 성적으로 졸업」한 것이 아니라 고급소학교 2학년 제2학기 초에 중도 퇴학하였다. ①,②를 보면 김일성은 1년도 못되는 기간을 무송제1고급소학교에 다녔는데 입학도 졸업도 하지않았다.그래서인지 이 학교는 한 때 그에 대하여 별로 큰 대접을 하지 않았다. 「그이께서 학교교장의 안내로 한 책상에 다가 가시었을 때였다.위대한 수령님과 함께 책상에 앉게 된 중국인 학생이 일어나 그에게서 들고 계신 책가방을 받아놓으며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그가 바로 장울화동지였다」 이것은 1985년에 나온 「장을화동지는 나와생사고락을 같이 한 옛 전우입니다」라는 글인데 김일성의 회상을 전기작가가 대필로 써준 것이다.그런데 문제는 학교 교장이 그를 교실의 책상머리까지 안내했다는 말에 있다. 1959년 김일성은 해방전에 자기가 한 항일투쟁의 「전적지」를 답사하는 대표단을 만주에 보냈다.그러나 무송도 들렀던 답사단은 무송소학교 기사는 쓰지 않았다.이때 답사단을 영접한 무송소학교 선생은 마청산이었는데 그가 답사단을 소학교에 안내하지 않고 그들을 김형직이 살았다는 소남문가의 집에 안내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답사단은 그가 여기서 「김일성원수는 바로 저 창가에 책상을 놓고 공부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고 쓰고 있다. 25년 김일성을 교실 책상머리까지 안내했다는 무송소학교 교장은 59년,김일성이 직접 보낸 대표단을 푸대접하여 학교 문전에도 안내하지 않았다.그 까닭은 1학년 1학기 도중에 전학하고 2학년 2학기 도중에 중도퇴학한 김일성에 관한 자료란 이 학교에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일은 있었지만 중국인 장울화(통명 장아청)와김일성이 친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대표단은 25년 당시에 소학교에서 장울화의 선생을 했다는 연동지와도 만났다.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다. 「장울화가… 지주의 아들로서 그렇게까지 훌륭하게 싸울 수 있은 것은 오로지 김일성 원수의 영향과 지도에 의한 것이었지요」 여기서도 문제는 연동지가 자신과 장울화의 관계가 사제간이었다는 것은 밝히면서 자신과 김일성이 사제간이었던가 어떤가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는 점이 있다.그러나 하여간 김일성과 장울화가 사이가 좋았다는 것은 알 수가 있다. 「세기와 더불어」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며칠 후 나는 무송 제1소학교에 편입하였다.이 학교에서 나와 제일 친한 학생은 장울화라는 중국소년이었다.그는 무송에서 두번째인가 세번째로 손꼽히는 부자집 아들이었다. 장울화네 집에는 가병만 해도 수십명이나 있었다.무송현 동강에 있는 인삼포는 거의가 장울화네 것이었다.장울화네는 해마다 가을이면 인삼을 캐 말이나 노새에 싣고 다른 지방에 가져다 팔았다.그 집에서 인삼을 팔러 갈 때에는 가병들이 10리씩이나 늘어서고 하였다.장울화의 아버지는 이름있는 부자였지만 제국주의를 미워하고 자기 조국을 사랑하는 양심적인 인간이었다.장울화 역시 그랬다」 한약방의 주인인 김형직과 인삼포 소유자인 무송의 토호 장만정은 친했다. 그 아들들인 김일성과 장울화도 막역한 사이였던 것이다. ①평전 68∼70면 ②1985년 5월13일자「노동신문」 ③「항일무장투쟁 전적지를 찾아서」 1960년 당간 11면 ④상동서 17면 ⑤「세기와 더불어」 1백20면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2)

    ◎매신의 구국활동/국채보상운동 주도… 항일 선봉에/「황무지 개간」반대·의병항거 대서특필/일제탄압불복… 식민정책 부당성 고발/박은식·신채호 등 반일언론인 포진… 절대적 국민신뢰 확보 노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부터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은 일본이 한반도에서의 독점적 우위를 확보하고 침략정책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시기이다.바로 이러한 격동기에 발행되어 항일구국의 최선봉에 섰던 가장 대표적인 신문이 있다면 대한매일신보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이 신문의 소유자이자 발행인은 영국인 배설(ErnestThomasBethell)이었으나 신문발간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양기탁이었다.배설은 노일전쟁 취재차 한국에 왔던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의 통신원이었으며 양기탁은 당대의 언론을 이끌던 논객이자 우국지사로 추앙받던 인물이다. 민족의 대변지 대한매일신보는 이들의 혈기와 의기가 합쳐져 1904년 7월18일에 창간됐다.영문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와 함께 창간된 대한매일신보는 당초 한호 6면으로 이중 2면은 한글 전용이었고 4면은 영문판으로 할애했다. ○장지연사건 실어 파문 이 무렵은 일본의 한국 황무지개간권 요구를 반대하는 국민운동이 전국에서 분출되던 때이기도 했다.당시 한국과 일본의 신문들은 제각기 황무지개간권 요구를 비판하거나 옹호하고 나섰다.이런 시기에 더구나 민족진영이 가세해 창간된 대한매일신보가 이를 좌시할리 만무였다.논조는 당연히 반일이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의 황무지개간권이 한반도의 영구식민지화를 꾀하려는 책동임을 지적,그 부당성을 널리 알리는 것으로 첫 포문을 열었다.이를 시발로 「장삼씨의 문뎨 □론」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일본 시사신보의 개간권 옹호론을 예리한 필치로 찔러버렸다. 창간초부터 반일논조의 중심에 서서 항일민족운동을 고취하는데 앞장에 나선 것이다.그러나 이 신문은 창간시 미비했던 시설을 갖추느라 5개월의 휴면기간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다시 속간되기는 이듬해 8월11일이었다.속간하면서 한글전용을 국한문 혼용판으로 바꾸는 한편 영문판을 분리해 2종을 발행했다. 새모습으로 재출발한 대한매일신보의 반일언론은 다시 불을 뿜기 시작했고 이를 눈의 가시로 여긴 일본은 외교적 탄압으로 배설추방공작을 폈다.일본인들이 발간하던 한성신보·대동신보·대한일보등이 대한매일신보를 비방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그러나 대한매일신보의 반일논조는 더욱 뜨거워져 황성신문이 정간당한 사실과 장지연의 구속을 대서특필하는등 일관된 자세를 고수했다.이러한 항일논조에 대해 고종도 은밀히 격려,지원을 아끼지 않았다.1906년 2월10일 고종은 「대한매일신보 사장 배설로 신문급 통신에 전권자로 특히 위임할 사」라는 친필 특허장을 내리는 한편 매월 1천원을 신문사 운영비로 보조해준 것이다. 용기백배하게된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의 집요한 탄압에도 불구,또다시 일본을 궁지에 몰아넣는다.런던 트리뷴지에 실렸던 고종의 밀서사진을 전재,밀서가 근거없다고 주장해온 일본의 허위를 폭로(1907년 1월16일자)한 것이다. 대한매일신보는 그 직후 국채보상운동의 총합소가 되어 구국운동의 새지평을 연 신문이기도 했다.이 운동은 대한제국이 일본으로부터 빌린 돈 1천3백만원을 국민들의 성금으로 거두어 갚자는 자발적인 민중운동이었다.대구에서 시작된 이 운동의 취지는 많은 국채를 나라의 재정으로는 상환할 길이 없으니 장차 한국의 강토가 일본의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국민의 성금으로 이를 갚자는 것이었다. 그 취지서를 크게 실어 전국적인 호응을 얻게 한것이다.고종도 호응하여 담배를 끊었다는 보도를 낸뒤부터는 여기에 자극받은 지도급 인사는 물론 부녀자들까지 참여,반지와 패물을 다투어 성금으로 내는등 적극적인 성원을 이끌어 냈다. 당초 이 운동은 전국적인 조직체를 가지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따라서 각처에서 거두는 성금을 통합된 조직으로 일원화해 적립해야한다는 논의가 일게 됐고 그결과 결성된 것이 국채보상지원금 총합소였다.1907년 3월에 설립된 이 총합소는 임시사무소를 신보사에 두기로 했으며 양기탁이 재무를 맡아 대한매일신보사는 이 운동의 실질적인 본부가 되었다. 이 운동은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는 민족의 일대 각성이었으며 그 역량의 과시였다.국채보상운동의 중심기관이 되면서 사세를 크게 신장하게된 대한매일신보는 이해 5월23일 한글전용판을 다시 발간,기존의 국한문판·영문판과 함께 3종의 신문을 발행하게 되어 미상불 영향력있는 최대의 민족지로 성장했다. 이때의 발행부수는 3종을 합쳐 1만부를 넘어섰다.이는 한국언론사상 기록적인 최고의 부수였으며 이해 하반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더욱 늘어나 서울에서 발행되던 신문 전체의 발행부수를 앞지를 정도였다. 사세가 이처럼 커지면서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의 대한정책을 더욱 날카롭게 비판,헤이그 밀사사건과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고종이 퇴위한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이어서 고종퇴위 직후의 대한제국 군대해산과 이에 불만을 품은 군인들의 항거운동을 낱낱이 보도했다.이같은 보도는 전국의 많은 의병들에게 무장항쟁을 촉발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고종퇴위·군해산 보도 일본의 입장에서 대한매일신보의 이러한 끈질긴 항일언론이야말로 한반도 식민지화정책을 수행하는데 있어 가장 큰 장애요인이었다.특히 이 신문의 필진이 지닌 칼날같으면서도 설득력 짙은 필봉은 일본인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더구나 당시 대한매일신보가 갖는 국민적 신뢰도는 거의 절대적이었으며 인기 또한 높아 한부의 신문을 여러사람이 돌려가며 읽을만큼 사회적 영향력은 막강했다. 『한국내 신문이 가진 권력이란 비상한 것이라 이등의 백마디 말보다 신문의 일필이 한인을 감동케하는 힘이 매우 크다.그중에도 지금 한국에서 발간하는 일외국인의 대한매일신보는 확증이 있는 일본의 제반 악정을 반대하여 한인을 선동함이 연일 부절하니 이에 관하여는 통감이 책임을 질밖에 없다』 이렇게 개탄한 초대 통감 이등박문의 말을 재음미하면 대한매일신보 지면 한장한장마다에는 모두가 민족의 독립함성이 응고 되었음을 익히 알수 있다.일본의 강압속에서도 대한매일신보가 항일논조와 구국운동의 구심점이 될수 있었던데는 이 신문이 영국인 소유여서 치외법권을 누린 탓도 물론 있다.그러나 신문제작을 총괄했던 양기탁을 비롯,박은식·신채호등 민족사상에 투철했던 항일언론투사들이이 신문을 그렇게 이끌었다는 사실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일제식민통치문서 요약 발간/항일탄압­경제수탈 등 내용

    ◎정부 기록보존소/기독교 동향보고서도 담아 한·일합방직전 국내기독교계의 국권회복운동을 비롯,일제의 항일운동탄압·경제수탈·식민지이데올로기조장등 일본총독부가 작성한 주요문서를 풀이한 「일제문서해제선집」이 31일 발간됐다.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소가 펴낸 이 선집은 지난1906년 통감부설치부터 45년 일제패망까지 총독부가 작성한 문서 2만4천여권중 총독관방·경무국·식산국·학무국 등에서 작성된 주요문서 60권을 선별풀이한 것이다. 지난해부터 추진해 완성된 이 선집은 크게 ▲식민통치 ▲경제수탈 ▲식민문화등 세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선집은 특히 첨부자료로 한·일합방직전 국내기독교계의 국권회복운동등에 관한 각종 정보를 담은 문서인 「야소교에 관한 보고서」를 싣고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상재선생을 비롯한 기독교계 인사들이 황성기독청년회(YMCA전신)를 중심으로 일제에 항거,국권회복을 위한 구체적 활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1932년 총독부 재무국이 작성한 「이왕가예산관계서류」는 국권상실후 이왕직으로 격하된조선왕실의 재정운영실태를 규명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1)

    ◎여명기의 민족지/“항일구국” 염원안고 대한매일신보 탄생/국운 기울어 암울했던 1904년 창간/주권수호 앞장서며 숱한 고난/해방직후 서울신문으로 속간/초대사장에 오세창 취임… 권동진·홍명희 고문에 영입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그 시대는 고난으로 점철되었다.1904년 국운이 기울어가는 암담한 나라 운명속에서 한가닥 빛으로 창강된 대한매일신보.그 항일구국지가 1945년 서울신문으로 거듭 태어나기까지는 파란만장한 우리 근·현대사를 함께 살았다.당시 민족의 생존이 그렇듯 일제의 모질고 간교한 탄압에 쓰러진 대한매일신보의 맥락은 서울신문이 잇고있다.일제 강점기 사이에 변화도 없지 않았으나 서울신문의 뿌리는 분명히 대한매일신보에 두었다.그 위대한 항일구국지 창간 1세기를 불과 1년 앞둔 오늘,그 역사를 조명하여 서울신문의 연륜을 다시 헤아리고자 한다. 「대한매일신보」는 대한제국 말기 6년동안 항일언론의 최선봉에서 민족주권 수호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가히 전설적인 신문이었다.근대 언론사에서 「다시 없는민족의 대변기관」으로 평가 받는 이 신문은 나라 안팎이 매우 복잡한 시기에 발행됐다. 국제적으로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일본이 한국의 지배권을 열강으로부터 승인받아 한국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던 때이기도 했다.그리고 국내정세는 일본의 한국지배를 반대하는 민족운동이 불길처럼 치솟던 시기였다. 특히 나라안에서는 일본의 한국 황무지 개간권을 막으려는 민중운동과 함께 의병 무장투쟁,국채보상운동,애국계몽운동등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대한매일신보는 이러한 격동의 시기에 창간되어 항일구국의 가시밭길을 걸었다.창간한 사람은 영국인 배설(Ernest Thomas Bethell·1702∼1909년)이다. 러·일전쟁때 취재차 한국에 왔던 런던의 데일리 크로니클 특별통신원인 그가 한글전용인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날짜는 89년전인 1904년7월18일로 돼있다.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도 동시에 창간했다. 창간에 참여한 인사들의 면모를 보아도 쟁쟁하다.당대의 언론을 주도했던 논객이자 우국지사였던 양기탁을 비롯,박은식·신채호·옥관빈등이 그 주역들. 나중에는 안창호·이갑등 구국운동조직인 서북학회의 인사들도 뛰어들었다. 창간호(타블로이드판)는 한호의 지면이 6면으로 4면은 영문,2면은 한글전용의 2개국어 신문체제였다.그러나 이듬해 8월에는 국한문 혼용판과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를 분리,2종을 발행했다.1907년5월에는 한글전용 「대한매일신보」를 새로 창간,3종의 신문을 한꺼번에 펴 냈다.국한문·영문·한글등 3종의 신문이 발행되기는 한국 언론사상 초유의 일이다. 황실(고종)의 은밀한 재정적 뒷받침과 민족진영의 도움을 받았다.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대한매일신보의 논조는 처음부터 반일구국일수밖에 없었다.그 첫 지탄공격은 황무지 개간권 요구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시작됐다.이를 시발로 황성신문의 「시일야방성대곡」전재,샌프란시스코의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 저격사건보도,영국의 트리뷴지에 실린 고종밀서사진 전재등 기사와 논설로 항일언론의 횃불을 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이 신문의 강력한 반일논조야말로침략정책을 수행하는데 있어 가장 큰 저해요인이었다. 일본은 이에 대응,「경성일보」(일어)「Seoul Press」(영어)등 통감부의 기관지를 직접 발행하여 언론대응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또 한편으로는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외교적 압력과 사법적인 탄압을 가했다.외교적 압력은 영국측에 대해 배설의 추방요구로,사법적 탄압은 통감부의 신문압수 형식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대한매일신보」의 항일언론 자세는 좀체 꺾이지 않아 국한문판 24차례,한글판 21차례의 압수를 당하면서도 여전히 지속됐다.민족진영의 언론보루로서 이처럼 항일언론을 펼칠수 있었던 것은 이 신문이 영국인 소유여서 치외법권을 누릴수 있었기 때문이었다.이 신문에 몸담고 있던 항일언론투사들의 민족사상과 구국정신이 그같은 논조를 주도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대한매일신보」가 남긴 족적중 또한 특기할만한 것은 이 신문이 주동이 되어 벌인 국채보상운동이었다.이는 을사보호조약이후 일본으로부터 얻은 나라의 빚 1천3백만원을 국민의 성금으로 갚아 일본의예속에서 벗어나려는 일대 구국운동이라 할 수 있다. ○우국지사 대거 참여 대한매일신보는 이 운동의 중심기관이 되던 시기에 사세를 크게 신장,발행부수가 1만부를 넘어섰다(1907년 9월3일 기준 국한문 8천,한글3천부).이같은 발행부수는 그때까지 한국언론사상 최고의 기록이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강경한 논조를 터뜨리던 이 신문은 일본 통감부의 집요한 탄압끝에 배설의 상해옥살이와 양기탁의 구속으로 물이 꺾이기 시작했다.그후 배설이 숨지면서 이 신문은 더욱 기울어졌으며 영국인 만성(Alfred Marnham)이 사장직을 인수받았다.그러나 영·일간의 외교문제를 꺼리던 주한 영국총영사 보나르(Bonar)와 통감부의 회유및 압력을 받아 1910년 5월21일 결국 통감부에 팔리고 만다.국권수호의 상징적 존재였던 「대한매일신보」가 마침내 비극적인 종언을 고한것이다.그때의 지령은 제1461호(국한문판)였다. 그리하여 「대한매일신보」는 한일합병 이튿날인 1910년 8월30일부터 제호가운데 국가를 상징했던 두글자 「대한」을 빼앗겨 버린다.「대한」이 없어진 「매일신보」는 결국 통감부의 기관지로 전락하는 것이다.그러면서도 「매일신보」는 그러나 「대한매일신보」의 국한문판 종간호인 제1461호(1910년 8월28일)의 지령을 계승,제1462호부터 국한문판을 발간했다.(한글판은 제939호부터) 이 날짜의 사설제목은 「동화의 주의」로 나온다.제국주의 36년간의 일본 전위역할을 이렇게 상징하고 일제 선전기관으로 얼굴을 바꾼 매일신보는 이틀만인 9월1일 대한제국의 기관지 성격이던 한양신문(전대한신문)까지 합병한다.국한문판과 한글판의 두가지 신문을 발행하는 유일한 한국어 신문이었지만 한국인이 만드는 한국의 소리는 담기지 않았다.이는 「일선융화와 세도인심의 감화유도」를 내건 일제의 어용언론활동의 전주곡이었다. 경영의 측면에서 경성일보사에 흡수통합,경일편집국의 한부서로서 철저하게 총독부기관지 역할을 수행한 매신은 그후 3·1운동의 결과로 일제의 무단정치가 표면상 문화정치로 바뀌면서 1920년 독립된 편집국으로 확대 승격됐다.그리고 1929년에는 한국인 편집국장이 임명된데 이어 1930년 한국인 부사장이 처음 기용되어 다소 편집제작의 재량권이 이루어지는듯 했다. 그러나 매신은 철저하게 일제의 입장에서 만들어져 편집방향은 「내선일체」를 고수했다.이러한 목적을 위해 총독정치의 선전과 홍보를 위주로 했으나 민족민간지들의 논조를 반박하거나 민족진영을 비난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일제의 비호속에 이같은 논조로 일관하던 매신은 기구를 확대,경성일보사에서 분리하게 됐다.1938년 4월16일 독립된 언론기관으로서 제호를 매일 「신」보로 고쳐 새로 출발한 것이다. 매신이 경일과 맞붙은 지금의 프레스센터 자리에 4층 콘크리트 사옥을 짓고 들어선 것은 바로 이때였다.하지만 경일은 매신의 주식 45%를 소유한 대주주로 남았고 여기에 총독부 소유의 주를 포함한다면 매신의 경일예속은 이전과 조금도 다를바 없는 셈이었다.매신의 일제옹호논조 또한 해방직전까지 변함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일제는 패망했다.1945년 8월15일 마침내 조국광복을 맞았다.매신은 이러한 오욕의 역사를 청산하고 「해방조선의 대변기관」으로서의「서울신문」으로 거듭나기위해 대대적인 개편수술을 받게됐다.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정청이 그해 10월2일 매신을 접수,매신 한인주주총회를 열어 새중역진을 구성토록 종용했다.이에따라 10월25일 주총이 열려 「서울신문」이라는 새로운 제호와 오세창을 사장으로하는 간부진용이 결정됐다.이 무렵은 사장 이성근이 지난날의 과오를 전사원에게 사과하고 자퇴한뒤 사원자치위원회에 의해 신문이 발행되던 때였다. 경영간부가 없는 상태에서 신문을 만들어오던 6백명의 자치위는 그러나 주총의 간부진용결정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다.주총결정은 자치위와 사전협의를 거치지 않은 것이라는게 그 표면적 이유였으나 실상은 간부진용에 우익인사가 너무 많은데 불만을 품은 때문이었다. 그동안 비교적 관망상태에 있던 미군정당국은 11월10일 재산조사를 이유로 매신에 정간명령을 내렸다.매신이 정간되던날 자치위는 「3천만 민중의 정당한 공기」로서 신문이 새롭게 출현해야 한다는 종래의 입장을 재확인 한뒤 일단 한발 물러섰고 이를 계기로 개편실무진과 자취위 사이에 얽혔던 매듭이 풀리기 시작했다. ○한때 총독부 기관지로 미군정당국으로부터 매신개편의 대업을 새로 위임받은 이관구와 하경덕은 재원확보문제와 함께 내외에서 모두 수긍할수 있는 권위있는 인사들로 경영·편집진을 구성하는 작업을 신속하게 추진했다. 초대사장에 위창 오세창이 추대됐다.근대 신문계의 선구자이자 지조높은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으로서 그가 지닌 사회적·정치적 덕망은 새롭게 등장하는 서울신문의 이미지에 걸맞는 것이었다.위창과 함께 역시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인 권동진과 당시 문단의 원로격인 홍명희가 고문에 영입됐다. 서울신문 탄생의 산파역을 맡은 저명교육자 하경덕이 부사장에,그리고 사려 깊은 논조를 감당할 주필에는 항일언론의 선봉에 섰던 이관구가 선임됐다. 이러한 일사천리의 준비작업은 21일 5층 옥상에서 가진 오세창사장의 취임식으로 그 결실을 보게됐다.해방의 감격과 함께 독립한 이 민족의 진실된 언론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자임하면서 서울신문이 마침내 그 첫 지면을 이 땅에 선보인 것이다. 이날이 1945년11월22일이었는데 신문은 11월23일자로 발행됐다. 이때의 서울신문 지령은 대한매일신보→매일신보→매일신보를 그대로 계승,제13738호를 기록하기에 이른다.그 고난의 역사를 마감하고 또 다른 시련의 역사를 향해 서울신문으로 거듭 태어난 것이었다. □연보 ◇대한매일신보(1904·7·18∼1910·8·28) ▲1904년 7월18일 창간 ▲편집겸 발행인 배설,총무 양기탁취임 ▲1910년 5월21일 통감부가 매수 ▲1910년 8월28일 국한문판 1461호,한글판 938호로 종간 ◇매일신보(1910·8·30∼1938·4·28) ▲경성일보에 흡수 통합,1910년 8월30일 매일신보로 개제발행(지령은 대한매신을 계승) ▲경성일보사장 길야태좌위문 취임(매일신보사장 겸임) ▲1912년 3월1일 국한문판과 한글판을 한글전용으로 합간 ▲1938년 4월28일 매신의 제호로 최종발행(지령11 012호) ◇매일신보(1938·4·29∼1945·11·10) ▲경일에서 분리독립,제호를 매일신보로 개제발행(지령은 매신을 계승) ▲사장 최린,부사장 이상협취임 ▲1945년 11월10일미군정에 의해 정간 ◇서울신문(1945·11·23∼현재) ▲1945년 11월23일 매신을 서울신문으로 개제발행(지령은 매신을 계승) ▲초대사장 오세창,고문 권동진 홍명희,부사장 하경덕,전무 김동준,주필 이관구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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